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모세의 노래를 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출애굽기 15장
둘째는 신명기 31-32장
셋째는 요한계시록 15장
출애굽기 15:1-11
1.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2.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3.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4.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5.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7.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8.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9.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0.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19.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출애굽기 15장에는 바다의 노래(쉬랏 하-얌, Shirat ha-Yam)라고 불리는 모세의 노래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노래가 나온다.
모세는 태어나 2번의 노래를 부르고 죽는다.
첫번째는 출애굽기 15장의 바다의 노래
두번째는 신명기 32장에서
그가 죽음을 앞두고 부른 노래이다.
바다의 노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출애굽을 마무리 짓고 휘날레를 장식하는 노래이며
애굽의 군대가 홍해 바다에 빠져 죽음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눈으로 목격하며 부른 노래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바로의 대결에서
압승으로 끝난 하나님의 승리와 바다에서의 구원을 노래한다.
14장 31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믿었다고 기록한다.
애굽
땅에서 많은 이적과 기사를 체험했음에도 아직 믿음의 실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들은 홍해 바다에서의 구원을 통해 비로소
믿음을 가지게 된다.
바다의 노래는 노래를 통해 그들이 갖게 된 믿음을 확인하고 증거하며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믿음으로 갖게 된 크리스천의 신앙고백이며 간증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홍해 바다에서 만났다.
교회에 처음 나간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처음 만나 다시 태어남을 체험했던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바다의 노래는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담아 하나님께 바치는 노래이며 예배이다.
21절에 나오는 미리암의 노래는 미리암과 여인들이 부른 노래이며 모세의 노래의 메시지를 요약하여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이 노래는 교회 성가대에서 부르는 합창과 같은 찬양의 이미지를 준다.
모세의 노래와 미리암의 노래는 홍해 바다에서의 극적인 승리의 순간을 기념하는 승리의 노래로 동시에 불려진 것으로 보인다.
모세의 노래에서 하나님은 싸우는 전사(Warrior)로 묘사된다.
3절에는 여호와를 용사로 묘사하며 4-7절까지 구체적인 전쟁의 행위를 묘사한다.
여호와는 바로의 병거와 군대를 바다에 던지신다.
모세의 노래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부분이 없다.
대신 여호와가 바로의 군대를 물리치고 그들을 바다 속 깊은 곳에 빠지게 한다.
전쟁의 주체인 하나님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노래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강조된다.
3절에 여호와는 그의 이름임을 선언한다.
왜 하나님의 이름을 강조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구원을 눈으로 목도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생각처럼
단순한 말이 아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생각과
확고한 태도가 있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어두운 과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단과 의지에서 오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공허한 부르짖음에 불과하다.
3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기 전 2절에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아니라 나의 구원임을 강조한다.
자신의 마음 속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고 세상의 만물 위에 뛰어난 존귀한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모델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을 닮아감으로써만 가능하다.
구원은 이미 끝난 과거형이 아니라 오늘도 계속 되어야 하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믿음 생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의
이름인 예수를 증거하고 높이는 길이며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진정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2절에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라는 표현과 함께 여호와는 나의 힘과 노래,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반복적인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아이덴터티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려주며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과거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미래의 하나님이시다.
모세의 노래의 전반부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후반부는 이스라엘에게로 초점이 바뀌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주의 성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끝나며 현재의
구원을 넘어 미래를 향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거쳐 하나님의 성산에 이르게 되고 그 곳에서 왕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성소이다.
모세의 노래의 마지막은 여호와의 다스림이 영원하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다.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며 하나님의 나라도 영원하다.
모세의 노래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 하나님의 성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바다의 노래(Song of Sea)가 성산의 노래(Song of Holy
Mountain)로 바뀐다.
바다에서의 승리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있는 성소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클라이맥스를
이루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여느 종교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찬송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기독교에서 찬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예배 시간에도 찬송을 많이 부릅니다.
노래를 많이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최초의 노래는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고 말했습니다(창 2:23).
이것이 최초의 노래입니다.
새번역성경에는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것에 대한 아담의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노래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래가 많이 나옵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도 노래가 나왔는데,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도 노래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날 하나님의 백성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의 처음과 끝에 노래가 나옵니다. 에덴동산에서 노래를 불렀고, 천국에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장차 천국에 가면 찬송을 가장 많이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5장 19절에 보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한 후에 이어서 예배에 대해 말했습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예배의 핵심입니다.
찬송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어디든지 찬송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신자들은 어디서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이면 찬송합니다. 장례식장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찬송이 살아있는 공동체는 소망이 있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부흥한 시대에는 그 시대를 살리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을 많이 부를 때, 신앙이 성장합니다.
본문에 보면, 형식을 갖춘 최초의 노래가 나옵니다. 본문에 기록된 노래를 통해 찬송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찬송이 무엇인가, 누가 찬송할 수 있는가, 무엇을 찬양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무엇인가를 찬양합니다. 사람들은 예술작품, 멋진 건축물을 보며 감탄합니다. 감탄하는 것도 일종의 찬양입니다.
