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현상
그리스도의 사랑
영국의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의 전도 책임자로 있을 때 그는 가끔 전도를 희망하는 후보자를 면접하였다 한번은 봉사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을 만나 "왜 당신은 해외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하고 물었다.
선교사 후보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그
모든 동기들은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가 당신을 어려운 시험과 시련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가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진실로 좋아해서 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닙니다. 나와 처는 먼지와 이 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냄새가 나는 이런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위험하거나
불쾌한 조건에서 나도 시험을 당할 때 주님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진정한 봉사를 하게 할
것입니다.
3D 현상
산업사회를 지나면서 우리가 흔히 듣던 3D 현상이 있다.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것은 회피하는 현상이다.
정보사회의 3D 현상
디지털(digital)
디엔에이(DNA)
디자인(design)이 신 3D 현상이다.
이 셋은 정보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습득해야 할 것들이다.
‘디지털’이란 말은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의미하는 ‘디지투스(digitus)'에서 온 말이다.
컴퓨터의 모든 자료는 ’비트(bit)' 단위로 기억되는데 하나의 글자를 기억하는데 필요한 8개의 비트를 묶어 놓은 것을 ‘바이트(bite)'라고 한다.
컴퓨터 데이터의 가장 작은 단위는 0과 1로 이루어져 있는 ’비트‘와 '네트(net)'의 결합으로 컴퓨터를 통한 정보산업 즉 ’디지털 혁명‘은 가능하게 되었다.
’비트‘는 자유자제로 변형이 가능하고, ’네트‘는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전달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성이 컴퓨터와 통신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제는 컴퓨터와 통신은 각각 다른 기술이 아니라 통합 기술로 발전하고 있다.
디지털의 세계는 아날로그의 세계와는 다르다.
어떤 이는 이전의 시대를 진공관의 시대, 아날로그 시대라고 하고, 현대를 디지털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신의 변화도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로 표현되는 정보사회는 이제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정보사회는 이전의 산업사회와는 달리 효율성이나 효과성보다 유연성이나 창의성이 더 중요한 사회이다.
정보사회는 조직의 혁신 방안도 구조조정이나 리엔지니어링 그리고 모듈레이션 등으로 발달하게 되므로 정보 마인드로 변화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정보사회는 인간의 위상도 상당히 달라진다.
인류의 1차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혁명 시대는 자연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였고 2차 혁명인 산업혁명 시대는 기계를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였지만 3차 혁명인 정보혁명 시대는 사람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방송 매체의 패러다임에도 상당히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차이를 개미 사회와 거미 사회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개미란 부지런히 일하여 모든 먹이를 독점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업 사회에서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었으며 소유를 독점하던 시대이다.
그러나 거미는 개미가 아니다.
거미는 공중에 거미줄을 치고 사는 생물로 부지런히 일하는 타입이 아니라 좋은 길목에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다가 먹이가 걸리면 잡아먹는다.
정보 사회는 부지런함 보다 정보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
정보 사회는 개미 사회와 같이 독점이 아니라 공유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정보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는 정보 네트워크를 가져야 하며 모든 지식과 소유의 공유로 전환해야 한다.
현대의 인터넷은 WWW(World Wide Web)로 대변된다. WWW는 세계적인 거미줄 망이다.
즉 인터넷은 거미줄이다.
미래 사회는 전 세계가 거미줄 망으로 연결될 것이고 이 거미줄을 의존하고 살게 될 것이다.
현재는 인터넷을 알지 못하면 조금 불편한 정도이지만 앞으로는 인터넷을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가 올 것이다.
인터넷은 좋든 싫든 생활의 중심에 서 있는 생존수단으로 변형을 몸부림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사회는 모든 사람이 중심인 사회이다.
거미의 자리는 항상 거미줄의 중심이다.
이런 정보사회로의 이동은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나 가치에 대 전환을 가지고 오므로 혼란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미 우리 사회도 전통 규범이나 가치가 혼돈 되는 정보사회의 현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인터넷의 순기능이 극대화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너희는 가서
`가서'(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 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Trilling, 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 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제자를 삼아(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 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에서 `...으로'(에이스)에 관해 몇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씻는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세례' 또는 `침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세례'냐 `침례'냐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란 죄사함을 받고(막16:16) 메시야의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는 사실이다(Beasley-Murray, Baptism
pp.90-92).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
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 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 -
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
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볼지어다(이두)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 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24:3). 그리고
`항상'(*,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未完)의 책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주신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권세를 오늘도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오늘은 그 권세가 무엇이며 그 권세를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일을 하셨으며 그 권세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서 말씀의 은혜를 더하고자 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 하늘에 계신 분이 땅의 권세를 가지셔야만 했을까요?
사실 하늘과 땅의 권세는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사건이 일어났죠?!
바로 인간의 원죄에 관한 사건입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의 청지기로 사람을 세웠는데 그 사람이 죄를 범하고 말았고 이로 인해 땅이 하나님의 땅으로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는 여전히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세워가기 위한 땅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 문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 이상의 권세가 필요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란? 하늘과 땅의 권세 그 위에 있는 (인간의 모든 죄악도 해결하는 권세를 말씀합니다. 곧 구원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말씀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위하여 인간의 죄악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
몸으로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 그 이상의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죄인을 의롭다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땅을 온전히 세워가도록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권세는 그냥 그런 권세가 아닙니다.
물질의 권세, 명예의 권세, 멋진 집, 멋진 차, 부동산의 권세 이런 것일까요?
여러분과 제가
지금 바라고 소망하는 권세는 무엇입니까?
이 권세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합니까?
그 권세를 어디에 사용하기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기 위하여 고난 당하셨고 조롱당하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며
자신을 주시며 피흘리시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권세를 과연 어디에 사용하고 계십니까? 하늘과 땅의 권세 그 이상의 권세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권세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한 권세.
이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사용하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어느 곳에 사용됩니까?
너희는 바로 여러분과 저 그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그의 백성에게 사용됩니다.
요한복음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가 주어졌다고 고백한 이유는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생명은 부자가 된다거나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게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으로 인식하고 믿었다.
그 결과가 하늘과 땅의 권세라는 표현에 녹아 있다.
우리에게 문제는 제자들이 경험한 그런 생명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십자가에 이르는 사랑과 부활에 대한 희망을 아는 사람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해방이다.
이는 곧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게 확실하다면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에게 주어졌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127. [요한계시록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28. [요한계시록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129. [요한계시록 13: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130. [요한계시록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1. [요한계시록 13: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2. [요한계시록 13: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33. [요한계시록 16:8]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134. [요한계시록 16: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135. [요한계시록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136. [요한계시록 17:13]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37. [요한계시록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138. [요한계시록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마태복음 28:18-20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사도신조의 고백 라는 것에 대한 신앙고백입니
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지금은 하늘 위에 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 (J.Calvin)은
사도신경 가운데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탄생, 고난, 부활, 승천에 관한 것은 과거의 사건으 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은 현재의 상태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함은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분류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또 그가 지금 하
나님 우편에 좌정하시고 계신다는 것도 전능하신 주님으로서 우주적인 왕권을 행사하고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서
뿐 아니라 하늘에서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시고 인류와 역사를 지배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 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 가셨다는 사실은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매우 큰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구약 시대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도 육체를 가진 채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늘」이란 장소로서의 하늘이며 하나님께서 계신 영역을 말합니다.
곧 신령한 장소입니다.
땅에 대한 하늘이요, 죄가 없는 곳입니다.
하늘은 본래 예수님이 계시던 그곳입니다.
따라서 하늘은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이 갈 곳이며, 예수님께서 우
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곳입니다.
⑴ 승천의 내용
마가복음 16:19에는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말씀하 시고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25:50-51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 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속편」이라는 사도행전에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장면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
전 1:9-11에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 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 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이 한쪽 구석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사건이 아닌 것처럼 주님이 승천도 대낮에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 진
사건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의 지상 사역이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요, 객관적인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⑵ 승천의 의미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완성을 뜻합니다.
성탄으로 시작된 그의 지상 생활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살아나신 것과 부 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활동하시다가 감람산 위에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서 지상에서의 활동이 완료된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생애는 그의 승천과 함께 매듭지어 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셔 야 될 모든 일들을 완료하신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9:30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을 거두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여기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속죄 사역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서 완성하셨음을 선언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곧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일이며,40 일 동안 더 머무르면서 부활의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일이었으며,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 건들을 통하여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② 본래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사실 전체를 거부하고 있
었습니다(요9: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예수님께 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 육신을 입고 세상을 오실 때 하늘의 보좌를 비워 두고 오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 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제 지상에서 하셔야 될 그의 사역을 다
마치셨기에 다시 그가 왔던 곳으 로 되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③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축복이었던 것처럼 그의 승천 역시 성도들에게 「소망의 확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가지게 될 궁극적인 소망을 「하늘 나라」요,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
한복음 14:2-3에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 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 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그곳에 장차 들어가야 될 우리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예수님처
럼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7에 보면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 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⑶ 승천의 소망을 가진 자의 자세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현장에서 그 장면을 소개하는 누가의 기록에는 거기 나온 무리들에게 천사가 당부했던 말을 기록하였
습니다. 사도행전 1:11에 보면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 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① 재림의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신 현장에 나온 천사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그 장면처럼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였
습니다. 요한계시록 1:7에도 언급하기를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 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부가 신랑을 맞이 하기 위하여
단장을 하고 기다리듯이 성도는 언제든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줄을 알고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 서 예수님은
마 25:13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 입니다.
②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실하여야 됩니다.
멍청하게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자기가 하여야 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열심히 일해야만 됩니
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즉시 요한의 다락방으로 가서 기도에 힘쓰던 중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행 2:1-4)
또한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남겨둔 그의 제자들 과 교회에
분부하신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마28:18-20)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규모없이 생활해서는 안됩니다. 규모있게 생
활해야 합니다(살후 3:10,11)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는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살후 3:13,갈 6:9)
2. 하나님 우편에 앉아게신 예수님
신앙고백의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씀 중에서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한 말은 현재 진행되고 있
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그 하늘 좌소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서 그의 지위와 권능과 사역 에
변함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⑴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보상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그의 지상 사역과 관련된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십자가상의 죽음과 무덤 속에까지 내려가신 그의 희생이 가장 비참하게 된 비하(卑下)였다면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 우편 에
좌정하시는 것은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영광에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2:9-11에 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 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 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에도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 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앉았다」는 개념은 휴식과 기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 말 가운데 「쉰다」라는 단어의 「안식」의 뜻 이
있습니다(시1611)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 기쁨은 고통과 폭풍이 지난 뒤 에
맑은 날씨와 같은 기쁨입니다. 주님이 누리시는 기쁨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기쁨이요, 영광의 자리, 심판의 자리를 획
득하신 기쁨입니다(롬8:34)
⑵ 하늘 위에서의 사역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도가 죽어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세상에서와 같이 일을 하지 아니하고 편하게 안식하며 즐기게 됩니다. 요한 계시
록 14:13에 보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 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위에 올라가신 후에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 여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 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 곳에서 하늘의 영들과 천사들을 부리면서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벧전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켜 칼빈 목사는 「대리(代理)의 기능」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고대 국가에서 제왕이나 군주
가 영의정과 같은 대신 옆에 앉혀 두고 자기를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요셉을
총리 를 세운 다음 인정 반지를 손에 끼워 주며 애굽 전국을 총리 하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41:40-43)
⑶ 우편에 앉은 것은 권능의 표시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오른편 손보다 왼편의 손을 더 힘있게 사용하는 왼손잡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른팔 또는 오른손이라
고 할 때에 이는 힘이 있고 자유자재로 편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
수님은 모든 권세를 행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 경영을 주도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았으며(마28:18)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행사하시면서(빌2:9) 역사를 주관하시 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로서 지상 교회를 통하여 구속사(救贖史)를 주도하시는 한편 인류 역사의 주권자로서 세상의 모든 역사 를
관장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9:16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하였습니다. 보좌 우편 에 계시는
예수님의 권세는 언제나 정당하고 바르게 사용됩니다. 곧 악을 징벌하고 선을 권장하며 어두운 역사를 밝고 올바르게 이끌 어 가시는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도 오른편이라고 할 때 왼편에 비해서 바르고 정당한 것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집니다. 수천년의 인류역사 가운 데
폭군이나 무신론적 독재 권력에 의하여 잘못되고 그르쳐진 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은 예수 그리스도는 원대한 그의 경륜을 따라 악 을
선으로 바뀌어 놓습니다. 더욱이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와 복음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이 땅 위
이루어지도록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의 의도하시는 이 땅에 이루어 자기 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⑷ 우편에 앉은 것은 심판의 권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심판 받는 자가 아니라 심판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만왕의 왕으로 만인을 심판
하시는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초림」과는 전혀 다릅니다(히12:2)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짧든지 길든
지 주님의 십자가만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차 우리들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택함 받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보 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를 감찰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 한 때에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려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릴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주신 일에 충실하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자 모든 신자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자신이 속한 가정, 학교,
직장, 사회 어디에서든지 또 필요하다면 선교사가 되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자기가 하는 일이나
전문적인 사역을 통해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신자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선 그 권세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마가 16:17,18)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매직 파워를 가진 슈퍼맨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했지 “믿는 자들은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은 그것을 소유한 자가 시행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자전거 타기, 수영, 언어 같이 한 번
배우면 평생을 두고 잊어버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표적은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나님이 초자연적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미
소유하고 있어서 언제든 포켓에서 꺼내어 쓸 수 있는 능력과는 다르기에 “따른다”고 말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말한 대로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며 그것도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으로 초대하고 이미 믿은 자에게는 그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우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상 명령과 함께 표적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전도할 때에 표적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실제 오지의 선교
현장에선 많은 표적이 따릅니다.
사단이 그때까지 자기 노예로 부리던 사람들에게 진리의 복음이 들어오는 것이 두려워 자기 모든
능력을 동원해 갖은 방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더 큰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단과 맞서
당당하게 싸우기만 하면 그 권세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위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했는데도 권세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단과 사람과 죄악에 져서 넘어질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습니다.
물론 표적은 항상 나타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필요와 뜻에 의해서만 드러난다는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권세가 끝 날까지, 땅 끝까지 함께 한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으므로 언제 어디서든 그 권세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결과가 됩니다. 아니면 우리 믿음에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둘 다 아닌
것 같아 신자들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럼 제 삼의 원인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거짓말 하셨거나 신자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선 표적을 능력으로 오해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수호신처럼 신자가 무슨 일을 해도 지켜주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와 항상 함께 하는 예수님의 권세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마16:19) 권세를 말합니다. 또 다시 신자가 자신의 문제를 기도하여 응답받는 능력을 말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 앞에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역으로 말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권세인 것입니다. 음부에
붙잡혀 있는 영혼을 구해내는 권세입니다.
또 그런 기도를 하고 전도하고 있는 신자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권세입니다. 잠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죄악에 빠져있어도
기도하면 흑암의 권세를 이겨내고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현실의 경제적 궁핍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본인의 영적인 성결과 성숙을 전제로 들어주기도 안 들어주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권세란 신자가 흔히 생각하듯 인간이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어렵고 큰일을 해치우는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신자로 사단을 이기도록 하는 능력인데 이 또한 힘으로 사단을 이기게 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컨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게 하는 것이 한쪽에선 예수님이 다른 쪽에서 사단이 그 귀신을 붙들고 줄 당기기 시합을 하다가 예수님이 더 힘이
세어 귀신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4:15,16) 신자에게 함께하는 예수님의 권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바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이자, 하늘과 땅의 다른 모든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두고 사단과 예수님이 힘겨루기 하는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 귀신들린 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 종으로 부려먹을 욕심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언제 어디서든 이기는 이유는 그 능력으로도 아예 비교가 되지
않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귀신들린 자의 영혼마저 예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로 시인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자 음부를 이기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사단에게
이길지 질지는 이미 선택과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사단에 대한 승리는 확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를 찾아서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는 믿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비유하자면 신자는 예수님을 믿어 자신의 주로 영접하는
순간 음부를 이기는 열쇠를 받아 포켓에 넣어 놓았습니다. 표적이 아니라 능력이 되었습니다.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것을 꺼내 쓰는 일이 귀찮고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완전히 잠겨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신자가 되어서도 자신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하니까 자신의 문제만은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이 결핍된 채로는
아직 포켓에서 열쇠를 끄집어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신자는 모릅니다. 자기 포켓에 열쇠가 있으니 당연히 열리겠거니 생각한 것입니다.
그 열쇠를 포켓에서 꺼내어 직접 열쇠 구멍에 끼우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기도는
사실 그렇지 않으니 당연히 표적이나 능력이 나타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고전13;2) 했습니다. 또 요한 사도도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요일4:18)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 때에도 틀림없이 어떤 축사를, 말하자면 기도의 형식은 취했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과
제자들의 축사에 차이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고상하고 심오한 내용이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까? 열심과 정성과 심지어 믿음의
차이입니까?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의 영혼을 정말 사랑했고 제자들은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권세를 갖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포켓에는 전지전능한 권세가 항상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것을 끄집어내어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분의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그분의 권세에 동참할 수 있는 길도 결국 그분의 사랑 안에 잠기는 길
뿐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시 주님이 나를 영원토록 사랑해주셔서 기도만 하면 나를 형통케 해주실 것이라는 분홍빛 환상에 젖어 들어선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음부에 붙들린 모든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 내는 사랑입니다. 신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고 또 그럴 때에 당신의 권세가 함께 할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신자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순간 영원토록 주님의 사랑 안에 이미 잠겨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따로 자신을 위해 받을 사랑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주위에 미혹된 영혼과 심지어 잠시 죄악에 빠진 자신마저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지금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사랑이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도 힘이 더 세다고
확신하십니까?
흔히들 모성애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끼리도 그러할찐대 왜 하나님의 사랑에는 의존하려
하지 않고 자꾸 그 능력만 그것도 무조건 무엇이든 해줄 것 같은 능력에만 목을 매달고 있습니까?
능력에 사랑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능력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십시오.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권세를 받았고 그 권세를 열심히 쓰고자 하는 소망과 열정이 있는 자신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천하에 정말로 두려울 것 하나 없을 것이며 이루지 못할 “사랑의 일”이라고는 하나 없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8:1-20
모든 권세(18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Then Jesus came to them and said,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has been given to me.
모든 권세(all authority)는 "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을 포함하는 매우 중요한 용어를 말합니다.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권세로 지상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권세(마태복음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둘째는 병을 고치는 권세(마태복음 8:1-13)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셋째는 죄인을 용서하는 권세(마태복음 9:6, 마가복음 2:10, 누가복음 5:24)
마태복음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가복음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누가복음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失墜)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마 9:6, 마가 2:10, 누가 5:24).
마태복음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가복음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누가복음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 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이다.
모든 권세(파스 에쿠시아)
모든(파스) 3956.
πᾶς, πᾶσα, πᾶν, gen. παντός, πάσης, παντός
관련 성경 / [형] 마다, 각(마3:10, 눅 3:9, 요 1:9), 무엇이든지 다(마 18:19, 고후 1:4), 온, 전체(마 2:3, 롬 11:26), 모든(고후 1:4, 빌 1:1), [명] 누구든지 (눅 16:16), 다(마 18:26), 모든 사람(롬 11:32), 만물(롬 11:36), 무엇이(행 17:25).
신약 성경 / 1244회 사용
권세(에쿠시아) 1849.
ἐξουσία, ας, ἡ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 1832. ἔξεστι
관련 성경 / 옳다(마 12:10,12, 막12:14, 눅6:9, 20:22), 가하다(고전6:12), 합당하다(눅14:3), 권한이 없다(요18:31).
신약 성경 / 32회 사용
마가복음 16:15-18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이 참된 성경공부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라도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도로 기도와 간구의 영을 부어주셔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역사가 찬송으로만 허공을 때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서해안에 진흙 속에 걸려 멈추어 있는 배들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 배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터보엔진과 커다란 마력의 기관, 증기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밀려오는 바다의 조수 외에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조수가 밀려 올 때 배들은 살아서 움직이고 큰 배들은 짐을 싣고 제 시간에 바다로 항해 할 수 있습니다.
2000년전
제자들에게 하신 이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이 명령하시는 복음전파의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지상 대명 복음전파의 사명이 주어졌으니 그러므로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더욱 전도하는 일에 힘써서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명령을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모든 권세가 주님께 있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권세로서 제자들에게 지상 대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지신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세 곧 하나님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권세, 하나님이 주신 하늘과 땅의 권세는 과연 어떤 권세일까요?
세상의 권세와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권세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다분히 파괴적이며 폭력적인 권세입니다.
이기적이며 자기의 세력과 부를 위하여 사용하는 권세입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은 세상 권세가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당시 그와 같은 것을 세울 수 있었던 애굽의 왕과 중국의 진시황제의 권세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뮬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는 무엇일까요?
창조의 권세와 심판의 권세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권세,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는 다릅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권세요 사랑의 권세입니다.
하늘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창조의 권세입니다.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의 권세입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권세입니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고 다시리시는 주권자의 권세입니다.
사람의 권세와는 비교될 수 없는 우주적인 권세입니다.
해 아래 모든 것들은 그 권세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권세입니다.
하늘의 권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권세이며 모든 사람의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주관하시는 권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치르시며 사랑하여 구원하시는 권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사망의 권세에서 일으키시고 부활케 하시는 권세가 하늘의 권세입니다.
땅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병든 자를 고치시는 권세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권세입니다.
묵인 자를 자유케 하며 은혜의 해를 온 땅 가득히 선포하시는 권세입니다.
연약한 자를 붙들어 주시며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위로하시는 권세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벗은 자를 입혀주시는 권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이 모든 하늘과 땅의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권세를 주님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로서 생명을 살리고 주의 은혜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따를 때 우리에게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하늘과 땅의 권세는 우리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의지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누리게 될 권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 주님은 모든 권세로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하늘의 권세로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해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땅의 권세로서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첫째, 너희는 가라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라” ‘어디로’ ‘세상으로’
가야할 그 세상에는 누가 있습니까? 죄에 물든 멸망 받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를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보내심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성도다운 삶, 제자로서의 합당한 사람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자기 뜻대로 고집대로 경험대로 살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자아의 음성을 듣고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의 권세를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받아 여러분들은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들고 보내심을 따라 어디든지 가야합니다.
롬10:14-15 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러한 주님의 위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위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 주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은혜이며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이며 주님을 위해 일할 자격자라로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뿐 아니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물론 예배하는 곳이며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교회의 역할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또한 흩어지기를 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모이는 사명과 흩어지는 사명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궁극적인 교회의 사명은 세상으로 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모여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아 복음 들고 흩어지는 기능이 교회의 건강한 기능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이며 복음 들고 흩어져서 전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선교의 대상은 특정한 몇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모든 사람입니다. 특히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은 곳에 복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모든 사람을 품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족속들에게 특히 미전도 종족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비젼이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계를 가슴에 품고 땅 끝까지 선교한다.’
“모든 족속”이라는 말에는 가장 가까운 나의 가족들이 있음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친구, 친지, 부모 형제들로부터 전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성도 여러분,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늘부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한 영혼을
품고 기도하며 그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귀한 전도의 사명에 온전히 헌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일부만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겸손도 가르쳐야 하고 인내도 가르쳐야 하고 헌신도 가르쳐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도 가르쳐야 하고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지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감사의 생활과 십일조의 생활과 주님께 드리는 모든 헌신의 생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믿음의 생활로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 보다 더욱 큰 가르침은 행함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부만 가르치지 말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여러분 모두 모든 것을 배워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격려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승리에 대한 약속입니다. 마지막까지 교회와 성도의 승리를 보장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는 곧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재림하시고 모든 세상의 심판주로 오실 때까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주님께서 항상 동해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잘 들으십시오. 항상 입니다. 언제나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지 함께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무엇이 겁날 것입니까?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염려하고 근심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승리자이십니다. 할렐루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통해 승리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항상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영원한 승리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담대히 복음 들고 나아가 세상 끝까지 주의 은혜를 선포하는 멋있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You Have The Authority Of Jesus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오늘의 본문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분께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9-10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모든 권세를 합해서 예수님께 부여한 것은 세상의 모든 위정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부름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지금 믿고 있는 자들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권세에 근거해서 나는
너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모든 민족에게 가르치라고 명한다.” 예수님께서는 나가서 세상의 민족들을 제자와 학생으로 삼으며,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라고 교회에 그분의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권세는 완전하고 절대적입니다. 당신이 모든 곳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때 어떤 악과 귀신들이나
어둠도 이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6:17-18은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언입니다. 곧 영의 영역에 있는 법칙입니다. 당신이 예수 이름으로 말할 때,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고 예수 이름의 권세로 사십시오. 마귀가 당신의 환경에서 날뛰지 못하게 하십시오. 마귀에 맞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아버지, 저에게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예수 이름을 사용할 특권과 권세를 주시니 감사합니다.예수 이름 앞에 마귀는 비틀거리고 사슬은 깨어지며 문은 열리고 산들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의 능력과 권세로 오늘 저는 승리하며 나가서 환경을 다스리고 통치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과 우주만물을 통치하는 권세를 받았음을 선포하십니다.
* 예수님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
* 아니, 부활하셔서 하늘로 도로 가시고, 이 땅은 걍 내버려주신 게 아닌가욤? 주님이 다스리시는데 이 모양 이 꼴로 악이 활개치고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냐고요..
* 예수님 왈, “아냐! 난 지금 너희와 함께 있고, 또 지금 이곳을 컨트롤(통치)하고 있다고!! 단지 통치방식이 너희들이 기대하는 방식과 좀 다른 것뿐이야!!”
3.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 “내가 지금 이곳을 다스리는 방식은 말야... 너희를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 공평을 이루어가는 거야. 그래서 너희를 지금까지 훈련했고, 지금 보내는 거야.”
① 전도, 제자삼기
* 먼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야 해!
* 복음을 전하는 것 = 하나님나라가 지금 이곳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 예수님이 지금 여기를 다스리고 있다는 걸 선포하고 보여주는 것,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초청하는 것!!
②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마태는 놀랍게도 우리가 삼위일체로 부르는 신학적 개념을 이 때 벌써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실은 신학적 개념정리(삼위일체)는
나중에 된 거죠. 제자들 모두는 걍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보니 당근 아버지하나님, 아들 예수님, 그리고 오순절 이후 경험한
성령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죠^^
* 세례 =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증표. 도장 찍음. 특히나 물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올 때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그림이 펼쳐진다는~~^^
③ 가르쳐 지키게 하라
*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을 차근차근 가르쳐서, 삶으로 살아가도록 하라.
*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면서 삶을 통해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 예수님이 이곳을 지금 다스리시는 방식이 바로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도라는 방식을 통해서 라는 게, 엄청 부담스럽게 다가오는데요...
4. 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
* 예수님 왈, “그 부담스러운 거 다 안다.. 근데 말야, 너희가 잠깐 눈을 들어 내가 보고 있는 걸 같이 보렴! 그럼 부담 없이 그 길을 받아들이게 될 거야.”
* 예수님이 보시는 것, 이 작은 갈릴리 동네에서 시작애서 복음의 들불처럼 번져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복음의 파도가 일어나는 모습을~~
* 모든 세상이 예수님의 발 아래 무릎 꿇고 세상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그 심판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때를~~
*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편만하게 이루어지는 그 아름다운 모습, 사자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뒹구는 그 아름다운 완성의 모습을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는 하지 말라 해도 걍 한달음에 달려가서 이웃들에게 이 환상적인 모습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는~~~
* 열 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모두가 바로 이 예수님의 꿈, 예수님이 보시는 걸 보고, 느끼고 알았기에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구나... 라는 마음이 찾아옵니다.
*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하늘 아버지 우릴 새롭게 하사, 열방 중에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모든 나라 일어나, 찬송 부르며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
*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하시네요. “그래도 힘든 일은 많을 거야.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끝 날까지 너희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을 거니까 말야..”
* 임마누엘!! 아멘!!
* 이 땅에 오시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3)하며 찾아오시더니, 마지막 때까지 임마누엘로 내 옆에 지금 이곳에 함께 계시는 주님. 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7:45-66
성소 휘장(51절)
1832.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 네덜란드선교회).
1832년
영국 암허스트 호 통역 겸 의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도착한다.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하며 주민들과 접촉하다.
감자심는 법을
가르쳐주며 주민들에게 약과 전도문서등을 전했다.
관리들이 이를 금지시켰다.
한달간 정박한후에 외국과 통상할수 없다는 통보로 인해
한국을 떠나야했다.
항해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귀츨라프의 방문이 선교와 직접적으로 연결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씨를 뿌리는 수고와 간절한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 당시에 먹을 게 없었는데 그가 심은 감자가
유용하게 음식으로 쓰여졌다 전해진다.
1866. 한국최초의 기독교순교자 -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귀츨라프가
한국을 다녀간 지 33년 후, 토마스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온다.
토마스는 중국 상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부인이 사망하고 그
충격으로 선교사의 임무를 그만두고 해관통역업무를 보았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을 만나면서 한국선교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한국에서 온 두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서 성경을 전해줬을때 기뻐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선교를 소망하게 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달 반의 한국선교여행(황해도)을 하게 되고
성경배포를 하였다.
주민들이 성경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다시 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1866년 미국의 무장된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했지만, 배가 무장된 상선이었기에 병사들의 폭탄에 의해 좌초되고,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 갖고 있던
성경을 한권 한권 뭍으로 던졌다.
토마스와 일행들은 뭍에 끌려내리게 되고 군인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나이
27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병사에게 성경을 전해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한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의 죽음 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훗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그
때 성경을 받은 병사가 훗날 예수를 믿게 되고 평양교회의 초대장로가 된 박춘권이란 사람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다.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한다.
하나님의 일은 결단코 성취되어진다.
1933년
9월 14일에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 제너럴 셔먼호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보복하기 위해 군함을 보내어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얼마 후인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교회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은 국제간의 통상등을 사용하셔서
복음의 문을 여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어쨌든 이로써 조선은 복음의 씨앗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
어떠한 열매도 없었지만 분명히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다. 그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מָסָךְ 4539
어원 / 55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휘장(출 26:36, 40:8, 민 4:5), 휘장 문(출 26:37, 38:18, 민 4:25), 휘장(민 3:31), 덮개(시 105:39), 덮였던 것(사 22:8), 덮을 것(삼하 17:19).
구약 성경 / 25회 사용
* 5526. סָכַךְ
관련 성경 / 가리다(출 40:3, 삿 3:24, 삼상 24:3), 덮다(출33:22, 왕상8:7, 시91:4, 겔28:14), 조직하다(시139:13), 가두다(욥38:8, 나2:5), 둘러싸이다(욥3:23), 격동하다(사19:2), 격동시키다(사9:11). [명] 보호(시5:11).
구약 성경 / 19회 사용
פֹּרֶכֶת 6532
관련 성경 / 휘장(출 26:31, 레 4:17, 민 18:7).
구약 성경 / 25회 사용
καταπέτασμα, ατος, τό 2665
어원 / 2596과 40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휘장(마 27:51, 눅 23:45, 히 10:20)
신약 성경 / 6회 사용
* 2596. κατά
* 4095. πίνω
어원 / 미완료 ἔπινον, 미래 πίομαι, 미래2인칭단수 πίεσαι, 제2부정과거 ἔπιον, 제2부정과거 명령 πίε, πιέτω, 제2부정과거 부정사 πιεῖν, 완료 πέπωκα, πίω의 연장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마시다(마 6:25, 눅 1:15, 요 4:12, 13, 14, 고전 9:4), 흡수하다(히 6:7)
신약 성경 / 73회 사용
성소의 휘장(출애굽기 26:31-33)
성소에는 두 개의 휘장이 있습니다.
첫번째 휘장은 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은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성소 밖과 안를 구분합니다.
두번째 휘장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하여 지나야 하는 휘장입니다.
두번째 휘장을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육체라고 설명합니다.
"휘장"이라고 번역한 "카타페타스마(katapĕtasma. καταπέτασμα)"란 페르시아 말 "파르고트"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의 궁창과 땅의 궁창을 구분하는 벽을 의미합니다.
성소에는 분향단이 있고 분향단 뒤에 휘장이 쳐 있으며 휘장 안에는 법궤가 놓여진 곳을 지성소라고 합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항상 임재하여 계신 곳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지성소는 매우 거룩한 곳입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도 함부로 지성소를 들여다보거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휘장으로 가리웠던 것입니다.
만약에 함부로 인간이 지성소를 들여다보거나 들어갔다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막으로 휘장은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한, 마지막 관문과 같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은 일년에 한번씩 출입하는 대제사장만이 열고 들어 갈 수 있던 곳입니다.
일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에 휘장은 열리고 대제사장만이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시은좌가 모셔진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 나라를 상징합니다.
지성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앞에 서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번 정한 기일에만 들어 갈 수가 있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심판받아 운명하실 때 휘장의 한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며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습니다(마태 27:51).
그러므로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고, 들어갈 때에, 임할지도 모르는 죽음에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되었던 것이다.
당당히 들여다보고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휘장이 주는 영적 의미
휘장은 그 자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성막의 휘장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그것이 주님의 육체란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온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7~38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니라.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정확하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는 것은 주님이 바로 휘장의 본체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휘장으로 막혀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휘장을 제거하심으로써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언제든지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접근을 막는 불 칼을 든 그룹들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죄 없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얻었습니다.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확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히브리서 6:19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성도들의 소망인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6:19- 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솔로몬 성전의 휘장의 크기 / 유대
랍비 전통 문헌에 의하면,
솔로몬 성전의 휘장은 휘장의
두께는 8~9인치 (약 20센티, 매우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
높이는 60피트(약 18미터)
넓이는 20피트(6 미터)
이 무거운 휘장을 한번 설치하는 데는 유대인 제사장 3백
명이 한꺼번에 매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휘장이 크고 무거운 이유가 무엇인가요?
죄인들이 함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지 말라 입니다.
광야의 성막 휘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가로가 5 미터이고 길이가 5미터입니다.(10규빗)
출애굽기 26:31-37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받침 위에 둘지며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
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그 장 바깥
북편에 상을 놓고 남편에 등대를 놓아 상과 대하게 할지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짜서 성막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위하여 기둥 다섯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지며 또 그 기둥을 위하여 받침
다섯을 놋으로 부어 만들지니라.
히브리서 10:19-2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성막을 알아야하는 이유
1. 성막은 예수그리스도를 계시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와 또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으로, 성막은 3,500년 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계시해 주신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정확한 모형이며, 성막안의 모든 기물들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을 담고 있어, 교회와 성도들의 삶과 직접연관 지어볼 수 있습니다.
2.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만나는 방법을 계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나(창 6:20,15:12, 46:1),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3. 성막에 관한 성경의 말씀은 50장
성막은 단일 주제로서 가장 많은 성경 장을 차지하며 50장이나 됩니다.
출애굽기 13개 장.
레위기에 18개 장,
민수기에 13개 장,
신명기에 2개 장,
히브리서에 4개 장,
도합 50개장 외에도 시편과 애가 등에 언급되었습니다.
천지창조 11개 장,
아브라함의 생애 14개 장 정도에 비해 월등히 많습니다.
4. 성막을 통해 자신의 영적상태를 진단
1) 문 : 나는 동편으로 난 유일한 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는가?
2) 번제단 : 나의 죄의 결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용서 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3) 물두멍 : 나는 죄 사함을 받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결 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버리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죄는 없는가?
4) 촛대 : 진리의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가?
빛 된 사명에 충성하고 있는가?
5) 떡상 :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6) 분향단 :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날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고 있는가?
7) 법궤 : 속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있는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하는가?
죽은 나뭇가지에도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는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고 있는가?
성막은 문에서부터 지성소까지 세상과는 다른 구별된 곳이며, 한 장소에 모여 있고 성막은 세 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뜰"입니다.
동편문으로 성막안으로 들어가면 제일먼저 나타나는 곳은 "뜰"입니다.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아직은 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번제단에서 모든 죄를 사함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받은 신자들이 날마다 회개하는 모습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가 복있다고 하셨습니다" (마 5:4)
신자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물두멍에 수족을 씻는 제사장처럼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떡상과 금촛대와 금향단이 있는 "성소"
첫번째의 휘장
성막에는 2 군데의 휘장이 있는데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곳에 휘장을 만들어 가리라고 했고(출 26:36-37)
이 휘장은 제사장이 날마다 성소를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합니다(히 9:6)
제사장이 하는 일은 뜰에서 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이나 수족을 물두멍에 씻는 것처럼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들에 반하여, 성소 안에서 하는 일은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교회의 봉사와 헌신과 전도와 주일 성수를 하는 것과 심지어 헌금을 드리는 일까지도 남을 위하거나 스스로를 위하는 행위가 아니고, 오로지 제사장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 번째 휘장의 중요성은 성소를 보호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바람막이로 성소를 보호하고 짐승의 침입을 막기도 하고 불경건한 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휘장입니다.
성도는 교회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는 첫번째 휘장입니다.
세상의 풍조와 인본주의의 바람을 막아내야 합니다.
두번째의 휘장
이 휘장은 성소(The Holy Place)와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휘장을 말합니다.
그 휘장의 재료는 첫 번째 휘장의 재료와 같습니다.
청색, 홍색, 자색과 가늘게 꼰 베실로 혼방된 것입니다.
이 두 번째 휘장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라고 했습니다.
성소에는 떡상과 금촛대와 금향단이 있습니다.
떡은 제사장의 몫입니다.
제사장은 성소안의 떡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촛대의 불은 항상 밝혀져 있어야 합니다.
향단에는 향연이 계속되는 곳이 성소입니다.
이곳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의무와 사명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떡은 말씀입니다.
촛대는 빛입니다.
향연은 기도입니다.
말씀과 빛과 기도는 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와 사명입니다.
휘장은 육체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휘장의 의미
하나님께서 휘장을 만들게 하셨는데 휘장의 의미는 분리입니다.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휘장 밖 성소까지입니다.
휘장을 기준으로 성막은 둘로 나누어지고, 성소를 첫째 성막, 휘장 안을 둘째 성막은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제사장들을 항상 첫째 성막 안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둘째 성막에는 일 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들어가 속죄의 피를 뿌리는 것을 제외하고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레위기 24:3
아론은 회중의 성막 안 곧 증거판의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 계속해서 그것을 정비(整備)할지니 이것이 너희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주님은 휘장을 두심으로써 제사장들은 휘장 밖에서 주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주 보며, 주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주님을 섬긴 시대가 바로 구약의 율법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만들게 하신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휘장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휘장을 걷어주시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와 직접적으로 대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만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리하시고 구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리와 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흔히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통합과 연합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은 혼합을 유난히 싫어하십니다.
신명기 22:9~11
포도원에 여러 가지 씨를 섞어 뿌리지 말지니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열매가 더러워질까 염려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함께하여 밭을 갈지 말지니라.
너는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같이 여러 가지로 섞어서 짠 옷을 입지 말지니라.
주님은 이스라엘의 생활 방식에서 조차도 혼합을 거부하도록 하셨습니다.
구분과 경계를 두는 것은 순결과 거룩함의 첫째 요건입니다.
오늘날 유전공학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종자의 성질을 혼합해서 변종을 만드는 것은 주님이 매우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성경에 네피림이라고 있습니다.
창세기 6: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은 천사와 사람의 혼합 되어 탄생한 사람을 네피림이라 하였고 하나님은 이를 극히 싫어하시었고 가나안땅에도 네피림이 있었는데 그런 네피림을 멸절하기 위하여 가나온 족속을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 홍수로 네피림을 진멸하였고 가나안 땅에서도 역시 네피림을 진멸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도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혼합된 인간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네피림은 유전 공학으로 DNA를 조작하여 Super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DNA를 조작하여 초능력 인간을 만들어 이미 30여명의 아이가 태어나 있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극히 싫어하는 일을 인간들이 자초하고 있으니 멸망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이와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요사이 종교통합이라 하여 하나님과 우상과 이방신을 통합하여 WCC를 만들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면, 나도 여러 차례 경고와 삭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성 결혼지지 여부도 물어 보아야 하지요.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극히 싫어하셨고, 가증이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종통합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연합하거나 세상 사람들과 멍에를 같이 메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한 몫을 나누겠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너희 자신을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딸이 되리라. 전능자 주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여 몸이 연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집회를 하면서 마음을 같이하는 것을 주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리를 명하십니다.
성막에서 주님의 분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가지가 바로 ‘휘장’ 입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합니다.
휘장이 있는 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습니다.
휘장 재료와 크기
솔로몬 성전의 휘장의 크기 / 유대
랍비 전통 문헌에 의하면,
솔로몬 성전의 휘장은 휘장의
두께는 8~9인치 (약 20센티, 매우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
높이는 60피트(약 18미터)
넓이는 20피트(6 미터)
이 무거운 휘장을 한번 설치하는 데는 유대인 제사장 3백
명이 한꺼번에 매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휘장이 크고 무거운 이유가 무엇인가요?
죄인들이 함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지 말라 입니다.
광야의 성막 휘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가로가 5 미터이고 길이가 5미터입니다.(10규빗)
출애굽기 26:31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이 휘장은 네 가지 색깔로 직조한 위에다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만들었습니다.
휘장에 그룹을 수놓은 것은, 지성소는 하나님의 법궤가 모셔진 곳으로 매우 거룩한 곳임을 말하여 주며, 또한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거룩하심을 말하여 줍니다.
이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그룹들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9:3- 4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사람들은 그룹 앞에까지만 갈수 있습니다.
성소에도 제사장은 그룹 앞에서 떡을 올리고 불을 켜고 분향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하나님과 보좌와 그 주위에 있는 스랍들을 보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합니다.
휘장을 만든 재료는 4가지 청색, 자주색, 주홍색, 흰색(아마) 실로 가늘게 꼬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수놓아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복음서가 주님의 4가지 면을 조화롭게 보여 주듯이 주님의 인성과 신성을 골고루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청색은 하늘의 색
이 청색은 푸른 하늘의 색으로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신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생명의 색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나타내는 색이 청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분이시며, 하늘에서 오신분이십니다.
요한복음 6:38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음이니라.
주님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습니다.
이것이 청색이 상징하는 영적 의미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오셨고, 하늘에 계신 분이셨습니다(요 3:13)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는데, 청색은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자주색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
자주색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던 고급 옷감에 사용되는 색입니다.
존귀, 위엄, 부요의 색으로서 왕의 의복 색깔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색의 의미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주색은 부와 존귀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왕들은 대부분 자주색 옷을 입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서 전리품을 취한 장면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사기 8:26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으로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장식과 목걸이와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주색 의복과 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자주 색 옷이 왕복입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하심과 왕권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며, 만왕의 왕이십니다.
시편 8:6
또 주께서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셨사오니.
주님은 모든 것을 발아래 두신 지배자요 왕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7:14
이들이 어린양과 전쟁을 하려니와 어린양께서 그들을 이기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주(主)들의 주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또 그분과 함께 있는 자들이 부르심을 받고 선택받은 신실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하더라.
이를 통해 볼 때 자주색은 왕되신 주님을 상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주색 옷을 입고 이스라엘의 군중들 앞으로 불려 나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9:2. 5
군사들이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 그분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긴 옷을 입히고 이에 예수님께서 가시나무로 엮은 왕관을 쓰고 자주색 긴 옷을 걸치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보라! 하니.
주님이 입으실 옷은 사람들이 입혀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옷을 입으십니다.
자주색은 사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이 증거하는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홍색은 우리 구주 예수의 보혈
홍색은 피의 색으로서 보혈을 흘리셔서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님이 주홍색 옷을 입으신 것으로 나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마27:28). 홍색은 우리가 지은 죄의 색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1장 18절 "주께서 이르시되,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辯論)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
우리의 죄는 주홍 같으며, 진홍같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흘린 피로 이 죄를 씻기십니다.
흰색은 성결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순결의 색으로서 아무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백색은 승리의 색으로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승리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줄 의의 옷이며, 주님께서 입으실 옷입니다.
흰색은 순결과 의를 나타냅니다.
흰옷은 이기는 자들이 입는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3:4-5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이는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이기는 자 곧 그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 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늘에서 입게 될 옷이 모두 흰 옷입니다.
흰 옷은 수치를 가리는 옷입니다.
희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덕분에 그만큼 더러움을 쉽게 타고, 약간만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얼룩이 지고, 때가집니다.
이는 교회와 성도들 역시 조금만 부주의하면 금방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검은 색 옷을 입게 하셔서 때가 타도 먼지가 앉아도 보이지 않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입은 옷의 색도 흰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그 성전에서 나오는데 순결하고 흰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었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고운 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더라.(계 19:14).
부활하신 예수님의 동굴에 있던 두 천사들 역시 흰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막 16:5, 요 20:2).
우리 주님이 입으신 옷도 흰 옷입니다. 주님은 변화산에서 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사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마 17:2).
자주 빨래를 하고, 자신의 몸을 씻는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고 말씀의 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죄를 씻기는 것은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a).
우리는 매일 발을 씻듯이 그렇게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7장 1절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 된 그릇이 되리라.(딤후2:21).
깨끗함을 입은 성도가 개가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 가고, 씻겨 진 돼지가 진창 속에서 뒹굴 듯이(벧후2:22) 옛 생활의 습관 속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성소에 들어와서 지성소 앞에 가려진 휘장을 볼 때마다 이들은 이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26:31
너는 정교한 솜씨로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휘장(揮帳) 하나를 만들되 그룹들을 수놓아 그것을 만들지니라.”
주님은 정교한 솜씨로 휘장 하나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대충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정교한 솜씨란 숙달된 기술자의 노련한 능력을 다 발휘해서 최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정교한 솜씨로 만들라고 한 것은 휘장(앙장)과 흉패에만 사용한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다 정교하게 만들어야겠지만 성막에서 주님은 이 두 가지에만 정교한 솜씨로 만들라고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정교한 솜씨란 주님께서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온갖 기술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일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일을 할 때 주님께서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의 영을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단지 마음속에 영적 평안, 정신적인 기쁨, 추상적인 개념과 관념에만 역사하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활, 우리의 작업하는 일손에 직접 역사하십니다.
창의력과 기술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디자인을 하든, 몸에 침을 놓든, 사진을 찍든, 정원을 꾸미든, 페인트를 칠하든 모든 일에 주님의 영으로 충만할 때 놀라운 솜씨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5장 30~35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보라, 주께서 유다 지파에 한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레엘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지혜와 명철(明哲)과 지식과 온갖 기술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충만하게 하사 정교한 일들을
고안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온갖 정교한 것을 만들게 하셨고 또 그와 단 지파에
속한 아히사막의 아들 아홀리압의 마음 속에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넣어 주셨으며 마음의 지혜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사 온갖 일을
하게 하시되 곧 조각하는 일과 정교한 일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고운 베실로 수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게 하시고 또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휘장에 그룹들을 수놓게 하셨습니다.
그룹들의 일차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룹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룹이 수 놓여 있다는 말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오색으로 수놓은 휘장은 주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룹은 인간이 타락하여 쫓겨난 에덴의 낙원을 지키는 천사들입니다.
불 칼을 들고 인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모습을 통해 죄악 된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곳이 그룹들 앞까지란 사실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셔서 두신 곳, 자신을 부르시던 곳에 다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룹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휘장에 수놓인 그룹들은 인간은 그룹들이 그 자리에서 철수하기 전에는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휘장이 찢겨짐으로 수놓이 그룹들 역시 찢겨졌는데 더 이상 그룹들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참고 : 천사, 그룹, 스랍)
출애굽기 26장 32절. “너는 시팀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네 기둥에 그 휘장을 걸고 기둥의 갈고리들은 금으로 만들어 은으로 만든 네 개의 밑받침 위에 둘지니라.“
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네 기둥에 휘장을 걸었습니다. 휘장은 네 기둥에 걸리고 팽팽하게 고정되었습니다.
그냥 펄럭이거나 접히거나 고이 보관된 것이 아닙니다. 네 기둥 역시 사복음서와 마찬 가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을 골고루 조화롭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6장 33절. “또 너는 그 휘장을 갈고리들 밑에 걸어 놓고 증거궤를 휘장 안에 들여 놓을지니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리라.”
이로써 성소와 지성소는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기를,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성막은 지성소라 일컬음을 받나니 (히 9 : 3)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이곳은 거룩히 구분되었습니다.
5. 휘장이 주는 영적 의미
휘장은 그 자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성막의 휘장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그것이 주님의 육체란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온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7~38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니라.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정확하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는 것은 주님이 바로 휘장의 본체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휘장으로 막혀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휘장을 제거하심으로써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언제든지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접근을 막는 불 칼을 든 그룹들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죄 없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얻었습니다.
에베소 3장 12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확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히브리서 6장 19절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성도들의 소망인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 휘장 안은 지성소라 하여 그 안에는 언약궤, 시은좌 (은혜 베푸는 곳)가 있습니다.
주님이 육신 안에 거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휘장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듯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둘로 찢어졌습니다.
사람이 찢었다면 아래서부터 위로 찢었겠지만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 - 52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휘장이 있는 동안은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오면 죽임을 당합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 하나님께서 나아 오셔서 믿는 성도의 마음에 성전을 삼고 계시게 되었습니다.
나. 찢어진 휘장 안에는 피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휘장 안에는 일년에 한차례씩 대 제사장이 양의 피를 들고 들어가서 피를 뿌리고, 붓고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기다립니다.
내 백성의 죄를 사했노라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대 제사장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후에 한번도 피를 닦으러 청소하려 한번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피 없이 지성소에 들어 올 때에는 죽임을 당하므로 아무도 청소를 한번 하려 들어가지 못합니다.
매년 피를 뿌리고 부은 피가 마르고 붙어서 지성소 안은 피로 물들인 곳, 피가 찌든 곳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양의 피로 백성의 죄를 사함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로는 예수의 보혈을 믿음으로, 양의 피가 없이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피를 믿지 않고, 예수의 피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 휘장이 가로로 찢어지지 않고 세로로 찢어진 이유.
각 개인에 따라서 다시 열리는 휘장을 의미합니다.
휘장에 들어 갈 사람은 번제단, 물두멍, 금촛대, 떡상 향단을 거치고 많은 기도를 할 때에 휘장을 찢으신 하나님께서 내 몸에 좌정하시고 거처를 정하십니다.
각 개인의 신앙에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가 각기 다르게 임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라. 휘장은 하나님이 친히 찢으셨습니다.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솔로몬이 만든 때의 휘장입니다. 소 두 마리가 잡아 당겨도 (4마리) 찢어지지 않는 손바닥 두께만한 잘 짜여진 휘장입니다. 후에 찢어진 휘장을 수리하여 꼬매여 놓으면 터지고, 터지고 하여 결국 성전의 휘장 수리를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놓은 길은 사람이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소에 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서는 지성소에 들어가야 하였지만, 신약 시대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성령으로 직접 찾아 오셔서 내 마음에 좌정하여 계십니다.
성령 충만이, 구약 시대에는 핌푸레미 성령 충만으로 사역을 위한 외적인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지만 (Upon, With)
신약 시대에는 푸레로 성령 충만으로 내 몸에 성령께서 좌정하여(In, Into) 내 몸을 성전 삼고 나와 함께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전 휘장을 찢으시고 내 속에, 하나님께서 내 몸을 성전을 삼고 거하시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하시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1. 천사들(angels)
많은 사람들은 천사와 그룹이 같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둘은 분명히 서로 다릅니다.
성경에서 천사는 무수히 많다고 언급하지만(히 12:22), 그룹처럼 날개를 가진 천사는 하나도 없으며, 그룹처럼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천사도 없습니다.
천사는
몸이 없는 영적인 존재라 사람과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창 18:2; 19:1, 5).
"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앙겔로스)가 남성명사인 것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주로 남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천사는 날개 없는 젊은 남성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때로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신들"(gods)로 불려지기도 했고(시 82:1,6,8),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욥 1:6; 2:1; 38:7).
2. 그룹(cherub, 체루빔-cherubim)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게 했을 때에도, 그룹의 위치는 지성소 안, 언약궤 위였습니다(출 25:20).
솔로몬도 지성소 안에 두 그룹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왕상 6:23). 이것은 그룹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자리는 그룹들 사이였습니다 (왕하 19:15, 대상 13:6).
이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모형으로, 하늘에서의 모습을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시 80:1; 99:1, 겔 10:1). 그룹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가 있습니다. (겔 10:4)은 그룹들과 함께 나타난 주의 영광으로 인해 성전에 주의 영광이 가득 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다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시 18:9,10). 또 온 백성들이 두려워 떨 만큼 위엄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서도 그룹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시 99;1).
3. 스랍(세라핌-seraphim)
스랍은 그룹과는 약간 다른 존재로서, 그룹에 대해서는 (사 6장)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스랍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사 6:2). 성경에서 스랍들은 그룹처럼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그분의 영광을 호위하면서(사 6:1,2)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사 6:3).
휘장의 재료는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었다. 여기서 각 색깔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희망과 생명을 상징한다.
성경은 예수는 하늘에서 나신 분(고전 15:47),
생명의 주(요 10:10),
하늘에서 오신 분(요 3:3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 안에 있는 영생을 암시한다.
자색은 부요와 고귀를 상징한다.
자색 옷은 왕이나 귀인들이 입는 옷으로 만유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다.
홍색은 희생을 상징한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매달리셔서 붉은 피를 흘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량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나타낸다.
흰색은 성결과 의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하시며 의로우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그분의 의를 확증하셨다.
휘장의 모양
휘장은 네 가지 색깔로 직조한 위에다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만들었다.
휘장에 그룹을 놓은 것은, 지성소는 하나님의 벱궤가 모셔진 곳으로 매우 거룩한 곳임을 말하여 주며, 또한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거룩하심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그룹들을 상징하는 것이다(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구약 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하나님과 보좌와 그 주위에 있는 스랍들을 보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 갈 수 없는 곳이다.
죄인은 갈 수 없는 곳이다.
의인만이 가는 거룩한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인 저나 여러분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아무런 죄가 없어야 한다.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로마서 3장10절에서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인은 이 땅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요. 그곳은 매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갈라진 휘장(마 27:50-53. 막 15:37-39. 히 10:19-23)
지성소와 성소의 사이에 쳤던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휘장 안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시은좌가 있는 지성소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다.
곧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하나님을 직접 만나려면, 이 지성소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레위기 16장의말씀을 보면, 이 지성소에는 일년에 일차씩 속죄일인 7월 10일에 제사장들 중에서도, 그해 대제사장으로 뽑힌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사장으로써 성소에 출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성소는 이렇게 거룩한 곳이다.
이 당시에는 대제사장으로 뽑히어서 지성소를 출입할 수 있는 제사장은 개인으로는 큰 영광을 얻은 것이다.
속죄일에는 제사장들이라도 백성들과 함께 성막(회막)밖에 서있어야 했고, 대제사장 혼자만이 성막안으로 들어가서, 대제사장의 옷을 벗고, 몸을 깨끗이 씻고, 고운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대제사장 자신을 위하여 속제의 제물로, 수소 한 마리와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수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고, 또 번제물로 드릴 수양 두 마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수 염소 두 마리 중에 제비를 뽑아,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제물로 정하고 또 한 마리는 아세살을 위하여 준비하고 나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인 수송아지를 대제사장의 권속들을 위하여 속죄하고, 그 수송아지를 잡고는,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의 단에 피운 불을 채우고, 두 손으로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수송아지의 피와 함께 가지고 휘장을 열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향연을 피워, 증거궤와 속죄소를 가리우게 하고,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속죄소 앞에 일곱 번을 뿌리고 나서, 다시 성막 뜰로 나와서,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하여 속제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안에 들어가서, 수송아지의 피를 뿌린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뿌려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과 모든 죄를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대제사장은 성막의 뜰로 나와서 아세살을 위하여 준비된 수염소에게 안수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하여 준비하고 있던 사람에게 염소를 맡기어 광야로 끌고 가서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염소를 광야에 놓아주고 돌아왔던 것이다. 이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의를 짊어지고 광야에 버려졌던 것이다.
이런 예식이 끝나고 나면, 대제사장은 다시 목욕을 하고, 대제사장의 예복으로 갈아입고, 수양 두 마리를 잡아 번제로 드리고 나면, 대 속죄제가 끝나게 된다.
여기서 아사셀의 염소는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세살의 염소처럼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에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밖 골고다 언덕에 오르셔서, 양발과 양 손이, 대못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다가 운명하셨다.
이때에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치어있던, 휘장 한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이때 상황을 누가복음 23장44-46절 말씀을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19, 20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고 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치어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늘 나라의 거룩한 하나님 보좌 앞에 인간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육체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못박혀 찢기시고, 죽기까지 내어 주심으로, 아담의 피를 받아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인생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예수님은 이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계시록 7장9-12절의 말씀에 보면, 하늘나라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고 한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그 흘리신 보혈의 은총과 영광에 부활로, 이 대열에 저나 여러분이 서게 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할렐루야!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자. 아멘! 아멘! 아멘!
그리고 계시록 21장3절에서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니, 보라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신,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광스러운 이곳에 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찬송하며 살게 될 것이다.
출 26:33/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여기서 "장"은 실내를 외부와 차단시키는 커어튼(curtain)이나 휘장(veil)을 가리킨다. 성소에는 이러한 커어튼이 두 개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것이며(출 26:31-35절)다른 하나는 성소의 문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36, 37절).
"그
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그리고 안식일마다 제사를 드릴때
들어갔지만(27:21;30:7;24:3,8)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갔다(레16:1-34;히9:7).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거룩함의 차이 때문이었다. 즉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봉사하는 예물과 기구가 놓여 있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언약궤(법궤,증거궤)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성소(코데쉬, קֹ֥דֶש)가 원어로 '거룩한
곳'이란 뜻인데 반해 지성소(코데쉬 하코다쉼, קֹ֥דֶש הַקֳּדָשִֽׁים)는 '거룩한 곳들 중의 거룩한 곳'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두장소는 단지 휘장 하나로만 가려져 있을 뿐인데, 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이 휘장은 둘로 찢겨졌다(마 27:51; 막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따라서 이제는 제사장과 일반인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한편
등대가 있는 성소로부터 차단된 지성소는 빛이 없어 어두웠음에 틀림없었고(왕상 8:12), 따라서 안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은 자연히
조심스럽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때때로 '하나님의 그늘'이 구원과 보호의 장소로 언급되고 있는데(시
17:8;91:1),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지성소가 어두운 것도 이러한 의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왕상 8:12)
• 휘장을 거는 도구들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 휘장을 거는 방법에 대한 설명으로 즉 기둥에 달린 금 갈고리에 휘장을 걸어서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을 뜻한다. 한편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은 성소 입구에서 9m, 뒷면(서쪽 편) 끝에서 4.6m 에 해당하는
지점에 걸려 있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솔로몬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의 길이의 비율이 대략 2:1인 점으로 볼 때(왕상
6:16-20), 광야에서의 성막도 같은 비율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조각목으로 만든 기둥 넷이 있었는데 바로 이 기둥들에 여러색깔로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은 휘장이 내리걸려 있었다. 이 휘장을
지성소 휘장이라 하는데 이 휘장 안쪽에는 법궤(증거궤,언약궤)가 안치되어 있었다. 또한 이 지성소 휘장은 항상 드리워져 있었으며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오직 일년에 한번 속죄일(7월
10일)에만 속죄의 피를 가지고서 들어갈 수 있었다.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레 23:27-28)
• 성소의 휘장
"성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 지성소의 휘장과 함께 성소에도 휘장이 쳐졌다. 그런데 지성소 휘장과 성소 휘장과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 지성소의 휘장에는 그룹이 수 놓아진 데 비해 성소의 휘장에는 그룹이 수놓아지지 않았다. (2) 지성소 휘장은
4개의 기둥에 드리워져 있으나 성소 휘장은 5개의 기둥에 드리워져 있다. (3) 지성소 휘장의 기둥 받침은 은으로 되어 있으나
성소 휘장의 기둥 받침은 놋으로 되어있다(아래 참조).
"그 문장을 위하여 기둥 다섯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찌며 또 그 기둥을 위하여 받침 다섯을 놋으로 부어 만들찌니라"(출 26:37)
이성하의 일화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속에 국가에서 금지하는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압록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응하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속의
교회로 서게 된다.
이성하는 한국인 최초로 세례받은 4인중의 한명이며, 로스를 도와 성서번역사업에 힘을 썼다.
그는 성경을 몰래
숨기고 귀국하여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서상륜의
중재로 압록강에서 행해진 언더우드의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성하
의주 출신.
1874년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와 함께 중국 동북성으로 가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J. 로스와 알게 되었고, 이어 로스의 처남인 J. 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奉) 선교사도 사귀게 되었다.
1876년
마침내 이들 4인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로스를 도와 최초의 성서 한글번역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후
4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을 몰래 숨기고 귀국,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 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7:32-44
억지로(32절)
마태복음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가게 하였더라.
마가복음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누가복음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구레네에서 예루살렘까지 대략 2,000Km.
자동차를 이용할 경우 22시간
하루동안 이동해야 하는 거리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태복음 27:32)
디아스포라는 원래 자기가 살던 땅에서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디아스포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이 유대인일 겁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인들은 그 출신에 따라서 아쉬케나짐(
אשכנזים ), 스파라딤(ספרדים ), 미즈라힘(מזרחים )으로 나뉩니다.
중앙 유럽과 동부 유럽의 디아스포라 출신들을 아쉬케나짐,
서부유럽 지역의 디아스포라 출신들을 스파라딤,
그리고 중동 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미즈라힘이라 부르는 거예요.
그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아쉬케나짐들로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의 60퍼센트 정도입니다.
이 서로 다른 유대인들은 단지 출신지만 다른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법도
조금씩 다릅니다.
많이 다르다고 한다면 많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고요.
그래서 이들은 한 회당에서 섞여서 예배드리지도 않습니다.
각각의 회당이
따로 있어요.
