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수) 범람한 물(나훔 1:7-8)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나훔이란 이름의 뜻은 "위로자" 또는 "위로" 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훔서를 읽어보면 전혀 위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멸망의 예언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나훔과 같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는 "예레미야" "스바냐"입니다.
나훔 선지자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해서 외치기 130년 전에 선지자 요나가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요나 선지자의 외침에 니느웨 성은 왕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과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금식하며 회개하므로 니느웨 성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혀왔던 원수 앗수르의 몰락과 멸망에 대한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를 오랫동안 괴롭히던 일제 치하 시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사건으로 인한 일본 천황의 항복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독립에 대한 기대로 인한 위로와 기쁨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진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1장은 하나님의 심판
2장은 니느웨의 멸망
3장은 앗수르의 멸망
나훔 1:7-8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아멘
경고하시는 하나님(맛사. massâʼ) מַשָּׂא
나훔 1:1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중한 경고(맛사. massâʼ) מַשָּׂא
목소리를 높이다(사 3:7, 42:11)
- 하나님의 의뢰를 받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
미가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법과 도덕을 범하면서도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신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미가 1:3a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출애굽기 34:6b,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선하신 하나님(토브 아도나이)
나훔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진멸하시는 하나님
나훔 1:8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나훔 1:15a
볼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오늘의 기도
아름다운 소식과 화평을 전하게 하소서!
미즈노의 하나님 / 미즈노 겐조(1937-1984)
일본에
미즈노라는 시인이 있습니다(1937-1984).
그런데 미즈노씨는 세상에서 참 혹한 불구자인 것입니다. 전신이 해삼처럼 퍼져서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며,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며 물론 글도 쓸 수 없습니다. 그가 의사를 발표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은 눈을
반짝이는 것뿐입니다. 그가 작품으로 발표한 시는 그의 형수의 헌신적인 협조에서 이뤄 진 것입니다.
그가
시를 쓸 때에는 그의 형수가 일본어 50자표를 걸어 두고 막대기로 한 자씩 짚어 내려가다가 미즈노씨가 원하는 글자가 짚히면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수는 그 글 자를 백지에 써두고, 또 짚어 내려가다가 다음 글자를 쓰는 식으로 미즈노
씨의 마음에 있는 시가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 한 수를 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두 사람의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그 시가 바로 일본 문단의 걸작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며, NHK가 특집으로 보도한 것입니다.
미즈노씨의 시집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미즈노 같은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터인데 말입니다.
파스칼
“사람은 같은 사건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같은 조건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그 조건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미즈노씨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세상의 어떤 환경 속에서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은혜가 족하도다 (고후 12:7-10)
시인 미즈노 겐죠(水野源三)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뇌성 소아마비를 앓아 온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오직 눈뿐이었습니다. 울어도 자신의 눈물을 닦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죽기를 원했지만 죽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야오 목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매일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어가는 동안 자신이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모습이 밝아져갔습니다.
몸이 부자유스럽고 말조차 못하던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겐조를 진찰하던 의사가 예라고 대답할 때 눈을 감으라고 주문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일본 문자판을 하나씩 짚어 가면, 원하는 자음과 모음에서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한자 한자의 글을 찾으며 문장을 만들어갔습니다. 이런 엄청난 작업을 통하여 말로 할 수 없었던 겐조의 내면세계가 표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눈 깜빡임을 통해 수백 편에 이르는 시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겐죠는 ‘괴롭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한 것처럼 불평을 일삼으며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없는 것이나 잃어버린 약한 점만 찾지 말고 장점을 헤아리며 감사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였으며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시로 인해 약함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신의 가시를 ‘사단의 사자’ 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에게 큰 고통이었던 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고 대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족하다”는 말은 ‘충분하다, 넉넉하다’ 의 수동태입니다.
바울은 가시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로 인하여 족한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기도한 대로 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에 오히려 만족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약함은 바울에게 가시가 아니라 보배처럼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괴롭혔던 가시가 도리어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약함은 바울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깨달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주셨던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는 응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약함이 온전해지리니
거듭남 (Born again)의 저자 찰스 콜슨 (Charles Colson)의 말입니다.
“나는 40년 동안 세상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얻은 성공과 세상 것을 다 잃어버리고 차가운 감옥 바닥에 앉았을 때 비로소 나는 감옥이 하나님 사랑의 울타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콜슨이 누구입니까? 닉슨 전 미국 대통령 보좌관으로 영화와 공명을 누렸으나 정치적 스캔들에 걸려 지위를 모두 박탈당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된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회개하고 변화되어 감옥에서 나온 그는 교도소 선교회를 조직하여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지금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일련의 고통들이 가시가 되었으나 그 약함을 통해 교만과 자기 우상화가 깨어져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가시만 보고 원망하며 불평해 합니다. 그러나 그 가시가 약함을 깨닫게 해주는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은혜이며 온전한 자아로 나아가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나는 심히 약하나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크게 하십니다. 여기의 ‘온전하여진다’ 는 말은 성숙해진다는 뜻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가시를 아픔이라 하지 않고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스스로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만약 바울이 약하지 않았더라면 계시를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가시를 하나님의은혜로라 고백하십시오. 그때 비로소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혹 부끄러운 약한 점이 있습니까? 약함을 고백할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계시를 주사 온전함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약함이야말로 온전하게 만드는 은혜의 통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약함을 자랑케 되리니
용혜원 목사의 ‘약함의 향기’ 라는 시입니다.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엔 뒤차가 보이지 않은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돌려 확인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스스로 보지 못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자꾸 깨닫습니다. 아무리 잘 살고 똑똑하고 빈틈없는 사람인 것 같아도 가까이 가보면 다 결점이 있고 편견이 있으며 약한 부분도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내가 완벽한 줄 압니다. 그래서 주장이 강하고 용서가 힘들며 실수를 못 참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우리는 내게도 약점이 있음을 깨닫고 남의 약점을 이해하게 되고 남의 실수도 용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실수와 약점과 결점이 우리 삶의 소중한 부분이고 향기인 것까지 눈치 채게 됩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가시를 가졌음에도 기뻐하였습니다. 도리어 약한 것들을 자랑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머문다’ 는 말은 ‘에피스게노세’ 로서 ‘장막을 펴고 함께 산다” 는 의미입니다. 즉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은혜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약함을 드러내면 치명적인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약함은 숨겨야 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약함을 극복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결코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약함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약함이 자랑거리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탄 배가 암초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암초를 치우시는 것이 아니라 강물을 불어나게 하시사 암초를 넘어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때 불어나는 강물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약함은 우리로 자랑하게 만드는 은혜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약함이 강하여지리니
나이가 든 소금장수와 젊은 소금장수가 소금을 팔기 위해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산을 오르다 너무 힘들어 젊은 소금장수가 불평하며 말합니다. “이 산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자 나이 든 소금장수가 말합니다. “나는 이 산이 지금보다 갑절만 더 높았으면 좋겠는걸” 그러자 젊은 소금장수가 의아히 여기며 묻습니다. “어르신도 힘들어 쩔쩔매면서 산이 더 높았으면 좋겠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때 나이가 든 소금장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이 더 높아야 산 너머 사람들이 소금 구하기가 더 어려워져 우리가 가져가는 소금 값을 더 쳐 줄 것이 아니겠는가?”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약한 것들, 능욕, 궁핍, 박해, 곤고가 기쁨이 됨은 약할 때가 강할 때이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약함을 가진 바울이 어떻게 강해질 수 있었습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강함의 비결은 약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약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강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하고 무능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강한 사람에게는 그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며 어려운 일과 약점이 생겨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도리어 약함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정채봉 동화작가의 글입니다.
“콩 형제가 있었습니다. 콩 형이 ‘나는 들에 가서 살래’ 그러니까 동생 콩이 ‘아니야. 나는 방안에서 살래’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콩 형은 들에 나가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며 콩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햇빛도 받지 않고 비도 맞지 않는 방안에서 자란 동생 콩은 콩나물이 되어 상에 올라 반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콩이지만 햇빛을 받고 비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것은 나무가 되지만 온실에서 자라는 것은 콩나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약함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약함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경제적인 약함, 환경적인 약함, 인간관계의 약함이 있습니까?
약함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 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약할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 맡길 기회인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약함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온전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자랑이 되는 은혜입니다.
강함이 되는 은혜이기에 약함 속에서도 내게 주신 은혜의 족함을 깨닫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월 15일(목) 그 존귀한 자(나훔 2:5)
나훔 2:5그가 그 존귀한 자를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예비하도다.
(현대인의 성경)
왕이 정예병을 소집시키자 그들이 쓰러질 듯이 급히 성으로 달려가서 방어 태세를 취한다.
야곱의 영광(가온. gâʼôwn) גָּאוֹן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한 후
질투하시는 하나님(1:2)
보복하시는 하나님(1:2)
죄인을 멸하시는 하나님(1:3)
진멸하시는 하나님(1:8)
이사야 10:5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나훔 2:1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찌어다.
나훔 2:6-7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명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며 그 모든 시녀가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나훔 2: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의 기도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를 세워주소서!
(이야기) 속 안에 있는 것
독일이 아직 통일이 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공산주의였던 동독 사람들은 한 밤 중에
베를린 장벽을 통과해 쓰레기나 선전물을 종종 서독으로 던졌습니다.
서독의 정부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여 여러 차례 해결 방안을 의논했다고 합니다.
첫째, 쓰레기를 모아서
다시 돌려주자
둘째, 적법한 절차를 걸쳐 항의하자
셋째,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자
넷째, 식료품과 생필품을 가득 쌓아 동독의 장벽 앞에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물건들 앞에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밖에 주지 못한다.’ 라는 푯말을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작가
펄벅이 한국을 잠깐 들렀을 때, 한국의 농부들이 소 를 끌고 가면서도 지게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농부가 하루 종일 일한 소를 위한 배려라는 말을 하자 펄벅은 깊은 감명을 받고 이에 대한 글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주님도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주님의 말씀과 사랑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선한 것을 담고, 선한 것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반드시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주님!
온전히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마음에 자리하게 하소서!
최근 내 안에서 나온 말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고 반성하십시오.
7월 16일(금) 그 음행과 그 마술(나훔 3:4)
나훔 3:4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나훔 3:1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새번역 성경너는 망한다! 피의 도성!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
* 거짓으로 다스리는 문명
나훔 3:2-3
휙휙하는 채찍 소리, 굉굉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 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 전쟁으로 다스리는 문명
나훔 3:4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 화려함과 마술(속임수)로 다스리는 문명
나훔 3:6-7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 개인의 존엄을 파괴하는 문명 오늘의 기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으로 살아가자!
문화의 의미
문화는 라틴어로 쿨투라(Cultura)다.
그것은 종교의식과 경작하고 파종한다라는 ‘쿨투스’에서
기원했다.
종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신앙 차원에서 문화가 발생했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의 기독교문화도 이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은 일은 하나님의 뜻을 어긴 인간이 모여 하늘로 올라가려는 의지를 표현한 문화적
활동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적대시하고, 명령을 거스르는 ‘바벨탑의 문화’는 지금도 곳곳에서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문화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좋은 선교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신앙을 파괴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의 사명을 그 시대 속에서 잘 감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정직과 희생의 모습을 갖춘 신앙인의 삶이 모일 때 아름다운 새 문화를 이룰 수 있다.
제사 문화를 예배문화로
유교
제사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이조 시대 때부터입니다.
유교에서는 효자로서 어버이를 섬기는데 있어서 3도를 말합니다.
첫째, 살아계실 때에는 봉양
둘째, 돌아가시면 그 상복을 입고
셋째, 상이 끝나면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이 조상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가장 큰 불효라."했습니다.
왜
죽은 후 제사를 강조합니까?
제사가 끊어지면 영원히 죽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중시 여기는 사람들의 혼령관은 입귀, 귀신,
명신(신명)으로 나누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입귀는 짐승의 혼과 구별되는 것으로 영혼이라 지칭하는 '귀'입니다.
귀신은 전생에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고 충분한 학식을 소유한 자로서 죽기 전 생존시에 획득한 특수 지위로 말미암아 사후에 일반 귀보다 나은
영혼입니다.
명신 또는 신명은 귀신들 중 천상에 살고 있는 귀신입니다.
후손들의 제사로서 궤양을 풍족히 받는 영혼은 오래 동안
사나 제사가 끊어지면 주림에 못이겨 제 2차 죽음으로 결정적으로 적멸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상 제사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상제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화는 아닙니다. 이집트. 중국. 페르시아. 로마. 그리이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반적 현상입니다.
그들은 믿기를 죽은 조상이 신으로 화해 그의 가족과 종족을 적으로부터 지켜주며 상선 벌악을 하는 존재로서 죽어서도 변함없이
돌봐주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문화는 죽은 자보다는 산자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부모 효는 살아계실 때 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후 고기밥 해드리는 것 보다 살아 계실 때 전화 한 통화가 더 중요합니다. 명절 문화는 죽은 자를 위한 문화가 아니라
산자를 위한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추석에 조상 제사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시고
예배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리타드 니버(H. Richard Niebuhr, 1894-1963) /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미국의 신학자 리차드 니버의 1951년 작품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문화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5가지 유형(모델)을 제시하였다.
-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 관습이 무엇이든 지간에 그리스도와 적대 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는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과 톨스토이에서 그 전형을 본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문화의 타락한 오락, 학문, 정치에서 탈출하도록
권면하였다.
한편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버에 의하면 이러한
반문화적인 유형의 삶은 그 자체 내에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문화의 그리스도'
첫 번째 유형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유형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와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육자요 문화의 영웅이시다.
토마스
제퍼슨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도덕 교육가로 보았고,
술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모든 종교와 문화의 완성자로 보았다.
이 관점은
신학의 본질과 그 문화적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 '문화 위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 긍정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로고스와 주님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은 층에 두고 문화를 낮은 층에 둔다.
이러한 생각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서 나타났고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나타났다.
-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화해할 수 없는 양자간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요 문화는 문화다.
니버는 이런 유형의 대표자가 사도 바울과 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등이라고 말한다.
-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이 유형의 대표자는 어거스틴, 칼빈, 존 웨슬리 등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계는 구속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간 문화의 문제는 변혁의 문제이다.
세계는 배격되어서도 안되고 소홀히 여겨져도
안된다.
따라서 이 유형에서 주장된 그리스도는 죽음과 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을 구속하시는 것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사는 인간
생활을 계속적으로 성화시키고 변혁시키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독일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취의 사상적 연관관계가 매우 깊다.
트뢸취의 신학은 니버의 지난한 노력으로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활짝
꽃폈고, 이질적이고 새로운 토양에서 놀랄 정도로 잘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적용되었다.
