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06-10-2022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 공동서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42. 새롭게함, 갱신, 갱생 -  아나카이노시스(ἀνακαίνωσις)

ἀνακαίνωσις, εως, ἡ 

1. 갱신,  2. 갱생,  3. 새롭게 함
발음 / 아나카이노시스(anakainō- sis)
어원 / 303과 2537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롭게 함(롬 12:2, 딛 3:5)
신약 성경 / 2회 사용


3067. 씻음 - 루트론(λουτρόν)

λουτρόν, οῦ, τό  

1. 목욕,  2. 씻음,  3. 세례
발음 / 루트론(lŏutrŏn)
어원 / 306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씻음(엡 5:26, 딛 3:5)
신약 성경 / 2회 사용

중생의 씻음 : 거듭남의 세례
성령의 새롭게 하심 :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



바른 교훈(디도서 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You must teach what is in accord with sound doctrine.

5198. 바른 - 후기아이노(ὑγιαίνω)

ὑγιαίνω 
1. 건강하다,  2. 누가 5:31,  3. 건전하다
발음 / 후기아이노(hügiainō)
어원 / 5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건강하다(눅 5:31, 15:27), 강건하다(요삼 1:2), 바르다(딤전 1:10, 딤후 4:3, 딛 2:1), 온전하게 하다(딛 1:13, 2:2)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5199 ὑγιής, ές 
1. 건강한,  2. 마태 15:31,  3. 건전한
발음 / 후기에스(hügiēs)
어원 / 대격 ὑγιῆ, 837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한(마 12:13), 온전한(마 15:31), 건강한 (막 5:34), 나은(요 5:6, 9,14), 고친(요 5:15), 바른(딛 2:8)
신약 성경 / 12회 사용

1319 교훈 - 디다스카리아(διδασκαλία)

1. 가르침,  2. 가르쳐진 교훈, 
발음 / 디다스카리아(didaskalia)
어원 / 132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교훈(마 15:9, 롬 15:4, 엡 4:14), 가르침(골 2:22, 딤전 4:1, 5:17), 가르치는 일(롬 12:7), 가르치는 것(딤전 4:13)
신약 성경 / 21회 사용

* 1320 디다스카로스(
διδάσκαλος)

1. 교사,  2. 마태 10:24,  3. 마태 8:19
발음 / 디다스카로스(didaskalŏs)
어원 / 13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선생님(마 8:19, 12:38, 요 11:28), 선생(마 9:11, 막 5:35, 약 3:1), 교사(행 13:1, 고전 12:28, 엡 4:11), 스승(딤전 2:7, 딤후 4:3)신약 성경 / 97회 사용

* 1321 디다스코(διδάσκω)

1. 마태 4:23,  2. ~을 가르치다,  3. 마태 15:9
발음 / 디다스코(didaskō)
관련 성경 / 가르치다(마 4:23, 막 1:21, 눅 4:15), 배우다(갈 1:12), 교훈을 받다(골 2:7).
[명] 가르침 (엡 4:21, 골 1:28)
신약 성경 / 97회 사용


바른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은 가르침을 말합니다.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따라 바른 교훈과 다른 교훈으로 구분됩니다.
잘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건강하게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이 들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다 이해 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거부 반응이 없이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입니다.

둘째, 경건에 부합하는 가르침에게 건강한 관계를 맺느냐 아니냐

경건에 부합하는 가르침이란 예수님을 닮은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윤리적 삶입니다.
바른 교훈이란 바른 교리와 바른 삶을 포함합니다.
바른 교리를 주장하면서 바른 윤리, 바른 삶은 무시한다면 바른 교훈이 아닙니다.
바른 삶은 있지만 바른 교리가 없으면 그것도 바른 교훈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는 것도 병든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 중에 하나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다른 교훈, 병든 교훈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병 고침, 죽은 자 살림, 예수님이 행하신 각종 이적들, 이 모든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것을 표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병고침, 이적들, 부유케하심 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지나치게 나아간 병든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영과 육을 구별하는 가르침도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이 세상의 삶만을 강조하는 것,반대로 내세의 삶만을 강조하는 것도 다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사회성을 부인하고, 교회당만을 강조하는 것도 지나친 교훈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구원자와 계시록에 나오는 구원자를 균형 있게 다루어야 바른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영의 세계의 왕이십니다.
종교적 색채만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윤리적인 면을 경시하는 것도 지나친 병든 교훈입니다.
지나치게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복음을 경시하면 그것도 지나친 교훈입니다.
바른 교훈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이해 할 수는 없어도 예수님의 말씀과 경건에 부합한 교훈을 건강하게 받고 소화시킵니다.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인데 내용과 저자에 따라 크게 보면 4가지로 분류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직접적으로 다룬 책은 '복음서(4권)'
초대교회 역사를 다룬 사도행전은 '역사서(1권)'
사도들이 쓴 편지글로 된 성경은 '서신서(21권)'
종말의 계시를 다룬 요한계시록을 '예언서(1권)' 라고 합니다.

'서신서'는 바울이 쓴 '바울서신(13권)'과 다른 사도나 제자들이 쓴 '공동서신(8권)'으로 구분합니다.
놀랍게도 바울이 쓴 13개의 편지글이 성경이 되었습니다.
바울서신은 다시 바울이 로마에 가택 연금 된 상황에서 쓴 '옥중서신(4권)', 목회를 위해 쓴 '목회서신(3권)', 그리고 각 지역 교회들에 편지한 '일반 서신(6권)'으로 분류합니다.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구분되는 책입니다.
목회서신은 바울이 에베소와 그레데에서 목회하고 있는 그의 제자 디모데와 디도에게 목회를 함에 있어 주의하고 살피며 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디모데전서는 초대교회를 어렵게 했던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계하고 교회 행정과 관련해 공적 예배에서의 태도나 직분자들에 대한 자격을 설명하고 교회 내에 여러 계층들이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등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지침은 문화적, 상황적 재해석이 필요하지만 전체적으로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내용들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보낸 첫 번째 목적이 교회 내에서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금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1:3~4).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훼방하고 끝없는 변론을 만들어 내어(1:4)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1:11).

오늘 본문 내용은 단순합니다. 바울은 '다른 교훈'에 대해 경계하면서(1:3~10), '바른 교훈'을 지킬 것을 요청합니다(1:10~11). 그리고 이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주께서 '직분'을 주셨음을 분명히 합니다(1:12). 주께서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부르사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지키는 직분을 주심이 바로 참복음임을 설명하고 우리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이 참복음 안에 거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설명합니다(1:13~17).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경계한 '다른 교훈'은 무엇일까요? 먼저 바울이 경계한 다른 교훈이 외부적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공격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평가, 세상의 핍박이 교회를 어렵게 하고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억울한 평가나 핍박이 있으면 우리 안에 어린 신앙인, 교회의 거룩성, 하나님의 영광을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워 거부하고 대적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활동했던 시대는 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로 핍박을 받아 가정과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으로 던져졌던 때입니다. 그리스·로마 지역은 온갖 신화와 신들로 가득했고 헬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주의가 가장 발달했던 시기입니다. 외부적 핍박, 다른 종교와 철학의 확장 등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 상황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다른 교훈'은 이런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히려 세속적 가치, 세상적 철학, 이데올로기를 교회 내에 가지고 들어와 마치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양, 하나님의 뜻인 양 포장하고 합리화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당시에 경계하는 것은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입니다.

영지주의

'영지(gnosis)'는 지식, 깨달음 등의 의미로 지중해 연안의 토속 종교들의 신학적 이론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상입니다.
영적 지식, 영적 깨달음 이런 것을 강조하며 육체는 악하고 천하다는 이원론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으며(딤후 2:18) 결혼도 금지시켰습니다(딤전 4:3).
이들의 이원론적 사상은 결국 교회 내에 혼합 주의를 양산한 것입니다.

영적이라는 사상에서 각종 천상적 존재들을 유추하고 '신화'를 만들고 신들의 '족보'를 만들어 그것에 몰두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며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성경의 의미를 밝힌다며 끊임없이 논쟁하고 토론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경륜(섭리, 역사)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섭리, 역사)은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유대인들로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배우고 예루살렘 성전과 지역 회당을 중심으로 코란과 선지서들을 공부했던 이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도 어떤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구약 율법을 다시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조문을 강조하면서 정작 그 율법이 가지고 있는 원래적 의미인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1:7)."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다른 교훈도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 '성령 운동'은 마치 영지주의처럼 영적인 것만이 모든 것인 양 사람들을 미혹하고 속입니다.
육적인 질병,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을 이용해 사람들을 특종 종교 집단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또 다른 것은 '율법주의'의 부활입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새벽 기도회, QT 등 다양한 종교적 행위를 절대화하고 신앙 성숙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된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도록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율법이 궁극적으로 믿는 자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1:11).

심각한 문제는 영지주의(성령 운동), 율법주의 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돈을 구하는 것입니다(딛 1:11, 딤전 6:5).
하나님의 이름, 은혜를 빙자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직분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 주신 것

'바른 교훈'이라는 용어는 바울의 다른 서신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오직 '목회서신'에만 5번 등장합니다(딛 1:9, 13, 딤전 1:10, 6:3, 딤후 1:13, 4:3)
그것은 바른 교훈을 지키는 것이 목회의 핵심이고 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지키게 하기 위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12)"고 고백합니다.

직분은 바른 교훈을 지키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직분은 군림하고 명령하고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의 효율을 위해 직분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을 삼으시고 그의 일을 맡기심은 바른 교훈을 지키고 이를 전하라는 데 목적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직분을 맡겨 주시고 이 거룩한 사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의로운 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1:13).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또 교회와 관련해 기독교와 관련해 어떤 직분을 맡은 자들은 바로 이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라는 것입니다.
무슨 선한 것이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할 때 이는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딤전 1:15b).
현재진행형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주께서 우리를 긍휼이 여기셔서 믿음과 사랑으로 풍성하게 주신 것처럼 지금도 그의 긍휼하심이 필요하며 날마다 그의 긍휼하심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먼저 믿은 자로서 본을 삼기 위함이다

이 긍휼은 내가 어떠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1:16).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1:16). 우리에게 중요한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먼저 믿은 자로서,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이제 다른 사람의 본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명을 통해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1:17).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1:5).
우리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날마다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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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소망(디도서 1:2)

하루살이와 메뚜기

하루살이가 메뚜기하고 아침부터 놀다가 저녘이 되었습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 에게  "하루살이야! 벌써 저녘이 되었으니 그만 놀고 내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메뚜기에게 물었습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기때문에 "내일"을 모릅니다.
하루살이가 죽고나니 메뚜기가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만난 것이 "개구리" 였습니다.
개구리와 놀다가 가을이 왔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메뚜기야! 겨울이 지나고 내년에 만나서 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내년이 뭐야!" 라고 물었습니다.
메뚜기는 "내년"을 모릅니다.
1년만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똑 같습니다.
아는 것만 알다가 갑자기 떠납니다.
사후, 아무 준비도 없이 칠십, 팔십 지나도 일만 하다가 그대로 딱 아는 그 만큼만 알고, 좋아하는 여행구경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이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따르기 보다는 뜨는 해를 바라보며 남은 인생, 즐겁게 살아야겠습니다.
지는 노을이 좋을지 모르지만, 그 노을은 허무할뿐 뜨는 해는 내일을, 내년을 위하여 준비를 다하고 사는 나의 삶과 가족의 삶을 준비한 자에겐 항상 활력이 넘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1680. 소망 - 엘피스(ἐλπίς)

ἐλπίς, ίδος, ἡ 
1. 기대,   2. 신뢰,   3. 행 16:19
발음 / 엘피스(ĕlpis)
어원 / ἔλπω
관련 성경 / 희망(행 2:26), 소망(행 16:19, 롬 5:5, 고전 9:10), 여망(행 27:20), 바람(행 26:6, 롬 5:2, 8:24)
신약 성경 / 53회 사용


생명(生命)


1.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 : 비오스(βίος)

979. βίος, ου, ὁ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발음 / 비오스(biŏs)
관련 성경 / 생활비(막 12:44, 눅 21:4), 이생(눅 8:14, 요일 2:16), 생활(눅 8:43, 딤전 2:2, 벧전 4:3), 살림(눅 15:12, 30), 재물(요일 3:17)
신약 성경 / 10회 사용

2.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 : 조에(ζωή)

2222. ζωή, ῆς, ἡ  

1. 생명,   2. 죽음(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조에(zōē)
어원 / 21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신약 성경 / 135회 사용


166. 영원한 -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

αἰώνιος, ον
1. 영원한,   2. 시작이 없는,   3. 시작이나 끝이 없는 
발음 / 아이오니오스(aiōniŏs)
어원/ 1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한(마 18:8, 계 14:6), 영생의(눅 18:30, 요 17:2)
신약 성경 / 71회 사용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는데 6·25를 전후하여 장로 7명 중 4명이 순교를 당했다.  
그 중의 강석기 장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나무에 묶어 놓고 눈알을 다 뽑았다.
두 눈이 다 빠져 피가 흐르는데 강 장로님은 "내가 두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더니 두 눈이 빠지니 하늘나라를 볼 수 있구나"하며 외쳤다.

죽은 후 천국과 지옥을 보고 살아난 박상옥

그는 충북 괴산군 어느 농촌에서 태어났다.
본래 기독교 가정이 아니었고 누이가 예수 믿고 목사님에게 결혼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매형과 누이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 그는 집사가 되었다.
1965년 11월 22일 사업상 볼 일 때문에 경북지방으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조령새재를 넘는 순간 와장창하는 요란한 광음과 함께 버스는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는 얼굴과 머리가 깨어졌다.
피는 눈, 코, 입으로 흘러내려 일어설 힘이 없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는 쓰러져 있는 그대로 찬송가 562장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이렇게 4절까지 부른 후에 영영 의식을 잃고 말았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그는 죽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평탄한 길 위에 서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앞에 가던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충북 괴산 화양동에 사는 최인만(37세)이라는 분이었다.
그들은 둘이서 목적지도 없이 길벗 되어서 함께 걸었다.
얼마나 갔을까 그들 앞에 커다란 안내판이 나타났다.
알아보기 힘든 각 나라말로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나라 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우측으로, 믿지 않는 자는 좌측으로>라고 쓰여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가고 최인만씨는 왼쪽으로 서로 헤어져 가게되었다.
그가 가는 우측 길은 계단이 있는데 서너 계단 올라서서 뒤로 돌아 최인만씨를 바라보니 그는 까맣게 변하여 있었다.
그래서 자기 옷을 보았더니 어느새 흰옷으로 바꾸어졌다.
계단을 올라서 보니 앞에는 잔잔한 큰 강이 있고 강가에는 흰 옷 입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낚시질하는 노인에게 가까이 가서 배가 언제쯤 오는가를 여쭈어 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아직 때가 안되었는데……" 하시면서 그의 인사를 받으시는 것이었다.
이때 머리와 수염이 희고 긴 노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뿔관을 쓰고 도포를 걸치고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을 보라> 위엄 있는 음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직사각형의 12문이 있고 문 앞에는 흰옷을 입은 문지기가 있었다.
  문에는 사람들이 두 줄로 들어가고
  문에서는 세상에서 행한 사실을 말하고
  문에서 이간질, 거짓말하는 등, 입으로 죄를 지은 자는 혀를 뽑고, 눈에는 눈을, 손에는 손을 등 각가지 병신이 되고 있었다.
그는 좌측으로 90도 고개를 돌려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두 줄로 서서 가는데 머리에는 뿔이 나고 눈이 셋이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괴물이 곡괭이를 들고 서서 이들을 찍어 던지는 것이었다. 용광로와는 비교가 안 되는 불꽃이 타오르고 붉은 물이 이글거리는 영원한 불못 지옥이었다(계 19 : 20).
  다시 오른쪽을 바라보니 문은 보이지 않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많아 흰 구름같이 보였다. 그 왼쪽으로 붉은 말들이 있고 말을 탄 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밑에 감옥이 있었는데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음부였다(벧전 3 : 19).
  다시 우측을 보니 백말이 있고 백로의 머리와 어린 아이의 머리를 맞춘 것 같은 것이 평화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낙원이었다. 정신 없이 낙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소라야"하는 음성이 들려오기에 대답을 하였더니 "나를 믿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주여 믿습니다"고 대답을 하니 구원의 증표를 준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후 잠시 후의 일이었다.
  가느다란 사람의 음성이 들려와 눈을 떠보니 자기가 살던 집이었다. 그가 일어났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나타났다고 놀라 야단들이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산중에 무덤을 파놓고 그 시체를 하관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3일 3시간 동안 죽은 가운데 있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교통사고로 즉사해야 할 그가 관 속에서 살아나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능치 못하신 일이 없는 하나님께서 이 일쯤이야 못하시랴.
  정신을 가다듬어 남은 여생 덤으로 사는 그는 주님을 위해 몸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인사를 나누었는데 괴산의 최인만씨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최인만씨는 그와 한 날 죽어 장사 지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교우와 불신자들에게 그가 보고들은 천국과 지옥을 떨리는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자료출처 / 복음신보에서

영원한 집으로 가야지

  존 애덤즈 목사에게 한 사람이 문안했다. "목사님 요즈음 기력이 어떻습니까?". "예, 존 애덤즈는 든든한데 그가 사는 주택이 형편 없어요. (머리를 가리키며) 지붕이 이렇게 낡은 데다가, (가슴을 가리키며) 벽도 흙이 다 떨어지고 기둥만이 앙상하게 드러났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지팡이를 보이면서)바람이 불면 집이 넘어 질까봐 이렇게 받침대까지 있답니다.
  어디 살겠오. 이제 튼튼하고 영원한 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해야지요"하고 존 애덤즈 목사님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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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개역 성경을 인터넷 다국어 성경으로 "말세"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7구절이 소개됩니다.
구약에서는 1구절신명기 31:29
신약에서는 7구절 사도행전 2:17, 고린도전서 10:11, 디모데후서 3:1, 야고보서 5:3, 베드로전서 1:5,  20, 베드로후서 3:3

신명기 31:29b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베드로후서 3: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야고보서 5:3b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마태복음 16:1-4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

이단 못 떠나는 심리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가…

이단·사이비에 빠진 신도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쉽지 않다.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교리의 모순을 정면으로 반박해도 꿈적도 하지 않는다.
가출과 폭력, 심하면 가정 파탄까지 치닫게 만드는 이단·사이비는 왜 빠져나오기 힘든 걸까?
월간 현대종교(6월호)가 분석한 ‘이단을 떠나지 못하는 5대 심리’를 들여다봤다.