세상의 노래가 그렇습니다. 노래 속에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노래의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노래는 위력이 있습니다.
노래는 사람의 뇌파를 자극합니다. 노래는 사람의 내면을 자극합니다. 감정을 움직입니다. 노래가 사람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의 영향을 받습니다. 허무주의적인 노래를 많이 부른 가수는 일찍 죽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노래는 사람의 내면을 표현한 것입니다. 노래는 사람의 인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시대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수만 노래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의 영향을 받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에서는 단조의 노래를 부르기보다 활발하고 힘 있는 찬송을 해야 합니다. 평소 많이 부르는 찬양은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노래해야 합니까? 본문 출애굽기 15장 1절에 보면,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18절을 가리켜 ‘모세의 노래’라고도 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부른 노래로 여겨집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노래를 부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본문 앞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본문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후 부른 노래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놓여있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옵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것은 반전 중의 반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셨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1절에 보면,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1절이 ‘이 때에’라고 시작하는 것은 출애굽기 14장과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후에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후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은 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는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이 깊어집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2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로만 알던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직접 경험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전시회에 가서 유명한 작품을 봐도 그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추상화의 경우, 그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감탄할 수 있습니다. 감탄은 억지로 쥐어짤 수 없습니다. 감탄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지만, 찬송이 입에 맴도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찬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혼 없는 찬양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찬송을 반복해서 부를 때가 많습니다. 주일예배 시간에도 찬송을 반복해서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송을 의식의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찬송이 영혼에서 터져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한 적 없기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감격을 찬송으로 표현합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분명하게 경험했습니다.
본문 모세의 노래에 보면, ‘여호와’를 비롯하여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고 가치이십니다. 영혼의 최고 가치이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그보다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찬양의 핵심은 하나님이십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목하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선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왜 실패합니까, 왜 절망합니까, 왜 두려워합니까, 삶이 왜 힘듭니까. 상황을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주목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상황이 좋지 않아도, 하나님을 주목하면 찬양할 수 있습니다.
본문 모세의 노래에서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빠져버리면, 노래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찬양은 찬양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 노래와 찬양의 차이입니다.
세상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빠져 노래를 부릅니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 신바람 나게 부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의존한 열정은 쉽게 바닥 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세상 노래와 다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 세상의 물질, 세상의 인기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노래하게 하십니다. 찬송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노래의 주제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찬양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찬양은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찬양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찬양의 멜로디와 리듬을 즐기면 안 됩니다. 물론 멜로디와 리듬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멜로디와 리듬에 심취하여 흥에 겨워 찬양해서는 안 됩니다.
찬양에서 중요한 것은 가사입니다. 찬양할 때에는 찬양의 가사를 묵상해야 합니다. 찬양의 가사로 인해 즐거워야 합니다.
찬양 가사를 통해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찬양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찬양하게 하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찬양하면서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모세의 노래를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1절에 보면,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마병을 휴지 조각처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3절에 보면,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6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8절에 보면,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 콧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콧김에 바다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물이 쌓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0~12절에 보면,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아무도 버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누구도 설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을 날마다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수록 하나님을 힘껏 찬양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찬송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기도도 일종의 찬양입니다. 기도 가운데 찬양이 포함됩니다.
무엇을 기도하든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림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기도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면, 우리의 기도제목을 모두 잊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찬양은 감탄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에 대해 감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감탄하는 것입니다.
C.S.루이스(C.S. Lewis)는 “감탄한다는 것은 깨어있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의미다.”라고 말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에 대해 경탄(驚歎)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찬송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계속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한순간도 살 수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6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늘에서 허다한 무리의 소리, 많은 물 소리, 큰 우렛소리와 같은 소리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노래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하나님을 힘껏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노래하는 이유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합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2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3절에 보면,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만 보여주셨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기적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을 죄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사망에서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출애굽기 15장 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출 15:2)”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만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감격은 구원 받은 것으로 인한 감격입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것은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태동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마귀의 방해가 있고 우리가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죽으면 천국에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은 찬송을 부르는 것이 다릅니다. 구원의 노래는 입술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노래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 나옵니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노래가 있습니다. 구원의 노래에는 감격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섰을 때는 위기 중의 위기였습니다.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막힌 듯했습니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때가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실 때입니다. 가장 어려운 때에 하나님께서는 찬송 받기 원하십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노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십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절망적인 일이 생겼을 때, 세상 사람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어두웠던 때에 아름다운 노래가 많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을 겪은 후, 입에서 찬양이 나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시선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송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문제가 둘러싸여 찬송을 잊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찬송은 승리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노래 자체가 승리를 의미합니다. 승리한 사람이 노래합니다.
찬양은 승리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를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승리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순간, 마귀는 권세가 꺾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우리에게 승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노래합니다. 승리의 개가를 부릅니다. 우리에게 저주는 더 이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살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패배감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안 돼’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찬양은 밝습니다. 천국도 밝습니다. 천국에는 해가 필요 없습니다. 음울한 천국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 노래는 어둡습니다. 박자가 빠르고, 가사가 밝은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슬픕니다. 밝게 부르려고 할수록 우울함이 몰려옵니다.
