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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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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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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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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παρά 스트롱번호 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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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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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라고 부르다, 이름하다, 일컫다, 마21:13, 눅20:44, 롬9:25, 약2:23. ㉡ 이름을 주다, 명명하다, 눅1:59. ㉢ [수동] 이름을 받다, 이름을 가지다, 일컬음을 받다, 눅1:60, 행1:19. ㉣ ~라고 한다, 마2:23, 눅1:32, 고전15:9, 히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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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초대하다, 마22:3, 눅14:8, 고전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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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불러모으다, 마20:8, 22:3, 25:14, 눅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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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부르다, 마2:15, 행3:11, 히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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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호출하다, 마4:21, 막1:20, 행4:18,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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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유적] 부르다, 마9:13, 막2:17, 롬4:17, 고전1:9, 벧전5:10.
- 문법설명 / 미완료 ἐκάλουν, 미래 καλέσω, 제1부정과거 ἐκάλεσα, 완료 κέκληκα, 완료 수동태 κέκλη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κλήθην, 미래 수동태 κλη- θήσομαι, 2753의 어간과 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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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곁에서 부르다, 옆으로 부르다, 호출하다, 소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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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τινά+부정사가 따르는 경우] 행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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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청하다, 이끌다, 권하다, 눅8:41, 행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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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의 도움을 청하다, 마26:53, 고후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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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소하다, 강권하다, 역설하다, 권면하다, 격려하다, 행16:40, 고후10:1, 히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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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구하다, 간청하다, 마8:5, 막1:40, 눅8:31, 행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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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로하다, 격려하다, 마5:4, 눅16:25, 고후1:4, 엡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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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로해보다, 정답게 말하다, 눅15:28, 행16:39, 고전4:13, 살전2:12, 딤전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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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위로받다(마2:18, 5:4, 고후13:11), 간구하다(마8:5, 눅8:31, 몬1:10), 빌다(마18:32), 구하다(마26:53, 막5:10, 눅7:4), 권하다(눅3:18, 행11:23, 빌4:2), 청하다(행8:31, 13:42, 28:14), 간청하다(행9:38), 권면하다(행15:32, 고전4:13, 살전2:11), 위로하다(행16:40, 고후7:6, 엡6:22), 여쭈다(행24:4), 원하다(히13:19), 위로하다(롬12:8), 위안받다(골2:2).
화냥년, 병자호란과 환향녀(還鄕女)
병자호란 때 잡혀간 우리 조상 여인들이 되돌아 올 때 홍제천에서 더럽혀진 몸을 깨끗이 씻고 들어 오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화냥년이라고 돌팔매질을 해 대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화냥년’은 ‘화냥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로, 그리고 ‘화냥’은 ‘서방질을 하는 여자’로 풀이되어 있다.
‘화냥질, 화냥기,
화냥데기’ 등의 단어들로 보아서 ‘화냥년’은 ‘화냥’과 여자를 낮잡아 이를 때 쓰는 말인 ‘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화냥’은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화냥’에 대해서는 여러 어원설이 제기되어 왔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화냥년’을 ‘환향녀(還鄕女)’에서 왔다는 설이다.
즉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붙잡혀 갔던 여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여인들이 몸을
버린 여자들이어서 그들을 지칭하던 ‘환향녀’가 오늘날의 뜻을 가진 ‘화냥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발음도 비슷하고 민족적 설움도
끼어 있어서 일반인들에게 그럴 듯하게 들렸던지, 오늘날은 이 설을 믿는 사람도 꽤나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설은 어디까지나
민간어원설일 뿐이다.
또 한 가지는 만주어 ‘hanyang’ (음탕한 여자)에서 왔다는 설이다.
이 단어가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끌려갔던 여자들이 돌아오면서 같이 들어와 우리나라에 퍼졌다는 것인데, 증거가 없어서 믿기 어렵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화냥’이 만주어 ‘hayang'으로 부터 온 ’화랑(花娘)‘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그 근거가 불분명하다.
‘놈을
기르다’의 뜻인 ‘한양(漢養)’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옛 문헌에 ‘화냥’을 ‘양한(養漢)’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양한(養漢)’의 뜻을 몰라 ‘한양(漢養)’으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설은 남자 무당을 ‘화랑이’라고
했는데, 떠돌이 남자 무당은 이 여자 무당 저 여자 무당을 찾아 다녔기 때문에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을 ‘화랑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여자의 경우에 적용되면서 ‘화냥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훈몽자회에 ‘격(覡)’을 ‘화랑이 격’이라고 하고 또 ‘화냥’을 ‘화랑’(花郞)이라고도 한 문헌이 있어서, 여기에 암시를 받아 해석한 것이지만, 이제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
‘화냥’이란 단어는 아무래도 그 의미로 보아 ‘화냥’의 ‘화’가 ‘꽃 화(花)’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여성에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냥’도 한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냥’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으니 ‘화냥’과 연관된 단어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화냥년’의 ‘화냥’과 같은 여자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어떤 단어를 썼을까?
먼저 발견되는 단어는
‘화랑(花娘)’이다.
이 ‘화랑(花娘)’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쓰인 단어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0년(1489년) 3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
이제 유녀(遊女)라 칭하고 혹은 화랑(花娘)이라 칭하며 음란한 짓을 제멋대로 하니, 이를 금제(禁制)하는 조목을 뒤에 자세히
기록합니다.
○ 화랑과 유녀가 음란한 짓을 하여 이득을 꾀하고, 승려와 속인(俗人)이 서로 즐겨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
모든 업자[色人]가 화랑과 유녀를 숨기고 사람과 통간(通奸)하게 하고 인하여 이익을 얻는 자는, 범인(犯人)과 같은 죄를 주고
재리(財利)는 관(官)에 몰수하소서.
결국
‘화랑(花娘)’은 이 기록에 보이는 대로 ‘음란한 짓을 제멋대로 하는 유녀(遊女)’를 말한다.
그렇다면 ‘화랑’(花娘)은 원래
무슨 뜻일까?
중국 원말 명초의 학자인 도종의(陶宗儀, 호는 남촌(南村))가 지은 ‘철경록’(綴耕錄) 권14에 ‘창부를 화랑이라고
한다’
(娼婦曰花娘)는 기록이 있어서 ‘창녀’를 ‘화랑’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의 중국어 발음이
‘화냥(huániãng)’이어서 이를 차용한 것이 바로 ‘화냥’인 것으로 보인다.
‘화냥’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박통사언해’(1677년)다.
‘이 도적 화냥년의 난 나괴 야 (這賊養漢生的小驢精)’에서 ‘화냥년’이
등장하는데, 이것과 같은 계통의 박통사신석언해(1677년)에는 ‘네 이 도적 養漢여 나흔 져근 나귀아’로 나타난다.
여기의
‘양한’(養漢)은 ‘남자와 통간하는 여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양한’이 바로 ‘화랑’(花娘)과 동일한 뜻이다.
역어유해(1690년)에 ‘養漢的’을 ‘花娘’으로 풀이하고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재삼이 편찬한 ‘송남잡지’에
‘지봉유설’(1614년)에 ‘양한’에 대해 기록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즉 이수광이 말하기를 ‘창녀’를 ‘양한적’(養漢的)이라고
했다 (芝峯曰 今中朝號娼女爲養漢的)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기록으로 보아 ‘화냥’과 ‘화랑’(花娘)과 ‘양한(養漢)’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화랑’(花娘)의
중국어 발음이 ‘화냥’과 같은 것에 주목하게 된다.
따라서 ‘화냥’은 그 어원이 ‘화랑’(花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화랑’(花娘)이 ‘화랑’(花郞)과 발음이 같고 또 실제로 ‘花娘’을 ‘花郞’으로도 표기한 예들이 있어서 ‘화냥년’을 무당이나
신라 화랑과 연관시켜 풀이한 것도 나오게 된 것이다.
‘화냥년’의 ‘화냥’은 여러 형태로 쓰이었다.
‘화냥, 화냥이, 화랑, 환양년, 화랑년, 화낭, 하냥년, 한양년’ 등이 등장하는데, 이중에서 ‘화낭’과 ‘화랑’은 한자 ‘花娘’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듯하다.
화냥이(慣嫁人) <몽어유해보(1768년)> 화냥이(養漢的) <1778방언유석(1778년) > 화냥이(慣嫁人) <한청문감(1779?)> 화낭(養漢的) <화어유초(1883년> 년긔가 젹고 기미 아름다오믈 인여 져 분슈 모로 사들은 모다 그릇 화랑의 류로 알더라 <홍루몽(19세기)> 환양년(歡兩女) <한불자전(1880년)>
화랑년(花嫏女) <국한회어(1895년)> 뎌 화낭이 뎌의 부친이 뢰횡에게 마져 즁샹엿슴을 보고 (那花娘見父母被雷橫打了, 又帶重傷)<수호지(20세기)> 온 동리에서 판박어 노흔 화냥년이니 한 번 화냥이나 두 번 화냥이나 <뽕(1925년)>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쁘냐, 이 하냥년 같으니 <어머니(20세기)> 내가 딴 서방을 했꺼나 한양년의 짓을 했거나 <어머니(20세기)> (놈) 쌩 화냥년의 죵 지금 야동ㅅ집은 두 발을 동동 굴으며 를 쓰는 <목단화(1908년)>
예나
이제나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인이 있었음을 앞의 성종실록의 기록(모든 업자[色人]가 화랑과 유녀를 숨기고 사람과
통간(通奸)하게 하고 인하여 이익을 얻는 자는)에서 알 수 있는데, 오늘날의 ‘화냥년’은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을 말하기는 해도,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인을 지칭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남녀관계가 방정치 못한 여인을 일컫는 말로 ‘논다니’란 단어도
쓰이었는데, 이 단어는 남자 ‘건달패’에 대응되는 여인을 일컫는 어휘인 것 같다. 19세기 말부터 ‘갈보’란 말도 쓰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한자어는 ‘창녀’(娼女)와 ‘유녀’(遊女)일 것이며, 그 이후에 직업적으로 국내 남자를 대하는 여인은
‘창녀’로, 그리고 외국인을 상대하는 직업여성을 ‘양공주’(洋公主)로 부른 적도 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모두
‘윤락녀’(淪落女)로 통일되어 부르게 되었다.
건달패와
논다니들이 어우러져서 약물이 아닌 누룩국물을 마시고 그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다.
<상록수(1935년)> 혜쥬 창녀
별악을 쳐 쥭으니 <태상감응편도설언해(1852년) 갈보(娼女)<국한회어(1895년)> 어떤 특별한 뜻을 나타내는
단어가 이렇게 다양하게 분화되어 변천하는 것을 보면서 언어는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화냥년의 어원은 환향녀(還鄕女)라고 한다.
출세해서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오면 이 것을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하듯 환향(還鄕)은 고향으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즉, 화냥년의 본뜻은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還鄕女)라는 얘기가 된다.
물론 욕도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바람피는 여자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왜 환향녀(還鄕女)가 화냥년으로 바뀌었을까?
호란이나 왜란처럼 이땅이 전쟁터가되면 문화재뿐만 아니라 힘없는 백성까지 수탈의 대상이되었다.
물론 이러한 수탈이 남성보다 여성에 집중된다는 것은 전쟁의 주체가 남성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호란이나 왜란에 잡혀간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일종의 평화협정을 맺을때 상당수는 우리나라로 되돌려 보내진다.
이렇게 되돌려 보내진 여자가 환향녀(還鄕女)이다.
금의환향(錦衣還鄕)처럼 환대받지 못하는 환향(還鄕)이기, 조선조 최대의 덕목인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의 환향(還鄕)이기에 환향(還鄕)에 년(女ㄴ)이 붙어 화냥년이된 것이다.
자기나라도 지키지 못해 죄없는 백성을 침탈의 대상이 되게하고, 자신의 여자도 지키지 못해 환향녀(還鄕女)가 되게한 우리의 슬픈 역사, 그러한 역사의 주체였던 우리 남성이 붙여준 슬픈 이름이 화냥년인 것이다.
화냥년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슬퍼진다.
화냥년이라는 말, 화냥년이라는 말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역사도 슬프다.
그러나 이러한 뜻도 모르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슬프기보다는 안타깝다.
화냥년은 우리의 슬픈 역사이다.
이러한 슬픈 역사를 다시 반복되지않게 하는 일, 이 것이 슬픈 역사를 만들어온 우리 남성들의 업이 아닐까?
12-31-2024(화) 요한복음 14:27-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평안(27절)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
평안(1515) 에이레네(ĕirēnē) εἰρήν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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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평안(마 10:13, 눅 2:29, 행 9:31), 화평(마 10: 34, 눅 12:51, 행 10:36), 평강(눅 1:79, 요 20:19, 롬 1:7), 평화(눅 2:14, 19:42), 안전(눅 11:21), 화친(눅 14:32), 화해(행 7:26), 태평(행 24:3).
1. 뒤흔들다. 2. 뒤끓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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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소동하다(마2:3, 행17:8, 벧전3:14), 놀라다(마14:26, 막6:50, 눅1:12), 두려워하다(눅 24:38), 움직이다(요5:7), 불쌍히 여기다(요11:33), 괴롭다(요12:27, 13:21), 근심하다(요14:1,27), 괴롭게 하다(행15:24), 교란하다 (갈1:7), 요동하게 하다(갈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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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겁하게 되다, 겁을 먹다, 요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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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두려워하다(요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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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평안(마10:13, 눅2:29, 행9:31), 화평(마10: 34, 눅12:51, 행10:36), 평강(눅1:79, 요20:19, 롬1:7), 평화(눅2:14, 19:42), 안전(눅11:21), 화친(눅14:32), 화해(행7:26), 태평(행24:3).
누가복음 16:19-31 /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한 부자 : 자색 옷, 고운 베옷,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
부자도 죽어 장사되어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거지 나사로 :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다,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더라,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세상의 평안 - 육신적인 평안 / 부자
하늘의 평안 - 신령한 평안 / 거지 나사로
다양한 화가들의 뛰어난 솜씨에 의해서 작품들이 전시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동양화 한 점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폭포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포의 뒤편 작은 나무 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이 대상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새가 거대하고 웅장한 폭포가 떨어지는 그 환경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참 평안이라고 화가에 의해서 표현된 것입니다.
성경이 주는 평안은 이러한 평안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
1.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모든 인류에 대한 용서는 사랑의 출발점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개인에 대한 용서의 무죄 선언
3.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요한복음 19:26~27)
부모 공경을 위한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 : 46, 마가복음 15:34)
시편 22:1절을 인용
5. "내가 목마르다" (요한복음 19:28)
6.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누가복음 23:46)
A.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①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속죄하여 주실 때 그는 구원을 받고 평안히 돌아갔습니다. (눅7:36-50)
② 중풍병자의 죄를 사죄하여
주실 때 곧 건강하여 졌습니다. (마9:1-8, 요5:14)
③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속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26:28)
2. 예수님은 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을 위한 죽음 이셨습니다.
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눅23:34)
②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요19:6-23)
③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마26:15-69)
3. 우리에게도 용서하라고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①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골3:13)
② 주기도문에서 명령 하셨습니다. (마6:12)
③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마18:21-22)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1. 예수님은 낙원의 주인이심을 의미합니다.
① 낙원을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요14:1-6)
②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계22:1-6)
③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세상의 집과는 다릅니다. (고후5:1-3)
2.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사람은 강도입니다.
① 회개와 기도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1-42)
②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눅23:40)
③ 예수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함으로 낙원에 갔습니다. (눅23:42)
3. 주님이 가시고 우리가 갈 낙원입니다.
① 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합니다. (계22:5)
② 세상 끝까지 함께 계십니다. (마28:20)
③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요14:3)
제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친히 효도의 계명을 지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어려서는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예배하러 갔습니다. (눅2:41-51)
② 예수님이 효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엡6:1)
③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셨습니다. (요19:26-27)
2.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①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효도입니다. (출20:12)
② 고르반의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막7:11)
③ 효도하는 자에게 장수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5:16)
3. 가상칠언중에 3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산 교훈입니다.
① 부모님에게 순종을 해야 합니다. (마21:28-31)
② 부모는 타락과 실패의 자식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눅15:11-24)
③ 스승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요,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부모입니다. (막3:31)
제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
1. 예수님의 이 순간은
① 흑암의 권세가 잠깐 이기는 모습입니다 (마27:46)
② 하나님이 얼굴을 돌이키신 순간입니다 (시22:1)
③ 하나님과 인간의 담을 허시는 순간입니다. (엡2:14-18)
2. 4언의 산 교훈
①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최고봉의 순간입니다. (딤전2:4)
② 죄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산 교훈입니다.
(계21:8)
③ 예수님이 인간 대신 버림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사 53:4-6)
3.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8:29) ② 예수님의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시는 고백입니다. (대하20:20) ③ 충성과 봉사의 순종으로 끝까지 맡기시는 모습입니다. (사53:7)
제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1. 목마른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목말라 주셨습니다.
① 우리의 심령이 목마릅니다 (사 55:1)
② 우리의 애정이 목마르고 있습니다. (요일 3:16)
③ 경제적으로 목마르고 있습니다. (신 28:15-19)
2. 목마름을 해갈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사 55:1-3)
② 예수님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요 4:14)
③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행 2:1-4)
3. 세상엔 목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① 생명수를 주어야 합니다. (마 10:40-42)
② 사모하게 해야 합니다 (마 5:6)
③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요 7:37-38)
제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 19:30)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완성자 이십니다.
① 순종을 완성하셨습니다. (빌 2:6)
②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마 5:44)
③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요 19:30)
2. 인간은 다 이루고 갈 수가 없습니다.
① 자기의 계획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② 자녀나 부부가 가진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③ 교회나 국가의 꿈을 다 이루고 가는 이가 없습니다.
3. 못다 이루는 우리 인생은 다 이루신 주님을 믿고 가야 합니다.(벧전2:24)
① 마귀는 우리의 완성을 방해합니다. (마4:1-10)
②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 이루셨습니다. (요16:33)
③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와 확신의 말씀이 됩니다. - (계20:1-3)
제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1. 사람은 세 가지 형태로 창조되었습니다(육, 혼, 영).
①
육으로 지어진 몸은 물질과 교제하고 (갈 5:19-21)
② 혼은 사람의 정신으로 자기를 담고 있습니다. (살전 5:23)
③ 영은
하나님이 임하시매 신령한 세계에서만이 통합니다. (롬 8:10-11)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이십니다.
①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눅23:46) ②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엡1:3)
③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롬 8:15-17)
3.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① 천하보다 귀한 것은 생명(영혼)입니다 (마 16:26)
②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요1:12)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요 14:6)
이
요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눅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ㅐ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엡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빌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ㄱ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ㄴ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이 말씀이 윗절까지 계속되던 성령론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이 귀절이 위의 모든 말씀의 결론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26절에 말한대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사건("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고 하였고, 그 뒤에 이 귀절은 평안의 선물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을 깨닫고 믿을 때에 비로소 참다운 평안을 누린다. 어떤 학설에, 평안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단순한 작별 인사라고 하나, 이 말씀을 그렇게 보는 것은 잘 못이다. 그 이유는, 이 귀절에 말한대로 그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하였고, 또한 그것이 세상의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신자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28 절), 또한 그 평안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된다. 예수님의 평안은, 그가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내시는 관계를 말함이다. 그는 구속 사업의 완성으로 신자들에게도 그런 평안을 주신다. 그의 주시는 평안이 세상의 그것과 다른 특성은, 그 가장 위험한 때에도 심령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Barrett)
- 무사히 잘 있음
- 무사하여 걱정이 없음
1515. 평안 에이레네() εἰρήνη 스트롱번호1515
관련 성경 / 평안(마 10:13, 눅 2:29, 행 9:31), 화평(마 10: 34, 눅 12:51, 행 10:36), 평강(눅 1:79, 요 20:19, 롬 1:7), 평화(눅 2:14, 19:42), 안전(눅 11:21), 화친(눅 14:32), 화해(행 7:26), 태평(행 24:3).
록 음악의 기타 연주자가 있었습니다.
1970년 어느 공연의 마지막에 가서 그는 자기의 기타를 부숴버렸습니다.
로버트 맥기와 도날드 사포가 쏜 [평안을 찾아서]라는 글에 의하면, 어느 날 지미 핸드릭스의 공연이 마치자 관중들은 소리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열광하던 박수갈채가 갑자기 그쳤습니다.
지미 핸드릭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고요한 정적을 깨며 그는 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누구 참된 평안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무대 뒤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갑작스런 초청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약물과용으로 죽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의 동생은 찾아와서 그 밤동안 위로하며 같이 지내자고 했다. 그때 리들리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말했다.
"나는 오늘 밤 평안히 자고 내일 순교하겠다."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왜 그는 그렇게 평안하게 죽을 수 있을까?
그것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빌 3:7-8)
예수 믿는 사람은 환난이나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요 16:33, 행 12:7)
12-30-2024(월) 요한복음 14:25-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혜사(保惠師) 26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All this I have spoken while still with you.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여기"너희"란 말은 사도들만 가리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직접 들은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여 주시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은 사도들이다. 성령의 일은, 예수님의 교훈을 되살려 해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님의 전날 교훈을 사도들의 기억에 되살려 깨닫게 하시는 운동이다.
보혜사(保惠師) :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사)
- 신자를 보호하여 돕는다.
3875. 보혜사. 파라클래토스()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
관련 성경 / 보혜사(요14:16,26, 16:7), 대언자(요일2:1).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가르치고(1321) 디다스코() διδάσκω 스트롱번호1321
생각나게(5279) 후포밈네스코() ὑπομιμνήσκω
스트롱번호5279
-
1. [능동]
-
a. 회상시키다, 상기하게 하다, 깨우치다, 생각나게 하다, 요14:26, 딛 3:1, 벧후1:12, 유1:5.
-
b. 회상하다, 상기하다, 내놓다, 딤후2:14, 요삼1:10.
-
-
2. [수동] 기억하다, 생각하다, 눅22:61.
-
관련 성경 / 생각나다(눅22:61, 유1:5), 기억하다(딤후2:14), 기억하게 하다(딛3:2), 잊지 아니하다(요삼1:10).
성령에 대한 이해를 크게 두 영역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순복음 교회와 성결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특징은 성령을 은사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와 같은 이해의 현상은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해야 하고 "병을 고쳐야 한다(치유)"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에 장로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특징은 성령을 이론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와 같은 이해의 현상은 누구든지 예수를 구세주로 시인하고 믿는다는 것은 이미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방언과 병을 고치는 은사적인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성령의 이해는 은사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 양면을 모두 겸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사도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사람(자연인)
육체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육신적인 사람(초신자)
육신적인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였으나 아직도 세상의 것에 만족을 좋아하며 즐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러한 사람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어린아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습니다.
셋째는 신령한 사람(영적인 존재)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환경에 따라 신앙이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기근과 적신과 고통이 닥쳐올지라도 두려움이 없이 천국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킵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신령한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분열하여 서로 자기들의 의를 고집하고 주장하므로 발생한 문제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시대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믿음으로 섬김에 열중할 때 발생하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을 때 두 가지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가르침을 받는 은혜
둘째는 깨닫는 은혜
가르침을 받게 됨으로 모르던 것도 알 수 있고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
이러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은혜의 사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
유치원 선생님들의 가장 큰 애로점은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을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까지 낮춰서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려 줘도 듣는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답답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천국 복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
깨닫지 못한다면 세상에 의미 없는 다른 말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께
간구하면 천국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우리는 이제 간절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령님께 무릎을 꿇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말씀을 들려주실 때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님이 그 마음속에 있는 자는 들을 수
있는 귀와 깨달을 수 있는 머리를 가진 자입니다. 겸손함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면 성령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천국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듣지만 말고 깨닫는 자가 되십시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마13:19)
1.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길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l20명이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하루, 이틀, 사흘… 열흘 동안이나 기다리면서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 열흘째 되던 날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뜨거워지더니 이상한 말을 하고 능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자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성령 충만해 진다는 말은 마치 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물을 많이 가지고 있듯이 성령을 많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를 믿는 생활이 힘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은혜를 받으면 기쁨으로 하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성령이 충만해지면 모든 의심과 부조리가 해결됩니다. 과거에는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읽어도 의심이 자꾸 생겨납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러한 의심이 다 사라지고 부조리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믿음 안에서 다 해결되고 완전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중생하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에 대해서는 중생도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깜깜하고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육체대로만 살고 영적으로 영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아무리 영의 일을 이야기해도 알지 못합니다. 천국? 지옥? 하나님의 계심? 심판?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합니다.
2. 육신적(Carnal man)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정말 믿기는 하나 영적으로 성숙하여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아직 육체의 소욕을 버리지 못하고 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먹여 주어야지 스스로는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또 은혜를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시기, 분쟁, 다툼이 많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문제들도 바로 이런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육적인 사람들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신령한 신자(Spiritual man)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장성하여 분별력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는 장성한 교인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교인은 잘못된 교리,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의 역사 등을 다 분별할 수가 있어서 이단사설에 현혹되거나 매혹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1서 2장 20절과 27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 마음속에 오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주께 맡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면 자연히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교인 중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시험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 자기를 반성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떠한 사람에게 속했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의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은 능력과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받은 후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① 이 능력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와 싸울 것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도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소욕에 지고 맙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8장부터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승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슬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슬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능력은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 전도와 봉사의 능력입니다.
육은 영적인 일에 무능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봉사에 쓰여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영적인 봉사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무디(D.L. Moodv) 같은 이는 초등학교 3학년 밖에 못나온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목소리도 나빴다고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훌륭한 체모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무디와 같은 부흥사는 없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때에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 보면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나 기도나 봉사나 무엇이든지 성령을 받아야 그 능력이 오는 것을 믿으시고 아무쪼록 열심히 기도하고 사모하고 기다려 성령 충만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2-28-2024(토) 요한복음 14:21-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버지의 말씀(24절)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Whoever has my commands and obeys them, he is the one who loves me. He who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too will love him and show myself to him."
Then Judas (not Judas Iscariot) said, "But, Lord, why do you intend to show yourself to us and not to the world?"
Jesus replied, "If anyone loves me, he will obey my teaching. My Father will love him, and we will come to him and make our home with him.
He who does not love me will not obey my teaching. These words you hear are not my own; they belong to the Father who sent me.
*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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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 미완료 ἐτήρουν, 미래 τηρήσω, 제1부정과거 ἐτήρησα, 완료 τετήρηκα, 미완료 수동태 ἐτηρούμην, 완료수동태 τετήρη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τηρήθην, τηρός ‘감시’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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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켜보다, 감시하다, 파수하다, 마28: 4, 행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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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키다, 간직하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요2:10, 행25:21, 고전7:37, 딤전6:14, 벧전1:4.
3. 유지하다, 붙들다, 엡4:3, 딤후4:7, 유1:6. -
4. 보호하다, 요17:15, 계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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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준수하다, 준행하다, 지키다, 유의하다, 마23:3, 요14:15, 계12:17,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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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지키다(마 19:17, 마 28:4, 딤전 5:22, 계 3:3), 지키게 하다(마28:20), 두다(요2:10, 12:7), 보전하다(요17:11,15), 갇히다(행12:5), 간직 하다(벧전1:4), 구류하다(행25:4), 지켜주다 (행25:21), 그대로 두다(고전7:37), 조심하다(고후11:9), 보전되다(살전5:23), 예비되다(유1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아버지의 말씀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은 아버지를 사랑할 때에 드러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행동하는 언어로 표현될 때 그 진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도 바칠 것이라고 사나이답게 호언장담(豪言壯談) 했습니다.
그런데 용감한 것 같았던 베드로이었지만 하녀들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결단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무너진 후에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물고기를 잡던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오른편으로 옮겼을 때 그물을 잡고 있던 손의 감각에 많은 물고기가 잡혔음을 알고 내가 모른다고 부인했던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은 나를 깨닫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왜 나를 깨닫게 할까요?
아버지의 말씀은 죄인을 거룩하게 다듬기 때문입니다(요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더러운 죄인을 어떻게 거룩하게 다듬어주실까요?(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더러운 것을 물로 세탁하듯 거룩한 말씀으로 더러워진 인간의 몸과 혼과 영을 씻어 거룩한 존재로 세워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게 된 사람을 사용합니다.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거룩해지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주님의 도구로 받아주시옵소서
오 주님,
더럽고 추한 인생을
거룩한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주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다듬어 주옵소서
내 주의 보혈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나의 계명."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13:34) "새 계명"을 가리키는데,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다.
13:34 해석, 요일 2:7-11 참조.
형제를 사랑한다 함은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포한 신약 윤리(예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이 모든 윤리는 사랑을 목적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신약 윤리가 모세의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 완성이라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사고 방식으로 관설하였다(롬 13:8-10).
그런데, 기독자가 계명을 실행함에 있어서 구약 시대 성도보다 더욱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관철하게 된다.
그 이유는, 신약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그 성취 형태에서 누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그 큰 사랑을 받은 것이, 언제나 그의 윤리 생활의 동기를 이룬다.
요일 4:19에 말하기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무슨 일을 행할 때든지 사랑의 동기로 행하여 모든 의(義)를 이루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랑의 동기를 가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명확하고 철저하고 일관성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마 22:37-40).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나실 것을 가리킨다.
그 나타나심은, 우리의 육신에 나타나심보다 더욱 근거 깊이 우리의 심령에 나타나심이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니까
- 여기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눅 6:16).
그의 물어본 말은 세상 영광을 생각한 것이다.
곧, 예수님이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시리라(21 절)고 하신 말씀을, 유다는 이름낸다(명성을 떨친다)는 뜻으로 오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묻기를, "왜 널리 세상에는 이름을 나타내시지 않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의 말씀을 지킴보다 앞선다.
사랑없이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지킨다 해도 생명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성부(聖父)와 예수님이 함께 신자에게 오셔서 거하신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내주(內住)를 가리킨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신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다(고전 6:19; 고후 6:16; 엡 3:17; 살전 4:8).
이와 같은 연합은 내세에 이르러서 더욱 완전히 이룬다(계 3:20, 21:3).
현세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거하시며, 내세에는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거한다(Godet).
요한복음 5:19-29 / 요약
서론
오늘은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29절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권위와 그 분이 선포하신 생명의 말씀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한 안식일에 행하신 기적 이후에 이루어진 논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기적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비난과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하며,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밀하게 설명하십니다.
1. 예수님과 아버지의 완전한 일치 (요한복음 5:19-23)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며, 아버지가 행하는 것을 아들도 동일하게 행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뜻과 권위 아래 행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더 큰 일들을 보고 동일하게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사역이 지극히 놀랍고 초자연적인 것임을 암시하십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권위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능력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원하시는 자를 살리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단순한 치유의 차원을 넘어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생명의 말씀과 심판의 권위 (요한복음 5:24-27)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과 ‘심판’에 대한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선언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과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자는 현재 영생을 소유하고 있으며, 내세에서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여기서 ‘영생’은 단순한 연속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하는 권한도 받았다’고 설명하십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생명을 주신 것과 더불어, 심판의 권한도 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구원하시는 권위자이십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느니라’는 선언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적인 부활이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3. 부활과 최후의 심판 (요한복음 5:28-29)
요한복음 5장 28절과 29절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모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일어날 때가 올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은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행위가 최후의 심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한 일’이란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반드시 선한 행실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서 2장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마지막 날, 예수님의 권위 아래 모든 인류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과 심판 앞에서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살아간 자들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현재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결론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29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완전하게 일치된 사역을 하시는 분이며, 그분이 생명과 심판을 주관하시는 권위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이며, 그분을 믿는 자는 심판에서 벗어나 영생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더욱 깊이 믿고 따르며, 우리의 일상에서 그분의 생명의 말씀을 살아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묵상과 나눔
기도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한복음 5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사랑을 깊이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된 사역을 하시며, 생명과 심판을 주관하는 권위자이심을 우리 마음 깊이 새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듣고 믿게 하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여신 그 사랑을 하루하루의 삶에서 살아내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생의 약속을 소망으로 삼게 하시고, 이 소망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 이 귀절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악이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말씀을 받은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과 당시 제자들의 차이가 하나 있다면 아버지의 말씀을 받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말씀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은 여러분은 그들과 다르다. 하나님 말씀을 받은 영혼들인 여러분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저희들의 마음 속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며, 또 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 주님의 간절한 기도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악으로 충만하다. 악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저들을 아예 데려가 버리면 좋을텐데,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 저들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악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셨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분별됨과 거룩함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희를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즉 13절에서 기쁨을 말한 뒤에 나아가 거룩으로 전진하고 있다.
거룩은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이라는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을 위해 나는 감옥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오직 한 가지 죄를 두려워한다.”
이는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성도로서 가장 괴로운 것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병이 드는
것도 아니다.
죄를 짓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악에 빠지고, 그러면 기쁨이 사라지며 거룩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성도들과 하나를
잃어버린다.
거룩하게 되어야, 세상에서 분별될 수 있어야, 성도들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경계선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세상과 분리되지 않아 교회에 분열이 생긴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지 않기 때문에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를 철저하게 심판하지 않고 십자가로 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분열이 생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주 말씀하셨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하지 않으면 성도로서 소용이 없다.
‘성도’라는 자체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다.
거룩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져야 하는데, 세상을 떠나야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이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거룩은 음란이나 세속에 물들지 않음을 말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거룩은 ‘분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분별되는 것이다.
원래 시장에 있는 금은 거룩하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성전에 놓이면 거룩해진다.
이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을 위해 분별되었을 때 거룩한 것이다.
다만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분별되었는지, 온전히
하나님께 쓰이도록 드렸는지가 거룩함의 척도라는 말이다.
19절을 보라. 주님이 자신을 거룩케 한다고 하신다.
주님은 원래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고 거룩한 분 아닌가?
그러므로 이
뜻은 ‘저희를 위해 내가 십자가로 가서 제물이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거룩케 한다는 뜻이다.
오늘 여러분이 모든 세상적인 것에서, 자신을 위한 삶에서 자신을 분별해
‘하나님 오늘부터는 내가 아버지 뜻을 위해서만 살겠습니다.
나는 주님 뜻만 위해 이 땅에 존재하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나를
사용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해보라.
그런 마음을 가져보라. 그렇게 헌신해보라. 그때 당신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거룩함을 드러냄
중세에 ‘기둥 성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 4:24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 위해서 물리적인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요 1:1, 14)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독특한
형태입니다(마 1:23).
민수기 23:19는 하나님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참되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떤 이들은 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마치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9:1에는
하나님의 “손”과 “귀”를 언급합니다.
역대하 16:9에는 하나님의 “눈”에 관해 말합니다.
마태복음 4:4에는 하나님의
“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신명기 33:27에는 하나님의 “팔”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구절은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예로, 인간이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 해부학적이거나 감정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묘사한 것입니다.
비유적인 말의 한
형태인 의인화를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실제 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골로새서 1:15에서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1:17에서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살아계시며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3:10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라고 말합니다.
시편 84:2에서는 “…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철학적으로 생각해봐도,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위해서는 영이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육체에 제한되어 있다면 (한 번에 모든
곳에서) 편재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피조물과 같이 차원적인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한 번에 모든 곳에 편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제1 원인이시며, 이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4:24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과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연관시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바르게, 또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전통이나 의식, 물리적인 장소에 의존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기둥 위의 첫 사람 / 기둥 위의 성자 시므온(St. Simeon the stylite, 389-459)
영어에
‘스타일라이트’(stylite)라는 단어가 있다.
기둥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툴리테스’(στυλιτη?)에서 유래한 말로
‘주상 성자’(柱上聖者), ‘주상(柱上) 수도자’, 곧
‘기둥 위의 수도자’라는 뜻이다.
동굴의
수도자, 사막의 수도자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기둥 위의
수도자’는 무슨 말일까?
이는 말 그대로, 기둥 위에서 고행하며 살았던
수도자를 말한다.
지금은 생소하게 보이지만 4세기 이후 동방 교회에서는
이러한 봉헌 생활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 ‘기둥 위의 성자’ 시메온 성인이다.
개종한 양치기 수도자
4세기
말 시리아에서 이교도로 태어난 시메온은 양치기였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양치기들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도시 생활에 지친
많은 이가 전원생활을 꿈꾼다.
그들은 시골에 가기만 하면 산과 들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유토피아적 삶이 펼쳐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농촌 생활, 산촌 생활은 생각처럼 목가적이지 않다. 낭만적이지도 않다.
나는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 안다.
시골의 산과 들판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말이다.
시메온이
처한 환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양치기들은 여유롭게 전원생활을
한 이들이 아니다.
도둑과 들짐승들로부터 양 떼를 지키고자 밤에도
들에서 야영했다.
양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늘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자신의 양을 뺏으려는 사람이나 짐승이 나타나는 비상 상태에 이르면
극도로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험한 일을 하다 보면 대체로 완력이
세지고 성격도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양치기들은 아마도 턱수염 덥수룩한
산적 같은 외모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당시의 양치기 시메온은 거친
세상에 맞서 거칠게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실제로
우리는 양치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가진 양을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와 쏙 빼닮은, 눈을 뜨면 일어나 움직이고 눈을 감으면 자는 의미
없는 일상을 반복하던 양치기 시메온에게 어느 날 계시가 찾아들었다.
봉헌 생활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예수님께 경배한 목동들이 하느님께도
찬양했다면, 시메온은 이를 봉헌 생활로써 실천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의
규율마저 싱겁다고 느낀 그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밧줄로 자신을 꽁꽁
묶어 단식하는 등 극도의 고행을 실천했다.
그런데
수도원은 ‘함께’ 봉헌 생활을 하는 곳이다.
유독 혼자서 과하게 고행하는
시메온을 품기란 어려웠다.
수도원을 나온 시메온은 인근 오두막에서
잠시 살다가, 다음에는 작은 동굴을 찾아 들어가 노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기둥 하나가 들어왔다.
시메온은 무릎을 쳤다.
기둥 위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완벽한 고행처였다.
기둥 위의 고행
그는
그렇게 사막이나 동굴로의 수평적인 탈출이 아닌, 수직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3m 높이의 기둥에 올라가서 생활했는데, 곧 6m 기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더 높이 옮겨 갔다.
마지막 기둥의 높이는 자그마치 18m나
되었다.
더 높은 기둥의 선택은 불가능했다.
첫째, 사다리를
댈 수 없으니 식량을 공급받을 수 없었으며
둘째, 기둥 아래 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기둥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러친 가로세로 각각 2m의 공간이 있었다.
시메온은
이 작은 공간에서 햇빛과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노숙했고, 잠잘
때 외에는 앉거나 눕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소박한 식사만을 했는데,
음식은 자발적으로 제자가 되기를 청한 이들이 기둥 아래에서 일일이
챙겨 주었다.
위대한
성자가 기둥 위에서 고행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수많은 사람이
그를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기둥은 순례지가 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순례객들이 시메온에게 청하는
기도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질병, 고통, 불임, 죄악, 심지어는 자연재해까지
시메온이 나서서 해결해 주길 바랐다.
신기하게도 시메온의 기도는 바로
효과를 보여,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시메온의 유산
시메온의
일과는 사도직 수행으로 빡빡했다.
그는 새벽 세 시부터 기도했고 기둥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론했다.
그러고 난 뒤 찾아온 이들의 고충을
듣고 상담했으며 병자를 치료했다.
이교도를 개종시켰으며 전염병과
기근, 각종 재해의 해결사가 되었다.
신학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주교가
직접 시메온을 찾아와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일흔을 조금 넘긴
459년에 눈을 감았는데, 그때서야 오랜 고행을 마치고 기둥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시메온이
선종한 뒤 기둥 위 수도자의 수는 급격히 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도자였던
다니엘은 시메온과 면담한 뒤 곧바로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33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 변두리의 기둥 위에서 산 다니엘은
84세에 죽었다.
기둥
위에서 봉헌 생활을 하는 전통은 서방 교회에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동방
교회는 1800년대 말까지 간헐적으로나마 그 명맥을 유지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기둥 위 수도자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시대의 맥락에서 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욕정과 세속의
유혹이 지금보다도 강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매우 방탕히
생활했다.
수도자들은 그처럼 죄악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에야 하느님께
오롯이 봉헌하는 삶을 살고 더 나아가 그분과의 유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봉헌 생활 전통은 오늘날의 이집트, 이란, 이라크,
터키, 시리아, 그리스 등 동방 교회 지역에서 생겨났고 그곳에서 성행하였다.
처음에는 사막이나 기둥 위에서 홀로 봉헌 생활을 하다가, 차츰 같은
생활을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공동생활 형태가 생겨났다.
사람들이
사막으로 가서 생활한다는 소문은 곧 유럽 서방 교회에 퍼졌고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동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행은
흐른다.
동쪽 발원지에서 넘쳐 난 봉헌 생활 전통의 거센 물결은 이제
새롭게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달마는 동쪽으로 갔고, 동쪽의 중국에서
불교의 화려한 꽃이 피어났다.
동방 교회 수도자는 서쪽으로 갔고, 서쪽의
유럽에서 이제 그리스도교 봉헌 생활의 화려한 꽃이 피어난다.
당시에는 거룩하게 살려는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거룩해지고 싶은 이들끼리
따로 생활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에 있을 때는 거룩한 것 같다.
항상 기도하고 항상 말씀
읽고 항상 찬송 부르니 거룩한 것 같은데, 그런 생활을 10년쯤 한 후 내려와 사람들을 만나 보면, 그것은 시험을 거치지 않은
거룩함,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무죄 상태(innocent) 같음을 알 수 있다.
주 예수님의 기도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면서 악에 빠지지 않고, 거기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은 시험된 거룩이고 능력 있는 거룩이다.
생명의
능력이 그들 가운데 있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끼리만 모여 있으면 별로 시험에 들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성도들과 많이 교제해야 한다).
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항상 만나는 한두 사람과만 만나면서 자신이 거룩하다고 확신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시험이 되지 않은 거룩인 것이다.
소금이란 무엇인가?
야채나 여러 가지 재료 속에 집어넣으면 녹아 없어져 버린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소금의 기능은
살아 있다.
그래서 음식이 부패하지 않는다.
이러한 거룩함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성도들을 두심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고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소금이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야, 우리 참 짜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이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을 켜서 통 속에
넣어두고 ‘우리끼리 얼마나 밝은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마 5:14,16).
주님은 이렇듯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사람들이 그들의 연합, 하나됨, 서로 사랑함을 보고 ‘아,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을 믿어야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진리로 거룩하게 됨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룩하게 되는가?
우리 주님은 ‘진리로 거룩케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진리가 있어야 한다.
진리의
종국이란 지혜가 아니다.
‘나는 많이 배워 이렇게 많이 안다’ 자랑하라고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받은
성도들은 그 종국이 거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삶이 성결케 된다는 것이다.
진리의 종국이란 우리가 배운 뒤에 우리의 삶이
진정 거룩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온유함과 겸손함과 그리스도의 미덕들을 나타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며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게 하고 복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지, 지식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잘못된 진리이다.
기묘한 것은 여러분이 참으로 성결하게 되었다면 주님은 다시 여러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18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거룩하게 된 성도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하신다.
‘주님, 제 주변에는 왜 이렇게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를
괴롭힙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내신 이유이다.
거기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와 거룩과 생명과 그 아름다운 것을
나타내라고 보내신 것이다.
거룩한 생명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게 되어 있다.
거짓 신앙으로는 거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룩은 여러분 마음 속 깊이 있는 참된 신앙을 세웠을 때에서야
오는 것이다.
선한 행위, 거룩한 행위는 참된 신앙의 결과이다.
진리를 참되게 믿었을 때 그 모든 진리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낳게 되어 있다.
반면 잘못된 교리는 간접적·직접적으로 여러분을 죄로 인도한다.
편협하게 만들고 인생의 발걸음을 바르지
못하게 만든다.
참된 진리는 자연스러움 속에서 거룩을 산출하는 것이다.
지금은 마지막 시대이다.
주님은 거룩한 교회를 얻기 원하신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야할 곳은 성경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러분이 말씀 자체를 사랑하고 말씀으로부터 영양분을 얻고 가르침을 받고 감동을 받고 새롭게 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기를 원한다.
성경의 증거에서 떠나지 말고 성경을 사랑하되 끝까지 이 경주에서 낙오하지 않기 바란다.
특정한 사람들만 거룩하게
된다고 오해하지 말라.
진리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울 때 여러분의 삶 가운데 거룩함이 이루어진다.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아버지에 의해 아들이 이 세상에 보내심 받은 것처럼, 아들은 제자들을 보내신다.
주님은 원래 거룩하시다.
하늘에 계실
때부터, 또 이 땅에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시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이 ‘저희들을 위해 내가 나를 거룩케 한다’고 하셨으니,
거룩이라는 말에는 한 가지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무언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자신을 바쳐
순종하시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거룩하게 되려면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룩케 하셨듯 우리도 거룩케 해야 한다.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분별하여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거룩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체험적으로 여러분들이 진정 주님의 거룩하게 함을 입으려면 첫째는 먼저 배워야 한다.
많이 배웠을 때, 은혜를
많이 얻었을 때, 비로소 보내심을 받는다.
그 때부터 여러분은 거룩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리 주님도 거룩한 분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이 증명되셔야 했다.
그럴 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거룩한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삼 년 이상 교육하셨다.
그들은 많이 배웠다.
발 씻어주는 것도 배우고 말씀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떠나려고 하신다.
제자들의 거룩함이 증명되어야 할 단계이다.
나는 여러분도 이런 단계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어느 날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내실 것이다.
주님이 당신을 거룩하게 하셨듯이 말이다.
주님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얼마나 죄인을 사랑하며 절대적으로 구별된 사람인가를 증명하셨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다.
세상에서 입증되어야 하는 거룩
거룩은 세상에 있는 속된 것이나 평범한 것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나타내는 길은 세상 속에 있을 때라야
입증될 수 있다.
오해가 없기 바란다.
스스로 거룩한 것이 다 거짓이 아니라, 참되게 증명되는 곳은 바로 세상이라는 것이다.
거룩이란 세상과 절대로 다른 방식과 속성, 본질의 어떠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이 배경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성도의
거룩함이 세상과 대비되어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다.
여러분도 주님의 음성과 명령을 듣고 가야 한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것이 다 세상이다.
그곳에서 결국 우리 주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이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죄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피를 흘리셨듯
그분과 같은 생명을 가진 여러분 역시 세상 속에 그 거룩함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받은
진리이다.
진리가 여러분 속에서 역사해 여러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12-27-2024(금) 요한복음 14:18-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에게로 오리라(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I will not leave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Before long, the world will not see me anymore, but you will see me. Because I live, you also will live.
On that day you will realize that I am in my Father, and you are in me, and I am in you.
"너희에게 오리라(I will come to you.)"
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재림의 예수(살후 1:10, 에르코마이. 강림하다)
둘째는 부활의 예수(눅 14:18, 에르코마이. 오리라)
셋째는 성령의 임재(마 3:16. 에르코마이. 임하심을)
문맥상으로 살펴보면 세번째 성령의 임재가 가장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19절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때는 모두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두번째 해석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번째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항상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좀 더 확장하여 말씀을 읽어보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참조 / 요 14:18-27)
1. 신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살리신다(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신다(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신다.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를 깨닫게 하신다(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27 절)
물론 마지막 때에는 분명히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때에도 "에르코마이"라는 단어로 말씀하셨습니다(살후 1:10, 강림하신다).
'너희에게 오리라'고 하셨을 때에도 "에르코마이"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단어일지라도 그 용례와 문맥을 고려할 때 본문에서 강조하는 의미는 "성령의 임재"라고 하겠습니다.
땅(아다마)의 흙(아파르)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생명이 멈추면 반드시 땅(아마다)의 흙(아파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보혜사)이 없는 존재는 "먼지" 또는 "티끌"과 같은 허무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임재한 영의 사람이 될 때에 거룩한 백성으로 생명이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주 성령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옵소서
성령이여 강림하사
* 오리라(2064) 에르코마이(ĕrchŏmai) ἔρχομαι
관련 성경 / 오다(마 2:2, 막 13:36, 눅 1:59), 가다(마 2:8, 막 5:38, 요 3:26), 들어가다(마 2:11, 막 1:29, 11:27), 임하다(마 3:16, 24:39, 골3:6), 나아 오다(마 7:15, 8:2), 이르다(마 9:1, 27:33, 막 2: 20), 나오다(막1:45, 요 7:42, 계 7:14), 내려오다(눅 6:17), 나아가다(눅 7:7), 가서 보다(눅 11:25), 돌아오다(눅 12:36), 따르다(눅 14:27), 돌이키다(눅 15:17), 강림하다(살후 1:10), 내리다(히 6:7).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여기서 갑자기 "내가"란 말씀으로 시작된 것은, 위(16-17)의 논제(성령)와 달라진 느낌이 있다.
즈안(Zahn)은 이것을 논거로 하여, 이 귀절 말씀은 재림을 취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란 말을 사용하신 이유는,
위(16-17)에 관설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 자신의 속죄 사업의 연장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과 일체이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내가"란 말을 기탄 없이 사용하셨다.
위의 16-17절은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 뿐이고, 이 귀절(18 절)부터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란 말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 "내가...너희에게로 오리라"하신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는가?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가? 혹은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가?
(1) 재림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조금 있으면"이란 말(19절 초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온다는 것은 미구에 오심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오심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재림설에 맞지 않는다.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리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계 1:7).
(2)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켰다는 학설도 여기 맞지 않는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땅에 계신 기간은 길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것이 18절의,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킬 수 있겠는가 함이 문제 된다(Smide).
(3)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을 성령 강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령 강림 사건에 주님의 부활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인(Fein)은 말하기를, "부활절과 오순절은 일체(一體)로 합류한다"라고 하였다(Ostern und Pfingsten fliessen zu einer Einheit zusammen. - Theol., S. 383).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사는고로 너희도 살게 되리라"고 번역하신 것이 헬라 원문과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 한역의 "이는"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위의 말씀에 직속하는 이유 문구가 아니고 하나의 독립 문구이다.
"내가 사는고로"란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Lange, Barrett).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고유하신 생명 근원을 의미한다고 한다(Grosheide).
어쨌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려 주시는 근원이 되심을 보여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상반절의 "나를 보리니"란 말씀이, 살게 하여 주는 원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산다는 것(영생의 생명)은 실상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봄으로(앎으로) 생기는 것이다.
요 17:3 참조. 18절부터 27절 까지는 보혜사의 하실 일에 대하여 말한다.
곧, (1) 신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살리심(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심(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를 깨닫도록 하심(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심이다(27 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이 말씀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연합한 관계를 가리킨다.
신자와 그리스도와 연합에는 여러가지 방면이 있으니,
(1) 신자가 선택 관계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1:3-4).
(2) 신자가 구원사상(救援史上)의 그리스도 행적에서 그와 연합함.
곧, 그의 죽으심, 그의 부활, 그의 승천의 복된 사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롬 6:3-11; 엡 2:4-6; 골 3:3-4).
(3) 신자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엡 2:10).
(4) 신자가 그의 행위와 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롬 6:4; 고전 1:4-5).
(5) 신자가 죽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함(살전 4:14,16).
(6) 신자가 부활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고전 15:22; 롬 8:17). 이렇게 이 연합은 영원하며, 죽음도 그것을 파괴 시키지 못한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여기서 갑자기 "내가"란 말씀으로 시작된 것은, 위(16-17)의 논제(성령)와 달라진 느낌이 있다.
즈안(Zahn)은 이것을 논거로 하여, 이 귀절 말씀은 재림을 취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내가"란 말을 사용하신 이유는, 위(16-17)에 관설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 자신의 속죄 사업의 연장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삼위 일체 안에서 성령과 일체이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내가"란 말을 기탄 없이 사용하셨다.
위의 16-17절은 성령의 오심을 약속하신 것 뿐이고, 이 귀절(18 절)부터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내가"란 말로 가르치신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 "내가...너희에게로 오리라"하신 말씀은 재림을 가리키는가?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가?
혹은 성령의 강림을 가리키는가?
1. 재림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옳지 않은 이유는,
"조금 있으면"이란 말(19절 초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온다는 것은 미구에 오심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오심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재림설에 맞지 않는다.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리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계 1:7).
2.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켰다는 학설도 여기 맞지 않는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땅에 계신 기간은 길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그것이 18절의,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성취시킬 수 있겠는가 함이 문제 된다(Smide).
3.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을 성령 강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성령 강림 사건에 주님의 부활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페인(Fein)은 말하기를, "부활절과 오순절은 일체(一體)로 합류한다"라고 하였다(Ostern und Pfingsten fliessen zu einer Einheit zusammen. - Theol., S. 383).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이 말씀은, "내가 사는고로 너희도 살게 되리라"고 번역하신 것이 헬라 원문과 부합한다.
그리고 우리 한역의 "이는"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위의 말씀에 직속하는 이유 문구가 아니고 하나의 독립 문구이다.
"내가 사는고로"란 말씀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으나(Lange, Barrett).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의 고유하신 생명 근원을 의미한다고 한다(Grosheide).
어쨌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영적으로 살려 주시는 근원이 되심을 보여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점에 있어서 상반절의 "나를 보리니"란 말씀이, 살게 하여 주는 원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곧, 산다는 것(영생의 생명)은 실상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봄으로(앎으로) 생기는 것이다.
요 17:3 참조. 18절부터 27절 까지는 보혜사의 하실 일에 대하여 말한다.
곧, (1) 신자들을 거듭나게 하여 살리심(19 절),
(2) 그리스도와 신자를 연합하게 하심(20 절),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심.
(4) 사도들로 하여금 진리(예수님의 업적과 말씀)를 깨닫도록 하심(26 절),
(5)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심이다(27 절).
내가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24)
주님은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부모 없는 고아가 얼마나 불행할까요?
저는 어느 책에서 고아였던 김 호걸 씨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년기에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싸리문 있는 시골 집에서 친구들과 논두렁으로 뛰어 다니면서 즐거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고 가정불화가 생겼습니다.
부모의 갈등이 마침내 자식을 버리는 결과가 됐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데려다 딴 사람 손에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가끔 와 보더니 마침내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있던 사람에게도 버림받고 고아원 신세가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보호자 없이 뛰놀던 그는 어느 겨울날 사고를 당해 두 눈을 못 보는 장님이 됐습니다.
나이 들면서 맹인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늘 외톨이였습니다.
사람이 싫어졌습니다.
자신을 버린 부모가 원망스럽고, 앞까지 못 보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면 가족이나 있든지, 가족이 없으면 눈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가끔 그리워지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어려서 기어 다니던 누이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주변 장애인 가운데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교회도 부모 갖춘 사람이나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고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피아노 조율을 배웠기 때문에 조율하러 다니다가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어느 날 찬송가를 귀로 듣고 피아노를 치는데 목사님이 이 소리를 듣고 그에게 반주를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마침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혼자 성경을 읽던 중에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됐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편 27:10)
정말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 내 부모는 나를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구나!”
그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늘 기도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나를 버리지 마소서!”
18절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주님이 떠나시면 인생은 고아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없으면 육신의 고아가 되듯이, 영적인 부모가 없으면 영적 고아가 됩니다.
세상에서 부모 없는 불행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립니다.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항상 외롭고 방황합니다.
자기의 형편을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위로받지 못하고, 넘어져도 격려 받지 못합니다.
영적 고아는 육신적 고아보다 훨씬 더 비참합니다. 자기가 온 곳을 모르고 갈 곳도 모릅니다. 인생이 뭔지 모릅니다. 고독합니다. 평생토록 안식처를 찾아 헤매다가 불현듯 죽음이 다가 오면 준비도 안 된 채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고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영적 고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들의 아버지이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
그러면 주님은 부모로서 우리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실까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평생 가족,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지상 생애뿐만 아닙니다. 영원히 함께 사십니다. 여름에 해수욕장에 가면 안전 요원이 높다란 망대에 앉아 사람들을 살핍니다. 혹시 물에 빠진 사람이 보이면 뛰어들어 구조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하늘 의자에 앉아 우리를 관찰하실까요? 성도들에게 긴급한 문제가 생기면 멀리서 달려오실까요? 하나님은 긴급 시에만 나타나는 안전 요원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항상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야곱은 형과 원수지고 도망쳐서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길가에서 홀로 노숙을 했습니다.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낮선 땅에서 홀로 지새워야 했습니다. 몹시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들짐승이 물어갈 수도 있습니다. 강도나 도적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 속에 잠을 청했는데 꿈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결혼 문제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자녀 출산에 개입하셨습니다.(창29:31) 야곱의 20년 머슴살이에 함께하셨습니다. 야곱의 품삯을 찾아 주시고 재산을 모아 떠나게 하셨습니다.(31:11-13) 아무도 야곱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31:24),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하셨습니다.(32:1,30) 야곱이 노숙하면서 처음 서약했던 벧엘까지 함께하셨습니다.(35:1) 하나님은 야곱의 전 생애에 매 순간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생애 전반에 참여하십니다. 전쟁터에서 골리앗과 싸우는 소년 다윗에게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파사의 왕실에서 다니엘의 식탁과 건강을 지키셨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고아로 자란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되도록 함께하시고, 유대인 모르드개가 하만의 음모에서 벗어나도록 함께하셨습니다. 풍랑 속에 바다를 건너는 바울과 시종 함께하시고,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게 하시고, 감옥에 갇혀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생애에 참여하시되, 형제들과의 관계 중에 관여하시고, 종으로 팔려가는 일에 개입하시고, 시위대장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중에 개입하시고, 감옥에서 죄수로 있는 동안에 개입하시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총리가 되게 하시고, 총리 직을 수행하는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도들 속에 임하시는 방식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외형적인 것과 내재적인 차이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눈에 보이게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보이지 않게 심령 성전에 임하십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집단과 개인의 차이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민족 단위의 공동체에 임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집단이 아닌 각 사람 속에 개별적으로 임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생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을 포도나무 줄기로 성도들은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나무 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져 나오면 영양분을 받지 못해 말라 죽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생존합니다. 생존적인 관련성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함께 먹겠다고 하셨습니다. 매일같이 한 식탁에 참여하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가족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주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보살핌이 없으면 다 잡혀 죽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이런 인격적인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은 지금 그 문제 중에 임하여 계십니다. 오늘 내 인생의 문제를 주님과 함께 풀어가세요. 주여,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은 지금 내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알려 주세요!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23하)
마치 혼자 사는 듯이 괴롭게 살지 마세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답게 능력 있고, 힘 있는 모습으로 사세요.
세상에는 숨기고 성도에게는 나타내시고
주님께서 임마누엘을 말씀하셨을 때, 유다(다대오)는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22)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좀 나타내 보이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위력을 세상 권력자들 앞에 나타내 보이시면 얼마나 효과가 클까요?
첫째, 세상 나라는 본질상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세상 나라는 돈이 지배합니다. 권모술수가 지배합니다. 위선, 사기, 자기 과시, 폭력, 강압이 지배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이 다 그렇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가 지배합니다.
매스컴이란 괴물이 사람들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만들고 전파합니다. 이 세상은 판이 더럽습니다. 놀자 판, 먹자 판, 춤 판, 과시 판, 욕망과 자극의 판, 살인강도 판, 도적질 판, 사기꾼 판. 한 마디로 개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아무리 신령한 능력을 보인다 해도 결코 왕으로 받들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이적을 보이셨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있습니까? 세상도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주님도 이런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주님은 세속 권세를 지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더러운 이 세상은 종말에 사라지고 멸망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요란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1-5,10-12)
세상 나라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의롭습니다. 선합니다. 사랑의 나라입니다. 질서와 화목의 나라입니다. 유다가 기대한 것은 유대 민족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시고자 하신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둘째, 세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없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 주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9)
조금 있으면 세상이 주님을 다시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가까이는 육신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장사될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한 부활 승천하셔서 사람들 곁을 떠나실 주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주님이 제자들에게는 계속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19)
이 말씀은 현재형 동사로서(qewrei'tev) 확실히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보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부활하신 육신을 보리라는 말씀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항상 보리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영적인 눈으로 계속 본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계속 볼 수 있게 된 까닭을 주님은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9) 고 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19) 하신 말씀은 현재형이고, “너희가 살겠음이라”(19) 하신 말씀은 미래형입니다.
육으로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셔서 영원히 계십니다. 그리고 육으로 살아 있는 제자들은 주님의 살리는 영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이니 주님을 영원히 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제자들의 마음에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게 됐고 영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처음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주님과 숙식을 함께 했어도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오히려 마음 깊이 주님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주님은 눈에서 사라졌지만 영적으로 그들은 주님을 더욱 확실히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육신의 주님을 볼 때 실족했지만 오히려 승천 후에 성령을 받고나서, 영으로 주님을 보게 된 후에는 더욱 담대한 증거자가 됐습니다.
유다는 왜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나타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구약시대처럼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실상 주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나타나셨지만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또한 그들의 영안이 어두워서 주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왕들은 다 버리고 예수님만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영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봅니다. 성령을 받고 영의 눈을 떴습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을 육안으로가 아닌, 영의 눈으로 매일매일 보고 따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은 영적 고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는 감독자가 아닙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사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사는 곳에 함께 계십니다.
형통의 때에든지 고난의 때에든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무리 자신을 나타내도 믿지 않습니다.
왕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영의 눈이 닫혀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은 생애를 영적 고아로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곁에 계신 주님, 우리와 함께 사시는 주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그리고 성령을 받아서 매일매일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가족으로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던 길을 따라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을 너는 따라 올 수 없다. 하지만 후에는 따라올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왜 따라
갈 수 없는지 그리고 열정과 열심을 갖고 있는데 왜 갈 수 없는지 마음이 불편 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반발이라도 하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와같이
신앙의 길은 열심과 열정으로도 따라 갈 수 없는 길, 목숨을 버리고도 갈 수 없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여드는 군중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 일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열정으로 가려는가, 목숨을 버릴만한 각오로 가려는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닭이 세번 울며 자신의 의지와 열정이 무너졌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예수님이 가신 길을 영원히 따라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 14:18)
우리가 도저히 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찾아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생(生)과 사(死)
영적인 고아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에 이들을 언급할 때는 주로 같이 언급을 하고 계십니다.
조금 다른 말로 하면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한 묶음으로 기록합니다.
그들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입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기준에서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는 사람이며,
나그네는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사람이고,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없고 집이 없고 남편이 없어
정상적인 기준에서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돌보아주십니다.
고아는
육적인 고아와 영적인 고아로 나누어집니다.
성경에서 주로 말하고 있는 고아는 육적인 고아를 말합니다.
육신의 부모가 없는 육적인
고아도 불쌍한 사람이지만 더더욱 불쌍한 것은 영적인 아버지가 없는 영적인 고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68:5에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영적인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요?
사울은 육신적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이며 기스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고아입니다.
삼상 16:14에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날까지는 여호와의 영이 사울과 함께 했는데 떠났으니 이제부터는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하지 않기에 영적인 고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삼상 18:12에서도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셨다”고
하였으니 사울은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영적인 고아가 된 것입니다.
사울이 영적인 고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제부터는 광활한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나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울을 도우실 그 어떠한
분도 계시지 않으니 육신의 고아에 비하면 더 없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에는 고아를 도우시는 일을 하지 않다가 오늘에 와서 갑자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 아니라 옛날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일을 해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사람의 도움을 작은 도움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도움은 큰 도움이십니다.
사울이 큰 도움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니 더더욱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런 영적인 사실을 몰랐기에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떠남을 알면서도 육신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인 고아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어 하나님과 함께 살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다윗을 말할 때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삼상 18:12),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14),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28)라고 말씀하심으로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살았고,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셨음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고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교회
다니고 직분을 받으면 자동으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줄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려면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어야 하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신 아들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나를 다스리고 계시며 나를 거처로 삼으시고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이 성령으로 믿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우리는 영적인 고아가 아니며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긍휼이 여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12-26-2024(목) 요한복음 14:16-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또 다른 보혜사(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Counselor to be with you forever--
- the Spirit of truth. The world cannot accept him, because it neither sees him nor knows him. But you know him, for he lives with you and will be in you.
* 보혜사(3875) 파라클레토스(paraklētŏs)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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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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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 26, 15:26,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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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 또 다른 보혜사(και αλλον παρακλητον)
보혜사라는 용어가 신약 성경 요한복음에서만 4번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보혜사에 관한 의미를 살펴보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1.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대언자(3875) 파라클래토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2. 성령을 가리킬 때(요한복음 14:16, 26, 15:26, 16:7)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성령과 하나(요한일서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따라서 삼위일체가 되는 신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여기 이른바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 원어(*)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혜사"란 말(*)은 "대언자"를 의미한다.
요일 2:1에 예수님을 "대언자"라고 하였으니, 성령을 가리켜 "다른 대언자"라고 함이 적당하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란 말을 위로자란 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과 마찬가지의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 약속된 보혜사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말씀은, 진리(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 사업에 대한 설명 계시)가 성령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이 그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은 육안에 보이는데로만 무엇을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를 받는 이유는, 그가 그들 속에 거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까닭이다.
그것이,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하신 말씀이 의미한 바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구속 사역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구약 시대는 성부 하나님을 통한 구속 사역
신약 시대는 성자 예수님을 통한 구속 사역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한 이후에는 성령님을 통한 구속 사역
따라서 오늘의 시대는 구속 사역을 감당하는 성령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란 한자어로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자라는 훈으로 "지키고,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는 역할"을 합성한 뜻입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에 의하면 "보혜사"를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παράκλητος)"라고 합니다.
'파라클래토스'란 "다른 사람을 위해 나타난 자"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소개 됩니다.
"파라칼래토스"란 "곁으로(파라. παρά)" "부른다(칼래오. καλέω)"라는 두 단어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로 "켵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단어를 성경에서는 "보호자, 변호자, advocate(JB, NEB)", "협조자, helper(NASB, 공동)", "위로자, comforter(위클맆, AV)", "상담자, counselor(NIV)" "대언자(요일 2:1)" 등으로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성경에서 소개한 '파라클래토스'의 사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대언자(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둘째는 도고하는 자(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셋째는 위로자(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머물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예언은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땅의 사람들은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믿는 일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또 다른 보혜사의 도움을 받아 영적생활을 승리로 이끌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며 축복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그러나 성령을 세상 변호사처럼 대하면 안 됩니다. 세상 변호사와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첫째로,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변호사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억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 속에만 찾아오십니다. 성령님의 변호를 받고 싶으시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셔야만 됩니다.
둘째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변호하십니다.
세상 변호사는 의뢰받은 문제만 다룹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도와주십니다. 영혼의 문제나, 육신의 문제나, 재산 문제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죽고 사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의뢰 받은 일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도와주십니다.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보혜사’란 말은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성령님은 모든 인생 문제의 보호자요 변호자요 협조자요 위로자요 상담자요 대언자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인생 문제에 돕지 못하실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세상 변호인은 돈 받고 맡은 사건에 한해서만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 인생에 만나는 모든 일에 관해서 도움을 주십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실 준비를 하고 곁에 계십니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metav) 있게 하시리리...저는 너희와 함께(parav)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ejn) 계시겠음이라”(16-17) 이것은 성령님이 우리와 교제하시고(metav, with), 우리 삶 속에 임재하시고(parav, from, with), 우리 인격 속에 내주하심(ejn, in)을 의미합니다.(롬8:26) 이렇게 성령님이 함께 사시는 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합니다.
우리 인생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삶의 벽에 부딪치면 누군가 내편에 서서 도와주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진정한 도우미는 없습니다. 사람은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사람을 의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운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이사야 31:1-3)
사람 의지하지 마세요. 사람은 진정한 도움이 못됩니다. 우리 인생을 도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임하심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성령이 오시는 경로입니다. 성령이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임하실까요? 성령은 예수님의 요청으로 성부께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
성령을 엉뚱하게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19에 보면,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안수하면 귀신이 쫓겨 가고, 불치병자나 불구자가 일어나고, 방언을 하니까, 베드로 사도에게 돈을 바치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노발대발 하면서 이렇게 저주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19:20) 요즘도 성령을 돈으로 사고, 인간의 노력으로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단련하고 연습한다고 임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믿음의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 속에 성령은 오십니다.
