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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장성교회 정연수원로목사
밭을 갈다가 천사를 보고 일을 멈추고 냇가에서 목욕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두루마기를 입고 내가 죽을테니 장례를 하지 말라
9일 후에 다시 일어나서 왜 그렇게 시끄럽게 우느냐?
제발 울지 말라
그리고 다시 죽은 후 3일 후에 다시 깨어났다.
12일만에 살아난 후에
천국에서 너는 영수가 되라
나는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없어 도저히 못하겠노라
그래 내려가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보라
술을 한모금 마시니 토하고
담배를 한모금 피우니 다시 포하고.....
이런 아버지 때문에 아들이 약사로 일을 하다가 결국 목회자가 되었다.
선교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영수로 임명하였다.
11-23-2024(토) 요한복음 11:23-3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믿느냐(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네가 믿느냐?(Do you believe this?)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11-22-2024(금) 요한복음 11:17-2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라도(22절)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But I know that even now God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이 두 귀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듯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이 있었다. 그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절),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절).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또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이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의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척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도가 일어도 그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또 깊이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알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줄 알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때 어름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그 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는 네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건너 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간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11-21-2024(목) 요한복음 11:11-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깨우러 가노라(11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After he had said this, he went on to tell them, "Our friend Lazarus has fallen asleep; but I am going there to wake him up."
청년들을 지도할 때 한번은 어느 대학생이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본인이 반드시 살려낼 것이라며 시신을 놓고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결국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미친놈이라는 소리만 듣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착각하는 믿음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김하성, 당시 울산대학교 CCC)
하나님이 계시를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 계시가 정말 올바른 계시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감추어진 비밀의 기도
어느 양반집으로 출가한 새댁이 몸에 이상이 와서 아무리 치성을 드려도 해결되지 않아 고생하는데 어느 지나가던 사람이 성경책을 구입하여 읽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창고에 있던 쌀을 팔아서 성경을 구하여 몰래 읽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새벽마다 몰래 숨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밭에서 일을 하던 중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무슨 말을 전하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듣지 못하고 볼 수도 없는데 갑자기 일을 멈추라고 하므로 몸이 아픈가 아니면 정신이 이상해졌는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깨우러 가노라( I am going there to wake him up.)
신앙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것도 잠들었다
병든 것도 죽을 병이 아니다
이렇게 역설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나사로가 죽은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잠들었다고 표현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을 자는 정도의 아픔이면 깨우면 되지만, 죽은 것이면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속단한 것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는 죽음이 잠을 자는 것과 같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믿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을 미리 구분해 놓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세상의 것에 의해서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과학이라고 하는 것과 전통적인 방식과 습관적인 사고는 주님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God's eye of view)을 회복하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정말 단념할 수밖에 없을 때,
완전히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면 하나는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누구나 호흡이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육체는 활동을 하지만 영적인 상태는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육체와 더불어 영적인 활동이 조화를 갖추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그 육체가 병들 수도 있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질병과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깨어있다면 분명히 소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내가 주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을 갖추고 있는가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나의 믿음 없음을 용납하여 주시고 새 힘을 주시옵소서 라며 간구할 때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영역의 세계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니엘 12:1-2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성경의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기 14:21)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도서 9:5),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시편 146:4)
무활동의 상태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전도서 9:10)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편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편
115:17)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이사 야 38:18-19)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서 9:5-6,10)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편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편 6:5).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을까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데살로니가전서 4:16-1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린도전 서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잠과 죽음
흔히 죽음을 ‘잠’에 비유한다.
어느 묘비명에는 ‘아무개가 여기에 잠들다’ 같은 글귀가 쓰여 있기도 하고,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 중 하나인 ‘영면(永眠)’은 길 영(永), 잠잘 면(眠) 자를 써서 ‘영원히 잠들다’라는 뜻이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잠에 비유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알리실 때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한복음 11:11~14)
잠과 죽음의 차이점과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 이유
죽은 사람과 잠든 사람. 겉으로 보면 유사하다.
둘 다 의식 없이 눈을 감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눈에 보이는 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신 것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죽음은 신체의 모든 생명 활동이 중지된 상태를 의미하고, 잠은 눈이 감긴 채 의식 활동을 쉬는 상태를 말한다.
잠과 죽음의 큰
차이점은 ‘생명’의 존재 여부다.
죽은 사람은 깨어날 수 없지만, 잠든 사람은 몇 시간 뒤 반드시 깨어난다. 살아 있어서다.
육신적으로
보자면 나사로는 생명 활동이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표현하셨다.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하다.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나사로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육신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존재하는 것, 바로
영혼이다.
모든 것을 영적인 관점으로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영혼이 살아있기에 그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말씀을 통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살아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새번역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말씀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즉 죽음이란 육체의 영멸을
가리키거나,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가리킨다.
구약시대 선지자였던 욥도 같은 내용을 성경을 통해 증거했다.
내 육체의 가죽이 썩은 후에는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며 (현대인의성경 욥기 19:26)
여기에서
‘나’는 욥(Job)이다.
욥은 자신의 가죽이 썩은 후, 즉 육체가 죽은 이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
영혼이다. 영혼은 육체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욥의 증거 외에도 성경은 『창세기』, 『전도서』, 『에스겔』, 『누가복음』 등 여러 구절을 통해 육신과 별개로 영혼이 존재함을 알려주고 있다(창세기 2:7, 전도서 12:7, 에스겔 37:14, 누가복음 12:20).
육체의 삶과 영혼의 삶이 존재
육체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의 몸이 있으면 영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현대인의성경 고린도전서 15:44)
육신이
존재하면 육신의 삶이 있듯,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은 영혼의 삶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영혼의 존재를 인지하고, 영혼의 삶
역시 준비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당장 눈앞의 현실을 살기도 바쁘다. 잘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삶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영혼의 삶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영혼이 곧 내가 존재하는 이유,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 엘리야와 아이 일화를 통해 확인해보자.
엘리야는 몸을 펴서 그 아이 위에 세 번 엎드리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 아이의 영혼이 돌아오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므로 그 아이의 영혼이 몸으로 돌아와 그가 되살아났다.(현대인의성경 열왕기상 17:21~22)
선지자 엘리야가
사르밧 지역에 사는 한 과부의 아이를 살리는 장면이다.
성경은 죽었던 아이가 “영혼이 몸으로 돌아와 되살아났다”고 기록한다.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 짓는 것은 그 육체 안에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영혼이 없는
몸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벗어놓은 옷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영혼이 떠난 육체다.
그렇다면 육신의 삶과 영혼의 삶 중, 우리는 어떤 삶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까. 순간과 찰나에 불과한 삶보다 영원한 시간의 삶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하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16~20)
죽음과 잠
마태복음 9:23-26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지더라.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흔히 영원한 잠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비유가 단지 문학적인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표현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지막 때의 부활 혹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심판을 믿든 안 믿든 간에 영생 자체는 소원합니다. ‘잠’이라고 말한 것은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불사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소원일 뿐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영원히 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장면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말씀은 그런 인간적 소망이나 종교적 믿음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예수님에게만은 죽음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딸이 육신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잠시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두고 죽었다고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자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요즘으로 치면 장의사와 그 직원들입니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최고 전문가들로서 호흡과 심장의 박동을 정밀하게 확인 한 후입니다. 아마도 관공서에 사망 신고까지 접수한 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웬 젊은 랍비가 나타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니까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쳇말로 식모 앞에 행주 빠는 격이 되었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상주가 데려온 랍비라서 격식을 차려 주었기에 비웃는 것으로 그친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죽었다고 얼마나 확신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가달라고 부탁하니까 순순하게 비켜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면 이 젊은 랍비가 혹시 마술을 사용해 살려내려는 것이 아닌지 곁에서 지켜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다시 살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 네 마음대로 해봐!” 하고 비켜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야이로의 딸이 되살아 난 것은 인간 세상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는커녕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신자라고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의 죽음은, 특별히 믿는 자의 죽음은 하나님에게는 잠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력이 미치는 범위는 오직 물질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물질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도 물질계를 향해 열려 있고 또 그 안에서만 작동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면의 지정의가 하는 역할도 그 감각기관들이 외부로부터 인지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 보관, 해석, 적용하는 일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인간 이성은 자신의 감각 기관과 지정의를 동원해 인식이 가능한 이 땅의 현상들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그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 딸은 물질계의 영역에선 확실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계의 영역까지 연장해서 그 현상을 파악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생명의 근원이시라 영계에서부터 생기(生氣)를 가져와서 그녀에게 불어 넣어 물질계로 소생시킬 것을 작정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선 어느 누구도 도저히 깨어날 수 없는 죽음 혹은 영원한 잠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잠이라고 표현한 의미는 언제 어디서라도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니 신자가 항상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언제 어디에서 깨어 있느냐 뿐입니다.
신자로선 인간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물질계 안에서 깨어 있으면 이곳의 생(生)이고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계에서 깨어 있으면 저곳의 생(生)일 뿐입니다. 불신자 입장에선 전자만이 인생이고 후자는 완전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전자는 당신이 인간을 보내신 바요, 후자는 당신이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인간더러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불신자에게는 죽음이 끝이지만 신자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깨어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한 것뿐입니다. 신자에게 육신의 죽음은 더 좋은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길목일 뿐입니다.
그럼 그 영원한 본향으로 어떻게 해야 갈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했으니 자동으로 갑니까? 교인으로 평생을 성실히 살다가 언제 어디에서 죽어도 잠시 후 눈을 뜨면 천국일까요? 신자가 죽어 천국을 갈 수 있는 여부를 점검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실제적인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환난이나 고통이 그것으로 전부이자 실체(實體)라고 보느냐, 아니면 그것은 결코 전부나 실체가 될 수 없다고 보느냐에 달렸습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지정의 한도 내에서 모든 일들을 분석, 판단, 적용하느냐 아니면 그것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오류로 이끌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매번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느냐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입니다. 인간 이성의 판단 범위는 물질계가 한도이므로 천국 보좌에서 세상만사 특별히 자신의 신자 된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는 성령으로만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교통한 자라야 죽어서도 천국 보좌 앞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현재 이런 저런 환난 가운데 힘들어 하십니까? 그 시커먼 터널이 도저히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그렇게 여겨질지라도 하나님 안에선 영원한 잠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선 결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환난도 없습니다. 이미 당신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다 감당하시고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망의 쏘는 것마저 정복하셨는데 이 땅에서의 인간적 환난이 그분에게 더 이상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부분에 진심으로 확신을 하면 영원한 본향은 보장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글쎄 예수 믿은 것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베드로전서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베드로의 말은 그 당시 죽어있던 시람들에게 생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유앵겔리스데,
단순과거형)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로는 시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한번 심판을
받았으나 소망으로는 계속 살아 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잠"이라고 부른다.
죄된 육신으로는 사람을 따라 죽었으나, 살아 생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으니 영적으로는 심판 시에 하나님을 따라 불멸의 몸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전도서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되어 있다.
”누가 알랴’는 말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공동번역은 ”사람의 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숨은 땅 속으로 내려간다고 누가 장담하랴’라고 번역했고,
현대어 성경은 ”인간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저 깊은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번역하였다.
여기 ”혼”은 ”루아흐”인데 공동번역이 ”숨”으로 번역한 것은 잘한 것이다.
만일 죽은 시람의 혼이라면 짐승도 혼이 있다는 말이 되고 땅 속에는 짐승의 혼이 가득하다는 말이 되어 어리둥절하게 된다.
문맥을
잘 살펴보면 18절에서 사람이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였고,
20절에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 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라고 한 후, 위의 성경절이 나온다.
이것은 사람과 짐승의 숨이 각기 다른 곳으로
간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죽기는 일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 잠들다(2837) κοιμάω
스트롱번호 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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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다,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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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자적으로] 마 28:13, 눅 22:45, 요 11:12, 행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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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비유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잠들다, 죽다, 요 11:11, 행 7:60, 고전 7:39.
관련 성경 / 자다(마 27:52, 행 12:6, 살전 4:13), 잠들다(눅 22:45, 요 11:11, 행 13:36), 죽다(고전 7:39), 잠자다(고전 11:3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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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우다(1852) ἐξυπνίζω
스트롱번호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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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다, [잠을] 일깨우다, 요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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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깨우다(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 "잠들었다"는 것은 성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잠들었다가 깨는 것처럼, 성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때가 온다.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경건한 자의 죽음은 하늘 나라의 방언으로는 잠듬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누가복음 7:11-17)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던 사례가 세 가지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마가복음 5:35-43)
41.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둘째는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요한복음 11:1-57)
42. 나사로야 나오라!
셋째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누가복음 7:11-17)
14. 청년아 내게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야이로의 딸은 어린이를 살리신 것
과부의 아들을 청년을 살리신 것
나사로는 장년을 살리신 것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청년과 장년을 살리셨다는 것은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차별화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랍비라거나, 선지자라거나, 능력이 많은 분이라는 등 말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의 작은 마을인 나인성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 한 장례행렬과 마주치셨습니다.
한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사지내러가는 행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과부를 찾으셨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장례행렬 안으로 들어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 말씀이후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통 선지자가 아닌 큰 선지자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두루 퍼졌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13절을 보면 “불쌍히 여기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글자 그대로 ‘과부’입니다.
이미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없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과의 사별의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고생스럽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남편과 사별할 때보다 그 슬픔은 훨씬 컸을 것입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슬픔은 이 여인이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 죽고 겨우
아들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그 아들마저 곁을 떠나게 되자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울었을까요?
지금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않을 수 없어 장례 행렬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제대로 걸을 수는 있었을까요?
아마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이 보다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주목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원어 스프랑크니조마이”(σπλαγκνίζομαι)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창자가 뒤틀리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과부를 보시며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슬픔을 느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애끊다.”라는 말입니다.
너무 슬퍼서 창자가 다 끊어질 것 같다는 것입니다.
유행가 중에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미아리고개만 생각하면, 공산당에게 끌려가 소식이 없는 남편 생각에 단장 즉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 밀려온다는 노래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과부를 보실 때 단장의 슬픔을 느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애 / 어원 <애(腸)<두시-초>
‘연민’(憐憫)과 ‘공감’(共感)이란 말이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을 보며 마음속에 생기는 감정이라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느끼는 감정의 깊이나 질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연민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sympathy’라는 말입니다.
“함께”라는 뜻의 ‘sym’과 “느낌” 또는 “고통”을 뜻하는
‘pathos’가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옆에서 누군가의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에
비해서 공감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empathy’라는 말입니다.
“안에”라는 뜻의 ‘em’과 “느낌” 또는 “고통”을 뜻하는
‘pathos’가 합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가 고통이나 슬픔을 함께 느끼고 겪는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함께 가슴 아프게 느끼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는 다는 말입니다.
장례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과부의 고통와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 과부를 연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과부를 보시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과부의 슬픔을 당신의 슬픔으로 느끼시며 공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힘든 일을 겪을 때 보고 아십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주목해 보시고 그 슬픔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으시고 또 함께 슬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 아파하시며 우리를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공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울지 마라”
본문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부의 슬픔을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으로 함께 느끼시면서 이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상을 당한 가정을 위로 차 방문합니다. 가서 조문도 하고 예배도 드립니다. 그러면서 늘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큰 슬픔으로 눈물 짓는 유족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울고 있는 분들에게 “울지 마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울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아무 말 없이 손만 꼭 잡아드리고 옵니다. 만일 말해야 한다면 “주 안에서 위로 받으십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신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며 성경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가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세 번 모두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울고 있는 유족들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조금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니 울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족들은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주님의 위로, 저 하늘로부터 임하는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한 번은 미국 시카고 구세군센터에서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부스 터커(Booth Tucker)목사님이 “하나님의 위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한 남자가 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따지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로요? 만일 당신의 아내가 죽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부르면서 칭얼대고 있다면, 그래도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후 기차 탈선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칠 전 누군가 저에게 아내를 잃는다면 그 때도 위로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여기 계시다면 이제 그 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시다시피 제 아내가 이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이 순간 그분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로 이 슬픔을 견뎌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위로하십니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저 하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본문 14절을 보면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보고 슬퍼하고만 계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신 것입니다.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과부가 예수님께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이 과부를 도와주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관에 손을 대는 일은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율법에 시체나 무덤이나 주검과 관련된 것을 만지는 일은 부정한 일이기 때문에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율법의 금기를 깨시고 지금 관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결단하시고 나서신 것입니다. 율법의 금기에도 불구하고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사람을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개입하셔서 그 인생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 말씀을 하신 대상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대상이 바로 죽은 시체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벌써 죽은 뒤 며칠 됐고, 염을 하여 관에 넣어놓은 시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른 두 번의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에서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막 5:41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그리고 요 11:43을 보면, 나사로를 살리실 때 무덤 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시체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강을 넘어가서 되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의료진들이 환자를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특히 응급환자인 경우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시간 안에 병원으로 이송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앰뷸런스 안에서도 의료진이 응급처치를 하며 죽음을 막아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병원에서는 응급환자가 도착하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는데도 심박이 멈추면 끝입니다. 의사가 사망 진단을 내리고 흰 천을 덮습니다. 그리고 모든 의료행위를 중단합니다. 진료하던 의료진들이 다 떠납니다. 가족들도 더 이상 곁에 있지 못하고 슬픔 가운데 그 곁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에게 죽음은 한계입니다.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입니다. 일단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무엇인가 몸부림치며 하던 노력도 이 한계 전까지만 합니다. 희망을 가져도 이 한계 전까지만 갖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이 한계를 알고 이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안 될 거야. 그것은 기도해도 소용없을 거야. 마음으로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한계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데도 포기하고, 믿고 나갈 수 있는데도 주저 않고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어떤 믿음으로 순종했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쳐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실제 칼로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한계가 어디까지 여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일으키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능력의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저앉아있는 영혼들,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을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침체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주시옵소서.”
“우리 가정, 우리 사업, 우리나라를 향해 일어나라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11-20-2024(수) 요한복음 1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대로 다시 가자(7절)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Then he said to his disciples, "Let us go back to Judea."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처음(4413) 프로토스(prōtŏs) πρωτος, η, ον
처음이란 하나 둘 셋의 순서가 아니라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물론 차례와 순서라는 의미도 있지만......
마태복음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your slave.
마가복음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slave of all.
처음 사랑(요한계시록 2:4) 사랑이 으뜸이다 - 서로 사랑하는 것
처음 믿음(디모데전서 5:2) 믿음이 으뜸이다 -
처음 말씀(요한일서 2:7)
디모데전서 5: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돈, 명예, 권력일 수도 있다. 행복, 사랑, 건강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의미 있기 위한 필수조건이 하나 있다.
바로 ‘기억’이다.
전 세계를 정복해도, 내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국 무의미하다. 나에 대한 기억이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나는 ‘나’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흐릿해진다.
인간은 한 사건을 접한 후 단 10분 만에 42%, 1시간 후 50%, 하루가 지나면
70%, 1개월 뒤엔 80%가 잊힌다.
‘기억은 시간에 반비례한다’.
그 유명한 Hermann Ebbinghaus의 ‘망각의
곡선’ 이론이다.
그러나 오래되어도 잊지 않는 것이 있다.
자전거 타는 법이다.
익숙한 악기 연주다.
치매나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주로 측두엽이 손상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는 바이올린 켜는 법을 잊지 않는다.
에베소 교회의 회복을 위한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라’고 말씀한다.
‘생각하고’에 해당하는 ‘μνημονεύω’(므네모뉴오)는 ‘기억하다, 언급하다’ 뜻이다. KJV, NASV, NIV, NRSV
모두 ‘remember’번역하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은 찬송과 고백으로 기억된다(비교, 시 6:5). 절기는 기억을 위해 제정되었다(출 13:3). 기억하는 것은 현실화하는 것이다. 과거 사건이 동시대화되는 과정이다. 기억을 통해 절기를 지킬 때 그 순간은 과거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잃어버린 처음 사랑은 과거다. 기억을 통해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대로 기억될 것이다(출 3:15). 말씀과 기록이 기억을 돕는다(출 17:14). 기억은 사람을 사람답게 떠받치는 기둥이다. 기억이 사라지면 사람다움도 함께 사라진다. 나와 가족과 이웃은 서로에 대한 기억으로 연결돼 있다. 기억의 다리가 끊기는 순간 우리는 인격적·사회적 존재로서 낭떠러지에 서게 된다.
‘기억하다’는 LXX에서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 가운데서 사람을 기억하신다(창 8:1; 19:29). 엄청난 사건이다. 언약(창 9:5; 출 2:24)과 족장들(출 32:13)을 기억한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과거 행위와 계명들을 기억한다(민 15:39-40).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것은 자신이 품꾼이 아니라 지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준다. 기억은 그리스도인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거주할 수 있는 끈이다.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공동기억을 구축하는 행위다.
1.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
장석주의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의 첫 시구다.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렘
2:2. 겔 16:8).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는 세 줄짜리 단시(短詩)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사그라져가는 연탄을 통해 뜨거운 사랑의 회복을 노래했다. 연탄이 비록 그
열기를 모두 세상에 내주었다고 하더라도 연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존재가 쓸모를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존재는
변함이 없다. 에베소 교회는 박해 속에서 옳은 교리를 지켜낸 교회다. ‘처음 사랑을 잃었다.’ 거짓 사도에게 진리를 수호하는 일도
긴요하다. 판단만 하는 무서운 교리주의자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고 현재 명령형으로
말씀하신다. 단순히 추억을 떠올리라는 것이 아니다. 처음 사랑을 행하라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종종 원래의 경험의 ‘현실화’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교회 가운데를 거닐고 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비극적인 역설이다. 하나님이나 서로에 대한 사랑보다 진리를 파수하는 일에 더 매진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신자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수고와 인내로 칭찬받은 교회다. 처음 사랑은 냉각되고 정통성에 대한 잘못된 열정으로 대체되었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정체성은 기억을 전제로 한다. 신생아의 기억은 저장되지 않는다. 기억을 만들어내는 해마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을 멈추는 순간 해마 역시 파괴된다. 우리의 죽음 역시 기억되지 못한다. 에베소 교회는 신생아도 아니다. 죽은 교회도 아니다.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기억해야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이 뜨거웠던 날들을 기억하라고 요청받는다. 이 버림은 감정적 열정의 상실이 아니다. 믿음의 실제적 실천의 문제다. 회개에는 지름길이 없다. 처음 사랑에서 빗나가게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초인적 노력을 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것은 온고지신과 다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온(溫)은 옛 것의 부활이 아니다. 이전의 질서를 가열하고 변형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나 색다른 것을 담고 있지 않다. 도덕적 권고를 되풀이하는 개념이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과거 행위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는 복음과 함께 기억되어야 한다(마 26:13; 막 14:9).
2. 처음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라
에베소 교회는 회중 가운데 사랑이 충만했던 이전의 날들을 기억하라고 요청받는다. 사랑의 대상으로 하나님과 이웃 모두 가능하다. 니골라 당의 행위에 대한 미움과 ‘처음 사랑’의 상실이 강하게 대조된다. 후자를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에게 편리한 것을 위주로 기억한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좋은 지표를 먼저 기억한다. 이걸 '선택적 기억'이라고 한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과 싸움이 강하게 각인된 기억만 남겼다. 사랑은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교회는 예수님(딤후 2:8)과 교회 지도자들(히 13:7)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처음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있다.
‘무화과’는 번영과 심판의 상징이다.
첫 믿음의
회복을 촉구하는 ‘기억의 식물’이다.
유월절 즈음에 맺히는 첫 열매는 히브리어로 ‘파게(Phage)’다.
이후에 차례로 열리는
무화과는 ‘테에나(Thaena)’다.
무화과처럼 신앙의 첫 열매, ‘파게’를 맺어야 한다.
다시 그 가지에 잘 익은 ‘테에나’를
맺어야 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할 의무가 있다.
기억은 더 나은 관계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기억하라’는 현재 명령형이다.
‘회개하라’는 부정과거 명령형이다.
대조를 이룬다. 분명한 단절에 대한 지속적인 태도임을 보여 준다.
에베소 교인들은 무엇이 옳은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회개하여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용서한 사람과 처음 사랑을 나누었다.
그 사랑을 지속해야 한다. 우리에게 초청한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십자가로 돌아가라고
초청한다.
생명나무는 문자적으로 ‘죽은 생명의 나무’ 또는 ‘십자가’다.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Hannah Monyer와 철학자 Martin Gessmann이 함께 쓴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에서 기억은 과거 경험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재처리해서 미래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기억은 더 나은 관계로 돌아가도록 하는 데 강력한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한나 모니어, 마르틴 게스만 著, 전대호 譯, 문예출판사
탕자는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음을 생각했다(눅 15:17-18).
청중들에게
‘기억하라’는 지난날 받았던 가르침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전의 도덕적, 영적 규범을 따라 생활하라는 요구다.
그 규범들을
되찾으라고 격려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본문들에서 자주 사용된 방법이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차별 없는 친절함’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 표현되는 형제에 대한
태도다.
처음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면,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없다. 맹자는 말했다.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을 파도 샘에 이르지 않으면, 그것은 쓸모없는 우물이 된다(有爲者辟若掘井, 掘井九軔而不及泉, 猶爲棄井也).”
그리스도인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다.
오실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 처음 사랑이 식어지면, 결국 못 만나게 된다.
회복의 단계는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표류하기 시작한 출발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세 개의 동사가 나온다.
생각하라
회개하라
가지라
처음 사랑을 찾는 과정이다.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
잘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를 하는 니골라는 미워하는 것은 다르다.
이단의 교훈은 미워해야 한다.
이단에 빠진 자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의 교훈은 미워해야 한다.
원수는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는가(마 5:44).
회복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어떻게 상처 주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에베소 교회의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실패가
아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미움이 커서 사랑이 머물 곳이 없어진 것이다.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책망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명령어를 사용하여 제시한다.
이러한 세 가지 명령은 에베소 교인들을 보호하시려는 그리스도의 단호한 명령이며 권고이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3421)
- 이것은 죄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생각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므네모뉴에'(*)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계속하여 생각하고 회상하라'는 의미이다.(눅 15:17-22). 에베소 교인들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을 어디에서 무엇으로 인해서 상실하게 되었는가를 상고해야만 한다.
μνημονεύω 스트롱번호 3421
어원 / 미완료 ἐμνημόνευον, 제1부정과거 ἐμ νημόνευσα, 3420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생각하다, 언급하다.
-
a. [속격을 취할 때] 눅17:32, 요15:20, 갈2:10, 골4:18, 히13:7.
-
-
관련 성경 / 깨닫다(마16:9), 기억하다(막8:18, 눅17:32, 행20:35, 갈2:10, 살전2:9), 생각하다(계2:5), 기억나다(요16:4), 말하다(히11:22).
회개하여(3340)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은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마 3:2; 눅 15:20).
μετανοέω 스트롱번호 3340
- 어원 / 미래 μετανοήσω, 제1부정과거 με- τε νόησα, 3326과 3539에서 유래
-
1.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 마3:2, 막1:15, 눅10:13, 행2:38, 8:22, 고후12:21,계2:21,22, 16:11.
-
관련 성경 / 회개하다(마 3:2, 눅 10:13, 계 2:5).
처음 행위를 가지라(4160)
- 에베소 교인들은 특별히 회개하여 돌아가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닌 그들이 가졌던 처음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Kiddle, Moffatt).
여기서 '가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손'(*)은 '행하다'는 의미를 가진 '포이에오'(*)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지금 즉시 행하라'는 말이다(마 3:8, Robertson, Johnson, Mounce).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즉시 처음에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ποιέω 스트롱번호4160
하다
제조하다
행하다
-
발음 [ pŏiĕō ]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권면을 외면했을 때 초래할 결과에 대한 진술이다.
'내가 네게 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 소이'(*)는 미래적인 현재 능동태로 예언적인 사실의 확실성을 나타낸다(22:20; 요14:13; 요일 2:18).
그러기에 혹자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때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Clarke), 오히려 회개치 않을 경우 맞게 될 현재적 심판을 선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Charles, Alford, Plummer).
한편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에베소 교회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Ramsay).
2. 당장 있게 될 지금의 심판을 말하는 것으로 에베소에서 교회가 없어지고 그 도시 전체가 황폐화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요 15:6; 엡 1:22, Mounce, Greijdanus, Charle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현재에 임할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유대로 다시 가자(Let us go back to Judea.)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신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흥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곳으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처음 믿음으로 돌아가자!"
"처음 은혜를 회복하자!"
"처음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자!"
이러한 의미로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시 가시겠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왜 그곳으로 가시려고 합니까? 하고 반문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빛이 있을 동안은 낮이라고 하시며 낮이 밤을 이길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은 평안히 살아가여 할 장소가 아니라 싸워야 할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딤전 1:18. 6:12. 딤후 4:7).
더구나 예수님도 세상에서 싸워서 이기셨다고 하셨습니다(요 16:33)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을 십자가 군병이라고 합니다.
군병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경공부는 말씀을 위한 훈련입니다.
기도는 말씀으로 공격할 수 있는 훈련입니다.
봉사와 섬김은 지친 영혼들을 주님의 편으로 이끄는 훈련입니다.
그런데 훈련을 마치 지식 정보센터와 같이 운영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갖습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사람을 가르켜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 被投性 存在)" 라고 합니다.
사탄이 권세를 잡은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Birth) 죽을 때까지(Death) 매순간 선택하며(Choice) 살아야 할(Living) 사명을 갖고 세상에 던져진 존재(Das Ding)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던져진 존재로서 "나그네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저 천성(파트리스)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와 같습니다.
순례자의 특징은 이 세상에 거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계신 곳에서 함께 살아갈 그 날을 기다립니다.
육체의 죽음은 그 날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 날에 비로서 완성된 천국의 삶을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가 순례자들에게는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의 길을 정처없이 걷는 인생이 아니라 저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가는 거룩한 순례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순례자의 길에서 승리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디모데전서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후서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인간은 기존의 어떠한 본질에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며 자기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실존적 존재'라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만들었다. 여기서 실존이란 '존재한다'는 뜻이고, 본질이란 '이미 정해진 운명'을 말한다.
여기에 의자가 있다고 하자. 의자는 일정한 구조로 만들어진 물체인 동시에, 일정한 용도를 지니고 있다. 의자는 '앉는
도구'라는 본질이 있다. 의자처럼 구조와 용도가 미리 정해진 존재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반대로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
실존이 먼저 등장하고 난 뒤에 무엇이어야 한다는 본질을 만든다. 스스로 존재하면서 만들어 낸 본질이 삶의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따라서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태아나 죽을 때까지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매 순간 자유롭게 인생의 길을 끊임없이 무언가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전진할 수
없다. 그래서 샤르트르는 '삶이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이라며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고 분명히 말한다. 샤르트르의 이 말은 우리는 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선택하며, 행동한다는 뜻이다.
삶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하여 만들어가는 것으로,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현실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심하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사유하는 까닭에 주어진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살아간다는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우리가 불평불만 하는 사회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이기 때문에
계속 불평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샤르트르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사람을 사유하는 주체와 그렇지 않은 주체로 구분한다. 끊임없는 자신과의 대화, 즉 사유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삶을 늘 달리 만들어가는 힘 있는 주체를 대자적(對自的) 존재라 하고, 사유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자연적
존재를 즉자적(卽自的)존재라 했다. 대자적 존재야 말로 의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참된 존재, 즉 실존이라 했다.
샤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라고 표현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매순간마다 자유를 어떻게 실천했는지에 따라 인간의 삶의 가치는 결정된다.
그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실현하는 한에서만 실존한다'는 말로 실존주의의 정의를 마무리하면서 어찌할 수 없는 남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환경에 책임을 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대체로 인간은 근거가 없는 것을 근거로 하여 실체, 자기, 주체, 사실, 진리, 정의 등이 무엇이라고 믿는다. 그런 것들은 무한광대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조차 변화하므로 형상도 없고 실체도 없다. 이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생사소멸(生死消滅)을 반복하면서 쉼없이 변화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존재는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다. 하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자기 존재를 깨우치는 한편 진정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모든 존재가 공(空)하면서 공하지 않다는 중도론(中道論)에서 보면 오히려 무상하기 때문에 세상을 비극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하고 정진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무상함을 깨우치는 것을 넘어서서 적멸의 상태, 즉 니르바나(Nirvana)의 열반으로 나가서 더 이상의 윤회가 없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를 지향한다.
불교에서는 존재의 특성을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삼법인은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다. 이 중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첫번째 팔정도(八正道)가 올바로 본다는 정견(正見)이다. 제행무상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존재, 모든 행위, 모든 인식, 모든 감정은 허무하고 공허할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허무한 것을 허무하지 않다고 믿으며, 공허한 것을 공허하지 않다고 착각하면서 없는 실체를 찾아 헤맨다. 여기서 일체의 고통이 생겨난다. 이것을 석가모니(釋迦牟尼 BC 563? - BC 483?)는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다’라는 뜻의 고해(苦海) 즉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고 그 고(苦)를 없앤 궁극을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했다.
제행무상 사상은 동물성을 가진 인간을 고상하고 고결한 존재로 설정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즉, 대다수의 인간은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멸도(苦集滅道)에 빠지는 것이고 욕망의 주체이기 때문에 욕심과 집착과 어리석음의 탐진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한 인간의 업보일 것이므로 카르마(karma)가 작용하는 인과율(因果律)과 인연설로 이해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이 사상은 철학, 역사, 예술은 물론이고 여러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소동파는 ‘인생이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비슷한 것(人生到處知何似) 날아온 기러기가 눈밭을 밟은 것과 같을 뿐(應似飛鴻踏雪泥)’이라고 하여 무상한 인간존재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인도철학에서 유래하여 힌두교, 불교, 도교 등에 큰 영향을 미친 제행무상이라는 개념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기본 주제였다. 한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그리고 실존주의적 허무에서 보듯이 불확실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생각은 인류의 보편적인 사유이다.
- 끝 - (충북문화예술연구소장 / 충북대교수 김승환, 2010년 5월 20일 목) *참고나 인용을 했을 경우에는 정확하게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표절은 범죄입니다
11-19-2024(화) 요한복음 1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을 병이 아니라(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When he heard this, Jesus said, "This sickness will
not end in death. No, it is for God's glory so that God's Son may be
glorified through it."
죽을 병이 아니라(This sickness will
not end in death.)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미 결론을 알고 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은혜를 스쳐 지나가는 경향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합니다.
그 좋은 예가 나사로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몇일만에 살아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삼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후 나흘이라고 합니다.
또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蘇生)이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영원히 살아난 것이 아니라 다시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왜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관점(God's Perspective)"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구약에서는 율법의 관점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복음의 관점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관점은 그 핵심이 십계명입니다.
복음의 관점은 그 핵심이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관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복음이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죽은 사람을 일컬어 잠을 자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는 모든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나사로의 경우 하나님의 관점으로 읽는다면 세 가지 놀라운 은혜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계시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
둘째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
셋째는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
천성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복음의 관점으로 십자가의 관점으로 읽고 묵상하며 나를 향한 새로운 깨우침을 찾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신앙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은 것도 잠들었다
병든 것도 죽을 병이 아니다
이렇게 역설적인 사고를 주장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이 말씀은 세 가지 큰 뜻을 보여 준다.
(1) 예수님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神性)을 보여 주고,
(2)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체(一體)이신 사실을 보여 주고,
(3) 또한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지않으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곧,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 있다.
* 죽음(2288)
*병(769)
하나님의 관점에는 율법의 관점과 복음의 관점으로 구분합니다.
율법의 관점은 십계명이 핵심이 됩니다.
복음의 관점은 십자가가 핵심이 됩니다.
율법의 관점은 행위가 중심이며, 복음의 관점은 은혜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적 사고라고도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하나 예수께서는 그들 가운데를 지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곳으로 가십니다.
신이라 하였노라(34-38)
예수께서는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라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시 82:6).
'너희는 신들이며'라는
말은 '재판하는 자'를 가리킵니다(시 82:1).
하나님은 '신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신들은 재판을 위해
임명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공정한 심판을 행하지 않았고 단지 백성 위에 군림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만일
시편 82편에 나오는 자들이 신들이라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모독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보냈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페스테일렌'입니다.
이 단어는 분명한 공식적 임무를 맡기거나 권위를 주어 보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곧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받은 분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있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면 그들은 예수를 거부할 명분을 잃게 됩니다.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39-42)
궁지에 몰린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시 잡으려 합니다.
그들은 이미 돌로 치려할 정도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십니다.
공생애 초기에 요한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은
곳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소리가 들렸던 곳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중요한 결단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겁니다.
결코 유대인들을 무서워했거나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증거한 것과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에 비해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예수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영성이 그 땅 가운데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일까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힘드십니까?
당신의 첫 세례를 기억하십시오.
첫 사랑의 자리를 기억하고 나누어 보십시오.
‘삶의 요소들은 바뀌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이것들과 우리의 관계다.’
-몰리 바스. 재능과 상처가 무엇이건, 삶의 상황이 어떻건 삶의 핵심 문제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는 누구도 대신 열어줄 수 없는 회피하고 싶은 내면의 문이 있다.
가치 있는 일들로 몇 년 동안 주의를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용기를 내 우리 앞에 놓인 문을 열지 않으면 어떤 문턱도 넘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신념과 영적인 진리가 대립될 때가 있습니다.
율법을 맹신하고 진리인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 과오를 범한 유대인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는 영생을 허락해 주신 주를 믿는 자의 참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당시 시대 상황
이스라엘 족속은 1446 BC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에서 나왔다. 그러나 불순종의 결과로 바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훈련을 받는 시기를 갖는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1406 BC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넌 이스라엘은 신천지 약속의 땅에 정착했으나 항상 불순종으로 고난을 겪기도 한다.
사사 시대에는 하나님의 종들이 나타나서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시간을 보냈고, 사무엘에 이르러서 왕정(王政, 1050 BC)으로 이행하게 된다. 왕정은 직접적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패륜(悖倫)이지만, 순종을 요구하셨다. 왕이 다스리던 시대 대부분 패륜을 저질러서 항상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다. 물론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현군(賢君)도 있었지만 대체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다.
통일 왕국은 솔로몬의 불순종(왕상11:1-13)으로 남북(南北)으로 나뉘게 되고 민족 간의 전쟁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불행한 역사이다. 다윗의 후손들은 남조(南朝) 유다(Judea)가 되었고 나머지 10지파를 중심으로 한 북조(北朝) 이스라엘(Israel)이 형성됨으로 분단국가(分斷國家)가 되었다.
이들은 모세의 유언을 무시했다(신8:11-20). 폐역한 민족이었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은 722 BC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게 되고, 남조 유다는 586 BC 북방의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솔로몬의 성전이 불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는 수모를 당한다. 그 백성은 북방으로 끌려가고 민족적 이산(diaspora)이 이루어진다. 불순종이 가져온 결과이다.
설두화는 전체로 볼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2024 J. K. Kim패역한 민족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주셨다. 왕정 시대 선지자들은 죄에 대해, 불순종으로 인한 징벌에 대해 선언하고 회개를 촉구하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선지자도 말라기를 끝으로 문을 닫으셨다. 그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를 중간 시대(400 BC-4 BC)라 하는데 영적으로 암흑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중간 시대 이스라엘을 지배한 국가는 페르시아(549 BC-331 BC),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336 BC-323 BC), 알렉산더 사후에 그의 봉신(封臣)들에 의해 세워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323 BC-30 BC)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세워진 셀레우코스 왕조(321 BC-64 BC),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치 정부인 하스몬 왕조(142 BC-63 BC), 하스몬 왕조를 멸망시킨 로마제국(63 BC-AD 135)에 의해 지배되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즈음에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고 수백 년간을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정복자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국가를 이루는 초능력자일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이루어질 가시적인 정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은 스스로 조화를 이루나 인간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 2024 J. K. Kim하스몬 왕조 시대 종교적 새로운 분파들이 생겨났다. 하스몬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만행에 저항한 마카비(Maccabean) 항쟁(166 BC-142 BC)의 결과로 태어난 이스라엘 자치 정부이지만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종교적 정파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들이다. 이들은 2세기 BC에 새로 생겨난 종교 세력들이다. 이들은 예수님 사역 시기에 예수님에 대항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등장한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율법사 그리고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 파 등에 저항을 받았다. 이들은 기득권 세력이고 당시 사회의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 문제를 외면하고 형식적 면에 치우친 사람들이다. 백성을 위한 사람들이 아니고 무거운 짐을 지게 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 사람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무리이다.
자연은 우리의 스승이다.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살려둘 수 없는 사람이라 보았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고, 생명력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따라서 예수님은 이들을 회칠한 무덤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은 생명의 역사를 통해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진리를 선포하셨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안식으로 초대하신다.
짐은 지고 있는데 무게가 없는 짐, 멍에를 메었는데 아주 쉬운 멍에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되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강하게 질타하셨고 그들은 깊은 반감을 보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그들의 모의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진행되었고, 예수님은 세속적 지상의 메시아 왕국이 아니라, 영적 메시아 왕국을 이루시어 만인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성취하신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요한복음 1:14, 20:28)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Thomas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예수님의 탄생은 마치 4성 장군이 부하 군인들의 생활상태가 어떤가를 알아보기 위해 별 네 개를 떼어버리고 어깨에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말단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어느 날 다시 별 네 개를 달고 시뻘건 별판을 붙인 자동차를 타고 원 위치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무릎 꿇고 고백한 그 신앙고백은 최고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My Lord My
God)라고 한 것은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분입니다. 역사와 시간을 초월해
계시던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시간과 역사 속으로 찾아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창조 이래 가장 큰 사건이며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통틀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탄생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별이 나타났고
이스라엘 나라도 아닌 먼 매데와 파사 나라에서 동방박사들이 하늘에 나타난 징조를 보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찾아 와서 경배했고, 밤중에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찬송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보면 천사가 나타날 때 보통 하나나 둘, 셋 나타났지 이렇게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난 일은 없습니다. 아람군대 18만 5천 명을 진멸할 때에도 천사 하나(an angel)로 되어 있지 이렇게 많은 천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비 중에 최고의 신비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이 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가장
중요한 교리이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God-Man)도 되신다는 이 진리는 제일 중요한 교리이면서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Webster사전을 쓴 유명한 Daniel Webster씨에게 어느 분이 묻기를 “Webster씨 그리스도가 하나님도
되시고 사람도 되신다는 것이 이해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까 대답하기를 “아니요, 나는 그것을 이해(comprehend)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이해했다면 그는 나보다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초인적인 구세주(superhuman savior)가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진리는 피조물 인간의 두뇌로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역점을 두어 “그리스도교”라고 하지 성부교 혹은 성령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을 때 하나님도 바로 알 수 있고 성령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알면 거기서 이단이 생겨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면 이단입니다. 요한일서 4장 2~3절에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참 크리스천이요,
구원 받은 성도입니다.
붉은색 병에 하얀 우유를 담아 놓으면 포도주인지 우유인지 모릅니다. 쏟아보면 우유인 것을 아는 것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지만 부활승천하실 때에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1.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God-Man)이신데 초대교회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었습니다. ◎ 4세기경
Arius(Alexandria 교회의 장로)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logos)일 뿐이다”라고 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
아폴리나리스(Appolinaris-Laodicea교회의 감독)는 “인간의 몸을 가졌으나 인간의 영을 가지신 분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 5세기경 네스토리우스(Nestorius-Constantinople교회의 장로(patriarch))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다. 두 인격을 가진 분이다”라고 했는데 한 인격이 아니라 두 인격을 가졌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 또 5세기경
유티키스(Eutyches-Constantinople의 수도사)는 Nestorian주의를 열심히 배격했습니다. 주님의 성품의 또 다른 학설을
주장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human natrue)은 그리스도의 신성(divine nature)에 흡수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즉 그리 스도의
인성은 잠시 있었다가 없어진 것이라는 뜻이 되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은 강하게 견지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논쟁을 거듭하다가 간단히 네 단어로 정의를 지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참으로(truly), 완전히(perfectly), 나눌 수 없게(undividedly), 섞인 것이 아닌 상태로(unmixedly) 연합된
것이다”라고 간단하고 편리하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여기서 “참으로(truly)”라고 하는 것은 Arian주의를 배격한 것이고
“완전하게(perfectly)”는 Appolinarian을 배격한 것이고 “나눌 수 없게(undividedly)”란 것은 Nestorian을
배격한 것이고 “섞인 상태가 아닌(unmixedly)”라고 한 것은 Eutyches를 배격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God-Man)이신 분이라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2.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사실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되시고 사람이 되신 분인데 예수님의 인성(human nature)보다 신성(divine nature)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봅니다. 요한복음 20장 28절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말씀에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① 그의 생활에서 신성이
나타남
⒜ 동정녀 탄생
마태복음 1장 20절에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라고 천사가 일러주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결혼관계를 통하여 태어나셨다면 아담의 후손, 죄인으로 태어나신 분이므로 하나님도 될 수 없고 우리의 구세주도 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에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라고 하고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 죄가
없으신 분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라고 하시고, 히브리서 4장 15절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전대미문의 기적을 행하신 분
예수님은
35번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라고 한 니고데모의 말대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전대무문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 희생물로 죽으심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죄 없는 피를 다 쏟아주셨을 때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다가 “진정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했습니다.
⒠ 죽음에서 부활하심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신
절정입니다.
⒡ 하늘로 승천하심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계시다가 감람산에서 500여 명의 신자들이 보는 데서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행1:9-11).
② 그의 주장하신 말씀에 신성이 나타남
⒜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하심
요한복음 17장 5절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했고,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하심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시자 그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 인간의 삶 속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하심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심판주가 되실 것이라고 하심
창조, 보존,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은 최후 심판주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③ 하나님께 대한 이름이 예수님께 사용됨
이사야 44장 6절에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는 “…나(예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22:13등)라고 했습니다. 시편 24편에 하나님을 “영광의 왕”이라고
했는데, 고린도전서 2장 28절에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5절에 “…저(예수)는…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④ 하나님의 다섯 가지 속성을 가지심
⒜ 하나님과 같이
무소불능(omnipotent)하신 분입니다. 질병을 고치시고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 하나님과 같이
무소부지(omniscient)하신 분입니다. 수가성 여인의 비밀을 아셨고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밑에 있었던 것과 그의 진실함을 다
아셨습니다.
ⓒ 하나님과 같이 무소부재(omnipresent)하신 분입니다. 예수님도 동시에 어디에나 계신분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라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과 같이
영원하신(eternal) 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했는데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라고 하셨는데 요한복음 8장 58절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예수님도 하셨습니다. 창조, 보존, 죄 사함 등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 믿음, 충성을 그리스도께서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가 헌옷 벗듯이 몸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셔서 신성만 남으신 분이 아닙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창 자국, 못 자국을 만져본 것처럼 이다음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 못 자국, 창 자국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이 되신 것은 영원한 변화입니다.
그가 이렇게 되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 지옥에 갈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우리는 다 상상을 할 수가 없고 영원히 감사하고 찬송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천상의 계시를 보았을 때의 장면이 요한계시록 5장 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또 12절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라고 천천, 만만의 성도들이 찬송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시간이 없고 다만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이 계셨고 목마르기도 하셨고 울기도 하시고 불쌍히 여기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 생존시에 로마의 퍼블리우스
렌트루스(Publius Lentlus)라는 하원의원이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로마 하원에 써 보낸 서한이 있습니다.
“요사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높은 덕망을 지닌 사람이 우리 가운데 나타났는데 그는 지금 우리 가운데 생존해 있고 이방인들은 그를 진리의 선지자라 하고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고 여러 가지 질병을 고쳐주고 있습니다.
약간 큰 키에 자색이 고우며(comely) 대단히
존경스러운 용모를 가진 분이며 사랑과 두려움을 함께 지닌 분입니다.
그의 머리칼은 잘 익은 밤색깔이며 귀에까지는 직선이며 아래로 내려와
동양적으로 보이는 굽실굽실한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습니다. 앞머리의 중간에서 머리칼이 반으로 갈라졌고 나사렛 사람들의 풍습을 가졌고 앞이마는
반듯하고 고상해 보이며 그의 얼굴은 점이나 주름이 없이 아름다우며 고운 붉은 색을 띠었고, 그의 코와 입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이 날카롭게
보이며 수염은 머리칼과 같은 색깔에 짙으며 너무 길지는 않습니다.
그의 모습은 순진해 보이면서도 성숙해 보이며 그의 눈은 회색이며 빠르고 깨끗해
보입니다.
비판할 때는 무섭고 훈계할 때는 예의 바르고 공평하게 말을 하며 대화할 때는 쾌활(pleasant)하면서 끌어당기는
힘(gravity)이 있으며 누구도 그가 웃는 것을 본 기억이 없으나 우는 것을 본 사람은 많습니다.
그의 몸은 균형이 잡혔으며 훌륭해
보입니다.
그의 손과 팔은 유쾌해 보이고 말할 때에는 온건하고 겸손하며 지혜로우며 독특한 미와(singular beauty) 보통사람을 능가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 되신 분이며 인성과 신성을 영원히 갈라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면 예수님은 인간 형상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예수 - 참 하나님(신성), 참 사람(인성)
사람 -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
예수 -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신 하나님
염치(廉恥) : 청렴할 렴(염), 부끄러울 치(치)
파렴치(破廉恥) : 깨트릴 파(破), 청렴할 렴(염)(廉), 부끄러울 치(恥)
1. 수치(羞恥)를 수치(羞恥)로 알지 아니함.
2. 염치(廉恥)를 모름. 몰염치(沒廉恥).
흔들리지 않는 지식
미국의 저자 존 맥스웰이 쓴 '위대한 영향력'이라는 책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갖고 잠시 성공한다.
몇몇 사람은 행동을 갖고 조금 더 오래 성공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인격을 갖고 영원히 성공한다."
주변에 지식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지식은 스펙을 의미할 수도 있고 실력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경험에 의한 노하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성품과 인격 위에 세워지지 못한 지식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비바람이나 다른 외부자극에 의해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또한 인격의 터전 위에 세워지지 않은 지식과 스펙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데
이유는 자신이 지닌 지식과 능력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격 위에 세워진 지식은 반석 위에 세워진 빌딩과 같습니다.
인격 위에 바로 선 사람의 행동은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재능과 지식을 나와 타인의 공생을 위해 사용하기에 웬만해서는 타인에게 상처도 주지 않습니다.
타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사람은 자신 또한 다른 이들에게 인격적인 대우와 존중을 받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는 경쟁력을 갖춘 인재가 되기 이전에 인격을 갖춘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가장 튼튼하고 영향력 있는 인재가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격을 갖추는 일이란, 보이지 않는 건물의 기초를 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오늘의 명언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
– 다산 정약용
11-18-2024(월) 요한복음 10:39-4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 참이라(41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and many people came to him. They said, "Though John
never performed a miraculous sign, all that John said about this man was
true."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므로 세례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으나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하여 말한 모든 것이 참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언행심사(言行心思)"를 일컬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하는 자세 그리고 마음의 생각이 진실한가 아니면 거짓인가에 의해 그 사람이 평가합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다 참이라(This man is true)"고 하는 것은 평소에 예수님의 인품이 어떠하였는지를 가늠케 합니다.
사(思)는 참된(眞)생각
언(言)은 착한(善)말
행(行)은 아름다운(美) 삶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聖徒)들도 예수님처럼 "사언행(思言行)"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이란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믿음의 열매를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는 두 가지 성품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정직(正直)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항상 성실하고, 진실하며,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높은 도덕율(道德律)입니다.
도덕율이란 세상 사람들이 이익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갈지라도 믿음의 사람은 십계명의 가르침을 원칙으로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엄격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거짓이 팽배한 세상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과 높은 도덕율이 지배하는 세상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것을 거룩한 생각과 구별된 언어와 진솔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내가 맡은 그 자리에서 땅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참 알래데스(alēthēs) ἀληθής, ἑς
어원 / [부정불변사]과 299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참된(요 8:13, 벧후 2:22), 참(요 5:32).
사람이 진실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거짓이 없다는 뜻입니다.
온전한 사람만이 진실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온전한 진실의 삶을 보여줄 수 없기에 온전한 진실의 삶의 본이 되신 예수님을 삶과 신앙의 본으로 삼고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사(思)는 참된(眞)생각
언(言)은 착한(善)말
행(行)은 아름다운(美) 삶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은 인격의 사대요소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로 심사언행(心思言行)을 삼가야 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여기서 사람은 무엇보다 첫째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은 마음의 바탕에서 생각이 떠오르며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한 대로 행동하게 되므로 “심사언행”이라 본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으로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쳐다보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마음에 먹고 싶은 생각대로 따먹고 아담도 함께 범죄케 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라고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고, 바울사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 3:8)라고 권면했다.
다윗
왕은 궁궐에서 건너편에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마음에 음심이 생겨 우리아 대장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했으니 모세의 십계명의 5, 6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인륜의 첫 두 계명을 범했으므로 마땅히 죽어야 했다.
다음으로, 마음에서 생겨나는 생각이 중요하다.
마귀는 먼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고(요 13:2) 이어서
사단이 마음에 들어가(요 13:27) 돈을 받기로 대제사장과 약속한 후 원수들에게 스승 예수를 노예 몸값에 팔아넘기고 목매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번 말하기 전에 열 번 생각하라.
의식과 인식의 중요성은 말과 행위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2)고 경계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라고 사도 바울은 마음의 생각을 경계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라고 다윗은
기도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신앙고백에서 말의 경고를 제자들에게 많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솔로몬도 말의 경고를 들려준다.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잠 4:13)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 옛 말에 말이 적은 사람은 거리낌도 적다고 했다.
또한 토해낸 말의 심판을 주님은 엄중히 경고하셨다. 한번 입으로 토해낸 말은 날아간 화살이요 총알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4~36)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는 말의 결과를 경고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2~6)
사랑의 사도 요한도 말의 실행을 권면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말은 씨앗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바울 사도는 말의 고백은 구원을 약속했다.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9~10,13)
넷째로 말한 대로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 듣기만 하고 실천이 없는 오늘 나와 성도들과 한국교회에게 주는 귀한 말씀을 명심하여 실천하자,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2~27)
우선 예수님께서 말 만하고 행치 아니하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눅 6:46~48)
예수님께서 7화(마 23장)를 말씀하신 중에 우선 첫째 내용은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마태복음 23장의 7화를 겸손히 읽고 자신의 모습을 십자가 아래서 살펴 회개하고 수난주간을 보내고 부활절을 맞으며 십자가로 우리의 인격의 활로인 심사언
새 사람의 언행심사(言行心思)(에베소서 4:25~3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우리는, 마땅히 언행심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먼저 말에 대한 것인데, 오늘은 한 가지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을 버리고 참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결국 드러나 더 큰 혼란과 아픔을 가져옵니다.
당장 불이익이 오더라도 참된 말이 결국 관계를 더욱 더 돈독하게 합니다.
거짓말 등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하겠습니다.
다음은 행동에 대한 것인데, 도둑질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야합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꼭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그것에 사랑의 마음을 담아 나눌 때, 거기에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삶에 하나님께서 풍성한 손길로 하십니다.
마음에 대하여는, 분을 품지 말자는 것입니다.
분을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혈기나 불의로 인한 것이 되면 안 됩니다.
잘 해오다가 한순간의 혈기로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혹시 분을 내었더라도 그것을 품고 잠자리에 들면 안 됩니다.
그것은 상대에게도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이지만, 자기에게도 매우 심각한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에 하나님께 고백하고, 상대와 화해해야합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메뉴는 거짓말과 남을 해하는 것과 분내는 것입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않도록 특별히 분을 잘 다스려야하겠습니다.
잘못된 언행심사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합니다. 구원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을 늘 기쁘시게 하기 위해 언행심사를 곱고 바르게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새 사람인 우리의 언행심사로 가족과 친지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일평생 아름답게 기억될 추석이 되었으면 합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란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이 같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말과 행동이 같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말이란 어떤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말로 나타내는 것이며, 글이란 어떤 일이나 생각을 문자로 나타낸 기록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언행(言行)은 말이나 글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글을 읽어 보면
어디서 주어왔는지 그럴 듯한 사자성어 같은 것을 베껴다가 내놓고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말한
사람이나 글을 쓴 자기는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독자들에게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오만이며 방자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잘난
체하여 건방진 행위에 해당되며 그럴듯하게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한 것과 같기 때문에 속임수에 불과한 기만이다.
간혹
보면 “거리를 깨끗이 합시다!”라는 구호가 새겨진 어깨띠를 메고 길거리에 나와 주변 정화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그런데 이런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만약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다시 그 쓰레기를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말과 실제의 행동이 다른 사람은 이런 부류에 해당하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요즘 와서
정치판을 향해 유행하는 말 중에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쓴 소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인들은 입후보하면 당선부터 되고 보자는 식으로 실천 불가능한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속임수로 많이 내놓았다가 당선만 되면
모르쇠로 변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정치인들은 ‘아는 것이나 모르는 것이나 다 모른다.’고 하기 때문에 신뢰도가 더
떨어진 것이다.
누구든지
글을 쓰는 사람이나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부터 실천가능한가’라는 자기반성과 각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언행일치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나 말은 자기부터 실천이 가능해야 하며 무엇보다 논리에 맞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생각을 말이나 글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 때 마다 되도록 옳은 생각을 많이 하고 잘 못된 생각을
줄일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한다.
누구든지 오류는 범할 수 있지만, 거짓말이나 고의적인 실수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억이
안 난다' '죄송하다.'는 등으로 얼버무리고 넘어 가서는 안 된다.
어떤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점심때가 되어서 추어탕을 잘 하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추어탕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인지 손님들이 많이 왔습니다.
저와 집사람이 한 테이블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세분이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앉으면서 윗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흘렸습니다.
그때까지는 담배가 쏟아 졌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식사를 하는데 낮인데도 불구하고 소주 한 병을 시켜서 드셨습니다.
한 병을 다 드시지 않고 제가 보니 1/3을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식사를 하는데 얼마 후에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가 들려요.
복음송가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갑자기 복음송가소리가 들리는데 이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가 유심하게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나는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분이에요.
주머니에는 담배, 점심에는 반주로 소주를 드시는 그 분.
여러분, 저는 그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름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화벨소리가 복음송가가 나온다는 것은 그분이 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까?
여러분, 제발 이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이 때, 침체된 이 때, 빛을 발하려고 하면 우리의 <언, 행, 심, 사>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자로서의 의로운 삶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손에서 벗어난 예수님께서 어디로 향하셨지 4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여기서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고, ‘세례 베풀던 곳’은 ‘요단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신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으로 가셔서 한동안 머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심을 불과 4개월 정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결코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공생애를 시작할 때, 세례를 받았던 곳으로 가심은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하게 걸어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초심(初心)'이란 "처음 마음"을 말합니다.
처음 마음, 처음 정신, 처음 사랑을 잃지 않는다면, 가정, 일터, 교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바르게 세워져 있을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할 때의 첫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가정이 오늘날처럼 오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직장인이 처음 출근할 때의 마음,
기업인이 처음 출발할 때의 마음을 갖고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정부패로 얼룩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부르심을 받고,
안수받을 때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정결하고도 신실한 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의 은총을 잊지 않았다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과 믿음이 성숙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41-42).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요단강 강가에 계실 때,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나, 그 입에서 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갈릴리 호수를 걸으며,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을
보고서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모든 표적을 다 합친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표적이고,
그것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도 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게 보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한, 그 무엇도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또한, 세속적 가치관이 아무리 범람해도, 뉴노멀(new normal)들이 아무리 파도쳐도, 그것이 우리를 살리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 말씀이 영원한 노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의 손과 그분의 말씀
속에서 사시는 한 날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 중에 중요한 것만 뽑아 말할 때 7대 강화라고 합니다.
이중에 요한복음 10장은 마지막에 설교하신
것입니다.
이 설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0장 1절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 예수님의 언어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아멘은 예수님의 언어적인 도장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목자와 양의 비유,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선한 목자란 양을
위해 목숨을 주고 거짓 목자는 양을 늑탈하고 헤친다고 하셨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어린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푸른 목걸이 참 예쁘네요. 이것 싸주세요.”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그러니?”
“우리 언니요.
저는 엄마가 없어서 언니가 저를 키워 주셨어요.
언니에게 줄 선물을 찾고 있는데 이 목걸이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거예요.”
“돈이 얼마나 있니?”
“제 저금통을 털었어요. 여기요. 이것이 전부예요.”
소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모두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목걸이의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돈이었습니다.
소녀는 목걸이 가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소녀 몰래 정가표를 떼고는 예쁘게 포장해서 주었습니다.
“집에 갈 때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젊은 여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 푸른 목걸이를 내어놓으며 말했습니다.
“이 목걸이 이곳에서 파신 물건이 맞나요? 진짜 보석인가요?”
“예 저희가게 물건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석입니다.”
“누구에게 파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예쁜 소녀였지요.”
“그 아이에게는 이런 보석을 살 돈이 없었을 텐데요.”
그러나 가게 주인은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 소녀는 누구도 지불할 없는 아주 큰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냈거든요.”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잊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놓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것으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19).
그 중에 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20).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합니다(31).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는 피신해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이제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또 요한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지금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된 것인지는 마태복음
3:5-9에 보면 나옵니다.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불편한 장소로 오세요.
