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와 나훔서 소개
피터 림(Peter Lim) 박사는 요나서와 나훔서를 소개하며 하나님의 원대한 사명에 대한 메시지와 세상의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선교대학원의 글로벌 리더십 개발학의 부교수입니다.
기독교 구약성경의 소예언서 섹션에 있는 책 두 권 요나와 나훔을 리더십 개발의 관점에서 소개하겠습니다.
나훔은 칠십인역(헬라어로 번역된 히브리 성서)에서 요나서 바로 뒤에 나옵니다.
이 순서는 꽤 적절합니다.
특히 요나와 나훔 둘 다 자신의 사역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발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청중에게 전했습니다.
요나는 나훔보다 한 세기 전에 니느웨에 있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훔은 기원전 7 세기에 남유다 왕국에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압제자가 곧 멸망할 것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때쯤 앗수르는 이미 유다의 이웃인 이스라엘 왕국을 지도에서 지웠습니다.
앗수르의 정치 지도력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청렴과 잔학함이었습니다.
이는 나훔서 3 장 1 절에서 4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초강대국으로서 앗수르 사람들은 다른 나라를 속였습니다.
다른 나라를 소멸시키고 스스로를 더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조약과 약속을 어겼습니다.
무고한 피를 흘리게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무시했습니다.
이는 구약성경 전반에서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심각한 범죄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요나는 니느웨에서 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복음주의자들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구원 대신 파멸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 중 일부는 이슬람 혐오증을 조장하고, 이슬람교도들이 미국으로 오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까지 제안합니다.
그들은 요나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변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선교는 더 이상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선교는 어디에서나 시작되고, 어느 곳에서나 갑니다.
좋든 싫든 우리가 있는 곳은 이제 선교의 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움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선지자를 지도자라고 부르기를 꺼려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종으로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로버트 그린리프는 자신의 저서 "서번트 리더십"에서 섬기는 지도자는 먼저 하인이라고 말합니다.
섬기는 지도자가 되는 것은 봉사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봉사하고자 하는 감정에서요.
그린리프는 가장 효율적이지만, 가장 하기 어려운 시험은 다음과 같다고 말합니다.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성장하는가? 섬김을 받는 동안 더 건강해지고, 더 현명해지고, 더 자유로워지는가? 더 자율적이고, 그들 자신이 섬길 가능성이 더 높아졌는가?"
저는 이것이 예언사역에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결과에 감사하지는 않았지만요.
요나의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둘 다 질문으로 끝납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는 노아몬(Thebes, 애굽 제18왕조 시대의 수도)의 함락(661년)이다.
다른 하나는 니느웨의 함락이다(612년).
나훔의 활동 시대는 이 두 사건의 중간 시대일 것이다.
본서 나훔 3:8-10을 보면 노아몬의 함락이 과거사로 기록이 되어있는데 노아몬은 661년에 앗수르왕 아술버니팔 (Ashurb- anipal) 에게 점령되었다.
또 본서에는 니느웨가 함락 되던일을 목격자 처럼 묘사해 있는데 니느웨는 612년에 바벨론왕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함락 시켰다.
그러므 로 나훔은 661년과 612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나훔은 메소보다미아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고 되어있으나 본서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이며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사람 인(人)
人 人 人 人 人
믿을 신(信)
信 信 信 信 信
19세기 말 영국에서활동한 조지 프레드릭 왓츠(George Frederic Watts)의 이 그림은 2004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보고 감동을 받아 대권에 도전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유명해졌다.
오바마는 이 그림을 소개하며 미국은 "담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외쳤다.
그림을 가만히 보면 한 여인이 둥근 공 위에서 슬픈 듯이 고래를 숙인 채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여인은 하프에 기대어 앉아
가까스로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눈은 가려져 있고, 하프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세히 보면 47개의 줄 중에 마지막 한
줄만 남은 상황이다.
이 여인이 앉아 있는 공을 화가는 무엇으로 묘사했는가?
바로 지구다.
지구 위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여인,
볼수도 없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나 하프를 연주해야 한다.
지구에서 내 사정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고, 더
이상 버틸 힘도 없는 상태.
그런데 이 그림의 제목이 ‘희망!’이다.
절망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 같은데 희망이라니, 그것도
아직 한 가닥의 하프 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 가닥으로도 연주는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한 가닥으로
연주가 가능한가?
클래식 음악 중에 잘 알려진 곡으로 G선상의 아리아 라는 작품이 있다.
왜 그 곳이 ‘G선상의 아리아’일까?
이 작품은 바이올린의 4개의 현 중
‘G선’이라는 하나의 줄로만 연주하는 곡이다.
하나의 선으로만 연주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한 가닥만
남겨진 하프와 같아도 괜찮다.
내가 붙들 것이 하나밖에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마지막 한 가닥이 되어 주시는 주님이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른다.
희망, 조지 프레드릭 와츠
희망 뒤에 있는 희망은 없다.
절망 뒤에만 희망이 존재한다'희망 Hope', 조지 프레드릭 와츠 George Frederic Watts,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42.2 x 111.8 cm, 두 번째 버전, 현재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in에서 전시 중.
실명을
나타내는 붕대 감은 눈먼 장님, 한 줄 남고 모두 끊어진 류트, 무엇인가 소리를 들으려고 고개 숙여 귀 기울이고 있지만 그녀의
노력은 지쳐갑니다.
희망이라 말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달까?
슬픔이나 황폐함, 절망에 가까운 블루, 우울의 색조가 지배하고 있는
미지의 별 위에 앉은 그녀, 초록과 파란색의 우울한 렌더링은 불과 5년 후 악명 높은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예고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류트에 현 한 줄은 남았지, 노래하기에는 아직도 희망은 있지, '희망을 가져요, 테이크 호프!' 엄밀함과 순수를 숭상하는
'하이 아트'의 와츠 그림 중에서 아마도 가장 서정적이고 시적이며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입니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희망'.
눈가리개를 쓰고 거대한 오렌지 같은 별 위에 앉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소녀, 끈이 끊긴 한 가닥 남은 류트를 안고 절망
속에서도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무엇인가 귀 기울이는 이 버전의 유화는 11년 후 영국 전역에 순회 전시에 나섰다.
1959년에는 자유의 행진에서 마틴 루서 킹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 주제로 등장했다. 1990년에는 젊은
청년 버락 오바마 Barack Obama는 자신이 출석하는 시카고 연합교회에서 이 그림을 만나 충격을 받았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오바마가 외치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희망'의 열광적인 제목이 되었고, 2년 뒤
그의 베스트셀러의 선언문 메시지 제목이 되었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이 그림 한 장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치는 민중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그림이 되었다.
조지 프레더릭 왓츠의 ‘희망’
누가 나를 위로해 주나
저 소녀, 각박한 현실에 뒤통수를 맞았을까요, 냉정한 사랑에 상처 입었을까요? 어찌 됐건 지독한 상실감에 세상과 맞서지도 못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남루하지만
소녀의 옷이 섬세하기도 하지요? 누추한 옷이지만, 어떤 화사한 옷보다도 소녀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단애의
끝에서 통곡도 잊은 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소녀의 마음과 공명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작가는 꿈을 잃어버린 아픈 자리에서
보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맨 발의 곡옥(曲玉) 자세로 현이 끊어진 수금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소녀의
마음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있는 거지요.
악기는 사람을 닮습니다. 현이
끊어진 수금은 바로 저 소녀의 마음일 겁니다. 기댈 것이라곤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금밖에 없네요, 저 소녀는! 슬픔과
고독을 수금에 실어보고 싶었으나 끊어진 수금은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줄 모르니 또다시 억장이 무너집니다. 단장(斷腸)이라 해도
좋을 깊디깊은 절망감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럴수록 소녀는 자기 자신 속으로 아득히 숨어들고 있습니다. 저 풍경이 도피일까요,
치유일까요?
조지 프레더릭 왓츠 ‘희망’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42×112㎝, 테이트 브리튼, 런던
소녀의 눈을 보십시오.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보지 않는 거지요. 그거
아십니까?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만 보는 신전의 사제들은 대부분 장님이었다는 것을. 오이디푸스의 운명의 실타래를 풀게 도와주는
타이리시아스가 장님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상처 받았다고 느낄 때는 더더욱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예 희망이 없으니까요. 그 때는 오히려 바깥으로 향하는 모든 시선을 차단하고 자기 숨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도피는 치유는
아니지만, 종종 도피가 치유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소녀가 구(球)
위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저 원은 지구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상처 입은 소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부드러운
선이라 느껴집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지쳐버린 소녀를 무심하게 드러내는 저 구가 동굴 같습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헛디디다
상처투성이가 된 내가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신을 숨기는 자신 속의 동굴 말입니다.
동굴의
시간을 가져보셨습니까? 그 시간은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접는 시간입니다. 행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머무는, 혹은 미친 듯
떠도는 시간이지요. 웃고 떠드는 시간이 아니라 침묵하는 시간이고, 비판하는 시간이 아니라 참회하는 시간입니다. 그 동굴의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동굴로 숨어들게 했던 두려움으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을 비축케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심지가 굳은 내 친구가 겹쳐집니다. 끊어진 수금 대신 말 못하는 강아지를 안고 위로를 받았던 외유내강형의
친구가. 친구의 강아지 초롱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슬픔에 찬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지요. 아, 이 친구는 한 마리 개를 잃은 게 아니라 가족을 잃었구나, 초롱이와 함께 보낸 한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나는 우리가 초롱이를 돌봐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초롱이가 우리를 지켜줬던 거야. 한참 어려울 때 집안에 들어온 강아지거든. 힘들어서 집에 들어가 그저 핸드백을 툭, 던져놓고
20분씩, 30분씩 초롱이를 안고 있었던 적이 참 많아. 그러면 초롱이는 내 아픔을 아는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는
거야. 생각해보면 그게 내겐 기도였던 거 같아. 초롱이는 울 수조차 없을 때 가장 낮은 자리에서 편안히 나를 위로해준
사랑이었어!”
역사(歷史)의 교훈(敎訓)
역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라는 말은 단순히 “이야기”라는 뜻의 story가 아니고 history이다.
history는 어원상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historia』에서 유래했다.
historia는 histor를 어원으로 하는데, histor는 나라에 중대한 일이 발생했을 때 자문을 구했던 학식이 깊은 연장자, 즉 현자를 뜻한다.
따라서 역사 history는 “현자의 이야기”라는 뜻을 갖는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직 깊은 학식이 있는 연장자만이 들려 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즉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은 현자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이 담긴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과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해석된 사실이고, 역사학은 그러한 해석을 통한 과학, 즉 주관성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즉 역사의 교훈은 무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첫째로 역사는 윤리를 상기시킨다.
역사는 시험을 치기 위해서 외우는, 나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는 그런 지식 나부랭이가 아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지평, 즉 당시의 경제적 여건으로부터 문화, 사회, 심지어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까지 보여 준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 주는 그러한 중층의 의미지평 속에서 우리는 삶과 인간성,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성찰을 하게 된다.
즉 역사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 즉 윤리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이미 여러 지식인들, 특히 이율곡의 ‘십만양병설’로 예견되었던 전쟁이었다.
일본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보냈던 조선통신사가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외교문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칠 테니 길을
비키라는 침략의도가 드러나는 문구가 있었다.
그럼에도 동인은 서인이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왜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당파적 정략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왜가 쳐들어 왔을 때 부산성을 사수하던 정발 장군은 전사하고 성을 빼앗겼고,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에 맞서 동래부사 송상현 이하 군민들이 항전했으나 순국했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는 파죽지세로 서울로 북상해 들어왔고,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만에 서울이 위험하게 되었다.
충주에서 신립의 패전보가 전해지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왕이 도성을 버린 게 알려지자 민심은 흉흉해져 민란이 일고,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창덕궁과 창경궁의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해갔다.
개성에서 평양, 평양에서 임진강, 그리고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지자 선조는 의주로 향했고, 급히 명에 원병을 요청했다.
그리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왕세자 책봉을 광해로 하고, 광해군은 의병과 군량의 확보에 열중하도록 했다.
이렇게 육군이 수세로 몰리고 있을 때 해군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한 왜군을 무찌르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편제는 고려시대부터 왜구 방어위주로 잘 정비되어 각 도의 수영(水營)을 근간으로 했다.
