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Mark) 06-08-2023(금) / 06-24-2023(토)


마가가 전한 복음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기록자 : 마가,
기록 시기 : 주후 60년경,
성격 : 역사,
기간 : 3년 반
수신자 : 군단, 백부장 등의 라틴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방인들 특히 핍박 중에 있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마가복음의 수신자였을 것이다.

로마 사람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지 않았으므로 마가는 메시아의 계보를 생략한다.
또한 그는 구약성경의 여러 예언을 생략하고 이방인 독자들을 위하여 요르단이 강이라는 것과(1:5) 올리브 산이 성전 맞은편에 있다는 것(13:3) 등을 설명한다.

이름 : 이 책의 이름은 이 책을 기록한 성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망치’를 뜻하는 마가는 마리아의 아들이며(행12:12) 바나바의 생질이고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이다(벧전 5:13).
그는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으며 사도행전에 8회 언급된다.

주제 : 주 하나님의 종의 사역

목적 :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었음을 보여 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도 그분처럼 섬겨야 함을 보여 주는 것

내용 :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언급하고는 곧바로 그분의 지상 사역을 기술하며 주로 그분의 일을 많이 말한다.
특히 마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위하여 보내신 종으로서의 예수님의 행적과 수난 기록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며 구약의 인용이나 유대 풍습에 대한 묘사보다는 침례자 요한의 사역부터 주님의 사역의 끝부분까지를 간략하지만 매우 힘 있게 전달한다.
기록의 단순함과 평범함 때문에 마가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짧고 명쾌하며 놀랍고 동시에 가장 만족스런 역사 기록’이라는 평을 받는다. 마가복음은 16장, 678절, 15,171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 10장(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

핵심 절 :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10:45),
핵심 단어 : 곧장(42회),
핵심 구 : “곧 그분께서”(1:20)
마가복음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의로운 종(사 53:11),
영적 교훈 : “그분의 놀라운 사역이 그분을 증명한다.”



















































06-08-2023(수) /

복음(福音)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신약 성경 / 76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장 / 복음(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1- 서언.
2-8 세례 요한의 전도.
9-13 예수의 세례받으심과 시험받으심.
14-15 최초의 갈릴리 전도와 제목.
16-20 최초의 제자 베드로, 안드레, 야곱, 요한을 부르심.
21-28 가버나움 전도. 회당에 있어서의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일.
29-31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심.
32-34 일몰 후의 많은 치료.
35-39 새벽의 기도. 갈릴리 순회 전도 여행.
40-45 문둥병자를 고치심.

시작이란 헬라단어는 아르케라고 합니다.
아르케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연결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우주 만물의 시작
이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하나님의 영원성, 선재성, 거룩성을 설명합니다.

[질문]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어떻게 다릅니까? 아니면 같은 시점입니까?

[답변] 이 질문은 성경해석을 위한 목표의 초점과 접근방법에 따라, 서로 다르다고 하는 학설과 같다고 하는 학설로 나누어집니다. 우선 본문들부터 보겠습니다.

창 1:1 (Genesis 1:1)

[개역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 .$r,a;h; taew !yIm'V;h' tae !yhila> ar;B; tyviareB
[영어 KJ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영어AS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요 1:1 (John 1:1)

[개역성경]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헬라원어] !En ajrch'/ ἦν lovgo", kai; oJ lovgo" ἦν pro;" to;n qeovn, kai; qeo;" ἦν oJ lovgo".
[영어 KJ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NI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AS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요일 I:1 (John 1:1)

[개역성경]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헬라원어] ^O ἦn ajp! ajrch'", o} ajkhkovamen...
[영어 KJ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영어 NI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영어 AS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that which we have heard, that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that which we beheld, and our hands handled, concerning the Word of life.

(*) 창 1:1에 있는 “태초”라는 용어는 히브리 원어로 tyviareB(베레쉬트)인데, 이것을 헬라어 ἐν ἁρχᾖ(엔 아르케)로 번역했고(LXX),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를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태초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태초”(ἐν ἁρχή)라는 말은 요한복음 저자의 서신인 요한일서에는 앞프 아르케(ajp! ajrch)'"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from the beginning로 번역되었는데, 우리말로 “태초부터”입니다.

(*) 질문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용어) 자체가 시간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창세기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말하고자하는 목표와 그 접근방식이 다른 것뿐입니다. 창세기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관한 것이고, 요한복음의 목표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에 관한 것으로, 이 문제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어원학적인 접근(etymological approach)과 신학적인 접근(theological approach)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 어원학적 접근 (Etymological Approach)

(1) 전술한 바와 같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는 그 용어에 있어서 다른 단어들과 달리 별로 다양하게 사용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 모든 것들(시간, 장소, 질서, 계급 등)의 시작(beginning)과 첫째(the first), 우두머리(head), 주권(sovereignty), 권세(power), 원리(principle)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의 첫째, 처음 곧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이렇게 본다면, “태초”는 모든 것 즉 만물(피조물)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태초에 관하여는 이견(異見)이 없이 “시간”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에 관하여는 시간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영원”과 관련시켜, 시간 이전, 영원의 아득한 어느 순간(momentum)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원어에 있어서 tyviareB(베레쉬트)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는 분명히 시간의 시작의 한 지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tyviareB(베레쉬트)는 전치사 eB(베, in)와 명사인 tyviare(레쉬트, beginning)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tyviare(레쉬트)는 영어 beginning(시초), former state(이전 상태), former times(전번), 그 종류의 첫째로서 시간에 관련해서는 first fruit(초실), first born(장자)의 뜻으로, 위계(dignity)에 관련해서는 the first(첫째), chief(우두머리)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헬라어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도 전치사 ἐν(엔, in)과 ἁρχή(아르케, beginning)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ἁρχή(아르케)는 a beginning(시초), origin(기원), first cause(제1의 원인)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영원”은 헬라어로 αἰών(아이온)으로, 신학적인 의미로 존재의 기간(period of existence)을 말할 때,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life(생명), life time(생명시간), life itself(생명자체)로 영원성(eternity)을 의미합니다. 질적인 의미라는 뜻입니다. 고로 “태초”는 영원의 어느 한 지점(a point of eternity)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영원과 시간의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연속이 아닙니다. 시간은 시작(알파)과 끝(오메가)이 있지만, 영원이란 그 본질부터가 다릅니다. 본질상 시간의 무한한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초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시간과 영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기 때문에 영원을 시간의 연속으로 보고 구속을 논하다가 결국 구원사학파(Heilgeschichte School)로 낙인찍혔습니다. 영원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생명”(life)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시간”(timelessness)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αἰών, 아이온)이란 시간을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것,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생명”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어원학적으로 “태초”는 시간의 시작, 시간의 시작점이지, 영원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시간은 본질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은 인간에게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영원은 하나님에게 관련된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전 3:1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시간의 존재인 인간의 탈을 벗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부활의 몸”이 되어야만 합니다.

2. 신학적 접근 (Theological Approach)

(1) 신학적으로 “태초”는 창세기나 요한복음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시간의 시작점인 것과 같이 요한복음에서의 “태초”도 시간의 시작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화육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화육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던 예수님의 근본을 설명하기 위하여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ent Christ)라는 의미에서 로고스(λογός)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적 존재에, 그리고 레이마(ῥῆμα, rJhvmato" Cristou)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존재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현재적 실존뿐만 아니라, 시간 전, 즉 창세전에 선재하신 영원 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요한의 “태초”에 대한 목표(goal)와 접근방법(the method of approach)이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주)에, 요한은 구속(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물론, 출발점은 동일합니다.
곧 그 출발점이 “태초”인데, 이 태초의 의미는 모세(창세기)에게 있어서나 요한(요한복음)에게 있어서 다른 지점이 아니라 동일한 지점으로서의 출발점(starting point)으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3) 그러나 그 목표(goal)에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요한은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출발점(starting point)에서 모세는 “천지창조”를 논하고, 요한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논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4) 좀 더 신학적 논리로 말하자면, 모세는 “태초”에 관하여, 창조론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요한은 구속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의미로서의 출발점인 “태초”를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모세는 그 지점(태초)에서 천지창조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진행하여 “창조역사”를 말하고 있고, 요한은 그 지점(태초)에서 시작하여, 영원 전에도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유추하여 그 분이 바로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여 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구속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태초로부터 영원 전에도 계시고, 육신이 되어 현재 우리 가운데에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5) 다시 말하면, 모세는 “태초”가 아닌 영원의 세계에 스스로 계신 분(I AM THAT I AM, 출 3:14)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yhila)께서 영원, 즉 창세전에 신의 회의(Divine Council)에서 내적교통(intra-communication)을 통하여,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컨셉(concept)을 의논하시고, 이 프로젝트(project)를 가지고 창조를 시작하신 시점이 바로 “태초”인데, 이 태초마저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속한 것입니다. 이 “태초”가 창조세계와 구속세계의 출발점이 됩니다.

요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시점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 비로소 계셨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계셨다”(ἦν)는 단어는 미완료형(imperfect)의 부정과거로, 자존의 영구성, 영원성을 나타내는 말로, 영원 전뿐만 아니라, 그때로부터, 태초라는 시간의 시점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태초가 창조되기 전에서부터 계신 분으로, 창조의 시점인 “태초” 바로 그 때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존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계시론적 차원에서 개진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전제하고 있는 말씀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계시론적 차원에서 언급하는데, 이것이 성경계시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그의 나타내심, 즉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에서 다루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태초”라는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운동이 시작되었고, 구속운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서의 “하나님의 시간” (God's time)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시점, 즉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태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출발점이 되는데,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이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만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구속사건의 근원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구속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과 그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이 하나님의 창조운동과 구속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며,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본질(근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빌 2:6).

(6) 다음으로 요한일서의 태초도 역시 동일한 “창조의 시점”으로 생명의 말씀의 현존하신 시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로 계신 분으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자이신 그리스도(계 1: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요 1:1~2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는데, 말씀이 계신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하셨고, 그 때가 곧 “태초”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창세전 영원히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셔서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시점이 곧 창세기의 태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재하신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신 그 시점이 태초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요 1:3).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일서 1장 1절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 말씀은 창세전에 있던 생명의 말씀(선재하신 그리스도)이 창조 시, 즉 태초부터(창조하신 그리스도) 계셨고, 재창조시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성육하신 그리스도)로 이 모두가 동일하신 그리스도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의 그리스도(계 1:4, 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여기서 특히 창조 시인 태초부터, 즉 역사 속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실,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ing Christ)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하셔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시고 몸소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Conclusion)

1. 창세기의 “태초"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 역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 자체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태초에”(έν ajrch)이거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pro; to;n kovsmon) 말씀이 계셨다거나 “창세전에”(pro; to;n kovsmon)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는 창조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태초에”(έν ajrch)와 “태초부터”(ajp! ajrch'")라고 언급한 것입니다.(cf. 요 17:5, 24; 엡 1:4; 마 13:35, 24:21, 25:34; 눅 11:50; 요 9:32; 롬 1:20; 엡 1:4; 벧전 1:20; 계 13:8).

2. 창세기에서 모세는 “태초”라는 시점에서 천지창조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같은 “태초”라는 시점에서 삼위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을 바라보며,
그 근본으로부터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요한일서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우리가 처음부터(구약과 신약시대) “들은 바요,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해서 성육하신 성자의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창조론에, 요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원론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같은 시점인 “태초”이지만, 모세는 그 태초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요한은 그 태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세계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모세는 태초에서 창조세계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은 태초에서 말씀(λογός)이신 하나님(!yhila)으로 선재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성육하신 구속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방향, 즉 양면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전문용어로 “절대성의 태초”(Absolute Beginning)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태초와 요한의 태초는 동일한 것으로 전개방향과 목표가 다를 뿐입니다.

4. 결론적으로, 모세가 사용한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이 사용한 요한복음의 태초는 같은 시점으로 “시간의 시작”(the beginning of time)입니다.
단지 그들이 의도하고 있는 목표(goal)와 전개하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모세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요한의 목표의 초점은 구속(redemption/salvation)에 있기 때문에, 접근방법과 진행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태초에 관한 도표해설

<태초>

[창세기]

(영원) 창세전 .................................... ⇢ 창조 .......................⇢ 창세후 역사 (종말)
창세전에 계신 하나님이 ................ ⇢ 태초에 창세에 계셔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종말)

[요한복음]

(영원) 창세전 ⇠그리스도(선재) .................... ⇢ 구속 그리스도(화육) ⇢ 예수 ............ ⇢ (종말)
창세전에 계신 그리스도가 ............... ⇢ 태초에
(창세에)도 계심 창세전 영원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 ⇢ 말씀이 계속해서 존재해 오시며 바로
계시니라 창세, 즉 태초에 계셨다는 뜻
(선재의 X가 창조 시에도 계심)
......................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
계셨으니 (창세전에) 께서
................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
(요 1:1)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1:14) (성육신) (신약시대)

[요한일서]

(영원) 창세전 ⇠ ................말씀/그리스도 구속 그리스도(화육)⇢ 예수 ⇢............ (종말)
창세전의 생명의 말씀 ............... ⇢ 태초부터
창세부터 ...........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성육하신 그리스도)


요한복음의 [태초에]와 창세기의 [태초에]

1. 요한복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가 잘 요약되고 정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기록의 목적대로(20:31)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고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 12:8)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분명한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2.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목적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떤 구절에서도 믿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란 공통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 다.
그래서 이 복음서는 먼저 육신으로 오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선포부터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선포해야 할까요?
그것은 당시의 영지주의가 신앙과 신학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영적인 탁월한 인간과 일시적으로 결합해서 있다가 십자가 사건 전에 떠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가르칠 때에도 직접 반기를 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심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여 쓴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면서 요한복음에 특별한 강조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I AM)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에고 에이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라고 강조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요 하나님이심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길, 진리, 양의 문, 선 한목자, 부활, 영원 생명 되심을 믿고 의지합시다.

3. 이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서 요한복음은 일곱 가지 표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나 혼인잔치,
둘째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셋째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넷째는 오병이어의 이적,
다섯째는 물위로 걸으 심,
여섯째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고치심,
일곱째는 죽은 나사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적을 행하신 다음에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무슨 때일까요?
물론 십자가의 죽으심의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의 때를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 끝에 "때가 이르지 않았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요한복음에서 일곱 가지 표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으로 흘러가 끝나고 있습니다.
곧 일곱 가지 표적이 가나의 잔치 기쁨으 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전제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나의 잔치는 우리에게 천국잔치의 모습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설명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7가지 표적의 ‘7’이란 숫자가 바로 태초 곧 천지창조와 비슷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부분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시작하면서, 그 의미를 표적에 담아 하나님의 재창조사건을 전개하고 있는 듯 합니다. 곧 시작인 천지창조의 완성과 마침인 새 창조의 완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되어진다는 신학적인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요한복음의 시작인 [태초에]와 창세기 1장의 창조와의 연관성을 유추해 봅시다.

창세기(브레쉬트)와 요한복음(아르케)과 요한일서(아르케)는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어쩌면 요한은 창세기를 떠올리면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새로운 창세기를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사건을 창세기의 태초와 연관을 시키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의 처음 창조의 구조와 동일한 면을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의 “태초에” 라는 어귀를 연구하기 위해 창세기에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곧 창세기는 요한복음의 진리를 그림자(상징)로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뿐인 죄인의 마음에 오셔서 흑암을 밝히시고 공허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구속사(redemptive history)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공허의 세상에 성령으로 운행하시면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할 때 흑암을 신학적으로 풀어낸다면 무엇을 상징할 수 있겠습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장면은 성령을 보증으로 세우시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새 창조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르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과 창세기를 이렇게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태초의 첫째 날

하나님께서 태초 곧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창 1:3-5).

(1) 그 빛과 또 다른 빛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빛은 발광체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여기서 발광체는 태양입니다.
그래야 빛이 세워지겠지요.
그런데 태양은 몇째 날에 만들었습니까?
넷째 날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첫째 날 만들어진 빛의 발광체가 무엇입니까?
이 빛(히, 오르)은 구체적인 발광체 현상보다는 에너지원으로서 능력이란 말로도 쓰입니다.
“빛이 있으라(히, 하야)”는 말에서 “있으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이름에 쓰인 단어입니다.
곧 “빛이 있으라(히, 오르 하야)”는 명령 자체에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의 빛은 참 광채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만물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합니다(Augustine). 

시편 36편 9절에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할 때, ‘광명(빛)’이 두 번 나오는데(히, 오르 오르) 먼저 나오는 빛은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거기서 흘러 나와 우리의 생명이 되는 또 하나의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과 만물을 창조하고 존재하게 하는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채소가 이미 자라고 있습니다.
식물이 넷째 날이 아니라 셋째 날에 자라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태양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야 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은 감추어진 그 빛, 곧 그 근본적인 빛인 그 생명에 의해 자란 것입니다.
태양의 창조이전에 생물의 등장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 장의 빛의 창조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드러 내고 있습니다. 

밤에 속한 자는 영원한 어두움, 빛에 속한 자에게는 영원한 나라에 들이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신학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을 밤이라고 하고, 빛을 낮이라고 했습니다.
낮은 성경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밤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해같이 빛나는 천국이 있고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밤을 상징적으로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과 다른 성경에서도 이것을 극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2) 요한복음은 빛과 생명을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곳에 어둠이 공존하게 하셨지만 그 어두움을 몰아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말씀 하며, 5절에서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이기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시에 창조한 빛은 창조의 목적에서 볼 때, 완전한 빛이지만, 요한복음의 빛과 견주어 볼 때, 참 빛은 아닙니다. 참 빛을 위해 먼저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참 빛의 힌트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빛이 실체이신 빛인데, 천지창조의 때에는 감취어진 빛이며, 그 실체의 빛이 왔다는 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알았을까요?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완성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3) 창세기는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 창세기의 창조가 암시하는 새 창조의 완성은 요한 계시록 22장 5절에 등장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그가 누구일까요?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태양 빛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만 진정한 생명이 있고 그 빛에 거하는 자, 곧 진리 안에 사는 자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빛이 있었으나 어둠이 공존했다는 것을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완전한 참 빛이 등장하는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장 9절) 라고 말씀하듯이 그 참 빛이 오셔서 어떻게 세상에 비추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4) 첫째 날 세례 요한이 와서 그렇게 말하고 증거합니다.

1장 7절과 8절에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 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이 빛이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셔서 빛이 있었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태초의 둘째 날

(1) 그때에 물이 궁창 위와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이 모세의 둘째 책 인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택한 받은 사람만 살아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10:1)에서는 물과 바다에 대해, 그것을 ‘세례’라고 해석합니다. 선민들은 구름과 바다에서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둘째 날에 궁창 위의 물(구름)과 궁 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모두 심판을 받아 죽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만 올라오는 것이 세례입니다. 과거의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동시에 죄의 진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심판사건이 있었습니다(창6-7장). 그 심판 이후 이제는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언약하셨습니 다. 이 언약이 어떤 언약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부어 다 심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 들어있는 자를 살리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실례가 바로 노아 방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고전10:2).

 

홍해사건과 노아 방주사건을 종합한 것을 요한복음 1장 39 절 이하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지만, 죄인만 받는 세례를 직접 받으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죄인과 연합하시는 사건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지만,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죄인들을 대표하고, 마치 노아시대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모든 물에 사람들이 죽어야 하듯이, 그렇게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2) 그래서 사도요한은 일부러 시간을 표현하면서 말합니다. 1장 29-30절에 “이틀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곧 창조의 둘째 날이란 뉘앙스를 갖고 말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바로 둘째 날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3) 세례는 죽으심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너희의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질문합니다(막 10:38).
이는 예수님 자신의 비참한 죽으심을 미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의 궁창에 의해 죽으심으로 궁창을 찢으셔서 그 모든 죽음을 담당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막는 두꺼운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이상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래서 예수께서 창세기의 둘째 날 궁창 위와 아래를 창조하셨는데, 요한복음의 둘째 날에는 그 궁창 위와 아래 물의 죽음의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둘째 날에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것을 암시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 둘째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뉘앙스를 담고서 “태초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의 셋째 날

(1) 창세기의 셋째 날과 다른 성경의 표현을 찾아봅시다. 셋째 날에 물과 뭍이 나뉘어 육지와 바다가 창조되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창조 되었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면 요한이 쓴 계시록에서 바다는 악을 상징하며 나중에 바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뭍(육지)은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이란 표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지음 받은 하늘과 바다가 동일하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 21절에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큰 물고기(히, 타닌)는 나중에 뱀, 혹은 바다 괴물과 비슷한 단어로 쓰입니다.

 

이사야 27장 1절에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날에 날랜 뱀(타닌) 리워야단을 벌하시고 바다의 용(타닌)을 죽이십니다. 욥기 26장 12절에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또 이사야 51장 9절에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타닌)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창세기 1장 21절은 고래나 물고기를 의미할 수 있지 만, 그러나 구속사 안에서의 바다라는 관점에서는 용이란 해석도 가능합니다. 바다에 큰 고기, ‘타닌’을 넣어두심으로 앞으로 일어날 다른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바다는 주로 ‘어둠’, ‘죄악’, ‘더러움’(계시록의 바다의 더 러운 짐승)을 상징하고 뭍(땅)은 생명있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생명 얻습니까?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봄(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29절의 [이튿 날]은 2일째이고, 1장 31절에 [또 이튿날]에는 3일째를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3일째처럼, 주님의 3일째 사건이 무엇입니까? 1장 35-36절에 “또 이튿날 요 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곧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세상에 어린 양이 오십니다. 구약의 제사 드리던 양이 아니라, 진정한 어린 양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복음의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 38절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라고 말합니다. ‘너희들은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보아야 정상인데 무엇을 구하느냐고 보신 것 입니다. 주님은 두 제자의 마음을 간파하시고 ‘누구를 좇느냐’ 보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왜요? 제자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배우는 선생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1장 3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에 함께 거하니 때가 열시쯤 되었더라.”라고 말씀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시간에 그들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순간을 강조할 때 시간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능력으로 복음이 깨달아지게 되는 시간은 예수께서 “와보라!” 하는 그 시간이었습 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니 그들의 무지와 죄악이 새생명의 변화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1장 40절에 안드레가 형 베드로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셋째 날입니다.

 

(3)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의 모든 혼돈을 질서로 채우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3일째까지 창조하셨지만, 빈 공간(공허함)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빈 공간을 채우십니다. 그래서 넷째 날은 첫째 날의 공간을 채우십니다. 첫째 날에 창조하신 빛과 어두움의 공간에, 넷째 날에 일월성신을 만드셔서 그 공간을 채워 넣으십니다. 또한 둘째 날의 하늘 궁창과 그 공허에 대해, 다섯째 날에 각각 생물, 새, 짐승을 채우십니다. 셋째 날 창조하신 육지와 바다와 식물의 공간에는 하늘과 땅의 짐승의 종류대로 온 땅의 공간을 채우신 후에, 마침내 모든 복을 주실 대상으로 사람을 만들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태초의 넷째 날

(1) 창세기의 넷째 날은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들을 궁창에 채우십니다(창1:14-19절). 빛들을 궁창에 채우신 것입니다. 영적 의미를 찾는다면,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비추게 하시듯,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부르셔서 이 빈 공간을 채우고 확장하는 순종의 삶을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요한복음의 넷째 날의 일은 무엇입니까? 안드레가 베드로를 베드로가 빌립을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주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새 생명의 주님이신 메시아를 만난 자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빛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넷째 날은 창세기에서 해와 달과 별을 채우듯이 생명의 주님이 증거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태초의 다섯째 날

창세기의 다섯째 날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초의 복으로 생육과 번성과 충만에 대한 말씀입니다(창 1:22-23) 이처럼 요한복음의 복도 아들의 생명으로 인한 영혼 구원이 더욱 번성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전도의 삶을 통하여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사람 낚 는 어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참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다섯째 날의 복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육과 번성과 충만의 복을 허락하셨다면, 요한복음에서의 복은 아들의 생명으로 인한 영혼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 다. 영원구원에서의 축복도 창세기에서처럼 번성과 충만과 생육의 축복이 넘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증거하는 생육과 정복과 충만의 복은 각자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이 확실하고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곳에 반드시 생명의 확장과 번성과 충만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태초의 여섯째 날

(1) 창세기의 여섯째 날에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과 가축과 기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자 기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 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1:26-31). 사람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충만의 축복에 더하여 창조하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복을 주셨고 또한 식물도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것들을 식물로 함께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1:31)

 

(2) 요한복음의 여섯째 날은 복음 증거로 인한 영혼구원으로 예수께서 베푸는 세례를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복음증거로 인한 영혼 구원의 실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베푸는 세례에 동참하심으로 인하여 세례요한은 이러한 광경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했 고, 또한 이러한 사실을 신부를 취하는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요 3:29). 그리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세례요한) 쇠하여야 하리라( 요3:30)”라고 말합니다. 이에 앞서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은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 회복(시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일곱째 날

(1) 하나님께서 태초의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사 안식하셨습니다(창 2:3)

이 안식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는 창조와 연관되어 말씀하지만, 신명기에서는 구원과 연관되어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 하셨음이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2) 마태복음에서는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오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안식이지만(마 11:28).
요한복음에서 안식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며, 거룩함 속에 생명으로 역사하는 안식입니다.
안식의 개념은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심으로 내 속사람이 안식을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촉구하십니다(요 15:4)”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 속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심령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에 속한 안식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베데스다의 38 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심으로 안식일에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안식의 새로운 의미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9장에서도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시면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말씀하시고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9:5).
안식일이 우리에게 이런 진정한 자유를 준다면,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요 8:31-32).

(3) 창세기와 요한복음에서 각각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창세기 2장 1절은 천지 창조의 역사의 이루심을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19장 30절은 십자가에서 구원의 사역이 다 이루어진 것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천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1)와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 이루시기 위하여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1:18) 말씀,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1:3)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14).

창세기의 창조는 구속사 안에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여지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첫째 날은 밤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여지를 남겨 놓으며,
둘째 날은 저주의 물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가는 하늘을 막는 휘장이 찢어지는 여지를 남겨 놓으며,
셋째 날에 뭍이 드러나고 있습니 다.
이것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어떻게 향하는지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고 행하심으로 이루 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나와 내 영적 생활에 실제적 사건을 창조적 사건에서 다루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내 안에 천지 창조의 실제 적 사건을 이루시려고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모든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을 암시합니다.

창조의 사건은 실제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의 첫 순서입니다.
이런 창조의 사건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실제적이며 영적인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속사의 관점을 가지고 요한복음 첫 부분부터 가장 깊은 진리를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거하는 삶을 삽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한 것이 믿어지는 것이 하나님 백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 이전에도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타락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 영원한 나라에 살게 하시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이를 믿고 그 영생을 얻되 풍성한 생명으로 살게 하시려고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요한복음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만남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마무리 합니다(1:1, 15:39)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물론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으로 마칩니다(16:19-20).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1:1, 3:11, 5:7, 15:39) 휘우 데우

바티칸 사본과 같은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으나, 시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런 사본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가 기재되어야만 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많은 사본들이 이를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2. 헬라어 원문에서 볼 때 바로 앞에 나오는 두 단어 곧 '예수 그리스도'(예수 크리스투)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시내 사본 필사자가 본의 아니게 본 문구를 빠뜨리고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복음의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1:11; 3:11; 5:7; 9:7; 12:6; 13:32; 14:36, 61; 15:39).

테일러(Taylor)는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기를 '분명히 이 칭호는 마가의 기독론에서 가장 근본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p. 120).
실로 이 칭호는 본서의 서두마지막 부분(15:39)을 장식하는 대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마가가 구약 신학적 배경과 당시 로마 문화적 배경을 절묘하게 융합(融合)시킨 표현으로서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 용어는, 보통 명사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천사적 존재(창 6:1-4; 욥 1:6; 2:1) 또는 선택된 백성 전체(신 14:1; 렘 3:19; 호 1:10; 11:1)를 가리켰으나,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유일한 메시야의 칭호로서 예수께서 섬삼위 중 제 2위 되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삼하 7:14; 시 2:7).

한편 로마인들은 위대한 인간이나 영웅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아직 유일신 메시야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일단 무리 없이 예수를 소개할 수 있는 이중적 용어였다.

예수 그리스도 / 에수 크리스투 

본문에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격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Lenski)

오히려 주격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수신자들인 로마 성도들이 익히 알고 있고 또 체험했던 그 복음의 근원이 바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건들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복음서 곳곳에는 그들이 복음의 역사적 근원에 대해 무심(無心)했다는 사실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여하튼 위의 사실의 결론으로 본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 '예수아' 등의 헬라식 이름으로서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마 1:1).
이 이름은 예수의 사명의 요체(要諦)를 밝히며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으로서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것이다(눅 1:31).

'그리스도'(크리스토스)란 '기름붓다'는 뜻의 동사 '크리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쉬아흐'에서 '메시야'가 연유되었다(요 4:25).
이는 분명 직접적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성격을 지닌 그분의 거룩한 직임(職任)을 강조한 것이며, 통상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성 및 그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예수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마 1:1).

복음
'복음'(유앙겔리온)이란 원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의미했으나,
점차 '좋은 소식' 그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특히 신약에서는 이 말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가는 바로 이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문학 양식, 즉 '복음'이란 유형을 창안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가 쓴 복음서의 주 내용이 '케뤼그마'(선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가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라는 바로 그 복음을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a Gospel)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Moul,Gospel of Mark,p.8).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및 부활의 사실은 복음의 근본이요, '시작'이 되며, 마가의 이 복된 메시지 속에 사도적인 선교가 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Donald W.Burdick).

시작이라
헬라어 원문에서는 원래 이 말이 마가복음 제일 첫 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 했다시피 마가는 70인역(LXX)의 서론적 문구인 창 1:1의 '태초에'(엔 아르케)를 염두에 두고 '시작' 곧 '아르케'란 말을 본서 기록의 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새 역사의 시작 곧 복음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로 삼고 있다.

특히 여기 '시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케'에는 관사가 없으나 영역(英譯) 성경에는 관사 'the'(즉 the beginning)가 첨가되어 있어 이 '시작'이란 말에 대한 의미의 비중을 한층 부각시켜 주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의 '시작'이라는 말은 창 1:1과 요 1:1의 '태초에'란 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우주를 창조한 바로 그분이 인간 구원의 역사도 수행해 나가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의 시작에 동참한 예수께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를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즉 '복음'이란 말과 이 '시작'이라는 말을 연결시킨 점에서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특별한 의미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 곧 단순한 시작의 전개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신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중(暗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5절.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자복하고(1843). 에코모로게오(ĕxŏmŏlŏgĕō)  ἐξομολογέω

1. 약속하다,   2. 고백하다,  3. 인정하다
발음 / 에코모로게오(ĕxŏmŏlŏgĕō)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ξωμολόγησα, 미래중간태 ἐξομολογήσομαι, 1537과 36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복하다(마 3:6, 막 1:5, 행 19:18), 감사하다(마 11:25, 눅 10:21, 롬 15:9), 허락하다(눅  22:6), 자백하다(롬 14:11), 시인하다(빌 2:11, 계 3:5), 고백하다(약 5:16)
신약 성경 / 10회 사용

* 1537. 에크(ĕk)  ἐκ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태 2:15,  3. 요한 15:19
발음 / 에크(ĕk)
관련 성경 /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 미암아, ~에게서 온(마 1:18)
신약 성경 / 916회 사용



󰃨 기록되었으되(*, 게그랖타이 가르) - 이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혼합형으로서 사 45:23과 49:18을 결합시킨 것이다. 바울은 기억에 의존하여 두 구절을 무의식적으로 혼합 인용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인용했을 것이다(Dunn). 아무튼 어느 방법이든 간에 구약성경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기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인용문 역시 앞절(10절)에서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를 엄하게 책망하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상기시킨 교훈에 대해 구약성경으로 인증(認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Hendriksen).

󰃨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 조 에고, 레게이 퀴리오스) -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민 14:28;사 49:18;렘 22:24, 46;겔 5:11;14:16;16:48;17:16;18:3;20:13), 반드시 성취될 중차대한 진리를 선언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 3:3, 5, 11;5:19, 24,25)라는 규칙적인 관용구를 사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 사 45:23의 문자적 인용이다. 다만 '여소몰로게세타이'(*, '자백하리라')와 '파사 글롯사'(*, '모든 혀')이 두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이 예언의 말씀은(사 45:23) 여기서 구약성경의 원래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한 분이신 지고(至高)한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최후 심판시에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꿇고 인정할 것이다(사 45:21). 예컨대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행위는(10절)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심판의 영역을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 숭배의 올무에 빠지는 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21-25). 그리고 '자백하다'(*, 여소몰로게오)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70인역(LXX)에서 '인정하다', '자백하다', '찬양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15:9;마 11:25;눅 10:21;Dunn). 이는 모든 사람이 최후에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자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내용에 대해 모든 인류가 주께 찬양하며 경배하고 복종하게 됨을 나타낸다. 즉,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판단하는 이방인들의 회심(悔心)을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 행위인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자기들이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방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회심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의해서 선포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순종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아울러 사 45:23의 인용문이 빌 2:10, 11에서는 부활하시고 승귀(昇歸)하신 그리스도의 신분과 역할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백'을 말할 때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께 자백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통상적인 습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3670.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 

1. 약속하다,  2. 동의하다,  3. 고백하다.
발음 /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어원 / 미완료 ὡμολόγουν, 미래 ὁμολο- γήσω, 제1부정과거 ὡμολόγησα, 3674의 어간과 305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말하다(마 7:23, 요 9:22), 시인하다(마 10:32, 딛 1:16, 요일 4:2), 고백하다(행 24:14), 증언하다(딤전 6:12, 히 11:13, 13:15), 자백하다(요일 1:9), 드러나게 말하다(요 12:42), 약속하다(마 14:7)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3674. ὁμοῦ  
1. 함께,  2. 동시에
발음 / 호모우(hŏmŏu)
관련 성경 / 함께(요 4:36, 21:2), 같이(요 20:4)
신약 성경 / 4회 사용

* 3056.  λόγος, ου, ὁ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로고스(lŏgŏs)
어원 / 30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말(마 5:37, 눅 1:20, 행 2:22), 말씀(마 8:8, 막 4:15, 행 6:2, 11:19, 14:25, 살전 1:6), 소리(눅 3:4), 소문(눅 7:17, 행 11:22), 이야기(눅 24:17), 글(행 1:1), 언변(고전 1:5), 모양(골 2: 23), 일(행 15:6, 18:15, 19:40), 고발(행 19: 38), 전도(골 4:3), 결산(마 18:23, 25:19), 전파(막 1: 45), 말씀(막 2:2, 요2:22, 행 20:35), 고(벧전4 :5), 예언(벧후 1:19), 이유(마 5:32, 벧전 3:15)
신약 성경 / 330회 사용

* 3004. λέγω 

1. 말하다,  2. 글로 말하다,  3. 묻다
발음 / 레고(lĕgō)
관련 성경 / 칭하다(마 1:16, 눅 20:37), 말씀하다(마 2:15, 눅 11:45, 요 2:22), 이르다(마 5:18), 말하다(마 6:29, 12:38, 요 8:25), 대답하다(마 13: 51, 요 9:17), 논의하다(마 16:7), 여쭙다(마 19:7, 26:22, 막 1:30), 묻다(마 22:35, 막 8:29), 일컫다(행 15:17), 고발하다(롬 11:2), 고하다(막 9:5, 행 5:25). [명] 말(막 13:37, 14:58, 행 15: 24), 대답(롬 11:4)
신약 성경 / 2262회 사용

󰃨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는 복수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죄들'을 가리키며, '자백'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시 32:1-5; 잠 28:13, Stott). 한편 '시하시며'의 헬라어 '아페'(*)는 빛의 탕감이나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 등과 같은 의미이며 '깨끗하게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 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묘사는 사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며,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Stott, Smalley).

󰃨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를 자백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를 나타낸다. '미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설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약속하셨으며(렘 32:34; 미 7:19, 20)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신설한 분이다(시 89편; 롬 3:25; 고전 10:13; 딤후 2:13; 히 10:23; 11:11). 그러므로 미쁘신 당신의 성품대로 죄를 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카셔서 죄를 자백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한편 '의로우사'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스'(*)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Ross). (2) 혹자는 언약 혹은 약속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3) 혹자는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odd). (4) 혹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지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고백한 죄인들을 사죄하신다(Barker).






복음(福音,  유앙게리온. ĕuanggĕliŏn. εὐαγγέλιον)이란 기쁜 소식(good news)이란 뜻입니다.
전쟁 중에 있었던 두 나라 사이에서 가장 기쁜 소식은 전쟁에 이겼다는 승전보(勝戰譜)라고 합니다.

마라톤의 유래가 이러한 승전보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기원전 490년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전투에서 아테네의 밀리티아테스(Militiades)장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필립피데스(Philppides)가 넓은 벌판(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36.75Km를 달렸다고 합니다.
승전보의 기쁜 소식을 전한 후 필립피데스는 쓰러져 죽었으나 그를 기념하여 시작한 것이 마라톤의 기원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할 때에 그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복음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5절)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둘째는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7절)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셋째는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9-10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넷째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12절)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다섯째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17절)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섯째는 더러운 귀신을 내쫓는 것입니다(25-26절)

예수
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 믿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98. 복음(福音)(유앙게리온. ĕuanggĕ- liŏn)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1.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
2. τὸ εὐαγ- γέλιον
3. ὁ λόγος τοῦ εὐ.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신약 성경 / 76회 사용

* 2095. 유(ĕu) εὖ 
1. 잘,  2. 좋게,  3. εὖ ποιεῖν : 좋게 행하다
발음 / 유(ĕu)
관련 성경 / 잘, 좋게, 다행히(마 25:21, 눅 19:17, 행 15:29, 엡 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 32. 앙게로스(anggĕlŏs) ἄγγελος, ου, ὁ 
1. 사자,  2. 사람이 보낸 사신,  3. 하나님이 보낸 사자 : 메시아의 예고자
발음 / 앙게로스(anggĕlŏs)
어원 /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마 1:20, 행 5:19, 약 2:25), 천사(마 13:39, 히 1:4, 계 1:1)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도입 이야기) 마라톤의 유래

기원전 490년 그리스 마라톤 근처의 전쟁터에서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그리스의 승전보를 알리려 아테네까지 달려간 병사 페이디피데스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 바로 마라톤대회이다.
이 역사적인 달리기를 끝내고 페이디피데스는 쓰러져 죽었고 그가 달린 거리는 마라톤의 선례가 되었다.

1896년 그리스에서 올림픽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페이디피데스의 전설은 아테네의 마라톤교(橋)에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40km(24.85마일) 달리기로 부활되었다.

마라톤은 전통적으로 올림픽의 마지막 경기종목으로 자리잡았는데 처음 조직된 1896년 4월 10일의 올림픽에서 그리스인에게 마라톤은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첫 올림픽을 주최한 그리스는 그때까지 메달을 따지 못했으며 조국에 승리의 영광을 안겨줄 마지막 단 하나의 희망만 남아있었다.
마라톤교에는 25명의 주자들이 모였다.
운영관은 몇마디를 중얼거린 후 출발을 알리는 총을 쏘았고 레이스는 시작되었다.
"새단장을 한 고대 파나덴 스타디움의 골인지점에서 기다리는 관중의 흥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고 그리스의 사학자 퀘르세타니는 적고있다.

그리스 마루시마을의 집배원이자 군의장대 출신인 스피리돈 루이스(Spiridon Louis)가 2위그룹보다 7분빠른 기록으로 골인했다.
그의 기록은 2시간 58분 50초였다.
40km거리였으므로 마일당 7:11의 페이스로 달린 것이다.
경기가 모두 끝났을 때 9명의 주자가 골인했는데 그중 명이 그리스인이었다.
주최국은 열광했고 마라톤은 이렇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마라톤의 기원과 역사



기원전 490년 아테네 VS 페르시아

아테네 동북쪽에 위치한 들판에서 아테네의 밀리티아테스(Militiades)장군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필립피데스(Philppides)가 넓은 벌판(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달리기 시작하였다.
필립피데스의 달리기가 지금의 마라톤의 기원이다.


필립피데스가 실제 뛴 거리는 36.75Km 그렇다면 마라톤의 현재 거리는 어떻게 정해졌을까?
필립피데스가 40Km를 달린 걸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거리는 36.75 Km입니다.
그 후 1896년 아테네에서 근대올림픽 제1회 대회가 열렸을 때 프랑스의 언어학자 미셸 브레알(Michel Breal)이 이러한 이야기에서 착안, 올림픽종목에 마라톤을 넣자고 주장하여 육상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지의 형편에 따라 경주거리가 40 Km를 전후로 하여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왜 마가복음을 공부하는가?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죽음, 부활을 속도감 있게 서술하며, 대체로 구주의 권능 있는 행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행적 중 으뜸은 속죄이며, 마가는 오랫동안 약속되어 왔던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핵심 사명인 속죄를 강조했다.

누가 마가복음을 썼는가?

복음서의 저자는 마가(또한 요한 마가라고도 불림)이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 제자들에는 속해 있지 않았으나, 나중에 개종하여 사도 베드로의 조력자가 되었으며, 베드로에게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마가와 그의 모친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살았으며, 그들의 집은 일부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사도행전 12:12 )
마가는 첫 선교 여행을 떠나는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다.(사도행전 12:25; 13:4~6, 42~48 )
이후에 바울은 마가가 로마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기록했으며(골로새서 4:10; 빌레몬서 1:24 참조), 마가를 성역 “일에 유익[한]”(디모데후서 4:11) 동반자로 칭찬했다.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마가”(베드로전서 5:13)로 언급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시사했다.

마가복음은 언제, 어디에서 쓰였는가?

마가복음이 정확히 언제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마가는 주후 64년과 주후 70년 사이에 로마에서 이 복음서를 썼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사도 베드로가 주후 64년경에 순교당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구를 위해, 왜 쓰였는가?

마가복음에는 아람어 인용문의 번역본, 라틴어 표현, 유대인의 관습에 대한 설명 등이 자세히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주로 로마인과 그 외 이방 국가 출신의 사람들, 그리고 대부분 로마와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구성된 독자를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교회의 다수 회원들이 신앙의 시련을 극심하게 겪던 시기에 마가가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믿는 이들이 많다.

마가복음 중 삼분의 일은 구주께서 생애의 마지막 주 동안 전하신 가르침과 그 기간의 사건들을 다룬다.
마가는 수난을 겪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결국에는 악과 죄, 죽음을 이기셨음을 증거했다.
이 증거는 구주를 따르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박해나 시련, 또는 심지어 죽음에 처했을 때에도 구주를 따랐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실 것이며 그분이 하신 약속은 결국 성취될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 있게 견뎌 낼 수 있었다.

마가복음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마가복음은 갑작스럽고도 극적으로 전개되며, 사건들의 진행 속도를 빠르게 이어간다.
마가는 , 즉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여 빠른 속도와 행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마가복음의 내용 중 90퍼센트 이상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것이지만, 마가의 기록에는 종종 더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구주께서 보이신 연민과 그분의 주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더 깊이 느낄 수가 있다.(마가복음 9장 14~27절마태복음 17장 14~18절과 비교해 본다)

예를 들어, 마가는 구주께서 성역 초기에 갈릴리와 그 밖의 지역에서 널리 열렬한 환대를 받으셨다고 언급했다.(마가복음 1:32~33, 45; 2:2; 3:7~9; 4:1 참조)
마가는 또한 조심스럽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부정적인 반응도 기록했는데, 그들의 반대는 회의적인 생각에서부터(마가복음 2:6~7 참조)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는 음모에 이르기까지(마가복음 3:6 참조) 급속도로 커져 갔다.

마가복음에서 다룬 중요한 주제 중에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누가 그분의 신분을 이해했는지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마가복음 8:34) 하는 제자의 본분도 포함된다. 또한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마가복음 4:26~27 참조),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 먹은 사람을 고치신 일(마가복음 7:31~37 참조),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신 일(마가복음 8:22~26 참조)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개요

마가복음 1~4장
예수께서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서, 복음을 전하며 제자들을 부르고, 기적을 행하는 일을 시작하시다.
그분이 자신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자 비유로 가르치시다.

마가복음 5~7장
구주께서 계속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보이시다.
침례 요한이 죽임을 당한 후, 예수께서 5천 명 이상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다.
예수께서 거짓 전통에 반하는 가르침을 주시다.

마가복음 8~10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기적을 행하시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간증하다.
구주께서 자신이 고통과 죽음 및 부활을 겪게 된다고 세 차례 예언하시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겸손과 봉사에 관해 가르치시다.

마가복음 11~16장
구주께서는 생애의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다.


06-08-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장 / 복음(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福音)이란 복된 소리를 말합니다.
복된 소리는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넉넉하게 제공하는 것이지요.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아픈 부분을 치료할 수 있는 비법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먹을 것을 많이 제공해도 사람은 하루 세 끼를 계속 먹어야 합니다.
아픈 부위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부위가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의 질병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예수님일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럼 비복음적이라고 한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비복음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복음적인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거나 신자로서 그릇된 처신을 하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들을 행하는 신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권면하였습니다.

복음은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좁은 의미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 ‘복음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행하신 일과 그에 대한 죄인들의 올바른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의는 이해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장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의 복음”(갈 1:7; 빌 1:27)이라고 불렀습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명령은 예수님을 전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은 한 묶음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천사가 전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은 곧 그리스도의 탄생이었습니다(눅 2:11). 복음과 예수님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1:4).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나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동전의 안팎과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느냐고 물으면 복음의 정의에 따라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단순히 ‘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면 ‘예스’ 대답이 나오고, 복음의 정의를 ‘예수를 믿는 것+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면 ‘노’가 될 것입니다. 전자는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이라는 대답이고, 후자는 믿음+행위라야 구원이라는 대답입니다. 이 두 갈래의 엇갈린 주장들은 지금도 신학계와 교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복음의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의에 붙잡히지 말고 성경 본문 자체에서 해답을 얻는 것입니다. 정의는 신학자들이 내립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신학 체계를 새워놓고 그 틀 안에서 성경의 개념을 정의합니다. 문제는 신학자들에 따라 정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움도 주지만 혼란도 일으킵니다. 우리는 학자의 소명을 받지 않은 이상 그들처럼 전문적인 많은 연구를 한 후에 비로소 어떤 결론에 이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 성도의 입장에서 성경 본문 자체를 공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하나씩 깨달아 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 본문을 내 앞에 놓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깨닫도록 힘쓰십시오. 상식적인 방식이란 문장을 대할 때 문맥이나 단어의 뜻이나 혹은 역사적 배경이나 주제나 중심 교훈이나 저자의 의도나 관련 구절 등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참고 서적이나 쉽게 쓴 좋은 강해서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읽는 성경이 내게 가장 은혜로워야 합니다. 이제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어떻게 진술했는지를 살피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믿었기에 복음을 위해 목숨도 걸었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복음 선교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가 로마로 가려고 한 것도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복음을 그처럼 귀하게 여긴 까닭이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줍니다.

복음은 사람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국경과 인종과 문화와 신분과 성별과 나이가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입니다. 사도요한은 믿으면 곧 영생(구원)이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세상에 이처럼 공평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라고 하였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은혜 구원’이라고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믿음만 있으면 선한 행위가 없어도 천국 간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행은 타종교에서도 권장합니다. 물론 신자에게는 ‘복음에 합당한 삶’(빌 1:27)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첫 구원에 관한 한,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둘째,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믿지 않더라도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죄의 세상입니다. 죄인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날마다 온갖 죄악이 범람합니다. 죄의 역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복음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능력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십니다. 복음은 인간을 죄로부터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자신의 체험으로 압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작정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당시 로마는 거대한 제국의 수도였지만 오늘날의 대도시처럼 온갖 종류의 부패와 죄악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일으키는 매우 탁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죄를 떠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직접 간접으로 죄에 물들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이 세상을 벗어난다고 하여도 죄를 안고 떠납니다. 인간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우주선을 발사하는 플로리다의 Kennedy Space Center 지역에 삽니다. 집에서도 하늘로 치솟는 로켓을 자주 목격합니다. 그런데 지구의 궤도를 벗어났다 돌아오는 우주비행사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인으로 떠났다가 다시 죄인으로 돌아옵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아무리 발달했어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복음이라고 믿었습니다. 문화가 인간을 바꾸지 못합니다.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품고 로마로 향하였습니다. 우리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다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할 것입니다.

 

셋째, 불의한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불순종으로 타락했을 때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하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하나님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날마다 죽음을 안고 사는 불치병 환자와 같습니다. 인간은 날마다 자신의 관을 끌고 다닙니다. 그럼 살길이 없을까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마 19:27).

 

인간의 허무한 운명을 하나님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다 행하시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 곧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죄가 없는 완전한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 힘으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단 지은 죄는 용서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용서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시 51:4).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럼 그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모든 인간의 죄를 지고 대신 형벌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달렸던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치렀어야 할 죗값을 지불하시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제 주 예수를 자신의 대속주로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입혀집니다. 그 순간부터 에덴동산의 삶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과 교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가지셨던 원래의 선한 뜻이 성취되게 합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안식으로 연결되는 새 창조의 삶입니다.

 

넷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됩니다.

♠ 복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 3:1).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은 살고, 죄 없는 예수님은 죽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하나님의 의는 죄 없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십자가 사랑입니다.

 

♠ 복음은 예수님에게 인간의 죄를 씌워 죽게 하였듯이, 죄인에게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를 씌워 마치 죄인이 죄 없는 자로 여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롬 4:5)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인간의 가치로 보면 이것은 오히려 불의한 일입니다. 일한 것이 없는데도 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품삯을 지불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는 편은 하나님입니다. 아들을 희생시키고 죄인을 풀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기이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공의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는 차원의 사랑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가 나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나는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 덮여서 하나님의 눈에 전혀 죄가 없는 의로운 자로 보입니다. 이 일에 어떤 인간도 자신의 경건이나 선행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구원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엡 2:9; 고전 1:31).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롬 1:16, 표준새번역)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최근에 복음주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놓고서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우리가 복음을 죄인들이 회개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메시지로 이해하든, 아니면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하든, 어쨌든 그런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때로는 두 진영 간에 의견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에서는 상대 진영이 복음에 대해 “환원주의적임”을 지적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상대 진영이 복음을 희석시키며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간과하게 한다며 반격했다. 

나는 우리가 몇 가지 사항을 주의 깊게 고찰함으로써 이 같은 혼란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이들 두 진영이—복음이란 하나님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다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들을 “A”라 부르자)과 복음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을 새롭게 하며 개조하실 거라고 하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들을 “B”라 부르자)이- 각기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본다. 달리 말해서, 나는 A와 B가 같은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두 진영 모두가 자신들이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의를 기울여 보면,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르되 동일하게 성경적인 물음들에 대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두 가지 물음들은 이러하다. 

  1. 복음이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2. 복음이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기독교의 좋은 소식 전체는 무엇인가?

A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은 “사람이 구원 얻기 위해 믿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이해하며, 죄인들을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회개하고 믿으라는 부르심 등에 대해 말함으로써 이에 대답한다.

B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그들은 “기독교의 좋은 소식 전체는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이해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말함으로써 이에 대답한다.

이들 양측이 왜 서로 긴장상태에 있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새 창조에 대해 말함으로써 물음 (1)에 대답하면, A는 그 대답이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중심에서 밀쳐내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성경 속에서 어떤 사람이 “내가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면, 그 대답은 장차 오는 새 창조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심지어 종종) 성경은 새 창조라는 측면에서 ‘복음’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죄인들을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말함으로써 물음 (2)에 대답하는 것은,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복음이 아니라고(단지 연관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편협하다. 그것은 몸의 부활,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이 성경에서 제시하는 기독교의 “좋은 소식”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들 두 가지 물음 중의 어느 것도 그릇되지 않음을, 그리고 이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더 성경적이지 않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이들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묻고 대답한다. 여기서 나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물음들 모두가 적법하며 성경적인 이유를 성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성경은 ‘복음’이라는 말을 두 가지 서로 다른, 그러나 밀접하게 연관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매우 넓은 의미로, 즉 죄 사함은 물론이고 죄 사함으로 인해 비롯되는 다른 모든 것들을(하나님 나라의 확립, 새 하늘과 새 땅 등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취하시려는 모든 약속들)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가 하면, ‘복음’을 매우 좁은 의미로,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그분의 부활을 통한 죄 사함을 특별히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더 넓은 의미의 약속들은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다음은 성경에서 ‘복음’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로 사용한 사례들이다.

1. 사도행전 10장 36-43절: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을 특별히 가리킨다.

2. 로마서 1장 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믿음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복음을 규정한다. 여기서 바울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죄 사함(칭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로마서 전반에 걸쳐 분명해진다. 로마서에서 그의 초점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나라의 일원이 되는가에 맞춰져 있으며, 바울은 그것을 ‘복음’이라 부른다.

3. 고린도전서 1장 17-18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이 보내심을 받아 전하는 복음은 “십자가의 도”이다.

4. 고린도전서 15장 1-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마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서 거듭하여 나타나신 것이 ‘복음’의 일부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야고보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을 말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언급들은 부활이 실제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임을 확언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 4장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는 마태복음 기사에서 ‘복음’이라는 말이 처음 언급된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이 용어의 의미와 관련한 윤곽을 엿볼 수 있다. 예수께서 전하신 “천국 복음”의 내용을 보완하려면 “천국”을 처음 언급한 17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거기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설교하셨다.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 복음은 a) 천국이 다가왔고 b) 회개하는 자들이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메시지였다.

2. 마가복음 1장 14-15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니라.”

 첫 구절을 제외하면, 마가복음 기사에서 ‘복음’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사용된다. 예수께서 선언하신 “하나님의 복음”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다.

하나님의 복음은 a)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고 b)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메시지이다.

3.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이것은 예수께서 공적 사역의 출발점으로 삼으신 구약성경 구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서 ‘복음'(복된 소식)이라는 말은 이사야 61장에서 사용된 것처럼 하나님 나라 통치의 온건한 확립을 가리킨다.

4. 사도행전 13장 32-33절: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38절에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이 사람”을 통해서 얻는 죄 사함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32-33절에서 ‘복음’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루게 하신 약속이다. 조상들에게 주셨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은 죄 사함을 포함하되 이것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신약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복음’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보다 좁은 의미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넓게는 마태복음 4장, 마가복음 1장, 누가복음 4장, 사도행전 13장에서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을 가리킨다. 죄 사함은 물론이고, 부활, 하나님과의 화목과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 성화, 영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 등에 대한 약속을 포함한다. 이 경우에, ‘복음’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 보장되는 하나님의 복합적인 약속들 전체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 넓은 의미에서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부를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는, 사도행전 10장, 로마서 전체, 고린도전서 1장과 15장에서 보듯이, ‘복음’이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그분의 부활 그리고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라고 하는 초청을 특별히 가리킨다. 우리는 이 좁은 의미에서의 복음을 십자가의 복음이라 부를 수 있다. 

이제 다른 두 가지 사실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첫째, ‘복음’이라는 말의 넓은 의미는 좁은 의미를 당연히 포함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사례를 보라.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선언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선언하시고, 거기 들어가는 방편도 선언하신다. 자세히 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만 선언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복음과 비복음 간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하나님 나라와 새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되, 거기에 들어가는 방법, 즉 회개,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 받는 것 등에 대해서는 선언하지 않으면, 이것은 비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새 창조에 속하게 될 소망을 전혀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 복음은 단지 천국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천국 선언과 아울러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거기 들어갈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 신약성경이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에 관한 좁은 의미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만을 전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전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은 옳지 않다. 바울과 베드로 둘 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을 통한 죄 사함에 대해 전했다면 ‘복음’을 전했음을 기꺼이 인정했을 것이다. 

만일 신약성경이 ‘복음’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둘 다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이들 둘 간의-천국 복음과 십자가 복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 다음 물음이며, 일단 우리가 그 물음에 답하면, 몇 가지 참으로 중요한 물음들에 대한 더 분명한 답을 찾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러면 천국 복음과 십자가 복음은 어떻게 연결될까? 천국 복음이 필수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십자가 복음이 단지 천국 복음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전자는 후자의 핵심인가, 아니면 주변적인 것인가, 그 중심인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가? 신약성경 기자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죄 사함이라는 특정한 약속에 ‘복음’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반면에 넓은 의미의 복음에 포함되는 다른 약속들에는 ‘복음’이라는 말을 적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서로 화목할 수 있게 된 것이 내 복음이다”라는 바울의 말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십자가 복음이 천국 복음의 단순한 일부가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십자가 복음은 천국 복음의 문이며 원천이며 씨앗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읽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죄 사함을 받지 않고서는 천국의 각종 축복들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 분명한 메시지임을 곧바로 알게 된다. 그것은 다른 모든 샘들의 원천이다.

성경 기자들이 전체 패키지(용서, 칭의, 부활, 새 창조 등)를 ‘복음’이라 부르면서 그 원천적인 메시지도 ‘복음’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넓은 의미의 복음의 축복들이 좁은 의미의 축복들(속죄, 용서, 믿음, 회개)을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전자가 후자를 통해 반드시 얻어지기 때문에 신약성경 기자들이 문/씨앗/원천이 되는 약속을 ‘복음’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 적절하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그 원천 약속을 ‘복음’이라 부르고 넓은 의미의 다른 개별적 축복들을 ‘복음’이라 부르지 않는 것도 너무나 적절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 간의 화해를 ‘복음’이라 부르지 않는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도 ‘복음’이라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속죄를 통한 용서를 ‘복음’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원천이며 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있다. 

첫째, ‘복음’이 천국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복음은 천국 선언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천국과 아울러 거기 들어가는 방법까지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 십자가 복음이 복음이 아니라거나 복음보다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음이 “구원받기 위해 믿어야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것인 한, 십자가 복음은 복음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바울과 베드로도 그렇게 말한다.¹⁾ 

셋째, 천국 복음이 복음의 덤 또는 복음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물음이 “기독교의 좋은 소식 전체가 무엇인가?”라는 것인 한, 천국 복음은 복음의 덤이 아니라 복음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바울과 베드로도 그렇게 말한다. 

넷째, 어떤 사람이 단지 선한 일을 하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른다”고 해서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려면, 천국의 축복에 참여하는 사람이려면, 먼저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이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번연은 크리스천이 천상의 도성으로 가는 길에 만난 형식주의자와 위선자의 특성에 대해 말한다. 잠시 대화를 나눈 후에, 크리스천은 그들이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벽을 넘어 길로 나섰음을 알게 된다. 결론은, 현재 이들이 아무리 잘 나아가더라도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천국 삶을 산다고 자처하는 자라도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한 믿음으로 예수께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이 외관상 예수님처럼 살 수도 있지만, 속죄와 믿음과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벽을 넘었을 뿐이다. 

다섯째, 비그리스도인들이 “천국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들 간의 화해나 정의를 위해 일하는 비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천국 사역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왕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C.S. 루이스가 틀렸다. 타쉬(Tash)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고서 아슬란이 행복해할 거라고 기대할 순 없다. 

여섯째, 그리스도인 개인이 행하는 것이든 교회가 행하는 것이든, 모든 선량한 사역의 궁극적 목표는 세상 사람들에게 좁은 문을 가리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면 강력한 선교 동기를 얻게 되며 세상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게 된다. 예컨대,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발소를 쇄신할 경우에, 당신은 이발소 주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아름다움과 질서와 평화와 같은 것들에 관심을 지니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고 내가 믿는 바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이 세상을 재창조하시고 페인트가 벗겨지거나 나무들이 죽지 않는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장님은 거기 속하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사장님이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 그러합니다.” 그런 다음에 당신은 그에게 십자가 복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발소를 쇄신하고서 다가오는 천국을 선언한다면, 복음 선언에 미치지 못한다. 천국 복음은 천국과 거기 들어가는 방법을 함께 선언하는 것이다. 

일곱째, 앞에서 설명했듯이, 소위 이머징 교회들은, 그들의 복음이 놀라운 것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관한 진정 놀라운 것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예수님이 왕이시며 사랑과 긍휼의 나라를 도래하게 하셨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소식이 아니다. 모든 유대인들도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복음의 정말 놀라운 사실은 메시아 왕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인자,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 그리고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이 동일인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천국 복음과 십자가 복음이 결합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왕이시다. 이머징 교회에서 제시하는 놀라운 복음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지겨운 것일 뿐이다. 

여덟째,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내용은, 이 시대의 복음전도적, 선교적, 목회적 강조점이 십자가 복음(더 넓은 의미인 천국 복음의 문이요 원천인)에 놓여 있다는 결론으로 이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주목하게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든 것은 나쁜 소식이며 도달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이 최우선적으로 명하시는 말씀은 “회개하고 믿으라”이다. 실제로 복음(넓은 의미의 복음이든 좁은 의미의 복음이든) 자체 속에 포함된 유일한 명령은 “회개하고 믿으라”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부여된 주요 의무이며, 따라서 우리의 설교에서도 주요 강조점이어야 한다.

 

 1. 예수께서 그분의 기록된 말씀 중에서 ‘복음’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십자가 복음과 연결시키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은 매우 분명히 십자가 복음을 전하셨다(예, 막 10:45). 일반적인 측면에서 단어 연구는 유익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규정하고 성경 본문 속에서 복음에 대한 내용을 찾을 때 ‘복음’이라는 단어 자체에 너무 집착해선 안 된다. 그럴 경우에는, 요한은 복음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은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기록한 신약성경 책들에서 그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교자]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1779~1801)과 이순이 루갈다(1782~1802)

“순결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 두 고귀한 마음의 결합은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처남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 이승훈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이순이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어린 이순이는 일찍부터 모친에게서 글과 교리를 배웠습니다.
어려서부터 「효경」 등 경전을 배워 익힌 이순이는 학문과 지식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필가 집안의 재능도 물려받아 그녀가 남긴 「옥중 편지」는 문장이 깊고 맑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이미 오래전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고백했습니다.
크게 놀란 어머니는 대견함과 현실적인 염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앞장서 삼강오륜을 지켜야 했던 양반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을 혼인시키지 않는 것은 일종의 패륜으로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선택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라 생각한 어머니는 평소 언행이 갸륵하고 믿음이 깊었던 딸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승낙이 떨어지자 이순이주문모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결심하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 신부는 이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전주의 유중철을 떠올렸습니다.
2년 전 주 신부가 전주 유항검의 집에서 며칠 머무를 때, 유항검의 아들 중철이 아버지와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주 신부는 이들의 결심을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주 신부 역시 조선 사회의 여론과 이목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멀쩡한 처녀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동정’에 관한 천주교 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당장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기 십상이고, 결국에는 화가 닥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궁리 끝에 주 신부는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아예 두 사람을 혼인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평소 유중철이순이의 신덕과 사람 됨됨이를 신뢰하였던 까닭에 부부로 맺어 주어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틀림없이 동정을 지켜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주 신부는 두 사람의 중매에 나섰습니다.
먼저 전주의 유항검에게 이순이를 소개하며 의향을 물었습니다.
유항검이순이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이순이의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혼인이 성사되었습니다.

동정부부 ②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어머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천하고 약한 자식인 제가 끝없는 행복의 화관을 머리에 쓰고 모든 천상 기쁨이 넘치는 마음으로 어머님의 손을 잡아 영원한 고향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 이순이 루갈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마침내 1797년 10월 이순이의 집에서 혼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열아홉 살 유중철과 열여섯 살 이순이가, 겉으로는 부부지만 내막으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당시 서류부가(?留婦家)라 하여 혼례를 올린 신부가 한동안 친정에 머무르던 풍습에 따라 이순이는 1년 동안 친정에 머물다가 이듬해 10월 전주의 시댁으로 내려갔습니다.
재회한 유중철과 이순이는 부모님 앞에 꿇어앉아 장엄하게 동정을 서약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오누이로 지내며 동정을 지켜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본능적 욕구가 불쑥 치솟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 갔습니다.
이들에게 일상은 매 순간이 자기 극복의 단련으로 이어지는 영신 수련의 삶이었습니다.

1801년 시작된 신유박해의 불길은 그 해 2월 이순이의 큰외삼촌인 권철신을 덮쳤고, 이 비보가 전주에 당도하기 무섭게 유항검이 체포되었습니다.

‘전라도 천주학의 괴수’라 소문난 유항검이고 보니 도무지 무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항검은 즉시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유관검유중철도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9월 17일, 유항검 유관검은 전주 풍남문 밖, 지금의 전동 성당 터에서 능지처참 되었고 유중철은 큰칼을 쓴 채 무한정 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항검의 사형 판결 소식을 전해 들은 이순이와 가족들은 머지않아 닥칠 환난을 예감하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9월 15일, 전주 감영의 포졸들이 몰려와 이순이와 가족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이순이는 옥에 갇히면서도 지필묵을 챙겨 들었습니다.
언젠가 유항검 집안이 박해를 당하거든 박해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해 두라는 주문모 신부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9월 27일에는 옥졸들의 눈을 피해 어머니에게 유서와도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11월 14일, 옥졸이 옥에 갇힌 시동생 유문석을 불러냈습니다.
이순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옥졸은 “관장의 명령이다. 유문석을 큰 옥으로 데려가서 제 형과 함께 가둘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순이는 유문석에게 “서로 잊지 맙시다!” 하고는, 가거든 형에게 같은 시간에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기를 원한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동정부부 ③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유문석이 떠나고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유중철과 유문석 형제가 교수형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유중철이 22세의 나이로 순교한 뒤, 옥중의 이순이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뒤, 전주 관장은 이순이와 가족들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바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에 파견했습니다. 그 결과 이순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유배형을 받았고, 이순이는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순이는 가족들을 대표하여 “우리들은 하느님을 공경하였으니 모두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하고 항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순이와 가족들은 결국 유배지를 향해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습니다. ‘하마터면 치명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한 이순이는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다시 전주 감영에 당도한 이순이와 가족들은 서슬 퍼런 심문에도 다만 하느님을 공경하며 죽기를 원한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감사는 사형을 선고한 후 몽둥이로 정강이를 치고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전라 감사가 의금부에 장계를 올린 지 20일이 지나도록 이들을 처형하라는 기별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순이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소일 삼아 친정 언니와 올케 등 다른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이는 편지에서 유배지의 관비가 되는 것보다 치명자가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며 “내가 죽는 것을 산 것으로 알고, 산 것을 죽은 것으로 알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의(義)를 배반하고 사는 것은 천지의 죄인이라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않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사형 판결이 났습니다. 1802년 1월 31일, 이순이는 판결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숲정이라 불리는 전주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 스물이었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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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이 문제 일세

학생이 교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사람이 죽는 준비를 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그거야 몇 분이면 되지”하고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천당 가는 준비를 하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그것도 몇 분이면 되네. 예수님 곁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잠깐 예수 믿고도 구원받지 않았나?”
그러자 젊은이는 “그렇다면 괜찮겠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는 즐기다가 마지막에 가서 예수 믿으렵니다.”
그리고는 자리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는 학생을 불러 앉히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한 마디 묻겠네. 자네는 자네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나?”
“모르지요, 그야”
“바로 그것이 문제 일세”

맑은 시냇물을 홀스타인종 젖소가 먹고 있고 건너편 언덕에선 살모사가 목을 축이고 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셨는데 잠시 후 그 물은 젖소에게서 우유가 되고 독사의 몸에서는 무서운 맹독으로 변합니다.
이 책임이 어찌 물에게 있다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어떤이는 듣고 어찌할꼬하여 구원에 이르지만은 어떤이는 듣고 이를 갈더라 오히려 악해져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옥토와 같은 밭은 듣고 결실하여 100배의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많은 선한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 암호를 알고 있습니까?

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천국 문 앞에 서니, 한 천사가 그에게 암호를 대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물러가고, 외모가 훌륭한 다른 남자가 천국 문을 두드렸습니다.
천사가 암호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성직자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의로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유명한 기관들이 나에게 최고의 영예를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왕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물러나자마자 할머니 한 분이 그 문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구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얼굴은 빛났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높이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피, 나의 대답은 오직 피라오.
할렐루야! 그 피가 나를 씻겨준다네!”
즉시 진주문이 열리고, 그 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갈 때, 천국의 합창단이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암호입니다.

06-09-2023(목) /

권세(1849)  ἐξ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에쿠시아(ĕxŏusia)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 1832. ἔξεστι 
1. ~은 적합하다.  2. 마태 12:2.  3. 마태 20:15
발음 / 에크세스티(ĕxĕsti)
관련 성경 / 옳다(마 12:10, 12, 막 12:14, 눅 6:9, 20:22), 가하다(고전 6:12), 합당하다(눅 14:3), 권한이 없다(요 18:31)
신약 성경 / 32회 사용

죄(266)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 ίας, ἡ 

1. 죄,   2. 고후11:7,  3. 요한 9:41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신약 성경 / 43회 사용

인자가 땅에서...알게 하려 하노라
- 서기관들은 9절에서 예수께서 제시한 선택적 질문에 어느 한 쪽도 무책임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먼저 인간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신(神)의 관점에서 더 어려운 편, 곧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죄 사함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죄를 사하는 권리와 권능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신다(Robertson).

인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그리스도께서 즐겨 사용하신 자기 자신에 대한 메시야적 명칭이자 타인으로부터 쉽게 공격을 받지 않는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표현이다.

인자(호 휘오스 안드로푸)
- 복음서에서는 이 용어가 90여회 나온다.
그 중 본서에만 26회 나올 만큼 인자 개념은 본서의 핵심 사상이다.
요한복음 12:34을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용어(6:5, 22;11:30;마 8:20;막 14:41;요 3:14)인 '인자'가 원문의 표현상 여자적(如字的) 의미로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2. 이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상(異象)중에 본 '인자'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였던 점(단 7:13)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신 예수의 대답(막 14:62)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3. 그러나 예수께서 인자로서의 종말론적 영광을 누리기 의하여서는 그 이전에 반드시 이 땅에서의 각종 수난과 죽임을 당하여야만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22:4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마 26:53) 시도 때도 없이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각종 모욕과 수난을 감내해내셨는데(4:29; 11:53, 54; 20:20; 22:63-65; 23:11) 여기에 예수께서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 칭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즉 '인자'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identity)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authority)와도 관련되어 있다.

한편 이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마가가 즐겨 사용한 메시야 칭호이다.
그런데 이 호칭은 구약성경과 경외전(經外典)인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黙示文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어로서, 특히 구약에서는 주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8:4; 겔 2:1, 3, 6, 8; 단7:13, 14).

그리고 묵시 문학에서는 주로 여호와의 날 곧 종말에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이 땅에 심판주로 임하실 메시야라는 뜻으로 전달되고 있다(Taylor, Grant).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제시하는 바 이 '인자' 개념은 주로 심판주로서의 메시야란 의미와더불어 이 세상의 죄인을 지금 용납하시고 그 죄를 지금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으로서의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다(2:28; 14:62).
즉 그분은 심판의 시점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직권(職權)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Robertson).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 이 구절의 첫 부분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통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는 부분은 이제 서기관들이 아니라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삽입구가 된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의 대상이 바뀌는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아마도 어떤 몸의 동작 변화로 이야기의 대상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편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본 사건의 종합적인 상황을 알고 있던 저자 마가가 상황의 급격스런 변화라는 어색한 표현 기법을 사용해서라도 독자들에게 본 사건의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위와 같이 진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자연스럽지 못한 문제로 해결이 된다(Wessel).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서기관들의 태도에는 관심이 없었고 중풍병자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06-09-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2장 / 죄를 사하는 권세(10절)

그러나 인자가 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But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1-12 중풍병자의 치유.
13-17 세리 레위의 부르심과, 그 집에서의 식사의 자리에 있어서의 예수와 서기관들의 문답.
18-22 금식에 관한 문답과,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의 비유.
23-28 안식일에 관한 바리새인의 비난과 예수의 문답.

2:1, 가버나움 / 가버나움(Capernaum) : 위로의 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명하면 이 문제는 해결 될 것입니다.
 

창세기 1:1-3

  1. 태초하나님천지창조하시니라
  2.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 있으라 하시매 이 있었고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빛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빛은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의 빛과는 다른 빛을 말합니다.

하나님이란 히브리 단어가 복수형으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나님들" 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문법은 특별한 복수명사로 모습은 복수이지만 단수형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들이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세 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고 선언하신 것이라면 중풍병자에게 네 죄를 사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히 하나님으로 명령할 수 있는 사죄의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
마가복음 1장 1절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태초)"

요한복음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일서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죄의 확신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창세기 서론

1. 표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첫 글자를 따서 창세기를 “브레시트”(bereshith,태초에)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 책을 “세계 창조의 책”이라고 하였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라는 이름은 70인역에서 번역한 것으로써, 헬라어 “게네시스”는 “기원”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것이 70인역에 처음으로 사용될 때, 그 의도는 그 책의 내용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부제로 자주 붙어다니는 “모세의 첫번째 책”이란 명칭은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에 처음부터 붙어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2. 저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공히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위대한 입법자요, 지도자인 모세를 창세기의 저자로 간주해 왔다.
이러한 확신은 기독교 초기에 몇몇 이교적 반대자들에 의하여 약간의 도전을 받기는 하였으나, 18세기 중엽까지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한 번도 심각하게 의심된 적이 없었다.
200여년 전부터 하나의 새로운 사조가 시작되어, 인간의 모든 사고 영역 가운데서 전통적인 신앙과 견해들은 일단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해 냄으로써 이 세상의 생활의 방법을 많이 변경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탐구 또는 취조(取調) 정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비평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서의 성서의 확실성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창세기는 근대에 있어서 비평적인 시험을 당한 첫 책이 되었으며 이러한 시험은 성경의 고등 비평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1753년에 프랑스의 궁중 의사 장 아스트뤼크(Jean Astruc)는‘추측’(推測)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신격에 대한 각기 다른 이름들이 발견된 것을 지적하고, 이것은 창세기가 여러가지 자료들의 수집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스트뤼크는 모세가 바로 그 자료들의 수집가요, 이 책의 편찬자라고 추측하였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이윽고 모세를 창세기의 편집자로 단정하였다.

비평적인 마음을 가진 신학자들은 창세기의 가정된 자료들을 각기 분리하고 그것들을 서로 다른 저자별로 분류하거나 적어도 그 자료들이 형성, 수집, 변화, 편집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책으로 묶여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별로 자료들을 분류하기 위하여 근 200년 동안이나 애써 왔다.

이와 같은 비평적인 견해들을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은 하나의 커다란 원칙에 있어서 의견 일치를 보았는데, 그것은 즉 이 책의 가치와 저자와 유래된 시기 등이 각각 다른 많은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체 내에서도 어느 것이 어느 시기에 해당되는지에 대하여 광범위한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견해 차이는 비평적인 학자들의 가정(假定)의 기초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건전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비평적인 논쟁들의 거짓됨이 지난 100년간의 고고학적 발견들에 의하여 드러났다.
비평자들은 그들의 이론과 주장을 끊임없이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다수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아직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들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각기 다른 이름 세 가지가 사용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둘 이상임을 가리킨다.