당시 유대광야는 모이기에 편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루살렘, 온 유대, 요단강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병고치는 은사집회를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귀신을 쫓는 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흔히 했던
축복성회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성경공부나 강해 설교를 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소리는 논리성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전한 말씀은 자력 있는
쇠붙이처럼 무섭게 사람들의 영혼을 끌어당겼습니다. 아모스가 예언한 것처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말라기, 스가랴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기갈 상태와 더불어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겪고있었습니다. 지금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이 되어서 성전이 다
무너졌습니다.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껍데기를 남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겨놓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더러운 것이 얼마나 묻었는지 보려면 거울에 비쳐보아야 합니다. 또 밝은 빛에 비쳐보면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니까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로마서
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들어가지 않으면 죄를 모릅니다. 마치 빛이 없어 더러운 것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남들 앞에서 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극히 가벼운 것들입니다. 내놓아도 별로 부끄럽지 않은 것만 죄라고 인정할
뿐입니다. 진짜 깊은 죄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끄집어 내지 못하고 본인 자신도 무서워서 꺼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지없이 우리의 죄를 노출시킵니다. 그리고 이 죄는 깊은 뉘우침과 아울러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고백과 더불어 지난날의 죄에 메여있던 죄를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합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은 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속에 깊이 박혀있는 죄가 빠져 나오지 않고는 아무리 은혜 받고 싶어도
은혜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도 만나지지 않습니다. 죄가 노출되면 씻을 수 있습니다. 이 죄는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자연적으로 물러가듯이 하나님을 말씀을 받는 순간 물러갑니다.
가라지가 섞여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온 사람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온 사람도 있지만 이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 그룹의 종교집단이 있었습니다. 엣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인입니다.
엣세네파는 결혼하지 않고 은둔과 경건주의 삶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를 두었고, 사해 근방에 모여 집단
생활을 하면서 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본 작업을 했습니다. 이 그룹은 예수님때 제일 예수님과 충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은둔과
성경필사에만 매달린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자주 예수님과 충돌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바리세파와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엣세네파와 달리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분리주의자’입니다. 이들의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육체의 부활도 천사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교리적으로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형식과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또 한 그룹은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서 그 이름을 땄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그룹이면서
공회원 그룹으로 종교적, 정치적으로 최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입장은 바리새파와 아주 다른 입장을 보였습니다. 모세
오경만 믿고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타락한 집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이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인기가 높고 이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구경나온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또 장사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으니까 가봐야지! 이것들이 모여서 뭐하나?”생각하고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잘 다녀야 합니다. 나도 성경을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는 다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교회에 왜
다녀야 되는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일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경은 가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세례요한은 강한 어조로 이들을 질책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합니다. 예수님 외에 이렇게 외친 사람은 세례요한뿐입니다. 경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활개를 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순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유머입니다.
1등급 암소집사 : 교회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
2등급 양 집사 : 목사님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
3등급 막대기집사 : 자기 할 일은 다 알아서 하지만, 넘치는 충성은 하지 않는 사람
4등급 비행기집사 : 띄워주고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아니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
5등급 미꾸라지집사 : 요리조리 잘도 핑계 대며 빠지는 사람
6등급 개구리집사 : 아무 데나 퐁당퐁당 끼여들고 간섭하구, 구설수를 만드는 사람
7등급 염소집사 : 질투하는 자 잡아당기며 갈라놓고 흩어놓고, 높은 곳에만 올라가려는 사람
8등급 서서잡사 : 술도 잡수고, 담배도 잡수는 사람
여러분은 몇 등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여러분! 사람이 본질이 변해야 합니다.
아무리 화장을 바꾸고, 옷을 바꿔 입어도 안됩니다.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 본성 나올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이 강력한 메시지를 듣고 난 후에 사람들은 누가복음 3장 10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어떻게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때 세례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
이 말을 듣고 있다가 당시 유명한
세리들이 또 질문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이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 3:13)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억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군인들이 또 묻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고 했습니다.
“강포하지 말라”는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세례요한이나 바울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까지가 할 일입니다. 더 할 수도 없으며 더 한다고 말해도 큰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한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도바울이 위대하다는 것은 자신들이 한 일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세례요한은 매우 훌륭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똑 같지는 않을 수 있지만 비슷한말을 다른 성인들도 했습니다. 타종교에도 사람의 근본과 윤리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41절 …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께 대해서 세례요한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바로 이 장면 때만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면 그것이 최선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르치고 교육시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종적인 선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쫓겨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으로 피신 오셨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 전에 세례요한에 의해서 뿌려졌던
복음이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동네에서 예수님이 지금 하신 어떤 설교나 능력 행하심이 없습니다.
본문
42절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는 바로 마 3:11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 더블린의 홀튼씨 부부에게 샴 쌍둥이(Siamese twins, 몸은 하나에 머리는 둘, 팔은 넷, 다리는 둘, 내장은
모두 각기 가지고 있으나 간과 골반은 하나인 기형아), ‘아일리쉬’와 ‘캐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1992년, 그들이 세 살
반되었을 때, 분리 수술하다가 캐티는 사망하고 아일리쉬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소아과 전문의사들과 여러 전문의사들이 1년 동안
연구 조사한 결과 분리 수술하여 둘 다 살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술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수술 후 혼자만 살아남은 왼쪽의
‘아일리쉬’는 옆에 늘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캐티’가 보이지 않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우리 옆에 늘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눈만 뜨면 아일리쉬 옆에는 캐티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큰 충격이 있다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항상 내 옆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머리요 나는 몸입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면 우리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네가 샴 쌍둥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6. 중보자는 왜 참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죗값 치르기를 요구하나,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하나님이셔야 합니까?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人性)에 짊어지시며,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18. 그러나 누가 참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인간이고 의로우신 그 중보자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신 분입니다.
19.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 후에는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儀式)들로써 예표하셨고,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참 하나님 & 참 사람(로마서 8:3-4)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새번역)
“이 경건의 비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 전파되셨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믿었고, 그분은 영광에 싸여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
하이델 베르크 요리 문답 제 2부 ‘우리의 구원(구속. 救贖)에 대하여’
’참 하나님, 참 사람‘에 관한 16-19문의
내용입니다.
질문 16. 왜 중보자이며 또한 구원자이신 그 분이 참 사람이면서 또한 의로움이 완전한 분이어야 합니까?
답 : 그 까닭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를 때, 죄를 범하였던 사람의 본성과 동일한 본성이 죗값을 치러야 하며(겔 18:4,20; 롬 5:12-18; 고전 15:21; 히 2:14-16; 벧전 3:18; 사 53:3-5, 10-11). 죄인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죗값을 치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 7:26-27; 시 49:7-8; 벧전 3:18).
세부질문 g. 인간을 구원할 중보자가 참 사람이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죗값을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 언약을 파기한 당사자인 사람이 그것을 갚아야 됨. 동물X. 천사X. 중보자는 참된 인간이어야 함.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이어야 함. 왜냐하면, 물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물에 빠진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두 사람 모두 물에 빠져서 죽게 됨.
** 참된 인간이면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과 동정녀 탄생은 어떻게 관련됩니까?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사람은 사람이지만 아담의 후손이 아닌 분. 처음 사람 아담의 범죄에 속하지 않은 사람. ‘인간이시되 아담에 속하지 않은 인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질문 17. 왜 중보자이며 또한 구원자이신 그 분이 또한 참 하나님이어야 합니까?
답 : 그것은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사 9:6, 63:3; 롬 1:4; 히 1:3), 그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람의 본성 안에서(사 53:4,11; 요 10:17-18)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를 짊어지시고(신 4:24; 나 1:6; 시 130:3) 또한 의와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획득하시고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사 53:5,11; 벧전 3:18; 요 3:16; 행 20:28; 요 1:4)
세부질문 h. 인간을 구원한 중보자가 참 하나님이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자기 뒤에 오는 많은 사람들의 죄까지 다 짊어지려면 그는 시간 안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어야 함. 피조물X. 하나님이셔야 함.
** 하나님의 진노의 짐은 어떠한 것입니까? 영원함. 하나님의 형벌과 모든 시대 사람들의 죄를 다 짊어지시려면 그 분은 하나님이셔야 함.
** 누가 그 짐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 우리의 중보자가 하나님이셔야 할 두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1)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에 짊어지시기 위함. 2)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 주시기 위함.
** 부활이 예수님의 칭의라는 사실을 설명하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다 만족시키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려내심으로써 예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심. 부활시켜 주심. 딤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 3:16). ---> 부활의 때: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심.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성결의 영: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영’ 곧 ‘생명의 영’이 되신 것. 참조: 고후 3:17; 고전 15:45;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 믿는 사람의 칭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믿으니까 의롭다. 부활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그 분 안에서 내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 그리스도께서 부활로써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얻으셨고, 그 얻으신 것을 우리에게 돌려 주시고 입혀 주시는 것. 부활하여 의롭다 함을 얻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그의 백성인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 큰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는 것.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서 우리에게 돌려 주시는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질문 18 : 그런데 누가 참 하나님이시면서(요일 5:20; 롬 8:3, 9:5; 갈 4:4; 사 9:6; 렘 23:6; 말 3:1) 동시에 참 사람이면서(눅 1:42, 2:7; 롬 1:3, 9:5; 빌 2:7; 히 2:14-17; 히 4:15) 또한 참으로 의로운 분이신(사 53:9, 11; 렘 23:5; 눅 1:35; 요 8:46; 히 7:26; 벧전 1:19, 2:22; 3:18) 그와 같은 중보자이겠습니까? 답: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중보자이십니다(마 1:21-23; 눅 2:11; 요 1:1, 14, 14:6; 롬 9:5; 딤전 2:5, 3:16; 히 2:9).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분(고전 1:30; 고후 5:210) 즉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세부질문 i. 그러면 누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고 또 의로우신 중보자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으며, 또한 죗값을 대신하여 치러 주셨음. 이 사실을 깨달아 알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음. 이것이 복음.
** 하나님의 지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고전 1:30. 복음의 요약.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심. 그 지혜의 내용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
의로움: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회복시켜 주는 것.
거룩함: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면서 사는 것. 자기의 자질은 사명을 위하여 주신 것이므로 자기의 자질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신 모든 것으로 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감. 변화, 생각, 말, 행동.
구속함: 값을 치르고 다시 삼. 복음:예수님께서 보혈로 나의 죗값을 치르고 나를 사서 나를 주님의 것으로 삼으셨다.
** 그것을 고린도 교회의 형편에서 설명하고 우리의 상황에도 적용하여 보십시오.
** 이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단: 파악의 태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함.
사복음서 <5> 기독교는 유대교의 완성
마태복음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태복음의 구조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주제적 구조와 연대기적 구조이다. 주제적 구조 중 대표적인 것은 일찍이 벤자민 베이컨이 연구·발표한 모세오경적 구조이다. 연대기적 구조란 잭 딘 킹스베리가 주장한 것으로, 주제적 구조의 단점을 보완하여 마태복음을 연대기적 흐름을 따라 분석한 것이다.
마태복음 이해에 널리 사용되는 모세오경적 구조는 마태복음이 모세오경과 같이 다섯 권의 말씀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이론이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설교, 혹은 강화가 다섯 편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강화는 5~7장의 산상 설교, 두번째 강화는 10장의 제자(사도) 파송 설교, 세번째 강화는 13장의 천국 비유 설교, 네번째 강화는 18장의 교회 공동체의 질서에 관한 설교, 다섯번째 강화는 24~25장의 종말론 설교다. 이렇게 주님의 설교를 다섯 편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 설교 끝에 반복되는 종결 후렴 문구를 근거로 한다.
첫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7:28). ·
두번째 강화 /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11:1a).
세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13:53).
네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19:1a).
다섯번째 강화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26:1).
이처럼 동일한 종결 후렴 문구가 반복되는 것은 저자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 다섯 강화를 다섯 권의 책으로 묶으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 부르듯,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이 다섯 권의 강화를 일컬어 ‘마태오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주님의 말씀을 다섯 권으로 묶어 마치 모세오경과도 같이 제시하려 했을까? 여기에는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의 마태 교회, 혹 공동체의 상황이 반영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상황이란 회당과의 갈등이 고조된 상태를 말하는데, 회당으로 대변되는 유대교에서 최고의 권위자는 모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태는 회당 유대교의 공격과 도전에 직면하여, 모세보다 더 위대하고 권세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한 유력한 증거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세오경적 형태로 제시했던 것이다. 또 이것을 통해 유대교의 완성이 바로 기독교임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오경적 구조만으로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무리이고, 따라서 마태는 구약의 많은 예언들의 성취를 소개하고, 또 옛 사람의 글(모세오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대조해 주님 말씀의 권위를 부가시킴으로써(마 5:21~48; 5:21~22a), 예수님이 모세보다 위대하고, 기독교가 유대교의 아류가 아니라 완성임을 증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모세오경 <5> 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에 소개되고 있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 행위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려진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땅의 소산으로 바쳐진 카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는다.
혹자는
양의 첫 새끼를 바친 아벨의 희생제사가 카인이 바친 곡식제물(素際)보다 더 잘 하나님께 열납된 것으로 이해한다.
또 어떤 이들은
카인과 아벨의 갈등을 농부들과 유목민과의 대립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위기 2장 1절 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소제(素際)는 번제(燔際)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제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보여준다.
결국 희생제물과 곡식제물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자기가 바친 제물이 열납되지 못하자 이것을 본 카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만일 카인 혼자서 야훼께 제사를 지내는 도중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도 분개(憤慨)했을까?
그곳에 자기 혼자만 있었다면 카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물어 본다든지 다시 제물을 바쳤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기 옆에 아우 아벨이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제물은 열납되지 않고 아우의 제물이 열납된 사실 앞에서 카인은 이성을 잃고
동생을 죽이는 끔직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의 7대 강화 중 그 첫번째 에 깨당한다. 이 강화는 하나님 나라와 거듭남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거듭남의 교훈(1-8절),
예수의 자기 증거(9-15절),
믿음으로 얻는
영생(16-21절),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22-30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증거(31-36절)
성경 속의 예수님 교훈
-
-
1. 예수님의 30대 강화
번
장 소
대 상
주 요 내 용
스 타 일
성 구
1
예루살렘
니고데모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대화체
요 3:1-21
2
야곱의 우물
사마리아 여인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
요 4:1-30
3
〃
제자들
성도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
요 4:31-38
4
나사렛
추종자들
선지자는 고향에서 배척당한다.
설교체
눅 4:16-31
5
갈릴리 한 동산
제자와 군중
산상 수훈
〃
마 5-7장
6
베데스타 연못
우대인들
예수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대화체
요 5:1-47
7
예루살렘 근처
바리새인들
안식일에도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
눅 6:1-11
8
나 인
군중들
세례요한은 예수의 선구자였다.
선언문
마 11: 2-29
9
가버나움
바리새인들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한다.
대화체
마 12:22-45
10
〃
제자들
제자의 길..
〃
마 10:1-42
11
〃
주의 가족
예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예수의 가족이다.
〃
막 3:31-35
12
〃
군중들
예수는 생명의 양식이다.
설교체
요 6:22-71
13
〃
서기관,바리새인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은 그 속에서 나온 것이다.
비판과책망
막 7:1-23
14
〃
제자들
겸손하고 남을 실족 시키지 말라.
예화 설교
마 18;1-14
15
예루살렘 성전
유대인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훈 계
요 7:11-40
16
〃
〃
나를 따르는 자는 빛에 행하라.
〃
요 8: 12-59
17
〃
바리새인들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 10:1-21
18
가버나움
70인 사역자들
세상은 주의 사역자들을 요청한다.
격 려
눅 10:1-24
19
베다니
제자들
열심 있는 기도는 능력이 있다.
훈 계
눅 11:1-13
20
〃
군중들
믿지 않는 자는 어리석고 비참하다.
대화체
눅 11:14-36
21
바리새인의 집
바리새인들
오직 내적 순결이 요구된다.
책 망
눅 11:37-54
22
요단 동편
군중들
탐욕, 외식, 불 경건을 조심하라.
위 로
눅 12:1-21
23
베레아
제자들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중요하다
예화 설교
눅 22:22-34
24
예루살렘
군중들
영생을 얻는 길
위 로
요 12:20-50
25
〃
바리새인들
외식을 금하라
책 망
마 23 ;1-39
26
감람산
제자들
예수 재림의 징조들
예 언
마 24: 1-51
27
예루살렘
〃
겸손과 섬김
위 로
요 13:1-20
28
〃
〃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제자의 삶
〃
요 14:16
29
감람산 근경
〃
복음을 전파하라
약 속
마 28; 18-20
30
밧모섬
사도요한
내가 속히 재림하리라
〃
계 22;6-16
2 . 예수 교훈의 주제들
가까운 수난의 때 마 26 : 45-46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 : 43-44
가난한 자들을 청하라 눅 14 : 12-14
가장 큰 계명 마 22 : 37-40
각기 다른 재능 마 25 : 14-15
간절한 기도 눅 11 : 5-8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 26 : 40-41
거룩함을 얻게 하는 진리 요 17 : 17-19
거짓그리스와 선지자의 활동 막 13 : 22
거짓된 칭찬의 화 눅 26 :6
건축자들의 버린 돌 마 21 : 42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자 마 5 : 19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 마 5 : 45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자 마 8 : 17
구원 얻을 때까지 견디라 마 10 : 22
구원을 얻는 길 요 10 ; 7-9
구하는 자에게 주라 마 5 : 42
국가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에 대한 의무 마 22: 15-22
그 날까지 깨어 있으라 막 13 : 35-36
금식의 바른 자세 마 6 : 16-18
기도의 모범 마 6 : 9-13
기도하는 집 마 21 : 13
기도할 말을 가르치는 성령 눅 12 : 12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요 14 : 6
낙원의 존재 눅 23 : 43
남을 함부로 바판하지 말라 마 7 : 1-2
남을 헤아리지 말라 막 4 : 24
낮에 일하라 요 9 : 4
내 안에 거하라 요 15 : 4-10
내 증인이 되라 행 1 : 8
너희도 온전 하라 마 5 : 48
누가 큰 자 눅 22 : 24-30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막 14 : 24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 마 12 : 28
독신주의에 대한 가르침 마 19 ;11-12
뒤 돌아보지 말라 눅 9 : 62
마음으로 지은 죄 마 5 : 27-28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눅 16 : 15
마음의 악한 생각들 막 7 : 21-22
마지막 날의 부활 요 6 : 40
말세의 징조 마 24 : 7-12
말씀에 순종하는자의 복 요 14 : 23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의 결과 마 13 : 18-22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마 13 : 19
말씀의 결실을 맺으라 막 4 ; 18-19
맡은 일에 충성하라 눅 12 : 47-48
맹세에 대한 권면 마 5 : 33-37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사랑 마 10 : 30
먼저 남을 대접하라 마 7 : 12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마 20 : 16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마 6 : 30, 33
명령 받는 대로 다 행하라 눅 17 : 10
목숨보다 더 귀한 예수 마 16 : 25-26
몸의 등불은 눈 눅 11 : 34-35
미혹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 24 : 4-5
믿고 의심치 말라 마 21 : 21
믿는 자들의 표적 마 16 : 17-18
믿음으로 구원 받은 여인 마 9 : 22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눅 18 : 9-14
반석 위에 지은 집 눅 6 : 47-49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요 20 : 27-29
보혜사 성령의 사역 요 14 : 16
복음 전파의 필연성 막 16 : 15-16
복 있는 종 눅 12 : 42-43
불신앙으로 인한 두려움 막 4 : 40
불신에 대한 경고 마 11 : 21-23
비유된 천국 비밀 막 4 : 12-13
빛 가운데 다니라 요 11 : 9
사람을 낚는 어부 마 4 : 19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마 15 : 1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 5 : 37-39
생명의 떡이신 예수 요 6 : 32-25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요 4 : 10
서로 화목하라 막 9 : 50
목자이신 예수 요 10 : 11-13
선행에 대한 보상 마 10 : 42
선행의 바른 자세 눅 6 : 34-35
섬기러 오신 예수 마 20 : 28
성도가 기뻐해야 할 것 눅 10 : 20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 요 17 : 9
성도의 역할 마 5 : 13-15
성도의 연합 요 17 : 20-21
성자와 동행하시는 성부 요 8 : 29
세상에 검을 주러 오신 예수 마 10 : 34-36
세상을 책망하러 오실 성령 요 16 : 8
세상의 미움을 받은 이유 요 15 : 18-19
세상적인 염려는 버리라 눅 12 : 22-3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마 15 : 14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지혜 마16: 2-3
심판의 기준과 근거 마 25 : 34-40
악하고 게으른 종 마 25 : 26-30
안식일의 주인 마 12 : 5-6
안식일의 참 의미 요 7 : 22-23
어리석은 다섯 처녀 마 25 : 7-12
어리석은 부자의 교훈 눅 12 : 16-21
영생에 이르는 열매 요 4 : 36
영생을 얻을 자 마 19 : 29
영원한 죄 마 3 : 29
영원히 멸망치 않을 영생 요 10 : 27-29
영접 자가 받을 상 마 10 : 40-42
예고된 배반 마 26 : 21
예고된 성도에 대한 핍박 요 16 : 1-3
예수가 오실 날까지 경건하라. 눅 21 : 34
예수를 시인하는 자의 상급 마 10 : 32-33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 막 9 : 37
예수를 좇는 자의 각오 마 8 : 22
예수 권세의 근원 마 21 : 23-27
예수의 길은 희생과 고난의 길 마 8 : 20
예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 눅 7 : 24-28
예수의 본을 따르라 요 13 : 15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얻는 영생
요 6 ; 35
예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눅 9 : 22
예수의 이름을 위한 고난 마 24 : 9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눅 14 : 33
예수의 초대 마 11 : 28-29
예수의 최후 명령 마 28 : 28-29
완악한 백성들의 두려움 마 13 : 15
외모로 판단치 말라 요 7 : 24
외식자의 결국 눅 12 : 1-3
외식하는 자에게 내려질 화 마 23 :23-28
외식하는 자의 추악함 마 23 : 27-28
요나의 표적 마 12 : 39-41
용서 받지 못할 죄 마 12 : 31-32
원수를 사랑하라 마 5 : 43-44
위선자와 외식주의자들 마 23 : 2-33
은밀히 구제하라 마 6 : 2-4
의로운 예수의 심판 요 5 : 30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의 복 마 5 : 10-11
의원이신 예수 마 9 :12
의인과 죄인의 구별 마 25 : 46
이미 심판을 받은 불신자 요 3 : 18
이웃과의 화해 명령 마 5 : 25-26
이혼에 대한 가르침 마 5 : 31-32
이혼의 불가함 마 19 : 4-6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 눅 15 : 4-7
잃은 양 한 마리 눅 15 : 4-7
자기 눈 속의 들보부터 먼저 빼라 마 7 : 3-5
자기 십자가를 지라 마 10 : 38
작은 일에 충성하라 마 25 ; 21
재물과 소유 마 6 : 24
재물에 우선하는 예수 섬김 막 10 : 21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 눅 12 : 33-34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요 13 : 12-15
제자직의 어려움 마 10 : 34-39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 : 13-14
죄 사함 얻는 믿음 마 9 : 2
죄 없는 자는 누구 요 8 : 7-9
죄의 근원은 마귀 요 8 : 44-45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막 2 : 17
죄인의 친구 예수 요 15 : 15
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눅 6 : 38
주 안의 새 가족 마 12 : 48-50
주의해야 할 누룩 마 16 : 6
중생의 비밀 요 3 : 1-21
지옥의 존재 마 23 : 33
지옥 형별의 고통 막 9 : 43-48
지혜롭고 순결하라. 마 10 : 16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요 8 : 31-32
진리의 성령 요 16 : 13
진정한 이웃 눅 10 : 30, 37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마 5: 16
참된 증거 요 8 : 14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 마 25 : 34
천국에서 복 있는 자 눅 6 : 21
천국에서 큰 자의 권세 눅 22 ; 25-30
천국에 이르는 의 마 5 : 20
천국의 비밀 마 13 : 11
추수할 일꾼 마 9 : 37-38
충성에 대한 교훈 눅 19 : 13-27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바리새인 눅 11 : 39
택함 받은 자는 소수 마 22 : 14
팔복의 가르침 마 5 : 3-11
포도원 품꾼 비유의 교훈 마 20 : 1-15
풍성한 삶의 근원 요 10 : 10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함 마 6 : 24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자 마 21 : 31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 마 19 : 17, 26
하나뿐인 선생 예수 마 23 : 8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마 10 : 28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자들 마 15 : 3-6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 요 5 : 42-44
한 말씀이라도 다 이루리라 마 5 : 18
합심기도의 힘 마 18 : 19
헛된 경배 막 7 : 6-8
혈통에 우선하는 믿음 요 8 : 37, 56
형제 권고의 3단계 마 18 : 15-17
형제에게 노하는 자의 형벌 마 5 : 22
혼인 잔치비유를 통한 교훈 마 22 :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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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2024(토) 요한복음 10:34-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일은 믿으라(38절)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But if I do it, even though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miracles, that you may know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그 일은 믿으라(believe the miracles)
그 일이란 예수께서 행하셨던 표적(세메이온)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표적은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지 않으려면 내가 행하는 일이라도 보고 깨달아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지역을 떠나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유대 지도자들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논쟁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합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신성모독을 일삼는 예수님을 그냥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신성모독에 대하여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단강 건너편으로 간 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의 위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신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피신을 그들의 승리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간 자리에서도 많은 믿는 자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위축되고 실패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나라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첫째는 돌을 던지려는 사람들
둘째는 예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
나는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믿을 수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일(2041) ἔργον, ου, ὁ 스트롱번호 2041
신앙의 걸림돌(요한복음 10:30-42)
대형
수해가 나거나 온 국민이 누군가를 도울 일이 생기면 방송이나 신문에서 모금운동을 하는데, 그때 사람들은 TV가 생중계하는
현장으로 봉투를 들고 줄을 서서 기부금을 넣습니다.
그리고 신문마다 1면에 어느 회사 사장은 몇 억을 하고 어느 단체 대표는 몇
억을 기부했다고 액수에 따라 활자를 달리하면서 보도를 해줍니다.
구호물품을 가지고 현장으로 가는 사람들도 구제물건을 쌓아놓고
현수막을 걸고 사진을 찍어서 신문에 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과 얼굴 내는 보람에 착한 일을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다 선한 일을 하고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다고 그 일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일반 국민들이 하는 구제와 봉사 전체보다 교회들이 모르게 하는 구제와 봉사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주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는 작은 일을 하고도 큰 칭찬과 격려를 받기를 원하면서도 이름 없이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 없는 천사” 라고 부르며 존경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신 뒤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는 내가 이런 일을 했다고 드러내지만, 주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는,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고, 나는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룰 뿐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고는 그가 행하신 위대한 일 보다는 자기가
누구이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지를 더 적극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내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고, 내가 행하는
능력이 그 증거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덤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여주었는데 그중에 어떤 일이 문제가 되어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은 네가 행한 선한 일 때문이 아니라 신성모독을 했기 때문이다. 네가 사람이면서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가 신봉하는 율법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사람들에게도 신적권위를 부여했는데,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온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신성모독이 된단 말이냐, 내가 만약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를 믿지 않아도 되지만,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거든 나를 믿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선한 일을 했습니다. 마6장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검정을 바르고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해도 네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그들의 좋지 않은 관습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주목받는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드러내는데 활용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할 때마다 “아버지”라고 하셨고, 심지어 오늘 본문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누가 착한 일을 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좋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면서, 하나님이 내게
이런 능력을 주셨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선을 넘었습니다.
“내가 한 이 큰 일을 봐라. 내가 창조주 아버지를
닮지 않았느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와 나는 똑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안색이 변하면서 돌을 들어
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고 까지 분노한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왜 그렇게 발끈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반발하였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제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상이 좋아서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서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는 반쪽
신자들이 오늘 교회안에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좋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생각지 않게 어떤 큰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어났고
인정합니다.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이건 정말 신이 도우신거야,”라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45년 갑자기 광복을 맞이했을
때가 그랬습니다.
온 국민은, 신 불신 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백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만세~” 라고 애국가를 지어 부를 때는, 왜 우리나라국가에 하나님이 들어가느냐고 토 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는다.
그분이 지금도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라고 말하면 금방 안색이 변하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더러
믿으라고 하는 거냐고 반발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일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은혜는
좋아하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는 발끈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믿고 있는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도 하나님이라고 하시니까 그것이 성경과
맞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표면적 이유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했지만, 하나님은 말로만 공경했지 사실은 자기들의 유익과 취향에 따라서
생활했습니다.
그들의 종교도 겉은 성경을 중심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의 안위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곁에 등장하시면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은 정치나 경제나 종교생활에서 자기들이
주인노릇 해 왔는데, 만약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면 그분의 간섭과 지도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가진 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고 자기들의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으니 이제는 그렇게 살지 못하겠다는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을 듣는 유대인들이 느꼈던 감정은 특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주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문제도 함께 상의해서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계획과 비밀을 아들은 다 알고 있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만의 특별한
지식과 경험과 기술을 아들에게 모두 전수해 준답니다.
그래서 어떤 기술을 보면, “아, 이 사람이 누구의 아들이구나” 하고 금방
알았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부자관계는 서로 얼굴 표정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차렸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이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고는, 이것이 내 아버지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술과 능력을 전수받은 아들이 아니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표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면, 이제는 자기 생각과 욕심대로 살 수가 없고,
그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존경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복종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일부러 부정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와 망대를 건설한 다음에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들이 때가 되어도 주인에게 세를 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의 하인을 보내어 세를 내라고 하자, 세는 내지 않고 심부름 간 종만 때려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종을 보냈더니, 농부들이 이번에는 그 종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의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은 존중하리라고 생각했더니, 농부들은 반대로 했습니다.
마가복음 12:7에 보면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들만 없애버리면
이 포도원은 영영 우리의 것이 될 것인데 왜 아들의 말을 듣겠느냐, 아들을 죽여 버리자.”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자기를 배척할 것을 미리 비유로 예고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우리 마음대로 못사니까 저를 죽여 버리고, 계속해서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살자는 속셈이었습니다.
이것은 2000여년 전에 유대인들에게나 있었던 옛날 이야기일까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신앙을 갖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자 하는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정도를 인정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고 따르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날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상의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먼데 계시면서
우리가 찾아갈 때마다 축복이나 주시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 삶의 현장에 가까이 오셔서 내 삶을 간섭하시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과 친밀한 부자관계가 되어 매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면, 내 모든 재산과 취미와 인생계획을 그분이
마음대로 하시지 않을까, 그래서 내 인생이 불행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믿음의 깊은 데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이유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아주 비밀스런 지혜와 세상을 이기는 기술을 전수해 주시려고
부르신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 복을 주려고
찾아와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할 것 같은 생각만 들어서 아버지와 가장 친밀한 아들로
살아갈 결심을 못합니다.
매사를 내놓고 아버지와 상의하고 순종할 결심을 못합니다.
그 대신에 세상에서 보고 들은 방식으로
성공해보려고 하니까 계속해서 문제가 생기고 절망스런 환경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우기는 싸우되 세상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아버지가 주시는 지혜와 기술로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힘을 주시고 도와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에서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봐서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도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들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좋아하고 자랑도 간증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듣는 순간,
너무 부담스러워합니다.
혹시 내 생각과 계획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대인들처럼 태도가 돌변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에게서 보호와 도움만 받기 원했지, 하나님이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왕이고 싶은데 왜 남이 나를 간섭하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말고도 우리를 얽어매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슬에
매인 채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염려와 걱정과 불안이 그것이고, 남들이 내게 한 말들도 우리를 얽어맵니다.
누구는 어떤 사람의
협박에 묶였고, 누구는 어떤 사람의 비난과 저주에 묶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만 하면 마치 그것이 절대적인 것처럼
그 말이 마음을 묶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생각 없이 쏟아놓은 말 한마디에는 벌벌 떱니다.
누구에게나 신앙의 걸림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자기 욕망이 걸림돌이 되고 누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이유없는 반항감정이 걸림돌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 자신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점이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첫째 걸림돌은 예수님의 초라한 인성(이사야 53:2-3)
예수님의 가난한 삶, 그의 온유한 모습, 그의 겸손, 모든 것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은 이런 외모를 가진 분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들은 갈릴리의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란 예수님을 보고 ‘저렇게 약한 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야, 나와 똑같잖아’하며 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는 데는 걸림돌들이 많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예수가 어떻게 나의 하나님이야’ 라는 생각이 걸림돌이 되어
2000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 십자가를 진 예수와 오늘 이 시대에 살며 죄지은 내가 무슨 상관이나 있겠냐고, 그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어떻게 내 죄사함이 되겠느냐고 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을 걸림돌로 삼기도 합니다.
또한 이 시대 교회가 존경스럽지
못한 점도 걸림돌이 작용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래 기독교는 새롭고 신선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신선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런 곳이라고 소개해 주기만 해도 오랜 구습에 찌든 사람들이 이 새로운 삶을 사는 단체에 관심을
가졌고 돌아왔습니다.
구한말에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파는 사람을 백정이라 하여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구박받던 여자들의 인권도 인정하였고, 축첩도, 노름도 못하게 하고 술 담배도 금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신선한 모임인 교회에 충격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의
단체처럼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한 건물에 몇 개씩 들어서 있는 교회의 종탑을 보면 교회가 영업장소라고 오해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신자들은 도처에 깔려있지만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타락한 생활을 욕심껏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그 교회가
소개하는 그리스도를 시시한 분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바른 신앙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 외모를 보고서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나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라.
소경인 채로 태어난
사람이 눈을 뜨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나면서부터 40년이 넘도록 일어서 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 뛰고, 나병환자가 즉석에서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누가 주신 능력이겠느냐?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아니시면 이 놀라운 능력을 누가 전수해
주셨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놀라운 일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둘째 걸림돌은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그동안 내가 주물렀던 내 인생을 주인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
포도원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죽인 이유와 같았습니다.
이
걸림돌에 걸리는 사람들은, 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미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긴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축복만 사모했지, 하나님이 내 삶 전체를 주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아버지와 상의하자고 하시니, 자기 것을 빼앗길까봐서 두려워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있나요?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이 걸림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지금까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면 내
마음대로 못 살 것 같으니까, 그래서 순종하는 신앙,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걸림돌을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부자관계를 누리며 날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지혜와 방법으로 담대하게 오늘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는가?
형상(체렘. tselem) צֶלֶם 스트롱번호 6754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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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그림자, 시39:7(6), [은유적으로] 헛된 것, 시7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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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사, 남성 형상, 창1:27, 5:3, 9:6, 우상, 형상, 왕하11:18, 암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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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everyone who is called by my name, whom I created for my glory, whom I formed and made.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11-15-2024(금) 요한복음 10:28-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칭 하나님이라(33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We are not stoning you for any of these," replied the Jews, "but for blasphemy, because you, a mere man, claim to be God."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의 정체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요 10:36)
둘째는 나는 생명이라(요 11:25)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선언은 매우 불경스러운 것으로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며 생명이 되신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언에 대하여 참람하다고 외쳤습니다.
참람(僭濫)이란 헬라어는 "블라스패미아(blasphēmia. βλασφημία)"라고 하며 그 의미는 "비방" 또는 "신성모독"이라고 합니다.
'블라스패미아'라는 헬라 단어에서 "신성모독"이라는 영어 단어 "블라스퍼미(blasphemy)"가 유래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는 것을 참람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유대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희는 땅의(gē. γῆ) 소금이며, 세상의(kŏsmŏs. κόσμος) 빛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agapē. ἀγάπη) 하셨는데 서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aphiēmi. ἀφίημι) 하셨는데 단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빛의 자녀들이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서 허덕이고 방황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참람한 모습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벧전 4:7).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3:3, 5)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5)
촛대(교회)를 옮기기 전에, 망하기 전에 회개합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주여, 자유대한민국을 붙잡아 주옵소서!"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성경에서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
동영상
성령 모독죄(마 12:31-32)
은혜 받고도 타락한 십자가 욕되게 하는 죄(히 6:4-6)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요일 5:16)
아담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죄 - 예수 내 구주
신성모독 (마태복음 26:59-68)
주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정죄되고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무슨 죄로 주님을 사형에 처했는가?
바로 신성모독죄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선하고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느냐 악하고 더러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단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사실 자체가 죄로 여겨졌다.
물론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한다면 더 큰 모독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주님이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자리에서 처음 표명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표명된 바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0-33)
그렇다면 주님은 이런 관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을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4-38)
주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것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째서 잘못이며 어째서 죄가 되느냐 하는 것이 주님의 입장이었다.
유대인들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 것은 그러한 행동을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하나님을 사람의 자리로 끌어내려 낮추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적 관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님은 외형을 보지 않고 속을 보았다. 그는 사람의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마귀의 생명이 있으면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생명)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자인 것이다.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냐 어떠냐 하는
것은 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주님의 시각은 이렇게 달랐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형식적으로 판단했다.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때도 오직 껍데기를 가지고 판단했다. 그들의 눈에는 한 손으로 피를 묻히며 죄를 짓으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아무 문제도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38년간 앉은뱅이로 고생하던 사람이 안식일에 나아서 걸어가는 것이 죄로 보였으며 그를 고쳐준 예수님도 죄인으로 보였다. 이 얼마나 표면적인가! 이러한 거짓된 관념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어이없는 죄로 정죄를 받고 죽음을 당했다.
오늘날에는 이런 문제가 없는가?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대인들이 익숙하게 생각하지 않던 몇 가지 용어들에 오늘날의
신자들이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빼고는 사실상 달라진 것이 없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참람하다고 생각하여 감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은 이러한 용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 관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로 생각하며
가까이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결국 그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씨)으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감히
받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의 관념 곧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이고 종교적 관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실제로 자기를 스스로 높여서 하나님처럼 행세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이르겠다고
스스로를 높이며 교만하게 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분명히 교만하고 망령된 생각이며 그 기원은 타락한 천사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높여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멸망할 교만한 생각이다.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자기를 스스로 높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아들의 자리로 이끄실 때 거기에 순종하여 따라가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주님은 자기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억지로 자기를 높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언제나 아버지 앞에서 자기를 낮추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야 할 아들로서 행했고 실제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했다. 이것은 자기를 스스로 높인 것이 아니요 도리어 스스로 낮춘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자기 인생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희생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한 것이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 교만과 일탈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보시며 어떤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시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며 그의 아들로 보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항상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지으셨다. 그래서 아담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그 속에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또한 그로 생명과를 먹게 하셨으며 그로 천하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며 그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정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뜻이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차질을 빚게 되자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택하신 한 무리를 불러 다시 자기 아들(백성)을 삼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처음 뜻을 이루게끔 역사하셨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고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4:22,23)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호11:1)
이스라엘은 그 생명의 실상으로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서 아들로 조성(회복)되어가는 중에 있었기 때문에 아들로 간주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서 그리고 약속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합당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서로를 그렇게 격려하며 거기에 맞게 살았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영원한 뜻에 대해 알지 못했고 관심이 없었다. 주님이 성경(시82:6)을 인용하셔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는 지적을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마땅히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하여 아버지의 길과 생명 안에서 행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연합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사소하거나 희미한 계획도 아니고 감추어진 비밀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의
핵심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세상 끝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은 그것을 보여준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1-7)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전혀 몰랐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들을 전혀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3-47)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그것이 안 맞는 것이다.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은 더욱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다고 고백하며 증거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주님 때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후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감히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 말하지 못했으며 그렇게 행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생각에 항상 갇혀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지만 인간은 죄나 짓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겸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불신앙과 진리에 대한 무지, 육신대로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참 아들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살지 못한 것이다.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이 마귀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생명)을 받은 사람들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표현하기를 주저했다. 그것은 세상의 종교적 관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보다 인간의 종교적 철학적 관념이 득세한 경우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관념에 따라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 보아야 한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그대로 보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롬8:14)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좇는 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아버지의 모든 것은 우리 것이다. 그가 거룩하면 우리도 거룩할 수 있으며 그가 의인과 악인에게 꼭 같이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시는 분이면 우리도 원수를 용납하며 축복할 수 있다.
신성
모독이 무엇인가? 진짜 신성모독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좇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것이다.
진짜 신성 모독은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 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육신의 욕망을 위해 그것을 어기며 그것을 교묘하게 위장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진짜 신성모독인 것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4)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하나님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종교적 의식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인격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1-9)
금식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경건과 섬김이 아니요 하나님의 심정으로 행하는 것이 경건과 섬김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겉과 속이 다른 자는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꾸지람을 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겉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속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조롱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4:31-3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5-19)
누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를 섬기는 것을 자기 양식으로 삼는 그 사람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그 사람이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이 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함에 있어서)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할 때 벌써 때가 찼으며 시간이 촉급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때 이스라엘의 죽어가는 죄인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39-44)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을 말하게 될 것이고 그 뜻을 말하게 될 것이고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기를 하나님의 권속으로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반가워서 그를 보고 자연히 '형제여'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법적 문제도 아니고 다른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생명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레위기 24장 10절 말씀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의 어머니가 이스라엘 여인이요 그의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어떤 사람이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영 중에서 싸우다가”
출애굽기 12장 38절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들이 그들과 함께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수많은 잡족이라는 말은 다양한 민족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민족만 나온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따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민족들이 혼합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여성과 애굽 남성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어떤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사람이 무리 지어 살다 보면 다툴 수 있고 언쟁이 일어날 수 있죠.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면, 더이상 큰 문제로 번지지 않도록 지혜롭게 잘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11절에서 이 혼혈인 아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맙니다.
11절 말씀 다시 보시면,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혼혈인 아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저주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혼혈인 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심하게 모독했는지, 그 정도는 알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한 행동으로 인해 모세에게 끌려갑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직접 판결을 내리시는데요.
14절 말씀 보세요.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쳐라.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그 사람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으로 끌어내서 이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먼저 첫 번째로, 모세가 신성모독한 사람을 직접 끌어냅니다.
모세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이끄는 지도자였습니다.
이러한 지도자가 죄인을 사형하는 집행장까지 직접 끌고 가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재판장이 사형선고를 내리고 자기 손으로 사형수를 집행장으로 직접 데려갑니까?
그렇지 않죠. 사형수를 집행장으로 데려가는 일은 누가 하든 크게 상관없습니다.
누가 끌고 가든 무슨 상관입니까.
결과적으로 사형만 집행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정확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바깥으로 끌어내라.
신성모독한 사람을 육체적으로는 모세가 끌어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친히 담당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죠.
그만큼 하나님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신성모독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매우 죄질이 나쁜 것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악이며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눈여겨봐야 하는 두 번째 내용은, 신성모독하는 사람이 했던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부정해졌기 때문에 다시 정결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뭐 어떻게 보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되는 것 아니냐.
본인이 신성모독하는 말에 동의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그 말에 흔들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신성모독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기 24장의 상황을 상상해보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싸움 구경을 하다가 신성모독하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들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냥 재미로 싸움났길래 뭐 때문에 그런가 하고 구경하다가 신성모독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런 악한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들을 수 있는 것이죠.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신성모독하는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손을 신성모독한 사람의 머리 위에 얹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소리를 들은 그 자체가 부정한 죄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며 부정해진 상태를 다시 정결해지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손을 죄인의 머리에 얹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에게 자기의 죄를 전가하듯이 그 부정함을 죄인에게 전가하는 것이죠.
이러한 경우는 율법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경우입니다. 자기 죄를 사람에게 전가하는 유일한 경우이죠.
사형 집행관이 따로 없는 것이죠. 이렇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직접 돌을 던지면서 사형을 집행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잔인하고 몰상식한 방법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가 그만큼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밝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5절과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아멘.
왜냐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사형선고를 내리더라도 집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형제를 실질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국가는 대부분이 중동과 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으며, 유럽의 경우에는 벨라루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국가가 사형제도를 폐지했습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국가는 일본과 미국, 두 나라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을 보면, 사형 집행은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다가옵니다. 게다가 사형 방식도 성경에 나오는 방식과는 많이 다르죠. 교수형이나 총살형과 다르게 오늘 말씀에서 살펴본 돌로 쳐서 죽이는 방식은 훨씬 더 고통스럽고 잔인한 방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나눈 말씀 내용은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βλασφημ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988
어원 / 989에서 유래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 분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언제까지 우리를 의심하게 하겠느냐고, 분명히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드는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어떤 내용을 마음속에 정해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말씀해 주지 않으시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무도 주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이 내용을 강조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받았다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영어로 보시면, they shall never perish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두 번이나 강조해서, 아무도 내 손에서, 그리고 내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번 주님의 손을 잡았을 때, 이제 주님께서는 아무도 그 손을 놓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놔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잡은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잡으셨기 때문입니다.
11-14-2024(목) 요한복음 10:22-2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전절(修殿節)(22절)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Then came the Feast of Dedication at Jerusalem. It was winter,
수전절(修殿節, Feast of Dedication)은 유대인들이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케 한 역사를 기념하여 지키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수전절은 유대력 기슬르월 25일부터 8일간 지키는 절기이며, 기슬르월은 오늘날 그레고리력으로 11~12월에 해당합니다.
수전절은 부림절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유대인의 민족 절기일 뿐 하나님의 계명이나 하나님의 절기는 아닙니다.
수전절을 "봉헌절"(공동번역) 또는 "성전 봉헌절"(표준새번역)이라고도 하며, 유대교에서는 하누카(Hanukkah, חֲנֻכָּה)라고 합니다.
'하누카'는 '봉헌'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2024년 하누카의 절기는 2024년 12월 25일 수요일 저녁부터 2025년 1월 2일 목요일까지라고 합니다.
수전절의 기원은 기원전 2세기경 유대인들은 헬라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이 메대·바사(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중동 지역의 패권을 차지했던 대제국을 말하며,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부하였던 네
장수(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대를 분할 통치했습니다.
초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으나, 100여 년 뒤에는 시리아를 포함해 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셀레우코스가 팔레스타인 통치권을 빼앗았습니다.
이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 역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재위 B.C. 175-B.C. 163)는 헬레니즘 문화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려
했고 그 대상에 유대인도 포함되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인들에게 헬라 신앙을 강요하며 수많은 핍박을 가합니다.
심지어 할례와 안식일 및 절기 등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 뜰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이 같은 핍박에 일부 유대인들이 항거했습니다.
그중 유다 마카베오는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기원전 165년경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성전에서 모든 우상과 도구를 치우고 깨끗하게 정리한 뒤 기슬르월(양력 11-12월) 25일에 새 번제단을 하나님께 봉헌한 것에서 시작한 것을 기념하는 날을 수전절이라고 합니다.
성전을 청결케한 사건을 기념하듯이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곧 성전입니다.
따라서 내 몸을 항상 정결케하여 성령께서 내주하는 거룩한 몸으로 관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자의 귀한 몸
학자들은 수전절에 대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친히 명하신 절기보다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설명한다.
유대인의 민족 명절, 수전절
유대인들은 가지가 아홉 개인 촛대 '하누키아(hanukkiyah)'에 불을 밝히며 민족 명절인 수전절을 기념한다.
수전절은 유대인들이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정결케 한 역사를 기념해 기슬르월 25일부터 8일간 지키는 절기다.
기슬르월은 오늘날 그레고리력으로 11~12월에 해당한다.
수전절은 부림절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유대인의 민족 절기일 뿐 하나님의 계명이나 절기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절기로는 주간 절기인 안식일과 연간 절기인 7개 절기가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성경에서 수전절은 단 한 차례 등장하는데,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신 시점이 수전절이 된 겨울임을 설명할 때 언급됐다.
예수께서 수전절(하누카)을 지키신 세 가지 이유(요한복음 10:22)
'수전절'은 이방신 숭배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켜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래서 이 절기의 히브리어 명칭은
'봉헌'을 의미하는 '하누카'이다.
수전절이 우리들에게 특별한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직접 올라가 지키신 절기이기
때문이다(요 10:22).
수전절은 유대력으로 '키스레브' 월 25일에 시작하여 8일 동안 지켜지는데, 이때는 12월경으로 비가
내리는 겨울철이다.
이스라엘에서 우기인 겨울철은 통행하기가 매우 불편한 계절이다.
더구나 수전절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순례
절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수전절을 지키셨다.
그렇게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전 정화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시킨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주전 334년부터 시작된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정복으로 이스라엘은
그리스제국의 통치 아래에 놓였다.
헬라문화와 종교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셀루커스왕조의 제8대 왕 안티오커스 4세는 주전 168년
예루살렘성전에 제우스신상을 세우면서 제물로 돼지고기를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격분한 모디인 지역의 제사장 마타티아스는 다섯
아들과 함께 헬라제국을 향한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저항운동은 마타티아스의 아들이었던 유다 마카비가 주도하였다.
이 저항운동을
'마카비전쟁'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카비 저항군은 주전 164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방신 숭배로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시켜 봉헌하였다.
수전절 기간이 8일인 이유는 저항기간 동안 유보되었던 초막절을 겸하여 지켰기 때문이다(마카비 상
4:56-59).
예수께서도 두 차례나 예루살렘성전을 정화시키신 적이 있으셨다(요 2:13-22; 마 21:12-13).
예수께서는 소, 양,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면서 성전을 장사하는 집 곧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책망하였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제2의 수전절 사건을 일으키신 분이시다.
그것이 통행이 불편한 겨울철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수전절을 지키신 이유이다.
둘째, 빛의 축제
수전절은 '빛의 축제'이기 때문이었다.
37년에서 100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고대사」에서 수전절을 '빛의 축제'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마카비시대부터 수전절이 8일 동안 매일 하나씩 추가하여
8개의 등잔에 불을 밝히는 절기였음을 의미한다.
수전절에 사용하는 촛대인 '하느키야'는 9개의 등(기본 등 + 8개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기본 등은 '샤마쉬'라고
부르는데, '봉사자' '시중드는 자'라는 뜻으로 다른 8개의 등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빛의 축제로서의 수전절과 관련된 탈무드
내용이 있다.
마카비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회복하였을 때, 이방신으로 더렵혀진 성전 안에는 7곱 촛대(메노라)를 밝힐
정결한 기름이 하루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기름이 8일 동안 꺼지질 않고 계속 유지가 되었고, 그 사이에 정결한 기름을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 같은 '기름의 기적'이 수전절을 더욱 즐거운 빛의 축제로 만들었다.
예수께서는 이 땅의 빛으로 오신 분이시다(요 8:12; 9:5).
그분은 또한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마 5:14).
우리들은 하나님의 제사장나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을 붙여주는 수전절의 '샤마쉬'가 되어야 한다(출
19:6; 사 61:6; 벧전 2:9).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빛의 축제인 수전절을 지키심으로 자신의 빛 되심과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함을 행동으로 직접 강조하신 것이다.
셋째, 세 때를 가르치셨다(형벌의 날, 이방인의 때, 재림의 날)
수전절을 통해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치신 '세 때' 곧 '형벌의 날(징벌의 날)(눅 21:22)'과 '이방인의 때(눅 21:24)'와 '재림의
날(눅 21:27)'을 강조하셨다.
마카비군대의 예루살렘 점령과 성전회복으로 100여 년간 지속된 하스모니아 왕조가 세워졌다.
이를 통해 수전절은
유대인들의 개척과 독립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누가복음 21: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누가복음 21:22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누가복음 21: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세푸스는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끝난 유대인전쟁의 배경에 수전절 속에 담긴 마카비의 저항정신이 있음을 증언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징벌의 날'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수전절에 참석하신 것은 곧 다가올 멸망의 그 날을 슬픈
마음으로 예시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면서 장차 닥칠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늑 19: 41). 그 자리에는 '눈물교회'라는 이름의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마카비정신은 19세기 말 헤르츨에 의해 시작된 시온주의운동에서 다시 부각되었다.
5차례에 걸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맨 손으로 불모의 땅을 가꾸는 불굴의 개척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용기를 안겨준 것 역시 수전절 속에 담긴 마카비
개척정신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에 대한 증거가 유대인올림픽으로 알려진 '마카비아'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올림픽과 월드컵과 함께
삼대 국제스포츠대회인 '마카비아'가 처음 제안된 것은 1929년이었다.
3년 뒤인 1932년 첫 대회가 텔아비브에서 개최되어 오늘날까지 매 4년마다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7년에 개최된
제20회 '마카비아'는 85개국으로부터 45개 종목의 10,000여명 선수가 참가하였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마카비아'는 새로운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마카비아'라는 명칭 자체가 수전절 속에 담긴 독립정신을
보여준다.
1948년 5월 14일에 이루어진 이스라엘독립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수전절 참석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방인의 때'가 끝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신 예언적 행동이시기도 하다.
11-13-2024(수) 요한복음 10:19-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분쟁(分爭)(19절)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At these words the Jews were again divided.
분쟁(分爭) 4978. 스키스마(schisma) σχίσμα, ατος, τό
-
1. 찢어지기, 분열.
-
a. [문자적으로] 터진 곳, 찢어진 곳, 마 9:16, 막 2:21.
-
b. [상징적으로] 분열, 불화, 요 7:43, 9:16, 고전 1:10.
-
-
관련 성경 / 쟁론(요 7:43), 분쟁(고전 1:10, 12:25), 헤어짐(마 9:16, 막 2:21)
* 4977 σχίζω
성령 훼방 죄
어원 / 98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모독(마 12:31, 막 2:7, 눅 5:21, 계 13:1), 비방 (막 7:22, 골 3:8), [명] 신성모독(요 10:33).
989. βλάσφημος, ον 스트롱번호 989
어원 / 984와 5345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모욕적인, 중상하는, 상스러운, 행6:11,13, 벧후2:11, 계13:5. 모욕하는 자, 딤전1:13, 딤후3:2.
-
관련 성경모독하는(행6:11), 비방하는(딤후3:2, 벧후2:11). [명] 비방자(딤전1:13), 거스르는(행6:13).
984. βλάπτω 스트롱번호 984
-
1. 방해하다, 해를 끼치다, 상처를 주다, 막16:18, 눅4:35.
-
관련 성경해를 받다(막16:18), 상하다(눅4:35).
5345. φήμη, ης, ἡ 스트롱번호5345
어원 / 5346에서 유래
-
1. 소문, 소식, 마 9:26, 눅 4:14.
-
관련 성경 / 소문(마 9:26, 눅 4:14).
마태복음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 공동번역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으로 번역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 역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죄와 비방은 사하심을 받게 될 수 있으나'의 뜻으로 이래된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 풍성하므로 인간의 모든 죄악이 도말(塗抹)될 수 있다는 성경의 보편적 진리를 입증해 준다(시 63:3 ; 86:5 ; 130:3,4 ; 사 1:18 ; 미 7:19 ; 요일 1:7).
더욱이 이 진리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대속사역은 완전, 충만하여 그 어떤 죄악일지라도 능히 용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 언급된 '훼방'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βλασφημια)는 '심한 비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지독한 '모독'(9:3) 또는 어떤 대상은 '반대하여 말하다'(32절)는 뜻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비방하는(blasphemy) 행위에는 매우 심각하게 대처(reaction)했다(26:65).
그러나 예수는 이 부분에서 인자, 곧 자신을 거역하는 행위와 심지어 암묵(unspokenness)적 의미에서이지만 하나님을 훼방하는 행위 조차도 용서의 가능성이 주어짐을 시사하셨다.
*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이 선언은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의 대속 사역에 어떤 결함이나 불충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더욱이 성삼위 하나님의 위상(位相)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성령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한편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성령의 이지적 사역을 사단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보는 학자들이 있다(Broadus, Chafer, Gebelein).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이미 그 죄를 범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예수의 이적을 바알세불의 소치(result)로 매도했던 것이다(24절).
이와 대조적으로
본문을 단순히 예수를 헐뜯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령의 독특한 사역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발생하신
분으로서(요 15:26 ; 16:7 ' 롬 8:9 ; 갈 4:6) 창조와 구속을 완성하는 사명을 맡으셨다.
그런 까닭에 그분은
죄인들에게 죄를 자각케 하고, 예수의 초청을 수락(acceptance)케 하며,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성숙한 신앙
인격체로 자라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비록 성부를 경원(敬遠)시 하고 성자를 미워한 자라 할지라도(딤전 1:13), 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로 인해 참회(懺悔)의 자리를 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성령이 역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비방,
모독하는 것은, 곧 참회와 중생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遮斷)해 버리는 일로서 결국 심판에 회부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요 3:36). 한편 신.구약을 통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규정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짐짓 범한
죄', 곧 의지적 결단에 의해 자행한 죄이다(민 15:30 ; 히 6:4-6 ; 10:26-32 ; 요일 5:16).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은혜의 빛이 어떻게 비취는가를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지중(不知中)에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의 경우(고전 15:9)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범죄이다.
이같은 범죄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즉 예수가 행하시는 놀라운 사역들(치유, 금식, 부활하심 등)이 분명히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안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부인하는 것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분명한 것임을 인지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인간의 내면에 들어오셔서 감동, 감화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곧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일아 된다.
결국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란 어떤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시킬 수 없는 일로서, 죄를 깨닫게 하고 참회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고의적(故意的)으로 성령에
대항하려는 고집스럽고도 악의에 찬 심령과 그 모든 활약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Alford, Plummer, Robinson
등).
귀신 들린
요한복음 8: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요한복음 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한복음 10: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귀신(1140) δαιμόν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1140
* 들려(2192) 에코(ĕchō) ἔχω
누가복음 4:33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가복음 1:23
마침(*, 유뒤스) - 긴박감을 더해 주는 마가의 표현 기법이다. 곧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으로 회당 내(內)가 놀라움과 감동으로 가득차 있던 바로 '그 시점'에라는 뜻이다.
더러운 귀신(*, 프뉴마티 아카다르토) - 본서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다이모니온'(*)을 부가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4:33;8:27;10:17등),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존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갈릴리 사역 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 진리 전파 장소 한 가운데로 돌진해 온 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첫반응은 '소리질러'(*, 아나크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신이란 정신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이상자와 간질병자의 경우로 나타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한다.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며 사람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이다(벧전 5:8).
마가복음 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 무덤 사에에서 나와. - 배가 도착하고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자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가 도착한 장소가 무덤 가까이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즉 무덤 사이에서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께서 막 만나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6절을 보면 멀리서 예수를 보고 귀신들린 사람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가 닿은 곳이 무덤 근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한편 4:35의 상황으로 볼 때 이미 날이 저물었을 때였으므로 호수를 횡단(橫斷)한 후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던 때였음이 분명하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 여기서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러운”(아카다르토)은 “불순한”, “더러운”, “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눅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이 단수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Calven). 나머지 한 사람은 여기 소개된 자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Lenski).
마태복음 8:16
귀신들린 자를 많이 - 성경은 육체적 질병과 뚜렷한 구별을 두고 '귀신들린 자'를 취급하고 있다(4:24; 12:22;
17:18). 따라서 이는 정신적 질환의 일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경은 정신 질환의 발병 원인을 사단의 역사로 보는
경향이 짙다(Weiss). 여하튼 예수 당시 유대 지방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지적한 바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대단히 사악하였으며 도덕적
신앙적인 면에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괴상한 마술에 심취하여 악령을 부르고 또 그들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이다(Dr. Lightfoot).
마가복음 7:25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 예수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대한 배경
설명이다. 확실히 그녀는 예수께 대한 소문, 그중에서도 그분의 탁월한 신유의 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찻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오신 소문을 듣자 마자 '곧'(*, 유뒤스)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했다. 한편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1 :23;5:2 주석 참조). 평행 본문인 마 15:22에서는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악령'과 '마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병은 육체적 압박과 두려움을 동반한 심한
정신적(精神的) 질환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러한 딸을 두고 있던 그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 여인은 헬라인(a Greek)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그녀의 국적이 분명 헬라 곧 그리이스가 아닌 점을 생각할 때 여기서'헬라인'(Greek)은 유대인콰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이방인'(Gentile) 에 해당하는 말이거나,'헬라어를 상용하는'(Greek-Speaking)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행
18:4;롬 3:9;10:12). 한편 그녀는 '수로보니게' 출신이었는데, 여기서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시리아'에 야한 '뵈니게'(Phoemicia)지방을 말한다(24절 주석 참조). 당시 '보니게'는 행정상
시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어쨌든 마가는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오 보니게'(Liobyo-Phoemicia)와 혼돈을 피하기 위해
'수로'라는 지방 이름을 붙여 '수로 보니게인'(SyroPhoemicia)이라 이름하였을 것이다. 실로 여기 언급된 여인은 분명
헬라화된 이방사람 이었다.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Josephus).
