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2장- 14장 02/03/2024(토)

2-21-2024(수) 누가복음 14:7-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석에 앉으라(누가복음 14: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But when you are invited, take the lowest place, so that when your host comes, he will say to you, 'Friend, move up to a better place.' Then you will be honored in the presence of all your fellow guests.

상석(上席. the highest place)과 말석(末席. the lowest place)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다면 어느 자리에 앉기를 원할까요?
아마 모두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대한 비유의 핵심은 혼인 만찬에서 먼저 높은 자리에 앉으면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 자리를 내주면서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면 초청한 주인이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고 할 때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왕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잠언 25:6-7).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안식일에 고창병에 고생하던 사람을 고쳐주신 것에 대해서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은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관심을 갖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망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손님들이 앞을 다투어 높은 자리를 잡는 것을 보셨습니다.
저들은 누가 더 높고 중요한가를 자리를 통해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보려는 사람들의 가식적이고 과시적인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그들의 허위의식을 깨우치셨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손님으로 초대 받았을 때 안내자가 인도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판단하여 높은 자리에 먼저 앉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지체가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어주고 끝자리에 앉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먼저 끝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주인이 그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부르면서 다가와 더 높은 자리로 안내를 해 주어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높은 자리와 끝자리를 대조하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비유라고 하겠습니다(눅 13:30).

신앙이란 항상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들도 나를 낮추고 또 낮추므로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겸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11절에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지만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 질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잠언 29:23, 겔 21:26, 눅 18:14, 마 23:12, 약 4:6,10,벧전 5:5-6).
이 교훈은 신랑 메시아의 결혼 만찬에 초대받은 자들과 신자들 모두를 위한 말씀이다.
제자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자신이 가장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나를 드러내고자 상좌에 앉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늘 낮은 자세, 겸손한 자세로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는 다는 사실을 늘 헤아려서 낮은 자리 말석에 앉는 낮은 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2-20-2024(화) 누가복음 1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창병 든 사람(누가복음 14: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There in front of him was a man suffering from dropsy.

고창병(蠱脹病)

고창병(5203) 휘드로피코스( hüdrōpikŏs)  ὑδρωπ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5203

1. 수종 걸린.  2. 수종으로 앓는. 3. 눅 14:2.
발음 [ hüdrōpikŏs ]
어원 / 5204와 3700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수종(水腫) 걸린, 수종으로 앓는, 눅 14:2.

* 5204

ὕδωρ,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5204
1. 물.  2. 마 3:16. 3. 막 1:10
발음 [ hüdōr ]
어원  /  5205의 어간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물, 마 3:16, 막 1:10, 눅 7:44, 요 4:7.



* 3700.  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행 1:3.
발음 [ ŏptanŏmai ]

뜻풀이부

1. 나타나다, 보여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 1:3.

* 수종(水腫) : 물 수, 종기 종 
1. (신장성(腎臟性)ㆍ심장성(心臟性)ㆍ영양(營養) 장해성(障害性) 등(等)에 의(依)하여)몸이 조직(組織) 간격(間隔)이나 체강(體腔) 안에 임파약ㆍ장액(漿液)이 많이 괴어 몸이 붓는 병(病). 물종기.
2. 부증(浮症).


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 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도르'(*)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 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 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미쉬나, shabbat 7:2).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일.

이러한 금지 사항들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으며, 반대로 우상숭배자라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그 죄를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탈무드, shabbat 118b).
이밖에 더 자세한규정들에 대해서는 미쉬나의\"안식일\"(shabbat)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엣세네파들은 안식일을 바리새인이나 보통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다. \"다마스커스계약\"(Covenant of Damascus) 은 자세하게 안식일에 지켜야 할규정들에 대해서 기록하고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다(당시의 랍비들은1Km까지는 허용하고 있었다. 참조.행 1: 12).
엣세네파들은 마실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았고, 그들 가까이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엣세네 종파는 다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겨도 되도록 허락하였다.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겼을 때에는 7년동안 가두도록 규정하였다.
위에서 언급 한대로,안식일을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금지사항들은 범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용납되었다(미쉬나, Yoma 8: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던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마 12:9-14, 막 3:1-6, 눅 6:6-8).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었다. 다만 그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아니면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는그를 치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예수의 경우에는 환자(손 마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날까지기다렸다 치료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심으로 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랍비 유다(Judah the Prince) 와 메이어(Meir)는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양을 꺼내 주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하물며\"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하셨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려 구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다든지 아니면 그 동물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매트레스 같은 것을 그 구덩이에 넣어 주도록 했다.
예수께서는 또한 안식일에 18년동안 귀신에 잡혀 있던 여자를 고쳐 주셨다(눅13: 10-17).
이에 대해 회당장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꼭 고쳐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비난하였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된 것은 안식일에 응급 환자가 아닌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데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끌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박하셨다(15-16 절).
이러한 예수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되기도 한다).
"소는 매일마다 물을 주어야 하며, 이는 안식일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일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아니하면, 그 소는 큰고통을 당할 것이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랍비들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년동안 류머티스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전형적인 성서 해석 방법인 kal va-homer ("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을 사용하셨다).
즉 동물도안식일에 풀어 주는데 \"하물며\"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기초해서
예수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셨던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셨을 때에도 예수는 똑같은논리를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한편, 예수께서도 말씀하신것처럼 미쉬나와 탈무드는 안식일에 어떻게 동물들을 돌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요 5:12).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금지 사항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을 어겼다고 그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편,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까서 먹은 것때문에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기도 했다(마 12:1-8; 막 2:24-28, 눅 6:1-5).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임과 동시에 그것을 까부는 일로 비쳤다. 이러한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범하지않았다. 다만 제자들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을 내버려 둔 것에 대하여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금지된 거룩한 떡을 먹은 것(삼상 21:1-6)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떡을 먹었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율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토라(율법서)에서는 그러한 명백한 규정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예수의 이 말씀을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선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랍비들도 이렇게 가르쳤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Mekilta Exodus 31:13, 14; 탈무드, Yoma 85b).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시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나에게 분개하느냐?\"(요 7:23).
이러한 규정도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전통)가운데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잘 알려진 랍비들의 결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법을 따라서 아이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할례 받는 날이 안식일이 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주도록 랍비들은 결정을 했다.
안식일에 할례받는 것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할례를 주기 위해 할례에 사용될 도구를 운반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위에서 본대로 금지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 사항으로 허락을 했던 것이다(미쉬나, Shabbat 19:1).
그러나 아이의 건강 때문에 8일째에 할례를 받을 수 없을 경우는 아이가 회복된 다음에 받도록 했다(미쉬나, shabbat 19:5).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할례도 베풀거늘“하물며”사람의 전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고 반박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보편적인 해석 방법이었던 kal va-homer(\"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를사용하셔서 토라와 구전법을 해석하셨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규정을 부정하거나 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한번도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신 적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구전법)에 근거해서 자신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이 그들의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주셨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고창병(蠱脹病. dropsy)"이라고 하지만 새번역 성경에서는 "수종병(水腫病. dropsy)" 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휘드로피코스(hüdrōpikŏs. ὑδρωπικός)" 라고 합니다.
'고창병'이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질병이라고 하여 새번역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수종병'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병은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혈액 속으로 흘러야 할 물이 혈액 밖으로 나와서 몸이 붓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죄인들을 가리켜 영적 병자로 비유합니다.
따라서 '고창병'은 영적으로 어떤 병적인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창병'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왜 생명의 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병을 윱ㄹ하고 그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거나 더 악화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물인 말씀을 율법으로 읽고 적용하여 얻게 되는 병을 말합니다.
그 좋은 예가 "안식일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인들이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은 후에 거듭난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토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법으로 이해하고 행하므로 생명이 되어야 할 말씀이 오히려 죄인들을 고창병 또는 수종병에 걸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문제로 자주 부딪혔던 것입니다.
그만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문제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경 안에서 이렇게 생명과 같이 여기는 법이 왜 없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처럼 간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마치 율법적으로 인식하고 지킨다면 그것은 곧 고창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킨다면 율법의 범위를 벗어나 더 큰 긍휼과 자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한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더 높고 깊고 넓게 이해하고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명령대로, 그 율법대로 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단지 법을 지키는 행위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곧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말씀(물)에 의하여 고창병이 든 것이 아닐까요?

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며 고창병에서 자유롭게 되어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는 은혜로운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우리의 고창병, 참 예수를 만나서 안식일에 고침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치유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먼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떤 질병으로, 어떤  정도로 아픈 환자이든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마침내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셨기 때문에 병자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 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수종병(Dropsy)은 다른 말로 고창병이라고도 합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그러니 수종병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의 마음은 어떠했겠는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류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문제가 생기고, 그 증상이 만연하며, 복수가 차면서 몸이 퉁퉁 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심하십니다.

치유를 받아 생명의 연장을 보장받고, 건강하고 힘차게 사시며, 마음속에 기쁨과 희망과 행복이 넘쳐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서 치료와 회복과 쉼의 은총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항상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고창병든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이지만 실은 이 환자와의 관계성 보다는 예 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관계성에 더 집중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고창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셨기도 하시겠지만 주님은 이 환자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이 환자를 이용해서 바리새인들을 교육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에 들어가셨다.

1. 예수님과 바리새인?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 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눅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눅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 는가 엿보니”

눅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는 눈?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23:13 “화 있을진저 !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 이 먹는다' 하더라”

2.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시고 주님은 오늘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들어가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때에도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다)

①언제? 안식일에

②무엇을 하시려? 잡수시려

③어디에? 두령의 집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고, 안식일에 일하는 자라고 비판하는 그 잘 에 주님은 바리새인의 집에들어 가신다.

주님을 죽일려고 하는 그 바리새인들의 두목의 집에 들어 가신다.

왜 주님이 그 집에 들어 가시는가?

진정으로 배가 고파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이 좋아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의 꼬임에 바졌는가?
주님은 배고픔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좋아서도 아니고, 꼬임에 빠진 것도 아니다.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가?
생명이(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상좌의 어리석음이 어떤 것인가?
가난한 자들을 돌아 보아야 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

3.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이들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도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초청을 하고 초청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환대와 인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엿보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심성과 괴략을 엿보고 계셨다.

주님은 엿보아야 될 분이 아니다.
고백하고 그 분앞에 엎드려야 한다.
교회는 엿보는 데가 아니다.
목사는 엿보아서 될 사람이 아니다.
설교는 엿보아 들어서는 안된다.
평생가도 은혜 한번 받지를 못할 것이다.

4. 고창병 든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 ⇨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 가는 병.
당시에는 이 병이 하나님의 저주로 생기는 불치병으로 인식했다.

5. 예수님의 질문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①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의 엿봄을 지적하는 것이다.
② 이 질문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잠히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지를 않는 다는 것 을 그들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의 치유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이 환자의 치유는 이 환자의 믿음이나 고백이나, 간구가 없었고 주님의 필요에 의해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

Ⅱ. 예수님의 가르치심

1. 율법과 생명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 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에 우선을 두고 계신다.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생명 사랑, 생명 구원

2. 상좌에 앉은 사람들

「청함 받은 사람들의 상좌택함을 보시고...」
진정으로 상좌에 앉아야 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주님이 상좌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들은 주님을 모르기에 주님 앞에서도 자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자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3.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자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14절)


인트로(Intro, 소개)

어느 안식일날에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인 지도자들 중에 어떤 한 바리새인 집을 방문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 앞에는 수종병이라는 병을 앓으며 고생하고 있는 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등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켜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라도 귀신들려 18년 동안 중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 주신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번에도 예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면 그것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흠내고자 해서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진 생각을 아시고는 수종병을 앓는 자를 바라보시며 바리새인과 율법선생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대답해 보아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이 물으심에 그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수종병을 앓고 있는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는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묵묵부답으로 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너희 아들이나 집에서 키우는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고 해서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안식일이라도 당장에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 말씀에 그 누구도 이러쿵 저러쿵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고창병(Dropsy. 드랍시)

본문에 수종병이 나옵니다.
수종병(水腫病, dropsy) 옛날 성경에는 고창병이라 기억하는데, 헬라어는 "휘드로피코스" (물이라는 '휘도르'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고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수종병이 고창병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개역개정이나 한글성경에 수정이 되어서 지금은 수종병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사실 옛날에 쓰여진 고창병은 잘못된 표현이어서 지금은 수정한 것입니다.
사실 고창병이라는 말은 동물들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에 생기는 병이기에 동물에게 나타나는 병입니다.
그리고 고창병이 생기는 원인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삼킨 거친 풀· 나뭇잎· 열매들이 첫째위에서 다시 입으로 뱉어져 되새김을 하지 않고 막바로 4째위까지 통과하여 장으로 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전혀 되새김으로 씹히지 않은 음식물이 장에 오면 소화 장애로 부패되었기에 수분도 흡수가 안되어서 배만 맹꽁이배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게 되고 소가 한 번 이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라 합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위험한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자에 물이차서 북처럼 부풀어 생기는 병이라 해서 고창(鼓脹)병이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휘드로피코스 즉 물과 관련된 그리고 물이 차서 생긴 병이기에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창병으로 쓰였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물의 병과는 좀 다르기에 현재 수종병이라고 수정한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Dropsy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물이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는 대략 70%정도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의 60%가 물이라고 합니다.
물이 없으면 죽고맙니다.
날마다 물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수액을 통해서 온몸에 영양분들이 전달이 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이란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유지해 주는 아주 소중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물도 과하면 수종병처럼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뭐든지 과하면 안좋은것 같습니다.
적당함이 참 좋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물(事物)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도리어 안한 것만 못함이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분명히 물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3일만 물의 공급이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 전체에 문제가 생기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심지어 생명에도 지장을 초래 한다고 합니다.
부족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또 많이 넘치면 그것 역시 우리의 몸을 위험한 상태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은 우리에게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나치면 도리어 해가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에서 오는 것도 문제이지만 넘쳐서 오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물과 말씀

말씀 또한 물과 같은 것은 아닐까?
말씀 또한 언제나 필요한 물처럼 영적으로 생각을 해 볼때 날마다 반드시 필요한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매일같이 말씀이 없다면, 물이 부족하면 목마름이 오는 갈증처럼 우리의 심령의 갈급함이 생기고 급기야는 몸에 심각한 일이 벌어지듯이 말씀도 부족하면 우리의 영혼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바로 넘치면 오히려 안좋다는 그 말!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물이 우리를 해할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수종병…물과 관계된 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하필 물에 의해 피패된 몸을 치유하셨을까요?
그리고 그것도 안식일에 바리새인들 앞에서 말이죠?

물과 말씀을 같이 생각해 봤습니다.
물은 우리의 육신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말씀은 우리의 영이 숨쉬고 살아가는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수종병…딱 맞는 비유인것 같아요. 그것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장 많이 알고 말씀을 넘치게 알고 있는 그 바라새인들 앞에서 물이 넘쳐나서 수종병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는 치유의 목적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대로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생명 살리는 일이 가장 큰 일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높은 뜻을 가진 율법이라고 해도 안식일이라 하여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인 것입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은 하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수종병이 걸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독이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의 말씀은 정말 소중하고 귀한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오히려 생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씀이 아닌것입니다.
생명인 말씀을 그저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것만을 따르게 된다면 수종병에 걸리듯이 우리의 영혼도 수종병에 걸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런 영적 수종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이고 깨우치기를 원하셔서 수종병에 걸린자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귀한 말씀을 생명력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의 말씀을 알지만 온전한 이해가 되지 않고 그저 아는것만으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을 먹는것일까요?
혹시 이런 일들을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날 처음으로 성경의 내적인(영적) 비밀들을 접하면 너무도 기뻐서 놀라움에 젖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게 됩니다.
날마다 숨겨진 비밀들을 알아내느라고 다른 일은 뒷전이 되고 심지어는 집에 있는 아이들 밥 챙겨주는 일도 마다하고 이런 저런 모임에 열심을 냅니다. 일주일 내내 듣고 듣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유튜브라든 수많은 각종 SNS을 통해 많은 말씀들을 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여기서 알아진 지식을 남에게 전달하느라고 또 여념이 없습니다. 이모임 저모임에서 자랑하듯이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보면 참 은혜가 넘치는 일인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하기도 합니다. 소위 하나님과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여, 주구장창 말씀은 추구하나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 실제가 없는 공허한 이론일 뿐인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머리로만 알고 나의 영은 점점 수종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육신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친히 낮고 천한 피조물로 내려와서 인생을 체휼한 수난의 과정이 있어야 실제가 되었듯이, 영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역동되어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가 있어야 그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자신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며 부활의 삶으로 사는 것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지식은 그저 이론일 뿐이고 그저 떠있는 관념뿐인 것입니다. 역동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처럼 자신은 지식의 허영 속에서 높은 구원을 성취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비춰지는 실재의 모습은 생명이 없는 그저 곧 썩어 죽을 그런 뿌리없는 생명을 잃은 나무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에 제가 고창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종병의 옛날 말입니다. 같은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들에게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서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이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은 곧 묵상이라도 해도 될것 같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영적인 고창병 즉 수종병이 걸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되새김질하는 동물들처럼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내서 그 말씀을 곰곰이 되씹어야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가 풀만 먹어도 골수가 가득 찬 단단하고 굵은 뼈를 만들어내고, 영양이 풍부한 젖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되새김질에 비밀이 있습니다.
되새김질은 소화 흡수를 완벽하게 돕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억새풀이라 할지라도 다 분해시켜 버려 몸에 풍부한 영양을 공급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되새김질의 말씀묵상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뼈와 같은 견고한 믿음으로 형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게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는것을 봅니다.
이곳 저곳에서 온갖 미디어를 통해 마구잡이로 말씀을 먹습니다.
토할때 까지 먹고 또 먹습니다.
탈이 납니다.
바로 고창병 수종병이 생기고 맙니다.
묵상이 없이 마구 먹어대서 배에 복수가 차는 무서운 병인 복수 수종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계속되면 온갖 성인병 증세로 시달릴 것입니다. 암은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이라던가요? 그래서 암(癌)이라는 한자에 보면 입구자가 세 개나 들어 있습니다. 영적인 암은 많이 안다는 교만의 도도함과, 다른 이를 정죄하는 증세로 나타납니다. 쉽게 치료되지 않기에 아주 치명적입니다.
많이 듣고서 소화만 잘 시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완전 금상첨화 이겠죠. 그러나 들은 만큼 실제가 안 된다면, 이것들이 쌓여 영적인 수종병인 교만을 초래하고 곧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때에 조심할 것은, 듣는 것이 모두 구원이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말 위험합니다. 들은 만큼 살아내지 못하면 모든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습관적 신앙생활을 없애시기를 바랍니다. 혹여 우리가 그런 습관적 신앙생활을 한다면 단번에 일소하고, 말씀 앞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이제 탈바꿈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야만 더이상 고창병에 걸려 생사를 오고가는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무조건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씹고 또 되씹고 묵상이라는 말씀의 되새김을 통해 살아서 생명력을 갖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신앙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실제가 있는 살아 숨쉬는 건강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길은 오직 말씀의 되새김인 묵상뿐입니다.

요한계시록 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작은 능력(지식적으로 작은)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결단코 배반치 아니함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승리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능력이 많아 보인다고 해서 건강하고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비록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새김하는 묵상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삶가운데 지켜내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충만한 삶이 되어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이제 더이상 고창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생하지 마시고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작은 능력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뇌이면서 되새기면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생명력 넘치는 말씀의 능력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이 실제의 능력이 넘치고 살아 숨쉬는 그럼 신앙인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며 기도해 봅니다.



2-19-2024(월) 누가복음 13:31-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삼일에는(누가복음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He replied, "Go tell that fox, 'I will drive out demons and heal people today and tomorrow, and on the third day I will reach my goal.'

예수님 당시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인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희생물이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됨으로 속죄의 제물로 드려졌다.

헤롯(헤롯 안티파스, 분봉 왕. 영주)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 추종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헤롯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다(32절).


유대 사회에서(1세기 시대) 여우는

아가 2:15 / 여우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귀찮은 존재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3-4월).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오는 이유는 들쥐를 잡으려고 들어오는데 들쥐가 포도향을 좋아하여 포도원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때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와 포도나무의 꽃을 떨어트려 열매를 얻지 못하게 한다.

헤롯의 야심은 유대인의 왕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추종하는 세력은 미리 제거하려고 하였다.

마태복음 8:20 / 여우는 하찮은 존재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느헤미야 4:15 / 여우는 성벽을 쌓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여우가 지나가도 무너지겠다.
너희들이 쌓는 성은.........
깃털처럼 가벼운 하찮은 존재

열매를 맺히기 전에 꽃을 떨어트리는 여우
성곽을 쌓기도 전에 허무는 여우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본문의 내용은 어떤 바리새인 사람들 예수님께 와서 '이 곳을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다가 사흘이 되면 일을 모두 마칠 것" 이라고 일러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계속 갈 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적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 집이 버림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다.' 할 때까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랍비 문헌에서는 '여우'를 간교함의 대명사라고 합니다.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예수님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한 교활함과 간사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삼일에는 완전하여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삼일은 상징적 의미로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하겠으며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씩 주저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주님의 분부하심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따라가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내가 지고

저 여우
- 여우는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서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온다.
예수께서 여기서 헤롯을 여우로 부르는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당신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 한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여우는 사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승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또 다른 의미는 그의 교활함과 간교함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며 예수께서는 결코 그의 협박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과 내일...제 삼 일
- 헤롯의 협박은,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임을 언명(言明)하고 있다.
난해 구절인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1. 문자적인 의미에서 삼일을 가리킨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은 일을 더하고 제3일에 헤롯의 관할 지역을 떠나가겠다는 의미로 본다(Bleek,Meyer).
2. 출 19:10-11에 배경을 둔다고 보아 준비와 정결 기간인 이틀이 지나고 사홀째 되는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3. 제 삼 일이 절정에 이르는 결정적인 시간을 뜻한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즉 '이틀'은 그 시간에 이르기 까지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Marshall).
4. 상징적 의미로 보아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Bengel, Farrar).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4의 견해가 유력하다.

완전하여지리라
-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 문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헤롯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완료하신다(Bleek,Bruce).
2.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완료하신다(Manson).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m, Farrar, Marshall, Gilmour).
이중 3의 견해가 유력하다.

완성하다, 완전하다. 텔레이오오(tĕlĕiŏō) τελειόω 스트롱번호 5048

1. 완성하다.  2. 완수하다. 3. 히 2:10
발음 [ tĕlĕiŏ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τελείωσα, 완료 τε- τελείωκα, 완료수동태 τετελείω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τελειώθην, 미래 수동태 τελειωθήσομαι, 5046에서 유래


성경에서 숫자 3의 의미는?

모든 종교에서 3이란 숫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에서 쓰는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심오한 관념을 보더라도 3이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체적 효과가 무엇이든지 삼중 반복 형식은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민속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대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은 대체로 세 명이 한조로 나온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거나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점술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을 때도 세 번 연속으로 같은 수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문화권에서 3이란 숫자는 행운의 숫자이자,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하는 수로 사용했다.

3은 일련의 사건들의 형태가 이뤄지는 데 필요한 최소 숫자이다.
어떤 사건이 한 번이나 두 번 발생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으로 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신호가 된다.

성경에서도 3이란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3이란 숫자는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그래서 숫자 3은 '하느님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하느님이 사제의 축복에 관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에서도 축복을 세 번에 걸쳐서 하라고 당부하신다(민수 6:22-27).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신다(마태 4:1-11).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도 3일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는 최종적 목적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또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발생한다면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완전히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관해 물어본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복은 그들의 거절이 매우 단호한 것임을 의미한다(누가 23:13-25).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예사로 돼 있다.
미사 때 참회예식에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세 번 반복하는데, 이는 잘못을 완전하게 참회한다는 뜻이다.
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노래하는데, 이 역시 하느님이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순 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49

2

18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50

2

19

월 

누가 13:31∼35

제 삼일에는(32절)

51

2

20

누가 14:1∼6

고창병 든 사람(2절)

52

2

21

누가 14:7∼14

말석에 앉으라(10절)

53

2

22

누가 14:15∼24

큰 잔치(16절)

54

2

23

누가 14:25∼35

제자가 되려면(27절)

55

2

24

누가 15:1∼10

하나를 잃으면(25절)


2-17-2024(토) 누가복음 13:22-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열어주소서(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Once the owner of the house gets up and closes the door, you will stand outside knocking and pleading, 'Sir, open the door for us.' "But he will answer, 'I don't know you or where you come from.'

