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댜(Obadiah) -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
저자 : 1절은 선지자 오바댜가 오바댜서의 저자라고 알려줍니다.
본서의 기록자는 남 유다 출신 선지자 오바댜이다.
오바댜는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라는 뜻이다.
에돔의 멸망을 선포했으며 고향이나 가족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성경에는 오바댜 선지자를 비롯해 아합의 궁내 대신 오바댜 등 총 13명의 오바댜가 등장한다.
저작 연대 : 오바댜서는 주전 848-84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바댜서의 기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본서의 포로 귀환 내용이 바벨론 포로 귀환을 연상케 하며, 또한 열왕기서나 역대기의 기록에서 에돔의 배반을 언급하긴 했으나 에돔이 유다를 침공했다는 내용은 없어 열왕 시대 이후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기록 목적 :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인 오바댜서는 단지 21절 밖에 없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범죄한 에돔을 정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선지자입니다.
에돔 사람들은 에서의 후손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서의 쌍둥이 형제 야곱의 후손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의 형제 싸움은 천년 동안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분열
때문에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중에 그들의 땅을 건너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이제 주의 심판의 말씀은 에돔의 교만에
대해 선포될 것입니다.
핵심 구절 : 오바댜 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바댜 1: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오바댜 1: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요약 : 오바댜의 메시지는 최종적이며 확실합니다.
에돔 왕국은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에돔은
오만하고 이스라엘이 불행을 당할 때 기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적군의 공격을 에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들은 그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이러한 교만한 죄악은 더 이상 간과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마지막
때에 시온의 완성과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끝나며, 그 때에 그 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되어 주께서 그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예표: 오바댜서 21절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개역한글).
이 “구원자들”(다른 역본은 “구원받은 자들")은 말씀 사역자들인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특히 마지막 때의 복음 설교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구원자들’로 불리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구원을 얻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선포하고 우리에게 그 구원을 얻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그들에 의해
선포되는 말씀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수단입니다.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값 주고 사신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구원의 창시자이십니다.
반면, 복음의 구원자들과 전달자들은 시대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말세의 증거로서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적용 :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승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에돔과
달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은 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외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31번째 책으로 선지자 오바댜가 기록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가장 짧다.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연합해서 유다를 공격한 에돔은 멸망하고, 유다는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에돔
오바댜가 심판을 예고한 에돔 민족은 이삭의 아들 에서의 후손으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과는 형제지간이다. 사해 남단의 세일산에 정착해 큰 민족을 이루었다.[17]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향할 때 에돔은 자신들의 영토를 지나지 못하게 하고,[18]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을 배신하거나 괴롭혔다.[19][20][16][21][22][23][24]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할 때는 앞장서서 침공하기까지 했다. 결국 자신들도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유다에 복속되었다가 끝내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
오바댜의 내용 구성
장 | 절 | 내용 |
1장 | 1-16 | 에돔의 죄와 심판 |
17-21 | 이스라엘의 회복과 복된 미래 |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 믿고 교만하게 행한 에돔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셨다. 형제 나라인 유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돕기는커녕 오히려 침략자를 도와 약탈에 앞장선 죄로 인해 그 행위대로 멸망당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한편 유다는 이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오바서는 구약에서 유일하게 단 한 장으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한 장으로 구성된 말씀은 신약에서는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빌레몬서 4권이며 구약에서는 오바댜서 1권으로 모두 5권입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섬기다는 아바드와 여호와라는 야가 결합된 것으로 "여호와의 종"이란 뜻입니다.
오바댜서는 에돔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말씀으로 묵상의 주제는 '중심의 교만(the pride of your heart)'입니다.
중심의 교만이란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신의 힘을 믿는 에돔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오바댜 1: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The pride
of your heart has deceived you, you who live in the clefts of the rocks
and make your home on the heights, you who say to yourself, 'Who can
bring me down to the ground?'
에돔 족속들이 거주한 곳은 사해 남동쪽 바위가 많은 산악 지대로 난공 불락의 요새였다.
그 주민들은 자연적인 동굴이나 인공적으로 바위를 깨어 만든 집에서 거주하였다.
이런 조건들은 외부로부터 보호해 줄 뿐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더욱이 수도인 베트라는 약 3Km에 걸쳐 펼쳐지는 좁은 암반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리 많은 적이라도 적은 수의 군사력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에돔 족속은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리어 이로 인해 교만을 불러일으켰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돈'(2087)은 '끓는다'(boil)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지드'(*)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으로는 끓고 있는 음식이나 물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사람의 심성을 나타낼 때는 자만하여 스스로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마치 물이 끓어넘치는 듯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자들은 그 어떤 것에도 복종하려 하지 않고,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
2087. 자돈(zâdôwn) זָדוֹן
어원 / 210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교만(잠언 11:2, 잠 13:10, 겔 7:10), 교만한 자(렘 50:31, 32).
[부] 무법하게(신 17:12), 마음대로(신 18:22).
구약 성경 / 11회 사용
2102. 주드(zûwd) זוּד
관련 성경 / 교만하다(렘 50:29), (죽을) 쑤다(창 25:29).
[부] 거리낌 없이(신 1:43, 17:13), 교만하게(출 18:11, 느 9:10), 마음대로(신 18:20).
구약 성경 / 10회 사용
오바댜 1: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 '시온 산'은 하나님의 통치가 강력하게 구현되고 시행되는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표상적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를 심판할 수 있는 근거나(사 31:9; 욜 3:16), 심판의 장소를 의미하기도 한다(11-14,16절; 사 10:12; 미 3:12).
한편, '피할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펠레이타'(*)로서 '구출'', '모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 봐서 '그 산에 피할 자'란 심판을 모면하여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학개와 스가랴 때에 고국의 종교를 재건한 사람을 가리킨다(학 1:12,14).
에돔에 대한 심판 예언(1-9절)
오바댜는 구약성경 39권 중에서 유일하게 1장으로 구성된 성경입니다. 신약성경에는 1장짜리가 4권, 빌레몬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가 있습니다.
오바댜 선지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바댜’라는 인물이 성경에 몇 명 등장합니다. 아합왕 시대에 기근이 극심할 때에, 왕궁을 맡은 사람 중에 오바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선지자 100명을 굴에 몰래 숨겨 두고, 빵과 물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오바댜는 선지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시야 왕 때 성전 수리에 동참했던 인물 중에 오바댜가 있었고,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도 오바댜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오바댜’의 뜻이 ‘여호와의 종’입니다. 또한 이 이름은 ‘에베드_예배하다, 경배하다’라는 동사에서 왔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어떤 신분에 있었든지, 또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1-9절은 에돔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묵시(하존)’라는 말은 ‘계시’, ‘말씀’,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바댜를 통해서 에돔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라는 의미입니다. 한 국가의 대사가 대통령의 명을 받고서 다른 나라에 가서 그것을 전하면, 그 말을 대사가 자기 입으로 말할지라도, 그 말은 대사의 말이 아니라 대통령의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도 동일합니다. 선지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선지자가 목이 터져라 외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터지는 것입니다. 또 선지자가 눈물로 호소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눈물의 호소가 됩니다.
(1-2)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에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에돔을 쳐부수러 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로 에돔은 아주 작게(보잘 것 없게) 될 것이고, 굉장히 경멸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돔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입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역사,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당시의 초강대국이 좌지우지하는 것 같고, 역량이 굉장히 뛰어난 최고 통치권자가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개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고, 내 계획과 내 의지가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돔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들의 문제를 이렇게 밝힙니다.
(3-4)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이었습니다. 에돔은 해발 1,500m 이상 되는 험준한 바위산에 요새를 건설하고 살았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이 북한산인데, 가장 높은 곳인 ‘백운대’가 해발 836m입니다. 평소 등산하지 않던 사람이 올라가려고 하면, 쉬운 높이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산은 높을수록 올라가기는 더 힘듭니다. 에돔 사람들은 북한산 위에 또 북한산을 하나 더 올려놓은 정도 지점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는 난공불락의 성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에돔 사람들을 ‘독수리’에 비유합니다. 독수리는 새 중에서 가장 높은 곳,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삽니다. 게다가 조류 중에서 가장 강합니다. 또한 시력도 좋아서 2,000m 상공에서 들판을 지나는 쥐를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독수리 둥지와 같은 곳에 요새를 만든 것과 같은 곳에 살았던 에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자신들을 함락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끌어내릴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남의 집 담을 넘어가 물건을 훔칠지라도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지 않습니다. 아니 가져갈 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져가려고 했던 것만 가져가든지,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정도만 가져갑니다. 또 남의 포도밭에 들어가 서리를 할 때도 밭에 있는 포도를 전부 가져갈 수 없습니다. 가져갈 수 있을 정도만 갖고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돔에게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남긴 것이 없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깊이 감추어 둔 것까지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8-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말미암아 에서의 산에 있는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여 멸절되리라
혹 나라가 망하게 되더라도 ‘지혜로운 사람’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좀 더 빠른 시간에 재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그런 사람들을 남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만’은 에돔의 대표적인 도시를 뜻하거나, ‘에브라임’이 북이스라엘을 전제를 대표하듯이, 에돔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드만이 에돔을 대표하는 도시이든, 에돔 전체를 뜻하든, 군인들이 모두 멸절을 당한다는 것은 에돔이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돔의 죄(10-14절)
10-14절은 에돔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저질렀던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네 형제 야곱(이스라엘)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십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가 들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몹시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붉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그 죽을 좀 달라고 했더니, 야곱이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에서는 말로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 장자의 명분이 넘어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팔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붉은 팥죽으로 인해서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고, 그 뜻이 ‘붉다’입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은 모두 이삭과 리브가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임이니라(신 2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할 때에 에돔 지역을 통과만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밭이 있는 지역이나, 포도원이 있는 지역은 결코 통과하지 않을 것이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큰 길로만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돔의 대답은 “NO!”였습니다. 그럼에도 지나가겠다고 하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 두 민족은 오랜 기간 적대적이었습니다.
(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멀리 섰던 날’의 문자적인 뜻은 ‘반대편에 섰던 날’입니다. 즉 에돔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에 바빌로니아의 편에서 서서 함께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바빌로니아 군대와 서로 지역을 나누어서 약탈했습니다.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표현이 ‘현재, 부정형’으로 되어 있는데, ‘과거, 긍정형’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했으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했으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렸으며’입니다. 과거 긍정형의 일을 현재 부정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더욱더 생생하며 묘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입을 크게 벌렸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그만큼 통쾌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즉 손가락질하며 “쌤통이다!”, “고소한 참기름이다” 등등을 큰 소리로 말하며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13-14)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이 말씀도 ‘현재, 부정형’으로 된 것을 ‘과거, 긍정형’으로 읽어야 합니다. 에돔은 예루살렘이 침략을 당할 때 들어가지 말아야 할 성문으로 들어갔고, 고난을 덜어 주지 않고 방관했으며, 손대지 말아야 할 재물에 손을 댔고, 심지어 도망가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막아 도망가지 못하게 했고, 더 나아가 원수(바빌로니아)에게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에돔의 이런 만행을 하나님께서 결코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며 불순종할 때에, 바빌로니아를 통해서 징계하셨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 백성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에돔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15-21절)
15-21절은 세상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에돔도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돔은 B.C. 32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함락당하여, 수천 명의 지도자가 죽임을 당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A.D. 66-73년에 있었던 ‘제1차 유다-로마전쟁(First Jewish–Roman War)’ 또는 ‘유대독립전쟁’ 이후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7-18)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에돔이 보기에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짓밟을 때는 유다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침략자의 편에서 함께 짓밟고 약탈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타 재가 된 것은 에서 족속(에돔)이고, 반면에 야곱 족속(남유다)과 요셉 족속(북이스라엘)은 불꽃처럼 되살아나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21)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이것이 ‘오바댜’의 결론입니다. 스스로 난공불락이라 여기며 교만했던 에서의 산(에돔)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에 대한 박해였습니다. 에돔의 조상인 에서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은 형제였습니다. 그것도 쌍둥이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가까운 사람(가족, 친척, 교우 등)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치면, 그것이 징계의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짓누르는 것인지, 반대로 대가를 지불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짓누르는 삶은 당장은 이익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기 삶을 무너지게 만드는 첩경입니다. 그러나 대가를 지불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은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대가를 지불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하지만 에서가 하나님의 향한 삶을 살지 않게 될 때에 그 후손들은 서로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1,500m나 되는 곳, 바위틈에 요새와 같이 세워졌기 때문에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함락당할 때에 침략군의 편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을 자행했습니다.
바라옵나니 우리가 가족과 친척, 교우 등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바르게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불해야 할 대가를 감당하게 하시고,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1. 에돔은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에 지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난공불락이라 여겨 교만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높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낭패를 당한 일은 없습니까?