물론 경상 좌수영과 우수영은 싸움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대패했지만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옥포해전의 첫 승리를 필두로,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전과를 거둔 이유는 거북선이라는 함선에 있다고 말해지는데, 거북선은 태종 때 기록으로 처음 전해지지만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 새롭게 건조된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 즉 곽재우, 정인홍, 고경명, 김천일, 조헌, 정문부 그리고 휴정, 유정 등이 진주싸움 등지에서 왜병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명의 원군의 도움을 받아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왜를 물리치자 서울에서 철수했고, 이후 두 번의 진주성 싸움이 있은 후 왜는 강화회담을 제안했다.
결국 회담이 결렬되어 정유재란이 발발했으나 왜는 북진하지 못했고, 수군에서는 이순신이 소극적이라는 죄목으로 하옥되어 원균이 그 후임을 맡았으나 수군이 전멸하자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명량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는 총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노량대첩에서 이순신은 최후를 맞는다.
임진왜란의 역사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돌보느라 진실을 외면하여 전쟁을 불러온 당시 당쟁으로 얼룩진 위정자들의 파렴치, 심지어 궁궐을 버리고 피란을 가는 선조의 무책임함, 게다가 거기서 버려진 민초들의 고통과 그것이 야기한 궁궐방화사건, 뿐만 아니라 전쟁의 폐색을 염려하여 왕의 신변을 위해 왕세자 책봉을 서두른 일, 그 가운데 이순신이 수군을 통제하고 전과를 이루었으나 또한 소극적이라 하여 하옥된 일, 그는 홀로 영웅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결국 노량에서 죽음을 맞는다.
여기서 위정자들의 파렴치와 민초의 고통, 선조와 이순신에게서 보이는 인간성의 문제, 선으로 향하기 보다 악으로 빠지는 인간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인간과 삶 그리고 그 의미와 윤리까지 총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다른 예로 영국의 헨리8세를 보자.
그는 15세기 영국의 절대주의 시대의 왕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성에 대해 눈뜨면서 유럽은 종교로 통일되어 있던 중세를 벗어나 국가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에 국가의 수반으로서 왕은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는데, “짐이 곧 국가다”라는 루이14세의 말처럼 왕의 권력은 신이 그에게 부여한 절대적 파워를 가졌다.
이러한 시대에 헨리8세는 형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과 결혼했는데, 스페인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 부왕에 의한 정략적 결혼이었다. 그러나 캐서린이 딸 메리 튜터밖에 두지 못했고 그러한 가운데 헨리는 그녀의 시녀였던 앤 불린을 사랑하게 된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20년만에 이혼을 신청하는데 가톨릭 교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헨리8세는 로마 가톨릭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를 탄생시키는데 이것이 영국에 있어서의 종교개혁이다.
대륙에서는 루터와 칼뱅에 의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이룩되는 종교개혁이 영국에서는 한 사람의 왕의 개인적인 사랑의 치정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그것은 또한 당시의 절대왕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헨리8세는 교회뿐만 아니라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등의 신뢰를 보였던 토마스 모어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혼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관직에 해직되어 반역죄를 이유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결혼한 앤 불린은 전처소생인 메리에게 쌀쌀맞게 대했고 딸 하나를 낳은 후 연속으로 두 아들을 사산하자 헨리는 그녀를 불륜과 외도의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한다.
세 번째 왕비도 아들을 낳았지만 산욕열로 죽고, 네 번째 부인은 독일과의 친선을 위해 들였으나 금방 이혼하고, 앤 불린의 사촌누이였던 하워즈를 들여 좋아했으나 근위대 시종과 외도한 것이 밝혀지자 참수형에 처하고 끝내 두 딸의 가정교사이자 청상과부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절대왕이라는 시대적 조건에서 헨리의 변덕을 보며 인간성과 선악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의 가진 위정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할 수 있는가를 잘 드러난다.
다음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데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다.
당시 프랑스 구체제(앙시앙 레짐)는 귀족과 성직자가 대토지를 소유한 가운데 면세까지 받았지만 일반 시민과 농민은 온갖 세금에 시달려 나무껍질까지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90% 이상의 농민과 시민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는 이 특권층의 모순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었다.
그런데 루이16세는 미국의 독립운동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지원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성직자, 귀족, 그리고 시민의 삼부회의를 소집한다.
이때 시민의 대표로 참석한 이들은 이른바 테니스코트 선언을 통해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시민의 권리가 인정되는 법을 통과시키고자 한다.
왕과 귀족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두려워했다.
이에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는데 그러자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국왕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죄수를 풀어주었다.
바스티유 습격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에 일어났다기 보다는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선언에 평등사회를 추구하여 불평등 사회에 저항하는 사회개혁 의지가 표출된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물결은 농촌으로 이어져 농민들이 귀족의 저택을 습격하고 전국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선언된 것이 바로 ‘인권선언’인데, 바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고 귀족은 그들의 특권을 버려야 하며 국가의 권력은 왕으로부터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에 영주제를 폐지하고 봉건적 특권층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러한 인권선언을 용납할 수 없었던 왕은 도피하여 왕비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가서 프랑스를 반격하고자 할 계획을 세우는데, 마침 참모였던 미라보의 죽음으로 실패하고 만다.
왕이 다시 프랑스로 끌려오면서 국민을 버린 왕을 존경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왕의 단두대 처형을 두고 강경파와 보수파 간의 대립이 격했다.
강경파는 점차 파리코뮌(자치 시회)를 만들면서 시민 속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고, 보수파가 투표에서 패하여 왕은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이렇게 강경해진 산악파 혹은 자코뱅파는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공포정치를 시행한다.
왕이 처형된 프랑스를 주변의 국가들은 호시탐탐 노렸고, 외국의 공격을 받게 되면 어렵게 얻은 자유와 평등이 사라지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은 ‘라 마르셰예즈’를 부르며 자진해서 전장에 나갔다.
혼란한 정국속에 물품을 사재거나 외국과 손잡고 혁명세력을 타도하려는 자들은 발견 즉시 단두대에 처형되었는데, 여기에 마리 앙투아네트도 끼어 있었고 1년 동안 처형된 사람의 수가 1만에 달한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결국 “폭군을 타도하라”는 구호 속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는 걸로 끝난다.
이렇게 불안한 정국을 진압하고 “혁명은 끝났다”라고 외치며 군사적 독재를 확립한 것이 나폴레옹이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에서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과, 그 속에 얽힌 인간의 운명과 그 비극, 그러면서도 권력이 갖는 무상함 등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비감이 비슷하게 드러나는 것이 한국사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이 아닌가 한다.
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숨죽이며 산 사람이다.
그는 유방의 근위대장이었던 한신이 가랑이 밑을 지나갔다는 말처럼 안동김씨의 가랑이 밑을 지나갈 만큼 모자라는 행세를 하며 지냈다. 그가 임진왜란 후에 소실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했다.
그리고 그는 난초 잘 치기로 유명했고 그가 지냈던 곳은 운현궁으로 불리며 고종이 즉위 10년 동안 합파로 치세하며 왕 위에 군림하는 일종의 세도정치를 했다.
그러나 그는 격동의 시대적 상황에서 외세를 인정하지 않고 쇄국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에 반해 개화에 대한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담한 것이 명성왕후 민비였는데, 그녀는 친일과 친러를 오가면서 고종의 정치적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고종에게 간하는 첫 번째 신하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등으로 쇄국정책을 주도하던 대원군의 세가 복귀하는 듯했으나 민씨 일파가 청의 세력을 들여오면서 대원군의 치세는 단명에 가고 청국에 볼모로 잡혀갔으며, 일본과 청국의 조선에서의 세력만 넓혀 주는 결과가 됐다.
그리고 갑신정변에서 청국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의 힘을 얻어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던 것이 실패하고 이후 갑오경장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나아가 청일 전쟁 이후에 일본의 세력이 내정간섭으로까지 번지면서 급기야 조선의 국운이 몰락의 견지로 가는 마당에 명성황우는 일본의 깡패집단에 의해 살해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러한 번민의 세월 동안 한 여인으로서 명성왕후가 쓴 편지와 그녀의 생가가 경기도 여주에 보존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장희빈이라는 인물과 숙종, 인현왕후 그리고 숙빈 최씨의 조선 중후반기 역사에서 조강지처를 내쳤다가 다시 들이면서 용서를 구하는 숙종에서 오류많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당파와 신분제 사회 속에서 모친 명성왕후에 의해 계비로 들여진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편견, 또한 속절없이 후궁에서 왕비로까지 등극하며 세자를 낳은 모후를 결국 사사하는 인간의 변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여러 가지 의미지평을 보여 준다.
그 의미지평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심각하게 묻는 질문의 장을 마련하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의미는 윤리성까지 묻는 것이다.
둘째로 역사는 역사성을 노정하고 그것을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시킨다.
언급했다시피, 역사는 의미지평을 제시한다.
그 의미지평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역사성을 인식하는 것을 ‘역사의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단순한 사건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의식을 갖기 위해서, 즉 그것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역사의식은 한 국가와 민족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의식은 문화의식의 기초이고 문화의식은 곧 한 사회의 혼과 넋, 정신세계이다.
한 개인에게 정신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듯이 한 국가나 민족에게도 그 정신세계를 이루는 역사의식이 중요하다.
이러한 정신세계가 올바르게 갖춰지지 않은 민족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이에 김구 선생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중국 자금성에 있는 건청문에 가면 ‘건청문(乾淸門)’이라고 적힌 한자 옆에 이상한 글자가 적혀 있다.
이 글자는 만주어인데요, 이것은 청나라 만주족이 사용했던 문자로 지금은 만주족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 사어(死語)가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를 300년가량이나 지배했는데도 그들의 역사의식, 즉 정신세계가 뚜렷하지 못해서 중국에 문화적으로 동화되는 바람에 글자만 덩그렇게 남은 채 민족은 사라지고 말았다.
만주족뿐만 아니라 중국변방의 여러 민족들, 예컨대 10-11세기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도, 12-13세기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들은 자신만의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까닭에 그들의 정체성이 정비되지 못했기에 역사의 현장에서 사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독일은 철저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독일은 자신들의 과거사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무릎 꿇고 사과하는 장면은 너무나 유명하다.
지금의 메르켈 총리 또한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영원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정도이다.
독일이 1870년 통일 이후에 제2의 산업혁명이라는 성과를 이루고, 1,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유럽의 금융위기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철저한 역사의식으로 드러나는 민족적 정신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2006년 독일과 프랑스는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는데요, 이는 역사적으로 라이벌로서 서로의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양국이 70년 동안 양국이 교류하면서 일구어낸 성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세계 경제 대국이지만 역사의식에 있어서는 저열하다.
독도 망언이나 위안부 문제, 그리고 역사교과서 문제로 우리민족의 공분을 살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아베 정부는 집단자위권이나 신사참배 등으로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며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의심케 하고 있다.
일본뿐만이 아니다.
최근 안중근 기념관 건립과 관계하여 중국과 한국 간에 역사적 교류가 호혜적 물결을 타는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중국은 이미 2000년부터 동북공정이라는 명목 하에 중국변방의 역사를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 라오닝 성에 있는 고구려 성산산성 입구에 있는 표지석에는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이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고, 중국 헤이룽 성에 있는 발해의 옛 도읍지의 발해국 안내 현판에는 “발해가 옛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관광기념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유엔에 등재된 고구려 유물이 중국 지역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중국의 역사로 소개되고 있다.
이렇게 일본과 중국의 강국 속에서 한국의 존립을 보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필요하고, 더욱이 이들의 퇴행적 역사의식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역사의식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 강국들이 역사왜국에 이토록 광분하는 것은, 곧 역사가 한 국가와 민족의 정신세계의 기저를 이루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들의 민족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역사를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역사가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된다.
셋째로, 역사는 사회정의의 바탕이다.
역사는 역사적 정의 실현을 통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여 한 사회의 도덕성을 형성하는 기본이다.
예컨대 과거사 청산과 같은 역사문제는 곧 그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의로운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이다.
우리의 경우 친일파 척결이나 국가 유공자 처우 문제가 보여 주듯이, 한국사회는 과거의 역사의 공과가 제대로 심판되지 않은, 따라서 도덕적으로 그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이다.
