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1일(토)
느헤미야 13장 / 주의 큰 은혜(22절)
♦ 9월 1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3: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의 큰 은혜(22절)
♦ 성구 :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命)하여 몸을 정결(淨潔)케 하고 와서 성문(城門)을 지켜서 안식일(安息日)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爲)하여 이 일도 기억(記憶)하옵시고 주(主)의 큰 은혜(恩惠)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주의 큰 은혜(your great love, your great grace)”
예루살렘의 멸망(BC 586)과 동시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불타버린 성전 재건을 시작으로 유다의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허물어진 성벽까지 52일 만에 재건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말씀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개혁을 이루고 하나님께 복을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일로, 주의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하여 주신 개혁의 의미를 생각하며 오늘의 시대를 살아야 하고 신앙을 지켜야 하는 우리들에게 개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구별과 성결의 삶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눈에 보이는 성벽 재건을 완공한 후에 느헤미야는 성벽과 함께 무너져 내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말씀의 기준을 바로 세웠습니다.
느헤미야는 개혁과정에서 빠짐없이 기도했습니다(14절, 22절, 29절, 31절). 반복해서 기록된 기도는 “내 하나님이여, ..... 기억하옵소서.”입니다.
“기억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모든 과정에 있어 하나님의 헤아림을 구하는 것이며 동시에 결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의 기쁨으로 만족하지 않고 죄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살피며 거듭된 신앙 개혁으로 끝맺습니다.
이제는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진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야 합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쉽게 잊어버리고 나도 모르게 죄에 물든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헤아리며 매 순간을 말씀과 기도로 다시 세워가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개혁은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서를 통하여 개혁의 의미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끊임없는 추구와 도전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말씀의 벽을 재건하여 그 안에서 거룩함을 회복하고 지켜야 할 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https://www.youtube.com/watch?v=vFTCLcsN2ng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9월 10일(금)
느헤미야 12장 / 예루살렘 성벽 낙성식(27절)
♦ 9월 10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2∼47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루살렘 성벽 낙성식(27절)
♦ 성구 : 예루살렘 성곽(城郭)이 낙성(落成)되니 각처(各處)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感謝)하며 노래하며 제금(提琴) 치며 비파(琵琶)와 수금(竪琴)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奉獻式)을 행하려 하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수난(受難)의 역사(歷史)(suffering history)라고 합니다.
한국의 역사 또한 수난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수난의 역사 가운데서 느헤미야 12장은 예루살렘 성벽 낙성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12장의 내용을 두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12:1∼26,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
12:27∼43, 성벽 봉헌식
당시 예루살렘 성벽의 규모는 길이가 6.4km, 폭은 약 9피트(2.7m) 라고 합니다. 두세 명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6.4Km의 성벽을 공사 현장 42곳으로 구분하여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현장을 맡기고 공사를 진행할 때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란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지속적으로 훼방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총독으로 임명된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월급도 포기하고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오직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52일 만에 성벽은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벽 낙성식을 거행하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기도하면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아무리 올바른 선택을 하여도 선거관리가 부정한 방법으로 진행되면 어느 누구도 공정한 선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스탈린(Josep Stalin. 1878. 12. 18∼1953. 3. 5)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투표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다. 개표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Those who vote decide nothing. Those who count the vote decide everything.)”
오늘의 시대가 이러한 영향을 받아 선거가 진행된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갖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느헤미야와 같은 올곧은 지도자가 간절하게 요구됩니다.
깨어있는 지성들과 신앙인들이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그 방향을 생각하며 서로 서로 깨우치고 격려하며 공정한 선거와 공정한 관리에 의해서 역사를 반듯하게 세워나갈 일꾼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https://www.youtube.com/watch?v=fwnvm2faLT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도입 이야기) 사람을 찾습니다.
어느날 이솝의 주인이 말했다.
"얘, 이솝아 ,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 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도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
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이솝은 여전히 그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서더니 목욕탕의 사람수를 세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이솝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중심이 딱 선 사람은 어떤 소리를 해도 홀리지 않지만, 중심이 서지 않은 사람은 늘 망상 속에 있으니 걸리게 돼요.
같은 꽃을 보고도 한숨 지으며 눈물 뿌리는 사람이 있고, 웃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노래하는 꽃,
눈물뿌리는 꽃이 따로 있나요?
자기 마음을 중심으로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 서화동의《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중에서 -
* 중심이 선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쳐도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갑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은 중심이 서 있지 않음의 증거입니다.
https://m.blog.naver.com/acts2915/221487788709
9월 9일(목)
느헤미야 11장 /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2절)
느헤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위로자" 라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의 위로를 받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좋을까요?
교회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을까요?
예루살렘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느헤미야 11장은 예루살렘보다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제비 뽑기를 하여
9절부터 24절까지는 예루살렘 안에 들어갈 사람들의 명단
25절부터는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명단
8장에서 성벽을 완공한 후에 백성들이 자원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원하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무려 6시간씩 일어서서 율법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령의 부흥을 회복한 후에는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이라고 서명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들을 찾았을 때는 어느 누구도 나서질 않았기에 하는 수없이 제비 뽑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유가 느헤미야 7장 4절입니다.
느헤미야 7:4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자 이제 느헴;야 10장 39절을 읽겠습니다.
느헤미야 10: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예루살렘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여전히 예루실렘 성에 거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 11장 1절을 읽겠습니다.
느헤미야 11:1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느헤미야 11:2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아멘
(현대인의 성경)
백성들은 자진해서 예루살렘에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칭찬하였다.
느헤미야 11:1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11:4∼24, 예루살렘에 살게 된 사람들
느헤미야 7:4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솔로몬 성전(BC 95)
스룹바벨 성전(BC 516)
헤롯 성전(BC 20-AD 63)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오늘의 기도
어디에서 살든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9월 8일(수)
느헤미야 10장 / 그 인친 자(1절)
♦ 9월 8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0: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 인친 자(1절)
♦ 성구 : 그 인(印)친 자(者)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方伯)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느헤미야 10장은 언약에 인친 자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그 이름은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백성의 우두머리와 일반 백성들의 순으로 소개됩니다.
“그 언약에 인친 자들”이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서약한 것을 말합니다.
성전의 재건과 52일 만에 성벽 공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사모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조상들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죄를 회개했습니다.
이어서 느헤미야 10장은 이제부터는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것을 서약하는 말씀입니다.
느헤미야 8장부터 10장은 부흥(復興)의 핵심을 깨닫게 하는 원리를 깨우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흥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전의 재건
둘째는 성벽의 완공
셋째는 회개 운동
넷째는 말씀의 생활화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이제부터는 언약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다짐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살펴보며 오늘의 시대를 살아야 할 우리들이 결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거룩한 가정
가치와 질서가 뒤범벅되어 혼란한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먼저 그의 가정에서부터 거룩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둘째는 말씀의 생활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만 외쳐질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교회 밖에서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그 말씀을 보여주고 읽혀지고 들려져야 합니다.
셋째는 육체(몸)의 성전화
건물로 세워진 교회에서 모여 예배하고 가르침을 받은 후에 모든 예배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거룩하게 변화된 몸으로 세워질 때 세상의 혼돈과 무너지는 질서를 바르게 세워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 이 하루가 말씀으로 인침을 받은 후에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삶으로 드러날 때 이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성공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기만 하지 말고 교회가 되어라"는 깨우침에 귀를 기우리며 살아갑니다.
♪ 찬양 / 시온 성과 같은 교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10:1
그 인친 자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 인치다(하탐. châtham) חָתַם
- 인봉하다(느 9:38, 렘 32:10, 14, 44)
느헤미야 9:38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생각하며 다시 주를 섬기기로 합의하고 성명서를 작성하여 여기에 우리 지도자들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서명을 합니다.
느헤미야 10:29
다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말씀의 회복)
느헤미야 10:30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고린도후서 6:14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어울리며 함께 죄를 짓지 말라!)
다른 신앙의 사람과 혼인하지 말라!
느헤미야 10:31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출애굽기 20:8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날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친근히 하라!)
느헤미야 10:32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시편 51:12 /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 /
어떤 영국 농부 하나가 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다.
기분이 아주 좋아 부인에게 "여보, 송아지 두 마리나 낳았는데 내가 한 마리는 우리 것으로 하고, 한 마리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께 바칠꺼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말을 하므로 부인이 아주 기분이 좋아서 “아! 우리 남편이 신앙이 좀 생기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아주 시무룩해 가지고서 집에 들어오더니 부인에게 송아지 중에 한 마리가 죽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부인이 "어떤 송아지가 죽었어요?"
그러자 남편은 "물론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지요?"
이 말은 그 마음에 이미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금은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면, 또 나 자신도 주님의 것이라면 기꺼이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가 있느냐? 는 질문을 해야 한다.
바벨론 포로 생활
1. 안식일에 대한 신앙
2. 결혼에 대한 신앙
3. 물질에 대한 신앙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오늘의 기도
진리의 말씀에 따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9월 7일(화)
느헤미야 9장 / 사유하시는 하나님(17절)
♦ 9월 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9:1∼38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유하시는 하나님(17b)
♦ 성구 : 그러나 주(主)께서는 용서(容恕)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恩惠)로우시며 긍휼(矜恤)히 여기시며 더디 노(怒)하시며 인자(仁慈)가 풍부(豊富)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사유하시는 하나님(forgiving God)”
학사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서 주의 뜻을 알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초막절을 지켜야 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은 온 마음과 기쁨으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 달 이십사일 이었습니다(1절).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하여 8일 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마지막 성회는 7월 23일입니다.
그런데 그 달 24일이라고 하였으므로 7월 24일입니다(9:1).
그러므로 초막절 다음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끝났지만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또다시 모였습니다.
초막절 절기를 마치고 그 다음 날 모일 때는 온 백성이 금식하며 거친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들은 초막절 행사 때에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마음껏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매우 괴로웠을 것입니다.
특히, 그들의 죄악을 오래 참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초막절 기간에 깊게 깨닫게 되면서 회개의 영이 그들 모두에게 임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거친 베옷을 입고 머리에 하얀 재 가루를 뒤집어 쓴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고 두 손으로는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이는 지은 죄악에 대해 괴로워하며 아파하며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특히 재를 머리에 썼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끔찍한 죄악을 범한 이스라엘 공동체와 각 개인은 죽어 마땅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증오와 거룩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에 물들었던 과거의 삶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머리에 재를 뿌리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주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참된 회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방해하는 모든 관계를 과감히 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회개의 영이 주의 백성에게 임하면 삶은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레위 지도자들의 기도는 네 부분으로 그 내용을 용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9:5∼6)
둘째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자백(9:7∼31)
셋째는 죄에 대한 용서(9:32∼37)
넷째는 새 언약에 대한 헌신(9:38)
회개의 영이 임할 때 비로써 자기의 죄와 조상의 허물을 자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와 우리의 가족이 지은 죄를 용서하소서.
주여,
우리 공동체가 지은 죄를 용서하소서.
주여,
우리의 부모와 조상들이 지은 죄악을 용서하소서.
주여,
이 민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고쳐주소서.
나라의 정체성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에 파묻혀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는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라도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의 영을 힘입어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나라와 민족 앞에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9월 6일(월)
느헤미야 8장 / 여호와의 성일(9절)
자신을 위한 기도
주여, 저에게 건강을 주시되
필요한 때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그 건강을 잘 보전케 하여주소서.
저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시고
선하고 맑은 것을 알아보게 해주소서.
악에 굴복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게 해주시며
사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소서.
지루함을 모르고
원망과 탄식과 부르짖음을 모르는 영을 주소서.
나 자신에 너무 집착하지 말게 해주시며
너무 걱정하지 않게 해주소서.
행복하게 살며 그 행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저에게 유머를 이해하는 친절과
풍자를 포용하는 은혜를 주소서.
♦ 9월 6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8: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성일(9절)
♦
성구 : 백성(百姓)이 율법(律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總督)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祭司長 兼) 학사(學士)
에스라와 백성(百姓)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百姓)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聖日)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는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1∼7장)
둘째는 예루살렘 신앙 회복(8∼13장)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란 가시적인 외적 요소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는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도록 영적 부흥이 있어야 하겠다며 학사 에스라와 더불어 신앙 재건에 심혈을 기우리게 됩니다.
각기 성읍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일곱째 달 초하루에 율법을 듣기 원하여 예루살렘 성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학사(서기관) 에스라는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율법책을 가져와 수문 앞 광장에서 낭독할 때 레위인들이 에스라가 읽은 말씀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자 백성들은 애통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느헤미야는 주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라 하였고 백성들은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서 모두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입니다(레 23장).
일곱 절기는 봄철에 지키는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와 가을철에 지키는 절기(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로 구분합니다.
7월에는 세 개의 절기(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가 있으므로 성스러운 달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7은 창조의 수, 완전수, 안식의 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일곱째 달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것입니다.
나팔절은 7월 초하루, 대속죄일은 7월 10일, 그리고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지킵니다.
초막절은 대속죄일의 은혜와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의미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켰으며 초막절이 끝나면 모든 절기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성회(아체레트)로 모입니다.
스룹바벨과 에스라에 의해서 성전을 재건한 후에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듣고 배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진리의 말씀이 가까이 있을 때에 그 말씀의 진가를 찾아내어 마지막 때에 말씀으로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https://www.youtube.com/watch?v=4QG8MS6uj94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아멘
유대인에게 칠월은 매우 중요한 절기를 지켜야 하는 달입니다.
물론 일곱(7)이란 숫자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일곱(7)이란 완전 후, 행운 수, 안식의 수라고 합니다.
7월 1일 : 나팔절
7월 10일 : 대속죄일
7월 15일 : 장막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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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배제와 차별을 일삼는 이들을 향한 경고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을 비판하고 종교 간 대화, 이웃 종교와의 평화와 상생을 도모하는 폴 니터의 문제의식이 집약된 제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종교개혁 이후 벌어진 종교전쟁들, 각종 마녀사냥과 종교재판들, 서구 열강들이 제3세계를 향한 제국주의적 선교 과정에서 있었던 만행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구호였고, 교회의 폭력과 광기를 덮고 넘어가게끔 했던 면죄부 역할을 했던 것 역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구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4장 12절 본문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구원의 배타성을 뒷받침하는 성서적 전거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는 베드로의 이 말은 그리스도교 외의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으며,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는 말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물음이 제기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교를 모르고 죽었던 사람들, 지금도 예수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착하고 선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인이고 구원의 대상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
저는 지금 개신교인 의식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신앙 전반에 대한 설문을 실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 개신교인의 의식의 지도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내용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2015년 인구센서스 결과 개신교인의 비율이 종교인 인구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습니다(960만). 하지만 출석률은 88.4%(2004년도)에서 76.7%(2017년도)로 12% 낮아졌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150~200만 가까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개신교인들의 신앙관이 생각보다 근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1)'타 종교에서 진리가 있느냐'는 질문에 47%가 '그렇다'(23.9%,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고, (2) '타 종교의 가르침도 선한가'라는 질문에 58%가 '그렇다'(11.3%, 그렇지 않다), (3)'교회의 현실 참여를 지지하느냐'라는 질문에 48.5%가 '그렇다'(16%, 그렇지 않다), 즉 개신교인 50%가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고, 타 종교의 가르침도 선하고,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통계를 근거로 한국 개신교의 성향이 다원주의(pluralism)까지는 아니지만, 배타주의(exclusivism)에서 포괄주의(inclusivism)로 옮겨 가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여전히 배타주의적 면모를 지우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4)'성서에도 오류가 있다'라는 질문에 20% 만이 '그렇다'(그렇지 않다 50.9%, 보류 29%), (5)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질문에 28.4%가 '그렇다'(그렇지 않다 45%, 보류 26%) 즉, 성서무오설과 구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한국 개신교의 과반이 확고하게 성서무오설과 구원의 배타성을 고수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학자는 과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교인 인구의 고령화로 인해 개신교인들은 한 세대 후 지금보다 2/3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고, 그때쯤 되면 더욱 종교다원주의적으로 흐를 것이다, 라는 예측을 합니다. 암튼 20~30년 내 한국교회는 커다란 격변을 맞을 것이고, 그것은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청년층 급감, 신학교 사양화 등).