성령은 예수님 때문에 오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청하시고 보내셔서 예수님 대신 오신 분입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원래의 보혜사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원래부터 계시는 제1의 보혜사가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요한1서 2:1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했습니다. 여기서 ‘대언자’란 말은 헬라어로 ‘보혜사’와 같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예수님은 사형 선고 받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시는 제1의 변호사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역할을 하십니다. 선한 목자요(10:11), 양의 문이요(10:8), 생명의 떡이요(6:48), 빛이요(8:12),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14:6) 때로는 근엄하고 자상한 아버지시요(14:18), 형님이시요(20:17),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우리의 친구십니다.(15:15)
이러한 예수님이 잠시 제자들 곁을 떠나게 되셨을 때 제자들은 낙심했습니다. 누가 이러한 주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가? 주님은 이렇게 걱정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면서 제2의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6) 성령님은 바로 ‘예수님 대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요청하신 결과로 예수님과 똑 같은 역할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제2의 보혜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 성령을 구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만 성령님이 그 마음에 오십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 속에 강림하신 시기는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은 매우 의미 있는 절기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은 주님의 부활 승천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 감람산에서 승천하신지 1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때에 주님을 부활을 목격했던 500여 명의 무리들 중에 약120여명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를 시작한지 열흘째 되던 날 갑자기 공중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불이 혀같이 갈라져서 각 사람 위에 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 불의 모양이 보이고 바람 소리가 들린 것은 신성을 지니신 성령이 임재하신 표식입니다. 과거 시내산에서 혹은 광야 시절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불과 구름 기둥, 혹은 천둥과 번개와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육안으로 느끼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날에 성령이 오신 것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본래 성령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각 사람 속에 임하여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날 때에 성령님은 인간들 속에서 떠나셨습니다. 홍수 심판에 앞서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
그런데 그 아주 떠나셨던 성령께서 다시 인간 속에 영원히 거하고자 오셨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날은 구약의 오순절입니다. 구약시대 오순절은 첫 열매 드린 날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대량 추수가 이루어지는 절기입니다. 성령이 오신 신약의 오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이 살아나신지 50일째 되는 날, 모든 성도들을 부활시키시는 성령이 임하셨으니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성령님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셨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성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성령은 예수 믿는 자 속에 임하십니다. 교회 다닌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교리를 안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성령이 임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믿음이 많든 적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인생을 맡기세요. 그러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성령 받기를 원하십니다. 가이사라에 주둔하던 로마군의 백부장 고넬료는 집에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베드로의 설교들 듣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행10:44)
사마리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행8:14-16)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행19:5-6) 우리도 이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알고 그 분이 바로 내 인격 속에 살아 계심을 알아야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약속하셨고, 예수님이 구하셨고, 예수님 대신 아버지께서 보내신 보혜사십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과의 동거
이제까지 보혜사 성령과 오시는 경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은 성부 성자 성령과 성도가 함께 동거하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앞서 빌립과의 대화를 통해서 주님은 자신 속에 아버지가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의 일체적 관계입니다. 여기에 이제 성령님과의 관계, 나아가서 성도들과의 관계가 나타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6-20)
이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자세히 보세요. 주님이 아버지께 구하셔서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은 성도들과 함께 있습니다. 장차 육체로 떠나셨던 주님도 다시 오셔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십니다. 성도들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 안에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성도가 인격적인 동거 안에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의 영원한 동거!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성도들의 최종적인 삶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성령님의 임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성령님이 성도들 안에 계심으로써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성령의 역할이 뭡니까? 성령님은 주님을 대신한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적어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육체적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에게 가장 큰 역할을 하실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본문은 성령님의 칭호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17) 성령님 칭호 앞에 “진리”(ajlhvqeia)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26절 말씀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언급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26)
첫째는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둘째는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무슨 새로운 것을 가르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회개하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게 하십니다. 바른 판단을 하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마귀와 싸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지혜를 주시고, 때로는 능력을 주십니다. 병을 고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게 하십니다. 마음에 결단하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지요? 그러면 지금 성령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십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모든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거룩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항상 삼위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우리의 최고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오라
이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영적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사탄의 세계 아니면 성령의 세계,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제3의 영적 세계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싫든 좋든 국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얻을 영적인 국적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아니면 사탄의 나라!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나라에 태어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태어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굴복하지도 않고, 그 분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세요.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거짓된 곳에 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죄가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탈출하여 성령의 통치 안으로 들어와야만 됩니다. 악한 영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결코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정의가 불의를 이기고 선이 악을 이긴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의 보다는 불의를 좋아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따라가고, 일신상의 안락함을 따라갑니다.
역사를 보세요. 독재자 한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나요? 그래도 여전히 지구상의 대부분 나라들이 악한 지도자 아래 신음합니다. 근면 정직하면 돈 번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 안하고 수단부리지 않은 자가 재벌 된 적 있나요? 겸손하고 온유하면 대접받는다 하지만 온유 겸손한 사람이 정말 높은 자리 차지한 적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 다소나마 정의가 존재하고, 선이 존재하고, 사랑과 인정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요? 사람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모든 인간들을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인 말로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선인과 악인,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내리십니다.(마5:45)
또한 악한 인간들을 부단히 심판하시고 더 악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 사회에서 손을 떼신다면 당장 죄로 멸망합니다. 우리는 이 죄악 세상에서 성령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사탄의 세상에서 탈출했습니다. 비록 세상에 몸 담고 살지만 이제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오려면 세상 죄를 버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설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
먼지 묻은 유리창으로는 빛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죄로 가득한 마음에 성령님은 임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단히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줄 알며 고백하고 예수님의 속죄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각양 도우심 속에 살게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이 새 인생으로 태어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성령을 받으셔서 소속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탈출하세요. 사탄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악한 영의 지배에서 성령의 지배로, 죽음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리라(요한복음 14:16-21)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그 첫 번째
메시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고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신 후에 다시 데리러 오실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을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아버지를 알았고 또 보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우리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 것을 믿는다면 두 가지 기적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수 있고 그보다 큰일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예수님께서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모든 것이 끝장나고 수포로 돌아갈
것인데, 제자들에게 기적과 축복을 약속하시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기적과 축복이 계속 된다고 말씀하시는 결정적인 비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믿는다고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 굉장한 충격을 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아주 새롭고 놀라운 진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16,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간구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란 헬라어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분’,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
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 주시는 분이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인격이 다른 예수님, 다른 대언자, 다른 위로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똑같은 역할을 하시는 보혜사께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 모습은 다르지만 보혜사는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적과 축복 그리고 약속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곧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성령님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16절 말씀을
통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또 다른 형태인 예수님께서 영으로서 다시 오시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에 대해 성령님을 체험하기 전에는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죄 문제와 부딪히게 될 때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죄 문제, 성격 문제, 인생 문제 하나 해결하시지 못한다면 우리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개인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실 수 없다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신이라면 우리에게 변화가 있어야 하고, 개인적 제(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선
권능자이십니다.
또 다른 예수님이신 보혜사 성령
16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 예수님의 또 다른 형태로 오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둘,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세상으로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요청하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은 보혜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단적으로 말해 보혜사 성령님의 덕분입니다.
사람이 똑똑하고 유능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수양이나 득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성령충만을 힘써야 합니다.
셋, 보혜사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계시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동일하게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시지만,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선 시공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은 시공의 제약을 받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수천,
수만, 수백만 명을 동시에 믿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의 멸망도 순식간에 일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경험으로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면 모든
현상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17절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 진리의 영
인간은 오류와 모순투성이지만 성령 하나님께선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오류와 모순이 전혀 없으십니다.
둘, 세상은 능히 보혜사 성령님을 받지 못한다
박사 학위를 받거나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다 해도 사람의 이성, 지성, 지식 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우리는 알고 믿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33세 된 한 청년의 죽음이 나의 구원으로 믿어진다는 사실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셋, 영원히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것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과
상관없이 개인의 안에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또 좋은 메시지를 듣게 되면 기쁨이 솟아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는 성령님
세상은 능히 성령님을 받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받아 알고 믿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성령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그분은 우리 안에,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크리스천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크게 세 번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깊이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영원히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가슴에 손을 얹어 보면 그 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며 위기를 넘기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실체를 느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은 가까운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님 안에 있고 성령님께서 제 안에 계시기 때문에 개인적인 근심과 걱정을 모두 털어버리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이며 이런 방법으로 주님의 기적과 축복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딘 셔먼(Dean Sherman)은 믿음으로 선포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미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성령님의 음성 듣기를
고대할 때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가짐도 없이 그 사실마저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과 성령 체험의 실례(實例)
성령님을
체험한 후에 저는 놀랍게도 예수님께 대한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삼위일체에 대해 무감각했는데 지금은 삼위일체의
진리가 가슴을 저리게 만듭니다.
진리에 대해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육체의 본능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불완전함과 연약함과 질병과 죽음에 대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약하고 미숙하며 불완전하지만 그 사실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제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에 안심이 됩니다.
예를 들어 실수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밀고 나간다는 담대함마저 생겼습니다.
이것도 성령님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18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의 고아처럼 살고 있습니다.
마치 우주의 모든 고민을
혼자 지고 있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독이나 외로움 등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불안, 소외, 허무함도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오직 기쁨, 감사, 찬양, 승리, 축복, 믿음 등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9절 말씀을 읽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살아있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날’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를 말합니다. 즉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후를
말합니다. 그때 성령님과 접속하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접속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켜라’
포도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가면 곧 말라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결론으로 21절 말씀을 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신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14장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과 하나님의 말씀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에 순종하는 말씀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오늘
예배 후에 나누게 될 성만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접속되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신가?
예수님은 기도의 통로인가 아니면 기도를 받는 분이요 기도의 응답자인가?
성령님은 제3위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예수님의 또 다른 자기자신인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응답이 이번주와 다음주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에 대해 살펴봅니다.
요 14장의 말씀은 예수님의 다락방강화(요13-17장)의 한 부분이다. 특히 요14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하루 전 날 세족식과 성만찬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다. 그때에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신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근심에 쌓여 있었고 그리고 두려워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두려워 떨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강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이 바로 요14장이다.
그때 그들의 곁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3가지 것을 약속하심으로 그들을 위로하시고 평강으로 인도하신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는 것은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동안 떠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천국에 장차 제자들이 들어가서 살
처소(맨션)을 준비해놓기 위함이요, 그후에는 다시 와서 제자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하셨다.
둘째는 예수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제자들이 비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임을 약속하신다.
셋째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어, 성령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으면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상담해주고 변호해주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고 그 뜻을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다시 말해, 보혜사 성령이 오심은 곧 자신의 변형된 오심으로
알라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3위의 하나님이시지만 원래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령이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 인간의 머리로서는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말씀을 우리는 그대로 믿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예수님은
아들인가 아버지인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다면 이제는 나를 믿으라.
왜냐하면 나는
너희들이 믿어왔던 아버지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이면 아버지이고, 아들이면 아들이었지,
어찌 아들이 아버지이며, 아버지가 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700년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가르쳐주셨다.
사 9:6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아기를 주실 것인데 그 아기는 아들일 것이며, 그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제자 빌립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요 14장의 말씀을 정리해 보자.
하나님께서 아들이란 이름으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곧 아버지의 말씀이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떠한가?
12-25-2024(수) 요한복음 14: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If you love me, you will obey what I command.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Whoever has my commands and obeys them, he is the one who loves me. He who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too will love him and show myself to him.
https://ko.wikipedia.org/wiki/613_%EA%B3%84%EB%AA%85
계명(엔토래. ĕntŏlē) ἐντολή, ῆς, ἡ
-
1. 계명, 명령.
-
a. [사람의] 요11:57.
-
b. [하나님의] 눅23:56, 롬7:8, 고전14: 37, 엡6:2, 딤전6:14, 벧후2:21.
-
-
관련 성경 / 계명(마 5:19, 막 7:8, 눅 1:6), 명(눅 15:29), 명령(막 10:5, 요 11:57, 딤전 6:14), 명하신 것 (벧후 3:2), 말씀(마 15:6).
1781. 명령하다(엔톨레마이. ĕntĕllŏmai) ἐντέλλομαι
(예) 김익두목사 / 야 임마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았다.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이후의 삶
김익두(金益斗) 1874. 11. 3 ~ 1950. 10. 14. 조선 황해도 안악군 출생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한 한국 초기 개신교 목사
청년 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900년 미국인 선교사 W. L 스왈렌의 설교에 감동하여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년 후 스왈렌에게 세례를 받고 재령교회의 전도사가 된 김익두는 황해도 신천 지역의 개척 전도사로 파견되어 개척교회 활동을 하였다.
1910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19년 강동 염파교회에서 사경회 도중 신적인 치유 능력을 얻어 이것이 소문나기 시작하면서 그가 주최하는 부흥집회에는 치료를 받고자 많은 인파들이 찾아왔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로 고문을 받기도 했다.
광복 이후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 남아 김일성 정권에 협력을 가장하면서 반공연대를 조직하는 등 우익 인사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1950년 10월 14일,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총에 맞아 7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이때 함께 있다가 저지에 나선 5명의 성도 또한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 지키다(5083) 테레오(tērĕō) τηρέ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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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지키다(마19:17, 마28:4, 딤전5:22, 계3:3), 지키게 하다(마28:20), 두다(요2:10, 12:7), 보전하다(요17:11,15), 갇히다(행12:5), 간직 하다(벧전1:4), 구류하다(행25:4), 지켜주다 (행25:21), 그대로 두다(고전7:37), 조심하다(고후11:9), 보전되다(살전5:23), 예비되다(유13).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도들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신자가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이 말씀이 앞절과 관계를 가지는가 혹은 독립적인 말씀인가?
또 혹은 이것이, 16절 이하에 나오는 보혜사 약속과 관련된 말씀인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몇몇 학자들의 의견을 생각해 보고저 한다.
1.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귀절의 말씀이 독립적인 언사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2. 렌스키(Lenski)와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귀절 말씀이 위에 있는 많은 말씀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곧, 그들은, 여기 "사랑"이란 것을 믿음(11절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계명"이란 것을 기도하라는 부탁과 같이 생각하여 윗말과 연결시킨다.
3. 버나드(Bernnard)는, 이 말씀을 16절 이하의 보혜사 약속과 관련시킨다.
곧, 그는 생각하기를, 신자가 계명을 지켜야 되는데, 그것은, 16절 이하에 약속된 성령의 은혜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4. 다른 학자들은 역시 이 귀절을 16절 이하와 연락시키면서도 위의 버나드(Bernnard)와 달리 취급한다.
이들은, 이 귀절(15 절)과 아랫 말씀을 연락시켜서 다음과 같은 뜻을 찾는다.
곧, 신자들의 계명을 지켜야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계명이란 것은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과(34 절), 또한 합심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신약 교회를 창립하는 오순절 성령 운동은 물론 구원사(救援史)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이다.
이 약속 성취는 인간의 주관적 조건에 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약속 성취를 내다 보시면서 사도들과 그 때 신자들의 주관적 준비를 명하시기는 하셨다.
예컨대, 그들더러 예루살렘에 유하며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행 1:4).
그들의 기다리는 일은 바로 기도에 전력함이었다(행 1:14).
5.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계명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14절에 나온 기도하라는 부탁과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15: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귀절의 말씀이 그 아래 나오는 말씀, 곧, 성령이 오시리라는 약속과 관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기도하는 결과로 성령님이 오시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행 1:12-14, 2:1-4).
"계명을 지키리라." "지킨다"는 말은, 보배를 지키며 보관함에 대해 쓰는 말이다.
이것은 계명을 중심에서부터 사랑하여 지킴이다.
계명 지킴과 기도 응답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마술적 의미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 윤리적 내용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그 기도자가 주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사실이 있어야 그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다.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계명과 율법을 무시하는 경향에 있다.
예를 들면, 재세례파에 속하는 란텔파(rANTERS)는, 자기들이 모든 계명을 초월한다(계명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뜻)고 하였다(R.A. knox. Enthusiasm, p. 173).
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자기 자신을 신격화(神格化) 하는 참람한 행동이다.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어떻게 사랑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면 먼저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구약에서는 열 가지 계명으로 계시하셨습니다(출 20:1-17).
하나님의 계명은 신약에서는 두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기기를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4-40).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요일 4:21).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은 직접 대면하고 만날 수 없지만 이웃과 형제들은 항상 대면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요일 4:12).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웃이나 형제를 사랑하는 비결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만일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허물을 전달하는 것은 친한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잠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두에게 하늘의 은총이 차고 넘치도록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Merry Christmas!"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989년 12월 24일
루마니아 "차우셰스쿠"를 무너트린 혁명의 날
12-24-2024(화) 요한복음 12:13-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시행하리라(13-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And I will do whatever you ask in my name, so that the Son may bring glory to the Father.
You may ask me for anything in my name, and I will do it.
예수는 중보자
이사야 38:14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갈라디아서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라디아서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브리서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무엇이든지(5100) Tὶς, τὶ
구하다(154) αἰτέω
중보(3316) μεσίτης, ου, 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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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재자, 갈 3:19, 20, 딤전 2:5, 히 8:6, 9:15,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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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 시행하다(4160) 포이에오(pŏiĕō) ποιέω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신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위의 12절에서 독립된 것인가?
혹은 그것의 연속인가?
이것은 하나의 난제이다.
1. 핸드릭슨(Hendriksen)은, 이 부분 말씀이 12절 내용을 더 설명해 주는 부속 문구라고 한다.
고데이(Godet)와 즈안(Zaln)도 역시 같은 해석을 취한다.
2. 크로솨이데(Grosheide)와 버나드(Bernard)와 렌스키(Lenski)등은, 이 부분 말씀을 또 하나의 독립적인 약속으로 간주한다.
특히 버나드(Bernard)는, 13절 초두에 있는 "또한"(*)이란 헬라원어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세웠다.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1. 예수님의 권위(權威), 혹은 공로(功勞)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
2.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
"내가 시행하리니"란 말씀은,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기도응답은 언제나 인간의 사욕을 채우려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그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 함이다.
이런 기도 응답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사로 인하여 실시되는고로, 여기서 "아들을 인하여"란 말이 쓰여 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내가 시행하리라(에고 포이에소. εγω ποιησω) I will do it.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호모 오란스(homo orans)"는 "기도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기도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만 응답하시는가?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이었던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중재자가 되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남이 가능하지요.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12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자격과 특권에 힘입어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과 계속 이 땅에 계신다면 그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약속은 하셨지만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하는 내용의 범위를 제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려면 먼저 철저한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순종의 길은 걷지 않으면서 내게 있어야 할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지라도 반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나의 기도에 응답이 없었다면 먼저 내가 어느 길을 가고 있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먼저 순종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에서 철저한 순종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몰두할 때 구하지 않은 것 까지도 채워주시고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신적능력으로 큰 이적을 일으킨 겉모습만 보고서 우리가 구하는 모든 일에 그 능력이 함께 해달라고 간구해선 큰 잘못입니다.
먼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한 후에 아버지가 인도하시는 길에서 구하는 즐거움과 구하는 보람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깊은 곳에서
이 약속의 꼬리도 당연히 바로 뒤의 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2절에서 제한을 가한 무엇이든
구하는 기도의 범주를 다시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행했던 일보다 더 크게 구하라고 했습니다.
문맥에서만 따지면, 우리로선 현실적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정말로 주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또 주님이 성부의 계명을 지켰던 것보다 더 성실하고
열심히 준행하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16절)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늘 보좌의 영광으로 복귀하시니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어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내주토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17절) 말하자면 기도할 때에 과연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잘 분간이 안 될 수 있으니 가르쳐 주는 영으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겨우 바로 앞뒤 한절씩만 보지 않았는데도 전혀 다른 해석과 적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다시 코끼리로 비유하면 가장 중요한 기다란 코와 꼬리, 큰 귀는 물론 기둥 같은 다리까지 다 없애고 그냥 드럼통 같은 몸통만 들고 끝까지 코끼리라고 우깁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든 구하면 다 시행해 준다고 해놓고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또 무엇이든 주님보다 더 큰 일을 구하라고 하니까 자기가 정한 아주 큰 계획을, 물론 종교적 도덕적 겉치장은 조금 합니다만, 약속과 달리 이뤄주지 않는다고 떼를 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해석 적용해야만 뜨겁고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의”는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실이나 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와 관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문자적인 해석으로
“의”는 “정의”나 “공의”로 해석합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지만 의인이라고 인정을 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
구약에서는 율법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노아, 욥, 다니엘 (겔 14:14).
에스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을 말합니다(롬 1:17).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의(義)”는 관계(relation)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다면 내가 의식주의 문제를 걱정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주의 문제를 갖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로마서 14:17)와 하나님의 의(로마서 3:22)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자녀는 부모님이 계시므로 그런 의식주 걱정은 하지 않는 것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성경에서의 의(義)
1. 공의
2. 정의
3. 관계
어느 것을 사용할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1:17은 유명한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구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서도 ‘의’란 ‘관계’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이걸 공의나 정의로 해석하면 이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실수하거나 오해하여 복음에는 공의/정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랑입니다.
복음에는 공의나 정의가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내가 새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가 자녀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 됩니다.
최소한 이 두 구절(마 6:33, 롬 1:17)만큼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히 12:11도 "관계"로 해석하여 전체적으로 올바른 해석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속에서 정의와 평강과 희락이 이루어짐)와
“의”(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나는 그의 아들이요 딸이다)를 구하고 찾으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공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라는 겁니다.
먼저 내 마음에, 그리고 가족, 교회, 회사, 사회에 이뤄가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기독교 영성가 오스왈드 챔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의 목적은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하나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현실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챔버스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과는 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이 주님과의 관계를 촉진시키고, 우리의 기도의 목적 또한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기도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 유교 문화 때문에 침묵이 금이라고 세뇌되어진(?) 한국인들은 대화나 토론에 아주 미숙합니다.
거기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기질 때문에 사고에 논리성, 합리성,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정이나 사회나 건전한 토론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기보다는 상명하달이 아니면 끝없는 시비 둘 중 하나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국가 장래와 국민 복지를 책임지는 정책을 결정해야 하기에 건전한 토론이 가장 절실한 정치판이 오히려 더 그러합니다.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끝까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그에 동조하면 동지요, 반대하면 원수로 편 가름합니다.
논쟁의 당사자들은 화자가 말한
전체 대의는 물론, 강조코자 하는 주제는 아예 무시하고 오직 말꼬리 잡는데 혈안이 됩니다.
예컨대 코끼리의 머리와 꼬리를 거두절미(去頭截尾)하면 몸통 밖에 남지 않기에 누가 봐도 도무지 코끼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장님은 그나마 자기가 만진 것에 대해선 정확하게 표현이라도 합니다.
멀쩡히 코끼리를 전부 다 보고나서도 몸통만 코끼리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우기니 차라리 장님보다 즉, 아무 것도 안 보느니 못한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들을 비평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다락방 강화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권능의 약속인데 신자들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기도하면 그대로 시행하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 이해로 그치면 그야말로 거두절미한 해석이 됩니다.
아니 오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한다고
다 응답되는 법이 없음을 실감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만 이해합니다.
나아가 이 말씀을 기도 응답의 가장 확실한 근거로 하나님께
들이대며(?) 열심히 뜨겁게 기도합니다.
원래 성경은 장과 절로 나눠지지 않았습니다.
훨씬 후대에 빨리 찾아서 서로 대조 연구하기 편리하게 편의상 붙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중단 없이 죽 이어진 글입니다.
다른 말로 성경은 절대로 거두절미해서 읽어선 안 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어쩌면 누구에게나 성경에서 가장 은혜가 되는 말씀인데도 현실에선 실제 적용이 가장 안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아주
심오한 영성을 지녀 어려운 탓도 아니요, 예수님이 크게 과장했거나 공수표를 발행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신자들이 머리와 꼬리 모두 잘라내고 읽고, 해석,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머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앞의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제 우리의 해석과 적용의 잘못이 무엇인지 조금 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이제 아버지께로 가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즉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신자)의 자격과 특권에 힘입어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제자들과 계속 이 땅에 남아 계실 것 같으면 그런 말씀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약속은 하셨지만 특정한 범주(範疇. category)로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셨던 일과 동일한 범주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심지어
같은 범주라면 얼마든지 더 큰 일도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하는 “무엇이든”과 주님이 뜻하는
“무엇이든”의 범주가 과연 같은지 따져보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은 아무리
사소해도 단 한 건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간, 물론 그럴 리는 만에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지
않음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그런데도 단순히 주님이 신적능력으로 큰 이적을 일으킨 겉모습만 보고서 우리가 구하는 모든 일에 그 능력이 함께 해달라고 간구해선
아주 큰 잘못이지, 최소한 어긋난 적용이지 않습니까?
주님이 일으키신 모든 이적의 목적 또한 모든 이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만
죄인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뜻이었지 않습니까?
역으로 따져 우리 기도에 그런 목적만 있다면 얼마든지
큰 기적을 구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의 꼬리도 당연히 바로 뒤의 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2절에서 제한을 가한 무엇이든
구하는 기도의 범주를 다시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행했던 일보다 더 크게 구하라고 했습니다.
문맥에서만 따지면, 우리로선 현실적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정말로 주님이 성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또 주님이 성부의 계명을 지켰던 것보다 더 성실하고
열심히 준행하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16절)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늘 보좌의 영광으로 복귀하시니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어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내주토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17절) 말하자면 기도할 때에 과연 “무엇이든 구할 수 있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잘 분간이 안 될 수 있으니 가르쳐 주는 영으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겨우 바로 앞뒤 한절씩만 보지 않았는데도 전혀 다른 해석과 적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다시 코끼리로 비유하면 가장 중요한 기다란 코와 꼬리, 큰 귀는 물론 기둥 같은 다리까지 다 없애고 그냥 드럼통 같은 몸통만 들고 끝까지 코끼리라고 우깁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든 구하면 다 시행해 준다고 해놓고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또 무엇이든 주님보다 더 큰 일을 구하라고 하니까 자기가 정한 아주 큰 계획을, 물론 종교적 도덕적 겉치장은 조금 합니다만, 약속과 달리 이뤄주지 않는다고 떼를 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해석 적용해야만 뜨겁고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합니다.
말꼬리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정치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새벽마다 울며불며 하나님에게마저 몸통만 들고서 코끼리라고 우기는
신자들을 하늘에서 그분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보겠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는 정말 구해야할 것을 모를 때가, 사실은 이런
원리는 알면서도 잊어버리는 일이 너무 잦습니다.
그래서 일단 무엇이든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야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만 하셨던 주님처럼 구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또
그런 범주 안이라면 정말로 무엇이든, 아무리 큰일이라도 담대하게 구하고 있는지도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거룩해지고, 주변에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자기를 통해 전해지는 바로 그 일 말입니다.
나아가 그런 간구라면 마땅히 응답될 것을 확신하기에 미리
감사하며 기도하는지도 말입니다.
기도는 무엇인가?
첫째,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대한 갈망
인간의 욕망과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기도를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인간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을 추구하고, 인간의 유한함은 영원을 추구하게 하면서 종교와 기도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들이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는 상당부분 맞는 말인 것 같다.
기독교 안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는 단 한 가지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정의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기독교는 오랜 역사동안 다양한 하나님과의
대화 방법들을 발견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의 정의, 기도의 방법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리를 만들고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는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으나 막상 기도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참된 기도(독백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는 일상의 삶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이때 기도의 길이, 기도의 질, 지식의 수준은 기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만남 보다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기 쉽다.
시작하는 기도의 기도는 실재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없다.
기도를 지속함으로
친밀함은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색하더라도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기도를 위한 시간을 찾아라.
기도에 도움이
되는 음악, 성경본문, 그림(헤겔에
따르면 상징은 인간의 종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표현 형태이다.
이러한 상징에 집착하는 ‘상징주의’는 참된 영적 깨달음을
방해한다.
헤겔은 상징을 통해 얻어지는 상징적 지식과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직접적 이해(통찰)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그러나 상징자체를 부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전문 독자라면 상징에 대한 헤겔의 견해를 두고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 개신교 신학자 폴틸리히, 그리고 고대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상징에 대한 논의들을 참고하라.
칼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등을 활용해도 좋다.
관건은 규칙성에 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서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고 영적인 성장을 통해 기도의 방식도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침묵을 통한 기도로 들어간다.
즉, 듣는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들어가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의식을 집중하여 응시하는 ‘관상’(관상에
대해 개신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뉴에이저들이 사용하는 기법이라 하여 이교도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관상은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험 문제를 풀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
또한 관상적 방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관상에 대해 무조건적 반감은 자제가 필요하다.)적 자세를 통해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상은 하나님을 향해 시선과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집중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서 깊은 기도에 대한 오해 또한 풀어야 한다.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신비한 것을 보거나 체험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과정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는 온갖 보화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사막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함은 그곳에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하면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기도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현실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간들을 기도로 잘 극복해 나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함을 통해 통찰력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깨달은 바들을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기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들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할 때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기도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평생에 걸친 여정
인간을 구분하는 관점과 기준들은 매우 다양하다.
‘기도하는 인간’과 ‘기도하지 않는 인간’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기도에 대해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은 여기서 배제된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 왜 있을까?
분명 그들은 기도를 미루거나, 기도를 못하는 분명한 변명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를 읽어보라.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할 수도 있고, 눈을 뜨고 할 수도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할
수있고,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기도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언제 어디에서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평생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면 기도 생활은 평생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존 프리처드 (John Pritchard)
1948년생.
성공회 성직자이자 문필가. 옥스퍼드 세인트 피터 갈리지,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공부한 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지역 교회 사목 활동과 동시에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진행하는 그리스도교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직책을 맡았다.
2002년에는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옥스퍼드 교구의 주교로 활동했다.
현재 SPCK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숙과 영성 생활을 돕는 다양한 저작을 썼으며 주요 저서로 『기도하는 법』How to
Pray(2002), 『교회에 가다』Going to Church(2009) 등이 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또한 이보다 큰일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큰일이 바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이다.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라고 말씀하심으로 너희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 이름으로” 구하며, 구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여야 하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내가 시행한다’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확실하게 정의하여 주신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일은
예수님이 하실 것이며 그 일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 일을 시행하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기에 반드시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는” 일로 바꾸어 내시겠다는 약속이다.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도는
육신이 호흡해야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호흡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됨으로 기도를 ‘영적 호흡’ 혹은
‘생명줄’이라고 부른다.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된 상태이기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기에
오직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에게만 주시는 하늘나라의 특권이기에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증거를 낳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반드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사귐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되며,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며,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게
되며,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의 숨결을 매일 체험하면서 매일 그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게 됨을 확신하게 된다.
때문에 기도는 말씀과
같이 성도의 존재 양식이며 살아가는 생명력이다.
우리
주님은 모든 질고와 아픔과 고난과 멸시와 고통과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겪으셨다.
무시당하고, 핍박당하고, 맞고 찢기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으시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치른 대가는,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심으로 영원한 지옥 의 혈별에 합당한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끌어내어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올리기 위함이었으며, 죄인으로 살던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 이제 아버지와 하나이고 아들과 하나인 영원한 연합을 이루어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놀라운 은혜와 특권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우리에게 오직 사랑으로 선물로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깨닫게 하며 증거하는 역할이
바로 기도와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호흡을 통하여 매일 그분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마음에 되새기며 매일 매순간마다 체험함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없는 영원한 하나임을 확신하게 된다.
또한 이 세상 권세 마귀의 유혹과 시험과
박해와 멸시와 같은 모든 악의 세력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믿음을 잃지 않고 굳세게 서서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자랑할 수 있도록 기도로 붙들어 주시며,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과 절망과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의 영적
사귐으로 지탱할 수 있고 이길 수 있고 감사와 기쁨으로 화답하는 사랑의 힘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기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의 위력으로 기쁨과 성령 충만으로 순교를 자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과 위대함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라고 “내 이름으로 구하는” 제한성과 “무엇이든지”이루어주시는 무제한 능력을
동시에 약속 하셨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뜻과 생각에 일치한 기도를 하게 되며 그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은 곧 성령님이심을 뜻한다.
즉 기도는 내 자의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시하여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6:24)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이 육신으로 있을 때는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기에 성령님이 아직 오지 않은 상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하여도 그 기도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음으로 “구하지 아니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즉 육신적 욕망과 탐심에서 나오는 기도는 ’내 이름‘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예수님의 뜻과 일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너희가 구한 것은 ”내(예수) 이름으로“
구한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비록 육신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3년을 동고동락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기에 온통 자신들의 유익만 계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성찬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그 힘든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서로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이 되는 가를 놓고 다툼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로마군에게 잡혀가는 주님을 보고 두려움으로 배신하고 뿔뿔이 도망하여 숨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
없이 자의로 구하는 기도는 이 세상 것을 구하는 육신을 위한 기도이기에 들어줄 수가 없음으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육신의 기도를 부정하시고, 이내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2-13)라고 확실하게 명하신다.
이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면 그때 비로소 성령님의 인도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뜻과 일치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친히 시행하실 것이며 그로 인하여 아버지에게는 영광이 되고, 제자들에게는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신다.
이와
같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놓게 되는 성령강림과 기도, 이 두 가지를 약속하신다.
즉 주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으로 제자들 마음에 뚫고 들어오셔서 매일 그들과 동행함을 기도를 통하여
현실로 실감하게 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매일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게 됨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으며, 그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아무런 방해가 없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수시로 주님과 영적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현실을 체험하게 됨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
동시에 성령의
권능으로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됨으로 ‘너희는 나의 하는 일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14:12)라고 확신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부터 출발하여 내 마음에 영접하여 그분을 믿게 됨으로 나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내려놓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 믿음은 나의 의지와 나의 원함에서 발동되어 내가 먼저 그분을 알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를 부르시고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나의 티끌 같은 존재
가치를 인식함으로 그분 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는 항복으로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즉 기도는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이며, 그 자아인식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애통이 터져 나오게
된다.
자신이 바로 티끌과 같은 ‘없음’이었으며, 죄로 인하여 한없이 부패한 존재이며, ‘죄와 허물로 죽은 자’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게 되는 가난한 심령에서 외치는 애통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는 오직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애통함의 기도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으며, 이제 그 무엇으로도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었으며, 그분의 믿음으로 매일 교제하는 사귐을 통하여 그분의 마음에 합당한
자녀로 지어져가고 있다.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믿는 예수는 고난과 수모와 죽임을 당한 십자가 예수이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취하려 오신 세상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며, 또한 인간에게 이 세상 부귀영화를 주어 이 세상의 삶을 형통케하여 주는 인간이 원하는 세상 임금으로 오신 분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지”는 육신의 욕망과 탐심과 정욕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내용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무엇이든지”라는 무제한을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내용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신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4). 이와 같이 주님은 기도의 진의를 상세히 가르쳐 주시고 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육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초월하여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즉 우리가 마땅히 구하여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잠깐 살다가 없어지는 육신의 원함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하늘나라 백성의 의무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에 돌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주신 곧 없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허무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와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는 그 기도를 원하시며 그 기도만이 기쁨이 충만하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면 우리가 구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주님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도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그분은 굳이 이 죄악 된 세상에 종의 형체를 입고 어린 아기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잉태하시고, 굳이 이 세상의 더러움과 추악함과 죄로 가득 찬 죄인들이 사는 곳을 상징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굳이 구유에 눕히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먹게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굳이 세상 죄인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매를 맞는 고난과 조롱과 수치를 다 당하셔야 하셨으며, 저주의 사형들인 십자가에 못을 박아 피를 흘리는 죽임을 당하셨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사 53:5).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뿌리박고 있는 모든 죄의 유전을 송두리째 뽑아서 자신에게 전가시키고 죄를 짊어진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를 깡그리 철저히 도말하여 주셨다. 동시에 영으로는 자신의 본체이신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을 주실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삶이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을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게 하신 그 위대한 사실을 마음으로 깨닫게 됨으로 그분의 한없는 아가페 사랑에 나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내려놓음과 항복과 신뢰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육신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
세상 원리와 가치관과 완전히 대립되는 방법으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살려 내시는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6-8).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여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는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육신의
원함이 아니라, 반대로 나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계획하신 하나님께 나의 인생 전체를 맡기고 그분의 의로운 인도에 나를 쳐서
복종할 수 있도록 내 ‘자아’가 죽음으로 내 안에서 그분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항복과 순종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에 ‘시행하시는’ 그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밝히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4:13). 즉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응답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기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합당한 기도를 하게 하시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렸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함과 같이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수난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수시로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이 들어주시는 기도는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그 십자가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여야 함을 계시하고 있다.
거듭난 성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하는가?
거듭난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육신이 원하는 이 세상의 것을 구할 수가 없다.
신랑의
뜻을 헤아리게 됨으로 신랑의 뜻과 일치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하게끔 내안에서 성령님이 인도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내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 또 다른 이의 생명을 태동시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음에 관한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실 것이며, 반드시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조건을 붙이고 있다. ‘우리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육신을
위한 탐심에서 출발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이기에 무엇이든지 몽땅 이루어짐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제한 하에서
그분의 의와 그분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무제한으로 시행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요구 사항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포기하는 항복으로 전적으로 그분의 뜻에 맡기는 순종이다. 기도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바로 죄와 허물로 패역한 죄인으로 죽어있는 실체임을 투명하게
깨닫는데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은혜만을 구하게 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영적
가난함을 인지하는 가난한 심령과 자신을 부인하는 애통으로, 진리를 갈망하는 굶주림과 의에 대한 목마름을 호소하는 그 기도는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정복되지 못한 내 옛사람의 성품들이 남아 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정욕, 교만, 이기심, 거짓과 위선 등등 수많은 세상 것들이 우리 육신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죄들을 여전히 우리 안에 남기게 하신 이유는, 그렇게 끈질기게 뿌리박고 있는 내 속 마음의 탐심과 야망들을 경험하면서,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의와 가치를 챙기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외식적인 악행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도저히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패역한 죄인이 맞구나’, ‘죄인중의 괴수가 바로 나’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꼭 붙들라고 우리에게 항상 쉬지 말고 오직 기도로 숨 쉬는 순간마다 아버지만을 의지하며 신랑의 사랑으로 악에서 벗어나는 도움을 요청하게 하신다. 세상을 향하여서는 굶어서 목말라 죽게 하심으로 필사적으로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찾는 그 절박한 갈증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로 인도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구원과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영적 사귐과 교제를 통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로 내려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각으로 애통하며, 주리고 목마름으로 진리를 간구하며, 내 안에서 당신이 거할 처소를 만들고 계시는 주님의 열심에 항복하여 이 세상의 것들이 잘려나가고 부서지고 삭제되어 내 ‘자아’가 죽기를 소원하게 되며, 그 기도가 바로 주님의 뜻과 일치되는 기도이기에 주님이 시행하여 주신다.
모든 일은 주님이 이루시는 사역임에도 왜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시는가?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주어도 예수님
구하는 내용도 예수님의
것
시행하시는 분도 예수님이라는 말씀이다.
다만 당신의 십자가 복음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구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 라고
즐겨 부른다.
‘동역’이란 같은 목적을 향하여 같은 일을 함께 하는 사역을 의미한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는 "기도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매일 기도를 하면서도 내가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을 헤아려 보셨는지요?
때로는 너무 오랫동안 응답이 없으므로 기도를 포기한 적은 없었는지요?
육체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그의 장애를 해결하려고 일생동안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다고 생각할 때 과연 그의 기도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육신의 장애는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구현하실는지 또 나를 통하여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복음서를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꼼꼼히 살펴보십시오. 역사상 이보다 큰일을 하신 분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을 의지하는데 어찌 우리가 나약한 사람들입니까? 도리어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나약한 종교 교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우람한 육체를 가지거나 혹은 격투기 선수처럼 강인한 모습을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53:2에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가끔 화가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영화배우처럼 잘 생기고 건장한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그리는데 이는 성경에서 묘사한 예수님의 모습하고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찌하든지 좋게 묘사하려는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그러다가 사실까지 곡해하면 안 됩니다.
죄송하지만 예수님의 육체의 모습은 그리 잘나지 않았습니다. 그 분에게는 고운 모양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피부는 좋지 않았습니다. 때깔도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잘 상상이 안 가시는 분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를 해드릴까요?
북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살찌고 포동포동한 김정은이나 공산당 간부들을 생각하지 말고 못 먹고 못사는 저 불쌍한 이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 먹어서 삐쩍 말랐습니다. 누가 봐도 때깔이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사실
크리스천으로서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놓치고 살면 그때가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민생활, 유학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가정생활, 교회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붙잡고 힘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의 명령을 지키며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 힘으로 잘 안됩니다.
내
힘으로는 빛의 자녀로 살아갈 힘도 없고, 남에게 빛을 비추는 사명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고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달을 보십시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태양 빛을 받아서 반사시키므로 비로소 빛을 비추게 됩니다. 우리도 빛 되신 예수님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인생 살면서 빛의 자녀로 살 수 있고, 남에게 빛을 비출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없으면 불 꺼진 항구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3-14)
“내가 시행하리라.”
물론 그렇게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한다고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월급 주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반주자들, 주일 학교 교사들, 각 부서를 맡아 수고하시는 분들 굉장히 열심히 수고하시는데 죄송하지만 월급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나에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끼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자주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입니다.
나의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너희는 내게로
와서 나에게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이것이 일상생활이 되면 즉 나는 구하고 예수님은 실행하고, 그렇게 늘 인생을 살다보면 예수님을 향해 고백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 나의 주님!” 아무쪼록 오늘도 각자는 기도하고 주님은 실행하시므로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는 복된 자리에 머물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자력종교와 타력종교
불교를 '자력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타력종교'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해탈과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해탈에 이르려면 수행과 깨우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인 죄성으로 인하여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죄를 사하는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자력구원은 자기의 의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타력구원은 하나님의 섭리로 무조건 선택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력구원은 전적으로 자기의 피나는 고행과 수행으로 남의
도움 없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고, 타력구원은 자기 노력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공짜로 구원을 얻는 일종의 선물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창조주이신 반면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성이 가득 찬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로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과 같은 완전성과 거룩성의 신성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12-23-2024(월) 요한복음 14: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하는 일(1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has faith in me will
do what I have been doing. He will do even greater things than these,
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
불교를 '자력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타력종교'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해탈과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해탈에 이르려면 수행과 깨우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인 죄성으로 인하여 그 죄를 사하는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구원을 얻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앙은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말씀을 믿는 것
둘째는 행하신 일을 믿는 것
본문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의 하는 일도 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요한복음은 두 가지 내용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표적과 같은 놀라운 일(세메이온)
요한복음 1장부터 12장은 표적에 관한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로서 일곱 가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표적이란 용어가 다른 복음에서는 "기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표적을 인간으로서는 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표적이란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그 안에 감추어진 메시야의 능력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으로 어떻게 표적과 같은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일은 나 같은 죄인이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인생이었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갈 때 나를 통한 표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통한 영광스러운 일(스타우로스)
요한복음 13장부터 21장은 표적을 행하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겁고 고통스런 짐을 즐겁게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십자가와 같은 고통스런 일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나에게만은 이런 고통이 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릴 때는 믿음으로 잘 견디라고 쉬운 말로 권면합니다.
그렇지만 내게 그와같은 고통이 닥쳐오면 원망과 불평과 더불어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며 울부짖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믿음으로 견디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원망과 불평으로 항변하는 믿음을 과연 바람직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광만 즐거워하는 신앙이 아니라 때로는 영광을 위한 고통과 아픔을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하고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나의 생각을 부인하고 버린 후에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말없이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사모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나를 위한 표적은 없을지라도
표적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기적같은 일을 베푸소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고백하던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으로
주님만 믿고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를 앙모하는 자
* 일(에르곤. 2041) 에르곤( ĕrgŏn) ἔργον, ου, ὁ
1. 행위. 2. 히 4:3, 4, 10. 3. 표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이 말씀은 사도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일반 신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1. 14-17장의 말씀이 사도들의 사명에 대한 주님의 임종유언(臨終遺言)과 같은 까닭(26,17:18),
2. 이 부분 교훈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는 17장의 기도에, 주님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후대의 신자들을 사도들에게서 구분하신 까닭이다(17, 20).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곧,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에 의하여 이적을 행하며, 기타 위대한 일들을 하되,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것과 같은 정도의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보다 큰 것."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므로 성령이 오서서 이루실 만국 전도와 구령(救靈) 사업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땅 위에서 행하신 일들은 미래의 이 큰 일들을 위한 준비였다.
신비가들은 이 귀절에 근거하여, 신자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땅 위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일과 승천하신 뒤에 그의 하시는 일과 이 구분을 모르는 가운데서 일어난 오해이다.
"이보다 큰 일"
외부적인 육신 상대의 이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시므로 완성된 구원을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실시함이다.
외부적 이적은 "비유로 말씀하신" 계시(啓示)라고 할 수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 실시는 "밝히 말씀하시는" 계시라고 할 수 있다(16:25-28).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성령이 오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만국에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저렇게 큰 일이다(시 27:8; 사 42:6; 슥 9:10).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스가랴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나의 일을 찾기 위한 5가지 질문
Q1.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일반적으로
소명(calling)이란 천직, 신에게 부여받은 사명이라고 해석한다.
천직은 자발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부여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올 때 신으로부터 특별한 재능, 달란트를 부여받았고, 그 각자의
쓸모를 가지고 쓰임을 다하고 가는 것이 생애의 과정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준 사명을 발견하는 것은 내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첫번째 중요한 단계이다.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는 질문은 나의 욕망을 넘어서 삶을 이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나의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라는 성경 말씀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루크 버기스의 ‘너 자신의 이유로 살라’에서도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타인이 욕망하는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타인의 충족에 더 책임감을 두는 ‘두터운 욕망’으로 살라고 했다.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 답을 찾는 것, 이것은 무작정 찾게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내가 가진 강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 내가 무엇을 내어놓을 수 있을지에 대한 성찰로 연결된다.
세상이 내게 바라는 것, 그것은 내가 존재의 이유이자 나의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Q2. 이 일은 나의 코나투스를 높이는가?
*코나투스 : 자신다운 자신으로 있으려는 힘
라틴어 "코나투스(conatus)"
코나투스의 원의는 노력, 충동, 경향, 성향, 약속
심리철학 또는 형이상학에서 용어로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은 옷은 아무리 비싸고 좋은 것이라해도 어울리지 않다. 일이란 내가 세상에 쓰이는 방식의 아주 큰 부분이며, 내 인생의 시간을 잘 보내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내 성향과 잘 맞는일,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일을 선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나의 코나투스를 높이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업 업무(보험영업과 같은 대면 세일즈
업무)와 같이 사람을 만나 직접적인 판매 행위를 하는 이런 성격의 업무는 내게 너무 맞지 않는다.
하다못해 CEO들 끼리 만나
네트워킹을 하는 조찬 미팅을 하다가 너무 내 적성에 맞지 않아 집어치운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일은 내 나름대로
나에게는 ‘나쁜 일’로 규정되었고, 이런 일을 하느라 내 정신적 에너지를 더이상은 소진하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경험을 통해 깨달은 ‘나를 나답게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 주체적으로 시간과 자원을 활용하는 것
-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
-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일하는 것
- 사람과의 관계보다 일 중심으로 일하는 환경과 구조들
- 꼼꼼하고 분석적 사고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 등등
그래서 이제는 일을 할 때 이런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Q3. 적어도 3년은 해봤는가?
일이란
시켜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무리 내 소명이라 생각되고, 내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도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
게다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해도 노력으로 지속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꾸준하고 착실하게 계속 할 수 있는지가 이 일이 나의 일인지 아닌지 판가름해준다.
해보기 전과 해봤을때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해봐야 성취감이 있는지 없는지 어떤 만족감이 있는지 알 수가 있다.
바위 위에 3년이라(차가운 돌도 3년 앉아있이면 따뜻해진다는
일본 속담)고 3년도 지속할 수 없으면 그걸 과연 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속할 수 있는지, 내 노력을 들일 수 있는지,
몰입할 수 있는지, 기다릴 수 있는지, 인내할 수 있는지, 꾸준함으로 결국 잘하는 일이 될 수 있는지…적어도 일정 시간은 지나봐야
그 일이 내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일의 즐거움이란 어느 정도 해봐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어느 정도..최소
3년도 버틸 수 없다면 그 일에 대해 판단하지 말자.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차라리 결정을 미루면서 어느 정도 해보면 환난이
인내가 되고, 인내가 연달이 되어,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것을 경험해본다.
Q4.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는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무엇이 되고 싶은지, 즉 장래희망을 묻고
답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고민도 없는 사람 취급이 되니 ‘되고 싶은 멋진 나’에
대한 ‘상’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의 ‘일’을 찾는데에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가 아닌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자기 업을 정의할 때 명사가 아닌 동사로 정의하는 것과 같다.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 나는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것을 알려주고 가르치고 싶다.
다행히 나는 주어진 일을 하다보니 ‘무언가 얽힌 일을 정리하고, 처리하고, 개선하고, 이루어내 결과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런 성향이 컨설턴트직과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나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고 성취하는데 만족감을 느끼고,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는 무슨 “일”을 하느냐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단순한 컨설턴트가 아니다.
나는 고객이 자기다움(소명)으로 성공하게 돕는다.(내가 가진 경영학, 브랜드,마케팅 지식을 바탕으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해결자이자 성취가이다)
Q5. 재밌는가? 행복감을 느끼는가?
일이 성향적으로 나에게 잘 맞고, 능력이나 역량면에서도 내가 잘한다 할지라도 이 일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없다면 과연 이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일을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건 결국 자신의 가치관과 맞는 일이어야 한다.
가치관과 맞지 않아 매번
판단과 결정을 할때마다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난다면 일 자체가 고역이 된다.
나는 무엇은 양보할 수 있고, 무엇은 양보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절대로 희생하고 싶지 않은 가치관이나 욕구가 있다면 이 ‘일’이 그것을 지키는 일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한다.
자신의 앵커를 알지 못하면 결국 보수나 직함 등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으로 일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은 곧 후회와 불만을 일으키게 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환경에 따라 회피형 이직을 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앵커를 알면 나의 가치관을 지키면서 겪는 불편하거나 힘들게 만드는 외부적인 요소 등은 충분히 버텨낼 수 있게 된다. 나는 성장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정직함을 지키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나의 중요한 가치관이었기에 이 가치관을 지킬 수 있는 일터에서는 힘든 일도 버텨낼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게 힘들었던 만큼 더 큰 성취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5가지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내 일이 나와 잘 맞고 잘 하는 일, 주변에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 돈이
되면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의 교집합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을 경험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일로서 나를 증명한다는
것은,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됬기에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내가 가진 것(소명,가치)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고(기여), 그로 인해 나와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 그것이 바로 일로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
12-21-2024(토) 요한복음 14:8-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믿으라(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Believe me when I say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or at least believe on the evidence of the miracles
themselves.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I am in the Father)
아버지께서 내 안에(the Father is in me)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하나가 된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나가 되실까요?
부부(夫婦)를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요.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아주 친밀하고 목표가 같고 방향이 같고 삶이 같아야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와 예수님은 서로 안에 거하므로 하나가 됨을 계시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됨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일을 인하여 하나됨과 안에 거하심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안에(엔. ĕn. ἐν)"라는 헬라 단어를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엔'이란 단어가 다양한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되지만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밀접한 관계(막 8:38, 롬 1:12, 갈 1:14)" 또는 "가까운 관계(요 10:38, 갈 2:20, 골 2:9)"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때에는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내가 예수님 안에(ἐν)
예수님이 내 안에(ἐν) 거하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으며 그 깨달음은 곧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하신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므로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온전히 하나됨의 은혜를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열매를 맺는 일에 진력하는 은총의 하루가 펼쳐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부탁합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여기 "믿으라"는 부탁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저 그의 말씀에 의하여 그런 줄 믿으라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그의 말씀대로 믿으라는 명령이다.
이렇게 함이 최고의 신앙이다(Hendriksen).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렇게 믿는 것이 둘째로 가는 신앙이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이 첫째인데, 그것은 상반절에 보여 주었다.
"그 일"이란 것은 그의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10:25, 37-38 참조.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이사야 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안에(1722) 엔(ĕn) ἐν
-
1. 장소를 나타내는 경우].
-
a. 안에, 마2:1, 눅7:37, 가까이, 요8:20.
-
b. 목적[인격, 물건] 고전9:15, 갈1:24.
-
c. 사람 앞에, 마21:42, 눅4:21.
-
d. 밀접한 관계, 막8:38, 롬1:12, 갈1:14.
-
e. 가까운 관계, 요10:38, 갈2:20, 골2:9.
-
f.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 [안에] 눅9:46, 계11:11.
-
-
2. 시간을 나타내는 경우.
-
a. 기간, 동안, 마27:40, 요2:19.
-
b. 때에, 시점, 요6:44, 행7:13.
-
-
3. 기타, 인간관계 소개, 막9:50, 눅14: 34, 방법, 이유, 갈1:6, 살후1:11, 히10:10.
예를 들면 은혜 안에 머문다고 한다면
내가 은혜로운 장소에 머물러 있다는 것
내가 은혜로운 시간에 존재하는 것
내가 은혜로운 사람과 가까이 있는 것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의 희생 제물로 바치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들과 더불어 약속된 장소로 삼일 길을 걸었습니다.
- 작심삼일(作心三日) / 지을 작(作), 마음 심(心), 석 삼(三), 날 일(日)
아들을 약속된 장소에서 칼을 들어 목숨을 끊는 시간에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 혼연일체(渾然一體) / 흐릴 혼(渾), 불탈 연(然), 한 일(一), 몸 체(體)
드디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와 함께 한다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 각골낙망(刻骨難忘) / 세길 각(刻), 뼈 골(骨), 어려울 난(難), 잊을 망(忘)
• 유래 : 뼈에 새겨질 만큼 잊기 어렵다는 뜻
누군가에게 받은 큰 은혜나 도움을 평생 잊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비롯된 말.
• 의미 : 누군가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이를 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할 때 사용.
12-20-2024(금) 요한복음 14:5-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길과 진리와 생명(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λεγει αυτω ο ιησους εγω ειμι η οδος και η αληθεια και η ζωη ουδεις ερχεται προς τον πατερα ει μη δι εμου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여기 "길", "진리", "생명"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모두다 "그"라는 관사(ἡ)를 가지고 있어서, "그 길(the Way)", "그 진리(the Truth)", "그 생명(the Life)"을 의미합니다.
"그 길(η οδος)"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 진리(η αληθεια)"는 죄에서 자유를 얻게하는 진리(요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생명(η ζωη)"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종교다원화주의와 같은 거짓된 풍조가 세상을 흔들지라도 온전한 믿음은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며 이성적인 주장과 합리적인 사고가 사람들을 미혹할 때에도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고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며 질서를 파괴하고 법을 무시하며 편가르기에 열중하는 거짓된 무리들을 향하여 참된 진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굽히지 말아야 합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온갖 좋은 것을 몸안에 담으려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않고 절제와 나눔과 용서를 위한 삶을 통하여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일에 게으름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여전히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이원론적인 사상이 지배할 때에도 유일한 것은 오직 주님을 따르는 믿음뿐이라 확신하며 흔들림이 없었던 믿음의 선각자들처럼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일에 승리하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다른 종교 사상과 타협하시지 않은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간다는 영지파(노시스)의 사상과 기타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타협하는 혼합주의(Syncretis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 독일 무이(獨逸無二)하신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그는 메시야적인 자아 주장을 세우신다. 선지자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요, 더욱이 그 길의 목적인 "그 진리", "그 생명"자체이시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시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이 사실은 그가 절대적인 구주이심을 성립시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당 가는 길을 알려는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천당 가는 길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당이 하나님 중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별도로 천당을 생각하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으로 흐른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善)이나 진리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처소를 예비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간 뒤에, 베드로가 주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것이라는 그런 결연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른 많은 제자들도 있는데, ‘네가 정말 나를 위해 죽겠느냐?
너는 닭 울기 전에, 정녕 세 번을,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망신을 주셨어요.
유다와 베드로를 한 곳에 등장시킴으로 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유다나
베드로나 똑같은 인간이다.’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나라에 입성을
하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유기(遺棄)가 되어서, 창자가 터져 죽게 되는 그런, 완전히 다른 운명에
처해지게 되는, 그런 두 종류의 사람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될 사람 베드로와 안 될 사람 가룟 유다
그것이 바로 두 갈래로 갈리는, 전체 인류의 운명이에요.
그것을 신학은
‘이중예정’ 이라고 합니다.
칼뱅주의 예정론은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도 합니다.
은혜로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한 반면,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죄와 원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부르고 후자에 대해서는 유기(reprobation)라고 부른다.
칼뱅주의에서는 전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으로 중생하도록 유효적인 소명으로 예정받았다고 한다.
저주받은 자들에 대한 유기를 말하지 않은 것을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견해가 될수 없다고 보기도 한다
주님은
14장 1절에서, 그러한 은혜의 수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나를
믿어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세요.
그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온갖 핍박과 억압 속에서도, 메시아를 기다렸던 거와
같은, 바로 그 믿음으로, ‘이제 내가 다시 올 거니까, 나를, 예수를, 확신 속에서 기다리라’는 선언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온갖 핍박과 억압을 견뎌낸 것처럼, 내가 다시 올 때까지도, 그러한
일들이 너희들에게 반복되어질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근심하지 말라! 확신 속에서 기다려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2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 거할 곳(3438. 모네. mŏnē) μονή, ῆς, ἡ
-
1. 체류, 요 14:23.
-
2. 거처, 자리, 요 14:2.
-
관련 성경 / 거하는 곳(요 14:2), 거처(요 14:23).
그리고는 내가
너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여기서 ‘처소’가 뭘까요.
우리 성도가 죽은 뒤에 가게 될 ‘그 하나님나라
안에서의 주택? 우리가 살 곳? 그곳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 처소(5117) 토포스(tŏpŏs) τόπος, ου, ὁ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는데 왜 처소를 예비하러 가셔야 합니까?
장차 아버지 집에 들어올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처소가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집에 처소는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서 하늘이란 단어가 복수형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삼층천에 해당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창조 때에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처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처소를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것이 아닙니다.
처소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3장을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일사각오의 결의를 다짐했지만 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예수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 나라 즉 성도의 처소는 무엇일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거하게 될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들의 죄를 말끔하게 씻어내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 속에 들어가서 함께 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완성하시겠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제자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모두 주님을 떠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제자 즉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려면 처소를 예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안에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처소는 성도들과 하나님이 함께 거할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처소를 예비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이미 완성된 그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소를 예비해야만 합니다.
그 처소는 곧 나와 더불어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야 할 곳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사람의 마음이에요)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죄인은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거처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청결한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이 함께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소 예비라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레미야 17장 9절 이하의 그 마음과는 다른 마음이에요. 이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대요. 복 있는 자들은! 바로 요 상태로 만들어 내시는 거예요. 이게 처소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도 그분의 돌격을 면하게 되는 거예요. 죄인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돌격하여 죽여야 됩니다. 하나님이 못 때서가 아니라, 죄는 거룩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는,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는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에스겔서 36장 24절 보세요.
에스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더러운 마음을, 당신의 물로 깨끗이 씻어서, 그들을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거처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새 언약을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씻김을 받은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영광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이 물로 씻으시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그런 존재를, 교회라고 한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교회가 바로, 더러운 마음을 씻김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처소가 된 자들의 무리인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만물 중에 가장 더러웠던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씻으셨는가? 예수님의 발 씻김의 에피소드 뒤에, 이 이야기가 붙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어떻게 우리가 깨끗하게 씻긴 거예요? 어떻게 처소가 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보세요. 계시록 7장 13절.
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디에? 어린양의 피에! 깨끗하게 씻어서, 맑은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을, 교회(敎會)라고 해요. 그런데 그들이, 환란 속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은, 환란이 맞는 거죠?
이렇게 성도는,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서 말갛게 씻기고, 드디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된 거예요. 그래서 급기야, 더럽고 추한 마음이 제해지고, 청결한 마음이 심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좌정할 수 있게 된 거죠.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세요? 안 계세요? 성령이 계세요? 안 계세요? 성령은 누구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어떻게? 그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게 됐죠? 옛날 같았으면, 돌격하여 죽여 버려야 되는 그 더러운 마음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세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죠? 고린도서에서 뭐라 그래요?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지금 성령이 계신다 말이에요. 하나님이 계신다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여러분의 더러운 마음을 전부 가져가셔서, 거기에서 싹 제해버리셨어요. 없애 버리셨단 말입니다.
내가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것은 유다가 나를 팔러 갔기 때문에 이제 곧 십자가를 지러
가야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곳을 하나님나라 곧 천국(天國)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처소! 즉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떠나신다고 하는 것이고, 그 말은 이제 곧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를 내가 처소로 만들어 낼 것이고, 지금은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서 나의
피로 너희들의 죄를 말갛게 씻어내면, 너희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땅에서, 역사 속에서, 현실
속에서는, 차근차근, 차근차근 성화의 모습으로 진행되어져 가는 거죠, 그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사신다는 게 이게 말이 돼요? 우리가 우리를 볼 때!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 선언적으로,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렇게 우리를 지금, 이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힘들죠.
나는 ‘나’라는 우상이 원하는 대로, ‘나’라는 우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는데, 그 ‘나’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비워내고, 심지어, 심지어 비워내고,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곳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그 삶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뼈와 살과 피에 녹아있는 옛 사람을, 솎아 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참으로 힘들어요. 어렵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나라의 개념정리를 잘 하고 계셔야 돼요.
하나님나라는, 공간적이며,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은하계 뒤편에 어딘가에 마련되어 있는 그러한 곳!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하나님나라는 고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
어디에 그냥 콱 붙박이로 박혀있는 그런 곳! 그런 곳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나라는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통치권 즉 왕국과 같은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실레이아!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그 통치에 순복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죠?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그런 마음과 그런 행위를 하고 있으면, 거기가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죄와 악이 싹 제해지게 되면, 거기야말로 가장 행복한 곳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하나님나라에, 죄와 악이 섞여 있단 말이에요. 이 세상에서는! 그래서 이 세상에 그런 사망의 증상들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믿음으로 느끼고, 자각하고, 인식하며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어느 날 죄와 악이 싹 사라진 그곳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오롯이 남는 것을, 천국(天國)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맛볼 수 있다? 없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주 일어나진 않아요. 그죠? 왜냐면 죄라는 것이 너무 어둡고 무섭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가 쉽사리 그 하나님나라를 경험할 수 없어요. 그게 참 안타까운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천국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거예요. 아! 제가 이야기하고도, 참 굉장히 흐흐 이런 거는 명언 집에다 하나 써 놔야 되는 건데, 그죠? 천국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자들이, 그 하나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는 곳이,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초가삼간도, 판잣집이라도, 거기가 감옥이라 할지라도, 아니, 지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이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고백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 고백을 우리 안에서 끌어내시기 위해서, 여러분의 삶 속에, 때로는 지옥을 허락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너, 이런데도 나로 말미암아 천국을 이야기할 수 있어?’라고 물어보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에는,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자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는 거죠.
예수님은, ‘너희들 죽고 나서, 꼭 천국가라!’ 이렇게 말씀하신 적 없어요. 예수님은 언제나, ‘천국이 지금 너희 가운데 있다. 그리고 지금 천국이 너희에게 임했다.’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게 처소란 말입니다. 우리의 처소! 그러니까 천국은 죽고 나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란 뜻이에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너희를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라고 하신 것은, 내가 이제 십자가를 지고, 너희의 더러운 마음을 씻을 피를 흘리게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너희의 죄가 해결이 되고, 성령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거하시게 되는, 하나님나라! 즉 처소가, 너희가 처소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그런 말인 거예요.
그리고 다시 오셔서, 당신이 준비하신 처소로, 우리를 영접하셔서, 당신이 계신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시겠다는 그 말씀은, 단순히 먼 훗날에 재림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영접을 하시겠다는, 그런 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도 있긴 있어요. 그러나 그런 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과, 예수님의 가시적 재림의, 이중적 상징인 거예요.
그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 이미 오셨죠? 그러나 가시적으로 또 오신단 말입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올레디 낫 옛(already not yet) 그죠? 예수님은 언젠가 가시적으로 재림을 하실 거예요. 그러나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시는, 그런 식의 재림은 아니에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라는 그 말은, ‘볼지어다.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라는 뜻이라 그랬죠?
그런데 그 구름은 뭐라 그랬어요?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근두운 같은 그런 구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랬잖아요?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오실 것이다.’지, 절대 구름을 타고 저 꼭대기에서, 성화(聖畫)를 너무나 많이 봐서, 그런 모습으로 오실 거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는, 성육신 하셔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연한 순처럼, 이 땅에 오셨지만, 이제 가시적으로 우리 눈에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 영광에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이다가, 바로 ‘볼지어다. 구름과 함께 오시리라!’라는 뜻인 거예요.
그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再臨), 파루지아’라는 단어는, ‘구름을 타고 멀리에서 내려오다’는 뜻이 아니라, ‘안 보이던 것이 나타나다’란 뜻이에요. ‘파루지아’는! 그러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여러분 안에 계시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눈으로 볼 수는 없어요. 그런데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이제 나는 지금 믿음으로 예수를 보는데, 내 눈으로 보게 되는 그 날을, 재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재림을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내 안에서 지금 이미, 재림이 일어났다니깐요. 영적으로는! 그 영적인 재림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이제 영원히 지속되는 그 곳! 거기가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이 땅에서도, 그 예수의 재림을, 우리가 자각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 그 예수님이, ‘내가 처소를 마련해서, 너희들에게 내려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들을 영접할 거야!’라고 말씀하신 거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오순절 날 성령으로, 성도의, 교회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의 거처! 지성소를 완성해 놓으신, 그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정말 가시적으로 다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가시적인 하나님나라를, 확 완성해 놓으시는 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모습! 문화도 있고, 자연도 있고, 여러분 직업도 가져야 될 것이고, 각자 다른 모양의 몸! 육신도 서 있어야 되는 이런 모습! 이런 모습에서, 죄와 악과 썩어짐과 더러움만, 싹 빠진 그런 것!
그런 거! 예 고런 것처럼, 지금 이 세상은요, 죄로 말미암아 많이 왜곡되어져 있고, 뒤틀려 있어요. 그리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고, 후패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죄와 악이 싹 빠져 버리고, 깨끗한 하나님나라만 남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요 하나님나라가 있는데, 죄와 함께 공존하고 있잖아요? 고것들이 싹 사라진 그곳! 거기가 하나님나라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때에는, 그 나라가 인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가시적으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성도들은 그렇게 이미,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살아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가시적으로 재림을 하실 때에는, 가시적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영원한 안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죠, 그죠?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 여러분은 시간을 벗어나서, 바로 거기로 한 번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이 땅의 역사 속에서 보면, 역사 속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많이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때때로 성경이, 성도들이 죽어서 잠자고 있다고들 이야기를 하는데, 땅 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수천 년 후에 다시 이렇게 부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시간 속에서, 확 나가는 게, 죽음이란 말이에요. 시간 속에서 나가면, 거기는 영원이란 말입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곳!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눈을 감는 그 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우리 다 만나요. 기다림이 없어요. 거기는요.
그래서 제가 가끔 임종을 하게 될 때, 그런 분들의 손을 잡고 그러는 거예요. 가시면 저 있나 꼭 확인해 주세요! 흐흐흐 예, 맞습니다. 가면은 우리는, 그 시간 밖의 영원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곳에 있는, 우리 모두를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는 이미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원 속에서!
그런데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나라를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추악함을 배우고, 그러느라, 이렇게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다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 보면, 참 재미없는 싸움이에요. 이 싸움은요! 다 이긴 게임을 뭐 하러 또 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김을 안고, 한발 한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러니까 영적 처소는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언약 속에서, 이미 완성이 된 거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골고다에 십자가로 나타났으며, 그 영적으로 완성이 된 처소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처소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모습이, 성도의 신앙생활인 거죠. 그걸 성화라고 하잖아요? 생티피케이션(Sanctification)!
사실은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처소의 완성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기도 해요.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창조를 하신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를 해 놓으셨는데, 어떤 피조물의 훼방으로 말미암아, 지금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워 진 게 아니에요. 사실은요! 그러면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죠? 실수도 할 수 있고, 누군가로 부터 방해도 받을 수 있다면, 그분의 전지전능함은, 훼손이 되죠, 그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기 위함이었어요. 하나님의 백성들과 거하기 위함이었어요.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고 너무 피곤해서,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하에 잘 지어지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움직이는 상태! 그 상태를 싸베스(Sabbath), 안식이라고 한다, 그랬죠? 그죠? 그것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께 항복하여 있는 상태를 말하기도 해요. 절대 타락할 수 없고, 영원히 그러한 상태로 유지되는 그곳을 만들기 위해, 일차적으로 타락이 가능한 것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타락하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게 역사에요. 그게 성경인 것입니다.
자, 고 상태를 성경이, 예배(禮拜)라 부른다, 그랬죠? 가치부여 행위! 월십(worship)! 어떤 것이 정말 참 가치인지를, 올바로 인식하고 깨달아서, 그 가치에 올인해 버리는 거예요. 그걸 예배라고 하는 것이죠, 그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올인을 하죠. 나 자신을 위해 살죠. 모든 것을 다 걸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거예요. 그게 예배인 겁니다. 월쉽(worship)! 하나님만이 참 가치이시며, 하나님만이 영광의 주인이심을, 모든 만물이 인정하고, 그 앞에서 순종하고, 의존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과 합일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그 상태! 그걸 하나님과 연합(聯合)이라고 이야기해요. 다 같은 말이에요.