세상 노래에는 답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인생을 누르는 어둠은 노래 몇 곡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찬양은 세상 노래와 다릅니다. 찬양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을 경탄하는 것입니다. 승리의 찬가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하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사탄이 떠납니다. 절망적인 생각이 사라집니다. 불평이 사라집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가슴이 뜁니다. 힘이 솟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집니다.
찬양은 기쁨입니다.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두운 찬양은 없습니다. 찬양은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기쁨의 극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담긴 노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정이 담긴 노래입니다. 찬양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지적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찬양할 때, 찬양의 가사에 집중해야 합니다. 찬양 안에 신앙고백이 있고,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격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을 부를수록 힘이 넘칩니다.
찬양은 우리의 죄 된 감정을 사로잡습니다. 찬양을 부를 때, 우울함이 사라집니다. 상처가 씻겨집니다.
시편 119편 164절에 보면,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종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찬양은 우리의 삶의 이유입니다. 신자는 찬양해야 합니다. 아침에도 찬양, 저녁에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평생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할 때, 우리는 계속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영원히 찬양합니다. 영원히 찬양한다는 것은 영원한 복락 가운데 산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기쁨 가운데 산다는 의미입니다.
천국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불행이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영원한 기쁨, 복락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찬양합니다. 찬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찬양 속에 말씀이 있습니다. 찬양은 기도가 됩니다. 찬양 속에서 매일 감격하며 사는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되게 하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노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패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고, 하나님께 집중할 때, 상황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매일 기쁨을 경험하며 살 것입니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본문: 계15:1-8
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15: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5:7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오늘 읽은 본문은 요한계시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일곱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에 있는 일곱 등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곱 인이 떼이는 것을 보았고, 일곱 나팔이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고, 일곱 우레가 발했지만 생략되었고, 이제 우리는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몸통은 바로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아닙니다.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악을 심판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말하면서 사실 하나님의 쏟아 부어지는 심판에 대한 표현들이 많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일곱 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계시되고, 일곱 나팔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되고 있으며, 마지막 일곱 대접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모두 다 한 가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을 받지 않습니까? 즉,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곱 대접은 사실 일곱 나팔에 포함되어 있고, 일곱 나팔은 일곱 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인은 천상의 어린양께서 개봉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구조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인간의 역사 가운데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역사 속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계시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경고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됨으로써 실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삼중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곱 째 인에 일곱 나팔이 포함되고, 일곱째 나팔에 일곱 대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며 또한 점진적으로 강력해질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기 위해서 인류가 경험하게 되는 재앙이 세 가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류에게 임하는 화는 다섯째 나팔, 여섯째 나팔, 그리고 일곱째 나팔입니다.(계8:13) 첫째는 영적 재앙으로서, 무저갱에서 올라온 귀신들의 횡포입니다. 둘째는 홀로코스트로서 인류는 대학살의 참사를 겪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순간 쏟아 부어지게 될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 일곱 대접의 재앙은 인류가 경험하게 되는 마지막 세 번째 화에 속합니다. 마지막 재앙으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하나님의 마지막 추수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세 번째 재앙으로서 일곱 대접이 자신들 머리 위로 쏟아 부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인데 그 전에 그리스도는 영광중에 오실 것이고 교회는 변화를 받아 공중으로 들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 세 번째 재앙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시간적으로 따지자면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들의 부활, 그리고 교회가 들림 받는 사건과 거의 동시적으로 일곱 대접은 쏟아 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연 설명이 필요하므로 일곱째 나팔을 울려 분 11장 이후 일곱 대접 재앙이 본격적으로 부어지게 될 16장 사이에 12, 13, 14장은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 사이에 막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재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상주시고,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으로서(계11:18) 하늘에서 시작된 영적 전쟁이(12장) 지상에서 어떻게 확대되고 있으며(13장) 그 가운데서 구원받은 자들과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한 자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결국 최후의 날에 그들을 어떻게 상과 벌을 주실 것인지(14장) 하나님이 행하실 큰 일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 15장은 마지막 재앙의 서곡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14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상과 벌을 주시는 장면을 보았는데 자연스럽게 우리는 15장에서 상을 받는 자들의 감격스러운 노래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대적한 자들에게 임하기 위해 장엄하게 준비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은 마지막 재앙의 집행, 그리고 17장은 마지막 재앙의 결과로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장은 마지막 재앙의 당위성과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흐름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요한계시록은 주된 교리적 요점을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점차 절정으로 향하여 가는 히브리 문학의 전형적인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서론 본론 결론 혹은 기승전결 식의 구성으로 보면 제대로 본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14장에 구름을 타고서 영광스럽게 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다음, 19장에 이르러 흰말을 타고서 승리하면서 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본문에 이르러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사건은 두 번 발생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오해입니다. 