3.
한백교회 교인들 같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적인 언어로 들립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이단 논쟁,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선교와 식민주의, 원주민 학살, 인종주의, 제국주의적 침략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수행된 침략과 학살, 타 종교 배제와 억압, 전통문화의 파괴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모토 아래 희생당한 모든 희생자에게 교회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라는 주님의 명령을 신뢰하며 세상으로 나가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는 주장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진리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런 믿음과 고백으로 선교지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이름 모를 선교사 또한 많습니다.
시카고에서 4년마다 한 번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한인 선교사들이 모여 일주일 정도 묵으면서 선교 대회를 합니다. 우리나라 선교사가 1만 8000명쯤 된다고 해요. 미국이 2만 명이 넘는 선교 1위국인데, 대회 장소인 위튼칼리지 빌리그레이엄센터에 2000~3000명 되는 한인 선교사들이 옵니다. 저는 시카고에서 유학하는 동안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정말 수십 년 동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많은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어요. 그분들 앞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에서 발생했던 폭력들, 현재 선교사들이 저지르는 깃발 꽂고 예수의 이름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선교의 문제점들에 대해 제가 배운 것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신 있게 말 못 하겠더라고요. 제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이 또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구절은 해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서 안에는 진리에 대한 배타성과 다원성이 서로 모순적으로 각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가나안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상수리나무 옆에 제단을 쌓으면서 타 종교와 공생의 길을 간 전통이 있는가 하면(창 12:6-7),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간 사이에 금송아지로 우상을 섬긴 일이 발생하죠. 주께서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는 일이 발생합니다(창 32장). 즉 가나안이라는 종교다원주의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모습이 성서에는 있고, 반면 그런 경향을 반대하는 전통이 성서에는 또한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구한말에 척화파와 개화파가 있었듯이, 성경이 쓰일 당시에도 이방의 종교를 포용하느냐 배척하느냐를 두고 성경 저자들 사이에 입장이 달랐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 우주의 주님으로 고백되었습니다. 인간 세계만이 아니라,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모든 것의 신이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엡 4:6). 이렇듯 우주적 하느님으로 그려지다가도 동시에 하느님은 땅 위의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당파적인 하나님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신 7:6). 이방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의 시체를 너희가 섬기는 그 우상들의 시체 위에다 쌓아놓을 것이다. 나는 도저히 너희를 불쌍히 여길 수 없다"(레 26:30)고 말씀하시는 무서운 하느님은 다른 한편으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요 3:17) 말하는 그런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마치 옛날 마징가 제트에 나왔던 아수라 백작과도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신입니다. 아주 밀당을 잘하는 애인 같기도 한 하느님입니다. 무엇이 신의 진정한 모습일까요.
5.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증언,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해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임했고, 사도들의 말을 듣고 수천 명이 예수를 믿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한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와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는 일이 발생했고 다음 날 제자들을 향한 문책이 이어집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이런 일은 구체적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는 일'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유언비어 유포, 집시법, 사기 등등의 죄목으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가 말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행 4:9-10)."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1-12)."
베드로가 이 말을 한 후에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놀랐다고 적혀 있습니다(행 4:13). 왜 놀란 것일까요? 사람들이 나았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을까요. 나사렛 예수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는 것 때문에 놀랐을까요. 하루 밤새 수천 명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에 놀랐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그들이 놀랐던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행 4:13)"고 적혀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와 같았던 사람들, 세례 요한과 같았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수처럼 귀신 들린 사람을 쫒아내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수처럼 병든 사람 고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가히 기적이 난무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기적을 일으키고 무슨 요술을 부르는 것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근거로, 즉 어떤 이름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하느냐입니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을 가두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6.
제자들을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누구입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율법을 하찮게 여기면서 신성모독을 일삼았던 죄인입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도 능란한 언변과 기적을 행하면서 민심을 얻고 있는 예수가 골치 아픈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유대 지도자과 로마제국 앞잡이들의 음모, 조직되고 동원된 대중들의 광기 어린 선택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렇게 제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한과 베드로가 병자들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더니 수천 명씩 예수의 메시지에 동의를 하고 있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제는 죽어 사라진 예수의 이름으로 지금 자신들과 당당하게 맞짱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척 그들에게는 경악스러웠던 것이죠. 이것이 지금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라는 발언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2000년이 지난 후에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구절에서 다른 종교의 구원의 유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런 의도도 없습니다. 내가 믿는 신, 내가 믿는 신을 향한 구도의 길을 따라가기도 힘겨운 마당에 다른 종교의 구원을 논할 오지랖을 펼칠 정도의 한가함과 여유가 제자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특별히 종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종교는 모두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다만 그 방식과 내용이 다를 뿐이지요. 이웃 종교의 구원 논의를 적대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들이 역사적 교회 안에서는 있어 왔고, 그 역사는 광기와 폭력의 역사였습니다. 한국 개신교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예수 밖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이나, 그리스도교만이 갖는 구원의 배타적 독권을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부와 권력에 기대어 살아갔던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선동에 넘어가 동원된 대중에게 한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구원은 율법에 대한 기계적이고 엄격한 준수에 의해 얻어지거나, 아니면 현실의 권력을 쥐고 있는 로마 황제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처형은 유대 율법과 로마제국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세력들과 예수와 단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민중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환호했습니다.
7.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도망가거나 회피했던 추종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자신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모든 억압되었던 것은 귀환하기 마련입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울부짖고 있었을 때 내가 뭘하고 있었던 거지.' 이것이 바로 그들이 던졌던 왜상적 기억의 내용입니다. 어쩌면 성령강림 사건은 억압된 트라우마를 지우고 현실로 귀환하게 하여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들은 변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다양한 민중적 메시아 운동들 통하여, 유대-로마 전쟁에서, 회당 시스템에서 축출당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지난 시절 예수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휘감는 고통을 속에서도 예수의 고통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 순간을 견디며 예수를 전승하였습니다. 예수를 기억하면서 현실에서 자신들에게 닥치는 불의와 고난에 맞섭니다. 이런 예수 전승의 활성화가 결국 지금 이곳에서의 저항과 이곳에서의 부활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 아닐까. 그것이 민중신학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수의 사건과 부활을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이야기는 주변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억되고 순환되고 전승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지금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늘 아래에서 구원을 약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뉴타운을 통해 너희를 잘살게 해 주겠다. 경제개발을 해서 너희를 잘살게 해 주겠다. 빨갱이를 이 땅에서 몰아내면 잘살 수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고 나면 우리는 선진국이 될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감언이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 달콤한 속삭임에 얼마나 많이 속았고(속고 있고) 얼마나 우리가 좌절했습니까(지금도 좌절하고 있습니까).
이런 이름은 권력과 자본이라고 단순화하여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실로 신과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고 실제로 그 힘으로 누군가는 구원을 이루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함으로써, 권력과 자본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 이 말은 그 누구도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을 어떤 무엇인가로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권력과 자본으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을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고백은 자본과 권력만 있으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한 대항 담론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공격성,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이웃 종교인들에 대한 저주의 언어가 절대 아닙니다.
이 말은 또한 제도와 법을 가지고 세상을 가르는 사람들, 그 기준으로 배제와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말이기도 합니다. 국경을 경계로 자국민과 난민을 가르고, 21세기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계약직과 정규직을 가르고, 창조의 섭리란 이름으로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흑인과 백인을 나누면서, 그러한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사용하고, 다름을 배제의 메커니즘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름 아래서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다"(갈 4:28)고 선언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제자들의 발언은 세상을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이름과 논리에 대한 저항이고 반대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독선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나 차별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세가들을 향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는 경고의 구절이고, 민중들에게는 세상에 쫄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격려의 구절이 되어 우리에게 전달되어 지금까지 전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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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에 선구자적 사역을 담당한 알렌 선교사
강석진 목사의 북한교회사 이야기(1)
한 나라의 교회 역사는 그 나라의 역사 속에 상호 작용하며 흐른다.
"역사는 과거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가 되고 현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며 미래를 바라 볼 수 있는 창이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한민족의 시대적 소명은 "통일 대한민국"이며 교회도 역시 동일하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지 75년이 경과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그 날을 막연히 기다리기 보다는 그 통일의 비전과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공산체제 하에 억압과 핍박 속에 살아가고 있는 2천 4백만의 북한 동포들과 그 가운데에 신음하며 자유의 날을 갈망하고 있는 그루터기 기독교인들을 기억하며 자유 통일의 날을 함께 품고 나가야 한다.
본 필자는 30여 년 전인 1991.10.1일에 중국 단동 압록강가에서 동이 틀 무렵 신의주를 바라보며 이같이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저 강 건너 동편에 해가 떠오르고 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해가 그곳에 떠 올라 저 북녘의 동포를 비추어 주시옵소서!"
나의 이런 기도가 북한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믿어 지지 않는 사실이 밝혀졌다.
강 건너 철의 장막에 쌓인 신의주 땅에 "신의주 제1교회"를 섬겼던 고령의 기독교 신자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 될 수 없었다.
더욱 기이했던 것은 일명 "지하교회 성도"라고 하는 저들 중에는 주일에 자신들이 다녔던 예배당의 뜰을 돌면서 침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뿐만 아니라 장차 통일이 되면 공산화되는 시기에 남으로 내려간 성도들은 통일이 되면 교회 재건을 위해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기로는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이북지역에는 공산화되는 과정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고, 다시 1951년 1.4 후퇴 시에도 많은 이북 동포와 기독교인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그 후 북한은 엄혹한 공산체제 하에 그 땅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숙청되고 산간 벽지로 추방되어 더 이상 그 곳에는 기독교인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장망성 같은 그곳에 지하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한국교회 역사와 특히 북한 교회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한국교회사에서는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파송된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파송된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제물포에 들어 온 그 날이 교회사의 원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교회사의 디딤돌을 놓은 앞선 선교사가 있었다.
그가 알렌 선교사(Horace Newton Allen,1858~1932)였다.
그는 1884년 9월에 미국 공사관에 공의로 입경하였는데, 그 해 12월 갑신정변시에 고종과 민비의 최 측근인 민영익이 자객에게 테러를 당하여 다 죽어 갈 때에 그를 수술해 살려냄으로 그 공로의 보은으로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세워졌다.
이 병원 운영과 조선 의료인 교육에 봉사할 일꾼이 필요하였는데, 이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병원에 직원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고, 아펜젤러는 고종의 승인을 받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제학당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명의 최초의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 덕분에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알렌을 최초의 한국교회사의 첫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처럼 선교사의 신분으로 선교에 전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렌은 1887년에는 고종의 부탁으로 워싱톤의 주미공사관의 참찬관으로 박정양 공사를 돕는 조선의 공직자로 한.미 외교사에 디딤돌을 놓는 기여를 하였다. 1890년에는 조선에 주한 미공사가 공백되자 미 정부에 의해 역으로 주한 미공사관의 대리공사를 맡았다.
그 후 1905년 7월에 미국과 일본이 "가스라 테프트조약"으로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밀약에 이어서, 그해 11월에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한성에 미공사관이 폐쇄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한국교회 역사에 공식인 선교사 신분은 아니었지만, 한국교회사의 정사를 형성하는 데에 개척자였고 선구자적 사역을 한 것이며 나아가서 한.미 외교사에도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음이 확실하다.
이처럼 알렌이 조선 선교의 선두주자로 입경한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이어서 스크렌턴(Mary F.B. Scranton, 1832~1909) 모자가 들어와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연이어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 중에 이북 지방에 선교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몇몇 선교사가 이에 나선다. 1890년에 미 북장로선교부로 부터 파송된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1892년에 카나다 출신이며 감리교 파송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5)과 그의 아내 로제타 셔워드 홀(Rosseta S. Hall,1865~1951) 의사 부부와 이어서 1897년에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선교사가 들어와 이들이 이북의 중심지인 평양을 선교지(Mission Station)로 정하여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이북 지방의 선교가 본격화 되었다. 이들의 사역으로 인해 나타난 결실은 상대적으로 이남지역보다 이북지역의 선교활동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사무엘 마펫은 왜 평양이 최적의 선교지라고 했을까?
1893년 2월에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인 윌리엄 제임스 홀과 사무엘 마펫, 그레이엄 리(Graham Lee, 1861~1916)는 이북 서북지방(황해도,평안도)으로 선교지 탐사를 위해 순회 여행을 한 끝에 왜 평양이 최적의 선교지 인지를 선교 본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첫째, 이 평양 도성은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곳이므로 선교의 도전 대상지이다.
둘째, 이들은 자기들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일반인이건 관원들이건 막론하고 돌로 때리는 폭력배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셋째, 인구가 10만명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고 상업적이라 비교적 번성할 여지가 있는 곳이다.
넷째, 한성과 베이징 간을 연결하는 도로 선상에 위치하므로 육로 사정도 괜찮고 대동강을 통한 해상 교통도 용이한 점으로 볼 때 평양은 찬란한 역사의 도시임이 틀림없다."
이들이 이북지방 곳곳을 답사했던 이유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 선교사들이 집결되자 타지방으로 균형있게 분산될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은 파송 국가와 단체가 달랐지만 선교지 분할에 대해 합의가 되어야했다. 새로이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에게는 새로운 선교지가 필요했고 선교지가 서로 중첩되지 말아야 했다. 이들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12 지파별로 분배했던 것같이 조선 땅의 선교 지경을 나누게 되었다. 먼저 선교사 수가 많은 미국 북장로교는 경기와 이북 관서 지방을 감리교와 나누었고 강원도는 주로 감리교가 감당하게 되었다. 카나다 장로교는 함경도 지역을, 미국 남장로교는 호남지역을, 경상도 지역은 호주 장로교가 맡게 되었다.
그후 한국교회사의 자료를 보면 이남 지역보다 이북지역의 교회의 부흥이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선교사들의 개개인의 선교 전략이나 선교사들의 수의 크고 작음에 의한 요인도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그 당시의 지역적 또는 사회적 환경 요인이 매우 컸음을 보게 된다. 이는 그 당시의 교회 현황 자료가 입증하고 있다. 1898년 당시 조선의 장로교 전체 교인 수가 7,500여 명이었는데, 평안도와 황해도에 해당하는 서북지방의 교인수가 5,950명으로 전체 교인의 약 80%를 차지하였다.
이같은 현격한 결과의 원인으로는 첫째, 청일전쟁(1894~1895)중에 평양이 격전지가 되자 전쟁 중에 일반인들도 신변의 안전을 기대하고 교회로 몰렸다. 또한 전세에 따라 신앙인들이 황해도로 흩어지면서 교회가 분리 개척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로는 서북지방에서는 양반 계층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왕실에서 이 지역의 인재들을 등용하지 않는 차별 정책으로 인해 지식층들은 유교의 전통 문화에 억매이지 않고 새로운 학문과 종교에 쉽게 심취하는 개방형적 의식이 강하므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는 조선 최초의 장로교 7인 목사가 모두 이북 출신이며 양반 지식층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한석진, 길선주, 서상륜, 서경조, 이기풍 등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셋째로는 이북지방에는 자립적 중산층이 많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보수 성향이 아닌 진보적 의식이 강하였기에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넷째로는 선교사들의 사역 중심축이 한성과 경기도, 호남지역보다는 점차 평양을 중심으로 집중되었다. 그 증거로서 장로교의 경우 이북 서북지방에 기독교인 수가 1910년에 23,483명인데 반해 경기와 호남의 기독교인 수는 2,975명이었다. 선교사의 수도 이북 지역의 선교사와 이남지역의 선교사 비율도 45:25명으로 나타나 있다.