니버는 트뢸취의 신학을 미국의
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다 심었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탁월한 신학자요 기독교윤리학자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니버의
신학방법론은‘역사적 방법’이다. 기존에 니버의 방법론으로알려졌던‘반성의 방법론’이라든지‘변증법적 방법론’은 니버의 방법론과는
거리가 멀다. 니버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역사적 방법’이라고 직접적으로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트뢸취와 동일한 방법론적
길을걸어갔다. 니버는 트뢸취처럼 자신의 신학 전반을 역사 위에다 정초했다. 니버는 신학연구를 위한 대상을 개별성과 발전 개념에서
잡았다. 그는 방법론의 대상 빛 아래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대상적 객체나 주체의 개체성과 독특성, 다양성 측면을 명백하게
주목했다. 이것은 니버가 신학연구 작업의 주요 방법인‘역사적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또 거기로부터 파생되고 있는
지난한 신학 과제인 역사상대성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신학의 중요 주제인 계시나 신앙의 의미를 종교적
상대주의로서 실증적이거나 합리적 차원이 아닌 신중심적인 상대주의로부터 해결코자 했다. 니버는 역사적 방법의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역사비평적 방법의 3원칙인 비평, 유비, 상관관계를 유효적절하게 역사에다 적용하기도 했다. 니버는 역사적 방법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그것은 사회학적방법이다. 역사적 방법의 보충적 측면을 의미한다. 니버는 트뢸취처럼신학에서 사회학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는데, 사회적인 것도 신학적인것처럼 역사적인 사실임을 밝혀냈다. 그는 역사적 방법의 연구 대상이사회적인 것까지 확대되고
있고, 역사화되고 있음을 통찰했다. 신학 형태의 다양성과 교리의 차이점이 생긴 것은 순수 신학적인 이유가 아닌사회적 상황 내지
사회학적 배경구조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이다. 니버는사회적 상황에서 계속 다양하고 이질적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가 새로운
모멘트인‘사회학적 관점’이 있었기 때문임을 확신했다. 사회학적방법에서 M. 베버나 E. 트뢸취 식으로 시행된 사회학적 유형론
연구는니버의 저서『그리스도와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훔의 일곱 가지 특징을 소개하고 이 선지서를 설교해야 하는 이유
1. 나훔은 요나가 미처 들려주지 못한 하나님의 성품을 전달하는 책이다
성경에는
두려운 앗수르 제국의 수도, 곧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과 이에 불순종한 요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비록
후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
요나가 단번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이유는, 그분이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 4:1-2).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돌이켜서 자신의 민족을 괴롭히던 앗수르를 심판하지 않으실까봐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그런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훔은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등장하여, 요나와 마찬가지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한다.
이때는 요나 당시의 앗수르인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요나를 통해 그 세대가 일으켰던 진실한 회개 운동도 더 이상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의 마음을 상실한 채, 잔인한 정복 전쟁과 주변국들에 대한 약탈 및 압제를 다시 이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니느웨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곧이어 남유다에 대한 습격을 전개했으며, 마침내는 예루살렘에까지 포위 공격을 퍼부었다.
이
끔찍한 고통의 시대에 나훔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요나를 통해 은혜와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면, 나훔을 통해서느 죄악을 관용치 않으시는 그분의 성품을 보여 준다(출 34:6-7).
2. 나훔은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정해 주는 책이다
나훔이
1장 9절에서 던지는 질문은 문자적으로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문장이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너희는 여호와에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라는 표현으로 옮겨져 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언급되는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흔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의 '대적'뿐 아니라 그 '백성'도 함께 다루는
문맥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품으신 생각과 대적에 대해 품으신 생각은 마치 1장 10절에 묘사된
표현처럼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나훔은 하나님에 대해 크리스천들이 가지는 통념 내지 일반적인 전제에
도전하며 우리의 이해를 교정해 준다.
3. 나훔은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훔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이로서
그분을 소개한다(나 1:2).
이는 결코 우리가 가볍게 대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자신에게 속한 영광을 위해
마땅히 품어야 할 질투를 드러내신다.
아마도
막강한 파괴력을 지닌 앗수르 군대가 거침없이 남유다로 진격해 오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 떨며 과연 하나님이 그 순간에
무엇을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과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려는 행위로
나타난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라도 그분의 행위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하실지라도, 그 모습은 무력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인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리하여 심판의 그림자를 앗수르에 드리우듯, 인내하시던 하나님은 마침내 그 제국을 무참히 멸망시키신다.
나훔은
이와 같이 하나님이 심판을 늦추지 않고 질투하며 보복하실 때, 어떻게 그 의로운 분노가 표출되는지를 생생한 야생의 모습과 전장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전달한다(나 2-3장).
4. 나훔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알려 주는 책이다
세상
사람들은 911테러나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느냐고 묻곤 한다.
또 많은 크리스천들도 왜 세계 곳곳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나훔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알려 준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분노가 매우 강렬해서, 바다를 뒤엎고, 비옥한 땅을 메마르게 하며, 산과 언덕을 떨게 만드는 광풍과 같다고 묘사한다(나
1:3-5).
또한
여기서 그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나
1:6).
이에 대한 답변은 너무나 명백하다.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다.
아무도 맞서 상대할 수 없는 대상은 그 어떤 제국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느웨는 인간적인 힘으로 이루고자 했던 제국의 꿈이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나 3:8-10).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시기로 한 이상, 아무리 겉모습이 그럴듯하더라도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나 3:12-19).
5. 나훔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평안의 메신저가 전하는 책이다
나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만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을 향한 평안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나훔’은 평안을 의미한다.
이는 저자의 이름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그 책의 특징을 문학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전개되는 이야기와 메시지는 평안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찾게 하는 성경의 장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1장 1절에서 언급되는) “엘고스”라는 지명조차 격분하신 하나님을 일컫는 히브리 식의 언어 유희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나훔은 그처럼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평안의 메신저가 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혹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 겪는 박해라든가, 좀 더 일상적으로는 다양성을 강요하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또는
복음을 전하면서 마주하는 적대 등,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하나님이 알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훔은 그분이 자기
백성이 당하는 고통에 민감하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대적의 능력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신다(나 1:7-2:9).
더
나아가 나훔은 그 모든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여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를 통해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이 처한
현실을 알고, 그들을 돌보시며, 고난 속의 유일한 요새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즉 앗수르 대군과 같이 거대하게
밀려드는 고난 앞에서,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6. 나훔은 구원에 대해 더욱 감사하게 하는 책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법적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음을 가르친다. 그 한분은 바로 아버지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이 하나님께 대적하던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만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본다.
이처럼
나와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마련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정의가
회복되리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 또한 우리와 끝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신 그분의 약속을 즐거움으로 붙들 수 있으며(마
28:20),
더 나아가 그분이 우리의 적군, 곧 사탄과 죄악 및 죽음을 물리치셨다는 소식을 들으며 기뻐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승리가 모든 이에게 알려질 그날을 대망한다.
나훔의
이야기를 통해 만군의 여호와를 자신의 대적으로 삼은 니느웨의 무모함과 그 심판을 떠올리며(나 2:13; 3:5),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며 겪은 고통과 수치를 깊이 묵상할 수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절규하실 때,
그분은 대체 어느 만큼의 고통을 견디고 계셨을까?
이렇듯 나훔은 하나님의 대적이
느끼게 될 괴로움과 수치를 계속 상기시킴으로써 내게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를 깨닫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7. 나훔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날을 향해 전진하게 만드는 책
주전 612년, 나훔의 예언이 기록된 지 이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앗수르는 완전히 멸망한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난공불락의 수도였던 니느웨도 역사의 저변에 묻혀 모든 이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흔적은 1842년,
고고학자들이 이라크 모술에서 잔해를 발견함으로써 다시금 우리에게 회자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니느웨의 소멸에 대해 우리는 경탄하며 찬양해야 할 것이다.
마치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바벨론의 무너짐을 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그
정의로운 심판에 기뻐 찬양하듯이 말이다.
나훔은 이러한 종말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임하리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최종 승리를 확정하실 그날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까지, 지금의 걸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천국
시민이 된 우리는 “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가? 나는 아직 육에 속한 젖먹이 신자인가, 은혜를 받은 장성한 신자인가? 사명을
깨닫고 충성하는 일꾼 신자인가,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인가?”를 항상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듭났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회개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회개하는 죄인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모두 다 장성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젖먹이 신자입니다. 젖먹이 신자는 아직도 옛 사람이 살아있고 옛 습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시기와 분쟁이 있는 교회는 바로 이런 젖먹이 신자들이 많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육에 속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젖먹이 신자들은 하루속히 은혜를 받아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받은
장성한 신자를 가리켜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철저한 회개를 하게 되며,
거룩한 자가 되고 겸손한 자가 됩니다. 늘 감사가 넘치고, 예수 믿는 기쁨이 있으며, 행복한 모습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
사명을 깨닫고 사명에 충성하는 일꾼이 됩니다.
여러분은 육에 속한 어린 성도입니까? 아니면 신령한 성도입니까? 사명을 알고 충성하며 사는 성도입니까? 아니면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까? 아무쪼록 장성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지내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그가 자리를 들고 걷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를 본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한다고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은 선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11~12을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이 죽기 전에 속히 살려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안식일이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1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사명이 중요한 이유는?
1.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지상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라면 영혼구원을 위해 힘써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2. 우리의 사명은 위대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쓰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9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6:1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20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는 천국의
대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3:2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나눠주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며, 옷가지를 나누고 안식처를
제공하며 여러 가지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4. 영원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영원히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느냐, 아니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느냐가 결정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는 한 순간의 복락이나 고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복락이냐 영원한 고통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대한 결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명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5. 우리의 사명은 우리의 삶을 가장 의미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의 삶을 보다 오래 남을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머지 않은 장래에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 믿어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 외의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지옥의
심판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사명을 알고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은 천국에서 상급과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라도 이 사명을 망각하고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자신의 결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6.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날이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되고 이 세상의 종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4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몇월 몇일에 이 세상에 오시는지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일단은 복음이 전파되고 나서 이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더욱 더 죄악이 관영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환난과 재난이 더욱 더 심해질 것입니다.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년보다 금년이, 해가 갈수록 더 험한 일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마음을 굳게 먹고 사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어질 것입니다. 더욱이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몇 천명씩 모입니다만, 전국적으로 아이들이 모이지 않아서 주일학교를 하지 못하는 교회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린 손주가 컴퓨터로 게임을 하며 또 인터넷을 사용하여 자신의 사진을 찾아내 “할아버지 보세요”하는 것을 보니, 우리의 아이들이 신앙을 지키며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 세상이 더 악해지기 전에 하루 빨리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속히 재림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하루 빨리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영혼구원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늘 이기적이
아니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걱정 없이 먹고 살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처럼 밤낮 잘 살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시는 우리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시고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1840년 리빙스턴은 런던 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송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로 한창 젊은
나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의 발길조차 드문 곳까지 들어가 전도사역에 전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와 의료를 겸하면서 아프리카
각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세계의 사람들에게 오지의 땅인 아프리카의 실상을 밝혔습니다. 그는 탐험을 계속하는 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871년에는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구출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만날 때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리빙스턴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는 날은 사명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 신념을 가지고 계속 탐험과 선교를 강행했습니다.
새들벡교회의 릭 위렌 목사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50년 이상 목사로 사역하셨고, 대부분 시골 중소 도시의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아버지는 평범한 설교자로 사명감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 중에 아버지께서 가장 애착을 보이신 일은,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해외에 작은 교회 건물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전세계에 150개 이상의 교회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께서는 2년 전 암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한 주일 동안은 거의 24시간을 의식이
반밖에 없는 상태로 깨어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꿈을 꾸시면서 그 꿈에 대해 크게 말씀하시곤 했는데, 숨을 거두실 무렵 갑자기 생기가 돌더니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 상태가 너무 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를 다시 눕혀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시면서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한 시간 동안 아버지는 그 말을 백 번 정도 더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마치 명령을 하시듯, 약한 손을 뻗어 내 머리에 얹고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귀한 일에 쓰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일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장차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음을 보고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장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열방에 맞서서 그들의 악함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란 내용입니다.
1장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투기’라는 단어는 ‘질투’라는 뜻입니다.
질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원래 주님께서
받으셔야 했던 사랑과 영광을 이방 나라들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빼앗아간 일이 대하여 반드시 보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참
창조주이신 주님을 버리고 거짓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긴 자들에게 진노를 내리십니다.
나훔서 3장 7절을 봅시다. “(나 3: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 멸망하는 앗수르를 보며 애곡하며 “니느웨가 폐허가
되었다. 이를 어찌할꼬?”하고 슬프게 눈물 흘릴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앗수르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며
슬퍼하거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앞서 선지자 나훔의 이름의 뜻이 ‘위로자’라고 했지요? 7절을 다시 보십시오. 말씀
중반에 ‘위로할 자’란 단어가 나옵니다. 즉 앗수르를 향하여 “너에게는 멸망 가운데 너를 위로할 자, 즉 나훔이 없구나?”하고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면 “우리에게는 나훔, 즉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셔!”하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위로’란 뜻의 이름을 가진 선지자 ‘나훔’과 이스라엘의 압제자 앗수르의 멸망이
하나의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오랜 원수 앗수르의 심판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큰 기쁨이고 위로인 것입니다.
● 기록연대:
이 책은 주전 7세기, 정확하게는 주전 620년경 즈음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따가 다시 보겠습니다만 나훔서 3장
8절을 보면 애굽의 도시 중 하나인 ‘노아몬’이란 곳이 멸망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주전 663년경에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나훔서는 주전 663년 이후에 기록된 책입니다. 또한 나훔서가 예언하고 있는 니느웨의 몰락은 주전 612년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주전 663년과 주전 612년 사이에 기록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그와 함께
사역했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와 스바냐 입니다.
● 시대상황:
선지자 나훔이 활동하기 약 130여 년 전,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에 가서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뒤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때 니느웨에서는 도시 전체가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하나님은 니느웨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계획을 철회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흘러 약 한 세기가 지났습니다. 나훔이 활동할
당시 니느웨는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또 다시 죄악이 가득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선지자 나훔을
통해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서와 나훔서의 공통점은 둘 다 니느웨를 향한 예언이란 점입니다. 그러나 두
선지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요나서에서는 니느웨를 향한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가 함께 주어진 반면에, 나훔서는 오직 심판의 메시지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가 저지른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죄악들로 인해 그들의 멸망이 불가피함을 선포했습니다.
● 핵심메시지:
거대 제국이었던 앗수르는 막강한 군사력과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려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매우 잔인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은 정복지에 반역의 의지를 원천부터 꺾어
버리고, 다른 민족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자 전쟁 시 적의 피부를 벗겨 성벽에 붙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머리를 잘라 피라미드처럼
높게 쌓았습니다. 말뚝을 가지고 사람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찍어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죽은 병사들의 시체로 높은 더미를 쌓아
놓고 자랑했습니다. 얼굴과 신체의 일부를 잘라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게 했고, 때로는 남편의 머리를 잘라 아내가 들고 행진하게
했으며, 또한 아버지의 머리를 잘라 자녀들이 들고 거리를 돌게 함으로써 지배국가와 민족에게 반역을 저지를 수 없도록 엄청난
공포심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이 앗수르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들의 수도 니느웨의 별명이 ‘the blood
castle’(피의 도성)입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악명높으면, 선지자 요나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기 싫어서 반대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자신의 사명을 버리고 도망을 쳤겠습니까?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주변 국가들이 앗수르 앞에 벌벌 떨면서도, 속으로는 누가 제발
앗수르를 무너뜨려 주기를, 자신들이 당한 끔찍한 일들을 보복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너무나도 막강했기에 그 누구도
이 나라를 건들지 못했습니다. 이 당시 앗수르 제국의 땅이 얼마나 컷는가 하면, 오늘날로 말하면 이집트, 이란,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그 밖에도 수많은 나라가 앗수르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바로 그 막강해 보이는 원수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이 바로 나훔서의 주제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통쾌한
메시지고 큰 기쁨과 위로의 말씀입니까? 그래서 우스개소리로 “선지자 요나가 가장 좋아할 구약성경이 ‘나훔’이다”라고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분명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나훔은 바로 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죄악이 범람하는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오래된 원수요 민족의 압제자인 니느웨의 멸망 메시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이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즉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훔서의 핵심구절인 1장 15절을 보면 니느웨의 멸망 소식에 대하여 아름다운 소식, 화평 즉 평화를 전하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1장 15절을 읽겠습니다. “(나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원수의 멸망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이 그 유명한 로마서를 쓰며 바로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모든 인류를 괴롭혀왔던 오래된 원수 사단의 나라가 멸망하는 것, 죄의
통치가 무너지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소식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일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음을 선포하는데 이 말씀을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써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고
좋은 소식 즉 복음임을 가르쳐줍니다. 나훔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로 이루어진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악의 세력을 꺾으시고 마침내 정의를 완성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 나훔서의 특징:
나훔서는 언뜻 읽으면 이스라엘의 가장 큰 압제였던 앗수르 제국과 그 수도인 니느웨의 몰락을 선포하는 내용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훔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1장 그 어디에서도 니느웨와 앗수르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니느웨와 앗수르 이야기는
2장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책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에 대한 심판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는 모든 오만하고 폭력적인 세력들을 영원히 용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또한 모든 시대의 폭력적이고
오만한 세력들과 사람들을 꺾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나훔서는 악한 원수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신실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임을 보여줍니다.
