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순결(로마서 16:19) σοφός, ἡ, όν 4680
σοφός, ἡ, όν 4680
지혜(소포스) σοφός
σοφός, ἡ, όν 4680
발음 / 소포스(sŏphŏs)
- 어원/ σαφής ‘깨끗한’과 유사
- 관련 성경 / 지혜로운(마 11:25, 눅 10:21, 딤전 1:17), 지혜 있는(마 23:34, 롬 1:22, 고전 3:18, 약 3:13)
- 신약 성경 / 20회 사용
ἀκέραιος, ον 185
미련한(아케이로스) ἀκέραιος
ἀκέραιος, ον 185
발음 / 아케라이오스(akĕraiŏs) - 악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767의 파생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순결한(마 10:16), 미련한(롬 16:19), 순전한(빌 2:15).
- 신약 성경 / 3회 사용
* 2767. κεράννυμι
발음 / 케란누미(kĕrannümi)
- 관련 성경 / 섞다(계 14:10, 18:6).
- 신약 성경 / 3회 사용
문안하라(782) ἀσπάζομαι
- ἀσπάζομαι
발음 / 아스파조마이(aspazŏmai)
- 어원 / 제1부정과거 ἠσπασά- μην, 1[연합을 나타내는 불변사]과 4685의 추정된 형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문안하다(마 5:47, 막 9:15, 고전 16:19), 경례하다(막 15:18), 평안하기를 빌다(마 10:12), 안부를 묻다(행 18:22, 행 21:7),
작별하다(행 21:6), 환영하다(히 11:13)
- 신약 성경 / 59회 사용
-
살피고 돌아서라!(17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 σκοπέω 4648
발음 / 스코페오(skŏpĕō)
- 어원/ 464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보다(눅 11:35), 살피다(롬 16:17), 살펴보다(갈 6:1), 돌보다(빌 2:4)
- 신약 성경 / 6회 사용
발음 / 에크크리노(ĕkklinō)
- 어원/ 제1부정과거 ἐξέκλινα, 1537과 2827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떠나다(롬 16:17), 치우치다(롬 3:12)
- 신약 성경 / 3회 사용
속지마라 - 미혹하느니라(18절)
ἐξαπατάω 1818
발음 / 엑스파나오(ĕxapata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ξητάτησα, 1537과 538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속이다(롬 7:11, 고전 3:18), 미혹하다(롬 16:18, 고후 11:3, 살후 2:3)
- 신약 성경 / 6회 사용
승리를 확신하라(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1. 산산이 부수다, 2. 깨트리다, 3. 꺾어지다
발음 / 순트리보(süntribō)
- 어원 / 미래 συντρίψω, 제1부정과거 συ- νέτριψα, 완료수동태부정사 συντετ- ρῖφθαι, 완료수동분사 συντετριμμέ- νος, 제2부정과거 수동태 συνετρίβην, 미래수동태 συντριβήσομαι, 4862와 5147의 어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상하다(마 12:20), 상하게 하다(눅 9:39), 깨뜨리다(막 14:3, 계 2:27), 꺾이다(요 19:36).
- 신약 성경 / 7회 사용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려면? 문안하라(782) ἀσπάζομαι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려면?(마태복음 10:16)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궁금해 했던 구절이다.
그리고 ‘과연 사탄이 슬기로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말씀은 중동 지방에서 널리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 중 하나였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예화를 드신 거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보았다.
뱀같이 지혜로운 사람도 많이 만나 보았다.
그러나 그 심중에는 비둘기의 순결함이 없는 악한 사람이 많았다.
순결하기보다는 지혜로우면서 간교한 사람을 많이 본 것 같다.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는 사탄의 모습을 경계하라’는 말씀도 이제는 이해가 된다.
보기에는 정말 착한 하나님의 사람 같은데, 오히려 큰 피해를 주는 사람도 상대해 보았다.
사도 바울은 특히 교회 안 지도층에서 미혹하는 사탄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계하라고 말씀하신다.
교회 내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미혹되기가 쉽다.
하나님께 영적 분별력을 주시기를 간구해야겠다.
순수한 마음만 가지고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많은 성도들을 만나 보았다.
길거리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들은 마음만 앞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미움 받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비록 사람들은 비난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위로를 했다.
