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욧(사무엘상 19:18-24)
'라마'는 사무엘의 출생지이자 고향이다.
이곳에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 길갈, 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다(삼상7:15~17).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다(삼상 8:4~55).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 10:1),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다(삼상 16:13).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 15:34~35)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다.
'나욧'은 "거주지, 거처, 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다(삼상 19:18).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다(삼상 19:19).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된다(삼상 19:21).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다.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다.
아마도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며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라마나욧'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성경 공부는 말씀을 지식적으로 공부할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여기서 라마는 지명으로 사무엘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그와 함께 하면서 사역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사울과 결별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과 결별하기 전에 한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했던지,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 15:35).
아마도 이 말은 사람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아닐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런 사울을 버릴 것이라고 선포하고 라마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 19:18).
다윗은 사울의 딸이요 자신의 아내였던 미갈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생명을 보존한 후, 사무엘을 만나러
라마나욧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에게 자신을 지켜줄 세상적 권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다만
사무엘이 하나님과 깊이 교류하는 참 선지자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라마로 이끈 것입니다.
이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에게 나가는 자를 돌본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 19:18)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여기 살았다는 단어에 사무엘은 물론
선지생도들도 다윗을 환영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실 같은 장소에서 몸을 부딪기고 산다는 것은 환영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관계에선 쉽지 않습니다.
다윗은 당시 살아있는 권력 사울 왕의 눈에 난 자이니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반역죄가 되는 것이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무엘은 물론 그의 제자들도, 인간적인 두려움을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하나님의 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라마나욧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역할과 관련해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라마나욧은 사단이 힘쓸 수
없는 곳이요, 죄인의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라마나욧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믿음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마침 붉은 석양 빛이 그 먼지 위에 내려앉자 황토 먼지가 금가루처럼 빛을 냈습니다.
한 사진 작가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사진에 담아 “먼지도 아름답다!”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더러운 먼지도 빛을 입으니 아름다운 작품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티끌 같은 인생도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면 밝게 빛을 내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변화되어 세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후
여호와의 영이 다윗의 걸음 걸음을 아주 치밀하게 인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처음에는 여호와의 영께서 다윗을 왕실로 입궁시키는 것을 봅니다.
악신 들린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은 수금 타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엔 골리앗 앞으로, 그 다음엔 사울의 군장이 되여 이스라엘 앞에 출입시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미갈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신혼생활은 한갖 꿈일뿐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니 사울은 자기의 사위 다윗을 일컬어 자기 대적(원수)이라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자기 딸 미갈 앞에서 말입니다.
이제 다윗은 왕의 대적으로 죽어 마땅한 국가적인 죄수가 된 것입니다.
다윗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간 곳은 사무엘이 있는 라마입니다.
그에게 다윗은 사울이 자기에게 어찌 행하였는지 말했다 합니다.
만일 사무엘이 다윗과 사울에 관한 사전정보 없이 있다 갑자기 왕의 군졸들이 쳐들어 오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다윗은 사무엘에게 미주알 고주알 다 일러바치고 난 후 대단히 홀가분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은 자신의 기름부음에 관하여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무엇보담 더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왕의 대적자로 몰리게 된 것인지 가장 질문하고픈 난제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갓 결혼한 신부 미갈를 두고 이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과연 기름부음 받은 자의 모습인 것인지..
도대체 기름부음이 뭐길래 이토록 괴로운 것인지...
다시 물리고픈 심정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 그는 예전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정치판에 들어가게 된 것을 봅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의 기름부음이 아닌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응당 그리 되어야 할 것이지만 무척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낮 양 치는 목동임에 불과한 자신에게 정치적인 자질이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 그 무엇보담 더 정치적인 소명감이 있는 것일까?
길지 않은 시간들이였지만 다윗의 눈에 들어 오는 왕권과 야합한 세력들을 보며 그는 절규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정치판에 뛰어 들어가느니 차라리 다시 목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상에 좋다 싶었을 것입니다.
나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자각할정도로 받은 이후 맨 처음에는 예수 믿는게 참 쉬워보였습니다.
허나 날이 갈수록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예수 믿는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예수님을 내가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날 떠나지 않고 늘 십자가의 못박히신 예수와 함께 죽고 또한 그분과 함께 사는 복음의 비밀을 삶속에서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나는 벌써 오래전에 예수님을 배도하였을 것입니다.