주여 열어주소서(Sir, open the door for us) / Lord please open it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세상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로 가야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좁은 길을 가기를 힘쓰라”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좁은 길로 가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그 좁은 길, 고난을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그 길은 생명의 길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육체적 ‘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생명’…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그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황에서 ‘좁은 문’은 어떤 문이었을까? 
예루살렘에는 문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문들에는 작은 문이 달려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큰 문을 닫히면 그 좁은 문으로는 짐을 실은 나귀나 수레 같은 것들은 들어올 수 없었고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씀에 대하여 ‘버클레이’ 신학자는 여기서 ‘바늘 귀’는 ‘바늘 문’, 즉 ‘좁은 문’인 이 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가는 문은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우리의 모든 세상의 짐들, 소유를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좁은 문이라는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냐 하면 어떤 사람의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마지막 때에 집 주인이 문을 닫을 때 사람들이 와서 문들 두드리며 ‘나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집 주인이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라고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악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믿음 있는 자와 행하는 자는 전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자는 비록 자신이 실패할지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기를 기뻐합니다. 그 길을 가며 항상 성공하지 않을 지라도 믿음으로 그 길을 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기뻐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오늘 나의 삶에서 어느 길로 가시며,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 길에 함께 동행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의 욕심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오늘 나의 삶에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주님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설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시며, 그 좁은 문 안으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적은지 물었다면,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많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하여도’로 번역된 기본형 ‘ζητέω제테오’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개인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장로들의 유전이나 율법에 열심을 내어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좁은 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구하여도 / 구하다. 제태오(zētĕō)  ζητέω 스트롱번호 2212

1. 발견하려고 찾다.  2. 마 28:5. 3. 요 18;4
발음 [ zētĕō ]

어원  / 미완료 ἐζήτουν, 미완료 단수3인칭수동 ἐζητεῖτο, 미래 ζητήσω, 제1부정과거 ἐζήτησα, 미래수동태 ζητη- θήσομαι,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발견하려고 찾다, 구하다.
 1. [문자적으로]
  a.  [잃는 것을] 마28:5, 막1:37, 눅2: 48, 19:10, 요6:24,26, 7:34, 36등.
  b.  [자기와 관계를 맺기 원하고 또 어디서 찾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얻기를 원하고 존재를 찾을 때] 요18;4, 행10:19,21, 딤후1:17, ζητεῖν τ. θε- όν, εἰ ἄραγε αὐτὸν εὕροιεν: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하여 하나님을 찾는다. 마2:13, 12:43, 눅11: 9,24등, 행17:27, 롬10:20등. 
 2.  찾아다니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 막3:32, 행9:11.
 3.  조사하다, 검사하다, 생각하다, 궁리하다, 막11:18, 14:1,11, 요16:19, [법적 용어로] 요8:50, 11:56.
II.  [찾는다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
 1.  얻으려고 노력하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다, 마6:33, 26:16, 막14: 55, 눅12:31, 22:6, 요5:44, 7:18, 롬2:7, 고전7:27, 고후12:14, 골3:1, 벧전3:11등.
 2.  애쓰다, 목표를 삼다, 원하다.
  a.  [무엇을] 요5:30, 빌2:21등, 고전7: 27, 계9:6.
  b.  [의문문과 함께] τί ζητεῖτε: 무엇을 원하는가, 요1:38, 4:27.
  c.  [부정사와 함께] 마12:46, 막12:12, 눅5:18, 9:9, 17:33, 요5:18, 7:1, 롬10:3, 갈2:17등.
  d.  ζ. τὴν ψυχήν τινος: 누군가의 생명을 찾는다, 마2:20, 롬11:3.
  3. 요구하다, 막8:12, 고전1:22, 고후13:3등, ζητεῖται ἐν τ. οἰκονόμοιςἵνα: 관리자에게 ~을 요구하다, 고전4:2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25-2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문이 닫힌 후에서 문 밖에 서 있는 이들은 문을 두드리며, 과거 집주인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문을 열어 줄 것을 애원합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외면한 채 호통합니다.
과거 주인과의 교제와 가르침에 진심으로 따르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그마저도 이용하려는 모습은 혹 우리의 모습일까 싶어 씁쓸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대조를 통해, 이야기를 매듭짓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야 6: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역설적 사명을 받았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 6:9-10).
주님도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라고 했다. 이사야처럼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열어주소서(κυριε ανοιξον)

눈을 열어주소서!(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성령이 눈을 열어주면, 위기를 극복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데스와 베렛 사이 샘 곁에서 하갈의 눈을 열어줬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을 만난 그녀는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라 불렀다(창 16:14).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자, “눈이 가리어져서”(눅 24:16) 주님을 몰라보던 엠마오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다”(눅 24:31).
성경을 풀어주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눅 24:32).
아람 군대가 밤에 사마리아를 에워싸자, 엘리사가 사환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엘리사가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사환은 불말과 불병거가 사마리아 산에 가득함을 보았다(왕하 6:17).
또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아람군대의 눈이 어두워졌다(왕하 6:18).

귀를 열어주소서!(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성령이 귀를 열어주면, 말씀을 깨닫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 11:15)고 가르쳤다.
“길가 밭”은 사탄의 방해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마 13:19).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과 박해로 곧 넘어진다(마 13:20-21).
“가시떨기”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결실치 못한다(마 13:22).
“좋은 땅”만 말씀을 듣고 깨달아 100배, 60배, 30배로 결실한다(마 13:23).
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의 후렴은 이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 29; 3:6,13, 22)

마음을 열어주소서!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He came to that which was his own, but his own did not receive him.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성령이 마음을 열어주면, 주님을 영접한다(요 1:12-13).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바울이 말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고(행 16:14), 베뢰아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것처럼(행 17:11),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자!(계 3:20)

말씀을 열어주소서(요한복음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All this I have spoken while still with you.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가르쳐 생각나게 하소서!(요 14:25-2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오직 성령께서 말씀을 가르쳐줘야 영적 분별력이 생긴다(고전 2:13-14).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19-21)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귀국길에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다. 성령의 인도로 그 수레에 올라탄 빌립과 내시의 대화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행 8:30)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행 8:31).
그러자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고(행 8:34-35), 물을 만나자 빌립은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8:36-38).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을 앞두고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따라가자!(막 10:46-52)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자!(히 3:1; 12:2)



하나님의 법칙이나 예수님의 법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느 누가 교회를 30년 40년 다녔다고 하면 우선 그의 인격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오래 다녔다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문제는 연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이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시간 이후로는 내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다고 그 년 수를 자랑하지 말고 몇 십 년 다녔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믿음이 뒤떨어졌거나 신앙생활 하는 것이 남만 못하다면 가슴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느냐 하는 년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의 믿음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설교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구원의 문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쫓겨 날 수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처럼 자기는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은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다시 한 번 자신의 믿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 “주여! 열어주소서” 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날에 은혜 받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 모두가 들림 받아 천국 문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16-2024(금) 누가복음 13:18-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겨자씨 한 알(누가복음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garden. It grew and became a tree, and the birds of the air perched in its branches."

겨자씨 한 알(a mustard seed) /

성경에 나오는 새는 실제 육적인 새와 영적인 새가 있으며 영적인 새는 영(靈)[1]을 의미한다.

육적 이치와 영적 의미

새가 하늘을 날며 나무에 깃들듯이, 성경에서는 나무목자와 성도로(사 5:7, 요 15:1), 그들에게 임한 나무에 깃드는 새로 비유한다(마 3:16).

두 가지 소속의 새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새

  •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계 18:2)
  • 공중에 나는 모든 새(계 19:17)
  • 하나님의 보좌네 생물 중 넷째 생물을 독수리 같다고 함(계 4:6~7).
  •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화를 외침(계 8:13).
  •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양육 받음(계 12:14).

역사

예언 성취

구약 예언

신약 예언

관련 인물

마태복음 13:31-32
겨자씨 비유

겨자씨와 누룩 비유인데 겨자씨 비유는 두 절이고 누룩 비유는 단 한 절이다.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리 쉽고 간단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두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 겨자씨, 밭, 겨자가 나무가 된다는 것, 공중의 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여자, 가루 서 말, 누룩, 부푼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풀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유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근거로 보았을 때 비유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며, 적어도 본 장에서 기록된 모든 비유가 각각 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같은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31-32절)라고 천국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흔히 “겨자씨 비유”라고 일컫는데 이 비유에 대한 해석들을 보면 대부분이 천국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미미하지만 나중에는 엄청나게 확장되어 놀라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혹은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욥기 8:7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천국을 크기로 말씀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의 왕국은 시작과 나중의 개념이 없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하고 주님의 일을 열심히하며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상태로 이 땅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수님은 그 나라의 본질을 보여 주셨고 그 본질은 십자가를 통해 극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겨자씨 비유는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에 연결하여 보충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알리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런 점에서 밀과 독보리 비유와 문맥상 연결되어 있고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하셔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밀과 독보리 비유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과 일맥상통한 관점에서 그 다음 비유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았을 것이다.
즉 누구든지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겨자가 자라서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겨자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좀 의아한 것이었다.
겨자는 2-3월이면 노란 십자화로 피는데 온 산과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다.
이스라엘 전역에 널리 자라지만 특히 갈릴리 지역에 많이 퍼져 있는 1년초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밭에 겨자를 심을 필요가 없었다.
지천에 널려 있는 겨자를 굳이 자기 밭에 뿌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농부도 없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어느 땅에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개정 성경에서는 “풀”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개역한글판에서는 “나물”이라고 번역하였었다.
사실 풀이라는 의미보다 나물 혹은 채소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보통은 1m정도로 자라지만 더 큰 것은 2-3m까지 자라기도 하는데 포기로 군락을 이루어 자라기 때문에 여름 건조기가 시작되면 씨를 맺은 후 말라 서로 엉켜서 딱딱한 나무같이 되어 새가 집을 짓기도 한다.
씨는 지름이 1-2mm 크기로 작은데 겨자씨가 씨앗 중의 가장 작은 씨앗은 아니지만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의 대명사로 쓰였다. 이것을 기름을 짜거나 향신료로 이용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는 구약적 배경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을 하고 있는 다니엘서 말씀을 통해 본문을 이해하도록 하자.

다니엘 4:10-12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본문은 느부갓네살의 꿈인데 다니엘이 설명하기를 느부갓네살이 이룩한 거대한 바벨론 제국은 땅의 모든 족속들이 깃들일 만한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넓은 문맥에서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살펴보면 이 꿈을 꾸기 전에 거대한 신상이 세워진 꿈이었는데 사람이 손대지 않은 뜨인 돌이 신상을 치니 산산이 파괴되어 작은 돌은 큰 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한 꿈이었다(단 2:31-45).
다시 말하면 바벨론 나라가 거대하여 모든 족속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지만 언젠가 뜨인 돌에 의해 망하는 나라가 될 것을 계시해 주신 것이었다(에스겔 17:22-24, 31:3-14에 보면 애굽 역시 이런 나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중의 나는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겉으로 풍성하게 보일지 모르나 언젠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실 나라라는 것이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의 씨를 먹는 존재가 13:4에서는 새라고 하였는데 그 새는 9절에서 악한 자라고 하셨고 그 악한 자는 38-39절에서 곧 원수요 마귀라고 밝히셨다.

성경에서 새는 일단 영적인 존재로 상징되는데 비둘기나 독수리는 성령님이나 하나님을 나타낼 때에 쓰여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중의 새는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악한 영으로 상징된다(참고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새는 공중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새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가만히 보금자리를 틀고 그 나무를 장악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들이 깃든 그 나라를 심판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8:2-4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언약의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뿌려 열매를 맺는 땅으로 만드셨고 천국의 아들들을 심으셨으나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추수 때까지는 그대로 두신다.
그것이 천국의 아들들을 보존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밀과 독보리 비유에 이어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고 경계를 삼도록 하시기 위하여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같이 되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물이 나무가 되는 비정상적인 현상, 예수님은 그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이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정상적인 확장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가 되어 악한 영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결과가 되는 복을 주신 것이라고 속이는 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하시기 위해 이 비유로 미리 알려 주셨다

이사야 6:9-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전통적인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고 하며, 누룩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내적 성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해석과 설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성장으로 인하여 부패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자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으로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가 깃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고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로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에 좋다고 합니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겨자씨는 마치 무씨 크기의 씨앗을 맺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마치 교회의 외적 성장을 강조한 결과 거대한 대형 교회로 성장한 후에는 대내외적으로 부패한 양상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생각할 때 무조건 좋게만 해석하는 것보다는 경고성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며(겨자씨 비유처럼) 또한 내적 성장(누룩의 비유처럼)을 겸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작금에 대형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기현상에 의한 것일뿐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철저하게 안으로는 욕망에 붙잡히려는 자아를 죽이고 겉으로는 날마다 후패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반듯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리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가 4:32.  누가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스겔은(17:3. 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

그리스도 왕국 이룰 ‘복음의 씨앗’으로 비유. 예수님 시대 ‘가장 작은 씨’로 속담에 자주 등장. 옆으로 자라며 순식간 번식하는 특성 때문 만민 향해 ‘말씀’ 퍼뜨려 온 세상 채우는 의미


아니, 이스라엘에도 유채 꽃이 자라요?

겨자 꽃이 보일 때마다 터지는 감탄사다. 특히 갈릴래아 호수는 봄마다 겨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현무암도 많아서, 제주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유채 같은 노란 꽃이 겨자라고 알게 되면, 겨자나무가 어쩜 저렇게 작냐고 또 한 번 감탄사가 터진다. 성경에서 겨자씨 비유를 읽을 때, 올리브나 소나무처럼 키 큰 나무들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다.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 좋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무씨 크기의 씨앗을 송알송알 맺는다.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성지에서 누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서 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그뿐인가?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르 4,32 루카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제키엘은(17,3.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도 실제로는 가장 작은 씨앗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의 대명사처럼 속담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고대 유다 법전 미쉬나는 정원에 겨자씨를 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순식간에 자라 공간을 잠식해 버리므로, 다른 식물들이 맥을 못 추는 까닭이다. 곧, 씨앗 크기에 비해 번식력이 대단해서, 작은 씨의 대명사가 된 듯하다. 또한 이런 특성 때문에 겨자는 큰 나무에 비유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겨자는 옆으로 제 존재를 퍼뜨린다. 예수님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도 만민을 향해 수평으로 번성하여, 온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간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천국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주변에 널린 겨자처럼 매일매일은 평범하다. 하지만, 그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면 내게는 천국이 된다. 겨자가 큰 들판을 메워가듯 내 인생에 천국들이 쌓이면, 마침내 하늘나라처럼 풍성해질 것이다. 게다가 새들까지 보듬는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은, 다른 이들과 천국을 나눌 수 있는 이타적 아름다움도 비유해 주는 듯하다. 이런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볼 때, 겨자 꽃은 정말 하늘나라를 닮지 않았나?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겨자씨(4615)

σίναπι, εως, τό 스트롱번호4615

1.

겨자

2.

겨자 씨

3.

마13:31

발음 [ sinapi ]
어원
σίνομαι ‘쏘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겨자, 겨자 씨, 마13:31, 막4:31, 눅13:19.

κόκκος, ου, ὁ 스트롱번호2848
1.

2.

낱알

3.

각종 식물의 씨

발음 [ kŏkk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씨, 낱알, 각종 식물의 씨, 겨 자씨, 마13:31, 17:20, 막4:31, 눅13:19, 17:6, 고전15:37.


겨자씨 한 알
- 유대인들에게는 "겨자씨 만큼이나 작다" 속담이 있는데(Robertson) 이는 '겨자씨'가 아주 작은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씨앗은 그렇게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무려 5m나 되는 큰 나무가 된다.
어떤 사본들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커다란'(*, 메가)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도 있다.
본문에서도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나 그 마지막 사람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 '그러므로'(*, 운)는 시간의 계속을 표시하는 접속사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말씀이 앞부분과 연속성을 가진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앞에서의 치유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관련되어져 이해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1) 예수께서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장과 같이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가....무엇으로 비할꼬 - 이 이중(二重)의 도입구는 사 40:18과 유형상 비슷하며 막 4:30 에 더 온전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NIV)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여러번 언급이 있었고, 여러 교훈 및 치유 사건을 통해 그 나라의 성격이 부분적으로 암시되기는 했지만(6:20;7:28;8:10;9:2,27,60;10:9,11;11:20), 여기서는 비유를 통해 그 성격이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이용해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을 설명하셨다. 

겨자씨는 놀랄 만큼 작은 것이다. 우리가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주님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를 설명하시기 위해 겨자씨를 사용하셨다. 이에 대해 말해보자.

겨자씨는 정말 정말 작다. 겨자 식물의 종류에 따라 연노란색에서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겨자씨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잘 심길 경우, 10일 아내 싹을 틔운다. 다 자란 겨자 줄기는 말을 탄 기수의 키 만큼 자란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3가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

누가복음 13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족한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몇 사람으로 시작된 교회가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방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원을 받자마자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 모두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성장해나갈 것이다.

믿음은 산도 움직일 수 있다

누가복음 17장 5~6절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하셨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 12:4)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ㅇ르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믿음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해도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찌라도 산과 나무를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믿음은 작게 시작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닿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 정도로 성장한다.

우리의 믿음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어둔 하늘에 빛과 같이 비추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마태 13:31-33과 누가 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

“12명의 제자들, 머지않아 그들은 70명의 제자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500명이 되었습니다.
500명은 어느 날 30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곧 이어 5000명이 됩니다. 
곧 이어 그들은 2만 명, 3만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지는 역사의 고동 소리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p. 66)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40년이 채 못 되어서 복음은 모든 로마제국의 대도시의 심장부까지 전파되었고, 이들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통상로를 따라서 수많은 마을들과 작은 촌락들에까지도 전파되었으며, 2세기 말쯤에는 알려진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Charles Swindoll, “New Testament Insights, LUCK”, pp. 444-445)

위의 예들은 다 역사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역사 속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눅 17:20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겨자씨 비유”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설령 가시적이라 할지라도(그러나 결코 가시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 나라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 13:31-32과 눅 13:18-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막 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와는 전후문맥 안에서만 보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룩 비유” 없이 “겨자씨 비유”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처음 깨닫고 지적한 자는, 필자가 알기에는, Arno C. Gaebelein(1861-1945)이다. 그는 마 13장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교회의 비정상적이며 유해한 관료주의적 팽창과 누룩으로 표현된 죄의 주입을 통해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사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비유들은 악의 성장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에 걸쳐 적용되는 예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에 눌려 이내 묻혀 버렸고, 나중에 James M. Boice(1938-2000)에 의해 또 다시 주장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 Arno C. Gaebelein은 무슨 근거로 이 비유에 나오는 거대한 겨자 나무와 누룩이 퍼진 반죽 덩이를 긍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커진, 그러나 내부는 전체가 죄로 오염된 타락한 교회로 보았는가?
Arno C. Gaebelein의 주장을 받아들인 James M. Boice가 그의 책 “The Parables of Jesus”에서 말한 것들 중에 우선 “겨자씨의 비유”에 관한 것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 13:31-32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James M. Boice의 견해

James M. Boice가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 비유”가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타락한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로 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겨자씨가 나무로까지 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예수께서 성장하는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셨으면,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자라는 비유나 백향목 씨가 레바논의 크나큰 나무 중 하나로 자라는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다.

둘째, 마 13장의 전후문맥에서 보면, 겨자나무에 깃들이는 새(32절)는 이미 첫 번째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어버린 새를 악한 자(마귀)로 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마귀로 비유된 새가 조금 뒤 겨자씨 비유에서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또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36-43절) 사이에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이 비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끼어있다는 것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동일한 성격의 비유라는 것을 말해준다.

“겨자씨 비유”에 대한 Arno C. Gaebelein과 James M. Boice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가 비정상적인 화려함과 거대함에 매몰된 참담한 상태를 고발하는 예수님의 슬픈 비유임에 틀림없다.
 

눅 13:18-19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견해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

누가복음의 “겨자씨 비유”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처럼 먼저 전후문맥 속에서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전후문맥 속에서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이 비유 앞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 13:6-9)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겨자씨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동일하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겉만 그럴 듯한 타락한 하나님 나라를 책망하시는 비유라는 말이다.
이는 “전후문맥에서”와 “겨자씨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 전후문맥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눅13:2-5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향해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눅13: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3:6)를 시작으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눅13:6-9).

그 후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셨다.(눅13:10-13). 이때 회당장은 분을 내어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어겼다고 비난한다(눅13;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이에 대해 예수님은 회당장을 비롯한 무리에게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신 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나귀에 대한 행위와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신다(눅13:15-16).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13:18)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회당장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태를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겉만 크고 화려한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그러나 그 속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반죽처럼 죄로 만연된 이스라엘을 “겨자씨와 누룩 비유”(눅13:18-22)로 폭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눅13: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에서, 또 눅13:34-35(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계속 발하신다.

이렇게 눅13장 전체의 전후문맥에서 볼 때(그 이전과 그 이후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정적인 그 무엇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엄중한 심판의 경고들을 쏟아내시면서, 그 사이에 전후문맥과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생뚱맞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2. 비유 속에서

“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타락한 하나님 나라, 즉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라는 증거는 눅13장의 전후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겨자씨 비유” 속에서도 차고 넘친다. 예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시작하신다.

여기서 “채소밭”(κῆπος. 케포스)은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자신의 집 부근에 정원을 만들어 놓고 틈틈이 채소 등을 재배해서 자급자족하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왜 저 사람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지 바보같이? 이 사람, 미친 거 아냐?’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 당시 겨자는 향신료(양념)와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겨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써야하는 필수 소비재가 아니어서 겨자를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들판에 널려 있는 것이 겨자 풀이었기 때문이다. 1년생 잡풀인 겨자는 번식력이 대단히 강해서 농부들은 오히려 자기 밭이나 채소밭에 겨자 풀이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쓴다. 만약 어쩌다가 겨자풀이 자기 채소밭을 침범해 자라기 시작하면, 그 채소밭은 못쓰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겨자 풀의 왕성한 생장으로 인해, 그 채소밭에서는 채소가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일부러 심는 바보는 절대로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등장하는 이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누가복음과 의미가 다른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는 단순히 “땅에 심길 때에는”이라고만 되어 있다).

또 유대인이 대단히 무겁게 여기는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유대인은 결코 없을 것이다(레19: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율법에 의하면 채소밭에는 채소만 심어서 재배해야 한다. 채소가 자라는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어 겨자 풀을 키우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 왜 그랬을까? 이 사람이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자신의 채소밭이 망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 율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겨자 풀은 번식력과 아울러 생장 속도도 대단히 빠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금방 크게 자란다. 보통은 3-5m, 대단히 크게 자라는 것은 8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뿌린 까닭은,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빠른 시간 내에 예루살렘의 겉모습과 이로 인한 자기 자신의 지위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내기 위해 부당하게 수많은 돈을 착복했다. 예루살렘 성전 당국은 절기 때 제사 제물에 쓸 짐승을 성전에서 팔면서 턱없는 폭리를 취했으며(예수님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마리를 염소 한 마리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비둘기를 준비해 오면, 제사장들이 고의적으로 흠 없는 제물로서의 부적격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전 뜰에서 파는 값비싼 비둘기를 사야 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악행은 수두룩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신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제 헌금을 내기도 하고, 또 제사를 잘 드리는 척,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의로운 척 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겨자 나무처럼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 위선으로 일관하면서도(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 속에서 몰래 누룩이 퍼지듯 속으로는 율법을 밥 먹듯이 어기면서(누룩 비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채소밭을 쓸모없게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에 “누룩 비유”를 더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따라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누룩 비유”가 없는“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와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겉만 화려하고 웅장한 위선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이 1년생 겨자 풀을 굳이 겨자 나무로 묘사하신 것은 단4:11-12(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에서 나무로 묘사된 바벨론 제국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은 거대한 나무이지만 이스라엘은 겉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년생 잡풀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1년생 겨자 풀을 겨자 나무라고 묘사하신 것은 바벨론 제국의 나무처럼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있는, 그러나 1년생 잡풀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진실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단4:11-12에서 하늘에 닿은 엄청난 크기의 나무는 바벨론 제국을 가리키며, 그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바벨론 제국에 빌붙어 살고 있는 주변국의 열왕들, 부자들, 권세자들을 가리킨다. 새들이 깃들이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불의한 무력으로 만들어낸 거짓 평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바벨론 제국을 흉내 내며 엄청난 크기의 겨자 나무를 가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그 가지들에 온갖 잡새들(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깃들이며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참 하나님 나라였다면 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과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겨자 나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누룩 비유”에서처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이에 누룩 같은 죄가 구석구석 완전히 퍼져버린 타락한 하나님 나라에 불과했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설명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잡새 같은 불법적인 권세자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께 끊임없이 비수를 들이댔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을 보라. 비정상적으로 커진 겨자 나무처럼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이런 교회에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반드시 온갖 잡새를 모여들고 깃들인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겨자 나무가 크면 클수록 더욱 많은 잡새들이 날아온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날아든 잡새들을 위해 둘러서서 정성껏 안수기도도 해주고, 이런 잡새들이 교회에 많이 깃들이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기까지 한다. “우리 교회는 대통령이 출석해요. 우리 교회에 국회의원들이 몇 명이나 출석하시는 줄 아세요? 우리 교회에는 판검사, 변호사만 200명이 넘어요”라고 하면서 말이다(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대통령들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자들 중에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커다란 겨자 나무 같은 교회를 골라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있는 잡새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겨자 나무는 1년생이므로 아무리 크게 자란다 할지라도 1년 동안 자라다가 사라지는 잡풀에 불과하며, 결코 진짜 나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무가 아닌 겨자 풀의 가지가 아무리 크고 굵게 자랐다할지라도 그 속이 비어있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는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설령 정신 나간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 깃들였다할지라도 겨자 풀은 1년생 잡풀이므로 깃들인 둥지의 수명은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다.

또 겨자 나무가 있는 채소밭은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 있고,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설령 겨자 풀의 가지가 나무처럼 튼튼하더라도 사람 가까이에 있는 채소밭에는 새들이 결코 깃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 나무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만큼이나 정상적인 새들이 아님에 틀림없다.
물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겨자 나무는 오래지 않아 로마 제국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겨자 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을 리는 결코 없다(다시 말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전진과 성장을 계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만연을 상징하는 “누룩 비유”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비유의 내용이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와 누룩 비유”와는 그 목적과 초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다면, 1년생 잡풀인 겨자 풀이 아니라 오래 동안 생존하며, 또 외관이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백향목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향목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시 92:12-13 /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104:16 /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정말로 의도하셨다면, 아마도 “마치 사람이 자기 뒷산에 갖다 심은 작은 백향목 가지 같으니 자라서 거대한 백향목이 되어, 공중의 비둘기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관한 비유는 결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웅장함과 거대함은 말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가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겨자씨 비유”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라 나무가 되어”에서 “자라”로 번역된 “ηὔξησεν”(에윅세센)은 “자라다, 늘어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αὐξάνω”(아욱사노)의 ‘단순 과거’이며, “되어”로 번역된 “ἐγένετο”(에게네토)는 “존재하게 되다, 있게 되다, 생기다, ~이 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γίνομαι”(기노마이)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가 이미 다 자라서 이제는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에서 “깃들였느니라”로 번역된 “κατεσκήνωσεν”(카테스케노센)도 “살다, 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κατασκηνόω”(카타스케노오)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나무가 된 겨자 풀의 가지에 새들이 이미 깃들였다는 말이다(참고로 “누룩 비유”가 없는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자라서”(ἀναβαίνει/아나바이네이), “커지며”(γίνεται μεῖζον/기네타이 메이존), “내니”(ποιεῖ/포이에이) 등의 모든 동사는 ‘현재형’ 동사로 되어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계속 전진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약 “겨자씨 비유”가 처음에는 겨자씨 한 알 크기의 보잘 것 없는 하나님 나라가 나중에 자라서 엄청나게 커지는 겨자 나무처럼 부흥하는 지상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였다면, 예수님은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미래형’(또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셔서 “자라 나무가 될 것이며(되고 있으며)”,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다(깃들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있을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이후의 교회의 외적 성장과 또 화려하고 엄청나게 성장(?)할 중세 교회와 중세 교회보다 더 화려하고 더 커질 현대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 하나님 나라임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현재형’이나 ‘미래형’은 고사하고, ‘미완료 과거’도 아닌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신 까닭은 당시에 타락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 화려하게 커져버린 고착화된 껍데기를 지적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헌금을 면죄부 등으로 사기치면서, 크고 화려하게 키운 교회의 외적인 껍데기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로 합리화시키기를 좋아했다. 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세교회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물들, 거대한 교회의 조직과 재물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등을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대하게 자란 겨자 나무 같은 성장이며 부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00%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외식적인 이스라엘을 거대한 겨자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와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성장(?)을 웅장한 겨자 나무에 적용시키며 기뻐하는 것은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가, 중세 교회처럼 황제마저도 굴복시키는 대단한 교세와 위용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외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사적인 교훈은 교회가 외적으로 커질 때 필연적으로 교회는 타락했다.
아니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외적으로 교회가 커졌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커지는데 집착하게 되며, 그러므로 필연적인 외적 성장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 이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셨듯이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타락한 중세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가?