그러나 꼭 그럴까? 좀 더 지혜롭게 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열정과 믿음만 가지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지하철에서, 서울역에서 큰 소리로 전도하는 분들과 내가 무엇이 달랐을까 생각해 본다.
좀 더 뱀같이 슬기롭게 하는 방법을 왜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순결한 마음만 가지고는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해 본다.
사탄의 제자들은 거짓을 아주 자애롭고 평화롭게 포장하고는 박수를 받으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데, 나는 진리를 가지고도 박수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종교의 지도자는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성경 말씀도 달리하고, 예수 이외에도 모든 종교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를 가지고도 ‘세계 평화’니 ‘가난한 자’니 ‘약한 자’니 ‘소외받는 자’니 포장하면서 칭찬을 받으며 목적을 달성하는데, 진리를 가지고도 제대로 전파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잘한 것만 있는 것인가?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비둘기같이 순결한 마음을 갖되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뱀의 지혜도 갖추어야겠다는 반성을 한다.
뱀처럼 지혜로워라
세속적 수단에 의지하여 고달픈 현실을
영악하게 헤쳐나가도 된다고 여깁니다.
뱀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비추었으니 일부 불법과 부정이 용납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양심과 행동을 도덕적으로 최대한 깨끗하게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뱀, 지혜롭게, 비둘기,
순결하게"
네 단어의 뜻만을, 그것도 일반적인 의미만을 기준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이 두가지 해석 내지 적용이 서로 조화가 안
된다는 점을 나중에 스스로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악하게 행동하려다 보면 아무래도 거짓 불법 탐욕 시기 등과
타협하여 잘못을 범할 수 있고 그러면 윤리적으로 결코 순결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각각 따로 적용시키기로
작정합니다.
세상 일은 지혜롭게, 교회 일은 순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문자적 부분적으로 해석했으니까 그 적용 실천도 문자적 부분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말씀대로 살았으며 분명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다 세상에서 영악하게 행한 것이 신앙
양심에 조금이라도 걸리면 교회에서 더욱 열심히 충성함으로써 일말의 위로와 안식을 얻고자합니다.
혹시라도 세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렇게 헷갈리게(?) 가르치신 주님의 탓이 됩니다.
신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령의 교통으로 신자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이나 불법과 타협하더라도 영악하게 현실의 고난을 이기고 안락을 취하라는 지혜를 주실 리가
없습니다.
뱀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고대 유대인들이 가장 지혜로운(하나님의
지혜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고 단순히 그 자체로)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연결해선 안됩니다.
비둘기는 물론 순결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성경이 말하는 순결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결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이 세속적 처세술이나 교회에서의 충성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지혜’를 신자도 현실 문제를 극복해 나감에 믿음과 기도에만 집중하지 말고 이성적 분별력도 사용해야 한다고 적용하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단 그럼에도 반드시 순결해야만 합니다.
거짓과 불법과 타협 관용해도 된다는 의미는 한 치도 개입시키지 않은채 이성적 지혜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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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터(로마서 15:20)
강한 자(호 두나토스)
δυνατός, ἡ, όν 1415
발음 / 두나토스(dünatŏs)
어원/ 141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능한(막 9:23, 눅 24:19, 행 18:24), 강한(롬 15:1, 고후 12:10), 유력한(행 25:5).
[명] 능력 (롬 9:22, 11:23, 고후 10:4), 권능(롬 14:4). [부] 능히(행 11:17, 롬 4:21).
- 신약 성경 / 32회 사용
연약한 자(호 아두나토스)
ἀδύνατος, ον 102
발음 / 아두나토스(adünatŏs)
- 어원/ 1[부정불변사]과 1415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약한(롬 15:1), 할 수 없는(마 19:26), 하지 못하는(히 10:4)
- 신약 성경 / 10회 사용
기쁘게(아레스코)
ἀρέσκω 700
발음 / 아레스코(arĕskō)
- 어원/ 미완료 ἤρεσκον, 미래 ἀρέσω, 제1부정과거 ἤρεσα, 아마도 14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기쁘게 하다(마 14:6, 막 6:22, 롬 8:8)
- 신약 성경 / 17회 사용
(도입 이야기)
소경의 이기심
어느 시각장애인의 간절한 소원은 두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간절하였던지 어느 날 부엉이가 찾아와서 시각장애인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나는 밤에만 활동하므로 낮에는 눈이 필요없지요.
