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diet)의 어원
διατροφή, ῆς, ἡ 스트롱번호1305
어원 / 1223과 5142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먹을 것(딤전 6:8) -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신약 성경 / 1회 사용
* 1223.
διά
스트롱번호1223
관련 성경 / «속격»통하여, 항상,«대격»~ 때문에, ~을 위하여, 말미암아(요1:3), 후에(막2:1), 인하여(마10:22), 까닭이니라(마17:20), 이러므로(마18:23), ~에게는(마26:24), 가운데로(막9:30), 안으로(막11:16), ~이므로 (눅2:4), 새도록(눅5:5), ~하니(눅18:5).
신약 성경 / 668회 사용
* 5142.
τρέφω
스트롱번호5142
어원 / 제1부정과거 ἔθρεψα, 완료수동분사 τεθραμμένος, 5157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르다(마6:26, 눅12:24), 대접하다(마25: 37), 자라나다(눅4:16), 나다(행12:20), 살찌게 하다(약5:5), 양육하다(계12:6), 양육받다(계12:14).
신약 성경 / 9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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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는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다
구약성경의 중심은 레위기이다.
레위기가 온전히 이해될 때 구약성경 전체가 이해된다.
우리가 "율법"이라 할 때 그것은 레위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편, 구약성경의 축(軸)은 신명기 31:9-13이다.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난 세계 모든 만민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오라는 제사장적인 사명을 주시는 구절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까지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만 선택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민족이었다.
그들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며 지금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야벳의 후손 카자르 민족이다.
지금의 유대인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종교적 유대인인 것이다.
창세기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까지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들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이 전개된다.
노아
시대에 오면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한다.
결국 성적인 타락은 대홍수 심판을 불러오고 말았다.
노아 홍수 후 민족의 기원과 방언의
기원이 아브라함을 소명하시는 창세기 11장까지 기록되었다.
12장부터는 히브리 족장들의 신앙과 생활이 기록되었고,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종살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할 하나님이 쓰실 사람 준비하셨으니 그가 바로 모세다.
모세는 80세에 부르심을 받아 형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졌다.
애굽 땅에 임한 10가지 재앙이 나오고 마지막 유월절과 출애굽하는 사건이 기록되었다.
20세
이상 남자 603,550명과 남녀 합하여 200만 명이 시내 광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50일 동안 시내산 아래까지 걸어서
도착한다.
1년 동안 시내산에 머물면서 레위기를 받고, 십계명을 받았으며, 성막을 건축하였다.
따라서 레위기는 66권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이다.
레위기는 말라기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다.
지금도 레위기의 정신대로 살면 우리 삶에 생명과 평안이 임한다.
레위기의 주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어서
거룩한 백성의 계수와 훈련에 대한 이야기, 즉 민수기가 나온다.
민수기는 단순히 백성을 계수한 것이 아니라 38년 광야훈련을
위한 군사와 성막을 호위하기 위한 것이다.
38년 광야 훈련이 끝나고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위한 설교가 나온다.
신명기는 레위기를 본문으로 한 모세의 고별 설교이며 모세의 유언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의로운 해(the sun of righteousness)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말합니다.
구약은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보다 더 강력한 것이 필요한데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메시야를 믿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는 이전에 소홀하게 생각했던 율법에 관심을 갖고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내 육신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더 은혜를 사모하게 합니다.
의로운 해는 치료의 빛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입니다.
의로운 해는 의를 가져다 주는 해입니다.
사람들은 풀뿌리나 약을 통해서 치료합니다.
하나님은 빛(광선)으로 치료합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극렬한 불로 태울 때 모든 것은 타버립니다.
한편으로는 빛으로 치료하여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날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라는 말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신앙을 경외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가리킵니다(눅 1:78). 시 84:11 60:19 )
태양이 만물을 살리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생명력으로 우리를 치료하여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라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치료"라는 말은 구원을
가리킵니다(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은, 신자들이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극도로 기뻐할 것을
비유합니다.
밤새 외양간에 있던 소를 내놓으면 자유를 얻고 껑충껑충 뛸 것입니다.
외양간은 죄로 인하여 가두어 놓은 세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에 들어가서 메시야가 나타났다며 외쳤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 재림 이전 시대에 완전히 실현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친히 악인들을 멸망시키실 때에 완전히 실현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 승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물론 이 승리가 복음 운동 시대 곧, 신약에도 겨자씨와 같은 종자로 존재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09-07-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의로운 해(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But for you who revere my name,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 with healing in its wings. And you will go out and leap like calves released from the stall.
의로운 해(the sun of righteousness)
쉐메쉬 체다카(שֶׁמֶשׁ צְדָקָה)
의로운(6666) 체다카(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발음
/ [ tsedâqâh ]
어원 / 66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창 15:6, 삼하 8:15, 잠 11:5), 의로움(신6:25, 24:13, 사5:7), 공의(신33:21,
왕상3:6, 사10:22), 권리(느2:20), 정의(암5:7, 6:12, 슥8:8).
[형] 의로운(삿 5:11, 대하 6:23,
시 11:7), 옳은(삼하 19:28), 적당한(욜 2:23).
구약 성경 / 157회 사용
* 6663. צָדַק
관련 성경 / 옳다(창 38:26, 욥 27:5, 사 43:9), 의롭다(욥 9:15, 사 45:25, 겔 16:52), 정결하다(단 8:14),의롭게 하다(잠 17:15).
[명] 의(사 43:26, 사 5:23), 의로움(렘 3:11), 정의(삼하 15:4), 공의(시 82:3), 정직(창 44:16).
구약 성경 / 41회 사용
해(8121) 쉐메쉬(shemesh) שֶׁמֶשׁ
어원/ ‘빛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해(창 28:11, 시 19:4, 나 3:17), 일월, 태양(수 10:12, 왕하 23:11, 겔 8:16), 해뜨는 곳(수 13:5), 동쪽(삿 20:43, 왕하 10:33),
백주(삼하 12:11), 햇볕(아 1:6), 햇빛(전 6:5, 7:11), 볕(사 49:10).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치료하는 광선
מַרְפֵּא
스트롱번호4832
어원/ 7495에서 유래[7495 참조]
관련 성경 / 화평(잠 14:30), 공손함(전 10:4), 건강(잠 4:22), 양약(잠 12:18, 13:17, 16:24).
[동] 치료하다(렘 14:19, 말 4:2), 치료받다(렘 14:19), 고치다(대하 21:18, 렘 8:15), 회복하다(대하 36:16), 온순한(잠 15:4).
구약 성경 / 16회 사용
* 7495. רָפָא
관련 성경 / 고치다(시 107:20, 사 19:22, 겔 34:4), 고침받다(사 6:10), 치료하다(창 20:17, 왕하 8:29, 렘 33:6), 고쳐주다(민 12:13, 렘 6:14, 8:11), 낫게 하다(왕하 20:8), 싸매다(호 6:1), 낫다(레 13:18, 삼상 6:3, 렘 51:9), 완전하다(렘 9:11), 되살아나다(겔 47:9), 완치되다(출 21:19), 수축(修築)하다(왕상 18:30).
[명] 의원(창 50:2), 의사(렘 8:22)
구약 성경 / 67회 사용
심판 날과 언약에 대한 확인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들이 장차 누릴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신다(1-3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극복하라고
지시하신 다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고(4절),
예언자 엘리야 즉,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이 전해 줄
하나님의 비밀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5-6절).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종말에 있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교만하여 악을 행하는
자는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치유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전개시키는 신약 시대고, 은혜로 사람을 부르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옛
구약의 율법 시대와는 전혀 다른 복음의 시대이다.
율법의 모든 규례를 지켜야만 구원을 받던 시대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은혜의 시대에도 복음 운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의 흥하고 패함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복음도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방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른 냄새'가 된다(고후 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한다.
이것이 본장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로서 이 예언을 통해 구약을 종결하고
신약과의 연결점을 제공한다.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가 은혜로 복음의 혜택을 누린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한 악한 세력과의 싸움에 참여해야 함이 마땅하다.
복음 운동은, 선교의 운동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사회의 악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현실의 장벽을 넘어 멀리 있는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상 끝에 이루어질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극렬한 불로 심판할 때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서 구원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옵니다.
용광로의 불은 심판의 불입니다.
하나님은 용광로 불로 심판하십니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입니다.
여기 이른바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에는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5절에 그리스도의 초림 시대 곧, 신약 시대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야인 세례 요한이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오신 시대 곧, 신약 시대를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 시대는 은혜로 사람들을 부르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를 어떻게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편에서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들어가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극렬히 타는 십자가 풀무에서 심판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심판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지금도 복음을 영접지 않는 자들을 불로 심판하십니다. 원자력이나 수소폭탄과 같은 광선이 와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일본에 있습니다. 사십만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있던 자리만 있고 사람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도 불로 심판하십니다. 뿌리까지 태우십니다. 영원히 고통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이 광선이 치료하는 광선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한 두 가지 방면을 가지고 있습니다.(눅 2:34).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고후 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합니다. 내 대신 심판 받은 것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고 영접지 않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멸망 당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신약 시대도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입니다. 이 때에 교만하여 복음을 받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재림 시에 다 초개와 같이 불타서 망하듯이 멸망을 당합니다.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공의로운 해는 치료의 빛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입니다.
공의로운 해는 의를 가져다 주는 해입니다.
사람들은 풀뿌리나 약을 통해서 치료합니다.
하나님은 광선으로 치료합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극렬한 불로 태울 때 모든 것은 타버립니다.
한편으로는 빛은 치료하여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날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라는 말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신앙을 경외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가리킵니다(눅 1:78). 시 84:11 60:19 )
태양이 만물을 살리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생명력으로 우리를 치료하여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라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치료"라는 말은 구원을
가리킵니다(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은, 신자들이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극도로 기뻐할 것을
비유합니다.
밤새 외양간에 있던 소를 내놓으면 자유를 얻고 껑충껑충 뛸 것입니다.
외양간은 죄로 인하여 가두어 놓은 세계입니다. 온전한 자유를 누립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마리아 지방에 가서 뛰어다니면 복음을 전합니다.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여호와가 이 일을 이루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은 그들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악인들을 짓밟을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악인을 밟는다“ 함은, 구원 얻은 하나님 백성의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날 악인이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재와 같이 없어지는 것을 봅니다. 악한 자는 불로 심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치료하는 광선으로 소생합니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 재림 이전 시대에 완전히 실현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친히 악인들을 멸망시키실 때에 완전히 실현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 승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물론 이 승리가 복음 운동 시대 곧, 신약에도 겨자씨와 같은 종자로 존재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모세의 법을 기억해야함)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가 호렙 산에서 여호와의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선지자 말라기가, 유대인들더러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합니다. 그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그 시대가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내다보는 그는,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로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에 세례 요한(여기서는 엘리야라 함. 5절 하반절)이 오신 목적도 회개하고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를 보내심)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가 그들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십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 엘리야" 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이유는, 양자의 사역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눅 1:17).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치료하는 광선으로 임하지만 그 전에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가 옵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세레요한을 메시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메시야가 아니라 엘리야라고 하십니다. 세례요한은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이 치료의 광선을 영접하도록 돕습니다.
(돌이키는 일을 함)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야합니다.
돌이키는 것의 반대는 마음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 마음이 서로 먼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집에 오랜만에 갔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느냐 물으니 아버지는 알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보아도 이해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대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멀어진 것입니다. 마음이 가까워지면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와서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효를 회복하고 자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이키지 아니하면, 여호와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실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가족끼리 마음을 열어야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이 마음을 열게 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복음을 영접합니다. 동숙자는 있어도 가족은 없다고 합니다. 같이 살면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고독이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문을 닫았습니다. 엘
리야는 마음의 문을 열어서 돌이킵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이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이나 환경으로 마음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좋은 집보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하나가 됩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가족은 마음이 멀어집니다.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마음이 통합니다.
다 신앙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면 마음이 통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유대인은 이방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복음을 이방과 유대인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끼리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미국에는 국회 안에 기도실이 있고 예배당이 있습니다.
국회할 때는 싸웁니다.
그러나 예배드릴 때는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여야가 다르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신앙 안에서 마음의 거리를 좁혀야합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독이 없고 한숨이 없고 위로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도록 하면 효자가 됩니다.
훌륭한 부모가 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그런 도덕적 타락을 회개시킵니다.
도덕적 개혁이 예수님을 믿게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는 시킬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은 도덕적 개혁을 힘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눅 3:4-6)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러시아 작가 이반 끄르일로프가 지은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의 집에 빈 자루가 하나 있었다.
가끔 걸레로나 쓰일 뿐 딱히 쓰임새가 없는 자루였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그 자루에 금화를 잔뜩 담아서 금고 속에 넣자, 순식간에 귀한 존재가 되었다.
주인은 이 자루를 수시로 어루만지고 안을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귀한 손님이나 친지들이 오면 이 자루를 열어 보여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아주 귀한 것을 대하는 손길로 자루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이로 인해 자루는 자신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루가 으스대면서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지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저런 입바른 말들을 상황이나 분위기도 모르면서 마구 던져댔다.
사람들은 때로는 듣기 거북하고 불쾌하기도 하였지만 금화가 든 자루가 하는 말이라, 그 말을 높이 사는 척 굴었다.
그런던 어느 날 이 주인집에 도둑이 들어, 금화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달아났다.
도둑은 금화만 빼고 자루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사라진 금화에만 관심을 가질 뿐 아무도 자루의 행방은 궁굼해 하지 않았다.
09-06-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념책(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Then those who feared the LORD talked with each other,
and the LORD listened and heard. A scroll of remembrance was written in
his presence concerning those who feared the LORD and honored his name.
어원 / 어미활용 סִפְרִי, 복수 סְפָרִים, 복수 연계형 סִפְרֵי, 560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출32:32, 신28:58, 시56:8, 렘36:13), 두루마리(민5:23), 증서(신24:1, 렘32:10,44),편지(삼하11:14, 왕상21:8, 에9:30), 역대지략(왕상14:19, 왕하8:23, 느12:23), 글(왕하5:6, 렘29:29, 나1 : 1), 조서(에1:22, 3:13, 8:10), 일기(에2:23, 6:1, 10:2), 학문(단1:4,17). [동] 기록하다(삼상10:25, 느7:5)
구약 성경 / 185회 사용
어원 / 2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념(출 28:12, 민 31:54, 말 3:16), 표(출 13:9), 기념물(민 16:40), 기억되는 바(느 2:20), 일기(에 6:1), 격언(욥 13:12), 기념표(사 57:8). [동] 기념하다(출 12:14, 레 23:24, 슥 6:14), 생각하다(민 5:15,18), 기억하다(민 10:10, 전 1:11).
구약 성경 / 24회 사용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2장 마지막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공의가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공의를 세우는가를 말씀합니다.
또한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야합니까 묻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구체적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을 짓고 제물을 드렸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정성과 믿음으로 드려야합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돌아왔지만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오지 않는 백성을 찾아오셔서 돌아오도록 일하십니다.
생명책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호적과 같이 언제 어디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기록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념책은 장차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기록한 것을 말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의 구원은 보장해 주십니다.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할 자에 대해서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 13:8).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계 20:15).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 둘 일은 이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영접했다면 자기의 이름이 틀림없이 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눅 10:20, 빌 4:3).
이 책 이름이 구약 말라기에는 "기념책"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삶이 모두 기념책에 기록될 것입니다.
장차 그 기념책에 의하여 상급이 결정될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의 삶이 다람쥐가 체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은 같은 일상이 아니라 새로운 날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은총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상급을 위한 믿는 자의 덕을 쌓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말3:16).
생명책이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키는 것인데 반하여, 기념책은 그리스도인의 상받을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명책은 기록되어 있는 상태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만 지워지는 것인데 반하여, 기념책은 그때 그때마다 기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있는 생명책
생명책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호적과 같은 책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 생명책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된 자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기록이 안된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의 구원은 보장해 주십니다.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할 자에 대해서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 13:8).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계 20:15).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 둘 일은 이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영접했다면 자기의 이름이 틀림없이 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눅 10:20, 빌 4:3).
2. 그리스도인의 상급을 위한 기념책
그리스도인들의 상급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위한 다른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이름이 구약 말라기에는 "기념책"이라고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말3:16).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냉수 한그릇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공궤하면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그런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이 책에 기록되어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바울은 고전15:58절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이처럼 격려하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심판을 받을 자들에게도 생존시에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기록이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계20:12 하반절).
성도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그 생애를 살아가는 중에 행하는 모든 행위가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급을 위해 낱낱히 기록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선한 일, 열매 맺는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늘에 가서는 이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합니다.
생명책은 시편(시 69:28)과 요한계시록(계 3:5; 13:8; 17:8; 20:12; 20:15; 21:27)을 제외하고는 여기에 유일하게 언급된 책이다. 생명책은 의인들의 명단,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명단이 기록된 책이다. 이 책에 기록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생명책. 고대에는 자유시들에는 시민권을 가진 모든 사람의 이름이 담긴 두루마리 책이 있었다(사 4:3; 겔 13:9 주석). 이곳에서 사도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들의 이름이 적힌 하늘 기록부를 언급한다(출 32:32; 단 7:10; 12:1; 눅 10:20; 계 3:5 주석). 이 책에는 이 서신에 개인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다른 동역자들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재림교 성경주석, 빌 4:3)
4.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나요?
(빌 4:4-9, 개정)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한 권면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2)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3)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5)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5.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덕목들은 실행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나 실행한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약속되어 있나요?
(빌 4:7,9, 개정)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7. 지각. 헬라어 누스(nous).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 “이해력”, “이해”, “마음”, (2) “이성”, (3) “판단력”, (4) “생각의 형태”, 곧 “생각”, “감정.” 신약에서 누스는 24회 나오는데 17회는 “마음”으로, 7회는 “이해”로 번역된다. 이곳에서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이다. (1) 근심을 극복하는 능력에서 하나님의 평강은 인간의 모든 이성을 초월한다. (2)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을 초월한다. 두 번째 의미가 더 적절한 듯한데, 이는 그것이 자신이 거론하는 것을 최고로 칭송하고자 할 때 그리고 인간의 표현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 최상급을 사용하는 바울의 습관(참조 엡 3:20)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경험으로 이 평강을 아는 자들밖에는 그 의미를 만족스럽게 간파할 수 있는 자들이 없다.
뛰어난. 헬라어 휘페레코(huperecho-), “능가하다”, “우월하다”, “초월하다.”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에게서 오는 평강 혹은 하나님이 베푸는 평강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롬 5:1)하는 것과는 다르며 그 경험을 누리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바울은 그러한 평강이 기도로 가득 찬 생애를 사는 사람(4:6)에게 주어질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사람과 항상 화평하게 지내는(히 12:14; 참조 롬 12:18 주석) 것이 가능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런 조건을 성취하는 데 실패한다고 해서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을 받아들이는 일이 방해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한 평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능력과 돌봄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에 기초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항상 함께하는 하나님을 지각하는 데부터 흘러나오며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와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참조 요 14:27; 롬 1:7; 5:1; 골 3:15; 살후 3:16 주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신자들을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에 대한 바울의 용법에 대해서는 빌 1:1; 2:1과 비교하고 롬 8:1의 주석을 참조하라.