마치 요즈음 한 동네에 감리교회, 성결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가 각각 있듯이 유대인 동네마다 몇 개의 회당이
있습니다.
간혹 TV에서 아쉬케나짐 랍비와 스파라딤 랍비가 율법 해석을 놓고 벌이는 설전을 볼 수도 있는데, 이와 같은 율법 이해에 대한 견해 차이는 서로 오래 떨어져서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컸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시리아의 안디옥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가운데서도 유대교의 신학과 성서 해석의 방법을 만드는 중심지였습니다.
이 두 지역 외에도 셀 수없이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지역은 바대, 메데, 엘람, 메소보다미아, 갑바도기아, 본도,브루기아, 밤빌리아,
구레네, 리비아,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의 디아스포라 입니다(사도행전 2:9-11)
디아스포라에 거주하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유대아(Judea)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세 개의 명절(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니까요.
디아스포라에서
유대인들이 순례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으면 제사는 성전 한곳에서 드리지만,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갈 때면 각각의 디아스포라의
회당을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마치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아쉬케나짐과 스파라딤, 미즈라힘이 서로 다른 회당을 가듯이 말이지요.
신약성경에서도 사도행전
6장에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던 유대인들을 보면 9절,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각 회당에서
스데반의 반대자로 일어나 스데반을 몰아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디아스포라 중에서 구레네라는 곳은 지금의 리비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3-2세기 프톨레미 시대의 기록을 보면, 구레네
지역에는 약 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1세기 때에는 로마의 속주(屬州) 가운데서 북아프리카 지역의
중심지로 부상합니다.
신약성경의 시몬이 바로 구레네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ViaDolorosa)을 걸어가실 때에 로마 병사들이 잡아다가 억지로 십자가를 끌고 가게 한 사람말이지요(마 27:32 ; 막 15:21 ; 눅 23:26).
각각의 성경에서 단 한 절로만 구레네 사람 시몬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시몬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창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구레네 사람이라고 하지만, 구레네에서 유월절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었는지,
아니면 그가 태생만 구레네이고 예루살렘 주변이나 유대 땅 어디에선가 살았던 사람인지, 그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는지, 아니면 그 고난의 길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인지 성경에는 이렇다 할 단서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그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이 아니라 로마 병사들에 의해서 억지로 끌고 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통과하셨던 그 길은 십자가만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특별한 길이 아니라 시장통이었거든요.
예수님의 주변에서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소리치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좇아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던 사람,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 기적의
당사자, 그리고 제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갈 때에 그 누구도 채찍질하는 로마 병사들을 말리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쓰러지셨을 때에 어느 누구도 쓰러지신 예수님을 일으켜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섯 번째 장소 :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 곳을 기념하는 곳.
이곳을 기념하는 작은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쪽 벽에는 비틀거리시던 예수님께서 손을 짚으셨다고 전해져 내려오는곳이 있다.
순례객들은 예수님의 손과 포개어보기 위해서 이곳에 손을 대고 간다.
그 구경꾼 가운데 구레네 사람 시몬도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로마 병사는 누군지도모르는 시몬을 붙들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함께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메고 가기 싫었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시몬이 알지도 못하는
예수라는 사람의 십자가를 아무런 감동과 슬픔도 없이 마지못해 억지로 끌고 갔다고 흉보지는 마세요.
시몬 외에는 아무도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간 사람이 없었으니 말예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하던 무리들은 다들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지고 예수님의 고난을 재미삼아
구경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은 죄다 도망갔는데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끌고 갔다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요?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치도 못했던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시몬에게는 충격적인 만남이었고, ‘내가 십자가를 함께 져주고 있는이 ‘예수’라는 인물이 누군가?’ 하는 의문과 함께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소아시아 지방 여러 곳으로 흩어질 때에 구레네 사람 몇몇이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증거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전해지는데, 학자들 중에 일부는 그 구레네 사람들 중에 시몬이 있지 않았는가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행 11:20).
뿐만 아니라, 그의 두 아들 중 하나인 루포는 로마의 초대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중요한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구레네 사람 시몬의 부인이자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알렉산더의 뼈 상자 :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7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뼈 상자의 뚜껑에는 “구레네 사람 알렉산더”
그리고 상자의 옆면에는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드론 골짜기 실완 남쪽에서 히브리대학교 교수 수케닉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또 다른 아들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성경에 제대로 나와 있지 않지만, 1941년부터 시작된 히브리대학교 고고학 발굴단에 의해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사역했다는 간접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실로암 연못 남쪽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의 오래된 무덤들을
발굴하던 중,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라는 1세기의 뼈 상자(Ossuary)가 발견된 것이지요.
그 상자에는 주인인 알렉산더가 구레네 사람( קרנית )이라고 그 출신지까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이 뼈 상자의 주인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라고 확인해주었습니다.
유월절 즈음이 되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명절을 보내려고 세계 각지에서 날아옵니다.
엄청난 수의 기독교인들은 그
즈음에예루살렘에서 부활절을 보내려고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지요.
온 예루살렘의 숙박 시설들은 이미 예약이 끝났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성을 채울 겁니다.
그때에 적어도 기독교인들이라면 구레네 사람 시몬도 함께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억지로"라는 단어의 "부사"로 "이치나 조건에 맞지 아니하게 강제로"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by force"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엥가류오(anggarĕuō. ἀγγαρεύω)" 라고 합니다.
'엥가류오'의 뜻은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강제하다, 억지로 가게 하다"입니다.
"시몬(Simon)"이란 이름의 뜻은 "총"이라고 합니다.
'시몬'은 억수로 재수 없는 사람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맞아 그 먼 곳에서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구레네"는 현재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라고 합니다.
마치 촌놈의 행색이 로마 군병의 눈에 쉽게 들어왔겠지요.
그때 마침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던 예수님께서 지쳐 쓰러지므로 로마 군병은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짊어지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레네 출신이라고 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군중 가운데서 얼굴빛이 다른 '시몬' 로마 군병의 눈에 다가왔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시몬'에게는 얼마나 수치스럽고 재수없는 순간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주 안에서 택함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라고 사도 바울은 극찬하였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6:13).
'루포'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마가복음 15:21)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입니다.
마가의 증언은 구레네 사람 시몬은 루포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억지로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십자가로 인하여 구레네 시몬의 집안은 위대한 사도 바울로부터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억지로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근심과 걱정에 붙잡힐 것이 아니라 은총의 기회가 될 것으로 믿고 순종하여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신앙의 명품 가족들로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인 시몬과의 만남이 곧 있었던 것으로 보아(막 15:20, 21) '관정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사형 집행이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규정(레
24:14; 왕상 21:13)과 사람들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형장에 이르게 하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는 예루살렘 시민이 모두
목격할 수 있는 대로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께서 나아갔던 그 고난의 길을 가리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시 심한 매질로 인해 거의 기진했기 때문에(요 19:17)
혼자의 힘으로 형장에까지 완전히 나아갈 수 없었다(히 13:13).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아마 그는 리비아 서북편에 위치한 구레네의 '디아스포라'란 큰 유대인
집단에(Jos.,Antiq.,XIV.7,2;Cont.Apion., 제 2권)소속된 일원이었던것 같다(행 11:22; 13:1).
한편 구레네 거주자들은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시몬은 이때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경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사도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 볼 때에 (막 15:21; 롬 16:13), 시몬
역시 이 사건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가 유월절과 안식일을 눈 앞에 두고
피 흘리는 십자가를 지고자 했겠는가마는 이때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원망과 불평없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徵發)되는 비운을 맞았으나 그는 피 흘리며 죽어가신 예수의 최후를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수 있었으며,
그후로 전가족이 구원얻는 크나큰 측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억지로'(엥가류산)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마치 중앙정부로부터 특명을 받은 전령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강제로 말이나 사람을 차출해갔던 상황을 묘사한 것(5:14).
여기서는 '징발하며'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축복을 받은 격이 되었다.
여기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막 15:21-34의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하다.
즉 제 2세기 영지주의의 이단자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는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도중에 바뀌치기 당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34절의
'예수께'는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 이고 따라서 본문상 '시몬에게'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인다(31절 이후에는 원문상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35절의 '예수를 십자가에'도 원문에는 '그를 십자가에'라고 되어 있어 이 경우 역시
'시몬을 십자가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실리데스의 견해는 이 장면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며, 이일로 인해 그는
이단자로 정죄되었다.
사실 법적용에 있어서 철저했던 로마 당국자들과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심히 원했던 유대지도자들이 이러한
실수를 용인할리 만무하다.
그와 더불어 요한복음 19:17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가셨다'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1.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2. 강제하다. 3. 억지로 가게 하다
어원 / 외래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억지로 가게 하다(마 5:41, 막 15:21).
신약 성경 / 3회 사용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권력자도 아니고 뛰어난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닌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름이 성경 이곳 저곳에서 언급이 된다.
억지로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기뻐하시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각자에게 지워준 어려움과 문제들의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을 온전하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누가복음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27:32과 마가복음 15:21을 보면 시몬은 ‘억지로’란 단어를 삽입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다고 부연하여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몬은 기꺼이 자신이 원해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는 상반되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뜻
시몬이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은 구원을 얻게 하시는 이해 할 수 없는 주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었지만, 이 사건은 시몬은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인지 시몬은 그곳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다.
사도행전 13:1의 말씀에서 시몬을 니게르 시몬이라 말한다.
‘니게르’는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인을 말한다.
아마 시몬은 아프리카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 유대인이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듯 하다.
그런데 마침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처참한 몰골의 한 사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너무나 힘이 들어 주저 앉아 있다.
아무리 군사가 채찍을 내리쳐도 너무나 지치고 힘도 없어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군졸 중의 하나가 갑자기 자신을 지목하여 끌어 내어 대신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구경하다가 전적으로 타인에 의하여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시몬.
예수님이 불쌍하고 가엽게 보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변화 받아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형제요 친척이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나의 뜻대로 내가 원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때에 뜻밖으로 주님을 만나게 된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며 나를 택하신 주님의 뜻이다.
시몬은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 주님을 만났고 택함으로 구원을 입었다.
시몬은 방관하며 구경하는 한 사람으로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보고 있다가 억지로 택함을 입었다.
시몬의 선한 행위로 주님의 택함을 받아 십자가를 지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시몬과 같이 우리 역시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속량함을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의 어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 전전인 하나님의 은혜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마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삶의 전환점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삶은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던 구레네 사람 시몬.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불평하고 욕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대신 진 십자가에 달릴 예수님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간혹 쳐다 보았을 것이며 예수님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는 시몬을 쳐다 보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우리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누구인지를 알게 하신다.
(눅19:3) 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더라.
공통으로 사용된 단어는 “본다”가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보기를 원하는 자를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그에게는 축복이 임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 후의 그의 삶은 전적으로 바뀌었다.
삭개오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고자 해서 나무위에 올라가 있을때,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 아래에 오셔서 삭개오를 보자 삭개오에게는 축복이 임했으며 그와 그의 집에는 구원이 임했다.
주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쳐다 보시자 비로서 참된 주님을 만나게 되어 전적으로 변화를 받아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그전에는 무섭고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지만, 주님께서 쳐다 보시자 그는 변화를 받아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주님을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로 바뀐다.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분명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보셨을 것이다.
시몬은 그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형수들을 구경하던 방관자의 하나였지만, 주님께서는 시몬을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자로 택하셨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전적인 다른 삶을 살게 된 시몬.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바라 보신 예수님.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건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주님을 만난 시몬은 그 후 전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하며 초대교회의 귀한 초석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지금의 나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졌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것은 그의 삶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며 주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변화된 시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까지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온 하늘과 땅을 캄캄하게 뒤덮는 깊은 어둠의 두려운 신기한 현상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강도와 제자와 하나님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며, 군사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돌무덤에 안치된 후 삼일 후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는데 더욱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소식이 들리며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더욱 알고 싶어졌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제자들은 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시몬 역시 자신이 대신 십자가를 진 예수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제자들에게 찿아갔을 것입니다.
시몬은 주님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당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며 그 후에 초대교회의 귀한 일군이 될 수 있엇습니다.
그후 시몬은 안디옥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사도행전 11:19-21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의 복음을 전파하며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였으며 병든 자들을 고치며 천국을 선포하였다.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시몬은 안디옥 교회에서 선지자요 교사로서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섬겼다. 시몬은 사울과 바나바의 동역자였던 것이다. 사울은 이들과 친분을 가졌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네 어머니니라.
특히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루포의 어머니를 너의 어머니라 소개를 한다. 그만큼 시몬과 사도바울은 친구처럼 지냈으며 초대교회에서 주님께서 귀하게 쓰신 종이었다. 그의 아들들인 루포와 알렉산더 역시 교회의 중요한 일군이 되었다. 그래서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를 한다.
시몬은 성경에서 말씀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었지만,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에는 전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 초대교회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그 후 시몬은 천국에서 많은 영혼들에게 귀감이 되었을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임한다.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었는가?
전혀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심은 주님의 은혜이다.
내게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언젠가는 골고다에 이를 것이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복음 27:42b)
우화 중에 두려움 많은 겁 많은 생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겁 많은 생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생쥐는 저 멀리서 걸어가며 울고 있는 고양이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서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겁쟁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저히 살수가 없습니다.
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찾아가서 하나님 저를 제발 고양이로 만들어 주세요. 라고 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생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고양이가 되었는데, 뭐가 그리 겁이나?’
‘예, 하나님 개가 겁이 나서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개가 어느 한 마리의 쥐를 잡아먹는 모습을 본 이 고양이가 된 생쥐는 개가 겁이 나서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시 개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개가 되어서 사방을 멍멍 짖으며 재밌게 뛰어 다닐 줄 알았던 그 개가 여전히 자기 집에서 꼼짝을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묻습니다.
‘이제 개가 되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나서 재밌게 다니지 못하느냐’
‘하나님 호랑이가 겁이 나서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하기를 ‘얘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네 마음이 생쥐라면 아무 소용도 없겠구나, 뭐 벌벌 떨 바에야 다시 생쥐로 돌아 가는게 낫겠다.’
그래 다시 생쥐가 되었더랍니다.
사람도 마음에 변화가 없으면 외적 조건이 아무리 달라진다고 해도 매 한가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책임을 환경에 돌리려고 합니다.
물론 환경의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과 나,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내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환경이 나를 완전히 삼키는 것입니까.
무엇이 진정 사람의 모습입니까.
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환경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끝없는 욕망, 우리는 그 욕망이 채워지면 될 것이라고 전제 합니다.
그래서 집 없는 사람은 집이 있었으면 하고, 병든 사람은 건강했으면 하고, 직업 없는 사람은 직업만 있으면 아무 소원도 없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만, 그런 것이 다 채워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은 점점 더 커집니다.
채울 수 없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 욕망의 문제를 완전히 제어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물질로도 명예로도 그는 절대로 평안하거나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의 문제,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밖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큰 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기적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적마저도 내 수준에서, 내 판단에다 딱 맞추어서 그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것을 전문용어로 ‘Tunnel View’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요즘 터널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터널을 뚫는 기술이 굉장히 발달하여서 세계에서 1, 2위라고 합니다.
아무리 큰 산도 양쪽에서 뚫기 시작하면 그 속에서 기차게 딱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고속도로를 내거나 하면 터널을 굉장히 많이 뚫고 굉장히 긴 터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터널을 바라다보는 눈, 그런 뜻입니다.
tunnel view. 밖이 아무리 맑고 아름다워도 터널을 들여다보면 긴 굴 저 끝에 구멍이 조그마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내 앞에 있는 세계를 이렇게 ‘tunnel view’로, 꼭 굴을 들여다보듯이 보고 거기에다 맞추려고 합니다.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뭐든지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런 내 방식, 내 방법대로, 내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사람의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적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다 못 박아 놓고, 자기들이 못 박아놓고 하는 말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면 정말 믿을 것 같습니까?
오늘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는 ‘뛰어내려!’ 뛰어내리면 믿겠노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지요.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지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셨지요.
5천명을 먹이셨지요.
예수님의 생애는 온 통 이적과 기사로 충만합니다만 이것을 바라보았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힌 것이 뭡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표적, 지금 보인 것 말고, 다른 뭐 좀 화끈한 것, 천지개벽 같은 좀 기가 찬 그런 기적을 보이라고 재촉합니다.
이렇게 보면 기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결국 기적에 대한 ‘Reading Comprehension’ 기적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적을 읽는 능력 다르게 말하면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바라보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건강한 것만,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병이 드는 것도 기적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어느 날 병이 나, 병원에 가게 되어 병을 발견하고 수술하여 회복하게 되는 것, 병이 든 것 그것이 기적일 수 도 있습니다. 하루를 산 것도 기적이요. 여기와 예배 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기적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그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 역시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어리석은 이 사람들처럼 또 다른 기적을 보기 원하는 어리석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었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도다. 이것은 죽었다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한 알이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셨겠습니까? 내가 죽어야 열매를 맺느니라.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죽지 말고 살아라.’ 그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사는 것만이 기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바라보면 죽는 것이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집트의 3천년이나 된 미라에서 몇 알의 밀알이 나왔습니다.
바싹 마른 밀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기하여서 그것을 땅 속에 묻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밀알이 죽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을 때, 3천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않았지만, 그것이 땅에 들어가 죽어서 썩으니까, 싹도 나고 열매도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요사이 새 정부가 새로움을 원하고 새로운 변화를 요구합니다. 옛것의 죽음, 옛 가치관의 매장, 완전히 죽고 사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득바득 안 죽으려고 하니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변화란 바로 죽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도 공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새로운 변화는 바라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이나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이 ‘니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자체에 의미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었습니다.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가 모세 멘델스존인데 이 모세 멘델스존은 키가 작고 곱추였다고 합니다.
곱사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 많은 상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그 집의 프롬체라고 하는 딸을 보자마자 그만 순간적으로 사랑에 빠집니다.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방에 조용히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 아가씨는 본체도 하지 않습니다.
말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부부관계를 맺어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고 말고요. 당신은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요?’
‘저요, 저는 물론 믿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때 환상에서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예쁜 아가씨를 소개하면서, 이 여자와 네가 앞으로 살아야 되겠는데 그런데 세상에 태어날 때는 네가 한 평생 사랑해야 될 이 여자는 곱추로 태어날 것이다.
너는 곱추와 살아야 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올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곱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내가 곱추가 되겠습니다.
내가 대신 곱추가 되겠습니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가 곱추가 되라. 합디다.
그래서 내가 곱추가 된 것입니다.’
프롬체는 다 듣고 나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마음에 가지고 있나요?’ 하고 감동하였고, 마침내 둘은 결혼했다고 합니다.
내가 대신 곱추가 되겠습니다.
과연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감동을 시키고 이런 감동이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내려오라고 아우성 쳤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고, 죽지 않으면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지 아니하면 열매가 없고, 죽음이 없이는 새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만이, 살아나는 것만이, 많은 것만이, 높은 것만이, 믿음의 길이라 고집하지 맙시다. 나도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그 주님 앞에서 나도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모욕에도, 그 희롱과 고통에서도 묵묵히 사랑으로 대응하며 그들을 감동시키고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하며 주님을 다시 아프게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맙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하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면서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또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주시면 그러면 믿겠노라 하여,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고 아프게 하였던 우리의 잘못을 이제는 다시는 반복하지 맙시다.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기만 하여도 우리의 구원되심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주님의 택하심을 입었읍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마가복음 15:21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요한 19:1)
“로마의 태형은 무시무시하게 잔인한 형벌로 알려져 있죠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쇠 구슬이 박혀 있었습니다. 채찍으로 몸을 때리면 구슬들 때문에 깊은 상처나 멍이 생겼고, 채찍질을 계속하면 상처 난 곳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또 채찍에는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박혀 있었기 채찍질을 하면 살이 심하게 찢겨져 나갔습니다. 특히 등이 심하게 찢겨져 나가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척추의 일부가 드러나기까지 했습니다. 채찍질은 어깨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아래에 있는 등, 엉덩이 그리고 정강이까지 계속 됩니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 로마의 태형을 연구했던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형이 계속되면, 피부 밑에 있는 골격 근육까지 찢겨지게 되고 찢겨진 살은 피범벅이 된 채로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태형만 당하고서도 죽었습니다. 죽지는 않더라도 희생자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 상태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평들보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비틀거리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넘어지셨고 로마 군인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라고 명령했죠.】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의 "예수는 역사다" p 257~258
리 스트로벨의 "예수는 역사다"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전 날 맞은 태형으로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힘이 없으셨습니다. 그 때 로마병정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있었던 건장해 보이는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것입니다.
구레네에 살던 시몬은 가족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잠간 예루살렘에 올라온 방문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 군인들에 의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로 향했습니다.
『지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마27:32
그러나 이 일 후에.....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그리도인이 되었고 시몬의 아내는 사도 바울에게 ‘내 어머니’라고 칭해집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로마서 16:13
♣ 십자가를 지는 일, 비록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진 것이라 할지라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행운이며 기회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퀴어(Queer)는 '기묘한' '괴상한' 등의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단어로 쓰인다.
LGBT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인터섹스(intersex)
무성애자(asexual) 등을 두루 일컫는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자신과 같은 성별에 끌리는 성향을 가진 동성애자다.
바이섹슈얼은 두 개 이상의 젠더에 끌리는 양성애자를 지칭한다.
트랜스젠더는 신체적으로는 남성 또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본인은 타고난 자신의 성과 반대되는 성을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 인터섹스는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는 특질과 다르게 태어난 사람으로 '간성'이라고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7:1-31
피 값(6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마 26:26-29, 히 13:20-21)
베드로전서 1:18-19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보배로운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귀중한 피입니다.
세상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하고 존귀하고 값진 피입니다.
히브리서 12:24에서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는 왜 보배로운 피입니까?
속량(贖良) / 속할 속, 어질 량
-
1. (몸값을 받고) 종을 풀어 주어서 양민(良民)이 되게 함. 속신(贖身).
-
2. 속죄(贖罪).
-
3. 남의 근심과 재난(災難)을 대신(代身)하여 받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만인간의 죄를 사해 주는 공의로운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살아 있는 피요, 만인간의 죄를
사해 주는 공의로운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마 26:28, 막 14:24, 눅 22:20).
베드로전서 1:18-19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구속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속이란 값을 지불함을 의미합니다.
그 값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값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7).
원죄와 유전죄와 자범죄까지 완전히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이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고(마 26:2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1:7).
이 피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계
1:5).
죄에서 해방 받은
몸입니다.
사망에서 영원하고 확실한 참된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죄의 원수가 잡아가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주께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과거에 죄 지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신앙고백하는
순간 다 씻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희고 깨끗하게 해주십니다(히 9:14, 계 7:14).
정결하게 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합니다(히
10:19-20).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공의로운 피를 믿고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는 만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기쁨, 어느
정도의 행복입니까?
기억치 않는 행복입니다(예레미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잘못 쓴 글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영원히 지웠습니다.
멀리 옮기셨습니다(시편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주의 등 뒤로 던졌습니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도말해 버렸습니다(이사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사야 43:2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내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도말이란 ‘완전히 빼버리다, 완전히 지워버리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지워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피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신다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 앞에 설 수
있습니까?
미가 7:18-19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0:20에서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을 받았으니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 32:1에 ‘허물을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에 적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영원한 넉넉함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만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영원한 피를 날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6:33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영원한 승리의 구원입니다.
교회의 근원입니다(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날마다 기쁨의 생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우리의 삶에
성령께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 몸에 들어 있는 피의 양은 체중의 약 8% 정도다.
사람마다 체중에 차이가 있으니 피의 양도 달라지며, 일반적으로는 보통 4~6리터의 피를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몸무게가 70kg의 경우 혈액의 양은 5.2리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운 교회
'하나님'이라 표기된 각주 1)에는 "어떤 사본에, 주께서"라고 되어 있지요.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는 뜻이지요.
교회 어느 분이 물걸레를 헌신하셨지요.
그걸 사려고 해도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의 매장지를 위해 값을 주고 샀지요.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도 "피 흘림이 없는 즉 사함이 없느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향해, 에베소 교회를 주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교회를 세우셨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두 가지 차원이 있겠지요.
그 하나는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사람들의 모임이지요.
그렇듯이 교회의 주권은 그리스도의 피 값에 있는 것이지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교회는 인간을 위한 사교 모임이거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한 모임이 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피 값이 드러나는, 주님을 위한 교회여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교회는 피 흘림, 곧 헌신과 섬김을 통해 세워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림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다면, 교회 공동체 사람들도 자기 피를 흘리기까지 주님의 몸을 세워 가야 함을 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지요.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스스로의 피 흘림, 곧 헌신과 섬김을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아브라함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지요.
소유의 넉넉함으로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지요.
그래서 둘이 갈라졌고 롯이 아브라함 곁을 떠나 소돔으로 향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롯이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가지요.
그때 아브라함은 롯을 외면하지 않고 집에서 기른 318명을 직접 데리고 가서 구출해 내지요.
바로 자기 피 흘림을 각오하면서 말이지요.
그런 삼촌의 모습을 본 롯이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실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기도 하지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우리를 당신의 피로 사셨으니 말이지요.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으니 말이지요.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신 이유가 우리만 구원받고 천국 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지요.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교회를 세우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역량 속에서 우리 자신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에베소 장로들, 곧 주님의 동역자들이요 대표자들인 장로들에게 바울이 당부하고 있는 바지요.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그와 같은 피 흘림의 각오로 헌신한 것을 3년이나 해 왔다고 31절에서 밝혀 주고 있고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탐한 일도 없이 제 수고로 그 일을 감당했다고 33절에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도 그런 교회, 그런 주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십시다.
세상 황제나 권력이나 금권이나 명예의 법칙을 따르는 교회가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십시다.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의 법칙, 예수 그리스도의 법칙으로 교회를 세워 가도록 하십시다.
이것은 피 값이라
유다가 '예수의 피(4절)를 팔므로써 벌어들인 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 이갈은 단정적
발언을 한 것은 적어도 유다의 행위가 사악한 자신들 의견시에서 볼 때도 옳지 못했다는 점을 간접 시인한 것이다.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율법에 의하면서(신 23:18) 이런 피값으로 얻은 돈은 창기나 개같은 자의 돈과
같이 취급되어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신 이런 류의 돈들은 자선과 구제 등의 대사회적인 용도로 사용되거나,
현금한 당사자에게 되돌려준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 금고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성전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르바나스'는 거룩한 물건과 고르반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서(15:5; Jos. Wars II,IX.4),
이곳의 재물들은 주로 각종 제사와 성전 관리를 해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전에 가룟 유다에게 주어진 은 삼십은 이곳에서 지출된
것이라는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지도자들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했음에도 의식상으로는 깨끗하려는
위선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12:9-14; 15:1-9; 23:23).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구속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속이란 값을 지불함을 의미합니다.
그 값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값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로마서 6:23)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수명이 짧아졌나요?
아니면 길어졌나요?
1940년대, 50년대, 60년대, 70년대까지 만해도 60세 이상의 어르신네들을 뵈면 '허리는
꼬부라지고, 완전히 백발인데 다가 힘없는 노인들'이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60대/ 70대 되신 분들은 청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정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은 60부터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명이 연장된 것은 영양학과 의학/ 유전공학의 발달로 육체의 건강과 생명의 보호에 도움을 주어서 짧아진 수명에 어느 정도 연장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B.C. 2348)이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훨씬 더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고, 에녹의 아들 무드셀라(Methuselah)는 969세까지 건강하게 살면서 인생을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도
600세 되는 해에 홍수가 발생(창 7:11-12)하였는데, 노아의 홍수란 죄 많은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 속에 태어나고,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무서운 범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에 흠집을 내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과 수명의 단축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00살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죽어가게 된 것입니다.
질병은 우리 몸의 균형을 깨트립니다.
죄와 질병은 인생을 늙게 만들고, 사람을 괴롭히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 붙입니다.
질병은
육체의 병이고,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래서, 질병은 육체를 괴롭히고, 죄는 영혼을 괴롭혀서 결국은 우리의 귀중한 삶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짧은 수명을 재촉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의 영·육을 파괴하는 죄의 원인은 아담의 범죄에 있다고
하며, 아담의 죄가 대대손손 모든 인생에게 파급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하게 되었나요?
아담을 범죄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은
뱀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고, 하와는 아담을 유혹하여 범죄의 통로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뱀은 어쩐지 기분 나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뱀이란 악어나 호랑이처럼 크지도 않고, 흉칙한 이빨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작은 동물을 무서워하고 싫어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동물이지만 뱀은 인간에게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뱀에게 유혹을 받고, 죄의 사슬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모든 인간은 누구나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뱀에게 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뱀에게
물린 인간은 모두가 우리 몸의 피 속에 독액이 스며 들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뱀에게 물려있어서 도덕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절음발이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3:9-12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간 모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이토록 뱀에 물려서 독이 온 몸에 퍼져서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피 속에 스며든 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왜 입니까?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독이 점점 온 몸에 퍼져서 죽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치료를 받을 수 있나요?
어떻게 독을 제거할 수 있나요?
그 방법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잘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4-15, 16절에서 십자가를 쳐다보면, 십자가를 믿으면 치료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왜 예수는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나요?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희생당해야 했나를 가장 종합적으로/ 신학적으로 표현한 곳이 오늘 본문의 말씀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함이라"
영어로 "A
ransom for many"(배상금/몸값)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대속물"/"배상금"/"몸 값"이란 뜻은 무엇을 위한
대속물이고, 누구를 위한 배상금인가? 예수의 몸값은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지불하는가?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어떻게 "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될 수 있는가?
"예수의 수난"(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예수에 대한 영화가
수없이 많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Mel Gibson감독이 만든 "예수의 수난"이란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이합니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기록한 것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고문/ 고통/ 수난을 잔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영화 전체의 길이가 126분인데, 그 중 100분 이상이 예수의 '고문'으로 채워졌습니다.
이 영화의 특이점 중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는 와중에 예수께서 흘리는 피입니다.
쇠갈퀴 같은 회초리로 예수의 몸을 내리칠 때마다
살이 찢겨 나가며, 예수의 몸에서 흐르는 피, 온 몸 구석구석의 상처에서 흐른 피, 고문 장소가 예수의 피로 강물이 된 듯...
그뿐인가요?
가시면류관을 무지막지하게 씌울 때 흐른 피, 십자가에 양손과 발을 못질할 때 홍수처럼 흐른 피...
인간의 몸에서 피의 기능은 매우 중요합니다.
피는 우리 몸의 모세혈관에서 흡수한 산소를 온몸의 조직세포에 운반하고, 음식을
먹어서 흡수된 영양분을 온 몸에 운반하며, 온 몸의 조직세포에서 생긴 노폐물을 배설기관까지 운반합니다.
뿐만 아니라, 피는 우리
체온을 조절하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각종의 이 물질이나 병균을 물리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토록 중요한 피를 예수는 그
모두를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배상금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뱀의 독이 온 몸에 스며들어서 우리 몸의 피 속에는 독소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영혼 속에는 죄의 독소가 스며들어 있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점점 파멸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으며, 우리 속의 뱀의 독을 스스로 제거할 수도 없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희생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기까지
희생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유는 남에게 빚진 것을 갚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친구가 감옥에 찾아와서 그에게 그 엄청난 돈을 주면서 빚진 것을 갚으라고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가 공짜로 준 돈으로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되어 감옥에서 풀려 나오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의 빚을 갚아 주었나요?
그의 친구입니다.
그 결과 빚진 것을 갚게 되어, 무거운 죄책에서 벗어나 감옥에서 나오게 되고,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 죄수가
친구의 돈을 감사히 받는 순간 그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민수기 21장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게 물려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가 동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 달은 뱀을
쳐다보면, 뱀에게 물린 독이 없어지고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요한복음 3:14에서 예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예수의 흘린 피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나?
그 피 속에는 모든
죄인들을 위한 해독제/ 새 언약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새 언약/ 해독제는 여러분과 저를 위한 것이며,
그것은 나를 위한 영원한 용서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은 감옥에 갇혀있는 나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며, 뱀의 독이 내 몸의 피
속에 숨어있어서 내 영혼을 파멸시킴에서 해독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에게 주신 장수할 수 있는 영생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7:1-31
피 값(6절)
셀마 라겔뢰프 (문학부문 여성 최초 수상자)
셀마 오틸리아 로비사 라겔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rlöf, 쎌마 라게를뢰프, 1858. 11. 20~1940. 3. 16)는 스웨덴의 작가이자 교사이다.
1909년 노벨 문학상 부문에서 여성 최초 수상자로 등극한 여류 문학작가로, 1914년 스웨덴 한림원 회원으로도 등극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또 그와 연관된 전설이나 이야기를 갖는 경우도 있다.
검은등뻐꾸기는 뻐꾸기와 함께 두견이과에 속한다.
뻐꾸기처럼 골 깊은 산골짜기 하나를 울리고도 남을만한 소리로, 골짜기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심어놓기나 한듯이 구석구석 누비면서 네 음절로 우는 특징이 있다.
사람들은 이 소리와 음절을 따라 흉내 내는 비슷한 음절의 말들을 만들어냈는데, 여기 지면에 쓰기는 민망스러운 내용이기에 그 중 한 가지만 소개한다면 경상도 음으로 ‘내캉 살자 내캉 살자’고 운다는 것이다.
호반새는 몸 전체가 붉은 색을 가지고 있어서 ‘불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파랑새는 한 동화의 제목 때문에 행복의 상징이 되었고, 도요새(사실 도요새는 종류가 아주 많다)는 어떤 노랫말 때문에 가장 높이 나는 새로 알려져 그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는다.
새들의 이야기 중에는 해학적인 야화들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래 잘하는 꾀꼬리와 까마귀 이야기이다.
두 새가 노래시합을 했는데, 심판관인 두루미에게 개구리를 잡아다 바친 까마귀가 이겼다는 야화는 맛깔스럽고 제법 풍자적이다.
제비는 또 어떠한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 때문에 대접받고 살아가는 새가 제비 아닐까?
그리고 시어머니의 구박과 시집살이 때문에 피를 토하며 굶어 죽은 며느리가 소쩍새가 되었다는 유명한 전설도 있다.
그 소쩍새가 세 음절로 ‘솥 작다, 솥 작다’하고 울면 풍년이 오고, 두 음절로 ‘솥탕, 솥탕’하고 울면 흉년이 온다는 이야기는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 할머니가 손주들의 귀에 들려주는 영양가 높은 이야기 간식이었다.
진홍가슴(진홍가슴새)의 이야기와 솔잣새의 전설을 알게 되면서, 이 두 새를 카메라에 담아보려고 애를 썼던 적이 있다.
진홍가슴과 솔잣새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관된 이야기와 전설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드물게 찾아오는 겨울철새인 솔잣새.
솔잣새는 우리나라에 드물게 찾아오는 겨울철새이다. 다행히도 솔잣새는 여기 지면에 내놓아도 될 만큼 좋은 사진을 담았는데, 진홍가슴의 사진은 지면에 내놓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평소 친분이 있는 최동주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진홍가슴새’ 이야기는 스웨덴의 여류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rlöf, 1858~1940)의 동화이다.
라게를뢰프는 19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게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깊은 생각을 하신 후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셨다.
그리고는 ‘진홍가슴새’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다.
진홍가슴새는 자신에게 온통 잿빛 털 뿐인데 어찌 이름을 진홍가슴새라고 하셨는지 여쭈어 보았다.
하나님은 진홍가슴새에게 “네가 참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에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진홍가슴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진홍가슴새는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하나씩 뽑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가시를 뽑을 때마다 솟아나온 피로 인하여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결국 그 사람은 숨을 거두었고 이 새의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새가 낳은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겼다는 것이다.
솔잣새의 전설은 조금 더 간략하다.
솔잣새의 부리를 보면 아랫부리와 윗부리가 어긋나게 꼬인 것처럼 구부러져 있다.
휘어지고 구부러진 부리는 솔방울이나 잣 열매를 좋아하는 솔잣새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잣 열매 사이를 부리로 열어 씨앗을 빼 먹기에는 최적화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생김새로 인하여 전설이 생겨났는데, 바로 휘어진 부리와 수컷의 붉은 색 깃에 대한 이야기이다.
솔잣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손에 박힌 대못을 부리로 뽑으려다가 그만 부리가 휘어졌으며, 수컷의 붉은색 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묻어서 그렇게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잣새의 부리가 진화론자의 눈에는 진화의 흔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솔잣새를 ‘다윈의 핀치’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이처럼 새들의 외모나 우는 소리로 인하여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 그냥 재미있는 전설로 남기도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정서에 감동을 주며 삶의 비타민 같은 역할을 한다.
독수리의 전설
가끔은 새들에 관한 전설을 사실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독수리의 결단과 인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지는 이렇다. ‘독수리는 70년을 살 수 있는데, 40살이 되면 부리와 발톱이 휘어져 버리고 깃털은 무거워 날 수도 없게 된다.
독수리는 이때에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한다.
휘어진 부리와 발톱을 모두 뽑고, 150일을 기다려 새롭게 돋아난 부리와 발톱으로 제2의 삶을 산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단지 교훈으로만 받아들이면 큰 감동이 되지만, 생태적 사실이 아닌 부분까지 실제 그런 것으로 오해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필자가 알기로도 독수리가 다른 새들에 비해 오랜 시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주일 이상 굶는 것은 아무리 독수리라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새들에게 체온유지는 무엇보다 중요한데, 몸의 털을 다 뽑아버리고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전설은 그냥 전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진홍 가슴새
최초로
여성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 가슴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 동식물을 지으실 때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시고 ‘진홍 가슴새’라고 이름붙여 주셨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왜 ‘진홍 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진홍 가슴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곳에 어떤 사람이 매달렸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던 진홍 가슴새는 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져서 그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는데, 그
가시마다 검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새는 조그만 부리로 그 가엾은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나와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자신의 둥지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가 낳는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채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진홍 가슴새 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온통 덧입혀져서 죄 사함을 받았으며, 그분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보혈의 능력(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의하여 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어떤 역활을 성취하는가를 말씀을 통해 상고하고자 합니다.
1. 구속 곧 죄사함을 받습니다(에베소서 1:7)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인류을 위해 대속물로 주셨음(마20:28, 딤전1:15, 요3:17)
2. 우리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심(엡 2:16, 빌 2:8, 골 2:14)
3.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얻음(히 13:12, 벧전 1:19-20, 엡 1:7)
4. 그 피로 화목 곧 평화를 누리게 됨(골 1:20)
원수되었던 우리를 자기 육체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골 1:21-22, 엡 2:14-15, 롬 5:10)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 곧 화평을 누리게 하심((엡 1:10, 2:13-14), 골 1:20, 롬 5:11)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심(갈 3:20, 딤전 2:5, (히 8:6, 9:15)
5. 그피로 영생과 생명을 얻게 하심(요6:54)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생과 생명을 얻지 못함((요6:47-48, 63), 요11:25-26, 14:6)
6. 예수의 피가 생명의 근원이 되심(마 26:27-28, 요 6:53-54, 56-57, 레 17:11)
예수는 모든 믿는 자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심(롬 6:23, 히 5:8-9, 10:10, 14)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죄로 죽었던 우리를 소생시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임을 명심하고 사나 죽으나 항상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피
한
복음 전도자가 큰 도시의 슬럼가 모퉁이에 서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갑자기 야유하는 군중들 틈에서 날아온 일격을 맞고 쓰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돌연한 공포가 군중들을 뒤덮었으며. 그 중에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은
교수형을 받게 될 것이다.”
경찰이 오기 전에 군중들은 현장에서 허둥지둥 사라졌고, 전도자를 때렸던 사람은 공동주택의 음침한 자기
방에 숨어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범죄자는 날카로워진 신경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은신처에서 한 소년을 보내 담배를 사오게
했습니다.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은 교수형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그 다음날 하루 종일 그의 귓속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는
읽을 거리를 찾기 위해 초라한 방을 둘러보다가 짓구겨진 종이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담배 가게 주인이 담배를 싸서 보냈던
종이였는데 한 장의 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의 맨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 죽음의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사함이 없느니라.”
그 날 하루가 몹시 길게 느껴지자
그는 또 소년을 보내 담배를 사오게 했는데 담배가 도착하여 그것을 움켜쥐고 보았더니 담배는 또 한 장의 성경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의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올 때까지 미친 사람처럼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게 정말일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 종이 조각들은 구원의 역사를 일으켰으며,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말씀을 통하여 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7)
그리스도의 피(Sanquis Christi. Blood of Christ)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피를 말하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다.
보혈(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는 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성경에서의 보혈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한다. (히브리서 9장 11-22절)
-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 (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14절)
-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 (15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레위기 17:11, 골로새서 1:14)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며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서 너희 혼들을 속죄케 하였나니 이는 혼을 속죄케 하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라."
골로새서 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모든 외과 의사들은 피와 생명은 동일하다고 증언합니다.
피와 생명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를 잃으면 둘 다 잃게 됩니다.
성경은 살아 있습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성경을 칼로 베면 피가 툭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 어디를 베도 피가 나오듯 성경의 어느 부분을 베어도 피가 나옵니다.
창세기 3:21에서 피가 흘러서 계시록에서는 그 피가 말고삐까지 차 오릅니다.
말을 타신 주님의 옷이 피로 적셔 질 정도로 피가 흥건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400회 이상 피란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도록 하십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 가운데 가장 큰 부류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가 나오면 자꾸 회피합니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피"란 단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단어보다 3배나 많이 사용하였으며, 죽음이란 단어보다 5배나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I. 귀한 피(보혈) (베드로전서 1:18-19)
이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너희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이어받은 너희의 허망한 행실에서 은이나 금같은 썩어질 것들로 구속된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니라.
구원은 살 수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지불할 돈도 없습니다.
이 피는 너무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가격을 책정할 수 없습니다.
'귀한 피'라고 하는 것은 값이 많이 나간다는 뜻이지 값이 안 나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값없는 선물'을 자꾸 외치니까 사람들이 그저 얻는 줄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수술을 할 때 피가 모자라면 급히 수혈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피란 것이 또 사람마다 다른데다가 어떤 피는 혈소판이 부족하고, 어떤 피는 어떤 병균으로 감염되어 있습니다.
수혈 받았다가 에이즈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수혈을 잘못 받아서 이상한 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피입니다.
이 피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이 피만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혼을 완전히 정상으로 치유해 줍니다.
한 줌의 피에도 5백만개의 적혈구가 있고, 30만개의 혈소판이 있으며 7천개의 백혈구가 있습니다.
피 속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바다처럼 넘쳐 흐릅니다.
II. 깨끗하게 하는 피 (히브리서 9: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기시고
피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몸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피는 영양을 공급해 주며, 산소를 공급해 주고, 노폐물들을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피는 심장에서 생성되어 몸의 구석 구석 마디마디를 돕니다.
이 피가 여행하는 거리는 무려 60,000마일이나 됩니다.
머리카락의 1/10보다 작은 모세 혈관을 통과하며 이산화탄소와 음식물의 노폐물 등을 걸러 냅니다.
몸에 치명적인 독소는 체외로 내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23초만에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심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돕니다.
보통 적혈구는 이런 운동을 4개월 동안 50만 번 수행합니다.
우리는 죄의 독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죄는 단절을 가져 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도록 막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59:2).
"너희의 죄악이 이러한 일들을 쫓아버렸고, 너희의 죄들이 너희로부터 좋은 것들을 거두어 갔느니라."(렘 5:25).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이런 모든 것들을 정결케 해 줍니다.
히브리서 9:14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
오직 피만이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먼지로 묻은 때를 씻는데는 물을 씁니다.
기름 때는 기름을 써야 합니다.
사람의 죄의 때는 피를 써야 합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피입니다.
피도 짐승이나 사람의 피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7).
피는 붉은 색입니다.
죄도 붉은 색입니다.
성경은 죄의 색깔을 말씀해 줍니다.
"이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주가 말하노니,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여러분은 이 피로 깨끗함을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평생을 수도하고, 고행하고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고, 냉수마찰을 아무래 해대도 깨끗하게 할 수 없던 여러분과 저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씻겼습니다.
어제 지은 죄가 있습니까?
그동안 은밀히 숨겨 놓은 죄가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께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죄를 짓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으로써 죄를 짓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인줄 알면서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 했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탐심이 죄인줄 알고, 정욕이 죄인줄 알지만 시시때때로 마음 가운데 깊은 죄를 짓습니다.
이 시간 모두 저희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화목케 하는 피 (로마서 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모두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이 본래는 다 선하다느니, 모두가 불성이 있다느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느니...별의별 좋은 말을 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2-3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
이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선한 존재라고 하니,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데, 인간은 죄로 더러워 졌고 악합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둘을 화해하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화해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 피를 믿는 자들과 화해하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자들에게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피를 믿는 자들과 하나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제 여러분과저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IV. 풍성한 피 (요한일서 2:2)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
주님의 피는 일시적이거나, 극히 제한적이 아닙니다.
장로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정된 사람들, 택함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해 흘리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 효력도 영원하여 우리의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지을 모든 죄까지 근본적으로 해결 해 주신 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피로 인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피의 은혜를 모를 때,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다거나, 믿음만으로는 안된다거나, 은총을 입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주님과 화평하게 사는 것, 우리가 두려움없이 주를 섬길 수 있는 것은 이 피가 영원토록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V. 능력있는 피(요한계시록 12:10-11)
그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거한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피는 능력의 피요, 승리의 피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공격용 무기라면 피는 가장 강력한 방어용 무기입니다.
피를 믿는 믿음이야 말로 성경에서 말한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피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려면 반드시 피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피가 없는 제사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듯이, 피를 믿지 않는 믿음은 종교요,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어린 양의 피가 없는 믿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닌 가증스런 마귀의 제사에 불과합니다.
모든 이교도들의 제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피가 없습니다.
그들에겐 오직 땀만 있습니다.
피가 있는 종교는 모두 더러운 컬트 집단들입니다.
그들은 인신 공양을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외에 어떤 피도 주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VI. 값주고 사신 피(사도행전 20:28)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주님의 피는 교회를 사는데 지불된 값진 피입니다.
교회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거듭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피를 통해 사셨습니다.
노예 시장이 열렸습니다.
아주 총명하고 충성스럽게 생긴 한 노예를 발견한 사람이 그 노예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이 노예는 얼마요?" 물었더니 "팔지 않습니다."
"값을 듬뿍 쳐 드릴테니 파시오."
"그 노예는 비쌉니다.
돈으로 받지 않고 대신 당신 몸에 있는 피를 몽땅 준다면 팔겠소!" 아마 남의 종이나 노예를 돈이 아닌 피를 주고 살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해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세상 영광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돈을 요구하지 않고 독생자의 피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대로 자신의 피를 몽땅 내어 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VII. 미리 예정하신 피(계 13:8, 벧전 1:18-20)
베드로전서 1:18-20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사고도 아니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이미 창세 전에 주님께서 예정해 두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8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모든 자는 그에게 경배할 것이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피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피를 거부하는 성경들이 속출하고 그 피를 인간의 피인 것처럼 교묘히 위장하는 가르침이 많은 이 마지막 세대에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피를 믿는 바른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피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승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주님께 짓밟혀 피를 튀기며 죽게 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5-75
멀찍이 예수를 좇아(58절)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But Peter followed him at a distance, right up to the
courtyard of the high priest. He entered and sat down with the guards
to see the outcome.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초점을 잘 맞춰야 합니다.
볼록렌즈와 검은 먹지를 이용하여 태양의 초점을 맞추며 검은 먹지에서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그러나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검은 먹지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태양을 하나님, 볼록렌즈를 신앙, 검은 먹지를 세상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신앙이 초점이 맞을 때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 세례 요한, 예레미야' 라고 한다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다른 제자들이 아무 말도 못할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런 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며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후 3년이 지났을 무렵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 가셨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서 있었습니다.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너무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열두 명만 있다면
지금부터 대략 150년 전에 영국
런던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1834-1892) 목사님이 목회하고 있었는데 당시 1866년에 소속 성도가 4천 3백 66명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열 두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 천3백 66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부가 미지근한 성도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한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은 은 30에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혔을 때 멀찍이서 좇아 갔습니다.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는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신앙의 촛점을 맞추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서 좇아갔다고 합니다.
멀찍이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아주 가깝게 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가까운 것도 문제가 됩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신앙의 적당한 거리를 "촛점(focus)"이라고 하겠습니다.
렌즈의 촛점을 맞추는 것은 쉽지만 신앙의 촛점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는 촛점을 잘 맞춘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이 끊임없이 다가오면 연약한 인간의 마음으로 촛점을 맞추기가 참 어렵습니다.
멀찍이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공생애를 마치고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남은 일을 성취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취되는 과정이 참 힘들게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손에 넘겨지는 배신을 당해야 합니다.
신성모독(blasphemy)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무력으로 체포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 할 때는 침묵으로 수모를 당해야 할 때는 온갖 수치와 수모를 당합니다.
하늘의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땅의 세력에 짓밟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의 촛점입니다.
아무나 이런 신앙의 촛점을 맞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은 매일 촛점을 맞추지 않으면 당장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신앙의 촛점을 맞추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말씀과 기도의 통로를 믿음으로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여하튼 그렇게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잡혀갔다.
그리고 이제 당시 대제사장(the high priest)이던 가야바에게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심판하기 위한 자리였다.
사람이
사람을 심문하고 심판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이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다 같은 인간이며, 다같이 실수하고 연약한 존재인데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정죄하겠는가?
예수님도 당시 사형이라 일컬어지는 죄인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 대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물며, 연약하고 허점투성이인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심판하려고 모였다.
물론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은 올바른 신앙을 견지하고 사회와 종교의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일념이었을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말이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자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고, 또 그것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는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교회 일에서도 그렇고 세상일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이면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욕망, 혹은 숨기고 싶은 치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우리자신이 먼저 떳떳한 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잡혀갔고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을 베드로에게로 돌려본다.
베드로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특별한 곳에 가려할 때 동행시켰던 사람이고,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인 제자이다.
게다가 베드로는 바로 직전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예고에서,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제자였다(마 26:33).
그만큼 호언장담했던 제자였다.
최소한 그 당시 그의 마음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말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 왔다.
예수님이 잡히시는 장면에서 그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칼을 빼내어 말고의 귀를 잘랐다.
나름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행동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한번 제지를 당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과정(자신이 잡히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예수님은 잡히셨다.
이제 그는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까 궁금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을 잡은 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결말지을지 궁금했고 확인하고 싶었다(26:58).
대제사장의 뜰까지 그는 예수님을 따랐다.
멀찍이 떨어져서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쫓아가는 베드로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잡혀가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을 수도 있고, 자신의 뜻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모습이 숭고해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멀찍이’의 신앙은 그리 권장할만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이제 내일 살펴보겠지만, 그 ‘멀찍이’ 떨어진 것이 시험을 당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있었기에 한 여종으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라는 질문을 받게 되고, 당황한 나머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멀찍이 신앙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다.
예배를 드릴 때도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멀찍이 어정쩡한 자세로 지켜보기만
한다.
나도 그 무리 가운데 낄까 말까를 생각하면서 떨어져 있다.
비단 예배뿐이겠는가?
교회 내의 각종 행사와 관련된 것도
그렇고, 신앙생활 하는 전반적인 것이 모두 그렇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멀찍이(at a distance) 떨어져있다.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멀찍이’라는 거리는 도망갈 수도 있고, 참여할 수도 있는 거리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도저도 아닌 박쥐같은 삶이다.
그런데 이런 삶은 잘 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 할 때는 더욱 커다란 낭패를 당한다.
바로 베드로가 여종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 신앙의 삶을 되짚어 봤으면 좋겠다.
나는 과연 멀찍이 떨어져있는 신앙은 아닌가?
그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기회를 봐서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기회는 멀찍이 떨어진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직접 참여한 자에게 온다는 사실이다.
멀찍이 떨어진 자가 기회인 것을 알고 뛰어가는 순간, 이미 그 가운데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일을 이루는 사람은 직접 가담한 사람이다.
참여한 사람이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칠(及) 수 없다’ 내가 그 일 가운데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법이다.
공무원 사회를 비판하는 말 중에 복지부동이라는 말이 있다.
적당히 그대만 견디면 된다는 말이리라.
그러나 적당히 해서는 되는 것도 없다.
오히려 나중에 실망과 후회만 남을 따름이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도 ‘멀찍이’의 신앙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야겠다.
예수님은 먼저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공회를 대표하는 자들이 이미 그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거짓 증인을 동원하고 불법으로 재판을 받는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61절, 거짓 증인은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잘못된 진술을 합니다.
이 말은 성전을 모독했다는 뜻입니다.
62절, 대제사장이 이에 대해 예수님께 묻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의 잠잠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예수님의 주관적 침묵입니다.
63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며 이어지는 질문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다고 답하십니다.
최후엔 너희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구름타고 오시는 인자의 권능을 말씀합니다.(다니엘 7:13-14)
65절,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다는 말에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증거보다 합당한 것이 없으니, 증인도 필요 없게됩니다.
66절, 그리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며 고독과 고통, 조롱을 주게됩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권능을 가지셨는데도 이런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으로 인해 잘못된 오해를 받을 때 남탓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비록 멀찌기 예수님을 좇았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좋겠습니다.
멀찌기로는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많은 거짓 증인이 나타나지만, 이 때 외롭고 힘들어도 예수님을 바짝 좇게되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 항상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까?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우리 인생의 참된 목적을 놓치기 쉽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께 집중하려고
분투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사는 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각자의 방식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매주 성경을 한 구절씩
암기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아침마다 개인 성경 공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복음을 매주 최소 한 사람에게 전하는 걸
목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해줍니다.
또한, 이러한 활동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활동들은 신자가 마땅히 집중해야 할 영역에 집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내어드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 대한 내어드림입니다.
자신의 온 인생을, 필요와 걱정과 고통과 기쁨과 찬송을
바치는 것입니다.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걸 드리는 일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누가복음 9:23-2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로마서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삶을 내어드리는 건 신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여러분의 유익을 위하신다는 걸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어드림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대신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며, 이는
순종으로 입증됩니다.
캘리포니아 레이크 포레스트에 있는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어드림은 삶의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 유일한 방식이다.
다른 방식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른 모든 접근은 좌절과 실망, 자기 파괴로 이어질
뿐이다.”
신자로서 자신의 삶을 구주께 내어드리는 것보다 신앙생활에 집중하기에 더 좋은 방식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의 특징중 하나는 상대적 가치관이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급변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변화하되
근본적으로 변하며 그 기초까지 흔들리는 세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변적이며 다원적인 세대가 되고 보니 그 어떤 것에도 절대란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통하고 있습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다는 말까지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으며 상대적인 가치 이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은 계속 절대자를 찾으려 하고 영원히 불변하는 그 어떤 가치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러한 사랑을 계속 원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나 흔들리는 것에 근거하고서는 어떠한 안정과 평안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모순된 현실 속에서 현대인은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진퇴양난의 입장과 희미한 일이 너무나도 많은 현실에 처해 있으면서 아무런 확신도 약속도 없는 암담한 미래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불가피성에 몰려 살면서 그 어떤 보장도 없는 생을 "그 무엇에 끌려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웅겔스마(Ungelsma)라는 심리학자는 "사람은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흔히들 군중 속의 고독을 운위하면서 세상에 나 혼자인 듯이 말합니다마는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다 쓸쓸해서 하는 말이요, 역설적인 넋두리입니다. 어쩔수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가 경험한 것, 내가 확실하게 본 것을 말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이 증거를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내 존재 자체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는 자기 존재의 상실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이처럼 희미하고 미분명한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자니
희미하고, 없다고 하자니 불안하다는 것이 현대인의 신앙이라"고까지 말한 것을 읽었습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앞이 보이지도 않고 아무
보장도 없으며, 뒤로 물러가자니 그 동안 지켜 온 과거의 업적을 져버리기가 아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에 끌려가는
막연한 인간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초점 (마태복음 16:13~20)
1970년대의 어느 날 백악관의 비공식 기도모임에서 번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깊은 통찰력을 가진 번즈의 기도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구별은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주여 주여’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성경적 신앙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성경적 신앙을 훼파해 온 것은 언제나 교회밖에 있는 어떤 것이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늘 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시기적으로는 갈릴리 사역이 끝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3년 가까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많은 말씀들로 가르치셨고 많은 기적들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 교육이 제대로 되었는지 점검하셨습니다.
마치 졸업 시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질문의 의미는 ‘너희가 나의 제자라고 하려면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제자 교육의 핵심이요 본질이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 수준을 모르셔서 알아보려고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이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 스스로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을 올바로 알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겠지요. 아무튼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신앙생활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합니다.
먼저 예수께서 본문과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고 가정해봅시다. ‘너희는 나의 가르침 중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을 찾고 또한 그 가르침을 핵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해야 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행한 기적 중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전수하는 일들을 핵심으로 삼아야 했겠지요. ‘너희가 나를 따르면서 받은 복중에 가장 큰 복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받은 복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무슨 복을 받았는지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핵심으로 신앙이 전개되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기적들,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것들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그것이 본질과 핵심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사실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들을 추구하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간디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늘 머리맡에 두고 읽으며 그 사상을 실천하려고 했던 인물이었으나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이단들이나 타 종교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과 동일한 기적들을 일으키는 예도 허다합니다. 예수님 믿지 않고서도 여러 종류의 복들을 누리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며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산다고 해서 참 기독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체험하며 엄청나게 기적들을 행할지라도 참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많은 복을 받았다고 해서 참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과 기적을 행하는 것과 복을 받은 사실들은 참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점검하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초점이 되면 단지 ‘주여 주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배고픈 훈련병 시절에 초코파이를 먹고 싶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대에 배치 받으면 고참들의 눈초리를 벗어나서 잠시나마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구 때문에, 혹은 못다 잔 잠을 자려고, 혹은 하기 싫은 일을 피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군대 교회를 다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을 중심으로 교회를 다닌 자들은 고참이 되면서 서서히 교회를 떠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많은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할까요?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코파이를 먹으려는 동기로 교회에 왔다가, 혹은 위로 받으려는 마음에서 교회에 왔다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교회에 머무는 기간 중에 반드시 알아야 할 신앙의 핵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그 핵심을 모르면서 계속 다른 동기로 교회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기독교 신앙은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그 핵심을 모르면서 열심히 기독교 종교적인 일들을 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더욱 빨리 부패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참 그리스도인임을 점검할 수 있는 표지는 무엇일까요? 이제 예수께서 어떻게 질문하셨는지 본문을 살펴봅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예수님은 사람들이든 제자들이든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지?’ 점검하기 원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아는데 초점을 두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전도와 선교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파하는 것에 초점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한 인격’에 대한 관심이지 ‘비인격적인 어떤 것’에 대한 관심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가르침들과 행하셨던 모든 이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도록 하기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신구약 성경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의 ‘인격’에 대해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도 ‘어떤 인격’에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한 인격’에 대한 초점에서 벗어나 일이나 가르침이나 기적이나 복과 같은 비 인격적인 어떤 것으로 옮겨질 때 변질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변질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신앙은 반드시 부패를 가져옵니다.
변질된 명목상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사람들은 ‘예수여, 저를 당신의 추종자들로부터 구원하소서’라는 티셔츠를 입을 수도 있겠지요.
반면에 한 인격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초대 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았었습니다.
가르침과 기적이 풍성하면서도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며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너무 상반되어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순종하고 있을 때나 기적을 체험했을 때나, 열심히 종교적인 일을 행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라는 한 인격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바르게 성장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바르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는 바르게 살아낼 재주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변화와 성장이 있는 순간은 언제나 그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늘 그분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가슴으로 깨달아졌을 때, 그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깨달아졌을 때, 그 때 사람은 변하고 성장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깨달아 졌을 때,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운명주의자도 변하고 허무주의자도 변합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자도 변합니다.
게으르고 한심한 자도 변합니다.
무기력한 자도 힘을 얻고, 무능한 자가 능력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핵심 역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교육함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도록 돕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초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7).
베드로는 그분이 온전한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온전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분만이 성경에 기록된 ‘그 그리스도’이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은 아주 적은 복에 불과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은 내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고 하셨습니다.
항상 신앙의 초점을 점검하며 본질이 왜곡되지 않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삶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빌립보서 3:12~16
초점은 ‘관심이나 주의가 집중되는 중심 부분’입니다.
사진에서 ‘초점을 ’OUT FOCUS’라고 하고, 이 과정을 ‘OUT-FOCUSING’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 풀면, 찍고자 하는 중심 부분이 아닌 것은 전부 ‘OUT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찍으면 주요 피사체만 도드라지고 나머지는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이 배경도 참으로 중요한데, 피사체를 도드라지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웃포커싱’을 잘해야 작품이 나옵니다.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라!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으시다면 “하나님을 아웃 포커싱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웃 포커싱이 되지 않으면 주변의 잡다한 것들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나 잡다한 일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그 모든 일을 겪을뿐 아니라 때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춤으로 하나님만 드러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만 드러남으로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배경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겪는 문제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께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빛을 얼마나 잘 조절하는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빛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조리개’인데, 조리개가 작아지면 빛이 조금씩 들어와서 한 장의 사진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신에 많은 정보가 들어있고, 이 시간이 길어지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사진이 나옵니다.
‘장노출’이라는 기법인데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사진이 완성됩니다.
사진을 보시면 ‘파도’가 구름이나 안개처럼 보입니다.
‘파도’라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난이나 시험,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시야가 좁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힘든 일을 만나면 평상시와는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삶의 초점을 세상일에 맞추고 살아가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까지도 하나님을 도드라지게 하는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문장으로 바꾸면, 우리의 아픔과 고난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라’고 권고합니다.
‘푯대’는 초점입니다.
14절에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초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푯대에 초점을 맞추고 열심히 달려갑니다.
그러나 아직은 얻은 것도 아니고 이룬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달려가는 중입니다.