낮에는 당신이 내 눈을 사용하고 밤에는 내가 사용하면 좋겠지요.
한 가지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밤에는 반드시 눈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시각 장애인이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밝은 세상이 보였습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낮 동안에는 눈을 사용하고 밤에는 부엉이에게 눈을 돌려줍니다.
이렇게 여러 날 지내는 동안 시각장애인의 마음에 왜 바보 같을까?
멀리 도망을 가서 낮에도 밤에도 내 마음대로 보면 될텐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이 점점 흐려집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서 부엉이를 만났지요.
밤에 활동을 하지 못한 부엉이는 그동안 먹이를 얻지 못해서 기력이 약해졌습니다.
부엉이는 시각장애인에게 "왜 이제 왔어요!"
그리고 부엉이가 죽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더 이상 낮에도 밤에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때는 반드시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찾아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이 복음이 전한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을 남의 터에 집을 짓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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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로마서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It is written : As surely as I live, says the Lord, every knee will bow before me; every tongue will confess to God.
ἐξομολογέω 1843
발음 / 에코모로게오(ĕxŏmŏlŏgĕō)
- 어원/ 제1부정과거 ἐξωμολόγησα, 미래중간태 ἐξομολογήσομαι, 1537과 367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자복하다(마 3:6, 막 1:5, 행 19:18), 감사하다(마 11:25, 눅 10:21, 롬 15:9), 허락하다(눅 22:6), 자백하다(롬 14:11),
시인하다(빌 2:11, 계 3:5), 고백하다(약 5:16)
- 신약 성경 / 10회 사용
비판(로마서 14:1) διάκρισις
비판(로마서 14:1) διάκρισις
διάκρισις, εως, ἡ 1253
발음 / 디아크리시스(diakrisis)
- 어원/ 125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비판(롬 14:1), 분별함(고전 12:10), 분별(히 5:14).
- 신약 성경 / 3회 사용
판단(로마서 14:4) κρίνω
판단(로마서 14:4) κρίνω
κρίνω 2919
발음 / 크리노(krinō)
-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 5:40, 고전 6:6), 비판하다(마 7:1), 심판하다(마 19:28, 눅 19:22, 요 3:17,
계 18:8), 정죄받다(눅 6:37),
판단하다(요 8:16, 롬 2:1), 다스리다(눅 22:30), 심판받다(요 3:18, 벧전 4:6, 계 20:12), 재판하다(요 18:31), 결의하다(행 3:13, 21:25),
작정하다(행 20:16, 고전 2:2, 딛 3:12), 심문받다(행 23:6, 24:21, 25:20), 판단받다(롬 3:4, 고전 11:32), 정죄하다(롬 14:22),
결심하다(고후2:1).
- 신약 성경 / 115회 사용
* 연약한(ἀσθενέω)
ἀσθενέω 770
발음 / 아스데네오(asthĕnĕō)
- 어원/ 제1부정과거 ἠσθένησα, 77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병들다(마 25:36, 요 11:3, 빌 2:27), 앓다(눅 9:2), 약하다(행 20:35, 롬 4:19, 고후 11: 21), 연약하다(롬 8:3), 거리끼다(롬14:21). [명] 병자(막 6:56, 요 5:3,7, 6:2), 병(눅 4:40), 약한 자(고전 8:9, 11, 12), 연약한 자(롬 14:1, 2).
- 신약 성경 / 33회 사용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So then each one of us will give an account of himself to God.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베드로전서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갈라디아서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전도서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 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8:23-35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누가복음 16: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포렌식(Forensics)’
고대 로마의 포럼(Forum)과 공공(Public)이 합성하여 나온
라틴어 입니다.
포렌식이란 범죄수사와 관련된 모든 과학기술을 의미합니다.
특히 요즘은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s)'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이는 컴퓨터, 스마트 폰, 각종
전자기기 같은 디지털 증거물을 분석하여 범죄의 증거를 수집하는 과학수사 기술입니다.