마음. 신약은 “마음”이라는 단어를 생각의 중심, 욕망, 감정과 열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참조 마 5:8, 28; 12:34; 롬 1:21 주석).
생각. 헬라어 노에마타(noe-mata), 마음에서 나오는 “사상”, “목적.”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은 감정과 생각을 근심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보초처럼 마음과 생각 앞을 순찰한다.”(재림교 성경주석, 빌 4:7)
“평강의 하나님. 평강의 창시자이며 시여자인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생각을 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자들과 함께 거하며, 그가 함께 계시면 그의 소유인 평강이 이르러 온다(참조 빌 4:7; 롬 15:33 주석).”(재림교 성경주석, 빌 4:9)
6.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무엇에 대해 감사했나요?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언제 어떻게 도왔나요?(빌 4:10, 14~18)
(빌 4:10, 개정)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 4:14-18, 개정)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도운 경우
1) 마게도냐를 떠날 때 도움
2)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두 번 도움
3)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에바브로디도를 보냄
7. 바울이 모든 일 즉 “풍부와 궁핍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면서 동시에 한 유명한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좌절에 빠진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의 문맥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빌 4:13, 개정)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은 유명하다. 어른이나 아이나, 교회를 오래 다닌 신자나 이제 교회 생활을 시작하는 초신자나, 그리스도인이나 비(非)그리스도인이나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이다. 또한 설교자들이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구절이다. 무엇보다, 적극적인 사고와 긍정적인 확신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일 것이다.
사람들은 본 구절을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혹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믿는 자들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어떤 운동선수들은 그들의 이마에나 눈 밑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혹은 ‘빌 4:13’이라고 써서 붙이고 경기를 치르기도 한다. 이들에게 본 구절은 ‘하면 된다’는 적극적 사고와 ‘할 수 있다’는 긍정적 확신을 주는 일종의 주문(呪文)이다,
그러나 본 구절을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마디로 오독(誤讀)으로 인한 오해(誤解)이다. 그리고 그 오독(誤讀)은 본문(text)을 문맥(context) 속에서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면 이 구절은 ‘하면 된다!’거나 ‘할 수 있다’는 맹신(盲信)을 말하지 않음을 쉽게 알게 된다. 오히려 이 구절은 ‘긍정의 힘’ 혹은 ‘적극적 사고’와 같은 인본주의적 생각이나 인간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를 강력하게 배척한다.
먼저, 본 절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를 강조한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가” 아니라,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에게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즉, 본 구절을 읽을 때에 인본주의적 생각에 기초하여 “내가 할 수 있느니라”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를 강조하여 읽어야 한다. 이러한 강조는 본서의 말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또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거나, 성취하고 싶은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거나, 또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독(誤讀)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할 수도, 성취할 수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표현을 ‘모든(혹은 어떠한) 상황(여건)에서도 감사(기뻐)할 수 있느니라’로 읽어야 한다. 이렇게 읽는 것이 조금은 생소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글의 맥락과 전후 문맥을 고려하면 아주 자연스러운 독법(讀法)이다. 이러한 이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나타난 바울의 권면과도 조화를 이룬다. “범사에 감사하라.”
빌립보서 4장 13절은 오독(誤讀)으로 인하여 오해(誤解)되고 있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절은 육체적인 힘이나 사회적인 능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이 구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이 참담할 때에 우리에게 자족하고 기뻐(감사)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며,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인내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어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고, 모든 여건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느니라’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될 때, 이 구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라’는 신앙 규범이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능히 견디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담고 있는 강력한 약속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8. 주 안에 사는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하나요?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2)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3)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
3. 소소한 일상 잔잔한 감동
4. 성경적 결론
1) 의인들의 명단,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명단이 기록된 책은 생명책이다.
2) 빌립보서 4장 13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라’는 신앙 규범이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능히 견디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담고 있는 강력한 약속의 말씀이다.
3) 주 안에 사는 사람의 삶은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에게 먼저 메시야의 길을 닦는 하나님의 사자가 올 것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계신다(1-6절).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타락시킨 것에 대해 책망하면서, 그 문제를 시정하라고 당부하신다. 특히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한 죄악을 책망하시는데, 올바르게 규례를 지킬 경우 하나님이 다시금 자비롭게 돌아가리라고
약속하신다(7-12절).
그 후에 이스라엘의 배교적 행위에 대해 책망하신 하나님은(13-15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자들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16-18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죄악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의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어 아들의 권세를 누리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모든 하나님의 예언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이와 같이
답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행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장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언약을 부인하는 악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옛
조상들 때부터 약속하시기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본장 후반부에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하신다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 가치관을
따랐기에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것이 헛되며 교만한 자가 창성하게 된다는 악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들의
징벌을 자초하였다.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규정해 주신 하나님의 법토는 지켜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우상 숭배하는
일과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일, 그리고 불의한 일을 행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겼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심판을 받게 되었고,
귀환 후에도 죄악을 계속 저지르자 하 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흩어져 사는 민족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인간적인 꾀를 부려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것은 결국 축복을 받기는
했어도, 수많은 고난의 시절을 보냈어야 했습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욕심이 앞서는 방법은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굳건히 받들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살 때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내렸던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는 세 가지 종류의 책들이 있습니다. 세 가지 책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보좌 앞에 심판대(계 20:11,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가 있는데 그 심판대 앞에 책들이 놓여 있는데, 이 책들을 사도 요한이 보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 20:11~15)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12)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심판의 책)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이 심판을 백보좌 대 심판이라 하며, 행위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갔던 모든 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세상에서의 불신앙의 생을 낱낱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마 5:26).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여러 책들이 있는데 보좌 앞에 있는 심판대 앞에서 펴져 있었다 하였습니다. 이 시간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세 가지 책들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행위에 대한 심판의 책>입니다
(계 20:12)...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심판의 책)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복음을 영접치 않고, 육체의 본능대로 행한 자들이 기록된 책입니다. 구원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17:1)“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인간이 지은 죄는 그저 세월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거나 없어지지 아니하고 철필로 기록되고 새겨졌다고 하였습니다.
심판의 보좌 앞에 펼쳐진 책들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의 죄와 악행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죄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는 그 기록들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계 20:12)하반절에“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 되어 있습니다. 내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어린양의 생명책(요한계시록 3:5)
(계 13: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7:8)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격려와 칭찬을 받으며 천사들의 영접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로서 영화의 몸을 입고서
예수님이 준비하신 처소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세세무궁토록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
생명책은 그러므로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입니다.
셋째, 여호와 보좌 앞에 있는 기념 책(말라기 3:16)
‘기록하셨느니라’(와익카테브)
1. 새기다
2. 기록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카타브’의 수동형입니다.
기념책(세페르
직카론)은 ‘기억의 책’(a book of remembrance)이라는 의미입니다.
‘직카론’은‘(과거의 일을 잊지
않고)기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원에서‘기억, 기념, 기념물’이라는 의미입니다(출 39:7, 민 10:10, 31:54).
그 책이 여호와 앞에 여호와께서 언제든지 그 책을 보실 수 있다는 사실, 즉 항상 기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기록은 언제부터 기록될까요?
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존재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땅에서 생명을 다하기 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시다 그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의 일들을 기록해 놓으실 것입니다.
(말 3:16)중반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어떤 사람들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었습니까?
그러면 이 기념책과 생명책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생명책에는 구원받을 사람들, 천국백성들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는 책입니다.
기념책에 적혀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의 명단인 어린양 생명책에 적혀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특별히 헌신하고 희생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 행위들을 기념하여 적어놓은 책인 것입니다
무엇이 경외인가?
창세기 18:18~19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신 것’입니다.
큰 믿음, 큰 기쁨, 큰 순종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여호와의 기념 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내 이름의 책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만일 내가 주님의 뜻을 위하여 일한 것은 반드시
기념책에 무엇인가 기록되어져 갑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내 이름의 명목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에
기록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1.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름
시편 56:8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은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눈물 흘리며 기도한 내용들이 주의 책에 기록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경건한 언어
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유다서 1:10~11)
16절 전반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으시고”라 하였습니다. 말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념책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 여호와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말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념책에 기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저주도 들으시고 저주하시는 것입니다(민 14장).
하나님께서 주신 입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혀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로 주의 은혜를 끼치고 사랑을 더하는 말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의 이름도 분명 기념책에
녹명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를 영화스럽게 영광스럽게 하는 일로 인해 여호와의 기념 책에 기록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와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를 돕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있다 하였는데 그 이름은 생명책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념 책에도
기록되어집니다(빌 4:3, 딤후 2:15).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양 생명책에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은 기념 책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4:9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무엇입니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 여인이니 물론 어린양 생명책에도 있을 것이요 예수님을 위해 귀한 것을 바쳤으니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기념 책에도 기록되었을 것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져서 그 여인의 행적은 성경책에도 기록되어집니다.
그러나 기념 책에 기록되어지면 하늘에서 받을 상급과 바로 연결되어집니다.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여호와가 당신의 특사를 보내십니다. 그가 주의 갈 길을 닦을 것입니다. 여기 이른바, ‘내 사자’ 라는 말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님께서 돌아오지 않는 백성을 위해서 친히 사자를 보내십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마음 그릇을 준비시킵니다. ‘길을 예비한다’ 함은, 모든 사람들의 심령에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로서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미리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킵니다.
누구를 만나려면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합니다. 마음을 잘 준비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바르게 만나고 바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에 나오는 것도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배 전에 와서 준비하고 드려야 큰 은혜가 됩니다. 마음과 정성과 사랑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율법적인 준비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세례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다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율법으로 나를 살펴보아야합니다. 나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철저한 자기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야합니다. 그 후에 은혜의 세계가 열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심판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마음에 주님이 오시도록 고속도로를 만들어야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바로 그 마음에 오십니다. 그 후에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입니다.
‘너희의 구하는바 주’ 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 때에 곧, 메시야를 대망할 줄 모르고 있던 때에 그가 홀연히 오셔서 그가 오신 일이 뜻밖의 일이 됩니다. 메시야의 사역은 영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사역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는 성전에 임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성전에 오시고 친히 성전이 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합니다. ‘언약의 사자’ 라는 뜻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구원 언약을 성취하시는 중보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말라기는 세례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금을 연단하는 불과 같으신 분)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예수님은 먼저 오셔서 정결케 하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르는 날에, 아무도 예수님을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의 인간 그대로는 초림하신 그리스도 앞에도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별 수 없이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악에 대하여 무관심하신 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가지시고 사람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의 주시는 구원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멸망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가 나타나는 때에,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재물’과 같이 우리를 정화하십니다. 빨래를 깨끗하게 빠는 것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이와 같은 정화 운동은, 십자가에서 자신이 심판을 받으심으로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여러 고난을 주셔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 때에 정화하는 이 일은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재림 때에 완전히 정화하는 날까지를 포함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드려야합니다.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여호와는 레위자손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여호와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여호와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가장 최상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는 저는 것, 도둑질한 것을 드리지 않습니다.
여기 레위 자손은 제사장들을 말하는 것인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일반 성도를 총칭합니다. 예수를 영접한 자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깨끗케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니심으로 속죄를 통하여 깨끗게 하십니다.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시키는 운동을 통하여 신자를 깨끗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방편으로 하여 사랑하는 자를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을 연단하셨고 폐르시아나 그리스 로마를 통해서 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시련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하십니다. 예수님도 오셔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죄를 철저히 다루셨습니다.
요즘에 우리나라 교회의 지도자가 부패되어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량주의 성적인 부패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인 지도자들을 불신자들의 비난과 사법부의 심판을 통하여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화되어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참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여호와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정성과 사랑으로 헌금과 예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여호와 주를 기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자들)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기서부터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재림하셔서 공의를 회복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회개하는 자들이 있지만 회개치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날에 회개치 않는 그들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점 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일꾼의 품삯을 떼어 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주님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심판의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십니다.
술수하는 자는 거짓된 종교적 수단에 의하여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일계명을 어기는 자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거짓 맹세하는 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자신을 포장하는 자입니다.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함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나 남의 사유재산에 피해를 주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창녀들이 번 돈을 헌금으로 드리면 받지 않으십니다. 품꾼의 삯을 주지 않고 그 돈으로 헌금하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을케함은, 무자비한 지이니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과부, 고아, 외국에서 온 나그네 이 셋은 성경에서 흔히 함께 나타납니다. 그들은 다 긍휼의 대상입니다.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라는 말씀은, 이 부분에 기록된 죄악의 목록에 있어서 최후로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것이 모든 죄악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음으로 다른 죄를 짓게 됩니다. 모든 죄악의 근본인 경외심 없음을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하여 도리어 그것을 중요한 죄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매한 자들에게는 돌연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연히 재림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계속하여 유대 민족의 정화 운동에 대하여 진술합니다. 이 정화 운동은 위에 말한 것(3절)과 같이 제사장에게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임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기탄없이 범하는 자들에게 임하여 의와 불의를 갈라놓으십니다. 예수님은 처음 오셔서는 이런 죄를 위해서 예수님 스스로 심판을 받아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이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예수님이 재림 시에 친히 심판하십니다.
(회개한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 주는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야곱의 자손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말라기는 정화의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하신 것을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필경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내시어,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 이른바 야곱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 중에 있었던 교회를 가리킵니다. 거기에 더하여 연속된 새 이스라엘 곧, 이방인 교회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보혈을 영접한 자들을 다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 때도 이스라엘을 소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우상숭배를 했지만 그들을 없애지 않고 그들을 바벨론에 보내서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2007년 후부터 한국교회 목회자를 연단하시고 훈련하십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하심)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정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이 정의를 버린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때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규례를 떠나서 지키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이제 너희는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으로 돌아와야 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도 그들에게로 돌아가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공의를 회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또 다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회개치 않음을 통탄히 여기십니다. 그들의 범죄 생활의 역사는 오래였고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은, 회개의 은혜로운 성격을 보여줍니다(1:3). 사람이 회개할 마음을 진실히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무한히 먼 거리를 가는 것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회개한 자에게로 돌아오시니, 거리가 먼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복음적 은혜입니다. 이렇게 복음적 은혜인 회개를 유대인들에게 요구하였으나 저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가려면,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무슨 죄를 회개하라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죄에 대해서 무지하였습니다.
(도둑질한 것을 회개할 것)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사람이 사람의 것을 훔쳐도 안 되지만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더욱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은 것이 도둑질입니다. 아브라함이 멜리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립니다. 야곱도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도 십일조에 대해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의와 공의와 사랑을 갖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23) 이스라엘 온 백성이 여호와의 것을 훔치니, 그들 모두가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더러 그 소산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실상 은혜입니다. 그 소산을 주신 이가 여호와시니 그것을 그가 전부 요구하셔도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않고 다만 십분지 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역대상 29장 14절에서 우리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순간 내 소유가 하나님의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열에 하나는 내게 주고 나머지는 네가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서 레위 족속의 사용할 것을 공급하시게 하셨습니다. 곡식, 술, 기름 양떼와 소떼의 처음난 것 등에 대한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레 27:30 민 18:20-24 신 14:22).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치지 않는 자는, 특별히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죄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쓸 때 그 돈은 헤어진 전대처럼 새어나가게 됩니다. 십일조를 내면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내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 많은 십일조를 드릴 수 있으니 내 일을 잘 되게 해달라는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 우리는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받는 복)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스라엘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별하여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최상의 것을 드리듯이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절름발이나 눈삔 것이나 병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것을 드리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구별하여 드려야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여기 창고라고 한 것은 성전 창고를 말하는 것입니다(느 10:38, 13:12 대하 31:11). 온교인이 십일조를 하면 성전창고가 넘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양식이 풍부합니다. 그러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도울 수 있습니다. 직접 가난한 자를 돕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 쉽습니다. 교회 이름으로 돕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나의 이름을 빼야 합니다. 내 이름 석자를 써서 하고 싶다고 하면 안 됩니다.
나를 시험하여 라는 말씀은, 그가 확실히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주실 것을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시험라라고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바치는 일로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가 하늘 문을 열고서, 그들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하였어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못하였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야 복을 주십니다.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것은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도 바치지 않으니 시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험하라는 것은 순종을 통하여 체험해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조금 미련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풍성한 물질을 복주심)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 만군의 주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주실 것인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땅의 소산물을 해로운 벌레가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포도밭의 열매가 채 익기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땅이 이처럼 비옥하여지므로,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을 복되다고 할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 주실 것을 여러 가지로 진술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 중에 확실히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갚아주시는 풍성한 물질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때는 십일조를 드리는 자세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온전힌 십일조를 드렸나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십일조는 바치지만 다른 죄악 때문에 물질적 축복을 못받을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바치되 게으르고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주시는 것을 체험해야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는 7가지의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바보들은 항상 최선을 다하였다고 말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바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최소한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바보들은 자신이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만 잘나고 세상 사람들은 다 못났습니다. 이것이 바보의 정체의식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운동을 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알아야합니다. 형편없이 하면서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만합니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선이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지난 날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보면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바보였습니다.
이웃과의 관게도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 더 잘 해주었어야하는데 잘못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밥먹이고 학비만 주었다고 다 해준 것은 아닙니다.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고스톱합니다. 놀러가면서 시장 간다고 거짓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적합니다. 이스라엘이 불손한 말로 여호와를 거역하였습니다.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였기에, 주님을 거역하였다고 하십니까?“ 하고 이스라엘은 묻는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남에게는 복을 주시고 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대듭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은 물질만 가지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당대에만 평가하지 못합니다. 후대에 평가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을 지적합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여기서도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눈먼 것을 드리고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모든 원망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왜 키가 작으냐고 원망합니다. 왜 이렇게 낳았느냐고 하는 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적절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입니다. 그들은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느냐고 말하지만 그들이 원망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욥도 왜 나를 태어나게 하였느냐고 원망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처지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고의 은사임을 알아야합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많은 은헤를 주셨느냐고 과분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에 있어서 그 특징은, 이와 같이 답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한 점입니다.
(유익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무슨 복을 받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원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금식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행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그가 갚아주시는 일이 없다고 패역하게 주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억지로 지킵니다. 마음 없이 지킵니다. 축복을 목적으로 하여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지켜야 합니다. 기쁨으로 드려야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유익하느냐고 유익만을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드려도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십일조 드리고 그 주에 장사 안 된다고 십일조를 돌려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돈을 꾸어서 드렸는데 장사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가 십일조를 낸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유익에 초첨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를 바쳤으면 하나님이 이미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을 기다려야합니다.
(내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최선임)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그들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고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잘 살드만’ 하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들이 잘 산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가 보자하며 의심하지만 이런 자가 화를 면한다는 주장합니다.
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불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신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정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어설프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신자들이 말로는 이런 죄악된 사상을 표현하지 않아도, 그 마음 속에 이런 죄악된 사상을 품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 행동 면에 있어서 자기들도 모르는 가운데 이런 죄악된 사상을 행위로 그려 놓는 일이 있을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런 위험을 경계하고 언제나 생각과 언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기록하심)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우리는 위의 13-15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반대 되는 진실한 신자들의 주장을, 선지자 말라기가 여기에 소개합니다.
그 때에 주께서는, 주를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는 자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만 피차에 말하매 라고만 하였습니다.
이들의 담화 내용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14,15절)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에게 벌을 주신다는(18절) 담화일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경외하는 자들은 관점이 다르고 말이 다릅니다.