● 나훔서의 구조
1장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선포
1) 열방 중의 악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출현
이제 본격적으로 나훔서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순서적으로 1장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만, 그전에 한 번 전체적인 구조를
봅시다. 구조를 보면, 2장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을, 3장에서는 앗수르의 멸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열방에 맞서서 그들의 악함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란 내용입니다. 1장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투기’라는 단어는 ‘질투’라는 뜻입니다. 질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원래 주님께서
받으셔야 했던 사랑과 영광을 이방 나라들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빼앗아간 일이 대하여 반드시 보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참
창조주이신 주님을 버리고 거짓 우상들과 거짓 신들을 섬긴 자들에게 진노를 내리십니다.
분명 우리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영원히 참기만 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 크신
권능으로 모든 악인들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시기 위해 임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모스서의 경우,
하나님께서 음성을 발하시매 풀밭이 시들고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가 메말라 버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미가서의 경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시자 산들이 녹아버리고 골짜기가 갈라져버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훔서도 이와 같이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하나님의 출현으로 인한 자연적 변화를 보여줍니다. 3-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나 1: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나 1:5)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오르는도다 (나 1:6)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하나님께서 회오리 바람과 광풍으로 임하십니다. 4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니 바다가 마르고,
모든 강이 마릅니다. 홍해가 마르고, 요단강이 바른 것처럼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바다도 힘을 못 씁니다. 4절에 바산과 갈멜,
레바논 세 도시가 등장하는데요, 이는 당시 가장 비옥하기로 소문난 땅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면 그 비옥한 땅들이
메마르고 꽃봉오리가 시들어버립니다. 5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오시니 산들이 진동합니다. 작은 산들이 아예 녹아버립니다. 6절을
보니 하나님의 불 같은 진노로 인하여 바위들이 깨져버립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장면입니까? 나훔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악을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을 심판하시고 정의를 회복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악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임하시지만, 주님의 심판은 무차별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악인을 심판하시지만,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7절 말씀입니다. “(나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선지자 나훔은 6절까지 천지를 진동시키고 산을 녹일만큼 두려운 하나님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의지하고 따르는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어려움을 다할 때에 친히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그려줌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번 그의 이름 뜻대로 ‘나훔’ 즉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심판하십니까? 8절입니다. “(나 1:8)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쓰나미나 홍수가 나면 물이 도시 전체를 쓸어가 버리죠?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거처를
마치 홍수와 쓰나미가 지나간 것처럼 완전히 멸명시키고, 그들을 어둠으로 쫓아내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심판이 앗수르에게
적용되고, 앗수르와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에게도 적용됩니다.
2) ‘오만하고 폭력적인 민족들의 운명’과 ‘하나님께 충성된 신실한 자들의 운명’ 대조
이어서 9절부터는 오만하고 폭력적인 민족들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나 1:9)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나 1: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이 마른
지푸라기 같이 다 탈 것이어늘” 나훔이 묻습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대항해 음모를 꾸민다 하여도 그것이 통할리가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그분의 대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마치 담장에 친
가시덤불처럼 엉크러진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술 취한 자들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마른 지푸라기처럼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심판을 받을 자가 니느웨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나
1: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하는도다” 니느웨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계획을 꾀하고 사악한 조언자들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나 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아무리 강하고 병사들의 숫자가 많다하더라도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남 유다의 남아있는 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나 1:12)…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12절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유다야, 내가 너를 심판했지만 다시는 너를 심판하지 않겠다. 그들이 네게 지운 멍에를 내가 꺾어 버리겠다. 너를
묶어 놓은 사슬을 내가 끊어 버리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향해 영원토록 노를 품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이제 앗수르가 지운 멍에를
주님께서 꺾어 버리시고, 사슬을 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니느웨를 어떻게 멸하시는지 봅시다. 14절입니다.
“(나 1: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 선지자 나훔이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에 대해 명령을
내리셨다. ‘네 이름을 이어 갈 후손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네 신전에 있는 새겨 만든 우상들과 녹여 만든 우상들을 내가 없애
버리겠다. 너는 아무런 쓸모가 없고 악하기에 내가 네 무덤을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악인을 심판하실 무덤까지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단의 세력을 무찌르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을 알리는 복음과 같습니다. 원수 사단은
멸망했습니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나 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15절은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원수 니느웨의 멸망 소식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름답고 좋은 소식이 됩니다. 평안을 선포하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이기셨음은 너무 기쁘고 좋은 소식이라, 이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산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마라톤이 전쟁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간 이유와 같다.)
이제 유다는 앗수르의 침략이나 압제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축제의 절기를 지키고, 앗수르 사람들 눈치 않보고, 그들에게
조롱당할 염려없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마음껏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15절 후반부에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원수들과 악인들을 완전히 멸하셨음으로 이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1장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출현과 오만하고 폭력적인 민족들의
파멸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구원자요 피난처 되심을 보여줍니다.
나훔서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나훔이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니네베로)에 대한 예언을 한 예언서이다.
나훔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3장(구약 929장), 47절(구약 23,191절), 558단어(구약 304,901단어), 약2,100자(구약 약 116만자)로 이루어진다.
저자 :
나훔서는 그 책의 저자가 엘고스 사람 나훔(히브리어의 의미는 위로자 또는 위안자이다) (나
1:1)이라고 알려줍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엘고스 성의 위치에 관한 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론 중 하나는 훗날의
갈릴리 바다의 가버나움(문자적으로 "나훔의 마을"을 의미함) 도시가 엘고스라고 설명합니다.
저작 연대 :
나훔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나훔서가
주전 663-612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좁히는 것입니다.
나훔서 안에 저작 연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나훔은 과거 시제로 애굽의 테베(노아몬, 나 3:8)가 앗수르 사람들에게 함락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주전 663년), 그렇다면 이미 그 함락 사건은 나훔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발생한 것이 됩니다.
둘째, 나훔의 나머지 예언은
주전 612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기록 목적 :
나훔은 이 책을 니느웨 백성들에게 경고하거나 "회개하도록 부르기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150 년 전에 선지자 요나를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계속 악행을 일삼을 경우에 발생하게 될 일을
경고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회개했지만 지금은 그 때의 회개 이전만큼이나 악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정복
과정에서 지나치게 잔인해졌습니다.
(수 많은 잔악 행위들 중에는 희생자들의 몸을 기둥에 매달고 또한 그들의 가죽을 장벽에
걸어두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제 나훔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선포하셨고 앗수르 사람들은 이제 곧 마땅히 받을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절망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핵심 구절 :
나훔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나훔 1: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나훔 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참조, 사 52:7; 롬 10:15)
나훔 2: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나훔 3: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요약 :
니느웨는 과거에 요나의 설교를 듣고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150 년 후 니느웨는 우상 숭배와 폭력과 교만으로 다시 물들었습니다(나 3:1-4).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선지자 중 한 사람을
니느웨로 보내어 그들의 도성이 멸망할 것을 알려주고 회개를 권고하게 하셨습니다.
슬프게도 니느웨 사람들은 나훔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 성은 바벨론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표 :
바울은 로마서 10장 15절에서 나훔 1장 15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메시아와 그분의 사역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복음 사역자는 자신들의 일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인들과 화평을 이루셨고, 자기 백성에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셨습니다(빌 4:7).
전도자의 사역은 또한 화해, 의, 죄사함, 삶,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인한 영원한 구원과 같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을 전파하고 그러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전도자의 발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그림은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간절함과 즐거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적용 :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나라에게 주님을 그들의 주로
선포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분은 조롱 받지 않으십니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때에 하나님은
심판의 발걸음을 떼십니다. 거의 220년 전에 미국은 성경에 나오는 원리를 따르는 국가로 설립되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그러한
모습은 변질되었고 우리는 매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유일한 소망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원칙과 진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제 1강 나훔 1:1- 8 엄중히 심판하시는 주
나훔서는 소 예언서 12권 가운데 7번째 책이지요 궁금한게 있어요 왜냐하면 나훔서를 본문으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사실은 나훔서 같은 성경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위한 본문으로 선택하기가 쉽지가 않은 그런 본문입니다
실지로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도 자기 마음에 찡하고 울리는 것 밑줄을 긋지요 그것을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그러나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에 드는 편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 아이들이 13살이 되면 성인 의식을 성경을 해석하도록 요구하는 데 뽑아요 성경구절을 그 성경구절은 아주 편한 이야기 예를 들면 창세기에 나오는 선조들의 이야기 성경의 스토리가 있는 것들이면 해석하기가 쉽지 않아요
레위기에 난해한 것들을 뽑게 돼 이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
돼 연구를 해 가지고 이게 나에게 있는 성경인데 나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면 질문을 하는 것이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물으면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반대합니다 하면서 자기 설명을 해 나가야 돼 여하튼 창의적인 성경 공부인데요 그렇다고 보면
되어요
그러니까 성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토라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정 받는 자리여요 성년 의식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발달했어 이런 것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존중해 주어야 된다는 것이어요
재미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것 해 가지고 이것 할 것이야 이것 아니거든요 뽑아 난감한 부분도 걸리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읽어야 되는 것이지요 아마 성경 말씀을 소 예언서를 선택하여 설교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이렇게 보여 지는데
오늘 공부하게 될 나훔서는 낯선 책일 것이어요 그러나 패스하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건너 뛰면 안 되어요 이것은 반드시 우리들이 차근 차근 꼭 씹어 봐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진노 분노 보복 그러니까 불편해 이게 나훔서가 설교하기 어려운 이유의 하나입니다 나훔 위로하시다 나훔 전체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아주 괴롭히고 있던 나라인 앗시리아라는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그들이 쏳았던 폭력 그들이 민족들을 겁탈해 왔던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다 실지로 나훔서가 쓰여진 후에 니느웨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가 멸망한 것이 비시 612년 경으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정말로 망합니다 이 나라가 역사의 정점에서 앗시리아가 제일 잘
나갈 때 갑작스럽게 망해 버리고 마는데 그러니까 앗시리아는 망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것이 나훔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앗시리아가 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민족주의적 감정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일단의 학자들은 성경으로서 문제가 있지 않나 특수한 상황이 있지 않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말에 우리가
반박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인 동시에 죄로 가득차고 교만하고 억압적인 정치 체제를 보였던 그런 도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니느웨의 심판을 예언한 다른 예언자를 압니다 요나가 니느웨가서 전하지요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나중에는 니느웨가 망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 백성 까지도 사랑하신다 말하지요 나훔은 아니어요 망할 것이다 이것이 차이어요 요나서와 나훔서는 그런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아라는 수도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니느웨가 상징하는
것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 힘을 함부로 대하는 모든 세력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힘 있는 나라가 망해 버렸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한 대로 역사의 정점에서 확 망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알려주는 책으로 아주 좋은
메시지를 안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앗시리아라는 나라는 주전 20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강가에 있었던 나라인데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에 주 도시가 앗수르라는 도시가 핵심 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앗시리아를 때때로 앗수르 앗수르 하는 까닭도 그런데 이유가 있다고
앗시리아라고 변방에 조그마한 나라였지만 가장 강성한 것은 주전
10세기부터 주전 7세기 사이에 아주 강성한 국가를 형성이 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두 개의 강이 있지요 유브레스강 티그리스
강이 있는데 강 유역이 있었기 때문에 강을 통한 원거리 무역에 능했고 소통 시키면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립니다
잉여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하면 군비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교한 관료 조직들을 만들어 내고 또 기병과 말을 탄 군인들 육성하고 전차 부대 만들어 내고 이런 일들을 통해서 이 나라는 아주 강성한 나라가 됩니다
전쟁을 치루기 위한 전쟁 국가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말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참 제도 같은 것도 발전시킵니다 타고 가다가 말을 바꾸어 타는 그런데 군사력이 강력해 지고 주위와 싸움에서 거의 승리를
거두게 되자 앗시리아는 점점 교만해 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당할 자가 누구냐 그렇게 가는 것이어요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돌에 세긴 부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부조는 앗시리아가 적들에 대해서 얼마나 잔인했는가 부조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잔인한 일들을 하냐 하면 전쟁에 승리하고 포로들을 끌고 가지 않아요 그냥 묶어 가면 좋은데 코를 둟어 가지고 쇠 사슬로 묶고 데리고 가기도 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강제 이주 시킵니다 그런데 강제 이주 시킬 때 빨리
빨리 걸어가야 하는 데 잘 못 걷는 사람들이 있지요 어떤 사람들일까요? 병든 사람들 특히 애기들 이 애기들을 돌에 메쳐 죽이고
성경에도 등장한 이야기인데 진자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너무 잔혹하니까 그리고 이 앗시리아가 중앙 집권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권력을 나누어 주는 일을 안 하기 때문에 권력의 사각지역에서 반란이 자꾸 일어나는 것이어요
너무 잔혹하게 하니까 틈만 나며 벗어 버리고 싶어서 반난이 일어난 것이어요 메데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서 망합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망해 버리고 맙니다
나중에 보면 페르시야라는 나라가 우리가 고레스 임금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지 않아요 페르시야가 어떤 식민지 정책을 쓰느냐 하면 권력을 다 나누어 주어요 너희 민족끼리 자치 생활을 해봐
두 가지 요구를 합니다 세금은 내야 돼 그 다음에 너희들 종교를 가지고 살아 해 우리 왕실을 위해 꼭 기도해주어야 해 이렇게 해요 그것이 앗시리아라는 나라가 반면 교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 억압적으로 했기에 페르시야는 정 반대의 길로 갔던 것이지요 반면 교사입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은 나훔서의 1장 2절에서 11절에 등장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여호와가 보복하시는 분이시다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계속 심판하시는 분이시다는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1장 2절 여호와가 보복하는 분이시다 계속 심판하는 분이시다
진노 보복 똑 같은 단어가 반복 되기 때문에 똑 같은 것을 읽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똑 같은 말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하게 시행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진노와 보복은 누구에게 주어지지요 자기를 거스리는 자 야훼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에게 진노와 보복이 주어진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나훔서는 어디이아요 앗시리아이지요 앗시리아라 앗시리라고 하지만 앗시리아라고 대게 쓰는데 그러니까 앗시리아이지만 그 수도인 니느웨 이지만 하나님은 보복하는 분이시다 하고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에 3장에 가면 앗시리아가 망하는 것이어요