사도행전 16:16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 누가는 거듭하여 우리에게, 기독교 복음이 싸워 나가야 했던 그리이스-로마의 미신적 배경을 상기시키고 있다(8:9;13:6). '귀신'(*, 프뉴마 휘도나)의 '퓌돈'(*)은 고린도만 북부 파르나소스산 남쪽 언덕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지키는 신화 속의 뱀 또는 용을 가리키는데 퓌돈은 결국 아폴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퓌돈은 나중에 복화술사(腹話術師)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퓌돈의 영이 들어있는 것으로 여겨졌다(Plutarch).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 여종은 점을 쳐 사람들의 앞날을 알아 맞히고 많은 돈을 벌었으나, 수입금의 대부분은 주인들에 의해 착취되었다. 이러한 주인들의 태도는 약자들의 병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약함을 이용하여 이윤만을 챙기려는 불의한 정치인들과 악덕 기업주 그리고 적게는 이기주의에 젖어있는 우리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귀신(鬼神)에 대한 성경적 이해
1. 귀신(鬼神, demon, evil spirit)
원어로 다이몬(daimon)이라 하며, 악한 영(devil)을 가리킨다(마 10:1, 8; 행 16:16).
2. 귀신의 정체(正體)
1) 타락한 천사이다(벧후 2:4; 유 6).
2) 사단을 우두머리로 하는 조직과 계급을 가진 악한 영들이다(엡 6:12).
3) 세대주의자들은 홍수 이전에 천사와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종족으로 보기도 한다(창 6:1-4).
3. 귀신에 대하여 여러 견해
1) 아담 이전의 인류의 영혼이라는 견해아담 이전에도 인류가 있었는데 그들이 타락하여 저주를 받아 죽은 영혼이 귀신이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라는 성경의 기록을 부정하는 결과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2) 천사와 결혼한 후손들의 사후 영혼이라는 견해창세기 6장 1-4절을 근거로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세상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네피림'인데, 네피림이 죽은 후에 귀신이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아들은 셋의 후손을,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라는 신학자들의 해석이 받아들여져 설득력이 없습니다.
3) 노아 홍수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견해노아 홍수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음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도는 귀신이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누가복음 16장 31절 말씀을 부정하는 결과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4) 불신자 사후의 영혼이라는 견해불신자가 죽으면 음부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들어가지 못하여 지상에서 방황하는 영혼이 귀신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음부는 죽은 자의 거처로서, 사후 모든 인간의 영혼이 예외 없이 가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창42:38;전9:10;눅16;23;행2;27)는 성경의 기록을 부정하는 결과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5) 타락한 천사라는 견해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였지만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항하는 죄를 짓고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사14:12-14;겔28:11-19). 타락한 천사들이 영으로 이 땅에 던져져 활동하고 있다는 견해로 대다수 한국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사단을 귀신의 왕으로 불렀으며, 귀신은 사람을 통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4. 귀신의 정체에 대한 오류
1) 귀신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사단을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이다
(1) 귀신의 왕을 '바알세블'이라고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눅11:15;마12:24).바알세불(Baalzebul)은 사단의 별명이다(눅11:18,19).
(2) 귀신들린 사람을 사단에게 매여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눅13:11-16;행10:38).
(3) 귀신이 죽은 자의 영혼이라면 바울을 알 수 없어야 하는데 잘 알고 있다(행19:15).
2) 귀신은 천사와 여인의 후손이 아니다.
천사들은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22:30).
5. 귀신의 속성(屬性)
1) 영적 존재이다. 더러운 영으로 불리우고(마10:1;막9:25;계16:14).수천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막5:9).
2) 지적 존재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다(눅4:41;막1:24,3:11).
3) 부도덕한 존재이다. 악하고 거짓말을 한다(삼상16:14;딤전4:1,2;요8:44;대하18:21).
6. 귀신의 종류(種類, kind)
① 마귀(신32:17).
② 사신(시106:37),
③ 염소(레17:7),
④ 온역(합3:5),
⑤ 번갯불(시78:48),
⑥ 흡혈귀(잠30,15의 거머리),
⑦ 폐렴, 염병, 열병(신28장)
7. 귀신의 능력(能力)
1) 수천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막 5:9).
2) 운명을 알고(눅 8:31; 마 8:31,32), 강한 자를 안다(행 19:13).
3) 예수 그리스도께는 복종하도록 되어 있다(마 8:16-17; 막 16:17;행 19:15).
8. 귀신의 활동(活動)
1)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 한다(단10:10-14;계16:13-16).
2)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수행에 이용되기도 한다(삼상16:14;고후12:7).
3)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성장을 저해하고 사단의 권위를 확장하려 한다(엡6:11,12).
4) 인간(마4;24)과 동물(막5:13)을 사로잡아 병들게 한다(미9:33;눅13:11,16;행10:38).
5)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게 그릇된 교리를 유포한다(딤전4:1).
6) 복음을 방해하며(행13:10), 믿지 못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한다(마13:19).
7) 죄 짓도록 올무를 놓는다(딤전3:7;창3:4,5).
8) 의심과 불신앙이 일게 하고(창3:4,5), 분쟁이 있게 한다(고전3:1-3).
9) 제사를 지내게 한다(고전10:20).
10) 점을 치게 한다(행16:16).
11) 어떤 귀신은 감금을 당했으나(벧후2:4;유1:6), 어떤 귀신은 매이지 않고 사단의 일을 하고 있다.
12) 귀신들은 광야나 황무지에 산다고 여겼으며, '아사셀'(레16:8,10)을 대표격으로 꼽을 수 있다.
9. 귀신들림의 특징
'귀신들림'이란 귀신의 권세와 능력에 사로잡힘을 말한다(마9:32).
귀신들린자의 정신 상태는 정신병자의 상태와 비슷하다(막5:15;눅8:35).
육체적인 질병과 귀신들린의 질병이 다른 점은 육체적인 질병은 안수니 기름부음으로 치료되나 귀신들림의 질병은 귀신을 꾸짖거나 명령하여야 치료되었다(마10:8;막6:13;눅13;32;행8:7,19:12)
1) 사람의 병들게 한다(마12:22;눅13:11)
2) 사람을 사납게 한다(마8:28).
3) 사람을 괴롭힌다(마12:45;눅6:18).
4)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막9:22;롬3:23)
5) 사람을 부르짖고 미치게 한다(막1:26,9:26;눅9:39)
6)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막1:26;눅9:39,42)
7) 옷을 벗게 한다(눅8:27) 8) 광야로 내보낸다(눅8:29)
*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 의함은 아니다(딤전5:23). 육체적인 질병과 귀신들림의 질병이 있는데, 육체적인 질병은 안수나 기름부음으로 치료되나 귀신들림의 질병은 귀신을 꾸짖거나 명령하여야 치료되었다(마10:8;막6:13;눅13;32;행8:7,19:12)
10. 성경에 귀신 들린 자
1) 사울왕(삼상16;14)
2) 가버나움 회당의 귀신 들린 자(막1;24)
3)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린 자(마8;29;막5;15)
4) 벙어리 귀신 들린 자(눅11:25,26)
5)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마15:22-28;막7;25-30)
6) 귀신 들린 소년(마17:18)
7) 빌립보 성의 여자 노예(행16:16-18) 8) 스게와의 아들(행19:15,16).
11. 귀신의 운명(運命, fate, destiny)
1) 일시적 운명
(1) 성령의 이름으로 쫓겨난다(마12:28).
(2) 갇힌 어떤 귀신들은 환난 때에 놓임을 받기도 한다(벧후2:4;계9:1-11).
(3) 훗날 무저갱에 던지움을 받는다(눅8:31).
2) 영구적 운명
궁극적으로 모든 귀신은 사단과 함께 불못에 던지움을 당한다(계20:14).
12. 귀신에 관한 관용어
1) 귀신의 영(계18:2) : 사단의 추종 세력. 더러운 영을 가리킨다.
2) 귀신의 왕(마9:34) :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단'을 지칭한다.
3) 귀신의 처소(계18:2) : 영원한 형벌의 장소 곧 '지옥'을 가리킨다.
4)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떠는데, 그런 귀신들의 믿음과 다름없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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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귀신 들릴 수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귀신 들릴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은 귀신들릴 수 없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합니다.
귀신들리는 것과 귀신에게 억눌리거나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귀신들리는 것은 귀신이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직접적으로/완전히 조종하는 것을 말합니다((마 17:14-18; 눅
4:33-35; 8:27-33).
하지만 귀신의 억누름이나 영향은 귀신 또는 마귀들이 영적으로 사람을 공격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고무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전쟁을 다루는 신약 성경의 모든 본문 중에는 신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으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엡 6:10-18).
신자들에게는 귀신을 내쫓으라는 말씀보다는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약 4:7; 벧전
5:8-9).
신자들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십니다(롬 8:9-11; 고전 3:16; 6:19).
분명히 성령께서는 자신이 거하시는 동일한 사람이
귀신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셔서(벧전 1:18-19)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그분의 자녀들 중 한 사람이라도 귀신 들려서 귀신에 의해 조종 받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들로서 사탄 및 그를 따르는 귀신들과 전쟁을 치르지만 우리 속에 있는 귀신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선언합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우리 안에 계신 이는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사탄과 그를 따르는
귀신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귀신의 세계를 이기었고 이에 신자의 귀신들림은 성경적으로 볼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어떤 성경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은 귀신들릴 수 없다는 강력한 성경적 증거를 염두에 두고 “귀신처럼
되다”(demon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조종하는 상태를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 수는 없지만, 귀신처럼 될 수는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으로, 귀신처럼 된다는 묘사는 사실상 귀신들림의 묘사와
동일합니다.
따라서 결국 똑같은 문제가 됩니다.
즉, 용어를 바꾸는 것이 귀신이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거나 완전한 조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귀신의 영향이나 억압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실제적으로 발생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리거나 귀신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신자의 귀신들림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귀신에 의해 조종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는 개인적 체험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이 우리의 성경 해석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을 걸러내야 합니다(딤후 3:16-17).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여겼던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행동을 드러내는 것을 목격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였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목격이 그리스도인이
귀신들릴 수 있고 귀신처럼 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견해를 달라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진정한 그리스도인도 심하게 귀신에게
억압을 당하고 또는 심한 심리적 문제로 인해 고통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확신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하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귀신 들림의 특징
귀신 들린 상태는 악령의 인격체와 함께 악령의 에너지가 그 사람의 몸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성경의 예로는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인 광인이 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그를 매어 놓았지만 언제나 쇠사슬과 고랑을 끊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막 5:4).
성경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하여 그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막 5:2).
귀신이 들렸을 때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훼방이다.
성경에서 훼방이라는 단어가 상위 권위나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욕’을 의미한다.
계시록 16장을 보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며 고통 당하는 자들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악령으로 가득찬 상태이다.
이때 그 특징이 하나님을 향하여 욕하는 것이다.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계 16:9, 참조 계 16:11, 21).
사탄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긍극적인 목적이 성경에 자명하게 나와 있는데 바로 욥기 2장 5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람이 악령이 들 때 그의 마음과 입술은 하나님을 향하여 더러운 욕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악령들이 사람들에게
들어가려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철저한 원수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악령이 들리면 하나님처럼 자신을 신으로
높이려 하거나, 무서운 죄악들을 범하거나, 하나님을 미워하며 멸시하고 무시하는 마음과 말을 하거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르거나 일반 은총 및 특별 은총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게 된다.
악령이 들게 되면 그 사람은 악령의 지.정.의를
따르게 된다.
지적으로는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항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철저하게 멸망할 것을 안다.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본능으로 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방도 밖에 없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지만 그러나 동시에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하나님께 욕을 하며
대항한다(약 2:19).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버리시지 않았는데, 그는 귀신이 들려 귀신에게 속은
상태로 귀신하고 똑 같은 처지의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감정적으로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특히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와
보혈을 미워한다.
또한 복음의 사람들을 증오하고 시기하는 것은 당연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악령들은 사람보다 더 지능이 높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과 지능은 전지하지 않다.
인간에 비하여 높을 뿐이다.
그러므로 악령들의 왕인 사탄마저도 모르는 것이 많다.
대신 그는 수억의 악령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 악령들은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나눈다.
주의 백성들은 결코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섭리 하심이 없다면 사탄과 악령들의 궤계와 조작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지혜와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들의 공격에 날마다 쓰러져
패배하게 된다.
또한 귀신들은 잔인하다.
따라서 귀신들린 사람들은 잔인하여진다.
자비가 없어지며 지독히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
정도가 도를 넘는다.
특히 난폭함은 극을 달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멸망하게 하면서 말할 수 없는 악한 희열을 느낀다.
따라서 귀신들린 사람들은 정신 병자처럼 보일 때가 많다.
실제로 귀신들린 상태로 정신병자가 되기도 한다.
귀신이 들려고 하는 초기에는 보통 우울증에 빠진다.
도에 지나친 자기 연민에
빠진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통곡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귀신이 들면 그의 감정은 하늘과 땅을 왔다 갔다
한다.
너무 좋아서 펄쩍 뛰기도 하며 황홀경을 체험하기도 하다가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슬픔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몸을 뒹굴 정도로
아파한다. 발광하는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갑자기 벽이나 전봇대 등, 아무 물체에 자신을 부딪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 욕설과 폭행을 일삼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신병과 귀신 들린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를 구별하지 못할 경우 한 영혼의 마음에 평생 상처를 줄 수 있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사실 많은 이단들이 정신병과 귀신들림,
일반 병과 귀신 들림을 구별하지 못함으로 의사를 만나게 하면 쉽게 고쳐질 평범한 사람 하나를 악령의 자녀나 마귀 새끼로 만들어
놓기 쉽상이다.
영적 무지로 인하여 이단들이나 어리석은 목회자들이 여러 연약한 사람들에게 범하는 상상도 못할 무서운 피해들은
무지기수이다.
귀신이 들렸을 때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그의 말하는 내용이 거짓이란 점이 중요하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따라서 매우 심한 거짓의 '의도'가 나타난다.
쉬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감쪽 같이 속을 수
있는 거짓말을 한다.
정신병 같은 경우는 실체에 대한 오해를 정직하게 말한다.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오해한다.
이러한 경우
일반인들은 그의 의식이 허상에 있음을 쉽게 본다.
그러나 귀신 들린 경우는 그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인격체가 그를 통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특히 말을 할 때 그 말을 들어보면 내용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 정신병과 귀신들린 사람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난다.
귀신이 들린 경우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나는 경우도 많다.
또한 방언이나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며, 귀신의 이름과 정체를 토설하는 때도 많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분명이 인식한 가운데 의사를 만나게 해야
하는 신체의 병 및 정신 병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그 영혼을 귀신 들린 상태로부터 구출해야 하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귀신 들림과 신체의 병이 반드시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정신적인 병이 귀신 들림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귀신 들림으로 인한 병이 있고 같은 종류의 병이라도 귀신
들림과 상관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병을 보며 귀신이 들렸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김기동 베뢰아 신학의 경우가 이러한 문제에 빠져 있다.
감기마저도 귀신의 역사라고 생각하여 귀신을 내어 쫓는다.
모든 병이 다 귀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무좀 귀신 물러가라”는 농담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돌팔이 이단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데 거의 획일적으로 모든 병을 귀신의 역사로 치부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병을 치유하러 오시 것이 주 목적이 아니시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식과 함께 회개를 촉구하고 나아가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가 담겨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복음대로 믿고
자신의 마음을 드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사함과 함께 영생을 얻도록 되어 있다.
마가복음 1장 36-38절은 예수님께서
오신 주된 목적은 전도인 것을 분명하게 하셨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귀신 들린 상태의 병과 귀신이 들리지 않은 상태의 병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마가복음 1:32-34절을 보면 성경은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병은 귀신을 내쫓지 않으시고 고치시고 어떤 병은 귀신을
내쫓으시면서 고치신다.
또한 병이 없어도 귀신이 들린 상태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귀신만 쫓아내신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들림은 몸과 마음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몸에 병이 들 수 있고,
정신적으로도 병이 들 수 있다.
귀신이 들릴 경우 일반적으로 정신적으로는 우울증 및 정신병 증상이 동반되며 귀신이 말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환청) 귀신이 이야기 해 주는 내용 때문에 헛것을 보기도 한다 (허상).
한편 마음은 악으로 가득차서 일반인이
저지를 수 없는 무서운 죄악들을 저지르게 된다.
분명하게는, 귀신 들림의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려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귀신에 들린 자는 쉬지 않고 반복되는 죄악을 범하게 되며 그리고 점점 더 무서운 죄악으로 치달리게 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무서운 죄악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악으로서 복음을 막는 죄악이다.
이를 위하여 귀신 들린 사람들은 모든 거짓말과
거짓을 동원한다.
신접한
사람들은 귀신이 들린 상태의 사람들인데 이들은 영적인 차원의 거짓을 행한다.
거짓중에 첨단의 거짓은 마술이다.
따라서
이들은 마술과 요술을 통해 거짓 기적과 거짓 기사를 나타내며 이를 통해 사탄을 선전하고 사탄을 숭배한다.
21세기에 사탄의 전략은
'거짓' 평화이다.
거짓 하나됨이다.
온 인류가 거짓에 속아서 하나가 될 것이다.
거짓 복음과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신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평범하게 보일 것이다.
너도 나도 신접하는 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참된 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착각한 가운데 온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귀신들림’(‘다이모니조마이’)에 대한 영어번역, 분명 문제가 있다.
δαιμονίζομαι
스트롱번호 1139
δαιμόν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1140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을 반대하는 이들은 귀신들림을 '귀신이 그리스도인을 완전히 지배하는 상태‘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해는 귀신들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daimonizomai)에 대한 영어 번역(demon possession)에서 기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귀신들림’(demon possession)이란 표현에 소유 그리고 통제라는 개념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마귀에 의해서 소유가 된다는 것은 마귀에 의해 소유가 되었으며 완전히 그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사람이 무능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그 자신의 그리고 그녀의 의지에 기초하여 더 이상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신들림은 비행기가 납치된 것과 같다.
Clinton E. Arnold, 3 Crucial Question about Spiritual Warfare (Grands Rapids, Michigan: Baker Books, 1997), 79.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소유가 된 그리스도인이 동시에 귀신의 소유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아놀드(Clinton E. Arnold)가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본래 ‘귀신 소유’(demon possession)로 번역한 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daimonizomai)에는 이러한 ‘소유권’ 혹은 ‘소유’라는 개념이 없다.
이러한 번역은 3세기 동안 가장 대중적인 성경인 킹제임스역(KJV)에 의해 표준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이른 라틴어 역본인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a)는 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를 ‘소유’로 번역하지 않고 단순한 표현인 ‘귀신을 가졌다’(to have a demon, habeo with daemonia)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귀신들림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이모니조마이’를 ‘귀신소유’(demon possession)로 번역하기보다 ‘귀신침입’(demonization)으로 번역하기를 제안한다.
전 세계 복음주의 진영의 귀신론에 성서적 기초를 제공한 엉거(M. F. Unger) 역시 ‘귀신소유와 ‘귀신들림’ 개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는 ‘귀신소유’는 귀신의 완전히 사람을 지배하는 상태, 즉, 가장 심각하고 가장 심하게 귀신들린 상태를 말하며 대표적인 실례가 ‘거라사 귀신들린 남자’(막 5:1-20)다.
반면, ‘귀신들림’(demonization)은 가벼운 귀신들림, 보통 귀신들림, 심각한 귀신들림으로 단계를 구별한다.
결국 엉거는 ‘귀신들림’(demonization)이란 개념을 가장 거친 상태의 귀신들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귀신의 모든 침범의 경우를 총칭하는 개념이라 본다.
디카슨(C. F. Dickason)은 귀신은 그리스도인들을 실제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귀신소유’와 '귀신들림'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보고, 일반적으로 귀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침입하는 것은 ‘귀신들림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이 외에도 그리스도의 귀신들림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귀신소유와 ‘귀신들림’을 구분하며, 이 가운데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귀신이 침입한 상태를 ‘귀신침입’(demonization)으로 보려고 한다.
배본철은 실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영혼 속에는 성령께서 거주하시기에 심각한 귀신들림의 상태 즉, 귀신들림(demon possession)으로부터 보호를 받지만 귀신들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 없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귀신들림보다는 약간 단계인 ‘귀신의 억압’(demon oppression) 즉, 인간의 지정의와 몸과 환경이 귀신의 영향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멀쩡한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 귀신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들이 대단히 많다는 점입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귀신들이 얼마나 가깝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는 귀신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나면 곧 밝혀집니다.
저는 그 동안의 성령사역을 통해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귀신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수 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늘 깨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 않으면 얼마든지 귀신의 억압이나 영향을 받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 배본철, “귀신들림과 정신병, 무엇이 다른가,” 크리스챤투데이 2010년 7월 20일자.
배본철은 ‘귀신들림’과 ‘귀신억압’으로 구분하되, ‘귀신억압’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본다.
심지어 매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깨어 있지 않고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귀신억압(demon oppression)이 상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귀신 들렸다’는 헬라어 ‘다이모니조마이’의 적절한 영어번역은 ‘귀신 소유’(demon-possession)보다는 ‘귀신 침입’(demonization)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사료된다.
질문 / 귀신 들림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어떤 분은 삶의 어려운 부분을 얘기하실 때 마다 ‘악한 영’ ‘어둠의 영’ 등으로
얘기하면서 대부분 삶의 어려운 부분을 악한 귀신과 연관해서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귀신 들림 혹은 마귀의 역사
등을 어떻게 보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답변 / 성경은 분명히 귀신의 존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죽은 자가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적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 혹은 지옥을 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즉, 귀신은 죽은 자의 혼령이 아니라, 사단(즉 마귀)의 부하들입니다.
* 귀신을 죽은 자의 넋이라고 보는 것은 민속신앙의 결과이다.
사단의 존재가 분명히 있듯이, 귀신의 존재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주권과 질서로
창조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반적인 창조 영역을 무시한 채, 모든 세계를 영적인 측면으로만 보고, 부정적인 삶의
요소들(병걸림, 정신이상적 상황, 우울증, 관계의 어려움 등 등)을 모두 귀신과 연관해서 보는 자세는 옳지 못한 자세입니다.
김기동의 귀신론을 주장하는 베뢰아 아카데미를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일반 자연 영역이
있습니다.
그 영역은 일반적인 원리와 방법을 따라서 살아가고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잘못된 것을 귀신의 작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영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성적 올려 달라고 하나님께 조르는 것은 신앙이 깊은 것이 아니라, 신앙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과도 마찬가지 입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건강이 약해 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식사와 운동을 잘 겸해서 조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존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영역을 일반 이성적, 경험적 자세로만 살아가는 것 또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마 12:28).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의 삶을 규칙적으로
사셨습니다(막 1:35).
이는 사람의 지혜로 이기지 못하는 사단의 영역이 반드시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존재, 귀신의 존재 등을 늘 기억하고,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귀신의 존재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삶의 잘못된 전 영역에 영향을 주는 존재를 귀신과만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자세입니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너무 둔감해서도 안됩니다.
극단적인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정신 분열 증세와 귀신 들림의 경우는 외견상 구분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경우
‘귀신 들렸다’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신병의 증상인 경우는 ‘말의 조리가 없고, 횡설 수설 한다거나, 자기가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한다거나, 약물 투여 등으로 인해 효과를 본다거나, 육체적으로는 나약하다거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한다거나,
치유가 장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부분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습니다.
이는 정신 분열 증세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뚜렷한 의식이 있고, 합리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빛나고 사악한 광채나 음침한 눈빛을 발하며, 발작시 진정제나 약물투여가
효과가 없는 경우도 있고, 불가사의한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으며, 남의 목소리를 내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급속하게 치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의 기준 등을 통해서 적절하게 구분하고, 그에 따른 올바른 접근을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하게
보이는 증상이라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정신 분열과 귀신들림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으로 구분되며, 그에 따른 적절한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귀신에 대한 논의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어두움을 어떤 다른 노력으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귀신은 아무런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없애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모시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입니다.
어두움인 귀신은 빛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뢰아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김기동의 귀신론은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타락한
천사(사탄)를 멸망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그 어떤 존재 위에 유일하게 뛰어난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기 보다는, 귀신의 존재에 더 많은 초점과 민감함을 보였던 것입니다.
귀신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 깨어 있으십시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 분만 앞세우고 나아가면,
어둠의 영인 귀신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에게까지 낮아지시고, 자신의 몸을 주기까지 하신
참 사랑, 그리고 부활의 능력, 천국을 준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연약함과 부조리함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참된 해결과 참된 능력이 온전히 담겨져 있습니다.
분쟁(分爭)이란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 내 주장이 옳다고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이 옳다 아니라 하며 서로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충돌을 일컬어 분쟁 곧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divided).
성경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 12:31. 막 3:29).
유대인들의 분쟁은 에수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과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심지어 귀신들린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곧 성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귀신들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성령 훼방 죄와 같습니다.
말하는 것이 자유라고 하여 말을 감정에 그대로 실어서 표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율법의 전통에 따라 안식일 규정을 만들고 대략 39가지를 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신 것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므로 예언된 메시야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의견은 메시야가 아니라면 어떻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는가?
그로므로 그 사람은 메시야가 분명하다는 의견입니다.
이렇게 두 의견이 대립하여 서로 분쟁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채워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실천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박과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는 예수님께서 드디어 로마의 권력을 부수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선택하므로 이에 대한 반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기대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우선이라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줄 아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을 부인하는 믿음과 나를 위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추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에 감격하는 은총의 사람으로 회복하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사탄은 분쟁케 한다!
예수님이 메시아란 사실이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전적으로 정치적 메시아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유대나라와 민족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킴은 물론, 통일왕국의 다윗처럼 번영케 하는 자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갖 고초를 당하고, 친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에서 맥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라는 자가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주장합니다.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께서 자기를 아시고 자기가 아버지를 안다”합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자기를 사랑한다”며, “그 사랑을 자기에게서 빼앗는 자는 없고, 자기가 스스로 버린다”며,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주장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는 아주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하지만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기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분쟁은 이번뿐이 아닙니다.
벌써 여러 차례 그들은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사람들이었고요.
또 다른 일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 사람들이 조금 낫기는 하나 전적으로 배격한 자들과 예수님을 배척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일점일획의 남김도 없이 100%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안타까운 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잘 신봉하고, 가르치고 있다’고 자랑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대부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배격하고 있다”는 겁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장차 메시아가 오실 것이란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틈만 나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 줄 것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셨는데도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제아무리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가르치며, 잘 알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성경을 많이 읽어 잘 알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함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오직 우리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이 전적으로 죽느냐 죽지 않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앞에 전적으로 죽어야 비로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실제로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각별히 유의해야 할 부분이며,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할 부분입니다.
본문 20-21절 말씀을 보면 유대종교지도자들 간의 분쟁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보십시오.
대부분의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귀신 들려 미쳤다”면서, “왜 귀신 들려 미친 예수의 말을 듣느냐”라며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7:19-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모세가 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말씀하실 떼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8:44-48에도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내가 진리를 말해도 너희가 나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우리가 너를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않으냐”고 말했습니다. 또 있습니다.
요한복음 8:51-52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똑 같은 말을 예수님에게 했습니다.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지 않습니까?
결국, 나중에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합세하여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신 사건을 두고 “네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냈다”고 힐난합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그런 와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이 귀신의 말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할만한 사건을 덧붙입니다.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라며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신 사건을 증거로 들고 나와 예수님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요한복음 9:1-7에 있는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자신이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사건은 구약에서 하신 예언을 예수님께서 몸소 성취시킨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35:4-5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17-22을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질 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가서 알려줍니다.
그 때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침 그 때 예수님은 각종 질병과 귀신 들린 자들을 많이 고치시고, 맹인의 눈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보낸 제자에게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를 미뤄볼 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이는 예수님뿐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코 귀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요즘도 무당이 귀신의 힘을 빌어서 병을 고친다고 합니다만 일시적인 고침일 뿐입니다.
사단이 사람을 미혹하여 자기 자녀를 삼기 위해 눈속임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귀신이 육신의 병을 일시적으로 고칠지는 모르나 영혼의 병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실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육신의 질병과 함께 영혼의 병까지 고치시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치료불가능한 병에서 고침 받는다 해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병 고침이 도리어 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차라리 자신의 질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해할 수 없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영혼이 변하지 않는데 육신의 질병이 고쳐진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질병이 고쳐지지 않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11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현장에서 구해 주고, 권면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질병과 함께 영혼의 병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귀신 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전혀 사실의 근거가 없는 음해입니다.
그들이 그처럼 예수님을 음해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현재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예수가 빼앗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말을 믿고 백성들이 예수를 귀신 들려 미친 자로 여긴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은 현저하게 줄어들 거고요.
자기들의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판단해 그처럼 예수님을 음해한 것입니다.
소위 유대인들의 영적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의 행태가 이 모양입니다.
자기들의 권위와 기득권이 조금이라도 위협 받으면 무슨 말이든 지어내어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다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죠.
본문 21절을 보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모를 리 없겠죠?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유대종교지도자들 가운데 일부와 소수의 백성들이 그들의 주장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자연히 자기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일반적으로 분쟁이 일어나면 쌍방이 다 피해자가 됩니다.
분명히 분쟁을 야기한 자들에게 책임을 물려야 하는데 분쟁에 휘말린 사람들이 자기들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분쟁이 터지면 쉽게 해결되겠습니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쟁이 나면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며 싸울 게 아니라 분쟁이 일어나는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더욱이 분쟁은 사단이 일으키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단은 분쟁케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분쟁이 나면 해결이 어렵습니다.
본문 19절의 분쟁을 보십시오.
여기서 분쟁의 헬라어원문은 ‘스키스마’인데, ‘분열이나 불화’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사람들을 분열케 하고, 불화케 하는 못된 존재인 것입니다.
혹자는 반문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마태복음 10:34-36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글자대로 해석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씀은 은유입니다.
여기서 ‘검’은 ‘세상의 모든 죄악들과 불신앙에 대해 적극적이고 신앙적으로 복음을 들고 싸우는 수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심지어 부모자녀들 간에도 일어나는, 온갖 죄악들과 불신앙적인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제거되면 부모자식 간에 또, 사람들 간에 분쟁은 사라지고, 평화가 깃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말세지말이라고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물론 특히 성도들 간에 분쟁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들 간에도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사단이 분쟁케 하는 것입니다.
잘 잘못을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쟁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립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분쟁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 버리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오늘날 왜 교회들과 성도들이 분쟁에서 자유하지 못합니까?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기 싫어서입니다.
그런 생각은 결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기득권, 권위, 권세, 권리, 자기주장, 특히 옳고 그름 등등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주장이 옳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분쟁하면 사단이 좋아할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심으로써 분쟁의 소지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도 마땅히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버러야 합니다.
특별히 옳고 그름에 대한 분쟁의 소지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과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분쟁케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여 이제부터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들과 예수님 안에서 화평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10:19-21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듣는 자들이 두 편으로 갈렸다.
언제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환영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귀에게 속한 자도 있기 때문이다(창 3:15).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분쟁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귀신들려 미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양들이 있어(16-18)예수께서는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고 하십니다.
다른 양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고
하십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해야 다시 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버림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런 자기희생과 헌신은 자발적인 의지였습니다(18).
예수께서는 결코 힘이 없거나 마지못해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하신 고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의 자발적인 인내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동의가 없었다면 그 누구도 머리털 하나라도 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통해서 앞에 있는 무리들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성경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의 생명과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양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가 귀신들려 미쳤다(19-21)
예수의 말씀이 증거 되자 유대인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져 그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귀신들렸다,
미쳤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에서 예수께서는 이미 귀신 들렸다고 몇 번이나 비난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라며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신뢰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비록 소수의 어떤 사람들이었지만 영적으로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소수의 사람들 중에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처럼 분쟁이 일어납니다.
예수로 인해 가족들이 불화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하셨습니다(마 10:34).
그러나 불화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케 됩니다.
말씀이 증거되는 곳에는 언제나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나와 내 주변의 삶이 너무 평안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말씀이 증거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전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나누어 봅시다.
어둠에
휴식이 들어가면 빛이 움직이기 시작한다〈황금꽃의 비밀중〉혼란이나 슬픔, 장애물에 뒤엉킨 상태에서 벗어나 어떻게 내일로 가는 길을
찾아가는가?
어둠이 일으키는 동요는 언제나 우리를 뒤덮는다.
목자들이 양들 가운데 뿔로 박아 고통을 주는 염소 몇 마리를 함께
키우는 것은 양이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과 같이, 주님의 관심은 이 땅의 가치기준이 아닌 우리 영혼입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인도하심대로 따라가면 우리는 건강한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11-12-2024(화) 요한복음 10:11-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lays down his life for the sheep.
나는 선한 목자라(I am the good shepherd)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εγω ειμι ο ποιμην ο καλος
목자(4166) 포이맨() ποιμήν, ένος, ὁ
선한(18) 아가도스(agathŏs) ἀγαθός, ἡ, όν
선한(2570) 칼로스(kalŏs) καλός, ἡ, όν
예수님은 선한(아가도스) 목자가 되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반대는 악한 목자가 아니라 삯군 목자라고 합니다.
저녁때가 되면 목자들이 자기 양들을 양의 우리로 데려가려고 양들을 불러 모읍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우리 안에 넣어두고 자기 숙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몸이 곧 양의 문이 되어 밤새도록 양들과 더불어 함께 지냅니다.
따라서 선한 목자라고 말할 때 선하다(아가도스)는 의미는 절대적인 선을 말합니다.
선하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헬라 단어에는 "아가도스(절대적 선)"와 "칼로스(상대적 선)"로 구분합니다.
'칼로스의 선'이란 다른 것과 비교하여 조금 더 우위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A와 B를 비교할 때 A가 B보다 더 착하다고 할 때는 '칼로스'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선한 것은 '아가도스'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셨다는 것은 가장 선한 목자가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최고의 선이며 가장 아름다운 선을 갖춘 목자를 일컬어 "선한 목자" 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세 가지 특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첫째는 양을 우리 안으로 안전하게 이끌어 갑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모든 양들을 우리 안으로 안전하게 가두고 들짐승으로부터 지켜줍니다.
둘째는 양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갈로 이끌어 갑니다.
푸른 초장에서 풍성한 꼴을 먹게 하고 쉴만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거나 편하게 쉼을 얻도록 합니다.
셋째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들짐승이 양을 공격할 때는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양을 위하여 희생합니다.
선한 목자가 되셨던 예수님은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 값을 지불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들은 그 사랑과 그 은혜를 힘입어 오늘도 건강하게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늘 반복되는 삶에서 드러나지 않은 선한 목자의 부드러운 음성과 손길을 따라 환난과 질고가 많은 세상에서도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 순한 양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10:2. 양의 목자 - 본(모범). 솔선수범(率先垂範)
* 10:7. 양의 문 - 꼴(양식). 동고동락(同苦同樂)
* 10:11. 선한 목자 - 희생. 견위치명(見危致命)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침
목자(牧者)
1. 지키는 역할(보호자. 保護者) Guardian
2. 이끄는 역할(인도자. 引導者) Leader
3. 먹이는 역할(양육자. 養育者) Rearer
목자라면 양을 맹수로부터 지키고,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로 이끌고,
또 먹이를 먹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목자의 세 가지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까?
이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시련이 찾아오고 여러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신실한 성도인데, 집에 불이 나서 자기 집은 물론 이웃집까지 많은 피해를 줍니다.
교회에서 아주 충성스러운 일꾼인데, 자동차 사고가 나서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열심히 믿으며 봉사하는 사역자인데 갑자기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백혈병에 걸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면, 날마다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먹여주지는 않으신다 해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셔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이해가 안 가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잘 믿다가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나 바울 사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도 이해가 안 갑니다.
왜 그토록 신실한 스데반이 그런 끔찍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왜 그토록 헌신되어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고난을 당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그 외에도 신앙으로 해석이 안 되는 상황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기 아주 힘들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말씀하시고서는 안 지켜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능력이 안 되어 못 지켜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둘 다 아닙니다.
우리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주님께서 지켜주시려는 것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시기를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로 우리의 성공과 건강과 재물과 편안한 삶과 자녀가 잘되는 것과 안락함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잠언 4:23).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꽉 붙어 있도록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잘못되면 생명을 잃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우리의 마음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지킨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무엇인가 지킬 것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핍박을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카타콤 생활을 무려 300년간이나 했습니다.
이것을 세대로 따지면 13대 정도 되는데, 이 긴 시간 동안 그들이 그 어두운 카타콤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지킬 가치가 있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들로 하여금 평생 땅속에서 생활하게 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카타콤에서 지킨 복음으로 인해 대제국 로마가 무너졌습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자 하십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들에 의해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어떤 것도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아주 시시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명을 간직하고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지켜주십니까?
그 방법을 알면 무엇이 생명을 얻게 하는 가장 소중한 마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 선한 목자인가?
1. 삯군 목자
2.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2-13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사람들이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로 구분할 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관심일 것입니다.
교인들과 언제나 함께 있어주고, 교인들이 뭔가를 필요로 할 때 함께 기도해주고, 교회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고, 교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목사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 교인들과 함께 하지 않고, 교인들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돈과 명예를 좋아해서 총회 같은 데에 자주 가고, 교회보다는 자기 가정의 일이나 교회 밖의 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목사를 가리켜 삯꾼 목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기준이 아주 틀리지는 않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정확한 기준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으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구분하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정확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선한 목자는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주는 목자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마음을 잡아주는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14)이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함께 있어 주거나 양의 사정을 잘 아는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5)라고 하신 것을 보십시오.
단순히 시간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나 양의 사정을 잘 아는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완벽한 하나 됨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됨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무엇을 합니까?
서로를 지켜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서로 지켜주며 도와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반대로 삯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12). ‘삯꾼 목자’라고 하지만 삯꾼은 사실 목자도 아닙니다.
삯꾼은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지 못하도록 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리에게 물려가도록 그냥 놔두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붙어 있던 마음이 “이리”로 표현된 세상의 가치관에 공격당하고 끌려가도 그냥 방치하고 놓아두는 사람이 삯꾼입니다.
삯꾼도 양들과 함께 하면서 양들을 칩니다. 양들의 사정도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와의 차이점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나 몰라라 하며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물려가고 흩어지게 됩니다(12). 그럼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볼 때 왜 달아납니까?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3절, 새)
삯꾼이 도망가는 이유는 “양들을 생각하지(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함께 있는 시간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정을 잘 아는 것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빼앗기도록 놔두는 목자는 아무리 양들과 함께 있고 양들의 사정을 알고 있어도 결코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삯꾼일 뿐입니다.
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왜 예배를 드립니까? 왜 기도를 합니까? 왜 큐티를 합니까? 건강하기 위함입니까? 성공하기 위해서입니까?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고 잘되기 위해서 기도합니까? 사업이 잘 풀리기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가 하루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봉사한다 해도, 우리의 관심이 온통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이리에게 물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도한다면, 그것은 이리와 같은 세상에 물려가도록 방치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삯꾼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기준이 아닙니다. 사정을 조금 더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게 도움으로써 마음을 지키도록 해주는 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켜준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목숨을 버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7-18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들 곁에서 지켜주다가 무서운 맹수가 오면 싸워다가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선한 목자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또 교인들을 위해 너무 열심히 사역하다가 병을 얻은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절)
여기서도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고, 15절에서도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17절에서도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예수님은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5천 명(여자와 아이들까지 수만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여러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리셨습니다(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베다니의 나사로). 또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고, 물 위를 걷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저런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틀림없고, 그래서 로마를 물리치실 분이며, 배고픈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환영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그러한 예수님의 힘으로 2인자가 되어 권력을 누려보겠다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은, 왕으로 오시는 분에 대한 예의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왕으로 보좌에 앉기만 하시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힘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아무 저항도 못한 채 그 끔찍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분께 기대하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주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죽으심으로써 이리에게 물려가는 우리를 구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기준을 따라가려 했던 우리를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구해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던 마음이 세상의 가치관에 물려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 온전히 붙어 있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갖게 하시려고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논리, 힘의 논리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예수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수 있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죽음 앞에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붙어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기준만을 가지고 살도록,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도록,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도록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렇게 “버릴 권세” 즉 죽을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신 분인데, 그 권세란 요즘 권력자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한 권세가 아니라, 스스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권세였던 것입니다.
삯꾼이 아닌 선한 목자로 살기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해주심으로써,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물려가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선한 목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해왔습니까? 지금까지는 주로 이런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연약한 교인들에게 새 힘을 주어 다시금 세상에서의 경쟁에서 이길 힘을 북돋워주는 목사,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하는 욕심을 꿈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헛된 욕망을 마음에 심어준 목사,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여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해준 목사,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 교인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주며 기도해주는 목사...
이런 목사들이 지금도 선한 목자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교회의 경우를 보아도, 우리 내면의 죽어 있는 열정을 깨워 “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고 외치며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는 교회를 선한 목자라고,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정말로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가 선한 목자이고 누가 삯꾼인지 제대로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온통 성공과 재물과 건강과 편안함과 안락함이 복의 개념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리에게 물려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에 열정을 내더라도, 세상의 성공을 부추기는 가르침을 받는다면 우리는 삯꾼에게서 이리에게 물려가도록 방치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의 가치관에 물려가도록 놔두는 자들은 다 삯꾼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만 선한 목자나 삯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서로에게 선한 목자가 될 수도 있고 삯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섬기거나 목자로 섬기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정에서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체에서도 남을 속인다면 삯꾼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저와 여러분 모두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가정에서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부모라면 자녀의 마음이 이리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세상의 기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신앙을 저버린 채 얻는 세상의 성공이 축복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세상에서 실패하고 생명을 잃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선한 목자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생업(직장, 사업체)에서도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남을 속이거나 누르고서라도 내가 잘되고자 하는 이리의 공격과 유혹을 물리치고, 내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또한 교회에서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지금 맡은 직분과 섬기는 사역을 통해 대충 하거나 내가 섬기는 지체들에게 이리의 공격이 오면 나 몰라라 도망가는 삯꾼이 아니라, 내 생명을 내어주더라도 양들을 지키고 섬기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선한 목자로 살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디모데후서 4:7-8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참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도 바울과 같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매일 가정과 생업과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의 기준대로 살며 또 그것을 전하는 선한 목자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만약
목자들이 자기 양들을 다 찾아간 이후까지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이 있다면, 그 양은 주인이 없는 양이거나 길을 잃어버린 양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종종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양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사람들 중에는 이런 양들이 너무 많다고 보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보다도 우리 밖에서 전혀 목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방치된 양들이 더 많다고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 안으로 들어가 쉬고 있는 양은 몇 마리가
되지 않았고, 거의 대부분의 양들은 아직도 늑대들이 득실거리는 빈들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예수님께서 우리에 들어오지 않고 들판을 헤매는 양떼를 걱정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란 무엇일까요?
‘우리’란 밤에 소나 양을 재우는 곳으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가축의 집, 혹은
보호용 울타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양으로 비유하시면서 ‘우리’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떤 것을
인생들의 ‘우리’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는 어떤 집이나 성전 같은 건물이나 공간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건물을 소유하신 적이 없었고, 사람들을 어떤 건물로 오라고 초청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하셨지만, 그 말씀은 어떤 장소나 건물을 두고 그리로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로 오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장소로 가거나 어떤 건물이나 어떤 조직에 가야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는 어떤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를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그 어떤 곳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들의 예배당이나 자기들이 지정한 장소로 옮겨야 구원을 받는다고 선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정리하고, 아이들 학교도 중퇴시키고 집을 팔아서 어디론가 들어갑니다. 과거에 신앙촌이라는 곳이 그런 곳이었고, 계룡산 어디가 그런 곳이었고, 요즘에는 과천에 있는 장막성전에 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공간적인 의미로 ‘우리’를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누가, 어디로 가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신 것은 유대교에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실 의사도 없으셨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에 가입해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우리는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교파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교파를 주장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란 무엇을 가리킨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구약과 신약 전체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인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에베소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밖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 안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안으로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언약안으로 들어와야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집을 사거나 팔 때 계약을 맺습니다. 어떤 계약이든지 일단 계약서를 쓰고 나면 상호간에 의무가 생깁니다. 집을 산 사람은 약속한 기한 내에 집값을 내야하고, 판 사람은 약속한 기한 내에 집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일에도 쌍방 간에 의무가 생기는데,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잘 만들어 주셨는데 우리가 타락해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다시 어떤 계약을 맺어주실 필요가 없으시고, 우리도 하나님과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을 상대가 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일방적인 언약을 발표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보내주시고는, 우리가 그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언약이 체결되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원히 당신의 품에 품어 보호하고 책임지신다는, 아주 일방적이고 특혜적인 언약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 언약관계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며 섬겨야 할 의무가 생기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책임져 주실 책임이 생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지켜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약속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언약관계로 태어났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근로하며, 납세를 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입니다. 반면에 국가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와 인권을 보호해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다가 어떤 권리의 손상을 입었으면 국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땅에서 살면서도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노동을 하거나 장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권익에 손해를 입어도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대한민국과 언약관계를 맺지 않아서,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국가가 울타리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불법 입국자는 언제라도 추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국민은 어떤 상황에서도 추방할 수가 없습니다. 한상열씨가 북한에 들어가서 제 나라에 적대행위를 하고 판문점으로 돌아왔지만 정부가 그를 가로막지 못하고 허용한 이유는 그가 대한민국의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내가 대한민국에 소속되었다는 것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자기 국민 보호에 더욱 철저합니다. 지난주에도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에 들어갔는데, 이유가 곰즈라는 미국청년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은 북한에 압력을 넣는 중이고, 카터가 북한에 가면 압력행사에 차질이 빚어지지만, 그래도 외교적 전략보다는 자국민 보호가 우선이라고 보고 한 명의 국민을 구하러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가 국민에게 져야 하는 의무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가 영원할까요? 우리나라는 100년 전에 나라를 잃어버린 일이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간신히 되찾아 이만큼 자랐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절대 없을까요? 만약 나라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월남처럼 나라가 망해버리게 되면, 그 나라에 소속했다는 사실처럼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망한 나라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은 참혹한 고난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것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무너진다면, 우리는 비참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나 가정이라는 울타리 외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우리’, 진정한 양의 ‘우리’에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언약 안으로 데려가시려고 오셨습니다. 요 5장24절에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그 언약 안으로 옮겨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의무를 짊어지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시고, 최종적으로는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게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믿는 사람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확실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단 그 안에만 들어와 머물기만 하면,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 지키지 못할 만큼 약한 분이 아니고, 우리에게 해주신 약속을 어길 만큼 진실 되지 않은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 6장40절에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증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많은 양들이 우리 밖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는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 그렇게 밖에 서성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의 목자이신 주님은 아직도 우리 밖에서 서성이는 양들을 못된 양으로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아직 몰라서 목자가 부르는 우리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말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많은 의심과 오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아주 나쁘게 보았습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들만 잘났다고 하면서 남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위선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는 남들이 죽는다고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자기 이익은 철저하게 챙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우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도 그 유대인중의 한명으로 보고, 그렇게 숨통 막히는 유대인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라는 말로 오해하고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로마세계의 타락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지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폐쇄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한 유대인이 자기네 유대인 공동체로 들어오라는 권면으로 이해하고 주님의 우리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능력과 위로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만 잔뜩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에도 기독교에 대한 너무나 많은 오해와 편견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의 기독교가 당시의 유대교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폭넓게 인식되어서 아무리 열심히 전도를 해봐야 믿지 않던 사람이 교회로 돌아오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불신자가 생각하기에 자기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가장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 틈에 끼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이고,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이익만 무섭게 챙기고 남은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비열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기독교가 이 사회에서 나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주저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 믿는 것은 교회라는 명망이 좋지 않은 단체에 소속되어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 믿는 것을 주저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해와 편견 때문입니다.
왜 오해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나의 모든 자유와 행복을 빼앗고 위선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며 언약의 품안에 안으시는 것임을 들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세심하게 나를 책임져 주시는지를 들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해 주셨고 자연 환경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힘이 들고 아쉬울 때에는 하나님을 찾다가도 제 형편이 나아지면 하나님을 귀찮아하면서 하나님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한 두 명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그런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존경하기는커녕 무시하고 비난하고 욕을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으로 갚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진노를 쏟아 부으셔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바꾸어 사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평안과 영생의 길을 만들어 놓으시고 내가 제시한 언약을 받아들여서 내 언약 안으로 들어와 혜택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언약을 우리가 들어가야 할 ‘우리’라고 하셨으니, 예수 믿는 것은 그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자유와 행복을 빼앗고 어떤 종교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서 위선자를 만드시려고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였던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진정으로 가슴에 와 닿는 사람은 말씀이 고마워서 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의 입에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제 맘대로 살아온 삶은 자유로운 것 같았으나, 외롭고 두려움이 가득한,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제가 멸망에 빠지기 전에 저를 불러주신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 두 번째 인생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저도 주님께 약속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주님만 모시고 주님 사랑하며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준비하신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양들을 통해서 우리 안으로 이끄십니다.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은 의심을 잘합니다.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자유를 잃게 되고 꼼짝 못하게 될거야, 자유를 빼앗기고 억눌린
생활을 해야 할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운명을 자기 힘으로 개척해 보겠다고 몸부림치지만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들어온 양들은 두 가지의 경험을 다 갖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 밖에서 살아본 경험과, 지금 우리 안에서 사는 경험입니다. 이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자기 욕심대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때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두려웠고 추했고 방황했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를 믿고 변화된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평안과 행복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밖에서 서성대는 양들을 볼 때 불쌍한 마음을 갖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품이라는 것을 알 뿐 아니라, 저들이 왜 아직도 망설이고 서성대고 있는지도 압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밖에 있는 불신자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하지도 않고,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자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겸손하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자기에게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나에게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 언약 때문에 책임져 주셨다고, 하나님의 과분한 은총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은혜를 전하는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젖어 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고, 아직도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의 종말의 비참함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로 주님이 만드신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안에 들어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우리 근처에서 빙빙 돌고 있는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밖에 있는 양에 대한 관심으로 압니다. 만약,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은혜와 사랑의 풍성함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사는 삶의 공허함도 알지 못하면서 교회를 계속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근처에 서성이는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가까이에 있으니 다행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우리 밖에 있는 영혼들에 대하여 무한한 관심과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이들은 우리 밖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얼마 전까지는 우리 밖에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 차린 양들을 통하여 우리밖에 있는 양들을 불러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다른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오늘 한국사회에 비쳐진 이상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벗고,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으로 살면서, 주님이 부르시는 참 뜻을 우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줍시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마틴 루터(M. Luther)는 ‘성경을 짜보면 피가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짜면 양의 피가 나오고 신약성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고 십자가는 피 흘림의 사건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경의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예수님 이야기는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왜 세상에 보내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 들었던 말씀을 이야기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전서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순전한(아돌로스) ἄδολος, ον
스트롱번호 97
1. 속일 수 없는. 2. 순수한. 3. 성실한
발음
[ adŏlŏs ]
* 신령한 (로기코스) λογ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3050
어원 / 3050에서 유래
* 젖(가라) γάλα, γάλακτος, τό 스트롱번호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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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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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자적으로] 음식으로의 우유, 고전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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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징적으로] 기독교도의 초보, 고전3:2, 히5:12,13. 순전하고 신령한 젖, 벧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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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젖(고전3:2, 히5:12, 벧전2:2).
“신령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로기코스”이다. 명사 “로고스”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로기코스는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이것은 스토아 학파에서 즐겨 쓰는 말인데,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이신 신적인 이성과 관계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을 이성과 관련지어 이해한다면 정신적이란 의미가 된다.
둘째로, 로고스는 보통 “지성” 또는 “이성”이란 말이기 때문에 그 형용사인 “로기코스”는 가끔 지성적 또는 이성적이란 뜻이 된다.
셋째로, 로고스는 말씀이란 말이며 요한복음에선 이 뜻으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로기코스는 “말씀에 속한”이란 말이 된다.
영어흠정역에선 이런 의미로 사용하여 “말씀의 젖”이라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신령한 젖”이란 바로 이 말씀의 자양분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바로 앞장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벧전 1:23-25).
순전하다는 말의 원어는 “아돌로스”인데 이것은 겨나 먼지나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낟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인간의 말이나 지혜에는 불필요하고 해로운 혼합물이 섞이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무런 혼합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알곡인 것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이와 같은 순전한 말씀의 자양분을 사모하라고 했다. 사모한다(에피포데오)는 말은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하게 찾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시편 42:1). 이 말은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는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말이다(시편 119:174).
크리스천이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것은 그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의 꿀보다 더 하나이다”(시 119:10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러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으면 신앙으로 자라야 할 것이 아니냐? 그래야 너희 구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순전하다(아돌로스) ἄδολος, ον 스트롱번호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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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경하다, 그리워하다, 롬1:11, 고후9:14, 빌1:8, 2:26, 살전3:6, 딤후1;4, 약4:5, 벧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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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간절히 사모하다(고후5:2, 벧전2:2), 심히 원하다(롬1:11), 원하다(딤후1:4), 사모하다 (고후9:14)
11-11-2024(월) 요한복음 10:7-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양의 문이라(7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Therefore Jesus said again,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나는 양의 문이라(I am the gate for the sheep)
헤 뒤라 톤 프로바톤
η θυρα των προβατων
예수님께서는 양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하셨습니다.
첫째는 양의 목자(2절)
둘째는 양의 문(7절)
셋째는 선한 목자(11절)
오늘은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양의 우리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 우리는 마을의 공동 우리
가난한 사람들은 마을에 공동 우리를 설치하고 교대로 돌아가며 양의 문을 지킵니다.
이때 여우가 있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우리를 설치합니다.
둘째는 야외 우리
양을 치려고 마을 밖에서 양을 관리할 경우 설치합니다.
야외 우리는 양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담을 쌓고 야간에는 양을 그 우리 안에 넣고 관리합니다.
양의 문은 양의 우리에 문을 만들어 설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로 양이 넘어갈 수 없도록 담을 쌓고 양이 드나드는 곳에서 목자가 문이 됩니다.
악성 근시의 양은 발레 무엇이 걸리기만 해도 그 위를 넘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의 우리가 사람이 넘나들 수 없는 높은 담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야간에 들짐승이 공격하면 목자가 즉시 일어나서 들짐승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은 보호자가 됩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은 관리자가 됩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은 영양사가 됩니다.
양떼를 위한 양의 문이 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9절)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행 4:12)
양은 목자의 그늘에서 안전합니다.
양은 문안으로 들어올 때 보호를 받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보호를 받으면 안전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 문(2374) 두라(thüra) θύρα, ας, ἡ 스트롱번호 237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여기서는, 윗부분(1-5)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 뿐이다.
1-6절 해석에 대한 머리말을 참조하여라.
버나드(Bernard)에 의하면, 여기 "문"이란 말이 사히딕(Sahidic) 사본에는 "목자"란 말로 읽게되어 있는데, 모판트(Moffat)는 그것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버나드(Bernard) 자신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양의 문"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하는 통로를 의미한다(14:6).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시 118:19-20을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문은 의(義)의 문, 곧, 그리스도라 하였고,
익나디오(Ignatius)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문, 곧, 그리스도라 하고, 그것을 통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선지자들, 사도들, 또는 교회가 들어간다고 하였다.
슐라텔(Schlatter)에 의하면, 예수님은, 시 118:20의 예언("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대로 오신 분이다.
그는 말하기를, "시 118:20에 있는 '이는'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하나님의 문이시다.
거기 '의인들'이란 말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양들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dieser, namlich der Christus, ist das Tor Gottes. Die Gerechten des
Psalms sind bei Joh. die dem Christus gehorenden Schafe.-Der Evangelist
Johannes, p. 235)
첫째,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그 부수러기를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차게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육신과 영혼의 필요한 생명의 떡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도라면 오늘 내 모든 삶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둘째,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예수님은 소경들의 눈을 볼 수 있도록 고쳐 주셨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눈을 열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나는 양의 문이라(10:7)
양으로서 믿는 성도들에게 그 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생명의 세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유일하신 분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넷째, 나는 선한 목자라(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양들의 죄악을 대신 해서 담당하시기 위해 죽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의지해서 살게 됩니다.
다섯째,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11:25)
이 선언을 하시고 실제적으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도 언젠가 예수님처럼 이 몸이 영화로운 부활체를 입고 영생에 들어갈 것으로 믿고 삽니다.
여섯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그를 참으로 믿는 모든 양무리들에게 길이 되어 주심으로 방황치 않게 하시고, 진리가 되어 주심으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고, 생명이 되어 주심으로 그 에너지로 살게 하십니다.
일곱째, 나는 참 포도나무라(15: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자동적으로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할 때 삶의 신적인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종류의 "양 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사는 마을에 있는 "공동 우리" 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개인 우리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을의 공동 우리에 양을 넣은 후 관리합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목자들이 문지기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산이나 들판에 있는 "야외 우리"입니다.
목자가 마을에서 먼 산이나 들판에서 양을 칠 때, 밤에 양들을 보살피기 위해 야외 우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산이나
들판에 있는 우리는 제대로 지어진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울타리는 있어도 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양들을 우리로 불러들인
후 목자가 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누워 쉬면서 문 역할을 합니다.
이 우리의 문이 되는 목자가 곧 양의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목자이심과 동시에 양의 문이 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까요?
1.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9절)
2.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행 4:12)
3.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9절)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들은 목자를 통해서만 양의 우리를 출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10절은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게 한다'는 말은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을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대부분 칠 팔십 년이면 다 소진해서 없어지고 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생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영원히 사는 영혼이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 넣어주셔서 창조된 인간이 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이 진리를 간결하고 또 확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사람 위에 죽음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제 아무리 죄인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도 속이지 못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있다고 해도, 성자나 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해도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가 지금 온 세상을 뒤엎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어도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더욱 지능화되고 더욱 잔인해지고 더욱 노골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을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되는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얼마인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관이 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예외없이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못 받으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다시말하면 우리의 노력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엡2:5).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납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천만에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영적 생명을 얻습니까? 천만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만나야 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우리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드디어 우리의 구원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때 이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 확실히 믿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오늘 귀한 말씀을 바로 여러분에게 들려주셨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지금 이 시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오라고 부르십니다. "나에게 오면 내가 영생을 주겠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데 여러분이 돌아서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다 구원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중에 예수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제목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권면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생명의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그것을 안다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그들도 값없이 얻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행 4:12)
(행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요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담을 넘어가면 그는 강도요 절도입니다.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자기보다 앞에 온 모든 사람은 강도요 절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사람들을 두고 강도요 절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우리의 문은 하나 뿐입니다. 누구든지, 심지어 목자라 해도 그 문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양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문 말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데, 세상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독선주의니 배타주의니 하며 기독교를 비방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다원주의 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따라서 어느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좋겠는데, 기독교는 유달리 타종교를 배척하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주장하니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중에는 이런 독선이 싫어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하나입니다. 타협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억지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바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말하는 것이 바른 진리라면 설혹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이나 미움을 받는다 해도, 심지어 순교를 당하게 된다 해도 우리의 주장을 굽히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장로였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솔직하게 말하라." 이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 뜻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못된 놈, 참람하고 건방진 놈."하고는 야고보를 끌어다가 저 높은 벼랑에서 집어 던졌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굽혀서는 안될 진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는 분이 계십니까? 관용이 많고, 너그러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타협할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은 말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지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3.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9절)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푸른초장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다른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10절입니다.
10절 중간을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놓고 손을 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에서 건져 주고는 "이제 당신 맘대로 하시오."하고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눕혀 둔 채 그 자리를 떠나는 냉혹한 구조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고 다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집으로 돌아가시오."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내 팽개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대에다가 그 환자를 싣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공무상 부득불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어 자기 대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간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곧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는 손을 털고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성하도록 계속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마음속에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의 행복한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다윗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그가 나를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날마다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함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날마다 풍성한 은혜가운데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을 오해하고는 예수님께서 만사형통케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십시오. 예수를 믿었다고 만사형통한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만사형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은 절대 안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사형통하게 되면 영적인 생명이 건강해지기보다 병들어 버릴 가능성이 십중팔구로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사형통하게 해 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보십시오. 그렇게 권능있는 사역자로서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선교사사명을 감당하셨지만 육체의 가시라고 하는 질병이 늘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기도했지 않았습니까? 그 응답은 이것이었습니다. 고후 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좋으니까 만사가 형통하다는 말은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시험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자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환란이 와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환경에 눌린 자가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영권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이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면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맛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서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먹고 성령의 생수를 맘껏 들이키며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활력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처럼 영적인 식물일 수 없습니다. 바드시 교회생활이나 하고 아무런 영적인 생명을 누리지 못하면 그는 영적으로 병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과연 풍성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이 떠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번번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게 끌려 다닙니까? 그런대로 살고 있는데도 만족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아직 어린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어리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얻어야만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더 풍성해지면 우리는 젊은이들과 같이 약동하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 역시 매우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설혹 내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도 우리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어떻습니까? 영적 생명이 풍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이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이 떠나지 않아도 그것이 그 사람을 억압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불을 끄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는 늘 평강이 가득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으니까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절대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모자라는 것도 많지만 자족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많이 받아 먹으시기 바랍니다. 순간순간 주님을 생각하면 영적 교제를 통해 성령의 생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매일매일 받다보면 주님이 나에게 심어주신 생명이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나를 다스리게 될 때 진정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강이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누가 범하겠습니까?
그 사람을 누가 꺾어 놓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도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유하는 사람을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좀 더 풍성한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절)."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데 드나드는 문이 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다른 데로, 그러니까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다.