첫째,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연애를 하는 남녀가 부모의 반대 등 어려움이 있으면 유대관계가 더 끈끈해지는 것과 같은 심리다.
주변의 만류가 심해질수록 “예수님도 이단 취급을 받으셨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단체에 대한 마음이 두터워진다.

둘째, 선민사상

남들이 알지 못하는 교리를 알고 있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에게 배척당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 택함받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라 여기며 오히려 자부심을 갖는다.

셋째, 군중심리

수많은 신도가 불평 없이 교주를 따르는 모습에 휘둘리는 심리를 말한다.

넷째, 밀 그램 효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이름을 딴 ‘밀그램 효과’도 있다.
권위자의 지시에 따라야 할 것만 같은 심리다.

다섯째, 탈퇴하면 지옥에 간다

교주들이 “탈퇴하면 지옥에 간다”는 식의 협박을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신도들에게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무의식 중에 목표에 맞게 행동하게끔 하는 ‘자기실현적 예언’도 이단이 자주 사용하는 신도 관리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단에 빠진 이들을 구출해내는 첫걸음은 뭘까?

“이단에 빠진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족이나 친구 등 관계의 결핍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이단 단체를 통해 관계의 욕구를 채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단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해법도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며 “가장 가깝게는 가족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 나아가 이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려는 교회의 노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50259&code=23111111&sid1=chr

말세(末世) the Last Days 에스카토스 헤메라


2078. ἔσχατος, η, ον

1. 마지막,  2. 장소에 대하여,  3. 지위나 서열에 있어서 마지막
발음 / 에스카토스(ĕschatŏ)
어원 / 최상급, 2192에서 유래한 듯
2192. 에코(ἔχω) 가지다, 손에 가지다, 입다
관련 성경 / 가장 멀리(까지)의, 마지막의, 최후의, 가장 낮은, 가장 어려운 곤경[입장, 처지] 의.
신약 성경 / 52회 사용

2250. ἡμέρα, ας, ἡ

1. 날,  2. 마태 4:2
3. ἡμέρα γίνε- ται: 날이 밝아온다
발음 / 헤메라(hēmĕra)
관련 성경 / 때(마 2:1, 막 1:9, 눅 23:7), 날(마 7:22, 막 2: 20, 눅 4:2), 하루(눅 2:44, 8:22), 시대(눅 4:25), 낮(요 11:9, 살전 5:5),
                  나이(눅 1:7), 세(눅 2:37), 오래(행 15:7), 날짜(행 28:23), 주(살후 3:8), 무렵(막 8:1)
신약 성경 / 389회 사용


말일(末日) the Last Days 베아하리트 하야밈 /  אַחֲרִית  יוֹם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319. 말일 - 아하리트(אַחֲרִית )

1. 마지막 부분,  2. 종말,   3. 장래

발음 / 아하리트(’achărîyth)
어원 / 3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후일(창 49:1, 민 24:14), 종말(민 23:10, 신 32:20, 사 46:10), 끝날(신 4:30, 겔 38:16), 마침내(신 8:16, 잠 23:32),
나중(욥 8:7, 잠 29:21), 자손(시 109:13), 마지막(잠 5:11, 단 8:23), 필경(잠 14:12, 19:20), 장래(잠 23:18, 24:20, 렘  29:11),
말일(사 2:2, 렘 23:20), 남은 자(겔  23:25, 암 4:2, 9:1), 자손(단 11:4).
[동] 마치다(단 8:19)
구약 성경 / 61회 사용

3117. 말일 - 욤(יוֹם)

1. 낮,  2. 낮에,  3. 날마다

발음 / 욤(yôwm)
어원 /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낮(창 1:5, 시 136:8), 날(창 1:8, 출 6:28, 시 89:45), 일자(창 1:14), 때(창 3:5, 출 19:1), 세월(창 4:3), 오늘(창 4:14, 출 5:14, 민22:30), 당시(창 6:4, 신 17:9, 삼상 17:12), 항상(창 6:5, 신 5:29,삼하 19:13), 나이(창 18:11, 수 23:2), 오늘날(창 19:37, 신 1:10), 며칠(창24:55), 어느 날(창 27:2), 기한(창 25:24, 레 12:6), 해(창 29:7), 지금(창 35:20, 삼상 9:9), 여러 날(창 40:4), 생명(출 20:12, 신 5:15, 시34:12), 매일(출 29:36, 민 28:3), 일(창 7:4, 출 34:28), 날수(신 1:46, 시 90:15), 평생(신 12:1, 삼상 1:11), 종일(신 28: 32,시 74:22), 장수(신 30:20), 시기(수 3:15), 얼마(삿 11:4), 매년(삿 21:19, 삼상 1:3), 곧(삼상 9:13), 평일(삼상 18:10, 왕상 5:1), 요즈음(삼상 25:10), 일생(삼상 25:28), 볕(삼하 4:5), 수한(삼하 7:12), 시대(삼하 21:1, 왕상 21:29), 전(삼하 21:12), 한번(왕상 1:6), 세대(왕상11:12), 일평생(왕상11:25, 욥15:20), 여러 날(왕상17:15), 하루(왕상19:4), 햇수(왕하10:36), 생전(대상22:9), 기간(대상29:27), 초하루(스10:16), 생일(욥1:4), 연한(시 39:4), 옛날(시 44:1), 연수(시 109:8), 광명(잠 4:18), 보름(잠 7:20), 여생(사 38:10), 태초(사 43:13), 옛적(겔 38:17, 암 9:11), 시일(호2:13), 아침(암5:8). [부] 종신토록(창3:14), 날마다(39:10, 왕상8:59), 영원히(왕상11:39), 영영히(창44:32, 신18:5, 삼상28:2), 오래(민20:15), 처음(신10:10), 종일토록(수10:13, 삿9:45), 해마다(삿11:40), 먼저(삼상2:16), 때마다(삼상2:19), 영원토록(삼상2:32), 영구히(삼상2:35), 이제(삼상 9:27, 삼하 18:18), 오래(삼하 14:2), 때때로(대하 24:11), 당장(잠 12:16), 부지런히(렘 7:25).
[동] 장수하다(신 22:7), 장수하게 하다(시 61:6)
구약 성경 / 2291회 사용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디모데후서 2:3)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강건해야 합니다(1절).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강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디모데는 성품이 온화하고 진실되고 충성된 자였습니다.
또한 눈물이 많은 자로서 목사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반면 내면이 연약하고 속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는 현재 에베소 교회의 책임 목사로 있었지만 연소하고(딤전 4:12), 몸이 허약하며(딤전 5:23), 성격은 소심하여 많은 고전을 겪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에베소의 타락한 문화와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유대 율법주의, 영지주의와 같은 각종 이단 사상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그가 의지하고 존경하던 사도 바울은 네로의 박해로 인해 재 투옥되어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 언제 순교 당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또한 이로 인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복음을 저버리고 바울을 떠나갔습니다(딤후1:15). 이 소식은 디모데를 더욱 연약하게 하고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강하라”(be strong)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일꾼은 강건해야 합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강해야 살아  남듯이 영적으로도 강해야 합니다. 강해야 복음의 외적 내적 원수와 싸울 수 있고 제자 훈련을 시킬 수 있습니다. 강해야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고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강해야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강해야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이 강하면 병균이 몸에 침입해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몸이 약하여 저항력을 상실하게 되면 병에 걸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영적으로 건강한 인생을 살려면 내면이 강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습니까? 열심히 운동을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하여야 합니까? 물론 운동을 하고 먹는 것을 조절할 때 육신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이 강하다 할지라고 영적으로 약하면 사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이기고 내면이 강해지려면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죄 사함의 은혜요 부르심의 은혜 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은 엡 6:10-11에서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강건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엡 6:12-18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절)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절)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절)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충성스러워야 합니다(2절)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디모데는 딤후 1:13,14절에서 복음 진리를 지키라는 사명을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 진리를 수호할 뿐 아니라 전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4단계로 설명하였습니다.  
맨 먼저 복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바울에게 맡겨졌습니다(딤전1:12).
다음으로 바울에게 맡겨졌던 복음은 디모데에게 맡겨졌습니다.
바울에게서 디모데에게 전달된 복음은 사적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증인 앞에서 공적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이제 디모데는 이 복음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 충성된 사람들은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 복음을 맡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서 계승되고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것을 복음의 사도적 계승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에게는 사도적 사명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올림픽 성화의 횃불이 성화 주자의 손과 손을 통해 전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복음의 횃불을 들고 달리는 성화 주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복음의 횃불을 꺼뜨리지 아니하고 온전하게 보존하였다가 충성된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세대에 전달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이 전달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충성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충성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충성이란 말은 “변함이 없는 신실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신뢰한 만한, 믿을만한 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충성에는 책임성과 신뢰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충성된 자는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습니다.
충성된 자는 좋으나 싫으나 꾸준히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합니다.
충성된 자는 책임성이 강하고 성실합니다.
일을 맡으면 상황을 핑계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책임성 있게 해냅니다.
이런 자는 신뢰할 만합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귀히 쓰십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배교치 않은 충성된 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계승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일꾼이 되려면 주님께서 나를 충성할 자로 여겨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딤전 1:12-13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의 모습으로 충성할 때에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게 됩니다.(창 39:1-6)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고난을 견디어야 합니다(3절)

본문 3절에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고난을 견디이어야 합니다. 고난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딤후 4:5에서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사가 된다는 것은 그 군사가 세속적이든 영적이든 고난을 견디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 자연인이 늠름한 군인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피나는 훈련이 요구됩니다. 혹 이 훈련기간 동안 심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인간이하의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두려워 훈련을 거부한다면 그는 결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국토방위와 국민의 생명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세속적 군사도 국가로부터 모집되어 훈련소에 들어가면 그 고난이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난 후에도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 가는 과정상에 숱한 고초와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한 육체적 훈련과 정신적 고통, 잠이 모자라고 배가 고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때로는 멀리 도망하고 싶고, 탈출하고 싶고, 죽은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끝까지 견뎌야 훌륭한 군인이 되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현역 근무의 군사들은 안전하거나 편안한 시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 곤경, 위험과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편안한 때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난과 핍박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가정으로 불화(不和)가 일어날 수있고, 재산(財産)상으로 피해가 닥칠 수도 있으며, 혹은 인격적인 수모나 심하게는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마19:29, 행14:1-7) 그러기에 신자로서 충성된 주의 일꾼 되기를 열망(熱望)하는 분이 계시다면우선 그는 자신의 소유와 소망과 자유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위해 모두 희생(犧牲)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마26: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과 영적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고난을 두려워 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고난을 견디고 참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① 타협주의 ② 회피주의 ③ 대세주의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 공로는 아니지만 ① 인간은 고난을 받아야 겸손해 집니다. 사람은 우선 겸손해야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말하기를 "천국은 높지만 내려가면서 배운다"라고 했습니다.  ② 고난을 받아야 그의 신앙 인격이 연단을 받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2에서 모든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고, 약 1:3에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단 없는 자는 믿을 수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갖게 합니다(롬 5:3,4) 인내하는 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특히 우리는 선을 행할 때도 인내해야 합니다(갈 6:9) "우리가 선(善)을 행하되 낙심하지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이르매 거두리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땅히 인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도(히 6:15), 이삭도(창 2618,20-22), 모세(출 16:7,8),다윗(시40:1), 욥도(약5:11), 바울도(고후 6:4-6) 인내하면 좋은 군사의 모습을 지켰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把握)하고, 그 말씀을 열심히 읽고 이해하여 어떻게 하면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연구(硏究)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난과 역경도 참도 견디어 내야 합니다. 
욥은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하루아침에 잃었어도 신앙의 연단 과정에서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런 연단 과정은 우리를 영적 사람으로 성장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엡 6:12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을 성숙한 군사, 훌륭한 군사, 좋은 군사로 훈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배후에 숨겨져 있는 줄로 믿고 결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고난을 극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고난을 견디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세상이 너무 편리한 세상이라 컴퓨터에 한번 접속으로 앉아서 모든 정보를 수고하지 않고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편리하다 보니 안일해지고 연약합니다.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적용이 안되고 절제력, 투쟁심, 끈기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훈련을 통해 보완이 될 때 비로소 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훈련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4a)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군사 훈련의 인간의 이기심을 없애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갯벌훈련을 통해 수치심, 자존심, 이기심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새로 태어나게 하는 훈련과정이라고 합니다.
군사가 국가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시민으로서 일생생활을 합니다.
시민에게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와 권리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인격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군인은 국가의 안위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최우선시해야 해야 합니다.
군인은 입대와 함께 이와 같은 군인의 존재의미와 목적에 바쳐진 자라고 할 수 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꿈과 이상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일단 민간인이 군(軍)에 복무하게 되면 민간인으로서의 생활을 모두 포기(泡起)하고 오직 군(軍) 생활에만 전념(專念)해야 합니다.
군인은 고난을 받아야 될 뿐만 아니라 기꺼이 군인(軍人) 생활에 전력투구해야 됩니다.
훈련 잘 받고 의무에 충실한 군인은 절대로 군의 규율을 어기면서 함부로 외출, 휴가 등을 하지 않습니다.
탈영하지 않습니다.
또한 군인이 되면 가정을 떠나서 국가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현역 복무 중일 때 군인은 개인 사업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집안의 문제를 걱정한다거나 개인의 사생활에 연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국가는 군인의 먹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비용을 책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의 일꾼이 되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성도의 길에 들어선 자는 무엇보다 경건(敬虔) 생활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면 마땅히 영적 전투에서 강력한 싸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잘 받은 성도라면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가면서 자기 뜻대로 편한 대로하고, 자기 기분대로 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예수 믿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기 이치(理致)대로 사사로이 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자기의 일을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많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에녹이 자기의 일에 얽매였다면 하나님과 300년동안 동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군사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자기의 일에 얽매여서는 결코 안됩니다. 