물론 이승만 정권 당시 반민특위(반민족 특별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친일파를 척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초대 총리를 비롯하여 친일세력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위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해방 이후 우리사회는 친일세력이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아 그들의 이세와 삼세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잘못된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은 것은, 곧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오히려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결국 사회의 도덕성을 타락시킨다.
즉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사회가 가진 도덕성이 저열할 경우 그 개인의 삶이 타협하거나 파멸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경제적 양극화를 비롯한 경제적 정의뿐만 아니라 관피아로 불리는 관료사회의 부패와 같은 적폐(積弊)로 비정상이 정상으로 행동하는 사회가 된 것은, 바로 역사적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아 기본이 바로 서지 않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정의의 기본은 역사적 정의실현에 있고, 역사적 정의는 곧 사회의 도덕성을 담보하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세월이 흐르더라도 사회가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응징하고, 과거에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을 한다는 역사적 정의가 바로 서야 하고, 그럴 때에만 개인은 그 사회를 신뢰하고 그의 도덕성을 발휘해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정의는 사회의 도덕성을 바로 세우는 바탕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해석을 요구하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사실을 통해 중층적 의미지평을 보여 주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반성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역사는 역사의 의미지평인 역사성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 즉 역사의식을 형성한다.
역사의식은 곧 한 사회의 문화의식으로서 그 사회의 정신세계의 기저를 이룬다.
이런 까닭에 일본과 중국의 퇴행적 역사의식은 곧 그들의 국가적 야심을 실현하고자 하는 방편으로서 자국의 정신을 결속하려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사회의 도덕성을 재는 기본으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역사의 잘못이 바로잡히지 않는 곳에서 개인의 도덕성을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우리에게 단순한 지식 이상의 의미로서 우리의 집단적 삶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소중한 인문학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08-08-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피 성이여(나훔 3:1)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Woe to the city of blood, full of lies, full of plunder, never without victims!
"피 성이여(the city of blood)"
이르 다밈(עִיר דָּמִים)
성(5893) 이르( ʽîyr) עִיר
어원 / 58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일(대상 7:12, 렘 15:8, 호 11:9).
구약 성경 / 3회 사용
* 5892. 이르(ʽîyr) עִיר
발음 / 이르[ ʽîyr ]
어원 / 57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창 4:17, 출9:29, 삼상30:3), 성읍(창19:25, 레25:33, 민13:19), 고을(창35:5, 신3:5), 도성(창36:32, 민21:26, 대상1:43), 집(삼하17:23), 성주(왕상22:26, 왕하10:5), 성중(대하23:21), 영문(느2:8), 읍(에8:17, 9:2, 합2:12),촌락(렘19:15).
구약 성경 / 1042회 사용
*. 5782. עוּר
관련 성경 / 깨다(삿5:12, 욥14:12, 시73:20, 사51:17), 일어나다(아4:6, 슥2:13), 격동시키다(욥41:10, 단11:2, 슥9:13), 통하다(욜3:12), 깨우다(시108:2, 아8:5, 슥4 :1), 들다(삼하23:18, 대상11:11), 치다(사10:26), 소동하다(사14:9), 내다(시80:2), 일으키다(대상5:26, 잠10:12, 사45:13, 호7:4), 부르짖다(사15:5), 감동시키다(대하36:22, 스1:1), 감동받다(스1:5), 부추기다(렘51:11), 떨치다(시35:23, 단11:25), 격려하다(욜3:9), 어지럽게 하다(신32:11), 흔들다(아2:7, 8:4), 분발하다(사42:13, 64:7), 깨우치다(사50:4), 떨치다(단11:25), 흥분시키다(학1:14), 뽐내다(욥31:29), 놀라다(욥17:8).
[명] 격동(렘50:41).
구약 성경 / 80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어원 / 18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826. 다맘(dâmam) דָּמָם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나훔 3장 : 니느웨 멸망의 원인과 멸망의 필요성
1장에서
나훔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고 유다는 구원하실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2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과 약탈을 당할 것인가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3장에서도 2장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격앙되어 있는 강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 예언의 초점은 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이유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한때 번창했던 교만한 도시 니느웨의 영적인 부패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3장의 내용을 세부분으로 구분합니다.
3:1-7, 니느웨의 폭력과 속임수가 수치를 가져올 것
3:8-11, 테베(노아몬)에 대한 니느웨의 태도가 자기 자신의 패망을 불러 올 것을 예언
3:12-19, 니느웨의 방어 노력이 전부 무용지물이 될 것을 선포
"피의 도성(the city of blood)" 니느웨를 히브리어로 "이르 다밈(עִיר דָּמִים)"이라고 합니다.
'이르((ʽîyr. עִיר)'는 "도시(city), '다밈'은 "피(dâm, דָּם)"를 말합니다.
피의 도성 니느웨는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에 대하여 “너는 망한다!”라는
말은 큰 슬픔의 일이나 임박한 죽음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감탄사입니다.
니느웨는 문자 그대로 ‘피의 성’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살인으로 그 성은 피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Maier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니느웨는 포로들에게 온갖 잔학 행위를 떡 먹듯이 일삼았다.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고, 눈을 뽑아내고, 목을 쳐 떨구는가 하면, 나무에 매달아두거나, 성문 앞에 쌓아두었고, 심지어 산 사람에게 말뚝을 박고, 아주 천천히 최후의 한 조각까지 온 몸의 껍질을 벗겨내는 따위의 마성(魔性)을 드러내었다.”
니느웨는 또한 궤휼, 즉 속임수와 거짓말의 도시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앗수르가 써먹은 책략을 보면 이 궤휼의 특성이 아주 명백히 드러납니다(왕하 18:28-31).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나훔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다시금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니느웨가 요나의 경고를 받아 잠시 회개했지만,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바로
그들의 잔혹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피난처가 되신다는 진리를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넘치게 됩니다.
나훔의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으로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 심판의 원인이 된 니느웨의 죄악상
▶ 잔혹한 피의 성 니느웨
1.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니느웨 성은 망합니다. 니느웨 성은 피의 도성입니다.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입니다. “너는 망한다!”라는 말은 큰 슬픔의 일이나 임박한 죽음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감탄사입니다. 니느웨는 문자 그대로 ‘피의 성’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살인으로 그 성은 피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Maier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니느웨는 포로들에게 온갖 잔학 행위를 떡 먹듯이 일삼았다.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고, 눈을 뽑아내고, 목을 쳐 떨구는가 하면, 나무에 매달아두거나, 성문 앞에 쌓아두었고, 심지어 산 사람에게 말뚝을 박고, 아주 천천히 최후의 한 조각까지 온 몸의 껍질을 벗겨내는 따위의 마성(魔性)을 드러내었다.”
니느웨는 또한 궤휼, 즉 속임수와 거짓말의 도시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앗수르가 써먹은 책략을 보면 이 궤휼의 특성이 아주 명백히 드러납니다.(왕하 18:28-31).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열왕기하 18:28~31)
▶ 행한 대로 당하는 니느웨
2.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훔 선지자는 1절에서 니느웨의 죄를 개괄적으로 지적한 다음, 2~4절에는 이어 몇 가지 신랄하고 생생한 묘사로 이 도시에 대한 마지막 죄목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점층법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채찍’에서 ‘병거 바퀴’로, 다시 ‘말’로, ‘병거’로, ‘기병’과 ‘칼’과 ‘창’으로, 그리고 살육 당한 떼와 큰 무더기 주검(무수한 시체)으로 강도가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바로 니느웨가 당한 공격을 의미하는데, 놀랍게도 이것은 다 니느웨가 자기들의 전술로 써먹던 잔인한 방법들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서 많은 시체 무더기를 쌓았던 니느웨는 이제 자기 시체들이 무더기로 쌓일 차례가 된 것입니다. 찢어지는 듯한 말채찍 소리, 요란하게 울리는 병거 바퀴 소리. 말이 달려옵니다. 병거가 굴러옵니다. 기병대가 습격하여 옵니다. 칼이 번쩍이며 불이 납니다. 창은 번개처럼 번쩍입니다. 떼죽음, 높게 쌓인 시체 더미, 셀 수도 없는 시체. 사람이 시체 더미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 3세는 적들 앞에서 사람의 머리를 잘라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려놓고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왕들은 정복한 도성의 입구에 시체를 마치 장작처럼 쌓아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그와 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
4.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이렇게 심판을 받는 것은 니느웨가, 창녀가 되어서 음행을 일삼고, 마술을 써서 사람을 홀린 탓입니다. 음행으로 뭇 나라를 홀리고, 마술로 뭇 민족을 꾀었기 때문입니다.
마술’이란 자신들의 잔인함을 미화시키는 니느웨의 외교정책을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살육이 임하게 되는 이유는 마치 음녀가 음행을 탐하는 것처럼, 니느웨가 권력을 탐해왔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열국을 자기 수하로 유혹하기 위해 군사적인 지원과 권력을 팔았습니다. 음녀는 니느웨가 섬기던 여신 이스달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매우 음란하고 야만적인 일들을 많이 한 신이라고 합니다. 열국에 대한 니느웨의 통제력 행사는 마법과 마술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열방을 정복한 후 그 민족들을 음행과 마술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통치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미래를 알기 위해 점을 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무수한 주문(呪文)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한 새나 동물이나 구름의 움직임, 간밤에 꾼 꿈 등에서도 징조를 읽곤 했다고 합니다. 바벨론이 니느웨 성을 공격합니다. 여기서는 니느웨를 음녀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가 영적인 간음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을 떠난 것 자체가 바로 우상 숭배이며, 이 세상의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행동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7:5절과 19:2절에서 이 죄악 된 세상을 ‘음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 부끄러움을 당하는 니느웨
5.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이제 여호와께서 니느웨를 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니느웨의 치마를 그 얼굴 위로 걷어 올려서 그의 벌거벗은 것을 뭇 나라가 보게 하고, 그의 부끄러운 곳을 뭇 왕국이 보게 하십니다. 니느웨가 다른 나라들을 대적하여 저질렀던 염치없는 행위들은 이제 그 부끄러움과 수치가 백일하에 노출됨으로써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권력과 여신을 섬겼지만, 그에 의해서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대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2:13) 어떤 나라든 그 나라가 아무리 부하고 강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믿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인간의 생명을 짓밟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대적이 되실 것입니다.
니느웨는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여 그들에게 불명예와 수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수치를 당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물을 니느웨에게 던져서 그를 부끄럽게 하고, 구경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더러운 것’ 즉 인간의 배설물과 ‘능욕’으로 불명예와 망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럽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을 가리켜 사용되는 말입니다. 특히 우상을 지칭하여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신 29:17 렘 4:1 겔 20:7-8). 따라서 이제 니느웨의 영광은 더러운 것으로 탈바꿈하고 말 것입니다.
▶ 니느웨를 위로할 사람이 없음
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니느웨가 망하였다만, 누가 그를 애도하랴?" 하면서 애도할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사람들이 니느웨를 피하여 달아나니, 그를 위로할 자들을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니느웨 성읍이 요나시대(BC. 793-753)에는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지만, 이제 100년이 지난 후(나훔; BC.640-612)에는 전혀 동정을 받지도 못한 채 완전히 멸망할 것을 수사적인 질문으로 강조합니다. 니느웨가 수치를 당하고, 마침내 황무하게 되고도 위로할 자가 전혀 없게 되는 그 날 그들의 멸망은 절정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가 얼마나 잔인했었던지 이제 그토록 큰 피해를 입고 있어도 누구 하나 와서 거들떠 봐주는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한때 매력을 뽐내던 기생이 이제 그 수치가 다 드러나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매력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이웃 나라들을 유혹하며 음녀처럼 부도덕한 행위들로 타락시켰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 노아몬 멸망의 예를 통한 니느웨 멸망의 필요성
▶ 자신이 망하게 한 이집트처럼 망하는 앗수르
8.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9.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10.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1.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니느웨가 이집트의 테베(노아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테베는 나일 강 옆에 자리 잡은 테베, 강물에 둘러 싸여 그 큰 물이 방어벽이 되고, 그 큰 물이 성벽이 된 그 성읍입니다, 이제 니느웨의 힘은 앗수르가 주전 663년에 정복했던 애굽의 도시 테베 또는 노아몬 보다도 도덕적으로 나을 것이 전혀 없는 도시이므로 마땅히 테베처럼 패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이 도시를 노아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몬 神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호머의 일리아드에 의하면 이 테베라고 하는 도시는 문이 백 개나 있었던 이집트 남쪽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전들, 스핑크스 그리고 오벨리스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도성이었다고 합니다. 그 위치는 지금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6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 가면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나일 강의 동편 제방 위에 건설되었으나 그 외곽 지역은 양쪽 해안에 다 퍼져있었습니다. 테베의 한 가지 장점은 전략적인 위치였다고 합니다. 사방이 물로 둘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운하와 수로가 여기저기 많은 지역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시 방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적군들은 도시 심장부에 들어가려면 수많은 운하를 건너야만 했는데, 그것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와 이집트가 얼마든지 그들의 힘이 되어 주고, 붓과 리비아가 이집트를 도와주었습니다. 테베의 또 한 가지 강점은 정치적으로 유력한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니느웨에게는 아무런 동맹국도 없었습니다. 테베는 당시 구스(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이 구스는 나일 강 상류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오늘날의 이집트 남부, 수단, 그리고 에티오피아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나일 강 하류 지역은 애굽에 속해 있었지만, 테베는 당시에 구스에 속해 있었습니다.