그 연합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뮤추얼 인드웰링(mutual in-dwelling)이에요. 상호내주(相互內住)! 하나님이 인간 안에 들어오고, 인간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연합이라 그러고, 그걸 ‘상호내주’라 그러고, 그걸 ‘처소삼기’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창조의 목적이었단 말이에요. 그 상호내주, 뮤추얼 인드웰링(mutual in-dwelling)이라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완성해 내시는지를, 인제 보여주는 거죠. 주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도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게 바로 연합이잖아요? 그 연합이 바로, 뮤추얼 인드웰링(mutual in-dwelling), 상호내주, 처소란 말이에요. 그걸 뭐라 그런다? ‘안식(安息)’이라 그런다 말이에요. 하나님의 안식이, 이 우주의 안식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목적이었잖아요? 그걸 안식이라 그런다 말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안식을, ‘하나님의 거처 삼으심!’ ‘하나님의 처소 삼으심’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어요. 안식이 바로 거주의 개념이니깐요. 그렇게 상호 거주가 될 때, 그 상태를 연합(聯合)이라고 하는 거고, 그 연합의 상태에서, 쌍방의 뜻이 하나가 되는 거고, 거기에서 예배가 나오고, 거기에서 참된 안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연결이 되십니까? 왜 주님의 처소 예비가, 창조의 목적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는지, 이제 아시겠죠?
자,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은 인간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어요. 이제 하나님의 안식은, 깨어져 버린 거예요. 물론 상징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깨질 수가 없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안식은 어떻게 깨져요? 피조물 때문에 깨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은 그 무엇으로도 깨질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다시는 깨어지지 않는 안식을 마련하기 위해, 혼돈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의미에서, 안식이 깨졌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지, 하나님의 안식을 깨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안식의 처소를 마련하시는 일을 시작하셨어요. 구속사를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새 언약과 새 창조잖아요?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출발이 돼요. 그게 지금 새 창조의 과정인 거예요.
그 민족적 이스라엘은 바로 누구다? 누구를 상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교회! 영적인 이스라엘은 바로 성도를 상징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거하실 처소를 준비한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거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처소 예비와, 하나님의 구원은, 같은 이야기란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세요. 출애굽기 15장 13절 보세요.
출애굽기 15:13, 17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잘 기억하세요. 그런데 17절에 보면, 바로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어요.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처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는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거예요. 그걸 뭐라 그런다, 그랬죠? 뮤추얼 인 드웰링(mutual in-dwelling), 상호 내주라 그랬어요. 그걸 염두에 두시고 신명기로 가보세요.
신명기 33: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지금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을 가나안에 넣으시는 것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처소를 주심이라고 하셨는데, 출애굽기 15장 17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고도 그러고, 신명기에서는 그 처소가 또 하나님이래요.
가나안! 이스라엘! 하나님! 하나님의 처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소를 우리에게 예비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 내셨다는 것은, 어디로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 안으로 우리를 확 끌어 드리는 거예요. 삼위일체 속으로! 우리를 이 더러운, 만물 중에 가장 더러운, 우리를 확 끌어 당기셨다가, 하나님의 삼위일체 속으로, 그분의 신의 성품 속으로 우리를 확 참여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산다? 하나님처럼 살아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처럼 살겠다고 했을 때, 이런 더럽고 지저분하고 추악한 것들이, 막 주렁주렁하고 맺혔어요.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처럼, 진짜 하나님처럼 살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살겠다고 나서서, 우리가 열심히 애를 쓰고, 우리의 꾀를 짜내면, 이 지경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내가 만들어 낸 그 하나님나라에, 그 나라에 은혜로, 믿음으로 들어와라! 이것이 신앙생활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알아라! 은혜로 들어와라! 믿음으로 들어와라! 시편 90편 1절로 가볼게요.
시편 90:1. 9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표준새번역 /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가장 높으신 분을 너의 처소로 삼았으니
시편 132: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표준새번역 / 주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그 곳을 당신의 처소로 삼으시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온은
누구예요?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여기도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다.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다.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다.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다. 계속 혼용해서 쓰고 있죠? 그게 상호내주(相互內住)라는 거예요. 연합(聯合)이라는
거예요. 그게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런데 그 온전한 연합이 되기 위해서는, 한쪽에서 완전한 순종을 해버려야 된다 말이에요. 절대 자기 주장이 요 만큼도 남아있으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이성과 인격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경험케 해주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래서 우리는 그거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요, 교회를 예수라고도 불러요. 벌써부터! 여러분은 예수예요. 작은 예수!
고린도전서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지금 이거 교회를 설명하는 거거든요.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그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예수라는 머리를 두고, 많은 지체로 거기에 붙어 있는 것이다. 그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뭐라 그래요?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교회도 그러하니라가 아니라,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누구라는 거예요? 예수로 벌써,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예요. 내 아들로 부르시는 거예요.
예수라는 안경을 끼고, 우리를 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라는 안경을 끼고 보면, 빨간 색 안경을 끼고 보면, 온 세상이 빨갛고, 노란색 안경을 끼고 온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노랗듯이, 예수라는 안경을 끼고 하나님이 우리를 내려다 보시면은! 그 법궤 안에 인간들의 실패가 가득 들어 있잖아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맛나 항아리! 십계명 돌판! 그건 인간의 실수와 실패를, 죄악을 상징하는 거거든요. 그것을 예수의 피가 싹 덮으니까,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인간의 실패와 죄악이 하나도 안보이고, 예수의 피만 보이는 거예요. 아들의 피만! 마찬가지로 우리를 예수로 보시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예수만,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어요. 예수만 의인(義人)이고, 예수를 확 끌어 올렸더니, 그 안에 연합되어 있는 교회가 따라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모세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왜냐하면, 모세만 길을 알았거든요.
모세는 이미 애굽에서 한번 나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가 홍해를 먼저 건너갔다는 뜻이 아니라, 에굽에서 먼저 나왔던 그 존재에게, 다른 백성들을 연합을 시켜서, 하나님이 모세만 확 끌어올리는 거예요. 그랬더니 모세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이 주렁주렁 매달려 올라오더라는 것이죠. 그거는 왜 굳이 그런 표현을 쓴 거냐 하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만 구원하세요. 예수를 구원했는데, 그 예수가 우리를 꼭 품어 안고 있는 거예요. 흘리지도 않고, 하나도 안 흘리고! 그 요한복음에 나오잖아요? 내가 하나도 안 흘렸다. 그러지 않습니까? 다 끌고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거예요. 예수가 머리이고 우리가 지체라는 건, 우리가 예수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가 공동상속자가 된 거예요. 로마서에! 여러분, 우리에게 그런 것이 주어져 있어요. 이게 안 믿기니까, 지금 이 땅에서 엉뚱한 것으로, 자기의 공허를 채우고 있는 거예요. 이게 안 믿겨지니까!
거기가 얼마나 좋고, 얼마나 아름답고, 그 죄악이 없는 곳이, 얼마나 평안하고 기쁜 곳인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너무 못 배운 거예요. 그 동안에요!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고, 선교 많이 하면, 우리에게 주어질 그런 복에 대한 것만, 너무 많이 배워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것만 연구했어요.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힘이 없는 거예요. 소망도 없고, 기대도 없고, 죽음은 두렵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우리가요?
그 하나님의 새 언약의 내용이, 다윗의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반복이 되는지 한번 보세요. 사무엘하 7장 5절.
사무엘하 7:5-7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다윗이 여호와의 처소!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언제 사람이 만든 곳에, 거하는 거 봤냐?’ 그러면서 다윗에 성전 건축을 막으시죠. 하나님의 처소 건축을 막으세요. 나는 인간들로 부터 무엇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8절부터 다윗에게 언약을 하세요.
사무엘하 7:8-9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 위에 분명히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살 집을 네가 어떻게 만든다, 그래?’ 말씀해 놓고, 축복을 막 부어주고 계세요. 그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은 지금 다윗에게, 아니,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줄 복은, 너희들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너희들에게 베푸는 것이다.’라는 은혜의 언약을 하시는 장면이에요. 이것이요!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에게, 거저 그냥 그렇게 하실 수는 없다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다윗에게, 그 무시무시한 죄를 지었던, 그리고 죽는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엉터리 같은 삶만 살았던 다윗에게, 이렇게 축복을 하실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바로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 나오죠?
다윗과 밧세바가 죄를 졌어요. 간음을 해서 애를 뱄어요. 애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애를 죽여요. 애가 무슨 죄예요? 무죄한 자가 죽고, 솔로몬! 하나님의 자손을 대표하는, 솔로몬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 은혜의 언약의 근거로, 바로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다윗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봐라!’ 이게 아닙니다. 여러분! 구속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을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을 보세요.
사무엘하 7:11-13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시겠다고 이야기를 하세요. ‘다윗아! 너는 내가 거할 처소! 그런 거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집 져줄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네 집 져줄 거야!’ 그게 구원인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 짓는 거 아니에요. 성전이 어디 있어요? 오늘날 성전은? 있긴 있죠? 어디 있어요? 여러분이 성전이잖아요? 내가 성전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뭐, 성전 건축이니 뭐니, 해서 말이죠? 예, 성전은 바로 여러분인 거예요. 그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러는 거죠. ‘얘들아! 너희들이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져줄 수 있다고 생각해? 집은 내가 너희들에게 지어주는 거야!’라고 말씀하세요. 여기서 ‘집’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바이트’는 가문(家門)! 가족(家族)! 이런 것을 함께 이야기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다윗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한 가문을 약속하시는 거예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14대 14대 14대가 나오잖아요? 14, 14, 14는 뭐예요? 7, 7, 7, 7, 7, 7이라고 그랬어요? 14, 14, 14는 D(달렙: 4) V(바우: 6) D(달렙: 4) 당시에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모음도 없었으니까, 자음으로 다윗이, 14란 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14, 14, 14로 맞춰 놓고,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족보가 되려면 7, 7, 7, 7, 7, 7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14, 14, 14 여섯 개 밖에 없다 말이죠? 그리고 그 14, 14, 14의 마지막 족보가 누구예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로 끝나죠, 그죠? 그러면 마지막 일곱 번째 세대는, 누구예요? 그 족보를 완성할,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밑에, 줄줄이 딸려오는 우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가, 너의 후손을 통하여 집을 짓겠다고 표현을 하시는 거예요. 집을 지어 너에게 주겠다는 거예요. 그 말은, 그 가문을 다윗을 위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은, 다윗을 그 안에 넣어주시겠다는 것이죠? 네 후손으로 그 집을 만들겠다는 것은! 너를 내가 거기에 넣어주는 거지, 네가 내가 거할 집을 짓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가 돈을 벌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여러분의 실력이나, 여러분의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도구로 쓰이는 거지,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갖고 쓰는 도구라니깐요.
그런데 그걸 갖고 하나님한테 자꾸 생색을 내는 거예요. 그래놓고 요만큼 했으니까, 좀 더 주셔야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오늘날, 신앙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워졌어요?
그런데 문제는, 12절과 13절이에요. 하나님은 분명 다윗에게, 내가 사람 없는 집에 거하는 것을 봤냐? 그러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게 하겠다고 하잖아요? 왜 다윗이 지은 성전 안 받으시겠다고 하시고, 다윗에 후손에게는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고 할까요?
그 성전은 무슨 성전이에요? 우리 요한복음 이미 공부했기 때문에, 너무 싱거워 졌어요. 나! 예수가, 내가 성전이다! 그랬잖아요? 그 성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지게 될 바로, 하나님의 백성! 교회! 예수를 시켜서, 다윗의 후손 예수를 시켜,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짓겠다고, 지금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의 언약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단순히
다윗이 죄를 많이 지었고,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다윗에게 집 못 짓게 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 말은 솔로몬은, 다윗보다
괜찮으니까, 솔로몬에게는 내가 성전 짓게 할 거야! 그 말도 아니에요. 솔로몬이 성전을 짓긴 지었어요. 그러나 그건 또 다른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거하시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도 안 거하세요.
사도행전 7장 46절 보십시오.
사도행전 7:46-53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지었어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도 거하지 않으셨대요. 그러면 네 후손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 처소인, 성전인 교회를 만드실 것이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물론 여기에는 이중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죠. 다윗의 후손! 솔로몬은, 분명히 성전을 지었어요. 그런데 그 성전은요, 얼마 있다가 파괴됩니다.
그리고 그 솔로몬의 왕위! 그게 영원했어요? 사무엘하에서는 분명히 영원할 거라 그랬잖아요? 아니요. 바로 솔로몬 아들 때에서 갈라지고, 얼마 있다가, 북이스라엘, 남유대, 홀랑 망했어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분명히 하나님이 내 이름을 위하여 짓게 하겠다고 했는데, 그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지어졌던 걸까요?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지은 성전은, 이렇게 파괴된다. ‘내가 내 힘으로 지은 성전만이 영원할 것이다.’를 보여주는, 하나의 파괴되는 성전으로 지어진 거예요. 우리의 육신이 그렇기 지어진거처럼! 우리의 육신은, 이거 파괴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육신은 후패되어져요. 썩어져 가게 됩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완성하신 온전한 새 성전으로 싹 입혀 줄 때, 그때 하나님과 우리가 온전한 연합이 되는 것이죠.
그거처럼, 솔로몬이 짓고, 학개가 재건하고, 헤롯이 중건하고 한, 이런 성전들은, 하나님이 그래서 때마다 부셔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나중에 타이터스 시켜서 돌 위에 돌 하나도 안 남게 사그리 부셔 버렸죠. 지금까지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만든 성전은 이런 것이다. 바로 인간이 만든 성전이, 지금 이 우주의 과학 문명이며, 역사인 거예요. 이거 완전히 부셔버릴 거예요. 하나님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시는 것이, 바로 이 구속사인 거예요. 성경은 그 이야기 하나만 하고 있어요.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그걸 이해를 잘 못하시니까, 제가 반복하여 계속 설명을 해드리는 거죠. 너무 반복해 주니까, 또 반복하겠지! 그리고 잘 듣지도 않아요. (하하하하) 그래도 계속 하는 거죠. 여러분 성경은 그 이야기한가지 밖에 없어요. 그것만 알고 있으면 여러분은 제 설교! 어떤 설교를 들으셔도, 다 충분하게 이해를 하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닌 거예요. 그게 바로 은혜 언약인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공력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것은 다 불타버릴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진 거예요.
반면에, 그 다윗의 후손에 의해 지어지게 될, 집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두 번째 상징은, 여호와의 처소! 여호와께서 거하실 참 성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질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라 그랬어요. 그렇게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세요.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처소로 제공하시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세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래요. 그리고 오늘 본문 조금 밑에 가면, 뭐라고 나와 있는지 보세요. 거기에 분명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14장 20절 보십시오.
요한복음 14:20-23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뮤추얼 인듀웰링(mutual in-dwelling)이에요. 상호내주(相互內住)! 연합(聯合)! 안식(安息)! 예배(禮拜)! 이거예요. 이게 우리 인생의 목적이에요. 역사의 목적지예요. 이것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중에, 우리가 이 상태가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키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그러나 그것을 목적지로 하여, 우리의 삶을 지향시켜야 되는 거예요. 그 쪽으로! 22절)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보세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그를 나의 처소로 삼으리라.’ 지금 주님이 그거 예비하러 가신다, 그랬죠? 그런데 그를 나의 처소로 삼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상태가 되어야 돼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 이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처소! 처소로, 지금 예비시켜 가시고, 완성시켜 가신다는 건 뭐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지금 철장으로 두들겨 패면서, 만들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길에, 여러분의 사업이 망하기도 하는 거고, 여러분이 병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고, 그 길에, 여러분의 희로애락이 사용되는 것일 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모든 것이 합력되어, 선을 이루는 거예요. ‘아! 그래도 나는 옛날에 너무 파렴치한 죄를 지어서, 그거는 용서받지 못 할 거예요.’ 아니에요. 그거 때문에 예수가 오셨다니깐요. ‘아니, 저 인간은, 정말 용서받지 못할 그런 못된 죄를 저질렀는데, 저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징계를 하셔야 돼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가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 것들을 상처로 품고 계시지 마세요.
‘아! 내가 옛날에, 어렸을 때, 뭐 학대를 당하고, 뭐 십대 때 강간을 당하고…’ 물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역사와 우리의 육신은, 잠시, 구속사 속에서 도구로 쓰이는 것뿐이라니깐요. 이 껍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그걸 왜 더렵혀졌다고 생각합니까? 뭐가 더러워요? 그게? 우리의 마음이 정말 더러운 거라니깐요. 만물 중에 가장 더러운 게 마음이라 그러잖아요? 그 걸로는 마음 아파하지 않으면서, 그 따위 걸로, 상처라고 하면서, 죽는 날까지 가지고 가요. 그거를 갖다가! ‘내가 어려서 당한 그 일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어!’ 예수님이 그거 때문에 오셨단 말입니다. 그런 걸 상처로 갖고 있지 말란 말이에요.
뭐 ‘저 옛날에 마약했는데요.’ 커피중독이나 마약중독이나 똑같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집착과 중독 속에서, 나의 행복과 쾌락을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던 나를, 하나님이 건지셔서, 하나님께 중독 시켜버린 그 하나님의 은혜를, 더 찬양하실 수 있어야지, 왜 자꾸 자기 뒤를 돌아보면서, 그런 거 가지고 자기를 폄훼하세요? 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누구 하나 잘난 인간 없고, 누구하나 못난 인간 없어요.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다 똑같아요. 다 똑같아요. 살인마! 김대두가 나중에 예수 믿고 전도하다가, 천국 갔다고. 어떤 사람이, ‘그런 인간이 간 천국이면, 난 안 간다.’ 그랬다 그러는데, 그 인간과 자기가 뭐가 달라요? 그래서 사람 열 몇 명 죽인 거, 죽였어요. 여러분은 입으로 수십 명 죽이잖아요? 하나님은 그거 살인이라 그랬어요. 분명히! 살인으로 여길 거다. 간주할 거다도 아니고, 그거 살인이다! 그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김대두는 나쁜 놈이고, 나는 칼로 쑤시지 않아서, 좋은 놈이에요? 아니라니깐요.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죄가 동일해요. 다 사형(死刑)이에요. 그 분이 너무 크신 분이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너무 크게 되면, 모든 죄가 다 동일해요. 사형이에요. 여러분, 오바마 뒤에 가서, 꿀밤 한 대 때리고 도망가면 바로 사살(射殺)이에요. 거기서 그게 무슨 큰 죄라고? 그러나 대상이 미국 대통령이기 때문에 사형이에요. 그 대상이 하나님이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누구를 가리켜서, ‘저런 못돼 먹은, 엉덩이에 뿔난 인간!’ 뭐 그렇게 어떻게 우리가 평가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왜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너는 안 돼! 너는 구제불능이야!’ 왜 그러시냐 말이에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면서! 그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셨는데!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짓고, 어떤 과정을 통과해서 자라왔든, 그거는 하나님의 의해 도구로 쓰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신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근거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다 씻어버림으로, 당신이 우리 속에 거하실 수 있게 하시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망을 이기신 부활로 이어지고, 그 부활은 하늘로의 승천으로 결론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셔서, 죄의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인정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건, ‘그래, 네 제사가, 완전하게 나에게 흠향이 되었다.’ 인정하신 거란 말입니다.
완전한
승리를 인정받으셨고, 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의 모습으로, 자기가 완성해 놓으신, 청결한 마음의 성도들에게, 내려 오셨어요. 그게
우리예요.
여러분, 전부 청결한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에요. 사실이에요.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청결한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그 더러운 마음을 함께 가지고 가면서, 잠시 어떤 한 과정을 겪고 있을 뿐이지, 여러분은 전부 청결한 마음 갖고 계신 분이에요. 청결한 마음을 갖고 있는 자만, 하나님을 본다, 그랬으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랬잖아요?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 보시잖아요? 여러분은 마음이 청결해 지신 분이에요. 그 상태에서, 마음이 청결한 상태! 하나님의 백성으로, 처소로 완성이 된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처소로 완성이 되었는가를, 여러분이 미래에서 과거를 이렇게 바라보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인생인 거예요.
그래서 ‘근심하지 말라’가 1절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처소로 만들고 있는데, 누가 그걸 방해할 거야? ‘근심하지 말아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고 기다린 것처럼, 그날이 분명히 올 거니까, 근심하지 말고 기다려! 믿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1절, 2절, 3절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하거나, 너무 부끄러워하거나, 너무 절망하거나, 그러시면 안 돼요. 물론, 우리가 후회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건, 참 좋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마저도, 어디 구석으로 처박아 놓고, 그냥 절망만 하시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때에 은혜를 더 꼭 붙드시는 거예요. ‘맞아! 나는 그런 사람이 맞아! 그래서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러 오셨잖아?’하고 꼭 붙드세요. 그러면요, 나중에는 사탄이, 그런 방법으로 더 이상 여러분들 미혹 안 해요.
그럴 때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더 꼭 꼭 붙드는데, 재미없어서 더 그렇게 공격 안 해요. 지금은 자꾸 거기에 휘둘리니까, 재미있으니까, 장난을 치면은, 누가 깜짝 놀라줘야 계속 장난칠 맛이 나잖아요? 저같이 누가 장난을 쳐도, 그냥 한번 쳐다보고, 말고 뭐 이러면은, 저희 집사람이 재미가 없어서 못 살겠대요. 장난을 치면은, 깜짝 놀라는…, 안 놀라운데 어떡해요? 흐흐 재미 하나도 없는데…. 매일 하고 있어요. 그런 거를! 그냥 흐흐 지겨워 죽겠어! (하하하하)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거기에 격동되지 않으면요, 사탄이 재미없어서 안 해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들이 정말 헛것이고, 허상이고, 마귀의 속임수라는 걸 자꾸 놓치고, 거기에 자꾸 이리저리 흔들리니까, 마귀가 재미있어서, 자꾸 여러분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이미, 완성된 자리에서 과거를 보는 분들이라니깐요. 그냥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내가 경험을 하면서, 이렇게 오는 거예요. ‘야!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비디오로 한번 볼래?’ 보고 있는데, ‘야! 그래도 더 실감나게 네가 한번 들어가서, 여기까지 와봐!’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화면 속으로 들어와서, 거기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를, 지금 가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모든 것은, 여러분을 이 자리에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안다면, 어떤 것에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확고한 목표지점! 잘 붙들고 하루하루를 잘 이기십시오.
12-19-2024(목) 요한복음 14: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처소를 예비하면(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And if I go and prepare a place for you, I will come back and take you to be with me that you also may be where I am.
* 처소(5117) 토포스(tŏpŏs) τόπος, ου, ὁ
* 거할 곳(3438) 모네(mŏnē) μονή, ῆς, ἡ 스트롱번호 3438
발음 [ mŏnē ]
어원 / 3306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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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체류, 요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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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처, 자리, 요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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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거하는 곳(요 14:2), 거처(요 14:23).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가서 살게 될 어떤 곳을 예비하려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처소는 무엇일까요?
처소는 어떤 장소와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곳으로 가신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를 깨뜻하게 씻음받은 주의 백성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생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거짓되어서(렘 17:9-10)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부패한 마음을 청결한 마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 5:8).
이미 부패한 인생이 자기의 힘으로 부패한 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직접 해결하시려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내가
너희들의 마음을 볼 때, 나는 너희들에게 보응할 수밖에 없는, 그런 더러운 마음을 너희들이 갖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아담 안에서 타락을 한 모든 인간들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해서, 하나님의 보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예요.
거기에는
하나님이 들어가실 수가 없어요. 죄와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실 때도, 성막에 숨으셔서, 그들을 끌고 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거예요. 하나님이 성막에 숨으셨던 것은, 하나님이 뭐 성막 안에 이렇게 갇혀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죄인과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다. 동행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숨으시는 하나님으로, 성막에 숨어 버린 것이란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자신을 드러낼 수 가 없었죠. 그래서 아름다운 뒤태만 살짝 보여주시고, 마셨단 말이죠? 못 본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모세도!
죄인은 그렇게 하나님과 공존할 수가 없어요. 거처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더러운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청결한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이 함께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소예비인거예요. 마태복음 5장 8절 보십시오.
(마태복음 5:8)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레미야 17장 9절 이하의 그 마음과는 다른 마음이에요. 이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대요. 복 있는 자들은! 바로 요 상태로 만들어 내시는 거예요. 이게 처소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도 그분의 돌격을 면하게 되는 거예요. 죄인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돌격하여 죽여야 됩니다. 하나님이 못 때서가 아니라, 죄는 거룩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만물 중에 제일 더럽다는,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있는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에스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더러운 마음을, 당신의 물로 깨끗이 씻어서, 그들을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그러한 거처로, 처소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이런 새 언약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셨단 말이에요.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씻김을 받은 성도들의 현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영광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이 물로 씻으시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바로, 더러운 마음을 씻김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처소가 된 자들의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만물 중에 가장 더러웠던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씻으셨는가?
예수님의 발 씻김의 에피소드 뒤에, 이
이야기가 붙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어떻게 우리가 깨끗하게 씻긴 거예요?
어떻게 처소가 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디에?
어린양의 피에 깨끗하게 씻어서, 맑은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을, 교회(敎會)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환란 속에서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된 성도들의 삶은 환란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에 의해서 말갛게 씻기고, 드디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된 거예요.
그래서 급기야, 더럽고 추한 마음이 제해지고, 청결한 마음이 심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좌정할 수
있게 된 거죠.
여러분 안에 하나님이 계세요? 안 계세요? 성령이 계세요? 안 계세요? 성령은 누구의 영? 그리스도의 영! 어떻게? 그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게 됐죠? 옛날 같았으면, 돌격하여 죽여 버려야 되는 그 더러운 마음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세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죠?
고린도서에서 뭐라 그래요?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
안에 지금 성령이 계신다 말이에요. 하나님이 계신다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여러분의 더러운
마음을 전부 가져가셔서, 거기에서 싹 제해버리셨어요. 없애 버리셨단 말입니다.
내가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는 것은 가룟 유다가 나를 팔러 나갔기 때문에 이제 곧 십자가를 짊어지로 가야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곳을 하나님 나라! 천국(天國)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처소 즉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떠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곧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내가 처소로 만들어 낼 것이다.
지금은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서 나의
피로 너희들의 죄를 말갛게 씻어내면, 너희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땅에서, 역사 속에서, 현실
속에서는, 차근차근, 차근차근 성화의 모습으로 진행되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사신다는 게 이게 말이 돼요? 우리가 우리를 볼
때!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 선언적으로,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렇게 우리를 지금, 이
가시적인 역사 속에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힘들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여기 "거할 곳"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모나이(*)인데, 이것은 영구한 저택(邸宅)을 의미하는 바, 하반절의 "처소"(* )라는 말과 다르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나이 곧, "거할 곳"은 구약 시대에도 늘 있어오는 것이니,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가 예비하실 "처소"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거할 곳"에 신자들을 수용할 자리이다.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으심 곧, 구속 사업의 완성인 것이다.
그렇지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이 번역은, 원문의 문구를 괄호구로 취급하고 번역한 것이다.
그 뜻은, 만일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사실을 그들에게 벌써 말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문구를 그 아래 호티(*)로 시작되는 문구와 연속시켜서 의문(疑問)의 말씀으로 읽음이 더욱 문법적이다.
그렇게하면 그 문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라고 일찌기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예비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12:26, 32에 포함되었다.
어째든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천당 신앙을 강조함이다.
무디(Moody)는 말하기를, "준비된 천국을 믿고 바라보는 신자는, 벌써 천국에 들어가 있는 듯한 생활을 한다"라고 하였다(Those who look for a heaven made ready will live as though they were already in heaven-Notes from my Bible, p. 141).
우리가 내세에 들어가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에 조급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영원토록 살 사람들이다.
볼트만(Bultmann)은, 여기 관설된 내세 소망이 유대적 기독교의 색체를 가지지 않고, 개인 본위로 말하는 노시스주의(靈智派)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 465).
곧, 요한복음의 내세관(來世觀)이 노시스 사상에서 말한 것(영혼이 하늘 세계에 올라간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복음의 말씀이 물론 신자의 별세 후 그 영혼이 하늘 세계에 감을 말하지만, 노시스 사상에 있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노시스의 내세관은 범신론적이며, 유출설에 속한다.
한스 조나스(Hans Jonas)는, 노시스 사상이 말하는 영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떨어져 내려온 부분이라"고 하였다(Gnostic Religion p. 44)
헬미티즘(Hermetism) 문헌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분산된 것이니 이는 마치, 광선이 태양에서 분산된 것과 같다고 한다(Libelius, p. 12 ).
따라서 노시스 사상에서 말하는 영혼의 승천은, 그것이 질적으로 하나님과 다시 연합을 의미하는데, 점차 성화되어 올라간다는 것이다(Hans Jonas, The Gnostic Religion. pp. 45, 166).
이같은 사상이 헬메티즘(Hermetism)문헌에 있다(Libelius 1:25-26).
거기 있는 말을 보면, 별세한 영혼이 7 층 세계를 통과하여 결국 하늘에 이르러 성화 되어 신화(神化)된다고 한다.
그 말을 소개하면 이렇다.
곧, "승천에 대하여 내게 말하시요"하니 포이만드레스(Poimandres)가 대답하기를 "내 몸이 용해되면 나는 하늘들을 통과한다.
첫째 하늘은 일이 증가되기도 하고 감손되기도 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모든 악한 계획들이 있는 곳이요.
세째 하늘은 사람을 속이는 정욕이 있는 곳이요,
네째 하늘은 교만이 다스리는 곳이요,
다섯째 하늘은 거룩지 못한 용기와 담력이 다스리는 곳이요,
여섯째 하늘은 부하기를 원하는 악한 욕심이 있는 곳이요,
일곱째 하늘은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거짓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이다.
영혼이 이 모든 하늘들을 지나서 여덟째 하늘에 있는 본체에 올라가 그 본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완성이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은 노시스 사상은 인간의 자력 구원을 말하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러나 요한의 구원론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단독 역사(役事)로 말미암는 구원론이다.
요 14:2 이하는, 실상 구약 사상(시 49:15, 73:24)에 근거한 것이다.
볼트만(Bultmann)의 신환 제거(Demythologizierung)주의는, 실존주의적인 해석 방법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쓰는 말은 대부분 신화(神話)라고 잘못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하여 사람의 언사로 표현될 수 있다.
12-18-2024(수) 요한복음 13:36-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Simon Peter asked him, "Lord, where are you going?"
Jesus replied, "Where I am going, you cannot follow now, but you will
follow later."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36. Simon Peter asked him, "Lord, where are you
going?" Jesus replied, "Where I am going, you cannot follow now, but you
will follow later."
37. Peter asked, "Lord, why can't I follow you now? I will lay down my life for you."
38. Then Jesus answered, "Will you really lay
down your life for me? I tell you the truth, before the rooster crows,
you will disown me three times!
이 부분의 말씀은, 베드로의 결심과 예수님의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신다"는 것(33 절), 그가 죽어서 하나님 계신 하늘 나라에 가실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것을 오해하고 질문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였다(36 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가시는 곳에 목숨을 버리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것은, 진리대로 움직인 신앙의 용기가 아니고 하나의 육적인 용기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육적인 용기를 꺾어 겸손하게 하시려고 예언의 말씀으로 경고하셨으니, 곧,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38 절).
그가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육적 용기는 도리어 주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주여 어디로가시나이까?(Lord, where are you going?)
이 말씀을 라틴어로 "도미네 쿠오 바디스?(Domine, quo vadis?)" 라고 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로마 집정관이었던 아그립바에게는 네 명의 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첩들이 어느 날 베드로의 "순결"이란 설교를 듣고 잠자리를 거부합니다.
또 다른 집정관이었던 알비누스의 아내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잠자리를 거부합니다.
이때부터 집정관 알비누스와 아그립바가 베드로를 증오하고 죽이기로 공모하였는데 그 비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이 첩들과 믿음의
형제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종용해서 베드로는 마침내 위협을 느껴 변장을 하고 조용히 로마를 떠나게 됩니다.
베드로가 로마성을
벗어났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로마로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발견하고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를 라틴어로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시 달리려고 로마로 간다.”고
합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눈이 번쩍 뜨였고 정신을 차린 후에 그 길로 다시 로마로 들어가서 끝내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합니다.
베드로행전 35장
그 공모를 알게 된 크산티페가 베드로에게 알려주고는 로마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마르첼로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도 그에게 떠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배신자처럼 달아나도 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런 게 아니지요. 다만 로마를 떠나면 당신은 계속해서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형제들의 말에 복종하여 혼자 로마를 떠나면서 “아무도 따라오지 마십시오. 나는 변장을 하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로마 성문을 벗어나자, 베드로는 로마로 들어가는 주님을 보았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주님,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그렇다, 베드로야.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서야 베드로가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베드로는 기쁨에 가득 차서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못박힐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베드로행전 36장
형제들에게 돌아가서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시를 전해주었다.
슬픔에 잠긴 형제들이 울면서 “젊은 저희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다시 떠나가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 해도, 주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신앙을 더욱 굳세게 만들어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오래도록 살려두시겠다면 난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데리고
가시겠다면 역시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로마 군사 네 명이 와서 그를 잡아다가 아그리파에게 데리고 갔다.
아그리파는 베드로를 독신죄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명령했다.
가난한 자와 부자, 과부와 고아, 건강한 사람과 불구자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베드로를 바라보고 또
그를 구출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한 목소리로 “아그리파여, 베드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이오? 그가 죽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멸망시키실까 두렵소.”라고 고함쳤다.
베드로가 조용히 하라고 진정시킨 뒤에 “나를 통해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기적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다시 오셔서 각자의 행실에 따라 보상하실 때까지 그분을 기다리십시오.
아그리파는 자기 아버지의 하인이니 그에게 화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그대로 지금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가는 것을 왜 꾸물거려야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베드로행전 37장
십자가에 가서 베드로가 “오, 십자가의 이름! 숨겨진 신비여! 십자가의 이름으로 표현된
형언할 수 없는 자비여!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인성이여! 오, 형언할 수 없고 분리할 수 없는 사랑이여! 지상의 경력을
끝내는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붙잡고 있습니다.
사형 집행자들이여, 내 머리를 아래로 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베드로행전 38장
그들이 베드로의 말대로 거꾸로 매달았다.
베드로행전 39장
외경 베드로행전 3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을 소재로 1951년 머빈 르로이(Mervyn LeRoy, 1900년 10월 15일 ~ 1987년 9월 13일)가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 초월적 능력이 있음에도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를 합니다.
로마의 핍박 앞에서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죽기 위해 십자가 앞에 섰을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오 십자가의 이름,
숨겨진 신비여
십자가의 이름으로 표현된 형언할 수 없는 자비여,
지상의 경력을 끝내는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붙잡습니다.
사형집행자들이여 나의
머리를 아래로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오."
그리고
베드로가 죽어갈 때 예수님처럼 찬미하며 기쁨으로 죽어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용감하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 베드로가 순교하던 모습에 감동을 받아 아이들의 이름을 "피터(베드로)"라고 작명하였다고 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내가 가야 할 그 자리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할 때 주님은 다시 내가 가야 할 그 자리를 찾아 십자가를 짊어지시려고 합니다.
내가 외면한 그 십자가를 붙잡기 위하여 돌아설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옵소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도록 날 붙들어 주옵소서.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베드로의 모습에서 감화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소망이
있다.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 선수 조니 에릭슨은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침체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재활 훈련 및 치료 기간을 통해, 그리고 부모님, 자매들과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부활이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된다고 말한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 존 스토트
십자가는
부활이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만을 강요하는 종교라면 모두 의인이 되기를 요구하는 슈퍼맨의 종교일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이 있기에 고난을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고난의 의미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36년 만이었는데,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라고 묻자,
예수는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Venio Romam iterum crucifigi.)"라고 대답한다.
이 구절을 "네가 나의 어린 양들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고 하니까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간다."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혹은 "너는 너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제 천국으로 오너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도미네 쿠오바디스 성당"으로 불리는 "팔미스의 산타마리아 성당"이 세워졌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Κύριε, ποῦ ὑπάγεις
마가복음 11:6-14, 마태복음 26:6-13, 요한복음 18:33-38
라틴어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3:36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합니다(요한
13:33).
시몬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대답하시며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예고 하셨습니다(요한 13:36).
「베드로행전」이라는 외경(外經 - 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책)에 다시 이 질문이 나옵니다(베드로행전 35장).
먼 훗날 로마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혼자 로마를 빠져나가던 베드로가 로마 성문을 벗어날 때 거꾸로 로마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주님은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에 들어간다' 대답하십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기쁨으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솅키에비치가 장편소설 『쿼바디스』를 썼습니다.
이 작품은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12년, 1951년 그리고 2001년에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벤허>와
<십계> 다음으로 TV에서 많이 방영해줍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 시절, 정복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비니키우스가
기독교인 리지아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내용이지요.
영화 속의 명장면은 박해를 피해
급히 로마를 빠져나가는 베드로 앞에 예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빛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가 내 양들을 버린다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러 로마에 가리라!"
'쿼바디스 도미네.'
베드로는 이 질문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닙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았기에 꼭
그 길로 가야만 하시냐고 물은 것입니다.
왜 그 길로 가야만 하시냐고 물은 겁니다.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처음 가르치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고", 예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짖으신 적이 있었습니다(마가 8:31-33, 마태 16:21-23).
그래서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결국 묻고야 말았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죽는 줄
알면서 왜 이 길로 가십니까!'
'꼭 이리로 가셔야만 합니까!' '이 길 말고도 딴 길이 있지 않을까요!'
닉 페이지(Nick Page)의 책 『가장 길었던 한 주 The Longest Week: The Truth about
Jesus' Last Days』(포이에마, 2011)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서의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로의 저작, 유대의 랍비 문학 <미슈나 Mishna>, 그리고 외경 복음서들을
가지고 2천 년 전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일별로, 시간대별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전적으로 변화시킨 그 일주일에 관한 책입니다.
실패처럼 보이지만 영광스러운 승리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폭력적 사랑 이야기"라고 이름 붙인 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간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죽음의 여행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서기 33년 3월 29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려주일로 지키는 바로 그 일요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베다니에서 감람산 등성이를 넘어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모습이 우스꽝스럽습니다.
마치 다 큰 어른이 어린이용 자전거를 탄 모양새입니다.
주님은 구약성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터 이런 모습을 연출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연출'이라 했습니다.
허튼 말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재미와 풍자가 있는 행진을 정교하게 기획하셨다는 데
동의합니다.
또 다른 행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언제나 로마의 군사들이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들의 반짝이는 갑옷과 윤나는 가죽을 상상해보십시오.
보무당당하게 높은 말 위에 탄 기병들과 어깨
위 제국의 독수리가 행진을 이끕니다.
로마의 황제를 대표해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시위하는 행진이었습니다.
총독 빌라도 언제나
서쪽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의 동쪽에서 입성하셨습니다.
말이 아니라 일부러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전쟁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평화의 임금'으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 9:10)
전쟁과 폭력에 찌든 예루살렘 백성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가 11:9)라고 환호했습니다.
평화의 연호(連呼)였습니다.
지금 온 세계 교회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서 외치는그 평화와 연호와 같은 연호였습니다.
이 평화의 바람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이를 보고 한 말에서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한 12:19) 그렇게 첫날이 갔습니다.
서기 33년 3월 30일 월요일,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날 예수님은 느닷없이 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마가 11:12-14) 듣고 보니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무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서도 기록합니다. 그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리는
철이 아니었습니다. 무화과는 5~6월에 한 번, 또 8~10월에 두 번째 과실을 맺습니다. 그때는 3월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상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고대 세계에서 아주 큰 건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쪽의 벽, 곧 '통곡의 벽'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룹바벨이 중건(重建)한 성전을 헤롯 대왕이 두 배로 규모를 키웠습니다. 얼마나 웅장하게 재건축했는지 사람들은 이 성전을 '성전 산'(Temple Mount)이라 불렀습니다. 이 성전은 로마 제국 전체에서도 가장 부유한 조직 중 하나였습니다. 매년 로마 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세를 거둬들였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에게 날마다 희생 제물을 판매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농산물의 십일조도 거둬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단지 제사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기계였습니다. 이 덕에 성전귀족들은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얼마나 사치와 낭비가 심했냐 하면 대제사장의 의복을 만드는 데 1만 데나리온이나 썼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치 일당입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노동자 하나가 1만 일, 즉 약 27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을 대제사장 의복 만드는 데 탕진했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서도 큰돈이 필요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택하는 제물인 비둘기는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새끼 양은 4데나리온, 숫양은 8데나리온, 송아지는 20데나리온이었습니다. 부자들은 한 마리에 100~200데나리온 하는 소를 바쳤습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백성이 성전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이 둘째 날, 주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요한 2: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누가 19:46) 질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강도'(lestes)라는 단어는 좀도둑이 아닙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강탈자'를 뜻합니다. 돈 바꾸는 사람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배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난(Hanan)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하난은 당시의 실권자 '안나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주후 6~15년까지 10년 동안 로마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안나스는 자신의 '대제사장 왕조'를 세웠습니다.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실권을 행사하며 자기의 다섯 아들과 사위가 대제사장직을 돌아가며 맡게 했습니다. (이중 사위 가야바는 예수님의 처형을 주장한 장본인이고, 막내아들 아나누스는 나중에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처형한 장본인입니다.)
제사장직은 대개 사두개인이 맡았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날 토요일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이미 신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화요일에 예수님은 성전의 상을 뒤엎음으로써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대제사장 하난(안나스) 가문에 채찍을 가하셨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왜 그렇게 확고히 예수님의 처형을 주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의 큰 건물을 보고 감탄하는 제자에게,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가 13:2)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다음 날 예수께서 저주한 '성전 산'의 상징인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보고 베드로가 묻자, "하나님을 믿으라. [성전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3)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왜 베드로가 물었는지.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 꼭 이 길로 가서야 합니까!'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까!'
서기 33년 3월 31일 화요일, 드디어 반격이 시작됩니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셋째 날,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총공세를 폅니다. 그들은 군대를 보내어 예수님을 체포하는 대신 먼저 그분의 신뢰도를 무너뜨려 대중과 분리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네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형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부활 때 그중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그리고 "모든 계명 중에 제일가는 계명은 무엇인가?" 이 네 가지입니다. 이중 마지막 질문만 진짜 질문이고 나머지 셋은 정교한 덫이고 함정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바리새인, 헤롯당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똘똘 뭉쳐 던지는 이 도전들을 다 물리치시고 질문한 자들의 자기모순과 위선을 폭로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체포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서기 33년 4월 1일 수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의 넷째 날, 급기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기]"(마가 14:1) 시작합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이날 수요일에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아시고 그냥 베다니에 머무신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주님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십니다. 요즘엔 나병을 한센병이라 부르는데, 고대의 나병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나병이 아니라 피부 발진, 상처, 외관 손상 등을 포괄하는, 흉터가 남은 유전적 피부 질환을 가리킵니다. 이 질병에 걸리면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공동체에서 제명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나병환자' 집에서 식사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얼마나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경계를 쉽게 허무셨는지 보여줍니다. 그분은 나병환자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들을 친히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일입니다. 죽음도 불사한 일입니다. 지금 도대체 주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주님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왜 자꾸 그리고 가십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예수께서 식탁에 계실 때 한 여인이 다가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그분에게 부었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여자를 비난했습니다. 차라리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게 더 낫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변호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한 12:8)라고 말씀하시며 그 여인이 영원히 기념될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사실 이 여인은 당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시 여성은 '지각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논쟁하고 토론하고 배우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여성들은 그 틈에서 요리를 해야 했습니다. 여성들은 권리도 거의 없었습니다. 남편의 부정(不貞)이 아니면 이혼을 청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사실상 아무 이유로든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주목할 점은 당시 종교인들이 '하나님은 결코 여성에게 말을 걸지 않으신다'라고 확신했다는 점입니다. 엘리에제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전능자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제외하고는 어떤 여성에게도 말씀하신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여성은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랍비들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대인의 랍비 문학 <미슈나>는 "만약 여자가 머리카락을 묶거나 틀어 올리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 아무 남자와 이야기하면" 이혼 사유가 된다고 했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이런 행동을 한 여인과 이혼하는 것은 남편의 종교적 의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기록한 향유 사건이 당시 얼마나 충격적인 반향을 일으켰을지 가늠하게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누가 7:38) 그렇게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한 12:3) 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지정된 자리에서 이탈하고 경계를 넘었습니다. 여성은 남자와 함께 논쟁에 참여할 수 없기에, 식사하는 동안 조용히 시중을 들어야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야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또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듣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이야기에 참여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유일한 길은 항아리를 깨뜨려 온 집을 향기로 진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행동은 사려 깊거나 품위 있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인은 말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언권(言權)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촉각과 후각의 언어가 되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절규하고 있는 겁니다. 멀리 네팔에서 수입된 진귀한 나드 향유 전체를 깨뜨려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인의 언어를 구사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언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짓밟혀 본 사람은 압니다. 여인은 예수께서 어떤 형벌을 받게 되실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금기를 깨뜨린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높은 분들은 절대로 자기들의 질서와 이권에 도전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억압을 경험했기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 지 알았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았기에 아무 말 없이, 눈물로, 사랑으로, 향기로 그분의 마지막 여정을 축복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처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로 가시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막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알았기에 눈물로, 향기로 그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주님은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항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태 26:12)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마가 14:8)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고 그 길을 예비한 여인을 가리키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가 14:9), 마태 26:13) 축복하셨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의 넷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음 날, 서기 33년 4월 1일 목요일,
주님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시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알다시피 유대 도시들은 매우 불결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오물과 먼지, 배설물과 쓰레기, 타고 남은 재와 썩은
음식물을 비껴갈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발을 씻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생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정결법 규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전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자기 발을 씻어야 하고 최소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자유민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할은 노예들이나 아내와 자녀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발을 씻기시려는 예수님에게 베드로가
그렇게나 놀랐던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주께서 [노예가 아니라!]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한 13:6)
베드로는 충격으로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웅얼거립니다. "주님, 아니... 세상에나!"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이해했기에 충격으로 웅얼거립니다. 주님은 인간으로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지위인 노예의 신분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가장 천한 인간의 역할을 자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당신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의 교회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배운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을
대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묵에 사는 어떤 사람도 이 급진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 사상은 다름 아닌 예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이 없었다면
초대교회도 없고 지금 이 교회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유대의 관습에 따라 목요일 자정이나 다음 날 금요일 새벽 2시쯤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새벽 이른 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달빛이 형형했습니다.
보름달이었습니다.
서기 33년 4월 3일
금요일,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주님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꼭 그 길로
가셔야 하시겠습니까!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아시면서 왜 자꾸 그리로 가십니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 12:24-25)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바꾼 '가장 길었던 한 주'를 주님이 가신 "Via
Dolorosa"(십자가의 길)을 따라 함께 가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길을 함께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러 골고다 언덕으로 간다!'
12-17-2024(화) 요한복음 13:34-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By this all men will know t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εντολην καινην διδωμι υμιν ινα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καθως ηγαπησα υμας ινα και υμεις αγαπατε αλληλους
옛 계명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력(自力)으로 애급에서부터 탈출한 것이 아니라 전적(全的)인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후에는 다시는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이란 세상을 상징합니다.
또한 애굽은 영적으로는 소돔과 같은 곳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하셨습니다(계 11:8).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분열된 나라가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남유다왕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이때에도 극적으로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잠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듯 하였으나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율법을 준수(遵守)할 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을 계시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계명을 말합니다.
새 계명(New Commandment)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주신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언약"이라고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새 계명은 지켜야 할 계명이며 언약입니다.
언약은 율법처럼 돌비에 새겨진 약속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약속입니다.
믿음이란 내 안에 새겨진 약속을 확신하며 그 약속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나의 삶의 현장에서 언약을 실천하는 믿음의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일에 성공하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새 계명 - 마음 - 은혜 - 믿음, 의 <용서> / 예수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새 계명에 담긴 사랑의 원리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다."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새 언약 유월절에 담긴 사랑의 원리를 깨달았을 때 실천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새 언약 유월절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이 되면 자기 몸이 된 형제자매를 미워할 수 없다. 또한 유월절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깨닫게 되는 예식이다.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도 새 언약 유월절을 통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한 몸이 된 형제자매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새 언약 유월절에 담긴 사랑의 원리다. 그래서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킬 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준수할 수 있다.
새 계명(A new command. 엔톨렌 카이넨. εντολην καινην)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는데(행 17:26),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의 것이다(롬 13:8-10).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종말관적 동기.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것이야말로 종말관적인 것이다(요일 2:8).
예수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행 17:26)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누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끼리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 관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임 - 고전 13: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갈 6:2).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유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임.
요 15: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고 하였다.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임.
자식을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 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 시작해야 된다.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임.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들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도 같다.
이 세상엔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 주어야 된다.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닭.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3).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 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됨.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 나가셨다(마 22:37-40; 롬 13:8-10).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된 구약의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으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집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계된 벌칠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새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그 날자가 변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제 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여기 이른바,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속하는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믿으며 사랑하는 일의 열매이다.
모든 사람들(세상)이 이 사랑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를 실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 말씀이다.
이것은,
1. 예수님의 제자된 표가 사랑이라는 말과 같고,
2. 또한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된다는 뜻도 있다. 17:21-23 참조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Dear friends, I am not writing you a new command but an
old one, which you have had since the beginning. This old command is the
message you have heard.
아가페토이 우크 엔톨렌 카이넨 그라포 휘민 알 엔톨렌 팔라이안 헨 에이케테 앞 아르케스 헤 엔톨레 헤 팔라이아 에스틴 호 로고스 혼 에쿠사테.
αδελφοι ουκ εντολην καινην γραφω υμιν αλλ εντολην παλαιαν ην ειχετε απ αρχης η εντολη η παλαια εστιν ο λογος ον ηκουσατε απ αρχης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 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 약
2:8; 벧전 2:17).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η εντολη)는 단수이다.
'엔토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ηκουσατε)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19절) : 약속된 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천사들이 전해준 것을 사람이 받아 공포한 것이다. 본문에서 '약속하신 자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의 차이점 (20절) 율법은 중재인이 필요하므로 두 당사자 (율법에 어긋나는지 판단하는 사람 & 판단받는 사람) 가 있어야 했지만, 약속을 하는 데는 하나님 한 분이면 된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29절 큐티: 율법을 주신 이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19절) :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디모데전서 1:9-10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사도행전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약속된 분(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천사들이 전해준 것을 사람이 받아 공포한 것이다.
본문에서 '약속하신 자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의 차이점 (20절)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율법은 중재인이 필요하므로 두 당사자 (율법에 어긋나는지 판단하는 사람 & 판단받는 사람) 가 있어야 했지만, 약속을 하는 데는 하나님 한 분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 (21절)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하나님께서 만약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면, 우리가 '의인'이 되는 일이 율법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21절 뒷부분)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릴 수 없는 율법'을 주셨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면'의 예시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정상에서 절을 세 번 하면 의인으로 인정받고 구원받는다 이런 법을 정해두셨다면?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 산의 정상에 살아있는 동안 한번은 꼭 가서 절을 세 번 하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 규정을 보면 알 수 있듯...
도저히 우리가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다양하고 엄격한 율법들...
그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세상 사람들은 이 율법을 통해 '죄의 포로'가 되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죄'인지 죄가 아닌지가 결정되는데,
우리가 이걸 다 지킬 수 없으니 무조건 우린 다 죽은목숨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만드셨는가?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주어지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22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믿음의 때'가 도래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때가 오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율법으로 인해 죄의 포로가 되어 갇혀 있었다. (23절)
여기에 율법의 역할이 있다.
율법의 역할 : 우리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초등교사) 역할을 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다른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
왜 율법의 역할이 초등교사 / 가정교사 라고 하였을까? (24절)
그것은 바로, 초등교사가 하는 일을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하나 하나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초등학교 때 '바른생활'이라는 교과서 과목이 있었다.
율법은 바로,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활'인지를 가르쳐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율법을 초등교사에 비유한 것 같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죄를 짓도록 설계되어 있는 우리는
엄청나게 두꺼운 바른생활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다.
이건 마치 바른생활 교과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려 5000개 정도의 시험문제를 주관식으로 내서,
단 한개도 틀리지 않고 100점을 받아야만 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이런 방법만 있다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대안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교장선생님이 그 시험을 이미 치루었고,
그분께 이미 치루었던 그 과제 완성의 효력을 내게도 적용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죄 없이 사셨고, (율법의 시험을 통과하심)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형벌은 받으셨다.
우리가 할 일은, 나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루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자녀 삼아달라고 요청하는 것 뿐이다.
예수님이 오셨고, 믿음의 시대(24절)가 왔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26절)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사람이 되었다. (27절)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이며, 국적과 신분, 성별을 막론하고 차별이 없다. (28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받을 상속자들이다. (29절)
적용 -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 상속자로서의 정체성 발견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왜 주셨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뭐가 옳은지 그른지 알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 못지키라고 주신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선택지가 결국 예수님 한 분밖에 없도록...
감사한 것은, 대안적 방법이 '믿음'으로,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하나님의 대안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오히려 의심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지 '믿음'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적용된다.
만약 내가 상상해본 대로, 산 정상에 올라 절을 세번 해야 했다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좇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산에 오르는 것을 시도했을지는 모르지만, 모두에게 온전히 열려있는 방법은 아니게 된다. 몸이 불편한 사람/장애인/ 그 산으로부터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 등...
새 계명 (New Commandment)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에 제자들에게 교훈으로 준 "서로 사랑하라"(love one another)로 기존의 구약의 중요 계명을 넘어선 기독교인에게 새로운 명령이며 새로운 계명이다.[1]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서(13장)에 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실천해야 하는 사항이다.
요한복음서에서 가룟 유다가 배신하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수가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제자들에게 말한 전언이다. 자신의 제자들을 어린 자녀로 묘사하며, 어린 자녀가 아니가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실천해야 할 사안으로 '서로 사랑하라'(아가페의 사랑)을 전한다. 서로에게 아가페 개념의 사랑을 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해서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새 계명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 계명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새 계명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어졌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 계명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로 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히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오직 새 계명을 통하여 죄에 대한 용서가 있다. 히 9:14-1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옛 계명 아래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로 약속하였는가? 출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새 계명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로 약속하셨는가? 히 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2-16-2024(월) 요한복음 13:31-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31절)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When he was gone,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위기(危機) = 위험(危險) + 기회(機會)
인자(人子. 호 휘오스. ο υιος. the son)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어떻게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지혜와 믿음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처참한 형벌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의 지혜를 온 몸에 채운 후에 밤을 새워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한 믿음의 기도를 마치셨기 때문에 이제는 고통이 아니라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간암 말기로 사경을 헤맬 때 아버지의 간을 내어줌으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간이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의 간을 몸에 담은 아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에는 간을 떼어내는 고통의 흔적이 뚜렷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아들을 향한 사랑의 흔적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미 일체가 되셨기에 인자가 받은 영광은 곧 아버지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라는 말씀에서 "인자"란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부활 승천
둘째는 십자가의 죽으심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문맥상 바람직한 해석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가(유다) 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나가서 사탄의 계획대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겨야만 십자가 사건이 전개될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곧 이어 예수님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다음 구절에서 "영광을 주시리니"라는 말씀은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인식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비참한 죽음의 십자가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속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해결할 수 없었던 구속의 은혜를 십자가로 해결할 뿐만 아니라 완성할 수 있는 사랑의 대로를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하였기에 오늘도 험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 꿋꿋하게 믿음으로 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말씀에서 "인자를 인하여"라는 말은 "인자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흉악한 죄인를 처형하는 사형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영광이 아니라 처형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처형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완성이었기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드러난 사랑의 완성에 의한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어갈 때 대신 아플 수 없고 죽을 수 없어 몸부림을 치며 아들을 위하여 울부짖을 때 그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몸부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를 처형하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실 때 그 고통으로 인하여 내가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을 힘입어 오늘도 이렇게 살아서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어 그 사랑 앞에 감격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영광 즉 십자가의 영광을 을 경험함으로써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광으로
자신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만이 신자됨의 행복이고 정체성입니다.
하나님 영광으로 연합되는 구원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공의, 능력과 지혜가 들어 있는 하나님 최고의
영광입니다.
천지창조 속의 능력과 지혜, 홍해의 갈라짐, 만나 등 구약의 표적과 기적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지만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만큼 깊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표적 중의 표적이고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 후 주님은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십자가만이 그가 기도하신 대로 우리와 연합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과 능력이 십자가라면 성도가 지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영광된 삶과 복된 삶도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랑의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오는 자기 부인입니다.
선교란 운동이나 행정,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탁월한 영광을 맛보았을 때 마땅히 열방을 향해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그 영광의 탁월함을 전하여 그들과 연합하려고
하는 경향성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공과 부유, 권세, 높아짐 등으로 십자가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영광으로 배부르고자 하나
영혼의 기갈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오는 하나님 영광 앞에 배부르고 십자가의 영광을 그리스도인의 최고
미덕으로 여기는 삶이 회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과 연합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요한복음 17장 기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중보기도 속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있기에 한국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When he was gone,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1. When he was gone, Jesus said,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32. If God is glorified in him, God will glorify the Son in himself, and will glorify him at once.
33. "My children, I will be with you only a
little longer. You will look for me, and just as I told the Jews, so I
tell you now: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나간 것은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주었고 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하여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기려는 의도를 아시면서도 그 의도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도 아시면서도 영광을 얻었다고 하신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의 배신 행위는 더구나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의 배신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배신행위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은 역설적인 생각입니다.
인자(人子. 호 휘오스. ο υιος. the son)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어떻게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지혜와 믿음이 없으면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처참한 형벌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의 지혜를 온 몸에 채운 후에 밤을 새워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한 믿음의 기도를 마치셨기 때문에 이제는 고통이 아니라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간암 말기로 사경을 헤맬 때 아버지의 간을 내어줌으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간이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버지의 간을 몸에 담은 아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에는 간을 떼어내는 고통의 흔적이 뚜렷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아들을 향한 사랑의 흔적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미 일체가 되셨기에 인자가 받은 영광은 곧 아버지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라는 말씀에서 "인자"란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부활 승천
둘째는 십자가의 죽으심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문맥상 바람직한 해석은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가(유다) 나간 후에 곧 이어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나가서 사탄의 계획대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겨야만 십자가 사건이 전개될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것은 곧 이어 예수님에게 고난이 닥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다음 구절에서 "영광을 주시리니"라는 말씀은 "미래사(未來詞)"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신 후의 일(부활, 승천)을 의미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광을 얻었고"란 과거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실 고난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받으실 고난을 영광으로 인식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비참한 죽음의 십자가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속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해결할 수 없었던 구속의 은혜를 십자가로 해결할 뿐만 아니라 완성할 수 있는 사랑의 대로를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선택하였기에 오늘도 험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 꿋꿋하게 믿음으로 그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라는 말씀에서 "인자를 인하여"라는 말은 "인자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일체이심으로 아들이 영광을 얻으심에 따라서 그 자신도 영광을 얻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흉악한 죄인를 처형하는 사형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영광이 아니라 처형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처형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완성이었기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드러난 사랑의 완성에 의한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어갈 때 대신 아플 수 없고 죽을 수 없어 몸부림을 치며 아들을 위하여 울부짖을 때 그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몸부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를 처형하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실 때 그 고통으로 인하여 내가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을 힘입어 오늘도 이렇게 살아서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어 그 사랑 앞에 감격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영광 즉 십자가의 영광을 을 경험함으로써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광으로
자신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만이 신자됨의 행복이고 정체성입니다.
하나님 영광으로 연합되는 구원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공의, 능력과 지혜가 들어 있는 하나님 최고의
영광입니다.
천지창조 속의 능력과 지혜, 홍해의 갈라짐, 만나 등 구약의 표적과 기적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지만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만큼 깊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표적 중의 표적이고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 후 주님은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십자가만이 그가 기도하신 대로 우리와 연합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과 능력이 십자가라면 성도가 지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영광된 삶과 복된 삶도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랑의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오는 자기 부인입니다.
선교란 운동이나 행정,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탁월한 영광을 맛보았을 때 마땅히 열방을 향해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그 영광의 탁월함을 전하여 그들과 연합하려고
하는 경향성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공과 부유, 권세, 높아짐 등으로 십자가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영광으로 배부르고자 하나
영혼의 기갈 속에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오는 하나님 영광 앞에 배부르고 십자가의 영광을 그리스도인의 최고
미덕으로 여기는 삶이 회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과 연합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요한복음 17장 기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중보기도 속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있기에 한국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갖춰야 할 4가지 덕목
- 아우렐리우스의 지도자론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 혹은 덕목(德目)으로 무엇이 중요한가?
로마제국을
통치한 현군(賢君)이며 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가 쓴 명상록에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네 가지로 소개하였다.
1. 지혜(wisdom)
2. 정의감(justice)
3. 강인성(fortitude)
4. 절제력(temperance)
당대의
대철학자였으며 직접 군대를 지휘한 사령관이었고,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가
꼽은 지도자의 덕목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1. 지혜(wisdom) 智慧(슬기 지, 슬기로울 혜), 知慧(알 지, 슬기로울 혜)
지도자는
조직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미래를 기획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지적(知的)인 능력,즉 '지혜'를 필요로 할 것이
분명하다.
지도자는 조직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판단과 조직의 앞날을 위한 필요를 결합시켜서 최적의사결정(optimal
decision making)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적능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2. 정의감(justice) 正義感(바를 정, 옳을 의, 느낄 감)
조직을
다스리는 지도자는 옳고(正義), 그름(不義)을 가려서 옳은 것을 택하고 그른 것을 잘라낼 수 있는 도덕적 판단력과 실천력이
필요하다.
조직 지도자의 이러한 능력을 아우렐리우스는 '정의감(justice)'이라고 부른 것 같다.
조직의 지도자가 정의롭지
못하면 그 조직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내부로부터 스스로 붕괴될 수 있다.
도전(挑戰,challenge)과 응전(應戰,response)의 개념으로 역사 속의 흥망을 설명하는 토인비는 조직을 위태롭게 하는 도전을
1. 자연으로부터의 도전
2. 외부세력으로부터의 도전
3. 조직내부로부터의 도전
이와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토인비는 이들 셋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조직내부로부터의 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도 (외부세력의 침공 때문이 아니라)로마제국 내부로부터의 분열과 부패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타락하기
쉽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것이 인간의 속성인 이상, 조직 지도자는 조직의 가장 무서운 적,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정의의
칼을 휘둘러야 할 것이다.
주역(周易)의 오행(五行)사상에 의하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의(義)는 금(金)이고, 금은 칼, 가위,
도끼 등 생명을 자르는 쇠붙이를 상징한다.
한편 5행(水火木金土)중 생명을 가진 것은 목(木)이고 따라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상, 즉 인(仁)은 목(木)이다.
따라서(잘라내야 할)생명을 자르는 의(義)는 생명존중 사상인 인(仁)과 상치될 수 밖에 없고
이런 의미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고뇌(苦惱)를 수반한다.
서양문화에서도 정의의 여신은 왼손에는(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저울을, 그리고 오른손에는 생명을 자르기 위한 칼을 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이처럼 정의에 대한 사상은 동서양이 본질적으로 같다. 서양의 경제평론가들은 동아시아의 경제위기가 부정부패에서 왔다고 평함으로써 지도자들의 정의실천력이 빈곤함을 지적했다.
3. 강인성(fortitude) 強靭性(강할 강, 질길 인, 성품 성)
랜덤하우스 사전은 '강인성'을 어려움, 역경, 위험 등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mental), 정서적(emotional)인 힘(strength)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장군은 자기 가족 모두의 목을 친 후 나당(羅唐)연합군을 맞으러 나갔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 주는 역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계백은 인간의 심리세계를 이해하는 지혜(wisdom)면에서는 부족함을 보였다.
신라의 어린 화랑 관창(官倉)이 단신으로 백제
진영을 계속 침범하자, 그의 목을 친 후 그것을 말에 메달아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내는 실수를 범했다.
관창의 목을 본 신라군은
살기등등해져 백제군을 향해 돌진해왔고 백제군은 결국 최후를 맞았다.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라는 누명을 벗고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도 우리의 강인성 덕이었다.
그러나 소위 압구정동 세대로 상징되는 우리의 차세대들이 과거 세대와 같은 강인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4. 절제력(temperance) 節制力(마디 절, 절제할 제, 힘 력)
랜덤하우스
사전에 의하면 '절제력'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여 균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다.
지혜, 정의감, 강인성이 남을 다스리기
위한 향외적(向外的) 능력이라면 절제력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향내적(向內的) 능력인 것이다.
지도자가 도덕적, 정신적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조직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여 결국 통솔력을 잃고 말 것이다.지도자가
절제력을 발휘해야 할 주요영역의 하나로 검소한 생활을 들 수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고(故)
호치민(胡志明)대통령을 들 수 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기거했던 주택은 방 2칸 짜리 10평 정도의 허술한 건물로 이 집은
지금(하노이 시의)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이러한 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이 가난한 나라 베트남(Vietnam)이 세계
최강국 미국과 싸워서 이기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 통찰력(洞察力) 사물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 / 골 동, 살필 찰, 힘 력 - insight
- 영력(靈力) spiritual power
최고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덕목
동양에서는 최고지도자의 덕목을 다루는 분야를 "제왕학(帝王學)"이라 하였다.
서점에 가면 지금도 제왕학이란 제목의 책이 서너 종류는 서가에 꽂혀 있다.
제왕학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책을 들자면 당태종이 쓴 '정관정요'가 있고,
조선의 태조가 남긴 '경국대전'이 있다.
서양에서는 제왕학에 해당되는 분야를 대통령학이라 부른다.
물론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덕목, 능력 등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대통령에 한하여서만이 아니라 모든 최고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전체를 포함한다.
미국 대통령학의 대표格인 한 학자가 대통령과 최고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과 덕목을 다섯 가지로 손꼽았다.
첫째는 건강(健康)
이 점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은 부분이라 하겠다.
최고지도자가 위기의 시기에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건강과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건강과 체력을 관리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고도로 절제된 상태에서 건강을 관리하지 않으면,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둘째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
비전이란 나라나 기업이나 교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함께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미래의 목표이다.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뜻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정성을 하나로 모아 나가야 할 공동의 목표이다.
특별히 난세(亂世)의 지도자들은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지도자는 공동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여 그 목표를 달성함에 모든 자원과 역량을 하나로 모아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설득력(說得力)
아무리 고상한 비전도 국민들에게 설득할 수 없으면 허사가 된다.
좋은 목표임에도 국민들에게 제때에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소모적인 정쟁에 휩쓸려 국력을 낭비하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보아왔다.
그러기에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에서 설득력은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에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설득력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피알(PR)능력이다.
피알이란 무엇인가?
"피가 나도록 알리는 것"
"피할 것은 피하로 알릴 것은 알리는 것"
지금은 피알시대이다.
피알하는 능력이 없이는 정치도 기업도 심지어 목회까지도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다.
네번째는 도덕적 일관성(道德的 一貫性)
도덕적 일관성을 영어로는 Moral Integrity로 표현한다.
요즘 같이 도덕성이 허물어져 가는 시대에 지도자가 될 사람은 반드시 도덕적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도덕적 일관성을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자면 정직함이요, 본질을 추구하는 순수함이다.
정직함과 순수함이 없는 사람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그 공동체는 불신과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 실수는 하게 마련이고, 弱点도 역시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수는 언제나 스스로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면 되지만, 정직성과 순수함을 잃고 술수나 권모를 사용하게 되면 그 병폐는 마치 독가스처럼 조직 전체에 스며들어 조직을 병들게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실감케 되는 것이 깨끗하게 사는 것이 힘이요, 축복이라는 점이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최고지도자들의 도덕성이 높아진다.
선진사회에서는 일관된 도덕성을 요구하는 기준이 높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고 도덕적 일관성을 지켜나가게 된다.
다섯째는 열정(熱情)
열정 혹은 정열은 영어로는 Passion이다.
열정 있는 사람이 일을 성취시킨다.
사람들이 지닌 능력은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어디에서 달라지는가?
열정, Passion에서 판가름이 난다.
열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지도자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그 열정은 인간에 대한 열정이요, 비전을 이루려는 열정이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열정이다.
그런 열정을 지닌 사람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열정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따르는 者들을 모이게 하고, 모인 무리가 大業을 성취하게 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쓴 <역사철학>이라는 名著가 있다.
그 책의 말미에 이런 구절이 있다.
著者인 헤겔이 인류의 길고 긴 역사를 살펴볼 때에 역사를 이끌고 변화시킨 인물은 바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하였다.
모름지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善한 일을 이루겠다는 열정을 품는 데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 판단력(判斷力)과 실천력(實踐力)
건전한 판단력과 과감한 실천력은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의 필수 조건입니다.
어떤 지도자들은 판단력은 뛰어난데 실천력이 떨어집니다.
반면에 어떤 지도자들은 실천력은 탁월한데 판단력이 흐려서 사태를 그르칩니다.
판단력과 실천력 양면을 갖춘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 자신감을 기르는 다섯 가지 방법
- 나폴레옹 힐
1. 나에게는 훌륭한 인생을 구축할 능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중도에서 그만두지 않는다.
2. 무엇이든지 내가 마음속으로 강렬히 원하는 것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매일 30분 이상씩 성취한 모습을 상상한다.
3. 나는 자기 암시의 위대한 힘을 믿고 있다.
그래서 매일 10분간 정신을 통일하여 자신감을 기르기 위한 '자기 암시'를 건다.