좋은 군사로 부르심을 받는 성도라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고난 핍박 시험 환난(患難)이 걷잡을 수 없도록 몰아쳐도 참고 견디며 자기 뜻 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신본주의 곧 믿음 본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히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 싸움에서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로서 온전히 성령께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성령께 사로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일반 성도들에게 적용됩니다. 일반 성도라고 해서 생활에 얽매여 주님의 일을 게을리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직장 생활을 하든지, 농사를 하든지, 장사와 사업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가정생활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이든지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좋은 군사가 되려면 결코 우리의 생활에 얽매여서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에 얽매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불가능한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개인 생활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현세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피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가정, 직장 및 사회 등에서의 통상적인 의무 들고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 의무들을 실행하고 양심적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딤전 4:4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딤전 6:1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게 금지된 것은 모든 세속적인 활동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일생에 주어지는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을 사는데 완전히 무해(無害)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영적 싸움에서 사탄에게 강력하게 대적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의 삶을 살게 하는데 얽매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본문 4절 상반절에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권면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무엇을 우선 순위에 정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삶의 우선 순위가 주님을 위한 것에 집중되지 않는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얽매이게 하고 미혹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피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의 얽매이지 않고 만족할 만한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4b)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군사는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군인은 자신을 군사로 세운 지휘관에게 순종과 충성을 다함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군사를 모집한 자는 군사에게 모든 생활비를 지원(志願)해야 하고, 또한 군사는 그 모집한 자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고대의 좋은 군사들은 국왕이나 지휘관에게 충성을 다하여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군인의 생명(生命)은 바로 지휘 체계에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함으로서 그 주어진 임무를 충성스럽게 완수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군인(軍人)들에게 국가에 충성할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에 충동할 때는 서슴없이 국가의 이익에 복종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더라도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삼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그분께서 분부하신 명령이 비록 힘들지라도 기쁨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10).
충성은 군사된 자의 최고의 덕목(德目)이요, 최상의 영예(榮譽)인 것입니다. 

우리를 좋은 군사로 모집한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를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우리를 좋은 군사로 불러 주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순교자적 자세로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갈 1:10).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후사를 기다렸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좋은 군사로서 모집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으되 정말 우리 자신을 모집하신 하나님께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하는 자들이 얼마나 됩니까?
다른 사람을 언급하기 전에 지금 우리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저와 여러분은 우리를 만세 전에 선택하여 주시고, 시궁창 같은 죄악의 자리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에게 귀한 직분과 사명을 주신 주님께 얼마만큼 기쁨을 드리고 있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사명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문답에 보면 "사람의 제일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기본적인 일들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명령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절대적인 명령이요, 우리의 최대의 과제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10:31) 


좋은 논문을 쓰려면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좋은 질문을 던져야 본질을 생각하게 되고 초점이 맞추어진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비단 학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Washington Cathedral에서 시무하는 Wedel 목사가 쓴 인명구조소(Lifesaving Station)라는 글입니다.
배가 자주 파선이 되는 어느 위험한 해안에 작고 보잘것없는 인명구조소가 있었습니다.
건물은 그저 움막 같았고 배는 한 척밖에 없었으며 몇 사람의 헌신된 사람들이 쉬지 않고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파선이 되어 표류하는 자들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구조소를 통하여 구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구조 받은 사람들 중의 일부와 인근 지역에 살며 그곳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구조소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 보려고 자기들의 시간과 돈을 들였습니다.
새로운 구조선들이 구입되고 새로운 구조원들이 훈련되었습니다.
그 작던 인명구조소는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었습니다.

인명구조소에 새로운 멤버가 된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작고 초라한 것과 그들이 가진 장비가 너무 빈약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바다에서 건져진 사람들을 위하여 좀 더 안락한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간이침대 대신에 보다 좋은 침대와 가구를 들여놓았습니다.
이제 인명구조소는 멤버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더욱 아름답고도 고급스럽게 장식하였습니다.
그러나 멤버들은 점점 바다에 나가 구조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지게 되었고 대신 사람들을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조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인명구조소의 설립 취지가 새겨진 현판과 모형 구조선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건물 안에 있었으나 그 방에서는 각종 클럽 활동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이때에 어떤 커다란 배가 해안에 난파하여 고용된 구조원들은 추위에 떨고 옷은 물에 젖고 익사 직전에 있던 사람들을 잔뜩 구조선으로 실어 왔습니다. 그들은 더러웠고 병이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인명구조소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흑인도 있었고 아시아인도 있었습니다. 아름답던 클럽이 갑자기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지게 되자 관리자는 재빨리 클럽 바깥에 샤워하는 곳을 두고 거기에서 구조된 사람들이 클럽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씻도록 하였습니다. 


다음 번 회의에서 멤버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대부분의 멤버들은 해난 구조가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요 클럽의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데 장애가 된다 하여 이제 구조 활동을 중지하기 원하였습니다. 어떤 멤버들은 클럽의 주된 목적이 인명을 구조하는 것이라 주장하였고 아직도 이 장소가 인명구조소라고 불리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 회의에서 소수의 주장이 묵살되었고 만일 난파된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명구조소를 시작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따로 나갔습니다. 몇 년이 흘러 새로운 구조소도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도 클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인명구조소가 생겨났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그 해안을 방문한다면 그곳에 호화로운 클럽들이 해변을 따라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바다에서 배들은 여전히 난파를 당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인명구조소가 원래 생긴 목적은 파선되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많아지고 구조소가 커지고 활동이 많아지게 되니 본래의 사명감, 인명구조소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간을 보내며 즐기는 사교 클럽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것이 귀찮아지게 되고 물에서 건져진 사람들의 지저분한 모습이 자기들의 깨끗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개척 교회 시절에는 모이기를 힘쓰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도 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에 생기다 보니 자연히 자기들과 취미가 같거나 배경이 비슷하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듭니다.
건축 헌금도 생겨서 크고 좋은 건물을 짓습니다.
새로 지어진 건물 안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각종 행사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자칫하면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교인 상호간의 친목의 비중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예배는 간단하게 빨리 보고 남은 시간을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각종 여가를 즐기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언제나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데 대부분의 교인들의 경우 주일 한 번 교회에 나오면서 예배 시간이 좀 길어진다고 안절부절 한다면 본질에 충실한 교인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자신들이 물에 뛰어들지 않고 대신 고용된 구조원들에게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지게 하듯이 교우들이 잘 훈련받고 사역에 참여하려고 하기보다는 사역자를 교회에서 고용해서 월급이나 주는 사람들로 생각하고 사역은 사역자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관객이 되어 어떻게 하는가 관망하다가 잘하면 손뼉 치고 그렇지 못하면 비난하려 한다면 본질에서 크게 어긋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오늘의 디지털 바벨론 시대까지 세상은 많이 변했다.
그러나 사람은 죄인 그대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인된 인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참지 못함’이다. 

첫째, 정욕을 참지 못한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를 보고 참지 못했다.
보암직도, 먹음 직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에덴동산의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다.
아담에게도 주었다.
죄가 코로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염된다.
모든 인류에게 오늘도 흐르는 죄성이다.

다윗도 한밤중에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정욕을 참지 못하였다.
간음하였다.
죄를 덮으려고 우리야를 죽였다.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Z 세대의 참을성은 8초다.
신상품을 보면 8초 안에 우선 저지르고 본다.
저들은 이런 일을 ‘지른다’라고 한다.
죄는 지르는 것, 선을 넘는 것, trespass다. 

둘째, 분노를 참지 못한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 푸틴의 전쟁 선포하는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고 스데반이 돌 맞아 죽을 때 사울의 얼굴 에는 분노가 충만하였으리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지르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6-27).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 오래 참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 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푸틴이 쏘아대는 탄도 미사일보다, 핵폭탄보다 더 강 력한 것은 ‘오래 참는 것’이다. 

인내의 한자어 忍耐의 참을 인(忍)은 나의 마음에 무자비하게 칼을 대어 죽이는 것이다.
올림 픽 금메달리스트나 골프여제 박세리, 피겨여왕 김연아, 배구 여제 식빵 언니 김연경, 축구의 신 박지성이나 손흥민 같은 선수들은 무명시절에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육신적인 식탐과 분노에 칼 을 대고 오래 참았기에 오늘 유명인의 금메달을 목에 걸고 산다. 

성경의 인내는 자기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빌 2:5-11) 심령의 정욕과 분노에 칼을 대어 자기를 죽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고 오래 참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오래 참으셨(히 12:1-2).
그리고 영적인 금메달을 목에 걸고 보좌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예수님은 마귀를 미사일로, 폭력으로 멸하지 않으셨다.
‘오래 참으심’의 신의 성품으로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참으셨다.
그리고 자신을 죽여 화목제물로 드려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
십자가를 지고 오래 참으라! 그래서 정욕과 분노로 틈타서 나의 삶을 망치는 마귀의 일을 멸하고 살라!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디모데후서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Guard the good deposit that was entrusted to you--guard it wit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who lives in us.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역 42번 포터 랠스턴 영 이라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남의 짐을 운반해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차역에서 일하는 포터로서 기독교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는 한사람 한사람의 짐을 나를 때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나누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몸집이 작은 할머니를 기차의 지정석에까지 모셔다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할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승강기로 들어 갈 때 그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승강기가 내려가는 동안 랠스턴 영은 눈을 감고 하나님께 구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이 할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에게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하셨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승강기에서 내리면서 "할머니, 괜찮으시면 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쓰고 계신 모자가 참 잘 어울리십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랠스턴 영을 쳐다보며 고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드릴 말씀이 더 있는데요 입고 계시는 옷도 참 잘 어울립니다."
할머니도 여성이기에 그 말에 호감이 갔습니다.
그녀는 그리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밝게 그에게 웃었습니다.
"왜 나에게 친절하시지요? 참 자상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눈에 할머니가 너무 슬퍼 보였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할머니를 도울 수 있을까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자에 관해 말하라는 지혜를 주셨지요"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할머니 어디 편찮으십니까?"
"그래요, 저는 늘 아프답니다. 너무나도 고통이 심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모르실 것입니다."
조용히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있던 랠스턴 영이 대답했습니다.
"예. 할머니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한쪽 눈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한쪽 눈은 밤이나 낮이나 마치 뜨거운 쇠를 대고 있는 것처럼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주 행복해 보이시는데요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기도 덕분이지요 할머니"
"기도? 정말 기도가 당신의 고통을 없애 주었단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도가 언제나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 고통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지요. 할머니도 기도해 보세요."
어느새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그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나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딸이 랠스턴 영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당신에게 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당신을 찾아가서 지난해 휠체어에 탄 어머니를 기차에 태워준 일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니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긍정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나를 보게 하실 뿐 아니라 연약한 이웃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사람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한 장님이 안구를 기증 받아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끝나 눈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푸는 날이 되었습니다.
붕대가 조금씩 풀리면서 차츰 밝은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눈앞에 펼쳐 친 세상도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곁에 있는 어머니에게 외쳤습니다.
"어머니! 왜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 나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에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매일 이야기 해주었단다. 단지 네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야."
심판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그들 앞에 너무나도 화려한 천국과 영원한 불구덩이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몇 사람은 왜 이런 곳이 있는지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통곡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이 모든 것이며 말씀하셨고, 심지어 확장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증거들을 사실로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만남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성경에 그와 같은 아름다운 만남이 있는데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입니다. 처음엔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나중에는 믿음의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내용이 본문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거짓이 없는 믿음(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볼 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없는 믿음’이란 사람에게 거짓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거짓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가진 이 믿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을 디모데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둘째, 복음 전함(8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전하지 않는 복음에는 고난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선택해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52장 7절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고 있듯 복음 전함은 아름답습니다.
우리 인간의 제일가는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전도하는 일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잃었던 은전을 찾은 비유, 탕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찾았을 때 기뻐하는 주인, 목자,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한 생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가는 생명에게 복음을 전할 때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전도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전도하는 일에 모두 동참하여 아름다운 족적을 이 땅에 남기십시다. 그럴 때 의의 면류관과 상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볼 때 발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름답지 않은 발, 즉 복되지 못한 발입니다.
이러한 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탐욕적인 발입니다.
둘째로, 불의한 재물을 구하려고 달려가는 발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는 발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발, 즉 복된 발을 말합니다.
복된 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봉사하는 발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전진하는 발입니다.
셋째로, 교회를 가까이 하는 발입니다.
넷째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는 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발은 어떤 발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 복된 발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말씀의 가르침(13절)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르친 것을 그대로 지키라고 하는 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11절에 보면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했습니다. 교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입니다. 고전 14장 19절에 보면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변화시킨 그 말씀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가르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 없는 믿음이 아름답고, 복음 전함이 아름답고, 말씀을 잘 가르침이 아름답습니다. 이것들을 잘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구속의 은혜를 받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많은 신앙의 조상들이 복음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에게 그 복음을 증거하였듯이 우리도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험한 세상 속에서 인내하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백향목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족하는 마음

(自足) : 스스로 자, 발 족

1.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
2. 다른 곳으로부터 구(求)함이 없이 자기(自己)가 가진 것으로써 충분(充分)함.

자만자족(自慢自足)
스스로 뽐내며 흡족(洽足)하게 여김.

지족(知足) :  알 지, 발 족

1. 제 분수(分數)를 알아 마음에 불만(不滿)함이 없음.
2.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足)한 줄을 앎.

지족안분(知足安分)
족한 줄을 알아 자기(自己)의 분수(分數)에 만족(滿足)함.


자족하는 마음

“하나님은 해와 공기와 물과 같은 것들을 공유케 하셨다.
만일 누군가가 어떤 것을 자신만 소유하려 한다면, 마치 자연이 분노하듯이 서로 투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나의 것’과 ‘너의 것’ 이라는 차디찬 용어로 나누고 분리하기를 갈망한다.”

황금의 입이라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이 자신의 저서에서 한 말이다.

많은 사람이 물질을 두고 분쟁하며, 이로 인해 불안과 염려 그리고 시기심이 촉발돼 인간이 물질을 통해 누려야 할 행복을 빼앗기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물질의 포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이 물질의 억압과 시험 속에서도 우리를 자유케 할 능력을 충분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외부 조건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설령 외적 상황이 화려하더라도 영혼이 곤핍하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외적 상황이 곤핍하더라도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는 그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에너지를 공급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는 “현명한 사람은 자족한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긴 바 있다.
자족한다는 것은 일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지혜의 한 방편이다.
자족할 줄 아는 마음만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자족할 때 탐욕의 사슬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삶

피얼 목사는 자바에 있는 발리(Bali)섬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섬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보러 간 것입니다.
큰 산업 시설이나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섬이었습니다.
어째서 발리 사람들은 그토록 행복할까?
피얼 박사는 섬 사람들을 일주일 동안 인터뷰한 뒤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해답을 종합할 수가 있었습니다.

1. 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We have nothing)
2. 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Our life is simple)
3. 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We like each other)
4. 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We have enough to eat)
5. 우리는 아름다운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We live ona beautiful island)

자족하는 삶은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도 자족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병이 난 나이 많은 한 여자가 눈병을 고쳐주면 크게 사례하겠다고 약속하고 의사를 불렀습니다.
의사는 매일같이 그 여자의 집에 가서 그녀의 눈에 약을 넣기 위해 눈을 감게 하고서 그 사이에 그 집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을 하나씩 둘씩 몰래 집어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녀의 눈병이 거의 나을 무렵, 그녀의 집에는 변변한 가구라곤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자기가 탐이 나는 물건을 모두 훔쳐갈 수 있을 때까지 눈병 치료를 질질 끌어온 것입니다.
마침내 여자의 눈이 다 나았으므로 의사는 약속한 대로 사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약속한 사례를 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에 불려나온 그녀는 "어찌하여 약속한 사례를 치르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심문에 태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확실히 내 눈이 잘 보이도록 고쳐주면 상당한 사례를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저 의사의 치료를 받고 나서는 내 눈이 전보다 더 나쁜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의사는 물론 재판장도 크게 놀라 그 곡절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저 의사의 치료를 받기 전에는 내 집에 있는 값비싼 물건들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눈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욱 나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이 악덕 의사의 절도 사실이 법정에서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타울러가 하루는 거지를 만나서 “친구여, 오늘도 안녕하십시오” 하고 말하니 “나는 하루도 안녕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행복하기를…” 하자 거지는 “난 불행해 본 적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울러가 놀라서 “그것이 무슨 뜻이오?” 하고 묻자 거지는 “날이 좋으면 감사하고, 비가 와도 감사하고, 먹을 것이 넉넉하면 감사하고, 배고파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나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불행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타울러는 더 놀라서 “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왕이오” 하고 그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소?” 하고 타울러가 물으니 거지는 “내 마음속에 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 시므온은 “평생 동안 나는 한 번도 사슴이 무화과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고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 없이 먹고 산다. 만일 나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그들이 걱정 없이 먹고 산다면 창조주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나는 얼마나 더 걱정 없이 먹이시겠는가?
그러나 나는 염려함으로 내게 있는 것까지 부패시켰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
- 선한 행실의 스모킹 건

스모킹 건(smoking gun)
- 연기 나는 총

범죄 또는 사건 등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는 결정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일컫는 말

톨스토이의 '구두 수선공이 민난 하나님'은 마틴이라는 구두 수선공이 명일에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는 꿈을 꾸고 하루 종일 예수님을 기다리는 내용입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 가운데 그가 가난하고 곤란을 당한 이들을 도와주고 선행을 베풀자, 예수님께서는 그날 밤에 나타나셔서 네가 도와준 그들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유명하면서도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큰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소개