나훔 3장 14-19 절 그래서 앗시리아의 망가가 등장합니다
너 망하고 말았구나 장난체 하더니 중간을 채우는 중간 부분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네가지가 등장을 해요
나훔 1: 2-11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
괄호 쳐 놓고 끝판에 가서 망하는 나라에 대한 망가를 불러요
중간에 네 번에 심판 예고로 등장한다 이게 전체 구조이어요
나훔 1:2-11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
나훔 3:14-19 앗시리아의 멸망을 노래함
나훔 1: 2-11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
나훔 1:12-3:13 네 개의 심판
나훔 3;14-19 앗시리아의 멸망을 노래함
1장 1절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니느웨에 대한 경고 이 책은 경고라는 말로 압축적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곧 엘고스 사람 나품의 묵시의 글이라
엘고스라는 말은 하나님은 맹렬하시다는 뜻인데 이 지명이 가지고 있는 나훔서의 메시지가 맹렬하거든요
엘고스 사람 나훔의 대게는 어떻게 되어 있지요 비젼이라든지 환상이라든지 하는데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하고 이야기 합니다 선포가 아니라 글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훔의 선포는 처음 부터 두루마리 형태로 기록해서 선포된 것이다 왜 처음부터 기록하였을까요 확실하다 그런 뜻이어요 확실한 것이어요 틀림없이 망한다 기록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가 주어지고 있지만 이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위로하시는 것이지요
결국 너희를 억압하고 있는 저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야기함으로
그들에게 위로하시는 것이어요위로인 동시에 앗시리아처럼 살면 안돼 경고이기고 합나다 그런 식으로 살면 망할 것이야 위로한 동시에
경고하는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한 대로 요나서가 하나님의 헷세드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 이것을 강조한다면 나훔서는 하나님의 정의와 분노를 보여주는 그런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것을 나훔서는 강조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훔서를 우리가 읽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두 얼굴 가운데 어떤
얼굴을 좋아하느냐 하면 용서하시고 인내하시고 위로하시고 내 편이 되어 주시고 어떤 경우에도 다 받아 들여 주시고 따뜻한 아버지의
이미지 따뜻한 어머니의 이미지로 하나님을 소개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그런 요소도 있지만 벌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정의를 세워 가시는 분이시기도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나훔서를 통해 배우는 것이지요
2절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보복하고 진노하신다 질투하는 하나님 그러니까 진노하고 보복하는 하나님 질투하는 하나님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덧씌우고 싶지 않은 이미지들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용서해 주어야 하고 나훔서에 등장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알던 하나님의 얼굴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질투한다는 말이 질투라는 말이 부정적 감정일 때가 많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에게
질투라는 용어도 써도 되는 것이야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질투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어요 사랑이 있지요 사랑이 없이는 질투도 없지요 그러니까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었어 그런데 파트너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 그러면 질투나지요 하나님도 그런 것이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통치권에 도전하는 일체의 세력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참아내지
못하신다 그렇게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거스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소 예언서를 통해 계속 배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세계
질서를 두 가지 토대가 있다면 정의와 공의라고 이야기 했어요
하나님을 거스린다는 것은 이 땅에 마땅히 시행 되어야할 정의와 공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아브라함 죠스 헤셀라는 분이 세상은 세계의 기둥위에 세워있다고 합니다
그게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예배이고요 또 하나는 자애 사랑이어요 그리고 공부이다
이상하지 않아요 왜 공부위에 서 있나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예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에게
마땅히 돌려야 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이어요 그러니까 나의 삶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사는
것이 예배이어요 이것 무너지면 세상은 무너진다
자애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존재인 이웃과 피조 세계를 사랑과 애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자애입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끊임 없이 나의 삶을 이런 삶에 연결 시키기
위해서 나의 삶을 돌파하는 것이 공부여요 책만 들여다 보는 것이 공부가 아니라 이 세가지 기능 위에 서 있어야 해 이런 기둥들이
공의와 정의로 나타날 터인데 이것들을 무너뜨리는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반드시
보복하신다 이렇게 말합니다
3절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 바람과 광풍에 있고 그의 발은 티글이니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 주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노하시고 진노하시고 갑자기 노하기를 더디하신데 이것 어떤 의미이냐 하면 하나님이 정말 진노하고
보복하는 분이시면 왜 저들 그냥 놔두세요 하고 이야기 할 때 그 때 지금 하는 이야기여요
그것은 내가 무능해서 심판 안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앗수르가 저지른 만행을 바라보면 그들을 바로 심판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이유를 지금 밟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때가 무르 익은 것이어요 카이로스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하나님의 시간 (때) 마치 하나님의 때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을이 되면 밤나무에 밤이 달리지 않아요
그리고 여러분 밤이 신기한게 많이 익으면 벌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벌어진 것을 그게 밤송이 떨어지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안에 든 밤이 후두둑 떨어지지요 알밤이 떨어져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을이 되어서 때가 되니까 떨어져요
하나님의 시간은 그렇게 도래하고 있는 것이어요 내가 앞 당길 수도
없고 미룰수도 없어요 그 시간이 다가와 하나님의 인내를 하나님의 무능으로 보면 안 되어요 하나님이 지금 노하기를 더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심판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다
3절 벌 받을 자를 내 버려 두지 않으신다
새 번역은 이 부분을 더 실감나게 번역합니다 주님은 절대로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그 죄를 모른체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
3절 회오리 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에 티끌이로다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하나님이 임하실 때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벌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힌두교 이야기 혹시 아실지 모르겠는데 힌두교가 주로 어느 나라에서 인도 사실 힌두교라고 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어인 신두(Sindhu : )에서 유래된 말
큰 물을 뜻하는 신두라는 물에서 말하기도 합니다 인더스 강 흘러가는
겐지스강이나 그런 강들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힌두교에서는 최고의 신 힌두교는 수 억의 신이 있다고 말하는 데 다신이야
남미에서는 마라도나도 신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힌두교에서는 3대 신이 있어요
최고 신이 누구이냐 하면 브라흐마 (Brahma)라는 신과 비슈누
(Vishnu)라는 신과 쉬바 (Shiva) 신이 있습니다 각각 무엇을 강조하느냐 하면 브라흐마는 창조의신 비슈누는 유지의 신이고
쉬바는 파괴의 신이야 신은 파괴하면 안 될 것 처럼 보이는데 파괴해 낡은 것을 파괴해야 새로운 것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쉬바신의 모습은 무섭게 파괴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신 체험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유한 모습으로만 않는다는 것이어요 때때로 하나님은 매몰 차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는 야훼 하나님 속에 진노하는 모습과 긍휼히 여기는 모습이 다 있지요
하나님 안에 이 힌두교의 경우는 그것을 나누어서 각각의 신들의 역할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쩼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면 악을 제거하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엄을 이야기 하기 위하여
4절과 5절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살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 도다.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 오르는 도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의 위엄으로 지배하시는 분이셔요 그것을 바다를 꾸짖어 바다를 말리는 것으로 말합니다
바다와 강물은 고대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어요 바다가 일렁이면서 배를 삼키고 바다 속에 혼돈의 세력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지요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바다를 관장하고 계신다 강물을 관장하고 계신다
여기에는 깊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지만 어쩼던 바다와 강물로 상징되고 있는 혼돈의 세력까지도 다 잠잠케 하시는 분 이런 위대한 분이십니다
4절 바산과 갈멜이 쇠하여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다 시들게 창조하는 분이기도 하지만 황무하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비옥한 목초지인 바산과 갈멜을 황무하게 만드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5절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세상에 모든 것들 솟아 났다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6절 누가 능히 그의 본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가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누가 누가 이런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누가를 이 나훔이
쓰고 있을 때 누가가 누구인지를 대충 알아 그것이 앗시리아이지요 앗시리아 뿐만 아니라 앗시리아로 상징되고 있는 강대국 거들먹거리고
힘 있는 세력들 누가 감당하fi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의 위엄 앞에서 스스로 견데낼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쏳아지니 바위들이 깨지는 도다
세상에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어요
찬송가 70장 가사 떠오릅니다
어떤 가사이냐 하면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그 다음에 뒤에 가사는 이렇게 됩니다
만유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에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대 없네
이 가사 속에는 두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여서 진동하시만 하나님이 한번만 목소리를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한다
반대로 만유주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시면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망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한 이야기가 7절과 8절에 나옵니다
7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세상에 모든 선한 것이 그분으로부터 이렇게 엄위하게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8절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좇아 내시리라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심은 무엇을 뜻하지요
여호와의 심판 앞에 세상에 어떤 세력도 견딜 수 없다고 한 다음에
하나님은 선하시며 말함으로 그렇게 엄위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를 아시느니라 그래서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진멸
시키고 자기 대적들을 쫓아내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무엇을 뜻하지요? 약간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좋아하는 것 이지요 좋다 참 좋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와 참 좋다 이러지요
이제 예를 들어서 상훈씨가 맛 있는 음식을 보았는데 참 좋다고 그랬어요 상훈씨에게 졸아야 옆에 앉아 있는 나운 씨는 싫어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좋은 것의 한계입니다
선함은 상훈씨가 좋은 것이 나운 씨도 좋을 때 선함이어요 보편성이 기준이 좋은 것은 선함이 되어요
막 10장 17절 선하신 선생님 이야기 하거든요
막 10장 18절 왜 나보다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한분 밖에 없어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선함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평적으로 좋아할 때 선함이어요 성경이 이야기 합니다 세상의 모든 선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 선함은 악인들의 심판까지 포함된 선함입니다
7절 그 하나님은 환난 날에 누군가에 산성이 되어 주신다
그래서 유럽에 있는 예배당들 성당 건물이나 오래된 예배당들을 보면 예배당에 현관에서부터 이런 물결무늬 모양으로 계단들이 형상화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예배당 정문인데 나오면 물결 무늬로 되어 있는 것 보실 수 있지요 이것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살려주는 것으로 보여 주는데
에스겔 47장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선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리라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바닥에 팍스 에트 보눔 Pax et Bonum 팍스는 평화이고 보눔은 선함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의 평화와 선함이 흘러가는 것이어요
이것을 형상화 해 놓은 것이어요
여호와는 선하시고 산성이시라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주님이 아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사야 49장 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장 16절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세겼고 너희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당신을 거스리는 사람들에게 진노하고 보복하지만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산성이 되어 주시고 환난날에 만나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지켜 내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한 것이 흘러나오도록 한다
이것이 아름답게 형성된 찬송가가 70장 피난처 있으니
2절과 3절
2절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절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없네
오늘 공부했던 나훔 1장의 전반부는 이 찬송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확신 가지고 우리 힘차게 살아갑시다
제 2강 나훔 1:9-19 결박을 끊으시는 하나님
인생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인생은 자유를 향한 먼 여정 같아요 정말로 자유를 얻게 되는 것 예수님은
요 8장 32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그 말 한 마디만 이해해도 성경의 태반을 이해한 것 같은데 사실 진리라는 말도 이해하기 쉽지 않고 자유라는 말도 쉽지 않지요
인간이 부자유하게 된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덴 동산에 있을 때는 인간이 자유로왔지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죄가 들어와서 동산에서 쫓겨난 다음부터 불안 했습니다 시간이라는 게 시간이 곧 불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는 철학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신화적인 이야기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인데 결국은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주인은 누구이냐 하면 불안이다는 것이어요 운명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삶이 불 확실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불안의 대용물들을 무엇인가 찾지요 불안한 마음을 달레기 위해서 요즈음 사람들에 불안의 대용물로서 제일 좋은 것이
돈이고 대게 다 그렇지요
돈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요 돈은
구매력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 구매할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어떤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돈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돈은 우리를 확고하게 세상적으로 하지요
돈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불안이 우리에게 깃들고 그렇게되면 돈은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데 있다고 보아요
교역자들 이야기 나누다가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나왔어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법정에 서게된 선배들의 재판정에 가면 엄숙한 재판정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이런 곡들을 불렀어요 그리고 쫓겨 났지요
그리고 우리가 힘차게 불렀던 노래 가운데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듣기를 죽기를 원하노라 우리들은 정의파다 정의파다 우리들은 비장했어요 70년대 그런 시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제가 부 교역자들에게 물었어요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이것 누가 한 이야기이지 아무도 몰라 그러자 요즈음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요 왜냐하면 네이버에게 물어 보았어요
검색을 해 보보디 알베르 까뮈가 방항적 인간에서 한 이야기라는데
그겋지 제가 서가로 가 가지고 반항적 인간을 펼쳤는데 탁 나와요 35페이지에서 나와요 그렇지 자유 자유 그런데 성경에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우리에게 궁극적 자유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우리를 얽어메고 있는 부자유의 사슬들을 끌어내고 그래서 우리가 자유롭게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경축하고 즐겁게 살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살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그 자유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를 끝 없이 무엇인가 얽어 메려는 사람들ㅇ디 있는 것이지요 그들이 하나님 거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무력화 하시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나훔 9장 9절에서 15절까지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나훔을 통해 주신 경고의 말씀을 들었었고 그리고 여러분 기억나시지요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 진노하시는 분 보복하시는 분 무서운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이 또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도 했어요
그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지만 심판이 왜 지연되는 지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 이런 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것이 심판을 이르르기 위한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는 시절이다하는 이야기를 했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 바다를 말리는 것처럼 강물을 말리는 것 처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훔 1장 4절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꿏이 시드는도다
나훔 1장 7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날의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아시는 분으로 형상화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보았던 마지막 대목이었지요
9절 오늘은 이렇게 경고하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장 9절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는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라고 하는 말은 애매하기는 합니다 여호와 뜻을 거스리고 있는 앗시리아를 뜻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지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유다를 향한 것인지
유다에 대한 책망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하에
확고하게 거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력들은 명확해 보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나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하는 나라들을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요
애굽이 우리를 도와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드든지 아니야 지금의 대세는
앗시리아이기 때문에 굴욕스럽더라고 앗시리아에게 우리가 굴복해야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땅치 않는 것이지요 이것이 유다
사람들에 대한 책망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은 것 처럼 조금 더 많은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9절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의지하려고 하려는 세력들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세력들을 온전히 멸하시리다
온전히라는 것은 적당히 멸하시는 것이아니어요 두 번 수고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무너뜨린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일컷는 말이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10절 가시덤불 같이 엉쿠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어늘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예언자가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가시덜불 같이 엉크러진 것처럼 보여요 그 엉클러진 가시덩굴 무엇이지요 다가가면 찌르지 않아요 그렇게 엉크러진 가시 덩굴