다섯째로는 선교사들의 선교 중점 지향이 이남에서는 주로 교육, 의료, 사회사업 등 문화 사역으로 나타났고, 이북 지역에서는 전도 사역과 교회 설립에 비중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이북 지역 주민들은 개방성과 개척 성향이 강하여 그 지역의 복음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교의 역사에 나타난 선교의 역할에는 두 가지가 병행 되었다. 첫째로는 복음화(Evangelization)와 문명화(Civilization)였다. 조선 말기에 왕실은 서양의 영향으로부터 봉건 왕조 유지가 급선무였기에 그 당시 선교사들의 사역을 늘 감시하면서 경계시하였기에 한성과 경기지역에서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늘 긴장과 절제가 필요로 하였다. 그 예로서 선교 초기에 최초로 조선에 들어와 왕실의 어의 역할을 하였던 알렌은 언더우드와 여러 선교사들과 사역 활동의 범위를 놓고 갈등이 매우 심각하기도 하였다. 그에 반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역에서는 비교적 중앙 정부의 감시로부터 멀었기에 활달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환경도 크게 작용되었다. (계속)
제너랄 셔만호 사건이 한국 교회사에 미친 영향
한국교회사의 선교 역사에 장을 연 알렌 선교사(1894년 입경),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렌턴 모자 선교사(1885년 입경)들은 1기에 속한 선교사들이었다. 그 후 다수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사역의 새로운 지경을 개척하는데, 그 지역이 바로 이북 지역으로 1890년에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92년에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그레함 리(Graham Lee)선교사는 제 2기의 개척 선교사들로 최초로 평양에 선교의 둥지를 틀었다. 이들은 평양을 선택하여 이북 지역의 선교 개척자들이 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이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 기이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평양 대동문에 걸려있는 배의 닻(anchor)과 쇠사슬이었다. 이 대동문은 바로 전면의 대동강 능라도와 양각도 가운데에 있는 출입문으로 가장 중심적인 평양의 관문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그 동문 벽에 달려있는 그 두 개의 장식물에 대해 현지인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30여 년 전의 역사를 돌이키게 된다. 이들이 평양에 발을 딛기 전에 이미 그곳에 한 알의 밀알이 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1839~1866)선교사가 평양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로 그 유명한 제너랄 셔만호(General Sherman) 사건과 연유된 것이었다.
이 셔만호 사건은 사실상 한국 근대사에 물꼬를 튼 역사이면서 한국교회사와 북한 교회사에 새로운 국면을 갖다 준 중요한 사건으로 그 이후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일어난 후 5년이 되는 1871년에 미국 함대 5척이 강화도에서 이 사건의 진상 조사와 사과와 배상을 제시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미군과 조선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 역사가 바로 '신미양요'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연유되어 미정부는 조선과의 수호통상 조약을 11년이 지난 1882년에 제물포에서 조.미 수호 통상조약을 성사시켰다. 그후 1885년 4월 5일에 한국교회사의 최초 선교사로 기록된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한국교회사 첫 장을 열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셔만호 사건은 조선과의 외교 관계로 이어졌고 그로인한 조선의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셔만호 사건이 어떻게 발생되었고 그 후 어떤 역사로 이어지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이 사건의 폭넓게 일반 통사적인 측면과 교회사적인 측면이라는 양면을 균형있게 객관화하여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 당시의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를 먼저 살펴보면, 1860년대에 조선에서는 매우 엄정하고도 불안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1821~1898)의 치세하에서 국내적으로는 천주교인들이 이미 왕실에 잠입되어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중국과 일본에 매우 활발한 포교 활동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봉건사회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불교와 유교와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에 몰입해 왔던 지식층들과 권력층에게는 서양의 기독교는 매우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새로운 사상과 종교였기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왕실은 경계할 수밖에 없는 외세 종교와 학문이였다. 특히 1801년의 황사영백서 사건 이후 천주학이라고도 하는 천주교를 정치적으로는 매우 경계시 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다시 이양선이라고 하는 서양의 큰 배가 요란한 소리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평양 도성 한가운데에 나타나자 조선 왕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조선 왕실은 청나라가 1884년과 그 후에도 아편전쟁으로 패하면서 서양의 세력들이 중국의 봉건 왕조를 위협하는 모습과 1858년의 일본과 미국과의 수호통상 조약으로 일본의 정국이 급변을 맞이하는 메이지 정국으로 전환되자, 서양과의 국교 수교와 통상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정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즉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은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서구의 문물이나 사상의 유입에 대해 빗장을 걸어 잠그게 된 상황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 시대에는 동아시아에 서양의 근대화된 문명이 큰 조류를 이루면서 식민지 개척시대와 맞물리게 되었으며 동북아의 중국과 일본과 조선도 이 시대적 조류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과 변화에 대해 역사적 관점으로 이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하였다.
9월 4일(토)
느헤미야 7장 / 마음을 감동하사(5절)
♦ 9월 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7:1∼73
♦ 묵상을 위한 주제 : 마음을 감동하사(16절)
♦ 성구 :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감동)하사 귀인(貴人)들과 민장(民長)과 백성(百姓)을 모아 그 보계(譜系)대로 계수(計數)하게 하신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譜系)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記錄)한 것을 보면.
“느헤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나를 도움” 이라는 뜻입니다.
거친 세상 풍파가 심한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위로하실 때 “마음을 감동(put it into my heart to assemble the nobles)”하게 합니다.
느헤미야 7장의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7:1∼4, 지도자를 임명
7:5∼73,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
두 부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5. 그 이름들은 계보대로(가족별로) 등록
7:7. 인솔자 12명의 명단
7:8∼38. 가족별 명단
7:39∼45. 제사장들,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 등 레위 지파에 속한 명단
7:45∼60. 느디님 사람들(성전에서 막일하는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명단
7:61∼65.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명단
7:66∼73. 돌아온 사람들의 총수와 예물의 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52일 만에 문짝을 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집을 아름답게 건축한 후에 그곳에 들어가 살지 않는다면 그 집은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서 흉가가 될 것입니다. 집을 잘 지은 후에는 그 집에 거주하며 잘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완공으로 끝나지 않고 그 성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충성(忠誠)”과 “경외(敬畏)”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모순덩어리와 같은 우리들을 부르셨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계십니까?
오늘도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복된 주의 백성들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너 주의 사람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7:5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한 것을 보면. 아멘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고로(야하스) : 족보에 등록하다
느헤미야 7:1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7:45, 문지기들은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이 모두 일백 삼십 팔명이었느니라. 138명
느헤미야 7:2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
하나니 : 느헤미야의 동생(1:2)
하나냐(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 충성(에메트. 진리), 경외
느헤미야 7:3
내가 저희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거민으로 각각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7:45, 문지기들은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이 모두 일백 삼십 팔명이었느니라.
느헤미야 7:4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앙 수칙
1. 나의 모든 힘을 다해 살아간다
2. 한 순간이라도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이용한다
3.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4. 어떠한 일도 원한 때문에는 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오늘의 기도
맡은 일에 충성하는 일꾼을 세우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누가복음 16:10
토마스 모어의 '자신을 위한 기도'
느헤미야 7장의 내용 구분
7:1-4, 지도자를 임명
7:5-73,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
7:5. 그 이름들은 계보대로(가족별로) 등록
7:7. 인솔자 12명의 명단
7:8-38. 가족별 명단
7:39-45. 제사장들,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 등 레위 지파에 속한 명단
7:45-60. 느디님 사람들(성전에서 막일하는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명단
7:61-65.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명단
7:66-73. 돌아온 사람들의 총수와 예물의 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52일 만에, 문짝을 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집을 아름답게 건축하고서, 거기에 들어가 살지 않는다면 그 집은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서 흉가가 될 것입니다.
집을 잘 짓는 것만큼이나 지어진 집에 들어가 그 집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완공으로 끝나지 않고, 그 성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성벽을 완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습니다.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성벽이 완공되고 난 후에, 느헤미야는 그 성벽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세운 사람들이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들,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부류는 모두 레위 지파에 소속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벽을 공사를 방해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게셈은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5번이나 보내어서 오노 평지에 있는 한
마을에서 만나자고 했었습니다.
5번째 사람을 보낼 때에는 봉하지 않을 편지를 보냄으로 모욕을 주고, 모함을 했습니다.
심지어
선지자 스마야마저도 뇌물을 받고 느헤미야를 성전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벽을 완공했다면, 느헤미야는 응당 최정예 무사들이나 유다 사람들 가운데 기골장대한 사람들을 뽑아서 성벽을 지키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물리적인 힘이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레위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성벽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에스라서에서 살폈던 성전재건과 지금 느헤미야서에서 살피는 성벽재건은 단지 건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 다시는 하나님을 버리거나,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일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신앙공동체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을 레위 지파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그 성벽 안에 70여 년 전에 세워진 성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예루살렘 성벽 관리 책임자로 레위 지파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니와 하나냐가 선임되었습니다.
하나냐가 선정된 이유가 그가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충성스럽다’는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뛰어나다’, ‘바른 길, 정도를 걷다’, ‘공평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나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여겨 그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도 동일했습니다.
5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다 백성들이 기근과 납세와
고리이자로 먹고 살 것이 없고, 전답을 잡혀 세금을 내고,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 할 때에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총독의 봉급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냐는 충성스러움을 통해서는 사람들과 관계를 올바르게 맺어가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어가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바로 하나냐와 같이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를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합니다.
만약 사람들과의 관계는 바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면 그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데 사람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그의 일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동생 하나니는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겨울 궁전인 수산 궁에 있을 때,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형에게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환난과 고통을 겪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벽은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수산궁까지는 약 1,600km 정도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에 꼬박 4개월이 걸렸습니다.
현대인의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_Saint-Jean-Pied-de-Port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_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인데 약 800km이고 40일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가는 길에 잠잘 수 있는 호텔이
있고, 음식점이 있고, 쉼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짐은 다 실어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니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수산궁으로 갔던
사람들은 호텔, 음식점, 쉼터는 전무했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은 자신이 들고 가야 했습니다.
거리도 산티아고 순례기의 2배나
됩니다.
그 먼 길을 가서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니도 하나냐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3-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예루살렘 성벽은 완성이 되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반대자들은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해가 떠서 날이 완전히 밝은 후에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해가 지기 전에 문을 닫고 잠그고, 반드시 경비하는
사람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완성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완성된 성벽 안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예배당을 예쁘게 짓는 것보다, 그 안에 있는 교회인 사람들의 믿음이 아름답고 신실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5-73절까지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에 의하면 그 이름들은 계보대로(가족별로) 등록을 하였다고 합니다.
7절에는 인솔자 12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38절은 가족별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9-45절에는 제사장들,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 등 레위 지파에 속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5-60절에는 느디님 사람들(성전에서 막일하는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1-65절에는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6-73절에는 돌아온 사람들의 총 숫자와 예물의 숫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계보는 에스라 2장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옵니다.
본래 히브리 성경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한 권,
‘에스라-느헤미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한 권의 책에 이렇게 긴 족보를 2번 반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갔던 사람들이 전부 다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과 페르시아를 비교하면 페르시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국입니다.
그곳에서 수 십 년을 살게 되니 그곳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없는 땅, 척박한 예루살렘으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돌아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들을 기억해 주셔서 성경에
2번씩이나 새겨주셨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레위 지파 사람들도 있었지만, 성전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종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로부터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을지라도, 그들이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곳이라고 여겼기에 그들은 돌아왔고, 성벽을 재건하는데 온갖 방해가 있었을지라도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기에 그
이름을 지금까지 남겨 주셨습니다.
혹시 유다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의 예루살렘처럼 우리의 삶이 황량하게 보이고, 척박하게 보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도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고 믿으며 섬기십시다. 하나니와 하나냐처럼 사람들 앞에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십시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심어주신 우리의 삶의 자리에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들이 영글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은총이 오늘도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즉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합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악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행위보다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면 믿지않느냐? 이것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냐"를 일컬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 믿음의
분량을 똑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을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초신자보다 더 약한 믿음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상대방에 대해 아는 만큼의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믿음은 끊임없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신을 비우면 비운만큼 믿음의 분량이 자라납니다.
내 속에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거룩해질 것이며, 이러한 모습을 일컬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평가받게 됩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에게 인구조사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각 지파별로 거주할
지역을 배분했습니다.
이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오랜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사람들을 제대로 지파별, 족보별, 출신지역별로 구분을
했는데, 이는 이후에 배분할 때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감동 속에서 백성을 모아 그
족보대로 계수하였는데, 그때 그는 바벨론에서 처음 돌아왔던 자들, 즉 약 92년 전에 작성되었던 스룹바벨과 예수아 등을 중심으로
돌아왔던 자들의 족보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 이하의 내용은 에스라 2장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과 똑같지가 않고,
경우에 따라서 숫자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여러 의견들을 제시했지만, 가장 적절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스라 2장에 명시된 명단은 바벨론에서 조사한 명단으로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귀환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의 명단이지만, 느헤미야 7장의 명단은 처음에 조사할 때는 귀환하겠다고 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지 못한 사람들과 귀환 도중에 죽은 사람들이
누락되었고, 개인적으로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추가해서 나중에 새로 작성된 명단이기때문에 이같은 숫자의 차이가 난다고
해석합니다.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에 나타난 숫자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양자 모두 온 회중의 합계는
42,360명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에스라 2장에서 나온 숫자를 더하면 29,818명
느헤미야 7장에 나온 숫자를 합하면 31,089명
수학적 계산으로는 양자 모두 42,360명과는 틀립니다.
따라서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기록된 최종 합계가 42,360명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서, 원본 명단이 하나가 아니라 계수하는 과정에서 당시에 발생했던 상황의 변동으로 여러 개 존재했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각각 자기의 편의대로 이들 원본 명단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본문에 옮겨 적었기에 이러한 숫자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앞의 주장이 타당하게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충성과 경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이라고는 전혀 없는 죄악덩어리인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게 해주시고, 입으로 고백하게 해주시고, 이 믿음을 근거로 우리를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계십니까?
오늘도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복된
하루로 만들어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9월 3일(금)
느헤미야 6장 / 하나님이 이루신 것(16절)
♦ 9월 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6: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이 이루신 것(16절)
♦ 성구 : 우리 모든 대적(對敵)과 사면(四面) 이방(異邦)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落膽)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役事)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평신도 선지자 느헤미야의 유일한 목표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개인적으로 평안하게 살기를 원했다면 얼마든지 아닥사스다 왕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일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땅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면서도 선조들의 고향 땅 예루살렘의 성벽이 훼손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열한 애국심이 그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유다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성벽 재건하는 일에 몰두할 때 여러 차례 외부로부터 훼방꾼들로부터(산발랏, 도비야, 게셈)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느헤미야 6장에서는 심지어 느헤미야를 유인하는 편지를 다섯 차례씩 보내서 “오노 평지 한 촌”에서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심지어 선지자 “스마야”를 매수하여 성전 외소에 들어가 숨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느헤미야는 미리 잘못된 음모를 알고 아주 지혜롭게 거절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이 52일 만에 마쳤습니다.
그 날은 엘룰월 이십 오일이라고 소개합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은 민간력으로 압월(11월) 4일부터 시작하여 엘룰 월(12월)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양력으로는 7월 중순 경부터 9월 중순까지 마침 비가 오지 않는 건기(乾期)에 시행되었으므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이 세상의 삶은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을 마치 영원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순간의 것 때문에 아주 귀중한 것을 놓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내일을 모르는 하루살이처럼
내년을 모르는 메뚜기처럼
영원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살아갈 것이 아닙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오늘을 내일처럼 기도하며 계획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영원하신 기업
https://www.youtube.com/watch?v=OLzMCrEgl0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자의 꾀임에 빠진 네 마리 황소
친한 네 마리 황소가 있었다.
이 황소는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맛있는 풀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어떤 위험이 닥쳐오면 네 마리가 힘을 합쳐 위험을 물리쳤다.
네 마리의 황소를 노리는 사자가 있었다.
사자는 한 마리씩 사냥하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힘을 합한 네 마리의 방어에는 자신이
없어 늘 망설이다가 하루는 꾀를 내어 약간 뒤에 처져있는 황소 한 마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 마리의 황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똑같이 말했다.