그 말은 양을 가두어 놓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사람이 쉽게 넘어갈 정도로 낮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면 그 우리는, 그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는 양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사람이 넘어가는 데까지는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 일어나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양의 우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지 않는 목자 아닌 다른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양은 울타리를 넘어다닐 수 없고, 오직 문으로만 다닐 수 있다. 자, 이런 기초 지식을 가지고 그다음을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1절에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하시고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목자다, 라고 말씀하시더니 7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 직접 밝혀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라니요? 양의 문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개념이 바로 떠오르십니까? 문이란, 우리가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어느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거쳐 가는 장치, 시설을 말하니까 양의 문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동물인 양으로 들어가는 문,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우리 흔히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문, 차의 문….병원의 문…. 그래서 우리가 흔히 그것을 말할 때엔, 집 문, 차 문, 병원 문, 이런 식으로 줄여 말하는데 양의 문이라면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의 문을 병원의 문을 병원 문이라고 줄여 말하는 것처럼, 양 문이라 줄여 말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지을 때에 양문 교회, 이런 식으로 짓습니다. 아마 전주에도 양문교회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양의 문이라 할까요? 양이 어떤 장소나 공간이 아닌데, 또 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하셨으니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데…. 그래서 우리 성경으로는 양의 문이라, 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을 찾아보면 무언가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먼저 영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양이 들어갈 수 있게 하여 놓은 문, 양을 위하여 만들어 놓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곧 1절에 나오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강도요 절도이지만, 우리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목자라 했는데, 바로 그 문, 목자가 드나드는 문, 그 문을 7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문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은 목자만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양도 드나드는데, 내가 바로 그렇게 양이 드나드는 양의 문이다, 그것을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따라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양이 안전한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이 드나드는 문, 그렇다면 양이 드나드는 문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 문을 통하여 양이 들어가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양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당연히 양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곳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제 양이 양 문을 통하여 들어간 곳,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바로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실제적인 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양 우리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 생명을 얻게 되며, 두 번째로 풍성히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니다.
우리를 벗어난 양은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겨우 목자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양의 우리로 돌아온 사건… 그때 돌아온 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밖을 나가서 맨 처음에는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자와 늑대의 호시탐탐 노리는 죽음의 위협에 어찌 한순간인들 편할 때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하다가 겨우 살아나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 양의 목숨은 이제 부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목숨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양이 다시 우리에 돌아온 사건, 그것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풍성하다는 말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이지만, 풍성하다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지난번 묵상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묵상에서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였는데, 계시록 3장 17절에 의미 있는 말이 등장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들, 곤고하다 가련하다, 벌거벗었다, 가난하다, 그런 말들이 바로 풍성하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신 다음에 지난주 본문 말씀인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면서 하시는 말씀, 계시록 3장 20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들어가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저는 해석하기를 기쁨에 겨워, 그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그러한 장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잔치를 벌일 만큼 기쁨이 충만했으며 또한 그래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니만큼 음식이 얼마나 풍성했겠습니까? 그 풍성함이 바로 오늘 본문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오늘 본문 10절 말씀, 내가 온 것은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이 비교급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급이니까 단순히 '풍성히'가 아니라 '더 풍성히'가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더, 지금까지 얻었던 것보다 더, 양들이 지금까지 우리 안에 있어서 먹고 있던 꼴 그것보다 더, 더 많이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면 생명을 얻게 되며, 꼴 또한 더 많이 더 많이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우리를 뛰쳐나갔다 다시 우리에 돌아온 양을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처럼 그리고 그 양을 애지중지 거두며 보살피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자로서 양들에게 어떠한 것이 유익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양이 생명을 얻고, 어떻게 해야 풍성한 꼴을 먹일 수 있는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양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양의 문이란 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1절을 해석하면서,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 오직 양의 문을 통해서만 우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가 양의 우리에 들어가 푸른 초장을 만끽하며 더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난번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여닫는 데 소용되는 것이지, 만일에 그것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문이 아니라, 벽에 불과한 것이다. 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 앞에 보이는 문은 열려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이 마련해 놓으신 푸른 초장, 풍성한 꼴이 넘치는 그곳으로 들어가십시다.
지난 두 주간, 이번까지 세 번에 걸쳐서 우리 앞에 놓인 문을 보면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문을 열어 주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강조하시기 위해, 또한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 곳곳에 문을 마련해 놓으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문을 여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0:1-10)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계속해서
밝혀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말씀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목자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절도나 강도에
대비되는 의미로 자신을 목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양과의 관계에 있어서 목자와 절도 혹은 강도 사이의 차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6절).
그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을 보게 해주신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시자 “우리도 맹인인가?” 하며 냉소하며 반발했던 그 바리새인들입니다(요 9:39-40). 그들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귀로 들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의 뜻을 친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본문 7-10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설명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표현 하나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양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본문 7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라고도 하시고 양의
문이라고도 하신 말씀은 잠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문이면 문이고 목자면 목자지 어떻게 동시에 둘 다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양의 우리는 도둑이나 맹수나 악천후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장소입니다.
옛 팔레스타인에서는 그것이 동굴이거나
아니면 돌로 쌓은 벽이나 혹은 나뭇가지로 엮은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우리에는 단 하나의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그 문을 통해 양들을 우리 안에 몰아넣기도 하고 밖으로 불러내기도 합니다.
또 목자는 밤에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
문을 가로막은 채 잠을 자기도 합니다.
목자가 그렇게 문을 막아 지키고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자는 곧 문이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자가 양의 문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수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이며 또한 양의 문이라 하신 이 비유말씀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양”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맡기시고 그를 통해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시며 인도하시기 위하여 세우신 유일하신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3-24).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이 많은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끌고 갈 때 같이 잡혀간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 속에서의 다윗은 옛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의 다윗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새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유일하신 목자십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양만이 구원받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하셨으며, 9절에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구원받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참되신 주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알고 그 말씀만을 따르는 양 무리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절도나 강도를 따르는 것은 멸망하는 길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서 구세주인양, 메시야인양 양 무리에게 접근하는 모든 자들은 영혼을 훔치려는 절도요 강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그 누구의 말도 우리를 구원과 영생에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경의 진리와 다른 이념이나 교리나 주장은 다 우리를 멸망으로 끌고 가는 사설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란 그에 앞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상관없고 그를 부인하거나 배척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등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자칭 메시야라 주장하며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의 통치에
맞서 무장봉기하도록 선동해서 수많은 사람을 로마군의 무자비한 무력진압에 희생되게 한 자들을 가리키신 것일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자칭 메시야로
접근하는 자에게 현혹되는 것은 죽음과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려 하지 않던 바리새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다가 예수님의 의해 고침을 받고 보게 된 사람이 그 사실을 증언하자 그를 공회에서 출교시킨 일이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며 말씀하실 때 그 “너희” 속에는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그들에 의해 출교를 당한 사람도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의 문밖으로 쫓겨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참 문이다.” 말씀하신 것이며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놀라운 생명과 복락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따돌림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가 들어가야 할 참 문으로 알고 그리로 들어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영원하신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요1: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를 세상의 참 빛으로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요1:9, 3:19, 8:12, 9:5). 그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요1:14, 18, 34, 49).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1:29, 36).그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요3:16-17, 36). 그를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줄 영생의 샘물을 주시는 이로 믿는 것입니다(요4:14). 그를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요:25-26). 그를 우주만물과 모든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모든 권세를 부여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요2:7-10, 3:35, 4:46-53, 5:2-9, 6:19). 그를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 우리로 하여금 영생하게 하시는 참 떡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6:35, 47-51, 53-58). 그를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참으로 자유롭게 하실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요8:31-32, 36).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과 영생과 복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믿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목자로 받아들이고 평생 그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온갖 이단과 사이비들이 창궐하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히 귀하고 귀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의 문이시며 우리가 듣고 따라갈 음성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여기저기에서 소근거리는 엉뚱한 인간들의 음성을 듣고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길 잃은 양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지체하지 말고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모든 이단과 사이비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의 영혼을 훔치는 절도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강도입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본문 1절). 그들이 교회에 침투하는 목적과 그 결과가 무엇인지도 주님께서 일찍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 넘어간 사람들에게서 공통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재산을 다 털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파탄 나고 패가망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 영혼이 피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며 이상하게 해석하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의 구속사역의 완전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과는 즉시 결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이시고 문이신 교회의 우리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만 참 생명이 있고 생명의 풍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해서 거지일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은 예수님을 주로 영접함으로써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떠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흔들림 없이 머무름으로써 참 생명을 얻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
양들이 목자를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목자 아닌
사람들이 양을 불러도 자기를 보살펴 주는 목자가 아닌 줄 알고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들이 어떻게 목자와 다른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까요?
목자는 늘 자기들 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산으로 들로 유목을 위해 길을 나섰을
때, 목자는 종일토록 양들과 함께 합니다.
한 밤 중에도 야외 우리의 문이 되어 자기들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목자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목자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목자가 늘 자기들 곁을 지키며
보살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목자가 한 밤 중에도 양
우리의 문이 되어 양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목자가 늘 양들 곁을
지키며 양떼를 보살피는 것처럼,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 곁을 지키시면서 주님의 백성들을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주님의 눈에 주님 앞에 모여온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험한 인생길을 외롭게 홀로 걷고 있습니다.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목자 없는 삶입니다.
한
미식축구 감독이 있었습니다.
2년 째 계속 성적이 부진합니다.
매스컴도 외면하고 인기도 떨어집니다.
“도대체 성적이 그게
뭐냐?”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저 사람 곧 해고 될꺼야!”라며 비난을 퍼붓습니다.
친구들도 떠나가고 주변에 그 누구도 격려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비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자기를 반겨주는 것이 꼭 하나 밖에 없더랍니다.
새끼 때부터 길러온 개만이 여전히 꼬리를 치면서 자기를 환영하고 있더랍니다.
자기
부인까지도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자기 마음을 알아달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인생에서 나는
정말 내 마음을 알아주고 외로움을 알아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 하나를 발견했소.
내가 이런 일을 당해보니까 정말 이
개 밖에는 나의 친구가 없소.
내가 이런 친구를 또 하나만 더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
나갈 수가 있을 것 같소.”하면서 부인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부인이 웃더니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러더랍니다.
아내가 밖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답니다.
외로운 남편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글쎄 아내가 개 한 마리를 더 사가지고
왔더랍니다.
사실 오늘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병이 많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중에‘은둔형 외톨이’가 많답니다.
불안해하며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답니다.
이런 사람들이 10-30대에 무려 20만-30만 가량이나 된답니다.
일본은 이런 마음의 병이 우리 보다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말로 이런 사람들을 ‘히키코모리’라고 한답니다.
이들이 120만 명이나 된답니다.
곁에 그 누구도 없어서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성경적으로 고생하며 기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야 말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은둔형 외톨이들로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답니다.
돈이 많아도 힘이 있어도 은든형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지치고 힘든 세상을 살면서 불안하고 초조해 하면서 외롭고 고독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 그들 곁에 주님께서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지친 손을 잡아주시고, 그들의 기진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안아주시고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호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요 10:9)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 양의 우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그 옛날 노아 홍수 때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 가족들과 동물들이 특별한 보호를 받은 것처럼,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양은 정말 연약한 동물입니다.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말이나 사슴처럼 잘 도망치지도 못합니다.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눈에 잘 띱니다. 바늘처럼 생긴 털이 있는 고슴도치나 고약한 냄새를 가진 스컹크처럼 자기를 보호할 방어수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눈이 좋거나 냄새를 잘 맡아 맹수들을 먼저 발견하여 숨지도 못합니다. 양은 모든 동물 중에 약한 동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런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너무도 연약하여 쉽게 쓰러지고 쉽게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탄에 공격에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양의 문이 되셔서 보호해 주시고 돌봐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인디 안과 싸움을 할 당시의 일입니다.
워싱턴은
선두에 나서서 싸움을 지휘했습니다.
이때 인디언 추장이 부하들에게 “맨 앞에 나오는 워싱턴을 향하여 집중 사격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모두 워싱턴을 향해서 집중사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워싱턴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그 인디언이
전투에 져서 추장이 잡혀왔습니다.
그 때 그 추장이 워싱턴에게 “우리가 집중사격을 해도 총에 맞지 않은 당신은 신입니까?
사람입니까?” 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워싱턴은 “나를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가 계셔서 그 어머니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셨기 때문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사람은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 사는 날
동안 우리 평생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건강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가 가정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사업과 직장도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문안에 들어가면 생명의 안전이 있습니다.
주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거친 인생길에서 주님 안에 들어가서 주님의 보호를 받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양들이 양의 문 안에 거하게 되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문안에는 생명의 양식이 있습니다. 야외의 양 우리에서 아침이 되면 목자는 양들을 방목합니다. 목자는 우리 밖으로 나간 양들을 이끌고 푸른 초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갑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풀도 뜯고 물도 마실 수 있게 해 줍니다. 양들은 먹을 것 마실 것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목자가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목자만 따르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양의 문은 입구임과 동시에 출구라는 것입니다.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목자를 따라 양의 문 밖으로 나가게 되면 거기서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양의 문이라는 말씀이 주는 또 하나의 약속입니다. 양의문 안에 거하는 양들에게 생명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양의 문을 통해 출입하는 양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도 손해이고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도 물질의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잘하는 나라와 가정들이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나와 있는 증거들입니다.
창26장에 나오는 이삭의 이야기처럼 하나님께서 그 삶에 복을 주시기 때문에 그 삶이 더욱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 물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팠는데 거기서도 또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의 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인도를 따라 무엇인가 땀 흘려 수고할 때 풍성하게 얻게 됩니다. 주님 주시는 복 안에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닭 시리즈”
1. 세상에서 제일 빠른 닭은? 후다닥
2. 제일 섹시한 닭은? 홀딱
3. 제일 망한 닭은? 쫄딱
4. 죽은 닭은? 꼴까닥
5. 그럼 미친 닭은? 헷가닥
6. 가장 멋진 닭은? 토닥토닥
세상에
이런 닭 저런 닭이 많이 있다 해도 역시 최고의 닭은 “토닭 토닭”입니다.
살다보면 최고로 멋진 사람은 늘 곁에서 격려해주며
토닥토닥 격려해주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토닥 토닥 멋진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양(羊)의 종류(種類)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양(286) 암노스(amnŏs) / 4회 요 1:29. 36. 행 8:32. 벧후 1:19
ἀμν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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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양, 새끼 양[그리스도나 그에 관련되어 사용되거나 흠 없는 희생 양을 의미], 행8:32, 벧전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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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어린 양(벧전 1:19).
요한복음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 양(721) 아르니온(어린양)(arniŏn) ἀρνί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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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 어린 양[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의 명칭], 계5:6,8, 12, 6:1, 7:9,14,1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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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 공동체, 요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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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704의 지소형관련 성경 / 어린 양(요21:15, 계5:6, 22:1), 새끼 양(계13:11).
주제2: [내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 - 이 이름은 1: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것은 그에게서 수제자(首弟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함으로써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다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개역성경의 난하주(註)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RSV에서는 these로 되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네가 이 사람들(함께 있던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네가 이것들(배와 기타 기잡는 도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며 타당성을 갖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 해석은 첫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 우열(優劣)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막14:29)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혹자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3:16;5:20;14:21;16:27)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질문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만큼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를 하기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7절 주석 참조).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 '먹이라'는 명령이 연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번째와 세번째는 양들응 목초지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Tenney).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소명은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하는 것이다.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양(4263) 프로바톤( prŏbatŏn ) πρόβατ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263
-
1. 4260의 파생어로 추정됨: 어린 양, 양, 요 21:16,17.
-
관련 성경 / (어린) 양(마 7:15, 요 2:14, 벧전 2:25).
두번째 가라사대...내 양을 치라
- 두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번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일대일 차원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구절로,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종속절의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양(4263) 프로바톤
사랑하느냐
-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읕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실성과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受容)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관련하여 Living Bible은 본절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진정 나의 친구이냐?"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로 번역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근심하여 가로되 - 베드로는 예수의 세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 바 어쩌면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아시나이다 -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 기독론적(基督論的)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말 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갖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2:25;16:30).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야 함을 악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베드로의 세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번째의 '아시나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의 번역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번찌의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오이다'보다 더 갗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그러나 교만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내 양을 먹이라 -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였고 그에게 동일한 사명을 세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Barrett),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Bultmann). 특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선교 지향적 분부(마28:19, 20;막 16:15-18;눅 24"46-48)와 비교된다.
양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
1.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 집을 쉽게 찾아갑니다.
예를 들면 제비, 연어, 진도개.....
본능에 의한 직감이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은 시력이 3미처 앞도 잘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상태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2.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온 몸에 가시를 갖고 있습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을 위장하는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스컹크처럼 가스를 내뿜는 다는가,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다리가 있던가 아니면 덩치가 있던가 합니다.
그런데 양은 특별한 무기가 없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피할 수 있는 빠른 달리기도 상대에게 치명적을 가할 수 있는 독도 위협을 줄 수
있는 덩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은 평안한 가운데서 살며 번식도 합니다.
그 이유는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단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비무장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할 때의 방법이 총칼을 앞세우고 가면 안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주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3.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는 만큼 겁이 많은 짐승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도
얼룩말처럼 다른 짐승으로부터 특별한 방어수단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저 겁이 많기 때문에 모여있을 뿐입니다.
이리가 한 마리만 양
우리로 뛰어들어와도 양들은 힘을 합해서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돌봐 주는 목자가 없다면 결국 죽고
맙니다.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의 특징은 항상 목자와 연관됩니다.
4. 양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물이 몸에 묻으면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씻어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죄에서 사하여
주십니다(요일 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
5.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비해 양은 돌봄이 없으면 독초도 해로운 줄 모르고 뜯어먹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돌봄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교훈 이단의
유혹과 타종교의 호기심으로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면 구분하지 못합니다.
양은 이처럼 부족한 것이 많은
동물입니다.
양에 대한 문화적 인식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순하고, 인간과 가까이 생활하고,
깨끗한 동물, 하얀 털을 갖고 있는 호감 있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방에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놈, 고집이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심한 욕이 ‘개새끼’라면 중동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양은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한 동물입니다. 우리보다 오래 전부터 양을 치며 살아온
중동의 사람들이 양에 대해서는 더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양이 잘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양에게 발달된 것이 있다면 귀뿐입니다.
11-09-2024(토) 요한복음 10: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양(羊)의 목자(牧者)(2절)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The man who enters by the gate is the shepherd of his sheep.
"양의 목자(the shepherd of sheep)"
동물을 관리하는 다양한 호칭이 있습니다.
목동(牧童), 마부(馬夫), 사육사(飼育師), 조련사(調練師), 수의사(獸醫師), 관리사(管理使)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양(羊)의 목자(牧者)"라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짐승들을 몰고 갈 때는 짐승의 뒤에서 몰고갑니다.
그러나 양을 몰고 갈 때는 반드시 양의 앞에서 먼저 걸어가야만 양이 따라갑니다.
그 이유는 양의 시력은 악성 근시가 되어 바로 앞에 있는 것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의 앞에서 목자가 걸어가면 양들은 바로 앞을 보며 뒤 따라간다고 합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를 말씀을 읽어봅니다(요 10:3-5).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과 목자의 관계를 표현한 말씀에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봅니다.
첫째, 목자는 양의 문이 됩니다.
둘째,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셋째, 목자는 양을 위하여 앞장 서서 걸어갑니다.
넷째,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목자가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앞으로 나아갈 때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첫째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분별할 만 한 관계입니다.
H. V.
Morton이라는 분이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베들레헴 근처에서 매우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목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떼들과 함께 동굴에서 밤을 새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양들은 모두 섞여 있었고
목자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 시간이 됐습니다.
둘 중의 한 목자가 양 무리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서서 양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이름을 부르니까 댓 마리의 양이 그들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의 양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George Adam Smith란 사람도 서너 명의 목자가 이런 방식으로 양들을 구별해 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있습니다.
양떼들은 서로 섞여 있다가도 자기 목자가 부르면 그
음성을 알아듣고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내셨고,
양들은 각자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모시고 교통하기 때문에 피차 모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예수님을
모르고도 단체로 천국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의 옷자락을 잡고 천국의 일원이 되려는 생각은 당장에 버려야만 합니다.
부모형제가 교회 장로 권사라고 덩달아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천국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천국에 들여보내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개별적인 교제 관계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서로 알고 대화 할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 내가 속한 교회의 목자와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요즘은 상업주의 물량주의의 흐름에 따라서 교회도 대형화의 추세를
밟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 사이의 횡적인 유대관계도 없고, 목자와
양 사이의 유대관계도 없는 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천국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성도를
모르고 성도가 예수님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꾼’이
아닙니다.
교인들 역시 설교의 ‘청취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마다 목회 철학이 있고, 인생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교회의 목자가 어떤 사상과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알고 따르면
복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와 좋은 훈련을 다 받고도 배반자가 돼버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설교자와 청취자의 관계에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먼저 예수님과 일대 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다른 사상가들의 음성과 구별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목자와 이름을 주고받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분별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양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둘째로, 목자는 앞서 가고 양은 뒤따라오는 관계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수만 마리의 양떼들을 개를
동원하여 뒤에서 몰고 가는 목동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그렇게 많은 양들도 없거니와, 양떼를 뒤에서 몰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양들의 이름을 외울 만큼의 양들을 내어 놓고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뒤따라갑니다.
목자가 양떼들의 길을
안내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가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목자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갑니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목자보다는 양이 앞서갑니다.
간혹 잘 나가는 교회가 있어서 보면 개가 양 몰 듯이 몰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든
것이 알려지고 공개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목회 방식, 교회 형편 등등. 교인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교회를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다.
상업주의, 소비자 중심 사회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교회도 얼마든지 쇼핑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쇼핑하고, 교회도
쇼핑합니다. 좋으면 택하고 싫으면 떠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인들은 아주 똑똑합니다.
목자보다 잘난 양들이 많아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회자는 전반적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저나 제 동역자들이나 다 모자랍니다. 두뇌도 모자라고, 지식도 모자라고,
인품도 모자라고, 능력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모자라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따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자라고 부족한
지도자를 통해서, 모자라는 방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제는 양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양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양을 목자 위에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원리를 바로 알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가는 교회, 그것이 양들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유일한 길, 오직 유일한 진리, 오직 유일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강력한 선언의 진실을 뒷 바침해 주는 증거와 표적도 함께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만 7번이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포이멘 에스틴 톤 프로바톤
ποιμην εστιν των προβατων
양(4263) 프로바톤(prŏbatŏn) πρόβατ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263
* 4260. προβαίνω
발음 [ prŏbainō ]
목자(4166) 포이멘
[ pŏimēn ]
ποιμήν, ένος, ὁ
스트롱번호 4166
양(羊)
πρόβατον, ου, τό 4263 [prŏbatŏn]
-
4260의 파생어로 추정됨: 어린 양, 양, 요21:16,17.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πάσχα, τό 3957 [pascha]
-
1.
유월절 양, 막14:12, 눅22:7, 고전5:7.
-
2.
유월절.
-
3.
유대인의 명절, 막14:1, 요2:2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ἀρνίον, ου, τό 721 [arniŏn]
-
1.
양, 어린 양[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의 명칭], 계 5:6,8, 12, 6:1, 7:9,14,17 등.
-
2.
기독교 공동체, 요21:1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ἀμνός, οῦ, ὁ 286 [amnŏs]
-
어린 양, 새끼 양[그리스도나 그에 관련되어 사용되거나 흠 없는 희생 양을 의미], 행8:32, 벧전1:19.
프로바톤(provbaton)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프로바톤(Homer이래)는
프로바이노(4260: 앞에 가다)에서 유래했으며, 고전 헬라어에서는 드물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프로바톤은 헤엄치거나 기는 것들과 다른 네 발 달린 동물(짐승), 특히 길들이고 사육하는 가축, 말, 황소, 희생 동물을
나타낸다.|그리고 몸집이 작은 가축(특히 양)에 대하여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작은 가축은 다른 동물들보다 연약하면서도 앞서
간다. 이 단어는 복수로만 사용되었으나(양떼나 소떼), 후대에 이르러 특정하게 '양'을 의미하는 단수 용법이 생겼다.||
(b)
프로바톤은 단순한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이 단어를 욕설의 용어로 은유적으로
사용한다(Nubes,1203). 그는 무엇이든 열등하거나 우둔한 것은(예: 얼간이) 양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단어에는
누군가에 의해 안내를 받아야 하는 사람에 대한 은유로서 사용되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Epictetus,
Dissertationes, 3, 22, 35).||(c) 프로바톤은 '물고기'(Oppianos Depiscatione등)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H.Preisker; S.Schulz).||#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프로바톤은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나오며, 주로 촌(작은 가축, 양, 염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프로바톤은 구약성경에서 주로 유용하며 또한 떼지어 사는
동물인 양을 의미하며(창 30:38; 사 7:21; 암 7:15) 그리고 희생 제물로서의 양의 의미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레
1:2). 프로바톤(거의 항상 복수 프로바타)은 은유적으로 '백성'(삼하 24:17), 특히 '하나님의 백성'(시 74:1,
회중; 시 77:20; 시 78:52)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요지는 양에게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목자의 인도가
없으면 양떼는 흩어지며(겔 34:5, 겔 34:6) 양은 각기 제 길로 가며(사 53:6), 양들은 방랑하다가 광야의 위험의
희생이 되기도 하며(겔 34:5이하), 그러므로 그들은 목자에 의해 올바른 초장으로 인도되어야 한다(시 23장). 광야에서
지도자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것이다(민 27:17). 개인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잃은 양
같이 유리"한다(시 119:176). 여호와께서는 그의 흩어진 양떼를 위하여 메시야 왕이나(렘 23:1이하; 겔 34:23)
모세(시 77:20; 사 63:11)와 같은 목자들을 지명하거나, 친히 자기 백성의 목자로서 행동하심으로 목자를 확보하여
주신다(시 78:52이하; 시 80:1; 사 40:11).|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양이라고 부름으로써 첫째로
자신들의 힘만 갖고는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으며, 둘째로 그들의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시 23장; 시 95:7; 시 100:3).||#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프로바톤은 신약성경에서 37회
나오며, 마태복음(11회)과 요한복음(17회)에 자주 나온다.||(a)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양을 들어 교훈하였다. 양은 목자의
돌보는 것 없이 홀로 내버려 두면 잃게 된다(눅 15:4). 따라서 양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사랑이요, 비이기적
보호이며(마 12:11; 눅 15:4) 이 기본적인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은유의 배경을 이룬다.|목자 없는 양은 고생하고
유리하며(마 9:36), 길을 잃고(벧전 2:25) 잃어버린 바 된다(마 10:6; 마 15:24).|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용례를
따라 자기 백성을 목자 없는 양떼로 비유하신 것은(막 6:34; 참조: 민 27:17; 왕상 22:17) 그들이 구원 받지
않으면 어떤 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케 하신 것이다. 벧전 2:25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개종 이전에 그들이 양과 같이 길을 잃었으므로, 즉 희망없이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거짓 목자들에게 이용당했음을 상기한다(참조: 겔
34: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심 받은(마 15:24) "양의 큰
목자"이시다(히 13:20).||⒝ 마 26:31에서 양은 예수님께서 모으신 제자들에게 적용된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병행구, 막
14:27). 이 인용 구절은 다음의 슥 13:7의 예언을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적용하는데, 마소라 본문은 "목자를 치라,
그러면 양 떼(촌)가 흩어지리라"로 읽고 70인역본은 "목자를 치고 양들을(프로바타) 흩으라"라고 읽는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참 이스라엘이요, 예수님을 치실 이는 하나님이심을 적용하여 복음서에서 기독론적으로 해석된다. 스가랴서의 문맥은 이
구절이 목자에 대한 심판임을 시사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의 뜻을 행한 "양"은 대심판의 날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할 때에 비로소 마침내 염소와 분리될 것이다(마 25:32이하).(참조: R.Tuente).|스가랴의 예언이 달리 어떻게
성취되었든 간에 예수님은 여기서 그의 예언을 그 자신의 죽음과 제자들에 대한 그 효과(결과)를 가리키기 위해 인용하셨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는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심을 뜻한다. 그러면 제자들은 이 시련을 면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함정에
빠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본다. 즉 제자들이 심히 낭패 당한 나머지 그들이 예수를 버릴 것이며, 목자 없는 양 떼처럼,
사방으로 도망가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슬프고 무서운 일이 지금 일어나려고 하긴해도 예수님 자신이 이 일을 제자들에게 미리
사전에 알려주셨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이 사전 경고는 이 흩어진 양떼를 다시 모을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R.C.H.Lenski).||(c) 요한복음에서 프로바톤은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즉 그의 백성을 뜻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 양들은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를 따른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아시고, 그들을 부르시고, 이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다(요 10:1-요 10:11).|마태복음에서는 목자와 양떼의 관계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왕의 관계인 반면에
요한복음에서 목자는 하나님을 계시하려고 하나님께로서 오신 아들이요 양떼는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교회이다. "한 양떼와 한
목자"가 있을 때(요 10:16; 참조: 요 17:20이하), 즉 마침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주님 밑에서 한 교회 안에서 모일 때
그 때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목적이 성취되는 때이다.||(d) 프로바톤은 매우 드물게 희생 동물에 대해 사용되었다(요
2:14; 행 8:32; 롬 8:36). 하지만 이 사상은 신약성경에서 주로 암노스와 아르니온으로 표현된다.|(참조:
J.H.Thayer; Walter Bauer; J.Gess).
양과 목자의 관계
양과 목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3-5)
첫째로, 양들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분별할 만 한 관계입니다.
H. V.
Morton이라는 분이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나는 베들레헴 근처에서 매우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목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떼들과 함께 동굴에서 밤을 새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양들은 모두 섞여 있었고
목자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 시간이 됐습니다. 둘 중의 한 목자가 양 무리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서서 양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이름을 부르니까 댓 마리의 양이 그들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의 양들을 다
불러냈습니다.” George Adam Smith란 사람도 서너 명의 목자가 이런 방식으로 양들을 구별해 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있습니다. 양떼들은 서로 섞여 있다가도 자기 목자가 부르면 그
음성을 알아듣고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이름을 불러냅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내셨고, 양들은 각자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모시고 교통하기 때문에 피차 모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예수님을 모르고도 단체로 천국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의 옷자락을 잡고 천국의 일원이 되려는 생각은 당장에 버려야만 합니다. 부모형제가 교회 장로 권사라고 덩달아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혹시 천국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로 천국에 들여보내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개별적인 교제 관계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서로 알고 대화 할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 내가 속한 교회의 목자와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요즘은 상업주의 물량주의의 흐름에 따라서 교회도 대형화의 추세를 밟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 사이의 횡적인 유대관계도 없고, 목자와 양 사이의 유대관계도 없는 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천국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성도를 모르고 성도가 예수님을 모르는 경우가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는 ‘설교꾼’이 아닙니다. 교인들 역시 설교의 ‘청취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마다 목회 철학이 있고, 인생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내 교회의 목자가 어떤 사상과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지 알고 따르면 복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와 좋은 훈련을 다 받고도 배반자가 돼버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설교자와 청취자의 관계에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먼저 예수님과 일대 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다른 사상가들의 음성과 구별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목자와 이름을 주고받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음성을 분별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지상에서 양이 누리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둘째로, 목자는 앞서 가고 양은 뒤따라오는 관계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수만 마리의 양떼들을 개를
동원하여 뒤에서 몰고 가는 목동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그렇게 많은 양들도 없거니와, 양떼를 뒤에서 몰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양들의 이름을 외울 만큼의 양들을 내어 놓고 목자가 앞서 가면 양들이 뒤따라갑니다. 목자가 양떼들의 길을
안내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이 가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목자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해 갑니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목자보다는 양이 앞서갑니다.
간혹 잘 나가는 교회가 있어서 보면 개가 양 몰 듯이 몰아가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모든
것이 알려지고 공개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목회 방식, 교회 형편 등등. 교인들은 얼마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교회를 선택할
기회가 있습니다. 상업주의, 소비자 중심 사회에 익숙해진 교인들은 교회도 얼마든지 쇼핑할 수 있습니다. 설교도 쇼핑하고, 교회도
쇼핑합니다. 좋으면 택하고 싫으면 떠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교인들은 아주 똑똑합니다. 목자보다 잘난 양들이 많아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회자는 전반적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저나 제 동역자들이나 다 모자랍니다. 두뇌도 모자라고, 지식도 모자라고,
인품도 모자라고, 능력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면 모자라는 목회자에게 순종하며 따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얼마든지 모자라고 부족한
지도자를 통해서, 모자라는 방벙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문제는 양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양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양을 목자 위에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원리를 바로 알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앞서가는 목자를 따라가는 교회, 그것이 양들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유일한 길, 오직 유일한 진리, 오직 유일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강력한 선언의 진실을 뒷 바침해 주는 증거와 표적도 함께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만 7번이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첫째, 나는 생명의 떡(6:35)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 장정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그 부수러기를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차게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육신과 영혼의 필요한 생명의 떡을 공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성도라면 오늘 내 모든 삶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둘째, 나는 세상의 빛(8:12)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소경들의 눈을 볼 수 있도록 고쳐 주셨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의 눈을 열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나는 양의 문(10:7)
이는 그의 양인 믿는 성도들에게 그 문을 통과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생명의 세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유일하신 분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넷째, 나는 선한 목자라(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양들의 죄악을 대신 해서 담당하시기 위해 죽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의지해서 살게 됩니다.
다섯째, 나는 부활과 생명(11:25)
이 선언을 하시고 실제적으로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도 언젠가 예수님처럼 이 몸이 영화로운 부활체를 입고 영생에 들어갈 것으로 믿고 삽니다.
여섯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그를 참으로 믿는 모든 양무리들에게 길이 되어 주심으로 방황치 않게 하시고, 진리가 되어 주심으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시고, 생명이 되어 주심으로 그 에너지로 살게 하십니다.
일곱째, 나는 참 포도나무라(15: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자동적으로 맺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할 때 삶의 신적인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기적의 삶입니다.
종교생활은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생활은 여러분들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참으로 자유와 평안과 구원을 주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무감으로 구속하여 기쁨이 없는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양의 문’을 통과하여 이 깨달음과 축복을 얻는 양들은 누구인가?
1.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
본문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와 양에 대한 자료를 보면 대게 소규모로 양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마리, 어떤 사람은 열 마리 어떤 사람은 삼십 마리.....
그래서 각각의 양의 우리가 없고 공동우리에다가 자기 양들을 다 몰아 둡니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이 되면 다 그 공동 우리 속에 몰아두고 그리고 거기에 문지기가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목자들이 자기 양을 찾으러 옵니다.
그래서 문지기에게 확인을 받은 다음에 우리 안에 많은 양들 가운데 자기 양을 찾아 끌고 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고 문밖으로 걸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이스라엘 여행기에 나오는 글 가운데도 이런 내용들이 소개됩니다.
여러 명의 목자가 한 곳에서 양들을 모아 놓고 밤에 자고 다음날 아침에 섞어 있는 양들을 향해 목자들이 한 사람씩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목자의 양들만 따로 뛰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고침을 받은 맹인은 그의 사실적 증언으로 인해 쫓겨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께서 이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소개하시고 믿으라 하십니다.
이에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구원받는 은혜의 자리에
이르고 반면에 이를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심판의 자리를 예고하십니다.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35) 과거 맹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하셨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직접 찾아오셔서 만나주십니다. 오늘도 세상이 주는 고난으로 인한 우리의 작은 신음과 탄식에도 응답해주시고 만나 주시며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 11:6).
주여 내가 믿나이다(36-38)
찾아오신 주님께서 네가 인자를 믿는냐는 질문에 그는 “그가 누구시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선지자(17)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자(33)라고는 이해했지만, '인자'라고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
인자가 바로 네가 보았고 지금 너와 말하는 자기 자신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에 고침을 받은 맹인은 즉시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했습니다.
이는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이제 그는 완전히 주님을 시인하며 영접합니다.
우리에게 여러 모양으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원하고 바라는 모양이 아닌 말씀일지라도, 그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는 성숙한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39-41)
맹인의 치유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결론적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권한을 물려받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심판 하실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맹인이 치유 받았던 것처럼 은혜를 입는 자가 되지만,
이를 믿지 아니하고 영접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본다고 하는 이들이므로 구원에서는 멀어져 심판 받을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소경인가”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자문하고 그 진실을 찾아야 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적용 : 믿음
까닭에 생기는 세상에서의 배척은 주님에게 더 가까이 서게 합니다.
이는 주님이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삭이시듯 '내가
너의 주님이며 구원자이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일상에서 듣기 원합니다.
은혜에 은혜를 더하고 믿음에 믿음을 더해 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때부터 피조물인 생명체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산소, 물, 흙, 햇빛, 바람을 주셨습니다.
만일 생명체가
햇빛을 받지 못하고 산다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질병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촌에는 가시광선, x선, 감마선, 코발트선
등 여러 가지 광선(ray)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이용해 최첨단 암 치료기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같이 치료의
광선은 복음의 기쁜 소식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능력처럼 병든 영혼과 육을 치료하는 의술의 도구가 됨을 예언하였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란 ‘son of man’(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칭하는 ‘인자’의
의미는 다릅니다.
‘the Son of man’입니다.
구약을 잘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알아듣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는 ‘인자’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말에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찾아오실 메시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인자’에 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서기관들이 시비를 걸어올 때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하려 하노라”(마9:6)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신적권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특별 부탁하여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고, 제자들은 우편 좌편 빼앗기면 뒤편에 앉아야 한다며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툴 때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눅10:46)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으로 온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인자’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을 때에도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은 일평생 가장 큰 분노로 화를 내며 옷을 찢었습니다. ‘인자’는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 외에도 90번 정도 더 나오는 단어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자에 대해서 아주 잘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에 맹인이었던 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절,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이 사람은 ‘인자’를 기다려온 사람입니다. 그가 누군지만 알면 당장 달려가서 엎드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만 들었을 뿐 아직 만난 경험이 없습니다. 만나보고 싶었는데,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이유로 유대인에게 끌려가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 사람의 신앙은 고난 가운데서 점점 더 성숙되었습니다. 처음엔 “예수님은 선지자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논쟁하면서 말씀을 더 기억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자다” 이 정도까지 성숙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계신 분을 소개받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당장에 만나러 갈 태세입니다.
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얼마나 감동이 있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눈앞에 계신 것입니다.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보는 것과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날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의 불씨가 있다면 “그리스도! 그분이 오시면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나 나 같은 인생에게도 하나님을 예배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소망뿐이었습니다. 버림받은 땅 사마리아 한 복판에서 부르짖는 이 절규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마음에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작은 신음소리를 듣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녀 앞에 서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그토록 가다렸던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이 여자의 눈앞에 서 계십니다. 세상의 가치에 중독되어 끌려가던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순간입니다. 열등감의 감옥, 수치심의 감옥이 일시에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생명의 빛을 향하여 꼭꼭 걸어 잠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순간입니다. 가치가 바뀌고, 관심이 바뀌고,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전에 맹인이었던 이 사람도 동일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출교당하여 외로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꺼져가던 불씨와 같던 인생이 활활 타오르는 인생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는 즉시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38절,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출교 당할 때는 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늘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실 주님입니다. 이제 선한 목자가 되어서 그분을 따르는 양떼를 목숨으로 지켜줄 주님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영적 눈을 활짝 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양떼를 만나는 것이 영적 눈을 활짝 뜨는 것입니다.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심판 받아야 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백부장, 니고데모, 요한,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거기서 울었습니다. 눈이 활짝 떠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그 가슴에 은혜 위에 은혜로 밀려왔습니다.
이틀 전에 정신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기독교인들이 말하길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주신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때 제가 대답했습니다. “예, 베풀면 채워주시지요. 그러나 채워주시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제 마음에 큰 은혜가 밀려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렇게 받은 은혜가 크고도 큰데, 가끔 이 은혜를 망각하고 힘들다고 하는구나.” 죄송해서 울었습니다.
40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맹인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렇다. 율법은 잘 알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누구보다도 탁월하지만 자신들의 죄악을 보지 못하고 율법의 잣대로 남을 정죄하는데 열심을 내는 너희!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도 모르는 너희! 너희가 맹인이다”
십자가를 바라보셨습니까?
거기는 죄인인 내가 심판받아야 할 자리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랑을 경험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나누고
베풀면 채워주시는 은혜가 있지만, 이미 우리는 받은 사랑이 너무 큽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큽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께 어떻게 헌신해야 하겠습니까?
혹시 힘들고 어렵다고 헌신을 뒤로 미루는 일은 하지 않습니까?
힘들고 어렵다고
나누고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더불어 살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서 서로 나누며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전부다. 나의 왕이다. 나의 주인이다.”
이러한 신앙을 주장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결단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작은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시고 다가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경험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11-08-2024(금) 요한복음 9:35-4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인자를 믿느냐?(35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Jesus heard that they had thrown him out, and when he found him, he said, "Do you believe in the Son of Man?"
네가 인자를 믿느냐?(Do you believe in the Son of Man?)
사람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욕심과 염려와 미움이라고 합니다.
시력을 잃은 사람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나?" 하며 분노합니다.
더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고 염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고쳐주신 후에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son of man)'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지만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그 인자(the Son of Man)"를 의미합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을 했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둡던 사람이 육신의 눈이 열리면서 영의 눈도 열렸습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눈은 떴지만 영의 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의 영의 눈이 열렸는지 아니면 닫혔는지를 점검해 보시기바랍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즐기는 재미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는 즐거움
둘째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즐거움
셋째는 시대를 분별하는 즐거움
새로운 피조물에 의해서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되찾아 가실 것입니다.
혼돈과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이제부터는 땅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당당하게 일어나 힘차게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황무지가 장미 꽃같이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 주님은, 불법하게 출교 당한 신자를 가까이 하신다.
주님은 그를 만나서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신다.
곧,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시어, 그의 신앙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신다.
이 때까지 소경 되었던 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또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로 알 뿐이었다.
물론 그만한 신앙 지식에 강력한 신념이 함께 하였던 것만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은 좀 더 명백한 진리 지식이 필요하였다.
곧, 예수님을 인자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였다.
"인자"란 말 뜻은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런 친절한 주님의 계시 앞에서 그는 신앙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신앙은 무한히 장성할 수 있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부요(富饒)를 상대하고 있다.
확신의 소유자도 또 다시 더 깊은 신앙에 들어가기를 원해야 된다.
고침 받은 소경은 그것을 원하였고, 또한 그 소원을 구체화하여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였다.
인류('아담'='사람')를 이루는 각 개인('벤'='아들')을 가리킨다.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93번이나 '인자'라고 부르신다.
시편 8:4에서는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견주어 볼 때 약하고 덧없는 사람을 가리켜 '인자'라 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신'이 사람 안에 들어갈 때만 사람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할 수 있다(겔 2:1-2).
2. 신약 성경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들 계층에서는 인자('사람의 아들')가 오시기를 기다렸는데, 이 인자는 (그 표현에서 추측할 수 있는 바와는 달리) 마지막 심판이 있은 뒤에 하나님에게서 세계 통치권을 넘겨받으실 초인적인 하늘 존재를 가리킨다(다니엘 7:13-14).
다른 견해에 - 에티오피아 <에녹서>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견해이자 신약 성경에서도 표준적인 견해에 - 따르면, 인자는 하나님의 위탁과 전권을 받아서 몸소 마지막 심판을 주재하신다.
복음서에서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지상 생활을 하실 때 이미 인자의 전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허락되어 있고 무엇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지를 - 일반적으로는 경건한 계층에 널리 통하던 의견과는 달리 - 결정하셨고(막2:28)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다(막2:10).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은 인자가 하늘에서 누리는 권좌에 오르시게 된 것이다(마28:18-20을 단7:14와 견주어 보라). 예수께서는 인자가 다시 오신다고 처음에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말씀하셨지만(눅12:8-9: 막8:38), 다시 살아나신 주님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다시 오실 인자일 수가 없을 것이다(막13:26; 14:62). 이런 '인자'이신 예수께서는 장차 누리실 권세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낮고 멸시받는 삶을 사셨다(마8:20; 11:19). '인자'가 먼저 '사람들'에게 넘겨져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의 심판자가 사람들의 법정에 서서 사형 판결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어난 사건이다(막8:31; 9:31; 10:33-34). 막10:45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속죄물로 내놓으신 인자이시다 - 심판자가 언젠가는 자기 앞에서 심판받을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다! <요한복음>의 특성에 어울리게 <요한복음>에서 인자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더러 특별한 형태를 띤다. <요한복음>에서는 인자의 고난당하심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높이 들리심'(요3:14; 8:28; 12:34)이나 '영광 얻으심'(요12:23; 13:31)에 대해 말하고, 또 영원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몸이 되셨다는 고백에 어울리게(요1:1-2,14) 인자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한다(요3:13). 6:62에서는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이 연관되어 있다.
인자(人子 - 사람의 아들)
왜냐하면, 그가 하늘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에 인자는 다니엘 7:13-14의 환상에 근거하여, 최후의 심판 후에 하늘로부터 와서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리리라고 기대했던 인물이었다.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인자를 이미 심판과 용서의 권세를 가졌으나(막 2:10; 요 5:27)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릴 사람(막 10:45)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들 본문에서는, 만일 전부가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언급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 인자라는 칭호는 신약의 다른 곳(행 7:56; 계 1:13; 14:14를 보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그 말이 그리스어를 쓰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될 때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은 크리스쳔 (교회)의 목표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는 것과 아는 일에 균형을 이루고 통합된다는 뜻입니다.
영성과 지성의 균형을 통하여 건강한 기독교(교회)인이 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신앙인격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믿는 것은 “터”와 같고 아는 일은 “건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더하여 아는 일이 없으면 터만 닦고 건물이 없는 빈 터와 같아서 결국 황폐해집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방법은,
1. 주님만을 바라보고,
2.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3. 주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는 것
믿는 것(믿음)과 아는 일(지식)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행함있는)믿음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해감으로써 우리가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온전하지 못한 신앙이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지 못한 신앙입니다.
믿음은 강한데 아는 것이 얕다면.. 병든 신앙이 되고
아는 것은 많은데 믿음이 약하다면.. 쭉정이 신앙이 됩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한복음 6:69)는 제자들의 고백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요한1서 4:16)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믿음"과 비교할 만한 "앎"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아마 "하나님에 대한 앎"일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이 믿음과 어떤 관계일까요?
성경에서는 믿음과 아는 것을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믿음과 앎은 서로 연결됩니다.
믿음은 앎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미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가 받아들인 그것을 더 알고 싶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반드시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 성도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깨우치십니다.
만약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지 못하거나 배움에 게을러서 앎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만년 어린아이 신앙으로 남아있게 되며 천박해집니다.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잘 될 것이다.
복 받을 것이다"식, 미혹이나 듣기 좋은 소리에만 안주하면서 하나님의 대한 넓고 깊은 지식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 아이 상태에서 자라지 못하게 되어 이단 사설에 쉽게 미혹되어 인생과 가산을 탕진하게 됩니다.
평생 이단 교회만을 전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단 교회는 대개 더 화끈하고 매력적이며 신기합니다.
무지의 결과로, 진리를 분별하지 못한 채 잘못된 교리에 빠져들어 많은 혼란과 분리, 분쟁, 시행착오, 좌절을 겪게 될 것입니다.(엡 4: 14절)"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 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15절 :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표준새번역-엡4:14~15)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모두(교회)가 도달해야 할 목표는 “온전한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 이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만으로는 우리가 자만하기 쉬우나, 지식을 더함으로써 우리(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게 됩니다.
영성과 지성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성장하게 됩니다.
"믿다(信)"는 "설득당하다"는 어원적인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께 설득당하여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관한 한 선생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증인만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에 관한한 믿는 사람들 전부가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알다"는 신약성경의 헬라어에서 주로 세 낱말로 쓰였습니다.
기노스코(배워서 아는 것),
에이도(눈으로 보고 확인하여 아는 것),
에피스타마이(마음에 세워서 아는 것)가 바로 그것입니다.
γινώσκω 스트롱번호 1097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에이도는 "눈으로 보아서 알다, 혹은 감각 기관을 통해서 알다"는 뜻입니다.
기노스코는 "알게 되다, 알기 위해서 배우다, 배워서 알다"는 뜻입니다.
에피스타마이는 세 낱말 중에서 유일하게 합성어인데, "-에 주의를 기울이다. -에 생각을 집중시키다, -에 관심을 두다" 등으로 풀이합니다.
그냥 쉽게 어원적으로 직역하면 "마음 위에 세우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도 비슷한 구분이 있습니다.
우선 가장 널리 쓰인 말로 "야다"가 있습니다.
야다의 용법은 "알다"부터 "섹스하다"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넓습니다.
그렇지만 그 최초의 뜻은 기노스코처럼 "알게 되다, 배워서 알다"입니다.
두 번째로 "나카르"는 "알아보다, 관찰해서 알다, 보아서 알다"는 뜻입니다.
헬라어의 "에이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는 "베네"가 있는데 이것은 "마음을 써서 알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과의 코이노니아나(혹,게시판에서의 교제)
신학, 신앙서적, 이런 전체메일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만 올인하는 사람은 쉽게 이단 사이비의 큰 능력, 은사, 신비주의에 빠져듭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무엇을 본다, 듣는다, 입신, 기적, 은사다 하는) 것들만 찾아다니는 무당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만 올인하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 인도하심은 멸시하면서 죽은 믿음, 죽은 정통, 서기관 바리새인의 길로 빠져듭니다.
살아있는 진리를 자기 열심으로 판단,핍박하는 자들이 됩니다.
바리새인이나, 변화되기 전의 사울이나, 도올처럼, 아는 것(지식)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도 있지만그러나 실제로 전혀 믿음이 없는 말쟁이가 됩니다.
믿지 못하고 안다는 것은 어떤 교리나 논리일찌라도 한낱 지식의 모래탑이요, 장님들의 지팡이에 불과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믿음이 아니었듯 믿음이란 아는 것이 많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같이 앎과 믿음은 상호보완 관계에 있으면서도 조건에 따라 때로 적대적인 긴장 관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18~19)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영적인 눈이 열리면 세 가지가 보입니다.
이 세 가지가 열릴 때 영안이 뜨였다고 말합니다.
① 성경 보는 눈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보일 때 성경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②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외모만 보이다가 눈이 떠지면 이 사람을 통해서 어떤 귀한 일을 이룰 것인지, 그것을 위해 내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탁월한 리더는 앞으로 이루실 일을 보면서 현재를 봅니다.
③ 시대를 읽을 줄 아는 눈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할 영혼이 많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눈을 가졌습니까?
9장 16절에 보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면 모든 사람이 기뻐해야 할텐데 바리새인들은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했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혼구원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섭섭하게 한 것만 눈에 들어오면 영적인 맹인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상처 받은 것만 생각하고 상처 준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상처가 오면 버리십시오. 상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신앙생활 하기가 힘듭니다.
영안이 열려서 주님이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안이 열릴 수 있을까요?
내가 영적인 맹인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39-41절)
빛이 오면 내가 맹인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41절에 바리새인들은 본인들이 다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맹인입니다.
반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은 육적인 눈도 떠지고, 영적인 눈도 점점 밝아졌습니다.
11절에 보면 소경은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눈을 뜨게 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7절에는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밝아진 것입니다.
30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눈이 감긴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38절에는 예수님을 믿고 절을 하였습니다.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본인이 맹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영안을 뜨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크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십시오.
전체 그림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 교회, 나라를 통해서 이루실 전체 일을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앞의 일만 보고 급급해집니다.
멀리, 곧 죽을 때까지 내다봐야 합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인가,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죽어서 주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안이 열립니다.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에게 안수 기도를 받으십시오.
사도행전 9:17-18절에 보면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먼 사도바울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평신도인 아나니아를 통해 사도바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조금 전까지 사울을 원수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형제 사울”이라고 얘기합니다.
사도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영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비늘은 선입견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 온 것만큼 내 눈에 비늘이 끼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비늘이 벗겨진 후 즉시 하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20절)
그러나 안수 받을 때 주의하십시오. 아무에게나 받으면 안됩니다.
음란의 영, 욕심의 영, 명예욕, 거짓의 영이 많은 사람에게 안수를 받으면 그것들이 나에게 들어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사람인지, 그 시대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영안이 떠져야 영혼을 살릴 수 있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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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에이도) 구걸하거늘.
블레포(βλέπω. 991)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아테니조. 816) 가로되 우리를 보라(블레포. 991) 하니.
호라오는 물리적으로 보는 이외에도 이해, 인식, 통찰, 그리고 영적인식이나 지적시각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됩니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프로스도카오. 4328) 보거늘(에페코. 1907)
호라오(ὁράω. 3708)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호라오. 3708)
성경을 보면 특별한 기사와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평범한 일상 중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시간이나 장소가 아닌 어제와 다를 것 없는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 갑자기 일어난 것입니다.
목사의 모든 일과와 숙제는 거의 주일에 맞추어집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말씀을 구하는 이유도 주일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소원하는 바는 그 주일이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전 주에도, 그리고 그 전주에도 그래도 오늘 만큼은 평범한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설령 오늘 특별한 만남과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분명히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 날 것입니다.
이왕이면 오늘이 그날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인생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는 그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읽은 본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거지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일어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4장 22절에 보면 나이를 40여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말해주는 그가 지난 40 여 년 동안 한 일이라고는 그 곳에 앉아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고 또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도 그것뿐이라는 절망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성전에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문 앞이었습니다.
당대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길 미문은 황동으로 겉 문을 하고 금과 은으로 덧씌운 2 중문의 구조였다고 합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이토록 화려한 성전 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거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극과 극을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몸가짐과 깨끗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큰 복을 기대하며 그 문을 통과해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죄 사함의 기쁨과 응답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미문의 화려함과 함께 그 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생명의 활기와 기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앉은뱅이는 40 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40 년 동안 가장 아름답고 복된 장소에 있으면서도 그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는 미문을 들어 가본적이 없습니다.
병자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유대의 율법에 따라 그는 그 자리에 고개를 쳐박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운 미문은 결코 아름다운 미문이 아닌 고통의 문이요 저주의 문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활력과 생명의 장소지만 그는 그곳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40 여 년 동안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날도 별 다를 것이 없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시간부터 누구가가 던져 줄 돈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날이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습니다.
3시와 9시 기도가 지나고 해가 중천을 넘긴 오후 제 9 시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9시면 오후 3시입니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3절을 봅시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에이도) 구걸하거늘.
거지가 먼저 봤습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원어로 에이도입니다.
에이도는 see 그냥 보다는 뜻입니다.
그냥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의미없이 목적없이 본 것입니다.
흐리멍텅한 눈을 뜨고 늘 하던 대로 “ 불쌍한 사람에게 한푼 주십쇼 ” 하고 구걸하기 위해 본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 거지의 요청에 대해 베드로와 요한도 그에게 시선을 줍니다.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아테니조. 816) 가로되 우리를 보라(블레포. 991) 하니.
보라 - 블레포(look straight). 집중하라, 경험하여 알라
주목하여 - 아테니조
ἀτενίζω
스트롱번호 816
-
1. 주목하여 보다, 눈 여겨 주시하다, 유심히 보다, 눅4:20,22:56, 행1:10, 3:4,12, 6:15, 7:55, 10:4, 11:6, 13:9, 14:9, 23:1, 고후3:7,13.
-
관련 성경주목하다(눅4:20, 행3:4, 고후3:7), 자세히 쳐다보다(행1:10).
거지는 베드로를 건성으로 봤지만 베드로는 거지를 응시했습니다.
에이도는 보지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상태요 블레포는 대상을 확실히 보고 그것을 틀림없이 경험하여 알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블레포 할 때에 드디어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사람의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눈 앞의 것만 보는 육신의 눈(肉眼)
또 하나는 마음의 눈(心眼)
그리고 영적인 눈인 영안(靈眼)
그냥 씨하면 마음의 눈은 열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블레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 look at)말합니다.
이것도 블레포 하라는 말입니다.
블레포의 또 다른 뜻은 ‘마음의 눈으로 보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신들을 보라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눈을 보라는 것이 아닌 마음의 눈을 뜨라는 말인 것입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불행하게 되는 것은 좋은 환경이나 조건보다는 마음의 문제요, 바라봄의 문제에서 영향을 받는다 합니다.
유명한 헨델의 메시야라는 곡은 두시간 짜리의 대작입니다.
그 엄청난 곡을 헨델은 병상에서 죽어가며 열흘 만에 썼습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병석에서 하나님께 블레포했을 때 음악사에 길이 남는 대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역사 드라마 왕건에서 보면 궁예가 애꾸눈이었습니다.
영국의 해군 제독 닐슨도 애꾸였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하니발도 애꾸눈이었습니다.
이들은 애꾸눈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명장들이었습니다.
세계 3 대 서사시를 쓴 호메로스와 밀턴과 단테, 이 세 사람은 모두 맹인들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잘 보이거나 조건이 좋아 이른 업적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과 상관없이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블레포하면 소중한 것이 보입니다. 블레포하면 사랑이 보입니다. 부모를 향해 블레포하면 부모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부부가 블레포하면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삶의 위기는 환경보다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짜 위기는 영적 침체요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어느 시대보다 번쩍 거리며 발전하고 삶은 윤택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멀어졌습니다. 아름다운 황금 빛 문에 소중한 것들이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늙은 부모들이 버려지고 소중한 가정들이 깨지고 있습니다. 결국 원망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부모와 자괴감으로 고통받는 이혼부부와 비관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모릅니다. 영적 앉은뱅이요 거지가 널려 있습니다. 육신의 배부름 속에 사랑의 배고픔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거지 앉은뱅이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신의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감동과 소망이 꺼져버린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기대가 없습니다. 기대라고 한다면 오직 한푼 얻어 목구녁에 빵 몇 조각 밀어 넣는 창자가 채워지는 것 뿐입니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이런 마음의 장님인 그를 블레포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블레포 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입니까 ? 엔진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엔진은 잘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엔진이 어디입니까 ? 마음입니다. 마음의 엔진이 잘 돌면 뜨겁습니다. 마음이 식어진 예배는 곤욕입니다. 마음이 식어진 기도는 미신입니다. 마음이 은혜로 뜨거워졌을 때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은 마음의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블레포 마음의 눈을 뜨라, 나를 쳐다보라 , 마음으로 기대하라!
그러자 5절을 봅시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프로스도카오. 4328) 보거늘(에페코. 1907)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돈밖에 기대할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와 소경 사이에는 굉장한 간격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쳐다보라는 것은 돈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지 앉은뱅이는 돈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서로의 요구와 필요가 다릅니다. 이것도 극과 극입니다.
베드로가 보라 그랬는데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요 ? 베드로 자신의 행색일까요 ? 그도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베드로가 요구하는 블레포는 자신 안에 계신 어마 어마한 분이셨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세요, 어마 어마한 분이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대하세요, 하나님 주실 은혜를 기대하세요,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속상한 모든 것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요. 엄청난 은혜를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도 못한 굉장한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 일어날 것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가 블레포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고 눈을 들었습니다. 어째든 두 사람의 시선이 블레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기대하고 눈을 들었던 거지에게 베드로는 돈부터 없답니다. 기대하고 쳐다봤는데 “ 나 돈 없다 ” 약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딴게 있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니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무조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돈은 없지만 내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은 얼마 전에 죽은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으로 걸으라 명령하고는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고 걷고 뛰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시선이 블레포하고 짧은 말이 선포된 것뿐인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앉은뱅이였던 그가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났다는 사실 뿐입니다.
20 년 전 군에 입대했을 당시 훈련소에서 친척중에 군대나 정부기관에 고위직이 있으면 적어 내라고 합니다.
고위직의 줄이 있는 사람들은 좋은 곳으로 자대 배치받고 비교적 군 생활이 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날 동기 하나가 적어 내지 않고 머뭇거리며 소대장에게 ‘이런 분의 이름도 적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군대나 정부의 고위직하고는 상관없지만 소대장님이 아실만한 분이라서 적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소대장이“ 누군데 ”그랬더니 저희 큰 아버지 성함이 “ 최규하 쓰십니다. ”
그 날부터 훈련도 안시킵니다.
얼 차례도 다 빼주고 훈련병 때는 면회도 안 되는데 가족 면회까지 시켜 줍니다.
그리고 더 기막힌 것은 제가 대대 선임이어서 훈련 마치면 받기로 되어 있던 29 연대 연대장 상을 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상 받으면 자대 배치 받고 2박 3일 포상휴가거든요.
전직 대통령의 이름은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은 비교할 수 없는 파워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생사를 가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실력있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절대적인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먹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 이름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가 복종하며 영적 세계도 굴복하는 위대한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중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냉냉한 심령으로 이 곳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믿음과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어려우십니까? 사업이 어려우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업아 일어날지어다. 몸이 병들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의 고통에서 일어날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이 살아나고 우리 가정들과 사업이 이 일을 위해 일어날지어다.
우리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5절을 보면 앉은뱅이가 바라보았습니다.
