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몇명? 대략 2,600명
성경에 단 한번이라도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몇명일까요?
그냥 일일이 세보면 될 것 같지만 이것이 의외로 쉽지 않은 문제인데요, 쉽지 않은 이유는 정확한 분류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한 이름만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또한 동명이인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람, 아브라함, 사래, 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시몬, 게바는 같은 이름이요, 바울도 사울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이름이 두가지인 경우가 많아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열왕기하 15장의 아사랴와 역대하 26의 웃시야는 같은 인물인데 아사랴는 개인 이름이고 웃시야는 왕명이었을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웃시야와 충돌한 제사장 아사랴도 웃시야 왕의 본명 아사랴와 같습니다.
아래의 경우는 두가지 이름을 쓴 왕들의 이름들입니다.
아비야(아비얌) 여호람(요람) 웃시야(아사랴) 여호아하스(살룸) 여호야김(엘리야김) 시드기야(맛다니야)
그런가하면 동명이인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스마야라는 이름의 동명이인이 무려 29명이나 등장합니다.
신약의 마리아는 모두 6명이다 7명이다, 서로 견해도 다릅니다.
별명도 많습니다.
요셉의 별명은 사브낫바네아였습니다.
상징적인 이름도 많습니다.
호세아의 아들 딸에게는 새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성경번역본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의 '하와'를 개역성경 신약에서는 '이와'라고 표기했다가 개정성경부터 '하와'로 다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다 포함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숫자가 많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 이 사람과 같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다라는 신학적 견해차이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를 정확히 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일단 몇 자료를 소개합니다.
대한 성서공회 인명사전 성경인물 총 1888명
대한성서공회의 인명사전을 보면 ㄱ 부터 ㅎ 에 이르기까지 인명자료를 실어놓았는데 총 1888명입니다.
그런데 이름 번역으로 보면 우리 식으로 번역했기때문에 ㅈ,ㅊ,ㅋ,ㅌ,ㅍ 로 시작되는 이름은 없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지명은 생략하고 인명만 계산한 것입니다.)
ㄱ-140명, ㄴ-71명, ㄷ-104명, ㄹ-82명, ㅁ-146명, ㅂ-200명, ㅅ-260명, ㅇ-713명, ㅈ-없음, ㅊ-없음, ㅋ-없음, ㅌ-없음, ㅍ-없음, ㅎ-172명
그리하여 총계는 1888명입니다.
한국컴퓨터 선교회 인명사전 성경인물 총 1897명
한국컴퓨터 선교회 성경인명사전에 나온 이름은 1897명으로 되어있습니다.
ㄱ-141명, ㄴ-76명, ㄷ-106명, ㄹ-84명, ㅁ-152명, ㅂ-198명, ㅅ-265명, ㅇ-708명, ㅈ-없음, ㅊ-없음, ㅋ-클레멘트(빌 4:3 글레멘드), ㅌ-없음, ㅍ-없음, ㅎ-166명
신오진 님의 연구 2,197명 - 2,618명
성경 계보라는 책을 쓰신 평신도 성경연구가 신오진님의 연구와 검토에 따르면 성경에 나타난 총 인물의 숫자는 2197명이라는 것입니다.
한 인물이 두 이름을 가진 것까지 합하면 2618명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성서공회나 컴퓨터 선교회와 다른 것은 족보 위주로 이름을 편성하면서 이름이 복합적으로 들어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서울 주님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신오진 바이블루트출판 대표(43)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하고 시각화하는데 성공한 ‘성경계보’를 발간했다.
서양화가이자 컴퓨터 전문가인 신씨는 4년간 성경 인물 2197명의 관계를 철저히 연구한 끝에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분리하고 그에 따른 성경구절을 기록하는 등 지도를 보듯 쉽게 찾을 수 있게 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요셉과 마리아의 계보가 한눈에 들어온다.이스라엘 주변국가 인물도 담고 있는 등 명실상부한 성경속 인물 파노라마가 구축돼 있다.
신씨는 “성경계보를 정확하게 작성하기 위해 관주톰슨성경 뉴만나성경 비전성경 톰슨대역영한성경 등을 참조했으며 총신대 총장인 김의원 박사와 이주섭 목사 등 수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게 지도를 받았다”고 말했다.
신씨가
지난한 계보작업에 매달리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1년생이었던 딸아이의 방학숙제 ‘우리가족 뿌리찾기’를 함께 하면서였다고
한다.“그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인물이 나올 때마다 궁금했지만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한번 인물들을
정리해보고 싶어졌습니다.하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성경계보'에 담긴 사람은 모두 2197명.