여기에만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일에 집중하려면, 과거는 잊어야 합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형이고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OUT – FOCUSING’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의 목적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중입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신앙을 자랑하거나 후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일이니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온 정성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오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가, 오늘 나의 삶이 그 푯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우리 삶이 푯대에 초점이 맞춰지면,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은 물론이고, 세상의 쾌락 같은 것은 희미해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배경이 될 뿐입니다.
과거의 신앙을 자랑하거나 후회할 필요도 없고, 오늘 말고 내년에 신앙생활을 잘하겠다고 하지 말고 ‘오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히브리서는 탁월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면, 세상의 고난과 아픔과 쾌락은 흐릿해지고, 보이지 않던 하나님 나라는 선명해지고, 하나님만이 도드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어
사도 바울이 온갖 고난을 받으면서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매도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살해의 위협도 당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힘겨운 일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그는 오직 주님에게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주님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잡힌 바 되었습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이 돈에 잡혀 살아가고, 명예나 권력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거기에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을 ‘OUT’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OUT’시킬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면, 세상살이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예수님을 도드라지게 하는 배경이 되도록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므로, 이 세상의 필요를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돈도 있어야 하고, 명예도 때로는 권력도, 세상의 성공도 이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고난도 환난도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디딤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잡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에게 붙잡혀 살아가십시오.
자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 없이 자기 삶의 필요를 채우고자 한다면, 우리의 눈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작아지면,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모두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집중을 할 수 없고,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지 난감하게 됩니다.
게다가 초점을 맞췄지만, 셔터 속도가 늦어져서 흔들린 사진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흔들린 사진을 찍은 것과 초점을 잘 맞추고 싶었는데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도우실 것이요, 여러분의 삶을 통해 자신이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금 그것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처럼 달려갈 뿐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15).*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른 지가 벌써 3년이나 된 베드로라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그는 예수를 따르던 자들의 대표자이며 특별히 그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12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였습니다.
명실 공히 그는 수제자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물음에 누구보다 앞서서 먼저 대답하기를 좋아했으며 어느 곳에서나 주님 가까이 따랐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함으로 칭찬과 더불어 마침내 "반석(베드로)"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귀한 허락까지도 받은 바 있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너무나 나약하고 불투명하며 희미하고 비겁한 데가 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처럼 열심히 따라가던 그의 선생이요, 주시며,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데 그 순간에 와서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태도가 너무나 섭섭합니다.
함께 따라 가서 고난을 당했다고 하던지 아니면 도망하고 말았다던지 그도 아니면 차라리 배반하고 떠나 버렸다는 기록을 남겼어도 좋을뻔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따르든지 아니면 떠나거나 할 것이지 결국 따르지도, 도망도 못한 채 "멀찍이"가서 "그 결과를 보려고" 하였다는 점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생각하여 보십시다.
"결과를 보아서" 어찌 하겠다는 것입니까 만일에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다가 큰 이적이라도 나타내시어 빌라도의 법정을 뒤엎고 영광스러운 왕위에 오르시면 그 때에는 "내가 예수님의 수제자요"하고 나타날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비참하게 수난을 당하시게 되면 그때에는 별 수없이 도망해 버리겠다는 심사입니까 어찌 이처럼 기회주의적이요, 회색적인 비겁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단 말입니까 유감되기 그지없습니다.
이같이 불확실하며 비겁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더욱 큰 시험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도 베드로를 몰라보고 그에게 묻지만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그처럼 초라해지지는 아니할 것이었는데 본문에서 보여주는 의외의 사건으로 인하여 베드로는 더욱 비겁한 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면서 아무런 결정이 없는 일을 하게 되면 언제나 무기력해지는 법이요, 확실한 결심이 없는 일은 언제나 생각지 않는 함정에 빠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 너무나도 넌센스 같은 베드로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따라간 법정은 사람을 임의로 살리고 죽이는 권력을 행사하는 빌라도의 법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셨고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던 그 법정은 가야바의 법정입니다. 실상 법정이기보다는 공회 장소입니다. 이방인의 법정이 아니라 동족이며 유대인의 최고 종교 책임자인 대제사장 가야바의 공회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비겁해질 것이 무엇입니까 또한 창검을 든 군인이 검을 가슴에 들이대면서 네가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기 때문이라면 인간의 하나 뿐인 목숨을 위해서 부인했다하더라도 동정할 여지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바는 군인이 아닌 심부름하는 작은 계집애의 물음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게 됩니다. 설사 법정에 앉은 재판장의 준엄한 심문이 두려워서 갈릴리의 한 어부가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어도 유감된 일인데, 갈릴리 사람이란 말에 지레 겁을 내어 예수를 부인하였고 "함께 있었다", "사투리가 증명한다" 혹은 "그 당이다"라는 말에 미리 놀라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간단한 말로 부인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부인하고 두 번째에는 맹세하여 부인하였으며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가 저주하며 맹세까지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는 본인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거니와 이런 정도까지 전락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멀찍이 따라가는 자에게 있게되는 시험이며 뒤따르는 함정인 것입니다.
무디 선생님은 누가복음 22:61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고 하신 말씀에 이렇게 설명한 것을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실 때 단순히 보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모른다니 사실이냐 내가 너를 갈릴리 바닷가에서 불렀고, 네가 믿음이 없어서 물에 빠져 들어갈 때에 내가 네 손을 잡아 끌어 올렸는데 네가 나를 모른다니 그게 사실이냐"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멀리 따라 갔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었던 깊은 함정에 빠짐과 함께 또한 큰 시험에 들게된 것입니다. 언제나 소극적인 생활태도는 위험한 시험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멀찍이"란 말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애당초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한번도 가까이 따른 일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숙식을 같이 한다고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요는 마음과 마음의 문제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아는 일이 있어도 마음으로는 멀리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계실 때에 베드로는 잠잤었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정신없이 헛소리 같은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는 계속 잠자고 말았습니다.
이 어찌 가까이 따른 일이 되겠습니까 멀리 있었습니다.
실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에도 그는 고난의 메시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영광의 메시아로, 세속적인 영광만을 생각하며 "사람의 뜻"만을 생각하여 십자가를 만류하다가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시는 주님의 책망을 듣게된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베드로는 처음부터 계속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른 바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멀리 따른다는 뜻은 첫째 무지 속에 따른다는 뜻입니다. 확실히 모르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몸으로는 가까이 따랐으나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은 모르고 따랐기 때문에 결국은 멀리 따른 것이 됩니다. 칸트(Kant)의 말 중에 "이성이 없는 종교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종교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이 지식을 더욱 고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고 알았습니다", "아는 것이 영생이다", "지금은 모르나 이후에는 알리라", "성령이 알게 하리라"등 안다는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부하게 하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불학무식하다고 비난받던 베드로 자신도 그후에 깨닫고 그의 서신인 베드로후서 1장 5절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공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하는 일은 언제나 무기력한 것이며 모르는 중에 내는 용기는 용기가 아니라 미련한 고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좀 더 분명하게 알아야 하였습니다. 썩어지는 밀 알의 비유를 알아야 했고, "대속물"로 오셨다는 귀한 말씀의 참 뜻을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정욕에 사로잡힌 눈은 흐려지며, 세속적인 명예욕에 빠지게 되면 귀가 어두워지게 마련입니다.
그처럼 몇 번이고 말씀하셨건만은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뜻을 끝내 몰랐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25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하는 바와 사실은 무지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자를 꾸짖는 말씀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르고 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같은 거리의 길도 갈 때보다 올 때에는 가까운 것입니다. 모르고 가는 길은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욱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좀더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들을 귀"를 가지고 그리스도가 "고난의 메시아"란 진리를 배웠어야 했으며, "좁은 길"의 결과와 "마시려는 잔"의 의미를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천국은 십자가로 세워지며 영광은 수치와 수욕 후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음을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과와 미래를 알며 그 미래가 주는 약속된 현실의 뜻을 분명히 알았었다면 그 같이 나약하고 비겁한 자가 되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멍에란 죄짐이나 율법의 짐을 가르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의인의 고난과 대신 당하는 고난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비슷한 그 어떤 고난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될 때만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던 귀중한 뜻을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부정 없이 따르는 것이 곧 멀리 따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직업을 버리고 따랐으며 가정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버리고 따르지는 못했으며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워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고, 어떤 때는 자기 전토나 부모와 형제자매, 자기 목숨까지라도 미워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가 없게 되고, 예수님께 욕만 돌리다가 마침내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 자신을 먼저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이후에 주님을 쫓아야 가까이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으며 마틴 루터는 신앙생활이란 곧 "매일 세례(Daily Baptism)"라고 말하였습니다. 벌써 자기는 죽었어야 하며 그리고 또한 계속 자기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고 또 계속 죽여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생활입니다. 자기부정 없는 따름은 언제나 먼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 없이 따르는 일이 곧 멀리 따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은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완전히 하나님께 위탁해 버린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현실에 임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자신을 바쳐 버린 후에 현실적인 사건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현실 안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름을 듣고 그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위탁한 후 이제는 어떤 비난이 있고 조롱이 들리건, 채찍이나 십자가의 죽음이 와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벌써 완전히 위탁하였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나약한 때가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모를 때입니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확실히 모를 때에 당황하게 되며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는 확신과 이 일에 대한 자신이 없을 때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기도로써 해결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의 해결을 완전히 보지 못하고 현실에 임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실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간을 만났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기도 없는 모험은 그 자체가 어리석은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해야 했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으며 먼저 기도로써 힘을 얻어야 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 따라가서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옆에 있던 자가 하나는 강도라 하더라도 하나는 베드로이어야 했을 것이 아닙니까 어찌 십자가 옆에 있는 두 사람이 모두 강도들 이였단 말입니까
결론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영광의 길은 먼저 고난에서 시작되며 생명은 죽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서는 먼저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께 생명을 위탁한 후, 그리고 따릅시다. 따르되 바울같이 가까이 따릅시다.
그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히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며 연합된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 운명에 들어가 하나 된 생명, 이것이 참 생명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1834-1892)은 누구인가?
장차 영국의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게 될 찰스 스펄전 (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1834년 6월 19일 에세스의 캘버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조합교회 목사인 가정에서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던 존 번연의 영국 침례교적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스펄전은 신앙 속에서 양육되었으며 기도하는 손에 의해 길러 졌으며 예수님에 관한 노래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특히 찰스 스펄전을 위해서는 “제 아들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의 엄격한 교리와 경건한 칼빈주의자들과 청교도 신학과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스펄전은 17세기의 존 폭스의 ‘순교자의 책’과 존 오웬, 리처드 십스, 존 플라벨, 매튜 헨리, 리처드 백스터와 같은 위대한 청교도 작가들의 책을 읽고서 신학적 논의의 의미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그가 죽기 전까지 무려 100번이나 읽었으며, 15살 된 스펄전의 상상력은 풍부했고 기억력이 뛰어 났고 그의 독서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스펄전의 회심
15세의 스펄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알고 싶어 했다.
어느날 주일 아침 스펄전은 눈보라 때문에 옆길로 빠져 어떤 작은 감리교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본문은 이사야 45:2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설교했다.
“여러분 중에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신 속에는 어떤 위안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앙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라, 나는 큰 핏방울들을 흘리고 있다. 나를 보라, 나는 십자가에 달려 있다. 나를 보라, 하늘로 올라간다. 나를 보라, 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 오 가련한 죄인들아, 나를 보라! 나를 보라!”는 메시지가 스펄전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어두움으로부터 찬란한 빛으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기워 졌고, 절망으로부터 구출되었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결국 스펄전은 1850년 1월 6일 회심하였다. 1850년 5월 3일 라크강에서 침례를 받은 후 그는 일생동안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그분의 일을 확장 시키겠다”고 서원한다.
신학적 쇠퇴기였던 19세기의 영적상태
비국교도 교파들인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조합교회 등은 18세기에 경험했던 부흥의 열기가 많이 침체되었고, 다소 형식주의가 교회에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1859년의 부흥으로 인해 다시 신앙적 열정이 일어났고, 복음주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 활동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출현하였다. 1840년대에 시작된 현대주의 운동과 1859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도전과 성경 고등비평 (Higher Criticism)이 들어와 기독교의 기초를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신 신학’ 또는 ‘신 사상’의 공격을 받으면서 칼빈주의적 신학과 신앙이 쇠퇴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급속하게 일어났다. 스펄전은 이러한 개혁 신학의 쇠퇴를 지켜 보면서 성경적인 교리가 회복되는 것만이 영국교회 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워터비치 침례교회 부흥
스펄전은 1851년 10월 17살 때 워터비치 한 오두막집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했다.
캐임브리지 근처 워터비치 (Waterbeach) 침례교회 에 모여든 그곳 주민들이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자기네 교회 목사로 초청하여 1852년 1월에 부임했다.
그가 설교하자 사람들이 회심하기 시작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특별히 스펄전은 영적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능력을 보였고, 그 능력은 설교할 때 마다 나타났다.
처음에 40명이던 교인수가 100명으로, 더 나아가 450명으로 급증했다.
교인들은 스펄전을 사랑했고, 그가 대학으로 떠나지 않은 것을 기뻐했다.
스펄전은 워터비치에서 2년간 목사로 사역한 후 “청년 설교자”로서의 그의 명성이 런던에까지 퍼져 나갔다.
런던 부흥 - 메트로폴리탄 성전
당시 열아홉 살이던 스펄전은 1854년 4월 런던에 있는 침례교회인 New Park Street Baptist 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스펄전이 런던으로 온 것은 1859-1860년에 이루어진 잉글랜드 부흥의 전조였다.
매우 약해졌던 그의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많은 성도수로 인해 넘치게 되었다.
주일 예배 때가 되면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어 곧 교회 증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엑서터 홀에서 드린 주일 예배에 매주 4,500명이 몰려왔다.
또 좌석이 부족했다.
이보다 더 넓은 뮤직 홀로 옮겨 예배드린 첫번째 주일에 무려 2만 2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가 설교한 초창기 때 수 백명이 그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영접했는데 장차 아내가 될 수산나 톰슨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교회는 청중을 사로잡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스펄전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청중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새로 지은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 (Metropolitan Tabernacle) 교회는 1861년 3월에 문을 열었다.
당시 국교회에 반대하는 신도들이 예배드리는 장소로는 가장 큰 교회로 5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스펄전이 사역하는 동안 평균 출석 교인의 수는 약 5천명 이상 넘었다.
교인들의 수는 꾸준히 늘어나더니 1854년에 232명이던 교인수가 스펄전이 사망할 때 쯤에는 그 수가 5,307명으로 늘어났다.
스펄전이 런던에서 설교한 이후로 거의 매 예배 때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찾았다.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목회자 대학 (The Pastor's College) 설립
많은 젊은이들이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그 영적인 열정에 감동되어 빈민학교나 길 거리에 나가서 설교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복음의 열정이 강하였고 신학 수업을 받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러한 젊은 설교가들을 훈련시키는 목회자 대학 (The Pastor's College)을 설립하게 된다.
이 칼리지에 대한 그의 비전은 학자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설교자와 영혼구원에 열정을 가진 복음주의 사역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펄전은 2년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교회가 없는 곳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게 하였다.
1866년에 런던에서만 스펄전 칼리지 학생들이 18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후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고, 새로운 교회조직이 만들어지고, 오래되고 쇠퇴해가는 교회에 다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스펄전 칼리지를 졸업한 80여명의 사역자들이 영국의 각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두각을 나타 내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18명으로 줄어든 교회에 갔는데 몇 년 후 약 800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스펄전의 기도의 영성 - “스펄전의 기도는 신학적이다”
스펄전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말씀, 기도, 교리, 은혜, 성령이다.
그는 평생 동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사도시대 이래로 스펄전의 강단 기도에 비길 만한 기도가 없었다.
그의 강단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교우들을 위한 사랑과 격려, 축복,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표현들이 많다.
스펄전의 기도는 신학적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에는 진지함, 열정, 뜨거움, 창의적, 승리감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과 영원한 언약의 피가 가득하다.
그는 가끔 금식기도 기간을 정하든지 특별기도의 달을 마련하기도 했다.
스펄전은 교회 모든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최선책은 개인 기도훈련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 생명력이 넘치려면 기도회를 살려야 하고 기도회를 살리면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한다고 강조했다. 스펄전은 주일 예배가 시작되기 전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개인 기도실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실패감을 한탄했다. 스펄전은 설교자의 능력을 얻는 조건은 뜨겁고 끈질긴 기도가 가장 급선무라고 강조하면서 능력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무릎 꿇고 땀을 흘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 핵심 - “복음 설교”
스펄전의 모든 설교는 복음설교이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그의 설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가득 채워졌고, 성경과 죄의 타락성, 은혜 교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 구원의 영광이었다. 그의 설교는 권위있고, 열정적이며 우렁차고, 독창적이며, 감동적이고, 심오하고, 어휘 선택이 참신하고, 구체적인 적용사례들이 가득했다. 스펄전은 목회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의 사역 기간 동안 예배나 성례전보다는 설교와 회심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다. 스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명하고도 열정적으로 전했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핵심 사항들과 복음주의 신앙을 끝까지 사수했으며, 교리적으로는 칼빈주의를 고수하며 굽힐 줄 모르는 신학적 신념들이 강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스펄전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바로 이 사람인데 그는 칼빈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스펄전은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 수백 권의 책을 참고했다.
그의 서재에는 1만 2천권 정도 있는데 약 60-70%는 청교도 서적이다.
내리막 논쟁 (Down Grade Controversy)과 생의 마감
칼빈주의 신학이 확고한 스펄전은 연합침례교 안에서 자유주의와 논쟁을 하게 된다.
침례교 연맹을 분열시킬 뻔 했던 사건으로 1887년 교리적인 문제인 “내리막 논쟁”이 발생한다.
이 논쟁은 당시 침례교 목사들과 교회 및 신학 대학들 가운데 현대 성경 비판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난했을 때 발생했다.
스펄전은 새로 나온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칼빈주의 교리를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검과 흙손 월간지에 청교도 입장을 옹호하며 “우리 믿음의 적들”을 공격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면서 그는 침례교 연맹을 탈퇴했다.
비록 침례교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복음주의 연맹 회의가 열려 스펄전을 지지할 뿐 아니라 복음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스펄전은 진리수호를 위해 싸웠고 은혜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불사했다.
스펄전은 1892년 1월 31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불타오르는 사역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올리브 나무로 만든 스펄전의 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영원히 사랑하는 찰스 하돈 스펄전 목사를 기억하며, 1834년 6월 19일 캘베던에서 태어나 1892년 1월 31일 멘톤에서 예수님 품에 잠들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노라.’
찰스 스펄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Christ-centredness) 삶
스펄전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내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말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본질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한다.
스펄전의 모든 고백과 신학 그리고 교리적인 관점은 그의 예수님 중심적인 생각과 삶에서 비롯되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은 날 부터 스펄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전부가 되었다.
만약 예수님을 향한 스펄전의 이 헌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스펄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며 순종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따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실천하며 설교하였다.
성경은 스펄전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스펄전은 사람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고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았다.
3. 목회자상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 떼들을 참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섬겼다.
스펄전은 어디를 가든 어디서 설교를 하든 늘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설교를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영혼은 가장 중요하였으며 그 영혼을 먹이고 양육하는 것을 스펄전은 사랑하였다.
스펄전의 설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영혼을 향한 목자의 마음과 사랑이었다.
스펄전의 설교는 영혼을 살리는 설교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설교의 황태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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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특히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신앙의 관심을 십자가 즉 육체의 고통에 집착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말씀에서 멀어진 것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요한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마지막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붙잡히신 사건도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마태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다니엘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가룟 유다의 배신
시편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은 30에 팔리실 것
스가랴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죄인들과 못 박히심
이사야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수족이 찔리심
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47-56
열두 영(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Do you think I cannot call on my Father, and he will at once put at my disposal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개역개정)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현대인)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12개 여단의 군대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당장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새번역)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공동번역)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NASB) Or do you think that I cannot appeal to My Father, and He will at once put at My disposal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KJV) Thinkest thou that I cannot now pray to my Father, and he shall presently give me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로마의 군대조직의 가장 큰 단위는 군단이다.
당시 로마의 1개 군단은 약 6천 명 정도의 사병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로마 제국 안에는 총 28개 정도의 군단이 있었다.
한 개의 군단은 10개의 대대로 나뉘고 이 한 개의 대대는 여섯 개의 백인대로 나뉘었다.
명칭상으론 백 명이 기준이 되지만 실질적으로 백인대는 8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백인대를 이끄는 대장이 바로 백부장이다.
백부장은 로마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백부장은 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보통 15년이 되었을 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사병들 사이에선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그리고 군생활이 천국이 되느냐 지옥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이 속한 백인대의 백부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었다.
병사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서 백부장은 갖은 기합을 통해서 두려움을 심어줘 군기를 잡으려 노력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한 백부장의 별명은 ‘다른 놈을 데려와’였다고 한다.
아마도 군기를 잡기 위해서 병사들을 순번에 따라 앞에다 놓고 체벌을 가해 얻어진 별명일 것이다.
열두 영이란?
열 두 영의 천사란 천사들의 숫자가 열두 명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문 관주 성경에서 "열 두 영(營)"이라고 하여 "경영할 영(營)" 자를 사용합니다.
영이란 로마군대의 조직 체계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한글 개역 개정과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에서 "열 두 군단" 이라고 번역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열 두 여단" 이라고 합니다.
영어성경(NIV, KJV, NASB)에서 "twelve legions(12 군단)"라고 번역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레게온(λεγεών)" 이라고 합니다.
12 영(레기오나스. λεγιῶνας)이란 36,000명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붙잡히셨을 때 12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지금 나를 체포하려고 동원된 로마의 군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순종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칼을 사용하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어라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시며 오히려 말고의 귀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고의 사랑의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을 깨우치셨던 예수님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작은 불이익에도 화가 솟구쳐 흥분하기 쉬운 우리들의 모습과 대조하면 예수님의 행동은 온전한 인성과 온전한 신성을 겸비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
다른 하나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Kairos. καιρός)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인생을 즐기시렵니까?
아니면 오늘이란 내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의 시간 카이로스로 맞이하시렵니까?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다듬어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의 명언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 디오게네스 –
마태복음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영(λεγεών.
레게온)
로마 군의 ‘군단’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120명 단위로 총 1,200명씩,
최후미이자 예비대인 트리아리는 60명
단위로 총 600명을 편제하여 한개 군단병력을 3,000명 선에서 유지하였고,
양익에는 300명의 기병대를 나누어 배치된다.
군단
총원으로 세지 않는 벨리테스(Velites)들은 대열 중간에 나뉘어 배치된다.
천사들(ἀγγέλων. 앙겔론)을 말합니다.
로마의 군단들처럼 강하고 많음을 비교해서 말씀하심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
다른 하나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Kairos. καιρός)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인생은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 인생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기회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간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인 평범한 여러분의 하루를
특별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 디오게네스 –
χρόνος, ου, ὁ 5550
1. 시간, 2. 유예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마 2:7, 행 1:7, 벧전 4:2), 시대(행 17:30), 얼마간(행 19:22), 시간(히 11:32), 기회(계 2:21), 동안(막 2:19), 기한(눅 1:57), 시대(행 17:30), 항상(행 20:18), 날(행 27:9), 영세(롬 16:25).
뜻풀이부
-
명사 시간, 때, 마25:19, 눅8:27, 요7:33, 행8:11.
-
2.명사 유예, 지체, 계2:21, 10:6.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신약 성경 / 86회 사용
뜻풀이부
-
a.명사 [일반적으로] 달가운 때, 고후6:2, 어려운 때, 딤후3:1, 열매 맺는 때, 행14:17, 때때로, 정규적으로, 요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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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명사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에, 마24:45, 눅12:42, 행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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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명사 정한 때, 마13:30, 21:34, 막1:15, 행17:26, 갈4:10, 6:9, 딤전2:6, 딤후4:6, 딛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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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명사 [종말론적 숙어] 마8:29, 16:3, 눅21: 8, 고전4:5, 엡1:10, 계1:3, 22:10.
1. '영'과 '군단'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칼을 휘둘러 말고라는 병사의 귀를 잘랐다.
이 장면은 워낙 유명해서
예수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도 종종 등장한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소개되는데, 기록자의 특징이 드러나 흥미롭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으므로 그것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오른쪽 귀를 벴는데 그 종의 이름은 말고더라(요 18:10)
사도 요한은 유일하게 귀를 자른 자와 잘린 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베드로와 말고다.
누가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오른쪽 귀를 베니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것까지도 허락하라, 하시고 그의 귀에 손을 대사 그를 낫게 하시더라(눅 22:50~51)
말고의 귀를 예수님이 도로 고쳐주신 것은 누가만 기록했다.
그가 의사였던 점을 생각나게 하는 지점이다.
아무튼 그 사고가 있었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성경을 좀 읽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구절들이 있는데, 아마 이 말씀도 많이 귀에 익은 내용일 것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3, 개역한글)
나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알았는데, 이 구절을 보면 당연히 영적 존재인 열두 천사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하지만 열두 영의 '영'은 '군단'이다.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legions)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마 26:53, 흠정역)
열두
천사의 영(spirit)이 아니라 군단 수준의 하늘 군대를 보내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legion(리전)은 '리전
오브...'로 시작하는 게임들이 떼 지어 전쟁을 벌이는 종류들인 것처럼 '군단'을 의미한다.
미드, 게임, 소설 등에
'레기온'이라고도 종종 등장한다.
군단이라고
하면 중대, 대대, 연대, 사단보다 더 큰 개념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로마 부대의 군단을 말씀하신
것인데, 보병과 말 타는 기병을 합쳐 5천~6천 정도의 병사들이 당시의 군단 규모다.
열둘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수다.
개역개정은 2012년 이후 이것을 군단으로 바로잡았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개역개정)
그러면 왜 예전의 개역한글은 '군단'을 '영'으로 번역했을까?
처음엔 이것을 '병영(兵營)'이라고 할 때의 '영(營)'으로 본 것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명백한 오역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자 개역한글판으로 보면 진짜 '영(靈, 영묘할 영)'으로 나온다.
뭐지?? 아마도 번역 후 한자를 넣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영(靈)으로 생각한 것 아닐까... 그것밖에는 가능성이 없다. 이 부분은 교리적으로나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정확성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군대 귀신'과 '군단 마귀'
그런데
군단이 나오는 곳이 더 있다. 바로 마귀의 군단이다.
가다라(거라사)의 마귀 들린 자에게 들어가 있던 마귀들로 흔히 '군대
귀신'이라고 부르는 악한 영들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간청해 돼지 떼에 들어가는데, 돼지들은 호수로 내달아 죽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어 이르시되,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시매 그가 이르되, 군단이니이다, 하니 이는 많은 마귀들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이더라. (눅 8:30, 흠정역)
여기 군단도 리전(legion)인데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대문자 Legion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 군단이 아니라 마귀들의 부대임을 특정한 것이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같은 '리전'을 여기서는 군대로 번역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눅 8:30, 개역개정)
군대는 더 포괄적인 말이다. 천사들은 하늘의 군대라고 불렸다.
마귀의 천사들도 일부가 무리 지어 있으면 군단이지 군대는 아니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hosts)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 148:2, 개역개정)
그분의 모든 천사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그분의 모든 군대들(hosts)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시 148:2, 흠정역)
주의
모든 천사는 군대(host = army)이다.
문제는 통일성이다. 군단과 군대의 구분은 킹제임스 성경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영어
현대역본들도 다르게 구분이 돼 있다. 오직 개역성경만 그저 '알아서' 제멋대로 번역했다. 단어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따라가는 번역이다. 사실 '열두 군단' 같은 단어도 다른 성경들이 사용하고 나서 바뀐 것이다.
"군단이면 어떻고 군대면 어떤가. 열둘이면 어떻고 더 많으면 어떤가. 뜻만 통하면 됐지."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비교적 사소한 단어들만 문제인 것이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귀중한 교리와 신학까지 좌우할 수 있는 단어들도 중구난방이다.
성경을 여러 번 읽어도 뜻을 잘 알 수 없는 이유는 말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쉬운 말 성경을 봐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성경은 사전이나 주석서 이전에 성경이 스스로 그 단어를 드러내는 책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용례들을 통해 뜻을 저절로 알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일관성이다. 다른 곳에서 본 단어가 또 나올 때 저절로 깨닫게 하려면 같은 단어는 같게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5:17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이해하라(4920) συνίημι
어원 / 미래 συνησω, 제1부정과거 συνῆ- κα, 제1부정과거 가정법 συνῆτε, συ- νῶσιν, 제2부정과거 명령 2인칭복수 σύνετε, 4862와 ἵημι ‘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3:13, 막 4:12, 롬 3:11), 이해하다(엡 5:17), 지혜가 있다(고후 10: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겟세마네의 기도 / 감람산 기도
마태복음 26:36-46, 마가복음 14:32-42, 누가복음 22:39-46
1. 습관적인 기도(habitual prayer)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누가복음 22:39)
습관(에도스, ĕthŏs. 1485) ἔθος
어원/ 14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전례(눅 1:9, 2:42), 습관(눅 22:39, 히 10:25), 규례(행 6:14), 법(행 15:1, 25:16), 풍속(행 16: 21, 26:3), 관습(행 21:21, 28:17).신약 성경 / 12회 사용
* 1486. ἔθω
발음
/ 에도(ĕthō)
1. εἴωθα를 보라.
관련 성경 / 전례대로 하다(막 10:1), 규례대로 하다(눅 4:16), 전례가 있다(마 27:15).
설득의 3대 요소 -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평했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존재하지만, 그 개인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타인과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풀어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설득’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득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도 그래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다.
화자話者가 아무리 말을 잘한들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화자의 인격이고 신뢰감이다.
에토스가 ‘윤리학ethics’의 어원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파토스다.
청중의 감정이나 욕구에 호소해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 수단이다.
먼저 청중의 심리적 상태나 욕구 등을 고려해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영어로는 ‘페이소pathos’다.
파토스가 오늘에 와서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 외에 무엇에 대한 지속적인 정열과 정념 등의 뜻도 갖게 됐지만, 문자 자체로는 ‘고통’이라는 의미이며 ‘병病’을 나타내는 ‘패스path’의 어원이기도 하다.
에토스와 파토스를 잘 이용한 대표적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다.
그는 나치 정권의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를
등에 업고 독일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이끌어냈다.
괴벨스는 예술과 뉴미디어를 통해 독일 대중이 히틀러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독일
대중이 스스로 나치가 되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는 최후까지 히틀러에게 충성했으며,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 날
총리 관저 대피호에서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 스스로도 명연설가였다.
어떤 집회에서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다.
본능적으로 이들의 동경과 욕구를 파악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냈다.
그 결과 청중은 광기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인다.
“지성은
2류, 기질은 1류”라고 평가받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 역시 친근감으로 무장한 그의 감성 능력 덕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토스와 파토스에 이어 필요한 요소가 로고스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객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로고스가 ‘논리학logic’과 학문을 의미하는 ‘로지logy’의 어원이 된 것도 그래서다.
병을 연구하는 학문인 ‘병리학pathology’은
병을 의미하는 파토스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가 합쳐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가 파토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입증된 사실보다 믿고 싶어 하는 사실에 더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설득함에 있어 그 중요성을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의 비중으로 봤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로 대표되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의 연설이 지금도 회자되는 것은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잘 활용해 청중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뇌리에 남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기도(겟세마네 기도 - 감람산 기도)
마태복음 26:36-46, 마가복음 14:32-42, 누가복음 22:39-46
2. 친밀한 기도(intimate prayer)
내 아버지여(마태복음 26:39, 42)
아바 아버지여(마가복음 14:36)
아버지여(누가복음 22:42)
예수님의 기도(겟세마네 기도 - 감람산 기도)
마태복음 26:36-46, 마가복음 14:32-42, 누가복음 22:39-46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
(Prayer to fulfill God's will)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 26:39, 42)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 14:36)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 22:42)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복잡한 생태계 : 항상성과 나비효과
생태계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며, 이는 두 가지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생태계가 일종의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외부 충격이 주어졌을 때 생태계가 스스로 이에 대응하며 안정된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예들은 무수히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스템에 생긴 어떤 문제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걷잡을 수 없이 큰 결과를 낳는 경우입니다. 여러 유명인의 말로 전해지는, 꿀벌이 사라질 때 일어날 일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인간과 생태계의 복잡한 관계는 위의 두 가지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생태계의 일원으로 본다면,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지구 온난화를 다시 기술의 힘으로 되돌리려는 인류의 노력이 결국 하나의 커다란 생태계가 보여주는 자정작용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인간을 생태계의 파괴자로 본다면, 지금 이 순간 인간의 오만과 탐욕 때문에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지난 16일, 뉴욕타임스에는 인간과 생태계의 이런 복잡한 관계를 알려주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바로 지난 4억 5천만 년 동안 큰 진화 없이 형태를 유지해 온 투구게에 인간이 커다란 빚을 지고 있으며, 동시에 앞서 다섯 번의 대멸종을 이겨낸 투구게가 인간 때문에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멸종을 막을 힘 또한 인간에게 있습니다.
투구게는 다른 절지류처럼 푸른색 피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절지류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특성이 하나 있습니다. 외부의 균에 대응하는 백혈구가 없는 대신 LAL(리물루스 아메보사이트 라이세이트)이라는 단백질이 피를 응고시키는 방식을 택하는 겁니다. 이 LAL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내독소(endotoxin)에 반응하는 자연계의 유일한 물질이기 때문에, 투구게의 피는 주사 용액이나 의료용품의 안전성 검사에 쓰였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안전성 검사에 쓸 피를 얻고자 투구게를 과도하게 사냥하면서 이들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투구게가 멸종된다면, 인간은 저렴하고 안전한 내독소 검사 도구를 잃게 됩니다. 여기에 지난 5억 년을 멀쩡히 살아온 투구게를 인간이 멸종시켰다는 오명이 더 큰 문제일 겁니다.
칼럼을 쓴 데보라 크라머는 투구게를 이용하지 않고, 화학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바로 재조합 C인자(rFC)라는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물질로 내독소 검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이 물질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표준이 마련되지 않아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크라머는 지적합니다. 그러나 전문가와 제약회사가 모두 이 물질로 투구게(의 피)를 대체하기를 바란다면, 왜 20년 동안 재조합 C인자를 이용한 검사가 진척을 이루지 못했는지 좀 더 자세히 조명해 줬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습니다. 재조합 C인자가 정말로 투구게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면, 진작에 그렇게 진행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 표준이 마련되고 있다고 하니, 곧 투구게를 남획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생태계 균형을 위협하는 인간의 필요
다시 생태계 문제로 되돌아와 봅시다. 인간은 투구게 덕분에 더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고, 투구게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무척 많을 겁니다. 아마도 투구게를 대신할 재조합 C인자를 만들어낸 이들도 투구게 덕을 봤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과거 안전성 검사를 위한 동물실험에 이용되던 토끼나 설치류 역시 투구게 덕분에 수십만 마리가 희생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생태계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동물실험이라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오늘날 동물의 권리는 분명 신장되었고, 이는 보다 보편적인 생명의 가치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하나의 진전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을 비교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합니다. 동물실험이 대표적인 예죠.
인간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동물의 생명도 소중히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겁니다. 몇 가지 시도되고 시행 중인 기술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 장기를 이용한 실험이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방법이 그렇습니다. 정말로 언젠가는 불쾌한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5056. τέλος, ους, τό
관련 성경 / 끝(마 10:22, 24:6, 막 13:13, 눅 21:9), 마지막(롬 6:21,22, 고전 15:24), 결말(마 26:58, 약 5:11), 결국(고후 3:13), 관세(마17:25, 롬 13:7), 마침(롬 10:4), 목적(딤전 1:5), 말세(고전 10:11).
신약 성경 / 40회 사용
telos 미국식
[ télɑs,tí:l- ]
명사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목적인(目的因)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참된 관계를 맺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예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꾸짖습니다.
특히 그들은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32)”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첫 단계를
밟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요 1:12)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시
143:10).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숨기지 않으시며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의 뜻을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선행을 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2:15).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살전
4:3)
셋째, 변화된 삶을 증거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순서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본받기를 거부하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마음이
새로워지면 그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우리가 성경에 금지된 것을 구하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훔치는 것을 금합니다.
하나님이 도둑질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은행 강도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행 강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 기도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어렵습니다.
당장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이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번에 한 걸음씩 보여주시고 우리는 한 걸음씩
믿음의 길을 걸으면서 그분을 계속 신뢰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기다리는 동안 이미 알고 있는 선을
행하기도 바쁘다는 것입니다(약 4:17).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구체적인 것들을 알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디에서 일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어떤 차를 사야 하는지 등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맡기면 우리가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십니다(행 16:6-7).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갈수록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 아이가 번화가를 가로질러 굴러간 공을
보지만, 그 공을 쫓아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아빠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모든 특별한 상황에 대한 조언을 일일이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뭐라고 이야기할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영(성령)을
의지하면서 주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전 2:16)”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 또한 압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잠 11:5).
우리가 주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을 진정으로 갈망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이 바라시는 것들을 우리의 마음
속에 두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나님 아버지의 뜻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갖고 계시며 그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야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기도할 것이며 최선을 다하여 그 뜻대로 행하려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각본처럼 짜여진 어쩔 수 없는 운명도 아니고 냉엄한 법칙이나 명령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조화되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안심하고 믿고 즐겨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요 소원이며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것임을 알고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하신 뜻을 가지시고 그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롬 12:2).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마 7:21).
신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와 구원자로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성령을 보내주신 것과,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도 계속해서 구원 사역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구속 계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14를 보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가 택하심을 받고 예정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8-40).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40).
히브리서 10:7,9를 보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히 10: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뜻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셔서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사 61:12; 겔 34:15-16).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과 사탄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골 1:13-14; 요 6:40).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구속 성취를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되셨고(요 1:29, 36),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단번에 희생 제사로 드렸습니다(사 53장; 갈 1:4; 히 10:9-1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인성을 입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내신 아버지의 뜻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거룩하고 순결하게 사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완전히 치르셨으며, 우리를 위해 영원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요 19:30).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인 우리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순종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뜻인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만민을 다스리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심으로써 자기 백성에게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보면, 그는 삼십년 남짓 짧은 지상 생애를 사셨으며, 극한 가난 중에 사시다가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고, 그 결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토록 영광이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 일에 온전히 헌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계 14:13).
우리는 지능도 부족하고 도덕성도 부족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원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면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주님의 뜻대로 잘 쓰면 됩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마 25:14-23).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의 것 된 우리도 주님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나의 모든 것(마음, 힘, 시간, 소유 등)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자타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어떤 희생과 고난이 따른다 해도 기꺼이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실망하거나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잘 알고 구원의 복음을 더욱 굳게 믿고 소망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안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사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믿고 감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을 복음의 신앙과 소망과 사랑 안에 굳게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를 위해 더욱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마 28:19-20; 갈 5:16-25; 살전 4:3; 빌 2:12-14).
구원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합 3:17-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31-46
아버지의 원대로(42절)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He went away a second time and prayed, "My Father, if
it is not possible for this cup to be taken away unless I drink it, may
your will be done."
원대로(2307) θέλημα, ατος, τό
1. 뜻, 2. 뜻하는 바, 3. 마태복음 6:10(나라이 臨하옵시며 ㅠ뜻이 으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발음
/ 데레마(thĕlēma)
관련 성경 /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신약 성경 / 62회 사용
-하나님의 뜻은 "데레마" "불래"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βουλή, ῆς, ἡ 1012
어원 / 10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견(행 27:12), 뜻(눅 7:30, 행 2:23, 고전 4:5), 결의(눅 23:51), 사상(행 5:38), 결심(행 27:42)
신약 성경 / 12회 사용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단어로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불레(βουλή. bŏulē)"
"불레"라는 뜻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며 절대적인 뜻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불레와 같은 뜻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여도 그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 "델레마(θέλημα. thĕlēma)"
"델레마"라는 뜻은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며 소원적인 뜻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절대적인 뜻이 아니라 소원적인 뜻이며 허용적인 뜻이기 때문입니다(딤전 2:4).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완전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따먹었습니다.
'델레마'는 인간이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책임있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생각하며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델레마)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연약한 육체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셨겠지요?
그렇지만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할 길이기에 제자들이 잠든 것을 보시고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기도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곧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날마다 죽어야 응답이 가능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죽을 수 있는 힘, 내려 놓을 수 있는 믿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자기를 부인할 때, 주님의 뜻
가운데 죽어질 때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가정과 교회와 이 땅 가운데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두 개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불레(Boule) βουλή
불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절대적인 뜻’ ‘저항 불가능한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면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꼭 이루어지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는 ‘델레마’(thelema) θέλημα
델레마는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을 말합니다.
결정적인 뜻이 아니라 변경 가능한 뜻을 말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과 허용적인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있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의 뜻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 있고 허용적인 뜻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로봇이나 기계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허용적인 뜻이 있기에 우리의 자유의지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역사는 하늘에 뜻을 따라 뭔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하지만 스스로 결정해서 그 결과를 하늘에 통보하는 식의 역사관이다.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오디세이아 류의 인간 중심 캐릭터다.
사마천의 역사는 궁형을 당한 채 치욕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늘을 믿고 하늘의 뜻에 맞는 세상을 만들려는 사마천 류의 하늘 중심 인간이다. 후자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하늘의 뜻, 즉 천명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자작 천명을 만들어 유포할 위험이 있다.
어떤 선택은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직장사역국제연합 책임자 오스 힐먼(Os Hillman)에 의하면, 하나님과 수직적인 초점을 맞춰야 한다. 수직적인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거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있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2년을 하루같이 두란노서원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고 믿음이 성장해 가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음을 디테일하게 매일매일 짚어갔다. 구석구석 짚어가며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에차’는 심사숙고해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의도, 계획’을 뜻한다.
성경에는 ‘인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다.
시편 33:10-11에서 시인은 야훼께서 나라들의 계획, 즉 에차는 폐하시고 야훼의 에차는 영원히 선다고 노래한다.
잠언 19:21에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많은 ‘생각 또는 계획’에 해당하는 ‘마하샤바’이고 야훼의 뜻은 에차이다.
다니엘에서 나오는 아람어로서 이 의미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동사는 ‘체바’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시고 소원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명사는 ‘델레마(θέλημα)’와 ‘불레(βουλη)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의향이고, 후자는 심사숙고하여 작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뜻이다.
전자는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므로 실제로 이를 예증하신다(마 26:42).
하나님을 뜻, 즉 델레마를 행하는 자라야 예수님의 형제, 자매, 모친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불레를 꺼림 없이 전할뿐만 아니라 ‘다’ 전하였다.
하나님이 심사숙고하여 작정하신 영원하신 계획과 뜻을 대충 전할 수 없고, 사정이 변하여 중도에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이 왜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려고 애썼을까.
어느 도시보다 어느 선교지보다 많은 열심을 품고 가르치는 사역에 전념한 이유가 무엇일까?
에베소 교인들을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랬을까(행 20:25).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전도자로서 깨끗하기 위해 그렇게 힘썼을까(행 20:26).
아니면 바울이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와 같은 이들이 에베소 교회에 침투해서 신앙을 흔들어 놓을 것을 사전에 예방차원에서 그렇게 했는가(행 20:29).
이 모두가 이유가 된다면 부정적인 사유다.
그러나 긍정적인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자체가 온전하고 영원히 서야 하기 때문이다(시 33:11).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영적 전쟁을 하는 사람답게 어떤 긴박한 사건이 생겨도 습관적으로 정확히 대처할 수 있도록 몸에 빼여 있어야 한다.
운전하는 자가 돌발상황에 생각할 겨를이 없이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어야 하고 핸들을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
훈련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해야 할 바를 본능적으로 대처한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알아야 하는 이유다.
5W1H(육하원칙) 중 ‘How’는 다른 5개의 W와 차별되게 쓰인다.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옳은 대답이 없다.
어떠한 대답이 나오더라도 틀렸다 할 수 없고,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와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거침없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전하였느냐고 할 때 ‘다’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에서 그 뜻을 알고 있었지만(롬 2:18),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하였다(눅 13:47-48).
그리하여 바울은 회심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행 22:14).
성령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원대로 행동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신다(비교. 엡 5:17).
에베소서 5:17
- 주의 뜻(델레마)
Therefore do not be foolish, but understand what the Lord's will is.
반도체를 만드는 핵심 기술은 세 가지다.
소재· 장비· 제조다.
한국은 제조 기술에 온 화력을 집중했다.
나머지는 국제 분업 시스템에 따라 수입했다. 같은 재료와 소재를 써도 더 효율적인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기술에 집중했다. 반도체 중에서도 변화 주기가 빠른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했다.
기술이 뛰어났기에 세계 1위를 자랑할 수 있다.
그런데 소재가 공급이 안 되면 최첨단 장비가 있고 탁월한 기술이 있어도 제품을 만들 수 없다.
바울의 선교도 마찬가지다.
장비에 해당하는 훌륭한 선교팀과 후원체계, 바울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열정이 있어도 반도체를 만드는 소재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없다면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교도의 책을 불사르다”
하나님의 뜻은 다 전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 사역을 할 때 가장 중점을 둔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구약성경 속에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구원계획 전체에 대해 세세하게 가르쳤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떤 부분은 인기가 없거나 어렵다고 싶으면 건너뛰거나 생략하기 싶다.
바울이 지난 2년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칠 때 그런 일은 없었다는 말이다. 로마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오만한 자’라고 불렀다. 오만한 자는 장님이 돼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행을 인식할 수 없다. 자신이 자초한 불행의 희생자가 된다. 바울은 장님이 되기 싫어서, 열심히 가르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서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멀리 나는 알바트로스(Albatross)를 닮았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나는 새, 한 번도 쉬지 않고 먼 거리를 날 수 있는 비결이 있다. 바람 타기의 명수이기 때문이다. 바람과 파도를 이용한 역동적 활공법을 구사한다. 동양에서는 알바트로스를 신천옹(信天翁)이라 불렀다. ‘하늘의 뜻을 믿는 노익장’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다 펼친 두란노 서원은 우리나라 순천향 병원을 상기시킨다. 순천향(順天鄕)이란 이름을 풀이하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인술을 펼치는 고향마을’이다.
알바트로스, "하늘을 믿고 날아 오르는 노익장"의 의미로 동양에서는 이 새를 "신천옹(信天翁)"이라 부른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바울 역시 꺼림 없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보충 설명을 생략한다.
이는 그 뜻을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과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위정자들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고후 8:5).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의 주제다.
특히 누가-행전에서 그러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었고, 바리새인들은 선지자 요한을 반대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고(눅 7:30), 예수님은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에 의해 넘겨진 바 되셨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불레는 사도들의 메시지의 내용이다(20:27).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과 칭기스 칸의 하늘의 뜻은 다르다.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몽골국의 최고 통치자가 된 Činggis Qan은 자신의 성공이 결국 하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이 신념은 올바른 종교의 길을 가지 않는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하늘의 뜻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발전한다.
자신의 확신의 산물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 두란노 서원에서 2년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열정적으로 가르쳤다(참조. 19:9-10). 왜 그랬을까.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하려고 애쓰고 힘썼을까. 바울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을 전하지 않음으로 인해 앞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인 오류가 생겼을 때 가르치는 자에게 책임이 돌아온다. 그래서 자신은 책임이 없는 이유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뜻의 그 어떤 부분도 꺼리지 않고 다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시에스타 시간을 이용했다면 냉방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않는 공간에서 수면이나 휴식을 희생하면서 2년을 하루같이 열정을 쏟은 까닭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뜻도 되겠지만 진리를 전해 듣지 않고서는 성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면 결국 자신의 뜻이나 세상의 뜻을 앞세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나서 자신의 결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만 선택하는 인지적 오류를 말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향을 갖고 있다.
화자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청자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나머지는 걸려 버리면 통전적 지식을 갖지 못하고 인지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바울은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 전하였다.
‘다’에 해당하는 ‘파스’는 모두를 말한다.
장소는 공중과 각 집이다.
대상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다.
장소와 대상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면, 전하는 자의 임의에 따라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한다면 진리가 아니다.
장소와 청중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그대로 몽땅 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환경과 청중에 따라 전달하는 내용이 분량이나 시간 그리고 핵심이 가변적일 가능성이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장소가 바뀌든 대상이 많든 적든 또는 달라지든 전파하는 내용은 다 전하는데 전념했다.
언약(言約)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covenant)은 모든 아브라함의 종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적 언약이다.
언약의 원어는 '베리트'인데 '바라'(자르다, 끊다, 새기다)에서 왔다.
주로 모세 오경 또는율법이나 모세 오경인 처음 다섯 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발견된다.
다른 언약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것에 반하여 노아 언약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유일한 언약이다.
예레미아 31:30-33은 새 언약을 약속하는데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집을 세울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에서 언약
아브라함과 할례로서 언약을 맺었고(창 17:9-14), 노아와는 무지개로 언약을 맺으셨다(창 9:8-17).
이외에도
성경에는 이삭(창 26:24), 야곱(창 28:13,14) 등과 맺은 언약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모두 구속사에 있어서 최고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구속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
하나님께서 노아 개인과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로 인해 가족과 동물까지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표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담의 타락으로 전인류와 피조계가 함께 저주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창 3:17) 노아의 의로움이 동물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대표 원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루었는 데 곧 그분 한분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그 공로를 힘입어 속죄함을 받은 것이다(롬 5:17-19).
구약성경에는 세 가지의 언약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양쪽이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언약(삼상 18:3-4), 유력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맺는 언약(겔 17:13-14),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 등이다.
이 중하나님과 사람 간에 맺는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피로 맺은 은혜로운 약정이었다.
그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사람은 수혜자가 되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시는 약속이었다.
예레미야가 언급했던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되며(렘 31:33),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한 언약이었다(렘 31:32).
신약에서
언약이란 말은 '디아데케'(diatheke)로 헬라 세계에서는 '의지, 뜻, 서약, 유언'이란 뜻으로 쓰였다.
신약의 새 언약
구약의 베리트는 신약에서 '디아데케'(diatheke)로 번역었는데 신약시대에는 '의지, 뜻, 서약, 유언'이란 뜻으로 쓰였다.
새 언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고 하셨다.
새 언약은 예수를 통해 새롭게 시작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었다.
이제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받고(행 10:43, 롬 11:27) 죄악이 기억되지 않으며
구원을 받는다(사 43:25, 요 5:24, 요일 1:9).
언약의 의미
히브리어 - 베리트
‘언약’이란
히브리어로 ‘베리트’로서, 계약 당사자들이 상호 동의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인간은 그의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상호 동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는 창세기 6:18 말씀에도 언약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언약의 소유주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히브리어
‘베리트’는 ‘쪼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 근동 지방에서 파기되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계약을 맺을 때에 짐승을
죽여서 쪼개어 양쪽으로 나누어 놓은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창 15:10, 렘 34:18).
이것은 만약 계약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짐승처럼 쪼갬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 디아데케(διαθήκη)
LXX(70인경)에서는
‘베리트(언약)’를 대부분 ‘디아데케(διαθήκη)’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디아데케’의 어원은 ‘디아(δια: 둘)’와
‘티데미(τίθημι: 두다, 배열하다)’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둘 사이에 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두 상대방, 즉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디아데케’는 신약 성경에서 절반 정도가
‘유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히 9:16-17).
언약은 보통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유언은
죽는 사람이 남은 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남기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어원적 의미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과 그 언약의 상대인 인간이 하나로 결속되어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도구로 구속사를 진행하시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하신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Covenant)
두 당사자가 서로를 위해 어떤 일을 하기로 합의하여 이루어진 협약이다.
구약에서 언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리트’(berith)는 ‘끊는다’는 어원을 가지는데, 이는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둘로 절단하여 엄숙한 의식을 행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구약성경에는 세 가지의 언약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양쪽이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언약(삼상 18:3-4),
유력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맺는 언약(겔 17:13-14),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 등이다.
이 중 하나님과 사람 간에 맺는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피로 맺은 은혜로운 약정이었다.
그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사람은 수혜자가 되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시는 약속이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언약은 초자연적인 의식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 예로는
아브라함과 할례로서 맺은 언약(창 17:9-14),
노아와 무지개로 맺은 언약(창 9:8-17),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 등이 있다.
특별히 시내 산에서의 언약은 피(출 24:8; 슥 9:11)로 맺은 것인데,
스가랴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이는 하나님 한 분을 믿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이 되었으며 여러 선지자들이 계속하여 이 언약을 상기시켰다(렘 7:23; 호 8:1).
인간 상호 간에 맺는 언약은 개인 간에(창 21:27), 족속 간에(출 23:32; 신 7:2),
왕과 백성 간에(왕하 11:4; 대하 23:16) 이루어졌다. 이런 때는 대개 선물이나 악수,
입맞춤, 식사 혹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맺어졌다(겔 17:18; 삼하 3:17-21; 창 31:44).
신약에서 언약이란 말은 ‘디아데케’(diatheke)로 헬라 세계에서는 ‘의지, 뜻, 서약,
유언’이란 뜻으로 쓰였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들은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 언약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창 12: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12:2-3)고 약속하셨다.
또 “내가 이 땅(가나안)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하셨다. 이 약속은 피의 언약을 통해 확증되었는데, 당시 언약의 당사자들이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갔던 것과 달리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하나님만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다(창 15:17). 하나님 편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약속을 지킬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된 은혜의 언약이었다.
둘째, 언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 의해 성취되었다.
죽은 것 같은 사라의 몸을 통해 상속자 이삭을 낳게 하셨기 때문이다(롬 4:19).
셋째,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그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창 18:19).
넷째,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 아브라함 자신과 후손뿐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준다(창 12:3).
모세 언약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도달한 후 모세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고 하셨다. 이에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라고 대답했다. 많은 학자들은 모세 언약이 고대 중동에서 행해지던 종주간의 협정 형태를 띠고 있다고 본다.
종주간의 협정 순서는
첫째, 통치자와 그의 지위를 밝힌다(출 20:1-2; 신 1:1-5)
둘째, 그의 백성들을 위한 통치자의 업적들을 열거한다(출 19:4-5; 신 1:6-4:49)
셋째, 양자 간의 관계들을 다스릴 원리들을 진술한다(출 20:2-7; 출 21:1-23; 신 5-26장)
넷째, 순종해서 얻게 될 축복과 불순종으로 인해 얻게 될 형벌을 진술한다(출 23:20-33)
다섯째, 통치를 받는 자들이 언약을 받아들임을 기록한다(출 24:1-8; 신 31-33장)
이는 도덕적인 규칙뿐 아니라 시민법, 범죄에 대한 규정은 물론 종교적인 규칙을 담고 있다.
모세와의 언약은 비조건적이었던 아브라함과의 언약과는 달리 조건적이었다(창 12:2-3 참고).
즉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축복하시지만,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며 징벌하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다.
모세 언약의 특징은
첫째, 하나님의 뜻을 외적으로 보이는 글로 표현하여 성문화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전에 단편적으로 명령하셨다면(창 1:28; 9:6), 모세 때에는 뜻을 요약해서 율법으로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율법의 언약이라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려고 주신 것이었다(출 19:4-6).
다윗 언약 :
다윗이 성전을 짓기 원했을 때 하나님은 이를 거절하셨으나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한 약속을 주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윗의 이름을 세상에서 존귀케 만들 것이다(삼하 7:9)
둘째, 한 곳, 즉 예루살렘을 정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에 거하게 하여 다시 옮기지 않으며 대적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게 할 것이다(삼하 7:10).
셋째,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우실 것이다. 여기서 다윗을 위한 집은 다윗 왕조를 일컫는 것이다(삼하 7:11).
넷째,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전을 세울 것이고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의 나라를 견고케 할 것이다(삼하 7:13).
다섯째,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의 아비가 되고 다윗의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삼하 7:14).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시 89:2-4 참고)는 말씀은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나온다는 것으로, 신약에서 성취되었다(마 1장; 눅 3장 예수님의 족보 참고).
새 언약 :
새 언약은 예레미야(렘 31:31-34)가 언급했다.
예레미야 당시는 계속된 우상숭배와 죄의 결과로 인해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고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으로부터 굉장한 압박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유다 역시 곧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 속에서 예레미야는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는 새 언약을 선포했다.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새겨져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며(렘 31:33) 백성들의 죄가 용서받고 기억도 되지 않으리라(렘 31:34)는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언급했던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되며(렘 31:33),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한 언약이었다(렘 31:32).
새 언약은 AD 30년경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고 하셨다.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시작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었다.
이제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받고(행 10:43; 롬 11:27) 죄악이 기억되지 않으며 구원을 받는다(사 43:25; 요 5:24; 요일 1:9).
새 언약(New covenant)
옛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말한다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성취된 언약을 말한다(히 9:15).
옛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깨져 버리자(렘 11:1-9; 31:32) 하나님은 다시 그들과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렘 31:31).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렘 31:32).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새 언약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다(렘 31:33):
옛 언약이 돌비에 새겨졌고 언약 체결의 표시로 몸에 할례를 행했지만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시 40:8; 겔 11:19-20; 고후 3:3) 하나님을 알고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욜 2:28-32; 고후 3:1-3) 부패한 죄성과 불순종하는 심령의 요소들을 제거하여 자원하는 마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는 뜻이다(롬 8:2; 빌 1:6).
즉 하나님의 말씀을 돌판에 새기지 않아도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모두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게 되는 새로운 인격으로 재창조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옛 언약이 외적이고 임시적인 데 비해 새 언약은 내적이고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옛 언약에는 형벌을 담보로 강제적인 이행이 강요되었으나 새 언약은 심령의 변화가 생겨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백성들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렘 31:34):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이며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 되는 것이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생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 새 언약이었다. 약속 그대로 예수님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지 않으시겠다는 새 언약을 완벽하게 성취하셨다(마 26:28; 요 19:30).
한편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언약을 주도하신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속성과 공통점이 있다.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14-30
언약의 피(28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니라."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짐승의 피가 아담과 하와의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보호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세기 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피는 용서를 상징합니다(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의 자리에서 떡과 잔을 갖고 최초의 유월절의 의미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최초의 유월절은 애급에서 시작되었습니다(출애굽기 12:1-14).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떡을 그의 몸으로 포도주를 그의 피로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을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언약의 피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6절.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유로게오)
εὐλογέω 2127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복을 받다(갈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27절.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유카리스테오)
εὐχαριστέω 2168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사하다(마 15:36, 막 8:6, 행 27:35), 감사 기도하다(마 26:27, 눅 22:19), 감사하다(눅 18:11, 요 11:41, 고전 10:3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첫째,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
화체설은 성찬을 시행할 때 신부의 축사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이 살과 피로 변한다는 미신적(迷信的) 주장이다.
로마교회의 견해(transsubstantiatio)
로마
교회는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 의미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의 성례적 연합 이론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 표현에
따르면, 적절한 의미의 연합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징은 의미하는 것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길을 터주기
때문이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라”(hoc est corpus meum)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로마 교회는 말한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들의 본질은 변할지라도 속성은 그대로 남는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인 몸과 피가 임재한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성찬 제정의 말씀과 요한복음 6:50이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앞구절은 요한복음 14:6,
15:1, 10:9등과 같이 비유적인 표현임이 분명하며, 뒷구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성찬을 먹는 자마다 하늘에 가지만 성찬을
먹지 못하는 자는 누구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53, 54절)
로마 교회 자체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63절은 분명히 영적인 해석을 지칭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떼신 떡을 그 떡을 다루는 몸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해석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본질이 변화된 것으로 가정된 떡까지도 그대로 떡이라고
부른다(고전 10:17, 11:26-28).
이와 같은 로마 교회의 견해는 인간의 감각에도 맞지 않는다.
실체와 속성의 분리를 믿는
것과 물리적인 몸이 동시에 여러 곳에 임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체를 높이고 숭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 공재설(共在說, coexistentialism), 임재설
공재설은 마틴 루터가 주장한 것으로 떡과 포도주는 있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의 안에, 밑에, 함께(in, under, along with) 그리스도께서 임재한다는 주장이다.
공재설의 핵심은 성찬의 신비를 지켜내고 가톨릭의 미신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마 가톨릭의 미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천주교는 집례 하는 사람(신부)의 영적상태나 받는 사람(신자)의 신앙에 관계없이 성례전 집례와 동시에 은혜가 기계적으로 주입된다고 주장한다면, 루터는 받는 사람의 신앙(믿음)이 필수라 할 수 있다.
루터파의 견해(consubstantiatio)
루터는
화체설(transsubstantiation)을 거부하고 그것을 공재설(consubstantiation)로 대체했다.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아래,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한다고 한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 presence)한다고 주장한다.
루터파는 때때로 자신들이
성찬시에 그리스도께서 장소적으로 임재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장소적(local)이라는 단어를 달리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질이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말은 모든 다른 몸들이 같은 공간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디에나 있지 않다는 것, 예컨대 하늘에는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성이 자석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하고 영혼이 육체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질이 성찬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소위 입으로 먹는 것(manducatio oralis)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찬시의 빵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자들은 단순히 믿음을 통하여 주의 몸과 피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체의 입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자도 성찬을 받으나 그에게는 정죄밖에 안 된다.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와 별반 다른 것이 없는
견해이다.
이 견해가 속성의 변화없는 본질의 변화의 반복적인 기적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속성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채 본질만이 변화하는 기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이 내 몸에 동반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더욱이 이 교리는 주의 영광스러운 인성이 편재한다는 불가능한 교리를 가르치게 되는데, 이 점은 루터파들도 부인하는
교리이다.
셋째, 기념설(記念設. memorial)
기념설은 쯔빙글리(Zwingli, 1484 1531)의 주장으로 가톨릭의 미신에 대해 극단적 반대로 간 나머지 성찬의 신비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주장이다.
기념설 성찬에는 어떤 신비도 없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감상적으로 기념하는 정도로 끝난다.
애석하게도 상당수의 장로교가 칼빈이 아닌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르고 있다.