4. 나는 인생의 목표를 명확하게 종이에 쓴다.
다음은 한 걸음 한 걸음 자신감을 가지고, 전진해 가는 것이다.
5. 정도(正道)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는, 富도 지위도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기적이거나 비열한 방법으로는 성공하지 않겠다.
리더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열 가지
① 덕목 1 : 성실
성실이라고 답한 사람들은 이것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도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 항목에 포함된 답변으로는 정직, 신의, 도덕, 공평, 솔직, 성실, 믿음 등이 있었다.
모두 지도자들이 직접 한 말과 행동에 관련된 결과라고 하겠다.
② 덕목 2 : 비전
좋은 리더라면 조직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하고, 그 비전을 명확하게 전달해서
조직원들의 행동을 유발해야 한다.
비전은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 중 하나다.
물론 비전만으로는 사람이나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 없지만, 진정한 리더십은
사람들이 그 비전을 ‘볼’수 있게 해 조직원들이 그 방향으로 따라갈 수 있게 만든다.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③ 덕목 3 : 듣기 (경청)
리더가 남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도 포함되어 있다.
리더는 접근하기 쉬워야 하고, 다른 제안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마음이 열려 있고, 융통성이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피드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④ 덕목 4 : 피드백 제공
칭찬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적절한 칭찬을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을 잘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해 주는 것 등 말이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준다거나 직원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이 항목에 포함되었다.
⑤ 덕목 5 : 정서적인 현명함
정서적으로 현명하다는 것은 공감한다거나 동정하는 것, 사람들을 잘 대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처신하는지도 크게 작용한다.
⑥ 덕목 6 : 명확함
사람들은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명확하게 전달하고, 또 설득시키는지 예의 주시한다. 만일 그 생각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면, 조직원들은 리더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⑦ 덕목 7 : 지식과 지혜
진정한 지도자라면 해당 분야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더 나가가서 관련 분야를 망라하는 지혜도 갖추어야 한다.
⑧ 덕목 8 : 관리 능력
리더들은 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대리인을 설정하거나 금전적, 인적 자원을 배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꼽았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서 직원 스스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조직원들을 고무 시킬 수 있는 능력
⑨ 덕목 9 : 일관성
진정한 리더들은 자신이 하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다. 자신이 믿는 바를 실행에 옮기며, 조직원들은 이를 주시한다. 리더들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한 단계씩 전진한다. 리더들은 사람들이 나태해지지 않게 한다. 그들은 일을 어떻게 시작했느냐 하는 데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일을 어떻게 진행하느냐 하는데도 집중한다.
⑩ 덕목 10 : 겸손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듯이, 리더들은 역시 마찬가지다. 진정한 리더일 수록 겸손하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한다. 리더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고 남의 조언을 받아들일 줄도 안다. 또 그들은 적절한 위험을 감수하려고 한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며, 그것에 따른 대가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설문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살펴보면, 리더들은 남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그리고 존경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자질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말이나 행동을 통해 이런 자질들을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의 직책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성실성과 비전과 지혜를 갖춘 리더를 바랐다. 그들은 현실적이고 자신과 조직에 솔직한 진정한 리더들을 찾고 있었다.
CEO의 성공10훈(十訓)
갈수록 치열해지는 기업환경 속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기업 경영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 이코노미스트지는 성공적인 기업 경영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 10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첫째, 도덕성이다.
만약 기업 총수의 도덕적 기준이 낮다면 기업 전체의 도덕성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도덕성이 결여된 기업에서 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재 유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둘째, 과감성이다.
가끔씩
원치않는 의사결정을 과감하게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해결해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경영자의 담력이 필요하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적으로 만드는 위험을
감당할 수 없거나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꼭 명 확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예 기업 경영자가 되기를 포기해야 한다.
셋째, 선별능력이다.
어려운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내리기 위해서는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기업 경영자는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꼭 필요한 것만 추려내는 선별능력을 갖춰야 한다.
넷째, 야망이다.
기업 경영자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 이기주의적인 개인적 야망을 넘어서 후대까지 영속될 수 있는 기업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최고를 지향하는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다섯째, 의사소통이다.
기업
경영자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자가 돼야 한다. 언론 애널리스트 주 주 등 외부 입김이 거세지면서 이 같은 소통능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 기업 비전을 효과적으로 제시해 직원들에게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설득력 있 게 불어넣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여섯째, 판단력이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것도 리더십 요건이다.
일곱째, 전수능력이다.
부하직원의 재능을 살려주는 것도 기업 경영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다. 뛰어난 리더는 특정인의 재능이 어디에 가장 적합하게 쓰일 수 있을지 파악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노하우를 부하직원들에게 전수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
여덟째, 자신감이다.
기업 경영자는 자신감이 충만해야 한다. 자신있는 리더는 자신의 약점 을 인정하고 외부의 도움을 떳떳하게 받는다. 부하직원들에게조차 질투심을 느 끼는 지도자는 부하직원의 충성심을 유발할 수 없다.
아홉째, 적응력이다.
적응력도 중요하다. 시장변화를 감지하는 것과 신속하게 종전과 완전히 다른 접근방식을 택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열번째, 자신만의 매력이다.
리더는 부하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자신만의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리더가 가져야 할 7가지 마음가짐
1. 원리, 원칙을 중시한다.
2. 나쁜 정보를 숨기지 않는다.
3. 민첩하게 행동한다.
4. 회의는 최소한으로 한다.
5. 스스로 일을 만들어낸다.
6. 상벌을 규정대로 분명하게 한다.
7. 파벌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현장의 리더가 갖춰야 할 5가지 덕목
<회사로 말하면 PM과 같은 존재>
1. 지혜와 실전 경험을 마탕으로 하는 실력 => 대안제시능력 중요
산전수전 ,택(늪)전 ,평지의 육전 등을 다 격어본 장수만이 리더로서 실력이 있다할 수 있다. 그만큼 실무를 해보지 않고 떠드는 리더는 실력이 없다는 뜻이다.
2. 소신
실력으로 다져지면 자신만의 판단과 관점이 생겨나고 소신이 있어야 한다. 특히 싸움에서 물러날때는 후퇴해서 조직을 보호할 줄도
알아야 한다. 백전백승을 하겠다는 자세는 자신의 군대를 모두 죽이겠다는 자세라고 한다. 백전백태(안전)하겠다는 자세가 필요
3. 인격
인간적으로 끌려야 부하들이 따라온다.
4. 용기
5. 엄격함
제갈공명이 자신의 오른팔인 마속을 울면서 칠 수 있었던 공과 사를 구분하는 엄격함이 필요.
[읍참마속(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윤리덕목
“Virtue is own reward!”
어떤 리더든지 휘하에 쓸 만한 수하(手下)들을 거느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용장(庸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고 하지 않던가.
“나를 따르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용장의 리더십은 과연 무엇일까.
신세대를 바라보라.‘잔소리꾼 구세대’로 전락하기 싫다면 그들의 사고를 읽어라.
지식 산업을 ‘주름 잡는’ 지식 기업. 정보화 사회를 맞이하면서 그 중요성이 한층
강조되고 있다. 본지도 이미 여러 번 지식 기업 및 지식 자산들이
이끄는 국면의 변화들을 소개한 바 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선 지식 사회에 각광받을 만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일컫는
‘신지식인’이라는 용어가 한창 유행하기도 했다. 신지식인의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know what),
어떻게 하는 것이 세계 최고인지(know how),
필요한 정보와 지식이 어디에 있는지(know where),
누구에게 맡기면 가장 잘할 수 있는지(know who)를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때문에 신지식인의 자격 요건에는 학력 등 소위 ‘간판’이 필요 없다.
빌 게이츠도 신지식인이지만, 파출부나 막노동판의 일당 근로자,
농부 등 몸으로 때우는 직업인들 및 월급 받는 회사원들도 신지식인이 될 수 있다.
앨빈 토플러의 예측은 이제 더 이상 충격이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정보화 사회라는 ‘제3의 물결’ 속에서 패러다임의
대변혁(Paradigm Shift)을 맞고 있는 것이다.
신지식인은 과거의 지식 계급(The Intellectual Class)을 대치하며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이들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성취 목표로 자리잡았다.
신지식인의 특징은 과연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신의 일과 환경, 여건 등을 개선하고 개발하며 혁신해내는 이라면
신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비단 ‘완성형’뿐만 아니라 ‘진행형’도 신지식인에 포함된다.
이 글 말미의 박스에 신지식인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나열해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모든 특성들이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바로 이번호에 얘기하고자 하는
‘하인 리더십(Servant - Leadership)’이다.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인 리더십’이란 개념은 ‘청교도 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에서 생겼다.
우리는 그 말이 본디 기독교에서 일컬어졌던 용어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두 단어 사이에 하이픈이 붙으면 ‘경영자의 리더십’이 된다)이라는 말을 기독교에서는 ‘종(종복[使徒]의 의미일 것이다)으로서의
리더십’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원래 이 말은 ‘섬기는 자의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었던 예수의 리더십’을 뜻하는 말이다.
예수는 마가복음(마르코복음) 10장 43~45절을 통해 그의 지도자 철학을 밝혔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속세의 권력 쟁탈은 필연적으로 적과 중상모략을 부른다. 명예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날뛰기 때문이다.
하인 리더십은 ‘숭고한 인생 철학’이다.
예수의 12제자는 대부분 세속적 출세의 기회를 벼르고 있었다.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마가복음 9:34)”라고 전해진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9:35)”였다.
우리 나라의 ‘유교적 기독교’를 개탄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하인 리더십은 단골 메뉴다. 선교사들 가운데
“목사 섬길 줄 모르는 선교지 사람들에게 한 수 가르쳐줘야겠다”는
말을 내뱉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은
“한국에서 목사란 어느덧 ‘섬김을 받는 직분’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며
핏대를 올린다.
‘부정과 세속적 음모에 찌든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 일갈할 때에도
하인 리더십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교회 지도자는 ‘(덕망과 인격을 갖춘)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참뜻 구현’을 부르짖는 이들의 공통된 얘기다.
다소 장황한 얘기였지만 사실 결론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취지를 잊지 말자는 것.
“먼저 하인이 되어라!”
경영학적 측면의 하인 리더십이 최근 지식인들의 화두에 종종 오르내리고 있다.
기자는 지난 한 달 동안 세 명의 취재원으로부터 이 단어를 들었다.
모 최고 경영자 조찬 모임에서는
‘경영학에서의 하인 리더십(Servant-Leadership and Business)’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열린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실용적 의미의 ‘하인 리더십’ 또한
본질적으로는 앞서 살펴본 기독교에서의 하인 리더십과 다를 바 없다.
자, 기독교에서의 하인 리더십을 마지막으로 한번 되새겨보자.
‘복음의 전파’와 ‘사랑의 실천’ 등 기본적인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다 보면 하인 리더십에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제 시야를 좀더 ‘현실적인’ 방향으로 돌려본다.
자본주의사회의 대표적 계층은 ‘장사꾼’이다. 장사꾼 최대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윤의 극대화일 것이다. 이때의 이윤 극대화란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장사는 신용이 생명이고 신용은 곧 고객 만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객 만족을 극대화시킬 경우 이는 곧 장기적 측면에서의 이윤 극대화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고객 만족은 어떻게 극대화시킬 것인가.
고객과의 관계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영화 <배트맨과 로빈>의 충직한 집사 ‘알프레드’를 떠올려보자.
주인의 모든 욕구를 이해하고 최대한 만족시키면서
한점 흐트러짐 없이 품위를 유지하는 꼬장꼬장함, 고상한 인격,
한없이 따사로운 마음…. 충직한 하인이야말로 대 고객 관계의 귀감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다. 하인 리더십은 이런 발상에서 출발한다.
궁극적인 목표에 일관적으로 다가가고 싶은가?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싶은가?
조직의 리더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하인’이 되어라.
추종자들 없이는 리더도 없다
하인 리더십 연구의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면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K. Greenleaf, 1904 ~ 1990)를 들 수 있겠다.
1970년 그는 ‘Servant-Leadership’의 개념을 처음 소개한 <The Servant As Leader>라는 에세이를 발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처음 하인 리더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AT&T에서 교육 개발 운영직에서
은퇴한 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강의를 나가면서부터였다.
떠들썩한 1960년대를 보내면서 왜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국의 제도 및 공공기관,
특히 대학에 그토록 강렬히 항거했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조사를 마친 그는 ‘문제는 제도와 기관에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학교는
당연히 제공해야 할 서비스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얘기하는 ‘섬기는 지도자(Servant-Leader)’란 스스로의 노력과 비전 제시 능력,
하인으로서의 윤리를 모두 갖추고 있는 새로운 리더 상이다.
그는 섬기는 지도자가 사회를 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린리프는
“진정한 지도자란 추종자들이 선택하는 것
(True leaders are chosen by their followers)”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섬기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awareness), 선견지명(foresight), 경청(listening)을,
버려야 할 악습으로는
강압-속임수-말재간(coercive-anipulative-ersuasive power)을 지목했다.
그린리프 센터의 현 CEO인 래리 스피어즈(Larry Spears)는 그린리프의 글을 취합,
하인 리더십의 덕목을 10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경청(Listening),
개념화(Conceptualization),
공감(Empathy),
선견지명(Foresight),
치유(Healing),
책임감(Stewardship),
인식(Awareness),
커뮤니티 구축(Building Community),
설득(Persuasion), 신장의 보증(Commitment to the Growth of People)이 그것이다.
그린리프의 저서 < Servant - Leadership(New York: Paulist Press, 1977) >은
지금껏 리더십 연구의 교재로 각 대학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위치한 ‘그린리프 센터(Greenleaf Center)’는
범세계적인 지부망을 통해 하인 리더십의 보급 및 교육에 힘쓰는 비영리 단체다.
고객이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기업은 품질, 코스트, 스피드, 차별화 등의 향상 추구를 끊임없이 거듭해야 한다.
당연히 해당 사업에 대한 이해, 전반적 성공을 거두기 위한
나름의 계산, 필요한 사항에 대한 결정권, 전반적인 운영 능력 등을
확보하고 있어야 조직력과 체질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능력은 오로지 조직의 리더나 실질적 매니저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하인 리더십을 이해하는 이라면
시장에서 조직의 탄탄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 힘이
모두에게 고루 분배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가장 실질적이고 바람직한 하인 리더십의 실천 방법은 ‘대화’다.
대화는 조직 내 각 성원의 머리와 가슴, 두 손을 한데 모아준다.
대화는 협력의 기반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모든 조직을 구성 및 유지하는 데에는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이 따르는 법이다.
이런 끝없는 일들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해
단순히 일련의 상황 및 사람들을 처리하는 방법론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물론 그런 구체적 방법도 숙지할 필요는 있지만 그 외에
성실한 ‘의견 수렴(listening)’, 협조와 팀워크, 적절한 반향 등도 필수적인 덕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더 본인의 가치, 강점과 약점 등 총체적인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혹독한 자기 수련과 더불어
‘부드러운’ 대인 관계를 겸비한다면 파워풀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하인 리더십의 기본은 곧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리더십인 셈이다.
하인 리더십은 개인적인 성숙을 통한 리더십의 향상을 추구한다.
아울러 상하 구분 없이 원만한 인간 관계를 강조한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일상 생활, 즉 직장, 가정, 내적 충만에 도움이 된다.
‘밑바닥’에 있다면 더 나빠질 게 뭐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하인 리더십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았다.
그린리프의 생각이 너무 ‘부드럽다’고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지금껏 들어왔던 ‘전통적인’ 조직 장악의 지혜와는 조금 방향이 다른 면도 있다.
하지만 하인 리더십은 매우 실용주의적인 사고다.
그린리프는 “경영이란 일련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한
고찰(Management is the study of how things get done)”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대접을 ‘받기만’ 하는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과연 소위 ‘특권층’들은 ‘하인이 되기를 자청한 이들’에 비해
더욱 건강해지고, 현명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자율적으로 살 수 있을까?
반면 사회에서 가장 특권과 거리가 멀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뭔가 이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상황이 더 나빠질 리는 없지 않겠는가.”
자료-The Robert K. Greenleaf Center for Servant-Leadership
임원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10가지 자질
2, 열정
3. 추진력
4. 뛰어난 전문지식
5. 원만한 대인관계
6. 성실성
7. 폭넓은 네트워크
8.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판
9.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
10. 뛰어난 외국어실력
임원은 기업의 꽃이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기 때문에 '임시 직원'의 줄임말이라는 자조도 들리지만, 직장인이라면 한번 해보고 싶은 성공의 '척도'이기도 하다.
매경이코노미 기자 3명이 25명의 임원들을 취재해, 임원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10대 자질을 정리했다.
리더십, 열정, 추진력, 뛰어난 전문지식, 원만한 대인관계, 성실성, 폭넓은 네트워크,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판,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 뛰어난 외국어실력...
10가지 자질 모두 좋은 내용이고 필요한 것이겠지만, 숫자가 너무 많으면 '집중'이 안되는 단점도 있다. 이 중 세가지만 꼽는다면 열정, 전문지식, 그리고 리더십을 들 수 있다.
가슴 설레였던 '초심'을 항상 간직하며 적극적으로 일에 임하고 항상 자기계발에 노력하는 '열정'은 비단 임원승진 뿐 아니라 모든 성공에 필수적인 덕목인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쌓고 시대의 트렌드에 안테나를 항상 세우려 노력하는 자세, 부하직원과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리더십도 중요한 자질이다.
조직에서 성과를 내고 인정을 받기 위한 덕목 10가지. 이중 몇가지를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이 10가지 외에 더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다른 가족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좋겠다.
(예병일의 경제노트, 2006.12.11)
21세기 지도자가 갖춰야 할 조건
세계화의 기치아래 경쟁이 가속화 되고 시대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가치가 상실되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이런 불안정한 시대에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노령화가 급속하게 이뤄지고 단일 민족 국가에서 다민족 국가로 바뀌고 남북분단이라는 특수상황 속에 놓여 있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우리 나라는 더욱더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육사 시인의 말처럼 백마 타고 오시는 초인 같은 지도자가 우리는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나라를 이끌 지도자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야 하는지 공론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문회를 통한 지도자의 상을 구할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출함으로써 우리는 지도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21세기를 이끌어 가야 할 지도자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미래를 희망차게 맞이할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21세기 지도자는 현실에 바탕을 둔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실현 가능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리더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를 통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일본의 민주당도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를 통하여 정권을 창출했다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연설문에서 보듯 희망이 보일 때 즐거워하고 고난 속에서 참으면서 독재와 빈곤과 질병과 전쟁을 없앨 때까지 고난을 짊어지라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기에 현재의 고통을 참으며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희망찬 비전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통합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평화적 통일을 통한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 우리 나라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첫번째 덕목인 것 같습니다.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통한 평화적 통일을 이끌어 내는 민족의 지도자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는 철학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런 철학적 안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전을 통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등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현인들의 철학적 덕목을 꾸준하게 독서를 통하여 체화함으로써 지도자는 정신적 소양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철학적 안목을 가지고 현실에 바탕을 둔 실현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는 지도자를 우리는 맞이할 권리가 있습니다.
21세기 지도자는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야 합니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리더가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리더 곁에 있는 참모들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하여 그 참모들이 모든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고 격려를 하는 것이 21세기 리더입니다. 위대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 가장 잘한 부분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는 것입니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그 사람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함으로써 문화 창달을 이뤄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분야에 능력을 가진 분들이 최대한 능력을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리더의 두번째 덕목입니다. 세계화의 경쟁 속에 리더는 우리가 앞으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문화와 과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 그 분야의 전문가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조성해야 합니다. 제2의 빌 게이츠가 나올 수 있도록 지도자가 끊임없이 후원해야 하고 해리포터 같은 문화를 육성함으로써 먹고 살 수 있게 지도자는 문화와 과학 분야의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습니다. 그 인사는 지도자가 합니다. 앞으로 먹고 사는 길은 문화와 과학이라는 것을 지도자는 인지하고 문화와 과학에 대한 기초적 소양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1세기 지도자는 이성보다는 감성의 리더가 되었으면 합니다. 메마른 감정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남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다소 허물이 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이 많은 리더였으면 좋겠습니다. 경쟁이 격화될 수록 세상은 사람 냄새가 없어지는 세상으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메마른 현실하에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같이 울고 웃고 하는 격의없는 리더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내 가슴에 있는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그런 리더를 우리는 원합니다. 소수의 1%를 위한 리더가 아니라 다수의 99%를 위한 리더가 우리는 필요합니다. 리더가 상처 많은 다수를 안아줄 수 없다면 행복한 소수도 안아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의 작은 이야기를 들어 주고 같이 어울려 음악도 듣고 노래도 부르고 막걸리도 한잔 같이 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그런 포근하고 편한 아줌마 같은 리더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우리 위에서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큰형같은 자세로 우리 상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감성의 리더가 우리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커다란 산으로 멀리 있는 리더가 아니라 언제나 내가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눈물이 많은 리더가 우리는 필요합니다.
21세기 리더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의견 속에 강력하게 모든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끈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당장은 욕을 얻어먹더라도 미래의 발전을 위하여 소신있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철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의 인기에 부합하는 리더가 아니라 후손을 위해서 전체의 대의를 위해서 소신있게 자신의 철학을 견지하는 그런 리더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지역 간의 갈등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리더는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리더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카리스마가 있어야 합니다. 부드러움 속에서도 칼을 가는 외유내강형의 리더가 요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떨 때, 불굴의 의지로 이끌어 나가는 카리스마가 리더에게는 필요합니다. 이순신 장군처럼 풍전등화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불굴의 의지를 지닌 리더였기에 우리 나라를 전쟁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국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굴의 카리스마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카리스마가 리더가 갖춰야 할 네번째 덕목입니다.
21세기 리더는 겸손하게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다양한 국민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조정적 리더였으면 좋겠습니다. 퓨전의 시대, 다양성의 시대에 모든 의견을 통합하여 모든 사람이 윈윈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부여를 할 수 있는 리더였으면 좋겠습니다. 리더의 제시안에 갈등의 당사자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존경받는 조정적 리더를 보고 싶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리더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통합을 이끌어 내는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지녔으면 합니다. 많은 현안의 문제들은 통합의 문제입니다. 통합과 조화를 강조한 원효 대사의 화쟁 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조정 능력이 뛰어난 리더가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지역 간의 갈등을 치유하고 세대간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기부를 통하여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함 민족의 문화를 융합하여 산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고 평화적 통일을 통하여 전세계 인류 평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퓨전의 리더, 통합의 리더를 우리는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비전을 제시하고 적재적소에 인물을 배치하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며 카리스마를 지닌 조정적 리더가 21세기에 필요한 리더입니다. 독수리 5형제가 지구를 구했듯이 이런 5가지 덕목을 갖춘그런 리더가 우리 삶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리더는 특정한 인물이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의존하는 그런 속성을 버리고 스스로 21세기 리더가 되도록 각자 최선을 다합시다. 그래서 정상에서 웃으면서 아름다운 세상,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케네디 대통령처럼 리더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요구하지 말고 내가 리더가 되어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를 자문해 보는 주체적 리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리더입니다. 역사는 소수의 리더의 시대에서 다수의 리더 시대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리더를 확보한 국가만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노력을 통하여 쟁취하는 후천적 리더입니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 리더가 되기 위하여 준비합시다. 준비된 리더만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리더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리더를 갖추기 위해서는 질책보다는 칭찬과 격려를 통하여 리더를 배출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내 삶이 행복해진다는 사고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칭찬과 격려를 통하여 자란 리더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리더들이여!
사랑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할 것입니다.
최고지도자 리더십의 8대 덕목 [HS-way (40)]
국가, 대학, 기업의 발전에 있어서는 대통령, 대학 총장, 기업 CEO 등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패러다임 전환기나 위기 상황에서는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국가나 조직의 운명을 가른다.
최고지도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주요 덕목은 무엇인가? 나는 VIP(지도자의 자질)-PTR(지도자의 책무)-PT(위기관리 능력)를 최고지도자 리더십의 8대 덕목으로 제시한다. 지도자의 기본 자질은 비전(Vision Provider), 혁신(Innovation Driver), 열정(Passion)이고, 지도자의 기본 책무는 인사(Personnel), 신뢰(Trust), 책임(Responsibilities)이고, 지도자의 위기관리의 핵심은 우선순위(Priority), 타이밍(Timing)이다.
최고지도자는 비전을 제시하고(Vision Provider),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혁신 역량(Innovation Driver)이 있어야 하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열정(Passion)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인재들이 역량을 최대한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자원관리(Personnel)를 잘 해야 한다. 지도자는 신뢰(Trust)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결과에 대해 항상 책임(Responsibilities)을 다해야 한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일이나 자원배분에 있어서 우선순위(Priority)를 결정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하고, 의사결정의 타이밍(Timing)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의 성공은 개인 자신의 성장에 의해서 평가되지만, 대통령의 성공은 국가 발전에 의해서 평가되고, 대학 총장 등 지도자의 성공은 조직의 발전에 의해서 평가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 발전을 실현해야 하고,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의 발전을 실현해야 한다.
- 남천 이효수 -
In the development of the nation, university and enterprise, the leadership of top leaders, such as the national president, university president and corporate CEO, is very important. Especially in times of paradigm shift and times of crisis, the leadership of the supreme leader determines the fate of the nation or organization.
What are the main principles of leadership that the supreme leader must have? I present VIP-PTR-PT as the eight principles of supreme leader leadership. Vision Provider, Innovation Driver, Passion, Personnel, Trust, Responsibilities, Priority, Timing, etc.
Top leaders should have the ability to present a vision (Vision Provider), the ability to innovate to realize the vision, and the passion to pursue it. In addition, they should hire talented people. Top leaders must be able to be trusted and always be responsible for the consequences. Especially in times of crisis, the ability to determine priorities in work or resource allocation should be excellent, and the timing of decision-making should be well matched.
While individual success is judged by individual own growth, the president's success is judged by national development, and the success of the leader, such as the university president, is judged by the development of the organization. To become a successful president, you must realize national development, and to become a successful leader, you must realize the development of your organization.
Prof. Hyo-Soo Lee, Ph.D.
첫째가 예측하라다. 지도자는 언제나 앞을 내다보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여 그에 적합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둘째는 바닥을 살펴라다. 민초(民草)들의 마음을 잘 읽어 바르게 지도함이 지도력의 근본이다. 세번째는 지도자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부하들에게 시키려 들어서는 안 된다. 앞장서서 위험을 온몸으로 부딪쳐야 한다. 네번째는 공격하라다. 이 말은 공격 정신이 없이는 위기를 정면 돌파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는다. 다섯째는 사기를 올려 주라다. 자신의 주장대로 국민이나 사원을 선동하지 말고 국민들을 정직하게 대하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라는 말이다. 선동으로 움직이는 대중은 판단력을 잃을 뿐 아니라 도덕성까지 잃게 된다.
여섯째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다. 대상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말은 상대의 자질을 잘 파악하여 그 자질을 구체적으로 북돋워 주라는 말이다. 조직원의 숨은 자질을 잘 찾아내어 그에 적합한 대우를 해 줄 때 열린 공동체가 되어지고 생산성이 높아진다.일곱째는 진심으로 설득하라다. 강제적인 억압이나 권력 행사가 아니라 진실함과 진지함으로 공감대를 이루어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도자의 설득력은 솔선수범에서 드러난다. 여덟 번째는 위기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다. 어려울 때일수록 잔재주를 부리지 말고 편법을 쓰려들지 말고 명분을 지키고 원칙에 충실하여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평생 쌓은 업적과 평판이 허물어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도자의 올바른 자세와 판단이 역경을 극복하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지도자의 두 가지 조건, 다섯 가지 덕목
경향신문을 보고 알게 된 것_2017년 4월 25일
- [ 지도자의 두 가지 조건, 다섯 가지 덕목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은 하나의 시체에 대한 세 사람의 진술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한 사람은 범인으로 의심되는 도둑, 나머지 두 사람은 아내와 죽은 남편의 혼령. 기이한 것은 이들 셋이 모두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도 이 셋의 진술대로 사건을 재현할 뿐, 어떤 것이 진실인지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문화평론가 정은경씨는 “한 나라의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일단 법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어른이어야 한다. 어른은 스스로를 통제하고 책임지는 주인을 의미한다.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남에게 묻고 확인받으려는 자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그리고 어른은 삐지거나 토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모욕과 비난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또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덕목을 갖춰야 한다. 첫째,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소통(communicate)은 함께(com) 나누는(municate) 것이다. 둘째, 자신의 철학과 언어가 있어야 한다. 셋째, 곤혹과 딜레마를 알아야 한다. 넷째, 지도자의 대타자, 즉 그가 눈치 보아야 하는 대상은 국민이어야 하지 어떤 특정인이거나 권력이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지도자는 그가 이끄는 국민들을 모두 다 데리고 가야겠다는 원대한, 불가능한 꿈을 꾸는 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https://goo.gl/WawTqF
- [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는 ‘줄리의 법칙’ ] 별똥별이 떨어질 때, 아니 그 꼬리가 채 사라지기 전에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별똥별은 찰나와 같은 시간에 덧없이 실낱같이 사라진다. ‘줄리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는 법칙이다. 행운이란 건 아무 노력 없이 우연히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갈망하는 이가 알게 모르게 한 사소한 행동과 변화들이 쌓여 이루어진 결과라는 뜻이다. ‘우리말 절대지식’의 저자 김승용씨는 “진실로 자기 꿈을 꾸는 이는 다른 별을 보지 않습니다. 내 별 하나만 바라보고 그 별을 향해 꿈길을 걷습니다. 밤하늘 수많은 별들 모두가 내 꿈은 아닐 것입니다. 탐나는 모든 별을 꿈꾸는 이가 꾸는 꿈은 그저 허망한 ‘개꿈’일 것입니다. 오늘밤 우리, 저기 저 많은 별들 가운데 내 삶과 꿈의 별 하나쯤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말한다. https://goo.gl/7E8sq4
- [ 대선 토론이 남긴 것 “세탁기” “설거지” “이보세요”… ] 19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토론에서 ‘스탠딩’ 방식 등 난상토론을 유도하기 위한 룰이 도입됐지만, 정책·비전보다는 네거티브 공세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취지가 퇴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기 대선으로 기간이 압축되면서 TV토론의 관심도와 영향력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3차 토론의 7개 채널 합계시청률(닐슨코리아 기준)이 38.5%에 육박했다. 토론 긴장도는 높아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내용면에선 많은 과제를 남겼다. 새로운 형식과 후보자들의 낡은 토론 관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노출됐다. 기억나는 것은 “세탁기” “설거지” “이보세요” “버릇없이” 뿐이다. https://goo.gl/sma4Fq
- [ 세월호 학생 가방 속 한 푼도 못 쓴 용돈 5만원 ] 세월호 탑승자들의 소지품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희생된 안산 단원고 한 남학생의 낡은 지갑에는 “수학여행지에서 쓰라”며 부모가 준 5만원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하루에 많게는 30여점 넘게 발견되고 있는 유류품은 신발, 옷가지, 여행용 가방, 휴대전화 등이 대부분이다. 지난 4월22일에는 단원고 2학년8반 고 백승현군의 여행용 가방이 가족에게 인계됐다. 3년간 바닷속에 잠겨있던 백군의 가방에는 학생증과 함께 쓰지 못한 용돈 5만원, 옷가지 등 소지품이 들어 있었다. 백군의 어머니 임현실씨(51)는 “수학여행 가서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용돈 5만원을 줬는데 한 푼도 쓰지 않고 물에 젖어 돌아와 마음이 더 아프다”고 말했다. 세월호 수습본부는 백군의 가방처럼 소유자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물품은 세척 등을 거친 뒤 가족들에게 연락해 인계하고 있다. 침몰 당시 상황 등이 녹화됐을지도 모르는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 등 디지털기기는 발견 즉시 선체조사위원회로 넘겨진다. https://goo.gl/pRQoUZ
- [ 데뷔 40년 ‘도라지 위스키’ 가수 최백호, 미술전? ]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가수 최백호씨(67)가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가수뿐만 아니라 2009년부터 미술작가로도 활동한 최씨는 날마다 조금씩 그려둔 그림 중에서 ‘나무’란 이름의 작품 20여점을 선별해 데뷔 40주년 기념 개인전을 열게 됐다. 그는 “나무를 보면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 같아서 나무를 주제로 작품을 그려 나간다”고 말했다. 1977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데뷔한 최백호는 ‘입영전야’(1977), ‘영일만 친구’(1979) 등을 히트시키며 톱가수 반열에 올랐다. 40대 중반에 내놓은 자작곡 ‘낭만에 대하여’(1995)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아이유, 에코브릿지, 스웨덴세탁소 등 젊은 후배 가수들과 협업하며 꾸준히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최씨는 지난 3월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 <불혹>을 발표했다. 같은 달 서울 LG센터에서 이틀간 진행된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전회 매진시키며 성황리에 마쳤다. https://goo.gl/hiUOIf
- [ 불황에 유커 급감…서울 주요 상권 임대료 뚝↓ ] 월세가 전국에서 가장 비싼명동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다시피 하면서 매출이 절반가량 빠진 곳들이 많다. 작년 봄만 해도 명동 곳곳을 활보하던 중국인 관광객들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여파로 요즘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권은 명동뿐만이 아니다.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 위축이 계속되는 데다, 중국인 관광객까지 감소하면서 서울 주요 상권이 위축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상가 임대료도 하락세로 돌아섰다. 부동산114가 이날 발표한 ‘2017년 1분기 상권임대 동향’을 보면, 서울에 위치한 상가의 월평균 임대료는 1㎡당 3만2700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4분기(3만3700원)보다 3.0% 떨어진 수치다. 서울의 상가 월평균 임대료가 내림세를 보인 것은 지난해 1분기 이후 1년 만이다. 서울에서 임대료 하락폭이 가장 큰 상권은 합정역(홍대 일대·3만2200원)으로, 전 분기보다 12.5%나 떨어졌다. 북촌 상권 임대료도 12.2% 하락했다. https://goo.gl/KxMxao
12-14-2024(토) 요한복음 13:21-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팔리라(2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After he had said this, Jesus was troubled in spirit and testified, "I tell you the truth, one of you is going to betray me."
팔리다(파타쏘. patassō) πατάσσω
스트롱번호 3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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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다, 때리다, 마 26:51, 눅 22:49, 50, 행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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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때려눕히다, 죽이다, 마 26:31, 막 14:27, 행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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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치다(마 26:31, 막 14:27, 눅 22:49).
마태복음 26:51
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누가복음 22: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사도행전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마태복음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
마가복음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7:24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어떤 부인과 남편의 대화다.
“여보 당신은 내 인생에 로또야”
“정말, 그렇게 내가 좋아?”
“그게 아니라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잖아?”
이 부부에게 배신감은 그래도 애교 수준이지만 대중들의 인기가 높았던 시저의 권력이 계속 커가는 것을 시기한 원로원은
시저의 심복이었던 브루투스를 보내 그를 살해했다.
그때 믿었던 신복에게 찔린 시저는 죽어가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장 신뢰했던 신복으로부터 배신당한 자의 절규, 이 말은 믿었던 상대에게 배신당했을 때 흔하게 사용되는 대표적인
인용문이 되었다.
본문에 다시 한 번 유다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이 고개를 든다.
11절에도 언급하고 18절에서 또 언급한 것을 보면 그에게
엄청 충격이었던 것 같다.
예언이 점점 더 구체화 된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라고 하셨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강조 어구인 ‘진실로
진실로’를 쓰며 유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배신자가 누군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으로 식사하시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라는 명작이다.
배신자 유다는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가 “마태복음 26장의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25절)는 대화를 다른 동료들은 듣지 못하는 둘만의 대화였다며
회계 담당인 가룟유다가 예수님 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았을 것”으로 해석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배신자에게 마지막 만찬에서 특별히
곁에 앉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마 사색을 한 유다가 바로 오른쪽 사람인 것 같다.
다빈치는 그의 손에 돈주머니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앞에 소금통이 넘어져 있는데 소금은 쌍방 간에 맺은 계약이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다빈치는 유다 앞의
소금을 뒤엎었다.
그리고 요한의 얼굴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일까?
마치 여성 같다.
예수님 바로 오른쪽에 있지만 반대편으로 약간 기울인
편안한 모습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당황한 모습이다.
마치 손으로 자기 가슴이나 하늘을 가리키며 “저는 아닌데요” 그러는 것 같다.
평화롭기는커녕 배신과 놀람, 그리고 무지로 가득 찬 만찬장, 이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만찬장 분위기이다.
요한복음의 만찬장 분위기는 그림이 좀 다르다.
요한복음의 만찬장에서 두드러지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유다와 ‘사랑받는
제자’라는 익명의 사람, 익명으로 다룬 사람은 사도 요한이 거듭 그를 ‘사랑받는 제자’라고 표현한다.
학자들은 그를 별 이견없이
사도 요한으로 해석하는데 요한은 그 제자가 베드로보다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한다.
말씀으로 추정해볼 때 유다와 요한은
둘 다 예수님 가까이에 앉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다빈치의 그림과 달리 예수님 좌우편에 하나씩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다빈치의 그림은 마치 1자 테이블 위에서 식사를 한 것처럼 표현했지만 실제 유대나 로마식 식사 때 테이블 세팅은 원형이나 반원형이었고, 공간이 좁을 경우에는 서로 포개어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했다. 그래서 예수님 오른쪽에 있던 사랑받은 제자는 마치 예수님 품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26절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라 하시며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라는 말씀도 당사자들만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다의 자리를 예수님과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떡 조각을 나누는 식사, 가족적이고 친밀한 분위기처럼 보이지만 주고받는 대화는 심각하다. 예수님은 같이 떡을 먹는 자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는 범인을 색출하려고 사랑받는 제자에게 누군지 알아내라고 사인을 보낸다. 결국 사랑받은 제자가 묻는다. “주여 누구니이까”(25절), 좀 은밀하긴 하지만 예수님도 이제는 직접 누군지 밝히신다. 지금까지 암시만 하시던 것과는 다르다. 떡 조각을 주면서 “내가 이 떡 조각 주는 사람이 그”라고 하신다. 아마 다른 제자들은 잘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 같다. 아니 들었어도 무슨 소린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 그러고 있다.
한편 유다는 들통났다고 생각하고, 떡 조각을 받자마자 밖으로 나간다. 요한도 제자들도 유다가 다른 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유다는 행동을 결행할 타이밍으로 생각한다.
배신 결행, 열두 명을 택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며 가장 신뢰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신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절), 시편 41편을 인용한 말씀이다. 다윗의 시편인데 여기서 생략된 말씀이 그 상황을 더 뼈 아프게 한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함께 떡을 먹던 친구가 배신했다는 말씀이다. 그가 바로 늘 곁에 두고 중요한 결정에 자문을 구했던 최고의 책사 아히도벨이다. 다윗은 친아들 압살롬에게도 배신당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발꿈치를 들었다고 표현했다. 발로 마치 자기 얼굴을 밟듯 모욕적 행위를 행했다는 말이다. 축구장에서도 엘로 카드감, 심하면 레드 카드까지 받을 수 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를 밝힌 시편에 보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55:4-5)라고 했다. 상처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 배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다만 배신자인가? 유다는 하나의 상징, 구원의 방주라는 교회공동체에도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성경은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표현했다. 끊임없는 신앙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 유다와 같은 배신과 탐욕과 야망의 욕구가 섬김과 하나됨과 사랑의 마음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에서 떡과 말씀을 먹고 있지만 유다가 있고 사랑받는 제자가 있다.
유다는 마귀다
난해한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절),
이 말씀은 마치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는 방관의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된 말씀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교회사에
아예 가롯 유다를 옹호하는 이단이 있었다.
2-3세기 기독교 최대 이단으로 찍혔던 영지주의자들이 만든 위경 중 하나인
‘유다복음서’에 보면 유다가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나머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비밀한 계시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영적인 비밀을 안 유다는 빈껍데기에 불과한 예수님의 육신을 푼돈에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육적인 것을
붙잡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안 유다가 억울하게 정죄를 당했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나?
이 유다에 대한 옹호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 을 간과하는 오류다.
예수님의
대속 사역만 강조했다고 할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속죄론의 핵심이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인데 결과론적으로 보면 유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성취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리가 로마서에서도 나온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롬 3:5),
이스라엘의 불의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이방인이 구원받게 된다면
이스라엘의 불의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것인데 아니다.
현실은 배신일 뿐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한 결과로 바꾸셨을 뿐인
것, 그래서 유다에 대한 옹호는 변명에 불과하다.
요셉이 결과적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동생을 핍박하고 팔아넘긴 그의 형제들이 공로자 되나?
아니다. 형제들은
심판받을 짓 했다.
그들의 악을 바꾸어 요셉을 높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악인들의 변명에 동조할 필요 없다.
결과가
선하다고 악행을 용서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오류는 영웅화의 오류다.
인간에게는 악마를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실제 역사나 현실을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알렉산더나 칭기스칸이나 나폴레옹을 영웅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얼마나 광대한 땅을 빼앗았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만 현실은 피의 역사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대중이 그들의 칼날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가족이 붕괴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 러시아에서 지지도가 더 높아졌다고 영웅이 될 수 없듯이
유다는 영웅이 아니라 배신자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인데 성경은 유다를 가차 없이 마귀라고 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27절), ‘사탄’이란 이름이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데 사탄이 유다의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전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70절)라고 예수님은 유다를 마귀라고 하셨다. 사탄이 유다의 행동을
주장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기억하라. 마귀 짓하면 마귀이다. 마귀가 어떤 존재이고, 인간에게서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에 예수님은 관심이 없다. 다만 그 행동에 관심이 있고, 행동이 악하면 마귀이고 어둠의 자식이다. 그래서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절) ‘밤’은 단순한 시간만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에게 밤은 빛과 어두움의 싸움에서 어두움으로 넘어가는 때, 캄캄한 암흑이고, 또 유다의 영혼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유다가 지금 마귀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말씀의 핵심은 유다의 배신을 예수께서 미리 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셨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시편 말씀의 성취라고
하신다.
그래서 유다에게 “속히 그 일을 하라”고까지 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리 다 아셨다면 가룟 유다를 12제자 중 한
명으로 선택하신 것부터가 잘못이었고, 예수님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너무 단순한 의문이고 불신이다.
예수님은 이것은
말씀의 성취라고 하셨다.
요한이 단순히 예수님의 예지력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악은 통제되고 있다. 댐에 갇힌
물처럼 통제된 악은 위험하지 않다. 악이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우연이나 우발적이 아니라 모든 것은 계획 아래 진행된다. 그렇다면 배신, 실패에도 좌절할 필요 없다. 예측되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것, 모르기 때문에, 신뢰가 없기 때문에 불안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신뢰하기에 예수님은 충실히 오늘을 사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유다에게도 똑같았다.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다. 떡 조각을 찍어 주기도 하셨다. 떡 조각을 받았던 유다가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다는 그걸 버림의 사인으로 해석한 것 같다. 결국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배신이 아니라 회개였어야 한다. 그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도 놓쳤다. 마귀의 손을 붙잡힌 것, 전적으로 유다의 선택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유다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자극하셨지만 유다가 끝내 듣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안타깝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도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신 예수님, 결국 제자들 모두에게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실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9절), ‘일이 일어나기 전에’라고 하셨는데 이 일이 바로 유다의 배신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귀결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다. 곧 이 일련의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자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끝까지 믿게 하기 위해 미리
예고하실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심령이 괴로워”(21절), ‘타랏’이란 단어인데 나사로 죽음 앞에서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울 때 지으셨던 표정, 십자가를 앞두고 그 길로 인해 고통스러우셨을 때 지으셨던 표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단어다. 그 괴로움은 배신할 자를 제자로 삼고 다 알면서도 그와 3년간 삶을 나누셔야 했던 고뇌, 나머지 제자들도 다 주님을 부인하거나 버리고 흩어질 일에 대한 연민의 정, 무엇보다도 곧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말미암는 두려움, 이런 것을 종합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져야 할 죄와 괴로움의 짐을 대신 지셨기에 겪으신 괴로움, 그래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끝없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충성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그의 심령에 민망하시게 된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특별히 생각되는 것은,
(1) 그의 제자가 그를 팔아 먹는 일이 너무도 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
(2) 그런 일에 대하여 이제 공적으로 지적하여 말하기가 역시 괴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 일을 지적하여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될 단계였다.
그것은 너무도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엄격한 법정 선언과 같이 "증거하여" 말씀하셨다.
여기 "증거"란 말이 법정 용어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경 말씀 요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3장 18-30절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로
인한 예수님의 심정을 깊이 있게 묵상하려 합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과 그분의 구속 사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깊은 진리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예고와 제자들의 의심(요한복음 13:18-2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배신할 자가 있다고 예고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1절).
예수님의 이 예고는 곧 다가올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배신의 고통을 느끼는 인성을 엿보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서로 의심하고,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배신할지 궁금해 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2절).
그 중에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었고, 시몬 베드로가 그를 통해 누가 배신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2. 유다의 배신과 사탄의 역사(요한복음 13:26-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의문에 답하시면서 자신을 팔 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밝히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6절). 예수님께서 떡 한 조각을
적셔 유다에게 주신 후,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갑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27절).
여기서
우리는 유다가 단순히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사탄의 역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유다의 탐욕과
감정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그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경고합니다. 우리의
약점과 감정적인 통로를 통해 사탄이 역사할 수 있음을 유다의 예를 통해 분명히 보게 됩니다.
3. 예수님의 상처와 사랑 (요한복음 13:28-30)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받아 나가게 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라’ (30절).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예수님의 상처와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도 받아들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랑이
끝까지 변함이 없고, 심지어 배신자에게도 베푸는 극진한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타인의 배신이나 예상치 못한 상처로 인해 마음에 고통을 느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결론
오늘 요한복음 13장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배신에 대한 아픔, 그리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예고와 유다의 배신은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타인의 배신 앞에서 어떻게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사탄의 역사를 경계하고 우리의 영적 상태를 항상 점검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를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나를 팔리라"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이란 예식을 진행할 때 "나를 팔리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서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첫째, 예수님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사람은 빵을 찍어
주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빵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팔 사람입니까?
‘가룟 유다’ 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가룟 유다에게 빵을
주셨는지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13:28-29).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빵을 주셨는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얼마든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아니할 가룟 유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평상시 좋을 때는 주님 따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을
배신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상시에는 세상과 다른 것 같이 행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가룟 유다와 같은 배신자 입니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우리의 믿음을 잘 다듬어야 합니다.
늘
기도와 말씀으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 2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빵을 찍어 유다에게 주시며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는 것으로 오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제자 중 제자가 돈 관리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나가서 앞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잘못 이해 했습니다.
유월절 저녁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당시의 관습으로 인해, 어떤 제자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물건을 사오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은 지금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길 배신자라는 사실을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이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 조각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시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30절 말씀을 봅시다.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신 떡 조각을 받은 후, 드디어 예수님을 팔아 넘길 계획을 실행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목소리,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목소리는 들립니다만, 가룟 유다의 목소리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은밀하게 악을 도모하는 죄인의 음흉함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에 등을 돌렸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 예수님만큼 가룟 유다를 사랑하신 분이 있을까요?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에도 함께 했고, 예수님은 세족식을 거행하며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어 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이용하려고만 했고, 자신의 뜻이 관찰되지 않자, 예수님을 배반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사명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 가룟 유다에게 빵을 찍어 주시며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지난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닌 가룟 유다도 한 순간에 무너져 예수님을 등 지고 돌아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날마다 묵상합시다. 날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갑시다. 사망과 어둠을 이기신 빛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어두움을 물리치는 방법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고통 중에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목숨 바쳐 사랑한 제자가 스승을 팔아 버리다니요. 마귀가 유다의 마음을 지배하자 곧 그는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앎에도 왜 주님은 가룟 유다를 내치지 않았을까요. 왜 끝까지 사랑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어쩔 수 없어서? 주님의 사랑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유다는 매우 간교한 자였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돈을 훔쳤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은 몰랐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속였기에 수년 동안 도둑질을 하고도 제자들이 알지 못할까요?
내 발꿈치를 들었다를 인용한 구분은 시편 41:9입니다.
- 시편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편 41에서 발꿈치는 이간질하는 자를 말합니다. 화자가 병에 걸렸을 때 앞에 와서는 부드러운 말고 걱정하는 척 하지만 돌아가서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발꿈치는 지체의 가장 아래에 있어서 뒤로 뒤쳐지다. 더럽다. 약하다. 의 뜻인 동시에 발이 몸을 움직이는 기능을 갖기에 의지를 행사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본다면 가룟 유다를 향한 예수님이 표현은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 인척 하지만 뒤로는 더럽고 추한 자로 살아가는 배신자의 속성을 드러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워하며 내뱉으신 것입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배신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배신자의 종말을 보고 계십니다. 한 번 마귀에게 사로잡힌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아프게 한건 그가 '내 떡을 나눠 먹는 자'(시편 41:9)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 '설마' 하며 놀랐던 것입니다. '의심하더라'의 아포레오는 '당혹스러워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혼란스럽다'는 뜻입니다. 아마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우리 중에 주가 주님을 판단 말인가?'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 주의 품에 기댄 자(그는 요한이다)에게 베드로가 직접 물어보라 눈치를 보냅니다. 그러자 당돌하게 '주여 누구이니까'(25절) 묻습니다. 주님을 떡을 떼어 주었고, 그때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갑니다. 유다가 나가자 그때는 이미 밤이었습니다. 너무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는 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의심하고, 유다는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 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죽음으로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논쟁합니다. 이게 공생애 3년의 결과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침도, 수고도 허사가 되었습니다.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유다의 배신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가 돈 궤를 맡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즉 가장 머리가 좋고, 신임하는 자였다는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것입니다. 사탄도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신 천사장이었으니... 유다가 그렇게 한 것도 무리가 아닌 듯합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준 자가 배신하는 것입니다. 귀신의 거처가 되어버린 가룟 유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자멸의 길로 걸어갑니다.
우리는 유다의 선택과 삶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지식과 이성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영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처음 사단이 속살일 때 단호하게 뿌리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받았고 간직했습니다. 결국 싹이 나고 줄기가 나고 유다의 마음에 가득 채워 버렸습니다. 시편 1:1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는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를 몇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선택되었지만(요 6:64)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던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는 심지어
예수님이 메시아 (유다가 이해하는 메시아)라고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유다는 결코 예수님을 향해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선생 이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때때로 믿음과 충성을 드러내는 위대한 고백을 하였지만(요 6:68, 11:16), 유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침묵하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의 부족은 아래 열거된 다른 모든 고려 사항의 근간이
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그리고 죄 사함과 함께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시각으로부터 비롯되는 수많은 다른 문제들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유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거의 없거나 전혀 갖지 못했습니다.
공관
복음서가 열두 제자 명단을 나열할 때, 조금씩 변화는 있지만 항상 똑같은 일반적인 순서로 열거됩니다 (마태복음 10:2-4;
마가복음 3:16-19; 누가복음 6:14-16). 일반적인 순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상대적인 친밀감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약간의 변화는 있더라도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야고보와 요한은 언제나 가장 먼저 나열되어 있으며, 이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와 일치합니다.
유다는 항상 마지막으로 열거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유다 사이의 대화 가운데 유일하게 문서화된 대화는 유다가 마리아에게 탐욕적인 동기를 가지고 말한 것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 받은 것 (요 12:1-8), 배신에 대해서 유다가 부인한 것 (마 26:25), 배신 그 자체
(눅 22:48) 입니다.
셋째, 우리가 요한복음 12:5-6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는 탐욕에 사로 잡혀서 예수님 뿐만 아니라 동료 제자들의 신뢰를
배신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유다는 단지 예수님에게 많은 추종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단체를 위해 거둬지는 모금으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다가 그 그룹을 위한 돈 가방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관심이 돈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요 13:29).
또한 유다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메시아가 로마의 식민지배를 전복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다스릴 권력을 행사할 지위를 취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유다는 새로운 지배 정치 세력으로 부상할 그분과의 연관을 통하여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을
수도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혁명 이후 자신이 지배 엘리트 중 한 사람이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유다가 배반할 무렵에
예수께서는 로마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죽을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가 로마를 전복시키지 않는다면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결코 아니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 배신을 가리키는 성경 구절들이 몇 있는데, 어떤 구절들은 다른 구절들보다 더욱 구체적입니다.
다음은 두 구절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편 41:9; 마태복음
26:14, 48-49 에 나오는 예언 성취 참조).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스가랴 11:12-13;
스가랴의 예언 성취는 마태복음 27:3-5 참조).
이러한 구약의 예언들은 유다의 배반이 하나님께 알려져 있음을 나타내며, 그
배반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수단으로 주권적으로 미리 계획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만일 유다의 배신이 하나님께 알려져 있었다면, 유다에게 선택권이 있었습니까? 또한 배신에 대하여 그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유 의지”의 개념과 미래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를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는 주로 직선의 방식으로 시간을 지나는 우리의 제한된 체험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시간 밖에 계시는 하나님을 본다면, 하나님은 모든 순간을 현재처럼 보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직선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직선으로 보고,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점차적으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는 기억하지만, 우리가 접근하고 있는 미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신 영원한 창조주이시므로, “시간 안”이나 시간의 선 상에 계시지 않고 시간 밖에 계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시간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원으로 생각하고 모든 점이 그 중심과 동등한 거리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유다는 적어도 사탄이 그에게 들어가는 시점 (요한복음 13:27) 까지는 주어진 선택을 맘껏 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예지 (요한복음 13:10, 18, 21)는 결코 유다의 선택 능력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다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하나님은 마치 현재를 보는 것처럼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선택에 대해서는 유다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마가복음 14:18). 예수님이 유다가 배신에 참여하는 것을 분명하게 한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이 배반에 대한 책임에 관해서 예수께서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 26-27에서 볼 수 있듯이, 사탄도 이 부분에 참여했으며, 그는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러하신 것처럼, 그분의 지혜 가운데 인류의 이익을 위해 사탄의 반란까지 다스릴 수 있으셨습니다. 이에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보내고,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이 패배하게 하고,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허락되도록 하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12-13-2024(금) 요한복음 13:16-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고 행하면(17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Now that you know these things, you will be blessed if you do them.
알고(에이도) 1492 εἴδω 스트롱번호1492
보다(마2:2, 막1:10, 요1:39), 알다(마2:16, 막10:42, 요9:25), 뵙다(마28:17), 보이다(막12:15), 당하다(행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2:15), 의논하다(행15:6).
기노스코(γινώσκω) - "알다" / 체험. 경험하다
마태복음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기노스코) 아니하더니.
누가복음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기노스코)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오이다 / 에이도 / 호라오 - "알다" / 이 단어는 "보다"는 뜻에서 출발한 단어
세 단어 중에서 호라오(ὁράω)는 (눈으로)보다는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환상과 같은 것을 볼 때 이 단어가 주로 쓰이는데 은유적으로나 영적으로 본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이도 / "보다"는 뜻인데 "알다"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영어로는 see에 해당합니다.
호라오와 에이도(εἰδῶ)를 같이 취급하는 이유는 호라오의 과거(aorist)는 εἴδομεν(에이도멘, we saw)
“보라/볼찌어다”는 Ἰδοὺ(이두, 2인칭 과거명령)일 정도로 에이도와 호라오는 의미와 어미변화가 같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I know 와 I see 의 차이는?
모두 "알다"는 의미이지만 전자는 "충분히 잘 알았다"이고, 후자는 단순히 알았다는 뜻입니다.
후자는 단순한 정보를 알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전자는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를, 후자는 약속 시간과 같은 가벼운 사실 등을 알게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헬라어 오이다/에이도/호라오는 영어의 I see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세 단어가 보다/알다는 의미가 된 것은 헬라어 동사 변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형이나 의미가 서로 비슷하고 그래서 그런지 변화된 형태도 같습니다.
호라오라고 하지만 (역 숨표 ( ̔ ) rough breathing) 때문에 호라오라고 발음할 뿐 낱말로 하면 오라오입니다. 예수를 브라질에선 "헤수스"라고 발음하는 것처럼, 토트넘 선수 Richardson을 히알리송이라고 발음하듯이.
오이다(οἶδα)는 에이도의 현재완료형인데 워낙 많이 쓰이다 보니, 이형(variant)이 기본형이 된 경우입니다.
영국 철학자 베이컨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아는 게 힘이다"입니다.
Knowledge is power라고 하지요.
여기 "날리지"는 기노스코라는 헬라어 "알다"(know)라는 동사의 명사입니다.
영어로 헬라어로는 그노시스(γνῶσις)라는 명사입니다.
헬라어로는 지식, 앎이 g(그) 발음으로 되는데, 영어로는 그것이 k(크)로 바뀝니다.
베이컨은 영국의 경험주의(empiricism) 철학자입니다.
"경험주의"는 모든 지식의 기원이 경험에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주의라는 영어 단어(-pir-)는 πεῖρα(페이라)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는데, 시험하다, 검증하다는 "페이라조"에서 유래했습니다. 경험주의는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험실과 현장에서 검증된 것을 우선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 그는 일개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영국의 대법관이고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과학 혁명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로 현장 지식과 첨단 지식의 선구자였습니다.
경험주의는 오직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실과 사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인데, 사도 도마와 같이 만져봐야 믿겠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이런 철학이지요.
그는 시무언도 언젠가 한 번 말씀하신 우상(idola)을 없애야 한다고 했지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따라서 베이컨이라는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철학자가 말하는 것은 경험이 힘이라는 것이지요. 아는 게 힘이라는 것은 경험이 힘, 현장이 힘이라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이 경구가 공부를 하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지요. 공부를 많이 하면 권력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닌데 말입니다.
당시 영국은
나침판이 도입되면서 섬 나라에 날개가 생기는 새 시대를 맞이합니다. 해양과 과학 시대를 맞이하여 이런 경험주의 사상으로 전세계를 정복하는 대영제국이 되었지요. 당시 다윈의 진화론이 인기였던 이유는 이론이 특이하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가 그보다 놀라운 것, 즉 해외에서 새로운 지식을 영국사회에 가져왔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경험 시대에 새로운 지식.
당시 지식은 이탈리아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 이성주의가 휩쓸었지요.
그 원조는 중세 스콜라주의이지요. 현장은 없고 이론만 있는, 폐쇄형 사회에서 일어난 학문이었지요.
아무튼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꼬지또 에르고 쑴, cogito ergo sum)"
이 문구는 생각/이성에 방점을 둡니다. 경험이나 행동에는 특별한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이론 위주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지식주의, 교리주의를 버린 영국의 경험주의 세계관은 현장 중심, 체험적 지식 존중으로 발전하여 전세계를 정복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대영제국을 만든 것이지요.
에이도는 원래 "보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ee 에 해당합니다.
영어로 I know 와 I see 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두 문장 모두 “나는 알아”이지만 전자는 "충분히 잘 알아"이고, 후자는 단순히 알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정보를 알았다는 것이지요. 만져보거나 확인하지 않은 지식, 눈으로만 본 것과 같은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경험적 지식은 기노스코, 머리와 이성으로 이해하는 지식은 에이도입니다.
따라서 전자는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를, 후자는 약속 시간과 같은 가벼운 사실을 인지했을 때를 의미한다.
에이도는 변형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헬라어 에이콘/영어로 아이콘입니다.
핸드폰에 어플 그림이 아이콘이지요.
형상이라는 말인데 보이는 형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볼 수 있는 형상.
성경에 보라, 볼찌어다, 보소서 등의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영어로 하면 lo, behold, look입니다.
헬라어로 이두(ἰδού) 혹은 이데(ἴδε)입니다.
철학용어 플라톤의 이데아(IDEA)를 "형"(形)이라고 하지요. 형이상학, 형이하학에서 형은 보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이다 / 에이도와 기노스코의 차이를 말해주는 성구 :
요한복음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오이다)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기노스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알아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체험한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3년간 최고 스승이신 예수께 교육과 훈련을 받았어도 기노스코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성령 받기 전과 후는 차이가 분명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행하면(포이에오. pŏiĕō) 4160 ποιέω 스트롱번호4160
12절부터 2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의미와 이에 대한 적용을 말씀합니다.
12절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묻습니다.
이 질문은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진정한 의도,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라는 말씀이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묻는 것은 "너희들의 삶 가운데 나의 행한 것과 같은 모습으로 행하여야 할 것" 이라는 의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가 행한 것처럼 너희들도 행하라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의도와 의미를 잘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바로 알지 못하고 행하는 모습에 대한 책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바로 알지 못했기에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본보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의도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보면 우리의 행할 길, 우리의 갈 바, 우리의 할 바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하셨던 그 말씀 속에 담긴 의미를 통해서 우리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소금이 되라!
소금은 귀금속이 아닙니다.
실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귀금속은 없어도 음식을 만들 수 있지만 소금이 없으면 음식의 맛있게 조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란 음식에 소금이 녹아들지 못하여 세상은 점덤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
빛은 형체가 없습니다.
형체가 없지만 빛이 들어가면 모든 형체를 드러나게 보여줍니다.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는 빛이 세상에 들어가 그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결과 거짓 지도자들이 자기 정체를 볼 수 없어서 마치 자기가 옳은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나는 옳지만 다른 사람은 부정하다고 소리칩니다.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선동질을 합니다.
빛이 없으므로 그 아우성은 점점 더 크게 울려퍼집니다.
기본이 무너진 세상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공의를 실현하는 길은 믿음의 사람들이 먼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소금과 빛으로 일어납시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독일의 메르켈(Angelika Merkel) 전 총리를 기억하나?
2021년 12월 7일 퇴임했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최고의 지도자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섬기는 리더십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였다. 무려 4번 연임하고 16년 동안이나 재임했고, 4년 연속 포브스(Forbes)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였다. 종교에 냉담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목사의 딸이었으니 얼마나 불리한 조건이었나? 원래 전공도 물리학이었다. 양자 화학 분야의 박사였는데 헬무트 콜에게 발탁되어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 자연보호, 원자력부 장관을 지냈고, 2005년 11월 22일부터 독일 총리가 되어 독일을 이끌었다. 그에게 따라다닌 별칭은 ‘엄마(Mutti) 리더십’, 철저히 양극단을 배제하면서 화합과 포용으로 나라를 이끌었기에 붙여진 별칭이다. 이게 바로 발을 씻어주는, 섬기는 리더십, 그녀의 리더십은 이념 따지고 편 따지고 과거 따지는 권위적 리더십이 아니었다.
메르켈은 총리 재임 중에도 늘 동네 아줌마 같았다.
옷도 항상 똑같은 옷, 사람들이 왜 매일 같은 옷을 입냐고 물으면 “나는 패션모델이 아니고 공무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다.
돋보이려고 기 쓰지도 않았고, 경직되지도 않았다.
그저 타인의 발을 씻어주겠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섬기는 리더였다.
메르켈은 예수님을 본받은 삶을 살았다.
아마 목사의 딸로 자라며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몸소 섬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를 높이셨다.
그리고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셨다. 단순히 섬기는 삶이 아니라 살리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이기에 제자들은 물론 우리도 알고 있는 일을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복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앙겔라 도로테아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 1954. 7. 17- 현재)
2005년부터 2021년까지 재임했던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
독일 역사상 최초로 연방총리직에 오른 여성.
동독에서 물리학자로 활동한 후 통일 과정에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헬무트 콜 내각에서 환경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00년에 독일의 보수 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의 의장직에 취임한 이후 2005년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했지만 어느 세력도 과반을 점하지 못한 헝 의회가 발생하자, 메르켈은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여 총리직에 올랐다. 2009년 총선에서는 더 보수적인 성향의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했지만, 2013년 총선에서는 다시 헝 의회가 발생하여 대연정을 구성하였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그리스 경제 위기와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난민 사태 등 국제적 현안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메르켈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2010년을 제외하고, 포브스는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선정하였으며[1], 2015년 '타임'은 '자유 세계의 총리(Chancellor of the Free World)'이라는 이름으로 '올해의 인물'에 선정하였다.[2]
어떻게 하면 복이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잘 알고 행하면 너희에게도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을 닦아주시는 일입니다.
“세족식”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쳐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사도행전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했잖아요?”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 딸이 시집갈 때 가르치는, 지혜로운 아내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대우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자존심’을 내세워서, 남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하면, 그는 힘으로 너를 하녀같이 부릴 것이다.
남편을 극진히 대접하라. 그러면 남편은 네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줄 것이다.”
“21세기를 이끄는 경영철학”이 뭘까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랍니다.
“서번트 리더십”? servant-머슴, 하인, 즉 종입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바로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발을 닦아주는 봉사헌신입니다.
“포춘”이라는 미국의 경제전문지에서, 세계 100대 기업의 회장, 사장, 리더들, CEO들에게 물었습니다.
“회사에서 리더, 사장, 회장, 지도자들, CEO들은 무엇입니까?”
“리더, 사장 회장 CEO 종이다. 종이라는 마음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사원들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Servant leadership,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섬김의 정신, 종의 정신, 봉사의 정신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사원들을 대하고 있더랍니다.
서번트 리더의 특성
- 인내
위기상황일수록 인간은 여러 가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동이 아닌 원칙에 따른 대응을 할 수 있는 인내심을 함양하는 것은 리더십의 본질이다. 서번트 리더는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관계에서의 인내와 자제를 중시하며 분노를 잘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조직 구성원들은 리더가 마음대로 대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다. 서번트 리더는 직원들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올바른 방식으로 직원들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야 한다.
- 친절
친절의 사전적 의미는 ‘타인을 향한 관심과 이해, 격려의 표현’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타인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는 관심을 표현해야 하며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원만한 관계는 타인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예의를 갖추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있음으로 친절은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중요한 속성이다.
- 겸손
겸손이란 진실하고 가식이 없으며 거만하거나 뽐내지 않는 것이다. 겸손한 리더는 자신의 가치관과 도덕성에 부합하거나 옳은 일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주어진 임무나 목표를 향해 강한 열정과 추진력을 보인다. 겸손한 리더는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비하하기 보다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한 리더는 언제나 타인의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반대 의견도 폭넓게 수용한다. 또한 겸손한 리더는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부각시키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존중
훌륭한 서번트 리더는 언제 어떤 경우든 주변 사람들을 소중한 존재로 대한다. 상대방에게 존중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위임함으로써 그들의 성장과 자기계발을 돕는 것이다. 적정 수준의 위임은 당사자의 능력과 기술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서번트 리더에게 있어 모든 사람은 소중한 존재로 다만 직무와 책임의 차이, 그리고 그 책임의 달성 여부에 따른 시장의 보상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 무욕
무욕이란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서번트 리더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며 우리의 기대와 욕구보다 타인들의 최선을 기꺼이 추구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서번트 리더십은 타인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변화,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집 앞마당부터 깨끗이 치울 때 비로소 아름다운 거리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용서
용서의 정의는 적대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리더의 주변 사람들은 예외 없이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리더는 타인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인내하는 기술(습관)을 배양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거나 낙담하면서 생겨나는 적대감을 극복하는 기술도 배워야 한다. 용서란 그릇된 행동이 낳은 결과를 당사자들과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적대감을 조금씩 극복하는 과정을 말한다.
- 정직
정직은 속이지 않는 것이다. 정직은 신뢰를 형성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정직한 리더와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무거운 책임의식을 느낀다. 직원들에게 책임의식을 부여하는 것은 리더의 몫이다.
- 헌신
헌신은 선택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강한 의지와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지금껏 언급한 모든 자질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 최고의 서번트 리더는 자신의 선택을 충실히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서번트 리더십은 개인과 조직 모두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헌신과 열정을 요구한다. 약속을 준수하고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려는 열정, 올바른 일을 추구하고 최선의 존재가 되려는 열정, 이 모든 것들이 서번트 리더십의 필요조건이다. 팀원들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서번트 리더십의 본질이다. 헌신이란 올바른 길을 추구한다는 도덕적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도덕적 용기란 내면의 양심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듣겠다는 의지, 생소하고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말한다. 또한 직원들이 올바른 행동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해주겠다는 단호한 결의도 여기에 포함된다.
- 타인의 욕구 충족
서번트 리더는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킬 줄 알아야 한다. 이 때 주의할 점은 타인의 욕구와 욕망을 명백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번트 리더는 일종의 봉사자이다. 그러나 타인의 욕구가 아닌 욕망을 충족시키는 리더는 봉사자 보다는 노예에 가깝다. 욕구는 'Need'의 개념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요구되는 물질적 또는 심리적 요구 조건’을 뜻한다. 욕구의 예는 ‘자아실현의 욕구’, ‘의미와 대의를 향한 욕구’, ‘존중 받고 싶은 욕구’, ‘뛰어난 조직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 등으로 정신적 가치와 관련과 깊다. 반면 욕망은 'Want'의 개념으로써 ‘물질적 또는 심리적으로 특별한 중요성이 없는 단순한 바람 또는 희망’을 의미한다. 욕망의 예는 봉급, 승진, 휴가 등으로써 물질적 가치와 관련된다.