그러자 네 친구들은 서로 불신하였고, 크게 싸우다가 마침내 각기 흩어져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분열을 노린 사자는 네 번의 훌륭한 식사를 마친 것이다
성벽의 길이 : 6.4km
성벽 공사 현장 ; 42곳
느헤미야 6:16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아멘
느헤미야 6: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느헤미야 6:9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느헤미야 6:14-15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링컨의 신앙생활 십계명
1.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
2.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천할 것
3. 하나님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 할 것
4. 하나님 뜻에 순종할 것
5.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할 것
6.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할 것
7.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영광을 올려 드릴 것
8. 모든 사람은 자유하며 평등 하다고 믿는 것
9. 주님의 명령을 실천 할 것(이웃을 사랑)
10.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 되도록 기도할 것.
요한삼서 1:3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오늘의 기도
항상 진리편에 서게 하시고 진리가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9월 2일(목)
느헤미야 5장 /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절)
♦ 9월 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5: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절)
♦ 성구 :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百姓)을 위(爲)하여 행(行)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恩惠)를 베푸시옵소서.
“은혜를 베푸시옵소서(Remember me with favor.)”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역할을 정하고 마음을 다하여 성벽을 재건할 때 호른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도비야는 “유다 백성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 백성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파수꾼을 세워 지키며 한손으로는 건축도구를 잡았고 또 한손으로는 병기를 잡고서 불철주야 열심히 중수하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5장은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일이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부의 방해란 흉년으로 인하여 먹을 것을 얻기가 어려울 때 비싼 이자를 받으며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이방 사람들의 비방도 견디기가 어렵지만 같은 동족끼리 힘들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며 이자를 받지 말고 돈을 빌려주어 이 어려운 때를 극복하자고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인 삶이라고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느헤미야의 가르침대로 행할 것을 서로 맹세하였습니다.
더구나 느헤미야는 통독으로 임명을 받았지만 12년 동안 백성들에게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모두에게 힘든 일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자고 합니다.
은혜는 받을만한 그릇과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비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하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반드시 은혜를 담을 수 있는 희생과 나눔과 사랑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어려운 이 시기를 서로 힘을 더하여 함께 극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져 봅시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인내로 무장하여 소망의 그 날을 함께 맞이할 수 있는 복된 주의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이 몸의 소망 무엔가
https://www.youtube.com/watch?v=rf9YzdOIVr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5: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아멘
- 오늘 내게 필요한 은혜가 무엇일까?
궁극적인 구원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매일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지혜" 라고 하겠습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최대의 효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성벽 건축에 대한 두 가지 적대 세력
1. 외부의 적(산발랏, 도비야, 게셈)
2. 내부의 적(형제 유다 사람)
- 큰 흉년으로 인한 곡식 구매를 위한 밭, 포도원, 집을 전당 잡힘, 세금 문제
느헤미야 5: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느헤미야 5:6-7a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중심에 계획하고(신중히 생각한 다음)
느헤미야 5:8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 5:9-10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
느헤미야의 신앙 / 솔선수범
1. 총독의 녹을 거절(14절, 18절)
2. 과거의 총독 / 은 40세겔, 양식, 포도주를 요구(15절)
3. 하나님을 경외(15b)
4. 성벽 재건에 몰두(16절)
5. 매일 150명의 식사(17절)
- 소 1, 양 6, 닭, 각종 포도주를 준비
6. 백성의 부역이 중함(18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오늘의 기도
천국 시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주옵소서!
9월 1일(수)
느헤미야 4장 / 위하여 싸우시리라(20절)
예수 내 구주!
느헤미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위로자가 되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하여 느헤미야는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점쟁이로부터 "당신은 왕이 될 사람이오!" 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예언을 들은 후에는 "나는 왕이야!" 하며 왕의 자리에 오를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가을 날 마당 밤나무 아래 평상에 누워 언제쯤 나를 왕으로 모시러 올까 하며 낮짐이 들었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밤송이가 떨어져 그 사람의 얼굴위에 떨어져 깜짝 놀라 일어나며 "야, 이 밤나무야! 내가 누군 줄 아느냐?" 하며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내다가 결국 세상을 떠날 때 한 마디 하기를 "여기, 왕이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세상이 나를 왕으로 몰라주어 결국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구나!"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백범은 ‘마의상서’라는 관상책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배운 대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니 가난과 살인, 풍파, 불안, 비명횡사할 온갖 역마살이 다 끼어 있었습니다. 관상책의 이론대로라면 그야말로 하지하(下之下), 최악의 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내 관상이 이 모양인데 도대체 누구의 관상을 보아준단 말인가’라며 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 책 마지막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얼굴 잘생긴 관상(觀相)은 몸이 튼튼한 신상(身相)만 못하고, 몸이 좋은 신상은 마음씨 좋은 심상(心相)만 못하다.
심상이 좋으면 관상이나 신상이 좋은 것보다 낫다.’
이 구절에서 용기를 얻은 백범은 어떻게 하면 심상을 좋게 기를까 고심하다가 ‘이 나라에 태어났으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자’고 결단했습니다. 그는 나라의 터를 닦는 훌륭한 민족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얼굴이나 외모를 고치는 데 돈과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마음을 다듬는 데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꾼으로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끈질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철저한 계획과 답사를 하며 준비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그 다음은"(22회)
"중수(重修)"(28회)
두 단어로 느헤미야 3장을 정리하면 "그 다음은 중수하여" 라고 하겠습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그 다음은 맡은 구역과 다른 구역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연결이 아니라 중수 즉 아주 든든하게 보수하는 것입니다.
성벽의 두께가 대략 5미터,
* 1에이커 = 43560m2 / 2.787(대략 3에이커)
그 면적은 121,405m2(대략 37,000평)의 성을 보호하는 성벽을 52일 만에 완성했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느헤미야 4장은 성벽을 재건하는 백성들을 훼방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산발랏, 도미야, 게셈,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
느헤미야 4:20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아멘
느헤미야 4:7-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느헤미야 4:1-2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느헤미야 4: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느헤미야 12: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느헤미야 4:9-10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 기도는 최선의 방법이다!
* 기도는 최고의 전략이다!
느헤미야 4:11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느헤미야 4:14
느헤미야 4:16-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느헤미야 4:20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느헤미야 4:21-22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찌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느헤미야 4:6(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백성들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마침내 우리는 전 성벽을 절반이나 쌓아 올렸다.
오늘의 기도
힘을 다하여 기도하므로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느헤미야 4:1-23
좋은 일을 시도했다가 예기치 않은 일에 부딪힐 때가 있다.
느헤미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부딪혔다.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에 기생해서 세력을 쌓아가던 산발랏과 도비야가 집요한 방해꾼(2:19)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기들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염려해서 방해에 들어간 것이다.
1. 방해하는 역사
산발랏과 도비야의 비웃음(4:1-3)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140년간 동안 불타고 무너져서 그대로 흙무더기가 되어있던 예루살렘성을 재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을 아니었다. 매사가 그렇듯이 그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웃음)이라는 것이 있다.
(내 안)에 있는 비웃음비웃음은 밖에 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안에도 있는 것이다. “술 담배도 끊지 못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내 앞가림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밖에 일이냐? 그래 내가 뭐랬어? 해보나 마나 그럴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더욱 거세지는 방해(4:7-8)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북에는 산발랏과 도비야, 남에는 아라비아, 서에는 아스돗, 동에는 암몬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예루살렘성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2. 가중되는 위기
그들의 (힘)이 다 빠졌다(4: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마귀의 전략 가운데 하나는 힘빼기 작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신다.
이사야 40:29 /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사야 40:31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그들은 (낙심)했다(4:10)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어느 날 마귀가 무기전시회를 열었다. 그중에 한 무기에는 가장 비싼 값이 매겨져 있었다. 그 무기의 이름 바로 ‘낙망’, ‘의욕상실’이었다. 바리새인들의 비판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히브리서 12:3 /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그들은 (두려움)에 빠졌다(4:11)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디모데후서 1:7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대처할 사람의 수가 (부족)했다(4:12)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3. 이루는 역사
그들은 (기도)했다(4:4-5)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대적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들고 나왔다.
빌립보서 4:6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두 목사님이 각각 문제가 있는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한 분은 교회에 부임하자 마다 조리있게 시시비비를 가리기 시작했다. 교인들은 목사님의 조리있는 논리에 수긍했다. 그러나 문제가 밝혀지고 난 뒤에 교인들은 그 교회를 다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또 한 분의 목사님은 그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셨다. 그리고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는 “(무릎)으로 인생의 싸움을 싸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의 ABC를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특히, (교회) 곧 믿음공동체가 기도할 때 악한 권세를 물리칠 수 있다. 성경은 합심기도를 가르치고 있다.
(마음)을 담아서 일했다(4: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최선)을 다했다(4:9. 13)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느 4:16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느 4: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느 4: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느 4: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느 4:23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4:14)
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 문제보다 (주님)이 더 크다는 사실을 보라! 불신앙은 문제를 더 크게 보지만, 신앙은 주님을 더 크게 본다.
이루시는 하나님(4:15)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웃음과 분노와 위협으로 대적하던 그들의 꾀(4:11)를 무너뜨리셨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그 선하심의 목적을 버리실 수 없다.
나팔소리를 듣거든(4:20)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오늘의 나팔소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디로 모여야 하는가?
거기에는 누가 계시는가!
선한 일에 힘쓰는 자여!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세우려고 하는 자여!
어떠한 장애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 세상의 어떤 문제보다도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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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자, 원산의 기적이 시작됐다
1903년 원산 부흥 운동 이끈 캐나다 선교사 ‘하디’의 삶 1200쪽으로 펴낸 이덕주 교수
“하디 선교사가 수없이 ‘회개하라’고 할 땐 아무 반응이 없던 교인들이 ‘저부터 회개합니다’ 하자 기적처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영(靈)의 사람, 로버트 하디’(신앙과지성사)를 최근 펴낸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은퇴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 출신 감리교 의사 선교사로 1890년 조선에 온 하디(1865~1949)는 선교사, 신학 교육자, 신학 교재 60여 권을
쓴 저술가로 평생 한국 복음화에 헌신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을 이끈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원산 부흥 운동은
4년 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평양 대부흥’의 도화선이 된 사건.
그러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도 하디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새 건물을 짓고 기념촬영한 모습. /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에 따르면 하디는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회개’가 뭔지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원산 부흥 운동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하디는
1902년 무렵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한국 선교 13년째, 원산 부임 10년째인 이때까지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인 집을
불시에 방문해 보니 술상을 놓고 교인 모임을 하고 있었고, 교인을 빙자한 횡령·사기 사건도 빈발했다.
하디는 ‘세례 교인’을
‘학습 교인’으로 강등시키고 ‘제명’ ‘무기한 (예배) 출석 금지’ 조치도 내렸다.
선교 보고서에 “원산 교인들의 영적(靈的)
상태는 대단히 실망스럽다”고 적을 정도였다
극적
반전이 일어난 것은 이듬해인 1903년 여름.
휴가철을 맞아 외국인 선교사들이 휴양지 원산에 모여 기도회와 성경 공부
모임(사경회)을 열었다.
최고참 선교사 하디가 설교를 맡게 됐다.
그는 문득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모태
신앙이었지만 진정한 믿음이 없었고, 조선 교인들을 오만과 교만으로 대했음을 통회(痛悔)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
그동안
‘조선 교인 탓’을 하던 하디가 ‘내 탓’이라고 고백하자 다른 외국인 선교사에 이어 조선 교인들로 회개의 불길이 번졌다.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갚지 않은 돈을 갚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졌고, 20년 전
본의 아니게 더 받은 봉급을 반환하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그 이전까지 ‘회개’는 무슨 뜻인지 감(感)도 못 잡던 조선 교인들이
비로소 회개의 참뜻을 알게 된 것이다.
부흥의 불길은 이내 원산에서 서울, 개성 그리고 평양으로 확산했다.
그 결과 불과 10여 년
후인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의 절반 이상을 개신교인이 차지할 정도로 개신교가 이 땅에 탄탄히 자리 잡게
됐다.
하디 선교사는 좀처럼 웃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는 하디의 삶을 통해 개신교가 조선에 전해져 뿌리 내리는 과정을 꼼꼼히 재구성했다.
그는 “원산 부흥 운동의 본질은 ‘물질적
성장’이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본질적 변화였기에 가능했다”며 “코로나 시대를 맞은 한국 교회도
하디의 삶을 통해 무엇이 우선이고 본질인지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023년 원산 부흥 운동 120주년을 앞두고 하디 선교사의 전도로 세운 간성·강릉중앙·광희문·선교·수표교·양양·종교교회가 ‘하디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교) 본부와 감리교신학대가 평전 발간에 뜻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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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목사 교육기관으로 세운 하버드대... 새 교목실장은 ‘무신론자’
163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들은 교회의 장래를 놓고 고민이 있었다.
정착지의 청교도 교회들을 이끌어갈 미래의
목사들을 어떻게 양성할 것이냐였다.
그 해답이 존 하버드 목사가 기부한 책과 자금으로 1636년 설립된 하버드 칼리지였다.
이후
종합대학으로 발전했지만, 1880년대까지 하버드대의 신조(motto)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와 ‘교회의 그리스도를 위하여’이란 뜻의 라틴어가 번갈아 쓰였다.
버드대의 새 교목실장(Chief Chaplain)에 44세의 유대계 출신 무신론자가 지난 주 선출됐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인 ‘신(神) 없는 선(Good Without God)’이란 책의 저자이기도 한 그레그 엡스타인은 2005년부터
하버드대와 인근 MIT대에서 무신론 커뮤니티를 이끌며 학생들에게 “신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래서
종종 “세속적, 가치 중심적 철학인 인문주의 운동의 대부(代父)”로 소개된다.
엡스타인은 NYT에 “갈수록 많은 사람이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고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얘기하고 도움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기독교‧천주교‧불교‧힌두교 등 하버드대에서 다양한 종교 커뮤니티를 이끄는 40여 명의 성직자가 만장일치로 무신론자인 엡스타인을
교목실장으로 선출했다.
‘교목실장’이란 직책도 대학 내 존재하는 다양한 종교를 고려할 때 ‘사제(司祭)실장’ ‘종교실장’에
가깝다.
이 대학의 크리스천사이언스 교목인 매깃 해머스트롬은 NYT에 “보수적인 대학에선 ‘도대체 뭔 짓을 하는 거냐?’라고
하겠지만, 하버드대 같은 환경에선 그가 적격”이라며 “엡스타인은 서로 다른 신앙 사이에 소통 채널을 계속 유지해왔다”고 말했다.
무신론자 엡스타인이 하버드대 교목실장으로 선출된 것은 미국사회에서 기독교 색채가 점차 옅어지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에 따르면, 자신을 크리스천(개신교‧가톨릭)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07년 78%에서 2019년에는 65%로 줄었다.
반면에,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16%에서 26%로 올라갔다.
2019년도 하버드대 졸업예정자 중에서도 기독교와 가톨릭 신자는 17%와 17.1%에 그쳤고, 불가지론자 21.3%, 무신론자 16.6% 등이었다.
8월 31일(화)
느헤미야 3장 / 성벽을 건축하여(1절)
♦ 8월 3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3: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벽을 건축하여(1절)
♦ 성구 : 때에 대제사장(大祭司長) 엘리아십이 그 형제(兄弟) 제사장(祭司長)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羊門)을 건축(建築)하여 성별(聖別)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城壁)을 건축(建築)하여 함메아 망대(望臺)에서부터 하나넬 망대(望臺)까지 성별(聖別)하였고.
느헤미야 3장에서는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이름이 낯선 것처럼 느헤미야 3장에 소개된 유대인들의 이름도 우리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낯선 이름들을 기록한 것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역사적 사실
둘째는 계획적인 성벽 건축
셋째는 조직적인 건축
넷째는 역할 분담
성벽을 건축하는 일에 많은 백성들이 기꺼이 참여했으나 성벽 건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5절).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귀족들은 성벽 재건을 위한 사역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부자들을 말합니다.
왜 부자들은 성벽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시며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마태 19:23∼24).
부자들의 관심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의 관심은 어렵지만 서로 의지하며 함께 공존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때 거지로 생활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후에 간증하기를 부자 동네에서 주는 음식은 반드시 끓여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부자들은 먹을 수 없는 상한 것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동네에서 주는 음식은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은 걸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성벽을 쌓고 있습니까?