레프 톨스토이는 백작 가문의 4남으로 러시아 뚤라 지방에 있는 야스나야 뽈랴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와 사별한 후, 고모의 양육을 받았다.
1844년에 까잔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847년에 중퇴하고 영지 야스나야 뽈랴나에 정착하여 농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
잠시 환락에 빠져 타락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공허하고 무용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1851년에 까프까즈 의용병에 들어가 포병장교가 된다.
그가 형을 따라 까프까즈로 가서 쓴 작품 『유년시절』(1852)이 시인 네끄라스프에게 인정받아 잡지 《현대인》에 게재되면서 작가로 데뷔한다.
제대 이후 톨스토이는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기 위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 외국을 여행하고, 1859년에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 학교를 세우고 농민과 아동 교육에 애쓴다.
1862년에는 폭넓은 지적 관심을 지닌 중산층 출신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한다.
15년간은 행복했지만, 그 후에는 지독히 불행한 결혼생활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그의 문학 활동은 가장 왕성했다.
1910년에 자신에게 명성과 풍요, 번영, 수많은 자식을 안겨주었던 영지와 아내를 버리고 순례자가 되어 빈손으로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실천적 사랑을 실천하고자 노구를 이끌고 집을 나섰다가 허름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책에 번역된 10편의 단편은 자살 직전까지 갔던 정신적인 위기를 맞으며 사상적인 전환을 겪는 과정에서 나온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신약성경 복음서에서 건져낸 삶의 원리와 깨달음을 평범한 민중도 이해하는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이전까지 사용했던 작품의 색깔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톨스토이가 주창한 기독교적인 윤리관과 무저항주의가 오롯이 담긴 ‘인생 단편’이 탄생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구두수선공 마틴 아브디치(Martin Avdeich)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마틴의 이야기는 눈물겨운 시련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는 구두수선공이었지만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세 살 된 아들 하나를 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얼마 후, 그 아들마저도 그를 막 도울 수 있는 나이에 죽어 그의 곁을 떠납니다.
마틴은 절망했습니다.
상실의 슬픔에 젖어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찾아온 역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실의 아픔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고, 결국 교회를 떠났습니다.
마틴이 회의와 낙담 중에 있을 때 그 앞에 한 노인이 등장했습니다.
8년 동안의 순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마틴에게 그의 슬픔의 이유가 자신의 행복에 집착하는 데 있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노인은 하나님을 위해 사신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에 대해 알고 싶으면 성경을 읽어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마틴은 노인의 권면대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무렵, 그를 찾아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마틴은 그를 찾아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그에게 하나님이 오시지 아니했습니다.
그를 찾아온 것은 나이 들어 쇠약한 채로 눈을 치우는 노병 스데반 청소부 이었습니다.
그는 추위에 떨고 있는 그를 방으로 모셔 들이고, 그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노병이 떠난 후에 그를 찾아 온 사람은 추운 날 벌벌 떨면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가난했습니다. 이 여인은 며칠 동안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도 굶은 상태였습니다.
마틴은 따뜻한 차와 빵과 스프를 제공하고, 그 여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의 외투를 선물했습니다.
은밀히 보관해 두었던 비상금을 꺼내어 그 여인의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또한 마틴을 찾아 온 사람은 사과를 파는 늙은 여인과 그 여인에게서 사과를 훔친 소년이었습니다.
늙은 여인은 사과를 훔친 소년을 경찰에 데려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마틴은 늙은 여인에게 소년을 위해 사과 값을 대신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늙은 여인은 소년을 용서했고, 소년은 늙은 여인의 무거운 자루를 등에 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은 마틴에게 찾아오셔서, 그가 만났던 작은 소자들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 소자들을 섬긴 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임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때 마틴의 영혼이 기쁨에 휘감겼습니다.
환경이 바뀐 것은 없었지만 그는 참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를 부요케 한 것은 소외된 이웃을 돕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심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본을 보여라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에게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인즉 첫째도 본보기,둘째도 본보기,셋째도 본보기라고 했다.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나타내기를 원하면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부모가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이다.
자녀가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면 부모가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는 것이다.


첫째, 말에 대하여 본이 되라.

말은 곧 칼입니다.
칼은 수술도로 사용되면 사람을 살리지만 흉기로 사용되면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말 한마디는 칼이 되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이 막중한 몸이 아니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말을 꼭 필요할 때에, 친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둘째, 행실의 본이 되라

성경은 믿음 못지않게 행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르고 온유한 행실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옷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경험한 우리는 말뿐만이 아니라 행함에도 온유함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사랑의 본이 되라

사랑의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게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합니다.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나가서 사랑의 씨를 뿌린다면 언젠가 사랑의 열매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넷째, 믿음의 본이 되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신할 수 있는 마음의 증거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 것이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도 믿음의 결과입니다.

위험한 일, 손해 보는 일, 너무 어려워서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그 일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여러분과 제가 감당할 때, 우리 안에 있는 그 위대한 믿음의 실체를 세상 사람들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정절의 본이 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나님이 깨끗하니 우리도 그분만큼 정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정절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하다, 청결하다’는 뜻과 동시에 ‘굳은 마음, 변하지 않는 절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깨끗함을 상실하면 그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찾으시고 사용하시는 사람은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말과 행동, 그리고 사랑의 본이 되고 믿음과 정절의 모습을 보인다면 진정한 세상의 소금이요 등불이 되어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위대한 사명이 바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를 모델로 삼을까?

오늘날 미국의 상징이 된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의 작품입니다.
본래 미국에 줄 이 동상을 만드는 데에 프랑스 정부가 4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르톨디는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며 20년이나 걸려 이 작품을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 여신상의 얼굴을 누구를 모델로 삼아 조각할지가 문제였습니다.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그는 많은 고심 끝에 자신을 낳아 기르고 사랑해주신 어머니를 모델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뉴욕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 자유의 여신상은 바로 바르톨디의 어머니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은 누구를 모델로 하여 인생을 바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녀들의 인생모델로서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될 수 있어야겠습니다.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서쪽 야산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생을 남을 위해 살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
이 비석의 주인공은 바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선생입니다.
남강은 모진 고생을 하며 오산학교를 세웠는데 학교를 건축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건축하던 일꾼이 찾아와 기와가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집의 기와를 떼어다가 학교를 지어라.”
그는 오산학교를 위하여 재산을 다 팔았으며 나중에는 부엌세간까지 팔았다고 합니다.
남강은 1907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난 후 희생을 앞장서는 생활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암송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철저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오산 학교 변소에 얼어붙은 오물을 교장인 자신이 먼저 도끼로 깨고 청소하는 솔선수범을 보였습니다.
학생들과 교직원에게 청결 관념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겨레를 위하여 걸레질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 남강은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가장 잘 가르칠 수가 있지요?”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즉 첫째는 본을 보이는 것이고, 둘째가 본을 보이는 것이며, 셋째도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녀의 교육을 중요시하였으며, 아울러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을 매우 존경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부일체(師父一體)라고 스승과 부모를 동등하게 여겼습니다.
교회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사들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교사란 먼저 자신이 성경을 잘 배우고, 다음에 그 배운 것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가르치되 사명감으로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은 영적 지도자로서 주의 일을 하는 디모데에게 ‘믿는 자에게 본(本)이 되라’고 교훈합니다.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본받는 삶을 살았기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을 포함하여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여기의 ‘본(本)’은 본보기의 준말입니다.
옷을 만들 때, 만들려고 하는 옷을 생각하면서 먼저 종이 위에 그려보고 잘라 내어 본을 뜹니다.
그리고 옷감을 본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재단하여 옷을 만듭니다. 무엇이든지 본이 있어야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본’ 의 원어는 ‘튀포프’ 인데 ‘어떤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식이나 모델’이란 뜻입니다.
교사를 비롯한 가르치는 자들은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말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본을 보이며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어떤 면에서 본이 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첫째, 오직 행실에 있어서

북유럽에 사는 흰 담비(ermine)는 흰 털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흰 담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냥꾼들은 이 속성을 이용해서 흰 담비를 잡는다고 합니다. 흰 담비가 사는 굴 입구에 새까만 숯검정을 칠해 놓고 숲속에서 놀고 있는 흰 담비를 굴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굴 입구에 다다른 흰 담비는 자신의 흰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새까만 숯검정이 묻어 있는 굴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라리 사냥꾼에게 잡히는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안나가) 교인도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교인들의 행실이 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거룩성을 잃어버렸고 그 행실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마땅히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거룩한 행실을 갖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바울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연소함을 행동의 진지함으로 보충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연소함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행동으로 본을 보여서 권위를 지니라는 뜻입니다. 사역자의 권위는 외부적인 치장이나 장식, 그리고 연령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가르침과 거룩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기의 ‘행실’ 은 ‘아나스토로’ 인데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먼저 언행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말과 행실은 실과 바늘 같이 불가분리의 관계로서 양자가 일치되어야 참된 인격이 나타납니다. 말과 행실이 다르면 위선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행이 일치되는 행실은 교사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말이 거룩하지 못하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하면 복음이 제대로 전파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되게 말하고 행실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의로써 행하여 말과 행실이 모순이 없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오직 사랑에 있어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25년 동안 원주민들을 섬기며 헌신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은퇴 후에도 종종 아프리카 밀림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던 중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일날, 선교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죽었습니다. 리빙스턴이 죽은 지 삼년 후에, 당대의 설교가 헨리 드루먼드(H. Drummond)가 선교지를 찾아가서 원주민들, 특히 리빙스턴과 가까이 지냈던 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이 당신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습니까? 어떤 설교를 들었습니까?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남긴 인상 깊은 교훈은 어떤 것입니까?” 그의 질문에 원주민들은 전혀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가르쳐준 성경의 내용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설교 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베푼 사랑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감동적으로 읽은 책의 내용도 얼마 후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예배시간 마다 듣는 설교의 내용도 며칠이 못가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은 결코 잊지 못합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만이 오래오래 남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성품으로 타인과 관계된 생활과 연결됩니다. 이 사랑은 말과 행위로 표현됩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요 바울이 강조한 제일의 덕목입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을 본받아 영혼을 몸처럼 사랑함으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헌신적인 구제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적인 구제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구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혹여 자기 공로를 앞세우는 마음으로 행하는 구제와 희생이라면 사랑이 없는 헛수고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든지, 봉사하는 일이든지, 충성하는 일이든지 사랑으로 행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사랑으로 감당하므로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오직 믿음에 있어서

존 와나메이커(Johon Wanamaker)가 51세가 되었을 때 벤자민 해리슨(B. Harrison) 대통령으로부터 체신부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왔습니다. 그러나 와나메이커는 정중하게 사양을 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주일이 되면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왔습니다. 저는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장관직을 맡게 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지장을 받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해리슨 대통령은 와나메이커에게 주일이 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조건으로 와너메이커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주일이 되면 반드시 섬기는 교회로 가서 아이들에게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본업은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장관직은 부업일 뿐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종신직입니다. 장관직은 임시직일 뿐입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그는 세상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대통령이 맡긴 일보다도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믿음은 누구에게나 본이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믿음은 사랑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말과 행실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듯이 믿음과 사랑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굳건한 믿음 없이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고, 사랑 없이는 믿음의 확신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진실로 믿음이 충만하다면 좋은 지도자로서 성도들 앞에 부끄럼이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버렸습니다. 그토록 연마해 왔던 학문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다 버렸습니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공들여 쌓아왔던 업적도 다 버렸습니다.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철저하게 믿음만 앞세웠습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등반대의 길을 안내하는 티베트 사람들을 ‘셰르파(sherpa)’라고 부릅니다. 셰르파는 길에 익숙합니다. 일기변화와 산세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수없이 산을 오르내린 사람들입니다.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봉 등반에 따른 자신들의 기여가 인정되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생명을 무릅쓰고 히말라야 등반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등반대는 셰르파의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야 등반에 성공합니다.

모름지기 가르치는 교사들은 영적 셰르파가 되어야 합니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다른 이들을 잘 인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직 거룩한 행실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향하는 믿음으로 본이 되어 모든 이를 살리는 복된 교사들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란 책을 쓴 전혜성씨는 말한다.
“남편과 나는 집안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았다.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부탁해서 한글로 된 우리책을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작은 천사들’이라는 노래 테이프를 사다가 틀어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 노래를 모두 외우고 곧잘 따라 불렀다.
아이들은 한국어를 잘하는 것은 물론 읽고 쓰는 데도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적어도 초등학교 수준의 말과 글은 익힐 수 있었다”

칸트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와 똑같이 행하라고 말할 수 있게 행동하라”고 말했다.

생각은 쉽고 행동은 어려운데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부모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데 어떻게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간디와 사탕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선생님,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라고 말했다.
아이 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다.
“한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아이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달후에 또 갔다.
“애야,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다.
“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하시는데 왜 두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
“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데 두달이 걸렸답니다”

희생의 모범이 가장 좋은 교육이다.
교육이란 끝없이 지속되는 희생의 과정이다.

재판장과 나뭇가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옆집 나뭇가지가 담장을 넘어와서 그늘을 만들어 채소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담장을 넘어온 가지를 잘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옆집 주인은 나뭇가지를 자르면 볼품이 없기 때문에 자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두 사람은 결국 재판장 앞에 섰습니다.
재판장은 두 사람 말을 듣더니 재판을 하루 늦추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재판정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재판장에게 왜 판결을 하루 늦췄느냐고 물었습니다.
재판장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뭇가지를 자르도록 판결하려고 했는데 우리집 나뭇가지가 옆집에 넘어가 있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어제 집에 가서 가지를 자르고 와서 오늘 판결을 한 것입니다.”

남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면 나부터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솔선수범

어떤 아버지가 중학생인 아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걱정스런 눈길만 보낼 뿐 아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담배를 끊으라고 타일렀다.
아들은 왜 아버지가 그때 바로 얘기하지 않고 한 달이 지난 다음 얘기했는지 궁금해 그 이유를 물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알다시피 나도 담배를 즐겨 피웠단다.
그런데 어떻게 너만 담배를 끊으라고 할 수 있겠니?
내가 먼저 담배를 끊는 것을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담배를 끊었단다.
그래서 이제 너에게 이렇게 떳떳이 이야기하는 것이란다.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말을 너무 안듣는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어른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은 어떨까요.
아이들이 누굴 보고 배우겠습니까?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 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실례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는 이튼 칼리지 출신이 2,000여 명이 전사했고, 6. 25전쟁 때에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아 들도 육군 소령으로 참전하였고, 미군 장성 이들이 142명 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중국의 마오쩌뚱 아들도 6.25 때 전사했다고 한다.

믿음은 내면의 변화로부터

곤충을 매우 사랑하는 곤충학자가 있었다.
어느 날 고치를 찢으려고 몸부림치는 나비의 애벌레를 보게 되었다.
몸부림에 비해 고치가 너무 견고한 듯 보였다.
곤충학자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위로 그 고치를 찢고 나비를 꺼내주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그 나비는 공중을 몇 번 선회하더니 땅에 주저앉아 죽고 말았다.
고치에서 나오기 위해 스스로 애를 쓰며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날개가 충분히 강해지지 못했고
물기가 마르지 않아 날개가 약해 날 수 없었다.
외부의 도움이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만물은 변화와 성장을 갈망한다.
그래서 외모를 변화시키기나 외부의 힘에 의지하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자기 내면에서 와야 한다.
변화시켜줄 무엇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변화해야 한다.
내면의 변화를 반영하는 외면의 변화가 진실한 것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믿음의 비밀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믿음이란 내가 받은 사랑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란 사실상 내가 모를 때 받은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4살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핏덩이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누이고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애지 중지 키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육학에서 보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4살 전의 일은 까맣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갓난아이 때에 우유를 먹었습니까?
엄마의 모유를 먹었습니까?
아마 그걸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4살 이후에도 모유나 우유를 먹었던 사람일 겁니다.
그 소중한 사랑은 다 몰라요.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먹였다더라.
저 분이 나를 도왔다더라……
그것은 믿음으로 알게 된 것이지 결코 피부로 기억으로 알게 되어 있지 않아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를 때, 알지 못할 때에 사랑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디모데(Timothy) /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

부 : 헬라인
모 : 유대인 유니게  

사도바울의 복음 사역은 사도 바울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같은 부부를 비롯, 수많은 동역자들이 사도 바울 곁에서 도왔기 때문에, 위대한 복음사역이 가능했다.
디모데 역시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영적인 아들로 생각할 정도로, 바울에게 있어 디모데는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였다.