‘붓’과 ‘리비아’는 때로 같은 이름으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처럼 함께 언급될 때에는 ‘붓’이 홍해와 맞닿은 해안을 가리키고 그 남방 끝은 오늘날의 소말리아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테베의 동맹국들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니느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새의 테베의 성읍의 주민도 사로잡혀 가고, 포로가 되어서 끌려갔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길거리 모퉁이, 모퉁이에서 나동그라져서 죽고, 귀족들은 제비 뽑혀서 잡혀 가고, 모든 지도자가 사슬에 묶여서 끌려갔습니다.
여러 가지 지리적 외교적인 강점에도 불구하고 테베는 앗수르의 앗수르바니팔 왕에게 함락되고 맙니다. 테베의 백성 대부분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갑니다. 테베의 어린아이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됩니다. 앗수르 군인들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길모퉁이마다 이 일을 자행합니다. 백성들 사이엔 극도의 공포와 고통이 하늘에 사무쳤고, 테베의 뒤를 이를 후세대의 씨가 마르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테베에 대한 이런 극악무도한 잔학 행위들이 니느웨의 죄를 더하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간 테베인들 중에 일반 백성들은 그대로 포로 상태로 집단 거주하게 된 반면,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어졌습니다. 아마도 니느웨인들의 노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귀족들로서는 매우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 포로 중 제비 뽑히는 자들은 주로 평민이었는데, 여기서는 귀족들이 평민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앗수르의 ‘니느웨’도 또한 술에 취해서 갈팡질팡하고, 원수를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아, 허둥지둥 할 것입니다. 니느웨가 테베에게 한 일이 이제 니느웨에게 그대로 되돌아 올 것을 예언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공격을 받을 즈음에 ‘취한’ 사람들처럼 의식과 방향을 잃은 채 피난처를 찾아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사실 니느웨 사람들은 술에 취해 있었는데(1:10), 그 바람에 그들은 방어 능력을 상실한 채 향방 없이 좌충우돌하여 큰 피해를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숨을 곳을 찾아’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은 흔적도 없이 멸망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니느웨의 유적지는 1842년 그곳이 발굴될 때까지 숨겨져 있었습니다.
◈ 메뚜기 비유를 통한 니느웨 멸망의 필연성
▶ 불에 타는 니느웨
12.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13.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니느웨의 모든 요새가 무화과처럼 떨어질 것입니다. 흔들기만 하면 먹을 이의 입에 떨어지는,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될 것입니다. 적들이 공격을 감행해올 때, 니느웨는 자기의 모든 산성이 허약해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봄에 맺히는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는(민 13:20) 나무를 살짝 흔들기만 해도 우수수 땅에 다 떨어집니다. 조금만 손을 대어도 먹는 자의 입으로 무화과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의 수비도 침략자의 발 앞에 이렇게 쉽고 빠르게 무릎을 꿇게 되고 말 것입니다. 과연 이 일은 주전 612년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앗수르의 군인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군인들은 모두 여자들처럼 연약합니다. 밀어닥치는 대적들 앞에서 니느웨 땅의 성문들은 모두 열리고, 빗장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침략자들을 보는 순간, 성 방비를 힘쓰고 있던 장정들이 일시에 용기를 잃고 ‘여자’같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인은 두려움이 많고 방어 능력이 없습니다.(사 19:16 렘 50:37 51:30) 한때 사자처럼 날뛰던 앗수르인들이 두려움에 질려 무력해지고 맙니다. 범람하는 물에 의한 성벽 유실에 힘입어 적군들은 쉽게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문과 빗장에 불을 지르고 물밀듯이 성안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 대비책이 소용없이 망하게 됨
14.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15.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이제 니느웨가 에워싸일 터이니, 물이나 길어 두라고 하십니다. 옛날에 전쟁을 할 때 도시가 포위를 당하게 되면 가장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깨끗한 식수를 충분히 공급하는 일이었습니다. 니느웨의 요새를 탄탄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수렁 속으로 들어가서 진흙을 짓이기고, 벽돌을 찍어 두라고 합니다. 니느웨가 아무리 수비책을 찾아 애를 쓴다 하더라도 여호와의 심판을 막을 도리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제 파멸의 장면은 산성과 성문에서(12-13절) 성 내부로 옮겨집니다(14-17절). 조롱조의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나훔은 니느웨의 군인들에게 한번 수비를 잘 해보라고 명령합니다. 적군이 도시의 성벽을 허물게 되면, 수비하는 도시는 새 벽돌과 진흙으로 이 부분들을 수리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탄탄하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수리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니느웨의 잔해를 발굴했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적군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렸을 때 그 인근 지역을 방비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쌓았던 2차 방벽의 흔적들도 발견해 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앗수르는 멸망할 것임을 나훔 선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느치가 풀을 먹어 치우듯이, 산성에서 불이 나와 니느웨를 삼킬 것입니다. 칼이 니느웨를 벨 것입니다. 느치처럼 숫자나 불어나 보라고 합니다. 메뚜기처럼 숫자를 많이 불어나 보라고 하십니다. 모든 방비의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이윽고 ‘불’과 ‘칼’을 동반한 재난이 니느웨를 강타하게 됩니다. 시내로 들어온 적군은 많은 사람들을 칼로 살육합니다. 그 군대는 마치 온 사면의 농작물을 완전히 다 먹어치우는 ‘느치’와도 같을 것입니다.
‘느치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하라’는 나훔의 명령은 니느웨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숫자를 늘려서 어떻게든 방어를 해보라는 말이지요. 그게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이 말씀을 적군들에게 주어지는 명령으로 본다면, 이것은 숫자를 늘려서 니느웨 정복을 성공리에 끝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 많은 수의 상인과 방백들이 다 도망갈 것임
16. 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17. 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니느웨는 상인들을 하늘의 별보다 더 많게 하였습니다. 느치가 땅을 황폐하게 하고 날아가듯이 그들이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나훔 선지자는 다시 ‘느치’이야기를 합니다. 니느웨는 수많은 ‘상고(商賈-상인)’와의 무역을 통하여 부를 엄청나게 모았으나, 이제 그 거래처 상고들은 채소밭을 죄다 갉아먹는 많은 느치 떼와 같이 될 것입니다. 비록 니느웨가 무역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이제 그 거래처 상인들이 부정 이득을 통해 똑같은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니느웨 상품들을 도로 취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군대도 부(富)도 니느웨 사람들을 구해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의 수비대가 메뚜기 떼처럼 많고, 그의 관리들이 느치처럼 많아도, 추울 때에는 울타리에 붙어 있다가 해가 떠오르면 날아가고 마는 메뚜기 떼처럼,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격의 ‘메뚜기’가 등장합니다. 니느웨가 공격을 당하게 되는 날, 방백들과 대장들은 너무나 두려워 야반도주를 할 것입니다. 메뚜기는 저녁에 추울 때는 울타리에 달라붙어 있지만, 아침에 해가 뜨면 곧바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성벽(울타리)을 지키던 장수들도 공포에 질려 순식간에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1845년이 될 때까지 니느웨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도 발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 니느웨는 회복이 불가능함
18.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아시리아의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의 목자들이 다 죽고 그의 귀족들이 영영 잠들었습니다. 그의 백성이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졌으나, 다시 모을 사람이 없습니다. 18~19절에는 마치 장송곡 가사와도 같은 마지막 예언이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왕’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 당시인 주전 612년에 앗수르를 통치했던 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니느웨가 함락된 지 3년 뒤인 주전 609년에 앗수르 제국을 다시 일으켜 보려고 노력했던 앗수르 우발릿 왕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대개 후자 쪽이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앗수르우발릿 왕은 황무하게 되어버린 제국을 둘러보면서, 그의 지도자들(목자와 귀족)은 다 죽었고,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백성들은 다 흩어져서, 그들을 다시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난공불락을 자랑해 온 이 제국이 이제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니느웨의 상처는 고칠 길이 없고, 그 부상은 치명적입니다. 그의 소식을 듣는 이들마다, 그가 망한 것을 보고 기뻐서 손뼉을 칩니다. 그의 계속되는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불살라지고 약탈당한 도성 니느웨의 참상은 마치 ‘치명적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 함락된 정도가 너무도 고칠 수 없고 중하여, 이제 니느웨의 재건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고고학이 아주 잘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잔인하고 포학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압제를 당한 적이 있는 모든 열국들은 이제 니느웨가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그 악행을 늘 받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이제 니느웨가 함락되어 그 악행도 끝이 났다고 하니, 이는 누구보다도 특히 유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여호와께서는 니느웨에게는 진노하시고, 주를 의뢰하는 백성들은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보이실 것입니다.
오늘날
이 나훔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다시금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니느웨가 요나의 경고를 받아 잠시 회개했지만,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바로
그들의 잔혹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피난처가 되신다는 진리를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넘치게 됩니다. 나훔의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으로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08-07-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괴하는 자(나훔 2: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찌어다.
An attacker advances against you, Nineveh . Guard the fortress, watch the road, brace yourselves, marshal all your strength!
"파괴하는 자(an attacker)"는 당시 세계를 제패하고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던 앗수르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예비한 연합군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파괴하는 자(메피츠. מֵפִיץ)"는 문자적으로는 "승리의 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앗수르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일어난 바벨론 "나보폴리살"과 메대 "카카레스"의 연합군을 말합니다(렘 51: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의 철퇴 곧 병기라 내가 너로 열방을 파하며 너로 국가들을 멸하며."
연합군의 모습을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3-4절)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
6. 25 전쟁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후 70년 동안 전쟁이 멈춘 상태에서 성경적인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방법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긴 전쟁 보다 낫다"는 거짓 슬로건을 주장하며 모든 사람들을 미혹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성경적 평화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과 은혜로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맡은 일을 위하여 충성하는 진실한 일군으로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파괴하는 자(6327) 푸츠(pûwts) פּוּץ
관련 성경 / 흩어지다(창 11:4, 삼상 11:11, 겔 34:12), 흩다(민 10:35, 신 4:27, 겔 11:16), 흘러가다(잠 5:16), 넘치다(슥 1:17), 퍼지다(삼하18:8), 부숴뜨리다(욥 16:12, 렘 23:29), 헤치다(렘 9:16), 쫓다(욥 18:11), 뿌리다(사 28:25), 쏟다(욥 40:11), 흩어버리다(사 41:16), 파괴하다(나 2:1), 전율하다(합 3:6).
구약 성경 / 64회 사용
나훔 2장 : 니느웨 멸망의 참상 예언
1장에서
나훔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고, 유다는 구원하실 것에 대해 개괄적으로 말씀했습니다.
2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과 약탈을 당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2:1-7, 당당한 세력으로 세계를 다스리던 니느웨가 적군의 침입으로 인하여
왕궁이 파괴되고 존귀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을 예고
2:8-13, 위세를 당당하게
떨치던 니느웨가 그들이 자랑하던 젊은 용사들까지도 모두 적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예언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도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니느웨를 통해 보여 주려고 합니다.