나중에 살피겠지만 승리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다음 20장에 천년왕국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노릇 하심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재적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백성이 떠들고 나라들이 모여서 진동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왕노릇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결국 겉으로 볼 때는 패배하는 것 같고, 권세들에게 끌려가서 죽임 당하는 것 같고, 고난과 핍박이 많은 것 같지만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자들로 살고 있다는 매우 감동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자, 다시 오늘 읽은 본문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은 앞으로 진행될 하나님의 대접 재앙에 대한 선언에 해당하며, 2절에서 4절까지는 구원받은 자들이 감격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장면, 그리고 5절에서 8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부어지기 위해 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한 가지 적용을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찬양이 고난의 때에 더욱더 빛을 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쭉 읽어 가다보면 의인들의 노랫소리를 자주 들어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랫소리는 매우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밤이 가장 어두울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것처럼 1절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이 선포되는 순간에 모든 인생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 즐거이 노래부르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우리 자신의 얼굴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재앙이 선포된 시점에서 절망하기는커녕 노래를 부르는 무리들 가운데 우리가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요한계시록의 편지를 돌려가면서 읽었던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면 본문에 기록된 노래가 진정한 감동으로, 아니 자신이 직접 부르는 것과 같은 감흥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상황이 나빠지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미 이루신 하나님의 큰 일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그들은 즐거운 찬양을 주님께 올려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찬양을 주께 드린 적이 있으십니까? 어려운 가운데 기쁜 찬양을 불러보신 적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에 여러분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 구주를 찬양해보셨습니까? 그때 구주께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위로를 주시던가요? 우리가 진정 주님을 안다면 그분의 위로도 알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지 볼 것입니다. 인류가 경험하게 될 세 번째 화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임할 것인지 볼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는 것은 대단히 경이롭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이처럼 무섭고 무자비한 심판을 일곱 대접에 담아 쏟아 부으실 수 있는가?’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쏟아 부어지게 되는 심판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몸서리칠 것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절규했던 빌립보 간수장처럼 구원을 얻기 위해 무릎을 꿇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럴 수가?’라고 하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것입니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가혹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욕하며 항의하면서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내세울 것입니다. 그들 편에서 보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가혹한지는 앞서 14장 20절에서 잠시 언급이 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 천 육 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이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흘리신 모든 피를 부정하게 여긴 자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성밖으로 내쳐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가운데 그들 스스로 피를 흘리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의 깊이와 범위는 참으로 철저한 것입니다. 말굴레까지 닿았다는 말은 사람의 키 크기만큼 피의 강물이 이루었다는 말이며, 1,600 스다디온에 퍼졌다는 말은 320km까지 피의 강물이 흘러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깊고 광범위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전 인생을 다 삼킬 규모이며, 전 세계를 다 포함할 규모인 것입니다. 이토록 철저하고 가혹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두 가지 반응으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됩니다. 2절부터 나오는 무리들처럼 감격과 환희로 찬양을 부르는 자들이 생기거나 혹은 16장 9절과 21절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14장 마지막 부분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이 16장에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는 지 자세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14장과 16장 사이에 있는 15장에서 우리는 저마다 테스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즉, “이 최후의 재앙에 대해 우리는 찬양하는 자로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훼방하는 자로 나타날 것인가?”입니다. 그것이 1절에서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적을 보고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녔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실망시키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바다 가운데 홀로 고난을 겪는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 가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통해 단지 떡만을 생각한 사람은 결국 예수님에 대해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통해 영생의 말씀을 생각한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의 진정한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이적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하게 될 수 있습니다. 말씀 없이 체험만을 추구하는 ‘표적주의 신앙’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마12:38-45) 이적은 있는데 말씀이 없는 집회를 조심하십시오. 체험은 있는데 말씀은 없는 자칭 ‘은사주의자들’을 조심하십시오. 말씀에 착념하지 않는 모든 ‘지도자’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에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장면을 ‘크고 이상한 이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무시무시한 재앙선포가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최후의 재앙이 선언된 상황에서 감격으로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백성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이 선언을 듣고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심판이 어떻게 공의로운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거나 혹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하게 심판을 내리실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무시무시한 재앙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롭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왜냐면 애굽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은 죄악을 하나님께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였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애굽이 그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애굽인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1절 말씀은 시금석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의 소속이 하늘나라인지 아니면 세상나라인지 우리의 근본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한 절 말씀의 간결하지만 매우 강력한 선언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보이는 가에 따라 내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분명하다면 세상에 이토록 가혹하고 잔혹한 재앙을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을 반드시 의롭다고 인정하고 또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이 내리시기로 작정한 그 무서운 심판을 보면서 즐거이 하나님을 의로우시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면, 이제 세상에 일곱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하는 무리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봅시다. 