권력의 정의는 ‘타인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지위나 힘을 이용하여 타인이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하도록 강요 또는 강제하는 능력’이다. 반면 권위는 ‘자신의 개인적 영향력을 통해 타인이 자신의 의도대로 기꺼이 행동하도록 하는 기술’을 뜻한다. 따라서 권력과 권위는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서번트 리더십은 이 중 권위에 기반하여 형성된다. 권력은 직함이나 지위 등으로부터 형성된다. 리더가 권력을 통해 조직 구성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권위가 결여된 이러한 영향력은 일반적으로 오래 유지될 수 없다. 권력을 통해 장기간 지속되는 영향력은 리더와 조직 구성원 간의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저해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권위는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봉사’와 ‘희생’의 정신으로부터 형성된다. 권위를 바탕으로 한 리더는 조직 구성원의 건설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이를 통해 조직 구성원은 리더의 인격체 자체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권위를 매개체로 한 리더와 조직 구성원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이러한 권위로부터 생성된 서번트 리더십은 조직 구성원에 대해 강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는다.
전통적 리더십과의 비교
그래서 세계 100대 기업이 된 것입니다. 그런 기업이 ‘복’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씨어스(Sears department store)라는 백화점은 창립해서 100년 동안 미국 내, 2350개 백화점 매장과, 그리고 1천1백개 할인 소매 점포를 소유한 대기업입니다.
이 거대한 기업체가 가지고 있는 경영철학이 뭘까요? “손님을 왕으로 섬긴다”
1세기에 들어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섬기는 리더쉽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손해냐, 이익이냐 그것을 따지지 않고, 종의 자세로, 섬김의 자세로 일하는 개인과 기업이 성공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조건 먼저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서 우리 예수님의 Servant leadership 입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발 씻김의 의미(요한복음 13:1~20)
요한복음 13장은 요한복음 전반부(1~12장, 표적의 책)가 끝나고 후반부(13~20장, 영광의 책)가 시작되는 부분에
있습니다.
후반부는 다시 13장~17장까지가 예수님의 고별사이고, 18~20장까지가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1~12:50절의 표적들의 책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와서 사람들에게 많은 표적들과 강론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했는가?
그러나 빛보다 암흑을 선호한 대다수 사람과 유대인에 의해서 거절이 되었는가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37절을 보면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였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했으나 그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론에 해당하는
1:11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입니다.
즉, 요한복음 1:11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책(13장~20장)은 표적들의 책(1장~12장)이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표적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그를 믿게 된 소수의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광의 책의 주제는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감이 주제입니다.
반면 표적들의 책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과 계시로 하나님을 계시함이 주제였습니다.
영광의 책의
아버지께로 돌아감은 요한복음 12:32절에 예언된 대로 그 사람의 아들이 들림 받으심입니다.
들림 받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게 되는데(요한복음 12:32), 그것은 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지표(地表)에서 들림 받음을 시작으로 해서 부활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높임을 받으심과 성령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영광 받으신 주는 그의 백성 가운데 주로 임재하심으로 절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영광의 책(13~20장)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그의 영광 받으심이라고 지칭합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의 사랑을 계시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인류를
위해서 내어 주심을 나타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심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은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 주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 됨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수난의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광 받음입니다.
요한복음 13~17장까지는 긴 예수님의 고별사로 되어 있습니다.
고별사를 시작하기 전에 13:1-30절에 하나의 표적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Sign 행위로 시작이 됩니다.
이 표적이 유월절 잔치 때 일어납니다.
상황은 지금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의 장면은 있고, 또 최후의 만찬의 의미가 요한복음 13장, 15장, 특별히 요한복음 6장에 집중적으로
강해 되어 있지만, 최후의 만찬을 성만찬으로 되풀이하라는, 즉 그것을 계속 기념하라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이 이곳저곳에 나타나고, 그 말들의 의미가 요한복음 6, 13, 15장 등에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그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함의 표징으로 식탁을 대하고 둘러앉은 이들의 발들을 씻기는 장면입니다.
당시 유대 종들은 상전의 발을 씻기는 의무를 갖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노예, 그것도 이방인 노예에게만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을 시켰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식사 전이 아니라 식사 도중에 발을 씻겼다는 것입니다(3절).
예수님께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바로 유대 상전에 대한 종의 위치보다 더 낮아진 행위입니다.
한 마디로 낮아진
행위입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입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는 낮아진 행위, 낮아짐의
극치입니다.
예수께서 위 세상에서 내려오신 분인데 내려오심의 극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연극으로 이루어집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상태, 이제는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κατάβασις
스트롱번호 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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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탈, 비탈길. [명사] 눅19:37.
관련 성경 / 내리막길(눅 19:37).
그의 아버지께로의 돌아감, 곧 그의 영광 받음, “아나바시스”(anabasis)가
시작되려는 가장 낮아짐의 상태는 십자가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발 씻김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해설입니다.
극이요 드라마입니다.
이 발을 씻긴 극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론적인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ἀναβαίνω 스트롱번호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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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올라오다(마3:16, 막1:10), 올라가다(마5:1), 자라다(마13:7), 오르다(막3:13), 향하다(눅19:28), 넘어가다(요10:1), 보내다(행15:2), 생각하다(고전2:9), 일어나다(눅24: 38), 상실하다(행10:4), 들어가다(행21:4), 들리다(행21:31), 널리 퍼지다(계20:9).
카타바시스(catabasis)와 아나바시스(anabasis)
예배의 본질은 독백 (monologue)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 (dialogue)이다.
즉 예배에 참여하는 두 인격체의 “대화적 행위”를 의미한다.
예배
인격체는 예배를 받으시는 삼위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인 사람이다.
이 두 인격체 사이에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일체의 의미 있는 인간행위(actus humanus)들은 모두가
예배적 행위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 두 측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라고 부른다.
카타바시스(Catabasis: God’s Decent to Man)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내려오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의미한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로 구현되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말씀과 행위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말씀 계시를
주시고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성취하셨다.
한마디로,
카타바시스는 하나님의 ‘아래를 향한’(downward)
행위이며, 구원론적 행위 (divines salvific
action)이다.
아나바시스(Anabasis: Man’s Ascent to
God)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받아들임으로 인간 내적 행위인 믿음과 외적 응답 행위인 예배 행위가 발생한다.
즉 아나바시스는
인간의 ‘위를 향한’(upward) 행위이며, 예배적 행위 (human liturgical action)를
의미한다.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하나의
통일체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구원론적
통일체’(salvific unity)이며, ‘예배학적
통일체’(liturgical unity)이다.
물론 이
말은 신적인 행위가 부족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되고 보충되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어떤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예배적 영광(human liturgical
doxa)을 돌리지 않더라도 그 분은 스스로 신적 존재론적 영광(divine
ontological doxa)을 가지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예배자로 부르셔서 교회를 삼으셨다.
이 구원론적이고 예배학적 통일체가 된
교회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의미 있는 다양한 방법과 상징과 언어와 표현들로 구현된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매우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미학을 담고 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는, 하향의 카타바시스와 상향의 아나바시스의
커뮤니케이션은 예배의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예배의 두 방향과 요소를 결정하고 규정한다.
1절을 보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에이스 텔로스”로서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상으로 텔로스는 “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끝까지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강조의 의미에서 “최종 목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 자신의 구속 사역의 목적을 완성하기까지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 목적(텔로스)을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라고 하십니다. 텔로스의 두 가지 의미 모두 십자가 사건을 그 정점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구원 사적인 의미와 윤리적인 범주로서의 의미를 다
가진 것이 세족식입니다.
본문의 구조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크게 4~11절과 12~17절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자는 세족식의 교리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고, 후자는 세족식의 윤리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윤리적인 모범의 범주에 집착을 해왔습니다. 예수님의 겸손, 섬김의 도를 보라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만 해석하였는데, 사실은 이것은 이차적입니다. 일차적인 것은 예수님이 백성을 죄로부터 깨끗이 씻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치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자기는 씻지 않겠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씻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상관(헬리어 : 메로스)이 없다는 말은 종말론적으로 받을 몫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속,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씻는다는 말은 제의적 용어입니다. “깨끗한”(카타로스)이라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세 번 사용됩니다(10, 11, 15:3). 요한복음 15:3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로 제자들이 깨끗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의 백성이 예수님으로부터 죄 씻김을 받아서 그들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언제, 어떻게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깁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서입니다. 그래서 발을 씻김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아주 극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해서 그들을 씻기는 행위이고,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그들의 죄를 깨끗이 씻기는 행위, 죄를 속하는 행위임을 미리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통 사랑의 행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백성을 사랑해서, 그들의 죄를 씻어 가지고 속죄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함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그렇게 하는 일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발을 씻기는 행위로 나타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윤리적, 모범의 범주로서 발을 씻김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족식에서 본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휘포데이그마”라는 말의 기본 뜻은
“복사”입니다. 휘포데이그마는 마카비 시대, 다른 사람이 본받아야 할 순교적 삶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휘포데이그마”와 같은 어원의 단어인 “파라데이그마”는 구약에서 성전의 모형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출애굽기 25:9, 역대상 28:11). “파라데이그마”는 성전 건축을 위한 일종의 건축 모형인 셈입니다. 성전 건축가들은 이 모형을 보고 성전을 짓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새 성전의 모델이 되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새 성전으로, 성전 된 그의 제자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로 섬김, 사랑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세족”은 크게 두 가지 경우에 시행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 자기의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 물두멍에서 자기의 손과 발을 정결하게 하였습니다(출애굽기 30:17~21, 40:30~32). 일반 유대인들은 제물을 제단에 드릴 때, 자기의 손과 발을 씻어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결 예식은 성전 출입의 필수 요소였습니다. 세족의 또 다른 전통은 가정 방문 정결 예식입니다. 어떤 방문객이 한 집을 방문할 때, 집주인은 발 씻을 물을 제공하며 환대합니다(창세기 18:4, 19:2, 24:32, 누가복음 7:36~50).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 십자가에서 속죄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새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새 언약의 공동체입니다. 새 언약의 공동체 교회에 언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으로 성립이 되느냐면 새 계명으로 됩니다.
옛 시내산 언약은 모세율법으로 표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사랑을 통해서 이제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로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속죄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새 언약의 제사입니다. 새 언약의 공동체에 주어지는 새 언약은 무엇으로 표현이 됩니까? 새 계명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탄생 되는 새 언약의 공동체는 온통 사랑으로 특징 지워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그들을 위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그들을 위한 사랑이 서로 간에 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발을 씻김의 두 번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을 보이셨는데 사랑은 서로를 섬기는 것이라는 모범의 범주가 이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관계 회복을, 그리고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의 부요함. 즉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됨을 보이십니다. 철저한 낮아짐, 사랑의 극치를 보이심으로, 이 모든 구원의 행위가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새 언약의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인데, 예수님의 자신들을 향한 사랑이 서로 사랑함으로 모범의 범주로서 계속 이루어지는 일이어야 함을 보이십니다. “카타바시스”(catabasis)일 때 비로소 “아나바시스”(anabasis)가 시작이 된다는 귀한 교훈을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발을 씻기는 극, 드라마를 통하여 일깨워주십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이(낮아짐의 극치, 카타바시스) 영광의 사건(높이심, 높아지심, 아나바시스)인가를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역설적인 삶을 살아내는 자임을 강조합니다.
1. 예수님을 선생으로, 주님으로 믿고 따라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앉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는데, 너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옳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내가 너희 선생이다, 내가 너희들의 주다> 라고 확증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가 닮아가야 할 모범으로써 선생님, 내 삶의 가치와 기준이 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잠시 좋은 감동을 받기 위해, 일시적인 위로를 얻기 위해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일시적인 감정이나 일시적인 의지를 따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예수님은 내가 앞으로 남은 인생을 걸어감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안내자로써의 선생이십니다.
지난번
제가 어디를 가는데, 핸드폰 네비게이션을 켜고 갈때, 바로 앞에서 좌회전 하라 해서 좌회전하고 들어갔는데, 따라 들어가 보니
막다른 길인 것입니다.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만약 이렇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네비게이션은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네비게이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의 선생이시며 또한 내 인생의 모든 방향과 길을 인도하실 가장 믿을만한
분으로써 주님이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윗사람에게 예의상 선생, 주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선생, 주라는 호칭은 결코 예의상 불러주는 그런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가르침 받기 원한다는 의미에서 <선생>이요,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기 원한다는 의미에서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나, 주로 부르는 것이 맞다, 옳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주와 선생으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 역시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 내가 <섬김의 모범>으로 발을 씻겼으니 너희 역시 나처럼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마태복음 11:28-29절에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부모들은 부모대로, 자녀들은 자녀대로, 사장들은 사장대로, 종업원들은 종업원대로…. 이 쪽에는 이 쪽 입장이 있고, 반대쪽에는 그쪽 입장이 있습니다. 그렇게 수고를 하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각자 각자의 개인적인 짐들이 있습니다. 죄의 짐, 고민의 짐, 괴로움의 짐, 또한 병으로 인한 짐… 실패로 인한 짐등… 이런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의 수고를 안다, 너희들의 무거운 짐을 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휘청 휘청 걷는 것을 안다..> 하십니다. 너희 짐이 그렇게 무거우니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어떻게 내가 너희들을 쉬게 할 수 있느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쉼은 어디서 얻습니까? 부드러운 곳, 따뜻한 곳,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에서 얻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부드러운 안식, 따뜻함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겸손하십니다. 교만하고 높은 곳에 쉼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집에 갔을 때 교만하고, 아래로 내려다 보는 곳에 평안이, 쉼이 있습니까? 불편한 곳에 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겸손하십니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분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죄인으로써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의 자리로 낮아지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 분 안에 쉼이 있습니다.
그리고<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짐을 지고 가면 무겁지만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께서 메어주신 멍에, 주님께서 이끄시는 멍에를 메고 주님의 이끄심을 따를 때, 주님께 배우며 따라 갈 때 그 때 우리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세상의 짐, 죄의 짐은 무겁지만 우리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진정한 복은 우리 예수님을 나의 평생의 인도자, 나의 평생의 삶을 이끄실 선생이요, 주님으로 믿고 그 분을 따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내가 선생으로 주님을 본을 보였으니> <너희 역시 섬김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주님의 본을 따라 <섬기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가장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는 것을 행복을 느끼신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써 행복을 누리셨고 우리 역시 이런 행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만나 쉼을 누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쉼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만족을 내려놓고, 세상의 기쁨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누립니다.
오직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안내자인 선생으로, 주님으로 믿고 따르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분을 믿고 따른다면 그 분의 섬김의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가장 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자신의 위치를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예수님은 제자들에 간곡히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간곡히 너희들에게 부탁하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꼭 명심해라><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꼭 명심해라>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종들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종들이다,너희가 결코 주인 된 나보다, 하나님보다 크거나 앞설 수 없다" 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보냄을 받고 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보냄은 받은 자가 어찌 보낸 자보다 클 수 있겠느냐? 사신이 왕보다 결코 크지 못하고 앞서지 못하듯이, 너희는 나의 보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결코 주님보다 크지 못하고 앞서지 못한다… 이것을 진실로 진실로, 꼭 명심하도록 하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써,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들로써 복 받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는 <나는 결코 주님보다 크지 못하며 결코 주님보다 앞서지 않으리라> 하는 자세입니다.
한 여자 게스트의 체험적 고백
언젠가 TV에 한 게스트가 체험적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한 리조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멋있게 차려 입고 하이힐을 신은 한 여자가 그만 잘못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화가 난 이 여자가 웃었다는 이유로 이 사람의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무릎을 꿇리고 빌라고 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갑질을 한 것입니다. 더군다가 상급 직원을 불러서 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릎을 꿇고 빌게 되었답니다. 너무나 억울해서 뛰어서 직원 숙소로 돌아와 통곡하며 울었답니다.
그렇게 통곡하고 울고 나서 그 순간 결심을 하였답니다. "그래, 손님은 왕이다. 서비스 하는 사람도 전문가이다"
대학 졸업후 그 회사에 면접을 보았답니다. 면접하는 사장 앞에서 이 회사를 지원하게 된 동기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채용되었다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이겨내서 다행이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경우지만, 세상에는 참 갑질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만함 때문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의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요? 돈이 많거나 혹은 권세가 있어 거들먹거린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참 섬김의 삶을 살아간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종이며, 주님의 보내신 자일 뿐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이나 화려한 프로그램보다는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사랑의 섬김과 봉사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떼들로 낮에는 한센병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한센병자들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그분의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들 섬김은 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와 섬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님은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 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정양순 사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긴 분이었고, 그 다음 남편을 섬긴 분이었고, 그리고 한센병자들을 섬긴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한센병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한센병자 교회였습니다.
보냄 받은 자, 종임을 알고 사신 분들입니다. 목회자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누구든지 우리의 위치는 결코 주님의 보다 앞설 수 없고, 주님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이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 위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섬김의 기쁨을 누리기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설 자인지 알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3. 주님의 택한 자들임을 알고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
18절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가 택한 자들>이라고 하신 말씀은 처음부터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삼기 위해서 부르신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역시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배와 자신들의 아버지 세베대를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모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자신들이 원해서 제자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심은 택하신 자 한 명 한 명의 성격과 기질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의 결과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예수님의 전지 전능성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없이 우리가 어찌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겠습니까? 부르신 주님은 12제자들의 한 명 한 명의 성격과 기질과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고 계시듯이 전지전능하신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를 이렇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구인지 앎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요6:70)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배반할 가롯 유다까지도 그를 부르실 때부터 이미 그의 배반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듯이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도망할 것과, 특히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에 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 시 41:8의 인용이며 시55:12-14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 시편들은 압살롬의 반역을 배경으로 지은 다윗의 비탄 시입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모습을 다윗이 너무나 총애하던 모사 아히도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총애했던 인물이지만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고 다윗을 쫓아냈을 때, 이 압살롬과 함께 했던 인물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자신을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배반했던 아히도벨은 나중에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고향 집에 돌아가 목메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배반한 후 목매어 죽습니다. 가룟유다의 배신에 대해서도 다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확신시킵니다. 결코 <나의 택함 받은 자들임을 의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
"나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나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보낸 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이시며 그분 예수님께서 복음을 위해 보낸 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제자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확신과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뜻이 전해진다 라고 하는 사실에 결코 부끄러워 여기지 말고 확신하며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택함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사람은 정말 복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선생으로, 주님으로 믿고 따라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종이며, 보냄 받은 자란 사실을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신이 택함을 받아 주님을 증거하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12-12-2024(목) 요한복음 13:12-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본을 보였노라(15절)
I have set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do as I have done for you.
영국의 61대(1940. 5. 10 ~ 1945. 7.26) 63대(1951. 10. 26 ~ 1955. 4. 7) 총리 역임
처칠이 어쩌다 운전사에게 차를 급히 몰게 했습니다.
그런데 교통 경찰관이 수상을 태운 자동차가 과속으로 달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차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수상께서 타셨소."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는 경찰관에게 운전사가 말했습니다.
"알고 있소. 그러나 과속은 과속이오. 딱지를 떼겠으니 벌금을 물도록 하시오."
경찰관이 끄떡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처칠이 직접 나섰습니다.
"이봐! 내가 누군 줄 알아?"
처칠이 그 특유의 여송연을 입에 문 채 언성을 높였습니다.
"예, 얼굴은 우리 수상 각하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은 비슷하질 않습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결국 처칠은 딱지를 떼였습니다.
처칠은 의회에서 업무를 마치고 올라와 경시총감을 불렀습니다.
그 딱지뗀 경찰관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그 경찰을 찾아 특진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경시총감은 과속차를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라는 규정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규정을 준수하는 본을 지도자가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아름다운 신앙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첫번째가 되고 그 뒤로 여러 명의 아이들이 순번을 정하여 첫번째 아이가 하는 행동을 따라하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첫번째 아이가 하는 행동과 전혀 다른 행동이 마지막 아이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모든 아이들이 크게 웃으며 서로 즐거워했던 놀이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던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본보기가 된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을 가리켜 "제2의 성경" 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이 거짓과 교만과 게으름으로 보여지면 세상 사람들이 그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나타난다면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좌파의 지도자를 선택하여 거짓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지도자를 세워 정의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대립 구도에 놓여있습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시점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거짓과 범죄로 가장한 철면피의 지도자를 선호하는 사람들 중에 성도들도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진리편에 서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의 골육일지라도 거짓으로 선동하고 잘못을 정당화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면 냉정하게 끊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언제나 진리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일시적인 즐거움보다 영원한 기쁨을 붙잡아야 합니다.
때로는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하여 당장의 아픔과 고통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인내와 소망의 깃발을 높이 들고 천성을 향하여 앞으로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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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5262) 후포데이그마(hüpŏdĕig- ma) ὑπόδει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5262
- 어 원/ 5263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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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모형, 원형, 견본, 요13:15, 히4:11, 약5:10, 벧후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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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방, 복사, 모사, 히8:5,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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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본(요13:15, 히4:11, 벧후2:6), 모형(히8:5, 9:23).
보였노라(1325) δίδωμι 스트롱번호 1325
1. 주다. 2. ~을 ~에게 주다. 3. 막 2:26
베드로전서 2:20-21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But how is it to your credit if you receive a beating
for doing wrong and endure it? But if you suffer for doing good and you
endure it, this is commendable before God.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To this you were called, because Christ suffered for you, leaving you an example, that you should follow in his steps.
세상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부르신 이유는?
잘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8-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Finally, all of you, 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be sympathetic, love as brothers, be compassionate and humble.
Do not repay evil with evil or insult with
insult, but with blessing, because to this you were called so that you
may inherit a blessing.
이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바울의 경우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라는 권고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라’라는 표현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자신을 드렸다’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그가 고난을 받으셨다’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역사적인 예수를 강조하며 그분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다는 교리적이고 결과적인 사실보다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촉구합니다.
하지만 그 고난과 죽으심의 십자가가 동시에 ‘내가 따라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주저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오신 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이 길이 하나이며,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반드시 좇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죄가 없다’ 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으실 수 있는 자유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이미 세팅된 기계 같은 과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자유의 길이었고, 순간순간 선택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며,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씨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온전한 자유를 드렸습니다.
기꺼이 자신을 드렸습니다.
자유롭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유에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로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볼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죽음과 죄와 허무의 문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2-20)
13장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말씀하신 일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이 계시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공생활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겠느냐고 분량적으로 묻는다면 적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하신 한 사건 한 사건이 계시적 의미가 있다고 할 때, 거기에는 대단히 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신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행동 하나하나가 말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밤에 행해진 성만찬 예식과 말씀은 더욱더 소중한 계시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신 사건은 바로 앞장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은 질투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여 자기들끼리는 물론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일 조차 잊어 유월절 잔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발을 씻기신 후의 일입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요 13:12)
주어진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13:7에서는 "너희들이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고 지금 모르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만, 그러나 12절의 질문에서는 그래도 알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아니, 점점 더 깊은 뜻을 알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 뜻을 모르면 무효입니다.
물질을 주고 받았다는 물리적 현상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물질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물질이 상징적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에 사랑을 담아서 주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인 유익만 가지고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정신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가령, 돈을 쓸 줄 모르는 어린 자식에게 무작정 많은 돈을 주어서 이 자식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돈을 준 그것이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었다고 결코 사랑은 아닙니다.
문제는 받는 자가 그 물질 속에 담겨진 의미를 받고 소화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사랑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함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적인, 물질적인, 구체적인 사건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그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고, 모르는 줄을 아시지만 그래도 다소라도 알기를 원하시며, 점진적으로 깊이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발을 씻겼다고 하는 사건 그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이웃을 알고, 나를 아는, 즉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을 놓고 볼 때에 베드로는 얼마나 초라해졌습니까?
베드로 입장에서 본다면, 베드로 자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제자들끼리의 관계도 다시 알아야 하며,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도 알아야 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날 아침, 주님은 배를 타고 건너가시는데, 그 배 안에 떡이 없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바리새 교인들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숙덕거리며 예수님이 시장하신 줄로 잘못 알고 서로 책임을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에게 회계를 맡으면서 왜 진작 떡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또 가룟 유다는 수제자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책임을 전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떡이 없음에 대해 서로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지켜보시던 예수님은 어이없어 하시며 오천 명을 먹이고 떡이 얼마나 남았느냐, 아직도 떡이 없음을 가지고 염려하느냐고 그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누룩이라는 말에서는 오직 떡만을 생각하는 미련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보았고 들었고 먹기까지 하는 경험을 했었지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이 본문에서도 발을 씻기신 그 의미를 물으셨지만, 제자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깨달음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고 가슴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론적이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나아가서는 실천하면서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접 사건 속에 부딪쳐서 몸이 닿아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이란 사랑을 받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라도 사랑하고서야 사랑받은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고 물으셨지만, 끝내 그 뜻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베드로서에 볼 것 같으면) 저들이 한 가지 두 가지씩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오늘 네가 당한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제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가슴으로 벅차게 깨닫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본보기로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지금 열 두 제자들은 질투로 팽팽히 맞서서 서로 먼저 발을 씻겨 주지 못하고, 씻김을 받은 후에야 씻기겠다고 눈치보다가 결국 씻기 않고 잔치에 임했습니다.
이런 순간에 누군가가 먼저 씻기는 일을 시작하는, 즉 주도권을 잡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 모두가 먼저 사랑 받고 사랑하겠다든지, 용서받고 용서하겠다고 기다린다면, 사랑 받거나 용서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 문에 들어서면서, "이 교회에는 사람이 없구나"하고 불평을 합니다.
교회에서 사랑하는 자가 누구이며 사랑 받는 자가 누구입니까?
도대체 주는 자가 없는 친절을 누가 받을 수 있습니까?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먼저 주는 자의 입장에 서자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랑의 길을 떠난 한국 교인들"이라는 설교가 생각납니다.
보따리를 싸들고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려 보십시오.
누가 나를 사랑하며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나, 방향을 돌려 내가 먼저 사랑해 보십시오. 어디서나 먼저 본을 보이면 여기저기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미움받았다고 미워하고 사랑 받았다고 사랑한다면 그는 인격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존재(being)가 아니라, 다만 되어진 바(becoming)로서 벌레와 같은 환경의 동물일 뿐 아무 의미가 없는 삶입니다.
미움받았다고 미워하고, 도둑맞았다고 도둑질하며, 나쁜 말 들었다고 욕하는 식으로 악순환하면 어디서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누군가가 미움받고도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대하는 주도적인 본보기가 있어야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열 두 제자들 그대로 두면, 시기와 질투가 점점 심화되어 서로 악수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 분위기를 깨뜨려 본을 보여야 합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지도자가 되어서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본보기가 되어 보십시오. 화목의 본, 사랑의 본이 되어 보십시오. 대체적으로 앞장서기는 힘들어도 뒤따라가기는 좋아합니다. 즉, 닮기를 좋아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나 본이 필요합니다. 본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요, 편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본을 보이시되, 본문에 보면 주(註)를 달았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 : 14-15) 받지 못하고 주는 주도적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도 받지 못하는 자가 있어야 공짜로 받는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었다고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은 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는 또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사과나무를 심었고, 다음 사람은 그 사과를 따먹고, 나는 또 다른 사람이 심은 사과를 먹는단 말입니다. 내가 심었다고 반드시 내가 먹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말씀은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은 너희들이 다시 내 발을 씻으라는 뜻이 아니고 너희들이 발을 서로서로 씻기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라는 깊은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본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을 베풀었으면 즉각적으로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되돌려 받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을 베푼 것으로 만족하고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본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17절에 보면,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고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대개 모르고 행하기 때문에,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행하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본래 배신도 있고, 거짓도 있고, 선한 일에도 나쁜 소리를 듣는 것을 충분히 알고 출발하면 무슨 문제입니까? 아무 생각 없이 덜컥 출발을 하고 보니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젊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그 기분으로 모든 것이 그렇게 좋은 줄만 알고 결혼했다가 얼마 후에야 아닌 것을 알고 후회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리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 즉 미리 지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후회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기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이 사건에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첫째, 스승으로서 제자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인이 종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낮추어서 종을 섬겼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모릅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고,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치와 논리를 따져서 사랑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때로 논리를 무시하고 초월합니다.
아랫사람, 윗사람 가리는 일반적인 질서가 아닌 또 다른 질서가 존재한단 말입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은 율법이요,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기는 것은 은혜입니다.
섬겨야 할 자가 마땅히 섬기는 것을 공로라고 하거나 선행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섬김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태복음 20:28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섬김의 뜻은,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낮추어서 섬긴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내가 크냐, 네가 크냐고 따지겠습니까?
당연히 섬기기만 하면 됩니다.
윗 자리, 아래 자리 없이 섬기자는 것입니다.
언젠가 본이 되게 섬기는 좋은 분을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뉴욕의 한 은행장인데, 교회에서는 회계도 아닌 회계보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에서는 큰 은행장이었지만, 주일이면 오후 3시까지 돈을 맞추고 계산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교회란 바로 이런 곳입니다.
아래 자리, 윗 자리 없이 서로 봉사하고 섬기는 곳입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허리를 굽혀서 종의 발을 씻기는 것이 섬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의 발을 닦으시며 너희도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문적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는 희생적 권위입니다.
어머니가 훌륭하다는 것은 바로 이 희생의 권위 때문입니다.
희생의 권위를 인정하기 전에는 어떤 말을 해도 가슴이 열려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섬김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발 씻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씻겼으니 너희들도 서로 씻어 주라"
즉 내가 씻김을 받았기 때문에 받았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씻어 주라는 것입니다.
흔히 받고서도 받지 않았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많이 받았고, 너무나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가 넘칩니다.
내가 준 것은 없고 받은 것만 많다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반대로 나는 한 번도 섬김을 받은 일이 없고 섬기기만 하고 주었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불평만 하게 되어 피곤하기만 합니다.
다윗처럼 항상 받은 자의 마음으로, 어찌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다 보답할까 하고 받은 마음으로 꽉 차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결국, 겸손한 사람은 무자격한 자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다고 가슴벅차 하며 살아가고, 교만한 사람은 받은 것이 없다며 계속해서 투정하고 피곤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은 "빚진 자"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세째로, 그 속에 가룟 유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가룟 유다가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깨끗지는 아니하니라,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다",
즉 마귀에 씌였다는 것을 아시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그들 모두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봉사할 때에 베드로 가리고, 야고보 가리고, 가룟 유다 가려서는 안 됩니다.
선한자의 발이나 악한 자의 발을 가리시지 않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낙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흔히 나의 사랑을 알아 줄 만한 사람만 사랑하고,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사랑만을 골라서 계산적으로 하다 보면, 여기에는 낙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발까지 예수께서 씻기셨다는 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나, 보답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이, 섬기는 자의 자세로 봉사하면, 즉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하면 절대로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 성경적인 해석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
성경적으로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시다 저들에게 체포당하실 때도(요 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셨고, 또한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칼을 빼어 귀를 치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3-54)고 예언의 말씀을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적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봉사, 선교가 성경의 어느 말씀에 의해 하고 있느냐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일하는 도중 무슨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도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 사건을 설명하는 가운데 "저는 제 갈 곳으로 가니라"고, 즉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6: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악한 자에 대해서도 적당하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사건 속에 있는 신비로운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불쌍히 여겨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하필이면 너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사건을 풀이하고 이 모순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배반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섬겨야 합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예수님도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나는 너무나 받은 것이 많기에 말없이 다만 섬길 뿐입니다.
나아가서는 악인과 모순을 극복하는 초월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해석을 얻고, 모순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 선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한복음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일평생 배우며 삽시다.
바르게 가르치며 삽시다"
믿음으로
가지는 꿈은 막연한 희망사항과는 달라요. 믿음의 꿈을 꾸세요. 사업도, 직장도, 앞날도, 행복도 초점을 주님께 맞추어 나가면
영육간에 더 풍성한 열매를 거둘 때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씨를 뿌려야 거둘 것이
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안 되는 자녀문제, 염려하고 한숨쉬어 보아도 별 도리가 없어요. 걱정하는 그 시간에,
염려하는 그 시간에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여 오늘을 살면 주님께서 앞날을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날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와 같은 상황이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니 생기가
들어가서 다시 살아나고, 큰 군대가 되었던 것처럼,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의 믿음의 살아나고, 용기가 살아나고, 생활이
살아나고, 경제가 살아나고, 건강이 회복되어 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바라보는 믿음의 꿈을 가지고 어려운 이 시대를 이겨 나가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눈물의 자녀는 결단코 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내
생각과 달라도 잘 인내하는 곳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까지 가는 곳에 결국은 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내가 먼저 믿음준비, 기도준비, 생활준비 잘 하셔서 역사의 주인공이 되거니와 가까이 있는 내 자녀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더욱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는 복된 도구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은 말한 대로 행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영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나
교사는 물론이고, 부모나 기성세대는 알게 모르게 이미 자녀들이나 차세대들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좋은 본인가? 나쁜
본인가? 자녀들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게 아니라 보는 대로 배웁니다. 안 가르친 것도 배워요. 어느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한참 흑판에 글을 쓰고 있는데 아이들이 고개를 좌우로 길게 빼며 열심히 따라 적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선생님, 안 보여요.
대가리 좀 비켜 주세요? 왜 그렇게 된지 아세요? 이 아이는 머리를 대가리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거예요. 평소 집에서
부모가 늘 하는 말이 ?아이고, 이놈의 돌대가리야, 도대체 이 대가리 속에 뭐가 들어 있길래 이렇게 공부를 못 하는 거야?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머리는 대가리다? 자연스럽게 박혀버린 거예요. 어머니의 가르침은 어린 아이 때로 끝나지 않아요. 무덤까지
갑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어머니예요. 수산나는 가난한 집에 19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말하기 전부터 주기도문을
듣게 해서 제일 먼저 주기도문 외우게 하고, 사도신경 외우게 하고, 십계명 외우게 했어요. 잠 잘 때는 머리마다 기도해 주어서
잠들게 했어요. 이 사랑을 받고 자란 자녀들이 다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어요. 가정은 단순히 먹고 쉬는 곳이 아니에요. 부모는 먹을
것, 입을 것, 학비나 용돈을 주는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부모가 더 이상 교사이기를 포기한
데 있습니다. 어머니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는 스승은 없습니다. 어머니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을 만드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아이들의 가슴에 가장 뚜렷한 자국을 남기는 것은 어머니예요. 행복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아요. 내 가정에서 내가 할
일을 묵묵히 다 할 때 복이 있고, 보람이 있는 거예요. 어머니의 행복은, 어머니의 아름다움은 자녀를 잘 길러 내는 거예요.
토스토예프스키는 말하기를 "좋은 기억처럼 훌륭한 교육이 없다"
최대의 교육은 좋은 기억을 자녀들에게 우리가 가르치는
심령들에게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를 안고라도 새벽제단을 쌓는 것,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이 귀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구하는 믿음, 하나님 보시기에도 귀한 일이기에 복을 주시거니와 자녀의 가슴에,
제자들의 가슴에 깊이 박힌 좋은 기억이 됩니다.
나중에 다른 길로 가려고 하다가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기도하는 그 기억이,
선생님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던 그 기억이 바른 길 가게 붙들어 주더라는 거예요.
거창한 것으로 이 나라가 좋아지는 것 아니에요.
내가 자녀를 믿음의 자녀로 만들면 우리 가정이 좋은 가정되어지고, 내게 맡겨진 어린 영혼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면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새로운 소망이 보일 줄로 믿습니다.
내가 먼저 이 귀한 일에 제물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눈에 보이는 이유 때문에 신앙 교육을 미루지 마세요. 청년 시절에 열심히 믿고 집사까지 하던
사람이 의사가 되어 병원을 개업하고 나더니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친구가 안타까워서 권면을 하니까 "나 자가용 산 다음에
나갈께" 차를 산 다음에도 안 나와요.
"병원 빌딩 하나 짓고 나갈께" 얼마 후에 만났더니 안색이 안 좋더라는 거예요.
왜 건강이
안 좋아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소화가 좀 안 되어서 그래" 몇 달 후에 이 친구가 좀 와 달라고 해서 달려가 보니 벌써 간암
말기가 되어 복수가 차 있더랍니다.
의사이면서도 자기 몸을 모르는 것이 사람이에요.
결국은 물질도, 건강도, 생명도, 하나님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내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자녀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르치는 제자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공부 할 때니까, 지금은 돈 벌어야 하니까, 아니에요. 믿음의 결단은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가슴에서, 교사의 가슴에서 기도를 듣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녀를 사랑합니다. 좋은 것 있으면
자녀에게 주고 싶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내게 맡겨주신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기도로 표현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자녀 문제입니다. 철들 때가 되었는데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실망시키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부모에게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부모의 눈물의 기도가 있다면 그 자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가슴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축복의 손을 활짝 펴실 줄로 믿습니다. 자녀들에게 우리가
가르치는 어린 생명들에게 기도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시는 복된 부모, 복된 교사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숙해 질수록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성숙한 자녀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요. 그래서 철들고
나면 칭찬보다 책망이 귀한 줄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무엇인가 주님이 내게 깨달음을
주십니까? 해야 할 일거리를 보여 주십니까?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까? 먼저 주님의 뜻을 깨닫는 자가 복있는
자요, 깨닫는 대로 헌신하며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는 자가 참된 축복의 사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뿐만 아니에요. 시간에 맞추어서 차량 봉사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몇 백명이 먹는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 일에
몸을 드리는 일도 귀한 일입니다. 집안 청소하기도 어려운데 넓은 본당과 교회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에요. 찬양대로 봉사하는 분도 귀해요. 찬양하는 시간은 한 3분 정도, 준비하는 일에는 많은 수고가
따르잖아요? 매주 안내로 봉사하는 손길도 귀하고, 구역에서 충성하고, 각 기관 각 부서에서 말없이 충성하는 손길들이 다 귀하고
복된 손길들입니다. 사람은 혹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알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 상급을 예비해 놓으셨거니와 이 땅에서도 좋은
것들로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른 것 기대하지 마세요. 주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거예요. 주님 인정하시면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부름받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필요하고 요긴한 존재들이에요. 중직자들만이 아니에요. 어린 생명 하나라도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부르셨고,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는 다 요긴한 존재들이고, 각기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주님께서
주신 다양한 기질과 은사들을 주님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이 복입니다. 내가 주님의 좋은 도구로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시대에 할 일을 주셨다는 것이 축복이에요.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게 복이 아닙니다. 일 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오. 일할 거리가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더욱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받는 복된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주신 일하면서 자기에게 은혜가 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볼때도 은혜를 받는다면 대단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지 않으면 결국 마귀가 써요. 내 시간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사탄이 쓰게 됩니다. 내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아니하면 사탄의 노예가 되고, 죄의 종노릇하게 되는
거예요. 주님께 쓰임받는 복된 길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즐겁게 헌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것 조금 부족해도 내가 믿음으로 살고, 우리 자녀와 차세대를, 믿음으로 바로 가르치고 길러 놓으면 세상을 위하여도
요긴한 도구가 됩니다. 링컨을 보십시오. 하나님도 잘 믿고, 나라를 위해서도 큰 일을 했어요. 아이젠하워나 루즈벨트도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는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큰 인물된 거예요. 잘 안 믿고도 큰 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류 역사에
위대한 지도자의 80%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노벨상 받은 사람의 80%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지 1년
9개월부터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설리반이라는 한 여자가 이 사람을 사랑하고 용기를 주고 기도해 주고 도와서
세계적인 명문 하버드를 졸업하고 20세기 인류 역사에 최고의 인물이 되게 했고, 록펠러는 세계적인 거부인데, 16살에 주급
5달러를 받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어요. 그런데 자신의 개인 수입만으로, 대학을 24개, 교회를 4,928개를 세워
헌납을 했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일을 이룬 거예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결국 좋은 사람,
위대한 사람으로 쓰임받게 되는데, 이런 복이 언제 임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헛되지
않아요. 이사야 55:10,11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가르치고 들려지는 말씀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고, 갈급한 심령을 적시고, 마른
심령에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만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말씀만이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 될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믿음으로 듣는 자의 심령 속에서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말씀 듣는 시간마다 놓치지 마십시오. 나 자신 뿐 아니라 자녀를 말씀듣는 자리를 귀하게
여기도록 기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자라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돌짝 밭 되지 아니하고, 가시덤불에 뿌린 씨앗 되지 아니하고,
길가에 떨어진 씨앗 되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밭에 떨어진 씨앗 되어서 100배, 60배, 30배 열매맺는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현실은 아닐지라도 눈에 보이는 환경과 세상, 그 너머를 보는 지혜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멀리 바라보며 살아서 크게 이루고, 크게 남기는 축복의 길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잠간의 고통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고통은 잠간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의 길에는 시기가
있습니다.
은혜 주실 때 은혜 받아야 역사가 나타나고, 뿌릴 때 뿌려야 거둘 것이 있어요.
다른 사람 다 거두는 시기에, 다른
사람 거두는 풍성한 열매를 보고 씨를 들고 나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안에서 큰 꿈을 갖는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디모데전서 4:12)
아무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메데이스 수 테스 네오테토스 카타프로네이토 알라 튀포스 기누 톤 피스톤 엔 로고 엔 아나스트로페 엔 아가페 엔 피스테이 엔 하그네이아.
μηδεις σου της νεοτητος καταφρονειτω αλλα τυπος γινου των πιστων εν λογω εν αναστροφη εν αγαπη εν πνευματι εν πιστει εν αγνεια.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 '연소함'(*, 네오테토스)이란 '젊음'을 뜻하는 '네오스'(*)에서 온 말로서 유대 사회에서 군대를 갈 만큼 자란 나이에서부터 40세까지 달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용하였다(Lock). 많은 학자들은 디모데의 나이가 매우 어렸을 것으로 추측(推測)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연소함'은 장로들이나 교인들 틈에서 경륜이 적은 디모데가 상대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기에 어려운 점을 의미하는 것이지 나이에 대한 연소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Guthrie).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연륜과 경륜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연소함을 행동의 진지함으로 보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장로들과 나이 많은 교인들에게 연소함으로 업신여김을 받는다면,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서 권위를 지니라는 말이다(Calvin).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의 권위는 외부적인 치장이나 장식, 그리고 연령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가르침과 거룩한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 '말'이란 공개적인 연설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까지도 포함한다. '행실'(*, 아나스트로페)은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또한 다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세 가지 '사랑', '믿음', '정절'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성품이며, 이것들도 결국 타인과 관계된 생활과 연결된다. '사랑'은 말과 행위로 표현되고 '믿음'은 사랑에 근거를 둔다. '정절'의 헬라어 '하그네이아'(*)는 '순결한 양심을 지키다'라는 뜻을 가지는 헬라어 동사 '하그뉴오'(*)에서 유래된 말로, 생활에 있어서 죄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철저한 순결을 의미한다(5:2, Robertson). 한편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튀포스'(*)는 '상처를 내다'는 뜻인 '튀프포'(*)로부터 나온 단어로서 어떤 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양식' '모델', '본보기'라는 뜻이다(빌 3:17; 살전 1:7; 살후 3:9). 바울은 본절에서 디모데가 비록 젊은 사람이었지만 경험(經驗)이 충분한 인생을 산 사람처럼 말과 행실에 있어서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보살펴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직한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연소함(3503) 네오테스() νεότης, τητος, ἡ 스트롱번호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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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음, 막10:20, 눅 18:21, 행26:4, 딤전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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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어림(막10:20, 눅18:21), 젊음(행26:4), 연소함(딤전4:12).
“연소함”이라는 것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디모데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로 여겨졌고, 당시 에베소교회의 목회자로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리고 젊은 나이에 목회자가 된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면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도 네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무시하지 못하게 하고”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본이 되라
아무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어떻게 하면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 구절을 읽어보니 뒷부분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내가 어린애취급을 받지 않기 위해서 눈에 힘을 주고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내가 어른처럼 존중받고 대접을 받기 위해서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어른들이 알고 있는 소식을 옆에서 엿듣는다고 해서 어른과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누가 보더라도 “아 저 사람은 믿음이 있구나. 내가 보고 배울만한 믿음의 본보기가 되는구나.”라고 느낄 만큼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연소함 때문에, 즉 나이가 어린 것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 싫어서 이 구절을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는 말씀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소년일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니엘도 어린 소년일 때, 바빌론 왕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하고 순종하였습니다. 다윗도 어린 소년일 때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이삭은 청소년의 때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죽이려고 할 때 순종하였습니다.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16살 때부터 교회에서 매주 설교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읽고, 공부하며 묵상하고, 기뻐하고 순종하는 만큼 멋지고 거대하게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디엘 무디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나이가 40대 정도 된 어른 한 사람과 십대 초반의 어린이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디엘 무디 목사님은 기도를 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한 사람 절반의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 표현에 관해 물었습니다. “한 사람 절반의 인생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디엘 무디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어린 소년의 인생은 한 사람분의 인생이고, 어른의 인생은 이미 자신을 위해 절반을 낭비하였으니 절반의 인생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아직 어린 나이에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게 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께 한 사람분의 온전한 인생을 드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절반을 낭비한 뒤에 나머지의 인생을 드리시겠습니까?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음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나이가 어린 디모데에게 믿음의 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과 행실(3056 & 391)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말하기.
말
㉠ 너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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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 [ lŏgŏs ]
- 어원
- 3004에서 유래
1. 삶의 방식. 2. 행동 양식. 3. 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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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의 방식, 행동 양식, 처신, 품행, 갈1:13, 엡4:22, 딤전4:12, 히13:7, 약3:13, 벧전2:12, 3:2, 벧후2:7,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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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행한 일(갈1:13), 구습(엡4:22), 행실(딤전4:12, 히13:7, 벧전1:18, 3:1,2), 선행(벧전3:16).
특별히 오늘 말씀은 디모데에게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두 여섯 가지 항목이 등장하였습니다.
말, 행실, 사랑, 영, 믿음, 순결
말과 행실이라는 것은 빙산의 일각처럼 사람들 앞에 드러나 보여 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믿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부분의 두 배만큼 보이지 않는 항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바로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빙산의 물속에 잠긴 부분이 얼마나 거대한지 안다면 물 밖에 나온 부분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말과 행실은 사실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초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우선 말과 행실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평가할 때 그의 말을 들어보고 또 행동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를 판단하게 됩니다. 내가 돈을 빌려줘도 되는 사람인지, 정말 중요한 나의 일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인지, 멀리해야 하는 사람인지 등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의 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분대로 말하고 감정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믿음의 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 생각대로 말하고 내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믿음의 본보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진리에 어긋난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쓸데없는 말, 더러운 농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 뒤에서 남을 헐뜯는 말은 믿음의 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과 행실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는 인생인 것입니다.
사랑(26)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스트롱번호26
사랑.
인간의 사랑.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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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 [ agapē ]
- 어원
- 25에서 유래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뛰어난 지식은 믿음의 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본은 먼저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님을 존경하고 또 선생님을 존경할 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들이 힘이 세고 능력이 뛰어나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존경할 때 그 이유는 대부분 나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나와 성격이 맞지 않거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시키실 때에도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리며 존경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 선생님에 대해서도 때로는 선생님이 실수하거나 잘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선생님께 순종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향한 선생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는 귀하고 자랑스러운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것에서 부족하다 할지라도 사랑에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랑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목숨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조건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십시오. 오늘날 이기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이상하게 취급을 받는 그런 시대에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당당하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영(4151)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4151
불기
바람
숨 내쉬기
-
발음 [ pnĕnuma ]
- 어원
- 4154에서 유래
우리는 사랑뿐만 아니라 영에 대해서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질 수 있겠지만, 성령 충만한 삶이야말로 영에 있어서 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욕심, 나의 의견으로 충만한 삶은 절대 성령 충만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주장이 강하게 서있을 때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의 삶은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삶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감정이 상할 때 누구에게 굴복하십니까?
나의 감정에 굴복하고, 죄에게 굴복하여 말하고 행동하십니까?
아니면 성령님께 굴복하여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자존심의 삶입니까?
아니면 성령님께 순종하는 삶입니까?
믿음(4102) 피스티스() πίστ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4102
어원 / 3982에서 유래
우리는 또한 믿음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대해 나누기 원합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무엇으로 구별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돈을 선택하는지, 자기 명예를 선택하는지, 자기 뜻을 고집하는지, 자기 자존심을 선택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집트의 보물을 내어놓고,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손해를 볼지라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그 선택을 보고 믿음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순결(47) 하그네이아(hagnĕia) ἁγν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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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진한 마음의 순결, 사상이나 감정의 청순함, 정조의 순결, 딤전 4:12, 5:2.
순결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결이란 것은 순수하고 청결한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섞이지 않고 깨끗한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가 결혼하기 전까지 다른 남녀로부터 더럽혀지지 않은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순결이란 완전히 깨끗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보상도 바라면서 이집트의 보물도 바라는 것은 순결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과 칭찬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광과 칭찬을 바란다면 그것은 순결한 믿음이 아닙니다. 순결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도 붙잡고, 돈도 붙잡고, 죄도 붙잡으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붙잡으려 하는 것은 순결한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많은지 몰라도 순결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여러분. 만큼은 순결한 믿음으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초청
여러분 잠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배움을 주는 믿음입니까? 사무엘, 다니엘, 다윗, 이삭과 같은 사람들은 어린 나이 때부터 주님을 기쁘시게 했고,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배움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감정이 있고 자존심이 있고 고집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행실,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온전한 한 사람분의 인생을 드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절반의 나머지 인생을 드리시겠습니까? 믿음은 선택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영원하신 하나님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11-2024(수) 요한복음 13:1-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후에는 알리라(7절)
Jesus replied, "You do not realize now what I am doing, but later you will understand."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의 구성은 1장부터 12장까지를 전반부라고 하며 그 내용은 표적에 관한 말씀이 핵심 내용입니다.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음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 소개된 일곱 가지 표적을 정리해 봅시다.
1.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2:1-11)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표적(4:46-54)
3.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표적(5:1-9)
4. 오병이어의 표적(6:1-15)
5. 바다 위를 걸으신 표적(6:16-21)
6.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신 표적(9:1-12)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7-44)
요한복음 13장부터 20장까지는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말씀이 주제가 됩니다.
마지막 21장은 에필로그(Epilogue) 즉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건을 말씀합니다.
이때 사탄은 가룟 유다에게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갖게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가룟 유다의 발을 씻겨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당시 유대 풍속은 하인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었는데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다른 제자들은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어떻게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대답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후에는 알리라(Later you will understand)
민수기 19:20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누가복음 7:44
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사건을 "섬김의 본" 또는 "겸손의 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특별한 분위기에서 "구속의 은혜"를 보여주신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런 주장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그의 몸을 일컬어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전이 되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성전으로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자기 몸을 정결케해야 합니다.
이미 목욕을 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될 것이라고 하셨기에 발을 씻음으로 정결케 되는 과정을 거쳐가게 하신 것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유대인의 풍속에는 보통 식사 전에 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 법인데, 이 때에는 식사 도중에 그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그 때에 이 일을 할 종이 없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겉옷"은 저고리를 말함이 아니고 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일할 준비를 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겸손의 극치(極致)이다.
그가 최종의 행동 교훈으로 식사 도중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의 별세 후에 제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겸덕을 고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저렇게 계급을 초월하시고 영광의 주님을 사랑의 발 씻는 종으로 삼으셨다.
고데이(F. Godet)는 추측하기를, 이 발 씻는 일이 아마도 제자들의 서로 다툰 사건(눅 22:24-27)을 동기로 하고 있은 듯하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이것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한다고 설교하신 셈이다(12-16).
실행으로 본을 보이는 설교자는 그 설교로써 사람들의 심령을 아주 점령해 버린다.
(2)이것은, 그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속죄하시는 중보(中保)의 역사를 비유로 가르치시는 지극히 크신 사랑의 행동이시다.
그가 피를 흘려서 그의 백성의 죄를 씻으신 일도 지극한 사랑이면서 역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낸다.
유명한 변증 학자 스킬더(Schilder)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하여 물을 휘저으신 주님의 손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그의 못 박히신 손에서 흐르는 피가 죄에 속한 자에게 이해되지 못함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그는 또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뜻은, 그의 몇 제자들에게만 그의 친절과 겸손의 모본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위로써 온 세계를 찾으시는 그의 속죄의 역사를 비유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3: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겸손한 봉사의 표본인 사실을 보여 준다.
이 일로써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위 사람으로서 아랫 사람을 겸손히 봉사하신 고상한 정신이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대하여 겸손하기는 쉬우나, 윗 사람으로 아랫 사람에게 대하여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에 기준하여, 톨레도(Toledo)회의에서 발 씻는 것을 하나의 교회 의식으로 세웠다(694 A.D.).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이 그것을 폐지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부탁하신 것은, 다만 제자들더러 서로 겸손하게 봉사하라는 것 뿐이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자진하여 형제를 겸손히 봉사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크게 간주될 것을 가리킨다(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한복음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겉옷(2440) ἱμάτ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2440
-
1. 옷.
-
a. 일반적으로 모든 옷을 가리킴: [단수로] 마9:16, 막2:21, 5:27, 눅5:36, 히1:11등. [복수로] 마27:35, 막5:28, 9: 3, 15:24, ἱ. μαλακά: 부드러운 옷, 눅 7:25.
-
b. 겉옷, 외투, 마9:20, 24:18, 눅8:44, 요19:2, 계19:16등.
-
요한복음 13: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 입으시고(2983) λαμβάνω
스트롱번호 2983
* 장막(4636) σκῆνος, ους, τό
- 어원 / 4633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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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막, 거처, 집[사람의 몸을 영혼의 거처로 비유함], 고후 5:1, 4.
-
관련 성경 / 장막집(고후 5:1), 장막(고후 5:4).
* 집(3614) οἰκ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614
어원 / 3624에서 유래
-
1. 집.
-
a. [문자적으로] 건물, 마2:11, 7:24- 27, 24:43, 막10:29이하, 요12:3, 행10:6.
-
b. [상징적으로] 영혼의 거주지로서의 몸, 고후 5:1.
-
-
2. 가족, 집안, 마 12:25, 13:57, 막 3:25, 6:4, 요 4:53.
-
3. [1)과2)의 중간형태] 마10:12, 빌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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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집(마 2:11, 막 3:25, 눅 22:10, 고전 11:22), 가산(막 12:40).
σκήνωμα. 1. 장막
고린도후서 5:1-5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의 장막 집
- '장막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누스'(*)는 천막을 가리키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천막(天幕)이 일시적인 것이듯이 인간의 육신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체의 한계성을 천막에 비유한 것은 아마 그가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경험에서 얻은 지혜에서 기인했을 것이다(행 18:3).
무너지면
- 이 표현은 (1) 육신의 죽음, 또는 (2)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혹자는 바울이 이렇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말을 한 것은 글을 쓰는 당시 심경(心境)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바울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경험할 성도들 가운데 자신도 포함되리라고 기대했었는데, 최근에 겪은 아시아에서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경험을 통해서(1:8-11), 재림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견해이다(Harris).
그러나 이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그보다는 주의 재림 이전에 죽음으로써 재림을 경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려는 의도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의 영원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 구절의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쉽게 썩고 낡아지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 역시 마찬가지 운명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질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5:38-54).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바 성도들을 위해 예비된 하늘의 처소(處所) 즉 하늘나라(요 14:2)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Hodge, Harris, Tasker), 또한 집단적인 몸 즉 고전 3:16; 6:16에 언급된 '성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E.E. Ellis).
이 두 견해에 대해 혹자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므로 본 구절의 '집'도 사람의 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rtin).
그러나 본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일시적인 집과 영원한 집의 비교이지 몸과 몸의 비교가 아니다(Hodge).
성도들은 현재 유한한 장막에 거하나 나중에는 영원한 장막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 본절의 강조점이다.
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옷을 벗고 죽는 것인데 이 죽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게 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에게는 죽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죽음을 성경은 세례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
바울은 이 죽음을 가리켜 “죽을 육신이 생명에 삼킨 바가 되는 것” 이라고 표현합니다.
종종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우리는
충동적인 천국소망에 사로 잡힙니다.
이렇게 사느니 그냥 빨리 죽어 천국에 가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참 복음의
내용은 성도가 죽어 이 땅을 떠나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죽는 순간(세례
받는 순간)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제, 즉 천국생활이 시작되는 것에 대한 소식입니다.
만일 바울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몸으로 덧입기를 날마다 사모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때가 되어 이 육체의 장막을 벗는 날에 벌거벗은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발견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임금의 잔치 자리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했다가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마태복음 22:11~13)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는 임금의 질문에 그가 아무말도 못한 이유는 입어야 할 예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 입어야 할 예복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나는 죽고 그 분으로 옷 입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기를 불편해하고 싫어합니다.
자녀들이나, 배우자를
대할 때,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분의 방식과 길로 행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그것을 매우 불편해하고 손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분의 방식 (그리스도라는 옷)으로 행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세상의
옷)으로 행합니다.
예복이 있음도 알고, 입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앉아있다가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는 정확히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당신은 정말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장막이 있음을 믿습니까?
성도는 썩어질 이 몸을 벗어버리고‘자연사’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썩을 이 몸이 날마다 생명의 성령에게 삼켜져 죽기를 사모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성도의 죽음이며 그
죽음에만 영생의 약속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죽는 그 죽음만이 우리를 삼키려는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케하는 능력이
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거든 날마다 그리스도로 옷 입어 죽는 죽음을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세 가지 요소를 말한다면 의식주(衣食住)입니다.
주(住)는 물론 인간의 육신의 생활을 영위하는 집을
가리킵니다.
육신이 사는 집도 임시로 판자를 두르고 천막 조각을 걸치는 가건물이 있는가 하면 화려 찬란하며 견고하게 만든 주택이
있습니다.
이는 집을 지은 재료나 모습에 따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장막집은 임시로 거처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제외한 모든 세상 만사는 장막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 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이나 인간의 지식이나 인간의 영화 등은 모두가 장막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요, 집의 재산, 전답,
살림, 냉장고, 세탁기, T.V, 아파트, 고급 주택들도 장막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임시적인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 사라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이 집에 거할 자는 예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몸과 마음과 예복이 깨끗하게 되어 있는 자만이 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곳은 결코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곳입니다.
장막집과 영원한 집의 비교
(1) 장막은 임시요 영원한 집은 항구적입니다.
벧후 1:14에 “내가 장막을 벗을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하였고,
벧전 1:24에는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 이 땅의
삶이 얼마나 유한한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옛날 유목민들은 장막을 치고 살았는데 아침에는 풀따라 동편 언덕에 치고, 낮에는 그늘따라
북쪽 기슭에 치고. 밤에는 맹수를 피해 남쪽 골짜기에 치는 것이었으니 어느 것이나 임시적인 장막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육신의 생활도 이러한 장막과 같아 일시적이요 잠깐인 것입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이요, 풀잎과 같은 인생이며, 하루살이와
물거품같은 인생입니다.
어느 청년이 미국의 대통령 아담스 각하와 기차에서 한자리에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대통령임을 알아보고
“아담스 대통령 안녕하십니까” 하며 인사를 했더니 대통령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평안치 못하군”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청년은
의아해서 “아니 대통령도 평안치 않으세요”라고 반문했더니 하시는 말이 “이 사람아. 지금 기왓장이 다 벗겨지고, 벽은 무너져가고,
창문에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고, 기둥은 힘이 없어 넘어지려고 하여 받치고 있는데 편안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점점 더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백악관의 기왓장이 벗겨졌나요 수리해야지요. 또 벽이 무너지고 빛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기둥이
넘어질 정도로 백악관이 헐었나요 아니 국민의 세금을 어떻게 하길래 각하의 저택 백악관을 그렇게 두었습니까 이는 국민의
수치입니다”라고 흥분했습니다.
아담스 대통령은 이 사람을 진정시키면서 “아, 이 사람아. 보게나 기왓장이 벗겨지듯 내 머리는
백발이 되어가고, 벽이 무너지듯 가슴 에는 갈비뼈가 보이고, 눈이 어두워 빛이 보이지 않고, 기둥이 무너질듯 내 두 다리가 힘이
없어 지팡이로 바치니 편안할 리 있겠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도 장막집이 점점 노쇠하는 것은 막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합병원에 가 보십시오.
장막집이 고장나고 썩어가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현대공원의 묘를 보면 1년이
지나기 무섭게 온 산이 무덤으로 변합니다.
어떤 스물 세살의 신랑이 결혼한 첫날밤에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장막집이 삽시간에 무너져
버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집을 위해 준비하여 사는 자가 지혜있는 자입니다.
물질과 재능을 최대한으로 선용하며
선하게 살다가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그 순간부터 영원한 집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축복과 칭찬과 평안이 있고, 그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성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장생불로, 영원한 장생불로만이
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흡족한 흑자인생의 결산서를 내어 놓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장막은 연약하여 무너지나 영원한 집은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전 3:10에서 건축재료를 말하는 중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것은 썩어지기도 쉽고 불타기도 쉽고 오래가지 못하나 금, 은 같은 재료로 지은 집은 썩지도 않고 불타지도 않고 견고하여
오래간다고 하였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십시오.
성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벽옥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고 했습니다.
또 그 성곽의 기초석은 각각 보석으로 꾸미었는데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정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열 두 진주문의 그 화려함은 혀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뉴욕, 동경과 같은 대도시도 세월이 흐르면 무너져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쑥대밭이 될 것이요, 모스크바에 즐비한
고루거각도 소돔 고모라와 같이 멸망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영원한 집은 영원무궁, 영광충만하여 구원 받은
성도들이 가서 영주하여 영원토록 즐거워 할 것입니다.
(3) 장막집은 누구든지 되는대로 살 수 있으나 영원한 집은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으로라야만 가서 살 수 있습니다. 공개된 공원에는 온갖 잡인이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어도 잠긴 동산에는 주인만이
거닐 수 있는 곳입니다(잠 4:12).
공개된 창기의 방에는 난봉꾼, 건달, 잡류들이 다 출입할 수 있어도 신부의 신방은 오직
신랑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장막에는 누구든지 되는대로 살 수 있으나 천국집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만 이
믿음으로 가서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스데반은 전도하다가 원수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되는 마당에도 “주 예수여. 나의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입천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외롭게 있으면 쓸쓸하고 잠깐이며 그 후에는 섭섭할 터이나 영원한
집에서는 예수님과 영원히 동거할 것이므로 완전하고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집을 가졌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5절에 “우리에게 이것을 이루게 하시려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이 보증됩니다.
천국의 보증서를 가진 자는 평안히 생을 살든지 죽든지 마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많은 고난 중에도 찬송과 기도를 할 수 있었고,
로마 옥중에서나 순교하는 순간까지도 편안히 하나님 품에 갈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칼날에 목베임을 받아 순교했고,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런 순간에서도 그들은 편안히 그의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
1:20-23에서 “내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은 육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합께 있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바울처럼 영원한 집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본문 5장 1절에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장막집 』(스케누스, σκῆνος)은 일시적으로 필요에 따라 치는 천막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리켜 장막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영구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인 천막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간의 육체를 가리켜 천막에다 비유한 것은 그가 천막 짓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를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장막 집은 무너지는 장막집입니다.
여기 『 무너진다 』는 말 '카타뤼에인()'은 개인적인 종말에 따르는 죽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살아서 주의 재림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주의 재림 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장막을 초라한 인생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4장 20절에 『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나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도다 』라고 했습니다.
마치 유목민들이 장막을 쳤다가 옮길 때에는 다시 걷어서 옮기듯이 우리 인생도 일시적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장막을 치고 살듯이 이 땅에서 일시적 삶을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장막처럼 일시적인 처소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3절에 『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라고 했습니다.
잠시 영혼이 머물다가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장막 집 곧 우리가 가진 육체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체는 영혼이 머무는 집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지나가는 것이고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30-31절에 『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0-11절에 『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두가 없어지고 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결코 이 땅에 있는 물질은 인간들이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모든 육체는 필연적으로 이미 종말의 한 날을 받아놓고 태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 앞에 예외나 특례는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시편 103편 15절에 『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시편 89편 47-48절에 『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셀라)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시 146:3). 이사야 2장 22절에 『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가치가 어디 있느뇨 』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본문 5장 1절에 『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 쉽게 낡아지고 썩는 것처럼 우리 육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가 썩는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썩어도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영원히 썩지 아니할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에 『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 』라고 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육체 밖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욥기 19장 26절에 『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유한한 인간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해서 여기서 말하는 이 집도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실존하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하늘의 처소, 즉 하늘나라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히 천국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천국에는 손으로 지은 장막 집과는 전혀 다른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확신 있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늘의 집은 사람에 의해 인공적으로 시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은
첫째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미 약속한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부활 신앙에 따른 개연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이 땅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생활환경과 고난당하는 자신의 삶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다보고 있는 것은 천국에 있는 영원한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장막 집에 사는 자들의 생활 수칙이 있습니다.
1.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5장 2절에 『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여기 『 탄식 』은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토해지는 자유와 희망의 몸부림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를 벗어 버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입기를 소망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영원한 집을 사모한 나머지 빨리 이 땅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4절에 보면 분명히 벗고자 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탄식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애원의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 속에서 재림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살아서 그 몸을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아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주님 고대가'에서 "낮이나 밤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립니다."는 가사도 주의 재림을 갈망하는 노래 가사입니다. 이 노래 가사에서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신학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과 신학이 잘 정돈되지 아니하면 절대 순교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과 신학이 정돈되지 아니하고도 어느 정도의 교회생활을 할 수 있으나 순교적 신앙생활은 할 수가 없습니다.
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담대해야 합니다.
본문 5장 6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생각할 때는 흔히 그 장소의 복락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주님 자신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1절에 『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사모하는 자는 주님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천국을 주님과 관계없이 그냥 천국으로 만족하고 동경하는 사람은 이원론(二元論)자입니다.
고(故) 정암 박윤선 박사는 그의 주석에서 "주님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또 하나의 진선미와 복락의 근원체가 있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가까운 사상이다. 의례히 그 복락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었고 또한 주님이 거기 계신 것 때문에 그 복락이 보존되는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3.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본문 5장 7절에 『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고(故) 정암 박윤선 박사는 "『 이는 』(가르, )이라는 말은 물론 이유 접속사(理由接續詞)이다. 몸에 거할 때는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곳을 사모하는 마음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여기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믿음에 의하여 아직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볼 뿐이라는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믿음으로만 관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국에 대해서는 앞서간 자들의 증거에 의해서 체험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우리는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증거를 받아 믿게 되는 하늘의 사실들은 지상(地上)의 보이는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감히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는 거룩하고 고상한 것들입니다.
4.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 5장 9절에 『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의요 삶의 목적입니다.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대요리 문답 1문).
여기 『 힘쓰노라 』는 말은 우리의 목표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4절에 『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5. 주의 일에 미쳐버려야 합니다.
본문 5장 13절에 『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에 집중하게 될 때 비보통한 상태처럼 보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6-17절에 『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고 했습니다.
베스도가 사도 바울을 미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4-25절에 『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생들은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일에 미치든지 세상일에 미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두 곳에 다 미칠 수 없고 두 곳에 다 안 미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6. 오직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본문 5장 14-15절에 『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롬 12:1).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인의 값을 해야 합니다.
요한1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단이 되고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고전 6:19).
우리의 육체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육체는 썩어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흙으로 만든 육체로는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몸이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곧 부활체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육체 밖에서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는 곧 하늘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은 이미 이 땅에 하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심령천국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 땅에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적 집합체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늘의 영원한 집을 제공받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 교회는 하늘의 영원한 집과 병행선상에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장막 집(육체)에 있을 때는 땅에 있는 교회가 우리의 집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의 집입니다.
땅에 있는 교회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친히 지으신 하늘의 영원한 집입니다.
땅에 있는 교회나 하늘에 있는 집은 모두 우리의 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한 우리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집이 있다는 사실은 집의 구성원으로써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분명한 책임과 의무가 따라야 한다는 당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명예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처럼 아버지의 말씀에 의해 그 수칙과 규범대로 힘써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 "너도 이 다음에 너하고 꼭 닮은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면 내 마음을 알 것이다"라고 타이르던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이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행동을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유월절을 맞이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왜 나귀를 타셨는지 주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당시 풍속에 따르는 종이 발을 씻어주는 것인데 하물며 예수님께서(스승)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이때는 이미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를 아시면서도 그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왜 내 발을 씻겨주십니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네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지금은 모를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철이 없을 때는 몰랐지만 철이 든 후에는 그 때의 행동에 대해서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을까요?
첫째는 섬김의 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둘째는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사랑의 덕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넷째는 믿음의 삶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들도 발을 씻어줄 수 있는 여유있는 믿음과 지혜로운 행실을 갖춰야 하겠습니다.
♪ 찬송 / 후일에 생명 그칠 때
발음 [ ginōskō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 이것은, 그 현재에 베드로가 죄로 인하여 어두워서 깨닫지 못하나,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발을 씻기심은, 그의 속죄의 고난으로 신자들의 죄 씻을 것을 비유한 것이다(11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본 뒤에야 그의 발 씻기신 뜻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이후에는 알리라(요한복음 13:1-11)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행하신 일들은 대부분 기이했습니다.