츠빙글리의 견해
츠빙글리의
성찬론에는 아주 결함이 많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고, 이와 같은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상징들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표(badge)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이 스위스의 개혁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일부는 그에게 있어서
성례란 단순한 기념의식으로서 신자들이 서약하는 표지와 상징일 뿐이라는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는,
보다 깊은 성찬의 의미를 전달하고 성찬을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하시는 일에 대한 인 또는 보증(pledge)으로 간주하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상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 간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가 생각했던 내용을 정확히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가 성찬론에서 모든 반지성적인 신비주의를
제거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성찬을 표현하려는 경향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종종 성찬은 단지 주의
죽으심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성찬은 인 또는 보증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같은 생각을 충분히
전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성례에서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보다는 신자들이 서약한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는 것과, 그를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을 동일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신자의 믿음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다만 그의
신성으로만,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 신자들의 이해에만 임재하실 뿐이다.
개혁파의 견해(praesentia spiritualis sive virtualis)
칼빈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츠빙글리의 성찬론을 반대했다.
1. 이 견해는 성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을 희생시키면서 신자들의 행위를
강조한다.
2. 이 견해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을,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의 사역 곧 (츠빙글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도 관계가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물론 육체적으로
그리고 장소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몸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으로서 임재하시며 또한 향유된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들과
구주의 전인격과의 신비적인 연합을 강조한다.
그의 표현은 아주 명료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에 임재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만 장소적으로 임재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감화는 실재적인 것이면서도,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신비적이요, 성령을 매개로 하여
전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받는 믿음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교(communio)를 가능케 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수찬자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이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로 들어올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감화를 수찬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Dabney는 마치 수찬자가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를 받아 먹은 것처럼 말한 칼빈의 표현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것은 분명히 칼빈의 표현에서 애매한 부분이다. 어떤 때는 문자적인 의미의 육체적인 몸과 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말은 성례적으로 곧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와 같은 칼빈의 견해는 우리의 신앙 고백서에서 발견된다(비교- 벨기에 신앙고백 35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5,76문;성찬집례모범). 이와 같은 칼빈의 교리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만 실질적으로(virtually) 임재한다는 것이다. Hodge 박사의 말을 빌리면 “십자가에 달려 희생된 구주의 몸이 가져오는 덕과 효과는, 자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른 도구로서 성찬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합당한 수찬자에게 임하고 전달된다”.
넷째, 영적 임재설(靈的 臨在設, spiritual presence)
영적 임재설은 성찬의 신비를 결코 상실시키지 않으면서 가톨릭의 미신을 정확하게 극복한 교리다.
그러므로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첫째로 표징에 대해서 주의를 게을리 하는 나머지 표징이 나타내는 신비를 표징과 완전히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둘째로 표징 자체를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나머지 그 속에 담긴 신비를 조금이라도 흐리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적인 성찬은 신비는 살리고 미신은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 돼야 한다.
그러면 신자가 성찬에 참여할 때, 어떻게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신비를 경험하면서 미신에 빠지지 않으면서 믿음에 유익을 얻을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는 영적 임재설이 가르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영적 임재설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거나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성찬의 신비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감사와 애통이 주를 이룬다. 예수님께서 재정하신 성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도의 영적 양식으로 삼도록 하는 신비한 예식이다. 칼빈은 성찬의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지적해준다.
“요컨대, 떡과 포도주가 육체의 생명을 지탱시키고 유지시켜 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혼에게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 고백과 직결된 성경구절이 바로 신명기 8:3의 말씀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의 이 말씀을 성찬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기적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자신이 광야에서 만나를 베풀었던 모세와 같은 메시아라고 스스로를 입증하셨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6:51)고 선언하신다. 광야의 만나는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고 선언하시면서 성찬의 의미를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라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을 양식으로 삼아야 하며, 결코 애굽의 양식(옛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구약의 성례로서 생명나무의 실과와 선악을 아는 실과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여기서 영적 임재가 강조된다. 성도는 손으로 떡과 포도주를 잡는 것을 통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을 묵상한다5). 믿음으로(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빵을 입에 넣고 씹으며 삼키면서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이 살과 피가 되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소화 할 때,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연합됨(신비적 결합)을 경험하게 된다. 성령께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에게 임재 하여(빵과 잔에 임재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에 연합시킴으로 믿음을 견고케 한다.
두 번째로 성찬이 말씀과 기도처럼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지려면, 성찬이 보이는 말씀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6). 성경이 읽는 말씀, 혹은 듣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성찬은 보이는 말씀이다. 보이는 말씀이란 글이나 음성으로 성도들에게 인식하도록 하는 성경과 다르다. 눈으로 봄으로써 복음을 인식하게 한다는 말이다. 성찬은 오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살과 피가 되는지 깨닫게 한다. 빵을 냄새 맡고, 입으로 맛있게 씹어 먹으며, 그 후에 삼켜 소화를 시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주린 영혼에게 구미를 당기게 하는 향기를 내며 먹음으로 즐겁게 소화를 하여 살과 피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만 하고 먹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깨닫게 한다. 칼빈의 주장을 들어보자.
“떡이 보는 것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먹어야만 몸에 영양이 공급되는 것처럼, 영혼도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깊이 참여하져야만 비로소 그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7)”
개혁파 교회는 성찬을 집례 할 때마다 설교를 통해서 성찬의 이러한 신비한 유익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찬의 유익이 보이는 말씀이 되어 성도들에게 말씀처럼 유익이 되고 궁극적으로 말씀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퍼킨스의 주장처럼 “성찬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8).
마지막 세 번째로 성찬이 말씀과 기도처럼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지려면 성찬을 통해서 성도가 한 몸이라는 점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에 같이 참여한다는 점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찬을 하실 때, 하나의 빵을 찢어서 나누신 것은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함, 혹은 연합됨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심을 믿사오며”라는 고백과 관련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때, 성도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임을 고백하며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심리적 하나 됨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임재 가운데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성령의 하나 됨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적 프로그램보다 탁월한 교회의 일치를 일구어 낸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자. 칼빈은 성찬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찬의 약속들이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은 그저 겉모양과 단순한 지식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을 진정으로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 했다. 성찬은 은혜가 성도에게 주어지도록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성찬의 은혜가 주어지는 방식은 퍼킨스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매번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열매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찬의 효력이 나타났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웬의 주장을 하나만 더 인용하자.
“우리가 [성찬] 규례에 가치를 별로 부여하지 않고 성찬을 통해 그리 유익을 얻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와 갖는 특별한 교제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하여 다른 말로 상징설(象徵說)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견해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입니다.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크리소스톰(Chrysostom or
John of Antioch),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andria),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등이
화체설을 주장하였고 중세 기독교의 제4차 라테란회의 (The Fourth Lateran Council, 1215)에서 화체설이 천주교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칼빈은
성만찬은 영적 행위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성찬의 실체(實體)요 기초로서 떡과 포도주라는
기구를 통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고 합니다.
칼빈의 성찬론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 제4편 17장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의 살과 피에도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거기에 현실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하는 실재설(實在說)을 주장합니다.
칼빈의 실재설은 루터의 공재설과 쯔빙글러의 기념설을
조화, 절충하는 뜻에서 주장한 학설이다.
<꼴찌박사>
건국대 조명환 교수의 신앙 간증
그는 어린 시절에 별명이 형광등이고, 고등학교때 반에서 꼴찌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수가 되고,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 학회 회장이요,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6.25때 월남하셔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에 한 여성이 45년 동안 그에게 매달 15달러씩 편지와 함께 송금해 주었습니다.
Edna Elson이란 분이었습니다.
편지 마지막에는 항상 세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God loves you”
“Trust his love”
“I pray for you”
나중에 조명환이 교수가 되어 Edna 할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 분은 미국 중부 네브라스카주에 작은 시골 마을 세인트 폴에 사는 독신여성이었습니다.
평생 비행기 한 번 타 본 적 없는 평범한 할머니였습니다.
조 교수가 너무 감사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얼굴도 한번 본 적이 없는 한국 학생을 위해서 45년 동안 편지와 후원금을 보낼 수 있으셨어요?”
그 할머니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보내 주셨잖아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나는 자네를 위해 지극히 작은 일을 한 것 뿐이라네”
그게 답의 전부였습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이 45년 동안 한 학생을 위해서 기도하고 진심을 쏟아 부었을 때 꼴찌를 세계적인 학자요, 훌륭한 믿음의 거장으로 키워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의 심정으로 주님께 나의 진심을 쏟아 부을 때 주님이 기뻐 하시고 귀하게 받으십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신 예수님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다는 것입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근심하며 하나씩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설마 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 아니지요?”
“제 얼굴을 보세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열 둘 중에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암묵적으로 지칭하시고 그가 회개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자기가 힘들어서 예수님을 떠나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팔아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마태복음 26:15절에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자 대제사장들과 거래를 합니다.
은 삼십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라고 합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삼백 데나리온이 넘은 향유를 깨뜨려 부어 드리는데 예수님의 제자인 자가 겨우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자 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는 결국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야고보서 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만찬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22-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때 찢겨지는 예수님의 살이 우리의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은 또 잔을 나눠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게 됩니다.
그 피는 우리의 진홍같이 붉은 죄를 눈 같이 희게 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13, 14절은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구약시대 유월절에 뿌려지는 짐승의 피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깨끗케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짐승을 잡아 검붉은 피를 뿌려도 죄로 오염된 영혼과 양심을 깨끗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죄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거대한 죄의 스모그로 가득하기 때문에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려주십니다.
그 피는 능히 우리의 죄를 씻고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8, 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했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예수님의 보배피만이 우리를 죄악된 행동에서 구원하시고 거룩한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영국의 폴 리치 목자가 마태복음 9장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의 돈을 500만원이나 훔쳤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발각되자 친한 친구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는 그때 당시는 모면했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했다는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자신이 가룟 유다와 같은 자라는 양심의 송사에 시달렸습니다.
또 한 여자와 동거하며 무절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영국의 명문대 법대를 나온 변호사였지만 자신의 죄문제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Paul, your sins are forgiven”
“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가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을 때 죄의식과 수치심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양들을 섬기는 훌륭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흘리신 피로서 언약을 맺기 원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니라” “거룩한 신부가 되었느니라” 라며 언약을 맺으십니다. 구 언약은 행위언약이요, 율법언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언약은 은혜언약이요, 믿음언약입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이제 주님과 나의 관계는 피로 맺어진 생명의 언약관계입니다. 누구도 이 언약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 할 때 언약을 맺습니다.
옛날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거울을 반으로 쪼개서 언약의 징표로 삼았습니다.
화살을 분질러서 의형제의 언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새끼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서 언약을 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온통 다 쏟아서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은 피의 언약이 때문에 변개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살을 떼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와 생명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제 주님과 나의 관계는 피로서 맺혀진 언약관계입니다.
내 안의 죄를 해결하는 떡과 잔으로 받아들이자!
인간은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관계 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관계를 떠난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관계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발명가인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입니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걸린 최후의 만찬(1498년)은 불후의 명화 중 하나죠.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 1498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 화가와 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도저히 그 친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분노가 타올랐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복수를 결심하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배신자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 친구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다빈치가 작품에 그리스도를 그리려 하자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다 결국 붓을 던져 버렸죠.
뒤늦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친구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은 자신의 복수가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친구에 대한 복수심이 타오르는 한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빈치는 주님 앞에서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허물을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 유다의 얼굴에서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떠오르지 않던 주님의 형상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은 그렇게 그려졌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용서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한 종의 비유가 바로 용서의 가치에 관해 말합니다.
자신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무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1달란트=60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에 빚진 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대속의 은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6).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의로우신 존재여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가 놀라운 은총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남을 용서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나를 용서하는 행위입니다.
용서의 은총 안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스가랴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히브리서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언약의 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면서 떡을 떼어 축복하시고,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언약의 죽으심" 이고,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 입니다.
언약의 피란 원죄의 모든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이며 사탄의 머리를 깨트리고 승리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약속의 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언약으로 잡은 자는 반드시 그 영혼과 인생이 저주에서 나오며, 사탄을 꺾고 정복할 수 있고, 영원히 하나님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아로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삼중직을 갖고 오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삼중직을 갖고 오신 예수님께서 그의 생명을 속죄제물로 바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갖고 그의 몸과 피를 나눠주므로 언약관계를 확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사람은 온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언약으로 우리들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약은 애급에서 나올 때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힘으로 애급에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약속에 따라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애급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언약의 피에 참여하므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처럼 오늘날도 주님께서 세우신 언약에 따라 떡과 잔을 받는 백성들의 믿음은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즉 피는 곧 생명이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피라는 방법을 쓰셨다는 뜻이며, 피를 특별하게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피는 음식이 아니라는 뜻이며, 히브리서 9:22에는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이 피로 인하여 생명을 유지하도록 만드시고, 그 피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을 설명하고, 거기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창세전의 계획이었다는 뜻 입니다.
출애굽기 24:1-11 사이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피를 반으로 나누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려 하나님의 언약서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을 선언하면서 그 피를 하나님의 언약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피로서 하시고, 창세기 3:21부터 이 언약의 피 제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이 언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언약의 피의 효과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믿음의 시대입니다.
언약의 피 안에서 해방을 누리고, 정복을 하고, 하나님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이 언약의 피가 역사하고, 사탄이 무너지고, 영적 문제에서 해방이 되며, 인생의 많은 육신 문제에서도 해방이 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에 대한 간증도 있고, 또 그것을 기념함으로 인해 내 자신을 다시 돌아 보는 의미도 있기에 어떠한 주장이 더 옳다고 얘기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어떠한 주장에 편승함으로 인해 앞서 말한 본질에서 멀어질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성찬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소중한 예식이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떠나, 자신이 믿음과 회개로 죄사함 받았는가, 거듭난 자로서 말씀을 지키고 자신의 죄를 멀리는 자신을 살피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아 볼 수 있는 것이 성찬 예식이다.
성찬식의 중요한 의미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날(기간)은 부활절 (구약의 유월절-종려주일, 무교절 기간), 성령강림절 (구약-칠칠절), 그리고 추수감사절 (구약의 초막절, 실제 미국의 추수감사절기 보다 한국의 추석이 절기상 더 가까움)로 볼 수 있다.
* 성경에는 크리스마스 (명확하지 않은 예수님 탄생일)를 기념하는 내용은 없으며, 또 사순절 (부활절 이전 40일 기간)에 대한 내용도 없다. 또한 부활절을 영어로는 "Easter" 라 표현하는데 이는 다산의 상징인 이스터 여신을 이르는 말로 (그래서 부활절에 계란을 주는 행사가 있다), 이것은 이교도적인 표현이며 정확한 표현은 "Resurrection day" 가 맞다.
그러나 위의 기념일들 외에 예수님께서 특별히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직전의 만찬에서 알려 주신 '성찬' 이다. 따라서 믿음 있는 신앙인에게 있어 성찬은 무엇 보다 중요한 의식이다.
그러나 이 성찬도 현재는 본질을 많이 잃어 버린 것 같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성찬의 핵심은 떡 (예수님의 몸)과 포도주 (예수님의 피) 이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실때 있었던 째찍 (살점이 떨어져 나감)과 가시면류관 (피를 흘리심)이 예수님의 살과 피흘림으로 죽으시는 과정을 표현한다.
따라서 바울은 떡과 잔이 곧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뜻하므로 이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도행전 2:41-42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초대교회 시대에는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모일때 마다 교제 (나눔)와 떡을 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함) 쉬지 않았던 것이다.
마태복음 26:26-28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성찬이 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이것이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의 징표임을 강조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신다는 것과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언약임을 또한 알려 주고 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따라서 성찬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의 징표임과 동시에, 그 떡 (예수님의 살)을 먹은 자들은 영생한다는 징표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찬은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여기서 현대 교회의 문제가 크게 나타난다.
교단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세례 받은 교인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교회에서 세례 받은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참여한, 다른 말로 말하면 거듭난 사람들인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참여하여 구원 받아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27-3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성찬에 합당치 않은 자가 참여 했을 때 (구속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지 않은 사람들, 죄의 문제를 매우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 이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이며 이로 인해 자신의 죄를 먹고 마셔 오히려 상황이 악화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건강한 교회라면 세례를 남발하여 구원 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성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옳은 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미 구원을 행위로 대치하려는 사탄의 시도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세례로 구원을 갈음하거나 믿음의 사람으로 갈음하려는 모습도 바울 서신에서 목격되고 있다.
고린도전서 1:14-15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성찬의 또다른 의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의 온전한 몸이 되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검토이다.
고린도전서 11:26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실 때 하나의 떡을 떼어서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하나에서 구원 받은 성도 하나 하나가 나와 다시 교회의 몸을 이룬 다는 것을 상징한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따라서 성찬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살 (떡)을 먹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는 교회의 몸을 이룬다는 것을 뜻하며, 피 (잔)을 마심으로 인해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교회의 성도로서 영생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찬은 교회의 몸을 이루는 구원의 증거 (사실 사람이 판단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므로, 적어도 예수님을 알아가려는 열망이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가 나타나는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의 반석은 예수님 이시며 (머리로도 표현됨) 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위에 세워진 교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들의 모임)를 통해 사탄의 권세를 결국 꺾고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세워질 것임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성찬은 개개인에게는 구원을 날마다 기념 (이루어 감)하는 것이며 이는 혼자 이루어 갈 수 없음 (혼자 하는 신앙은 반드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을 깨닫고 성도 들과 함께 교회의 몸의 되어 음부의 권세를 이기겠다는 결단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성찬은 개인구원과 교회를 통한 구원의 징표임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성찬 마저도 때로는 교리 논쟁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카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하여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한다거나 (신비주의적 요소를 가미),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통해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도 하며 (예배 시에도 주님의 임재가 있으므로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음, 그러나 항상 그렇다고 볼수도 없음),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여 다시 성찬을 기념하는 것으로의 의미가 있다 (일반적이겠지만 지나치면 행사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 지지 않을 수 있음)고 말하고 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에 대한 간증도 있고, 또 그것을 기념함으로 인해 내 자신을 다시 돌아 보는 의미도 있기에 어떠한 주장이 더 옳다고 얘기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어떠한 주장에 편승함으로 인해 앞서 말한 본질에서 멀어질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성찬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소중한 예식이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떠나, 자신이 믿음과 회개로 죄사함 받았는가, 거듭난 자로서 말씀을 지키고 자신의 죄를 멀리는 자신을 살피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아 볼 수 있는 것이 성찬 예식이다.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 구약 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체(要諦) 죄용서를
얻게 하는 대속 제물의 '피'였다.
실로 피 없이는 하나님께 속죄받을수 없었다(히 9:22)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짐승으로서의 대속 제물은 임시적이요, 단편적이며, 불완전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인간을 죄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제 주께서는 그 대속제물의 궁극적 완성자요 영원한 표상으로서 친히 십자가 제단에 오르시려 하신 것이다(요일 1:7).
정녕 당신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근거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 히브리 관용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즉 예수께서 어떤 특정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으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지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죽음은 본질적으로 세상 모두를 위해서 죽었다는 의미이다(20:28).
그러나 이 죽음의 선한 영향력이 각자의
믿음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흘리는 바'에 해당하는 원어 '에크퀸노메논'은 현재수동태
분사를 취한 단어로서 당신의 대속적 죽음이 확정적 사실이며, 지금부터 영원토록 흘려질(상징적임) 당신의 피흘림으로 인해 그 대속의
효력이 영속할 것임을 드러내고 계신다.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예수의 이같은 선인은 구약의 출 24:8; 렘
31:31-34; 슥 9:11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예레미야 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특히 바울과 누가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함로써 렘
31:31-34의 내용과 긴밀히 연관시키고 있다(눅 22:19; 고 전 11:25).
한편 본문에 언급된 '언약'(테스디아데케스)이란 말은 '둘'(디아) 사이에 무엇을 '세우는 것'(티데미), 곧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개념에 있어서 이 언약(계약)은 피흘린 생명을 근거로 맺는 그야말로 전존재론적 약속을 의미한다(창 24:5-8;
히 8:6-13).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 곧 십자가 회생을 담보로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계신 것이다.
즉 그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맺었던 '옛 언약'의 시대를 마감하시고(출 24:5-8; 히 8:6-13),
이제 그 옛 언약이 상징하는 바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온 인류와 교회 앞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셨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여 이 예수의 흘린 피를 마시는 자는 개별적으로 내밀(內密)하게 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연은 없다
우주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일어나는 것은 전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필연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유월절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겠느냐고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답을 주셨는데, 성안에 들어가 아무에게나 말하면 그가 준비할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정말로 그렇게 하였더니 이미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있었고, 아무에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했더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고, 하나님 아니면 절대로 못할 일입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 14:13-15과 누가복음 22:10-13 에는 ‘너희가 성내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 가서 그 집주인에게 말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셨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성내에 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딱 만나게 시간이 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오차 없이 그를 만나고 그를 따라 가서 모든 것이 주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도 이렇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있는 어려움이나 기쁨이나 슬픈 일이 전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필연적으로 되어진 일이며, 이런 다양한 것을 통하여 우리 인생을 종합적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전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 대하여는 구약에 기록된 대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우연은 없습니다.
전부 필연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많은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하고, 하나님의 중대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여야 하고 우연은 절대 없고, 항상 반드시 일어나야 할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절대적인 것 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려움 중에 있어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당연 필연 절대의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더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가 오히려 역전의 발판이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히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날 것이 일어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리고 약속의 그 날, 승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록된 대로 가셨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도 기록 된 대로 가시는 데 말입니다.
단지 우리의 것에 대한 것은 성경에 직접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의 기록된 계획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언약을 잡으며, 하나님의 소원에 인생을 맞추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연은 없고, 그리스도의 보혈은 언약의 보혈입니다. 반드시 육신적 저주에서도 해방될 것이며, 음부의 권세는 절대로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요, 우리에게도 24시 하나님을 누리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언약으로 잡고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언약으로 고백하는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피가 사용된다.
제사에서 피는 죄를 속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히브리서 9:22) 제사장이 제단에 피를 뿌리므로 정결케 하는 의식을 수행했다.
제사를 드리러 온 자가 자기가 가지고 온 희생제물이 희생되어 그 피가 제단에 뿌려졌을 때 그로 인해 코를 진동하는 피 비린내를 맡으며 자신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깨달았다는 것은 지난 번에 살펴 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피 뿌림이 정결케 하는 수단이 되었을까? 피는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런 기능을 하는 것일까?
법규에 합당한 음식 – 코셔푸드
‘코셔푸드’는 레위기 11장 1절-43절, 17장 10절-16절과 신명기 14장 3절-21절 등에 기록된 음식규례에 따라
만들어진 음식을 말한다.
구약에는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분하고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은 반드시 정결한 동물에서
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포함된 음식법규를 ‘카샤룻’이라고 하는데 ‘코셔’는 ‘적당한’또는 ‘합당한’이란 뜻으로 이런 법규에 합당한 음식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레위기 17장 10절의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라는 대목이다. 정결한 동물이라도 피와 함께 먹지 말라는 규정이다.
그래서 동물을 도살할 때 ‘카샤룻’ 법규에 따라 행하도록 교육되고 자격이 주어진 종교적 도살자 ‘쇼헷’에 의해서 도살된 동물만 코셔 인증을 받을 수 있는데 ‘쇼헷’은 도살한 동물에 소금을 뿌려 그 삼투압을 이용해 가능한 한 피를 모두 제거한다.
피에 관한 성경적 의미
성경에서 피 채 먹지 말라는 규정의 이유는 이어지는 레위기 17장 11절과 17장 14절에 기록되어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피에는 속죄의 기능이 있는데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피는 동물의 생명을 의미한다.
음식규정에서 동물을 음식으로 취할 때 피를 제하고 먹으라는 것은 그 동물의 육체(고기)는 음식으로 취하지만 생명은 취하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 가지고는 이미 그 동물의 생명을 취해서(도살해서) 음식으로 만들었는데 피 채 먹지 않았다는 사실로 생명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더 깊은 성경적 고찰이 필요하다.
네페쉬
레위기 17장 11절의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는 말씀 중 ‘생명’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네페쉬’이다.
이 ‘네페쉬’라는
히브리어는 레위기에서는 생명으로 번역되어 있고 창세기 2장 7절(“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에서는 생령으로 번역된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
히브리어 ‘네페쉬’라는 단어는 존재, 또는 육신과 정신, 또는 영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넓은 의미로 ‘네피쉬’는 영혼이 포함된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한 생명체를 바라볼 때 그 외향으로만 알지 않고 식성, 성격, 태도 등(사람에게는 인격이 포함되지만)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으로 그 존재를 인식하는데 이러할 때 이 ‘네피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물을 피 채 먹는다는 것은 그 동물의 존재 전체를 취한다는 의미가 되며, 비록 하나님께서 홍수사건 이후 육식을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을 음식으로 취하면서도 피 채 먹지 않음으로 그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생각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속죄를 위해서는 한 생명의 영혼이 포함된 존재 전체로서만이 가능하며 이는 예수님의 육체만이 아닌 예수님 전체로서 우리에게 속전으로 드린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의 의미
여기에서 우리는 성만찬에 포함된 의미도 함께 살펴 볼 수 있다.
성만찬에는 떡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다.
떡은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하며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곧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마태복음 26:26-29,
고린도전서 11:23-25).
떡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전체로서의 존재에 함께 하나가 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며 모세와 세운 구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지 못함으로,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깨져버린 구 언약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신 언약에 참여한 자라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모세를 통해 세운 첫 언약(옛 언약, 구 언약)에도 생명 전체의 존재로서의 피가 언약에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9: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송아지나 염소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세운 언약에 참여한 자이며, 속죄를 위해 영원한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자이다.
언약의 피
히브리서 9:16-22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대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가 외치고 있는 내용이라고 믿기에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것이 곧 십자가를
믿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은
분명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십자가를 생각한다고 해서 모두 신자라 할 수 없고
구원받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믿게 되는데 있어서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그것을 해결함으로 십자가를 믿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즉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그만큼 여러 가지의 문제를 안겨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에게 요구한 것은 내가 뜻하고 있고, 목표하고 있고, 소원하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로서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나의 포부와 욕심을 포기하지 않은 채 십자가를 외치는 것은 거짓임을 깨닫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한때 나에게는 크나큰 고민거리였던 것이고 지금도 때때로 나에게 고민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주 쉽게 받아들이고 믿는 있는 분들을 보면 의아스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고, 저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기에 이리 차이가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내려지는 결론은 ‘걸림이 될 만한 부분을 모두 빼 버린 십자가이기에 그렇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나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너는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네가 바로 형벌을 받고 죽어야 할 존재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 외침을 듣지 않습니다. 단지 ‘구원’이라는 외침만 들으려고 함으로써 자신의 악함은 외면한 채 십자가만 말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는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외치는 예수님의 피의 소리를 들음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의 소리를 듣지 못함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무작정 ‘믿자 믿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맹목적이 믿음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주님의 외침을 들으며 믿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나는 예수 믿고 있다’라는 답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나는 상관없음’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신자는 항상 자신이 믿음 없는 존재임을 길이 자각하고 주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피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피를 말하면서도 피가 중심이 아니며 관심 또한 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8-22절을 다시 보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사세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말한 후에 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 이 의미를 깨닫는 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4:7절을 보면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준행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모세는 어떻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말씀을 들을 교인들이 말씀에 감동이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열심히 지켜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교인들의 반응에 감동하면서 무척 고무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 말씀에 은혜를 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진정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피를 뿌린 것입니다. 언약서에 피를 뿌린 것은 없지만 본문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모세가 행한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모세처럼 피를 뿌리는 것이 될까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피를 뿌린 것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이유가 없이 피만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말씀을 낭독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피로써 죄사함을 얻었으니 죄사함을 받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은 자답게 살게 하기 위해 내려진 하나의 생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피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에서 자기 구원만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피는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단순히 ‘너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는 죽은 자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책에도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죽은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피’
언약은 이스라엘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언약을 기어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약의 피 앞에서 우리의 실천 의지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 실천 의지까지 몽땅 무너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살았을 때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 채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는 그 효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왕성한 활동과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러한 우리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선포하게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외쳐야 합니다.
성찬, 언약의 피
출 24:1-8 / 마 26:26-28
[성례에 대하여]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의 거룩한 예식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라고 명령하신 것 예식입니다.
세례는 마 28장(18-20절)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성찬은 고전 11장(25-26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베푸시면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증표로 주신 것입니다. 즉 이미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것이지 이것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의 표증입니다.
성례와 말씀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공통점 |
차이점 |
1. 제정하신 분이 하나님 2. 중심내용은 그리스도 3.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임 |
1. 말씀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성례는 그렇지 않음 2. 말씀은 믿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보강해주기도 하지만 성례는 믿음을 전제로 공급되는 것 3. 말씀은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반면 성례는 오직 교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만 제공됨. |
성례의 필요성
성례는 죄인의 구원에 절대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으로서 우리에게는 의무적인 것이다.
성례의 유익 – 은혜의 수단
1. 눈에 보이는 역할을 통해 성령께서 믿음으로 받는 백성들에게 믿음의 보강을 허락하신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묵상하고 기억하게 함으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다.
이상 <김홍전, 성례란 무엇인가> 참조.
[출애굽기 시내산에서의 언약식] 출 24:1-11
언약체결식으로서의 피뿌림(3-8)
유월절에 행하여진 피뿌림이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20-23장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규범,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 규범을 제시하신 후 이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우고 단을 쌓게 한 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셨다. 이 과정에서 모세는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나누어 담고 반은 그 단에 뿌렸다. 그리고 언약서를 낭독하여 백성들이 듣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그 내용을 다 들은 후 그 율법을 승인한다. 모세는 피의 절반을 백성들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로 선언하였다.
‘언약의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의미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언약체결자들이 짐승을 반으로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이유는 언약을 지킬 것이라는 맹세의 서약이다. 만약 언약을 어길 경우 그 짐승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려 죽은 것처럼 언약 위반자 역시 그와 같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의식이었다. 즉 죽음으로써 언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서로 굳게 세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를 취하여 반은 하나님의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에게 뿌린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선언하면서 죽음을 담보로 맺은 언약식임을 알려준다.
유월절의 피뿌림은 이스라엘을 그동안 억압하던 바로의 세력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이 자유인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새생명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짐을 상징한다.
반면 시내산에서의 피뿌림은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각성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문화를 세워 새로운 나라를 구현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언약의 표였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피뿌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기 위함이었고, 시내산에서의 피뿌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신앙 고백의 의미가 있다.
공동운명체로서의 이스라엘(9-11)
당시 사회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들간에 원수가 아닌 인생의 동반자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내었다. 더 나아가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유업을 받을 사람들임을 상징하는 까닭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월절 음식은 이 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과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고백한 사람만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이었다.
반면에 시내산에서 언약 체결식이 끝난 후 이스라엘을 대표한 모세와 제사장들, 70명의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음식을 먹은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월절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어 장차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날을 소망했다면 시내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뵙고 그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된 것은 유월절에서 소망한 하나님의 유업을 받았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유월절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만 베풀어 주신 잔치였다. 그들이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가지는 교제의 고유한 의미이다.
이처럼 시내산에서 완성된 유월절을 체험한 그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 음식을 먹겠다는 것을 소망하고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기업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즉 이미 받은 기업을 실제로 들어가 누리고 건설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이미 그들은 헌신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공동 운명체로서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민족 공동체였다.
결국 공동 식사는 하나님 앞에서 친밀감과 기쁨을 누리는 축제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현존하심 안에서 그분의 은총을 깊이 체험하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해를 다짐하는 식사이다. (성찬식의 예표)
이런 언약체결식에서 행해졌던 언약의 피는 결국 언약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백성들에게는 어겼을 시 죽음과 심판을 상징하는 피가 된다. 그런데 그 속에 흐르는 참된 의미는 유월절에서 보여주는 어린 양의 피로 시내산에서 뿌려지는 언약의 피가 완성할 그 무엇을 비추고 있다.
[마태복음 유월절 만찬에서의 언약의 피] 마 26:26-2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유월절 식사를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시작되는 예수님의 말씀은 최초의 만찬식이 된다.
우리가 흔히 이 자리를 최후의 만찬으로 기억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 자리는 최초의 만찬이다. 즉, 예수님께서 새롭게 제정하시는 새언약의 비준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제자 중 열둘을 택하사 그들을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 칭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 지실 일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라 하셨다.
유월절.. 출애굽 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신 놀라운 사건.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가는 유월을 기념하며 절기가 시작된다. 이 절기를 행할 때마다 자녀들이 식사 때마다 물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 해 준다. 그리고 일년, 이년, 십년, 백년, 천년이 지나면서 유월절은 실패를 거듭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제사를 약속하셨다. 다시는 거듭해도 되지 않을 단번의 제사 말이다. 이 유월절 식사, 의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까지 약 1400-1500년 동안 행해오던 의식이었다.
유대인들이었던 사도들도 이 절기만 되면 부모님과 둘러앉은 식탁에서 출애굽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떤 사도는 누군가에게 유월절 식탁에서 출애굽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유월절 식탁에서의 의식은 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식사 자리를 준비하여 둘러앉아 있다.
제자들은 이제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의 입을 통해 듣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충격이다.
유월절 식사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하신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나누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전통을 따라 1400여년동안 전해오던 출애굽의 말씀,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떡을 몸으로, 잔을 피로 말씀하고 있다. 유월절을 따라 예수님께서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는 먹지 아니할 최후의 만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구원을 이룬 단번에 제사를 드리게 될 예수님께서 최초의 만찬을 이루고 계신 장면이다.
유월절 마지막 식사에서 행해졌던 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일과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며 다툼이 일어난 일도 있다. 참 복잡한 식사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 떡과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만찬은 폭풍 속의 고요함처럼 잔잔함 속에 1400년의 전통이 가리키던 어린양, 그림자였던 그 의식에 참된 주인이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자신의 몸과 피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뿌려지는 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언약 체결을 염두에 두시고 자신의 피를 가르키면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새언약으로서의 피]
시내산에서의 언약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눅 22:20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말씀과 연결이 된다.
렘 31:31-34
시내산 언약은 개혁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내산 언약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언약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죄인인 살람이 문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는 사람에 의해서 지켜지는 언약식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피로 마음에 새겨질 새언약의 피로 완성하시는 것이다.
히9:11-22
이런 의미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고전 11:23-26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기념하다’는 헬라어 ‘아남네시스’는 ‘회상, 기억’을 의미한다. 제자들을 두고 십자가를 지실 일을 앞두신 주께서 그동안 제자들에게 당부하며 설명했던 성령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의 시간 사이에 살아야 하는 제자들에게 성찬식을 몸소 행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억할 것을 일러 주신 것이다.
이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총애를 더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성찬식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감사를 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에 다시 한번 감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표지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성찬식을 행할 때 떡과 포도주가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는 것이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는 않지만 성찬식을 통해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성찬식에 보여주는 바 오직 우리의 죄를 사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를 부르신 그 사랑은 확인하는 자리가 성찬식이다. 나를 부르신 예수님의 십자가, 그 찢으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억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성찬식의 자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을 앞두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고전 11:27-29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마시면서 다시 감사드리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이 되고, 미래에 다가올 주님의 나라, 그 영원한 나라가 오늘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을 기념하는 성찬식은 단순히 머리로 기억하는 자리가 아니라 현존하시며 실재하시고,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자리가 된다.
그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교육으로 남아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지금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게 된다. 또한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배우면서 머리 속에 기억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승리하신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하며 기억하게 된다.
새언약의 피로 새롭게 제정하신 예수님의 선언, 그 언약의 피는 언약을 지키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임한 죽음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죽음과 심판을 대신 지신 완전한 대제사장이며, 완전한 속죄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성찬식을 행하여 기념할 때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 주의 죽으심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왜 피를 흘리셨는지, 왜 제물이 되셨는지 묵상하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
2. 공동 식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친밀감과 기쁨을 누리는 축제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하심 안에서 그분의 은총을 깊이 체험하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해를 다짐하는 성찬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일은 우리를 주님의 몸과 피로 하나되게 하심에 감사하면서 서로를 용납하고 안아주며 용서하고 이해하는 자리로 가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며, 우리의 사랑이 된다. 그것을 잊고 살아가다가도 성찬식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게 되고 서로를 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억하면서 현재 우리가 한 몸으로 다시 서게 한다. 지금 여기 함께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이 의식으로만 남아있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기념하라고 했으니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깊으신 의미를 삶 속에서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지 우리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님께 더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살과 피를 기억하면서.
성도들을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세상을 더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더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놀라운 살과 피를 기억하면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1-13
저를 기념하라(13절)
* 관점(觀點, View of Point)을 바꾸라!
요셉의 관점
다윗의 관점
정탐꾼의 관점
욥의 관점
스데반의 관점
예수님 시대의 장례문화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떠할까?
그들은 우선 죽음을 ‘생명의 끝’으로 보지않는다.
영혼은 ‘죽음’이라는 길을 통해서 그 사람의
몸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장례 문화 속에는 내세에 대한
가치관이 깊게 녹아있다.
죽음 이후에도 그들은 다른 장소, 즉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집에서 여전히 사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크리아(Kriah)
사람이
죽으며, 죽는 순간부터 ‘크리아’(Kriah)라고 불리는 애곡 의식이 있었다.
매장하러 나가기 전까지 옷의 윗부분을 찢어가면서
슬퍼하고 목소리를 높여 곡하는 것이다.
임종의 순간을 지켜보지 못한 유족들도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하는 순간 옷을 찢어가면서
애곡한다.
‘크리아’에 의무적인 사람들은 배우자,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형제, 자매이다.
성경에서
크리아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해서 슬퍼하며 애통하였다(창 23:2).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이 악한 짐승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하여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애통하였다(창 37:34).
다윗은 사울 왕과 그의 친구 요나단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 옷을 찢었고 함께 있었던 사람들도 옷을 찢었고 저녁때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였다(삼하 1:11,12).
욥은 자녀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욥 1:20).
오네인(Onein)
가까운 가족 관계 즉 부모, 배우자, 형제, 자매, 자녀가 죽으면 그 가족은 매장 전까지 오네인(Onein)이 된다.
오네인은 시체를 씻고, 수의를 입히고, 시체를 매장할 무덤을 준비하는 등의 장례절차를 책임져야 한다.
타하라(Tahara)
타하라(Tahara)는
매장 전에 시체를 씻는 의식이다.
시체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기름을 바르기도 하고, 물로 씻기도 한다.
씻을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어야 하고, 입은 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다.
시체는 깨끗한 천으로 감싼다.
이런 ‘타하라’ 의식을 사도행전의
다비다의 죽은 사건에서 볼 수 있다.
“다비다가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행 9:37)
타크리킴(Tachrichim)
시체를
씻었으면 그 다음으로 타크리킴(Tachrichim)을 행한다.
‘타크리킴’은 시체에 입히는 수의를 말한다.
그 수의는 100%
아마(Linen)로 만들어 진다.
하얀색을 사용하는 이유는 죽은 이의 순결과 품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죽은 이의
몸을 매우 품위있게 다루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쌌다(마
27:59).
나사로의 경우는 얼굴은 수건에 싸였고, 손과 발은 베로 감싸있었다.(요 11:44)
탈무드에
따르면 이렇게 하얀 세마포로 싸는 이유는 부활 사상에 기인한다.
즉 하얀 세마포를 입고, 깨끗한 양말과 신발을 신고, 손과 발을
싸고 누이는 것은 메시아가 오실 때에 그를 따라갈 준비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메시아가 오실 때에 시체가 일어난 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 26:19).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겔
37:13)
이런 사건이 예수의 죽음의 순간에 일어났음을 마태는 전하고 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상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이집트에서는 시체를 미이라로 만든다.
미이라로 만드는 것은 방부처리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시체를
방부 처리를 하지 않는다.
그냥 깨끗이 씻고 하얀 천으로 감싼 다음 관에 넣어서 매장지까지 운반한다.
아브넬이 죽었을 때, 이렇게
관에 넣어서 운반하는 상여를 다윗 왕은 따라갔다.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상여 가까이에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다(눅 7:14).
누가복음 7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예수님께서 살려주시는 사건은 상여를 매고 매장지로 가는 중에
일어났다.
상여에는
피리 부는 자가 있었고, 애곡하는 자들도 있었다(마 9:23).
피리 부는 자들과 애곡하는 자들은 모두 직업적인 사람들로 장례를
위해서 고용된 사람들이다.
피리 부는 자들은 맨발로 상여 제일 앞에 서서 상여꾼들을 인도한다.
피리 부는 자들 뒤로는 역시
맨발로 애곡하는 여인들이 따른다.
여인들의 하는 일은 매우 슬프게 우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여인이 슬피
울며 곡하는 소리에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울게 된다.
이런 모습을 예레미야서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국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렘 9:17,18)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게 할 만큼 이들의 우는 기술은 뛰어났고, 그 기술은 그녀의 딸에게 혹은 그 직업을 갖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수되었다.
“너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렘 9:20)
미쉬나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적어도 두 명의 피리 부는 사람과 한 명의 애곡하는 전문적인 여성이 있어야 함을 기록하고 있다.
매장
예수님
시대의 매장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인데 주로 부자들이 사용하였고, 또 하나는 땅바닥을 파서
만든 무덤인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부랑자들이 사용하였다.
구약에서는 이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평민의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고(열하 23:6, 렘 26:23), 기드론 골짜기에 있었다.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 무덤에는 돌 선반 위에 시체가 놓여진다.
엄청난 부를 갖고 있는 사람의 경우, 석관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로쿨리’(Loculi)라고 불리는 조그만 동굴에 시체가 놓요진다.
그리고 바위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는다.
쉬바(Shivah)
쉬바(Shivah)는
7이라는 의미이다.
애도자들은 죽음이 발생되고 난 이후 7일 동안 슬퍼한다.
이 7일 동안에는 일, 목욕, 화장, 성관계 등을
금하고 있다. 사울 왕이 죽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를 위해 장사를 지내고 7일 동안 금식하였다(삼상 31:13).
야곱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요셉은 그를 위해서 7일 동안 애곡하였다(창 50:10).
쉴로쉼(Sheloshim)
쉴로쉼이라
하는 것은 30이라는 뜻이다.
쉬바를 마치고 난 이후로 30일을 애도하는 것이다.
쉬바를 마치면 애도자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쉬바 이후 30일 동안에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정들이 있다.
30일 동안 수염이나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고,
어떠한 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
30일이라고 하는 숫자는 아론과 모세의 애도에서 찾을 수 있다.
아론이 죽자 이스라엘 온
족속이 삼십일을 애곡하였다(민 20:29).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위하여 30일을 애곡했다(신 34:8).
이렇게 쉴로쉼을
지키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형제, 아들, 딸이다.
2차 매장
매장
즉 시체를 무덤에 묻고 난 이후 가족은 1년 뒤에 다시 그 무덤으로 간다.
굳이 1년이라는 기간을 두는 이유는 그 1년 동안
시체가 완전히 부패하기 때문이다.
몸이 부패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뼈들이다.
가족은 그 뼈들을 모아서 ‘오슈아리’라고 하는
조그만 석회암 상자에 넣는다.
이런 의식을 가리켜 2차 매장이라고 부른다.
예수님
시대의 장례 문화와 구약 시대의 장례 문화를 비교해 볼 때, 가장 크게 차이 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구약에는 이
‘오슈아리’라는 상자가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매장 문화에 있어서 아주 특이한 문화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4:3-9, 누가복음 7:36-39, 요한복음 12:1-8
사복음에서 모두 기록된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들이 듣고 기억한 내용들은 잘못된 정보들로 혼합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이었고 그녀는 죄가 많은 여자 즉 "창녀" 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와 같은 것들을 바르게 정리해야 합니다.
장소
마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6) 향유 한 옥합 머리에 부으니 좋은 일 내 장사를 위함 저를 기념하리라
마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3) 향유 나드 한 옥합 머리 300데나리온 좋은 일 장사를 미리 준비 저를 기념하리라
누가 바리새인의 집 죄인인 한 여자 향유 한 옥합 발 머리털로 씻고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누구인줄 알았으리라
요한 베다니 마리아 향유 나드 한 근(330g) 발 머리털로 씻으니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마태, 마가, 장소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누가는 바리새인의 집
마태, 마가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 왕, 선지자, 제사장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과 같다
누가, 요한은 발에 향유를 부었다. - 장례를 위한 것과 같다.
유대 풍속은 신부아 결혼을 위하여 반드시 준비해야 할 혼수품 향유는 첫날밤 신랑의 머리에 향유를 한 방울 떨어트린다.
그리고 향유를 보관하였다가 신랑이 죽은 후에 그 향유를 장례를 위하여 시신에 바르기 위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마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오신 메시아를 위한 향유를 부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누가와 요한이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것이 기념될 것이라고 하셨다.
(개정) 기억될 것이다
(현대인) 기억에 남을 것이다
(새번역) 기억하게 될 것이다
(공동번역) 기억하게 될 것이다
기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기억되는가?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교회가 시작되고 교회가 시작됨과 동시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등장하므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된다.
여자가 힘을 다하여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관점(觀點, view of point)이란 "볼 관(觀)" "점찍을 점(點)"이란 훈으로 "사물(事物)을 관찰(觀察)하거나 고찰(考察)할 때,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각도." 로 "견지(見地)" 라고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관점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세속적인 관점으로 여자의 행동을 보았기에 기념될 만한 일을 남길 수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주님께서 기념 할 만한 일을 남길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했던 12명의 정탐꾼들은 모두 똑같은 장소를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왜 말이 달랐을까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언어와 행동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그냥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따라 행동이 결정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행동의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믿음이 행동을 결정하기 이전에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놓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바꿉니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에 따라 살면 생각이 자연스레 바뀌고, 생각이 바뀜에 따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믿음은 우리 삶의 동력(動力)입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여나가는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행동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타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도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에 따라 행동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로마서
14장 1절과 15장 1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로마 교회에서도 재물로
올려진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먹으면 안 되는가가 문제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재물로 올려진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믿음으로 행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행동의 핵심 요인이 믿음으로 행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행동의 근원적
요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행동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믿음으로 한 행동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믿음에
따라 한 행동이 아니라면 죄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믿음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일어난 상황 자체보다 자신이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행동의 동기가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뿌리가 결정적입니다. 뿌리가 살아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출발지점에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스타트 라인(start line)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어떤 일에 믿음으로 출발했는가, 아니면 불신앙으로 시작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강화(强化)는 뿌리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뿌리가 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뿌리가 깊으면, 웬만한 외적인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깊으면, 삶 속에서 요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동일한 상황에 마주쳐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바꿉니다. 바뀐 생각은 우리의 행동을 바꿉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의 관점을 바꿉니다.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는 관점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의 강화를 통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것은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입니다.
똑같은
사물과 상황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접근하면,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점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사물과
상황을 보는 눈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view),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인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는 관점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관점은 믿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수(將帥)들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흔히 믿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관점의 차이입니다. 골리앗을 바라보는 다윗의 관점과 이스라엘 장수들의 관점이 전혀 달랐습니다.
가나안 정탐꾼 열두 명이 똑같이 가나안에 갔다 왔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믿음의 차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이 만들어낸 관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많이 하면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관점이 잘못되어있는 사람은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해도 좋은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관점이 다르면, 똑같은 곳에 서있어도 전혀 다르게 봅니다.
똑같은 곳에 갔다 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똑같은 사물과 사건이 있는데, 사람들마다 전혀 다르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이 보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본 것입니다.
쥐가 런던에 갔다 와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제는 고양이 뿐입니다.
쥐는 “런던에 갔는데 런던에도 지하철에 고양이가 많더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쥐의 관심사는 고양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눈을 열어줍니다.
여러분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관점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야 실제적인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사물과 사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전에 보이던 것과 다르게 보입니다. 예전에는 돈이 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믿음의 관점으로 보면 돈이 돈으로 보이지 않고, 다른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직장이 생존의 현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다른 면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돈을 위해 직장에 다녔는데, 이제는 직장이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예전에는 고통에 불과했지만, 다른 관점으로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이면을 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어떻게 관점을 변화시킵니까?
우리가 믿음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모셔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나 홀로 살아온 인생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의 삶에 모셔오면, 이제는 나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과 모든 생각 속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계산하며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플러스하면, 관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보는 관점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관점이 변하지 않았다면, 믿음이 작동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믿음의 훈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사건 속에 찾아오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만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생물학자인데, 무신론자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안중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철저히 배제되어있는 존재로, 그가 모든 사고와 지식의 세계를 끌어갑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확신하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음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모든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는 것에서부터 모든 사고와 논리의 체계를 끌어갑니다.
이
사람이 쓴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 보면, 그는 인간을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할 만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잔인한 이기주의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적
유물론자들은 사람과 사물을 이상한 관점으로 봅니다. 하나님이 플러스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신의 섭리 같은 이야기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기계와 동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삶에 누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아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실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아주 섬세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우리가 작은 일에도 감사합니까?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 속에 이루어진 일인 줄 믿습니다. 작은 일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우리가 믿기 때문에 아주 작은 일들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을 봅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없었던 적이 없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삶 속에서 상처 입지 않고, 넓은 가슴으로 형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손길이 플러스된 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관점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다면, 역사의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 안에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우리가 알고, 그런 관점으로 세상의 만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낙심할 만한 사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관점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손길 속에서 이 일이 다루어지고 있는 과정을 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관점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새로운 눈이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이 새롭게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요셉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관점(view),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사물과 사건을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 빠져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에 “눈을 활짝 열어주시옵소서. 새로운 관점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했습니다(살전 5:18). 범사는 모든 것(everything)을 말합니다. 좋은 것, 힘든 것, 어려운 것 등 모든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바울이 말한 범사에 포함됩니다.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일이 잘 되고 있을 때에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극심한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에 있는 것도 바울이 말한 ‘범사’에 포함되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 속에 다루어지고 있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감사의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과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하나님을 늘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플러스 알파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삶이 달라집니다.
감사가 넘쳐흐르고, 찬양이 흘러넘치게 된다면, 일이 변화되었거나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관점이 변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관점이 변화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관점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당면한 현재만 보였는데, 이제는 눈이 열려서 다가오지 않은 미래까지 보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눈이 열려서 지금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보입니다. 장래의 일이 보입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장래의 소망이 현실에 닥친 상황보다 더 강력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결론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들어 알지만,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을 머리로는 알지만, 현실적으로 파고들지 않으니까 그 말씀을 붙들고도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이 열리면, 그 말씀이 지식으로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와닿습니다.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와닿습니다. 지금 일어난 상황보다 더 구체적으로 와닿아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미래가 보이면,
현재를 보는 관점도 달라집니다. 그러면 다르게 살게 됩니다. 이전에는 실패한 것만 보였는데, 이제는 가능성이 보입니다. 이전에는
부정적인 관점이 자신을 많이 주장했는데, 이제는 긍정적인 관점이 열렸습니다. 절망보다는 희망이 더 우세한 것을 경험했다면,
새로운 관점이 열린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면만 보았습니다. 수평에서 일직선으로 사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단상에서
여러분을 바라보는 것과 여러분이 여러분의 옆을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단상에 있으면, 다 보입니다. 놀랍게도 굉장히 많은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은혜홀 3층에서 은혜홀 2층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합적으로 보는 것과 수평에서
일직선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사물과 사건을 바라볼 때 다양한 앵글(angle)로 보는 눈이 생기는 것, 믿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90°만 보는 사람이 있고, 180°를 보는 사람이 있고, 360°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는 앵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부분만 보면,
헤어나기가 힘듭니다. 어려운 문제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하고, 절망 속에 탄식하는 사람들은 시각이 너무 좁기 때문입니다. 단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어난 상황 외에는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보는 것인데, 드러난 현상 뿐만 아니라, 이면도 보고, 90°, 180°만 보는 것이 아니라, 360°를 다 보는
것입니다. 전체를 보는, 종합적인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물을 해석하는 능력이 달라집니다. 일어난 어려움을 두고 자신의 문제를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면, 문제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안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삶의 앵글이 좁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원 웨이(one way)로, 막힌 벽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그러합니다. 바닷가에서 자기 무릎 정도 높이의 파도에 부딪쳐 넘어졌는데,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일어서면 되는데,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우습기만 합니다.
그런데
어른인데도 영적으로 미성숙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절대 죽지 않는데, 절대 망하지 않는데, 망하는 줄 생각합니다.
그것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머리를 쥐어박으니 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고개를 들면, 온 세상이 다 보일 텐데….
앵글이 좁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표면만 보고, 이면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다고,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나사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의 가족들은 나사로가 죽는다고 야단이었지만, 주님은 느긋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늘
느긋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다가올지 종합적으로 360°, 이면까지 다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면, 느긋해질 수 있습니다.
조급함은 불신앙입니다. 영적으로 병들면, 시야가 자꾸 좁아집니다. 영적으로 병들면, 멀리보지 못합니다. 앵글이 좁아집니다. 결국 당장 일어난 일에 확대경을 대고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대경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날개를 펴고 하나님과 함께 날아올라 다른 세계를 보는 은혜가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죽겠다고 야단인데, 하나님은 “이것은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너에게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 아느냐? 눈을 떠봐라. 일어서봐라. 나와 함께 날아올라보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셉은
360° 앵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앞에 일어난 일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히 감당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꾸준히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셉의 주변에서 야단법석이 일어났는데도 요셉은 어떻게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할 수 있었습니까? 눈이 열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주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눈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느긋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을 때에도 느긋했습니다. 느긋하신 하나님과 느긋하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숨어있는 그림을 찾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믿음은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돈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믿음의 눈이 열리면, 관점이 변하게 되면, 돈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열리면, 돈의 액수보다
가치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이런 눈이 열리면, 돈 때문에 눈이 뒤집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분별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생겼다는 것은 앵글이 굉장히 넓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돈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돈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에 따라 움직입니다. 돈의 액수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돈의 가치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판단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고, 멀리 바라보며 절대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사기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분별력과 판단력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리석은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돈에 속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거짓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아다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덫에 빠지게 됩니다. 신자들도 자칫 잘못하면 세상이 만들어놓은 거짓된 문화 안에서 수없이 많은 덫에 빠져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는 물질주의 속에서 물질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살면, 물질의 덫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새로운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세상의 거짓에 빠지지 않는 판단력이 생깁니다.
그러면 믿음을 따라 행할 때,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행동의 제약이 많고, 소극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에는 추진력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부정적이었던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기면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면, 삶에 추진력이 생기고, 삶이 적극적이고, 활달하고, 진보적입니다.
믿음은 지금까지 가졌던 관점을 해체해버립니다.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있던, 이 세상이 만들어준 신화에 감염되어 많은 고정관념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편견의 두꺼운 벽이 우리를 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 번 만들어진 고정관념의 집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정신적 감옥’이라고 말합니다.
사고의 틀이 잡히면, 아주 무섭습니다. 믿음의 세계에 들어왔는데도 노력하지 않으면 옛날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그것이 내가 이전에 가졌던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어떤 틀로 만들어졌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국수는 국수틀에서 나옵니다. 국수틀의 모양에 따라 국수의 모양과 굵기가 결정됩니다. 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따라서 틀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을 강화하면, 어느 순간 관점이 변하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긍정적 관점, 적극적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이전의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삶입니다. 고정관념을 깨야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안 된다”라고 말할 때, 믿음의 사람들은 무조건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하는 그 지점에서 “왜 안 되지?”라고 질문해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편견의 감옥 안에 갇혀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도하긴 하지만, 될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안 된다고 말한다고 안 되는 것일까요? 모두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래, 나는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절망하고 결론내린 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상하게도 호기심이 치밀어 올라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동안 결론 맺었던 것을 재해석하시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시고, 하나님께 물어 답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움츠려있었다면, 다시 시도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에는 길을
돌아갔다면, 이제는 정면 승부하시기 바랍니다. 괜히 돌지 마세요. 벽이 앞에 가로막고 있어도 벽 때문에 돌아가지 말고, 벽을 뚫고
가시기 바랍니다. 벽을 뚫으면, 그곳이 출입구가 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의외로 쉬운 답을 만들어냅니다. 어려운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과 얘기하면 시원시원합니다. 말이 복잡하게 꼬이지 않습니다.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오며 자신의 내면에서 모든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결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추억의 오솔길을 거닐며 훌쩍거리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은 적극적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생각이 굉장히 단순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 추진력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둘째, 삶이 풍성해집니다.
로마서 14장 2절에 보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똑같은
음식을 두고서도 믿음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은 먹을 만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하여 스스로 거리끼는 사람은 거리끼는 상태로 먹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속되다고 여기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채소만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음식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20절에 보면,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방인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로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거리끼면서 먹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면,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을 재해석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그 어떤 것도 금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율법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먹는 문제로 인하여 깨끗하여지고, 먹는 문제로 인하여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더러워지고 깨끗해지는 것은 먹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거룩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는 것으로 인해 우리의 몸이
더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주의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유대인들은 모든 일에 까다롭게
접근하고, 행동에 장애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들을 마음대로 누리지 못하고, 행동의 제약을 받으며,
날마다 넘어졌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날마다 넘어지는 연약한 자들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면, 모든 것에 눌리고, 제약을 많이 받고, 행동이 위축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을 때에도 믿음이 연약한 단계에 있을 때에는 애가 좀 아파도 ‘내가 교회에 다녀서 그런가.’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우리나라는 미신을 많이 섬겼던 나라입니다. 지금도 그런 모습이 많습니다만, 미신을 많이 생각하는 불신자들을 보면, 대단히
민감합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미신들과 우상들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점을 얼마나 많이 치는지 모릅니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다 선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씩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7:15~16).
베드로
역시 율법이 정한 속된 것에 대한 구별의식이 강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하시는데도 쩔쩔매면서 거부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선입견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문제는 먹고 사용하고 다루는 사람의 태도에 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러운 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돈이 왜 더럽습니까? 자신의 손이 더러운 것입니다. 더러운 사람이 만졌을 뿐입니다.
“오늘 비가 오니 느낌이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여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상하게 합니다. 비가 오는 것과 기분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가 행동하는 기준은 믿음, 단 하나뿐입니다.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느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어난 상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누릴 수 있습니다. 눌릴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일본에 자주 다니시는 분이 계십니다. 일본에만 가면 무언가에 눌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일본에는 귀신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단히 무장해서 가는데, 돌아올 때에는 늘 아파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일본에 가면 우울하다고 합니다. ‘일본에
귀신이 많으니 귀신의 역사인가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는 모든 사람 그런 경험을 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는 사람은 일본에 가기 전부터 이미 눌려있습니다.
모든 것을 연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생각의 덫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믿음이 연약하여 거리낌을 느끼고, 자기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감옥에 갇혀있는 분들이 있다면,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고정관념,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이 세상의 거짓된 속삭임에 감염되어 스스로 자신의 삶과 행동을 제약할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게 되는지 모릅니다.
믿음이 클수록 받아들이는 용량이 커집니다. 용량이 클수록 자유가 옵니다. 자유가 주어지면, 그만큼 활동범위가 넓어지고, 삶은 풍성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의 풍속이나 문화에 매여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주의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복음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면, 삶은 풍성해집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 매이는 것이 없어집니다. 더 이상 종의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과거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미신을 섬겼을 때, 수없이 많은 것들에 매였던 삶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우리를 얽어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까다롭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 사람은 인생이 피곤해집니다. 자신이 정해놓은 룰에 자신이 갇혀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만든 신화에 빠져 손해 보는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스케일이 크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좀 더 대범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위해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괜히 사업하다가 사고 치면 어떡하나, 그러다가 주인 돈까지 다 빼앗기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땅에 묻어뒀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장사를 하다가 실수를 하고, 손해를 보고, 주인의 돈을 잃어버리더라도 적극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가라는 적극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남겼는가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이 적극적이어야 하고,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구습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풍요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릴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살아가다 보면, 의외의 곳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의외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믿음으로 과감하게 도전하시고, 움츠러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이
때문에 움츠러드는 분이 계십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나이로 인해 움츠러들지 마세요. 돈 때문에
움츠러드는 분이 계십니까? 왜 돈 때문에 움츠러듭니까? 잘 나가는 친구 때문에 움츠러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실패로 인해 움츠러들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면, 우리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을 플러스하시기 바랍니다.
관점이
달라지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믿음에 의해 보이는 변화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눈이 열리기만 한다면,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사람과는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이전에 겁을 잔뜩 먹고, 엄두내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이 그러했습니다. 여리고는 거대한 철옹성과 같은, 견고한 성이었지만, 손 하나 대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믿음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도니까 손 하나 대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그런 일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대한 성과 같고,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데, 믿음으로
행동하면, 손 하나 댈 필요 없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삶이 얼마나 신나는 삶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고, 평가하는 대로 함께 춤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의 눈이 열려서 전혀 다른 관점, 새로운 관점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성경은 소망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세상에서 소망이 보일 것입니다.
믿음이 찾아낼 것입니다.
소망이 붙잡을 것입니다.
사랑이 이루어 낼 것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은 4복음서의 아래 장,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8개 절)
마가복음: 14장 3절~9절 (7개 절)
누가복음: 7장 36절~50절 (15개 절)
요한복음: 12장 1절~8절 (8개 절)
1세기 유대인들은 시신을 매장할 때 어떤 준비를 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신속히 매장했고 대개 당일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시신을 빨리 처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중동 지역은 날씨가 무더웠기 때문에 시체가 빠른 속도로 부패했습니다.
둘째로,
당시에는 시신을 매장하지 않은 채 여러 날 방치해 두는 것이 고인과 유족에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는 사망 당일에 시신을 매장한 사례가 적어도 네 차례 언급됩니다.
마태 27:57-60
사도 5:5-10, 7:60-8:2
그보다 여러 세기 전에는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여행을 하던 중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라헬의 시신을 가지고 가족 매장지로 가는 대신 “베들레헴에 이르는 길”에 있는 무덤에
매장했습니다.