2. 에돔은 같은 피를 이어받은 이스라엘에게 행한 포악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데 바꾸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만, 다시 회복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된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4. 가까운 사람들에게부터 대가를 지불하는 삶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며, 또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오바댜의 묵시(默示)다.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산다
하여 누구도 감히 우리를 땅에 끌어내리지 못할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끌어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에서가 어찌 수탐(搜探) 되었는가 놀랄 것이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악으로 말미암아 멸절(滅絶)되리라.
너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너도 그들 중에 끼어 함께 제비를 뽑았다.
네가 형제의 날 곧 재앙의 날에 방관해서는 안 되었다.
너는 오히려 그들의 환난을 기뻐했고 도망하는 자를 막았고 원수에게 넘겼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 왔다.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으리라.
하지만 시온 산에는 피할 자가 있다.
야곱 족속은 그곳에서 기업을 얻을 것이다.
야곱 족속이 불이 되어 에서 족속이 지푸라기가 되어 불탈 것이다.
야곱의 족속은 주변의 땅들을 얻을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 에서의 산을 심판할 것이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했다.
8300. 생존자,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자, 민수기 21:35
사리드(sârîyd) שָׂרִיד
발음 / 사리드[ sârîyd ]
어원 / 827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남김(민 21:35, 신 2:34), 남기는 것(욥 20:21), 남은[을] 자[사람](민 24:19, 수 10:20, 렘 42:17), 남아 있는 바(렘 47:4), 남은 자(욥 18:19, 렘 44:14, 옵 1:14).
구약 성경 / 28회 사용
다름 아닌 ‘셀라’이다.
셀라에 대한 궁금증은 대부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셀라의 의미,
둘째 셀라의 기능,
셋째 셀라를 읽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이다.
셀라는 주로 시편에 기록되어 있고 하박국에도 기록되어 있다.
시편 3편 2절에 처음 등장하는 셀라는 총 39편의 시편에서 68회 사용됐고, 하박국에서 3회(합 3:3, 9, 12)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인 셀라는 신약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총 71회 등장한다.
문자적 의미의 셀라는 올리라는 뜻이다.
기능적으로 음악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셀라가 음악 악상기호라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셀라가 악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셀라가 ‘들어 올리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음을 높이라는 부호로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음 자체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악기나 사람의 목소리를 크게 하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는 지휘자가 단조로운 음악의 흐름에 변화를 주려고 붙인 부호라는 것이다.
사실 시편의 기자들이 처음부터 셀라를 넣어 시를 지은 것은 아니다.
하박국 3장과 서른아홉 편의 시편을 후대 혹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곡조를 붙여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로 연주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한글 성경은 괄호 안에 넣어 (셀라)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괄호가 없다.
한글 성경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괄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셀라가 시편과 하박국의 기자가 지은 원문에는 없었지만, 필사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셀라가 처음 등장하는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지은 시이다.
시편 51편 또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다윗에게 이 사건들은 평생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시편들에 곡조를 붙여 찬양대가 부르게 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며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짓지 않으려는 다윗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에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돔 사람들은 이삭의 맏아들이자 야곱의 쌍동이 형인 에서의 후손입니다.리브가의 뱃속에서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엄마인 리브가에게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25:23).
성인이 된 에서는 경솔하게도 팥죽을 먹기 위해 야곱에게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 버립니다(창세기 25:30-34).
그리고는 그 후부터 그의 동생 야곱을 증오합니다.
에서는 에돔 사람의 아버지가 되고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끝없이 싸웁니다.
성경에서 “세일”(여호수아 24:4), “보스라”(이사야63:1)와 “셀라” (열왕기하14:7)는 에돔 땅과 수도를 말합니다.
셀라는 오늘날 페트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돔”이라는 이름은 “붉은”을 뜻하는 셈 족 언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또한 사해의 남쪽을 에돔이라 부른 이유는 지형학적으로 붉은 사암이 너무나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을 팥죽과 맞바꾼 바람에 에서는 에돔이라고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가족을 데리고 같은 이름의 구릉지대로 이사를 갑니다.
창세기 36장은 에돔 사람들의 초기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아직 없을 때에 왕들이 차례로 에돔 땅을 다스렸습니다(창세기 36:31).
에돔 사람들의 종교는 풍요의 신을 섬긴 다른 이방 족속들과 비슷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결국 남쪽 땅을 점령하고 농사와 무역으로 생계를 꾸립니다.
고대 무역로 중 하나인 임금님의 땅(민수기 20:17)은 에돔을 통과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당시 그 통로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강제로 거부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에돔 족속과 가까운 친척이었으므로 에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되었습니다(신명기23:7).
그러나 에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그로 인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사울 왕이 에돔과 전쟁을 치를 때 다윗이 그들을 물리치고 에돔에 군사기지를 세웁니다.
에돔 영토를 통치하면서 솔로몬 때 이스라엘은 홍해에 에시온 게벨 항구를 건설하여 많은 원정을 보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 이후 에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잠시 자유를 누리다가 티글라스-필레세르 3 세가 이끄는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진압당했습니다.
마카베오 전쟁 동안 에돔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토벌 당하여 유대교로 강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에돔인은 유대인에 대한 오래된 미움을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헬라어가 공용어가 되었을 때 에돔 사람들은 이두메 사람으로 불리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탄생과 함께 유대교로 개종한 한 이두메 사람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이두메 사람이 바로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에 학살을 명령한 폭군 헤롯 대왕입니다(마태복음2:16-18).
헤롯이 사망한 이후 이두메 사람들은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35장에서 이미 에돔 사람들의 파멸을 예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35:15).
이스라엘이 에돔보다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유대인들을 지배하려는 지속적인 에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북쪽의 모압과는 세렛 시내를 경계로 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경계는 홍해에 맞닿아 있는 에시온게벨(현재 에일랏)까지였다. 에돔의 수도는 보스라(사 34:6, 64:1; 렘 48:24)로 이곳에는 에돔의 궁궐이 있었다(암 1:12). 히브리어로 에돔의 의미는 ‘붉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와디 알-아르바 동쪽의 세일 산의 색깔이 붉은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성경에 의하면 에돔 땅의 조상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서로 그의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붉었다(창 25:25). 또한 그는 야곱이 내어 준 붉은 것을 먹어 그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다(창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 25:30)
'에돔'(Edom)은 ‘붉다’라는 뜻이다. 원문에는 이 말이 두 번 반복되어 '그 붉고 붉은 것(???? ???)'으로 나온다. 에서가 팥죽의 붉은 색깔에 자극받은 식욕 때문에 지극히 흥분한 상태에 있음을 묘사한다. 본래의 붉은 피부에다 이 붉은 팥죽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이후 사람들은 그를 '붉다'는 뜻을 지닌 '에돔'이라 불렀다.
장자권을 팔고 대신하여 받은 '붉은'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얻게 된 에서의 별명으로(창 25:30), 에돔 족속은 바로 이 에서의 후손이다. 유다 지파는 에돔 경계에 닿는 영토를 분배받았지만 에돔 영토를 결코 침범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에돔 지역은 모압, 암몬 등과 더불어 정복 대상에서 제외된 곳이었기 때문이다(신 2:4-23). 따라서 가나안 정복과 분배시기에 이스라엘과 에돔이 서로 접촉하거나 충돌한 기록은 없다. 약 2세기 후에 사울이 에돔인들과 싸운 적이 있고(삼상 21:7),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에돔은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게 된다.
한편, 장자는 짐승의 '초태생'과 추상적으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처음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외적 특권으로 아비의 뒤를 승계하여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27:1-45; 대하 21:3)과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을 가진다.
둘째는 내적 특권으로 장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함과 동시에,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된다.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이다.
야곱이 이런 장자권의 소유를 위한 형 에서와 흥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평소에 장막에 머물 때 장자권의 영적 축복을 부모로 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반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에 관해 무지하므로 가능했고, 과거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언행을 자주 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 왔었고, 사전에 이 문제를 놓고 농담조의 대화가 빈번하여 에서의 경계심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굶주림에 처한 형의 처지를 이용해 장자권을 흥정한 처사는 정당시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향후 그의 고달픈 인생의 여정이 잘 반증해 준다.
구약 당시 장자권의 상실은 본 절처럼 본인의 의사로 맹세를 통하여 직접 양도할 때, 서자가 장자일 경우 합법적인 아내가 그 후 아들을 낳아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때(창 21:10), 아비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창 48:22; 대상 26:10), 중죄에 대한 징벌로 박탈당할 때(창 49:3,4; 대상 5:1)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성경 기록과 유사한 풍습이 기록된 아카드어 토판인 누지서판(Nuzi Tablets)에는 형제가 상속받은 숲을 다른 형제에게 세 마리의 양을 받고 팔고 있는 상속권 거래에 관한 실례가 소개되어 있다.
그러므로 에서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후회하는 에서를 답습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면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6).
결국 그가 살았던 지역은 에돔이라 불렸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세일 산 에돔 들에 거주했다(창 32:3; 36:8∼9). 창세기 36장은 세일 산에서 살았던 에돔 족속의 족보를 상당히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창 36:9∼43). 이는 아마도 에서가 이삭의 아들이요 야곱의 형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관계는 에돔 족속이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에 조금 더 우호적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데스에서부터 에돔 땅을 건너가고자 할 때 에돔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민 20:14∼21). 그러나 에돔은 모압과 암몬이 그랬던 것처럼 연맹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하지는 않았다. 성경에는 에돔 사람이 이스라엘의 형제이기에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신 23: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
민수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하던 시대에 에돔은 이미 왕정을 이루고 있었다(민 20:14). 그러나 역사고고학적으로 볼 때 당시 에돔은 국가 개념의 왕정이 아닌 유목민의 부족장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시대보다 100년 정도 빠른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 256번에 기록된 우루-두-무(URUU-du-mu·두무 도시라는 뜻)가 에돔 도시국가를 말한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었던 우두무라 불리던 유적지라고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시대와 동시대에 기록된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주전 1213∼1203년에 재위한 메르넵타 왕 시대에 기록됨)는 ‘에돔으로부터 온 샤수 유목민’을 언급하고 있다. 샤수는 주전 15세기경부터 이집트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무리들을 일컫는 말로 ‘발로 걸어 움직이는 자’라는 뜻이다.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민 20:14)
대부분 학자들은 샤수를 사막 유목민으로 보고 있다. 샤수는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사해 남쪽 지역을 넘어 시나이 반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이들로, 당시 국가보다는 족속(부족)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왕보다는 족장의 개념이 더 어울린다. 때로 이들은 이집트의 북서쪽 지역을 넘어 약탈을 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아멘호테프 3세 같은 경우 그의 적들의 목록에 샤수를 넣기도 했고,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벽 부조에는 샤수와의 전투 현장 모습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했던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 외에 샤수를 에돔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에돔 땅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고고학적 흔적이 주전 9세기 이후인 것으로 보아 당시 에돔을 사막 유목민의 단계에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일 산의 원주민은 "호리 족속"이다. '호리'란 '구멍'을 의미한다. 이는 '호리족속'이 혈거인(穴居人)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세일산 주변의 석회암 동굴을 거처로 삼았던 것 같다. 세일의 원주민이었던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 의해 1차 정복당하였고(창 14:5,6), 훗날 에서의 자손에 의해 추방당하거나 남은 자들은 에돔 족속에게 예속되어 동화되고 말았다(신 2:12,22). 한편 에서의 아내가 된 ‘오홀리바마’ 역시 이 호리 족속이었다.
세일 산은 사해와 아카바 만(gulf) 사이의 아라바 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다.
에서는 일찍 부터 이삭을 떠나 세일에서 생활했었다(창 32:3; 33:16). 야곱과 완전히 분리하여 세일에 거주하고 됨으로써 언약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인 가나안 땅(창 12:7)에 대한 주권은 별다른 저항을 일으키지 않고 야곱의 후손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에서가 야곱과 갈리게 된 표면적 이유는 소유의 풍부로 인한 목초지의 부족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이삭을 통해 이미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창 27:39,40). 즉 이미 하나님은 영원 전 부터 야곱에게는 가나안 땅(창 28:13)을, 에서에게는 세일 산지를 기업으로 주시려고 작정 하셨었다(신 2:5; 수 24:4; 32:3).
한편 가나안의 시온산이 언약의 땅을 상징한다면(시 87:1-5), 세일 산은 에돔을 대표하는 산으로서 이방인의 요새를 의미한다(겔 35:2,15).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무함을 인하여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로 황무케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무하리니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5:15).
에서의 아내는 ‘아다’, ‘바스맛’, ‘오홀리바마’ 이렇게 셋이다. 에서는 3명의 아내와 5명의 아들 및 11명의 손자가 있다. 그 중 중요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데만 : 문자적인 뜻은 '오른 쪽에 있는 자'로서 이 이름은 훗날 에돔의 한 부족이자 북동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렘 49:20;겔 25:13).