특히 그 이름들이 각기 특정한 부분에 두드러지게 자주 사용된 것은 그 부분의 저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Yahweh) 곧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비평적인 학자들은 “야비스트”(Jahvist)라고 일컫고, “엘로힘”(Elohim) 곧 “하나님”이란 칭호가 주로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엘로히스트”(Elohist)라고 일컫는다.

그 외에도 창세기의 내용을 기록한 고대의 저자들 중에는 제사장 저자도 있었고, 또 그 모든 자료들을 편집한 편집자도 있었을 것이다.

2. 이 책에 포함된 이야기들이 여러 번 반복된 것은, 이미 존재하던 평행 자료들을 후대의 편집자가 한데 묶어 전체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으나, 근원이 다른 자료들을 사용한 사실을 숨기지 못한 결과이다.

3. 창세기의 이야기들 가운데 반영된 여건들은 시간적으로 그 당시와 부합하지 않고 오히려 휠씬 후기와 부합한다.

4. 지명(地名)을 사용함에 있어서, 초기에는 그렇게 불리우지 않은 지방들이 후기에 사용된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5. 고대 바벨론에 존재하던 창조, 홍수, 그리고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전설들이 성경 기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히브리인 저자들이 포로 기간 동안에 이러한 설화들을 바빌로니아인들에게서 빌어 와서 자기들이 믿는 일신론적인 형태로 새로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써 이러한 견해들을 배격한다.

(1) 하나님, 주, 그리고 여호와 등의 성호(聖號)들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별로 차별없이 사용되었으며, 비평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저자가 다른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 볼 수 없다. 70인역과 대부분의 고대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 그리고 근래에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 등에서는 어느 한 사본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란 칭호가 그 같은 구절의 다른 사본에서는 “주” 또는 “여호와”로 되어 있고, 또한 그 반대로 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2) 설화들에 나타나는 반복은 그것이 바로 저자가 다른 여러 자료들을 사용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다. 모세의 책들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허다한 성서 이외의 예증들로써 동일한 저자가 기록한 고대의 문학작품 및 심지어 현대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사한 반복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고대의 역사와 여건들에 관한 지식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가 그 당시의 형편에 대하여 정통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서술은 그들의 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4) 지명들은 경우에 따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복사자(複寫者)들에 의하여 후대의 이름으로 대치되어 왔다.

(5) 바빌로니아인들이 히브리인들의 기록과 어느 정도 흡사한 전설들을 가졌다는 사실이 바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서 빌어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두 기록들에 대한 공통적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따라서 창세기의 영감된 기록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완전하고도 순수한 형태의 것이요, 바빌로니아인의 기록들은 동일한 사건들을 저열한 이교적인 배경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고등 비평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내세우기 위하여 주장하는 것들을 구태여 논박하려고 대항할 필요는 없으나,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포착하는 일은 퍽 중요하다.

출애굽기의 저자가 창세기의 저자였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오경(五經)의 둘째 책은 첫째 책의 연속이요, 동일한 정신과 의도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책을 “모세의 책”(막 12:26)이라고 일컬으셨을 때에 분명하게 확증되었으므로, 그에 선행하는 책인 창세기 또한 모세의 기록인 것은 명백하다. 애굽인의 단어와 표현들의 사용, 그리고 요셉의 역사에 나타난 애굽인의 생활과 관습에 정통함 등은 모세가 받은 교육 및 경험과 조화를 이룬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술이라는 증거가 오경의 나머지 책들이 가진 증거보다는 덜 명백하고 덜 직접적이긴 하지만, 모세 오경에 시종 공통적인 언어의 독특성들과 신약의 증언은 다름아닌 모세가 성령의 영감하에 이 책을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로부터 몇 구절을 인용하신 사실은 그분이 그 책을 성서의 일부로 간주하신 분명한 증거가 된다. 창 1:27; 2:24을 인용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라는 공식적인 언사를 사용하셨다(마 19:4, 5).이것은 여기에 인용한 구절들이 여전히 구속력과 타당성을 가지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예: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막 10:2-9; 창 1:27; 2:24).

다른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창세기에만 묘사된 사건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친히 이 책을 하나의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셨음을 보여 주셨다(눅 17:26-29; 요 8:37 등).

또한 사도들의 기록들 가운데 발견되는 수많은 창세기의 인용구들은 사도들이 모세를 그 책의 저자로 확신한 사실과 그 책이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롬 4:17; 갈 3:8; 4:30; 히 4:4; 약 2:23).

이러한 증거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인은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마음놓고 믿어도 좋다.

3. 역사적 배경

창세기는 B.C. 1500년경, 히브리인들이 아직도 애굽의 속박하에 있던 동안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는 실로 많은 세기들에 뻗쳐 통하는 세계 역사의 소묘(素描: sketch)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의 초반은 우리가 역사에 관하여 상례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 넣어질 수가 없다.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것 이외에 홍수 이전의 세계의 역사를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화석들의 묵묵(默默)하고도 때때로 모호한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고고학적인 기록들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경우가 다르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창세기의 후반이 차지하는 기간 동안의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과 정부의 형태 등에 관한 많은 기록들을 밝혀 내었다. 예컨대, 아브라함의 시대는 이제 상당히 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속박 기간 동안의 애굽의 역사는 비교적 정확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 이 시대 동안,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출애굽까지의 시대에는 고등한 문명이 만개(滿開)해 있었으며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계곡과 나일 강의 제방 연변에는 더욱 그러했다. 북방에서는 헷 족속이 세력을 얻고 있었으며, 팔레스틴에는 군소(群小) 왕들의 지도하에 호전적인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관습은 이 모든 민족들의 암흑한 이교주의를 반영하고 있었다.

창세기의 부조들과 하부 및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셈 족속들 사이에는 강한 인종적인 유대(紐帶)가 잠재해 있었다. 싯딤 골짜기에서의 왕들의 싸움(14장), 평지에 있는 도성들의 멸망(18, 19장), 그리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기근을 겪는 동안 애굽의 백성들을 보존한 일(41장)과 같은 초기의 큼직한 사건들 가운데서 부조들이 감당한 역할들이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다. 창세기의 인물들은 목자와 전사(戰士)로, 도회지 거주자와 광야의 유목민으로, 정치가와 망명객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경험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아득한 고대의 열강(列强)들과 특히 히브리인들이 이따금씩 접촉하던 군소 백성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느끼게 한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 일어났던 위대한 문명들에 관해서는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는 부조들의 경험 가운데서 강하게 느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 있는 화려한 격리 지대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열국이 어울려 있는 사회의 부분이었으며, 그들의 문명과 문화 역시 주위의 다른 백성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종교의 차이뿐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진정한 경배자들 가운데서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영감을 받은 저자 모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계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명백한 관찰과 인식은 자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도하게 된다. 모세가 이 책을 기록한 주된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4. 주제

창세기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충성스런 작은 무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하시는지에 관한 서술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빠진 타락의 심연을 묘사한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허락된 최초의 영원한 계시이며, 신령한 기록이다.

이 책은 또한 교의적(敎義的)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삼라만상의 창조, 죄가 들어온 경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허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자유스러운 도덕적 존재요, 자유 의지의 소유자임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재화(災禍)의 근원임을 가르쳐 준다. 또한 이 책에는 휴식과 예배의 날로서의 거룩한 안식일(安息日)을 준수해야 할 것과 결혼의 신성성과 가정 제도의 수립, 그리고 순종에 대한 보상과 범죄에 대한 형벌 등에 관한 교훈들이 주어져 있다.

이 책은 흥미있는 문체로 기록되어 있어서 젊은이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 담긴 숭고한 도덕적인 주제들은 성인들을 위해서도 정신적 양식이 되며, 만인을 위한 교훈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누구도 그것의 연구를 게을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그 속에서 광채를 발하는 모범적인 인물들을 본받아야 하는 책, 그 책이 바로 창세기이다.

5. 개요

Ⅰ. 천지 창조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1:1-11:26

    1. 천지 창조 1:1-2:25

       (1) 창조의 6일간 1:1-31

       (2) 안식일을 제정함 2:1-3

       (3)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에 관한 세부적 설명 2:4-25

    2. 타락의 역사와 그에 따른 결과 3:1-5:32

       (1) 유혹과 타락 3:1-8

       (2) 에덴에서 추방당함 3:9-24

       (3) 가인과 아벨 4:1-15

       (4) 가인의 후예들 4:16-24

       (5)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4:25-5:32

    3. 대홍수 6:1-9:17

       (1) 대홍수 이전의 타락상 6:1-13

       (2) 방주 건조 6:14-22

       (3) 홍수에 관한 이야기 7:1-8:14

       (4) 노아의 언약 8:15-9:17

    4.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9:18-11:26

       (1) 노아의 아들들의 운명 9:18-29

       (2) 국가 목록 10:1-32

       (3) 바벨에서의 언어 혼란 11:1-9

       (4) 셈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세대 11:10-26

Ⅱ. 부조 아브라함과 이삭 11:27-26:35

    1. 아브람 11:27-16:16

       (1) 소명과 가나안으로의 여행 11:27-12:9

       (2) 애굽에서의 경험 12:10-20

       (3) 롯과의 이별 13:1-18

       (4)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을 만남 14:1-24

       (5) 하나님과의 언약 15:1-21

       (6) 하갈과의 결혼, 이스마엘의 출생 16:1-16

    2. 아브라함 17:1-25:18

       (1) 언약의 갱신,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작함 17:1-27

       (2) 아브라함과 천사들, 소돔과 인접도시들의 멸망 18:1-19:38

       (3) 그랄에서의 체험, 이삭의 출생, 이스마엘 축출 20:1-21:34

       (4) 아브라함의 극심한 시험 22:1-24

       (5) 사라의 죽음과 장례 23:1-20

       (6)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함 24:1-67

       (7) 아브라함의 후예들 25:1-18

    3. 이삭 25:19-26:35

       (1) 이삭의 아들들 25:19-34

       (2) 이삭과 그랄의 아비멜렉 26:1-35

Ⅲ. 부조 야곱 27:1-36:43

    1. 찬탈자 야곱 27:1-31:55

       (1)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받음 27:1-46

       (2) 야곱의 도망과 벧엘에서의 이상 28:1-22

       (3) 야곱이 자기 아내들을 위하여 봉사함, 가족을 형성함 29:1-30:43

       (4) 야곱이 라반으로부터 도망함 31:1-55

    2.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32:1-36:43

       (1)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옴, 브니엘의 체험 32:1-33:20

       (2) 세겜에서의 수치, 가족 문제 34:1-35:29

       (3) 에서의 후예들 36:1-43

Ⅳ. 구원자 요셉 37:1-50:26

    1. 요셉과 그의 형제들 37:1-36

    2. 유다의 타락 38:1-30

    3. 요셉이 원칙 위에 굳게 섬 39:1-40:23

    4. 요셉이 애굽을 구원함 41:1-57

    5. 요셉과 그의 형제들 42:1-45:28

    6. 야곱이 애굽으로 감 46:1-47:31

    7. 야곱의 축복 48:1-49:33

    8. 야곱과 요셉의 죽음 50:1-26






예수님의 보혈로 천국에 들어간다!

히브리서 9:12, 베드로전서 1:18-19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아 천국에 입성한다.

히브리서 9:1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 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들이 교회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과연 우리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당연한 말을 질문한다면 별걸 다 물어보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영생할 수 있는가이다.
신앙새활은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위의 말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죄를 사하여 정결하게 하여서 우리들이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가 되었으니 하늘나라에서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주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인간이 죄를 범하면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죄씻음 받아 죄를 용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죄를 용서받는 상징적인 방법이었다.
한마디로 피흘림이 없이는 더러운 죄에서 사함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서 어떻게 생활 하는가를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고 있다.

밧모 섬에 추방된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요한을 환상속에서 천국으로 데려갔을때 요한이 천국 본 광경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 서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찬양하는 구속받은 무리를 보게 하셨습니다.
구속받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불렀던 노래의 주제는 한 마디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주님의 보혈에 대한 구속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가 들은 바 나팔 소리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으며.

하늘나라에 있는 성도들이 우리 주님을 찬양할 주제가 많지만 가장 중요한 찬양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구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속이란 죄사함인데 이 찬양은 일찍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흘리신 그 보혈로 우리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었다는 찬양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올라간 성도들의 찬양의 주제는 자신들이 천국에서 수고 근심 걱정 사망없는 것에 대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고 있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에 올라간 모든 성도들께서는 자신들이 어떻게 구속을 받았는지 알게 되는데 그들은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구속을 받았다고 외칩니다.
천국의 보좌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에 대한 감격적인 찬양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성도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피로 구속을 받았다는 감격이 찬양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좀더 유추해 본다면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하늘에 있는 의의 문을 지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인해 구속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새 예루살렘의 진주 문을 지나다니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의 생명수 강물을 마실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의 황금 길을 걸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영광의 보좌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주위에는 찬양하는 모든 성도들 중에는 짐승의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천국에 온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으로 천국에 도달한 사람도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침례를 받고 기도를 하고 성모 마리아를 부르고 십자가를 붙들고 교회에서 성찬식을 하고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교황의 반지에 입을 맞추고 묵주의 구슬을 꿰고 성상들 앞에 무릎을 꿇고 길 거리 가난한 노인을 도와주는 것으로 인하여 천국에 온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지 않은 한 어느 누구도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구속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필요성과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속의 충분성과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진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한 구속의 필요성

모든 사람은 반드시 구속받을 필요가 있는데 여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
  2. 죄가 우리를 구속하고 있기 때문
  3.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

우리가 구속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구속(redemption)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속을 받는다’는 의미를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1 되사다 또는 회복시키다(to buy back, recover)

2 몸값을 지불하다(to ransom)

3 속죄하다 혹은 죄에서 구해내다(to atone for, deliver from sin)

왜 모든 사람들이 구속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좀더 깊이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1.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십계명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믿지 말것이며 어떠한 형상을 만들어 절하지 말 것, 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 것, 안식일을 기억할 것, 부모를 공경할 것, 살인 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 하지 말 것,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지 말 것 이라고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이 율법을 범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의 잣대에서 죄를 짓이 않았다고 자유로울 수 없으니 모든 인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들이 죄인이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을 봅시다.

(시편 14:2-3) 주께서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그들이 다 치우쳐서 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고 유법을 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백성들에게 물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앞에서 율법을 범하면 당연히 벌을 받겠다는 대답을 약속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온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동일한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니라(갈3:10)

인간이 하나님과 약속한 대로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물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때부터 땀흘려 일을 해야 하고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 하고 마지막은 사망의 저주를 받는 것이 율법을 범한 인간이 받아야하는 저주이다.

 

저주당한 인간이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정결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 그 분의 율법을 위반한 사람으로 마땅이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필사적으로 우리가 범한 죄를 속죄 받아야 우리가 저주를 피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구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어야 하는 저주를 받을 수 있는 분은 사람이시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 대신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주 받으셨는가?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인데 이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이 십자가 형벌을 받아야만 하고 동시에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정죄를 율법적으로 온전히 제거하셨다는 것입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라 하였느니라

 

(골2:13-14)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율법의 저주에서 저와 여러분을 구속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더 이상 당신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속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할렐루야

 

구속은 특정한 교회나가는 것이나 사제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것에나 선행에 있지 않습니다. 구속은 오직 한 곳 즉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에만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위에서 피를 흘리고 죽지 않았다면 죄사함의 구속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1장 14절은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사함 받은 사람을 고후5:17 새로운 창조물 이라고 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1:12)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제부터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다 구속 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해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하늘의 보좌에 서서 ‘주께서 주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라고 예수님께 노래할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구속받아야 할 둘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2) 죄가 우리를 결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죄에 묶이지 않았던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히4:15). 이 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죄인이며 스스로 원해서 다 죄에 묶여 있으며 죄에서 구속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요8:32-36)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니라

이 말씀을 통해 죄의 종인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결박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죄에 포로되어 죄의 노예로 팔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우리는 죄의 노예로 있는데 그대로 있으면 사망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구출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의 속박 가운데서 죽는다면 둘째 사망인 불 못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계20:14, 21:8).

그러나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고 죄의 노예로서 죄 아래 팔렸으며니 인간 누구도 죄의노예인 우리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가 죄값을 지불하여 주고 우리를 구속해 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죄의 노예 시장에서 해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아닌 존재만이 우리를 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하나님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함과 공의와 주권 속에서 죄는 오직 피흘리는 것을 통해서만 죄가 용서되고 사면될 수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레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오직 피만이 죄를 속죄할 수 있다는 것과 이 일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죄인의 피는 결코 우리의 죄를 용서하거나 우리를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뿐이므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반드시 그분의 죄 없는 피가 흘려져야만 했습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롬6:23)하였으니 죄에 속박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며 죽으사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인류죄를 속죄하기 위해 처녀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혈액 전문 의사들에 의하면 아기가 수태될 때에 자기 어머니로부터 피를 한방울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말은 마리아는 죄인이므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피를 한방울도 물려받지 않았으므로 죄인의 피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피가 왜 중요한가는 레위기 17: 11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담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기 까지는 생명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생명을 불어 넣으니 그는 곧 ‘살아 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창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생령)이 되니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어떤 부분이 죄를 범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혼입니다.

히브리어 네페쉬는 창세기 2:7생명의 숨은 혼soul으로 번역되었으므로 우리가 육체의 혼 soul이 피에 있다고 말해도 틀린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혈관 속에 마리아의 피를 단 한 방울이라도 물려받았다면 그 분의 피는 죄로 더럽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700년 전에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직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통해 그분은 반드시 더럽혀지지 않은 피를 지닌 채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만일 그분께서 죄로 더럽혀진 피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런 피로 결코 죄인들을 구속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전혀 피를 주지 않았으므로 그분의 처녀 탄생은 하나님의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었습니다. 절대 무오한 성경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명합니다.

(눅1:30-32) 30 그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마리아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호의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예수라 하리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요10:36) 아버지께서 거룩히 구별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인 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그에게 네가 신성모독한다 하느냐?

이제 요약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시며 아기를 수태한 어머니는 아기에게 전혀 피를 주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혈관 속에 들어 있는 피는 죄 없고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피로 다 하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의 피는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던 예수님의 혈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바로 하나님의 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고 말합니다

어느 이단 딤 목사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붉은 피는 우리의 구원과 상관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 영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맥아더 목사라는 자도 뻔뻔스러운 이단 교리로 말하기를 ‘예수님의 육신적 피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단호히 말했다. 이들은 혈액전문 의사가 말한것도 믿지 않고 전혀 비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혈관에 있는 피는 하나님의 피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여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분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서 죄사하여 주시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일을 이루셨습니까?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갈보리 험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흠 없고 점없는 피를 흘리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할렐루야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요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

저는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기쁜날에 저는 하늘의 보좌 주위에 있는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의 이름을 힘껏 찬양할 것입니다.

(계5:9)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으며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되 사셨습니다. 이렇게 저를 구속하기 위한 대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였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구속하시면서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그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저를 죄로부터 되사실 때에 바로 그 피를 몸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분께서 흘린 피가 없었다면 저는 여전히 죄의 노예 시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 소망 없이 영원히 버려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죽음은 피를 흘리는 죽음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독살, 교수형, 질식사 같은 죽음을 당하셨다면 우리의 죄가 사면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도 구원도 속죄도 전혀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면 결코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구속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구속하였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구속을 받아야 하는 필요성과 연관된 셋째 기본적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3).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상태로 죽으면 결국은 지옥 불 못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임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죄를 지은자는 저주를 받는 것인데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고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육체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 더 무서운 것은 지옥에서 영원히 불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인데 지옥의 저주를 알게된다면 반드시 지옥에 가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는 것이다.

 

대신 속죄(代身 贖罪) 요한복음 1:29

다음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나님은 눈이 심히 정결하시므로 악을 보지 못하신다(합1: 13)
그러므로 누구라도 죄가 있는 사람은 그분 앞에 설 수 없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죄 없는 짐승을 잡아서 그의 죄악에 대한 수치를 가리도록 옷을 만들어 주신 이후로(창 3:21)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죄 없는 희생물을 대신 죽여 피를 흘려서 속죄가 이루어야만 함을 보여 주었다.

특별히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소나 양 염소 등의 짐승을 끌고 성막 앞의 제사장에게로 간다(레 1: 2-9) 그리고 그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기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칼로 직접 짐승의 목을 찌른다.
그가 칼을 양의 목에 꽂는 순간 양은 비명을 지르고 피가 몸에서 튀겨 나온다.
이로써 죄인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피를 흘리는 희생물이 있어야만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는 이 제물을 여러 조각 내서 번제 헌물 제단에 태워야 한다.
이것을 통해 죄인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 뜨거운 지옥 불의 정죄가 있어서 불의 고통을 받아야 함을 깨닫는다.
이런 일은 또 유월절(출 12)과 속죄일(레 23:27-32)에도 이루어져서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해 흠없는 어린양이나 소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짐승의 희생은 죄를 온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죄를 덮는 역할을 하며 예표의 기능을 했을 뿐이다 (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희생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지옥의 고통을 다 담당해서 단 한번에 영원한 대신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시대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이라는 중보자가 있었으나 우리 주님께서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면서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마 27:51, 히 6:19-20).
그분께서 단 한번에 세상의 모든 죄를 영원토록 제거하셨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다른 희생물이나 제사장이 필요 없다(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위에서 죽으심이 나의 죄값이라는 것을 믿는자는 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성경은 지옥의 실존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시편 9:17) 사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러하되

(마태복음 23:33) 뱀들아 독사의 세대야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

(요한계시록 14:9-11) 셋째 천사가 그들을 뒤따르며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자기 이마 안에나 손 안에 그의 표를 받으면 바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즙 곧 그분의 격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즙을 마시리라 그가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 그들의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는도다.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낮이나 밤이나 안식을 얻지 못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는 불 못에 던져졌더라

우리가 방금 읽은 말씀들만 보아도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은 불타는 지옥에서 고통당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주께서 주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라고 예수님께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도착합니다. 피로 인한 구속이 없이는 결코 구원도 없으며 지옥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둘째 부분을 살펴봅니다.

2. 그 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충분성

이 책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의 신분에서 벗어나 구속받을 시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에 그 땅을 두루 다니시며 한 가지를 찾고 계셨습니다.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있는지 없는지를 찾고 계셨다. 피를 바른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고 피가 발랄져있지 않은 집은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저주가 있었다.

(출12;13)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해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각 집의 대문 위에 있던 단 한 가지만이 모든 맏아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죽음을 저주를 피하는 일에 충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직 어린양의 피만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유일한 요소입니다. 물론 이 피는 주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를 피의 희생물 받치라고 말씀하신 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창22; 7-8) 7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매 그가 이르되 불과 나무를 보시거니와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니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친히 예비하시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두 가지 즉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물론 자기가 예정된 희생물이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손에 든 칼과 자기 아버지가 가져온 불을 보면서 이삭은 자신의 등에 놓인 나무의 무게를 느끼며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자 아브라함의 대답을 살펴봅시다

(창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헌물로 쓸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위 구절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드릴 어린양을 준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이 정확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물이 될 존귀한 어린양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비하셨습니다. 만일 이분이 사람이었다면 이분께서 흘린 피와 희생물이 된 이분의 몸은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처벌에서 우리를 구속하기에 충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피는 반드시 흠이 없고 점 없는 이런 성질의 피를 가진 유일한 사람은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 없습니다.

 

침례자 요한은 요단 강에서 허리 깊이의 물에 서서 둑에 늘어선 무리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한 곳을 쳐다보았고 예수님께서 둑 아래로 내려오셔서 강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면서 곧바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요1:29) 다음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요한은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갈릴리 사람을 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세상 죄를 제거하는 유다 지파의 사자를 보라’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현들도 다 예수님께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제거하실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이 일에 대해 분명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어떤 사람의 피나 희생적인 죽음도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하기에 충분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를 구속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피를 찬양합시다. 이제 셋째 부분을 살펴봅시다

 

3.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해 구속을 받는 진리의 말씀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인용하는 성경 말씀은 다 진리입니다.

(요17:17)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저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성경의 모든 장의 모든 말씀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사 하늘에 올리우신 후 예수님의 지위를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존재로 자신의 아들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빌2: 9-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오직 한 이름 즉 예수라는 이름만을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마귀들과 모든 타락한 천사들과 모든 좋은 천사들이 오직 한 분 예수님에게만 무릎을 꿇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영광과 명예를 예수님께 주셨을까요?

이 질문의 답은 제가 방금 인용한 구절의 문맥 그러므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방금 말한 사실에 기초하여 그러므로는 절대적인 진리 즉 예수님 이외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의해 지극히 높여지지 않았고 우리의 구원자 이외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갖지 않으며 하나님의 어린양 오직 그분의 이름에 온 세상 만물이 무릎을 꿇고 모든 존재가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이유를 보여 줍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여기의 ‘그러므로’는 그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제 그 앞의 네 구절을 살펴봅시다.

(빌2: 5-8)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체로서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이처럼 최고 위치와 지위에 높이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그분의 권위를 찬탈하는 반역 행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진리 다음에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죽기까지 복종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죽음이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복종하시며 자신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로 하여금 다 예수라는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또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교수형으로 돌아가셨다던지 만일 예수님께서 독살되어 죽으셨다던지 만일 예수님께서 질식사를 당하셨다면 결코 아버지께서 그분을 그토록 높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몸안의 피에는 우리를 구원하는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이단 목사인 맥아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필요가 없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피가 효력이 없다면 그분께서는 자신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도 여러 형태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상태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죽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죄들의 사면이 없다(히9:22)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이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 즉 피를 흘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이런 사실이 절대 무오한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고 죽으신 후에는 로마병정이 창으로 옆구릴를 찔러서 자신의 피를 전 인류의 속죄를 위해 흘리신 것은 확신한 진리입니다.

맥아더목사의 교리는 순전히 이단 교리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셨다면 가련하고 무능하고 희망없이 버려진 죄인들을 구속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맥아더와 딤과 또 그들과 함께하는 다른 사람들의 사악한 이단 교리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의 나머지 생애 동안 제가 값없이 구속받은 것을 계속해서 찬양할 것이며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그것을 찬양할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權勢)가 있는 예수님                
누가복음 5:17-2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요 8: 58).    

누가복음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But I want you to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So he said to the paralyzed man, ‘I tell you, get up, take your mat and go home.’”

농구 선수들은 “삼중위협”(三重威脅)의 위치와 자세(“triple threat” position)의 힘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선수가 공을 가졌을 때, 슛을 하거나, 패스를 하거나, 골대 밑으로 몰고 가기 좋은 위치(位置)와 자세(姿勢)를 가리키는 말이다.
삼중 위협의 위치와 자세를 취한 선수는 수비 팀에 추가의 압력을 가한다.
여러 가지 능력(能力)을 발휘(發揮)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훌륭한 설교자로 혹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자로 생각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맞는 말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주시려고 하는 것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놀랍고도 중요한 선물은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권세이다.


누가복음 5:12-26

예수님이 어부들인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셔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 (5: 1 -11)과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 (5: 27 -32) 사이에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두 병자를 고쳐주신 두 가지 사건(事件)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나병 들린 사람을 깨끗이 고쳐주신 일이고 (5: 12 -16),
다른 하나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일이 되고 있다 (5: 17 -26).

병자를 고치는 일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흔한 일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한 동네에 계실 때, 한 나병 환자가 담대하게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간청하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나타내었다 (5: 12).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금지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적 규범을 깨뜨리셨다.

먼저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났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 많이 퍼지게 되자, “수 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은 예수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마치고 가버나움으로 돌아 오셨을 때 일어났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 자리에는 여러 곳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려고 하였다 (5: 18).

그러나 그 집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없었다.

절박함과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비상한 방법으로 일을 하게 하였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어 천장에 구멍을 내고, 병자를 침상째 예수님이 앉아서 가르치고 계신 방 가운데로 달아 내렸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방해가 아니라 기회로 보셨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므로, 중풍병자가 온전하게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당시 예수님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에 근거(根據)하여 그같이 말씀하셨다.

분노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며,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하는 자로 정죄하였다 (5: 21).

     그 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다.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는 치료 자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실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신다. 
그 같은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입증(立證)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다.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가 누었던 침상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자, 목격자들은 그들이 본 것에 놀라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믿음의 증거를 나타낸 사람들
누가복음 5:17-19

하루는 예수님이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서 일어난 일로 밝혀지고 있다(막 2:1 -12).
그 자리에는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침상에 메워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기 원하였다(막 2:3).
예수님이 앉아 계신 자리까지 들어갈 수 없음으로, 그들은 중풍병자를 지붕위로 메고 올라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천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다.  

누가복음 5장 17절
●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시며 전도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시던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막 2:1).하루는 예수님이 그 집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그 자리에는 많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도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1세기에 유대교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보수적인 종파의 하나로 대표되었다.   

또 다른 종파인 사두개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세력과 권위를 행사한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유대지역과 갈릴리 전역에 흩어져있는 회당을 중심으로 큰 영향을 행사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율법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율법 자체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제한과 규칙들을 부과하는 율법주의(律法主義)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일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율법의 진정한 해석자(解釋者)이자 보호자(保護者)로 여기며 주장하였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갈등은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무거운 전통의 짐으로 만들고 율법을 성경에 맞지 않고 부적절하게 해석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거부하신 것에 집중되고 있다.

율법교사”라는 문구는 다른 맥락에서 서기관이라는 용어와 대략적으로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눅 15: 2).

서기관(書記官)으로도 불려지고 있던 “율법교사”들은 성경말씀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뿐 아니라,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성경전문가들로 인정을 받았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그 자리에는 많은 바리새인들이 와 있었는데, 누가는 그 같은 사실을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가는 그들의 동기(動機)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율법적으로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를 찾을 목적으로 찾아 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같은 사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라고 한 6장 7절의 말씀에서도 잘 입증되고 있다.

    누가는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는 말로, 그 날에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당연하게 들리는 말로 17절을 끝 맺고 있다.

누가 복음의 이방인 청중은 치유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다양한 이방 신들에 익숙해 있었다.

의사였던 누가는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은 몸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5장 18 -19절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누가는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메고 [왔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마가는 그 중풍병자를 “ 사람”이 메워가지고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막 2: 3).

그들은 소문을 듣고 구경 삼아 예수님을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꼭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들이 침상에 메고 온 중풍병자를 “예수[앞에 들여놓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막 2: 1),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은 자기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전에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거나, 그 같은 소문을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간에, 그들은 중풍병자 친구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올만큼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일행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하였다.

그 집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가복음은 “ 앞까지도 들어설 자라가 [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밝히고 있다 (2: 2).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그곳에 모인 군중들이 영적인 가르침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이라면, 중풍병자가 예수님한테 들어갈 길을 내줄 만큼 영적으로 민감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그같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쉽게 단념하고 돌아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친구의 병을 고쳐주어야겠다는 간절한 염원(念願)과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자, 네 명의 친구들은 병자를 메고 “지붕”위로 올라갔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택들은 보통 평평한 지붕으로 지어져 있었고, 외부에는 계단이 나 있었다.

평평한 지붕은 가외(加外)의 생활공간(生活空間)으로 사용되어, 여름에는 바람이 부는 시원한 장소가 되었다.

그 같은 건물 구조는 시몬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라고 한 사도 행전 10 장 9 절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지붕들은 다양한 재료들로 덮여있었는데, 작은 집들은 초가 지붕을 사용하였는데 반해, 큰 집이나 고급(高級) 집들은 찰 흙으로 구운 타일이나 석회석 타일로 깔았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집은 지붕이 “기와로 덮여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으로 올라간 네 사람은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와들을 벗겨내고 병자를 들어 내릴 만한 크기의 구멍을 내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방안은 갑자기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 차고 천정에서는 나무 조각들과 흙들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그들을 막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같은 실정으로 인해, 어떤 성경 주석자들은 그 집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머무르실 때 거처하신 곳이었거나, 집 주인이 예수님과 가까운 측근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세 복음서 (마 9: 1 -8; 막 2: 1-12; 눅 5: 17 -26) 모두 네 사람의 행동으로 인한 소동이나 집 주인의 반응을 묘사하지 않고 있다.

모든 초점(焦點)은 친구들의 끈기와 중풍병자의 필요, 그리고 특별히 그 사람들이 나타낸 놀라운 믿음을 보셨을 때 예수님의 반응에 집중되고 있다.

    친구들의 행동은, 절박한 심정을 암시하고 있는 반면에, 실제로는 희망의 표현이 되고 있다.   

그것은 중풍병자가 일상적인 방법으로 회복 될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뜻하는 일이 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1 세기 가버나움에 살았던 그 중풍병자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셨던 것처럼, 그는 또한 오늘 날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치료할 수 없는 죄의 병에 걸려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유일하고도 참된 소망이 되신다.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다 어떤 장애물들을 놓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죄를 사함 받은 믿음 (누가복음 5장 20 -24절)

 

우리는 그날 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얼마나 먼 곳에서 데려 왔는지 모른다.

우리는 또한 그들이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것을 알고 있었는지. 만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어던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거나 어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예수님이 병든 친구를 고쳐 주실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따라서 그를 예수님 앞에 데려 오기 위해서는 어떤 장벽이나 장애물도 극복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친구의 육체적 치유를 훨씬 뛰어 넘는 놀라운 것이 되고 있다. 

 

누가복음 5장 20 -21절:


●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네 사람이 지붕을 뚫고 “병자를 침상째” 방으로 달아 내렸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충격과 당혹감으로 지켜 보았을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은 그 같은 상황 속에서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이 행한 일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사건(事件)은 누가 복음에서 처음으로 복음서 저자가 사람들의 믿음과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 사이의 직접적(直接的)인 연관성(聯關性)을 표현한 것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은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침상에 누워있던 병자의 믿음까지도 가리키는 말이 되고 있다.

그 같은 점은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야고보도 그의 서신에서 병의 치유와 죄의 용서를 믿음과 연결시키면서 “서로 기도하라”는 말로 중보기도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약 5: 15).

     예수님은 침상에 매달려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관심을 돌리시고, 그를 쳐다보시면서 먼저 그를 “이 사람아”라고 부르셨다.

모든 사람들은, 특별히 지붕 위에 있는 네 친구는.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전적으로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상 외로,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명한 그 병자의 문제와 필요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이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게 여길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어렵고도 힘들게 찾아온 분명하고도 절박한 목적을 예수님께서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생각하고 크게 실망했을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먼저 해결해 주시려고 한 인간의 더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와 필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들은 그 병자와 친구들의 반응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중들 속에 앉아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분노에 가득한 것이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며 “오직 하나님 외에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강하게 정죄하며 힐문하였다.

그들이 그 같이 강한 반응을 보인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선지자일지라도,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고,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이 누가 죄를 사해주는지를 구체적으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으로 단순히 그 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은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반면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그 사람의 죄를 사해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 책략을 아셨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같이 표현하셨을 수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였다는 것이다.

     1세기 당시에 유대교 내에서의 신성모독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그에 따르는 처벌에 대한 문제는 성경학자들이 계속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주제가 되고 있다.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부정(否定)하는 행위나 말은 신상모독이 될 수 있었다.   

고대 랍비의 일부 작품들은 율법에 대해 비방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신성모독 죄에 포함시키고 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문제로 삼은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하신 것과 하나님께 속한 명칭을 사용하신 일이 되고 있다.

한 예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기는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이니라”고 하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을 한다며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요 10: 30 -33).

또 다른 한 예로, 예수님이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을 “그리스도”로 자백했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면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였다 (막 14: 61 -64). 

     본문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인해 “신성모독”을 했다고 믿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맞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해주실 수 있으시다.           

 

누가복음 5장 22 -24절:


●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들 종교지도자들이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 아시고 계신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생각을 아[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 종교 지도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를 완전히 알고 계 셨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반문하시면서, 그들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질문으로 대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라고하셨다.

중풍병자와 같이 인간의 문제가 분명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는 것과 그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지시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말하기가 더 쉽겠는가?  

말할 수 있는 면에서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외적 증거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는 모두가 그같이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즉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인자”로 지칭하셨다.

예수님은 인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메시야로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아셨다 (눅 21: 27).             

순교 당하기 직전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는 설교를 할 때, 스데반은 환상으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이를 묘사하였다 (행 7: 55 -56).

이 구절은 인자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특별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메시아로서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기를 원하였다.

아무리 많은 신학적 논쟁을 벌린다 할지라도 이들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주장을 납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만이 충분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다음, 중풍병자를 향하여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은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로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 중풍병자는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와 친구들이 참 믿음을 행동으로 보였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의 가장 큰 필요인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셨다.  

겸손한 마음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오면,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만일 당신이 그날 군중들 속에 있었다면,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행한 일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당신은 어떤 필요를 예수님께 가져오고 싶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믿음 (누가복음 5장 25 -26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 하셨을 때 그것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였다.

군중들 가운데서도 그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또한 예수님처럼 죄를 사해주며 병을 치유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그 중풍병자가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 갔을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누가복음 5장 25 -26절


●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었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라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즉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그가 더 나아지는 것을 보려고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본문은 그 병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밝혀주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태가 침상에 누워 사람들에게 메워 올 만큼 나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는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는 짧은 말로,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이 기쁨과 감격에 차서 자기를 데려온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나머지 군중은 그 치유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누가는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영광을 돌리다’ 혹은 ‘찬양하다’라는 말은 누군가를 칭찬하고 그의 평판을 높이는 방법으로 그의 위대함을 확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누가는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는 한마디 문장으로, 군중들이 말로 표현한 반응들을 요약하였다.

놀라운 일”로 번역된 말은 어떤 것이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 혹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군중들은 그들이 목격한 기이하고도, 경이로우며, 예상치 못한 사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당신은 소망이 필요한 사람들로 누구를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소망을 알려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이나 당신과 가까운 사람의 삶에서 놀라운 일을 하신 때에 대해 적어보십시오.  
그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당신이 이해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2장 1절부터 3장 6절까지는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5번의 논쟁이 연속해서 일어나는데 본문은 그 첫 번째 논쟁을 다룹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엔 어디를 가셔도 더는 감추실 수 없었습니다(1:45).

“수일 후에”다시 가버나움에 들어오시자 다시 “집에 계신 소문”이 퍼졌습니다(2:1).

문둥이를 불쌍히 여기신 대가로 사역하시기가 훨씬 불편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문둥이가 이처럼 사역을 방해하게 될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역을 좀 더 쉽게 하려고 불쌍한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문둥이의 허물과 약점을 다 짊어지시고 모든 불편을 감수하신 채 사역하셨습니다.

문 앞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2).
이 구절의 “도”는 노자 사상의 ‘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은 1장 15절에 요약되었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이겠지요.
아무튼, 마가는 말씀의 내용은 밝히지 않고 말씀을 전하셨다는 사실만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후에 “전도”하겠다고 결심하신 일을 실행에 옮긴 것이지요(1:38a).
1장 33절과 비교하면 예수님의 태도엔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몰려온 무리의 필요에 따라 병을 고쳐주시거나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리가 어떤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하기를 결심하시며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b)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시는 중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에 소비자가 왕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소비자는 자신의 필요를 따라 선택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당연히 배제합니다. 그것이 소비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할 때도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지 아닌지에 따라 선택하기도 하고 배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소비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필요 중심으로 주님을 찾을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단락에서 하나님 나라는 왕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으로 임하며, 백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전처럼 계속 군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만 하신다면, 백성은 왕이 되고 예수님은 종인 이상한 나라가 건설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소비자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나의 필요보다 하나님과 교회의 필요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신앙의 기초가 바르게 놓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중심으로 선택하고 배제하는 까칠한 소비자의 태도가 신앙 형성 과정에 작용한다면, 분명 그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말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왔습니다(3).
입구의 무리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자,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렸습니다(4).
유대 서민들은 보통 단층의 흙벽돌집에 살았습니다. 지붕은 평평하고 집 바깥에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지붕은 나무 들보를 놓고 짚과 흙(가끔은 기와와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뜯어내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가 누운 “상”은 짚으로 엮은 돗자리나 담요 같은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방법은 유별납니다. 기발하고 창의적이긴 한데, 무례하고 황당합니다.

 

마가는 당시 집주인이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지붕을 뚫는 동안 발생한 엄청난 소음과 군중의 소란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방안으로 흙이 떨어질 때 예수님의 말씀이 중단되고,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소동했을 텐데 이것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오직 예수께서 무엇을 보셨고,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어 있습니다(5).

 

먼저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행위를 보고 판단합니다. 내면을 보려고 노력할지라도 드러나는 겉모습을 통해 추측할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 중심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이 장면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도 행위를 보셨다면, 말씀 집회를 방해한 그들은 진노를 당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한 행위 속에서 오직 믿음만을 골라내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또한 복음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은 불순물이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 속에 이기심이나 교만함이나 무례함이 붙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헌신의 믿음 속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가장 거룩하게 구별한 예배 시간조차, 경배하는 그 마음에 온갖 잡생각이 섞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소 생활의 행위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만큼 매우 무례합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살필수록 믿음만을 보시는 우리 주님의 시선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께서 보신 믿음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은 사회의 통념이나 인간관계의 예의를 뛰어넘을 만큼 역동성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머릿속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과 제한을 뛰어넘어 행동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부딪친 장벽 앞에 주저앉아 버릴 만큼 허약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한 상황을 돌파할 만큼 강력한 능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긴 사람은 예전과 같은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거기 앉아 있던 어떤 서기관들의 마음에 큰 충격을 줍니다(6).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 이날 죄 사함의 선포로 서기관들이 예수님과의 갈등을 시작합니다. 첫 만남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는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침범했으니, 지붕 뚫고 침범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례한 인물로 각인됩니다. 만일 예수께서 병만 고쳐주셨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 고치러( 온 사람에게 느닷없이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스스로 논란거리를 만드셨습니다.

병자가 지붕을 통해 내려올 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반응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긴장된 상황을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적 권위를 드러내실 절호의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먼저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중심에 아시고”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8).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속생각을 추측할 수는 있으나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왕상 8:39; 렘 17:9~10).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의 생각까지도 아십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
특별한 행동 속에서 믿음을 보는 일이나 특별한 상황에서 마음의 생각을 아는 일 정도는, 통찰력 있는 사람도 충분히 어느 정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 사함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죄 사함은 서기관들이 올바로 생각한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통찰력 있는 인간도 죄를 사해줄 수는 없습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메시아조차 죄 사함을 위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오랫동안 율법을 연구하고서도 예수님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러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죄 사함을 선언하실 때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신성모독은 그들이 행하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9)는 질문은 관점에 따라 답이 다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죄 사함 선언이 어렵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선언하실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사에서도 천지 창조는 6일 걸렸는데, 죄 사함을 선언하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렸으니 죄 사함 자체가 더 어렵습니다.

일상의 관점에서는 죄 사함 선언이 더 쉽습니다.
병 나음은 즉석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죄 사함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관점에서도 말하는 행위 자체는 둘 다 쉽습니다.
하지만 말한 대로 실현하는 일은 둘 다 인간에겐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관점에서 말씀하셨을까요?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람인 주제에 죄 사함을 선언했으니 그것은 단지 ‘빈말’이라 여겼겠지요.
예수님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려 하셨습니다.
그들의 수준까지 내려가셔서, 일상의 관점에서 보다 말하기 어려운 일을 행함으로써 증명하려 하신 것입니다.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말씀이 즉시 이루어진다면, 죄 사함의 선언 역시 즉시 이루어졌음을 유추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10).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치셨을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먼저 제사장들에게 보이게 하셨습니다(1:44).
또 자신의 본질을 감추시던 주님께서 서기관들에게는 먼저 알려 주려 하십니다.
왜일까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 시대가 오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셔서 죄가 다시는 기억되지 않게 하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사 43:25, 44:22; 렘 31:34, 50:20).
짐승의 피를 통해 잠깐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자가 되실 것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사 43:11).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이심을 먼저 깨달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따져 보면,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발생한 갈등은 예수께서 종교 지도자들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으셨습니다.
또한, 왕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서기관들 중 몇을 즉석에서 중풍에 걸리도록 하심으로써 증명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의 본질을 백성보다 먼저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특권을 베풀수록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나쁜 인상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지라도 예수님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이들처럼 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뛰어난 인간에 불과하다는 선입견으로 접근한다든지,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나쁘면 율법 전문가라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대적하는 적대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셨고, 그 말이 떨어지자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11~12a).

예수님의 말씀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그 권능 그대로 역사했습니다.
‘있으라’하신 말씀과 함께 천지 만물이 있게 되었듯이 말씀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12b).
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전엔 도무지 보지 못했던 메시아 시대의 한 단면을 맛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죄 사함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하는 영광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함 받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병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라도 불행하게 만들진 않습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 죄를 짓습니다.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돌아보면 지나온 삶은 죄와 허물투성입니다. 인류 최악의 소식은 이 죄를 인간 스스로 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죄의 비밀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고, 하나님은 더욱 속일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몰래 숨긴 한 가지 죄 때문에 평생 불안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도 그의 병보다 죄 사함이 더 필요함을 아시고 죄부터 사해주셨습니다.

 

참으로 두렵게 생각할 일은 이 땅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히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죄를 사함 받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은 이 땅에서 죄가 사해진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죄 사함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재림 때나 되어서야 죄 사함을 받는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만이 하실 일을 하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신 그분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면 이 땅에서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몰려와서, 집 앞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잡했다. 그 와중에 네 명의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와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려서 예수의 치유를 받게 되었다(1-12절). 예수께서 바닷가로 나가 무리를 가르치신 후에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제자를 삼으시고, 그의 집에 가셔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셨다(13-16절).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고(17-22절), 안식일에 밀밭의 이삭을 잘라먹은 것과 관련해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대답하셨다(23-28절).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창조의 복된 상태를 누리는 것을 말힙니다.
또한 모든 생업을 중단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아간다는 신앙 고백적 행동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은 장차 올 천국의 예표로 이해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거룩한 날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일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일과 선한 일들을 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의 병 고침의 사역은 안식일에 일어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피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실 수도 있었을텐데, 바리새인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까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신 사건들을 보면 안식일의 의미가 병자 치유의 사건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기원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안식하셨으므로 우리도 안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시느라 피곤하셔서 하루를 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은 천지 창조 후에 피조 세계를 복 주시고 창조 질서를 보존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후에 이러한 안식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안식이 깨진 것입니다.

구약 율법이 말하는 안식일의 의미를 살펴보면 출애굽기 22:11에서는 창조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이지만, 신명기 5:15에 의하면 출애굽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라고 합니다.

출애굽을 구원의 상징으로 본다면 죄악의 땅인 애굽에서는 안식이 없었으나 이제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은 후부터는 새롭게 안식의 의미가 인식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후 안식이 깨졌으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진정한 안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출애굽 사건이 증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안식일 논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모든 죄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고 태초의 창조 질서가 회복되는 날이기 떄문입니다.

병과 죽음은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죄로부터 거룩하게 만드는 구원 사역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 없이는 안식일이 없습니다.








06-10-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3장 / 네 손을 내밀라(5절)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He looked around at them in anger and, deeply distressed at their stubborn hearts,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completely restored.  

1-6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
7-12 바닷가에 있어서의 군중과 치유.
13-19 12사도의 선정.
19-21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를 붙들러 오다.
22-30 서기관들의 비방과 예수의 대답.
31-35 새로운 영적 친족관계.


손(5495) 케이르(chĕir) χείρ, χειρός, ἡ


1.  손,  2. 마태 12:10,  3. 하나님의 손
발음 / 케이르(chĕir)
어원 / 5494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손(막 3:3, 요 20:20, 계 14:14), 권능(행 4:28), 팔(요 21:18), 손짓(행 21:40)
신약 성경 / 178회 사용
* 5494.  χειμών, ῶνος, ὁ 
1.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씨
2. 나쁜 날씨가 많은 계절
발음 / 케이몬(chĕimōn)
어원 / χέω ‘붓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겨울(마 24:20, 요 10:22, 딤후 4:21), 풍랑(행 27:20), 궂은 날씨(마 16:3)
신약 성경 / 6회 사용

내밀라(1614) 에크테이노(ĕktĕinō) κτείνω

1. 뻗치다,   2. 퍼뜨리다,  3. 마태복음 26:51
발음 / 에크테이노(ĕktĕinō)
어원 / 미래 ἐκτενῶ , 제1부정과거 ἐξέτει- να, 1537과 τείνω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내밀다(마 8:3, 막 1:41, 행 4:30), 펴다(마 26: 51), 대다(눅 22:53), 벌리다(요 21:18), 내려 놓다(행 27:30), 들다(행 26:1)
신약 성경 / 16회 사용

* 1537. ἐκ
1. 모음 앞에서는 ἐξ,  2. 마태복음 2:15,  3. 요한복음 15:19
발음 / 에크(ĕk)
관련 성경 / ~에서부터, ~에서부터 멀리, ~로 말 미암아, ~에게서 온(마 1:18)
신약 성경 / 916회 사용

* τείνω

엿보다(3906) 파라테레오(paratērĕō) παρατηρέω 스트롱번호3906
1. 가까이서 지켜보다,  2. 악의를 가지고 지켜보다, 3. 기회를 노리다
발음 / 파라테레오(paratērĕō)
어원 / 미완료 παρετήρουν, 미완료중간태 παρετηρούμην, 제1부정과거 παρε- τήρησα, 3844와 503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엿보다(눅 6:7, 14:1), 지키다(행 9:24, 갈 4:10)
신약 성경 / 6회 사용

일어서라(1453) 에게이로(ĕgĕirō)

ἐγείρω 스트롱번호1453
1. 깨우다
2. 일으키다
3. 마태 8:25
발음 / 에게이로(ĕgĕirō)
관련 성경 / 일어나다(마 2:14, 막 5:41, 행 12:7), 일어나게 하다(마 3:9), 깨우다(마 8:25), 살리다(마 10:8, 요 12:1, 행 10:40), 살아나다(마11:5, 막 6:14, 요 2:22), 내다(마 2:11), 일어서다(막 3:3), 깨다(막 4:27, 눅 8:24, 롬 13:11), 세우다(행 13:22, 23), 살다(고전 15:20, 43)
신약 성경 / 144회 사용




오늘 우리가 내밀어야 하는 손은 어떤 손인가?

첫째, 말씀을 지키지 못한 손(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둘째, 사람을 죽인 손(창세기 4:8)

가인이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요한일서 3:15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 대왕은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두 손을 펴 관 밖으로 내어 놓으시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가는 것임을 온 백성이 볼 수 있게 하시오." 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두 손을 꽉 쥐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날 때는 모두가 손을 편 상태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간은 두 손을 움켜쥐고 무엇을 잡으려고 태어났짐만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 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손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그 사람의 직업이라고도 합니다.
선수(先手)는 손이 뽑힌 사람
실수(失手)는 손이 실패한 사람
조수(助手)는 손이 돕는 사람

손이 부족한다!
손을 뗀다!
손 쉽다!
손 안에 있다!


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는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수 있음은 이 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도구적 인간(호모 파베르, homo faber)' 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이 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손을 얼마나 능력 있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위인이 되기도 하고 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손은 그 사람의 능력과 인격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사람은 "내 손안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모자랄 때 우리는 손이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어떤 일에 능한 사람을 우리는 선수(選手)라고 합니다.
선수란 뽑힌 손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과 관계를 끊을 때 손을 뗀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한 편 손이 마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의 직업을 외경 ‘히브리인의 믿음’이라는 책에서는 "석수(石手)"이었다고 합니다.
석수는 손으로 돌을 다듬으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손이 마른 상태라면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일을 하다가 손을 다치게 되었을지 아니면 돌에 찍혔을 수도 있습니다.
또 망치를 치다가 손을 다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오른손을 다쳐서 한쪽 손이 불편했습니다.
한 손을 쓰지 못하자 그의 인생도 바뀌었습니다.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힘들어졌습니다.
악수를 하려고 하더라도 손을 내밀수가 없었습니다.
이 석수는 점점 사회 속에서 멀어져 갔고, 외톨이가 되어서 살아갔습니다.
육체적 핸디캡이 사회적, 인격적 핸디캡으로까지 번지게 된 것입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한 순간에 우리 모든 것이 다 바뀔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손 마름’ 이것은 이 석수에게는 인생에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소망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바로 ‘예수님’이라는 분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고, 문둥병도 고치고, 그를 만난 사람들이 병든 자신의 모습에서 회복이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회당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회당을 찾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예수님이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그 회당에 오신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회당을 찾으신 것입니다.
회당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회당에서 모든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회당에 들어가니깐 ‘손 마른 자가 있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 마른 자가 ‘주님을 오실 것을 기대하며 회당에 와 있었던 ’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문제’ 있는 사람은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의 사례 /
웃시야 왕이 나라를 통치할 힘이 없었을 때에 그는 주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웃시야 왕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왕도 병으로 죽음에 이르자 그는 자신의 생명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갑니다. 한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삶의 문제, 자식이 없어서 홀대받고 살아온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도 주님을 찾았고, 문둥병 걸린 열 명의 사람들은 주님을 향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백 부장은 하인의 죽음 앞에서 주님을 찾아서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문제 있는 인생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없는 인생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교회 올 때 문제를 갖고 와야 합니다.
삶의 문제, 영혼의 문제, 관계의 문제, 물질의 문제 등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나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찾을 때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바라보며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 함께 기도해 주고 근심해 주고 하는 좋은 의도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를 트집 잡기 위해서 회당을 찾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절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누가복음 14장에서는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율법 교사, 바리새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초신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좀 성경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히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교회법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질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누구보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안다고 했던 ‘바리새인들’ 그들이 주시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과연 이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도 고쳐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율법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예) 안식에 규례를 보면 ‘의사가 무료로 병을 고쳐주는 것과 유료로 병을 고쳐주는 일 중에 어느 것이 안 되는 것일까요? 모두 안되는 일입니다. 무료든 유료든 아예 병을 고쳐 주는 일은 안됩니다. 그래서 다리가 삐었습니다. 찬물에 담가야 하지요? 안됩니다.

손을 베었습니다. 후시딘을 발라야 하지요? 안됩니다. 그러나 붕대를 감는 것은 됩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병을 치료해서는 안됩니다. 더 악화되는 것을 막는 것은 됩니다.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를 낳아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낳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를 갖고 하는 모든 치료 행위를 유대인들은 ‘일’로 보았습니다.

아마도 회당에 있던 바리새인들도 ‘손 마른 자에 대한 치료 행위가’ 주일을 범한 만큼 중한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손 마른 자를 고쳐 주게 되면 이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일’로서 돌에 맞아 죽일 수도 있는 큰 범죄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한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들은 율법은 보았지만 ‘ 불쌍한 영혼’ 은 보지 못했습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한 영혼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그다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 이것에 그들은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무엇이라 대답을 합니까? 전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도 ‘사랑’ 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그 사랑’ 이 없었습니다.

영혼을 향한 긍휼함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와야 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나와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갑니까?

‘이번 주 아무개 집사님이 안색이 안 좋으시네,, 요즘 사업이 잘 안되신다고 하는데, 좀 힘든가 봐.. 기도해 줘야겠어.. 자식이 말썽을 피운다고 하는데 얼굴이 많이 말랐네... 기도해 줘야겠어.. ’

이런 모습이 좋습니까?

아니면 ‘이번 주에 가보니 아무개 권사가 예배드리는 모습이 영 아니야.. 나한테 이렇게 말을 했네.. 아주 교만이 싹이 트네요, 싹이 트여..

이렇게 다른 사람의 결점과 실수만 트집만 보고 갈 것입니까?

주님의 눈으로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눈이 필요합니다.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영혼을 향해서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바로 이 마음, 이 열정, 이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이 아닌 그 아픔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예닮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대해서 주님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셨습니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고, 또 손을 고쳐주면 고발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도 예수님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이라는 것이 마음을 전달해 준다고 하잖아요? 눈빛을 보면 사람을 알수 있습니다

먼가 숨기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눈을 보면 그가 나를 사랑으로 보는지 나를 가증하게 보는지, 또는 나를 트집 잡기 위해서 보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주님도 그들의 눈을 통해서 아마도 이미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지능을 다루는 아이큐가 있습니다. 아이큐가 높을수록 이성적인 활동이 더 높습니다.

또 이큐(EQ)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감성지수’라고 합니다. 감성지수가 높을수록 다른 사람의 심리나 마음을 잘 안다고 합니다.

아이큐보다 이큐가 사회생활에서는 더욱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큐가 높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더 잘 파악합니다. 의도를 더 잘 파악합니다.

그래서 이큐가 높으면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해서 거기에 적당히 대처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이큐가 높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 다른 사람의 의도’를 알고 미리 그 사람을 역이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역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이치이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을 쓰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쓸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하신 것을 보십시오

자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자신을 고소하고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한가운데 일어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손 마른 자를 향해서 ‘사람들 한가운데 일어서라’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곳에 세우십니다. 주님은 사람들 주변으로 끌고 가서 조용히 말하며 그를 고쳐 주시지 않으셨고,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바보스럽습니다. 왜 굳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5절을 보십시오 ‘네 손을 내밀라’ 그리고 그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의도대로 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도를 알고는 그들의 의도를 역이용해서 그들을 칩니다. 그리고 통쾌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입니까?

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입니까? 다른 사람의 의도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 의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나의 태도는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 있는가’ 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안에 주님의 길 가운데 서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고,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고 죽는 것에 나의 이익이나 불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길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늘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가 주님을 잡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을 로마 병사들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예수님이라는 표징으로 주님께 와서 ‘랍비여’ 하고 이마에 키스를 합니다. 이 행위는 벌써 로마 병사들과 짜 놓은 시나리오입니다. ‘내가 이마에 키스하는 자가 예수니라’ 그래서 그는 주님을 보고 주님께 이마에 키스를 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 가증한 행위를 하는 자를 향해서 손을 들어서 뺨을 쳤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니?,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아니면 저주를 내뱉어 줄 것입니다. ’

그러나 주님은 그의 키스를 받으셨습니다. 그의 의도를 다 아시고도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그 길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길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변의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이 나를 모함하고, 나를 위험 가운데 빠지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늘 주님의 뜻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십자가의 길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는 모습이며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당당한 모습입니다.

늘 주님의 뜻 안에 서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주님은 손이 마른 자를 향해서 ‘네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아픔을 내 앞에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너의 상처와 너의 부족함을 내게 내어 놓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진정으로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말라버린 가슴입니다. 말라버린 영혼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 영혼, 다른 사람을 향해서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마음, 우리 마음은 말라 버렸습니다.

그 마음을 내어 놓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손 마른 자처럼 우리들의 말라 버린 마음을 주님께 내어 놓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 지라"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한편  손 마른 사람' 그는 아주 심한 장애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생각은 할 수  있었지만 그의 손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손이 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다가 한편 손이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이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가 안 고쳐 주시는가 엿보고 책잡기 위해서 온 바리새사람 몇이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그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고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물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그 당시 바리새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완악한 것을 근심하셔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한편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네 손을  내밀라" 하셨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자기의 마른손을 그냥 내밀 수는 없었습니다. 그 동안 마음으로는 내밀고 싶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 따라 순종하고 내밀었더니 말라서 움직이지 않던 손이 힘을 얻어 앞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손이 말랐던 사람이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하는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바리새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오히려 분이 가득해서 나가서 헤롯왕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하고 모의를 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병을 고침 받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병고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일에  회당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새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편 손이  말라서 불행하게 지내는 사람의 마른  손을 고쳐서 온전한 손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계신 줄 믿습니다.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여기 모인  우리에게 역시 두 가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바리새  사람들이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바리새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리새 사람들의 인상은 아주 악하고, 나쁜 사람이고, 외식하고, 교활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편견이지 바리새사람을  바로  알고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 사람들은  본래  율법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도  보통  사람이상으로 열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때 문자 그대로 모든 계명을  엄격하게 지키기를 힘쓴 것입니다. 가령 안식일을 지킬때도 넷째 계명에 써 있는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넷째 계명에 보면  그 날은  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집안에 유하는 손님이라도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데 문자 그대로  절대 무슨 일을  하지 않고  지키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 사람들은 이렇게 율법을 문자대로 지키려고  힘쓰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처럼 살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걸어가다가 배가 고프니까 밀 이삭을 따서 비며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밭의 밀이라도 배가 고플 때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은 율법이 허락해 주니까 죄로 인정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문자주의자인 바리새 사람의  눈으로 볼때는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곧 타작하는 것인데  이것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바리새 사람들의  이론이었습니다.
   문자의 뜻만 알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그 근본 원리는 깨달아 알지 못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자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도 많은 사람 가운데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왔으니까 예수가 과연 안식일을 범해서 저 사람의 병을 고쳐주나 안고쳐주나  보고자 한 것입니다. 만일에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면 이것은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어기는 것이니까  그들을 정죄 할 수밖에 없는 이단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선입주견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율법을  읽는데 문자에 표현된 그 뜻만 알고 그 뒤에  있는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것을  보통으로 말해  문자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는 그 말 하나만 알았지 왜  일하지 말라고 하고,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해 주셨는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할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다시말하면 이런 문자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계명 배후에 있는 보다 더 깊은  의미와 원리 그리고 그 근본정신을 몰랐습니다. 여기서부터  바리새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도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바리새  사람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 가면서 누구든지 그대로 좇지 아니하고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잘못되었고 소위  이단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의견이 꼭 옳고, 우리의 해석이  절대로 틀림없다'라고 생각하는  이런 사상적 경향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고  하니 독선주의하고    합니다.     영어로
self-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이런 독선주의 사상을 가지고  바리새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도  율법을 범하는 잘못된 사람  그러니까 이단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 결과 바리새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정신을 잊어  버렸을 뿐더러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 그 불쌍한 사람의 병을 고쳐 준  것에 대해서 기쁘고 감사하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고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그 생각에만 사로 잡혀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정죄하기까지  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바리새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나가서  헤롯왕과 의논을 했습니다.  헤롯왕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과 나가서 무슨 의논을 했어요?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는  모함을 했습니다. 언제요?   바로 안식일에 그런 의논을 했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사람이 독선적 신앙을 가지게 되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정죄하면서  사람 죽일 의논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독선적인 신앙을 가지면 이처럼  조그마한 일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모의하게 됩니다.
   더구나, 율법을  믿지도 아니하는 헤롯왕과 공모해서 죽이기를  의논하는 그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얼마나 큰 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주의는 독선주의를 낳았고,  독선주의는 맹목적 신앙을 낳아서 사람들의  마음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완악해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도덕까지도 무시해서 사람을 죽이려고 음모를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렇게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열심의 방향이 잘못 정하게 되어서  문자주의자가 되고 문자주의자가 독선주의자가 되고, 독선주의자가  맹목적 신앙주의자가 되어서 심지어 도덕까지  무시하는 신앙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 인자하신 주님께서도  그런  사람을 마음 아프게 보셨고 노하심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를  보면  가장 철저하게 책망하고  공박한  대상은 바리새 사람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처럼 왜곡되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그야말로  자기자신을 망칠뿐더러  그런  사람이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민족과 교회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 사람의 누룩을 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바리새사람의 잘못된 신앙을 시정하시고  다음에는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신앙성경의 외경 가운데 히브리인의 복음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손마른 사람은 본래 돌을 다듬는 일을 하는 석수(石手)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오른 손이 말
라버렸습니다. 신경이  죽고 혈맥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석수일을 할 수 없게 되니까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회당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  말라버린 오른  손을 고치고 싶은 마음에서 회당에  들어 왔다고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가 손이  말라버려서  손이 있기는 하지마는 쓰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당에  오셔서는  언제나 이와 같이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 중에 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이 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
을 하려 할 때 이 손이 없이 할  일은 거이 없습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손으로  밭을 갈고, 손으로  씨를 뿌리고,  손으로 김을 매고,  손으로 추수를  합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도  손으로 만듭니다.
집을 짓는  사람도 손으로 집을 짓습니다.
의사는 손으로 수술을 합니다.
간호사는 손으로 붕대를  감습니다.
미술가는 손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음악가는 손으로 악기를 연주합니다.
손 없이 할 일은 없습니다.
이  손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석공의 손이 말라 버렸습니다.
손으로 일하던 사람이  손이 말라버렸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끔 되었습니다.
아무 쓸모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빌어먹는 가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실제로 손이 마른 분이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보면 내 손이 마르지 않았습니까?
사실 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른손의 장애를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자신과  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좋은 생각은 있지만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린드 버그는 대서양을 횡단하기 전에 그는 그것을 꿈꾸어 왔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머릿속에 언제나 전등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행동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꿈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실패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행동에 옮기고 싶은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직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또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변명은 손이  말라서라는 말입니다. 생각은 좋은데 행동에 옮기지  못합니다.
   이렇게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충분한 주의력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른손에 대해서  말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혼자 힘으로 행동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여러 번 손을 써 보려 애써 보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함께 있습니다.  "해야지"하고   말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너는 할 수  없어"라는 외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확신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이 과연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는 손을 펴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믿음과 그의 믿음이  일치하는 순간 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망설이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계획합니다. 언젠가는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만 믿는  한 결코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손이 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네 손을 내밀라" 주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손으로  봉사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얘들아,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포도원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다 이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해야 할 손이 있습니까? 손은  있지만 일 할 수 없는 손 마른손이 아닙니까? 과연  신령한 의미에서  내 손이 주님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을 봉사할 수  있습니까?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손이  있습니까? 주를 위해서 교회를 받드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교회학교에서 봉사 할 수 있는 손이 있습니까? 구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손이 있습니까? 성가대에서 봉사할 수 있는  손이 있습니까?  불쌍한 사람들  도와 줄 손이 있습니까? 영적으로 마른손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어떤 분은 지방에서는 열심히 봉사했는데 서울에 와서  봉사의 손이 마르지는 않았습니까? 결혼 전에는 열심히 봉사했는데 결혼  후에 봉사의 손이 마르지 않았습니까?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봉사했는데  장년이 되면서 사업이 커지고  바빠지면서 그만 그  손이 말라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몇  해 전까지  만해도 주의 일을 잘 했었는데 금년에 와서 그만 그 손이 말라 버린 분은 안 계십니까?
   "네 손을 내밀라" 마른손을  주님앞에 내어 밉시다. 그래서 주님의 새로운 은혜와 능력을 받아서  일할 수 있는 손,  봉사할 수  있는 손을 가지시고 이 자리를 떠나시기  바랍
니다.
   그리고 이 손은 예나  지금이나 기도하는데 많이  사용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내가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나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옛날에는  기도할 때   손을 들고 기도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해 나올 때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과 싸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두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래 기도하다 보니까 손이  피곤해서 손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아말렉사람에게 여호수아의 군대가 불리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지켜보던 아론과 훌이 그 옆에 가서  모세의 두 손을 부축해서 계속해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이스라엘 군대가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손을 모둡고  기도합니다. 손은 기도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손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의 손이 혹시 마르지는 않았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모세가  두손을 내릴 수 없어던것과 같이 오늘 우리 한국의 예수 믿는 사람들도 문자 그대로 두손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와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말렉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손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올라갑니까? 수요 기도회 시간, 심야기도회 시간에 여러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갑니까? 전에는 열심히 기도했는데 요사이는  그 기도의 손이 마르지 않았습니까?
   우리 주님은  보시고 아십니다.
그런 손을 향하여 주님께서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주님앞에 그  손을 내미세요.   그리고 그손에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졸 때가 아니고 깨어 있어 기도할 때입니다.
   더구나 이 손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데 씁니다.
   갈라디아 2장 9절에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과  같이 의논할 때에 그 경험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옛날 번역에 보면 오른손을 주어서 교제를 하였다 했고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교제의 악수를 했다고  하였습니다(the right hand of fellowship).
   교제의 악수, 성도들이 서로 가까이 사귈 때 그 표로써 서로  악수를 합니다. 손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합니다. 이 손은 성도의  교제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실떄 간절히  기도하신  제목 가운데 하나는 주를 믿는 사람이 다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서로 다투지 말고  주를 믿는 사람이 다 아버지와 주예수께서  하나가 된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장에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성령이 하나  되게 한 것을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손에 손을 잡고 주안에서 하나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꼭 같아야 한다는 말입
니까? 그럴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서로가 다르면서도 서로가 존중히 여기면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퍽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 된 것을 잊어버리고 이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 사이는 말할  것 없고  다른 교회라도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참으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과 서로 연락하고 교제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섬김을 위한 손이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손 - 앨버트 듈러의 기도하는 손의 그림의 배경 이야기



화가의 꿈을 가진 두 청년이 있었는데 둘은 너무 가난해서 일을 하면서 그림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 뒤러의 친구 또는 동생 또는 형님이 뒤러에게
내가 돈을 벌어서 네 학비를 댈 테니 네가 열심히 그림을 배워서 나중에 성공하면 그때 내가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줘

뒤러는 미안했지만 그렇게 합의를 보고 열심히 미술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 또는 동생 또는 형님은 뒤러를 위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뒤러는 성공한 화가가 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친구 또는 동생 또는 형님을 만났는데 그만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일한다고 너무 고생한 나머지 손 마디가 휘어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 또는 동생 또는 형님은 뒤러를 보고 반가워하며 이렇게 기도했다지요.

하나님 저는 이제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제 친구 또는 형님 또는 동생 뒤러가 부디 더 성공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한 번 감동의 눈물을 흘린 뒤러는 그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고 명언을 남겼습니다.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1471년 독일의 남부 뉘른베르크 Nuerenburg에서 14 또는 18 형제자매 중 둘째 또는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애들 겁나 많죠?
아버지는 알브레히트 뒤러 아빠 Albrecht Durer the Elder로 이름이 같은데 헝가리 출신입니다. 
성 뒤러는 원래 Türer 인데요 헝가리어로 Ajtósi, 헝가리어를 찾아보시면 문을 만드는 사람, 즉 아주 성공한 세공사였습니다.
그래서 애들도 많이 키울 수 있었겠죠? 

알브레히트 뒤러의 대부는 엄청 유명한 안톤 코버거 Anton Koberger입니다.
안톤 코버거 성경을 출간한 엄청난 갑부 인쇄업자였습니다. 조금 실망인가요?
그 덕에 뒤러는 교육도 잘 받았고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몇 번씩이나 말이죠. 뒤러는 20대에 이미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두 번째 이탈리아 유학 중에는 원근법과 기하학, 신체 비율 등 엄청 체계적인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이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던 것 같기도 하고요.
피렌체의 수학자 루카 파촐리 Luca Pacioli도 만난 것 같고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거장들로부터 제대로 배웠던 것 같습니다. 

뒤러가 그린 기도하는 손은 1508년, 즉 37살에 그린 드로잉으로 원래 제목은 Studie zu den Händen eines Apostels 독일어를 모르지만 사전 뒤적거려보니 사도의 손에 대한 연구로 해석이 되네요.
두 번째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렸습니다.
뒤러는 이 손을 파란 종이에 검은 잉크로 그렸는데요 이 작품은 곧바로 인쇄가 되었고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원작을 좀 더 자세히 보면 파란 조이는 원래 파란 종이가 아니라 뒤러가 파란 칠을 했는지 직접 만든 파란 종이입니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 그가 전에 그렸던 다른 작품에서 똑같은 손 모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곧 내 손이니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한 도시가 폭격을 당하면서 커다란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크게 파손됐습니다.
잔해 속에서 동상을 찾은 주민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 동상은 그들의 신앙과 그들 삶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던,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동상을 대부분 복원해냈지만 손은 너무 심하게 파손되어 복원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각가를 고용해서 새로운 손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사람들은 그대로 놔 두고 싶어했습니다.
전쟁의 비극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동상은 손이 없는 채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예수 그리스도 동상 발판에 다음 한 마디 말이 적힌 푯말을 세웠습니다.
“너희가 곧 내 손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심오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구주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손을 내미시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위로하고 치유하고 축복하며 사랑하기 위해 손을 뻗으시는 모습 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걷고 보살피시며 희망과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께서 필멸의 삶 동안 하신 일이며,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살아 계시다면 하실 일입니다.
이는 또한 그분의 제자이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원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구주께서 보이신 완벽한 모범을 따를 때, 우리 손이 구주의 손이 되고 우리 눈이 구주의 눈이 되며 우리 마음이 구주의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감싸 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소금이며 빛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독일은 분단되고, 황폐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갔습니다.
저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교회에서 보낸 식량과 의복이 담긴 인도주의 물자들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그 옷에서 나던 냄새와 복숭아 통조림의 달콤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물품 때문에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회원들은 그런 개종자들을 깔보기도 했습니다.
비아냥거리며 Büchsen Mormonen, 즉 “통조림 몰몬”이라 부르면서 증오했는데 그런 신회원들은 세상적인 필요 사항만 해결되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몇몇은 정말 교회를 떠났지만, 많은 이들이 남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복음의 달콤함을 맛보았으며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품에 안겨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집”을 찾았습니다. 서너 세대가 흐른 지금, 많은 가족들이 교회에 들어온 유래를 찾다 보면 그때 그 개종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환영하고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복장이나 외모, 말투나 행동이 조금 다르더라도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모자란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위에 있는 그런 사람들을 북돋아 줍시다. 환영하는 손길을 내밉시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인간미와 연민과 사랑을 특별히 듬뿍 부어 주어 그들이 마침내 집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게 합시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유혹이 들 때면 “세상을 사랑하사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시려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신]” 구주를 기억합시다.

“그는 이르시기를, 너희 모든 땅 끝이여, 내게로 오라 …… 모든 사람이 서로 같은 특권을 가졌나니 아무도 금지 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경전을 읽으면서 저는 구주께서 가장 혹독하게 꾸짖으신 대상은 주로 자신이 부유하고 권세 있으며 의롭다고 착각하여 자만심으로 가득했던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주께서는 기도하러 성전에 간 두 남자의 비유를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존경받는 바리새인이었던 한 남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한 남자는 미움을 받던 세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리 모두에게 자비가 필요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에 불려갔을 때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결점들에 대해 용서받고 싶지 않습니까?
구주의 품에 안기기를 열망하지 않으십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베풀 줄 안다면 참으로 옳고 타당한 일입니다.

우리의 개인 생활이나 세상에서 죄를 수용하거나 악을 경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열정이 지나쳐서 죄와 죄인을 혼동하고 성급하고 매몰차게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현대 계시를 통해 우리는 “영혼의 가치가 하나님 보시기에 큼”4을 압니다. 우리가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듯이 다른 영혼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이해하면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슬픔으로 가득 찬 세월을 겪은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오래 된 20달러짜리 지폐와 같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구겨지고 찢어지고 더럽고 헤지고 흠집이 났죠.
하지만 이래 봐도 20달러 지폐예요.
아직 가치가 있죠.
그렇게 안 보이고 닳고 해졌더라도 제게는 여전히 20달러만큼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우리의 손은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기고, 연민을 품은 채 우리의 마음과 손을 사람들에게 내밉시다. 모든 사람은 각기 나름대로 어려운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지지하고 치유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로하라는 계명을 받았습니다.5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은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부활절 안식일은 구주께서 우리 모두가 짊어진, 심지어 고통 받아 마땅해 보이는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과 질병까지도 기꺼이 짊어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기에 좋은 날입니다.6

잠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7 사랑이 끊어지지 않게 합시다. 특히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 형제와 자매들 곁에 있어 줍시다.