1장에서는 조용하지만 위엄이 있는
톤에서,
2장은 좀 더 감정적으로 생생한 묘사의 톤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편이므로 유다를 대적하는 앗수르를
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라면 우리의 대적이 아무리 무서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본질상 공의로우시므로 악과는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이는 이방 민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택함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은 언제나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악에 빠져 있을 때는 가차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악 중에 빠져 있을 때마다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선지자를 통해 끊임없이 예고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주변 국가들을 권고해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일깨우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의 세력에 대해 심판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악한 백성들을 우선적 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예고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신다. 또한 이러한 긍휼을 베푸심은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인근 열방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 한 예로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니느웨의 심판을 예고하셨고 니느웨의 회개로 심판은 유보되었다. 니느웨는 당시 고대 근동을 지배하던 앗수르의 수도였다.
따라서 니느웨는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찼으며 이스라엘에게는 철저한 원수였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한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니느웨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는
또다시 죄악 가운데 거하게 되었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따라서 본장은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분노하시는 하나님임과 동시에 회개하는 자에 대해서는 긍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시는 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영적교훈]
사람은 살아가면서 언제나 죄를 짓습니다.
평생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하게 뉘우치고 다시는 같은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과거 심판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마저 놓쳐 버린 니느웨는 결국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시지만 결코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평소의 삶 속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지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 니느웨 멸망 당시의 참상 예언
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BC
612년경,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성벽의 길이는 13km로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성벽의 높이는 30m
였습니다.
성벽 위로 6대의 마치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성 주위에 18m 깊이의 연못이 둘러쳐져 있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이었습니다.
9b를 보면 “노략한 금은으로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했습니다.”
침략군이
이런 앗수르를 치러 올라왔습니다.
앗수르가 성을 지켜보아도, 길을 지켜보아도, 허리를 질끈 동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이제 공격을 받아 곧 멸망할 니느웨에게 스스로 방어할 테면 해보라고 조소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다 2절에는 유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렇게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와 유다를 번갈아 언급하는 교차 표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니느웨를 치러 파괴하는 자가 올라온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올라왔다는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올라왔다’는 동사는 군사 용어입니다.
파괴하는 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메대(메디아)의 키악사레스(Cyaxares)와 함께 니느웨를 정복한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어서
나훔은 말합니다.
‘성을 지켜보려무나. 길을 지켜보려무나. 허리를 질끈 동 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려무나.’
이 말은
사실 매우 신랄한 조롱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방어를 위해 발버둥을 쳐도 결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니느웨의 자기 방어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심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약탈자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포도나무 가지를 없애 버렸지만, 주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시며,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공격에 대한 묘사는 야곱과 이스라엘에 관한 언급에 의해 잠시 중단됩니다. 야곱이 남왕국 유다를 가리키고 이스라엘은 북왕국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두 단어는 모두 백성 전체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니느웨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낮아지고 겸비해진 자리에서 다시금 영광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메시야가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란 하나님의 기업인 유다를 가리킵니다.
▶ 앗수르를 공격하는 바벨론
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앗수르의 적군들은 붉은 방패를 들고, 자주색 군복을 입었습니다. 병거가 대열을 지어 올 때에 그 철갑이 불꽃처럼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물결칩니다. 이제 나훔은 그 ‘파괴하는 자’들이 어떠한 장비를 가지고 공격해 오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메대와 바벨론의 방패들은 붉은 색이었는데, 그것은 피가 묻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나무 방패에 구리를 입혔거나 붉게 염색된 가죽을 입혀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사들의 붉은 (겔 23:14) 군복 옷은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자아내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무사들의 구브로에서 난 노송나무로 만든 창이 거친 공격 때문에 흔들렸고, 병거는 차축에 직각으로 낫을 부착시켰기 때문에 쇠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고 합니다. 병거들이 질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광장에서 이리저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습니다 포위군의 달리는 병거는 격분하여 미친 듯이 달리는 것 같았습니다(렘 46:9). 그들의 움직임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칼로 정복한 앗수르는 칼로 망합니다.
5절의 주어(그)는 앗수르 왕을 가리킵니다. 그가 정예 부대를 앞세워 성벽을 방어하고 막을 것을 예비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을 지키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정예부대를 앞세웠으나, 폐르시아 군대는 거꾸러지면서도 돌격합니다. 벼락같이 성벽에 들이닥쳐 성벽 부수는 장치를 설치합니다. 마침내 강의 수문이 터지고, 왕궁이 휩쓸려서 떠내려갑니다.
‘수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도시를 통과하여 티그리스 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고스르(Kosher) 강의 유량을 조절하기 위해 있던 수문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 왕은 도시 외곽의 강에 물을 막아두는 둑을 설치하고 그곳을 저수지로 삼았으며 니느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 개의 두꺼운 수문을 설치하여 강물의 유량을 조절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문은 고고학적으로도 발굴되었습니다. 적군들이 니느웨를 포위하면서 수문을 다 닫아 저수지에 물이 찬 후 일제히 수문을 다시 열어 물이 넘침으로 왕궁이 소멸되었습니다. 아니면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니느웨 성의 자연적 요새가 되었던 강물이 이제는 니느웨를 파멸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들은 다 이와 같습니다. 많은 나라들의 왕궁을 소멸시켰던 앗수르의 마지막 왕 앗수르-바니팔은 이제 자기 왕궁이 파멸되는 운명을 맛보게 됩니다. 앗수르의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고, 시녀들이 비둘기처럼 구슬피 울면서 가슴을 치는 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실제 여왕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이스달 여신상을 가리킬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시녀들이 비둘기같이 슬피 울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니느웨의 운명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니느웨는 함락되고 그 사람들은 이제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 니느웨가 멸망한 후 참상 예언
▶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진 니느웨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니느웨는 생길 때로부터, 물이 가득 찬 연못처럼 주민이 가득하였으나, 이제 모두 허겁지겁 달아납니다. "멈추어라, 멈추어라!" 하고 소리를 치나, 뒤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시가 홍수에 잠기게 되자, 니느웨 사람들은 모든 소유를 뒤에 버려둔 채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연못’이라는 단어는 물이 넘쳐 물난리를 겪고 있는 지역으로서, 니느웨의 상황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물이 넘치자 사람들은 이제 혼비백산하여 도망합니다. 공포 가운데 달아나는 그들을 향해 서라고 하여도 아무도 돌아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서라고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지휘관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적군일수도 있겠습니다.
적군은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금과 은이 얼마든지 쌓여 있다고 합니다. 온갖 진귀한 보물이 많기도 하구나! 말합니다. 이제 나훔은 승전한 침략자들에게 전리품을 수확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약탈한 엄청난 전리품이 니느웨에 있었을 것입니다. 은과 금의 보유량이 엄청났고, 기타 공물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도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많은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했던 니느웨가 이제는 오히려 약탈을 당하게 됩니다.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집니다. 그가 행한 대로 자기가 당합니다. 앗수르는 털리고 털려서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의 떨리는 가슴, 후들거리는 무릎, 끊어질 것같이 아픈 허리, 하얗게 질린 얼굴들이 보입니다. 이렇게 되자 니느웨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낙담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무릎이 후들거리며 허리가 아프고 얼굴이 하얗게 질립니다.
▶ 수사자 같은 앗수르를 멸하심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사자들과 같은 앗수르 사람들의 굴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사자들이 그 새끼들을 먹이던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수사자와 암사자와 새끼 사자가 겁 없이 드나들던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수사자가 새끼에게 먹이를 넉넉히 먹이려고, 숱하게 죽이더니, 앗수르는 수사자처럼 암컷에게도 많이 먹이려고, 먹이를 많이도 죽였습니다. 사냥하여 온 것으로 바위굴을 가득 채우고, 잡아온 먹이로 사자굴을 가득 채우더니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나훔은 파멸된 니느웨를 바라보면서 조롱 섞인 물음을 던집니다. ‘이제 사자들의 굴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다시 말해 니느웨는 더 이상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자가 자기의 암사자와 새끼 사자들을 위해 먹이를 사냥하듯이, 앗수르도 다른 나라들을 그렇게 노략했습니다. 사자는 앗수르의 상징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왕들은 사자 사냥을 나가 사자를 죽이면서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자만하고, 자신의 용맹을 사자에 비유하곤 했다고 합니다. 산헤립은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면서 ‘내가 사자처럼 포효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부조와 장식품들에는 사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자굴이 텅 비게 되었다고 나훔은 선포합니다. 즉 사자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앗수르가 이제는 곧 잡힐 사자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대적이 되심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치겠다고 여호와 만군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앗수르의 대적이 되십니다. 앗수르 병거를 불살라서 연기와 함께 사라지게 하십니다. 앗수르의 새끼 사자들은 칼을 맞고 죽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앗수르 먹이를 남겨 놓지 않으십니다. 앗수르가 보낸 전령의 전갈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니느웨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적의가 아주 강력한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치겠다, 즉 하나님 자신이 니느웨를 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불이 병거들을 사를 것이고, 칼로 군사들(젊은 사자들을) 멸할 것이며, 이제 니느웨는 힘없는 다른 나라들을 괴롭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만한 도시는 항복을 요구하거나 공물을 수탈하기 위해, 두 번 다시는 전령을 보내는 일도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칼로 일어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시는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단 한 문장이지만 깊은 역사 철학을 담고 있는 진리입니다. 역사가 이 말씀의 진리 됨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역사를 교훈 삼아 회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앗수르의 편이 되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현재에 적용한다면 죄악 된 세상과 교회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을 것이며, 동시에 교회는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예비 된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 편이 되어야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서 우리를 도우 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날을 대망하며 흠 없는 신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 의지할 때,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저 막강한 니느웨 도성도 하루아침에 쓸어버리시듯 모든 악한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08-05-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길(나훔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The LORD is slow to anger and great in power; the LORD will not leave the guilty unpunished. His way is in the whirlwind and the storm, and clouds are the dust of his feet.
여호와의 길(the Lord's Way)
아도나이 다르코(דַּרְכֹּו יְהוָה)
길(1870) 데레크(derek) דֶּרֶךְ
어원 /18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길(창 3:24, 삼상 4:13, 겔 48:1), 행위(창 6:12,삼상 8:3, 왕상 8:32), 도(창 18:19, 신 13:5, 시 18:21), 도리(창 19:31, 욥 21:14), 생리(창 31:35), 도중(왕하 10:12), 도로(레 26:22, 애 1:4), 여행(민 9:10, 수 9:13), 행사(욥 26:14), 중도(시 102:23), 때문(시 107:17), 행실(잠 8:13, 13:6), 소행(잠 12:26, 호 4:9), 바른 길(잠 23:19, 사 30:11), 옳은 길(말 2:8), 자취(잠 30:19), 사정(사 40:27),행동(겔 14:22,23), 풍속(겔 20:30).
[동] 향하다(겔 20:46, 21:2, 40:6,22,46), 위하다(암 8:14), 여행하다(수 9:11), 가다(삿 4:9), 행하다(잠 14:2, 28:6), 본받다(사 10:24).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 1869. 다라크(dârak) דֶּרַךְ
관련 성경 / 나오다(민 24:17), 밟다(신 1:36, 수 1:3), 당기다(시 7:12, 대상 5:18), 겨누다(시 64:3), 쏘다(대상 8:40), 짓밟다(삿 20:43), 지도하다(시 25:5, 9), 행하다(시 119:35), 건너가다(사 11:15), 다니다(합 3:19).
[명] 타작마당(렘 51:33).
구약 성경 / 62회 사용
어원 / 53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짐(출 23:5, 사 46:2, 렘 17:21), 누(삼하 15:33,19:35), 일(왕하 9:25), 노래(대상 15:22), 경책(대하 24:27), 해(욥 7:20), 잠언(잠30:1, 31:1), 경고(사 13:1, 나 1:1, 슥 9:11), 중벌(렘 23:36),묵시(겔 12:10).
[동] 메다(민 4:15, 대하 35:3),싣다(왕하 5:17, 8:9), 노래하다(대상 15:27), 바치다(대하 17:11), 탈취하다(대하 20:25), 엄중하다(렘23:33, 34, 36).