같은데 서로를 찌르는 형국이기도 하고요 술에 취한 것 같아 이성적인 능력이 마비가 되었어요 인간 이하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른 지푸라기와 같다 불꽃만 다면 훨훨 타 버리고 마는 그런 상황 여러분 예언자는 기본적으로 무엇이냐 보는 사람이다 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어요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어요
누구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보는 사람이 무엇인가 보고 있을 때 이게 현실이야 말할 때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게 무엇이야 그래서 이 보는 사람인 예언자는 본다고 말하지만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몽상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몽상가처럼 보여요 꿈꾸는 자이고 엉뚱한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 예언자 같은 사람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어 주는 사람들을 시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어요 여러분 시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은 대단히 일상적인 삶 속에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일상적으로
흔러가는 일인데 그 순간 속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을 발견해 내는 시인들이 이게 시인이단 말이어요
설교하는 사람도 그렇고 예언자라든지 이런 분들이 시인이다는 것이야 제가 좋아하는 구구절 가운데 하나가 정오승 시인이 예수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그런 말을 비슷하게 했던 사람이 칼리 지브란입니다 칼리 지브란이 했던
말을 정오승 선생도 기억했을 것이어요 모든 사람을 시인이기에 해 모든 사람을 시인이기에 한다는 말은 예수를 만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하는 순간 내가 이전에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기 시작하고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이어요
우리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시인이 되어야 합니다 되지도 않는 시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예언 이것이 실지로 일어났어 이런 일이 시인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얼마전에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좀 정리를 했어요 한 사 오천권 정도 정리해서 다 없엤어요
기준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앞으로 이제 살아가면서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 싫어서가 아니라 싫어서가 아니라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책을 다 빼냈습니다 그런데 한 권도 안 버린 책이 있습니다 시집 시집은 한 권도 안 버렸어요
여하튼 이렇게 시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
11절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악을 꾀하는 이 한 사람이 나올 것이다 히고 말합니다
나훔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앗수르의 왕인 산헤립일 가능성일 것 같이 보입니다 산헤립이 히스기야 시대에 쳐 들어와서 유다를 쳐 들어와 가지고 굉장히 굴욕을 안겨 주거든요
이게 산헤립인데 혹은 산헤립일 수도 있고 앗시리아라고 하는 그 압도족인 세력에 압도 되어서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어떤 사람일 수도 있어요 이것은 특정하기는 좀 어려워요
여하튼 이 앗시리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돈 속에 끌여 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유다의 46개 성읍을 징벌하고요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입니다 어찌 할 수 없어가지고 우리가 항복합니다
왕하 18장 14절 유다왕 히스기아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은 내가 당하리라 하였더니 왓수르 왕이 곧 은
삼백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왕 히스기아에게 내게 한지라
당신의 봉신 국가가 되겠습니다 항복의 조건으로 유다에 부과하는 징벌금이 있습니다 그게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만큼인지 감이 안 오지요 달란트라는 것을 구약과 신약과 무게 단위인데 구약 시대와 헬라 시대가 달라요 구약시대의 한 달란트가 34키로 그램쯤입니다 헬라시대는 한 2키로 정도로 보고 있는데 한 달란트가 금 34키로 정도여요
계산을 해 보아야 하는 데 한 달란트의 값이 금 34키로가 6천 드라크마로 보는데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노동자가 6천일의 품삯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것만큼이 얼만큼 되느냐 하면 한돈이 몇
그램이지요 3.75그램이래요 돈으로 따지면 30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금 27만 2천돈입니다 돌 반지 27만 2천개 은 반지로
이야기하면 그것에 지금 열배 정도니까 어마 어마하지요
그러니까 전쟁 배상금 우리가 너희를 완전히 멸망 시키지 않을 조건으로 이렇게 내놔
왕하 18장 15절 성전 안에 금을 다 내주었고 성전 문 기둥에 입힌 금까지 벗겨서 다 산헤립에게 주었습니다
성전 왕궁 곳간에 금을 다 내 주었고 내 주어도 부족하기에 성전 문 기둥에 입힌 금가지 벗겨서 다 주었습니다 너무 비참하지요 어쩼던 두려운 것이어요 왜냐하면 전멸 당하게 생겼거든요
특별히 산헤립이 보내었던 랍사게라는 사람이 사람들앞에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왕하 18장 20절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더 자손심 상한 말이 나옵니다
왕하 18장 33절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우리를 대적할 수 없어 자존심 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야훼가 너희를 건져 줄 것을 믿지 마라 야훼도 앗수르를 당한 수 없어 자기 한계를 모르는 권력의 오만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그래서 11절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 도다 하고 이아기 합니다
사실은 권력은 반드시 타락하도록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아요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 이야기합니다 내 힘이 너무 세지면 그것은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이것을 Crime against humanity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말하는 데 한 사람에게 행한 범죄는 인간이 특별히 가하는 범죄는 해당 당사자만의 범죄만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거역이기에 인간 범죄어요
인간 범죄는 그의 인간 존엄을 해쳤기 때문에 어떤 개인에게 내가
잘못을 저지른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어요 특별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믿는 우리들에게는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하는 모든 죄는 인류에게 대한 범죄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세력들 20세기에 가작 비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나치에 의해 수업이 많은 유치인들ㅇ, 홀로코스트 유대인만이 아니지요 집시 장애인 사회 체제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 그런 이들이 다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민족주의적 구 소련의 나라들이 그 민족들이 발흥하면서 서로를
죽이고 종교적 차이 이념적 차이 이런 것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도 부족간에 전쟁으로 잔혹한 살해 사건이 벌어지고 사회작 약자 혹은
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벌어지고 이런 모든 일들이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것이지요
한 개인에게 자행된 범죄만이 아니라 인류 보편에 범죄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가운데 칼 야스퍼스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요 그 분은 독일이 2차 대전 당신 저지른 죄에 대한 참담한 물음들에 대해서
]
철학자 하이데커와 참담한 죄를 참회하는 의미에서 독일의 죄책에 대한 물음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인간의 죄책을 네가지로 설명합니다
(1) 첫째는 범죄적 죄책인데 죄책감을 느끼는 게
(2) 두 번째는 정치적 죄책인데 국민드이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어요
내가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말할는지 모른데도 나라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았어 침묵했어 이것이 정치적 죄책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3) 세 번째는 도덕적 죄책이라는 것이 있는데
자기 반성을 통해서 내 속에도 저런 죄의 가능성이 있어 느끼는 게 도덕덕 죄책입니다
(4) 그런데 마지막 형이상학적 죄책 말하는 데 이것은 너무 철학적이어요
그 말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성을 결여하는 것이 아닌가
남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국가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 정치적 죄책이라 한다면 고통 받는 사람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지 못한 것이 형이상학적 죄책이다는 것이어요
살아 남았다고 하는 것 다 죽었는데 살아 남았네 이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을 때 모른 척 함으로 그를 사지로 몰아 넣은 나의 죄 여기에 대해서 참회해야 된다는 것이어요 이래야
문명이 바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두고 보시지만 이것이 권력의 극점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이 반복되어 나타날 때 반드시 그 생각과 뜻을 무너뜨리시는 이심을 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 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멸절 당할 것이다 없어질 것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어떤 뜻입니까? 내가 멸절하겠다 내가 없에 버리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비록 강하고 많을 지라도 그들이 남들을 압도할만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들이 메뚜기 떼 처럼 많을 지라도 그러나 그 속에는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12절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3절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트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하나님은 멍에를 깨트리고 결박을 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에 하나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이고요 신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이어요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해서 신약 전체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약도 어떻게 보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인류에게 알려지고 그 뜻에 따라서 살거나 살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고의 이야기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전체가 구약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바로로 상징되고 있는 애굽의 전제
정치로부터 그 속에서 비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는 사람들 하나의 부품처럼 늘 교환 가능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던 사람들이 존엄한 삶을
누리도록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었어요
그 하나님은 해방하는 하나님 결박을 풀어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끊임 없이 누군가에게 집중해서 그를 죽음의 길로 내 몹니다
죽음을 누군가에게 우리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일 수 있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영혼까지 죽일 수 있는 그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
마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무력화 시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무력화 시킵니다 그것이 부활로 등장하지요 부활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이지요 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결박을
푸시며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것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어요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멋있어져 합니다
함으로 부자유한 사소한 일에도 제발 그렇게 살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즐겁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우울증에 걸린 표정을 짓고 안 되어요
상훈씨 노래가 아주 즐겁게 밝은 노래를 하고 있지요 오로지 상훈씨에게 특화된 분야이지요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악한 자의 지배는 반드시 끊는다 이것이 이 본문이 하고 있는
이야기여요 제가 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청년 시절에 나갔는데 신앙 생활을 늦게 했는데 그 때 부른 복음 성가들은 굉장히 심플합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이런 것 또 무어이냐 하면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그런 곡들 그런데 그게 오랬동안 기억이 나
처음 만났기 때문에 그럴까 그 심플한 것이 감동을 주었어요 그 가사가
마음에 들어왔어요 주 말씀하시길 쇠사슬 끊겼네 우리 자유 얻었네 할렐루야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생활의 보람은 무엇이냐 우리를
얽어 메고 있던 것들이 끊어지는 경험 세상의 경험 세상에 우리를 길 들이려고 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갔던
부자유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았던 주눅들고 그래서 신동엽 시인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시를 보면 우리는 머리에 이고 있는 쇠
항아리를 하늘로 여기고 살았어요 쇠 항아리를 이것을 찢어야 돼 그래야 푸를 하늘이 보이는 것이어요
우리 머리에 쇠 항아리 같은 것이 드리어 져 있어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두려움에 짓 눌려 있어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무엇인가 짓 눌려 헌금 제대로 안 하면 벌 받는다든지 주일 날
일이 분조해 가지고 무엇하면 하나님을 너무 이상하게 하나님은 무엇하는 분이시냐 하면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도 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영혼의 문제가 잇어요
어쩼던 너무 율법적으로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게 살기를 원하시지요
14절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네가 네 신들의 집에서 세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여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여기에 너는 누구냐 하면 앗시리아입니다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이름이 전파된다 잊혀진 존재가 된다 사람이 두려워 하는 것 가운데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위에 올라가서 바위에 이름도 세기고 가끔 누구 하트 그러면 늘 궁금해 이 사랑이 유지될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는데 여하튼 그들의 이름 권력의 정점에 있는 것 처럼 보인 그들 오로지 세상에 그들 밖에 없는 것 처럼
보였던 신동엽 시인이 이야기한 것 처럼 우리 머리 위에 드리어 져 있는 쇠 항아리 같은 그들이 절대로 망할 것 같지 않던 그들이 그
이름도 전파되지 않고 그들이 잊힌 존재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선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명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그 제국이 이루고 있던 신들인데 신들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고 이 신들이 지켜 준다고 했는데 그것들 다 멸절한다
14절 그것들 다 멸절한다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악취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무덤을 준비한다 왜 무덤을 준비하느냐 하면 악취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스겔 32장 22절 거기에 앗수르와 온 무리가 있음이여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려진 자라 그 무덤이 그 사방에 있도다
23절 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는 자로다
그러니까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들이 무너지는 그 무너짐이 마태복음 7장에서 어리석은 사람의 건축처럼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 말하는 데 앗시리아가 그렇게 멸망할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주어 집니다
15절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은 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동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이것은 이사야 52장 7절에도 거의 비슷한 소식이 등장 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15절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이제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 지어다
왜 절기를 지키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악인이 질멸되었으니 다시는
그들이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dskg을 것이다 침략군이 네 나라를 짓 밟고 가지 못할 것이다 농사 지은 것을 다 따 먹거나 불살라
버리지 않는 그런 평화의 시기가 온다
평화의 이미지로 제일 중요한 것이 일상의 회복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이 얼마나 아파보아야 여기가 아파봐야 건강의 중요함을 알아요 아파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재미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여기가 아파 왜 왜 사람들은 아픈 대를 알고 여기를 치고 가는 것이야
어떤 분이 이야기 합니다 자기가 연기자인데 다리를 저는 연기를 해야 했데 다리를 저는 붙들이 어떻게 저나 보려고 거리에 나가 보았더니 다리 저는 분들이 정말 많더라는 것이어요 그 전에는 몰랐어 무심히 보고 지나가니까 그렇지요
내가 여기 아프면 여기만 치고 가는 것 처럼 느껴지듯이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세상에 고통 받는 이가 세상의 중심이다 그 눈으로 보아야 세상을 제대로 보여요 건강한 사람들이 차 길을 건너갈 때
신호가 바뀌면 나는 두 번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건강하기 때문에 정말 건강이 어려운 분들이 있지 않아요 그분들에게는
공포여요 시간 내에 걷는다는 게 좋은 사회라고 하는 것은 교통의 흐름도 중요하지만 이분들이 근심하지 않고 살도록 해 주어주는 것이
이것이 고통 받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일상의 회복처럼 좋은 것이 없어요 절기를 지키고
] 제가 좋아하는 시편 89편 15절 표준 새 번역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 그런 사람들은 주의 빛나는 얼굴을 보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축제의 함성 즐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경축하면 살 수 있는 사람들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능한 것인데 그런 때가 반드시 온다
15절 악인이 질멸 되었으니
악인을 뜻하는 단어가 벨리알이거든요
고린도 후서 6장 15절 그리스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대조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긴 자가 벨리알을 섬길 수 없다고 하거든요 벨리알은 무 무가치함 사악함 죽음의 세력을 형상화 한 존재입니다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음습하게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의 삶을 즐기며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래서 우리를 종살이하도록 만드는 그것이 벨리알인데 그것이 여기에서는 악인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까닭이 악인이 진멸되었다 여기서 벨리알은
앗시리아이겠지묘 앗시리아 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앗시리아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집어 넣고 법적 그 자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삼고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짓 밟는 모든 사람들이 벨리알 들인데 하나님은 그들을 멸절 시킨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축제로 해 주신다 이것이 나훔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요 아직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 처럼 보일지
몰라고 악인들은 졸지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 들에게 기 죽지 않고 무릎을 꿇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하노라 이런 당담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걸아야 하겠습니다
제3강 나훔 2: 1-13 니느웨에 임할 재앙
여러분 산에 올라가 보신 적 있나요 산에 올라가신 적이 있나요 올라갈
때가 어려워요 내려올 때가 어려워요 내려갈 때가 어렵습니다 전문가들이 이야기할 때는 내려올 때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리 힘이 없거나 다리가 아프거나 산에 갈 때 조심해야 되는 것은 내려올 때 무릎에 체중의 하중이 걸린다고 하지요
그리고 꼭데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올 때면 마음이 약간 풀리거든요 안심하게 되고 인생 사는 것도 마찬가지여요 올라갈 때 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올라가지요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 올 날도 있어야하거든 거기에 머물 수 없지 않아요
산의 경우는 그렇지만 인생의 경우는 올라가서 거기 머물고 싶지 않아요 그게 문제이지요 그런데 머물수가 없어요 왜 그 꼭데기라고 하는 자리는 정상의 자리는 좁아요 좁지 않아요 바람도 많이 불어요
그러니까 그 좁은 자리에 올라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뒷사람을 위해서 자리를 내 주어야 하고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속상해지고 인생이 잘 사는 것이 아니지요
인생을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잘 올라가는 중요하지만 잘 내려 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자연스러운 생의 과정이지 젊음이 아름답지만 젊음만 아름답다고 하면 안 되거든요 하나님은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였기 때문에 젊음의 정점을 찍고 내려 올 때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도 그렇고 역사 국가를 보더라도 정점을 찍은 국가들은 그 다음에 쇠망의 길로 접어들고 합니다 역사 속에 형성된 모든 제국은 다 무너졌어요 가장 화려한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것도 다 무너집니다
이것이 역사의 엄중함이기도한데요 우리는 늘 겸허하게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섭리하고 지배하고 계신 분이 계심을 인정해야 하는데 내 힘이 커지면 그것을 인정하기 어려워요
이것은 종교인들도 똑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많아지고 나의 영향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전능자가 된 것 같은 느낌 속에 들어가기가 쉬어요