우리의 손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유태인 전래동화에는 같은 밭을 함께 일구던 아브람과 짐리라는 두 형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일과 수확량을 공평하게 나누기로 했습니다. 추수가 끝날 무렵, 짐리는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일곱 아들을 부양해야만 하는 형이 수확량 중 절반만 가져가는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 자신이 너무 많은 양을 차지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짐리는 옷을 입고 조용히 밭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이 수확한 곡식단 중에서 1/3을 가져다 형의 곡식단에 얹어 두고는 옳은 일을 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침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아브람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며 일을 거들어 줄 아들도 없는 가난한 동생 짐리가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그토록 열심히 일한 짐리가 수확량 중에서 절반만을 가져가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브람 생각에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조용히 밭으로 가서 자신이 수확한 곡식단 중 1/3을 가져다가 사랑하는 동생의 곡식단에 얹어 두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밭으로 간 두 형제는 둘 다 자신의 곡식단이 전과 같아 보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두 형제는 그날 밤에 슬그머니 집을 빠져 나와서 전날 밤에 했던 일을 되풀이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로를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랑과 고마운 마음이 복받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민의 정신입니다.
타인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9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실천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편지나 시를 쓸 수도 있고, 사랑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를 수도 있으며, 사랑을 촉구하는 설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말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11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사랑에 대해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매일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군중을 피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잃은 자들을 구출하셨습니다. 사랑으로 다가가라는 공과를 가르치기만 하고 실천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지는 않으셨습니다. 가르치기만 하신 게 아니라 또한 “약한 자를 [돕고] 처진 손을 일으켜 세우며, 연약한 무릎을 강건하게” 12하는 방법을 직접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보살피는 방법을 아십니다. 구주께서 내미신 손길에 닿은 사람들은 고양됩니다. 그 결과, 더 훌륭하고 강하고 나은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손은 구주의 손입니다!

구주께서는 사랑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큰 계명이라 말씀하시며 우리의 생활, 가정, 지역 사회, 조국에서 추구할 분명한 우선 순위를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예쁘고 좋은 것들, 율법, 그리고 할 일을 적어 놓은 목록에만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큰 계명을 소홀히 여긴다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마치 바람에 날리는 물 없는 구름이나 열매 없는 나무일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알맹이 없이 그분의 교회라는 껍질만 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다면 선교 사업이나 성전 사업 또는 복지 사업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영을 창조하신 동기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시도록 구주를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끈 힘도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구원의 계획을 이룩한 위대한 동기입니다.
행복의 근원이자 영원히 솟아나는 치유의 샘이며, 귀중한 소망의 분수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우리 손과 마음을 내밀면 우리에게도 아주 훌륭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영이 치유되고 더 깨끗해지며, 강해집니다.
더 행복해지고 평온해지며, 성령의 속삭임에 마음을 더 활짝 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과, 그리고 그분의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을 제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모범, 흠 없고 비이기적인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머물지 않으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며 그분의 권세와 복음을 인간에게 회복하고자 지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남자와 여자가 되어야 할지를 완벽한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셨지 죽은 오라비를 살려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중동의 더운 날씨 때문에 시체가 이미 부패하여 썩는 냄새가 나오자 믿음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며,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부활생명으로 믿으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이요 생명이었지만 이것이 드러나려면 믿음의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이미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것이 드러나려면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르다는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하늘을 보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는 둘러선 무리를 위한 것인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신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제가 이 말씀을 고시공부를 하는 가운데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현재 제 마음속에는 불신의 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시간 불신을 회개하고 불신의 돌을 옮겨 놓습니다. 제가 이 불신의 돌을 옮기고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봉사하는 손 - 토요일마다 교회 화장실을 청소하는 어느 교수 부인의 이야기

교제하는 손 - 주 일회 지역 사회의 어려운 집에 반찬을 만들어 제공하는 이야기

나는 어떤 손을 내밀어야 할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그 손을 내밀라고 하셨을까?
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을까?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던 예수님께서 그까짓 돌을 옮길 수 없으셨는가?
손 마른 사람의 손을 당장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으셨던 예수님께서 왜 그 손을 내밀라고 하셨는가?
능력을 경험하려면 먼저 내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몫이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내가 해야 할 몫을 내가 해야만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내가 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야 할 몫까지 주님이 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요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능력의 은혜는 나의 몫에 따라 나타날 것입니다.


좋은(2570) καλός, ἡ, όν   


καλός, ἡ, όν 스트롱번호2570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칼로스(kal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좋은(마3:10, 막4:8, 요2:10), 아름다운(마7:19), 착한(마5:16), 마땅한(마15:26), 나은 (마18:8,9, 막9:45), 선한(요10:11, 고후8:21, 딤전1:8), 옳은(고전5:6), 잘하는(딤전3:13), 유익을 얻는(히13:9)
신약 성경 / 101회 사용

아가도스(18) ἀγαθός, ἡ, όν


아가도스(18) ἀγαθός, ἡ, όν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아가도스(agathŏs)
관련 성경 / 선(마 5:45, 롬 2:7), 물건(눅 12:18,19), 선행(행 9:36), 양심(행 23:1). [형] 선한(마 12:34, 19:16, 눅 6:45, 골 1:10), 좋은(마7:11, 눅 1:53, 요 7:12), 착한(마 25:21, 고후 9:8)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αγαθος아가도스의 선함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인간 삶에서 펼쳐지는 행위를 통해 발견되는 비중이 더 크다면, καλος칼로스로서의 선함은 선함 궁극인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 하나님에게 발견되는 발견체 자체로서의 존재론적 의미에 좀 더 할애된다.

칼로스와 아가도스 그리고 토브와 라아(선악이 아닌 좋음과 나쁨)


좋은(아가도스) 나무가 나쁜(포네로스)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칼로스)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관계를 조금만 더 살펴봅니다.
좋은(아가도스) 나무에서 아름다운(칼로스)의 열매가 맺힙니다.
여기서 아가도스는 칼로스의 근원이고 기둥입니다.
아가도스의 토대에서 칼로스가 드러납니다.
비유컨대 우리는 아가도스(좋은) 나무여야하고 거기서 맺히는 열매는 칼로스(아름다운)한 열매여야 합니다.

여기서 살펴보면 칼로스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은 사람들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타당합니다.
칼로스는 같은 말이라도 말을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그에게 적합한 말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칼로스 한 말이고 또 칼로스 한 열매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상대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컬어 칼로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식과 교리, 그리고 율법과 옳고 그름은 상대의 상태나 형편과 상관없이 오로지 지식 그 자체만을 주장하고 드러내려 합니다. 이는 도리어 카코스합니다. 즉 말은 맞는 말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분명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칼로스 하지 않고 카코스 하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칼로스와 카코스를 분별하는 사람은 고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어린아이에게 하는 말이 다르고 어른에게 하는 말이 다릅니다. 비록 다르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고 지각을 사용하는 이들의 몫입니다. 여기서 지각이라 함은 성숙한 센스요, 지성적이고 직관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칼로스의 바탕에는 아가도스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따라서 아가도스가 ‘좋음’이라고 한다면, 칼로스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번역 성서에는 아가도스도 칼로스도 good으로 번역하고 있고 그 의미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그 뉘앙스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토브와 라아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어 토브는 헬라어 아가도스가 그 상응어라 했는데, 그것은 제가 잠시 착각해 바꾸어 말한 것으로 아가도스가 아니라 칼로스로 바로 잡습니다.
70인역은 토브를 아가도스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칼로스(Good)로 라아는 카코스(Bad)가 아니라 포네로스(evil)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토브 베라아’는 好惡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好惡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건 조금 적절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좋음과 나쁨’이란, 나의 성향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하는 걸 말하기보다는 생명의 관점에서 그것이 생명에 좋으냐 아니면 생명에 해로우냐(나쁘냐)입니다. ‘좋음과 나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도리어 선악이라는 말보다 원의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문맥에 따라서 토브와 라아는 선악으로 볼 수도 있고, 좋음과 나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은 선악과로 보기보다는 ‘좋음과 나쁨의 열매’로 보는 것이 창세기1장의 토브를 ‘좋았더라’라는 흐름에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육신의 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읽힐 수밖에는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냐, 좋음과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로 볼 것이냐는 독자의 예민한 선택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만, 저는 후자로 보여집니다. 토브와 라아를 선악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도 문맥에 따라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만, 성서의 전체를 천천히 살펴보고 탐색해봐야 할 과제로 남깁니다.

동시에 이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게 성서의 말법, 곧 문법입니다.
좋음과 나쁨은 양식으로 삼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생명나무의 열매를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창세기의 대선언이라고 여깁니다. 좋음과 나쁨의 지식 나무에서 맺힌 열매는 정신의 양식이 아니라, 그냥 좋으냐 나쁘냐를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면 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정신의 자양분을 삼는 먹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러냐는 것이지요. 처음 사람은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지식의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를 양식으로 삼고 살더라는 게 에덴의 이야기며 인생의 실존이라는 것이지요.

한 술 더 떠 사람들은 이를 선악으로 환원해서 열매로 먹습니다. 정신의 양식으로 삼습니다. 삶의 지표와 목적으로 삼습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사람을 대하며 선악판단하려 합니다. 선악에 경도되는 것이지요. 좋음과 나쁨을 통해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을 왜 좋음과 나쁨의 지식을 양식으로 삼는 것인지, 인생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거기서 발생합니다. 지금도 동산 중앙에는 명증하게 이 두 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의 이기적인 처음 사람은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정보의 확충을 통해 지배력을 강화시키려는 권력욕구가 합해져서 선악의 지식을 열매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권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지식이기 때문이고, 바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지식을 양식으로 삼는 다는 것이지요. 하여 그곳에서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시시비비가 끊임없습니다. 좋음과 나쁨을 아는 나무도 동산 중앙에 있는 까닭은 그 열매를 먹으라는 뜻이 아니요, 분별하라는 뜻일 따름입니다. 분별하는 것과 먹는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도리어 생명나무에서 맺히는 열매를 양식으로 삼으라는 게 성서의 논법입니다. 물론 동산의 각종 나물의 실과를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키워본 어버이들은 이 관계를 조금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생명나무에서 맺히는 생명의 열매를 먹으면 우리의 영혼과 정신은 맑아지고 힘을 얻습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분별해서 어린아이를 돌보고 잘 자라게 하는 데 사용할 뿐, 그걸 양식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육신의 양식조차도 몸에 좋은 것과 몸에 해로운 것을 분별해서 해로운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을 취하는 데 사용될 뿐입니다.

그의 양식은 어린아이의 생명이 자라면서 맺히는 열매를 그 정신과 영혼의 풍성한 양식으로 삼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자손녀를 바라보며 기쁨을 얻는 걸 보면, 그들의 양식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손주들에게서 맺히는 생명의 과실들을 양식으로 삼으며 기쁨을 얻습니다.
어머니의 육아에 대한 수많은 지식은 아이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해로운 가를 분별하기 위한 지식이고 정보일 따름이지, 아이에게 어머니의 권력을 행사하고 그 지식으로 우쭐하거나 아이를 지배하고 통솔하기 위해 소위 모권, 어머니의 권세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머니에게 있는 그 모든 권력과 권세는 오로지 자녀의 생명을 지키고 키우는 데 있는 것이지, 권력을 향유하고 자녀들에게 그것을 휘두르며 즐거워하라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권력과 권세는 바로 생명을 낳고 키우는 모권이 그 원형이 아닐까 합니다.
부권은 사냥을 통해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서부터 형성된 것인데, 어느 세대나 경제력과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내와 자녀를 살리고 돌보기 위한 사랑의 권세에서 지배의 권세로 타락한 것은 좋음과 나쁨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삼고자 하는 정신의 타락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곧 소유와 이기주의의 발동 때문일 것입니다.

권세의 의미가 바로 그 같은 것에 있다는 점을 처음 사람은 모릅니다.
좋음과 나쁨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거리로 삼는 삶에서는 결국 사망의 열매를 맺힐 수밖에 없다는 게 성서의 진단입니다.
오로지 생명을 양식으로 삼는 이들에 의해 이 같은 것이 드러나고 진단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지식의 열매를 먹지말고 생명의 열매를 먹거리로 살으라는 게 성서의 한결같은 메시지 아닐까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해설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간단히 하면 여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의 딸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계보에 속한 자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사의 타락으로 보려는 견해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서엔 두 계보 이야기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셋의 후손들의 정체성)이 가인의 후손들의 딸을 보고 아름다움(토보트)을 느꼈다는 것에서부터 아담이 겪었던 에덴의 혼돈이 재발한 것은 아닐런지요.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성은 육체(바살, 싸르크)가 되었다는 지적이니 즉,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인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답던 그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시 말해 생명의 관점에서 토브 혹은 칼로스 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의 눈으로 아름다워보였다는 것, 거기서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결합한 것이고 홍수심판의 근인과 원인이 된 것은 아닐런지요.

이 이야기는 침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문장에서 토브를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해설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대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혼합되고 결국 영의 생각이 육신의 생각에 편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마치는 이야기의 대목과도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사한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06-10-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4장 / 좋은 땅(20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Others, like seed sown on good soil, hear the word, accept it, and produce a crop--thirty, sixty or even a hundred times what was sown."

좋은(아가도스) 나무가 좋은(칼로스)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칼로스) 땅에 뿌려진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누구나 좋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려면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결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무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사람이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한국의 경우 1885년 4월 5일 미국의 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의 입국과 더불어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선교 100년 만에 세계에서 최대의 부흥을 일켰던 나라가 되었습니다.
138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교회는 점점 약화되고 있습니다.
가장 빨리 부흥과 성장을 경험하였지만 또한 가장 빨리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복음의 기초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렇게 간단 명료하게 복음을 외쳤건만 이제는 그와 같은 외침이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이 되고 있습니다.
자동차의 급발진 사고처럼 복음의 급발진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까닭은 아가도스의 좋음이란 상대적인 것을 말합니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외부로부터 너무 많은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예수를 믿으면 잘 살고 복받는다는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수 있는 아주 좋은 미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잘 살고 급성장하므로 해외여행을 즐기고 거리마다 집집마다 자동차의 물결이 넘쳐나게 될 때 경쟁적으로 좋은 것을 보여주려는 아가도스에 대한 사랑이 앞뒤 분별없이 더 크고 화려하고 멋진 것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좋은 것은 칼로스입니다.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라도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핵심이 믿음의 본질이 될 때 좋은 아가도스의  나무가 좋은 칼로스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칼로스 열매를 위하여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작지만 들어 있을 건 다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대답했습니다.
“씨앗이요!”
그렇습니다!
씨앗 속에는 정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작은 씨앗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의 지혜가 참 놀랍지 않습니까?
씨앗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매우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싹이 날 것을 믿고 씨앗을 땅에 뿌립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지 않습니까?
아무리 서둘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싹이 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씨앗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지만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어떤 학자들은 마태복음 13장이 복음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전환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초기에는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회당을 장악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바닷가로 나가셨고 사람들은 해변에 모여들었습니다.
넓게 트인 자연을 교실로 삼아 가르치기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교육 방식은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 비유의 말씀도 멀리 들판에서 씨를 뿌리고 있는 농부를 바라보시면서 하신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밭들은 길고 좁은 이랑으로 되어 있고 그 이랑들 사이에 보통 길이 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이랑들 사이 길에 떨어진 씨앗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이랑에 씨앗을 뿌리고 다음 이랑으로 넘어갈 때에 길에 씨앗이 떨어지는데 그 씨앗은 싹이 트지 못합니다.
땅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듣기는 해도 마음은 굳게 닫아 버린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씨앗은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도 있습니다.
토양이 좋지 않은 땅처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싹은 나옵니다.
그러나 그 싹이 금방 말라 버립니다.
복음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얼마 못 가서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세상 일을 할 때에도 유행을 따라서 요란스럽게 시작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 열정이 식어버립니다.
한 가지 일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떠도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이 있습니다.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도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많은 유혹을 받아서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무 분주해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 분주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또 기도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일은 하지만 이룬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나무꾼 두 사람이 장작을 팼습니다. 한 사람은 종일 쉬지 않고 장작을 팼고 다른 사람은 일하고 쉬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 것 같습니까? 결과는 쉬면서 일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장작을 팼습니다. 쉬지 않고 장작을 팬 사람이 묻자 지혜로운 나무꾼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쉴 때에 도끼날을 갈았다네.”

그렇습니다! 날을 갈아야 합니다. 일하다가 쉴 때에는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결실을 가로막는 가시떨기를 제거해야 비로소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가시떨기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하반절)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히면 싹이 나더라도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길 가와 같이 교만한 마음 밭은 아닙니까?
뿌리 내리기 어려운 돌밭은 아닙니까?
온갖 염려와 유혹에 사로잡힌 가시떨기는 아닙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씨앗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복음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어른들은 여간 애쓰지 않으면 좋은 밭의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틈나는 대로 김도 매어 주고 비료도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태가 아주 좋은 밭이 있습니다.
특별히 퇴비를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어린 아이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은 아이들이 더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저희가 자랄 때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문제란 결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어른들이 하는 짓을 보고 배운 것이 아이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여간 어린 아이들이라고 하는 좋은 땅에 복음의 말씀이라는 씨앗을 심을 것 같으면 반드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 학교의 부흥이 단순히 교회 학교의 부흥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인천의 어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아주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학교 학생 중에 태도가 불량하고 또 난폭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평소에 다른 학생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그 학생은 몸도 건장하고 싸움도 아주 잘하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평소에 당하기만 하던 학생들 몇 명이 힘을 합해서 그 학생을 공격했는데 맨손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흉기를 가지고 공격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보여 준 태도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교무실에 찾아온 그 학생의 아버지는 선생님들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기가 자식 교육을 잘못해서 결국 이런 일이 생겼다고 오히려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해 학생들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사정했습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가 크게 감동을 받았고 그 후 그 학생도 변화된 모습으로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 학생은 없다. 다만 문제 학부모가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풍성한 결실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좋은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의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 말씀의 씨앗을 정성껏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땀과 피와 눈물이 요구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둘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복음의 씨앗을 어린 아이들의 마음 밭에 정성껏 심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씨가 네 가지 땅에 뿌려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네 땅이란 “길가”(the path), “돌밭”(rocky places), “가시떨기”(thorns) 그리고 “좋은 땅”(good soil)임.  이 네 땅 중에 네 번째 땅인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열매(“결실”)을 맺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8절).  여기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눅8:11)이고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좋은 땅에 뿌려진 씨”란 제목 아래 네 가지 땅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길가에 뿌려진 씨

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19에 이렇게 그 비유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즉, ‘길 가에 씨가 뿌려진 자’란 “천국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듣지만 깨닫지 못할 때 “악한 자”(the evil one)가 와서 그 뿌려진 말씀을 빼았긴 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악한 자”란 누구입니까? 
마가복음 4장 15절을 보면 저자 마가는 “사단”(Satan)이라고 말하였고 누가복음 8장12절을 보면 저자 누가는 “마귀”(the devil)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마귀 사단은 우리 마음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서 빼앗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8: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so that they may not believe and be saved)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천국 말씀을 빼앗는 것입니다. 
빼앗되 사단은 우리가 말씀을 들었을 때에 “즉시”(immediately) 와서 우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습니다(막 4:15). 
박윤선 박사님은 “길 가”와 같은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길 가’와 같은 마음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운동과 영향에 개방된 마음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으로 섭취하려는 생각이 없다.  이것이 큰 병통이다”(박윤선). 
즉, 길 가와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순종 하려는 자세가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순종의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때문에 그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혜 있는 자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귀를 기울여 들으라[listen obediently(Harris)]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순종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불순종의 자세로 그 말씀을 듣는 다면 물론 사단이 그 말씀의 씨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불순종하며서 교만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더욱더 강팍(완고)해져서 어느 누구의 사랑의 책망도 귀 기울여 듣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사단에게 그 들은 말씀을 빼앗기지 않으려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의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들을 때에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깨달은 말씀을 우리는 실제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잠 22:18).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면 할 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19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그 말씀을 우리 소유로 만들 때에(시 119:56)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자라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의 자세로 들으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은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맏음은 점점 더 연약해 져서 점점 더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불신하여 그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길 가에 뿌려진 씨의 삶입니다.

둘째, 돌밭에 뿌려진 씨

마태복음 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20-21에서 그 비유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돌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기뻐하며 즉시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지 못하고 잠시 견디다가 그 말씀 때문에 고통이나 핍박이 오면 곧 넘어지는 사람이다”. 
즉, ‘돌밭에 씨가 뿌려진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밀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입니다. 
그래도 “돌밭에 뿌려진 자”는 “길 가에 뿌려진 자”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누가복음 8:13을 보면 “잠시 믿다가”(They believe for a while)라고 저자 누가는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오래 못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신앙) 때문에 오는 환난(고통)이나 박해(핍박)로 인하여 시험을 받을 때에 그는 넘어지고(막 4:17) 심지어 믿음을 “배반”합니다(눅8:13).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원인은 “그 속에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마 13:21, 막 4:17). 
이것이 바로 뿌리 깊지 못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님 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뿌리 깊은 영성에 가운데 저자가 말한 내용 중에 흥미로운 말은 ‘뿌리 깊은 영성은 먼저 아래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가 땅 밑으로 성장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말에 대하여 한 4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로,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영성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작은 것에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성취, 성과, 결과에 가치를 두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존재”에 가치를 둡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영혼의 가치에 두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영성
빌립보서 2:7-8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셋째로, 자신을 감추는 영
“뿌리는 드러내지 않습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넷째로, 보이지 않는 속사람을 돌보는 영성.

에베소서 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뿌리는 언제 깊이 내릴 수 있는지요?
그것은 시련 때 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기도 합니다.
모세는 40년동안 광야에서 그랬습니다.
나무는 겨울에 쉬면서 뿌리만 가꾸게 됩니다.
나무에게 겨울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아주 힘들게 하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존 번연도 그러했습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제 자신에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을 낭비하지 말라.’”

뿌리 깊은 신앙(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핍박과 박해가 있다 할지라도 뿌리가 움직이지 않는(잠 12:3) 견곤한 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계속 그분 안에 사십시오.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분을 기초로 여러분의 인생을 건설하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고전 3:11).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떄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주님을 본 받는 자들이 되며,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며 또한 우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살전 1:6-8).

셋째,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

마태복음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22에 이렇게 그 비유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현대인의 성경) “또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말씀은 듣지만 이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가시떨기에 씨가 뿌려진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그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즉, 그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가시떨기에 씨가 뿌려진 자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세상의 염려(걱정)와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입니다(마 13:22). 
이 외에 “기타 욕심”(the desires for other things)(막 4:19)과 “항락에 기운”(쾌락)(pleasures)(눅 8:14)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환경은, 그 좋은 씨가 섭취해야할 영양을 다 빼앗기 때문에 그것이 결실하지 못한다”(박윤선). 
무슨 뜻입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가시떨기와 같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우리 마음이 이미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과 기타 욕심 및 쾌락에게 빼았겨서 그 말씀대로 살지못하므로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런 저런 세상의 염려든지 재물의 유혹이나 욕심과 쾌락에 우리 마음이 빼았겼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염려하며 재물의 유혹과 욕심과 쾌락에 빠져서 하나님께 범죄할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이 말한 가시떨기와 같은 환경을 생각할 때 오래 전에 읽었던 영동 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소장인 이희대 의사의 “희대의 소망”이란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 분은 유방암 전문의면서 대장에서 시작된 암이 간과 뼈로 전이되서 10번의 재발을 겪은 암 4기 환자로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는 암환자들에게 그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읽었던 글 중 암세포가 왜 무서운지에 대한 글을 소개합니다.

“암세포가 무서운 것은 끊임없이 자라나기 위해서 다른 세포들의 영향분을 혼자서 차지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도 한군데서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면서 말이다. 
암세포는 칼로리 섭취가 지나치게 많을 때 번식을 잘하는 경향이 있다. 
암세포는 가만히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고칼로리 영양분을 낚아채서 독식하며 성장한다. 
암세포가 다른 세포의 영양분을 독식하면서 성장하듯이, 그 생성 또한 끊임없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암세포의 본질은 탐욕이다"(이희대). 

마치 이러한 암세포처럼 세상의 염려나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은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분을 빼았아 갑니다. 좀 더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은 우리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으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3:22절을 보면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막혀”라는 말은 영어로 “choke it”이란 말로서 그 의미는 ‘숨이 막히다, 질식시키다’, ‘목을 조르다’는 뜻입니다. 

또한 영어 단어는 “strangle”로서 그 의미는 ‘목을 조이다’, ‘목 졸라 죽이다’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하면 좀 이해하기가 쉬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그 말씀을 머리에 넣었는데 그 말씀이 우리 마음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가 우리 목을 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무엇인가는 바로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 세상의 염려과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이 있다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버리되 우리는 그저 입술로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입술로만 그리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이 막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할(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마치 암세포와 같은 세상의 염려과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및 쾌락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도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좋은 땅에 뿌려진 씨           

마태복음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23절에서 그 비유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100배, 60배, 또는 30배의 열매를 맺는다”. 
즉,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자란 말입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잘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킨다”. 

착하고 좋은 마음”(a noble and good heart)에서 ‘착하고 좋다’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를 보면 다른 두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좋은’(good)이란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이란 의미를 좀 구분할 수가 있는데 두 번째 단어인 “좋은 마음”(good heart)이란 도덕적으로 똑바른[곧은, 고결(순결)한(noble)] 마음을 가리킵니다(Zodhiates).  그런가 하면 첫 번째 단어인 “착하고”란 단어는 “아름답다’ (beautiful)이란 의미도 있는데 그 의미에는 ‘건강하다, 바르다, 적합하다’(healthy, sound, fit)이란 의미가 내포되 있습니다(Friberg). 

누가복음 8장 15절에 나와 있는 “착하고”란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을 현대인의 성경에서 “바르고”라고 번역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단어를 구분한 이유는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자의 마음은 어떠한지 좀 더 정확하게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바르고 건강하되 하나님의 말씀 받기가 적합한 마음입니다.  또한 그 마음은 도덕적으로 똑바르고 고결(순결)한 마음으로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저는 이 마음을 생각할 때 사도행전 17장 11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현대인의 성경)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착한 마음’의 영어 번역인 “a noble heart’를 생각할 때 사도행전 17장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더 너그러워서”(개혁개정) 또는 “신사적이어서”(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말씀하였는데 그 단어의 영어 번역이 “noble character”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구절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했을 때 오늘 마태복음 13장 8절과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좋은 땅”, 즉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진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무엇인지 좀 더 풍성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깨닫다(4920) - 이해하다, 통찰하다

συνίημι 스트롱번호4920

1. 깨닫다,  2. 이해하다,  3. 통찰하다
발음 / 수니에미(süniēmi)
어원 / 미래 συνησω, 제1부정과거 συνῆ- κα, 제1부정과거 가정법 συνῆτε, συ- νῶσιν, 제2부정과거 명령 2인칭복수 σύνετε, 4862와 ἵημι ‘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3:13, 막 4:12, 롬 3:11), 이해하다 (엡 5:17), 지혜가 있다(고후 10: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그 마음이란 ‘바르고 건강하되 하나님의 말씀 받기가 적합한 마음이요 도덕적으로 똑바르고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상고 – 곰곰히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이러한 마음이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의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이라네
주님의 사랑 놀라와 한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새 희망을 전하고 싶으리

친구여 당신께 이 기쁨 전하고 싶소
내 주는 당신의 의지할 구세주라오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이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며 맺고자 할 때 저는 오늘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100배, 60배, 혹은 30배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어서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적합한 마음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적합한 마음은 건강한 마음이요 바르고 순결한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세로 듣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뿌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내립니다. 
그러므로 말씀(신앙)으로 인하여 어떠한 고통과 역경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견디며 이겨나아 갑니다. 
그리고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 및 기타 욕심과 쾌락으로 인하여 말씀이 막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태복음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좋은(아가도스) 18


나쁜(포네로스) 4190


못된(사프로스) 4550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선포(복음 전도)
둘째, 신유와 축사
셋째, 소외된 자들과의 교제(세리, 죄인 등)

이러한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입니다.
특히 신유와 축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임재의 증거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천국)에는 슬픔과 눈물과 고통과 질병이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실재적으로 이 땅에 임하였다(마 12:28, 눅 11:20).
우리는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영화의 예고편처럼 보여 주는 상징 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유명한 신학사인 죠지 래드는 풀코스의 정식 중 맨 먼저 나오는 스프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격에다 비교하였다.
그것은 실제적인 정식의 한 과정이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현장을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수많은 신유와 축사의 능력을 베푸신 것은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현재 여기에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시는 행위인 것이다.

군대 귀신들렸다가 치유함을 받은 사람은 너무 감사해서 온몸과 마음을 바쳐서 예수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집으로 돌아가서 네가 당한 이 큰 일을 증거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이 살던 삶의 현장을 사수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주의 크신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단한 사람에게 자신의 직업 전선에서 성실한 삶을 살면서 복음 전파를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06-12-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5장 / 더러운 귀신(2절)


"더러운 귀신"이란 말씀이 마가복음에서 11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23, 26, 27.  3:11, 30.  5:2.  8, 13.  6:7.  7:25.  9:25

더러운(169) 아카다르토스(akathartŏs) ἀκάθαρτος, ον 


1. 불순한,  2. 신성과 밀접할 수 없는,  3. 에베소서 5:5
발음 / 아카다르토스(akathartŏs)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508 ‘정결하다’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더러운(마 10:1, 계 18:2), 깨끗하지 아니한 (행 10:14), 깨끗하지 못한(고전 7:14), 부정한 (고후 6:17)
신약 성경 / 32회 사용

귀신(4151) 프뉴마(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프뉴마(pnĕnuma)
어원 / 41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령(마 4:1, 막 1:10, 눅 2:27), 심령(마 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신약 성경 / 379회 사용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안드로포스 엔 프튜마티 아카다르토)

“귀신”(프뉴마티)은 문자적으로 숨, 바람, 기운, 생명, 영혼, 영(spirit), 유령, 귀신, 성령(the Holy Spirit) 등의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더러운”(아카다르토) “불순한”, “더러운”, “부정한” 등의 뜻으로 쓰인다.
직역하면 “부정한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선한 의지가 완전히 결여되어 버리고 오직 약령의 지배하에서 자기 파괴적인 우울 증세를 보이는 상태를 의미한다(1:23 주석 참조). 이에 대해 공동번역“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누가복음 8:27과 본문에서는 악령들린 사람단수이다(안드로포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으로 묘사된다(마 8:28).
아마도 이같은 차이점은 마태는 그 보고가 상세한데 비해 마가와 누가는 그 둘 중 가장 대표될 만하고 특징적인(치명적인) 한 사람을 강조하고자 했던 차이일 것이다(Calven).
나머지 한 사람은 여기 소개된 자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Lenski).

마가복음 1: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더러운 귀신(프뉴마티 아카다르토)

마가복음에서 이 말은 11회 나오며,
누가는 이 말에 '귀신' 혹은 '마귀'라는 뜻을 가진 '다이모니온'()을 부가하여 사용하고 있으나(눅 4:33; 8:27; 10:17등),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 마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귀신'이라는 존재에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를 첨가한 데 있다.
이 '더러운 영'은 선한 의지와 도덕성이 완전히 상실된 그야말로 악의 실체가 되어버린 영의 상태를 의미한다.

실로 예수의 갈릴리 사역 초두(初頭)인 바로 이 안식일에 진리 전파 장소 한 가운데로 돌진해 온 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악한 영, 곧 마귀의 일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일 3:8).
한편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첫반응은 '소리질러'(아나크라조)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진리 전파 사역을 '방해하고'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눅 4:33).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 심지어는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도어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濃厚)하다.
즉 그들은, 귀신이란 정신병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정서적 불안 상태에서 충격을 받은 경우 혹은 정신이상자와 간질병자의 경우로 나타나는 증세를 가정(假定)해서 칭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 구절은 귀신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명백히 규명해 주고 있다(마 4:1-11, 주제 강해 '사단'(마귀)과 '귀신'참조).
이러한 귀신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며 사람들에게 극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것이다(벧전 5:8).


마태복음 4장

시험하는 자(호 페이라존)

-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단이 예수에게 접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u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적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단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마가복음 1:21-28)

문명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귀신”을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허구적인 존재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오늘날처럼 과학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 천사나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그 생명력을 잃게 된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는 성경의 이야기들과 우리 신앙 생활 가운데서 영적인 존재들 곧 천사들이나 귀신들을 쫓아내버린 것이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상은 크게 “보이는 세상(visible world)”과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상은 우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이며, 보이지 않는 세상은 영이신 하나님을 위시하여 온갖 종류의 영들이 존재하며 활동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들은 이 두 세상을 모두 섭렵하며, 또 그 두 세상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과 영적인 존재들을 그 주인공들로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과 그 세상을 채우고 있는 영들이야말로 많은 사건들 속에 진정한 주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와 “더러운 귀신”이 만나 격돌한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둘 모두 그 실체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이 사건에서 귀신을 빼버린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상(invisible world)”을 이해하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synagogue)이란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전체에 걸쳐 오직 하나뿐인 성전(Temple)이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안식일에 각자의 마을에 있는 회당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읽고, 이를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오늘날의 예배당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22절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기관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권세가 있었고, 서기관들의 그것은 권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바로 이어지는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명하시기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자, 귀신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세는 “영적인 권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서기관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가 없어서, 그냥 두고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이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영적 권세”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귀신이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은 크게 소리를 질러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 사이에 대화를 보자면, 이 둘은 서로가 어떤 존재인 것을 분명히 알았으며, 또 서로를 향하여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이에 반응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들 눈 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놀라워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현실 세계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시골 나사렛에서 온 가난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은 두려워서 떨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치 컴컴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켜면 어둠 속에서 활동하던 벌레들이나 쥐들이 황급히 몸을 감추듯이, 이 더러운 귀신 또한 예수님의 빛 앞에 그 정체가 밝히 드러나고 두려워 떨며 급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세로 더러운 귀신을 완전히 제압하시고, 이 귀신 들려 비참해진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며, 또 이 싸움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하신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인의 회당에서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곳에 “더러운 귀신”이 버젓이 드나들며 대놓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결벽증으로 보일 만큼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멀리하며 밤낮으로 손발을 씻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왜 유대인들은 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을까요?
왜 회당에서 가르치는 서기관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권세가 없었을까요?

야고보서 4:7, 8절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이기고 쫓아낼 권세를 갖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이 되는 마음 속의 죄들을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온 마음을 들여 생각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속에 마귀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마귀를 싫어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마귀를 쫓아낼 권세를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매우 연약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고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 15:8).
이들의 이러한 영적 상태를 생각하면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권세가 없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권세 (authority)”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을 “권세 있는 자”라고 하며(22절), 또 귀신을 내어쫓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켜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고 합니다 (27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권세를 가지신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도 주십니다.

마가복음 3:14, 15절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세우시면서 그들을 부르시는 세 가지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보내사 전도하게 하시며,
셋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가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인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갖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귀신 또한 어둠의 세계를 주관하는 일종의 영적 권세자(spiritual force of evil)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둠의 세력을 무서워하는 대신 이를 대적하고, 제어하고, 내어쫓을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제자들의 신분이 “땅에 속한 사람(earthly being)”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 (heavenly being)”으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치하는 영적인 권세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권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권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하나님의 권세는 밝은 눈과 같다(Divine authority is like the single eye)”고 말합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밝은 눈”이란 마태복음 6: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밝으면 (If your eye is single - KJV)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따온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나를 똑바로 보시면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권세에 순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사로잡으며 나의 밝은 눈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보이고, 귀신은 귀신으로 보이고, 빛은 빛으로 보이고, 어둠은 어둠으로 보입니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게 되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가까이 할 것을 가까이 하게 되고, 대적할 것을 대적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권세가 내 안에 살아있어서 마귀를 대적하고 제어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여 마귀의 궤계를 분별하고 대적한 이야기들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입니다.
40일 동안 금식하여 거의 죽음에 눈 앞에 보일 지경이 되신 예수님께 “시험하는 자” 곧 마귀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에게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3).
몹시 배가 고프신 예수님께 이 마귀의 말은 참으로 큰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아마도 벌써 돌멩이가 떡으로 보이고, 유혹하는 마귀가 천사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하는 마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명이 “떡”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달려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주관하시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잘 아시고 오직 이 하나님께 순복하셨습니다.
40일을 굶으신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경외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시므로 예수님께서는 항상 밝은 눈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밝은 눈으로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대적하셨습니다.
심지어 마귀가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을 막으려 할 때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며 그를 책망하셨습니다(마가복음 8:33).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며 그 뜻을 이루는데 온 몸과 마음을 드리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는 마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정말 바늘 구멍만큼도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님의 권세가 예수님께 밝은 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귀신이나 마귀의 존재를 믿지도 않으며, 또 자신들이 지금 마귀의 권세 아래 있음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악한 영들로부터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로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시는 영(이사야 11:2)이시며,
또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영(로마서 8:15)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을 받을 때, 우리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악한 마귀의 더러운 귀신을 분별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의지하여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권세자가 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 관하여 잘 모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요한복음 4:24), 예수님의 말씀 또한 영입니다 (요한복음 6:63).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또한 영적 싸움이며,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혈과 육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에베소서 6:12).

우리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덧입고 이 영적 싸움을 능히 감당하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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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왕 바알세불 곧 사탄마귀는 이미 진 자다.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40일이 지난 시점에 예수님과 맞붙어서 3대 0으로 판정패 당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KO패 당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3대 0으로 판정승할 때부터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12제자들과 70명의 제자들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귀신쫓는 권세를 위임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공생애기간에는 판정승한 것으로 인하여 사탄마귀의 졸개들인 귀신을 쫓아내었고, 부활승천하신 후에는 KO승한 것을 바탕으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 권세를 위임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으며, 쫓아내야 한다.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마 12:28).
귀신이 쫓겨나가지 않으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가?
그리고 귀신을 쫓았는데도 그가 떠나가지 않을 때에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알고 보면 쉬운 일이지만 모를 때에는 당황할 수도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성도의 신앙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는 귀신(鬼神, 다이모니온)이 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도 있으며, 귀신이 얼마나 많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몰라 귀신에게 당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귀신을 알아야 귀신을 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이 어떤 존재이며 성도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잘 모르는 분들이 이외에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귀신의 공격하고 있음을 알고서도 귀신을 그냥 방치함으로 귀신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도 적잖게 있는 것 같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하고 명령하면 왜 귀신들은 순종할 수밖에 없는가?  

성도들이 귀신들에게 나갈 것을 명령하면 왜 귀신들은 나가야 하는가?
나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들은 왜 성도들의 축사 명령에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귀신은 패배자(敗北者)이기 때문이다.

귀신의 대장인 사탄 마귀가 성도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이미 패했기 때문이다(벧후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그러므로 귀신들도 자기들의 대장을 이긴 예수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권세를 처음에는 당신 혼자 사용하셨지만, 이내 그러한 권세를 12제자들에게도 위임하셨다(마 10: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리고 70명의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으며(눅 10:1),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위임하셨다(막 16:17).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예수께서 주어진 권세를 이용하여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다.

누가복음 10: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왜냐하면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벧후 2:19).

베드로후서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영계에도 엄연히 일정한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놀라운 법칙이다.
그런데 귀신들의 왕(지배자)인 마귀가 예수님과 한 판 붙어 싸웠을 때 마귀는 어떻게 되었는가?
마귀는 그때 예수님에게 3대 0으로 판정패 당했다(그리고 십자가에서 마귀는 완전히 패배당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마저 주님께 내어주어야 했다).

예수께서는 마 4장에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때 예수께서 마귀와 처음으로 한 판 붙으셨다.
그때만해도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날, 그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을 것이이다. 아니면 자기의 부하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2)"
그때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마귀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한낱 피조물에게 시험을 받으시겠는가?
하지만 그 때에는 예수께서 사람으로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는가?
그것은 "기록된 말씀"을 사용해서였다.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고 댓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귀는 의식주의 유혹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릴 수가 없음을 알고는 새로운 시도에 들어간다.

이제는 마귀도 기록된 말씀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시도한 것이다.
우선 그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으니라(마 4:6)"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 4:7)"이라고 말씀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최종적으로 마귀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가서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만일 내게 엎으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저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마 4:10)"이라고 댓구하심으로 물리치셨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님을 얼마동안 떠나야 했다.
마귀는 예수께 3대 0 판정패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 자로서 마귀의 부하들은 예수님에게 복종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 가운데 하나라도 마귀의 말에 순종했더라면 큰 일 날 뻔 했다.
만약 그날 예수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었거나, 성전에서 뛰어내렸다면, 그는 마귀의 말처럼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취했을 수는 있으나, 그때부터 예수님은 마귀의 종이 되어버리는 것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계에서는 누구의 말에 순종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든지 순종한다면 우리는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다.
즉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도 마귀의 말에 순종하고 말았으니, 예수님도 그만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먹을 수 있었지만, 결코 그 순간에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
예수께서 뛰어내리 때에는 천사가 와서 그를 받들어 지켜주실 것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뛰어내지지 않았다.
마귀의 말에 순종하지 않기 위해서다.
만약 마귀의 말에 순종했다면, 우리는 전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고, 그러면 마귀에게 진 자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어릴 적부터 기적을 행하셨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께서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지 그는 아직 기름부음을 받지 못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 예수님은 그 어떤 기적을 행하시지 아니했으며, 귀신을 쫓아내시지도 아니하셨다.

그런데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한 이후에 마귀에게 한 판 승부를 벌여서,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이제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신 것이다.

어느날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말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게 되고, 보게 되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여 예수께서 귀신의 왕(통치자)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그중에 왜 우리 믿는 이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들어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 12:29의 말씀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 말씀에 나오는 "강한 자"는 귀신의 왕(통치자) 바알세불인 사탄 마귀(루시퍼)를 가리키며, 강한 자의 집 안에 있는 세간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그와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인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성도들은 누구든지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 이름의 명령은 이미 승리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귀신들로 하여금 떠나갈 것을 명령하면, 귀신들에게 엄청난 타격이 가해짐으로 그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마가복음 5:7~9).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우리가 귀신들에게 명령하면 영적 질서가 세워진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신 하나님으로 엄청난 징계가 임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그들에게 괴로움이 임한다.
나갈 때까지 더욱 더 큰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에서 나가는 말씀과 명령이 칼이 되고 불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명령하는 말씀이 칼이 되면, 칼은 밖으로 나가서 귀신에게 계속해서 엄청나게 타격을 가한다.
그리고 명령하는 말씀이 불이 되면, 귀신들을 태워버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떠나갈 것을 명령하면 명령할수록 고통을 받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한 번 내쫓으려고 했다면 계속해서 꾸짖어야 한다.
그가 떠나갈 때까지 말이다.

귀신에게 나갈 것을 명령할 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명령해야 하는가?  

귀신을 쫓아낼 때에는 어쩡쩡한 태도나 부탁조로 말해서는 아니 된다.
그럼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가?

꾸짖어서 쫒아내야 한다(마가복음 1:25, 9: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When Jesus saw that a crowd was running to the scene, he rebuked the evil spirit. "You deaf and mute spirit," he said, "I command you, come out of him and never enter him again."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 "꾸짖어"서 쫓아내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귀신도 인격체이므로 자신을 꾸짖는지 부탁하는지를 안다.
그러므로 귀신에게는 이제는 그가 사람 속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고지하고 그 사람에게서 떠나갈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직접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도만 "꾸짖"었지만, 귀신이 역사하고 있는 현장과 대상에 대해서도 꾸짖으셨다.
특히 베드로의 장로가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에는 열병을 꾸짖으셨으며(눅 4:39), 심지어 자연의 기본적인 힘들 즉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하게 하기도 하셨다(막 4:39).
왜냐하면 질병과 바람 가운데에 귀신이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So he bent over her and rebuked the fever, and it left her. She got up at once and began to wait on them.

마가복음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He got up,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waves, "Quiet! Be still!" Then the wind died down and it was completely calm.

명령하여 쫓아내야한다(마가복음 5:7~9)

귀신에게 떠나나갈 것을 명령하고 나간 다음에는 "다시는 들어오지 말라"고 다짐시키듯 명령해야 한다(막 5:7~9).

귀신이 잘 나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귀신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했으나 잘 나가지 않을 때에는 당황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12제자들이나 사도바울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는 그냥 귀신이 순종하며 떠나갔는데, 나 자신이 명령했을 때에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때에는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 이유를 다시 확인해보아야 한다.
귀신이 떠나지 않는 데에는 다음의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어서다.
그때에는 그만한 이유들을 제거해주고 명령해야 한다.

첫째, 귀신들린 자가 회개하지 않은 죄를 갖고 있을 때 귀신은 잘 떠나가지 않는다.

죄를 완전히 인정하고 회개해야  떠나간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요일 3:8).
그러니 자기가 그 사람 속에 들어있을 합법적인 이유가 있는데 왜 떠나가려고 하겠는가? 그냥 버티려고 할 것이다.

둘째, 귀신들린 자에게 많은 귀신들이 들어있으면 귀신은 잘 안 떠난다.

그때에는 "너 말고 누가 더 있어?" 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군대귀신처럼 많은 귀신들이 들어있을 때에는 잘 떠나가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때에는 "너 말고 다른 귀신도 함께 떠나 가~~"라고 명령해야 한다.

셋째, 귀신들린 자가 스스로 자기 안에는 귀신이 없다고 말하거나, 벌써 귀신들린 지가 몇 년쯤 되어서 귀신이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귀신이 떠나가지 아니한다.

귀신은 계급이 높을수록 자기를 잘 감춘다.
이제 맨 밑의 귀신들은 금방 자신을 드러내지만, 오래된 높은 계급의 귀신은 어찌하든지 자신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넷째,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합법적인 이유들이 있으면 안 떠난다.

예를 들어, 과거에 무당집에 살면서 그 집의 밥을 얻어먹고 살았다거나, 굿하면서 귀신에게 절을 한 일이 있다거나, 점을 친 일이 있다거나 하면 귀신들은 잘 안 떠난다.
그때에는 우상숭배한 죄를 직접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시인한 뒤에 하나님께 분명하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또한 자기 몸에 귀신이나 용같은 문신을 새기고 있거나, 용반지를 타고 있거나, 용바클을 허리띠로 차고 있거나, 집 안에 옛날에 귀신을 섬길 때에 사용하거나 간직했던 물건이 있으면 귀신은 잘 안 떠난다.
벽에 걸쳐져 있는 사진이 남아있을지라도 귀신은 잘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에 귀신을 섬기거나 귀신을 섬길 때에 사용했던 물건이 있으면 전부 태워버리거나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귀신은 잘 안 떠나간다.

다섯째, 귀신더러 떠나가도록 명령하는 축사자가 기도를 많이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저쪽에 있는 귀신의 숫자가 내가 기도함으로 나를 돕도록 하늘에서 내려보낸 천사보다 숫자가 많을 때에 귀신들은 잘 안떠난다.

예수님께서도 변화산 아래에서 9명의 제자들이 자신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묻자,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기도의 분량이 어느정도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강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면 귀신이 저절로 겁을 먹고 떠나간다.

귀신이 잘 나가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신도 사람의 눈을 통해 우리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두 가지를 생각하면 된다.

첫째, 지체하면 할 수록 귀신은 고통이 더 가중 될 것이다.

"너는 내가 떠나가라고 명령했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떠나가지 않는다면 너는 떠나지 않을수록 더 괴로울 껄.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가는 것이 좋을 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귀신들에게 떠나갈 것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이 떠나가지 않는다면, 귀신은 그순간부터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명령하는 그 말씀이 이 귀신에게는, 때로는 칼이 되어 귀신을 잘라버리고, 때로는 불이 되어 귀신을 태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신이 떠나지 않더라도 급하게 마음을 먹지 말라.
느긋한 마음을 먹으라.
"네가 떠나지 않을수록 너는 더 고통을 받을 것이다. 너만 손해보는 거야"하고 생각하고 있으라라.

둘째, 귀신의 속임수에 놀라지 말라

감히 네가 누구에게 들어와서 이 장난질을 하는거야! 하고 생각하라.
이미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었기에 죄사함을 받은 자요, 예수님에 대한 믿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들, 장차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자에게 감히 종(노예)인 주제에 말을 듣지 않고 버티는구나.
감히 겁도 없이 말이야! 라고 생각하라.
그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가소롭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당황해하며 포기하면 귀신들도 우리들의 마음을 다 알고 더욱 겁을 상실한 자가 되어간다.

귀신은 영물이다.
귀신도 영물이기에 귀신같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 놈들도 다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도 영적 세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일정한 법칙과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비록 능력있는 존재라도 자기의 권한 밖의 일을 결코 행할 수가 없다.
그러면 그들의 불법에 대한 심판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사람을 점거하고 있을 때에는 과감히 쫓아버려야 한다.
그러나 가만히 놔두면 저놈도 사람의 몸 속에 기생하면서 살아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지은 죄들이 있으면 회개하라.
그리고 우상숭배와 관련된 물건들과 문신을 찾아내어 제거하라.
그리고 과감히 그들에게 선포하라.
꾸짖으면서 나갈 것을 명령하라.
나가지 않을수록 자기만 손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들에게 명령하라.
내가 떠나가라고 명령하는데도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징계가 임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꾸짖으라.
내 입에서 나가는 명령과 말씀이 저들에게 칼이 되고 꽃히고 불이 되어 태워버린다는 것을 기억하고 쫓으라.
그리고 단호하게 떠나갈 것을 계속 명령하라.
떠나갈 때까지.
그러면 어느 순간에 이르면, 버티다가 버티다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후에 떠나가게 된다.
귀신도 상당히 끈질긴 놈이기도 하다.
그래서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며, 단호함이나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칭할 때 더러운 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귀신은 영물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 ἀκάθαρτον  πνεῦμα)은 무엇을 의미할까?
유대인들은 사탄이나 옛뱀 또는 마귀를 더러운 영(the unclean spirit)라고 불렀다.
사탄은 주로 구약에서 말하는 악한 영이고 마귀신약에서 말하는 악한 영인데 같은 종류입니다.

사탄이나 마귀는 하나의 거대한 악한 영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탄안에 수많은 귀신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귀신들이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꼬이고 미혹케하는데 적그리스도인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거짓선지자를 따르는 이단들과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세상권세자인 군왕들이 가운데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휘하(麾下, 주장의 지휘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에베소서 2:2)

요한계시록 8: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이것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마귀와 더불어 불과 유황못인 지옥에 던저질 것이라고 요한계시록 20:10에서 말씀하고 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귀신은 더러운 귀신인데 이 더러운(á̓κάθαρτος, unclean)이란 뜻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깨끗한(pure clean)의 반대뜻이다.
무엇을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순전하신 분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순전하시고 깨끗하신 분인데 마귀가 더러운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이요 악이요 죄라고 한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반대로 행하기 때문에 더러운 영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서 거룩함과 더러움울 규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하나님편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반대편에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 외의 것으로는 무엇으로도 거룩함과 더러움을 결정한 기준이 없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마귀에게 속해서  사람들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마귀의 행동대원격인 귀신을 의미한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에게서 나갔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왜 나갔을까?

그것은 더러운 귀신의 특성 때문인데 우리가 옛말에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물러있지 못하고 온 곳을 다 헤집고 싸돌아다니는 것이 역마살인데 이것은 떠돌아 다니는 귀신이란 뜻이다.

귀신은 한 자리에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을 옮겨다니면서 사람들이 죄를 짓게 만드는 일을 한다.
더러운 귀신이 이 사람 저사람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집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귀신은 사람의 마음을 집으로 삼고 살아간다.
옛날 사람들은 귀신이 나무나 바위나 집이나 길에 붙어서 산다고 한다.
그러나 귀신은 결코 사람을 떠나서 살수 없다.
귀신이 거하는 집은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가 사복음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뛰쳐나와서 예수님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종종 나오고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고 명령하셔서 귀신들린 사람의 병이나 정신을 고쳐주셔서 멀쩡하게 만들어 주시는 사건이 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은 귀신이 사람의 마음을 거처로 삼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줄만한 어떤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더러운 귀신이 사람의 마음을 집으로 삼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더러운 귀신이 편히 쉴 안식처는 물없는 곳이란 뜻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물없는(ἀνύδρων) 곳은 어떤 곳일까?
유대인들은 더러운 귀신이 물없는 곳 즉 모래사막이나 풀이 없고 황량한 황무지에 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없는 곳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막이나 메마른 황무지가 아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도 귀신이 깊은 산속이나 오래된 고목에 거한다고 믿고 산의 바위아래나 고목나무 아래서 귀신을 부르는 고사를 지낸다.
무속인들이 귀신을 부르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더 강하고 센 귀신을 등에 업고 굿을 하기 위해서이다.
마귀나 귀신은 영물이기 때문에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곳이나 다닐 수도 있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머무르는 집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들도 집을 떠나 여기저기 다닐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집에 와서 안식을 누리고 쉼을 얻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처럼 더러운 귀신도 여기저기 옮겨다닐 수 있고 광야나 산에도 다닐수도 있고 하지만 쉴곳은 사람의 마음인데 예수님은 귀신이 쉴 곳은 물 없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물 없는 마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물은 거룩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
물없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물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한 마음은 더럽고 황량하며 강퍅하고 사막과 같이 메마른 영혼이다.
더러운 귀신은 특성상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안에 거하기를 좋아한다.

더러운 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15:19-2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귀신은 이런 더러운 생각과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을 가진 자 속에 들어가면 매우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적 정결의 함정이 있다   

그런데 이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으로부터 나가서 물없는 곳을 찾아다닌 이유는 이 사람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정결해졌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인데 바리새인들은 한때 모세의 율법으로 일시적으로 또는 반복적으로 지킴으로 그 마음이 정결케 되어지기도 했다.
율법이나 인간의 강한 의지나 노력도 어느 정도 어느 기간동안에는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다.
개과천선한다는 말이 있는데 잘못 들어선 길을 버리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결의를 실천하여 마침내 정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죽을 힘을 다해 죄와 욕심을 억누를 수 있지만 인간은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기 때문에 한 번 방심하면 순간적으로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율법이나 인간의 의지노력 수양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과거에 노름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나서 후회하며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잘라내었는데 나중에는 발가락으로 놀음질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에 양도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믿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음욕을 없앨까 날마다 노력했는데 그 음욕이 없어지지 않아 어느 날 산기도중에 돌을 들어 자신의 음부를 쳐서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정결하게 되려다가 결국 이단 교주가 되고 말았다.

죄를 끊으려는 이 몸부림이 얼마나 처참한가?
그렇다고 해서 정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과 인간의 의지 수련은 어느 정도 효과는 있지만 결국 인간의 마음깊숙이 숨어 있는 욕망에 의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노력이나 율법 인내함으로 죄를 없이한다든지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확인하는 비극이 되어진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의로워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 때 잠시마음이 깨끗해져서 더러운 귀신이 그들에게서 떠나간 것이다.
어쨌든 잠깐이지만 모세의 율법으로 깨끗해지기는 했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노력으로 수련으로 잠시 마음이 깨끗해진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은 "어 이 사람이 마음이 깨끗해졌네"  하면서 귀신 적성상 맞지 않으므로 나와서 다른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으로부터 나간 더러운 귀신은 자신이 쉴만한 더러운 영혼을 찾고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했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수련으로 죄를 억누르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으로 마음을 깨끗케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더러운 귀신은 왜 다른 더러운 영혼을 찾지 못했을까?

이 세상에 더러운 사람들이 그렇게도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더러운 귀신이 쉴곳을 찾지 못했다는 뜻을 잘 생각해보자.
쉬기를(ἀνάπαυσιν. rest) 구하되(ζητοῦν. seeking)  그러나(καὶ.  but) 찾지 못했다(μὴ  εὑρίσκον. not finds)

여기서 쉬기를(아나파우시스. ἀνάπαυσιs)이라는 말은 막간 잠깐(intermission)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막간을 이용해서 라는 말을 하는데 연극공연할 때 일 막이 끝나고 이 막이 시작되기 전 잠깐의 휴식시간인데 이 때 관객들은 음료수를 마신다든지 화장실에 다녀온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마음을 율법이나 도덕 또는 수련등으로 깨끗하게 청소하는 그 잠깐 사이에  더러운 귀신이 잠시 가 있을 곳을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안을 청소하면서 애들아 잠깐 밖에 나가 놀다가 엄마가 청소 다하면 들어와라고 하실 때가 종종 있었다. 왜냐면 어머니 생각은 애들이 집안에 바글바글있으면 청소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잠시애들한테 휴식시간을 주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은 막간을 이용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흥미있고 신나는 일들을 찾아 다녔는데 더러운 귀신이 찾아다닌 것은 악하고 못되고 더러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충동질했던 것이다.

더러운 귀신들은 말 그대로 악동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못된 짓 악한 짓 아주 혐오스럽고 더러운 그런 쓰레기같은 자들을 찾아다니는 악동들이 바로 귀신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러운 귀신은 좋아할만한 그런 악하고 더러운 짓들을 하는 자들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귀신들도 다 종류가 있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그 앞에 귀신들의 특성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셨다.
벙어리귀신, 더러운귀신, 일곱귀신, 군대귀신, 꼬부라져 펴지못하게 하는 귀신등 예수님은 귀신들이 인간에게 정신병과 여러 가지 질병을 가지고 들어가며 귀신이 하는 일들을 병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실 때 장님이 앞을 보기도 하고 벙어리가 말을 하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키던 사람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정신이 온전하게 되며 병증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일곱 귀신(누가복음 8:2, 11:26)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일곱 귀신이란

귀신들도 다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귀신은 어떤 귀신인가?

바리새인들 즉 율법주의라는 외식과 위선의 귀신이며 교만과 사람차별이라는 귀신이 들어와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지식적이며 고상한 죄악을 범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더러운 영혼을 가진 자들을 사냥하는 귀신을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여기에 있는 더러운 귀신은 양반 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도덕군자요 법을 잘지키는 자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떠받듬을 받는 자들속에 있는 위선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악함을 우리 주님은 드러내고 계신다.
더러운 귀신은 자신이 쉴만한 곳을 탐색해봤지만 자신의 특성과 맞는 위선자들을 찾지 못하고 다시 나왔던 그 사람에게 찾아온 것이다. 또한 거짓말하는 귀신 음란한 귀신 시기질투하는 귀신 남을 비판하고 악담하는 귀신 자살하는 귀신등등 귀신의 종류는 매우 많은데 그 귀신들은 적성에 맞는 사람에게 들어간다.

우리가 살인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충동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소에 원망과 저주와 앙심을 계속 품고 있다가 귀신의 충동으로 들어와서 결국 끔찍한 악을 저지르게 된다.

 어떤 죄든지 순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죄된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으므로 언젠가 그 죄를 좋아하는 귀신이 들어와서 실제로 그 죄악을 짓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샤마니즘에 보면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구천을 헤매다가 사람들 속에 들어온다는 말을 무당들이 하는데 이것은 다 귀신의 속임수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결코 이 세상에 있을수 없고 단지 마귀의 하수인인 귀신이 죽은 자들의 흉내를 내어서 마치 전생이 있는 것처럼 죽은 영혼을 달래주어서 보내주어야 한다고 해서 마귀가 사람들에게 제사(섬김)을 받아먹으려는 수작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전생체험이나 무당이 죽은 자의 혼을 불러들인다는 초혼의식은 완전히 마귀의 장난질이다. 

결코 무당이 죽은 부모의 영혼이나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올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들어가서 심판을 기다린다.
그래서 죽은 자는 다시 세상에 불러올수도 머물수도 없다. 

불교에서 49제를 하는 것은 구천에 떠돌아 다니는 죽은 사람의 혼이 49일째에 저승으로 가는데 잘 보내줘야 한다고 하면서 고인의 가족들에게 돈이나 절에 필요한 물건을 바치라고 한다.
죽은 영혼을 이용해서 돈벌어먹는 사람들이 누가 있는가 주변을 둘러보라! 
실상 카톨릭에서는 죽은 자를 위해 선행을 하면 그가 지옥에서 연옥으로 올라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헌금을 뜯어낸다.
무당 점쟁이도 죽은 자의 혼을 달래기 위해 굿을 하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낸다.

만일 어떤 교회에서도 죽은 자를 위해 명복을 빈다든지 어떤 기념비나 기념회를 만들기 위해 헌금을 요구한다면 귀신의 짓거리이며 저주받을 일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귀의 하수인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고 오직 살아있는 가족들이나 친척들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행을 행해야 한다.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오다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귀신이 나왔던 사람에게 돌아가보니까 그 사람의 마음은 깨끗해졌는는데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을 깨끗이 청소한 사람의 맹점은 그 마음에 주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빈집 빈 마음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아무리 모세의 율법과 구제와 금식과 기도로 자신들을 청소했지만 그 마음속에 진정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빈 영혼으로 두었던 것이다.
깨끗이 청소되어 있는 정돈된 영혼에 주인이 없다는 사실은 더러운 귀신들에게 아주 구미가 당기고 굉장한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상황이었다.
다시 일곱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소제되고 정리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온갖 더러운 것들로 다시 채우는 일이다.
세상사람들이 가장 흥미있고 매우 쇼킹한 뉴스는 너무나 착하고 도덕적이고 예의바르고 정의로운 사람이 갑자기 사기를 쳤다든지 뇌물을 받았다든지 혹은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면 뉴스에 토픽으로 장식된다.
고아원이나 장애자 시설을 운영하는 목사나 신부 혹은 스님이 횡령을 하고 아이들에게 몹쓸짓을 했다는 뉴스를 들으면 사람들은 매우 흥분하면서 그럴수가 있어 그게 사람이야 하고 난리가 난다.
겉으로 볼 때는 매우 착하고 법없이도 살 사람인데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고 강도짓을 했데 하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지적인 마음을 가진 자의 삶을 더럽고 음란하게 어지럽히는 것이 더러운 귀신들의 아주 재미난 활동인 것이다.
세상사람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 될 수 있다.
특히 거룩하고 의의 사자같이 보였던 교회 목사가 성추행이니 그룸밍 성범죄니 하고 뉴스에 나오면  사람들의 입에 매우 흥미로운 가십거리가 된다.
마치 어머니가 깨끗하게 집안을 청소했는데 철없는 자식들이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서 흙뭍은 옷을 털지도 않고 더러운 손과 발도 깨끗해진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온갖 때를 뭍히면서 깔깔대고 재미있는 놀이라고 하듯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는 것과 같다.

얼마나 악동들인가?

지식으로 가득차고 윤리와 도덕으로 가득한 인격자들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가지런히 정돈된 마음을 음란함과 탐욕으로 외식과 위선으로 더럽혀놓는 악동들이 바로 더러운 귀신들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도덕군자이고 법을 잘지키는 사람이라고 해도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사람들앞에서 선비같고 점잖은 사람도 그가 혼자 있을 때 또는 그 마음속에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들이 들어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나는 아니다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기의 의와 자기의 의지 자기의 도덕과 자기의 법으로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부하고 믿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러운 귀신이 일곱이 들어가 상태가 전보다 더 악해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짓과 위선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은 점점 더 더러워져서 나중은 처음상태보다 7배나 더 악한 더러운 귀신들의 집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씀하신 귀신이야기를 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 도덕군자들이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고 주님을 잡아 죽이려고 이를 갈았던 것이다

주님은 율법주의자 외식주의자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겉으로 법을 잘지키고 도덕적이며  모범적이고 착한 척하지만 너희들의 영혼은 7마리 더러운 귀신의 잡탕질하는 놀이터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영혼의 집에 주인을 모셔야 한다.
우리의 영혼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될수 없다.
왜냐면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쫓겨난 후부터 인간의 영혼은 쭉 빈집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마귀는 사람들에게 네 인생은 네 거야 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속삭인다.
그래서 케세라 세라 네 인생이니 마음껏 즐겨라 하고 귀신은 속살거린다.
내가 내 영혼을 주인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대고 내 인생은 내것이라고 아무리 소리질러봐도 소용없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가 가르켜주지 않아도 바로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내가 왜 이러지?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할때가 있다.
이러한 자책은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한다.
착한 것같은 사람도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도 자신의 뜻과 달리 행동하는 자기를 보고 놀랜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누군가 있다는 뜻이다.
그 영혼의 주인이 더러운 귀신이라면 점점 점점 더 나빠져서 결국은 7귀신의 거처가 될 것이다.
7귀신은 단지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완벽한 악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혹시 일곱귀신이 들렸다고 해도 회생의 가능성을 있다.
일곱귀신이 들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하나님으로 영접한 후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일곱귀신에 매여서 인생을 포기할 정도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맞이했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선포한 여인이 되었다.
우리의 영혼이 더러운 귀신의 집이나 난장판이 되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 /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전혀 없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나 죄가 전혀 없으시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의 중보자 그리스도 주가 되시고 장차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러 다시 재림하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로 모시고 내 영혼의 집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내 영혼에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가 거하시고 내 영혼의 주인이 되실 때 더러운 귀신들은 왔다가도 혼비백산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될 것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앞에 갈 때까지 더러운 귀신들은 우리의 영혼에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의와 거룩함은 결코 도덕이나 율법 선행 수도 지식 인격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현 시대에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변태적행동과 탐욕으로 부끄러운 짓을 행하고 권력자들이 음란과 정욕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선생이 제자들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행하고 목사가 스님이 신부가 외간 여자들로 인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본다.

우리 자신이 이것을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러한 더러움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영혼속에 이 더러움이 깊이 숨어 있을 수가 있다.
더러운 귀신이 탐하고 유혹하는 더러움을 우리가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거룩함 밖에는 없다.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우리 영혼의 주인으로 붙잡아 모셔놓을 때 우리는 모든 더러움을 이겨낼 수 있고 어떤 종류의 귀신도 다 쫓아낼 수 있다.



더러운 귀신(
The evil spirit)이란 더러운 영(The unclean spirit)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한 영으로 존재하는데 더러운 영은 하나님을 떠난 영이기 때문에 더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귀신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명칭으로 부릅니다.





축사(逐邪) / 귀신을 쫓아내는 것

쫓을 축(逐), 간사할 사(邪)
사귀(邪鬼)ㆍ사기(邪氣)를 물리쳐 내쫓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태복음 12:43-45)

고양이는 영물(靈物)인가?

오래 전에 나온 미국 영화 “사랑과 영혼”(the Ghost)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억울하게 죽은 남주인공의 영이 사랑하는 애인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데 하루는 그녀 혼자 사는 아파트에 강도가 들었다. 자칫 강간당할 위급한 상황인데 애인은 전혀 낌새도 못 채고 있었다. 죽은 영으로선 그녀에게 그 사실을 도무지 알려 줄 길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강도 앞에 고양이가 있어서 그 영이 고양이와 강도 사이에 들어가 고양이에게 자꾸 해코지를 했다. 고양이가 화가 나서 영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실체가 없는 영 대신에 강도의 얼굴을 할퀴게 되었다. 갑작스레 얼굴에 피가 나도록 깊이 할퀸 강도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말하자면 사람은 죽은 영혼과 전혀 교통을 못했지만 고양이는 알아봤다는 뜻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서양인도 한국 사람처럼 고양이를 영물(靈物)로 간주하는가보다 생각했던 적이 잇다.

예수님은 지금 비유이긴 하지만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 영물인 고양이에게 들어가 쉬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 이야기다. 사탄이나 하나님과 교통(communication)이 가능한 영적인 존재는 만물 중에 인간뿐이다.

또 죽은 자의 영혼은 반드시 천국 아니면 지옥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마련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히9:27) 귀신이란 타락한 천사장 즉, 사탄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영계에서 쫓겨날 때에 함께 동조했던 악한 천사들이다. 세상에 미련이 남았던 죽은 자의 영이 구천(九天)으로 가지 않고 이 땅에서 떠도는 것이 귀신이라는 것은 민간의 미신일 뿐이다.

귀신이 쉬려고 찾아간 “물 없는 곳”은 광야 사막을 뜻한다. 당시의 이스라엘에선 광야는 사탄의 본거지로 간주되었다. 비유이긴 해도 귀신이 광야로 갔지만 쉬지 못했다는 것은 이런 뜻이 된다. 한 귀신이 어떤 사람을 실컷 갖고 놀면서 더럽고 추하게 만들고 그 인생을 실패케 한 후에 자기 임무를 완수했다고 여기고 보스에게 찾아가 휴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 사탄은 겨우 그것으로 쉴 수 없다고 도리어 크게 야단치면서 네보다 더 강한 동료 귀신 여섯을 더 붙여줄 테니 어떡하든 돌아가 더 열심히 맡은 일을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또 돌아와 보니 그 사람이 깨끗하게 소제되는 바람에 이젠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신나게 데리고 놀면서 그 자의 인생을 완전히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사탄과 그 졸개인 귀신들이 설치는 무대는 오직 인간과 인간이 활동하는 세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들고 세상을 더러운 죄악으로 만연케 하는 것만이 사탄과 귀신들의 존재 목적이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다닌다. 사탄의 식욕은 끝이 없다. 포만감을 절대 느끼지 않으며 활동을 쉬는 법이 없다. 신자로선 항상 깨어 경성하여 기도하며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귀신 하나가 들어있을 때보다 일곱이 들었으니 얼마나 형편이 심해졌겠는가? 그러나 단순히 이전보다 일곱 배나 나빠졌다는 뜻이 아니다. 일곱은 완전 숫자, 더 이상 찰 필요가 없는 숫자를 뜻한다. 더 나빠지려야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말한다. 나아질 가능성은 물론 소망마저 전무(全無)한 것이다. 도무지 구원될 수 없는 완전한 멸망이다. 그럼 대체 예수님은 누구를 대상으로 비유한 것이며, 또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궁금해진다.

완전히 멸망당할 자는 누구인가?  

많은 신자들이 이 비유의 대상에 대해 한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먼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귀신이 물러나갔다가 도덕적 종교적 죄를 많이 지으면 다시 일곱 귀신이 들어와 멸망한다고 여기는 신자들이 간혹 있다. 신자는 하나님에게 야단 징계는 맞지만 절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거기다 사단과 귀신이 신자를 훼방, 시험, 유혹은 해도 절대 망하게 하지는 않는다. 신자 내면에 들어와서 점거하고 마음 놓고 갖고 놀 수는 결코 없다.

또 예수님이 귀신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었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 나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다시 귀신이 들어갔다는 뜻도 아니다. 성경은 그 사람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침묵하고 있기에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 예단해선 안 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영육 간에 어디를 고쳐주던 완전한 치유이며 다시 사탄에게 절대 넘겨주지 않는다. 다시 망하도록 놓아둘 양이면 처음부터 고쳐주지도 않으신다. 신자는 때로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갈 수 있어도 영원한 멸망과는 영원히 거리가 멀다. 한 번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의심나는 거의 모든 질문의 해답은 명료하게 혹은 어렴풋이 반드시 본문(text)과 문맥(context) 안에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본문 내의 해답 혹은 힌트부터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45절)고 말했다. 귀신이 쫓겨나간 그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는 등 하나님 앞에 음란한 죄를 많이 지었지만 히스기야왕, 요시야왕,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절에는 죄를 회개하고 영적 부흥을 이뤘다. 그런 때에 귀신이 잠시 떠나고 깨끗이 소제되었지만 다시 죄악으로 타락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그처럼 앞으로의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일리가 있고 올바른 해석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얻은 해석은 다시 문맥의 의미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을 하시기 시작한 39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니”라고 했다. 결론에서도 “이 악한 세대”라고 말했다. 한 문맥이나 이야기 안에 동일한 표현을 사용했다면 그 의미도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중에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할 세대가 직접적이고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며 성전 제사를 열심히 수행했고 율법을 성실히 준행했다. 구제, 기도, 금식, 십일조에 능해 경건한 자들로 존경받았다. 거기다 유대 대중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자들로 오늘날로 치면 목사 선교사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대체 어떻게 해서 일곱 귀신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본문을 해석할 때에 흔히 범하는 우가 하나 있다.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표현에만 주목한다. 그래서 더 나빠진 나중 형편을 죄를 많이 지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실제로 당대에선 가장 의로운 자들로 죄를 많이 짓지 않았다. 귀신이 나갔으니 당연히 깨끗해진 것이다. 예수님 표현대로 하자면 귀신이 스스로 나간 것이지 사람이 내어보낸 것이 아니다. 귀신은 사람의 내면이 깨끗하면 아예 들어오지 못한다. 더럽고 추하고 어두운 심령에 잘 들어가는 법이다. 특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외롭게 혼자 따로 떨어진 채 사는 자들에게 더 잘 들어간다.

본문의 해석의 키는 그 사람의 내면이 텅텅 비워졌다는 사실에 있다. 외롭게 격리된 자에게 귀신의 훼방이 심하다는 것도 결국은 내면이 비워졌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내면이 비워진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하나님의 영이 채워져 있었다면 일곱 귀신이 아니라 그 보스인 사단이 와도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 본문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잘 알고 열심히 믿어도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채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상대방 코트에 넘어간 공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물었다(요 8:1-11).
간음한 여인은 그 자리에서 돌로 쳐서 죽이면 되었다.
구태여 물어볼 일이 아니었는데도 일부러 예수님 앞까지 끌고 온 수고를 한 까닭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작정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이라고 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위반한 위선자라고 몰아붙이고, 그 반대로 용서해주라고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어긴 이단이라고 정죄할 판이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이었다(요 8:7).
죽이라고도, 살려주라고도 하지 않았다.
예수를 완전히 꼼짝 못할 함정에 빠트렸다고 믿었던 그들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주님은 절묘하게 도리어 그들에게 그 여인의 처분을 맡겼다.
공이 상대방의 코너로 넘어간 셈이다.
인간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릴 수는 결코 없다.
너무나 교만하고 완악한 죄이다 못해 정말로 하늘에서 보시고 웃을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다.

예수님의 뜻은 “율법에 대해선 너희가 전문가이자 집행자가 아니냐? 그러니 너희가 알아서 처리하라. 실은 나한테까지 데리고 올 필요 없이 율법대로 바로 처리했어야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그렇게 의롭다면 너희야말로 정죄할 자격이 있지 않느냐. 이 중에 너희 말고 이 여인을 정죄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럼 어떤 결과가 되는가? 누구라도 먼저 돌을 들고 치면 자신은 전혀 무죄한 성자가 된다. 반면에 돌을 들고 치지 않으면 율법을 수호해야할 자들이 오히려 율법을 어긴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실제로 벌어진 상황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물러갔다. 팽팽한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찼고 이제 곧 피가 튀는 비참한 장면이 연출될 상황이 너무나 싱겁게 종료되었다. 기세등등했던 그들이 왜 모두 물러가버렸는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이전에 지었던 크고 작은 죄들이 순간적으로 떠오르면서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는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리 선하지 않다. 아니 사실은 아주 위선적이고 치사하고 음흉하다. 지금 물러간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시장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경건한 자들이었다. 스스로 회개를 쉽게 할 자들이 아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모함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또 자기들의 기득권 보호라는 내면의 동기는 철저히 감추었다. 아니 하나님을 위한다는 신념과 열정에 가득 차서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평소에 미워하며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상대인 예수에게서 네 자신의 죄부터 돌아보라는 한 마디를 들었다고 결코 쉽게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꼴로 분노와 미움만 가중된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싫은 자가 말하면 그 옳은 말 때문에라도 더 미워진다.  