구약 성경 / 66회 사용
* 5375. נָשָׂא
묵시(2377) 하존(châzôwn) חָזוֹן
어원 / 23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이상(異像)(삼상 3:1, 사 1:1, 단 8:2), 계시(대상 17:15), 묵시(대하 32:32, 겔 7:13), 환상(사 29:7), 예언(렘 14:14).
구약 성경 / 35회 사용
* 2372. חָזָה
관련 성경 / 보다(욥 15:17, 시 58:10, 겔 12:27), 우러러보다(욥 36:25), 바라보다(시 63:2, 미 4:11), 받다(사 2:1), 이상(異像)으로 받다(암1:1, 합 1:1), 보이다(사 30:10), 들어가다(욥 8:17), 뵙다(욥 23:9, 시 11:7), 깨닫다(욥 34:32), 보게 하다(아 6:13).
구약 성경 / 55회 사용
나훔 선지자의 하나님(나훔 1:2-3)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투기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길"이란 영어 단어는 '웨이(way)'라고 합니다.
'웨이'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의미는 "방법"이란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길이란 '여호와의 방법' 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기원전 722년에 망합니다.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트린 앗수르는 기원전 612년에 신흥 강국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선지자 나훔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앗수르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민족주의자적인 선지자라고 하겠습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은 "충분한 위로" 라고 합니다.
앗수르라고 불리는 앗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주전 2500년경에 시작된 고대국가입니다.
한때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였지만, 많은 나라가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나며 약해지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잊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앗수르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잠시 회복하는 모습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 나라의 멸망을 선포했을 때 입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는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회복하는 듯하더니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희생적인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자신의 안일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삶이 아니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한다는 확고한 믿음과 결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앗수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이사야 19:22-25).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우리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향한 안양의 삶을 사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예언하시며 애굽과 이스라엘과 앗수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마지막 때에 쓰임 받음도 심지어 애굽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백성이라 불림을 받음도 애굽의 콥틱 크리스찬의 모습을 접하며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지만 앗수르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나라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앗시리안 크리스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앗시리아는 그저 구약시대에 한 시대를 풍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이기에 오랫동안 그 민족들 또한 함께 사라졌다고
여겨졌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관심이 부족해서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앗시리안은 역사 가운데 계속 이 땅에 존재
해왔고 우리는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복음 가운데로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현재 중동 지역과 심지어 미국 시카고
지역까지 세계에 3백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하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크리스찬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1세기 도마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잊고 기억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수많은 나라를 핍박하고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사마리아인이라 불리게 되는 혼합인을 만든 앗시리아를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복음 안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십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주권을 봅니다. 내가 알지 못해도, 내가 들어 본 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이 땅과 우리를 향한 그의 섭리와 주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앗수르와 나훔 선지자(B.C. 7세기)
150년 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의 전도를 받고 왕에서부터 모든 백성이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150년 만에 앗수르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즉 하나님께 중한 경고를 들어야 할 만큼 타락해 버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신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 1:1)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가 범람한 물로 진멸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흑암으로 쫓아내실 것이라고 완전한 멸망을 말씀하신다.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나 1:8)
티그리스 강의 강물이 니느웨를 덮어 그 위에 토사가 쌓여 있었기에 니느웨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0년 전 요나 선지자를 통해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던 하나님은 이제 나훔 선지자를 통해서는 니느웨에 대한 완전한 멸망을 가차 없이 말씀하신다. 반드시 멸절하시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멸절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롭게 할 것도 없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니라.”(나 1:12)
나훔서가 기록되기 약 100년 전(B.C. 760년 경)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그들이 회개를 하자 심판을 유보하여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멸망 받아 마땅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손을 거두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의 결과였다. 그런데 회개 운동이 일어난지 약 100여년이 지난 나훔 선지자 당시의 니느웨 사람들은, 지난 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하고 도리어 이전보다 더 교만하며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이웃 민족에 대하여 매우 포악했고 간교했으며, 지극히 교만했다.
즉 앗수르는 부흥기였던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5-727’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B.C. 727-722)’ 때에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고,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성격을 호전적이고 무자비한 것으로 만들어 다른 민족에 대한 학대와 착취, 그리고 약탈을 서슴치 않게 되었다.
성경에서 때로는 ‘불’로 알려지기도 한 ‘디글랏빌레셀 3세(B.C. 745-727)’ 가 아시리아(앗수르)의 왕 위에 오른 이후로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 의 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종주국의 위치에서 군림했던 아시리아는 단순히 종주국들의 정치에 관여하며 조공을 받는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회, 종교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약소국가인 유다와 이스라엘의 처지는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열왕기하는 유다의 아하스와 이스라엘의 므나헴이 디글랏빌레셀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북 왕국의 므나헴은 디글랏빌레셀로부터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주었다.
“앗시리아의 불 왕이 그 땅을 치려고 올라오니, 므나헴은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왕국의 통치권을 굳게 하려 함이었다. 므나헴은,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부자에게 한 사람당 은 쉰 세겔씩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더 이상 그 땅에 머물지 않고 되돌아갔다.”(왕하 15:19-20, 새번역)
유다 왕 아하스는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반아시리아에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그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사람들을 보내 디글랏빌레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아시리아의 신을 숭배하는 제단이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며(왕하 16:10-16), 이들의 정치 경제적인 압박은 나훔 선지자가 활약하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아하스 시대부터 유다는 100여 년 동안 아시리아의 종속국으로 존재했다. 아시리아는 유다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을 억압하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종주국이었다. 이스라엘에게 한없이 잔인하기만 했던 아시리아는 니느웨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였다.
니느웨(니네베)는 도시 중심을 흐르는 코서 강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나뉜 곳이었다. 북쪽 지역은 면적이 남쪽 지역의 두 배에 달했으며,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니느웨의 면적은 1,800에이커(총 225만평) 정도 되었다. 당시 도시국가치고는 매우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니느웨가 주전 5,000년부터 도시로 존재했으며, 3,000년 이후부터 이 도시에 이스타르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한창 가나안에 정착하던 B.C. 1400~1200년에 이르러 살만에셀(1세)과 디글랏빌레셀(1세)이 대단한 건축 사업을 통하여 니느웨의 규모를 키웠다. 주전 700년경에 산헤립이 니느웨에 새 궁궐을 세우고 아시리아의 수도로 삼으면서 도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때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는 앗술이었다). ‘산헤립’은 도시에 정원들을 세웠고, 약50Km에 달하는 수로 시스템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인 ‘에살핫돈’과 ‘아술바니발’도 꾸준히 건축사업을 지속해 나갔다. 특히 아술바니발의 도서관은 수만 점의 흙판 문서가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되어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에 산헤립은 유다를 공략하여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마치 ‘새를 새장에 가두듯이’ 가두어 둔적이 있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모면했다(사 36-39장, 왕하 18장). 그러나 산헤립이 유다에서 철수한 다음에도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유다 땅에서 지속되었다.
므낫세(B.C. 697-643)는 바알과 아세라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의 종교를 지향했으며(왕하 21:3), 그의 아들 아몬은 암살될 때까지 2년 동안 아버지보다 더한 배교행위를 지향했다(왕하 21:23). 아몬이 왜 암살을 당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유다의 외교정책에 변화를 추구하던 자들의 음모에 의하여 저격되었을 것이다(Malamat).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B.C. 641년) 아시리아는 유다의 종주국으로 이미 100여년 동안 군림해 오던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때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은 옛적 다윗시대에 누렸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갈망했을 것이다. 이러한 갈망 속에서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술바니발이 B.C. 627년에 죽자, 요시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34:3).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방 종교들의 흔적을 뿌리뽑고자 했으며, 바알제단과 아세라 상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부수도록 했다(대하 34:3-7). 이같은 행위는 아시리아의 신들을 거부하며 므낫세의 종교적 복합주의를 지탄하는 것을 의미했다(Bright).
이런 정황에서 볼 때 B.C. 627년은 고대 근동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아술바니발의' 죽음은 곧 아시리아의 쇠퇴로 이어졌다. 그의 죽음은 아시리아의 내부적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반유목민으로 분류되는 키메리오스족, 스키타이족, 메대족 등이 압력을 가해왔다. 지금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있었던 바벨론에서는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왕이 되었으며, B.C. 623년에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아시리아 공략에 나섰다. 아시리아는 B.C. 614년에 앗술을 메대 사람들에게 빼앗겼으며, B.C. 612년에는 갈그미스 전투를 통하여 아시리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아술바니발(아슈르버니팔)'이 죽은 B.C. 627년에 유다에서는 ‘예레미야’와 ‘스바냐’, 두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했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국제 정세가 불안한 시기에 유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훔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보다 더욱더 강도 높게 아시리아의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니 그때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게다가 성전을 보수하던 제사장 '힐기야'가 B.C. 621년에 율법 책을 발견한 사건은 이러한 기대와 함께 종교개혁에의 의지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율법책이 발견된 후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고 점술가들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열왕기 저자는 ‘요시야’를 전무후무한 왕으로 평가하였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유다의 왕 요시야 통치기간(B.C. 641-609년)이 나훔 선지자의 사역 후반기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힘들어하던 요시야 왕이 나훔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하여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요시야는 종주국으로 섬기기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던 아시리아가 곧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앓던 이가 빠지는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시리아의 최종적인 종말은 보지 못하고 B.C. 609년에 므깃도에서 죽었다. 아시리아가 B.C. 625년에 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B.C.. 605년에야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메대 연합군에 퍄하여 지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대 사료에 의하면 앗수르는 적국을 완벽하게 초토화하거나 폐허로 만드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으며, 반란자들에 대해서는 살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각을 뜨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앗수르는 약소국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속이기를 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그들의 간교함과 다른 민족의 피 위에 건설된 국가였다.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를 고칠 수 없고, 앗수르가 망햇다는 소식에 모두들 손뼉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 앗수르로 인해 고통 받지 않은 나라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나 3:18-19)
앗수르 제국의 멸망(B.C. 609년)|
앗수르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적다운 적의 대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앗수르(아시리아)는 B.C. 732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를 멸망시켰으며, 사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B.C. 722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B.C. 701년에는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을 차지한 적이 있다. B.C. 663년에는 천연의 난공불락 요새로 알려졌던 이집트의 수도 테베를 점령했다.
그러나 B.C. 609년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앗수르는 수백 년을 이어온 상 아시아의 주인 자리를 완전하게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이미 바벨론에게 함락되었고,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바벨론의 하란 공격으로 인해 B.C. 610년 하란까지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 제국을 계승할 야심을 품고 앗수르 패잔병들과 함께 바벨론을 대항하려 했던 애굽의 바로 느고가 B.C. 609년 하란을 재탈환하려다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앗수르는 B.C. 609년 제국으로서의 깃발을 완전히 뽑아야만 했다. 그렇게 잔인하고 무섭던 앗수르의 왕들도 모두 사라지고, 앗수르의 마지막 모습은 왕궁에 불을 질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비겁함 그 자체였다.
나훔의 예언대로 앗수르의 멸망은 고대 근동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박수를 칠 만큼 기쁜 소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오랜 세월 제국주의를 펼치면서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피지배 민족들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앗수르 왕의 어느 기념비에서 새겨진 문구이다.
『나는 귀족들의 겁데기를 벗겼고, 3000명의 포로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나는 한 명의 포로도 남겨 두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고, 코와 귀를 베어 내기도 하였다. 수많은 병졸들의 눈을 도려내기도 하였으며, 처녀들을 통째로 굽기도 하였다.』
그후 바벨론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던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니네베)는 나훔의 예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해 도시 위로 6m나 토사가 쌓여 B.C. 609년부터 A.D. 1846년까지, 2,450년 이상 그 존재를 깊은 땅 속에 묻어두게 되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려 혼혈족을 만들어 각 민족의 독특성을 소멸시킴으로 반란의 근원을 도려내, 그들의 제국을 영원하게 하려고 했다. 사마리아가 그 예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심해지자, 앗수르를 몽둥이로 들어 사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과 거주의 경계는 대제국에 의해 재편성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주의 경계를 이미 태초부터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고유한 각 민족들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일찍이 앗수르 민족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하고 앗수르 민족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요나를 설득하셔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게 함으로 니느웨의 12만 명의 생명과 가축들을 살리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점령한 앗수르가 남유다로 공격해올 때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의 뜻은 앗수르가 사마리아까지는 정복했으나, 예수살렘까지는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지켜주신다는 것이었다. 앗수르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경계는 사마리아까지였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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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 이안 프로반 V. 외 지음, CLC.