보라 해서 본 것입니다. 블레포 하라 했으면 블레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 바라보거늘 ” 이 단어는 불레포가 아닙니다. 룩 엩이 아닙니다. 블레포가 아닌 다른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원어로 에페코라는 단어가 쓰여졌고, 영문으로 보면 give attention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에페코라는 단어의 의미는 못 떠나게 굳게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용어를 확실하게 정리를 해 보십시다.
헬라어에서 본다라는 단어가 3가지가 있는데
그냥본다는 에이도가 있고
집중해서 본다는 블레포,
그리고 마음안에 꽉 붙잡아 둘 정도로 본다는 에페코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우리를 블레포하라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거지는 돈을 얻을까하여 블레포했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짧은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시선 속에서 지금까지 보았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시선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거지 앉은뱅이에게 마음의 눈이 열린 정도가 아니라 또 다른 눈인 영안이 열려 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시선을 발견한 앉은뱅이는 그 짧은 순간 예수님의 시선을 블레포한 것이 아니라 에페코 한 것입니다.
주목한 정도가 아니라 굳게 붙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못 떠나게 굳게 붙잡다’는 에페코를 써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 보거늘’ 예수님의 시선을 절대로 놓칠 수 없도록 자기의 마음에 꽉 붙들어 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잡힌 오른 손도 더 이상 베드로의 손일 수 없었습니다. 그 손은 앉은뱅이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손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과 그 분의 피 묻은 손에 잡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한없이 따뜻한 생명의 시선을 주지 않았던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선행된 시선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시선이 떠나지 않도록 꽉 붙잡는 것입니다.
따스한 햇볕같이 쏟아지는 주님의 시선에 인간이 에페코 할 때 평범한 일상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 때 마다 저를 블레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 만큼이나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를 블레포 하지 마시고 저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평범한 예배가 여러분 각자에게 놀라운 체험과 기적을 만드는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복잡한 인생길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해결의 열쇠를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능키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주님께 에페코하면 그것으로 인생은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즘 다 차를 몰고 다니는데요. 차를 다 아는 사람만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도 운전 잘합니다.
저희 아내는 자동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동키면 가는 줄 알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줄만 압니다.
자동차의 원리나 구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인생을 잘 모릅니다. 인간관계도 잘 하지 못합니다. 말 주변도 없습니다. 소심합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대속이 뭐고 삼위일체가 뭐고 은혜 언약이 뭔지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예수님께 에페코 하면 받드시 복을 받는다. 믿음 생활 잘하면 복을 받는다.’ 이것만 붙들면 됩니다.
대구 서부 교회에 아멘 교수로 불리는 조동식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신답니다.
그 분의 어머니께서 큰 며느리를 보시던 해가 마흔 다섯 이었답니다.
구역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께서 며느리에게 축복하기를 “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아들 낳기를 축원합니다. ”하더랍니다.
그럼 아멘해야 잖아요.
그런데 이 며느리가 아멘을 안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꾸 눈짓을 하는데도 안하는 겁니다.
그러자 다급한 시어머니께서 대신“아멘“해 주었는데 그만 시어머니가 임신을 해 가지고 늦동이를 나았답니다.
그 목사님이 축복한데로 다윗같이 신앙 좋고 다니엘처럼 뛰어난 머리를 가진 교수 조동식 집사가 태어난 겁니다.
신앙을 머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무슨 말씀을 주시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에페코 하면 그대로 되는 줄 믿습니다.
앉은뱅이가 눈을 뜨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
8절을 보세요. 성전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하나님을 찬미하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에게도 드디어 미문이 아름다운 문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건축물인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에 주께서 이곳에 계신 여러분을 뜨거운 사랑과 생명의 눈으로 응시하고 계십니다.
자기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며 마음의 눈이 먼채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블레포 할 것을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밀려나 영적 앉은뱅이로 주저앉은 그 다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려고 피 묻은 손으로 우리 손을 잡으려 하십니다.
그 분을 향해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그 분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까 ?
활짝 열린 축복의 성전을 향해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찬양하며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
참된 생명도 , 참된 사랑도, 참된 능력도, 참된 위로도, 참된 소망도, 참된 성공도 오직 그 분께만 있습니다.
이 시간 나를 위해 피흘려 주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시선에 에페코 하고 싶지 않습니까 ?
저를 블레포 하십시오.
look at me , 믿음의 눈을 열어 저를 보십시오.
그리고 저를 통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에페코 하십시오.
굳게 잡아 결코 놓치지 마십시오. 잡으셨습니까 ?
이제 선포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정과 사업이 불 같이 일어날 지어다.
11-07-2024(목) 요한복음 9:31-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적반하장(賊反荷杖)(34절)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To this they replied, "You were steeped in sin at birth; how dare you lecture us!" And they threw him out.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주객전도(主客顚倒)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도리에 어긋난 자가 도리어 스스로 성내고 업수이 여긴다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예언된 메시야(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강조합니다.
태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불러 네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반복하여 추궁합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은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전에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두 눈으로 분명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선지자이심을 확신한다고 주장하며 이르기를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려느냐 하며 소경되었던 사람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소경으로 태어났던 사람은 그의 눈이 회복된 후에 눈을 밝히 보게하신 그 분이 바로 선지자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준수할 뿐만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을 믿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그 분이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메시야로 오신 것을 부정합니다.
메시야를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 메시야를 통하여 두 눈을 밝히 떠서 세상을 환하게 보게 된 사람의 증언을 거부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나라들이 지구촌에서 거의 사라지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공산주의 잔재를 희망의 끈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붙잡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유민주주의를 흔들려는 불손한 세력들이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엉뚱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진리를 이 땅에 실현하시려고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바르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온 세상 위하여
성경에서 적반하장과 같은 대표적인 사례는 갈보리 언덕 위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 십자가에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외경에 의하면 두 강도 "디스마"와 "게스다"는 좌우에 못 박힌 죄인들이었습니다.
오른편의 강도는 '디스마'라고 합니다.
왼편의 강도는 '게스다'라고 하며 그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부탁합니다.
만일 당신이 구세주가 되신다면 당신이 먼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이 구세주가 되심을 믿겠습니다.
이때 오른 편의 강도 디스마가 게스다를 꾸짖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값으로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 사람은 전혀 죄가 없음에도 이런 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디스마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강도 디스마와 게스다의 경우
게스다는 적반하장 또는 주객전도라는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주객전도(主客顚倒)
잠언 30:21-23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은 주인과 손님의 역할이 거꾸로 되었다는 뜻으로 경우가 바르지 않거나 어이없는 상황을 설명할 때 쓰이는 말이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든다는 뜻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도 비슷한 경우를 설명하는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위치와 본분을 망각한 체로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
손님이 주인인 체 하거나 종이 주인인 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손님은 손님이고, 종은 종이고, 주인은 주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주라 부르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종으로 인식하는 자각을 담고 있다.
불행한 것은, 입으로는 주님을 주님으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창조주인 것처럼, 자신의 모든 일의 주권자인 것처럼, 마치 자신의 삶은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심판주가 된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사는 것이다.
주님은 거짓된 인간의 위선에 속지 않으신다.
누가복음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아니하느냐.
주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다.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영원한 죄와 심판으로부터 건져 주신 우리의 주인 이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 이유도,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우리 주님의 종이다.
우리 삶 속에서 어이없는 주객전도를 버리도록 하자.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적반하장(말라기 2:17~3:15)
2:17 절에는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느냐고 묻는 첫 번째 적반하장이 나옵니다.
7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합니다.
세 번째 적반하장은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모두 처음 관점이 어긋난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내 사자를 보내리라(2:17~3:6절)
자, 그럼 첫 번째 부작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를 내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17절을 요약하면 그런 의미가 됩니다. 과거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문제를 제기하면서 “하나님 세상이 도대체 왜 이 모양입니까?”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뜻밖의 답변을 듣고 성문에서 지켜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고 없어도 인하여 감사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따졌던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무지나 영적인 불감증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공의의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적반하장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의 문제는 첫째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비틀어진 시각으로 역사를 보려고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가 의심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짓고 뭔가 획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열강들은 승승장구하고 자신들은 되는 일이 없는 것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비틀린 시각으로 인해 영적 생활이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하나님은 대접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껍데기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생활도 엉망, 성적인 방종도 서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 통혼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런 이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해는 갑니다. 기다림의 세월이 길어짐으로 인한 이들의 고통이 이해가 간다는 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도 고통의 세월의 무게 때문에 너무 힘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럴 때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영적 생활을 등한히 하면 상황이 더 좋아집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위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음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종래는 이들처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내 시간과 같지 않으며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고난의 시간들 동안에 견고하고 꿋꿋한 모습으로 훈련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도리어 하나님의 공의를 묻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사자를 보내겠다.”라고 하십니다. 함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3:1절 이하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뭐라고 하십니까? 내 사자를 보낼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볼 때 이 사자는 세례 요한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세례 요한의 사역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희의 구하는 바 주,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어떻게 임하신다고 하십니까? 홀연히 임하신다고 하십니다. 갑자기, 예기치 않은 날에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항상 재난과 파멸과 함께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여기 “너희가 구하는바 또 너희의 사모하는바”라는 표현에서 이들이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모하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입니까? 계속되는 외세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힘 있고 강력한 메시아, 다윗의 영화를 회복할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내시겠다는 메시아는 지금 이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와는 다른 메시아입니다. 따라서 17절에 이들이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탄식하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신 것입니까? 내가 메시아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어떤 메시아입니까?
2절입니다.
어떤 메시아입니까? 은과 금을 연단하는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은 메시아입니다. 불은 흔히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 4:24 절에서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라고 합니다. 고전 3:13 절에는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불은 정화의 불입니다. 연단의 불입니다. 깨끗하게 불순물을 걸러내는 불입니다. 없애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깨끗하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중동지방을 가면 지금도 길거리에서 은장색들을 만난답니다. 그들은 서방 여행객들이 주고 간 주화를 이동 용광로에 넣어 녹여서 은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여행객들에게 파는데, 그 방법이 주화나 광물을 용광로에 넣은 다음에는 계속은 도가니를 바라보면서 찌꺼기를 퍼내고, 또 들여다보고 찌꺼기를 퍼내는데, “왜 자꾸 들여다보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기를 “은에서 나온 찌꺼기가 다 없어지고 순수한 은만 남으면 거기에 자기의 얼굴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비친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게 무슨 과정입니까? 정화의 과정입니다. 마치 알곡과 가라지를 걸러내는 것처럼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골라내는 것처럼 불순물들을 걸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하는 자의 불입니다. 심판의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연단의 불입니다. 성도를 깨끗하게 제련하기 위한 정화의 불이라는 말입니다.
표백하는 잿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같이 비누가 나오기 전에는 우리나라도 잿물로 빨래를 빨았습니다. 표백하는 자의 잿물은 천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회복하심에 대한 은혜는 3~4절에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3절입니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기간, 하나님이 충분히 고통스러운 그들을 그냥 놓아두시는 기간 그 기간이 뭐라는 것입니까? 은을 연단해서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연단하는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말세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구원 받은 이후의 이 기간은 근본적으로 연단과 훈련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인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배가 회복됩니다. 3절 하반 절에는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는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배가 형식화되고 번폐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제물이 어떤 제물을 드리게 되었습니까? 저는 것, 눈먼 것 병든 것으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병들게 되면 가장 먼저 예배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배는 늘 제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사가 사라집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나면 인색한 마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럴 때 구약처럼 저는 것 병든 것은 아닐 테지만 그와 똑같은 자세로 헌금하게 됩니다. 다 쓰고 남은 것, 어쩔 수 없어서 드리는 것으로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메시아가 오셔서 하는 일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정화하고 연단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불로 정화하고 잿물로 씻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창조 사역의 아름다운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온 인격과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회복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오랜 시간 기다리게 만들어서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 연단의 기간, 그 훈련의 기간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참된 예배자로 기쁨의 예물을 드리는 회복된 사람들로 만들어 가시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틀어져 있는 시각과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지점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회복하시려는 것과 다른 메시아, 다른 영광을 기대했기 때문에 실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과 잿물로 회복하시는 것은 그들의 그런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온 마음과 생각을 집중함으로 이 땅에서 섬기고 낮아지는 종으로서 삶을 살아내는 백성들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높은 곳에 마음을 두고 다윗의 영화와 같은 번영과 영광만을 찬양하는 승리주의 기독교는 어쩌면 주님이 바라보시는 곳과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이며 다른 것을 추구하는 기독교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회복되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내가 의로운 제물과 여호와께 기쁨이 되는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회복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멸되지 아니하리라(6절)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복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뭐라고 위로하십니까? 나는 인생이 아니기에 식언치 않고, 인자가 아니기에 후회가 없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야곱의 자손들 누굽니까? 성도들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회복된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느냐? 여기 너희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나는 변하지 않는 여호와! 나는 처음과 나중이 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불과 잿물로 씻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야곱의 자손들을 소멸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심판 주로 오심(5절)
그런데요? 주님의 오심은 야곱의 후손, 레위 자손들에게는 분명히 은혜입니다. 이들을 구약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남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 고난의 시기를 인내로 경주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바로 회복된 예배를 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많은 사람, 특히 경건의 모양을 가졌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심판 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면 알곡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으로 향하는 축복의 시간이지만 그렇지 않은 가라지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시간인 것처럼 주님의 오심은 심판하러 오심의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심판을 받을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지금 불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제사장들입니다.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내용적으로는 경외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술수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마술이나 무당들을 의미하는 말로 혼합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순전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섞여버린 기독교입니다. 세상 정신을 본받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 정신과 기독교를 섞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런 기독교는 가장 인격적인 주님을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하나님으로 바꿔 버립니다. 그래서 성도가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부분들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미 2:10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혼과 잡혼을 일삼는 궤사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구역질 난다고 하시는 그런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생활이 성결하지 않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순간의 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라기의 제사장들, 성도들은 이방 신의 딸들과 통혼했습니다. 고의로 아내를 버렸습니다. 궤사를 행했습니다. 잠자리를 거부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거짓 맹세하는 사람, 품꾼의 삯을 떼어 먹는 사람,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사람 즉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술수, 마술적인 종교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짓 맹세, 품꾼의 삯을 떼어먹는 못된 고용주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추상적인 무엇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것은 구체적인 생활입니다.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일은 성도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구체적인 일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이렇게 양면적인 것입니다. 필경 알곡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주님의 연단의 불과 표백의 잿물을 통해서 날마다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살다가, 삶의 고난과 어려움에도 더욱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져서 주님을 닮은 성품으로 자라가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되어서 영원히 주님과 찬양하며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과 다른 세계관 다른 시간관, 다른 욕구들로 삶의 채우고 주님이 내 욕구에 응답해 주지 않는다고 타성에 젖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라지로 분류되어 지옥의 영벌을 상속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기위해, 유다와 예루살렘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기를 원하셔서 오늘 우리를 연단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거룩한 삶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게 할 것입니다. 우리로 살아 있는 예배, 역동적인 예배, 감격, 감사, 찬양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변역치 않으십니다. 고난의 시간들은 연단의 시간들입니다. 나를 모세처럼 온유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훈련과정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성품으로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고 힘을 내십시다. 감사를 회복합시다. 찬양을 회복합시다.
내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확연하게 깨닫는 진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한 삶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즐겨 하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것은 성경을 알면 알수록 주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확연해지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2. 어떻게 도적질했습니까? (7~12절)
이 단락은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해지는 본문입니다. 뭡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간절히 불렀더니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돌아가는 것입니까? 하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그간의 잘못된 생활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저는 것, 눈 먼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돌아서고, 아! 예배가 너무 번폐스럽구나 하고 있는 타성에 젖은 예배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돌아섭니까? 그럽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것들은 응답도 해주지 않으시면서 뭘 잘못했다고 그러십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은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십일조를 예화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운동을 하다보면 자세가 지나치게 기형적인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보기에도 혐오스러울 뿐 아니라 몸에도 무리가 많이 갑니다. 그래서 자세를 교정하려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에이, 뭐 그냥 취미로 치는데요. 그냥 놓아두세요. 내 맘대로 치게”, 또는 “나 편하면 되지요. 뭐가 문젭니까? 이걸로 밥 먹고 살 것도 아닌데...” 그럽니다. 그러면 참 말한 사람이 머쓱해집니다. 문제가 심각한데 그게 문제인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멋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전혀 고칠 의사도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도둑질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서도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했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둑질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상대로 사기 친다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덮다”라는 말입니다. 거짓말을 슬쩍 덮어버리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속여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뭘 도둑질했습니까? 십일조와 헌물을 가지고 사기를 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헌금의 원리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헌금의 원리
우선 우리는 최초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있는 창세기로 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14:20절입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그럽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도저히 승산이 없는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야간 습격을 통해 대승을 거둡니다. 그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의 마중을 받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때 십일조의 의미는 감사와 찬양, 기쁨과 감격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십일조를 바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너무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드린 것입니다.
창 28:22절에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에 노숙하다가 꿈을 꾸고 그 꿈에 감격해서 예배하고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면서 십일조를 서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야곱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때에도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 십일조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은혜의 표현이요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로운 모습은 아마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범법함으로 율법이 더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율법이 되고 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 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레 27:30절에는 “땅의 십분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고, 모든 것을 소유한 분이시기 때문에 실제로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하나님이 가져다 쓰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일조의 참된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께서 쓰시지도 않으시면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성물로 구별하라고 하십니까? 일단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십일조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로 실질적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민 18:24 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십일조는 성도가 드렸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첫 번째는 레위인들, 즉 하나님의 성막, 혹은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의 생활비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신 14:28~29절을 보시겠습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축복을 주시리라” 그럽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정신은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섬김이요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십일조가 율법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가르쳐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용도에 있어서는 사랑의 실천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 14:29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헌금의 원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특히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생활과 직결되어있는 소중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이런 것들이 잘 지켜졌지만, 후대에 와서는 대체적으로 십일조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안식년만 해도 바벨로 포로기 70년을 안식년이라고 말씀할 정도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사기에는 레위인이 방황하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에스라서에는 레위인들이 돌아오기를 꺼립니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레위인들도 타락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읍에 매 3년마다 저장했던 그 십일조는 온갖 부패와 부정의 온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고아와 과부들의 위한 것까지 다 착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말라기 처음 시작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 이하에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가운데 더러운 떡을 드린다. 눈먼 희생으로 드리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고 타성에 젖을 때 제사장들이 깨어서 그들을 일깨운 것이 아니라 그들은 더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 가운데 좋은 것은 자신들이 착복하고 저는 것, 병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 번폐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제사장들의 도적질에 대한 실질적인 그림은 말라기와 동시대 선지자인 느헤미야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 13:4절 이하에는 제사장 엘리아십과 도비야의 비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14:29절의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가 성읍에 저장되었다고 했는데 대하 31:10~12절에는 이것이 성전 곳간에 모아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 고아와 과부 어려운 사람들을 돕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큰 방을 마련했습니다. 그 방이 어딥니까? 바로 이런 십일조의 곡물을 두는 방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공공연하게 비리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도비야가 누굽니까? 얼마나 집요하게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방해했던 사람입니까? 암몬 사람인 도비야가 어떻게 성전에 그것도 가장 깊숙한 심처에서 성도들이 내는 십일조를 먹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게 당시의 타락상이었습니다. 그러자 느13:10절에는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이 그 직무를 포기하고 도망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꼴을 보고 백성들이 십일조 내기를 중단했습니다. 그 결과 레위인들이 전리로 도망치는 악순환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남아 있는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사랑과 섬김의 십일조를 착복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도망쳐서 더 이상 레위인으로 살기를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도적질은 일차적으로 누구 이야기입니까? 제사장들 이야기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린 사랑과 고아와 과부들, 객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착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둑질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나라가 이렇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제사장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레위인들이 도망쳤겠습니까?
이게 뭡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위기 상황입니다. 부작용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대의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의 탐욕스러운 물질 사랑이나 우리 시대의 목회자들이 돈만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나, 성도들이 은혜와 사랑,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사라져서 인색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헌금하고 그나마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도 없어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상황은 다 뭡니까? 부작용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헌금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그 원리입니다. 십일조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본 교회에 해야 합니까? 등등의 질문은 전부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으면 “십일조 해야 합니까?”라고 물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다른 교회에 해야 합니까 하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사랑과 섬김의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목회자가 돈에 욕심을 내고 명예에 욕심을 내게 마련입니다. 성도가 주일이고 예배고 별 상관없이 그저 돈의 노예가 되어 살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고사하고 날마다 더 채우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적 생활을 가장 심각한 대적이요 부작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더 알기 원한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본문의 답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 어려운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오면 그래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양식을 채워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배당을 살찌우고 예배당에 최고 좋은 집기를 들여놓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말씀은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 곡간에 곡식들은 고아와 과부, 객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 시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연장 선상에 십일조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 십일조를 통해 공동체가 어떻게 어려운 사람을 돕고, 또 여기서 애쓰는 목회자가 생활하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해 보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한 번 투자해 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배로 두 배로 세배로 축복해 주시는지 테스트해 보라는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이요 세속적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입니다.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 과도한 욕심을 내고 부정해서 사업하고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지 환경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부자만 되면 되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시험해 보라는 말씀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나를 증명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test 해보라는 말씀이 아닌 것은 이어지는 15절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보고 싶습니다. 너희의 타성에 젖은 마음, 하나님이 내 시간, 내 의도대로 움직여주시지 않는다고 상한 너희 마음! 그 마음에 하나님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원리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호하고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싶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풍성한 삶을 살게 하고 싶어서 마음이 타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보호받고 최소한 먹을 것 때문에 애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레위인들이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헌금을 통해 나타나 평균케 하는 원리가 실현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랑하는 마음이요 자원하는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꾸 바벨 정신에 입각한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백성들이 나태해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방종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그런 생활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이게 단순히 십일조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십일조는 그런 돌아선 마음의 지극히 작은 결과일 뿐입니다. 오히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더 섬길 것이 없는가? 더 드릴 수 없을까를 가지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십일조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세계관이 낳은 부작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돌아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주님은 인간의 중심을 꿰뚫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물질이 어디에 주로 사용되고 있는가는 분명히 나의 마음의 방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시간 대부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그 시간이 사용되는 곳에 내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곳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쓸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랑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공동체와 이웃을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사랑하십시오. 그 사랑만이 우리를 모든 시험으로부터 이기도록 넉넉한 힘을 줄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에 담긴 의미입니다.
말로 하나님을 대적함(1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했을 때 사용했던 말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돌같이 단단해졌으며 악의로 가득하게 되었는가를 잘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주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말로 하나님을 탄압하고 말이 강퍅할 대로 강퍅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 놓고는 우리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 25장에 보면 주님 다시 오셔서 양과 염소를 골라내실 때 우리가 언제 주님을 돌보았느냐고 묻는 사람들과 언제 주님을 모른 척했느냐고 묻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셨던 말씀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 가운데 가장 작은 소자 하나, 고아와 과부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둘 다 그것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완악한 말을 하고도 무슨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느냐고 묻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이 말로 저지르는 부작용이 무엇입니까? 14~15절입니다.
3. 너희는 말하기를(14~15절)
1)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
무슨 말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슬프게 행하는 것이”라는 말은 주로 애도하는 사람들이 입는 복장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행사가 있을 때는 회개의 복장으로 베옷을 입거나, 재를 뒤집어쓰고, 또는 금식을 하며, 철야기도를 하며, 스스로 자기 몸을 괴롭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내가 철야하고, 금식하고, 새벽기도를 안 빠지고, 열심히 봉사하니까 하나님께서 합격을 주시고, 승진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좋은 사람 만나게 해 부실 것이라고 하는 보상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총칭해서 “슬프게 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십시오.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말은 우리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했는데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원망입니다. 예수 믿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백날 예수 믿고 고생했는데 얻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그들이 바라는 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보상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영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잘 먹고 잘사는 부강한 나라를 이루는 것에 있었습니다. 2:17절에 이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버림과 탄압을 받고 환란을 받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마음을 괴롭게 하며 살아보았더니 별 소용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진심으로 순종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온전하게 괴롭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것을 원하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것과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시대에 한 번도 변변하게 복음을 올바르게 배워보지도 못하고 그저 교회 언저리에 세상 정신이 가득한 모습으로 머물다가 내가 교회 다녀보니까 별 것 없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보려고 정말 노력했는데 그래보니 별 것 없더라는 말입니다. 또 뭐라고 말했습니까?
2) 교만한 자가 복되고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오히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잘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회사가 커지더라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교만한 자가 복되다,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나 마음을 애통하게 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혀는 불의 세계입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악입니다.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의 속사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교만을 끔찍하게 싫어하십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요 패망의 선봉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그런데 마음이 잘못된 것을 구하고 비틀어진 눈으로 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교만한 사람들이 복된 것처럼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 잘되는 것 같은데 예수 믿는 나는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복입니까? 주님과 함께 동거하며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에서 심령의 평안을 구가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 때문에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낙보다 고난을 택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것이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이며 교만한 자의 길을 따라 걷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는 복되다는 말은 성경이 말하는 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들이 교만한 자들이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복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다 잘되는 것 같더라는 말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뇌물을 주고, 불의한 방법을 동원하고 교활하게 행동하는 자가 번영하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보니까 안 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십자가에서 온갖 조롱 가운데 침묵하셨던 주님은 우리의 성공주의를 지지하시면서 그것이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보너스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덤으로 주시는 것들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와 인과 신이 아닌 번영만을 꿈꾸면서도 자신들이 명령을 순종했다고 믿고 있고, 마음을 슬프게 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이들을 더욱 심각한 부작용으로 인도하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까지 합니다. 여기서 시험한다는 말은 심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 가운데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아무 이상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뒤틀려 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처럼 보입니다. 중세 기독교의 타락한 시대를 지나던 사람들이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잘못된 신에 의해 붙잡혀 있던 인간 이성을 불을 밝힌다고 했습니다. 신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사람들이 잘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신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세상이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상한 마음 그대로, 잘못된 세계관 그대로 사는 것은 그것 자체로 저주입니다. 그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의 말들로 삶을 더 황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상한 사람들, 잘못된 세계관으로 잘못된 신앙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이중적인 어려움입니다.
하나님 상대 소송 제기 - 말세의 `적반하장!`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도다』(시편 53:1).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건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큰소리치며 만용을 부리던 사람,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 죄인이 오히려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 대해 법원 판사가 기각하는 해프닝이 소송천국으로
알려진 미국에서 벌어졌다.
미국 네브래스카 주 상원의원인
‘어니 체임버스’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제기한 소송을 네브래스카 주의
한 판사가 기각시켰다고 한다.
뉴스에 의하면, 네브래스카 오마하에
있는 더글러스 카운티 디스트릭 법정의 ‘말론 포크’ 판사는 지난 14일 주 상원의원인 어니 체임버스가 지난 2007년에 접수시킨 하나님에 대한 소송을 기각시켰다.
포크 판사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고소 통지서 집행을 할 수 없다’면서
‘소장에 명시된 피고인에 대한 효과적인 법 집행이 불가능하므로 이
고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체임버스 의원은 고소장에서
‘하나님은 지구상의 수백만 인류에 대한 수백만 건의 파괴, 테러, 죽음의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법적으로 규탄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체임버스는 포크 판사의 기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이 소송을 알고 계셨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상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곤 한다.
억울한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탄원하는 일은 있어 왔으나 하나님을
상대로 고소하는 일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통해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가끔씩 하나님께
그 화살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 세상에는 참으로 어이없는 소송들이
많음을 본다.
어떤 자료에 보면, 캐나다에서 어느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한 판사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벌금형을 선고해놓고는
다시 정상을 참작해 벌금을 다시 면제해 주는 웃지 못할 판결을 내린
사례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루마니아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는데, 살인죄로 20년간을
복역한 ‘페블’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의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으로 믿고 세례까지 받았지만, 여전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하나님이 계약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일이다.
이 정도면 말 그대로 적반하장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이라고
정죄한 죄인들이 되레 하나님을 고소하다니!
『네 소송을 변호할 자가 아무도 없나니 너를
싸매 줄 자도 없을 것이요, 너를 치유해 줄 약도 없으리라』(예레미야 30:13).
구원받지 않은
자연인들, 특히 하나님을 찾고 선을 행하는 것을 멀리하는 죄인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탄원이나 항변이다.
그런데도 죄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나 무지를 탓하지 않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같이 주를 비난하더라』(마태복음 27:44).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변론하자고 제의하신다.
『이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주가 말하노니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18).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해서 얼마든지 송사를 하되 너희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입증해 보이라고 도전하신다.
『나를 기억하라. 함께 변론하여 네가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라』(이사야
43:26).
그러나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할 수 없다.
그런데 두려움을 모르고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처럼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했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얼굴을 바꾸어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심지어 땅 위에 사는 교회 목사에 대한 송사도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하셨거늘(디모데전서 5:19) 하나님을 고소하는 데 있어서 그 누가 증인으로
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 이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 그리고 자연재해 등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사건은 불효자가 부모에게 자신을 왜 낳았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은 삼류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 해프닝이다.
그가 미국의
상원위원일지라도 그의 지식이나 지혜가 하나님께는 전혀 쓸모가 없음을
입증하고 만 것이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것이 아니냐?』(고린도전서 1:20).
옛날 물건을 훔치려 남의 집에 들어간 도둑이 주인에게 들켰다.
주인은 큰 소리로 “도둑 이야”하며 도움을 청했고, 곧이어 이웃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도둑은 몽둥이를 들고 “도둑을 잡아라”하며 피해자인 척하며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는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든다는 뜻의 ‘적반하장’의 유래로 추측되는 이야기다.
비슷한 성어로,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뒤바뀐다는 뜻으로 사물의 경중(輕重) 선후(先後) 완급(緩急) 등이 서로 바뀐다는 ‘주객전도(主客顚倒)’가 있다.
‘적반하장’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아예 인식을 못하는 경우, 잘못을 인정하기 싫을 때, 잘못을 인정할 수 없을 때, 알아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거나 되레 덮어씌우는 경우 등 뻔뻔함이 극치에 달한다.
어쨌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잘 맞는 것 같다.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시평가(時評家)인 홍만종(洪萬鍾)의 문학평론집 <순오지(旬五志>에 ‘적반하장’의 해석이 나온다.
<순오지>에는 ‘도리를 어긴 사람이 오히려 스스로 성을 내면서 업신여기는 것’을 비유한 말로 풀이되고 있다.
이처럼 ‘적반하장’은 잘못한 사람이 잘못을 빌거나 미안해 하기는 커녕 되레 화를 내면서 잘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에 ‘기가차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말이다.
적반하장(賊反荷杖)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다른 것은 different이고 틀린 것은 wrong이니까 같이 쓰지 않는데, 한국말로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나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되면 ‘저건 틀렸다.’라고 하니까 관계가 나빠집니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성도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에 보면 전부 그런 것을 봅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보며 다르니까 틀렸다고 하고, 그쪽에서도 이쪽을 보며 자기와 다르니까 틀렸다고 합니다.
다른 것인데 틀렸다고 하니까 문제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다 틀렸습니까?
그게 아닌데, 자기들과 다르고 자기들의 방식이 아니면 다 틀렸다고 하는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갈등이 많이 생겼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바리새인들의 심문 (24~29절)
이전에 9장 1~23절까지 살펴보았는데, 9장에서 우리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살펴보는가 하면, 이 사건이 주님의 회복하시는 은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고 본의 아니게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위기를 맞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은 후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 점점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보았듯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더 이상 아들의 인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고, 이제 눈을 떴으니 스스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제 눈을 막 뜬 아들이 성인이었기 때문에 아들 때문에 자기들이 불이익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냉정하게 보이는데, 그 당시 출교를 당하게 되면 어디서도 발붙이고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나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고 아들이 책임지도록 한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눈을 뜨게 된 아들에게 부모가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상당히 매정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부모의 그러한 책임회피성 매정함을 통해서, 또는 바리새인들의 강퍅함을 통해서, 오히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맹인이었던 이 사람에게 스스로 신앙의 선택을 내리고 회복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4절)
그의 부모로부터 그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지만 바리새인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지 않기로 결정한 자신들을 합리화할 수 있는 어떤 근거나 이유나 구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부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늘 어떤 구실이 있고 핑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핑계는 그의 부모의 주저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러 추궁하는 겁니다.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맹인이었던 사람의 삶에 이루어진 치유 사건에 대해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이미 어떻게 된 것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사실대로 실토하라는 위협입니다. 지금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 부분이 여호수아 때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거기서 아간이라는 사람이 물건을 훔치고 제비뽑기를 통해 나오게 되었을 때 여호수아가 그에게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수 7:19)라고 한 것을 염두에 두고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에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여호수아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고 죄를 추궁할 수 있는 인물이며, 상대방은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정말 그렇고 상대방이 정말 죄인인 겁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넘겨짚었을 뿐이지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맹인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은 뜨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못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자기들은 안다고 스스로 믿었던 것뿐입니다.
요즘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 가운데도 여러 경로를 통해 지식을 갖게 되는데, 실제로 정말 자기가 성경을 연구해보고 여러 가지 책도 공부해본 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제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대부분은 들은 풍월이나 자기 생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어떤 학문적 연구 결과로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정말 지적으로 학문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 사람이 굉장히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아도 많은 결정들을 감정에 따라 내립니다. 그냥 기분 나빠서 안 하겠다는 겁니다. 아니면 기분이 좋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남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너무 그게 좋아서 푹 빠집니다. 또 남들이 보면 정말 좋은 일인데 자기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하는 경우가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보아도 많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정말 연구하고 부인하는 경우는 못 보았습니다.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겁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이야기해도,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도 진리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 비해 맹인이었던 사람은 아무런 꾸밈도 기교도 없이 그냥 단순하고 진솔하게 대답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5절)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것이 바로 “I was blind but now I see.”라는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의 가사입니다. ‘내가 이전에는 못 봤는데 이제는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모르면서 안다고 했지만, 그는 알면서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전에 예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선지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던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거스르면서까지 예수님을 철저히 변호할 만큼 그분에 대해 분명히 알거나 확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순간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 속에는 그가 은근히 바리새인들의 견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먼저는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여호수아가 아간을 추궁한 것처럼 자기들이 볼 때는 예수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한 것인데,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가 죄인인지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말이 아닙니까? 이것은 논쟁을 할 게 없습니다. 예수가 죄인인가 아닌가는 논쟁할 거리가 되지만, ‘내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데 지금은 보고 있습니다.’라는 것은 누가 봐도 사실이기 때문에 논쟁할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간증의 파워입니다. 간증은 논쟁할 거리가 없습니다. 나에게 주님이 해주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맞다, 틀리다 논쟁할 것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이 사실이라고 확인합니다. 이 말에는 ‘이런 엄청난 일을 한 분이 어떻게 죄인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를 완전히 옹호하지는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이런 일을 하신 분이 어떻게 죄인일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눈이 열린 다음과 그 전의 자신의 변화를 압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을 스스로 깨닫는데, 자기도 뭐가 변했는지 모른다면 정말 믿은 것인지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으로든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처럼 설사 예수님과 성경에 대해 지식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전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이겁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다.’ 내게 일어난 일을 간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변화되었다.’ 하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삶에 별로 변화가 없으니까 부끄러워서 잘 이야기를 못합니다. 그래서 전도가 잘 안 되는 것이지, 복음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의 부모가 출교당하는 게 두려워서 ‘우리는 모르니까 아들에게 물어보십시오.’라고 대답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또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6절)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물어보는 것은 윽박지르는 겁니다. 위협하는 겁니다. 뭔가 안 좋은 말을 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이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다 안다고 했는데 또 물어보는 걸 보면 이것이 유도 심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두려워했지만 이 사람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과 직접 체험한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주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면 이렇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어느새 그는 영적 어린아이가 아닌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대답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7절)
마치 선생님이 몇 번을 가르쳐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를 꾸짖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보통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야, 너는 왜 한 번 말해서 알아듣지를 못하니?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니?” 요즘에는 자녀도 부모에게 이야기합니다. “너 아까 그거 했니?”라고 하면 “아까 이야기해줬잖아? 왜 또 물어봐?” 제 경우입니다. 요즘은 제가 아들에게 혼나고 있습니다. ^^
이 사람은 지금 너무 당당하게 ‘아니, 당신들은 내가 얘기해주었을 때는 뭘 듣고 있다가 또 물어봅니까?’라고 조롱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만 영적 지도자이지 실제로는 영적 맹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이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눈이 밝아지고 있는 이 사람에게 오히려 배우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말한 것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들을 귀도 없었고 들을 의지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큰 함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를 포함해서 교회를 몇 십 년 또는 평생 다닌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실수가 바로 이런 겁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도대체 설교를 몇 번 듣습니까? 매주 안 빠지면 1년에 50번 이상, 수요예배와 토요새벽예배도 나오면 1년에 150번 이상 설교를 듣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성경도 읽고 큐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는 등,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 ‘그건 뭐 다 아는 거야. 다 아는 이야기를 뭘 또 하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 큰 위험입니다. 진짜 아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지는 않으면서 머리로 안다고 자기는 다 아는 거라고 하며 시시하게 아는 이야기를 또 하느냐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함정에 빠진 겁니다.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아는 게 아닙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뿐 아니라 조롱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정도 표적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정상인데, 바리새인들은 영적 맹인이어서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아주 여유만만 합니다. 그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미 인간의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구약 이사야에서 맹인이 눈을 뜬다는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졌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렇기에 용감하고 단순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가 선지자라고 믿었으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는 겁니다. 따질 게 없는 겁니다. 그냥 단순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못 보았는데 이제는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말 하나가 눈에 띄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신들도”에서 ‘도’입니다. 이 말이 뭡니까? ‘나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을 변호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드러내게 된 겁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그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나는 나를 고쳐주신 그분의 제자다. 나는 이제 그분을 따라가겠다.’ 하고 결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바리새인들을 아주 자극하고 기분을 나쁘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고 약이 올라 있는데 이 말을 듣자 곧바로 속에 있던 진심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8절)
이게 그들의 진심입니다. 그런데 말을 하기 전에 뭘 했습니까? 욕부터 했습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화가 나오니까 확 욕이 나옵니다. 이게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 혹시 화가 나면 확 욕부터 나오십니까? 고상하고 아름다운 게 내 진짜 모습이 아니고 욕이 나오는 그게 내 진짜 모습인 겁니다.
이 사람들이 논리로 당할 수 없게 되니까 일단 욕부터 합니다. 무슨 욕을 했는지는 차마 기록할 수 없어서 안 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이 사람의 말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지금 기분이 나쁩니다. 그래서 일단 욕부터 하고, 자기들의 종교적 무기를 사용하면서 그를 저주하는 겁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는 말은 ‘너는 모세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제 그들은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관한 간증이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이 가진 것은 권력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놀랍게도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아냥거리듯 말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알면서도 ‘그’의 제자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의 분위기를 살려서 번역하면 ‘너는 그 치의 제자이나’ 또는 ‘너는 그 놈의 제자이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 대신 자기들의 스승은 모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나는 너희 같은 제자를 둔 적이 없는데?’라고 했을 겁니다. 그들은 모세를 오해했습니다. 모세를 정말로 알았다면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어야 옳습니다. 모세가 일관되게 선포했던 것이 바로 메시야(그리스도), 즉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모세의 말을 오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들이 받았던 율법과 믿었던 하나님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신이지 진짜 하나님을 믿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자동적으로 좋은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떤 목사님도 이전에 그것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좋은 말을 한다고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물론 진짜 좋은 사람이면 좋은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속여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에 좋은 것이 들어 있으면 좋은 말이 나오지만, 좋은 말을 살짝 했다고 그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그것이 체험되고 삶에 드러나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세상에 좋은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찾아서 이메일, 메시지, 카톡 등에서 얼마나 좋은 말들을 서로 주고받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5장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세가 말한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도 다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바리새인들을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고발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가짜 제자다. 나를 사칭하고 있다.’라고 했을 겁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관계는 요한복음에서 5장에도 잘 나와 있고, 처음인 1장부터도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6-17)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가르침에 있어서 전문가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귀한 특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오히려 그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저것들은 율법도 모르는 것들이다.’라고 했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세리나 창녀 같은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며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29절)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았습니다. 모세는 직접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모세가 힘주어 전했던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전했는데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맹인이었던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아마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바리새인들에게 똑같이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바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실 뿐 아니라 말씀을 들으셨고 또 하나님을 보신 분입니다(8:38).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여러 번 가르치셨지만(6:46, 8:42; 13:3, 16:30 등)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제시하는 증거(30-34절)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저주와 위협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태도가 당당하다 못해 당돌해집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쩔쩔 매는 것을 보면서 신이 나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세 가지 증거를 들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시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경험(30절)
둘째는 성경에 나온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31절)
셋째는 역사적인 증거(32-33절)
첫째 증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0절)
이 사람이 이 말을 할 때의 표정을 상상해보십시오.
“참 이상하네?” 하고 조롱하는 표정을 말하는 겁니다.
믿지 않는 세상을 볼 때 우리도 놀랍니다.
어떻게 안 믿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라는 분은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고, 그분의 말과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무엇보다 그분의 부활을 보고 듣고 믿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시작한 교회가 2천 년 이상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왕성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 안 좋은 모습들도 있지만, 지금도 복음은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복음 때문에 인생이 변화되고,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성품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습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한 것은 단지 경험적인 증거만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증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1절)
그는 어느새 자기가 들어서 알고 있던 성경(구약) 지식을 통해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일을 평가하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얻은 경험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맞는지를 봐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면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이 다르다면 내가 뭔가를 잘못 경험한 겁니다.
미혹 당했을 수가 있습니다.
사탄도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신비적인 체험을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신 13:1-5).
예수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능력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냈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1-23) 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가 맹인이었을 때는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심오한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신다.”라는 것은 신앙의 상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지 지식적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도 성경의 무슨 내용이 어디 있는지는 척척 잘 알지만, 정작 그 말씀이 내 생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눈을 뜬 사람과 영적 맹인의 차이입니다.
세 번째,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2-33절)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예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16)라고 했는데, 맹인이었다 나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놀라운 말입니다.
이런 세 가지 증거를 또박또박 이야기할 때 그것을 들은 바리새인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을 겁니다.
정말 겸손한 지도자라면 누가 말했는가와 상관없이 그 말씀이 진리인가를 보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4절)
이걸 보십시오.
맹인이었던 사람을 만나자마자 죄를 실토하라고 윽박지르더니(24), 아는 대로 솔직히 말하니까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고 저주하고(28), 이제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증거까지 말하며 예수님을 두둔하니까 아예 쫓아내버립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이게 진리와 상관이 있습니까?
‘너의 말은 틀렸다. 그러니까 나가라.’ 하고 쫓아낸 게 아니라, ‘네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느냐?’
즉,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기분이 나빠서 쫓아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진리, 말씀, 율법을 다 말해도 결정적으로는 기분이 나빠서 그러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우리도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정적일 때 기분이 나빠서 또는 기분이 좋아서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라는 겁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이것이 사실인가, 진리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이 바로 불의한 권력이 자기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진리를 따지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윽박질러서 힘으로 쫓아내는 그런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나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말을 잘 보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즉 ‘너는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는 것을 바리새인들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9장 첫 부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1-2).
누군가의 죄 때문에 그가 맹인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죄 가운데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3).
실제로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쫓겨났습니다.
부모가 두려워 피했던 일을 아들이 당한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을 때는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 또다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어둠의 세상에서 빛 되신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가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기쁠 때도 있지만 고난이 올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고난을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정면으로 돌파할 것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일에 세상과 충돌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안 믿는 사람이나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러셨습니다.
‘너희들의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라.’
선한 행실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행실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거스르는 삶을 우리가 선택하게 되면 고난이 오고, 반면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들과 함께 흘러 떠내려가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이 우리 삶 속에 매일 올 수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순간부터 큰 결정을 내릴 때까지 항상 우리 앞에는 도전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살 건지, 아니면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주님을 따라 살 것인지?
맹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은 사실 엄청난 위기상황, 위협을 당하는 상황, 저주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고백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도 두렵고 힘든 상황, 믿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믿음을 선택하며 나아가면, 당장은 힘든 것 같아도 놀랍게 그 안에 점점 더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역사를 풍성하게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1-08-2024(수) 요한복음 9:24-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지 아는 것(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He replied, "Whether he is a sinner or not, I don't know.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날 때 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였을 때 그의 고백입니다.
"내가 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지금은 목사가 되어 주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백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이러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출발은 무엇인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직 예수의 피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의 피는 점진적 계시로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담과 하와 입었던 가죽옷
둘째는 노아의 홍수 때 방주 안밖으로 칠한 역청
셋째는 금송아지가루를 물에 풀어서 마시게 했던 사건
넷째는 속죄제의 제물
다섯째는 갈보리 언덕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러한 점진적 계시로 말미암아 피로써 정결케 된다는 히브리서의 선언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정말 이 찬송을 아멘으로 화답하십니까?
이제부터는 예수의 피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일에 선두주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죄인이었을 때 나를 위하여 죄 값을 지불하신 그 은혜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고백이며 신앙의 근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나의 한 가지 아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됩니다.
예수의 피,
이것만이 나의 간증이며 나의 찬송이며 나의 일생 다가도록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의 피를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밟혀도 밟혀도 끈질긴 자생력으로 찬란한 꽃을 피우는 야생화.
민들레의 근성(根性)은 일편단심(一片丹心)이죠.
이 꽃은 큰 뿌리 하나를 곧게 땅속 깊게 내리고 옆으로 실뿌리가 뻗어 있으나 가늘고 빈약하지요.
그러나 큰 뿌리 하나가 땅속 깊게 뿌리를 내림으로써 바람에 흔들려도 쉽게 쓰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지요.
노래의 작사자가 ‘이주현’이라는 여성입니다.
당시(1981년) 72세의 이 여사는 납북된 남편을 그리워하며 쓴 자전적인 이야기를 신문에 투고(投稿)했는데 이를 본 조용필이 가사로 만들 것을 제안하여 노래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녀의 사연은 이랬습니다.
50년 전 그녀는 동아일보 국장이던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한국전쟁 때 납북되는 바람에 홀로 3남매를 키우며 살았습니다. 노점 좌판 등을 하며 어렵사리 살아온 그녀는 평생 모은 돈을 남편이 다닌 동아일보에 기부해서 남편 이름을 붙인 <수남 장학금>을 만듭니다.
1981년 4월 28일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햇빛 본 할머니의 꿈'은 이주현 여사의 일편단심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남(水南)! 이렇게 불러볼 날도 이제 오래지 않겠지요. 어언 접어든 나이가 고희(古稀)를 넘겼으니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되리까. 당신을 잃은 지도 30년 성상, 밟혀도 밟혀도 고개를 쳐드는 민들레같이 살아온 세월, 몇 번씩이나 지치고 힘에 부쳐 쓰러질 듯하면서도 그때마다 당신을 생각하며 이겨 왔습니다.”
이 여사는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1년에 걸쳐 집필한 원고 1천여 장 분량의 '일편단심 민들레야'의 첫머리에 생사를 알 길 없는 남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끈질긴 생명력의 민들레라 해도 일편단심 붉은 정열이 내게 없었다면 어린 자식들을 못 키웠을 것이고, 지아비에 대한 깊은 그리움의 정(情)이 없었다면 붓대를 들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자전(自傳)의 내용을 다듬어서 쓴 노랫말 가사는 이렇습니다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 여름 어인 광풍
그 여름 어인 광풍
낙엽 지듯 가시었나.
행복했던 장미 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일편단심 민들레는
떠나지 않으리라.』
노래 중 ‘그 여름의 광풍(狂風)'은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청천벽력 같은 전쟁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낙엽 지듯 가시었나'는 그해 가을 납북된 남편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늘만 바라보는 것'은 천국에 간 남편을 바라보며 그리워함이고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는 남편이 떠나면서 "걱정하지 마, 잘 다녀올게!"라고 말했던 그 목소리였습니다.
남편 납북(拉北) 시에 41세 여인은 그 험한 세월을 이겨냈습니다. 지난 30년의 절망과 피눈물 속에서도 그녀가 말했듯 '일편단심 붉은 정열'로 버티며 어린 것들을 키워낸 것입니다.
민들레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식물로 4~5월쯤에 꽃이 핀다. 뿌리에서 직접 돋아난 여러 장의 잎은 무 잎을 닮아서 깊게 파인 톱날 모양을 하고 땅에 거의 붙어 퍼져있다. 잎 사이로 돋아난 꽃줄기는 처음에는 짧지만 30~50cm 정도 높이로 자라고 꽃줄기 끝에 한 송이의 꽃을 피운다. 꽃줄기는 가운데가 비어있고 꺾으면 흰 유액이 나온다.
요즘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민들레는 토종민들레가 아니라 대부분이 서양민들레라는 점은 아쉽다. 서양민들레는 유럽산이 1910년대 유입된 것으로 겉모습이 토종과 닮아서 구별이 쉽지 않지만 꽃송이 뒷부분인 꽃받침을 비교하면 확실하게 구별이 가능하다. 꽃받침의 겉 조각이 위로 뻗어있으면 토종 민들레이며 밑으로 젖혀졌으면 서양민들레다.
서양민들레에 비해 우리 토종 민들레를 찾기 힘든 까닭은 번식력 때문이다.
서양민들레는 처녀생식을 할 수 있어서 암술에 꽃가루가 묻든 묻지않든 어미세포가 그대로 씨앗이 될 수 있다.
즉 꽃가루받이를 거치지 않아도 씨앗을 맺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토종 민들레는 토종인 다른 개체의 꽃가루로 수분을 해야만 씨가 만들어 진다.
노래 가사처럼 '일편단심 민들레'다.
꽃이 지고 나면 수많은 씨앗 하나하나에 붙어있는 갓털(관모冠毛; 가벼운 솜털)로 인해 공처럼 둥근 열매가 만들어진다.
이 씨앗들은 바람에 쉽게 날아갈 수 있어서 46km 즉 100리까지 날아간다는 보고도 있다.
토종 민들레건 서양민들레건 우리나라 온 산과 들에 널려 피고 있는 꽃이 민들레다.
흔하디 흔한 식물이 민들레다.
우리 어렸을 적 사립문 둘레에도 민들레 천지였다.
그래서 '문 둘레'에서도 흔하게 피는 꽃이라고 했고 이것이 ‘민들레’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출처 : 인사이드비나(http://www.insidevina.com)
일편단심 민들레(꽃말, 행복 . 감사하는 마음), 일편단심 예수님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
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서 만신창이가 되어도 기어이 잎과 꽃대를 다시 내밀고 꽃을 피우며 씨를 날려 보내는 꽃이 바로 우리나라
토종 민들레랍니다.
그런데 왜 민들레에게 일편단심이란 별명이 붙었냐하면, 토종민들레 아가씨는 서양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찾아와
애걸해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오직 토종민들레 신랑이 날아오기를 일편단심으로 기다리다 토종민들레의 꽃가루 총각이 날아오면
받아들이고 끝내 오지 않으면 급기야는 처녀임신을 해버리고 만답니다.
발아가 되지 않는 무정란과 같은 씨를 퍼뜨려 순수하게 동족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만 굳게 믿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치는 소경 거지의 믿음을 만나보시고, 여러분도 “내가 아는
한가지, 일편단심 예수님”을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환경을 탓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낮이니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초청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심을 통해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소경 거지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당신이 그 소경 거지요?
그런데 눈을 뜬 소경 거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를 알아보고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에 놀란 사람들과 그럴
리가 없다며 극구 그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는 사실은 정말 축하해줄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동정의 감정을 버리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슬픔을 나누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인간의
죄인된 본성입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을 보며 잔치를 벌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뻔히 아는 사람을 놓고 ‘누구냐?’며 모른 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렇게 잘 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인데’ 하는 데서 출발하는
‘시기심’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정을 베푸는 것은 쉽지만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형제가 잘되면 박수를 쳐주고 더 잘되도록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축하와 진실한 격려와 진실한 위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건을 보는 눈이 달라질 때, 진심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축하해주며 함께 기뻐하고 더 놀라운 일을 위해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영암교회가 함께 박수치며
전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소경 거지’가 ‘눈을 떴다 안떴다, 그다 아니다’ 할 때 그는 오히려 담대하게 자신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바로 그 소경 거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보게 되었다.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그가 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고, 그가 시킨 그대로 했더니 내가 보게 되었다.’(9-11) 참으로 놀랍습니다. 소경 거지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를 보십시오. 모두다 진실입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진실이 배어 있다. ‘내가 그이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며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듣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경 거지가 눈을 뜬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한 방법이 안식일 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면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를 믿음으로 영접하며,
자기들의 영의 눈도 떠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텐데... 시기심에 눈이 멀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영광도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교회 안에, 성도 안에 다양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 일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는 것이 커다란 영적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 영암교회에 영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복음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믿음 안에서 바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동참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세상 일에 눈이 멀어서도 안되고, 잠에 취해 있어서도 안되고, 깨어서 주님을
기대하며, 말씀으로 이 시대를 분별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목자를 통해 문자적
율법만을 주입받고 사람들 정죄하는 훈련만 받은 무리들은 참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소경 거지를 정죄하기 위해 거짓
심판자에게 끌고 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쟁론
16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소경 거지의 증거를 들은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온 분인가 아닌가에 대한 쟁론이었다. 한쪽은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은 ‘그가 만약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며 의아해 합니다.
‘안식일 법이냐 표적이냐’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티격태격하다가 소경 거지에게 다시 묻습니다. 17절에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그런데 헛갈리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소경 거지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찔러 버립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는 선지자이니이다’ 당당하게 내가 만난 주님, 내가 믿는 주님을 ‘선지자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하고 분명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와 권위주의로 ‘있는 사실’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소경 거지는 그 있는 사실을 통해 ‘그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소경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선지자이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인 것을 인정해야 할 텐데, 그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소경이었던 사실 마저 부인하며 그 부모를 호출하여 심문합니다.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 얼마나
바보같은 질문입니까! 자기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서 하는 말이 그가 정말 소경이었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이
소경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대답을 보십시오. 20-21절.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부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무슨 태도입니까? ‘오리발’을 쑥 내미는 것입니다. ‘내 자식은 맞는데 우린 모르겠다!’
그의 부모는 진실을 진실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르쇠로 딱 잡아뗍니다. 오히려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 부모들이 정말 몰랐을까? 설령 부모가 그 현장에 없었다 할지라도
아들이 부모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부모라면 아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들은 지금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 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22절.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부모들은 이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때문에 출교당할 일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출교란
율법을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출교당한 자는 동족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기에 유대 사회에서 영구히
매장됩니다. 그러니 소경 거지를 둔 것도 억울한 데, 이제까지도 그놈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는데, 이제 그가 보게 되어 근심
걱정 면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그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순간 얼마나 자식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이 놈이 끝까지 애비 속을 썩이는구나...’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았다면, 예수님이 참빛이신 것을 알았다면, 믿음으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그 빛을 쫓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믿음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과연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려하지 않고 환경 탓만 하고 있는 제자들인지, 율법으로 눈이 멀어 이 사람 저 사람 정죄하는 바리새인인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만 현실적으로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대충 오리발 내밀며 믿음을 저버리는 부모와 같은지, 아니면 당당하게 진리를
붙들고 믿음을 고백하는 소경 거지인지! 이렇게 말씀은 여러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이다!
이렇게 소경 거지의 부모가 두려움에 믿음을 저버리며 책임을 회피하자 바리새인들은 소경 거지에게 더 힘을 주어 말합니다. 24절.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그를 따르면 너도 죄인으로
정죄하여 출교시키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라는 권위주의와 율법이라는 칼을 들이밀며 이제 막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어린양의 마음에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심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교가 무서워서라도 예수를 부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자가 예수를 부인하며 죄인이라고 정죄한다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신나고 기고만장해 지겠습니까!
‘봐라! 기적을 체험한 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저가 빼앗아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며 가로채고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 대한 정죄의 칼날을 더 높이 들 심산이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자에게는 빛의 역사를 삼키려는 어두움의 역사가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믿음의 삶을 진실되게
시작하려 하면 어두움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마음을 낙심하게 하고, 나는 예수를 믿으면 안된다는 거짓을 심으려고
두려움과 회의와 불신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럴 때, 우리가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려고 할 때 오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아는 것은
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전에는 내가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사실이다!” 소경 거지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자기 속에 이루어진 능력의
역사 한 가지를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그 한 가지 구원의 사실을 꼭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말씀도 모르고 신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날 때부터 나는 소경이고 거지로 살았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나를 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가지’ 언제 어떤
상황에 어떤 두려움이 나를 엄습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것이
있습니까?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꼭 이 한 가지를 붙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되신다”는 것을 결코 흔들지
못하는 한 가지가 나에게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붙드십시오. 그것을 붙들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내가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도망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될 수 있으면 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은
1997년 나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아니라 병원 침대에 누이시고, 육신의 질병을 먼저 치료해 주시고, 영혼의 질병인 불신과
회의도 말끔히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고 고쳐주시고, 목자의 길로 초청해 주신 예수님! 바로
이 사실이 내가 목자의 길을 가야하는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두려움과 불신과 회의가 든다 할지라도 이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내 신앙의 원동력은 바로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결국 소경 거지는 출교를 당하고...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한 가지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오히려 소경 거지를 욕하며 꾸짖었습니다. 28절.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그러나 소경 거지는 자기가 아는 것을 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31절.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참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경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고, 창세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감격스러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자칭 율법에 정통하다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소경 거지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그리고 소경 거지는 그것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출교당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도 그를
버렸습니다. 눈을 뜬 기쁨은 잠시였고, 이제는 또 다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어두움에 갇혔습니다. 이제는 거지 생활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한 가지’를 고백한 결과 얻게 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고백하고 암담한 현실을 직면한 이 소경 거지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35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서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아멘. 사람들이 소경 거지를 쫓아냈다는 말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 주시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올바른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이전에 소경 거지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불완전한 고백입니다. 이제는 인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경 거지는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37절.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소경 거지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육신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본
것입니다. 38절.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면 그의 믿음이 여기까지 자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내가 아는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소경 거지가 출교 당했을 때 그를 찾아가 동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실 문제를 안타까워하며 해결해 주시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궁극적인 근원은 바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소경 거지를 찾아가셔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
거지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빛을 볼 뿐만 아니라 빛을 따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지만 사회 단체가 아니며, 친목단체도 아니고, 자선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을 심어 생명을 거두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오셨고,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내가 아는 한 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불신과 회의와 두려움을 몰아낼 “내가 아는 한 가지”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그
“한 가지”를 붙들고, 내 신앙을 말씀에 뿌리내리기 위해 현실과 싸우며, 기도의 무릎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고, 복음을
전하여 제자삼고,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에, 일편단심 충성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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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미쉬나, shabbat 7:2).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 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일.
이러한 금지 사항들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으며, 반대로 우상숭배자라도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그 죄를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탈무드, shabbat 118b).
이밖에 더 자세한규정들에 대해서는
미쉬나의\"안식일\"(shabbat)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엣세네파들은 안식일을 바리새인이나 보통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다. \
"다마스커스계약\"(Covenant of Damascus) 은 자세하게 안식일에 지켜야 할규정들에 대해서 기록하고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다(당시의 랍비들은1Km까지는
허용하고 있었다. 참조.행 1: 12).
엣세네파들은 마실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았고, 그들 가까이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엣세네 종파는 다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겨도 되도록 허락하였다.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겼을 때에는 7년동안 가두도록 규정하였다.
위에서 언급 한대로,안식일을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금지사항들은 범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용납되었다(미쉬나, Yoma 8: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던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마 12:9-14, 막
3:1-6, 눅 6:6-8).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었다.
다만 그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아니면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는그를 치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예수의 경우에는 환자(손 마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날까지기다렸다 치료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심으로 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랍비 유다(Judah the Prince) 와 메이어(Meir)는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양을 꺼내 주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하물며\"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하셨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려 구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다든지 아니면 그 동물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매트레스 같은 것을 그 구덩이에 넣어 주도록 했다.
예수께서는 또한 안식일에 18년동안 귀신에 잡혀 있던 여자를 고쳐 주셨다(눅 13:10-17).
이에 대해 회당장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꼭 고쳐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비난하였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된것은 안식일에 응급 환자가 아닌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데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끌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박하셨다(15-16 절).
이러한 예수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되기도 한다). \"소는
매일마다 물을 주어야 하며, 이는 안식일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일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아니하면, 그 소는 큰고통을 당할 것이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랍비들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년동안 류머티스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전형적인 성서 해석 방법인 kal
va-homer
(\"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을 사용하셨다). 즉 동물도안식일에 풀어
주는데 \"하물며\"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기초해서
예수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셨던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셨을 때에도 예수는 똑같은논리를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한편, 예수께서도
말씀하신것처럼 미쉬나와 탈무드는 안식일에 어떻게 동물들을 돌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요 5:12).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금지 사항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을 어겼다고 그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편,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까서 먹은
것때문에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기도 했다(마
12:1-8; 막2:24-28, 눅 6:1-5).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임과 동시에 그것을 까부는 일로 비쳤다.
이러한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범하지않았다.