그래서 따르는 무리들도, 심지어는 동행하는 제자들도 오해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알고서 말씀하시고, 알고서 행하셨기 때문이고,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들은 모르고 듣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시시해도 모르고 보면 신비할 수 있습니다.
우수광스럽게도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기행이 따로 없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겉옷을 벗으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한사람씩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세상을 떠나실 때가 다가왔고 마귀는 벌써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을 때였습니다(1-2절).
이 위험하고 긴박한 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놀랍고 아름다운 행동 한 가지를 제자들에게 또 보이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원래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들의 몫이었고 아랫사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생각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그냥 발을 내밀어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베드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발 대신에 의문을 내 밀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해볼 때 예수님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시고 닦아주시는 것은 인간 도리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드리고 닦아드리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이것이 거꾸로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7절 말씀에 예수님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시며 달래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베드로는 자기의 발을 예수님께서 씻어주시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베드로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349년경 - 407년)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이었다.
"황금의 입을 가진" 이라는 뜻인 그리스어 "크리소스토모스(Χρυσόστομος)' 라는 별칭이 붙었다
교부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님께서 맨 먼저 가룟 유다의 발부터 씻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발을 내놓아라'하시며 차례차례 열두 제자들을 씻기셨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을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 자신으로 보더라도 이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이 자기 처지, 자기 앞에 있는 이 무거운 십자가를 생각하고 여기에 집착한다면, 지금 누구를 사랑할 경황이 없습니다.
지금 이 처지에 누구 발 씻기게 되었습니까? 지금 이 처지에 누구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누구 생각하게 되었느냐고요.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내 처지가 어떻게 곤두박질을 하든, 가난하든 부하든, 병들든 죽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대개 사람을 보면 자기 처지에 매여서, 자기 기분에 매여서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누구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누구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따집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심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실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놀라운 사랑의 신념이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늘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소중한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모든 지식에 다 통달하고, 모든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겸손으로 묶을 때에 소망이 되고, 소망으로 굳게 설 때에 인내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는 오늘의 성경에 보는 바와 같이 사랑의 뜻도 모르는 사람, 허영에 들떠 있는 사람, 배신자 가룟 유다까지 포함합니다. 행동적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큰 역사 안에서 이 사건을 소화하고 계십니다.
「회남자(淮南子)」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운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쓸데없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아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겸손할 수 있다."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사랑으로 들을 때에 여유가 있고, 사랑으로 보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사랑으로 섬기기 때문에 신뢰가 있습니다.
참사랑을 하는 자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보입니다.
끝난 것이 아니예요.
아직도 몇 번은 바뀔 수 있습니다.
계속 소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얼마나 여유 있고,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래서 주를 따르고, 이래서 주의 본을 따라 증인이 될 것입니다. *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많은 난관과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 문제들이란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건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자녀들의 문제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어떤 재난과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문제가 있는가하면 또한 공동체적이고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많은 문제 앞에서 때때로 우리는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또한 낙심합니다.
그리고는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하나님께 의문을 표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왜 이런 슬픔이 우리 가정에 있어야만 합니까?"
"왜 이렇게 비참한 재난이 이 땅위에 존재해야만 합니까?"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우리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선지자들도 그랬고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왜입니까?"
"어찌하여 그랬습니까?"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인생의 문제와 그 의미를 다 깨닫기에는 우리가 늘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서두른다고 앞당길 수도 없는 일입니다.
결국 때가 되어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수준의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알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1절 말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하셨고, 3절에서도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고 하셨으며, 10절과 11절에서도 ".....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셨고, 이 일을 위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할 가룟유다의 배신도 이미 알고 행한 일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일을 제자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알고 행하신 일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아멘'
지금은 모를 수 있습니다.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 모르고 있는 일도 때가 차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그리고 지나가면 그떄서야 알게 됩니다.
왜 모릅니까? 우리 수준 때문입니다. 영적 이해력이 약해서입니다. 좀더 지니서 자라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이 놀라운 행동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그 영적 지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점점 더 자랄수록, 우리가 영적으로 점점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알지 못하는 일도 이후에는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알게 될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당장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더라도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급하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쩝니까? 지금 당장 알수 없기 때문에 놀라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제 당장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불안하고 미움이 솟아오르고 그래서 대적자가 되고 배신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인내하시고 소망을 품고 멀리 내다보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 일은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겸손의 본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주신 교훈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어떤 교훈일까요? 바로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이후에는 알게 된다"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필요없는 일이 아닙니다. 당장 깨닫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 함부로 이러니 저러니 불평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후에는 알게 되리라 믿고 기다려보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고 깨닫게 될 시간이 반드시 오게됩니다.
우물가에서 승늉 구한다는 말이 있는데 서둔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에 실 메달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후에는 알리라"는 주님의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고 소망을 품고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보는 미래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주님께서 이처럼 너그러우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이 사랑이, 지금은 알지도 못하면서 투정이나 하고, 불쑥 불쑥 나서기나 하는 제자들,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가서 예수를 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가룟유다, 스승이 눈믈을 삼키면서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해야 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의미도 모르는체 철없이 발을 맏겨놓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믿어주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허물을 몰라서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아주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발을 씻음 받은 사건의 경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데 엄청난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해주셨는데 내가 왜 이러나 하면서 곧 다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주시고 사랑할 가치가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을 믿고 참고 인내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사랑이든지 "후에는 알리라"는 심정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 몰라준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뿐만 아니라 고난과 시련을 당할찌라도 "지금 당장 시련의 의미를 알지 못할찌라도 언젠가는 알레 되리라. 이후에는 알게 해 주시시리라"는 심정으로 믿고 기다리고 인내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릉으로 축원합니다.
3. 지금 알지 못할지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주여 왜 주님이 내 발을 씻어주십니까?"하는 베드로의 물음에 주님은 "내가 너의 발을 씻겨주지 않으면 그리고 베드로 네가 나에게 발을 씻음받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게 발을 내밀어 씻음을 받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관계가 된다 하시면서 선택을 명하셨습니다. 설득과 이해보다는 선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하라하신 것입니다. 지금 머리로는, 지금 영적 상태로는 아무리 설득을 하고 이해를 시키볼려고 해도 되지 않음을 에수님께서 아셨기에 받아들일 것이냐 말것이냐를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깜짝놀라 "주여 그렇다면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쉽게 감동하고, 쉽게 낙심하고, 쉽게 결정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성품이 꼭 단점으로만 작용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설득과 이해보다는 순종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베드로의 장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생살다보면 지금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 한 두가지 뿐이겠습니까? 머리로 납득된 일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생살이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이해할 수 없다고, 당장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은 다 모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왜 그런 일이 있어야만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재난이 닥쳐왔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 의미를 다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하고도 안심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의 의미를 이후에는 다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처럼 "이후에는 알게 될 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시고 조금더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10-2024(화) 요한복음 12:44-5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는 하나님(44-45절)
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Then Jesus cried out, "When a man believes in me, he does not believe in me only, but in the one who sent me.
When he looks at me, he sees the one who sent me.
믿는 것(4100) πιστεύω
스트롱번호 4100
관련 성경 / 믿다(마8:13, 눅1:45, 벧전1:8), 맡기다(눅 16:11, 갈2:7, 딛1:3), 의탁하다(요2:24, 딤후1:12), 맡다(롬3:2, 고전9:17).
보는 것(2334)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관련 성경
유대인들의 믿음 - 여호와 하나님
요한의 믿음 - 예수를 믿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
- 예수를 보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것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은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용어를 사용하여 삼위일체 신앙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특이한 것이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부분적으로 삼위일체 신앙을 계시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4절과 4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
이 말씀에서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를 보는 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곧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하시며 하나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이시라는 증거가 되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하나님은 빛(요일 1:5)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사랑을 십자가로 증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마태복음 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5: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이외에도 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고 쉽게 설명할 수 없지만 삼위의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사역하시며 동시에 하나가 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지혜와 깨닫는 마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다 나와 찬송 드리세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I and the Father are one.
에고 카이 호 파테르 헨 에스멘
εγω και ο πατηρ εν εσμεν
엔(1520) εἷς, μία, ἕν ἑνός, μιᾶς, ἑνός 스트롱번호 1520
관련 성경 / 하나(마 5:29, 18:10, 막 14:10), 한(마 8:19, 막 10:7, 눅 10:42), 낱낱이(요 21:25), 일년(약 4:13), 일(마 5:18), 유일(막 12:29), 일일이(눅 4:40), 각(행 2:3), 각각(행 2:6), 각기(살후 1:3).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입니다
갑자기 선장을 부르면서 다급하게 요청을 합니다.
“선장님! 좀 멈춰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강아지가 바다에 빠졌어요!”
그러나 선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안됩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이 배를 멈춰 설 수는 없습니다.”
그랬더니 승객이 다시 말합니다.
“선장님, 사람이 빠진 경우는 어떠합니까?”
“물론 멈춰야지요! 그 사람을 구해야지요!”
이 승객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모든 것을 제쳐놓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강아지를 껴안았습니다.
그러자 선장은 배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승객과 강아지를 구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허물이 많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적대행위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내가 저들의 고통을 대신 나누겠습니다.
저들이 받을 징벌을 내가 대신 받겠습니다.
저들이 당해야할 죽음을 내가 대신 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가 인간이었다면 그의 죽음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바로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역사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풍요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하게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 남자는 무덤가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옆에 다가섰습니다.
그는 흐느끼면서 말합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무척 사랑했습니다.”
옆에 있던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여줬습니다.
그런데 더 흐느끼면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못하면 비극이 됩니다.
사랑은 표현해야 축복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시편 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1장 1절로 2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아멘!
오늘부터 하나님의 ‘성령’에 관한 말씀을 함께 공부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중에 특별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우리가 조금 더 깊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여러 표현 가운데 ‘영’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하신다. 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도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나타난 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당연히 성령님도 영이시기 때문에 세분을 가리켜서 다 영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세분이 다 거룩하다, 거룩하신 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다 인정할 수 있다.
이사야서 6장 3절에 스랍천사들이 부르는 찬양은 ‘거룩하다’는 말을 세 번 반복하고 있다. 또 요한계시록 4장 8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룹천사들이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똑같이 거룩하다는 찬양을 세 번 반복한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의 이름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이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기록되어 있다.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름이, 그 세 분의 하나님들의 인격적인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실 때, 아버지라고 직접 부르신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 이름은 우리가 집에서 사랑하는 아빠를 부를 때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가지신 독특한 성격, 아버지로서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와 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에스멘(2070) ἐσμέν
스트롱번호207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28절에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29-30절 말씀이 나왔다.
그들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심은, 본질적으로 그가 아버지로 더불어 일체로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계시자(啓示者)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시는 것 만큼, 그의 모든 행동은 곧바로 아버지의 행동과 완전히 일체(一體)였다.
요한복음 14:8-11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요한복음 5:19~2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유대교의 두 기둥, 율법(안식일)을 어기고 성전을 헐라는 가르침 때문이었지만 더 근거에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 친 아버지라 부르시고,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으로 선언하심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근거를 세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나신 분이다(요 1:14)
이것은 예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란 표현이다(요 1:1)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시고(출생)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출래) 이는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신적
존재방식이며, 이러한 신인동형론적 표현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
예수님은 자신을 아들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셨다.
한마디로 성자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자존하시던 하나님이셨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바 되셨다(요 7:24)
성경은 출생과 출래를 통한 성삼위 하나님 간의 존재방식과 함께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방식을 표현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일하신다(요 14:10).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셨고,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보내심을 받고 구속주로서 이 땅에 오셨다.
셋째,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하시며 아버지의 것을 말하신다(요 8:29).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방식이 성령 안에서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성령으로 충만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요한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담지자가 되시고
부활승천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성령의 파송자가 되셨다.
요한복음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요 10:38)
- 사건중심으로 기술된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일곱 표적과 일곱 선언을 기록하되 그 근본에는 예수님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권위가 있다.
이 권위의 근거는 앞에서 정리한 것처럼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중 하나님과 예수님의 성삼위일체
존재방식 사역방식을 기억함이 중요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성령으로 연합되어 있으며 이 연합의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동참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령께서 그의 안에 내주하신다.
성육신 이전 예수님은
영이셨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일체됨이 쉽게 이해되나,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육체가 되셨기에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으로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하신다(요 3:34) 아버지는 아들을 혼자 두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하신다(요 8:29).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 성령님은 영이신 하나님과 육체가 되신 예수님을 하나 되게 하시고 항상 함께 있게 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첫 창조 피조물의
존재방식대로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되게 하신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시듯, 우리들도 성령님으로 인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 성삼위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하는 에덴에 있었던 본래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이
생명이다(창2:7)
어떻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하나”인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의 동족 ‘유대’인들을 노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의 말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돌로 치려하였다(요 10:31-33).
왜 그랬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며 자기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셨는가?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의 문맥을 보면, 그의 말씀의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된다.
한
집단의 ‘유대’인들이 그를 에워싸고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지를 숨김없이 말하라고 요구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요한복음 10:25-30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나이지 동등이 아님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우월한 지위와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양”을 주셨음을 인정하셨다.
그는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크시다’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은 “양”을
구원하시는 목적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이다.
즉, 두 분이 “양”에 관하여 동등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도 그들의 손에서
양을 빼앗아가는 것을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신성에 있어서 동등함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목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임을 지적하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기도로 확증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6-11
예수께서 이 기도 가운데서 표명하신 사상이 요한복음 10장에 기록된 그의 말씀과 비슷하다는 것에 유의하라.
예수께서는 17장에서 다시 그의 제자들 즉 그의 “양”을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이 두 개의 장에서 지적된 하나라는
의미는 동일하다.
예수의 기도를 보면, 예수와 그의 아버지가 하나인 것은 그의 참다운 추종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하나”임을 알 수 있다.(요 17:11)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부가 결코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과 활동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기도 가운데서 그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시고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신 사실은 예수께서 자기 아버지와의 동등성을 결코 주장하지 않으셨음을 더욱 증명한다.(요 17:3, 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고 이의를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가?
기록을 조사하여 보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하나님을 모독, 새번역]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2-38)
그러면 왜 믿음없는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는가?
분명히,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아버지께만 속하였다고 믿은 능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그가 “양”에게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떠한 인간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빠뜨린 것은 예수께서 모든 것을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았음을 인정하셨고 그가 하고 있던 선한 일이 그가 아버지의
대표자임을 증명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분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릇된 결론이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논리가 그릇되었다는 것은 또한 다른 사건으로 볼 때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아들 하나님’이라고 자처해서가 아니라 ‘메시야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거짓 비난을 받으셨다.(마 26:63-68. 눅 22:66-71)
또한 이보다 앞서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자로 높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를 신성 모독자로 죽이기를 원하였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으 5:18은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 준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음에 유의하라.
그러나 예수의 믿지 않는 동족 ‘유대’인들은 그가 아버지와 이러한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특별한 아들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는 누명을 씌운 것이 잘못이었던 것과 같이
그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불렀’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자로 삼았다는 주장도 그릇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지 않음
물론 예수와 그의 아버지와의 하나이심 곧 그분들의 연합은 어떠한 인간 부자 관계에서의 연합보다 크고 웅대하다. 물질적인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도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인간 이전 존재에 대하여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I Am, 예루살렘 성서]” (요한 8:58)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을 여호와라고 밝히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 예루살렘 성서]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I Am]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출애굽기 3:14)
많은 번역자들은 요한복음 8:58과 출애굽기 3:14에서 다 같이 “I a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두 귀절은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는가?
아니다.
출애굽기 3:14이 희랍어 칠십인역(기원 제1세기에 사도들이 자주 인용한 번역판)에는 ‘에고 에이미 호온’ 즉 “나는 존재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8:58에 있는 ‘에고 에이미’(I am)라는 말의 단순한 사용법과 아주 다르다.
요한복음 8:58에 있는 동사 ‘에이미’는
분명히 역사적 현재형이다.
왜냐 하면,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과거와 관련시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많은
번역자들은 그들의 번역에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역」에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내가 존재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인간 이전 존재를 지적하신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놀랄 필요가
없었다.
여러 세기 전에 ‘미가’의 예언은 메시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 5:2)
그러므로 ‘아브라함’보다 오래 전에 존재하였지만 예수는 시작이 없는 분이 아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그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근본”이 있다.(시편 90: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 사실 자체가 그분이 아버지에 의하여 산출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맏아들이자 독생자임을 나타낸다.
예수 자신은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고 말씀하셨다.(요 6:57).
아들은 존재하게 된 후에 만물을 창조하는 데 사용되었다.(요 1:1-3. 골 1:15-17. 히 1:2)
독생자로서 이분은 아버지와의 특별한 친교를 즐기셨다.
성경에서 그는 “아버지 품 속”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요 1:18)
예수께서는 그의 아버지의 형상—개성과 길—을 매우 완전하게 반영하셨으므로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아들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눅 10:22)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는 참으로 광대한 의미에서 하나이다!
그분들은 항상
목적과 활동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백히 알려 주는 바와 같이 그들은 동등하지 않다.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셨고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순복하였으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요 8:29. 고전 11:3).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참으로 ‘아들 하나님’ 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요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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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경하다. 2. 깨닫다. 3. 요 14:17, 19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믿음을 권고하신 말씀이다.
이 권고의 내용은 그가 바로 신인 간(神人間)의 중보자란 것이다.
곧,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중보자)라는 것이, 요한 복음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중보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영적으로 보게)하시니,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는 누구신가?(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를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 평합니다.
다원주의 시대에는 이런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다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누가복음 1장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히브리어 1장 2절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요한복음 1장 역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영원한 구원을 이뤄주신 분입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함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대상 16:25~26)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이렇게 지어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아름다운 성도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함에 대해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간조한 곳, 건전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5~7)
셋째, 새롭게 하시는 재창조의 주님
주님은 오늘도 창조주로서 만물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내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주님께 인생을 맡깁시다.
주님께 인생을 맡길 때 내 심령과 삶이 새로워지는 은혜를 누립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읍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심으로 내 삶이 새로워지는 회복의 은혜와 새 길이 열리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창조주와 피조물,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희미하게나마 구약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기자는 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렸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호칭 ‘아버지’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아람어로는 abba)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첫째,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둘째,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셋째,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단순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넷째,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않된다.
우리의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의 목적이 있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다섯째,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색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모든 인간의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그것은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 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예수의 영 안에서 정립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 안에서만 정립되고 그 안에서 드러난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12-09-2024(월) 요한복음 12:36b-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영광을 보고(41절)
Isaiah said this because he saw Jesus' glory and spoke about him.
요한복음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공동번역>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보다도 인간이 주는 영광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번역>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고린도후서 12:1-2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현대인> 이런 경험이야말로 큰 자랑거리가 되겠지만 나는 나의 약한 것만을 자랑하기로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으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본 것을 말합니다(사 6:1).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을 때 선지자 이사야는 놀라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사 6:8).
주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굉장한 체험이며 놀라운 간증입니다.
대부분 은혜를 체험한 간증자들은 그 은혜로 인하여 내가 어떻게 되었다는 자기 중심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면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과 경제적 파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회복할 수 있었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 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는 극적인 드라마와 자기 자랑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도 볼 수 없고, 듣고도 듣지 못함며, 깨닫지 못하는 무지목매한 백성들을 향하여 바르게 가르치고 깨우쳐서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갖도록 헌신하는 신앙적 결단을 갖게 된 것을 고백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바르게 사용하고 관리하여 열매를 맺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내가 받았던 은혜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물론 사람마다 받은 은혜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통된 은혜는 지금 우리가 같은 시간대에 같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어떤 사람은 사고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 파산으로, 어떤 사람은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크로노스적 삶에 지쳐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건강한 몸과 마음과 신앙으로 카이로스적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크로노스적 삶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갖도록 권면하고 가르쳐서 카이로스적 삶의 자리로 옮겨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과거에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사람을 내면에서부터 새롭게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충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 맡은 본분은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이사야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들었다.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 말씀이 앞질러 인용된 내용이었다(사 6:9-10).
보고(호라오. hŏraō)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광명. 2. 눅 2:9. 3. 위엄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이사야는, 묵시 중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을 본 일이 있었다(사 6:1).
그는 그 때에 주님의 말씀, 곧,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심을 들었다.
그 때에 겸허하여 받은 말씀이 앞질러 인용된 내용이었다(사 6:9-10).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영광이란 사람으로부터 내가 인정을 받고 존경받는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이란 사람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존귀와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영광에 도취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구름에 태양이 가리워져서 그 찬란한 빛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 흡사합니다.
사람을 영적 존재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영이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동물을 만들었을 때 그 재료는 동일한 "흙"이었습니다.
단 한가지 차이는 사람에게는 생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 결과 동물은 육체적인 생명만 소유하였지만 사람은 영적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영적 존재라고 합니다.
사람의 영광은 영이 회복된 상태에서 사람답게 될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영광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36절에 예수님께서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고 했는데, 예수님 말씀을 듣고도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않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37절)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영적으로 마음이 길가같이 굳어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사할 일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말씀과 찬양을 통해서 내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사람들 못지 않게 안타까운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를 믿지만 드러내지 않고 믿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42절 43절에 말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42절에 ‘관리 중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서 관리들이란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회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을 가리키는데 요즘 우리나라로 말하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를 다 통괄하는 기구와도
같습니다. 그 당시 최고 권력층입니다. 고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지도자급 원로들로서 71인으로 구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와 권세가 막강한 사람들입니다. 그 관원들 중에 마음으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믿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심정이 이해되십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고 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믿는다고 고백하면 산헤드린 공회의에서 출회를 당하고 그 동안 누렸던 특권을 빼앗길 것이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회의원으로
누리는 권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두려워해서 예수님을 드러내서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43절에서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안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는가?’ 하고 이해가 안되어야 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해가 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니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괴롭지만 하나님께서는 통탄할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는 것을 시인을 해서 설혹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라고 하는 막강한 권력과 특혜를 다 포기하게 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땅한 일이지. 나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 마음 속에는 ‘ 충분히 이해가 되네. 예수님을 그들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서 산헤드린 공회 회원이라고 하는 엄청난 권력 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거야. 진짜 갈등이 많았을 거야.’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리들은 지금 얼마나 통탄하고 괴롭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믿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는 세상 권세, 사람의
영광을 포기하는 것은 죽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신지 이제는 보고 사람의 영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지금은 보았을 그들은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가슴을 칠 것입니다. ‘내가 왜 그 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영광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을 놓졌을까? 왜 나는 그 때 그렇게 바보같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순간에 사람의 영광이 훨씬 커보였습니다. 그가 공직자로서 누리는 권력과 특혜와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든 존경을 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죽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후회가 되고 원통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찌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저울질되고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비교가 되는데 안타깝습니다. 관리들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드러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사업하고 장사하다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감추고 거짓의 영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까?
성공하려다 보니 예수님 믿는 것을 감추고 미움의 영, 분열의 영을 따라 살지는 않았습니까?
세상 재미 쾌락을 좇다가 음란의 영을 따라가지는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10장 32-33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꼭 입으로 부인해야 부인하는 것입니까? 입으로는 시인하면서 삶으로 부인하는 것이 더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싶은 유혹이 예수님 당시 관리들만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실제로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사람의 영광만 알지 하나님의 영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사람의 영광과 세상 영광에 대한 미련이 너무 강한
것입니다. 이것 잃어버리면 어떻게 할까?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이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얻고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일에 대해서 아직 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심심찮게 입시 실패로 자살한 학생들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살을 할 만큼 심각했을 것입니다. 도무지 더 살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유는 사람의 영광, 세상 영광 밖에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대학 들어가지 못하고 또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생 그 손가락질 받고 어떻게 사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세상 영광과 비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누구에게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 시험 잘못 보면 죽을
생각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 계신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까?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여러분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 사이에서 망설여집니까?
이제는 망설여지지 않아야 합니다.
찬송하며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생명과 멸망의 갈림길인데. 망설여지면 큰 일이지요!
그러나 길이 좁으면 마음이 힘든 것이 사실이니
어떻게 합니까?
넓은 길, 모두가 가는 길이면 유혹이 되니 어떻게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면 망설여지지
않습니다.
갈등이 없어지게 됩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안타깝지 좁은 길로 가는 자신이 안타깝지 않습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면 압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마음이 길 가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테니까요. 그러나
마음이 돌밭이나 가사떨기인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진단해 보면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볼 것이다.
솔직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당하게 될 고난이 두렵습니다. 마음이 돌밭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어떻게 먹고 살까? 애들은 어떻게 공부시킬까? 집은 어떻게 마련할까? ’ 세상 재리로 마음에 걱정과 염려가 많은 사람은 가시덤불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현재는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 같아도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곧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될 가능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상태에서 그냥 머물러있으면 큰 일납니다. 사람의 영광 세상 영광에 그만 마음이 흔들려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는 일에 대해서 결단하지 못하는 관리들과 똑같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야기가 기록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 영광보다 더 사랑하여 우리 마음 상태가 그렇다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드러내지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큰 일 납니다.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영광’을 버리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합니다. 꼭 죽을 것 같습니다. 다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것 같습니다. 진짜 복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오직 사람의 영광 세상의 영광만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영광 버려도 절대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영광을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서 진정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 부분에서 심한 영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나누는 것은 너무 2분법적인 생각이야!’ ‘사람의 영광을 포기하라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태도야!’ ‘성도들은 이런 메시지를 들으면 다 떠나갈 거야!’ ‘성도들이 세상에서 낙오하게 만드는 것이야!’ ‘세상 영광도
하나님이 주신 복일 수 있잖아?’ 설교할 담대함을 잃어버릴 정도로 휘청거렸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너는 계속 가야 한다. 절대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보아라! 십자가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묵상했습니다.
제가 처음 십자가의 실상을 보았을 때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다고 했지만 십자가의 실상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장애인이 될 절박한 처지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 날 저는 나 자신이 철저한 죄인인 것을 비로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알았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람의 영광’의 실체도 보았습니다! 소위 성공이라는 것, 사람들의 평판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도 보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성공은 주님 앞에 설 때 ‘내 종아! 수고하였다.’ 한 마디 듣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때, 제가 장애인이 되기를 스스로 원했습니다. 장애인이냐 아니냐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말은 들었어도 머리로는 그러리라 생각했어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상이 좋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여전히 사람들 평판이 신경 쓰이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십자가를 알고 나니 그까짓 사람의 영광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겼는지 너무나 원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사람의 영광, 세상의 영광’ 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여러분, 배설물을 어떻게 버리는지 말을 안 드려도 다 아실 것입니다.
(빌 3:7-9)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면 결코 세상 영광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니 다시 한번 사람의 영광, 세상 영광의 실체가 뚜렷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실상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백했습니다. “주여, 종이 이 진리를 피해가지 않겠습니다. 계속하여 나아가겠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갈라지는 경계선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면 세상 영광의 실상도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 실상도
다 보입니다. 십자가에 서서 그 영광의 실체를 본 사람은 세상의 영광을 버려야 할 때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면 그 양쪽이 다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광이 주님 보다 앞설 때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할 때,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큰 일 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말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일본에 협력하여 전국 마을 마다 다니면서 시국 강연을 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라고 심지어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은 마치 순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국 젊은이들을 독려해서 무서운 다시 못 돌아오는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그 자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일제 말 민족
반역자들의 명단이 계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결혼도 떳떳하게 못합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어째서 그 똑똑한 사람들이 일본에 붙어서 반 민족적인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을까요?
세상 영광만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모르는 성도는 시대 분별도 못합니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으면 그러고 다녔겠습니까?
당시 형편을 잘 알면 알수록 더욱 일본이 오래 갈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 영광을 버리기 힘들었습니다.
민족에게 욕을 먹을지언정 일본에 협력하지 않았을 때 당할 어려움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신앙도 내동댕이치고 세상 영광 사람의 영광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언젠가는 사람의 영광 세상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결정적으로 붙잡아야 할 때가 옵니다.
그 때를 위한 준비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이 훈련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문제를 경험을 할 때 마다 명심해야
합니다.
거기서 준비된 사람이어야 결정적인 때 여러분이 성도의 반열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의 반열에 서실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일제 시대와 같은 때가 온다면 여러분은 ‘나는 이미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더 이상 세상
영광 때문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를 분명히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두 영광의 실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은 특별한 사명자만 가는 길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절대로 고난의 길도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누릴 축복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세상 이기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절)
사람들 속에 부대끼며 살면서 ‘사람의 영광’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려울 것 같다.
12-07-2024(토) 요한복음 12:31-3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빛을 믿으라(36절)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Put your trust in the light while you have it, so that you may become sons of light."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Jesus left and hid himself from them.
* 빛(포스. phōs)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 5457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빛(마4:16, 눅8:16, 딤전6:16), 불(막14: 54), 불빛(눅22:56), 등불(요5:35, 행16:29), 광채 (행12:7), 광명(고후11:14).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빛"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이시요, 예수님도 빛이시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하십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향하여 진리를 선포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보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이 더 바람직한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친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율법에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까?
도대체 인자가 누구입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은 사람의 특징은 "선택적 지각"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고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시야가 넓은 사람은 "종합적 지각"에 의하여 잘못된 것을 수정한 후에 올바른 것을 인정합니다.
메시야가 바로 눈 앞에 있지만 그 메시야를 알아 볼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처럼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듣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보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깨닫는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의 빛을 밝혀야 합니다.
생명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소망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준비합시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밤을 새웠던 목자 예수님처럼 내가 찾아야 할 양을 둘러봅시다.
애타게 나를 기다리는 방황하는 양을 위하여 어두운 밤에 빛의 등대가 되어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빛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시편 90: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한다(요한일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요한일서 2:9 /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하나님은 빛이시라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5절을 보면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사도들이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사도의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가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을 쓰고 있는 것은 이 소식을 듣는
자들에게 사도의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 자체가 사도들에게는
기쁨이었고, 또한 이 소식을 듣는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5절을 말씀을 들었을 때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어집니까?
아마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소개의 말 정도로 여겨지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에게는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이 기쁨이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기 위해 이같은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 자체만을 가지고는 쉽게 기쁨의 의미를 알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이 담고 있는 내용을 아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무한한 기쁨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 때 왜 이 말이
기쁨이 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빛이시며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다면 하나님은 어두움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악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의 실수는 바로 이것을 잊고 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 분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말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몽땅 용서하신 분으로만 여깁니다.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할 정도로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심판하시는 분임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말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신
사랑만을 말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는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러 일이 있게 하시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할 때 세상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왜’라는 물음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앞에서 비춰볼 때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를 가진 피조물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나에게 어떤 고통이 있다 해도 거룩 앞에서는 할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당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죽어야 할 이유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는 것은
당연히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대신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 죽는 것을 통해서 죽어야 할 자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무조건 우리를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자를 살리기 위해서 죽을 이유가
없는 분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마음껏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하찮게 여기고 세상의 것을 크게 봄으로서 날마다 사랑을 원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도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에서 이해하면 좋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실 때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과 사귄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현상이 있겠습니까?
빛이 올 때 빛을 아는 자는 자연히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교제인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과 사귄다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됨에 대해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둠의 존재로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오직 멸망의 자식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고 크나큰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는 기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시각에서 자신을 보면 다만 멸망을 받아야 할 어둠의 존재일
뿐입니다.
죽어야 할 존재에게는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함이고 기쁨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불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에서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야 마땅하고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서도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있게 하는가?’라는 의심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내가 사랑을 받았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만약 이
기쁨을 누리지를 못하고 상실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크게 여기지고 중하게 여겨지는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현재적인 세상이 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우리의 눈과 관심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입술은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도 마음에서 하나님은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쓸데없는 것들을 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앞에서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과연 가치있는 것인가를 묵상하고 바울의
고백처럼 그러한 것은 배설물에 불과할 뿐임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며 큰 선물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가치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더욱 크게 빛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 앞에 결코 나올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길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또 욕심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가장 큰 것을 주셨는데 무엇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신자다움일 것입니다.
나의 가치 없음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가치없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시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이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서 숨으시니라
- 여기서 "빛"은 윗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빛이신 만큼, 그도 빛이시다(요일 1:5; 요 8:12).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계심은 그 때 팔레스틴에만 한 번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는 중에 있었다. 그것은 천재 일우의 귀한 기회를 놓치는 불행이었다. 그 기회를 놓친 뒤에는, 그가 육신으로 세상이 계실 수는 영원히 없을 터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 기회를 붙잡아 그를 믿어야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별세 후에는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기회도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던 주님을 오랫 동안 보면서도 그렇게 완강하게 끝까지 배척하던 자들로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두 번이나 역설(力說)하신 것이다(35절 참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빛을 믿는다고 설명합니다.
왜 예수를 믿는 것이 빛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을까?
빛이 아니라 불은 왜 아닌가?
빛이 아니라 물은 왜 아닌가?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설명한 철학자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만물의 근원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다는 것은 빛을 믿는 것이라고 아주 간단 명료하게 깨우치셨습니다.
빛의 성질?
직진, 반사, 굴절, 분산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설득(31-36) 이제 예수님은 둘러선 사람들을 설득하십니다. 땅에서 들리시는 일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 거지요. 그리스도가 이루실 구원의 일(사역)을 위해 떠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일러주신 겁니다. 그러자 율법을 좀 안다는 무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율법에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고 하는데 어째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합니까? 도대체 인자가 누굽니까?" (34) 답답한 노릇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물었으니 말입니다. 이들은 영적 까막눈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답답한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낮이니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다.” (36) 빛이신 자신을 빗대어 지금 자신이 계실 동안에 자신을 보고 믿으라고 설득하셨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 중의 많은 이는 끝내 믿지 못하고 자기 길로 돌아갑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예수님을 코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했던 그들의 답답한 모습이 내게는 없을까요? 주님의 뜻이 분명하고, 주님이 분명히 원하시는 일임에도 모른 척, 아닌 척하며 외면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요한일서 1:5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합니다.
빛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잠언 4:18에는 의를 “돋는
햇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빌립보서 2:15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늘에서 빛나는 “순전하고 흠 없는” 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마태복음 5:16 예수님은 빛을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시편 76:4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주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은 어둠과 자연스럽게 대조를 이룹니다.
빛이 의와 선을 말한다면, 어둠은 악과 죄를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1:6에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또
5절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불빛 하나가 아니라 빛 자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빛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숨김이 없으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죄도 없으시며, 죄악도 없으시며, 불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벧후
1:4).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아들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따른다”는 것은 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빛을 비추어 그들이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살전 5:5). 하나님은 물리적인 빛의
창조자이시며 또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며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의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어둠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 (사 9:2; 합 2:14; 요 1:9).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드러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 (요 3:2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요 1:9).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예수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행
26:18).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 1:1~10)
요한일서의 첫 부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사이의 참된 교제에 대해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거짓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1서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어서 말씀을 전하는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고, 말씀을 듣는 성도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시면서 이 말씀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새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I. 요한 일서의 서언
1. 서신의 주제: 생명의 말씀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절의 말씀은 원문의 어감을 충분히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원문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 눈으로 보았던 것,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졌던 것, 생명의 말씀”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1절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요한은 이 편지의 주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제는 바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2. 생명의 말씀에 대한 요한의 두 가지 강조점 (2절)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2절) 이 생명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설)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보았고 너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주제가 되는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한 가지는 그 분은 먼저 계신 분이시다가 성육신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시다는 것과, 또 한 가지 사실은 이 생명의 말씀은 요한이 상상하거나 그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그리고 주목해서 만졌던 것을 너희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요한의 선포의 목적 (3-4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하는 목적은 너희(복음의 2세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다음 세대)로 하여금 우리(사도 요한으로 대표되는 복음의 1세대)와 사귐이 있어서 주님의 교회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도적인 믿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목격했던 이 사도들의 믿음을 그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3a절)
이 글을 쓰고 있을 때에 요한은 80세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유일한 생존자로 그의 삶을 마무리하는 노년의 시절에 이 글을 쓰면서 기대했던 것은 그 다음 세대 역시 사도적 신앙을 견지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3b절) 이 구절은 이전 번역이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개역한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명절 때 부모님을 중심으로 온 가족이 모이듯이 요한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둘러앉아 있는 것, 함께 이야기하며 교제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1서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다시 한 번 우리 교회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중심에 앉아계시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 되고,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가운데 성도님들 서로 간에 사귐과 교제가 풍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4절) 편지를 쓰는 목적을 한 번 더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사도 요한과 복음의 1세대가 기쁨에 충만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런데 많은 영문 번역을 보면 ‘우리’라는 표현을 ‘너희’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서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다른 어떤 사본에서 우리가 이것을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도 합니다. 둘 다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을 통해서 복음의 1세대도 기쁨이 충만하고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성도들과의 사귐도 회복하는 우리 성도들, 다음 세대들까지도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다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 함께 나누게 되는데, 제가 마음에 소망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성도님께서 저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던 요한, 교회의 터가 되고 기초가 되었던 사도들의 말씀을 귀로 듣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성도님들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 서로 간에 사귐이 풍성하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 나누게 될 때 설교자와 듣는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하여지기를 원합니다.
II. 예수님에게 듣고 전하는 소식(5절):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1. 내용: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로움과 거룩함과 참됨을 강조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5절) 사도 요한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첫 번째 소식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며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며 절대적으로 참된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 그 분의 속성에는 여러 가지 있음.
그런데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소개하는데 조금 이상한 것이 없습니까? 만약 제가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먼저 소개할 것 같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가장 널리 선포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유하시며 은혜가 한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들이 먼저 선포되어지며 우리는 그 말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던 제자였고 사랑의 사도였던 요한, 요한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요한이 노년에 몸이 거동할 수 없었을 때 설교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요한을 들것으로 옮겼을 때 요한은 모였던 성도들을 향해서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잠간 쉬다가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설교를 마무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요한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듣고 하나님에 대해서 전하면서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먼저 가르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깨닫게 될 때에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 때에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본받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생각보다 많이 무기력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편파적이고 이기적인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먼저 기억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사실입니다.
III.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위해 넘어서야 하는 세 가지 거짓말 (1:6-10)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씀을 전한 후에 6절부터 10절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너무 쉽게 빠질 수 있는 세 가지 거짓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누리기 위해서 꼭 극복해야 되고 넘어서야 되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거짓말을 6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거짓말 (6-7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6절) 오늘날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고집과 이 세상의 풍속을 쫓아서 살아간다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면서 여전히 어두움에 살아가는 것은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던가, 하나님을 믿으면 빛 가운데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귐이라는 것은 코이노니아, 공동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우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로움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어서 올바른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7a절) 성경에서 빛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준, 기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으로 삼아서 걸어가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 서로 간에 사귐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성도들 사이에 사귐, 성도들의 교제가 조금씩 피상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는 은혜를 받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성도의 교제를 누리는 일에는 게을리 하시는 분이 많이 있고, ‘믿음은 내 혼자 잘 하면 되지 무슨 사람들과 교제할 필요가 있나’라고 성도간의 교제 자체가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청년 시절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내 삶을 하나님의 빛된 말씀에 비추어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조금씩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잘못을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도 없는데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그 삶을 살아가려고, 빛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다보니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외롭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던 것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삼아서 빛 가운데 살아가기로 결심했던 순간부터 가장 보고 싶어지기 시작한 사람은 성도들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하나님의 빛된 말씀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의 가르침과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많은 믿음의 성도들이 너무 보고 싶어졌습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 16:3) 저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겪는 모든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성도들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으로 삼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시도하다보면 그때부터 성도들의 사귐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고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기쁨이 되고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됩니다. 성도님들 빛 가운데 살아갈 때 우리는 서로 사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b절) 이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예수의 피로 씻김을 받은 후에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한은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예수님의 피가 너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의 법도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게 될 때 그때서야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어쩌면 우리가 마음에 결심은 했지만 또 넘어지고 넘어졌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들의 타락한 성품까지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빛 가운데 살아가기로 결심할 때 이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우리를 새롭게 했는지를 체험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꼭 극복해야 되는 첫 번째 거짓말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 한 분 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바로 내일부터, 오늘 당장 성전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빛으로, 표준으로, 기준으로 삼아서 빛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두 번째와 세 번째 거짓말 (8-10절)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두 번째 거짓말이 나오게 되는데,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8절). 그리고 세 번째 거짓말이 나오는데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10절)
8절 말씀처럼 죄에 대한 성향,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10절 말씀처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며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다고 요한은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위해서 꼭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이 우리가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이며 우리는 범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가르침을 주는 것은 영지주의자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영지(靈知)주의자는 하나님과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지식, 신령한 비밀, 하나님과 신비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신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만남을 가졌기 때문에 나중에 그들이 하나님과 신비적인 만남을 가졌고, 하나님과 신비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는 비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저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날마다 해왔지만 주님 앞에 하나씩 자백한 것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느새 네가 이제 죄 없는 사람처럼, 범죄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있구나.’
저를 책망하셨는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9절)
여기서 자백이라는 말은 ‘confess’ 즉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내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내 삶을 돌아보는 것이 자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해주십니다. 죄를 범하고 나면 그 죄에 대해 형벌이 따라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따른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에는 책임과 형벌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앞에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 분이 우리를 사해주십니다. 이 죄에 따르는 형벌과 책임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십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들로 하여금 죄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들의 영혼을 깨끗케 씻어주십니다. 우리를 씻어주시고 허물과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주십니다.
제가 난지도를 섬길 때의 이야기를 가끔 말씀드렸는데, 1984년 처음 난지도에 갔을 때 난지도에 있는 아이들이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사 선생님들이 한 달에 한번씩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데리고 갔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씻고 나면 깨끗하여져서 아이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씻기 전과 씻고 난 후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육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님들 우리 영혼에 때가 많아서 우리 영혼이 무감각하여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빛 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허물을 보여주시고 그 죄를 예수님과 함께 하나씩 고백하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고 예수님의 피로 씻겨지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목욕을 하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로 씻김을 받게 되면 옆의 사람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도 상상 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우리 옆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누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떤 실존적인 결단을 해야 되겠습니까? 빛 가운데 행하기를 결단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표준에 합당하게, 순간 순간 빛 가운데 걸어가기를 선택하셔야 됩니다. 그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 성도간의 사귐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보혈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개신교의 유명한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감리교와 장로교의 차이점이 이것입니다. 유명한 존 웨슬레는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아서 이 땅에서도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죄의 영향력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난 그 완전한 삶에 이 땅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는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날마다 우리 자신을 고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허물을 자백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날마다 자신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입니다. 이것이 우리 장로교의 신앙고백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배우고 알아갈 때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사이에 풍성한 사랑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 마음속에 하늘의 기쁨, 하늘의 능력이 넘쳐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한번 보십시오.
성도님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셔야 됩니다.
우리가 다른 것보다 오늘도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는 빛 된 말씀을 통해서 오늘도 이 하루 빛 가운데 살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노력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제까지 실패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주님께서 다 용서해주십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서 날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우리 죄를 자백하고 날마다 자신을 고치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백이란 무엇인가?
자백은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관계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개인이 자신의 죄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자백은
법적, 도덕적, 심리적 측면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자백은 종종 범죄와 관련된 경우에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볼 수 있다.
친구에게 잘못한 일을 사과하거나, 가족과의 갈등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또한 자백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자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 과정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자백은 개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이는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진정한 자아를 마주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깨닫게 되며, 이는 자아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자백은 관계 회복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갈등을 일으킨 경우, 자백을 통해 상대방에게 진심을
전하고, 회복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도덕적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더욱 깊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자백은 이러한 관계의 복원력을 높이며, 상호 신뢰를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백의
과정은 종종 두려움과 불안이 동반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법적인 문제나 사회적 비난을
동반할 경우, 자백은 더욱 어려운 선택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과 마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필수적인 단계로 볼 수 있다.
자백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다.
자백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자백은 상대방에게도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행위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백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자백이 이루어질
때, 개인은 자신의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자백의
마지막 단계는 용서이다.
자백이 이루어질 때, 상대방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자백이 단순히 개인의
행위에 대한 인정에 그치지 않고, 관계의 회복과 더 나아가 사회적 화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자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는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자백은 개인의 심리적 성장, 사회적 관계의 회복, 그리고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자백은 두려움과 마주하는 용기이며, 진실을 받아들이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따라서 자백은 우리 모두가 경험해야 할 중요한 인간의 삶의 일부로,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성숙한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요한계시록 10: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아버지의 이름
민수기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12-06-2024(금) 요한복음 12:27-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의 소리(28절)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Father, glorify your name!" Then a voice came from heaven, "I have glorified it, and will glorify it again."
이 말씀은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내려보내신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우리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을까요?
먼저 선(善)이란 성경적 정의를 정확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선'이란 하나님을 찾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착한 행실을 하라(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착한(καλῶς) 행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착하다는 것은 다른 무엇과 비교하여 조금 더 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착함을 말합니다.
둘째는 용서받은 삶을 회복하라(마가복음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어느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그의 침상채로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으므로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지붕위에서부터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데리고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Son, your sins are forgiven)"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때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하시며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깨우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침상을 들고 일어나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하며 놀랐다고 합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 본 네 사람이 그가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으로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믿음의 부모로부터 육체적 생명을 받았고 또한 주님을 알 수 있는 믿음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목사가 되었고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지금 내가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있다면 그 은혜가 어떻게 내게 임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모두에게 알려지고 드러남으로 모두 함께 구원의 주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영광을 돌려보내야 하겠습니다.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영광스럽게하다(도카조. dŏxazō) δοξάζω
스트롱번호 1392
-
1. 찬양하다, 존경하다, 영예를 주다, 찬미하다, 영광돌리다.
-
a. [아버지께] 마 5:16.
-
b. [하나님께] 막 2:12. ㉠ ἔν τινι, 갈1:24, 벧전4:16. ㉡ ἐπίτινι, ~때문에 찬양하다, 행4:21. ㉢ διά τινος와 ἐπίτινι, 롬1:21, 11:13, 고전12:26, 고후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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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찬란하게 입히다, 영광스럽게 하다[내세에 올 영광으로], 요7:39, 12:16,23, 28, 13:31,32, 17:1,5,10, 행3:13, 롬8:30, [요한이 즐겨 사용한 단어] 고후3:10, 살후3:1, 벧전1:8 등.
-
관련 성경 / 영광 돌리다(마5:16, 막2:12, 눅2:20), 영광얻다(마6:2, 요11:4, 12:16), 칭송받다(눅 4:15), 영광스럽다(요12:28), 영화롭게 하다 (요17:1,4, 행3:13), 찬송하다(행13:48), 영광되다(고후3:10). [명] 영광(고전6:20, 갈1:24).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과 말씀에 의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앞으로는 그의 죽으심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소개합니다.
거룩한 이름이므로 사람의 입으로 부를 수 없었기에 문자로 기록할 때는 "야웨"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야웨'라는 거룩한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여 부를 때는 "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로 적은 것을 "테트라그람마톤(Τετραγράμματον. Tetragrammaton)"이라고 하여 "사자신명(四字神名)"이라고 번역합니다.
테트라그람마톤은 히브리 문자로 "야훼(야흐웨)"를 가리키는 네 글자를 말합니다.
테트라(τετρα)는 "넷"이란 뜻으며, 그람마톤(γράμματον)은 "글자"라는 뜻입니다.
테트라그람마톤(tetragrammaton) 히브리 4개의 문자이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한 문자라고 하여 그 문자를 특별하게 구분하는 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에서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라고 합니다(요 17:6, 11, 12, 26. 5:43. 10:25. 12:28).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합니다.
구성
히브리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에 요드(י)가 제일 오른쪽에 있다.
이렇게 자매품이 많은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고, 원래 라틴 문자 U와 W는 V에서 파생된 글자이고, J는 반자음 I를 가리키고자 중세 유럽 때 나온 글자며, Y는 본디 그리스어 발음[1]을 표시하고자 라틴인들이 도입했으나 후대에 음가를 상실하고 그냥 /i/처럼 발음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라틴 문자를 어떤 식으로 운용하느냐에 따라 달린 문제. 독일어식으로 하는가 라틴어식으로 하는가 등에 따라 다르다. 히브리 문자에서 역시 첫 번째 글자인 요드, 세 번째 글자인 와우는 각각 반자음 y와 w에 해당한다. 히브리 문자를 라틴 문자로 전사하는 단계에서 이런저런 방법이 생겨난 것. 후대에 생겨난 문자를 완전히 배제해서 고전 라틴 문자로만 표기하면 'IHVH'가 되는데 고대 문자임을 반영해서 이렇게 표기하는 곳이 있다.
셈어파 문어체가 흔히 그러하듯이 히브리엉 문서도 자음만 적었다.
모음 없이도 발음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셈어파의 3근 자음 특성상 단어를 알면, 자음자만 보고도 모음이 뭐가 들어갈지 대충 안다.
그래서 자음으로만 적어도 문서를 쓰고 읽을 수 있다.
물론 모음자가 없이는 문법적으로 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에 나중에는 모음자도 만들었지만 일상적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오독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성경, 사전, 어쩌다 외국어 고유 명사나 외국인용 교재에나 쓰인다.
현대 히브리어, 같은 셈어파에 속한 아랍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이런 문자의 특성상 신의 이름 역시 당연히 자음으로만 적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직접적으로 발음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도 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부분에서는 אֲדֹנָי(adonay. 아도나이) 즉 '주님'이란 뜻으로 읽었고, 유대인들의 경우 일상생활에선 הַשֵּׁם(ha Shem. 하 솀), 즉 '그 이름'이라고만 치환해 부르기도 한다.
이게 계속되다 보니 아예 신의 이름에 들어갈 모음자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저 문서상으로 자음자만 남게 되었다.
심지어는 모든 글자를 쓰지 않고 앞 두 글자만 딴 יָהּ(yah; 야)로만 써서 완곡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고 '신이 ~을 하신'이라는 뜻이 포함된 몇몇 인명의 경우 יְהוֹ־(y'ho-; 여호-), ־יָהוּ(-yahu; -야후) 등으로 축약해서 표현하기도 했다.
ἀγαθ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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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형] 선한, 착한,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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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외적인 의미에서] 적합한, 유능한, 유용한, 마25:21, 23, 눅19:17, 23:50, 행11:24, 엡4:29, 딛2:5, 벧전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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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가치로서] 완전한, 마19:17, 막10:18. 선한, 친절한, 마20:15, 벧전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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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선(마5:45, 롬2:7), 물건(눅12:18,19), 선행(행9:36), 양심(행23:1). [형] 선한(마12:34, 19:16, 눅6:45, 골1:10), 좋은(마7:11, 눅1:53, 요7:12), 착한(마25:21, 고후9:8).
καλῶς 스트롱번호 2573
어원 / 2570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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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잘,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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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맞게, 적절하게, 바로, 훌륭하게, 막7:37, 눅6:48, 고전14:17, 갈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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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덕적] 훌륭하게, 흠잡을 것 없이, 갈4:17, 히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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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하게, 받을 만하게, 마12:12, 눅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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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잘, 바로, 바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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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전7:37, 약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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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말하다, 듣다, 깨닫다 등의 동사와 함께] 바로, 잘, 마15:7, 막7:6, 눅 20:39, 요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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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감탄사로] 옳다!, 막12:32, 롬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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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빈정대는 말로] 잘도, 막7:9, 고후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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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비교급] κάλλιον: 매우 잘, 행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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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사랑하여(마5:44, 눅6:27), 옳게(막12:32, 벧후1:19), 낫게(막16:18), 잘(요18:23, 행10: 33, 고전14:17), 선하게(히13:18), 합당하게 (요삼1:6). [명] 선(마12:12). [부] 잘(마15:7, 막7:9, 행25:10).
'아가도스'와'칼로스'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도스'와'칼로스'입니다.
둘은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선'을 가리킬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칼로스는 선과 악 구조의 내용을 품은 선으로 그 칼로스로 아가도스의 참 선으로 이해 되어 진다면 선도악도 아닌 그 참 선으로 하나되는 그 깊은 '선'을 의미합니다.)
(요 10:11) 나는 선한(칼로스 G2530-가치있는)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 1: 6) 너희 속에 착한(아가또스 G18)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그 두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입니다.
성도의 착한 일, 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 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 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은 이 세상 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 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 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행 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소금의 삶,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순종의 착한 행실,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토브 (히 2896, טוֹב : good 562회)
아가도스 (헬 18, ἀγαθός : good 101회)
"Ἀγαπητέ, μὴ μιμοῦ τὸ κακὸν, ἀλλὰ τὸ ἀγαθόν.
ὁ ἀγαθοποιῶν, ἐκ τοῦ Θεοῦ ἐστιν; ὁ κακοποιῶν, οὐχ ἑώρακεν τὸν Θεόν."
(Ἰωάννου γ 1:11 Greek)
"아가파테, 메 미무 토 카콘, 알라 토 아가돈.
호 아가도포이온, 에크 투 데우 에스틴; 호 카코포이온, 우크 헤오라켄 톤 데온."
(이오안누 감마 1:11 한글음독)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요한3서 1:11 개역개정)
I
※ '선한 또는 선'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형용사 또는 명사
'토브' (2896, טוֹב : good)와 '선함, 좋은 것'이라 번역된 남성 명사
'투브' (2898, טוּב : goodness 32회)는 '선하다, 보기에 좋다'라는 동사
'토브' (2895, טוֹב : to be good 25회)에서 유래한다.
※ '선'이라 번역된 헬라어 여성 명사
'아가도쉬네' (19, ἀγαθωσύνη : goodness 4회)는 '선한'이라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아가도스' (18, ἀγαθός : good)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선을 행하다'라 번역된 동사
'아가도포이에오' (15, ἀγαθοποιέω : to do good 10회)가 있다.
동의어로 '선한'이라 번역된 형용사 기본어
'칼로스' (2570, καλός : good 101회)와 '선을 행하다'라 번역된 동사
'칼로포이에오' (2569, καλοποιέω : to do good 1회)가 있다.
II
아래에서는 히브리어 '토브'그리고 헬라어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용례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이들 원어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상고해 본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896, 토브)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세기 1:4 개역개정)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2896, 토브)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사무엘하 2:6 개역개정)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2896, 토브)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역대상 16:34 개역개정)
"또 주의 '선한'(2896, 토브)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느헤미야 9:20 개역개정)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2896, 토브)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2896, 토브)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편 14:1-3 개역개정)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2898, 투브)으로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2896, 토브)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편 25:7-8 개역개정)
"주는 '선'(2896, 토브)하사 '선을 행하시오니'(2895, 토브)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2896, 토브)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8, 71 개역개정)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2896, 토브)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개역개정)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4190, 포네로스)하니
어떻게 '선한'(18, 아가도스)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18, 아가도스) 사람은 그 쌓은 '선'(18, 아가도스)에서
'선한 것'(18, 아가도스)을 내고 '악한'(4190, 포네로스) 사람은
그 쌓은 '악'(4190, 포네로스)에서 '악한 것'(4190, 포네로스)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34-35 개역개정)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18, 아가도스)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18, 아가도스)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 19:16-17 개역개정)
"나는 '선한'(2570, 칼로스) 목자라 '선한'(2570, 칼로스)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한복음 10:11 개역개정)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18, 아가도스)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2570, 칼로스)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18, 아가도스)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2556, 카코스)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18-19 개역개정)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선'(19, 아가도쉬네)과 '의'(1343, 디카이오쉬네)와
'진리'(225, 알레데이아) 안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8-9 원문직역)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2569, 칼로포이에오) 낙심하지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3 개역개정)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18, 아가도스)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5-17 개역개정)
"'선을 행함'(15, 아가도포이에오)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2554, 카코포이에오)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베드로전서 3:17 개역개정)
위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히브리어 '토브'와 '투브' 그리고 헬라어 '아가도스'와 '칼로스'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선이요아는 것이 선이요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선이다.
선악(칼로스와 카코스)을 분별한다는 것과 착한 행실에 대하여
선악을 분별한다고 할 때의 선악은, 아가도스와 파울로스를 말하는 게 아니고, 칼로스와 카코스(히 5:14)를 일컫는데, 이는 선악과는 조금 다른 의미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선악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오로지 생명을 좇아서 사는 삶이 기름부음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여깁니다.
생명에 적합한가 아니면 적합지 않느냐를 분별하는 게 칼로스와 카코스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저것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를 나누는 능력이 아니라, 저것이 생명을 따라서 적합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칼로스와 카코스의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 착한 행실(호 칼로스 에르곤)
'타 카라 에르가'를 착한 행실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번역하는 분들이 선악의 뿌리깊은 사상에 기초하여 번역한 예 중 하나입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마법에 걸려 모범생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도리어 전혀 착하지도 모범적이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이러이러한 것은 착한 것이고, 이러 이러 한 것은 악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구분(토브와 라아)은 비록 잠시 인생에 유익을 줄런지는 몰라도 궁극을 지향하는 삶의 관점에서보면 해롭기 그지 없습니다.
타 카라 에르가는 착한 행실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칼로스는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헬라어에 '아가도스'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도 '선한'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선 혹은 착한으로 번역되는 것은 실로 생명의 사상에 기초하기보다 선악의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들이 바라보는 어쩔 수 없는 관점이 반영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브'가 영어에서 good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창세기 1장에보면 우리말로 '좋았더라'는 번역은 참으로 좋습니다.
하나님의 7일 창조에서 어떤 창조물을 보며 참으로 '선하구나'라고 한다면 이상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토브를 '착하더라' 혹은 '선하다'로 번역하고 있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토브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가도스'입니다.
'아가도스'는 좋은 것이며, 비록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그것에 적합할 때 아름답습니다.
좋다고 해서 반드시 칼로스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잘 먹는다는 것은 매우 좋은 것(아가도스)입니다.
영아기에는 모유가 '칼로스'하고 이유기의 아이에게는 이유식이 '칼로스'합니다.
성인이되면 단단한 음식이 '칼로스' 합니다.
여전히 젓이나 먹고 있다면 이는 '카코스'합니다.
그럴 때 '칼로스와 카코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뉘앙스 차이를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그것에 적합한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해롭고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좋거나 해롭거나 입니다.
따라서 착한 행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무슨 구제, 전도, 봉사, 사랑 등),
너희 안에 있는 빛을 말합니다.
빛이 무엇일까요?
그 빛을 착한 행실에 연관하여 정의하고 규정하려고 하는 것에서 미혹에 빠집니다.
너희에게 있는 빛이 과연 무엇이며, 등경위에 등불이 무엇이며, 산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빛이 무엇인지 먼저 고심해보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이미 앞서 마태복음 5장 3절에서부터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에르가(일)란 다른 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과 그 마음의 청결과 애통과 온유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목마름 ...
이런 상태는 생명을 비춰주는 빛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나누거나 분리하거나 무엇을 베풀려는 애씀이 없어집니다.
생을 비추는 아름다운 빛이 비추입니다.
이것이 곧 영혼에서 발산되는 '타 카라 에르가'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앞세우기보다는
우리 속에 있는 상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바라보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와 구제를 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그게 무슨 착한 행실이겠습니까?
혹여 사람들이 감동하고 거기에 착한 행실이라는 명찰을 달아준다 한들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빛이란 어떤 이들에겐 선(악)이 빛이 되고
어떤 이들에겐 생명이 빛이 됩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선(착한 행실)을 빛으로 삼다가 절망(결국은 악으로 드러나게 마련)하고,
모든 인생은 그렇게 시작하고 생을 마감하는게 대부분이지만,
그 절망의 터널을 지나서 새로운 빛을 만나게 됩니다.
하여,
두 번째 사람은 생명을 빛으로 삼게 됩니다.
생명의 빛을 교리적인 지식으로 규정하려는 미혹이 여전합니다.
소금이란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땅의 소금'입니다.
'토 할라스 테스 게스'에서 게스는 세상이 아니라 땅입니다.
소금 언약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소금언약은 단순히 무슨 방부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맛을 낸다는 것 뿐만 아니라, 땅에 소금을 뿌리면 가시와 엉겅퀴를 내던 땅을 황폐케 합니다.
선악을 먹는 인생에게는 소유한 지식이 찌르는 가시역할을 하고 끝없는 소유욕의 덧에 걸려 욕망이라는 엉겅퀴를 내고 사는 게 인생입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이들은, 땅의 소금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를 소멸하는 불이며,
엉겅퀴를 내는 땅을 황폐케 하는 소금역할을 하게 됩니다.
흔히 소금의 방부제 속성만을 강조하여,
착한 행실로 소금의 역할을 규정하려는 것 역시 선악의 세계관이 반영된 소산의 하나입니다.
소금에서 방부제와 짠맛의 속성을 통해 소금의 역할을 살피려면
착한 행실로 규정하기보다는 생명의 속성을 썩히지 않는 역할의 관점에서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에서의 이칭
- 야훼(여호와) : 항상 살아계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출 3:14)
-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 (사 40:28)
- 엘 로이(רֳאִי) :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 엘로힘 :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을 창조할 때에 부르던 이름)
- 아도나이 : 주인 되신 하나님 (유대인들의 호칭)
- 야훼 나케 : 벌하시는 하나님 (겔 7:9)
- 야훼 닛시 : 야훼는 나의 깃발 (출 17:15)
- 야훼 라파 : 치료하시는 하나님 (출 15:26)
- 야훼 로이(רֹעִי) : 야훼는 나의 목자 (시 23:1)
- 야훼 메카디쉬켐 :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출 31:13, 레 20:8)
- 야훼 사바욧 : 만군의 야훼 (시24:10)
- 야훼 샬롬 : 야훼는 나의 평강 (삿 6:24)
- 야훼 삼마 : 야훼가 거기 계신다 (겔 48:35)
- 야훼 엘 게물로트 : 보복의 하나님 (렘51:56)
- 야훼 이레 : 야훼께서 준비하신다. (창 22:13∼14)
- 야훼 치두케누 : 야훼는 우리의 의 (렘23:6)
- 야훼 체바오트 : 만군의 하나님 (삼상 1:3)
하늘에서 들린 소리(요한복음 12:26~33)
다음날, 신문을 펼친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 지하철 쓰레기통 옆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청년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조슈아 벨'은 30억원짜리 바이올린으로 40분간 최고 수준의 연주를 했습니다.
하지만 바이올린 케이스에 모인 돈은 고작 35달러였다고 합니다.
현장을 오가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값비싼 연주를 지나쳐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재능이 있다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훌륭한 연주를 단지 소음 정도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내가 접하는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인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머리는 저장용량과 처리용량에 한계가 있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여지없이 버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칵테일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고도 부릅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반대되는 정보를 접해도 쉽게 자신의 생각을 고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정치계에서 일어나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진보나 보수나 같은 정보를 접하지만, 양쪽 모두 자신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합니다.
내 성향과 다른 정보에는 아예 귀를 닫아 버리고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지요.
심지어 그것은 거짓이며, 가짜라고 치부해버리면서 말입니다.
이런 태도를 두고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 부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음에도 서로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선택적 지각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빌라도입니다.
그는 예수를 눈앞에 둔 재판석에서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정보, 곧 소리를 들었습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마 27:19)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마 27:23)
이 두 소리를 들은 빌라도는 어떠한 선택적 지각을 했을까요?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 27:26)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선택을 내렸습니다.
빌라도가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눅 23:23)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라는 말은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왜 군중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러한 선택을 내렸을까요?
누가복음 23장 12절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
빌라도와 헤롯은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3장 12절은 그들의 관계가 마치 원수와도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당시 시대적인 정황을 봅시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었으며, 헤롯은 로마가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인정하여 선출된 유대왕이었습니다.
이 둘은 아마 정치적으로 정적 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죽이는 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있어서는 헤롯과 빌라도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둘 모두 여론의 소리, 곧 군중의 목소리 앞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노련한 정치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빌라도와 헤롯은 자신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인지체계에 있어서는 동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날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죠.
한편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날, 하늘에서는 또 다른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절)
이 소리는 앞서 군중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 형틀을 눈앞에 둔 예수, 그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때 이 소리를 예수님과 함께 들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소리 앞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였던가요?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요 12:29)
그날 하늘에서 들렸던 소리는 당시 무리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합니다.
어떤 이는 마른하늘에 천둥이 쳤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천사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방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무리들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소리를 들었고, 그 곁에 있던 무리들은 단순한 천둥소리 또는 천사의 소리로 들었을까요?
그것은 결국 관심과 집중의 차이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선택적 지각, 확증편향의 차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무리들은 도대체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들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첫째, 그들은 세상 영광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3)
둘째, 그들은 세상 권세, 자리만을 탐내고 있었습니다. (마 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셋째, 그들은 누가 크고 높은가로 다툼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넷째, 그들은 예수를 팔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 13:2)
다섯째,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마 27:1~2)
그래서 이런 그들에게는 하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의미 없는 소리 정도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음성을 들었던 예수님은 무엇에 관심을 두며 어디에 집중하고 계셨던가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뜻, 때, 그리고 영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한마디로 위에 것을 찾고 계셨습니다.(골 3:1)
그렇기에 예수님은 하늘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고, 그 소리가 어떤 뜻인지 알아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 환경을 통해서, 심지어 내 몸 안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언어는 없는 듯합니다.
말씀도 없는 듯합니다.
들리는 소리도 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지금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은 세상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시 19:1~4)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분이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지고 있습니다.(롬 1:20) 그러므로 세상에 뜻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습니다.(고전 14:10)
오늘 나는 과연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아니, 지금 나의 관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빌라도처럼 노련한 정치꾼의 셈법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리들처럼 온통 세상 영광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까? 혹은 가룟 유다처럼 ‘은전’을 손에 꽉 쥐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런 그들은 모두 영적 귀머거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정치 셈법에 능통하고 세상 이치, 재리에 재빠르게 반응했을지라도 하늘나라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먼저 우리의 눈과 귀를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눈과 귀를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한 해 동안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극히 세미한 소리를 통해서도 하늘의 음성을 똑똑히 듣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
혹시 이런 경험들 있지 않으신가요?
똑같은 이야기를 동시에 듣고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 엄청 복잡하고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내가 필요한 말을 잘 들리는 경우 등등
1. 개념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보지 않게 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심리학 용어 중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와도 비슷한 말입니다. 주변이 시끄럽지만 내가 필요한 단어(내 이름, 내 관심사 등)들은 희한하게 잘 들리게 되는 현상입니다. 즉 전체 정보가 주어져도 자신이 가진 인지체계, 신념, 가치와 일치하는 정보나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선택적
지각은 다시 지각적 탐색(perceptual vigilance)와 지각적 방어(perceptual defense)로 나뉩니다.
즉
주어진 정보에 대해 더 잘 탐색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더 인식하지 않으려고(회피) 하는지 2가지 방향으로 작동됩니다.
우선 지각적 탐색은 내 의견, 태도, 신념 등에 일치하고 유리할 경우에 더 잘 지각이 되는 현상입니다.
반대로 지각적 방어는 내
의견, 태도, 신념 등에 불일치하기 때문에 회피하고 인식하지 않으려는 현상입니다.
2. 주요 사례들
1)
Hastorf and Cantril(1954)의 연구를 살펴볼까요.
1951년 프린스턴 대학과 다트머스 대학 간 미식축구가
있었는데 이 두 연구자들은 그 경기를 촬영해 똑같은 내용을 각각 두 학교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반칙 횟수를 물어봤는데
서로 타 학교 선수들이 더 많이 반칙을 했다고 보고합니다.
이 연구의 결과는 사람들은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 통해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온라인 (특히 정치적 이슈 있을 때)
- 온라인은 사실상 익명의 공간, 내 이름 대신 닉네임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 정치, 사회 이슈에 있어 극단적인 현상이 벌어집니다. 즉 온라인에서는 '우리=(우리 편)'와 저들(=적)'으로 나눠지게 되고 상대방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이 난무합니다. 이 역시 선택적 지각으로 벌어진 결과입니다. 결과 같은 집단에 대한 소속감, 의견 일치는 더 견고해지고 또 우호적 태도는 더 강화됩니다. 한편 반대 집단에 대해서는 더 배척하고, 이질감이 더 강화되게 됩니다.
- Hart et al(2009)에 따르면 정보 이용에 있어 선호하는 결론에 대해 방어적 목적 혹은 지향적 목적이 강할 경우 내가 생각하는 편향이 더 강해진다고 합니다.
3) 부동산 사이트
- 마찬가지로 지각적 편향이 여기저기 발생됩니다. 제가 가입해있는 카페에서 이런 현상이 잘 발견됩니다. 즉 같은 이슈(예: 부동산 8.2대책)에 대해 내가 보고 싶은 측면만 강조합니다(예 : 앞으로 더 오른다 vs 떨어진다). 이 또한 선택적 지각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4) 소비자 행동에서의 선택적 지각
- 평소 관심이 없는 물건인데 갑자기 큰 폭의 할인을 한다고 하면 없던 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세일을 하게 되면 할인된 가격이 확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더 잘 인식하고, 싫어하는 브랜드는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애플빠'와 '삼성빠'들의 끝없는 공방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광고에 더 집중하면서 타사 제품 광고는 별로라고 폄하합니다. 신제품 출시 때마다 서로 좋다고 난리 나기도 합니다.