- 「 이스라엘 역사 」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역, 컨콜디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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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역사사천년 」 맥스 디몬트 지음, 김재신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 「 유대인의 역사 1- 성경 속의 유대인들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유대인의 역사 2 -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유대인의 역사 3 -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이스라엘 왕정 멸망사 」 이병렬 지음, 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
- 「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 이병렬 지음, 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
- 「 고대 근동 역사 」 마르크 반드 미에룹 지음, CLC.
- 「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임미영 지음, CLC.
- 「 성서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 임미영 지음, 자체제작.
- 「 성경역사, 지리학, 고고학, 아틀라스 」 앤손 F. 레이디 지음, 강성열 옮김. 이레서원
내 손에 있는 것(사뮈엘 타퐁 예화) - 출애굽기 4: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 출4:2
세상에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 할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뮈엘 타퐁'이라는 사람은 큰 포도밭을 갖고 있던 돈 많은 양조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1934년 7만 5천만 달러를 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구두쇠였는지는 그가 자살하기 위해 밧줄을 사러 갔다가 그 밧줄 값을 깍았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가격을 깍은 밧줄로 그는 목을 메고 자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금고에는 약 200만 달러(약 23억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투자로 잃은 돈은 7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고 남은 돈은 200만 달러가 있었는데 그는 자살한 것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잃은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으로 자살을 한 것입니다.
남아 있는 것이 더 많은데도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부르실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모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소중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잃어 버린 것에 집중하며 살기보다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잃어 버린 것에 마음을 두면 불행해집니다
오히려 내 손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하고, 복된 인생의 비결입니다
스스로에게 늘 질문을 던지십시요
'내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손에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나훔서의 개론
▶ 내 용 : 하나님께서 압제와 잔인함과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니느웨(앗수르)를 심판하
실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으며, 니느웨 성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남.
▶ 선 지 자 : 나훔, 유다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음(그의 고향도 불확실함)
▶ 활동시기 : 주전612년 니느웨가 함락되기 전, 유다가 앗수르의 봉신 국가로 예속되어
있던 시기(대략 B.C 640- B.C 612)
▶ 강 조 점 :
- 모든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 앗수르의 잔인함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공의,
- 스스로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
▶ 구 조 :
나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니느웨 멸망 선포(1장) :
나훔은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의 권능은 위대하시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나훔은 공의의 하나님의 치리로 니느웨는 멸망하고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임을 예언한다.
2. 니느웨 멸망(2-3장)
나훔은 대적들에 의해 파괴될 니느웨 멸망의 참상을 예언한다. 그러면서 나훔은 니느웨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함임을 밝힌다. 아울러 그들의 죄악상 즉, 거짓과 포악과 탈취, 그리고 우상 숭배로 가득한 니느웨와 죄악을 고발하고 이러한 앗수르의 멸망은 기정사실화 되었다고 예언하면서 글을 마무리 한다.
12소선지서 중 일곱 번째 책인 나훔서는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열방의 맹주인 앗수르를 향해 무서운 경고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이 책은 백여 년 전에 기록된 요나서와 대조를 이룬다. 요나서에서는 더 이른 시기에 가장 잔인한 원수들(앗수르)에게까지 관심을 보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앗수르의 죄가 “가득 찼고”(창 15:16) 여호와 하나님의 잘 알려진 인내도 한계점에 도달했다. 나훔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1:7-8이다. 이 구절은 유다에게 위로를 전하는 동시에 니느웨의 파멸을 선언한다.
예언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나훔서는 신적인 전사의 승리를 찬송하는 것(12-8)으로 시작하는데, 이 찬송의 마지막 행들(7-8절) 역시 첫 번째 주요한 말씀(19-2:2)을 소개하는 구실을 한다. 이어서 니느웨의 파멸에 관한 이상(2:3-10)과 조롱(11-13절)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니느웨의 멸망이 절대적으로 확실함을 선언하는 말씀들과 조롱이 이어지고(3:1-17), 멸망당한 제국에 대한 풍자적 만가(18-19절)로 마무리한다.
나훔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선하심과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나훔의 이름은 ‘하나님의 위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훔의 고향은 ‘엘고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고향 ‘엘고스’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논쟁이 있어 왔다. 초대교회 교부 제롬(히에로니무스)은 갈릴리 근처 엘세시(Elcesi)가 나훔의 고향이라고 주장했으며, 크노벨(A.W.Knobel)과 히찍(F.Hitzig) 같은 학자는 가버나움 근처에 엘코쉬(Elkosh)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초대 교회 문서에는 벧 구브린 남쪽에 엘케시가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엘케시는 라기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엘고스가 어딘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는 나훔이 주전 660-620년 사이에 활동한 것 같다고 보고 있는데, 이 책에서 주전 663년의 테베(노아몬) 함락을 과거사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전 612년의 니느웨 함락을 미래형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이유로 기록 연대를 주전 663-612년으로 좁힐 수 있다. 그러나 주전 654년 테베 재건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과 나훔의 사역했던 시기의 왕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데베 함락과 재건 중간 즉, 므낫세 통치시기에 기록된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유다 사람이었고(1:15, 2:2) 엘고스가 그의 고향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주전 660-655년 경 엘고스에서 기록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 시대적 배경 :
① 정치적 상황 ;
앗수르는 요나의 경고를 받아들여 온 국민이 회개했다. 그러나 디글랏빌레셀 Ⅲ, 살만에셀 Ⅴ, 사르곤 Ⅱ, 산헤립, 에살핫돈, 아슈르바니팔 등 강력한 왕들이 통치하는 100년 동안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점점 마음이 높아졌다. 특히 아슈르바니팔(주전 669-633) 통치 시절에는 주전 663년 애굽의 테베를 함락시킬 만큼 세력이 강해졌다. 따라서 불과 50여년 뒤에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망해 없어졌으며, 한 때 남 유다 왕 므낫세도 아슈르바니팔의 군대의 침공을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다.(대하 33:10-19)
② 종교적 상황
유다 왕 므낫세는 우상숭배와 완악함과 무죄한 자의 피 흘림 등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왕하 21:1-16) 그는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기 위해 성전 뜰에 제단을 세웠으며, 무당과 점쟁이와 신접한 자를 가까이 했으나, 포로에서 돌아와 회개한 다음에는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산당을 없애며, 백성들로 여호와만 섬기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③ 같은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 :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 기록 목적 :
① 유다의 평화는 앗수르나 애굽에 대한 외교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으로 얻어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② 니느웨 멸망을 통해 세상의 모든 신들과 우상은 헛것임을 드러내므로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도전하기 위해.
▶ 니느웨 멸망에 대한 성취 :
앗수르 왕 산헤립 때부터 니느웨가 앗수르의 수도로 지정되어 25년에 걸친 대규모 공사를 벌인 결과, 높이 30M에 마차 세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길이가 120km에 이르는 성벽을 갖추었다. 거기에 200개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넓이가 45m에 깊이가 18m의 삼중해자로 성벽을 둘러쌌으며, 철통같은 15개의 성문을 설치하여 적들의 포위공격에도 20년을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로 무장시켜 놓고 있었다. 그리고 티그리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가지고 도시 가운데 난공불락의 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 나훔의 예언은 한낱 약소국가 선지자의 푸념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주전 612년 나보폴라살이 이끄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나훔이 예언한 대로 티그리스 강의 범람한 물을 메대와 바벨론 군대가 니느웨의 성벽을 파괴하는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2:6) 그리고 신샤르이쉬쿤 왕(주전 629-612)이 왕궁에 불을 질러 자살하므로, 나훔의 예언처럼 니느웨 성은 마치 마른 지푸라기가 불에 타는 것과 같고, 벽돌 가마에 불이 타는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1:10, 2:6, 3:15,15)
더욱 놀라운 것은 니느웨가 사람들의 눈에 감춰질 것이라는 예언대로(3:11), 주후 1820년 일단의 학자들이 고대 니느웨 지역에서 유물을 몇 점 발견하기까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철저히 사라져 심지어 니느웨의 존재조차 믿지 않으려 했을 정도였다. 주전 333년 페르시아 정벌을 위해 출정했던 알렉산더는 니느웨의 폐허에서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했던 것이다.
▶ 참고자료
- 니느웨(현재, 이라크 모술)
※ 참고 문헌
- 「 성경과 5대 제국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성서 그리고 역사 」 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황소자리.(내셔널지오그래픽)
- 「 성서의 역사와 지리 」 김흔중 지음, 엘맨.
- 「 왕국시대의 예언자들 」 김인철 지음, 그리심.
- 「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 이병렬 지음, 페트라 성경연구원.
- 「 이스라엘의 선지자 」 레온우드 지음, CLC.