제가 가끔하는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러분 마르린 몬노 사진
가운데 유명한 사진이 있지요 지하철을 타는데 거기에서 바람이 올라오니까 치마를 내리지 않아요 부풀려고 하는 마음을 자꾸 내려야 돼
자꾸 부프려 오르려는 내 마음을 이렇게 누르지 않으면 수치를 겪도록 되어 있어요 역사가 그럽니다
우리가 지금 나훔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나훔서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
이야기이지요 앗수르의 소도인 니으웨에 대한 심판 이야기인데 주전 7세기 8세기 가장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 내었던 앗수르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보여주는 게 나훔서이거든요
오늘 공부할 내용은 나훔서 2장 1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지금 니느웨의 멸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니느웨에게 파괴하는 자가 임할 것이다 하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를 영어로는 스케더라고 말하는데 전쟁을 통해서 그들을
침으로서 그들을 깨트려서 이산되게 하는 파괴하는 자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파괴하는 자는 바벨론과 메데 연합군을 뜻합니다
1절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 지어다
파괴하는 자가 와 이렇게 허리를 굳게하고 해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무기력증에서 벗어나서 그 침입해 오는 사람에게 힘 있게 맞서봐 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요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해 보려므나 너는 산성을 지켜 보려무나 너희 길을 파수하여 보려므로 네 허리를 견고하게 해 보려무나 이렇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 말속에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렇지요 그런 뉘앙스입니다
개역 성경 번역을 보면 누군가를 격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뉘앙스는 격려가 아니라 해 봐야 소용이 없어 그런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렇게 제 아무리 힘을 써 봐도 이 심판을
하나님으로부터 수행되는 물론 하나님은 바벨론이나 메데 연합군을 들어서 앗수르를 치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군사력으로 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치기 때문에 막을 수 없다 아무리 존귀하다 해도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말을
하고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 영광 같게 하시리니
뜸금 없는 이야기인데요 야곱 혹은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앗시리아라는 나라에 의해서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억압자 이들이 억압자인데 이들을 치러 지금 군대가 와요 여기
바벨론 메데 연합군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데 여기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파괴하는 자를 이야기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야
말로 파괴하는 자였어요 파괴하는 자가 파괴당하는 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 앗시리아가 파괴를 당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억압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야곱과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과 같게 하시나니 이스라엘의 영광과 야곱의 영광이 서로 꾸며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킨다 중요한 것은 회복이라는 단어이지요
구지 구별을 해 보자면 우리가 얍복강 사건을 잘 알고 있는데 외삼촌 라반과 불편하게 헤어졌다가 나중에 화해를 합니다 야곱이 돌아옵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형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인간적 방책을 세웁니다
창세기 32장 7절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자기 재산을 반을 나누어 앞서 보내고 뒤로 보내고 자기는 얍복강 나루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존재가 나타나서 그를 붙잡고 씨름합니다 성경은 그 사람과 씨름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32장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집니다 대 퇴골이 됩니다 축복하기 전에 놓아 주지 않습니다
26절 그라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겟나이다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습니다
27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의 뜻은 발 뒤굼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지요 지금부터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
야곱의 삶은 얍복강 가에서 무너졌지요 야곱은 더 이상 자기의 힘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야곱의 복이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회복되게 될 것이다
이야기 해서 이전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가장 불행했던 시기가 오히려 복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어요 회복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절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하였음이라
절망의 심연입니다 약탈자들에 의해 약탈 당합니다 포도나무로 상징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절하게 괴멸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어쩼던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슬그머니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보면 이후에 멸망의 날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요
3-4절 나오는 이야기는 강렬한 전사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색깔을 제일 좋아해요? 저는 보라색이어요 어렸을 때 사람들이 정신이 안 좋은 사람이 좋아한다고 좋아하면 안 된다고 보니까 보라색이 좋더라고요
좋게 해석하자면 하늘과 땅의 색깔이 붉은 색과 푸른색이거든요 동양 식으로 이야기하면 하늘이 붉은 것이어요 땅이 푸른 것이고 이 음양 이치로 보자면 그렇게 본단말이어요 하늘과 땅이 합쳐진 색깔이 보라색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이나 대림절이 되면 목사님들 보라색이 스올을
하지요 보라색이라는 것이 참회의 색깔이기도 하지만 나를 정결하게 합니다 하는 정결한 색깔이기도 하지만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러니까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괜찮은 것 같아요
보면 붉은 색 좋아하는 분들이 있지요 붉은 색이 가장 강렬하게 내게
다가온 것 중에 하나는 엣날에 영화 가운데 붉은 수수밭 밭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붉은 게 막 넘쳐요 그런 느낌들 그리고 홍위병들
중국의 문화 혁명 시절에 홍위병들이 붉은 색깔 사람을 흥분 시키는 색깔이지 않어요
그래서 전투에서도 붉은 색을 사용한 것 같아요
3절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 도다
이 앗시리아를 치기 위해 오는 군대 그 군대의 모습을 이렇게 형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붉은 빛으로 마치 쇠로 만든 병거의 쇠가 반짝인다 노송 나무로 만든 창이 번쩍 번쩍하고 햇빛에 항오를 벌여서 군대가 탁 진을 형성해 가지고 지금 오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병거가 달리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미친듯이 달리며
4절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이 느낌이 무엇이냐 하면 압도적인 앞에서 거칠 것이 없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앗수르 군대의 모습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들을 치기 위해 나선 하나님의 심판을 나훔은 이렇게 형상화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앗수르가 멸망하게 된것이 주전 612년이거든요 그 때 이 전투의 광경이 등장했음이 분명합니다
5절에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옵니다
5절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려 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더라
그가 누구 인지 알기 어려워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앗시리아의 수비군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고 바벨론의 공격군을 이야기 할 것이다 서로 헷갈립니다
정확하게 무엇이다고 하는 것이 어렵기는 한데 여기에서 존귀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정예군을 뜻해요 정예 군병들 그들을 파견하는 것이어요 그래서 대게 이렇게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정예군들으로 하여금 앗시리아의 도성을 치기 위해 달려가게 만드는
것이어요 그리고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성에서 공격해 오는 화살을 막기 위한 방어벽을 치고 바로 그 이야기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공격하는 이들이 성으로 달려가서 성으로부터 날라오는 화살을 막기 위해서 방어진지를 탁 구축해 놓은 그 모양을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6절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는 티그리스 강 가에 있는데 강물이 흘러가지요
모든 도시들이 그렇습니다마는 강도 있고 성이 있으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여기에 성이야 여기는 곽이야
성과 곽 사이에 무엇을 하느냐 하면 해자
해자는 웅덩이 쳐럼 파 가지고 채워 넣은 곳 물이 있으면 즉각 성에
들어가기 어려워 이 성에 들어갈 때 해자를 건너기 위한 다리 들었다 났다 그 생각나지요 그러니까 이 니느웨를 거쳐가고 있는 강들이
있고 그 다음에 해자도 있고 그런데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엇이라고 합니까?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도스라는 사람은 니느웨가
성읍 양족으로 강물이 불어나서 성벽이 무너졌다고 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1세기 후반의 역사가이기 때문에 몇 백년전에 일어난 일을
눈으로 보듯 서술했을 이는 없고 누군가의 자료에 의지했을 터인데 니느웨의 멸망을 물이 불어나고 있어서 성이 무너진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이 나훔서의 이야기하고 맥락이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냐 하면 성곽이 있고 성이 있고 해자까지 있지만 인간으로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할 때는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이 그들을 멸망 시키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7절 정한 대로 왕후가벌거벗은 몸으로 끌러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 도다
여기서 왕후가 끌려간다고 하는 것은 니느웨의 왕의 왕비가 끌려가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에서 왕후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던 있었던 여신 아스다롯을 상징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고대 세계의 전쟁은 신들의 싸움인데 신들이 탈취당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 신들을 숭배하고 있던 사람들이 슬피 우는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왕후가 끌려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결국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적나나하게 벌겨 벗기는 그 날이 온다 온다
니느웨의 참상을 8절부터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8절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하나 돌아 보는 자가 없도다
모든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물가에서 이루어지지요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인간의 몸의 70% 이상이 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물 없이는 사람이 살수가 없었는데 물가에 있었는데 니느웨가 물이 모인
옷 같더니 물이 모여드는 것처럼 니느웨에게 부가 집중 되었음을 나타내는 세상에 중심이 되는 것 처럼 보였다
주변 세계가 풍요로움이 있는 것 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 물이 오히려 니느웨를 치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흩어지는 것이어요 그래 서라 서라 하고 외쳐 보지만 돌아서는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노략군이 이릅니다
9절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그 나라가 성이 무너지고 노략군이 당도해 가지고 집집마다 뒤지면서 고귀한 것을 빼앗아가고 이 상황을 이야기한 다음에
10절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픞이 서로 부딪치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이 10절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자고 한다면 단어가 반복되고 있어요 황량 황폐 폐허 그렇게 여러 서술어를 붙이지 않고 단어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량 황폐 폐허 이야기 하는 데 부카 머부카 머불라카 바임이
있어요 무엇인가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부했던 파괴됨으로서 파괴가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이런 언어 놀이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어요 굉장히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니느웨가 서술적으로 말했지만 황량 황폐 폐허 니느웨 상황이어요
완전히 다 된 것이어요 그렇게 되자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치며 무엇인지 알겠지요 무릎이 웨 부딪쳐요 덜덜 떠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허리가 아프게 되며 허리가 어떤 때 아프지요 긴장하고
허리가 아프고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물이 가득 고인 물처럼 풍요롭게 이를데 없던 니느웨게
마치 마게가 빠져나가지고 물이 빠져 나간 것 처럼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되고 노략군들이 이르러 다 빼앗아 가고 그래서 황량 황폐
폐허가 그 속에 있고 거기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낙담하고 서 있을 힘 조차 사라지고 그 상활이 여기에 언급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11절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의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왜 갑자기 사자를 이야기 하고 있을까요? 앗시리아는 자기들이 사자라고 했어요 숫 사자로 세상의 것을 다 움켜쥐는 사자의 용맹함을 자기 민족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어요
그런데 지금 이야기 합니다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황량 황폐 폐허로 변하고 나니까 사자의 굴이 무너진 것이어요
그리고 젊은 사자가 먹을 것이 어디 있느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거기서 두려워 할 것이 없었으며
이 사자는 두려울 것이 없지요 그런데 그러니까 활보하는 것이지요 마치
포식 동물들을 언제나 귀를 쫓긋하고 포식자가 다가온 것을 보아야 하는데 이 사자들은 아주 눈치 안 보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물가에 배 깔고 엎드려 가지고 쉬기도 하고 그러면 초식 동물들은 주츰 주츰하면 다가가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요
마치 무엇인가 하면 요즈음 이제 여성들의 권익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마는 남성들이 알지 못하는 공포가 있어요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느낄 수 없는 공포가 있습니다 전에 밤에 어디를 갈 때 부득히
어두운 길을 가는데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앞에 가는 저 여성은 뒤에 들리는 발자국은 정말 공포스럽겠다
남자들은 의식 안하고 지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성들은 공포스러워요
그러니까 부득히 나도 그 길로 가야돼 두 가지를 취해요 저는 무엇이냐 하면 한참 기다려서 그 분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 가던지 하나는 실례합니다 앞서 가겠습니다 말을 하고 앞서 갑니다
정말 남성들이 느낄 수 없는 공포 같은 것들이 여성들에게 있어요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에 대해서 남성들이 예민하게 느껴야 해요 사자가 제 마음대로 처신을 했어요 어느 누구도 두려워 하지 않고 지금은 그런 상황이었어요
12절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두렵게 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해요 아까 파괴하던 자들이 파괴를 당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축적했던 것들이 누구 차지가 됩니까?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된 것이지요
이것이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고 내려 올지 몰랐던 오만하고 포악했던 문명이다고 합니다
13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력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나이다
여러분 이게 경정적인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만군의 여호와라고 이야기 할 때 이 만군의 여호와는 항상 이 단어는 법궤와 관련이 됩니다
전쟁에 나갈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시고 간다는 의미에서 법궤를 모시고 가지요 그것이 만군의 여호와여요 하나님 살아 계심을 알지 못하고 오만한 세력에 대해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합니다
병거를 자랑하던 그들 젊은 사자처럼 찢던 그 용사들 거두어 드린 모든
노략물들이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식민지에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무엇이어요 파견자들 사신들을 보내어서 공포를
뿌리고 다녔어 다시는 그렇게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망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시편 27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 이야기는 무엇이지요 두려워하지 않는다 데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나는 무서워 하지 않는다
2절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을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든든함이 이런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우리 집에 액자가 하나 있는데 그 액자는 그 분이 진자 쓰신 것 진품이면 좋겠지만 진품이 아닌 복제품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쓰신 것이어요 백범 김구 선생님이 살해당하기 얼마 전에 쓰신 것이어요 그 분이 성경 구절을 쓰셨어요 로마서 8장 31절입니다 백범 선생님이 당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던 말씀입니다
그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 때 성경을 가지고 써요 만일 하나님이 아등을 위하시면 아등은 우리를 뜻한 것이어요 수가 능히 아등을 대적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수가 능히 아들을 대적하리요 수는 무리수입니다 이 말속에 나는 하나님이 내 편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8장에서 이 세상에서 어떤 것 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없다 이런 든든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강력한 나라로 보이지만 그 나라들이 오만에 빠져 있을 때 그
오만함은 하나님은 무엇을 당신의 맞서는 것으로 보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맞서는 모든 문명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냥 두시지 않고 그들이
자랑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은 오히려 자랑거리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들을 치시는 것이지요
물이 모이는 것 같은 니느웨 자기를 완전하게 지켜 준다고 생각했던 강과 해자 같은 것들이 그들의 문명의 토대를 허물고 그들을 망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니이 하시는 일이라고 나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 고대 세계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어요
누가 나를 치겠어 누가 나를 맞설 수 있겠더 내가 이만큼 섰는데 든든하게 섰다고 하는 그 때가 무너지는 때입니다
나훔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만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올라가는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내가 내려올 때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올라가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라 내가 주어진 모든 때는 하나님의 현존의
경험하는 때로 바꾸어 갈 줄 아는 것이 인생이 가장 곤고한 때에 지속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라 우리들이 잘 사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4강 나훔 3:1- 7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우리기 나훔 이야기를 하는데 늘 망한 이야기 멸망하는 이야기 하는데 사람을 성장 시키는 것은 귀에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보다는 쓰디 쓴 이야기를 들을 때 크게 되는 것이지요
성서의 언어는 미풍처럼 우리의 마음을 감싸주기도 하지면 망치 언어가 되어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깨트리기도 하고 그러지요 걔트려져야 우리 마음에 보화가 들어나거든요 깨트려져야 되는데
나훔서 1장 2장 공부를 니느웨 멸망에 대한 이야기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니느웨의 구체적 죄가 무엇이었는지 나훔이 들려주고 있는 니느웨의 죄 이것은 아직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게 될 3장은 니느웨의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진노하시는지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3장을 시작하는 말이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강력하게 피의 성 브라디 시티 피의 성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어디를 보더라도 피가 베어 있다 하기 보기에 어렵게 화려하겠지요
그러나 예언자의 눈에는 피의 성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 가지고 내 백성을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안 듣지요
그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 무엇이었지요
출애굽기 5장 1절 그 땅에 내린 첫 번째 재앙이 물이 피로 변하는 그 이야기는 애집트라는 나일강 때문에 세워진 것이지요
나일강이
가져다 주는 풍부함이 강 문명을 세웠다고 할 수 잇습니다 물이 피로 변했다는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이 너희들의 문명의 강이라는
나일강 물이 백성들의 피의 강이라는 말이어요 수 많은 사람들의 노예 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문명이라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강렬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3장 1절 너는 망한다 피의 도성 피가 복수로 쓰였습니다 피들의 도성입니다 복수형이라는 것은 부당한 폭력을 말할 때 복수형을 쓰기도 합니다 니느웨라는 그 도성은 연약한 사람의 폭력에 바탕을 둔 문명임을 보여줍니다
피의 도성에 가득찬 것은 무엇이냐 하면 거짓이고 포악이고 탈취입니다