마치 갈랩과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욥은 믿음의 말을 하고 욥의 아내는 불신의 말, 불평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주를 경외하며, 주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담화를 들으시고 그것을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을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하여주십니다. 그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기 이전에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을 먼저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중세기 수도사가 길을 가는데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습니다. 농부가 파 마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수도사가 뭐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농부는 노는 사람이 뭐달라고 하느냐고 마른 마늘 봉다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 천국 창고에 가니 마늘봉다리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다 그대로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록하신 목적은, 그들이 믿는 대로 장차 갚아주시려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자를 특별한 소유로 삼으심)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지정한 날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가 됩니다. 부모가 효도하는 자식을 아끼듯이, 여호와가 그들을 아끼십니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들을 vip로 대접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잠언에 의인의 자식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선하게 사는 사람의 후손은 존경받으며 살게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설프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그날에 하나님이 그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심)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하나님은 다시 돌아와서 그 때에야 이스라엘이 다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비로소 분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와 경외하는 자를 분별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와 십일조를 내는 자를 분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또 한번 깨달을 것은,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사실입니다. ‘돌아와서’ 라는 말은, ‘또 한번’이라는 뜻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때는 양과 염소를 나누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와 경외심이 없는 자를 구별합니다. 양과 염소를 분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으로 살아야합니다.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생명책과 기념책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신구약 성경에 `생명책`이란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명책에 대한 언급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은 특이하면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상은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 끝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죽으면 이름이 영구적으로 지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셨습니다(요 1:29).
믿는 사람의 죄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요일 2:22).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고후 5:5).
모든 사람의 이름을 사망의 명부에서 생명의 명부에 올려 놓았는데,
그리스도의 공로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삭제되고 지워지는 것입니다.
`저희` 라는 사람은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 밑에 있던 불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도말` 이란 말은 기록되어 있는 상태에서 지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파피루스나 짐승의 가죽 위에 글자를 적었는데 그때 사용된 잉크에는 산(酸)이 가미되어 있지 않아서 종이의 안쪽까지 스며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폰지로 글자를 지워내면 종이 표면은 마치 글자가 없었던 것처럼 깨끗해 졌습니다.
이것이 도말이란
뜻입니다.
모세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출32:32)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출 32:33)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란 말씀에서 `흐리다`는 것은 영어로는 blot out이며 헬라말로는 엑살레입호이며 지운다는 뜻입니다.그러므로 이 말씀은 생명책에서 반드시 지워 없애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고 시인된다는 것을 살아 있을 때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일 5:10), 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며(요일 5:11), 또한
바울 사도가 복음을 위해 힘쓰던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음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끝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다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이름이 삭제되어 나중에 최후의 심판대에서 자기의 이름을 발견치 못하게 되며 영원한 불에서 고통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20:11~15).그러므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도말될 날이 오기 전, 은혜시대가 끝나기 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인 것 보다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 20).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땅에 기록되어 영원히 수치를 당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은혜시대가 끝나면 환난시대가 오며, 은혜시대에 끝까지 구원받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기회가 다시 없으므로(마 25:11~12,
눅 13:25), 생명책에서 자동적으로 다 지워지게 되어 남아있는 것은 환난과 심판밖에 없게 됩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결국 마귀와 함께 불못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히 12:23)는 영원한 영광 속에서 주님과 더불어 기쁨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이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키는 것인데 반하여, 기념책은 그리스도인의 상받을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명책은 기록되어 있는 상태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만 지워지는 것인데 반하여, 기념책은 그때 그때마다 기록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하여 대다수가 진리 가운데 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가 형통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말 3:15)는 불신의 말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옹호하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정히 처리하실 것임을 서로 말하며 믿음을 지키는
사람의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3장 16절).
기념책에 기록해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날에 그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고, 특별히 아끼며 영광을 주기 위함입니다(말3:17).
예수님은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며(마 10:42),
그리스도인이 주릴
때, 목마를 때, 병들 때, 나그네 되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모든 것을 주님께 한 것으로 여길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5:35~4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58).
중국의 어떤 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전 왕이 정치를 개판으로 해서인지 나랏말이라면 무조건 믿지 않았습니다. 새 왕은 나라의
영이 서고 나라말에 대한 신뢰가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왕궁 앞에 있는 대로변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을 서문으로 옮기우는 자에게
황금 5 냥(우리 돈으로 500 만원)을 주겠다고 방을 썼습니다. 백성들은 그 방을 보고 콧방귀를 뀌고 옮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어리숙한 젊은이가 그 기둥을 서문으로 옮겼고 나라의 관리는 현장에서 황금 5 냥을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백성들은
나랏님이 하시는 말씀에 신뢰를 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제가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는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무척 도움이 되는 무척 중요한 영적인 정보이니까 잘 들으시고 마음 속에 새겨 두시고 그 말씀 그대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옮기면 황금 5 냥이라고 단지 알고만 있으면 그 황금 5 냥이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옮기면 황금 5 냥이라는 것을 알고 옮길 때 황금 5 냥이 내 것이 되듯이 이 시간 여러분들이 들으시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을 가름하는 중요한 영적인 정보이고 이것을 행하는 것으로는 황금 5 천냥 황금 5 만냥 황금 5 억 냥 이상 가는 가치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잘 들으시기고 가슴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책이면서도 책에 대하여 말씀하는데 대략 네 가지 책들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 중 세 가지 책은 하늘에 있고 나머지 한 가지 책이 땅에 있습니다. 땅에 있는 한 가지 책이 무슨 책이냐 바로 성경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 누구나 볼 수 있는 성경책입니다. 디모데후서 3 장 15 절에서 17 절은 이렇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땅에다가 성경말씀을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성경책은 진리로서 이 땅에서 천국 가는 길과 지옥에 끌려가는 길을 낱낱이 예시하여 줍니다.
성경책
외에 성경이 말하는 다른 책들은 즉 세 가지 종류의 책들은 하늘에 있습니다. 세 가지 책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보좌 앞에 심판대가 있는데 그 심판대 앞에 책들이 놓여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보고 증언하였습니다.
생명책(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여러 책들이 있는데 그 책들의 상태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 앞에 있는 심판대 앞에서
펴져 있었다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보좌 앞에 나아가는데 심판대 앞에 펴져
있는 책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책들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심판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보좌 앞에 있는 책이 있다고 하지 않고 책들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책이 한 권이 아닌 여러 권인데 이 책들이 어떤 책들이겠습니까? 우리가 심판이라고 하면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심판의 보좌 오른쪽으로 가서 천국으로 직행하기도 하고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심판의 보좌 왼쪽으로 가는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기도 합니다. 심판은 꼭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죄가 있거나 죄가 없거나 두 가지 경우가 있지만 어느 경우든지 재판부가 상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늘의 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하여 지옥으로 가게 하거나 천국으로 가게 하거나 천국에서도 상을 타게 하는 세 가지 평결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세 가지 책들에 대하여 한 가지 한 가지 책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땅에 살았던 모든 이들이 지은 죄악과 불신으로 살았던 기록이 담긴 책입니다.
천국시민권자가 있듯이 이 책은 지옥주민등록부이면서 달리 말하면 “지옥연명부”라 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17: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인간이 지은 죄는 그저 세월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거나 없어지지 아니하고 철필로 기록되고 새겨진다 하였습니다.
시편 139 편에
있는 그대로 앉거나 서거나 먼데서 생각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도 낱낱이 다 기억하고 계시고 다 기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죄들이 천국의 문자로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가보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한뉴스 같은 동영상들도 다 기록소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나는 땅에서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증언하면 천사는 심판대 앞에 있는 대형 텔레비전을 켜 줄 것이고 그 안에 내가 땅에서 살았던 모습들이 은밀하게 감추어졌던 것이라 할지라도 마치 내 개인 비디오를 찍은 것처럼 소상하게 상세하게 기록되어 나올 것이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심판의 보좌 앞에 펼쳐진 책들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의 죄와 악행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죄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는 그 기록들이 중간에 지워져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지었던 죄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그 기록들은 붉은 문자로 ‘보혈의 피로 용서됨’이라는 어린양의 인장이 찍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한 이후에도 지은 똑같은 죄들에 대하여는 다시금 더 굵은 문자로 기록되어졌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 장 12 절 하반절에 보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 되어 있습니다. 이 죄악의 기록부에 지옥연명부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골 때리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왼쪽으로 끌려 강제 구인되는 일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수명이 한 10 년 정도 남아 있다면 10 년 이후에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들에 쓰여진 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을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어린양 생명책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반드시 놓여 있는 책이 있는데 바로 어린양 생명책입니다.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심판대 앞
오른쪽으로 판결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격려와 칭찬을 받으며 천사들의 영접을 받아 첫째, 새 하늘과 새 땅에 걸맞는 하늘에 속한 거룩한 형상 즉 새 육체를
부여 받으며 그 몸에다가 흰 세마포 옷을 입고 그 다음에는 천국문을 통과하는데 천국 안에서 예수님의 영접을 받아 천국의 살
구체적인 처소가 예비되게 됩니다. 천국시민권자로서 살게 되고 그곳에서 천천만만이 넘는 천군천사들과 보좌 중앙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 생명책은 그러므로 구원받을 사람들의 명부요 천국시민권자의 명부입니다. 다니엘 12 장 1 절입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성도 여러분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가 오늘 중심으로 말씀을 드릴 여호와 보좌 앞에 있는 기념책입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라기 3 장 16 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하나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앞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기념책“이라 하였습니다. 기념책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보시고 하나님의 가슴 속에 기념될 만한 것을 기록해 놓는 책입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이별하여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에
가면 거기에는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일대기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 모든 것들이 남김없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내 인생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내가 이 세상 이별하기 직전 무슨 유언을 남겼는지가 다 담겨 있는 기록이 등재되어 있는 내 인생이 기록되어
있는 노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기록은 언제부터 기록될까요? 시편 139 편 16 절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나의 모든 사항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존재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땅에서 생명을 다하기 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기념책에는 모든 기록들이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행한 행적이 있을 때 그것을 기념하여 기록해 놓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념책에는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으실까? 물론 하나님의 심장을 뛰게 하고 하나님의 심금을 울리게 하고 하나님의 가슴을 감동하게 하는 일들을 기록해 놓으실
것입니다. 말라기 3 장 16 절 중반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어떤 사람들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가 기념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념책과 생명책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생명책에는 구원받을 사람들, 천국시민권을 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는
책이요 기념책에 적혀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의 명단인 어린양 생명책에 적혀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특별히
헌신하고 희생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 행위들을 기념하여 적어놓은 책인 것입니다. 서울대학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이 있고
장학생 명단이 있다면 장학생 명단에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 합격생 명단에 있듯이 기념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물론 생명책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기념책에 기록될까요? 성경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기록된다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반드시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 장 11 절과 12 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념책에 “아브라함은 나를 경외하는 고로 백세에 얻은 자식을 기꺼이 나에게 제물로 바치려 하였음” 뭐 그렇게
기록되었는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기록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름은 300 회 이상 기록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나사로를 위로하고 있다 하였으니 생명책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행적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기념책에도 기록되었으니 아브라함은 성경책, 생명책, 기념책에 기록된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내 이름의 책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만일 내가 주님의 가슴을 적신다면 주님의 가슴을 감동으로 떨게 한다면 그 책에는 무엇인가 기록되어져 갑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내 이름의 명목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에 기록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기념책에 그 이름이 녹명될만한 일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 째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됩니다. 시편 56 편 8 절입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은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눈물 흘리며 기도한 내용들이 주의 책에 기록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자식 어거스틴을 위해서 눈물 뿌려 13 년 동안이나 기도하였습니가.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의 책에 기록하시고 어거스틴을 하나님의 구원사의 큰 인물로 삼아 주셨습니다. 새벽제단에 보면 자신의 자식을 위해 눈물 뿌려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과 이들의 기도의 내용은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들으시고 눈물로 기념책에다 그를 적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여러분들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말하는 일들로 인해 기념책에 기록되어집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라기 3 장 16 절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6 절 전반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으시고”라 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말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념책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말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분이 좋아지셔서 기념책에 기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입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혀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로 주의 은혜를 끼치고 사랑을 더하는 말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의 이름도 분명 기념책에 녹명된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절반이 말입니다만 어떤 이는 이 말을 하고 다님으로 인해 사람들의 가슴을 억장으로 무너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시 말하자면 말로서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말을 따뜻하게 함으로 천국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로운 말로 전도를 하면 전도하는 그 사람도 기념책에 기록됩니다. 가끔 아들이 전화를 하는데 특별한 용건이 없는 전화를 합니다. 몇마디 통화를 해도 왜 전화를 했는지 알 수가 없어 왜 전화 했냐? 물어보면 그냥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아빠! 사랑해요! 하고 그냥 전화를 끊을 때도 있습니다. 자식의 모습과 자식의 음성이 그대로 가슴에 각인되고 기록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말들을 다 기록해 놓으시고 내가 말을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드리는 말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기념책에 적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여러분들이 주를 위하여 행한 일들로 인해 기념책에 기록되어집니다. 주를 영화스럽게 영광스럽게 하는 일로 인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와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를 돕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있다 하였는데 그 이름은 생명책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념책에도 기록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양 생명책에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은 기념책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4 장 9 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무엇입니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 여인이니 물론 어린양 생명책에도 있을 것이요 예수님을 위해 귀한 것을 바쳤으니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기념책에도 기록되었을 것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져서 그 여인의 행적은 성경책에도 기록되어집니다. 우리 교회 2 대 목사님이신 배영석 목사님은 주를 위해 순교하셨으니 분명 어린양 생명책은 물론이고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배덕수 장로님께서도 눈물뿌려 기도하셨고 자신의 전 재산을 다 교회에 바치고 헌신하셨으니 그 역시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셨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강용심 권사님 현재 93 세가 넘으셨습니다만 소천하실 고비를 몇 번 넘기셨습니다만 몸이 무척 안 좋으심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십니다. 주일낮만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일밤에도 수요일밤에도 나아와 예배를 드리십니다.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성전에 죽기살기로 예배를 드리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시는 우리 권사님의 그 행적은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어 이담에 천국에 가서도 해같이 하나님께서 빛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면 천국으로 들어가는데 역할을 하지만 상급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기념책에 기록되어지면 하늘에서 받을 상급과 바로 연결되어집니다. 하늘에서 마련한 여러 가지 상들과 면류관들이 있어 기념책에 기록된 이들이 의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금면류관이 있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회하는 강진읍교회 성도들이 전원 다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기념책에도 기록되어 하늘에서 주시는 상을 많이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10 장 7 절 말씀에 보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나를 가르켜 기록된 것 같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 이름으로 기록되어가고 있는 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나를 가르켜 기록된 책이 있는 것입니다. 즉 내 죄악의 기록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기록들,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들 즉 나의 언행심사가 모조리 기록된 종합기록부가 있는 것입니다. “배태진” 하면 나의 대한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기록되어 있는 <배태진 인생종합기록철>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내 인생에 대한 종합기록부가 심판대 앞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록부가 언제 그 기록이 중지되느냐 하면 내가 숨호흡을 마치게 되는 그 순간까지 기록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마쳐지게 되어 마지막 유언하는 것까지도 기록되어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놓여져 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기록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 언행심사가 모두 통계와 도표가 되어 커다란 화면에 나타날 수 있도록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은밀히 행한 일도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모를 터이지만 거기 있는 화면으로는 너무도 생생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조만간입니다. 내가 오늘 죽어 세상을 떠난다면 오늘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입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남자 74.3세, 여자 78.5세라고 합니다. 내가 만일 남자로서 70 세이고 평균수명 정도를 산다면 앞으로 4 년 뒤에 나는 이 세상을 이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여자이고 현재 70 세라면 나는 8 년 후에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일년이 얼마나 후딱 지나갑니까? 그러나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는 여호와의 보좌 심판대 앞에 내 인생의 종합기록부가 놓여 있어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유미리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젊음의 빈 노트에 / 무엇을 그려야할까 / 내 젊음의 빈 노트에 / 무엇을 써야만하나 / 아름답고 신비로운 / 우리들 사랑의 이야기 / 이 세상에 살아있는 / 우리들의 모든 인생 이야기 / 내 젊음의 빈 노트에 / 무엇을 채워야하나”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지금 하늘에 있는 여러분 명의로 되어 있는 노트에 무엇이 기록되게 하시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인생의 노트에 어떤 여러분의 인생의 이야기가 쓰여 지게 하시려 합니까?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들로 가득 쓰여지게 하시렵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그저 그렇고 그런 일들로 아니면 죄악의 기록으로 풍성하게 기록되게 하시렵니까? 이 시간 조용히 여호와의 심판의 보좌 앞에 있는 내 명의로 되어 있는 책을 생각하시면서 이 시간 그 책이 어떻게 기록되어지게 할 것인가를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조용히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심판대에 내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 저희의 이름이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기념책에도 기록되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해 주옵소서! 행여나 저희의 인생이 주께서 멸망시키실 명부에 없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의 인생이 기념책에 기록되어 저희가 주님 주실 상을 바라면서 기쁨으로 사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복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명책(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생명책이란 용어가 성경에서 여러 차례 소개됩니다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기념책(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우리는 위의 13-15절에서 하나님을 대적 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보았다. 거기에 반대 되는 진실한 신자들의 주장을, 선지자 말라기가 여기에 소개한다. 이들의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만 "피차에 말하매"- 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담화 내용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14,15절)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하신다 (18절)는 담화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담화를 들으시고 그것을 "기념책"에 기록 하셨다고 한다. 그가이렇게 기록하신 목적은, 그들이 믿는대로 장차 갚아주시려는 것이다. "돌아와서" -라는 말은, "또 한번"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또 한번 깨달을 것은,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사실이다.
행실을 기록한 책(예레미야 17: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저주(779) 아라르 [ ’ârar ] אָרַר
관련 성경 / 저주하다(말 2:2, 창 12:3, 민 24:9), 저주받다(창 3:14, 시 119:21, 말 3:9).
[명] 저주(말2:2, 렘48:10, 민5:18).
구약 성경 / 63회 사용
저주(3994) 메에라[ meʼêrâh ] מְאֵרָה
1. 저주, 2. 증오, 3. 잠언 3:33
발음
[ meʼêrâh ]
어원 / 7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저주(신 28:20, 잠 3:33, 말 3:9).
[동] 저주하다(말 2:2)
구약 성경 / 5회 사용
복(1293) 베라카 [ Berâkâh ] בְּרָכָה
어원 / 12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창 12:2, 신 11:26, 말 3:10), 축복(창 27:41, 신 11:29, 슥 8:13), 예물(창 33:11, 사 36:16), 송축(느 9:5).
구약 성경 / 69회 사용
80년과 단 하루
히브리 사람들이 읽는 민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저녁 무렵 텐트 바깥에 나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80세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이 터벅터벅 찔뚝거리면서 아브라함이 있는 쪽으로 걸어옵니다.
그 노인은 피곤한 표정, 남루한 옷차림, 거지에 가까운 옷차림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배고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아주 찌들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80세 된 노인이 아브라함에게 오더니 “당신 장막에서 하루 밤 쉬어 갈 수 있겠소?”라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러세요? 들어오세요. 저희 장막에서 쉬어 가시죠”라고 흔쾌히 허락합니다.