다만
제자들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을 내버려 둔 것에 대하여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금지된 거룩한 떡을 먹은
것(삼상 21:1-6)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떡을
먹었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율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토라(율법서)에서는 그러한 명백한 규정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예수의 이 말씀을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선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랍비들도 이렇게 가르쳤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Mekilta Exodus 31:13, 14; 탈무드, Yoma
85b).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시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나에게 분개하느냐?"(요 7:23).
이러한 규정도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 즉 전통의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잘 알려진 랍비들의 결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법을 따라서
아이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할례 받는 날이 안식일이 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주도록 랍비들은 결정을 했다.
안식일에 할례받는 것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할례를 주기 위해 할례에 사용될 도구를 운반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위에서 본대로 금지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 사항으로 허락을 했던 것이다(미쉬나, Shabbat
19:1).
그러나 아이의 건강 때문에 8일째에 할례를 받을 수 없을 경우는 아이가 회복된 다음에 받도록 했다(미쉬나,
shabbat 19:5).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할례도 베풀거늘 “하물며” 사람의 전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고 반박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보편적인 해석 방법이었던
kal va-homer("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를 사용하셔서 토라와 구전법을 해석하셨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규정을 부정하거나 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한번도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신 적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구전법)에 근거해서 자신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이 그들의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주셨다.
11-05-2024(화) 요한복음 9:17-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출교(黜敎)(22절)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His parents said this because they were afraid of the
Jews, for already the Jews had decided that anyone who acknowledged
that Jesus was the Christ would be put out of the synagogue.
출교(黜敎) 656.
아포수나고고스[ apŏsünagō- gŏs ] ἀποσυνάγωγος, ον
스트롱번호 656
어원 / 575와 4864에서 유래
1. 회중에서 추방된, 출교 당한, 회당에서 쫓겨난, 저주받은, 요 9:22, 12:42, 16:2.
관련 성경 / 출교하는(요 9:22, 16:2).
* 575. ἀπό
스트롱번호 575
* 4806. συζωοποιέω 스트롱번호 4806
1. 같이 살아있게 하다, 엡 2:5, 골 2:13.
관련 성경 / 함께 살리다(엡 2:5, 골 2:13).
자유(데로르. derôwr) דְּרוֹר 스트롱번호 1865
어원 / ‘빨리 움직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8회 사용
-
1. 명사, 남성 빠른 비행, 선회, 잠 26:2
-
2. 명사, 남성 액체, 출 30:23.
-
3.명사, 남성 자유, 해방, 사 61:1, 렘 34:8,15, 17.
-
관련 성경 / 액체(출 30:23), 자유(레 25:10, 사 61:1, 렘 34:8), 희년(겔 46:17).
요한복음 9:17-23 / 출교(黜敎) 아포수나고고스(apŏsünagōgŏs) ἀποσυνάγωγος
바리새인(유대인들) -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소경 - 선지자니이다
바리새인(유대인들) -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믿지 않았다)
그 부모를 불러 네 아들이냐?
그 부모 - 우리 아들인 것은 맞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보는지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 회당에서 출교는 두가지 종류로 시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다두이
10일 간 회당 출입이 금지되고 사람들 곁에 4규빗(약 1.8m)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던 출교이다.
공회원 1인에 의해 단독으로 결정되었다.
둘째는 헤렘
회당 출입이 무기한 금지되고 사람들과의 교제가 허용되지 않았던 출교이다.
공회원 10인의 동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헤렘(חֵרֶם)은 히브리어의 단어로,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파문", "추방", "몰수", "억제" 등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인 용도로의 사용을 금하고 성별(聖別)하는 것, 봉헌된 것, 저주받은 것 등을 뜻한다.
오늘날 사회가 혼돈 가운데 술렁이는 까닭은 교회가 교인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의회가 구성되었을 때 회의를 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총회를 구성하고 매년 회의를 진행하였으며 매월 교회에서는 제직회로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인들은 회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였고 도처에 교회가 세워지고 교단이 분열되어 다양한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교인들이 잘못했을 때에 잘못을 시정할 수 있도록 권징하는 규정을 있어도 치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교회에서 치리를 받으면 다른 교회로 옮기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 정치제도가 이제는 세상으로 흘러들어가서 정치인들도 아무리 잘못을 하여도 자기 주장과 이익을 위하여 자리 바꿈과 각종 이유를 주장하며 교묘하게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치고 권징하였다면 이것이 거울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입법과 사법과 행정이 서로 견제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없도록 규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나타나는 현상은 입법이(국회) 사법을(법원) 마음대로 주무르고 자기 입맛에 맞도록 끌고 가려고 합니다.
힘으로 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현상을 바른 길로 이끌고 세워가려면 먼저 교회와 총회와 교단이 바른 정치와 권징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잘못을 회개하고 본래의 목적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이타적(利他的)
사전적 의미 : 타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보다 앞세우는 태도나 행동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보다 타인 또는 집단의 필요와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 자신 보다 < 타인, 집단
사회적 의미 :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초월하여 타인이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경향을 지칭합니다.
이타적인 사람들은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타적인 행동은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며, 이는 결국 사회적 조화와 집단의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시문장
1. 자원봉사자들의 이타적인 노력이 지역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 이타적인 행위는 종종 사람들 사이에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3. 비록 작은 기부였지만, 그녀의 이타적인 결정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4. 직장에서 이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동료들 사이에서 큰 존경을 받는다.
5. 이타적인 사랑은 조건 없이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배타적 뜻
사전적 의미 : 특정 집단이나 개인만을 위한 것으로,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제외하는 태도나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 신념, 문화 등을 우월하게 여기며, 다른 이들과의 교류나 협력을 배제하는 경향을 가리킵니다.
개인 > 다른사람, 집단
사회적 의미 : 배타적인 태도는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고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는 요소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배제하거나 차별할 때, 이는 공동체 내에서의 불신과 대립을 조장합니다.
배타적인 사회는 다양성과 포용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는 결국 사회적 발전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예시문장
1. 배타적인 정책은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어려움을 야기한다.
2. 그는 다른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로 유명하다.
3. 배타적인 사회 분위기는 창의성과 혁신을 저해합니다.
4. 회사 내의 배타적인 문화는 새로운 직원들의 적응을 어렵게 만든다.
5. 배타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변화와 발전을 두려워합니다.
헤렘의 개념
헤렘의 사전적 의미
- 동사 하람은 ‘완전히 멸하다, 저주 아래에 두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 명사 헤렘은 흔히 ‘멸하기로 작정된 물건, 금지된 물건’으로 번역된다.
개념
- ‘헤렘’의 개념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또는 그에게 봉헌된 것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사용이나 접촉으로부터 구별된 지위”를 뜻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Greenberg 1971:344)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뒤집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개념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까닭에, ‘헤렘’은 “궁극적인 봉헌”을 의미한다(Milgrom 1990:428). 그것은 어떤 물건을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 채 하나님께 드리는 행동을 가리킨다. 또한 ‘하람/헤렘’이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서 몇 가지 다양한 의미들을 드러내고 있기는 해도, 신명기로부터 열왕기하까지의 모든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그 중심 개념이 전쟁과 파멸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헤렘의 이유
- 이처럼 인상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에는 나름의 일관성 있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출23:33);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6);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5:55);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야웨를 떠나고”(신 7:4);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신 20:18).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명령, 곧 가나안 원주민을 향한 ‘헤렘’의 명령은 주로 질병 예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오염을 막는 확실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변 민족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이스라엘의 잠재력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이 한층 강조될 분이다. 그 명령의 주된 관심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처럼 행한 결과 가나안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헤렘은 여호수아 시대부터 엘리야의 시대 이후 요시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종교와 맞서 싸우던 오랜 투쟁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헤렘의 구속사적 의미
쉐마(Shema)와 헤렘(Cherem)
구약의 신명기적 역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이름하여 "쉐마"(신명기 6:4-5)로 성서 속의 이스라엘이 역사를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바탕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또는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은 한 분이시다. 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은 한 주님이시다. 또는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오직 주님만이).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 6:4-5).
성공에 이르는 열쇠가 무엇인가?
그 열쇠는 다름 아닌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그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며, 율법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예, 수 1:5-9;
삿 2:11-23; 삼상 12:19-25; 왕상 2:2-4; 왕하 17:1-41).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는 자는, 가나안 땅에서
사는 자는, 누구나 이 열쇠를 그 수중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유일신 신앙(monotheism)을 가르치는 계명으로 이해되는 쉐마는 여호수아에서
열왕기하서에 이르는 역사서의 기조를 인과응보적으로 이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펼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를 그 땅에 더하게 하셨다고 본다. 반면,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존중히 여기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칼과 기근과 재앙과 염병으로" 그 땅을 치셨다고
본다.
신명기적 역사서를 이끌어가는 한 사상이 쉐마라면 또 다른 사상은 히브리어 "헤렘"이다.
쉐마와 헤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유일신 신앙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신앙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야웨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한 "배타적 거부"이다.
이 거부가 신명기의 히브리어에서는 "헤렘"("진멸," "전멸"이라는
뜻)이라는 말로 묘사되었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으로 너희를 이끌어 들이시고, 너희 앞에서
여러 민족 곧, 너희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일곱 민족인 헷 족과 기르가스 족과 아모리 족과 가나안 족과 브리스 족과 히위 족과
여부스 족을 다 쫓아내실 것이다.
주 너희의 하나님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주셔서, 너희가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너희는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세우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아라.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된다.
너희 딸을 그들의 아들과 결혼시키지도 말고, 너희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말아라.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의 꾐에
빠져서 너희의 아들이 주를 떠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너희를 멸하실 것이다(신
7:1-4).
신명기적 역사서의 바탕에는 헤렘 사상이 깔려 있다(신 7, 20장; 수 1-12장).
가나안적인 요소는 철저히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헤렘이란 말이 사용되는 맥락은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하나님의 전쟁에서 등장한다.
헤렘이란 하나님이 싸우시기에 모든 것을 진멸해야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하나님이 싸우시기에 이스라엘은 전장에서 그 어떤
전리품도 얻을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것을 드러내는 표시가 모든 전리품을,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진멸해야만 되었다.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 중 그 어떤 경제적 이익도 얻고자 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사사들, 사울이나 다윗 같은 군사 지도자들은 모두 이 헤렘에 철저해야만 되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다(비교, 삼상 15:1-9, 17-23; 삼하 8:2-14).
사실
헤렘은 이스라엘의 건강한 영적 삶을 위한 예방조치이다.
헤렘은 신학적 선언이다.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은 가나안적인 것에
이스라엘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라는 반성이 여기에 깔려 있다(우리는 이 역사서가 사건이 흐른 한참 뒤에야 글로 기록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헤렘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패배에 대한 반성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겪은 재앙은 순전히 가나안 적인 요소를
이스라엘이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전쟁과 헤렘에 대하여"
구약의 역사서에 소개된 헤렘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그 해석이 어떠한 것이든, 헤렘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도덕적, 윤리적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이방인들을 무참히 진멸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여러 원주민들을 "진멸하라"는 것을 그토록 간절히 가르치고 있을까?
왜 신명기는 하나님을
전쟁 용사로,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전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수행했던 전쟁기를 읽어보면 사실 이민족들의 탄성을 무시해 버리는 누(累)가
저질러지고 있다.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진압하는 무참한 행동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진하는 모순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편에서는 이스라엘을 억압과 집 없음에서 구출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을 억압하고 진멸하며 쫓아내라고
명령하시고 있다면 이것은 모순이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야웨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을 파멸로 몰아놓는 역설을 자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물어보자. 하나님은 정녕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신가?
물론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온 민족, 온 세상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간주해버리고 만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 세상을 정의와 공평으로, 사랑과 샬롬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성서적 믿음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요나가 겪었던 갈등이 바로 이것이었다.
요나의 하나님은
유다사람들뿐만 아니라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셨는데 요나는 그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신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두고자 하였다.
만약 요나처럼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민족주의와 배타주의로 채색해버린 신으로 간주한다면, 모든
자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성서적 믿음은 벽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가 믿는 야웨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시며 지키시는 정의와 공평, 평화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의 짐을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른 것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약성서의 전쟁 이야기는 평화와 구원을 전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빛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 한 예가 이사야의 예언에 있다.
자 올라가자, 주님의 산으로 야곱의 하나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자 ......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3-4)
이사야의 예언은 야웨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딩굴며, 어린 아기가 새끼사자를 몰고 다니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며, 서로 헤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는"(이사 11:6-8) 날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날"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한다.
예수께서 걸은 길은 바로 이 이사야의 예언을 구현하시기 위해서이다. 그 도상에서 그는 구약 신명기의 쉐마(신 6:4-5)를 재해석하신다. 쉐마와 함께 "이웃 사랑"(레 19:18)을 가르치는 계명을 토라의 완성으로 정리하였다(마 22:37-39).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8, 개역).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 22:36-40).
구약 역사서의 전쟁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평화 이야기에서 상대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갈등과 분쟁, 전쟁과 싸움은 그 어떤 이유로도 진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정의와 평화, 진실과 구원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온다(시 85:10-13).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인내하는 자들,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손의 "낫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사 2: 4; 마 5:9).
(구약성서 이해 열마당 새길 왕대일 지음 2003)
구약의 헤렘 - 김정우 구약신학
1. 문제의 성격
구약에서 전쟁중에 내려지는, 원수를 '진멸하라' (herem)는 명령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해석하기 힘든 주제 중 하나이다. 무차별하게 모든 원수를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 교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 끔찍한 전쟁을 승인하시고 명하실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헤렘 전쟁과 연관된 성경의 몇몇 구절만 인용해보아도, 문제가 정말 심각해 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면서,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별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별하니 라"고 말한다(수 6:21).
(2)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첫 왕이 된 사울이 왕권을 확립하자, 및 출애굽 때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을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하셨나이다'(삼상 15:3)고 말한다.
(3)위의 두 본문이 말하는 진멸하는 전쟁에 대한법적인 근거는 신명기에 나타난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첫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신 20:16-17).
어떻게 한민족과 여러 족속들을 대량 학살하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고백하며,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아이와 나아가 젖먹이까지 불문하고 죽일 수 있을까? 만약 베트남 전쟁이나 보스니아전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학살을 명한 자와 집행한자는 모두 전시 재판감 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헤렘 전쟁은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구약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는가"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 문제의 범위
그러나 문제는 윈수를 전별시키는 본문이 구약의 주류에서 벗어나 격리된 하나의 단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32장 26-28절에서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따라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숭배자들을 다 칼로 처형한다. 마치 주님께서 자신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헤렘 전쟁을 집행하시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전쟁이 이런 본문에 근거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는 십자군 전쟁이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죄악으로 물든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아람과 유럽을 영원히 갈라놓는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엘리사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직후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갈 때에, 그 동네
아이들의 “대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을 저주하였다. 이때,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42명을 및어버렸다고 한다(왕하 2:23-25). 엘리사가 선지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린아이들에게 헤렘 전쟁을 선포했는지, 혹은"대머리여 더욱 올라가고 올라가라”는 말에 대한 그의 격노가 무죄한 아이들을 죽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어했든 갓 부름받은 선지자가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여 암곰에게 찢겨 죽게 했다는 사실을 들으면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페르시아 수산 성에 살고 있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아각 족속 하만의 음모에 빠져 학살을 당할 뻔 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을 내린 에스더의 헌신으로 구원을 받은 후, 하만을 20미터 정도의 나무에 달아 죽인 것까지는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수산 성 뿐만 아니라 각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자 75,000명을 도륙한 이야기(에 9:16)를 들으면서는, 피와 복수에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몸서리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쟁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여호수아서와 에스더서를 자녀들에게 읽어주지도 않는다.
시편으로 넘어가면, 원수들에 대한 분노가 마치 지옥불에서 올라오는 것같은 격렬함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시인은 자신의 원수를 향해, "그년수를 단축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백나 빌어먹게 하쇼(시 109:8-10)라고 저주한다. 또 한 시인은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7:8-9)라고 선언한다.
원수를 진멸하는 헤렘 전쟁은, 결국 오경과 역사서와 선지서와 시가서를 관통하고 있으며 구약에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는 구원, 심판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헤 렘 전쟁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약 전체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전쟁의 이름으로 집행된 헤렘 전쟁에서 어떤 적극적인 신학을 형성해낼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3. 헤렘 전쟁의 의미, 법주 그리고 규칙
(1) 헤렘 전쟁의 의미
개역성경에서 "진멸하라”는 전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렘(herem)은 '일반적인 용도에서 분리되어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 가증하거나 혹은 바쳐졌기 때문이다' (EnclopaediaJudaica 8指). 어근으로 보면, 헤렘이란 단어는 셈어에서 ‘분리하다. 금하다’ 혹은 '성별하다’는 뜻을 가진다.
TDOT 5:188).최근에 성경의 헤렘을 연구한 스턴(p.Stern 1991:16)은, 이 단어가 '파멸을 위해 봉헌함, 혹은 파멸에 봉헌함' (consec-ration to destruction)이 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으면서, 히필형(사역 형)에서는 '진멸을 통한 성별'(consecrate through destruction)이란 뜻이라고 말한다. 전쟁 밖의 맥락에서 헤렘은 '주께 바친 것' (heherim leyhwh,레27:28)으로, 전쟁 상황에서는 '주께 바쳐진 것'(미 4:13;수 6:17)으로 나타난다.
(2) 헤렘 전쟁의 범주
(S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인은 주님께 가증한 자가 되며, 이러한 사람은 죽이고 물건은 태운다(겨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벌할 지니라', 출22:20/히브리 원문상으로는 22:19; 신7:25-26, 13:13-19).
(2)약속의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들은 진멸되며(신 7:1-2, 20:17),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 (20:16).왜냐하면,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할까 함이라 (20:18).
(3)한 개인이 주님께 헤렘으로 바쳐진 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qodesh qodas-him). 이것은 철회가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성전에서 활거나, 혹은 바친 자에 의해 속량될 수 없다(레 27:28).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곧 신성모독이며 전쟁의 패배를 겪게 된다.
(3)헤렘 전쟁의 규칙
헤렘의 규칙은(D생존자를 남기지 않는 다(신 2:34, 3:3;수 10:28, 37, 39-40,11:12, 22; 대하 20:24; 렘 50:26;왕상9:21 참조). 사로잡은 왕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인다. 남자들은 완전히 제거하며(왕상 11:15),때로는 음의 일부를 자르거나(삿 1:6, 아도니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때로는 종으로 취한다(신 20:11).여자와 아이들은 전쟁의 노획물이며, 가끔 임신한 여인은 배를 갈랐다(왕하8:12, 15:16;암 1:13).
(D많은 경우에는 육축과 노획물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D가끔 도시 와 노획물을 불태운다(신7:5, 25, 13:17;수 6:24, 7:15, 25; 8:28,11:11,13).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그 결과 군사적인 패배(수 7장)를 겪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게 된다. 이것은 아간의 경우에 가장 잘 드러난다.
4. 구약에 나타난 헤렘 전쟁의 용례들
물론 구약성경에는 세속적인 의미의 헤렘전쟁(왕하19:11;대하32:14)과 헤렘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많지만, 헤렘 전쟁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명백하게 헤렘으로 나타난 경우들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사 :2; 렘 25:9;슥 14:11;말3:24참조).
아래의 용들을 살펴볼 때, 헤렘 전쟁은 구약 전쟁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룬 모든 전쟁이 다 헤렘 전쟁은 아니었다. 가나안 전쟁에서도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불태워 주님께 바친 경우는 극히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1)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침공하려다 아랏 왕에게 폐한 후 온 이스라엘은 아랏을 헤렘으로 바치길 서원하며, 승리 후에는 이 성과 성에 있는 사람들을 진멸하여 바친다(민 21:1-3).
(2)요단 동편에 있는 시혼(신 2:)과옥(3:6),그리고 요단 서편의 막게다. 에글론, 헤브론, 드비르, 리브나와 남방 동네들(10:28-40)과 북쪽 동네들◎ 1:10이하)을 진멸하여 바칠 떼, 생축과 노략물은 취하나 동네는 그대로 둔다.
腦)헤렘 전쟁 중 가장 독특한 것은 여리고이다. 사람과 동물을 모두 칼로 죽이고 성은 불태우며, 전리품은 은이나 금이나 동이나 철로 된 그릇 모두 성전에 바친다(수 6:17이하). 이 바쳐진 물건을 탐내고 취 한 아간과 그의 가족과 생축과 재산은 모두 돌로 치고 불사른다(수 7:24-26).아이 성과 하솔 성도 여리고와 함께 불태우나, 전리품은 미리 취한다(수 8:26, 10:39,10:8, 11:13).
(4)네게브에 있는 스밧 사람들은 모두 진별된다(삿 1:17).
(5)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와의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공적인 명세를 한 후,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사람들,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한 학 (딘 21:11).이런 헤렘 법은 레위기 27장29절을 따른 것이다.
(6)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멸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아말렉 족속이 출애굽 때 무방비 상태의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쳤기 때문이다(삼상 15;대상 10:13).
(7)후에 솔로몬은 그 당대까지 살아남은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지 않고 노예로 역군을 만드는' 정책적 전환을 하였다(왕상9:21;수 15:63,17:12;삿 1:19-35).
(8)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헤렘이 나타나는 곳은 에스라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성전에 불러모을 때이다.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를어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위의 헤렘 전쟁 중 가장 두드러진 두 본문은 여호수아의 여리고 전투(수 6장.)와 사울의 아말렉 전삼상 15:3)이다. 이 두 전쟁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우신다. 여리고의 파멸은 너무나 독특하다. 여호수아6장 24절에서는 여리고의 완전한 파멸이 묘사된다. 여리고 성은 불로 태워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애버렀다. 이성은 완전한 멸망을 당해야 했다. 이 전쟁은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진멸하는 전쟁'이었다. 여리고에 대한저주는 절대적이다. 이리하여 가나안의 도시와 땅이 완전히 멸망당하는 신명기 13장 16절의 규례가 이루어진다.
가나안 전쟁에서 완전히 불태워버린 성은 소수이지만, 여리고 멸망은 독특하다. 아브라함으로부터 400년간 가나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가나안족속의 죄악이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계는 가나안에 죄악이 관영하였으므로 이 약속의 땅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생존권차원에서 자기의 땅을 차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동일한원리가 열왕기하에 나온다. 이제는 심판받는 쪽이 이스라엘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땅에서 부패했기 때문이다.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따르면 가나안 땅아 그 거민을 토해낸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가나안정복으로부터 다윗 왕조가 끝날 때즈음에는,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을 토해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제는 바벨론사람이 거룩한 전쟁의 도구가 된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칼을 빼고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벌이시는 것이다. 즉 거룩한 전쟁이 역전된다. 이제 당하는 자는 소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여리고의 멸망은 죄로 가득 찬가나안족속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 성은하나님께 완전히 바친바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취할 수 없었다. '이 가운데서 무엇을 취하면 너희가 바친 바 될 것이다 (수6:18)는 것이다.
5. 더 넓은 맥락 : 구속사적 맥락에 나타나는 구약의 전쟁
원수를 하나님께 바쳐 진멸하는 전쟁은보다 더 넓은 '성전' (holy war)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전쟁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이때, 하나님이 '만군의 주님'으로 나타나며, 전쟁을 친히 치루신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서는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주 하나님이 '용사'로 불려진다. 모세는 주께서 애굽 군대를 홍해에서 수장시키시는 것을 보면서, "주는 용사 시니 야웨는 그의 이름이시다'라고 찬양한다. 용사로서 주님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서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했다. 용사로서 주님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원수를 치고 있다(출 15:6, 12,16린.주님에 대한 '용사' 라는 칭호는 출애굽기 15장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용사로서의 모습은 이미 창세기 3장에 나타난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실낙원을 한 후, 그룹과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도록 하신다. 주님은 용사로서, 이 거룩한 장소에 죄인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나님 자신이 용사로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다.
노아 홍수는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스케일로 모든 창조계를 동원하여 타락한 노아시대 사람들을 다 진멸하시고, 노아의 가족을 보호하신 사건이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 라"(창7:11).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예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신 29:23).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 때, 주님께서 다시 거룩한 용사로서, 불로 온 세상을 멸하실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약의 전쟁은, 냉정한 흡혈귀 같은 전쟁의 신이 남녀노소를 무차 적으로 혹은 한 민족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6. 결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구약의 전쟁에 대해 침묵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영해해버림으로써, 옛 언약의 백성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실 속에서 살며 '용사이신 하나님' 을 섬겼는지에 대해외면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나는 전쟁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도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에 침묵하면, 후에 같은 유형의 문제가 나을 때에도 대안을 만들 수 가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상황 속에서 구약의 성전 개념으로 현재 자신의 전쟁을 정당화시킨다. 지난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이 전쟁을 '성전'이라고 말하고, 이라크도 '성전' 이라고 말한다. 정치가들은 자신이 치루는 전쟁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 다 '북한전쟁' 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한다. 월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에른스트라이트(G. Ernest Wright)는 "야웨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나도 아니 볼라고 말했다고 한다(Hanson 342).
한국의 상황도 성전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겐 국방의 의무가 딘성한 것' 이므로, 이것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신성한 의부 는 어떤 사회적, 윤리적 가치보다 우월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죽은 자는'순국장병' 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면, 모든 전쟁이 신성한 것이 되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신성한것' 자체가주판적이 되어버리고 말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말시온으로부터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여겨졌다.
말시온은 결국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계를 만든 저급한 창조의 신이며 피를 좋아하는 전쟁의 신으로서, 신약이 말하는 및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만들고 말았다. 불트만은 구약성경이 현실 세계에 밀착되어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초월적인 종말론적 실체로 넘어가지 못하고'유관 으로 끝났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의 전쟁신학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배울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임종 직전, 심각한 병에 걸려 있었을 때 여호수아 주석을 마친다.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약화되었지만, 그는'더욱 크고 밝은 빛 속에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Hen Beveridge).
칼빈은 '교회에 대한 유언으로,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그렇게 성공적으로 선포한모든 교리 체계를 엄숙히 비준하는 작업' 으로 여호수아 주석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여리고의 멸망에 대해,"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비인간적인 학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를 주관하시는 그 분께서 공의롭게 이 나라들을 별하시도록 정하셨으므로 이것은 모든 토론을 끝내준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약의 전쟁과 송두리째 원수를 주님께 바치는 헤렘 전쟁을 보며,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역사 속에 먼저 침범해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아 홍수, 소돔과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일곱 족속의 진멸, 그리고 여리고와 아말렉의 진별은 죄에 대한 주님의 최종적 심판이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믿는다면, 구약에 나타난 저 비참하고 냉혹하게 보이는 '진멸하는 전쟁'도 담대히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적인 아집과 욕심에 이끌려 이음나라들과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전과 헤렘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인용 및 참고문헌
'erem", Ency긴랄aedta Judaica, Jemsalem
R. Goetz, 'Joshua, Calvin, and Genocide." Theolosy Today, PP. 263-74Paul Hanson, "War and Peace in the Hebrew Bible" interpretation 38, 1984, PP. 341-62.G. H.Jones, "HolyWar" or YahwehWar?" VT25, 1975, PP. 642-58.J P. U. Lilley, "Understanding Herem." 떴 Buttetm硝, 1993, PP. 169-77.Tremper Longman,성종현 옮김, U거룩한 용사i, 솔로몬,1鉛6.
Philip D. Stem, The Biblical Herem: A 'Windon on israel's Religious Expenence.BrownJuic Studies 211, Atlanta: Scholars Press, 1991, PP. 227-34에 있는 인용논 문을 보라._,'*Ihe Herem in 1 Kgs 20:42 as an Exegetical Problem." Btbltca 71, 1990, PP.43~47._, "ISamuel 15: towards an Ancient View of the War-Herem" UF21, 1989, PP. 413-20.
[출처] 구약의 헤렘-김정우|작성자 moses3100
관련 성경 구절
(창세 15,13-16)
13 그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잘 알아 두어라. 너의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14 그러나 네 후손이 종이 되어 섬길 민족을 나는 심판하겠다. 그런 다음, 네 후손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15 너는 평화로이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너는 장수를 누리고 무덤에 묻힐 것이다.
16 그리고 그들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족의 죄악이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출 23,20-33)
가나안 땅 입주에 관한 약속과 경고
20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21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22 너희가 그의 말을 잘 들어 내가 일러 준 것을 모두 실행하면, 나는 너희 원수들을 나의 원수로 삼고, 너희의 적들을 나의 적으로 삼겠다.
23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그들을 멸종시키겠다.
24 그러면 너희는 그들의 신들에게 경배해서도 그 신들을 섬겨서도 안 되고, 그들이 하는 짓을 따라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기념 기둥들을 부수고 깨뜨려 버려야 한다.
25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 그러면 나는 너희의 빵과 물에 강복하고, 너희에게서 질병을 없애 주겠다.
26 너희 땅에는 유산하는 여인도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도 없을 것이며, 나는 너희의 수명을 채워 주겠다.
27 나는 나에 대한 공포를 너희보다 앞서 보내어, 너희가 쳐들어가는 모든 민족을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의 모든 원수가 등을 돌려 달아나게 하겠다.
28 나는 또 말벌을 너희보다 앞서 보내어, 히위족과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게 하겠다.
29 그러나 땅이 황폐해지고 들짐승이 많아져서 너희를 해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므로, 일 년 동안은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겠다.
30 나는 너희가 번성하여 그 땅을 차지할 때까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조금씩 조금씩 몰아내겠다.
31 그리고 너희 땅의 경계를 갈대 바다에서 필리스티아 바다까지, 광야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로 정하여, 그 땅의 주민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32 너희는 그들이나 그들의 신들과 계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
33 그들이 너희 땅에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들이 너희를 유혹하여 나에게 죄를 짓게 할 것이다. 너희가 그들의 신들을 섬길 경우, 그것이 너희에게 덫이 되고 말 것이다.’”
안타깝게도 구약성경의 야훼 하느님을 ‘고대의 전쟁신’으로 폄하하는 오해를 접하곤 한다.
아마도 ‘전멸’로 번역되는 ‘헤렘’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이런 오해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대근동 종교의 독특함을 표현하는 용어로, 거룩한 것을 따로 떼어 놓고 온전히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을 지금 여기에서 철저히 신뢰함을 표현하는 말로서, ‘전멸’ 또는 ‘완전봉헌물’ 등으로 옮긴다.
‘헤르몬의 이슬’(시편 133:3)로 유명한 이 산의 이름은 ‘하람한 곳’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지명은 ‘거룩하게 구별된 산’, ‘세속적이지 않은 산’으로 새길 수 있다.
갈색 윗첨자 e는 거의 발음되지 않는다.
마치 생사의 기로에 선 군인처럼, ‘지금 여기서 철저히’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모티프이다.
성 이냐시오가 보여주듯 ‘충실한 전사의 내면’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높은 경지를 훌륭히 표현한다.
그러므로 헤렘은 인간의 편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기도 하다.
아무런 사심 없이 가장 순결한 믿음을 드리겠다는 철저한 내면의 자세가 헤렘이다.
우리는 야만적 폭력이 당연하던 시대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런 폭력적 표현 너머에 있는 보편적 신앙을 봐야 한다.
현대에도 헤렘 신학은 필요하다.
사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폭력성은 오히려 더 확대되었다.
그런 현대적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내면의 철저한 자세를 요구받을 때가 있다.
이슬람 신앙의 지하드(聖戰)도 헤렘의 전승을 잇는 말이다.
고대에 이미 종교색 짙은 용어로 탄생한 말을 21세기에 실제 전쟁용어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의 오류도 역시 우리가 전멸 신학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 자료출처 /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
출교(黜敎, Put out of the synagogue)
기독교에서 잘못을 저지른 교인을 교적에서 삭제하여 내쫓는 것을 말한다.
유대 공동체에서 출교는 회당 출입을 금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유대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인에게 행하는 가장 최고의 형벌이었다.
출교를 당한 사람은 회당 모임에 나갈 수 없었고 출교당한 사람에게는 2m 이내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또 그와 교제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출교당한 사람에게 물건을 팔거나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가 죽으면 우는 것도 금하였으며 시체에 돌을 던졌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아들을 둔 부모가 자기 아들의 눈을 고쳐주신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 것은 그 당시 유대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형벌인 출교를 내리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이었다(요 9:22).
출교, 견책, 근신 : 출교보다 약한 징벌로는 견책과 근신이 있었다.
견책은 7일에서 30일 동안, 근신은 최소 40일 간 공중 교제가 금지되었다.
근신은 이 40일 기간이 지나면 다시 30일 동안 훈계를 받고 원상 복귀되었다.
출교(黜敎)
파문과 비슷할 지 모르겠지만 권한이 정지되어도 신자로서의 의무가 부과되며 갱생의 여지를 남겨둔 파문과는 다르게 말 그대로 신자로서의 자격 자체를 박탈하기 때문에 신자로서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
대표적으로 개신교의 출교 제도가 있다. 또한 스스로 종교를 버리는 배교(背敎)와도 성격이 다르다.
"제명과 출교" 논란 -같은 의미? 다른 의미?
사소한 실수나 착오라도 오랫동안 굳어지면 통설이 되어 바로잡기가 어렵다. 더욱이 장로교 치리회가 권징하기 위해 참조하는 법조항들은 문장의 표현은 물론이고 낱말 하나 구두점 의 유무(有無)가 전혀 다른 판단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한국 장로교 헌법 안에는 이와 같이 오래된 논쟁 하나가 있다. 이미 심정적으로는 수정(사실상 교정에 가깝다)하는 데 동의하는 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첫째, 오랫동안 굳어져 온 관행는 점 둘째, 수정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점 셋째, 중대 사건에 대한 애매한 관용의 근거로 오용되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로교 치리회는 교회 안에 범죄 사건에 대하여 기소하여 재판을 하지 않고는 권징(처벌)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장로교는 권징에 관한 모든 적법한 절차와 내용을 ‘권징조례’에 담았다. 이중 문제가 된 부분은 권징의 종류에서 “제명”과 “출교”를 하나로 볼 것인가 두 종류의 권징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각 장로교 교단 헌법마다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본 글은 이러한 착오가 발생하게 된 과정과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해서 간단히 약술하겠다.
1. 한국 장로교 헌법의 유래
한국장로교의
시초는 1907년 독노회가 설립되면서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1905년에 작성된 간단한 규칙을 임시로 채택하여 노회록에
수록했다.
그러나 임시로 채택한 규칙은 미비한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설립되면서 장로회정치
헌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제4회 총회(1915년)는 교회정치, 권징조례 등을 출간하기로 하고 선교사 곽안력씨에게 번역을
위임했다(한국목사 참여 : 함태영, 차상진, 함율).
곽안련 선교사가 번역한 원서는 미국장로교회가 교회정치로 원용한 J.A.핫지의
“장로교회법이란 무엇인가?”(원제:What is Presbyterian Law?)이다.
본서가 『예수교장로회정치문답도례』
(조선예수교서회)라는 제목으로 1917년 출판되었고 제11회 장로회 총회는 이를 근거로 1922년 원헌법이라 불리는 교회정치와
권징조례 등을 담은 헌법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의 모든 장로교회 헌법의 근간이 되었다.
2. 문제의 발단과 과정에 대해서
위에
밝힌 바와 같이 우리나라 장로교 헌법의 실질적 기원은 미국장로교 헌법의 기원이 되었던 J.A.핫지의 책이다.
그리고 1922년
원헌법이 그것을 번역하여 수정 채용한 것이라면 논란이 되는 문구에 대한 해결책은 당연히 이 두 책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두 책
모두 권징의 종류에서 “권면, 견책, 정직, 면직, 성찬참여금지, 출교(Excommunication)”와 같이 여섯 개 뿐이며,
‘제명’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권징의 종류에 변화가 발생한 시점은 1930년 헌법이다.
여기서 교회정치에 “제명, 출교”(쉼표)로 권징조례에는 “제명
출교”(띄어쓰기)로 사용되었다.
이후 1934년 판, 1954년 판, 1957년 판, 1960년 판(합동), 1966년 판(합동)
헌법에서 제명과 출교사이에 일관되지 않은 표기 방식들이 혼용되었다.
이러한 혼돈은 출교(Excommunication)가
‘제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혹자는 인쇄 과정의 실수로 굳어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여섯 개의 권징이 일곱 개로 수정 삽입되었다고 가정할 때, 권징의 순서를 보아 제명은 출교의
직전 단계의 중한 책벌이다.
이 같은 수위의 권징이라면 당연히 수정 청원 헌의안이 제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11회
총회(1922년)에서 교회정치와 권징조례등 원헌법을 채택한 후 1930년 총회까지 총회록에 ‘제명’을 권징의 한 종류로 삽입
청원한 헌의안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수정 청원 없이 권징조례가 수정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별도로 제12, 13, 14회
총회록(1923,1924,1925년)에 “명부 제명”이 등장하는 데 이 사안은 재판하여 권징한 것이 아니라 단순 행정처리로서 회원
명부에서 삭제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례로 보건데 행정처리로서 ‘제명’을 권징의 ‘제명’으로 잘못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삽입
과정도 불분명하였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일제강점기에 장로교 총회(1938년)가 신사참배 가결을 하였다.
총회는
신사참배 가결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목회자들에게 ‘제명’의 조치를 취한 사례들이 발견된다.
이것은 변절한 총회가 저항하는
목사들에게 ‘면직’ 이나 ‘출교’로 책벌하기에는 부담을 느끼고 애매한 판결로 ‘제명’을 선택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비슷하게 오용되고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한 편, 정직, 면직, 출교와 같은 중한 책벌은 당연히 시벌과 해벌 조항에 따로 명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1922년 원헌법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장로교단 헌법에는 시벌과 해벌에서 “제명”에 대한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권징으로서 ‘제명’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며 수정된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잘못된 부분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말한다.
3. 각 장로교단의 상황과 변화
1922년
원헌법에 나와 있는 권징의 종류를 채택하고 있는 교단은 고신측이며, 통합측은 많은 변화를 가했지만 “출교 : 교인명부에서
제명하여...”로 유지하고 있고, 합동측은 당회재판에서는 “제명, 출교”로, 직원재판에서는 “출교”로 달리 병기하고 있고,
합신측은 “제명, 출교”로만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는 오래 전에 제기되었으나 최근에 합동 측에서 “제명”과 “출교”를 하나로
묶어 “제명출교”로 수정하는 헌법수정안이 상정되어 있고 합신 측에서도 같은 이유로 수정 청원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늦었지만 그동안
잘못 적용되었던 부분을 이제 바로 잡는다는 의미가 있다.
4. 정리
권징의
종류에 대한 이와 같은 논란은 신학적으로 큰 이슈가 될 만한 일이 아니다.
또한 많은 논의를 거쳐서 수정해야 할 만큼 복잡한
사안도 아니고 단순히 ‘교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삽입의 과정이 불분명하고 근거도 희박했으며 그 용도는 과거
일제강점기나 현재도 남용 혹은 오용되는 사례들을 낳고 있다.
면직이나 출교에 해당되는 범죄라고 판단했음에도 ‘제명’이라는 미명아래
사실상 가벼이 처리하는 사례들이 있다면 이는 더 큰 잘못을 범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례가 앞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차제에 반드시
교정해야 한다.
행정처리는 ‘제명’ 혹은 “명부삭제”로 표기하고 권징조례는 ‘제명출교’로 할 것이 아니라 ‘출교’라고 명확한
표기를 함으로써 엄중한 교회의 판결에 오남용과 혼돈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엘머 게이츠 교수는
사람의 감정분석을 위해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말의 숨결을
시험관에 모아 침전물을 걸러냈는데
각각 색깔이 달랐다고 합니다.
사랑의 감정일 때는
분홍색이었지만
화를 내거나 욕을 할 때는
갈색이었습니다.
그 갈색 침전물을
실험용 쥐에게 투여하자
몇 분 안에 쥐가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분노할 때나
심한 욕을 할 때 사람의 침은 이처럼
강한 독성이 있다고 해
‘분노의 침전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와 정반대의 침전물이나
농축된 액기스를 생각해본다면
예수님의 보혈이 아닐까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에는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충분히 씻을 만큼의 사랑이 담겨있으니까요.
11-04-2024(월) 요한복음 9:13-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쟁론(爭論)(16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Some of the Pharisees said, "This man is not from
God, for he does not keep the Sabbath." But others asked, "How can a
sinner do such miraculous signs?" So they were divided.
쟁론(爭論)이란 한자의 훈(訓)은 "다툴 쟁(爭)" "논할 론(論)"으로 "서로 다투어 토론 함" 또는 "서로 다투는 이론"이라는 뜻입니다.
쟁론의 반대를 "확신(確信)"이라고 하겠습니다.
확신이란 한자는 "굳을 확" "믿을 신"으로 굳게 믿는다는 뜻입니다.
πληροφορ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36
-
1. 확신, 골 2:2, 살전 1:5(큰 확신), 히 6:1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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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충만, 골 2:2, 히 6:11, 10: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확신(살전 1:5), 풍성함(골 2:2, 히 6:11), 온전함(히 10:22).
그리스도인의 다섯 가지 확신
데살로니가전서 1:5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1. 구원의 확신(요한일서 5:11-12)
2. 기도응답의 확신(요한복음 16:2)
3. 승리의 확신(고린도전서 10:13)
4. 사죄의 확신(요한일서 1:9)
5. 인도의 확신(잠언 3:5-6)
왜 서로 자기 생각이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합니까?
만일 확실한 것이 제시되면 쟁론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쟁론"의 반대어를 "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메사야가 된다 될 수 없다는 쟁론이 일어났으므로 예수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증명하면 쟁론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라는 것을 확증하면 됩니다.
첫째,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둘째, 역청(창세기 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셋째, 금송아지가루(출애굽기 32:20)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다섯째, 속죄제(레위기 4:13-21)
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찌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16.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17.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8.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19.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되
20.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것 같이 할찌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21.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사를찌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다섯째,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섯째,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쟁론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메시야가 맞는가?
아니면 메시야가 맞지 않는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구원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에서는 구원을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공산주의에서 경제 기초는 노동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기초는 자본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경제 기초는 "토지(土地)" 즉 "땅" 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땅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레위기 25:23-25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The land must not be sold permanently, because the land is mine and you are but aliens and my tenants.
Throughout the country that you hold as a possession, you must provide for the redemption of the land.
" 'If one of your countrymen becomes poor and sells some of his property, his nearest relative is to come and redeem what his countryman has sold.
무를 것 - 리뎀션(redemption)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in accordance with the riches of God's grace.
골로새서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e forgiveness of sins.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
who is a deposit guaranteeing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ose who are God's possession--to the praise of his glory.
redeem
1. 동사
(결함 등을) 보완[벌충/상쇄]하다 (=compensate for)
2. 동사
(실수 등을) 만회하다
3. 동사
(죄악으로부터) 구하다[구원하다]
redemption
1. 명사
격식
구원, 구함
2. 명사
금융
(주식) 상환(相換)[현금화]
성경에서는 기드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바알의 단을 헐었을 때 성읍 사람들은 기드온을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는 뜻으로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삿 6:25-32).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준 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이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준 것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또 다른 주장은 만일 저 사람이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느냐? 하며 서로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십계명 중 제4계명으로 출애굽기 20:8-11, 신명기 5:12-15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 처음 제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마치신 후 “일곱째 날” 안식하셨는데 이때에 이미 안식일이 제정된 것입니다(창 2:3).
기억하라는 히브리어는 "자코르" 라고 합니다.
'자코르'는 '자카르(지키다)'의 명령형으로 "반드시 기억하라, 언제나 유념해 두라, 깊이 뚫으라, 마음 깊은 곳에 되새기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려면 먼저 안식하는 날을 마음 한가운데 깊은 감동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안식일은 다른 부정한 것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날, 성별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목적으로 다른 날과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으신, 가장 으뜸가는 날, 귀중한 날, 영광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는 자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먼저 엿새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더구나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뜨게 된 것은 모두가 함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전통적으로 지킨다는 사람들로부터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주님의 날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배하러 가는 길에 어느 노숙자가 구걸을 한다면 그 노숙자를 외면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가 내민 손에 얼마를 쥐어주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반도 땅에 좌파와 우파의 바람이 뒤섞여 자기 주장을 실현하려고 거짓 선동과 거짓 뉴스가 사람들을 혼돈케합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리가 자유케 할 것이라는 말씀을 바르게 읽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 따라가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20:8-11, 신 5:12-15)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을 가장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글자 수로는 전체 십계명의 3분의 1 이상 되는
분량으로,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십계명 중에 안식일 계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가늠하게 합니다.
제 4계명은 다른
계명을 잘 지킬 수 있게 하는 신앙생활의 기초 원리요 중심입니다.
1. 제 4계명의 해석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 처음 제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마치신 후 “일곱째 날” 안식하셨는데 이때에 이미 안식일이 제정된 것입니다(창 2:3).
1)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기억하여”는 히브리어 ‘자카르’의 명령형 ‘자코르’로 ‘반드시 기억하라, 언제나 유념해 두라, 깊이 뚫으라, 마음 깊은 곳에 되새기라’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항상 성도의 마음 한가운데 깊은 감동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안식일은 다른 부정한 것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날, 성별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목적으로 다른 날과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으신, 가장 으뜸가는 날, 귀중한 날, 영광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는 자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2)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7일을 안식일로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힘써”는 히브리어로 ‘아바드’(섬기다, 경작하다,
봉사하다)의 미완료형이 쓰였는데, ‘아바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
열심히 일을 하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명하신 인간 본연의 사명입니다.
엿새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노동과 사명 감당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자만이 안식일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3)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신 것은, 안식일이 하나님께 속한 날, 하나님만을 위해 존재하는 날, 하나님만을 향하여 바라보아야 하는 날임을 뜻합니다.
4)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본인과 자녀와 종들은 물론 심지어 부리는 짐승들과 문 안에 머무는 이방 나그네까지도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안식일의 축복이 모든 피조 세계 전체에 미치게 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롬 8:19-23).
5)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안식일의
별칭은 모두 히브리어로 ‘샤바트 샤바톤’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안식하라’라는 의미의 강조 어법으로 안식일이 ‘반드시,
그리고 온전히 쉬는 날’이라는 미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에는 철저히 안식해야 할 것과 안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 이유가
있음을 선포합니다.
2. 제 4계명의 세부 율법
제 4계명에 대한 세부 율법이 기록된 곳은 출애굽기 21:1-11, 23:10-12, 신명기 15:1-16:17입니다.
1) 안식일 규례
첫째, 육신에 관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①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레 23:32).
②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출 20:9, 신 5:13).
③ 어떤 상황에도 나무를 하러 가서는 안 됩니다(민 15:32-36).
④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출 35:3).
⑤ 무역하지 못합니다(느 13:15-21).
⑥ 사고 팔지 못합니다(느 10:31, 암 8:5-6).
⑦ 술틀을 밟는 것과 물건 운반을 금합니다(느 13:15, 렘 17:21-22).
⑧ 밭을 갈 때나 거둘 때에도 쉬어야 합니다(출 34:21).
⑨ 발을 금하여 오락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사 58:13).
⑩ 일정 거리 이상 움직이면 안 됩니다(행 1:12).
⑪ 안식일에 바칠 제물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대로 별도로 준비해야 합니다(민 28:9-10).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출애굽기 20:11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쉬셨다는 것은 그 결과를 보고 흡족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창
1:31).
따라서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축복하셨다는 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철두철미하게 빈손 들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고 번창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안식일에 일이 허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 안식일에 선지자(하나님의 사람)를 찾아가는 여행(왕하 4:8-37)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전쟁하는 일(수 6:12-15, 왕상 20:1-30, 왕하 3:9-27, 11:5-12)
▶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와 관련되는 일(제사장과 레위인, 대상 23:24-32)
▶ 생후 8일 만에 할례 주는 일(요 7:22-23)
2) 안식년 규례
안식년은 안식일 개념이 확대된 것으로 7년을 주기로 맞이하는 제 7년째 되는 해입니다.
제 7년에는 땅을 쉬게 해야 하고(출 23:10-11, 레 25:1-7), 채무 변제를 유보해 주어야 하며(신 15:1-2), 히브리 종을 해방하여야 합니다(출 21:2-6, 신 15:12-18).
3) 희년 규례
희년은 안식년이 더 확대 강화된 것으로, 안식년이 7년마다 지켜졌다면 안식년이 일곱 번이 지나고 그 다음 50년째에 지켜졌습니다. 희년은 티쉬리월(7월) 10일에, 대속죄일의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레 25:9-10).
희년에는 남의 집에 있던 동족이 각각 자기 기업과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고(레 25:10), 땅과 가옥이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하며, 땅을 쉬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희년과 관련된 이자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희년의 규례를 볼 때, 희년의 정신은 모든 부채가 탕감을 받는 것입니다.
3. 예배에 대한 교훈
제 4계명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시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예배의 시간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대대의 표징’, 곧
영원한 표징입니다(출 31:13, 17).
구약 시대에 수많은 제사가 안식일에 드려졌듯이, 오늘날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드려져야 합니다.
‘주일’은 어떤 다른 요일로도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이 바로 주일이기 때문입니다(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을 공적 예배를 드리는 날로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행 20:7, 고전 16:2).
4. 제 4계명을 범한 자의 최후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할
경우, ‘사형’이라는 극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셨습니다(출 31:14).
실제로 광야 생활 중에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발각되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쳐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민 15:32-36).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유수의 징벌을 받은 것은, 안식일과 안식년 계명을 지키지 못한 죄에 대한 보응이었습니다(대하 36:21, 느
13:17-18, 레 26:34-35).
5. 제 4계명의 구속사적 교훈
아담이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것은, 하나님의 안식으로부터 도망친 죄입니다(창 3:8).
아담과 여자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켰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선한 안식일 규례를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규제하는
악법으로 변형시켰으며, 완전히 형식주의로 전락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뜻과 근본정신을 망각한 자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안식일에 손이 마른 자를 회당에서 고쳐주시면서(마 12:9-13, 막 3:1-5, 눅
6:6-10)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입법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모든 주권은 예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안식일에 모여서 드리는 모든 예배와 교제, 헌신과 봉사 등
무엇이든지 오직 예수님만을 중심해야 합니다. 또한 참안식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온다는 의미이며,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에 해당된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시고 예수님 안에 사는 자는, 언제나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의 축복 속에 사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기념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켰다면, 이제 신약 시대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구속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 계명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예표하였듯이 주일은 주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주어질 참안식의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히 4:4-9). 주일을 지키며 진정한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주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을 주의 날로 지킬 때, 마침내 남아있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롬 14:5-6, 히 4:9-11, 요 5:17, 히 4:3).
쟁론(爭論) 4978 스키스마(schisma) σχίσμα, ατος, τ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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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찢어지기,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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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자적으로] 터진 곳, 찢어진 곳, 마 9:16, 막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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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징적으로] 분열, 불화, 요 7:43, 9:16, 고전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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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쟁론(요 7:43), 분쟁(고전 1:10, 12:25), 해어짐(마 9:16, 막 2:21).
4977. 스키조() σχίζω 스트롱번호4977
이 구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본질과 출처에 대해
논쟁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맹인을 치유한 사건은 유대 법에 따라 이 거룩한 날에 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의 행동의 기적적인 성격에 혼란스러워하며,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경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의 이러한 내부 갈등은 복음서에서 더 넓은 주제를 강조합니다.
나 기대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는 도전입니다.
이 구절은 독자들에게 법과 은혜, 전통과 혁신 사이의 균형을 고려하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는 종교적 관습의 경직된 해석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는 변혁적인 능력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또한, 표면적인 판단을 넘어서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신앙과 일상에서 신의 작용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만약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얼마나 놀랍고 감격할 일인가?
더구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에 의해 눈을 뜨게 되었다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눈을 뜨게 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 할 것이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아쉽게도 이런 감격의 장면을 전혀 볼 수 없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시비 거리만 기록 되어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놀라고 감격하기에 앞서 "네가 진짜 나은 것이냐? 왜 하필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느냐?"
안식일을 어긴 것을 보니 이런 일 한 예수는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죄인이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 등으로 떠들고 있다.
눈을 뜨게 한 분이 누구 인지도 알지 못하고 율법주의에만 관심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불쌍하게 여길 뿐이다.
참된 신앙은 이런 신앙은 이런 시비의 신앙에서 벗어나 주님을 가슴에 모신 감격의 생활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바리새인과 같은 성경의 문자 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감격의 신앙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 인한 기쁜 감격과 감사가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은 놀라움과 감격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요, 하나님이 이 땅에 33년간 사셨다는 자체가 놀라움이요, 십자가에 달려 우리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며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자체가 감격의 연속인 것이다. 이를 더욱 확실히 보장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 또한 감격이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재림주로 오시는 것과 교회를 세우시고, 66권 말씀의 약속을 주시고, 이 말씀을 통해 만나를 먹이시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이는 주의 종을 세워 일하시는 그 자체가 또한 감격일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놀라움과 감격이 없나? 혹시 오늘 우리도 주님 주변에서 바리새인 같이 시지비조로 종교인으로 타락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이런 종교인으로 타락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급강한 바람과 불길같이 타 오름으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던 성령을 보내셨다.
그가 나를 증거 하게하실 것이요(요15장26절)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만약에 성령을 모시되 전혀 기도에 힘쓰던 초대교회 성도와 사도들처럼 놀라움과 감격에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새 술에 취하여 주님의 사랑에 황홀하고 놀라며, 감격을 경험하게 되어 질 것이다.
저는 은퇴 후 다문화 센터를 설립하여 운영하며, 교회를 설립하여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피곤하고 지칠 때도 많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마른 막대기 같은 자를 택하여 주님께 적게나마 쓰임 받게 된 것을 생각하면, 감격 할 뿐이다.
그럴 때 마다 성령께서 오셔서 저를 붙드시고, 나에게 은밀한 위로와 평화를 주심으로 황홀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새 힘과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에 너무도 고마워 눈물이 쏟아지는 감격이 있기에 기쁘게 감당하고 있다.
미국의 욕 중에 "성령 안 받고 목사나 해 먹어라."는 욕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 목사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성령 충만한 감격을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특정 신앙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면 오해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뇌가 오른 쪽 뇌와 왼쪽 뇌로 되었는데, 오른 쪽 뇌는 황홀한 감격을 추구하고, 왼쪽 뇌는 이성과 질서를 추구 한다"고 말한다.
논리와 이성만을 추구하는 왼쪽 뇌의 편향에서 벗어나, 오른쪽 뇌도 만족시켜 주어야만 정상적인 인간, 정상적인 자녀 교육, 정상적인 부부의 삶이 가능 하다고 한다.
나라와 민족의 해결도 그렇습니다.
독일은 19세기 초에 망했을 때 피히테가 '독일 민족에게 고함' 이라는 글에서 독일 민족은 감성이 예민하고 감격할 줄 아는 민족이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므로 독일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지금 나라가 우와 좌가 갈라져서 심각한 진통을 격고 있다.
증오와 국론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왼쪽 뇌에만 몰입되면 나라의 운명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제 오른쪽 뇌에 치우쳐 있다면 왼쪽으로, 왼쪽으로 치우 쳤으면 우 쪽을 보충해야 한다.
그러할 때 민족의 미래가 밝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제 너무 치우친 논리에서 벗어 날 때 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의존적 단계
please help me,
둘째 독립적 단계
I can take care my self,
셋째는 봉사적 단계
please lett help you
다시 말하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단계 그리고 예수 믿고 확신을 가지는 단계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이 소경이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그 신앙은 성숙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격의 신앙을 누리려면 첫째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맹인도 얼마나 부모를 원망하고 절망 속에 살아 왔겠는가?
생각하건데 자살 할 생각도 여러 번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예수를 만났다.
예수 믿고 변화 받으면 제일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된다.
삭개오는 여리고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새사람이 되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의심을 풀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으며, 사마리아 여인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바울이 되어 위대한 복음의 증거 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 즉 체험인 것이다.
이 소경은 두 눈을 뜨게 되자 자기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보지 못하던 내가 보게 되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예수 믿고 변화 받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감격의 눈물과 생의 벅찬 감격이다.
또한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된다.
나를 고쳐 주신 그분을 만나 볼 수 없을까?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까 생각 했을 것이다.
자기가 눈을 뜨게 된 것을 생각하면서 찬송과 영광을 돌렸을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증거 했다.
나는 잘 모르나 내가 아는 것은 그 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이다.
주후 165년 로마에서 순교한 '유스티누스'란 분이 예수를 믿게 된 기록이 있다.
그가 쟁쟁한 청년 시절에 한번은 에베소에서 해변을 산책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예수에 관해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노인의 말을 듣던 그는 갑자기 감동으로 뜨거워지고 회개하여, 그때부터 주님께 헌신하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경은 일평생 소경 되었다가 갑자기 세상을 보게 되니까 이웃사람과 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 소경은 두 눈을 뜨게 되자 자기 자신의 확실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놀라운 변화의 기쁨 즉 감격이다.
예수로 인하여 감격하는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로 인하여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1. 평범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
2. 부족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
3. 응답될 것을 기대하며 소망하는 신앙
이 감격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갈등이나 의견 충돌은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하며, 이를 잘 활용한다면 더 나은 관계, 효율적인 업무성과,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 등의 여러 긍정적 이득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건강한 방식의 갈등과 의견 충돌보다는 서로를 공격하고 비난하며 격렬하게 싸우거나, 반대로 원만한 관계를 위해 갈등이나 의견 충돌을 무시한 채 상황을 회피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갈등과 의견 충돌은 늘 일어나지만 갈등과 의견 충돌 상황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고, 다른 의견을 단순히 다르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틀렸다고만 생각을 하죠. 또 단순히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의 차원을 넘어 서로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해 점점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적대감과 불편한 감정만 남기는 소모적 대립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어느 집단, 어느 조직, 어느 사회든지 갈등이나 의견 충돌은 꼭 필요합니다.
갈등이나 의견 충돌을 통해 새로운 성과를 내고, 더 나은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약 한가지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는 집단, 조직, 사회라면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 뿐 아니라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이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등과 의견 충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갈등과 의견 충돌을 바라보는 시각과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갈등이나 의견 충돌을 ‘개인에 대한 공격’, ‘싸움’ 등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갈등과 의견 충돌을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 아닌 결국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불편한 대립으로 여기죠.
이러한 시각과 태도는 크게 2가지의 대응으로 이어집니다.
첫째, 공격적인 대응
갈등과 의견 충돌을 생산적 논쟁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정적인 싸움으로 생각한 탓에 상대의 다른 의견에 반박하고, 공격과 비난으로 상대를 이기려 하죠. 또한 상대가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을 공격이라고 받아들이기 까지 합니다.
이런 경우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결국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뿐입니다.
또한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때도 굴욕감, 수치심, 복수심과 같은 감정에 휩싸여 스스로를 갉아먹게 되겠죠.
결국 공격적 대응은 서로의 관계뿐만 아니라 각자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만 합니다.
둘째, 회피로 대응
갈등과 의견 충돌을 피하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된다고 생각해 상황 자체를 회피해 버립니다.
이런 경우도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듭니다.
우선, 상황을 회피한다고 해서 갈등이나 대립이 해소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덮어두고 넘어가는 것을 습관화 하다보면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켜켜이 쌓여 감정 쓰레기가 남습니다. 결국 해소되지 못한 채 묻은 탓에 서서히 부패되고, 악취를 풍기는 악순환을 초래합니다. 어디 감정뿐일까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넘어갔으므로 더 나은 결과를 내기란 쉽지 않겠죠.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을 발견할 수도 있고, 오류를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회피로 일관하게 된다면 새로운 점을 발견하거나 오류를 수정할 기회조차 잃게 되죠. 그러므로 서로 다른 의견일지라도 건강한 방식으로 대립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합니다.
갈등과 의견 충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갈등과 의견 충돌을 바라보는 시각과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갈등과 의견 충돌은 개인에 대한 공격도, 싸움도 아님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갈등과 의견 충돌은 싸워서 승리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한 방식의 갈등과 의견 충돌은 서로가 협력해서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생산적인 수단임을 꼭 기억하길 바랍니다.
갈등과 의견 충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 두 번째
오류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나와 다른 의견일지라도 수용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통 나의 행동이나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비합리적이거나 옳지 않은 말과 행동일지라도 어떻게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논리를 찾아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합리화하려 합니다. 비합리적이거나 옳지 않은 행위를 했을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거나 확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란 감정적으로 깨나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죠.
갈등이나 의견 충돌 상황에서는 이러한 습성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내 의견에 상대가 반박하면 이를 방어하기 위해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보호막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보호막이 뚫릴 것 같을 때마다 더욱 강력한 이유와 근거를 가져와서 방어막을 강화하려 하죠.
하지만 늘 내 말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맞기도 하겠지만 틀릴 가능성도 언제나 있죠. 만약 내 말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강력하게 방어막을 치려 했던 패턴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습니다. 틀린 순간에도 내가 주장하는 바를 어떻게든 옳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결과를 뒤집으려 하죠. 결국 고집불통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혹여 내 주장이 옳다고 할지라도 내 주장만을 강력하게 내세울수록 상대는 더욱 방어적 태세를 취할 것입니다. 나도 열린 자세가 될 수 없고, 상대 또한 열린 자세로 논쟁에 임할 수 없게 되죠. 결국 서로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다 소모적인 논쟁으로 끝이 나버릴지도 모릅니다.