실례로, 바울 서신 가운데 여섯 곳의 서두에서 디모데의 이름이 바울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빌레몬서) 그리고 그중 네 곳에는 다른 동역자의 이름 없이 디모데의 이름만 나온다.
그런데 바울이 서신을 기록할 때, 바울 곁에는 여러 다른 동역자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그의 서신 말미에 나오는 인사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독 디모데의 이름만이 서신에서 다른 동역자와 달리 자주 바울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디모데가 변함없이 바울의 사역의 짐을 나누어지는 평생의 동역자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하나님의 영예’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디모데의 조상에 대해서는 사도행전과 오늘 읽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디모데는 갈라디아성의 루스드라 출신이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혼혈아였다.
디모데의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는 디모데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특히 유니게의 친정 어머니 로이스(즉, 디모데의 외할머니)의 격려가 한몫 거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디모데가 성경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 공회를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나, 1차 전도여행지였던 루스드라를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 이미 디모데는 제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행 16:1).”
그러니까 약 2, 3년 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를 처음 방문했던 그 시기에 모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던 것 같다(행 14:6-20).

디모데가 바울을 통하여 회심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표현하고 있다(딤전 1:2). 
헬라,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전도한 제자를 흔히 자녀에 비유했는데, 디모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심 후에 디모데의 영적 성장은 아주 빠른 편이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성읍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상당히(약 30km) 떨어져 있던 이고니온의 성도들에게도 칭찬을 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청년 디모데를 잘 살펴본 후, 그의 평생의 동역자로 삼는다.

이때부터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복음사역에 결정적인 조력자가 되는데, 바울은 그의 선교활동에서 생긴 개척 교회들을 방문하도록 자주 디모데를 파송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 파송(살전 3:2-3), 고린도 파송(고전 4:1), 빌립보 파송(빌 2:19-24)

그런데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잘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 당시 복음사역은 순간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들은 너무나 어리고 취약하였다.
하지만, 젊은 디모데는 담대하게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책임감있게 사명을 잘 감당했다.
바울도 그런 디모데를 믿었기에, 주저함없이 여러곳으로 디모데를 파송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낸 1년 6개월의 기간 대부분과 후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게 되는 3년이라는 기간에, 디모데는 줄곧 그의 곁에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바울은 디모데를 파송하여, 자신을 대신해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도 그를 수행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된 후에는 잠시 보이지 않다가, 다시 로마에서 합류하게 된다.
로마의 옥중에서 바울이 빌립보서를 써서 디모데를 보내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또 그들의 소식을 가져오게 하는데, 빌립보 교회에 써 보낸 편지에 보면, 바울이 얼마나 디모데를 신뢰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20-22).”

바울의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 외 다른 동역자들을 크게 신뢰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이다. 그만큼 바울은 디모데를 철저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기려고 했던 일이 어떤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같은 상황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로마에서 빌립보까지는 걸어서 꼬박 40일이 걸린다.
그리고 또 돌아오는데도 40일이 걸린다.
다시 말해, 약 3개월 동안을,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쉼 없이 걷고 또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복음의 사역자들이라고 해도, 이같은 일을 선뜻 맡아 줄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만큼은 흔쾌히 맡아 주리라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디모데는 육신이 강건한 사람이 아니었다.

디모데전서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는 위가 약하여 고생하였고 또한 몸이 약하여 자주 병을 앓았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더욱 믿음직스러웠고 자랑스럽고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불렀던 것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자기 부인의 마음을 품을 것을 간절히 권면하였다(빌 2:5).
디모데야 말로 그런 마음을 실제로 보여 준 살아 있는 실례였다.
디모데전후서에 보면, 바울은 아직 젊은 디모데를 든든한 사역자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가르치고 권면하고 있는지 잘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후계자가 아닌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정성을 쏟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아버지가 자기와 같은 마음을 품은 아들을 향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느꼈고, 그래서인지 디모데 또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릴 수 있는 모든 섬김과 헌신을 바울에게 다했다.

말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과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적이 있었다.
순교를 얼마 앞두고 로마감옥에서 디모데에게 급히 전갈을 보낸다.
최대한 빨리 자기에게로 올 것과 오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이며, 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과 양가죽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전갈이었다(딤후 4:6-12).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예사롭지 않는 서신을 받은 디모데는 아마 겨울을 앞두고 두 달 이상 걸리는 여행을 서둘러 떠났을 것이다.
디모데가 바울이 순교당하기 전 늦지 않게 로마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은 순교를 앞두고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디모데후서 4:16-18.
변명-재판에서 자신이 기소당한 것에 대해 변호하는 것)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외로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바울은 독신이었다.

디모데는 이처럼 사도바울의 최후를 지켜줄 피붙이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히브리서의 끝부분에 보면, 디모데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히 13:23).”

이로 볼 때, 디모데가 언젠가 감옥에 갇혔으며, 또 풀려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디모데가 어떤 상황에서 언제 어디에서 갇혔고, 또 그의 최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디모데의 경견한 신앙은 어려서부터 외조모와 모친의 철저한 신앙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이 자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 주며, 세속 학문을 익히기 위한 학교 교육에 치중하여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 가정에 훌륭한 귀감이 된다.

바울은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또 자신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를 돌보도록 하고 격려 편지를 보내는 등 디모데의 목회를 위해 힘써 협력하였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자신만을 돌아보며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디모데를 양육한 것처럼 후세대를 힘써 양육하고 애정으로 협력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디모데가 자신의 내성적 성격과 병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역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동역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기도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인간의 연약함을 들어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과, 복음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기도해주며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동역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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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The Pastoral Letters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목회서신이란?

디모데에게 보낸 두개의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한개의 편지를 가리켜 "목회서신"(the Pastoral Letters) 또는 "목자 서신"(the Shepherd Letters)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가 "이 세 서신은 하나같이 목회규칙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데서 기인하며,
1849년 영국 성경 학자 헨리 알포드가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사용할 것을 주창함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세 서신만이 지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디모데에베소 지역을, 디도그레데섬을 책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지역 교회를 잘 지도하도록 훈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유대적 영지주의 형태의 이단적 교훈들로부터 신앙을 방어할 것을 교훈한다.

1. 수신자

디모데(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태생이다(행 16:1이하).

바울더베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아버지는 헬라인이라.
He came to Derbe and then to Lystra, where a disciple named Timothy lived, whose mother was a Jewess and a believer, but whose father was a Greek.

바울이 두번째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 들렸고 이때 디모데가 바울의 일행이 되어 전도 여행에 나섰으며
그 이후로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다(빌 2:19-22).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
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도(공경하다)는 바울에 의해 개종되었다(딛 1: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갈 2:1이하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고,
마게도니아에서 만나 다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위해 고린도로 돌려보냈다(고후 7:5이하, 8:23이하).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신실한 주의 종(참 아들 딛 1:4, 동무 고후 8:23) 개인적으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편지들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딤전 6:21, 딤후 4:22, 딛 3:15).

2. 기록 시기

바울이 1차 로마 감옥 생활을 마친 후부터 순교하기까지의 기간동안에 목회서신이 기록되었다고 본다.
로마에서 석방된 시기가 62-63년으로 추정되기에 석방된 이후 계속 전도여행을 하면서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딤전 1:3), 아가야의 니고볼리에서 디도서를(딛 3:12), 그 이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에
디모데 후서(딤후 4:6-11)를 기록했다.

3. 기록 목적

사도들의 시대는 임박한 종말 기대로 특징지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과 더불어 사도이후 시대에 세상에 대한무관심적 혹은 부정적 태도도 조정되어야 했다.
어떻게, 언제 종말을 맞아야 될까에서 종말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해 가며 생활해야 할까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기구와 조직이 필요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이단"의 위협이, 외적으로는 "박해"라는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적 안정을 위해 교회의 제도화를 추구했으며,
외적인 안정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적응을 꾀해 나갔다.
그리고 정통 신조와 교회 성직자에 대한 순종만이 외적인 반대나 내적인 분열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최선의 방편임을 가르쳤다.
이것이 목회서신의 목적이다.

1). 성육신 부인, 도덕 폐기론 주장하는 영지주의와 편협한 유대주의로부터 교회보호 (딤전 1:4-7 / 딤후 2:23-26 /딛 1:1-13)

2). 영적 나태를 막고 경건의 훈련과 도덕적 품성을 고양하도록(딤전 5:1-25/ 딤후 3: 14-17 /딛 2:1-10)

3). 교직제도와 그에 따른 교역자들의 자질을 규정함(딤전 3:1 / 딛 1:5)

4. 내용구분


디모데 전서


1) 인사 / 1:1-2

2) 거짓 교사들의 교리에 대한 공격 / 1:3-20
거짓 교훈은 유대적 요소를 가진 영지주의 형태이며, "꾸며낸 이야기와 지리한 족보 이야기"(4절)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그리고 "율법"(8-9절)에 대한 언급은 유대적 요소를 가리킨다.

3)교회질서 / 2:1-3:16 교회의 기구적 조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가. 교회예배 / 2:1-15 : 세상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후대의 시도이다.
나 성직제도 /  3:1-16 :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이 규정되고 있으며 기독론적 찬양시(16절)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4) 거짓교사들의 윤리에 대한 공격 /4:1-10 거짓교사들의 윤리가 참 교사들에게 기대되는 행위와 대조되고 있다.

5) 교회질서 / 4:11-6:19 기독교 성직자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으며(4;11-5:2) 과부들에 관한 규정도 밝히고 있다.

6) 결론 / 6:20-21


디모데 후서

1) 인사/1:1-2

2) 바울을 본받아 증거한 것에 대한 권면(1:3-2:13) 바울로부터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받고 따르며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모든 면에서 선한 행동을 보이라는 권면(2:14-4:8) 피해야 할 거짓교사들의 본보기와 따라야 할 사도 바울의 본보기가 제시되고 있다. 속되고 헛된 것(2:16)-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말(2:18)-허탕한 이야기(4:4)는 거짓 교훈을 말하며, 이에 반해 성경은 "영감된"것, 유익된 것으로 성경을 말하고 있다(3:16).


디도서


그레데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믿음의 선한 행위가 없었기에 교회 내의 질서 확립과 바른 신앙관의 정립이 시급한 상태였다(1:10-13 / 2:1-10). 이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올바른 권면과 격려가 필요하였다.

1)인사 /1:1-4

2) 성직제도 / 1:5-9 감독과 장로의 자격 및 그들에 대한 지시
* 두 직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3) 거짓 교훈에 대한 공격 / 1:10-16

4) 올바른 기독교적 행동에 대한 권면 / 2:1-3:7 표준적인 도덕 교훈이 나온다.

5) 거짓 교훈에 대한 또다른 공격 / 3:8-11

6) 개인적 언급 / 3:12-14

7) 마지막 인사 / 3:15


목회서신의 5 가지 주제들

목회서신은 바울의 말년에 자신의 선교팀의 일원이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교회들로 파송되었던 디모데와 디도를 위해 바울이 쓴 서신들이다.
바울 자신이 먼저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았던 목회자로서 경험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나누고 교회의 당면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쓴 것이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가 그 서신들인데 목회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가장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목회서신이라 불리운다.
시기와 저작 동기가 비슷해서 서로 다른 세 권의 편지에 쓰여져 있지만 공통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 공통된 내용들을 크게 다섯 가지, 교회 직분자의 조건, 이단에 대한 대처,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참된 신자의 경건으로 묶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직분자의 조건

목회 서신의 중요 주제 중 하는 교회의 직분을 맡을 자의 조건이다.
왜 사도 바울은 목회 서신에서 직분자의 조건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이는 목회 서신을 쓰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바울이 목회서신을 쓰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 가운데 이단의 거짓 가르침이 큰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단의 거짓 교리를 물리치려면 탁월한 신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교리에 대한 무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본래 이단은 바이러스처럼 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에 맥을 못 추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직분을 맡은 자들이 건강한 교회이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먼저 경건의 바른 모범을 보여줄 때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구석 구석에까지 미쳐서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을 사람을 신중하게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세속적인 기준을 그대로 교회 안에 적용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세속적인 기준이란 나이, 재산 정도, 학벌, 현재 직위, 인맥 관계, 능력 등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 직분자를 실제로 세우곤 한다.
그 결과 교회의 건강성을 잃게 되고 교회 답지 못한 교회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
우리는 직분자를 세울 때 바른 기준에 대해서 목회 서신을 통해 가이드를 얻을 수 있다.

디모데전서 3:1-13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디도서 1:5-9은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 중에서 장로와 감독은 사실상 같은 직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장로는 유대 전통에서 온 이름이고 감독은 헬라 전통에서 온 이름으로 보이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본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직분을 맡을 사람에 대한 성경적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정을 잘 다스린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직분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조건이다.
이 말은 일부일처제 원칙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직분자는 한 명의 아내에 대한 신실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단, 이 말이 재혼을 한 사람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직분자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한 사람이어야 한다.
바울은 왜 직분자에게 가정 생활의 열매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가정과 교회 간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통해 성도 간의 관계가 가족 관계임을 나타내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열매를 맺은 사람만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정 생활이 엉망인데 교회 직분자로 잘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둘째로 절제할 수 있는 품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도 리더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직분자의 자격 조건으로 세우는 도덕성의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수준이 높다.
여러 도덕적 자질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을 지도자의 조건으로 꼽고 있는 듯하다.
방탕하여 술을 즐기거나 쉽게 화를 내어 다투는 사람은 곤란하다.
왜 하필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에 중요성을 부여할까?
이는 지도자가 충동적이어서 한 번 사고를 내면 그 일이 자기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중하고 절제하는 능력을 우선으로 여긴다.
한 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의 허물은 공동체의 분열과 상호 비난의 꼬투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서신의 본문은 지도자는 일단 결혼하고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를 둔 사람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새로 입교한 사람도 적합하지 않다고 않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말해주는 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모로 검증이 된 사람, 누가 보더라도 성숙을 이룬 사람이 직분자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깨끗한 양심을 갖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재리의 유혹에 취약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직분자는 나이가 들었더라도 물질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부패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한 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모든 직분에 대한 요구 사항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감독의 직분에는 가르치는 일을 잘 할 것을 요구한 반면에 집사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감독이나 장로의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일은 장로나 감독 직분에 합당한 사람에게 부여된 은사이다.
앞에서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위주로 기준을 제시했지만 또한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 할지라도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단에 대한 대처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바울이 목회 서신을 보낸 교회들의 당면한 위협은 이단 세력이었다.
바울의 선교팀은 일단 교회를 세운 후에는 그 교회를 지역 지도자에게 맡기고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설립되었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다시 선교팀의 동역자를 파송하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각각 에베소와 그레데에 파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단에 잘 대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은 어떤 종류의 이단이었을까?

첫째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신화이다.

디모데전서 1:3-11, 디도서 1:10-1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교회의 이단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거나 그 영향을 깊숙하게 받은 이단이었다.
유대교의 영향을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는 율법주의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 외에 특정 율법 준수 행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할례였다.
이단의 교사들은 자신들의 율법 선생으로 자처했다.
그러면서 마치 바울이 성경과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왜곡하면서 바울이 가르치지 않은 율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성도들을 미혹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으로서 교육을 받은 바울이 가진 율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바울이 보기에 율법 선생을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유대주의에 의한 두번째 영향은 신화에 지나친 관심으로 나타났다.
유대교 특별히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는 구약 성경에 기반을 하되 자신들의 상상력이 가미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범람하던 종교였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잡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의 핵심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할 뿐 알맹이는 없는 허탄한 이야기들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허탄한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허탄한 이야기들을 단순한 흥미거리로 취급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이 신화들을 지속적으로 탐닉하게 되면 결국에는 정작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을 간과하게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둘째로 금욕주의이다.

디모데전서 4:1-5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특정 종류의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고 또한 결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바로 식욕과 성욕인데 이단 교사들은 일종의 금욕주의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같은 금욕주의는 본래 헤브라이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영과 육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가졌던 헬레니즘 전통 속에서는 익숙한 것이다.
바울 당시보다 후기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영지주의가 바로 이 같은 헬레니즘 전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은 유대교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의 이원론 전통도 일정 부분 흡수한 혼합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근원이 어찌되었던 금욕주의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금욕적인 룰에 따르는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 남들보다 더 경건한 사람으로 쉽게 간주되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 추종자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전면으로 부인하는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하나님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와 물질 세계도 선하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욕망의 무한 추구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단의 거짓 교사들은 금욕주의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은밀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탐욕과 쾌락의 추구이다.

디모데전서 6:3-10, 디모데후서 3:1-9을 통해서 보면 이단의 교사들은 경건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매우 탐욕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단 교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순한 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양들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 같은 본심을 감추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실은 재물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접근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편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서 재물을 갈취한다.
그야말로 벗겨 먹을대로 벗겨 먹어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이들은 결코 한 번 물은 먹이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기도 한다.
특히 음란한 쾌락을 남몰래 추구한다.
이단 교사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거나 혹은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된 종교 의식을 통해서 이를 은밀하게 추구한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얼마나 세속적인 인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이단에 대한 대응책으로 디모데전서 1:18-20에서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다.