그리고 이 노인장의 발을 정성스럽게 물로 씻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해서 대접합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기도를 안하고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태도에 화가 난 아브라함은 노인에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식사하시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인은 “하나님이요? 나에게는 음식이 바로 하나님이요”라고 대꾸합니다.
더욱 더 화가 난 아브라함은 “노인장, 나는 노인장 같은 노인은 우리 집에서 모시고 싶지 않소”라고 말하고 쫓아버렸습니다.
그날 밤 아브라함이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하나님.”
“오늘 저녁에 너희 집에 손님이 왔지?”
“네, 그랬었습니다.”
“왜 쫓아냈니?”
“아, 하나님도 보셨군요. 아시잖아요? 하나님을 모독하고, 음식이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쫓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말이야. 그 노인을 80년이나 참았는데. 너는 말이야, 하루 저녁, 그리고 한 시간도 참을 수가 없었더냐?”
09-05-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과 평강의 언약(말라기 2:5)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My covenant was with him, a covenant of life and peace, and I gave them to him; this called for reverence and he revered me and stood in awe of my name.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The mind of sinful man is death, but the mind controlled by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생명과 평강의 언약(covenant of life and peace)
베리티 하하이욤 웨핫솰롬(בְּרִיתִי הַחַיִּים וְהַשָּׁלֹום )
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And you will know that I have sent you this admonition so that my covenant with Levi may continue," says the LORD Almighty.
베리트 하이임 우솰롬(ברית חיים ושלום)
레위 언약(covenant with Levi)
생명(2416) 하이(chay) חַי
어원 / 24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산(창23:1, 민14:21, 렘8:3), 생존한(창43:27, 신4:4), 살아있는(창46:30, 신5:3, 전4:2), 살아계신(창45:3, 삼상25:26), 흐르는(레14:5), 생활하는(레25:35,36), 거주하는(신31:13), 사로잡은(삼상15:8), 살려주는(삼하12:22), 활발한(시38:19), 먹을 (것)(잠27:27), 장수하는(잠3:2). [명] 짐승(창1:24, 8:19, 레11:27,시50:9), 생물(창1:26, 욥30:23, 겔1:3), 생명(창1:30, 신28:66, 욥3:20), 들짐승(창7:14, 레25:7, 시68:30), 기한(창18:10), 연세(창47:8,9), 생활(출1:14), 평생(신6:2, 왕상15:5, 시30:5),친속(삼상18:18), 생전(삼하1:23, 왕상11:34,시146:2), 식욕(욥38:39), 이 세상(시17:14), 생시(시49:18), 회중(시68:10), 목숨(시74:19), 인생(시143:2, 전4:15), 일평생(전6:12), 산자(전7:2), 힘(사57:10). [부] 살아있는 동안(창3:14), 평생에(창3:17), 종신토록(왕하25:30), 산 채로(민16:30, 시55:15).
구약 성경 / 239회 사용
평강(7965) 솰롬(shâlôwm) שָׁלוֹם
어원 / 79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평안한(창29:6, 렘12:5, 슥8:12), 친한(렘20:10), 화평한(왕상2:13, 에9:30), 화목한(시55:20, 옵1:7),
[명] 안심(창43:23), 안부(창43:27), 문안(출18:7, 삼상17:22), 화평(신20:11), 화친(왕상20:18), 평강(삼상25:6, 대상12:18), 친목(왕상5:12), 안위(에10:3), 형통함(시73:3), 평화(레26:6, 신20:10), 평강(민6:22, 삼상16:4), 평안(신23:6, 삼상20:21), 화평(삿4:17, 시28:3), 안부(삼하11:7, 에2:11),태평(왕상2:5, 왕하20:19), 평안함(시35:27),친구(렘38:22). [부] 평안히(창15:15, 삼상1:17, 겔34:25), 평화로이(대상12:17), 안전히(사41:3), 온전히(렘13:19), 편안하게(창37:4).
구약 성경 / 237회 사용
주다(5414) 나단(nâthan) נָתַן
관련 성경 / 주다(창 1:29, 민 18:8, 왕하 12:11), 드리다(창 23:11, 출30:12), 막다(창31:7), 위탁하다(창39:4), 저장하다(창41:48), 상납하다(창47:24), 갚다(출21:23, 왕상8:39), 내다(출21:30, 왕상6:6), 두다(출25:30, 레1:7), 달다(출25:12), 늘어뜨리다(출26:32), 얹다(출25:21), 꿰어 매다(출28:24), 매다(출28:25), 씌우다(출29:6,삼상17:38), 넣다(출28:30, 왕하12: 9), 바르다(출29:12, 레4:7, 겔43:20), 담다(출29:3, 민5:17, 렘32:14), 쓰다(출30:16, 신26: 14), 붓다(출36:1), 세우다(출31:6, 레26:11), 얻다(출36:2, 렘45:5), 감동시키다(출35:34), 놓다(출4:6, 레2:1, 왕상18:23), 더하다(레2:15, 민15:38), 뽑다(레16:8), 분향하다(레16:13), 진노하다(레17:10), 치다(레26:17), 던지다(레26:30), 돌리다(민18:28, 삼상6:5, 겔16: 38),덮다(민4:6), 넘기다(민21:34, 신2:24), 용납하다(민21:23, 신18:14), 내리다(신11:14, 스7:11), 바꾸다(신14:25, 애1:11), 선포하다(신11:29), 사다(신14:26), 뚫다(신15:17), 진술하다(신30:1), 메우다(신28:48, 왕상12:4), 택하다(수20:8), 삼다(수22:25, 대하2:11), 빠지다(삿15:18), 싣다(삼상6:8), 돌리다(삼상18:8),태우다(왕상1:48), 들다(왕상13:3), 보이다(왕상13:5, 대하32:24), 받다(왕상18:26), 던지다(왕하19:18, 사37:19), 구원하다(대하12:7),소리를 내다(시46:6, 렘12:8), 허락하다(삼상1:17, 에8:11), 정하다(시148:6, 렘1:15), 원망하다(욥1:22), 전하다(잠4:2), 맡기다(잠31:24,사50:6), 다하다(전8:16), 토하다(아1:12), 맡겨두다(아8:11), 베풀다(사46:13, 겔16:18), 갚아주다(사61:8), 날리다(렘2:15), 만들다(렘9:11, 겔25:5), 갇히다(렘37:4), 가두다(창40:3, 렘37:15), 던져 넣다(렘38:7), 악수하다(애5:6), 남겨두다(렘40:11), 동여매다(겔3:25), 항복하다(렘50:15), 동이다(겔4:8), 허락하다(겔4:15), 보응하다(렘17:10, 겔7:3), 대적하다(겔14:8), 내밀다(겔17:18), 심다(겔17:22), 꾸이다(겔18:13), 나타내다(겔27:10),무역하다(겔27:12), 꿰다(겔29:4), 일으키다(겔30:16), 맺다(겔34:27), 향하다(단10:15),결심하다(단10:12), 지르다(합3:10), 가다(민22:13), 구제하다(신15:10), 올리다(왕상10:9, 대하9:8), 나누다(대하35:12), 수납하다(느10:32), 당하다(렘25:18), 내어 주다(렘26:24, 단8:13), 구하다(겔17:15), 보내다(창14:21), 청구하다(창30:14), 자복하다(수9:17, 스10:11), 정하다(수20:2), 끌어내다(삼상11:12),잡다(왕하10:15), 아우르다(시81:2), 나눠주다(전11:2), 높이다(민14:1, 렘22:20), 맞다(렘29:6), 차려놓다(창18:8), 주다(창34:11), 끼우다(창41:42, 겔16:11), 저장하다(창41:48),여기다(창42:30, 렘42:12), 차리다(창49:20), 좋다(출16:3), 가져오다(출32:24), 배상하다(출22:7), 입히다(레8:7), 동침하다(레18:20),베다(레19:28), 교합하다(레20:15), 머물러두다(신21:8), 시키다(신26:6), 들리다(삿7:16), 피하다(삿20:36), 묻히다(왕상2:5), 버리다(왕상14:16), 지우다(왕하5:23), 임명하다(왕하8:6), 주둔하다(대하17:2), 두르다(대하3:16), 숨기다(대하22:11), 반포하다(대하24:9), 내버리다(대하29:8), 쌓다(대하31:6),열다(느5:7), 감동하다(느7:5), 존경하다(에1:20), 비방하다(시50:20), 부르다(잠1:20),잃어버리다(잠5:9), 이루어지다(잠10:24),결실하다(잠12:12), 걸리다(잠29:25), 싸우다(사27:4), 채우다(렘20:2), 끼치다(전2:21),행음하다(겔23:7), 닿다(겔31:10), 일하다(겔36:29), 잡히다(겔39:23), 결심하다(단9:3),채워주다(미3:5), 붙여두다(미5:3), 내리다(슥10:1), 보복하다(삼하22:48, 시18:47), 구제하다(잠28:27), 폐하다(사40:23), 빼앗기다(신28:31,32), 맡다(대상6:48, 느13:4), 반포되다(에3:15, 8:14), 함락되다(왕하18:30),넘어가다(사37:10), 버림을 당하다(단11:6),공급되다(사33:16), 달리다(삼하18:9).
[명]선물(민 8:19).
구약 성경 / 2011회 사용
저주(779) 아라르 [ ’ârar ] אָרַר
관련 성경 / 저주하다(말 2:2, 창 12:3, 민 24:9), 저주받다(창 3:14, 시 119:21, 말 3:9).
[명] 저주(말2:2, 렘48:10, 민5:18).
구약 성경 / 63회 사용
저주(3994) 메에라[ meʼêrâh ] מְאֵרָה
1. 저주, 2. 증오, 3. 잠언 3:33
발음
[ meʼêrâh ]
어원 / 7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저주(신 28:20, 잠 3:33, 말 3:9).
[동] 저주하다(말 2:2)
구약 성경 / 5회 사용
복(1293) 베라카 [ Berâkâh ] בְּרָכָה
어원 / 12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창 12:2, 신 11:26, 말 3:10), 축복(창 27:41, 신 11:29, 슥 8:13), 예물(창 33:11, 사 36:16), 송축(느 9:5).
구약 성경 / 69회 사용
레위와 세운 언약 세 가지
그리고 모세 때 이르러 레위 제도가 시작되는데 민수기 3:12에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성막에서 사역하는 자들로 선택하셨습니다(민수기 3:11∼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오늘은 하나님이 레위와 세운 언약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깨닫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란 표현은 여호와께서 레위와 세우신 언약의 가장 현저한 개념이 바로 생명과 평강을 특성으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생명’, 즉 ‘하하이임’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살아있는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오랫동안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레위와 세운 언약을 생명의 언약이라 말하는 본문은 민 25:13에 나타나는 것처럼 레위인이 제사장의 직분을 ‘영원히’
수행할 것이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평강’에 해당하는 ‘핫솰롬’은 민 25:12에서도 직접 사용된 단어이다.
이는 그 구절의 문맥과 관련하여 볼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레위 지파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레위 자손들에게는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가 풍족했고, 제사를 드린 제물 가운데 일반 백성들이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먹을 수 있었고, 또 다른 지파들의 영역 내부에 설치된 특별한 장소에서 지내면서 보호를 받았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과 관련하여 레위 지파에 세우신 여호와의 언약을 ‘평강’의 언약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이 언약이 ‘생명’과 ‘평강’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제사장들이 죄인들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린 결과, 또 여호와의 언약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여호와 앞에 죽지 않고 사는 복을 누리며 평강을 누린다는 측면에서 이를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첫째, 생명과 평강의 언약
생명(2416) 하이(chay) חַי
어원 / 24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산(창23:1, 민14:21, 렘8:3), 생존한(창43:27, 신4:4), 살아있는(창46:30, 신5:3, 전4:2), 살아계신(창45:3, 삼상25:26), 흐르는(레14:5), 생활하는(레25:35,36), 거주하는(신31:13), 사로잡은(삼상15:8), 살려주는(삼하12:22), 활발한(시38:19), 먹을 (것)(잠27:27), 장수하는(잠3:2). [명] 짐승(창1:24, 8:19, 레11:27,시50:9), 생물(창1:26, 욥30:23, 겔1:3), 생명(창1:30, 신28:66, 욥3:20), 들짐승(창7:14, 레25:7, 시68:30), 기한(창18:10), 연세(창47:8,9), 생활(출1:14), 평생(신6:2, 왕상15:5, 시30:5),친속(삼상18:18), 생전(삼하1:23, 왕상11:34,시146:2), 식욕(욥38:39), 이 세상(시17:14), 생시(시49:18), 회중(시68:10), 목숨(시74:19), 인생(시143:2, 전4:15), 일평생(전6:12), 산자(전7:2), 힘(사57:10). [부] 살아있는 동안(창3:14), 평생에(창3:17), 종신토록(왕하25:30), 산 채로(민16:30, 시55:15).
구약 성경 / 239회 사용
평강(7965) 솰롬(shâlôwm) שָׁלוֹם
어원 / 79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평안한(창29:6, 렘12:5, 슥8:12), 친한(렘20:10), 화평한(왕상2:13, 에9:30), 화목한(시55:20, 옵1:7), [명] 안심(창43:23), 안부(창43:27), 문안(출18:7, 삼상17:22), 화평(신20:11), 화친(왕상20:18), 평강(삼상25:6, 대상12:18), 친목(왕상5:12), 안위(에10:3), 형통함(시73:3), 평화(레26:6, 신20:10), 평강(민6:22, 삼상16:4), 평안(신23:6, 삼상20:21), 화평(삿4:17, 시28:3), 안부(삼하11:7, 에2:11),태평(왕상2:5, 왕하20:19), 평안함(시35:27),친구(렘38:22). [부] 평안히(창15:15, 삼상1:17, 겔34:25), 평화로이(대상12:17), 안전히(사41:3), 온전히(렘13:19), 편안하게(창37:4).
구약 성경 / 237회 사용
언약(1285) 베리트(berîyth) בְּרִית
어원 / 1262에서 유래 [‘자르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언약(창9:9, 신9:9, 렘33:20,25, 말2:4), 계약(창26:28, 호12:1), 약조(왕상5:12, 15:19, 대하16:3), 조약(사33:8), 서약(말2:14), [동] 동맹하다(창14:13, 단11:22).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 1262. בָּרָה 스트롱번호1262
관련 성경 / 먹다(삼하12:17, 13:5,10), 택하다(삼상17:8),먹여 주다(삼하13:6), 삶아 먹다(애4:10)
구약 성경 / 7회 사용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에서 ‘와엣테냄’의 원형은 ‘나탄’으로 ‘주다’, ‘수여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는 1인칭 단수
주격으로 사용되어 3인칭 복수 목적격을 취하고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레위에게 평강의 언약과 생명의 언약을 주셨음을 나타낸다.
또한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 목적의 의미로 번역된 ‘모라’는 ‘두려움(fear)’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명사이다. ‘모라’는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두려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인격적으로 다른 누구보다 더 우위에 두어, 즉 최우선순위에 두고 존중하며
그를 공경할 뿐 아니라 실제 그의 뜻에 복종하는 것까지 내포하는 마음의 상태, 내지 태도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이 명사가
단독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레위 지파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영역본에서는 이 단어를 ‘두려움의 언약이었다(It was a covenant of fear)’는 의미로 의역하거나(ESV),
‘경외의 대상으로(as an object of reverence)’라는 의미로 의역한다(NASB).
이러한 번역에 드러나는 바는
여호와께서 레위지파에게 주신 생명의 언약과 평강의 언약이 참으로 중대하며 존중할 만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본절 후반부의
내용을 감안하면 그러한 두려움은 그 언약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본문은 다중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와 더불어 6절 전체는 제사장들의 영원한 이상적 원형인 과거 레위 지파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 서두에 나오는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하여 그는 나를 경외하였으며 그는 나의 이름 앞에서 놀라서 떨었다’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그’는 레위 개인을 가리킨다기보다 그로 대표되는 레위 지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본문은 처음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와 생명의 언약과 평강의 언약을 맺으셨을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인 경건한 반응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를 업신여긴 태도(1:6-14)와 대조적이다.
이는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에 해당하는 ‘우맙페네 쉐미 니 하트 후’를 통해 재차 강조된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히 명목상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 행사 등 전존재, 전인격을 함의한다. 그리고 단순히 목적격 조사인 ‘~을’ 로 번역된 ‘우법
페네’의 기본형 ‘파님’은 기본적으로 ‘얼굴’이란 의미를 지니며 전치사로 사용될 경우 ‘~ 의 앞에서의 면전에서’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과거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두려워하였으며’에 해당하는 ‘니하트’의 기본형 ‘하타트’는 기본적으로 ‘넘어뜨리다’, ‘부춰뜨리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는 수동형(Niphal)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 ‘파괴되다’, ‘당황하다’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 동사의
표현은 레위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겼는지를 부각시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문은 레위인들이 하나님 앞에, 그의 임재와 거룩한 이름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하였고 그의 앞에서 그 스스로 철저히 겸비하여 경외하는 자세를 견지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레위 지파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취한 이같은 태도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마저도 멸시하는 말라기 당시 제사장들의 태도와 전적으로 대조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그는 늘 참된 법을 가르치고 그릇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나에게 늘 정직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을 도와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였다.
하나님이 레위에게 주신 언약은 항상 있는 언약이라고 4절에서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영원한 언약’이나 ‘항상 있는 언약’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반드시 그 내용을 알고 지켜야 할 언약입니다. 이 중에서 항상 있는 언약을 받은 레위의 가문은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가문이 되었는데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2: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그 사건을 계기로 그 후부터 레위의 후손들은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일에서부터 성전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런 레위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었고 다른 기업은 일절 없었습니다.
이것이 레위에게 준 최고의 복이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된 증거였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을 둘 다 가지려고 매달리는데 사실은 이 둘 중에 하나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릅니다.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은 정 반대입니다.
영적인 복은 하늘의 복이고 육적인 복은 땅의 복인데 어떻게 이 둘을 모두 가질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동안 교회가 열심히 하나님을 잘 믿고 땅의 복을 많이 받으라는 식으로 기복신앙을 가르치면서 복음이 변질됐고 신앙은 약화됐습니다.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은 땅에서 움켜쥐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식의 육적인 복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높은 곳에서 양식을 얻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레위에게는 땅의 기업을 주시지 않았고 나머지 열 한지파가 안식일이나 절기를 지키며 드리는 헌물로 생활한 것이 구약의 레위지파였습니다.
그 대신 레위는 다른 지파에게는 없는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기업으로 주셨으니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에게 주신 기업이나 분깃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항상 있는 언약에 충실한 것이 레위지파가 할 일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쓰실 종으로 부르셨다면 다른 지파나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것으로 만족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적, 족속,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을 쫒아 갔듯이 지금도 약속의 말씀을 항상 있는 언약으로 받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언약은 무지개를 통해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 무지개가 놀랍게도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맨 처음 무지개가 등장한 것은 노아 때 홍수심판이 끝나고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으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4:1에 나오는 하나님 보좌에 둘려있는 무지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언약의 무지개입니다.
요한계시록 10:1에 나오는 힘센 다른 천사의 머리 위에 있는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약속의 종이 나온다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항상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교회를 볼 때도 그 교회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를 봐야 하는데 이것을 아는 방법은? 설교를 들어 보면 내용 속에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설교자도 약속을 설교하느냐? 안하느냐? 신자들을 대할 때도 약속으로 믿느냐 아니냐? 이런 것을 살필 수 있어야 언약의 사람입니다.