부자와 같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성벽입니까?
아니면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한 성벽입니까?
환난과 근심 걱정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늘도 신령한 성벽을 쌓고 주님과 동거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3: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아멘
느헤미야 3:32
성 모퉁이 누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중수하였느니라.
양문에서(1절) 양문으로(32절)
요한복음 1:29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0: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절, 양문 - 예수 그리스도(요 1:29)
3절, 어문 - 사람을 낚는 어부(마 4:19)
6절. 옛문 - 성도가 걸어야 할 선한 길(마 11:29)
(여사나문) 역대하 13;19
13절, 골짜기문 - 주를 섬기는 자의 겸손(벧전 5:5-6)
14절, 분문 - 영육의 더러움을 깨끗이 함(고후 5:17)
15절, 샘문 - 성령 충만(요 7:38-39)
26절, 수문 - 말씀의 물로 정결케 됨(요 6:50-51)
28절, 마문 - 그리스도의 군사의 선한 싸움(딤후 2:3-4)
29절, 동문 - 다시 오실 그리스도(계 22:16)
31절, 함밉갓문 - 그리스도의 심판대(빌 3:20, 히 9:27)
(죄수의 문) / 함밉갓(점호하다)
느헤미야 3: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풀무 망대를 중수하였고.
(개역한글) 화덕망대
(현대인의 성경) 용광로망대
고난은 영광의 화목이다!
베드로전서 4:13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오늘의 기도
느헤미야 3장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역사를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가 드러났다.
곧 모든 것을 함께하고, 모든 것을 분담하고, 부름받은 것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면서 각각의 성문에 담겨진 의미들로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후 스룹바벨 때 1차로 돌아왔습니다(BC 536년)
에스라 2차 귀환(BC 457년)
느헤미야 3차 귀환(BC 445년)
이스라엘 나라가 재건되어 안정을 찾은 후 BC 440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2차로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느헤미야 때 성벽재건 과정 특히 성문의 재건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 의미, 용도 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양문(羊門) 3:1 /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양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성전에 양 같은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갔다.
요한복음 10:7-10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삶은 결국 강도와 도둑(사탄의 권세)에게 빼앗기는 삶이다.
성벽건축은 양문에서 (시작)해서 돌아와 양문에서 (끝)을 맺었다.
인생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곧 양문을 재건하는 것은 곧 (예배)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양문 재건에는 ‘성별’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거룩하게, 곧 구별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양문을 드나드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고 예수님처럼 희생과 섬김으로 구별된 삶이다.
1절에 제일 먼저 양문을 중수했습니다.
이 문은 양이 드나들던 문이라서 양문입니다.
양문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양문 바로 아래 성전이 있어서 양문으로 양을 몰고 와서 잡았습니다.
아무 문으로 양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양을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무리의 양을 끌고 들어갔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서는 양을 키우지 않았고 주로 보리농사를 지었습니다.
요단 건너 모압 지역에서 주로 양을 키워서 잘 자란 흠 없는 양을 떼로 받아와서 양문으로 가져와 울타리 안에 두었다가 제사 때에 양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이 양문 근처에 양을 파는 시장이 있었습니다(흠정역).
가까이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어서 제사 드리기 전에 양을 씻겼습니다.
많은 양들이 드나들어야 해서 양문에는 문빗장이 없이 쉽게 열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문을 재건한 사람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입니다.
당시 성벽을 재건하는 데에 부유한 사람들의 헌금을 받아서 재건을 했는데 특히 이 문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재건에 드는 비용을 낸 것입니다.
엘리아십은 스룹바벨과 같이 바벨론에서 온 예수아의 손자입니다.
당시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중 하나가 성벽 재건을 반대한 산발랏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여 비난을 받았지만(느 13:28),
가장 중요한 이 문의 재건에 앞장서는 훌륭한 일도 했습니다.
또 도비야를 위해 성전 방을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느 13:4, 7).
양문은 성별되어야 한다고 한 유일한 문입니다.
이 문을 레위인 파수꾼들이 항상 지켰는데 레위인들은 성전과 관계가 있는 문만 지켰습니다.
양문은 현재의 스데반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안의 성전 옆과 밑에는 민가가 있었습니다.
솔로몬 행각 아래 오벨 지역에는 느디님 족속이 살았습니다.
실로암 못 옆에 양지바른 땅에는 대제사장들 같은 지위 높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2. 어문(魚門) 3:3 / 사람 낚는 어부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두로에서 오는 어상(魚商)이 출입한데서 이 이름이 붙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다.
성도는 주님께 낚인 (물고기)로 비유된다.
마태복음 4:19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주님 안에 있는 물고기가 다시 세상으로 쓸려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신앙의 문단속이 필요하다.
3절에서는 어문을 재건하였다고 나옵니다.
어문은 하스나아 사람이 재건했습니다.
물고기를 잡아와서 나르던 문이라서 어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가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하스나아는 여리고 지방의 이름입니다.
왜 그들이 중수했을까요?
어문은 요단강,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아오는데 요단강 옆에 있던 여리고 지역 사람들이 이 물고기를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여와서 예루살렘 성 안에 살던 일반 사람들에게 팔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문은 다윗시대에 중요한 출입구였고 고고학적으로 근처에 어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고기는 제사에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문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물고기를 들여오기 좋은 방향에 이 어문을 만든 것입니다.
현재의 다메섹문의 동쪽에 있습니다(대하 33:14, 습 1:10).
성벽의 모든 문들은 다 관계있는 사람들이 재건했습니다.
그 문을 많이 드나들고 꼭 그 문이 필요한 사람들이 돈을 드려서 문을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3. 옛문(古門) 3:6 / 성도가 걸어야 할 새 길
옛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버릴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별할 때, 새롭고도 견고하게 변화될 수 있다.
(1) (옛사람)으로 살았던 삶을 회상해보라.
신명기 24:22 /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2) 앞서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
이사야 46:9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3) 거듭 (변화)를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라.
고린도후서 5:17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6절에서 옛문을 재건했다고 나옵니다.
옛문은 가장 오래된 문으로 옛날 성벽에 있던 문이었기에 옛날부터 있었다고 해서 옛문입니다.
또 에브라임의 여사나 지역으로 통하는 문이었기 때문에 여사나의 문이라고도 불렸습니다(대하 13:19).
이 문의 영적 의미는 “성도가 걸어야 하는 선한 길”입니다.
이 옛문을 중수한 사람은 요야다와 므슬람이 재건하였는데(6절) 금장색, 향품장사(8절), 예루살렘의 절반을 다스리는 르바야(9절)와 나머지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12절)도 참여했습니다.
르바야와 할로헤스 두 사람이 예루살렘의 지주였고 함께 중수한 사람들도 예루살렘의 권력자이고 부자이며 옛날부터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오랫동안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이 옛문을 가장 많이 이용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중수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4. 골짜기문 3:13 / 주를 섬기는 자의 겸손
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주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천 규빗을 중수하였고.
13절에서 보면 골짜기문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문의 옆에는 힌놈의 골짜기가 있어 그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문이라서 골짜기문이라고 불립니다.
이 문의 영적 의미는 “주를 섬기는 자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이문은 하눈과 사노아 거민이 재건하였습니다.
사누아는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12마일정도 아래에 있는 동네입니다.
이들이 성전에 오는 가장 빠른 길이 이 골짜기문으로 통합니다.
사누아 사람들이 평소에 많이 드나드는 문이라서 그들이 중수한 것입니다.
그들이 문과 함께 성벽 500m정도를 중수하였습니다.
5. 분문(糞門) 3:14 / 영육의 더러움을 깨끗이 함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화덕망대를 지나고 골짜기문이 기다리고 있다.
눈물의 골짜기문에서부터 더럽고 냄새나는 분문까지 1천규빗(약450미터)이나 되는 긴 성벽을 중수해야 했다.
벧학게렘 지방은 포도원지역으로 예루살렘의 남부로 좁다란 지역이다.
당시 그곳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이 더러운 것들이 배출되는 분문을 중수한다.
극상품 포도주를 생산하려면 틀에서 발로 밟혀야 하듯이 포도원 통치자 아들이 분문에서 (낮아짐)의 훈련을 밟고 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비우고 나를 배설물로 여기기까지 낮아지는 과정이 없이 귀하게 성별되기는 어렵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라.
빌립보서 3:8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쓰레기에 버려질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침 뱉음을 받으시고 종보다 낮아지셨다.
14절에서는 분문을 재건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문은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재건하였습니다.
이 문의 영적인 의미는 “영육의 더러움을 깨끗이 함”입니다.
레갑 족속은 미디안 중 겐 족속에 속한 족속입니다.
이 문을 통해 성전에서 제사할 때 양의 배설물과 여러 재와 쓰레기를 가져와서 힌놈의 골짜기에서 태웠습니다.
이 문은 힌놈의 골짜기로 바로 통합니다.
이런 일을 느디님 사람들이 했기 때문에 그들이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래서 레갑 족속이 분문을 재건할 때 느디님 사람들이 함께 도왔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레갑 족속과 관련이 많습니다.
느디님 사람은 옛날 전쟁의 포로로서 성전의 노예가 된 미디안 사람과 기드온 사람 등 이방인들이 포함된 집단으로 바벨론에서 2차 귀환할 때 함께 돌아왔고 에스라를 통해 성전의 봉사자로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6. 샘문 3:15 / 성령 충만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쓰레기가 나가는 분문을 지나면 샘문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배설물 같은 우리를 주님의 보혈로 씻기시고 샘솟는 생명수를 마시게 하신다.
요한복음 4:14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사야 53:5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출세의 문, 재물의 문, 권력의 문, 쾌락의 문 등을 두드리고 있다.그러나 그 문을 지나면 허무와 절망과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열어주신 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다.
15절에서는 샘문을 재건했습니다.
실로암 옆에 있는 문으로 그 곳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실로암 연못이 생기기 전에도 옆의 기드온 골짜기 근처에 물웅덩이가 많았기 때문에 샘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충만”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문은 미스바를 다스린 유다지파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재건하였습니다.
7. 수문(水門) 3:26 / 말씀의 물로 정결케 됨
그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여 동쪽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민 망대까지 이르렀느니라.
물을 길으러가기 위해서 드나드는 문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있었다. 나아가 수문앞 광장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가 백성들을 모으고 말씀을 선포하며 백성들을 깨운 곳이었다.
8:2-3 /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8:16 /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메마른 영혼들이 (생명수)를 마시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생명수의 문이 되셨다.
요한복음 7:38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계시록 21:6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 /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요한계시록 22:17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수문은 느디님 사람들이 맡았다.
느디님 사람들은 기브온에 속하여 여호수아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종이 된 사람들이었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과정에서
전쟁포로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했다.
성전에서 잡일을 하던 종으로 살다가 바벨론 포로로 함께
잡혀갔다.
그 후 포로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돌아와도 또 종의 신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왔다.
시편 84:10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오늘의 느디님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의 선택을 오늘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6절에서 나오는 수문은 실로암 연못 위에 있는 문입니다.
영적으로 “말씀의 물로 정결케 됨”을 의미합니다.
기드온 골짜기의 물들이 많으므로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의 식수 공급을 위해 그 문을 통해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이 문으로 양이 들어온다면 물이 오염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각 다 문을 정해서 역할에 맞게 이용하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 동대문 근처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시구문이 따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에는 역할에 따라 나눠지는 것입니다.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마문은 왕궁에 이르는 말이 드나드는 문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문에서 처형된 여왕 아달랴 이야기(역대하 23:15)
이에 무리가 그(아달랴)에게 길을 열어 주고 그가 왕궁 말문(마문) 어귀에 이를 때에 거기서 죽였더라.
아달랴는 북이스라엘왕 오므리의 딸로서 남유다로 시집을 가서 아합과 이세벨의 며느리가 되었다.
남편이 여호람왕, 아들은 아하시야왕, 친정아버지는 오므리왕, 시아버지는 아합왕으로서, 자신도 왕이 되려고 아들과 손자들까지 죽였다. 아달랴는 이세벨의 성질을 닮아 야심과 수완으로 이세벨과 같은 독부였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 여호세바의 활동으로 왕자 요아스 만은 구출했다. 이로써 다윗의 왕통이 단절되지 않은 동시에, 메시야의 계통을 계승해 주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활동에 의해 왕자 요아스의 옹립운동을 일으키고 요아스를 세우고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다.
아달랴가 이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옷을 찢으며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하며 부르짖는 것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어 마문 어귀에서 처형했다. 그리고 이어 바알의 신당을 헐고, 우상을 깨뜨리고, 또 바알의 제사장을 죽였다(왕하11장, 대하22장).
이는 마문 역사에 남는 교훈이다. 말을 타는 자는 스스로 권위를 높여서는 안 된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다. 결국 자신도 죽고 공동체에도 해를 끼친다. 아달랴가 죽음으로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세속적인 권위가 죽어야 영적 권위가 살아난다.
여기서 한나의 찬양을 보라.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오직 (예수)께서 (말)을 타시게 하라! 그러면 예수께서 당신을 (등) 뒤에 태우실 것이다.
제사장들이 마문과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들을 중수하는 데 참여했다.
자기가 사는 동네를 깨끗하게 하지 않고 다른 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딤전 3:4 [감독의 직분]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딤전 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딤전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28절에서 마문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문의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 군사의 선한 싸움”입니다.
이 문은 말이 드나드는 문으로 제사장들이 재건하였습니다.
성전에서는 말이 필요 없으므로 이 문이 성전 옆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말이 성전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 두었을 것입니다.
왕궁이 성전 서쪽 옆에 있었는데 말은 보통 비싸고 군사용으로 쓰이므로 왕실에서 이 문을 통해 말을 이용했습니다.
당시에는 왕이 없었으므로 이 문은 제사장들이 재건하였습니다.
아합의 딸인 아달랴가 왕궁 근처의 이 마문 옆에서 죽임 당했습니다(왕하 11:15- 21).
아마도 어머니는 이세벨일 것입니다(왕하 8:18).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예루살렘성의 동문은 성전의 동쪽으로 난 문과 일직선상에 있다.
에스겔 42:15 / 그가 안에 있는 성전 측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쪽을 향한 문의 길로 나가서 사방 담을 측량하는데
성전의 동문은 여호와의 영광이 들어오는 문이다.
세상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에스겔 43:4 /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 동쪽으로 난 문 하나 밖에 없다.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뜨는 방향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예수께서 양이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요한복음 14: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9절에서는 동문을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재건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는 레위인이고 성전의 문지기 계열입니다.
이 문은 성전으로 드나드는 중요한 문이므로 레위인이 지켰고 그래서 그 문지기인 례위인들이 재건한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은 동쪽으로 하나의 문만 만들어 그 곳으로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문의 영적인 의미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이 문은 감람삼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감람산에서 해가 떠서 비취면 동문으로 성전에 빛이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재림하실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0. 함밉갓문(Muster gate,검열문 / 12:39 감옥 문 / 라틴역 : 재판관의 문) 3:31 / 죄수의 문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이 문은 (군대)가 드나드는 문이다.
군인은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 않는다.
바로 함께 하는 공동체로 산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요.
하나님의 군대다. 군대는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
출애굽기 12:41 /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31절에서 함밉갓문이 나오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된 문 이름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다른 문은 다 한글로 번역했는데 이 문만 그대로 두어서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바꿔서 하자면 “죄수의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밉갓은 “점호하다”의 뜻입니다.
“죄수를 점호하다”는 것입니다.
그 문 옆에는 감옥이 있어서 죄인들을 매일 점호했을 것입니다.
이 문은 양문과 동문 사이에 있는 문으로 성전과 가까운데 죄인을 그곳에 둔 이유가 궁금합니다.