목회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외부의 위협으로 양떼를 지키는 것이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목회자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모습이어야 하겠지만 후자에서는 주먹을 불끈 쥔 용기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단은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묘히 사람들을 속여서 잡아 먹는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모함과 오해와 핍박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런 힘든 과정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단으로부터 자기에게 맡겨 주신 양떼들을 지켜내야 한다.

3.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바울 당시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예배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각 가정 교회별로 모이는 모임 속에서의 예배이다.
이 예배는 좀 더 친밀하고 일상적인 예배였을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예배가 드려졌을 것이다.

둘째는 온 교회가 모이는 예배이다.
특정 지역 내에서 모든 가정 교회들이 한 자리에서 모이는 예배이다.
이와 같은 예배는 다수의 인원이 참석하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가정 교회의 예배에 비해 좀 더 공적인 성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온 교회가 드리는 공예배에 있어서 질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관심은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뿐만 아니라 목회 서신에서도 이 같은 공적인 예배에서의 지침에 대해서 일부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디모데전서 2:1-15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공예배의 지침은 무엇인가?

첫째는 공예배에서 기도, 특히 중보기도의 필요성이다.
바울은 공예배의 기도에 있어서 권력자들에 대한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이 말은 여러 모로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마치 교회가 친정부 혹은 친권력자 편에 서야한다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교회가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교회가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야 선교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뜻이다.
결코 현 권력자들의 통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에 따른 통치를 권력자들이 행해야 한다.
권력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때 바로 이와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자들은 분쟁하지 말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천성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다 보니 공예배 모임에서 작은 일에 분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키기 쉽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의 예배보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자들은 성내고 다투기보다는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특별히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한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이 당시 전형적인 기도의 자세이었던 것 같다.
다툴 때도 역시 손을 들 때가 많다.
똑같이 손을 든다 하더라도 기도하기 위해서 손을 드는 것과 다투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기도하는 남자는 아름답다.
남자다운 남자는 싸우는 남자가 아니라 손을 들어 기도하는 남자이다.

셋째로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뚜렷한 변화의 표지가 남녀 차별의 철폐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조선 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깨트리고 새 시대 연 장본인들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여자들이 지나치게 공예배 가운데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다 보면 실족하는 남성 성도들이 나올 수 있었다.
혹은 보수적인 여성 성도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 가운데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성들은 잠잠히 있도록 지침을 주었다.
차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지만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바울의 일관된 입장의 피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여자들이 소박하게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오도록 권면한다.
공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이 각기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유하겠지만 상당수는 가난하다.
만약 부유한 성도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한 성도들은 위화감과 위축감이 들어서 가까이 가기 힘들 것이다.
결국 하나됨과 가족 공동체성은 상실되고 말것이다.
그래서 공예배에서는 최대한 검소하고 소박한 옷차림을 할 필요가 있다.
남녀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겠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옷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남자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내적인 아름다움이다.
선한 행실과 인격과 거짓 없는 믿음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4.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목회 서신은 사도 바울이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남긴 충고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 서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에 대한 풍성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디모데전서 4:12-16, 디모데후서 1:3-18, 디모데후서 2:14-26 등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청지기 혹은 사명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즉 목회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에게 갖추어야 할 영성은 무엇인가?
맡은 일에 대한 충성과 신실함일 것이다.
가장 나쁜 일꾼은 게으른 일꾼이다.
그보다 더 나쁜 일꾼은 부패한 일꾼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전심전력해야 한다.
다른 일에 한눈 팔지 말고 목회에 전념해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목회서신에서는 지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또 일꾼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에게 일을 맡긴 주인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이다.
목회자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 사도 바울은 특히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지 더러운 그릇은 쓸 수 없다.
목회자는 도덕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덕적 결함과 하자가 있는 사람은 목회자로 합당하지 않다.
부도덕한 목회자는 주께서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바울은 디모데전서 6:11-16, 디모데후서 2:1-13에서 사역자를 군인에 비유한다.
군인의 특징은 자기 생활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도 군인들은 몇 년에 한 번 씩 수시로 근무지를 이동한다.
이 때문에 군인 자신에게 고통이 있고 무엇보다도 군인 가족에게 고난이 많다.
그러나 이는 군인으로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 중에 중요한 것은 인내이다.
인내가 없으면 끝까지 사역자의 길을 갈 수 없고 사역의 영광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는 또한 싸우는 사람이다.
항상 적을 상대하는 직업이 군인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수많은 대적들 가운데서 믿음이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 이단의 세력이 그 대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단만이 싸움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복음을 따르도록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사람들 속에 있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성도들의 경건과 믿음의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다.
자기와 싸우지 않고서는 누구와도 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디모데후서 3:10-4:8, 디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강조한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말씀을 수종드는 사람이다.
이 일을 위해 은사를 부여 받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 말씀에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의 세력도 말씀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다.
성도들이 경건에 이르도록 양육하는 수단 역시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바르게 전하여지지 않은 성도들이 결코 성숙에 이를 수 없다.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에 의해 안전하고 풍성한 말씀이 공급되는 교회이다.
목회자는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 말씀 연구에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말씀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목회자의 영성의 핵심은 말씀의 영성이다.

5. 참된 신자의 경건

목회 서신에서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신자의 참된 경건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참된’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거짓된 경건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경건이라고 불렀다.
거짓 교사들과 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경건이 바로 거짓된 경건이다.
거짓된 경건은 겉모습만 경건해 보일 뿐 사실 상 속이 비어있는 깡통 같은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참된 경건의 표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바울 서신에서도 일관하게 말해 왔던 대로 바로 사랑이다.
또한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셨던 내용이기도 하다.
경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경건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외에도 직분자에 대한 조건, 혹은 목회자가 힘써야 할 직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 등등 목회 서신 전반에 걸쳐 참된 경건에 대해 선한 행실, 도덕성, 절제, 깨끗한 양심 등등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참된 경건은 어디서부터 올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참된 경건은 바른 교훈에 의해 지도를 받은 삶이다

경건은 바른 교훈에서부터 온다.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경건을 낳지 못한다.
그저 경건을 흉내낼 수 있을 뿐이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면 성도들은 그 말씀에 의해 양육을 받게 된다.
바른 말씀에 의해 양육된 성도들은 내면에 변화를 받아 점점 성숙에 이르게 되고 그 열매를 외적으로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이 경건이다.
바른 교훈의 선포는 말씀 사역자의 의무라면 바른 말씀을 분별하게 듣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의무이다.
이단들이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목회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바른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그 말씀을 자주 듣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영양가가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띄엄띄엄 먹는다면 아이가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성도는 자랄 수 없다.
또한 듣기만 하고 끝난다면 역시 자랄 수 없다.
먹은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야 영양분이 온 몸에 퍼질 수 있듯이 성도가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받은 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시키려는 노고가 필요하다.

둘째, 참된 경건은 은혜에 합당한 삶이다

디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경건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과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은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은혜를 아는 만큼 경건해진다.
은혜를 모르면 참된 경건은 없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자들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말씀이었다.
인간의 공로와 의를 내세우는 말씀은 힘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경건은 내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얻는다.
그 동기가 성도를 참된 경건으로 이끌어 간다. 이 은혜의 크기를 아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요 끝이다.

셋째, 참된 경건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삶이다

디도서 3장에 언급되어 있다.
새 언약 시대의 특징은 성령의 내주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 중생하게 하신 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 속에서 내주하시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이 깨달아 알아지도록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령님에 의해 이끌어지는 삶이 경건한 삶이다.
성령의 열매가 경건이다.
성령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거짓된 경건은 여전히 성령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불경건이다.
자신의 힘으로 경건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추동하시는 그 힘에 의해 경건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성령에 의한 경건은 자기 혼자 이루어가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에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들을 통해 성도들은 경건에 이르는 길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임재와 은사가 나타나는 예배를 통해서 참된 경건을 갖춘 성도로 빚어지게 된다.

목회 서신에 나타난 공통 주제 다섯 가지를 살펴 보았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에 한국 땅도 아닌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목회하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쓰여졌던 편지이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정확하게 부합하고 필요한 말씀임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 역시 각종 이단들,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신학에 의해 오염되고 공격받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비난하고 탓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부지런히 내 자신을 연단하여 주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준비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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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서의 명칭과 분류


1. 서신서의 명칭

‘서신서’(the Epistles) 는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미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지역의 초대 교회 공동체 또는 특정한 일개인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기 위해 써 보낸 편지 들 중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 뿐아니라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근거가 되게 하시고자 특별하게 영감(靈感)하신 편지들로서 훗날에 신약의 정경(正經)으로써 채택된 로마서에서 유다서까지의 21권의 책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27권의 성경이 기록된 시기는 A.D.50년 -100년 여간이나 이것들이 공교회(公敎會) 의 공식적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대략 300년이 지난 A.D. 397년의 칼카타 공회(Councile of Cartageo)에서였다.
또한 이 27권의 책이 ‘서신서’로 불리우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제롬(Jerome , A.D.346-420년 ) 에 의해서였다. 즉 제롬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벌게이트 역’(Vulgate)이다. 이 ‘빌게이트 역’ 성경에서 제롬은 로마서에서유다서까지를 한 부류로 묶어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바로 ‘서신서’였다. 그리하여 A.D.150년경의 순교자 져스틴(Justin Martyr) 이 4 복음서를 가리켜 명명한 ‘복음서’(the Gospels) 란 명칭과 마찬가지로 ‘서신서’란 명칭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교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신서는 성도들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교회의 일원이며 여호와의 자녀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원리와 지침들을 제공해 주는 책일 뿐 아니라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인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 교회론, 종말론 전반을 다른 어떤 성경의 어떤 부분들보다도 직접적으로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상이 크다. 한편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주로 예수의 공생애와 복음의 확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증거한 것이라면 서신서는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성도의 삶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책이라고 볼 수 있다.


2.서신서의 분류

   가. 저자별 분류

서신서를 분류하는 일반적이고도 전통적인 방법은 저자별(著者別)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서신서는 바울의 저작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의 13권과 익명(匿名)의 저작인 히브리서 1권, 야고보의 저자 야고보서의 1권, 베드로의 저작 베드로 전서와 후서 2편,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저작 요한일서, 이서, 삼서, 3권과 유다의 저작 유다서 1권으로 분류된다.

한편 바울이 저술한 서신들은 바울 서신서라 부르며, 그리고 그 이외의 저자들이 저술한 서신들은 통칭하여 공동 서신서라 부른다. 그러므로 서신서는 그 저자를 기준으로 하면 일단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13권의 '바울 서신'과 바울 외의 사도들이 기록한 히브리서에서 유다까지 8권의 '공동 서신'이다. 이제 이와 같은 분류를 한 눈에 알아 볼수 있께끔 간략히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바울 서신은 수신자 또는 수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그 책의 제목이 니어진 반면, 공동 서신은 수신자를 반영한 이름인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책의 저자의 이름을 따라 그 제목이 붙여진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책  이 름

저자 이름

기록 연대

바울

 서신

로    마  서

바      울

A.D.57년

고린도전서

A.D.55년55년

고린도후서

A.D.56년

갈라디아서

A.D.61-62년

에 베 소 서

A.D.62-63년

빌 립 보 서

A.D.62-63년

골 로 새 서

A.D.62-63년

데살로니가전서

A.D.51년

데살로니가후서

A.D.51년

디 모 데 전 서

A.D.63-65년

디 모 데 후 서

A.D.66-67년

디   도   서

A.D.66년

빌  레  몬 서

A.D.62년

공동

서신

히  브  리  서

  미      상

A.D.60년대 후반

야  고  보  서

야  고  보

A.D.46-49년

베 드 로 전 서

베  드  로

A.D.64년 전후

베드로후서

베  드  로

A.D.64년 전후

요  한  일  서

요       한

A.D.90년

요  한  이  서

요      한

A.D.90년

요  한  삼  서

요       한

A.D.90년

유    다    서

유     다

A.D.70-80년

 


 나. 특징별 분류

서신서를 분류하는 또 다른 기준은 각 서신이 지니는 내용이 용도 및 기록 배경상의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런 특징별 분류는 전통적이기는 하나 서신서 전체를 일관되게 한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특징을 함께 가진 몇몇 서신을 함께 묶어 통칭하는 성격의 분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에 서신서를 각 특징에 따라 구분하는 대표적 실레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교리 서신(敎理書信)

다른 서신들도 교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특별하게 기독교의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등의 주요 교리들을 집중으로 다루면서 그 교리들의 실생활에서의 적용 문제까지 다루고 있는 서신들을 가리킨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이 4권이 이에 포함된다. 한편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기독교의 종말론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교리 서신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사항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따로 '재림 서신' 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옥중 서신(獄中 書信)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 중에서 특별하게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생활함으로써 기록한 서신서를 말한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이 4권이 해당된다.

       3) 교회 서신(敎會 書信)

바울이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 데살로니가 이 7개 교회에 보낸 서신을 가리킨다. (로마서에서 데살로니가후서까지). 이 서신들은 이미 계시된 구속의 원리를 자세히 풀어 설파(說破)하는 가운 데 각 교회 성도들을 때로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 교훈하며, 또 때로는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비하여 성도들의 안이한 또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시정 하도록 책망하며 바르게 이끌기 위해 교육하는 서신서들이다. (딤후 3:16).

       4) 목회 서신(牧會 書信)

바울 당시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의 목회를 담당하고 있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3편의 서신서를 가리킨다. (딤전,후, 딛). 이 서신들은 분명하게 일 개인에게 보낸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교회 전체와 괸련된 문제 곧 교회 직분자의 자격 및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 공중(公衆) 예배와 교회의 질서 유지 등과 같은 귀중한 목회 지침 등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디모데나 디도는 물론 모든 신약 교회의 모든 시대의 목회자와 더 나아가 모든 성도들이 읽어야 할 서신서이다.

       5) 회람 서신(回覽 書信)

처음부터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서를 말한다. 골로새서와 갈라디아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특별하게 골로새서에는 편지를 받은 자가 이 편지를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전하여 그들이 함께 볼 수 있게 하라는 지시가 명기(銘記) 되어 있다.(골 4:16).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초대 교회 전체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문제 곧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돌려 가며 읽었으리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밖에도 비록 서로 돌려가며 일을 것을 지시한 특별한 언급은 나와 있지 않으나 로마서와 에베소서 역시 회람 서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은혜로 말미암은 성도의 구원을 성찰(省察)한 다음 예수님의 지체(肢體)된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덕목들을 역설하고 있는 이 서신서들은 많은 성도들이 널리 돌려 볼 필요가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6) 추천 서신(推薦 書信)

로마인들이 '에피스틀라 콤멘다티아(epistula commendaticia), 즉 '천거(薦擧)의 편지'라고 일컸던 것이다. 이는 편지를 전하는 사람을 소개하거나 그 신분을 보증하기 위해 작성한 서신을 가리킨다. 서신서 중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빌레몬서와 요한 삼서가 있다. 이 중 빌레몬서는 주인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다가 바울을 만나 회심(回心)한 오네시모를 위하여 바울 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로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다. 그리고 요한 삼서는 요한이 가이오에게 보낸 편지로서 가이오의 선하고 신실한 행위를 칭찬하는 가운데 그 서신을 전하는 데메드리오를 천거하는 글이다.

         7) 답변 서신(答辯 書信)

이것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대화 형식을 빌어 스스로 질의응답(質疑應答) 하거나 수신자로부터 받은 물음의 편지에 대하여 담하는 내용을 적어 보낸 서신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와 후서와 빌립보서가 이에 해당하는데 전자,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편지는 교회 내에서의 파당(派黨) 문제, 죽은 자의 부활 문제, 구제 헌금 등에 관하여 질의 응담한 답신서이다. 그리고 빌리보서는 빌립보 교인들이 옥중에 있던 바울을 위하여 보내준 헌금에 대하여 감사하며, 자신의 근황을 알린 글이라는 측면에서 답신서이다.

(그랜드종합주석 서신서 서론 pp 620-622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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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서신


신약성경에서 바울서신과 계시록을 제외한 서신서들을 공동서신(The Catholic Epistles)이 라고 부른다. 그 외에 일반 서신(The General Epistles)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이 서신서들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서신서의 수신 대상이 어느 특정한 개 교회가 아니라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독자를 상대로 기록된 것이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 외에 바울서신과 구분키 위해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공통된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만일 바울서신에서 제외할 경우),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에 의해 기록된 서신서들은 그 주제와 내용이 각각 다르다. 그리고 각각 40여년 간의 기간 사이에

기록됐다. 초대교회는 제4세기경 베드로전서와 요한1서를 정경으로 공인했다. 기타의 서신들은 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모든 교회에서 정경으로 인정했다. 개인적으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히브리서를 제외한 현재의 7권의 서신을 공동서신으로 인정했으며, 그 후 1545년 트렌트 회의에서 정경으로 확인한 것이다.