좀 천한 말로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땅에 속한 사람에게는 땅의 것이 크게 보이고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는 하늘의 것이 중요하게 보이며 약속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보이는 것입니다.
노아와 세운 것도 약속이고 레위와도 약속, 이사야와도 약속, 사도요한과도 약속...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도 약속을 잃어버리지 말고 약속을 바라보며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불법이란? 약속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 모든 것은 불법이라는 말입니다.
경외(3372) 야래(yârêʼ) יָרֵא
관련 성경 / 두렵다(창18:15, 삼하7:23, 말4:5), 두려워하다(창19:30, 신5:5, 왕하10:4), 경외하다(출1:21, 왕상1:50, 대상16:25), 놀라다(합3:2,사57:11, 시106:22), 공경하다(레19:30), 두렵게 하다(느6:13, 삼하14:15, 느6:19), 내놓다(욥32:6), 보다(사60:5), 위험하다(신8:15), 두렵다(시47:2), 엄위하다(시65:5, 66:5), 기이하다(시139:14), 지존하다(시111:9).
[명]위엄(출15:11, 시68:35), 두려움(시76:12, 사18:2).구약 성경 / 293회 사용
하나님이 레위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세우신 것은 레위로 하여금 평생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는 그것으로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마엘과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둘 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약속으로 낳았느냐? 아니면 약속이 없이 육적인 방법으로 낳았느냐?
이것이 상속자의 갈림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유전자를 받은 언약백성이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를 드리는데 그 증거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을 보면 처음에는 최상급 제물을 드리다가 나중에는 타성에 젖어 눈먼 것, 병든 것, 흠이 있는 것, 이런 것을 골라서 드렸습니다.
이것은 경외하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제사는 신약에 와서 예배가 되는데 핵심은 신령과 진정입니다.
즉, 영으로 드려야 하고 진리로 드려야 했지만 이것이 누락된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설교하는 것)가 이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던 가인은 인류의 첫 살인자가 되었고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 시대마다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과 법대로 해야지 내 생각대로 하다가는 나중에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는 언약
진리(571) 에메트(’emeth) אֶמֶת
어원 / 53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름(창24:48), 진실함(출18:21, 렘42:5), 확실함(신17:4, 잠11:18), 참됨(신22:20, 단 10:1), 충성됨(대하32:1), 진정함(느9: 13), 성실함(시54:5), 충실함(사16:5), 견고함(사 39:8), 옳음(사43:9). [부] 분명히(렘32:41), 참으로(삿9:15), 진실히(삼상12:24, 왕상2:4, 겔18:8), 성실히(시132:11, 잠29:14). [명] 성실(창24:27, 왕상3:6, 시71:22), 진실(왕하20: 3, 시111:7), 진리(창32:10), 시57:3, 단10: 21), 성실함(창47:29), 참(신13:14, 대하15:3, 렘 10:10), 진실함(수24:14).
구약 성경 / 127회 사용
* 539. אָמַן
관련 성경 / 양육자(룻4:16), 유모(삼하4:4), 양부(사 49:23), 충성된 자(삼하20:19, 시101:6, 욥12: 20), 충실한 자(시12:1), 충성(잠27:6), 의지 (욥29:24), 믿는 자(사28:16), 성실한 자(시 31:23). [동] 자라다(애4:5), 보존되다(삼하 7:16), 교육하다(왕하10:1,5), 충성하다(시 78:8), 성실하다(시78:37), 확실하다(시93: 5, 사55:3), 신실하다(잠11:13, 호11:12, 사49:7), 진실하다(창42:20, 사8:2), 안기다(사60:4), 충성되다(민12:7), 오래다(신28:59), 충실하다(삼상2:35), 견고하다(삼상2:35, 왕상 11:38, 사33:16), 세움을 입다(삼상3:20), 든든하다(삼상25:28), 충직하다(느13:13), 굳게 세우다(시89:28), 단단하다(사22:25), 믿다(창15:6, 왕상10:7, 신1:32), 확신하다(신 28:66), 바라다(욥15:22, 24:22), 의탁하다 (욥39:12), 신뢰하다(대하20:20).
구약 성경 / 100회 사용
법(8451) 토라(tôwrâh) תּוֹרָה
어원 / 3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계명(창 26:5, 왕하 17:37, 시19:8), 법(출12:49, 민19:2, 시119 : 1), 율법(출13:9, 민31:21, 신 17:11, 왕하10:31, 겔7:26), 법도(출18:16, 시78:5, 겔43:11), 규례(레6:9, 14:2, 민15:16), 법률(왕상2:3), 말씀(욥 22:22)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 3384. 야라(yârâh) יָרָה
관련 성경 / 던지다(출15:4, 욥 30:19), 뽑다(수18:6), 쏘다(삼상20:36, 잠26:18), 놓다(욥38:6), 활 쏘다(대하35:23), 적시다(호6:3), 가르치다(출4:12,13, 잠4:11), 교훈하다(왕하12:2), 가리키다(출15:25), 점치다(미3:11), 윤택하다(잠11:25), 알게 하다(잠6:13). [명] 선생(잠5:13), 스승(사30:20, 합2:18), 교훈(합2:19, 욥36:22), 활 쏘는 자(삼상31:3, 대상10: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일방적인 약속
사람의 약속은 쌍방간에 합의된 약속이지만 하나님은 임의로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자기의 유익이나 환경따라 변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치 아니하십니다.
둘째, 순종하면 복, 불순종하면 저주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하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여 언약해 주셨지 결코 저주하고 멸망 시키고자 함이 아니요 다만 불순종 하는자는 그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언약의 성격과 그 언약을 잘 가르치고 지켜야 할 제사장들이 언약을 파기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니라'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믿고 순종하는 자는 참된 생명을 얻어 영생의 복을 받고 하나님 주시는 참된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의 근원이요 전체라 할 수 있는 평강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조건적으로 얻는 잠시 잠간인 것이 아니요 어떤 조건이나 세력이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강 얻은 다니엘은 사자굴 속이 두렵지 아니했습니다.
일곱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는 평안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각 사람에게 이 평강이 임하면 가정이 평강이 있고 사회와 나라에도 이 평강이 오는 것이니 이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지키며 참 생명과 평강을 얻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1. 언약의 성격을 살펴봅니다(4-5절)
'레위와 세운 언약'을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하셨는데 그 레위지파는 디나사건때(창 34:25,26) 하몰의 집을 전멸시켜 시므온과 더불어 저주받았던 것입니다(창 49:5-7).
그후 아론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할때에 유일하게 하나님편이 되어 백성중 3천명 가량을 죽이는 일을 했고(출 32:26-29) 발람의 바알브올에서 모압여인들과 음행하게 될 때 레위 지파 중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노를 그치게 하였습니다(민 25:1-13).
이렇게 헌신할때마다 하나님은 언약해 주셨습니다.(출 32:26-29, 신 33:8-10, 10:8,9, 민 25:13)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 받지 아니하고 전적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여 제사장이라고 성막에서 수중들게 하고 백성들의 십일조와 제물 중 일부를 취하게 함으로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언약은 지금도 자격 없는 우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언약에 참 생명과 평강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영원한 구원의 기쁨이 있고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이 언약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셨으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섬기라고 이 법을 정한 것입니다. 이 언약 안에서 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언약을 받은 우리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6-7절)
언약을 주시는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인가?
1. 말씀을 바로 깨닫고 가르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입에 진리의 법이 있고 그 입술에 불의함이 없고' 이는 제사장은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여 가르치고 보존하는 것이 사명이기에 하나님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기적인 정욕이나 탐욕에 치우치면 안되니 바르게 알고 깨닫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하는 것이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하셨으니 하나님과 사람사이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바른 역할이 있도록 늘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늘 교통하는 기도의 사람이요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되어 살던 에녹(창 5:22)이나 노아(창 6:9)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경외하는 삶입니다.
3. 복음 증거자 입니다.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다'고 하시니 이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증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려면 어려움도 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살펴봅니다(8-9절)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참 생명과 참 평강을 주실것이니 하나님의 위로와 복이 임할것이요, 이 언약을 파기해 버린자 즉, 정도를 버렸고 사람들에게 율법을 거치게 하고 사람들에게 편벽되이 행하여 편파성을 주어 가르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맡겨진 직분을 악용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또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되 3절에 있는대로 존경받을 제사장의 얼굴에 희생제물의 똥을 바르는 그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언약을 받고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이 이렇게 될까요? 영이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여 육신의 좋은대로 행하기 때문이라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6:63) 또한 내 자신의 욕망이나 욕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라면 기도하고 성령충만함 받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은 참 생명과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길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으니 말씀 바로 깨닫도록 말씀 묵상하시고 힘써 증거 하시며 영적으로 깊은 교제로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힘있게 증거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더욱 받아 백성들에게 존경과 칭찬 받는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입에 하나님의 법인 진리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다 진리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레위에게는 진리를 주셨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는데 말라기 내용을 보면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많은 제사장들이 진리에서 떠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고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버티며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새로운 법을 주시기 때문에 때를 알고 그때 주시는 양식을 안다면 그에게는 진리의 법이 있습니다.사람들이 진리와 순리를 착각하는데 진리의 법은 하늘의 법이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사람이 진리를 따르고 순리는 세상의 법이기 때문에 땅에 속한 사람들은 순리를 따르지만 진리와 순리는 차원이 달라서 순리의 사람은 절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체질개선이 돼서 모든 것을 진리의 법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따르기 때문에 진리의 법이 있으면 진리를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표현을 좀 부드럽게 하느냐?
아니면 액면 그대로 외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임신한 여자가 임신을 숨길 수 없듯이 진리는 숨길 수 없고 그 입에 진리의 법이 있다면 그는 진리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역사하시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 때를 아는 것이 믿음이고 그때 주시는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 하나님께 속한 종입니다.
그래서 입에 진리의 법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입을 지키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킨다는 것과 믿음의 정절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에 진리의 법이 있는 사람은 아무데나 가서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야 진리가 보존됩니다.
또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하고나 닥치는 대로 입맞추지 말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무데나 가서 설교를 듣거나 아멘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의 법이 있다면 그 아들과만 입맞추고 나머지는 상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신앙은 입을 잘 지켜서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아무한테나 대고 진리를 말한다면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것 보다는 먼저 받아들일만한 영성이 있는지 파악부터 하라는 것이고 또 내가 듣는 위치에 있다면 분별해서 잘 듣고 아무하고나 마구잡이로 입맞추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레위와 세운 언약은 항상 있는 언약이라서 지금도 유효한데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 언약백성이 확실하다면 생명과 평강을 다른 것보다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의 법을 입에 간직하는 종들이 되시기를........
생명과 평강의 언약(covenant of life and peace)은 레위와 세운 언약(covenant with Levi)을 말합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를 맡아 섬겨야 할 봉사자들을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성전에서 봉사해야 할 제사장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성전을 봉헌할 때 있었던 감격은 사라졌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사라졌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형식적으로 드립니다.
마음 깊은 곳에 정성이 사라집니다.
내용이 있으므로 형식이 있는 것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용이 없을 때 형식은 문제가 됩니다.
위선이 되고 외식주의가 됩니다.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립니다.
거룩한 예물만 드려야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제사장들은 정결한 예물을 검열하는 일을 합니다.
흠이 있는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부정한 제물은 바칠 수 없다고 구분하고 정한 제물을 가져오도록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그런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눈먼 것, 저는 것은 어떠냐 불태워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제물을 드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제사장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경건을 지킬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타락하자 경건한 행위가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책망하십니다.
죄를 사하는 제사의 특징은 제물의 피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 흘림의 제사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제사의 형식은 일찍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순종을 확인하신 후에 미리 예비한 양을 준비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 제물을 통하여 희생의 원리를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을 "모리아 산의 번제물"이라고 하며 장차 나타날 "십자가 대속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 후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오고 가나안에
정착할 때 어린 양의 제사 제도를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제사 의식에
참여할 의무를 가졌습니다.
죄 사함의 원리는 피 흘림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 거룩한 의식에 봉사할
직분자들을 레위 지파에게 맡기셨습니다.
레위인들은 성전에 관계된 일에 봉사함으로 토지 분배시 해당되는 부분이 없었으나 다른 지파의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특히 제사장들은 구별된 직분으로 특성상 거룩한 일에만 봉사하도록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봉사하는
자들이기에 거룩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룩한 직분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는 옛
직분의 거룩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거룩은 물론 하나님의 전과 제사 의식도 더럽혀 하나님을 더럽히는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이 극에 달한 때가 예수님이 성전에서 체찍을 들고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며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삶을 회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 정치의 모략과 술수를 부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처형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와 같은 레위인들을 향하여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선포합니다(3절)
예배하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자랑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건물의 크고 웅장함도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고 관심을 끄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위하여 나를 내려 놓을 수 있는 용기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구분된 믿음을 기도합니다.
주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시옵소서!
1.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이같이 명령하노라"고 한 말씀은, 말라기 1:6-14에 있는 것과 같이 제사장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여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제사장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말씀을 순종치도 않으며, 마음에 두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꾸짖는 말씀(1:6-14)을 그들의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 저주를 내려서, 그들이 누리는 복을 저주로 바꾸십니다.
본래 레위 지파는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레위 지파는 회개하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회개치 않는 자를
진멸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죄와 싸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만 복주시지 않습니다.
레위지파를 통하여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이스라엘 전체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특별히 레위 지파 중에 아론의 후손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음란 죄를 보고 싸웠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남녀를 창으로 찔러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질투한 비느하스를 복을 주시고 그의 후손을 영원히 제사장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비느하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복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을 때 여호와 만군의 주가 그들을 저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비는 복을 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은 결과로 벌써 저주 받은 일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빈 복을 주시지 않고 이미 저주를 받도록 하시는 것은, 앞으로 더욱 심하게 저주하신다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릴 때에도 단번에 다 내리지 않으시고 점차 많이 내리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이렇게 시간을 잡아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겨야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야합니다.
제사장들의 얼굴에 똥칠을 하심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여호와는 제사장들 때문에 그들의 자손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얼굴에 똥칠을 하십니다.
그들이 바친 희생제물의 똥을 그들 얼굴에 칠할 것입니다.
그들이 똥무더기 위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 "자손"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제라인데 제로아로 발음하여, 팔(arm)이라고 번역함이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팔을 꾸짖는다는 것은, 제사장들의 종교적 활동(팔은 일하는 것이니)을 열매 없이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자손(2233) 제라 [ zeraʽ ] זֶרַע
어원 / 연계형도 동일함[한 번만 사용됨, 민 11:7], 어미활용 זַרְעִי, 복수 연계형 זַרְעֵיכֶם,22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씨(창 4:25, 왕하 17:20, 사 57:3), 후손(창 3:15, 신 4:37, 시 89:29), 자손(창 12:7, 레 22:3, 렘 22:28), 종자(창 47:19, 레 11:37, 겔 17:5), 정수(精水)(레 15:17), 자녀(레 18:21), 자식(레 20:2, 사 57:4), 마지기수(레 27:16), 곡식(레 27:30, 욥 39:12), 아들(삼상 1:11), 족속(왕하 17:20, 에 6:13), 종족(느 7:61), 종친(렘 41:1), 후예(겔 20:5).
[동] 맺다(창 1:12), 심다(창 8:22).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제사장은 모세와 같이 얼굴이 빛이 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빛이 나야 하는 그들의 얼굴에 절기의 희생의 똥을 발라서,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제물로 가져온 소나 양의 똥과 같이 그 때에 활동하는 제사장들을 수치스럽게 만드십니다.
당시에
똥은 의식적으로나 위생적으로 부정하여 진밖에 버리게 하였습니다.
이런 똥을 그들의 얼굴에 발라서 부끄럽게 합니다.
하나님의 종된 자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희생의 똥을 얼굴에 바름과 같은 부끄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똥을 제거함과 같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습니다. 똥을 계속 씻어 버리는 것인데 그와 같이 그들을 제거하십니다.
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5a.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가 이 때까지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라고 명령(1:6-2:3)하신 목적을 밝힙니다.
그 목적은 "레위와
세운 언약" 을 보존하시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레위와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려고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라는 훈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징계하신 때에 가서야 그들이 비로소 하나님이 레위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고자 그들을 징게하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레위인을 세워 이스라엘을 복주시고자 하십니다. 레위의 언약은 레위지파를 제사장으로 세워서 레위지파를 통하여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복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레위지파의 후손 가운데 제사장 비누하스는 모압 여자와 죄를 짓는 자를 창으로 찔러 두 남녀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지파 가운데 비누하스의 자손과 평화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비누하스을 영원히 제사장으로 세우시겠다고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세우셨습니다.(민25:12,13)
레위는 제사장 족속인데 특별히 그의 자손 중 아론을 상대로 하여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대상6:49).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죄사함을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만이 드리는 예물을 받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왕이나 웃시야 왕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이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이 세우신 절차를 따라서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그들의 제사장 언약이 존속되려면 제사장들이 비누하스와같이 여호와를 존중히 여겨야합니다. 여호와를 멸시하는 죄와 싸워야합니다. 여호와께서 처음에 레위와 맺은 언약은, 생명과 평화가 약속된 언약입니다. 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드려서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으면 그들은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키 위한 언약)
5b"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여호와께서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우고자 언약을 맺은 목적은 백성들 편에서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레위는 제사장족의 명칭임)에게 제사의 직책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돕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예배를 섬겨야합니다.
제사장들이 처음에는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경외심이 사라집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히 해야 하나님과의 언약이 지속되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론을 위시하여 비누하스와 같은 충성된 제사장은 과연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조상과 같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병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그들은 제사장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죄에서 떠나게 하는 참제사장)
“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도 참된 제사장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레위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모든 참된 제사장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제사장은 비누하스와 같은 제사장입니다.
참된 제사장 레위는 늘 참된 법을 가르치고 그릇된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여호와에게 늘 정직하였습니다. 참된 제사장의 입에는 진리의 법 곧,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것을 지식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 생활도 경건하여 불의한 교훈을 가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제사장들은, 화평과 정직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평화의 관계를 맺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역을 실행했습니다.
화평과 순결은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그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사역할 때에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을 도와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제사장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제사를 드려서 죄인이 죄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모세의 시대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백성들이 송아지 우상숭배하는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비누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모압여인과 음행을 하고 우상숭배하는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죄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제사장 옆에는 죄인이 있고 그 옆에 제물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제물의 목을 치고 불에 태웁니다. 그것을 죄인이 보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죄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죄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레위와의 언약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지금 제사장이 이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제사를 드려야 생기는 것이 있으므로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을 방조하였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죄짓는 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제물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그들은 제사장직에서 쫓겨납니다. 우리가 양들이 드리는 헌금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방조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하는 제사장)
“7.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합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전문가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의사요 판사입니다. 율법적인 지식이 없으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고 율법을 해석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상해치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담장이 건드렸는데 담장이 무너져 죽었습니다.
과실치사로 사람을 죽인 경우 제사장이 그 사람을 과실치사인지 판단합니다. 제사장은 과실치사인 경우에는 제사장이 그를 도피성을 끌어들여서 보호해줍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은 그는 사형에 처하게 합니다. 율법을 생활 속에 적용하는 판단을 합니다.