아님 십자가와 세상을 적당히 야합한 폼새나는 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하길 나욧에서 사무엘이 다윗과 함께 살았다 합니다.
사울과는 사무엘이 함께 살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허나 다윗만큼은 사무엘이 곁에 품고 살았습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의 핍박이 원인이 되여 왔지만 그 핍박은 가장 축복스러운 만남을 갖도록 만든 희망 가득한 핍박이였습니다.
삶이 우리를 핍박할 때, 그것은 가장 축복된 만남으로 나를 인도해 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게 정답일 것입니다.
왜 사무엘은 다윗을 곁에 두고 살았을까요?
사무엘이 일평생 살면서 알게 된 하나님과 그 나라에 관한 여러가지를 소상히 가르쳐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사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왕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예요.
결국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도를 배우게 된 셈이지요.
더불어 왕으로서의 소명 의식도 새롭게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앞으로 통과하게 될 고난의 터널을 넉넉히 지나갈 수 있는 자양분들을 많이 많이 섭취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무엘과 라마나욧의 공동체를 통해 배울 것들을 배웠을 때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오도록 허락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어찌 보호해주시는가를 다윗 평생에 기억할 수 있도록 놀라운 일을 보여주십니다.
그런 걸 직접 눈으로 보면서 살았으니 다윗이 어찌 다윗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역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리 당신이 만드셨는데도 다윗을 두고 두고 당신과 마음이 합한 자라고 칭찬하시는 것 보면 울 아버지 참 재미있으셔요.
사울이 세 번씩이나 다윗을 잡아 오라고 보낸 전령들과 네 번째로 찾아 온 사울에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하도록 만드는 것을 봅니다. 사울은 세구라는 큰 우물가를 떠나 라마나욧을 향해 가는 길 내내 예언을 했다 합니다. 라마나욧 사무엘 앞에서는 옷을 벗고 온종일 누워서 예언 했다 합니다.
누구를 위한 예언인 것인가?
무엇을 예언하였을까?
분명 그 예언은 하나님을 위한 예언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함은 그가 기름을 부은 다윗 왕과 그 나라를 위해서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 그 예언들은 사무엘과 그의 생도들에게 라마나욧 신학을 정립하는데 엄청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라마나욧의 실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라마나욧의 실체인 말씀보다 기도를 더 중요시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길이요,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이 우선시 되지 않는 기도는 모두 인간적인 기원에 불과한 종교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를 지켜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다윗이 그 때 라마나욧이 아닌 다른 곳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해주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라마나욧이란 공동체원들이 기도를 하도 많이 한 결과 그 터가 특별히 영빨이 세기 때문에 악한 사울도 넘어져 예언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기도 빨 하나도 없는 다메섹 석상에서 꼬꾸라져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누군가 다메섹에서 열심히 기도를 한 자가 있었기에 특별히 예수님께서 그 장소를 택해 사울을 꼬꾸라지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필요하셔서 다메섹 석상에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라마나욧을 엉뚱하게 해석하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게 됩니다.
라마나욧의 실상인 예언, 즉 말씀을 붙잡지 않고 그곳에서 나타난 성령의 현상만 본다면
우린 얼마든지 지극 정성 기도 많이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할 것이라는 헛된 영광과 헛된 꿈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도구화시키는 대단히 큰 죄를 범하게 된답니다.
사탄은 이런 자를 미혹합니다.
말씀을 붙잡지 않고 나타난 표적과 기사만 붙잡고 기도할 때 미혹의 영이 왜 아니 오겠습니까?
미혹의 영이 주는 기적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자랑하며 다닐 때 그 말을 듣는 자들이 미혹되고 그러다 보면 미혹의 영들이 집단화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미혹의 세력이 형성된 것이지요.
라마나욧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영낙없이 미혹의 영들이 틈타 종내는 미혹의 세력 장소로 전락해버리게 되지요
주님!
소명이 있는 자를 보호해주시는 주님.
소명을 다 이루기까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주님.
라마나욧에서 사울과 그의 전령들이 예언한 그대로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라마나욧은 오늘도 내가 껴입은 두터운 옷들을 벗고 다윗의 사자이시며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 말씀과 상관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능히 벌거벗은 자로 만든다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입혀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입혀 주시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