창세기 35:19, 20, 27-29
장례
절차에 관한 성서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이 매장을 위해 시신을 준비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유족과 친지들은 시신을 씻은 뒤 향료와 좋은 기름을 바르고 천으로 감쌌습니다.
요한 19:39, 40.
사도 9:36-41
이웃과 그 밖의 사람들은 와서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족을 위로했습니다.
마가 5:38, 39
예수께서는 일반적인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매장되셨습니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이스라엘 여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드러운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이나 동굴에
시신을 매장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족장들이 남긴 선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헤브론 근처의 막벨라 동굴에 매장되었습니다.
창세기 23:19, 25:8-9, 49:29-31, 50:13
예수께서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매장되셨습니다
마가 15:46
그러한 무덤에는 일반적으로 폭이 좁은 입구가 있었습니다.
무덤 내부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벽감 즉 선반 모양의
공간이 여러 개 있어서 사망한 가족의 시신을 안치해 둘 수 있었습니다.
예수 시대에는 시체가 부패된 뒤에 마른
뼈들을 거두어서 석재 상자 즉 유골함에 넣어 두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가족은 무덤에 앞으로 더
매장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안식일을 지킬 것을 규정했기 때문에 그 날에 유대인들은 장례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세 시간 전에 돌아가셨으므로 아리마대의 요셉과 그 밖의 사람들은 매장 전에 하는 시신
준비 작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시신을 무덤에 뉘었습니다.
누가 23:50-16
그래서 예수와 가깝게 지내던 몇몇 사람은 안식일이 지난 뒤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무덤에 갔습니다.
마가 16:1, 누가 24:1
관점은 생각을 움직이고 삶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관점(觀點)이란 무엇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고 또는 저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했던 12명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라 본 후에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믿음의 차이라고 하겠다.
믿음과 의심의 차이가 전혀 다른 언어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욥과 같은 의로운 시인이 되기도 하고 욥의 아내와 같은 불평의 처세술인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을 친구로 둔 출판없자가 잘 팔리지 않는 책을 보내주면서 서평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통령은 형식적으로 ‘괜찮다’고 했더니 그는 ‘대통령이 좋아한 책’이라고 광고했습니다. 결국 이 책은 대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책을 또 보내면서 한마디 해달라 부탁했습니다. 지난번 소식을 들은 대통령은 이번에 ‘엉터리 책이다’고 혹평합니다. 그러나 ‘대통령도 싫어한 책’이라는 광고로 이번에도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 최필규 저 ‘머리에서 가슴까지 30센티 마음 여행’
관점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을 의미합니다. ‘창의적 사고’란 모두 다 허덕이고 있는 구덩이를 헤쳐 나올 수 있는 신선하고 새로운 관점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관점으로 만물과 현실을 보는 눈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그 출판업자가 또 다른 신간을 대통령에게 보내자, 대통령은 이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출판업자들의 불만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박을 터뜨리게 됩니다. ‘대통령이 읽고 아무런 이야기도 못한 책’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요한일서 5장 4절
기념하라(3422) 므네모쉬논(mnēmŏsü- nŏn) μνημόσυνον, ου, τό
어원 / 34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억(마 26:13, 막 14:9), 기억하신 바(행 10:4)
신약 성경 / 3회 사용
* 3421. μνημονεύω
1. 기억하다, 2. 누가복음 17:31
발음
/ 므네모뉴오(mnēmŏnĕuō)
어원 / 미완료 ἐμνημόνευον, 제1부정과거 ἐμ νημόνευσα, 3420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6:9), 기억하다(막 8:18, 눅 17:32, 행 20:35, 갈 2:10, 살전 2:9), 생각하다(계 2:5), 기억나다(요 16:4), 말하다(히11:22).
신약 성경 / 21회 사용
이 여인을 기념하라!
마가복음 14:1-9
인도의 창조 신화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먼저 지으신 다음, 연못 속에 피어
있는 연꽃을 가지고 아름다운 여자를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살집을 지어 주시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저 연못가에 용궁과 같은 아름다운 집을 지으면 어떻겠는가?"
여자가 연못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유인즉 연못 속에는 이상한 도깨비 같은 것과 물뱀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넓은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저렇게 밝고 넓은 들에서 살고 싶지 않니?"
여자는 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하기를
"저는 연약한 여성이에요.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들에서는 살 수 없어요."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 여자를 동굴로 데리고
갔습니다.
"비바람이 없는 따뜻한 동굴은 어떠냐?"
여자는 "저는 저렇게 좁고 음침한 동굴 속은 싫어요." 또 거절했습니다.
그때
마침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창조한 남자가 씩씩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너는 저 남성의 가슴에
안겨 그와 함께 살면 어떻겠니?"
그러자 여자가 기쁜 발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속을 들여다보고는
질겁하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저렇게 무서운 곳에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남자의 가슴속에는 연못과 같은 음침함이 들어 있고, 광야와 같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으며 동굴과 같은 편협하고 어두움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 문제없는 곳을 찾으려면 너는 어떤 곳에서라도 살 수 없단다. 너는 남자의 가슴속에
들어가 힘을 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며 살도록 하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연못의 음침함이 있거든 너는 진주가 되어 빛을 내거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광야의 황무함이 있다면 너는 백합화가 되어 향기를 발하거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동굴의 어두움이 있다면
너는 작은 태양이 되어 밝은 빛을 주어라."
여러분, 여성의 역할이 큽니다.
세상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여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큽니다.
여자 성도님 여러분, 진주가 되어 빛을 내십시오!
백합화가 되어 향기를 발하십시오!
작은 태양이 되어 밝은 빛을 주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주님 앞에 헌신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헌신을 한번 생각해 보고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마태복음 21:2-3
예수께서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께서 보잘 것 없는 나귀새끼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며 겸손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나오셨습니까?
주님이 은혜로 세우시면 한 세대 크게 들어 쓰실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가난한 사람이
나오셨습니까?
천국이 당신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인생을 비관하는 분이 있습니까?
성령의 불만 밭기만 하면 세상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무능하다고 자책하지 마시고 가진 것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인생살이에 조금 뒤졌다고 열등의식이나 실패의식을
가지지 마시고 예루살렘의 나귀새끼처럼 당신의 등위에 예수님을 태우시고 호산나를 외치며 앞을 향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나귀 주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름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 사복음서에서 다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도 말했고, 마가도 말했고, 누가, 요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명의 충성자입니다.
빛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쨌거나 영광스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는 이름과 명예와 빛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경력입니까?
그런데 여기 이 나귀 주인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시골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보상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농촌 마을에서 소 한 마리는 큰 재산입니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은 소를 기르느라고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렇게 키운 소 한 마리를 선뜻 내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나귀 주인도 분명히 나귀 한 마리가 큰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
나귀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그저 만족스럽게 바침으로써 기뻐했을 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정성껏 기른 나귀를 주께서 요긴하게 쓰신 다니 그것으로 보람과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아무 말 없이 나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하나님이 '네 인생이 필요하다.'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생', 주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내놓아야 합니다.
참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참 기쁨과 보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쓰임 받을 때입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곳에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헌신 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 질 때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때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기쁨입니다.
나귀의 주인은 자신이 귀하게 기른 나귀 한 마리를 주께 드림으로써 보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마침내 슥9:9절의 '보라 네 왕이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한 예언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도 바로 이런 헌신의 삶을 살았던 여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공명심'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명예욕'이라고도 말합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에 자기 이름을 파 놓고 가는 사람들의 흔적을 곧잘
보게 됩니다. 또는 그 탄탄하고 억센 바위 위에 '0년 0월 0일 아무개 다녀가다'라고 새겨 놓는 바위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공명심은 인간이 모여 사는 세계면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욕이 뜻대로 안될 경우에는 힘으로 돈으로라도 이름을 얻고 권력을 쟁취해서 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매관매직'이란 말도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좀 색다른 주인공을 보게 됩니다. 본문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요즘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선전을 해 주셨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파되어 이 여인의 일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나폴레옹 같은 영웅입니까? 시저와 같은 정치가입니까? 잔다르크, 유관순 같은 애국 여인입니까? 아니면 당시 빌라도 총독이나 헤롯왕의 영부인입니까?
아닙니다.
평범한 한 여성입니다.
본문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요12:2절에 의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살고 있는
의로운 삼남매 중에 하나인 마리아라고 합니다.
이 기사는 4복음서가 공통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한
여인의 이름이 왜 이토록 하늘의 별처럼 높이 빛날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주를 높이면 주께서도 나를
높여주신다고 하는 평범한 진리' 그대로입니다. 잠8: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할/ 이 여인은 가난했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자신의 귀한 것을 바쳤습니다.
사랑의 낭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 헨리'의 '박사의 선물'이라는 단편집의 이야기를 보면 지극히 사랑하는 가난한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올 성탄절에 무슨 선물을 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아 여인의 머리핀을 샀고, 여인은 20년간 길러온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시계 줄을 샀습니다.
성탄절 이브 때,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핀을 꽂아 주려고 하니 머리카락이 없고, 여인은 자기가 사온 시계 줄을 남자에게
채워주려고 하니 이미 시계가 없었습니다.
자초지경을 한 연인들은 더욱 더 사랑의 맹세를 굳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의 모든 기쁨으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은 주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려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쏟아 바쳤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기의 희생과 헌신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
되고 유월절이 지나면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1-2절을 보면 예수님의 예언처럼 죽음은 긴박하게 예수님 주위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국민의 대표기관인 장로들이 모여서 예수를 어떻게 잡아 처형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이런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 예수님은 그 날에 일정에 들어가셨습니다. 즉 베다니 시몬의 집에 심방을 가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세 종류의 사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향유를 부은 여인
둘째는 모여 있는 구경꾼들
셋째는 향유를 부음 받은 예수님
첫째는 향유를 부은 여인
요한복음 12장 3절에서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라고 합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7장에서는 큰 죄인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의 행동입니다.
그녀가 공개적으로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라고 합니다.
시몬은 전에 문둥병자이었으나 주님 앞에서 깨끗이 치료받은
후에 주님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집주인 외에도 제자인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향유의 값을 300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화폐 가치로 장정이 1년 동안 일해서 받은 노임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 돈은 오병이어 때
빌립이 모인 무리를 먹일 양식을 계산한 금액이 200데나리온인데 비해 100데나리온이 더 많은 돈의 액수입니다.
이 향유는
상당히 귀한 물건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 풍속가운데 혼수 준비물로서 가장 귀한 것이 옷과 향유라고
말합니다.
아마 마리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딸에게 혼숫감으로 이 귀한 향유를 물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부은 이 향유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으로 그것을 주님께 바친 것으로 사랑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던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그렇게 했다면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께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없다고 뜻 있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극장에 오듯이 성가대가 찬양을 얼마나 잘하나? 목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나? 내가 아는 사람이 왔나 안 왔나를 살핍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보다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무슨 사건이 이루어지고 어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백날 천 날 예배드려도 하나님은 끄덕도 안 하십니다. ▶이 여인이 드리고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최상의 존재에게 나의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바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이 여인만이 아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값으로 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싸구려 향유를 부어서 갚노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치의 성인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서울대 박 모 교수는 최근 미국에서 그 분야의 최고 권위를 가지고 치료하던 전문의를 만나서 치료받고 6개월만에
완치했다고 합니다. 박 교수는 병원 입원비, 수술비, 약값 등 엄청난 비용을 이맛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병원 수납계에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에게 정성어린 물질의 사례를 드렸고, 또 6개월 동안
자신의 병상을 드나들며 치료하고 간호해준 간호사들과 끼니때마다 식사를 날라주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정성껏 사례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이 아깝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이 다 새롭고 가진 것을 주고 싶은 흥분과 감격으로 귀가했다고 그의 병상일기에서 적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 갈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
오늘
본문의 값비싼 향유는 단순한 물량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드린 것은 그것보다 몇 천만 배 더
값비싼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헌신은 '저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깨달은
자'의 헌신입니다.
순전한 나드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나드향은 인도에서만 나오는 최고급 향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드에 다른 것을 배합하면 본래의 향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향수로 유명한 것은 블란서의 샤넬 향수가 단연 최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샤넬 향수지만 No.5와 No.9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을 한데 섞어 놓으면 전혀 다른 매력 없는
향이 된다고 향수전문가가 말합니다.
마리아가 드렸던 향유는 순전한 '나드 향'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순전한 사랑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헬'어의 '순전한'이란 말은 '믿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전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동의어로 해석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제 아무리 큰일을 하고 큰 봉사를 해도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하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향유를 깨뜨렸습니다.
3절'하'반절에
보면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깨뜨린 옥합은 이집트의 '알라바스트론' 지방에 있는
산에서만 나오는 돌로 만든 것으로 주로 향유 병을 만드는데 그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병도 비싼 병이고 향유도 비싼
순전한 것인데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왜 그냥 선물로 쇼핑백 같은 것에 담아드리지 않고 깨뜨렸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⑴그것은 자신을 깨뜨려 드리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⑵너무나 고가의 향유이기 때문에 깨뜨리지 않으면 항상 그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지닌 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⑶주님의 죽음의 장사를 위해 미리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머리에 기름을 붓는 몇 가지의 관습이 있습니다.
⑴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의 머리 위에 향유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관습이 있고, ⑵왕이 즉위할 때, ⑶제사장의 성별의식을 위해, ⑷선지자를 세울 때, ⑸장례식 때 시신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물쭈물하면 마음이 변할지 모르므로 순식간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하면 마음이 변합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십시오! 신앙에는 결심과 결단이 절대 필요합니다. 봉사하는 일도, 기도하는
일도, 전도하는 일도, 헌금하는 일도, 주일 성수하는 일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합니까? 깨뜨려서 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오만가지 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옥합을 깨뜨리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훗날 깨뜨린다고 상담하고 약속만 합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죄 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요, 구원의 감격을 가진 자요, 천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그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받쳤더니 주님이 이 여인을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여기
'여자가 행한 일'이란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부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으로 이 여인은 온 천하에 향수를 뿌린
여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기념될 만한 말'이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이 말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이 한 이 말도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이 한 말도 우리나라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
치고 이 말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
이같이 온 천하를 휩쓸고 있는 '기념비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 천하에 알려진 '기념비적인 행동'도 있습니다. ▶손 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행동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 이야기도 다 알고 있습니다. 훈련병들이
수류탄 훈련을 하다가 수류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엎어져 그 수류탄을 끼어 안았습니다. 그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혼자 죽었습니다. 육사 교정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습니다.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리아의 헌신은 '온 세상이 기념'할만한 그런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여인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이 함께 전파되어 이 여인의 믿음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성찬식도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눅22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 몸이라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피니라
받아 마시라 그리고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식의 목적은 '예수님을 기념'하는데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성찬은 몇 가지 정신이 있습니다.
①성찬식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념하라. 이를 행하라'는 말씀은 '떡을 들고 잔을 마실 때마다 나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를 따라 성찬 상을 베풀고 떡과 잔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그 고통을 기념하는 것은 나
때문에 죽으셨고 나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②성찬을 땔 때 중요한 것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고전11:27-29).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이 말씀을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먹는 것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고, '벵겔'은 '자기 성찰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고, '앨 포드'는 '주의 죽으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믿음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 성찬식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만찬이나 회식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피고 주를
생각하며 먹고 마시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자기를 살피고'라는 말씀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다듬고'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9절의 '주의 몸을 분변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희생과 그 고통을 깊이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④마라아의 헌신은 어떤 헌신인가? 우리가 바로 배워야 합니다.
⑴능동적인 헌신입니다. 그 누구도 마리아에게 헌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마리아의 헌신을 비방했습니다. 마리아는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⑵최선을 다하는 헌신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를 '임산부가 애를 낳을 때 쓰는 힘'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⑶비방을 이긴 헌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헐뜯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시험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가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⑷이미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헌신입니다. 오라비가 죽은 지 4일이나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마리아는 미래에 어떤 축복이나
은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 지난날에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은 어떤 조건을 내건
헌신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하는 순수한 헌신입니다.
2. 구경꾼들의 반응을 보자!
①집 주인 시몬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문둥이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격리되어 있어야 하고, 예배에도 참석을 못합니다. 집주인 시몬은 그런
문둥병에서 예수님께 치유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자기 집에 손님이 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환영합니다. ▶평안을 기원하며 입을 맞춥니다. ▶발을 씻겨 주거나 발
씻을 물을 줍니다. ▶향을 피우거나, 향을 머리에 부어 발라 줍니다. 그런데 이 시몬은 예수님이 오실 때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중에 그 어떤 한 가지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똑같은 배경의 눅7:44-46절에 보면 그 당시 예수님이 집주인
시몬을 책망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런 사람은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믿음을 형식과 의식으로만 채워져 있는 사람입니다.
②제자들과 가롯유다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을 내었습니다. 화를 내었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라고 말하며 분을
내었습니다. ▶책망했습니다. 비난했습니다. 나무랐습니다. 4절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요12:4를 보면 가롯유다가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롯유다의 논리는 그럴 듯하고 교양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일이지 왜 낭비하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롯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죄에 빠져서는 아니 됩니다. ▶그럼 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
⑴다른 사람의 의로운 일을 시비하고 나셨습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고 시비하는 사람은 자기 할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이 하는 좋은 일을 질투하는 사람은 그 질투심 때문에 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⑵영적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롯유다의 발상은 지옥 갈 사람을 건져내는 교회의 선교를 '왜 돈을 쓰느냐? 우리 교회도
어렵지 않느냐?'와 같습니다. 여러분 지옥 갈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데 필요한 돈이라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물질입니다.
우리 모두 선교 비를 드립시다.
지금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사들이는 마약 때문에 썩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서 빨리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롯유다같은 발상이나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⑶동기가 불순했습니다. 요12: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는
순전한 마음으로 나드향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가롯유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향유를 헌금화하여 구제하자고 불평했습니다. 문제는 그토록
구제 열이 불타고 이론이 정연했던 가롯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은30에 눈이 어두워 스승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결국 그는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의 논리대로라면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낭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마리아의 낭비 때문에 그의 신앙을 본받은 무리가 많고 또 세상에는 그런 낭비 때문에 어둠이 걷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낭비 자들은 동양에서도 있었고, 서양에서도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인도의 '무저항주의'를 부르짖은 '간디'였다고 봅니다.
그는 영국에서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자기만 원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으고 법률가로서 일등 국민의 특권과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안일과 행복한 생활을 집어 던지고 냄새나고 문화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조국 인도로 돌아가 인생을
무명옷을 입고 굶으며 옥중에서 온갖 고초와 학대를 받으면서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족의 흉탄에 맞아 자신의
인생을 무참히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바보가 독일에서도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다름 아닌 히틀러의
나찌 정권과 항거하여 싸우다 순교한 '본회퍼' 목사님입니다.
그는 40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약혼만 해 놓고
옥중에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1945년 나치에 의해 사형 대에 올랐습니다. 만일 '본회퍼'가 당시 다른
지성인들이나 성직자들처럼 진실이나 정의를 말하지 않고 나치에 아부하고 협력만 했다면 그렇게 고생하고 처참하게 사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는 이런 사람들 손에서 움직여지고 있고, 세워지고 빛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사람들의 삶을
낭비했다고 하겠습니까?
▶미국 뉴욕 항 앞 '리버티' 섬에는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 오른손에는 횃불을 들고, 왼손에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있습니다. 이는 '자유는 세계를 비춘다.'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 여인상은 프랑스 국민이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F. A.
바르톨디'라는 조각가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여신상을 무려 20년 에 걸려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조각상의 제작을 요청 받은
'바르톨디'는 '자유'라는 이미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 헤매는데 엄청난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델
감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많은 영웅들을 사진들도 모조리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다.'라고 부딪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몹시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그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모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여신상 모델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가장 훌륭한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옥합을 깬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곁에 게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멀리 있는 가난한 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⑴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26:10절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여자가 한 일을 '아주 좋은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십자가를 향하여!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쓰고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힘을 다해 준비한 향유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위해 미리 부어 드렸습니다. 유대인은 장사 때 시체에 기름을 바르곤
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위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비한 것으로 칭찬하였습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폐품을 모아 팔아서 성전 건축 헌금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폐품을 모아 팔았는데 상당한 액수의 헌금이 모아져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날밤 집사님의 꿈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안내로 예수님 계신 천국을 찾았는데 온갖 폐품으로 지어진 거지같은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천국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으로 알았는데 이런 거지 집이 천국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정성으로 지은 천국의 집은 폐품으로 지은 집이니라'고 할 때,
창피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꿈을 깼답니다. 집사님은 잠자리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값비싼 보화는 장롱 속에
두고 폐품을 모아 바친 인색한 마음을 회개하고 새롭게 믿음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긴 물질과 금은보화를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황금보석의 집을 쳐다 볼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고 드렸답니다. 물론 예화입니다만 주님은 정성을 다해 최선의 것을
드릴 때, 아벨의 산 제사처럼 받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⑵가롯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한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으로 일축해 버렸습니다. 길을 가는데 사람이 '여보세요' 부르면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말상대를 해주어야
합니다만 개가 짖는다면 그냥 가던 길을 가야합니다. 개가 짖는데 돌아서서 '개님 왜 짖습니까? 소원이 무엇입니까?' 개소리를 듣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가난한 자들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세상에는 일할 사람도 많고 구제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사람입니다.
2천년 교회사는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 여자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눈에 띄게 헌신한 남자들도 많지만, 남몰래 헌신한 여자들은 더욱 많습니다.
이들의 눈물어린 헌신과 아낌없는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존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행동을 비난한 사람들이 주위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합을 깨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옥합헌금 / jade box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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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종말론(24장, 25장)
1. 연구의 목적
본 연구는 마태복음 24, 25장에 나타난 종말론을 신약신학적인 관점에서 탐색하고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독특성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의 방법
성경의
각 책은 각각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들과 관련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마태의 공동체가 직면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과 관련하여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핵심을 이해하려 하였다.
본문연구를 통해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해석하고, 이 기록의 배경이 되는 23장을 살펴 본 후 다른 복음서 및 바울 서신과의 비교를 통하여 마태복음 종말론의
독특성을 알아 보고자 하였다.
3. 마태복음 24장의 구조
24장은
두가지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고 또 하나는
세상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한 답변이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의 사건이긴 하지만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 마지막에 일어나는 종말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장에서는 종말의 심판의
일부로 진행되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마지막날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징조들을 잘 구별하여 읽되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비춰지는
종말에 대한 교훈을 서로 잘 연결하여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멸예고(1-2절)
2) 제자들의 질문(3절)
(1) 어느 때에 예루살렘이 파멸되겠습니까?
(2) 또 주의 재림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3) 종말의 시작에 관한 말씀(4-8절)
(1)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날 것이다(5절)
(2) 전쟁과 내란이 있을 것이다(6-7절 상)
(3)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7절 하)
4)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말씀(9-28절)
(1) 제자들의 박해와 복음전파의 시작(9-14절)
(2) 예루살렘의 멸망과 제자들의 준비(15-28절)
5) 세상 마지막 날의 임박한 징조(29-36절)
(1) 우주적 변화(29절)
(2) 하늘에서 보이는 재림의 징조(30절 상)
(3)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30절 하-31절)
(4)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임(31절 하)
(5) 그 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32-36절)
이후 25장 까지는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내 용이 이어지고 있다.
4. 예루살렘 성전 파멸의 의미
마태복음
23장은 24장에서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종말론을 다루고 있는 24장과 25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문맥인 23장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23장에서 25장의 내용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23장은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즉 유대체제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선포인 반면 24, 25장은
제자들에 대한 사적인 가르침이라는 면에서 23-25장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반면에 23장의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는 24장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23장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태가 바라 본 예루살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유대체제를 상징한다.
23장은 당시 유대체제의
핵심부에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언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23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자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 선언이 나타나고 있다.
37-39절을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마태가 바라 본 예루살렘은 유대체제의 지배계층들의 위선의 집합소요 부패의 온상이었으며 이스라엘을 왜곡된 길로 인도하는
세력이었다.
하나님을 알려주고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을 죽였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자명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예수를 거부한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는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셀롯당원들이 제사장들을
학살함으로써 성전을 더럽혔고 그 결과 로마군과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피해 흩어지게 되었다.
초대 교회 역사가들은 그리스도인 선지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에게 이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도록 경고했다고 한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로마군은 성전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군기를 세웠다.
이 군기에는 로마황제의
휘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로마황제는 신으로 섬겨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정복 후 이 기장에 제물을 드렸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포위되자 상황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일부 여인들은 자식을 먹기 까지 했다고 한다.
겨울철은 더욱 어렵다.
겨울엔
계곡의 물줄기가 불어나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예루살렘을 빠져나간 피난민 중 일부는 실제로 겨울에 로마군의 공격을 피하려다 계곡의
물줄기에 막혔고 시간을 끌다가 살해를 당하기고 했다.
안식일은 통행수단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통행거리도 제한을 받았다.
그리고
셀롯당의 광적인 애국자들은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그리고 있는 환난과 심판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예루살렘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 멸망의 교훈은
비그리스도인에게는 회개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 전파의 시급성을 깨닫게 해준다.
마태복음 24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한 무서운 결과 즉 예수님을 거절한 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재앙들을 보여줌으로써 마지막날에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이 당하게될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마태의 공동체는 이 기록을 읽고 복음 전도의 시급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24장 이후 25장의 내용을 읽어 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마태복음의 종말론에서 보여지는 환난과 재앙들의 1차적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환난의 때에 보호받는다. (22:24)
또한 복음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세상에 전파된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 후 종말론의 맥락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비유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나타난 종말론의 핵심 메시지는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첫째 종말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파멸은 유대전통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음을 가진 공동체가 더
이상 유대체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시작이 전제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존의 유대체제와는
결별을 선언하여야 했다.
둘째 복음은 전 세계를 향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체제와 결별을 선언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체제 안에 더 이상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복음은 이제 유대를 넘어 온 세계로 전파되어야 한다.
셋째 예루살렘의 파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이 겪게될 마지막 날 심판의 고통이다.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전도의 사명을 일깨운다.
넷째 심판의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의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심판 가운데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보호하실 것이다.
5.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의 삶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말씀은 하나의 독립된 수사단위이다.
이들은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포함한 모든 말씀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5장의 내용을 보면 마태의 공동체 안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은
여러 부류의 생활양식들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 매여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4:37-51), 주님 오실 날이 언제 일지 자기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재림이 지체될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5:1-13), 복음을 듣고 신앙 공동체로 나아왔으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5:14-30), 자신의 재산을
움켜쥐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다(25:31-46).
노아
홍수 때의 비유(24:37-51)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36절)
홍수 때에 멸망당한
이들은 자신들에게 임박해있는 분명한 심판의 징조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에 매여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죽어 갔다.
마태복음은 일상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구원을 얻고 다른 한 사람은 심판을 받는 장소가 똑
같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인 ‘밭’과 ‘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일상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제자의 삶을 엄중히 경계한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어떤이는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고 어떤 이는
일상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비유로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종이
등장한다.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로서의 직무를 다하여야한다.
주인이 다시 와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있는
지를 불시에 확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깨어있는 제자의 삶이란 ‘때를 따라 양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 즉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시와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상의 삶을 살며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직무 즉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한다.
열
처녀 비유 역시 강조점은 ‘그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이 비유를 해석하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는 신랑이 그들의 예견대로 ‘속히’ 올 것이라고 예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주님이 곧 오실 줄 알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았거나 직업을 때려 치운 사람들일 것이다.
기름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본문에서는 신랑이 더디 오더라도 맞이 할 수 있는 ‘준비되어 있는 삶’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즉 종말을 살아가는 제자의
삶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달란트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는 조금 다른 강조점을 가진다.
앞의 두 비유는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데에 그 강조점이 있지만 달란트
비유는 ‘오랜 후에’(19절) 주인이 필연적으로 돌아와 결산한다는데 그 강조점이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신이 받은 능력에
상관없이 결산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자신은 그 만한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살 수 없었다거나 시간과
재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핑계를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도 금 한
달란트 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노동자가 일만일을 일하여 번 임금의 양이었다. 즉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많은 이들이 복음과 기독교 공동체를 접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왕국 가까이에는 왔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 헌신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마태는 그들에게 그들의 삶은 반드시 주인 앞에서 결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도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시와 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이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제자는 이 땅의 약자들을 위해 삶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믿었다. 그런데 종말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 공동체안에는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말씀들을 다시 정확하게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를 그들의 공동체에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지연된 종말’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의 가르침으로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종말론에 관한 마태의 기록은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후대에 복음서 기자에 의해 창작된 것인가?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는데 마태의 시대에 가서야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루살렘 파멸에 관한 예언 기사는 공관복음 모두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기록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볼 때 매우 조직적이며, 더욱 교훈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마태복음의 기록연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성전 파괴 이 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 하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마태복음 25장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미 시작된 종말과 아직은 오지 않은 종말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제시한다.
첫째, 예수의 제자들은 일상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때를 따라 양식을 그 집 맡은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준다“.
둘째,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속단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더라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계속’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능력, 재물, 시간의 부족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
주인은 충분히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주신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무엇을 했는 지 결산하게 될 것이다. 제자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기여한다.
넷째, 예수의 제자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까지 제자들은 가난한고 소외된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섬기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며, 그 분과 함께 있을 수 있다. 주님은 그들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6.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
마태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마가의 기록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을 비교해보자.
마가복음
13장 1-37절은 마태복음 24, 25장과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도 비교적 마가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마가복음과의 비교를 통해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독특성을 드러내 보이겠다.) 그러나 전 후
문맥과 그 강조점에서 볼 때 마태복음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점들은 마태복음의 종말론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첫번 째 차이점은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의 파멸이
부패한 유대전통과 예수님을 거부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는 맥락에서 설명되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에서는 그러한 전 문맥의 설명적 진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태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부패한 유대전통, 유대지배 체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번 째 차이점은 마가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이 후에 관련된 교훈적인 비유가 이어지지 않는다.
마가복음 13장 이후 14장 1, 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계략을 꾸미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제시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7. 바울서신과의 비교
바울서신에서의
종말론은 주로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고린도 전, 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고린도 전, 후서에서의 종말과 관련된 진술들을 살펴보면 주로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은 신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신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린도 후서에서도 바울은 후패한 몸을 벗고 새로운 생명의 몸을 덧입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고후
4:16-5:10)
바울에게 종말은 소망의 대상이며 기다림의 대상이다.
바울은 종말을 ‘기다리며’ 현재를 ‘산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종말을 ‘살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종말에
관한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의 강조점은 신자들이 종말에 관한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살후
2:1-12)
바울의 주된 관심은 성도들에게 종말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하여 미혹되지 않게 하는데 있었다.
종말에 관해서
바울은 ‘바르게 아는 것’을 더욱 강조 하였다면 그에 비해 마태의 관심은 종말의 시대를 ‘바르게 사는 가’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 결론
위의 연구를 토대로 마태복음 종말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태복음 종말론은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인 전통적인 종교지배체제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그러한 유대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태복음의
공동체였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유대체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심판받은 유대체제를 넘어서 복음을
들고 온 세계로 나아가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선교적이다.
둘째,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를 ‘오늘’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주요한 관심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이다.
그 삶은
일상의 삶을 살되 일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말씀을 전파하고 맡은 사람들을 돌보는 삶이다. 또한
그 삶은 종말을 의식하며 살되 늘 준비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꺼이 헌신의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며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적 삶은 철저하게 종말이 현재화된 삶인 것이다.
셋째,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제자로서의 ‘삶’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위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신앙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종말론적 신앙를 가졌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종말을 믿으며, 그 종말을 의식하며 사는가?.
참고문헌
France, R. T.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y: Matthew.: Grand Rapid: IVP,1987.
Keener, Craig s.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IVP. 1993. 「IVP성경배경주석 신약」. 정옥배외 역 서울: IVP.1998.
마태복음 24장은 "묵시강화, 소묵시록"으로 불리는 장으로,
이 내용은 신약성경의 다른 묵시적인 내용들 안에서,
더 넓게는 B.C 200-100년 사이에 셀류커스 왕조의 핍박으로 인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대 묵시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읽는 것이 좋다.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시기에 대해서 의견이 갈리지만,
대체로 A.D 70-8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잘아는대로 A.D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초대교회의 자리인 유대 땅은 혼란스러운 격변기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 왔다.
바울에 의해서 이방인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에 대해 재해석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마태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어진 종말에 대한 말씀을 토대로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말씀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면서
이 대격변기의 시기에 교회와 성도가 가져야할 신앙 태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이 묵시록의 초점은 천국의 비밀이나, 재림의 날짜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재림의 날짜는 예수님도 몰랐고, 천사장도 모르며 오직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의 구절을 나름 연구하여 재림 날짜를 알아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 묵시록의 초점은 환난과 박해의 시기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불어 넣어 주고,
신실한 신앙으로 환난과 박해를 견디며 이기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 묵시록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 말씀인 동시에
언젠가는 일어날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동시에 예언하는 의미도 품고 있다.
먼저 24장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혼란을 틈타
메시아를 자청하며 백성들을 미혹하는 불법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들은 모두 거짓 메시아이며, 이 일은 환난의 시작일 뿐이라고 하셨고,
유혹과 박해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 격려하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마카비 왕조의 혁명을 불러온 성전 우상과
칼리큘라 황제가 예루살렘에 세우려고 했던 우상과 같은 것들이다.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이러한 우상으로 유린당할 때 깨달은 것은
곧 전쟁이 일어나 큰 환난이 닥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예루살렘에 미련두지 말고
산(공격당하는 도시보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라고 경고하셨다.
이런 상황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해 주신다고 하셨다.
이러한 혼란과 박해의 상황에서 여전히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날 것인데,
분명히 알 것은 인자 즉 예수님의 재림은 부분적인 한 지역의 현상이 아니라,
온 지구의 사람들과 우주가 볼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우주적인 현상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지구의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재림주는 다 거짓인 것이다.
이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재림의 시기에 관한 것인데,
무화과나무의 잎 비유를 통해 이 일이 분명하게 일어나는 것이라 하시면서도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것이라 하셨다.
(이 일은 예수님도, 천사장도 몰랐으니, 하물며 사람들이 어찌 알수 있을까?)
다만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는 때에 분명히 일어날 일이니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방자하게 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준비하지 않은 때에 오셔서 홀연히 사람들을 갈라 놓으실 것을 경고하시면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어리석고 악한 종의 비유를 주셨다.
위임받은 종(교회의 지도자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목양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 다시 오실 때에 충성스럽게 목양하는 지도자들을 복을 받아 누리지만,
재림이 지연된다고 방자하게 살던 지도자들은 혹독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재림에 대한 거짓 사건들이 여러번 지나갔다.
아마도 또 다른 재림주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미래의 재림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늘 우리의 신앙적인 삶에 초점을 둔다.
마태복음 24장을 읽으면서
박해와 환난의 종류는 다르나
신앙으로 살아가기 만만치 않은 환경이 지속되는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동시에
이 땅에서 당당한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시며 지지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5장
영벌과 영생(46절)
천국과 지옥의 식사 시간 풍경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서 식사하는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이나 환경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천국과 지옥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같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긴 젓가락을 쓰는 것도 같았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되자 드디어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서는 밥을 먹으려고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각자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서로 짜증을 내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다정하게 먹여 주면서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에도 너무도 평화롭고 즐거운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할 때 행복의 기초가 세워짐을 말해 줍니다.
세상에는 눈물뿐이고 고통만 닥쳐와도
내 심령은 예수님으로 기쁜 찬송 부르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한숨 쉬는 불행이 변해 기쁜 찬송 부르니
괴로움을 주던 환경이 천국으로 변했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금은보화 다 준다 해도 예수님만 못하며
명예 지위 훌륭한 대도 주님만은 못하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속지 마라 세상 허영에 마음 뺏기지 마라
세상 것은 일장의 춘몽 물거품과 같도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중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마틴은 아내와 자녀를 먼저 보내고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노인의 격려를 듣고 성경을 읽던 중 ‘내일 거리를 내다보아라. 내가 너에게 가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다음 날 마틴은 늙은 청소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아기를 안은 젊은 여인에게 식사를 대접했고, 할머니와 소년이 다투는 것을 화해시켰지만 정작 오겠다던 예수님은 만나지 못합니다.
잠들기 전 성경을 편 마틴의 눈에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마틴은 ‘오늘 왜 안 오셨어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낮에 만났던 청소부와 여인과 소년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틴, 내가 세 번이나 너를 찾아갔는데 아직도 나를 못 알아 보겠느냐?”
그때 마틴이 펼쳐 둔 성경에 오늘 말씀의 요절인 마태복음 25장 40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재림하신 후에나 만나게 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어쩌면 예수님은 이미 수 없이 우리를 찾아오셨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에게 알아차릴 눈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실 때는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는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종이 되어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우리의 구원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재림하실 예수님은 초림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큰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이 보좌는 임금의 보좌이며 동시에 심판하는 재판장의 보좌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그들을 자기 앞에 모으시고 각 사람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하실 것입니다(32). 여기서 말씀의 제목인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왔습니다. 양은 한 곳으로 몰려드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서로 부딪치거나 걸려 넘어지는 일들이 자주 생기기 마련입니다. 반면 염소는 누가 가까이 있는 것을 싫어해 밀쳐냅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떼들 사이 사이에 염소를 섞어 흩어지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각각 분리해 양은 밖에 두고 염소는 안으로 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서늘한 곳을 좋아하는 반면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을 양과 염소로 나눈 후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리를, 왼쪽은 저주와 수치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당시 공회에서 판결할 때 무죄인 사람은 오른쪽에, 유죄인 사람은 왼편에 세웠다고 합니다. 재림하신 예수님도 재판장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누가 의인인지, 누가 악인인지 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양 아니면 염소, 오른쪽 아니면 왼쪽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이 판결은 온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존엄하신 재판장이 내린 최후의 판결이기 때문에 번복될 수 없고 재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최근에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대립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양측은 저마다 다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고 상대방이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입장에서 서로 조금도 물러설 뜻이 없어 보입니다. 양쪽의 지지자들이 아무리 우리가 옳다고 목소리를 높여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이 싸움의 승패는 ‘법원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 내 생각이 맞고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똑 같은 것을 놓고 어떤 사람은 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희다고 합니다. 이 둘 중에 누가 맞는지 끝까지 따져서 결론을 내보자 하는 것이 모더니즘입니다. 아무리 따져도 결론이 안 나고 싸움만 커졌습니다. 그래서 너도 맞고 나도 맞고 모두가 다 맞은 것으로 하자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참과 거짓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의와 불의를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디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모르겠고 양과 염소가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판결을 내려줄 재판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 세상에 오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재판장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인생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시고 판결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판결은 지극히 공정하고 오류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단호하고 명확할 것입니다. 이 판결에 따라 양이냐 염소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열심히 산 것이 의로움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판결 기준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 노력을 기울여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시험을 잘 보려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 인생을 잘 살고 싶다면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일까요?
최후 심판 날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 요즘 같은 세상에서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라도 상속을 받으면 대박 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되다니 참 놀랍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이런 큰 복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이에 의인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이럴 줄 알았습니다. 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이렇게 말했나요? 아닙니다. 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했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 이 말이 자신들이 누군가를 돌본 적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직접적으로 섬긴 기억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무 의외라는 반응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여기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심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마치 작은 자 한 사람을 자신 몸의 일부분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여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18:5). 또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예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기서도 예수님은 박해 받는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왜 이처럼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처음 오실 때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치여 결국 마구간 구유 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 촌 사람이라고 무시당하고 가방 끈이 짧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마침내 억울하게 고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본래 지극히 크신 분이 이렇게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을 돌보고 섬기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나병환자,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고생은 다 끝났고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곳에서 마음 편히 계신 줄로 여기기 쉽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이 땅의 성도들이 아무리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 있어도 그것은 우리 문제일 뿐 주님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주릴 때 주님도 배고픔을 느끼십니다. 그들이 목마를 때 주님도 목마름을 느끼십니다. 그들이 병에 걸려 신음할 때 주님도 고통을 느끼십니다. 그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가 먹이고 목을 축이게 하고 옷 입히고 영접해 준다면 그때 주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무척 고맙게 여기실 것입니다. 매우 기특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요?
첫째는 교회 공동체 안에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물질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들, 병든 사람들, 옥에 갇힌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곁에 있는 곳조차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따돌립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존경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잘 대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본 사람들입니다.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입니까? 작은 자들,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었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둘째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선교사와 복음 전도자와 사역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얼마든지 세상에서 큰 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작은 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사립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나서 에콰도르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던 짐 엘리엇 선교사, 미시시피에서 공주처럼 살 수 있었지만 한국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단칸방에서 김치를 드셨던 사라 베리 선교사님, 모스크바, 오뎃사, 인도네시아 등등 세계 각 지역에 나가 계신 우리 선교사님들, 동역자들도 없이 외로이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개척 센터의 스텝 목자님들이 바로 작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곧 주님의 고통이요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주님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작은 자들을 향한 베풂과 나눔과 섬김을 냉수 한 그릇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날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한 자들을 축복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들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이 말씀을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시피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와 동시에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신자의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외적인 증표입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인 나를 대신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은 그 마음에 주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감동이 있습니다. 과거 이기적이고 심령이 메말랐던 사람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샘솟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돌보는 수고를 감당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선행이라는 자각도 없이 그런 삶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 심판 때 오른 편에 서게 될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역자들과 선교사님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어떤 선포를 했습니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그들은 앞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에 들어가게 될 복 받을 자들과 대비가 됩니다. 그들은 왜 이런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2,43)” 이에 대해 왼편에 있는 자들이 반발했습니다. “주여 도대체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나신 적도 없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떤 답변을 주십니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이번에도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은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제 교도소에 출소한 조두순 같은 사람은 반드시 지옥 갈 사람으로 여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왼편 사람들이 왜 저주를 받아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어떤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법에서는 부작위의 죄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형법에서도 처벌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를 보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부작위의 죄는 작위적인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죄로 간주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한 것이나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은 다 똑 같은 죄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누가 복음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졌습니다. 이때 부자는 나사로를 그대로 방치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죽은 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반면 부자는 죽은 뒤 음부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크게 후회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뒤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가급적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신자라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를 싸매 주고 주막에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돈을 주면서 돌봐 주도록 부탁했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 24장부터 시작된 재림과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로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삶은 계속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때도 있고, 별로 또는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 삶에 참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에서 재판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양일까요? 염소일까요? 오른편에 서게 될까요? 왼편에 서게 될까요? 복을 받아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될까요? 저주를 받아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까요? 누가 영생 또는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는 신비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들의 상식과 통념이 정반대로 뒤집어 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준 한 가지를 명백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작은 자와의 관계가 곧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받은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지극히 작은 한 아기의 모습으로 비천한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성탄절이 작은 자와 함께 하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선교사님, 동역자들과 양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이웃을 적극적으로 돌아보고 섬기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벌(永罰)과 영생(永生)의 차이는 예수님을 믿었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나누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린 자와 목마른 자와 나그네 된 자를 섬기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시면 누구든지 그 분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때로는 굶주린 자로 때로는 목마른 자로 때로는 나그네로 오신다면 그 사람을 섬길 수 있을까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일을 하되 주께 하듯하라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영생을 얻으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받은 자가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고마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마음에 품고 손과 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섬김으로 예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의 삶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섬기는 태도에서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여 하겠습니다.
영생은 훗날 천국에서 누릴 은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와 함께 누려야 할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영벌이란 영원한 형벌로 지옥에서 죄인들이 받는 벌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만 받는 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가장 작은 형제가 도움을 받지 못할 때 도움을 받지 못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지옥과 같은 아픔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잠깐 이지만 훗날 심판 때에 도움을 주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영벌을 받아야 하지만 세상에서 아픔을 경험한 형제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영생(永生, eternal life)
일반적으로 생명이라고 하면 죽음을 안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을가리킨다.
여기서
죽음은 인간이 겪는 당연한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한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참 생명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난 죽음에서 탈피된 불멸의
생명이다.
이는 단순히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죄의 문제로부터 해방된 구원의 생명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생명과
죽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생명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교제이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로 이해되었다(참고,
출 32:32. 38:18),
참된 생명은 장수와 행복을 누리며,이는 율법이나 지혜에 순종함으로써 영위할 수 있는것이었다.
후대에
와서는 점차로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이요, 죽음에 대한 승리로 이해되었다(시 49:15).
신약에서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이요, 참 생명은 미래적이며 불멸하기 때문에 영원하고 구원과 결부된다(막 10:17. 롬 2:7. 갈 6:8).
즉, 영생이란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고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일로(요 17:3. 롬 5:21) 새로운 생명임과 동시에(요 5:24. 롬6:11. 요일 1:1-3) 마지막 날에 완성되는 것이다(요 6:40). '영생'이란 단어는 특히 요한이 사용한 표현에서 많이 언급되는데, 요한은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이미 믿음으로 생명을 소유하였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한다(요 5:24-25).
선택에 따라서 가는 길과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복된 길이라고 해서 평탄하고 저주의 길이라고 해서 걸림돌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저주의 길에도 유혹하는 각가지 미끼로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 같이 생각되어 질 때도 있다. 그래서 시작은 순탄하지만 중도에 도사리고 있는 각가지 걸림돌(사단의 올무)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 종교에서는 고행의 길을 말한다. 참된 진리에 가르침을 받고 따라가는 것은 복된 길이며 기쁘게 순종하면서 따라가는 것이기에 결코 어떤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고행이 아니고 기쁨이 넘치고 소망의 길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고행을 강조한다. 생명의 종교는 결코 고행이 아니다. Daum 백과사전에서 (1)고행(苦行)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또는 원망(願望)을 달성하기 위해 괴로운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육체적 욕망을 없애고, 최고의 정신생활을 실현하기 위한 준열한 육체적 가책을 말한다고 했다.
(2)고행이란 자기의 몸을 괴롭게 하고,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며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수행을 하는 것이며 이는 주로 외도들이 천상에 나기 위하여, 혹은 깨닫기 위하여, 또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행하는 정인(淨人)을 말한다고 했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4)라고 한 표현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어둡고 힘든 골짜기와 같은 길로 가기도 한다. 신불신간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들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후에는 임마누엘의 신앙심 때문에 인내로 모든 문제를 극복하면서 살아간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지옥의 영벌은 세상에서 지은 죄에 상응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란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을 마치 최후 목적인 양 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형벌뿐 아니라 다른 것들로부터도 해(害)를 받는 형벌을 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영벌’에, 양은
‘영생’에 들어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 25:46).
요한일서에서는 두려움에 형벌이 있으며, 사랑은 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합니다(요일 4:18).
영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영원한 불’(마 18:8; 25:41; 유 1:7), ‘영원한
죄’(막 3:29), ‘영원한 결박’(유 1:6), ‘영원한 멸망’(살후 1:9) 등은 모두 비슷한 개념들로 표현합니다.
영벌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정신적 혹은 신앙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도덕과 관계되는 삶의 모습을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생각되어
진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종교들이 가르치는 삶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언행을 비롯해서 마음관리와 신앙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행위를 바르게 가져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무리 종교심을 발휘해서 노력해도 분명한 것은 영벌(지옥)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도 있다. 그 형벌을 피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만이 생명의 길이 되어 주시며 그 분 안에 복음을 통해 연합될 때 영생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영생(Eternal life)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47번 소개됩니다.
영생에 대해서는 마음에 평안을 주는 용어로 들려진다.
그리고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의 축약형이라는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oe)와 ‘영원한’의 뜻을 가진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영생은 살아있는 것이 끝난 후의 단순한 시간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그 시작을 갖기 때문에(엡 1:4) 끝이 없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생명과 질적으로 같다(요일 5:11-12)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예정하심과 선택하심에 있다 해도, 영생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참된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을 때에(요 17:2-3; 갈 2:20) 얻는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인들이 두 단어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고 언행심사에 적용해보려고 힘쓰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짐승의 세계는 종교성이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 중에 종교성에 대한 내용가운데 ‘나’(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계명까지 주셨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주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복이고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전재로 하고 있다. 저주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해서 짐승 같다고 했다(시 49:20). 심지어 복을 받지 못하도록 담을 쌓고 방해하는 방법으로 사단의 무기인 죄라는 것으로 유혹하고 있다. 죄 가운데서 불신앙 혹은 우상숭배로 피조물이 피조물을(롬 1:25) 하나의 신으로 생각하고 경배하도록 유혹해서 결국은 영벌에 처하게 되고 마는 슬픔 현장이 세상이다.모든 사람들이 길을 가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목적지를 향하여 가느냐? 영벌의 세계인 지옥인가? 아니면 영생의 세계인 천국인가? 살아있는 동안 종교라는 태두리 안에서 ‘신앙’과 ‘행위’라는 선택을 통해서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영벌, 왼쪽 편에 서지 않는 참된 신앙자로 모두 영생의 길로 함께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목적하고 소망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영생이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믿지 않는
가족이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온갖 비판과 핍박을 당하면서 그토록 많은 시간과 물질과 헌신을 드려 신앙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가 신앙하는 목적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믿지 않거나 혹은 잘 못 믿어서 끔찍한 영벌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한 것이다.
창세기 때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복은 무엇이었는가?
창세기
때 하나님께서는 흙과 같은 아담에게 생기(살리는 기운)를 불어 넣어 생령(산영)이 되게 하셨다(창 2:7).
그리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후 아담을 그곳으로 인도하시고 생육, 번성,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주셨다(창 1:26~2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있으니,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되 다만 먹으면 정녕 죽는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창 2:15-17).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먹으면 죽는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고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나무의 실과만을 먹었더라면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영생하는 복을 받았을 것이었다.
사람의 죄는 무엇인가?
영생의 복을 약속받았던 아담은 대단히 안타깝게도 동산에 침입한 뱀(사단)의 미혹을 받고,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명하신 영생하는 생명나무 실과를(창 3:22) 외면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뱀(사단)이 주는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고 생령이었던 아담이 흙으로 돌아가서 죽게 되었다(창 3장).
그 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아담처럼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롬 5:12).
결국 사람의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아담의 욕심을 모든 사람이 물려받았기 때문이었고, 그 욕심이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약 1:15, 롬 6:23)
그러므로 사람들이 세상에서 짓는 각종 범죄도 죄이지만 그 죄의 본질은 사람이 자기를 지어주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배도(배반)하고 떠나버린 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확실하게 알아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 되는가?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죄악 세상에서 떠나가시면서 사람의 수명을 120세로 정해버리셨다(창 6:3).
그리고 떠나가신 하나님은 사람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죄가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 희생으로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요일 4:9~10).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믿다가 죽은 자들은 마지막 날 부활의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 부활의 때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신약에 예언하셨다(요 11:24~26).
또한 마지막 나팔이 불리면 죽은 자들이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고, 그 때 살아 있는 자들은 썩지 않고 죽지 않음을 입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생명이 사망을 이김으로 영생하게 된다는 것이다(고전 15:51~54).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영생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만 우리의 죄가 사해질 수 있으며(히 8:10-12), 우리를 미혹하여 죄와 사망으로 인도하는 사단마귀를 세상에서 없애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2천 년 전에 이루어졌으나 지금까지 죄와 사망이 사람에게서 떠나가지 않았던 원인은 사람을 미혹하여 죄와 사망의 구덩이로 몰아넣는 사단마귀가 이 세상에서 아직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죄 사함과 영생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그 때가 곧 신약 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는 마지막 주 재림 때이며, 그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최종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 하늘에서 보내신 천사에 의해 사단마귀가 붙잡혀 무저갱(지옥)에 갇혀 천년동안 인봉되었다가 결국 영원한 유황불 못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계 20:1~3, 계 20:12~15).
그리하여 사단이 주관하던 죄와 사망의 세상은 물러가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새 언약을 지킨 자들이 처음익은 열매로 추수되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을 맞고 12지파로 이루어진 새 하늘 새 땅에 영계의 하나님 나라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임하여 와서 하나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눈물도 사망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천국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계 11:15, 계 21:1~6).
이때 이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믿지 않는 자들이나 이러한 실상을 전하는 자들을 오히려 핍박하고 비난하는 자들은, 구더기도 죽지 않는 유황불 못에 던져져서 세세토록 고통을 당하는 둘째 사망 곧 영벌에 이르게 된다고 하므로 모두가 말씀에 깨어 근신하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막 9:47~49, 계 20:12~15).
영생은 구원받는 우리에게 상상조차 못할 최고의 복락을 영원히 안겨주지만, 영벌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최악의 고통 속에 영원히 던져진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고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참 된 신앙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로서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양과 염소'로
양분됩니다.
성도들은 양과 같은 자들로,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을 들으며 그 뒤를 따르는 자들입니다(요 10:1-5).
그들이 나타내는 사랑과 순종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푸는 삶"으로 나타납니다(40절).
이는 물론 '일반적인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를 믿는 믿음에 합당한 선을 행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믿음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만이 아니라 손님을 극진히
영접했던 아브라함처럼 '목마른 사람, 굶주린 자들, 헐벗은 자들'을 돌아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염소와 같은 불신자들은 반대의
삶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위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 이들의 마음과 행위 안에는
'주를 공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44절).
나의 선을 행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하고 존귀히 여기는 것은 참 성도들만의 표시입니다(시
16:3).
영원한 분리(46절)
주님은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가 정확한 판단에 따라 구분될 뿐 아니라 각각 '영생'과 '영벌'로 들어갈 것임을 확증하십니다.
영생과 영벌은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로 누구도 그것을 약화시켜서는 안되며,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소홀히 여겨서도 안됩니다.
주님은 주를 신실하게 사랑하고 순종하는 백성들에게는 "창세로부터 … 예비된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 증거하시고(34절), 반대편
무리들을 향해서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떨어질 것이라 증거하십니다.
여기 인생의 참된 복과 가장
두려운 저주가 있습니다(34, 41절).
참 복과 저주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얻는 복과 고통은
영원 속에서 직면하게 될 영생과 영벌의 그림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은 참 복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요, 진정
두려워해야 할 저주는 지옥의 형벌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무엇을 참된
복으로 여기십니까?
영생 얻은 자로서 합당한 사랑과 순종을 주님께 나타내고 있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4장
무슨 징조(3절)
예수님은 누구에게 오셨는가?
-
로마서 15:8-9 /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 4:4-5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9:16-17 /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0:5-8 /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은 어느 시대에 사셨는가?
- 구약? 신약?
성전에서 나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에 도착할 때까지 성전 파괴 예언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에 예수님께 조용히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성전 파괴의 이유보다는 그 시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의 임하심’을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는 시기로, ‘세상의 끝’을 성전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해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기 전까지 여전히 세상의 왕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징조를 요구하는 제자들에게 답변하시기 전, 먼저 주의해야할 사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혹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3인칭 단수 능동태이기에 미혹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대상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미혹하는 사람이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미혹의 내용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암울할수록 거짓 예수가 등장했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자칭 예수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기에 미혹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주의사항을 잊지
않고 미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미혹에 주의하라는 말씀에 이어 종말의 징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최근에 소위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이라는 전화금융사기 사건의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경찰청 발표를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피해 건수가 5,709건에 피해금액이 무려 595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보이스피싱은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속임수를 씁니다. 자녀를 납치했다거나 자녀가 사고를 당했다고 부모를 속여, 돈을 요구합니다. 국세청을 사칭해서 세금을 환급한다고 속여, 정보를 알아냅니다. 신용카드사나 은행을 사칭해서 신용카드가 도용되었다고 속여, 신용카드 번호를 알아냅니다. 백화점이나 가전회사를 사칭해서 경품행사에 당첨됐다고, 은행계좌번호를 알아냅니다. 대학입시에 추가 합격했다며, 등록금을 입금토록 합니다.
이런 보이스피싱의 수법은 한마디로 ‘미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화를 받고 미혹되는 사람은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전화를 받고도 미혹되지 않는 사람은 피해를 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융당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대국민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메시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같은 메시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이 메시지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크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Don't let anyone deceive you in any way, for
that day will not come until the rebellion occurs and the man of
lawlessness is revealed, the man doomed to destruction. NIV)
미혹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나,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매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3장 말씀을 기초로 보면, 사탄이 사람의 마음에 욕심을 심은 이래로, 사람 속에는 타락한 본성이 된 욕심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욕심을 채워줄 것 같은 무엇으로 유혹하면 쉽게 미혹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어떤 사람은 돈에, 어떤 사람은 남자나 여자에 미혹되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청소년들은 롤(LOL)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 만화 등에 미혹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중고 시절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미혹 중에 가장 치명적이고 악한 미혹이 바로 영적인 미혹입니다. 영적인 미혹은 사탄이 그 배후에 있는 미혹입니다. 이런 미혹은 사람을 영원히 멸망하게 하는 미혹입니다. 이런 미혹은 여러 가지 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는 ‘주의 날’과 관련해 미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미혹은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굳건하게 지키고 있지 않는 무늬만 신자들이 주된 타겟입니다. 이들은 미혹을 받을 때 그것이 어떤 미혹인지 분별할 줄 모르고, 이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미혹의 역사를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베소서 6장 11절 말씀을 통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미혹하는 자들
본문을 보면 바울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이 말씀 속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미혹하는 자들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이 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곳곳에 많다는 말씀입니다.
마 24:4-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장차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울 때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미혹하는 자들은 태초부터 있었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날이 가까울수록 미혹하는 자들이 더욱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은 태초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은 더욱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미혹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미혹의 영의 사주를 받아 미혹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요 1서 4: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진리의 영이 있고 미혹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을 따르는 자들이 있고 미혹의 영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딤전 4: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진리의 영을 따르던 자들 가운데 믿음에서 떠나 미혹의 영을 따르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마 16장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저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때 주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가 미혹의 영인 사탄의 사주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사람도 진리의 영을 따르다가도 미혹의 영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미혹의 영을 따르게 되면 자신이 미혹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을 미혹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긴장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미혹의 영을 따르지 않도록 영적으로 허리띠를 동여야 합니다.
벧전 1:13을 보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긴장의 끈을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보다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아가씨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늘 긴장하고 있지만, 아주머니들은 긴장의 끈을 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들보다 사관생도들이 멋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관생들은 제복을 입고 늘 긴장하고 있지만, 아저씨들은 긴장의 끈을 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긴장의 끈을 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영적으로 우리를 미혹하려는 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미혹의 내용
오늘 본문을 보면 미혹하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미혹했던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종말이 왔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라고 되어있습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찾아와서 이미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고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저들에게 미혹되어서 마음이 흔들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미혹되어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혹하는 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미혹의 주제는 때입니다. 종말이 임박했다거나 때로는 이미 종말이 임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1992년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장림이란 자가 나타나 1992년 10월 28일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하여 큰 미혹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6만여 명의 성도들이 미혹되어 휴거소동에 휘말렸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 학교를 자퇴한 학생들, 가정을 포기한 사람들... 많은 교회들이 이 소동에 휘말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잘못된 때에 대한 주장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있어왔습니다.
황국주, 문선명, 박태선을 위시해서 용화교, 동방교, 장막성전, 구인회, 안상홍 증인회, 영생교 등입니다.
그리고 최근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도 재림일시를 예언했다가 거짓으로 판명된 일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정말 많은 성도들이 저들에게 미혹되어 끌려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눅 17:22-24)
그렇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래서 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모두가 미혹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둘째는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당시 로마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자기를 숭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도 자신을 재림주로 자칭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재림주라고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거기에 속아 저들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따르는 자들이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 많은 하나님과 재림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종교에서 펴낸 [한국의 신흥종교]라는 책을 보면 현재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20여명이 활동하고 있고, 또한 ‘자칭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5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지 못 할 일은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던 자들, 자칭 재림주라고 하던 자들이 죽어 무덤 속에 누워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천부교 박태선, 하나님의 교회의 안상홍, 통일교의 문선명, 영생교의 조희성 등입니다.
저들은 죽어서도 여전히 추종자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의 이희성이라는 자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만희는 자신의 책 [요한계시록의 실상], [계시] 등에서 보혜사, 약속의 목자, 대언의 증인이라고 자처했으며, [성도와 천국], [계시록의 진상]에서는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를 창설하는 구원자라고 주장해 신도들은 이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단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명예훼손 소송 중에서 이만희는 자신이 낸 소장에서 분명하게 “자신은 보혜사도 아니고 그렇게 가르친 적도 없다”고 진술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만희라는 자는 자신이 재림주요 보혜사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주장해 오다가 법적으로 자신이 불리해 지니까 가르쳤던 것도 부인하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토록 미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미혹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미혹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미혹의 방법
오늘 본문을 보면 미혹하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어떻게 미혹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라고 되어있습니다.
첫째, 영으로 미혹했습니다.
영으로 미혹했다는 것은 당시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미혹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적접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에 경계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는 큰 믿음교회의 변승우 목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주요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도라고 주장하고 있고 자기가 받은 예언이 성경의 저자들이 받은 영감과 같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예언이나 성경해석은 전혀 틀림이 없는 완벽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꿈으로 환상으로 특별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영적 현상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말로 미혹했습니다.
말로 미혹했다는 말은 교묘한 말로 해괴한 논리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것과 다른 아주 교묘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2003년에 발표된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와 같은 주장들, 2007년에 출판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의 주장, 그리고 2010년에 출판된 스티븐 호킹이 쓴 [위대한 설계]라는 책에서 우주는 신이 창조하시 않았다는 주장 등. 이런 주장들은 현재 최고의 지성들이 쏟아낸 주장들이어서 수많은 현대인들을 미혹하여 불신앙의 자리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책을 보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런 미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조작된 문서들입니다.
2절을 보면 “우리에게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라고 되어있습니다. 바울에게서 받았다는 조작된 문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미혹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고대 문서들을 왜곡해서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캐런 킹이라는 하버드대 신학부 교수가 고대 파피루스 조각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의 아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결혼했고 아내는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파피루스 조각은 명함보다 크지 않은 작은 조각에는 4세기의 것으로 거기에 네 단어가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체불명의 문서로 허튼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고 이에 미혹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드린 대로 지금 미혹의 영이 활개를 치고 다닙니다. 그리고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미혹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설쳐댑니다. 그래서 자칫 미혹되기가 쉽습니다.