* 아말렉(에서가 아다에게서 낳은 엘리바스의 첩 딤나가 낳았다) : 아내들을 제쳐두고 이례적으로 엘리바스의 첩 딤나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괴롭힌 ‘아말렉 족속(출 17:8;민 14:45)’이 바로 그녀의 소생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힘과 동시에, 그들이 에돔 족으로부터 이탈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된 동기가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에서의 후손 중에는 사울 왕 때에 도엑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사악한 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무엘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삼상 21:7)
'도엑'(Doeg)은 '불안'이란 뜻이다. 그리고 '에돔 사람'은 야곱의 쌍동이 형 에서의 후손들로서 팔레스틴 지방과 인접한 남부에 살고 있었다(창 36장). 바로 이같은 혈연적, 지역적 사정으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에돔 사람들 중에는 개종(改宗)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사울 왕의 목자장(牧者長)이란 요직을 맡을 정도가 된 '도엑'은 이미 개종하여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엑의 과거 국적을 굳이 밝힌 까닭은, 그로 인하여 머지않아서 결코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려고 의도한 때문인 듯하다(창 25:25, 30; 민 20:14-21; 삼하 8:13, 14; 왕상 11:14-22).
"사울의 목자장"- 당시 가축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는 점에서, '도엑'이 사울 왕의 목자장이라는 요직(要職)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울 왕으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과는 달리 70인역(LXX)은 이 말을 '사울의 노새를 관리하는 자'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근거는 희박하다. 또한 최근 들어서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여기 '목자'를 '로임'이 아닌 '라침' , 즉 '달리는 자'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여기의 '달리는 자'는 왕의 병거보다 앞서 나가는 왕의 시위대를 가리키는데(8:11), 따라서 도엑을 '달리는 자의 우두머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견해는 ‘도엑’이라는 인물이 왕의 시위대 가운데 끼어 있었으며(22:17, 18), 많은 사람들과 가축을 쳐 죽일 만한 무예 및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 된다고 한다.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도엑'(Doeg)은 다윗과 아히멜렉 간에 되어진 일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발함으로써 무고한 제사장 85인과 놉 땅의 거민과 가축을 몰살케 만들었다(삼상 22:9-22 / 아히멜렉은 놉 땅의 제사장으로 허기진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성막의 떡을 주었고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주었다). 이처럼 도엑은 간악하고 아부 근성이 농후한 인물로서, 후일 다윗은 그의 시편 52편을 통해 도엑의 잔인성을 질타하였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에돔 땅을 지나가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한다. 에돔에 속한 것은 풀 한포기도 건들지 않고 혹 피해를 입히면 배상하겠다고 모세가 간곡히 부탁하지만 그들은 거절한다(민 20.14-21).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에돔의 세일산( 페트라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페트라 외곽 와디 무사(모세의 계곡)의 샘은 모세가 바위를 치자 물이 터져 나온 곳(민수기 20:10-11)이라고 한다. 모세의 형이자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은 현재 아랍어로 ‘자발 하룬’이라 불리는 페트라의 ‘호르산(아론산)’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솔로몬은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아한다(왕상 11:1). 그로인해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 만연하게 된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무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겔 25:12-13).
사울은 왕이 되자 우선 그의 주변에 있던 이스라엘의 적을 정복해야만 했다. 이 중에는 에돔도 포함되었고, 성경에 의하면 에돔을 비롯한 모든 적은 사울에게 정복되었다. 사울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다윗시대에도 여전히 적군이었다. 다윗은 소금 골짜기 즉 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만8000명을 물리쳤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어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게 하였다(삼하 8:13∼14). 심지어 그는 요압을 시켜 6개월 동안 남아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이도록 하였다(왕상 11:15∼16). 덕분에 솔로몬은 평화롭게 얻은 에돔 땅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어(왕상 9:26) 오빌에서 금을 가져올 수 있었고,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비록 요압의 칼에서 살아남아 이집트에서 돌아온 하닷에 의해 에돔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잠시 벗어난 듯하나(왕상 11:14∼25), 여호사밧 때에 에돔에는 왕 대신 섭정 왕이 있었고,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고자했던 모습은 에돔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기 즉 주전 11세기 후반부터 에돔과의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에돔이 주전 8∼6세기께 존재했던 나라였고 이스라엘의 속국이기보다는 독립국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시행된 캘리포니아 대학과 요르단 유물청의 ‘키르벳 엔-나하스’에서의 발굴은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키르벳 엔-나하스는 사해 남쪽에 위치한 유적지로 공중에서 찍은 사진에도 확연히 보이는 것처럼 사각형 모양의 요새화된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대부분이 주전 10∼9세기께 유물로 측정되고 있으며, 주전 11세기경 이집트 인장들도 발견된 바 있다. 유적지 공중사진에서도 검은 흔적들이 목격되는데, 이는 구리를 녹일 때 생기는 물질들이 굳어서 발견되는 구리 용재(鎔滓)의 흔적들로 이곳이 구리 광산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이스라엘의 주전 10∼9세기 유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벳 엔-나하스는 솔로몬의 이스라엘 경계에 세운 요새들 선상에는 속해 있지 않은 즉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유적지가 아니다.
결국 유적지를 발굴한 토머스 레비(Thomas Levy) 교수는 이 유적지는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에돔을 정복하고 세운 구리 광산을 위한 요새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이곳을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 네게브지역에 있는 팀나 유적지를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사실 이 유적지는 이집트의 구리 광산으로 주전 1400∼1250년께 활발한 활동이 있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오히려 미미한 흔적이 있을 뿐이며 구리광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요새화되어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성경에는 솔로몬이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요새화했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역대상 22장 3절에 예루살렘의 다윗 성을 짓기 위해 철과 놋이 준비되었던 것을 보아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5만∼6만t의 구리 보유량을 가진 1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이 발견된 키르벳 엔-나하스가 아마도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에돔 땅은 나무가 없고 붉은 바위로 이뤄진 산악지역이며, 농업과 목축업에 부적합한 광야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성경시대 에돔 사람들의 경제는 사해에서 추출해 내는 소금과 바위에서 얻어낸 향신료 수출에 의존했다. 이렇듯 열악한 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에돔 땅에 욕심을 냈던 것은 언급했던 구리광산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로(king’s way) 때문이었다. 더불어 지중해변에 적당한 항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유다가 에돔 땅의 바닷가 ‘에시온게벨’과 ‘엘롯(대하 8:17; 왕상 9:26)’을 항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윗이 차지했던 에돔 땅 덕분에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을 통해 오빌의 금을 들여올 수 있었다. 솔로몬 시대 이후 부국강병의 시대를 누렸던 유다의 임금 여호사밧 역시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어 오빌로 보내고자 하였다(왕상 22:48-50)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 22:48, 49)
결국 에돔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모압과 전쟁을 치를 때 그들의 동맹이 될 수밖에 없었다(왕하3장). 그러나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때에 에돔은 유다를 배반했고 섭정 왕이 아닌 자신들의 왕을 세웠다(왕하 8:20) 물론 여호람의 반격도 있었지만 에돔은 더 이상 유다의 속국이 아니었다(왕하 8:22). 후에 유다 왕 ‘아마샤’는 다시 한번 에돔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에돔 사람 1만 명을 죽이고 에돔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4:7; 대하 25장).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이와 같이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왕하 8:20-22)
앞에서 언급한 전쟁 과정 속에서 유다 왕 ‘아마샤’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고 이 범죄는 그를 망하게 만들었다. 아마샤는 에돔에서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지고 돌아왔고, 자신의 신으로 세우고 백성들에게 경배하며 분향하도록 하였다(대하 25:14) 성경은 이 에돔의 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신의 이름을 ‘코스(Qaws / Qos)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에 관한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에돔 역시 성경 외의 다른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에돔의 신화나 종교적 자료 역시 밝히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단지 앗수르의 왕들이 에돔을 파괴하고 조공을 받는 기록에 의하면 디글랏 빌레셀(주전 745-727)과 산헤립(주전 705-681) 시대에 에돔 왕의 이름은 ’코스 신은 임금)’ 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주전 680-669년)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다.
또한 에돔의 요새가 있었던 호르밧 키트밋(Horvat Qitmit)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 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가나안 지역에서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들이 섬기는 주요 신의 이름을 넣어 짓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들에 들어가는 ‘코스’가 어떤 신이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에돔 땅에서 신약 시대 전후에 거주했던 나바테안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섬겼던 ‘두슈라(Dushura)’라 불리는 신이 산을 다스리는 신이었던 것으로 보아 ‘코스’도 유사한 역할의 신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코스 신과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는 없지만 에돔의 요새가 발견된 호르밧 키트밋 유적지에서는 뿔 단린 진흙으로 만든 여인의 두상이 발견되어 여신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이 여신상의 모습은 가나안 땅에서 발견된 어떤 신상과도 다름 모습을 하고 있다. 두상의 양쪽에 뿔이 달렸고 다시 이마 한 가운데 뿔이 하나 더 달려 있다. 두상의 정수리에 돋아 있는 기둥은 마치 전쟁용 투구를 연상케 해 전쟁의 여신의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유적지에서 보다 남쪽에 위치한 ‘엔 하체바’ 유적지에서는 작은 성소구역이 발견되었는데, 제단과 함께 모두 750여개의 점토 형상들과 향을 피우는 제대 그리고 제사용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토기의 형태를 볼 때 에돔의 것들이었으며 특별히 제대 중 세 개는 받침대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호르밧 키트밋의 북쪽에 위치한 호르바 우자에도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다의 요새가 발견되었다.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앗수르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오히려 영토는 확장되었고 유다를 위협할 만큼 강력해 졌다. 호르밧 우자에서는 주전 7-6세기경 기록된 37개의 히브리어 오스트라콘들과 판독하기 힘든 에돔어로 기록된 오스트라콘 하나가 발견됐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 중 하나는 호르밧 우자보다 북쪽에 있는 아랏 요새로 보내지는 문헌으로 에돔이 쳐들어 오고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에돔의 위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돔 사람들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주전 586년 예루살렘을 파괴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유다 사람들을 학살했다. 선지자들은 에돔이 이 전쟁에 가담하였기에 저주가 있으리라 예언했다(시 137:7; 사 34:9; 겔 25:12-1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에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폐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진노와 분노를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25:12-14)
저주는 실현되었다. 바벨론의 나보니두스는 주전 553년 에돔을 멸망시켰다. 그 이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자 에돔 땅은 아라비아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됐고, 그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유다의 영역 안으로 이동하였다.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년)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주전 539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에돔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지역(진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곳은 한때 유다의 땅이었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버려져 있던 곳이었다. 에돔 사람들은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고 마레사와 벧술 같은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주전 332년경 알렉산더의 헬라 세력 이후 네게브 북쪽 지역에 정착한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을 경멸했고 그들과 혼인도 하지 않았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남긴 대표적인 유적지는 ‘마레사’가 있다.
마레사는 ‘갈렙’에게 주어진 성이었으며(수 15:44) 르호보암의 요새이기도 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 이스라엘의 46개 도시를 파괴했다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목록에 등장하기도 한다.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하면서 도시는 산산이 부서졌고 오랫동안 버려진 도시였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마레사에 정착하고 이두메아의 주요 도시가 되면서 도시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마레사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은퇴한 그리스 군사들의 주요 거주지가 되면서 헬라문명과 이두메아, 시돈 그리고 나바테아 같은 가나안 문명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적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마레사의 고고학적 흔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이 살았던 동굴과 지하구조이다. 마레사의 많은 구조물들은 부드러운 바위를 깎아 만든 석회동굴들이다. 일반적인 가옥과 가축우리, 작업실(workplace) 그리고 비둘기 집(Columbarium Cave) 등 동굴을 뚫어 만든 이 구조물들은 때로는 지하에 길을 만들어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이 구조물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비둘기 집이다. 85개의 비둘기 집들이 발견된 바 있는데 지하 구조물 벽에 구멍을 뚫어 마련된 곳도 있으며 길이가 30m에 달하는 터널형 비둘기 집도 있다. 후자의 경우 벽에는 3000마리 이상의 비둘기들이 서식할 수 있는 1900개 벽감(niche)이 마련되어 있다. 이 비둘기 집에서 길러진 비둘기는 식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비둘기의 변은 연료로 사용되었다.
마레사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지하 구조물 중에는 올리브 압축실이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큰 방의 한쪽 면을 깎아 만든 올리브 압축기가 보인다. 방 안에는 올리브가 담긴 주머니를 압축하기 위한 거대한 돌추들이 널려 있다. 돌추들은 벽면 반원형 아래 길게 깎여 있는 틈 사이에 걸려 있던 긴 통나무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방 한쪽에 마치 삼손의 연자 맷돌을 연상케 하는 맷돌들이 있다. 이 맷돌에서 먼저 올리브를 으깬 후 으깨진 올리브들을 바구니에 담아 벽면에 있는 올리브 압축기로 기름을 짜내었을 것이다.