사도 요한은 일단의 무리들을 보고 있습니다. 2~4절을 읽어봅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가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자, 이 무리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하늘 보좌 앞에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보좌 앞에 있는 이 무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보좌 앞에 서서 노래하는 시점은 머나먼 미래의 시점도, 과거의 시점도 아니라 영원한 시간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실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좌 앞에 있는 자들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이와 같이 영원하고 견고하며 복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유리 바닷가에 서서 찬양하는 무리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불이 섞인 유리바다’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거룩하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신 성품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유리바다를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 보좌 앞에 불붙는 유리바다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서 있는 이 일단의 무리는 그러한 유리바다를 통과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이 유리바다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개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지식입니다. 인격적인 지식은 삶 속에서 증명될 것입니다. 본문2절은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결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 삶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있다면 넉넉하게 짐승과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결코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짐승에 대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붙는 유리바다를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앞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거문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의미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영감을 아주 중시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멜로디와 화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노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거문고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거문고 줄이 끊어져 나간지 오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과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신령한 거문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배워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늘에서 내려준 ‘악기’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악기는 기타나 피나오나 신디사이저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영감인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진 노래의 가사를 흉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그들이 가진 찬양의 영감을 흉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런데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모세의 손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옛 이스라엘이 부른 노래와 같이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새 이스라엘만이 부를 수 있는 찬양을 뜻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옛 이스라엘이 홍해바다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그 광경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화 영화인 [이집트왕자]에서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장면이 제일 압권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보좌 앞에 선 것처럼 기쁨과 감격과 환희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진노와 거룩이라는 불붙는 유리바다와 악한 세상 특히 짐승의 흉악한 이빨에서부터 구원받는 순간이야말로 압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러한 압권에 대해 잘 압니다. 옛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벗어나 애굽 전차와 말들과 군인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홍해바닷가에 섰을 때 그들이 가진 감격으로 소고를 치면서 찬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과 동일한 감격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소고가 아닌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서 자신들을 세상에서부터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을 그렇게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찬양하게 될 날은 머나먼 미래의 어느 날이 결코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그렇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지도하에 구원을 경험한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것과 어린양의 희생하에 구원을 경험한 새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것이 서로 비교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와 파도로 일렁이는 홍해바다를 보십시오. 애굽의 전차부대를 삼켜버린 파도가 넘실대는 홍해바닷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고를 치며 노래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바로와 그 전차들을 삼켜버린 홍해바다와 그리스도인들을 삼키려는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을 오히려 삼켜버린 하나님의 공의의 유리바다가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바다에 빠져버린 애굽의 멸망과 바다에 빠져버린 바벨론의 최후(계18:21)가 서로 비교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세보다 더욱 탁월하신 어린양을 보내셔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하신 일이 서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삼키려는 바로의 칼에서 구원받은 것과 우리를 삼키려는 짐승의 입에서부터 영원히 받은 구원입니다. 지금의 비교는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보다 철저하고 보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종으로서, 제2의 모세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천상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림자로서의 출애굽의 구원경험은 오늘날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중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사건의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하나는 그림자요, 하나는 실체인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를 보았지만 지금 우리는 실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출애굽은 신약의 새 출애굽이 되었습니다.
옛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구원하신 출애굽을 결코 잊지 못하고 회당에서 모일 때마다 바닷가에서 소고 치며 찬양했던 찬양을 계속 반복했듯이,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세상에서부터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의 큰 일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들을 흉악한 짐승의 입에서와 세상에서 그리고 불붙는 유리바다에서 친히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우리가 어찌 그 크신 일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제사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당연한 의무이자 특권인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그토록 중요한 시금석을 다시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토록 무섭게 심판을 행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무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의 질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불이 붙는 무시무시한 유리바닷가에서 그렇게 찬양 드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쏟아 부어지는 재앙을 보고 어떻게 기쁨과 감격이 생길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14, 15장을 읽으면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니, 당신네들은 어떻게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홍해바닷가에서 그렇게 소고 치며 즐거이 찬양할 수 있단 말이오? 저렇게 죽은 사람들이 가엽지도 않단 말이오? 저렇게 떠다니는 시신에 대해 일말의 동정도 느낄 수 없소?”