오늘 본문의 소중한 경고를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미혹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0절을 보면 진리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 4:6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미혹이 넘쳐나는 이 때 우리가 더욱 말씀을 사랑하여 미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3장
너희 지도자(10절)
지도자. 카데게테스(kathēgētēs) καθηγητής, οῦ, ὁ 2519
1. 교사, 2. 스승, 3. 마태복음 23:10
어원 / 2596과 223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선생(마 23:8), 지도자(마 23:10)
신약 성경 / 2회 사용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가장 절 섬긴다는 핵심 두 그룹은?
1. 학자들 - "서기관"(에스라)
2. 학자가 아닌 행정 및 관리들 - "바리새인"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먼저 부르셨다는 것은 그만큰 서기관들을 더 높이 인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려주일 : 예루살렘 성 입성
고난주간 월요일 : 마태복음 21장,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고난주간 화요일 : 마태복음 22장, 23장, 24장, 25장
22장, 혼인잔치 비유
23장, 지도자론(서기관, 바리새인) - 성전 뜰에서 강론하는 말씀
- 교계에 잘못된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할 것을 예고하신 것
24장, 감람산 강론(3절,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25장, 감람산 설교
마태복음 23장에 소개된 일곱 가지 화
화 있을진저(3759) 우아이(ŏuai) οὐαί
관련 성경 / 화 있을진저(마 11:21, 고전 9:16, 계 8:13), 화가 있도다(마 18:7), 화로다(눅 17:1),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신약 성경 / 47회 사용
- 헬라어 '우아이'는 '오, 슬프다', `아이고'하는 탄식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저주를 내리는 선언문이다.
그런데 이 저주는 2중적 심판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즉 현재적이며(24:1, 2) 또한 종말적(미래적)이다(계 20:7-15)
마태복음 24: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요한계시록 20:7-15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여기서부터는 계속하여 헬라어
'우아이'로 시작되는 저주문이 7가지로 이어진다.
이러한 저주 선언문을 흔히 7화(禍)선언이라 한다.
7화 선언은 예수의 신적
인격이 총동원될 만큼 중엄하며, 결코 감정적이지 않은 조용하고도 진실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대의 자숙(自肅)과 회개를 촉구하며
상대를 압도하는 권위에 찬 선언이었다(Lenski).
예수께서는 이 7화의 대상이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임을
말한다.
마태 6:2, 구제 할 때
마태 6:5, 기도할 때
마태 6:16, 금식할 때
외식이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인 헬라어 '휘포크리타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위선자'로 번역 되어 있다.
속과 겉이 다른 모습
이중인격자의 모습
ὑποκριτής, οῦ, ὁ 5273
어원 / 527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외식하는 자(마 6:2, 15:7, 23:23,29, 눅 6:42)
신약 성경 / 18회 사용
* 5271. ὑποκρίνομαι
어원 / 제1부정과거 ὑπεκρίθην, 5259와 29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체하다(눅 20:20).
신약 성경 / 1회 사용
서기관(scribe) 그람마튜스(gramma- tĕus) γραμματεύς, έως, ὁ 1122
어원 / 11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서기관(마 2:4, 막 1:22, 행 6:12), 서기장(행 19:35), 선비(고전 1:20)
신약 성경 / 64회 사용
바리새인(Pharisee) - 보수그룹, 정치그룹. 파리사이오스(Pharisaiŏs) Φαρισαῖος, ου, ὁ 5330
어원 / 히브리어 656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리새인(마 3:7, 막 3:6, 눅 5:21, 행 23:6)
신약 성경 / 99회 사용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호칭은 '위선자'라는 아주 모욕적인 언어이다.
이같은 과격한 말은 6:2, 5,16;7:5에 그리고 22:18에도 나온다.
이렇게 위선자라고 단정짓는 이유는
앞부분(2-7절)에서 열거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이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여기서는 위선자들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천국 문
- 천국에 들어가는 표현을 '천국 문'으로 표현한 것은 7:7,8,13,14; 25:10에도 나타난다.
평행구절인 눅 11:52에서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라고
서술한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지식의
만용을 부려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법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4절).
2. 진리를 독점(獨占)하고 있으면서 실천을 하지 않아, 자신 마저도 천국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열쇠를
독점하여 들어 가고자하는 다른 사람까지도 못 들어가게 방해한다.
3. 위선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는 간접적인 방해가 아닌 적극적으로
천국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곧 그들의 천국 문까지 닫아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실로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
문을 막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 특히 신앙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주 1에 의하면 마가복음 12:40, 누가복음 20:47과 유사한 구절이 있음
마가복음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0: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두번째 저주 선언(15절)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교인 하나 지옥 자식이 되게
역시 저주의 대상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여기서 먼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란 13절의 소극적인 면과는 대조적으로 적극적인 활약상을 암시한다.
한편 당시 유대교인들은 선교에 적극성을 띠었다고 전한다(Josephus, Antiq. XX 2,4; Calvin, Bengel).
물론 그들 유대인들의 전도 활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갖는 파당적인 종교적 성격을 추종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한편 여기 교인(프로세뤼토스)이란 공동번역 성경과 같이 '개종자'로 이해해야 되는데 그 개종자들은 할례를 받고 성전세를 내는 등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모든 전통과 규범을 따름으로써 유대화해야만 했다.
이런 절차상의 문제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지녔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무지한 이방사람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잘못된 진리를 배운 사람들을 더 지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지옥'은 헬라어로 '게엔나'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람어로는 '게힌남' 히브리어로는 '게힌놈'이라고 음역되는데 이는 '힌놈 골짜기'(Valley of Hinnom)라고도 말한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서 유대의 후기신앙은 최후의 심판이 그곳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이 죽음 이후에 벌을 받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지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33절; 5:22).
한편 본문에서는 더 지독한 위선자를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강조 하기 위해 개종한 자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그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이교적 습속(習俗)에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덧입힘으로써 구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종자가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종자들이 더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욱 완고한 위선자들을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를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위해 노력하지만 참으로 전도할 대상에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월감을 갖고 나간다거나 섬김의 자세 보다는 '선생'이라는 의식을 갖고 나간다면 도리어 교회 문을 막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피 전도자가 비록 교인이 된다 하여도 잘못 배워 잘못된 신앙으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
잘못된 성경관과 신앙은 제거되어야지 재생산 되어서는 안된다.
세번째 저주선언(16절)
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 저주의 대상은 13절이나 15절과는 달리 '소경된 인도자'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진리에 눈이 먼 완고한 무지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10절; 15:14).
자신들의 행실도 온전치 못하면서 자기를 따르라 하는 지도자는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지옥으로 빠뜨린다.
성전으로 맹세(盟勢)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 이 말은 성소나 지성소 또는 제단등의 건물로서의 성전을 근거로 맹세하면
이를 기필코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맹세의 구속력을 무시하는 처사인 동시에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가르침이다.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 여기서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치는 예물로서의 금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성전
안에 비치된 금장식 또는 성전 금고에 간직된 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사나 하나님보다 성전 제물에 더 큰 관심을
지닌 바리새주의자들(교권주의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준다. 그러나 실로 율법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과 맹세했을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민 30장).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두고 맹세한 것만 효력(效力)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거짓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황금보다 낮추어 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라면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5:33-37).
예수께서는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에 근거하여, 실천 의지가 전혀 깃들지 않은 맹세를 철저히 거부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 그 저주의 대상이 13절과 15절의 형식과 똑같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지목(指目)된다.
비판의 내용은 그들이 사소하고 세분된 규정과 전통에는 아주 민감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십일조
- 소출의 10분의 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창
14:20; 28:22)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되었다(레 27:30; 신 14:22-27).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趣旨)는
1.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인정과
2.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 운영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
사랑의 예물로서가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통해 유대인됨과 율법 완수자됨의 규준(規準)으로 삼았다.
박하
- 헬라어로 '헤뒤오스몬'이라고 하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이다.
이는 유월절 쓴나물의 양념으로
쓰였으며(출 12:8) 그 향내로 인해 회당의 방향제(芳香劑)로 쓰였다고 한다.
회향은 헬라어로 '안네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이며 양념에 사용되는 식물로서(anise, dill) 약품과 향료에도 사용된다.
근채는 '퀴미논'이라고
부르는 식물로서 이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된다.
근채를 다른 말로
구민초(cumin)라고도 한다.
이상에서 나열한 식물 종류는 이스라엘의 농작물 중 매우 사소한 수확물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사소한
종류를 나열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레위기 27:30의 규례(規例)에 따라 얼마나 십일조에 철저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판은 이렇게 세세한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행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그들의 십일조 생활을 강조한다.
율법의 더 중한 바
- 여기서 '더 중한 바'란 '더 어려운 일이나 `더 힘든 일'(De Wette)이
아니라 지엽적(枝葉的)이거나 사소한 일과 대조되는 '더 중심적이거나 결정적인 일'(Ridderbos) 또는 '더 중요한
일'(Meyer, NIV)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아주 중요한 율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차등(差等)적인 율법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앞에 나온 사소한 십일조 행위와 대비시킴으로써 더욱더 중요한 율법을 소홀히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다.
의(義)
- 헬라어로 '크리시스'라고 부르는 이 말은 종말적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재판, 판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옮음(right)와,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에서의 '의'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으로서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간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를 분명하게 하도록 돕는다(신 16:19;사 1:17;렘 5:13).
인(仁)
-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22:37-40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信)
-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용(faith, truth), 약속, 서약, 증거, 담보,
보증, 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히 11:6)와 이웃에 대한 신뢰(시
15:3, 4)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가지 종류의 단어, 의(義), 인(仁), 신(信)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보일 수 있지만 의(義), 신(信), 인(仁)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버렸도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버렸다'로, 공동번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여기서 예수의 치밀함을 엿보게 된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인의 십일조
행습(行習)은 무조건 비판을 가할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의 선언(5:1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 번째 저주선언(25절)
여기서는 당시의 랍비들에 의해 제정될 의식적(儀式的) 정결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잔과 대접'은 먹고 '너는 그릇을 통칭(通稱)한 말인데, 이것을 정결히 한다함은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이고 가식적인 율법적 청결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종교적 의식(儀式)보다는 음식을 깨끗하게 담기 위함이다.
따라서 물론 안팎을 모두 깨끗이 해야 되지만 우선적으로 깨끗이 해야 할 부분은 그릇 안쪽일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릇 안을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다.
다시 말해 정작 중요한 것은 속마음인데 겉으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척하면서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네번째 저주 선언문인 23, 24의 내용과 비슷하다.
탐욕과 방탕으로
- 탐욕'은 헬라어로 '하르파게'라고 하는데 '강탈', '약탈', '도둑질'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는 주로 물질적인 측면의 죄악을 암시한다.
'방탕'은 헬라어로 '아크라시아'인데 그 뜻은 '자제력 상실',
'무절제'이다.
이는 주로 윤리적 측면의 범죄를 암시한다.
한편 이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는 구절이 7:15의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마음 속에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즉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실제로 남의 것을 착취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강조점은 악한 마음과 동시에 그 악독한 마음에서 비롯된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 무덤은 들판이나 길 옆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무덤은 겔 39:15에 근거한 랍비들의 명령에 따라 우기(雨期)가 지난 유월절 전 아달월 15일에 회가루를 뿌려 하얗게 칠한다. 그 이유는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특히 유월절 순례자들)이 쉽게 식별하여 피해가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한편 행 23:3에서 바울은 이와 유사하게 대제사장을 '회칠한 벽'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당시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대제사장의 위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어법으로 나타내려한 의도를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회칠한 무덤'이란 그들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죄악성은 뒤로 하더라도 사람만을 의식하는 그들의 허영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형태에 대한 극히 독설적인 책망이다.
2.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극히 부정하다고 단죄(斷罪)하는 율법 조항에 의해 비판받게 하여 그들에게 지독한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고자 함이었다.
실로 그들은 회칠한 '무덤'에 비교될 만한 무가치하고 반신앙적 인물들이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칠한 무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곧이어 함으로써 이해를 보충시키고 있다. 즉 '겉'과 '안'을 대조(對照)시키고 다시 '아름답게'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대조시켜 위선자의 양면성을 밝힌다. 27절의 내용은 사실 25절의 저주 선언문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
-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인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창 3:9; 요일 3:14,15).
따라서 주검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누구든지 그것과 접촉하면 역시 부정에 전염(傳染)된다고 규정하였다(민 5:2;6:6).
한편 그러한 주검이 안장되어 있는 유대인의 무덤 속에는 송장의 뼈와 시체의 악취와 기타 오물로 가득하여 의식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위생학적으로도 더럽고 추한 몰골을 형성하였다.
실로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실체요 내면의 부정이었던 것이다(행 23:3).
한편 인위적이고 과도한 경건은 독선과 가식의 겉포장일 수 있다.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 추앙(推仰)받은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이었다.
더욱이 성전 금고의 일부분이 그 일에 사용될 만큼 전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 사회에는 자연 무덤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근본적인 동기는 그 선열들의 발자취를 좇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나갈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위선된 자신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남을 부리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랍비 곧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형제이며 선생은 오직 유일한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히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삶을 온전하게 실천한다면 그 사람은 곧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것이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실 이유가 없다. 물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모든 사람의 표상이고 기준이다. 그래서 영어로 표시할 때는
the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모든 인생은 또한 그리스도(a christ)이다.
이것은 신앙적 타락이나 변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신격화와 같은 이단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요 제사장과 같은 삶이되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하나님의 그 뜻(LOGOS)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이다. 즉 육신을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창조 목적을 육신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소 오셔서 그것을 보이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이단 논리가 아니라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일한 지도자인 것이다. 지도자란 따르는 사람에게 바른 것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좇는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에게 하나 밖에 없는 지도자인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고, 자기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고 따라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 지도자이신 그리스도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분이신 것을 예수님께서 전하셨고 또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도자', '선생', 그러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가진 선생이나 지도자가 되지 말고, 오직 너희 삶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말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의 정체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지도자나 선생은 결국은 대접을 받고 가르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앞에 있다는 것에 조금만 심취하면 따라오지 못하거나 알아듣지 못한다 싶을 때 훈계나 질책하기도 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런 지도자였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만 뜨면 예수님께 혼났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아니 부활하셔서 변화된 몸을 보이셨음에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책망보다는 몸소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 그들이 본 예수님의 모습과 들은 말씀이 땅에 심긴 씨앗이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깨달아지도록 기다리고 몸소 보이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바로 그런 모습이 남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고자 한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모습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섬기는 존재이고, 또 반면에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이 섬기고 따라야 할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의 지도자이고, 그리스도의 성품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모른다고) 사형을 당하셨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단면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예를 들어 목사와 성경에 대하여 논쟁하다 목사로부터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은가? 정말로 목사가 성경에 대하여 다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건 목사는 성경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회칠한 무덤 같은 논리이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무덤과 같이 죽고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신분은 성경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 취급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성경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가장 잘 알면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인가?
그것은 비단 목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아노라 하면 하나님을 모른다는 심판으로 죽어 나가는 모습을 수용할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단 받는 랍비와 예수님께서 듣지 말라고 하는 선생이라는 칭함을 받는 사람일 뿐 그리스도의 제자나, 성경을 가르치는 온전한 선생의 모습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발을 씻어 주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내려서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유모차처럼 생긴 보행 보조기를 손에 잡고 힘들게 서 있었다. 그런데 횡단보도 밑에 내려서 계셨기 때문에 차가 지나갈 때 불편했다. 그때 어떤 차는 조심스럽게 속도를 죽이고 맞은편에 차가 오는지 살피면서 피해갔다. 그런데 어떤 차는 큰소리로 경적을 오래 울리면서 빠르게 할머니 앞을 지나갔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가 편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의 차이다. 조심스레 지나간 차는 남을 섬기는 것이다. 반면에 경적을 울린 차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칭함을 받지 말라는 선생의 모습이 그것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해보면 별게 아니다. 다만 자존심 상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지 못하는 분함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내가 생각할 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딱 그것 하나로 인해서 그러고 싶지 않고, 그러면 안 되고, 그러면 내가 불편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선악과다. 내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화평과 안식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옳고 그런 것 중에 가장 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께 주장하고 결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순종하신 분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즉 선악과를 먹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이란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므로 예수님을 죽은 자 중에서 살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 가진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바로 그런 것에 쓰라고 주신 것이다.
더 알고, 더 밝은 것은 무식하고 어두운 자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같이 내어주고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내 보이는 것이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섬기는 그리스도, 그 정체성은 더 알기에 죄인이 되고 모르는 이들을 섬기는 것, 그것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지도자"라는 호칭이 가능한가?
2.1. 신약성서에서 "지도자"(a leader) 혹은 "지도하다"(to lead)에 해당하는 어휘들을 대략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명사형으로 "지도자"는 a*rchgoV", h&gouvmeno", o&dhvgo", e*pivskopo", e*pivtropo", e*pistavth", prwtostavth", paidagwnov", kaqhghthv", 혹은 e*piskophv 등이며, 동사형으로 "지도하다"는 h&neomai, o&dhnevw, poimaivnw 등이다. 논의에 앞서, 구체적으로 위의 어휘들에 대한 용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 아르케고스(a*rchgoV")이 말은 칠십인 역에서 통상 백성들의 정치적 혹은 군사적 지도자를 의미했다. 신약성서에서는 단 4회 사용되는데, 행 3:15은 "생명의 주"(a*rchnoV" th'" zwh'"), 행 5:31은 "임금과 구주"(a*rchnoVn kaiV swth'ra), 히 2:10은 "구원의 주", 히 12:2은 "믿음의 주" 등이다. 이는 초기교회가 이 말을 변증적 설교의 맥락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도록 사용했음을 알게 한다.
2) 헤구메노스(h&gouvmeno")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8회 사용된다(마 2:6, 눅 22:26, 행 7:10, 14:12, 15:22, 히 13:7, 17, 24). 이 말을 마태는 2:6에서 미가 5:1, 3와 왕하 5:2을 결합해 종말론적 왕으로서 백성의 선한 지도자로 이해하며, 행전과 히브리서에서도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책임을 맡은 목회자들이나 신앙의 모범자들로 이해한다. 특히, 막 10:43-44("누가 큰 자인가")을 자료로 하여, 누가는 눅 22:26에서 "지도자"는 "섬기는 자"이어야 함을 말한다(눅 22:26, 27b, 막 10:43, 45 참조).
3) 호데고스(o&dhvgo")이 말은 칠십인 역에 거의 나오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지도자"나 "안내자"로 사용한다. 행 1:16에서 예수님을 대적자들에게 안내한 가룟유다에게 적용하며, 마태 23장(16, 24, 참조. 15:14)에서는 소경 인도자인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특히 요 16:13에 "인도하다"(o&dhnevw)는 말을 통해 요 14:26의 "보혜사 성령"(paravklhto")과 관련하여, 지상의 예수 자신도 참 인도자로 그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도했음을 말한다.
4) 에피스코포스(e*pivskopo")이 말은 성서 밖의 헬라어와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감독자인 인간, 견유학파 사람, 혹은 어떤 직책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단 5회만이 사용된다. 벧전 2:25에는 '그리스도' 자신을 그렇게 불렀고, 나머지 구절에서는 대체로 초기교회 내의 '지도자'를 가리킨다(행 20:28, 빌 1:1, 딤전 3:2, 딛 1:7). 아마도 이 말은 교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장로"와 같이 책임있는 자를 가리키다가, 목회서신의 교회에 와서는 구별된 직책으로 말해졌을 것이다.
5) 에피스타테스(e*pistavth")이 말은 세속 헬라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를 주로 가리켰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누가복음에서만 호격(e*pistavta)으로 7회 사용된다(눅 5:5, 8:24, 45, 9:33, 49, 17:13). 복음서 기자 누가는 다른 복음서의 "랍비"(r&abbiv), "교사"(didavskale), "주님"(kuvrie)에 대신하여 이 말을 편집 삽입어로 사용한다. 누가는 제자 공동체를 지도한 지상의 예수님을 회상하며, 역시 지금도 그가 교회 공동체의 참 지도자(a true leader)임을 말한다.
6) 카데게테스(kaqhghthv")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마 23:10에서만 2회 사용되었다. 물론 이 말이 "교사"나 "(길)안내자" 등을 가리키지만, 마태 23장의 맥락에서 마태는 예수님만이 제자들에게 "유일한 지도자"일 수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니 곧 그리스도니라"로 말한다.
2.2. 우리는 이미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을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막스 베버(M. Weber)의 지도자론에 따르면, 지도력(leadership)이란 지도자와 추종자들 모두가 그 가치들, 동기들, 희망들을 구체화 시키기 위해 어떤 추상적인 목표들을 향해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초기교회는 바로 자신들의 교회적 지도력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으려 했으며 지상의 예수님을 참 지도자로 이해하며 따라야 할 모범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이해의 뿌리는 지상의 예수님에서 출발해야 함이 사회학적으로 타당하다. 결국 예수님의 지도력은 그 자신의 기독론적 혹은 종말론적 이해의 지평과 더불어 초기교회의 신앙 고백적 선포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은 일반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개념의 테두리를 넘어서 '구원자'라는 신적 인간의 성격을 띄게 되는 것이다.
2.3. 초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님으로서만 아니라, 참된 지도자로 이해했으며, 교회 공동체인 자신들은 그를 따르는 선택된 무리 혹은 제자들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누가의 이해는 분명하다. 누가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e*pistavta"로 부르도록 하며, 눅 22:24-33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지도자적 모습이 제자들과의 관계로 더욱 구체화되어 드러난다. 즉, 유월절 만찬(14-23)에 이어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로 다툰다(24-30).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지도자는 섬기는 자"(26절)라 말하면서, 바로 그 자신이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말한다(27). 이런 맥락에서 누가는 예수님을 제자들의 지도자(o& h&gouvmeno", '두목')로 이해한다. 더불어, 편집구인 28-33절에서 누가는 이 맥락을 더 확대시킨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범으로 수난의 길을 갔듯이, 지금 제자 공동체들도 종말론적인 심판과 "그 나라"를 소망하며 그들 자신도 다른 "형제들"을 지도해야 함을 말한다. 결국 누가는 교회의 지도력이 주님의 말씀에 있었고 지상의 예수님이 교회 지도자의 원형(proto-type)이었음을 회고하며, 동시에 누가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행전의 베드로와 바울처럼 역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요 16:13에서도 동일하다.
2.4. 이러한 검토로, 우리는 이미 초기 교회로부터 지상의 예수님은 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안내하며 지도하는 제자들의 참 지도자로 이해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적인 몇몇 호칭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지상 활동에서 위의 호칭들이 그 분에게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경험한 초기 교회에 얼마간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교회 안에 지도력의 대두라는 교회의 자리에서 참 지도자였던 지상의 예수님을 자연스레 회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해는 실제로 예수님 자신이 이미 언급한 호칭들로 자신을 말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지도자"였다. 12명의 제자들이, 혹은 다른 이들이 그를 누구로 이해하고 불렀던지 간에, 그는 새로운 목표와 이상을 제시하며, 그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앞서 나가며 자신의 지도력을 생명으로 바친 참 지도자였다(요 10:11-18 참조. 막 8:27 이하).
3.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도자론
만약 초기교회가 지상의 예수님을 회고하면서 그를 자신들의 참 지도자로 이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자기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마 23:8-12의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단락의 전승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랍비"나 "지도자"로 불려지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마 23:8,10). 마 23:8-11에 따르면, "랍비", "아비"(일종의 스승), "지도자" 등으로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호칭은 그리스도처럼 '섬기는 자'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는 오직 한 분 - 그리스도 - 만이 그런 호칭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마태는 "랍비"(r&abbiv)"아비"(pathvr)"지도자"(kaqhghthv")"그리스도"(Cristov")"섬기는 자"(diavkono")라는 도식을 통해, 섬김의 참 지도자인 그리스도를 마태 교회의 모범으로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참조. 마 23:8-9). 그러면, 이런 호칭의 사용이 전적으로 초기교회로만 돌려져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3.1. 참 지도자로서의 권위
사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도력의 바탕을 예루살렘 성전과 제의 율법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에세네파나 제롯당은 그러한 기존의 세력이 이끄는 지도력에 반대하거나 대항했던 자들이었지만,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를 포함한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지도력이 이스라엘 대중에 보다 더 영향력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했나? 예수님은 영향력있는 지도자였나? 그렇지 못했다. 사실 그의 지도력은 결과적으로 대중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간 예수님의 인격으로즉, 그의 말씀과 행위로예수님의 지도력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 나오는 성전청결 사건(막 11:15-19)과 그에 따른 권위에 관한 논쟁 이야기(막 11:27-33)는 이를 잘 보여준다. 수난의 맥락에서 이런 예수님의 도발 행위는 메시아적 상징을 띤 선지자적 행위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위한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스스로 촉발시키며 새로운 성전(공동체)의 회복을 뜻하는 종말론적 상징행위를 행한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은 자신의 지도력을 의식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자기 중심적" 중재자로 자신을 이해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권위였다(참조. 막 1:27, 2:10, 28, 4:41, 11:18, 27-33).
3.2. 삶의 자리
3.2.1.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곧 모든 이들을 이끄는 현장을 의미한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당시에 팔레스틴 지역에는 많은 회당이 있었고 여기서 많은 대중들은 율법을 만나고 안식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눅 4:20).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한의 연대기를 고려해 볼 때, 복음서도 예수님의 활동의 자리를 우선은 예루살렘 성전과 여러 회당으로 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제도와 전통의 틀에 바탕하여 자신의 입지를 마련해 가는 예수님의 모습인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체포와 수난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이와 같이 그의 지도력의 경로는 얼마간 일반 지도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막 14:49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고 말한다. 이는 그의 지도력이 성전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지도력의 우선성이 사회적 적법성을 유지코자 하는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3.2.2. 그러나 우리는 한번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았던 유랑자적인 카리스마이기도 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눅 9:58, 마 8:20). 사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사제들, 랍비들, 서기관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했던 반면에, 예수님은 제한된 대중이나 닫혀진 공간이 아니라 열려진 공간에서 모든 이들을 찾아나서며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 당시 있던 에세네파의 쿰란처럼 금욕적 은둔생활을 강요하거나, 제롯당처럼 어떤 정치적, 군사적 혁명운동을 부추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때를 분별하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자기 인격 안에서 화해와 섬김의 복음으로 선포했던 것이다(막 1:15, 눅 4:18-19).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에 의해 소외된 자들세리, 죄인, 간음한 여자, 각색 병든 자, 소경, 문둥병자, 여자들, 가난한 자들, 귀신들린 자 등을 찾아 다니며 그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기도 했다(막 2:15-17 참조).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유랑하며 닫힌 사회적, 종교적 공간을 의도적으로 깨트리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세우는 운동에 있었다.
지도자론
예수님은 자신을 추종하는 많은 무리들 중에서 그의 말과 행위를 모범으로 삼고 배우려는 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다(막 3:13-19). 그러나 제자들을 부름이 오직 예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진다. 배타적으로 그들에게 당시의 다른 지도자와 어떤 관계도 허락지 않았다(마 23:8-10). 이는 예수님의 지도자 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 나라, 율법의 해석, 일상생활 규범,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활동규칙 등에 대해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철저히 가르치려 했으며 역시 자신의 제자들을 다시 세상에 파송하면서 사명을 주고 행동 지침을 주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 했다(막 6:6-13, 마 10:1, 5-15, 눅 9:1-6, 10:1 이하). 유대교의 지도력이 율법에 대한 결의론적 해석에 치중한 유대교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법 해석에 기반을 둔데 반하여, 그의 지도력은 보다 인간 중심적인 법의 정신과 그의 종말론적 지평에 의해 이끌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시의 지도 세력들과 갈등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3.1. 지도력의 동기들
예수님은 천편일률적으로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자기만을 중심으로 해서 말하거나 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상대방의 처해진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에만 몰입하는 황당무개한 지도자가 아니라, 너와 나의 만남으로 이뤄진 공통된 상황의 일치점을 중심 주제로 하여 사건을 판단하고 해석하며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의 지도력은 전적으로 천부적이었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복음서는 그의 여러 가지 경험을 말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결정적 경험으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받은 수세사건을 들고 있다(막 1:9-11 및 병행구절).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영적 체험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경험한 그런 소명에 따른 환상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예수님의 확실한 자기 소명의식은 이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떤 자의식(自意識)이 비로소 확정되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지도력의 중요 동기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1) 먼저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라는 자의식(自意識)이다(막 1:38 병행, 10:45 병행, 마 5: 17, 15:24, 10:34-35, 눅 12:49). 이는 "나는 …이다"(e*gwv ei*mi)는 예수님의 독특한 말투에서도 잘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자기 정체성이 신적인 필연성에 의해 정해진 삶의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체득되었다기 보다는, 점진적이며 다양한 삶의 경험에 의해 연속적으로 획득된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과의 만남, 수세사건, 마귀와의 시험사화, 각계각층과의 만남과 인간관계, 제자 파송, 율법에 대한 논쟁, 죄용서의 선포 등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송된 자라는 지도자 의식을 체득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파송된 자로서의 다양한 삶의 여정을 경험하며 고난의 길을 스스로 밟아 나가는 지도자였다.
2) 둘째는, 그의 "(그) 선지자" 의식이다(눅 13:33, 마 23:31 이하, 37-39 병행, 막 6:4 및 병행구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막 3:28 이하, 마 12:28, 사 61:1 참조). 이는 그의 선지자적 권위와 연관한다. 역시 백성들도, 제자들도, 심지어 바리새인도 그를 선지자로 이해한다. 그는 사 61:1의 영의 약속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끊어진 영"에 대한 공유로 종말론적 회복을 제자들에게 기대했다.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영은 아버지아들따르는 자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도록 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들"의 자격을 부여한다. 이런 창조적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 부름말 "아바"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율법적 권위가 아닌, 가족적 사랑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의 종말론적 지평과 더불어 기존의 제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연히 새로운 이단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참조. 막 1:22, 27, 2:10, 11:27-33).
3) 셋째는, 그의 메시아적 "인자" 의식이다. 수세사건(막 1:11)과 시험사화(막 1:12-13)를 통해 이미 세례요한에 의해 예고된 인자-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한다(참조. 막 1:7 병행). 이런 "최초의 결단"을 통해 그는 점진적으로 메시아적 인자의 길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엄격한 "아들됨의 순종"(A. Schlatter)으로 걸어가도록 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종적인 결단"에 이른다. 이처럼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아들과 인자-메시아로 나아갔고 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때, 예수님 자신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극진한 헌신(cf. 사 61:1-2), 사랑의 섬김(눅 19:10, 막 10:42-45, 요 13:2-17), 또한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 새롭게 자신을 이스라엘과 일치시키려 한다.
3.3.2. 지도 방법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자의식과 그것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런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지도하려 했고 또 지도했는지를 알기 위해,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방법론을 추출 해내기 보다는 일괄적으로 예수님의 특징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살펴보려 한다.
1)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지만 비유적이어서 그 성격상 제한된 자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참조. 막 4:11-12).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를 자신의 자리에 초대했지만, 세리, 죄인, 가난한 자, 종 등과 같은 하층민들이 그 초대에 응할 뿐이었다(참조. 눅 14:7-14, 4:18 이하, 마 11:5, 참조. 막 2:17b), 그의 초대에 응한 자들은 속옷조차도 빼앗기며,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만 하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마 5:40-41). 한편,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과 제사는 원하면서 이웃에 대한 자비는 원치 않았다(마 12:7, 참조. 막 2:23 이하). 화려한 궁전과 쌓이는 재물에 정신이 팔려 그것들을 의인의 축복과 평안으로 오해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이 결국 자신들의 자멸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적,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 때,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회에 등장했던 것이다.
2)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 사회적 현실이 역전되기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을 향한 새로운 비존이며 새로운 지도력이었다. 그 약속은 물질의 만족을 넘어서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확신"을 체험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런 새로운 확신의 자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며 행동으로 옮겨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그 현장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하나의 비젼(the vision)을 통해 서로가 만나는 삶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랍비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에 대한 문자의 해석과 행위적 모범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혹은 새로운 신율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무리들을 초대하고 지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밖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왕국을 꿈꾸며 자신의 지도력을 이 땅에 확장시켜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요 10:11, 마 26:31b 참조)를 보기 보다는, 열 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그런 지도자(마 26:53)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의 지도자였다. 이는 남을 자유케 하는 고난의 섬김을 뜻한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붸아내며(막 1:32-34, 21-28, 3:1-6, 5:1-43), 세리나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의도적으로 한다(막 2:15-17, 마 9:10-13). 그런 일들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베푸는 용서의 샬롬에 그들을 동참하게 함으로, 상처난 자리를 싸매고 병치유의 자리에 들게 한다. 이렇게 사회 속에 함께 나눔의 자리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가 누려야 할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친히 그것을 몸으로써 보여 주었다. 즉,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있을 용서와 화해를 그 초대의 현장에서 종말론적으로 경험케 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과 행위 앞에는 의인과 죄인, 정결과 부정, 부자와 빈자라는 이분법적 차별이 없어진다. 그는 율법의 행위 규범으로 인간을 파악하지 않고 믿음의 법인 섬김과 사랑으로 모두를 파악했던 것이다.
4) 더 나아가 예수님의 섬김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막 10:45에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맞이 할 수난을 앞두고 대속적 죽음을 각오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지도자나, 선지자, 혹은 모범자로 이해하고 부르는 것을 거부케 한다. 예수님의 섬김은 일반적 범주를 넘어서 오히려 고난 당하는 자들과 그 현장을 자신의 인격에 일치시키며 새롭게 자유와 생명을 해산하는 창조적 행위였다. 이를 우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알게 된다. 그는 유월절을 앞두고 자신의 사명과 제자들의 책임을 가르쳤다.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통해 자신의 제자 공동체가 '하나'이어야 함을 가르치며 죄용서 받은 기쁨의 '새 계약 공동체'가 그의 인격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이해시켰다. 역시 부활후에 초기교회는 이런 것들을 기억하며 새롭게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지도자론은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다.
그는 지도자로서 성경을 풀어 주기도 하고, 비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며, 종말론적 신앙의 능력을 보여주고, 자신의 말씀 앞에 제자들을 결단하도록 이끌며, 눈물을 흘리는 자와 함께 흘리며, 기쁨에 넘치는 자와 함께 기뻐하며, 그렇다고 유대교의 지도자들처럼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온유와 겸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며,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남을 자기처럼 여기며,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섬김과 화해의 지도자로 자신을 내던졌던 고난의 종이었다. 그리하여 의인보다는 죄인을 찾아 다니며, 일등보다는 꼴찌를 사랑하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나라의 새질서는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그 뿐인가? 예수님은 타락한 성전 예배를 반대하며 성전을 청결케 하며, 율법의 원래적 정신에 어긋난 비인간적 독소 조항을 철저히 비판하며, 또한 그것들을 자신의 안위에 이용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훼파하려 했으며, 개혁하지 못하는 안일한 기존의 체제를 향해 메시아적 선지자로서 저주를 선포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한다는 자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기존의 체제를 비판하고, 민중 봉기를 획책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국역 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던 것이다. 어느 누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결단"을 통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초하며 하나님 나라의 모범을 보이신 하나님 아들이었다.
초기교회는 자신들의 지도력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으려 했다.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지상의 예수님을 회상하므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공동체의 참 지도자의 원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해가 초기교회의 것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물론 예수님의 지상 활동에서 "지도자"라는 호칭이 직접적으로 불려지지는 않았지만, 초기교회의 이런 이해의 바탕은 지상의 예수로부터 나왔다는 데에 거부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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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나 랑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두르라’는 뜻의 라틴어 명언이다.
로마의 최초황제 아우구스투스(케사르 옥타비아누스)가 즐겨 쓰던 말이었다.
곧 좌우명이자 인생훈이었다.
그 새김은 모든 일에 성급함이란 금물이며 그렇다고 두손 놓고 태평세월하지 마라는 뜻이지 싶다.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자주 사용된다. 요즘 식으로는 ‘천천히 그리고 빨리’가 된다. ‘천천히 서두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이다. 말 그것만으로는 앞뒤가 안 맞는다. 천천히 하면 서두를 수 없고, 서두르다 보면 천천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이 결합돼서 ‘천천히 서두른다’는 새로운 개념이 빚어졌다. 모순어법(oxymoron)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마도 훌륭한 지도자상에 대해 많은 고민과 반성을 했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뛰어난 지도자가 되려면 성급함은 금물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그걸 경계하는 뜻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로마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의 해석에 따른다면 그렇다. 이런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주조된 금화 뒷면에 이 말을 상징하는 게와 나비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게나 나비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게나 나비가 민첩하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물은 아니다. 뭔가 꾸물꾸물 느리게, 그러나 늘상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를 황제로서 깨어있도록 주목시키기 위한 동물로 삼은 것 아닐까 한다.
천천히 가는 사람은 실수 없이 간다
옥타비아누스가 이런 생각에 마음을 쏟았던 이유는 뭔가. 그는 휘하 장군들에게 조급하게 훈련을 시키기보다는 서두르지 않고 강하게 훈련을 시키는 장군이 되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언제나 장군들에게 “천천히 서두르라”고 훈시했다. 왜 그랬을까. 대담하고 성급하기보다 안전하고 강한 사령관이 일을 더 잘해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아닐까. 그는 공화정이던 로마를 제정으로 바꿔놓은,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였다. 사실 생전에 그는 절대로 스스로를 '황제'라고 부르지 않고 '제1 시민'이라고 불렀다. 진정으로 로마시민에 겸손했는지 통치기법상 그랬는지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말이다.
페스티나 랑테! 여기서 그 의미를 잠자코 음미해보자. 고요하면서도 묵중한 가르침이 새겨지지 않는가. 참으로 명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 어떤 행동이든지 서두르다 보면 실수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니 일이 그릇됨이 없도록 찬찬히 균형과 중심을 잡으라는 말이겠다. 지나치게 무리하면서 서두르면 실수가 생기고 장기적으로 볼 때도 결코 긍정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삶을 살아가며 인간사를 깊게 느낀 이들의 지혜가 만든 명언들은 많다. 그 중 하나가 “천천히 서두르라” 이다. ‘천천히 가는 사람은 실수 없이 간다. 실수 없이 가는 사람은 멀리 간다.’ 라는 이탈리아 속담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의 삶이란 짧은 듯해도 일생이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긴 안목으로 멀리 보는 삶은 그래서 주목받는다.
이런 멋진 격언들이 어찌하여 부각됐겠는가. 그만큼 많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예부터 전해오던 이런 명언들을 새겨보면 예전의 문제와 해결 방법론들의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방식이나 지혜는 모두 같구나 하고 공감한다. 그래서 숱한 삶 속에서 얻은 지혜와 교훈은 격언이나 명언으로 남아 우리를 일깨워 준다.
뽕잎이 비단이 되려면 인내가 필요
이제 우리는 ‘시간과 인내가 뽕잎을 비단으로 만든다’는 잠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인내는 힘이다. 시간과 인내는 뽕잎을 비단으로 만든다.
아무리 비단이 좋다 한들 뽕나무를 키워서 누에를 기르고 네 번의 잠을 재워 고치를 얻고 명주실을 뽑지 않으면 비단의 아름다움은 얻을 수 없다. 뽕잎이 없어도 안되고 누에치기의 노력과 오랜 기다림이 없어도 뜻을 이루기 어렵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뭐라 해도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이다. 그런데 조급함으로 서두른다면 무엇을 얻겠는가.
목적지로 가는 길에 도사리고 있는 두 번째 함정은 서두름이다. 무슨 일이든지 서둘러 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다. 현대인은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옛날에는 밥을 한번 하려면 장작불 피우고 쌀을 씻어 밥이 되기까지 한 시간 이상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1분이면 즉석밥을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처리에서조차 서둘러서는 내실있는 성과를 얻기 어렵다.
중국에 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만만디(천천히)’라는 말이다.
반면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익히는 말이 ‘빨리빨리’ 다.
심지어 외국인들은 우리 한국 사람을 ‘미스터 빨리빨리’ 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중국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야말로 만만디이다. 만만디라는 말이 나오게 된 유래가 재미있다.
양자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배에 오리알을 싣고 유유히 유람을 하면서 강을 따라 내려갔다.
그런데 유람을 하는 사이에 오리알에서 새끼가 태어났다.
배에서 부화된 오리 새끼는 배 위에서 자라나 어미오리가 되어 또 알을 낳았다.
그 오리 알이 오리 새끼가 되고, 또 자라서 어미 오리가 되고, 알, 새끼오리, 어미오리… 이렇게 반복했다. 배가 양자강 하류에 도착을 했을 때는 배 안에 오리가 가득하게 됐다.
그는 오리와 알을 모두 팔고 다른 물건들을 샀다.
그리고 또 다시 양자강을 유람하면서 상류로 올라왔다.
이런 식으로 양자강을 세 번 왕복하자 그의 일생이 끝이 났다.
바로 이 사람 이름이 '만만디' 였다.
여기에서 만만디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중국인의 여유와 느긋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런데 한국인은 이와 정반대다.
너무나 조급하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달라는 식으로 급하기 짝이 없다.
성마른 판단은 일을 그르친다
잠시 알렉산더 대왕 얘기로 넘어가자, 대왕은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다. 바로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다. 알렉산더는 사냥을 즐겼던지라 매우 기뻐했다. 어느 날 왕은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달아나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다. 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없는 사냥개들은 내가 모두 죽여 버렸네!” 친구는 대왕의 말을 듣고 매우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대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값비싼 개들입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알렉산더 대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천하의 알렉산더도 이건 매우 성급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면 실수를 하고, 따라서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을 두고 신중히 생각하여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불교의 선문집 벽암록(碧巖錄)에는 ‘줄탁동기(啐啄同機)’란 화두가 나온다. 닭은 병아리를 부화하기 위해 알을 품는다.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알 안에서 껍질을 톡톡 쪼게 되는 것을 줄(啐), 그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어미닭이 밖에서 동조해 껍질을 쪼아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이 두 행위가 같은 시점에 일어나야 병아리가 비로소 알에서 나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도 않았는데 어미닭이 밖에서 쪼게 되면 병아리는 아직 채 제대로 부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만다. 때가 되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해도 어미닭의 도움이 없으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이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에도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 때를 못 맞추면 일은 그르치게 된다. 병아리가 ‘줄’할 때를 기다리는 어미 닭의 기다림과 인내가 그만큼 중요한 요체다.
아무리 급하다고 이삭을 뽑아 올려서야
맹자가 제자들에게 열심히 수양하라고 권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어리석은 농부가 살았다. 그 농부가 어느 날 자기 논에 나가 보니 논의 벼키가 다른 논의 벼보다 작았다. 고민 끝에 농부는 자기 논의 벼 줄기를 일일이 뽑아 올려놓았다. 노인은 만족한 듯이 집에 돌아와 말했다. "오늘은 참 피곤하구나. 벼의 싹을 뽑아 올려놓고 왔더니만…”
농부는 아내에게 벼의 늦게 자라서 싹을 뽑아 놓았다고 말했다. 깜작 놀란 아내가 다음 날 논으로 달려갔다. 모든 벼는 이미 다 말라 죽어 있었다.
이게 바로 ‘알묘조장(揠苗助長)’이다. 줄여서 ‘조장’이라고 한다. 벼 이삭은 시간이 지나면 자라게 돼 있다. 그동안 김을 매주고 물을 잘 대주면 스스로 자란다. 이것을 공연히 조바심을 내서 서두르다 보면 오히려 농사를 망친다.
공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욕속즉부달(欲速則不達)’이다. “너무 빨리 가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거부라는 고을 태수가 되자 스승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공자가 타일렀다. "빨리 하려고 서둘지 말고 작은 이익을 꾀하지 말라. '빨리 하려 하면 일이 잘되지 않고' 작은 이익에 구애되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느니라."
정책의 실효가 빨리 나타나기를 안달하지 말고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면 눈앞의 작은 이익을 노리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빨리 성과가 나타나 나쁠 건 없지만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고 빠르기만 추구한다면 부실하거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말이다. 속담에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빨리 서두르면 도리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아무리 바느질이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묶어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서두르면 성공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눈을 팔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대어(大魚)를 낚으려는 낚시꾼 일수록 기다림이 익숙하고,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일수록 서둘러 신발 끈을 매지 않는다.
지식은 쌓아지는 것이고, 지혜는 깨닫는 것이다. 지식은 사람의 경험이 근원이기에 익힌 자의 결과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지혜는 진리가 근원이기에 알지만 깨달아야 한다. 결과가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다. 기업이나 조직, 한 나라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무엇이라는 것은 누구나 지식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지혜이기에 누구나 이룩할 수는 없다.
빠른 개혁 보다 바른 개혁 이뤄야
지금 한반도는 격랑에 휩싸여 있다. 만약 한참 진행 중인 비핵화 협상이 실패한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보고 싶은 현실만 보는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책임있는 지도자는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직시해야 한다.
또한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변화하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한다. 부디 한미정상이 북한의 상황변화에 맞는 현명한 대책을 마련하여 한반도에 '핵 없는 평화'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혹여 비핵화라는 열망을 지나치게 갈망한 나머지 앞뒤 헤아림도 없이 허겁지겁 협상타결만을 서두른다면 생각지도 못한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시간을 재촉함 없이 조목조목 짚고 따지면서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법체계가 거의 무너진 상태로 복원조차 힘든 상태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지난 시절 BBK특검은 물론이고 일개 정무수석의 손에 놀아난 대법원장이라는 작자의 행태 또한 있을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절 독재정권에 아부하느라 거짓 수사와 허위판결을 일삼은 자들이 출세가도를 달리며 여전히 중책을 맡고 우리사회를 주름잡고 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정치 경제 외교 모든 게 힘든 상황이다. 소위 과거 정권들이 저질러 놓은 온갖 적폐를 쓸어내고 새로운 미래를 꾸려가려면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럴수록 천천히 하나씩 다지면서 나아갈 때다. 급하게 서둘지 말고 조바심이 나더라도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며 철저하고 꼼꼼하게 청소해야 한다. 그러니만큼 천천히 서두르자는 주장이 딱 들어맞는다.
시중에 ‘무식’은 중세병이고 ‘속단’은 현대병이라는 말이 퍼져있다. 정보의 시대에 무식해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고 속단 즉, 빠른 판단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 생존기술이기도 하다. 속도감은 생리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감각이다. 지난날 세계가 시속 60km 정도로 움직였다고 한다면, 오늘날 세계는 그 열 배의 속도로 움직인다. 100년 전 사람들은 시속 30km에도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현대인들은 그 속도에 짜증을 낸다. 남보다 먼저 판단하고 남보다 먼저 움직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건 현대의 상식이다. 그렇게들 살다 보니 기다림은 곧 짜증을 유발하는 행위가 돼버렸다. 속단의 짝이 조급증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반 정도 지나니, 여기저기에서 개혁 속도가 더디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막상 개혁의 방향과 청사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하다. 수십, 수백 년 묵은 적폐를 5년이나 2~3년만에 청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국민은 5년 내에 모든 적폐를 청산하라고 요구하고, 정부는 그 중 5년 내에 마무리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중요한 장기 개혁 과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현재 정치여건 아래서는 10년짜리 개혁 과제를 고민하는 것도 도에 넘치는 오버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한 개혁을 포기할 수도 없다. 당장 눈앞의 효과만을 노릴 것이 아니라 정부가 실현가능한 계획을 만들고 성실하게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더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음 정부까지 가더라도 그 개혁안을 실천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빠른 개혁에 마음을 빼앗겨 바른 개혁이 무산돼서는 안된다. 천천히 서두를 과제다.
나팔꽃의 개화생리가 바로 세상의 원리
나팔꽃은 먼동이 틀 때 피어나는 꽃이다. 어둠이 가고 햇살이 돋아오를 때 피는 꽃은 낮이면 시들어 버린다. 그러나 요즈음 이런 상식을 뒤엎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 식물학자가 나팔꽃을 연구했다. 24시간 빛을 쬐게 했다. 아예 어둠을 박탈한 것이다. 그랬더니 나팔꽃은 피지 않았다. 나팔꽃을 피게 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 어느 정도의 어둠과 추위가 나팔꽃을 피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 나팔꽃의 개화생리가 바로 온 세상의 원리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일하는 낮만 아니라 잠자는 밤도 필요하다. 일손을 놓고 일을 잊어버리는 밤도 있어야 한다.
예술작품의 경우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얼개와 밑그림을 차분히 준비하지 않으면 원하는 멋진 작품을 얻기란 기대난이다. 꼼꼼히 준비하지 않으면 작업을 진행하다 덧칠하고 개칠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때는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만 못하다.
서두르면 실패한다. 서두른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서두르면 실수하기 쉽다. 서두름은 땀 흘리는 과정을 밟지 않고 살려는 편의주의이다. 서두름은 기다림을 모르는 조급함이다. ‘천천히 빨리’라는 말이 있다. 서두름은 성취를 얻는데 함정이다.
자제하고 기다리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다. 호랑이의 눈빛을 간직한 채 소 걸음으로 간다. 늘 예리하게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행동은 소처럼 끈기 있게 하는 모습이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했다. 아무리 밥이 좋은 것이라 한들 체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비핵화도 적폐 청산도 정치개혁도 경제살리기도 모두 마찬가지다. 조바심 나더라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천천히 서두르라” 이 말의 속마음도 천천히 서둘러 새겨졌길 바란다. 정부에게 하는 말이지만 모든 독자들에게도 전해드리고자 한다.
어르신과 원로, 뒷방 늙은이
러․일전쟁이 터지자 톨스토이는 80세의 나이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 식으로 말해 뒷방 늙은이 되기 딱 알맞은 나이에 배움이라. 이미 10개 국어를 익혔던 그였다. 그럼에도 또다시 배움을 택한 그는 평생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라고 말했던 톨스토이의 심경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배우려는 욕구는 사람만이 가진 사람만의 특성이다. 만일 톨스토이에게서 지적 욕구가 없었다면? 여든 살의 나이에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곧 늙음을 잊을 수 있는 길 아닐까.
10개 국어 능통한데도 80세에 일본어 배우기 시작한 톨스토이
흔히 유명한 사람이 늙으면, 늙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저 원로라고 불린다. ‘원로’라고 남발돼 불리는 이 말은 기실 복잡한 속성을 갖는다. 무엇보다 누가 그런 자격을 부여할 것이냐는 문제다. 어떤 사람에게는 원로로 보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겉모습만 원로인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뿐, 진정 당대의 현실을 걱정하고, 미래를 헤아려 빛을 밝혀준 참 원로가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저마다의 주장이 넘치다 못해 분분한 논쟁으로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라면 더욱 잣대가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그저 나이가 많은 이를 대접하려는 뜻에서라면 굳이 원로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다른 호칭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늙음에 대한 확고한 존경의 표현으로는 앞에 ‘노(老)’라는 접두어를 붙이면 된다. 정치인이라면 노정치인, 사업가면 노사업가, 시인이라면 노시인, 교수라면 노교수 하면 된다. 그런 것을 지나치게 높여주다 보니 웬만하면 원로고 어지간하면 어른이다.
어떤 분야의 정상을 부르는 지칭은 약간씩 결이 다르다. 물론 거기에는 나이와 적절히 연관돼 있다.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거벽(巨擘)이라고 한다. 거장의 뜻이라고 보면 된다. 또 세상 사람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을 태두(泰斗)라 이른다. 이들은 주로 전문성을 위주로 나누는 평가다. 반면 나이가 많아 덕망이 높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기숙(耆宿)이라고 부른다. 원로와 뜻이 상통한다.
증자(曾子)는 “조정에서는 벼슬만한 것이 없고 시골 마을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을 돕고 백성들의 어른 노릇하기에는 덕(德)만한 것이 없다(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고 했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하편에 나온다.
우리가 흔히 나이다툼을 할 때 ‘향당이 막여치’야 하고 내세우는 밑바탕이다. 하기는 요즘엔 ‘노슬아치’라는 말도 나와 있다. 노인에 벼슬아치를 합성한 말이다.
나이 얘기가 나온 만큼 한 가지 더. “나이가 배가 되면 아버지 같이 섬기고(年長以倍則 父事之), 10년이 위이면 형님으로 모시고(十年以長則 兄事之), 5년이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해서 따른다(五年以長則 肩隨之)”고 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이 나이로 상대방을 대접하는 기준이 돼서 이어져 내려왔다. 지금껏 나이가 벼슬처럼 인정받는 근거다. 수평적 평등사회가 아닌 나이를 매개로 하는 수직적 상하구조를 만드는 데는 나이가 이렇게 힘을 발휘했다
연장자 식견·경륜 존중하는 존년상치(尊年尙齒)
나이 든 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식견과 경륜을 존중해야 한다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다. 이른바 존년상치(尊年尙齒)다. 중국 당나라 초기의 명신 영호덕분(令狐德棻·583~666) 등이 지은 주서(周書) 무제상(武帝上)편이 출처다.[尊年尙齒 列代弘規 序舊酬勞 哲王明范] 존로상치(尊老尙齒)로도 알려져 있다. 동양권 문화에서 나이대접에 소홀했다가는 기본 매너가 없는 사람으로 외면당하기 딱 알맞다.
연장자를 대우하는 이런 관습은 퍽 오래됐다. 3대 유리왕부터 16대 흘해왕 때까지 썼던 신라 왕호 ‘이사금’은 이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聖智人]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 치리(齒理)라는 말이다. 유리왕과 탈해왕이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이가 더 많은 유리왕이 먼저 즉위한 다음부터 왕을 이사금으로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내려 온다.
조선시대에는 나이 많은 임금이나 현직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여서 놀도록 기로소(耆老所)를 운영했다. 60세를 기(耆), 70세를 노(老)라 한다. 또 국왕이나 왕비 대비 대왕대비 등이 예순 살 또는 일흔 살이 됐을 때, 60 또는 70세 이상자만을 대상으로 기로과(耆老科) 또는 기로정시(耆老庭試)라는 과거도 실시했다. 대표적인 존노상치 제도다. 최초의 기로과는 영조 32년이던 1756년 대비 인원왕후의 70세 때 실시됐다. 53년간 재위하면서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는 기로과를 자주 열었다. 왕의 나이가 여러 선비들에게 기회를 늘려준 셈이다. 영조 나이 70, 즉위 40년이 된 1763년에는 대증광시(大增廣試)에 이어 70세 이상을 대상으로 기로과도 열었다. 그 뒤엔 별로 없었다.
추어탕 한 대접일망정 노인 모시고 상치잔치판 벌이는 마을공동체
전남 담양 출신 농부 시인 고재종의 시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를 보자.
“·……그 벌건, 그 걸쭉한, 그 땀벅벅 나는, 그 입에 쩍쩍 붙는 추어탕으로 상치(尙齒)마당이 열렸는데, 세상에, 원 세상에, 그 허리가 평생 엎드렸던 논두렁으로 휜 샛터집 영감도, 그 무릎이 자갈밭에 삽날 부딪는 소리를 내는 대추나무집 할매도, 그 눈빛이 한번 빠지면 도리 없던 수렁 논빛을 띤 영대 씨와, 그 기침이 마르고 마른 논에 먼지같이 밭은 보성댁도 내남없이, 한 그릇 두 양품씩을 거침없이 비워 내니
봉두난발에, 젓국 냄새에, 너시에, 반편이로 삭은 사람들이, 세상에, 원 세상에, 그 어깨가 눈 비 오고 바람 치는 날을 닮아 버린 그 어깨가 풀리고, 그 핏줄이 평생 울분과 폭폭증으로 막혀 버린 그 핏줄이 풀리고, 그 온몸이 이젠 쓰러지고 떠나 버린 폐가로 흔들리는 그 온몸이 풀리는지, 모두들 얼굴이 발그작작, 거기에 소주도 몇 잔 걸치니 더더욱 발그작작해서는, 마당가의 아직 못 따 낸 홍시알들로 밝았는데,
때마침 안방 전축에선,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이별도 있다고 하며, 한번 놀아 보장께. 기필코 놀아 보장께, 누군가 추어대곤, 박수 치고 보릿대춤 추고 노래 부르고 또 소주 마시니, 세상에, 원 세상에, 늦가을 노루 꼬루만 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잘 노니, 아 글쎄, 청천하늘의 수만 별들도 퉁방울만 한 눈물 뗄 글썽이며, 아 글쎄, 구경 한번 잘 하더라니!”
읽으면 절로 흥이 나고 즐거운 이 시에 ‘상치(尙齒)마당’이 나온다. 상치란 이(齒) 즉, 나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니 나이든 노인들을 위해 베푼 잔치마당을 말한다. 가을철 미꾸라지 보양식으로 한데 어우러져 흥겹게 한때를 보내는 풍경이라니. 여기에 등장하는 농군들은 하나같이 가난에 찌들고 농삿일에 지쳤으되 한 대접 추어탕 잔치에 흥을 맡기고 흐드러지는 농투성이들이다. 그러나 존로상치 전통으로 마을공동체의 따뜻한 인심을 나누고 함께한다.
‘이가 다 빠졌으니 이제 아플 일도 없다’고 달관한 선인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 치아를 때우고 새로 해 넣고 교정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예전엔 이가 빠지면 그저 잇몸으로 살아야 했다.
“지난해 어금니 한 개 빠지더니/올해는 앞니 한 개가 빠졌다/어느새 6, 7개가 빠졌는데/그 기세가 줄어들지 않는구나.” 당송 팔대가 한유(韓愈)의 시 ‘낙치(落齒)’ 중 일부다. 마지막은 이렇게 돼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네/이가 빠지는 건 수명이 다한 거라고/나는 말하네. 인생은 유한한 것/장수하든 단명하든 죽는 건 마찬가지.”
시인은 이가 빠지는 것을 두고 인생의 끝을 읽고 있다.
여섯 수로 이뤄진 다산 정약용의 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도 이(齒) 이야기가 나온다. 다산은 첫째 시에서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 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라고 눙을 친다. 이어 둘째 수에서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고 너스레다. 다산은 마지막에 “유쾌하도다. 의서(醫書) 가운데에서/치통이란 글자는 빼버려야겠네”라고 자위한다. 이가 다 빠졌으니 이제 아플 일도 없다는 말이다.
나이 들어 이 빠지는 게 유쾌할 리 없건만, 이렇게 달관과 해학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이(齒)는 건강과 노화, 두 가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다. 노(老)를 쇠퇴나 쇠약이 아니라 애써 노숙과 노련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빠진 이가 새로 날 수 없고 만든 이가 온전히 내 이와 같을 리 없다.
오랜 신산스런 세월을 한국인들은 참 악착같이 살아왔다. 악착도 이와 관련된 말이다. 작은이 악(齷)과 이 마주 붙을 착(齪)이 합쳐진 게 ‘악착’이다. 이게 변해 ‘억척’이 됐다. 본뜻은 ‘작은이가 꽉 맞물린 상태’ ‘앙다물어 이가 맞부딪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게 우리는 이를 앙다물고 악물고 살아온 게 아닐까?
하지만 나이 많은 것을 밝히기 꺼린 것은 동서양 모두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미국의 명사 뉴컴 차리라는 사람은 생전에 자기 나이를 숨겨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관에 명찰을 붙여야 했는데 명찰에 써 넣어야 할 그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 역시 “아마 79세일거야”, “아마 그보다 아래일거야”라고 미심쩍어 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장의사가 “저승길에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정확한 나이를 모르면 ‘초상당한 노인’이라고 쓰겠습니다”고 말했다.
덕망과 위엄을 함께 갖춰야 존경과 대접받아
우리는 예로부터 덕의 기준을 명시하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 윗사람이나 어른이 갖춰야 할 덕목은 ‘덕위상제(德威相濟)’다. 즉 글자대로 풀면 “덕과 위엄으로 서로 건진다”가 된다. 다시 말해 덕은 위엄으로 건지고, 위엄은 덕으로 건진다는 말이다.
덕과 위엄은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덕만 있으면 사람 좋다는 소리야 들을 수 있겠지만, 위엄이 서지 않는다. 반대로 위엄만 내세우고 덕이 없어도 안 된다.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견뎌도 속으로는 반발한다. 결국 바른 말 하는 사람은 떠나고 아첨하는 사람만 남는다. 다시 말해 어른으로서 인정받는 원로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로라고 하기엔 낯간지러운 사람들이 꼭 원로대접을 받겠다고 설친다. 무엇보다 원로다우려면 출처진퇴를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되나 못되나,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 가리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인사는 원로가 아니다. 그저 체면이나 염치도 모르고 뻔뻔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약방의 감초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노추(老醜)함으로 뭉쳐진 우중충하고 추레한 늙은이들까지 설쳐댄다. 그들이 모두 원로일 수는 없다. 더더구나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석에 앉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시민 모두의 존경까지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조용히 있으면 호호야(好好爺)란 평판이라도 얻으련만 다들 무엇이 그리 자랑스럽다고 설쳐대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젊은이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다.
원로들에 대한 존경과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언행이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다. 원로는 연륜만큼 믿음을 주고 내일을 내다보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 또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익과는 관계 없이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를 헤아려야 한다. 더구나 자신의 처지와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고 고통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존경받고 덕망을 받는 이가 바로 원로다.
무조건 나이나 기득권만으로 원로행세 하려고 달려드는 꼴불견들이 곳곳에 적지 않다. 하지만 원로란 단순히 세월을 헤쳐 온 연장자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참 어른’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 과잉의 시대, 비정치 분야의 원로들이 스스로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겠다. 그렇지만 멀리서 바라만 봐도 힘이 되고 그저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든든한 위안이 되는, 거목과 같은 원로는 분명 우리사회에 꼭 필요하다 .