- 자동차 동호회에서도 현대차 애호가(현빠), 르노삼성차 애호가(르삼빠), 쉐보레자동차 애호가(쉐슬람) 등으로 나눠 서로 좋아하는 브랜드 칭송하고, 싫어하는 브랜드는 폄하하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3. 시사점
사람들은
아무리 다양한 정보를 제시해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사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 아전인수(我田引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정보가 있어 일상의 의사결정할 때는 시간과
노력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 조직, 기업, 정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렇게 선택적 지각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이런
선택적 지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유연성과 반대 사고를 활성화하고, 조직 차원에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 소수의견 중시 등이
필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적 지각을 방지하려고 하는 노력과 훈련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지요.
한편
선택적 지각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사람, 사물, 단어 등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마케팅, 광고, 스피치, 소통, 영업 등에서 적극 활용해볼 수 있습니다.
즉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호감, 설득, 주의, 관심 등이 더 올라갈 수 있게 됩니다.
□ 참고문헌
Hart, Albarracín, Eagly, Brechan, Lindberg,and Merrill(2009), Feeling validated versus being correct: A meta-analysis of selective exposure to information, Psychological Bulletin, Vol 135(4), 555-588.
Hastorf, A. H., & Cantril, H. (1954). They saw a game; a case study. Th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49(1), 129-134.
12-05-2024(목) 요한복음 12: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귀히 여기시리라(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Whoever serves me must follow me; and where I am, my servant also will be. My Father will honor the one who serves me.
섬기다(1247) 디아코네오(diakŏnĕō) διακονέω
- 어원 / 미완료 διηκόνουν, 미래 διακονή- σω, 제1부정과거 διηκόνησ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διηκονήθην, 1249에서 유래
-
1. 식사시중을 들다, 눅10:40, 12:37, 17: 8, 22:26,27, 요12:2.
-
2.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을] 섬기다, 시중들다, 봉사하다, 마4:11, 8:15, 막1:13,31, 눅4:39, 요12:26, 행19:22, 딤후1:18, 몬1:13, 벧전1:12, 4:10,11. 수동, 마20:28, 막10:45, 고후8:19,20.
-
3. 돌보다, 간호하다[사물의 여격과 함께], 행6:2, 고후3:3.
-
4. 돕다, 부양하다[+여격], 마25:44, 눅 8:3, 롬15:25, 히6:10.
-
5. 집사일을 보다, 딤전3:10,13.
-
관련 성경 / 수종들다(마4:11, 막1:31, 눅4:39), 섬기다 (마20:28, 막15:41, 눅8:3), 공양하다(마25: 44), 일하다(눅10:40, 요12:2), 맡다(고후8: 20), 돕다(행19:22), 봉사하다(벧전4:10, 11), 일삼다(행6:2),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하다 (딤전3:3).
따르다(190) 아코루데오(akŏlŏuthĕō) ἀκολουθέω
어원 / 명령법 ἀκολούθει, 미완료 ἠκο- λούθουν, 미래 ἀκλουθήσω, 제1부정과거 ἠκολούθησα, 완료 ἠκολούθη- κα, 막10: 28, 1[연합을 나타내는 불변사]과 κέλευθ ος ‘길’에서 유래
-
1. ‘함께 같은 길에 있다’
-
a. [문자적으로] 뒤따르다, 뒤쫓다, 따라가다, 마21:9, 9:19, 26:58, 막11:9, 14:13, 눅22:10, 요10:4, 11:31.
-
b. 동반하다, 함께 가다, 마4:25, 8:1, 12: 15, 14:13, 막5:24, 눅7:9, 요6:2, 계6:8.
-
c. [상징적으로] 제자로서 따르다, 마9:9, 막1:18, 2:14, 8:34, 눅5:11,27.
-
d. [일반적으로] 따르다, 복종하다.
-
-
관련 성경 / 따르다(마4:20, 21:9, 막1:18, 고전10:4), 따라가다(막5:24, 눅22:54), 따라오다(요10: 4, 행12:8).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됩시다!
귀히 여기다라는 헬라 단어는 "티마오(timaō. τιμάω)"라고 합니다.
'티마오'는 "값을 치다" "존경하다"는 뜻입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그릇 등 다양한 그릇들을 사용합니다.
그릇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그릇이 결정되는 것같지만 실상은 그릇은 깨끗해야 사용됩니다.
금으로 만든 그릇일지라도, 은으로 만든 그릇일지라도, 나무로 만들 그릇일지라도 먹지 못할 음식을 담으면 그 음식을 누가 먹겠습니까?
아무리 재료가 값비싼 것일지라도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맛있는 음식이 담겨져야 합니다.
성경은 귀히 여겨야 할 것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첫째는 말씀을 귀히 여기라!(욥기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둘째는깨끗한 그릇이 되라!(디모데후서 2: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예수만을 섬기는 신앙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율법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신약의 주일은 받은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만을 섬기는 신앙은 거룩한 예배를 회복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 즉 성령의 감동에 따는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 감동과 감격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예수만을 섬기는 신앙은 철저하게 죄를 회개합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거룩한 믿음을 사랑합니다.
거룩한 믿음의 전제조건은 철저하게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는 심령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십자가의 고통이 닥쳐올 때에 온 밤을 새워가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하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 간구의 자리를 확보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대의 큰 흐름을 역류할 줄 아는 영원한 생명을 따라 세상을 이기도록 돕는 귀히 여김을 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귀히여기시리라(5091)
귀히 여기다(티마오. timaō) τιμάω
스트롱번호 5091
- 어원 / 미래 τιμήσω, 제1부정과거 ἐτίμη- σ 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τιμησάμην, 완료 수동태 τετίμημαι, 완료수동분사 τετιμημένος, 5093에서 유래
-
1. 값을 치다, 평가하다, 값을 정하다, 마 27:9.
-
2. 존경하다, 공경하다, 마 15:8, 막 7:6, 요 5:23.
관련 성경 / 공경하다(마 15:4, 막 7:6, 요 5:23, 벧전 2:17), 가격 매기다(마 27:9), 귀히 여기다(요 12:26), 대접하다(행 28:10), 존대하다(딤전 5:3).
귀히 여겨야 할 것
말씀을 귀히 여기라!(욥기 23: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귀하 사용하는 그릇이 되라!(디모데후서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혼인을 귀히 여기라!(히브리서 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베드로전서 3: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이것은, 위의 말씀에 이어서 참된 신자 되는 원리를 더 자세히 가르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곧, 사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25절 하반), 여기서 주님을 따른다(믿는다)는 말로 바뀌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주님을 섬기는 자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는, 고난도 주님과 함께 받게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장차 주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하반절).
딤후 2:11-12 참조.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신자의 구원을 내세의 장소와 관련시키는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에 많다(14:2, 17:24). 8:21, 33 참조.
그러나 이와 같은 내세 사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하고 있다.
곧, 그 장소가 그리스도의 계신 곳이라는 것이다.
"나 있는 곳", "나의 가는 곳"이란 말씀들이 그 뜻이다.
공관 복음도 내세의 장소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마 19:28; 눅 23:43), 주로 "천국"이란 말에 내세(來世)를 포함시킨다.
천국이란 말이 내세의 장소성(場所性)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운동의 경역(곧, 하나님의 통치 경역)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말하는 내세적 구원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혹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는 사실을 그 중심 요소로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과 및 그를 섬기는 자들이 동일한 곳에 들어감에 대하여, 볼트만(R. Bultmann)은 다음과 같이 잘못 말하였다.
곧, "여기에 나타난 교훈은 노시스(露智派) 신비의 구속 교리와 부합한다.
노시스는 우주적 관련에서 그런 구속자의 구원 받는 자들의 연합을 가리키고, 여기 요한 복음은 역사적 관련에서 그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26).
그는, 특별히 32절의 모든 사람을 이끄는 "들리움"이란 말 해석에서도 이와같은 견해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예수님은 다시 여기서 신비(노시스 신비)의 술어로써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30).
그러나 예수님의 돌리우심은, 노시스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우주 전쟁을 통과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구원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들리우심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신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사 부활 승천케 하신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사람(사무엘상 2:30)
효도란 부모를 존중히 여기는 일이며, 신앙이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할
이유는
첫째, 창조주에게 대한 피조물의 당연한 예법이기 때문
둘째, 하나님은 완전무결하신 절대자이시기 때문
셋째, 내가
주를 존중히 여기는 것만큼 주께로부터 나도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
사실 하나님께서 경멸히 여정을 받는 사회에서는
인권의 존중이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 서두에 “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오며 ” 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주를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1. 주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주님의 날을 존중히 여깁니다.
주일은 주님께 경배하기 위해 성별된 주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하나님께만 바쳐지고 쓰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 중에는 주일에 세상의 여러 곳에 모임으로 나가는 자가 많습니다. 동창회,
산악회, 종친회, 군민회, 야유회 등등 주일을 성수하지 않고 산으로 강으로 들로 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주일을 경멸히 여기는
행위이며 주일을 경멸히 여김은 곧 주님을 경멸히 여기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존경하는 자는 마땅히 주일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로써 우리를 죄와 사명과 저주와 지옥에서 건져주신 축복의 날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사는 날입니다. 엿새 동안은 육신의 날이라면 주일은 우리들의 영을 위한 날입니다. 영혼을위한 날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이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주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날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온 가족, 온 국민이 주일을 지키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주를 높이는
백성은 하나님께서 존귀케 해 주실 것입니다.
2. 주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주께 드리는 예배를 존중히 여깁니다.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신자가 되려면 예배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드리는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신자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예배 기피증에 걸려 있습니다. 예배 기피증 신자는 예배 시간보다 늦게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 시간을 다 마치기 전에
일찍 나갑니다. 자신이 주님보다 더 귀하신 몸처럼 행세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생활이 아닙니다. 요즘 주일되면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와 오락 등의 놀이와 게임을 즐기며 하루를 보냅니다. 예배에 대한 관심보다 세상일에 더 관심 두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존중히 여 기지 않는 자세는 주님을 경멸히 여기는 일입니다. 사
58:13-14에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
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날을 존귀히 여기고 즐거운 날로 살고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쓰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일을 멸시하는 개인과 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신자들이 언제 타락합니까 주일을 범하고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할 때요,
주의 날을 다른 일을 위해 쓸 때가 바로 타락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께 예배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할 줄 모른다면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이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시는데 그 하루마저도 자신의 향락과 안일을 위해서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섭섭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를 통해서 영광 돌리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귀중히 여기시고 돌보시며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회개하는 자를 존귀히 여기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되 죄는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하박국에 보면 “
너희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 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므로 악인을 형통하게 오래 놓아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암 4:6에 “ 죄를 두고 회개하지 않으면 일거리가 없어서 실직하게될 것이라 ” 고 했습니다. 잠 28:13에 “
사람이 죄를 회개치 않으면 만사가 이루지 못하리라 ” 고 했습니다.
사 1:5에 “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으면 매를 때린다 ”
(1) 하나님 께서 죄 짓고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매를 계리시는데 어떻게 때리십니까
1) 물질에 매를 때리십니다.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살림은 점점 궁핍해져 갑니다.
2) 죄를 회개치 않으면 건강에 매를 때립니다.
3) 그래도 지를
회개치 않으면 자녀에게 매를 때립니다. 부모의 죄 때문에 죄 없는 자녀가 매를 맞습니다.
4) 그래도 안되면 육신의 생명을 거두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것은 죄요 주님은 죄를 두고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않습니다.
(2) 그런데 죄는 병마와 같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죄는 부착성이 있습니다. 한 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2) 죄는 번식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전염병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한 번 죄를 짓게 되면 자꾸만 더 죄를 짓게 됩니다.
3) 성장합니다. 죄는 끝장 볼 때까지
자랍니다. 그리고 우리 영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과의 모든 교통을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기도문이 막히고 찬송문이 막히고 은혜문이
막힙니다.
4) 죄는 파괴성이 있습니다.
(3) 그리면 죄를 어떻게 회개합니까
1) 차례대로 죄를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시
50:21). 신앙의 양심에 걸리는 것이 죄인 것이므로 그 죄를 차례대로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 찾아 낸다 ” 는
말의 원문은 “ 대차대조표 ”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은 경리 장부를 하는데 장부를 할 때는
수입과 지출이 정확하게 대차대조가 잘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리원이 대차대조가 안맞으면 단 10원, 100원 때문에 몇
시간 며칠이 걸려서라도 찾아내고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도 그렇게 차례대로 찾아내서 하나님과 막히고 사람과 막힌
것을 찾아내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 오 아버지시여! 내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혀 있는 죄를 발견하여
해결해 주시음소서 ” 라고 기도함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존귀히 여겨서 축복하시는 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회개란
마음을 찢으라는 말입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면서 “ 주여 ! 지난날은 무지해서, 환경 때문에 죄를 지었으나 이제는 죄를
짓지 않겠나이다 라고 하면서 마음을 찢는 것이 회개입니다. 3) 180도 방향전환이 회개입니다. 죄라고 생각하면 일단 돌아서야
합니다. 또 내가 죄 지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에 있다면 일단 “ 돌아가자 ” 라고 하며 죄 짓는 장소나 환경을 피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지 못하고 연약하여 지은 죄일지라도 차례를 찾고 마음을 찢으면서 죄를 멀리하면서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심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편지하는 중에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을 보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큰집에는 그릇이 많습니다.
그 많은 그릇 중에는 금으로 만든 금그릇, 은으로 만든 은그릇, 나무로 만든 나무그릇,
흙으로 만든 질그릇 등이 있습니다.
주인이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된다고 바울 사도는 덧붙였습니다.
이 큰집을 교회라고 하면 교회는 그릇 노릇하는 교인들 중에 귀히
쓰는 교인도 있고 천히 쓰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히 쓰는 그릇은 질이 좋아야 합니다.
금으로 만든 그릇과 흙으로 만든
그릇은 질이 다릅니다.
사람도 보면 똑같이 교육을 받았는데도 아주 질이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질이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날 한 시에 예수 믿고 10년 동안 교회에서 교인 노릇하면서도 질이 좋은 집사가 있고 질이 나쁜 집사도 있습니다.
믿음도
질이 좋은 믿음이 있고 질이 나쁜 믿음이 있습니다.
I.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20-2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아합 임금 때 너무 노여워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아합 임금이 이방 여자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들였는데, 이세벨이 아합의 왕궁으로 바알 신을 가지고 와서 바알 종교를 열심히 퍼뜨리니 모든 백성들이 바알
신에게로 넘어 갑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기다리던 주의 종 엘리야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임금을 찾아가 바알신이 참 신인지 우리가 조상 대대로 믿어 오던 여호와가 참
신인지 한 번 내기를 해보자 하고 정한 날 정한 시에 갈멜산에 제단을 쌓고장작 올려놓고 송아지를 잡아 각을 뜨고. 기도할 때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이 나왔습니다.
아마 자신이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아세라 신의 선지자 400명은 나오지를 않고 일찌감치 포기를 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을 쌓아 놓고 송아지를
잡고 얼마나 바알 신을 애처롭게 부르는지 애간장을 녹이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제 몸을 상하게 하면서 까지 바알신의 긍휼을
입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제단 주위를 뛰놀았는데 응답이 얼자 포기를 했습니다. 뛰놀았음이 신의 역사는 아닙니다.
이번에는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려 놓은 다음에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제물로 올려놓고 물을 분 다음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모두 태웠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믿어온 여호와가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했는데 이것은 불을 체험했기 때문에 일어난 자발적인 고백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돌아갔는데 엘리야가 보니 하나님이 이쯤 되었으면 축복의 장마비를 주실 텐데 왜 안 주시나 생각하며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갑니다.
일곱 번을 기도하며 사환을 보내고 또 보냈더니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조금 후에
큰비가 내렸습니다.
기도하는 종이 귀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여기 7천 명의 맡은 사람들은 엘리아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주의 종을 잘 만났습니다.
주의 종을 만날 때 주의 종
엘리야가 자기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하고 하나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엘리야를 만났고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보실 때 7천명이 귀합니까?
엘리야가 귀합니까? 하나님을 보여준 사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사람을 귀하게 여 기십니다.
여러분도 믿지 않는 내 식구, 내 이웃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고 예수님을 보여 주고
만나게 해 주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그릇이 되시기를 바합니다.
본문 20절에서 22절을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애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여짜온대" 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은 유월절을 가리킵니다.
유월절에는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 남자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이 온 것은 유대인으로서 헬라 말을 쓰고 사는 헬라파 유대인이 있으나 본문의 헬라인은 그런 유대인은
아닙니다.
헬라 사람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왜 지키러 왔느냐?
이 사람들은 할례를 받고 개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인이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려면 세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와서 예수님을 뵙고 싶은데 직접 만날 수 없어서 빌립에게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빌립이
안드레에게 말하고 빌립과 안드레가 함께 예수님께 가서 이 사람들을 소개하고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싶어 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찾아 나오는 사람도 귀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을 보여 주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은 하나님이 더 귀하게
여 기십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보여 주고 만나게 해주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귀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Ⅱ.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23-25절)
예수 믿고 잘된 사람은 바울보다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배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력서를 쓴다면 별로 볼 것이 없을 정도로
무식한 편입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내놓을 것도 얼을 뿐 아니라 가문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 3년 4개월을 배웠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배웠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세계적인 인물이 되고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닮았고, 예수님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면 예수를 많이 닳는 사람이 되게 하면 됩니다.
내 아들 딸들이 훌륭한 사람 또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기를 원하시면 예수를 닳아가게 하면 됩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본문 23에서 25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회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쓸어 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찾아 온 헬라 사람
몇을 앞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영광받을 때가 됐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영광받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서 죽으면 많은 열매 맺지만 밀알이 땅에 심기어져 썩지 않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가 죽으므로 만민의 죄를 속하여 사람에게 부활의 생명,영생하는 생명을 주실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아파트 한 채를 가졌습니까?
저금 통장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관공서에서 취직해 월급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하게 여기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생명으로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육신은 개나 돼지처럼 먹여주고, 입혀 주고 좋은 잠자리 주면 좋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고린 도전서 2장 14절에서 3장 1절에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나 돼지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자리만 있으면 좋다고 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내가 알 바 아니라고 합니다.
개나 돼지와 다름이 없습니다.
두 번째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안다 하고 제법 교회도 나오는데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좋아합니다.
주일 예배 드리는 것보다 설악산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영에 속한 사람 즉. 신령한 사람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금덩어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찾고 하나님만 섬기고 찬양하는 즐거움으로 삽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찾아야 살게 되어 있고 찬송하고 영광 돌리고 높여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도 육신의 생명만 생각하고 육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면
결국멸망을 당할 뿐이라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나를 본 받아 영적인 삶, 영에 속한 삶을 살아야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고, 예수님 닮아 가는 삶을 사는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선생 중에 가장 훌륭한 선생은 예수님이십니다.
말하는 것도, 마음 쓰는 것도. 생활하는 것도 예수님을 닮아 가면 하나님께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Ⅲ.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26절)
운동하는 경기장에는 선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도 있어야 합니다.
역시 영화관에도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구경꾼이나 관객은 필요 없습니다.
교회는 경기장도. 영화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 가고 예수님을 높이고 섬겨야 합니다.
본문 7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섬기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섬기지 않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말 많은 사람은 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열심을
내어 봉사하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헌금하는 사람은 헌금에 대해서 말이 없습니다.
안하는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은 말이 없지만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여기에 섬긴다는 말은 집사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집사
노릇을 잘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낮아져야 하는 사람이 집사요, 더 많이 봉사해야 하는 사람이
집사입니다.
집사가 되면 더 올라가는 줄 알고 목에 힘을 주고, 장로가 되면 더 이상 올라 갈 것이 없는 줄 알고 어디 가든지
대접만 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목사가 같이 가서 냉면 간 내는 것 보았습니까?
목사는 꼭 대접받아야만 되는 사람입니까?
목사가
되면 더 낮아져야 하고 남을 대접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집사 노릇 잘하는 사람, 권사 노릇 잘하는 사람, 장로 노릇 잘하는
사람, 목사 노릇 잘하는 사람, 즉 봉사를 많이 하고 더 많이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 기십니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평생을 도적질만 한 사람을 귀히 여길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고, 자랑하고, 높이고,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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καιρός, οῦ , ὁ 스트롱번호2540
-
1. 때, 시점, 기간, 시기.
-
a. [일반적으로] 달가운 때, 고후 6:2, 어려운 때, 딤후 3:1, 열매 맺는 때, 행 14:17, 때때로, 정규적으로, 요 5:4.
-
b.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에, 마 24:45, 눅 12:42, 행 24:25.
-
c. 정한 때, 마 13:30, 21:34, 막 1:15, 행 17:26, 갈 4:10, 6:9, 딤전 2:6, 딤후 4:6, 딛 1:3.
. [종말론적 숙어] 마 8:29, 16:3, 눅 21: 8, 고전 4:5, 엡 1:10, 계 1:3, 22:10.
관련 성경 / 때(마 8:29, 눅 8:13, 딤후 3:1), 날(마 16:3, 눅 1:20, 고후 6:2), 세월(골 4:5), 연대(행 17:26), 틈(행 24:25), 현재(롬8:18, 히 9:9), 기회(갈 6:10), 항상(엡 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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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 때, 마 25:19, 눅 8:27, 요 7:33, 행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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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예, 지체, 계 2:21, 10:6.
-
관련 성경 / 때(마2:7, 행1:7, 벧전4:2), 시대(행17:30), 얼마간(행19:22), 시간(11:32), 기회(계2:21), 동안(막2:19), 기한(눅1:57), 시대(행17:30), 항상(행20:18), 날(행27:9), 영세(롬16:25).
때(5610) 호라(hōra) ὥρα, ας, 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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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낮의], 막 11:11, 마 14:15, 눅 12:39, 40, 계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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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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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간의 한토막, 계 9:15, 요 11:9, 마 20:12.
-
b. 짧은 시간, 잠깐, 계 18:10,17,19, 요 5:35, 고후 7:8, 막 15:25, 행 2:15, 23:23, 마 20:5, 막 15:33, 눅 23:44, 요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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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떤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시점, 마 8:13, 막 13:11, 눅 7:21, 행 16:33, 계 11:13.
크로노스(Κ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
헬라어는 '때'(시간)를 표현하는 단어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있다.
이 두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 뿐만아니라 우리의 때와 시간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된다.
'크로노스'(Κρόνος)는 규칙적인 시간적 흐름을 가리키고,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시간의 어떤 특별한 시기를 뜻한다.
“때가 벌써 되었으니”(ὥρα ἡμᾶς ἐγείρω 호라 헤나스 에기로)라는 표현(은유)은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
안에서 어떤 특별한 때(카이로스와 비슷함)를 가리킨다(종종 요한복음에서 사용됨/ 참조, 요 16:25, 3:26; 고전 7:29;
10:11; 약 5:8; 벧전 4:7; 벧후 3:9-13; 요일 2:18; 계 1:3; 22:10).
•'카이로스'에 대한 몇가지 예문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 이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해준다(갈 4:4; 엡 1:9).
다시 말해 본문의
'때'(카이로스)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되는 시기를 뜻하는 '크로노스'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호기(好期,opportunity), 즉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드디어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으신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이쩌(Schweizer)는 말하기를 '그는 역사상 유래없는 특정한 구원의 때를 성취하신 것이다'라고 묘사하였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 24:3-51; 요 21:22).
누가복음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때가
이르매" - '때'(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언제라도 오실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만 한다.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카이로스)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이
시기를 알거니와"
- 본문의 '시기'(카이로스)는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계절'(season)과 같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그 시기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주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그 시기의 성격이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주의 가르침(마 24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가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바울의 촉구가
담겨있는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이
- 본문의 '구원'은 현재의 고난으로부터의 탈피 또는 점진적인 구원의 과정에 참여함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최종적인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주의 강림 때 일어날 미래적 구원의 정점(定點)이 더 가까와지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이론'은 '좋은' 혹은 '옳게'를 뜻하는 '유'와
'시기'를 뜻하는 '카이로스'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 주심을 나타낸다.
카이로스(Kairos)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반대의 뜻을 가집니다.
우리는 크로노스보다는 카이로스로 가득찬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냥 밥 먹고, 자고, 출근하고, 게임하는 시간으로 보내는 건 크로노스로 가득찬 인생입니다.
내가 달성하려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하루에 무엇을 해야할지 결정하고 하루하루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동들을 매순간 자각하며 실천하는 것.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서핑을 할 때, 서핑에 가만히 서서 파도를 맞는 건 크로노스입니다.
파도를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죠. 하지만 파도의 힘을 이용해 서핑을 하는 것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파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야 합니다.
헛되이 보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가 보낸 시간들이, 우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보낸 시간들이 우리에게 성과라는 달콤한 열매로 돌아올 것입니다.
크로노스(Chronos)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
쉽게 말해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는 크로노스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모두가 똑같이 흘러갑니다.
어떻게든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흘러가는 건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붙잡을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라는 시간은 붙잡을 수는 없지만, 함께 갈 수는 있습니다.
12-04-2024(수) 요한복음 12:20-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광을 얻을 때(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Jesus replied, "The hour has come for the Son of Man to be glorified.
때(5610) 호라(hōra) ὥρα, ας, 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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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낮의], 막 11:11, 마 14:15, 눅 12:39, 40, 계 3:3.
-
2.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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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간의 한토막, 계 9:15, 요 11:9, 마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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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짧은 시간, 잠깐, 계 18:10,17,19, 요 5:35, 고후 7:8, 막 15:25, 행 2:15, 23:23, 마 20:5, 막 15:33, 눅 23:44, 요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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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떤 일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시점, 마 8:13, 막 13:11, 눅 7:21, 행 16:33, 계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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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시(時)(마 8:13, 막 15:33, 계 3:3), 때(마 14:15, 요 4:53, 요일 2:18), 시간(마 20:12, 눅 1:10, 14:17), 날(마 24:42), 한때(요 5:35), 잠시(고후 7:8), ~시(마 8:23).
상징적 의미: “호라”는 종종 신이 일하는 특정한 계절이나 시간을 상징합니다.
성경 문헌에서 특정 시간은 신의 개입에 결정적인 순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영광을 얻을 때(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때를 말합니다.
영광을 생각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그 때를 말합니다.
때(time)
때를 가리키는 성경 단어들 그 자체로는 성경적 때의 개념들에 관한 성찰의 확고한 기반이 되지 못한다.
때를 가리키는 성경의 단어들이 사용되는 맥락으로부터 성경적 때의 개념들을 모아보는 길밖에 없다.
1. 때와 절기
히브리인들은 시간의 경과를 헤아리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때'와 '절기'로 번역되는 단어들의 대부분의 맥락들은 정해진 때, 적당한 때, 어떤 사건이나 행동의 기회에 대한 관심을
시시한다.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는 히브리어 '에트'(전 3:1이하)이며 '제만'이란 단어도 에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모에드'는 '정하다'는 뜻을 지닌 어근에서 온 단어로 초승달(예. 시 104:19)과 같은 자연적 시기나 정해진 절기(예.
민 9:2)에 사용된다.
특히 이 모든 단어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그가 주신 기회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예.
신 11:14; 시 145:15; 사 49:8; 렘 18:23).
신약에서 헬라어 '카이로스'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결정적 순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흔히 나타난다(참고. 눅 19:44; 행 17:26; 딛 1:3; 벧전 1:11).
이렇듯 성경은 시간의 추상적 연속이 아닌, 하나님이 역사의 일정 순간에 부여하신
내용을 강조한다.
이 시간관은 고대 세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순환적 시간관과 대조되는 '직선적' 시간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완성을 향해 움직인다.
사태는 그냥 진행되는 것이나 처음 시작된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시간관을 '직선적'이라 한다고 해서 시간과 역사가 불가피한 사건들의 예기 속에서 계속 흘러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세계에 그의 목적들을 진척시키는 '때'를 강조한다.
* 참조 / 여호와의 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 '때'를 정하신다. 아들조차도 그의 사역 초기에는 완성의 날과
시간을 알지 못하였다(막 13:32; 행 1:7).
하나님의 주권은 개별 인생의 때에까지도 확대된다(시 31:5).
다니엘서에 나오는
아람어 '이단'은 연대기적인 일정한 기간을 가리키며(예. 단 2:9; 3:15), 흔히 일년을 가리키기도 한다(예.
단 4:16; 7:25, 물론 이런 해석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여기서도 강조된다(단 2:21).
'크로노스'라는 단어는 세속 헬라어에서와 같이 신약에서도 때로는 단순한 시간의 경과를
가리키기도한다(예. 눅 20:9; 행 14:28).
문맥에 따라 크로노스는 '지체', '머무르거나 기다리는 시간'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예. 행 18:20, 23).
계 10:6에 '크로노스'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이 경우에도 시간이라 해석하기보다
'지체'(delay)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시간이라 해석할 경우, 현세대가 끝나면 시간도 끝난다는 의미가 된다.
한글개역이 '지체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한 것은 타당해 보인다).
에트(6256) עֵת
스트롱번호6256
어원 / 어미활용 עִתִּי, 복수 עִתּוֹת ,עִתִּים,5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4회 사용
제만(2164) זְמַן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1회 사용
모에드(4150) מוֹעֵד
어원 / 325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2. 영원
히브리어 '아드'와 '올람'은 사람의 한평생에 해당하거나(참고.
삼상 1:22, 28) 산이 한없음과 같은(참고. 창 49:26) 오래고 요원한 시간을 가리킨다.
무엇보다도 이 단어들은 하나님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이 없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다(시 90:2).
이 시간의 무제약성은 또한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에도
해당되며, 그 백성을 향한 그의 사랑은 영원무궁하시다(참고. 렘 31:3; 32:40; 호2:19).
하나님은 어떤 고정된 기한에
제약받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보다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적인 강한 복수형(예. 시 145:13; 단 9:24)이 사용되거나 이중
형식(예. 시 132:14)이 사용되기도 한다.
신약의 '아이온' 용법도 이와 비슷하다. '아이온'이란 단어는 평생의
시간(고전 8:13)이나 과거(눅 1:70)나 미래(막 11:14)의 요원한 시간에 사용될 수 있다.
'아이온'이란 단어는
'세세토록'(갈 1:5), '영영하며'(히 1:8)라는 뜻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하나님은 또한 '만세 전에'(고전 2:7) 지혜를
미리 정하신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구약과 신약의 이런 용법들은 우리 말의 '영원한, 영원'의 용법에 상응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 사용된 언어 자체가 우리가 논의하는 시간과 영원에 관한
철학적인 문제들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형용사 '아이오니오스'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의 아이온의 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시간적 의미 이외에도 '신적인', '불후의'란 의미를 함께 풍긴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히브리어 '올람'이
'세상'의 공간적 의미로 사용되어 금세(이 세상)와 내세(오는 세상)로 표현되기도 한다(예. 막10:30).
3. 두 시대
신약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적인 것으로 정해진 한 때를 지적한다.
예수의 설교의 제 일성은 "때가 찼다"는 것이었다(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예수의 삶과 사업은 하나님의 목적들의 결정적 시기를
나타낸다(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to be put into effect when the times will have reached their fulfillment--to bring all things in heaven and on earth together under one head, even Christ.
이 때는 기독교인들이 완전히 장악해야 할(엡 5:16; 골 4:5) 대기회이다(고후 6:2).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because the days are evil.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Be wise in the way you act toward outsiders;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예수의 초기 사역
시기에 그의 죽음과 부활의 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참고. 마 26:18; 요 7:6).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He replied, "Go into the city to a certain man and
tell him, 'The Teacher says: My appointed time is near. I am going to
celebrate the Passover with my disciples at your house.'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Therefore Jesus told them, "The right time for me has not yet come; for you any time is right.
미래에 대한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차이는 결정적인 때가 과거에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유대교인은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결정적 개입을 찾는다.
그리스도인은
결정적 순간이 과거에 '단번에'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만물의 완성을 더욱 예민하게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때(말세)는 이미 우리와 함께 있다(행 2:17; 히 1:2; 벧전 1:20; 요일 2:18).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Utterly amazed, they asked: "Are not all these men who are speaking Galileans?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but in these last days he has spoken to us by his Son, whom he appointed heir of all things, and through whom he made the universe.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He was chosen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but was revealed in these last times for your sake.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Dear children, this is the last hour; and as you have
heard that the antichrist is coming, even now many antichrists have
come. This is how we know it is the last hour.
신약은 현세(금세)와 내세에 대한 당시의 유대인의 시간 구분을 크게 수정한다.
'현세'(이 세상)와 '내세'(오는 세상) 사이의 전환점이 여전히 미래에 있으나(막 10:30; 엡 1:21; 딛 2:12-13)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미 결정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완성이 선취된 일면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이 선취의 표시이며, 이것은
오는 세상의 권능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엡 1:14; 히 6:4-6. 참고. 롬 8:18-23; 갈 1:4).
이에 따라 요한은 지금 우리가 영생을 지닌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한다(예. 요 3:36).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의해 완전하게 들어가게 될 생명을 '지금'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요 11:23-25). 바울이 고전 10:11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이 두 시대의 '중첩'(overlapping)일 가능성이 있다.
4. 시간과 영원
많은 기독교 철학자들은 성경의 강력한 시간 언어는 철학에서의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원으로 표현될 하나님의 존재의 측면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해 왔다.
이와 다른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여긴다.
우리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시간과 관련되기 때문에 무시간적 존재(timeless
being)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추상화시키게 되고 따라서 세상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없게 될 위험이 따른다고 본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 행동하시는 기독교의 신관을 견지하려면 우리는 '이승'의 시간의 세계와
'저승'의 영원의 세계를 대립시키는 플라톤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기보다 성경의 언어를 고수하여야 한다.
신약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 '현재'와 '미래'의 단순 대립을 선취의 교리(doctrine of anticipation)로 초월하고 있다.
철학적
논의의 결과가 어떠하든 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난 '만세의 왕'(딤전 1:17. 참고.
벧후 3:8)이시라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Now to the King eternal, immortal, invisible, the only God, be honor and glory for ever and ever. Amen.
베드로후서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But do not forget this one thing, dear friends: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re like a
day.
영광을 얻을 때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이 아니라 메시야 구원 사역을 완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죽으셔야 합니다(십자가 신앙).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셔야 합니다(부활 신앙).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셔야 합니다(승천 신앙).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심판의 주로 다시 오려야 합니다(재림 신앙).
이 시대에 예수를 믿고 예수를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 사역에 동참하려면
첫째는 희생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둘째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셋째는 부활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넷째는 심판대 앞에서야 합니다.
훗날 심판대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를 잊지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의 심판대와 역사의 심판대와 최후의 심판대가 항상 열려있습니다.
그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맙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가 맡은 직분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포기하면 세상을 어지럽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이 말씀은, 그의 개인적인 영화를 말함이 아니고 메시야의 구원 역사의 완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론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내포한 것이다.
구원의 갈증을 느낀 헬라인들이 찾아 온 마당에 있어서, 이 말씀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뵈옵고자 한 것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올 영광은,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실현된다는 의미로, 그는 여기서 말씀하신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먼저 찾아 오는 원리에 따르지 않고 그가 저희를 부르심으로 되는 원리에 따른다.
곧,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셔서 저희에게 복음을 전하심으로만 된다"라고 하였다(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P. 215-216).
12장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를 영화롭게 함(1-8)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영화롭게 함(12-19) 헬라인 몇이 그를 베옵고 영화롭게 하려 한 것이다(20-33).
그러나 이 일들이 모두 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실 사건을 보여 줌과 관련되었다.
영광을 얻을 때(요한복음 12:20-28)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 잎을 꺾어서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여 맞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맞이하던 그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념하면서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오시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대대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거리에 있는 종려나무 가지 잎을 꺾어서 흔들고,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오시는 길에 깔고서 예수님을 환영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외치면서 맞습니다.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라는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큰 기대가운데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그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는 장군들을 환영할 때의 사람들이 행하던 일인데, 거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장군과 같은 존재로 믿고 기대하면서 열렬히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환영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며, 또한 구원받은
자들에게 원하시는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헬라 사람들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헬라인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헬라인 몇 명이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뵙고자 원한다고 전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으로부터 헬라 사람들이 자신을 찾는 다는 말씀을 들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십니다.
갑자기 영광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때”에 대해서 수 차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로부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첫번째 대답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도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드디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헬라인이 오는
것을 보고서 이제 그 때가 다다랐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이 때는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적대시 하는 사마리아 땅에 가셔서도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대인들이 아닌 헬라인들, 곧 이방사람들이 예수님께 온 것을 보시고, 이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영광스러운 순간이 오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그 동안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시면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얻으실 영광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으로부터 인정함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고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출세해서 높아지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많은 인기를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구한 영광은 사람들이 유한한 것처럼, 유한하고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만한 많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모든 영광을 자신이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을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영광된 일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스스로 영광을 받고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모든 영광된 일들은 하나님께서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하신 소명을 따라서 살아갈 때에 영광을 받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영광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로 사용받는 것 자체가 영광된 일인 줄로 믿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자신이 죽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될 방법을 밀알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죄인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영광된 일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는 다는 말을 쉽게 합니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추우면 “추워 죽겠다.” 더우면 “더워 죽겠다.” 고 합니다. 몸이 아프면 “아파 죽겠다.” 누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속상하게 하면 “너 때문에 내가 못살아” 합니다. 심지어는 너무 좋은 일이 있어도 뭐라고 말합니까? “정말, 좋아 죽겠다.””우스워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죽을 일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죽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서도 자기 자신을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27절에도,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하였습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도 심한 갈등과 괴로움 속에 있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드셨든지 그 동안 이 영광을 얻을 때를 기다리셨는데,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죽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고 싶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가장 강한 적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죽지 못하고 혼자 살고자 하기 때문에 많은 열매를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못하고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리고, 도리어 자기 생명을 이 세상에서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보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더 귀하고, 내 생명보다 다른 이들의 생명이 더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에 비로서 나의 생명을 미워하여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아내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늘 불신자인 남편 때문에 불만이었습니다. 남편한테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권면을 하고 애를 써봤지만 남편은 한번도 아내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자고 할 때마다 요지부동하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서 화가 나서 싸우기 일수였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그러냐? 다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데 한 번 정도는 그냥 따라와 줄 수 있잖아”그러면 남편은 “나는 이대로 살다가 죽으려니까 제발 내버려 둬”라면서 대꾸를 합니다. 남편을 전도하려다가 마음만 상하고 남편이 더욱 미워졌습니다. 남편이 미우니까 남편이 신는 신발만 봐도 화가 나서,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발로 밟아 버립니다. 자기 자신도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 대한 상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아내의 마음속에서 남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그 남편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부터 아내는 자신의 자존심을 살리고자 남편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남편이 신는 신을 품에 안고서 제발 이 신을 신고서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죽이고자 애를 썼습니다. 남편이 그 아내의 변화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도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한 알에 밀알이 되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밀알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2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나와 같이 죽자는 말씀입니다.
곧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너희도 다른 이들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생명을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내 목숨을 버리는 것도 힘들지만,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 또한 내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 나 자신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니 그것처럼 힘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살아있다고 내 자존심을 살리고 내 입장을 살리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죽이기 십상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뜻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 자신을 죽일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앞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하나님의 나타나고, 내가 죽어서 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삶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주실 때에 나 자신을 사랑하여서 그 생명을 끝까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고,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을 것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 죽으면 보통 4개월 후에 열매를 맺게 되는데, 보통 100-125알을 맺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확한 밀알을 뿌리고 수확하고를 5년 정도하게 되면, 100-125억 알을 맺게 되는데 그 양은 200명의 사람이 34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한 알의 밀알 안에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엄청난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명력은 그 한 알이 썩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질 때에 그 많은 양의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죽으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생명을 이어받은 밀알로 여기에 살아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과 같이 누군가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죽어주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까?
그 때는 나를 통해서 누군가를 살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 자녀를 살리고, 내 배우자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자 나로 하여금 나를 부인하고 나를 죽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다 죽이고 나 혼자 살아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죽이고 다른 이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내 생명을 주셨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많은 영혼을 살리는 일을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죽이는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을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처럼 존귀한 자가 없고 영광된 자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셔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처럼, 내 자신을
더욱 더 죽이고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받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1. 당신은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까?
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행하셨던 자기 부정과 죽음은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자존심,억울함, 무시당함, 육신의 생명 등)
3.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떠한 자기 부정의 모습을 행하고 있습니까?
12-03-2024(화) 요한복음 12:12-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호산나 찬송하리로다(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They took palm branches and went out to meet him,
shouting, "Hosann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Blessed is the King of Israel!"
호산나라는 외침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편에서 예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며 또한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으로 온갖 고난과 시련과 핍박을 견뎌온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대를 이루어주실 놀라운 능력을 갖춘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심지어 그들의 겉옷을 길에 깔고 예수를 환영하며 영접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오천명을 배부르게 하셨고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 두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삼십 팔년 된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그들이 고대하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분명합니다.
왕들은 말을 타고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무리들이 말과 나귀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직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왕이시여 하고 외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절제(節制)"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절제해야 할까요?
시간의 절제(moderation of time)
물질의 절제(moderation of matter)
재능의 절제(moderation of talent)
인터넷의 절제(moderation of the Internet)
하루의 일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칠 줄 아는 믿음과 지혜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이 내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삶의 나침판이 되어 천성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의 길에 올바른 이정표로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주의 진리위해 십자가 군기
호산나의 뜻과 용례
호산나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입니다.
성경에는 모두 5번에 걸쳐 사용되지만 시간적 배경은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들어가시는 날 사람들이 환영하며 외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5, 막 11:9, 막11:10, 요 12:13에 사용되지만 모두 동일한 사건 속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원출처는 구약성경이며, 시편
118:25에 사용된 히브리어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시편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5 히브리어
אנא יהוה הושיעה נא אנא יהוה הצליחה נא׃
여기서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의 부분을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나나 야훼 호쉐아 나 난나 야웨 하치리하 나
나는 구한다 야훼께 구원하소서 지금, 나는 기도한다 야훼께 형통을 지금
형통은 ‘짤라(צָלַח)’이며, 구원하다는 ‘아샤(יָשַׁע)’입니다.
호산나는 ‘아샤(יָשַׁע)’ 그대로 발음한
것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된 언어는 아람어(히브리어 방언 정도)였으며,
성경으로 기록할 때 당신
공용어인 헬라어로 적으면서 ‘호산나’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1:9을 헬라어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사용한 성경은 NA28 최신판입니다.
οἱ δὲ ὄχλοι οἱ προάγοντες αὐτὸν καὶ οἱ ἀκολουθοῦντες ἔκραζον λέγοντες·
ὡσαννὰ τῷ υἱῷ Δαυίδ·
εὐλογημένος ὁ ἐρχόμενος 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
ὡσαννὰ ἐν τοῖς ὑψίστοις.
호산나(ὡσαννὰ)는 아람어인 ‘아샤(יָשַׁע)’를 그대로 헬라어로 적은 것입니다.
종려가지를 흔다는 것은 제2성전기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호산나는 샬롬이
목적이며, 샬롬은 평안의 히브리어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달라는 간절함은 메시아를 통해 회복하게될 이스라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곧 평안으로 가는 방법이기에 구원과 평안이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호산나(5614) [ hōsanna ] ὡσαννά
-
1. 호산나, 지금 구하소서, 부디 도와주소서, 구해 주소서, 마 21:9, 막 11:9,10, 요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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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호산나(마 21:9, 막 11:9, 요 12:13).
히브리어 3467
יָשַׁע
스트롱번호 3467 야사(yâsha)
구약 성경 / 205회 사용
히브리어 4994 나(nâʼ) נָא
구약 성경 / 404회 사용
호산나(Hosanna) 뜻과 용례
호산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유월절 행사차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들이 외쳤던 구호입니다.
호산나 유래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시편 118:25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안나 아도나이 오쉬아 나 안나 아도나이 하츨리하 나
אָנָּא יְהוָה הֹושִׁיעָה נָּא אָנָּא יְהוָה הַצְלִיחָה נָּא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 이는 미래 사건에 대한 호소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과거에 이스라엘 군대를 승리로 인도하신 주께서 앞으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들에게 보여달라는 것이다(Weiser, Dahood).
한편 '이제'에 해당하는 '나'(*)가 이 어구 끝에 쓰이고 있는데, 이 말은 '이제'와 같은 시간 부사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구하옵나니'에 해당하는 '아나'(*)와 상관적 의미로 쓰이는 간구 형식으로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Calvin, 창 33:14 참조).
칼빈(Calvin)은 '나'를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전형적인 기도문 형식이란 견해를 제시한다.
형통케 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하첼리하'(*)는 '전진하다', '번영하다'란 뜻을 가진 '찰라흐'(*)의 히필형인데 '번영케 하다', '성공으로 인도하다'란 의미로도 쓰인다.
한 예로서 아브라함의 명령으로 이삭의 배우자를 선택하러 간 늙은 종이 리브가를 만나는 과정에서 이 말이 '평탄한 길을 주다'란 의미로 쓰인 바 있다(창 24:21).
호시아나이며, 아람어로 오샤나입니다.
신약 기록자들은 이것을 헬라어로 음역하여 호산나(ὡσαννά)로 기록했습니다.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호산나가 정치적인 색을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중간기를 거치면서 독립전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헬라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지배하면서 이스라엘을 헬라화 시킵니다.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악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더립히며 조롱한 지도자였습니다.
결국 마카비 가문에 의해 혁명이 시작되고 결국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그들을 추앙하면서 '호산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호산나 / 지금 구하소서, 부디 도와주소서, 구해 주소서
마태복음 21:9, 마가복음 11:9-10, 요한복음 12:13.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가복음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마가복음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한복음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호산나 외침에 담긴 의미(마태복음 21:1-11)
종려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호산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수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찬양을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종려나무를 꺾어 호산나를 부른 것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생생한 그림들이 그려집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행진합니다. 그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고 찬양을 부르며 쫓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 위에 깔았습니다.
군중들의 찬양과 함성이 얼마나 컸던지 오늘 본문에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진이 난 것과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비우스는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이백만 내지 삼백만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 이백만 명의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찬양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만 해도 대단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곧 무너질 것처럼 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이 떠날 것처럼 환호하는 군중들을 뒤로 하고 나귀 새끼를 타고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지금의 환호가 조금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예루살렘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같은 지명인데 ‘예로솔루마’라고 헬라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에서 ‘예루’는 ‘도시, 도읍’이라는 뜻입니다.
‘살렘’은 샬롬에서 온 말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다윗 왕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중심으로 만들어 주신 평화의 도시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우월의식을 가지고 다른 도시와 나라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예루살렘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우월의식이 얼마나 강했던지 이스라엘 백성들 말고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부를 때 빈정대는 어투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살렘’이라고 부르지 않고 ‘솔루마’라고 불렀습니다.
솔루마는 평화는 평화인데 빈정대는 의미의 말입니다.
즉 ‘평화라고?’ 그런 뜻입니다.
‘평화라고 웃기지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들이 거하는 평화로운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로솔루마’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곳이라고? 웃기지 마라!’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마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예루살렘’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로솔루마’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곳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평화가 가득한 예루살렘이 아닌 ‘평화의 도시라고?’하는 이방인들이 조롱이 섞인 위선과 거짓,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도시로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제물을 사고 팔며, 돈을 환전하면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장사꾼들과 뒷거래를 통해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외치시면서 성전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사 56:7. 마가 11:17).
‘예루살렘’이라는 ‘평화의 도시’가 아닌 ‘예로솔루마’ ‘평화의 도시라고?’라고 말씀하시며 그 평화와 거룩함으로 위장된 예루살렘의 허상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금요일까지 예루살렘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선과 위장된 신앙을 그대로 지적하셨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말라 버리게 하시면서 겉모습만 거룩하게 꾸미고 속은 썩어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랄하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부패와 부정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성전이 돌 하나 돌 위에 남겨지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여인들이 울 때 ‘나를 위해 울지말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평화가 있는 ‘예루살렘’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장사꾼으로 가득 차 있고, 기도는 없고 자신의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의 소리로 가 차 있는 ‘예로솔루마’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시지는 것은 흠과 허물이 없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흠과 허물이 많은 ‘예로솔루마’를 구원하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로솔루마’의 모습을 진정한 ‘예루살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예로 솔루마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온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외쳤던 외침은 ‘호산나’였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에 모여 제사를 드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보면서 ‘호산나’ 즉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예루살렘 성이 지진으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맞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분명히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호산나’ 찬양의 환호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는 분노의 함성으로 바뀝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아드렸던 모습은 침 뱉음과 조롱으로 바뀝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던 모습은 채찍으로 내리치고 가시관을 씌우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루살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예로솔루마’였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해 우리들의 신앙 내용을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예루살렘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예로 솔루마의 모습입니까?
고난주간이 되면 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는 질문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현장에 네가 있었다면 어디에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현장에 여러분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 것 같습니까?
자신의 직분 때문에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빌라도 총독이었을까요?
자신들의 악과 죄를 숨기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중들을 부추겨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유대지도자들이었을까요?
이기적인 욕망을 중심으로 군중심리에 휩쓸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쳤던 대다수의 군중들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잔인한 역할을 했던 로마 병사였을까요?
스승으로, 주님으로 섬겼다가 죽을 것이 두려워 숨어 버린 제자들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로 지켜 본 몇 명의 여인들이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했을 것 같습니까?
몇 명의 여인들을 빼놓고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신들이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 욕망의 내용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이기적인 욕망이었습니다.
그 욕망을 채워달라고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이기심으로 가득 찬 ‘호산나’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향해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감사와 경배의 찬양을 드리는 ‘호산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파티를 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의의 파티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오면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받아 주십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축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파티에 들고 갈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만드신 의를 접시에 담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파티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희생을 통해 만들어 주신 선물인 의의 접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만들어주신 의의 접시를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를 기쁨으로 맞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 늦게 믿었느냐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의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상식일 뿐, 가슴으로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거룩한 부담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부담 때문에 절제가 가능합니다.
음식의 절제, 취미의 절제, 시간의 절제, 유투브의 절제, 인터넷 절제, ........
내 욕심과 욕구를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언어를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감정을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앞에 내 욕구와 욕심의 호산나가 아닌 진정한 감사와 감격으로 호산나를 외치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종려 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호산나"란 것은 히브리 말(*)의 음역(音譯)이니, 그 뜻은, "도와 주소서", 혹은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란 것은 시 118:25에서 나온 말씀이나, 메시야를 가리킨 것이다.
* 호산나의 적용 / 절제(節制) - 마디 절(節), 절제할 제(制)
1. 알맞게 조절(調節)함.
2. 방종(放縱)하지 아니하도록 자기(自己)의 욕망(欲望)을 이성(理性)으로써 제어(制御ㆍ制馭)함.
moderation, self-control, restraint, control, restrain, be moderate (in)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가?
1. 물질(돈), 2. 시간, 3. 재능, 4. 인터넷(유투브), 5. 습관
호산나(Hosanna) 역사와 현대적 해석
호산나는 기독교 전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단어로, 원컨대 구원하소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호산나 역사적 배경과 의미, 그리고 이 단어가 시대를 거쳐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알아보고, 현대 사회에서의 해석과 적용에 대해서도 탐구해보겠습니다.
호산나의 뿌리부터 현대적 해석까지, 이 단어가 지닌 깊은 의미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호산나의 뿌리와 역사적 의미
호산나(Hosanna)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원컨대 구원하소서 또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강렬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때, 유월절을 맞이해 모인 군중들이 그를 맞이하며 사용했던 구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18:25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이 시는 구원을 갈망하는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구절에서 호산나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구원호소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합니다.
호산나의 변화와 정치적 의미
시간이 지나며 호산나는 단순한 구원의 호소를 넘어 정치적, 메시아니즘적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며, 이 단어는 독립과 구원의 염원을 상징하는 구호로 변모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 메시아로서 기리는 찬양의 말로 사용되면서, 호산나는 깊은 종교적,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습니다.
엑셀시스의 호산나
엑셀시스의 호산나 표현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가장 높은 곳에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과 그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는 문구로, 종려주일과 승리의 입성, 주님에 대한 숭배 등을 상징합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된 성경 구절에서 군중들이 사용한 찬양의 말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현대적 해석과 적용
오늘날 호산나는 여전히 기독교 음악, 예배, 기도 등에서 널리 사용되며, 그 의미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됩니다.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단어는 현대 사회에서도 인간의 깊은 갈망과 신앙의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최신 연구나 해석에서 호산나에 관한 직접적 내용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변화를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과 사용은 호산나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신앙의 언어임을 보여줍니다.
호산나 단어를 통해, 우리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간절한 구원의 호소부터 현대 사회에서의 다양한 해석과 적용에 이르기까지 그 깊이와 너비를 탐구해 보았습니다.
역사적
문맥과 신앙적 의미를 품고 있는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시 군중들의 찬양과 메시아로서의 인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 음악, 예배, 기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갈망과 희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호산나의 여정을 따라가며, 우리는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넘어, 살아있는 신앙의 언어와 그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이로써 호산나가 담고 있는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깊이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산나의 유래는 구약 시편 118편 25절에서 출발합니다.
시편 118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감사의 시에 해당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일까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감사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호산나의 의미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호산나라는 의미는 역사속에서 억압받고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무리들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호산나, 호산나" 하며 크게 외쳤습니다.
이러한 외침에는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절함이 함축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호산나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에 잘 나타났습니다.
정치적인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백성들의 환호성처럼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의 갈라짐에서 예수님께서 어느 편에 계실 것인가를 찾게 됩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주님(28-36)
나귀를
마련하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제자들에게 지시하십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면 매여 있는 어린 나귀가 있을 텐데 풀어 오라.
나귀의 주인이 항의하면 딱 한 마디만 하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신다"(31)
주님은 지금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제자들
앞에서 선언하십니다.
나귀의 주인도 주님이십니다.
우리 생명과 인생의 주인도 주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 주인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우리는 주저 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가 우리 인생의 전성기입니다.
신앙의 전성기를 누리고 싶습니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드리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부르는 찬송의 내용은 무엇입니까?(38)
찬양 받으셔야 할 주님 (37-40)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진이 초라해 보이지만, 누가가 "제자의 무리"라고 표현한 자들, 즉 그 시점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의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니 좀 위안이 됩니다(37).
예수님이 환영 받는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배 아파합니다.
청중의
함성을 멈추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39).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누구도
찬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찬양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의 찬송을 뒤로 하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41)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주님(41-44)
주님은 군중의 함성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십니다(41).
얼마 후에 무너질 성, 그 멸망의 성에 사는 영혼들이
불쌍해서 우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닷새 후에 그 불쌍한 인생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이 대신 죽으십니다.
주님은
긍휼의 눈물만 흘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긍휼을 자신의 생명으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 주님의 긍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
주님이 나의 주님, 우리 주님이십니다.
일상에서 주님의 긍휼을 만납니까?
주님께 시간을 내어드리십시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Rejoice greatly, O Daughter of Zion! Shout, Daughter of Jerusalem! See, your king comes to you, righteous and having salvation, gentle and riding on a donkey, on a colt, the foal of a donkey.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는 이유는 무엇인가?(30, 35절)
어린 나귀를 타신 왕(28-36)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예언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말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시는 행동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스가랴 9:9의 성취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갑자기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시는지 제자들도 처음에는 영문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츰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펼치곤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나귀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들이나, 자기들의 겉옷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왕 되심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내 삶의 왕으로 기쁘게 맞이해야
합니다.
나는 내 삶의 왕으로 임하시는 주님 앞에 무엇을 드려서 맞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영광 돌리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39절)
찬양하는 무리와 시기하는 무리 (37-40)
예수님의 행동 언어는 대단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반응합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길
위에 펼칠 뿐만 아니라 나귀 뒤를 따르면서 기쁨으로 소리를 지르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반응은 때로 우리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듭니다.
이런 행동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전혀 없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기쁨을 주체
못하고 있는 반면 바리새인들은 평소보다 더 냉정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이 못마땅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이들을 말리라고 강하게 어필합니다. 그러나
말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소리 지를 것입니다. 진실은 거짓을 이기며 기쁨은 비판을 이기는 법입니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은 기쁨을 삶과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이는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신 것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메시야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여기고 찬양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인 부담과 예수님에 대한 적의감 때문에 무리들의 찬송을
비난했다.
예루살렘 가까이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될 성을 보고 우셨다.
예루살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이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거절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첫째,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은 예수님이 평화를 위해 오셨음을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해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평화가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강력한 힘이 있어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떤 강력한 사람이나 나라도 평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평화를 파괴한 것은 죄이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해야 참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두고 겸손히
낮아지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도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의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 심판의 주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갑자기 우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완전히 파괴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체계에 빠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부정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구원과 평화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하며 회개하기도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심판 받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던 성전이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심판의 주님으로서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절한 사람들은 자기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주님을 두려워하며 회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며 심판의 주님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회개하고 주시는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의 긍휼을 전달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증거
첫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서 8:14-15)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둘째, 기쁨이 충만합니다(요한복음 15:11. 16:22, 17:13, 사도행전 2:46)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그 말씀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베드로전서 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넷째,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다섯째, 십자가의 길을 선택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과 핍박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들은 영원한 것에 관심과 가치를 두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핍박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언제나 영원한 것, 천국의 것으로 판단 기준을 삼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를 모두 죽은 자로 취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할 뿐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알고, 육적인 사람은 세상의 것이 삶의 기준이 되지만 영적인 사람은 하늘의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됩니다.
육적인 사람은 허무함과 공허에 쌓여 있지만 영적인 사람은 기쁨과 만족함이 있고 육적인 사람은 세상에 쌓으려고 노력하지만 영적인 사람은 하늘에 쌓으려고 애씁니다.
뿐만 아니라 육적인 사람들은 대속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영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대속함을 받습니다.
육적인 면과 영적인 면 중에서 어떤 면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항상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국의 것에 관심을 가지셨고 천국의 것으로 기준을 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오래 잘 산다고 하여도 반드시 죽지만, 천국을 소유한 영적인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은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한시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심으로 영생을 얻어 주님과 함께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몸(빌립보서 2:5-11)
스승이 벽돌을 갈고 있었습니다.
제자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벽돌을 왜 가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
제자는 어이가 없어 반문했습니다.
“벽돌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꾸했습니다.
“이놈아, 눈 감고 가부좌 튼다고 다 부처가 되냐?”
아무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도를 닦는 모양새를 갖추더라도 깨달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선문답입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갖출 것 다 갖추고 있어도 알맹이가 빠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강조합니다(딤 3:5).
사실
오늘날 교회는 거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세계 십대 교회에 든다는 교회만도 서울에 서넛 된다 하고, 교회시설이나 설비도
최고급 최신으로 갖추고 있으며, 인적 물적 자원은 넘쳐나고, 각종 프로그램과 이벤트와 행사는 끊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불미스러운 일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처럼 가난한 마음이 없으니
신앙은 한낱 욕망충족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리스도 예수처럼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감투 얻으려고 수십 억 쓴다하고, 그리스도
예수처럼 사랑하는 마음 없으니 멱살잡이에 법정다툼 마다하지 않고, 예수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들에게 인색한 것이지요.
가장 부족한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야말로 삶의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삶의 시름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깨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열정을 갖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으면 무기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삶의 정수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있으면 생명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두 종류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 현실이 만들어내는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내면의 영이 빚어내는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벗들의 내적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벗들의 마음은 삶의 경험과 외부환경과 여러 관계들 곧 외부 현실이
만들어낸 마음 아닌가요? 그 마음에 휘둘리면서 지나치게 욕심 부리고 쓸데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헛된 일에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벗들의 존재의 중심에서 샘솟는 마음이나 벗들의 영이 빚어내는 마음은 얼마나 되나요? 바라기는 벗들! 영이
빚어내는 마음이 벗들의 내면을 가득 채웠으면 합니다.
조금 전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처럼 큰 삶의 자산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덧붙여 그리스도의 마음은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산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세상의 환경과 현실과 경험이 빚어낸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빚어낸 마음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려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생명과 평안과 관계된 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하고, 배려하고, 관용하고, 자비를 베풀고, 측은지심을 갖고, 섬기고, 나누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엡2:2) 사탄과 세속의 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죽음과 관계된 일을 생각합니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롬8:6) 이것은 비교와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사람들을 미워하고, 지배하고, 부리고, 누르고, 빼앗고, 이용하게 합니다.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아동학대가 왜 일어나나요? 그것은 사탄과 세속의 영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저지른 끔찍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까요? 당시 정치 지형과 관련하여 유대 기득권층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음험한 마음이 야합했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로마 정부의 비호가 필요했고, 총독 빌라도는 식민통치를 위해 유대 기득권층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선동했고, 총독 빌라도는 수하에 있는 병사들을 이용했습니다. 세상의 일과 권력과 기적에 혈안이 된 당대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광기가 한데 뭉쳐서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마음이 세속의 영에 지배를 받았기에 순수하고 여린 하나님의 어린양마저 끔찍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어떤가요?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온 마음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외부 현실이 만들어낸 마음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외부의 자극으로 형성된 마음은 강력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빚어낸 그리스도의 마음은 맥을 못출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만족이 없고,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지 못하고, 생명과 평화를 위해 일하지 못합니다.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현실은 점점 각박해집니다.
[어떻게]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 안에 임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요. 몸이 없으면 영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몸과 영은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두 차원입니다. 몸은 영의 보이는 차원이고, 영은 몸의 보이지 않는 차원입니다. 따라서 영을 무시하는 몸의 살림이 짐승의 그것과 같다면, 몸을 무시하는 영의 살림은 유령의 그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라는 신비체를 통해 우리에게 현존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1:18) 고린도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서 “너희”는 고린도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적 활동이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는 예배와 성도의 사귐과 사역 세 가지를 통해 세워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의 세 가지 거룩한 활동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경험합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의 활동이 언제나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은 일로 지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인간관계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조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며, 그때 그리스도의 영은 임재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영은 성찬을 통해 우리 안에 임재합니다. 성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습니다. 이때 믿음으로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합니다. 우리는 가톨릭교도들처럼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화체설)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상징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한다고 믿습니다.(임재설) 그리고 영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에게 언제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벗들, 매월 1회 하고 있는 연합성찬예배를 귀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성찬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을 모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셋째, 관상기도에 힘쓰십시오. 관상기도란 그리스도의 영을 내면에 모시는 기도입니다. 온갖 생각의 홍수나 분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 내면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임재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하면 하기 전과 하고 난 후의 마음이 다른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매번 경험합니다. 어수선한 마음은 고요해지고, 흥분했던 마음은 평온을 되찾으며, 분노하던 마음은 온유한 마음으로 바뀌며, 걱정하던 마음은 새로운 희망으로 빛납니다. 갈피를 못 잡던 마음에는 영감과 통찰이 주어지고, 서운한 마음은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은 살아갈 힘과 생명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벗들! 그리스도의 영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과 생명과 평화를 위해 일합니다. 이 마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왕 노릇합니다. 이 마음을 통해 생명시스템이 힘차게 작동합니다. 마침내 이 마음이 벗들을 삶의 만족과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언제 어디서든 그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마음을 얻고 이 마음을 통해 삶을 빚는 예술입니다. 멋진 삶입니다. 이런 삶으로 벗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12-02-2024(월) 요한복음 12:9-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사로 까닭에(11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for on account of him many of the Jews were going over to Jesus and putting their faith in him.
까닭에(1223) by reason. for on account of
여러분,
죽어서 무덤에 안장된 후 사일이 지났습니다.
유대는 더운 지방이라 사람이 죽으면 그 날 즉시 무덤에 안장합니다.
더구나 사일이 지났기 때문에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무덤에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덤의 돌문을 치우라고 하신 후에 소리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가 온 몸을 붕대로 감은 그대로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끼셨고,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나는 이 장면을 다시 읽고 묵상하면서 죽은 나사로가 들었던 예수님의 음성을 왜 나는 듣지 못하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도 들었는데 살아있는 나는 왜 듣지 못하고 있었나?
여러분 이 시간 살아있다면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나사로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놀라운 일이 펼쳐졌습니다.
나사로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소생)
둘째는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 죄의 무덤에서 온전히 나와야 합니다.
셋째는 온 몸을 감고 있는 붕대를 풀어야 합니다
- 기도하지 못하는 것,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 못하는 것, 전도하지 못하는 것, 봉사하지 못하는 것.....
"나사로 까닭에"라는 구절은 "나사로 때문에" 라고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왜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나사로가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나사로는 죽어서 장사되었고 무덤에 안장되어 사흘(4일)이 지났습니다.
나사로의 몸에서(屍體)는 썪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문을 옮기라고 하셨고 돌문이 옮겨진 후에 무덤 안을 향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Lazarus, come out!)"
이때 나사로가 온몸에 붕대를 감은채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도 듣지 못했던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죽은 나사로가 그 말씀을 듣고 나왔습니다.
나는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나사로와 같이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나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울림이었습니다.
그 울림이 내게 임하기 전에는 주님이 살아계시다면 내게 한 번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음성이 나를 무너트렸습니다.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찌 거룩하고 아름다운 주님을 오라고 하였는지......
믿음이란 선포되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나사로가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 흙덩어리가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될 때마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이 드러나도록 온전하게 믿고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께서 나오라고 선포하셨던 말씀을 듣고 나왔던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라는 복음송 가사를 소개합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너무 아픈데
내가 노래할 수 있는건
예수님 때문에
살아있는 것 보다 죽음이 아름다울만큼
지쳐도 일어설 수 있는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지금도 날 위한 그 기도 때문에
* 까닭에(때문에) - 의존명사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
1. on account of. 2. because of. 3. owing to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나로 인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사로가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죽었던 나사로가 나사로야 나오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음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살아있는 나는 지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영음(靈音) - 영적인 음성
4 Ways To Hear God’s Voice In Your Life
많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 더 깊이 연결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전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바쁜 일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여유를 주지 못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조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분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배우는 데 시간을 할애하면 그분의 음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4가지 주요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정은 어디에서 시작되나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은 여러분이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이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고린도후서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All this is from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아직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바로 받아보세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그분의 영을 보내주셔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신 후 진리의 영을 보내셔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안에. 신자는 내 안에 성령이 계시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신자로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3절에서 양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요한복음 10장 4절에서 양들이 그분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낯선 자의 음성을 거부하고 그를 따르지 않고 그에게서 도망칩니다(요 10:5).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바쁘면 하나님의 음성을 거의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분의 음성을 식별하고 원수나 우리의 육신의 생각과 구별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심부름을 할 때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특정 시간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지만 항상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이 듣는 음성을 항상 말씀의 말씀으로 확인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명확하게 식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전히 작은 목소리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실 준비를 하고 계실 때 강한 바람이 불더니 지진이 일어났고, 그 후에는 불이 났으며, 마지막으로 고요한 작은 음성이 들렸습니다(열왕기상 19:11-13).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하지 않고 확고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놓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음성은 우리 마음이나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기 전 아침입니다. 시끄러운 환경에 있다면 낮 동안 휴식을 취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가슴에 남는 강렬한 인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릴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강한 인상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인도하시거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논리로 설명하려고 너무 바쁘지 않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이 바로 우리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시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강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던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러다가 나중에 자신이 실수했고 무시했던 강한 느낌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실제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꿈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하시고 요엘서 2장 28절에서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며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의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며 일부는 마귀로부터 온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을 꾸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알아보고, 꿈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검색하여 잠자는 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보세요. 인터넷에 떠도는 꿈의 상징 사전은 속임수에 빠질 수 있으므로 서두르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배우에 대한 꿈을 꾼다고 가정하고 배우나 연기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아보세요. 예를 들어 에스겔 4장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포위 공격을 역할극으로 연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포위 공격이 일어나기 전에 포위 공격을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경우 꿈속의 배우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사람들, 특히 예언자들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에 침투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지, 반대되는 영으로 말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은 모든 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영인지 시험해 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예언할 때 그 사람이 말하는 영을 시험해 보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 기도하고 성경을 통해
확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당면한 문제에 관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과도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른 방법들
하나님은 우리 개인에게 말씀하실 때 다른 많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분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연에 대한 비유, 누군가의 티셔츠에 적힌 메시지, 노래,
설교, 간증, 환상, 성경 가르침 등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읽으면 일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고 지혜를 구하세요.
떠오르는 생각, 아이디어, 인상을 일기로 쓰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방식을 가리키는 패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음성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Meanwhile a large crowd of Jews found out that
Jesus was there and came, not only because of him but also to see
Lazarus, whom he had raised from the dead.
So the chief priests made plans to kill Lazarus as well.
for on account of him many of the Jews were going over to Jesus and putting their faith in him.
나사로(Lazarus. 돕는 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인물입니다.
성경에는 두 명의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첫번째 나사로는 거지로 부자의 집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을 먹으며 지내다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람입니다.
두번째 나사로는 베다니에 살던 인물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셨던 사람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던 나사로처럼 오늘날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도움을 원하십니까?
거지 나사로를 통하여 비참한 현실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직 소망을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살아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처럼 이미 죽어서 송장 썪는 냄새가 진동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그 말씀을 듣는다면 소생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 합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믿음(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로마서 8:2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믿음(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설교를 듣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430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끝낸 해방 기념일입니다.
그래서
1주간 온 민족이 거나하게 축제를 벌이는 기간입니다.
1월 14일부터 1주간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또
잊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곳입니다.