보통 죄인들은 골까기 문 근처에 감옥이 있어서 그 곳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지금 가보면 넓은 웅덩이에 지붕을 씌운 감옥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함밉갓문에 따로 감옥을 둔 것은 아마도 성전 제사에 있어 죄를 지은 사람을 끌고 나가서 가두는 곳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사를 방해하고 율법을 어기는 등 예배와 관계되어 문제를 일으킨 죄인을 멀리 골짜기문까지 데려가서 가둘 수 없으므로 성전 옆에 가까운 곳에 따로 감옥을 만들어 가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문의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배를 잘 드리는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문은 금장색 말기야가 재건하였습니다.
보통 문을 재건할 때 그 문과 관계된 사람이 중수하였는데 성벽을 재건할 때 죄인이 없으므로 중수하게 할 수 없으니 금장색 말기야는 부자이므로 그에게 재건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려운 사람은 어려운 대로, 넉넉한 사람은 넉넉한 대로 섬기게 하는 것이 공평합니다.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가장 심하게 무너졌었습니다.
죄인을 가두었던 방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 다시 양문으로!
3:32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양문에서 출발하여(1절) 양문으로 돌아왔다(32절).
성벽건축은 양문에서 시작해서 돌아와 양문에서 마무리 되었다.
인생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곧 양문을 재건하는 것은 곧 (예배)의 회복이다.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회복하여 든든히 세우는 운동이다.
화덕망대를 지나칠 수 없다(느헤미야 3: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화덕 망대>를 중수하였고
앞선 개역성경에서는 화덕망대를 ‘풀무망대’,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용광로망대’라 하였다.
성도의 삶에는 풀무질과 같은 (고난)의 시기가 있다.
고난은 영광의 화목이다!
로마서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베드로전서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또한 이 망대에는 화덕이 있어서 불을 피워 연기를 내어 신호를 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우리의 (기도)는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게 하는 사역이다.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눅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
지금까지 살펴본 문들 외에도 성경 곳곳을 살펴보면 예루살렘 성벽에는 다른 문들이 있었습니다.
에브라임문(느 8:16)과 베냐민문(렘 37:13) 등 각 지파가 드나드는 문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에브라임문은 모퉁이문에서 200m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첫문(슥 14:10)은 엣문과 에브라임문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높은문(대하 27:3)은 “주의 전에 높은 문”의 의미가 있는 문으로 파수꾼의 문이고 왕궁과 성전 사이에 있는 문입니다.
또 안문(겔 8:3), 새문(렘 36:10), 가운데문(렘 39:3) 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여러 번 무너지고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고대의 문과 성벽의 모습과 지금 성벽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따라서 지금 있는 문과 성경에 나오는 문은 이름과 위치가 조금씩 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 각 층, 각 족속이 연합하여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미디안, 레갑, 느디님 사람들을 배우면서 이 내용도 궁금하실 것 같아서 연구해보았습니다.
각각의 문을 재건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드나드는,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문이기에 돈을 들이고 노력을 들여서 앞장서서 재건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 나라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재난이 발생했을 때 방치하고 무관심하게 멀리서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내가 관계된 곳이라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부분이 약한지 잘 살펴보고 내가 쌓아서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3장 성벽을 세우는 사람들
전도서 9:10,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느헤미야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중의 일부가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고향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 와서
'여호와의 새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파괴된 성전을 다시 짓는 일과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에
걸쳐 성벽을 수축하려고 하였지만 그때마다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였고 백성들의 사기 또한 저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하여 아닥사스다 왕이 성벽 재건을 허락함으로 느헤미야가 주전 444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감동으로 주신 비전을 제시하면서 소집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성벽 재건에 참여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들에게 성전
재건의 필요성과 더불어 이 일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확신을 불어넣으며 무리들의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곤경은 너희
눈에 보는 바와 같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성문은 불에 탔다면서 먼저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을 무리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합니다. 성벽 재건은 단순히 무너진 성벽에 대한 개축 공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을 대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 (identity)을 회복하기 위함이라.
나라를 세우자. 역사를 만들자. 미래에 도전하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페르시아 왕조차도 이 사역을 돕는다는 느헤미야의 설명을
들은 지도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마음이 뜨거워지며, 오랜 동안 잊어왔던 선택된 백성들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고,
성벽 재건이라는 사명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Let us start rebuilding. 모든 거민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벽 재건의 선한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벽의 둘레는 4 마일, 두께는 1 m, 높이는 5 m 이상
되는데 느헤미야는 불과 52일 만에 성벽 재건에 성공합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 일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성경적 형통의 원리를
살펴보고 교회당 건축을 앞둔 저희 교회에 적용하면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고자 합니다.
1) 리더들의 솔선수범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먼저 일을 시작하면서 백성들에게 본을 보입니다. 제사장들이 북쪽 성벽을 맡아 공사에 임했던
것은 그 곳이 성전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양문의 기둥을 놓고 문짝을 달았으며 함메아 망대에서 하나넬 망대에 이르는
구간에 돌을 쌓아 성벽을 건축하였습니다. 다른 문에는 '성별한 후에'라는 말이 없이 그냥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양문에 대해서는 '성별하고 문짝을 달았다고 언급한 것은 이 양문이 다른 문과는 달리 성전과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양들이 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 인접한 베다스다 못(참조, 요
5:2-9)에서 깨끗이 씻은 후에 이 문을 통하여 성전 구역으로 운반되었기에 양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제사장 가문의 사역을 제일
먼저 기록한 것은 예루살렘 성벽 중수 사업의 종교적인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으로 새 예루살렘을 예표하였기 때문입니다.
2) 역할의 분담
성벽 재건은 성벽 북쪽에 있는 양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계의 반대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3장은 성벽 중건 사업에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맡은 관할 구역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각 집안별로
작업량과 장소를 할당하여 그 일을 감당하게 하였는데, 이는 일의 책임 의식을 고취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의 신앙적인
자세를 다지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각 지역별로 분할하여 해당 지역의 거주자들이 자기 지역을 할당하여 성벽 중건 작업을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1) 자기 집 부근의 성벽을 쌓도록 할당된 백성들은 개인적으로 열심히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시간을 낭비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성벽 건축에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을 하는 자세는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3장에만 28번이나 ‘그 다음에’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사용됩니다.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우는 것은 크고 힘든 일이지만 각 사람이 자기의 몫을 감당하였을 때 가능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그 다음 사람이 그 다음 부분을 잘 감당하면 결국 전체가 이루어집니다. 느헤미야는 이
공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성벽 공사를 42 개 부분으로 구분하고 이것을 38개 가문에 분담시켰습니다. 역할을 분담함으로 일을 능률
있게 하고, 책임 의식을 고취합니다.
교회의 사역도 목회자가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역할을 분담해야 합니다. 엡 4:12에 의하면 목사의 하는 일은 성도들을 잘
훈련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찬양대,
교사, 친교, 청소, 비품 관리, food bank에서 음식 분배 등등. 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금년에 어떤 사역부서에서 섬기기
원하십니까? 아직까지 결정하지 않으신 친교실 분들은 벽에 붙여놓은 신청서에 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3) 공동 참여
본문에는 대제사장 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평민에 이르기까지 각기 한 부분씩을 담당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한 책임자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지위고하,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각계각층에서 참여합니다.
이 공사에는 유다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앞장서서 일합니다. 성전에서 가장 천한 일을 담당하는
느디님 사람들이 자기들이 거주하는 성전 망대 주변 지역을 재건합니다. 각 지방의 통치자들 즉 예루살렘 지방, 벧학게렘, 미스바,
벧술, 그일라 지방을 다스리는 자들의 아들들도 성벽 중건에 참여합니다. "금 장색, 향품장사"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비교적 고급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자기의 일들은 잠시 접어둔 채 성벽 중건에 참여합니다. 레위인도 일반
상인들도 참여합니다. 이들 뿐 아니라 개인들도 참여합니다. 관리의 아들 르바야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신 일할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수고하였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자기에게 할당된 직임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였습니다.
- 특히 여성들이 참여합니다.
예루살렘의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인 살룸이 자기 딸들과 함께 성벽을 보수하는데 참여하였습니다. 여성들의 지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여성들의 헌신이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물질적으로 도운 사람들도 주로 여인들이었습니다. 눅 8장에
보면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경건한 여성들의 수고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원근각처에서 참여합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성 밖에 거주하는 자들도 이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사는 자들은 성벽 부근에 사람이 살지
않은 지역에 할당되었습니다. 여리고(2), 드고아(5, 27), 기브온(7), 미스바(7)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를 속여 조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던 족속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일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20km 쯤 떨어진 드고아에서 온 평민들도 동편 성벽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일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분문은 성읍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시중의 쓰레기와 오물을 실어 나르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와 아들이 그쪽 부분을 담당하였습니다. 지도층이 솔선수범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화장실을 청소해야 하고, 어지럽혀진
방을 깨끗이 해야 하고, 친교 후에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 주보를 접어야 하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일을 하고
싶어도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할 수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큰
것, 작은 것, 더러운 것, 천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4) 사역에 대한 열정
생물 시간에 리비히의 ‘최소율의 법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널빤지로 만들어진 통이 있는데 그 높이가 다르다고
가정합시다. 그 통에 물을 부어 넣을 때 어디까지 물이 차겠습니까? 길이가 가장 짧은 널빤지까지 물이 차오를 것이요 그 이상은
아무리 부어도 물은 다 새어 나갈 것입니다. 성벽 건축은 모든 구간에서 튼튼히 잘 지어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열심을 내어
성벽의 99%를 잘 지었다 할지라도 1%가 여전히 무너진 상태로 있다든지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다면 대적들이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올 것이요 그렇게 되면 99%를 짓는데 들인 노력이 헛수고가 됩니다.
일부 미온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나 대체로 자기가 맡은 일들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일이 어려운 곳이나 쉬운 곳이나를
막론하고 불평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건축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3:20절을 개역성경에서는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였다고
나옵니다. '한 부분'이라고 번역된 말은 '둘째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제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룩은
제사장으로서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먼저 한 공사를 끝내고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까지 또 다른 부분을 맡아
일하면서 여호와께 대한 열심 있는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 줍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배당된 공사를 먼저 마치고 또 다른 일에 투입된
경우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19, 24, 27절).
하나님의 일은 특정 개인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마음이 될 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한마음이 될 때 인간적인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열과 성을
다하여(20절) 참여해야 합니다. 한 마음으로 그들이 가진 달란트와 자원을 합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협동의
유익입니다. 자신의 일을 감당하고 남을 돕는 사람들은 공동체에 뜨거운 열성을 불어넣습니다. 성도 모두가 각기 한 분야씩을 분담하여
그 일을 책임지고,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참여할 때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거둡니다.
* 하나님의 일에도 비협조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드고아 집안의 어떤 유력자들은 공사 책임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협조하다'라는 말은 ‘어깨를
들이대다’는 뜻이므로 그들이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기록이 3장에 포함된 것은 백성들 모두가 공사를 찬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많은 역량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꾼으로
남았습니다. 성벽 중건 사역은 느헤미야 개인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모두 힘을 합하여 참여하는 사역에 그들이 어떤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계속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하다보면 드고아 귀족
같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도리어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그 성벽 중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원근각처에 사는
사람들이 다함께 모여 성벽 중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3장에 나타난 성경적인 원리는 솔선수범,
역할 분담, 공동 참여, 그리고 열정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공동체에서 필요한 업무 수행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원리를
우리의 사역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1)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지으려면 시간도 들여야 하고 물질도 바쳐야 하고 육신의 힘도 써야 합니다. 이 일은 느헤미야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지 생각한다면 아무도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드고아 귀족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권리만 찾을 줄 알았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는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인의식이 있었기에 힘들지만 성벽 중건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성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이 성을 지으면 우리가 대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성은 제사장들의 성도 느헤미야의 성도 아니요 하나님의 성이요, 우리의 성이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요단강물을 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으로 들어서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제사장들의 발이
강물에 잠기자마자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 흐름을 중단하고 멀리 밀려올라가 쌓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믿음의 발을 내디딜 때 길이 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발을
디뎌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그 발을 먼저 내디디려면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요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는
주인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교회는 목사나 어떤 특정인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교회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섬겨야할 우리 교회라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주인 의식을 가질 때 자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도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출 35:21) 참여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진대 기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섬기되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2) 하면서 자원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희생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와 더불어 일한 사람들은 사방에 대적들이 여전히 존재하여 안전을 위협받고 포로에서 귀환하여 아직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던
시절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이 성벽 중건공사를 할 때에 일에만 몰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방해할지 알 수 없었기에 한 손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습니다. (4:17) 겪은 고통이 클수록
성취한 사역은 위대하며, 고난이 클수록 영광도 더욱 빛납니다.
when you are comfortable, you don't really grow.
편안할 때 제대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 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의식을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은 그대로 있는 것이 뒷걸음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2월부터 본당 사용료를 3700불에서 5000불로 올리겠다는 통보를 건물주로부터 받았습니다. 게다가 교육관을 쓰려면 추가로 돈을 더
지불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건물주의 처사가 지나치다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난 10년 동안 이 장소를 사용하였으니 이제는
주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는 사인으로 생각됩니다.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 속에 발전해왔다고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습니다.
우리 앞에 건물 사용료 인상이라는 당장의 도전이 있습니다. 교회당 건축이라는 더 큰 도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이미 건물이 마련된 곳으로 가서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 번 해보자는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도전해보시겠습니까?
하만이 페르샤 제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다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만의 요청에 따라 어인을 찍어 유대인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립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서 모르드개는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에스더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그 앞에 나아갈 경우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공포된 조서를 거두도록 왕을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왕비의 자리에 연연하여 편안하게 있기보다
민족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담대하게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에스더의 희생이 있었기에
유대인은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막 8:35) (If anyone wishes to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자기를 당장 부인해라. 네 십자가를 당장
져라.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따르라. 이것이 주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뿐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기뻐합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육신적인 박해를 받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때로 자기의 계획이나 일을 유보하거나 희생하는 것도 고난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3장에 나타난 성벽 공사에 참여한 자들의 명단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그 이름들은 성벽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
것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이름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 이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후세에 그들의 이름을 후손들이 볼 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반면에 드고아 귀족의 자손들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교우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원하여 주의 일을 감당하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며 자기를
포기하는 자세로 주님의 몸 된 이 팔로마한인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 교회역사를 보면서 목사와 장로들이
함께 일어나 성전의 기초를 놓고 성별하였고, 그 다음은 어떤 교우들이 음향시설을 기증하였고, 그 다음은 어떤 교우들이 페인트를
칠하였고, 그 다음은 어떤 교우들이 실내장식을 하였고, 그 다음은 어떤 교우들이 조경을 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52일간의 예루살렘 중건 역사를 통하여 공동체적 참여의 위력을 경험하였습니다. 비록 포로에서 귀환한 별로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그들이었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얻어진 느헤미야의 영력,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바탕으로 한 계획, 낙심한
백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역사 세우기에 동참하자는 느헤미야의 호소,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지음으로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 회복을 원하는 백성들의 결단과 헌신 등이 합쳐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2007년도 저희 팔로마한인교회에서 벌이는 귀한 역사에 한 마음이 되어 참여합시다. 성벽을 재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어깨를
서로 들이대고 참여합시다. 팔로마 공동체의 하나됨의 위력을 보여줍시다. 우리가 드린 모든 수고를 주님께서 기억하실 것입니다.
건축하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기도로 참여하는 사람들,
물질로 참여하는 사람들, 손과 발을 움직여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마리아의 고백을
각자의 고백으로 삼으며 온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팔로마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되어 나아가면서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가랴(Hagaliah) / 여호와께서 막으심
느헤미야(Nehemiah) / 여호와에게 위로를 받으심
하나님(Hanani) / 여호와는 자비하심
8월 30일(월)
느헤미야 2장 / 하나님께 묵도하고(4절)
♦ 8월 3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2: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께 묵도하고(1절)
♦ 성구 :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願)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黙禱)하고.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I prayed to the God of heaven)”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묵도한 것은 평범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올라왔던 사람으로부터 당시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된 상태로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삼 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어떻게 하면 다시 쌓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느헤미야에게 “왜 안색이 좋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 순간 왕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 잠간 기도한 것이 묵도(黙禱, silent prayer)입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은 세계를 통치하는 왕입니다.