조직이나 나라가 제대로 움직이려면 원로의 역할이 중요하다. 학식과 덕망, 경륜을 갖춘 원로의 말과 행동은 국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원로가 제대로 처신해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나라가 바로 선다. 누구보다 열심히 땀 흘리고 고민했던 원로들은 이제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의 ‘멘토’로서 할 일이 많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반목과 갈등이 심할수록 곧고 바른 발언은 의견 통합과 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한다.
모름지기 원로라면 <장자(莊子)>의 천도(天道)편에 나오는 착륜옹(斲輪翁)처럼 직언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제환공의 으름장에도 전혀 굽힘없이 자신의 소견을 내놨다. 원로란 권력자에게 달콤한 말보다는 꼬장꼬장한 주견으로 거침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로지 아집으로 똘똘 뭉쳐 제 이익에만 눈멀고 아첨의 말과 글로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노회(老獪)한 영감태기들과는 품격이 달라야 한다.
‘루틴’ 갖추는 등 ‘노인의 기술’로 ‘꺼리’ 만들어야
노인의 ‘지혜’는 풍부하다. “두 마리 말 중 어미와 자식을 구분해 보라”는 물음에 “풀을 줘서 먼저 먹는 쪽이 새끼”라고 답하는 게 노인이다. 노인의 슬기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자주 인용되는 ‘상속의 지혜’가 그중 하나다. 한 노인이 소 17마리를 남기고 죽으면서 큰아들 1/2, 작은아들 1/3, 막내에게 1/9을 가지라고 유언했다.
아무리 나눠도 답이 나오지 않자 아들들은 동네 어르신에게 답을 구했다. 그는 “1마리를 빌려줄 테니 18마리 중 각각 9마리, 6마리, 2마리를 갖고 남은 1마리는 다시 날 주게”라고 했다. 사람의 판단력과 지혜는 청년기보다 사회경험이 많은 노년기에 더 성숙해진다. 연륜이 쌓일수록 깊어지는 노년의 지혜는 우리 사회의 희망이자 등불이다. 물론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늙어서 탐욕을 부리는 노욕이나 노탐으로 인해 시대에 뒤떨어져 ‘꼰대’ 소리를 듣는 것도 무척이나 딱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노인의 지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지혜로운 노인’이 되려는 노력이다. 그래야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사회에 존경받는 어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나이 들어 희망의 등불은 되지 못할지언정 정녕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감력을 키워가야 한다.
노후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무료(無聊)다. 지루하고 심심함해서 외롭고 쓸쓸해진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산송장’ 이 안되려면 자기일이 있어야 된다. 돈 버는 일만 일은 아니다. 취미도 좋고 레저도 좋고 ‘꺼리’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노인의 기술’이라고나 할까. ‘루틴’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루틴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곧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노후의 ‘자기일’ 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텔레비전 리모콘을 쥐고 소파에 누우면 인생은 종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직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는 인생이 된다.
노인은 노인다워야, 대접받을 수 있어
<논어> 안연편을 보자. 제 경공이 정치에 대해서 공자에게 묻자, 공자가 답하길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팝나무의 꽃말 : 영원한 사람
이 나무에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꽃
피는 시기가 예전 같으면 가장 배고픈 고통에 시달렸던 보릿고개 즈음이다.
그래서 춘궁기에 굶어 죽은 자식의 무덤가에 이 나무를
심어놓고 죽어서라도 흰 쌀밥을 마음껏 먹기를 빌었다.
그러니 그냥 꽃이 아니라 밥꽃이다.
이팝나무와 쌀밥에 얽힌
또다른 이야기도 애달프다.
시어머니 구박을 받던 착한 며느리가 어느 날 조상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귀한 쌀밥을 지었다.
그러다가
뜸이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 개를 떠먹는 것을 때마침 부엌에 들어온 시어머니가 봤다.
시어머니는 조상 제사 올리기 전에
며느리가 먼저 퍼먹었다고 더욱 더 구박했다.
구박을 견디다 못한 며느리,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 가에 흰 꽃이 수북하게 피는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쌀밥에 한이 맺혀 죽은 며느리가 환생한 것이라고 해서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밥을 닮았다 해서
‘이팝나무’다.
벼농사가 잘되면 쌀밥(이밥)을 먹는다고 해서, 또 입하 무렵에 꽃이 피기 때문에 이팝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이팝나무 꽃이 많이 피면 풍년이 들 걸로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여겼다고 한다.
지난날에는 꽃이 얼마나 잘 피는지, 이팝나무의 꽃피는 모습을 보고 한 해 벼농사의 풍흉을 짐작했다.
치성을 드리면 그해 풍년이
든다며 신목(神木)으로 받들기도 했다.
이팝나무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다.
자식을 위한 사랑인지, 부모를 위한 사랑인지, 여하간에 영원하다니 값진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쎄라비!
이 말대로 산다는 것은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고 우연하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잘못됐다고 자책하거나 탓하지 말자. 인생은 그런 것이니.
그렇다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풍타죽낭타죽(風打竹浪打竹)’ 바람불면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면 물결치는 대로는 아니다. 인위적이고 억지스럽게 거스르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말이겠다.
매사에 다 흐르는 결이 있고 풀리는 가닥이 있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다. ‘Such is life! 사는 게 다 그런 거지!’가 넉살맞지만 그럴싸하다.
“느림은 무엇보다 사랑과 잘 맞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빠름이지만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림이다.”
독일 뮌헨대 칼 하인츠 A 가이슬러 교수가 쓴 책 ‘시간’에 나오는 구절이다.
빠름을 이기는 것은 더 빠름이고 더 빠름을 이기는 것은 더 더 빠름이 아니라 느림이다.
느림에는 사랑 여유 인내가 있다.
나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게으른 상태라면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느린 달팽이가 풍경을 본다고 했다.
또 느림의 미학자 피에르 상소는 이렇게 말했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 가지 않겠다는 결심이며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런 느림 예찬론자들의 사색을 빌려와 원용해 본다면 인생도 느림이란 덕목을 필요로 한다. 매사 빠른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때로 느리게 기다리는 것이 더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내와 성찰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는 지 익히 알지 않는가. 빠른 인내, 빠른 성찰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가톨릭은 '호감'이 가지만
개신교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종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난 16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발표한 '2023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 가장 친근감 있는 종교에 대하여 불교가 23.2%로 가장 높았고 가톨릭 19.9%, 개신교 19.6% 순으로 드러났다.
가장 호감가는 종교에 대해서는 가톨릭이 가장 높은 24.7%, 불교 23.4%, 개신교는 16.2%로 드러났다.
또 가장 신뢰하는 종교 역시 가톨릭이 21.4%로 가장 많았고 개신교 16.5%, 불교 15.7%였다.
친근감과 호감은 비슷한 표현이지만 친근감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이미지라면 호감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감정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일반 국민들에게 이미 가까이 와 있는 종교이고 가톨릭이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종교라면, 개신교는 두 가지면에서 모두 가장 거리감을 느끼는 종교라는 결과가 드러났다.
특히 무종교인들에게 개신교의 친근감은 가톨릭에 대한 친근감의 4분의 1수준인 4.2%에 그쳤다.
다른 종교인들보다 무종교인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본다면, 전도의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교회 신뢰도는 여전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의 신뢰도에 대하여 '신뢰한다'는 응답이 21.0%에 그친 반면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0.4%로 조사돼 국민의 5명 중 1명만 한국교회를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지난 2020년과 비교했을 때보다 10.8%p가 더 낮아진 결과다.
지난 2020년 조사가 진행된 시점이 2020년 1월로 코로나 사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임을 감안했을 때 코로나 사태를 경험한 3년 사이에 한국교회 신뢰도는 더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와 전체 응답자 54.7%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으며, 무종교인의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10.6%에 불과했다.
'기독교 목사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응답이 74.6%로 기독교 신뢰도와 거의 같은 결과를 나타냈다.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2%, '신뢰한다'는 응답은 20.6%로 2020년 32.9%보다 더 하락했다.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교회를 구성하는 목회자와 성도들 조차 신뢰를 잃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교회의 사회기여도에 대한 인식도 낮았다.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기여하고 있지 않다'는 응답이 70.8%로 다수였으며 무종교인들은 80.4%가 부정적으로 답했다.
한국교회는 교회 밖의 비판 여론을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80.0%), 특히 '부패방지' '사회통합' '남북화해'에 대한 영역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응답이 80% 안팎으로 높게 나온 것으로 보아 교회가 이러한 영역에서 도움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인식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사회 공익을 중시하지 않는 '교회 이기주의' 단체로 인식했다.
공공성과 관련해 사회 공동의 이익과 종교 신년이 충돌할 때 한국교회는 '공익보다 교회의 교리를 추구할 것'이라는 대답이 60.0%로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이상이 한국교회는 사회공익이나 공공성보다 교리를 더 중시하는 종교로 평가했다.
무종교인의 19.6%만 한국교회가 '사회 공동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고 응답한 것은 공공성에 관련해 한국교회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이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가장 먼저 개선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교회 이기주의'가 34.2%를 차지했으며, 교회 지도자들의 삶(19.6%) 불투명한 재정 사용(17.9%) 타 종교에 대한 태도(17.3%)가 언급됐다.
아울러 무종교인들은 개신교인이 신뢰받기 위한 개선점에 대해서 '나만 옳다는 자세'를 개선하기를 원하는 비율이 종교인들보다 높아서 특별히 '개신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이번 설문조사는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11일부터 15일까지 전국 성인 남여 1000명을 대상으로 5일동안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기윤실이 2008년부터 3년마다 실시해 온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는 이번이 7번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2장
혼인 잔치(23절)
천국 혼인 잔치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로서 성도들이 구원 받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혼인이 일생일대에 중대하고 경사스러운 일인 것처럼 천국 또한 그렇습니다.
천국을 혼인 잔치로 비유한 또 다른 목적은 신부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신랑, 신부, 하객으로 이루어지는 혼인 잔치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랑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자리든 격식에 맞는 복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결혼식에 초청받은 하객이라면 그 예식을 축하하는 옷을 입어야 하듯이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의 주빈이 되신 임금이 손님들을 영접하려고 나왔을 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임금은 사환들에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마지막 혼인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 그 예복을 "세마포'라고 합니다(계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는데 옳은 행실은 곧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에서 얻어진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계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잔치에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는 하나님의 힘을 덧입어야 들어가는 곳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잔치를 맛보는 복되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혼인 잔치의 비유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셨다. 좋은 씨를 뿌린 사람,[1] 겨자씨 한 알,[2] 밭에 감추인 보화,[3] 좋은 진주,[4] 물고기를 모는 그물,[5] 종들과 회계하는 임금,[6] 포도원의 품꾼들,[7]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8] 주인의 달란트를 맡은 종들[9] 등 여러 가지 비유가 복음서에 기록돼 있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까닭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며 "하나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1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천국의 비밀 가운데 하나가 '혼인 잔치의 비유'다. 성도들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천국 혼인 잔치의 구성원
혼인 예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랑, 신부, 하객이 필요하다. 혼인 잔치는 성도들이 구원받아 들어갈 천국을 비유하는 만큼, 신랑과 신부와 하객이 각각 누구를 뜻하는지 아는 것은 구원과 직결된다.
신랑(아버지 하나님)
신랑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11] 그러나 2000년 전,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마치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신부가 없었다. 예수님 승천 이후 기록된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의 아내가 예비함으로 혼인 기약이 이르게 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12] '어린양'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신부가 예비되어 마침내 이루어질 천국 혼인 잔치의 신랑은 재림 그리스도를 뜻한다.[13][14]
하객(성도)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손님을 청한다는 것은 천국 혼인 잔치에 나아갈, 구원받을 사람들을 모은다는 뜻이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신부가 성도라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신부가 성도라면 청함을 입은 자는 누구를 뜻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신랑과 신부는 손님을 초청하는 입장이므로, 신부와 손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외에 다른 가르침을 주실 때에도 제자들을 한결같이 혼인집 손님으로 비유하셨다.[15] 따라서 천국 혼인 잔치의 하객 즉, 청함을 입은 자는 성도들이다.
하객은 '청함을 받은 자'만 아니라 '택함을 입은 자'로도 표현되어 있다. '택함을 입은 자',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6] 했으니 하객은 성도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신부(어머니 하나님)
마태복음 22장에 기록된 '혼인 잔치의 비유'에는 혼인 잔치에 마땅히 있어야 할 주인공인 신부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신부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등장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등장할 신부가 있으므로 예수님이 천국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 것이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사도 요한은 신부가 등장할 것을 계시로 보고 기록했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 등장하지 않았던 신부는 어린양으로 비유된 재림 예수님과 함께 등장한다. 신부의 등장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에는 신부의 실체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은 천사들에게 이끌려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계시로 보았다. 그가 본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이었다. 그 예루살렘에 대해 갈라디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그 실체는 구원받을 성도들의 어머니시다. 천국 혼인 잔치의 신랑은 재림 예수님 곧 아버지 하나님이고, 신부는 어머니 하나님인 것이다.
생명수 주시는 성령과 신부
천국 혼인 잔치는 마지막 때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하여 하객으로 비유된 자녀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 그 예언이 성취된다. 요한계시록에는 그에 대한 예언이 생명수를 주시는 모습으로도 묘사되어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9장과 21장에는 어린양과 아내 또는 어린양과 신부라고 하였는데 22장에서는 성령과 신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아버지 어머니께서 마지막 때 함께 나타나신다는 예언이다. 마지막 날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나타나시는 목적은 생명수를 주시기 위함이다. 생명수는 영생 곧 구원을 의미한다. 신부이신 어머니의 등장으로 성도들이 생명수를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복이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녀들을 가리켜 성경은 '약속의 자녀'라 명명했다.[17]성령과 신부 곧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영접하여 믿고 따르는 자들이 혼인 잔치에 택함을 입은 약속의 자녀로서 천국의 영광을 얻게 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성령과 신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천국 혼인 잔치의 예복
어느 자리든 격식에 맞는 복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결혼식에 초청받은 하객이라면 그 예식을 축하하는 옷을 입어야 하듯이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의 주빈이 되신 임금이 손님들을 영접하려고 나왔을 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임금은 사환들에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마지막 혼인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 그 예복을 "세마포'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결국 쫓겨나고 만다. 청함을 받았지만 택함은 받지 못한 사람이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다. 예복은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18] 기록되었으므로, 예복은 하나님의 언약인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바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올바른 언행과 품성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아울러 신부이신 하늘 어머니의 영광이 된다.[19][20]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 빗대어 말씀하신 또 다른 교훈으로 '열 처녀의 비유'가 있다.[8]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셨다. 신랑이 더디 오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졸며 자는데 밤중에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기름을 넉넉히 예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영접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갔으나, 등에 기름이
떨어진 다섯 처녀는 끝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비유에서 등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뜻하고,[21] 기름은 '믿음'을 뜻한다. 마지막 시대의 구원자이신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를 영접하여 그 가르침대로 행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19:7-10에서 요한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는 천상의 군중들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축제, 말 그대로 “혼인 잔치”가 곧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개념은 그리스도 시기의 혼인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좀 더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당시의 혼인 풍습에는 세 가지 주요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신랑 신부 부모가 혼인 계약서에 서명
신랑 당사자나 신랑의 부모는 신부나 신부 부모에게 지참금을 지불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의 약혼과 마찬가지인 정혼 기한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았을 당시 요셉과 마리아도 이 정혼 기한에 속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8, 누가복음 2:5).
둘째, 보통 일년 후 신랑이 자기 친구들을 동반하고 자정에 신부 집에 찾아가면서 거리에 횃불 행진을 벌이는 행사
신부는 이 행사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처녀들과 함께 준비합니다.
그들이 모두 이 행진에 참여하고 신랑의 집에서 행사가 마무리됩니다.
이 관습은 마태복음 25:1-13의 열 처녀 비유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셋째, 혼인 잔치
요한복음 2:1-2에 나온 가나의 혼인 잔치로 알 수 있는, 며칠간 이어지곤 했던 혼인 잔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의 환상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절차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과 그의 아내 (교회)의 혼인 잔치입니다.
이는 이미 앞의 두 단계가 끝났음을 함축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각 개인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믿음으로써 완수되었습니다. 신랑의 부모 (아버지 하나님)가 지불하는 지참금은 신부를 위해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약혼”을 한 것이고, 비유에 나온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모든 믿는 자들은 신랑이 올 때 (재림)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의 신부를 데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교회의 휴거를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는 그래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입니다.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 (이 땅에서의 환난 중) 사이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베풀어진다는 것이 우리가 보는 관점입니다.
혼인 잔치에는 그리스도의 아내인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함께 합니다. 이 “다른 자들”은 구약성경의 성도들을 포함합니다. 그들이 아직 부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영혼/영은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쓰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9).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축제가 될 것입니다.
1. 주님은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1~14).
임금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많은 사람을 청하지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거절할 뿐 아니라, 왕의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왕은 진노하여 그들을 심판하고, 그 잔치에 참여하는 권리는 악함과 선함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10).
다만 왕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올 때 중요한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예복을 입었는가의 문제였습니다(12).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쫓겨났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왕의 잔치에 참여하면 왕이 제공하는 의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들은 왕이 제공하는 의복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 의복은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을 합당하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가리킵니다.
내게서 초청의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서 받은 것으로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많은 사람이 초청을 받아도, 그 자리에 앉도록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만 복음에 응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양탄자처럼 길에다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다 깔았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호산나(제발 구원하소서)”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였지만, 그 모습의 실상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덮개가 열린 자동차를 타고서 카퍼레이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타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고, 일반화폐를 성전화폐로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아무런 열매가 없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3가지 비유로 그들의 불순종과 강퍅함을 지적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두 아들 비유’(21:28-32)
두 번째는 ‘포도원 농부 비유’(21:33-41)
세 번째는 '혼인 잔치 비유'(22:1-14)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고대에는 지금처럼 먹거리와 볼거리가 많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먹고 사는 것이 어느 정도 나아진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4000년이 넘는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 보릿고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불과 50년 전부터입니다. 또한 100년 전의 사진을 보면, 거리에 있는 사람 중에 신을 신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풍성한 혼인 잔치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도 잔치, 특히 혼인 잔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예수님 당시에 잔치 참석은 두 번의 초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인(임금)은 잔치를 열 날짜를 정하고 -이때에는 시간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초대할 사람들을 정해서, 종들을 보내 그날 참석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참석할 사람들의 숫자가 파악되면, 그 수에 알맞은 양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잔치 당일 주인은 음식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종들을 보내어서 처음에 초대한 사람들을 불러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주인이 종들을 두 번째 보낸 것입니다. 물론 주인은 그들이 당연히 잔치에 참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응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오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초대하는 사람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습니다.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임금은 종들을 다시 보내어서, 오찬을 준비했으니 꼭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와 살진 짐승, 그리고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했습니다.
600kg짜리 소 한 마리를 도축하면, 약 1,500명 이상이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소’는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複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마리 이상을 잡은 것입니다. 두 마리를 잡았다면 3,000명, 세 마리를 잡았다고 하면 4,500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만약 10마리를 잡았다고 하면 15,000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만 잡은 것이 아니라 ‘살진 짐승’도 잡았습니다. 양이나 염소, 닭 등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 단어 역시 복수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얼마나 풍성하게 준비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초대했는지,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을 만큼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풍성하게, 또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시고 사람들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5-6)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돌아보지 않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무시하다’, ‘소홀히 여기다’입니다. 히브리서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등한히 여기다’가 ‘돌아보지 않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을 요즘 하는 말로 표현하면, 임금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그 초대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것입니다.
초대의 거부 이유가 한 사람은 ‘자기 밭’ 때문이었고, 또한 사람은 ‘자기 사업’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탕진하거나, 세속적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또 악한 일을 저지르기 위해서 참석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 일상생활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유물들을 잘 관리하고, 일터와 학교에서, 가정에서 모두 우리는 진실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신뢰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우리의 눈을 ‘영원’이 아니라 ‘세상’에만 머물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줄 것 같이 느껴져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진리를 살지 못하고,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잡다’, ‘모욕하다’, ‘죽이다’라는 점점 그 폭력의 강도가 심해지는 동사를 사용해서 적나라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선지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임금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유대인들이 ‘잡다’, ‘모욕하다’, ‘죽이다’라는 3개의 동사로 악을 행한 것을 표현했었는데, 임금도 ‘보내다’, ‘진멸하다’, ‘불사르다’의 3개의 동사로 심판의 강도가 점점 커 짐을 표현합니다.
이 예언은 A.D. 70년, 로마 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이후로 그들은 1,900여 년의 세월을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결과였습니다.
임금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8-9)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처음에 임금은 사람들을 초대할 때 아주 예의를 갖추어서 했습니다.
초대할 사람들에게 미리 종들을 보내서 참석 여부를 확인하고, 잔치 준비가 끝났을 때 다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정식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리를 채울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의견이 어떤지, 잔치가 마음에 드는지, 참석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손하기까지 합니다.
마치 ‘해 놓은 음식 처리하게나 하자’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적인 풍자(諷刺)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의 꺾어짐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어가게 했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이번에 초대될 사람들은 ‘악한 자’에서 ‘선한 자’까지입니다.
그 안에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갑니다.
이 초대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처음에 초대를 거절했던 사람들은 당시로 보면,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하신 그 의미를 상실한 채 조상들이 해석해 준 율법을 가지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고집을 피우며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당시에 죄인으로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과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11-14절)
11-14절은 임금이 초대한 잔치에 들어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겨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이 앞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비유로 보기도 합니다.
두 비유라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1절에는 ‘비유로 대답하여’에서 ‘비유’가 복수형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고대 중동의 잔치에서는 잔치 호스트가 처음부터 배석해 있지 않고,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에 나왔다고 합니다.
손님이 가득한 잔치에 임금이 등장했다는 것은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리 좋은 것이 많아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일 수가 없듯이, 임금이 초대한 잔치에 임금이 계시지 않는다면, 임금의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보니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에는 장례식에 어울리는 옷이 있고, 등산을 할 때는 산에 어울리는 옷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혼 잔치에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당연하게 임금은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지를 물었지만, 그는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은 있으되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길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길에서 초대받은 사람이 이 사람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초대를 받고서 왔는데, 한 사람만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이 더 의아하지 않습니까?
고대 이스라엘 왕궁에는 왕궁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입혀 주는 예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 중에 이 사람만 예복을 입지 않았던 것은, 그는 나눠 받은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잔치로 초대한 임금을 무시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 입을 옷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13-14)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의 형벌은 영원한 형벌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복’을 받아 입는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을 거부한 사람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
Korean Living Bible
천국이란?
22 예수님은 다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푸는 어떤 왕과 같다.
3 왕은 종들을 시켜 잔치에 초대한 손님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4 왕은 또 다른 종들을 초대한 사람들에게 보내 ‘살진 소를 잡아 모든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해 놓았으니 어서 잔치에 오십시오’ 하라고 하였다.
5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않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여 버렸다.
7 그러자 왕은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 살인자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왕은 종들에게 말하였다.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격이 없다.
9 그러니 너희는 길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잔치에 초대하여라.’
10 “그래서 종들이 나가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만나는 대로 데려오자 잔치 자리가 가득 찼다.
11 왕이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그대는 어째서 예복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는가?’ 하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13 그때 왕은 종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라.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 하였다.
14 이와 같이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적다.”
15 그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말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까 하고 의논한 후에
16 자기들의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 물어 보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알기에 선생님은 진실하시고 진리대로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시며 사람의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으십니다.
17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a]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8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교한 생각을 아시고 “위선자들아, 왜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내게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예수님께 [b]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20 예수님은 “이 초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21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말문이 막힌 채 가 버렸다.
23 바로 그 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24 “선생님, 모세는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5 우리 이웃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결혼하여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습니다.
26 그러나 둘째도 자식 없이 죽었고 셋째에서 일곱째까지 모두 그렇게 되었으며
27 끝내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8 이렇게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29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30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안 가고 다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
31 너희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하여 하나님이
32 [c]‘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33 그러자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감탄하였다.
34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셨다는 말을 듣고 다 함께 모였다.
35 그들 중에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36 “선생님, 모세의 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d]‘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다.
39 그 다음은 [e]‘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이다.
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41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후손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후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43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다윗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44 [f]‘하나님이 나의 주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앞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거라’ 고 하지 않았느냐?
45 다윗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
46 그러자 한마디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고 그 날부터 예수님께 묻는 사람도 없었다.
무슨 권세(23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Jesus entered the temple courts, and, while he was
teaching,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came to him.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they asked. "An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권세(1849) 에쿠시아(ĕxŏusia) ἐξουσία, ας, ἡ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 마태복음 28:18 - 모든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마태복음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태복음 10:1 - 권능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 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이다.
* 요한복음 1:12 - 자녀 되는 권세
- 1832. 에케스티( ĕxĕsti) ἔξεστι
관련 성경 / 옳다(마 12:10, 12, 막 12:14, 눅 6:9, 20:22), 가하다(고전 6:12), 합당하다(눅 14:3), 권한이 없다(요 18:31).
신약 성경 / 32회 사용
1. 힘, 2. ἰδίᾳ δύναμις ~의 권능으로, 3. ἐν δύναμις. : 권능으로
어원 / 14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세(마 6:13, 행 4:7), 권능(마 7:22, 막 6:5, 행 1:8), 능력(마 13:54, 눅 1:17, 롬 1:4), 재능(마 25:15), 권능자(막 14:62), 뜻(고전 14:11), 힘 (고후 1:8, 8:3, 히 11:11), 세력(히 11:34).
[동] 능하다(막 9:39, 눅 19:37), 강하다(고전 15:43), 힘있다(계 1:16)
신약 성경 / 119회 사용
- 1410. 두나마이(dünamai) δύναμαι
어원 / 수동. 디포넌트. 현재2인칭단수 δύ- νῃ와 δύνασαι, 미완료 ἠδυνάμην과 ἐδυνάμην, 미래 δυ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δυνήθην과 ἠδυνάσθην, 불확실한 유사 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할 수 있다, 능히 하다(마 3:9, 10:28, 막 2:7, 9:28, 눅 1:20, 3:8).
신약 성경 / 210회 사용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나 환경에 이끌리지 않으시고 주님이 하실 일과 가실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어떤 능력이나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1. 예수님은 공생에 마지막 며칠을 앞두고서도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르침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많은 가르침을 예루살렘에서 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죽었고 자신도 죽으실 것을 아시지만 한 말씀이라도 더 전하여 그들을 돌이키고 살리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이 장차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시지만 부활 후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못마땅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백성들로부터 빼앗길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성전의 주인인데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잡아 죽일 구실을 찾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되고 오만한 질문에 대항 하거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악과 맞서거나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어떤 권세로 가르치시는지 마땅히 자신의 권세를 보여 주실 수도 있지만 결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어떤 권세와 능력을 가르치셨는지 알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권세로 가르치시는지 말해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주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하셔서 그들 스스로 질문에 대답할 수 없게 하심으로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악과 맞서지 않고도 그들에게 질문을 하셔서 그들 스스로 질문에 대답할 수 없게 하심으로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악에 맞서지 않고도 그들에게 대답하시는 주님의 지혜요, 권세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세상의 약한 것을 들어 강한 것을 폐하시는 권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가 그 재판소에서 기탄없이, 지극히 당당하고 유창하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됐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런 예상외의 펀치를 한 방 맞고도 어떻게 대꾸할 말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지금 앉은뱅이를 고쳐
놓고 그것이 바로 ‘예수 이름’ 때문이라고 기탄없이 외치는데 그에 대한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까지 자기네들 눈앞에 있으니 도무지
힐난할 말, 무슨 트집거리조차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사도들을 일단 “공회에서 나가라”고 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네들끼리 일종의 밀실회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난관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하고 완전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무작정 체포해 오고 재판을 벌였는데, 오히려 그들 앞에 제시된 증거와 그 변론된 사실은 자기네들 말로도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실로 명백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민과 궁리 끝에 그들은 겨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곧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권한을 최대로 사용하여 그들을 협박하자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로마제국이 유대사회에 허용해 준 자치권을 행사하는 기관입니다. 그들은 그 어떤 사람이든지 마음대로 체포하고 심문할 뿐 아니라
사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형벌이라도 마음대로 줄 수 있었습니다. 즉 산헤드린 공회는 적어도 유대사회에 있어서는 신분적으로 최상류
사회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고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 권한의 공포감을 십분 활용하여 사도들의
입을 막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도 역시 또 한 번의 뜻밖의 반격에 의하여 완전히 참패를 당하고 말게 됩니다. 19절로 22절 말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마치 자기네들이 모든 사람들 위에 최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부활을 했든지 말든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런 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기네들의 이익과 사상에 거치는 것이기만
하면 무조건 마음대로 처벌하고 금지시킬 수 있다고 교만해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그처럼 인간적인 권력을 마음껏
누리던 중에 바로 자기네들 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잊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가 떨어지지 마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지 아닌지 너희들 스스로 한번 판단해 보아라”고 되받아쳤습니다. 즉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보다 훨씬 더 높은 권위를
두려워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진짜 높으신, 진짜 권세 잡으신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힘 있는 자들보다도, 그 어떤 권위
있는 기관보다도 훨씬 더 두려워하며 받들어 복종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아무리 유대사회에서는 최고 권력을
자랑하더라도 그것과는 비교도 못될 진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던 까닭에 그 사도들은 세상 권력 앞에서 조금도 겁내거나
머리를 수그리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네들이 “보고 들은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행하신 일들을 전한다는 것은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에 순종하는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열두 명만을 뽑아서 삼년 동안이나 그들의 눈을 통하여 보게 해
주시고 귀를 통하여 듣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권위를 아는 자로서는 도무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결국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또 한 번 창피스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네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발언을 그 공회석상에서 들으면서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들을 그저 다시 한 번 “위협하고” 즉 그저 경고 사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실로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역사가 여기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본인은
약해도 그 사람이 어떤 강력한 것을 소유하거나 그것과 줄이 닿아 있으면 그 힘을 고스란히 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빼빼마른 사람
혼자 있다 해도 그 손에 권총이 들려 있으면 건장한 사람 여럿이라도 함부로 덤빌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인 줄
알았는데 품속에 있던 마패를 꺼내들면 모든 관리들이 그 앞에 벌벌 떨면서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그 권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민간인은 권총을 소지할 수 없지만, 경찰은 치안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그것을 차고 다님으로써 범죄자들을 제압합니다. 청와대를 사칭함으로써 사람들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자들은 다 쇠고랑을 찰 수밖에 없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정식 임명을 받은 국무총리나 장관이나 청와대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수행을 위한 권한 역시 위임을 받게 됩니다. 결국 권력이라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임명해 주는 직위와 부여해 주는
사명을 통하여 활용될 때, 정당하면서도 효과 있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극히 높은 권위와 무한한 능력은 그 하나님께로부터 복음 전파를 위한 직분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자의 삶 속에서 크게 역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에 전력투구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힘을 아깝게 낭비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받은 사명에 충성하는 일에 쓰지 않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많은 달란트와 더 큰 고을의 권세를 허비하실 아무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용기와 힘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를 높이 받들고 그 사명을 순종함으로써 절로 얻게 됩니다. 그런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권세라는 것은 제아무리 높아 보이고 제아무리 강해 보여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는 신자는 아무리 불신 사장이 핍박을 해도 주일성수에 조금도 굴하지 않습니다.
실로 세상의 가장 귀하고 높은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패했고 사도들 앞에서 연이어 창피를 당했으며 오늘날의
기독신자들 앞에서도 여전히 무색하고 무력한 것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꿀리지 아니합니다.
‘예수 이름’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권세’를 두려워할 줄 아는 신자는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복음을 믿고 전하고 있는지 질문 받을 때마다 이처럼 “기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멋진 복음의
전도자들, 하나님의 주권에 크게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충성된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여 말하였다.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하면, 온 백성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으니,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눅20: 1-8)
미국 국방부 정보담당 부차관인 윌리엄 보이킨 중장이 아랍인을 사탄에 비유하며, 우상숭배적 이교도 집단인 이슬람에 맞서 성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 김정일이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미국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자신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키는 전사로서 군 상관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는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보이킨 중장은 미 최정예 특수부대인 델타포스 출신으로 1980년 이란에서 실패로 끝난 미국인 인질 구출작전을 진두지휘한 것을 비롯해, 그레나다·파나마 침공,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 체포작전 등 미국의 특수전을 현장에서 이끌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이킨 중장의 주장대로 오사마 빈 라덴과 후세인이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가 미국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라면, 예전에 그러니까 오사마 빈 라덴과 후세인이 미국과 밀월 관계에 있던 때는 미국이 사탄의 나라였기에 그들이 미국을 친구로 여겼던 것일까요?
이란과의 전쟁 시 후세인은 미국의 친구 아니었던가요? 게다가 오사마 빈 라덴 가문은 미국 대통령을 둘씩이나 배출한 부시 가문과 사업상으로도 절친한 사이로서 집으로 초청해 식사도 함께 했다는데, 정말 헷갈립니다. 아마도 보이킨 중장은 자신의 상관인 부시 대통령의 명령을 받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기에(그가 주장한 대로) 이런 혼동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정말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나라다운 풍경이지요. 뿐만 아니라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로 백악관 내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아마 모든 회의가 기도로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부시가 열심 있는 신앙인 임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요.
부시와 그의 추종 세력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전사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에 거슬리는 대상들, 즉 그들의 요구와 이익에 반하는 무리들을 사탄의 자식으로 간주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보이킨 중장은 무슨 근거로 자신을 하나님의 전사라 칭하며 이슬람을 향한 전쟁을 외치는 것일까요. 이라크를 침공하여 후세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이라크의 석유 산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미국의 행태가 과연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까요. 미국의 부시 패거리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세계의 여론은 미국의 오만한 행동이,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초강대국 미국의 무력에서 온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당시 유대 권력자인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들은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은 하늘에서 온 것이며 이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분을 통해 입증된다고 말입니다.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의 종교 체제가 그들에게는 하늘이 주신 권세의 근거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종교의식을 주관하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제사와 율법과 기도 등 그들의 삶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고 있는 자라는 주장을 하고도 남을 만한 소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갈릴리라는 볼품없는 동네의 출신인데다, 권력과의 연관성도 전혀 없어 보이는 지방 청년입니다. 그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속해 있던 종교 조직의 권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를 따릅니다. 예수가 하는 말과 예수가 행한 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유대 지도층도 지닌 종교적 권세와 무관한 예수에게 사람들이 몰리니 그들로서는 불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지탱해주는 권세와 무관한 새로운 권세가 나타난 게 아닙니까. 그러니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던질 만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이 말에 유대의 권력자들이 고민합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라 답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는 질책이 따를 것이요,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 말하면 백성들이 분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무리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례요한은 유대의 종교 조직이 주는 권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지닌 종교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나 정치적 권력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세상의 논리를 넘어서 있었습니다. 광야에 머물던 그는 도시에 있는 유대 권력자들이 맛보는 안락한 세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경제적 배경도, 정치적 권력도, 군사적 무력도 갖지 못한 세상적으로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적어도 유대 권력자들이 판단하기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말은 힘이 있었고 자신감에 넘쳤습니다. 유대 권력자들이 소유한 경제력도, 정치력도, 군사력도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유대 권력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삶의 조건(부드러운 잠자리와 풍족한 음식)도 그를 유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늘의 외침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지닌 정치·사회적 배경이나 경제적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말과 행동이 하늘의 뜻에 합당함을 알뿐입니다. 힘없는 청년 예수에게는 고개를 숙였지만, 힘있는 왕 헤롯을 향해서는 서슴지 않고 죄를 추궁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주어도 주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나는 죽고 하나님이 살아 있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거덜나고 바닥이 보이는 것 같아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결코 마를 수가 없는 영원의 샘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권세는 채워도 채워도 새는 밑 빠진 독입니다.
아무리 부어도 부족함은 멈추지 않습니다. 끝없이 남의 그릇을 넘보며 자신이 남보다 더 가져야 한다는 욕망에 매어 삽니다. 창고를 채워 놓고도 언제 자신의 그릇이 빌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하나님은 죽고 나는 살았기에 그렇습니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무얼 소유해도 빈 강정처럼 허무하게 부서지고 맙니다.
무적의 로마군단이 하나님의 권세가 아니었듯이 가공할 파괴력의 미국 신무기도 하나님의 권세가 아닙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궁중에 있었고 하나님의 소리를 외치는 세례요한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최첨단 신무기와 경제적 풍요와 초고속 승진과 복권 당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의 권세요 요행일 따름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비교를 통한 상대적 우위를 부단히 추구합니다. 잠시라도 밀리면 안 된다는 강박증을 마음에 품고 삽니다. 무시당하지는 않았나, 남들보다 손해 보지는 않았나, 좀더 차지할 수는 없나 갖가지 계산으로 번잡한 삶은 밑 빠진 독처럼 불안스럽기만 합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주머니 계산을 하느라 주변 사람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럼으로써 사면초가의 상황에 스스로를 가두고 맙니다. 그러니 항상 공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는 내가 죽습니다. 내가 없기에 이해득실에 대한 초조함도 없습니다. 모든 존재를 향해 순수한 호의로 대할 수 있습니다. 나의 궁극적 힘은 하나님이며 이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기에 그렇습니다.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무한 영역에 속해 있기에 남과 비교하며 계산할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해야 할 말을 하고, 행할 바를 행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에 대한 반성만이 유일한 제어장치입니다. 결과에 대한 계산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니까요.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복음 20:1-26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런 권세를 누가 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보면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자신들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런 일은’ 가장 가까이는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신 후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그들을 책망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자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슨 권세로 그런 일을 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 대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와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간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전에 행한 사건에 대해서 무리 중 어떤 이들은 그의 권위가 귀신의 능력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11:14-15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더러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만일 예수님이 행한 능력이 인간의 내제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런 능력은 인간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의 권위를 능가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대표자들도 예수님의 권위가 인간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은 ‘누가 이 권세를 네게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자신들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권세를 네게 주었느냐?’는 이 질문은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신의 권위를 신적 권위로 주장한다면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할 수 있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는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준 사건에서 이미 거론되었습니다. 누가복음 5:21절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왔는데 많은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가지 못하자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예수님께 달아 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고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며 예수님을 참람한 말을 하는 자라고 정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위치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의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4). 예수님은 랍비의 전통이나 성전이나 토라와 같은 유대교의 중요한 원천들을 권위의 근거로 삼지 않고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하셨습니다. 곧 ‘신적 권위인가? 인간의 권위인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근본적인 방식으로 이슈를 전개함으로써 예수님은 산헤드린의 결정을 요구합니다. 이 결정은 그들이 권위의 원천으로 삼는 토라나 곧 모세 오경이나 성전이나 로마의 권위로 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답하면 자신도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는지 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과 의도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몰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역공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5-8절을 보면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역 질문을 받은 그들은 당황해서 서로 의논했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왜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돌로 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산헤드린 공회가 요한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4절의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산헤드린 공회가 요한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세례요한이 증거 한 권세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증거 했습니까? 누가복음 3:7-13절을 보면 세례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기며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치며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이 회개의 소식을 백성들은 받아들입니다. 군인들도 회개합니다. 세리들도 회개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의 물로 베푸는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모든 백성들이 다 세례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의 질문에 그들은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을 하늘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세례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3:16-17절을 보면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합니까?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합니다.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는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심판의 주로 증거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요, 심판의 주로 증거합니다. 곧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메시아로 증거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3:21-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권위를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을 인정하면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5-6절에 보면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고 하며 서로 의논했습니다. ‘의논했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쉴로기조마이’(sullogivzomai)인데 이 단어는 70인역에서는 네 번 사용되지만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어떤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능성을 의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고 할 수도 없었고 사람에게서라고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의논한 것입니다. 그들은 외통수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7). 그러나 그들의 이와 같은 대답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8).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선언하신 후 그들에게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비유는 공관복음에 다 나오는데 구약의 그림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종으로 묘사하는 것(암 3:7; 슥 1:4-6)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유업으로 설명하는 것(시 2:8), 그리고 비유의 핵심 주제인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묘사하는 것도 구약적 소재입니다. 시편 80:8-13절을 보면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포도나무를 가지고 오는 그림으로 묘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비유하는 말씀은 이사야 5장입니다. 이사야 5:1-7절을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9-18절을 보면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되어 포도원의 소출 얼마를 받게 하려고 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세를 주기는커녕 세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주인은 다른 종을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에게도 똑같이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보냈습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을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그들은 종을 때리고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습니다. 이에 주인은 ‘어찌할꼬’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포도원 주인의 독백입니다. 그런데 이 독백은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하는 농부들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당장 군사를 보내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고자 했습니다. 이는 농부들이 아들은 혹 공경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농부들은 아들을 보고 서로 의논한 후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습니다. 농부들이 아들을 죽인 것은 상속자인 것을 알고 죽인 것입니다. 곧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자신들이 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즉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까? 16절에 보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오늘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의 시대에 ‘다른 사람’은 분명히 이방인을 포함했을 것입니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금하신다고 외쳤습니다. 16b절을 보면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업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질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빼앗을 것이라는 사실로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17-18절을 보면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22절과 이사야 8:14-15절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8:22절을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8:14-15절을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과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다른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된 신기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 돌 위에 걸려 넘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이 돌이 심판을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베드로전서 2:6절을 보면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퉁이 머릿돌은 유대인들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19-26절을 보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듣습니다. 특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을 향한 말씀인줄 알아듣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총독의 치리와 권세아래 붙여 죽이고자 사람을 보내 유도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1). 그들은 스스로 의인체하면서 예수님을 치켜세우며 예수님의 말을 책잡고자 질문합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나이까”(22).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해도 책잡히도록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라고 하면 이방 왕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였으니 참선지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 총독의 권세에 붙여 죽이고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계를 아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이자 “누구의 화상과 글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26절에 보면 저희들은 백성 앞에서 능히 책잡지 못하고 예수님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며 잠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냄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반석으로 믿고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께 경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멸망의 자식들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에 참예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세상에는
두 종류의 권세가 있음을 봅니다.
하나는 세상 권세입니다.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를 위해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권세들입니다.
돈과
권력과 자신의 이름 사용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사는 이가 가지는 권세입니다.
돈과 권력과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권세가 아닌
섬김과 오래 참음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권세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추구해야 할 권세는 큰 예배당과 많은 무리가
모여 들기 때문에 있게 되는 권세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인해, 이웃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 주어지는 권세이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할 포도원]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세상을 산 농부들]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됩니다]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거니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께 왔습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무슨 귄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이들의 이 말의 의미는 성전에 관한 권세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데 지금 누구 허락을 받아서 성전에서
가르치며 성전에서 매매하는 것을 금하는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로마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들에게 되묻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이렇게 주님이 묻자 생각해 보고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을 백성들이 참 선지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온 권세라 할 수 없고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실상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은 누구의 권위로 일하시는지를 말씀하셨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도들은 주님의 비유를 통해 자신들은 심판 받을 농부들이란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12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비유의 농부들처럼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를 자세히 살펴 봅시다. 먼저 등장 인물 가운데 포도원 주인이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산울타리도 만들었습니다. 즙 짜는 틀도 만들고 망대도 지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포도원은 부족한 것이 없도록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포도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갑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등장 인물 가운데 농부가 나옵니다. 여기서의 농부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분명합니다. 12절에서 이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인 줄을 알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인 것이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비유한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 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자손과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고 그 나라의 성격은 모든 백성들에게 복덩어리가 되는 나라였습니다(창12:1-3)
그런데 2절부터 9절까지를 보면 포도원을 관리하던 농부들은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주인에게 돌려야 할 포도원의 소출 얼마를 주인에게 줄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들이 소유하고자 한 것입니다.
농부는 포도나무의 열매가 잘 맺도록 하고 그 열매의 일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덩이로 살고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의 종를 보냅니다. 자기를 위해 세상을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종들을 보낸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탐욕을 쫓아살아가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갑니다.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물질과 권세와 명예를 가진 삶을 꿈꾸며 거대한 저택과 하인을 가진 이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까지 보냅니다. 당신의 아들을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게 하셨으며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세상이 추구하는 삶은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하나님께 세를 내고자 하지 않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복을 받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이제 영문 밖으로 끌고가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8절) 합니다.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은 이런 자기만을 위해 사는 농부들 곧 세상을 사는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오늘날 포도원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복덩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이 어디에 헌금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이 왜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이 교회당을 짓는데 거의 모든 물질을 사용하였고 카톨릭의 신부들과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다시 말해서 교회만을 위해 물질과 시간들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교회들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어디에 물질을 사용하고 있고 어디에 교회의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고 세상을 세우는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버린 돌을 곧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와 웰빙과 세상의 성공을 위한 지혜가 아니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의 열매를 맺으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복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혜가 참 지혜이며 바로 이 지혜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우리의 삶은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가 행복할 때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세상은 무너질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것과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웰 비잉(Well Being)과 더불어 웰 다잉(Well Dying) 이 동시에 준비되어야 합니다.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
필자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대학병원과 기독병원에 근무한 후 사회적으로 병든자들을 교정하는 교도소에서 수년간 의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최근 수원에서 말기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사역을 하고 있다. 따라서 육체의 병듬과 치료, 정신적 파멸과 회생의 과정, 그리고 말기 환자들의 안락사 현장을 보면서 진정한 건강과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됐다.
사실 안락사 부분은 일선 의료인들의 영역으로 알았는데 최근 총회 신학부에서 개최한 안락사 공청회에 참석했다가 조금이나마 신학적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었고 임종의 중요성을 재인식 할 수 있었다.
잠언 3장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는 말씀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년이 되어 반드시 임종의 길에 이른다는 인간의 진로를 명시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그때그때 현재의 삶이 가장 중요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어떻게 임종을 맞느냐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웰다잉은 건강하게 잘 사는 것 보다 건강한 죽음을 의미한다. 웰다잉의 단계인 호스피스 사역은 그래서 요즘 관심 사역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호스피스(Hospice)란 병원(Hospital)의 라틴어로 ‘손님’이란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오갈데 없는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호텔처럼 쉬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병원에서 치유 불가능한 인생 말기 환우가 마지막 머무는 곳으로 완화의학적 차원에서 웰다잉 하도록 환우와 가족들을 보살피는 케어 호스피스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현대의학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질병이나 노환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다. 회복이 불가능하고 고통이 심할 경우 환자나 혹은 가족들 중에서 생명을 종결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약물투여 등 적극적 안락사는 살인 혹은 살인방조 행위가 되고 환자 자신도 자살행위가 될 수 있어 가능한 피하고 자연사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임종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실제 임상경험상 안락사는 완화의학적 측면에서 생명의 존엄사로 평가하기도 한다. 즉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의료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락사는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행위로 죄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환자 자신이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임종을 맞이하는게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신앙적 임종이 웰다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웰빙하는 삶이 곧 웰다잉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순간순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가 아닐까.
웰 빙, 웰 다잉, 웰 에이징(Well being, Well dying, Well aging)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을 웰 다잉(Well Dying)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웰 에이징(Well Aging) 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연령에는 자연 연령과 건강연령 , 정신연령, 영적연령 등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다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는 것이다.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웰빙.웰다잉.웰에이징-(福生 - 善終 - 黃金老年)
아름답게 늙어가기 위해서는 일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4대 고통이 따른다. 질병, 고독감, 경제적 빈곤, 그리고 역할 상실이다. 점점 의욕과 열정을 잃어가게 된다.
노년을 초라하지 않고 우아하게 보내는 비결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 등이다. 특히 핵심적인 요소는 열정이다. 모세는 80세에 민족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노년기에 열정을 가지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7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3%는 70-80세 노인에 의하여, 그리고 6%는 8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한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64%가 60세 이상의 노인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소포클레스가 ‘클로노스의 에디푸스’를 쓴 것은 80세 때였고,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은 80이 넘어서였다.
다니엘 드 포우는 59세에 ‘로빈슨 크루소’를 썼고, 칸트는 57세에 ‘순수 이성비판’을 발표하였고,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70세에 완성했다.
베르디, 하이든, 헨델 등도 고희의 나이를 넘어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였다.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초라하지 않으려면 대인관계를 잘 하여야 한다. 즉 인간관계를 ‘나’ 중심이 아니라 믿음 중심으로 가져야 한다.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인생에 실패한 이유에 대하여 조사를 했는데,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했다는 이유는 15%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85%는 잘못된 대인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사람답게 살고 늙고 죽음. 그만큼 인간관계는 살아가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이기주의가 강해진다. 노욕(老慾)이 생긴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폭군 노릇을 하고, 자기도취에 몰입하는 나르시시즘 (narcissism)에 빠질 수 있다.
또는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페이탈리즘(fatalism) 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의 대인관계는 결국 초라하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관계는 중심축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질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들 수록 초라해지고 △일 중심이나 ‘나’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로 초라해진다.
△타인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가장 좋고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갖는 것은 믿음 중심의 인간관계다. 변함없는 가치관을 갖는 믿음 중심의 대인관계를 웰에이징(wellaging)이라 한다.
웰에이징을 위해서는 대신관계(對神關係)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신앙의 여부가 삶의 질을 확연
하게 바꾸어 놓는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을 의지하기보다는 믿음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과 가까이하면 정신연령과 영적연령은 더욱 젊어진다. 우리는 결승점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한다.
후반전의 인생은 여생(餘生)이 아니라, 후반생(後半生)이다. 인생의 주기로 보면 내리막길 같지만 내세(來世)을 향해 새 인생을 시작할 때다.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우리들 마음의 깊은 각오는 가능하다고 판단해 본다. wellbeing 인생은 결국 wellaging 하다가 welldying으로 마쳐야 한다.
영국 리버풀대학의 노인 심리학자 브롬리(D. B. Bromley)는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며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며 보낸다.'라고 했습니다.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볼 때 60년을 늙어가며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의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며 지내는 것일까요?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에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보았을 때 일생동안 어떤 일에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며 지내는지 활동별로 비교한 기사가 게재된 바 있습니다. 이는 영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로 문화가 많이 다른 우리 일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 수 있고, 세대에 따라 소비하는 시간의 패턴도 크게 다를 수 있지만 그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평균수명 80년은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701,280시간이 됩니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 = 700,800시간에 윤달인 해 20년의 24시간 X 20년 = 480시간을 더하면 그리됩니다.
보도에 따르면 <표>에서처럼 일로 지내는 시간이 26년(227,760시간)으로 가장 길게 나타났고, 아침에 깨어날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잠자는 시간은 평균 25년(239,000시간)으로 2위였습니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합쳐보면 평생 시간의 64% 가까이 됩니다. 이는 하루 24시간에서 15시간 반이 넘는 시간으로 우리가 하루에서 쓸 수 있는 나머지 시간은 8시간 반 정도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TV를 보는 시간이 10년으로 하루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이상으로 3위로 나타났고,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양분의 공급을 위한 식사나 간식을 하는 시간이 52,560시간(6년)으로 4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화 통화 시간이 4년으로 그 뒤를 잇고 있는데, 이는 하루 중 1.2시간을 전화통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마트폰 사용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남성과 여성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우선 부엌에서 일하는 시간으로 여성이 2년 5개월, 남성은 1년 3개월로 차이를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적 차이에 따라 그 시간은 여성이 영국보다 더 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외모를 가꾸는 몸단장 시간(거울을 보는 시간)이 여성의 경우 평생 136일로 남성의 46일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에 비해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는 데 평생 들이는 시간은 남성이 1년인 데 비해 여성은 0.5년으로 2배의 차이를 보이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아쉽게도 조사 항목 중 미소 짓는 시간은 88일로 꼴찌로 나타났습니다. 미소 짓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씩 더 가진다면 1년에 3,650분, 약 60시간으로 2.5일 정도가 됩니다. 이는 40세인 사람이라면 80세까지 약 100일로 조사에서 나타난 평생의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 삶은 평소의 시간 관리에 대한 마음가짐에 따라 크게 변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 80년의 시간에서 그동안 지내온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맞이할 시간의 효율적인 관리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웰빙과 웰다잉은 반대 개념 아닌 삶의 한 묶음
웰빙(well-being)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넘치는 사회에서 내놓고 얘기하기도 꺼리는 웰다잉(well-dying)에 천착하는 이가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논설고문을 지낸 원로 언론인 최철주(72)씨다. 현재는 호스피스와 웰다잉 강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웰빙과 웰다잉에 대해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웰빙 안에 웰다잉이 존재한다”며 “몇 년 전 딸과 아내를 잇따라 암으로 잃은 것을 계기로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2004년 자궁암 환자이던 딸은 말기 상태에 들어가면서 수술을 마다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도 완강히 거부해 가족들을 자주 울렸다. 딸은 메모지에 “더 치료할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고통이나 마찬가지”라고 적었다. 당시 32세이던 딸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주부였다. 이런 딸이 너무 일찍 죽음을 맞게 된 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은 아빠에게 호스피스 아카데미 교육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웰다잉 강사 교육에 50대 여성 몰려
그가 6개월 과정인 호스피스 교육을 받던 중 딸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에도 그는 호스피스 교육에 참석했다. 죽음 교육을 잘 받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집사람은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게 독이 됐다. 딸이 숨진 지 4년 뒤 아내도 암에 걸려 모녀 관계는 참 특별하다고 느꼈다.” 그의 눈이 촉촉해졌다. 부인은 항암제 치료를 거부하고 호스피스 센터를 나와 8개월간 집에서 머물다 임종했다.
그는 요즘 말기 환자들이 편안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웰다잉 강사로 활동 중이다. 웰다잉 강사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적극적이다. 보통 10주 동안 진행되는 강좌인데 그는 이 중 한 강좌를 맡는다. 수강생은 80명 정도. 큰 일을 치른 뒤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 여성 수강생이 많단다. 50대 이후 여성이 수강생의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웰다잉 전도사가 되려는 남편과 함께 다른 나라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했다. 투병 중에도 남편이 웰다잉 강사로 나가는 일을 적극 권하기도 했다가 어느 때는 씁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병이 심해질수록 감정의 기복이 커졌다.
웰다잉 강사에게도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선뜻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답을 구하기 위해 그는 아내와 함께 미국·일본 등의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하고 죽음을 앞둔 30여 명의 말기 환자를 만났다. 현역에서 은퇴한 원로기자가 다시 취재수첩을 들고 ‘좋은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의 차이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 결과물이 2008년 출간된 『해피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란 책이다.
부인이 딸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미국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많은 환자를 보고 나서였다. 그 후 부인은 “딸이 편안하게 갔다. 그것도 제 복이지”라고 자주 중얼거렸다.
연명 치료 거부한 소설가 최인호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그의 취재에 순순히 응해줬을까.
“한국에선 힘들었다. 열에 여덟·아홉 사람은 자신의 말년을 남에게 드러내길 꺼렸다. 기자나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어 저널리스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말기 환자들은 달랐다.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담소하고 죽음을 평화로운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질문에도 잘 답변해줬다.”
그는 웰다잉을 실천한 저명인사로 고(故) 최종현 SK 회장을 먼저 꼽았다.
“죽음을 앞둔 최 회장을 직접 만난 건 아니다. 현역 기자 시절부터 최 회장의 죽음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다. 돈·명예·권력을 모두 가졌던 최 회장이 대학병원에서 치료 받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 6개월 동안 통증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난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당시 나는 중앙일보 도쿄총국장이었는데 일본 기자들이 오히려 최 회장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게 취재했다. 나중에 최 회장의 동반자였던 SK텔레콤 손길승 명예회장으로부터 죽음의 과정을 전해 들었다. 손 회장에 따르면 최 회장은 폐암 수술 뒤 암이 재발하자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거부했다. 통증이 심해지면 통증 완화제를 맞으면서 호흡 훈련을 하며 자기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새 항암제를 써보자는 주변의 권유도 뿌리치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최 회장이 생을 마감한 당시(1998년)만 해도 토장(土葬)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 회장은 자신을 화장해 자연에 뿌려줄 것을 당부했다. 그의 유언은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유명 작곡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조념씨의 죽음도 그에겐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경기도 포천의 한 호스피스 센터에서 조 선생을 만난 것은 2008년 그가 숨지기 닷새 전이었다. 그는 지인들이 마지막 눈도장을 찍기 위해 병원을 찾는 것을 피곤해하고 나중엔 다 거부했다. 그러던 분이 내 책을 보고 공감했다면서 나를 위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직접 연주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그는 소설가 최인호씨도 임종 전에 만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러 번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나를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최 작가의 친구로부터 ‘그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으며 계속 글을 쓰고 싶지만 죽음이란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는 연명 치료를 거부했다.”
그럼 죽음을 앞둔 가족이나 지인들에겐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그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권한다.
“병문안 와서 자신도 모르게 살아 있는 우월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환자에게 위로는커녕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천당 가실 거다’ ‘극락왕생 하실 거다’ 같은 말은 환자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하느님·성경·화엄경·금강경 등 종교와 관련된 말도 너무 많이 하는 건 피하는 것이 좋다. 신앙을 지닌 환자들도 종교 얘기를 하는 것은 싫어했다. ‘우리 지난 봄에 놀러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런 행복한 시절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 ‘약간 괜찮아지면 차나 한 잔 마시자’ ‘커피향 좋지’ ‘장미가 참 예쁘지’와 같이 평소처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시인 이해인 수녀에게 들은 얘기가 인상 깊다.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잠깐 오라’고 했단다. 자신을 종교적으로 위로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김 추기경은 종교 언어 하나 쓰지 않고 ‘이해인 수녀,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 하며 인간적인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이 가난하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터득한 위로의 말일 것으로 이해인 수녀는 말했다.”
미국에선 초등학교 때부터 죽음 교육 시작
질병으로 여명이 제한돼 있는 이들은 어떻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
웰다잉일까.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명도 연장될 수
있다”고 답했다. 평온한 죽음, 즉 평온사(平穩死)에서 답을 찾자는 것이다.
“웰다잉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삶의 마지막을 맞는 것이다. 생존 가능한 시간을 주치의에게 미리 알려달라고 요청한 뒤 남은 시간에 마무리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떠나는 것이 웰다잉의 좋은 예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처럼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실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말기 환자 중엔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멀리는 못 가지만 일본·중국 등 가까운 나라를 여행한다. 이들은 진통제를 처방받아 통증이 심해지는 상황에 대비한다. 배낭을 메고 가족과 함께 국내 여행을 하거나 서예 등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환자에게 여명을 말해주지 않는 의사가 꽤 많은 게 현실이다. 나중에 있을지 모를 환자나 보호자들의 항의를 꺼려서라고 한다.
“의료진이 예상하는 이상으로 오래 사는 환자들도 꽤 많다. 나는 주치의가 여명을 말해주지 않으면 담당 레지던트에게 물어볼 것을 권한다. 의사가 죽음을 모르고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난센스다. 의사라면 환자의 치료(cure)와 관리(care)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내 의대에선 죽음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 지난해 가을부터 울산대 의대가 전국 최초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서구에선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그는 미국의 예를 들면서 초등학교 때 그런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선 초등 교사가 테이블 위에 화분을 놓고 삶과 죽음의 개념을 가르친다. 꽃은 열흘이면 시드는데 그게 꽃의 인생이란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가족처럼 대하는 애완견도 10∼20년이면 떠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도 그는 “웰빙의 삶을 살려면 웰다잉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 수명 증가로 인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웰빙·Well Being(참살이)이 화두이었다면 앞으로는 웰다잉·Well Dying(인간다운 죽음)이 화두가 될 것이다. 요즈음 주위를 아우러 보면 100세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얼마 전 한창 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따뜻한 나라 한 지방으로 지인들과 골프 여행을 갔다. 그때 70대 후반에 들어선 많은 노부부 그룹들이 피한 골프 운동을 즐기는 모습을 목도하고 100세 시대가 오래전에 우리에게 와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웰빙을 자각하지 못한것 같아 겸연쩍어 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다시한번 웰빙의 삶을 다시 조직해 봐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우리의 삶이 60대 중반에 서면 은퇴라 하여 현업을 떠나고 앞으로의 삶을 휴식년이라 생각하고 일하고는 떨어져 남은 세월을 즐기는 쪽에만 두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거나, 그래도 놀 수만은 없으니까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이룩해 보려고 다시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지나면 후회스러운 목적없이 시간만 보내는 사람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부류에 따라 웰빙의 개념도 다를 수 있어 웰빙의 참 뜻을 환기 해보려 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사는데 즉 부를 축적하는데 소비하면서 정신적 건강은 소흘히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나 문화가 웰빙이라 늦게나마 조화로운 삶으로 전환하려고도 한다.
우리나라가 해방 후 가난에서 벗어나 산업고도화로 인한 물질적 풍요가 2000년 이후 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때부터 웰빙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웰빙을 추구하는 부류로 육체적으로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로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느끼는 소속감이나 성취감의 정도, 여가생활이나 가족 간의 유대, 심리적 안정 등 다양한 요소들을 웰빙의 척도로 삼는다. 몸과 마음, 일과 휴식, 가정과 사회, 자신과 공동체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삶 바로 웰빙의 삶이다. 이런 웰빙의 삶은 고기보다 생선과 유기농산물을 즐기고 단전호홉, 요가 등 심신을 안정시키는 운동을 하며 외식보다는 가정에서 만드는 슬로우 푸드를 즐겨먹고 여행, 등산, 독서 등 취미생활을 즐긴다. 이와같이 물질적 부가 아니라 삶의 질을 강조하는 생활 방식이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건강하게 살고 어렵지 않게 살고 여유롭게 살면 하는게 우리들의 바람이요 희망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웰빙에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이 아니고 행복한 죽음, 즉 웰다잉도 포함되어야 한다.