여자가 강간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들에서 강간 당하면 남자를 죽이게 합니다. 동리에서 강간 당하면 소리 지르지 않았다고 여자책임입니다. 이것은 강간이 아니고 화간입니다. 율법을 생활에 적용하는 판단지식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제자장이 이권만 챙기고 지식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들에게 율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제사장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어야(6절 상반절)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어야 그 입술이 진리의 지식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 입에 진리의 법이 있어야 백성들은 제사장들에게서 율법의 지식을 찾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식이 없으면 제사장이 아닙니다.
제사장이야말로 만군의 주 여호와의 특사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특사입니다. 그들은 청나라 대사가 천자의 뜻을 전하듯이 하나님의 대사는 하나님의 뜻만을 온전히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사답게 겸손히 살아야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특사로 살아야 레위와의 언약이 지속됩니다. 청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오면 청나라 천자를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대사를 잘못 대하면 청나라 천자를 무시하였다고 생각하여 공격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제사장)
“8.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하지만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바른 길에서 떠났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버리고 곁길로 가도록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문화적이고 인본적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멸시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가 레위와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세워야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유익을 추구하다 사람들에게 버림 받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이 주신 제사장의 행동원리에서 이탈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을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백성들이 이런 제사장을 보고 제사장을 따라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제사장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멸시하자 그의 제사장직을 빼앗아 사무엘에게 주셨습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경건하게 바르게 서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멸시를 받게 하심)
“9.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여호와도, 제사장들이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한 탓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해석할 때에나 혹은 시행할 때 가난한 자에게는 가혹하게 하고 부자에게는 순하게 하여 불공정하게 행하였습니다. 자신의 이익이 되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자신의 자녀에게 치우쳐서 공정성을 잃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고, 제 마음대로 그것을 이렇게도 이용하고 저렇게도 이용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장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십니다.(9절 하반절).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공의를 지키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어느 편당에 서면 하나님이 그들을 멸시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그대로 순종하지도 않는 교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멸시당하게 하십니다.
[이혼하는 자들]
“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합니다. 모자에는 하나님 앞에 성결이라고 쓴 모자를 쓰고 나갑니다. 성결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살아갈 때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면 성결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습니다. 한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형제들입니다. 형제들끼리 미워할 수 없습니다. 서로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서로 싸울 수 없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 죄를 짓고 분명히 잘못하였습니다. 형은 왜 죄지은 동생을 환영하느냐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이요 네 동생인데 왜 비판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족끼리 서로가 배신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주께서 그들 조상과 맺으신 십계명의 언약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른바 "한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유대인들을 민족적으로 택하여 신정 국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있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자기들의 아내에게 대하여 반역적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유대인 아내를 버리고 이방 여자를 취하였습니다.
"조상들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기타 족장들로 더불어 그 자손들이 십계명을 지키면 그들을 제사장 나라 삼아서 세계 만민에게 복주신다는 약속입니다.(출 19:5,6, 24:8). 이렇게 성별된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을 지켜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혼하지 말아야합니다. 이방 여자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 여자를 취한 경우에는 이방 우상을 수입하게 되고 따라서 성민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 여자를 취하면 열조의 언약 곧, 이스라엘 자손들을 성민이 되게 한 언약을 욕되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방여자를 취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혼하고 이방인과 결혼하는 자들의 죄악)
“11.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
유다 백성은 주를 배신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온 땅에서, 추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은 주께서 아끼시는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여기 기록된 ‘거짓을 행함’, ‘가증한 일을 행함’, ‘성결을 욕되게함’은, 모두 다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채소담는 그릇에서는 채소만 담고 고기를 담는 그릇은 고기만 담습니다. 그릇을 섞지 않습니다. 그들은 옷도 얼룩얼룩한 것은 안 입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성결하게 합니다. 그들은 성결을 모토로 삼습니다.
성결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신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방신의 딸’이라는 말은, 다른 신(참 하나님이 아닌)을 섬기는 이방인의 딸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우상에게 양자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방인과 결혼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이렇게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만군의 주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주께서 그를 야곱의 가문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이방 여자들과 결혼 사람은 망합니다. 솔로몬 삼손은 이방여자와 결혼하여 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이혼한 아내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는 자들)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이스라엘이 잘못한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여기 이른바 "이런 일도 행하나니"라는 말씀은, "둘째로 이것도 행하나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두 번째 지은 죄악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면 둘째 죄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처로 하여금 눈물겨운 이혼을 당하게 한 일입니다. 그들이 이방 여자를 취 할 뿐 아니고 그 본래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 버림 받은 여자들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서 눈물을 뿌리며 호소하게 됩니다. 그 버림받은 아내들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서 눈물을 많이 흘리므로 제단을 가리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이 남들을 억울하게 하는 고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신자가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교통이 단절되도록 만드는 큰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 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 5:23,24).
(이혼할 수 없는 이유)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또다시 저들의 죄책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이, "어찜이니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시지 않는 이유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까닭은, 이스라엘이 젊은 날에 만나서 결혼한 그의 아내를 배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는 의미에서 ‘이는’-(그 이유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려서 취한 아내를 버려서 하나님은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시지 않으십니다. 주께서 그들이 결혼한 일에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내는 그의 동반자이며, 그가 성실하게 살겠다고 언약을 맺고 맞아들인 아내인데도, 그들은 아내를 배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언약 다음으로 결혼 언약 말씀을 주십니다. 결혼 언약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의 본처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취한 아내니, 그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배반하는 죄악입니다. 그(아내)에게 ‘거짓을 행함’은, 여기서는 이혼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혼하는 일을 크게 책망하십니다.
(믿음의 결혼은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한 것)
“15.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이 그에게 한 명의 아내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이 둘이 합하여 하나입니다. ‘영이 충만하’시다 함은 영이 부족하지 않고 남아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여자를 얼마든지 창조하시려면 창조하실 수 있었으나, 한 여자만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일처제가 되게 하셨습니다.(창2:24 마 19:4-6).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들어서 그들이 연합하여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둘이 합하여 하나된다는 의미에서 하나이라는 뜻입니다. 부부는 연합하여 한 사람이 되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갈리지 않고 하나되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둘이 하나 되어 경건한 자손을 낳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경건한 부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부생활의 기준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때를 생각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서로 만나야 자손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자손들을 생각해야합니다. 자랑받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야합니다. 이혼도 자손을 생각하면 할 수 없습니다. 먼 장래를 생각하면 함께 살게 됩니다. 여러 여자와 관계를 하고 늙어서 고생합니다. 깨끗하게 사는 것이 영원 지향적입니다. 불결하게 사는 것은 순간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결하면 후회가 없습니다. 우상 숭배하듯이 불결하게 되면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명심하여, 젊어서 결혼한 그들의 아내를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 심령을 삼가 지켜"라고 하였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데 있어서 형식뿐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 화합하여 일치함이 참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한몸을 이룸에 있어서 우리는 육체뿐 아니라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나는 자손이 경건한 자손이 됩니다. "아내에게 거짓을 행치 말지니라"고 한 말씀은, 아내로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배반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혼하는 자를 미워하심)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여호와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내를 학대하는 것도 여호와는 미워하십니다.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라는 말씀의 의미는, 남을 학대하는 죄악을 심하게 범하기 때문에 그 악이 마치 그의 옷이 몸을 가리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전 인격을 학대로 싸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혼하는 자는 그렇게 큰 학대를 그 아내에게 행하는 자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명심하여, 아내를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해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자들]
“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로 여호와 주를 괴롭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괴롭게 해 드렸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범하는 죄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불신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리하면서도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주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십니다. 주께서 오히려 악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말합니다.
도비야와 같은 자는 대제사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버젓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도비야는 성전의 방을 하나 얻었습니다. 하박국도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결을 잃었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그들이 여호와를 괴롭게 한 죄가 불신임을 지적합니다. 불신은 오해를 낳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지 않는다고 오해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악자를 바로 심판하시지 않자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기뻐하시는 줄로 오해합니다. 그들은 살아계셔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대한 우리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받으십니다. 사람들도 남에게서 불신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에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어드려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2:3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말 3장] [내용개요] 본장에는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에게 먼저 메시야의 길을 닦는 하나님의 사자가 올 것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계신다(1-6절).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타락시킨 것에 대해 책망하면서, 그 문제를 시정하라고 당부하신다. 특히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한 죄악을 책망하시는데, 올바르게 규례를 지킬 경우 하나님이 다시금 자비롭게 돌아가리라고 약속하신다(7-12절). 그 후에 이스라엘의 배교적 행위에 대해 책망하신 하나님은(13-15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자들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16-18절). [강 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죄악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의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어 아들의 권세를 누리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모든 하나님의 예언이 완성될 것입니다. |
[신학주제]
이스라엘의 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이다. 선지자 말라기 본 예언서를 통해 이와 같이
답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한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행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그가 같아 주시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장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언약을 부인하는 악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옛
조상들 때부터 약속하시기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본장 후반부에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하신다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 가치관을
따랐기에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것이 헛되며 교만한 자가 창성하게 된다는 악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들의
징벌을 자초하였다.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규정해 주신 하나님의 법토는 지켜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우상 숭배하는
일과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일, 그리고 불의한 일을 행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겼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심판을 받게 되었고,
귀환 후에도 죄악을 계속 저지르자 하 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흩어져 사는 민족이 되게 하셨다.
[영적교훈]
신자는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요구하신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인간적인 꾀를 부려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것은 결국 축복을 받기는
했어도, 수많은 고난의 시절을 보냈어야 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욕심이 앞서는 방법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마련이다. 신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굳건히 받들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살 때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내렸던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다.
09-04-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큰 임금(말라기 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Cursed is the cheat who has an acceptable male in
his flock and vows to give it, but then sacrifices a blemished animal to
the Lord. For I am a great king," says the LORD Almighty, "and my name
is to be feared among the nations.
나는 큰 임금(I am a great king)
멜렠 가돌 아니(מֶלֶךְ גָּדֹול אָנִי)
나는(589) 아니(’ănîy) אֲנִי
구약 성경 / 871회 사용
큰(1419) 가돌(gâdôwl) גָּדוֹל
어원 / 14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큰(창1:16, 신6:10, 왕상19:11), 무거운(창4:13), 중한(겔9:9), 강대한(창18:18, 신4:38, 수23:9), 높은(창29:7), 많은(창44:12, 삼상17:25), 더하다(민22:18, 삼하13:15), 장대한(신1:28, 9:2), 강한(신2:10), 광대한(신8:15,왕상8:42), 장성한(삼상17:14), 부한(삼상25:2), 강성한(삼하5:10), 존귀한(삼하7:9, 왕하10:6), 귀한(왕하4:8), 심한(느9:37), 창대한(에9:4), 자랑하는(시12:3), 요란한(렘51:55), 일어나는(욘1:4).
[명] 대신(욘3:7), 큰 자(욘3:2), 이층(겔43:14), 권세자(미7:3, 나3:10), 큰일(시106:21, 욥37:5, 시71:19, 렘45:5), 형(창10:21, 겔16:46), 세력 있는 자(레19:15), 큰 인물(삼하3:38). [부] 심히(창15:12, 왕하20:3), 많이(대하16:14), 맹렬히(잠19:19).
구약 성경 / 526회 사용
* 1431. גָּדַל
관련 성경 / 크다(창19:13, 애1:9, 단11:37), 중히 여기다(삼상26:24), 위대하다(삼하7:22, 시35:27, 70:4), 자라나다(왕상12:8, 대하10:8), 많다(스9:6), 심하다(욥2:13), 기르다(욥31:18), 창성하다(전2:9), 장성하다(창25:27, 출2:11), 창대하다(창26:13, 렘5:27, 미5:4), 자라다(출2:10, 삿11:2, 삼상3:19), 나타내다(민14:17), 견고하다(삼하7:26, 대상17:24), 무겁다(애4:6), 커지다(단8:9,10), 더하다(슥12:7), 크게 하다(수4:14, 왕상1:37, 암8:5), 높이다(에5:11), 존귀하게 하다(에10:2), 양육하다(사1:2, 23:4, 51:18), 강하게 하다(대상29: 12), 기르다(단1:5), 크게 여기다(욥7:17), 교육하다(왕하10:6), 행한 큰 일(삼상12:24), 스스로 교만하다(시38:16), 들다(시41:9), 낫다(전1:16), 자만하다(렘48:26, 42), 강대하다(단8:4,8), 높아지다(단8:11), 웅장하다(대상22:5), 베풀다(창19:19), 자랑하다(겔35:13),크게 벌리다(옵1:12).구약 성경 / 116회 사용
임금(4428) 멜렉(melek) מֶלֶךְ
어원 / 44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왕(창 14:1, 출 1:8, 삼하 5:2, 19:11, 대상 29:23, 대하 9:8), 왕들(창 17:6,16, 삿 5:19), 임금(신 28:36, 삼하 3:17, 왕하 23:25), 군왕(시 2:2, 10)
구약 성경 / 2548회 사용
* 4427. מָלַךְ
관련 성경 / 다스리다(창 36:31, 삼상 12:14, 왕상 11:37, 수 13:10), 왕이 되다(삼하 15:10, 왕상 6:1, 대하 10:17), 치리하다(왕상 2:11 대상 1:43, 대하 28 : 1), 오르다(왕하 12 : 1), 통치하다(대상 16:31,시 93 : 1), 나아가다(대하 25:1, 29 : 1), 즉위하다(왕하 25:27, 대하21:20), 임금이 되다(잠 30:22), 생각하다(느 5:7), 세우다(삼상 8:22,15:11, 호 8:4).
[명] 왕위(삼하 2:10), 왕(왕상 2:15, 왕하 24:12), 권세(욥 34:30), 통치(단 9:2).
구약 성경 / 347회 사용
여기 이른바 "떼"
- 양떼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양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수컷을 좋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제사(무슨 소원이 있어서 이룸 받기를 원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때에는 어떠한 감사를 하겠다는 서약의 제사를 의미함)를
드릴 때에 수컷은 못드릴 망정, 다른 것들도 흠 있는 것을 드렸으니,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행동이다.
여기
이른바 "사기"
- 좋지 못하고, 흠 있는 것을 드리면서 제사를 잘 드린듯이 취한 태도를 이름이다.
구약 성경 중 시가 단 한 줄도 들어가지 않은 책은 레위기, 룻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학개와 말라기의 일곱 권에 불과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의 큰 임금이시며 열방이 두려워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셨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여 부정한 제물을 제단에
드렸음을 책망하셨으며 그 이름을
멸시하므로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장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1:1-5.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있었기에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합니다.
1:6-11. 제사장들은 눈먼 희생 제물과 병든 제물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불경건을 자행합니다.
1:12-14. 제사장들이
거룩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상을 더럽히고 토색한 물건과 병든 것을 가져오는 것을 꾸짖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그런 행위를 가능케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케 한바, 곧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저들은 그것에 대한 감사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실의 확실성을 먼저
변증한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무엇보다도 저들을 택하신 사랑이다.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다는 뜻이다(창 25:23; 롬 9:10-17).
에서는 야곱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야곱에게 장자의 기업을 주신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선택은 반드시 자연적 질서로 말미암아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행위이다.
참사랑은 이렇게 객관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행하는 주체자의 무조건적 결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조성하실 때 그들의 공로나 의를 보지 않으셨다.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장차 이스라엘을 통하여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성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가이다.
인간의 죄악으로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 상태를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피로 속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당신 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인간에 의해서는 전혀 구원의 길이 없게 하시고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하셨고, 후에는 가나안의
연단을 통해 강력한 왕정 국가로의 성장을 허락하셨으며,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도 항상 회개와 애통을 촉구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곧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우주적인 사랑으로 나타나셨다.
신자의 사는 것과 죽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신자가 구원의 반열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떤 의나 공로도 신자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적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에 대해 요즘
공로나 의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칼빈은 이런 요소를 인정하는 경우 단호히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
자력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신앙이다.
올바른 신앙은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길이다.
큰 임금(말라기 1:14)
성경은 어떤 정치제도를 선호할까요?
구속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형태는 어떤 것일까요?
사무엘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가시적인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자신들도 왕이 필요하다고 간청합니다.
사무엘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구속역사 속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반역의 행위가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삼상 12:12)
이스라엘이 세상 나라들처럼 왕의 제도를 채택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전환점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습니다.
이스라엘 왕 역시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을 해야 하고, 또한 통치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큰 임금(왕)이라 선언합니다.
* ...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4)
예수님 역시 이스라엘을 다스린 분은 하나님이라 말씀하십니다.
*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마 5:35)
하나님의 왕 되심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왕이 되시기에 모든 호칭에 소유가 담겨집니다.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천사, 하나님의 백성(아들,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
모든 것의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구약 성경은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이나 어떤 자들은 구약에는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구약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통치도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왕 되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해서 나온 결핍된 이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말라기 1: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라기는 스룹바벨 성전을 지은 후에 쓰여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하나님께 감격을 합니다.
그들이 돌아와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성전을 짓다가 내적 외적 시련으로 16년 정도 멈추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을 지어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예언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성전의 영광을 보고 성전을 짓도록 격려합니다.
그 후에 사년에 걸쳐서 성전을 짓습니다.
성전은 20년에 걸쳐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제2의 성전 또는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을 지은 후 40여년이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실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메뚜기로 인하여 농사는 망쳤습니다.
포도가 익기 전에 떨어졌습니다.
아직도 바벨론 총독이 상주하고 바벨론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환경에서 하나님께 일곱 가지 질문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 질문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런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둘째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복을 주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매 주일 예배하러 교회에 갑니다.
아침마다 오늘의 말씀으로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에 의해서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며 신실한 믿음의 삶을 위하여 헌신할 때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하늘의 은총과 땅의 기름진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바람직한 신앙적 삶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말라기서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던 경고를 듣고 종교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영적인 신앙생활에 전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주님께서 말라기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족보나 가족은 모릅니다.
말라기는 나의 천사, 사자라는 뜻입니다.
여기 "경고"라는 말은, 재앙이나 환난을 가지고 위협하면서 책망하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정성이 없습니다.
형식은 있지만 신앙이
없습니다.
그들은 병든 것 저는 것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멸시한 죄를 책망하십니다.
“2a.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고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말라기에는 일곱 개의 질문 중에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어야 사랑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정치적으로 독립해야 그들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병충해가 있었고 메뚜기떼의 피해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폐르시아의 식민지 아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조건이라도 그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주관적입니다.
다윗은 원수의 목전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병들면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부인은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십년 동안 섬기고 있습니다.
남편은 앉히면 앉고 먹이면 먹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아직 안
죽었어요 라고 말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못합니다.
식물인간은 사랑의 반응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주고 아내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빙그레 웃어주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는데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 못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들 소원을 다
이루어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그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지 않아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높은데 올라가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여 도와 줄 것을 알고 뛰어내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지 않은 것도 때로는 사랑입니다.
우찌무라간조는 임종 직전에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내 소원을 다 들어주셨으면 오늘의 내가 았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랑을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을 그들의 조상 야곱에서부터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과 에서는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에서 20년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입니다.
여호와는 야곱과 에서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십니다.(창 25:23. 롬 9:10-17)
여호와는 뱃속에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자신의 고집이 강하였습니다.