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겨자씨 한 알처럼 외적으로는 오히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 나라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나라,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다(계 11:7-8 /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증인된 삶으로 인하여 세상의 핍박을 받으며 그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계 7:17 /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럼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므로(계 13:10 /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순교했으나 주의 재림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계 11:11 /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끝내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겨자씨 비유”에서의 겨자 나무처럼 거대해지고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외적으로 웅장하게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 없이 눈으로 판단하고 주판을 튕기거나 계산기를 두들기며, “교회가 이렇게 크고 화려하니까 불교보다는 낫겠지?”하면서, 겨자 나무 가지에 잡새들이 깃들이듯이, 누구나 들어와 깃들일 수 있는 다른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크고 힘이 강한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이 될수록 더욱 커지고 힘이 강해질 것이므로 세상 나라의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 나라가 친구가 되자고 거대한 겨자 나무 같은 교회에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들은 세상 나라의 핍박으로 인한 인내도 눈물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신 것처럼, 크고 힘은 강하나 타락한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모든 지상 교회들은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와 누룩 비유”에서 주님의 엄한 경고를 귀기우려 듣고, 피 눈물 나는 회개를 통해 “남은 자”의 교회로 다시 새롭게 서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교회가 아닌 겨자 나무 같은 교회들은 오히려 필자의 피토하는 권면을 비웃을 테지만 말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2-15-2024(목) 누가복음 13:10-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누가복음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forward and said to her, "Woman, 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 you are free from your illness

infirmity - 허약

ἀπολύω 스트롱번호 630

1. 놓아주다.  2. 가게 하다. 3. 이혼하다
발음 [ apŏlŏuō ]
어원 / 미완료 ἀπέλυον, 미래 ἀπολύσω, 제1부정과거 ἀπέλυσα, 제1부정과거부정사 ἀπολῦσαι, 현재완료수동태 ἀ- πολέλυ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πε- λύθην, 미래수동태 ἀπολυθήσομαι, 575와 3089에서 유래

* 575. 아포(apŏ)  ἀπό  

1. ~으로부터.  2. aπάγεσθαι.  3. 마 27:24
발음 [ apŏ ]

뜻풀이부

1.  놓아주다, 풀어주다, 용서하다, 마18: 27, 27:15-26, 눅6:37, 요18:39, 행3:13, 5:40. [수동태] 놓이다, 풀리다, 눅13:12.
2.  가게 하다, 보내버리다, 해산시키다.
  a. 이혼하다, 보내버리다, 마1:19, 5:31, 19:3, 막10:2,4,11, 눅16:18.
  b.  해산시키다, 돌려보내다, 마14:15, 22, 15:32,39, 막6:36, 8:3,9, 행19:41. [수동태] 해산 당하다, 출발하다, 떠나다, 행4:23, 15:30, 히13:2
 c.  [중간태] 가다, 떠나다, 행28:25, 히13:23

* 3089. 루오(lüō)  λύω 

1. 풀다.  2. 깨다. 3. 열다
발음 [ lüō ]

뜻풀이부

I. 풀다[결박, 족쇄 등을].
 1. [문자적] 깨다, 열다.
 2.  [비유적] 열다, 펴다, 막7:35.

II. 놓아 주다, 풀어주다.
 1. [문자적]
  a.  [죄수를] 행 22:30.
  b.  [천사를] 계9:14.
  c.  [사탄] 계20:3.
  d.  [나사로] 요11:44.
  e.  [동물] 마21:2, 막11:2,4, 눅19:30.
 2.  [비유적] 해방시키다, 자유하게 하다, 풀어주다.
 3.  파괴하다, 부수다, 헐다, 행27:41, 벧후3:10-12.
 4.  절멸시키다, 끝내다, 폐지하다, 없애다, 마5:19, 요5:18, 행2:24, 요일 3:8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마리아와 요셉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 레위기 12장 말씀에 따른다면, 예수님의 가족이 성전을 방문한 때는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을 넘긴 때였을 것입니다.
번제물로 ‘1년 된 어린 양’이 아니라 비둘기로 제사하려 했던 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품에 안겨있는 예수님이야말로, 온 인류를 위한 가장 크고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이것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 곧 성령님과 깊은 교류 속에 있었던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이자 온 인류를 구원할 대속제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생 동안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감격에 겨워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찬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누가 2:29).
‘놓임을 받다’(아폴루오)는 말은 속박되어있던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아포) 비로소 풀어지는(루오)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무엇에 묶여 있다가 풀려났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 것일까요?

1차적으로는 그를 붙들고 있는 세상과 육신입니다.
그는 이제 드디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히 육신의 속박을 벗어나는 ‘죽음’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시므온이 안고 있는 그 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육신을 벗어나는 죽음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자유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그에게 선사한 것은 잠깐 동안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짧은 분리’가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놓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 메시야로 인하여 임할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위로’는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이루시게 될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읽으신 성경 말씀이 이사야 61장입니다.
거기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읽으신 후에, 이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시므온은 30년 후에 예수님을 통해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의 품에 안기신 메시야를 만남으로 마음에 족한 위로가 넘쳤습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평안과 놓임과 위로를 얻었다면, 우리는 이에 비할 수 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14:16-17).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완전한 평안입니다(요 14:2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나를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부자유함
둘째는 정신적인 부자유함
셋째는 영적인 부자유함

사람을 부자유 하게 하는 것들 중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 부자유함은 이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영적인 부자유함은 심판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부자유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부자유함은 세상에서 해결 받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해결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차라리 그 손을 찍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가 다시 죽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을 두 번씩이나 경험했던 인물이 나사로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3절)

오늘날도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런 치유와 기적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치유와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내 죄 사함받고서

https://www.youtube.com/watch?v=CC_PApJ1oOw



동사 아폴루오(Homer 이래)는 아포($575)와 루오($3068: 목욕하다, 씻다)에서 유래했으며, 루오의 강의형으로 역시 '씻다, 씻어내다'를 의미한다. 의식적인 정화를 ...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요. C.S. 루이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노래하네요.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곧, C.S. 루이스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지 하나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의 진리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사주나 팔자 혹은 타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우상 앞에게 예물을 드리며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주팔자 등 운명을 점치며 부적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모든 우상숭배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지요.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세를 성취하고, 더 많은 재물을 성취하고, 세상의 더 큰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때로는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또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나누며 섬기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성경의 이러한 가치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사람이 이제는 양보하고 배려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결국 그의 행동과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치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0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안식일을 맞이하면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장소, 곧 정해진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면 다음주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 곧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는 그 이전까지 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다른 랍비들이 가르치다가 혹은 이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가르치다가,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회당을 찾아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의 능력과 그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날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른 랍비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권위와 권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절) “아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 회당에는 오랜 세월 안식일마다 회당예배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많은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겠지요. 당시 회당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안식일이나 바로 그날의 안식일이나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가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회당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 회당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더라도, 예배 준비가 완벽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라 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예배 준비가 조금 부족하고 예배를 위한 시설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은 치유를 받은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관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드디어 그 회당은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지는 극심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이 깨끗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은혜의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 회당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모든 책임을 가진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14a절) 

지금 회당장은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회당장이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회당장이 화가 난 대상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던 그는 회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그가 지적하는 사항은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겨있는 회당장의 마음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있는 행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회당장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고 있는데 왜 굳이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그의 또 다른 의도를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회당장이 크게 화를 내는 핵심 이유가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회당장의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외식하는 자들아”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하잖아요.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하지요. 

자, 회당장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숨겨진 원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세요.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네, 여기까지는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지요? 어떠한 전제입니까?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회당을 찾아와도 언제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여인은 18년 동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지 않았기에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잖아요. 지금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 회당장이나 여러 랍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방문하시기 이전까지 그들은 참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유독 회당장만큼은 애써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회당을 방문하면 언제라도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애써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회당장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 선포와 예수님의 치유 역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가 보아도 회당에서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당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회당장, 곧 그 회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날 하루만 예수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회당장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신 뒤에 18년 동안 근육이 수축되어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어요. ‘아니, 내가 이 회당의 회당장인데, 이 회당에서는 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 회당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쏠리니 회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본성은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질병인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여기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생각은 심지어 회당장조차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써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새로운 관점

회당장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거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이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기르는 가축에게는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고 안식일에도 풀을 뜯겼던 것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6절) 

회당장은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화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안식일의 규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대답 역시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해 답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본문 16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관점은 18년 동안 큰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이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브라함의 딸을” 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네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딸’ 정도가 되겠네요. 

이 여인이 겪었던 질병은 몸의 근육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다 꼬부라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육이 수축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이 힘을 잃고 탄력을 잃어버리기만 해도 몸의 자태가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관절이 꼬부라져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겉모습에는 만물의 영장,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자기 중심적 관점으로 가득했던 회당장을 비롯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여인을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겼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날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주십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여인은 그 외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딸’이라고 선언하여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바꾸어주시자,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라파(Yahwe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출 15:26) godsname
☆ Yahweh-Rapha

The Lord our healer. “By His stripes were are healed” declares the Bible. Jesus Christ died to give you life. Not only was God the healer in the Old Testament, but Jesus Christ revealed the healing heart of God for all of us, more than ever. (Exodus 15:26, 2 Chronicles 7:14, Psalm 6:2, 41:4, 103:3, 147:3, Isaiah 19:22, 30:26, 57:18-19Jeremiah 3:22; 17:14, 30:17)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시00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0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사19: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사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57:18-19 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렘0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당장처럼, 우리 역시 지독한 자기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반드시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여 주셔서, 철저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그들의 겉모습과 상관 없이 아브라함의 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무척이나 인형을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분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이 소녀는 손님 앞에서 여러 인형을 꺼내서 자기의 인형을 설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밝은 얼굴을 보다가 그 아저씨는 이렇게 묻게 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느냐? 가장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소녀는 깊은 침묵에 잠기었다가 한참 후에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저씨에게 다짐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절대로 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아, 그러지” 아저씨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저 뒤에 있는,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지고 옷은 다 헤진 가장 못난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와서 “제가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랬습니다. “어째서냐?”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대답합니다. “이 인형이 저와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제가 사랑한 그런 인형이고요, 둘째는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는 못난 인형이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꼭 같은 이 이야기가 있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데리고 하숙을 치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하숙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네 아이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이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맏아들, 우리 첫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더니 곧 부인합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우리집 4남매 중에 하나뿐인 고명딸이거든요. 그 딸이 예뻐서, 재롱을 떨고 그래서 제가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아니고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복자로서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아니오,” 다시 부인하고 한참을 생각한 후 이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합니다.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에 걸렸거든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아십니까? 병든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요. 오히려 약한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문제의 자식을 부모는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인물이 잘났느니 못났느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고 사랑의 이유는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왜 사랑하느냐고는 묻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성경에서 보십시다.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꼬부라진 사람입니다. 18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장기 병자입니다. 어쩌면 누구도 이 장애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어서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온 가족들도 다 버렸고 그 누구도 이것을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과 식구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그런 버려진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다른 말로 정신적 지체요, 이것은 의식의 부자유라는 것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말을 들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사랑을 압니까? 준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찌 생각하면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할 정도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몸도 병들었고 정신도 병들었고 인격도 병들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우리 인간의 흔히 보는 보편적 가치로 볼 때에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버려진, 완전히 소외당한 불쌍한 청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치론의 대표자인 R. B. 페리(Ralph Barton Perry)라고 하는 분의 그 가치론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
그래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돈이 많으면 대접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받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소비하느냐?
가졌더라도 구두쇠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돈을 쓰면서 사느냐?
이것이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가치가 오르고 내리기도 합니다.

둘째는 신체적 가치입니다.
건강하고 잘먹고 튼튼하고 그리고 늠름하게 보일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 말하는대로 키도 한 180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축구선수들이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확실히 신체적 가치가 높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평가가 됩니다.

셋째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혹은 심리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예술성이 있느냐?
아름다움을 갖추었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줄 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런 것입니다.

넷째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그것이 그 사람이 가치입니다.
목적이 가치를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높은 것 그것을,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살 때에 그만큼 인생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자, 이런 가치론에 한 번 준해서 여기에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자,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이 원리의 기준에 의해서 생각해 볼 때에 완전히 제로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잘 보십시오, 이 여자를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의 사람됨을 보았느냐?
분명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유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의 건강과 젊음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내면적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 통하든 안통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대해야 되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적인 인간을 보시면서 아브라함의 딸, 선민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렇게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에서 보아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 그러면서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지금 건강을 잃어버리고 특별히 마귀에게 붙들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부자유한 그러한 억압된 생명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를 볼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유가 없습니다. 무엇에 붙들려 있다는 말입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세 오르테가(Jose Ortega Y Gasset)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집단의 반란(The Revolt of the Masses)”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독특한 학술용어가 쓰여있습니다.
그것은 “전문화의 야만주의”라고 했습니다.
The Barbarism of Specialization,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단순 지식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단순 무식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합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둘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식하게 무식한 것입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아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Learned Ignorance 라고 했습니다. 공부 많이 한 무식한 사람,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전문화 때문입니다. 너무 한쪽으로만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어느 잡지를 보니까 의학도 이제는 부득불 일반의학을 많이 해야하겠다는 논문을 본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너무 전문적으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서 환자가 하나 왔을 때에 그 사람 진찰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공부하지 않은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환자가 와야 알지 내가 공부하지 않은 환자는 아무리 보아도 진찰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병도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은 딱 하나만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지식이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한쪽으로만 공부를 했지 너무 많이 하는 동안에 다른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니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 공부를 많이 못했더라도 절대 ‘나는 무식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무식한 사람들 밖에 살지 않으니까. 다 무식하니까. 왜? 전체적인 것을 모릅니다. 또 하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을 모르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만 했지 왜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연구에 연구를 하면서 건강까지 해치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번다고. 아니 병들어서 돈을 벌면 무엇합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 실상은 모르고 무엇을 가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없고. 여러분, 혹시 은행 빛이 없습니까? 당신은 재벌입니다. 요즘 빚이 없는 사람은 재벌입니다. 요즘 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 다 빚입니다. 자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있다고 하나 아무 것도 없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불쌍하고 무식한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알긴 무엇을 압니까?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모를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웃는 이런 학설이 나와있습니다. 유식한 무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기 우상화의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안다고 하는 감옥 속에 갇힌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들리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만의 감옥에 있고 욕심의 감옥에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열등의식의 감옥에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고집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을 볼까요?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늘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어려운 사회가 이 체제를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아, 거기는 뭐 분명합니다. 강한 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언제 이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북한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6.25때, 전쟁에 그 무자비하게 폭격할 때 부모가 다 죽고 고아로 살아남은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커서 지금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본인들이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본 일이 없습니다. 미 제국주의자 놈들이 폭격을 해서 다 죽었대요. 수령님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셔서 탁아소, 고아원을 거쳐서 지금 이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수령이요 진짜 어버이입니다. 어버이 수령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아, 무섭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죽인 그 놈들, 제가 복수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원한, 이 복수심에 꽉 막힌 것입니다. 여기에 붙들렸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그 복수할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북한이 못사는 것입니다. 무기 준비하고 전쟁 준비하느라고 거기다가 온 정력을 다 쏟다보니까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 변증법적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속 사람은 다 우리와 같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마음, 잘못된 생각, 증오심, 원한, 섭섭한 마음, 분한 마음에 꽉 붙들리면은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납니다.

자, 오늘 예수님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여자,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명만 유지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 들을 수 잇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지금 메어있습니다. 속박되어있습니다. 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이 완전히 속박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 거기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 공항에 나가면서 보면은 한쪽 구석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 모여 앉아서 이러고 빨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지나가면서 한 번씩 웃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아,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안 그렇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서 무엇엔가 노예가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그 욕심, 그 명예심, 그 벌컥벌컥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잘못된 습관에 매인 것, 다 매인 것입니다. 다 씌운 것입니다. 확실하게 씌운 것입니다. 제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매였다, 매였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의 시각에서 보셨습니다. 은혜를 +로 부여하시고 은혜 속에서 이 여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보여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미래가 보입니다. 애들이 장난을 칩니다. 심한 장난을 칠 때에 부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아이가 발명가가 되려고 하나보다’ 안 그렇습니까? 고집을 부리고 뒹굴고 할 때에도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은 “쟤가 의지가 있어. 개성이 있다고 쟤가.” 그렇지 않습니까? 왜요? 미래를 보잖아요 미래를. 사랑의 시각으로 보니까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봅니다. 이 매여있는 불쌍한 여자를 보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나면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한평생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하며 살 것을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자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미래와 소망을 환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노예가 된 것이요, 혈기의 노예가 되고, 욕심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여러분, 온전한 자유인이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여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 그 불쌍한 곳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입니다. 


2-14-2024(수) 누가복음 13:6-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누가복음 13: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Sir,' the man replied, '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and I'll dig around it and fertilize it.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Please leave it as it is this year too.

유예(猶豫) : 오히려 유, 미리 예
 1. 시일을 늦춤
 2. 망설여 결행하지 않음
 3. 집행(執行) 유예(猶豫)

중보(3316)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중보(3316) 메시테스(mĕsitēs) μεσίτης, ου, ὁ 스트롱번호 3316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발음 [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3319.  μέσος, η, ον 스트롱번호 3319

1. 중간의.  2. 마 25:6.  3. 중앙
발음 [ mĕsŏs ]
어원 / 332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간의, 가운데 있는.
 a. [형용사] 마 25:6, 눅 22:55, 요 1:26, 19:18, 행 26:13.
 b. [중성명사로] 중앙, 가운데, 마 13:25, 14:6, 막 3:3, 7:31, 눅 4:30,35, 17:11, 요 8:3,59, 20:19, 행 4:7, 계 7:17.
 c. [중성 μέσον이 부사로 사용됨] 빌 2:15.



이사야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라는 법률용어에서 '사면(赦免)’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후 2-3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맺는 열매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 그대로 두고 다시 한 번 더 열매를 맺도록 관리하겠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과원지기는 예수님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로서 예수님은 주인에게 간청하여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어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한다면 당장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왜 그토록 오래동안 참고 기다리실까요?
그 까닭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에스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들을 아직도 이 세상에 머물도록 지켜주시는 것은 구원해야 할 생명을 찾아내어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은혜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024년 내가 구원해야 할 생명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날마다 그 생명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열매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https://www.youtube.com/watch?v=i1UbpDjlDtU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겔 18: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누가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유대인 농부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쉽게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번식력이 아주 강해서 아무 데에나 심어 놓아도 열매를 잘 맺습니다.
그런데 이 가치 없고 흔한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할 농부는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를 위해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돌보는 주인도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농사 규례를 살펴보면, 과목을 심고 3년 동안 맺힌 열매는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않고, 제 4년에는 첫 열매이니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부터 열매를 거둡니다(레 19:23~25).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24.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삼 년을 와서 열매를 구했다면 이 주인은 나무를 심어놓고 7년 이상을 기다린 셈입니다.
7년이 지나도 무화과나무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포도원에 있다면 정말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해서 7년 넘게 기다렸다는 것도 유대인 농부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마침내 주인은 화가 났고, 이제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무화과나무가 찍힘을 당하는구나’ 생각할 즈음에, 이번에는 주인이 아닌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주인에게 무화과나무를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주인이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이제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는데, 과원지기가 나서서 마땅히 찍어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변호합니다.
자신이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과원지기가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 간구는 과원지기가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하시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하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다림과 긍휼이라고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도대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왜 주님은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이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사야 27장 말씀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포도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오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무화과나무처럼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데, 열매를 맺도록 때를 따라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하거나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돌봐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찍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은 집행유예가 아닌 사면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외친 누가복음 13장 8절 말씀,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여기에서 ‘그대로 두소서’는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압히에미는 ‘용서하소서, 사면하소서’ 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하신 말씀인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즉 “압히에미(사면하소서)!”라고 외치십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완전히 끝이 난 것이고,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이나 벌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외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대적하는 무리, 인간들을 향하여 완전한 사면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지 못하여 무화과나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집행유예를 받은 것처럼 늘 행위를 보고 자신을 정죄하며 불안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예수님은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다

찍힘을 당해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압히에미” 즉 “사면하소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우리 행위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아야 할 심판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지만 믿지 못한 악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포도원지기 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 수 없는 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또한, 주인의 오래 참음과 과원지기의 간청 때문에 우리가 놀라운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때때로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도 우리를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진리를 믿지 못하는 악함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사탄에게 속아 자신에게 빠져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긍휼을 베푸시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임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포도원 안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자신에 대하여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원래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했습니다.
보통 무화과나무는 2~3년 정도가 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3년이 되었음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존재에는 분명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존재 가치를 결정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무화과나무의 존재 가치는 없습니다.
목적이 불분명하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땅을 아깝게 방치시켜놓을 바에 무화과나무를 어서 잘라버리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그 자리에 다른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금년까지만 유예기간을 준다면, 정성껏 가꿔보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망설임 없이 찍어버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과 가치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의 마땅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올 한해 동안 내 삶 속에서 어떠한 열매가 맺혔는가, 혹은 열매를 맺었는가 맺지 못했는가를 돌아봅시다. 

첫째, 기다림에도 때가 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주인은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참고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치시는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 등. 하지만 또 다른 성품이 있다면, 인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행동이 있습니다.

8절의 말씀에 포도원지기가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기다림 중에도 행동하십니다.
가만히 방관하며 기다리지 않고 열매가 맺어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시면서 깨닫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또 다른 특징은 한계, 곧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죄악에서 떠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인내하신 후에도 열매가 없을 때 마땅히 그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더 이상 은혜를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려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떠나가고 심판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기다림 끝에 “찍어버려라. 어찌 땅만 버리고 있느냐”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 포도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며 간절히 만류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인이 포도원지기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의 인정을 받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무화과나무를 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주인에게 한 번 더 수고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만약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무화과나무는 가차없이 찍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가 한 해만 더 거름과 물을 주며 수고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멸망 사이에 두신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주인의 생각에는 소망이 없는 나무이지만, 포도원지기는 소망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런 중보자이심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인 우리를 중보하시어 새로운 인생으로 치유하시고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조금만 더 고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면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중보자이신 예수님도 우리 안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며, 열매 맺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끝까지 책임지시는 예수님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유예기간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 무화과나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스스로 자신이 관리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무가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종자가 좋지 않아 노력을 기울여도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3년의 시간 동안 기르며 지켜봤던 포도원지기만큼 그 사실을 잘 아는 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자신이 더 노력해보겠다, 내가 끝까지 책임져보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더럽고 추하고 비틀어졌다고 해서 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곧고 바르게, 깨끗하게 만들어가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그 안에 품어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세워가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형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깨끗하고 병들지 않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깨끗하냐에 따라 그에 맞는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한 심령으로 빚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중보하시고 책임지시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

법률 용어에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가 있습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유예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사형이라는 형벌이 집행됩니다.
유예 기간 동안 잘 살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이라는 형의 집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聖徒)는 이 땅에 사는 유예 기간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면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사형 판결을 받고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던 우리가 대(大) 사면을 받아 하늘의 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뤄진 완전한 사면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된 사실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사탄이 주는 생각을 따라 살면서 십자가에서 이뤄진 역사를 집행유예 정도로 삶에 적용시켜서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항상 잘하려는 조바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쁨을 주는 소식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사면된 성도의 거룩함은 이 세상의 어떤 더러운 것과도 섞이지 않고,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는 온전한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렇기에 성화(聖化)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온전케 하셨다는 이 말씀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론으로 이 말씀에 교묘하게 흠집을 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에 짐을 질 뿐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았습니다. 설령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노력해서 벗어야 할 저주가 더 이상 없고, 십자가의 효력이 무효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이미 다 받아버리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하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주인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과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고 말하는데, 그것은 ‘열매를 잘 맺으면 살리고 못 맺으면 버릴 테니 금년에도 두고 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 속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게 참혹한 형의 집행을 일 년 동안 미루어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로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대로 두소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압히에미’로, 그 뜻은 ‘용서하다, 사면하다, 버리지 않고 놔두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형을 당하기 위해 집행 장소로 끌려가는 사형수에게 “당신은 사면이요!”라고 외치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대로 두소서(압히에미),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압히에미’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셔서 외치신 말씀 중에도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외치실 때, ‘사하여 주옵소서’란 말이 바로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사면해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 무화과나무에게 똑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형의 집행을 1년간 미루어 주시면 잘 해보겠습니다’ 하고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년이란 시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참혹히 찍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처럼 성도가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성화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과원지기에 의해 찍힘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과 죄가 온전히 씻어져서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 죄를 기억함이 없는 완전한 사면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름이 되셨다

물질이 죽어서 썩음으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에너지를 가진 것이 ‘거름’입니다.
거름은 죽음이 함의된 단어로,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거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거름이 되었고, 우리가 그 거름을 양분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혀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때를 따라 물을 주며 항상 보호하여 찍히지 않게 하며, 주인이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오직 과원지기에 의해서

신앙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한 나를 발견하고 과원지기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인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일에도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2-13-2024(화) 누가복음 13: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누가복음 13:3,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If you don't repent, you will perish)

* 회개하다(3340) 메타노에오(mĕtanŏĕō)  μετανοέω 스트롱번호 3340

1. 마음을 고치다.  2. 바꾸다.  3. 뉘우치다
발음 [ mĕtanŏĕō ]
어원  /  미래 μετανοήσω, 제1부정과거 με- τε νόησα, 3326과 353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 마 3:2, 막 1:15, 눅 10:13, 행 2:38, 8:22, 고후 12:21, 계 2:21, 22, 16:11.