웰다잉이란 지금까지 살아 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편안한 삶의 마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삶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길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스스로 미리 준비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뜻깊게 보낼 뿐 아니라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으로 고령화에 따른 질병의 증가, 가족해체와 1인 가구의 확산으로 급증하고 있는 고독사 등 슬프고 불행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당하는 죽음'으로 우리를 슬프게 우울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측면보다 웰다잉에 대한 관심을 높히면서 '맞이하는 죽음'을 위한 '웰다잉 10계명'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웰다잉 십계명은 첫째 버킷리스트 작성하기, 둘째 건강 체크하기, 셋째 법적 효력 있는 유언장 작성하기, 넷째 고독사 예방하기, 다섯째 장례계획 세우기, 여섯째 자성의 시간 갖기, 일곱째 마음의 빚 청산하기, 여덟째 자원 봉사하기, 아홉째 추억물품 보관하기, 열째 사전의료의향서 작성하기 등이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임종체험 재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이 스스로 수의를 입고 입관하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참가자가 수위를 입고 스스로 입관하여 관두껑이 닫히면서 깜깜한 암흑 속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하는 모습에서 참가자가 말하는 가족의 재발견과 가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는 체험담이 가슴에 오랫동안 남게 되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한화손해보험에서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노년을 보다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는 동기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2009년 부터 '하늘 소풍 이야기'이라는 웰다잉 준비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강원 웰다잉 연구소는 2013년 1월부터 '인생 100세 시대, 행복한 삶, 아름다운 마무리'를 주제로 매월 두차례씩 장례계획 세우기, 유언과 상속, 장기기증, 나의 묘비명, 나의 사망기 등을 노인이 직접 작성 체험토록 하는 프로그래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얼마 전 대한노인병학회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들은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대수명은 82.4세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건강수명(유병기간을 제외한 기대수명)은 65.4세로 무려 17년이나 차이가 나면서 건강수명 연장이 노인문제에서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이러한 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틈틈이 건강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웰다잉을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웰다잉은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이나 친구들에게도 편안한 이별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2009년
2월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은 생명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런 죽음의 과정을 받아들임으로서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평소 존엄사를 긍정적으로 인정해 온 고 김수환 추기경은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말부터 인공호홉기와 같은
기계적 치료에 의한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거부해 왔다. 나의 부친이 17년 전 중국에 있는 자식을 보러 오셨다. 이곳 저곳
구경도 다니시면서 잘 잡수시고 잠도 잘 주무시고 하며 보름동안 보내시고 귀국하셔서 일주일을 잘 지내시다 몸이 불편하시다 하시면서
병원에 입원하시고 사흘만에 돌아가셨다. 평소에 지병 있으신것도 아니고 항상 건강하시어 말년에는 서예로 소일하시며 잘 지내셨는데
중국에 갔다오고 싶다고 하셔서 모친이 모시고 오셨는데 가시기전에 정리하시는 차원에서 아들도 보고 가시겠다고 하신 것 같다. 너무나
깨끗하게 죽음을 받아 들이신것이다. 나도 깨끗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웰다잉의 준비를 우선 건강부터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겠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서는 일생을 건강하게 사는 웰빙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웰다잉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태복음 21 Korean Living Bible
예루살렘으로 가심
2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기슭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가면 나귀 한 마리가 나귀 새끼와 함께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들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3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여라. 그러면 곧 보내 줄 것이다.”
4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5 [a]“시온 사람들에게 말하라. ‘보라! 너희 왕이 오신다! 그가 겸손하여 나귀를 탔으니 어린 나귀, 곧 나귀 새끼이다.’ ”
6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7 나귀와 그 새끼를 끌어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등에 펴자 예수님이 올라타셨다.
8 많은 군중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기도 했다.
9 그리고 예수님을 앞뒤로 에워싸고 가는 군중들은 “다윗의 후손에게 [b]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게 찬양을!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10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시내가 떠들썩하며 “이분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군중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2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거기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3 그리고 그들에게 “[c]‘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성경에 쓰여 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14 성전 안에 있던 소경들과 절뚝발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다.
15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신기한 일과 성전에서 “다윗의 후손에게 호산나!”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나서
16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렇다. 너희는 [d]‘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완전하게 하셨다’ 라고 한 성경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 베다니에 가셔서 밤을 보내셨다.
18 다음날 이른 아침, 성으로 들어가실 때 예수님은 시장하셨다.
19 마침 길가에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가까이 가셨으나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이 그 나무를 향해 “네가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시자 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
20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습니까?” 하고 물었다.
21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의심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내가 그 무화과나무에게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산을 향하여 ‘땅에서 들려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다.
22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
유대인의 올무
23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따져 물었다.
24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나도 한 가지 묻겠는데 너희가 대답하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겠다.
25 요한의 [e]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f]하나님에게서 왔느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왔느냐?” 그러자 그들은 “만일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두렵다” 하고 서로 의논하다가
27 “우리는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하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가 먼저 맏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하였으나
29 그는 [g]‘예,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았다.
30 그가 둘째 아들에게도 가서 같은 말을 했는데 그는 [h]‘싫습니다’ 하고 거절하였으나 뒤에 뉘우치고 갔다.
31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느냐?” 그들이 “둘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세무원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요한이 와서 [i]올바른 길을 가르쳤으나 너희는 믿지 않았고 세무원과 창녀들은 믿었다. 그리고 너희는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33 “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다. 그는 포도원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틀을 놓고 망대를 세운 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
34 포도철이 되어 주인은 자기 몫의 포도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냈다.
35 그러자 소작인들은 종들을 잡아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다른 하나는 돌로 쳤다.
36 주인은 처음보다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으나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37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내 아들은 존경하겠지’ 하였으나
38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이 사람은 상속자이다. 자, 죽여 버리고 그가 받을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하고 서로 말하며
39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 죽였다.
40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 악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포도원은 제때 열매를 주인에게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42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j]‘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신기한 일이다’ 라고 한 성경 말씀을 읽지 못했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해 둔다.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k]그 나라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백성이 그 나라를 얻을 것이다.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깨어질 것이며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한 말인 줄 알고
46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기기 때문에 두려워서 잡지 못하였다.
대속물(代贖物) 마가복음 10:4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0장
대속물(代贖物)(28절)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代贖物
: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거나 속죄를 하기 위해 바쳐진 물건이나 사람.대신할 대, 바칠 속, 만물 물
어원 / 30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속물(마 20:28, 막 10:45)
신약 성경 / 2회 사용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대속물이 되시려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섬김의 본은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묵상하며 목회 현장에서 목사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녀들에게 종을 섬겨야 한다고 강요할까요?
차라리 목사는 하나님의 아들 교인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모르지만...............
잘못된 현상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재림(再臨)의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시려고 오실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심판하실까요?
질서를 파괴한 것부터 심판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종을 섬기라고 강요한 괘씸죄를 다스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재림의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광을 드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은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섬김을 즐거워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 희생과 헌신을 좋아할 것입니다.
섬김과 대속의 은혜가 회복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생명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삭막한 세상에서 생명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과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섬김과 대속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결단이라고 하겠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섬김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거대한 행렬을 거느리고 대속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입술로는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몸은 더 화려하게 더 크고 웅장하게 치장하므로 좁은 문 보다는 넓은 문으로 좁은 길 보다는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과부화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팽창하여 스스로 터져버릴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굉음을 듣지 못하기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디모데전서 2:5-7)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이기에 더 힘들었을 십자가의 무서운 처형과 고통과 아픔과 수치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감당하심에 더욱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가 되시려고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그 복음을 위하여 이방인의 전도자가 되어 고난의 길을 선택했던 사도 바울이라도 본 받아야 합니다.
대속(代贖)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롬 3:9-18, 23).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고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로 지옥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망은 ‘분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지옥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가르치는 두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대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악된 삶을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십자가위에 놓여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우리는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우리가 지은 죄를 담당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몇 구절 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라는 내용을 접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된 사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악에 합당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속죄물이 되신 사실도 가르칩니다.
대속에 관해 말하는 또 다른 구절은 이사야 53장 5절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예언은 매우 상세하며, 십자가의 처형은 예언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대속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서도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가를 치르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지옥에서 형벌을 받으며 그곳에 있어야만 우리 자신의 죄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값을 치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 뿐만 아니라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기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셨던 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할 대속물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인 속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은 인간의 죄, 하나님의 뜻에 집요하게 불순종한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을 필요성이 있으며 인간 자신은 이 일에 속수무책이라고 말합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인간들은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고’(골 1:21),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이며’(엡 2:12),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엡 4:18)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롬 5:10)이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합니다. 죄의 결과로 두려운 형벌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 형벌의 법칙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뜻하는 것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 위에 머물며(롬 1:18),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는 엄숙한 경고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죄인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 2:1)입니다. 그리고 긴박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2. 대속의 수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으신 반대와 죄에 수반될 두려운 결과, 즉 하나님이 정하신 가공할 결과를 솔직하게 그리고 완강하게 선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싸늘한 시선으로 멸시하며 그로부터 초연히 서 있거나 풀 길 없는 감정을 품으시고 죄인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 분은 몇 번이고 인간에게 오셔서 인간을 파멸시키고 있는,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 이 악에서 건지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특별히 그 분은 자기 아들 예수를 통하여 사랑과 자비의 마지막 손짓을 하시며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이 오신 목적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목적을 성취하는 가운데 그 분은 ‘죄인의 친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땅 위에 오사 겸손히 사람들 사이에서 비천하게 사시며 선행과 악에게 억눌림 당하는 모든 자의 치료에 열중하셨습니다. 그 분은 인간을 위하여 죄 많은 사람들의 손에 죽으셨습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Redemption’ 혹은 ‘Atone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대신하여 갚아 준다’, ‘값을 주고 되찾아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속이란, 죄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죄 값을 치러 주시고, 마귀와 죄와 사망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매여 죄의 종이 된 인간을 위해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그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데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화목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으므로 그 속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속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죄에 매여 사는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은 먼저 죄에 대하여 죽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즉 죄인을 대신하여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피 흘려 우리 각 사람을 구속하여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흑암의 권세에 매여 종노릇 하던 우리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며, 또한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으니 주님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자원하여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두 번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습니다(갈2:16).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십니다. 즉 인간은 불의하지만, 인간의 의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의인의 옷을 입은 새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더 이상 죄가 주관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이고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령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다니엘 9: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요한복음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부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김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대속물(代贖物) 마가복음 10:45
마태복음 20 Korean Living Bible
2 그는 일꾼들에게 하루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3 [a]시쯤 되어 다시 나가 보니 일거리가 없어 장터에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있었다.
4 그래서 주인이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일한 것만큼 삯을 주겠다’ 하자 그들이 포도원에 갔다.
5 주인은 [b]12시와 오후 [c]3시에도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6 오후 [d]5시에도 나가 보니 여전히 일거리가 없어 섰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희는 어째서 하루 종일 여기서 놀고 섰느냐?’ 하고 주인이 묻자
7 ‘우리를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다.
8 “날이 저물자 주인은 포도원 감독에게 ‘일꾼을 불러 나중 온 사람부터 차례로 품삯을 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9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기에
10 먼저 온 사람들은 좀더 많이 받을 줄로 생각했으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했다.
11 그래서 그들은 품삯을 받고 주인에게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12 ‘나중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종일 더위에 시달리며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해 줍니까?’
13 “그러나 주인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은 내 마음이다.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냐? 내 너그러움이 네 비위에 거슬리느냐?’
16 “이와 같이 앞선 사람이 뒤떨어지고 뒤진 사람이 앞설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사람
17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도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18 “지금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e]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19 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20 그때 세베대의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저의 이 두 아들을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22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곧 마시게 될 [f]고난의 쓴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마실 수 있습니다.”
23 “너희가 정말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사람들의 것이다.”
24 듣고 있던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보고 화를 내자
25 예수님이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g]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h]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
29 그들이 여리고를 떠나갈 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다.
30 그런데 두 소경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후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군중들이 그들을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으나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다윗의 후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2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 “왜 그러느냐?” 하고 물으시자
33 그들은 “주님,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4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을 만지시자 그들은 곧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19장
바늘 귀(24절)
예수님 당시 부자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여야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부자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풍토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부자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지버 엎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고 자신있게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구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처럼 철저히 계명을 지킨 사람은 마땅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의 착한 행실의 대가로 ‘영생’을 얻으리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누구라도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당연히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때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을 때, 주님의 말씀은 마치 ‘모든 세상의 부자들은 아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부자청년과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의도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내용이 전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영생은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자청년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지, 원래부터 영생과 부자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는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모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만약 부자가 정말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많은 부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칭찬한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장례 비용을 마련한 아리마대 요셉도 성경은 부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120문도가 한자리에 모였던 오순절 다락방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 중 부자가 아니었다면 마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지, 돈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가난한 자가 ‘물질 축복’을 구하는 것은 기복 신앙도 아니고, 이단도 아닙니다.
물질 축복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선물 중의 하나요, 물질을 이웃과 나누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물질 축복을 받아, 천국에 가는 부자도 되고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을 소유한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몽골 교회에서 예배후에 기도제목을 나누던 중, 한 몽골 청년이 ‘부자되게 해 달라’고 기도제목을 부탁하자, 오랜 신앙생활을 했던 몽골분이 그 청년을 나무라더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지 ‘육적인 돈’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신자가 ‘예수 이름으로 돈 많이 벌어 부자 되기를 바라는 것’은 ‘기복 신앙’이요, 죄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한 부자청년과 나눈 대화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25).
바늘 귀에 대한 이해를 마치 바늘 구멍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바늘 구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 당시 문화적 배경을 생각할 때 "바늘 귀 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낮 시간에는 큰 문 즉 많은 사라들과 가축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문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해가 떨어진 후에는 아주 작은 문을 이용하기 때문에 짐을 실은 낙타가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등에 실었던 짐을 모두 내려야 하고 심지어 낙타가 발을 굽혀야만 지나갈 수 있느 작은 문이었다고 합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자가 영생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비유라고 하겠습니다.
영국의 주경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바늘귀란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흔히 성곽을 두르고 있는 도시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중의 큰 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니는 것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흔히 '바늘귀
문'(門)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큰 짐승 낙타(camel)가 이 작은 문으로 통과하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Calvin)은 낙타를
가리키는 헬라어가 "카멜로스(κάμηλος)"이며 배에서 사용되는 밧줄(rope)은 "카밀로스καμιλος)"라는 것으로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 귀에 통과하기 어렵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바늘귀가 '바늘귀 문'이며 약대가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약대는 바늘 문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밧줄은 바늘귀에 매어쓸수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의 정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시 부자들은 단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부를 누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매우 파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부자는 현세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천국을 바라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현세욕에서 벗어날 때 부자도 당당하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현세욕을 버린 부자가 되든지
아니면 믿음의 부자가 되어 날마다 천국의 삶을 즐기며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육체가 혼을 떠나면 죽는 것처럼 영혼이 신을 떠나면 죽는다”
사망이란 ‘존재 상실’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신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를 상실한 ‘존재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빈 것’ ‘헛것’ ‘없는 것’이 아닌가? 신을 떠난 인간이 바로 그렇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성서해석학자인 폴 리쾨르(1913~2005)는 그의 ‘악의 상징’에서 구약성서에 이에 대한 ‘매혹적 상징’이 있다고 했다. ‘바람(風)’이 그것이다.
리쾨르는 “김, 바람, 먼지 같은 물질의 영상은 가벼움, 텅 비어 있음, 불안정함, 쓸모없음 따위의 분위기를 풍겨 ‘버림받은’ 인간의 모습을 단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사람은 바람과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시편 114:4),
“아담의 자녀들은 헛되고 사람의 자녀들은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모두 해야 바람보다 가볍다”(시편 62:9)라는 구절들에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헛것’ ‘헛됨’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사야 40장 17절에는 “주의 존전에서는 모든 열방은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느니라”라고 신을 떠난 죄인이 가진 ‘없음의 성격’, 곧 존재의 무의미성과 무가치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신에게서 돌아선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받는 형벌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가지 측면, 곧 죄의 ‘소극적 측면’일 뿐이다. 영혼이 사망하자마자 죄는 곧바로 ‘적극적 측면’을 드러낸다.
영혼의 사망이 무한한 욕망을 낳는다
죄의 적극적 측면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 갖는 ‘무한한 욕망’을 말한다. ‘신에게서 돌아섬’이라는 죄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섬’ 또는 ‘세상을 향해 돌아섬’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갖는다. 신에게서 돌아서는 죄가 인간을 ‘자기중심주의’ ‘현세중심주의’에 빠지게 한다는 뜻이다. ‘존재에 대한 관심의 상실’은 동시에 ‘존재물에 대한 관심의 획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혼의 사망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 갖는 ‘무한한 욕망’으로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콘큐피스켄치아(concupiscentia)’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넓은 의미로서, 세상에 대한 인간의 탐심, 곧 현세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좁은 의미로서 성욕이다. 요컨대 인간이 신에게서 돌아서면 성욕을 비롯한 온갖 현세욕의 노예가 되어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죄의 적극적 측면으로서 우리가 ‘죄의 삯’으로 받는 2차적인 형벌이다.
리쾨르는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향해 갖는 무한한 욕망을 ‘우상(偶像)’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우상’은 좀 더 정교한 신학적 반성으로 ‘실존적인 헛됨’을 ‘거짓-신’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거짓-신도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적인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죽은 영혼에게서 일어나는 콘큐피스켄치아, 곧 성욕과 현세욕에 대한 우리의 무한한 욕망은 더 이상 바람보다 가벼운 ‘헛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마성을 지니고 우리를 노예로 삼는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것이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에 비할 만하다고 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설교 속에는 이처럼 막강한 죄의 마성에 대한 체험들이 잘 나타나 있다. “음행의 영이 저희를 미혹시켜 저희가 하느님(하나님)을 버리고 음행을 하느니라”(호세아 4:12)나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예레미야 2:24) 등이 그 표현들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찾아왔던 부자 청년이, 그리고 당신과 내가 재물에 대한 탐욕을 결코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여기에서 우리들 자신을 위한 변론을 하나 하자!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앞에 무엇이 놓여 있었던가? 가시덩굴과 엉겅퀴가 뒤덮인 저주받은 땅, 무의미한 노동, 그리고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이 아니었던가? 카뮈, 사르트르, 하이데거를 비롯한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신랄하게 고발했던 ‘내던져짐(Geworfenheit)’이라는 끔찍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아담이 누구인가? 일찍이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언급한 대로, 아담은 “그 자신이자 동시에 인류”가 아니던가? 그가 마주한 상황이 곧 우리 모두가 당면하는 실존적 상황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뭘 더 바라는가!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을 챙기고, 저주받은 땅이라도 움켜쥐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라도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움켜쥐는 것이 아니던가! 바로 이것이 자기중심주의, 현세중심주의의 본질이 아니던가! 우리가 갖는 무한한 성욕, 재물욕, 현세욕의 근거가 아니던가! 이것이 인간 실존의 가련함이 아니던가!
백번 옳은 이야기다. 그런데 기독교의 생각은 다르다. 리쾨르를 비롯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가진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과 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의미성과 무가치성, 그리고 불안은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에게서 돌아섬, 신을 떠남, 존재상실이라는 ‘원초적 분리’에서 왔다.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다시 ‘신에게로 돌아감’ 곧 ‘존재회복’뿐이다. 원초적 분리는 원초적 결합에 의해서만 회복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반대로 치닫고 있다. 그래서 신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라 하였노라”(예레미야 3:19),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을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란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니”(예레미야 2:28) 등과 같이 ‘돌아서지 말 것’ ‘떠나지 말 것’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일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라고 재결합을 요청했다. 이 재결합이 예수가 말하는 ‘구원’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맺는 ‘과일’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징표이자 축복이다. 예수는 이 말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태복음 7:16~17)라고 교훈했는데, 바울은 그 열매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 5:22)라고 가르쳤다.(이 열매들이 지난 호에서 미룬 물음인 ‘구원받아 의인이 되면 뭐가 좋은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자, 여기에서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자. 천국에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들어간다. 죄인이란 신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의인은 다시 신에게로 향함으로써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향유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부자이든 가난한 자든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욕망을 갖고 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자들이 그것을 가졌다. 그래서 예수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라고 교훈한 것이다. 부자들이 모두 악인이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자라고 해도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미 여러 번 밝혔듯이, 구원은 본질적으로 선과 악이 아니라 의와 죄에 연관된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옳다고 하는가’일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기독교는 신구약성서가 제시한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해 왔다. 하나는 ‘재물이라는 거짓-신의 마성’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중세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가운데 루터교가 취하는 입장으로 다분히 소극적이며 현실도피적이다. 이들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태복음 6:19)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 등을 근거로 삼는다. 성서에는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구체적 실천 요강들도 숱하게 들어 있다. 예컨대 과도한 소비(잠언 21:20), 빚(잠언 6:5, 22:7), 이자(출애굽기 22:25, 시편 15:5, 에스겔 18:8, 13, 17), 뇌물(잠언 15:27, 에스겔 22:12), 투기(잠언 28:19~20), 사기(잠언 13:11, 20:10, 23) 등을 금하는 가르침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예레미야가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라고 한탄했듯이 재물이 가진 마성을 이기지 못해 결국 실패했다.
다른 하나는 재물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방법이다. 상당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취하는 입장으로, 다분히 칼뱅주의 내지 청교도적 방법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편 기자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편 50:12)라고 읊었듯이 세상의 모든 재물은 신의 소유다. 또한 신명기에 “네 하느님(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17)고 기록되었듯이,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아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이 같은 구조에서 보면 부자란 더 많은 관리가능성을 지닌 청지기이며 신으로부터 더 많은 축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그 사람은 자기의 재물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쓸 수 없다. 오직 신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 방법 역시 재물이 가진 놀라운 마력 때문에 결국 실패했고, 오히려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야합하는 부작용마저 낳았다.
이로써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우리가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섬기는 우상인 재물의 마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그것의 ‘장악’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 문제지만, 해답은 이미 2000년 전에 주어졌다. 한마디로, 땅위의 보물이 아니라 하늘의 보물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7:20~21)라는 준칙을 제시했다. 이어 바울은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에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느님(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라고 구체적 실천 방안도 내놓았다. 물론 이 가르침들을 받아들여 실행하느냐, 마느냐는 오직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이유는 부자는 세상에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누구인가?
공관복음서를 종합하여 볼 때 부자 청년은
1. 부자(세습적인 부자)
2. 관원(아르곤) : 지도자
3. 신앙적 관심 :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4. 예수님을 선한 선생으로 인식 : 랍비
* 관원(758) 아르콘(archōn) ἄρχων, οντος, ὁ
관련 성경 / 관리(마 9:18, 23), 왕(마 9:34, 막 3:22, 눅 11:15), 집권자(마 20:25), 회당장(눅 8:41), 법관(눅 12:58), 지도자(눅 14:1), 당국자(요 7:26, 48), 임금(요 12:31, 14:30), 권세 잡은 자(엡 2:2).
신약 성경 / 37회 사용
바늘귀()
바늘(4476) ῥαφίς, ίδος, ἡ
발음 / 라피스(rhaphis)
관련 성경 / 바늘(마 19:24, 막 10:25, 눅 18:25).
신약 성경 / 2회 사용
귀(5169) τρύπημα, ατος, τό
어원 / 5168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늘귀(마 19:24).
신약 성경 / 1회 사용
* 낙타(2574) κάμηλος, ου, ὁ and ἡ
어원 / 히브리어 15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낙타(마 19:24, 막 10:25, 눅 18:25)
신약 성경 / 6회 사용
* 밧줄(4979) σχοινίον, ου, τό
관련 성경 / 노끈(요 2:15), (거룻) 줄(행 27:32).
신약 성경 / 2회 사용
* 낙타(1581) 가말(gâmâl) גָּמָל
어원/ 혼성. 복수 גְּמַלִּים, 1580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낙타(창 12:16, 삿 7:12, 슥 14:15).
구약 성경 / 54회 사용
밧줄과 낙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표현이 오역이란 얘기를 처음 접한 것은 '상식의 오류사전'이란 책에서였습니다.즉, 아람어의 밧줄이 gamta인데, 이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gamla로 잘못 옮겼다는 얘기였답니다.
아람어는 모르니 패스지만, 재밌는 것은 그리스어에서도 밧줄과 낙타는 철자가 비슷합니다.
낙타 - kamelos (καμηλος, 카멜로스)
밧줄 - kamilos (καμιλος, 카밀로스)
랑게(Lange)에 의하면
육중한 몸무게의 약대가 부자를 상징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 구멍이 하늘나라로 가는 영적통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은 이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더욱 확실히 해 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격언으로 바벨론 탈무드에는(B.
Berakoth 55b) '약대' 대신 '코끼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벧론에서는 코끼리가 흔하고,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지나갈 때까지 천국 문은 악인에게 닫혀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는 이 복음서에서 빌어 쓴 듯하다.
여하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더구나 교만(驕慢)과
자기 만족으로 살지운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더욱 더 좁은 것이다.
이 비유가 영생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만큼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만큼 더 놀라운 것이며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마태복음 19 Korean Living Bible
19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편 유대 지방 으로 가셨다.
2 그때 많은 군중이 따르므로 예수님은 거기서도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결혼과 이혼
3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와서 “구실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5 [a]‘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두 사람이 한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렇게 되면 두 몸이 아니라 한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7 “그렇다면 왜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와 이혼하라’ 고 했습니까?” 하고 그들이 묻자
8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너희가 고집이 세고 악하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9 [b]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음행한 일도 없는데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자
11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다 이 말대로 할 수는 없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12 처음부터 결혼할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난 남자도 있고 [c]불구자가 되어서 결혼할 수 없는 남자도 있으며 하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 이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13 그때 사람들이 손을 얹어 축복해 달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으나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5 그러고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하시고 그 곳을 떠나셨다.
부자 청년
16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17 “어째서 선한 일을 나에게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밖에 없다.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라.”
18 “어느 계명입니까?” “[d]‘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하지 말아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e]‘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이다.”
20 “저는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 저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1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 그러나 그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
23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24 내가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27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받겠습니까?” 하고 묻자
28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f]새 시대가 되어 [g]내가 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또 나를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h]부모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누구든지 [i]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 그러나 지금 앞서도 나중에 뒤떨어지고 지금은 뒤떨어져도 나중에 앞설 사람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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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3. 낮추다 ταπεινόω
어원 / 미래 ταπεινώσω, 제1부정과거 ἐ- ταπ είνωσα, 완료 수동태 분사 ἐταπεί- νω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ταπεινώ- θην, 미래수동태 ταπεινωθήσομαι, 50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낮추다(마 18:4, 고후 12:21, 약 4:10), 낮아 지다(눅 3:5, 18:14), 겸손하다(벧전 5:6), 비천에 처하다(빌 4:12).
신약 성경 / 14회 사용
* 5011. ταπεινός, ἡ, όν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관련 성경 / 겸손한(마 11:29, 약 4:6, 벧전 5:6), 비천한(눅 1:52, 고후 7:6), 낮은(롬 12:16, 약 1:9), 유순한(고후 10:1).
신약 성경 / 8회 사용
교회의 권징(勸懲)에 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권징(勸懲) / 권할 권(勸), 징계할 징(懲)
권선징악의 준말
교회의 권징은 교회를 보호하고, 죄 지은 자를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며, 교회 지체들 사이에 교제를 새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역 교회의 지체들 간에 발생한 죄된 동을 바로 잡는 과정입니다.
교회의 권징에는 다섯 종류가 있습니다.
1. 권고(勸告)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제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이
말씀처럼 개인 간의 범죄는 개인적으로 다루어야 하지만,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는 교회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2. 권계(勸戒)
"형제들아···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살전 5:14)"
여기서 규모 없는 자란 지역 교회에서 무질서하며 분열을 일으키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교회적으로 권계해야 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And we urge you, brothers, warn those who are idle, encourage the timid, help the weak, be patient with everyone.
3. 경계(警戒)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I urge you, brothers, to watch
out for those who cause divisions and put obstacles in your way that
are contrary to the teaching you have learned. Keep away from them.
이 말씀처럼 교리를 거슬려 분쟁을 조장하는 자는 교회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4. 경고(警告)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 말씀처럼 이단에 속한 자들을 경고하고 거절해야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Warn a divisive person once, and then warn him a second time. After that, have nothing to do with him.
5. 출교(黜敎)
징계의 최종적인 단계는 지역 교회로부터의 출교이다. 이 징계는 음행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모욕하는 자, 술 취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등에게 적용된다(고전 5:11~13).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God will judge those outside. "Expel the wicked man from among you.
어떤 경우에는, 교회의 권징이 출교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을 교회의 회원에서 공식적으로 제거하고, 그 개인으로부터 비공식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8:15-20은 교회가 권징을 위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 절차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가해자를 먼저 개인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상황의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2-3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회개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죄를 고집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교회에 알립니다.
이제
가해자는 죄를 회개하고 그의 죄된 행동을 버릴 수 있는 세 번째 기회를 가집니다.
만일 교회의 권징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 때라도
죄 지은 그 사람이 회개한다면, “형제를 얻은 것” (마태복음 18:15) 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절차가 진행될 때까지 죄
지은 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17)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 결코 즐겁지 않은 것처럼, 교회의 권징 과정은 결코 유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교회의 권징이
필요합니다.
교회 권징의 목적은 죄 지은 자를 향해 멸시하는 마음 자세를 취하거나 영적인 우월감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권징의 목표는 한 개인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다른 신자들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권징은 개인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여, 그 후 점차적으로 공개해야 합니다.
권징은 개인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교회의 다른 지체들을 위하는 경건한 두려움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권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회원제의 필요성을 암시합니다.
교회와 목회자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아닌, 특정 그룹의
사람들 (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의 영적 안녕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 권징의 맥락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고린도전서 5:12) 라고 묻습니다.
교회의 권징을 받아야 하는 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하며, 교회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론할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치리를 받게 되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맹백한 죄를 지속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고린도교회 (고린도전서 5:1-13)를 통해, 지역 교회에서의 권징의 예를 보여줍니다. 이 경우 치리는 출교에까지
이르렀는데, 사도 바울은 치리를 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죄는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일 죄를 허용되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 (고린도전서 5:6-7)처럼 죄가 주변으로 퍼질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멀어져서 “누룩 없는 자”가 되거나, 또는 영적으로 부패시키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5:7-8). 자기의 신부인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것은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5-27). 불신자들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 (와 그의 교회)을 증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의 결과들 중 하나는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원수들에 의해
모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2:14).
교회가 회원에 대해 취하는 징계 조치들이 경건한 슬픔과 진정한 회개를 가져오는데 효과적이기를 소망합니다. 회개를 하게 되면, 그
개인은 다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회개하였고, 나중에 바울은 교회가 그를 받아들여
교회와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2:5-8). 불행하게도, 치리 조치가 사랑 안에서 올바르게
수행되더라도, 회복을 가져오는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권징이 회개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세상에서 선한
증거를 유지하는 등의 여러 다른 선한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치리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일관된 징계 없이 제멋대로 하도록 방치된 젊은이들의 행동을 우리 모두 목격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보기에 흉합니다.
지나치게 관대한 부모의 사랑은 아이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함으로써 그 아이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징계를 받지 않고
자라난 아이는 통제되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며 제대로 적응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의
권징도 결코 즐겁거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때때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권징은 사랑입니다.
권징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로부터 신학교들은 학생들이 아니라 교수들이 타락시켜 왔고, 교회는 성도들이 아니라 목사들이 타락시켜 왔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국내의 개신교도 자질 부족인 교수들과 목사들이 망쳐 놓았으므로 그 책임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타락의 주역으로 특히 목사들을 지목하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국내 개신교회의 적지 않은 저명한 목사들이 간음, 성추행, 사기, 공금 횡령, 배임, 교회 세습, 부정 선거, 학력 위조, 폭행 등등의 죄상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이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는 교회 개혁을 위한 국내 기독교 인터넷 신문인 <뉴스앤조이>나 <당당뉴스> 등에서 살펴보면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들의 범죄 행위가 크고 많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교회나 교단의 징계를 받고 쫓겨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과를 뉘우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버젓이 다른 지역에 자기네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여 다른 이름으로 교회 간판을 달고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며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서두에 언급한 삼일교회 전 목사의 성추행 사건과 또 그와 유사한 담임목사들의 온갖 범죄행위 때문에 한국 개신교가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에게 온갖 지탄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 교인들도 경악하거나 실족하여 교회를 옮기거나 심지어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런 삯꾼 목사들과 타락한 목사들이 하루라도 빨리 기독교계에서 사라져야 기독교가 초대교회처럼 올바로 부활할 것이다.
이제는 국내의 수많은 개신교 교단의 헌법이나 내부 규정에 따른 교회의 징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교회의 징계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지역 교회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신 마태복음 18장에는 지역 교회 안의 죄에 대한 치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죄를 범했을 때 피해를 당한 형제가 피해를 준 형제에게 그의 잘못을 뉘우칠 것을 권면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한두 명을 더 데리고 가서 말하고, 그래도 뉘우치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게 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출교하라고 되어 있다(마 18:15~17).
상기와 같이 마태복음 18장에는 지역 교회에서 범죄한 사람의 징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여러 서신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1장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 모두 13번 정도 나오는데, 이 용어는 지역 교회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은 그 교회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다는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벧전 1:16).
그 실례로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리하리라"고 쓰여 있다. 이 말씀처럼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며,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여기서 성전이란 교회의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무리를 말한다.
지역 교회인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하므로, 이 교회 안에는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아이디어가 스며들어 와서는 안 된다. 지역 교회는 인간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방법 등, 세상적인 물결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므로 이곳에 부도덕이나 잘못된 교리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 도덕적인 악이나 교리적인 악이 지역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는 엄청난 손실을 입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징계라는 조치를 취하게 되고, 그로 인해 성도들은 큰 고통과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늘 깨어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도덕적인 문제와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거룩함과 순결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지역 교회의 징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징계의 목적, 징계의 예방, 징계의 원칙, 징계의 대상, 징계의 종류, 징계의 결과 등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징계의 목적에 대해 알아보자.
징계의 조치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
1.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을 드러내고 퇴출시키기 위함이다(요일 2:19).
2. 범죄한 신자를 징계함으로써 마침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키며, 지역 교회의 교제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신자에 대한 징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제나 영적인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일 뿐이다(고전 5:7).
3. 지역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하니님의 교회는 거룩하며 힘써 이 거룩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징계를 통해 거룩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고전 3:17).
둘째, 징계의 예방에 대해 살펴보자.
항상 치료보다는 예방이 우선이다.
징계해야 할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화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므로, 이러한 거룩한 삶은 항상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만 유지될 수 있다(딤전 4:5).
따라서 신자 개인이 갖는 규칙적인 성경 공부와 기도 생활은 범죄를 예방하는 지름길이다.
2. 교회적인 가르침의 체계화이다.
지역 교회는 신자들이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한다.
말씀을 올바르게 체계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지역 교회는 신자를 범죄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징계의 원칙에 대해 알아보자.
1. 확실한 증거
"나의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사람들에 의하여 너희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너희에 관한 것이 내게 밝히 드러났기 때문이라(고전 1:11)."
이 말씀처럼 사도 바울은 그에게 전해 온 사람의 이름을 항상 밝히면서 명백히 드러난 증거를 제시했다.
그리고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 5:19)"
이 말씀처럼 두세 증인에 의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2. 공명정대함
징계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혈연이나 지연 등에 얽매이지 말고 공평하게 시행해야 한다(신 1:17).
넷째, 징계의 대상에 대해 살펴보자.
1. 교리적으로 타락한 신자
성경의 명백한 교리에 반하는 다른 교리를 인정하거나 옹호하거나 추종하는 신자는 이미 교리적인 면에서 이탈된 자이다(딤후 2:17~18). 이들은 발견되는 즉시 사실을 확인하여 경고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에는 징계해야 한다(딤전 1:19~20).
2).도덕적으로 타락한 신자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면 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때 돌이키고 회개하지 않으면 계속 반복하여 죄를 짓게 된다. 이런 신자는 영적 분별력이 마비되고 돌이키기 힘든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런 신자들은 교회적으로 엄중한 징계를 가할 수 밖에 없다(고전 5:11~13).
다섯째, 징계의 종류(단계)에 대해 알아보자.
지역 교회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이리가 들어올 수 있고(행 20:29), 사탄이 교회를 부패시킬 수 있다(고후 11:3).
그로 인해 지역 교회는 불가피하게 징계를 하게 되는데, 징계는 그 정도(경중)에 따라 몇 가지 단계가 있다.
1. 권고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제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이 말씀처럼 개인 간의 범죄는 개인적으로 다루어야 하지만,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는 교회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2. 권계
"형제들아···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살전 5:14)" 여기서 규모 없는 자란 지역 교회에서 무질서하며 분열을 일으키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교회적으로 권계해야 한다.
3. 경계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롬 16:17)." 이 말씀처럼 교리를 거슬려 분쟁을 조장하는 자는 교회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4. 경고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 말씀처럼 이단에 속한 자들을 경고하고 거절해야 한다.
5. 출교
징계의 최종적인 단계는 지역 교회로부터의 출교이다. 이 징계는 음행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모욕하는 자, 술 취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등에게 적용된다(고전 5:11~13).
여섯째, 징계의 결과에 대해 살펴보자.
1.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함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이 말씀처럼 징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한다.
2.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음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이 말씀처럼 징계는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한다.
지금까지 지역 교회의 징계와 관련하여 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사항들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나 있는 대로 징계에 대한 내용을 올바로 적용하고 실행하기만 하면, 초대교회처럼 지역 교회는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기독교의 좋은 본을 보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오늘날 국내의 개신교회는 일반 교인이 아닌, 자질이 부족한 담임목사들이 솔선수범하여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국내의 개신교회가 개혁되고 정화되려면 무엇보다 일반 신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목사들을 징계하고 교회에서 과감히 퇴출시켜 두 번 다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올바른 자격을 갖춘 인도자를 내세워 하나님의 성전인 지역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고 유지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의 징계 순서
마태복음 18: 15~16
15또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짓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있을 때 그에게 그의 잘못을 일러주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라.
16그러나 만일 그가 네 말을 듣지 아니하면 너 외에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입증하게 하라.
15절: 첫 번째 순서는 자신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찾아가서 그의 잘못됨을 알려 주는
것으로 당사자 간에 문제된 일을 직접 해결 해야 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이야기 하거나 뒤에서 이야기 한다면 그 일은 해결 되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형제를 잃게 된다.
16절: 15절과 같이 직접 형제를 찾아가서 그의 잘못을 알려 주었는데도 자신의 잘못함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된 자기 주장으로 고집을 피운다면 다른 형제, 자매를 동행
하여서 다시 한 번 그 형제의 잘못을 설명하고, 있었던 일들을 입증 하는 것이
두 번째 징계 순서이다.
그래도 듣지 않을 때 세 번째 순서로
마18: 17
그래도 그가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교회에다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이교도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
교회에다 공개적으로 말하고(목자) 이도 듣지 않으면 이교도나 세리와 같이 여기는 것으로 이는 형제 자매와 같이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간 개인적으로 교회 내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런 순서대로 행하고 만약 세 번째까지 듣지 않을 때는 공개적으로 교회에서 징계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성경에서 찿아 보면…
고전5: 1~13 음행하는 자가 교회 안에 있자~
1너희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것은 다 알려진 바로되 즉 어떤 자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이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인들 가운데도 없는 일이라
2그런데도 너희가 통곡하기는커녕 교만해져서 이런 행위를 한 자를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지
아니하는도다.
3내가 참으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이런 행위를 한 그 자를 내가 마치
거기에 있는 것처럼 이미 판단하였느니라.
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와 나의 영이 함께 모인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5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신은 멸망케 하여도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
6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도다. 너희는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7그러므로 묵은 누룩은 떼어내 버리라. 그래야 너희가 누룩을 넣지 않은 새 반죽이 되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으므로
9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는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였으나
10이는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욕하는 자들이나 약탈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함께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라.
11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만일 형제라고 하는 어떤 자가 음행을 하는 자거나
탐욕하는 자거나 우상 숭배하는 자거나 욕설하는 자거나 술 취하는 자거나 약탈하는
자이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이라.
12밖에 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겠느냐?
13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나니 그러한 악한 사람은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
이 구절은 교회의 명예가 상처를 받는 것으로 개인적인 일이 아닌 공적인 경우의 일로서 교회에서 판단하고 그 사람을 징계하여야 하는데 바로 행하지 못함을 보고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구절로서 교회의 징계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1절: 믿지 않는 자들인 이방인 가운데도 없는 아버지의 아내를 음행하는 일이 발생.
2절: 교회라 하면서 이방인들이 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였음에도 이를 반성하고 통곡하기는
커녕 교만해져서, 음행한 자를 교회에서 쫓아 내지 않고 있는 모습
(지금처럼 사랑을 운운 하면서 자신들이 사랑이 많은 자처럼 교만하여 심판치 못함)
3절: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음행한 자를 이미 판단함(판단치 않고 감싸는 등의
행위는 잘못된 일임을 지적.)
4~5절: 교회의 법칙은 세상의 법보다 더 엄격하여 무서운 법으로/ 죄를 지어 3번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듣지 않아 공개적으로 징계하는 (이방인과 같이 여기고,
교회에서 쫓아 냄)것은 물론 기도로써 그 사람을 사탄에게 넘긴다(사탄에게
넘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육신이 더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의 육신의
죽음을 뜻한다)
6~7절: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이기에 묵은 누룩을 떼어 내는 징계를 하는
것으로 이렇게 징계를 함으로써 순수하게 교회를 지키라는 것(새 반죽이
되도록)으로 죄를 덮어 주는 것이 아니다.(묵은 누룩을 떼어 내야 하는 것이다)
9~10절: 4절에서 7절과 같이 교회 내에서 판단하고 징계하라고 하는 말씀이지 “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의 사람들과도 상관치 말라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예를
들면서 말씀.
11절: 형제(믿는 자인 성도)가 죄를 지으면 사귀지도 함께 먹지도 말라고 다시 한번
구분하여 말씀하시고
12~13절: 교회 안에서는 당연히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세상의 사람들 곧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심을 말씀.
교회 밖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나, 교회 내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교회의 규칙”대로 행하여서 교회의 순수성을 잃지 않아야 함이다.
교회 내의 문제 중에서 개인적인 문제 발생으로 개인간 권고와 책망을하는 일들은(징계의 순서 중 1~2번째) 지역교회 목사는 거론하지 않으나 공개적으로 교회를 비방하고 공격하는 일들은 지역교회 목사가 공개적으로 거론 하고 징계를 하는 것은 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교회 권징의 핵심
교회의 권징을 위한 모델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행하시는 권징입니다. 히브리서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권징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6)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권징의 목적은 의로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권징의 중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서로를 돌보는 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심각하고 회개하지 않은 죄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I. 두 종류의 권징
교회 안에서 두 가지 종류의 권징이 있습니다.
형성적(formative) 권징과 견책적(corrective) 권징입니다.
형성적 권징
"형성적 권징"이 훨씬 더 자주 시행됩니다.
사실 형성적 권징은 모든 교인에게 항상 행해집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지도와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형성(formaiton)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성숙하게 양육해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설교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게 될 때, 또는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격려할 때, 이것이 형성적인 권징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4:11~12, 히브리서 10:24~25, 골로새서 3:16 참조) 이러한 권징은 하나님께서 견책적 권징이 필요한 죄를 막기 위해
사용하시므로 중요합니다. 교회가 형성적 훈련에 의해 더욱 주님의 모습을 닮아갈수록, 견책적 권징이 덜 필요합니다.
견책적 권징
"견책적 권징"은 특정 교인의 죄에 대한 구체적인 훈계 또는 견책입니다.
때로는 견책적 권징은 비공식적입니다. 한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 "이봐, 톰, 그건 잘못된 거 같아."라고 하는 식입니다. 때로는 공식적입니다. 전체 성도들이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메리, 우리는 당신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므로 당신을 비기독교인처럼 대해야 합니다 "
"신중한 교회(Deliberate Church)"에서 마크 디버(Mark Dever)와 폴 알렉산더(Paul Alexander)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유형의 권징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훈련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서 권징을 비교한다면 형성적 권징은 제대로 먹고 운동을 하는 것이라면, 견책적 권징은 마치 수술과 같은 것입니다."
II. 견책적 권징의 이점
오늘 우리는 이 두 종류의 권징 중 견책적 권징에 집중할 것입니다. 견책적 권징의 이점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가 있습니다.
- 첫째, 견책적 권징은 권징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권징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사실 권징은 죄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 둘째, 견책적 권징은 다른 크리스천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교회가 죄에 대항하여 말하고 행동할 때 전체 회중은 죄의 심각한 성격과 그 결과를 알게 됩니다.
- 셋째, 견책적 권징은 교회 전체에 도움이 됩니다. 교회 권징은 도덕적 붕괴로부터 개교회를 보호함으로써 순결을 유지해 줍니다. 또한 교회에 다툼과 갈등을 가져오는 죄를 해결합니다.
- 넷째, 견책적 권징은 교회의 공동체적 증거(corporate witness)에 유익하며, 따라서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유익합니다 .견책적 권징은 전도 시 공동체적 증거를 강력하게 보호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신자들의 온전한 공동체가 있을 때 사람들은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사람들의 공동체, 즉 비 기독인들에게 사람들이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유익은 견책적 권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높아지시게 하려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눈에서 볼 때 빛나시기를 원합니다. 그중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그분의 위대한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 죄를 교회에서 다루어야 할 책임입니다.
교회 권징이 필요할 때,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 또한 어떻게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동시에 연합을 증진하는 방법으로 권징을 할 수 있습니까? 성서는 여러 상황에서 권징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지침을 줍니다.
III.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첫째, 누군가가 당신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거리낌 없이 상대에게 말한 다음, 더 이상 상대와 말하지 않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방식은 성경에서 주어진 옵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이 질문에 답하고 계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최소한의 세 단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첫째, 가서 죄를 범한 형제와 이야기하십시오. 둘째, 형제가 듣지 않을 경우, 한 두 명의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다시 이야기하십시오. 셋째, 그가 여전히 듣기를 거부한다면 교회에 말하십시오. 그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교회는 결국 그를 내쫓을 수 있습니다.
1단계: 가서 형제에게 잘못을 보여주십시오.
첫 단계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대부분의 경우, 죄를 범한 사람과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도 분쟁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형제를 얻기 위해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상대와 마주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준비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마음 준비하기
켄 산드(Ken Sande)는 자신의 저서 '피스메이커(The Peacemaker')에 이렇게 하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합니다.
- 먼저 대면할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시키시도록, 그가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이야기를 준비할 때 그 사람을 향한 당신의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 둘째,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가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매우 기만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형제나 자매에게 갈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를 신중하게 기도하고 생각하십시오. 또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분쟁에서 당신이 이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구해야 하는 잘못이 있는지 생각하십시오. 마태복음 7장 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 셋째,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보십시오. 당신의 동기가 적절한지, 그리고 분노, 복수, 교만 또는 다른 죄가 되는 태도에서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가려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십시오(로마서 12:19). 대신, 당신의 목표가 그 형제와 자신 모두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화해인지 확인하십시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불편함을 없애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형제가 죄에서 벗어나도록 섬기고 돕기 위한 것입니까?
- 넷째, 단순히 자기 기분이 좋아지려고, 또는 공감하고 들어줄 사람을 만들려고 형제의 죄를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죄를 범한 형제에게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가 필요하거나 실제로 죄를 저지른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분출하려고 대화를 사용하는 것은 수군거림입니다. 그것은 화합을 약화시키고 마태복음 18장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구할 때조차도, 죄를 범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조언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다섯째, 가해자와 대면할 때 온유와 겸손, 사랑의 정신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 15:1).
마태복음 18장에 설명된 과정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두 가지만 더 짚어 보겠습니다.
모든 허물을 다루어야 합니까?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자문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모든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형제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아닙니다. 잠언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인내와 참을성을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잠 19:11). 베드로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알려줍니다(벧전 4:8).
허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상태가 생긴 경우 또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 위험이 될 때만 형제 또는 자매에게 가야 합니다. 날마다 그 허물이 생각납니까? 그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습니까? 그 죄가 얼마나 크든 작든 상관없이 그 삶이 그리스도를 주변 세계에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릅니까? 그 죄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는 사인이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예"라면 형제나 자매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화해는 당신이 죄를 지은 것이든 아니든 간에 당신의 책임입니다.
둘째로, 마태복음 18장은 잘못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과 화해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마태복음 5장 23~24절은 죄지은 사람이 화해를 구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리스도인 사이의 좋은 관계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를 범한 사람에게 예배의 행위를 중단하고라도 화해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구절이 함께 제시하는 그림은 얼마나 놀라운가요! 두 명의 기독교 형제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둘 다 화해를 시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은 화해를 위해 서로 달려 가야 합니다!
2단계: 한두 명을 증참케 하라
죄를 범한 사람이 듣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두 명의 다른 사람을 데려가서 그와 이야기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첫째, 죄를 범한 사람은 자신이 죄를 범한 대상보다 제삼자의 말을 들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둘째, 권징 과정이 다음 단계로 진행될 경우 추가적인 인원이 회중의 증인 역할을 합니다.
이 단계에서 자신이 잘못을 당한 사람인 경우, 두 가지를 명심하십시오.
- 첫째, 죄가 얼마나 객관적인지를 고려하십시오. 결국 의견이나 관점의 문제인 것으로 형제와 마주하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그 형제가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너무 교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그것들은 정당한 우려일 수도 있지만, 교회 앞에서 입증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이런 우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과 이야기했고 그들과 당신이 의견이 맞지 않았다면, 그 문제를 내려놓고 성령의 깨닫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역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교회 권징의 과정은 구체적이고 쉽게 입증되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 둘째, 당신이 데려가는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고, 신중하고, 공평하며, 훌륭한 판단력을 가졌는지 확인하십시오. 죄를 범한 사람은 그런 이들의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셋째, 죄를 범한 사람에게 하기 전에 당신이 하려고 하는 바를 알리십시오. 교회 권징에 대한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는 바로 그 인식 때문에 그 사람이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고,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으로, 증인이 자신의 편을 들도록 로비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수군거림 또는 중상모략일 수 있습니다.
3단계: 교회에 알리기
죄를 범한 사람이 여전히 듣기를 거부한다면, 이 문제는 교회로 가져가고, 그가 회개를 거부하면 교인 자격이 취소됩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최대치의 표준이 아니라 최소치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덜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전체 교회에 문제를 맡기기 전에 장로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으로 취하는 적절한 단계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의 패턴을 아셨습니까? 단계마다 더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기 위해 참여합니다. 최종 단계에 이르러 그 사람이 교회에서 나가 세상에 던져진다고 하더라도, 말하자면, 세상조차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회개케 하기 위해 섭리적으로 사용됩니다.
IV. 만약 당신이 한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 죄를 짓는 것을 보게 된다면?
마태복음 18장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러나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지은 것을 알았지만, 그 죄가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다른 기독교인을 상대로 죄를 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죄가 전혀 어떤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과 그 죄에 대해 이야기 할 성경적 의무가 있습니까?
대답은 '예'이지만, 자격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그리고 누가복음 17장 3절에는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할 기회를 찾는 일만 만드는 자(busybodies)가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에 '일만 만드는 자들'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고와 베드로전서 4:15에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meddlers)'에 대한 경고 참조)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격한 모든 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비생산적입니다. 우리가 형제나 자매에게 죄에 대해 접근하는 것이 적절한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어떤 엄격하고 확고한 규칙이 없으며, 하나님이 각 상황에서 주시는 지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 첫째, 이 죄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입니까? 외인들이 그것을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죄가 하나님에 관한 거짓을 말해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외인들의 인식에 영향을 줍니까?
- 둘째, 다른 사람을 해치는 죄입니까?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유혹을 받게 하거나 나쁜 예를 만들고 있습니까?
- 셋째, 죄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불화와 분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까?
- 또는 마지막으로 죄가 심각하게 죄를 지은 사람을 해치고 있습니까? 그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까?
그러한 질문에 "예"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 죄에 대해 죄를 범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V. 누군가가 교회 전체에 대해 공개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적인 죄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단지 극소수의 사람들만 죄에 대해 알고 있거나 죄의 영향을 받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교인의 죄가 공개적이고 중대한 경우, 교회 회중 내에서 또는 심지어 공동체 밖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알게 된 문제일 경우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5장 1~11절에서 바울이 아버지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심각한 범죄에 대해 해당하는 사람을 추방하라고 회중에게 권고하는 상황을 봅니다.
그런 공개적인 죄로 인해 바울은 마태복음 18장의 처음 두 단계를 따르도록 교회에 권고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죄를 범한 사람을 추방하라고 권고합니다. (고린도전서 5:4~5, 11, 23, 데살로니가후서 3:6, 로마서 16:17 참조) 사실 교회가 이러한 상황에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교회는 직무 태만입니다.
바울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로 교회가 이 사람을 파문시키기를 바랐습니다.
- 첫째, 그것은 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은 그의 신앙 고백이 거룩하지 못한 삶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것을 그에게 분명하게 해줍니다.
- 둘째, 교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심각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해 대중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명성이 보존될 수 있도록 행동할 것을 교회에 권고합니다.
VI. 교회 지도자가 죄를 짓는다면?
마지막으로,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의 죄에 대해 성경이 말한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위한 지도 구절은 디모데전서 5:19~20절입니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여기서 바울의 목표는 거짓 공격과 비난으로부터 장로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장로를 상대로 어떤 권징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는 그 죄에 대한 두세 명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구절이 지혜롭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근거 없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자주 연관되므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이 장로를 비난하는 소문이 듣게 된다면? 그리고 당신이 개인적으로 죄 가운데 있는 장로를 만나게 된다면?
당신이 장로의 죄에 대한 소문을 들을 경우
어떤 사람이 장로에게 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다음과 같은 간단한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수군거림 및 중상모략의 당사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소문을 얘기한 사람에게 그 장로와 이야기하고, 당신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적극적으로 그 장로에 대한 비방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고, 대신 상황을 성경적인 방식으로 다루십시오.
당신이 죄를 짓는 장로를 목격하는 경우
장로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짓거나 아니면 장로가 죄를 짓는 것을 목격한다면 어떨까요? 그다음은 어떻게 하나요? 다음은 몇 가지 지침입니다.
먼저 그분에게 이야기하십시오. 물론, 실제 상황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겸손하게 행동하십시오. 그분이 교회에서 책망할 것이 없다고 인정받아서 장로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장로에게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십시오.
둘째, 혼자 상황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다른 개인(또 더 좋은 방법은 다른 장로)에게 당신의 우려에 대해 말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이 문제를 조용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디모데후서 5:19의 의도를 위반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의 특정 단어가 여기서 유익합니다. "장로에 대한 송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거나 당신의 말은 듣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송사를 받는다(그리스어 paradechomai)'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을 듣거나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 것이요."라고 이 구절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고 그에 대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다른 교인이나 장로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거나 또는 그들이 도움 주는 것이 금지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당신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신중하게 조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고발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그는 디모데후서 5:19에서 요구되는 '증인' 중 하나가 됩니다.
셋째, 교회 지도자가 당신과 만났을 때 회개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문제를 계속할지를 신중히 결정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해당 사안이 객관적인 문제인지 또는 의견이나 관점의 문제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후자의 경우 사안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문제, 예를 들어 횡령이나 간통 같은 경우,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딤전 5:19을 수행하는 것이 당신의 책임입니다. 죄를 목격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당신과 함께 장로와 대면하도록 요청하십시오. 필요한 경우 다른 장로들에게 이 일을 말하십시오. 디모데후서 5장 19절에 언급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권징 절차가 시작되면, 잘못을 당한 사람은 그와 함께 공동 기소자가 될 한 명 이상의 개인을 데려 와야 합니다.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문제를 신중하게 조사했다면 디모데전서 5:19의 증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로가 범한 죄는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에 죄를 지은 장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도록 명령합니다. 즉, 죄악의 성격에 관한 어떤 진술이 교회에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신뢰를 깨뜨린 지도자는 적절한 공개적 대응이 있을 때만 복귀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리더십은 더 큰 짐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로의 죄가 교회에 더 큰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VII. 결론
교회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순결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성을 지키도록 힘써야 하며,
이를 위해서 우리는 교회 권징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의 죄로 인해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어떤 권징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런 종류의 열정의 살아있는 예를 19세기 버지니아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원로이며 탁월한 교인이 알코올 중독이 되었습니다. . . . 그는 자신을 교회에 신고하고 자신의 죄를 후회하며 홍수 같은 눈물로 회개를 표시했지만, 교회가 그 의무를 이행하여 자신의 비행으로 인해 교회가 받을 비난으로부터 보호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 남자의 깊은 고통은 모든 이의 가슴 속에서 동정을 일으켰고, 교회 전체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이 모여서 그 죄를 사하고 해당 사건을 마무리하자는 제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의견에 즉시 동조했습니다. 단 하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것을 반대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바로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의 목소리였습니다. 드디어 지식과 인정받은 경건함을 갖춘 목사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매우 걱정된 눈으로 목사님을 응시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형제의 불행에 대한 자신의 유감을 표했으며,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 . 그러나 목사님은 죄를 지은 형제가 교회의 명예를 위해서 교회는 가장 단호한 방식으로 그가 지은 죄의 행동에 대해 허가하지 않음을 표현해야 하고 죄를 지은 사람을 출교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 . 교회는. 마지 못해서 목사와 죄를 지은 사람의 일치한 견해에 순종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출교되었지만, 1~ 2개월 후 복귀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아는 한 그 이후로는 구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Joseph S. Baker, "교회 권징", Polity , Mark Dever 편, 266쪽)
우리 모두는 개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이런 열정을 갖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은 다양한 주제를 소개합니다.
1-14. 어린 아이에 대한 교훈과 경고.
1-6. 천국에서 큰 자. 소자를 실족케 하는 화.
7-10. 죄의 유혹과 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와 처치.
11-14. 길 잃은 양을 찾는 비유.
15-18. 죄를 범한 형제를 취급하는 방법.
19-20. 일치의 기도.
21-35. 사람을 용서하는 일, 그 예.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사람에게 권고하라고 합니다.
만일 듣지 않을 경우에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고하되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권고(眷顧)"란 한자의 훈(訓)은 "돌볼 권(眷)" "돌아볼 고(顧)"라고 하여 "돌보아 줌" 또는 "정을 두고 돌봄"을 의미합니다.
권고하다는 헬라어는 "에렝코(ĕlĕngchō, ἐλέγχω)"라고 합니다.
'에렝코'는 "빛으로 가져오다, 증명하다, 견책하다" 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므로 거짓된 것과 부정한 것 그리고 죄악된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교회 부흥과 성장이 목표가 된 이후에 이와 같은 교훈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지역에서 어느 한 교회에서 권고를 받은 교인이 다른 교회로 옮기면 오히려 그 교회에서는 두 손을 들고 환영하기 때문에 권고하는 교회는 그 지역에서 성장할 수 없는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권고하라(1651) 에렝코(ĕlĕngchō) ἐλέγχω
어원 / 미래 ἐλέγξω, 제1부정과거명령 ἔ- λεγξον, 제1부정과거부정사 ἐλέγξ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λέγχθην,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고하다(마18:15), 드러나다(요3:20), 책 망하다(요16:8, 딛1:9, 계3:19), 책잡다(요8: 46), 꾸짖다(딤전5:20, 딛1:13), 정죄하다(약2:9), 경책하다(딤후4:2), 꾸지람을 받다(히12:5), 책망을 받다(눅3:19, 엡5:13), 가책을 느끼다(요8:9).
신약 성경 / 17회 사용
- 돌보아 줌. 정(情)을 두고 돌봄.
살후 3: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딛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약 5: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레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교회의 권위는 교인이 잘못했을 때에 그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징계하므로 다시는 같은 실수를 교회 내에서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제도가 실천될 수 있었을 때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이런 제도가 실천될 수 없게 된 것은 징계가 솜방망이처럼 그 효력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A교회에서 징계를 받은 교인이 같은 지역의 B교회로 옮겨간 후에 그 교회에서 활동하며 직분을 맡아 지역 사회에서 그 이름을 드러내게 되면 마치 A교회가 멀쩡한 사람을 죄인 취급한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기에는 징계를 받은 교인은 철저하게 회개하며 신앙생활에 이전보다 더 열심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므로 모든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에 다시 직분을 받고 충성하므로 교회의 권위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징계에는 직분을 맡기지 않거나 심지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출교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인은 출교를 명받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므로 모두에게 신임을 받아 훗날 신앙의 귀감이 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맨다는 것은 금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출교하는 것입니다.
출교란 교회에서 쫓아 이방인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푼다는 것은 징계를 받았던 자가 회개하고 돌아서면 다시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부터 용서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이 구절들은 합심기도의 능력이나 모임 숫자의 많고 적음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권세가 무엇인지와 그 권세가 어떻게 시행이 되는지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왜 이런 권세가 교회에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권징 즉 권고와 징계가 교회에 필요하며 그것이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닌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이며 이 권세에 대하여 하나님은 승낙하시며 그것을 승인하십니다. 또한 주님도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교회의 결정은 권세가 있는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이런 권세가 필요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언제 그리고 누구에게 이러한 교회의 권세가 시행되어야 하는 것을 살펴보면 이것을 주신 목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약한 자들을 미혹하여 잘못된 가르침으로 신앙을 왜곡시키거나
범죄하게 만드는 경우에 권징은 시행이 됩니다. 성도로써 온전하지 못하며 큰 죄를 범하였을 때 교회는
권징을 시행하여 왔습니다. 고린도전서 5:2절을 봅시다. 이 말씀에 바울은 너희 중에 물리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물리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쫓아내지 않았다는 말이며 출교를 의미합니다. 이유는 아비의 아내를 취하여 음행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에
대하여 교회가 비통하기는 커녕 내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11절에서 언급된 자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은 또한 출교에
해당하는 징계입니다. 교회가 이런 징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순결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의 순결성을 생각할 때 이것을 주님이 직접하시지 않고
교회에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정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순결함을 유지해야 할 노력이 있어야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짓된 복음과 속임수에서 자신을 지키며 순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무엇이 거짓이며 잘못된 것이며 교회를 세속화
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음으로 순결함을 잃어 버리고 세상에 함몰되고 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