잘 되라고 하는 부모의 진정어린 충고조차 반발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솔직히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가 어려서부터 부모님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다면 지금보다는 형편이 한층 나아지고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겠는가? 미국 이민 와서 이런 고생도 하지 않고 말이다. 부모가 사랑으로 당부하는 지당한 말씀도 듣기는커녕 반발하는 것이 인간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길 외에 어떤 소망이 있겠는가?

물러간 두 가지 이유

인간의 사고는 가장 최근의 일부터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물러간 개연성 있는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다. 우선 죄송하지만 영화로 치면 R(성인) 등급의 이야기를 하겠다. 간음한 여인은 아무래도 얼굴이 예쁜 편이다. 한국의 한 뚱뚱하고 못난 노처녀 개그맨이 너무 외롭다 못해 집에 도적이라도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우스개를 했다. 못난 여인은 시집도 못 가는데 간음할 수는 없지 않는가?

어쨌든 예쁜 여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왔으니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거의 벌거벗은 몸이다. 그런 여인이 지금 남정네들이 둘러싼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져 있다. 사람은 참으로 요상한 동물이다. 발레나 피겨처럼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쩍쩍 벌리고 올려도 예술적 감동을 느끼는 반면에 노출 여부와 상관없이 이상야릇한 모습이나 상황에서 정욕이 발동된다. 어려서부터 사탕을 뺏거나, 속이거나, 훔쳐서 먹어야 훨씬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경은 그래서 죄를 화살이 과녁을, 즉 정도와 기준을, 벗어난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둘러싼 남정네들이 그 여인을 정죄하여 죽이려 들면서도 내심 그 여인의 몸매를 지긋이 감상하고 음욕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칠 때에 참여했던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예쁜 여인을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순간적으로 깨달았을 수 있다. 그 여인은 육체로 간음했지만 그들은 마음과 영혼으로 간음한 것이다. 그녀만 돌로 쳐 죽임을 당할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돌을 맞아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따로 있다. 율법에는 간음한 남녀는 둘 다 처형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상대 남자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남성을 우대했던 당시에 남자부터 돌로 처형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예수를 모함에 빠트리려는 음모가 배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인을 술이나 미약으로 유혹했든지 간에 그 구체적 경과는 몰라도 여자만 잡혀온 것은 분명히 억울한 희생양이었다.

명색이 종교지도자들이었는데 그 생각이 얼마나 간사하고 치졸한지 모른다. 우선 그 여인의 생명과 인격은 정말 돌멩이보다 못하게 여겼다. 또 그녀를 돌로 쳐 죽이는 책임을 예수께 떠넘기려 했다. 아니면 예수를 일구이언하는 위선자로 매도하려 했다. 어떤 경우가 되던 예수를 죽일 수 있는 나름 타당한 근거를 쌓으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너희가 여인의 정죄를 책임지라고 하자 아무리 양심에 털이 난 자들이었지만 불현듯 심령에 찔림을 느낀 것이다. 만약 단순히 그녀를 보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든지, 지난 죄들이 생각났다 치면 개인적 문제이므로 남들이 알아챌 리가 없다. 먼저 돌을 던지고 여인을 정죄하면 율법을 가장 잘 준행하는 자로 도리어 존경 받을 수 있다. 반면에 음모란 여러 명이 의논하는 법이다. 조금 전에 여자만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몰면서 예수까지 옭아매는 일석이조의 논의를 함께 했던 자들끼리는 서로의 잘못을 익히 알고 있다.

   성경이 얼마나 정미한 기록인지 모른다. 어른부터 물러갔다고 한다. 어른은 나이든 장로,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의미하는데 악하고 추한 모의에 함께 참여했던 자들로선 도무지 먼저 돌을 들고 칠 자신이 안 생긴 것이다. 율법 집행자들이 물러가니 구경꾼으로 따라온 대중들이야 더 머물 일이 없다. 어른이 직분과 상관없이 순전히 나이만 뜻한다 쳐도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고, 아니 늙은이가 더하다는 뜻이 된다. 노아 홍수의 심판 후에 하나님이 탄식했던 상황에서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물론 그들이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었거나, 또 그 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음모를 꾸몄다는 성경의 언급은 없다. 단순히 행간의 의미를 추적해 본 개연성 있는 추측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어 죽일 구실을 만들려는 음모를 꾸민 것만은 확실하다. 또 그래서 그들이 희미하게나마 양심에 찔려 물러 간 것은 오늘의 본문으로 치면 한 귀신이 물러간 것이다. 그들의 심령을 묶고 있던 사단의 사슬에서 일시적으로 풀린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음모가 완전히 무력화되고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으니 씁쓸한 패배감, 낭패감, 수치감이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예수에 대해 얼마나 이를 갈았을지 눈에 빤하다. 광분하여 예수를 더 심하게 대적하다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았다. 일곱 귀신이 들어가 나중 형편이 더 심해진 것이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기들 권세, 명예, 재물이 줄 것만 염려해 하나님 그분을 대적했다.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히 영원한 멸망 외는 없지 않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

반면에 그 여자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유대 율법으로 따져 그녀의 운명은 곧바로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아예 모든 이의 관심 밖이었다. 본인도 이제 곧 돌팔매가 날아올 텐데 그 고통을 어찌 견뎌낼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어떡하든 머리에 돌 맞는 것은 피해보려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는지 모른다. 벌거벗은 여인네들은 본능적으로 가슴을 가리는데 머리를 감싸고 있으니 더 야릇한 포즈가 되었을 것이다. 그 벌거벗은 몸 위로 남정네들의 끈끈한 시선이 지렁이처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기에 부끄러워서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을 것이다. 소망이라곤 단 한 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모든 미련을 포기했을 것이다. 어서 죽어 이 상황이 한 순간이라도 빨리 끝나기만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죽지 않고 살아나게 된 것이다. 새 인생을 덤으로 허락 받았다. 아마 유대 사회에서 간음한 여자가 처형 안 당한 최초의 사건일지 모른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했는가? 물론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 쪽에서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렸다. 물론 자의로 그랬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긴 했어도, 그 속마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하고 그 영원한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의탁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고 칭송 받았고, 율법을 해석 판단하고 집행하는 권세를 가졌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앞을 떠남으로써 나중에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반면에 인간의 상식, 법률, 관습, 종교, 양심 어느 것으로 따져도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은 예수 앞에서 아무리 부끄럽고 치사한 모습이라도 끝까지 남아 있음으로써 천국의 영광스런 구원을 얻었다.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진짜로 살고 죽음이 누구에게 달렸는지 깨닫겠는가?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본문의 일곱 귀신의 비유가 뜻하는 것은 우선 지정의로 인식은 못해도 인간의 내면에 영이 자리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또 그 영이 오히려 지정의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은 비워있지 않고 반드시 사단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두 종류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더러운 사단의 영에 조종을 받아서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는 자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의 인도에 따라 밝고 빛나는 하늘나라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자다.
하나님에 속했느냐, 사단에 속했느냐 둘 중 하나다.
그 중간 지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속한 자는 아무도 없다.

말하자면 지성, 도덕성, 종교성이 뛰어나서 세상에서 의인으로 칭송 받아도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없으면 일곱 귀신이 들어가 완전히 멸망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 내면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갈 수 없다. 그 여인처럼 주님 앞에 자신의 전부가 썩고 추했음을 진실로 고백하고 엎드리는 길 말고는 말이다.

일곱 귀신이 들었다고 해서 괴상한 말과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실제로도 가장 경건한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심판권을 넘겨주었지만 차마 양심에 찔려 정죄하지 못했다.
그럼 자기들도 이미 죄인임을 시인했다.
가장 경건했던 그들마저 죄인이라면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을 절대 정죄하지 못한다는 것이 간음한 여인 사건의 또 다른 의미다.

그 장소에서 인간을 정죄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자는 오직 메시아 예수님뿐이었다. 그런데 그분 하나님조차 그녀를 정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용서하는 사랑을 베푸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음모에 억울하게 희생되었음을 아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그들의 음모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대중들이나, 현장에서 간음하고 잡혀온 여인이나 모두가 똑 같은 죄인임을 아셨던 것이다. 인간이 너무나 연약, 무지, 무능 한데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사는 진토 같은 존재임을 철두철미 아시기에 너무나도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기셨던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당신께서 택하신 자기 사람을 당신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사실은 외면한 것이 아니다. 그들만 유독 저주하며 야단치셨지만 아무 관심이 없다면 상대도 않았을 것이다. 지도자들이니까 더더욱 안타까워 바로 서라고 꾸중한 것이다. 죽기 직전에도 그들이 자기들이 한 짓을 모른다고 성부께 용서를 구했다. 그들에게 죄 없는 자 먼저 치라고 말한 것도 음모했던 일에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진정으로 회개하라는 구원으로의 초대였다.  

그들은 주님의 그 초대마저 거절했다. 자기들 음모가 들키고 양심에 찔려 물러 가긴했어도, 어쩌면 먼저 물러가는 그 조차 자신의 의이기에 내심 자랑스럽게 여겼을지 모른다. 엄밀히 따져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했어도 자기는 주위의 누구, 누구보다는 훨씬 낫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다. 오늘 날에도 지성과 도덕성과 종교성이 뛰어나서 하나님까지는 인정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린 적이 없는 의로운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동일한 행태이지 않는가?  

예수 믿은 가장 큰 표적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치명적 잘못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라보았고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 그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야단친 이유는 그들이 표적을 보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마12:38) 만약 진정으로 표적을 보기 원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떡하든 예수님의 메시아 됨에 시비를 걸려고 덤볐기에 악한 것이다.

인간적 수단이 고갈되면 기적을 구할 수밖에 없다. 신자는 표적을 구할 수 있고 또 구해야만 한다. 아니 기도의 의미 자체가 그러하다.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이지 않는가? 그래서 아무리 적은 모습이라도 기도가 응답되면 그것은 기적이다. 아니 죄에 찌든 추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예수 믿기 전에 너무나 교만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 기도라는 것을 해 본적이 전혀 없었다. 불쌍한 이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고 부모 형제는 물론 내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 심령이 완전히 깨어지고 난 후에 비로소 기도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기도하도록 만든 것이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기적인 까닭이다.

그랬던 제가 지금 단상에서 설교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표적인가? 여러분을 만날 것은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저의 자격, 의, 공로, 노력, 능력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끄신 일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기적이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이 교회에 나오고, 주위의 성도를 만난 것도 기적이다. 나아가 지금의 아내나 남편이나, 죽도록 말 안 듣는 자식을 만난 것도 다 하나님의 기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라면 정말로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가뜩이나 진정으로 사랑할 시간이 너무 모자라는 인생이니까 말이다.

예수 믿고 난 후에 얻은 가장 큰 표적이 무엇이겠는가? 신자가 되어 가장 수지맞은 것 말이다. 오늘의 본문으로 치면 절대로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나를 갖고 놀 수 없는 신분이 된 것이다. 주 예수 안에 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기적을 성경은 또 이렇게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7-9)

세상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은 당할 수 있으나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단의 훼방과 시험과 유혹은 받을 수 있으나 절대로 그 노예로 묶여 조종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이 비워져 있지 않고 예수의 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환난과 질병으로 고통이 끊이지 않고 인간관계에 상처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쓸 수 있으며 죄에 빠져 추해질 수도 있지만 주님은 끝까지 용서하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신다.

불신자나 신자나 도무지 해결책이 안 보이는 너무나 갑갑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의 나락에는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다. 오직 흑암과 멸망과 죽음만이 기다린다. 여태 주인 행세하던 사단마저 또 한명 예수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기뻐 날뛸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술, 마약, 섹스, 모든 수단을 써보다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저 자포자기한 채 살아 간다. 유일한 위로인 술병을 끌어안고 말이다.

신자가 떨어지는 나락에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아니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신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38년 된 행려병자, 12년간 혈루병을 앓은 여인,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린 된 자, 밤늦게 찾아온 니고데모, 거기다 죽은 지 나흘 되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안에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는 비춰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절대로 일곱 귀신에 물려가도록 우리의 내면을 비워두지 않는다. 그분께 엎드리기만 하면 당신의 사랑과 긍휼로 채워주신다. 아니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우리더러 이제는 이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새롭고도 거룩한 인생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망과 기쁨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앞에서 부모 권면만 제대로 따랐어도 미국에 이민 와서 이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만약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직도 절망의 나락에 홀로 떨어져서 지난 실패를 한탄하고 세상을 불평하면서 술독에 빠져 지새웠을 것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 당신께서 이 교회, 이 자리에 옮겨놓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절대로 이전의 헛된 삶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얼마나 의롭고 경건한지가 아니다. 착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불신자도 할 수 있다. 신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래야만 하는 당위다. 물론 교회 안에서 그러도록 가르치고 훈련 받고 실천해야 함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란 성도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곳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왜 신자더러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는가? 자신이 부인해지는 만큼 성령이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그런다고 당장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고 고통이 멈춰지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담담해지게 된다.  흔들리지 않고 요동치지 않게 된다. 불신자처럼 자포자기에서 오는 담담함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기에 그분의 권세에 힘입어 죄와 사단과 사망 앞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것이다. 또  현실에서 비록 우겨쌈을 당해도 주의 영이 함께 하기에 절대로 망하지 않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선택된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이다라는 명제는 일견 옳아 보이죠. 관계를 맺을 사람을 선택하고 또 사건을 선택하고 진로를 선택하고 사물을 선택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사는 것이 보편적 인간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심지어 인간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결정지어지도록 종교행위를 빙자해서 열심히 빌기도 하죠. 아니 거의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그러한 자신의 그 선택의 용이를 위해서 자신의 종교와 신을 이용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소설 햄릿에 나오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사느냐 죽느냐 거기에 대한 선택을 먼저 해야 돼요! 일단 죽음이냐 삶이냐를 선택을 해야 그 나머지 선택이 가능해질 수 있다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에요.

소유 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요 그 소유라는 대상이 사라지거나 줄어들게 되면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만, 존재 지향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소유의 변화에 의해서 수시로 행복과 불행에 따른 롤로코스트를 타지 않을 수 있어요. 존재가 소유를 지배해야지 소유에 의해서 인간존재가 끌려 다니면 안 된다는 거죠.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여기에 넘어가면 안 돼요. 인간은 소유의 증대를 목표로 삼아서 살아서는 안 되고 인간 존재 자체의 그 가치와 질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삶아야 한다라는 거죠.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걸 다 뭉뚱그려 죄라고 해요. 인간은 소유를 늘이고 성공을 추구하며 행복을 얻도록 창조되지도 않았지만, 자기 존재의 성숙과 발전과 향상을 위해 창조된 것도 아닙니다!

역사는 인간이 착해지고 순결해지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거예요.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죄성은요 자기 존재의 착함이나 선함등도 소유의 대상으로 끌어당겨요. 그래서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소유 지향적 삶이에요.

어떤 스님처럼 무소유의 삶을 자기의 소유로 삼기도 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청빈과 무소유는 그 무소유와 청빈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죄성이란 말입니다. 봉사나 구제 이런 것도 인간들은 소유로 붙들어요. 내 것! 내가 한 것! 그러니까 내가 칭찬받아야 할 일!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진짜 존재 지향적 삶을 선택할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낼 수도 없어요.

여러분 인간들이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행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인간들에 행위, 사건화된 인간들의 행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성경이 관심을 갖는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그를 움직이는게 무엇인가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나쁜 일 한 놈도 천국 가고, 착한 일 많이한 이가 지옥 가는 일이 성경에 그려져 있는 거예요.

(고린전13,3) 3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게 낫땅이라는 뜻이거든요. 없다라는 뜻이에요. 헛거다. 내 모든걸 다 털어서 구제를 하는 행위 요만큼도 안 남기고 내 모든걸 전부 털어서 남을 돕는 행위란 뜻이에요. 그리고 남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도록 분신이죠 이거? 불사르도록 내주는 헌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입고 그 사랑을 아는 이의 행위가 아니라면 전부 헛것이라는 거예요. 아니 헛것 정도가 아니라 그것 자체를 하느님이 '죄'라 그래요.


따라서 성도의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하느님이라는 사랑의 본체를 증거하는 것이어야지,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어야지. 그러니까 내가 쇠해지고 망해지며 하느님이 드러나는 것이어야지! 그 자체의 그 성숙이나 발전이나 변화를 보여주는 용도여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가 드러난다 말입니다. 그가 높아지는 거예요.

성경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의 자기평판, 자기인기, 자기 자랑 챙기기의 일환으로 드러나는 그 어떤 모양의 선한 모습도 전부 죄라고 규정해 버려요. 오히려 소유의 획득을 지향하는 기복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은 순진하기라도 하죠. 어떨 때 보면 귀엽잖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거니까 순진하기라도 해요. 그 사람들은요.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이미 들키고나 있지만,

(에페소2,2)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마귀 귀신)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는 자들이 다 귀신들린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착한 일이어도 귀신들린 자의 삶이란 말이에요. 하느님은 그들의 행위에 진노하신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이 무엇을 좋아하실 것인가 조차도 자신들의 선악구조로 지들끼리 합의하여 지키고 있는 거라 말이에요. 그걸 죄라고 해요. 오늘 본문의 일곱 귀신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예요.

어떤 사람 속에 귀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귀신이라는 건 실제로 존재하는 마귀의 실체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우리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자아 숭배의 삶. 나를 주인으로 하여 사는 삶. 그 자아 숭배의 삶인 그 마귀적 속성 전체를 귀신 마귀 사탄이라고 한다 말입니다! 실존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런 총합적인 개념을 마귀 귀신이라고도 해요.

어리석은 사람들이 귀신들림 이라는걸 입에 거품이나 물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죠. 헛것이나 보고 헛소리나 듣고 하는거 목소리가 막 애기 목소리로 나오고 이러는거... 그건 그냥 질병이라 그러는 거예요. 진짜 무서운 귀신들림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건 병이에요. 물론 그러한 질병도 죽음의 증상이기는 해요. 그러나 정신 분열증 같은 류의 그 정신과적 질병만을 귀신들림으로 이해를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거예요.

우리 인간들의 뇌세포는 무려 천억 개가 넘어요. 그 뇌세포들이 시냅스라는 연결장치로 이어져 있어요. 그 시냅스로 화학 전달 물질이 흘러서 정보가 전달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뇌세포 속에서 일을 하는 신경전달 물질 중에 도파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도파민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모르핀 같은 역할을 해서 감정, 동기부여, 욕망, 쾌락 등에 영향을 미치죠. 이 도파민 분비 조절에 이상이 발생하면 사람에게 다양한 질환이 생기게 되는데요.

도파민의 분비가 너무 많아지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고요. 도파민의 분비가 줄어들 경우에는 우울증을 일으키게 돼요. 따라서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 도파민제 주사를 한방 주면 차분해지게 됩니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낸다라는 건 보다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죄의 뿌리이자 본질의 총합을 부수고 밀어내는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축귀인 거예요.

예수님 당시 그러한 삶을 살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단 말입니다. 율법학자들이었단 말이에요. 지금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 깨끗한 사람들에게 그 착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율법의 요만큼이라도 흠이 없었던 그 사람들에게 귀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니들이 일곱 귀신 들린 놈들이야 이놈들아' 이야기하는 거예요.

(루가18,11~14) 11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13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14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 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했고,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도 않았던 바리새인을 주께서 불의하다 그런데 주님께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감히 하늘도 우러러보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라고 면목없이 쭈그려 있는 사람 이 사람을 하느님이 의인이라고 한다구요.

"하느님 저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인데 어쩌면 좋습니까!"하고 면목 없는 자리에 서는 것을 하느님이 요구하신다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카운트되는건 그 사람의 행위가 아니에요. 그가 정말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실체와 하느님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아느냐!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는 것! 그분이 누군지를 알면 내가 누군지를 알게 돼요. 그리고 나와 그분 사이의 그 갭을 이건 도저히 메꿔질 수 없는 갭을 누군가가 채워주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것을 알고 하느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토록 열심히 종교행위를 했고 그토록 열심히 착한 일을 행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기도 했어요.

(요한8,44)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 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마귀다 그런 뜻이에요. 그 착한 사람들에게 귀신들렸다 이렇게 착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기의 영광과 가치와 자랑과 만족을 챙기기 위한 모든 시도가 귀신들린 자의 행위인 거예요. 그게 마귀의 행사인 거예요.

그러니까 착한 마귀 있다? 없다? 우리의 인간적 관점으로 봤을 때 착한 마귀 있어요? 마귀는 이 땅에서 광명한 천사로 보여지게 되어 있어요. 악당같은 마귀는 그건 미련한 마귀에요. 진짜 마귀는 착한 마귀로 보여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존재의 주도권을 귀신이 쥐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마태12,43-45) 43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44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45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귀신이 사람의 허락도 안 받고 자기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갔다 하죠? 우리가 여기에서 그 귀신이 애초에 있던 곳에서 왜 나갔느냐를 밝히는 건 무의미한 수고에요. 왜냐면 성경이 그것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이 귀신에 들고 나는 것에 전혀 관여를 할 수 없다라는 사실이에요. 지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 말입니다.

마치 감기를 비롯한 질병이 자기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것과 비슷하고요. 도박이나 알콜이나 마약들의 중독들이 자기 마음대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현상과 비슷하기도 해요.

중독이라는 건 우리가 의지를 결단하고 노력을 하여 몰아낼 수 있는게 아닙니다. 중독이라는건 지가 찾아왔다가 지가 나가는 거예요. 그거를 알으라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감기가 우리 허락 맡고 들어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통보하고 나가나요? 아니에요. 인간은 이렇게 늘 객체로 살게 돼있어요.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속에서도 인간은 주체로 행사를 할 수 없어요. 그렇게 무력한 존재에요. 인간은요. 오늘 본문 바로 위에 나오는 예수님에 말씀 한번 보세요.

(마태12,27~28) 27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제자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8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보다시피 구원받기 전의 인간은요 마귀의 세간일 뿐이에요. 장롱 의자 흐흐... 테이블. 마귀집의 세간 그 세간은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해요. 마귀가 놓는 곳에 있어야 돼요. 그리고 마귀가 사용하는 데로 그냥 사용당해야 돼요. 그게 세간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세간(世間)이 행하는 모든 일은 그 모양이 아무리 깨끗하고 훌륭해 보여도 마귀의 행사에요.

그러므로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죽느냐 사느냐 혹은 소유냐 존재냐 등의 질문에 대한 선택도 결국 인간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거예요.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주인에 의해 선택을 강요당하며 살게 되어 있어요. 마귀의 세간은 마귀의 선택을 쫓아가게 되어 있는 거구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을 쫓아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으로 선택을 하며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 주관으로 내 의지로 나는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다?

연약하고 우매한 인간은요 늘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요. 그래서 아담 속의 인간은 늘 죄만 선택합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다스리고 있거든요. 그가 죄를 선택하라고 늘 선택을 강요하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길인 소유형의 삶을 선택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렇게 죄만을 선택하게 만드는 그 마귀를 결박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마귀의 집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오신 거라 말이에요. 그리고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게 만들어 버리는 걸 구속이라 그래요.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선택하게 될 그 하느님의 뜻이 뭡니까?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수렴이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선택은 늘 옛 자아가 망하는 쪽으로 점철이 되게 돼요. 그래서 우리들이 뭘 선택만 하면 망하는 거예요. 내 옛 자아가 죽는 쪽으로 하느님이 나를 끌고 가는 거예요. 내 선택을 바오로와 요한이 그 구속의 현실을 어떻게 표현하나 보세요.

(골로사이1,13~14)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요한일3,8)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 마귀의 세간을 늑탈해 내는 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전부 귀신들려 귀신의 세간으로 태어나는 거구요. 그들 중 창세전에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느님 백성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 마귀에게서 구출받게 되는 거예요. 그게 역사이며 구속사인 거예요.

(로마6,16)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에 순종하는 죄의 종으로 마귀의 세간으로 귀신들려서 태어나요. 그러나 그러한 귀신들린 자의 삶으로 하느님의 의가 은혜가 침노해 들어와서 그 귀신을 잡아 결박을 하고 귀신의 세력 그 죄의 세력에서 구출을 해내서 의의 종으로 순종의 종으로 만들어내 버리는 거예요. 그 어디에도 인간 측에서의 공로를 찾아볼 수 없어요. 모든게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침공을 당한 신자의 삶 속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요. 자기 자신의 신됨. 그래서 성도라는 이들의 삶은 이 땅에서 자기의 영광이나 인기나 스스로의 만족까지도 챙겨 살 수 없는 삶이 되고야 말아요. 그래서 힘들어요. 그걸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 귀신이 결박된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된게 귀신 씌운 거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침공을 받지도 못한 자들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아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과 헌신과 섬김과 봉사등을 흉내내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그것을 오늘 본문이 깨끗이 청소되어 있다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깨끗이 청소되어 있어요.

귀신이 잠깐 나갔다 들어왔더니, 깨끗이 청소해 놨어 귀신이 어디 다른 거처가 없을까 하고 자기 마음대로 외출했습니다. 물 없는 곳 즉 은혜의 생수가 없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다른 거처를 마련하고자 했는데 물이 없는 곳에는 귀신들이 전부 들어차 있어요. 이게 현 세상의 실체에요.

그래서 마땅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더니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어요. 귀신은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친구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더 난장판으로 삽니다. 총 몇 마리? 여덟 마리. 그런데 왜 제가 일곱마리라고 했냐면 그건 숫자를 세는 산술적 표현이 아니라, 7이라는 완전수를 써서 그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일곱마리라고 한 거예요.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는 거예요.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성령의 침입으로 그 마음이 은혜로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은혜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비워져 있는 상태에서 깨끗함을 흉내 내는 그 행위 고게 바리새인들이었단 말이에요.

예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알지도 못하고 자기들의 제사 지냄, 율법 지킴, 구제, 봉사 이런 것으로 자기들을 드러내려고 했던게 깨끗함이거든요. 청소됨이에요. 그게 바로 일곱 귀신들린 행위라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 그게 얼마나 많습니까? 일곱 귀신 들린 인간들 얼마나 많아요? 착한 일곱 귀신 그걸 조심하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불교나 동양철학 등의 참 선 같은 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참선이라는건요, 번뇌의 원천이 되는 마음을 아예 들어내버리는거 거든요. 그래서 그걸 몰아 무아라고 그래요. 번뇌의 원천이 되는 마음을 들어내는 거예요. 완전히 비우는 거죠.

거기에서 무소유의 삶이 나오고, 청빈이 나오고, 청결한 삶이 나온다는 거예요.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러한 것을 시도하는 것이 일곱 귀신 들린 행위에요. 성경이 말하는 비움은 그런게 아닙니다. 성경이 성도에게 요구하는 비움은 성령으로 채워짐까지를 말하는 거예요. 은혜로 채워짐까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채워지면서 비워져 가야지 이게 채워지지 않았는데 스스로 깨끗하게 청소하는걸 일곱 귀신 들렸다고 하는 거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복음을 배워야 되는 거예요. 복음을 알아야 되는 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는 바로 그런 승려들의 비움과 같은류의 비움으로 자신들을 자랑하고 있었던 거예요.

본문 38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이야기가 주어지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성경 박사들입니다. 성경연구가들이니까...

그리고 그 착한 행위 종교행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거짓말 안 하겠다고 입을 스스로 꿰맸던 사람들이니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 너희들은 마귀의 세간이야! 그 말은 '넌 마귀야! 이 귀신아!' 그런 거예요. 귀신아.

주님은 그러한 거짓 비움과 거짓 깨끗함으로 다른 이들과의 비교 상대적 우월감을 누리는 그 교활한 행위를 뭐라고 그래요? 고 위에서 '성령 거역(훼방)'이라고 그러죠. 사제 말 안듣는게 성령훼방이 아니라... 그리고 그건 절대 용서함을 입을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아요.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연결이 되어 있는건지 아세요? 이 충돌의 발화지점은요 마태복음 12장 22~24절에 나오는 귀신들린 벙어리 치유 사건에서 연결이 되는 거예요.

(마태12,22~24) 22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시자, 말을 못하던 그 사람이 말도 하고 보게도 되었다. 23 그러자 군중이 모두 질겁하며, “저분이 혹시 다윗의 자손이 아니신가?” 하고 말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은 이 말을 듣고,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서 눈 멀고 귀가 먼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주셨어요. 우리 이런거 읽으면서 또 모든 병은 다 귀신이 들어와서 그런 건가 보다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건 하나의 상징이에요. 마귀의 세력하에 있는 자들은 반드시 죽음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데 그 죽음의 증상으로 질병이 온다라는 것을 상징으로 이야기해주는 거지...

모든게 다 귀신이 들어와서 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귀신한테 책임전가 시키지 마세요. 많이 먹어서 살찌는거고 그래서 병든거고 운동 안 해서 병드는 거예요. 무슨 귀신이에요.

귀신은 율법주의 율법주의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귀신이 들려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구요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날 때부터 소경된 이를 가리키면서 이가 누구의 죄로 이렇게 된 것이냐고 물었던 거예요. 제자들까지도...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그러한 저주받고 부정한 자를 율법과 행위의 법칙을 넘어서서 용서의 법칙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정한 자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자기들 눈앞에서... 이건 지금 자기들이 주장하는 삶의 원리와 정 반대되는 삶의 원리가 지금 투입이 된거란 말입니다. 유대주의 자들에게 있어서 정(淨, 깨끗)함과 용서받음 이라는 건 인간 측에서의 열심과 노력이 근거가 되어야 하는 거였어요. 그게 유대주의잖아요. 율법주의.

그들은 그러한 노력과 열심을 내어놓지 못한 부정하고 더러운 자들은 다니엘서 7장의 그 심판주 그 인자가 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 심판주인 인자가 와서 심판을 해 버릴 거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런데 그 어떤 노력도 행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용서가 주어지냐 말이에요. 부정한 자에게 귀신들린 자에게서 어떻게 귀신이 나가냐 말이에요. 노력도 안했는데, 율법도 안 지켰는데, 여전히 부정한 상태인데 어떻게 니가 뭔데 와서 그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냐는 거예요.

이 용서의 법칙. 덮어줌의 법칙. 이게 구원의 법칙인데... 이걸 이해를 못하고 왜 율법도 안 지키고 제사도 안 지낸 저 부정한 자를 니 맘대로 용서하냐는 거예요.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해 왔던 인자이신 메시야는 그렇게 오시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바리새인들이 그 예수님의 축귀(逐鬼)사건을 바알제불을 힘입어 행한 사건이라고 한 거예요. 왜? 자기들 생각에 인자인 메시야가 와서 한 일이 아니면 마귀가 한거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모독(훼방)’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언급을 하시는 거예요.

하느님을 향한 모든 죄와 훼방이 용서의 법칙에 의해서 선물로 덮이는 시대가 왔다는 거예요 모든 죄와 허물은 사해질 수 있다라는 전제가 떨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지금!

그 증거로 아무것도 행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는 그림을 지금 보여준 거예요. 보라고 이게 표적이라고 이게 내 십자가 죽음에 의해 귀신은 이렇게 아무 너희들의 행함을 근거하지 않고 나가게 될 것이다 라는걸 그림으로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왜 하느님처럼 선악과 따먹고 하느님처럼 강하게 된 인간들이 스스로의 노력과 힘과 의지를 묵살당한 채 수동적 양자의 모습으로 내려가야 하느냐 하고 반기를 든 거예요. 요게 귀신들린 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의 법칙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는게 바로 성령훼방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알매니안 주의는 성령훼방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자를 거역하는건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죠? 그건 주님이 이사야서 53장의 예언대로 연약한 자로 감추어진 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인간인 인자 예수를 못알아 보는건 괜찮아요. 어차피 감추어져 오셨거든요.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이 분이 바로 이렇게 연약하고 감추어진 모습으로 온 이분이 바로 메시야이며 이분의 십자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바로 승리다라는걸 성령이 와서 가르쳐 주는 시대가 온다 말이에요. 은혜의 시대. 그때에도 '은혜가 무슨 말이냐?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착해져야지'라고 하는 자들은 성령을 못 받은 거기 때문에 성령모독(훼방)죄가 되는거고, 그들은 용서 못받는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은혜의 법칙 덮어줌의 법칙 이걸 정말 절절한 눈물과 함께 이해 못한 사람은 아직 성령받은 사람 아닙니다. 착한 마귀에요.

고린도전서 15:45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살려주는 영이래요.
여기서 우리들은 ‘살려주는’ 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보셔야 돼요.
살려준다는 말은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기분나쁜 말이에요.
우리가 길을 가고 있는데 누가 와서 내가 당신 살려줄까요?
그럼 뭐라 그러시겠어요. 나는 살아있는데? 무슨 소리 하는거냐? 니가 왜 날 살려줘? 이게 살아있다라고 착각하는 인간들이에요. 그래서 굉장히 기분 나빠해요. 살려준다라는 말을...

그런데 성경은 주님을 가리켜 살려주는 영이라 그래요.
그 말은 성령이 아니면 절대 자력으로 살아날 자가 없다란 뜻이에요.
그래서 살려주는 영이에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는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귀신은 성령에 의해서만 쫓겨나갈 수 있다라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의 노력으로 절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 빈자리를 성령이 채워버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쫓겨나간 귀신이 일곱 귀신이 아니라 700귀신을 데리고 와도 못 들어오는 거예요.
성령이 그 안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귀신이 쫓겨나간 삶이라는건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반드시 그렇게 완성이 되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 귀신이 나간 성도의 삶이 세상적 관점으로 볼 때 고달프다 주님은 그걸 하느님 나라가 임한 자의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거면 너희들의 삶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임했다라는 말이 그 말인 거예요. 하느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를 확 구별시켜 버리는 거예요. 존경받는 바리새인들의 삶이 사탄의 나라였다라고 확정지어 버리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렇다면 메시야로 위장한 가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반기는 모습으로. 우리들은 마귀를 너무 좋아합니다. 마귀도 아이큐가 있지 머리에 뿔 달고 찾아올 거 같으세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으로 와요. 그리고 가장 존경받을 만한 모습으로 옵니다.

고린후서 11:14-15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흔히 있는 일이다라는 뜻이에요. 그거 뭐 큰일이다라고 생각해? 늘 있는 일이야. 야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니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오는데 사탄의 하수인들은 어떻겠느냐? 니들이 아주 존경할만한 모습으로 온다라는 뜻이에요. 흔히 있는 일이니까 당황하지 말어.

그러나 우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인간은 날 때부터 마귀의 종으로 오기 때문에 생래적으로요 마귀의 뜻을 좋아하게 되어 있어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마귀를 우호적으로 접대하게 돼요. 그래서 번영의 신약이니 뭐니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의 획득을 돕겠다라고 하는 오스틴 같은 사람들이 인기를 끄는 거예요. 광명한 천사니까... 그런데 더욱더 무서운건 마귀가 양의 탈을 쓰고도 온다는 거예요.

(마태7,15~17)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참 조심하셔야 돼요. 잘 들어보세요. 이거 읽어 드리니까 또 속으로 '거봐 좋은 열매를 맺어야 좋은 나무지' 이러고 있죠? 또 속으로...

자 마귀가 순결하고 연약하고 착하고 여린 모습 양의 탈을 쓴 모습으로 와서 그러한 것들로도 인간의 만족과 영광을 챙기게 독려한단 뜻이에요. '양의 탈을 입고 와서 양처럼 살아 그게 정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일이란다 양처럼 살아 그리고 나를 봐 양처럼 살고 있잖아'하고 온단 뜻이에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추수때까지 놔두라 그런 거예요. 너희들은 판별 못한다고 우리는 여전히 선악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판단 못해요. 그래서 놔두라는 거예요. 추수는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착하고 순결하고 열심있는 종교행위를 내어 놓는 사람들도 그게 좋은 열매인거 같잖아요? 사람들도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 아니면 지옥을 면치 못한다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7장의 '주님, 주님!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항변한 마귀의 자식들이죠.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좋은 열매 비슷한 가짜열매를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나는 안 속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다라는 어구속에 들어있는 진의(眞意)인 거예요. “니들이 지금 좋은 열매인 것처럼 남들은 세상이 다 속을 만큼 그렇게 열매들을 내어 놓고 있는데 니들이 원래 나쁜 나무인데 어떻게 좋은 열매가 맺겠니? 사람들은 다 속지만 나는 안속아.” 이 뜻이에요.

착한 일 많이 해라가 아니라 좋은 열매는 하느님이 맺는 거예요. 나무가 맺는다 그러잖아요. 요한복음에서. 니들이 맺는게 아니라 내가 맺을 건데 니들은 근사한 열매들을 갖고 와갖고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이고 나에게 까지 갖고 왔구나. 그런데 니들이 원래 나쁜 나무인데 어떻게 좋은 열매가 맺니? 거짓말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완전히 꺼꾸로 읽고 있는거죠 성경을? 그래서 문맥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위에서도 똑같이 나무와 열매 이야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아 이 나쁜 나무들아 제발 착한척좀 하지 말아라! 니들이 일곱 귀신 들린 자들인데 뭘 좋은 열매를 갖고 왔다고 자꾸 이렇게 내미는거야. 이 나쁜 나무들아' 어떠세요? 일관성이 있죠.

마귀의 나라는 절대 마귀나라 백성들의 열심에 의해 정복이 안된다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마귀의 세력이 서로 충돌하여 분열을 일으키겠느냐? 그 말씀을 그래서 하신 거예요. 니들은 여전히 귀신들려 있는 자인데 귀신들려 있는 자들이 거기에서 지금 빠져 나왔다고 하는데 니들의 행사 또한 귀신들린 자의 행사야. 그런데 어떻게 그게 분열이 되겠니? 그런 뜻이에요. 귀신은 성령에 의해서만 나간다 은혜에 의해서만 나간다라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십자가 은혜에 의해서 죄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질병이 치유되는 사건으로 또 귀신이 나가는 것 등으로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신게 예수님의 표적이며 행적이였던 거예요.

그래서 당연히 예수를 알아보는 자들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나가, 벙어리가 말을 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사건을 보면 예수의 은혜 그 은혜에 의해 쫓겨간 죽음. 이걸 알아먹어야 되는데 하나도 못알아 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인간의 공로와 열심을 배제한 예수님의 그 은혜사역을 가리켜서 마귀의 행사라고 비난한 거예요. '니가 마귀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착한 성도들은 제가 이런 설명하면 ‘저보고 마귀새끼라 그래요. 이단이라고’... '어쩌면 성경과 그렇게 똑같은지 몰라' 아주 무서워요. 성경을 잘 보면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표적을 이렇게 말씀하시는걸 볼 수 있어요.

(마르코16,17~18)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보세요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 그러죠. 이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예수믿는 사람들은 전부 귀신 쫓아낼 수 있다 이런말 아닙니다. 전부 뭐 뱀 집어도 상하지 않고 독을 먹어도 죽지 않고 이거 아니에요.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세상 권세잡은 자들의 종으로 있던 사람들이 귀신들려 있던 사람들이 하느님 아들의 나라로 옮겨오는 역사가 일어난단 뜻이에요. 우리의 복음 전함의 행위에 의해서 그게 귀신이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상한 언어(새 방언)라는 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말을 가르키는게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인 하느님의 말씀이 올바로 이해되어지고 내 입을 통하여 전달되어진다는 뜻이에요.

예수를 믿는 자들의 말씀 선포에 의해 뱀의 세력이 물러간단 뜻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간다는 말과 똑같은 말인 거예요.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맹독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그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 온다 할지라도, 내 자식이 죽고 사업이 망하고 질병이 나에게 온다 할지라도 내 영원한 생명은 건드릴 수 없다!가 독을 마셔도 그를 해할 수 없다라는 뜻인 거예요.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된다라는 것도 역시 죽음의 대표적인 증상인 질병이 복음에 의해 정복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병이 낫는단 뜻이 아니라, 死亡이 정복될 거라는 뜻이에요. 그까짓 병 안 나으면 어때요? 병이 낫는다고 신앙이 좋아져요? 천만의 말씀.

(사도행전10장,38)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병을 마귀에게 눌린 상태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복음에 의해 마귀에게 눌린 이 상태가 해결된다가 병이 낫는다 뜻이란 말이에요. 그걸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기적으로 잠시 보여줬던 거예요. 초대교회 때에. 이제 성경이 완성됐는데 그게 왜 우리에게 필요해요? 믿음이 이제 직접 오는데. 절대 우리는 그런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상에 의해서 흔들려 다니면 안 돼요. 그건 믿음 없는 자의 대표적인 표징이에요.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보여달라 그러는거 아니에요?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데 자꾸 보여달라는 건 뭐예요? '나 믿음 없어요' 그리고 다니는 거예요. 믿음 없으니까 한번만 또 보여주세요. 보여줬어요 또 보여주세요. 잊어 버렸어요. 더 큰거 보여주세요. 그 전거로는 만족이 안돼요. 그래 점점 큰걸 봐야 돼요.

성경은 이 세상의 힘의 원리와 인본주의 속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의 원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걸 구원이라고, 그걸 귀신이 나가는 것이라고 그래요.

절대 어줍지 않은 착한 일 몇개 해 놓고 혹은 남이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아내어서 자신의 만족이나 인기나 평판을 챙기는 그런게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더 낮아지고, 비워지고, 부인되어서 연한 순처럼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감추어지고 쇠하여 져서 하느님이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흥함을 증거하는 자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는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라는 말씀을 하신 거예요.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너희의 열심과 노력과 상관없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사흘 밤 낮을 스올에 갖혀 있어야만 너희의 죄가 너희를 누루고 있는 마귀가 물러날 수 있다. 그 방법 밖에 없다!‘가 요나의 표적이에요.

'너희들에게는 그 어떤 기적을 보여줘도 봐 지금 내가 귀신 쫓아냈는데 너희들 오해하고 나보고 바알제불이라고 그러잖아. 무슨 표적을 보여주니 거기다가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이제 하나밖에 없어.’ 뭐예요? 내가 죽는길 밖에 없어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죽어서 이 뱀같은 왠수들이 살아나는 그 기적보다 큰 기적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그걸 안다는 사람들이 무슨 기적을 그렇게 보여달라 그러세요?

은이빨이 금이빨로 바뀌는게 뭐 그렇게 대단한 기적입니까? 금가루가 쏟아지는게 뭐 그렇게 대단히 신기해요. 그 새끼들이 마귀새끼들인 거예요. 성경이 여태까지 우리 배운게 그거잖아요.

그런데 성령집회가 왠 말입니까? 거기 가서 뭐 하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눈에 보이는거 몇개 또 보고 싶다는거 아닙니까? 이 믿음 없는 사람들인 거예요. 귀가 막혀 있으면서 듣는 척 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이렇게... 이시대는 지금 이렇게 타락해 있어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요.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렇게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이들 그래서 마귀에게서 부터 해방된 이들을 하느님께로 난 자들이라 그러죠? 하늘의 사람들이란 뜻이에요. 하느님에 의해 태어난 하늘의 사람 하느님의 아들들 구약에서 하느님의 아들들 하늘의 존재들, 천사들 나오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그러한 하늘의 존재들이 됐단 뜻인데 그러면 한번 보자구요.

하늘의 존재들이 천사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부동산 투기했다는 소리 들어 보셨어요? 그들은 우리를 수종들 그런 존재들이에요. 그런데도 그 하늘의 존재들이 이 땅에 천사들이 잠깐 내려와서 무슨 일을 행했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뭘 하다 갔나요? 하느님의 메신저로서만 살다 그냥 가는 거예요. 천사들이 자기의 인기 명예 이런 거 챙기기 위해 남을 경쟁자로 원수로 취급했던 적있습니까? 천사들이 자기 자식새끼 좋은대학 못들어갔다고 목매달아 죽는거 보셨어요? 그런데 왜 하느님께로서 난 하늘의 존재들이 왜 우리를 수종든다고 하는 그 천사들보다도 못하게 사냐구요.

그래서 성경이 반복하여 너희들은 땅의 것 보지 말고 위에 것을 찾으라 반복하여 외치는 거예요. 위에 것을 찾으라!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존재들 하느님의 메신저로서만 존재하는 하느님의 백성들 그들의 삶을 천사들이 잠깐 보여줬기 때문에 그 천사들에게 날개가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거예요. 영이 날개가 어디 있어요? 꼭 그림 그려놓으면 그냥 날개를 이따만한 거 그려놔갖고 징그럽게. 닭털 같은거 덕지덕지 그려놓고 하느님의 메신저로서 그 뜻을 신속히 전달한단 뜻에서 상징적으로 날개라는 표현을 쓰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삶을 살도록 되어 있단 말입니다. 지금.

그러면 그분이 이끄는대로 내 삶 속에서 하느님만 드러나면 돼요. 그게 메신저에요. 날개달린 천사. 그런데 전부 그 날개 말고 닭 날개 달고 막 날으려고 푸드덕 거리고 있으니까... 이게 날수가 없는 거예요.

(골로새 3,1-3) 1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귀신의 세계에서 죽고 하느님의 아들의 나라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거예요. 성도의 삶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영광만을 드러내며 찬양하는 자기부인의 삶, 십자가의 삶 즉 하느님 증거 지향적 삶이에요. 자기 존재 지향적 삶 아니에요. 하느님 증거 지향적 삶. 그게 진짜 존재 지향적 삶이에요. 나머진 전부 소유 지향적 삶입니다. 여전히 나라는 우상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선악구조에 의한 이러저러한 행위들 몇개 내어놓고 나는 성숙했내 나는 발전했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네 이 딴 소리들 좀 하지 마세요.

도낀 개낀 이에요. 빽도로 나갈 수 있어요 그러다가. 그게 일곱 귀신 들린 자들의 삶이에요. 뭐가 더 났습니까? 50보 100보지. 둘 다. 도망가는 놈은 마찬가지예요.

더 낮아지시고 더 내려가세요. 그리고 더 벗으십시오. 그리고 더 털리셔야 돼요. 바보가 되란 뜻입니다.

발달장애아나 정신 지체아들이 암걸렸단 소리 들어보셨어요? 나는 우리 의사님한테 정신 박약아 들이 암환자로 보고된게 한 건도 없다란 소리듣고 깜짝 놀랬어요. '아 그거구나 이 시대는 너무 똑똑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거구나' 너무 똑똑해서. 옛날에 우리동네에 연탄지게 나르는 친구 이름이 성수였거든요. 그때는 늘 조금 모자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연탄지게를 날랐어요. 그죠? 그런데 저는 걔가 한번도 찡그리는걸 못봤어요. 늘 웃으면서 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니는데 늘 행복해. 밥주면 먹고, 날러 그러면 날러. 자 그러면 자 세상은 그를 바보라고 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바보들을 원하시는 거예요. '내 말만 들어! 그러면 행복할거야!' 그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우리 모두 바보가 됍시다.

더러운 이라는 것은 마태복음 15:19-2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Exorcism / 퇴마(退魔) ・ 구마(驅魔) ・ 축사(逐邪)


라틴어 Exorcismus를 그대로 영어화한 단어
교회 라틴어식으로는 '엑소르치스무스'라고 읽는다.
그리스어 exorkismos에서 라틴어로 유입한 단어
어원을 분석하면 '밖으로 나가겠다고 맹세를 받아내다.' 정도 의미가 된다.
그리스 등에서 사람에게 씐 귀신에게 "다시는 안 들어오겠습니다." 같은 식으로 맹세를 받아냄으로써 귀신을 몰아낸 문화에서 유래한 듯하다.
물론 그리스도교에서 이 단어를 받아들였을 때는 의미가 살짝 달라졌지만. 한자어로 구마술(驅魔術), 퇴마술(退魔術), 축마술(逐魔術)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며, 우리나라 무속용어를 사용하여 푸닥거리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는 원한 맺힌 귀신 원귀(怨鬼), 원령(怨靈)의 원(怨)을 풀어주어 저승으로 떠나도록 하는 제령(制靈)이라는 개념이 이와 비슷하다.





06-13-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6장 / 목자 없는 양(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When Jesus landed and saw a large crowd,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So he began teaching them many things.

목자없는 양과 같이(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When He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본문에 앞서 사도들이 예수님의 명을 받아서 둘씩 짝을 지어 전도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각각 흩어져 회개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낫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하는 데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곤고함을 보시고 한적한 곳에서 쉬기를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달려가기 시작해서 배보다 앞서 다른 고을로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은 그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집을 떠나고 먼 곳까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시간시간이 고되었습니다. 이젠가 저젠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줄 메시야를 언제 보내주실까?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룩해줄 메시아는 어디계신가? 이런 마음조차 잊게 만드는 시간이 흘러 주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귀한 목자였습니다. 그것도 선한 목자.

양은 목자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동물입니다.
왜냐하면 양의 특성 때문입니다.

첫째는 악성 근시
양의 시력은 아주 나쁘기 때문에 다니던 길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먹어야 할 풀과 독초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비공격성
양은 공경할 수 있는 뿔도 없고 강한 발도 없고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도 없습니다.
산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잡혀 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연약함
양은 아주 약하기 때문에 비탈진 곳을 올라갈 때는 뒤에서 받쳐 주어야 하고 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이와 같은 양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라고 이끌고 다녀야 합니다.
목자가 없는 양들이 있다면 큰 위험에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목자 없는 양이란 위험천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거짓 목자에게 속아 흩어진 양으로서 피폐한 영적인 상황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이라는 표현은 민수기 27장 17절에 처음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신 후에 사랑하는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였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택해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여호수아(Joshua)는 적들을 물리쳐 이스라엘을 보호하여 주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福地)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무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 목자 같은 이가 없었습니까? 제사장이나 서기관 혹은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종교지도자로서 무리들에게 목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리를 추구하고 자신과 가문의 명예만을 생각한 이들은 진리를 저버리고 거짓 목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을 고수하려고 무리들의 안위와 평안을 져버렸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살았으나 이미 죽은 존재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살려고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처지를 아셨고 자신의 몸이 피곤하였음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하게 여기시고 진리로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이었습니다. 참 안식도 없이 살았던 무리들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셨습니다. 무리들은 지쳤고 목말랐으며 배고파했습니다. 단지 육신의 것만 이었을까요?


열왕기상 22장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동맹을 맺고 아람을 공격하려고 할 때 유다 왕 여호사밧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이 전쟁에 대해서 묻고자 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영과 거짓말 하는 영이 서로 경쟁하여 결국 거짓 선지자 시드기애 편에 많은 선지자들을 동조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전하므로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매드 맥스(Mad Max: Fury Road, 2015)라는 영화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어린 시절에 봤던 것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멜 깁슨이 나왔던 그 영화는 리메이크 되어 올해 개봉되었는데, 목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주제는 ‘구원 salvation’ 이었습니다. 핵전쟁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찾아야 할 곳 초록의 대지, 낙원, 구원의 땅. 하지만 황무지를 헤매고 거기 있다고 믿던 것이 사라진 때에 ‘Where must we go?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를 질문합니다. 구원의 소망이 어디 있냐고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구원을 향한 갈망을 하고 있는 영혼들의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압제 하에서 오랜 동안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았고 하늘 아버지의 귀에 울렸습니다. 때가 이르러 유대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압제받는 이스라엘, 죄로 신음하는 인류를 위해 자신을 드려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 제국의 힘 아래, 경제논리라는 우상아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아래 사람들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윤택하고, 삶은 나아진 것 같고, 남성과 여성, 노인과 어린이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하지만 정말 그런지, 그것이 진정 진리에 맞는 일인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평안하지도 풍성하지도 그렇다고 자유롭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What should the Church do?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환난의 때요 인내의 때입니다. 주님의 역사를 기다립니다. 동시에 우리의 소망이 이룰 줄 믿고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주의 강하심이 드러나기를 바라며,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 주의 풍요하심이 나타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잘못 행하고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음성을 듣고 나아가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로 죄를 알게 하고 죄에 대한 형벌이 있음을 알려주지만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거나 구원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 우리에게 의로 덧입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세상이 원하는 길로 가야 합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까? 무엇이 그것을 알려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뭐라고 하십니까? 자비와 긍휼의 사랑의 법을 따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십시오. 그들의 진리를 향한 갈급함을 예수의 이름으로 채워주십시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거기 그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주님의 사랑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십시오. 교회는 거기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거기 그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기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의 일을 하여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담담히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면 거기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 요약]

우리 주님은 우리인간을 한마디로 ‘목자없는 양’ (sheep without a shepherd)과 같다고 정의 하셨습니다. 오늘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누구인지?’ 깨닫고, 주님 안에서 참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선한 목자의 양으로써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무엇이 ‘목자없는 양같은 삶’ 입니까? 그 이유는 양의 특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양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시력이 나쁘고, 분별력이 형편 없어서 잘 속아 넘어 갑니다. 그뿐 아니라, 양들은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잘 넘어집니다. 방향감각이 없어서 쉽게 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방어할 능력조차 없습니다. 거기다가 양들은 온순한듯 하지만 상당히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어서 목자가 돌보고 인도해 주질 않으면 쉽게 제 멋대로 흩어져서 길을 헤메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러한 양의 특성을 통해 ‘목자없는 양의 상태’는 살아남을 가망성이 없는 절망이자, 죽음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 살아갈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follow the good Shepherd as His sheep?)

첫째, ‘우리가 양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We ought to recognize our spiritual condition as ‘sheep’): 이사야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2:6) 우리는 모두 그릇 행하여 고집부리며 제 갈길로 간 목자없는 양이라는 것 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자동적으로 그분을 잘 따르는 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나의 선한 목자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동일하게 그분을 떠나서는 생존할수 없는 양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하는 것 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선한 목자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We ought to trust Jesus as my ‘good Shepherd’):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라고. 여기서  주께서 ‘내 양은 나를 안다’ (my sheep know Me)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의 양은 그를 알아본다는 것 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믿고 따른 만큼 삶을 통해 그분이 선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 입니다.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식별할줄 알고, 목자가 평상시 자기를 어떻게 지켜주고 인도했는지를 경험함으로 그분을 더욱 더욱 신뢰해 나가는 것 입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점점더 알아가야’ 합니다 (We ought to know the will of our heavenly Father day by day): 선한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 ~ 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b) 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할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주시고자 함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풍성한 삶일까요? 그 풍성함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누리는 유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깨닫고 누려나가는 것> 입니다.

바라건데 약속의 성령께서 성도 여러분의 영의 눈을 여셔서 ‘목자없는 양’같았던 우리 존재를 바라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 선한 목자를 삶으로 따르기를 결단하는 풍성한 삶 살도록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세상의 많은 지혜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가 그들의 가장 큰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유교의 시조라고 할수있는 공자는 그의 제자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했을때, “내가 지금의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 고 솔직하게 대답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책, <논어>에서 “아침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고 말했던 것 입니다. 인간 마음의 중심에는 참된 진리를 깨닫기 원하는 갈구가 강하게 요구되기 때문일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우리의 인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인간을 한마디로 ‘목자없는 양’ (sheep without a shepherd)과 같다고 정의 하셨습니다. 오늘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누구인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주님 안에서 참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선한 목자의 양으로써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의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 9:35). 이런 상황속에서 주께서 그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고자 몰려오는 무리들을 보실때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음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음’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상황은 다르지만, 매우 유사하게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 복음서 말씀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 6장>인데, 저자 마가는 이렇게 주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6:34) 고. <막. 6:34>말씀의 배경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빈들로 갔는데 저녁이 되고 날도 저물어서 먹을것이 없고 지쳐있을때 하신 말씀 입니다. 어떻게 본다면 그들의 육신의 배고픈것도 불쌍하지만, 그들의 인생전체가 갈곳을 몰라서 목자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모습이 더욱 불쌍하다는 뜻이 될것 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베푸신 이적이 우리가 너무도 잘아는 <5병2어>의 기적인 것 입니다.

무엇이 ‘목자없는 양같은 삶’ 입니까?

왜 인간은 이런 목자없는 양의 불쌍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목자없는 양과 같다는 뜻은 간단히 말하자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라, 얼마가지 않아서 (몇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을 못넘기고) 죽음에 처하게 되는 매우 절망적이고 희망이 끊어진 상황을 뜻하는 것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양의 특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양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시력이 나쁩니다.
그말은 악한 짐승들이 가까이 다가와도 그들을 좀처럼 식별하지 못한다는 뜻 입니다.
더욱이 양은 분별력이 형편 없어서 잘 속아 넘어 갑니다.

양들은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쉽게 넘어지고, 넘어지면 잘 일어나지 못합니다.
방향감각이 없어서 쉽게 길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방어할 능력조차 없습니다.
거기다가 심각한 것은 양들은 온순한듯 하지만 상당히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어서 목자가 돌보고 인도해 주질 않으면 쉽게 제 멋대로 흩어지서 길을 헤메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의 특성을 통해 ‘목자없는 양의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절망이요, 죽음 입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양의 특성상 그들 스스로는 야생에서 생존할수 있는 방어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양이 야생에서 살아 남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유 하자면 태어난지 몇시간 않되는 새끼 새를 어미새의 돌봄없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하는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의 처해있는 상황이 본질적으로 이런 목자없는 양과 같다는 것 입니다. 살아 남을 가망이 없고 악한 짐승에게 속히 먹힘바 될수 밖에 없는 양이라는 것 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쓸찌라도 결과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 입니다. 목자없는 양과 같이, 길잃은 양과 같이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1~12) 라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만이 유일한 선한 목자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선언하시는 것 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목숨을 버린다는 것> 자체의 강조점 보다도, 바로 앞절에서 밝히신 <양들의 생명을 살린다>는데 그 진정한 중요점이 있는 것 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제가 성도여러분과 남은 시간 생각해 보기 원하는 것은 이것 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우리는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 살아갈수 있을까요?” (How are we able to follow the good Shepherd as His sheep?) 라는 것 입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가 양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We ought to recognize our spiritual condition as ‘sheep’): 우리가 어떻게 선한 목자되신 주님을 따르는 양으로 살아갈수 있을것인가를 결정하는 첫걸음은 ‘내가 양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600여년전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죄악을 담당할 것임을 예언했던 이사야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2:6) 우리는 모두 그릇 행하여 고집부리며 제 갈길로 간 목자없는 양이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챤들 중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것은,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내가 영적으로 예수님의 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은근히 부끄러워하거나 거북하게 여기는 크리스챤들을 보게 됩니다. 마치 미국사람들 가운데 ‘Don’t be a sheep’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처럼, 이런 표현 가운데 <양이 된다는 것>이 <자기 판단력이 없고 스스로 독립성이 없이 의존적이고 시키는데로 따라만 하는 지적 능력이 부족한 자가 되는것>으로 비꼬고 비하하는 생각이 있는것 입니다. 양이 된다는 것이 한마디로 무능하고 바보같은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 합니까? 다시말씀 드리지만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양으로 살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은 ‘나를 포함한 우리 인간의 본질을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 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분명히 이해해야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자동적으로 그분을 잘 따르는 양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 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양과 같은 존재임을 자각함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내 스스로 내 뜻데로 나의 갈길로 가겠다고 고집피우며 제갈길로 갔던 양임을 시인하는데서 부터 시작 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나의 선한 목자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동일하게 그분을 떠나서는 생존할수 없는 양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하는 것 입니다. 양은 목자없이는 한시도 생존할수 없는 존재인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깊은 자신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까?!

둘째, ‘예수님이 선한 목자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We ought to trust Jesus as my ‘good Shepherd’): 만약 성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선한 목자로 신뢰 하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라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한가지 사실은 주께서 ‘내 양은 나를 안다’ (my sheep know Me)라고 말씀 하셨다는 것 입니다. 주님의 양은 그를 알아본다는 것 입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믿고 따른 만큼 삶을 통해 그분이 선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 입니다. 양으로서 목자의 음성을 식별할줄 알고, 목자가 평상시 자기를 어떻게 지켜주고 인도했는지를 경험함으로 그분을 더욱 더욱 신뢰해 나가는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것은 내 삶에서는 목자되신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이 얼마나 형성되어 가고 있는지? 그로말미암아 나는 얼마나 그분을 신뢰해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하는 것 입니다. 나는 다윗이 고백했드시 그 선한 목자로 부터 날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고,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말미암아 못된 짐승의 공격과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받고 인도되어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어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런 목자와의 깊은 관계와 신뢰를 누리는 삶의 경험이 내게 부족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목자가 내게 관심이 없어서도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요, 그의 양인 내가 그분을 신뢰함으로 따르지 않은 까닭인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분명히 도전하십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8) 라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인격적인 결단 가운데 날마다 그분을 따르지 않는 제자, 그의 양들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삶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점점더 알아가야’ 합니다 (We ought to know the will of our heavenly Father day by day):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 우리가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양으로 살아갈수 있을까?’에 대해 말씀 드렸지만,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속시원하게 ‘예수님의 양’이 되었음에 대한 확신과 감격이 부족하다면 그 중심에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한 목자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함일 것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분의 뜻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우리를 살리고자 하심 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까? 한가지 안타까운 현실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성도들 가운데 적지않은 분들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라고만 이해한다는 것 입니다.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 ~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요. 10:10)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 입니다. 우리를 구원할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주시고자 함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풍성한 삶일까요? 그 풍성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그분안에 감추인 모든 풍성한 복을 누리는 삶’인 것 입니다 (엡. 1:3~14). 구원받았다는 것이 ‘단순히 죽어서 천당간다’는 뜻이 전부가 아닌것 입니다. 구원은 풍성함으로 열매맺어 가는 것 입니다. 이 풍성함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누리는 유업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를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깨닫고 누려나가는 것>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한 목자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풍성한 삶을 현재 누려나가고 있습니까?

이제 2주후면 우리 선한 목자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양들에게 생명주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 입니다. 주님의 부활사건이 진정으로 우리 크리스챤들의 최고의 기쁨이요 승리의 사건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가 살펴 본데로 ‘왜 여러분과 제가 목자없는 양이었는지?’ ‘왜 우리 성도는 주님을 신뢰하며 따라가야 하는지?’ 그리고 ‘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야만 하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증하고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오는 2주에 걸쳐 주님의 부활사건의 의미를 살펴볼것 입니다. 바라건데 약속의 성령께서 성도 여러분의 영의 눈을 여셔서 ‘목자없는 양’같았던 우리 존재를 바라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 선한 목자를 삶으로 따르기를 결단하는 풍성한 삶 살도록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마태복음 9:35-38,
목자 없는 양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가르치시는 것이 먼저다. 앞서 산상 수훈과 율법에 대한 해석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지적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터득하게 한다는 것이다. 터득해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기초가 되어 천국 복음은 전파되는 것이다.
천국복음이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고, 복음을 받아들일 때 천국에 소속되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된다는 의미다. 그 나라의 왕은 하나님이시다.
즉 가르침과 전파, 배움과 전도는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사역은 결국 치유사역과도 연결된다.
순서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 자연스럽게 천국 복음에 대한 전파가 되고, 그 전파함은 결국 모든 병과 약한 것을 회복시켜가는 과정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사역이어야 한다.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돌봐줄 부모가 있는데 어떤 아이들 부모가 없어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심정인 것이다. 다 목자가 있는데, 목자가 없어서 어찌할 바 모르는 양들을 본 것이다.
예수님의 특기가 제대로 다른 대상을 꿰뚫어보시는 것이다. 대상들의 상태를 본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사유가 명시되어 있다. 다른 사유가 없다. 긍휼히 여기는 그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스플랑크니조마이), “내적인 부분에서 감동이 오다” 라는 말이다.
“기진함”은 ‘던지다’. ‘풀이 죽은’, 이렇게 번역되는 단어다. 던져진 양들이다. 학대받고 있는 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목자 없는 양 같다” 이 의미는 ‘목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양’ (프로바타 메 에콘타 포이메나) 라는 표현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중요한 비유로 알려진 내용이 에스겔 34장이다.

2절에, 자기만 먹는 목자, 양떼를 먹이지 않는 것이 나온다. 여기서의 목자는 지도자들을 말하는데, 당시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학대하는 모습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적하신다.

벧전 5:1-3절, 양무리를 쳐라. 억지로 하지 말고 ‘주장하듯’ 하지 말라. 여기에서 ‘주장하듯’ 하는 모습이 에스겔서의 학대와 비슷한 성격이다.

여기서 ‘주장’이란, ‘권위의 남용’을 말한다. 학대성 목자가 신약시대 당시에도 있었는데, 베드로는 이를 염두한 것이다. 양순하고, 머리는 떨어지고, 공격력은 전혀 없고, 시각은 전방 9미터인 양들에게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때리고, 소리치는 그런 목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집어 던지기도 한다.
오늘날의 모습으로, 차별, 빈정거림, 모독, 비하감, 맹종과 충성 요구, 자신만 돈으로 특혜를 누림, 복수를 증대하기 위한 공공장소 이용 등의 모습을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4절에, 연약하고 병든자, 쫒기는 자, 잃어버린 자를 찾지도 않는다. 집 나갔으니 그만이라는 것이다. 못된 목자는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지만 그 책임을 하나님은 목자에게 묻는다. 집나간 양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8절에, 그렇다보니 양들이 노략거리가 되고, 들짐승의 밥이 되는 상황이 된 것을 지적하신다. 그 이유는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15절과 16절에서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그 양들을 직접 챙기시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이 동일하게 그 심정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지도자들인 제사장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을 생각하고 지적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에 당신이 목자되신 것을 나타낸 본문은 요한복음 10장에서의 선한 목자라는 표현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돌보시고, 자신의 목숨을 다하신다는 표현으로 위로하신다.

어떻게 양무리를 돌봐야 할까?

먼저 먹인다.
네 양을 먹이라라는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지시는 요 21:15-23에서, 세 번의 지시가 나온다. 한 번은 일반적인 양치기의 동사 포이마이노를 사용했지만, 처음과 세 번째는 보스코’, 즉 급양이다. 먹이는 것이다.
6:34에서 목자 없는 양같은 이야기를 하실 때, 그 앞에 오천명을 먹이신 것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건강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가난한 백성을 보신 것이 아니라 목자 없는 양떼로 보신 것이다. 목자가 있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함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먹이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빈곤상태를 채워주라는 것이다. 삶의 중심을 잃고 존재의 목표를 상실한 채 무의미한 체험을 반복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측은한 것이다.
먹일 때는 분리해서 먹여야 한다. 겔 34:16-22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를 함께 두면 약한 자는 먹을 수 없다. 이를 분리해서 맞는 꼴을 먹여 주어야 한다.

치유한다.
목자는, 매일 매일 자신의 양을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도록 한다. (20:37) 그 과정에서 병의 징후, 상처, 체중의 감량 등을 점검한다. 직접적인 신체접촉으로 확인한다.
예수님도 직접적으로 손을 대시고, 만져주시고, 안수하시고 치유하셨다. 가장 고통받는 약한 자들을 돌보셨다.

양들을 지킨다. 이리들과 하이에나 심지어 사자와도 싸운다.
그래서 양 한 마리가 귀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이 죄를 지었을 때 예로 든 것이 삼하 12:7에서 딸 같은 양 한 마리를 잡아 먹은 것을 나단이 든다. 다윗은 알고 있다. 양 한 마리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예수님도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잃으면 찾으러 간다. 찾아야 한다.
세계에는 약 10억 마리의 양들이 있는데, 각각의 양들은 어디에서든 특정한 목자와 반드시 연계되어 있다.
단 한 마리만 잃어도 잠을 이룰 수 없고, 이를 찾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한다. 반드시 한 마리씩 센다. 이름을 지어주고, 모든 이름을 부를 때 양들이 알아듣는 것을 목격한다.
어떤 목자가 두 달이 지나서 지나는 양떼의 목자에게 잃은 양을 물을 때 그 말 소리에 자기 주인의 목소리에 대뜸 머리를 쳐들어 목자는 비명을 지르며 와락 끌어 안았다. 온 동네가 재회의 기쁨을 같이 나눈다. (양을 돌보는 참목자 중)

외톨이 되는 양은 파멸된다. 사탄의 먹이가 된다. 이리의 먹이가 된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들을 추수해야 하는 현장으로 보시고, 그 추수할 일꾼을 필요로 하신다.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에르가테스)이 적으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큐리오)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추수할 것이 많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신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는 상당한 숫자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 들어야 할 사람은 여전히 많은데 그 사명을 감당할 예수님의 제자들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제자들을 주님께서 보내시듯이, 천국 복음 전파의 자발적 사명을 받고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필요로 하신다.

새로운 신자가 교회에 오게 되면, 이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 새로운 가족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기시는가를 봐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기도를 하는 교회의 표시는 새롭게 등록하는 분들에 대한 일꾼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심에 대한 응답으로 보느냐이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 목자 없는 양같이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다. 우리에게 목자가 없을 수 없다. 요 14장 16절,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착한 일을 많이 했다 그럴 수도 없을 것입니다. 4장 23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병들고 상한 자를 고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권세있는 가르침, 소위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이 끝나고 나면 권세를 직접행하신 열 가지 이적사역이 나옵니다. 권세있는 가르침과 권세를 직접 행하신 이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9장 35절에서 또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병들고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 8장 9장을 가운데 두고 4장 23절의 말씀과 9장 35절의 말씀이 호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마태는 천국을 가르치신 사역 Teaching사역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은 5편의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 가르침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베이컨(B.W. Bacon)은 마태복음은 오경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5권의 책으로 시작했듯이 신약의 말씀은 마태의 5편의 설교로 시작되어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 첫 번째 설교는 산상보훈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말씀하신 위대한 교훈이라고 하여 산상보훈이라고 하지요.
마태 5장 6장 7장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면서 7장 28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고 얘기합니다. 

2. 마태복음 10장은 파송설교 혹은 사도설교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그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 설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장 전체는 파송설교입니다.
파송설교가 마쳐지고 11장 1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설교는 13장 천국 비유설교입니다.
다양한 천국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마치면서 13장 53절에 예수님께서 이 모든 비유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4. 18장은 교리설교입니다.
18장 전체를 교리설교로 채운 다음에 19장 1절에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5. 23장 24장 25장은 종말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군천사들과 함께 나팔불며 이 땅에 임하실 때에 어떤 일이 임하시며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될 것인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25장까지 종말설교를 마치고 26장 1절에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마태가 권세 있는 가르침, 산상보훈을 설교하신 다음에 친히 권세를 행하신 열가지의 놀라운 이적 사역을 배치한 것은 마태의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도 많은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바로 천국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공부한 풍랑 사건을 두고 제자들이 뭐라고 반응합니까?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어떤 병에 걸렸든지 예수만 만나면 고침을 받는가? 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가 누구이기에? 죽은 자도 그를 만나면 살아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자연도 그분께 순종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들도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에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이 천국복음을 가르치신 목적이었고 천국복음을 가르친 다음에 이적사역을 배치한 목적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10장에서는 이 삼중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합니다.
열 두 제자를 선택하여 세상에 보냅니다.
세상으로 파송하시며 보냄받은 자 사도들에게 다시 설교합니다.
그것이 사도설교 제 10장의 말씀입니다.
10장을 펼쳐보면 12제자가 나오는데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는 12제자라고 얘기하다가, 2절에 12사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사도란 말이 본문 10장 2절 마태는 유일하게 한번 씁니다.
금방 제자라 그랬으면 제자라 그러면 될 터인데 왜 1절에서는 12제자라 그랬다가 2절에 와서는 12사도라 그랬을까요? 제자는 선생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을 배우고 선생님으로부터 그분이 가졌던 권세와 권세있는 가르침, 권세 있는 능력을 다 위임받아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제자들이지만 권세를 위임받아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란 뜻에서 사도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파송 설교를 하게 되는 배경이 오늘 9장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제자들을 세운 목적이 여기에 나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은혜 받고 세상으로 나아가 살아가야 되는 삶의 목적이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4697. 불쌍히 여기다(스프랑크니조마이, splanchnizomai) σπλαγχνίζομαι 

1. 불쌍히 여기다,  2. 동정하다, 3. 측은히 여기다
발음 /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gchnizŏmai)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πλαγχνίσ- θ ην, 미래 σπλαγχνισθήσομαι, 46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불쌍히 여기다(마 9:36, 14:14, 막 6:34, 눅 10:33), 측은히 여기다(눅 15:20)
신약 성경 / 12회 사용

무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불쌍히 여기셨나요?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했다고 했는데 그들의 목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요?
그들의 목자는 누구였나요? 

3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왈 "예수는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였던 종교지도자들, 무리의 목자였던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그 심성은 사악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임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단의 장난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은 권세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권세있는 가르침과 이적을 부인했습니다.
귀신 놀음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목자라고 따랐으니 저들을 목자라고 섬겼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쌍하냐는 것이지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가 임했는데도 불구하고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여 병든자가 고쳐지고 귀신이 결박당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이것은 귀신의 장난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쌍히 여기다"는 스프랑크니조마이 이 말은 신약성경 모든데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공관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에 5번, 마가에 4번, 누가복음에 3번 나와서 도합 12번 오직 공관복음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즉  하나님의 가슴 앓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스프랑크니조마이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스프랑크니조마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속에는 스프랑크니조마이가 있었기 때문에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분의 스프랑크니조마이 때문에 귀신에 결박된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불쌍한 무리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스프랑크니조마이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

"목자 없는 양" 이라고 할 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많은 양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목자가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이 어떤 상태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때부터 양을 치던 유목민이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예전에 부잣집을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양이 몇 마리, 소가 몇 마리, 낙타가 몇 마리, 염소가 몇 마리 이렇게 계산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가축이 양이었습니다.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금방 알아듣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바라보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도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이 무슨 얘기인지 알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천 년 전 그 당시 상황으로 또 지리적으로 그 나라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양이라고 했을 때에 어떤 이미지를 가졌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양하면 양은 매우 약한 동물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은 제 몸 보호할 무기 하나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도 없습니다.
힘센 황소의 뿔도 없습니다.
말처럼 뒷발질도 할 줄 모릅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조그마한 비탈진 길을 가려면 올라가질 못합니다.
뒤에서 목자가 밀어 주어야 됩니다.
어린 새끼 양은 아예 어깨에 매고 올라가야 언덕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양은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털이 많기 때문에 시냇물 소리만 들으면 냅다 도망갑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이 말씀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씀이지요. 

양은 매우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매일 먹는 풀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먹을 수 있는 풀인지 못먹는 풀인지 구분할 줄 모릅니다.
독초와 목초를 구분할 줄 모릅니다.
자기가 매일 다니던 길인데 그 길을 못 찾아옵니다.