다른 사람과 혈연관계없이 단독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제외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해 인덱스는 261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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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
실존주의 : 사물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착하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하므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동양 철학에서 맹자는 성선절을 주장하였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어떤 이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신에 대한 이론에서
유신론(有神論)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무신론(無神論)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신의 존재의 유무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사도행전 24장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Ananiah) : 시온
- 6절 /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입장에 대해서 고소하는 사람
(자기 명예와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
변호사 더둘로(Tertullus) : 거짓말장이
- 2절 /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 5절 /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총독 벨릭스(Felix) : 즐겁다
- 26절 /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 17, 18절 / 여러 해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Drusillia) : 이슬이 내림
- 24절 /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 대헤롯의 아들 아그립바 1세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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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 방식에서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잘 돕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그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고 합니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불안이라는 정서에서 이해합니다.
그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끓임 없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 이해를 위한 토대를 성경 계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파악한 ‘실존’에 두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방식은 신 존재의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有神論, Theism),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無神論, atheism)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도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무신론과 신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대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들의 신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 따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엉뚱한 신을 만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은 이 세계가 아름답고 또한
합리적이며 완전한 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현명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주론적(cosmological)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들은 자연과 인과관계를 계속 추적해 가면 제1원인인 신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존재론적(ontological) 설명은,
인간은 불완전하고 신과 인간은 상호 관련이 있으므로 완전무결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목적론적(teleological) 설명은 자연이 어디까지나
목적에 적응한 질서를 지니고 있는 이상, 자연 전체의 설계자로서의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도덕적(moralistic) 설명은 우리에게 그
실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도덕 법칙의 원천으로서 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미학적(aesthetic) 설명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서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가장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히브리서 1:1- 2).
-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 곧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따라야 할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성경 계시의 핵심입니다.
이 계시를 지향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방식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17:1)
모세에게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명기 18:13)
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완전함이나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인데 이 둘도 결국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16)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계시의 완성이고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 방식은 호흡을 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회적 존재 방식은 인간관계 가운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 방식은 앞의 두 가지를 포함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같은
존재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능력과 수준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신분에 따른 요구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불의를 비판하는 일까지도 사랑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와
방법과 목적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명분과 실천이 불일치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믿음과 삶이 불일치합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지만 그보다 신자들끼리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로 다투고 서로 적개심을 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 문제에 있어서 비난 받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의 수준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믿음과 삶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나 삶을 보고
믿음을 평가하지만, 엄격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삶이나 인격과 차원을 달리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의 윤리적 책임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행위와 차원이 다른 믿음을 말하면서 또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윤리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면 교회가 상처를 입고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믿음과 윤리적 삶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덕목을 제시하여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덕목들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론적 토대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완벽하게 이루어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부응하는 행위를 하도록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율법으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업적 위주의 행위와 율법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서상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분입니다. 이것은 구체적 신앙의 규범에 집착하기보다 새로운 신분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존재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존재 방식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존재 방식은
사랑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한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께 의존하여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동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어떤 글을 쓰기 전에, 설교하기 전에,
권면하기 전에, 책망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는지 사랑이 목적이 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골 3:14, 고전 13:3, 요일 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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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로새서 3:12-17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본문은 ‘그러므로 너희는 ... 옷 입으라.’는 매우 특이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는 앞에 나온 어떤 이야기를 전제합니다.
그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이 피해야할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3장 8절에서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과 같은 다섯 가지 항목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것을 마치 옷을 벗듯이 벗어버리고 대신 새로운 옷을 입어야합니다.
골로새서 3장 8절에서 다섯 가지 항목이 나온 것처럼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는 "긍휼,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다섯 가지 항목을 말합니다.
옷은 사람이 아닙니다.
옷보다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노숙자가 법복을 입는다고 해서 판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대통령이 군복을 입었다고 해서 군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옷은 옷일 뿐입니다.
옷이 화려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화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철학자일 수 있습니다.
옷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긍휼이 좋은 옷이기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참는 게 좋으나 빨리 결단을 내려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지만 내쳐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나야할 성품을 거론했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보가 핵심입니다.
그것을 저는 오늘 ‘영적 실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2절에는 그것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거룩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진정성 있는 자비와 친절함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옷처럼 입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정확한 대답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
둘째는 거룩한 사람
셋째는 사랑받은 사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걸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이것을 실제로 이해하고 경험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보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사람
- 선택이란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은 것이다!
‘선택’은 신구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곧 선택입니다.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무엘과 이사야와 호세아 등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대 역사에서 이런 사람들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선택했다는 인식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믿음은 신약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바울의 편지 서두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로마서 1:1절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성경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허다합니다.