그때 마침
- 이 표현은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을 말해주는 동시에 어떤 예기치 않은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빌라도가...섞은 일
-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예수께 보고되고 있다.
여러명의 갈릴리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그 보고 내용인데 이러한 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극은 당시에 흔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느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고 다만 여러가지 추축이 있을 뿐이다.
1. 사도행전 5:37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2.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처럼 되게 한 사건이라고 본다(23:12).
12. 헤롯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3.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이들 견해는 확실한 증거로써 뒷받침되지 않는 하나의 추축에 불과하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이 말씀은 앞에서 보고한 사람들의 관심(關心)이 빌라도의 악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살자들의 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바,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욥 4:7;-8. 20. 22:4-5. 요 9:1-2).

회개치 아니하면...망하리라
-
'아니라'(*, 우키)고 하는 단정적인 부정의 표연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固定觀念) 즉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편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
여기서 '회개'(*, 메타노에오)는 지난 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깃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마 7:1-5; 롬 3:10-12). 한편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Farrar,Godet), 그보다는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arshall,Lenski).

실로암에서...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
-
예수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는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어상으로는 2절과 4절의 '죄'가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즉 2절(*, 하마르톨로이)에서 와는 달리 4절의 '오페일레타이(*)는 '빚진 자'라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서 '빚진 자'를 '죄인'에 대한 단순한 동의어라고 보는 견해(Marshall)와 열 여덟 명의 희생자들이 성전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Ewald)가 있다.
즉 이들은 빌라도의 수로공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고, 빌라도는 그 공사비를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사용한 것이므로 이 돈을 노임으로 받은 이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부분은 1-5절로 빌라도에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둘째 부분은 6-9절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입니다.
 
첫째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1-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두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극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죽음을 목격한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허겁지겁 달려와서 고했습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 의도는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객사한 이유는 바로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합니다. 
정말 갈릴리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갈릴리 사람들처럼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판단하지 말고 오리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요즘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삼풍백화점 , 성수대교, 무역센터, 비행기사고 , 열차사고, 자동차사고, 화재사고 이런 일들이 죄가 많아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회개라는 말은 히랍어로 “메타노에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 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입니다. 
망하지 않는 지름길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2월 13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13:1∼5
묵상을 위한 주제 : 회개치 않으면 망한다(3절)
성구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으로빌라도에 의해서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죄악이 크고 무겁기 때문에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3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같은 의미의 말씀으로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그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사고와 자연 재해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메타노에오) 라는 단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이며 망하지 않는 지름길이라고 하겠습니다.

♪ 찬양 / 어서 돌아오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시인 필립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는다면 회개를 설교하다가 죽기를 원하며, 만일 내가 강단 밖에서 죽는다면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
당신의 비밀스런 의무를  확실히 실행하라.
무엇을 하든 멈추지 말라.
그것을 소홀히 하면 영혼은 절대 강건하지 못한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골방 문을 먼저 떠난다.

주님과의 비밀스런 교제를 풍성히 하라.
그것은 성도를 풍요롭게 하는 비밀스런 업무이다.

기도가 당신의 아침을 여는 열쇠와 하루를 마감하는 빗장이 되게 하라.

죄를 대적하여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릎을 꿇고 싸우는 것이다. - 필립 헨리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착각이다.
사람들은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나라가 언제 부터인가 커피공화국이 되었다.
커피집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커피집을 오픈하는 사람들은 커피집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 대박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별화 되지 않으면 대박이 아니라 쪽박 찬다.
차별화하지 않으면 쪽박 찬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커피집을 오픈하면서부터 차별화를 위해서 몸부림 칠 것이다.
고객을 만족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시 회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예외 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일침이 놓고 계신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발생했던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을 좀 살펴보자.

첫 번째 사건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복음서에는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이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예수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로 건설을 제안했다.
수로를 건설하려면 재정이 많이 드는데 빌라도는 이 재정을 성전 헌금에서 충당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 바쳐지는 엄청난 수의 가축 희생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전체에서 성전의 물소비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빌라도의 제안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가운데 일부 갈릴리 사람들은 성전의 거룩한 돈을 이방인과 함께 썼다고 흥분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빌라도는 군사들을 풀어 이를 진압했다.
또한 경고의 의미에서 진압하는 과정가운데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성전제물에 섞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이방 민족에 의해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정치적 사건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전 모독과 관련되어 있어서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 분명했다.

​두 번째 사건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이다.

여기서 실로암 망대란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빌라도가 성전 헌금을 이용해서 예루살렘 성 밖에 건설했던 수로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던 망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망대가 무너짐으로 인해 18명의 사망자 발생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말씀처럼 어떤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디선가 재난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건이 자신과 관계되었을 경우에는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닥치는가?’ 라고 말하며 흥분한다. 타인에게 일어나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옛말에 ‘강 건너 불구경 하듯한다’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당장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들은 더욱 심했다. 그들은 누군가 불행한 사건을 당하면 인과 응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을 당했다는 것이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에 저가 시각장애인이 되었냐고 물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각장애인을 죄의 소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건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각은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다. 즉 유대인들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러한 사건을 당한 자들의 죄를 지적하기 바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초점을 바로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두셨다. 다시 말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정치적 살육이나 실로암 망대가 붕괴된 자연적 사건 모두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하셨다. 곧 그 모든 사건들은 ‘그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을 향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5절 말씀을 보라. 두 사건 이야기를 하시고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살육을 당했던 사람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도 너희도 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그들처럼 똑같이 망하게 된다고 말씀한다. 오늘 이 시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코로나 19에 걸린 사람이 우리 보다 죄가 많아서 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살육 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실로암 망대에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다르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말씀하신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망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정신차리라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았다면 너희는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 결과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예수님은 죄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은 죄 값에 따라 형량이 다르다. 형량이 큰 사람은 그 만큼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고 형량이 적은 사람은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다. 살인죄를 지은 사람과 좀도둑이 같은 형량을 받을 수는 없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는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실 때는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다. 큰 죄를 지었던 작은 죄를 지었던 모두가 죄인이다. 덜 죄인은 없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야고보기자는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그 죄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다고 말씀한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향하여 칼을 가신다고 말씀한다.
활을 이미 당기어서 쏠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말씀한다.
얼마나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인지 모른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하신 교회에 대해서는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큰 환난가운데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셨다.
토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이런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이것이 죄인의 끝이다.
죄를 지은 인간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그 끝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과하고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쉬운 것이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쉽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일까?
하나님을 의식하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회개는 쉽다.
인간인지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말은 하지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죄인 줄을 알고 빨리 회개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하기 어렵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니 죄에 대해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니까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회개는 형식적인 회개로 그치면 안 됩니다.
입으로만 하는 회개로 그치면 안 된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유다광야에 있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로 몰려왔다.
세례요한이 몰려오는 그들에게 가장 먼저 외쳤던 말씀이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쳤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라.
여전히 예루살렘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다.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가지고 와서 그 짐승에게 안수하여 자의 죄를 전가하고 직접 잡았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제물을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다 치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좋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세례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다. 왜 이미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을 그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인가? 이는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가운데 진정한 회개는 사라지고 없고 형식적인 회개, 말뿐만 회개만이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대해 말라기 3: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거짓된 모습으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성전 문을 차라리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는 너희가 손으로 어떤 것을 드리든지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사1:13절에서 더 강하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은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회로, 예배를 드린다고 모여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호소하고 계신다.

​짐승 한 마리 잡아서 바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고해성사 한 번 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 시대이다. 죄를 지어도 그것에 대한 대가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니 죄를 쉽게 짓는다. 바울은 죄와 싸우데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다.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죄다.
죄는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 된다.
죄는 사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회개하는 것이다.

이사야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보다 희게 씻어주시겠다고 하셨다. 회개하면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는 부패하고 만다.
회개가 없는 신앙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
회개가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 말뿐인 회개가 하니라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를 할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을 때 진정한 회개를 통해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늘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난을 보는 시각(누가복음 13:1~5)







지진은 말세의 징조 중에 대표적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1에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참고 마 24:7, 막 13:8).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큰’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말세에는 곳곳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8에도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이런 큰 지진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보아서 아는 사람이 있고, 또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다.
보지 않아도 됩니다.
듣기만하면 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삼고, 교훈을 받는 사람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 하찮은 남의 언행일지라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집 일본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지진을 앞에 두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오늘 읽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십시다.

재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총독 빌라도가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저들의 제물에 섞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세상이 이런 흉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수 더 떠서, 실로암에서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비참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2,4절에서 “이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남의 허물은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 나라 일본의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의 참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이 엄청난 일을 통해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화하고자 하는가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재난을 만나면 남의 죄를 생각하거나 원망부터 합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나라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핍니다. 이제 이 재난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1)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의 역사다. 왜 이런 비극이 인류에게 있는 것인가요? 성경은 이 세 가지가 인류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재난과 불행을 피해갈 길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경고와 심판으로 재난을 이 땅에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있는 곳에 재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2)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재난 속에는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재난 속에서 우리의 죄악을 털어내는 심판의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도 믿습니다.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는 사람이 죄를 버립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모든 인생을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은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곳이요, 홍수를 만난 노아의 때와 같았을 것입니다. 남아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래도 남겨두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자비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78:38에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3)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셋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치어죽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사건 뒤에 여러 가지로 사건 자체가 분석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실공사입니다. 돈을 떼어 먹고 엉터리공사를 했다느니, 관리를 잘못했다느니 정부정책이 잘못됐다느니 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망대가 낡았으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든지 보수 공사를 제 때 해야지, 이것은 인재(人災)라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본지진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지진에 대해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첨단장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어째서 지진 징후를 알지 못했으며 경보를 발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가하면 지진의 과학적 규명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경제손실과 득실을 따지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깨닫고 이 재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글자 한자 안 틀리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난 속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재난을 보는 주님의 시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남의 불행이나 재난을 보면 “무슨 죄가 얼마나 커서 저렇게 당할까?”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인과응보론 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어떤 사람들도 그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요한복음 9:2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욥이 당한 고난의 소문을 듣고 위로하려 왔다가 그 고난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는 결국, 욥이 죄 없이 이런 일을 당하겠느냐며 정죄자로 돌아선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재난을 보는 예수님의 시각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재난과 비극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요?

1) 우리도 저들과 같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나, 지진과 쓰나미로 죽거나 손해와 비극을 당한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고, 4절에도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비극을 보면서, 세상의 재난과 비극의 원인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렇듯 비참하게 죽었으나 우리도 저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원래 다혈질이라 자주 반정부, 반 정치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들이 다스리기가 어려워 ‘유대의 화약고’라고 불렀다. 그러니 까불다가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에 치어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공연히 죽었겠는가? 다 죗값이제!”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저 지진을 만난 것이 우상숭배, 배금주의, 성적 타락 때문이라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쉽게 비판하지 말라. 저 사람이 죄 때문에 망했다고 비판하지 말라. 너희도 저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도 저와 같다는 것이다. 남의 죄는 보면서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남이 당하는 고난을 보면서 자신이 당할 고난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3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눅 6:41).

2) 저들이 당하는 재난은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만 죄가 더 많아서 그 모든 재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는 분들은 종종 그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안전벨트 안 했다고 교통순경이 잡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가 걸린 순간에도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 차들이 무수히 지나갑니다. 그러면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왜 나만 잡아요. 저 사람들도 안하고 그냥 가는 데요!” 그러면, 순경이 하는 말이 “선생님, 죄 지었다고 다 감옥 갑니까? 대표로 가는 거지요. 대표로” 그럽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위반한 적이 많지만 그럭저럭 다 넘어가고 가끔씩 걸립니다. 죄지었다고 다 감옥가면 감옥이 세상보다 커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당할 일을 저들이 먼저 당한 것뿐입니다.

여기 갈릴리 사람들이 죽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도처에서 사고로, 질병으로, 전쟁으로, 지진으로 애매하게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만 죄인인가요? 아닙니다.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마치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당한 것처럼 아파하는 애통을 가져야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역사상 폼페이 지진이 유명합니다. 그러면 왜 폼페일까요? 로마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폼페이를 치시고, 그래도 로마가 회개치 않으니 다음에 로마를 치신 것입니다. 모두들 죄악이 관영한 중에 폼페이가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때는 부모 대신 자녀가 당하기도 하고, 내 대신 이웃이 당하기도 합니다. 결코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위태롭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좌파들이 너무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를 짓밟습니다. 안티크리스천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안티들은 세상에 대통령이 기독교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꿇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번은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이 많이 조심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은 메시지입니다. 재난은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지나가는 사건도 아니요 미래적인 사건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귀로 듣도록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눈으로 보게 하시고, 눈으로 봐도 못 알아들으면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재난을 보는 우리의 반응.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재앙을 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요?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3, 5절에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반복은 자비입니다.
먼저 죽은 몇 사람은 우리 모두가 당해야 할 일을 부분적으로 당한 것뿐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 사람이 당한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1. 회개하라.

주님은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일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사고를 보고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가족이 한 번 앰뷸런스로 병원에 실려 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추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저 차에 실려 가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재난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은혜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당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먼저 당함으로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거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6,11을 개역 성경은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다. 거울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개정 개역은 ‘본보기’로 썼다고 합니다.

유다서 1:7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8:23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했고, 디모데전서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십시다.

2. 깨어 있으라.

깨어 있지 않으면 들어도 못 듣고, 보아도 못 봅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결국 회개할 수 없게 됩니다.

누가복음 21:34-36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깨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의식하며 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영적각성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가요?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가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열매를 맺으라.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이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과 일에 열매를 남겨야 할 때이다. 열매를 생각합시다.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는 그 곳에 있지 않았으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일본 지진의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지금 내가 그 일을 보고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금이 복음이요, 지금이 은총입니다.
아직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주 앞에 나와서 이 음성을 듣고 있지 않은가요! 이것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일본의 엄청난 재난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TV가 하나님의 심판을 촉구하는 매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일본이다. 먼 나라가 아닙니다. 강 건너 이웃집입니다. 가까이 일본을 통해 종말이 가까웠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의로운가요? 아니다. 대표로 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말할 시간도 아니요, 비판할 시간도 아니요, 다만 들어야 할 시간이요, 무릎을 꿇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듣고 보았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총입니다. 이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요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다. 우리 오늘 이 시간 한 번 의자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읍시다. 대통령과 마음이 하나 되십시다. 주의 자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마음의 손을 들고 겸손의 무릎을 꿇읍시다.

김익두 목사님이 노방전도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천당’하고 외쳤더니, 그 중에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 여기서는 전도 안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고 은근히 협박을 합니다.
그래서 김목사님 ‘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큰 비가 있고, 뇌성벽력이 있었는데, 벼락이 정자나무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을 웅덩이처럼 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없으니 애꿎은 나무나 논을 때렸겠지요.
만약 하나님이 있어도 눈이 멀었을 겁니다.”
그럽니다. 그래 목사님이 잠시 묵상을 하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김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서당 나왔나? 학교에 다녔나?” 
“학교 다녔지요!” 
“그러면 선생님 손에 뭐가 있더냐?” 
“매가 있지요1” 
“그러면 그 매로 어딜 치더냐?” 
“그야, 칠판을 치거나 책상을 때리지요!” 
“왜 애매한 칠판이나 책상을 치는가?” 
“그야, 아이들이 떠들거나 안 듣고 장난치기 때문이지요!”
그때 김목사님이 냅다 고함을 질렀습니다.
“네 이놈, 다음에는 하나님이 네게 벼락을 때리실 게다!” 
그랬더니, 이 청년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그 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2-12-2024(월) 누가복음 12:54-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대를 분별하라(누가복음 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How is it that you don't know how to interpret this present time?

예수님께서는 천지의 기상을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는 불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이 불어오면 더위가 올 것을 알았습니다.
이와같이 기상은 잘 알면서도 시대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고 있습니까?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특징하는 사상을 "다원주의"라고 합니다.
'다원주의'의 대한 세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둘째는 뉴에이지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을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뉴에이지의 문자적 의미는 "새 시대"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합니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셋째는 동성애와 동성혼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하여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 섭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흐름에 한국에서도 "차별금지법"을 제안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을 교회가 막아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도 결국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생명력이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분별하다는 헬라어는 "도키마조(dŏkimazō. δοκιμάζω)"라고 합니다.
'도키마조'는 "시험하다, 시험하여 증거하다,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라(interpret this present time) Discern the times

분별하다(1381) 도키마조(dŏkimazō) δοκιμάζω 스트롱번호 1381

1. 시험하다.  2. 시험하여 증거하다. 3.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
발음 [ dŏkimazō ]
어원 / 미래 δοκιμάσω, 제1부정과거 ἐδο- κίμασα, 완료수동 δεδοκίμασμαι, 1384에서 유래


천지의 기상은...분변치 못하느냐

- '천지의 기상'에 대비되는 '이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선교 활동과 관련된 사건들,
(2) 인간들의 결단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행위(Marshall).
(3)예루살렘의 멸망 또는 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말(Jeremias).
본문은 이러한 제견해들을 종합하여 이해되어야 옳을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시대적 징후를 분별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시대를 분별하여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 태도 때문이었던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의 사람들은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을 불면, 어김없이 더위가 올 것을 알았다. 이렇게 기상은 잘 알아맞히면서도, 시대는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이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이 지금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 쯤 가고 있는지 왜 무관심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이 시대를 분별하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할 때, 우리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한 마디로 ‘다원주의’다.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교회는 다원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싸워야 한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를 살펴보자.

 1.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다원주의가 종교의 형태를 띠고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다.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한 마디로,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우리 시대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책들이 시중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학생들은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해서 학문을 배우기 때문에, 무엇을 전공했든지 간에 대학교를 나올 때는 종교다원주의의 맹신자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가 유일한 구주다”라고 말하면, 콧방귀를 끼고 만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영적인 면에서 심각한 도전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교회는 더욱 말씀으로 무장하고, 진리로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싸워 승리해야한다.

 2. 뉴에이지 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이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뉴에이지를 문화의 한 흐름 정도로만 이해하고 지나가는데, 그것은 피상적인 면만을 본 것이고, 그 본질에 들어가면 문화의 형태가 아니라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문화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영적인 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로운 영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에이지가 무슨 의미인가? ‘새 시대’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가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뉴에이지의 해로운 영적 영향력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3. 동성애와 동성혼(same-sex marriage, gay marriage)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섭리요 성경적인 모델인데,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기까지 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소위 ‘성 평등’이란 용어를 들고 나와서 법으로 명문화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성 평등이 무엇인가?
성을 구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성을 자신이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태어날 때 갖게 되는 생물학적인 성의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정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양성평등’은 인정하지만, 성 평등은 인정할 수 없다! 양성평등이 무엇인가? 남녀를 차별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하자는 것이다. 이는 이미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다(헌법 36조 1항). 동성애를 관철하기 위해서 양성평등을 성 평등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녀의 평등은 마땅하나, 모든 성이 평등할 수는 없다!

또 한 가지, 동성애,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의 개정을 주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기존의 차별금지법(헌법 11조 1항)에다가 ‘개인의 성적 지향’ 차별금지 등의 조항을 슬쩍 포함시켜놓고 있다. 이는 동성애, 동성혼을 비롯해서 온갖 변태적인 성적 태도들에 대해서도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성 평등과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되면, 학교에서는 성교육시간에 동성 간의 성관계에 대해서도 가르쳐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군대에서는 동성애자를 제재할 방법이 없게 되고 군사기와 전력은 크게 저하될 것이다.

영국의 기독교변호사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동성애 관련 법제화를 못 막으면, 교회가 세상에 짓밝히고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2만 명 넘게 나가 있는 해외선교사들도 다 철수해야합니다. 앞서 영국은 성 평등법 통과 후 출석교인이 2%가 안 될 정도로 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했는데, 더 이상 선교사를 내보낼 능력이 안 되어 빠른 속도로 철수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유능한 일꾼들을 선교사로 내보낼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남아서 차별금지법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최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통한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시대를 분별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이 시대를 변화시켜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노년 삶의 질을 향상하는 방법으로 ‘섹서사이즈’(sexercise)를 적극 권한다.
섹스(sex)와 운동(exercise)을 조합한 신조어다.
그 주제는 ‘침대에서 잠자는 것 이상을 얻으라’는 거다.
“섹스는 모든 근육 집단을 사용하며 심장과 폐를 활발히 움직이게 하고 시간당 약 300㎈를 소모한다”고 설명한다.
한술 더 떠 “올겨울의 정기적인 섹스가 다가오는 봄에 더 훌륭한 몸매와 더 젊어 보이는 용모로 이어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다 늙어서 무슨…’ ‘아휴 남사스럽게…’ ‘거 참. 주책맞네…’ 하며 외면할 일이 아니다.
친구도 아닌 며느리를 민망스럽게 한 주인공은 사실 내 아버지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전립선암을 앓고 계시다.
20년도 넘게 약을 잡수신다.
나는 아버지가 성생활은 졸업한 줄 알았다.
그런 내게 아버지의 고백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신비로웠다.
내 친구들 몇은 비아그라를 복용한 지 오래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아그라를 처방받은 흔적도 없다.

도쿄 노인의학연구소가 2007년 87세 노인의 건강과 체력을 조사했더니 1977년 70세에 해당했다.
30년 사이 17세가 젊어졌다.
요즘엔 자기 나이에 0.7을 곱하면 아버지 세대의 신체· 정신· 사회적인 나이와 맞먹는다고 한다.
지금 내 아버지 나이 93세에 0.7을 곱하면 겨우 65.1세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부친은 ‘장청년(長靑年)’이 맞다.
그동안 나 자신의 젊음에만 관심이 있었지 아버지 나이를 놓치고 있었다.
불효가 딴 게 불효가 아니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은 신석기시대 29세에서 17세기 유럽인은 51세였다.
이 기준으로 할 것 같으면 마르틴 루터의 63세는 오늘날 호모 헌드레드에 해당한다.
그는 죽음을 앞둔 며칠 전까지도 아내 폰 보라와 섹스를 주제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루터는 “일주일에 두 번 아내에 대한 의무로 섹스를 하면 남편은 물론 아내에게도 이롭다”는 부부섹스 규칙까지 제안했을까.
루터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침실에까지 확대한다.

“아담의 타락에서 잉태되어 인간의 불순한 본능으로 귀착돼 버린 성욕의 허물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것을 눈감아 준다.
결혼생활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섹스는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악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고(故) 안병무 교수는 어느 날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에 부부가 성교하는 중인데 하나님이 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면 손을 저으며 하나님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들과 며느리가 가정사역자로 살아가는 일을 삶으로 응원해준 아버지가 고맙기 그지없다.
부모님은 가정사역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성질’만 빼고 내 아버지를 살아내야 한다. 맞다.
침대는 잠자는 것 이상의 ‘스위트 홈’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 보자기다.




2-10-2024(토) 누가복음 12:3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을 던지러 왔노라(누가복음 12:49)

내가 불을 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I have come to bring fire on the earth, and how I wish it were already kindled!

성경에서 불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신명기 4:24)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 열 명이 없으므로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사도행전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예수님께서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한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셋째는 불은 하나님입니다(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our "God is a consuming fire."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했을까요?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는다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싸움을 "영적 싸움"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 종교 사회이었습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신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는 유일신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참람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번에 칼로 무를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놔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 하고 비난합니다.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합니다. 
결국 그 결과는 다툼과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을 소유한 영의 사람과 육체를 기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기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이 불과 같다고 할 때 불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용광로와 불타는 벌판의 불처럼, 성령의 불은 하나님의 강력한 영광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불같이 강력하게 임재하실 때에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구원입니다.
성령의 불은 쭉정이에게는 심판의 불이고, 알곡에게는 구원의 불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동일한 불이심판의 불도 되고, 구원의 불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불이 구원의 불로는 어떻게 임합니까?

* 흠향의 불 :

흠향의 불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영광으로 강력하게 임재 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엘리야의 제물을 흠향하셨습니다(왕상 18:33).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임재 하셔서 참 하나님 되심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이 됨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력한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공식 예배와 삶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강력한 임재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제련의 불 :

성령의 불은 흠향의 불이기도 하지만 제련의 불이기도 합니다.
말라기 3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의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용광로 불 속에 넣으셔서 불순물을 제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속에 교만과 음란과 미움의 불순물을 태워 없애버리십니다.
불평과 불만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감사와 경배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 파급의 불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경우 성령의 불이 불타는 벌판의 불길처럼 번지는 파급의 불이 됩니다.
성령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담력과 열정을 줍니다(행 4:31).
성령의 불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함으로 복음이 번져나가게 합니다.
성령의 불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겁게 해서 복음 열정의 불이 번지게도 합니다(눅 24:32).
성령의 불이 이 경우 열정의 불로 번집니다.
성령의 불은 마음에 감동을 주어 인도함으로 그 불이 번지게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감동을 주어 이것저것을 하게 하는 인도의 불로 번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불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번졌습니다.
성령의 불은 3세기 이내에 당시 로마제국 전체를 복음 앞에 무릎 꿇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게 번졌습니다.
성령의 불을 흠향의 불, 제련의 불, 파급의 불로 확실하게 체험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확실하고 강력한 증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행 1:8).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시면서 이 세상에 불이 붙는 것을 예수님은 그토록 원하고 계신다.
49절의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는 불이 붙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 뿐 불은 아직 붙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불이길래 예수님은 불이 붙기를 그토록 열망하고 계시는가?
50절에 주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다.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무엇이기에 그 세례를 받기까지 답답해하시는가?
그러면서 51절부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을 하시기 시작하는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시면서 “이후로는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이,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와 며느리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37)
도대체 불은 무엇이고 세례는 무엇이며 왜 집안 가족들이 이렇게 싸우고 다툰다는 말씀인가?

엡 2:14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골 1:20)
그리고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주님은 스스로 분쟁을 조장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 믿으면 가정이 화목해야지 이렇게 아비와 자식이 어미와 딸이 시어미와 며느리가 분쟁한다면 누가 예수 믿겠는가?

목사들이 설교할 때 예수 믿으면 가정에 싸움난다고 하는 말씀을 들어 보았는가?
본문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가를 확정해야 할 것이다.
49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불을 던지러 왔다고 했을 때 불은 어떤 불인가 하면 5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쟁이다.
주님은 지금 분쟁의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분쟁의 불이 붙지 않고 있다.