- 「 엑스포지멘터리 - 나훔편 」 송병헌 지음, EM. 외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다(열왕기하 23:31-24:16)
1. 요시야의 아들들 유다가 멸망하기까지의 계보를 간략히 정리해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여호야김은 왕이 된 다음에 자기를 세운 애굽를 배반했습니다. 왜냐하면 24:7절에서 설명하듯이 이때 이미 바벨론이 앗수르를 물리치고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애굽이 그 뒤로 다시는 자기 나라 밖으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도 애굽을 버리고 바벨론을 섬겼는데, 24:1절을 보면 3년 만에 다시 바벨론을 배반했습니다. 결국 바벨론 왕이 군대를 보내서 여호야김을 폐위시켜버리고, 대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24:17-18절을 보면,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디야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친 뒤에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16대. 요시야(31년) 여호와 하스는 요시야의 아들로 유다 17대 왕이 되었습니다. 23살의 비교적 성년이 되어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고작 3개월입니다. 유다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통치한 왕으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그는 포로로 애굽에 잡혀가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요? 왜 바로느고는 여호와 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만 것일까요? 일단 요시야가 반 애굽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바로느고는 보복성 벌금을 물립니다. 아마도 요시야의 반 애굽 정책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여호와하스가 비교적 똑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권을 잃은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처음 왕정이 시작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걸었던 슬로건 말입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정이 끝나갈 무렵에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나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이 모욕을 받으면서까지 이 나라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도록 이들은 철저하게 부패했으며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개혁을 하고 나라가 강건해 졌음에도 아버지가 믿었던 하나님, 그 말씀을 따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포로가 되어 애굽에 죽는 비참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3. 여호야 김(23:34-24:7절) 여호와하스의 뒤를 이은 왕은 요시야 왕의 배다른 아들 엘리야김이었습니다. 이 왕은 애굽의 바로느고가 세운 일종의 섭정왕인 셈입니다. 아무런 실권이 없고 그저 애굽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힘없는 군주가 바로 여호야김이었습니다. 이름을 개명한 것은 일종의 모욕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가 세상 나라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배상금을 요구했습니다. 애굽에 의해서 왕이 된 여호야김은 거절한 능력도 믿음도 담력도 없는 그야 말로 최악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조공을 바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더 나갑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할 초호화 왕국을 건설하는 무모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렘22:13-14절).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는 이 말씀이 바로 여호야김의 악행을 고발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 우리야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렘 26:20-23절입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참 부끄러움의 대명사가 되는 사람입니다. 애굽에까지 사람을 보내 연행 해다가 죽일 그 열정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들의 이런 선택이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멸망시키시려는 예언을 성취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행동하고 있지만 이런 행동들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나라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결국에는 열강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바로 이런 모습을 보지 않고 죽게 되는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여호야김이 통치했던 11년은 그렇지 않아도 기울어지는 국가의 수명을 재촉하는 어둠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재위 기간 내내 애굽의 눈치를 보며 백성을 압제했던 여호야김은 통치 말년에는 바벨론의 압박까지 받게 됩니다. 주전 605년 당시 국제 정세의 판도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로느고가 신흥 강자인 바벨론 군대에 참패한 것입니다. 이때 애굽을 무너트린 장수가 바로 느브갓네살입니다. 그는 신바벨론의 창시자인 나보폴라살의 아들로 무적으로 일컬어지던 앗수르를 물리치고 이어서 애굽의 바로느고까지 꺾어 버려 명실상부한 중동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 갈그미스 전투를 시작으로 바벨론은 애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서진 정책을 마음껏 밀어붙이게 됩니다. 이때 유다도 점령 당하게 됩니다. 멸망의 서곡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위시한 일련의 영재들입니다. 느브갓네살은 뛰어난 장군이자 대단한 리더로서 관제를 정비하고 궁전과 저수지, 대운하등을 건설하여 위대한 바벨론 제국의 기틀을 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복국에서 인재들을 데려다가 최고의 시설에서 훈련 받게 하고 국가의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다니엘이 그 나라의 셋째 치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느브갓네살의 열린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호야김은 죽은 듯이 3년을 바벨론이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애굽에 이어 바벨론의 속주가 되는 기막힌 경험을 하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3년 후에 돌연 태도를 바꿔 바벨론을 배반합니다. 이것이 왕하24:1절입니다. 왜 여호야김은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한 것입니까? 성경은 이 결정이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유다에 임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여호야김의 선택은 예언을 이루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이 이런 결정을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전 602년 경에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전진기지로 애굽을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애굽은 결사 항전을 해서 간신히 느브갓네살의 공격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본 여호야김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애굽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애굽은 거의 죽을 힘을 다해서 버틴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을 거역하지 말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친애굽파의 말을 듣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때 느브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 군대는 결사 항전하는 애굽 군대를 죽자고 물리쳐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작전상 후퇴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유다를 징계하지 못할 정도로 군사력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김의 이런 정책에 바벨론은 득달같이 몰려오게 된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 본대와 유다 변방이 아람, 모압, 암몬 족속의 연합군들까지 몰려와 유다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이사야, 미가, 나훔, 하박국, 예레미야 등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유다의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이 경고를 하나같이 무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토굴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선택... 그들의 그런 끊임없는 불신앙과 악행이 멸망을 향하여 점점 더 다가가게 만든 것입니다. 이 침공으로 유다는 철저하게 유린 당합니다. 여호야김은 느브갓네살의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갑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털어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뒷날 벨사살이 바로 이 성전 기구들을 가지고 술판을 벌이다가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받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4. 여호야긴(왕하8-17절; 대하36:9-10절) 유다의 19대 왕은 여호야 긴입니다. 여고냐 라는 이름을 가진 여호야긴은 왕이 되어 석달 열흘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 아버지 여호야김의 뒤를 따라 멸망의 길을 재촉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재위 100일만에 바벨론의 2차 침공이라는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런데요? 바벨론은 이미 정복한 나라를 왜 다시 정복한 것입니까? 여기에는 앞서 여호야김의 잘못된 선택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야김이 포로로 끌려간 해가 주전 602년이라면 바벨론의 2차 침공시기가 주전 597년이라고 할 때 5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야긴은 100밖에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차 침공과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가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한 홍목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른 시기는 아버지인 여호야김이 포로로 끌려간 직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5년 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5년의 공백은 누가 다스렸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를 한 홍목사는 여호야김이 바벨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바로 풀려났다고 봅니다. 그렇게 충성을 맹세했다가 5년 후에 다시 배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격분한 바벨론 군대가 2차 침공을 감행하게 되고 그 결과는 훨씬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여호야긴은 100일을 통치하고 무려 37년이라는 긴 세월을 포로로 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이렇게 포로로 잡혀 있었던 것이 저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포로로 잡혀 있음으로 유다 왕조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 기막힌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멸망한 나라의 왕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의 37년 포로 생활은 왕족의 대통을 잇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으로 2차 침공을 당한 유다는 철저하게 유린을 당하고 훨씬 많은 사람이 2차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때 잡혀간 사람들이 바로 모르드개, 에스더, 에스겔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때 포로의 규모가 1만 명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인물들은 거의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국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학자, 군인,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에 유다는 아예 재기할 힘을 일어 버릴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자, 우리는 세 왕이 국제 정세 속에서 계속 잘못된 결정을 하는 장면을 차례로 살폈습니다. 결과는 이미 말씀에 기록된 대로 멸망을 향해서 치닥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호와하스나 여호야김, 여호야긴은 모두가 자신이 최선을 다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국제 정세를 읽었습니다. 나름대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의 왕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계획을 짜고 하나님 없이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것이 열방을 쫓아간 인생들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열왕기는 결국 열방을 쫓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정이 그들 스스로를 심판의 구덩이에 던지게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극단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타락한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성품이나 삶이 저절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그대로두면 이렇게 세상을 쫓다가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옳게 인식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매일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곁길로 가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21-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21)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 이시다” 구약의 선지서 17권이 있다. 이사야서를 제외한 16권 가운데 “구원” 이라는 단어 딱 7번 쓰인다. 그런데 이사야 서에만 “구원” 이라는 단어는 26번 나온다. . 구원에 대한 말씀, 그 이름만큼, 구원에 대한 말씀을 많이 허락하고 있다. 이게 은혜이다. . 이사야는 약 주전 739-681 에 대략 50년동안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했다. 이 당시는 북동쪽에 앗수르, 남서쪽 애굽제국 그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었다. 양쪽에 메소포타미아, 나일강의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쪽에도 기울수 없고, 한쪾이 강력해지면 반대편을 의지해서 나라를 지켜야하는 시기였다. . 이사야는 그런 가운데 두려움이 없이 구원에 대하여 선포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이 예루살렘 함락. 그리고 바벨론으로 3차레 포로로 끌려간다.(주전 605, 597, 586) . 이사야, 예레미야 포로에서 “해방, 귀환할것이다.” 이사야는 이때에 앞으로 150년후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예언이 나온다. . 이샤야 44장까지 가서보면 바라, 고래스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동방사람, 메사 _바사, 페르시아 제국, 바사에서 매데까지 다스리게 된다. 쓰임 받는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 “공의로 불러서” (41:2)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역사가 진행이 된다. . 바벨론을 무너 트린다. 그리고 말씀 하신다. 공의를 통해서 우리를 보호 하시는것이다. 세상의 공의와 다르다. 공의롭게 일하시겠다는거다. 심판과 회복 두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계시다. . 단순히 이스라엘의 나라와 민족의 회복이 아니다. 나의 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하는자.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자들은 두려워말라. 이다. . 선택된 자들에게 임하는 은혜이다. . 당시 사람들은 고래스를 가볍게 여겼었다. 바벨론을 무너질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41:4) .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면 누구도 막을수없다. 그렇지만 나의 종들은 두령워하지말라. 이게 어제 본문이다. . “우상들은 소송하라. 우상의 허무함을 알아라! 뜻이다. 보이라, 진술하라,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했는지 알게하라.”(21-24) . 우상은 존재자체가 없다. 이전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다.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바라보는게 허망한것이다. . 우상에 빠져있는 자들은 예언의 능력도 없고, 하나님의 일을 말하지 못한다. 아는것도 없고, 들어본것도 없는것이다. |
아도나이 다르코(יְהֹוָה דַּרְכֹּו )
길(1870) 데레크(derek) דֶּרֶךְ
어원 / 18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길(창3:24, 삼상4:13, 겔48:1), 행위(창6: 12,삼상8:3, 왕상8:32), 도(창18:19, 신13:5, 시18:21), 도리(창19:31, 욥21:14), 생리(창31:35), 도중(왕하10:12), 도로(레26:22, 애1:4), 여행(민9:10, 수9:13), 행사(욥26:14), 중도(시102:23),때문(시107:17), 행실(잠8:13, 13:6), 소행(잠12:26, 호4:9), 바른 길(잠23:19, 사30:11), 옳은 길(말2:8), 자취(잠30:19), 사정(사40:27),행동(겔14:22,23), 풍속(겔20:30). [동] 향하다(겔20:46, 21:2, 40:6,22,46), 위하다(암8:14), 여행하다(수9:11), 가다(삿4:9), 행하다(잠14:2, 28:6), 본받다(사10:24).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징벌 심판을 내리실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겨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포학을
행하는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에 멸망을 선포하면서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권능과 선민 유다 민족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특히 본장에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면서, 죄악을 행하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다에 평화의 소식이 전하여진다는 메시지로 본장을 마무리 짓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본장은 자연계와 이방 백성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보여주는 전반부(1-8절)와 니느웨에는 심판을
행하시지만 반면에 유다에는 구원을 베푸실 것임을 보여 주는 후반부(9-15절)로 나눌 수 있다.
나훔 1:1-8
나훔 1:9-15
[신학주제]
모든 피조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학과 사상의 주제는 존재하는 피조 세계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의 존재 근원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의 삶의 목적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류의
시작으로부터 제기된 질문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피조 세계가 어떤 알 수 없는 절대자로부터 지배되고 있다는 선험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대로부터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사상을 주장하였지만
시대가 지나가면 언제나 사람들의 관념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런데 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정확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방 족속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본장이 처음부 터 하나님을 피조물의 주관자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므로 그들을 심판하실 자격이 있으시고 그들에게 찬양을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신 것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려 함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찬양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주권과 그 솜씨를 노래하며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자이신 만큼 만드신 그 모든 것들을 심판하실 권한도 있으시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속 깨우치고자 하신 것이 바로
심판의 메시지이다.
또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
본장에 언급된 이방 족속들이 심판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피조물의 사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창조 솜씨를 찬양하고 높이는 것이다.
[영적교훈]
본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향한 안양의 삶을 사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이사야 40:2-5)
가. 절망 중에도 희망의 길을 열어야 한다.2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본문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랜 포로생활에 지친 나머지 절망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시기를 절망 중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희망의 길을 열라고 하셨다.
* 본문에서 ‘사막’(아라바)은 ‘해가 지다’ 또는 ‘방황하다’를 뜻하는 ‘아라브’에서 유래하였다. 즉 사막은 희망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를 암시한다. 이것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도 하나님은 절망하지 말고 희망의 길을 열라고 하신다.
* 현재 우리들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삼포시대’ 또는 ‘오포시대’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헬(hell)조선’이라는 괴이한 용어가 등장하고,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
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시다.
3절,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본문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외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곳에 희망이 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온전히 따를 때에 희망이 있다.
* 본문에서 ‘광야’(미드바르)는 ‘말하다’ 또는 ‘인도하다’와 ‘따르다’를 뜻하는 ‘다바르’에서 유래하였다. 광야는 양이 목자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인도하시고 백성들은 양같이 그의 말씀을 온전히 따를 때에 안전하고 평화롭다.
*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에 있다. ‘꿈이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약속은 이루어진다’가 신앙적인 표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확실하게 성취되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도 확실하게 성취되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참조하라.
다. 주님이 오실 길을 잘 예비하여야 한다.
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본문 3절에 이어 4절에서도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한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파나, 피엘형)는 ‘제거하라’ 또는 ‘깨끗하게 하라’는 뜻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맞으려면 속사람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 여호와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야사르, 피엘형)는 ‘똑바르게 하라’는 뜻이다. 성도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절망의 땅에서 비열한 야합, 술수, 음모 등이 판치는 것과는 대조적인 말씀이다.
* 여기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는 낮은 자들이 높여지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는 힘 있는 자들이 몸을 낮추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는 뒤에 처진 자들이 이끌어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공평을 이루는 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라.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은 그의 영광을 본다.
5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임재를 상징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없으나 그의 영광을 보고 그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소에 임하실 때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출40:34).
* 에스겔서에 보면 이스라엘을 벌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를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겔10장 참조).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의 환상과 같고...”(겔43:2-3a)
* 여호와의 ‘영광’(카도쉬)은 ‘풍부’라는 뜻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그가 임재하시면 백성들은 구원을 받고 부요케 하시는 은총을 입는다. 하나님이 오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며,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다.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들이 이 영광을 본다.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순 |
월 |
일 |
요일 |
오늘 읽을 말씀 |
묵상 주제 |
211 |
7 |
30 |
주일 |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
|
212 |
7 |
31 |
월 |
미가 3장 |
여호와의 신(8절) |
213 |
8 |
1 |
화 |
미가 4장 |
여호와의 산(2절) |
214 |
8 |
2 |
수 |
미가 5장 |
근본(2절) |
215 |
8 |
3 |
목 |
미가 6장 |
영혼의 죄(7절) |
216 |
8 |
4 |
금 |
미가 7장 |
주와 같은 신(18절) |
217 |
8 |
5 |
토 |
미가 8장 |
여호와의 길(3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