그렇게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을 형제가 아닌 이방인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노래를 부르는 무리들 가운데 속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죠? 바로와 그 군대들은 그들을 죽이려고 뒤쫓아 온 원수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노래 부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과 거짓선지자들과 세상을 향하여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붓고자 하시는 일이 그토록 의로우신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놀라운 사랑이 되는 이 역설은 그들이 우리를 삼키려고 한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의 원수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단지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고 인격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을 진정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원수들을 향하여 심판을 내리실 것에 대해 노래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탄원시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은 줄 아는 것은 자신을 삼키려고 한 짐승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세상에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그러한 심판이 자신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세상에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본문의 상황에서 도저히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극렬하고 무자비한 심판 속에서 결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찬양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오직 육신의 떡만을 위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크고 놀라운 이적을 이해할만한 말씀도 명철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요구에 따라 응답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시는 이 이적을 보고 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두려우신 하나님, 영화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오직 유일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만국으로부터 마땅히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러분을 삼키려고 하는 악한 짐승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가혹하고 잔혹한 심판의 날에 즐거이 하나님을 의롭다고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겁니다.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큰 일이 우리를 사랑하는 큰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의 찬양이 끝난 후 사도는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서 성막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모형이듯이, 모세의 성막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가 들린 후에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린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옛 성막에도 증거판을 보관하고 있었듯이, 하늘의 성막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기울어지기 전에 하늘의 성막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영광스러운 광경입니다. 원래 구약에서 성막은 두꺼운 가죽으로 네 겹씩 덮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의 장막이 공개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께서 그 종 선지자들과 사도들로 말미암아 하신 약속은 성취될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환히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이 쏟아 부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이 땅에 부을 천사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들입니다. 빛난 세마포와 가슴에 금띠를 착용하는 것은 제사장들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는 천사들이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거룩에서 비롯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보십시오.“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전은 영광의 임재로 가득 차게 됩니다. 구약에서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경험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막도를 받습니다. 출애굽기 40장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성막을 다 만들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40:34-38) 그런데, 본문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다 만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가득 찬 것은 성막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의 처소로 인(印)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성막에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성막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구원입니다. 애굽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한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홍해바다에서 죽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온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영원히 즐거워하는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닷가에 서서 기뻐하는 구원의 확신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막으로 나아가서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
편에서 싸우시기 위해 임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성막에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신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 앞에 모인 백성들 가운데
다시 한 번 충만한 영광으로 임하셔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고 그들을 위해 이제 싸우실 것입니다.
그들을 괴롭게 하고
그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삼키려고 했던 모든 원수들과 친히 싸우실 것입니다.
그들을 죽이려고 한 짐승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괴롭게 한 모든 세상에 대해 당신의 거룩하심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충만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것은 짐승의
수를 이기고 유리바닷가를 벗어난 자들에게는 한없는 사랑과 축복으로 나타날 것이고, 짐승과 짐승에게 엎드려 절한 자들에게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공의의 징표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출애굽기의 완벽한 성취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분은 과거 무서운 파도가 넘실거리는 홍해바다에서 당신의 거룩과 영광을 입증하신
분께서 다시 한 번 불붙는 유리바다에서 당신의 영광과 거룩을 드러내실 하나님이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뒤쫓아오던 바로와
그 군대들을 홍해바다에 깊이 빠뜨리셨듯이 다시 한 번 역사의 마지막에서 짐승과 거짓선지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모든 인생들을
유리바다에 깊이 빠뜨리실 분이십니다.
과거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을 직접 보고서 감격하면서 소고를 치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바닷가에서 춤을 추면서 영광을 받으셨던 것과 같이 다시 한 번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세상에서부터
구원받은 자들에게 당신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게 하실 것이고 그래서 감격스러워하며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가지고서 유리바닷가에서
뛰놀며 올려드릴 영광의 찬미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것은 결코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도 그 영광의 찬미소리는 계속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 구원하신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위해 싸우시려고 충만한 영광의 구름으로 임하신 주께서 다시 한 번 역사의 마지막에 그렇게 임하실 것입니다.
공의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그분의 엄정하고
엄위로우신 심판을 찬양합시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크고 기이하며 행하시는 모든 방식이 의롭고 신실하며 거룩하십니다.
그분은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진정 알고
계십니까? 과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까? 과거 애굽의 군대들을 홍해에 쳐 넣으신 그
능력의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은 그 능력을 진정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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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의 구체적인 내용은 32장에 나오며, 31장은 이 노래를 지어서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으로서, 앞에서 지속적으로 경고한 내용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은총으로 베푸셨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다룬다.
그들이 온전히 섬겨야 한다고 명령받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감동적인 메시지가 예언적인 노래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제사장들에게 주는 권면 (31장)
담대히 진군하라
모세는 자신이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그들을 위해 싸워 주신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믿었다(3절).
그래서 모세는 온 백성들에게 “강건하고 담대하라.”고 확신을 준다(6절).
왜 담대하라 하시는가?
이미 승리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앞에” 건너가 싸우시는 분임과 동시에(3절),
“너와 함께” 가시는 분이시다(6절).
특히 6절은 『그분께서는 너를 단념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시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히브리서 13:5에서 인용되어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신약 교리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단념하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많은 반역들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적절하게 징계하시기는 했지만, 결코 그들을 단념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이행하셨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끝까지 이행하실 것이다.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7절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강건하고 담대하라.”고 한 번 더 강조한다.
이 용기의 권면은 23절과, 여호수아 1:6-9에서도 반복된다.
새 땅을 향해 진군하는 백성에게, 또 새로운 지도자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덕목은 담대함이다.
이 명령이 신명기 마지막과 여호수아 시작에서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모세와 여호수아 사역의 연속성을 보게 된다. 둘의 임무는 동일하니, 즉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단지 모세가 시작한 것을 여호수아가 완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표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율법(모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게 했고, 예수님(여호수아)은 율법의 의를 완성시키셨다.