왜 주님은 집안을 분쟁시키지 못해서 애가 타시는가? 남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주님을 생각해 보셨는가? 남의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그렇게 원하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평화롭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왜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50절의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고 했다. 그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의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받으실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남의 가정 파탄 내는 불세례이다. 이 불세례는 다름 아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는 세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는 것이다. 불이 붙어 아비가 자식을 어미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미가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버리면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대 사회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사회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파버린다.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인다. 그들의 사고에서 유일신 사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참람죄를 걸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다. 단번에 칼로 무우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고 하고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하니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본문의 말씀을 정리하면 예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시면서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셨는데, 그 불이 다름 아닌 성령의 불을 의미했다. 그 성령의 불은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십자가에 죽지 않은 상태이고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게 될 때 하나님과 성령이 임한 성도는 화평을 이루는데, 하나님과 화평 된 자는 이제 사단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들 즉 사단의 종들과는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10: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했다. 마10:36절에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 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천륜을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령은 천륜을 거스린다. 둘 사이는 건너지 못할 강이 가로 막고 있듯이 한족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마귀가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집안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예수는 믿는데 엉터리로 믿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지 않은 영적 싸움을 하게 된다.

여기서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은 눈뜬 소경이고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저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먼저 본 자가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예수 믿는 것을 취미생활 수준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니까 능력은 절대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제대로 믿어버린다면 사단은 역사할 것이고 믿지 않는 불신 가족들은 적지 않게 괴롭힐 것이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에서 부터 '호적을 판다', '이혼을 한다' 까지 갈 것이다.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면 친지들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고 친지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이웃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등천하는 이 땅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불을 던지러 오신 주님의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지상 교회는 마귀와 싸우는 전투적 하나님 나라이다. 주님의 승리를 내 승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부득이하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고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 입고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불세례를 받기 전의 답답함을 우리가 느끼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의 승리가 나의 것이 되기까지 우리는 그 답답함과 싸우며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은 이상 영적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승리하기 위한 모든 영적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예수님의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습니다(49-50)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는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나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천국에서 영생으로 곧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주어지기에 불은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붙이기 위해 죽음의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말씀의 불을 지폈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을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그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믿는 자의 심령마다 오시고 구하는 자마다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해야 하고, 최선과 차선을 분별해야 하고, 선과 악을 계속 분별하여 가까이할 것과 멀리할 것을 계속해야 하고, 예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한 가운데 주님 편을 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깨달아 감사한 마음과 기쁜 마음,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잘 감당하도록 합시다.

2. 진리 위에 바로 섭시다(51-53)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고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이 분열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와 불신자 간에 바른 관계가 지속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과 육체적인 자는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 평화는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선행 요건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 간의 갈등과 분열을 필연적으로 동반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쟁입니다. 복음의 계획과 그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 주고 거룩한 사랑 안에 함께 묶어주는 것으로, 만일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연 그렇게 되어질 것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어 복음이 분쟁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쟁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이 이성과 감정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의 가장 근거 있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계속 조명하며 우리의 생각을 이성이 아니라 말씀으로 바꾸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둠과 빛은 상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취면 어둠은 도망가야 합니다. 동시에 빛이 빛을 발하지 않거나 못하면 어두움 속에 묻혀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 위에 서서 말씀을 통하여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3.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합시다(54-57)

팔레스틴에서의 비는 지중해의 습도 높은 바람에서 기인하는바 서쪽 지중해 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곧 비가 올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바람은 남쪽의 사막 지역에서 불어왔는데, 팔레스틴 지역을 가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위와 가뭄이 시작되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하시면서 질책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종교 윤리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상을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상황을 통하여 사회 속의 사회인들은 사회인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 지도자들대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영적 분별력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기상 변화에나 민감하고 자신의 안일함을 위해 로마의 정치적 상황에만 재빠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구약에 직간접으로 450번이나 예언된 메시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교회와 우리의 모습을 분별하여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때는 악한 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악한 시대이기에 세월을 아끼도록 말씀합니다. 하지만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기에 신랑 되신 예수님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머뭇머뭇하지 말고 옳은 것에 대하여 선택하였어야 합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수많은 유혹의 손길에서 결단하여 뿌리쳐야 합니다. 시대를 바르게 분변하여 죄악 된 길에서 단호히 돌아서야 합니다.

결단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4. 회개만이 살길입니다(58-59)

예수님은 58절에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하십니다. 이는 채무자가 법정에 서기전에 어떻게 해서든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정에 서기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늦기 전에 시대의 징후를 분별하여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법정 밖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쌍방이 서로 합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는 예수님의 댓속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 5장에서는 하나님과 화목케 됨을 말씀합니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요, 긍휼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우리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불에서 건짐을 받아 영원한 생명 된 길을 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영혼은 밝게 되어 세상을 밝게, 소망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 만이 살길이요 이 길을 가는 방법입니다. 죽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못하면 하나님의 법정에 서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의 뜻은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긍휼하심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회개만이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성령세례와 불세례

주님은 물과 성령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던지신다 하였다.

물과 불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물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로는 마임이라 한다. 물은 땅에도 하늘에도 있으며 처음 땅에는 깊은 샘(테홈, 깊음)이 있었고 그곳에 물이 있었으니 물의 얼굴에는 엘로힘의 영이 품고 있었다고 한다(창 1:2). 물과 성령의 관계는 태초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었으며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물과 영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으며(요 3:5) 제자들에게 너희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으나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하셨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 하셨으니(요 3:6) 물에서 난 것이 육이요 또한 물이다. 이 육은 물에서 났으나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하였다(벧후 3:5). 이와 같이 태초부터 물은 육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땅의 물은 아래 사상이요 하늘엔 윗물, 높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이 하늘의 높은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뜻을 거슬리어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어 땅과 모든 생물을 물에 수장시키신다. 노아 때에 홍수로 지면에 기식하는 모든 것을 멸하셨으나 노아를 비롯하여 여덟 목숨을 건지셨다. 그리고 노아와 그 후손과 방주에서 나오는 모든 생물과 언약을 정하셨다. 그것은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으며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어 땅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언약의 표적이라 하셨으니 앞으로는 물이 아닌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창 9:8~17).

인자는 밤에 도적같이 오시는데 그날에는 하늘과 초등 학문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태워지리니 의로운 삶을 산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된다고 한다(벧후 3:10~13). 이로 보건대 물과 성령의 관계와 물과 불의 관계에 물이 항상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은 위에 높은 사상이 깨우쳐 주고 품어 주어 일정한 기간을 훈육하여 그 물(사상)에서 나오게 하시는데 이를 세례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물과 세례를 이렇게 설명한다.

"물은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부도덕함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선한 양심이 하나님에 이르고자 질문하는 것이라(벧전 3:21)."

구원은 목숨이 받게 되는데 물에 잠겼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것을 세례라 한다. 둘째 날에 노아 때 홍수로 잠겼다가 나오며 셋째 날엔 소돔 고모라의 불세례에서 살아남은 믿음의 사람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넷째 날엔 요단강을 건너면서 세례를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고 다섯째 날엔 또 다시 요단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게 된다. 주님도 다섯째 날에 요단강 물로부터 올라오시게 된다.

다섯째 날까지의 물에서 나온다는 것은 물로써 거듭남이라 하는데 다섯째 날까지의 물, 곧 사상이란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법이다. 둘째 날에 홍수를 내려 지면의 죄악을 쓸어버리시고 무지개 언약을 주시고 셋째 날 아브라함의 믿음에 언약하셨으며 넷째 날 죄 있는 인생들에게 율법을 주시어 사망을 이루시는 사상이 다섯째 날까지의 사상이며 물이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다.

이제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에서 거듭남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이를 바울의 주석을 빌리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오도록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했으니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인데 불세례와 병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불 심판의 법인가? 성령세례란 죄와 사망의 법(사상)에서 해방되어 성령으로 사는 자를 말하는데 이 자를 연결된 소식을 가진 자라 말하고 있다.

주님이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연결된 소식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고 하셨다. 이로써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임하시어 성령세례를 주신다.

"오순절 날을 함께 채우려고 저희가 모두 하나 되어 그곳에 있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의 몰아치는 것 같은 울림이 나서 저희 앉아 있던 집 전부를 가득 채웠으니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져 저희에게 보이더니 각 사람 위에 앉았으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케 되어 성령이 발표하도록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혀)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온 자들, 즉 요한의 세례로 나온 자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는 동시에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지는 역사와 함께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게 된 것이다. 혀(방언)가 불이니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자신의 혀가 자신을 태운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상이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며 지옥에 속하여 불살라진다(약 3:6)."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불이 있는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을 불 못 또는 둘째 사망이라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불지옥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인데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사도 요한도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불속에 태우신다 하였으니 불세례는 쭉정이를 태우는 심판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쭉정이를 태우는 불 있는 지옥이 어느 장소에 있느냐다.

몸 밖에 있다면 주님께서 던지는 불세례는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몸 안에 있다면 반드시 불세례를 받아서 내 몸 안에 이롭지 못한 쭉정이와 더러운 사망의 사상들을 깨끗이 쓸어서 불지옥에 던져 태워야 한다. 그럼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도 얻는 일거양득의 효과적인 증인의 삶을 살도록 계획하신 것이니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동시에 받기를 권면한다.

주의 날(인자의 날)은 밤에 임하시므로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 날에 주님을 만난 자들은 모두 깨어서 옥을 지키던 자들이었다. 도적이 어느 옥에 올지 모르기에 항상 깨어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 성령세례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니 그날 하늘과 땅이 불타고 초등 학문이 불에 녹아질 때에 의로운 삶을 사는 자는 소식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 안에 도적같이 도착하리니 그날 안에서 하늘 삶이 굉음으로 지나갈 것이며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풀어질 것이며 땅과 그 안에 행위가 불 태워질 것이다. 그런즉 이 모든 삶이 풀어지나니 어떻든 너의 삶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안에서 시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날의 출현을 기다리고 서두르면 그날을 인하여 하늘 삶이 불붙어져 풀어지고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녹아지게 된다. 나의 삶도 그의 연결된 소식을 좇아 새 하늘 삶과 새 땅을 기다리나니 의는 하늘 삶 안에서 안주한다(벧후 3:10~13)."

주님께서는 나와 동행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뽑아서 짊어지고 나와 동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형 틀이니 사형장에 있어야 하지만 아예 사형 틀을 뽑아서 짊어지고 다니면서 죽을 일이 생각나거든 바로 죽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고 불붙은 지옥을 소유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시며 이 자에게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 연결된 소식을 주시어 의로운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시어 둘째 사망에 온전히 들어가지 않고 사망에 관한 부분만 태워서 불 못에 던지므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https://nykcn.org/serye-xi-li-mataebogeum-3-11






불(4442) 푸르()


던지다(906) 발로




- 본문에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것은 '불'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Grundmann, Ellis).
2. 영적 활동(Bengel,Vincent).
3. 심판 (Schlatter,Grasser).
4. 로마의 침략(Clark).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정확한 것인지를 판별하기란 어렵지만 앞의 비유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건대 (3)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이 불이...무엇을 원하리요

- 이 문구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하다.

1.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오(Bleek,Wette).
2. 내가 무엇을 하리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Alford,Meyer,Stier).
3. 이 불이 붙었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Plummer).
4. 이 불이 이제 붙어지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가?(Marshall).

이 가운데 "이 불이 이제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에 따라 (3)과 (4)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심판을 내리러 오셨는데 그 불이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어떤 화가가 복음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복음에 대한 그림은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침몰한 배에서 선원 한사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두 손으로 바위를 움켜잡고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참으로 생동감이 있고 세상 풍파 속에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를 때 산 소망이 주어진다는 뜻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는 그 그림을 보다가 다시 한번 더 붓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으로는 복음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완전하게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는 붓을 들고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냥 얼핏 보기에는 똑 같은 그림이었는데 앞에 그린 그림과 한군데 틀린 곳이 있었습니다.
앞에 그린 그림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바위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지만 뒤에 그린 그림은 한 손은 바위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자기만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다른 영혼들을 전도해서 함께 천국 가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 것입니다.


옛날에 석가님과 공자님과 예수님 세 분이 산보를 하는데 한 청년이 못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공자님이 말하기를 "허어, 군자는 대로 행인데 어찌하다 물에 빠져 고생을 하는고?" 하더랍니다.
그 다음에 석가님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물에 빠져 고생하는고?" 했답니다.
그 뒤를 따라가던 젊은 예수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그 청년을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한낱 우스운 얘기 같지만은 우리 기독교는 도덕적인 책망 이전에, 철학적인 윤회설 이전에 물에 빠진 사람을 나가서 건져 주는 사랑과 자비의 종교요 우리의 잘못을 책하지 않고 용서해 주고 믿음을 주고 돌보아주는 은총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요단강 계곡 경사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화창한 날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각기 자기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꿈이 있었어. 나는 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거기서 하 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쓰여졌으면 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큰 봉사를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알게 될 꺼야."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내 꿈이야.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해변으로 끌려나가서 큰 범선이 되어서 지중해 를 내왕하는 사람들을 도와 날라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모험을 하게 하고 저 로마의 풍요함을 이 땅에 심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 때 세 번째 나무도 늘어진 가지를 쳐들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이 너희들하고는 좀 달라. 나는 여기 그대 로 혼자 남아 있고 싶어. 여기서 내 가지를 하늘로 향하여 치켜들고 산을 오르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눈을 들어 하 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여름에 햇빛이 쪼일 때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이 내 그늘 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나무 그루에 도끼가 와 닿았습니다.
그 나무는 높은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언덕 에서 끌려 내려 왔습니다.
목수는 그 나무를 받아서 조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의 재목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이 나무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나무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어느 집의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들이 핥으며 비를 맞아 시들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그 나무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낡아빠진 구유가 되다니"하며 한탄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도 잘렸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 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큰 범선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를 싣고 다니는 작은 어선이 되었습니다.
매일 바닥에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싣고 다니는 조각배가 된 그 나무는 절망에 가득 차 자 기의 신세를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도 역시 베어져서 그 언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목수들의 손에 의해서 그 당시 중한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인 십자가로 만 들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나?"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하늘에 별 하나가 나타나서 그 말구유 위를 비추고 구유 위에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이 한 아기를 낳아 눕혔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건축물도 그 구유와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 습니다.
고깃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작은 바다에서 고기나 싣고 다니던 이 배는 자신의 삶이 시간 낭비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작은 배에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를 제단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이 작은 배는 세상의 어느 큰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십자가 된 나무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딴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땅의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나무는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 나무는 언덕 기슭에 있던 평범한 나무였지만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에게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쓰일 곳이 어딘지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삶의 성공이란 이것을 찾아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거기에 바쳐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의 자세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2-9-2024(금) 누가복음 12:3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다리는 사람(누가복음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to return from a wedding banquet, so that when he comes and knocks they can immediately open the door for him.

영국 리버풀대학의 로인 심리학자 브롬리(D. B. Bromley)는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며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며 보낸다"라고 했다.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볼때 60년을 늙어가며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의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며 지내는 것일가?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에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보았을 때 일생동안 어떤 일에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며 지내는지 활동별로 비교한 기사가 게재된바 있다. 이는 영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로 문화가 많이 다른 우리 일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수 있고 세대에 따라 소비하는 시간의 형식도 크게 다를수 있지만 그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평균수명 80년은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701,280시간이 된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 = 700,800시간에 윤달인 해 20년의 24시간 X 20년 = 480시간을 더하면 된다.

"표"에 따르면 일로 지내는 시간이 26년(227,760시간)으로 가장 길게 나타났고 아침에 깨여날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잠자는 시간은 평균 25년(239,000시간)으로 2위였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합쳐보면 평생 시간의 64% 가까이 된다. 이는 하루 24시간에서 15시간 반이 넘는 시간으로서 우리가 하루 쓸수 있는 나머지 시간은 8시간 반 정도라는 것을 알려준다.

TV를 보는 시간이 10년으로 하루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이상으로 3위로 나타났고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양분의 공급을 위한 식사나 간식을 하는 시간이 52,560시간(6년)으로 4위에 있다.

전화통화시간이 4년으로 그 뒤를 잇고 이는 하루중 1.2시간을 전화통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여준다. 스마트폰사용이 확산되고있는 현실에서 그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3년으로 6위로 나타났고 특별한 생각 없이 지내는 시간과 화를 내며 지내는 시간이 2년으로 같게 나타난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남성과 녀성에서 차이를 보이는것은 우선 주방에서 일하는 시간으로 녀성이 2년 5개월, 남성은 1년 3개월로 차이를 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외모를 가꾸는 몸단장 시간(거울을 보는 시간)이 녀성의 경우 평생 136일로 남성의 46일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것으로 나타난것이다. 그에 비해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는데 평생 들이는 시간은 남성이 1년인데 비해 녀성은 0.5년으로 2배의 차이를 보이는것도 흥미로왔다.

아쉽게도 조사항목중 미소짓는 시간은 88일로 꼴찌로 나타났다. 미소짓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씩 더 가진다면 1년에 3,650분, 약 60시간으로 2.5일 정도가 된다. 이는 40세인 사람이라면 80세까지 약 100일로 조사에서 나타난 평생의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된다.

이렇듯 우리 삶은 평소의 시간관리에 대한 마음가짐에 따라 크게 변할수 있다. "행복하기때문에 웃는것이 아니라 웃기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도 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기다리다(4327) 프로스데코마이(prŏsdĕchŏmai) προσδέχομαι

1. 집어 올리다.  2. 기다리다
발음 [ prŏsdĕ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εδε- χόμην, 제1부정과거 προσεδεξάμην, 제1부정과거수동태 προσεδέχθην, 4314와 120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집어 올리다, 받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눅 15:2, 행 24:15, 롬 16:2, 빌 2:29, 히 10:34.
2.  기다리다, 기대하다, 눅 12:36, 행 23: 21, 딛 2:13.


거룩한 성도(벧전 2:9)
거룩한 성전(고전 3:16)
하나님의 자녀(요 1:12)





깨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역사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이 깨어나야 한다
셋째는 교회가 깨어나야 한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의 수가 부족하여 멸망의 불에 의해서 무너졌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찾는 교회와 지도자들의 수가 부족하여 시련과 고통을 겪은 후에 다시 일어서야 한다면 불행한 역사가 될 것이다.

- 깨어 있으라 / 깨어 있다는 말씀의 원문 뜻은 = 주의를 기울이다. 준비하고 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시리란 구약의 예언 횟수는 456회
주님의 재림 횟수는 신구약 도합 1,518회(신약에만 300회)

1189장, 31073구절
초림에 대한 예언 109구절
재림에 대한 예언 224구절
모두 333구절




깨어 있음의 본질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정, 경주, 싸움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순례자로서, 멸망의 성으로부터 천성을 향하여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갑니다. 이 여정은 온갖 위험과 시련, 유혹의 덫이 도사리고 있는 낯선 땅을 지나는 나그네 길과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경주자로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마치기 위해 모든 방해 요인을 극복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군인으로서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의 대장이요 왕이신 예수님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여 우리를 대적하는 죄와 세상,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순례자요, 경주자요, 군인인 신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의 습관을 묵상과 기도처럼 잘 알려진 영적 훈련과 나란히 강조하면서도, 특별히 깨어 있음은 다른 습관들을 예리하게 유지해주는 습관으로 보았습니다. 즉 깨어 있음을 게을리할 때 다른 영적 습관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집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에 관해 가르칠 때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존 플라벨은 이 구절을 주제로 쓴 책의 서론에서 “회심할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고, 회심 이후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깨어 경계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이 용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말 그대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경성’(警醒)이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시 127:1; 히 13:17). 운전자에게 졸음은 선택 사항이 아닌 것처럼, 신자의 삶에도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물리적으로 깨어서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음은 정신적, 영적 의미일 때가 더 많습니다. 즉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 있어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어 있음은 일시적인 의무가 아니라 긴급하고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시기를 분별하는 신자들에게 ‘잠에서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롬 13:11). 어두운 밤과 같은 이 세상이 끝나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밝아올 새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깨어 있음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밤에 적의 후방을 노리기 위해 고공 침투 훈련을 받는 공수부대처럼 행동해야 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여객기에 탑승한 승객처럼 행동합니다. 위험을 긴급하거나 실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시 주의 사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고 금새 잊어버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교훈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눅 8:18)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2:1은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우리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있음에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살피는 일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눅 2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함께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끝으로, 깨어 있음은 특히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려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히 12:2). 우리 자신만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유혹에서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깨어 있음의 세 번째 요소는 ‘경계’입니다. 파수꾼은 깨어서 주의할 뿐만 아니라 적군이 침투하지 않는지 유심히 살피며 지킵니다. 신자가 파수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대적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 육신, 마귀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원수는 세상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말씀하고, 세상의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약 4:4)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치, 문화 체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두 번째 원수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울이 종종 “육신”으로 언급하는 “내주하는 죄”입니다(롬 7:18-20; 갈 5:16-17,24). 우리 내면에서 솟구치는 육신의 욕망에 미혹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는 스파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은밀히 숨어서 우리를 배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세 번째 원수, 가장 큰 원수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와 그의 명령을 받는 악한 영들입니다(엡 6:12).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4) 깨어 있음의 마지막 요소는 ‘기대’입니다. 경계가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면 기대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대를 시편 130:5-8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시편 저자는 자신을 날이 새기를 고대하며 한밤중에 불침번을 서는 파수꾼에 비유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5-8).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말씀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영혼의 태도입니다. 그런 영혼은 주제넘게 서두르거나 나태함에 빠져 죄를 짓거나 불신앙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이 올 것을 확신하며 자신의 위치를 굳게 지킨 채 어둡고 긴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자는 희망에 찬 기대를 품고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깨어 있음을 종말론적인 기대와 연결지어, 재림하실 그리스도께 생각을 집중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곧 깨어 있음이란 항상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줄곧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저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 모든 것을 과거에 이루어진 그분의 승리와 미래에 있을 그분의 재림이라는 영광스러운 빛에 비추어 생각하는 태도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랑이신 주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활기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깨어 있음은 네 가지 요소(경성, 주의, 경계, 기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도덕적인 원수들(세상, 육신, 마귀)을 경계해야 하고, 주님(그분의 약속과 재림)을 기대해야 합니다.

점검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정이자 경주요,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이자 경주자요, 군인입니다. 이런 비유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비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깨어 있음에 관하여 청교도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이 정의를 꼼꼼하게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깨어 있음이란 … 낱낱이 조심하면서 부지런하게 하나님이 지정하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 우리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사탄의 전략과 전술을 살펴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기회에 얽혀들지 않는 것이다.”

3.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4. 여러분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경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가장 필요한지 깨닫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5.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더욱 기쁘고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인....기다리는 사람

- 13:25와 마 25:11 에서는 주인이 문을 관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상황이 설정(設定)되고 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으므로 본문의 비유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실감나게 들렸을 것이다.
여기서 '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앙의 주(主)로서의 예수를 부를 때 많이 사용되는 말이나(마 26:22),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되었다(막 13:35).
그리고 '돌아와'의 헬라어 '아날뤼오(*) 문자적 의미는 '떠나다'이다(빌 :23; 딤후 4:16).
그러나 본문의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가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할 때는 집으로 떠나가는 것이 되고 그 주인의 집을 중심으로 할 때는 돌아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언제 오실지 알수는 없어도 반드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늘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재차 강조한 내용이다(마 25:1-13).



신앙생활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막연하게 시간만 흘러가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간을 성경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비록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기다리는 사람(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이라고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로마의 기독교 탄압이 심각하던 시대에 지하 땅굴 속으로 들어가(카타콤) 생활을 하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 북한 땅에서 지하교회 성도들은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언제 붙잡혀서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을지 알 수 없는 환경에서 더욱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탈북자들을 돕던 중국 연변의 어느 선교사의 놀라운 이야기가 새롭게 뇌리를 스쳐갑니다.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 탈북자들을 돕는 선교사를 만나 먹을 양식과 성경을 요구합니다.
이때 그 노인의 처참한 모습이 마음이 뭉클해진 선교사가 노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어르신 원하시면 제가 남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잠깐 하나님께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왔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남한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할 일은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네 믿음을 지키는 것이란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이제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마지막까지 내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북한 땅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 노인의 모습에서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구나!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난는 그 노인처럼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을까?
두렵고 떨리는 몸과 마음을 다시 내 믿음을 추스려야 하겠습니다.

주여,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찾아 오셨네









2-8-2024(목) 누가복음 12:22-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누가복음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
For the pagan world runs after all such things, and your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세상 사람들은 염려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맡겨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에피립토(ĕpirrhiptō)  ἐπιῤῥίπτω 스트롱번호 1977

1. ~위에 던지다.  2. 눅 19:35.
발음 [ ĕpirrhipt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έριψα, 제2부정과거수동태 ἐπερρίφην, 1909와 449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에 던지다.
  a.  [문자적으로 : 옷에 대하여] 눅 19:35.
  b.  [상징적으로] τ. μέριμναν ἐ. ἐπὶ θεόν: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다, 벧전 5:7.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솰라크(shâlak) שָׁלַךְ 스트롱번호 7993

1. 히필형.  2. 던지다. 3. 물리치다
발음 [ shâlak ]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뜻풀이부

I. 동사 히필형
 1. 동사 던지다, 창 21:15, 민 35:20, 22
 2. 동사 물리치다, 버리다, 왕하 7:15, 겔 20:8, 전 3:6.
  a. 동사 [אֶל을 수반하여] 창 37:22, 민 19:6, 신 9:21, 렘 26:23.
  b. 동사 [בְּ를 수반하여] 창 37:20, 출 32:24, 미 7:19.
  c. 동사 [עַל을 수반하여] 삿 9:53, 욥 27:22.
3.동사 굴복시키다, 뒤엎다, 렘 9:18.
  a. 동사 [주][비유적 표현] 욥 18:7.
  b. 동사 호팔형 הָשְׁלַךְ: 내쫓기다, 사 14:19. [בְּ와 אֶל을 수반하여] 삼하20:21, 렘14:16, 겔16:5. [לְ을 수반하여] 버림을 당하다, 렘36:30
  c. 동사 [주][비유적 표현] 시 22:11(10)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ἐπί 스트롱번호 1909

1. ㉠ ~을 다스리는
발음 [ ĕpi ]


ῥίπτω 스트롱번호 4496

1. 던지다.  2. 맡기다. 3. 놓다
발음 [ rhiptō ]

뜻풀이부

1. 던지다, 맡기다, 놓다, 뉘우다[사나움이나 강렬함을 내포하지 않고], 마 9:36, 15:30.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 자기의 염려를 떠맡길 수 있다.