갈등과 의견 충돌 상황에서 나의 주장에 확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내 주장만이 정답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명확하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오류는 있을 수 있으며, 내 주장이 옳다고 해도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상대의 마음을 열어야 서로 다른 의견을 건강하게 주고 받을 수 있으며, 상대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나부터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갈등과 의견 충돌이 단순히 충돌과 대립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셋째, 감정을 조절하라
논쟁을 하다보면 설득이 잘 되지 않거나 대립적인 순간에 욱하는 감정이 올라오기도 하고, 분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비아냥 거리거나 상대의 약을 올리기도 하죠. 이러한 태도는 결코 효과적으로 갈등과 의견 충돌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논쟁은 성숙한 감정 상태를 유지할 때 가능합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다소 무례하거나, 흥분하거나, 화를 내는 등의 행동은 논쟁을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누군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무례하게 말한다면 평정심을 유지하던 상대방도 덩달아 똑같이 무례하게 대응하려 할 것입니다.
결국 논쟁이 논쟁으로 끝나지 못하고 감정적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겠죠. 그러므로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는 자세로 논쟁에 임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의견 대립은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을 통해 더 나은 기회를 찾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니 더 나은 갈등과 의견 충돌을 위해서는 감정적 대응을 주의해야 합니다. 논쟁을 통해 어떤 결과를 얻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 결과를 위해 감정을 조절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갈등과 의견 충돌은 곳곳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갈등과 의견 충돌을 생산적인 논쟁으로 바꾸기 위해 조금만 노력한다면 우리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쟁론은 두 가지 논의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판단 규칙의 결여로 인해 공정하게 해결될 수 없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한 경우이다.
이러한 쟁론을 계쟁인 양 간주하여 동일한 판단 규칙을 양쪽에 적용한다면, 둘 중 적어도 한 쪽에 대해 잘못을
범한 게 된다.
잘못은 우리가 판단의 준거로 삼는 어떤 장르의 담론 규칙들이, 판단되는 담론/들의 장르 또는 장르들의 규칙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11-02-2024(토) 요한복음 9: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하시는 일(3절)
"Neither this man nor his parents sinned," said Jesus, "but this happened so that the work of God might be displayed in his life.
앞에서 친구들이 욥을 교훈하려 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도리어 욥이 그들에게 충고와
교훈을 베풀려는 의도를 타나낸다.
또한 본절과 12절에는 12:7-13에 나타난 모티브들이 엿보인다.
즉 자연 세계를 통한
'가르침'(12:7), '하나님의 손'에 관한 진술(12:9) 등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 원문에는 '하나님의 손에 대하여'(*,베야드엘)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은 욥의 생애에 하나님의 고난으로써 개입하신 사실을 암시한다(10:7; 12:9; 13:21; 19:21).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 즉,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이나
숨겨진 뜻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13절 이하에서 언급되거니와, 욥은 친구들과는 달리 원칙론과 현실 사이의
모순점을 은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적하며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J.
E.Hartley).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 아름답게 하셨고
-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실 때 '좋았더라'(창 1:31)고 하신 말씀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문맥상 하나님이 2-8절에 암시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당신의 뜻과, 섭리대로 하실 때 아름답고 흠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 ... 주셨느니라(*, 하올람 나탄 벧리밤)
- 이는 '그가 그들의 마음에 영원을 두셨다'(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 heart of men, NIV; He has also set eternity in their heart, NASB)의 뜻이다.
이는 죄악된 인생의 유한성과 연약성 및 그로 말미암는 허무 의식을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서 전체의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사(창 1:27)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 '영원'이란 말을 '세상'(the world, KJV)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Luther), 다른 사람은 '무지'를 뜻하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나(G.A. Barton) 그 근거는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주석가들은 이를 한글 개역 성경처럼 '영원' 또는 '영원을 나타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Nowack, Ginsburg, Wangeman, Wright).
그러나 ...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으되, 인간은 제한적인 피조물인 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더더욱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마음과 생각이 부패되고 왜곡된 바(렘 17:9; 롬 1:21) 그런 상태에서는 하는 일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신묘(神妙) 귀신 신(神), 묘할 묘(妙)
그렇다면 창조 주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작품들 앞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대답을 얻기 어렵습니다. 여기 다윗은 그저 「신묘막측」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신기하고 오묘하여 측량할 수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것도 거대한 우주를 논하고 무한대의 만상을 다 들먹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기 하나를 하나님 앞에 비춰 보면서도 이렇게 탄복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무능함을 고백하였습니다(고후 11:30). 그러나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하심에 감탄하면서 그는 항상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헤아리며 거기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습니다(고전 15:10). 이 시간 우리는 나의 삶 속에서 신묘막측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깨달으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신묘막측의 내용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생각하는 것이나 말이나 행동까지 모두를 하나님의 목전에서 조명해 보고 평가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기 다윗은 성령의 지혜로 자기의 삶 속에 비춰진 하나님의 간섭과 그 깊으신 섭리를 깨달으면서 과히 신묘막측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로마서 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2:3에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혜의 근원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지혜는 매우 미미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주의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나 삼라만상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가 지으신 피조물에 대하여는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고 계시는 것이 너무나 세밀하고 정확하다는데 놀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1-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편재성(遍在性)입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66:1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우주만상을 다 품으시고 하늘과 땅 어디든지 편재하시는 분입니다.
본문 말씀 7-10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공간의 경계를 의식한 나머지 장소만 이동하면 하나님의 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나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맙니다(욘 1:17).
(3)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의 창조사역을 통하여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있으라”고 하시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욥기 37:5-6에 보면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그 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욥기 37:23에는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태어나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신체적 기능이나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솜씨와 능력이 개입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본문 말씀 13-14에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고 하였습니다.
Ⅱ. 신묘막측의 적용
마술사나 요술쟁이의 경우 희한한 재주를 가지고 사람들의 눈을 속이며 돈을 버는데 이용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특기가 있을 때 그것을 출세의 도구로 활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묘막측한 능력을 가지고 그의 선하신 목적에 사용하십니다.
(1)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적용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기사가 있습니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말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 가브리엘이 꿈에 나타나서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현몽해 주었습니다.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동정녀(童貞女)가 잉태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을 하심에 대하여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마 1:21). 예수님의 탄생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나 무덤에서 살아나신 일, 승천과 재림 모두 다 인간이 볼 때는 신묘막측한 일이지만 결국 이런 일을 통하여 죄인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역사 경영에 적용됩니다.
구약에 나타난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세심한 부분까지 개입하시면서 이를 주관하셨습니다. 일찍이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근거로 하여(창 15:13-15) 그 후손을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는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침마다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보내 고기로 먹게 하였으며 반석에서 샘이 솟아나고 밤낮으로 번갈아 가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며 보호하였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하신 것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다윗왕 이후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고 신정국가를 수립하여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세계를 유랑하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으나 그들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나게 하였습니다(마 1:1). 예수 그리스도 이후 성령의 능력으로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에 구별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날 지상 교회를 통하여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삶 속에서 선하게 적용됩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인생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하였습니다(롬 14:7-8).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작용하십니다(롬 8:28).
옛날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 앞에서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라고 간증하였습니다(창 50:20).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도 이스라엘과 함께 겪은 사십 년 광야 길을 회고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신 33:29).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가시 곧 사단의 사자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를 발견하고 오히려 감격해 하였습니다(고후 12:7-10).
Ⅲ. 신묘막측의 신앙
성경 소요리 문답 제 4문답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신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불변하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하심과 신묘막측하신 성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입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다윗은 한나라의 제왕 군주로서 모든 권세를 행사하였습니다. 그 당시 자기의 나라 안에는 어느 누구도 왕권에 도전하거나 거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7절에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거나 거기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2:15-23에 보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에게서 낳은 아들이 병으로 앓다가 죽은 일이 있습니다. 다윗은 일주일간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으나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다윗의 태도를 보면 “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하고 깨끗이 승복하였습니다. 또 사무엘하 16:10에 보면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을 때 시므이가 티끌을 날리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 기가 막히는 현장에서도 그는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하고 담담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탁합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아이의 성격과 식성, 잠버릇, 건강 상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관찰해왔기 때문에 거의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좋은 점뿐만 아니라 나쁜 점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성격적 결함이나 신체적인 장애가 있을 때 본인은 애써 감추려 하지만 부모는 그런 약점 때문에 자식이 어려움 당할 것을 생각해서 그것을 보완해 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럴 경우 자식이 부모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감찰하고 아신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앉고 일어서는 것과 생각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계획하고 행하고자 하는 일에 미리 대비하시며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고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시 23:2). 지혜자 솔로몬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1). 그러므로 그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잠 16:3).
(3)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와 능력이 그의 구원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 감탄하면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로마서 11:33-36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능력을 실감하는 다윗은 그의 평생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편 30:4-5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세상에는 무작위로 일어나는 일이 없으며, 모든 현상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르면, 좋은 행동은 좋은 결과를, 나쁜 행동은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근본적인 질서를 이해하게 하며, 그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인과응보는 단순히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닌, 우리 삶의 경험과 지혜로운 삶을 위한 중요한 지침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인과응보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이 고사성어가 어떻게 실제 삶에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뜻과 유래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원인과 그 결과가 서로 대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모든 행동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나타냅니다.
즉, 선한 행동은 좋은 결과를, 악한 행동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동양 철학과 종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이것은 모든 존재와 사건이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서 발생하며, 이러한 연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 심지어 생명과 죽음의 사이클까지도 이 원리에 의해 설명됩니다.
인과응보의 이해는 개인과 사회, 심지어 자연과 우주의 관계까지도 포괄하며,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한자풀이
각 한자의 뜻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因(인): 원인, 까닭을 의미합니다.
- 果(과): 결과, 열매를 의미합니다.
- 應(응): 응답하다, 대응하다를 의미합니다.
- 報(보): 보답,報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인과응보'는 원인과 결과가 상호 대응하며, 행위와 그 결과가 서로 일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 삶의 지혜와 철학에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운명론의 한계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과거에 의해 결정된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운명론에 빠진 사람을 보면 지난 삶을 그리워합니다.
이민자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나는 과거에......"
이런 식의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현재의 삶에 만족과 감사와 기쁨이 없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운명론에 빠진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역경(逆境)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의 원인을 찾습니다.
제자들이 소경을 보면서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는 것처럼 과거의 행적 때문에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운명론에 빠지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정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신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가?"하고 한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바르게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이 고난과 풍랑으로 인하여 이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역경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누구에게 오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수많은 원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역경의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께서 주시는 역경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육체적인 질병을 주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찾아오는 역경
사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셋째는 사단이 주는 역경
사단은 우리가 고통받는 수많은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욥입니다.
고통을 받게 되는 원인을 덧붙여 말한다면, 집단적인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즉 미국과 아프가니스탄과 있었던 전쟁을 통해서 무고한 국민들이 목숨을 잃고 난민이 되는 경우입니다. 또한, 고의적 혹은 무의식적인 실수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와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연재해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이 이외에도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고통의 원인을 알기는 하면서도 치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은 역경을 겪을 때 힘들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인생의 성공을 맛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앙드레 세니에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평온한 얼굴 모습으로 고뇌를 숨기고 있다. 때문에 누구도 다른 이의 고뇌를 가늠할 수 없다. 그가 번민을 숨기듯 다른 사람도 모두가 고뇌를 감출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각자 자기만을 측은하게 여긴다. '나만 빼놓고 다른 사람은 행복하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독 자신만이 지금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그늘에서 잠자고 있던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당겼습니다.
잠자던 호랑이를
건드린 나무꾼이 놀라 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호랑이가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게 되었는데, 마침 호랑이 등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힘껏 호랑이 등을 끌어안았는데 호랑이가 이 나무꾼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쳐도 떨어지지 않게 되자, 이 사람을 등에 얹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하며 호랑이를 꽉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 '나는 평생 땀 흘려 일해도 사는 게 이 꼴인데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니 어디 살맛이 나겠는가?'라며 탄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유독 자신만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의 원인만을 찾고 자기
자신만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역경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역경의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역경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럼으로, 성경은 역경의 원인을 찾는 일에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경의 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경을 대하는 우리의 반응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역경의 원인을 찾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하나님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소경이 당하는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까? 보지 못하는 이 소경을 보게 했습니까? 제자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하나님을 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미래에 있을 일에 더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성도라면, 적어도, 역경의 원인,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의 원인에 너무 얽매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역경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경의 원인을 파악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역경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경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반응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가 된 요셉은 성실하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여 보디발로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시 역경이 찾아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 실패하자, 요셉이 자기를 범하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어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후에, 요셉은 오랜 가뭄으로 식량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요셉이 형제들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내어 우리 가족과 민족을 구원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믿음의 사람 요셉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과 역경을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키케로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고 말했고, 베네트는 "역경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보석들을 가공하시는 다이아몬드 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허버트는 "큰 배는 깊은 바다를 필요로 한다"고 했으며, 아논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은 역경을 지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셉과 같은 고백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바울과 같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이 하나님께서 교만치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고백하는 성도
찰스
스탠리 목사는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언제나 승리한다고 말하면서, "만약 당신이 역경을 겪고
있다면, 먼저 자기 연민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아,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더 이상 나를 도와 줄 사람도 없고.
내 처지를 봐. 난 가망이 없어. 머지않아 친구들도 떠나고,
나 홀로 남겠지..."
성도 여러분, 왜 자기 연민에 빠지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아닌 자신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환경 사이에 하나의 가상적인 영역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공감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그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종 혼자 있게 되고 결국에는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낙심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일수록 오히려 분노와 독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분노와
독한 마음으로는 역경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성도가 역경 중에 처해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사용하셔서 긍정적인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실망하거나 낙심해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고통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⑴ 먼저, 역경의 원인이 죄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②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했다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우연한 사고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그것을 죄라고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동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청산해야만 합니다.
③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나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원망할 자격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사람들로부터 동정심을 얻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원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도
여러분, 원망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위해서만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④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죄를 짓는 원인은 연약한 신앙 때문입니다.
신앙이 약하면 약할수록 사단을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나의 연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잘못된 생각은 없는가?',
'혹 성경의 교훈과
정반대가 되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 안에 결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불안전한 영역은 없는가?',
'나를
끌어내리는 친구는 없는가?',
'내 삶 가운데 계속해서 미혹하는 사람은 없는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봄으로써, 우리는
나의 삶 가운데 죄가 들어와 자리잡게 된 정확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내 삶 가운데 역경을 사용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경은
그것의 원인과 상관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언제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소경도 그랬고,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 앞 바다에서 뒤쫓아 오는 애굽
군사에 의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⑥ 죄의 결과를 피할 수 없도록 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감사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나의 죄를 있는 그대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무서운 해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의 삶에 역경을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역경의 원인이 아닐 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죄가 역경의 원인이 아니고 하나님이나 사단에 의한 역경일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위치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안다.
나는 구원받은 자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다.
나는 성령으로 인친 자다. 주님께서는 결코 나를 혼자 두거나 방치하지 않으신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나를 해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르심 받은 내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라는 확신만 있다면, 역경은 극복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② 우리의 삶에서 역경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역경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는 유치한 기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 자기의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그같은 기도에 대해 그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믿음의 표현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의 약속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역경을 제거해 달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그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통을 감당하고자 하는 자는 그것에 완전히 짓눌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으로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은혜를 매순간 충분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④ 영적으로 자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역경의 순간은 고통을 참는다고 해서 극복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역경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은 점점 더 성숙해질 것입니다.
⑤ 역경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역경이 사단에게서 온 것이든 그렇지 않든 그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역경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역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차라리 이것이 유익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도 여러분, 역경이 사단에게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싸울 힘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싸우게 되고, 그 싸움이 오래 지속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역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역경을 극복하기란 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힘이 있습니다.
⑥ 성경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겪은 역경에 대해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을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별로 원하지 않는 땅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보십시오. 노아는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자신에 대해 얼마나 어리석게 느꼈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실함만은 변치 않았습니다. 이들의 삶을 역경 가운데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물들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역경을 겪을 때 자신만이 겪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역경을 겪을 때, 그 원인만을 찾으려고 하지 미래를 보지 못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역경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역경을 담대히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역경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더욱 강하게 될 것이며,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깊이 역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역경의 성격이나 원인을 찾는데 급급한 삶에서 벗어나 역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삶 가운데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닫는 축복된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3절 말씀은, 마치 나면서 소경 된 것이 하나님의 하실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인 듯이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다는 의미까지는 아니다.
그것은 그 불행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이론을 붙이는 것보다, 불행을 상대하고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다행한 일들만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도 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가지셨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을 보고 피하며 저주하기에 급급하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대하셔서도 자비를 베푸신다.
여기 "일"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복수명사(*)로서 "일들"이란 뜻이다.
이 "일들"은,
(1) 이제 예수님의 고쳐주시는 은혜(그것도 하나님의 일)로 나타났고,
(2) 그 고침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일로도 나타났다.
말쿠스 다즈(Marcus Dods)는 말하기를, "불행(고통)은 하나님의 일을 증진시킨다. 곧, 그것을 극복하는 데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낮"이란 말은 예수님이 땅에 계신 기간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서 영원토록 선을 행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국한하여 하셔야 될 일들이 별도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의미의 사명 실행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그는, 사명 실행의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밤과 같은 일할 수 없는 때가 온 줄 아셨다.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시기는, 낮과 같이 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보다 귀한 시간인 것이다.
기회는 귀하다.
"기회는 오직 한 번만 문을 두드린다"(Opportunity knocks the door only once).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있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비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행위. 2. 히 4:3, 4,10. 3. 표시
맹인과 예수님의 만남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실로암의 기적
사람들의 반응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발병원인에 대해서 제자들이 주님께 한 질문입니다.
그렇게 물은
것은 당시 유대인들은 모든 사고와 불행과 질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욥의 경우 고난과 질병은 그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일어났습니다.
물론 모든 것의 근본원인은 인간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이나 장애의 원인을 전적으로 죄에 대한 징계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회개하여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전혀 다른 답변을 하셨으므로 그것은 잘못된 편견이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맹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주께서 답변하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을 자칫 잘 못 받아 들이면 마치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계획된 불행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말로 해석해서 그런 뉴앙스를 풍기는 것이지, 원문을 보다 정확하게
번역한 라틴어성경이나 그것을 다시 번역한 영어성경을 보면 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보지 못함으로 인해 너희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볼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분의 일을 보이는 것이지, 결코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람을 불행하게 하실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암시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낮은 주님이 세상에 있을 때를 말하고, 밤은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여부가 낮과 밤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있을 때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낮 시간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제 그 바통은 우리에게 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맹인 된 원인을 죄라고 단정하고 그의 죄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인지 밝혀달라고 주님께 주문했습니다.
분명한 흑백논리이며 철저한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른
말입니다.
매사 상관관계를 갖고 그것에 따라 결과를 해석하는 사고를 갖고 있는 그들입니다.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시각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을 갖고 사물을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죄도 아니고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시며 다만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비뚤어진 시각을 교정해주며, 사고의
전환에 동력을 점화시키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극과 도전이 왔을 때 반응하는 것이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과 적용이 달라지는 법이지요.
바둑에 미친 사람은 모든 보이는 물건들이 다 바둑돌이라고 합니다.
한참
당구 치는 재미에 빠진 젊은이는 돈과 시간이 없을지라도 어떻게 되는지 당구장에 갑니다.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보고 사람마다 그 보는 이미지가 다른 것은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사는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관점과 시각을 갖고 성경을 보고 묵상하며 삶에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발상 배경도 그렇습니다.
윤회 사상은 인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고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고 그리스까지도 편만하게 퍼져있었던 환생의 교리라고 합니다. 그것에
따르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그 다음 세대에 그 대가를 치러 불행하게 산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교리가 유대인 민간인들에도 슬그머니 침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랍비들은 극구 반대했지만, 이미 백성들 사이에는 사고와 질병은 전생의 죄 때문이라고 상식화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점을 시정하고자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왜곡된 시각과 관점은 진리를 가리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흙을 이겨 눈 먼 사람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아주 특이한 치료법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건이 나오지만
이처럼 구체적이고 특별한 것은 오직 요한복음에게만 나옵니다.
그냥 말씀만 해도 될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일어나라고 하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주님의
겉옷만 만져도 병 나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그에게는 흙에 침을 뱉어 그의 눈에 부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이고자 함입니다.
흙(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나기를 원해서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기에 그의 아들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흙은 사람을 살리기를 원하시는 생명의 안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진흙이 우리 눈에도 부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상식화되어 뿌리가 깊이 내려진 하나님 아닌 사고와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다 벗겨지기를 소원합니다.
눈에서 그런 비늘 같은 것들이
벗겨져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다시 탄생되길 원합니다.
맹인이 눈을 떠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생명의 빛입니다.
그 빛을 받아 빛 된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태양 빛을 반사하는 달도 밝습니다.
참스승
그리스의 역사 철학자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기록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테네 군관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 청년 장교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와서 자기가 공부한 지식을 장광설로 늘어놓으며 자랑했다.
"우리 선생님이 '언제든지 좋은 사람은 행렬의 앞과 뒤에 세우고 나쁜 사람은 가운데 세우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매우 좋은 가르침일세. 그러나 너희 선생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어떻게 분간하는지를 가르쳐 주더냐?"
이 말에 당황한 청년 장교는 "그것은 안 가르쳐 주셨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돌아가서 네 월사금을 도로 찾아 가지고 오거라."고 했다.
이처럼
선과 악의 구별과 그 판단의 표준을 가르쳐 주지 않은 교육은 어떤 종류의 교육을 불문하고 기본적인 인간교육에 실패한 교육이다.
그런 교육은 사람을 얼치기 바보가 아니면 회의주의자를 만들어 내는 이상의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참 스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 배움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미켈란젤로의 스승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지만, 보톨도 지오바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보톨도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이 되었을 때, 그는 보톨도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의 놀라운 재능을 본 보톨도는 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된다. 너는 네 기술로써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 먼저 분명한 결정을 해야 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가서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구경시켜준 곳은 바로 술집입니다.
“스승님,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어요.”
“이 조각은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술집을 위해서 이 조각을 사용했단다.”
이 스승은 다시 어린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서 아주 거대한 성당으로 가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서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스승의 물음에 어린 미켈란젤로는 세 번씩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 시간, 기회 등 이 모든 것을 무엇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까?
11-01-2024(금) 요한복음 8:52-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Are you greater than our father Abraham? He died, and so did the prophets. Who do you think you are?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Who do you think you are?)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미 아브라함은 죽었는데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가르침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당신이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하므로 군중들은 돌을 들어 치려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테레오( tērĕō. τηρέω)"라는 단어는 십자가 정신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테레오'는 말씀의 동일화(同一化) 또는 육체화(肉體化)라고 하여 그 최종 결과는 성육신(成肉身)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킬 때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 간음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마 5:28).
"퓔라쏘(phülassō. φυλάσσω)"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명령식 방법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킴을 '휠라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는 지킴은 '테레오'라고 합니다.
테레오는 율법을 문자화하여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감추어진 정신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자를 끌고 와서 돌을 들고 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치라"고 하심으로 "퓔라쏘"에서 "테레오"로 군중들을 돌이켰던 것처럼 오늘날도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퀴즈에 정답을 말하고 성구를 암송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발전시켜 성경을 생활화 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생활화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성육신 사건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중심의 신앙에서 삶의 현장으로 말씀의 가르침을 바르게 적용해야 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예언된 메시야로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예언된 메시야는 신적 권위와 왕과 같은 권위와 힘을 갖고 오셔서 억압받는 백성들을 자유케 하는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기대하고 기다렸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대에 어긋난 예수님을 생각할 때 어떤 때는 메시야와 같고 어떤 때는 전혀 메시야가 아닌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하고 예수님에게 돌을 전지려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무려 천년 동안 불교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씨 조선 시대가 시작하면서 주자 성리학을 도입하여 사당과 제사를 강요하면서 오백년 동안 제사문화가 지배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가 전래되면서(1885. 4. 5) 전혀 새로운 방식의 신앙이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땅에 복음이 전래되고 139년이 지나면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사회적인 비난이 물끓듯 일어나는 때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초대교회와 같은 믿음의 공동체로 바르게 세워지는 일에 마음과 뜻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크신 사랑
ㄱ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한복음 5장 : 안식일 배경
6장 : 유월절 배경
7-8장 : 초막절 배경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하는 말에 “너는 사마리아인이다, 귀신이 들렸다!”라고 받아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 논리적인 반발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반발입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혈통이 의심스럽다는 의미이면서 또한 이단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미쳤다, 제 정신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 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혈통 따위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기에 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반박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란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파는 자,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대적인 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논쟁 가운데에서 상당히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시는데, 이처럼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사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듯이,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면 영원한 생명이 보장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영생에 대한 약속을 놓고 비웃고 있습니다.
다시 아브라함이 언급되면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선지자들이 다 죽었는데 안 죽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는데, 이는 “네가 뭔데?”라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는 묘한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 곧 유대인들도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 하나님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말씀하시지 않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결국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주실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그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실 것을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7~8장의 결론이며, 또한 5~8장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을 50년도 살지 못한 네가 어떻게 보았겠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여기서 “내가 있다”는 말은 헬라어 “에고 에이미” 영어로는 “I AM”이라 번역되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게다가 시제조차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는 부정과거시제이고, “내가 있다”는 현재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인데, 그 족보의 시작보다 더 이전에 있었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이 “나는 ~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이 때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무슨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은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는데, 여기서 ‘숨었다’(헬. 에크리베)는 말은 ‘묻혀서’(7:4)와 ‘은밀히’(7:10)에 해당하는 말(헬. 크륍토)과 어근이 같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을 맞아 은밀한 모습으로 성전에 오심으로써 성육신의 신비를 보여주셨고, 또 마지막에 은밀한 모습으로 성전을 떠나심으로써 더 이상 성전에 임재하시지 않고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한 이해력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드러내려 하시며, 그것을 위해 자기 손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오직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닮고,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예수님을 닮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의 이득을 챙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자기 영광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통해 나는 과연 어떻게 주님을 닮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죽음”이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 영벌에 처하게 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강하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예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도 더 큰 자라고 말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53절에서,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유대인들이 이렇게 다시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54절).
그리고 본문 55절에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고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 성경으로 번역했을 때 많은 성도가 루터가 번역한 책이 성경책인지 몰랐던 것과 같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바른 이해가 있어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56절에서, 예수님의 때가 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해주시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도 ‘예수님의 때’를 기다렸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당시 유대 랍비들 사이에서도 아브라함이 메시아의 때를 본 것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나의 때’가 ‘메시야의 때’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구원자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아브라함에게 먼저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100세에 낳은 귀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곳으로 가서 번제로 제단에 바쳐야만 했습니다(창 22장).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막으시고, 예비하신 숫양 한 마리를 제사의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중한 아들까지도 희생시키려고 했기에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셔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아브라함은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이삭을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골고다와 동일한 장소였습니다.
30세 초반의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니까 유대인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본문 57절에서,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8절 하반절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아멘.
“내가”라는 영어(I AM)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I AM WHO I AM)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표현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심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도 먼저 계셨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주장과도 같은 발언이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대인들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신성모독 발언들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돌을 집어서 예수님을 향해 던지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셨던 예수님은 재빠르게 성전을 빠져나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을 거절했던 겁니다.
하나님을 거절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사탄의 거짓 진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게 만드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이러한 거짓 진리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는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속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속입니다.
세례를 받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줄 믿습니다.
집 안에서 주인과 종이 같이 살아도 종은 상속권도 없고 혈통을 이을 자격도 없습니다.
죄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보혈의 피를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고,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갖고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 속에서 마음의 평강과 기쁨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명화 속 예수의 진짜 얼굴은?
예수도 비켜 가지 못했던 외모 지상주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8년
위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에 그린 너무도 유명한 벽화, '최후의 만찬'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그림에서처럼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와 녹갈색, 혹은 파란 눈을 가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백인이다.
몇 년 전, 영국 BBC 다큐멘터리 '신의 아들(The Son of God)'이
공개한 전혀 예상치 못한 예수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적잖이 충격을 주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귀티나게 잘생긴 얼굴이 아닌 농민이나
노동자 계층의 서민적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영국의 법인류학자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재현한 예수는 키 153㎝,
몸무게 50㎏의 검고 짧은 머리카락과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진 거칠고 투박한 생김새의 남성이었다.
신약성서 기록을 참고하고 1세기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셈족(유대인) 유골과 고대 시리아 프레스코화를 컴퓨터 이미지로 합성, 분석한 결과라고 한다.
현대 법인류학적 분석과 컴퓨터 합성에 의해 재현된 예수의 얼굴(출처 Wikipedia)
이 이미지를 따른다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예수의 외모는 완전한 허구다.
사실 2,000년 전 중동지역 유대인은 어두운 올리브색 피부, 갈색 눈, 검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고, 당시 유대사회에서 남자의 긴
머리는 수치로 여겨졌다.
예수 역시 짧은 헤어스타일에 그 시대의 보통 유대인 외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직업이
목수였으므로 육체 노동자의 다부진 체격을 가졌을 가능성도 많다.
귀족같이 기품 있고 부드러운 모습은 오랫동안 그림과 조각을 통해,
최근에는 상업영화들을 통해 심어진 이미지일 뿐이다.
물론 재현된 예수의 얼굴이 진짜 그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동안 수많은 미술가들이 그리고 조각해온 미술작품 속 예수보다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예수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왜 이렇게 오랫동안 왜곡된 모습이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2세기경 로마시대 모각 벨베데레 아폴로(출처Wikipedia)와 3세기 로마 산 칼리스토의 카타콤베 벽화의 예수(오른쪽)
초기 기독교 교회는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했다. 예수의 형상 대신 그를 뜻하는 물고기나 십자가, 빵과 포도주 등의 상징물을 사용했다. 그러나 3세기경에는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베 벽화에서 양을 어깨에 매고 있는 '선한 목자'로 표현된 예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예수는 수염이 없는 젊은이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리스 로마 미술의 아폴로 형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인물이 몸무게를 한쪽 다리에 싣고 다른 쪽 다리는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있는 자세)라든가 로마의 토가를 연상시키는 옷 주름에서도 고대 조각상의 영향이 엿보인다.
2세기경 로마 시대 제우스상(출처 British Museum)과 6세기 이집트 시나이 산의 성 가타리나 수도원의 벽화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오른쪽)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경부터 조각상을 통해 신을 숭배하는 고대 그리스 로마 전통이 점차 비잔틴제국의 동방교회에서 뿌리를 내렸다. 비잔틴 예술가들은 예수를 묘사하기 위해 로마 판테온 신전의 주피터나 넵튠같이 더 강력하고 성숙하며 권위 있는 신들의 모습을 차용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위엄있는 제왕, 혹은 우주의 지배자로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은 아폴로의 모습에 긴 머리와 턱수염을 가진 좀 더 나이 든 신들의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6세기경에는 어깨 길이의 장발과 수염이 있는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Christ Pantokrator)’가 등장했고, 이후 비잔틴제국과 서유럽의 중세미술에서 관습적인 예수의 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는 ‘전능한 그리스도’라는 뜻으로 오른손으로는 하늘과 땅을 축복하고 왼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있는 이콘(Icon: 도상)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공식적인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의 딱딱한 도상에서 벗어나 인간적이고 개성 있는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적 가치를 중시한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배경으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남성미가 넘치는 근육질 예수,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우아하고 이상적 아름다움을 지닌 예수가 등장한 것이다. 여전히 르네상스 미술가들의 예술적 영감의 근원도 고대 그리스 로마였다. 예외도 있었지만, 예수 역시 고대신화 속 올림포스 신들의 조각상을 본뜬 수려한 남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다 당대 유럽인 자신들의 외모가 일부 투영된 것은 물론이다. 서구에서 르네상스 문화예술은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르네상스 미술작품 속 예수의 이미지 역시 이후 미술사에서 면면히 이어졌다.
워너 샐먼의 ‘그리스도의 머리’(왼쪽)와 영화 ‘나사렛 예수’의 이미지(출처 Wikipedia)
20세기 미국의 상업 미술가 워너 샐먼이 그린 흰 피부, 긴 머리, 푸른 눈을 가진 예수의 초상도 이런 미술사의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샐먼의 그림은 개신교, 가톨릭교회와의 파트너십 속에서 카드, 스테인드글라스, 달력, 유화작품 등의 매개체를 통해 상업적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친근하고 달콤한 예수의 이미지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심지어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나사렛 예수',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 영화에서는 늘씬한 훈남 예수들이 등장하면서, 패션쇼 런웨이에 나타날 듯한 팔등신 꽃미남으로 변신했다.
BBC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예수의 외모는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합리적으로 추론해 볼 때 역사적 개연성이 높다. 성서의 이사야 53장에도 그의 용모에 대해, ‘아름다운 모습이나 위엄있는 풍채가 없어서 흠모할만한 것이 없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멋진 외모를 가졌든 작은 키에 볼품이 없었든 간에, 그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성인이자 스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떠올리는 예수의 전형적인 모습은 우리가 원하고 보고 싶은 형상이며, 이것이 미술에 반영되어 왜곡된 이미지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신의 아들 예수도 집요한 외모 지상주의를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욕망은 물욕, 권력욕, 명예욕과 함께 인간이 가장 버리기 힘든 우상숭배의 한 유형인지도 모른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예수의 얼굴을 그린 화가들
현재도 전 세계 가장 많은 지지자를 거느린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를 직접 목격 했거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말보다는 눈빛이 먼저라는 메라비언의 법칙과는 달리 작금의 예수를 따르는 지지자들은 그의 이미지보다 그의 말과 가르침에 매료된 사람들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전무후무한 인물인 생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화가들이 예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붓을 휘둘렀다.
이들 중 사랑받는 예수의 그림을 그린 몇몇의 화가를 간단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요한 마이클 페르디난도 하인리히 호프만
독일 출신 화가인 ‘하인리히 호프만(John Michael Ferdinando Heinrich Hoffman 1824-1911)’는 또 다른 독일 화가 루트비히 폰 호프만의 삼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예수는 물론이고 1889년에 그린 ‘그리스도와 부자 청년’은 성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 예수에 관한한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려온 덴마크의 ‘카를 하인리히 블로흐(Carl Heinrich Bloch 1834년-1890년)’.
그는 렘브란트의 미술 작품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예수의 모습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화를 그렸다.
그의 미술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1865년부터 1879년 사이에 제작,
프레데릭스보르 성의 예배당에 전시된 예수의 생애를 소재로 총 23편의 작품이 있다.
하인리히 블로흐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
델 파슨
델 파슨(Del' Parson 1948년 출생)은 미국의 화가로서
1983년에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Latter-day Saint)로부터
그의 첫 번째 예수 초상화인 "붉은 로브의 그리스도"를 그리도록 의뢰받아
3차례에 걸쳐 비로소 완성된 그림을 내놓았다.
그가 그린 예수 그림이 공식 이미지로 인정받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는 교회의 요청을 지속으로 받아들여 성경뿐만이 아니라
몰몬경에 나오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 240여점을 그리기도 했다.
델 파슨이 그린 예수 그리스도(미소지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후기성도
화가였던 델 파슨에게는 특별한 스토리가 있었다.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그는 임무에 전율과 영예로움을 느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안에 그는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는 큰 만족을 느끼며 그림을 포장해서 십이사도 정원회에 보냈다.
몇
주 후 파슨형제는 십이사도 중 한 분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 편지에는 그림을 보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있었으며, 또한 그 그림이 그리스도의 실제 모습과 다르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려 달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이전
경험으로 인해 그 형제는 겸손해 졌으며, 자신을 더욱 잘 준비 시킬 수 있었다.
많은 기도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두
번째 초상화도 곧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림을 보낸 몇 주 후 십이사도로 부터의 연락이 있었다.
이번 작품이 더욱
훌륭하며,구세주의 실제모습과 더욱 비슷하지만 역시 충분치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파슨형제는
더욱 겸손해졌으며, 많은 금식과 기도를 했다.
그는 가능한한 영과 구세주에게 가까와 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파슨 형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리고싶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영을 갖기를 원했다.
이전에는 영예로운 임무를 받은
것에 대한 명예, 자랑으로 여겼었지만, 이제 그는 그 일에 대한 중요성과 책임감으로 자신을 가득채웠다.파슨 형제는 세번째 구세주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초상화는 십이사도 정원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모습으로써 받아 들여 졌으며, 이 그림은 모든 공식 교회 간행물에 사용되고 있다.
파슨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의 경험들을 교회의 여러 모임에서 소개했다.
처음 임무를 지명받았을 때의 느낌과 첫
번째 그림을 발송하기까지의 일들을 전해 주었다.
또한 어떻게 첫 번째 그림이 거절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그림에 관한 이야기도 역시 전해 주었다.
이런
경험이 전해졌다.
한 특별한 노변의 밤 모임에 14세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 소녀는 7살때 교통사고로 부모가 사망하는 무서운
교통사고의 경험이 있었다.
그 소녀와 부모는 어느 늦은 날 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도로를 이탈하는 사고를 당하였다.
앞
좌석에 앉아 있던 그 소녀의 부모는 그 즉시 사망을 했다.
그 소녀는 다음날 아침 뒷좌석에 혼자 앉아 있는 채로 발견 되었으며,
단지 가벼운 상처만 있을 뿐이었다.
이
사고는 그 소녀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소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는것을 발견했다.
소녀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하지 않았으며, 말도 거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소녀는 한 후기 성도 회원의
가족에 입양 되어 있는 중이었다.
파슨
형제가 세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그 소녀는 초상화 앞으로 달려 나갔으며, 그 초상화를
가리키며 “ 바로 이 사람이야!, 바로 이 사람이야!”라고 소리쳤다.
그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그 소녀를 입양했던 어머니가 달려
나가 그녀를 안으며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어 보았다.
그 소녀는 대답했다.
“나는 이 사람의 이름을 모르지만, 이 사람은 나의
부모님이 죽던 날 밤 차 안에서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예요.”
또
다른 이야기는 솔트레이크 시 한 와드 간증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한 자매님은 그녀가 가르치던 초등협회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했다.
몇 년 전에 그녀의 조카는 다섯 살 때 그의 아버지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는 어머니를 목격했다.
그는 아버지가 총을
꺼내어 어머니를 살해할 때 그 곳에 같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갑자기 죽음을 당한 그의 어머니와 함께 방안에 가두고 방을 잠가 버렸다.
한 이웃집 사람이 어머니의 실종에 관해 의문을
갖게 되었을 때, 그 둘은 발견 되었고 그 때에서야 그곳을 나올 수가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을 그 경험으로 인해 마음에 깊을
충격을 받았다.
그 소년은 비록 교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그 자매와 그의 보모에 의해 그녀가 가르치는 주일학교에 참석하게 되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그 자매는 아이들을 둥그렇게 모이게 해놓고 개개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보여 주며, 이 분이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
그 자매가 그 소년에게 다가왔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 째 질문을 했을 때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자매는 그 소년이 그림속의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세 번째 질문을 하였다.
소년은 대답하기 시작했다 “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르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을 때, 나를 팔로 안아주고 있던 사람이예요.”
10-31-2024(목) 요한복음 8:45-5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말을 지키면(51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I tell you the truth, if anyone keeps my word, he will never see death.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죽음이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내 말을(로고스) 지키면(테레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내 말을 지키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첫째는 내 말을 지키라
둘째는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되리라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에서 지킨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은 내 말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지키려면 말씀의 가르침따라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을 내가 살아가는 것같지만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내 말을 지키라는 말씀은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라는 교훈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은 생명의 주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몸이라고 말하지만 내 몸이라면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 나의 몸입니다.
예를 들면 내 손톱과 발톱이 자라서 정리해야 할 때마다 손톱과 발톱아 자라지 말아라 이렇게 명령하면 내 것이므로 내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손톱과 발톱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반드시 영적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죽음은 없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사망의 그늘이 짙은 이 세상에서도 평강의 삶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은 짧은 생명을 걸고 긴 생명 즉 영생을 얻는 과정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포기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헌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습니다.
한번 뿐인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살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미래를 준비하고 인도하시는 분은,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의탁하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길이 없습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따라 순종하므로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유대인의 말씀 지킴 vs 예수님의 말씀 지킴
분명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그 지킴이와,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지킴이 사이에는 뭔가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51절에 말씀하시는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의 “지키다”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이것의 의미에 관하여 먼저 생각을 하고자 합니다.
51절. 지키다(테레오), 보다(쎄오레오)
52절. 지키다(테레오), 죽음을
맛보다(게우오마이, 경험, 즐기다),
55절. 지키노라(테레오),
56절. 보다(호라오), 볼 것을(호라오),
57절. 보다(호라오)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 초막절 설교를 하시면서, “믿음” 나를 믿으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그
믿음이 이제 8장 마지막에 와서는 “내 말을 지키고 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9장으로 가면서 “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믿음 - 지킴 - 봄
7장의 예수를 믿는 믿음
8장에 의하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며,
9장에서는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란, 영적으로 그 말씀을 보는 것이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손에 돌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자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키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 사이에는 뭔가 차이가 있다는 것이며, 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 이야기를 생각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장 17절에서“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을 지키라(테레오, τηρέω).” 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계명을 말씀하십니까? 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사랑하라.
이러한 것들이라. 청년이 예수의 말을 듣고, 선생님, 제가 당신께서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19:20, 퓔라쏘, φυλάσσω).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네가 온전하여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자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테레오(τηρέω) vs 퓔라쏘(φυλάσσω)
τηρέω 스트롱번호 5083
-
관련 성경 / 지키다(마 19:17, 마 28:4, 딤전 5:22, 계 3:3), 지키게 하다(마 28:20), 두다(요 2:10, 12:7), 보전하다(요 17:11, 15), 갇히다(행 12:5), 간직 하다(벧전 1:4), 구류하다(행 25:4), 지켜주다 (행 25:21), 그대로 두다(고전 7:37), 조심하다(고후 11:9), 보전되다(살전 5:23), 예비되다(유 13).
φυλάσσω 스트롱번호 5442
-
관련 성경 / 지키다(마 19:20, 행 12:4, 갈 6:13), 물리치다(눅 12:15), 보전하다(요 12:25, 벧후 2:5), 피하다(행 21:25), 주의하다(딤후 4:15), 삼가다(벧후 3:17), 보호하다(유 1:24).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
1. 구경하다, 보다, 관찰하다, 인지하다, 마27:55, 막15:40, 눅14:29, 23:35, 요6:40, 계11:11,12, 바라보다, 마28:1, 주목하다, 막3:11, 5:38.
-
2. [마음이나 영으로 깨닫는 것]
-
a. 깨닫다, 감지하다, 관찰하다, 발견하다, 요4:19, 12:19, 행4:13, 28:6, 히7:4등.
-
b.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사람을 영적으로 인지함] 요14:17,19, 17:24.
-
c. 경험하다, 요8:51.
-
-
관련 성경 / 바라보다(마 27:55, 막 15:40), 보다(막 3:11, 눅 10:18), 구경하다(눅 23:35, 계 11:12), 생각하다(히 7:4).
이
대화 내용을 정리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지키라고 하니까, 청년은 네 저는 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동일합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니까, 예수께서 원하는 지킴은 테레오 였고, 청년이 지킨 것은 퓔라쏘 였습니다.
두 사람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 그것을 지키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젊은 유대인 청년이 생각한 “지킴(퓔라쏘) 방식”은 말하자면 군대식 지킴 방식입니다.
전투적 지킴 입니다.
눈으로 감시하는
것입니다.
보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눈으로 감찰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감찰하고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손해가 가지 않도록,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소극적으로 보호하고, 감시하는, 그래서 복종하고 순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퓔라쏘의 방식은 시키면 시킨 것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으니, 그 율법만을 바라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통해서
율법을 묵상하고 읽어야 하는데,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율법 그 자체만을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퓔라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부정적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7절에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퓔라쏘)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에 나오는 지키다는 “퓔라쏘” 입니다.
즉, 퓔라쏘 안 한다고
해서 내가 그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말씀을 테레오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 말씀 지킴이 방식은 “테레오” 였습니다.
이것은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하여 묵상하여 저장하고,
조심스럽게 섬기고 시중들고 돌보는, 그래서 바라보면서 끝까지 보호하는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상대와의 만남이
있는 지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τηρέω),
테레오 한다는 의미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그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관찰하고, 묵상하여 내 마음에 저장하여, 말씀 그분의 정확한 뜻을 읽어내어 섬기고 시중들며 끝까지 보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테레오’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품는다는 것이며, 내 삶으로 그 말씀을 온전히 담아내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테레오. τηρέω)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요 14:21).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τηρέω)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다’(요일 2:4)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τηρέω)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τηρέω)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테레오’(τηρέω)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샤마르’(שמר)인데 ‘울타리 치다, 지키다, 보존하다, 지키다, 보관하다, 축하하다, 책임지다,
구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솨마르’(שמר)를 파자하면 ‘분석된 진리의 말씀으로 시작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창세기 2장
15절에 등장.
타락하기 이전에 그들에게 부탁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שמר) 하시니라’(창 26:5)는
말씀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항목 하나 하나를 모두 지켰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에 두었고 자기 마음으로
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שמר)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예수님
역시 하나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 분의 하나님 말씀 지킴 방식은 십자가 방식이었습니다.
퓔라쏘하여 소극적으로 하나 하나
따지면서, 그대로 기록된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었으니까,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당신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십니까?
묻는 태도에서 시작합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의 매일의 교제 가운데서 그 말씀 지켜내는 방식으로 말씀을 지켜 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자기 내부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으로 동일화 즉, 육체화시켜가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의 사건입니다.
성육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하나님 말씀 지킴은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모든 영적 재산을 내어주기까지 하면서, 남을 살리는 방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말씀 지킴 방식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신적 사상을 단순히 전달하는 말이 아닙니다.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 성육하는 말씀이며, 또한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 지킨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육화 되어가는 것을 의미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과 세상이 요구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 삶이 우리 교회가 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세상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퓔라쏘 하기를 원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니까 말입니다.
당장 경건한 것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당장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예수를 향해서 돌을 든 사람들은 자기들은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 퓔라쏘 하는 사람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퓔라쏘 식으로 보고, 믿고, 지키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손에는 분명 돌이 들려져 있을 것입니다.
퓔라쏘 식의 교회는 군대식으로 일사불란하게 잘 움직이며, 뭔가 성공한 것 같고, 부흥한 것 같고, 자기들만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잘 진행되어 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곳에서 떠나십니다.
우리는 퓔라쏘해서는 안됩니다.
테레오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테레오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도 51절에 말씀하시지만, “내 말을 테레오” 하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말” 예수의 말로 테레오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말씀, 십자가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테레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라는 방식입니다.
사람을 정죄하기 이전에, 나에게도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이웃을 정죄하기 이전에, 나를 살피고, 이웃을 살피는 일입니다.
돌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돌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방식의 하나님 말씀 지킴이가 없는 곳에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59절에, 두 개의 동사에 주목 하시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숨기십니다.
또 하나는 성전에서 나가시더라. 즉 떠나가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숨기는 것과 성전에 떠나가는 것은 다른 동사이지만, 숨기는 것은 떠나는 것이고, 떠나는 것은 숨기는 일입니다.
회당에서 나가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성전에서 나갑니다.
이가봇의 사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이가봇 사건을 기억합니다.
습관적인 제사 예배 생활과 하나님 말씀 지킴이는 이가봇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방식으로 말씀을 지키며 십자가로 살아가는 영혼들을
기뻐하시는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퓔라소의 의미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며”(유 24).
저자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을 향하여 위로와 기도로 권면합니다.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다”는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공동번역)는 뜻입니다.
보호하다, 지키다는 군사적으로 경계하여 안전을 지키다, 따라서 눈동자같이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퓔라소’(φυλάσσω)를 번역한 것이며, “거침이 없다”는 비실비실하여 넘어지지 않는, 또는
엇나가서 실수와 죄를 범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아쁘따이스또스’(ἄπταιστος)를 번역한 것입니다.
세상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것 같습니다.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한 길을 걸어가는 것 같아서, 우리의 마음이 더욱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자들을 향하여, 저자는 용기와 위로 가득한 권면의 말을 심어 줍니다.
결단코 넘어짐이 없도록 지금도 경계 보초를 서시고 계신
주님께서 마침내야 우리를 “기쁨으로 설 수 있게”(24) 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찬 소망입니다.
이 희망 가득한
기쁨으로, 오늘도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웃들과, 그들을 보살피는 의료진들과,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 수고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
예수님이
구원자시며, 신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제압하신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헐뜯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다, 귀신 들렸다!
주님은 이들에게 반박하십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를 믿으면 죽음을
보지 않아!
나는 너희의 죽음을 해결하러 온 구세주야!
나는 너희를 죽음에서 구원할 메시아야! 51절을 보세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진실로 진실로’의 귀절입니다.
본문 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구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내 말을 지키면’
지킨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킨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내 말을
지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내 말’(τον εμον λογον)의 뜻은 ‘주님의 모든 말씀’ 곧, 구원
도리인 복음과 윤리적 교훈들을 총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주님이 전하신 말씀 전체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이 쓴 글에 보면 ‘지킨다’는 동사가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18번, 요한1서에 7번, 요한계시록에 11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이란, 곧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15,23)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 종교 개혁자 죤 칼빈은 본문에 “지킨다”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당나귀처럼 목이나 꺼떡거려 찬성을 표시하거나, 혀로 공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보물처럼 그 가르침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기는 것은 곧 주님을 믿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당연히 그의 말씀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 지킬 것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선전하는 사람이나, 주님의 말씀이 다 옳다고 찬성하는 사람이 참 신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참 신자입니다.
둘째로, 죽음을 보지 않는다(never see death)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 표현이 좀 색다릅니다. 죽는다는 말입니까?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죽음을 보지 않는다 하니까 당장 유대인들이 대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52) 유대인들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을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죽었고, 위대한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예수 당신이 누구기에 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가? 예수 자신이 죽지 않는 것도 이상한 데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보지 않는다’ 하니 무슨 말인가? 다른 사람들까지 죽지 않게 한다는 말이 아닌가?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영적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즉시 그 영혼은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모든 형벌을 면합니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적 신분의 회복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영혼 구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죽음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 된 질문을 합니다.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 주님은 영적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비록 육신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죽음에 집중하지 않고 생명에 집중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내다보고 안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never see death)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never taste of death)는 말로 오해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볼 필요도 없고,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장차 다시 사는 부활만 보고 기뻐하며,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만을 누리면서 삽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영생을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먹으면 어떤
사람이든지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고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갈등이 생기는 것은 작은 머리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무한하고 영원하신 창조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와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분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가 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만 진리가 아닙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것이 세상입니다.
내가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손바닥뿐입니다.
만지지 못하고 느낄 수 있는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자연 세계보다 더 넓은 것이 영적 세계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육의 존재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간 육체의 한정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
1. 지켜보다, 감시하다, 파수하다, 마 28: 4, 행 12:5.
-
2. 지키다, 간직하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요 2:10, 행 25:21, 고전 7:37, 딤전 6:14, 벧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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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지하다, 붙들다, 엡 4:3, 딤후 4:7, 유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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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호하다, 요 17:15, 계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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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준수하다, 준행하다, 지키다, 유의하다, 마 23:3, 요 14:15, 계 12:17, 22:7.
관련 성경 / 지키다(마 19:17, 마 28:4, 딤전 5:22, 계 3:3), 지키게 하다(마 28:20), 두다(요 2:10, 12:7), 보전하다(요 17:11, 15), 갇히다(행 12:5), 간직 하다(벧전 1:4), 구류하다(행 25:4), 지켜주다(행 25:21), 그대로 두다(고전 7:37), 조심하다(고후 11:9), 보전되다(살전 5:23), 예비되다(유 13).
10-30-2024(수) 요한복음 8:37-4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38절)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I am telling you what I have seen in the Father's presence, and you do what you have heard from your father.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란 말씀은 내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너희 아비는 너희 육신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아버지어와 아비라는 헬라 단어는 "파테르(patēr. πατήρ)" 라고 합니다.
'파테르'라는 단어는 "아버지" 또는 "조상"이란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본 것(호라오. hŏraō. ὁράω)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들은 것(아쿠오. akŏuō. ἀκούω)를 이야기 합니다.
본 것과 들은 것의 차이를 "호라오"와 "아쿠오"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호라오와 아쿠오의 차이에 따라 증인의 자격이 결정됩니다.
증인이란 들은 것이 아니라 본 것이 분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참된 것도 들을 수 있지만 소문에 의한 거짓된 것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 것은 정확하고 분명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부터 온다는 것은 만물 위에 계신 것을 말합니다(요 3:31).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약 3:17).
그러나 땅에서 난 것은 시기와 다툼으로 나타납니다(약 3:14).
이러한 것들은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이므로 요란하고 악한 일이 자주 일어날 뿐입니다(약 3:16).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합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행동하라고 깨우치셨습니다.
육신적으로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고집하지 말고 온전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 위하여 영적으로 깨어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선택하셨던 예수님처럼 영광과 번영의 휘황찬란한 길이 유혹할지라도 그 길을 떠나 고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물욕에 눈이 어두워진 선지자 발람처럼 당나귀에게 책망을 받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비록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지날지라도 착하고 충성되다는 칭찬을 듣는 믿음의 사람으로 꿋꿋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우리의 눈을 들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하시갖추시줄이쉬그것을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하면서도 아브라함처럼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부라함
본 것(3708) 호라오(hŏraō) ὁράω
들은 것(191) 아쿠오(akŏuō) ἀκούω 스트롱번호 191
아버지, 아비(3962) 파테르(patēr) ατήρ, πατρός, ὁ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 이 말씀도,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은, 역시 그들과 예수님과의 영적 차이점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더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셨던 예수님과 일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불일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현재에도 하나님 아버지 곁에 계셔서 그의 보시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하여(말씀하여) 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곧, 마귀)에게 들은 것을 행하였다.
예수님의 역사는, 모두 다 계시를 목적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언행이 "말씀하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언행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이 다 죄악이다.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돌보신다)
그 천사가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물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는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면서 이렇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내가 네 자손을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불어나게 하리라."
야훼의 천사는 다시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공동번역 창세기 16:8-11
구약성서 창세기와 쿠란에 등장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의 서장자이다.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이다. 쿠란에 기록된 바에 따라 이슬람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여기며 아랍인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가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교회의 회개를 외치며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의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개혁교회는 이 날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다짐하는 기념일로 삼았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도 부패한 유대교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7장으로부터 시작된 초막절 전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행적 중에서 열한 번째 단락으로,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에 있었던 ‘아버지 논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37절의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유대인들은 누구에게든지 자랑할 만큼 훌륭한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창 12:1-3).
그리고 믿음을 의로 인정받았습니다(창 15:6, 롬 4장).
선한 일을 하거나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여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신 첫 사람이었습니다(갈 3:6-9).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롬 4:16).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모세, 다윗, 다니엘과 같은 주옥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둔 믿음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당시는 ‘화려한 성전’, ‘끊이지 않는 제사’, ‘수많은 종교지도자들’ 등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신앙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이처럼 탄탄한 신앙 전통을 가졌음에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그들은,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며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율법, 곧 성경을 함부로 왜곡하여 수많은 신앙의 전통과 규례를 만들었고, 그렇게 왜곡된 전통과 규례를 맹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자 사탄이 그들의 육체적인 욕구를 제물 삼아 그들의 영적인 눈을 흐리게 했고, 그들의
영적인 눈이 멀어지게 되자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유대인들의 영안을 멀게 한 도구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만들어 온 ‘신앙의 전통’이었습니다.
사탄은 유대인들의 탐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보다는 형식적인 신앙의 전통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그를 통해 교만한 마음에 빠지게 했습니다.
자신들은 회개할 죄도 없고, 죄사함을 받을 필요도 없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사탄에게 깊이 미혹 당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앞서 회개를 선포한 ‘세례 요한’을 외면했고,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믿음의 권고에도 귀를 막았습니다(마 11:12-19).
여러분, 신앙의 전통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매우 중요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신앙의 전통이 외적인 형식에 머물게 될 때에는 “사탄이 강력하게 역사하여 오히려 멸망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훌륭한 신앙 전통을 지닌 가문 출신도 있고, 또 교회를 위해 큰 헌신을 하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점이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러한 복된 일들이 오히려 자신을 넘어뜨리는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먹잇감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많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기도로만 영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라고까지 고백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삼상 12:23)
그리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1:9에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고백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과거의 신앙의 자랑거리, 지금 가지고 있는 많은 은혜의 선물이 참으로 소중하지만,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오늘 이 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전통이나 받은 은혜를 가슴 깊이 품고 감사하되 “나는 과연 진리 안에 거하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하며 하나님의 뜻에 더욱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38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이려고 하는 원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여기서 ‘너희 아비’는 유대인들의 조상들을 지칭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유대인의 조상 중에는 휼륭한 믿음의 조상이 있었던 반면,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상숭배를 일삼고 온갖 죄에 물든 조상들이 더 많았습니다(마 24:29-36).
그들은 율법, 곧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악행을 저질렀는데, 특히 ‘신·구약 중간기’ 또는 ‘침묵기’라고 칭하는 주전 400년경부터 성경 해석과 주석에 대한 많은 책들을 임의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성경보다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인본주의적인 종교 규례를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가 고난받는 종으로 오신다”는 성경의 예언도 모르고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믿지 못했습니다(사 53장).
그들은 인본주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들은 것으로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도 성경보다는 성경을 해석한 글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각 교단들 마다 자신들의 신학을 가지고 있고, 강조하는 부분이나 해석도 조금씩 다릅니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많은 성도들은 성경을 직접 읽는 것보다 그렇게 해석된 말씀을 듣고 읽는 것을 더 좋아하고 신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넘쳐나는 교리와 신앙 서적 중에는 인본주의에 물든 글들이 너무나도 많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와 다르지 않을 만큼 ‘풍요의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푯대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평안과 풍요를 이루기에만 급급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공로를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누리려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제자 삼으신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은 자로서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심인데, 예수님의 공로를 누리기만
할 뿐, 예수님께서 주신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성도들이 넘쳐나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로서 자신의 삶의 자리가 어디이고, 그 삶을 통해 어떠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복을 누리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서의 복을 추구하고 누린 자들은 하늘나라에서의 상급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6:1-21).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의 복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사용함으로 ‘하늘의 복을 쌓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42, 마 19:21, 마 28:18-20).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사탄의 달콤한 미혹에 빠진 목회자들에 의해 교묘하게 왜곡되어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처럼 ‘풍요의 신앙’으로 성도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이 시대의 신앙의 척도로 자리 잡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 만일 이 땅에서의 복을 받는 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라면, 믿음의 본이 되시는 우리 예수님은 왜 그렇게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세상의 복을 조금만 인정하고 받아들이시면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지도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셨기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마 8:20)
그러나 그럼에도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복을 버리고 고난의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마음껏 누리되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마귀의 미혹에 빠져 죄의 도구로 삼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 자녀들은 더욱 마귀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슴에 품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에 힘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39-43절에 유대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라고 반박하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44절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리고 47절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너무나 분명하고 단호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알든 모르든 사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했던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마귀의 자녀’요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6:60 절의 말씀처럼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요 6:66).
그런데 그들은 반대로 사탄의 말은 매우 잘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려던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수많은 인본주의적인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탄의 미혹에 아무런 저항없이 따랐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도 잘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능력은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이미 사탄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미혹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잘 이해하고 듣는가에 따라 그 소속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요 10:4-5).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들은 누구의 말을 더 잘 이해하고 따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불의와 죄와 불신앙을 조장하는 사탄의 미혹입니까?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반대로 사탄의 미혹에 빠져 살고 있는지 살펴보면 현재 자신의 영적인 소속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사탄에게 미혹되어 타락한 원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은 무조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맹신하며, 조상들로부터 시작된 인본주의적인 종교 규례를 신앙의 근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사탄을 대적할 힘을 상실하고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님을 믿기에 무조건 천국으로 갈 것이며,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오늘 본문의 유대인의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계명도 불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탄으로부터 지켜주실 줄 믿는다면 이 또한 유대인들의 맹신과 다름이 없습니다(요 14:21).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린도전서 4장에서 예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세상 죄악에 물든 고린도 교회의 몇몇 성도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여러분, 사탄은 오늘도 끊임없이 성도를 타락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한순간도 육체의 정욕과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교훈의 말씀을 기억하고, 매일 같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사탄의 미혹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고전 10:12).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사탄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유념하고, 예수님의 계명과 언약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사탄과 싸워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가르침만을 따름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참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난 과거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소중하지만,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오늘 이 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임을 가슴 깊이 깨닫습니다.
받은 구원에 안주하며 주신 복을 누리기에만 급급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힘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축복된 삶을
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0-29-2024(화) 요한복음 8:31-3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 내 제자(3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To the Jews who had believed him, Jesus said, "If you hold to my teaching, you are really my disciples.
한글개역성경에서 "구원"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은 530구절입니다.