개미는 자기가 다니는 길 바깥에 갖다 놓아도 제 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이란 동물은 자기가 매일 다니는 길인데 어디로 다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양은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지만 모든 가축 가운데 가장 지독한 냄새가 나는 어쩌면 가장 더러운 동물 중에 하나가 양이라고 합니다.
이게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냄새가 납니다.
덮어두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후벼파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물은 급류입니다.
맹수는 많습니다.
산엔 온통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입니다.
길은 험악하지요.
목자가 없으면 양은 이 땅에 살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목자의 임무가 무엇일까요? 
안전한 길로 양들을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이 풀은 못 먹는다.
독초와 목초를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 뒤에서 밀어줍니다.
가시덤불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맹수들이 덤비면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풀을 뜯거나 그늘에 쉴 때 피리를 불어 편안하게 안내 해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목자로 보냄을 받았다는 얘기는 예수님의 권세있는 가르침과 권세있는 설교와 권세를 직접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위임받았다는 얘기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천국길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세상의 더러운 유혹과 세상의 가치관을 먹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이 세상 혼자 살아갈 수 없을 때 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엉덩이를 밀어주는 것입니다.
가시덤불 피할 수 있게 도와주듯이 이 세상은 유혹의 지뢰밭입니다.
전신만신 나를 찌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택한 자를 삼키려고 덤벼듭니다.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서로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양들이 목자를 잃는 다는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양을 친다면 아침에 밥 먹고 "양치고 오겠습니다."
양 몇 마리 몰고 산에 가서 양을 치다가 저녁에 "양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안다는 것입니다.
목자 한 사람이 많은 양떼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갑니다.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 어간동안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며 양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깊은 산속에 갔다가 목자가 병이 들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목자가 죽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양들은 목자를 잃어버려요.
맹수가 나타납니다.
도적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자 사자 도망가다가 언덕에 굴러 떨어져서 죽는 놈들, 도망가다가 가시덤불에 걸려서 온몸이 찢겨져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해서 매애~ 매애~ 울부짖고 있는 놈들, 맹수가 덤비니까 앞뒤 보지 않고 지칠 때까지 도망갑니다.
더 이상 뛸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어 뒤로 발랑 나자빠져서 네 다리를 하늘로 보고 바들바들 떨다 누가 일으켜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내장이 꼬여서 죽는 겁니다. 이게 목자 없는 양입니다. 

가끔은 목자가 삯꾼 목자입니다.
도적떼가 나타난다든지 맹수가 나타나면 저 혼자 살기 위해서 양을 버려두고 도망갑니다.
그러면 목자 없는 양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 고생한다는 얘기는 헬라어 원문적으로 보면 몸이 갈기갈기 찢겨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망가다가 나뭇가지에 찢겨지고 날카로운 바위에 걸려 찢겨지고 가시덤불에 찢겨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상태 이것을 "고생하며" 그랬습니다. 

"기진함이라" -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도망가서 발랑 나자빠져있는 상태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때 신속하게 목자가 달려가서 양을 일으켜 주지 않으면 양은 그 자리에서 죽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기록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역일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지요.
한 가지를 더 들라고 한다면 12제자를 만든 사역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제자되라고. 제자를 삼으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가장 영광스런 이름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는 성도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 때문에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세를 우리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권세 있게 복음을 전하고 권세 있는 가르침, 권세를 나누며 이 땅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지요. 

만약 당신에게 이 땅에 살 시간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사시고 싶으십니까?
다만 한 두 달이 여러분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여러분은 이 땅에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아니 백년이 남았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부름받아 서시겠습니까?

병든자, 마음상한 자, 귀신에 시달리는 자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병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나 때문에 속상하고 나 때문에 병든 자는 없는지, 나 때문에 마음상한 사람은 없는지, 그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용서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내가 용서해야 될 사람이 없는지, 용서를 선언해 주어야 될 사람이 없는지, 찾아서 그들에게 용서를 선언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목사님 한소망교회 비전채플은 왜 세워야 합니까? 묻는다면 나는 대답이 동일할 것입니다. 천국복음을 권세 있게 전하기 위해서, 천국복음을 권세 있게 가르치기 위해서, 권세 있는 공동체로 바꾸어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받는 권세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서.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다음 세대에 꿈을 주기 위해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민족의 영향력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나누기 위해서, 이것이 목양 사역이요, 추수 사역이요, 제자 사역입니다. 

우리 모두는 양입니다.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예수 없는 우리의 삶은 목자 잃은 양과 같아서 이곳 저곳에서 찢겨지고 피흘렸지만 닦아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허둥대며 인생을 달려왔지만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일으켜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찾아오셔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위임하여 주셔서 너도 세상의 권세 있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삶의 환경과 내 생애 모든 것을 투자하여 주님 하셨던 그 일들을 우리가 감당하다가 오늘 밤이라도 주님 날 부르시면 주여 제가 주님께서 내가 명하신 일을 감당하다 왔습니다. 내일이라도 천군천사와 함께 주님 이 땅에 임하시게 되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제가 주께서 맡겨주신 사역 감당하다가 주님 오심을 기다렸나이다. 영광스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 27: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22:17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역대하 18:16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마태복음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가복음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06-14-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7장 / 고르반(11절)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But you say that if a man says to his father or mother: 'Whatever help you might otherwise have received from me is Corban' (that is, a gift devoted to God),


2878. 고르반(kŏrban) κορβᾶν 

1. 고르반,   2. 예물,  3. 마가복음 7:11
발음 / 고르반(kŏrban)
어원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신약 성경 / 1회 사용

7133. 코르반(qorbân)   קָרְבָּן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위기 2:1
발음  / [ qorbân ]
어원  /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관련 성경  /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동] 드리다(레 2:12, 느 10:34)
구약 성경 / 80회 사용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책망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당시의 '고르반'이라는 제도의 폐단을 들어 외형적인 의식보다는 내면적인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고, 오히려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를 폐하여 버리는 행태를 책망하셨습니다(1-23절).

예수께서 두로 지경을 가셨을 때에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자기의 딸을 고쳐 주시기를 믿음으로 간구함으로써 딸의 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24-30절).

예수께서 다시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을 때 귀먹고 어눌한 자를 만나서 그 사람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대시며 기도하심으로써 고쳐 주셨습니다(31-37절).

구약에서 '고르반'이란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이란 뜻으로 사용하였으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드리다(레 2:12, 느 10:34)"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마가복음에서만 단 한번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부모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으러 잘못 사용되는 것을 꾸짖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10-13)

‘고르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예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르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맹세하면, 그 물건은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하지 않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물건을 분명히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고르반’이라고 말하므로, 부모에게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마치 계명을 지킨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도 속이고, 부모도 속이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르반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자신이 잘못했음을 뉘우치고, 그것을 다시 부모에게 드리려고 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고르반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지 부모에게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을 많이 자행했다고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쉬나’(*유대인의 구전 토라를 기록한 것으로 최초의 것)를 보면 후기 유대교에서 고르반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연로한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회피하였습니다. 교묘하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을 지킨 것입니다.
 
어설픈 마음으로 고르반의 맹세를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철저한 신앙의 행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마저 낮추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혹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행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대에게 중요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계명의 첫 번째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도 동일합니다.
아니 그 의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가장 먼저 깊게 고려되어야 할 존재론적 의미는, ‘나와 나의 관계’입니다.
나와 나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거나, 함몰되어 있거나, 타락해 있거나,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그대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할 정도로, ‘나와 나’의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이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고르반 신앙이란 내가 드린 것만 주님의 것이 아니라 내가 드린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내가 드린 것과 내가 남아 있는 것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의 주인도 주님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것을 사용하는 자세가 아니라 항상 주님의 것을 내가 사용하고 있다는 믿음의 자세가 나를 다스리고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물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오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외형적인 형식을 아무리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외식적인 것에 불과하고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다면 하나님에서 받지 않으시는 헛된 경배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인 마음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전과 율법에 따라서 외형적으로 손만을 씻는 것보다는 설혹 손을 씻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기뻐하신다. 


마가복음 6장 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특히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오늘날의 국회와 교단 총회를 합친 기관)에서 파견된 사람들과의 전통에 대한 논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시비 거는 것은 거의 습관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합니다.
어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벽, 해 뜨기 전에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셔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배에 타시고는 게네사렛까지 가셨습니다.
게네사렛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게네사렛까지는 약 150km나 됩니다.
그 거리를 걸어서 가려면, 최소한 4-5일 걸립니다.
바리새인들과 몇몇 서기관들은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계셨을지라도, 그 소문이 이스라엘 남쪽에 위치한 유대 지방은 물론 수도 예루살렘에까지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계속 확장되어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견제하기 위해서 제동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막을 수 없음은, 주님이 진리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을 면밀하게 관찰한 후에, 시빗거리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몇몇이 부정한 손,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정한(코이노스)’이라는 단어는 ‘구별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거룩’이 ‘구별’이라는 뜻이니까,
‘구별하지 않은’ 것은 곧 ‘부정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그때만 사용하는 그릇이 있었습니다.
누룩이 없는 음식을 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릇을 구별하여 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평상시에 쓰는 그릇을 깨끗하게 씻은 후에 안식일에 쓰는 것을 보고서,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이 틀린 것이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지방에 사는 사람은 식사할 때에 숟가락과 젓가락, 또는 포크와 나이프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었습니다. 그래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바빌론 포로 이후에 그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정결 의식이 되어, 종교 행위가 되고, 그것이 이어지자 그들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씻을 때도, ‘고인 물은 부정하므로, 흐르는 물에서만 씻어야 한다’와 같은 규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도 않고 빵을 먹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시비를 거는데,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집어 먹는 것은 ‘비위생적이다’가 아니라, ‘비전통적이다’ 또는 ‘비신앙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손을 제대로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고,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씻지 않고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그 밖에도 지키는 여러 가지 전통이 있는데, 여러 그릇을 씻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4절은 ‘괄호’로 묶여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로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의 언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다시 번역하며, 익숙하지 않은 유대의 풍속은 설명합니다.

‘보아너게(3:17)’는 ‘우레의 아들’, ‘달리다굼(5:41)’은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다시 번역합니다.
또한 ‘무교절의 첫날(14:12)’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손을 씻는 전통’을 로마 사람들 또는 이방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3-4절에 따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은 5절로 이어집니다.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 지킴이들’이었을 것입니다.
본래 ‘손을 씻는 규례’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할 때에만 적용되었습니다(출 30:18-21). 일상생활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성경 말씀 외에 수많은 규정과 규칙을 만들고, 그것들을 열심히 지켰으며, 결국엔 그 규정을 어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까지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우리가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처럼 정결하게 하자”라고 순수한 헌신의 발로로 손을 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그 중심은 사라지고, 전통만 남아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서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유전 vs 하나님의 계명(6-13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주장에 어이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29:13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외식하는 자’의 문자적인 의미는 ‘가면을 쓴 사람’입니다. 그리고 ‘입술’이 ‘말’과 ‘표면’, ‘형식’이라면, ‘마음’은 ‘삶’과 ‘내면’, ‘본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율법주의자들은 말로는 그리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삶으로는 그리고 중심으로는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아무리 구구절절 옳아도 그 삶이 바르지 않으면, 그 말은 공기만 진동하는 공허한 울림만 됩니다. 왜냐하면 말의 소리나 겉의 소리보다, 삶의 소리와 중심의 소리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7-8.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상은 그 계명을 백성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하나님을 높이기보다 자신들을 높였던 것입니다. 특히 8절에 대조되는 두 동사가 있는데, ‘버리다’와 ‘지키다’입니다. 즉 그들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버리고,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은 지켰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바르게 분별해서 순종하는 것이 신실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켜야 할 것과 버리는 것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지키다’의 문자적인 뜻은 ‘세우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워야 할 ‘하나님의 계명’은 세우지 않고, 대신해서 세우지 말아야 할 ‘장로들의 전통’을 세웠던 것입니다. 또 ‘저버리다’의 문자적인 뜻은 ‘옮기다’ 또는 ‘제거하다’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옮기거나 제거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계명’은 옮기고 제거하면서, 반대로 옮기고 제거해야 할 ‘장로들의 전통’은 옮기지도 않고, 제거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은 제자리에 두어야 할 것을 두는 것이며, 치워야 하는 것은 치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를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10-13)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고르반’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예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르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맹세하면, 그 물건은 아무도 손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드리는 예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하지 않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물건을 분명히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고르반’이라고 말하므로, 부모에게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마치 계명을 지킨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도 속이고, 부모도 속이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고르반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자신이 잘못했음을 뉘우치고, 그것을 다시 부모에게 드리려고 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미 고르반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야지 부모에게 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일을 많이 자행했다고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 죄악의 근원(14-23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함께한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을 일단락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16)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장로들의 전통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열심히 씻었습니다. 그것이 신앙 행위가 될 정도로 열심히 씻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으로 굉장히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손을 열심히 씻는다고 해서, 그가 정결한 사람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성경에는 또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단수로 표현되어 있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라는 말씀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결하게 해야 할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진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음식이 사람을 정결하지 못하게, 즉 부정하게 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음식을 먹었을 때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위)로 가서 다시 배설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이 나옵니다. 그것에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 집을 방문했을 때,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음식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인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음란에서 우매함까지, 12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정직하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이 조목들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속이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고, 그런 것들은 방치하면서 겉사람만 정결하게 하려고 한다면, 점점 더 외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롬 12:2).

우리가 어떻게 우리 속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두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결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우리 속에 두면, 그 말씀이 우리를 정결하게 만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에게 드린다고 하는 이 말씀 이것을 여러분이 엉뚱하게 이용하여 여러분 편의대로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신랑의 말씀대로 입니다.  신랑의  말씀대로, 신랑의 집안 가풍대로 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시집 온 사람들이 예수를 닮아서 입맛도 닮아가야 되고 모습도 닮아가야 되고 모든 것이 신랑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도 비슷해야 잘 산다고요.  김형제님하고 정집사님하고 두 분이 같이 앉아있네요. 봐요. 좀 돌아봐요.  저 양반들이 비슷하게 닮았어!  비슷하게 닮았다구요. 처음에 결혼하고서 안닮은 곳이 많아서 싸움하고 화가 나서 이불도 뒤집어쓰고, 너니 내니 한다고!   박집사님하고 저 김자매님하고 비슷하게 닮았거든!  보세요.   원래는 안 닮았었는데  살아가면서 비슷하게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닮아가요.  부부간에  틀림없이 닮습니다.  둘이 닮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들 거짓말인 줄 압니까?  부부간에 성질도 닮아갑니다.  비슷하게 닮습니다. 봐요. 내 말이 거짓말인가?  전부 다 닮아갑니다. 남편이 그냥 상을 찡그리고 싸우는 사람은 부인도 슬슬 닮아가요. 그래서 아내를 보면 남편을 알고 남편을 알면 부인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르반이라고 하는 것은 저쪽에서 나를 닮아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쪽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를 닮아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차원에다 끌어내려 더러운 자리에다 모셔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서 그 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르반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어떤 부분만 드리지 마세요.
십일조 드리고, 주일날 한 시간 드리고, 저녁에 한 시간 드리고, 가끔가다 성경 한 장 드리고.... 그러지 마시고 여러분 전체를 다 드리세요.  여러분 전체 생애를 다 갖다 드리세요.  이것이 고르반입니다. 전부 다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어디 있어요?  전부 다 드리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믿는 것이 편해요.  그래야 제대로 믿어져  예배당에 들어가면 예수 믿는 것이고 예배당 밖으로 나가면 예수 안 믿는 것이고...이런 게 아니라,   생활전체가 예수 믿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배드리는 이것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 나가서 사는 모든 생활이 전부 다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 고르반의 생활, 이것이 돼야 된다─  그런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르반 하려거든 하는 말씀입니다. 원래의 고르반은 이런 것인데 인간들이 자기 편리한대로 고르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을 하셨다가 여러분은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르반 사상을 차용하지 마세요.   그것 빌리지 마세요.  그것 가져다가 사용하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이어요.  잘못된 고르반 사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엉뚱하게 바리새인들의 고르반 사상을 가져다가 여러분이 빌려쓰고 있다 그 말입니다.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말고 여러분의 생활 전체가 모든 생활 전체가 주님께 다 드려지는 생활이 고르반 생활로,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생활, 이 생활이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가복은 다시 넘어 가세요.   마가복음 7장 8절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읽어 나갈테니까 여러분들에게 지금까지 드린 고르반 사상을 잘 음미 해 보세요.  8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고 생 안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니까 버렸어,─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은 지키느니라. >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자기 생각,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형식만 잘 갖추어졌으면 만족하면서 이것이 바로 고르반,고르반 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상입니다.  그 다음 말씀─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 버리는도다.』
 이것을 실제 예를 들어서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자기 유전을 지키려고,자기들에게 내려오는 유전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린단 말입니다.  
『너희가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에 더욱 힘쓰라』고 그랬어요.
모이기에 더욱 힘쓰라고 했는데, 여러분이 모이기에 힘쓰십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요새 이자매님이 그냥 모이기에 힘을 내는데 조금 더 해야 돼. 조금 힘을 더 내야 돼. 주일날 낮에 한 번 나왔으면 됐지 뭐, 저녁에 또 나오고─ 아이구, 왜 이렇게 자주 모여!   수요일날 또 나오고!  하나님의 계명이 맞습니다. 알아 듣습니까?
자,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날이 가까음을 볼 수록 점점, 점점, 모이기에 더욱 힘쓰라고 했는데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참석했으면 됐지─ 하고 자기 유전을 만들어 놓는 겁니다.   수요일 날, 아이구! 오늘은 심사가 불편한 데 집에 들어 앉아 있어야 되겠다, 자기 유전을 자기가 만드는 것입니다.  혼자 앉아서 고독을 씹느라고 하나님의 계명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새는 결혼식들이 하두 많아 가지고, 모이기에 힘쓰라고 그랬는데, 결혼식에서 요리 컴 하거든! 오라고 말입니다. 오집사님 뭐 괜찮아요?  더러 가셔도 돼요?  요리 컴,일요일 날만 되면 요리컴, 택일을 해도 꼭 그날 해.  왜?  그날이 제일이거든!    옛날에는 육십갑자 손가락으로 짚어 가지고 택일을 했습니다.  제가 육갑 잘 짚습니다. 사주팔자 보는 것 조금 잊어버렸는데   오운육기 가지고 보면 여러분들 정확하게 나와요. 다른 데 가서 보시지 말고 나한테 와서 보십시오. 잠깐 성경 덮어놓고 보면 되니까.   에이그, 목사님이 그런걸 아실라구?  내가 전에 대전역전 앞에 자리 깔아 놓고 그거 보려고 하던 사람이요. 제가 공부할 때 한문을 많이 했거든요.  공부할 때 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다.   <너는 그것 공부해 가지고 대전역 앞에서 자리 깔아 놓고서 하는 것 그것 해라.   그 사람들 돈 많이 번다고 하더라.>  
내가 그 때 그걸 했더라면 지금 돈 좀 벌었을 텐데  이 신세가 됐어.  뭔지 잊어 버렸네요.  아! 그렇지요.      좋은 날을 택해서 혼인합니다.  일요일 안 합니다.  월요일이든 수요일이든 아무 때든지 상관없이 길일을 택해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그랬는데  요새는 뭐 얘기 할 것도 없이 일요일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믿는 사람들이 일요일 날 꼼짝없이 놀고, 놀고, 놀고 하거든? 그래서 가만히 보니까 놀고서도 잘 되네?  그러니까 불신자들도 일요일날로 결혼식하자 그렇게 된 것인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공중에 있는 마귀새끼가 예수쟁이들을 어떻게 하면 예배드리는데 방해를 해 볼까 궁리를 하다가, 꼭 택일을 일요일날로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고 주님께 경배하라고 했지만   어떻게 다 따라갈 수 있습니까?  적당히 해야지 그래서 오늘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서는 날라 가는 것입니다.  예식장으로요─!
요새는 또 놀러 다니는데 많이 있죠?  신나게 한바탕 흔들어대고 와야 일년을 견디는 사람들이 바로 현실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무주 구천동을 한 번 갔었어요. 우리 양형제님이 그냥 가자고 졸라! 그 바람에 갔었는데, 아이들 뭘 배워!  그러면서 너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이 보고들은 것이 그것인데, 배운 것을 안하고 무얼 하란 말입니까?  아이구, 아버지는 도적질하면서 자식은 하지 말라고?   자기가 실제 실물 교육을 시켜 놓고 자식보고는 그런 것 하면 안 된다  그래요?   술 먹고 주정 실컷 하면서 자식보고 넌 술 먹으면 안 된다─!   아니 아버지가 실물교육을 시켰는데,  어릴 때부터 소꿉살이를 해도 흔들흔들하면서 <난 아버지다>  이러고 들어오는 데─!  아니 실물교육 시켜 놓고 하지 말래?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에 전부 그런 곳으로 나가떨어진다고!   이것이 바로 고르반 사상,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고르반 사상입니다.
이 만큼 드렸으면 됐지 뭘,  하나님 말씀 폐지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편의대로 살지 말고 사생결단내야 합니다.   사생결단을 하고 신앙생활 이렇게 해야겠다하고, 신앙은 이 길로 걸어가야 되겠다... 말씀을 내가 반드시 지켜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어물쩡하게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고르반사상을 여러분들 다 집어 내 버리세요. 그러지 마세요.  신앙생활도 하려면  그냥 멋들어지게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김형제, 그렇지? 야! 참 달라졌다. 참 달라졌네.  예배당에 가더니 달라졌어! 이래야 됩니다.   뭔가 달라졌어. 신경질만 더 내는 걸?  이거 곤란해요.  예배당에 가더니 사람이 확 달라졌어. 어떻게 달라졌어?  야! 얼굴이 쫙  풀려서 정말로 멋있어졌어.   그렇게 삐치던 사람이 삐치지도 않고 그렇게 이불 뒤집어쓰던 사람이 뒤집어쓰지도 않고, 그렇게 빡빡 우기던 사람이 우기지도 않고, 독살을 떨고 혈기를 띄던 사람이 그것도 안하지. 이렇게 변해서 사람이 바뀌어져야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야! 참 멋있다고 할 것 아닙니까?   예수 믿으면서 할 것 다하고 끌려 다녀 봐요. 체, 예수믿는 것이 저 모양이야?  속으로 그런다고요. 특히 뒤돌아서서 그런다고요.  저게 예수믿는데...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진짜 예수쟁이가 아녀.  그렇게 비웃는다구요.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먹으라고 해서 안 막는다고 하면   컵밑에 조금 따라가지고 먹이면서 하는 말이 요까짓껏 먹는 건 괜찮지?   야 야, 하나님도 요건 봐주쟎냐?  이번 한 번만해라.  하나님이 한번 봐준다고 해서 싹 마셨어! 그럼 먹여 준 사람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에이, 미친 놈아!. 네가 예수 믿는 놈이냐? 예수믿는 사람은 그것도 딱자르는게 예수믿는 사람이야!  속으로 그래요. 참말로 여러분들 정신차리세요.  비웃음 받지 마세요.  예수 믿는 사람으로 딱 서십시오. 이자매님, 회사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딱─ 섰습니까?  
「나, 예수 믿는 사람이다. 올테면 와라. 때려죽이겠다.」  그렇습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꼿꼿하게 서서 나는 예수믿는 사람이니까  이런 것 안 해!   나는 예수믿는 사람이니까 밀씀대로 살꺼야!  이렇게 한 번 나가봐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야!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그 교회는 뭐가 있는 가봐」 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 자매님을 보고서 그런 말이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교회는 뭐가 있는가봐─ 이래돼야 여러분이 힘 안들이고 전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떠들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저절로 스스로 따라오니까─ 「 얘, 나도한 번 가 보자 」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르반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앞에 고르반된 사람이리는 말씀입니다.     우리 김형제처럼 말씀입니다.  「예수는 믿지만 오늘 딱 한 잔만 해! 」 그 결과는 위장병 걸리지요, 뭐.  그렇죠?  공개된 비밀이니까 얘기해도 괜찮은 일이지요?   예수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하니깐 한잔씩,한잔씩 하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치질밖에 없어요.  남는 건 위장병밖에 안 남아요.

 고르반이면 철저하게 고르반하  철저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내 인생 전부 다 하나님께 드렸으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 주님께 드리는 이 시간을 우리 다른 데로 써 먹을 수 있어요?   내 인생을 전부 다 드렸는데... 이렇게 되어야 진실로 고르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다 핑계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딱 세워 놓고, 하나님의 계명은 다 폐해 버리고,자기 생각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잘못된 고르반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러지 마세요.  말씀 읽습니다.  10절 말씀... 여기 하는 말씀 좀 봐요.  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가.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거늘─』
 
그렇죠?   부모를섬기지 않는 사람은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훼방하고─ 어머니를 욕하고,아버지를 욕하는 사람은 죽이게 되어있어요.   이 성경말씀은 불효자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은 옆에다 살짝 제껴 놓고서는  뭐라고 하느냐─ 11절 말씀을 읽습니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이렇게 말로만 다 해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런식으로 말로만 다 해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에 나옵니다. 출애굽기에도 나오고 신명기에도 나오요.  계속 나옵니다.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쑥 잡아 빼놓고,레위기 1장 2절 그 말씀을 쏙 빼다가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하는, 이 고르반이라고 하는 말씀을 제 필요한대로 사용하여 가로되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고 어머니께 드리면 되나?  하나님을 더중하게 섬겨야지.   그러니까 어머니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면 되는 거야. 어머니는  안 섬겨도 돼!」 하는 것입니다. 이 따위로 성경을 이용하여 제 이론을 펴 나가는 것, 그것이 곧 고르반 사상입니다. 바로 이것을 주님께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것을 제가 조금 더 부연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원받고 나면 제일 빠지기  쉬운 게 뭐냐 하면 바로 이 고르반 사상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제일 빠지기 쉬운 사상입니다,  저를 따라 하십시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게 아니요, 내속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자, 우리 조형제님 속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살고 계십니다.   그러면 조형제님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분명히 죽었지요?   그러면 죽었다는 사람이 어떻게 여기와서 이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이것이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처음에 거듭나고 나서 이 말씀을 잘 몰라서, 이해를 할수가 없어서 지금 잘못되어 가는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있어요. 저는 이 생각만 하면 속이 아파요.  화가 슬그머니 난다니까요.  잘못 되어 가는 것을 보면 기가 막혀요. 「예수께서 내 속에 계시고 나는 죽었어. 그래서 나는 없어.」 그런 식으로 자기는 없답니다. 무조건 자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없어요?  없는데 왜 그러고 돌아다녀?   없는데 왜 그러고 다니느냐 말입니다.  자기가 없으면 어떻게 없다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습니까?   그게 바로 있다는 증거예요.  이것이 완전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후에 이렇게 되기가 아주 쉬워요.  제발 이 사상에 여러분들 빠져 들어가지 마세요. 그래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 목사님?
─ 예 !
─ 한가지 물어 봐도 돼요?
─ 물어 보시요.
─ 나는 죽고 예수는 내 속에 들어 오셨죠?
─ 그렇습니다.
─ 그러면, 이제는 내가 죄를 짓습니까, 안 짓습니까?
─ 아! 죄 짓죠.  미워하잖아요?
─ 그러면 그게 죄 입니까?   나는 죽었는데 내가 죄졌습니까?  
    나는 죽고   예수만 사는데 이 속에서 나오는 게 예수님께서 하는게 아닙니까?

아이구, 사람잡네!  아니, 그러면  나는 죽었는데 왜 그런 더러운 게 나와?   이런 경우에 제 속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그 사람은 신이 나요. 목사님보다 자기가 성경을 더 많이 안다고요. 나는 죽고 예수가 내 속에서 사신다는 말씀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가서 결국은 고르반 사상이 됩니다.   고르반 사상을 현대 우리말로 표현하면 도덕폐기론이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니까 내가 아무 짓을 했어도 하나님과 교제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까 다른 것은 아무렇게나 해도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 내 자신이 드려졌으니까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바로 고르반 사상입니다.   딴 게 없어요.  하나님을 빙자 해 가지고 저 좋은 방향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도덕폐기론, 고르반 사상입니다.  무서운 사상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 목사님, 나 교회 안 나가렵니다.
─ 왜 안 나오실려고 합니까?  나오십시요.
─ 저는 목사님 설교 들을 게 없어서 못 듣겠어요.
─ 들을 것이 없으면 할 수 없지요. 어째서 그렇게 들을 것이 없습니까?  구체적인 말씀을 해 보시지요.
─ 목사님은 시간마다 복음은 전하지 않고 율법만 전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어떻게 율법만 전했습니까?
─ 왜 자꾸만 하라, 하라고만 하십니까?  왜 사랑하라고 하고
    왜 자꾸 열심히 하라고 합니까?  할 수도 없는 것을 왜 자꾸 하라고 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고받다가 제가 한마다 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에 보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사랑해라, 미워하지 말아라, 싸우지 말아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라, 이런 말씀이 쭉 나오는데 그것도 모두 율법인가요?」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구 그것도 해석하기 나름이지요. 김목사처럼 해석을 하면 다 율법이 돼.」 그러더라구요. 그저 우리 집 아이들 같으면 종아리라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도 없고 내 속만 터지는 거예요.   성경을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  그러면 중간은 갈 것 아닙니까?   똑똑한 척 하느라고 아는 척 하느라고 성서해석을 그 따위로 해 가지고 여러 사람 바보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또 물었습니다.  해결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신이 와서 설교를 한 번 해  보고,
   내가 율법을 전하니까 당신이 복음을 더 잘 전하면 내가 물러서고    당신이 해야   될게 아니냐고 했더니
─ 에이, 사람들이 안 믿어서 안돼.
그래서 제가 ,그럼 할 수 없지 어떻게 하느냐니까, 그 사람 하는 말씀이, 한 마디만 해 주고서 전화를 끊어야 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 무슨 말씀이냐고 하니까 당신들은 전부 다 지옥 간대요. 그래서 내가 어째서 지옥 가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 고르반 사상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옥 가는 이유는 당신들은 완전성화가 못돼서 전부 다 지옥 간다고 했습니다.   그럼 성경에는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못 가고, 거듭나면 천국간다고 했는데 그럼 거듭나는 것은 뭣에다 쓰느냐고 했더니 거듭나는 것은 기초라서 그것은 반드시 통과해야 될 문인데   그것만 가지고는 천국은 못 가고 지옥가는 것이랍니다. 거듭나는 것만 가지고 지옥갈 수 없고 거기까지 온 사람은 지옥가고  그 다음에 자기처럼 이렇게 완성이 돼야 그래야 천국을 간다고 합니다.  그럼 당신의 완성은 어떤 것이냐고 하니까, 나는 죄하고 의하고 그런 걸 떠났다고 해요.
물론-성화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완전성화-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밖에는 그렇게 완전성화가 된 사람이 세상에 아직 없다는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하두 답답해서 제가 또 물었습니다.   그래 제가 또 물었읍니다.  그래 대한민국에 당신같은 사람이 또 하나 있는가, 없는가, 또 많이 있는가고 물었더니 세상에 암만 찾아봐도 자기밖에 없대요. 자기처럼 된 사람이 없다고 해서 하두 기가 막혀서 그럼 서울에 아무개 목사님도 내가 분명한 분인 줄로 알고 내가 존경하고 있는데   그 양반은 어떠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   그 양반! 거기도 없어.  아직까지 못 찾았어. 거기도 비슷하게 하기는 하는데 그것도 아녀! 세상에 이런 오만 방자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고르반 사상이 잘못 들어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 뱃속 편하게 삽디다.  어떻게 사느냐?  죄가 전혀 안 나오는 겁니다.   왜?  나는 죽고 예수가 살기 때문에 죄가 전혀 안 나옵니다.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죄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뭣을 해도 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니까요.  욕을 했어도 예수님이 하신 것이고   막걸리를 마셔도 예수가 마신 것이고 싸움을 했어도 예수가 싸운 것이고....!  예수가 해요?   하여간 무엇을 했어도 다 예수가 한 것이지, 왜 내가 한거냐 이겁니다.   다 예수가 한 것이라니 내가 그것을 이길수가 있어야지요.  이런 사람들은 이길 장사가 없어요. 이길 수가 없어서 잘 알았다고,  나중에 당신이 천국가고   혹시 내가 죽어 지옥가게  되어서 지옥에서 고통받게 되거든  나사로와 부자처럼 될터이니 그때 내가 물한바가지 달라고 하든 수고스럽지만 거절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전화 끊었습니다.   이 고르반 사상은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러고 나서 초기에 아주 그 사상으로 물들어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꼭 누구하고만 대화를 하느냐하면 속썩이는 사람, 그저 뭔가 생활도 안되고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 찾아 가지고 그 사상을 쏙 집어 넣는다구요.

─ 야! 속 썩이지 말어! 이 숙맥아.
─ 죄가 나와서 그러고 있지?
─ 그거 죄가 아니야! 그게 왜 죄냐?   성경을 봐라.  로마서 8장1절을 봐라.
    그게 어디 죄냐? 그리스도안에서  죄는 전혀 없는 것이다.
     제대로 믿어야 되는 거야. 정죄함이 없는 것인데
     왜 율법에 매여 가지고 속을 썩이냐?

이렇게 되면 웬만한 사람은 한바퀴 휙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바퀴 돌고 나면 정신이 어리벙벙해져서 이제는 헤롱헤롱 세상이 말짱 거꾸로 보입니다. 거기 박자매님도 아마 슬쩍 그런 것 가져다 집어넣으면 신이 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편하게 살는지도 모릅니다.  하긴 그것도 편하긴 할 것입니다. 성경 볼 것도 없고 예배드릴 것도 없고 조심할 것도 없고, 그저 제 욕심차려서   돈 버는데 눈이 휘둥그래져서 벌고 돌아다니면서 할 짓 다하고 말입니다.   하여간 저는 양손 번쩍 들었어요. 그것이 바로 고르반 사상입니다.   아무리 책망해도 안 들어요. 들어먹지를 않아요. 왜 들어먹지를 않게 되었느냐 하면   이 고르반사상은 자기가  대한 민국에서 제일 최고봉에 올라가서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자기를 가르칠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얘길 해도 안 들어요. 혹시라도 여러분이 이렇게 되지 마시길 바라고 큰 문제나 작은 문제나   그런 이론들이 여러분에게 들어 올때 여러분들이 알아서 잘라 버리세요. 여러분들이 구원받고서 하나님께 드림이 됐다─그러면서 부모나 형제에게 잘못한다는 것은 아직 드림이 안된 것입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말씀을 찾겠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 제가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이게 바로 고르반 입니다. 하나님께 드렸다,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 말씀입니다.  고르반 했다 그 말씀입니다.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것은 미워하면서도 그걸 합리화시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놓고 남의 얘기하듯 하니까 여러분이 지금 고개를 끄덕입니다.   자기가 실제 이 상황 가운데 들어가면 미워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한다 이겁니다.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미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다. 빛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 어둠의 생활을 하기 때문에 요한일서를 쓴 것입니다. 요한일서─그냥 쓴게 아닙니다.  요한일서는 예수를 잘 믿어 하나님 안에 산다고 하면서 잘못된 삶을 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요한일서를 쓰면서 그들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찌르고 있습니다. 그 다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라... 그렇죠?  앞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 못하는데  하나님께 다 드렸어?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 다 드렸다는 말은 이 전체를 다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내게 손해를 붙여도─ 군자는 물에 빠져도 헤엄 안친다는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활이 하나님께 드림이 됐다면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미워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결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실제 생활입니다.  어려운 게 아니에요. 결코 어려운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여러분에게 가시처럼 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께 드림이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분이 날 사랑하신다─ 하시기 때문에 나의 자신을 그분에게 다 드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게 합당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시기하는 게 합당한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그런 소리 들어서 합당한 사람이지요. 잔소리가 잘려 버립니다.   자기 변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익어져 가면 익어져 갈수록 여러분들이 느끼셔야 할 것은 자기 변호가 점점 없어집니다. 자기 변호가 잘라져 나가요.  자기 변호가 무슨 말인지 압니까?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변호하지 않아요.  이것이 하나님께 드린 바 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문제 안돼요.  그러니까 나에게 형제가 이렇게 저렇게 불편하게 했어도, 가시 같아서 이렇게 했어도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에 전혀 문제없이   「안녕하십니까?」 인사하고 지냅니다.  그러면 그것도 저쪽에서 꼴 보기 싫어 해!  속으로는 미워하면서도 인사는 잘하네 하고 속으로 미워합니다. 자기 속이 그러니까 남의 속도 그렇게 미움으로 가득찬 줄 아는 것입니다. 어느 책방엘 갔어요. 제가 시골에 가는 중이라서 책방에 뭘 좀 맡겨 놓고 시골에 갔다와서 책방에 들렸더니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이름이 신애정이래요. 그래서 애정이 많은 아가씨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주인양반이 넥타이를 삐딱하게 매고 들어 왔습니다. 부인이 보고서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좋겠는데 넥타이를 잘못 매고 다닌다고 핀잔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넥타이를 삐뚤게 매고 다니는 사람은 성격이 삐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하고 농담을 했어요. 옛날에 제가 그런 얘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하고 사귀고 있을 때입니다. 무학대사가 바로 임금앞에 딱 섰더니 이성계하는 말이 <허허, 대사는 얼굴이 꼭 돼지새끼 같소>   그랬더니 무학대사가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하하, 임금님, 자기 속에 돼지가 들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모두 돼지로 보이는 것입니다.>했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남을 미워 하니까 남도 자기를 미워하는 줄로 알아요.   아니, 말도 안되는 얘기예요. 말도 안되는 얘기하지도 마세요. 여러분들이 저를 미워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목사가 그전엔 설교도 잘하더니 요새는 못하고, 맨날 소리만 지르고...!   왜?  제 속에 돼지새끼가 들었으니까 남도 모두 돼지로 보이는 것입니다. 목사는 작금이 똑같은데 그럽니다. 미워하죠. 제가 언제 여러분이 저를 미워한다고 같이 미워하던가요?  마가복음 7장 조금 있으면 읽습니다. 흘기눈 뜨는거 나오는데 흘기눈 뜨다가 눈 빠져요. 흘기눈 뜨지 말아요. 자기가 흘기눈 딱 뜨니까 남도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모두 다 파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노란 안경을 쓰고 보면 노랗게 보이고.... 저거 어찌 저렇게 전부다 노렇지?   자기 눈에 노란 안경을 썼으니까 노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볼 줄 알아야 해요.   자기를 볼줄 모르면 고집불통이 되어 자기만 옳은 줄 알아요.  그런 사람은 아무도 못 당해.   그러니까 그 고집불통이 무슨 말을 하면 무조건 O K 하는거야.  왜?   잘못 건드렸다간 원수가 될 판이니 누가 감히 겁나서 건드리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잘못이 있어도 고치질 못해요. 아무도 잘못했다고 책망을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람은 모름지기 부드러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10년,20년을 지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발견하는 날이 있어야 되는데....그것 정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고르반사상,   빛안에 거한다고 하면서 어둠을 행하는 사람─참 무서운 얘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원만하게 맺어졌다고 말 하면서도 마음속에 시기가 가득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아니하고, 말씀읽지 아니하고 전도하지 아니하고 하면 서도 하나님과 관계가 원만하게 이뤄졌다고하는 이 사람은 다 헛 것입니다. 그 믿음 헛 것이라, 잘못된 것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에서 하시는 말씀이 보이는 형제도 사랑 못하면서  하나님을 어찌 사랑하느냐,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정말로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지 아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미워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미워해요? 어떤 분이 글을 썼는데 그걸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안된다고 야단을 치니까 어떤 분이,
─그러면 목사님은 죄를 안 짓습니까?
─안 짓습니다.
─안 미웁습니까?  지금 누구 안 밉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한참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혹시라도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나서 대답이
─나 지금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요.
─거짓말....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남을 미워하고 있으니  목사도 당연히 미워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날 보고도 그런 질문 직접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요.


─ 이 형제님  지금  누구  미워합니까?  안 합니까?
─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 그럼 죄 안졌단말이요?  사람이 어떻게 죄를  안 짓고 살아?     미워하잖아요?   지금!   지금 안 미워요?
─ (이형제가 고개를 설레 설레...)
─ 분명히 미워하면서도 안 미워하는거래요.  그렇죠?

이렇게 돼 버린 사람들이 자기가 미워하니까 남도 그런 식으로 미워하고 있는 줄 안다고....!    답답한 노릇입니다. 원 자매님, 지금 누구 미워합니까? 나 참  내가 이렇게 뚱뚱한 데 우리 이 형제라도 좀 날씬했으면 좋겠는데 똑같이 이래가지고 그냥 퍼져서 뵈기 싫어. 안 미워요? 그렇지 않지요.  워낙 호인이라서 미워할 수가 있어야지.   자, 이렇게 안 미워야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인데 자기 속에 미움이 가득─ 이건 내가 성경공부하면서 그런 얘기했지만 처리를 받고 고생을 해도 신사처럼 처리를 받고 고생한 사람이 있고, 그냥 거지처럼 처리를 받고 고생을 하고 애를 먹고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있다구요. 오집사님!  저소리 나보고 하는 소리지 그러시겠지요?  제발 신사되세요. 신사. 다 똑같은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분이 속에 있는 그것 때문에 남도 똑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여러분 스스로가 잘못됐을 경우에는 내가 잘못됐구나를 알아야 됩니다. 남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못알아 들어.  우리 식구가 와서 들었으면 꼭 좋겠는데 안 나왔구먼!   아무개가 와서 들었어야 되는 건데 안 나왔구먼!  이래서는 아니됩니다.   자기가 듣고 자기만 고치면 상대는 까짓 것 미워하거나 팔팔뛰거나 말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 자기가 안 됐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고르반 사상, 이고르반사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내가 표현한다면 냄비에다가 라면끓여 먹는 것과 똑같은 신앙생활을 한다구! 조금 제 입맛에 맞으면 팔팔팔팔 끓어! 그냥 팔팔팔팔 얼른 끓어! 마구 끓다가 조금 제 맘에 안들으면 , 불이 다  꺼져가면, 뽀르륵 식어 들어가 버려! 이런 신앙생활을 한다구요... 조금 좋으면─ 아유! 목사님, 아구탕 사드릴께요, 어쩌구하는데 조금 입맛에 맞지 않으면─ 아구탕 좋아하지 마라, 목사야! 이게 바로 냄비 신앙입니다. 냄비신앙, 냄비신앙,   냄비신앙 할꺼요?  이자매? 냄비신앙!   조금만 입맛에 맞으면 보글보글 끓어! 사랑이 보글보글 끓어. 그것 엎질러지면 데어 죽어!  팔팔 금방 끓는 것 좋아하지 말아요. 팔팔팔팔 끓다가 조금 지나면 뽀르륵 식어, 싸악 식어! 내가 언제 끓었지?  아이구 정말 속터져서.... 뚝배기 신앙이되어야 합니다.  불을 때도 땐둥만둥, 그 놈 끓을려면 그냥 한 시간은   불을 때야 이게 끓는다구!  이게 좋은거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느긋하게 한 번 끓기 시작하는데 불을 끄고 상에다 딱 올려놓고 먹고 먹고 또 먹고 밥을 다 먹을때까지 끓어 가지고 뜨겁고 뜨겁고 또 뜨겁다구요. 이게 진짜 신앙입니다.  오집사님 알아 들어요? 앞으로 장마지면 마당에 물 퍼내야 할텐데 그렇게 되면 사─악 식는다구요.  그래가지구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하나님과의 관계가 뽀르륵 끓었다가 식는 그런 신앙은 있을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못합니다. 안 형제, 제발 냄비신앙 버리세요.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한없이 끓어서 불을 꺼도 그냥 끓어, 그냥 계속 끓어,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지! 김형제님, 알겠습니까?   뚝배기 신앙이냐, 냄비신앙이냐,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측정해보세요. 우리 박자매님은 냄비신앙일꺼요.  왜냐하면 부아가 났다하면 고독씹느라고 혼자 들어 앉아 있으니까... 그건 냄비신앙이라구, 냄비신앙!  뚝배기신앙은 부아가 나도 그저 할 일하고, 부아가 안 났을때도 할 일하고, 계속 자기 할 일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문제를 삼지 않고 계속 진행하는 것입니다.    부아가 나도 난둥 만둥 입니다. 그저 난둥 만둥!  우리 김자매님처럼 난둥 만둥, 좋아도 좋은 둥 만둥, 그렇죠?   그저 조금 좋았다 하면 펄펄 끓었다가 조금 싫으면 뽀르르 식어 버리는거야!   우리 이 자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요새 조금 끓는 중입니다. 지금 이제 끓을려고 시동이 걸렸어!   조금 보글보글하는 중이야.  뽀르르 식지 말어!  식었다 하면 쫓아가 버릴꺼야! 사실은 집이 어딘지도 몰라! 참, 목사하기 힘들어 못 해 먹겠어요. 세상에 자기네 집 좀 가르쳐 달라고 하면 왜 그렇게 뜸을 들이는지! 어떤 사람들은 1년이 가고, 2년이 가야 비로소 전화번호 알려 주는 사람도 있고, 이름 알려 주는 사람있고, 어떤 사람은 이름이 뭐냐고 했더니 눈을 이래 가지고 쳐다 봐!    왜? 내가 붙들을까봐?  시시한 소리 말어! 내가 그렇게 유치하게 안 붙들어. 그랬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   「 왜 이름도 안물어 보고, 주소도 안 물어 보느냐? 」고 해요.   기가 막혀서 내가 하는 말이   「그 때 물어 보니까 눈을 이렇게 떴잖아요? 」

그 다음 말씀 읽습니다.  다시 읽어요.  20절 말씀, 다시 읽습니다.  이 고르반 사상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그렇죠?  21절,

『 우리가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무슨 계명?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 할찌니라.』 입니다.
 이 사랑이 동일하게 여기도 나오고, 저기도 나와야 되는데 자기 입맛에 닿는 사람만 좋아하고,   입 맛에 닿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 이건 곤란한 것입니다. 입 맛에 닿을 때는 좋아하고,입 맛에 안 닿을 때는 싫어하고!  항상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그렇죠?  까시씨가 끓든지 식든지,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쟎아!  상관없이 사랑한다니까?   이상하게 들을라! 마가복음으로 넘어 가세요. 이제는 12절 말씀, 읽습니다.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많이 행합니다. 그런 억지를 많이 행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14절 ─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깨달으라고 했더니 자기 제자들이라도 깨닫지 못했어!   얼마나 속 터지고 답답한지 몰라요.  참 미련한 게 사람입니다.  15절 ─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 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
이것도 이제 고르반으로 써 먹는다고!  뭐든지 밖에서 들어 가는 건 더럽게 못 해!   그러니까 막걸리도 마셔, 마음대로 마셔!  이게 이제 고르반사상을 또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편리하게도 이렇게 저한테 좋게 써 먹는 것입니다.  꺼꾸로, 거꾸로 써먹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6절,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시고,
17절─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 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 참 답답하다는 말씀이죠. ─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 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 하느냐─ 먹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말씀이죠.  19절 ─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 가 』 ─ 먹는 것은 마음 속으로 안 들어가요. 배로 들어 가지요.  배로 들어 가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배로 들어 갔다가 어디로 나가요? ─ 『뒤로 나감이니라』─ 하수도로 통해 나가고, 화장실로 통해서 나가지요.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모든 식물을 다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사상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20절, ─

16절.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7절.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절.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절.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음란도적질살인
22절. 간음탐욕악독속임음탕흘기는 눈훼방교만광패
23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NIV
  1. For from within, out of men's hearts, come evil thoughts, sexual immorality, theft, murder, adultery,
  2. greed, malice, deceit, lewdness, envy, slander, arrogance and folly.
  3. All these evils come from inside and make a man 'unclean.' "
현대인의 성경
  1. 거기서부터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2. 간음, 지나친 욕심, 악독, 속임수, 방탕, 시기, 중상 모략,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3. 이런 것들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새번역 성경
  1.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2.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3.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

악한 생각들(evil thoughts)

1. 음란(
sexual immorality) 4202
2. 도적질(theft) 2829
3. 살인(murder) 5408
4. 간음(adultery) 3430
5. 탐욕(greed) 지나친 욕심 4124
6. 악독(malice) 악의 4189
7. 속임(deceit) 사기 1388
8. 음탕(lewdness) 방탕 766
9. 흘기는 눈(envy) 시기, 악한 시선 4190, 3788
10. 훼방(slander) 중상 모략, 모독 988
11. 교만
(arrogance)  5243







12. 광패(folly) 877. 어리석음,  아프로수네(aphrŏsünē)
-
ἀφρο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877
1. 어리석음,  2. 지각없음
발음 [ aphrŏsünē ]
어원 / 87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우매함(막 7:22), 어리석은 자(고후 11:17), 어리석은 것(고후 11:1), 어리석은 말(고후 11:21)
신약 성경 / 4회 사용
『광패』
─ 이것은 미친 지랄하는 것입니다. 이 광패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번역을 한 성경도 있습니다.  아주 지당한 말씀입니다. 어리석게 행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광패의 헬라 원어는 afrosuvnh:(아프로쉬네)입니다. 생각없이 행한다,또는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말 사전에는 [미친사람처럼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가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말 번역에 광패라고 번역된 것은 생각없는 어리석은 행위를 아주 잘 표현한 것입니다. 그냥 감정대로 사는 것입니다.    기분내키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 청중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같은 말, 즉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더럽히고, 또 더럽히는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 또는 '사람 속'이라는 말은 곧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음이란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생각 등의 근저(近著)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인격의 중심부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의 대표격으로 악한 생각(evil thoughts)을 지칭하신다.

'악한 생각'은 인간의 모든 부정과 악한 사상과 음모가곁들여진 의지적인 생각으로서 행동화된 죄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즉 바로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12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와 비슷한 언급이 로마서 1:29-31, 갈라디아서 5:19-21에서도 나온다.

평행 본문인 마 15:19에서는 6가지만 언급되었는데, 십계명의 제6. 7. 8. 9계명의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반면 마가는 그러한 전통 계명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나열하고 있다.
이를 재구성하여 살펴보면 음란, 간음, 음탕이다.
이 세 종류는 서로 비슷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데, 십계명 중 제 7계명에 상당하는 죄악이다.

한편 그 각각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음란'(포르네이아이)은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관게를 뜻하는 말로서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고, '간음'(*, 모이케이아이)은 기혼자와 관계되는 성범죄이며, '음탕'(아셀게이아)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성적 본능을 자제없이 노출시키는 공개적이고도 부끄럼을 모르는 성범죄를 말한다.

살인, 악독,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狂悖).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 6계명이 상관되는 '살인'이라는 말로 압축시킬 수있다.
여기서 '악독'(포네리아이)이란 말은 노동, 아픔, 고통이란 뜻의 '포노스'에서 나온 것이다.
즉 고되고 아프게 하는 요인이 될 행위를 말한다.

'흘기는 눈'(오프달모스 포네로스)은 악의적인 비읏음과 빈정거림으로 응시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시기한다는 셈어적 표현이다.

'훼방'( 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적인 욕설과 험담을 말하는 것이다.

'광패'(아프로쉬네)는 도덕적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의 어리석음을 뜻한다(foolishness; AV, RSV).

도덕질(클로파이)은 제 8계명,

속임(돌로스, '을가미', '덫'이란 뜻)은 제 9계명,

탐욕(플레오시아이) 은 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은 제 10계명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십게명에 사람과 판련된 6가지의 계명 중 부모와의 관계만 빼고 5계명 모두 포함되어 있어 마가 역시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서술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조항들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부정한 것의 '모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인간이 품은 마음에 있음을, 그리고 모든 부정의 원천은 사람의 마음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예시된 것일 뿐이다.
본절은 이와 같은 뜻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컨대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통해서 부정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도 못한다.
참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 변혁인 회개뿐이다(욜 2:13).


뭐가 더러운가 구체적으로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이제 고르반사상 즉,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 따위 짓들을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금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중에서 한 가지도 행하지 마세요. 

21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악한 생각 많죠? 악한 생각, 때려 죽일 놈, 잡아 먹을 놈, 소 같은 놈, 여우 같은 놈,욕 하는 것, 이런 것입니다.  
예수께서 악한 생각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여기 살인이 나왔는데  이 살인을 미워하는 것을 포함해서 살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미워하는 것을 말입니다.
남 미워 하면 살인하는 것입니다. 
살인하고 살 것 같아요?
남 죽이고 내가 살겠어? 
나도 같이 죽어요.  살인하지 말아요. 미워서 그냥 욕이 나올려고 할 때 꾹 참는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미움 자체가 우리에게는 먼나라 얘기가 돼야하는 것입니다.


22절, 『간음과』,─ 간음하는 것─ 마음 속에 것까지 다루시는 것입니다.   『탐욕』과─ 탐욕이 뭐죠?  그냥 막 욕심내는 것,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욕심이 나서 자꾸만 먹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인간은 자꾸만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배가 부른데도 자꾸만 먹는 것─ 여자들 조심 하십 시요.  이건 배가 불러도 자꾸만 먹어!   방에서도 먹고,부엌에 가서 또 먹고, 실컷 먹고 배가 아파가지고 배가 터질려고 해요. 하기는 짜장면 아홉그릇 먹은 사람도 있고, 냉면그릇에다 커피를 마시는 양반도 있긴 하지마는   탐욕스러운 것은 곤란한 것입니다.  먹을 만큼 먹으면 물러 날 줄을 알아야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 들으십니까?  일용할 양식 달라고 기도하는 삶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악독』한 것입니다.  자기 맘에 안 들으면 이를 깨물고 독살을 떠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은 이러지 말아야지!  우리가 이렇게 악독을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악독을 잘 품으면 여러분의 심신이 상해서 결국은 병들어 손해는 악독을 품는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그 다음, 『속임과 』─ 살 살 속이는 것이지요. 진실되지 못하게, 자신의 일시적인 유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속임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서 자신의 거짓된 것을 감추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감추고 외식하는 사람으로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말씀을 잘못 들어서 이제부터는 자기 속에 있는 대로 함부로 마구 사는 것을 말하는 줄로 알고 그와 같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마음속에 시기가 있으니 자기를 감추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시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있으니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감출 필요가 없이 있는 그대로 미워하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음란한 마음이 있으니 그것을 감출 필요가 없이 그대로 다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상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하면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해석한답시고 그런 식으로 말씀을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빨리 가나안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 정말로 큰 일날 사람들입니다. 성경 어디에 마구 있는대로 죄를 많이 지어야 빨리 가나안에 들어 간다는 말씀이 있는지 아무리 찾아 봐도 없던데요!    지금까지 지은 죄도 너무 크고 감당할 수가 없어서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 빨리 성화되기 위해서 신나게 죄를 지어야 된다니 이런 망발이 어디 있습니까?    무식하면 무식한대로 입이나 다물면 좋겠어요. 성경을 잘못 풀다가 망한 사람들이 한 둘입니까?   그러면서 그것이 바로 자기있는 그대로 하나님앞에 내어 놓은 것인 줄 알고 잘못을 했어도 당당합니다. 게다가 남까지 가르쳐줘요!  있는 죄 없는 죄 다 실범을 해 봐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말씀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지 않고 하나님앞에 정직하게 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니, 정말로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니,그것이 속상하고 괴로워서  고통스러워 하는 태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음탕한 것』─ 원어로는 아셀게이아( aselgeia)인데 정확한 의미는 <제 멋대로>입니다. 이것은 절제하는 것과 상당한 관계가 있습니다. 절제란 말씀은 되는 대로, 함부로 하는 것과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조심하여 자신을 살피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함부로 아무곳에나 주저 앉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탕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방임하는 것입니다.   유혹에서 자신을 조심하지 않고 끌면 끄는대로,밀면 미는대로, 그냥 흐르는대로 내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렇게 방탕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청년들도 장년들도 노인들도 자신을 거룩함에 훈련하지 아니하고 아무렇게나 내 버립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화산으로 멸망을 맞았던 폼페이처럼 방탕이 극한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거리를 지나다보면 퇴폐적인 시가의 광고물들이 사람들을,마음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비된 사람들로 자꾸만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긴 담배를 물고 그 연기가 자신의 영혼과 몸을 좀 먹는지도 모르고 어른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오늘 실컷 놀고,먹고,마시자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아이들이 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시대가 음탕한 음녀의  덫에 빠져 들어가는데 여러분도 함께 동참 하시렵니까?   음탕하면 자기자신도 집안도 망합니다.  아주 무서운 것이 음탕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나님 말씀 에서 멀어지면 이렇게되는 것입니다.   말씀 따라서 경건한 삶을 살지 않으면 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집착하지 않으면 저절로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흘기는 눈』 ponhros 인데 뜻은 <악의에 찬>입니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악의에 찬 눈이라는 뜻이지요.
흘기는 눈은 악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훼방』

훼방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마구 거침없이 헐뜯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훼방하는 당신은 구원받고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믿는 사람이 어찌하여 그렇게 남을 비방하는 것입니까? 내가 제일 고통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를 비방할 때 제 마음이 제일 고통스럽습니다. 자기는 가장 옳고,남은 모두가 잘못하는 것 같지요.   내 자식은 모두가 착하고 흠이 없는데 남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막난이요,버르장머리가 없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보다 내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면 여러분의 심령의 안식은 고사하고 날마다 풍랑의 연속입니다. 제발 깨달아 아십시요. 여러분이 지금 남을 훼방하고 있다는 것을...!   제발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남을 나쁘게 말하지 마십시요.  가장 좋지않은 것이 바로 남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좀 좋지 않은 행위를 한 사람이라도 결코 나쁘게 말하지 말고 좋게 평가해주십시요.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가 있는 법이요, 또한 당신이 그런 실수에 빠지지 아니한다고 어찌 장담하시겠습니까?   훼방이 나오지 않도록 여러분의 입을 조심해서 지키십시요. 남을 훼방할 때 여러분이 벌써 그 사람보다 훨씬 나빠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남보고 구원받은 것이 저 모양이냐고 훼방을 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나 당신이나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막무가내로 남을 훼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행위를 다 벗어 버리십시요. 자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교만』과─ 이것 역시 골치 아픈 것입니다. 주제파악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이 갈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를 못하니 걱정입니다. 이 교만에 관해서는 다음에 기회있는대로 자세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광패』
─ 이것은 미친 지랄하는 것입니다. 이 광패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번역을 한 성경도 있습니다.  아주 지당한 말씀입니다. 어리석게 행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광패의 헬라 원어는 afrosuvnh:(아프로쉬네)입니다. 생각없이 행한다,또는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말 사전에는 [미친사람처럼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가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말 번역에 광패라고 번역된 것은 생각없는 어리석은 행위를 아주 잘 표현한 것입니다. 그냥 감정대로 사는 것입니다.    기분내키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음란하면 음란한 대로,미움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탐욕과 악독과 속임이 절제없이 생긴 그대로 나타납니다. 미움이 한 번 시작되면 그 미움이  우리를 끌고 지옥불로 들어가서 한 바탕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악독이 나오면 휙 돌아가지고 미친 지랄을 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펄펄 뛰는 것입니다. 정신 이상이 되어 옷을 벗고 다니는 사람만 불쌍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이 광패하지 않은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그 다음 23절 말씀 ─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 속에서 나오는 이런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눈썹을 그리고 마스카라를 하고 아이샤도를 하고 입술에다 빨간 칠을 하고는 멋들어지게 하고 다니면 그런 것이 깨끗한 줄 압니까?  이런 더러운게 나오면 틀려 버린 것입니다. 이런 것이 나오면 참으로 사람이 더럽게 되는 것입니다.

고르반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란 수입의 1/10만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모든 수입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내가 아직도 미련하고 부족해서 모든 것을 다 드리지 못하고 최소한의 약속에 따라 1/10만 드립니다.
그러나 남은 것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멋대로 고르반 신앙을 마치 전부 드린 것이라고 자부하며 자랑한 것입니다.
사단의 속임수에 나를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어도 아들이기 때문에 때 거듭났기 때문에 더욱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징계하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죄를 그냥 건너 뛰시는분이 아니십니다.






















06-15-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8장 / 표적(11절)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The Pharisees came and began to question Jesus. To test him, they asked him for a sign from heaven.

표적(表迹)
하늘로서 오는 표적(a sign from heaven)

마가복음 8장의 내용을 정리하면 오병이어와 비슷한 칠병이어의 사건이 소개된다(1-10절).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힐난하면서 표적을 구하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악된 의도를 아시고 표적을 주시기를 거부한다(11-13절).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실 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교훈을 하신다(14-21절).
벳새다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온 것을 보시고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해서 치유해 주신다(22-26절).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유명한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곧이어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막음으로써 사단아 물러가라는 예수의 엄중한 문책을 당한다(27-38절).

왜곡된 두 신앙 : 기적 신앙과 말씀 신앙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라는 한자 사자성어의 훈은 "지나칠 과(過), 같을 유(猶)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어집니까요?”공자가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모자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자공은 둘 중에 누가 더 나은지를 알고 싶어 또 물었습니다. “그럼 자장이 더 낫다는 말입니까?”그 때 공자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나칠 과(過), 같을 유(猶), 아니 불(不), 미칠 급(及)으로“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공자를 비롯하여 옛 중국인들은 중용(中庸, golden mean)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중용이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고대 중국의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천하 통치의 정신을 도통(道統)이라고 하는데, 이 도통의 요체가 중용에 있으므로 이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없으며, 형편없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욕심과 도덕적 본성을 다스리는 이치가 중용이라는 것입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중용으로 하늘의 뜻과 인간의 도를 설명합니다. 효도와 자식 사랑, 형제간의 우애, 가정의 화목, 이웃 사랑이 인간이 가야 할 도이고 그 도를 재단하고 다듬는 것, 즉 마름질 하는 것을 교라고 하는데 유교가 바로 그런 것을 가르칩니다.



중용은 동양철학뿐만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에서 중용을 μεσοτης라고 하는데, 그 뜻은 영어로 a middle or central position, 또는 a mean between two extremes, 즉 물리적으로는 중감지점을 의미하고 사상적으로는 두 극단의 중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산술적인 중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생기는 중용을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사물의 한가운데(the intermediate in the object)인데 비하여 후자는 우리들에게 대하여 꼭 알맞은 것(the intermediate relatively to us)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튼 중용의 개념을 동서양 철학 모두가 모든 도덕 행위의 준칙, 지침으로 삼고 강조하여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덕으로 강조였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동양에서는 중용을 강조하는 사람은 인품이 고상하고 사상이 깊은 것처럼 생각하고 대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이나 서양에서 중용의 개념을 강조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무신론자입니다. 기독교적 중용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계시가 밝히 드러난 오늘날에는 하등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중용이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용이야 말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주장하면서 현대인의 삶의 방법에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 닫혀 있고 기독교는 천국으로 가는 문이 죽은 뒤에 열린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잘 모르는 자가 중용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하는 학문적 객기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중용의 가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고 중용의 가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단한 설득력으로 작용합니다. 지금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중용의 가치를 표방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도 중용의 가치에 소위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그런 가르침에 감동을 받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복음을 바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혼란을 겪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극단적인 두 형태가 있습니다. 이 두 극단적 신앙형태는 사도 바울에 의해 지적된 것으로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표적신앙의 극단으로, 헬라인을 지혜신앙의 극단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이 왜곡된 신앙이라는 사실은 참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는 토대에서 지적된 것입니다. 표적신앙이 체험과 감성의 극단이라면 지혜신앙은 이성적 극단입니다. 바울이 왜곡된 두 극단적 신앙 형태를 지적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바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고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중용의 가치로 변질시킨 경우는 넓게 보아 지혜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교회에서 표적신앙, 지혜신앙, 중용신앙 같은 형태의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은 변할 수 없고 인간의 존재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지적은 고린도교회에도 적합한 지적이고 현대 교회에도 적합한 지적입니다.

바울의 표적신앙과 지혜신앙에 대한 지적이 표적을 부정하거나 지혜 무용론은 아닙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 모든 유대인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다는 것도 모든 헬라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경향성에 대한 지적입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기독교의 참 진리는 표적신앙도 아니고 지혜신앙도 아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표적이나 지혜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표적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는 중요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러니까 표적 자체를 나쁘다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잠언이나 전도서 같은 성경은 지혜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복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지혜를 의인화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본문을 잘 못 이해하면 성경이 표적과 지혜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표적신앙은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표적의 부정적인 측면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나치게 표적에 집착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들은 수도 없이 많은 표적을 보았고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계속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표적을 구하는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라는 뜻으로 바울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는 왜곡된 표적신앙과 표적을 믿는 건전한 신앙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과 영적 생명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적신앙의 경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한 순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런 경향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마음으로 바랍니다. 만약에 모든 것이 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표적 신앙은 주로 이단들이 갖는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모든 것이 기적적으로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표적신앙의 특징들이 우리들에게도 상당할 정도로 농후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 깊은 곳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보다는 기적으로 대박이 터지기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기복신앙이 아니라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경향은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교훈의 토대에서 조금만 주의하여 생각하면 표적신앙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를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럴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되,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동하며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질서입니다. 비근한 예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지키려고 하지 않고 성경책을 중요시 하는 것도 일종의 표적신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무슨 마술적 능력이라고 생각하여 외우고 읽기만 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은혜를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도의 능력이라는 말도 사실은 잘 못된 말입니다. 기도를 하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간절히 오랫동안 하면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도는 노력하지 않는 대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도요,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서 기도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의 주장입니다. 표적 신앙은 미신적 신앙입니다. 표적 신앙은 방법과 수단을 신앙하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전쟁에 법궤만 가지고 나가면 이길 거라고 믿고 나갔다가 이스라엘 군인 4만 명과 함께 죽었고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그 사건은 법궤만 가지고 가면 전쟁에 이긴다는 생각은 미신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 사건입니다.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도 미신입니다. 기도만 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도 미신입니다. 선교, 헌금, 봉사만 열심히 하면 모든 다른 잘못도 탕감된다고 믿는 믿음은 미신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표적이 없으면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노아의 표적이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홍해에서 구원 받은 표적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표적을 의미합니다. 이런 표적을 주신 것은 이제 다른 표적을 구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믿고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종교적으로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표적을 추구하였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도 일종의 표적신앙이고 자본주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학자가 학문적 업적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신앙과 같은 것이고 목회자가 목회 성공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신앙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적 업적에 집착하는 것도 표적 신앙입니다. 표적 신앙은 십자가의 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업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에 관심이 없고 성공의 방법에 집착하는 모든 인간 행위는 표적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예민한 신전의식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생각과 의식이 집중되는 것이 영적생명 현상입니다. 하나님 없이 무엇을 생각하거나 시도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오병이어의 사건(마가복음 8:14-21, 마태복음 16:5-12)
칠병이어의 사건(마가복음 8:1-10, 마태복음 15:32-39)

마가복음 8장에서 칠병이어의 사건에 이어 오병이어의 사건을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06-16-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9장 / 기도(29절)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He replied, "This kind can come out only by prayer."

4336. 기도(祈禱)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4336. 기도 - 프로슈케(prŏsĕuchē) / προσευχή

1. 기도,  2. 기도처


4336. προσεύχομαι   
1. 기도하다,  2. 마가복음 1:35,  3. 누가복음 1:10
발음 [ prŏsĕu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υχόμην, 미래 προσεύξομαι, 제1부정과거 προ- σηυξάμην, 4314와 21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도하다(마 5:44, 눅 1:10, 행 1:24), 간구하다(롬 8:26)
신약 성경 / 86회 사용

* 4314. 프로스(πρός)
1. ~에게 유리하게,  2. 가까이,  3. 향하여
발음 [ prŏs ]
어원 / 42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에게로(마 2:12), ~을 향하여(눅 22:56)
신약 성경 / 699회 사용


* 2172. 유코마이(εὔχομαι)
1. 기도하다,  2. 바라다
발음 [ ĕuchŏmai ]
관련 성경 / 원하다(행 26:29, 롬 9:3), 고대하다(행 27:29), 구하다(고후 13:7, 9), 기도하다(약 5:16), 간구하다(요삼 1:2)
신약 성경 / 7회 사용


3521. 금식 - 네스테이아( nēstĕia) / νηστεία, ας, ἡ 

1. 금식,  2. 고린도후서 6:5, 3. 마태복음 17:21(어떤 사본에 /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발음 [ nēstĕia ]
어원 / 352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금식(마 17:21, 행 14:23), 행 27:9), 먹지 못함(고후 6:5)
신약 성경 / 6회 사용

마가복음 9장에서는변화산 사건과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9:1-8.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셔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다. 제자들은 심히 밝은 광채로 인하여 몹시 두려워하였다.
9:9-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변화산에서 본 것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였고,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엘리야는 이미 왔다는 사실을 밝혀 주셨다.
9:14-29. 산에서 내려와 보니 벙어리 귀신들린 자가 있었는데, 예수의 다른 제자들이 능히 고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이 세대를 한탄하시고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다. 제자들에게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9:30-32.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다시 한번 인자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9:33-37. 가버나움에 계실 때 제자들이 노중에 누가 크냐의 문제로 토론한 것을 꾸짖으시면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셨다.
9:38-50. 요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쿄훈을 주셨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은 지 엿새 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지켜 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신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을 예수님께서 추방하신 기적을 소개하며 논쟁을 벌이는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큰 자에 관한 교훈과 믿는 자를 실족케 하는 자에게 형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확실히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노중에서 누가 크냐고 쟁론한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명예를 추구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자기를 낮추고 종의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교만과 불손함을 제거하고 겸손한 성도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반대적인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가치 체계에서의 일등에는 관심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등이 아니라 등수에 상관없이 항상 남을 섬기려고 하는 마음과 섬김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꼴찌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하고 항상 남을 섬기는 자가 첫째 된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고 말씀하셨고(막 10:45),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27).

하나님 나라는 서로가 섬기기를 힘쓰는 나라입니다.
많이 섬기는 자가 더 높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높다는 것은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돈 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정도가 높다는 말입니다.
타인들의 존경을 받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열심히 섬기는 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속여서 자신이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명령하신 섬김의 삶이란 철저한 자기 희생 정신과 이타적인 정신의 바탕 위에 세워진 섬김의 삶을 말합니다.

세상의 변화를 원하신다면 먼저 내가 섬김의 앞잡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가복음 9:29
이런 가 나갈 수 없느니라.

* 유(1085) 게노스 γένος, ους, τό 
1. 혈통,  2. 같은 조상에서 나온 후손, 3. υἱοὶ γένους Ἀβραάμ
발음 [ gĕnŏs ]
어원 / 109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종(種)(마 13:47, 고전 12:10), 유(類)(마 17:21, 9:29), 족속(막 7:26, 행 7:19, 벧전 2:9), 문중(행 4:6), 친족(행 7:13), 후손(행13:26), 소생(행 17:28, 29), 종류(고전 14:10), 동족(고후 11:26, 갈 1:14), 자손(계 22:16).
신약 성경 / 21회 사용


기도(祈禱) - 대신관계(代神關係) / 마태복음 6:5-15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금식(禁食) - 대아관계(代我關係) / 마태복음 6:16-18
이사야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께서는 손이 범죄케 하면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이 범죄케 하면 눈을 찍어 버리라는 무서운 경고성 교훈을 하신다.
이러한 교훈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는 천국은 인간이 신체의 일부분을 잃고서라도 들어가야 할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란 사실이다.
둘째는 천국의 요구는 철저하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여, 우리가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내야 한다면 우리 연약한 인간의 신체는 얼마 못 가서 한 군데도 남아 있지를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교훈은 천국이 참으로 소중한 곳이므로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신를 철저히 단절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마 16:16.  막 8:29).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1下).

첫째, 예수님의 재림 사건 

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28절에는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의 해석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
즉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여기 서 있는 사람’인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된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재림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또한 이 당시 제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변형 사건 

또 다른 해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을 본문 2절 이후에 나타난 예수님의 변형사건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문제는 시간상의 부적절함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변형된 시간에 관한 정보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엿새 후’의 기준이 되는 시점은 오늘 본문 이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했던 날입니다.
이 날 6일 후 변화산상 사건만을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엿새 후에 일어날 사건을 염두에 두고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이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음의 확산 및 전파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변형사건을 포함하고 나아가 대속적 죽음, 부활, 그리고 이로 인한 복음의 확산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로마 제국까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으며 또한 이와 더불어 복음의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일부는 일찍 순교하였지만 일부는 복음의 확산과 결실을 두 눈으로 본 후에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변형 사건은 포괄적 범위의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시는 것’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실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근거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는 예수님의 변형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변형되셨느냐면 3절에 있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옷만 광채가 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에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7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얼굴도 함께 빛이 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던 것만이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움의 근거 둘째는 과거 인물들의 현현입니다.
변화산에 누가 나타났느냐면 엘리야와 모세입니다(4절).
제자들이 엘리야와 모세를 보았다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였습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약 B.C. 850년경에 살았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죽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였습니다.
모세는 약 B.C. 1500년경에 살았으며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신 34:6).
엘리야 선지자가 승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그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죽었던 모세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세가 부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이 변화산상에서 나타난 사람이 엘리야와 모세이었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를 생각해 본다면, 이 두 사람은 무덤이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승천했기에 무덤이 없음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모세는 육신이 죽어 장사되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명기 34장이 모세의 죽음을 다루면서 무덤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명기 34장 6절입니다.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의 무덤의 위치를 알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 무덤의 우상화를 막기 위함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아무튼 무덤이 없는 엘리야와 모세 두 사람의 변화산 등장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영생하도록 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 두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후에 있을 부활의 미래적 사건의 현재적 증거입니다.
또한 우리 신자들에게 있을 죽음이후 부활과 영생을 보증하는 사건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은 현재 우리보다 훨씬 더 놀랐던 것이 분명합니다.
6절 말씀이 제자들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예수님조차도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대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토라(Torah)’라고 불리워지는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율법, 모세5경의 기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십계명을 받았고 애굽의 바로 왕에 가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10가지 재앙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는 등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존경의 대상인 인물입니다.
그 모세를 제자들이 두 눈으로 본다는 것은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제자들의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놀라움의 근거 마지막으로는 그들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의 현현이 구름 속에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선포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제자들에게 환청으로 들렸던 것이 아니라 실재 소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제자들에게 현현하시어 직접 말씀하셨던 이유 중에 하나는 제자들의 믿음과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오기 직전에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부활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8: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때까지 만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꾸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적과 기사를 보는 신앙체험을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일에 맞추어 있지 않으면 곧 인간적이고 무의미하게 흘러가게 됩니다.
교회 일을 할 때에 아무리 열심을 가지고 땀을 흘릴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기쁨이 사라지고 분열과 문제를 초래하게 됩니다.
열정적인 베드로도 한 순간에 사탄의 사역자가 되듯이 우리는 항상 자신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일에 벗어나지 않도록 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듣거나 읽어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본문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11절 말씀대로 예수님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는 타당했습니다.
왜냐하면 말라기 4장 5절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서기관을 포함한 완악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말라기 성경을 근거로 엘리야가 오기 전에는 메시아가 오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서기관들이 잘못 생각했던 부분은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구약시대에 승천했던 선지자,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보았던 그 엘리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에서 언급한 엘리야는 바로 세례요한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17:11, 13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말라기서에 나타난 엘리야는 누가복음 1장 17절에 있는 “엘리야와 심령과 능력으로” 왔던 세례 요한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깨닫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항상 우리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욱 더 기도하며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의 일에 맞추어져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깨닫는 삶을 회복하여 혼돈의 땅에 질서의 소금과 빛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성경에서 기도의 중요서에 대한 말씀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베드로전서 4:7),
“기도에 항상 힘쓰며”(로마서 12:1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로새서 4: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자주 잊혀지거나 뒤로 밀려나곤 한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누가복음 5:15-16)

예수께서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누가복음 5장 말씀을 살펴보자. 이 때, 문맥과 배경, 즉 글의 흐름을 고려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시기와 상황적인 환경에 대해 알 수 있으므로 눈여겨 보는 것이 좋겠다. 누가복음 5장 12절부터 13절은 간질병을 앓고 있던 자가 치유를 받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 뒤를 잇는 15장 말씀은 예수께서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 물러나셨으나 끊임 없는 인파가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를 향해 몰려들었다고 이야기 한다 (누가복음 5:15). 이렇듯 예수께서는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 요즘 보통 사람들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하셨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기 쉽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살펴보자.