베드로전서 5:7의 원문은 "잊어버리는 것은 생각에서 지우라는 의미가 아니다. 행동에서 없이 하라는 말이다."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도
초대 교회 때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름은 티테디오스 아메림노스(Titedios Amerimnos)이다.
이 이름의 앞부분은 고유명사이며, 뒷 부 분은 “걱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 단어의 뜻이 반대가 되게 하는 부정 접두어인 헬라어의 문자 알파가 앞에 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이방신을 믿고 있었던 사람인데 그가 구원받고 예수의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코 걱정하지 않는 사람 티테디오스(Titedios)”라고 불리어졌던 것 같다.
ejpirivptw는  ejpi(위에) + rivptw(던지다)이다.
그럼 무엇 위에 던져야하는 가?
말씀 위로 던져야 한다(믿음이다.)
예수 위로 던져야 한다(기도이다.)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결의 key가 되시기 때문이다.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What the people of the world seek)

'세상 백성들'(타 에드네 투 코스무. τα εθνη του κοσμο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1934) 에피제테오(ĕpizētĕō) ἐπιζητέω

1. 탐색하다.  2. 누가 4:42.  3. 묻다
발음 [ ĕpizētĕō ]
어원 / 미완료 ἐπεζήτουν, 제1부정과거 ἐπεζήτησα, 1909와 221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탐색하다, 찾다.
  a. [문자적으로] 눅 4:42, 행 12:19.
  b. 묻다, 알기 원하다, 행 19:39.
  c. 토론하다, 논쟁하다, 논란하다.

2. 애써 노력하다.
 a. 바라다, 원하다, 마 6:32, 눅 12:30, 행 13:7, 롬 11:7, 빌 4:17, 히 11:14, 13:14.
 b. 요구하다, 갈망하다, 마 12:39, 16:4.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너 투 코스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의당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호멧이 군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이야기입니다.
"내일 여러분이 다시 모여 주시면 저 앞의 산이 내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도록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마호멧은 외칩니다.
"산아 내 앞으로 오라"고 외쳐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 다.
군중들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웅성거릴 때 마호멧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 산이 여기로 오지 않음은 만약 산이 이리로 오면 여러분이 다 산에 깔려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저 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산으로 숨어 버렸을 때 군중들은 깨닫고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야기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기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마호멧이 외친 "내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적이 내 앞으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기적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늘을 맞이하게 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맞이하지 못한 수 많은 사람들이 지구촌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서 호흡하며 생명의 길을 걷는 은혜의 기적을 믿음으로 누리며 더 큰 은총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작고 가난하여 교역자도 모시지 못하고 교인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러한 교회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휴가차 그곳에 왔다가 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 니다.
교인들끼리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단순한 예배인데 그 예배에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감동을 받은 목사님이 예배가 끝난 후 어느 집사님 한 분에게 어떻게 이렇게 은혜가 충만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깜짝 놀라며 그 목사님에게 그럼 은혜가 없는 예배도 있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라고 합니다.
그 시골 교회 교인들은 은혜 없는 예배가 있는 줄을 모르고 사는데 우리는 혹시 은혜가 충만한 예배가 있는  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은 흔히 예배와 설교를 놓고 은혜가 있었다 없었다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예배와 설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예배는 세상에 본시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은혜 받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동 받는 삶을 욕심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과 기도를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되기를 욕심 내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 보물...마음도

- '마음'은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며 '보물'은 궁국적인 관심을가리킨다.
결국 하늘과 땅 또는 물질과 하나님 나라 이 중 어느 것에 궁국적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미적지근하고 이중적인 자세는 용납되지 않으며 성도는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마 6:24).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재물을 덤으로 얻게 되지만 재물을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다.



2-7-2024(수) 누가복음 12:13-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탐심을 물리치라(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동남아에서 애완용 원숭이를 잡아 파는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아주 특이하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주둥이 긴 항아리 또는 병 속에 달콤한 사탕을 집어 넣고 그 항아리 또는 병을 땅에 깊숙히 박아 놓은 박대기에 묶어두면 원숭이가 그 병속에 들어있는 사탕을 꺼내려고 손에 사탕을 가득 잡고 손을 뺄 수 없어 결국은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팔려간다고 합니다.
이때 원숭이가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한개만 잡고 손을 빼면 될텐데 욕심 때문에 사탕을 쥐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붙잡으로 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멈추고 있다고 합니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다 보면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원숭이를 쉽게 만나게 됩니다.
이때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원주민이 조롱박과 바나나 몇 개 그리고 창이 넓은 밀짚모자를 준비해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나나 하나를 조롱박 속으로 집어넣고는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내서 맛있게 먹어 보였습니다.
물론 나무 위 원숭이들이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롱박 속에다 남아 있는 바나나를 집어넣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한숨 자는 척합니다.
원숭이들은 조롱박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중 대장 격인 원숭이 하나가 나무 밑에서 잠자는 사람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조롱박 속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습니다.
원숭이는 손에 힘을 주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이때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면 놀란 원숭이가 펄쩍 뛰어 나무를 잡고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한 손이 조롱박 속에 있기에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어서 결국 잡히고 맙니다.
조롱박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자기 손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고 불쌍해 보입니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도망갈 나무숲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왜 원숭이가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까?
바나나를 쥔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나나를 쥔 손을 풀고 밖에서 손을 빼었다면 원숭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끼 식사도 되지 않는 눈앞 욕심 때문에 자유를 잃고 인간의 포로가 된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람에게 실제 일어났습니다.

한 신앙 좋은 노인이 있었는데 그분은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연말이 되어 미국에 있던 자녀들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난 손자 녀석이 주둥이가 좁은 이조백자에 손을 집어넣고 빠지지 않는다고 울며 난리를 쳤습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백자가 깨지지 않도록 온 가족이 동원되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 사이 아이는 마치 죽어 넘어가는 아이처럼 울자 노인은 황급히 손자를 위해 망치로 백자를 깨뜨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가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던 손을 벌려보니 기가 막히게도 5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이 사건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노인의 결단과 아이의 행동을 통해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노인의 결단에 있어 아무리 고가 품의 백자라도 손자만큼 귀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백자의 가치보다 손자의 가치가 더 소중했기에 과감하게 깨트려 손자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있어 모범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이의 행동에 있어 마치 원숭이가 바나나를 쥔 것과 같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에게 이유를 말했더라면 백자를 깨지 않고 돈을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백자보다 5백 원짜리 동전의 가치가 더 있었고, 그것을 꺼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어른들보다는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고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욕심의 결과와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교훈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꼭 쥐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거나 그것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본다면 이제는 쥐고 있었던 손을 펴야 할 때 인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이란 분수에 넘거나 도에 지나친 욕망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까지 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그만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 가운데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제일 큰 욕심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정욕, 혹은 음욕

이것 때문에 고금을 통해 범죄하고 쓰러진 이들이 많습니다. 각종 성범죄와 치정 살인사건이 우리 사회에서도 매일 같이 일어납니다. 삼손은 이 정욕에 끌려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끝내 패망하였습니다.

둘째, 탐욕, 혹은 물욕

광부들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미시시피강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켰습니다. 배가 강 복판에서 휘청거리자 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승객들은 구명정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건장한 남성들은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뭍을 향해 헤엄을 쳤습니다. 승객들이 대부분 탈출한 후 한 남성이 갑판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있었고 몸에는 각종 보석들이 휘감겨 있었습니다. 그는 강물에 뛰어들었으나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구조대원들이 물 속에 잠긴 그의 시체를 건져 올렸는데 그 사람의 주머니는 승객들로부터 훔친 금덩이와 귀중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귀중품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익사한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한번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은 체면과 사랑과 우정도 모두 내팽개칩니다.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재물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을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욕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를 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 욕심 때문에 결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아간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탐내어 땅 속에 감추었다가 온 가족이 돌로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수7: 18- 26)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됩니다. 마음속에 이 욕심을 버려야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셋째, 권력욕, 혹은 지위욕

이 욕심 때문에 어떤 단체나, 조직이나 회사나 관청을 불문하고 온갖 시기와 쟁투와 분열과 뇌물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조 오백년사를 보면, 이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추태와 골육상쟁과 유혈의 비극이 있었습니까? 성경에도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의 위를 빼앗으려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에서는 먹는 데 약하여 그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고, 노아는 술에 약하여 큰 수치를 당하였고, 솔로몬은 정욕에 약하여 큰 실수를 했고, 롯 같은 이는 물욕에 약하여 소돔 성에 살다가 큰 재난을 당합니다. "누구나 지옥에 가는 사다리가 있다"는 속담처럼 항상 깨어 있어 내 자신의 약점을 미리 알아두고 이 방면에 침입하는 모든 유혹과 시험을 막아야 합니다.(마15:18- 20, 벧후2:10)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지라"(딛1:15)
특히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교만과 음행과 거짓과 탐심과 나태 등을 멀리하고 버려야 하겠습니다.(잠6: 16- 19)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심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하지만
때로는 더 좋은 것, 더 맛 있는 것, 더 멋진 것에 마음을 쏟기도 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이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에 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 만큼의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아침이 되자 곧장 출발하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름진 토지를 더 차지하려고 조금씩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한 채로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농부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그가 묻힌 3아르신(2미터) 크기만큼이었다.


탐심(4124) 플레오넥시아(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24

1. 탐심.  2. 탐욕. 3. 눅 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 412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탐심, 탐욕, 눅 12:15, 롬 1:29, 고후 9:5.

* 4123. πλεονέκτης, ου, ὁ   

1. 욕심꾸러기.  2. 탐심 많은 사람. 3. 고전5:10
발음 [ plĕŏnĕktēs ]
어원  / 4119와 219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욕심꾸러기, 탐심 많은 사람, 고전 5:10, 6:10, 엡 5:5.

* 4119.  πλείων    
1. 4183의 비교급 : 더 큰.  2. 마 12:41.
발음 [ plĕiōn ]


* 2192. ἔχω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
발음 [ ĕchō ]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예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거부하신 것은 그 사람이 당면한 문제 배후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은 한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즉 '저희에게'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탐심'(플레오녀시아. 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은 '더 많은'의 뜻을 가진 '플레온'(πλείων) 과 '소유하다'의 뜻을 가진 '혀시아'(*)의 합성어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가리킨다.
여기서 지적되는 것은 단지 '물질'에 대한 탐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는 모든 종류의 죄악된 성향(性向)을 총칭한다고 보아야 한다(시 39:6; 합 2:9; 골 3:5; 딤전6:9-11).



평생 베풀면서 살다간 방경삼 목사 소천이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방 목사님은 1935년 평안 남도에서 출생하여 월남하여 목회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영적 심적 물적으로 저들에게 베풀 수 있을 때까지만 목회하겠다" 일념으로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강원도 원주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습니다.
음성 나환자 뿐 만 아니라 양성 나환자 등 3백명이 전국에서 모여 사는 경천원에 들어 갔을 때 그들은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계란을 건네주었습니다.
방목사는 그것을 덥석 받아 먹고 그들의 환영 가운데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후 신안 농원에 가서 목회를 하였고 중부교회에서 교도소 출소자 뒷바라지를 하며 대전 신학교와 청주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이 어려울 때 생활비와 자녀학비를 내주느라 정작 자신의 딸과 아들의 등록금은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한이 되어 마지막 조의금으로 아들 등록금 한 번 내 주고 나머지는 섬선교회 후원과 목회자 미망인 자녀 장학금에 전달하고 돌아 가셨습니다.
마지막 그는 5월 15일 향년 62세로 아내에게 "살아 생전 내가 못다 베푼 어려운 이들을 당신이 대신 돌봐 달라.
내가 죽거든 시신을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고 장례식 대신 노회장으로 감사 예배를 드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소천 하였습니다.
입관식도 발인식도, 장례식도 없는 감사 예배로 이 땅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생활 경전이라 일컫는 <탈무드>에 사람의 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주먹을 꽉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 때는 손바닥을 보이고 숨을 거둔다.
태어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죽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빈손에 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도 흥미롭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신이 너무 일찍 그를 데리러 왔다.
32세의 나이에 정복지에서 중병에 걸렸다.
모기에 몰렸다고도 하고, 그를 시기한 어느 장군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신하들을 불러모아 "내가 죽거든 시체를 넣은 관 밖으로 내 손 하나를 내밀어 달라"라고 유언했다. 참으로 황당한 유언이었다. 신하들이 놀라자 알렉산더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호령했던 그 사람 역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부귀영화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물거품이라는 것을 자신의 관 밖으로 내민 빈손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유언이 이루어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 버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저승 갈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제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저승길에는 한 푼도 챙겨갈 수 없다. 그런데도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이것저것을 움켜쥐려고 악착을 떨다가 비루하고 던적스런 인간으로 몰락한다. 기어이 뭇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서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한다. 끝없는 욕심 때문에 파멸한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이사야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새번역) 사람의 탐욕스러운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로 가버렸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새번역)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로마서 7:7-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새번역)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새번역) 그러므로 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현대인)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욕심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하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또 그들은 탐욕에 빠져 그럴 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파멸이 반드시 그들에게 닥치고 말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개역개정,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과 과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온(whole) 3648. 홀로크레로스(hŏlŏklērŏs) ὁλόκληρος, ον 

1. 완전한.  2. 전체적인. 3. 건전한
발음 [ hŏlŏklērŏs ]
어원  / 3650과 28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완전한, 전체적인, 건전한, 건강한, 살전 5:23.

영혼육

몸, 육체(소마. sōma)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몸.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 14:12, 27:52, 58, 59, 막15:43, 45, 눅 17:37, 23:52, 55, 24:3, 23, 요 19:31, 38, 행 9:40, 히 13:11, 유 1:9.
  b. 산 몸, 마 5:29, 6:22, 26:12, 막 5: 29, 14:8, 눅 11:34, 요 2:21, 롬 1:24, 고전 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 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 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3, 2:16, 4: 4,12,16, 5:23, 30, 골 1:18, 24, 2:19, 3:15.


혼, 영혼(푸쉬케.  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혼, 목숨, 생명:
 1. [문자적으로]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영(프뉴마.  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 415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불기, 숨.
  a. 바람, 요 3:8, 히 1:7.
  b. 숨 내쉬기, 숨, 살후 2:8.
2.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 27:50, 눅 8:55, 행 7:59, 히 12:23.
3. [인간의 인격의 일부분으로서의] 영.
  a. 고후 7:1, 골 2:5.
  b. [통찰력, 감정, 의지의 원천 또는 좌 소, 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 막2:8, 눅1:47, 행17:16, 롬8:16, 고전16:18.
  c.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 성질, 기질, 의향, 고전4:21, 갈6:1, 엡4:23, 벧전3:4.
4. [독립적 존재로서의] 영.
  a.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요 4:24.
  b. 영, 영물, 행23:8,9, 히1:14, 12:9, 계1:4, 3:1.
  c. 유령, 눅24:37,39.
  d.  악한 영, 귀신, 마12:43, 막1:23, 눅8:29, 행5:16.
5.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를 구별짓는] 참된 영.
  a.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고전2:11, 롬8:11, 살전4:8.
  b. 그리스도의 영, 주님의 영, 행16:7, 고후3:17, 갈4:6, 빌1:19.
  c. 성령, 마12:32, 눅2:26, 행2:4, 히2:4.

영혼아...마시고 즐거워하자 -
그의 총체적 실존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물질에 의존하여 물질로 말미암아 쾌락을 즐기는 것일뿐 진리를 추구하는 의미의 문제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그에게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피땀흘려 부를 축적한 자에게 있어 그 부를 이용하여 안락하고 풍족한 세월을 구가해 보고자 하는 보상 심리는 본능적 욕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흘러가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했어야 옳았다(사 51:6).

어리석은 자여 -
자신의 삶에 대해 용의 주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18,19절)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 아프론)는 '정신없는 자','무분별한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의 근본이심을 거부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시 14:1).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뿌리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인하다시피 하는 유물론(唯物論)에 박혀 있음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시되는 소위 개인의 자유 역시 오직 자본 곧 물질을 확보하는 일에 집착되어가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물질이냐 영혼이냐 세속주의냐 하나님 중심주의냐 하는 이 근본적인 가치 선택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논제임에 분명하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부자는 '여러 해'를 계획했으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그의 영혼을 가져갈 것이다.
'오늘 밤'은 그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감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재물은 그의 생명을 단 하루 밤도 지속시키는 힘을 갖지 못한다.
여기서 '영혼'은 생명을 뜻하고 '도로 찾으리니'는 인간의 생명이란 하나님께 대여 받은 것으로 언젠가는 되돌려져야함을 말해주며 생명에 관한한 하나님이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기를 위하여...부요치 못한 자 -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부유함과 하나님께 대한 빈곤을 대비시킴으로써 부자의 삶의 목표가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33절; 마 6:20),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다(마 25:31-46).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생명과 재물이 하나님께 근거한 것임을 알고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벧전 4:10).

2-6-2024(화) 누가복음 12:8-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할 말(누가복음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for the Holy Spirit will teach you at that time what you should say.

신앙생활의 내용을 분석하면 언어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시자하기 전에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회중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때로는 어느 설교자의 외침에 동의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멘"하고 말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1:3)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인한다는 헬라어는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는 "같은(호모)"이란 단어와 "말을 한다(레고)"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인데 그 의미는 "같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인한다는 헬라어는 "아르네오마이(arnĕōmai. ἀρνέομαι)"라고 합니다.
'아르네오마이'는 "거절하다" "부정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심판주가 나는 너를 부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한 성당에서 한 사제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그 신부를 도와서 성찬을 준비합니다. 
그러다 그만 이 어린아이가 실수를 해서 포도주가 든 그릇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신부는 버럭 화를 내면서 저리 나가라고, 너 같은 녀석 필요 없다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무신론자가 되고 그리고 철저한 공산 국가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유고의 ‘티토(Josip Broz Tito. 1892. 5. 7~1980. 5. 4)' 대통령입니다. 
한편 동시대에 또 다른 한 성당에서 신부가 성찬을 준비하는데 어린이가 보좌를 합니다. 
어린이가 그만 실수해서 포도주잔을 땅에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너도 앞으로 큰 신부가 되겠어, 나도 너만 한때는 그런 실수를 많이 했거든,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훌륭한 신부가 됐잖아.” 
그리고 오히려 아이를 격려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유명한 ‘플턴 신(Fulton Sheen. 1895. 5. 8~1979. 12. 9)’ 대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만 어떻게 반응하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들의 인생이 전혀 다른 운명으로 갈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합니다.
말이란 이처럼 권세가 있습니다.

다 찬양하여라


6.25때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한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불행하게도 폐결핵이 걸렸습니다. 치료할 돈도 없습니다. 여동생이 어쩔 수 없이 술집에 가서 술을 따르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오빠에게는 절대적으로 비밀 이였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오빠를 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 후에 전쟁도 끝나고 오빠도 건강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신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바로 이 여동생이 술집에 있었던 사실을 아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교인은 다니면서 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덕스러운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온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오누이는 충격을 받고 그만 스스로 생명을 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 더 덮어줄 수 있었더라면, 지나간 과거의 일인데, 이제 새사람이 되었는데 그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걸 꼭 끄집어내서 소문을 내고 결국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유익한 말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말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말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말이 있으면 불안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말이 있는가하면 공동체를 허무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을 나쁜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얼마든지 선한 일에 쓰면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나라의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가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귀한 것을 가지고와라!” 또 다른 신하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와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 년 후에 신하들이 통에 무언가를 담아서 가져왔는데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인가 가져온 것을 뚜껑을 열어보니까 사람의 혀라는 것입니다. 혀는 죽을 사람도 살리고,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에 혀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신하들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담고 온 상자를 보니까 거기에도 역시 사람의 혀가 있었습니다. 혀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증오하게 만들기도 하고, 사기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우리가 말이라는 걸 참 조심해야합니다. 특히 목사라는 직분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십년 넘게 목회하면서 늘 말을 해놓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목사님은 그냥 내뱉고 끝나겠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얼마나 반성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내가 말을 또 조심해야지.’ 이러한 반성을 많이 하고 후회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괴로워하지만, 또 동시에 저에게 상처를 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에 맘이 괴롭고, 잠을 못 이루고, 갑자기 건강하던 위가 소화가 안 되고, 건강하던 허리가 아프고, 사람이 신경을 쓰니까 허리도 아프고 소화도 안 됩니다. 이게 문제가 참 많습니다. ‘사람의 모든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 신경성이다.’ 라는 걸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하던 곳이 문제가 생깁니다. 목사도 철갑을 두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하고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말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이 정말 저 사람에게 유익이 되겠는가? 저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저 사람에게 소망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늘 물어봐야 합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니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잘못된 말에 대해서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남을 헐뜯는 말 모두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니까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쓸데없는 말 자꾸 하면 문제만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1장에 보면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은 좀 두 번, 세 번 생각한 다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더러운 말, 덕이 되지 않는 말, 은혜가 안 되는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왜 잘 나가다 싸웁니까? 꼭 말 때문에 싸우고, 말 때문에 말꼬리 잡아서 그 말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좋은 말에 관한 격려도 있습니다. 잠언 16장에 보면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좋은 말은 보약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병이 떠나갑니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엔돌핀이 막 솟구칩니다. 

잠언 25장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정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데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하라.” 덕을 세우는 말만 합시다.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 헐뜯는 말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으면 묻어두는 것입니다.

잠언 18장에 보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데로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에고치 알고 계시지요?  이 누에고치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을 가지고 자기 집을 만듭니다. 누에고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누에의 나오는 실을 가지고 누에고치를 만들어서 자기가 그 속에 있는 거예요. 어찌 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근사한 빌딩을 지어가고, 어떤 사람은 초라한 초가집을 지어가고, 어떤 분은 개집 같은 것을 지어갑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에 이 은혜가 안 되는 말, 덕이 떠나는 말,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축복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 믿음의 말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붕어빵이 있고 잉어빵이 있습니다. 겨울에 화로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붕어모양의 틀에 넣으면 붕어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붕어빵을 잉어빵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붕어빵 틀을 버리고 잉어빵 틀을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틀을 놓느냐에 따라 빵이 결정 됩니다. 우리 인생을 바꾸려면 말을 바꿔야 합니다. 언어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이 언어를 잘 배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에 하숙하던 형님이 있었는데 이 형님이 남을 좀 비웃는 말을 자주합니다. 본인은 굉장히 유머스럽게 한다고 하는데 자꾸 남의 약점을 캐냅니다. 저도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게 재밌는 줄 알고, 잘하는 줄 알고 남의 약점만 있으면 자꾸 얘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받기는커녕 미움만 받았습니다. 저의 친형도 아닌데 그 형한테 잘못 배워서 남을 놀리는 것을 배우곤 했습니다.

제가 어느 집에 갔더니 그 집은 자기부인을 부르는데 보통 ‘여편네’라고 부릅니다. 저도 모르게 또 그것을 배워가지고 저희 집사람에게 “여편네! 여편네!” 라고 불렀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싫어합니다. “부인이라고 하지 여편네가 뭐냐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습관이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들이 한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위해서 말을 참 조심해야 해요. 여러분도 부인에게 ‘여편네’라고 하지 마십시오. 아들들이 장가가서 부인에게 ‘여편네! 여편네!’ 그러면 사랑도 못 받고, 참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말로 인해 운명이 갈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는데 10명의 정탐꾼은 그 가나안 땅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그 땅은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키는 장대 같아서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고 그 성은 견고합니다.” 이렇게 악평을 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온 백성이 술렁거립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에, 그런 들어가지도 못하는 땅에 들어가려고 여기까지 왔나?’ 하면서 백성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고, 돌을 들어서 지도자들을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능히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긍정적인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동요된 백성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매우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죽는다.”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경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해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보응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할 때에는 ‘하나님의 녹음기에 또 녹음이 됐겠구나!’ 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언어생활에 대한 어떤 말씀을 주고 계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망의 소리, 불평의 소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이래도 원망의 소리, 이래도 불평의 소리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임금이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 “임금이 안보이면 나랏님도 욕하는데 왜 욕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나랏님을 욕하면 하나님께서 다 듣고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망조차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데 그 전화 내용이 다 녹음되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 말조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도 못 듣는 거야, 비밀이야’ 이래서 마구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 녹음되어진다면, 만약에 제가 지금까지 핸드폰에서 한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져서 공개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불평과 원망을 다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말을 통해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교인들이 너무 불평이 너무 많아서 목사님께 와서 자꾸 누구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교인 불평록’이라는 공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뭐 불평을 하면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다 적겠습니다.” 하면서 다 적었습니다. “집사님께서 말씀하는 것, 어느 권사님이 어떤 일은 덕이 안 된다는데 지금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싸인하라고,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싸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싸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평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와 흑암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찬양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흑암의 나라, 사탄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불평과 원망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탄의 자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거 꼭 마음에 새기십시오.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8절부터 30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말씀입니다. 말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결국 다 죽었습니다. 정탐꾼이 정탐하고 돌아온 그 40일에 1년을 곱해가지고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고 유리하다가 20세 이상 된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어서 시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20세 이하의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 “우리는 그 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한 대로 된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정말 실수를 해도 “아이고 죽겠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죽겠다.” 물론 여러분은 그 말대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말한 것은 그 말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메랑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던지면 돌아서 자신의 손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존경받고 싶으냐? 남을 먼저 존경하라. 축복받고 싶으냐? 너희가 먼저 남을 축복해라. 이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말한 대로 응답하십니다.