우리도 그런 역사의 한 부분에 속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경험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한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도 없습니다.
그런 경험은 바람 현상처럼 아주 신비롭고 지극해서 영혼의 눈이 밝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 선택을 받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의 선택을 받습니다.
그의 영혼이 늘 돈에만 민감하다면 돈의 선택을 받은 겁니다.
정치적인 욕망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손익계산으로만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 결과에 일희일비하면서, 아니면 자신의 정치력을 즐기면서 여유만만하게 삽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영혼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한 확신이나 신뢰가 없으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위축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큰 의미가 없다거나, 그런 선택이 없어도 그냥 편안하고 즐겁게 잘 먹고 잘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에 충실한 기독교인들이 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인생입니다.
저는 그런 이들의 인생을 가타부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복음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존재의 기쁨과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말의 한 대목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선택입니다.
거룩한 사람
-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뭔가 불편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거룩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추한 모습이 많습니다.
성경은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하기오스’의 변형인 ‘하기오이’의 번역입니다.
하기오스는 거룩하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구별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대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거룩하다는 말과 구별되었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별되었다는 표현도 우리에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의 메커니즘에 묶여 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다른 표현은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과 신학적으로 투쟁할 때 붙든 가장 핵심 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칭의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은 어떤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실제적인 의가 아니라 법적인 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실수와 잘못을 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만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약 실제로 완전히 의로워지는 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다면 기독교인은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은 의의 기준을 사람에게 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둘 때만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서 철부지 아들을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리 아들 착하다.’고 인정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이가 아무런 변화 없이 늘 철부지로 머문다면 그는 철이 들지 않은 거겠지만 철이 들면 실제 삶에서도 변화가 시작됩니다.
철이 들기 전과 든 이후나 그 사람은 여전히 똑같은 사람입니다.
철이 들게 될 미래의 그를 하나님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현재의 그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칭의(稱義)의 본래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룩하심의 근거인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가 비록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서부터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결속을 그림처럼 본다면, 엄마 품에 안긴 아이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하나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살아가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느낌과 경험이 전혀 없이 살아갑니다.
두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를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은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느낌과 경험이 크게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언급할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이 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건조해지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재미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의 결속을 실제로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만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아시지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인생의 막장에 도달했습니다.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어서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를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가장 단단하게 하나님과 결속되어 있는 겁니다.
돼지 농장이라는 상황에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받은 사람
- 사랑이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영적 실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런 표현도 자칫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씨씨엠 찬송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값싼 감상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나온 선택받았다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과 깊이 연관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그 대상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느낌을 받고, 대상에 의해서 자신이 구별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자 능력입니다.
연애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상대방에 의해서 자신이 새로워지는 걸 경험합니다.
선택을 받고, 보살핌을 받고, 구별된다는 느낌이자 경험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도 이렇게 특별할진데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긴말이 소용없을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자 근거이며 토대라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람은 생명의 능력과 그 신비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말로 바꾸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죄와 죽음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야한다는 강박에 떨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은 그 사랑에 충실하기에 더 이상 자기가 무엇을 이뤄야한다는 강박과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자기 연민에 떨어지지 않고, 자기 과시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일상을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지 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실질적으로 누립니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텃밭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이라면 텃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사랑스러워 보일 겁니다.
잡초와 곤충과 지렁이, 새순과 낙엽 등등이 다 귀엽고 귀합니다.
장마로 인해서 깊이 파인 땅 모습도 사랑스럽습니다.
그는 귀찮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텃밭을 돌보고 가꿉니다.
텃밭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귀찮아합니다.
잡초가 날 때마다 신경질을 냅니다.
그게 다 짐으로 느껴집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텃밭을 평가하느라 신경이 곤두섭니다.
텃밭을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나 사업장이나, 또는 가정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도 됩니다.
목사의 입장으로 본다면 교회가 바로 텃밭과 같은 거지요.
사랑받은 사람은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것으로 인해서, 불편한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기뻐하지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조울증 환자처럼 자기 기분에 좌우됩니다.
세 가지 항목 중에서 세 번째의 ‘사랑받은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영혼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기자는 12b절에서 다섯 가지 옷을 언급하고 13절에서 누구에게 불만이 있어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권면한 뒤에 14절에서 다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인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띠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가 다 압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이라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은 각각의 상황에서 자기가 어떻게 가족을 대하고, 교우들을 대해야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고, 어려운 일은 무조건 피하는 방식으로 삽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인생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완성된다고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들과 다릅니다.
우리의 영적 실존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골로새서는 세 가지를 우리에게 말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