서원기도를 한 후에, 하나님은 그 서원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그는 10년 동안 서원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를
변화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아무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을 때에
선택하였습니다.
야곱이 아무 소원도 없을 때 선택하셨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은 반드시 자연적 질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 사랑은, 이렇게 객관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하는 주체자의 무조건적 결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많은 환난과 고난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많이 고난을 받은 민족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고난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큼 알맞게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징계를 받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애굽의 400년 노예살이에도 망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에게 망하고 나서 2500년 여러 나라의 식민지 살이를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 제일의 민족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세계 모든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에 빠졌지만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외에는 어떠한 다른 사랑의 표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확증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로마서 8장 29,30절)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우리가 야곱처럼 선택받은 증거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에서처럼 버림 받은 자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야곱이 됩니다. 우리가 야곱입니까? 에서입니까? 예수님을 믿은 사랑은 야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엡1:4) 하나님은 이미 택하신 우리를 절대적인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합니다. 선을 행할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행할 때도 사랑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해줄 때도 사랑하지만 때로는 매를 때릴 때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풍의 때나 역경의 때나 항상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합니다.
왜냐고요? 예수님을 믿은 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셨습니다.
여기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말은, 에서를 택하지 않은 결과 그의 지은 죄대로 갚으신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에서가 받는 고난은 징계가 아니라 심판입니다. 에서가 사는 언덕은 벌거숭이로 만들고, 그가 물려받은 땅은 들짐승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에서의 자손으로 되어진 에돔 나라가 황무지가 된 것은, 맨처음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하러 가는 도중에 성취되었습니다.(렘 25:9,21).
(에돔의 교만과 멸망)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에서의 자손인 에돔이, 비록 우리가 쓰러졌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우겠다고 장담합니다. 에돔은 교만합니다. 에돔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을 믿어 어디까지든지 국세를 회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세울 테면 세워 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가 기어이 에돔을 헐어 버리십니다. 에돔은 악한 나라, 주에게 영원히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을 제일 미워하시기 때문에, 에돔이 호언장담한 바와 정반대로 하나님은 에돔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년)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주전 539년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에돔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지역(진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주전 332년경 알렉산더의 헬라 세력 이후 네게브 북쪽 지역에 정착한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그들 나라는 없어지고 나중에는 유대인에 동화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은 자는 그의 행위대로 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이스라엘은 에돔의 멸망을 직접 보고, 주님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서도 높임을 받으신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밖에 이방 세계에서도 그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에돔을 멸망시키므로 역시 모든 이방에 대한 그의 주권이 확실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은 크신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에돔이 멸망 받은 것을 보고 나서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나라에도 크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6a.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크신 하나님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이라고 하십니다.
말라기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공경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부자 관계와 주종 관계의 도덕에 근거하여 말씀하십니다.
제사장들(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의미에서)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질문식으로 물으십니다. 그들이 아버지인 하나님을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하십니다. 주인인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제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윤리 제도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아버지요 주가 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신 32: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나라로 창조하시고 또 자녀처럼 양육하셨습니다.(사 44:26 렘 31:9 시100:3). 그들을 어린아이같이 업어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주가 되시어 피값으로 사서 그들을 소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또 두려워해야 합니다. "공경"한다 함은, 사랑함과 찬송함과 감사함과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함"은, 노예적인 공포가 아니고 공경함에서 오는 공포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두 가지 요소는,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멸시한 죄를 알고 이를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죄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아서 그들을 복주실 수 없었습니다. 멸시하는 자는 저주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6b를 보십시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이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그들의 두 번째 논쟁은 그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멸시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멸시하였는데도 여호와를 멸시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마비된 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멸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의식으로 무성의하게 멸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사가 형식적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양들의 가난한 형편을 이해하여주고 그들이 병든 제물을 가져와도 받아주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해하였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더러운 떡을 드리는 자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였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한 제사장은 여호와의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고 있습니다. 여기 이른바 "더러운 떡"이라는 것은, 성전 안에 드리는 진설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설병은 제단 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떡상에 놓습니다. 여기 말씀하시는 "떡"은, "여호와의 단에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희생 제물의 고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떡이라고 한 말씀은, 레 21:6, 8, 17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희생의 고기를 드리되 더러운 것으로 드린 것은, 흠 있는 동물의 고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레 22:20-25). 제사장들은, 더러운 떡을 바치면서도 우리가 언제 제단을 더럽혔느냐고 되묻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주님께 아무렇게나 상을 차려 주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인데 눈빠진 것을 드려도 태우는 것은 다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태우면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좋은 제물은 자신이 먹든지 다른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그들은 상품가치가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주님의 제단)을 더럽게 하면서도 그렇게 한 줄 모르고 그 죄악을 부인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말로써 멸시하지는 않아도, 말보다 행동으로 멸시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무지로 하나님을 멸시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무언 중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것을 예물로 드리는 자들)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하였는지 실례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제사장에게 눈먼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거냐고 묻습니다.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거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제물을 바쳤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물은 태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여기서 위의 7절에 말한 "더러운 떡"이 바로 흠있는 제물을 바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흠있는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습니다(레 22 :22).
이렇게 희생 제물을 완전한 것으로 드리도록 명령한 것은(레 22 :21), 속죄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완전한 것에는 그들의 정성과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에서 그 고기를 섭취하심이 아니고, 그 공경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제물이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정한 대로 순종하여 최상의 것을 바쳐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장사를 하는데 깨끗한 돈만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병든 것들을 그들의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그들을 반가워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을 좋게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총독에게 혼만 날 것입니다.
김정은에게 이런 것을 주면 당장 총살일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드려도 무슨 의도가 있는가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김정은과 달리 더 크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어디까지나 실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공경하는 표준을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서 판단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살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총독보다 못하신 분으로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만군의 주님을 보이지 않는다고 총독만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돈을 드릴 때 꾸깃꾸깃한 돈을 드리지 못합니다. 똑 같은 물건도 포장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거기에 마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천 원을 드리려고 하는데 천 원짜리가 없어서 만 원을 드리고 아까워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러야 합니다.
예전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는 최상의 제자를 파송하였습니다. 메시지를 전할 때는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고 정성을 다하여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최상의 것을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받으시고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경외심이 없으면 기도를 듣지 않으심)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제사장들아 이제 하나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으레 그렇게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좋게 보시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한 기도는, 대단히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보아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겸손한 듯한 기도는 외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가 진실하기 전에는 그것을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내용보다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차라리 예물을 드리지 않는 것이 좋음)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그들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그들이 여호와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마음 없이 드리는 그들의 예물을 싫어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바치는 제물도 여호와는 이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헛된 제사는 받지 않으시므로, 성전 문을 닫아 걸으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성전을 닫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라는 반어적인 말씀입니다.
(이방민족 가운데 높임 받으시는 하나님)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될 신약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이방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에 사용된 표현들이 역시 구약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향한’ 다던가 ‘제물’을 드린다는 표현들은, 실제에 있어서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그런 의식 제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요4:21-24). 다만 신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멸시하지만 도리어 이방인들 중에서 앞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자들이 많이 일어나리라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 줍니다. 이런 큰 이름을 그 때의 유대인들은 그 행동 면에서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앞으로 메시야가 오시면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여호와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바칠 것입니다.
영국과 미국과 한국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은 이방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더러운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최상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이 시점에서 이런 예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눈빠진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오랜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백성으로 자처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참되이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다. 이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신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께 차려 드리는 상쯤은 더러워져도 괜찮아! 말합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관념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께 드리는 상은 제단 위에 놓은 소산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싫어하는 음식을 제물이라고 제단 위에 바칩니다. 그들은 지금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예배를 귀찮아하는 자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제사드리는 이 일이 얼마나 싫증나는 일인가! 하고 말하며, 제물을 멸시합니다. 번거로운고 함은 번거롭고, 짐이 되고, 피곤함을 의미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사랑이 없고 마음이 없으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귀찮습니다.
예배참석 안한 것은 아닙니다. 예배가 나를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예배 나가지니 귀찮고 안 나가자니 꺼림찍합니다. 예배가 무거운 짐입니다. 안 나가니 더 괴롭습니다. 주일날 놀러가면서 비가 오면 벼락이라도 칠 것 같습니다. 정성이 없으니 형식만 갖추어서 예배를 드립니다. 외식하는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지 않고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고 억지로 드립니다.
‘코웃음하였다’ 함은 하나님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들이 희생제물을 바침에 있어서 하필 훔친 것, 병든 것과, 저는것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을 코웃음치며 멸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훔쳤거나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이라고 가지고 오니, 여호와가 그것을 그들에게서 달갑게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고기 타는 냄새를 받지 않지 않으십니다.
정성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경건한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물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임금 여호와 하나님)
“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짐승 떼 가운데 좋은 수컷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서도, 그것을 드리지 않고 흠 있는 것으로 바쳤습니다. 여기 이른바 ‘떼’는 양떼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양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수컷을 좋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제사(무슨 소원이 있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때에는 어떠한 감사를 하겠다는 서약의 제사를 의미함)를 드릴 때에 수컷은 못드릴 망정, 암컷들도 흠 있는 것을 드렸습니다. 수컷을 드리지 않고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은 제사를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여기 이른바 ‘속여’ - 라는 것은, 좋지 못하고, 흠 있는 것을 드리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제사를 잘 드린 듯이 취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에 왔느냐 안 왔느냐 만 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척하면서 자기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속여 제사하는 자들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도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사랑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어 예배당을 짓고 잘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예배당은 부흥되지 않고 망합니다. 그 후손이 잘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게 해야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요셉의 기념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 보니 천사가 요셉 기념관을 떼고 마리아의 기념관이라고 지었습니다. 마리아를 찾아보니 마리아라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이분은 헌금한 것이 없습니다. 그 할머니는 언덕에 오르는 말에게 말죽을 쑤어서 말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정성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재산을 드린 것보다 그 정성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임금입니다. 세계 만민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총독보다 더 크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큰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직장의 상관보다 박근혜 대통령보다 하나님을 더 높여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마음껏 우리를 복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의 큰 임금이십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공경함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고 두려워함으로 섬겨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마음껏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아멘!.
말라기 1: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라기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유다 백성들에게 다시금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억하도록 했기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과거 통일 이스라엘 왕국처럼 근방의 나라들 중 힘있고 강대한 나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또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의 성전에 거하시기를 기대하고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와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대와 바람을 충족시켜 주시지 않자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말라기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 중에 등장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하나님의 백성 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또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조건대로, 그들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방식으로 임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고, 우리가 원하고, 또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시기를 바라지 않나요? 과연 그렇다면, 말라기서의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과거 유다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과 신실하심,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행하실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고, 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실하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말라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가?
말라기서의 말씀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말라기는 유다 백성들에게 오실 위대한 왕에 대해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의 말라기서에서부터 페이지를 넘기면 바로 그 위대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마태복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는 4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무려 4 세기동안 그들은 이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말은 즉 말라기서의 유다 백성들은 이 소망과 약속의 말씀을 다음 세대에게, 또 그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왕의 오심을 기다리며 사모하면서 말이지요.
그 기다림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도무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
그러나 결국 이 오실 왕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또 그의 길을 예비할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예언은 세례 요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성경 말씀을 우리의 오늘날의 삶 속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a. 하나님의 선하심과 언약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까?
말라기서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b. 어떻게 여러분이 하나님께 다시 가까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여러분은 어려움과 기다림 속에서도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상기시킬 수 있겠습니까?
말라기를 해석하는 여섯 가지 법칙
1. 문학적 해석 :
장르—예언서 ; 예루살렘이 멸망하고(586 B.C.),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 끝난 후,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와 재건된(기원전 5 세기) (남왕국) 유다에 대한 예언입니다.
2. 역사적 해석 :
말라기는 포로귀환과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이끌었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대로부터 100 년 뒤에 예언활동을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했던 기대는 하나님께서 그들 왕국의 영광을 전과 같이 회복시켜 근방의 나라들로 그것을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다시 그들의 성전에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했고, 그 의심은 그들의 삶과 신앙생활에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다.
말라기는 이런 유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악한 행위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 앞에 신실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런 다음 여호와의 사자(messenger)가 와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이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400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아무 선지자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3. 신학적 해석 :
말라기의 신학적 주제 : “위대한 왕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축복하고 회복하시려 오실 것입니다.”
말라기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올 축복과 회복을 바라보도록 격려했습니다.
4. 문화적 해석 :
말라기 선지자는 느헤미야와 같은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유다의 죄에 대해 그들이 각각 전한 말씀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예루살렘은 재건 되었고, 유다 백성들의 종교 활동이 다시 재개 되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께로 돌이켜지지 않았습니다.
말라기서에서 선포된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함이었습니다.
5. 성경의 큰 그림 :
말라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는 신약성경 전,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러 오실 왕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마찬가지로 이 왕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왕과는 다를 것을 알려줍니다.
그 왕은 이스라엘 위에, 또는 이 땅에 모든 나라 위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방언, 온 세계와 온 우주 위에 다스릴 왕입니다.
6. 성령의 인도하심 :
성령님께서 말라기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통해 하실 일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메시아의 오심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옛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가 맞이한 위대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합니다.
성서에서 말라기라는 이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열두
소선지서의 모음집이자 히브리어 성경의 마지막 책은 일반적으로 말라기라는 선지자의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라기라는 별명은
일반적으로 고유한 이름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 의미는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 즉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말라기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말라기는
숭배의 포기를 비난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참으로 순수하고 보편적인 숭배의 회복과 확립을 약속합니다.
그분의 약속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 시대에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 의인에게는 구원의 심판이요 악인에게는 정죄의 심판이
되리라
예언자 말라기는 어디에서 태어났습니까?
Page Actions Malach iBirthYear 400-500 BC 국적 이스라엘 시민권
성경에는 선지자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선지자는 장편과 소선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여러 장을 기록한 자들이고 이사야서는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네 명뿐이고, 소선지는 몇 장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무엇을 선포합니까?
예언자는 수정 구슬, 몇 글자 또는 조약돌을 던짐으로써 "미래를 보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대중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이 많은 세상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엄밀히 말해서,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며, 그로부터 그의 계시를 전달하는 사명을 받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인간에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Papias of Hierapolis)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 전통은 예수께서 그를 사도 중 한 사람으로 따르도록
부르신 세금 징수원인 마태(마태복음 9:9-13)에게 그 저자를 돌립니다.
Papias는 "마태가 히브리어로 된 말씀을 수집하여
각자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번역했다"고 지적합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 마지막 선지자는 누구였습니까?
동방 정교회의 신자들은 요한이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으며 따라서 그 계시의 시대와 새 언약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이사야(히브리어, ישעיהו— Yeshaiáhu, 의미("여호와는 구원이시다)"에서 유래)는 이스라엘의 주요 선지자 중 한 명으로, 그의 사역은 기원전 XNUMX세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사역은 군주제 기간 동안 유다 왕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왜 그들이 주요 선지자라고 불리는가?
"대선지자"라는 용어는 [성경] [다나흐], [느비임], [구약]의 특정 예언서를 지칭하기 위해 [소선지자]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소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책의 길이가 더 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선지자는 무엇입니까?
세례자 요한. 선지자의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니 다 그리로 들어가고자 하되
예언적 망토가 무엇입니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가슴을 덮는 양가죽으로 띠를 띠는 고운 아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각 제사장은 예언의 겉옷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따라 성막 안에서 그들의 일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종들에게 주신 의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7선지자는?
주요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소선지자: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우리가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권합니까?
답변. 답: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직접 선택하거나 기존의 선지자나 영적 지도자를 통해 선택합니다. 새로 부름 받은 선지자는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권세를 받으며, 특히 경륜의 시대 지도자나 선지자의 경우 부름에 기적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작가
말라기서 (Malachi) 성경공부
말라기서 3:7-12
1. 말라기서 서론(序論)
■ 말라기서의 이름
말라기서는 꾸짖음과 소망의 책, 그리고 십일조에 관한 책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말르아키’(‘나의 사자’)이라고 했습니다.
70인역 성경(Septuagint)의 이름은 ‘말라키아스’(ΜΑΛΑΧΙΑΣ)입니다.
한글성경도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말라기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말라기서의 저자와 기록연대
말라기서의 저자는 말라기입니다(1:1). 그는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예언한 최후의 선지자입니다. 즉,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잇는
교량의 역할이 그의 사역이었으며 이스라엘에 계시한 하나님의 마지막 메신저였습니다. 기록 연대는 주전 435년경입니다.
■ 말라기서의 기록목적
기록목적을 요약하면, ①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혜를 가르쳐주고, ②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타락한 현상을 변론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 본서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 말라기서의 주제와 중심사상
말라기서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운 다스림을 믿어라!’는 것입니다.
중심사상은 ① 하나님의 사랑, ② 제사장, 백성들에 대한 책망의 하나님, ③ 십일조 사상, ④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부성적인 하나님 사상입니다.
2. 말라기서의 본론(本論)
말라기서는 성전 재건 후에 찾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무성의와 포로생활에서 발생된 혼음문제와 경제생활을 지적하는 내용이 개진되었습니다.
급기야는 불신풍조가 성행되었고 하나님과의 말씀생활의 무의미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①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② 너희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였다, ③ 너희들은
더러운 재물을 단에 드렸다, ④ 자기의 형제들에게 궤사를 행하였다, ⑤ 너희는 성결한 혼인의 언약을 파기했다, ⑥ 너희들은
여호와를 떠났다, ⑦ 너희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 ⑧ 여호와 하나님께 말로 대적하였다. 따라서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경우에는 극렬한 풀무불에 타는 초개(草芥) 같을 것이라.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그의
이름을 기념책에 기록하고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으로 치료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를 간략하게 구분하면,
1:1-5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였던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이고, 1:6-2:9까지는 제사장들의 부당한 행동이고, 2:10-4:3까지는 일반백성들의 부당한 행동, 4:4-6까지는 결론적인 경고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1:1-5)
(1) 하나님은 먼저 그들을 사랑한다고 선언하셨으나 이스라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2) 하나님은 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까?
(3) 여호와께서 왜 에돔이 쌓는 것을 허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확증하십니까?
둘째, 제사장들의 부당한 행동(1:6-2:9)
■ 1:6-14까지는 소홀한 제사
(1) 제사장들이 어떻게 주의 단을 더럽혔습니까?
(2) 제사장들의 악함이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민족 중에서 크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들이 형식적으로 이뤄짐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적은 없습니까?
■ 2:1-9까지는 계약 파기와 율법 불이행
(1)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십니까?
(2) 하나님께서 레위와 세우셨던 언약은 무슨 언약이었습니까?
(3) 제사장의 입술이 지켜야 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제사장들로 백성들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하나님께 약속드린 것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셋째, 일반백성들의 부당한 행동(2:10-4:3)
■ 2:10-16까지는 잡혼과 이혼
(1) 유다는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결(聖潔)을 욕되게 하였습니까?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드리는 헌물을 기꺼이 받지 아니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가운데 미워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의 삶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다고 생각됩니까?
■ 2:17-3:6까지는 주의 임재와 심판 예언
(1) 유다는 무엇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괴롭게 해드렸습니까?
(2) 여호와께서 누구를 보내시겠다고 하시고, 그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임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무엇을 위함이심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하나님 앞에 깨끗한 마음과 삶으로 나아오고 예배드립니까?