모세는 담대함을 명령함과 동시에 제사장들에게 율법 준수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9-13, 24-29절).
당장 싸움에 필요한 것은 담대함과 믿음이지만, 그 땅을 지속적으로 소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율법 준수이기 때문이다.
배교에 대한 경고 (31:14-30)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회중의 성막으로 함께 부르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권위를 이양시키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함께 부르시어 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배교를 예고해 주신다.
『...이 백성은 그들이 가서 그 가운데 거할 그 땅의 이방 신들을 좇아 음란한 짓을 하러 가리니...』(16절).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재앙이며(17,18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노래를 기록하여 가르치라 하신다.
이 노래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19,21절).
성경에는 “증거”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언약궤도 증거궤라 부르고(민 17:4), 십계명 돌판을 증거판이라 부르고(출 25:16), 성막도 증거의 성막이라 부른다(민 17:7).
여기서는 율법을 증거로 삼는다고 말씀하고, 앞서는 “노래” 역시 증거로 삼는다 하셨다.
증거란 어떠한 사실을 확실히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어떠한 사실을 증거해 주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백성 삼으셨는지 그분의 은총을 증거해 준다.
그들이 심판받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관계성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성막이나 언약궤가 그것을 증거하고, 율법과 이 “노래” 역시 그것을 증거한다. 모세는 자신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더 큰 배교를 행할 것임을 알기에(27절), 율법을 증거로 주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모세는 하늘과 땅까지 불러 증거를 삼고 있다(28절, 32:1). 온 하늘과 땅 앞에서 이 노래를 들려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한 증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모세의 노래 (32:1-43)
모세의 노래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그분의 위대한 베푸심을 보여 주고(1-14절)
둘째는 이스라엘의 배교한 모습과 그로 인한 심판을 보여 주며(15-26절)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27-43절).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 혹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심 (1-14절)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선언된다(3절).
그분은 반석이시다(4절).
변치 않고 완벽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의로우시고 정직하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사셨으며, 지으시고 세우셨다(6절).
사셨다는 말은 구속하셨다는 말인데, 노예 상태가 된 사람을 값을 지불하고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 구속은 가족이나 친족이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종된 이스라엘을 풀어 주셨으며,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신 것이다.
이 “노래”는 그들이 고난받을 때 기억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어떤 일들을 기억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업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9절).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민족들을 나누실 때도 이스라엘이라는 유업을 염두에 두셨다(8절).
또한 광야 생활에서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10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독수리가 새끼를 다루듯이 인도하고 보호하셨다(11절).
독수리가 새끼를 다루는 법은 일종의 훈련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다.
이스라엘은 오직 그분만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12절).
이것은 그들의 영적 위치가 다른 모든 이방인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광야 생활 가운데 다양하게 부양하셨음도 기억해야 한다(13,14절).
출애굽 상황에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지만, 본문에 따르면 들의 소산과, 꿀과 기름을 먹었고(13절), 소의 버터와 양의 젖과 어린양들의 기름과 바산에서 기르는 숫양들과 염소들과 기름진 밀알, 그리고 “포도의 순수한 피” 즉 포도주(즙)를 마셨다(14절).
하나님께서는 땅의 높은 곳들, 즉 산지를 통해 인도하셨는데 그 가운데에서 이러한 음식들을 먹이셨고, 요단 동편 특히 바산 지역을 차지하면서 좋은 것들을 먹이셨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만나만이 아니라 다양한 음식들을 먹었고, 이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보여 준다.
아울러 요단 동편 정복활동의 승리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특별히 14절의 “포도의 순수한 피”를 주목하라.
이것은 포도주를 말하는데, 순수하다는 말을 통해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임을 알 수 있다.
이사야 65:8은 이것을 “새 포도주”라고 말한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피 혹은 성령님을 예표하기도 한다.
특히 포도의 순수한 “피”라는 묘사를 통해 본문이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함을 알 수 있는데, 성경은 기본적으로 두 종류의 피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죄인들의 피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져서 죄인들은 구원받지만, 그 피를 믿지 않는 죄인들은 자신들의 피를 흘리게 된다.
여기 14절은 그리스도의 피를 보여 주지만, 32-33절에서는 죄인들의 피를 보여 준다.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들에서 나온 것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 포도니, 그 송이들은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용의 독이요, 독사들의 지독한 독이라.』
이것은 멸망할 죄인들이 흘릴 피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초림 때는 자신의 피를 흘리셨지만, 재림 때에는 세상 죄인들의 피를 흐르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 63:2,3에서는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포도즙틀을 밟듯이 죄인들을 밟아, 그 피가 그분의 옷을 얼룩지게 한다고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19:15에서는 그것을 “진노의 포도즙틀”이라고 말씀한다.
요한계시록 14:20에서는 그 피가 말고삐까지 닿을 정도라 말씀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피는 순수한 피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피로서, 하나님 자신의 피이기 때문이다(행 20:28).