최고의 권력자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던 포로로 끌려온 유다 사람의 후손으로서 다만 하늘의 하나님에게 지혜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향 땅의 형편을 아뢸 수 있었습니다.
만일 왕의 질문에 엉뚱한 말을 한다면 무서운 형벌이 떨어질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아하수에로 왕은 연회 자리에 왕후를 불렀으나 왕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왕후의 위를 폐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닥사스다 왕은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의 묵도는 지난 삼 개월 동안 줄기차게 기도했던 모든 것을 아주 짧게 아뢸 수 있는 기도자의 속사정을 진솔하게 아뢸 수 있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소리도 없고,
눈도 감을 수 없고,
마음속으로 “주여 할 말을 내게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런 때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는 일에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내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만이 갖는 기도 응답의 비밀을 신앙생활의 무기로 잘 활용하여 신앙생활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기도하는 이 시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 2:5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느헤미야 2: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느헤미야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느헤미야 2:9-10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런 사실을 통해서 볼 때에 다니엘서의 벨사살이 다니엘이 허구의 인물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 고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비록 바벨론 여러 문헌에 벨사살이 법적 인 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고고학 자료들은 그가 실질적인 통치자였음을 분명히 증거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기록 의도가 역사적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닐지라도 반대로 역 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경 기록의 역사성은 성경 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번 확 증하는 것입니다.
「나보니두스와 벨사살」(Nabonidus and Belshazzar, R. P. 도허티, 1929년)이라는 책에서는 벨사살의 어머니는 니토크리스였고 니토크리스는 느부갓네살(2세)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였다면 느부갓네살은 벨사살의 외할아버지였던 셈입니다.
고대 근동 국가에서 왕들이 잔치를 배설하고 귀족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 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이 베푼 연회는 정상적인 연회가 아니라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방탕한 것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벨사살이 연회를 열고 있을 당시는 바사와 고레스 2세가 바벨론 제국을 다 점령하고 수도인 바벨론 성을 2년 동안 포위하고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 밤에 벨사 살 자신이 죽게 될 그런 급박한 상황에 잔치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생 명과 나라의 존폐가 경각에 달려 있는 위태로운 시기에 자신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온 세상에 드 러내려고 한 듯이 술에 취하고 방탕하는 비 정상적인 대 연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5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 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그 때에 무리가 술에 취해 성전 기명 모독, 음주, 향락 등 점차 광적인 향락 상태로 고조되어 가던 그들의 악행이 우상숭배로 절정에 이르렀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궁극적 원인이 절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한 데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 편의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왕이 얼굴 빛이 변하고 번민하여 넓적다리가 녹는 듯 하고 무릎이 서로 부딪칩니다. 세상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촛대 맞는 편 흰 분벽 위에 있는 글을 촛불로 인해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때에 벨사살이 공포에 싸여 소리질러 말하기를 바벨론 박사들을 불러 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들이 왕 앞에 서자 왕이 말하기를.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어주는 사람은 자주색 도포를 입혀 주고 금목걸이를 걸어주며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높은 자리에 앉혀주리라." 제일 먼저 불러들인 사람 들은 바벨론 박사들이었습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징계로 정신 이상으로 일정 기 간 동안 왕위에서 쫓겨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건을 예언하였던 다니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벨사살이 어째서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 한 다니엘을 부르지 않았으며 태후의 깨우침이 있은 후에야 다니엘의 존재를 기억하게 되었을까 요?
벨사살은 유대 사람을 경멸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왕권이 바뀌면서 다니엘과 유대인들을 질투 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벨사살 왕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정권 하에서는 다니엘이 실권에서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연회에 참석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을 경멸하였고 유대의 하나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왕의 박사들이 다 들어 왔으나 역시 한 사람도 그 글을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박 사들이 홀연히 나타난 손가락이 쓴 글자를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과 공포가 급증했습니다. 연회 에 초대된 귀인들도 혼비백산하여 놀라 동요하고 혼란에 빠져 그리하여 흥겨움으로 인해 소란 하고 떠들석 하던 분위기는 멈추어지고 연회장은 갑자기 불안감으로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의 박사들이 그 글을 해석하지 못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동요와 혼란의 상태에 이르렀습 니다. 이 때에 태후가 소란한 연회장에 대해 듣고 연회장으로 들어 왔습니다.
‘16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푼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면 네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걸어 주어 너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 하니’
‘18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 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에서 다니엘은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징계로 정신병에 걸려 폐위되었다가 하나님의 주 권과 위엄을 알게 된 후 다신 회복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느부갓네살 시대의 융성을 허락하 신 분이 벨사살 왕이 그토록 경멸하는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며 교만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왕을 폐위시켰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한글 음역에서는 ‘바르신’으로 음역하였는데 그 앞에 ‘그리고’ 또는 ‘그러나’ 라는 뜻을 가 진 접속사 ‘우’가 결합되어 25절에서는 ‘우바르신’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25절의 ‘우 바르신’과 28절의 ‘베레스’는 복수와 단수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 동일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복수와 단수 사이에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양자는 동일한 단어 로 취급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바르신’은 또한 ‘바사인’이란 뜻도 가지고 있고 ‘나누다, 조각을 내다’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사실과 오묘하게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29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에서 다니엘의 해석이 벨사살 왕 에게 아주 불리했지만 일천명의 귀족들 앞에서 한 약속이기에 자신의 제안대로 다니엘에게 상금 과 셋째 치리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 바벨론제국의 멸망과 멸망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성경의 놀라운 예언을 알아보 겠습니다. 바벨론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 왔습니다. 최초 바벨론은 니므롯이 창시자 였으며, BC 18세기, BC16세기의 고대 바벨론은 함무라비왕 때 가장 왕성했습니다. 그 이후에 점점 약해져 앗 수르에 멸망을 당합니다. 바벨론은 멸망은 했지만 일부가 살아남아서BC 626년 나봇폴라살은 갈 대아인을 모아 신 바벨론을 건설합니다. 그 아들 느부갓네살 왕 시대에 와서 바벨론제국은 강대국 이 됩니다. 바벨론제국의 성은 시날평야의 유브라테스강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바벨론성은 유 브라테스강이 한 가운데로 흘렀고 바벨론성에 도착한 유브라테스강은 세 갈래로 나누어져 흘렀습 니다. 한 줄기는 바벨론성 안으로 흐르고 두 줄기는 바벨론성 주위를 감싸고 돌아서 흐르게 하였습 니다. 이렇게 한 것은 누구도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성벽의 두께가 30m인데 이 30m는 10층 건물 높이 입니다. 성곽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집니다.
성벽의 높이는 약120m인데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 둘레로는 유브라테스강이 흘렀습 니다. 성벽의 흙은 해자를 판 흙으로 벽돌을 구워 만들었고, 성벽의 벽돌은 콜타르를 사용했습니 다. 성벽 위에는 양쪽에 가옥들이 마주 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양편 가옥들 가운데 4두마차가 지나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바벨론 성의 규모입니다. 바벨론 도성은 성안의 집들이 3-4층 건물들 이 밀집되도록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 습니다. 그렇다면 난공불락의 바벨론성이 어떻게 해서 무너졌겠습니까?
그곳으로 군사가 들어가면서 바벨론 성이 힘 없이 함락되었습니다. 벨사살왕은 적이 성안으로 들 어오는 줄도 모르고 주색잡기에 정신이 없다 보니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그 화려했던 바벨론 제국은 한 순간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고레스가 바벨론 성을 무 너뜨릴 것을 성경은 이미 고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고레스란 이름을 지어주고 고레스의 앞길을 평 탄케 해주겠다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44장 26절~28절에,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 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유브 라데스 강물이 마르리라),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 하리라.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아프간 기독교인들 위해 기도해 주세요”
“탈레반은 기독교인이라는 걸 알게 되는 그 즉시 죽일 겁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인 카불에서 지난 21일 국민일보에 보내온 현지 기독교 사역자의 메시지는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의 긴박한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A씨(35)는 국민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탈레반이 장악하기 전에도 아프간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힘겨웠지만 적어도 죽이지는 않았다”며 “지금 기독교인들은 숨어 있고,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고 전했다.
아프간 남부 간즈니주 출신인 A씨는 카불에서 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아프간에서 99%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이기도 했다.
A씨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냐’는 질문에 “이슬람이 아프간을 덮은 약 900년은 아프간 사람들이 어둠 속을 걸은 시간”이라며 “2001년 유엔군이 아프간에 들어오면서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리고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젊은 세대에게 다가왔다”고 설명했다.
당시 20대인 A씨도 하나님을 만난 젊은 세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였던 나는 어둠 속에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며 “2009년 어둠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게 됐고, 이듬해부터 아내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카불과 인근 지역에 가정교회를 세웠다”고 말했다.
그가 이끄는 10개의 가정교회는 각각 5~8명 정도가 모여 예배하고 제자훈련을 받는다.
예배당이 따로 없어 공원, 자동차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났다.
아프간 문화에 맞춰 아내는 여성, A씨는 남성 성도를 담당했다.
한국과는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인연의 과정은 강대흥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사무총장이 대신 얘기해 줬다.
강 총장은 “2017년으로 기억한다.
A씨는 광명교회 세계기도자학교 아프간 대표로 참여했다”며 “당시 나는 태국 선교사로 A씨를 만났고 지금까지 연락해 왔다”고 말했다.
강 총장은 탈레반이 아프간 장악을 시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A씨와 아프간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 찾은 방법이 유학이다.
강 총장을 통해 국내 선교단체는 아시아 국가에 있는 한 국제학교를 연결해 줬고 A씨의 입학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뒤 A씨의 탈출 계획은 멈춰 섰다.
A씨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프간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 될 듯하다”고 말했다.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A씨는 아프간을 위한 계획과 비전을 놓지 않고 있다.
그는 “첫 번째 목표는 안전하게 탈출하는 거다.
탈출에 성공하면 외국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며 “그 다음은 외부에서 SNS 등 네트워크 기술을 활용해 아프간을 돕는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이어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아프간으로 돌아가서 아프간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도제목을 물었더니 당연하면서도 슬픈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다른 나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아프간 국민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06002&code=23111115&sid1=chr
美 복음연합, ‘탈레반에 대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미국 복음연합(TGC)은 21일(현지시간) 인터넷 홈페이지에 ‘탈레반에 대해 알아야 할 9가지’에 대해 글을 올렸다.
TGC는 “우리는 잔인한 이슬람주의 정권인 탈레반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밝혔다.
첫째, 탈레반이란 이름은 ‘학생’을 의미한다.
탈레반은 ‘학생’ 또는 ‘구도자’를 의미하는 파슈토어에서 나온 용어이다.
원래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전통적인 이슬람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동부 및 남부 파슈툰 지역의 종교 학생 (탈레반) 운동이었다.
둘째, 탈레반 학생들은 학교에서 코란과 전쟁 훈련을 받았다.
원래 탈레반 학생들이 다녔던 학교는 그들의 라이벌을 제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훈련을 받은 무장 단체로 조직됐다.
학생들은 공부에만 참여하는 그룹과 종교 전쟁에 참가할 준비를 하는 그룹 등 두 그룹으로 나뉜다.
18세 이상의 사람들은 당시 소련과 싸우고 전투에서 돌아올 때 학업으로 돌아간다.
셋째, 탈레반은 아프간 내전 동안 집권했다.
1979년 12월 당시 3만명의 소련군은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소련은 88년 철수하기 전까지 10년간 주둔했다.
소련 철수 이후 내전은 96년 정부가 탈레반에게 넘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공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구원을 위한 연합 이슬람 전선(United Islamic Front)으로 알려진 아프간 북부 동맹은 탈레반에 반대하기 위해 96년 말 결성됐다.
북부 동맹은 미군이 이슬람 정권을 전복시킨 2001년 9월까지 탈레반 정부와 방어 전쟁을 치렀다.
넷째, 미국 정부는 탈레반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2020년 2월,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미군을 철수하고 최대 5000명의 탈레반 전투 및 정치범을 석방하도록 요구하는 협정에 탈레반과 서명했다.
그 대가로 탈레반은 미국과 동맹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데 동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합의를 존중하기로 했으며,
“내가 직접 협상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미국 정부가 합의한 것이며 이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다섯째, 탈레반은 인신매매와 성노예에 가담했다.
탈레반은 집권하는 동안 강제 결혼과 성노예를 이유로 여성을 자주 납치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따르면 탈레반은 정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여성을 성노예로 매매했다.
좀 더 최근에 탈레반은 부도덕한 범죄 혐의로 기소된 일부 아동과 성인 성매매 피해자를 구금하고, 노동을 강요했다고 미 국무부가 밝혔다.
탈레반은 또 남성 성매매 피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 소년을 성인 인신매매범과 동일한 책임이 있는 범죄자로 기소하기도 했다.
당국은 소년 성매매 피해자들을 범죄 혐의로 소년원에 송환하고 몇 년간 가뒀다.
여섯째, 탈레반은 특정 이유를 위한 목적으로 소년병을 징집했다.
휴먼라이츠워치(HRW)에 따르면 탈레반은 나이별로 어린이를 모집해 훈련한다.
HRW는 “남자아이들은 6살부터 세뇌를 시작하고 최대 7년 동안 탈레반 교사 밑에서 종교 과목을 계속 공부한다”고 말했다.
탈레반이 모집한 소년들의 친척에 따르면 탈레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13살이 될 때까지 총기 사용, 급조폭발물(IED) 생산 및 배치를 포함한 군사 기술을 배웠다.
그런 다음 탈레반 교사는 훈련된 소년병을 해당 지역의 특정 탈레반 그룹에 소개한다.
일곱째, 탈레반은 인권을 짓밟은 역사가 있다.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악의 인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미 국무부가 밝혔다.
90년대에 탈레반이 집권했을 때 사회적 통제는 ‘악덕과 덕’의 경찰로 알려진 도덕 공무원에 의해 통제되고 운영됐다.
이들 관리는 지역 사회를 순찰하면서 복장과 품행, 수염 길이, 남성의 금요 기도 참석 여부, 스마트폰이나 기타 기기 사용과 관련해 탈레반이 규정한 사회 규범의 준수 여부를 점검했다.
여덟째, 탈레반은 소녀와 여성을 억압한 역사가 있다.
90년대에 탈레반이 집권하자 여자대학을 폐쇄하고 거의 모든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도록 했다.
탈레반은 여성의 의료 접근을 제한했고 복장 규정을 잔인하게 시행했으며 여성이 도시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했다.
아프간의 오랜 내전 동안 남편과 다른 남성 친척을 잃은 5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수입원이 없었다고 미 국무부가 전했다.
많은 사람이 소유물을 팔고 거리에서 구걸하거나 더 심한 경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구걸해야 했다.
여성들은 또 베일과 함께 부르카를 착용해야 했다.
보기가 허용된 부르카의 작은 메시 패널은 시야가 제한돼, 안전하게 길을 건너는 것조차 어려웠다는 증언이 많다.
아홉째,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인을 박해한 역사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소수 기독교인은 탈레반의 귀환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한 크리스천은 탈레반이 어떻게 신자들을 장악하며, 향후 어떻게 탈레반이 운영될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알려진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두려움을 퍼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미 15살의 독신 소녀가 있으면 탈레반 군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포스터가 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딸을 그들에게서 빼앗겨 탈레반과 강제로 결혼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뇌를 위해 종교학교인 마드라사로 보내질 것입니다. 부모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한 남성은 자신의 집이 현재 탈레반의 소유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공예품을 만드는 단순한 사람이고 그의 모든 재산은 집에 있습니다. 탈레반은 기독교인의 소유와 재산을 탈취하고 그들의 모든 여성을 빼앗을 것입니다.”
8월 28일(토)
느헤미야 1장 / 하늘의 하나님(4절)
16세기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당시 미술의 천재 미켈란제로에게 "시스틴 성당"에 "천지창조 벽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제로는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며 4년 동안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 날 미켈란제로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추기경이 미켈란제로에게 "내가 볼 때는 그림이 완성되었는데 무엇을 그렇게 그리는가?" 그러자 미켈란제로는 추기경에게 "내가 볼 때에는 끝났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성도들의 삶을 살아갈지라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생각이 곧 하늘의 하나님이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1∼11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늘의 하나님(4절)
♦ 성구 :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數日)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禁食)하며 기도(祈禱)하여.