여러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니느웨의 화려함일 것입니다
독일 베르린에 가면 페르가몬 미술관 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보면 죽 유적들을 보고 가다가 어떤 방에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라게 됩니다
앗시리아 문명관 바벨론 문명관이어요 그 화려함 이라는 게 그 장대함이라는 게 말할 수가 없어요 지금부터 2700년쯤 전인데 그 때 그들이 누렸던 융성함이라는 게 오늘의 내가 보기에도 놀라와요
내가 파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인데 거기에는 문화라는 것도 별로 없이 그러한 장소였는데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 문 앗시리아 문을 통과하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촌뜨기구나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런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눈이 히둥그레 지고 예언자들은 그 화려한 그
속을 화려하고 장엄해 보이고 멋져 보이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고 포악이고 탈취하고 하는 사실을 깨 둟어 보고 있는 것이지요
예언자라는
사람들은 바로 깨 뚫어 보는 사람들입니다 한자로 본다고 하는 단어는 굉장히 다양하게 볼 견자 눈으로 보는 것이어요 시는 시각 시선
이런 것으로 해서 나의 입장을 가지고 보는 게 볼 시자이지요 볼 관자도 있지요 꽤 둟어 보는 것이어요 겉으로 보는 것 만이
아니라 깨 뚫어 보는 것이어요
관람하고
이야기할 때 람자도 있어요 람이라는 것은 둘러보는 것이지요 본다는 행위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예언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명의 본질을 화려험의 피이고 거짓이고 포악이고 탈취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피의 도성이여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화라고 하는 것은 화 있을 진저 공동 번역은 망하게 되었도다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약자들의 희생을 둔 문명은 그 속에 멸망을 내장할 수 밖에 없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 멸망을 앞둔 세계이다 힘의 우위에 의해서
지배하는 세상
기미 3 1
독립 선언서 아등은 자야 조선이 독립국임과 독립선언문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독립 선언문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독립을 선언한 까닭이 하늘의 명령이고 시대의 대세이고 온 인류가 살아갈 발동이다고 이야기 하면서 이천면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 속에 칼날에 품으리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도덕이 무기가 되어 정의의 군대가 인륜과 도덕이
무기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는 오늘
인륜이 우리를 지켜 도덕이 무기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 새하늘과 새땅이 우리 앞에 펼쳐 집니다 새 날과 새 땅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온다 이게 정말 위대한 것이어요
힘의 시대가
가도 도의의 시대가 우리에게 온다 내가 힘 있다고 해가지고 약자들을 함부로 능멸하고 심판하고 빼앗고 억압하고 이런 시대가 지나가고
이것은 옛 세계이어야만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것은 힘의 시대가 아니라 도의의 시대입니다
마땅히 지켜 갈 것을 지켜 가는 것 인간의 인간됨은 어디에서 발현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무엇인가 갖고 싶지마는 나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이 충돌할 때 그의 필요에 의해서 나를 제한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그게 도덕입니다
도덕은 나 홀로 개인이 서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사는 존재로 만들었기에 내가 인간답게 된다는 것은 타자의 입장을 서 보는 일을 통해서 발생한 것이어요
바로 이것이 도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언어이기도 하지요 새 하늘과 우리 앞에 전개되는 데 새 땅은 힘의 시대가 지나간 것이어요 폭력의 시대가 지나간 것이어요
나훔서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피 탈취 이런 것들이 없는 거짓 폭력이 없는 그런 시대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데 그러니까 힘의 바탕을 두고 니느웨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3절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뀌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번쩍이는 충돌하는 칼 기변 무수한 시체여
단어가 착착 이어가지고 있어요 마치 문체가 이야기 하자면 폭포가 쉼 없이떨어지는 것처럼 그러니가 이 나라의 그 죄를 열거하기 위해서 서술법이 아니라 특정한 단어들을 반복함으로서 우리의 가슴 비트가 빨리 뛰게 만들지요
천천히 휙휙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뀌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이렇게 낭독하면 재미가 없지요 휙퓍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 바쀠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쩍이는 창
사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니느웨가 자랑하는 문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어요 채찍 그리고 병거 바뀌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든 폭력이야 이것이 성서 번역자들이 고민을 한 것 같아요
여기에 휙휙 윙윙 이런 의성어는 없어 원문에는 집어넣었어요 실감나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니느웨가 자랑하는 문명의 본질이 바로 이런 폭력에 근거하고 있다 하는 이야기이고 그러니까 앗시리아가 전쟁 국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전쟁 국가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영토 확장하려고 하지요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이어요 아니지 않아요 무엇하기 약탈하기 위해서 무역로를 획득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괴롭힘으로 자기의 부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권력자들에게 전쟁처럼 매력적인 것이 없습니다 막대한 부가 자기에게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에 승히한
자들은 전쟁에 패전한 사람들에게 막대한 전쟁 비용을 물리지요 그러니까 전쟁처럼 남는 장사가 없다고 여겨요 이게 무서운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속상한 게 무엇이냐 하면 전쟁을 기획하고 전쟁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늘 안전합니다 안전한 곳이 있어요
그러니까 늘
전쟁터에 가서 죽고 다치고 이런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아무런 결정 능력이 없는 사람들 약자들만 그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금방
이야기 했던 2절 3절은 숨가쁜 열거를 통해서 사태의 심각성을 아주 인상깊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전쟁 국가 전쟁을 통해서 주변을 복속시키고 탈취하고 거짓을 일삼는 나라인데
4절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음행과
미혹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지요 음행과 미혹이라는 게 둘은 친구여요 그러니까 앞 구절이 전쟁 혹은 폭력으로 세워진 제국의 실상을
폭로했다면 여기서는 음행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이 나라가 주변 세계를 어떻게 정신적으로 지배했는지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4절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 마숭에 능숙하데 아까 이야기한대로 앗시리아 문명 화려한 그 문명을 보면 미모이지요 겉으로 드러나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어요 그리고 마술에 능해 무엇인가 사람들을 신비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어요
문명의 화려함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음행과 미혹 니느웨가 보여준 화려한 문명과 문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어떤 문명의 본질을 형성하고 잇는 것은 종교인데 어떤
문명에 대한 매혹은 그 문명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종교의 매혹과 이어질 수 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음행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야훼 하나님에 우상들에게 굴복하는 이스라엘을 음행을 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바로 그 음행이라는 것은 다른 신들에게 매혹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마술에 능한 미모에 음녀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선진 문명에 대한 선망이 있지요 사람들은 우리는 촌스러워 보이고 저기는 선진 문명으로 보여요 그러면 거기에 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공동체도 그러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신명기 31장 16절 이 백성이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며
음란히 그 땅의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꽤 뚫어 보지지 않아요
인간은 연약해요 아무리 굳은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야
그 음녀에게 매혹될 수 밖에 없어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이
신명기 31장 11절 매 친년 끈에 면제년이 초막절이 되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이 듣게 하여라
끊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들이 그 말씀에 붙들고 살도록 함으로서 그들이 음녀에게 매혹된 것을 막아야 한다 모세에게 이야기 하고 있거든요
여러분 여기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가 그런 방식으로 ant 나라를 미혹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5절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상상이 되지요 치마를 덛어 올려
6절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것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며
이제 어떤 이야기냐 하면 화려합니다 몇겹 치마 화려하게 보여요 이것을 뒤집어 올리므로 그들이 숨기고 싶었던 부끄러움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6절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니느웨를 대적할 세력이 없는 것 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이 친히 그에 맞서신 것이지요
치마를 들어 올린다는 것은 여성들에 해당들에 들립니다마는 고대 중동에서 창녀들에 처벌이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치부를 드러냄으로 인간의 존엄을 박탈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존엄을 박탈하는 것이어요 수치심을 안겨 주는 것이어요 내가 수치스럽다 할 때에 수치심이 너무 커지면 사람들은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가했던 고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굴복 시켜야 돼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 때 관리들이 시킨 일이 무엇이냐 하면 용변을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몽둥이를 가지고 용변을 며칠토록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게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있지 않아요 쌀 수 밖에 없어요 싸고 나면 어떻느냐 하면 수치시려워 그게 오물을 싸고 서로를 혐오스러운
관계가 되게 만들어 혐오하게 만들어 그 다음에 무엇이냐 하면 오줌 똥을 싸고 침상에 묻히고 한 사람들을 나치의 관료들은 사람으로 안
봐 짐승같은 존재였어 이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어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존엄을 빼앗는 것이야 수치를 안겨 주면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 한국의 문화 가운데서 정말 안타까운게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를 수치심을 심어주는 일들 자꾸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은 일이 너무 속상해요
인간은 존엄한 존재인데 수치스러운 모습이 있으면 가려 주어야 합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 있을 때 벌거 벗고 있을 때 아들들이 보고 놀리면 안 되거든요 뒤로 가서 가려 주어야 하지요 아 저것 보네 하고 막 드러내 가지고 망신주면 안 되지 않아요
우리 사회가
너무 포악해 지는 것 같아 망신주고 수치스럽게 내가 수치의 대상이 나의 존엄은 사라져요 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개인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고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잘못 저지른 일도 있습니다
거기에 받는 벌을 받으면 모두가 나서 가지고 그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려요 그것이 그가 설 땅을 빼앗는 행위이지요 산자의 땅에 있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많은 것이어요 이게 극복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무엘하 10장에 보면 암몬 왕 나하스가 세상을 떠납니다 암몬왕 나하스하고 다윗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거든요
사무엘 하 10장 2절 소문을 듣고 다윗의 소문 사절단을 보냅니다
사절단이 오자 하눈은 잘 맞이하려고 합니다
사무엘하 10장 3절 신하들이 가서 속닥 속닥해요 사절단을 좋은 뜻으로 보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를 염탐하고 우리를 치려고 사절단을 보낸 것입니다
경험이 많지 않은 하눈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우려요
그리고 무엇을 했느냐 하면 다윗의 사신으로 간 사람들의 수염의 한쪽을 잘라냅니다 망신을 준 것이지요 수치스러운 것이지요
수염이라는 게 권위의 상징인데 엉덩이 쪽에 옷자락을 잘라 냅니다 엉덩이가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지요 수치 스럽게 만들어요 결국 그 일 때문에 다윗이 대노하지요 사신을 갔던 사람들은 망신을 당하고 돌아와서
5절 수염이
자랄 때 까지 여리고에 머물라고 합니다 그들의 수치가 닦아져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살아가면서 저는 내가 어떤 사람을 안
좋아할 수는 있어요 저 사람은 내 마음을 들지 않아 그렇다고 해서 수치의 대상으로 폭로하는 일들은 악마적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것들인데
어쩼던 이러한 세상이기는 합니다마는 그런데 다른 나라를 가차없이 침략하고 약탈하고 능욕하고 수치를 안겨 주었던 니느웨가 똑 같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파괴자가 파괴 당하는 자가 되는 것 처럼 다른 나라에 수치를 안겨준 그 나라도 똑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으로 드른 나라를 미혹하던 드러날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증하고 능욕하여 구경거리가 만들거리가 되게 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 힘에 하나님이 그저 두시지는 않지요
마리아의 찬가를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이
누가복음 1장 51절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절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절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베불리셧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을 통해 이 땅에 오게될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 이런 세상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요
정말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7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곱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합니다
니느웨를 보는
자가 다 도망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치 못 볼 것을 보는 것처럼 행여라고 재앙이 그에게 옮겨올까봐 두려워하는 것 처럼
그렇게 도망하며 니느웨게 황폐하였도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황폐함이라고 하는 것은 전쟁으로 초토화 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렇게 이야기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여 줄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제일 슬픈게 그 죽음 앞에서 애곡하여 줄 자가 없는것 처럼 슬픈 일이 없지요
꽃도 없고 상여도 없고 만장도 없고 시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그런 죽음처럼 쓸쓸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여기에 여신들은 남신들과 여신들이 있는데 고대 세계에서 여신들이 하고 있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들이 있어요
그 여신들이 하는 일 가운데 대지에 품어 안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 땅에 살고있는 이들의 애곡해 주는 역할들 그들의 슬픔을 함께 아파해 주는 역할들 여신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누가 우느냐 하면 땅 속에 있는 라헬이 울었다 성경에 보면 라헬이 우는 것이 등장하지요
예레미야 3장 15절 땅 속에 있는 라헬이 울지요
대지에 살고 존재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알아내는 존재가 여신으로 형상화 하는 때가 많이 있는데 니느웨가 결국은 파괴될 것이고 그 여신조차도 참혹하게 끌려가기 때문에 그 땅은 그 백성들 위에 울어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야
포악한 나라의 운명이어요 누군가가 보면서 참 안 되었어 좋은 이웃이었는데 그렇게 안한다 그 말이어요 그 망한 것을 보고 잘 되었다 간 것이지요
애도 의식이
있지 않아요 사람들마다 애도 의식을 치룹니다 요즈음 기독교 장례에서는 슬피 올지 않지 않아요 잘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이들은 장례를 천국
환송식이라고 하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어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이가 세상 떠나면 슬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분과 함께 지내 왔던 시간들 또 그분이 나의 영혼속에 남겨 놓았던 흔적들 이런 것들 생각하면 슾프지요 그래서 울지 않아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좋은 대 가셨는데 왜 울어 그래요 나는 그게 불편해 울게 좀 두지 옛날에 장례식 집에 가보면 곡하지 않아요 아이고
아이고 그리고 우리가 놀림 삼아 이야기 하는게 아이고 아이고 하다가 무엇이다고 하느냐 하면 예 부침게 타는 냄세 난다 뒤집어라
형식화 되는 울음 이야기인 것철 이렇게 이야기 하는 데 형식에 애도하는 의식은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슬픔의 수문을 열어야 할 때가 있어요 울어야 할 때 울 수 있어야 해요 왜냐하면 울어야 할 때 실컷 울어야 부정적 감정이 나를
사로잡지 않아요 그런데 애도하는 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 그만하면 됐다 지겹다 이제 그만 울어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대단히 비 인간적이어요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슬픔을 당했어 그래서 울어 아프다고 이야기해 그런데 그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쉬운일은 아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만 칭얼거리라 말하는 것은 대단히 폭력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왜 그가 그 자기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에 대해서 충분히 아파하고 그 아픔 속에서 누군가가 내 곁에 머물러 주면서 격려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던 그것이 나를 산자의 땅으로 인도한 길이 되지 않아요
애도하는 사람에게는 함께 아파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애도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는 대상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점차 상실의 충격에 벗어나는 것이 진자 애도여요
그럴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무엇이냐 하면 우울증이 생겨요 자기 속에 우울증이
생겨요 상실한 대상과 자기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 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했던 자아 상실처럼 느껴져
중요한 것이 애도하는 시간을 충분히 누리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문명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처절하게 그들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3장 1절에서 7절까지 이 대목은 앗시리아 특별히 니느웨의 문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고 그것이 폭력이었고 그리고 수치를 안겨주는 문화였고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도구화 하는 일이었지요
저는 이것이
제일 문제인데 도구화 한다고 말하는데 다른 말로 물화 물화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물건처럼 만드는 것이어요 어떤 존재를 물화
시키는 것이어요 물화 이렇게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주의해야 해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나의 욕망을 위해서 나의 잇속을
위해서 누군가를 내가 도구로 삼고 내가 누군가를 도구로 삼는 순간 나는 그에게서 인격을 박탈하는 것이어요
인격성을 똑
같은 이야기인데 도구화 한다는 것이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인데 수치를 안겨준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인간적 존엄을 박탈하는 행위인
것이지요 그렇게 누군가를 수치스럽게 만든 문명 그런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인 것이지요 니느웨는 바로 그런 죄로 말미암아 파멸의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나 자꾸만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의 길로 인도해 내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다고 볼 수 있는데 오히려 신앙을 통해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가두어 두고
자유로운 사고를 못하게 하고 이럴 때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두려움으로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누군가를 가두어 놓는 사이에 수치를 안겨 주는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보면서 절대로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 사람을 혐오와 수치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을 우리의 삶속에 하지 않는 그러한 마음을
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제 5강 나훔 3: 8-19 강함을 자랑하지 말라
우리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이 이야기 좋은 이야기여요 나쁜 이야기여요 좋은 이야기 같은데요 늙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어떻게 보면 변하기도 해야 하는데 사람이 좋은 방향으로 변하지요
그런데 대게 안
변하였어요 하는 말은 긍정적 메시지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는 어쩼던 변합니다 페라크레토스라는 철학자 530 680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에 잠글 수 없다 흘러가는 강물만이 아니아 그 강물에 발을 들여 놓는 나도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지요
왜냐 하면
그렇게 이야기 하려면 세포가 수천억개가 죽지 않아요 새로 재생되고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나이기도 하지요 모든 것은