누가복음 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한적한 곳에 혼자 물러가사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도 예수께서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셨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구절을 원문에서 읽어보면 문법적인 시제를 통해 예수께서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번역문은 간단한 기본적인 시제를 사용하여 마치 예수께서 과거에 한 번쯤 이와 같은 행동을 하셨던 것 같이 받아드려지기 쉬우나 예수께서는 반복적으로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해 기도를 드리셨다2. 좀 더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매번]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이렇듯 15-16절 말씀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단 한 번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인파에 쫒겨 바쁜 나날을 보내셨으나 이 와중에도 항상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께 기도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도 생활은 예수의 삶 속에서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한 사역으로 바쁜 와중에도 미루거나 게을리 하지 않으셨을 정도로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또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기도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 만큼의 우선 순위가 주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 할 시간이 충분했던 이유는,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이에 적당한 우선 순위를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여러 가지 활동에 시간을 투자 한다. 시간이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는 하루에 24시간이라는 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기도 생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큰 우선 순위를 차지하느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 속에 기도가 우선 순위인지 혹은 모든 하루 일과(일, 취침, 학교, TV 시청 등)를 마친 후 남는 시간을 차지하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기도는 우리 삶 속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해 마땅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남는 시간”을 투자하지 말고, 기도를 위한 시간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이를 위한 시간을 비워둘 수 있어야 하겠다.

2.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가복음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교훈적인 모습을 담은 구절이 또 있다 – 마가복음 1장 35절. 이번 또한 글의 흐름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21절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파하시는 모습, 그리고 마귀를 퇴취하시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28절). 회당을 나선 후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으로 향하시어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셨다 (30-31절).

마가복음 1:32-34
“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앞에서 살펴 본 구절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이 날 또한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더군다나 다음 날은 먼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었으며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 다음 날 또한 많은 인파에 쫒겨 바쁜 하루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36-37절은 예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 1:36-37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다. 생각해보라. 바쁜 하루를 마치고, 또 하루의 바쁜 날을 앞두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음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릴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린다 하면, 이 사람은 기도를 자신의 생활 속 가장 높은 우선 순위로 여긴다는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지 않은가? 바로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분이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께서는 다음 날이 아주 바쁜 하루가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기도 할 시간이 많이 없을 것을 예감하시고 예수께서는 그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 하루를 시작하기에 참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의 하루를 시작하기에도 참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 날의 고통과 압박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면 하루 동안 하나님의 보살핌과 능력을 느끼고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실 수 있는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 한다면 다음 날 아침 기도를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날 의지가 생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저 생각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우선적으로 중요시 여기셨기에 그러한 의지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여부가 아니라 우선 순위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 마태복음 14:23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담은 다음 구절은 마태복음 14장 말씀이다. 앞에서와 같이 글의 배경을 살펴보자. 이 날은 시작부터 아주 슬픈 날이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사형 소식을 접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사형에 대한 설명은 마태복음 1-11절 말씀 참고). 뒤를 잇는 14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4: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더 나아가기 앞서 잠시 다음 상황을 고려해 보도록 하자. 만약 당신을 위해 항상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던 친척이 사형을 당했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떻겠는가? 아마도 슬픔에 젖어 한 동안 혼자 떨어저 있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 또한 같은 마음이셨다.

마태복음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세례요한의 사형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예수께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계획하고 계시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후, 충격에 쌓여 이후 결정된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긴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다. 그를 기다리는 인파에 동정심을 느끼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마태복음 14:14). 치유는 물론 기적을 행하시어 그들의 배를 채워주시기까지 하셨다 (마태복음 14:15-21). 22절은 그 이후 일어난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여기서 “즉시”란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신 후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제촉”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제촉”이란 그리스어에서 “anagkazo”라는 단어의 과거 시제로서 “억지로라도 어떠한 일을 시키다”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 성서에서 아홉 번이나 쓰인 단어이다 (참고: “Vine’s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달가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들 또한 돌려보냈다.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을 “제촉”하시어 그들을 멀리 떨어뜨려 보냈을까? 그 이유는 23절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 이유는 바로 예수께서 혼자 머물러 “기도”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루 하루에서 기도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제자들과 인파를 제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기도는 단연 예수님의 삶 속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지켰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새겨듣고 우리의 삶 가운데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한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누가복음 6:12-13

성경 말씀을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중요성은 물론 기도 내용을 눈여겨 보도록 하겠다. 정확한 기도 제목은 알 수 없지만,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누가복음 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정확히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그 다음 날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음에 미뤄보아 열 두 제자의 임명이 기도 제목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결정을 내리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할 필요성을 느끼셨다면, 우리들 또한 이런저런 선택을 하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 결정에 도달하기보다 하나님께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간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계심은 물론 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 또한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를 알려주실 성령 또한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를 통해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이다.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 문제 또한 같은 문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 할 필요는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한된 지식을 가진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실 것이다. 이 중 몇 가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 이는 이미 성경에 적혀있는 조언이자 명령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좀 더 세부한 결정 – 어느 곳에 가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할 것인가 – 등의 문제는 하나님께 직접 의논하고 하나님의 의견을 여쭈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를 통해 간구하도록 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작 당신을 다른 곳에 보내거나 다른 일을 하도록 하고싶어 하실지도 모른다. 직장에 빗대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사와도 같다 – 최고의 결정권을 가진 상사 말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태복음 26:36-44

다음 보기는 잘 알려진 마태복음 26장 36절부터 44절의 말씀이다. 이 부분은 예수께서 구속되어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밖히시기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36절 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마태복음 26:36-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께서 슬퍼하신 이유는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지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 아주 힘든 시기였음과 동시에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 우리의 구원이 달린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 다음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태복음 26:39-4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인류 구원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으셨다.
이에 대한 기도를 무려 세 번이나 드렸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가짐은 참으로 좋은 본보기를 제공한다.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먼저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께 내려 놓았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꼭 이루어주셔야됨은 물론, 우리가 원하는 시기와 방법에 맞추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만 사실이 된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성경은 많은 예를 기록하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성경이 이야기하는 약속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의 예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일종의 차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자. 성경에는 내가 그 차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그 차를 꼭 가져야만 하며,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어떠한 차를 원하는지 하나님께 나의 희망사항을 간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인가? 그렇다! 내가 그 차를 소유하는 것이 정작 좋은 일인지 좋지 않은 결과를 나을 것인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것은 올바른 기도인가? 물론이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좋고 완벽하다고 (로마서 1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신다고 (베드로후서 2:7) 이야기 하는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할까? 이 말씀들을 믿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믿고 따라야 할까? 물론이다! 예수께서 하신 그대로 말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간구한 것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러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희망사항(“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랬다.“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리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예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희망사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흠잡을 데가 없는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랄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보기로 돌아가보자면, 비록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간구한 것들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무시하신 것을 아니다. 누가복음은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기록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22:41-43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더해주기 위해 천사를 보내주셨다.
가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희망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깨닳곤 한다(로마서 12:2).
만약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더해주실 것이다.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용기와 힘을 얻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8:3-11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 원하셨던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었다.
이에따라 예수께서는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셨다 – 우리 또한 이를 본받아야 하겠다.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듯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아시고 슬픔에 가득차 계셨으나 기도를 한 후 힘을 얻어 정작 잡혀가실 때에는 대담함과 굳은 의지를 보여주신다.
자신을 고문 할 자들을 만나러 가는데에는 대담함과 굳은 의지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두려움에 쌓인 자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미루고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들을 직접 찾아가셨음은 물론 제자들의 안전까지도 책임지셨다.
게다가 베드로로 인해 뜯겨진 하인의 귀까지 치유해 주기까지 하셨다(누가복음 22:51).
이 모든 힘 – 대담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굳은 의지는 오로지 기도를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제자들과 인파를 제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해 결정에 도달하고,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시간이 남으면 기도하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기도할 시간을 마련하셨다.
“우리 자신의 뜻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따르라”는 세상적인 조언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가복음 3:14-15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 '열 둘'이라는 숫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열 둘'은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마 19:28;눅 22:30).
그런 점에서 그들 12명의 제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를 12족장과 같은 영광을 얻었음이 분명하다(계 21:14, 15).
사실 앗시리아(B.C. 722)와 바벨론(B.C. 586)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래 현재의 이스라엘은 두 지파 내지 두 지파 반으로 만 구성되어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이 12제자 선택은 이스라엘이 종말의 때 곧 메시야 시대에 열두 지파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완성되리라는 예언서와 묵시 문학에 터잡은 기대와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사 11:11, 16; 27:12; 35:8-10; 49:22; 60:4, 9; 66:20; 겔 39:27; 미7:12 등).
그렇다면 열 두 제자는 전체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상징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그의 약속을 상징하기도 한다.
마가는 열 둘의 종말론적 기능을 역사적인 과제로 확대시킴으로써 그런 이해를 받아들였다.
이 역사적 과제는 분명히 예수의 일을 지속시키는 것이지만, 열 둘이 구분에 의해 파송되고 또한 예수의 뒤를 이어 교회의 중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일과 구별된다(Gnilka).
한편 마가는 이 선택된 제자들을 대개 '열 둘'이라 칭한데 비해(16절; 4:10; 6:7; 9:35 - 헬라어 원문에는 '열 둘'로 묘사되었으나 개역 성경은 이를 '열 두제자'로 번역하였다.)
마태는 '열 두 사도'(마 10:2) 또는 '열 두 제자'(마 10:1; 11:1; 20:17)로 표현하였다.
여하튼 마가는 이 '열 둘'이라는 칭호를 통해 그들을 단순히 예수를 좇는 무리들과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세우셨으니'(에포이에센)란 직역하면 '만드셨으니'로서 이를 근거로 본 구절을 '창조하셨으니'로 번역하기도 한다(Lohmeyer).
즉 이 12제자 선택은 예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실체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Taylor, Grant).
물론 나름대로 의미있는 번역이기는 하지만 본 구절은 단순히 열 둘을 '임명하셨으니'로 번역하여 예수께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다.
특별히 본문에서 목적 의식을 분명히 드러내는 헬라어 접속사 '히나'(...하기 위해')의 2회 반복적 사용은 12제자 선택에 있어서 예수께서 확실한 목적을 두시고 행하였음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세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실' 목적이었다.

실로 그 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했다.
즉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고 그와 대화하며 그에게 배워야 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훈련은 예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그들은 보냄을 받아야 했다(6:7).
즉 그들은 보냄 받은 자, 곧 '사도'(아포스톨로스)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수행해야 했다.
또한 제자들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었다.
이 귀신 축출은 원래 예수께서 지니신 권능으로서(1:26) 이제 사단의 왕국을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부름받은 제자들에게 부여(附與)되고 있는 것이다(마 10:8).
이렇듯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귀신을 쫓는 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은 사단과 그의 일당들을 멸하시고 당신과 구원받은 자들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마태복음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나의 원대로(2309)  θέλω 
1. 원하다,  2. 마태복음 19:21,  3. 마태복음 5: 40.
발음 [ thĕlo ]
어원 / 미완료 ἤθελον, 미래 θελήσω, 제1부정과거 ἠθέλησ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 θεληθῶ, 138의 변형에서 유래한 강세형인 듯
관련 성경 / 원하다, 바라다, 기뻐하다, 지지하다, 좋아하다(마8:2, 막1:40, 눅5:39, 마15:28, 27:15).
신약 성경 / 209회 사용

* 아버지의 원대로(4771)  σύ

1. 당신,  2. 너, 3. 마태복음 2:6 /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발음 [ su ]
관련 성경 / 너, 당신(마 2:6)
신약 성경 / 1066회 사용

조금 나아가사
- 누가복음에서는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눅 22:41)라고 되어 있다.
아마 그 거리는 30-50m 사이의 짧은 거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깊은 밤중에 극한 심적 갈등을 겪으시며 간구하시는(히 5:7) 예수의 기도 소리는 제자들의 귀에 또렷이 들렸을 것이며 그 애타는 심정은 그들 제자들의 마음에 넉넉히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 유대인의 기도 자세에는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는 기도(막 11:25), 무릎 꿇어서 하는 기도(행 7:60; 엡 3:15)등이 있다.
실로 주께서 머리를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절대 겸손의 표시로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복종의 표현이다.

내 아버지여(파테르 무)
- 마가는 아랍어적인 표현인 '아바(Abba) 아버지여'로 기술함으로써 그 호소의 뜨거운 호소의 뜨거운 정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진정 최후의 순간을 눈 앞에 둔 예수가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대상은 당신을 이 땅에 내려보내셨으며 또한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게 하실 성부 하나님 밖에는 없었다.

만일 할만하시거든
- 평행 구절인 막 14:36에는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로 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의지'를 나타낸 말로서 예수의 전적 순종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 자신의 죽음 이외에 또다른 그 무엇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이뤄 달라는 애타는 호소를 하고 계신 것이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 '잔'은 구약 성경에서 축복이건(시 23:5) 저주이건(시 11:6; 75:8; 사 51:17, 22) 하나님에 의해 전달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잔'은 분명 사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전달되는 잔을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요 10:17, 18; 18:11).
한편 예수께 있어서 이 '잔'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예수께서 친히 감당하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야심에 찬 요청을 하려고 왔을 때,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하여 '나의 마시려는 잔'(20:22)이라고 하신 바 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생물적 죽음 이상의 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영적 고통도 내포하고 있다(27:46).
이와 더불어 본문의 '지나가다'라는 동사는 유월절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출 12:23에서는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라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지나가다'는 말은 죽음의 재난을 피한다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소망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예수의 인성(人性)에 의한 불안과 고뇌에 찬 갈등의 시간이 다하고 신성(神性)에 의한 전적인 순복(順服)이 이뤄낸 궁극적 결론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의지를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굴복시킴으로써 그잔을 마시기로 결연히 다짐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의 기도의 주제는 이 '잔'을 마실터인데 충분히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십사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눅 22:43 /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한편 성부 하나님은 성자의 이 순결한 호소에 '부활'로 응답하신다(히 5:7, Homer A. Kent Jr.).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마가복음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나의 원대로(2309)
* 나의 원대로(2309)  θέλω  1. 원하다,  2. 마태복음 19:21,  3. 마태복음 5: 40.

* 아버지의 원대로(5101)

요한복음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나의 원대로(2307)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태복음 6:10 /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아버지의 원대로(2307)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이 말씀은 19절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재설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행사, 곧,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증하신 말씀이다.
그의 행사가 정당한 이유는, 그가 자행자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그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듣는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심판한다"는 말(*)이 여기서는 그의 재림시의 종말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복음을 통하여 살릴 자를 살리시는 주권행위를 가리킨다(3:18).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태복음 6:10 /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발음 [ thĕlēma ]
관련 성경 /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신약 성경 / 62회 사용

  • I. 뜻, 의지.
  • II. [객관적으로] 뜻하는 바.
    • 1. [일반적으로] 마 6:10, 26:42, 눅 11:2, 요 6:39, 행 21:14, 골 4:12, 히 10:10.
    • 2.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바라는 바] 요 5:30, 6:38, 고전 16:12, 엡 1:9.
    • 3.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하여 의지된 바]
      • a.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마 21:31, 눅 12:47.
      • b. [마귀에 대하여] 딤후 2:26.
      • c.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탁월성] 롬 12:2, 엡 5:17, 살전 4:3, 5:18, 벧전 2:15, 4:2, γινώσκειν τὸ θέλημα: 뜻을 알다, 롬2:18, 행 22:14.
      • d. ποιεῖν τὰ θελήματα τ. σαρκός: 육체의 욕망을 행하다, 엡 2:3.
  • III. [주관적으로 의도하거나 욕망하는 행동]
    • 1. [인간의 뜻에 대하여] 고전7:37, 벧후1:21, [예수의 죽음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뜻에 대하여] 눅 23:25.
      2. [하나님의 뜻] 엡 1:11, 벧전 3:17,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하나님의 뜻대로, 롬 15:32, 고전 1:1, 고후 1:1, 8:5, 엡 1:1, 골 1:1, 딤후1:1 등.



βου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012

1. 뜻,  2. 결의,  3. 사람의 결정
발음 [ bŏulē ]
어원 / 10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견(행 27:12), 뜻(눅 7:30, 행 2:23, 고전 4:5), 결의(눅 23:51), 사상(행 5:38), 결심(행 27:42)
신약 성경 / 12회 사용

뜻풀이부

  • 1. 뜻, 의도, 의향, 동기, 고전 4:5.
  • 2.결의, 결정.
    • a. 사람의 결정, 눅 23:51, 행 5:38, 27:12.
    • b. 하나님의 결정, 눅 7:30, 엡 1:11, 히 6:17.

βουλή 계획


06-17-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0장 / 부족한 것(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Jesus looked at him and loved him. "One thing you lack," he said. "Go, sell everything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정말 한 가지만 부족한 것을 말하셨을까요?

본문의 병행구를 모두 종합하여 살펴보면(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한 가지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였던 사람의 정체는 "젊은 사람, 재물이 많은 사람, 세상 지위를 가졌던 사람" 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젊고 돈도 많고 세상 지위도 있는 사람이 영생과 선한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천연기념물과 같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현실은 재물이 많고, 지위도 있고, 아직도 젊은 사람들은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 중에서 선하고 영생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셨나요?
젊음을 즐기는 청춘들로부터 어떻게 선한 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세상 재물에 풍성한 사람이 유산을 상속하기 위하여 법적인 절차를 따라 상속세를 납부하며 자녀들에게 물려주려는 사람을 보셨나요?

오늘의 현실은 참 어둡고 답답합니다.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 오직 한가지만 부족한 줄 착각하고 자기의 삶을 즐기는 세상에서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묵묵히 갈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을 아직도 사모하고 기대하시는지요?

이제는 다른 누구를 통하여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진리의 길을 따라 가므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인공으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뒤집는 진리 혁명을 위하여 당당하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19:16-30 / 어떤 사람(그 청년이. 22절))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마가복음 10:17-31 / 한 사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누가복음 18:18-30 / 어떤 관원이
                                 큰 부자인고로

청년(젊음), 큰 부자(재벌), 관원(세상 지위)
세상에서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오직 한 가지 선한 것이 무엇인가? 영생이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사회에 전통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음을 받는 사회이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예수를 잘 믿으면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도 같은 맥락을 찾아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부족한 것(5302) 휘스테레오(hüstĕrĕō)  ὑστερέω 

1. 너무 늦게 오다,  2. ~을 요하다, 3. 모자라다
발음 [ hüstĕrĕ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ὑστέρησα, 완료 ὑσ- τέρηκ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ὑστερή- θην, 5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부족하다(마 19:20, 눅 22:35, 고후 12:11), 궁핍하다(눅 15:14), 떨어지다(요 2:3). [명] 궁핍(히 11:37)
신약 성경 / 16회 사용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누가에는 “한가지 남은 것”이라 하나 뜻은 같은 것이다.
전절의“ 다 지키었다이다”의 대귀가 된다.

랍비들의 기록에 카니나(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네게 율법책을 가져와 거기 거룩한 것중에서 내가 미쳐 실행치 못한 것이 있나 보아 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 부족한 한가지는 율법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었겠으나 재물이 그에게는 우상이었고 영생의길을 가로 막는 치명적 상처였다.
그의 회의도 불안도 여기서 나왔고, 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한 것도 재물 때문이었다.
이 한가지 부족은 사람을 따라 같이 않을 것이다.
이 한가지 죄를 발견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는 충고가 아니라 명령이었으며,강압적이었으나 이 영혼의 성격을 따른 개인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수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 명령을 같이 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하면서 온전한 자가 있을것이고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도 온전치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명하신 것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것과, 예수를 따를 것 두가지였다.
중심 문제는 후자였으나 전자는 그 조건이었다.
전자를 실행하지 못하면 후자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빛이 먼저 되라고 하므로 세상은 점점 더 어둠에 짓눌려 간다.


예수께 와서 이혼 문제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대원칙을 세워 주셨습니다(1-12절).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에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귀찮게 여기고 막았으나 예수께서는 어린이를 사랑하사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13-16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셨을 때 한 사람이 달려와 영생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음을 아시고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므로 그 사람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17-22절).
나중에 제자들과 있을 때에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23-31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다시금 인자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하셨다(32-34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메시야의 왕국에서 고위 관직을 요구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무지를 책망하시고 섬김의 삶과 인자의 대속물 되심을 강조하셨다(35-45절).
여리고에 이르렀을 즈음엔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주셨다(46-52절).

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과 예루살렘 사역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갈릴리 사역(1-8장)과 은둔 사역(9장), 그리고 베레아를 중심으로 하는 본장이 마가복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장에서는 이혼에 관한 논쟁과 영생에 관해서 묻는 부자 청년의 어리석음과 제자들의 무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장을 통해 재물 때문에 영생의 길을 포기한 청년의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이와 유사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헌신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그것을 멀리하는 결단을 내려야 주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호칭에는 하나님의 아들, 주,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그리고 인자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있습니다.
인자란 주로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썼던 호칭이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예수께서는 인자에 관해 많이 말씀하셨다.
구약과 랍비 전승에서 메시야를 인자라고 호칭한 경우가 없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이상할 만큼 예수에 대해서 인자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자 말씀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다.
바울이 이상하게도 예수를 인자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바로 그 사실이 바울은 인자 말씀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신 뜻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인자란 말은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데 아람어에서는 숙어적으로 쓰여서 어떤 한 사람 즉, 불특정한 어떤 사람을 나타낸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자라는 말 앞에다가 항상 정관사를 붙인다.
그 인자,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아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인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학자들이 많이 토론했는데, 결론은 다니엘 7장에 나오는 메시야를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다니엘 7장의 메시야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사람의 아들)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인자를 가리키셨기 때문에 항상 정관사를 붙여 그 인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말할 때에는 메시야적인 자기 이해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부자가 천국께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예수의 말씀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다.
그러나 삭개오나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고는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자를 그대로 천국에 입장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부자의 마음과 재물을 모두 받으심으로써 부자를 부자 아니게 만든 다음에 천국으로 불러들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부자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 물었을 때, 주님은 가진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그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이것은 영생과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입니다.
부자는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신다고 느끼고 슬픈 기색으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를 실족하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부자가 자기 의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요구는 부자로 하여금 그의 진정한 사랑이, 하나님의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재물에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뭔가를 구체적으로 요구하시기까지는 착각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자를 사랑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21).
재물을 사랑하는 한,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그리고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 핵심적인 질문에서부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시는 핵심 메시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갑자기 찾아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을 줄곳 따라온 제자들에게 < 영생,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지? 그리고 영생,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해주신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갑자가 찾아온 부자 청년은 <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고 >, 줄고 따라온 제자들은 < 심히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 예수님을 쫓고 있습니다.

먼저 왜? 그들이 했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조금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을까?를 먼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바로 그것은 < 그들이 질문을 했을때는 그들이 기대했던 대답이 있었을 것이다 >는 사실입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청년은 아주 자신감 있게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그러나 결국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대답에 아주 자신감없이 돌아갑니다. 무언가? 예수님에게서 내가 기대하고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 청년과의 대화의 장면을 옆에서 보면서 자신들은 부자청년과 달리 <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 >는 이 놀라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지 없이 예수님께서 제시한 대답을 듣고는 < 이해할수 없다,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자신감에 가득찬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심감이 예수님께서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다를 자신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써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는 제자로써의 자부심으로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들의 <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나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를 찾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묵상포인트 , 관전 포인트가 될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재미있는 영화들을 볼때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다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선>이라는 것을 깔아 놓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주고자 하는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가 드러나도로 합니다. 그러나 쉽게 그 복선을 찾기가 힘듭니다. 대체로 무대 소품이나 등장인물을 대사를 통해서 작가가 심어 놓은 복선을 찾아 낼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서 구체적인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마태복음 19장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사람은 부자이고 청년이었으며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젊은 관원이었습니다.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은 상당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열심과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 달려와 꿇고 앉았습니다. > 이것은 그가 갖고 있는 < 신앙적인 열심과 종교적인 인격 >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 ! 선한 랍비여 ! >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랍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 >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을 주시는 주로 보지 않고 한수 가르쳐주시는 종교적인 선생으로 유대적인 훌륭한 선생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과 영생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으로 구원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 내가 무엇을 하여야 >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부자청년은 < 영생을 무엇을 하여야 얻을수 있는 것 >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서 원하시는 질문으로 바꿔 본다면 < 선하신 주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믿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이해하고 있는 영생.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영생이 있었습니다. 

<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얻을수 있는 영생, 자신이 예수 선생처럼 선함을 이루어야만 영생의 길을 알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여전히 < 율법적인 의과 율법적인 선 >을 알고 지키고 행해야만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유대적인 영생관에 매여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유대교적 영생은 선을 알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 은혜의 구원이 아니라 행위의 구원입니다. > 

그래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얻는 선함을 한수 배우고자 한수 터득하고자 나아온것입니다.

그러한 의도를 하셨던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 선하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 > 이것은 예수님의 유도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자청년의 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도질문입니다. < 네가 계명을 아나니 > 라고 말씀하시면 < 십계명 >을 이야기하십니다. <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 알고 지키는 것이 있지 않느냐 ? >라고 하는 일반적인 유대적 구원관에서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도된 대답, 부자 청년의 반응을 보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된 대답입니다.

그 대답에 부자청년은 < 내가 다 지켰다 > 라고 대답합니다. 부자청년의 대답을 숨은 의도와 동기를 파악하면 다음 같이 바꿔서 말할수 있습니다.

< 제가 어려서부터 선함을 알고 선함을 지키기 위해서 십계명도 알고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제가 영생을 받기에 충분한가요? 이 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것이 없지 않습니까? 또 제가 부자로써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시잖습니까? >

그당시에 랍비들은 <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선함과 복이 임했다 >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부자가 되었다면> 충분히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정하는 부자로써 겉으로 보기에도 영생을 얻기에도 충분해보이고 자신 스스로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심감 있게 말하는 이 부자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하시면서 예상밖의 21절-22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이 선한줄 알고 지키고 복은 받았지만 진정으로 영생은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땅에서 물질적인 복받음이나 이땅에서 율법행함이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나눠주어도 하늘의 복의 기대와 만족으로 > 살수 있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시킬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소유에 매이지 않을수 있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오해한다. < 예수님은 부자를 싫어하시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가난하게 살아야하는가 ?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당시 유대인들이 부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치 예수님께서 부자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 재물이 있는자나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마치 약대가 바늘귀에 나가는 것이 더쉬울만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바로 이 본문은 마치 < 부자들을 당황스러게 하거나 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하시게 되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적인 배경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재물이 많고 부자가되는 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관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생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부자들은 악착같이 부를 모아야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이 이정도 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 부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더 율법적인 구원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통념 종교적인 관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일종에 풍자한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의 과정법으로 그 시대의 부자들에게 충격요법으로 <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만큼 어렵다 >라고 말한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이 충격적인 선언이 조금 과하다 생각해서 <약대>라는 히브리어 단어 < 카멜론>을 다른 비슷한 발음인 < 카밀론 >으로 바꾸어 발음했습니다.
< 카밀론 >이라는 뜻은 < 밧줄 >이라는 뜻입니다.
< 밧줄이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이라고 바꾸어서 읽었습니다.

실제로 부자의 의미는 < 가진자, 잘사는 사람 >의 의미보다는 <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땅의 소유에 집착하는 자 >라고 볼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땅에 소유의 집착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소유나 복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이 바로 그런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니다.

이러한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충격적인 선언을 들은 제자들은 두가지 마음이었습니다.
< 아니 이럴수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우리는 해당사항이 있는 것 아닌가?
아니야 더 많은 보상이 있을 거야 ?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로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말합니다.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는데 ... >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무언가 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얻을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자 청년과 제자들의 공통점은 < 영생과 구원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무언가 보여주야 얻는다고 하는 유대교적 이해>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조건이나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 하시는 놀라운 은혜이면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삶은 <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무엇을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인 능력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족 중심의 유대교 공동체를 포기하고 그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가족을 뒤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육체적인 자족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으로 영접될것입니다.
그 결과 핍박과 박해가 주어지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복도 주어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놓여있는 기대이며 보상입니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가족이 되는 보상이며 내세에서는 영적인 부요함에 참여하는 영생을 보상받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것이 있다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러나 많은 첫째들이 말째들이 되고 말째들이 첫째들이 될 것이다.
그릇된 보상의 기대에 대한 경고입니다. 또한 자동적으로 첫 번째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하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1.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조건과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 스스로의 선함, 부요함, 완전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며 소유권 포기를 의미한다.
- 재물에 매이지 않고 재물에 대한 관점을 전환을 요구하신다.
-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는 내것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려 한다.

3.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세상적 기대를 거부하고 거절한다.
- 무엇을 하여야 .. 무엇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는다.
-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말한다. 

4.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우열의 순위와 관련하지 않는다.
- 율법의 완벽함 / 부자의 축복 / 순서상의 먼저



금수저와 흙수저 이야기

사회의 계급은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뉘는데, 금수저는 좋은 가정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운 좋은 사람들인 데 반해 흙수저는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지 못해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운 나쁜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부에 따라 인간의 계급이 결정되는 사회의 불공평한 면을 꼬집는 신조어다.
태어나기 전부터 인생이 결정된다니, 젊은 친구들 입장에서는 보면 억울한 것이 당연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연봉이 적은 것도, 외모가 뛰어나지 못해 주목받지 못하는 것도, 친구보다 잘나가지 않는 것도 모두 부모 탓인 듯싶기도 하다. 

세상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돼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있다.
아프리카 난민들은 갓난아이에게 맞힐 백신 하나 구할 길이 없어 자식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동남아 가난한 어린이는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학교에 가는 대신 동생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진다.
조상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인자로 인해 평생을 약과 씨름하며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이도 있다.
이런 생을 원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반면 우리는 흙수저라 해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우선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부모님과 사랑하는 가족,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들이 있다.
잘사는 국가, 깨끗한 거리에 살고 있으며, 아프면 언제든 병원에 갈 수 있고, 약을 사 먹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운 좋게도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태어나면서 거저 얻게 된 특혜들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자살률은 몇 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두 배를 넘는 수치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행복지수도 여전히 하위권이다.
물질은 넘쳐나지만 정신은 늘 배고프고 빈곤하다.
왠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한 일투성이니 당연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은 결코 물질에 있지 않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 없으면 어떤가.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한 끼 식사를 나눌 수 있고, 지구 반대편 누군가를 위해 작은 금액이라도 후원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금수저이며 행복이 아니겠는가?


금도끼와 은도끼 이야기

정직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옛이야기들은 대부분 가난하더라도 착하게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잘살게 되리라는 교훈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런 얘기를 믿지 않는 것 같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노력보다 부모의 배경에 따라 장래가 결정된다는, 젊은이들의 현실 자조적인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다.
‘금수저’는 돈 많고 능력 있는 부모를 둔 사람을 가리키는 반면, ‘흙수저’는 돈도 배경도 변변찮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 말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라고 하는 영어 관용 표현으로부터 나왔다.
은은 값진 귀금속이면서 독극물에 닿으면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어 예로부터 고급 식기로 사용돼 왔다.
이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은수저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날 때부터 ‘은수저를 물고’ 있었다는 것은 곧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되었다.

여기서 유래하여 처음 ‘은수저’라는 말이 집안 좋은 이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다가 은보다 금이 더 가치가 높다는 데서 곧 ‘금수저’란 말로 대체되었다.
이어서 ‘금수저’에 대비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흙수저’라는 말이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터넷에는 금수저 연예인 명단과 함께 자신이 흙수저 계층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표까지 돌아다니고 있다.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특히 유행하는 신조어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을 꾸밈없이 비춰준다.
그것이 ‘금수저’와 ‘흙수저’로 상징되는 부의 편중과 대물림 현상이라는 것이 가슴 아프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근본적인 차이

흙수저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라"라는 말을 듣고 자랍니다.
금수저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를 만들어라"라는 말을 듣고 자랍니다.

흙수저의 교육의 목적은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가서 스펙을 쌓은 후 일류 회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금수저의 교육의 목적은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과 일류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인재를 고용하는 것입니다.

흙수저는 그 회사의 최고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금수저는 그 회사의 최고의 사장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흙수저와 금수저는 왜 이렇게 각기 다른 목표를 갖게 되었을까요?

부모가 갖고 있는 생각의 틀안에서 아이가 자랐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의 세 가지 요소 - 지. 동. 신(지식, 동의, 신뢰 / knowledge, agreement, trust)

원제 : What Faith Is and Is Not

“저는 믿어요, 믿는다고요. 그게 어리석지만, 믿는단 말이에요.”
고전적인 크리스마스 영화인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 1947)에서 어린 수잔 워커가 말했던 유명한 대사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에서 흔히 믿음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잘 보여 준다.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아도 도약해 보는 일, 아무 근거도 없지만 한번 신뢰해 보는 일이 세상이 말하는 믿음이다.

하지만 믿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성경은 믿음을 설명할 때 비이성적이거나 어리석은 결단으로 말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신념이라든가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여기는 주관적인 느낌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느낌이나 신념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수많은 군중 가운데 알아보지도 않고 아무나 한 사람을 골라내 그 사람에게 심장절개술을 맡기는 일이나 다름없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건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정통 기독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구별함으로써 답변해 왔다.
그리고 세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라틴어 단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해 왔다.

지식을 의미하는 ‘노티티아’(notitia)
동의를 의미하는 ‘아센수스’(assensus)
신뢰를 의미하는 ‘피두키아’(fiducia)

지식 / 노티티아(notitia)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노티티아, 즉 지식이다.
이는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내용, 이를테면 지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을 포함한다는 의미다.
결코 공허한 대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믿음은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한다.
우리는 이 요소를 성경의 여러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한 본문은 흔히 ‘~을 믿나이다’라는 문형으로 표현되며, 이어서 특정 종류의 교리적 진술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좋은 예문으로 로마서 10장 9절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밝힘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20장 31절도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명시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예문에서 우리는 믿음에 교리적 내용이 수반되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믿음은 특정 진술을 믿는 일을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앞선 예문에서 그 진술은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으로 각각 주어진다.

동의 / 아센수스(assensus)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아센수스로 불리는 동의다.
이 요소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 객관적으로 사실일 뿐 아니라 그로부터 개인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성적인 확신을 의미한다.
어떤 내용을 단순히 아는 지식만으로는 믿음이 되기에 부족하다.
우리는 그러한 내용이 사실이며 또한 우리의 필요를 실제로 만족시킨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러한 믿음의 요소는 요한복음 5장 46-47절, 8장 31-38절. 45-46절, 10장 37-38절과 14장 11절 등의 본문에 묘사되어 있다.

신뢰 / 피두키아(fiducia)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피두키아, 바로 신뢰다.
이 요소는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요소가 빠지면, 믿음은 그저 지성적인 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에 관한 사실은 알고 있어도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는 싫어 결국 그분을 거절하고 마는 귀신들의 ‘믿음’과 같다(약 2:19; 마 8:29).
따라서 이 요소는 복음에 제시된 그대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든가(요 3:15-16; 롬 9:33; 10:11)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시 71:5-6; 잠 3:5-6), 그분을 바라보는 믿음(요 6:40; 히 12:1-2), 또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믿음(딤후 1:12; 마 11:28; 시 37:5) 등을 설명하는 본문에서 이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예화

다음에 소개하는 예화를 한번 생각해 보자.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없이 매우 광활한 지뢰밭 한가운데 갇힌 세 사람이 있다.
이중에 한 명은 마구잡이로 한 길을 선택해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방향을 따라 나선다.
물론 이 경우는 믿음이 아니라 서두에서 언급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보여 주는 예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믿음은 지식에 근거하고 있으며 결코 맹목적일 수 없다.

이어서 다음 상황이 벌어진다.
곧 헬리콥터 한 대가 지뢰밭에 남겨진 두 사람 위로 날아오더니 거기에 타고 있던 조종사가 어느 길로 그 밭을 통과할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그러자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 조종사의 말을 따라 망설이지 않고 지뢰밭 사이를 헤쳐 나간다.
이 경우 또한 믿음의 예시가 될 수 없다.
물론 이번에는 (조종사가 알려 준 정보에 대한) 지식과 (그 정보를 사실로 간주하고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되겠다고 여긴) 동의에 근거한 행동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행동은 (알지 못하는 조종사가 알려 준 불확실한 정보에 따른) 부족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기에 여전히 맹목적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믿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대상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

이제는 최종적으로 남겨진 사람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떻게 지뢰밭의 탈출 경로를 조종사가 알게 되었는지, 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지, 또 얼마나 확실히 그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조종사가 안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본다.
나아가 자신이 아는 지인 중에 조종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아본다.
심지어는 조종사가 알려 준 방향으로 돌멩이를 던져서 폭발물이 정말 없는지도 테스트해 본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그 사람은 충분한 지식을 확보해서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지식(노티티아)과 그 지식에 대한 동의(아센수스)에 근거하고 있는 신뢰(피두키아)가 비로소 참된 믿음을 완성한다.
이러한 믿음은 전혀 어리석지 않으며, 오히려 전적으로 이치에 부합하다고 할 수 있다.

행함으로 증명되는 믿음

믿음의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주어졌을 때, 그 모든 요소는 필연적으로 바른 행함을 통해 드러난다.
위에서 소개한 예화를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마지막에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믿음이 진실하다거나 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그 사람이 원래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기로 결정하여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거부한다면, 혹은 자기 스스로 생각한 방향을 따라 길을 나서기로 한다면, 그는 조종사의 말을 실제로 믿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그는 조종사가 알려 준 방향을 따라 길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조종사의 인도를 따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노티티아, 아센수스, 피두키아가 모두 갖춰졌을 때, 참된 믿음이 이뤄진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 형성되면, 바른 행함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바른 행함은 믿음을 구성하는 부분이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다.
즉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지만 그 믿음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바른 행함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수요성서학당 # 19(10-21-20)

믿음이란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NASB) Behold, as for the proud one, His soul is not right within him;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소개하기 전에 최근 제가 경험했던 한 사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어느 의사는 방문하는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의사가 이런 기독교 용어를 자주 사용하면 마치 믿음이 좋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가족 중 누가 자기 집 근처에 약국을 시작했는데 진찰을 받은 환자들의 약 처방전을 동의도 없이 그 약국으로 보냅니다.
원래 약국은 환자가 지정하는 약국으로 처방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환자들이 D약국에서 60% 정도 라고 합니다.
결국은 가족이 운영하는 약국을 위하여 이미 지정된 약국을 마음대로 변경한 것입니다.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일을 처리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가?
과연 이런 것이 믿음일까?

결론부터 소개합니다.

" 믿음이란 기준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성경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1st. 하박국 2:4b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이란 단어에 "" 라는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 라는 정관사가 사용될 때는 "믿음"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일부분을 말합니다.
제한된 믿음을 말합니다.

킹제임스 한글 성경에서는 "그 믿음"을 "자기 믿음"이라고 번역합니다.
믿음의 기준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기준이 사람이 될 때부터 이미 복음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을 히브리어로 "에무나" 라고 합니다.
에무나의 뜻은 "진실" "성실"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진실하게 살리라" 또는 "성실하게 살리라"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방법도 진실해야 합니다.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믿음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따라야 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익과 유익을 따라 살아갈 때는 이미 복음의 의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 무대를 남 유다북 이스라엘로 구분합니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라고 하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라고 하겠습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오놋(3:1)" "영장(3:19)"과 같은 전문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레위 자손으로 측정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좁은 생각과 의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날 것이고 실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이든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파 정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장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는 잘못된 것을 법대로 판단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도록 법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심지어 치안을 맡은 경찰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부까지도 때로는 판단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나 한국 물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믿음의 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 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고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때문에 무너지고 망했다고 강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문명고 한국의 문명도 무너질 때는 외부의 침략적인 전쟁보다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25%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라고 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체재를 갖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체재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 마디로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표기한다면 Sympathy, Empathy 라고 하겠습니다.
공감대(共感帶)를 Bond of Sympathy
공감이란 단어의 뜻은
1.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자기(自己)도 똑같이 느끼는 것.
2.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도 같은 감정을 같는 것.

예를 들면 아직도 남한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자기 집을 온갖 쓰레기로 채워놓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외면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관의 사회복지사와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동네 부녀회와 청소 업체에서 발벗고 나서 그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하여 검사를 받게 하고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쓰레기가 선더미처럼 쌓였던 집을 깨끗하게 청조하고 정리한 후 심지어 새로운 가구까지 들여놓고 다시는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감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남한 모두 먼저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워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2nd. 데살로니가후서 3:2b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For all men have not faith.)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특히 불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세계삼대 종교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분류이지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일반적인 분류에 에 따라 신앙생활을 할 경우의 믿음과 생명으로 믿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생명의 믿음이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생각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3rd. 마태복음 5:26-30

공중
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란 첫째는 도덕, 둘째는 상식, 셋째는 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복음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 17을 다락방 복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준을 바르게 찾고 정하려면 먼저 산상복음과 다락방 복음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4th. 고린도전서 12:9a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To another faith by the same Spirit.)

기독교를 생명으로 믿는 성도들은 믿음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은사로 받은 믿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다양한 은사가 많은 교회이었습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분쟁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당파를 만들었습니다(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방언의 종류에 따라 분쟁했습니다(어떤 방언을 하느냐?)

- 김종수목사님(태능 영세교회), 천국 방언(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 왜 방언이 필요한가?
  (어느 농촌교회의 목회자와 가정부의 아들)

5th. 누가복음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And the Lord said, If ye had faith as a grain of mustard seed, ye might say unto this sycamine tree, Be thou plucked up by the root, and be thou planted in the sea; and it should obey you.)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겨자씨는 모든 씨앗들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을 말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아마 채송화 씨앗처럼 아주 작은 씨앗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겨자씨 한 알을 방바닥에 떨어트린다면 마치 먼지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씨앗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가 뿌리채 뽑혀 바다에 던져질 수 있다고 합니다.

6th. 디모데전서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Holding on to faith and a good conscience. Some have rejected these and so have shipwrecked their faith).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양심을 버리면 그 믿음은 파선한 믿음입니다.

7th. 야고보서 2:26

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믿음이란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죽은 믿음은 무엇일까요?

8th. 베드로전서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Receiving the end of your faith, even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죽은 믿음이란 영혼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하박국서소선지서에 속한 책으로 3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내용이 짧은 말씀입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은 "포옹하다" 라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활동 무대를 남 유다북 이스라엘로 구분합니다.
남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라고 하겠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요나, 아모스, 호세아" 라고 하겠습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지혜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시기오놋(3:1)" "영장(3:19)"과 같은 전문 음악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레위 자손으로 측정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하박국 선지자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좁은 생각과 의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는 나타날 것이고 실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 대통령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바이든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를 선택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 대통령 문재인과 여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우파 정당을 지지해야 하느냐? 이런 의견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언론에서 국민들에게 장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사법부에서는 잘못된 것을 법대로 판단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칠 수 없도록 법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심지어 치안을 맡은 경찰과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부까지도 때로는 판단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제는 기도할 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라고 주장합니다.

미국이나 한국 물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믿음의 정의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믿음은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 이라고 서두에 소개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서 발생했던 문명들이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고 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때문에 무너지고 망했다고 강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문명고 한국의 문명도 무너질 때는 외부의 침략적인 전쟁보다는 내부의 부정과 부패에 의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25%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정도라고 한다면 부정과 부패가 세상을 주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북한과 남한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체재를 갖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체재는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주의라고 하겠습니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한 마디로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표기한다면 Sympathy, Empathy 라고 하겠습니다.
공감대(共感帶)를 Bond of Sympathy
공감이란 단어의 뜻은
1. 다른 사람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에 대하여 자기(自己)도 똑같이 느끼는 것.
2.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도 같은 감정을 같는 것.

예를 들면 아직도 남한에서는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자기 집을 온갖 쓰레기로 채워놓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모두가 외면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기관의 사회복지사와 정신과 의사를 비롯하여 동네 부녀회와 청소 업체에서 발벗고 나서 그 사람은 병원으로 안내하여 검사를 받게 하고 입원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모두가 힘을 모아 쓰레기가 선더미처럼 쌓였던 집을 깨끗하게 청조하고 정리한 후 심지어 새로운 가구까지 들여놓고 다시는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감이란 것이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이나 남한 모두 먼저 주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치 기준을 바르게 세워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파트리스교회가 후원하는 기관들의 후원을 멈추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후원을 받는 기관의 책임자의 말이 흔들렸던 제 마음과 생각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도록 멈추게 했습니다.
"너무 많은 후원자들이 더 이상 후원을 할 수 없다"며 후원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19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는데 파트리스교회마저 끊어야 하겠는가?
정말 끊어여 하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후원을 계속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적은 믿음과 큰 믿음

믿음이 자은 자들은 누구인가?

첫째,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자(마태복음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a little faith)

둘째, 문제에 당면했을 때, 무서워 하는 사람(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셋째, 두려워하는 사람(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믿음이 큰 사람은 누구인가?

첫째,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 이만한 믿음 (Great Faith)

둘째, 주인을 아는 사람(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 손에 손톱이 있습니다. 발에는 발톱이 있습니다.
손톱과 발톱이 누구 것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톱과 발톱이 내 손과 내 발에 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입니다.
왜 착각이냐 하면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톱과 발톱이 내 말을 듣습니까?
내 삶의 내 생명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 삶의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주인입니까?

개들의 주인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주인도 있습니다.
그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예수를 설득하는 믿음을 보며 그과부가  큰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면서 그딸을 고쳐 주었다 (마 15:21-28)

(예화) 바람 몸살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바람 몸살이란 나무를 옮겨서 이식할 때 옮겨진 곳에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려면 악력(握力)이 4배로 필요하다고 합니다.
악력(握力, 쥘 握. 힘 力. Grip)이란 "물건을 쥐는 힘"을 말합니다.

성경적 믿음이 내 삶에 뿌리를 내리려면 얼마의 힘이 필요할까요?
나무가 4배의 악력이 필요하다면 사람은 그 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는 대략 10배가 더 필요하다고 환산하면 약 40배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을 내 삶에 적용하려면 성령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악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구원을 위해 믿음이 요구된다면 왜 구원을 행위로 볼 수 없는 걸까요?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까?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하신 분이시며(고후 5:21),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이시고(요 1:29), 그분은 우리 믿음의 저자이자 완성자이십니다(히 12:2).
구원의 행위는 완전한 삶을 사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시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신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행위가 구원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딛 3:5).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엡 2:9).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이 말은 제물을 드리고, 계명을 지키며,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으며, 선행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롬 3:23; 마 19:17; 사 64:6).

성경은 구원이 조건적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의 한 가지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거의 200번이나 믿음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선언합니다(요 1:12; 행 16:31).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님은 즉시 그들에게 믿음에 관해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을 요구하시는지(복수형)에 관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단수형)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우리가 얻거나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11:6에 따르면, 어떤 “행위”는 은혜로 된 것이 아닙니다. 즉, 일꾼이 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은혜는 단순히 거저 받는 것으로 노력하여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롬 4장 참조ㅡ아브라함의 구원은 그가 행한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익명으로 $1,000,000짜리 수표를 여러분에게 보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돈은 여러분의 것이지만 수표에는 여전히 여러분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름을 서명하는 것으로 수백만 달러를 번 것은 아닙니다. 서명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의 노력이나 사업을 통해 백만 장자가 되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백만 달러는 하나의 선물이었고 이름을 서명하는 것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의 관대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그 선물에 합당한 행위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육에 속한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기에 행위가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것이며 우리를 위해 그분이 일하시는 것입니다(마 11:28-29; 히 4:10).

한 걸음 더 나아가 참된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행위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구원의 능력과 그 은혜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마태복음 19: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온전하고자 할진대
-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텔레이오스'(5046)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거나 무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신적인 완전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자의지(自意志)에 따른 결과로서의 완전이 아니라 처절하게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依托)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완전이다(5:48; 빌 3:12).
한편 본문에서의 이 말은 좀더 특수하게, 그 청년이 목표로 삼고 있는 영생에 이르는데 조금도 핍절함 없는 완벽한 상태, 즉 절대적인 자기 부인(self-denial)과 철저한 순종 및 완전한 자기 의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τέλειος, α, ον
1. 목적을 달성한,  2. 히브리서 9:11, 3. 로마서12:2
발음 [ tĕlĕiŏs ]
어원 / 505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전한(마 5:48, 고전 13:10, 약 1:4), 장성한 (고전 14:20, 히 5:14). [부] 온전히(빌 3:15, 약 1:4)
신약 성경 / 19회 사용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예수의 온전케 하는 계명은 겉으로는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Banks).
왜냐하면 구약의 어떠한 구절에서도 본문의 이 명령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다(6:19-24).
더구나 사람은 본성적(本性的)으로 탐욕(貪慾)스런 존재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써 차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땅에의 욕심이 많으면 하늘에로의 관심이 적어지게 됨을 아시고 그 부유한 청년이 그의 재물을 다나누어 줌으로써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릴 수있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청년은 율법에 나타난 모든 외적인 계명들을 다 준수하려고 했지만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즉 그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적극적이고 전적인 자기 포기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소극적이고도 수동적으로 행한 수 백 가지의 율법 준수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소유를 다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다가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임박한 종말의식(終末意識)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계 21:1)이 다가옴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에서의 참 보화를 소망하지 못하는 한 소유물들을 더욱더 굳게 움켜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나를 좇으라'하는 데에 있다. '가서, 팔아, 나누어 주라'(휘파게 폴레손 카이도스)는 천국과 영생의 실체이신 예수를 좆는 제 1 전제 조건이었고, 온전함을 얻기 위한 단 한가지의 필요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절대적 명령에 따라 '가서', '팔아', '나누어줄' 때 동시적으로 그에게 내적 변화가 수반될 것인데, 그 내적 변화는 바로 그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 13:44-46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다.
이는 결국 본문의 '하늘에서 보화'란 이 부자 청년이 찾아헤매는 바의 영생의 삶을 의미한다.
그의 마음이 지상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의미로, 예수께서 그 즉석에서 영생의 삶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실로 자기 보물이 있는 그곳에 자기 마음과 소망(所望)과 미래가 있는 것이다(6:19-21).

와서 나를 좇으라
-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과 연결되고 있다(Lane).
즉 하나님의 뜻,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17-19절) 바로 참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는 상호 협력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있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율법의 형식적인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 즉 자아(自我)의 전적인 포기를 수반한 복음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은총을 통한 승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본문에서 볼 수있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수시로 사람들을 그의 제자로 부르셨으며 다음과 같은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16:24) 따르라고 말이다.
이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을 얻고 예수의 사람이 되려는 자는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즉 세속적(世俗的)인 기대와 세상적인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의 전부(부, 희망, 삶 등)를 맡기고, 그분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일체적(一體的)삶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갈 2:20).
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크고도 힘든 장벽이자 조건이 되는 조항이다.






과연 예수님은 선한 분이 아닌가?
 
마태복음 19:16-17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해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16 ¶ 보라, 어떤 사람이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매 17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17절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이 자기는 선하지 않다고 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선하다고 했으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그 저자의 주장이 맞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성경적으로 바르게 설명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요한복음 10장 11-14절에서 그분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무려 3번이나 말씀하십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노라.

마태복음 19장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응답은 결코 자신이 선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선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행한 일들은 모두 다 선합니다.

요한복음 10:30-33
30.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라.
31. 이에 유대인들이 돌을 집어 다시 그분을 치려 하거늘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가 내 [아버지]로부터 나온 많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일들 중의 어떤 일 때문에 너희가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하시매
33.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하매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감추어진 내면의 위선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단지 사람으로만 생각하면서도 하나님께만 속하는 호칭을 내게 붙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이런 호칭을 내게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너희 유대인들이 그런 마음으로 이런 호칭을 쓸 때에는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록 그 호칭이 내게 적합하지만, 너희는 그 호칭의 참된 의미대로 무한대의 완전함을 가진 분, 즉 신성을 가진 하나님으로서의 의미로 그것을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너희는 단지 내게 아첨하려고 그 호칭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너희 마음이 시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첨하려고 아무 뜻도 없이 하나님께만 속하는 그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자신의 선한 속성이나 신성을 부인하시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은밀한 속 중심을 살피시는 예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께 속한 호칭을 사용하여 아첨하려는 이 사람을 반박하고 그 위선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교훈을 주십니까?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내가 바로 유일하게 선한 이 즉 하나님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사실 하나님만 선한(good) 분일까요?

 
성경에는 사람들 중에도 선한 자들이라고 불린 여러 명의 기록이 나옵니다.

잠언 2:20-21
20 이로써 네가 선한 자들의 길로 걸으며 의로운 자들의 행로들을 지키리니
21 이는 곧바른 자들이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들이 그 안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라. 
 
눅 23:50은 아리마대 요셉을 가리켜 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행 11:24는 바나바를 가리켜 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외에도 시 37:23; 112:5; 잠 12:2; 13:22; 14:14; 미 7:2; 마 12:35 등은 선한 사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만을 선하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의 신성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이슬람 소책자의 저자는 성경 문맥에 상관없이 한 구절을 따다가 사람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14:1).
사실 이런 수법은 사이비 이단 종파들이 흔히 쓰는 수법입니다.
성경 문맥은 무시한 채 자신들이 필요한 성경의 한두 구절만을 취해서 마치 모자이크 조각을 이어 붙이듯이 자신들의 교리를 위한 체계를 만들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영적으로 사악한 무리들이 쓰는 이런 고질적인 수법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해하고 문맥의 흐름에 따라 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습관을 정착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책자의 저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질 수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본래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함의 근원인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첨하는 호칭을 붙이는 자에게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 알라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즉 그 알라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하나님처럼, '삼위일체가 아니라 아버지 홀로 존재하는, 성경 기록과 상관없는, 사람이 만들어 낸 짝퉁 신'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 이 세 분이 한 하나님이신 참 하나님입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 5:7).



사물(事物)의 본질(本質)

고대 그리스에서 사물의 본질은 '에이도스(ĕidŏs. εἶδος)'라고 불렀다.
플라톤에게 있어 칼리아스와 소크라테스라는 개체들의 본질은 결국 '인간'이었다.
플라톤에게는 개체의 고유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반면 경험 세계를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칼리아스의 본질과 소크라테스의 본질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플라톤에게는 모든 인간들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공유한 것으로 사유되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인간이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본질'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서양 철학은 니체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등장 이후에야 사물의 '본질'이란 단지 우리 인간의 가치가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는 본질이라는 것이 하나의 언어적 관습에 불과하다는 통찰이 2,000여 년 전부터 이미 상식적인 견해의 하나였던 점이다.
이것은 과거 동양의 철학자들이 본질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지 이미 성찰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신이 사물들에 본질을 부여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인간과 무관한 절대적인 본질이 있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것,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중국의 장자나 인도의 나가르주나가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 니체 혹은 비트겐슈타인과 비교되곤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1491. εἶδος, ους, τό  

1. 형상,  2. 종류, 3. 실질적으로 보는 것
발음 [ ĕidŏs ]
어원 / 14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체(눅 3:22), 용모(눅 9:29), 형상(요 5:37), 모양(살전 5:22), 보는 것(고후 5:7)
신약 성경 / 5회 사용

본질(本質)은 그것이 그것으로서 있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사람과 성전과 무화과나무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이사야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5287. ὑπόστασις, εως, ἡ 

1. 본질적 성질,  2. 확신
발음 [ hüpŏstasis ]
관련 성경 / 본체(히 1:3), 실상(히 11:1), 믿던 것(고후 9:4)
신약 성경 / 5회 사용

1096. γίνομαι 

1. ~이 되다,  2. 탄생되다, 3. 마태복음 21:19
발음 [ ginŏmai ]
관련 성경 / 되다(마 1:22, 막 4:19, 눅 1:2), 되게 하다(마 4:3, 막 1:17, 고후 5:21), 이루다(마 5:18, 6:10, 눅 1:38), 내다(마 6:16), 일어나다(마 8:24, 막 4:17), 베풀다(마 11:20), 행하다(마 11:21,23), 나타나다(행 8:13), 맺다(마 21:19), 나다(마 25:6, 막 9:7, 눅 3:22), 생기다(마23:15, 요 5:14), 계시다(마 26:6, 막 4:10), 임하다(마 27: 45, 막 15:33), 이르다(막 1:4, 눅 10:32), 당하다(막 5:16, 딤후 3:11), 드러나다(막 6:14), 오다(막 6:21, 요 1:17), 차다(눅 2:6, 9:51), 만들다(행 19:26), 가다(행 27:33), 거하다(고전 2:3), 있다(마 18:12)
신약 성경 / 670회 사용

본질(本質)이란 무엇인가?

- 근본(根本), 원리(原理), 개념(槪念)

사람들은 본질을 중요시 여긴다.
본질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의 밑바탕에 있다고 여겨지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이다.
이를 '근본'이라 말하기도 하고, '원리'라 말하기도 하고, '개념'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본질(근본=원리=개념)을 바탕으로 대상과 현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혹은 이 본질을 알면 세상의 진리를 깨달을 것이라 생각한다. 

'말(언어)'의 환유적 성질 때문이다. 

사람은 '말'을 만들때 자신이 경험한 것의 일부를 강조하거나 확대한다.
이를 소리로 전환해 '말'을 만든다.
가령 어떤 사람이 거대한 동물을 보았는데 그 동물의 다양한 특징 중 '코가 길다'라는 것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 사람은 나중에 그 동물을 '코가 긴 것'이라고 기억할 것이고, 누군가에게 그 경험을 말할때 '코가 긴 것'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이를 짧게 압축하면 '코길이=코끼리'가 된다.

사람은 어떤 대상을 기억할때 전체를 다 기억하지 못하고, 부분을 가져와 기억하고, 이 부분을 가지고 유추해 전체를 재구성한다.
이를 신경과학에서 '맥락부호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부분의 '부호'가 전체에 '맥락'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에서 이 맥락부호화를 '환유'라 말한다.
'환유'는 어떤 사람이 어떤 대상을 지칭할때 그 부분을 가지고 지칭하는 언어적 행위를 말한다.
가령 어떤 건물을 가르키며, "저 노란 건물 봐봐"라고 말하는데 이는 말하는 사람이 '노란색'을 강조해 건물 전체를 가르키는 것이다. 

사람은 말을 만들때 혹은 말을 할때 '환유'적 태도를 갖고 있다.
이 환유적 태도는 어떤 대상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기 위한 부분을 취함으로서 생긴다.
이 과정에서 대상이나 현상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가져오는데 이때 가져온 바로 그것이 점차 '본질'로서 여겨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보통 '본질'은 대상과 현상을 가르키는 '말' 안에 내포되어 있다. 

'본질'은 하나의 대상에 내포되어 있거나 여러 대상의 공통 성질로서 존재한다.
하나의 대상에 내포되어 있을때는 본질이 어떤 대상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여러 대상의 공통 성질로서 존재할때는 본질이 초월적으로 포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에 대한 태도가 달랐고, 공자와 노자의 본질에 대한 태도도 달랐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자신의 존재가 '생각'에 있음을 강조했다.
데카르트에게 '생각'은 대상을 쪼갤 수 있는 능력이었다.
데카르트의 이 쪼개기 생각 능력은 후일 과학혁명의 철학적, 방법적 바탕이 된다.
이 바탕이 미술에 영향을 미쳐 근현대 미술이 탄생했고, 디자인이 형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 대상이나 현상에선 본질을 찾지 말아라.
대상과 현상의 전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 있냐 없냐가 아니라 본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별능력이다.
즉 '본질이란 무엇이가'를 두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는 쪼갤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둘째는 쪼갤 수 있는 것에서 본질을 찾는 것이고 쪼갤 수 없는 것에선 본질을 잊는 것이다.

                                                           











06-19-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1장 / 하나님을 믿으라(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무화과나무 비유 / 마태복음 21:18-22. 마가복음 11:12-14, 20-24

* 본질을 알고 있는가?

1. 성전의 본질
2. 무화과나무의 본질
- 이스라엘 나라의 본질
3. 믿음의 본질


"하나님을 믿으라(에케테 피스틴 데우. εχετε πιστιν θεου) "는 말씀의 배경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마침 시장하시므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무엇이 있을까 하고 가까이 가셨으나 잎만 무성하므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깨우치셨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성전 밖으로 나올 때 제자들은 아침에 저주했던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는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나무가 말랐나이다"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상과 의자를 엎어버리셨습니까?
왜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무엇이든지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본질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맺고 있었는가?
누구나 육체를 위한 자식 농사와 더불어 예수를 믿는 믿음의 열매가 무엇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항상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과연 기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응답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메아리가 되어 사라지는 기도가 아니라 반드시 열매로 맺혀지는 기도 생활이 신앙생활의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늘 하던 기도가 새로운 재미와 삶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열매맺는 기도로 드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따라서 기도자의 신앙의 기초가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서 튼튼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조하신 말씀들을 살펴봅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갈라디아서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십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로마서 4:3)

둘째는근심하지 말라(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세상에는 근심거리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 어떤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물리쳐야 할 적과 같습니다.

셋째는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에코(2192) [ ĕchō ]  ἔχω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
발음 / 에코[ ĕchō ]
관련 성경 / 잉태되다(마 1:18), 잉태하다(마 1:23), 입다(마 3:4), 얻다(막 3:29), 들리다(마 11:18), 생기다(마 13:27), 차지하다(마 14:4, 눅19:17), 가지다(마 18:8, 9), 여기다(마 21:26), 알다 (마 21:46, 몬 1:17), 요구하다(마 26:65), 지피다(막 3:22), 배다(막 13:17), 다하다(막 14:8), 쓰다(요 13:29), 기다리다(요 16:30), 부리다 (계 18:19). [명] 소유(마 13:44, 46)
신약 성경 / 711회 사용


피스티스(4102) [ pistis ]  πίστις, εως, ἡ

1. 믿음,  2. 신실성, 3. 엄숙한 약속
발음 / 피스티스[ pistis ]
어원 / 39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음(마 8:10, 롬 1:8, 히 10:22), 도(행 6:7), 충성(갈 5:22), 신앙(빌 1:27, 히 6:1)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데오스(2316) [ thĕŏs ] θεός, οῦ , ὁ, ἡ

1. 하나님,  2. 사도행전 28:6, 3. 요한복음 1:1
발음 / 데오스[ thĕ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하나님(마 3:9, 눅 1:30, 행 2:11), 신(행 7:40, 43), 주(행 8:22, 10:33, 롬 10:17), 아버지(고후 1:3)
신약 성경 / 1318회 사용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온전한 믿음을 회복하는 비결

믿음으로 행하라(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 얻도록 간구하라(데살로니가전서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믿음을 위하여 꾸짖으라(디도서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예수만 바라보라(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
마귀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다.
또 돈을 믿지 말고, 자기 재주를 믿지 말고, 수단 방법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란다.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어떤 자매를 보고 "하나님 공경하고 예수 믿으세요"하니까 "아니, 나는 안 믿어요" 한다.
"뭘 믿으려고 안 믿어" 하니 "내가 나를 믿지요"한다.
"아니! 여보 자매, 그거 무슨 소리요, 내가 나를 믿다니 자매가 무엇인데요?"
자매가 아무리 안다고 해도 눈앞에 눈썹이 몇 개인 줄도 모르면서, 또 아무리 잘났대도 콧구멍 두 개와 입 구멍만 막으면 팩팩하다 십 분 후에 눈알이 나와서 죽을 터인데 그것을 믿다니......
그런 망령된 소리를 하지 말고 피조물 된 인간은 조물주(하나님)를 믿어야 된다고 전도하였다.

그 자매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세계와 이 강산이 요 모양이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는다는 무신론자들과 인본주의자들 때문이다.

아니 무신론자들과 사회주의자들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심을 증거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말과 붓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하면서도 실제 생활로는 무신론자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베다니에 가셨다가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시장하시어 열매를 찾으셨으나 잡수실 만한 실과가 없으므로, 이제 후로는 네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영원히 없으리라 하시고 그곳을 떠나 그 이튿날 그곳을 다시 지나가실 때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모두 말라진 것을 보고, 베드로가 기억하고 여쭈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임의로 말랐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시장하신데 잡수실 것이 없어서 감정으로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40일 동안 금식하셔도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시는 시험을 이기셨으니 그것은 자기를 위한 감정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아니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는 믿는다.

속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무화과나무 / 탁쉬(taqsh) & 빅클(bickle

無(없을 무) 花(꽃 화) 果(열매 과).
꽃 없이 열매를 맺는 나무다.
꽃이란 찬란한 자신의 영광스런 때인데, 그런 자랑이나 뽐냄이 없이도 묵묵히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무화과는 꽃이라는 최고의 영광을 피우지 않고서도 열매라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에 배울 것이 많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의 진액을 모으고 뭉쳐놓는다.  

사실 이때는 무화과가 열리는 때가 아니었다.
제자 마가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는 연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가 알고 있는 '무화과의 때'는 시즌(season), 곧 정규 수확 철이다.
잎이 막 무성해지면 앞으로 무화과 열매가 달린다는 표시로 작은 마디로 된 알맹이가 열린다.
이게 아랍어로 “탁쉬”(taqsh), 히브리어로 "파게"
그리고 수확철에 열리는 것을 “빅클”(bickle), 히브리어로 "테헤나"

히브리어로는 각각 “파게”, “테헤나”라 부른다.  
탁쉬는 일꾼들이나 꼬마들이 배고플 때 따먹는다.
돈을 받고 팔만한 상품은 아니지만 허기를 달래는 데에는 그만이다.
탁쉬는 참 무화과 열매인 빅클이 만들어지기 전에 다 떨어진다.
하지만 잎사귀와 함께 탁쉬가 열리지 않으면 시즌이 와도 빅클이 맺히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이를 아셨던 것이다.
마가도 이를 알았기에 자신있게 기록했던 것이다.
탁쉬가 열리지 않았으니 '참 무화과의 때'가 와도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잎사귀만 아름다우면 뭣하나.
무화과는 열매로 모든 것이 판단되는데… 열매가 없는 무화과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

탁쉬로 일컬어지는 이런 무화과를 요한계시록 6:13에 나오는 “선 과실(무화과)”라고 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

선 무화과의 '선'에 관해 영어성경의 해석은 다양하다.
설익은(unripe), 때에 맞지 않는(untimely), 늦은(late), 겨울철의(winter) 등등.

그러나 이 “선”을 ‘회오리바람 선(颴)’ 혹은 '부채바람 선(扇)'으로 본다.
이는 요한계시록 6:13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해석이 아닐까?

탁쉬는 약하다.
비바람이 불면 와르르 떨어져 버리니 대풍 앞에서야 어찌 견디리오.
탁쉬는 핍박과 고난과 역경을 이길 힘이 없다.
그 전에 먼저 주님의 시장하심을 들어주었어야 했다.
그게 탁쉬의 쓰임 받음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 탁쉬는 결국 역경과 고난이 오면 제 나무에서 다 떨어지고 만다. 

하나님 앞에 전혀 쓸모가 없는 영혼이라면 어찌 될까?
작은 일에서부터 쓰임을 받아야 큰 일에도 쓰임을 받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성실과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나 비록 작을 지라도 정녕 주님께 쓰임 받고 싶다.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풍경에선 빠질 수 없는 나무다.
가지를 넓게 펴 그늘을 제공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그늘에서 쉬는 것을 보았다(요 1:48)고 하신 것처럼 길 가는 행인에게 쉼을 준다.
무화과 열매도 먹을 수 있었으니 더위와 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유익한 나무다.
그 그늘 아래 겉옷 깔고 누워 무화과를 한 입 베면 쌓인 피곤함을 제법 털 수 있었으리라.

한때 무화과나무 잎 모양이 어떠할까 궁금해 찾아 사진을 찍어뒀다.
이유는 소박하다.
인류가 맨 먼저 만들어 입은 옷이 무화과나무 잎이 아닌가.
비올 때 쓰곤 했던 토란 잎과 비슷하거나 더 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신구약을 통틀어 성경에는 무화과에 관한 구절이 57군데다.

무화과는 세 종류다.
같은 나무지만 무화과가 익는 계절을 따라 봄 무화과, 여름 무화과, 가을 무화과로 부른다.

봄 무화과가 제일 맛이 좋다.
어찌나 맛이 좋은 지 보는 즉시 손에 따서 먹을 정도라고 이사야서는 기록한다(28:4).

여름 무화과는 더운 여름에 익는다.
빨리 익기에 과일처럼 두고두고 생으로 먹기보단 건포도처럼 말려서 먹는다.
아비가엘이라는 총명한 여자는 위기 중 다윗을 설득하며 내놓은 예물 중 하나가 “무화과 뭉치”라는 여름 무화과다(삼상 25:18).
또 삼일 밤낮 광야에서 사경을 헤맨 소년에게 정신을 차리라며 내놓는 특효약이 “무화과 뭉치”였다(삼상 30:12).

가을 무화과는 가을에 반쯤 익었다가 초봄에 마저 익는다.
겨울 우기가 지나고 강이 마르기 시작할 즈음 짙은 푸른색의 약간 긴 모양의 무화과가 익는다.
아가서 2장의 무화과가 이 무화과다.

“유독 무화과나무만이 꽃이 없다. 꽃이라는 최고의 영광을 피우지 않고서도 열매라는 귀한 작품을 만든다.”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과, 그럼에도 열매 속에 영광(꽃)을 담아내는 충성을 다하는 나무다. 또 “무화과나무처럼 맡은 직분에 성실하자.”고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강조점은 예수께서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와 관련된다.
이때는 주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예루살렘으로 마지막으로 향하던 때다.
“그 능하신 권능으로 나무를 저주할 필요가 있었겠나?
다른 때에 다른 사람이라도 열매를 얻지 않았겠나?
어쨌든 두렵다는 것이 일반의 생각이다.”
하지만 예수의 혈기 내심도 괜한 일 하심도 아니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우주라는 물질세계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사건이다.”

무화과나무의 최후처럼 우주의 최후도 그와 같다고 본다.
자기 일을 다 이루신 분이 하늘로 귀환할 때 “아무 것도 없는”(막 11:13) 무화과나무(우주)는 더 이상 존치되어야 할 가치가 없다.
“성경의 모든 것을 무화과나무로 보여 주셨다.
주님은 우리 영혼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모두 무화과나무로 보여줬다.”

주님께 쓸모가 없는 것이 무화과나무다.
아담이 선택 받고 남은 네피림도 무화과나무다.
사울은 왕으로서 유지될 수도 있었으나 우상에게 절하므로 무화과나무가 되어버렸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해도 무화과나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는 어떤 것도 무화과나무다.

무화과나무의 사건을 “세상을 향하신 최후의 설교”라 했다.
이제 주님이 가셨으니 언제든 끝날 수 있는 우주(무화과나무)의 실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기대할 것이 없는 것같이 우주와 그 안의 것을 기대치 말고 그날이 속히 올 줄 알고 현재 모시고 있는 성령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풍경에선 빠질 수 없는 나무다.
가지를 넓게 펴 그늘을 제공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그늘에서 쉬는 것을 보았다(요 1:48)고 하신 것처럼 길 가는 행인에게 쉼을 준다.
무화과 열매도 먹을 수 있었으니 더위와 주림을 면하게 해주는 유익한 나무다.
그 그늘 아래 겉옷 깔고 누워 무화과를 한 입 베면 쌓인 피곤함을 제법 털 수 있었으리라.


어떠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1.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나무 한 그루라도, 풀 한 포기라도 자기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너희들도 특별한 은총을 받고도 주님의 열매가 없으면 버림을 받게 하신다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심판의 주님, 두려우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느니라. 죄많은 세계를 홍수로 멸망시키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유황불로 심판하시고, 일본의 죄악을 원자탄으로 징계하시고, 한국의 죄악을 38선으로 가로막아 놓으신 것이다.

삼손의 죄악은 결국 삼손이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게 하셨고, 웃시야 왕의 교만한 죄악은 문둥병이 들어 죽게 하셨으며, 헤롯의 교만은 몸에 충이 먹어 죽게 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민족의 죄악을 저울로 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2.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라

무화과나무의 이적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여 얻은 능력이다. 너희들도 기도하여 구한 것은 이미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라.
너희들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들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가지로 증거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으신 만물을 보아 알 것이다(롬 1:20). 본능으로 알 수 있고 자연과 인생의 조직, 피조물을 보아 조물주를 아는 것이다.

둘째,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하였다(벧전 3:21). 양심이 선악을 분별하며 책망하고 심판한다.

셋째,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요 5:39).

넷째, 세계의 역사가 증명한다(단 4:17, 7:27).

다섯째,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모든 소원을 아뢰고, 거룩한 뜻을 분별하게 되고, 죄를 자복하게 되고, 능력을 구하여 얻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위험과 실패와 사망에서 구함을 받는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노인에게 전도하였더니 "여보, 예수쟁이들만 하나님을 공경하시오? 우리도 다 하나님을 공경한답니다. 하나님이 우순풍조(雨順風調)로 오곡백과를 주어서 다 잘 산답니다" 하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노인장,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하시오?" 하니 "나는 해 뜨는 데로 향하여 소변도 보지 않지요"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하는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생활태도

1. 철두철미한 회개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먼저 회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다윗을 보시라. 한때 인간성을 가지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무서운 죄를 짓고 타락했었으나 나단의 책망을 듣고 겸손히 용상에서 내려와 부스러진 심정으로 침상을 적시고 요를 적시는 눈물의 회개를 밤마다 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회개와 베드로의 회개! 하여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때 죽었다 살아나는 철저한 회개를 경험한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러하였고 존 번연과 루터가 그러하였다. 아직도 회개가 철저치 못한 연고이다.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2.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양심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털끝만치도 어두움이 없나니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면서도 어두운 데 거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 하였다. 사람들이 볼 적에는 점잖고 의롭고 깨끗하게 사는 것 같으나 혼자 있을 때는 별 짓을 다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까닭이다.