마레사에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주전 3∼1세기 사이 이두메아 지역에 거주했던 시돈 사람들과 이두메아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중 무덤 내부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덤이 가장 유명한데 이는 시돈의 아폴로파네스 가족 무덤이었다. 무덤의 양면에는 시체를 눕힐 수 있는 벽감이 마련되어 있고 가장 안에는 침대처럼 생긴 벤치가 깎여져 있어 아마도 이 무덤을 사용했던 가족들의 가장 우두머리 조상이 안치되었을 것이다. 무덤 내부는 거대한 항아리(그리스의 암포라 형태)와 다양한 신화적 동물들의 벽화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까마귀들과 지하수의 입구를 지킨다는 세르베루스,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붉은 불새 등이 그려져 있다. 또 다른 무덤에는 플루트를 부는 남자와 하프를 켜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전 63년 이스라엘을 정복한 로마의 폼페이는 마레사와 에돔 지역을 유대와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마레사는 주전 40년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마레사에는 더 이상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 주후 2세기경 로마 도시 에루테로포리스(Eleutheropolis)가 마레사 근처 언덕에 건설되었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두메아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Ptoelemaic Dynasty)’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주전 202∼195년 사이 있었던 시리아 전쟁에서 ‘셀루시드 왕조(Seleucid Dynasty)’ 에게 통치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셀루시드 왕조의 이두메아 통치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셀루시드의 통치를 저지한 사람은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존 히르카누스’와 유대인들이었다(마카베오 1서 5:3). 마카베오서는 외경의 하나로 구약과 신약의 유대 중간사 중 망치라는 뜻을 유대 독립군 마카비가 어떻게 셀루시드 왕조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유대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는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주전 167∼164, 마카베오 1서 4:36∼61).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약 백년간(주전 164∼63년) 과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고, 유대교를 팽창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었던 이들은 유대 국가에 종속되었고, 모두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이두메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유대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두메아 사람들 중 누구보다 유명한 사람은 ‘헤롯’이다. 헤롯은 이두메아 아버지인 ‘안티파테르’와 나바테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사실 유대인들은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헤롯의 형제들과 그의 아들들 또한 이스라엘을 통치했지만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 땅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로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는 이두메아를 유대 통치지역으로 함께 보았고,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 되어갔다.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2만 명의 이두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싸웠다. 그들의 전쟁은 참혹한 파괴의 현장만을 남겼고 이 전쟁과 함께 이두메아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만 그들이 거주했던 장소를 이두메아라 부를 뿐이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의 땅을 차지했던 이들로 신약시대 유대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바테아의 수도인 페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랍계통 사람들로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이 즉 유프라테스 강부터 홍해까지 지역에 거주했다. 주전 586년 바빌론이 유다를 파괴하자 황폐한 유다 땅에 에돔 사람들이 목초를 찾아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남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올라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히려 에돔 사람들을 서쪽 유다 땅으로 몰아내고 자신들이 에돔 땅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주전 312년께 셀루시드 장군 ‘히에로니무스’의 나바테아와의 전쟁 기록 이후 헬라 문헌들에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나바테아 사람들이 남긴 그들만의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단지 사해 주변을 비롯한 요르단 남쪽의 주요 거주지 내에 남겨져 있는 벽화들과 비문들이 있을 뿐이다. 비문에 따르면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람어에서 발전된 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 12세기부터 오랫동안 근동의 언어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는 주전 330년경 헬라 문명의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사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헬라어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나바테아 알파벳은 아람어에서 발전한 것이었고, 주후 4세기경 이 지역에서 사용된 아랍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동전과 비문은 주로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도 아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후대에 아랍 사람들은 아람 사람을 ‘나바테아 사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나바테아의 언어와 문화가 아람에 기초하고 있지만 에돔이 차지하고 있었던 항구 엘롯과 아카바만을 지나는 무역상들 때문에 이 지역은 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는 사해에서 나오는 역청을 판매했고, 항구를 통해 들여오는 향료들을 동쪽 지역과 거래했다. 또한 사막의 기후이기는 하지만 관개시설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고 이를 통한 수입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나바테아 사람들의 관개시설은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현재 나바테아 사람들의 거주지는 매우 건조하여 거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으로 이 조건은 과거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에 비는 우기에 겨우 1∼2번 크게 내릴 뿐 자주 내리지도 않고 물이 고이지도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물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독특한 기술을 개발해냈다. 우선 땅을 깔때기 모양으로 파 들어간 후 가운데에 과일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 나무 주변 지역의 흙을 무너뜨려 부드럽게 만들어 물이 잘 스며들게 했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빗물은 깔때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들어가 나무 아래 고이게 되고 이 물을 덮어 물이 고여 있도록 하였다. 고대부터 역사학자들은 이 시설을 ‘사막의 오아시스’라 불렀다. 이러한 발전된 기술을 가진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바테아 사람들은 바다에서는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한때 해적으로 불린 적도 있다.
유대 하스모니아 왕조가 셀루시드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바테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동맹 관계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아 왕조의 알렉산더 야네우스는 이두메아인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나바테아 사람들 역시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하스모니아 왕조와 나바테아 사이는 나빠졌고, 주전 90년 나바테아 왕 오보다스 I세는 알렉산더 야네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주전 62년 로마의 침략에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 당시 무적이었던 로마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버텼던 장소가 페트라이다.
주전 32년 유다 왕 헤롯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손을 잡고 나바테아 왕 말리쿠스 Ⅱ세를 공격했다. 헤롯의 군사와 병거는 몇 번의 접전 끝에 나바테아를 함락할 수 있었다. 주후 1세기 로마시대에 아라비아와 홍해를 잇는 무역으로 인해 나바테아는 국제 무역시장으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며 주후 4세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페트라는 주전 312년경부터 나바테아의 수도로 대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사해에서부터 시작돼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인 와디 아라바의 동쪽 호르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계곡 덕분에 주변이 온통 높게 탑처럼 솟은 바위산들로 둘려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는 자연적 요새를 갖춘 곳이다. 로마가 왜 이곳을 함락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는지 이해할 수 있다.
페트라 유적지에서는 이미 주전 16∼13세기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학자들 중에는 페트라가 에돔 땅 중 ‘셀라(왕하 14:7)’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셀라의 뜻은 단순히 ‘바위’일 뿐 같은 장소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페트라는 바위 계곡 틈새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바위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었던 도시다. 이 계곡의 이름은 ‘와디 무사’ 즉, 와디 모세라 불리는데 아랍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바위에 지팡이를 꽂아 물이 나오게 한 장소가 페트라이다. 또한 이곳은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있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페트라에서 발견되는 로마 극장 등 도시의 모습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장관을 이룬 것은 무덤 군이다. 페트라의 무덤은 바위산의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무덤 입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주전 6세기께 사용된 초기 무덤은 단순한 기둥들이 있는 형태로 아취 형태의 입구가 연결되어 집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이 무덤의 형태는 점차 화려한 양식을 더하게 되는데 이집트의 장식들과 그리스의 기둥들이 혼합되어 웅장한 입구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무덤은 주전 2세기께 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에는 로마 신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로 발전했다.
현재 페트라의 무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Ⅲ편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던 성배를 찾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옵 1:1~16, 신 23:7)
내게 가시 같은 존재조차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신명기 23:7)
‘오바댜’서는 구약에서 가장 적은 분량의 책이며, 신약에도 인용이 거의 없는 성경책 중 하나입니다.그럼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뚜렷이 계시되어 있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들이 어떻게 멸망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 잘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지자 오바댜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을 밝힐 때는 히브리인의 관례에 따라, “…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지만, 오바댜서에는 단순히 “오바댜의 묵시라”고 소개합니다.
선지자 오바댜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흔하게 보이는 이름입니다.(대상 3:21, 7:3, 8:38, 9:16, 44, 12:9,
27:19, 대하 17:7, 34:12, 스 8:9, 느 10:5 등)
오바댜 시대도 확실하게 특정할 수 없습니다.
오바댜 1장 10~14절에 보면, 에돔의 죄를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을
때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은 것이 이때 뿐은 아닙니다.
르호보암 때 애굽 시삭의 침략, 여호람 때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의 침입,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때 바벨론의 공격 등이
있었습니다.
오바댜서의 내용은 에돔에 대한 심판(1:1~14)과 이스라엘의 구원(1:15~21)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형제인 야곱의 후손, 유다의 환란 때 행한 에돔의 포학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에 에돔을 비롯한 만국은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받을 것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에돔’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혹은 유다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대상자로, 신약교회의 모체입니다.
오바댜서는 교회의 승리를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며, ‘시온산’은 교회, 혹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유다에게 에돔처럼 눈에 거슬리는 사람, 부담되는 존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 중에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부담스런 상대가 존재합니다.
대한민국에게 일본은
부담스러운 나라입니다.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왜곡합니다.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을 견제하며 우리의 미래를 방해합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는 야욕을 보입니다.
첨단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군사력은 이미 대한민국 국군을 능가합니다.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괴롭게 하는 우리 주변의 가시 같은 존재들을 어떻게 대할 지, 신명기 23장 7절 말씀을 제목으로 삼아 오바댜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오바댜서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봅니다.
오바댜서를 성경의 ‘예루살렘이 침략당한 것’을 기록한 내용 중 유다의 여호람
왕이 통치할 때 유다에 반역하고 배반한 에돔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침략함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보면, 오바댜서의 연대는 B.C. 849~842년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8장 20~24절에 보면,
여호람 왕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20절을 보면,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여호람 때 유다가 에돔과 전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유다 왕
여호람이 에돔에 패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람에 대해 기록한 역대하 21장 16~17절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유다를 배반한 에돔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침략하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약탈한 전리품을 에돔과 연합군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오바댜 1장
10~14절에서 에돔 사람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를 기록했는데, 에돔은 동맹군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사람과
재산을 늑탈했으며, 유다 민족의 고통을 위로는커녕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주전 605년, 597년,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당해 약탈당할 때, 에돔은 바벨론을 도와서 바벨론의
침략과 약탈에 동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 도망자들이 있었는데, 그 도망자들을 붙잡아 바벨론에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에돔 족속과 유다 족속의 관계를 보면, 에돔 족속이 유다 족속에게 행한 일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입니다.
비록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일이 있었지만, 에서와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이미 화해했습니다.
이렇게 에돔과 유다가 한 핏줄, 형제관계의 족속인데도 에돔은
형제를 버리고, 침략자와 한 패가 되어 형제간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다 민족 곁에 왜 가시와 같은 에돔 민족을
두셔서 선민이 이토록 어려움을 겪게 하십니까?”라며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으로 하여금 유다 족속을
괴롭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이 하나님만 섬기는 민족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유다 곁에 에돔을 두셨습니다.
에돔 족속은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선민답게 세우기
위해 준비하신 회초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했을 때마다, 바른 길로 돌이키도록 드셨던 채찍이 에돔이었습니다.
이런 가시와 같은 에돔을 곁에 둔 상황에서 유다 족속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 능력을 힘입어 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 내게 부담되는 사람, 보기만 해도 괴롭고 가시와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사람들을 내 주변에 있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살펴볼 때, 아직도 변화되어야 할 성품과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때로는 나를 변화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괴롭게 하는 가시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던 교만을 꺾게 합니다. 가시 때문에 잘못된 성격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시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 때로 내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도 받아들이는
것은 참 힘듭니다.
에돔처럼 내게 가시 같은 존재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허락하신 가시와 같은 존재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으로 감싸 안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사람이나 세상의 방법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방법대로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느끼며 누리는 것입니다.
유다 족속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었는데, 에돔 족속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면에서 에돔 족속은 유다 족속보다
유력했습니다.
에돔 족속은 해상 무역에서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구리 광석 등 풍부한 천연자원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에돔의 동쪽과 서쪽은 높고, 북쪽은 절벽으로 차단되어 있어서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했습니다.
또한 에돔
사람들은 뛰어난 지혜와 학문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빈틈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에돔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 6~9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에돔은 다른 이방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유다 족속을 공격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동맹들에
의해 에돔은 배신을 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멸망하였습니다.
멸망하지 않을 것 같은 에돔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회복되지 못할 유다 족속이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멸망당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도 멸망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회복되지 못할 것 같은 나라도 회복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됩니다.
에돔이 아무리 완벽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니까 망했습니다.
교만하던 에돔이 망했습니다.
가시 같은 에돔이
망했습니다.
가시 같은 존재들 때문에 마음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아니
인생을 살다보면 주위에 가시 같은 존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시 같은 존재일지라도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시
같은 존재를 두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변화되어야 할 기질과 교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시
같은 존재는 미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감사할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37장 28절에 보면, 가시 같은 존재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고 합니다.
괴롭히는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며 기도해 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간섭(干涉) : 방패 간, 건널 섭
-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영향(影響)을 주려고 하는 것. 참견(參見).