반면에 "번성"이란 단어가 사용된 말씀은 64구절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살펴볼 때 성경이 우리들에게 강조하려는 것은 세상적인 번성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 내 제자는 세속적인 번성을 추구하는 일군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군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내 날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거하다는 헬라 단어는 "메노(mĕnō. μένω)"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메노'가 사용된 말씀을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10: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거하다(메노. mĕnō)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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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동사] 남아있다, 머물다, 머물러있다, 살다, 거주하다, 투숙하다, 요 1:38, 행 9:43, 딤후 4:20, 그대로 남아있다, 요 19:31, 영존하다, 존속하다, 요 12:34, 히 7:24, 고전 15:6, 남아있다, 마 11:23, 고전 3:14, 고후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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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동사]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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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람이] 기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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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위험이] 기다리다, 위협하다, 행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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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법설명 / 기본형] 미완료형 ἔμενον, 미래 μενῶ , 제1부정과거 ἔμεινα, 제1부정과거명령 μ εῖνον , 과거완료 μεμενήκε- ι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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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기본형] 미완료형 ἔμενον, 미래 μενῶ , 제1부정과거 ἔμεινα, 제1부정과거명령 μ εῖνον , 과거완료 μεμενήκε- ι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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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머물다(마 10:11, 요 1:32, 행 21:8, 딤후 4:20), 유하다(막 6:10, 눅 24:29), 거하다(눅 8:27, 요 8:35, 요일 2:27), 계시다(요 1:38, 2:12, 히 7:24), 머물러 있다(요 3:36), 붙어있다(요 15:4), 두다(요 19:31, 행 5:4), 붙다(행 27:41), 지내다(고전 7:8, 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 13:1).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10: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히브리서 13: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히브리서 12: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48,52,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제자가 되려면 가르침의 말에 거해야 합니다.
거한다는 헬라 단어는 "메노(mĕnō. μένω)"라고 합니다.
'메노'라는 단어의 속 뜻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안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만일 말씀 밖으로 나가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불순종을 말합니다.
따라서 순종하는 신앙은 제자가 되려는 믿음이지만 불순종하는 것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자가 되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계산해 보면 얼마나 어려운가를 짐작케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3년을 날 수로 환산하면 1,095일 입니다.
3년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26,280시간 입니다.
일주일 동안 몇 시간을 예배와 기도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지내고 있습니까?
만일 하루에 한 시간이라고 하면 일주일에 일곱 시간입니다.
일주일에 7시간은 일년동안 364시간이 됩니다.
26,280시간을 364시간으로 나눈다면 대략 72년이 소요됩니다.
72년 동안 단 한번도 단 한 시간도 실수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씀대로 순종해야 겨우 제자가 될 수 있는 시간의 양을 채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고 가르침과 삶을 배웠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력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제자가 되려면 먼저 성령의 도움을 절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 성령의 이끄심을 받기 위하여 끈질기게 간구하며 부족함을 채워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 "자기를 믿은"이란 말은, 아직 구원 받는데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사실은, 여기 나타난대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변론에 있어서 여러가지 좋지 못한 언행을 취한 것을 보아서도 알려진다.
40, 48, 52, 59 절 참조. "내 말에 거하면" 이란 말은 계속적으로 신앙함을 가리킨다.
파스칼, 공아(空我)와 진아(眞我)
147. 우리는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안에서 영위하는 생활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남의 관념 안에서 어떤 가공적인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에 띄려 노력한다.
우리는 부단히 자신의 가공적인 존재를 장식하고, 그것을 지니려고 애를 쓰며 참된 존재를 등한시한다.
만약 우리에게 평정이라든가 관용이라든가 충실 같은 것이 있으면, 그러한 미덕을 우리의 가공적인 존재에 결부시키기 위해 남에게 알려지기를 열망한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가공적인 존재에 결부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서 떼어 팽개쳐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용감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자진해서 비겁자가 된다.
공아(空我)가 없는 진아(眞我)에 만족하지 않고, 진아와 공아를 때에 따라서 바꾸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가 허무라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왜냐하면 자신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죽으려 하지 않는 자는 불명예스러운 자가 되고 말 테니까.
아이러니(irony)란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러니에는 언어적 아이러니와 상황적 아이러니 그리고 구조적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30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리.
아이러니의 세 가지 종류는 언어적 아이러니, 상황적 아이러니, 구조적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38절을 다시 한번 해석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이 놓인 상황은 초막절의 하이라이트, 클라이맥스 때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민족의 해방을 축하하고 기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마이크를 잡으시고 설교를 행하셨는데, 의외로 상상할 수 없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었다"라는 것입니다. 30-31절에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었던 유대인들이 여전히 예수를 돌로 쳐 죽이고자 하였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에 관하여 지난주 묵상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였던 유대인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예수를 믿었을까? 궁금하여집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믿는 사람을 배신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여차하면 바로 배신할 수 있는, 즉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예수를 죽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진 유대인들에 예수께서 먼저 던지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31절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느냐? 그렇다면 이제 “내 말에 거하라"라고 하십니다. “거하라!”, 명령형입니다. 아주 강하게 명하고 계십니다. 메이네테,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믿는 것에서 이제는 거하는 것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거하다”(메노)는 단어는 우리가 이미 몇 번이고 만났던 용어로서,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정말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입니다.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아주 유명합니다. 알기 쉽게 풀이된 말씀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15장은 “내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라고 나오지만, 오늘 본문은 “내 말에 거하라"라고 합니다. 똑같은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거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안에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먹고살고 생활한다면 무엇이 바뀌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삶의 스타일이 바뀝니다. 그 말씀
안에 걸맞은 생각과 행동이 당연히 뒤따라야 합니다. 마음, 생각, 판단 기준, 삶의 양식, 삶의 행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면, 내 말투, 내 행동, 내 생각, 내 판단 기준이 자동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이 바뀌어 간다는 것입니다. 행동양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기 때문에, 그 말씀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거함으로써 예수님은 먼저 제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 말씀이 왕성하여지면,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그래서 교회가 커져간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의 논리대로 하자면, 제자 수가 늘어납니다. 한국교회가 바른 역할을 못하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제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원하시고 계시는 것은 말씀 안에 거하고,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그래서 그 생각과 행동이 말씀 중심으로 변화된 제자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라고 하십니다. 말씀 안에 머무는 삶, 말씀 안에서 생활하는 제자가 되었을 때,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은 이론적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천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현재형이 사용되다가, 여기서는 미래형이 사용됩니다.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고, 생활할 때 제자가 되고, 제자가 될 때,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꽉 붙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현실적이며, 실존적인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말씀 안에 생활하며 살아갈 때, 마침내 보여오고, 깨닫게 되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만으로는 알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하심 안에 생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말씀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진리를 깨달을 때, 진실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성경 구절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암송하며, 자주 간증의 말씀으로도 사용하실 것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아주 자유롭게 통용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교 도서관에 가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장을 커다랗게 해서 걸어 놓고 있습니다.
하물며
일본 국회 도서관도 걸어 놓았습니다.
그만큼 좋은 말이라는 것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진리를 발견하라! 그리하면 너희 인생이 참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도님들 가운데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세계의 유명한 대학 도서관들과 사람들이 오늘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본문에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일차적으로 일반 계시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해석은 주의를 요합니다. 우리는 보다 본문에 충실하게 해석을 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에 진리와 자유에 관한 논리가 있었는데, 그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논리도 이와 비슷한데, 그들에게 진리는 율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 안에 거하는 자들,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 행하는 자들은 그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써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에 이러한 설명이 있습니다. 율법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지는 자는 세상의 모든 멍에가 그에게 살아지게 될 것이다. 즉
자유롭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동일한 구조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내 말에 거하라, 생활하라, 그리하면 제자가 되고, 진리가 보여 올 것이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너희들은 율법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율법 안에 거하고 생활할 때, 참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율법이 아니라, 내 말에 거하여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서 생활하라, 그리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그 진리로 말미암아 너희가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자유와, 예수가 주장하는 자유가 무엇이 다른지를 명확하게 분간하여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는 간음한 여인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요한복음 8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 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여(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녀를 정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즉, 유대인들은 율법이 진리이며, 그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참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여인을 죽일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말하는 자유, 율법이 가져다주는 자유란 “율법에 근거하여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음한 여인을 살리는 자유였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일한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며 생활하는 자들이, 한쪽은 죽이는 자유로, 다른 한 쪽은 살리는 자유로, 나누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돌을 던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살아졌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잠시 동안이지만 예수의 말씀에 거함으로서, 살리는 자유를 경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계속해서 머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 안에 거하면서 생각의 철저한 변화, 행동의 철저한 변화, 기준의 철저한 변화까지 맛보는 "머묾"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머무르다’, meno, 메노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잠시나마 분명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구나!!! 그래이제는 내 말에서 떠나지 말고, 그 말 안에 머물기를 바란다!!! 꼭 내 제자가 되어라. 마음으로 그렇게 바랬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기 이전에 먼저, 그 말씀으로 너희 자신을 둘러 보고, 너 자신을 먼저 밝히 까발리고, 그래서 먼저 너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죄하여 보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남을 죽이려는 생각, 남을 비방하려는 생각, 남과 싸우려는 생각이 살아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것은 남을 살릴 수 있는 자유이며 더 나아가 자신을 살리는 자유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고 하느냐.” 반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스스로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전혀 자유롭지 않은데, 본인들은 정작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왭니까? 율법을 가지고 있고, 율법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이웃을 정죄해서 그 이웃을 죽일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에 근거해서 사람을 자유롭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 그래서 자기들이야말로 참 자유인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일 수 있다는 자유로 인생을 살아갔던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남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남을 죽이는 자유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율법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서, 언제나 그 말씀의 채찍질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 말씀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된다면 이웃의 영혼을 살리는 자유, 더 나아가 자신을 살리는 자유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살리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깨닫게 해주는 진리는 당신이 말씀 안에 거할 때입니다.
“자유롭게 하다.”
set free, ἐλευθερόω, 엘레위테로, 엘레위테로사이, 속박에서 건져내다, 의무에서 건져 자유롭게 하다. 마치,
구약의 모세가 그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살리는 자유로 건져 내셨습니다.
두 가지 설움
세상에서 가장 큰 설움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 없는 설움입니다.
집이 없어 남의 집을 살면 아이들이 마음껏 놀지도 못합니다.
큰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언제나 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나가라면 언제든지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집 없는 설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 없는 설움입니다.
나라 없이 사는
민족들을 보십시오.
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왜 저렇게 싸우고 있습니까.
내 나라 때문입니다.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집과 내 나라는 자기가 지켜야 합니다.
내 나라는 그만큼 소중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자유함이라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 자유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
3,1절 때 모두 자유를 잃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자유를 잃은 민족은 몸부림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자유를 잃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일을 준비하지 않음
당시
조정에서는 내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일본은 벌써 명치유신으로 나라의 근대화를 이루어 세계로 눈을 뜨고 군대를 육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안으로 문을 잠그고
쇄국정치를 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싸움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으로부터 지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국가나 미래에 대해서 준비가 없으면 마침내 퇴보하고 망하고 지배당하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나무를 심고, 책을 쓰고, 후손을 낳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탈무드라는 책은 유대인들에게는 성경 다음가는 교훈서입니다.
유대인들은 3500년 동안 압박당하며 살았던 민족입니다.
그리고
2500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생활한 민족입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는 동안 선조들이 얻은 뼈저린 교훈들을 모아
엮어놓은 책이 탈무드라는 교훈서입니다.
그러니 그 교훈의 내용이 얼마나 심오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 하는
책이 탈무드입니다.
그 책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경험한 것을 후손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물려주라고 했습니다.
뭘 물려주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심는 일입니다.
심는다는 말은 내일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심는 삶은 오늘 당장
결과를 얻는 삶이 아닙니다.
심는 삶은 오랜 시간동안 무조건 수고하고 땀 흘리고 인내하는 삶입니다.
그래야 그 삶에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열매가 빨리 맺으면 나도 먹을 수 있습니다.
늦게 맺으면 그 대신 내 후손들이 먹게 됩니다.
그것이 심는 자의 삶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조상이나 선배나 부모는 후손들을 위해서 오늘 열심히 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책을 쓰는
일입니다.
인생의 경험은 참 소중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패하면서
발전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바로 서게 됩니다.
그 시행착오들을 통해서 얻은 지혜를 모두 후손들에게는 교훈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선조나 부모 그리고 선배나 연장자는 후손들에게 그 경험담을 들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인생의 삶의 깊은 방정식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젊어서 마시고 취하고 방황하고 돌아다녔는데 돌아다녀보아도 별 것이
아니더라, 오히려 인생에 오점만 남기게 되더라 하는 시행착오의 교훈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들려주어야 할 말이고
어른들이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교훈입니다.
오늘 책들이 참 많습니다.
책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참 좋은
책들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책들은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자녀들에게 참 좋은 영향을 미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시간이 없다”,
“오늘 방황하는 아들들에게”,
“아들아 당당하게 부자로 살아라”.
참 좋은 마음의 양식과 정신적
힘과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또 노아 벤샤(Noah Benshea)가 쓴 “빵장수 야곱의 영혼의 양식”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들이 나와 있습니다.
“신이 우리의 두 팔을 길게 만든 것은 서로 안으라는 것이다”,
“사람은 두려움과 씨름하면서 더
강해진다.”
“당신 자신이 자식들이 커서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라”,
“배고프면 밥을 먹고 다 먹었으면 그릇을 씻으라.”
모두
소중한 경험들을 내 후손들을 위해서 써 놓은 책들입니다.
내 삶의 경험은 모두 내 후손들에게 참 소중한 교훈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쓰라고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강조하시기를 후손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역사속의 인간의
발자취를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흔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후손을 낳아 기르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농사는 사람을
키우는 일입니다.
부모는 재산을 아끼지 말고 자녀를 교육시켜야 합니다.
땅, 재산, 집 여러 채 간직하고 자식으로 농사짓게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부모는 자식을 길러 그 집안에 미래가 있게 하고 희망이 있게 하고 장래가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곧 사회 발전으로 이어지고 국력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지하게 되면 늘 남에게 빼앗기고
지배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지배받고 억압받고 사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불행한 일입니다.
자유함은 하나님이 보장하신
개개인에게 주어진 권한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자유하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삶이 규모가 없음
사람이
규모 없이 살면 빚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빚을 지면 마음도 정신도 생각도 온통 얽매이게 됩니다.
빚은 잠도 안자고
늘어납니다.
그래서 빚진 사람은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얽매이는 생활입니다.
요즘 카드 빚 때문에
강도로 돌변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음을 택하기도 하는데 사람이 오죽하면 그런 길을 걷겠습니까. 카드를 긁을 때는 참
신나게 긁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도 없이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허황되게 살면 빚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유를 잃게
됩니다.
일본에 침략당할 때 우리나라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때 삶에 무슨 규모가 있었습니까.
궁중에서는 날마다
싸움뿐이었고 누가 백성들을 돌보며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했습니까.
그러니까 이웃 사람들이 이런 백성 그런 나라는 지배해도
되겠구나 하고 지배한 것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규모 없이 살면 남으로부터 지배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렇게 규모
없이 살면 악습에 물들게 됩니다.
술에 얽매이는 것도 악습입니다.
술에 얽매이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폐인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것이 노예입니다.
악습입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술을 담가 먹었습니다.
겨울에 마시기 위해서
가을이면 집집마다 술을 담갔습니다.
그리고 긴긴 겨우내 술에 취하고 노름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사회가 건강하고 그
나라가 튼튼하겠습니까.
거기에 일본은 이 나라에 화투를 장려했고 아편을 장려했고 유곽을 전국 읍내마다 지어놓고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 백성들이 얼마나 잘 타락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나라가 힘을 잃어버렸을 때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타락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술의 타락이 오늘 얼마나 위험수위를 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술 소비량은 세계
최고수준입니다.
모두 이 술로 인해서 우리사회가 알게 모르게 몸도 정신도 타락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음란문화는 어떻습니까.
인터넷만 열면 음란화면이 자유스럽게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 이 땅의 젊은이들의 정신이 얼마나 망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
타락문화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시는 죄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진리가 자유하게
해 주는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나라나 규모 없이 살게 되면 이렇게 약화되고 건강성을 잃어 마침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10-28-2024(월) 요한복음 8:21-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누구냐?(25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Who are you?" they asked. "Just what I have been claiming all along," Jesus replied.
21절. 예수의 떠남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2절. 유대인의 오해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23-24절. 위에서 오신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절. 예수님의 정체
26-27절.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
28절. 높이 들려질 인지
29-30절.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자니라"이 말씀에 대하여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 1. 그리스도는, 옛날부터 모든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되신 내용이란 뜻이라고 함.
유대인들은 그를 모를 수 없으리 만큼 겹겹이 계시(啓示)를 받아 왔고, 계약도 받아 왔다.
* 2. 예수님께서 그 성역 초기부터 자기가 누구라고 주장하여 오시던대로의 "그 이"란 뜻이라고 함.
3.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처음"(곧, 만물을 지으신 영원하신 자)이라는 뜻이라고 함(Augustine).
그러면,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처음이신 분이 너희에게 말씀도 하신다"(계시하신다)는 뜻을 이 문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고데이(Godet)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곧, "처음부터"란 말을, "절대로"란 뜻이라고 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선언하는 그대로이다"라는 말씀이라고 한다.
곧, 그가 선언하시는대로 메시야란 뜻이라는 말이겠다.
5. 본질적으로는 나는 너희에게 말하는 그 내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함(J.H.Bernard).
곧, 예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바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위의 모든 해석들 중에서 첫째나 둘째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해석들이 그 아래 문맥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네가 누구냐?(Who are you?)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놀라운 여러 가지 일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비한 능력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갖고 있지만 아직 그가 기디리던 메시야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네가 누구냐?" 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깨우치셨습니다.
"너희는 메시야를 찾기만하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올 수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하므로 이 사람이 자결하려는가 하고 의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결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 눈을 뜨고도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일컬어 "눈 뜬 소경"이라고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인자가 십자가에 달린 후에야 메시야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을 갖는 동기가 다양합니다.
첫째는 고난을 경험한 후에 예수를 만나는 사람
둘째는 고난을 모르지만 일찍부터 예수를 믿는 사람
셋째는 고난의 댓가를 치루고도 예수를 찾지 못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날마다 주와 동행하는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톨스토이의 단편 중 “세 가지 질문”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한 왕이 인생을 살아가다가 세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질문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한 현자에게 가서 묻자 그가 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답을 얻지 못하고 나가는 길에 한 부상당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를 치료해 줍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왕을 죽이기 위해 매복해 있다가 친위대의 공격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현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순간’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헌신을 드렸는지, 얼마나 큰 체험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바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가 집중 하십니다.
오늘 말씀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받기는 받았는데 헛되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는 “비어있는, 공허한”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았는데,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공허한 외침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면 모합니까?
지금 그 은혜가 내 삶에서 나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면… 값없이 주신 그 은혜가 내 눈물이 되면 모합니까?
지금 내 안에 그 은혜를 나눌만한 기쁨이 없다면…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면 모합니까?
역경이 다가오면 한없이 절망의 나래로 떨어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보시며 한탄하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천국을 가는 확신을 얻은 것으로 끝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울 왕은 처음에는 겸손한 사람으로 누구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을 누리기 못하고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을 피 흘려 죽이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값없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허비하고 살아가는 것은 죄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매일 우리의 통장에 86,400원을 넣어주는데 하루에 다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밤늦게 달려가서라도 다 쓰려고 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86,400초의 시간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것은 하루가 지나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은혜를 더 사랑하고 더 나누는 일에 사용하여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가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하며 그 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여전히 불안하고 공허한 부분이 있다면, 받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주님! 주님은 나에게 매일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받은 것에만 만족하고 누리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은 믿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나에게 선물로 주신 하루를 불안한 마음에 헛되이 보내는 것인 아니라
믿음으로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이유는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고 건강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의 부름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닐간강하게
상대방의 정체성을 알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내가 믿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림자!
이것이 나의 대답입니다.
해가 맑게 빛날 때에는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되면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없는 것이 아니며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떠난 것도 아닙니다.
내가 존재한다면 나의 그림자는 항상 나와 함께 따라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나와 늘 함께 하십니다.
꿈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는 꿈을 꾸면 아침이 상쾌합니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주님이 없는 방황하는 꿈을 꾸고 맞이하는 아침은 어수선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그림자와 같이 때로는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늘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실체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또는 <피터 슐레밀의 기묘한 이야기> 라고도 한다.
줄거리
이 책은 피터 슐레밀의 기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피터 슐레밀은 어느날 파티에서 회색인과 조우합니다.
이 인물은 토마스 존의 하인으로 보였고, 토마스 존이 원하는 물건을 작은 주머니에서 꺼내어주곤 했습니다.
이 주머니가 탐이 났으나, 알 수 없는 거북함이 들어 파티를 벗어나다 회색인물과 마주칩니다.
회색인은 그에게 아름다운 그림자를
준다면, 금화가 나오는 주머니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주머니가 탐났던 슐레밀은 이를 수락합니다.
회색인은 즉시 주머니를 주고
그림자를 돌돌 말아 가져갑니다.
당장은 금화를 무한으로 가질 수 있어 기뻐했지만, 그림자를 잃은 그를 받아줄 세상은 없었습니다.
그림자가 없는 그를 세상은 등졌으나 그에게는 금화가 있었고, 충직한 하인 벤델이 있었습니다.
그는 벤델의 도움을 받아 한 마을에
정착하여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마을 사람에게 들켜 마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회색인은 다시 나타나 그에게, 영혼을 내게 준다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가 악마임을 깨달은 슐레밀은
이를 거부하여 그에게서 도망을 다닙니다.
악마는 계속해서 그를 유혹하지만, 금화를 주는 주머니를 던져버리고(주머니를 사용할 때마다
악마가 위치를 알게 되기 때문), 길에서 만난 상인에게서 장화를 구매하여 도망갑니다.
우연히도 이 장화는 마법 장화로, 한걸음에 동서양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는 이를 계기로 동서양을 건너다니며 생물을 탐구하는 생물학자가 됩니다.
그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그의 절친한 친구인 샤미소(책의 저자)에게 이 일련의 이야기를 편지로 갈음하며 마지막 말을 남기며, 책을 마무리 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샤미소, 나의 환상적 이야기를 간직해줄 사람으로 나는 자네를 선택했네. (중략)
친구야,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출처 / 그림자를 판 사나이(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저, 138p)
감상평
이 책은 독특하게도 실존인물의 편지로 시작합니다.
1800년대를 풍미한 낭만주의 시인인 푸케에게 샤미소(작가)가 먼저 원고를
보여주었는데, 감명을 받은 푸케는 당시 이 원고를 편집장에게 보낼 때, 편집장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하여 이 이야기가 실제
인물의 이야기인 것처럼 각색을 했습니다.
이런 배경지식이 없던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뭐지?
이야기가 시작된건가?
그냥 편지인가? 했는데, 이 편지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에필로그 격이었으며 현실과 소설의 구분을 허물어트려 이야기를 몰입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허무는 장치는 중간중간 등장합니다.
소설속 주인공은 종종 작가를 부르는데, "사랑하는 벗 샤미소"라
언급하며 실제 인물이 작가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독창적인 소설기법이 19세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또 한번 놀라웠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라미제라블>이 생각이 났습니다.
라미제라블 속 장발장은 빵을 훔쳐 감옥살이를 했고, 전과가 있던
그는 사회에 섞이지 못해 정체를 숨기고 먼 타지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줄곳 자신의 전과기록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까 매번
전전긍긍했죠. 소설 속 슐레밀 또한 많은 금화를 가지고 있으나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 통념을 어겼다>라는 것으로 치환해서 이 책을 읽었고,
조금 더 편하게 해석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을 버렸다>로 해석했습니다.
즉, 그림자를 버리고 금화를 택한 그는 인간의
양심을 포기하고 물질을 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아마도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배척과 그보다 더 중요한
<그림자> 즉, 제 해석대로라면 사회적 통념의 준수를 강조합니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는 1813년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 초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부적 성장 속에서도 "부"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지 않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이 난 <라미제라블>은 산업혁명 직후 발생한
프랑스혁명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관통하는 두 소설이 제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산업혁명 속에서 재화보다 가치있는 그 무언가를 강조한 <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리고 이 책을 읽다보면 생각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 <라미제라블>.
이 두 혁명기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문학적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 페터 슐레밀은 사업 투자를 제안하기 위해 찾아간 토마스 융의 집에서 신비한 능력을 지닌 그레이맨을 만나게 된다.
그레이맨의 제안으로 페터는 그림자를 팔고 금화가 마르지 않는 주머니를 얻는다.
부를 얻은 페터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려 하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도시에서 추방당한다.
그림자를 되찾기 위해 그레이맨을 찾아나서는 페터.
하지만 그레이맨은 일 년 후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난다.
하인 벤델과 함께 여러 도시를 떠돌며 살아가던 중 과거의 연인이었던 리나를 만나게 되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일 년 뒤, 페터는 다시 만난 그레이맨에게 그림자를 돌려달라 요구하고 그레이맨은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두 번째 거래를 제안하는데...
월 |
일 |
요일 |
오늘 읽을 말씀 |
묵상 주제 |
10 |
27 |
주일 |
성령강림 후 제23주 /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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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28 |
월 |
요한복음 8:21-30 |
네가 누구냐(25절) |
10 |
29 |
화 |
요한복음 8:31-36 |
참 내 제자(31절) |
10 |
30 |
수 |
요한복음 8:37-44 |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38절) |
10 |
31 |
목 |
요한복음 8:45-51 |
내 말을 지키면(51절) |
11 |
1 |
금 |
요한복음 8:52-59 |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53절) |
11 |
2 |
토 |
요한복음 9:1-12 |
하나님의 하시는 일(3절) |
10-26-2024(토) 요한복음 8:12-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세상의 빛(12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When Jesus spoke again to the people, he sai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never walk in darkness, but will have the light of life."
* 빛(포스. phōs)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 5457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빛(마 4:16, 눅 8:16, 딤전 6:16), 불(막 14: 54), 불빛(눅 22:56), 등불(요 5:35, 행 16:29), 광채 (행 12:7), 광명(고후11:14).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I am 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복음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4).
나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제자들도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 되려면 먼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오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려면 먼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지 않은 믿음으로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많은 교회가 있고 성도들이 있을지라도 세상이 변화되지 않고 점점 더 어둡다고 탄식하는 절망의 아우성이 크게 울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를 "발광체"라고 합니다.
반면에 스스로 빛을 낼 수 없기 때문에 빛을 받아서 반사하므로 빛을 내는 물체를 "비발광체"라고 합니다.
태양은 발광체라고 하며 달은 비발광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빛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받아서 그 빛은 반사하는 것이 마치 달빛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인은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으므로 먼저 의로운 태양빛과 같은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반사하는 일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19) ἀγαθω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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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착함, 올바름, 너그러움, 롬15:14, 갈5:22, 엡5:9, 살후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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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선함(롬 15:14), 양선(良善)(갈 5:22).
의로움(1343) δικαιο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1343
어원 / 1342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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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의(마 3:15, 눅 1:75, 고후 3:9), 의로움(고전 1:30, 엡 5:9). [동] 의롭다(롬 3:25, 26).
진실함(225) ἀλήθ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
어원 / 227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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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참(마22:16), 사실(막5:33), 진리(요1:14, 4:24, 롬2:2), 실상(요16:7), 과연(행4:27), 참 됨(행26:25), 진실하심(롬15:8), [동] 진실 하다(롬15:8), 참되다(롬3:7).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빛의 자녀답게 착하고 의롭고 진실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는 은혜를 사모하며 삶의 자리를 믿음의 현장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세상의 빛(한글 개역 성경에서 4구절)
마태복음 5: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성경에서 '빛'의 의미와 상징에 대한 묵상
성경은 '빛'이라는 주제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 구원, 인도, 계시 등의 다양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빛은 성경
전반에 걸쳐 깊이 있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며,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빛의
히브리어적 배경, 성경 내에서의 상징적 의미, 그리고 빛이 가진 특징을 어떻게 묵상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찰하겠다.
1. 빛의 히브리어적 배경과 성경적 사용
성경에서 빛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오르' (אור)이다.
이
단어는 물리적 빛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영적, 도덕적 깨달음이나 진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히브리어의 '오르'는 문자적으로는 해나
불과 같은 물리적인 빛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하나님과 그의 본성, 그리고 그가 제공하는 영적인 지식, 진리, 구원을
의미하는데 자주 사용된다.
성경에서 빛은 창세기 1장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 가운데 첫 번째로
"빛이 있으라" (창세기 1:3)고 명령하신 후, 세상에 빛이 생겨난다.
이 사건은 빛이 창조 질서의 근본적인 요소임을
보여주며, 빛이 혼돈과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한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구절에서의 빛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창조 세계를 질서 있게 만들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혼돈과 질서 사이의 경계를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2. 빛의 상징적 의미
성경에서 빛은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몇 가지 주요 의미를 살펴보고, 각각이 어떻게 우리의 묵상 주제로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
1)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
첫째로, 빛은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빛으로 자주
묘사하신다.
예를 들어, 시편 104편 2절에서 "주는 옷을 입듯 빛을 입으시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영광과
권능을 나타내시는 방법으로 빛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편 104:2: "주께서 빛을 옷처럼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광과 빛을 연결하며, 빛은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도구로서 사용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본래 영광스럽고 순결하시며, 세상에 계시되실 때 그 영광의 빛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 진리와 계시
둘째로, 빛은 진리와 계시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빛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으로 비유되는 구절들이 이를 증명한다.
시편 119편 105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적인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자 빛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의 인생이 어둠 속에 있을 때, 말씀의 빛이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빛은 우리 삶에서 진리와 지혜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상징한다.
3) 구원과 생명
셋째로, 빛은 구원과 생명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한복음
8:12)고 말씀하신 구절은 그분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빛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빛은
영적인 어둠을 몰아내고, 죄와 죽음에서 자유하게 하는 구원의 상징이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빛으로 묘사하심으로써, 그분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있던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구원의 빛이다.
4) 도덕적 선과 의
넷째로, 빛은 도덕적 선과 의를 상징한다.
빛과 어둠은 성경에서 선과 악, 의와 죄의
대조로 자주 사용된다. 빛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의미하며, 어둠은 죄와 타락, 악을 상징한다.
요한복음 3장
19-21절에서는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리 안에서 행하지만,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은 악을 행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3:19-2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
여기서 빛은 하나님의 공의와 선함을 상징하며, 그 빛 안에서 사는 사람은 의롭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다. 반면, 어둠 속에 사는 자들은 그들의 죄와 불의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빛을 피하려 한다.
3. 빛의 특징과 묵상
성경에서 빛은 앞서 본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가진 속성을 표현한다.
이제 빛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묵상과 연결해 보자.
1) 어둠을 물리침
빛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다. 어둠은 빛이 없을 때 존재하며, 빛이 비추면 어둠은 사라진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구원은 영적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밝혀주며, 죄와 죽음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어둠 속에서 벗어나 참된 길을 발견할 수 있다.
묵상: "하나님의 빛이 내 삶 속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가? 나는 말씀의 빛 속에서 내 삶의 어둠과 싸우고 있는가?"
2) 진리를 비춤
빛은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고, 진리를 비추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빛으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참된 진리와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리는 숨겨지지 않고, 빛을 통해 온전하게 드러난다.
묵상: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있는가? 말씀의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춰보고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는가?"
3) 인도와 보호
빛은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표현처럼, 빛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보호하시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묵상: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내 인생의 길을 찾고 있는가? 말씀의 빛이 내 삶을 인도하고 있는가?"
4) 생명과 소생
빛은 생명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식물들이 빛을 통해 광합성을 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빛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소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불어넣어,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
묵상 :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인 생명을 얻고 있는가?
말씀의 빛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는 경험을 하고 있는가?
4. 결론 : 빛을 묵상하며 나아가야 할 길
성경에서 빛은 하나님의 존재, 구원, 진리, 도덕적 선 등을 상징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 빛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빛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빛은 우리를 어둠에서 인도하여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리의 발을 인도하는 등불이 되어 준다.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이 우리 안에서 더 크게 밝아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말씀의 빛으로 우리 삶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
성경의 상징 - 빛
빛은 그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포괄적이며 중요한 하나님의 상징물이다.
성경 속에 나타난 빛을 잘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존재적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빛을 통해 하나님을 은유하고 비유한다.
때로는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며, 예수님 또한 빛이시며, 생명과 회복에 관련된 수많은 의미들을 갖는다.
창세기 1:1을 창조가 아닌 서론으로 이해한다면 빛은 최초의 피물이 된다.
또한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빛으로서 온 세상에 비추신다. 성경은 빛으로 시작으로 빛으로 마무리한다.
1. 피조물로서의 빛
빛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3-5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곳에서 드러난 빛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셨다.
셋째,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넷째,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불렀다.
다섯째, 빛은 첫째 날에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러나 어둠은 창조했다는 표현이 없다. 그러나 이사야서로 가면 하나님께서 어둠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빛은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피조물로서의 빛은 몇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ㄱ. 피조물로서 빛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시편 148편에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들을 찬양의 의무를 지닌다.
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3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4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5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피조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ㄴ.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 경배해서는 안 된다.
빛은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빛을 숭배하는 행위는 우상숭배와 같다.
ㄷ. 빛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선한-토브) 존재이다.
빛이 악하거나 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 자체로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은 빛을 아름답다고 인정하셨다.
ㄹ. 빛은 불가피하게 어둠을 갖는다.
그러나 분리되어 있다. 빛과 어둠은 서로 같지 않으며, 대립적이다. 요한사도는 요한일서에서 빛과 어둠에 대한 대립적 구도를 잘 설명한다.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요한1서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2. 빛으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이 빛이라고 할 때, 그 빛은 하나님의 존재적 속성을 뜻한다. 빛은 진리이고 말씀이고 생명이다.
-하나님은 빛 자체이시다.
요한일서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얼굴의 빛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 또는 빛에 대한 언급은 적지 않다. 얼굴의 빛을 비춘다는 뜻은‘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얼굴의 빛을 비춘다는 말을 돌아보신시고 보호하시고 살핀다는 의미다.
시편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시편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빛이 비췸으로 구원하심
이러한 의미들은 다시 빛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치환된다. 하나님은 빛에 거하심으로 구원하신다.
이사야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마태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복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4장16절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빛으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빛은 진리이고 말씀이고 생명이다.
피조물로서의 빛
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빛은 낮을 주관한다.
빛은 만물을 드러낸다.
빛과 어둠
빛은 진리이다. 어둠은 악인들의 숨을 곳이다. 죽음이며 사망이다.
구원과 생명의 빛
빛은 깨달음이며, 생명이다.
빛을 통해 알고 행한다.
빛의 공동체
교회는 빛의 공동체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롬 2: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그러나 진정한 빛은 고난받는 종 단 한 사람 뿐입니다(사 42:6. 49: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10-25-2024(금) 요한복음 8:1-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11절)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No one, sir," she said. "Then neither do I condemn you," Jesus declared. "Go now and leave your life of sin."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Go now and leave your life of sin)
요한복음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Luther).
이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이다(요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민 16:46), 우리는 이 해석을 옳게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본다.
2.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헬라 원어(*)는,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년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를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년 동안 병 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다고한다(Maar
de man leefde nu in zonde, had zich niet aan den Heiland gegeben.-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352).
그렇다면, 여기 "더 심한 것"은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이다.
마 12:43-45 참조.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준다.
1. 예수님께서 친히 38년 된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
2. 그가 그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를 요구하신다는 사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 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히 2:2-3).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침 받은 자는 그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그 한 마디 말씀이 늘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된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한다.
곧,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dass man an die Genugtuung Christi glauben soll.-Evangeliem Auslegung, 4,P.206).
요한복음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회개자에게는 사죄를 선고하시는 사명을 가지셨다.
그러니 만큼, 그가 그 여자에게 회개를 권고하실 뿐이고 정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만일 간음하는 사람은 그 현장에서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군중들의 의도는 율법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로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
원수도 사랑하라.
어느 가르침이 옳은 것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워 죽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몰려왔던 사람들은 그들이 들고 왔던 돌을 내려놓고 모두 물러갔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줄 알았던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입니다(요 3:17. 12:47).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려는 것입니다(마 5:17).
어떻게 율법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롬 13:10).
돌을 던질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덮어줄 것인가?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본문에 기록 된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요한복음 7:53-8:2을 보면 전날에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 감람산에 가셔서 밤을 지내시고 아침에 성전에 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누가복음 9장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 9:58).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주무실 곳이 없어서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감람산에서 지내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풍요롭고 편안하게 사는 것만 추구하는 우리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한쪽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 여자를 끌고 옵니다.
요즘 TV에서 자주 보는 장면
같습니다.
경찰들과 기자들, 여러 시민들 앞에 얼굴을 가리고 서 있는 범죄인 말입니다.
간음한 이 여인은 그보다 훨씬 비참한
모습으로 서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간음하다 잡힌 사람은 돌을 쳐서 죽이라는 율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형장에 끌려 나온 죄수의
모습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녀는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인 여자입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인쇄술이 없었기에 성경을 일일이 필사하는 일을 하였고,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하며 죄에서 구별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히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누가복음 18:10-14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하고 무시하며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들어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마
23:1-5).
이들은 외식자들이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달랐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3-25).
겉으로는 깨끗한척하나
속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는 잘 밝혀내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는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타인의 눈에 티를 빼겠다고 합니다.
더러 믿는 성도들 중에도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시고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데,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비판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인을 잡아온 이유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시험하려고 했습니다(6).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죽을 죄를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5:1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도록 하여 죽일 방도를 찾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이 여인을 살려 주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는 간음한
남녀는 반드시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음이란 결혼한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혼한 부부 이외의 모든 성적관계는 하나님께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출애굽기 20:14의 십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신명기 22:22, 24에는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간음한 남녀는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아가 아니라고, 백성들을 선동할 것입니다.
반면에 돌로 치라고 말한다면 당시 유대인들을 다스리던 로마 정부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압력을 넣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요 18:31)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로마 정부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으며 무자비한 자라 트집을 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병들고 멸시 받는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트집 잡는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마 12:1-21).
이들은 예수님이 궁지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죽이라고 로마정부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7절에 그들이 계속 질문 공세를 합니다.
마치 오늘날 기자들처럼 말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아십니까?”
“증인들이 여기 다 있습니다.”
“보세요. 이 여자는 얼굴도 못 들고 죄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돌로 칠까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죄를 깨닫게 하심
6,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엇을 쓰시고 계십니다.
이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신명기 17:5-7에 범죄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절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확실한 두세 증인이 있어야 하고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을 던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웬일일까요?
9절에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 18:4에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간음죄 뿐 아니라 어떤 하나님의 계명도 어기면 죽을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것,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 안식일에 일하는 것,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탐심 모두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중 하나만 어겨도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말씀에 비춰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들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니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7절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떠나갔습니다.
여인을 끌고 온 자들도 다 떠났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죄인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이들이 주님 앞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하나님, 구원자 예수님을 몰라보고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생수를 달라는 수가성 여인에게 주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남편을 두고 부도덕하게 살던 여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양심의 가책은 받았지만 주님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아직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제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라”였습니다(막 1:14,15).
아직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저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우리 엄마도, 동네 분들도 다 착하다고 하셔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부모님 모르게, 교회 사람들 몰래 지은 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욕하는 것,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이 죄옥 갈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죄인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10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너를 고발 하던 자들이, 정죄하던 자들이 없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여인이 “주님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죄가 없으십니다.
고후 5:21에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정죄 하지 않으셨을까요?
요한복음 3:17에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으며
누가복음 19:10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17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내가 너의 간음 죄 대신 죽으러 왔다”
“너를 구원하러 왔다”
“죄를 회개하고 나를 믿으면 너의 모든 죄를 용서 해
주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로우신 말씀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죄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나오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얼마나
은혜로우신 말씀입니까?
11절 뒤 부분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님은 우리 죄를 용서 해주실 뿐 아니라 주님을
만난 후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죄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믿기 전에 지은 죄로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3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6:9-11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죄를 계속 짓는 것은 구원 받지 않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구주이십니다.
구원 받으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 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한 연회장 앞에 어린 소녀가 울고 있었습니다.
직원이 왜 여기서 울고 있냐고 물었더니 저 연회장에 들어갈 수
없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왜 들어갈 수 없냐고 물었더니 이 연회장에는 장애인 어린이들을 위한 파티를 하고 있는데 자기는
건강해서, 장애가 없어서 들어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죄 없는 사람인 척 하지 맙시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들만 비난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맙시다.
오히려 자신을
바로 보고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 하고 용서를 구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맙시다.
죄는 구원 받기 전에 지은 죄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 늘 우리 마음속에 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6세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라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를 자기 자신이 썼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존 오웬"은 17세기 청교도이자 목사였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존 오웬은
학문과 영적인 깊이가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서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쓴 책들 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느 주제는 바로 "죄"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존심과 이기심이 가득하며,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 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사람의 특징은 "죄"의 문제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신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인 성장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존 오웬의 책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적인 성장과 더불어
영적인 성장을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로마서 1~11장에는 '죄'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죄가 있다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 아래에 있지 말고, 구원과 은혜
안에 머물라는 권면을 강조하기 위해 죄와 관련된 내용이 지속적으로 등장하죠.
그래서 죄와 관련된 내용의 핵심은 로마서 6장
1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이런 죄인이 회심과 거듭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무었일까요?
구원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롬 12:1).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로마서 12장 2~21절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만약 로마서
12장에 나온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삶과 가정과 교회에서 드러내지 못한다면, 12장 1절에 나오는 영적 예배자가 될 수 없겠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요 6:48)"라는 말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12제자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권세가 있었기에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논의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잡기보다, 함정을 파서 예수님을
빠뜨리려 합니다.
그들은 음행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옵니다.
그리고 말씀 그 자체이신 분에게 율법을 말하며 음행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옳은지 시험합니다.
율법은 간음에 관에 크게 2가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는 결혼한 여자가 간음하면 죽여야 했습니다(레 20:10; 신 22:22).
다른 하나는 정혼한 여인이 간음했을 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했습니다(신 22:23~24).
남자도 같은 법을 적용받았고, 만약
여자가 창녀일 경우에는 그 사람을 처형하라는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끌고온 여인의 경우 아마도 신명기 22장
23~24절에 나온 정혼한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정혼하는 나이는 주로 14~15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사람을 예수님께 끌고 가면, 예수님은 당연히 율법을 무시하고 그 사람을 용서하라든지
아니면 율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의 '분노'를 이끄려 내려 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모습은 늘 가난한 자,
억울한 자, 약자, 죄인과 함께 했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죠. 율법대로 사형에 처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은 순식간에 잔인한 사람이
되고, 로마법을 어긴 사람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예수님께 향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손가락으로 무엇을 씁니다.
많은 학자가 예수님이 쓴 글이 무엇인지 밝혀내려
했지만, 모두 가정일 뿐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요한이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쓴 글의 내용을 적기 보다, 예수님의 행동을
묘사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쓴 장면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언약의 돌판에
글을 새긴 장면을 떠올립니다(출 32:16).
요한복음 1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며, 말씀이 이 땅에 오셨다는 전제를 통해 예수님의 행동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과 동등한 모습으로 드러내고 계시며, 새로운 언약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용서와 사랑, 그리고 회복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 사실을 잊으니 사람들을 정죄(죄 있다고 지적하는 것)하는 것에 집중한 것이죠. 예수님은 진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대상은 음행하다 잡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이 진리라고 믿고 행했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죄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죄 없는 예수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을듯합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음행'과 관련된 죄를 지었다는 것이죠.
로마 시대에는 음란함이 자연스러운
문화와 같았기 때문에 그런 문화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 예상해 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죄'는 음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합니다.
동성애자가 교회에 출석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별과 혐오로 내
쫓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질렀다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한 일일까요?
성경은 모든 '죄'를
동일하게 바라봅니다(동성애 옹호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만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여인과 예수님만이 남은 장소에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재판관의 모습으로 말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11절)" 여인에게 던지려 했던 돌은 결국 예수님에게 향합니다(59절).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주님의 온전하심과 거룩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돌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먹었다면, 내 안에 있는 전통과 관습을 중요하게 여기는 음란함을 몰아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을 몰아내고 회칠한 무덤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이 기록하신 두 가지 법이 효력을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오는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십자가의 대속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한 합의점을 찾은 것이죠.
더 이상 의혹을 갖지 말고 믿고 구원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내 죄로 인해 예수님이 달리신 끔찍한 십자가를 바라보며 똑같은 죄를 반복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동안 죄로 어지러웠던 불행한 삶을 계속 할 수는 없잖아요?
주일에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전투력이 상승해서 돌아가는 것예요.
상승된 전투력으로 세상과 내 옛사람의 죄와 잘 싸워서 이번 주도 평안과 복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영국에서 거짓말 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 사람이 일등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거짓이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임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은 무질서를 만들어 내고 무질서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계획도 세울 수가 없고 따라서 모든 사람은 불안 가운데 당면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어 거짓의
악순환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거짓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행복할 수가 없고 서로를 불신하고 경계하며 미워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거짓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을 싫어합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그 자신과 그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할 수 있다는 보편적 믿음이 있습니다. 이 같은 이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이들이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J. 벤덤, J.S. 밀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개인이
정직하게 행동해야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행복해야하는가, 불행 하면 어떤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고 착하고 정직해야 하는 도덕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착하고 정직한 것은
도덕적 가치 이지만 행복은 도덕적 가치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비도덕적 가치를 위해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합니다.
도덕적
가치가 비도덕적 가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사람이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칸트는 행복하기 위해 정직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정직한 것이 옳기 때문에 정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칸트의 의무주의입니다. 의무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직관적으로
무엇이 악하고 선한가를 안다고 합니다. 그의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쁜데, 거짓말을 하면 그 사회가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짓말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하면 안 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그의 정언명령입니다.
그의 여러 정언명령 중 중요한 한 가지를 소개하면, “너 자신의 준칙(準則)이 보편적(普遍的)인 자연법칙(自然法則)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때 그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준칙이란 개인의 행동원칙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한다.”라는 준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준칙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도 좋다면 필요할 때 얼마든지 거짓 말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하였습니다.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을 하는데 세상 모든 사람이 필요할
때 거짓말을 해도 괜찮으냐?”라고 했을 때 이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전제입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 모두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도둑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 하는 도둑의 입장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은 도둑질을 하면 안 됩니다. 모두가 도둑질 해도
된다고 하면 내가 애써 훔쳐다 놓은 것을 다른 사람이 또 훔쳐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도덕 의무론은 도덕이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는 앞선 이들의 주장보다는 한층 발전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아니고 의무 때문만도 아닙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정직해야 그 자신과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는 이론도 일리가 있고, 도덕은 수단이 아니라 의무라는 칸트의 주장도 나름 기여하는 바가 있지만 성경은 그런 가르침들과 차원을 달리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절대 전제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거짓말에 속지도 말아야 하고 거짓된 말과 생각과 정책과 선동을 분별하고 멀리하고 미워해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인들의 거짓말로 인하여 사회가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3일 서울 광화문 집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조국 법무부 장관을 규탄하였습니다. 조국을 규탄하는 주요 이유는 불법과 거짓말 때문입니다. 검찰이 혐의를 잡고 조사하고 있는 그의 불법과 거짓은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검찰이 그의 불법과 거짓을 조사하고 있는데 청와대와 여당과 혐의를 받고 있는 당사자와 그를 지지하는 몇몇 지식인들이 검찰을 개혁해야한다면서 검찰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검찰을 개혁한다면 개혁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는 검찰을 개혁하여야 한다면서 개혁되어야 할 방법으로 검찰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노골적으로 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과 학계와 종교계와 온 사회가 가치 질서의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거짓말도 용납 되어서는 안 되지만 몇몇 지식인들의 상식을 무시한 조국 지지 발언들은 지식인들에게 걸었던 일반 국민들의 일말의 기대 마져 무너져 내리게 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져 있는 한완상 씨가 지난 1일 CBS 라디오에 출연하여 조국 법무부 장관의 문제에 대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조국을 조사하고 있는 검찰과 조국 사퇴를 부르짖는 국민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검찰청 앞에 모인 친문지지 집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촛불 세력이 건재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부총리까지 지내신, 학자이고 정치 사회의 원로인 그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치 안보 경제 등의 총체적 위기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다면 조국 사태를 일벌백계로 조사하도록 검찰을 독려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검찰을 비난하고 조국을 두둔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간음 현장에서 잡아 온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으냐고 묻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조국을 지지하고 검찰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도 적지 않습니다. 한완상 씨는 지금까지 조국씨가 얼마나 많은 돌을 던져 온 사람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
것입니다. 조국의 그 수많은 돌팔매질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그가 조국을 역성들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사랑으로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데 이 말씀이 종종 오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빙자하여 성경을 왜곡하는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한 여자를 간음 현장에서 체포하여 예수님께 끌고 와,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여기 유대교 지도자들이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인데, 서기관이란 율법을 지키기 위한 모든 규칙을
창안한 자들이고, 바리새인이란 그 규칙들을 지키기 위하여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끌고 온 여인은 간음의
현장에서 덜미를 잡혔습니다.
남녀가 같은 방에 은밀히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송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던칸 데렛(J. Duncan
M. Derrett)의 설명에 의하면 증인들은 이 여인과 남자가 교합하는 중에 목격하고 체포 하였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인의
정리(定理)에 의하면 사전 경고가 없이는 처벌을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정황에는 저들이 그 여인을 송사 하면서 그러한
정리를 그 여인에게 공정하게 적용하였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습니다.
그 여인이 범행 중에 잡혔다면 엄격한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
여인의 간음 행위의 상대 남자도 이 자리에 잡혀 왔어야 합니다.
본문의 저자 요한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정의를 지키고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덫을 놓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자는 놓아 보내고 여자만 끌고 와서 많은
군중 앞에 그녀의 신분과 처참한 몰골을 노출 시켰다는 것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칩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율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을 간음 현장에서 예수님 앞에까지 끌고 온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여자 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나아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걸려 돌을 던지려 했던 군중들 모두가 범죄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에게 벌을 주는 것이 불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조치는 결국 범법자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법으로 법이 집행되는 것을 막으신 것이지 죄인을 죄가 없다고 하거나 무조건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저지른 행위가 죄라는 것을 아셨고 또한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건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시대에는 구약의 신정정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초림 이후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새로운 하나님 나라 원리에 의해 작동되고 통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형식과 조직을 갖지 않지만
교회는 형식과 조직을 갖추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원리를 따라 세워져 가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이 주신 권세로 바른
신앙고백을 통하여 사람을 받아들이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를 출교합니다. 그 외에 교회가 죄를 지은 자에게 여러 단계의
제제를 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게는 물리적 강제력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출교를 했는데도 교회를 나오는 자를 교회는 강제로 막을 수 있는 물리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체포하거나 구속하거나 물리적 폭력으로 벌을 줄 수 없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교회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중세 교회는 천년에 걸쳐 이러한 가르침을 오해하여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범법자에게 합법적인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권세는 국가에게 주었습니다. 교회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에게 더 이상 돌을 던질 수 있는 권세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간음하는 여인을 끌고 와서 사형을 집행 하려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자를 책망하고 회개를 권고하고 죄인이 회개하면 용서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출교까지는 할 수 있어도 구속하거나 사형을 집행할 수는 없습니다.
교인 중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회개한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하는 용서가 국가법의 처벌까지 면제 받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용서하지만 국가 법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말씀은 죄를 지은 자라도 무조건 용서 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교회의 권징과 용서, 그리고 엄격한 사회법의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할 것까지를 명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 같은 가르침을 잘 이해하여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1-4)
『 암흑기의 중세 여행 』
사람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계관시인(桂冠詩人)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라고 합니다.
암흑기라는 말을 중세의 별칭처럼 사용하는 것이 중세에게는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암흑기라는 말은 르네상스 이후의 관점에서 붙여졌습니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를 통칭해서 암흑기라고
부르지만 중세시대 중에서도 어두운 면만을 강조할 경우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즉 유럽문화의 전성 시절을 이끌던 로마제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야만족들의 침략과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와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서유럽은 암흑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이것을 가리켜 중세
암흑기라는 것으로 통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세는 곧 기독교 역사입니다. 로마제국은 망했지만 기독교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중세가 암흑기로 불러지는 것은 곧 기독교의 불명예입니다. 중세를 일컬어 암흑기라고 하는 것이 자칫 지나치게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일이 있다는 학계의 자성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암흑기라는 말은 개인이나 국가나 역사의 한 시기 가운데 불가피하게 겪었던 비극적이고 불행한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1536년 제네바 인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만든 주화에는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Post Tenebras Lux)라고 새겨 넣었습니다. 결국 교회사적으로도 중세는 어둠의 시기였고, 종교 개혁 시대는 빛이라는 역사관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게 됨으로서 천년의 중세를 어두운 창고에 처박아 넣고 문을 잠가버린 꼴이 되어버려 중세에 묻혀 있는 보석까지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시대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를 여행해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중세를 공부하려고 할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중세로 볼 것인가 부터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중세”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469년의 교황청 도서관 사서였던 지오반니 안드레아 (Giovanni Andrea)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색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사는 시대가 과거와 다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역사적 통찰은 17세기에 이르러 독일 지식인들에 의해 고대, 중세,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하게 하였습니다. 자크 르 코프 (Jacques Le Goff)는 중세의 4-9 세기까지를 중세 초기로, 10세기에서 14세기를 중세 중기로,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를 중세 말기로 보는 넓은 연대 구분을 하였습니다. 코플스톤 (Frederick Copleston)은 철학사의 관점에서 교부 시대를 중세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정치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5세기를, 교회 사적으로는 마지막 교부이자 첫 번째 교황인 그레고리 1세를 기점으로 6세기를 중세의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는 중세를 476년에서 1492년까지라고 못 박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 역사는 주로 로마의 멸망에서 르네상스 시대까지를, 곧 5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1,000 년을 중세로 봅니다. 그러나 중세는 기독교의 역사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인정받은 313년, 즉 4세기를 시작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16세기까지로 봅니다. 결국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중세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단순히 암흑기였다는 말로 특징 지워 버리기엔 그 역사가 너무나도 유구합니다.
현대는 중세의 자궁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현대가 중세로부터 나왔으면서도 중세를 캄캄한 창고에 처박아 넣어놓고 문을 굳게 잠가 놓아서 중세를 잘 모르고 중세를 잘 모르기 때문에 현대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갖 오해와 진부함이 중세를 억누르고 있어서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대작 「중세」의 서문에서 중세는 무엇이다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중세는 무엇 무엇이 아니라고 열거하는 편이 낫다고 하면서襬가지의 중세는 아니다.’라는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심지어 자크 르 코프는 중세의 천 년을 암흑이 아닌 “위대한 천 년”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필립 샤프 (Philip Schaff)는 중세를 평가하면서, 중세의 빛은 성경 말씀이 발산하는 태양 빛 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전승이라는 별빛과 달빛이었다고 하였고, 이 빛이 야만성과 이교성의 암혹을 뚫고 들어가 어둠을 몰아냈고, 위대한 종교 개혁의 광명한 빛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무지한 민족을 비추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평가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중세는 그 천 년의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미스터리와 혼돈, 무지와 맹신, 그리고 광기로 얼룩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 중에는 어린 아이처럼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았습니다. 신앙이 모든 학문과 정치와 문화까지 지배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주도하였고, 대학을 설립하며, 엄청난 학문과 건축과 예술과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하나의 언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나의 언어로 예배드리며, 모든 사람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를 통해 살았던 천년의 세월이 중세입니다. 중세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시대이자, 기독교 문명의 시대였습니다. 천 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로 된 성경과 교회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건축은 고딕 양식으로 통일 돼 있었고, 지붕은 붉은 색으로 통일 되어 있었습니다. 마을 중심 높은 곳에는 교회당이 있었고, 도시 중심에는 대성당의 첨탑이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교회당의 종소리에 따라 사람들은 일어나고 잠들었으며, 교회당 묘지는 천국과 영생을 의미했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마녀의 존재를 믿었고, 심지어 연옥이라는 가상의 사망 후 세계를 수용했고,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들의 중재를 믿고 미사라는 개혁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예배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수사들이 야만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개인적 회심뿐 아니라 한 도시와 한 민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집단적 회심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나 교리 교육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세례 시 신앙고백의 뜻조차도 모른 채 라틴어로 된 그것을 암기했습니다. 켈트족과 튜턴족, 슬라브족이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기독교와 함께 문자, 학문, 농경, 법, 예술도 받아 들였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까지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예술도 기독교 신앙에 동의했고, 심지어 황제마저도 기독교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중세는 정치, 경제, 사회가 봉건제라는 튼튼한 사회 구조 속에서 숨 막히는 지경의 경직성과 또한 해학성을 지녔습니다. 중세 인들을 세 부류, 즉 성직자, 기사, 농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직자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사는 싸우는 사람, 농노는 일하는 사람이었으며, 이는 곧 세 개의 신분이자 계급이었습니다. 중세를 떠받치는 두 기둥 같은 그룹이 기사와 학자였습니다. 박사에게는 기사의 작위와 같은 특혜를 부여했습니다. 기사가 가장 중세적인 이미지를 지닌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단은 사제와 귀족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천상의 천사 기사단을 지상에 복제 해 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기사단은 금욕과 절제, 이타심, 충성심 외에도 로맨스와 결투정신, 기사 서약과 맹세 같은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기사단은 예루살렘 기사단, 스페인 기사단, 신전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었는데, 이는 수도자들의 종단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후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단들이 생겨났습니다. 황금 양털 기사단, 성모 기사단, 황금 방패 기사단, 심지어 고슴도치 기사단, 심지어 사냥개 기사단까지 등장 했습니다. 기사 계급은 사제와 농노 계급 사이에서 경직된 중세 사회를 해학과 상상으로 이끌며 종교와 문학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중세를 특징짓는 두 세력인 교황과 황제는 언제나 지배권을 두고 긴장과 갈등과 불화와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황 칙서를 통해 “로마 교황 만이 보편적 교황으로 불려야 마땅하다”라고 했고, 이후에 교황은 성 베드로의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의 수위권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이런 권력의 갈등은 영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샤를마뉴(Charlemagne) 시대에 와서는 황제-교황이라는 제왕적 사제직으로 발전했고, 1077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관용을 구걸한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중세 교회는 언어의 다양성을 원죄의 결과들 중 하나라고 말하면서 중세 문명의 동일성, 나아가 유럽 문명의 통일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라틴어를 고집했습니다. 라틴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는 야만인으로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 라틴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특권을 가진 집단에 속하였음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라틴어만을 사용했고. 모든 나라와 민족은 라틴어로 번역 된 불가타 성경만을 사용했으며, 라틴어로만 예배를 드리고, 모든 종교 음악은 라틴어로 불렀습니다. 다중 언어 사용은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에 단일 언어로 라틴어만을 사용하도록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중세를 형성 한 주요 요소로 수도원과 대학을 들 수 있습니다. 중세 인들은 천상과 지상이 혼재 한 시대를 살면서 세속을 경멸하여 세속으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한 경향이 수도원 제도를 만들었고, 불행하게도 대표적인 도미니크 교단과 프란체스코 교단은 민중에게 위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사들이 교황청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수도원은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장 타락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수사들의 수도복은 유럽의 의복 문화에, 수도원의 식단은 유럽의 보편적인 음식문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수도원은 수도원 학교와 주교좌성당학교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학교와 교육의 발전을 촉진했고 마침내 이탈리아에 볼로냐 대학과 파리에 파리대학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중세 대학은 3학(문법학, 논리학, 수사학)과 4과(산술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자유학예에서 의학, 법학, 신학의 상위 학부가 설립 됐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의 집대성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중세의 역사에서 누구나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은 십자군 원정과 도시와 상업의 발전입니다. 기독교는 외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지만 유대인 대량 학살과 약탈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또한 상업의 부활과 함께 중세 도시가 탄생했고, 농촌에서는 토지 소유의 한 형태인 장원이 생겨났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종교 재판을 통해 마녀 사냥에 미쳤고, 중세 인들은 여행을 즐기는가하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중세에는 성경보다는 전승에 의존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중세는 성경이 닫혀서 어두웠습니다. 성경을 소유하지 못하고 읽지 못하고 배울 수 없는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보여 준 시대가 중세입니다. 그 결과 중세의 교회는 계시 의존적 종교가 아니라 인문학의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세 인들은 성경의 종교가 아닌 상상의 종교를 믿었고, 그 결과 중세는 판타지로 넘쳐났습니다. 중세는 소름이 돋을 섬뜩 할 정도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는가하며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통제 받지 않고 드러나는 해학성을 보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여행에 대한 동경과, 세속으로부터의 도피, 로맨스와 에로스가 혼재했습니다. 성경의 언어, 강단의 언어, 종교의 언어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호에 불과하였습니다.
중세는 온갖 상상과 무지와 왜곡이 판을 치기도 하였지만 또 한 편 성경 시대와 종교개혁시대와 더불어 신학과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하나님 중심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시대이고, 거짓과 왜곡을 걸러내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중세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잘 가려내면 아주 귀한 보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는 이 시대에 비하면 보화가 감추어진 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