외식하는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고 양심적으로 살지 않음으로 주님에게 얼마나 책망을 들었는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시라. 형님들의 미움을 받아 팔리어 이국 타향에 가서 보디발 장관의 가정에 총무로 충성되게 봉사할 때에 장관의 부인이 날마다 유혹하여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주인께서 나를 신용하여 가정의 모든 것을 맡기셨으나 당신만은 맡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하고 거절할 때에 달려들어 옷을 붙잡고 더욱 유혹함으로 붙잡힌 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났다. 그랬더니 부인이 모함하여 잡히게 되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그 정조를 지킨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은 결정이 아닌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일한다 하면서도 양심을 버리고 개인의 편리와 안일을 위하여 이리저리 좌우하는 생활로 신앙의 정조를 더럽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안타깝기 끝이 없는 것이다.

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희에게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사람들이 그 양심을 버렸으니 그 믿음을 의논컨대 파선한 배와 같으니라(딤전 1:9).

3.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생활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저희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마는 하나님을 알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다고 하였다(롬 1:21).

물고기가 물 안에 있으면서도 물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땅에 사는 인간들이 땅덩어리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지중하여 무감각하게 지내는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는 밥 한 그릇을 대할 때나 물 한 잔을 대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 신기하고 오묘하게 지음을 받아 열 달 동안 그 속에 있다가 나올 때에 배꼽줄 하나 가지고 나왔지만 나오자마자 그것을 똑 잘라 버리니 정말 핏덩어리로 된 것을 젖으로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사랑을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이웃집에서 떡국 한 그릇을 얻어먹고도 감사를 몇 번이나 하면서 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운 세계에서 봄에는 백화가 만발하고, 여름에는 녹음방초(錄陰芳草) 우거지고,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겨울에는 백설강산이 은세계를 이루어 보기 좋고, 놀기 좋고, 살기 좋게 축복하시었건만 우리는 얼마나 조물주께 감사를 하였는가? 캄캄한 밤중에 수렁에 고무신 한 짝을 빠뜨리고 헤맬 때에 누가 성냥 한 개비를 켜서 밝혀 주면 아이고 이 양반 고마워라 하면서도 낮에는 태양으로 변함없이 비추어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로서 밝게 해 주시는, 그 빛을 주시는 조물주 하나님께는 얼마나 감사하였는가? 배은망덕하는 인간들을 다 멸망시킬 것이로되 자비와 긍휼로 무조건 사랑하심을 깨닫는 자는 행복스러운 인간인 것이다.

또한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독생자까지 주신 그 사랑, 어찌 다 말로 형언하리오. 주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일만 가지 일이 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므로 행복과 순경(順境)에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불행과 역경 중에서도 항상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어떤 독실한 신자 노인이 있었다. 그가 쌀 한 가마니를 외상 맡아다가 마루에 두었더니 그날 밤에 도적이 와서 홀랑 가져다 버렸다.

그의 마누라는 도적을 욕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영감님은 "마누라, 너무 떠들지 마시오. 나는 쌀 한가마니 잃어버렸는데 다섯 가지 감사가 생기는구먼" 한다. "원, 저런 영감두, 무엇이 감사하단 말이요" 하니 "보라구, 우리는 쌀 한 말도 얻기 힘든 집에서 한 가마니나 외상으로 얻게 된 신용을 얻었으니 감사하지 않은가? 또 감사할 것은 남은 도적질하면서 사는데 우리는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오. 또한 그것 모두 다 우리가 잘못했지, 그것을 방안에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마루에 두어 실패하였으나 결국 좋은 경험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또한 육신의 양식은 잃어버렸어도 영혼의 양식은 잃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또 외상으로 얻어온 쌀이라도 남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것을 잃었으니 감사하지 않소?" 하며 찬송을 불렀다 한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 안할 것이 없고 감사 안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종이가 약하지만 벽에 붙어 있게 될 때는 강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지만 만세 반석 되시는 하나님께 신앙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과 나와 그리스도의 피로 반죽하여 콘크리트를 할 때 강하고 담대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쳐서 죽이고, 엘리야는 하나님을 믿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게 하였고 다시 기도하여 비가 쏟아지게 한 것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나님을 믿어 유대 민족을 하만의 손에서 위기 일발에 구원하여 낸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행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욱 큰 것도 행하게 하리라(요 14:12).

5.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깨어 기도하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생활을 하는 것이다.

효자 효녀는 무엇이든지 부모님께 문의하고 보고한다. 불효 자식은 무엇이든지 다 제 맘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한다. 부모님이 무엇을 좀 알고 싶어서 이번 일이 어찌되었느냐, 아까 왔던 사람이 누구이냐 하고 물을 때 "아이구,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겠소. 어서 진지나 잡수시고 낮잠이나 주무시구려. 원, 노인네들은 별 간섭을 다 하시려고 드시네" 하면 부모님들은 그만 쑥 들어가 손을 비비면서 "이거 왜 여지껏 살아서 이 수모를 받고 있을꼬" 하면서 뒷방에서 한숨만 짓는다. 물론 늙은 부모님은 아무 것도 몰라도 자식들이 하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시다. 무엇이든지 기도로 그에게 문의하고 보고하면 대소만사(大小萬事)를 최선으로 인도하여 주실 터인데, 불신앙의 무리들은 무엇이나 제 뜻대로 하여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며 자신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교통의 기도 호흡이 두절되면 벌써 죽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삼상 12:23).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말단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어 참된 회개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서 양심적으로 살며, 항상 기도와 감사와 희락과 화평으로 살며, 극히 강하고 담대하여 악마와 세상과 죄악과 싸워 날마다 백전 백승하는 개선장군이 되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어떤 목사님이 가난한 달동네에 사시는 할머니 성도님을 심방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할머니는 얼마나 가난하든지 방에 불도 넣지 못하고, 오돌오돌 떨고 있었습니다.
방에 벽지도 신문지,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해 드리고 집을 나올려고 하면서 방을 다시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벽에 이상한 딱지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딱지가 아니고 수표였습니다.
보통 수표도 아니고, 0이 굉장이 많은,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는 거액의 수표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이 수표를 왜 여기다 붙여 놓았습니까?”
“응, 내가 파출부하면서 한 할아버지를 돌봐 드렸는데,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맙다고 저걸 내게 줘서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기념으로 붙여 놓았지, 뭐”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게 수표라는 거에요. 돈이에요. 저 돈이면 큰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어요”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종이 한 장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님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그 수표로 좋은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여 편안히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앞에 할머니가 거액의 수표를 벽에 붙여 놓고 판자촌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능력의 하나님을 제껴 놓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픔에 잠겨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저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단 두 마디 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까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준 말씀입니다.
 
Ⅰ. 믿음의 능력(20-23)
 
20절을 봅시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아침에 성전 앞을 지나가다가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전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 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전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4절에 보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수님이 무섭게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상징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헤롯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크고 멋있고, 성대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크신 능력이 나타나리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이 성전 짓는데 8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만 명의 인부들과 천 대의 마차, 천 명의 사제들이 동원 되었습니다.
공사 완공 후, 수소 3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웅장한 성전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앞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를 뿌리채 마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거기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제사의식이 아무리 성대해도 그들 내면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셔서 뿌리채 마르게 하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이나 형식으로 우리를 치장한다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믿음이 없으면 메마른 무화과 나무처럼 심령이 말라 비틀어져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성전 건물을 믿지 말고, 거대한 조직이나, 돈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경력, 타이들 의존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권세가 어디서부터 옵니까?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죄 사함의 권세,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우리 가정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능력, 다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를 주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4:17절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21:1-6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우리 손에 당장 돈이 없고 나를 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 내가 비빌 언덕이 없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의 도움이 되시고, 나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의지할 때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서 남은 제자들에게 남겨주실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리에 관심이 많았고, 예수님에게 뭔가 인간적인 도움을 기대했습니다.
자리에서, 권력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보장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주실 수도 있으신데 일부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주면 그런 것들을 붙들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보다 더 본질적인 것, 더 근원적인 것, 모든 축복과 능력의 쏘스가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붙들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하나님만을 믿게 되었을 때 후에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때 앉은뱅이에게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성전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3천명, 5천명을 회심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교회 건물도 없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이나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을 때,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다른 외적 조건이 다 열악할지라도 능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 신인식(57세) 이사장의 간증을 보고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경상도 의령,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4살 때 술래잡기를 하다 이마를 뭔가에 부딪혀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아파서 병상에 누워 계시고, 자신은 실명해서 앞을 못 보니 얼마나 절망이 되었겠습니까?
너무 많이 울고 눈물을 많이 흘려서 눈물도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결핵 말기에 신경성 폐렴까지 걸려서 치료를 위해 약을 4년 동안 14만알, 주사를 매일 한 대씩 1400대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불우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 분은 하나님을 믿고 운명에 도전했습니다.
초등학교때 부터 껌팔이, 볼펜팔이, 신문배달, 전화교환원, 학교 숙직, 드럼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귀로 듣는 잡지인 <사랑의 메아리>를 창간하였습니다.
1994년에는 <종달새 전화도서관>을 개원하여서 시각장애인들이 전화만 하면 매일 신문기사를 읽어주고, 주간지, 월간지 등을 음성으로 들려주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히말라야산에도 등정하도록 후원해 주고, 해병대 병영체험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서울장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faith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피아노, 드럼, 트럼펫 연주가 수준급이고, 노래는 성악가도 놀랠 정도의 실력입니다.
전 세계 20여개국에 다니며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가 최근에 쓴 책 『꿈꾸는 자의 무한도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을 거닐고 있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일곱 블록을 가득 채우는 안개라도 담으면 물 한 컵 분량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망은 가장 게으른 선택입니다.
불행에 절망하지 말고 희망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기적을 구하십시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아무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Have faith in God”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랬을 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 그것이 우리의 최고 자산이요, 위대한 가능성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일반적으로 산은 거대해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 거대하고 견고한 산을 향해서도 외칠 수 있습니다. “산이여,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이렇게 말하고,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아주 복음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집어 던지시면 산 아니라 한 나라도 바다에 집어 던져 버리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직후 바로군대가 철병거 6백대를 이끌고 뒤쫓아 왔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탱크 600대를 몰고 뒤쫓아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애굽 군대를 다 물에 던져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1,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하나님은 세계 최강의 군대도 다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홍해도 건너게 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바다에 빠뜨리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에 믿음이 없습니다. 거대한 산 아니라, 작은 언덕만 만나도 두려워서 벌벌 떨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산도, 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고후 4:7). 우리 하나님은 얼마든지 산도 들려서 바다에 던지울 수 있고, 뽕나무도 뽑아서 바다에 심으실 수가 있습니다(눅17:6).
 
신인식 목사님은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해 봤자 안 될 일 뭐 하러 힘을 쓰냐 라고 말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진 계란의 흔적이라도 바위에 남지 않겠습니까. 단번에 될 수 없겠지만 끝없이 하다보면 언젠가는 되지 않겠습니까?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그 분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각장애인은 일반고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혈혈단신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가서 물어 물어서 정부청사에 가서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자,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장관을 만나서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그때 바로는 법이 시행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법이 개정되어서 지금은 시각 장애인이 일반고도 가고, 판사도 임용되고, 대기업도 들어가고 각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있는 사람과 믿음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믿음없는 사람은 계란으로 바위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과감하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깨진 계란 자국만 남기지만 나중에는 바위가 깨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차사순 할머니 이야기 아십니까?
전북 완주에 사시는 이 할머니는 손주 손녀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운전해서 유치원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운전면허에 도전했습니다. 70이 다 된 나이에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습니다.
실제로 959번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시험보기 위해 지출한 인세만 500만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치 않고 도전해서 960번 만에 합격했습니다.
이 할머니의 도전정신에 감동받은 승용차 회사에서 무료로 차도 한 대 선물해 주고, 승용차 광고모델로 출연하여 ‘올해의 광고모델상’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운전면허증 못 따신 사모님들, 다음 주부터 당장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 모두 거룩한 뻥쟁이가 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뻥쟁이. 참 좋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가 하는 말들이 뻥을 치는 것 같고, 얼도 당토 않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뻥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위대한 성경선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2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영적 거장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개척하고 있는 캠퍼스들이 복음으로 정복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처럼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승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야고보서 1:6절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마음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Ⅱ. 기도의 능력(24-25)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사단이 심는 의심을 극복하고 확신가운데 도전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의심의 먹구름이 물러가고 마음에 서광이 비쳐 옵니다. 기도할 때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위축된 마음이 풀리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자신감과 열정이 생겨납니다. 또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히11:1).
 
제이 필립스(J. B. Philips)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Your God is too small)』이란 책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하나님을 작은 분으로 제한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히 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제한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자꾸 믿음의 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는 우리의 하나님이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면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파이프라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길을 보여 주시고, 용기와 담대함과 지혜를 부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결된 파이프 라인이 막히고 녹슬어서 하늘의 능력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지치고 낙심되고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신기하게도 힘이 솟구치고 의욕과 열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반 동안 메말랐던 이스라엘 땅에 비가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기도하자 감옥 문이 열리고 베드로가 유유히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금식하며 기도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순식간에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 보면 기가 막힐 때가 많습니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등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산을 만날 때 힘이 빠지고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기가 막힐 때 기도합니다.

삼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기가 막힐 때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 막힐 때
도하면
적이 일어난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예례미야 33:3절은 말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또 한 가지 우리의 기도 파이프라인을 막히게 하는 것이 불편한 인간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 서운한 사람이 있으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도 사하여 주시고 기도도 응답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의 능력의 쏘스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거룩한 꿈을 꾸고, 꿈을 선포하고, 도전해서 꿈을 성취하는 거룩한 꿈쟁이, 뻥쟁이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오늘 저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모여서 입술로 고백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살아계신 것하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므로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소원을 해도 될까 말까 한데 하나님께서 직접 나 살아있는 것을 믿어라. 나 찾으면 상 받는 줄 믿으라. 누가 안 믿겠어요? 저도 오늘 상 받기 위해서 저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것을 믿고 또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에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1. 믿음의 요소

우리가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몇 가지 지켜야할 요소가 있습니다.
전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뭘 믿는 것입니까?
네 믿음을 좀 보여다고 하면 참 난처하지요.
믿음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말하지 세상을 믿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훌륭한 대통령이 계셔도 우리가 대통령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가 없고 부모님이 계셔도 전력을 다해서 부모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치 않고 믿을 수 있는 조건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왜 그처럼 믿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지 못하면 실력이 모자르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로 23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좀처럼 마음에 확실히 믿을 자신이 없지요. 너무 위대한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라고 말했는데 나보고 너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은 좀 힘들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좋겠는데 너나 다른 사람이나 누구든지 똑같이 이 산더러 들리어 저 바다에 던져지라 하고 그리고 자기 말한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힘을 믿음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시편 11편 4절에 보면 “야훼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야훼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라고 말씀하셔서 주님이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막에서 길을 만드시고 홍해도 가르시고 요단강도 말씀으로 갈라놓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여시면 막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막아 놓으면 열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생활에 사용하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항상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그 모든 일들이 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따라서 우리가 매일같이 소원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다음 그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줄 믿고 입술로 고백을 하고 흥얼거리고 다니면 그 일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생애 속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생각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는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내가 기도하면 좋은 일을 이뤄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능치 못하신 것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뜨겁게 사랑하사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면 믿을 수가 있어요.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전능자, 무엇이든지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자라는 것을 알고 그 다음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이 말의 의미를 우리가 전적으로 받아 주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여러분, 그런 경험이 여러분 일생에 한두 번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제가 어릴 때 어머니 손잡고 우리 외가집에 가는데 외가집에 외할머니가 뛰어 나와서 나를 끌어안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나를 안고 막 흔들면서 ‘아이고~ 용기야 잘 왔다. 많이 컸구나!’ 그렇게 나를 좋아해주는 외할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언제나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일이 여러분 생애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너무 좋아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한다. 하나님이 위대하신 하나님이 체면도 차라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하시느냐. 이렇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성전에 함께 모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여러분 보시고 하나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시고 ‘그래, 날 찾아 왔구나. 날 보러 왔구나. 잘 왔다. 잘 왔어.’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즐거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이런 말씀을 우리가 조합해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행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믿을 수 있고 우리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발을 굴리고 기뻐 외치시는 이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 안즉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알아보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람 입의 말 믿지 말라. 알아봐~ 흉악한 사람이다. 못 믿는다. 믿음이란 앎으로 생기고 모르면 못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웃을 잘 알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우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알고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 하나님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2.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있으면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어버려야 돼요.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여러분과 나 사이에 있는 담을 헐어버리기를 스스로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허물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될 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은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주신 것이 이 계명이지만 우리에게도 굉장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우리도 스스로 마음속에 세워놓고 비춰 보아서 십계명에 어긋나는 것을 늘 회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것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쓸데있는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을 깨달아 알려면 십계명을 앞에 두고 생각을 하면 쉽게 우리 잘못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여러분은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이 좋게 지내려면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야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 계명 지켜야 구원 받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계명은 우리가 행동이 하나님 뜻을 거스리느냐. 받아들이냐를 보여주는 계명이지 구원을 받는 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계명이 10개가 있고 그 계명을 우리가 살펴보아서 하나님과 어긋나는 것은 그 자리에서 회개해 버리면 돼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실(요일 1:9)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쉽게 예수님의 보혈로 청산해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계명은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내게 두지 말라. 우리가 다른 신들을 주면 그를 치우고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상에 절하지 말라. 셋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넷째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이것 다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십계명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 담을 스스로 만드는 것인데 어렵지가 않아요. 다른 신을 여러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다른 신 섬기고 여기 와서 하나님 섬기는 분 없잖아요. 우상을 일부러 만들어 놓고 절하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장난삼아 사용하는 사람은 가끔씩 있을지 몰라도 우리 전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유대인들은 토요일날 안식을 지키나 우리는 예수님이 주일날 세상을 떴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토요일날 안식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일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나와 이웃과의 관계 계명을 우리가 알고 지키는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 공경은 다 하지요. 살아계실 때 더 공경하면 좋겠지만 세상 뜨고 난 다음에 더 공경이 되는 것입니다. 어버이 섬기기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 섬기는 것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아무리 울고 통곡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말라 말라 하는데 우리가 이런 것들은 마음에 곧장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여러분을 지옥에 보내려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남이 없이 깨끗하고 좋은 관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구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므로 절대로 타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 행위를 정결케 하는 것이 십계명이기 때문에 십계명은 여러분의 발을 깨끗이 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혹은 말씀 읽는 중에 성령이 마음속에 가책을 주십니다. 성경께서 이것은 버려라. 이 길로 가지 마라. 내가 지시하는 길로 가라. 여러 가지 여러분에게 고요하고 잠잠하게 성령께서 말씀을 해주시는데 그 성령의 꾸짖으시는 말씀은 그 자리에서 고백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응답을 주시고자 해도 하나님이 좋지 않게 여기시는 일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혀 있으면 하나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대로 회개하면 씻으시고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 이상 하나님은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는 기도응답을 좀 많이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수천 번 수만 번이라도 기도응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 응답을 주시므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세상에 증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응답은 내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참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응답을 많이 받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고 성경에 믿음이 응답받기 위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만사 제켜 놓고 하나님 먼저 모시고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좋아하는 것을 비교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제켜 놓고 그것을 먼저 하면 하나님이 기뻐 안 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친구가 있는데 친구가 모든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좋아해서 나와 같이 일을 도모하기를 원하시면 그 친구 정말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가 있는데 자기 좋아하는 일 다 먼저 해놓고 난 다음에 쓸데없는 시간에 날 기뻐하고 받아주면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마음에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제가 50년 목회해 오면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목사님 중에 아주 우리가 한때는 좋았던 사이를 가졌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도 밤중에라도 내가 오라고 하면 뛰어오고 나도 밤중에라도 나를 보고 와달라고 하면 옷 갈아입고 그 집으로 갑니다. 그렇게 아주 다정한 친구인데 세월이 흘러가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사람이 나를 멀리하는 것 같고 나도 그 사람을 멀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점심 먹자고 전화를 해놓으면 그 점심 먹는 것은 한 달이나 두 달이나 지나야 될까 말까 합니다. 자기 좋은 일 한다고 시간 안 내놓거든요. 며칠 전에도 나에게 조목사, 우리 모여서 한번 점심 같이 하자. 내가 같이하지. 시간 내줘. 내가 알아볼게. 알아보기는 뭘 알아봐요. 지금 나 안 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친구보다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그 친구는 내 좋은 친구들 다 만나보고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만나볼 것입니다. 박수쳤다고 그 사람 나에게 화낼지 모르니까 박수치지 마십시오. 먼저 하고 나중한다. 좋은 것을 먼저하고 좋지 않은 것을 나중에 하는 것은 우리 생활에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나님을 먼저 좋아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 번째로 제켜 놓고 신앙생활하는 일이 없도록 제가 간절히 부탁합니다. 우리가 성수주일하기가 굉장히 힘든 것은 사실이에요.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특별히 말하든지 심방가자고 하든지 다른 어떤 쇼핑을 가자고 하든지. 그 날이 주일입니다. 야~ 오늘 주일이기 때문에 나는 못 간다. 예배드리고 가야 된다 하면 언제 그렇게 깊이 신앙이 들어왔노? 친구도 모르냐? 두고 보자! 아이고 알아줘~ 이해해줘~ 나 이해 못해! 그러면 성수주일을 포기하고 그 친구하고 같이 갈 때가 가끔 있어요. 저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과 다르잖아요. 나는 목사고 여러분은 평신도니까. 여러분은 그 친구를 따라가는 친구가 많이 있어요. 그냥 가면 좋은데 나에게 허락받기 위해서 전화를 내게 합니다. 오늘 친구가 꼭 나가자고 하는데 목사님 갔다 오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용서 빌어야지 왜 내게 용서를 빕니까? 그러면 제가 고약한 소리만 좀하고 말지요. 성수주일 안 하고 답답할 때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잘된다 잘돼! 그래도 한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내가 눈 감는다고 좋지는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면 용서는 해주시겠지만 그 일을 자주하면 하나님 나중에는 용서도 안 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대단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우리가 착실히 드리므로 하나님을 중요시 여기는 것을 온천하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일날은 우리가 예배 드리는 날입니다. 더구나 오늘 성찬예배 드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간다는 이 예배는 정말 중요한 의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굉장히 기뻐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드리면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대만에 가서 성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만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랜 옛날에 나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병이 나은 대만 사람들 여러명이 제게 와서 인사를 하는데 나는 본적이 없어요. 기억이 안나요. 그러나 그분들은 내가 싱가폴에서 집회할 때 왔다. 말레이시아에서 집회할 때 왔다. 그런 먼 곳에 기도를 받으러 와서 기도를 받고 병이 깨끗이 낫고 건강하게 되어서 낫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얼마나 주님을 기뻐하는지 몰라요. 그러한 사람들을 볼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주님께 받은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드리면 얼마나 즐거워하실까 마음에 감격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정말 인산인해라고 하더니만 인산인해로 사람들이 모여 왔어요. 주님을 사랑해서... 그래서 말씀을 증거하는데 내가 평안한 것은 주지사에게 물어봤습니다. 나 한시간 이상해도 괜찮습니까?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설교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옛날로 돌아가면 마음에 평안하게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하기를 원로목사님이 아니고 원래목사님이다. 여기서는 원로목사님으로 하지 말고 원래하던 식으로 해주십시오. 그래서 그대로 해줬지요. 원래 하던 대로 오래하고 전부 기도하고 나은 사람들 앞에 불러다가 간증을 시키고 원래대로 하니까 참 재미있고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예배시간에는 원래대로 안할 것이니까 조심하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귀중하게 여긴 만큼 우리를 귀중하게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 십일조를 꼭 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십일조는 율법시대에 하던 것이라 안 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내가 십일조를 꼭 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안 내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성경에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십일조를 내면 다른 사람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큰소리 할 수 있는데 저는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로 십일조를 도둑질한 경험이 기억이 안 납니다. 언제나 10분의 9, 10분의 8 이렇게 냈을 때가 많지 도둑질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물질적으로 필요할 때 기도하면 얼마나 담대한지 모릅니다. 주님 보세요. 내가 주님보다도 물질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십일조 꼭 드린 것 주님 기억하지요? 내가 지금 돈이 필요하니까 그만한 돈을 주님 좀 주십시오. 내일까지요. 너무 기다리지 말고 주십시오. 그날에 꼭 생겨나요. 내가 하나님께 물질 구해서 못 받은 적이 없어요.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십일조를 드리면 축복을 받겠다고 한 것입니다. 내가 개척할 때 예화로 종종 드는 유화문씨와 이초희씨 전도에 대한 것을 오늘도 기억합니다. 하루는 주일날 아침에 이초희씨가 머리에 무엇을 이고 왔어요. 그때는 교인수가 적으니까 다 내려주고 악수하고 인사하는데 이게 뭡니까 하니까 십일조입니다. 무슨 십일조를 머리에 이고 옵니까? 쌀입니다. 쌀이요? 열어보니까 쌀 반, 진흙 반 그렇게 되었어요. 무슨 쌀 십일조가 진흙이 많습니까 하니까 주저 앉으면서 울기 시작해요. 그래서 내가 등을 두드려 주면서 ‘울지 말고 말하라고 기도해 줄테니까 말하라고.’ 이 교회에 주의 종이 인도하는 대로 나와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십일조 드리라고 해서 꼭 내게 생긴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번에는 어제 저녁에 우리 남편이 10년동안 술주정뱅이가 술 끊었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함경북도 도청에 나가는 친구들이 모여서 쌀 한가마니를 선물로 주었어요. 다른 것 선물로 줄 것이 없으니까 쌀을 한가마니를 주었는데 그때 가마니는 이런 큰 가마니가 아니고 이런 조그마한 부대다가 보따리도 아니고 부대입니까? 부대에 줬어요. 그 쌀을 보고 난 다음 얼마나 오랫동안 쌀구경을 못했든지 기겁을 했어요 그 부인이... 그래서 그 쌀을 안고서 너무 기겁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데 성령께서 마음속에 십일조, 십일조, 이중에 십일조는 내꺼다. 십일조. 아이구 가난이 얼마나 원수고 미움인데 또 가난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릇가지고 오너라 이것 십일조 떼자! 그러면서 십일조를 부어놓고 난 다음에 기도를 하니까 너무 아까워서 도로 넣자. 하나님이 뭐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가 쌀 못 먹었는데 이것 먹는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 주겠느냐. 도로 부어놓자. 또 도로 부어 놓았다가 아니야 아니야~ 하나님이 그 무서운 가난을 도로 우리에게 주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도로 갖다 놓았습니다. 초저녁에 붓기 시작한 것이 새벽기도할 때까지 부었다 넣었다. 우리 보기에는 우습지만 얼마나 절실한 것입니까?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이 늦어질까 싶어서 입구를 묶지 아니하고 그대로 머리에 이고 오다가 눈물이 눈을 가려서 도랑에 걸려서 자빠졌어요. 이 논바닥에 다 흩어졌어요. 그 논바닥에 진흙하고 다 끓어 모아서 울면서 이제 진흙 반, 쌀 반 해서 가져와요.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우는데 나중에는 그 울음에 마음이 감동되어서 나도 울고 그도 울고 주위에 오는 사람들도 울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진흙에 섞인 쌀을 받으시고 난 다음 그 다음부터 그 집이 점점 생활이 부요해져서 나중에는 우리 교회에서 사라졌어요. 잘 사는 동리로 이사를 가서 잘 사는 동리 교회로 나가고 우리 교회는 옛날교회로 바이바이 당하고 말았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진흙 반, 쌀 반 된 십일조도 기쁘게 받으시고 난 다음 내가 축복해 주었는데 그 축복이 그 집에 이르렀어요. 나중에 그 집 아홉 명의 아들 중에 두 사람은 주의 종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얼마나 같이 하시는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로 역사하려면 반드시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 소득의 십일조는 물론, 회사 이윤의 10%를 사회에 기부하는 사장님도 계셨어요. 미국 한인사회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통하는 ISI의 설립자 김진수 대표는 개인 소득의 십일조는 물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기업 환경 속에서도 회사 수익의 10%를 꼭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 중심의 경영으로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자기 집안 한 구석에서 홀로 창업했던 회사가 500명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사업에서 은퇴한 그는 자선재단을 설립해서 연간 20만 달러를 후원하고, 또 비즈니스 선교로 제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병원의 의사는 십일조 수술을 해요. 돈 많은 사람에게는 돈을 받고 돈 없는 사람에게는 십일조만큼 공짜 수술을 해줘요. 그래서 공짜수술을 받는 10%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십일조를 드리는 모습들은 다양하지만 그 마음은 동일합니다.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얻는 모든 수입의 10분의 1은 주인에게 돌려드린다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꼭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4. 믿고 구하라
그 다음에 믿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이렇게 했으니 알아서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알아서 안 해주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꼭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없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지 아니하면 없습니다. 꼭 하나님께 구하는데 보통 구해서 될 것도 있고 좀 열심히 뜨거운 마음으로 구할 것도 있는데 보통은 여러분, 자고 깨고 일하면서 마음속에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기도가 많습니다. 저는 낯 씻다가도 하나님 알지요? 낯 씻고 있으면서 내가 기도한 것 응답해 주십시오. 자기 전에 침대 올라가기 전에 하나님께 ‘하나님, 꼭 응답해 주십시오.’ 어제 저녁에도 올라가면서도 나 피곤해서 쉬어야 되겠는데 ‘간단히 하겠습니다. 하나님, 내일 아침 설교할 때 목소리가 청명하게 나오게 해주시옵소서.’ 오늘 아침 목소리가 청명하잖아요.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평시에 평범하게 늘 말하는 것으로 해도 되는 것입니다. 좀 열심히 하려면 다른 일 치워 놓고 시간 내어서 하고 아주 긴박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을 때는 금식기도가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다 제켜 놓고 오산리기도원으로 가서 금식으로 기도하면 그것은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답답한 일을 당했을 때 금식기도 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꼭 응답이 와요. 그래서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하나님과 관계가 나쁘지 않고 좋은데 하나님 내 기도 들으신다고 믿고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응답이 와요. 우리 기독교는 기도응답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도응답 받지 못하는 종교가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기도로써 섬기면서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9절로 30절에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신 것을 여러분이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4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하나님께서 보통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을 통할 때도, 불을 통할 때도, 물 가운데서 불 가운데서 너와 같이 하여 건져 주겠다. 성경말씀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닌지라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생이 아니신지라 거짓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여러분 진실로 그 마음을 열어놓고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적당히 넘기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사랑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이 사랑하고 살아계시다는 것을 늘 입술로 중얼거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은 날 사랑하시고 계신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수많은 위험과 박해에 직면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탁자에 손가락으로 “그는 살아 계시다! 그는 살아계시다!(Vivid! Vivid!)”라고 늘 기록을 하고 읽었습니다. 대다수가 교황의 편이었고 모든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는 자기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 말씀을 늘 외웠습니다. 여러분께서 어려운 일을 당하시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자기에게 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마틴 루터가 완전히 종교개혁을 실패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이 배반해 나가는 사람들이 많고 교황이 분노해서 군대를 동원해서 그를 체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완전히 기가 죽어서 힘을 다 잃고 있는데 부인이 저쪽 방에서 통곡을 하고 울고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불행에 불행이 다가왔나? 왜 이러느냐? 일어나서 가보니까 부인이 초상난 집 수의를 입고 발을 뻗고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보! 누가 세상을 떴어?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또 가족 중에 누가 세상을 뜨다니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니까 아니에요 아니에요~ 모든 것이 끝났어요. 뭐가 끝났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뜨셨다구요. 무슨 장난 같은 소리를 하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니! 나는 당신만 믿고 사는데 당신이 이런 것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데 당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뜨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신이 초상집 상주처럼 행동할 수가 있습니까?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세상을 뜨셨어요. 아이고 하나님 이 세상 떴으니 우리는 어떻게 사노? 그 부인이 머리가 좋지 않습니까? 나보다 아이큐가 좋은 것 같아. 다른 설교하는 것보다 효과가 더 발생 되었어요. 당장 하나님께 회개하고 일어나서 용기와 힘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계속해서 오늘 종교를 개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죽은 하나님을 모신 것처럼 힘이 빠졌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시죠? 결코 힘을 놓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여러분 보고 하나님 세상 떴구나. 저 사람 행동하는 것 보니... 이렇게 말하면 절단입니다. 하나님은 돌아가실 수가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이 너무 꾀죄죄하고 적은 것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 같으면 가슴을 펴고 크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살아야 될 것인데 꾀죄죄 해서 하나님 믿으면 그렇게 꾀죄죄하고 있느냐. 네 하나님 얼마나 꾀죄죄하기에 네가 그 모양이냐.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거든요.

필립스(J.B. Philips) 목사님이 쓴「네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책은 “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크신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인생의 크기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이 크십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크신 하나님 모신 행동을 하고 꾀죄죄하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구하거들랑 굵직하게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크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주의 종들이 우리는 적은 교회를 자랑한다.
큰 교회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실제 양심적으로는 큰 교회를 사랑하는데 큰 교회가 안 되니까 적은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데 큰 교회를 세워서 교회 중에 들어오는 수입을 약한 교회들하고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큰 꿈을 아예 꾸고 목회를 하려면 큰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고 입을 넓게 열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가난한 교회와 연약한 성도들과 많이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내 제자 중에 한 사람 큰 꿈을 꾸고서 나가서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 교회 있을 때도 열심히 일 잘했어요.
그런데 우리 교회 조금 못 미칠 만한 교회를 지었었습니다.
짓고 난 다음에 빚을 잔뜩 졌는데 그 빚을 못 갚으니까 하는 말이 뭐냐면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입을 열었는데 너무 크게 열어가지고 입이 찢어져서 지금 고생을 하고 있다.
내가 감동을 받았어요.
입이 찢어질지라도 입을 크게 한 번 열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잘못 믿었다는 말은 안하고 입을 넓게 열라고 해서 넓게 열었는데 그만 찢어져서 지금 피가 나고 어려운데 아물면 된다고... 아물면 되는데 하나님이 아물게 해줄실 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크게 믿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적게 믿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홍해수가 갈라지는 것이 항복하여 들어가서 종이 되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 필립스 목사님이 책에서 기록한 대로 인생의 크기는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여러분이 큰 하나님, 좋은 하나님을 섬긴다면 여러분 크게 좋게 구하고 믿고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을 마음속에 믿고 계시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대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왜 기도 응답 안 해주십니까?
또 안 해주시겠지? 어렵지?
안되겠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에 이 성경구절을 생각하고 기도하세요.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야훼,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라고 했느냐면 독수리는 회갑이 되면 새로 옷을 입습니다.
독수리가 회갑이 되면 바위에 올라가서 햇빛이 비취는데 아무것도 안 먹고 햇빛을 보고 눈을 반짝반짝 하고 있으면 털이 다 떨어져 나옵니다.
몸에서 털이 떨어져 나가고 날개쭉지는 입으로 찢고 바위에 쳐서 떨어뜨리고 나중에는 완전히 통닭처럼 되버립니다.
그러면 도로 새털이 나요.
또 새털이 나고 깃털이 나서 자기가 보니 조금 날만하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입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는 것은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주님을 쳐다보고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낭패, 실망, 절망이 다 사라지고 새로운 꿈과 희망과 용기가 생겨나서 새로운 능력으로 새로운 인간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분명한 목표를 갖고 계속해서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부왕으로 불리는 폴 마이어(Paul J. Meyer)는 “목표 설정을 통해 성공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그 원리는 보험 세일즈를 했는데 나이 27세에 백만장자가 된 것은 목표를 두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항상 목표를 마음속에 꿈꾸고 감사한 결과에 27세에 백만장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이루는 열쇠는 바로 목표 설정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방법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너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삶을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방법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익의 50%를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약속을 평생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족은 전 세계에 40개 이상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 30개가 넘는 사역단체와 자선단체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생하게 꿈꾸고, 열렬하게 소망하고, 진실하게 믿고, 열정적으로 행동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이루어진다.”
내가 늘 여러분에게 말씀하는 것 한 가지인 것입니다.

바라보고 꿈꾸며 뜨거운 마음으로 믿으며 입으로 확신하면 이루어진다.
그가 늘 말하는 것은 제가 마음속에 재밌게 읽기도 합니다.
Whatever you vividly imagine, ardently desire, sincerely believe, and enthusiastically act upon must inevitably come to pass!
분명하고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응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응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본질

序 論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에 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의 완전하신 덕을 반영하는 거울 이지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요 가장 높고 부요한 신적 계시이다.

창세기 첫장에서 우리는 인간 창조의 유독성(惟獨性)을 발견 한다. 하나님 께서 다른 동물들을 창조 하실때는 '각기 그 종류 대로' 만드 셨으나(21,24,25절),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 하셨다.

창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26절의 주동사는 복수 이다. 많은 학자 들이 이 복수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을 시도 보편적으로 삼위 일체를 함의(含意) 하는 것으로 석의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26절은 또한 인간 창조에 앞서 신적 협의(協議)가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 하기도 하는데 이점은 인간 창조의 유독성을 다시금 드러 낸다. 왜냐 하면 다른 아무 피조물에게서도 인간 창조시 나타난 것과 같은 표현을 결코 발견 할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에 관해 잠시 고찰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목표로 하는 우리의 삶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

本 論

1. [形象](셀렘,ࠎࠌ)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의 성경적 용어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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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형상 따라 우리의 모양 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1:26).

위의 본문 에서 [形象](셀렘,ࠎࠌ)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이라는 말이 교대로 사용 되어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개념으로 구분 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그것은 공허한 일이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형상'과 '모양'이란 두 표현 사이에 아무런 접속사가 없다. 그러나 칠십인경과 라틴 벌게이트 역(Vulgata)에서는 και와 et라는 접속사가 첨가 되어 있다. 그래서 '형상'과 '모양'이 전혀 다른 별개의 내용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냐 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 나타난 데로는 '형상'과 '모양'이란 두 표현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차이를 발견할수 없다. 이와 같은 점은 본문과 더불어 다른곳에 나타난 관련 귀절들의 용례(用例)를 살펴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 난다. 창1:26에서는 [形象](셀렘,ࠎࠌ)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이란 용어가 둘다 사용 되었으나, 27절 에서는 단지 [形象](셀렘,ࠎࠌ)이란 단어만 사용 되었고 반면 창5:1에서는 [貌樣](데무드, ࠛࠂࠍࠃ )]이란 용어만 사용 되었다. 그리고 창5:3에서는 두 용어가 다시금 사용 되었으나 1:26과는 역순(逆順)으로 표현 되었다. 그리고 9:6에서는 다시금 '형상'이란 말만 사용 되었다. 만일에 인간 존재의 상이한 국면들을 묘사 하기 위하여 이 두 용어들이 사용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펴 본바와 같이 이 두 용어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용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할수 없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그와 같은 용법은 히브리 인들의 관습 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히브리 인들의 어법에는 반복이 많이 사용 되고 있는데 한가지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종종 두 낱말을 쓸때 가 있는데 이를 연구법(parallelism, 聯句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두 용어가 비록 일반적인 의미에서 유사어로 사용 되었다고 할찌라도 양자 사이에 개념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형상'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形象](셀렘,ࠎࠌ)는 "새기다"(to carve)혹은 "탁마(琢磨)하다"(to cut)는 의미를 가진 어근 으로 부터 유래 되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동물이나 인간을 조각한 모양을 묘사 하기 위하여 사용 되었다고 할수 있고 '모양'에 해다되는 [貌樣](데무드, ࠛࠂࠍࠃ )라는 말은 "비슷하다"(to be like)는 의미를 가진 어근으로 부터 파생 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모양'이란 말은 형상이 닮았다는 사실을 강조 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와 같이 '형상'이란 말이 강조 하는 바는 하나님은 원형이시고(dearchetype)인간은 그 모형(de ectype)이라는 사실이요 '모양' 이란 말은 그 상(象)이 모든 면에 있어서 원형과 일치 한다는 것을 강조 한다. 따라서 두 용어의 연구법(parallelism, 聯句法)적 용례로 부터 추론 할수 있는 사실은 것은 그와 같은 표현 양식을 통해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관념이 드러 난다는 점이다.

2. 성경 신학적 관점(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나타난)을 통해서본 [形象](셀렘,ࠎࠌ)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의 의미

26절과 27절은 인간 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이 두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계획과 목적을 세우신 사실(26절)과 사람을 만드신 사실(27절)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26절을 원어를 직역해서 살펴 본다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

우리가 만들자

사람을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처럼

그리고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그 바다의 고기를, 그리고

그 하늘의 새를, 그리고

그 육축을, 그리고

그 땅 모두를, 그리고

그 땅위에서 기는 모두를(26절)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으려는 목적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 목적은 26절 후반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후반절은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로 시작 된다. 즉 [다스리게] 하는것이 사람을 지은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다섯개의 목적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이제껏 엿새동안 지음받은모든 동식물을 총 망라한 표현이다. 이러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 하셨다. 이 사실은 27절이 잘 말해 주고 있는데 이를 직역 하여 보면

a.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 사람을

b. 그의 형상대로

b.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a. 그분께서 창조 하셨다 그를 (상반절)

남성과 여성(으로)

그분께서 창조 하셨다 그들을 (하반절)

26-2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과정에 대해서 알만한 단서는 찾을수가 없다. 그런 단서는 창세기2:7에 가서야 발견할수 있는데 반면 창2:7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려는 계획과 목적등 여기서 알수 있는 내용이 생략 되어 있다. 이렇듯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 내용에 차이가 생기는것은 기록자가 말하려는 의도 또는 촛점이나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7절에서 강조 하고자 하는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누가 사람을 창조 하셨으며, 둘볁: 지음 받은 사람은 어떠한 존재 인가 하는점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는 언급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함으로써 사람을 창조한 분은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크게 강조 하고 있다. 그 다음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 시키고 있다.따라서 우리가 사람의 존재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면 무엇 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의미를 파악해야 할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문맥에 가장 알맞는 것을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표현은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지을수 있는 독특한 차이점을 찾은 다음 그것을 이 표현과 연관 시켜 본다면 차이점은 단 한가지 인데 그것은 인간은 "다스리느"존재로 지어 졌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다스리는역활"과 연관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으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셨다느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이문맥에서는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6절에서도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지으시려는 목적은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러한 문맥적 이해가 타당 하다는것을 입증해 줄만한 성경 안팎의 증거들이 있다.

고대 근동 에서는 '신(神)의 형상'이라는 표현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였다. 왕이 가진 권위와 그의 통치는 신의 권위와 통치를 대신하는것으로 간주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왕은 신의 권력을 그대로 소유 하고 있는 이른바 신의 복사본(copy)인 것이다. 그리고 복사본(複寫本)이란 원형을 본뜬 것이므로 '형상'(image)이라는 표현으로 나타 내었다. 따라서 '신의 형상' 이라는 표현은 다름아닌 '왕'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차 독자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는신은 하나님 이시다. 그렇다면 일차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표현은 '왕'이라는 개념으로 이해 되기에 충분하다. 온 세상에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다스림을 나타낼 형상 으로서 사람을 창조 하셔서 그로 하여금 세상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께서는 자신의 다스림을 나타 내시려고 인간(남자와 여자)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뜻데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데로 다스림 으로써 그분의 다스림을 피조물 세계에 반영 하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술을 몇가지의 성경적인 증거를 통하여 입증한다면

첫째 증거는: '다스리다'는 동사 "라다"(radah)의 쓰임을 통해서 이다.

이 동사는 구약 성경의 여러곳에 나타 나느데 '다스리다'라는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특이 하게도 왕의 다스리는 행위를 묘사 하고 있다(왕상4:24; 사14:6; 겔34:4; 시72:8; 110:2). 따라서 이 동사가 창세기 1:26, 28에서 선택된 것은 아담의 다스리는 행위가 통치의 행위 임을 시사 하는것이다.

두 번째 증거는: 성경 전체에 비추어 볼때 아담은 분명히 왕의 역활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들수 있다. 우리가 아느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가지 직임(職任)은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이다. 이것은 두번째 아담으로서 갖는 직임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리스도 께서 이 세 직임을 행하시는것은 첫 사람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그런 직임을 행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류의 대표로서 그 직임을 맡아 행하셨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두째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을 살펴 점을 살펴 보았으나 어떤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는지 창조 기사 가운데 정확히 나타나 있다고 확언(確言) 할수는없지만 그럼 에도 불구 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유사성(類似性)을 어느 정도 발견 할수 있다고 보는데 창1:26에서 볼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피조물에 대한 통치(dominium)를 인간 속에 나타나는 신(神)형상 발현(發顯)의 한 국면으로 추론 할수 있는것이다.

3. 조직신학 관점(성경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서 나타난)을 통해서본 [形象](셀렘,ࠎࠌ)과 [貌樣](데무드, ࠛࠂࠍࠃ )]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의 의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각 교파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로마 교회와, 루터파, 의 견해를 간략하게 고찰한후 개혁파 교회의 견해는 여러 신학자들(죤칼빈, 칼바르트, 에밀 부룬너, 벌 카워)의 의견을 검토해본후 박형룡 박사의 교의 신학에 있는 내용을 빌어서 조직신학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논술 하고자 한다. 하지만 본인이 신학적 지식의 짧음으로 인하여 여러 신학자들의 깊은 사상을 올바른 관점(저자의 의도와 논술 목적)에서 제대로 이해 했는가? 하는 문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시인한다.

1) 로마 교회의 견해

로마 교회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초 자연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구분한다.

①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실때 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육체의 불사성(不死性)같은 어떤 자연적인 은사들을 인간에게 주셨는데 이것들이 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한다.

②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인간은 위에서 말한 자연적 은사를 통해서 자연적 의(義)를 소유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식욕, 정욕등 열등한 성향이 있으며 이것들은 그 자체가 죄는 아니나 죄를 위한 기회 또는 연료가 되기 쉬우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방지 하기 위하여 초 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여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주어진 은사 곧 초자연적인 은사로 말미암아 [原義]가 주어 졌으니 이것이 곧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한다. 로마 교회는 이와 같은 주장으로 말미암아 범죄후의 인간 상태를 본래 창조된 대로의 인간은 원의(原義)가 없었으나 또한 죄도 없었고 다만 죄의 결과를 낳기 쉬운 경향을 가진 것 뿐이었는데 범죄후 인간은 다만 원의가 상실 되었을 뿐이어서 범죄한 인간은 창조된 때와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범죄후 인간의 전적 부패 교리를 부정하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견해는 타락의 원인 설명이 곤란하며 범죄후 인간 상태의 심각성을 간과(看過)할 위험이 있다.

2)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사람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좁은 의미에서 제한 하여 이것을 사람의 [原始的 義]와 동일시[同一視]하며 이것이 타락을 통하여 전적으로 잃어 졌다고 결론한다. 즉 루터파는 [靈的 特質](Spiritual qualities)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말한다. 이때 [靈的 特質]이란 참 지식(知識)과 의(義)와 성(聖)을 가리키며 이것은 또한 [原始的 義]라고 불리워 진다. 결국 루터파의 [原始的 義]는 로마 교회의 그것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서 틀림 없다. 이렇게 볼때 루터파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로마 교회가 범죄후에 잃어 버렸다고 말하는바 [原始的 義]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잃어 버린 후에도 범죄한 인간이 동물과 똑같은 상태로 저너락 되지 아니한 이유를 설명할수가 없게 되다.

3) 개혁파 교회의 견해

① 죤 칼빈(John Calvin)의 견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죤 칼빈(1506-1564)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에 대한 이해를 고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데 인간 안에 어느곳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발견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자리 잡고 있는 좌소는 인간의 영혼속이다"라고 말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가 빛나지 않는곳은, 심지어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속의 어느 곳에도 없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오는 세상에서 온전히 회복 될때에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온전히 회복 될것이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원래적으로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아담이 부여 받은 순결성은 이 단어로(하나님의 형상(Imago Dei))표현 된다. 라고 하면서 골로새서3:10과 에베소서4:24에 근거하여 칼빈은 결론 짓기를 인간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원래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타락 하기 전에는 인간은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소유 하고 있었으나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엄청난 파괴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한 인류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그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도말되었다(utterly defaced), 파괴 되었다(destrroyed)고 종종 말하므로 타락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는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연구 해보면 타락한 인간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미워하는 자들 마저도 사랑하라고 권하면서 그 이유를 "그 사람의 악한 의도를 생각할것이 아니라 그들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쳐다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수 있는데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끼친 영향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하나님의 형사어이 전적으로 사라져 버리거나 파괴된것이 아니라고 인정 하더라도 죄로 인한 오염이 너무나도 심하여 이제 남아 있는것은 끔찍하게 기형적이된 형상일 뿐이다"고 했다.

이렇게 부패하고 오염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성령의 역사와 하난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롭게 되어 질수 있으며,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완전히 회복되어 지는 때는 장차 오는 삶이 도래 할때 비로서 완성된다.

② 칼 바르트(Karl Barth)의 견해

이제 우리는 최근의 신 신학자 이며 신 정통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워 지는 칼 바르트(1886-1968)의 견해를 살펴 보려고 한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이성과 지성속에서 발견 되지 않는다. 그는 창 1:27을 주해 하면서 "위의 본문이 너무도 명백하게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은 인간 존재가 대면(confrontation)속에 있다느것을 암시 한다. 인간과 인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결은 대면의 관계를 말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대면적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일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존재 하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도록 규정 지어 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피조적 존재는 만남의 존재라는 사실 - "나"와 "너", "남자"와 "여자"사이의 - 속에 분명한 상응점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러한 대면 속에 인간됨이 있으며 이러한 인간됨 속에 인간의 창조주를 닮은 모습이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류 역사속에서 인간이 실제로 정결한 상태에서 부패된 상태로 전락 하게된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타락"후에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상실될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순전히 관계성으로만 이해 하려는 바르트의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미친 타락의 엄청난 영향력과 그 형상의 갱신의 절실한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은 성경적 인간론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③ 에밀 부른너(Emil Brunner)의 견해

바르트와 동시대 인물이며소위 변증법적 신학을 대표하는 에밀 부룬너(1889-1966)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을 고찰 하는것이 유익하리라 본다. 바르트 처럼 부룬너도 아담의 역사적 실존성과 인간 타락의 역사성을 배격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성의 모든 영역,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능성속에서 발견 되어 진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자신을 스스로 영화 롭게 하기를 원하시고 자신을 나누워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대하여 감사와 반응적 사랑으로 반응하는 피조물이 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랑은 부룬너의 인간이해와 인간 존재 목적 이해의 중심부에 놓여있는개념이다. 또한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는 뜻은 인간은 결코 상실할수 없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도 인간은 그것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경의 두귀절(고전11:7; 약3:9)에서도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도 실제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는 점을 강조 한다. 그러나 부룬너의 이러한 견해에는 몇가지 심각한 의문이 제기 되는데 첫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부룬너는 결국 첫 아담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배격하는 것이며 따라서 제2아담이신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제기 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의 입장은 결국 그가 주장하고 있는 창조와 죄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도록 한다. 세째: 인간의 죄악성 에도 불구 하고 형식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그대로 유지 되었다고 주장하는등의 몇가지 문제점을 갖는다.

④ 박형룡(朴亨龍)박사의 견해

개혁파 여러 교회는 칼빈의 발자취에 따라 다른 교파들보다 훨씬더 포괄적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관념을 가진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독점적으로 사람의 이성적 성질(理性的 性質)로 구성된다는 견해와 이것이 전혀 그의 창조주의 도덕적 일치(道德的 一致)로 구성된다는 견해 사이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여 둘을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위의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고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몇가지 개혁파 입장에서본 사람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요약 할수 있는데

a. 인격 혹은 영혼에서

즉 그의 단순성, 영성, 불현성, 불사성 등의 품질들과 지(知), 정(情), 의(義)등의 심력(心力)들과 자의식및 자결성의 권능에서 자연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b. 원의(原義)에서

사람이 창조 되었을때 참된 지식, 의, 거룩을 나타낸 그 본성(本性)과 지성적 도덕적 완의(完義)혹은 원의에서(엡4:24; 골3;10)도덕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c. 신체에서

그 물질적 실체에서가 아니라 영혼의 영생에 참여 하는 적당한 기관과 하등 피조물계에 주권을 행사하는 기구로서의 신체에서 외면적 신형상이 나타났다.

d. 지상 주권에서

사람의 지상 주권에서(시8:5-6;계5:10) 권위적 신형상이 나타 났다.

⑤ 하문호 교수의 견해

하문호 교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관하여 말하기를

a.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한마디로 말해서 범죄후에 잃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참 지식, 義, 聖)(엡4:24; 골 3:10)등을 말한다.

b.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범죄 후에도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으로서 다른 동물들에게서 발견 할수 없는 理性,과 知識과 良心, 그리고 만물 통치권등 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통하여 영적 생명을 가진 결과로 이너간은 다음과 같은 동물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소유 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간은 영생의 가능성을 가진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할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만물을 주관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4.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 했을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상실하였고 더이상 신(神)형상의 소유자로 볼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5:1은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본문은 타락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임에도 불구 하고 아담에 대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만일 그 당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전적으로 상실되어 버蓡린 상태라고 한다면 본문은 아마도 그와 같이 깃술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인간의 타락 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더럽혀 졌다(Cf. 창6:5; 롬7:18)고는 생각 할수 있으나 타락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전적으로 상실해 버렸다고 주장할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경 본문이 말하지 아니하는 것을 주장하는 격이 되고 만다. 창5:3에서는 1:26의 용례와 같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으나 어순은 역(逆)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담의 아들인 셋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다고 진술되어 있지 아니하고 단지 아담이 그의 모양을 따라 그의 형상대로 출생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만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 후에 비록 죄로 말미암아 부패(腐敗)되고 오염(汚染) 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할수 있다면, 아담의 아들인 셋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라고 추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들은 타락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전적으로 잃어 버렸다는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사실은 창세기 9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 난다. 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다시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 할것이라는 사실이 계시 되어 지고(2절), 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수 있도록 허락 되었다(3절). 그러나 피채로 먹는 행위는 금지 되어 지고(4절) 또한 사람을 죽인 동물이나 사람을 살해한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생면의 피를 요구 하신다(5절). 이와같은 맥락 속에서 우리가 다룰 주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 6절이 나타나게 된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피를 흘릴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사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즉 살인이 죽음 으로써 처벌 되어질 만큼 가중한 죄로 지목 되는이유는 살해된 자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사람을 죽였다고 할때 그 행위는 단순히 한 사람의 생명을 손상 시키는 정도에 머무르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도전 하는셈이 되는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파멸시키는 행위는 발鱁로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 하신 창조주에 대한 범죄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이 귀절들은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의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러한 신(神)형상과 관련된 신약의 중요한 귀절 가운데 하나는 야고보3:9절 말씀이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죄의 문제를 취급 하는중 동일한 문맥에서 혀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또한 사람을 저주 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죄악된 자기 모순 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왜 이와 같은 일들이 상호 모순 된다고 말할수 있는가?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즉 우리가 저주하는 바로 그 대상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피조물들 이기 때문에 사람을 저주 한다는것은 사실에 있어서 그들을 자신의 모양 대로 창조 하신 하나님을 저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구 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 해야 할점은 "지음 받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시상이다. 이 동사는 " ---이 되다." 혹은 "만들어 지다"는 의미를 가진 γινομαι의 완료형 분사 γεγονοται로서 헬라어의 완료 시제는 "결과가 계속 되어 지는 과거 행위"를 묘사 하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인간은 과거 어느 시점에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은바 되었고 지금도 여저너히 그 모양 속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이 야고보 3:9은 우리가 저주하는 인간이 비록 죄로 인하여 오염(汚染) 되었다 해도 - 전적 부패로 표현 될수 있을 만큼 - 신(神)형상이 전적으로 제거 되어지지는 아니하였고 여전히 하나님의 모양 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의 하고 있다.

結 論

신약의 여러 귀절들은 타락 이후의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로의 회복이 요청 되는 존재로 묘사 하고 있으며(엡4:22-24, 골3:9-10), 또한 그와 같은 귀절들은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갱신(更新)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이루워져 가는 점진적 과정임을 시사 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신약이 가리키는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목적은 우리가 더욱 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요 혹은 더욱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는것이다(롬8:29; 고후3:18; 골3:9-10; 엡4:22-24).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우리 안에 회복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신 형상이 우리속에 왜곡 되어 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타락한 인간 일찌라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가운데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또다른 국면은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옳바로 반영하지 못한다는사실이다.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정적인(statisch)성질의 것이 아니라 동적인(dynamisch) 것이며 우리가 향해 나가야할 종말적인 목표라고 할수 있다. 우리는 아직 마땅히 되어 져야할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에 의하여 점점 하나님을 온전히 반영할수 있도록 변화 되고 있는 중이며 미래에 언젠가는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될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螱의 형상 에로의 갱신은 우선적으로 구속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워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노력을 함의 하는 것으로 신약에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새롭게 되는일은 직설적(indicative)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골3:10), 동시에 명령적(imperative)인 요구로 나타낱다(엡4:24; 5:1).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회복은 은사일 뿐 아니라 중요한 성도의 과제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성화의 최종 목적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데 -물론 신인 합일(神人 合一)의 의미는 아니지만-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된다는 의미 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히 될것이라는 표현인데 이를 종말론적 언어로서 묘사 하고 있다(고전15:49; 요일3:2).

參 考 文 獻

박형룡, [교의 신학Ⅲ 人罪論] 서울: 한국 기독교 교육연구원, 1981.
안토니 A. 후크마, [개혁 주의 인간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1.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上] 권수경,이상원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하문호, [기초 교의신학 Ⅲ 人間論] 서울: 한국 로고스 연구원, 1991.
최홍석, [교회와 신학]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김영철, [주님의 주님되심 구약 Ⅰ] 서울: 여수룬, 1992.
카일 델리취, [구약 주석 Ⅰ 창세기] 서울: 기독교 문화사, 1992.
알버트 반즈, [성경 주석 창세기 上] 서울: 크리스챤 서적, 1987.


성전의 본질은 무엇이며, 본질을 잃어버릴 때 일어나는 일(마태복음 21:12~22)

예수님이 다윗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겸손히 어린 나귀를 타시고,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실 분이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마자,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상상 하지 못한 예수님의 행동이다.
성경 안에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행동하셨을까?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 성전의 역할, 성전의 본모습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지금 성전은 그 성전의 본질과 역할과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는 본질과 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성전의 모습을 한마디로 '강도의 소굴'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러나 원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강도의 소굴을 뒤집어 엎어야, 다시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나왔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요청)을 들어주시며,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나와서 기도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사람들이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화를 내며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21장 16절 하반절, 시편 8편 2절 인용
다윗의 시라고 기록된 시편 8편에는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셨다고 기록되었다.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으로 원수들을 잠잠하게 하셨다.

온 땅이 알고, 또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도 알고 외치는데, 어찌 종교 지도자들은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머무셨다.

베다니는 '번뇌하는 자의 집' 또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이다.

예수님은 거기서 마지막 사역을 남겨두시고 번뇌 하셨다.

가난한 자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라(마가복음 11:15~19)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공생애 초기, 그리고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 입성 후에 있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고 환전하는 사람들에 대해 큰 분노를 표출했다.
어떻게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는가?
구체적 장소는? 실내가 아니다. 이방인의 뜰, 특히 그 뜰을 둘러싼 행각을 의미한다.





막 11:17 만민의 기도하는 집 vs. 강도의 소굴

제물: 졸업식장 앞의 꽃장사처럼, 먼 곳에서 제사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제물을 판매한 것은 좋으나 제사장들과 결탁하여 흠있는 제물을 유통했고
성전세 : 유대인의 세겔로 로마 화폐를 환전해서 내도록 했는데 수수료가 무척 높았다.
예수님이 문제 삼은 것은 매매와 환전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성전의 기능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기도하는 집인데, 그 모든 것이 사라져 의식만 남아 있고 利權과 탐욕으로 가득찬 제사장들만 남았기 때문이다. 도둑도 아닌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하시는데, 성전으로서의 우리는 그 본질을 잘 간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전의 본질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까?

1. 성전은 거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3:17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내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내 몸과 영혼에 유익하지 않은 술과 담배를 끊으려 할 뿐이다.
(우리 몸에 유익하지 않은 다른 것들도 금해야 한다.)

2. 만민의 기도하는 집

마가복음 11:17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각자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있다.
성전의 기능은 예배와 기도다.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은 시장하셨다. 

길가에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예수님은 거기로 가셨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에는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예수님은 나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21장 19절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행동과 결과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어보았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태복음 21:20-2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첫째,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뤄진다.

무엇이든지 믿고 기도하는 것은 다 받는다.

둘째,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예레미야 8: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이스라엘)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다.

본질(本質 )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질을 잃어버릴 때, 그 자체로 타락한 것이며, 변질된 것이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강도의 토굴이 된다.
본질의 역할을 다 하는 것만이, 존재의 이유인 것이다. 
성전의 본질은 바로 기도하는 집이다.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길 원하셔서 이 땅에 성전을 세우시고, 성전을 보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기능이다.
그러나 성전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경제 활동만이 남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 활동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성전은 그렇게 존재할 수 없다.
그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의 집이며, 하나님으로 가득한 집이다.
하나님을 만날 때, 경제 활동을 포함한 모든 삶이 질서를 찾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을 회복하길 원하셨다. 

질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는 무의미한 존재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성전에서 경제 생활을 영위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타락한 이스라엘(인류)을 새롭게 하려고 하십니다.
성전, 기도하는 집,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집,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사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믿음으로의 전환된 계기 - 앤드류 머레이

앤드류 머레이는 남아프리카의 네델란드 개혁교회 목사였으며 그가 저술한 많은 책은 지금까지도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 그도 그리스도인이 된 지 10년 후에 똑같은 발견을 했다.
1895년에 그는 이런 간증을 했다. 

"말하자면 나는 일에 있어 그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열심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나의 일을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내 마음은 만족이 없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내 작은 방에서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기던 일이 기억납니다.   
'뭐가 문제일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나를 의롭게 하셨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의 섬김에는 능력이 없지 않은가?'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행동, 나의 불충성, 이 모든 것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가장 열심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삶은 불만족스러웠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신앙 생활 초기 10년과는 대조적으로 지금 내게 주신 것을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나는 자신을 매일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채워질 그릇으로 내어 놓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의 일을 내게서 꼭 이루시겠다는 복된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내가 날마다 배우는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행하시며, 모든 것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의 간증의 골자

1. '내어드림
2. 모든 환경을 져야할 십자가로 받아들임
3. 생명을 체험함

 

 



06-20-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2장 / 산자의 하나님(27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You are badly mistaken!


산자의 하나님(데오스 존톤)
데오스(2316) θεός, οῦ , ὁ, ἡ  

1. 하나님,  2. 사도행전 28:6, 3. 요한복음 1:1
발음 / 데오스 [ thĕ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하나님(마 3:9, 눅 1:30, 행 2:11), 신(행 7:40, 43), 주(행 8:22, 10:33, 롬 10:17), 아버지(고후 1:3)
신약 성경 / 1318회 사용


"산 자의 하나님"이란 말씀에서 "산 자"는 살아 있는 자(자오. zaō. ζάω)"를 말합니다.
이때 살아있다는 것은 육체적 생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떤 제자가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고 간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마 8:21-22).

따라서 산 자는 살아있는 자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호흡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호흡은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영양 섭취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영양 섭취는 곧 영의 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활동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활동이란 세상에서는 자기 직업에 따라 일을 하지만 영원한 생명의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쌓아야 할 상급을 위한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 활동이란 봉사와 섬김과 희생과 헌신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호흡과 영양 섭취와 활동의 근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세상 일을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분법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실천할 때 그 사랑이 머무는 곳에 하나님은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도 만난 자와 함께 계시고 강도 만난 자의 속에 계신다고깨우쳤습니다.

따라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하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랑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던 가르침처럼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행함으로 실천적 사랑의 일군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존톤(2198)  ζάω

1. 살다,  2. 로마서 7:1-3,  3. 다시 살게 되다
발음 / 자오 [ zaō ]
관련 성경 / 살다(마 4:4, 눅 2:36, 롬 7:1), 살아 계시다(마 16:16, 26:63, 요 4:57), 살리다(요 6:58, 롬 1:17, 고전 9:14), 살아나다(행 20:12). [명] 살아있는 말씀(행 7:38).


포도원(290) 암페론(ampĕlōn)  ἀμπελών, ῶνος, ὁ

1. 포도원, 2. 고전 9:7. 비유적으로 사용된 경우, 3. 마 20:1이하

발음 / 암페론[ ampĕlōn ]
어원 / 2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포도원(마 20:8, 눅 20:16), 포도(고전 9:7)
신약 성경 / 23회 사용

상속자(클레로노모스. klērŏnŏ- mŏs)  κληρονόμος, ου, ὁ


1. 상속자,  2. 마태복음 21:38,  3. 히브리서 1:2
발음 / 크레로노모스[ klērŏnŏ- mŏs ]
어원 / 2819와 3551와 어근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상속자(마 21:38, 막 12:7, 눅 20:14, 롬 4:13, 딛 3:7, 히 11:7), 기업(基業)으로 받는 자(히 6:17)
신약 성경 / 15회 사용

I. 상속자, 후사.
 [문자적으로] 마 21:38, 막 12:7.
 [비유적으로]
  a.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경우] 히 1:2.
  b. [신자들을 가리키는 경우] 롬 8:17, 갈 4:7, 히 6:17, 약 2:5.

우크 에스틴 호 데오스 네크론 알라 데오스 존톤 휘메이스 운 폴뤼 플라나스데

개역개정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새번역 27.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생각을 크게 잘못 하고 있다.
우리말성경 27.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 
가톨릭성경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1-12절).
그 후에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어 넣기 위하여 몇 가지 질문을 시도한다.
세금 납부의 문제과 부활의 문제에 관하여 질문했으나 예수께서는 놀랍고도 지혜로운 답변을 하셨다(13-27절).
마지막으로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율법 중의 최고 계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셨다(28-34절).
모든 답변을 다 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질문하신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했는데 어째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35-37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외식하지 말 것을 경고했고, 한 과부의 초라한 헌금 속에 담긴 정성스런 마음을 칭찬해 주셨다(38-44절).

예수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의 잘못, 종교와 정치의 다른 면 그리고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과 바로 다음 장의 예루살렘 멸망 예언 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율법 조항들의 핵심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의하셨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을 형식적으로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일 뿐인데,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요일 4:20).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형제를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믿음은 보이지 않으므로 행함을 통해서 믿음이 드러나야 한다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유사합니다(약 2:17-18).
형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의 이웃과 나의 형제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도 만난 자와 함께 계시고 강도 만난 자의 속에 계신다고설명합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교훈을 균형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래도 하나님 사랑에 좀더 비중을 두는 사고 방식에 익숙해져있습니다.
많은 기독인들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근거 위에서 비로소 이웃 사랑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먼저이겠지만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시적이고 불가분리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우월시하는 사고 방식은 교회를 위한 봉사는 하나님 사랑이고 그 밖의 세상적인 일들을 위한 봉사는 이웃 사랑이라는 이원론적 사고 방식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교회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세상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웃 사랑이 있어야 하고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두 가지 반문을 하시면서 예수는 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는지를 두 가지 이유로 말씀하셨다.

첫번째는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죽음을 극복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두 번째 이유와 더불어 그 첫 번째 이유를 각각 보충 설명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 후에도 결혼이 다시 시작되는 것으로 잘못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한 사람들의 삶에는 정혼도 결혼도 없다.
다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께서 죽음 후에 전적인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실 것과 그와 관련된 눈에 보이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실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질문은 부당한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알지 못하여 부활에 대한 이해가 오경에는 없는 것으로 단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을 하시면서 모세의 책 즉 모세 오경에 호소하셨다. 그리고 불붙는 가시나무 떨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출3:1-6)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확언하시면서 모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셨다. 그들은 비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신 말씀이었다. 이것은 죽으면 끝이라고 이해한 사두개인들의 이해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예수는 결론을 내렸다. 만일 그들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지 않거나 죽음이 끝이라면 그는 진실하지 못한 하나님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이 바로 육체적 부활을 보증해 준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의 대답은 분명히 죽음 이후의 살에 대한 사실을 확증한 것이었다. 이것은 육체적 부활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마가가 기록한 예수의 마지막 교훈은 그들이 부활과 죽음 후의 삶을 부인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이었는가를 강조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3498. 죽은 자(네크로스. nĕkrŏs) νεκρός, ά, όν

1. 죽은,  2. 마태복음 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네크로스[ nĕkrŏs ]
어원 /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죽은(마 10:8, 막 9:9, 롬 1:4), 헛것인(약 2:20)
신약 성경 / 128회 사용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누가복음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현대인)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새번역)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마태복음 8: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헤테로스 데 톤 마데톤)
- 이 어구는 19절에 어급된 서기관 역시 예수의 제자에 속한 자였음을 암시해 준다.
즉 '또 하나'란 말의 원어 '헤테로스'(another)는 신약성경에서 '알로스'(다른 하나의, 같은 부류 내의 또 하나의)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데, 이는 분명, 앞절의 서기관 외에 또 하나의 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제자'란 자신의 전(全) 삶을 예수께 헌신하고 다른 모든 생활을 모두 다 내팽개치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예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의미하는 것(요 6:66)으로 볼 수 있다(19절).
왜냐하면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부친을 먼저 장사(葬事)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이런 요청이 거절당하기 이전에 이미 제자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 질문을 던진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 곧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고 다름 한 사람 곧 제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람만이 예수의 제자였다고 단정지을 수 없으므로 둘 다 예수의 제자에 속했던 자들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주여 나로 먼저
- 이 두번째 사람은 예수께로 소명받은 제자가 추구해야 할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욕망, 곧 예수를 따르고 싶은 열정과 자시의 의무를 등한히 하고 싶지 않은 소망 가운데서 망설이고 있었다.
실로 앞절의 서기관은 열정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반면 이 삶은 매우 소심한 신앙 태도를 보였다.
진정 그는 제자의 길이 차선(次善)의 신앙으로써가 아닌 최선의 신앙으로써 상황을 초월하여 예수를 좇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내 부친을 장사하게
- 당시 예수는 전도의 걸음을 재촉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 제자는 전도보다 먼저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 연로한 아버지를 섬기다 그가 죽으면 전도의 길을 따라나서겠다고 한 것
(2) 실제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잠시 가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뜻
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전도 사업에 우선하는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즉 이 제자는 무엇이 더 급하고 중요한 문제인가를 혼동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율법의 의하면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의 척도는 제 5계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된 자는 반드시 자기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이었다(출 20:12; 신 27:16).
물론 나이든 부모를 노후에 봉양하는 것 역시 장례에 관계된 의무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이같은 개인적 효도보다 더 우선되는 인생의 최고 급선무(急先務)는 그리스도 복음의 선교 사역이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 이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란 부자(父子) 윤리조차 무시하는 불효 막심한 반(反) 도덕적인 종교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로 이 말씀은 인륜과 도덕을 초월하여 계신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이해한 다음, 설명되어야 하는 말씀이다.
더욱이 교리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장례 절차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적 윤리를 알지 못하거나 또는 무시해서 이처럼 비윤리적인 것처럼 보인 용어를 선택한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우선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죽은 자'란 말의 의미
를 살펴보면 그 뜻을 두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죽었다는 말을
(1) 어떤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말
(2) 그 사물이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롬 7:4),
죄에 대하여 죽었다(롬 6:11)
세상이나 율법, 죄 등이 우리 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 되며, 이는 우리가 그런 것들에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여기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우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즉 '내일에 무관심한 자, 곧 영적인 사망자들 그리고 죄안에 죽어 있어 우리와 관계없는 자들'로 하여금(엡 2:1) 죽은 자들을 돌보게 하라는 것이다.

즉 영적으로 죽어버린 자들이 육적인 죽음을 맞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적 근심에서 자유한 상태로 복음 선교에 참여해야 했다. 예수께서는 이 제자의 우유 부단한 면을 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10:37)라고 재차 가르치신 바 있다.
정녕 죽은 자를 돌보는 일은 좋은 것이나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이보다 더 좋은 더 영원한 일이다(Chrysostom).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로 보면 “εγω ειμι η αναστασις και η ζωη”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 수 있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죠.
즉,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말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주관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이 예수는 이단이요 신성모독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1:1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이단도 아니고 신성모독자도 아니고 바로 너희가 믿고 섬기는 그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렇게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까? 네! 맞는 말이죠.

오늘은 이 부활에 대해서 함께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나옵니다.

하나는 불완전한 부활이구요 하나는 완전한 부활입니다.

불완전한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지만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부활입니다.

이를 완전한 부활과 구분한다면 소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완전한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난 후 완전히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는 부활입니다.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이죠.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부활의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등장하는 나사로이고 완전한 부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먼저 불완전한 부활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인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살았던 동네의 이름은 ‘베다니’라는 곳인데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3km 지점 정도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자주 나사로의 집에 방문을 하시고 신세를 지기도 하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방문하면 마리아는 그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느라 분주했지요.

베다니는 히브리어로는 ‘베트-아니’인데 이는 ‘가난한 자의 집’, 혹은 ‘고뇌 자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어떤 동네인지 아시겠지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문을 들으셨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사로의 병을 고치러 가신 것이 아니라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빨리 안 가시고 이틀을 더 머무셨을까요? 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을까요?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당시의 사람들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니까 바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달려 나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요한복음 11장 21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빨리 오셔서 우리 오라버니의 병을 고쳐주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텐데!”라는 원망이 섞인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 안에는 예수님이 병을 치료할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11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자 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11장 24절입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갑자기 왜 마지막 날 부활의 때가 등장하는가? 마르다는 바리새파적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부활과 천사와 영혼의 존재를 믿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이렇게 유대적인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능력이 지금 당장 자신의 눈 앞에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마르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요한복음 11:25-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마지막 날에도 너희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겠지만 지금 내가 생명의 능력으로 너희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려주겠다!” 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지만 마르다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할 때에도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장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 이미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해서 냄새가 납니다! 죽은 것이 확실하니 돌을 옮기는 그런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던지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11장 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내가 한 말을 좀 믿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시고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이고 수건을 얼굴에 싼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진짜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만 보고 마르다가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마르다는 매우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을 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거의 베드로급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다만, 한 가지, 이 대목에서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한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다!라는 바리새적인 신학 지식, 그리고 이미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여 생명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생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능력을 한계지은 것이죠. 아니, 아마도 자신의 지식을 뛰어넘는 이 부분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신학적 지식을 듣고 보고 배웁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여가고 신학적 지식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지식 안에 가두어버리죠.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지식으로 제한해 버립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말은 A라는 상황에서 항상 B로 행동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우리를 향한 자비와 사랑 등 하나님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항상 어떤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A라는 똑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이 때로는 B로 행동하실 수도 있고 때로는 C로 행동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하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말고 항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A라는 상황에서 나에게 B로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C로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판단과 행동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법으로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은 불완전한 부활 즉 소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난 나사로는 다시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부활, 완전한 부활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부활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후에 다시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그런 부활이죠.