유기(遺棄) : 남길 유, 버릴 기
- 내버리고 돌보지 않음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라(로마서 1:28-32)
왜 사도 바울은 죄의 목록을 열거했는가?
사람은 원래부터 죄인이고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서 열거된 21개의 죄를 거의 다 지을 것이다.
결국 그 죄들은 사람에게 복음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소리 없이 웅변한다.
그 모든 죄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내어버려 두셨기 때문이다.
잘못된 길로 갈 때 실패하고 매를 맞고 병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잘못된 길로 가도 아무 일이 없다면 오히려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심으로 성공하고 형통한 것보다 하나님이 간섭하심으로 실패하고 시험 당하는 것이 오히려 복이다.
가끔 보면 너무 책임감이 없고 잘못을 계속 저질러서 친구까지 포기한 사람이 있다.
불행한 사람이다.
목사까지 포기한 사람을 블랙유머로 ‘목포댁’이라고 한다.
더 불행한 사람이다.
가끔 보면 부모마저 포기한 사람이 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포기하면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
만약 하나님까지 포기한다면 오직 절망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다.
본문에 열거된 21가지 죄는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생기는 죄들이다. 결국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어떤 죄를 안 지으려는 노력보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는 노력이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해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이 목표로 한 어떤 한 가지 죄는 안 지을 수 있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죄를 짓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죄 구멍을 막으면 다른 죄 구멍이 터지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죄를 한꺼번에 막는 길을 찾아 그 길로 가는 것이다. 어떤 길이 죄를 한꺼번에 막는 길인가?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길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포기가 없으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포기하고 목사가 포기하고 부모가 포기해도 하나님만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나 구원의 길은 있고 넘치는 희망도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가? 복음의 정표를 내미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주신 최상의 정표다. 그 복음의 정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은 죄 공장들로서 가만히 두면 망하고 죽는 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복음 안에는 언제나 사는 길이 있다.
간섭(간섭)과 유기(遺棄) 그리고 사랑과 미움(로마서 1:24-32)
- 남길 유, 버릴 기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 하셨는가 하면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곧 피조물을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은 곧 피조물과 창조주를 연결해 주고 있는 생명줄이기도 합니다.
이러면 피조물은 하나님 말씀과 떨어지면 죽음이 됩니다.
생명줄로부터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떠난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피조물 입장에선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고 “최악의 저주”는 하나님 말씀과 끊어진 것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과 끊어져 있다 함은 독자적(獨自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죄(罪)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 로부터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 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 외에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피조물인 만물은 “그 말씀” 이신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을 때만 산 자가 됩니다.
이렇게 말씀이신 예수님과 연결이 된 상태를 의(義)라고 합니다.
의(義)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義)를 순종”이라고 하고, “불의(不義) 곧 죄를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이라 함은 하나님 말씀에 매여 있다는 뜻이며, 불순종이라 함은 말씀과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아말렉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을 하자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한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서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라고 자증(自證)을 하고 만 것입니다.
왜? 불순종을 합니까?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이 죄”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에 토를 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피조물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불순종을 불러 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자기 생각으로 아말렉을 다 진멸치 않고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 하나님이 기뻐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은 가상하지만 이 가상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말렉을 마귀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을 하실 때 내가 광야 길에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추억하노니 라고 언급을 하셨던 것입니다.
저 놈들은 내 백성을 괴롭힌 저주 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인정사정을 보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육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놈들은 살려두고 잔챙이들만 죽였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떠난 저주 받은 자들의 안목입니다.
이걸 악(惡)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서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가인이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아벨에게 쏟아 부은 것입니다.
가인은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제사를 거부한 하나님의 처사를 용납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정성껏 제사를 지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의 정성을 보아서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한 것은 가인의 제사에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 신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정성에 문제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성으로 판단치 않고 “어떤 제물이냐”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지목한 제물이냐”를 보십니다.
이를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십니다.
이걸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우린 그 제물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보다 제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제사보다 앎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만 앞세우고 나가면 그 제물을 보시고 흠향하십니다.
제물을 드린 사람을 보고 흠향하는 것이 아니고 제물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한 대로 내가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이레의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받으시는 제물이 따로 있습니다.
“그 제물의 제사”를 원하십니다.
그 제물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속에서 양으로 나타납니다.
양은 장차 오신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를 두고 아벨은 믿음으로 더 좋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으로 제사를 지낸 아벨의 제사를 흠향하신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피가 있습니다.
그 피가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를 예표 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에는 피가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에는 인간의 정성만 있었지 의인의 희생으로 죄인이 구속을 받는 대속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이걸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고 화를 발한 것입니다.
가인의 생각은 자신의 제사를 거부하고 아벨의 제사를 받아준 하나님의 결정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생각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하나님이 제사를 받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굴복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가인이나 사울은 자기 생각 때문에 하나님 생각을 거부하는 불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울이나 가인의 모습을 일컬어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불순종을 한 것이지 불순종을 하였기 때문에 악(惡)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세요.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불순종의 영”이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것도 사단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두고 자기 길로 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는 항상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죄는 항상 자신을 낳아 준 부모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의 부모는 하나님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부모란?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입니다.
부모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같은 동일한 중수의 죄로 물어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론적으로도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다 죄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이 부모에요.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하니까 가장 존경하고 감사하고 두려워하여야 할 분이 부모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 모든 자식들은 부모를 가장 우습게 여겨요.
만만하게 보고 말을 안 들어요.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가장 어리석음이 생명을 주신 분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뱀(살모사) 새끼들이라서 죄가 그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죄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안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곧 하나님 앞에서 아이들처럼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곧 참 부모이신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 자식과 같아요.
죄인은 자기를 낳아준 하나님을 죽인 패륜아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것으로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꼭 너희 자식들처럼 내 말을 안 듣는 자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단절이 된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단절(斷絶)이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님으로부터 단절이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보게 되면 피조물은 늘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그대로 되었다는 것은 곧 피조물이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순종의 끝엔 생명이 있고, 불순종의 끝엔 죽음이 있습니다.
생명(生命)이란? 어원적으로 보면 “살으라는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살어! 그러면 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생명의 능력(能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의 기운(氣運)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말씀이 의도하는 대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나무에게 꽃을 피워! 그러면 나무는 꽃을 피워내고!
바람아 불어! 그러면 바람이 불어요.
신앙적으로 말하면 너 예수 믿어! 그러면 예수가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걸 그대로 보여주셨어요.
제자들이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에 물이 들어와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잠에서 깬 예수님이 바람을 보고 꾸짖습니다.
바람아! 이제 그만 잠잠해라!
그러자 순식간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 집니다.
바람이 예수님 말씀에 잔잔해 진다는 것은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고 즉시로 잠잠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는다는 것은 바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고 즉시로 조용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이나 병도 말씀으로 고칩니다.
귀신도 예수님 말씀에 즉시로 나가고!
병도 예수님 말씀에 즉시로 고쳐집니다.
이는 귀신이나 병도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귀신이나 병도 만물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만물 안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그대로 순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주 만물이 수천 년 동안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해가 바뀌고 계절이 돌고 돌아도 어김없이 그 자리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또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어김없이 철을 따라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피고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달래” 보고 너~ “봄”에 꽃을 피워! 그러니 “진달래”는 봄이 되면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국화”에게 너~ “가을”에 꽃을 피워! 그러니 “국화”는 어김없이 가을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백”을 보고 야! 너는 “겨울”에 꽃을 피워! 그러니 “동백”은 그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새에게 살라고 하니 참새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 너 살어! 그러니 제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생명이고 창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말씀대로 되시니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무엇이 보시기에 봏은 것이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뭐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깨어졌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었어요.
죄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게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피조물이 하나님과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러자 생명의 공급이 끊겨버렸습니다.
그럼 피조물은 자기 안에 있는 수한(壽限)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수한(壽限)이 다 하였다는 것은 정한 기간 동안만 살다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10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7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3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1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 수한(壽限)이 다하면 죽습니다.
마치 핸드폰 밧데리가 정한 시간이 되면 방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밧데리는 충전을 하여야 살아 있어요.
밧데리에게는 충전기가 곧 생명의 끈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삽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 자기 수한(壽限)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산 영(靈)”이라고 합니다.
산 영(靈)은 밧데리처럼 자기 수한(壽限) 만큼만 살아요.
계속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충전(充電) 받지 않으면 죽어요.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靈)”으로 오셨습니다.
살려주는 영(靈)이란? 글자 그대로 살려주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주세요.
마치 방전된 밧데리에 전기를 공급하여서 충전으로 살려내듯이 예수님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살려내고 생명을 계속하여 공급을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생명의 말씀에서 떨어진 것을 다시 생명의 말씀에 붙잡아 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순종이란? 완전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붙좇게 되는 경향성(傾向性)을 말합니다.
이는 성령이 그 안에서 “순종하는 영(靈)”으로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주셨다는 것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니들 맘대로 살으라”는 말입니다.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살아가는 피조물이 생명줄에서 끊어져서 홀로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저주(詛呪)가 뭐냐?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유기(遺棄)시켜 버린 것입니다.
왜?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당함이 그렇게 큰 저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니까”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왜?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무당을 찾고 귀신을 섬기느냐 하면 하나님이 방치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죽을 짓을 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니까” 이성(理性)을 사랑하여 생명을 낳는 사랑을 하지 않고 생명도 낳지 못하는 동성(同姓)을 사랑하는 역리(逆理) 현상이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이건 단순하게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떠나 생명과 상관없는 일을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으면 생명을 낳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하나님과 떨어지면 생명을 낳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되어요.
하나님은 이성을 통하여서 생명을 낳게 하셨습니다.
동성(同性)이란? 같은 종이란 말입니다.
이성(理性)이란? 다른 종이란 말입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났습니다.
흙이 흙을 사랑하는 것은 동성(同性)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흙에게 있어 이성(理性)이란? 하늘입니다.
하늘에 것을 사랑하여야 생명이 잉태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후 흙에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이 세상에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마귀가 준 것입니다.
세상엔 생명이 없습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면 생명이 잉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할 자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어요.
흙이 흙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게 영적 동성애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낳지 못하는 동성애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죄는 생명을 낳지 못하는 사랑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을 흙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시니까” 이웃을 헤치는 살인과 미움과 강포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죄는 항상 생명을 죽이고 파멸케 하는 것으로 역사를 합니다.
이는 죄가 생명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반(反)하는 모습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한 각각의 말씀 속에서 특히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께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버려두셨다”는 말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즉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죄는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니 죄인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죽음이 넘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셨다 함은 죽게 내 버려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냥 그렇게 흙에서 나서 흙을 퍼 먹고 살다가 죽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냥 죄 아래서 태어나서 죄의 종노릇하다가 그 죄값으로 죽습니다.
이걸 신약의 유다에서는 흑암으로 돌아가는 유리하는 별이라고 했어요.
죄인은 끈 떨어진 연처럼 죄 아래서 출생하여서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자기 맘대로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은 죄에 대한 보응으로 그럼 “니 맘대로 살라”고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포기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니들 맘대로 살으라는 말은 죄인 입장에선 야~ 이제부터 자유다! 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건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간섭을 당하는 자와 간섭을 당하지 않는 자의 결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니 내용이 동화와 다르더라도 의미만 참고하세요.헤클베리 핀은 자유 합니다.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 합니다.
반면에 톰 소여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사건건 간섭을 받습니다.
톰 소여는 간섭하는 사람이 있고 헤클베리 핀은 간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섭 당하는 톰 소여의 눈에는 헤클베리 핀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나도 내 맘대로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경도 잠시입니다.
장성하고 난 후 두 사람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달라집니다.
허클베리 핀은 망나니로 살고 톰 소여는 예의범절을 갖춘 자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신자와 불신자의 이야기로 적용해 봅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사건건 간섭 당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신자는 간섭 당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상이라는 삶에서는 불신자들이 훨씬 편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지옥입니다.
신자는 지독하게 간섭 당합니다.
간섭 당할 때마다 아픕니다.
그러나 그 끝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은 자일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지독하게 간섭을 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얼마나 간섭을 당하였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욕을 먹고, 얻어맞고, 헐 벗고, 굶주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간섭 당할수록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곤핍해지고 아픕니다.
반면에 간섭 당하지 않으면 편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간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허클베리 핀처럼 자기 맘대로 살아가겠지요.
죄인이 자기 맘대로 하면 어찌 될까요?그야 당연히 죄 짓다가 죽겠지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죄인은 죽을 짓만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이니 죽을 짓만 하다가 영원한 죽음인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 버려주셨다는 것은 저주가 됩니다.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복(福)이란?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죄인을 하나님이 마음을 간섭하지 않으면 죄인들 맘대로 살게 됩니다.
죄인 맘대로 살면 죽을 짓만 골라서 하게 됩니다.