이를 고맙게 여긴 동리 사람들이 큰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때에 마르다가 그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아주 값진 나아드 향유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이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온 집안이 향유 냄새로 가득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이자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가 이것을 보고 버럭 화를 냅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 보라.
이 귀한 향유를
허비 하다니, 이것을 팔면 300 데나리온은 넘게 받을 값진 것인데, 차라리 예수님께는 적당하게 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텐데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는 예수님의 돈을 맡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돈 궤의 돈은
훔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버려 두어라.
그녀가 이 향유를 간직해 둔
것은 내 장례를 위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뿐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나사로도 보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대 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은 떠나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I.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됩시다
나사로의 사건은 정말 대단 했습니다.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난 때 예수님이 그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도 나흘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러니 이 소문이 얼마나 대단 했을 것인가는 우리가 짐작이 가능 합니다.
이 베다니는 하루 아침에 유명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 까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가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자세를 보세요.
그야말로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근본이 문제입니다.
근본이 잘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존귀성과 자유를 사랑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장의 유익을 위해 부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장의 위기를 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온 나라가 뒤죽박죽이 된 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건 한 사람의 잘못만 아닙니다.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사회,
교육, 문화, 윤리, 경제가 다 내 잘못인 줄 알면 됩니다.
부모에게 대들고, 마약, 부정, 이런 사회를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여기 한 사람 때문에 베다니는 정말 좋아 졌습니다.
세상에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여기 마리아는 정말 감사를 아는
신앙인입니다.
그는 향유 한 병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는 향유 보다 더 귀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을 드렸을 것입니다.
향유가 몇 병이 있었다면 그걸 다 드렸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감사를 해야 할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 갔습니까. 그런데 이 마리아는 그 귀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다 부어드렸습니다. 이런 것이 감사를 아는 행동입니다.
물론 몇 방울이라도 냄새는 납니다. 몇 방울이라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정말 마리아를 배야
합니다. 그는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시골 아가씨입니다. 그는 자기가 결혼은 위해 준비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사람은 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소나무, 참나무를 보세요, 그 나무들은 키가 굉장히 크게 자랍니다. 그런데
분제를 보세요. 그 나무는 기껏 70,80cm정도만 자랍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조경사가 나무의 꼭대기를 정기적으로 잘라 냅니다.
뿌리도 정기적으로 잘라내고, 나무를 매년 다른 화분에 옮겨 심습니다. 그래서 뿌리가 안정된 활동을 못하도록 정지를 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나무를 난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분재된 나무처럼 문명이라는 화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스스로 “나는 연약해 ” “나는 배운 것이 없어” “나는 돈이 없어” “ 나는 배경이 없어”
“나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야” “나는 나 혼자 교회 나오는데” 하는 식으로 늘 성장 잠재력의 가지와 뿌리를 잘라내 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 아니고도 사람이 많은데 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마리아는 배경이 없어도 잘 했습니다. 그는 재벌이 아닙니다. 그는 학벌이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는 그 귀한 향유를 바친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물론 우리는 내가 마리아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는 분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합니다. 믿음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헌신은 반드시 이런 용기가 필요 합니다. 어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감사를 정성껏 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주저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늘 망설이다 보면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사람 누구에게도 그런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 기회가 지나가고 나면 후회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감사하는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 정말 위대한 사람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이런 것이 정말 바른 헌신입니다.
II. 좋은 일에도 방해자가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이 아닌. 이 일이 정말 비난
받아야 할 일입니까. 자기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 뻔뻔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는 다짜고짜로 이 여인을 무안하게 했습니다. 거기서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이 일을 칭찬 했습니다.갈수록 황폐해지는 이 땅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욕심이 많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정말 곤란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으면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시기하고 놀리고 비웃는 사탄의 작용이 있습니다. 그러니 늘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귀가 역사하는 법입니다. 저가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학 교수님이 이런 강의를 하셨습니다. 교회가 부흥 할 그 때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배가 아파서 못 견딘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교회를 봉사하는 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괜히 말을 만들어 냅니다. 엉뚱한 소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서 이런 선한 일을 못하게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가 잘 성장 할 무렵 사탄은 가장 잘 이해 할 사람이라고 믿었던 그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예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동냥은 못줄지언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쪽박을 때는 사람입니다.
나사로 때문에 그 동리는 온통 큰 잔치가 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왜 그가 판 깨는 일을 합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지요. 우리가 좀 더 잘 살아 보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내 가족이
방해를 합니다. 비가와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늘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베다니에는 온 동리가 잔치였습니다.
얼마 전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것은 예수님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동리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동리에서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때에 마리아가 귀한
향유 나드 한 근은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온 방은 향유냄새로 가득 합니다.
예수님도 기분이 정말 좋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성이 나서 그 여인에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으면서 나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가룟 유다 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크게 꾸짖은 것입니다.
그는 도적이어서 남을 생각하는 척 하면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사람은 그렇습니다.
자기는 슬쩍 빠지고 남이
무슨 말을 하드라 하는 식입니다.
요즈음 카드라는 식입니다.
우리도 늘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약해지지 말고 늘 진리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나사로 까닭에 이런 좋은 일이 있은 것처럼 나 까닭에 이런 신나는 일들이 늘 있으시기 바랍니다.
베다니란 말은 괴로움의 집, 혹은 슬픔의 집을 뜻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베다니 에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로 까닭에 괴로움의 집, 슬품의 집 이 기쁨의 집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괴로움이 변하여 우리 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귀합니다. 나사로 가닭에 베풀어진 베다니 잔치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 "도대체 나는 누구냐"하는 교훈을 주고 있습 니다. 이 잔치에는 어떤 사람들이 등장합니까
1.매사에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9절"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나 이는 예수만 위 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씨름판에 가면 홍샅바, 청샅바 두 선수가 맞붙어서 옥신각신하며 씨름하는 것을 신나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은 지땀을 뺍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까하며 다리를 꼬기도 하고, 상대방을 허리를 조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하까 하며 머리를 짜고 힘을 다하여 온갖 몸부림을 다칩니다. 그런데 구경하는 사람은 어떠합까 편안하게 앉아서 부채질하며 땀도 흘리지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홍선수가 잘 하네, 선수는 기술이 부족하네" 각기 나름대로 심판자가 됩니다. "왜 이 모양이 냐"고 비판도 합니다. 권투시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선수가 지름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면서 금방 쓸어질 지경인데도 도리어 "롤려쳐라, 혹을 쳐라"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베푼 베다니 잔치집에 모여든 구경꾼들도 예수님을 구경했을 것 입니다. "예수님 나이가 얼마쯤 되었을까 어느 학교출신일까" 그리고 곁에 앉 은 나사로를 보고는 "저 친구 운수대통한 놈이야"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잔치 의 구경꾼들만 아닙니다.
더러는 성도들도 마찬가집니다. "전도합시다."하면 그 일에 동참하지는 않으면 서,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지는 않으면서 구경은 잘합니다. "전도는 이렇게 해 야 한다."고 이론은 좋습니다. "아무개는 방법이 틀렸다. 아무개는 너무 한다." 비판도 잘합니다. 이것이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하면 기도를 구경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합시다."하면 함께 진땀을 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구경꾼 인생은 한번도 일하거나 호 주머니에서 돈을 내놓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화살은 마구 쏘아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아 갈 때에 함께 동참하고 함께 울 고 함께 땀흘리면서, 함께 기뻐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매사에 모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절"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이것이 무엇입니까 믿지 않 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가령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여당, 야당을 무론하고 끼리끼리 수군수군 이러쿵 저러쿵 온갖 권모수술을 동원하면서 상대방 을 넘어뜨릴 모의를 하지 않습니까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고, 진리를 위해서 세례 요한처럼 순굘르 각오하는 사람도 없잔아 있습니다. 그런데 모의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요 11:53"이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들은 "나사렛 예수 저 자가 문제다."고 했을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다니. 그렇다면 그가 메시 야란 말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그자를 죽이자"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고, 심지어 나사로까지 죽이려했습니다. 한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간음중 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시렵니까" 살기가 등등했고 그들의 손에는 돌 맹이가 쥐어졌습니다. 그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러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흩어졌 습니다. 여기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도 좋을 만한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고발하기 전에 자신을 고발해 야 하고,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볼르 빼 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롬1:17"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여기 믿음으 로"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길이고 방법입니다. 우리 성도는 어떻게 예수님을 괴롭힐꼬가 아니라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기쁘게 할꼬 이렇게 살아야 합니 다. 도대체 예수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나사로 까닭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리어 나사로 까닭에 요1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 광이 드러났습니다. 얼마나 선한 일리고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모의합니까 어떻게 방해할까 어떻게 흠을 잡을까 를 생각합니다. 성 도 여러분, 우리는 마귀의 잔꾀를 역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선을 행 할까 어떻게 믿음으로 살까 어떻게 주님의 뜻대로 살까를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매사에 헌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3절"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근을 가져다가 예수님 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 지냈는데, 예수님께서 "나사로 야 나오라" 말씀하시므로 얼굴을 수건으로 동인 채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뚜벅뚝벅 걸어나오는 광경을 친히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감격스러운 광경 입니까 이것을 체험한 마리아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여 지극히 값진 향유, 곧 나드 한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또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리고 감 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따라서 향유 냄새가 잔칫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렇습니 다. 우리 가정에서 무엇으로 가득하게 하여야 합니까를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사랑의 향유냄새가 가득하여야 하고, 기도의 향유 냄새로 가득하여야 하고, 봉 사의 향유가 가득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모 습에서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마리아의 헌심입니다.
헌심은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의 왕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 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인생의 변화를 뜻하고, 마음 이 새로워져야 인생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있을 때 열매를 맺습 니다. 요15:4"내 안에서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 습니다.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내 마음을 곱게 만들어주실 것입니 다. 향유 냄새로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내 강퍅한 마음과 오만한 마음을 온유 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2)마리아의 헌물입니다.
헌물은 나의 물질을 주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막14:3절에 보면 마리 아는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예수님께 그것을 드린 후 다시는 기억조차 아니하겠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소중 한 헌물, 곧 지극히 값진 나드 향유를 주님께 드릴 때 옥합을 깨뜨려 버렸습니 다. 왜냐하면 절반 남은 것은 도로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옥합을 주님 앞에서 깨뜨리십시다. 십일조의 옥합을 주님께 깨뜨리는 성도가 됩시다. 감사헌금의 옥합을 주님께 깨뜨립시다. 주일헌금의 옥합을 깨뜨립시다.
3)마리아의 헌신입니다.
유대 풍속에 여인이 머리를 푸는 일은 치욕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소중한 자기의 머리를 풀어 눈물을 적시어 그것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눈물은 감사와 사랑과 참회를 뜻합니다. 우리 모두도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습니 다. 그 은혜를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감격해야 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우리 모두도 헌신해야 합니다.
4.베다니 잔치집에는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유다의 인본주의 믿음을 보십시오. 본문4-5"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 게 주지 아니하였으냐" 스스로 의로운 자 되어 마리아를 책망한 내용입니다. 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는 마리아의 선한 일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했습니 다.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마리아의 지극히 선한 일을 돈만으로 평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열심! 그것은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향유를 열배로 주님께 드려도 그저 아쉬운 마음밖에 없 는 마리아입니다. 가렷 유다의 잘못은 첫째로 선한 일을 물질적인 것으로 평가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다의 잘못은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6절에 보면"이렇게 말함은 간 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간난한 사람을 위한 척 했습니다. 그는 자기 주머니에 들어올 돈을 생각하였습니다. 동기가 너무도 불순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번째 잘못입니다.
또 유다의 잘못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자를 돕 는 자이다." 이것은 유다의 구호며 나팔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불탔더라면 그의 삶 가운데 구제의 열매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 까 언행이 맞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유다의 삶속에는 구 제의 열매가 없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습니다. 자기 호주머니를 비운 일이 없습니다. 자기의 것은 아끼면서 남더러 구제 안한다고 나팔만 물어제쳤습 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안되기를 기도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청장년회원 여러분, 우리는 본 문에 나오는 여러 사람 가운데 어디에 속합니까 구경꾼은 아닙닌 매사에 핑개 하고 비판하는 모의꾼은 아닙니까 가룟 유다처럼 거짓된 인생은 아닙니까 오 늘 우리의 모습은 마리아처럼,헌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헌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헌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이 되로독 합시다.
잠언 16:1-3
-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To man belong the plans of the heart, but from the LORD comes the reply of the tongue.
All a man's ways seem innocent to him, but motives are weighed by the LORD.
Commit to the LORD whatever you do, and your plans will succeed.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 여기서 '경영'(*, 마아르)은 원어상 '제어하다', '다스리다'란 뜻인 바, '마음의 경영'은 곧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 등 모든 것을 동원하여 총력을 다해 생각하고 꾸미는 계획이나 사상들을 가리킨다.
말의 응답을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 여기서 '말의 응답'은 문자적으로 '혀의 응답'이다.
혹자는 이를 '듣는 것'으로 해석하여 상반절에 대한 모든 계획이나 사상들의 최종적인 응답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이라고 읽는다(Elster, Umbreit,Bertheau).
그러나 본 구절에 있어서 '혀'는 상반절에 언급된 계획에 대한 표현의 수단으로 나타나는 바(Delitzsch, Zockler), 제아무리 인간이 탁월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수단인 혀를 적당한 시기와 감동적인 움직임으로 만드시는 것은 여호와께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15:23; 마 10:19; 롬 8:26; 고후 3:5).
자기 보기에는(*, 베에나)
- 문자적으로는 '자신의 눈 안에는'이란 의미로 눈이 그 사람의 전인격을 대변하는 곳이란 점에서 여기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에 따른 편협된 판단을 가리킨다.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 여기서 '심령'(*, 루아흐)은 상번절의 '행위'와 대조되는 말로 외적 행위의 동인(動因)으로서의 내면을 가리킨다.
또한 '감찰하시느니라'(*, 타칸)는 원어상 '무게를 달다', '공평하게 평가하다'란 뜻을 가지는 바,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외적 행위는 물론 그 내면의 은밀한 모든 부분까지도 보시고 당신의 공의의 속성에 준거해 판단하신다는 의미이다(히 4:12).
맡기라(골. גֹּל) 1556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 본 구절에서 '맡기라'는 동사 '골'(גֹּל)은 원어상 '굴리다', '던지다' 등의 의미로서 '전폭적인 의뢰와 위탁'을 가리키는 말인 바(시 22:8; 37:5), 이는 1, 2절에 나타난 바대로 모든 내적, 외적 측면의 동인과 과정과 그 결과를 곧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것을 지시하는 말이다(벧전 5:7).
시편 22: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He trusts in the LORD; let the LORD rescue him. Let him deliver him, since he delights in him."
의탁하니(골.) 1556 גָּלַל
스트롱번호1556
구약 성경 / 16회 사용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 여기서 `의탁하니'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골'(*)은 `굴려버리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짐을 맡김을 의미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윗을 조소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악인들은 그들 안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사실은 다윗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Craigie).
시편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Commit your way to the LORD; trust in him and he will do this:
맡기라(골. ) 15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 '맡기라'는 '갈랄'(*)로서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굴리다', '흘러 내려오다', '신뢰하다' 등이다(22:8 ; 잠 16:3 ; 벧전 5:7). 그리고 '길'은 삶의
모든 여정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것. 즉 계획들이나 행동들, 그 계획에 따르는 잇슈(issue)들이나
결과들을 가리킨다(10:7) 한편, 세상 사람들은 이것들을 운명이라고 부르지만(Anderson), 신앙인에게는 오직 이것이
여호와께만 있음을올 믿는다.
저를 의지하면
-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너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방법들에 맞추면'(잠 16:20 ; 28:26)이다.
저가 이루시고
- '이루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아세'(*)로 문자적인
뜻은 '...에게로 돌리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살면 그에 따른 혜택을
그에게 돌리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혜택이란 복된 결과의 보장, 유익을 지켜줌, 해받지 않음 등을 가리킨다고
본다(Barnes).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맡겨버리라(1977) 에피립토() ἐπιῤῥίπτω
스트롱번호 1977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έριψα, 제2부정과거수동태 ἐπερρίφην, 1909와 449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걸쳐놓다(눅 19:35), 맡기다(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본절은 시 55:23(LXX)의 인용이다.
'염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림난'(*)은'나누다'라는 의미의 '메림나'(*) 에서 유래한 단어로 악한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 뿐만 아니라 내면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이나 고민 등을 의미한다(마 6:25 - 34).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염려를 다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
'맡겨 버리라'의 헬라어 '에피립산테스'(*)는 '던져버리다'라는 의미로 부정 과거 분사형이나 본절에서는 새로운 명령형 형태를 취하지 않고 6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Kelly).
이것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자들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항상 보호하시는 손에 염려를 맡겨야함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권고하심이니라'의 헬라어 '멜레이'(3199)는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로 '염려가 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걱정과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을 맡겨야 하며 그때만이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
권고하심이니라(3199) μέλω
-
1. 관심을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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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 상관있다[현재 직설법에서 비인칭 동사로 사용], 마 22:16.
-
관련 성경 / 꺼리다(마 22:16, 막 12:14), 돌보다(막 4:38, 요 10:13, 벧전 5:7), 생각하다(요 12:6), 상관 하다(행 18:17), 염려하다(고전 7:21, 9:9).
골”(לוֹג) 알 아도나이” (주께 굴려버려라) (잠언 16:3)’ Show us your way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성경 여러 곳에는 우리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당부가 나옵니다.
특히 지혜서인 시편과 잠언에서 반복 말씀하십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편 37:5).
깊이 묵상해 보면 실로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가슴을 졸일 때가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씀하시며 성공의 비밀, 약속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하십니다.
여호와께 맡김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판단하여 이뤄 주실 것입니다”하고 권면하였습니다.
우리 말이나 영어에서 “맡기다”는 말은 “다시 찾아온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 돈을 맡기거나또 어떤 곳에 물건을 맡기면 다시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염려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보면 맡긴 지 얼마 후,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와서 다시 염려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 가운데 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도 조금 지나면 다시 근심에 쌓여 무엇인가 스스로 도모하며 모든 것을 다시 “내가” 맡아 주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당혹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맡기다”라는 말씀은 히브리어 원어로 “골”(לוֹג)입니다.
히브리어 단어인 “골” 은 “다시 찾아온다”는 개념이 완전히 배제된 표현입니다.
“골”은 “굴려 버린다”는 뜻입니다.
“골 알 아도나이”(주께 굴려버려라)는 마치 군인이 전쟁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 돌아갈 길인 다리를 끊는 것처럼 배수진을 치고 주님께 완전히 자신의 모든 행사를 “던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올인(all in)”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골”은 맡겼다가 찾아오고 다시 맡겼다가 찾아오는 계산된 행위가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무엇을 맡기는 것인가라는 명제입니다. “행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타이밍(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행사도 맡기고 타이밍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때에 역사하십니다.
맡김은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우리의 심령을 덮어갈 때 가능해집니다.
말씀이 조용하게 점진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덮는 조용한 혁명입니다.
오 주여,
오늘도 우리의 모든 행사를 맡깁니다.
Show us Your way!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11월 29일(토) 요한복음 12:7-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장사할 날(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Leave her alone," Jesus replied. " It was intended that she should save this perfume for the day of my burial.
장사할 날(The Day of my burial)
장사할 날이란 나의 장례식 날을 말합니다.
나의 장례식 날을 위하여 이런 준비를 예비하면 어떨는지요?!
첫째는 입관 예식을 위하여 부를 나의 찬송
둘째는 발인 예식을 위하여 부를 나의 찬송
셋째는 하관 예식을 위하여 부를 나의 찬송
자녀들을 위한 기도문
교회를 위한 기도문
나의 신앙고백문
- 내가 만난 예수님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일의 우선순위(優先順位)가 중요합니다.
만일 일의 순서가 잘못되면 모든 일이 망쳐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방을 수리하려고 할 때 싱크대를 고치려고 하는데 싱크대를 뜯었더니 그만 그 안에 보이지 않던 배수관과 수도관이 파열되어 예상밖의 일이 더 확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나드 향유를 붓게 된 것에 대하여 가룟 유다는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만 두어라 이것은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사 할 날을 위한 것에 대한 전통적인 두 가지 해석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지금 향유 붓고 남은 것을 보관하여 후일에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 때에 사용하게 하라.
"이를 두게하라"는 의미를 남은 향유를 보관하라고 이해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 여자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
그녀의 행동이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제 견해는 두번째 해석이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 칼빈(Calvin)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렇게 귀한 행위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동행(同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운동경기를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혼자서 경기에 임하는 것 단독 경기
예를 들면 권투, 단식 탁구, 100m 달리기, 마라톤과 같은 경기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여러 사람이 한 팀이 되어 경기에 임하는 단체 경기(운동)
예를 들면 축구, 농구, 럭비, 야구 등과 같은 경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이란 두 경기를 모두 갖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경건의 생활과 모여서 함께 해야하는 예배와 봉사는 공동체가 함께 활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음악회의 경우에는 독주와 합주가 있습니다.
독주는 혼자서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합주는 혼자서만 잘 한다고 훌륭한 연주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음악회의 경우 합주와 같으며 운동 경기로 비유하면 단체 경기와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경건을 위한 개인 기도와 말씀 묵상과 같은 신앙적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협력해야만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나보다 남을 더 존중하고 이해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바친 것은 개인적인 결단과 더불어 당장 눈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장차 다가올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은 의미있는 누군가와 동행하는 삶의 여정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교회와도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고난받는 이웃과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과 교회와 친밀하게 동행할 때,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웃의 동행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동행자가 될 때, 세상에서 주님이 빛나고 우리도 빛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교회와 늘 동행하게 하옵소서.
친밀한 교제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주의 빛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성자의 귀한 몸
동행하다
הָלַךְ
스트롱번호 1980
-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창세기 5:22 /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14:24 / 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
חָבַר 스트롱번호 2266
* 호세아 4:17 /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구약 성경 / 26회 사용
신앙은 동행하는 것이다(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연주회는 독주와 합주가 있지요.
독주는환자서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합주는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잘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맞춰야 합니다.
신앙은 독주가 아니라 합주라고 하겠습니다.
나하고 예수님, 성령님과 함께 해야만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저 질주를 위한 질주를 하기도 하고, 남이 달리니까 덩달아 달리기도 합니다. 남들을 모두 제치고 혼자 이기려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지내는 것이 안쓰러워서 하와를 만들어 짝을 지어 주셨습니다. 본래 누군가와 동행하도록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동행하는 삶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누구와 동행하는지에 따라 그 향기는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누구와 동행해야 하는지, 그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니면 지혜를 얻지만, 미련한 사람과
사귀면 해를 입는다 (20,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옳고 지혜로운 사람과 동행하면 삶이 의미있고 행복하지만, 그릇되고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하면 악을 행하여 결국 손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 나랏일(왕상
5:12)을 경영하는 영민한 사람, 영적으로 신령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등을 포함합니다. 본문에서 ‘동행’이
뜻하는 것은 단순히 ‘함께하다’가 아닌 ‘깊은 교감 속에서 교제를 나눈다’라는 의미입니다. 전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함께 걷는다’라는 뜻을 넘어서 전인격적으로 친밀한 관계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친밀하게 동행해야 할까요? 첫째,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 친밀합니다. 언제나 주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째, 지혜로운 사람은 가족과도 친밀합니다.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셋째, 지혜로운 사람은 신앙의 벗들과 친밀하고, 이웃과도 기쁨으로 동행합니다.
동행이 곧 신앙입니다. 신앙은 의미있는 누군가와 동행하는 삶의 여정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교회와도 친밀한 동행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고난받는 이웃과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과 교회와 친밀하게 동행할 때,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웃의 동행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의 동행자가 될 때, 세상에서 주님이 빛나고 우리도 빛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와 동행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교회와 늘 동행하게 하옵소서. 친밀한 교제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주의 빛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요한복음 12:7-8)
베다니는 무덤에서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복음 사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럴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에 도전하는 마귀의 교만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다른 제자들까지 동조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8-10).
가룟 유다는 양심에 화인 맞아서 성물을 도둑질하였고 또 훔치기 위해서였는데 마귀의 바이러스가 다른 제자들에게까지 퍼졌던 것입니다.
일생일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보다 더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요?
거룩한 봉사로 열매 맺는 일에 시험 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값진 물건이라도 제 용도에 따라 쓰임을 받았다면 족할 것입니다.
과연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은 당연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은 허비요, 낭비라고 하면 그것을 참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가룟 유다의 눈에는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돈만 보였지만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정성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그것도 부족해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삼십을 받고 주님을 팔았습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돈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죄 많은 여인에게서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정성을 받으시고 영원한 존귀와 영광의 복을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26:13).
그것은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진리에 새겨졌고,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복음과 함께 영원토록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입니까?
마귀의 시험을 조심하십시오.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성령이 기뻐하실 때에 즐겨 헌신하여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과 구제
구제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주님께 드리는 복이 됩니다.
마태복음 25:35-40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유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8절).
이 말씀은 가난한 자를 외면해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가 항상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은 단 한 번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또 항상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성도들의 손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주의 사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여러 부서와 조직이 있습니다.
기억할 일은 모든 기관이 모체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 여 전도회가 교회 안에 있는 지체요, 모든 교육 기관을 비롯하여 위원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몸된 교회에 향기를 풍기는 손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교회를 가까이하는 것은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귀히 여기는 것이 주님을 귀히 여기는 것이요, 교회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은 복음 사역이 왕성하도록 하는 것이요, 교회에 충성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가룟 유다와 같이 비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마리아와 같이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나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고난을 욕되게 하지 말고 거룩한 예물로 향기 풍기는 손길이 됩시다.
우리 모두 주의 날에 영광이 더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세 번의 유월절을 지내셨는가?
첫 유월절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셔서 ‘장사하는 집’으로 바뀐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어 니고데모를 만나셔서 거듭남에 대한 비밀을 가르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5)
위 두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예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유월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머무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요 6:1,4)
이 때 행하신 일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명의 무리를 먹이셨던 것이다.
그 기적의 의미는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의 희생이 되실 예수님 자신에 대한
계시였다.
아, 예수님 당신께서 스스로 오병이어가 되어 나를 먹이겠다는 말씀이시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말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48, 51, 54, 55)
세번째 유월절, 베다니를 방문(12:1)
이야말로 클라이막스였지 않은가?
예수님의 유월절 사역은 유월절 엿새 전에(요 12:1)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심으로 시작한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림으로 ‘장사할 날’을 미리 예비했다.
이어 예루살렘에 오셔서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준비하셨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 13:1)
이 유월절 식사는 예수님이 정말 원하셨던
것이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이어서 예수님의 고별설교
말씀이 13장부터 17장까지로 이어진다.
18장과 19장에서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 형에 처해지며, 십자가의 고난을 친히
당하셨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를 대신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7)
베드로 사도는 나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두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예수님은 ‘죄’를
위하여, 즉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둘째,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와 관련, 고린도후서5장 후반부에는 ‘대신하여’라는 단어만 여섯번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라는 찬송가 가사는 고쳐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하여’와 ‘나를
대신하여’는 엄밀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유월절 양은 어떻게 준비가 되며, 어떻게 쓰여졌을까?
출애굽기12장이 이를 말해준다.
유월절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된
수컷이어야 한다.(5절)
양을 잡아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야
한다.(22절)
(피를 뺀) 고기는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9절)
뼈는 꺾지 말아야 한다.(46절)
고기는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10절)
아, 이 모든 구절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대로, 정확히 이루어짐을 본다.
출애굽기 12장과 요한복음 19장을 대비해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감격의 눈물로 만난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매일의 삶에서 묵상토록 하겠습니다.
나를 위한 죽음을 넘어서, 나를 대신한 죽음이기에 더 감격스럽습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을 완벽히 성취하시고 이루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유월절 어린 양께서 또한 나의 어린 양 되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을 따라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내 옛사람을 못박고 새사람을 지어 가겠습니다.
기도 / 세상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으로 오셔서
유월절 절기 때마다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의 참 모습을 보여주시며
믿음의 본이 되셨던 예수님처럼
저희들도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신앙의 흔적을 바르게 새기며 남길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월 28일(금) 요한복음 1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향유 냄새와 도적(3, 6절)
Then Mary took about a pint of pure nard, an expensive perfume; she poured it on Jesus' feet and wiped his feet with her hair. And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perfume.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He did not say this because he cared about the poor but because he was a thief; as keeper of the money bag, he used to help himself to what was put into it.
첫째는 선행(先行) Good Deeds
“저는 열쇠를 얻기 위해 강아지를 구해준 것이 아닌데요”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다. “자신이 지금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잊은채 남을 돕는 사람에게 열쇠가 주어진단다” 진정한 선행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아름다운 선행은 감추어질 때 더욱 빛난다.
둘째는 시비조(是非調) Aggressive Attitude
마리아가 값비싼 순수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은 선행이라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본 후에 차라리 그 비싼 향우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 것은 시비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는 진심으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 많은 돈을 한순간에 소비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꽃을 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난다.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무엇을 그 안에 담느냐에 따라 전혀 냄새를 풍기듯이 무엇을 생각하는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인간의 죽음이 종말이 아니며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마리아와 가룟 유다의 행동을 통하여 어떤 길을 선택하며 무슨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리아는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뭇고 그녀의 머리털을 예수의 발을 씻었다고 합니다.
한편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행한 일을 보고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매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마리아가 행한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의 생각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사랑의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기(動機. motive)와 목적(目的. purpose)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드 순전한 향유 한 근의 가치가 일반 노동자들의 일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300 데나리온)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코 작은 금액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발상이 아주 현실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행동은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건을 이해할 때 외적으로 드러난 것만 살필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선행(先行)이란 착하고 어진 행실을 말합니다.
Good Deed
시비조(是非調)란 트집을 잡아 시비하는 것으로 집흔(執釁. 트집을 잡음)이라고도 합니다.
Aggressive Attitude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이 행한 것에 대하여 좋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보다 뭔가 부족한 것을 들추어 흠을 잡으려는 습성이 강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시비조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던 아주 조용한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그 비싼 순전한 나드 한 근의 향유를 예수님에세 쏟아 붓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결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였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존재와 소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아무리 소유가 중요할지라도 사람보다는 월등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소유가 사람을 짓밟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소유의 가치가 너무 크게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유 이전에 존재가 중요합니다.
올바른 존재는 올바른 소유를 갖지만 거짓된 존재는 거짓된 소유에 붙잡혀 물질의 노예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주의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이 소유에 집착하므로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도 올바른 정신 즉 자유시장경제라는 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완전히 땅속으로 꺼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소망을 품어봅니다.
1.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일찌기 창세로부터 계시되어온 하나님의 구원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 그러나 이와같이 구원의 정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는 데에는 한 여인의 희생적인 순종이 있었다. 한때는 세상을 풍미하던 다윗 가문 출신으로 벽촌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순박한 수천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며 기다리던 메시야를 잉태하게 된 것이다.
한 남자와 장래를 약속하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는 마리아에게 있어 임신이란 모진 수모와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우기 간음 한 자는 돌로 쳐 주이는 율법의 시대에 처녀가 잉태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여야 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알면서도 마리아는 자신의 잉태 사실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마리아의 겸손한 태도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확고한 신앙의 결단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리아는 무사히 약혼자 요셉과 결혼하고 아기 예수를 낳아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가 메시야 이심을 알고 있던 마리아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인간적인 요구를 하는 조급함을 보인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건강을 돌보 지 않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예수를 염려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불신앙의 모습도 보인다. 육신에 속한 자로서의 본능적인 모성과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교차하고 있는 마리아의 마음에 갈등과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세상 만민을 구원할 메시야를 낳았지만 마리아 역시 율법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일생 최대의 사건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가 사형을 당하게된 것이다. 삶의 한 기둥이었던 아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그 시간은 마리아에게 가장 처절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최악의 상황은 최상의 축복의 문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는 마리아의 마음에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구세주의 모습이 새겨진다. 그녀의 아들 예수의 육신은 처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녀의 심령 속에 영원한 메시야로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마리아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참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위하여 믿음으로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이어진다. 선한 것이라고는 날 것 같지 않던 나사렛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묻혀 있던 마리아가 선택한 고난의 길은 영생의 문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겸손한 자들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리아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랐듯이 오늘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할 때 생명책에 그 이름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2.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성경에 그 이름을 남긴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물론 명단 속에서 그의 온 집안까지 구원으로 인도한 신앙인들이 있다.
그들의 명단 속에서 우리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마리아에 대하여 오직 한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행 12:12).
그러나 우리는 단 한 군데에 농축되어 있는 마리아의 신실한 삶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마리아는 그녀의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장을 제공하고 아들 마가를 주님의 종으로 키움으로써 초대 교회의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한 여인이다.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누님이기도 한 마리아는 남편과 사별하고 예루살렘에서 홀로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
재산은 많았으나 과부로서 쓸쓸히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인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또한 마리아에게는 무엇 보다도 주 안에서 신앙으로 양육하는 아들 마가가 있었기에 오히려 보람과 기대에 찬 나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경건한 마리아는 일찍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활용하여 드리기를 자원하였다.
집을 개방하고 손님 접대하기에 인색하지 않은 마리아의 [실천하는 신앙]은 예수님의 방문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마리아의 집의 큰 다락방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는 장소가 되었다.
마리아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께 장소를 제공하고 후하게대접하던 그녀의 행위가 주님의 성만찬을 예비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또한 그 다락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 강림이 실현된 역사적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리아의 집은 모일 장소가 없던 성도들에게 예배처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믿음과 용기는 모든 이해타산과 생사를 초월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집에는 서도들은 물론 사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아들 마가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집안 일을 돕는 하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접하게 함으로써 식구들 모두가 구원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생활 가운데 실천하며 주님께 모든것을 드린 마리아의 헌신은 믿음의 결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믿음에 축복하시어 마리아 자신은 물론 그 자녀와 온 집을 영화롭게 하셨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 집의 주인이 되시어 함께 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마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여 주신 모든 것을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 드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마리아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을 도운 막달라(Magdalene)출신의 마리아를 일컫는다.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막달라는 염색업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특히 다른 지역들보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마리아의 생활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당시 일곱 귀신에 들린 채 교향을 떠나 방랑하던 그녀의 처지를 통해 그녀의 생활이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의 영혼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된다.
그녀를 방탕한 길로 몰아 넣던 일곱 귀신이 다 떠나가고 육신의 병은 물론 정신적인 이상까지 깨끗이 고침을 받아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주님의 종으로 충성을 다하는 마리아의 헌신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큰 은혜를 받고 많은 용서받은 사람은 진실 한 사랑으로 보답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을 따르며 자신의 소유를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여자로서 기업이 있을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반 동안 계속되는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직 마리아에게는 사랑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 후 예수님의 묘를 지키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목격하는 영광을 누린다. 다시 살아나시어서 자신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마리아는 놀라움과 기쁨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죄 중에 잉태되어 죄악 중에 출생한 한 죄인일 뿐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순간 랍오니(선생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육에 거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로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보인 마리아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여인들 가운데 함께 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여인으로서의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좁고 험난한 생명의 길로 택한 마리아의 이름은 예수님을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번째로 언급된다. 마리아가 경험한 것처럼 오늘날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침을 받는 신유의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영혼이 잘 되고 강건해지는 축복을 믿는 자들 모두가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그의 변화된 삶을 통해 보어주듯이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들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께 헌신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4. 베다니의 마리아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는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사는 강림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처럼 사회로부터 냉대받은 베다니 마을에서 마리아는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단촐하게 살고 있었다.
언니인 마르다는 실제적이고 활동적이었던 반면 사려깊고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마리아는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집안 일을 도우며 마음 속에 항상 메시야를 소망하던 마리아의 생활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급격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리아는 메마른 심령에 생명의 생수를 공급받게 된 것이다.
능력있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고 많은 이사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리아에게 인간의 걱이 아닌 메시야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졌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영적인 제자로서 신앙을 성숙시켜 가고 있던 마리아에게 그 믿음을 흔들어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집안의 생계를 맡고 있는 오빠 나사로가 중병이 들어 죽은 것이다.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죽음은 마리아게게 큰 충격일 수 밖에 없었다.
비탄에 잠긴 채 눈물을 토해내는 마리아의 호소는 예수님의 마음에 깊 은 감동으로 다가가서 마침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낳았다.
이 사건을 통하여 마리아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마리아의 마음 깊이 뿌리내린 믿음은 현실적인 행동으로 표출된다.
자신의 삶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 보여주시는 주님께 마리아는 가장 귀중한 소유를 아낌없이 드림으로 감사와 믿음을 나타내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께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부음으로써 신앙고백을 대신한 것이다.
결혼 지참금으로 사용할 향유를 부은 것은 곧 여자로서의 행복한 미래를 포기하고 주님만을 사랑하며 헌신하겠다는 의지였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영적 통찰력이 개발된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행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마태복음 26:13)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소외받는 비천한 여인 마리아가 그 이름이 영원토록 기억되는 존귀한 신앙으로 남게 된 것은 믿는 자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영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늘 대하고 이를 통하여 주님과 끊임 없이 교제하여야 함을 깨닫게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고 범사에 감사의 향기를 발하는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치는 성도를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기쁨으로 칭찬하며 맞아 주실 것이다.
가룟 유다(Judas Iscariot)
뜻 : 찬양받다, '가룟'은 '케리옷의 사람'이란 뜻(한글개역성경에서는 "그리욧"으로 나와있다).
1)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 예수를 판 제자(마27:5).2) 그 이름은 제자중에 언제나 맨 끝에 적혀 있다(마10:4,막3:19,눅6:16).3) 회계를 맡아 보았다(요12:6,13:29).4)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을 책망하였다(요12:4).
5) 귀신을 쫓아 내고 병을 고친 일도 있다 (마10:1, 눅9:1).
가롯유다는 가롯 시몬의 아들이며 (요6:7) 주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에한 사람이다. 가롯 유다는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가장 불가사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뜻과 배경, 성품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와 죽은 방법등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가롯이라는 이름에는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다. 즉 그리욧 사람 암살자 가짜, 거짓말장이, 위선자 등의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 가운데 일반적인 설명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롯사람이란 견해로12사도 중에 11사도가 갈릴리지방 사람인데 반해 유일하게 가롯유다만이 유다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둘째는 가장 가능성있는 견해로는 가롯이라는 말이 가짜, 거짓말장이,위선자를 뜻하는 세케르라는 아 람어의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이 말이 당시 아람어를 사용하던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배반자를 부를 때 사용한 별명이었다는 견해이다.
막3:14,요6:70을 미루어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도할 사도를 신중히 선택하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6:64를 보면 유다를 택한 것은 매우 곤혹스 러움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예수가 속죄적 죽음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의식적으로 복종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설명하려고 하는 바도 있지만 공관복음은다른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다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그를 유망하게 보고 또 그의 성격을 통찰하고 크게 쓰여질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여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 이 무리안에 배신자가 있으면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그의 성격을 생각하여 볼 때 아마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될때 지상에 있어서 어떤 이들일 얻게 되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제자단의 회계일을 보면서 일행의 전대를 맡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부정을 행했다. 베다니의 마리아 집에서 그녀가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지극히비싸고 순수한 나도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제자들 특히 유다는[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지아니하였으냐]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그 돈으로 자신의주머니를 채우러는 생각이었다.
이에 예수께서 부드럽게 충고한즉 그는 오히려 분격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팔아 넘길 것을 제의했다. 제사장들은 이에 동의하여은 30개를 지불했다. 그것은 당시 노예한 사람의 시세인데 약 9달러 50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이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했다. 마귀가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이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예수게서 조용히 말씀했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근심하면서 저마다 [내니이까?] 라고 반문하였다. 베드로는 예수의 품에 기대어 누워있는 요한에게 머릿짓를 하며[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졸랐다. 그러자 예수께서는[나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요13:26)라고 말씀했다. 그것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고 한 성경말씀의 성취였다 (요13:18,시41:9) 그리고 예수께서는 한 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가 그것을 받자마자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
뻔뻔스럽게도 유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26:21-25) 네 하는일을 속히 하라(요13:27). 제자들까지도 예수께서 왜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요13:28) 어떤 자는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쓸 문건을 사라고 하시는 것으로 혹 무엇을 나누어주라고 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 이에 유다는 곧 나가서 제사장들에게달려갔다. (요13:28-30)
최후의 만찬이 끝나자 예수께서는 11제자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으로갔다(마26:36). 기도가 끝났을 때 유다의 선도검과 몽둥이를 들고왔다. 야암이 기 때문에 누가 예수인지 알리는 신호로서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추었다. 이리하여 예수께서는 체포되었다.(마28:47-50)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동기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토록 악명높고 수치스러운 일화를 인위적으로 지어냈을 리는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더욱더 더럽혀져 제4복음서는 그를 사탄이나,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유다에 대한 적개심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사건 자체의 사실성을 왜곡시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되었지만 유다는 아마 단순히 욕심이 많고 부정직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를 배반했을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흉악한 반역으로 얻게 되는 돈이란 하찮은 소액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배반한 동기를 전적으로 이런식으로 생각 하기에는 조금 무리인 것으로도 여겨진다. 오히려 유다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한 것에 대한 실망과 거짓예언자들과 거짓메시야를 공격하는 유대교의 율법 및 제도에 대한집착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튿날 아침 어느 정도 냉정해진 유다는 예수께서 정죄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것, 자기가 죄없는 사람의 피를 판 것을 알고 후회하면서 제사장 과 장로들에게 가서 은 30개를 돌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라고 말했다. 그의 양심은 제자들의 양심처럼마비되어 있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그에게 말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리라] 그래서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나가서 목매어 죽었다. 제사장들은 [피값]을 성전 재정에 넣는 것을싫어하여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다.
이 밭은 [피밭]으로 알려지게되었다 (마27:3-5). 사도행전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다르게언급하고 있다. (행 1:18,19) 즉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 자신이 그 밭을샀으며,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혹 부풀어 올라?) 배가 터져 창자가다 흘러나왔다고 한다. 유다의 비참한 죽음은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과 저자들에 의하여 수없이 인용되곤 하였다. 그리고 또 유다의 죽음이 보다 무섭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소름이 끼치는 종류의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신약의 두 기사는 유다가 배신행위의 결과로 횡사를 당했다는 것과 예루살렘에 있는 작은 땅을 샀으나 배신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피밭]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은 서로 일치한다. 구약 시편 109편을 보면 유다의 죽음에 대한 것이 예시되어 있다. 이것은 원리 작자와 동시대에 된 일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가롯 유다에게서 이루어진 예언 이었던 것이다.(시109:8,행1:20)그리고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만이 멸망했다(요17:12). 이 두 장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에게 강요되어 멸망의자식이 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해서였으며 그리고 그것을 구하지도 않아서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특별히 술을 향기 있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흑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수 없다.
막 14:8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곧,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 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마 26:8; 막 14:4)은, 부주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귀절에 나타난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악행이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악까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 마음 속에 자라나던 죄악(탐심)이 결국 그로 하여금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민족이 살았던 팔레스타인 땅은 지역에 따라 3부분으로 나누입니다.
남쪽 유대와 중간 사마리아와 북쪽
갈릴리.
그런데 유독 남쪽 유대사람들과 인접해 있는 사마리아사람들은 그 시작이 야곱의 12아들로 형제지간이긴 했지만, 솔로몬 왕
이래 남 유다 왕국 북 이스라엘 왕국으로 갈린 이후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있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강대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그들의 지배 정책에 의해 다른 민족들과 피를 섞이게 되고 이로 인해 이방신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예루살렘 성전 제사와 정결법에 충실하였던 남쪽 사람들은 북쪽 사람들을 이제는 단순한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 아닌 일종의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사탄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의 지배 아래 정치적으로는 같은 민족으로 분류되고
있었지만, 실제 주민들의 접촉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종교가 사회체제를 받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질 때 종교는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마리아 보다 더 북쪽에 있었던 갈릴래아는 실상 지역적으로는 북왕국에 속하여 있었기에 사마리아의 일부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는 남쪽 유대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유대사람들의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분명하지만, 갈릴래아 사람에 대한 태도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무시하는 정도의 태도였지 적대적 태도는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논술적으로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긴 한데,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변방의 소수계로 짓눌려 살면서 자연적으로 갈릴래아 사람들이 갖게 되었던 민중해방정신과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정치종교적 독립을 원하고 있었던 남쪽 유대사람들의 정치적 이해가 함께 맞물린 것이 아닌가 하는 개연성이 하나이고 경제적으로는 비옥한 갈릴래아 지역에서 나오는 농산물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지주로서 땅을 확보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의 지주 계층과 갈릴래아 소작인과의 이해 관계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의 민족의
삼각이해관계는 오늘 우리 한민족이 남쪽의 대한민국 북쪽의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그리고 중국 연변의 조선족으로 크게 갈리어지
오늘의 현상을 주시하면 훨씬 그 이해가 쉬워집니다.
남과 북은 적대관계이지만 동시에 상대방이 죽으면 나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는
상생의 관계입니다.
연변사람들은 지역적으로나 사회주의 정치 이념체제로 볼 때는 남한보다는 북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실제
모습을 보면 연변의 조선족은 남한과 훨씬 더 교류가 많고 경제적 유대관계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당시의
사회정치의 묘한 삼각관계를 전제하고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 흥미로움은 결코 연속극 이순신에 못지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선산이 남쪽에 있고 태어나기를 남쪽에서 태어나 남쪽 출신으로 분류가 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자라기는
연변에서 자랐기에 연변 출신이었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남쪽 유대를 갔다가 갈릴래아로 가기 위해 올라가는데 사마리아 지방을
관통하여 가고자 합니다.
지금도 남한 사람들이 연변을 가려면 3.8 철책선이 있어 직접 관통을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우회를
하여야 하였듯이 당시에도 우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남쪽사람들의 종교 이데올로기라는 3.8 철책선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념적 3.8 철책선이란 처음에 언급한대로 유대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면 더러워진다는 관념입니다.
지금 이 얘기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이라는 지구상 조그마한 곳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는 것인데 묘하게도 오늘의 우리 상황과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책선과 거대한 방벽은 남쪽에만 있는 것입니다. 전 70년대 군생활을 철책선에서 했고 중부전선에는
철책선 뒤로 거대한 방벽을 쌓았는데 그때 일조를 했던 사람입니다. 최근까지 저는 북쪽에도 똑같은 철책선이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금강산을 가면서 보니까 남쪽은 삼중의 철책선이 있었고, 북쪽에는 초소는 있었지만 철책선은 없더군요.
하여간 2천년 전에도 담을 쌓은 건 남쪽이지 북쪽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남쪽 유대사람들이 저 북단의 갈릴래아를 가려고 할
때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오른쪽 요단강을 건너 북쪽으로 올라가서 다시금 요단강을 건너오든가 아니면 왼편 해변가의 오래된
상용도로를 통해서 가는 것이 통례였고 당시의 관습법이었고 그리고 사회안전 보안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만남]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 일행은 그 사회보안법을 깨고 종교이데올로기의 철책선을 넘어서 사마리아를 관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매우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대로 수가성을 통과할 정오쯤에 예수님은 배가 고프니 잠시 쉬워야겠다고 하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구해오도록 마을로 보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런 깨끗하니 더러우니 하는 당시의 사회종교적 관념 곧 제자들 마음속에 쌓아 올려있어 그 인간성을 좀 먹는 이데올로기의 담을 부수고자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예수님은 누구를 기다리라도 하는 듯이 우물가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고 계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옵니다.
한낮 정오 남들 다 논밭으로 일하러 나간 시간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우물가에 오는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요? 요즘은 마을공동체가 깨어지고 우물이 사라져 이런 경험을 할 수가 없지만, 제 기억 속의 마을은 우물이 중심입니다. 특히나 해가 뉘옄뉘옄 서산을 넘어가는 오후부터는 밭일을 마친 아낙네들이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물을 길러오거나 빨래하러 오는 여인들로 소란법석해지는 법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물을 길으러 온 것인지, 얘기를 하러 온 것인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특히나 하루 종일 아이들의 뒷바라지와 집안의 일과 밭일의 노동이라는 삼중고와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들의 눈총을 벗어난 어린 아낙네들의 떠들썩함과 생동성이란 오늘 아파트와 핵가족으로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럼에도 굳이 비슷한 경우를 생각하자면, 지난 주 수요일 정오에는 남편 이창희교수님을 따라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되어 한 일년넘어 떨어지는게 섭섭타하여 십여 명의 청녀신도회 아낙네들이 십여명 모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앞에서 모인 모임이라 자연히 담임목사도 한자리 앉았습니다. 뭐 그리 남의 눈총을 받을 만큼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용한 모임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집안 일손에서 벗어나 함께 만난다고 하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저도 함께 어울려 흥겨웠지요. 그런데 밥을 먹고 나오면서 자기네들끼리는 더 할 얘기가 있다고, 저보고는 들어가랩니다. 눈치없이 머뭇거리니까 들어가 일보랍니다. 나오랠 때는 언제고 들어가랄 때는 언제고. 하여간 목사는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목사(牧師)가 눈치가 빠르면 눈이 네 개인 목사(目四)가 되지만, 죽으면 넉 사가 죽을 사로 변해 또 다른 목사(目死)가 됩니다.
하여간, 우물로 다시 돌아오면, 그리하여 대낮 정오에 물 길러 오는 법은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한 여인은 항상 정오에 물을 길으러 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람들과 만나기 싫다는 것이지요. 아니 애초부터 사람 만나기 싫은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언제부터 모르게 싫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한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떠들썩하던 소란함이 갑자기 잠잠해지고 모두들 고개를 돌리거나 돌아앉고 그리고는 들릴랑말랑 수군수군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저 여자 뻔뻔하기도 해. 지금 남편이 여섯 번째라며, 애도 못 나는 석녀라며. 소문에 과거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며, 아니 저 옷 입은 꼴 좀 봐, 아니 지가 뭐 패션쇼의 주인공이라도 되는지 아는가봐, 손톱의 빨간 메니큐어 색깔하며 야 못 봐주겠다 못 봐줘.’ 그리하여 이 여인네들 꼴 보기 싫어 정오에 물 길러 오는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았을 때는 저 우물가 버드나무 밑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서 있는 줄 알았더니 가까이 오면서 보니 사람입니다. 그것도 남자입니다. 아마도 지나가는 길손인 모양입니다. 사람 부딪히는게 싫은 이 여인,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설 수도 없는 일, 모르는 길손이니 마주치지 않으면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조심스레 우물로 다가갑니다. 역시 전혀 못 보던 이방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서 풍기는 자태나 흘끗 쳐다본 얼굴 모습이 범상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 고장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타지방유대인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을 만나본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남자 유대인하고는 말 한번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그들이 자기 사마리아 사람들을 더럽다고 피해왔기 때문입니다. ‘흥, 지 놈들만 구원받겠다고, 그래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지. 나쁜 놈들.’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어른들의 얘기가 생겨나면서 괜한 증오심이 그 나그네를 향해 솟아오릅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뭐가 중하고 급한 일이 있어 자기네 율법을 어기고 이 사마리아 땅에 왔을까?“ 이생각저생각에 외간남자 앞에 섰으니 한편으론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도 하지만 애써 무시하며 머리에 이고 온 항아리를 내려놓고, 그 안에서 두레박을 꺼냅니다. 그 찰나 아까부터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 나그네가 말을 던집니다. ‘여보시오 거 아낙네 물 좀 주시오.’ 이 여인 화들짝 놀라며 첫마디 한다는 말이 ‘아니, 어찌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인 저에게 물을 달라는 것입니까? 우리끼리는 말은커녕 얼굴도 서로 쳐다보지 않는 관습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당신네들에게는 사회안전보안법이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지나가던 나그네가 목이 말라 물 한 모금 달라 하면 말없이 물 한바가지 퍼주는 것이 인지상정 사람됨의 마음이거늘, 이 여인 처음부터 시비조입니다. 아마도 그간 유대인에 대해 마음속에 가졌던 한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어긋난 대화 속에 담긴 숨은 해석]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은 엉뚱한 얘기를 하십니다. ‘네가 물을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말을 애 둘러 하셨지만, 내용이야 분명합니다. ‘야- 너- 내가 누구인줄 알아 보통사람 아니여. 내가 너에게 물을 달라고 했지만, 난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줄 수 있는 사람이여.‘ 듣자하니 이 남자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손히 한 번 더 청했으면 물 한바가지 떠 줄라고 했는데, 뭐 생수가 어쩌고저쩌고 이 사람 주제를 모르는 사람이구만.’ ‘주여!’ 사실 여기서 주여!라고 예수님을 향해 불렀지만, 이는 통상 외간 남자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아저씨!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줄이 달린 두레박은 더더구나 없는데, 이 깊은 우물에서 물 한 모금 뜰 수 없는 사람이 무슨 생수를 준다는 말이요?’ 이쯤 되면 두 사람의 대화는 한쪽은 영산포로 다른 한쪽은 삼천포로 완전히 어긋난 셈입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의 대화를 중단하고 다시금 이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얘기를 다른 쪽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저는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으로 일단 묘사하였고 대부분의 오늘의 사람들은 지금의 남편이 여섯 번째라는 말 속에서 이를 매우 당연시여깁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정반대의 여성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여성은 사람을 세는 숫자에 포함되지 않을 만큼 여권상실의 시대입니다. 그 시절에 여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고 하는 것은 요즘같이 미모와 재력이 갖추어진 어떤 여성이 자의로 남성을 바꾼 것을 말한 것은 아닌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든지 아니면 어떤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남성들로부터 채임을 당한 불우한 여성일 경우가 훨씬 더 실제에 가깝습니다.
하여간 이 여인은 깨어진 자아의 모습입니다. 물 한 모금 나누기를 거부하는 이 여인의 박절함은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또 다른 해석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저자는 언제나 단어 선택이나 이야기를 함에 있어 매우 비유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사건 배열에 있어 공관복음서 기자의 경우보다 훨씬 심하게 매우 의도적으로 배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해복음서라는 별칭도 있습니다만, 당시의 최고의 지식계층을 대상으로 씌어졌기에 상당한 이해를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남녀간의 결혼은 인간과 하느님간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그러니까 여섯 번이나 바뀐 남편은 다름 아닌 이방신을 섬겼다는 것을 말함이고 이방신을 섬겼다는 말은 곧 이방 나라의 지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배했던 강대국들은 에집트와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와 페르시아와 헬라제국 그리하여 다섯 나라이고 지금은 여섯 번째 로마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 ‘네가 이전에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하는 말씀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집니다. 다시금 우리는 성서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정치적 테두리를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만 제대로 성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사마리아 여인의 깨어진 자아상을 외세에 의해 지배당한 민족의 아픔으로 보면서 오늘 우리 남한 민족의 깨어진 자아상과 상처를 바라봅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 신문을 보면서 분당의 63평 아파트가 불과 3,4년 전 8억원하던 것이 14억원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부동산규제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남한 민족의 자아상이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안의 자유를 표방하고 자본주의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가 다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유독 남한에서 그것도 오늘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만 보여지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십 몇 억짜리가 아닌 수 억짜리 아파트만 해도 일반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부부가 평생을 수고하여도 정상적인 벌이로는 1억마저 저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뭔가 우리 사회 안에 비정상적인 돈벌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이 비정상적인 길은 바로 비정상적인 인간성에서 나옵니다. 우리 주위에 부자는 많지만 진정한 부자가 없습니다.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는 어떤 전직 대통령의 아들과 며느리와 그들의 아들까지도 각기 액수 미상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기사를 볼 때는 일종의 시샘을 넘어서 뭔가 마음속으로부터 쿵-- 하고 무너지는 찐한 아픔을 경험합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인간이란게 본래 이런 것인가? 누가 알까 창피하고 부끄럽기 한량 없습니다. 공동체라는 민족성 자체가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자신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을 상실한데서 오는 정신착란적 사회현상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수천 년간 외세에 시달려온 피지배역사 때문입니다. 제가 명명하여 부르기를 반도정신착란증후군입니다. 처녀가 여러 남자들에 의해 강간을 당하면 죽거나 미치지나 둘 중의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명나라 원나라 청나라 일본 러시아 미국에 점령당하여 오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게 미쳐버린 것입니다.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의 장교이자 죽지 않았으면 평생을 군림하였을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무엇을 말합니까? 자유보다는 빵을 택하겠다는 정신병자의 증후군입니다.
전 여기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바로 살기 위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외치시는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하는 메시지에 더욱 귀를 기울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의 진리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려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고 배부르게도 하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돈을 쓰느냐?’는 책망은 2,600년 전 바벨론의 신자유주의에 정신을 빼앗겼던 유대인들을 향한 외침이 아닌 오늘의 우리를 향한 책망인 것입니다. 한미정상회담의 결과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의 동향과 주식의 주가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이사야 선지자와 예수님은 외치시시를 ‘귀를 기울리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존재 그리고 소유]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프롬이 30년 전에 말한바
To be or To have? 존재냐 소유냐? 하는 질문에 빗대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 30년 전에야 To be or To
have?가 바른 질문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To be and To have가 보다 바른 질문과 해답이 될 것입니다. 존재와
소유는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선 취해야 할 것이 먼저 있습니다. 존재가 먼저 서면 그의 소유도 바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소유가 먼저 서면 그의 존재마저도 소유화되어 그 인간은 피폐함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물 한 모금 달라는 나그네의 요청에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 나에게 물을 달라 할 수 있는가? 하는 깨어진 자아의 울림이 울려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외치신 말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는 말씀의 해석도 중요하지만, 이 말씀의 시점인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라는 때의 해석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그 명절이란 초막절을 말합니다. 초막절은 유월절 오순절과 더불어 유대인 3대 절기 중 하나이지만, 가장 크게 지키는 절기이기에 그냥 명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절기는 본래 자신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느님의 인도하심 따라서 살아온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일주일동안 집 앞 마당에 얼기설기 나뭇가지와 잎사귀로 대강의 초막을 짓고 거기서 지내었기에 초막절이라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는 모든 곡식과 올리브와 포도를 수확하여 장막에다 보관하는 추수의 절기였기에 때로는 장막절이라고도 불리웁니다. 기쁨과 수확의 절기에 그냥 즐기지만 하지 않고 부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 살았다는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막 속에서 살면서 조상들의 어려웠던 시기를 기억하였는데 그 때는 풍성한 추수를 얻고 난 때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유대인들과 한국인들의 차이입니다. 아까 14억짜리 아파트 얘기를 하였습니다만, 그 아파트를 사시는 분이 여기 계시면 그 마음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내가 언제 남의 돈을 훔쳤는가? 제가 말하는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 유대사람들의 경험에 비추어 말하면, 그 14억짜리를 산 이후 참으로 감사하여 예전 내가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며 그 판자촌을 한번 가본다든가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해 그런 누더기 같은 천막을 실제로 지어놓고 그 안에 가족이 들어가 며칠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는 마음의 태도를 묻는 것입니다. 아니면 20억짜리 아파트를 찾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재벌 유대인들은 지금도 21세기를 넘어선 지금도 초막을 짓고 살아가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에서는 호텔에서도 그 앞에 초막을 지어놓습니다. 그리하여 원하는 숙객들은 잠은 거기서 자고 돈은 호텔비용을 지불합니다.
편한 집을 두고 초막에서 지내면 자연히 아이들이 왜 여기서 잠을 자야하는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출애굽에 나오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이삭 야곱의 이야기 요셉의 에집트의 총리가 된 이야기 그리하여 그 형제들이 모두 에집트로 내려간 이야기 이후 이들이 강성하여 히브리 민족을 형성하였지만, 노예로서 살아가야만 했던 불행한 이야기 거기서 모세가 등장하고 파라오 왕과 대결하여 끝내는 홍해를 건너고 에집트의 군사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는 이야기 속에서 아이들은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좋아합니다. 그리곤 이후 40년의 광야에서 살아간 조상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인생을 배웁니다. 수없이 들어왔던 얘기이지만 유대인 자녀들은 들을 때마다 그들의 눈총은 빛이 납니다. 더구나 학교에서 책으로 배웠을 때와는 달리 아버지를 통해 초막 속에서 밤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보면서 듣는 지금 그 얘기는 눈으로 보는 듯이 실감이 납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진정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고 민족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깨닫고 감사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저는 우리 민족에게도 이러한 훈련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 먹고 잘사는 것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닌 낮아짐의 훈련이 있는 곳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려면 우리 부모세대부터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부터 훈련에 참가를 해야 하는데, 그저 쉽게쉽게 편하게편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샘솟는 물]
하여간 이게 초막절을 지키는 일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또 다른 특이한 예식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매일 아침 제사장은 금주전자를 들고 예루살렘 성전 남동쪽에 있는 기혼샘으로 내려갑니다. 그 기혼샘은 성전안의 실로암 샘물을 채우는 물의 근원지입니다. 곧 예루살렘 성전 사람들의 생명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제사장이 금주전자에 물을 채워 높이 들면 성가대가 찬양의 노래를 힘차게 부릅니다. 그 가사는 이러합니다. 이사야 12장 3절 이하의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날에 너희는 야훼께 감사 하여라 그의 이름을 외쳐 불러라 그가 하신 큰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그 높으신 이름을 잊지 않게 하여라. 야훼를 찬양 하여라 그가 큰일을 하셨다.’ 성가대의 힘찬 찬양에 백성들 또한 화답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화답의 노래는 시편 113편에서 118편까지의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을 부르며 ‘수문(水門)’이라 불리우는 예루살렘 성전 대문을 통하여 법궤가 놓인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이때 백성들은 오른손에는 초막의 재료인 나뭇가지와 종려잎사귀를 들고 있고 왼손에는 추수의 상징인 레몬 하나를 들고 있습니다. 그리곤 마침내 제단에 도착하면 제단 주위를 돌면서 118편 25절을 반복하여 부릅니다. ‘주소서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주소서 야훼여 승리를 주소서.’ 그리하여 찬양이 절정에 오르면 제사장은 금주전자를 들고 제단 위로 올라가 은으로 된 깔대기에 그 물을 붓습니다. 그러면 그 물은 깔대기를 타고 내려와 제단 아래 대지를 흠뻑 적십니다. 목마른 대지 목마른 영혼에 하느님의 은혜 혹은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말씀이 충만히 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여 하루의 아침 예식이 끝납니다. 이렇게 하기를 일주일 일곱 번을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목 마른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외치신 그 때는 바로 이 일곱 번의 반복이 있어 그 예식이 가장 최고조로 오른 그날 제사장이 주전자로 제단에서 땅으로 물을 붓는 바로 그때에 외치신 것입니다. 그냥 외치신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외치신 것입니다. 그간 성전 안에서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칠 일째 되는 그 절정기에 일어서서 외치신 것입니다. 그냥 일어서서 외치신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본문은 ekraxen이라 하여 아주 큰 소리로 온 몸을 쥐어짜는 듯한 격정적인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어 표현에 cried out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금 바로 7장 초두에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그 위기의 순간에 큰 소리로, 떠들썩한 군중들의 찬양소리를 잠재울만큼 큰 소리로... ‘들어라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성전 뜰에 모인 백성들아 거기에 생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있다. 목마른 사람들아 나에게로 오너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예수님이 외치신 샘솟는 물 곧 생수. 이는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수가성의 여인이 달라고 했던 그 생수. 다시는 샘물에 물을 길러올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생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런데 이 여인은 그래서 그 생수를 마셨나요? 마셨나요 마시지 못했나요? 마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이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나서 크게 깨달아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곤 외쳤습니다. ‘마을 여러분, 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나의 과거를 다 알고 내 속영혼의 갈급함을 알고 이를 채워준 한분을 만났습니다. 이분을 만나보세요.’ 과거가 부끄럽다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이 여인이, 자아상이 깨어져 열등감 속에서 애궂은 자기의 가슴만 쳐대며 살아왔던 이 여인이 동네 안으로 들어가 소리를 쳐대었으니 이게 생수를 마신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물 뜨러 왔다 물동이 버려두고 갔으니 변화를 받아도 단단히 받은 것입니다.
그간 이 여인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남편 다섯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의지의 대상입니다. 지금 있는 남편은 의지할 수 없는 허구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참 남편이 누구냐?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나에게로 와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그는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요한복음은 외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예수의 참 생명을 접한 사람은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나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속이라는 본래의 희랍어 단어는 kailias라는 배라는 말입니다. 뱃속에서 생수가 나올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뱃속에서. 배는 위가 있고 창자가 있고 똥이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자고로 서양인들은 인간의 근본이 심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더러운 피가 모여 깨끗해져 온 몸 사방으로 보내는 곳이 심장이기에 당연히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심장이 아닌 배로 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인간의 생명 '네페쉬’는 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음식논쟁을 하실 때에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배속에서 나오는 시기와 욕심이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각의 근원지로 보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성서의 히브리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배는 단순한 위가 있는 창자를 일컫기 보다는 동양에서 말하는 단전(丹田)입니다. 동양은 사람의 생명은 단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의 생명력은 단전을 통해 들어온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물론 심장을 감정의 근원지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흥분하면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고 말하지 단전이 두근두근거린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恨)이라는 감정 저 너머의 깊은 감정을 생각해보면 이 한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 보다 더 깊은 가슴 곧 단전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히브리적 인간 이해는 본질적으로 서양적 보다는 동양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동서양의 분기점에서 시작해 서양으로 먼저 전해진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는 아직 판단은 서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본문은 이 샘물처럼 흐르는 생수를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누구이십니까? 성령은 하느님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삼위일체 하느님 중의 한분이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이는 동격이신 성자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얘기이지만, 피조물인 인간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개미가 지네들끼리 부흥회를 하면서 인간의 영을 받으라! 웃기는 얘기입니다. 개미라고 하니까 조금 감이 안오는 것 같은데 강아지가 지네들끼리 모여 부흥회를 하면서 인간의 영을 받으라! 웃기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하느님의 영이시자 곧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예수께서 외치신 말씀은 진정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들은 그 뱃속에서부터 샘물같은 생명력이 넘쳐 나오게 될 것인데, 이는 바로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어 흥분한다고 해서 다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로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너희 몸이 성령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몸 안에 거하십니다.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려보시기 바랍니다. 내 밖의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내 안의 영의 소리에 귀를 기울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처럼 이러 저리 안식을 찾아 남편을 바꾸면서 살아왔습니다.
아파트를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를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브랜드를 따라 옷과 핸드백과 신발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이
사회는 자녀들에게 대학의 졸업장이 일류회사의 고용계약서가 네가 의지해야 할 남편이라고 가르칩니다.
더 크게 민족적으로는 강대국의
외세가 네가 의지해야 할 남편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시대를 따라 중국이 러시아가 일본이 그리고 미국이 우리의 남편 노릇을 대신하여
왔습니다.
바벨로니아에서 생산되는 브랜드 제품에 마음을 빼앗긴 유대 백성을 향해 제2이사야 선지자는 외칩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느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떡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붙들어라.
외세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하느님의 능력을 붙들어라.
이 하느님의
능력은 우리 민족의 뱃속에 우리 한반도의 단전 속에 있습니다.
밖을 보지 말고 우리 안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이 민족을 살리는 생명의 물이 샘물처럼 솟아나오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물은 끝내 차고 넘쳐 온 세상을 적실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체육
단전으로 숨을 쉬는 정신 수련법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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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단전의 하나. 도가(道家)에서 배꼽 아래를 이르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배꼽 아래 한 치 다섯 푼 되는 곳으로 여기에 힘을 주면 건강과 용기를 얻는다고 한다. - 2.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상, 중, 하의 세 단전. 상단전은 뇌를, 중단전은 심장을, 하단전은 배꼽 아래를 이른다.
기록에 의하면 김익두 목사는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 환자를 2만여 명이나 안수 기도하여 고쳤으며 280여 개의 교회를 세웠고 200여 명의 신학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25사변 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였습니다.
전도사 시절, 그는 길을 가다가 앉은뱅이 거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앉은뱅이 거지를 보자 갑자기 사도행전 3:1-10 절 말씀, 곧 베드로가 미문 앞에서 행한 이적이 생각이 나면서 자기도 앉은뱅이를 낫게 하고픈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한번 해 보자.’ 는 결심하고 한적한 과수원 돌담 밑으로 그 거지를 업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그 거지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일어나라!”하면서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는커녕 앉은뱅이 거지가 아파서 죽겠다고 “살려 달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김익두 전도사는 크게 좌절하고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나는 성경대로 안 됩니까?” 몸부림치며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김익두 전도사는 사도행전3:1-10 말씀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온통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에만 있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 말씀의 초점이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를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고 예수님의 마음만 품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김익두 전도사는 다시 그 앉은뱅이를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는 그를 교회로 업고 가서 예배당에 그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거지 앉은뱅이에게 진심으로 지난번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진정으로 앉은뱅이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도 않았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이후로 김익두 목사는 병자의 병을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그 가운데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김익두목사는 이후 난치병 환자 2만 여명을 낫게 하는 수많은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귀한 종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6-8)”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십시요. 내 속에 성령으로 내주, 역사하시는 예수님에게 시선을 집중하십시다. 세상을 향하던 세상을 의지하던 시선을 주님께로 시선을 집중하는 순간부터 역사는 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