태어나는 때가 있고 성장하는 때가 있고 성장이 멈추는 때가 있고 쇠퇴하기 시작하고 마침네 돌아가지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역사도 그러거든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훔서를 공부하고 있어요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경고하는 말로 시작이 되어서 그 당시에 가장 강력한 나라 앗시리아가 권력의 정점에서 어떻게 무너질 수 밖에 없었는지 나훔 선지자가 보여주거든요
오늘 마지막 시간이어요 오늘은 나훔 3장 8절에서 19절까지 공부하겠습니다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 앗시리아라 였지요 앗수르라는 주요 도시 이름을 딴 것입니다마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폭력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이렇게 잔혹할 수 있나 상상 이상이거든요
사실 20세기에 가장 비극적인 일이 있다면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유대인과 히피 장애인들 동성애자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요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요약하자면 무엇이냐 하면 현실이 문학을 능가한다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폭력이 자행된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기는 했습니다마는 그 인간이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났을 때 얼마나 악마적 존재로 변할 수 있는 지 그런 것을 보여 주는 것이 20세기이고 그래서 19세기 말에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인간이 못할 준 신적 존재처럼 트꼈지요 인간이 신적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간은 통제 되지 아니한 인간 방향성을 잡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권력 귀결될 수 있는가를 처절하게 느끼게 되지요 신학자들도 고심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느끼게 되거든요
그런 상황인데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가 권력의 정점에서 주변에 보인 폭력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금도 부조물 같은데 보면 나타나는 데 여러분 사실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는 게 매우 부담스럽지요
그러니까
무심코 이렇게 개미 같은 것 밟을 수도 있지만 지나가는 애릉 일부러 눌러서 죽이는 것은 꺼림찍한 일입니다 살아 있는 것을 바퀴
벌레 경우에도 그런데 우리가 조금 더 큰 동물들은 어려운데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행하는 폭력의 정도라는 것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무도했던 권력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야지지요
8절 네가 여기 노아본보다 낫겠느냐
너라는 것은 앗시리아를 뜻이지요
노아몬 그러면 생각나는 것이 있나요 그런데 노아몬이라는 것이라는 것은 아몬의 도시 혹은 아몬의 거리라고 하는 뜻인데요 아몬이라는 것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입니다
아몬신의 이름이고 아몬신의 신전이 있는 거리 그 도시 이것이 노아몬인데 고대 세계에서 노아몬으로 불리우는 도시는 테베라고 불리었어요 이집트의 테베인데 지금의 지명으로 하면 룩소로라 합니다
요즈음도 이집트 관광하러 가는 사람들은 룩소르를 대부분 들립니다 거기가 고 왕조의 번성했던 자리이기 때문에 신전들이 많이 있고 많은 신전 건물들이 있습니다 룻소르 신전이라든지 기타 다양한 신들이 많이 있는데요
특히 이제
카르락이라는 신전을 보면 그 규모가 대단하고 거기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 이런 것들의 규모 거기에 있는 부조물들 거기에 있는 입상들
이런 것들을 보면 고대 로마가 얼마나 번성한 국가인가 보여주는데 그것이 아몬 신의 도시라고 일컬어 져 있고 지금은 아프리카가
중심으로 서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고대 세계에서 아프리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200년 300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 북부 지역은 세계 학문의 중심지였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의 석학들이 거기에서 다 나와요 아프리카 지역에서부터 나옵니다 특히 이집트라는 나라는 여기 대단한 나라였지요
여기
노아몬이라고 하는 게 바로 그 곳을 이야기 하는데 지정학적으로 이야기 하면 한쪽은 바다가 있고 한쪽은 나일강이 있고 그러니까
일종의 천연 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다가 있고 나일강이 흘러가고 천연 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9절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애굽의 강서함 때문에 서포트해 준 것이지요 그러니까 난공 불락처럼 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절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셔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아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 되었나니
고대 세계에서
일어났던 참강가운데 하나가 어린이들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지요 사실 어린이라는 말도 어리석다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아직은 개몽되어야 할 존재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그 말의 의미를 바꾸었지요 얼인 이 얼 같은 존재야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 같은 깊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어린이의 지위가 올라간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항상 어린이는 미성숙하고 자기 인격을 갖추지 못한 반 인간 절반 이 정도 취급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린 아이들은 미래 세계를 담고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적들을 적의 성읍을 파괴했을 때 그들이 했던 일들은 무엇이냐 현재의 성인들 죽이는 일도 하지만 미래에 우환이 될 아이들까지 다
죽이지요 참 끔찍한 일인데 사실은 이것이 고대 세계만 벌어진 일이 아니고 2차대전 시절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고 인제 만행도 듣고
있지 않아요
아이를 던지고
총에 착검한 검을 가지고 찌르고 이런 이야기들이 증언이 되고 있는데 인간이 얼마나 악마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데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나쁜 평화가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입니다
전쟁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듭니다 전쟁터에서 그렇게 잔혹한 일을 자행하는 것을 보면 타고난 악인들이서가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 놓였기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어요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성호씨는 절대 안 그럴 것이야 그렇게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어떤 가능성이
있어요 충분히 그러니까 우리가 저 사람들이 유난히 악인일 것이야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어요 여러분 유대계 미국
사상가였던 한나 아렌트 아렌트라고 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아히히만이라고 하는 나치에 부역을 했던 그 장교 유대인 학살에
아주 가담한 중요한 전범 재판에 가서 봅니다
1961년 이
아히히만이 악인으로 보이지 않고 너무나 평범한 것이어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고 죄책감이 없어요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죄책감이
없어요 왜 죄책감이 없냐 하면 나는 위에서 지시한 일을 수행했을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악이라고 하는 게 악을 저지르는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구나 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이어요 예를 들면 자식 등록금 걱정하고 꽃을 보면 예쁘다고 느끼고 누가 웃은 소리하면 깔갈 거리고 크레식 음악을
좋아하고 이런 사람들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한나 아렌트가 한 말이 악의 평범성 이라는 말을 하는데 특정한 사람만 악을 행하지 않더라는 것이어요 어떤 사람들이 악을 행하느냐 그것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무엇이냐 무사유 이야기 하는데
thoughtlessness
생각하지 않는 것이어요 쇼트라는 게 생각이지오 리스는 부정이고 생각하지 않은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어요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적 주체가 되어 사고하지 않고 남의 생각을 기계적으로 받아 들이고 자기의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 생각하지 않는것
함석헌
선생님이 1901-1989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산다 말하거든요 생각을 해야 돼 전쟁이라는 상황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아가느냐
하면 생각을 빼앗아간다 왜야 하면 옆에서 포탄이 터지고 내 동료가 쓰러지고 그러면 생각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동물적 본는 이런
것들이 살아나지요
그러니까 상대방을 존귀한 주체로 보지 않고 내가 극복해야할될 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게 전쟁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다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0절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 가고 어린아이들은 내치어 졌고 그리고 으시대고어 살고 있었던 존귀한 사람들 조차 종으로 팔려 가는
것이어요 떵떵 거리는 권세자들은 사슬에 묶여 가지고 사로 잡혀 갔다 고대 이집트 강력한 나라가 한 순간에 망한 것을 이야기 하면서
11절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한다고 하는 것은 심판과 연관이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술에 취한 사람이 지각이 없는 것 처럼 그런 상황 속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강력한 앗시리아 산성들 그 산성들이 무너지는 것을 이야기 하는데 상상력이 기가 막히비다 너희 산성들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데 여기에는 무엇이라고 말 합니까?
12절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 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정말
생생합니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보아도 놀라는 것이 있는데 성이 무너지는 것을 무화과 나무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 우리는 무화과가 많이
없으니까 밤 가을이 되어 가지고 입을 벌리지 않아요 안에 들어간 알밤이 있는데 먹고 싶을 때 장대 가지고 떠는 것도 있지마는
도토리 같은 것 딸 때에도 시골에서 나무 매가 있어요
나무로 만든
망치 이것을 가지고 나무를 탁 탁 치면 우수수 떨어져요 상훈씨 같은 사람은 대게 매로 안 하고 자기의 육중한 몸으로 그런데 이런
상상력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결국 네가 그렇게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산성도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야
13절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이 이야기는 승리자들은 패배자들을 여성에 비유하곤 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남성 중심의 문화여요 패배자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말함으로 이게 조삼스러운 이야기는 한데 남근을 제거하는 것이어요
그 사람에게서
자기들의 자부심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남근을 제거하는 것이야 말로서 그들을 여성 취급함으로 그러니까 옛날에 그런 이야기 많이
하지 않아요 사네 자식이 이런 이야기 계집 아이처럼 이렇게 이야기 하고 그 말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수심으로 남근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어요
여기 그 이야기입니다
13절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당에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을 불에 타도다고 말하고 하는 대요 다 알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문이 원수 앞에 열리고 이 속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여성들을 자기들의 쾌락의 도구로 삼았던 그 아픈 역사가 이
말속에 넌지시 암시되어 있어요
그렇게 너희가 될 것이다 결국은 너희들이 그동안 다른 나라에 이런 일들을 자행했는데 이제는 너희들이 똑 같은 일을 당할 수 밖에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것이 가장 허무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일종의 빙정 거립니다
너는 물을 길어 에어 쌓일 것을 대비하며 너희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이제 방비를 하라는 것이지요 너희를 치러오는 적들이 올 때 포위 공격 당할 때 살아남기 위해서 물이 있어야 하지요 무엇이 있었아 합니까 물이 있어야 하지요 물을 길어서 외워쌓일 것을 대비하라
그리고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라
15절 그렇게
수고해서 느치기 메뚜기 비슷한 종류를 이야기 하는데 우리가 흔히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아요 음식점 가지고 맛갈란 음식들을 먹으면
서로 쑥쓰러워 가지고 아이구 메뚜기가 지나가는 것 같다 남김 없이 먹었다고 성경에 메뚜기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지요
우리가 음식점 가 가지고 왕성한 사람들이 더 먹어 치우는 것을 보면 아이구 메뚜기 지나간 자리 같다 그러니까 나를 지켜 내기 위해 방비를 철저히 한다고 하는데 바로 거기에서 너를 멸망시킬 것들이 나올 것이다
장기 공방전을 대비하기 위해 그들이 많은 수고를 했지마는 결국은 다 망해 버리고 군비를 확충해 보아서 결국은 그것이 자기를 치는 그런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16절 내가 네 상인을 하늘에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앗수르 왕이 네 목자가 차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이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가 군사력을 통애서도 자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사실은 군사력을 약탈문들로 사실은 약탈하기도 했지면 그 땅을 지배하는 까닭이 세금도 거두어 드리고 그 곳을 자기들의 판매처로 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어요
상인들이 하늘의 별보다 많았어 다니면서 그러니까 그들이 일시에 마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붙잡으려고 해도 붙잡을 수가 없어요 순식간에 그들에게 부를 가져다 주는 것들이 일시에 다 사라고 만다
자고 일어나니까 사라진 것 같고
17절 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희 잠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지배하는
사람들 장군들 이런 사람들도 전부 메뚜기가 사라짐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군대도 소용 없어요 경제력도 소용 없어요 그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 했던 것들 정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18절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이제는 직접
앗수르 왕을 겨냥해서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목자는 잠들어 있으면 안 되지요 목자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리가 오는지를
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네 목자는 잠들 것이다 네 귀족은 누어 쉬며 그렇지요 백성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할 귀족들이 자기 직무를
안하는 것이어요
무엇이냐 하면
도덕적 해이가 찾아 온 것입니다 영어로 모랄 헤자드라고 이야기 하는 데 도덕적 해이가 찾아와서 더 이상 가지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무엇이어요 그렇게 자기를 돌봐 주어야할 울타리 같은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까 백성들은 흩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흩어진 백성들을 모을 중심조차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앗수르의 상처라고 합니다
19절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뻑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더라
회복할 상처가 다가 옵니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하고 말합니다 앗수르에게 당한 사람들 횡패를 당했지요 그들이 횡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악 악행을 듯하는 단어인데요
앗수르의
악행에 시달리는 나라는 자기들을 괴롭힌 나라가 속적 없이 망하는 모습을 보니까 기뻐 한다는 것이어요 백성들은 흩어지고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고 그렇게 주변 나라들은 기뻐하고 있다 하고 말합니다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는 의문문의 평태로 끝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결국 이 이야기를 통해 나훔이 들려주려고 하는 것은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가 속절 없이 멸망 당할 것을 이야기 하지만 이것이
앗시리아만이 이야기가 아니고 앗시리아 사람들 혹은 문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함께 살라고 준 이웃들을 함께
살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일체의 행위들 강자들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는 특정한 나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앗시리아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도한 강자입니다
여기 무도하다 이야기 하고 있는데 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어요
(1) 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살아 계심을 아는 것이 도여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역사를 예측할 수가 있어요 역사의 뱡향이 이렇게 가고 있을 것이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4차 산업 혁명을
이야기 하고 에이 아이 시대가 돌아온다고 그대로 진행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역사주의여요
그런데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예측한대로 가지 않아요 어떨 때 물고가 바뀌어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예측은 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염두에 역사의 주인인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어느 순간에 역사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2) 그 다음에 무도라고 이야기할 때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인간으로 만드신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연약한 자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라고 만들었어요
사람이라는 글자가 서로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이지요 어떤 사람이 여기에다가 이렇게 썼어 인 인 인 인 인 한자 해석 사람 인자를 여러개 섰어 해석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은 태어나지만 이 이야기를 사람은 태어납니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 사람이어요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구성되고 만들어 지는 것이야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보고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이어요
인간
다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이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데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
사람 다움이어요 대게 무도함은 앗시리아로 상징되고 무도한 강자들이 어떻게 몰락하는 지를 보여 주고 있어요
그래서 물음표로 이야기 하고 있지요
19절 이는 그들이 항상 횡패를 당함이 아니더냐 말함으로 이 말을 이제부터 어떻게 살네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단 말이어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무도한 강자들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힘이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짓 누르는 세상이지요 이런 세상에 살면서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러니까 바꿀 수 없어 지레 말하면 안 됩니다 이 무도한 강자들은 우리에게 끊임 없이 어떤 생각을 짚어 넣느냐 하면 네가 아무리
애써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요 가만히 있어 세상 달라지지 않아 이것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 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한가지 근원을 붙잡는 것이야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은 공의와 정의가 살아 있는 세상이단 말이어요
우리는 그런 세상이 열리도록 소리를 높여야 돼 악이 승리한 유일한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한 사람들의 침묵 악이 승리하기 유일한 조건이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니야 이것은 나쁜 세상이야 이야기 해야 돼
그러면 그런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늘 환영 받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잘 안 보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1990년에 제레미야 마이트라는 목사님이 미국 사회에 희망을 역설하면서 그림 하나를 소개를 했어요
그 그림이 무엇이냐 하면 죠지 프레드릭 와츠라는 사람이 그린 희망이라는 그림입니다
혹시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지구본 같은 곳에 소녀 하나가 앉아 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있고 허리를 잔득 구부리고 고개도 숙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이 가리어져 있어요 눈이 붕대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고 이 소녀가 기대듯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하프 일곱줄 하프인데 여셧개의 줄이 끊어졌어 단 하나만 남았어요
그러면 이
그림의 제목으로 적절한 것이 무엇이냐 절망일 것 같지요 그런데 죠지 프레드릭 왓츠는 그 제목을 희망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모든
조건이 좋기 때문에 희망이 아니고 모든 가능성이 자라진 것 처럼 느낄 때 단 하나 남은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간 다음이라는
것이어요
그 목사님이
제레미야 라이프 목사님이 어떤 유명한 사람의 담임 목사이어요 그 사람의 이름이 버락 오바마이어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기전에 그
이야기를 들어요 그리고는 버락 오바마가 2004년에 민주당 전당대해서 이 그림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미국 사회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인종차별이라든지 빈부 격차라든지 탐욕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람들이 희망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이 한 줄의 희망을 이것을 붙들고 우리 가야한다
그것을 담대한 희망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조건이 무르 익고 성숙했기에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고 아주작은 가능성일 망정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희망이다는 말이어요
나훔서는 앗시리아의 멸망을 사실은 강자들의 무도한 폭력에 의해서 무너지기 위해서 무너진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믿음의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아름다운 암시를 주고 있는 책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