저주란? 내가 내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본능(本能)이 이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죄인이 본능대로 살면 파멸이에요.
죄인이 자기 맘대로 살아가면 어떤 식으로서 살게 될까요?
나만 살고 남을 다 죽이게 되어요.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고 남도 있어요.
내가 있고 부모형제도 있어요.
자식도 나 보다 앞설 순 없어요.
아내나 남편도 나 보다 앞 설 순 없어요.
그 누구라도 날 힘들게 하면 싫어요.
내가 신(神)이에요.
내가 곧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나는 나 이외 다른 신(神)이 없어요.
하나님도 나 보단 우선하지 못해요.
내가 있고 하나님도 있어요.
이게 죄인이에요.
죄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얼마든지 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살아가는 세상에선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살인으로 나타나고, 도적질로 나타나고, 사기로 나타나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으로 이를 말해주셨어요.
십계명(十誡命)은 죄의 근원을 말해주고 있어요.
죄의 모습이 십계명에서 이웃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나,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사기나, 간음이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기 유익을 위하여 남을 헤치는 것들입니다.
십계명(十誡命)은 인간의 어그러진 면(面)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가 십계명(十誡命)이 말하는 악함 들을 생산해 내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근본(根本)은 자기 유익을 챙기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진 죄인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요.
그럼 모든 피조물이 전부 자기 유익으로 산다고 하면 어찌 될까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형국이 되겠지요.
인간들 세계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살아가고 있어요.
내게 유익이 된다고 하면 남이야 죽든 말든 개의치 않습니다.
서로가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을 헤친다고 하면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됩니다.
이게 죄인들의 삶에 모습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유기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된 것이 어째서 그렇게 큰 저주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제부터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遺棄) 당함이 왜? 무서운지 중요한 말을 하니 깊이 생각을 하시면서 들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묵시 속에 있는 천국의 모형(模型)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낙원이라고 합니다.
낙원(樂園)이란? 즐겁고 기쁜 동산이란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평화” 라고 합니다.
평화(平和)란? 구분이 없고 하나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차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차별이나 차등이 없으니 만족함이 되는 것입니다.
만족할 때 마음에 쉼을 얻고 안식이 되어요.
그러므로 천국을 일컬어 안식(安息)하는 세계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언제 안식을 합니까?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지요.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내시고 쉬신 날입니다.
더 이상 일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창조 사건으로 보면 창조를 마치고 일곱째 날 안식하는 날입니다.
안식이란? 더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할 일이 남아 있으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안식이 되려면 미완료(未完了)가 되면 안 되어요.
완료(完了) 상태가 되어야 다 이루심의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완료(完了)란? 변화나 자람이 필요치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온전한 자로서의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더 장성 할 것이 없는 자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온전한 자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고 영생으로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미완료에요.
영생이라는 더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로 창조가 된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어른으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자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정도로서의 어른이라는 입장에서 온전하다고 하는 말이니 참고하세요.
아담은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천국에서의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장성한 자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장성하였다 함은 더 이상의 자람이 필요치 않는 생명의 완전(完全)함 또는 완성(完成)된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담은 구원받은 천국백성의 모형인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곳입니다.
“완전(完全)의 세계이고!”
“완성(完成)의 세계이고”
“완료(完了)의 세계!” 입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이니 천국은 완전하고 완성되고 완료되어서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아담과 하와처럼 더 자람이 필요가 없는 온전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자람이나 변화됨이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아이를 낳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계대결혼 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잖아요.
어떤 집에 형이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율법에 의하면 동생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하는데 그 동생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어버렸어요.
이러한 식으로 일곱 형제가 계대혼인 법에 의하여 형수와 관계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럼 천국에 가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아주 난감한 질문을 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 세상 관점에서의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천국에서의 모습으로 대답을 합니다.
천국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누구의 아내라는 것이 없지요.
오로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존재하는 겁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으니 아이를 낳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곳이 아니에요.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자람이 필요치 않다는 뜻입니다.
자람이란? 미완료(未完了)입니다.
미완료(未完了)가 되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미완료가 되면 완료를 위하여 나아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어요.
그럼 안식이 되지 않잖아요.
만약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면 자라가야 하는 미완료의 상태가 되어요.
그럼 에덴동산은 안식의 세계가 될 수가 없어요.
에덴동산에서 미완료로서의 상태가 되면 안 되잖아요.
갓난아이는 성장을 전제로 하는 미완료 상태에요.
키워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 키울 때까지 안식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완전(完全)”하고, “완성(完成)”이 된 “완료(完了)”의 세계인 것입니다.
“완(完)” 자가 들어가는 것은 더 이상 변화나 자람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모두가 어린 양의 신부로서 충만한 자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천국에서의 삶은 창조 사건으로 보면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미숙아(未熟兒)로 낳지 않고 아담을 창조하듯이 장성한 아이로 낳으면 자람이 필요치 않겠지요.아이의 출생을 성도의 구원으로 이해하여 봅시다.
예를 들어서 성도가 거듭나자 말자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하는 즉시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역사 속에 둘 필요가 없어요.
더 가르치고 배울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역사라는 고난 속에 던져둡니까?
얼른 데리고 가야지요.
하지만 역사 속에 남겨 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자라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자람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온 세계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어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영광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알아가기를 기도했어요.
그러니 성도는 이 역사라는 곳에서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미하여야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천국에서 세세토록 찬미 할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생애를 마치고 공생애를 시작하잖아요.
사생애란? 나를 위하여 살던 때를 말하고!
공생애란?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30세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것은 역사 속에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이 장성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제 장성한 자로서 아버지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되었단 말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것은 장성하였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에선 30세가 되면 장성한 자로 간주해요.
그래서 회막에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어요.
30세란? 완전한 자를 상징해요.
요셉이 30세 때 총리가 되어서 나라의 일을 맡아서 하게 됩니다.
또한 다윗도 30세에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예수님도 30세가 되어서 제사장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 창조 된 아담처럼 자람이 필요치 않는 장성한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 아이를 낳아도 30살짜리를 낳아야 합니다.
미숙아(未熟兒)를 낳으면 안 되어요.
30살짜리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키우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낳아 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살아 갈 테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낳아지는 모든 생명은 장성한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없어요.
전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부모님이 보살핌이 필요한 자로 태어납니다.
미숙아(未熟兒)는 부모의 보살핌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미숙아(未熟兒)란? “아닐 미(未)”에, “익을 숙(熟)”에, “아이 아(兒)” 자를 써요.
어원적으로 말하면 “아직 익지 않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덜 익은 인간”이란 말입니다.
“사람이지만 아직 온전하게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는 자”란 뜻입니다.
온전한 자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질수 있는 자란 말입니다.
미숙아(未熟兒)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 질수가 없어요.
과실로 말하면 땡감처럼 텁텁하단 말입니다.
홍시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하려면 변화와 자람이 있어야 합니다.
미숙아(未熟兒)는 아직 홍시처럼 익어야 함이 남아 있는 미완료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 세상은 완전(完全)하고 완성(完成)되고 완료(完了)된 세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모의 보호함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낳아지는 모든 생명은 미완료(未完了)로서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완료(完了)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존재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생명줄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은 저주인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이를 낳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어째서 에덴동산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이를 낳았을까요?
이는 에덴동산 바깥은 역사로서 미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절대로 필요한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미완료인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였다는 것은 곧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죄인을 버려두셨다고 하는 말씀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겠지요.
간섭하지 않고 버려두셨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간섭하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 알겠습니까?
성경은 “완료의 세계를 묵시”라고 하고, “미완료의 세계를 역사”라고 해요.
에덴동산은 묵시(黙示)이고, 에덴동산 밖은 역사(歷史)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완료(完了)”의 세계이고, “에덴동산 밖은 미완료(未完了)”인 세계인 것입니다.
미완료(未完了)란? 아직 다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완료를 향하여서 뭔가 변화하고 장성하여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부모의 간섭이 필요해요.
마치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과 같이 아직 장성하도록 이르러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에서는 계속하여 장성한 것으로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안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자람이 있으면 안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람이란? 미완료(未完了)이고! 미완성(未完成)이고! 미완전(未完全)입니다.
안식(安息)이 되려면 “미(未)” 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未)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뭔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안식을 하려면 미(未) 라는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부족함이 있으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야 안식이 됩니다.
천국(天國)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의 상태로서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어진 상태가 천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덴동산에서는 자람이 필요치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는 자람이 필요한 아이의 출생이 없는 것입니다.
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혼인(婚姻)을 하였어도 아이를 낳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천국에 모습을 보아도 어린양과 혼인하는 것은 있어도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하는 것은 역사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는 묵시의 반대입니다.
묵시가 완료(完了)라고 한다면, 역사는 미완료(未完了)입니다.
묵시가 쉼이라고 하면, 역사는 수고로움입니다.
“묵시는 부족함이 없는 완(完)이고!”
“역사는 아직 이르러야 하고 모자라는 미(未)”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묵시와 다른 세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묵시는 일곱째 날로서 안식일이지만 역사는 수고하는 여섯째 날에 속하여 있습니다.
성경에 일곱째 날 이후에 다른 날이 없는 것은 모든 것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순환하는 주기(週期)를 일주일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게 하신 것도 모두가 창조의 사건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하루에서 엿새까지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해 놓은 것은 묵시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을 잠깐 살펴보고 갑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지요.
이는 엿새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은 묵시에 속한 날을 상징해요.
그래서 엿새 동안은 수고하는 날로 살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날로 삼은 것입니다.
이건 안식일을 통해서 장차 역사를 떠나 묵시인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가르치기 위함이에요.
엿새는 일곱째 날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을 겨냥하고 있어요.
모든 수고가 일곱째 날 안에서 완료가 되어요.
이게 창조 사건이 주는 교훈이에요.
우리가 일곱째 날인 주일날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과 다른 천국에서의 안식을 하는 모습으로서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가르치려고 엿새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안식을 한다고 하니 각자의 집에서 쉬게 한 것이 아니고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 간에 교제케 하였어요.
안식일에는 축제를 벌였어요.
이건 천국에서의 기쁘고 즐거운 삶에 모습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장차 가야 할 천국이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일곱째 날 안식일에 성회(聖會)로 모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에선 안식일 날 일을 해서도 안 되지만, 성회에 참석치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아도 돌로 쳐 죽였어요.
그건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에는 모두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함께 떡을 떼고 나누면서 축제를 벌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이 의미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일은 일곱째 날을 상징하는 묵시에 속한 날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라는 말은 이러한 일곱째 날의 의미 안에서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모인다면 그냥 엿새에 속한 날에 모임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요.
그건 주일로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일요일로 쉬는 것이에요.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듯이 주일을 기다려야 해요.
교회가 그리워져야 해요.
그래서 주일을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식으로서의 날이 아니고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의 날”이란 말이에요.
“주의 날”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로서 묵시에 속한 날이에요.
주의 날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과 달라요.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 월요일도 주의 날이고, 화요일도 주의 날이고, 수요일도 주의 날이고, 목요일도 주의 날이고, 금요일도 주의 날이고, 토요일도 주의 날이고, 일요일도 주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 받은 성도는 묵시에 속한 자로서 항상 주의 날로 사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역사와 묵시를 구분하는 의미에서 열심히 모이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일요일이라 생각지 말고 천국백성으로서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모이세요.
그럼 교회에서 성도들과의 모임이 곧 천국에서의 모임과 같은 의미가 되잖아요.
그러니 주일날 놀러 가지 말고 교회에 모이세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으로 주셨으니까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천국에 모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열심히 교회에 모여야지요.
성경에서 열심히 모이라고 하였지 교회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했지!
교회 안가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교회에 가면 곡식도 있고 가리지도 있어요.
흔히 복음 아는 성도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내가 구분하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로 섬기면 되어요.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따지지 말고 주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섬기세요.
어떤 분들은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라고 해요.
그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인간의 게으름을 복음으로 합리화시켜 주려고 공교하게 지은 말이에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자기 몸 편함으로 이용하는 것이에요.
이건 악한 것이에요.
설교를 듣는 것은 예배의 전부가 아니에요.
위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아래로는 형제간에 사귐이에요.
그래서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교회(敎會)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란? 모임을 말합니다.
예배란?
말씀을 듣는 것도 있지만 성도의 교제가 있어요.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이면 성전에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제사도 드리고 만남을 통하여서 교제하고 축제를 벌이라고 하셨어요.
이건 새 언약 안에서도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이 되어 있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날마다 교회로 모인 것도 다 이러한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완성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모이는 것보다 더 잘 모여야 하는 것이어야 해요.
옛 언약에선 이레 중에 하루가 안식일이었지만 새 언약에선 날마다 안식일이에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에요.
그러니 천국에 모형인 교회에 날마다 모여서 말씀도 듣고 교제도 하였던 것입니다.
옛 언약 안에서는 억지로 모였지만 새 언약 안에선 자발적으로 모여요.