한편 주의 만찬에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피가 순수한 피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상징적인 의식에서 발효된 포도주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 포도주는 “새 포도주”여야 하며, 그렇다면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본문은 그리스도의 피와 악인들의 피를 대조하지만, 그리스도의 피와 동물의 피에 대한 대조도 있다.
동물들의 피는 일시적인 속죄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룬다(히 9:12).
이스라엘의 배교와 심판 (15-26절)
『그러나 여수룬이 살찌자 걷어찼도다...』(15절).
여기서 여수룬은 이스라엘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배부르게 되자 자기를 먹이신 하나님을 버렸으며, 그들의 반석을 가볍게 여겼다(15절).
반석은 굳게 있어, 그들이 그 위에 설 수 있는 기반이다.
그들이 그 반석을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설 기반이 없어져 버렸다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정체성이 있는데, 그 언약을 버린 이상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도 없어져 버렸다.
그들은 우상에게로 나아갔으며, 그들의 희생제는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17절).
이에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셨다(16, 21절).
그들이 우상들로 하나님께 질투를 일으켰기에, 하나님께서도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에게 질투를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신다.
즉 그분의 진노를 이방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퍼부으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내용들이 모세를 현재로 해서 이스라엘이 미래에 배교할 것을 염두에 두고 부른 노래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배교하는 내용들도 과거 출애굽 때 배교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에도 그들은 종종 우상들에게 나아갔으나(출 32장, 민 25장), 구약 역사서를 통해 그들의 배교한 모습들을 훨씬 더 많이 보게 된다. 모든 선지자들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책망했다. 결과적으로 앗시리아와 바빌론을 통해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된다.
22-26절의 내용들은 앗시리아 혹은 바빌론 침입 때 당하는 고난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 “불”을 일으키실 것이라 하셨는데(22절), 이 불심판은 그들의 멸망을 말한다.
재앙, 화살들(23절), 굶주림, 타는 열기, 혹독한 멸망, 짐승들의 이빨, 뱀의 독(24절), 밖으로는 칼, 안으로는 공포(25절), 그리고 사방에 흩어 버림까지(26절)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배교했을 때 당하는 크나큰 심판을 보여 준다.
특별히 26절에서는 “내가 그들을 사방에 흩어서 그들의 기억을 인간에게서 끊어지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십자가 이후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까지도 예언하는 말씀이다.
그때 그들은 완전한 파괴를 당해서, 어느 누구도 그들의 회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또한 22절에서는 그분의 진노가 “가장 낮은 지옥”까지 사른다고 했는데, 이는 그 민족의 멸망을 극심하게 보여 주는 말씀이지만, 동시에 실제적인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배교한 이스라엘의 운명은 민족적으로는 멸망이요, 개인적으로는 지옥이다.
이스라엘의 구원 (27-43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끊어 버리려 하셨다(26절).
"내가 그들을 흩어서 인간에서 그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지만 이방인들로 하여금 비방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다시금 구원하실 것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아 이스라엘을 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한다(27절).
"대적을 격동할까 염려라 원수가 오해하고 말하기를 우리 수단이 높음이요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라 하시도다."
따라서 그들 역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멸망당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이 부분의 말씀은 그 이방인들을 멸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치실 때 그들이 신뢰하는 자기들의 신들은 전혀 자기들을 지켜 주지 못한다(30절).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
여기에 두 종류의 반석이 등장한다.
31절은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않음을 그들, 즉 원수들까지도 스스로 판단한다고 한다.
“그들”과 “우리”(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서로 다르다.
그 의지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철저히 하나님과만 맺어진 관계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포도와 이스라엘의 포도 역시 다르다(32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포도를 맺어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방을 좇아갈 때 이방의 포도를 내었다.
이사야 5:4은 그것을 “야생 포도”라 말한다.
여기 신명기 32장에서는 “쓸개 포도”라 말하며(32절),
그 포도주는 용의 독이요 독사들의 지독한 독이라 말한다(33절).
이것이 주님의 창고 속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34절) 주님이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35절에서 “복수와 보응이 내게 속해 있으니”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다.
그것은 “그들(이방인들)의 재앙의 날”이다.
앞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지만, 여기서는 이방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신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은 대환란이고, 이방인들에게 내리는 재앙은 지상 재림 때 이루실 큰 심판이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의 위엄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내가 하늘에 내 손을 들고 말하노니, 나는 영원히 사노라』(40절).
얼마나 위엄있는 말씀인가.
그렇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칼과 활로 복수하신다고 하신다(41-42절).
여기서 복수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일에 대한 복수이다(43절).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은 곧 하나님의 대적이기 떄문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민족들에게도 선포한다.
『오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43절).
주의 백성과 함께하는 자는 복을 받고 주의 백성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주신 언약이다(창 12:3).
결국 이 노래는 이스라엘을 향한 자비로 끝맺는다(43절).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
비록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해 심판하시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크신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대대손손 이 노래를 부른다면 범죄 가운데서도 돌이킬 수 있을 것이요, 비록 범죄함으로 심판받는다 해도 회복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 노래를 들려주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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