이에 대해서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우리는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순간에 홀연히 다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몸은 썩고 죽는 몸입니다. 이 몸이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순간 썩지 아니할 몸,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부활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나팔은 뭘까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려주신다고 하시면서 먼저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의 봉인들을 하나씩 떼시는데요, 이 봉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특정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 번째 인을 떼니까 흰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활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두 번째 인을 떼니까 붉은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땅에서 평화를 제하고 서로를 죽이게 합니다.

세 번째 인을 떼니까 검은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극심한 기근을 의미하는 것이죠.

네 번째 인을 떼니까 청황색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사망이고 음부가 그 뒤를 따르는데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생명 있는 것들을 죽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니까 순교자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섯째 인을 떼니까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고 달이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집니다.

일곱째 인을 떼니,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들고 등장합니다.

첫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습니다.

두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졌습니다.

세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물의 삼분의 일이 쓴 물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네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렇게 됩니다.

다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을 열어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와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로 나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괴롭힙니다.

여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가 놓임을 받아 사람 삼분의 일을 죽입니다.

이제 몇 번째 나팔이죠? 일곱 번째 나팔, 즉 마지막 나팔입니다.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되어 사람들이 홀연히 다 변화되어 더 이상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 전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부활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즉, 더 이상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부활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몸으로 영원히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초대교회에서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났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졌고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주일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에 부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완성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초대교회 때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함께 모여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우리도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죠.

우리 교회는 주로 1년을 주기로 하는 절기를 지킵니다.

부활절이라는 절기가 있는데요,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 부활절을 춘분 후 만월이 지난 바로 다음 주일로 지킵니다.

음력이죠. 그래서 매년 부활절의 날짜가 조금씩 바뀝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보냅니다.

이 사순절은 40일 동안 지키는 절기인데 원래 초기에는 부활절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훈련을 받는 기간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기에 가장 좋은 날은 부활절이죠. 따라서 초기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세례를 주었고 그 전에 세례를 위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사순절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다른 교인들도 이에 동참하며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쁨으로 부활절에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초기 사순절은 세례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에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순절의 초점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참회하고 이에 동참하는 의미로 조금씩 변화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따라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그런 문화가 사순절 기간에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참회와 회개로 끝나는 절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절기로 사순절을 지키면 참 좋겠지요?

이러한 사순절 절기는 40일 동안 지키는데요, 7주간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죠? 7주간이면 49일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40일이 될까요?

먼저 사순절은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는 수요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2일이 빠져서 47일이 되지요.

그리고 7주간 중에서 주일은 다 뺍니다. 그러면 7일이 빠져서 딱 40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일은 왜 뺄까요?

1년 주기로 부활주일은 한 번이지만, 사실 매 주일이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기뻐하고 축하하는 날이지 슬퍼하거나 참회하는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일은 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순절에서도 주일을 제외할 만큼 초대교회부터 항상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부활이 미래적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사실 외에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도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라고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죽음에 매여 계실 수 없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다!”

이렇게 증언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이 또 묻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죽임을 당하셨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죄가 들어왔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완전한 제물로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 있지 않은, 그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은 완전한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권세와 능력으로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에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지?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런 경험들 다들 있으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의심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1차 박해는 로마의 네로 황제라는 사람에 의해서 발생했는데, 로마에 발생한 대 화제를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래서 이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들 대부분이 이 때에 순교를 하게 되지요.

이렇게 매우 힘겨운 박해가 겨우 지나갔는데 또 A.D.90년경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또다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의 공포는 더욱 극심했습니다.

왜요? 이미 1차 박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때만 해도 학창시절에 매를 맞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여러 명이 매를 맞는 경우가 있었지요. 그런데 매를 처음 맞는 사람이 더 공포스러울까요? 아니면 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더 공포스러울까요?

당연히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매를 맞고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계속 증폭되는 것이죠.

기독교인들이 처음 네로에 의해 박해를 받을 때에는 박해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죠.

그런데 또다시 그런 박해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시작부터 너무 겁에 질려버렸습니다.

그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무섭고 두려운 책이 아니라 힘과 용기를 주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기록했는데요, 당시 사도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이라는 곳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사도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환상 중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며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면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흰 양털 같은 머리와 털을 하시고 불꽃 같은 눈을 하고 계셨으며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일곱 금 촛대는 무엇일까요?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은 무엇일까요?

일곱 교회의 사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며 일곱 별을 오른 손에 쥐고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와 성도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17-20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구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너희의 눈에 보이는 그 로마의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아니다! 전에 죽었었지만 지금은 부활해서 살아 있는 내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보살피고 있다!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요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왕이나 대통령이나 권력자나 기업가나 강대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왕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고백이었으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의 삶과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는 살아있는 자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내가 가졌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다”

그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06-21-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3장 / 깨어 있으라(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Be on guard! Be alert! You do not know when that time will come.

▣ 그 날을 준비하라

이솝우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자와 당나귀, 여우 셋이서 힘을 합해 사냥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나누는데, 사자가 당나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똑같이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자는 공평하지 못하다 하면서 당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한테 나누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 몫으로 돌리고 자기는 쥐꼬리만큼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사자는 흡족해 이제야 공평하게 되었구나 말합니다. 사자가 여우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지혜를 생각해 냈느냐" 그러자 여우가 대답하기를, "어떻게는 뭘, 당나귀 죽는 것보고 생각해 냈지".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여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들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병들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준비하셔야 합니다.

성경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중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날' 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창세기 7장 11절입니다.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 창들이 열려" . 여기서 그 날은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13장 19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었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날 역시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심판의 날인 그 날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 종말은 언제 오는가

먼저 종말에 관해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말로는 똑같으나 영어로는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는 마지막 날들(last days)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the Last Day)이다.
처음에 말한 것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의 모든 기간을 말하고 두번째 말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말세지말)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두번째 말한 것만을 말하기 때문에 혼돈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두번째 말한 말세지말은 언제인가?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0절)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그 날을 꼭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여러 번 주님의 재림의 날을 예언하여 물의를 일으킨 소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최근 한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 주장을 기억하고 있다. 주님께서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자기들은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단이다.
이런 시한부 종말론은 인류역사 6000년이란 잘못된 역사관과 왜곡된 성경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종말이 언제 올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초대교회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종말론에 관한 혼란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종말)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
그러나 바울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관한 혼란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 2:2)
그러면서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나니”(살후 2:3)라고 예언하고 있다. 비가 올 때에는 먼저 바람이 불고,구름이 끼고,날씨가 후텁지근하듯이 종말에도 먼저 여러 징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는 네 가지 징조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고 둘째는 민족이 민족을,나라가 나라를 대적해 일어나고,셋째는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게 되고,넷째는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때에야 끝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 24:14).


▣ 반드시 성취될 재림

우리는 이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땅위에 오시리란 구약의 예언 회수는 456회인데, 주님의 재림 예언 회수는 신구약에 도합 1518회(신약에만 300회)라고 하는 사실을! 456회 예언된 예수님의 초림(初臨)은 성취되었는데, 1518회나 예언된 재림은 성취되지 않을까? 우리는 몇 천 번이라도 대답하기를, 그 약속은 이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그대로 지키시는 어른이시다. 그의 약속은 곧 사실과 같은 것이며, 진리자체이다. 그는 여러 천년을 앞두고, 약속하시며, 기약이 이르면 성취하신다.(계1:7-)

▣ 목숨의 소중함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신약 성서는 종말론적 관심이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입니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썼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습니다. "온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마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합니다(벧후3:3).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듭니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세계를 알고 깨어 근신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이테.  γρηγορειτε. Be alert!. Keep watch!)

1127.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1. 깨어 있다,  2. 정신차리고 있다,  3. 마태복음 24:43
발음 / 그래고리오[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어 있다(마 24:43, 막 13:34, 눅 12:37), 일깨다(행 20:31, 계 3:2, 3), 깨다(살전 5:6, 벧전 5:8, 계 16:15)
신약 성경 / 22회 사용

  깨어 있다, 경성하다.
  • a.  [문자적으로] 마 24:43, 26:38, 40, 막 13:34, 14:34,37, 눅 12:37, 39.
  •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 24:42, 25:13, 26:41, 막 13:35, 37, 14:38, 행 20:31, 고전 16:13, 살전 5:6,10, 벧전 5:8, 골 4:2, 계 3:2, 3, 16:15.

마태복음 24:42-43a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 그 날과 그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요한계시록 3:3 / 회개하라!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16:15 / 자기 옷(행실)을 지키라!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베드로전서 5:8 / 마귀가 삼킬 자를 찾느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골로새서 4:2 /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미혹(4105)  πλανάω 
    1. 길을 잃게 하다,  2. 그릇되게 인도하다, 3. 길을 잃다

    발음 / 프라나오[ planaō ]
    어원 / 미래 πλανήσω, 제1부정과거 ἐπλά- νησα, 수동태 완료 πεπλάνημαι, 제1부정 과거 ἐπλανήθην, 4106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길을 잃다(마 18:12,13), 오해하다(마22:29, 막12:27), 미혹받다(마24:4, 고전6:9), 속다(고전15:33, 딛3:3, 약1:16), 속이다(갈6:7), 속다(고전15:33, 딛3:3, 약1:16), 속이다(갈6:7, 요일1:8), 미혹되다(히3:10, 5:2, 벧후2:15), 미혹하다(계13:14), 유리하다(히11:38), 꾀다(계2:20, 12:9)
    신약 성경 /  39회 사용


    • 마가복음 13장 내용 분해
      13:1-4. 성전 본 후 제자들과 한 문답.
      13:5-13. 이 세상의 끝, 즉 재난의 올 일의 예언과 경고, 격려.
      13:14-23. 대환난, 즉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것이 예표하는 세상의 끝.
      13:24-27. 영광 주의 재림, 즉 재림의 그리스도의 지상 현현.
      13:28-32. 무화과나무의 비유.
      13:33-37.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경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다(1-2절).
      감람산에 올라가사 제자들에게 종말에 일어날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각처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전쟁과 지진이 일어나고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고 해와 달과 별의 권능이 흔들릴 때 인자가 구름 타고 영광 중에 온다고 말씀하셨다(3-27절).
      그리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종말의 때는 알지 못하지만 대략적인 때는 알 수 있을 터이니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셨다(28-37절).

       
      마가복음 13장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세상 종말에 있을 사건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운명을 예언하신 후에 감람산에서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마지막 날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예언을 감람산에서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람산 강화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초림과 재림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 사람들은 메시야가 한번 오는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메시야의 예언은 초림(初臨)과 재림(再臨)으로 구분합니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두 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평면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은 초림의 메시야와 재림의 메시야를 하나의 평면적 화폭에다 동일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3장에서 묘사된 종말의 성격도 이와 비슷합니다. 
      일반적으로 종말(終末)이란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모든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끝에 오는 우주적 종말도 역시 종말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 13장은 이와 같은 두 가지 성격의 종말을 동일한 화폭에다 평면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주후 70년에 일어난 사건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버 리는 일은 우주적 대종말 사건을 말합니다.
      두 가지를 한 화폭의 동일한 평면 위에 묘사하였기 때문에 종말의 사건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종말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종말의 시대가 언제 끝날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항상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종말론적 신앙 즉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어 있다는 신앙은 오늘이 아닌 지금이 종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늘 깨어서 기도하며
      늘 깨어서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시대가 어둡고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는 항상 종말론이 득세했다.
      현세적인 암울함을 미래적인 희망으로 견뎌내려는 몸짓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말론은 대체로 현실도피적인 종말론이었다.
      그것은 성경적인 종말론적 신앙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종말이 구체적으로 언제라고 주장하는 모든 시도들 역시 배후에는 현실도피적인 종말론이 도사리고 있다.
      성경적인 종말론은 언제 종말이 오든지 동일한 신앙과 동일한 삶을 살아가며, 항상 종말을 소망하며 내일 종말이 오는 것처럼 살아가는 신앙과 삶이다. 

      5절. “주의하라”(플레페테, 조심하다, 경계하다)

      가르침 전반에 나타난 경계하라는 외침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이름을 사칭하며 다니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 위기 시기에는 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날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내가 그로라”라고 주장할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의 형식 속에 표현되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7-8절.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해서 종말이 왔다고 생각하는 잘못에 대해 경고하셨다.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전쟁의 소문이 멀리서 들을 때마다 놀라서 하던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서 일어나는데 이것들은 인간이 번역과 죄의 결과로서 허락된 전쟁을 포함하고 있다. 종말 이전에 얼마 동안의 기간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각 시대마다 각 시대의 전쟁과 천재지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역사는 새로운 메시야 시대의 출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독특한 타국에 나간 집주인의 비유는 계속해서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 있다는 것은 맡은 일에 충실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는 비유를 이 비유를 문지기와 다른 종들 사이의 구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셨다. 그들은 모두 영적인 위험과 기회들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책임이 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을 대표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고, 율법을 알고 있으되 행하지 않았으므로 멸망까지 받았습니다. 사람이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은 모르고 죄를 짓는 것보다 더더욱 하나님의 심판을 무섭게 받습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헛것이라 했습니다(약 2:).
      우리가 말세에 대한 교훈을 받았으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경건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참다운 뜻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려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42-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주님 오시는 날은 신부된 교회와 신랑되신 예수님의 만남으로 성경은 비유하고 있습니다(마 24; 계 19;).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 비유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불에 기름을 미리 준비하고 켜서 신랑이 언제라도 오시면 맞이할 준비를 잘 하였던 관계로 마침내 신랑이 오셨을 때 맞이하였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골로새서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대환난시에 공중휴거를 믿고 있으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불현듯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지식이 겸하고 믿음 안에서 영감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알고 주께서 강림하신 것도 도적같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전 5:4-5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
      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라는 말씀에서 증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 영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밝은 영감으로 두려움이나 갑자기 임하시는 공포가 아니라 소망 가운데서 환난을 겪으나 뜻을 알고 상급을 향하여 인내하고 주를 바랄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과 그 구원이 하나님의 계시로 인하여 얻어진 은혜임을 찬양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엡 1:).
      그럼에도 깊은 신앙인의 영감된 교훈을 해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이 알미니안주의자들처럼 우리의 의지로 불안하게 결정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하나님의 구원을 경건하고도 귀하게 여기면서 우리에게 역사하신 구원의 완성을 얻을 때가지 교만하지 말고, 영적으로 잠자지 말고, 떨림으로, 즉 감사와 경건과 조심 가운데서 주의 거룩하신 은총의 구원을 달성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종말에 가까워가는 징조들이 일어나는 이 시대에, 베드로의 권면을 듣고 새로운 결심과 기도가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베드로후서 3:11-13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서 주의 임하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신앙인의 참다운 승리를 가져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βλέπω 스트롱번호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발음 / [ blĕpō ]
      관련 성경 / 보다(마 5:28, 눅 6:41, 요 1:29), 보게 되다(마 12:22), 뵙다(마 18:10), 주의하다(마 24:4, 막 8:15, 눅 21:18), 삼가다(막 4:24, 눅 8:18), 보이다(막 8:23), 조심하다(막 13:9, 고전 8:9), 돌아보다(눅 9:62), (눈이)밝아지다(요 9:7).
      신약 성경 / 133회 사용


      말세에 나타날 징조들(디모데후서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세에 나타날 징조들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무정하며, 사나우며, 쾌락을 좋아하며, 경건의 능력보다도 경건의 모양만 갖추는...."

      정말 2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지만 요즈음의 세태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갈수록 메말라가는 인심과 이기적인 성정, 돈이 최고가 되는 세상, 이해관계가 조금이라도 복잡해지면 칼부림이 일어나고, 겉으로만 거룩한 척 경건의 모양만 갖추는 신앙... 말씀은 정확하게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 누가복음21:8-11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은 말세의 나타날 징조에 대해 물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for many shall come in my name, saying,I am Christ

      ​수많은 사이비 종교 집단의 가장 큰 특성은 바로 교주인 "자기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ㅇ홍'도,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 증거장막 성전 '이ㅇ희'도 모두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신천지 이ㅇ희는 죽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요즘은 그가 나이 늙고 죽을 것 같으니 너무 수고해서 하나님이 데려갈 것 같다고 했다는데... 그것을 믿고 추종하는 신도들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은 안 믿고 왜 그의 말은 믿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누구나 죽음은 정해져 있다고, 사람이면 다 죽는다고 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9:27)

      ​사람이면 누구나 정해진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다. 그가 죽지 않으려면 늙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ㅇ희는 구순이 다 된 힘 없는 인간이다. 신천지는 처음부터 사람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내지 않고 미혹하고, 서로 가까워지면 말도 안되는 왜곡된 복음을 이야기하며, 본격적으로 수개월 간의 교육을 통하여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에, 신천지라는 곳을 인지할 시점이면 이미 빠져 나올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복음이 정확히 서 있지 못하면 그냥 끌려가는 줄도 모르게 빠져버리고, 교주가 하는 행태도 분간을 할 수 없는 그런 지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말 정말 안타깝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세 때가 되면 당신의 자리에 앉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국가간의 전쟁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제1,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 전쟁 등, 그 수많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불청객이지만, 전쟁은 평화로움을 깨고 좀 더 향유할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기록된 말씀에 따르면 말세가 가까우면 국가간의 전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의 상황은 지금까지의 평화무드에서 냉전 상태로 점점 흘러가는 느낌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국지적인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세계대전 즉,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황금돔, 즉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 중인 황금사원 자리를 두고 전쟁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그 자리는 유대인이나,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모두의 성지다. 원래 그곳은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던 그 자리이기 때문에, 또 솔로몬 성전,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가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게 함락당한 자리라, 유대인은 그 자리에 이제 제3성전을 지으려고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다. 통곡의 벽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이다. 이슬람은 그 자리가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이 승천한 자리라고 한다. 지금은 그들이 모스크로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 자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자리다. 그래서 그곳은 세 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온난화, 이상 기후, 화산, 지진, 쓰나미, 전염병...

      지구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다.

      오존층이 구멍이 크게 생기고 기후환경 문제로 곳곳에서 화산과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한다. 남극과 북극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여의도 수십 배 만한 빙하가 갈라지고 흘러내린다. 한반도에도 이젠 겨울엔 예전처럼 눈이 안오고 있다. 과거보다 더 잦은 이상 기후로 지구 곳곳이 고통스럽다. 또 지진은 언제 우리 가까이에 또 나타날지 모른다. 안전하다는 우리나라도 최근 동해안에서 지진의 기운이 조금씩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이젠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할 때가 넘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서는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고, 지금 팬더믹으로 퍼져 나가는 코로나와 같은 온역으로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 유행병은 전에 없이 확산되는 감염병인 것 같다. 앞으로도 이 뿐만 아니라 또 무슨 유행병이 또 다가올지 모른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21:29-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사람들은 이 시대를 보면서 ‘말세(末世)’라고 말한다.
      말세에 나타날 징조를 조금씩 체감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피부로 다가옴을 느끼지 못한다. 갈수록 우리 마음이 굳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외면하며 농담으로 아주 우습게 여겨버린다. 그래서 더더욱 이 말세가 다가오는 시점에 그 마음에 영원에 대한 울림이 오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피폐해져 가는 것을, 또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자들을 예견하시고,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말씀하고 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 베드로후서3:5

      *기롱 : 실없는 말로 시시덕거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약속했다고? 웃기고 있네, 오늘도 어제처럼 해가 떴고 수천 년 전 처럼 변함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데 무슨 말세같은 소리야? 그래 자주 듣던 소리로 좋게 표현한 말이다.ㅎ

      시편 73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 시편73:16-19 -

      ​제발 우리 모두는 절대로 ‘저희’ 안에 들어가지 말자.


      말세의 징조에 관하여

      오늘날 한국 교회에 난무하고 있는 비 성경적인 시한부 종말론에 대하여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성경적인 종말론을 확립하여야 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견해라고 생각된다.
      말씀을 올바로 알지 못할때 이단 사상에 동요되며 미혹받을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하고확고한 성경관과 말씀에 기초한 올바른 신앙관이 요구되는 것 이다.

      제한된 지면을 통하여 종말에 대한 전체적인 부분들을 살펴볼 수 는 없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종말론의 한 부분인 말세의 징조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때에 이런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3-14)

      성경에서 말세(last times, 카이로스 에스카톤)에 대한 개념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세상끝의 마지막 한 시점일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전 기간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성격이 현재,과거,미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경에서 징조(sign, 세메이온),특히 시대의 징조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거나 재림을 선행하는 사건들이나 상황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진다.

      말세에 나타나는 징조들을 구분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1.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징조들 1)모든 나라에 복음이 선포됨 먼저 말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이전의 대 사건들에는 첫째,복음이 모든 민족과 국가들에 전파되어야 함을 보여준다.(마24:14,막13:10,롬11:25)

      *1)이 징조에 관하여는 이미 구약이 예견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세가 곧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 이며(욜2:28)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52:10,42:6,40:5)

      *2)또한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는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24:14, 막13:10)

      *3)이것은 전 세계 인류 한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말씀은 각 나라마다 복음을 접할 수 있게 되어 복음의 영향력을 받는 때를 말한다고 볼 수 있으며 복음은 모든 민족들에게 결단을 요청하는 하나의 증거물로써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의 선포"는 재림의 하나의 분명한 징조인 것이다.

      2)이스라엘의 회심.(슥12:10,슥13:1,롬11:25-29) *4)

      롬11:26의 "온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를

      의미하며 여기서 "충만"(pleroma)은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며 결국 이스라엘의 많

      은 수가 세상 끝날에 주님께 돌아옴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충만함이 구원을 얻는 일 속에 성

      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의 구원에 대한 징조 자체가 그리스도의 다

      시 오시는 시기에 관해 정확하게 예측해 주지는 못하며 이 징조는 다만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모여지는 것 처럼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

      간 동안 계속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개종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이

      확실하다는 징조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유대인을 향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얼마나 중요

      한가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1. 환난

      환란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는 원수들에 의한 대적의 표시인 것 이다.
      이 환란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예레미야와 다니엘)에 의해 예언되었다.(렘 30:7,단12:1) *5)

      신약에서는 에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세상 끝날에 관한 문제가 서로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 24:3-51,막 13:3-37, 눅 21:5-36의 예수님의 종말론적 말씀은 먼 미래에 발생 할 사건들과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사건(예루살렘의 멸망)을 함께 묶어 선포하고있는데 여기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환란의 징조가 단지 세상 끝에만 국한되어 발생한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며 오히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환란의 때로 특징지우는 것이 바람직 하다 하겠으며 환란의 징조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는 정확한 날자를 추산해 주지는 못하는 것 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 계속적인 환란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며 환란의 징조는 우리로 하여금 깨어 각성하게끔 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환란과 박해를 만나게 될때 이 것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이 점점 가까와 오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인 것이다.

      2. 배도

      하나님의 왕국에 반항하는 시대의 또다른 징조는 "배도"로써 배도는 이미 구약에서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광야 시대에 대 규모적 배역하는 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맛보게 된 것이다.
      또한 사사 시대,남북 왕국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의 배도와 패역함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포로로 끌려가는 비침한 결과가 초래하였음을 역사서와 예언서속에서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는 두가지 측면에서 배역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제 되는 배도함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것을 말하였고,둘째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Parousia)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에 대하여 신약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마 24:10-12, 24).
      따라서 배도하는 일은 말세의 징조들중에 하나이나,배도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정확하게 추정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다만 이 시대속에서 믿음안에서 굳게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하면서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3. 적그리스도(Anti Christ)

      하나님을 대적하는 징조로써 가장 현격한 징조는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적그리스도(anti christ)는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취하는자,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를 반대하는 자로 설명되며 적그리스도는 어떤 사물이 아닌 인격적인 존재로서 설명할 수 있다.
      이 징조 역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네 짐승에 관한 다니엘의 꿈속에 언급되고 있는 "작은 뿔"(단 7:24-26),*6) "북방왕"(단 11:36)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우리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은 이미 구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안티오커스 에파네스(antiochus epiphanes:헬라 지배시 유대의 폭군)나 디도(titus: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 장군)는 장차 올 적 그리스도의 모형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살후 2:3 이하의 "불법의 사람"의 출현은 적 그리스도와 동일시 할 수 있는데 이 불법의 사람은 큰 배도 사건후에 나타나며, 이는 하나의 인격체이며, 숭배의 대상이며, 불법의 사람은 대의 명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임수와 기적과 거짓 가르침을 사용하게 될 것 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시 완전히 무너뜨림을 당할 것이다.
      따라서 다른 징조들처럼 적 그리스도라는 징조도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면면히 나타나고 있으며 각 시대는 각 시대 특유의 적 그리스도적 행위가 나타나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결정적인 적 그리스도 한명의 출현을 예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적 그리스도와 그들의 가르침과 행위들에 대하여 조심하고 경성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반영하는 징조들에는 전쟁과 지진과 기근들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런 징조들이 언급되고 있다(마 24:6-8, 눅 13:7-8, 21:9-11) .
      전쟁과 지진과 기근들의 징조 역시 이미 구약에 그 선례를 갖고 있는데 "민족이 일어나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항하리라"라는 말씀은 사 19:2, 대하 15:6에서 인용된 문구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역사속에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사실을 묘사하기 위해 지진이 종종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 5:4-5, 시 18:7, 시 68:8, 사24:19,사 64:1) *7)
      기근에 대한 예언은 렘 15:2, 겔 5:16-17, 겔 14:13에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징조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증표들이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지진,기근등과 같은 재난때문에 죽거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특별한 대상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은 자들에 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 이다.(눅 13:4) *8)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증표들이라는 뜻은, 현 세상이 하나님이 저주 아래 놓여 있으며(창 3:17)하나님의 진노가 끊임없이 사람들의불 경건함과 악함을 향해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인 것 이다(롬 1:18) *9)
      즉, 이러한 징조들은 우리로 하여금 참 재판장이 문 앞에 서 계시다(약 5:9)는 심판의 임박성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는 것으로 우리는 이러한 징조들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기간을 특징지워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계산하여 예언하였으나 모든 예언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날과 그 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24:36-44, 막 13:21,22)
      자기의 죽을 날자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의 종말이 임할 날자는 우리들 중에 아무에게도 계시된 바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그날이 갑자기 임할 것과(고전 15:52. 마 24:27)  그날이 언제 임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벧후 3:4.마24:48-51.계 16:15)

      우리는 앞 부분에서 말세의 여러가지 징조들을 살펴보았는데 분명한 것은 말씀과 시대의 징조들이 주의 날이 가까운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나 그 시기와 일자를 정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재림의 징조들에 관하여 언급은 하고 있지만 재림의 시기에 있어서 구체적인 일시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계시되지 않는 것, 기록되지 않는 것은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침묵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우리는 재림의 시기를 모르므로 깨어 기도해야 할 것이고 깨어있는 자만이 슬기로운 처녀와 같은 신앙이 될 것이다.
      이제 교회는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을 교인들에게 성경적 시각에서 정립해 주어야 할 것이며 누구든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나갈 때, 그것은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계 22:18-19절의 경고를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말씀에 그 무엇을 가하지도 말고 감하지도 말라는 엄숙한 명령과 무서운 경고는 "때가 가까운" 지금에 해당되는 경고인것이다.
      교회는 이런 시점에서 성도들에게 건전한 성경관을 확립해 주어야 할 것이며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으로 교회가 올바른 말씀 교육을 해야 한다.
      모쪼록 우리 모두는 주님의 재림을 기억하고 세상의 깊은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고 있는 "시작된 종말"과 "완성될 종말"이라는 차원에서 현재라는 삶속에서 조화있는 신앙을 소유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 이다.

      *참고 성경:

      1.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2. "여호와게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사 52:10)
      3.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4.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5.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마는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렘 30:7)
      6.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6)
      7.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사 24:19)
      8.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 13:4)
      9.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10.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계 16:15)

      말세 징조에 관한 성경 구절 —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길을 찾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를 통해 마지막 때에 주님이 돌아오시면 말씀을 하여 문을 두드리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맞이한 자는 환란 전 휴거 되어 주와 함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을 통해 더 자세한 내용과 구체적인 실행의 길을 찾아보십시오.

      말세 징조에 관한 성경 구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태복음 24: 3)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태복음 24: 7-8)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태복음 24:37-39)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태복음 24:21)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요엘 2:30~31)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요한계시록 16:12~13)



      『말세가 도래하면서 각국이 불안정하고 정치가 혼란하며, 기근, 전염병, 수해, 가뭄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인간 세상에 재난이 있고 하늘도 재앙을 내린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다.』

      『모든 재난이 연달아 임하고 있다. 각국 각 지역에 재난이 일어나고 있으며, 전염병, 기근, 수해, 가뭄, 지진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미 한두 곳의 문제도, 하루 이틀에 끝날 문제도 아니다. 재난 지역이 점점 넓어지고 그 심각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 기간에는 각종 충해(蟲害)까지 연이어 발생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현상도 도처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는 모두 만국 만민에 대한 나의 심판이다. 』

      『세계 각 나라 각 지역에서 지진과 기근, 온역, 그리고 갖가지 흉년이 빈번해지고 있다. 내가 각 나라 각 지역에서 크게 역사할 때 이런 흉년은 창세 이후의 그 어떤 때보다 더 심하게 일어날 것인데, 이것은 내가 만민에게 내리는 심판의 시작이다. 하지만 내 아들아, 안심하여라. 그 어떤 재앙도 절대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너희를 보호할 것이다(앞으로 너희는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기에 그 어떤 재난의 고통도 겪지 않음을 뜻함). 너희는 나와 함께 왕이 되어 만국 만민을 심판하고, 나와 함께 우주 땅끝에서 영원히 아름다운 복을 누릴 것이다. 이런 말은 모두 응할 것이고 또한 곧바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시일을 끌지도 않고 일 처리도 아주 빠르니 조급해하며 속 끓이지 말라. 내가 너에게 베풀어 준 복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것이 나의 행정이다. 모든 사람은 나의 모든 행사로 말미암아 나에게 순종하고, 끊임없이 환호하고 끝없이 기뻐 뛸 것이다.』

      2. 환란 전 휴거 되어 주와 함께 잔치에 참석하는 길

      관련 구절: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 12:4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3)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 2:11)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8)

      관련된 말씀:

      『하나님의 자취를 찾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새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하나님의 자취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행사가 있으며, 하나님의 선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타남이 있고, 하나님이 나타나는 그곳에 진리, 길,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취를 찾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을 간과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진리를 얻고 나서도 하나님의 자취를 찾았다 생각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이 나타난 것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심각한 실수인가! 하나님이 사람의 관념대로 나타날 리도 없고, 사람의 요구에 따라 나타날 리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택과 계획,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방식에 따라 사역을 한다. 그는 어떤 사역을 하든 사람과 의논할 필요가 없고, 사람의 의견을 구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알릴 필요는 더더욱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자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이다. 하나님이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르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의 관념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지나치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을 너의 범주 안에 한정하거나 너의 관념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대신 하나님의 자취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하나님이 나타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에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사람은 모두 진리가 아니며 또 진리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찾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런 일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각 사람이 먼저 알아야 할 진리는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하나님이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다.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혹은 참도인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이상 단계마다 하나님의 발자취를 바짝 따라야 하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참도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고, 성령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다. 글귀나 이치만을 고집스레 지키는 자는 모두 성령의 역사에 의해 도태될 자이다. 하나님이 시기마다 새 사역을 전개하므로 시기마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단지 “여호와는 하나님이다” 혹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어느 한 시대에 적합한 이런 진리만 지킨다면, 사람은 영원히 성령의 역사를 따라갈 수도, 얻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든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바짝 따라간다면, 사람이 어찌 성령에 의해 도태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성령의 역사임을 확신하고, 아무런 걱정 없이 성령의 역사에 협력하여 하나님의 요구대로 한다면, 사람이 어찌 징벌받을 수 있겠느냐?』


      06-22-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4장 / 이제는 자고 쉬라(41절)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Returning the third time, he said to them, "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Enough! The hour has come. Look, the Son of Man is betrayed into the hands of sinners.

      (도입 이야기)

      기회의 신 카이로스(KAIROS)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의 모습은 무척이나 독특합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한 대신 뒷머리는 대머리이며, 어깨와 양발 뒤꿈치에는 날개가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양손에는 저울과 칼을 들고 있습니다.

      신화의 등장 인물의 모습은 대부분 은유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그를 발견한 자가 그의 머리채를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의 뒷머리는 대머리이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붙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발에 날개가 달려있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을 기회(機會. 틀 기, 모일 회)라고 합니다.

      프란체스코 델 로시(Francesco del Rossi)의 프레스코화의 일부분입니다.

      카이로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저울과 칼 인데요, 그것은 기회가 다가왔을 때 해야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저울과 같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칼과 같이 날카로운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것이 기회를 만났을 때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벌거벗은 이유는

      쉽게 눈에 띄기 위함이고,

      내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내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사람들이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어깨와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그들 앞에서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이다.



      3306. 머물러(메노. mĕnō) μένω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발음 / 메노[ mĕnō ]
      관련 성경 / 머물다(마 10:11, 요 1:32, 행 21:8, 딤후 4:20), 유하다(막 6:10, 눅 24:29), 거하다(눅 8:27, 요 8:35, 요일 2:27), 계시다(요1:38, 2:12, 히 7:24), 머물러 있다(요 3:36), 붙어있다(요 15:4), 두다(요 19:31, 행 5:4), 붙다(행 27:41), 지내다(고전 7:8, 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 13:1).
      신약 성경 / 118회 사용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이테.  γρηγορειτε. Be alert!. Keep watch!)

      1127.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1. 깨어 있다,  2. 정신차리고 있다,  3. 마태복음 24:43
      발음 / 그래고리오[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어 있다(마 24:43, 막 13:34, 눅 12:37), 일깨다(행 20:31, 계 3:2, 3), 깨다(살전 5:6, 벧전 5:8, 계 16:15)
      신약 성경 / 22회 사용

        깨어 있다, 경성하다.
      • a.  [문자적으로] 마 24:43, 26:38, 40, 막 13:34, 14:34,37, 눅 12:37, 39.
      •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 24:42, 25:13, 26:41, 막 13:35, 37, 14:38, 행 20:31, 고전 16:13, 살전 5:6,10, 벧전 5:8, 골 4:2, 계 3:2, 3, 16:15.


      기도하라(4336) 프로슈코마이(prŏsĕuchŏmai) προσεύχομαι

      1. 기도하다.  2. 마가복음 1:35,  3. 누가복음 1:10
      발음 / 프로슈코마이[ prŏsĕu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υχόμην, 미래 προσεύξομαι, 제1부정과거 προ- σηυξάμην, 4314와 21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도하다(마 5:44, 눅 1:10, 행 1:24), 간구하다(롬 8:26)
      신약 성경 / 86회 사용

      일어나라(1453) 에게이로(ĕgĕirō) ἐγείρω

      1. 깨우다.  2. 일으키다.  3. 마태복음 8:25
      발음 / 에게이로[ ĕgĕirō ]
      관련 성경 / 일어나다(마 2:14, 막 5:41, 행 12:7), 일어나게 하다(마 3:9), 깨우다(마 8:25), 살리다(마 10:8, 요 12:1, 행 10:40), 살아나다(마11:5, 막 6:14, 요 2:22), 내다(마 2:11), 일어서다(막 3:3), 깨다(막 4:27, 눅 8:24, 롬 13:11), 세우다 (행 13:22, 23), 살다(고전 15:20, 43)
      신약 성경 / 144회 사용

      * 마태복음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제는 자고 쉬라(καθευδετε το λοιπον και αναπαυεσθε)

                                     카듀데테 토 로이폰 카이 아나파우데스데
      Sleep on now, and take your rest
      πάω για ύπνο τώρα


      자고(2518) 카듀도(kathĕudō) καθεύδω

      1.  자다,  2. 마태복음 8:24,  3. 데살로니가전서 5:10
      발음 / 카듀도[ kathĕudō ]
      어원 / 미완료 ἐκάθευδον, 2596과 εὕδω ‘자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주무시다(마 8:24, 막 4:38), 자다(마 13:25, 막 14:41, 살전 5:10), 잠자다(엡 5:14)
      신약 성경 / 22회 사용


      쉬라(373) 아나파우오(anapauō) ἀναπαύω 

      1. 소생시키다,  2. 쉬다
      발음 / 아나파우오[ anapauō ]
      어원 / 미래 ἀναπαύσω, 제1부정과거 ἀνέ- παυσα, 제1부정과거명령 ἀνάπαυσον, 완료 중간태와 수동태 ἀναπέπαυ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νεπαύθην, 미래중간태 ἀναπαύσομαι, 미래수동태 ἀνα- παήσομαι, 303과 39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쉬게 하다(마 11:28), 쉬다(막 6:31, 눅 12:19, 계 14:13), 시원하게 하다(고전 16:18), 안식함을 얻다(고 후7:13), 평안하게 하다(몬 1:20), 평안함을 얻다(몬 1:7).
      신약 성경 / 12회 사용

      1-2.  율법학자(서기관)들의 예수 살해의 기도.
      3-9.  어떤 여인이, 주께 향유를 붓다.
      10-11.  유다가 적과 내통하고, 주님을 팔 약속을 하다.
      12-16.  유월절의 식사의 준비.
      17-21.  최후의 유월절의 식사. 주님을 배반할 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시다.
      22-25.  성찬 예식의 제정.
      26-31.  감람산으로 가시는 도중,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실족(실패)할 것의 예고.
      32-42.  겟세마네의 고민과 기도.
      43-52.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
      53-65.  공회(유대의 종교 재판)에 있어서의 예수의 재판.
      66-72.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다.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자고 쉬라. 기회는 지나갔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혼자 가지 않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세 번째’라는 말은(41절) 앞서 두 씩번이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만 잤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자고 쉬라. 기도할 기회가 지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심각하게 기도하셨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눅 24:44).
      지금 예수님은 심각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신 것도 잊어버리고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고 절박하셨으면, 잠자는 제자들을 두 번이나 깨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러나 제자들을 잠에 골아 떨어지고 시간은 흘러서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겟세마네 동산에 몰려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지나가버렸습니다.

      기도하기 좋은 시간을 잊고 지내셨다면 바로 지금이 기도할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기도 할 수 없는 병든 몸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는 죽음의 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래에 하고
      모래에 못하면 글피에 하려고 합니다.
      더구나 금년에 못하면 내년에 하려고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하지 못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고 경고 합니다.

      기도도 필요한 때에 해야지, 아무 때나 생각나는 때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소용이 없고 하나마나 한 긴박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기도만이 아닙니다.
      헌신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섬기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기회가 있을 때에 그 기회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그리고 기도 합시다!
      헌신합시다!
      봉사합시다!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에베소서 5:16, 공동번역 성경)
      오늘이 내게 주어진 '카이로스의 마지막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기회를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마가 14:32.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2523)  카디조(kathizō)  καθίζω

      1. 앉게 하다.  2. 임명하다.  3. 요한복음 19:13
      발음 / 카디조 [ kathizō ]
      관련 성경 / 앉다(마 19:28, 눅 22:30, 고전 10:7), 타다 (막 11:2, 요 12:4), 머물다(눅 24:49), 임하다(행 2:3, 18:11), 세우다(엡 1:20).
      신약 성경 / 46회 사용

      마가 14:34. 너희는 여기 머물러(3306) 깨어 있으라(1127)

      3306. 머물러(메노. mĕnō) μένω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발음 / 메노[ mĕnō ]
      관련 성경 / 머물다(마 10:11, 요 1:32, 행 21:8, 딤후 4:20), 유하다(막 6:10, 눅 24:29), 거하다(눅 8:27, 요 8:35, 요일 2:27), 계시다(요1:38, 2:12, 히 7:24), 머물러 있다(요 3:36), 붙어있다(요 15:4), 두다(요 19:31, 행 5:4), 붙다(행 27:41), 지내다(고전 7:8, 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 13:1).
      신약 성경 / 118회 사용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이테.  γρηγορειτε. Be alert!. Keep watch!)

      1127. 깨어 있으라(그레고레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1. 깨어 있다,  2. 정신차리고 있다,  3. 마태복음 24:43
      발음 / 그래고리오[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어 있다(마 24:43, 막 13:34, 눅 12:37), 일깨다(행 20:31, 계 3:2, 3), 깨다(살전 5:6, 벧전 5:8, 계 16:15)
      신약 성경 / 22회 사용







      삼세번(三-番)의 미학

      일생삼회 : 인생에 세 번 기회를 만나다

      숫자에 대한 의미나 상징성은 주로 홀수에 집중돼 나타난다.
      홀수는 양수(陽數)이기 때문에 중시된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을 보면 1월 1일인 설날, 3월 3일인 삼짇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9월 9일 중구일(重九日)'제비가 따뜻한 강남으로 돌아간다는 날) 등 모두 홀수가 중첩된 날이다.
      이들 숫자는 양수로서 잡귀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람들의 삶이 잘되기를 방해하는 잡귀들을 물리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숫자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은 유난히 셋과 백을 좋아한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숫자, 셋의 의미

      유행하는 화투놀이 가운데 고스톱의 기본점수도 3점이다.
      이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들 숫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어서 좋아하는 것일까.
      숫자에 대한 상징이나 의미부여는 요즘 와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 민족의 시원을 보여주는 ‘단군신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는 흥미롭게도 숫자 삼(三)이 많이 등장하는데, 삼 혹은 셋에 대한 우리 민족의 애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먼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풍백, 우사, 운사가 거느리는 삼천의 무리와 천부인(天符印) 3개를 들고 왔다고 한다.
      풍백 등은 바람과 비 등 자연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인물이다.
      이런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주술사를 대동한 것은 이 시기의 중요한 생업이 농경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왜 3명의 인물을 데리고 왔는가.
      바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세 분야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웅녀가 사람이 되기를 위해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했는데, 삼칠일(三七日) 만에 사람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여기에서 7일이 세 번 중첩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시공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으로 둔갑하기 위해서는 바로 세 번의 주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바로 삼(三)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바로 완성된다는 뜻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의 상징성, 무엇을 의미하나

      왜 우리 민족이 셋(三)을 주목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만하다.
      삼은 실상 일(一)과 이(二)의 합이다.
      즉 양과 음의 합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일과 이는 스스로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생산적인 능력도 갖추지 못한다.
      이 둘이 합해져야만 생산이 가능하게 되는데, 이때 생산된 것이 바로 삼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음양의 조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삼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삼은 남녀간의 결합으로 생산된 자식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셋에 대한 활용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승패를 결정짓기 위해서 우리는 삼세판을 한다.
      세 판을 통해 승패가 결정되며, 그것은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
      또한 심마니들이 산삼을 발견했을 때 “심봤다”를 외치는 것도 세 번이다.
      이 세 번의 외침은 산삼이 완전하게 자신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리는 행위다.

      민간신앙으로 연결된 셋의 상징

      이러한 습속은 최근까지도 삼신신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삼신상을 차려놓는데, 7일마다 세 번을 해놓는 풍속이 전승돼왔다.
      이것은 아기가 잔병에 걸리지 않고 잘 자랄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갓 태어난 아기가 하나의 생명을 갖게 될 수 있는 기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간 동안 금줄을 치는 것인데, 이것은 삼칠일 동안 아기의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병을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삶의 지혜이면서 동시에 셋의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삼신상에 메를 세 그릇 올려놓는 것도 이런 사정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강원도 지방에서는 흥미롭게도 3월 3일, 삼짇날을 삼신날이라고 하여 삼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 역시 셋이라는 숫자를 근거로 삼은 민간신앙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어선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삼, 셋의 의미가 중시되고 있다.
      남해안 지방에서는 배를 만들 때가 대개 3월이라고 한다.
      배가 완성되어 진수식을 행할 날이 결정되면, 그 전에 선주가 3일 동안 배에서 잠을 잔다.
      그 이유는 이 기간에 배를 관장하는 서낭이 현몽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배서낭이 정해지면 배내림날에 무당을 불러 3일 동안 풍어를 기원하는 굿을 하게 된다.
      이처럼 배를 만들어 진수하는 과정까지 셋은 신성한 숫자로 중시되고 있다. 특히 셋은 풍요를 가져다주는 상징적이자 주술적인 숫자임을 암시한다.

      이외에도 삼재가 끼었을 때 쓰는 부적에 머리가 세 개인 매를 그려서 액을 물리치는 습속도 있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을 때도 염라대왕의 사자가 잘 데리고 가기를 기원하면서 사자상(使者床)에 짚신, 밥, 북어를 각각 3개씩 올려놓는다. 이것은 저승사자가 3명이기 때문이다.
      저승사자가 3명이라는 것은 바로 죽음을 완전하게 마무리한다는 의도도 숨겨 있다고 하겠다.

      설화에 나타난 셋의 의미

      우리나라에서 전승되는 설화에서도 셋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내용이 많다.
      제주도의 시조신화에서도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세 시조가 땅에서 태어나 세 처녀를 맞이해 결혼한다.
      그리고 첫째 날 제일도, 둘째 날 제이도에, 셋째 날 제삼도에 거처를 삼아 오곡의 씨를 뿌리고 마소를 기르기 시작한 후에야 세상은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고 했다.
      즉 3일이 지난 후에 세상을 온전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굿에서 전승되는 무가(巫歌)에서도 셋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일반적으로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재수굿에서 구연되는 ‘제석본풀이’에서 아들 삼형제가 등장한다.
      이들 삼형제는 중과의 상징적인 행위, 예컨대 손목을 잡는 방식 등으로 당금애기가 낳은 자식들이다.
      당금애기는 대가집의 무남독녀였는데,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찾아온 중에 의해서 임신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그녀를 쫓아내자, 당금애기는 중을 찾아가 해산을 한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홀로 삼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이 아이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림을 당하자, 당금애기에게 아버지가 누구인가 알려달라고 한다.

      그 후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삼형제는 제석이 되고, 당금애기는 삼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석을 칭할 때 일반적으로 ‘삼불제석’이라고 하는 이유도 삼형제인 까닭에서다. 이들 삼형제는 당금애기가 삼신으로 자리잡은 것처럼 인간의 수명과 재복, 자손 번창을 담당하는 신으로 좌정했다. 이들 삼형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갖춰야 할 가장 필요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재부

      민담의 경우에도 주인공이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고난을 세 가지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셋째 딸이 가장 똑똑한 인물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구렁덩덩 신선비’ 이야기에서 뱀신랑과 결혼해 무수한 고초를 겪으면서 행복을 쟁취하는 여성이 바로 셋째 딸이다.
      유행가에도 보면 ‘최진사댁 셋째 따님이 가장 예쁘다던데’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 역시 우리 민족의 셋에 대한 관념을 명쾌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 뜻으로 본다면 셋은 완전함, 혹은 완결됨을 뜻하는 숫자로 이해해도 틀림이 없다.

      백(百), 완성되고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

      백도 셋이라는 숫자에 비해 만만치 않은 의미와 상징을 지니고 있다.
      백은 단지 수로서 100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념보다는 불완전한 것이 완전하게 이루어짐을 뜻한다. 예컨대 아기가 태어난 가장 먼저 하는 통과의례로 백일이 있다. 이것은 영아에서 하나의 인간적인 존재로 들어섰다는 것, 또는 죽지 않고 100일을 견디고 새로운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잔치인 것이다. 이때 백일떡을 100집에 나누어주면서 얻어온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게 되면 아기는 건강하게 10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하는 속신도 있다.

      백에 대한 표현도 단군신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어할 때 환웅이 제시한 금기, 즉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한 기간이 원래는 100일이었다. 여기서의 백은 숫자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동물의 탈을 벗고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기 위한 기간으로의 제시이다.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민담으로 전해져왔다. 그 대표적인 동물이 바로 여우라고 하겠다. 여우가 예쁜 여자로 둔갑해 남성들을 유혹한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간을 먹고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다. 이때 먹어야 할 간의 수가 바로 100개다. 100개를 먹어야만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여우는 항상 1개를 놓치는 바람에 사람이 되지 못한다.

      여기서 백이라는 수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셀 수 있는 개념이기보다는 꿈이나 희망의 숫자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 전승되는 대개의 설화에서는 백을 이루지 못한 숫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지방에서 전승되는 ‘황팔도 전설’의 경우도 좋은 예이다.

      황팔도라는 가난하지만 지극한 효자가 살았는데, 어머니가 중병에 걸린다.
      용한 의사가 개 100마리를 먹여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처방을 내린다. 황팔도는 산신으로부터 호랑이 가죽과 둔갑책을 얻게 된다.
      이를 이용해서 호랑이로 변신해 매일 밤 개 한 마리씩을 구해오다가 부인의 방해로 마지막 한 마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황팔도는 호랑이로 남게 되고, 어머니도 죽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의 백은 완성시킬 수 없는 불가능한 숫자임을 알 수 있다.
      백을 얻으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얻을 수 있으나, 백까지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백은 완성과 완전함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약이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의 일관된 주제 개념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고, 노아와도 언약을 세우셨고, 모세와도 언약을 세우셨고, 다윗과도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특히 모세와의 언약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출 19:5-6).
      언약의 증거를 위하여 언약의 피를 뿌렸습니다(출 24:8).
      인간들은 연약하여 수없이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은 언약의 피로서 언약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지만, 이를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의 보배로운 피 흘림에 의한 언약의 제사를 통하여 언약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왕이 되고 신자들은 백성이 되어 더불어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의 선포는 언약 그 자체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강조된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언약이라는 개념이나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거의 동일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에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서 예수의 재판 장소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자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하여 한없이 통곡했습니다.
      그날 새벽은 닭 울음소리와 베드로의 울음소리가 뒤엉켜서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갈릴리 호수 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베드로는 변화하여 목숨을 걸고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철저한 회개와 부활의 주를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연약함 투성입니다.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한 여인의 행동이 빛납니다.
      주님은 그녀의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여기셨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께 자기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측근이라거나,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복음을 깨닫고,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여, 진실로 주님을 위해 자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이제는(3063) 로이포스(lŏipŏs) λοιπόν, ἡ, όν

      1. 남은.   2. 나머지.  3. 다른
      발음 / 로이포스[ lŏipŏs ]
      관련 성경 / 마지막(고후 13:11), 끝(엡 6:10, 빌 4:8, 살전 4:1)
      신약 성경 / 55회 사용

      자고(2518) 카듀도(kathĕudō)  καθεύδω

      1.  자다.  2. 마태복음 8:24. 3. 데살로니가전서 5:10

      발음 / 카듀도[ kathĕudō ]
      어원 / 미완료 ἐκάθευδον, 2596과 εὕδω ‘자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주무시다(마 8:24, 막 4:38), 자다(마 13:25, 막 14:41, 살전 5:10), 잠자다(엡 5:14)
      신약 성경 / 22회 사용

      쉬라(373) 아나파우오(anapauō) ἀναπαύω 


      1. 소생시키다.  2. 쉬다.
      발음 / 아나파우오[ anapauō ]
      어원 / 미래 ἀναπαύσω, 제1부정과거 ἀνέ- παυσα, 제1부정과거명령 ἀνάπαυσον, 완료 중간태와 수동태 ἀναπέπαυ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νεπαύθην, 미래중간태 ἀναπαύσομαι, 미래수동태 ἀνα- παήσομαι, 303과 39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쉬게 하다(마 11:28), 쉬다(막 6:31, 눅 12:19, 계 14:13), 시원하게 하다(고전 16:18), 안식함을 얻다(고후 7:13), 평안하게 하다(몬 1:20), 평안함을 얻다(몬 1:7)
      신약 성경 / 12회 사용






      06-23-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5장 / 보고 믿게 할지어다(32절)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Let this Christ, this King of Israel, come down now from the cross, that we may see and believe." Those crucified with him also heaped insults on him.

      보고(3708) 호라오(hŏraō) ὁράω 
      1. 보다.  2. 마태복음 28:7. 3. 누가복음 1:22
      발음 / 호라오[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신약 성경 / 449회 사용


      믿게 하라(4100) 피스튜오(pistĕuō) πιστεύω 
      1. 믿다.  2. 신뢰하다
      발음 / 피스튜오[ pistĕuō ]
      어원 / 미완료 ἐπίστευον, 제1부정과거 ἐ- πίστευσα, 완료 πεπίστευκα, 과거완료 πεπιστεύκειν, 수동태완료형 πεπί- στευμαι, 제1부정과거 ἐπιστεύθην, 410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믿다(마 8:13, 눅 1:45, 벧전 1:8), 맡기다(눅 16:11, 갈 2:7, 딛 1:3), 의탁하다(요 2:24, 딤후 1:12), 맡다(롬 3:2, 고전 9:17)
      신약 성경 / 243회 사용


      한글 성경은 “보다”라는 단어를 그냥 단순하게 번역하였지만 원문 속으로 들어가면 '보다'라는 의미를 좀 더 상세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 호라오(ὁράω) '보다'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깨닫다 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한복음 3:11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것을 증언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2. 블레포’(βλέπω)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과학은 눈으로 본 것을 증명하는 학문이라고 하면 철학은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신앙이란 눈으로 본 것이 아닐지라도 마음으로 보고도 그 실체를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사가 펴낸 <세계상식백과>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피지 군도의 작은 섬 '베카'라는 곳에서는 '음베테'라고 불리는 고승과 그 제자들에 의해 불 위를 걷는 의식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직경 4.5 내지 6m 정도의 구덩이를 1 내지 1.5m 깊이로 파냅니다.
      통나무를 그 안에 잔뜩 쌓고 그 속에 돌을 집어넣습니다.
      통나무가 타들어 가면서 돌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준비가 완전히 끝나면 '음베테'는 돌 위에 마른 잎을 뿌려봅니다.
      그러면 금방 불길이 일어납니다.
      돌이 달구어진 것입니다.
      이윽고 고승과 제자들은 돌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나오는데 상처 하나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식이 스리랑카 콜롬보 북쪽의 작은 어촌에서도 매해 벌어진다고 합니다.
      또한 남부 인도의 일부 촌락에서도 해마다 벌어지는데 특히 '우다이푸르' 마을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불구덩이- 보통 8㎡ 에 1m 깊이-에 불이 준비되면 어찌나 뜨거운지 구경꾼은 10m 안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중화상을 입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이 불 위를 걸어다니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피지섬과 스리랑카에서 불 위를 걸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발바닥에 화상은 전혀 없었으며 발바닥 피부의 감각도 정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 옛날 다니엘 때에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다니엘이 불구덩이를 태연히 거닐다가 상처 하나 없이 나왔다는 기록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불구덩이 속을 손끝 하나 상하지 않고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럴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믿는다'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안다'가 되어 버렸고, '안다'고 했던 것이 '믿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 중에도 믿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앎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는 응시하다, 보여지다'( 눈으로, 향한 것처럼, 관찰하다.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 요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3. 에이도(εἶδω)는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바라봄으로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도는 ‘우상’이라는 ‘에이돌로’(εἴδωλο)에서 유래되었으며,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요1: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5. 블레포’(βλέπω)는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성경 원어에서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는 분명히 저자의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분명이 담겨 있다.

      "보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첫째로 응시하는(ὀπτάνομαι) 단계에서 둘째로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εἶδω) 단계로 셋째로 자세히 보아(θεάομαι)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βλέπω) 단계로 넷째로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단계에서

      다섯째로 깨닭아 알게 되어(ὁράω ) 인지하는 단계로의 그 깊음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심문을 마친 후에 빌라도에게 넘겼고, 빌라도도 예수를 심문하였다(1-4절).
      빌라도는 예수의 죄 없음을 알고 명절에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이용하여 석방하려고 했으나 무리들의 충동에 못 이겨서 예수 대신 바라바를 석방한다(5-15절).
      로마 군병들이 예수에게 자색 옷과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희롱한다(16-20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골고다로 끌고 간다. 가는 중에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21-32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돌아가셨다. 이때 성소 휘장이 갈라지고 한 백부장이 신앙 고백을 한다(33-41절).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예수의 시신을 장사지낸다(42-47절).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에 관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대제사장에게 잡힌 예수님은 새벽에 빌라도에게로 호송되었습니다.
      유대인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힘을 빌어 예수님을 처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죄목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무죄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빌라도가 아무리 나는 무죄하다 하며 손을 씻어도 모든 후세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신앙고백을 하므로 아직도 빌라도의 이름은 모든 성도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메시야를 십자가 처형시킨 것이 아니라 무죄한 평범한 사람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십자가 처형시켰다고 해도 빌라도의 죄악은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빌라도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사람들은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당신이 메시야가 되심을 증명해 달라고 합니다.
      메시야가 되심을 보고 믿게 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 가장 바람직한 믿음일까?
      첫째, 보지 않고 믿는 것
      둘째, 보고 믿는 것
      셋째, 보고도 믿지 않는 것
      넷째, 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것

      여러분은 어떤 자세가 가장 바람직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경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논쟁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보는 것과 믿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보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지 못한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지 못한 것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는 것은 곧 믿는 것이며 아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눈으로 보고 믿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므로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굳이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는다고 고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고가 경직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도 이 세상에는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으려는 어리석은 신앙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어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소 휘장은 지성소를 막는 커튼이었다.
      지성소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의 제사로 말미암아 지성소가 만인 앞에 공개되었다. 죄 때문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는 것 외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가 예수의 십자가 제사 이후에는 만인에게 공개되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드린 영원한 제사로 인해 죄 씻음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지성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대제사장처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모두가 제사장과 같은 자격을 얻었다. 이것이 만인 제사장론의 한부분이다.  


      어느 곡예사의 외줄 타기


      1859년 6월 30일, 프랑스의 줄타기 곡예사 샤를 블론딘(Charles Blondin)이라는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건너가는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수면에서 48미터나 되는 높이에 설치된 외줄을 타고 장대 하나로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335미터 길이의 밧줄 위를 걸어간 것입니다.

      40파운드 무게의 막대기로 균형을 잡은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던 블론딘이 마침내 맞은편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러자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수많은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습니다.
      블론딘은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에 보답이라도 하듯, 또 다시 뒤로 걸어서 건너기도 하고, 안대로 두 눈을 가리고 건너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자유자재로 오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모든 묘기를 마친 블론딘은 지켜보던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누군가를 등에 업고도 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갈 수가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관중들은 “그럼요. 믿습니다!” 하고 열광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딘은 다시 외쳤습니다.
      “그럼 누가 제 등에 업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제 등에 업혀서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 한 분만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관중들이 침묵에 빠졌습니다.
      혹시라도 블론딘과 눈이 마주칠까봐 애써 시선도 외면했습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블론딘은 관중 가운데 있던 한 남자에게 “당신은 날 믿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지목받은 사람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 등에 업히겠습니다.” 하며 그에게 업혔습니다.
      그 남자를 등에 업은 블론딘은 이전 어느 순간보다 더 신중하게 로프에 올라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등에 업고도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넜습니다.

      이것을 본 관중들은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더욱 뜨겁게 환호하고 박수 치며 열광했는데, 그때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같이 건넌 사람이 해리 콜코드(Harry Colcord)라는 사람인데, 그는 다름 아닌 블론딘의 매니저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말이나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만큼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관중들은 그의 묘기를 직접 자기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믿는다고 큰소리쳤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등에 업혀서 같이 폭포를 건너갈 마음은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럼 오십시오.”
      그러나 아무도 안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업힌 그의 매니저, 블론딘의 질문 앞에 믿는다고 대답하며 그의 등에 업히고 같이 건넜던 콜코드만이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진짜로 그를 믿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 ‘크리스천’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believer)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은 곧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믿는다’는 말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너는 나를 진짜로 믿느냐?”
      우리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오늘 점검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진짜 믿음을 갖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고다이바 부인(Madam Godiva)은 11세기 영국의 코벤트리 시(Coventry)의 영주(領主)인 레오프릭(Leofric)백작의 부인이었다. 어느 날 백작부인은 영주의 혹독한 세금징수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백작에게 몇 번씩이나 세금을 감면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백작은 “당신이 알몸뚱이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시내 거리를 한바퀴 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백작 부인은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다가 “공중의 행복을 위하는 일이라면” 알몸으로 말을 탄들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말을 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시의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한 나머지 부인이 말을 타고 거리를 돌 때에는 어느 누구도 창문을 굳게 닫고 내다보지 않기로 결의를 하였다.

      고다이바 부인은 긴 머리카락을 이용해 앞을 가린 다음 알몸으로 말을 타고 느릿 느릿 시내 거리를 돌기 시작 했다. 시민들도 약속대로 말을 타고 거리를 누비는 고다이바 부인을 엿보는 사람하나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기심 많은 재단사 톰(Tom)이라는 사나이만은 시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창문 틈으로 그 부인의 알몸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 톰이라는 사나이는 그만 두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진위(眞僞)와는 관계없이 고다이바 부인은 ”공중의 행복을 위한“(pro bono publico) 숭고한 행동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일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양복 재단사 “엿보는 톰(Peeping Tom)”은 졸지에 영원히 “관음증이나 호색한”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얘기에서 몇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고다이바부인은 알몸을 공개했다. 알몸은 지순한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이의 공개는 순진무구한 무한 봉사를 상징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공인(公人)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 고다이바부인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공인이란 고다이바 부인처럼 공중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존재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한사람이 공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수치스러움도 없는 알몸으로 나서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어떤 수치도 옷으로 가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높은 공직에 오를수록 그 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요즈음의 국회에서 공직취임 예정자를 앞에 앉혀 놓고 그 너울을 사정없이 벗겨 내는 것도 그 일환이라 할 것이다.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겹겹의 옷으로 감싸고 있어서는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서서히 깨닫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점점 더 이러한 사회로 성숙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공중의 행복추구가 사명일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톰이라는 사나이가 부인의 알몸을 문틈으로 엿본 행위로 인해 하늘의 벌을 받았다는 뜻은 또 무엇일까? “엿본 톰”은 호색한의 대명사처럼 쓰고 있지만 호색한이기 때문에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가 벌 받은 것은 “신의성실(信義誠實)이라는 법률의 기본 철칙을 어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법률의 대원칙을 어기고서야 어찌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주민들 간의 약속이 바로 법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법을 교묘히 어길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유능한 사람이 되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화려한 옷으로 잘도 감싸 안은 사람이 출세하는 사회에 대한 경종이 바로 고다이바 부인에 대한 얘기가 아닌가 싶다.



      믿음을 지키는 원칙 3가지  DSS / Divide(나누라), Search(찾으라), Show(보여주라)

       

      첫째, 성경을 나누라(Divide) 

      '진리를 바르게 나눌(=Divide) 줄' 알아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딤후2:15)

      ('Study to shew thyself approved unto God, a workman that needeth not to be ashamed, 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영어KJV성경 딤후2:15)

      전세계 인류를 인본주의적 구분이 아닌 성경기록에서 말하는 구분으로 나누면, 이방인(=그리스인)과 유대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라는 세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각각의 그룹들(이방인,유대인,하나님의 교회)에게 주신 말씀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어떤 분들의 경우, 성경의 기록내용들은 '모두가 믿음을 소유한 신약교회시대의 성도들에 해당하는 내용이다.'라고 생각하여 한결같이 나에게 모두 영적으로 적용해야 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데도 말이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킹제임스흠정역성경 고전1:22)

      '우리(=하나님의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니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킹제임스흠정역성경 고전1:23)

      말씀을 먼저 바르게 나눌 줄 알려면, 다음 '2가지 측면들'을 잘 이해한 다음 늘 숙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시대구분, 수신자, 전해지는 복음'> 의 측면에서

      (1) '십자가사건 이전(=구약율법시대)'인지? '십자가사건 이후(=신약교회시대)'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시 '하나님의 교회'의 휴거이후 시작되는 '환난기시대'인지?를 먼저 구분해야 합니다.

      (2) 그리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하나님의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환난성도'(=환란기를 거쳐 행위로 입증하며 믿음을 갖게 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3) 또한 선포되어지는 복음이 '십자가사건이전(=구약율법시대)의 왕국복음'(마24:14)인지? 십자가사건이후 신약교회시대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20:24)인지?

      환난기의 다시 선포될 '왕국복음'과 '천사의 영존하는 복음'(계14:6)인지? 를 구분해야 합니다.

      (4) 바울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인지?(고전15:1, 3-4) 아니면 '다른 복음'(갈1:6,8,9;고후11:4)인지?

      (5) 환난기를 지나, '천년왕국'에 관한 말씀인지? 이후의 '새하늘과 새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인지?도 잘 나누어 살펴야 합니다.

      <'구원(=save)을 말할 때의 그 대상을 분별'> 하는 측면에서

      신.구약성경전체를 놓고 영과 혼과 몸(살전5:23)의 보존(=preserve)과 함께 구원을 살펴 볼 때, '(고전5:5;요3:1-15)'과 '(벧전1:9)'과 '(마24:22)'중 어떤 구원(=save)을 말하는 것인지도 경우에 따라 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을 탐구하라(Search) 

      아무리 훌륭한 목사나 전도자 또는 교사에게 배운것이라도 믿음의 경주자는 '믿음의 경기법칙인 성경기록'을 늘 잘 이해하고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는데,

      믿음의 경주법칙이 스스로 명확하지 않을 때는 <이름 모를 베레아(=Berea)의 어느 성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기록들을 탐구(=Search)하라'는 원칙을 기억해서 습관적으로 몸에 베도록 해야 합니다.(요5:39;행17:11)  

      이 원칙 또한 모든 성도들의 경우에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요5:39)

      (' the scriptures; for in them ye think ye have eternal life: and they are they which testify of me.'-영어KJV성경 요5:39)Search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자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킹제임스흠정역성경 행17:11)

      ('These were more noble than those in Thessalonica, in that they received the word with all readiness of mind, and the scriptures daily, whether those things were so.'-영어KJV성경 행17:11)searched

      셋째, 성경을 보여주라(Show)

      우리 각 자신이 아무리 말에 능숙한 달변의 사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누군가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아 알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기록들을 직접 보여 주는(=Show,Shew)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이때 불신자의 변화가 가장 효과적으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 '성경의 권위'대신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는 이땅에서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킹제임스흠정역성경 갈4:30;롬4:3;롬11:4)

      ('Nevertheless what saith the scripture? Cast out the bondwoman and her son: for the son of the bondwoman shall not be heir with the son of the freewoman.'-영어KJV성경 갈4:30)

      '이는 그가 성경 기록들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여 주며 힘 있게 유대인들을 확신시키되 공개적으로 그리하였기 때문이더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행18:28)

      ('For he mightily convinced the Jews, [and that] publickly, shewing by the scriptures that Jesus was Christ.')

      '그러나 내가 진리의 성경 기록에 적힌 것을 네게 보여 주리니...'(킹제임스흠정역성경 단10:21)

      ('But I will shew thee that which is noted in the scripture of truth: ...')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고(Divide),
      탐구하고(찾고, Search)
      성경기록들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Show,Shew)' 성경신자요 교사요 전도자들이 모두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P.S.

      참고로, 신약성경중 '사도행전'은 말 그대로 사도들을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역사서'입니다.

      역사서는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목적을 대부분 달성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주님의 몸된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건전한 교리에 대한 최종적인 지침서'가 아닙니다.

      이런 이유들로 사도행전을 읽으시다가 교리적으로 잘 이해가 안되시는 부분들이 일부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이때 주로 바울서신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으셔야 '건전한 믿음의 도리'에서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신약교회가 지켜야 할 건전하고 참된 교리는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로 온전히 기록되었습니다.

      일부 다른 서신서들을 포함한 바울서신서들을 부지런히 읽고 마음에 새겨서 '건전한 교리에 합당 것들만'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딛2:1,딛1:9,딤전1:10,딤후4:3)

      일부의 많은 목회자들과 일부 많은 거짓교사들이 지금까지 그러했 듯이 '역사서와 교리서'를 바르게 나누지(divide rightly) 않고 마구 섞어서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인용하면 할수록 '마귀는 춤추며 좋아할 것'입니다.













      06-24-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가복음 16장 / 가서 뵈오리라(7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But go, tell his disciples and Peter, 'He is going ahead of you in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just as he told you.'

      "가서 뵈오리라"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거기서 그를 너희가 뵈오리라(에케이 아우톤 옾세스데. εκει αυτον οψεσθε)."

      거기서 뵈오리라는 말씀에서 "거기서"는 "갈릴리(Galilee)"를 말합니다.
      갈릴리는 어부이었던 제자들의 생업의 현장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은 생업의 현장을 복음의 현장으로 회복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수를 영접한 후에는 이전에 땀의 결정체가 얼룩진 생업의 현장은 세속의 일자리라고 생각하여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생업의 현장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구원 받아야 할 수많은 영혼들이 아직도 복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라는 지명의 뜻은 "둥글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둥근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모난 것이 좋을까요?
      예수를 영접한 후에 마음과 생각이 모가 나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언어와 비난하는 말을 벌지 못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 갈릴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위하여 두 개의 장소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삶의 자리(Place of Life. Sitz im Leben. locus vitae)
      둘째는 죽음의 자리(Place of Death. Sitz im Tod. locus mortis)

      삶의 자리는 현재 내가 주로 생활하고 활동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생업의 현장, 가정, 교회 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의 자리는 내가 마지막 임종을 맞이할 장소를 말합니다.
      이제 곧 내가 죽음의 문을 넘어가야 할 순간이라면 과연 나는 지금 내 모습 이대로 주님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겠느냐? 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일생동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교회와 가정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마디 마디가 류마치스 고통으로 걷는 것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대로 죽으면 주님께서 내게 무엇이라고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날을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 한 가지 생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프리카 지역에 원주민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데 5천불이면 가능하다는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매점이 있는데 그 매점에서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후에 아들을 찾아가서 너희 회사 매점에서 일을 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내가 5천불을 드릴터이니 편하게 쉬라고 하더랍니다.
      이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러면 그것은 네가 세우는 것이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다.
      결국 어머니가 아들의 회사 매점에서 하루종일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 월급을 모으고 모아서 드디어 5천불이 되었을 때 원주민 동네에 교회 하나를 세웠습니다.
      하나를 세운 후에 욕심이 일어나 하나 더 세워야지 하고 두번째 교회를 세우도록 도왔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1년이 지날 무렵 그 몸에 지독한 고통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때에 비로서 아, 이것이 부활 신앙이구나 하며 크게 기뻐하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뵈오리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이 소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그와 같은 장소를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찾아가기 어려운 장소가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 앞에 보여지는 자리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피하는 자리와 장소를 찾는 것이 부활신앙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토요일마다 교회 화장실만 맡아서 청소하는 교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려 그 일을 3년을 계속했는데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추적한 결과 어느 대학 교수의 부인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학교 교수의 부인이 그런 일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부활 신앙으로 거듭나면 얼마든지 좋아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2
      그리고 맡은 자들의 구할 것으 충성이니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베드로”라는 말은 베드로를 구별하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으로 마가의 자료의 상당 부분이 베드로로부터 나온 것임을 반영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아 열 한 제자의 무리 속에 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신빙성이 있는 증인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활의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는 제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안장되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리리로 가신다는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도마와 같은 제자는 주위에서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할 때에도 나는 직접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아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부활이란 사건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음 사건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에는 부활 신앙이 많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믿는 신앙으로 부활 신앙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 신앙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새로운 생명에의 소망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은 창조 신앙과 연결되며, 부활 신앙은 하나님께서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창조 신앙으로 부활에서 구속 사역과 창조 사역은 하나로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지만 강력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빈 무덤
      예수의 제자들의 부활 소식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당시의 로마 당국자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예수의 빈 무덤의 증거를 뒤엎을 수는 없었습니다.

      둘째는, 부활 예수의 현현(顯現)

      예수께서는 여인들에게와 열한 제자들에게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와 오백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두 명의 사람들만 보았다면 환상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난 사건은 도무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부활 후의 예수의 행적(行跡)
      예수께서는 문이 잠긴 제자들의 방에 바람처럼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한 영체라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넷째는, 제자들의 변화(變化)
      제자들이 실제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담대한 제자들의 모습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날도 예수님의 부활은 계속 증거되어야 합니다.
      다만 부활을 믿는 믿음의 증인들에 의해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증거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섯 가지 양심



      1. 깨끗한 양심(a Pure Conscience)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24:3-4)

       

      2. 선한 양심(a Good Conscience)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3. 찔림 받은 양심(a Stricken Conscience)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9)

       

      4. 더러워진 양심(a Defiled Conscience)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5. 악한 양심(an Evil Conscience)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6. 화인 맞은 양심(a Sealed Conscience)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1-2)

       



      예수님이 누우셨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무덤은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무덤 안에는 한 청년이 흰 옷을 입고 은총의 편인 우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 청년이 누구인지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조를 통해 그가 천사임을 밝힙니다.
      그는 전형적인 천사의 어투로 말을 시작합니다.
      “놀라지 말라”.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왔으나 예수님의 시신이 있지 않은 무덤을 보며, 당황하고 있던 그녀들에게 놀라지 말라는 근엄한 목소리는 큰 안도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적 메시지를 대언하는 천사가 이어서 자신들에게 전해줄 메시지에 대해 기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놀라지 말라는 메시지에 이어 천사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여성들에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천사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 형벌은 당시 존재하는 처형 가운데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을 통해 불명예스러움의 끝에 서 있는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활을 의미하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은 영광의 끝에 서 있는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대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비참함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그녀들에게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눈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빈 무덤을 확인하는 증인으로 세 여성이 세워졌습니다.
      유대의 사회에서 증인을 세울 때는 최소 두 명 이상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세 명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성이었다는 점은 당시 상황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성의 증언이 효력이 없던 이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부활의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세 명의 여성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시대의 상식을 넘는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위로와 부활의 사실을 설명한 천사는 그녀들에게 이제 부활의 증인이 되어, 제자들 앞에 나설 것을 명령합니다.







      너희는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님이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그들을 만나실 것이라고 알려 주어라.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1-3절).
      무덤에 도착해 보니 무덤 입구에 막아 두었던 돌이 굴려져 있고 무덤 안에는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있었고 그 흰옷 입은 청년은 나사렛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었으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소식을 전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4-8절).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막달라 마리아 에게 먼저 보이셨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했습니다(9-11절).
      그 후 시골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으나 다른 많은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12-13절).
      그 후 예수께서 열한 제자들이 음식 먹을 때에 나타나사 믿음 없고 완악함을 꾸짖으시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14-18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승천 하셨고, 제자들은 말씀을 전파했습니다(19-20절).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인류의 첫 열매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근거와 기반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생전에 많은 이적들과 가르침을 베푸셨고, 로마의 사형 집행장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율법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생전에 가르치셨던 그 가르침이 옳았다는 하나님의 인정이다. 예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