구약은 법적으로 모였지만 신약엔 은혜로 모이는 것이에요.
그러니 모인다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름이 없어요.
장차 예수 안에서 모두가 모일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차압을 합니다.
그러니 주변에 교회가 버젓이 있는데도 이런 저런 핑계로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악한 것이에요.
여러분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그 속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 따지지 말고 복음을 받은 우리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란? 말 자체가 모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에요.
왜? 모임을 전제로 하는 교회라고 하는가 하면 교회는 이 땅에 천국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는 반드시 교회라는 모임을 갖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성도와 성도를 연결하여서 교회로 모이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경은 열심히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온 몸과 맘으로 믿는 거에요.
복음을 머릿속으로 알고 마음으로 믿어지면 이제는 손과 발로 움직여서 복음으로 사세요.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하지요.
마음으로 믿는 것은 “내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외적인 믿음”이에요. 이 둘은 하나에요.
마음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행함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고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부인한다고 하잖아요.
제자들이 누구 앞에서 예수를 시인합니까?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 시인했어요.
이건 내가 믿는 예수를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 있어요.
빛을 말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드러내 밝히란 말입니다.
나 예수 믿는다!
교회 가서 복음 모르는 분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나는 이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교회에 더 열심히 가야지요.
성경을 보세요.
성령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그러면서 집에서 놀았는가요.
아니잖아요.
날마다 모여서 주를 찬미하고 했잖아요.
직장 때문에 날마다 못 모이면 모두가 모이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반가운 얼굴들을 대하고 교제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그 영광을 찬미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날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였어요.
성령이 임하자 역사에 속한 자들이 묵시로 편입이 되었어요.
땅에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이 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역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 묵시에 속한 사람이에요.
묵시에 속하였으니 이 세상에 비록 살아도 묵시적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표시로 일곱째 날에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묵시에 속한 곳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만대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주의 날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묵시의 날이에요.
교회도 묵시의 세계에요.
성도도 묵시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묵시에 속한 자들이 묵시의 날에 묵시적인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묵시는 완료된 세계이므로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날마다가 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그럼 이 시대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이는 사회의 구조가 일요일에는 쉬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선 매일 모여서 천국 생활을 맛보면 좋겠지만 먹고 살아야하니까 그럴 순 없잖아요.
직장도 다니고, 학교도 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먹고 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사회가 정한 6일 동안은 열심히 직장 생활 하다가 일요일은 출 애굽한 것과 같은 맘으로 역사에서 묵시로 탈출한 것과 같이 주의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을 간과하지 마세요.
귀하게 여기셔야 해요.
교회가 타락했다 아니다 말하지 말고!
내 자신이 교회의 가치를 주님의 몸이라 생각하고 모이면 비록 그 교회가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나는 타락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서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 모이는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정하다고 여기면 부정한 것이 되고 내가 정하다고 하면 정한 것이 되어요.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보자기를 내려 주잖아요.
그 속에 각양 더러운 곤충들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이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율법에 금하는 것들이므로 싫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네가 왜? 부정하여서 못 먹겠다고 하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보자기 속에 담겨진 곤충은 이방인인 고넬료를 상징해요.
고넬료는 이방인이에요.
그러니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은 더러운 짐승과 같아요.
이런 짐승과 같은 사람이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어요.
고넬료는 구제도 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고넬료는 아직 예수를 몰라요.
기껏 안다고 하여도 옛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만 있는 것입니다.
그 섬김으론 구원 못 받아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의(義)가 있어야 해요.
고넬료는 율법 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는 것은 있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가서 네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율법에 의(義)는 다 헛 것이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알려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서 예수라는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자 성령이 임하고 고넬료가 세례를 받잖아요.
아! 내가 지금까지 쌓은 의(義)는 의(義)가 아니었군요!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 안에 있군요!
고넬료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택한 백성이니까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서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요.
옛 언약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도 그들 중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잖아요.
베드로도 그들 중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어요.
하나님은 빼내시곤 다시 그 곳으로 보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베드로처럼 가야지요.
가서 그게 아니고 예수라고 복음을 전해야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그 의(義)를 전해야지요.
그런데 어떻게 저 교회는 복음 없으니 나 안 가!
그럽니까?
어디서 듣고 배운 복음입니까?
어떻게 목사라는 인간이 교회 가지 말라고 합니까?
이건 복음을 빙자한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아주 사악한 자에요.
그건 복음도 아니고 공교하게 만든 인본주의 사상으로 전하는 말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자기 챙기기를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을 긍정해주고 달래주는 죽은 뱀의 말이에요.
이런 사람을 따르는 자들도 유유상종이라서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켜서 달콤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 말이 복음인줄 알고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고 뱀의 말이에요.
그러니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복음 복음 하면서도 그 복음으로 말장난하면서 자기 이익의 재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삶을 합리화하여 결국 자기 육신의 쾌락을 쫓아간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뱀의 독(毒)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고 해요.
복음 속엔 내 가치 챙기기가 없어요.
복음 안에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채워주는 것이 없어요.
육신이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복음은 항상 우리 육신의 소욕이 죄라고 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니 복음 알았으니 이제부터 네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고!
성령이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네 맘대로 살지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살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이러한 간섭하심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오늘 본문 식으로 하나님이 버려두신 겁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이 네 맘대로 살지 말라고 하여도 우린 내 맘대로 살고자 합니다.
죄가 나를 내 몸 편한대로 끌고 가니까요.
그러니 성도는 상한 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한계를 알 때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오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우리 육신을 고발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억지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에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으로서의 자기 부인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반드시 인도하세요.
이런 삶이 안 나타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신 사생아에요.
그가 믿는 예수는 관념이고!
그가 아는 복음은 지식이고!
그에 신앙은 추상이고!
그에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
교회에 가라는 말은 강요가 아니고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말하는 것은 다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안 간다고 하는 그 사상이 뱀의 사상으로서 악하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이건 제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저는 다만 예수님의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신앙은 누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그 예수님이 반드시 예수님이 사셨던 그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예수님의 증거자로 사용하세요.
복음 주고서 빈둥거리고 놀게 하지 않아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지옥 생활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복음은 내 생각을 긍정해 주고 우리 육신의 편안한 삶을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천사가 깨우지요.
왜? 깨웁니까?
아직도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그 성(城)이 어디인가요?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은 예수를 죽인 원수들이 있는 곳이에요.
지금 베드로가 거기서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또 가래요.
가서 또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으래요!
이게 성령을 받은 성도의 운명이에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운명 안에 있어요.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 복음 들고 오셨어요.
빛이 어둠에 오셨다구요.
오셔서 죽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주시곤 어둠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교회로 보내는 거에요.
죽은 곳에 생명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게 두 증인들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주세요.
그리곤 그 복음으로 율법이 전해지는 곳으로 보냅니다.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고 율법 교회로 가라고 궁둥이를 확 차버립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자들은 거기서 죽어요.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뿌려진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교회에요.
복음을 받은 성도가 묻힐 무덤이 바로 교회에요.
제발 하나님의 일하심을 좀 아세요.
다시 완료와 미완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에덴동산은 완료이고 에덴동산 바깥은 미완료에요.
에덴동산 바깥을 역사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역사에 와서 아이를 낳지요.
미완료에서 아이를 생산하지요.
그러니 역사에서 낳아지는 아이는 전부가 다 미숙아(未熟兒)인 겁니다.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역사에 속한 모든 생명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미숙아(未熟兒)란? 자람을 전제로 하고 있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장성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아요.다 보살핌으로 자라서 장성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천국과 달라요.
요한계시록에서의 천국을 보면 생명수 강가에 달마다 과실이 맺힌다고 하지요.
달마다 실과가 맺힌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다 자란 완성이란 말이에요.
왜냐하면! 천국은 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역사와 다르다는 의미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유기시킨 것이 그렇게 큰 저주인지를 조금만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자람을 전제로 하는 미숙아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아야 합니다.
갓난아이는 미숙아(未熟兒)입니다.
미숙아(未熟兒)란? 아직 덜 익은 아이라고 했습니다.
덜 자라서 영글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글다” 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르지 못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讚美)케 하고자 함입니다.
이건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
“우리” 라는 어떤 무리들을 선택 하셨습니다.
어떤 집단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그 집단을 누구 안에서 선택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은 그 “우리” 라는 무리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 “우리” 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이 “우리” 속에 속한 “나” 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이 세상에서 흠 있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여기서 흠이란? 죄와 사망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죽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흠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서 살려 준다는 뜻입니다.
왜? 죽은 자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려 냅니까?
그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날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걸 찬미(讚美)라고 합니다.
찬미(讚美)란? 아름다움을 기리는 것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에 가면 난 죽은 자였는데!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라고 찬미해요.
이 찬미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어집니다.
내가 어떤 자이었는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친미하게 되어집니다.
이 땅에서 이 은혜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기도하지요.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더 길게 알아가기를 기도하잖아요.
예수님도 그랬어요.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아는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이건 양적(量的)인 것이 아니라 질적(質的)인 이야기에요.
이 깨달음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자람이에요.
우린 모두가 초등학문 아래서 태어났어요.
초등학문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우린 법 아래서 태어났고! 법 아래서 자랐고! 법 아래서 살았어요. 그래서 우린 법이 편해요.
법이란? 타율이에요. 강제에요.
지키면 상(賞)을 받고 안 지키면 벌(罰)을 받아요.
그래서 우린 하나님도 상(賞)은 받고 벌(罰)을 안 받고자 섬겼어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섬기지 않았어요.
이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가 내가 누구인지 감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원래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가 이 사실을 감추어 버렸어요.
죄가 내가 찬양 받도록 살게 하였어요.
그러므로 우린 무슨 일을 하여도 내 가치 챙기기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날 알아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처럼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영광 챙기기입니다.
그러니 법을 지켜도 자기 영광을 챙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자기 영광을 챙겨요.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고 깨달아야 하는데 우린 그걸 모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부모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모르는 것과 같아요.
자식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우린 우리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쥐뿔도 없는 것이 뭘 쬐끔하고 나면 그걸 힘을 삼고 꼴값을 떠는 것입니다.
이 꼴값을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일엔 미숙아(未熟兒)에요.
아직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인 것입니다.
우린 영적으로 미숙아(未熟兒)에요.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야할 자들입니다.
미숙아(未熟兒)란? 완전(完全)과 완성(完成)과 완료(完了)로 나아가야 하는 자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 자람이 필요로 한단 말입니다.
은혜 가운데 강건한 자로 자라가야 한단 말입니다.
한번 은혜 받는 것이 끝이 아니고 그 깊이를 끊임없이 알아가고 자라가야 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영적 미숙아(未熟兒)에겐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 뭐냐?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은혜를 알아야 하잖아요.
알아야 감사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는 일에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이 간섭 당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고난이 많을수록 신앙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토록 아픈 고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얼마나 고난이 심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겠어요.
이건 자살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놈에 이런 사랑이 다 있나요?
하지만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독한 간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많이 부대낄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의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얼마나 잠기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져요.
아주 푹 잠기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물에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이 발목에 잠기면 내 힘으로 살아가요!
물이 무릎에 잠기면 조금 불편해도 자기 힘으로 살아가요!
허리에 잠기면 힘이 부치지만 그래도 자기 힘과 물의 힘 반반으로 살아가요!
그러나 온 몸이 푹 잠기면 그 땐 내 힘으로 살수가 없어요.
물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요.
이건 우리의 신앙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알면 조금 감사하고 조금 찬미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알면 알수록 많이 감사하고 많이 찬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고난을 통해서 알아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빛을 알게 하려고 어둠을 두신 것과 같습니다.
영생을 알게 하려고 죽음을 경험케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곧 배가 많이 고플수록 음식의 귀중함과 고마움을 많이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아파본 사람일수록 건강의 귀함을 아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천국이 귀함은 이 땅에서 지옥을 많이 경험한 사람에게 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 받았음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깊이 알수록 감사가 됩니다.
그럼 여기서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고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어렵거나 육신이 고통스러우면 지옥 같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능적으로 육신이 편한 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인생의 목적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데 두고 쫓아갑니다.
이러한 안락한 삶을 재물이 준다고 믿어요.
그래서 재물을 쫓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입니다.
어떤 동네에 재물이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두고 “내 영혼아 즐거워하자” 라고 했어요.
이 사람은 재물이 영혼에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서 야~! 이 놈아!
오늘 밤 내가 너의 영혼을 거두어 가면 이 쌓아둔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재물이 너의 죽음을 막아 줄 수가 있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부자에게 알려주는 말은 사람이 사는 것은 보이는 이 땅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재물만 모았지 하나님은 잊고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부자는 어리석지 않아요.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우리가 다 꿈꾸는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우린 이 부자처럼 살고자 합니다.
교회에서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 가치를 가지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늠을 합니다.
너 하나님을 아느냐! 라고 묻습니다.