 

1. 공동서신 저자에 관한 견해 차이들

 

개혁교회의 보수주의에서는 공동서신이 그 편지의 발신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진보적인 사람들은 비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훨씬 후대 교회 사람들이

유명했던 사도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한서신도 베드로전서, 유다서도 또 야고보서도 실제 그 사도들의 기록물이 아니라 익명의 성도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서신의 집필 시기도 주후 64-200년까지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진보와 보수측의 견해 차이는 공동서신 각론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대체로 정통 보수측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각 서신서에 기록된 당시의 사도들과 전도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2. 공동서신의 가치

 

바울서신이 기독교와 그 복음 진리를 해석하고 적용하고 확립시킨 '골격'의 가치를 지녔다면, 공동서신은 '힘줄과 살'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동서신은 심오한 신학론이나 신비스러운 경험보다는 대중적이요, 윤리적이요, 교훈적인 내용이 주된 주제다. 실제적인 신앙 훈계와 권면으로 당시 핍박과 이단의 유혹과 신앙적 시험에 둘러 쌓였던 모든 교회에게 힘과 지혜를 주고자 기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서신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가 당면했던 보편적인 문제와 다양한 삶의 구조를 알 수 있다. 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바울 이외에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의 신앙 사상과 생각과 인품들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공동서신이 깊고 높은 신학적인 내용은 바울서신과 비교해 볼 때 가볍다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바울이 말한 신학과 진리가 공동서신 속에서는 '육화'되어 나타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만이 신야성경의 기자로 세우시지 않고 다양한 공동서신의 기자들을 따로 세우신 뜻은 이 세상의 성도들과 그 삶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논리와 공동서신의 풍성한 교훈은 서로 상호 보완하여 성도의 신앙을 깊고, 넓고, 높은 자리로 인도해 줄 것이다. 이처럼 공동서신의 가치는 신약의 감동된 정경으로서, 또 그 시대의 역사적 기록물로서 그리고 문학적인 가치로서 바울서신 못지 않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3. 공동서신의 특징

앞에서 말한 공동서신의 가치는 그 구성과 내용의 특성에서 기인된다. 우선 특정 지역이나 교회가 아닌 모든 교회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정황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실제적이며 대중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바울서신처럼 이론적이며 예방적인 성질보다 당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의 삶의 애로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이나 교훈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그 내용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대중적인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 다양한 주제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서는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베드로후서는 참희망과 참지식을, 요한서신은 사랑의 가치를, 유다서는 이단자들에 대한 경계를 주제로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해 기독교 진리의 다양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터득할 수 있다.

 

4. 공동서신의 각 개관

 

본 연구에서는 바울서신에서 다루지 않았던 히브리서도 공동서신의 범주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1) 히브리서

작자 미상이다. 바울, 아볼로, 바나바 등으로 추론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목회자, 신학자, 철학자의 자질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기록할 수 있는 심오한 내용과 구체적인 신앙 권면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율법과 제사와 예언의 완성이시며 본체이심을 강조하며, 그분만이 영원하고 유일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대제사장'이심을 증거한다.

 

2) 야고보서

헤이스(Hayes)라는 신학자는 '야고보서는 신약 속의 구약성경이다'라고 말했다. 그 안에 기록된 그리스도께 대한 두 세 구절의 언급을 제외시킨다면 마치 구약의 잠언서를 보는 듯하다. 야고보서는 바울서신의 대주제인 '신앙으로 인한 구원'과 반하는 듯한 내용이 있어 몇몇 개혁자들로부터 외면당한 예도 있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신앙을 성도의 전인격을 통해 관조하고 강조한 것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사상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생각'이 분명 아니다. 인격과 삶의 열매로 나타난다. 이는 바울서신서에도 강조되는 내용이다.

 

3) 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는 대사도 베드로의 아름답고 거룩한 신앙 인품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신앙고백서요, 위로서이다. 당시 로마 제국 판도 안에서 이질적인 존재들로 업신여김받고 오해받고 핍박받는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고자 쓴 베드로의 첫째 서신이다. 그 주제는 '고난을 상쇠하는 참희망'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성도들의 삶의 본분 중 한가지이며 그와 같은 삶에는 영원한 축복이 따름을 역설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처럼 핍박하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 주는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삶의 종말적인 위기가 올지라도 말은 사회적, 신앙적 의무에 최선을 다할 것을 전하는 내용이다. 후서는 베드로 사도의 유언장과 같다. 순교하기 전 자신의 마지막장을 감지하고 보낸 공동회람 문서이다. 당시 교회에 일어나기 시작한 신비철학 종교인 지혜 종교(영지주의)의 폐단을 지적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4) 요한서신들

요한서신중 요한1서를 제외하고 2,3서는 특정한 사람에게 보낸 서신이다. 그래서 공동서신의 범주에 제외시키는 이들도 있다. 요한 1서의 주제는 참사랑이다. 이는 요한복음 14,15장의 확대다. 신앙과 지혜와 덕의 권능은 사람에 있음을 강조한다. 당시 성행하던 영지주의에 물든 자들을 깨우치고 교화하며 예방키 위해 쓴 것으로 본다. 참된 성도, 참된 하나님의 자녀와 그 증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증거를 지닌 자임을 말한다. 요한2서는 1서의 내용과 관계된다. 즉 거짓 진리를 전하는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다. 요한3서는 교회의 질서에 대한 교훈이다. 교만하고 그릇된 어느 신자의 예를 들어 그것을 정죄하며 진리 안에서 행할 것을 강조한다.

 

5) 유다서

유다서는 주 예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 사도의 동생 유다가 쓴 서신이다. 베드로후서와 그 내용이 흡사하여 논란이 많은 서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다가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서신서를 기록한 것으로 본다. 그 내용은 역시 이단자들의 침투와 오염을 경계하는 것이며 그들의 운명에 대해 통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처럼 공동서신의 주제와 내용은 다양하고 풍성하다. 그만큼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메시지가 풍요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서신의 내용은 오늘 현재 경건한 삶을 갈망하는 모든 성도들의 삶에 있어 각 분야의 교사가 될 것이다.



제 1 강 히브리서


1. 명칭

 

본 서신의 명칭은 한마디로 애매하다. 초기 전승은 본 서신의 명칭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거나 언급하는 경우 '히브리인들에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주후 2세기경 활동한 판테누스와 터툴리안 역시 본 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본 서의 표제만은 '히브리인들에게'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명칭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2세기에 이 문서가 바울 서간집에 포함되었을 때 편집자가 '로마인들에게'와 같은 말에서 유추하여 이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명칭은 단순히 수신자가 유대인들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편집자의 막연한 느낌을 반영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명칭에 관한 불확실성은 본 서신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불리한 점이 되어 왔다. 물론 서신의 내용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을 찾아내어 추론할 수도 있지만 본 서신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은 매우 애매하고 단편적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명칭에 관한한 누구도 확정적인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2. 수신자

 

만일 '히브리인에게'란 명칭이 원래의 명칭이 아니라 편의상 편집자가 본 서신에 갖다 붙인 이름이라면 수신자를 밝히는데 있어서 명칭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가능한한 성경 본문의 내증에 근거하여 밝혀져야만 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본 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집단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개종한 이래 계속 박해를 받았는데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생활이 시작된 직후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아주 떠날 위험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계속 신앙의 전진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헬레니스트였음을 본 서신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은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옛 제사의식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구약성경을 읽은 데서 얻은 것이지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직접 접한 데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되어 있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계속되는 박해의 위협 속에서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강한 유혹에 처한 헬라어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보여진다.

 

3. 저자


1) 바울 저자설

본 서신이 누구에게 보내졌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여 또한 누가 이 서신을 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 바울이 저자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유세비우스 등의 신념은 동방 기독교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고 궁극적으로는 4세기 말엽에 서방 교회의 판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본 서신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경우처럼 단정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본 서신에 나타난 문체와 사상의 양식은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 즉 본 서신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역에서만 구약성경을 인용했으며 바울의 문체보다 훨씬 유창한 헬라어를 구사하고 있다.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은 바울의 저자설을 부인하기에 충분하다.

 

2) 바나바 저자설

주후 220년에 글을 쓴 터툴리안은 히브리서의 저자로 바울의 동료이며 사도인 바나바를 지적한다. 이 견해는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들의 일반적인 견해로 보여진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유력한 인물로서 '권위자'(행4:36)라고 불렀으며 헬라 사상에 젖어 있던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사 제도를 구속사에 정확하게 적용하여 기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했으므로 히2:3의 내용과 부합된다. 그러나 이것은 터툴리안이 지나치게 반유대주의저인 편에 있는 가짜 바나바의 편지와 성경의 사용법이 유사한 것을 보았을 뿐 초대교회 당시의 외적 증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3) 기타 저자설

419년 칼타고 회의 때 가서야 비로소 본 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이 동방에서처럼 사방에서도 전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비평적 판단을 하는 주석가들은 여전히 본 서의 저자가 로마의 클레멘트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가를 본 서의 번역자 또는 편집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은 누가나 로마의 클레멘트를, 루터는 아볼로 저작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본 서를 썼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것은 저자는 제2세대 그리스도인으로서 70인역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가졌으며 바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사학적인 문체의 대가였다. 그는 성경에 능한 자로서 스데반과 빌립의 동료들이며 이방 선교의 선구자들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을 이어받은 한 헬레니스트였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본서를 썼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그 진상을 아실 뿐이다.

 

4. 기록연대

 

본 서의 기록 연대에 관하여 성전이 아직 기능을 하고 있었던 시대로 보는 견해가 전통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성전 파괴 이후로 연대를 계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크게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조기 기록설(A.D.58-60년)과 예루살렘 멸망 직전설(A.D.70년이전)과 그 이후의 설(A.D.80-90년)로 각각 나누어진다. 이와 같은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로마의 클레멘트 히브리서 인용, 성전 제사의 진행여부, 박해 시기, 신학적 발전 여부에 따른 내, 외증에 의해 결정한다.

 

5. 목적

 

그 당시 독자들은 예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현재 계속되는 기독교안에 대한 박해와 죄의 문제로 딜레마에 빠져 유대교로 회귀함을 통해 제사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들은 세례 이후 죄의 문제로 시달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신학적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브리서 독자들의 특별한 상황에 비추어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도움이 됨을 논증하기 위해 히브리서의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께서 현재 대제사장 되심과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계속적으로 주고 계심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종말론적으로 한 번 영원히 효과 있는 제사로써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좀 새로운 논제로 이 문제의 해결을 전개한다.



제 2 강 야고보서


1. 서론

 

우리는 이제 신약성경 중 공동서신(General Epistles)이라고 부르는 부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바울서신처럼 어떤 특정한 교회에 보내진 서신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것이요. 그리고 여러 사도들의 서신서를 묶은 것이기에 공동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첫머리를 장식한 서신이 바로 야고보서라고 불리우는 본 서이다. 야고보서는 흔히 '신약의 잠언서'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신앙의 실천, 신앙인의 삶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저자와 기록 연대

 

1) 본 서의 저자 문제

많은 사람들이 본 서의 저자가 주 예수의 육신의 동생인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그 이유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이 본 서와 같은 고상한 희랍어를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요, 그 다음 문제로는 성모마리아를 신봉하는 구교에서 제기한 내용으로 예수님에게는 사촌만 있고 형제들은 없다는 견해 때문에 비롯되었다. 즉 마리아의 '무흠수태'(Immaculat conception) 교리를 지킴으로써 마리아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보호하고자 지어낸 이론으로 이것을 '히에로니무스 설'(Hieronymian)이라 부른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출산한 후 순결을 지켰으므로 야고보와 같은 예수의 씨다른 형제는 있을 수 없고 오직 사촌들만이 있는데 성경에서 그들을 예수의 형제나 가족으로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이 사촌들도 그렇게 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 설을 신봉하는 자들은 '작은 야고보'로 불리는 '알패오의 아들 사도 야고보'이며, 예수의 사촌으로서 글로바의 아내, 즉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자매인 마리아의 아들로 보는 것이다.

 

2) 본 서의 저자가 주의 동생이라는 증거

그렇다면 우리는 본 서의 저자가 어떤 이유로 예수그리스도의 동생인 초대교회 사도 야고보로 볼 수밖에 없는가? 먼저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예수의 동생들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마13:55). 그 중에는 분명히 야고보도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약속대로 예수를 출산한 후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예수와 육신적으로 이복 관계인 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정통 개혁교회들은 믿는데 이 이론을 '헬비디우스 설' (Helvidian)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본 서의 저자가 주의 동생 야고보가 될 수 없다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다음 희랍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모국어와 함께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사도 요한도 많은 서신서를 고급스러운 희랍어로 사용치 않았는가? 그 다음 약1:1에서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밝힌 점이다. 이 사실이 저자의 권위에 대한 확실한 증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감독이자 사도였던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아니라면 다른 표현으로 자신을 밝혔을 것이다. 그 다음 본 서 전체에 나타나는 명령적인 용법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와 가장 친근하게 생활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와 유사한 표현법과 내용 등이 본 서가 주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산 증표이다. 그는 주후 62년경 순교했으니 그 시기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3. 수신자와 기록 목적


본 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1:1)라고 시작한 것으로 보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 성도를 주대상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페스(Ropes)라는 신학자는 "모든 성도들은 저 하늘나라 본향을 떠나 이 땅에 흩어진 순례자(Diaspora)이며 새로운 이스라엘이다"라고 했다. 비록 야고보 사도가 유대 출신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었을지라고 그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된다. 기록 목적은 '시험과 갈등의 해결'을 위한 것으로 본다. 외적인 박해로 인한 시험, 교회 내 다른 이웃과의 갈등을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을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해결하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중심 요지인 것이다.

 

4. 타성경과의 연관성 문제

 

루터와 같은 개혁가는 본 서를 '지푸라기'라 불렀다. 바울에게서 확인 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배치되는 듯한 인상을 본 서에서 받았으리라. 그러나 본 서의 내용 중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바울서신서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충적이다. 바울서신에서 강조된 믿음 역시 실천적인 삶을 요구한다. 야고보는 다만 그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5. 본 서의 특징

 

1) 유대교적인 논증

내용이 일관된 논리적인 진전이나 사상의 체계는 없다. 다만 당시 유대 랍비와 희랍의 지혜자들의 교수법과 설교 양식이 발견된다. 즉 설교자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그 답을 하는 식이다.

 

2) 교리 중심이 아닌 생활 중심

본 서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죄, 고난, 부활이 없다. 다만 일상생활에서의 신앙적인 인내, 정절, 선행 등이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본 서를 신약의 잠언서라고 칭하는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와 흡사한 교수법

본 서에는 자연을 사용한 비유법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수법이다. 주 예수와한 지붕에서 오랫동안 지낸 주의 동생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교수법이다.

 

6. 본 서의 내용 개관

 

1. 시험과 시련에 관한 교훈(1:1-16)

2. 참예배와 그릇된 예배에 대한 교훈(1:17-2:13)

3. 무가치한 신앙 생활에 대한 교훈(2:14-3:12)

4. 참지혜에 관한 교훈(3:13-18)

5. 교회의 분쟁과 세속화에 대한 질타(4:1-12)

6. 불의한 유력가에 대한 경고(4:13-5:6)

7. 인내에 대한 격려(5:7-11)

8. 맹세, 고난, 질병, 기도, 전도에 대한 금언(5:12-20)



제 3 강 베드로전서


1. 서론

 

우리는 이제 공동서신의 두 번째 서신을 접하게 된다. 베드로의 첫 보통 서신(The First General Epistle of Peter, KJV)으로 명명된 본 서신은 공공 서신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내용으로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가장 밀접한 사도였던 신앙과 위로와 교훈으로 가득한 이 서신의 가치를 온전하게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경건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귀중한 격려와 소망을 주는데 있어서 본 서만큼 가치가 있는 책은 없다고 할 것이다.