‘사또 도미오’라는 일본사람이 쓴 책 중에는 <인생은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트 버드’라는 미국사람이 쓴 책 중에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책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젠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너는 그렇게 하다가 먹고나 살겠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이제는 축복을 선포해 주십시오. 비록 공부를 못하고 장난꾸러기일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아빠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넌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빌리그레이엄’목사님이 어렸을 때는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빌리가 커서 뭐가 되겠냐? 저거 깡패나 되겠지.”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믿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빌리! 너는 말도 잘하고 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귀하게 쓰실 거야.” 이렇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빌리그레이엄’ 같은 훌륭한 부흥강사가 나온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장군은 어릴 때 완전히 싸움꾼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맥아더만 보면 학을 땝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맥아더를 꼭 껴안고 “맥아더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그랬더니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훌륭한 대장군이 됩니다. 그 부모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인격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그의 인생이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소망의 말을 하면 소망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사랑의 말을 하면 사랑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정적인 말, 비판적인 말을 하면 다 부서져가는 비판적인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소망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거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도 힘듭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불신앙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신앙적인 삶을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비방을 일삼는 사람이 남에게 칭찬 받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타인을 무시하는 말을 뱉은 사람이 존경받고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은 그 입술의 열매대로 먹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혀는 영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말에는 기술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선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악해지는 것입니다. 음란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벌써 음란해지는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생각 없다가도 누가 자꾸 옆에서 음란한 말을 하면 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방하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도 거기 전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 줄로 믿습니다. 잠언 6장 2절에 보니까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입의 말로 내 인생의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내게 축복이 되는지, 남에게 유익이 되는지. 이 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세 번째로는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마가복음 11장 20절 이하를 살펴보았습니다.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러한 말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플러 신학교 ‘찰스 크래프트’ 교수가 <신자가 소유한 놀라운 권세>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참으로 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권세를 사탄이 빼앗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고 마귀에게 시험당할 때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내게 절하라. 내가 너에게 권세를 주겠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감히 예수님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잃어버린 권세를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찾아주신 그 놀라운 권세가 소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풍랑을 향해 명령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 자녀의 입에도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오십니까? 여러분! 두려움을 향해서 명령하십시오. “두려움은 떠나갈지어다.”, “풍랑은 잔잔해질지어다.”, “질병은 치료받을지어다.”, “장애물은 해결되어질지어다.” 여러분! 선포하시고 명령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앉은뱅이를 향해서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했을 때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믿음의 말만 하십시오. 믿음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불신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소망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남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말만 하십시오. 그것이 격려를 되고, 칭찬해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의 성공하는 비결은 바로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인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말합니다. “성공하는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 돈을 내면 그 지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몰려들었습니다. 돈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공하는 지혜가 무언가 들으려 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말 조심해.” 그리고 떠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말만 잘해도 천 냥 빚을 갚고, 말만 잘해도 죽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여러분의 인생이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아주 말이 거칠고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외아들이 하나 있는데 며느리를 봤습니다. 참 참한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혀를 찼습니다. “저 뭘 모르고 들어왔지, 저 집에 오면 죽어나가지, 살지 못할 텐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말이 거칠고 독살스러운데.” 그런데 이 며느리가 너무 지혜롭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초전박살 내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초반에 기를 잡으려고 무슨 일만 있으면 “너는 친정에서 그런 것도 못 배워가지고 왔느냐고, 무식한 년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저는 친정에서 별로 배운 게 없어요. 시집에 와서 훨씬 많이 배우네요. 어머니, 많이 지도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또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니 “야 너는 대학까지 나온 년이 그것도 모르냐?” 이 며느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아이고, 어머니! 지금은 대학 나와 봤자 옛날의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돼요. 어머니가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손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며느리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이제 내가졌다. 너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지혜로운 말로 시어머니에게 대응할 때 시어머니 마음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의 지혜입니다.

말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술에 이제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복음을 증거하며 실망한 자들을 일으키고 낙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하다(3670)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  

1. 약속하다.  2. 동의하다. 3. 고백하다.
발음 [ hŏmŏlŏgĕō ]
어원  / 미완료 ὡμολόγουν, 미래 ὁμολο- γήσω, 제1부정과거 ὡμολόγησα, 3674의 어간과 3056에서 유래

사람 앞에서...시인할 것이요

-
'앞에서'(*, 엠프로스덴)는 공개적인 고백을 강조하는 말로 판사 앞에서 증언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나를 시인하면'(*, 호몰로 게세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고백하면'의 뜻이 된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고백이 단지 하나의 당위성 때문에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안에 사는 삶의 결과로서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뜻한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와 아울러 구체적인 결실을 맺어 보이는 생명력있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자태(姿態)이다.
마태의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대신 내 아버지 앞에서"로 서술되어 있는데, 누가는 법정에서의 증언을 염두에 두고 있고 마태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인자'에 대해서는 5:24 절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부인하다(720)  아르네오마이(arnĕōmai)  ἀρνέομαι  

1. 거절하다.  2. 부정하다.ὁμο- λογεῖν. 3. 부정하다
발음 [ arnĕōmai ]
어원 / 미래 ἀρ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ρ- νησάμην, 완료 ἤρνημαι, 아마도 1[부정불 변사]과 4483의 중간태에서 유래

사람 앞에서...부인함을 받으리라

- 앞절에서의 긍정적인 약속이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심판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말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행위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한편 8, 9절 전체의 의미는 바른 신앙적 삶에 대한 격려와 비신앙적 삶에 대한 심판 경고 등 양자를 모두 포함하지만, 문맥상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분노에 의한 핍박이 예상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11:53, 54) 후자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이...가르치시리라

- '곧 그때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때 성령의 도우심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준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위기 상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해 준다거나 방해 세력을 분쇄한다고 말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을 가르치신다고 하신 점에 유의하자.

이것은 성령께서 결코 기적이나 무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제자들을 무력한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며 위기의 상황 조차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정공법(正攻法)을 채택하신다는 것을 암시 한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베드로(행 4:8-12), 스데반(행 6:10), 바울(딤후 4:17) 등에게서 실제로 성취되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에 가게 되면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하게 되면 세 번 기도하라."
러시아에서 전해오는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크리스찬 작가 엔로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
그 작품은 1587년 이래 일본의 태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도꾸가와(德川) 장군으로 이어 오면서,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여 많은 사제와 신도들이 화형으로 처형되고 고문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진 소설 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로드리꼬라는 신부인데 그는 박해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고뇌와 신앙적 회의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스켓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톨릭 신도들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도록 강요받았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화를 밟지 않고 참혹한 죽음의 길을 걷는 순교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내세워 주저 없이 성화를 밟고, 그리고 괴로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로드리꼬 신부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깊이 고뇌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도들이 바닷물 속으로 무참히 가라 앉아가지만,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잠잠하고 새는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하나님은 계속 침 묵을 지킬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며 깊은 고뇌 가운데 있던 로드리꼬 신부는 드디어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희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니라."

여기서 신부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마을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첫날을 지낸 다음에 아침 담임 목사가 강사 숙소에 들러서 집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어젯밤 강사 목사의 설교 중 "젖꼭지를 생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양반 마을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런 집회를 계속할 수 없다고 야단 났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어젯밤 설교 원고를 검토하다가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날 밤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오늘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젖꼭지를 생각하라 하더라"고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고 아들은 곧바로 동네 이 집 저 집에 전화를 걸어서 온 동리가 발칵 뒤집혀졌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담임 목사님에게 "내가 어제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까?"하면서 설교 원고를 내 보이시는데 거기에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의사소통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2-5-2024(월) 누가복음 12: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두려워 할 자(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But I will show you whom you should fear: Fear him who, after the killing of the body, has power to throw you into hell. Yes, I tell you, fear him.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이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주할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동물들의 몸값을 검색하였더니 흰곰은 1-2억, 돌고개는 1억 5천, 아프리카 코끼리는 2-3억, 오랑우탄은 3억, 기린은 2억, 브라자 원숭이는 1만 달러- 1만 6천달러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값은 얼마일까요?

죽은 동물의 가치는 상아 1kg 2천 달러, 러시아 웅담은 1천만원, 뉴질랜드 녹용은 2박시 분말가루 84,900원, 중국 호랑이 가죽 350만원 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는 오히려 장례비가 필요합니다.
뉴욕에서 장례를 치루려면 가장 싼 관 1개 3000불, 묘지 3천불, 장례식장 비 최소한 1만 5천불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몸 값으로는 동물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동물은 죽은 후에 세속적 가치만 갖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텐데 영생이란 복된 삶과 영벌이란 저주의 삶으로 구분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삶을 누가 결정하느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 결정합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을 재림의 날,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비싼 몸값 자랑하는, 세계의 동물 ‘톱7’은? - 비마이펫 크리에이터즈

모든 존재는 귀하다.
그래서 그 존재에 감히 값을 매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을 얻기 위해 들인 비용 또는 시장에서 거래됐던 가격은 기록으로 남는다.

미국 <인디아타임즈>는 8일(현지시간), 이런 기록들을 활용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동물’들을 소개했다. 여기엔 독특한 컬러를 지닌 원숭이부터 세계 기록 경주마, 흰색 사자 새끼, 과학의 힘을 빌린 복제견, 희소성 가득한 대형견, 우유 생산량이 대단한 젖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만 달러부터 1천600만 달러까지 그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7위. 브라자원숭이(De Brazza’s monkey)

7위는 브라자원숭이다. 영장목 긴꼬리원숭이과의 포유류다.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피에트로 사보르난 디 브라자’가 처음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따왔다. ‘네글렉투스원숭이’라고도 불린다.

브라자원숭이는 사진에서 보듯 흰 수염, 주황색 왕관 털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도 볼 수 있다. 한 마리당 가격은 1만 달러에 이른다.  

6위. 아라비아말(Arabian horse)

아라비아말이 6위를 기록했다. 아라비아 및 그 주변 지역을 원산지로 하는 품종의 말이다. 독특한 머리 모양과 높은 꼬리 마차가 특징이다. 

가장 오래된 말 품종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라비아말은 4천500년 전 역사 속 동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고고학적 기록도 있다. 

때문에 다른 품종을 향상시키는데 많이 기여했다. 오늘날 거의 모든 현대 승마 종에서 아라비아말의 혈통이 발견되는 것은 그래서다.  

5위. 흰 사자 새끼(White Lion Cubs)

흰 사자는 지난 1938년 남아프리카의 팀바바티(Timbavati)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그들은 사자 중 가장 희귀한 종들 중 하나다. 

흰 사자는 야생에서도 소수만이 살아남은 만큼, 매우 희귀하다. 최대 14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위. 랜슬롯(Sir Lancelot)

‘랜슬롯’은 최초의 복제견 레트리버다. 원래 최초의 개 ‘랜슬롯’을 기리기 위해 동명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 

복제의 시작은 이러했다. 랜슬롯을 키우던 에드가와 니나 오토 부부는 자신이 키우던 랜슬롯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슬픔에 잠겨 있던 이들은 랜슬롯을 복제하기로 결심한 것. 

그들이 랜슬롯에게 투자한 비용은 무려 15만5천달러가 넘는 금액. 랜슬롯은 현재 슬하 8마리 새끼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다.



3위. ‘티베트 마스티프’(Tibetan Mastiffs)

3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티베트 원산의 대형견 ‘티베탄 마스티프’가 차지했다. 네팔에서는 ‘티베트의 개’라는 뜻을 가졌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개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은 가축, 궁전, 수도원 등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된 경비견으로 쓰였다. 죽을 때까지 한 명의 주인만 섬기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비싸게 판매된 티베트 마스티프는 지난 2011년 거래된 아이(150만 달러)다. 당시 국제애견협회 켄넬클럽에서 ‘지구상 가장 비싼 개’로 선정됐다. 

2위. ‘미스 미시’(Miss Missy)

‘미스 미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소다.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 지방 원산인 대표적 젖소 홀스타인(Holestein) 종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소보다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무려 50%나 더 많이 우유를 만들어낸다. 

값어치는 무려 120만 달러다. ‘미스 미시’는 지난 2009년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온타리오 주에서 열린 경매에서 해당 가격에 판매됐다. 

1위. 그린 몽키(Green Monkey)

1위의 주인공은 미국의 서러브레드(thoroughbred) ‘그린 몽키’다. 서러브레드는 말 품종의 하나로, 영국에서 영국 재래종과 아랍 말을 교배해 개량한 경주 말을 뜻한다. 

‘그린 몽키’는 2004년생이다. 2006년 2살이 되던 해, 한 경매에서 지금까지도 최고가 기록을 빼앗기지 않은, 무려 1천600만 달러에 팔렸다. 

그는 첫 경기에서 8분의 1마일을 무려 9.8초 속도로 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1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한자에서 두 개의 단어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공포(恐怖. 두려울 공, 두려워할 포)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말합니다.
둘째는 경외(敬畏. 공경 경, 두려워할 외)는 공경하고 두려워함을 말합니다.

공포는 나보다 더 크고 강한 것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라면 경외는 나보다 더크고 강한 것 앞에서 오히려 그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3. 타인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을 뿐이며 죽음 이후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우치셨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몸에 대한 것과 영혼에 대한 것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모두 몸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몸에 대한 것보다 더 소중한 영혼에 대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과 혼과 영을 갖춘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심판 후에는 영생과 영벌의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5:46)

영벌(eternal punishment. everlasting punishment)은 생전에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영혼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라면 영생(eternal life. the righteous into life eternal)은 이 세상에서 부요함으로 또는 가난함으로 살았을지라도 세속의 가치에 따른 삶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적인 삶을 확신했던 영혼들이 누려야 할 새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은 나의 구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과 은혜로 늘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야기 예화) 펄벅 여사의 간증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이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중국 동네 마을에는 백인이었던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했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몽둥이, 곡괭이, 도끼, 쇠스랑 등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가지고 펄 벅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마치 오늘을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들었다.
잠시 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단숨에 거실로 몰려왔다.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펄 벅의 어머니는  "정말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하며 정중히 차를 권했다.
그들은 멈칫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고 말했는데, 그것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두려움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첫번째 유형은 유익하며 장려되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번째 유형은 해가 되며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첫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반드시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분의 진노와 분노에 대하여 마땅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정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면 많은 축복과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지혜의 시작이며 명철로 인도합니다(시편 111:10).
오직 어리석은 자만 지혜와 훈계를 경멸합니다(잠언 1:7).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과 안식과 평강과 만족으로 인도합니다(잠언 19:23).
그것은 샘과 생명이며(잠언 14:27), 우리에게 보장과 안전한 장소를 제공합니다(잠언 14:26).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언급된 두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디모데후서 1:7에 언급된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두려움과 겁내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풍성하게 뿌려 놓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1:10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와 우리에게 발생할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얼마나 그분의 자녀를 위해 공급하실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31). 이 몇 구절들은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의 두려움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홀로 있게 되는 것과, 너무 연약하게 되는 것과, 무시 당하는 것과, 육체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권고는 성경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56:11에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에 대한 놀라운 증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주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옵니다. 욥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어려운 몇몇 연단을 경험하면서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라” (욥기 13:15)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두려워하다(5399) 포베오(phŏbĕō) φοβέω  

1. 무서워하다.  2. 놀라다. 3. 두려워하다
발음 [ phŏbĕō ]
어원 / 수동태 φοβέομαι, 미완료 수동태 ἐφοβούμην,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 φοβήθην, 미래수동태 φοβηθήσομαι, 540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
 a. [자동사] 놀라다, 무서워하다, 마17: 6, 막5:33, 행16:38.
 b. [타동사]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마10:26, 요9:22, 갈2:12, 히 11:23.

히브리서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5399 

2. 공경하다, 존경하다, 경외하다, 눅 1:50, 행 10:35(하나님을 경외하며), 벧전 2:17.

사도행전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포베오) 의를 행하는(에르가조마이)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5399                            2038

베드로전서 2:17
뭇라람을 공경하며(티마오) 형제를 사랑하며(아가파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포베오) 왕을 공경하라.
                               5091                                   25                                              5399



내 친구
- 요 15:14에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천구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내 친구'라 표현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이다. 이는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의 친밀한 관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며(Grundmann), 이 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므로 명심해서 들어야 함을 뜻한다.

몸을 죽이고...두려워하지 말라


-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교훈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며,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며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세상 권력이나 악인의 위세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인간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믿는 확신이 요청될 뿐이다(21:18).

지옥

- 여기 사용된 헬라어 '게엔나'((gĕĕnnaγέεννα)는 히브리어 '게엔놈'을 음역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아하스왕 이후 어린 아이를 몰록의 신에게 제물로 불태워 바친 곳이며(레 18 :21. 왕하 23:10),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으로 이 우상 숭배가 근절된 후에도(왕하 23:16) 이 곳은 저주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19:6; 렘 7:31-34). 신약 시대에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 곳에서는 항상 불이 타고 연기가 피어 올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상징하기도 하였다(Tyndale).
이러한 어두운 역사적 버경을 가지고 있는'게엔나'는 종말론적인 심판 뒤에 악인들이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같은 '지옥'으로 번역되지만 몸을 떠난 영혼들이 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 '하데스'(*)와 구분된다.
'게엔나'에 던져넣을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막 9:45,47. 약 4:12).이 권세는 세상을 불의로 통치하는 어둠의 권세(22:53)곧 죽음의 세력을 (히 2:14) 능가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권세이다.

지옥(1067) 게엔나(gĕĕnnaγέεννα, ης, ἡ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발음 [ gĕĕnna ]
어원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 5:29, 30, 10:28, 18:9, 23:15,33, 막 9:43, 47, 눅 12:5, 불의 지옥, 마 5:22, 18:9.
[상징적으로] 약 3:6.

하데스(86) 하데스(hadēs)  ᾅδης, ου, ὁ   

1. ‘눈에 보이지 않는다’.  2.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3. 죽은 자들의 거처
발음 [ hadēs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149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눈에 보이지 않는다’.
 a.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b. 죽은 자들의 거처, 지하세계, 행 2:27, 31.
 c. [하늘과 대비된] 깊음, 음부, 마 11: 23, 눅 10:15.
2. [인격화된] 죽음, 고전 15:15, 계 6:8, 20:13.


스올, 음부, 지옥,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스올, 음부, 게헨나,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 등의 다양한 용어들은 많은 논쟁과 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12:4, 요한계시록 2:7).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도둑들 중 한 명이 그 분께 자비를 구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 분이 곧 천국에서 그 분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낙원을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하셨고, 이후 “낙원”이라는 단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기쁨의 장소들을 표현할 때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성경에서 단 한번,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누가복음 16:19-31).
아브라함의 품은 탈무드에서 “천국”의 동의어로서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요한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기대었던 것처럼, 나사로가 천국의 만찬에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기대어 식탁에 누워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천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낙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은 행복을 누리는 반면 그들 자신들은 고통을 받는 것과, 사악한 자와 의로운 자들 사이에 절대 이어지지 않을 “큰 구렁텅이”(누가복음 16:26)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의 핵심과 사건의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는 스올입니다.
스올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장소” 혹은 “세상을 떠난 영혼/정신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지옥”을 의미하는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하데스로, 역시 “죽은 자들의 장소”를 나타냅니다.
게헨나라는 헬라어 또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며, 힌놈이라는 히브리어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스올과 하데스는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마지막 부활과 크고 흰 보좌에서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있게 되는 일시적인 장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사망 시 곧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즉 천국, 낙원,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게 가게 됩니다(누가복음 23:43,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요한계시록 19:20, 20:10, 14-15에서만 언급되어있는 불못은 최후의 지옥으로 천상의 존재와인간 모두를 포함하여, 회개하지 않은 반역자들을 영원히 처벌하는 장소입니다(마태복음 25:41).

불못은 유황으로 타는 곳으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4, 마가복음 9:45-46). 그리스도를 부정하여 하데스 및스올 안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죽은 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불못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자들은 이렇게 끔찍한 운명을 마주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뿌려진 그 분의 피에 의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거할 운명을 지음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음부”로 번역된 “스올”

구약성경에 65번 나오는 “sheol(스올)”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한글 성경에는 주로 “음부”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저승”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처럼 느껴진다.

17세기에 번역된 흠정역 영어 성경을 보면,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연구를 거치는 동안, “지옥”으로 번역된 “스올”이 문맥과 전체적인 의미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새국제역(NIV)은 “지옥” 대신에 “무덤”으로 번역함으로써 잘못된 번역을 수정하였다. “음부”로 번역된 “스올”이란 말은 “무덤”이란 뜻으로 이해해야만 된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스올”을 지옥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야곱, 욥, 다윗과 같은 의인들이 죽어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엉뚱한 결론이 생기기 때문이다.
1) 신실하게 산 야곱도 자신이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창 37:35 ; 42:38,44
2) 의로운 욥도 죽으면 스올로 내려간다고 하였다 : 욥 14:13 ; 17:13~16
3) 다윗도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시편 18:4,5 ; 30:3

신약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3가지

신약성경에는 지옥(hell)으로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hades), 12번은 “게헨나”(gehenna), 그리고 나머지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라는 헬라어가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의 “음부”인 “하데스” 
 “하데스”는 구약성경의 “스올”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아시아의 무덤에 있는 묘비를 보면, 지금도 묘비 위에 기록된 “ooo의 무덤”이라는 글에서 “하데스”라는 단어가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종종 “지옥”이라고 번역된 “하데스”는 죽은 악인들의 영혼이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우리 모두가 가게 되는 “무덤”이나 “죽음” 자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의 본문만 주의깊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번역된 성경들은 “하데스”를 “무덤” 또는 원어 그대로 “하데스”로 표현함으로써, “하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할 때에 생기는 문맥상, 그리고 신학상의 혼란을 피하고 있다.

B. 어두운 구덩이 -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또 다른 헬라어인 “타르타루스”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루스)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매.” 베드로후서 2:4. 베드로 후서 2장에서는 “지옥에 던져”로 번역된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타르타루스, a dark 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셨으며.” 유다서 6절. 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지옥으로 번역되었던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어두운 구덩이)로 번역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은 이 흑암의 구렁텅이는 어디일까? 요한계시록에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범죄하여 지구로 쫓겨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는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지구)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 요한계시록 12:7~9.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던져져서 심판의 날까지 흑암 가운데 가두워진 곳은 바로 지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기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천년기가 시작되면서, 한 천사가 사단과 그의 천사들을 천년 동안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결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도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배웠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2:4에 “지옥”으로 번역되었고, 유다서 6절에 “흑암”(abyss)으로 번역된 “타르타루스”는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C. 신약성경의 지옥 - “게헨나” 
신약성경에서 게헨나(gehenna)는 모두 12번 “지옥”이란 말로 번역됨으로써,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다. 게헨나는 12번 중에서 단 한번(약 3:6)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특이한 표현이다. 그 중에서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은, 지옥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성경절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그런데 여기 나오는 게헨나는 지옥이 아니라 지명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증거 1: 게헨나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인명인 “힌놈”(Hinnom)이 합성되어 생긴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지명인데, 구약성경에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여러번 등장한다(여호수아 18:16).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게헨나는 실제적인 지옥이 아니라,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힌놈의 골짜기”(gehenna)는 저주와 살륙을 의미하는 장소였다. 구약시대에는 그곳에서 자식들을 몰렉신에게 불살라 제사하였다. “아하스가 ...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 그 자녀를 불사르고.” 역대하 28:1~3.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골짜기가 장차 살륙의 골짜기로 불려지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예레미야 7:31~33.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게헨나 곧, 힌놈의 골짜기라고 불리웠던 예루살렘 성 밖의 남쪽 골짜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차 메시야를 거절하는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게 될 장소로 상징되었다. 예루살렘 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하였다. 그 골짜기에는 항상 처형당한 죄인의 시체와 죽은 동물의 시체와 쓰레기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뿌연 연기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파괴적인 화염 속으로 어떤 것이 떨어지게 되면, 순식간에 구더기에 덮혀서 없어져 버렸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아신 예수께서는 악인들이 최후의 심판날에 “게헨나” 즉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성벽 아래서 전개되는 완전한 파멸의 장면을 가리키면서, 예수께서는 지옥불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예증을 들었던 것이다. 구더기와 쥐들이 계속해서 각종 동물의 시체들을 뜯어먹는 장면을 지적하시면서, 지옥의 완전한 멸망의 모습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 힌놈의 골짜기)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증거 2: 만일 이 성경절에서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헨나”가 유황불이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진짜 지옥이라면, 어떻게 구더기가 그곳에서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 있겠는가? “거기(지옥)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구더기들을 사람의 혼(soul)으로 해석하는데,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가? 결코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구더기를 사람의 혼으로 표현하거나 상징한 곳이 있는가? 단 한군데도 없다. 구더기와 지옥의 유황불은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단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쓰레기와 죽은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밤낮 타오르던 게헨나(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시면서, 마지막 심판 날에 악인들을 태울 불길을 “영영한 불”로 표현하셨던 것이다(마 25:41). “영영한 불” 이란 영원토록 중단되지 않고 타는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인한 결과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게헨나”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 지옥이란 말로 번역되었지만(마 5:22, 29, 30 ; 10:28 ; 23;33), 사람이 죽은 뒤 몸을 떠난 혼백이 영원토록 불 가운데서 고통받는 곳을 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그 대신, 장차 있을 재림과 연관된 심판의 때에 육신이 유황불에 소멸되는 곳으로 묘사되었다(마 5:22 ; 25:41 ; 마 10:28 ; 5:29, 30).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게헨나) 불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5:22. “...온 몸이 지옥(게헨나)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30.





인간의 여섯 가지 기본적인 두려움

모든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유전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육체적 유전이고, 하나는 사회적 유전이 그것이다.
인간이 육체적 유전은 갖가지 습성과 육체적 형태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 이루어진 육체적 유전을 통해 인류 공통의 여섯 가지 두려움도 유전되어 왔다.
이러한 두려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 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유전'이란 개인이 지식을 얻게 되는 모든 수단과 출처를 의미한다.
즉, 독서와 상호간의 대화, 일반적으로 '개인적 경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의 영감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동료를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성향으로 부터 - 이러한 성향은 유전된다.- 유래한다.
동물들은 서로 육체를 먹이로 삼는 포식을 행하지만, 고등의 감각, 즉 직관과 사고, 이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은 그 동족을 유체적으로 포식하진 않지만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데서 더욱 커다란 만족을 느낀다.

작금의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는 물질 숭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두둑한 은행잔고가 없으면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간주되는 시대인 것이다.

가난처럼 인간에게 고통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 없다.
인간이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부에 대한 소유욕은 너무나 강렬하여 때로는 이를 손에 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합법적인 수단을 통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기도 한다.