너 예수를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가 없는 일에 다다라야 신(神)을 찾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神)을 찾지 않아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돈이면 다 해결이 됩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란?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진시황이 그렇게 찾고 찾았던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의 화려함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화려함도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돈도 잃고! 명예도 잃고! 권세도 잃어버립니다.
결국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일평생 잃어버릴 것들을 붙잡고 산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럼 어리석지 않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건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책망하신 말을 알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어리석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말은 지혜로움입니다.
그럼 어리석은 부자에게 책망한 것을 내 것으로 살면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이 됩니까?
그건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답이 나옵니다.
누가 예수를 믿느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이 병든 자라는 것을 알아야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그건 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떨 때 밉습니까?
우리 뜻대로 살게 하지 않을 때 밉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을 하시면 우리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반대로 간섭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적개심이 발동을 해요.
그럼 우린 죄인으로 드러나요.
날 힘들게 하는데 감사가 나올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본능적으로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우리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토설케 만들어요.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살도록 가만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두면 우린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간섭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적개심이 생깁니다.
그 적개심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미움입니다.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아야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내가 하나님을 많이 미워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비례하여서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산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깊어갈수록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더욱 더 자각(自覺)하게 되어요.
이러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自覺)이 급기야는 내 자신이 미워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 난 진짜 지독한 악당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내가 악당임을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깨달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일수록 지독하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세요.
이 간섭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로부터 간섭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이는 스스로 왕처럼 살고 싶어하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간섭 당함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간섭 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을 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입장에선 하나님의 간섭을 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가만 둘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입니다.
사랑 속에는 예뻐함도 있지만 미워함도 있습니다.
예쁨과 미움은 모두가 사랑입니다.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도 많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보세요.
나만 그를 독점하고 싶어해요.
그러니 사랑이 자연히 당신은 나만 바라보라는 식으로서의 간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이기주의에요.
간섭한다는 것은 간섭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엄청난 고통입니다.
만약에 자신을 간섭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간섭이라는 사랑을 미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깊이에 따라서 간섭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간섭하고 적게 사랑하면 적게 간섭해요.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 보세요.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하잖아요.
어디에서 무얼 할까?
누구랑 있을까?
그러니 수시로 전화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이 간섭이 싫어지면 사랑도 깨어집니다.
다시 말합니다.
사랑과 미움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뒷면이 미움이고, 미움의 뒷면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기를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질투는 사랑의 다른 면이에요.
질투가 강할수록 많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백성들에게 알려 주라고 합니다.
사랑해서 그런다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그 누구도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에 종살이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미워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사랑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말대로 자신들이 포로가 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그 사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포로로 보내놓고선 잠시도 잊지 않았어요.
나중에 자기백성을 학대 하였다는 죄목으로 바벨론은 멸망시켜 버립니다.
간섭함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타인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타인으로 보이면 간섭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좋아 할 뿐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챙길 뿐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는 하나 라는 한 몸으로 보지만 좋아하는 것은 너는 너 나는 나 둘로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깊을수록 간섭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 할수록 많이 간섭합니다.
미움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내 버려두셨다고 합니다.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건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저주란?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이에요.
이걸 유기라고 합니다.
무관심이야 말로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신 형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면 멸망입니다.
죄인의 길은 멸망의 길이에요.
야곱과 에서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의 일생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았어요.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을 하는가 하면 야곱이 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식으로 간섭을 하십니다.
그러니 미칠 지경인 겁니다.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을 간섭하심으로 나타났고!하나님의 미워하심이 에서를 유기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럼 언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간섭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언약 백성은 새 언약의 길로 간섭을 하십니다.
이게 또 보통 아픈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율법이 편합니다.
또한 자연적으로 율법적 신앙을 선호합니다.
율법적 신앙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신앙은 좋을수록 자아가 확장됩니다.
율법 신앙이 좋을수록 내 자랑이 많아지고 내 자랑이 많아지면 내 영광으로 채워집니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 반(反)하는 악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에요.
그런데 영광을 돌려야 할 자가 영광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게 율법 신앙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런 신앙 안에 있지 못하게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율법 신앙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거치는 반석이란? 넘어뜨리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킨 것을 의(義)로 붙잡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義)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는 식으로 간섭해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옳음이 아니라 틀림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도록 간섭을 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려 버리십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대역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걸려들었어요.
자기 딴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어요.
추호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을 시켜서 죄인을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십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은혜를 입고 보니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넘어져도 감사하고 일어나도 감사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우리를 간섭하실 것입니다.
이 간섭이 끝나는 날엔 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하는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깨닫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잘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되어 가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우린 모두가 “주여 나의 나됨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그러므로 물에도 집어넣었다가 불에도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담금질을 하신답니다.
그러니 불같은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모두가 널 사랑해서 라고 합니다.
그토록 간섭을 당한 바울이 외칩니다.
누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위험이냐 칼이냐! 곤고나 적신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하늘에 있는 천사라 할지라도 이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한 사랑을 뉘라서 알까요?
이 사랑을 깊이 알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무엇인가요?(요한계시록 1:4, 3:1, 4:5, 5:6)
하나님의 일곱 영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4은 일곱 영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 3:1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4:5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켜진 일곱 개의 등불과 연결시킵니다.
요한계시록 5:6은 일곱 영을 어린 양의 “일곱 눈”과 동일시하고, 이들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진술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에는 최소 세 가지 가능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성령의 상징이라는 것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은 완벽성과 완전함을 언급하는 데 숫자 7을 사용합니다.
만일 “일곱 영”의 “일곱”이 그와 같은 의미라면,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각기 다른 영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완벽하심과 완전하심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의 천사들, 스랍 (seraphim)이나 그룹 (cherubim) 등을 언급하는 것
이는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천사들의 묘사와도 일치합니다 (요한계시록 4:6-9; 5:6-14; 19:4-5).
셋째는 이사야 11:2을 근거하는 것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일곱 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주님의 영
2. 지혜의 영
3. 총명의 영
4. 모략의 영
5. 재능의 영
6. 지식의 영
7. 주님을 경외하는 영
성경은 일곱 영들이 구체적으로 누구 혹은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지만, 첫번째 해석, 즉 일곱 영이 성령이라는 견해가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7 일곱 영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요한계시록 1:4)
하나님의 일곱 영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요한계시록 4:5)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요한계시록 5:6)
하나님의 일곱 영 / 키이스 밀러
하나님의 일곱 영에 대한 말씀들
1) 계시록 1: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2) 계시록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 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4) 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하나님의 일곱 영은 일곱 가지 성품을 가진 성령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영 (the Spirit of the Lord upon)
그리스도 예수님께 부어진 한량없는 성령의 임재 그 자체를 말한다.
마치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는 바로 이 성령으로 옷 입어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일곱 영 중에서 중심의 자리에 있는.
지혜의 영 (wisdom)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광대한 지혜,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이 바로 지혜의 근원이다.
총명의 영 (understanding)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
성경 속에 보물처럼 감취어진 영적 진리를 캐내게 하는 것이 바로 총명의 영의 사역임.
이 영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늘에서 하나님이 부으시는 비전의 삶을 창조적으로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계시의 중요성 이해 / 얻기 위해 기도한 이 : 바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모략의 영 (counsel)
모략이란 모든 일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 주님의 모략은 영원토록 이 땅 위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분의 계획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당신의 생각과 마음의 뜻을
계시할 것이다.
이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성령의 성품인 권능의 영이다.
권능의 영(might)
권능의 영을 받는 사람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권능, 강건함의 기름부음이 나타나게 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권능이란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일들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이란 고작해야 하나님 손가락 한두 개 만으로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권능의 광대함을 보고 이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사 9:6)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일은 결코 사람의 상상으로 품을 수 없는 놀라운 것.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영 (Spirit of knowledge of the Lord)
이전의 것들은 성령에 속하거나 성령에 관한 성품이었으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영은 여호와 하나님을 친히 아는 것.
하나님과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 같이 그분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속사정을 아는 것.
하나님에 대한 어떤 속성과 성품을 배우고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알게 되는 이 경험 때문에 성령의 나머지 모든 성품들이 가능.
하나님의 속사정까지 아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바로 하나님의 가슴 소게 있는 많은 하늘의 일들을 깨닫는 사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9)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장성함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지극히 크심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the Spirit of the fear of the Lord)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성도로 하여금 놀라운 영광의 하나님을 알고 온 마음으로 존경을 표하며 두려워하게 하는 것.
성령의 일곱 영이 없이는 그 어떤 환경적, 자연적 제약들을 극복할 수 없다.
세상과 사단과 인간육신의 정욕이라는 방해물들을 극복하고 초자연적 권능으로 하늘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임재가 필요하다.
교만
헨리 나우웬이 쓴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나라에 왕자 네 명이 있었다. 네 명의 왕자가 모여 이런 결정을 내렸다. “우리 형제가 전 세계에 흩어져서 최첨단 과학 기술을 배워오자.” 오랜 세월이 흘러 네 명의 왕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첫째 왕자가 말했다.“나는 한 조각의 생물의 뼈만 있으면 근육을 붙이는 기술이 있다.”둘째 왕자도 말했다. “나는 뼈와 근육만 있으면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는 기술을 배워왔다.” 셋째 왕자는 “나는 뼈와 근육 그리고 털이 있으면 사지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라고 했다. 막내 왕자도 질세라 말했다.“나는 사지가 있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을 배워왔다.” 네 왕자는 숲 속에 들어가 뼈를 하나 주웠는데, 그것은 사자의 뼈였다. 네 명의 왕자는 그 뼈에 근육을 붙이고,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고, 사지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사나운 사자가 일어나 그 네 명의 왕자를 물어뜯어 죽였다. 이 이야기는 인간들이 쌓아놓은 현대 문명의 바벨탑에 인간 스스로 깔려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문명에 의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비참하게 죽어가는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어리석은 벌레
하루는 하늘을 찌를 듯이 커다란 나무에서 살고 있던 벌레들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대장 벌레가 다른 벌레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나무가 어찌나 큰지 우리 벌레들이 이곳에 살고 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 몇 마리 정도로는 이 나무의 위용에 가려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끼를 많이 나아서 이 나무를 먹어치우면 세상은 이 나무보다 위대한 우리 벌레들을 알아줄 것입니다.” 대장 벌레의 말을 들은 붙임성 좋은 부하가 재빨리 나서며 말했습니다. “대장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다 짜내어 이 나무를 빨리 갉아먹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립시다.” 이 말을 들은 대장 벌레는 흐뭇해서 말했습니다. “좋다. 이 나무를 총공격하자. 한쪽은 부지런히 자식을 낳고 나머지는 나무를 공격하여 우리 이름을 만천하에 드러내자.”대장의 말에 신이 난 벌레들은 나무를 공격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벌레들은 열심히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을 구경하던 이웃 벌레들은 그들의 능력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벌레들의 공격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벌레들이 살고 있던 나무가 힘을 잃고 하나둘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그 큰 나무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나무를 쓰러뜨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벌레들이 먹을 양식 또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오자 벌레들은 모두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당나귀의 교만
어떤 마부가 당나귀 등에 돌부처를 싣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돌부처를 보고 합장 배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는 자기를 우러러보고 경배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쭐대며 교만한 마음으로 마부가 가라는 방향으로 가지를 않습니다.
이에 화가 난 마부는 채찍으로 내려칩니다.
갑자기 내려치는 채찍에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당나귀의 등에 있던 돌부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당나귀는 다리를 다쳐 그만 쓸모없는 나귀가 되었고 결국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부모 처자와 물과 대지와 공기와 햇볕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 하나, 세포 하나도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시간도, 삶의 기간도, 죽는 시간도 내가 정하지 못합니다.
절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시한부로 빌려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실 하나님만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은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은 실로 큰 죄이며, 하나님 나라의 거침돌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언 18:12)
교만과 독선의 머리를 치켜 세운 뱀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농부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길위에 꽁꽁 얼어붙은 뱀 한 마리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가져와 화롯가에 놓아두었다.
얼마 후 생기를 되찾은 뱀이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더니 농부의 아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농부는 홰초리를 들어 뱀을 후려쳤다.
그리고 길게 뻗은 뱀을 막대기에 감아 밖에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배은망덕한 놈, 은혜를 모르면 벌을 받지. 저를 살려준 사람의 아들을 물려 하다니…”
농부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앞으로는 절대로 뱀을 구해주지 마세요”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구해준 분이 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구해준 그분을 향해 인간은 가끔 교만과 독선의 머리를 치켜세운다.
불순종의 결과는 항상 사망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하늘의 노여움을 받는다.
옷걸이의 신분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하였습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체(本體)를 정확히 알고 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진짜 능력, 자기가 선 자리를 모르거나 망각하면, 설탕물을 먹고 가짜 꿀을 내놓는 벌처럼, 초라한 인격자의 모습이 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