 

2. 저자 문제

 

본 서는 1세기 말엽부터 교회들이 베드로 사도의 첫 편지로 인정해 왔다. 로마 교회의 교부 클레멘트, 또 유명한 폴리갑, 이레나이우스, 터툴리안 그리고 3세기의 오리겐에게 이르기까지 베드로전서가 베드로 사도의 것임을 의심치 않고 그 내용을 공공연하게 인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의혹을 제기한다. 첫째, 본 서에서 사용된 헬라어가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고상하다는 것이요, 그 다음 본 서의 내용이 너무나 바울 사도의 사상과 흡사하다는 것이며 그리고 본 서에서 다루는 고난과 박해는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기 전에는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문제는 본 서 5:12에서 밝혔듯이 용역자 실루아노가 대필했음이 분명하며, 그는 바울의 중요한 동반자로서(행15:40 ; 행16:19) 바울에게 깊은 신학적인 영향을 받았기에 베드로 사도의 말도 바울처럼 표현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언약과 교훈을 직접 체험한 사도로서 그분의 죽음, 고난, 부활, 승천, 재림의 언약도 직접 목도한 사도이기에 바울서신의 교리들을 산 경험으로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도인 것이다. 또 박해와 고난 문제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주후 62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상도들은 개인적으로 위기를 느낄만큼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임박하는 말세적인 대박해를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와 고난에 대비한 신앙 무장을 강조했던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1) 저작시기

대개의 학자들은 본 서가 로마 제국의 대박해 시기 중 어느 한 시기의 직전이나 초기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본 서의 분위기나 표현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벧전4:7) 또는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라고 베드로는 종말적인 대환란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베드로 사도는 주후 68년경 대박해 기간 중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네로 황제에 희한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첫 박해는 주후 64년경부터이다. 그 당시 네로는 기독교를 불법 단체로 간주하고 온 로마 판도 각처에서 개인적으로 사회로부터 냉대와 불이익을 당했었으며 누구나 곧 대대적인 박해가 닥칠 것을 예견했고 교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될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온 주후 63-64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2) 저작 장소

본 서에는 그 저작 장소가 언급되어 있는데, 즉 바벨론에 있는 교회(벧전5:13)에서 기록하여 보낸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벨론(벧전5:13)에서 기록하여 보낸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벨론은 어디인가? 중세의 에라스무스, 칼빈 등은 유브라데 강 유역의 유대인 정착지인 바벨론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집트 카이로 근처인 앗시리아인 정착지가 바벨론으로 불리워졌으므로 그 곳에 관심을 두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은 당시 로마를 상징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은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계14:8 ; 계17:5). 구전에 의하면 베드로는 말년에 20여년간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주후 64년 늦여름 네로의 분노의 희생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본 서가 로마에서 기록된 것임에 유력하다.

 

4. 저작 목적과 대상


본 서는 임박한 대박해로 인한 삶의 시련에 대한 신앙 무장을 위해 쓰여졌다. 물론 그 대상은 로마 판도 안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위대한 점은 다가올 박해를 소극적으로 맞을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박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영광스러운 것이요, 그 상급으로 영생 복락을 맞이하게 되는 축복임을 강조하므로써 성도들에게 한없는 힘과 위안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본 서는 격려의 서신 또는 소망의 서신으로 부르는 것이다.

 

5. 본 서의 특징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

벧전1:2은 본 서의 주제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다.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신 성부, 고난과 영광에 참예케 해주신 성자 그리고 위로의 성령에 관한 내용이 본 서 전체에 흐른다.

 

2)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관한 자세

고난은 곧 닥칠 것이나 한시적인 것이요, 그 고난으로 교회와 성도들은 더욱 견고케 될 것(벧전5:11)이며 극 고난으로 성도들은  더욱 성화될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고난의 증인인 베드로 사도의 빛나는 교훈은 고난에 대한 성도의 자세다. 즉 고난으로 삶의 종말이 올지라도 성도의 본분과 사명을 더 열심히 감당하라는 것이다. 열심히 선을 행하며, 열심히 봉사하며, 더 뜨겁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벧전4:7-11). 이와 같은 자세는 오직 고난의 주 그리스도의 그 자세를 본받음으로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다(벧전2:18-25). 그러므로 본 서는 종말때에 행할 성도의 신앙 윤리의 지침서의 가치도 지닌다.

 

6. 내용 개관

 

1.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1:1-12)

2. 은혜에 대한 성도의 자세(1:13-2:12)

3. 고난중에 지녀야 할 자세들(2:13-3:12)

4. 고난중에 행해야 할 일들(3:13-5:9)

5. 축복과 인사(5:10-14)



제 4 강 베드로후서


1. 서론

 

교회의 위기는 성도의 신앙적 삶의 위기에서 기인된다. 교회 구성원인 성도 각 개인의 삶의 정황이 곧 교회의 형편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교회 위기의 배경은 무엇인가? 베드로전서는 외적인 박해로 인한 위기에 대한 지침서인 반면 베드로후서는 이단 사설로 인한 교회의 내적 위기에 대한 경계서이다. 성도 각 개인이 거짓 교사와 거짓 교설에 물들어 반성서적인 신앙을 지닌다면 교회는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2. 저자 문제

 

1) 가장 의심받는 본 서의 저자

신약성경 중 본 서처럼 저자의 진위 문제에 논란이 많은 정경은 별로 없을 것이다. 본 서는 2,3세기경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전서를 사도 베드로가 쓴 것으로 인정했으나 베드로후서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리겐(Origen)도 마찬가지로 제2서신서는 다소 의심스럽다고 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도 루터(Luther)만이 베드로의 저술을 인정했고 칼빈(Calvin)이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부인했다.


20세기의 학자들(진보적)은 거의가 베드로후서를 위작으로 보며, 신약성경 중 가장 후대에 기록되어 삽입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서와 후서의 전혀 다른 주제의 차이. 또 문제의 차이와 표현이 전서는 매우 고상한 반면 후서는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그 다음 유다서와 내용이 많이 중복되었다는 점과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고 언급한 점(벧후3:4) 그리고 신앙의 조상들(사도)이 이미 잠들었다고 언급한 점과 교회가 늦게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본 서가 2세기경 어느 무명인에 의해 위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2) 베드로 사도가 저자인 증거들

그러나 그와 같은 문제들이 오히려 사도 베드로만이 본 서의 저자임을 대변해 주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드로는 분명히 '시몬 베드로'(벧후1:1)라고 자신을 밝혔다. 만일 위작이라면 그냥 베드로 사도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생한 신앙의 경험담, 즉 변화산에서 주님이 변모하신 사건을 말하고 있다(벧후1:16-18). 이는 베드로 자신이 아니면 증거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 다음 문체나 어휘가 틀린 것에 대해서는 전편이 실루아노의 대필로 작성된 것이라면 후편은 베드로 스스로 쓴 것이기에 헬라어의 수준이 다르고 문체가 다른 것으로 본다. 또 유다서를 인용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베드로후서는 '거짓 교사'들을 앞으로 나타날 존재들로 말하며 미래 시제로 표현했고, 유다서는 현재 시제로 말했음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어휘나 내용이 전서와 1/6이 일치한다. 이는 전서나 후서가 같은 사람이 쓴 것임을 반증한다. 그리고 권위 있고 단호하게 바울 사도가 쓴 서신서의 영감적 권위(정경성)를 인정하는 내용도 있는데(벧후3:16), 이는 사도 베드로 외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몇몇 사례만 볼지라도 본 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만일 본 서가 베드로가 쓴 것이라면 전서의 집필 시기인 주후 63-64년에서 순교한 주후 68년경 사이일 것이다. 벧후1:13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옴을 암시한 듯한 내용으로 볼 때 본 서는 순교 직전인 67-68년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장소도 마지막 활동 무대였던 로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대상과 목적

 

이 공동서신 역시 베드로의 첫째 서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교회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 판도에 있었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벧후1:1에서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한 것이다. 본 서의 수신자들은 이미 기독교의 모든 진리 체계를 이해하고 믿는 자들이다(벧후1:12). 그들은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이미 알고 있고 그의 가르침에 진지한 열의와 사모심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본 서를 기록했을까? 그 목적은 크게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인 문제와 당시 세계 교회의 보편적인 당면 문제 때문일 것이다. 즉 사도 베드로는 유언적으로 온 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1:15)는 말대로이다. 그 다음 세계 각처에서 성행하는 이단적 종교 사조인 '영지주의 풍조'를 경계하고자 본 서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벧후2:1-3). 영혼만 귀한 것이요, 육체는 하찮은 것이니 육체로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없다는 교설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사도 베드로는 종말적인 심판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한다.

 

5. 주제

 

'신앙적인 참지식'이 본 서의 큰 주제이다. '앎, 지식'(Know, Knowledge)이라는 말이 16회나 반복된다. 끝 말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3:18)고 했다. 이는 당시 특별한 영적 지시과 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미혹하는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강조했다(벧후1:5-7).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이 극단적으로 무도덕한 생활을 했기에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지식과 지혜임을 교훈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활은 종말에 필히 시행될 하나님의 대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신앙의 참 지식, 참지혜가 본 서의 강조점이다.


6. 내용 구성

 

1) 참된 지식의 의미(1장)

2) 거짓 지식을 전하는 자에 대한 경계(2장)

3) 참지식과 거짓 지식을 따르는 자들의 미래(3장)


제 5 강 요한서신


1. 요한서신의 서론

 

요한 1,2,3서를 요한서신이라고 한다. 이 서신들은 공동서신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견들이 있지만,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다른 문서들-요한복음, 요한 계시록-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서신은 세 개로 나눌 수 있는데, 논문 형식을 취한 요한 1서와 일반적인 서신 형식을 취한 요한 2,3서가 있다. 각 요한 서신들간에 보여지는 상이점도 있지만 이 서신들을 일괄적으로 연구하는 데는 별무리가 없다. 따라서 세 서신을 일괄적으로 연구함으로 요한서신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알아 보아야 할 것이다.

 

2. 요한서신의 저자와 저작 연대 

  

1) 요한 서신의 저자

본 서신들이 요한의 저작이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많은 이견들이 있다. 요한의 다른 문서들과 요한1,2,3서의 저자가 다르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사랑의 사도로 불려지는 요한이 이단에 대한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을 들어서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무식한 어부 출신인 요한이 본 서에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깊고도 오묘한 글을 썼을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아닌 본 서에 등장하는 '장로'요한이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의 대다수 학자들(Alford, Calvin, Meyer)은 요한이 저자라는 데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에서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주교들(Tertullian, Origen, Cyprian)도 요한의 저작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장로라고 표현한 것은 직분을 가리키기보다는 헬라어의 원뜻인 '연장자'라는 의미에서 사도 요한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본 서신의 기독론에 대해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것은 요한복음의 사상과 비슷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요한의 저작인 다른 문서들과 문체나 신학 사상 그리고 어휘들을 살펴볼 때 요한이 본 서신서들의 저자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학자들도 이 사실에 대해 동의를 한다고 한다.

 

2) 요한서신의 저작 연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저작 장소와 깊은 연관이 있다. 저작 장소에 대해 알아보면, 요한이 팔레스틴 지역에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요일5:21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많은 역사가들(Eusebius, Irenaeus)은 에베소에서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본 서신은 에베소에서 요한이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며,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 서신이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 둘째로는 본 서신과 요한복음이 같은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요한복음보다 본 서신이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지만, 본 서신이 요한의 말년에 기록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연대를 말한다면 주후 90-95년경으로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요한이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의 공격이 있었으며,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81-96)라는 로마 황제의 박해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본 서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3. 요한서신의 주제와 목적

 

1) 요한 서신의 주제

먼저 요한1서에서 보여지는 전체저인 주제는 '교제'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1서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물든 초대교회에 대해서는 폭탄적인 선언을 하였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요한2서에서는 성도들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성도들의 삶은 참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하며, 한편 요한3서에서는 성도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특히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도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주제를 종합하여 본다면, 요한서신의 주제는 '사랑의 윤리에 대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보여 주신 사랑이 전통적으로 유래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실천을 성도들은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다. 단지 이론으로 끝나 버리는 사랑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여 열매 맺는 사랑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형제요, 이웃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2) 요한서신의 목적

요한의 서신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주제가 있다고 한다.

그는 먼저 서로간에 사귐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쁨을 주기 위하여,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잘못된 교리들에 대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구원의 확신을 지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은 새로운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야기된 상황이었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는 복음으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주장과 진리의 복음을 구분할 수 있는 표준을 알지 못해 우왕 좌왕하는 상황 속에서 본 서신이 쓰여졌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란 분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이탈자들이 아니라 독자들 자신이 그 표준임을 알리기 위하여 본 서신이 쓰여진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으며, 참하나님이시며,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세주이심을 요한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본 서신은 예수그리스도의 선재설을 밝힘으로써 두 가지의 성품-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거짓 가르침에 대해 논박하고 있으며, 예수그리스도가 보여 주셨던 사랑을 성도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요한서신의 특징

 

1) 요한서신의 특징

요한1서는 2,3서와 같이 편지글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으며, 교훈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서신은 일반적인 독자들이 아니라 교회에서 영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본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랑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상을 표현하는 단어는 극히 단순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심오한 요한의 사상은 '사도적 권위의식'을 잘 표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도와 같이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본 서신의 문체는 히브리서의 문체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요한2,3서는 신약의 서신 중 가장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이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 6 강 유다서


1. 저자와 저작 연대

 

1) 저자

본 서신은 1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에 의해 기록되어졌다. 본 서신은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반박을 하고 나선 일부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본 서신에 나타나는 영지주의 이단은 2세기에 있었던 것이며, 본 서신은 인용한 인용구는 외경인 에녹서와 모세승천기에서 인용된 것으로 이것은 2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많은 외적인 증거에 의해 묵살되어 버리고 만다. 즉 초대 교부들은 본 서신이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에서도 유다의 저작으로 보고 있다. 내적인 증거로는 유1:1에 잘 나타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유다란 이름이 많이 나온다(막3:19 ; 막6:3 ; 눅3:30 ; 눅6:16 ; 행5:37 ; 행9:11 ; 행15:22). 그러나 이들 중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본 서신이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막6:3)가 기록하였다고 인정하게 된 것은 4세기 이후에 와서였다. 오늘날도 본 서신의 저자가 유다라고 알고 있는 것에 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저작 연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기록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근사치에 가까운 연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본 서신의 저작 연대를 2세기 중엽에서 말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이 예루살렘의 멸망 이전과 이후 중 어느 한 때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본 서신의 내용 중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멸망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주후 70년 이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세기 후반에 발흥되었던 영지주의에 대한 성도들이 경계를 그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예연적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락 이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유다가 주후 70-80년에 순교하였을 것으로 추정됨으로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주후 80-90년으로 보든지 훨씬 이후인 1세기 말엽으로 보는 것이 모든 상황에 적절할 것이다.

 

2. 특징과 목적

 

1) 특징

유다서가 공식적으로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때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가 주후 367년에 그의 정경에 본 서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인정은 주후 397년에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o)에서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Nicaen Council)에서는 본 서신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 서신이 외경인 '에녹서'와 '모세승천기'를 인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본 서신은 비록 짧은 문장으로 기록되어져 있지만 그 구조 면에서 서신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서신의 마지막 축도 부분이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롬16:25-27)에 기록되어 있는 부분과 상통한다는 사실을 들어 유다가 바울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기도 한다. 유다서의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본 서신 자체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짧은 내용 속에 구약의 많은 인물들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단자들에 대한 태도가 아주 논리저이고 단호한 것도 본 서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외경을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바울도 이방 시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으며(행17:28), 랍비의 문헌인 미드라쉬르 인용하기도 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고전10:4). 


2) 목적

유다서는 교회 내에서 일고 있는 이단들의 정체와 그들에 대한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유다는 교회 내에 침투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하게 하며,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자들을 경계하고,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야 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 서신은 영지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성도들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라고 한다.


본 서신은 베드로후서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의 침입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수신자들에게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울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기존적으로 받아들인 성도의 구원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가르침에 현혹되는 성도들이 있음을 알고 유다는, 이들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헤어나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본 서신의 목적은 유1:3유1:4에 잘 나타나고 있다.



3. 유다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와 내용 그리고 주제 

  

1) 유다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

유다는 당시 만연해 있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이원론적이다. 즉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육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도덕적으로 방탕한 모습을 보였다(유1:4). 그래서 유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말한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종말에 심판하실 심판자로서의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유1:15). 그리고 이단자들로부터 성도들을 영원까지 보호하여 주시며(유1:24). 언제나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유1:21).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 거리로 만드는 이단자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인 것이다. 유다가 말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할 때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어떠한 유혹이라도 굳건히 이기며 신앙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2) 유다서의 내용과 주제

본 서는 크게 세 가지의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가지신 권위와 예수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리고 믿음의 실천이 믿음을 지키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인 사고를 통하여 이단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본 서신의 내용은 이단자들의 특징적인 면과 그들이 종말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확신적인 면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도들의 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 서선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단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말고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인한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울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 66권 전체가 그러하듯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