■ 3:7-12까지는 십일조와 헌물의 소홀함
(1)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실 때 이스라엘과 유다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그들이 ‘도적질한 것’이 무엇입니까?
(3)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십니까? 십일조 생활과 믿음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 3:13-4:3까지는 악한 자와 의로운 자의 심판
(1) 유다와 이스라엘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까?
(2)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그의 기념책에 기록하셨습니까?
(3) 여호와의 날에 악을 행하던 자는 어떻게 될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던 자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의 날이 임함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당신의 삶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넷째, 결론적인 경고(4:4-6)
(1)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까?
(2)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누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4장 6절을 기록하시고 당신의 사명을 정립하십시오.
3. 결론(結論)--말라기서의 핵심적 교훈
말라기서의 핵심적 교훈은, 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를 확립하고, ② 뚜렷한 결혼관에 대하여, ③ 헌금생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고, ④ 진정한 겸손으로 주님의 날을 사모해야 된다고 교훈합니다.
*생활적용과 기도(祈禱)
1.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삶 가운데 늘 느끼며 고백하게 하옵소서!
2. 주님!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온전함 가운데 머물러 있게 하옵소서!
3. 주님!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헌물과 삶을 드리게 하옵소서!
*말라기서가 예언하는 그리스도
1. 언약의 사자(3:1)
2. 연단하며 깨끗케 하는 자(3:3)
3. 의로운 해(4:2)
말라기의 6가지 논쟁, 십일조와 종말론적 의미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으로 나의 사자, 나의 특사라는 의미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1)
말라기는 저자와 기록시대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으며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인지도 불확실하다.
다만 말라기에서 언급하는 문제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어느 시대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본토로 귀환하였지만 삶의 형편은 나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신앙은 형식주의로 흐르고 영적 순결은 점점 오염되어 갔다.
말라기는 당면한 모든 문제들과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말라기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허락하시는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잘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고 (1:6)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잘못 가르쳤으며 (2:7~8)
▶백성들은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욕되게 했고 (2:10)
▶아내와 맺은 언약을 파기했으며 (2:13~16)
▶여호와를 괴롭게 하였다 (2:17)
▶제사장들은 흠있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고, 백성들은 십일조를 성전에 들여 놓지 않았고 이혼을 일삼았다
결국 남녀노소, 지도자, 백성들 모두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충분한 인식도 없이 합리화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마침내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제시하며 특별한 소유된 백성과 나머지 백성들에게 저주가 임하는 날임을 강조하고 사람들을 준비시킨다
<말라기의 논쟁>
말라기서는 논쟁 - 질문 - 약속 - 깨달음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논쟁들 |
성경 |
논쟁 |
제1 논쟁 |
1:1~5 |
논쟁 :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Q: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A : 과거를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의 포로에로 끌려갈 때 고소해했던 에돔은 망했다 |
제2 논쟁 (제사장의 죄) |
1:6~2:9 |
논쟁 :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Q: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A: 제사장들은 병들고 눈멀고 흠있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 제사장들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며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특사, 참된 제사장의 모습> - 진실하고 정확하게 말씀을 가르치고 공정하게 행하는 것 - 제사장 직무를 성실하게 행하는 것 - 백성들의 거룩함을 보존시키는 것 |
제3 논쟁 (백성들의 죄) |
2:10~16 |
논쟁 : 백성들이 신실하지 못하다 Q : 어찌 됨이니이까? A : 너희가 이방인들과의 결혼하였으며, 이방인 스타일의 예배를 드렸고, 혐오스러운 이혼을 하였기 때문이라 |
제4 논쟁 (의심과 불평) |
2:17~3:5 |
논쟁 : 백성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하고 하나님을 비방하였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였다 Q: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A: 주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좋게 보신다,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한다 현존하는 악의 문제에 하나님이 방관하지 않으시며 여호와의 사자가 임하면 세상에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
제5 논쟁 (십일조와 헌물) |
3:6~12 |
논쟁 : 십일조와 헌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 Q : 우리 어떻게 하여야 여호와께 돌아가리이까? A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
제6 논쟁 (여호와의 날) |
3:13~4:3 |
논쟁 :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였다 Q : 우리가 무신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A :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행위가 무엇이 유익하리요 한다 |
비록 조금 흠이 있더라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예 드리지 읺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슈에 대한 하나님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신다
사람관계에서는 이런 행위는 모욕감을 이르키는데 어찌 만군의 하나님, 존귀하신 분께 이런 행위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제기다
엉터리로 예배드리려면 차라리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경고이다
예배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며 최선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7가지 범죄행위에 관하여>
하나님은 신자들이 사회 부조리, 이웃과의 문제와 인간관계에서 위반하는 범죄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성행한 범죄행위 7가지를 나열한다 (3:5)
① 점 치는 자들 : 신자들 가운데도 있는데 이는 매우 가증스러운 행위다
② 간음하는 자들: 결혼언약을 파기하는 도덕적 부패행위
③ 거짓 맹세하는 자들 : 인터넷에서 거짓을 옹호하고 선동하는 신자들도 많다, 거짓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죄인데 거짓말의 아비 사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④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들 : 기독교인중에서도 이런 사장, 회장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
⑤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는 자 : 절박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무관심하는 행위
⑥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 :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⑦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 : 그 자체가 범죄일 뿐 아니라 위에 나열된 죄의 성향을 요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십일조와 헌물이 대하여>
질문 1 :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인가?
세상의 것은 모두여호와의 소유물이며 하나님께 잠시 빌려 사용하는 것이고 영구한 것은 하늘에 있다
십일조와 헌물은 소작인이 경작한 땅의 소산물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
특히 구약에서 십일조는 레위인의 몫이기 때문에 만약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레위인은 생활할 수 없을 것이다
질문 2 : 십일조와 헌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몫이고 헌물은 레위인의 몫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구약 시대 백성들은 소득의 20%를 십일조와 다양한 헌물로 드렸던 것으로 추측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신자라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릴 것이다
말라기 시대 백성처럼 자신들이 버림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한다면 바치지 않을 것이다
질문 3 :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회개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세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선지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와의 언약조항을 잘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언약준수를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회개란 마음으로만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행위로 보상하거나 바꾸거나 중단하거나 시작해야 한다
특히 돈에 대한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질문 4 : 만일 크리스천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인가?
십일조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하여 드려야 할 것으로 언급하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이것 : 정의, 긍휼, 믿음
저것 :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농산물의 소득이 없으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데 넌센스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연보를 언급하면서 억지로 하지말고 각자의 마음에 정한대로 하라고 권면하였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5~11)
그렇지만 이후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연보를 드린 자들에 대한 복을 나열한다
- 가난한 자들에게 준 것은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다 (9:9)
-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더하신다(9:10)
-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로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고 감사가 넘치게 하신다(9:11~12)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이렇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서 손해볼 것이 없다
드리는 자는 더 풍성하게 되고, 드리지 않는 자는 돈이 다른데로 새서 더 빈궁하게 될 것이다(학개 1장)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은 하늘에 쌓아 놓은 영원한 보화와 상급이 없어 후회막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십일조와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선교와 구제와 교육같은 일을 하려면 재정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재정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NGO나 선교단체에 기부를 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재정이 흘러가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하늘문을 열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이는 물질적 복을 포함하여 영적인 영원한 복과 종말론 복이 모두 포함되는 약속이다
언약을 위반한 이스라엘이 민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된 것처럼 개인의 삶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돌이키고 회개한다면 역전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구별되어 특별한 소유가 될 신실한 사람들>
우리는 행실에서만 신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죄인도, 악인도, 죄도 다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뭐든지 다 사랑하신다고 하며 하나님을 모독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와 말 한마디까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상호작용한다
믿음과 신앙은 일상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언약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끝까지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여호와의 날에 특별한 소유를 삼으실 것이다
말라기에서 백성들이 거룩함과 언약을 배반한 목록을 제시하시며 언약을 회복하라 말씀하신다
한국교회는 한번 실수하면 매장당하는 문화가 있다, 회복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마지막 여호와의 날에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라는 중대한 약속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이다
용광로에 들어갈 자들과 특별한 소유로 삼아 기념책에 기록된 신실한 자들, 심판의 날에 의인과 악인을 분리시키신다는 약속은 힘겨운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말라기(Malachi)의 외침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말 1:1,참조. 말 3:13-4:6)
여러가지 의미로, 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만큼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구절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다고 나는 장담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주고 받은 말을 기록한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선언하시자 사람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였는데, 사실 이것은,'나는 그것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이러한 구절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 아래서 이 대화가 발생하였는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말라기가 역사상의
순서로 볼 때 구약 선지자들 중 마지막 사람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가 느헤미야의 활동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말라기서를 공부하기 전에 느헤미야서를 먼저 보는 것이 좋다.
느헤미야서에서 그 역사적 배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라기가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 이름이 한번도 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인
까닭에,만일 말라기가 그들과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가 그들의 활동을 그대로 뒤따른 것이 분명하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을 말라기서와 비교해 보면, 느헤미야를 화나게 만들고 말라기로 하여금 메시지를 전하도록 만든 백성들의 여러가지 잘못을 볼 수
있을것이다.
느헤미야서는 우리에게 아주 특출한 한인물을 소개하고 있듯이 책 자체가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때에 제상직은 더럽혀졌고 이방인과의 결혼 풍습이 성행하였으며 백성들이 십일조를 잘 내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된다.
이 점들이 바로 말라기 다룬 문제들이다.
백성들의 정신 상태가 말라기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다소 기묘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말라기서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일곱 문장을 하나씩 읽어보면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게 될 것이다.
1st,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1:1)
2nd,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1:6)
3rd,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1:7)
4th,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2:17)
5th,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3:7)
6th,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3:8)
7th,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3:13)
"어떻게"라는 말이 사실상 이 책을 여는 열쇠이며 백성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이다.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비난이 퍼부어질 때마다 그와 같은 말로 대꾸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말라기는
자기가 퍼붓고 있는 비난에 대해 항의를 하는 백성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전체는 무감각한 백성과 예민한 하나님을 동시에 보여 준다.
말라기는 바로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는데, 그가 이스라엘이란
말을 쓸 때는 단지 북왕국만을 가리키거나 남왕국 유다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이 사실과 관련해서 다음의 사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바벨론 포로사건 이후에 이 백성들이 돌아왔는데 이스라엘 백성 중
오직 남은 자만이 처음에는 에스라의 인솔 하에 돌아왔고 다음에는 또 다른 대표단의 인솔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유다 지파 뿐만 아니라 모드 지파 사람들도 다 있어서 말라기의 메시지는 자연히 이스라엘 전체에 전달되었다.
확실히,
돌아온 백성들 중 많은 수가 유다 지파에 속했으나 다른 지파 사람들도 들어 있었다.
느헤미야서에서 영감받은 히브리 역사의 마지막 단편을 보듯이, 말라기서에서는 영감받은 히브리 예언의 마지막 단편을 본다.
세례
요한이 올 때까지는 진정한 선지자가 달리 없었다.
마카비 시대에 특출한 인물이 여러 명 일어났었지만 그 시대에 관해서 영감을 받아
쓰여진 역사 기록은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진정한 선지자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이때로부터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학개와 스가랴가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성전 재건의 책임을 지도록
만든 것을 알게 된다.
백성들이 수고한 결과로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성읍을 세우고 성벽을 둘렀다.
성전이 세워졌고 제사장들은
직무를 맡았으며 제물들을 바쳤다.
이때 말라기가 와서 이스라엘에게 경고 혹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신탁을 알렸다.
그 경고의 첫
문장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것이고, 그 답변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이다.
그 다음에 이 책 전체를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 시대까지 그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세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첫번째는 여호와의 끊임없는 사랑이 계시되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이같은 사랑 앞에서 드러난 인간 생활의 끔찍한 실패에 대해 보게
되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백성들의 그런 실패 가운데서도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힘의 비결이 밝혀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끊임없는 사랑이 다음과 같은 서언으로 선포되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 번역문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히브리말의 근본적인 사상과 의미가 어느 정도 빠져 있다고 나는 본다. 나는 지금 이 문장이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것이다. 히브리어는 시제가 영어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여기서 사용된 시제는 과거 시제로 쓰인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말보다 훨씬 그 이상의 어떤 내용을 암시한다. 그 시제는 연속성을 표시하고 있다. 그 시제는 뒤를
돌아 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변과 앞을 내다 본다. 따라서 우리가 그 말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문장을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희를 사랑해 왔고 지금도 사랑하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이 부여된 4백년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와 그 기간 동안의 영감어린 예언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이러한 배경과 함께,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에 대한 이러한 위대한 선언을 접하게 된다.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변할 만한 이유가 생겼다고 해서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주 멋진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사람의 차원에서 사랑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할 만한 이유가 생길지라도 변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어떻게" 라는 질문이 발생하는 경우들을 주목하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잠깐 훑어 보면, 매 경우마다 어떤 비난에 대해
답변하느라고 질문을 꺼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비난은 신성한 것을 더럽힘과 탐욕, 예배를 권태롭게 여기는
무관심,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고발하는 것들이다. 두려운 죄목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 말라기는 비난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의 사랑을 이유로 들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호소한다. 게다가
그는 자기 메시지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그들의 일곱 가지 잘못의 기저에 있는 가장 심각한 죄는 그들이 하나님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쳐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신성을 모독하는 언행과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행위, 탐욕,
무관심,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함, 도둑질, 불경스러움 등 이러한 너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해 왔다."이것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이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강렬한 사랑 때문에 생긴 하나님의 상한
심정에서 나오는 슬픈 목소리를 듣는다.
그 다음에 백성들의 실패의 배경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밖으로 드러난 실패의 근본에는 항시,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소홀하였다는 사실이 있다. 그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원인이었다. 하나님께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나 신성을 모독하는 일,탐욕,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예배를 지겨워 하는 일,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리고 마음마저 무감각해져서 그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고 지껄였다. 이 백성들이 그동안 호된 경험들을 겪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었고 끔찍한 노예생활도 겪어 보았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는 했으나 새 성읍은 이전의 여광을 갖추지 못했고 성전은 그 장엄함이 솔로몬 때의 성전만 못하였다. 그래서 노인들은 그 성전을 보고 울었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마음 자세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은 생각이 든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은 그처럼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통과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가?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 때는 항시, 그 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떤 이유 때문에 약해졌다는 사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인가 끼이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종교의 형태와 의시ㅐ은 계속해서 유지해 올 수 있다. 성전에 계속해서 참석하고 교회에 제물을 가져왔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하다. 그동안 사랑이 우리 속에서 잘 발휘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도록 마치 수비대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 자신의 사랑이 어디선가 이지러지고 냉담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속에서 사랑이 식으면 마음이 무감각해지고 그 다음에는 양심이 무디어지고 마비된다. 그런데 속 상태는 이러면서도 종교의 외형적인 형식들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말라기 시대의 이야기이다. 즉 능력이 없는 형식의 이야기요 겉은 정확하면서도 속은 이단인 시대의 이야기이다.
말라기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의 변함없는 사실을 선언하였다. 사랑은 하나님의 통치의 동기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은, 그들이 복종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교제에 실패하여 그들의 사랑이 더이상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다음에는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밝히 보여 주는 계시가 나온다.
앞에서 말했듯이, 백성들 가운데 오직 남은 자들만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남은 자들 가운데는 또다른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 시기는 여러가지 면에서 혼란하였다. 이때는 왕이 없었다. 왕들은 그동안 다 사라졌다. 제사장직은 완전히 부패하였다. 예언은 이미 오랫동안 그쳐 왔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끔직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묘사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잠시 "그때에"라는 말을 살펴보자. 그때는 능력이 없는 형식이 판을 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 사랑을 의심하며 백성들이 십일조를 가져 오되 온전한 십일조를 가져 오지 않고 아주 차액이 심하게 가져오며,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지겹다고 말하던 때였다. 그때에 소수의 백성 집단이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영호와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였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3:16,17).
여기서 그 무리에 관한 두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첫째는 그들이 함께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피차에 말하매."타락한 시대 가운데서도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흠정역 성경은 그 구절을 "그들이 가끔 서로 말하였다."고 번역하고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가끔"이라는 말이 없다. 말라기의 그 진술은 가끔 발생하는 경우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는 생활의 습관을 나타내고 있다.
그 다음에, 말라기가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였다."고 말한 것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잠시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잠시 "생각하였다"는 말을 주목해 보자. 바울이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썼을 때 그는 70인역 성경의 말라기서에 있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목록 중의 물품을 조사한다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그 이름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그들의 재산 품목을 조사하고 있었다. 왕들은 죽었고 제사들은 타락하였다. 선지자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그 이름을 생가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여호와였다. 이 이름은 여러 시대에 여호와 샴마(Jehova-Shammah),여호와 치드케누(Jehova-Tsidkenu), 여호와 닛시(Jehova -Nissi),여호와 로페카(Jehova-Ropheka)등과 같은 말들과 연결됨으로써 다양한 뜻으로 해석되었다. 위 말들 및 다른 어구들은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 담긴 풍부한 의미들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남들과의 교제에서 발생하는 그러한 정신적 활동 속에, 모든 이가 타락하는 가운데서도 충성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이 있다.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the Lord hearkened and heard)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도 잠시 몇 마디 말을 생각해 보자.히브리 말은 언제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hearkened)라는 말은 동물에게 쓰이는 용어로서 귀를 세운다는 뜻이다. "heard"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도 회화적(pictorial)인데, 온 신경을 쏟아 한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는 귀를 세우시고 온 신경을 귀울여 들으셨다. 대담하게 말라기 선지자는 이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림으로써 그들의 주의를 끌려고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란, 그들이 타고 다녔을 말이 그것을 ㅌ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한 마디로 놓치지 않고 다듣기 위해 귀를 세우듯이 혹은 엄마가 어린 아기의 잘 알아 듣기 힘든 옹알거리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허리를 구푸려 듣듯이, 이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깊이 생각한 결과로 함께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듣고 계셨다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민족 생활에 있어서 실제적인 능력을 갖춘 중심 인물이었다. 사백 년 동안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어 백성들의 대다수는 형식주의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 때문에 질식하게 되기까지 더욱더 형식주의자들이 되어 갔다. 그러나 신약에서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밖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숙고한 결과로써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서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때 하나님 편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선지서의 마지막 장은 백성들에게 또 다른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보도록 촉구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사랄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4:1,2)
그 날은 해가 떠올라 밝아오는 날과 같게 될 것이다.
생활 상태에 따라 그 날의 결과가 좌우될 것이다.
해가 뜨면 뿌리가 없거나
생명이 없는 그루터기는 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뿌리도 있고 생명도 있는 곳에는 해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다.
말라기는
백성들에게 그 날을 바라보고 그 이상 (vision)에 맞게 행동하라고 명하였다.
오늘날의 기독교 국가의 상태가 말라기서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교회에 대하여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교회와 기독교 국가를
명백히 구분하고 싶다.
교회는 함께 모여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깊이 생각하는 선택된 남은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국가는 외형적인 형식이며 교회를 괴롭히는 거대한 형식주의이다.
그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고, 태앙이
떠오르면 전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성품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태양이 뿌리없고 생명없는
그루터기는 멸망시킬 것이나 충성스런 사람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