스룹바벨 성전은 재건되었고, 에스라의 영적 개혁도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성벽이 훼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이미 준공되었으니 성벽 정도는 별 문제가 안 되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집도 벽이 무너지면 언제든지 침입자가 들어올 수 있기에 안정감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지고 불타버린 성벽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평신도 지도자 느헤미야는 수산 궁에 왕의 술을 맡은 관원으로 “하늘의 하나님(the God of heaven)”에게 기도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느헤미야를 바사 왕의 궁전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술 관원은 왕의 모든 음식을 주관하고 왕의 신변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맡았기에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만이 설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마치 야곱의 가족들을 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애급으로 보내셨던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의 교훈에서 오늘 내가 있는 그 삶의 자리가 나의 선택과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심어놓으신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그 일을 영혼을 구원하는 마음으로 바르게 정직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4절).
느헤미야는 성벽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애통하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게 됩니다(6∼10절).
느헤미야는 왕궁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으로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고 예루살렘의 현실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부르실 때 그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곧 사명이 됩니다.
오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것이 곧 나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대한민국이란 나의 조국이 주사파들의 손에 의해서 자유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자유를 바로 세우려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오랫동안 주사파들은 그들의 힘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에 북한 김일성을 세웠고(주체사상)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세웠습니다(자유민주주의).
그 결과 북한은 가장 가난한 빈곤국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경제 강국으로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어느 길을 선택하고 누구를 세워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할 매우 중요한 때라고 하겠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깨우쳐야 합니다.
선택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오늘의 선택과 결정이 자유대한민국이 주사파들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여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는 통일한국으로 자리를 잡을 것인가?
느헤미야가 왕 앞에 나가기 전에 먼저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한 후에 올바른 선택과 결정으로 복음으로 열매를 맺는 선교국가로 세워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는 사명을 실천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갖는 아픔과 고통은 사명을 자극하는 아픔과 고통입니다.
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겸손히 하늘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나를 심으신 그 자리에서 나의 사명을 찾고 그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며 열매를 맺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맡은 본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5bb3rVpLcA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늘의 하나님
1. 구별
2. 거룩(초월성, 완전성)
3. 통치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아멘
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BC 445년 11월 중순 - 12월 중순
봄, 가을(수산 궁)
겨울(바벨론 궁)
여름(메대의 악메다 궁)
느헤미야 1:6-11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 참조 / 시편 33:12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민족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하늘의 하나님(느헤미야 1:4-5)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창세기 24:3)
하늘에 계신 하나님
유대인의 하늘개념
오늘은 하나님을 수식하고 있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구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먼저 유대인의 하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하늘이라는 단수로 나오지만 희랍어 성경에서는 ‘호 엔 호
오우라노스’(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삼중의 하늘로 생각했습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파란 하늘이 있고,
그 위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두 번째 하늘이 있고
어떤 악도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보좌가 있는 세 번째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태가 하늘들 안에 계신 아버지라고 한 것은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은 세 번째 하늘에 계시지만,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과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악의 하늘도 주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이심을 기도할때마다 명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늘은 하나님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의 유대교적 표현은 하늘 영광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자신의 나라의 기원이 하늘과 관계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이란 말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 앞에 기도하는 우리는 땅에 있다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과 창조세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고 인간도 그 범주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여기서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를 이 질문에 비추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수많은 흔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편견과 아집에 강력하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이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계신 것과 선과 악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또렷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성경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기뻐하며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성격들을 성경 계시의 빛으로 해석해서 올바른
지식으로 드러내어 누구든지 그 지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1. 구별된 존재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에 당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모두 합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남아 있는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뜻을 정할 수 있는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든 인간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는 흔적을 가지고 연속성을 이루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셨음에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차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가 있습니다. 이러한 탁월한 질적인 격차를 성경은
거룩하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빽빽한 구름과 천둥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들려주신 율법속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선언이 묻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아 죽어가면서까지
백성들을 탄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이유는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택 받은 백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이 위기를 만나고 핍박을 당할 때 매일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던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거룩하심이었습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사도들의 눈이 열렸고 예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신명을 바쳐 가르치려 했던 교훈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복음 증거를 위하여 갇힌바 된 몸임에도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나라가 거룩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성경 곳곳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무엇일까요? 원래 이 거룩하심은
피조물들에게는 티끌만큼도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한적으로 당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과 제도,
물건과 도구들에게까지 이 거룩하심을 분여해 주십니다. 우리는 타락한 이후 거룩함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죄의 영향에서 피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주실 때 우리는
성도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모임이 거룩할 리가 없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거룩하신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를 거룩한 성도의 무리라고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거룩하심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느 한 순간에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전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며 나의 지성을 넘어서는 무한히
광대하시고 엄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성의 벼락을 맞고 자신이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는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이 무한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정말 티끌 같은 인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그 존재의 크기와 위대함은 곧 가치의 크기와
위대함과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 ‘후’하고 부시는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떨며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돌보시고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 분이 어떤 성품을 갖고 계신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런 속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에도 드러나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가운데
당신의 속성을 충만하게 드러내십니다.
한 가지 예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사랑도 있고 사랑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지 않아도 사랑할 줄도
알고 사랑 받는 것이 좋은 줄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 율법을 통해 자신이 끔찍한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차마 인간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보실 수 없어서 외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 완전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며 바로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조잡하게 흉내 낸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고 자신은 같은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도
죄악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 참회의 눈물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고 더러운 얼룩으로 물든 자신의 도덕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때 인간은 자기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모든 생각과 기대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3.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러한 자각을 하나님을 높이면서 표현하는 정수가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가소롭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우러나오는 사랑과 경건으로 경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건성의 삶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목숨을 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끝나도 종류만 다르지 또 다른 문제들이 등장합니다.
문제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죽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일어나도 해결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문제들에 에워 쌓여
고통을 받을수록 눈을 들어 위에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땅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우러른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충만하게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주권을 앙망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릴 수 있게 됩니다.
결 론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이 땅에서 생겨났지만 결국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도록 그 분을 앙망하며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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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느헤미야서는 저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은 에스라를 저자로 인정합니다. 이것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원래 하나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저작 연대 :
느헤미야서는 주전 445년에서 42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록 목적 :
성경의 역사서 중 하나인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회복 및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핵심 구절 :
느헤미야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 6:15-16,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요약 :
느헤미야는 바사에 거하는 히브리 사람이었는데 어느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축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보호할 성벽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그 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사용하시기를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사왕 아닥사스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느헤미야에게 복을 빌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사업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도록 하셨습니다. 왕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총독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반대와 고소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세워졌고 적들은 잠잠해졌습니다. 느헤미야로부터 용기를 얻은 사람들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완성될 수 있도록 풍성한 십일조와 보급품 및 인력을 바침으로써 성벽 재건은 52일 동안에 마쳤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은 다시 배도에 빠졌기 때문에그들의 단합된 노력은 매우 짧았습니다. 12년 후에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성벽은 강하지만 사람들이 약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한 후에 도덕을 가르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느 13:25). 그는 기도를 통해 참된 예배를
다시 회복시켰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준수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부흥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예표 :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그의 백성을 위해 열정적으로 기도했습니다(느 1).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열렬한 중보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느헤미야와 예수님은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로 중보하였습니다.
적용 :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경 본문을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도록 인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던 믿음과
순종으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리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며 그 진리들을 기억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며, 모든 영적 필요를 얻기 위해 그 진리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부흥을
보기를 바란다면(느 8:1-8),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영적 또는 육체적인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진심어린 긍휼을 가져야 합니다. 연민을 느끼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성경적인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 내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마음으로 우리의 시간과 돈을 바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허락하면 불신자들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 전체 요약
1. 명칭
느헤미야서는 70인역에서 ‘에스라 제2서’로 불렀는데 그 이유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느헤미야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느헤미야란 이름은 1장 1절의 주인공 이름에서 유래했다.
느헤미야란 말의 ‘하나님의 위로’란 뜻이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전반부(1∼7장)에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내용이고 후반부(8∼12장)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개혁으로 되어 있다.
2. 저자
혹자는 에스라의 저작으로 보기도 하나, 본서에 일인칭 화법이 사용되었고 체험적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느헤미야가 더 유력하다.
3. 기록연대
B.C. 420년경. 느헤미야 총독 재직 시기를 B.C. 444-425년경으로 볼 수 있으나 본서는 은퇴 이후의 기록인 듯하다.
4. 배경
바사의 전성기였던 아닥사스다 왕 통치기(B.C.464~424년)를 배경으로 하여 당시 이방인으로부터 수모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다인의 부흥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5. 기록목적
(1) 3차 귀환의 과정과 성벽중건의 역사를 보여 주기 위하여.
(2)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정착과 종교적 정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3)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이에 대한 인간 복종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6. 특징
(1) 회복의 책 : 포로로부터의 회복, 무너짐으로부터의 성벽재건, 잃었던 신앙의 회복, 언약의 갱신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분리의 책 : 이교도, 잡혼으로부터의 분리 등 이스라엘 백성의 성결에 큰 비중을 둔다.
7. 요절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 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6:15-16)
8. 내용과 주요사상
본서의 주 무대는 귀 한민들의 일상생활과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축한 성벽의 모형도이다.
① 에스라 : 에스라는 제사장이요 율법 학자였다(스7:11). 그는 아닥사스닥 왕 때 바벨론으로 부터 많은 유대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는 먼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이방 여자와 결혼한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이혼할 것을 명령하고 율법 준수를 강조하였다. 바벨론 포로가 되어 황야에서 눈물지었던 유태인은 과거의 모든 고통을 잊고 마음은 새로운 성도 재건에 정열을 불태웠다.
그는 또 조직적으로 종교 교육을 실행할 것을 계획하는 등 성전 건축과 종교심의 고취 혈통의 순화와 후세 교육의 강화 등 민족 재건에 주력 하였다.
② 느헤미야 :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닥 왕의 명령을 받고 예루살렘의 성곽을 제건 할 권한과 유다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에스라가 돌아온 후 10년 후 이었다.
이 때에 주변 여러 이방 민족의 방해가 있었지만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느헤미야는 백성을 무장시켜 일면 재건, 일면 국방의 중대사를 성공적으로 지도하였다.
그는 종교적, 사회적 부패와 나약을 극복하고 민족중흥과 개혁을 이루는데 큰 공을 세웠다.
9. 내용분해
1) 총독 느헤미야 (느1:1-7:73)
① 느헤미야가 권세를 갖고 고국에 돌아옴 (느1:1-2:20)
② 예루살렘 성곽 건축자들의 명단 (느3:1-32)
③ 무장을 하고 일함 (느4:1-23)
④ 대금업자들을 꾸짖음 (느5:1-19)
⑤ 예루살렘 성곽을 완성함 (느6:1-19)
⑥ 돌아온 자들의 명단 (느7:1-73)
2) 에스라와 느헤미야 (느8:1-13:31)
① 에스라가 율법 책을 백성에게 읽어줌 (느8:1-18)
②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송축함 (느9:1-38 )
③ 백성이 율법 준수를 맹서함 (느10:1-39)
④ 예루살렘 주민의 명단 (느11:1-36)
⑤ 각 족속의 명단과 축하 행사 (느12:1-47)
⑥ 느헤미야가 성전을 정화함 (느13:1-31)
10. 내용분해(소분류)
1) 느1:1 느헤미야의 첫 번째 귀국과 기도
① 느1:1 느헤미야의 첫 번째 귀국 ② 느1:4 예루살렘을 위한 기도
2) 느2:1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
① 느2:1 느헤미야의 요청이 허락됨 ② 느2:11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기 시작함
3) 느3:1 성벽 건축자들
① 느3:1 북쪽과 서쪽의 성벽 건축 ② 느3:14 남쪽과 동쪽 성벽 건축
4) 느4:1 성전 재건의 방해 자들
①느4:1 산발랏의 방해를 물리침 ② 느4:4 기도하는 느헤미야
③ 느4:15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5) 느5:1 느헤미야가 가난한 자들 도움
① 느5:1 백성들의 불평 ② 느5:6 느헤미야의 책망
③ 느5:12 백성들의 순종 ④ 느5:14 느헤미야의 양심 선언
6) 느6:1 대적의 음모를 물리침
① 느6:10 스마야의 거짓 예언 ② 느6:15 성벽 건축 완공
③ 느6:17 도비야의 위협
7) 느7:1 예루살렘 성 재건 후의 조치
① 느7:1 예루살렘 치리자 임명 ② 느7:5 첫 귀환민의 명단을 찾음
③ 느7:8 이스라엘 백성의 수 ④ 느7:39 제사장과 레위인들
8) 느7:46 느디님인과 솔로몬 신복 자손들
① 느7:61 혈통 불평인들 ② 느7:70 성벽 건축을 위한 헌물
9) 느8:1 초막절을 지킴
① 느8:9 백성들의 통회 ② 느8:13 초막절 준수
10) 느9:1 백성들이 죄를 고백
① 느9:1 백성들의 금식과 회개 ② 느9:4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기도
③ 느9:16 배반의 역사 회고 ④ 느9:32 포로 시대의 회고
11) 느10:1 언약에 인친 자들
① 느11:1 예루살렘의 새로운 사람들 ② 느11:1 귀향 민들의 정착지
③ 느11:10 예루살렘에 정착한 제사장들 ④ 느11:25 여러 정착지
12) 느12:1 제사장과 레위인들 성벽의 봉헌
① 느12:1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기록 ② 느12:27 예루살렘 성 봉헌식
③ 느12:44 백성이 성직자들을 받들다
13) 느13:1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옴
① 느13:1 이방인과의 분리 정책 ② 느13:4 성전 정화
③ 느13:10 십일조 규례 강화 ④ 느13:15 안식일 규례 강화
⑤ 느13:23 이방인과의 잡혼 경제 ⑥ 느13:29 느헤미야의 저주와 축복
11. 주제
예루살렘의 회복. 3차 귀환 이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재건 작업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사회, 정치적 개혁과 언약 갱신을 통한 종교 부흥을 기술함으로써 예루살렘의 현실적 회복과 영적 회복을 보여준다.
12. 배경
바사의 전성기였던 아닥사스다 왕 통치기(B.C. 464~424년)를 배경으로 하여 당시 이방인으로부터 수모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다인의 부흥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13. 기록목적
(1)3차 귀환의 과정과 성벽중건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2)이스라엘의 예루살램 정착과 종교적 정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3)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이에 대한 인간 복종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14. 특징
(1) 회복의 책 : 포로로부터의 회복, 무너짐으로부터의 성벽재건, 잃었던 신앙의 회복, 언약의 갱신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분리의 책 : 이교도, 잡혼으로 부터의 분리 등 이스라엘 백성의 성결에 큰 비중을 둔다.
15. 요절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 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6:15-16)
16. 결론
느헤미야의 성벽의 재건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이것은 미슈나에 많은 울타리 율법(fence law)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본래 울타리란 집을 보호하고 주인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듯이 유대인들이 울타리 율법을 만든 것은 그 율법을 보호하고 잘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론중심과 형식화로 변질되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안식일 법인데 이것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39가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외식주의에 빠지게 되어 주님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본래의 의도는 율법을 보호하고 잘 지키자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전인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성벽이 아름답게 세워져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고 성벽 재건을 시작한 것이다. 성전 건축 때와 마찬가지로 방해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먼저 유대인들이 능력도 없으면서 성벽 재건을 하려는 것을 비웃으면서 바사 왕을 배반하려는 저의가 아니냐 하면서 정치적으로 모함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의 원망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52일 만에 성벽은 완공되었다. 성벽이 완공된 후에 에스라의 개혁은 시작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율법 책을 낭독한 후에 해석하여 깨닫게 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오늘날 설교의 모형이다. 이때 함께 모여 율법을 들었고 기뻐하였으며,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으며 회개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