가난에대한 두려움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다!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강간, 그리고 기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고도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위치에 계속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가난은 범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그러니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자신의 동료를 신뢰한다고 하면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첫 번째는 늙음이 가난과 결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종교인들의 무자비하고 그릇된 세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은 '유황과 불' , '연옥' 그리고 악령에 대한 설법으로 대변된다.
이에 따라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힘든 상황이나 악조건의 끔찍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관련한 두 가지 원인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하나는 자신의 재물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유전법칙을 통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사후 세계에대한 끔찍한 그림 때문이다.
이에 비쳐볼 때 인간이 나이 먹어가는 것을 두려워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3. 타인의 비판 대한 두려움

인간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에겐 이러한 종류의 두려움이 잘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류 제작업자는 모든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 이를 충분히 상업화에 이용하고 있다. 분기마다 의상의 컨셉과 소위 '트렌드' '스타일'이라는 것이 달라진다.
도대체 누가 트렌드를 창출하는 것인가? 이는 의류 구매자의 몫이 아니고 의류 제조업자의 상술이다.
그러면 그는 왜 분기마다 스타일을 바꾸는 것일까? 의심할 바 없이 더 많은 옷을 팔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자동차 생산업체의 경우에도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선보인다.
의류 제조업자들은 인간이란 동물이 '지금 보두가 입고 다니는 옷'보다 한두 시즌 뒤처진 옷을 입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해도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는 동료의 파트너를 빼앗으려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의 대상이어야 할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그녀를 뻇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본래 남성은 천성적으로 일부다처의 속성을 지닌다.
모든 남성은 '일부다처의 속성이 본능속에 잠재해 있다'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적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거나, 혹 다른 연유로 성적인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경우일 것이다.
'제정신의 미치광이'가운데에서도 여자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자와 반대로 남자 때문에 질투의 화신이 된 여자만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형태의 정신장애를 개인적으로 몇번 경험하였을 뿐인데 이 경험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령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6가지 두려움 가운데서는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은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마음을 파괴시키고 황폐화시켜 때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이상의 현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기원을 파헤쳐보면 가난과 나이 먹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빈곤과 노력에 대한 두려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건강 상실도 - 자신이 실제 경험해 본 적이 없어도 -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끔찍한 세계'로 이끌기 때문이다.
때로 건강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정도 이상으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인간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건강요법과 치료물질들이 존재해왔다.
자신의 생계를 타인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모든 수단을 다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설득을 할 것이다.
이래서 결국 사람들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물려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6가지 두려움 가운데 최악의 것으로 꼽을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두려움의 끔찍한 고통은 종교적인 광신주의에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죽음에 관한 이러한 종교상의 책임은 다른 이유들을 다 보탠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사실 '교화된' 사람들, 특히 신학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답이 없는 질문들을 해왔다.
'어디서?' '어디로?' 인데 이것은 결국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영(靈), 혼(魂), 육(肉)에 대한 성경적 이해

사람의 본질 / 사람은 흙으로 만든 몸(육)에 하나님이 숨(영)을 불어넣은 살아있는 혼이다.

창세기 2: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히브리어로 영은 “루아흐”, 혼은 “네페쉬”
히브리어 성경에는 "혼" 이라는 단어인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살전서 5: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혼이란 사람 그 자체를 말한다.

출애굽기 12:15
-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먹는 자는"에서 "자"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라고 한다.

For seven days you are to eat bread made without yeast. On the first day remove the yeast from your houses, for whoever eats anything with yeast in it from the first day through the seventh must be cut off from Israel.

에스겔 18:20
-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The soul that sinneth, it shall die. The son shall not bear the iniquity of the father, neither shall the father bear the iniquity of the son: the righteousness of the righteous shall be upon him, and the wickedness of the wicked shall be upon him.

혼이란 생명체를 말한다.

민수기 31:28 -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네페쉬”가 포함되어 있음.

From the soldiers who fought in the battle, set apart as tribute for the LORD one out of every five hundred, whether persons, cattle, donkeys, sheep or goats.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12:7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원어 성경에는 신이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되어 있음.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 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 개역의 "신"은 개역개정판에서 "영"으로 개정되었음

누가복음 23:46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낙원이나 지옥에 간다.

누가복음 16:22~23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특별한 경우 (예수님과 요나)

마태복음 12:40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 2:6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 the earth beneath barred me in forever. But you brought my life up from the pit, O LORD my God.

*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에,
요나의 혼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 예수님의 몸은 돌무덤에 있고,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19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영은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 혼, 몸이 다 있는 모습니다.

 

영, 혼 , 몸의 관계

예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태를 닫으셨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영이 슬퍼하였고, 그녀의 혼이 괴로워하고, 자기 혼을 주 앞에 쏟아놓았으며, 그의 몸은 음식을 거부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며 기도하였다.

사무엘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In bitterness of soul Hannah wept much and prayed to the LORD. ”

사무엘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영, 루아흐)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혼, 네페쉬) 통한 것뿐이오니”

* 원어 성경에는 마음은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번역되어 있고 심정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번역되어 있음.

"Not so, my lord," Hannah replied,  "I am a woman who is deeply troubled. I have not been drinking wine or beer;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영, 혼, 몸의 기능

: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
: 인격을 갖추고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인격체인 사람을 대표함
: 생명체로서의 기능 유지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혼은 자기를 의식하고, 몸은 세상을 의식한다.”

* 개역성경에서 "영(spirit)" 은 생기, 영, 신, 혼, 마음, 유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고,
" 혼(soul)"은 생령, 산 영, 심정, 마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이단적 사상과 오류들, 동양사상과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 NIV 성경은 "영"은 spirit, ghost 으로 "혼"은 soul, living being 으로 번역 되었다.

* 하나님의 이름은 KJV, NIV 성경은 "the LORD" 로 표기 했고 개역성경은 "여호와" 로 표기했다.




2-3-2024(토) 누가복음 12: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외식을 주의하라(1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Meanwhile, when a crowd of many thousands had gathered, so that they were trampling on one another, Jesus began to speak first to his disciples, saying: "Be on your guard against the yeast of the Pharisees, which is hypocrisy.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성경에서 누룩은 두 가지 의미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좋은 의미의 누룩(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선한 능력을 드러낸다면 그 믿음은 모두에게 유익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나쁜 의미의 누룩((마 16:6. 막 8: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만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범법자로 드러나거나 잘못된 일의 주인공이 될 때는 그 사람 때문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은 발효하는 힘이 있습니다.
음식에 누룩이 들어가면 그 음식을 발효시켜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적당한 발효는 음식을 더 좋은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효과를 얻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전통 음식 김치가 발효 음식입니다.
요구르트와 같은 음료도 발효 음료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믿음은 먼저 사람에게 들어간 후에 그 사람이 변화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이란 "위선, 가장, 겉표정"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과 친절한 언어로 마치 다정다감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마구잡이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겉과 속이 항상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언제나 일치한 삶과 신앙을 유지했던 인물이 "욥(Job. 인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고의 부자로 소문이 났을 때에도 갑작스런 변화로 온 몸에 악창이 솟아나 개가 그 헌데를 핥아주는 것으로도 만족하며 감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부인이 "차라리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라"고 욱박지를 때에도 입술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까?
내 어려움이 욥보다 더 심한가요?
그렇다면 욥도 참고 인내한 것처럼 나도 참고 인내하는 훈련장에서 멋진 훈련병으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이 하루가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내게 주어진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외식하는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 구제, 기도, 금식

외식이란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것,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것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복음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복음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기도  

     복음에 합당한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갖추라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

1. 복음을 방해하는 외식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 가득한 삶을 산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을 것이 빤하다. 복음은 ‘진리’이다. 그에 반해 위선은 ‘거짓’이다.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거짓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거짓된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도 거짓으로 매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책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바리새인의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 더욱 돋보였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보다 더욱 감동하여 마음을 열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녀들을 교육할 때도 나타난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 취급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한 행동을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으로, 직접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오히려 그런 사랑을 전하는 우리를 위선자로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진리로 생각하고 사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누룩, 즉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숨길 수 없는 외식

외식은 반드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서 겉모습을 위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리 숨기려고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일시적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 앞에서 모두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죄지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에게 긍휼을 베푼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지만 그 죄를 계속 숨기게 되면, 다시 말해서 나는 죄가 없다고 계속 발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위선은 거짓이다. 그리고 그 거짓은 숨길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숨길 경우, 즉 계속해서 위선으로 도배할 경우,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막 3;29).

3. 심판에 이르는 외식

신앙의 결과는 심판대 앞에서 결정될 것이다.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를 더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끝에서 이번에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를 ‘외식하는 자’로 규정하시면서, 그 외식 때문에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고 경고하셨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7-59).

무리를 고발하는 주체는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 등이다(요 5:45;롬 11:2-3). 모세와 엘리야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도 고발의 주체가 되신다. 고발하는 자가 죄를 범한 사람들을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끌어가면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가장 사소한 죄 하나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그곳에서 영원토록 나오지 못한다. 여기에서 ‘감옥’은 심판 장소인 ‘지옥’을 의미한다. 마가는 지옥의 참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네 눈이 너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지옥에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위선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지옥을 자초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외식이 주는 매력, 즉 죄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죄는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다리가 하나 잘려나가도, 암에 걸려 내일 죽게 되는데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죄가 주는 쾌락을 지옥과 맞바꾸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 한가운데로 몰려드는 나방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무교병을 먹는 절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누룩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을 상징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 세상의 힘으로 절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는 유일한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누룩이 되어 떡 속에 들어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누룩은 천국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측에서의 공로나 노력, 죄와 자기 의 등을 상징하는 이중적 상징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는 반면에, ‘천국은 누룩과 같다’라고 모순되는 듯한 인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후자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의 배를 위해 내놓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까지 포함한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외식이 무엇이지요?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가족들을 위해 나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외식이라고 하지 않고 ‘성실’이라고 합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타주며 “평안하시죠?”라고 인사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인내와 순종이라고 합니다.
외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기와 자랑과 배를 위한 모든 종교 행위와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식은 반드시 사람들의 눈을 세상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6:6~12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논의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논의라는 헬라 단어는 ‘디알로기조마이’라고 합니다.
디알로기조마이는 ‘논쟁하다,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떡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으십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미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으로 오게 될 구원과 영생에 대해 거기 모인 무리에게 표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만나가 바로 하늘의 떡인 당신을 상징함을 말씀해 주셨고, “이 세상의 떡은 사람들의 배를 잠시 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곧 다시 배가 고프게 되느니만큼 너희들은 하늘의 떡인 나를 먹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니느웨라는 야만인들의 구원을 위해 삼 일간 물고기 배 속에서 갇혀 있다 나와서 니느웨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물고기의 먹이로 내주셨다가 회개하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풀어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벌이라 하지 않고 ‘고난’이라고 한 것이며, 마치 예수님께서 사흘 간 지옥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사흘간의 물고기 배 속의 경험을 ‘스올, 음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요나 2:2~3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꾸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님의 표적이 담고 있던 구원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기적으로 자기들을 만족시켜 달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깨달은 사람은 절대 눈에 보이는 기적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무관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깨닫게 된 복음처럼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부복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신부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보태어 자기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우물물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야망에만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피해 도망가시는데, 제자들이 떡 하나를 갖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제자 중에서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성경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자기가 먹을 떡 한 개만 달랑 들고 배에 탄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무려 떡이 일곱 광주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한 개만 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떡 한 개가 뭐냐? 이걸로 어떻게 이 많은 숫자가 여행 중에 요기하겠느냐?”라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떡 한 개 챙겨온 사람이 다른 모든 제자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정당함을 피력하고 있었겠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떡을 두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이 말은 “외식하지 말라.”라고 했지요? 외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힘으로 삼아 그것의 유무로 일희일비하며 사는 것, 이 세상에서 자기 배만을 위해 사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즘 말로 쉽게 의역하면 “너희들의 육신의 배를 위해 이 세상의 떡이 마치 너희들 인생의 목적인 양 소란 떨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인생의 목적이 자신들의 입신양명과 자신들의 인기와 자기들의 자랑이기 때문에 하늘의 떡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떡을 또 만들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피해 도망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역시 영생의 떡으로 오신 당신 앞에서 세상의 떡을 하나 들고서 온통 그 떡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누룩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누룩,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 손에 들린 세상의 떡에 눈을 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기껏 하늘의 떡이신 당신의 공로로 거저 주어지게 될 구원에 관해 설명해 주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게다가 제자들까지 누룩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경건한 종교 행위까지도 자신들 이익의 재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떡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경건한 종교 행위는 전부 외식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 독사의 새끼들이라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건의 열심은 반드시 다툼과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나를 자랑하는 데 몰두하게 되면 우리는 경건까지도 나 자신의 이익에 사용하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겉으로 드러난 경건한 모습과 도덕적, 윤리적 삶의 양으로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기나 자랑을 위해 경건한 행위를 일삼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교만과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과 다툼이 쏟아지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9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세계적인 여성잡지 ‘엘르(Elle)’의 편집장이며 준수한 외모와 화술로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하던 43세의 한 젊은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3주 후 그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고,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깜박이는 신호로 알파벳을 지정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한 문장을 쓰는데 꼬박 하룻밤을 지새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필자인 클로드 망디빌(Claude Mendibil)에게 20만 번 이상의 눈을 깜박여 15개월 만에 책을 한권 쓰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잠수종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이고, 그 책의 저자는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1952-1997)입니다.

잠수종이라는 것은 세월호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다이빙벨(diving bell)입니다.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다이빙벨 안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갇혀있는 몸이지만 그의 마음만은 하늘을 훨훨나는 나비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잠수복을 입고 다이빙벨에 갇힌 것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마음은 훨훨 나는 나비를 상상하며 삶을 긍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잠수종과 나비』라는 자신의 책이 출간된 지 8일 후에 자신을 옥죄이는 잠수종을 벗어던지고 나비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그가 쓴 책 제목과 같은 ‘잠수종과 나비’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전신마비라는 처참한 상황에서 ‘우리가 자연스런 들숨과 날숨을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불평과 원망은 행복에 겨운 자의 사치스런 신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그는 50센티미터 앞에 있는 아들을 보고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어서 눈물을 쏟아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는 위기 덕분이고, 일류는 이류 덕분이고, 고귀함은 고생함 덕분입니다.
상처는 상급을 기약합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넘어진 곳이 일어서는 곳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희망적인 때이고, 어두움에 질식할 것 같을 때가 샛별이 나타날 때입니다.
희망이 늦을 수는 있지만 없을 수는 없습니다.
별은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축복은 조금 멀리 있어 보일 때 오히려 인생의 보약이 됩니다.
늦게 주어지는 축복이 더욱 풍성한 축복입니다.
꿈과 희망은 영혼의 날개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절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꿈과 희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자 하는 꿈과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은 축복의 씨앗이고, 행복의 설계도입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삶을 바라보십시오.
힘들다고 느낄 때 진짜 힘든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절망 중에서도 마음속에 태양을 품고 온기를 느끼십시오.
바른 길로 이끄는 ‘상처의 표지판’을 긍정하며 내일의 희망을 향해 훨훨 나는 나비가 되십시오.’

43살의 젊은 나이에 전신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눈꺼풀 밖에 없었지만, 그는 훨훨 하늘을 나는 나비를 꿈꾸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출간한 지 불과 8일 만에 45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잠수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비처럼 이 세상을 훌훌 털고 날아갔지만,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가 가장 희망적일 때’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에 수없이 만나는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중에 하나인 ‘희망’의 능력입니다.

장 도미니크 보비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욥입니다.
43살의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어느 날 뇌졸중이 찾아와 그의 삶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처럼, 욥에게도 그런 시련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욥기 1:1절에 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짧은 말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께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정도로 바른 삶, 정직한 삶,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아들 7명과 딸 3명 등 모두 10명의 자녀를 주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에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재산도 많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의 재산목록을 공개합니다.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욥기 1:3)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말 성경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인격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부러운 사람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 인격의 탁월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 성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욥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젊은이들은 그 앞에서 숨었고, 노인들도 다 일어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읍의 유지들은 말을 삼갔고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성읍의 지도자들조차 욥 앞에서는 말소리를 낮췄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앞에서 조심했습니다.(욥기 29:7-10)
성읍 사람들이 욥을 그렇게 존경하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욥이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다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욥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그가 가진 재산 때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욥에게 도움을 받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욥을 좋아했고 존경했던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멈췄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훌륭한 인품과 칭찬받는 신앙,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욥이 10명의 자식들과 함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평생을 살았다는 것으로 결말이 났으면, 많은 사람들이 ‘욥처럼 살면 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욥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어느 날 스바 사람들이 욥의 소유인 소떼를 다 빼앗아가버렸고, 가축을 지키던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남아 있던 양떼와 종들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침공해 들어와 낙타도 다 빼앗아갔고, 칼로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 소식에 낙심되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10명의 자녀들이 큰 아들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거친 들에서 폭풍우가 몰아쳐 건물 모퉁이 기둥을 치자 건물이 무너져 10명의 자녀들이 한 순간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욥기 1:20) 욥은 그런 큰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합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자신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표현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욥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항변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내게 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둬가신다면 내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당신이 가져다신다는데 내가 뭐 할 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온 몸에 종기가 생겼습니다. 건강을 잃은 것입니다. 그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8절) 성서학자들은 욥이 겪었던 병으로 추정되는 ‘종기’가 ‘궤양성 피부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악성 질병은 고대 사회에서 악인들만 감염되는 두렵고 수치스러운 질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욥은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재에 앉았다는 말은 비탄과 굴욕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신이 겪는 그 질병으로 인해 욥은 깊은 슬픔과 아울러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몸서리를 치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온 몸은 악성 종기로 가려워 질그릇으로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보십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한 순간에 잃었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욥의 열 명의 자들이 결혼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자녀들은 아직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욥의 나이는 많아야 50대, 그렇지 않으면 40대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부자라고 표현될 정도로 부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금수저로 태어난 어떤 갑부집의 자식이 아니라, 그는 그 재산을 그만큼 갖추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생의 시간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수고하고 땀 흘리며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가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열 명의 자녀는 그에게 미래의 행복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도 그만큼 부러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많은 자식들을 낳아도 가진 것이 없어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면 불쌍한 가정이겠지만, 욥에게는 그런 걱정이 필요없습니다. 욥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이 생일잔치를 하다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지 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일잔치가 끝나면 아이들을 데려다가 정결예식을 행하고 하나님께 아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풍족한 생활로 인해 죄를 짓지 않을까 하는 걱정 외에 욥이 자식들로 인해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욥의 미래입니다. 욥이 자녀들을 위해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것은 자녀들이 미래가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식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고 삽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좀 힘들어도 자식들이 잘 되면 기쁩니다. 부모님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욥은 건강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자신의 현재입니다. 과거가 사라지고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려도 오늘의 내가 굳건하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다시 일어설 용기도, 희망도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 현재가 무너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한 것처럼, 욥의 아내가 그에게 “당신은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이라.”(9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욥의 아내가 욥에게 신앙을 격려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겠느냐? 그냥 죽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보다 뜻을 명확하게 하여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진 재산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버렸을 때에도, 그리고 애지중지 키우던 열 명의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었을 때에도 욥의 아내는 욥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건강을 잃고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고 맙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 많던 재산이 날아가버린 것이 더 아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장사지내야 했던 어머니로서 아마도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때 욥의 아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일을 겪었을 때에도 욥의 신앙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던 아내가 욥이 건강을 잃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저주의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과거를 잃은 것도 마음 아프고, 미래를 잃은 것도 희망이 사라졌기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나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현재를 잃는 것입니다. 현재를 잃으면 과거도 필요 없고, 내일의 희망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도 잃었고, 미래도 잃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현재까지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었음에도 왜 욥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욥의 아내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는 악성종기로 인해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겠느냐?’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말한 ‘온전함’은 욥의 온전한 신앙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욥이 가진 온전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었을 때 욥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비난하는 아내를 향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 어려움을 겪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은 철저하게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찌 화를 당하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도 모두 잃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저주로밖에 읽혀지지 않을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뭔가를 조금만 잃어도 마음에 분노와 불평이 가득해집니다. 욥처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든 것을 잃은 상황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내기 바쁩니다. 가진 재산을 조금 잃었다고 불평하고, 나의 자존심이 조금 짓밟혔다고 분노하고,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원망합니다. 자식의 문제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 때문에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보다 승진이 더디다고 화가 납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너무나도 큰 존재인데 어느 순간에 내 곁을 떠나거나 내 품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많은 것을 잃었다 한들 욥만큼 잃어보았습니까? 우리는 과거 하나만 잃어도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 다 잃고도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되면 생을 자포하자기 하고 신앙이 흔들리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을 모두 잃고도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전부가 아니라 현재의 일부만 잃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데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니 어쩌면 온전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던 욥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욥기 42장에서 기록한 것처럼 고난의 때를 온전한 신앙으로 버티어냈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풍성한 것들로 채워주셨습니다. 재산이라는 과거를 모두 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욥에게 지난날 가졌던 것보다 배나 많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미래인 자녀 열 명을 모두 잃었었는데, 그 미래를 그대로 보상해 주셔서 열 명의 자녀를 다시 낳게 하셨습니다. 물론 건강이라는 현재의 삶도 온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서 온전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신앙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온전한 신앙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도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비비어(John Bevere)가 쓴 『광야에서』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우리네 인생길을 걸어 살아감에 있어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팁’을 제시하면서 그 열 번째 생존팁으로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는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기가 너무도 쉽다.
그래서 당신에게 작은 비밀 하나를 알려 주고 싶다.
정말이지 내가 광야에서 살아남고 번영하는데 큰 도움이 된 비밀이다.
나는 이것을 ‘비밀의 기쁨 약’이라고 부른다.
외적으로는 즐거운 일이 없을 때,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때,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이 해 주신 일을 다시 떠올린다.
예수님이 불이 꺼지지 않고 유황냄새가 그치지 않는 지옥에서 나를 구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고문, 그 지옥은 내가 아닌 마귀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마귀는 인류를 속여 수많은 사람을 그곳으로 함께 데려 간다.
하지만 창조주 예수님이 나를 그곳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생명을 내어 주셨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며 감사의 태도로 돌아서서 영원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때, 갑자기 눈앞의 상황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감사해야 할 모든 것을 돌아보며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 이것이 내 비밀의 기쁨 약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내게서 사라질 때, 심지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인도하신 구원의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만 바라보십시다. 그것이 온전한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온전한 신앙을 갖고 살면 욥을 회복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유대 지도자들이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16:6. 막 8:15)
이러한 경우 '누룩'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 반면 마태복음 13:33에서는 좋은 의미로 표현됩니다.

이와같이 누룩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누룩'이 '파급적 효과'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의 본래적 의미는 '배우', '각색'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위선'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위선은 11-37이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위선의 파급 효과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고(11:44)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52).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5272

1. 위선.  2. 가장. 3. 겉 표정
발음 [ hüpŏkrisis ]
어원 / 527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선, 가장, 겉 표정, 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약 5:12, 벧전 2:1.

오래 전에 일본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도시에 매우 진실하고 경건한 부인이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외출을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자동차들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역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집 가까이 다가갔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 부인의 집에 화재가 나서 집이 몽땅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후에 탄식하며 "아이구, 이제 망했구나!" 하고 슬퍼하더랍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말을 하였는데 막상 내 집이 불에 타서 시커먼 재로 변했을 때는 감사가 아니라 망했구나 하고 외치는 것이 과연 신앙의 본 모습일까요?


어떤 독일인이 혀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결국 혀를 잘라야 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의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수술이 끝나면 그는 입으로는 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눈과 손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그로서는 마지막 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그가 최후로 할 말은 무엇일까?
의사나 가족이나 간호원 모두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 조용히 감은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그의 입술을 통하여 흘러나온 말은 "주님, 감사합 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친구나 친척들 그리고 아끼던 것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른 최후의 이름은 "주님"이었고 남긴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멘으로 감사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에는 이유도 항변도 조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 눈을 감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라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사 신앙의 소유자가 됩시다.

누가복음 12:1-3 /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학자/율법선생]들의 외식을 책망하며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1:37-52).
1. 바리새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씻지만, 그들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2.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3.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4. 서기관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면서도, 너희는 스스로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5. 서기관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민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그들 조상들의 증인이 되며, 그들이 저지른 소행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여 그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는데, 이제 그 뒤를 좇아 서기관들이 의로운 자의 피 흘림에 있다. 이러한 그들은 아벨의 피에서부터 시작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6. 서기관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예수께서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책망하시자,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은 앙심을 품고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구실을 찾고자 악의적인 마음으로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지며 기회를 노렸습니다(눅 11:53-54).

그러한 동안에 사람들은 수없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어서 예수님 주변은 서로 짓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주의하라며 경계하게 하는 말씀을 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까닭 없이 괜히 그들을 미워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행하는 모습에서 선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은 외식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인 외식은 그들에게 있는 외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는 외식은 곧 온 유대인에게서 행해지고 있는 외식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선함이 없다는, 그래서 그들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겅건한 모양으로 치장한 몸과 그 행하는 일로 비록 선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는 선을 가장한, 그러니까 위선이라는 포장이요 가면일 뿐입니다.
포장 속에는 담겨 있는 내용물이 있으며 가면 속에는 실제의 얼굴이 있듯이, 위선은 영원히 그들의 본 모습의 얼굴을 숨겨 두지 못합니다.
그들의 위선은 떡덩이 속에 든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에 의해서 떡덩이는 크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떡덩이 속에는 누룩이 든 것을 압니다.
그러니 위선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본 모습인 악함이 드러납니다.
감추어 놓은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 숨겨 놓은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 있을 수 있었으며, 숨겨져 왔습니다만 언제까지나 그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그 실체는 감추어지지 못하며 숨겨지지 않고,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일지라도 밝은 대낮에 들리는 말이 되어서 위선자들의 위선을 환하게 드러낼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한 말이지만 지붕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만한 외치는 소리가 될 것이므로 위선자들의 위선은 감춰지지 못하고 누구나 알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이 있는 곳에서는 위선이 자리 잡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성에 의한 악독과 탐욕에 있는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나갑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 모두를 몰아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악독과 탐욕에 의한 위선이 자리할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없이 행하는 것에는 그것이 정결의 규례를 지키고 십일조 규례를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세밀히 가져나가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모두는 악독과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 것에서 가져나가는 외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그러한 행함이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에 의하여 하는 것이므로 아주 작고 적은 소소한 것일지라도 무시되지 않으며 선하며 존귀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외식이 결코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무릇 할 마음만 있으면 힘써 할 것이요,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를 힘입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죄 사함과 의를 힘입음에 있으므로 우리가 행하는 믿음 생활에서 선을 가장한 위선이 제거되고 외식의 포장이요 가면이 벗겨져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되며 받으심에 있습니다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온 유대인들에게서 드러내 주신 것에서 보는 외식을 주의할 것의 권면을 가볍게 여기고 한 귀로 흘려보내듯이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몸에 있는 한에는 육은 영을 거역하며 대적하는 유혹인 육의 욕망이 언제든지 꿈틀대며 그 기회의 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분을 아는 지식의 견고함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자신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 주시고 있는 권면, 주의에 주목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3-16)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있는 우리를 단 하루도 어둠에 갇혀 있게 하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진리가 비춰주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 아래에 있는 어둠이 물러가게 하므로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에, 단 한 시도 어둠의 지배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에 있을 틈이 없는 것은 어둠을 지배하는 빛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빛에 의하여 확연히 드러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있는 믿음은 외식에 있는 위선이 아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에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는 것을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5272

1. 위선.  2. 가장. 3. 겉 표정
발음 [ hüpŏkrisis ]
어원 / 527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선, 가장, 겉 표정, 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약 5:12, 벧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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