마치 시신을 부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이 사람이 자살을 했는지, 타살을 당했는지 혹은 자살을 위장한 타살을 당했는지 시체를 부검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디지털 포렌식 수사를 하면 삭제 된 정보까지 다 회복시켜 범죄행위를 낱낱이 알 수 있습니다.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무엇보다도 자기의 쓰던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없애거나 포렌식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기기를 불능화 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수사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범죄자의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거기에 기록이 다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범죄 증거를 찾기 위해 지문 채취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디지털 포렌식 수사가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펜실버니아 물리 통계학 박사이시고 명지대의 박영아 교수란 분은 사전투표와 본 투표간의 격차가 나오는 확률은 1000개의
동전을 던져서 모두 한 쪽만 나오는 확률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통계학 명예교수시고 한림원 원장인 한국 통계학의 거장
박성현 교수는 이번 선거의 사전투표와 본 투표율의 차이는 신이 작정을 하고 도와줘야만 나오는 수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월터 미베인이란 미국의 학자가 있습니다.
예일대와 하버드대를 나오신 분이고 현재 미시건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하시고 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부정선거 탐지 전문가입니다. 지난 미국 대선 때에도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 측에서 부정선거를
의심하고 이 분에게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러자 이 분이 “이번 선거는 부정선거가 아니다.”라고 연구의 결론을 내림으로 부정선거 논란을 잠재운 분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과거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부정선거를 8건이나 발견했는데 모두 사실로 들어났습니다. 특히 이 분의 부정선고 폭로로 볼리비아에서는 대통령이 사임을 하기도 했고, 콩고를 비롯해 이라크도 폭동이 일어나 선거가 다시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최근 한국의 총선이 ‘사기(Fraud)’라고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전(2020년 5월
10일)에는 한국 총선에 관한 2차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국의 총선은 “사기로 조작이
되었다(fraudulently manipulated)“라고 해서 큰 파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총선에서 낙선한 분이 “이거 이상하다. 확인해 보자.” 하고 법원에 증거 보전 신청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개표기, 개표기 제어용 컴퓨터, 선거 관리용 서버를 보존해달라고 했는데 기각이 되었습니다.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컴퓨터 서버를 어디에서 임차했는데 5월 1일에 그 서버를 돌려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서버를 돌려주는데 포렌식 수사를 아예 할 수 없게 ‘디가우징(?)’이나 무식하게 드릴로 뚫어서 파기한다고 합니다.
하여간 범죄자는 완전 범죄를 하려고 어찌하든지 자기의 범죄 증거를 없애려고 하고 반대로 수사관은 범죄의 단서와 증거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법정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을 내 자신과 한 번 대입해 봅시다. 내가 죄를 저질렀습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 죄를 저지르는 죄인들입니다. 그 죄가 발각되면 큰일 납니다. 죄가 탄로 나면 명예도 잃고, 돈도 잃고, 감옥도 가야되고, 어쩌면 사형도 당할 수 있습니다. 고로 나는 죄를 부인해야 합니다. “나 안 그랬어요. 모르겠는데요.” 오리발을 내밀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이때 나를 수사하는 수사관이 증거 없이 “야, 너가 죄를 저질렀잖아.” 하고 범죄자와 범정에서 말싸움만 해가지고는 안 됩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만약 범죄자가 역적모의를 했다면 역적모의를 한 사람들의 통화 기록을 가지고 와서 법정에서 공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증거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사람들을 심판하여 지옥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이 미련한 놈아!” 하고 욕을 하고 무시하면 그 말 한 마디에 심판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 목마를 때 물 한 컵을 준 것이 있으면 그에 대하여 상급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때 벌을 받는 자나 상급을 받는 자가 너무 오래 된 이야기이기에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과거에 내가 남에게 “이 미련한
녀석아!”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과거에 내가 남이 목마를 때에 냉수 한 컵을 대접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포렌식 수사를 통해 이러한 기록들을 다시 백업하여 공개까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상벌에 대한 심판이
누구도 인정할 수 있는 정의로운 심판이 되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로마서 14:10-12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베드로전서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이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하실 때 우리는 “주여, 저는 저의 죄를 모릅니다.
기억이
전혀 안 납니다.
저는 치매 환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아- 실지로 기억이 안 나니까요. 이때 하나님은 증거를
대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란 것을 끄집어냅니다. 마치 디지털 포렌식 처럼 지워진 기억을 되살려냅니다.
그것을 우리가 보면 도저히 죄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고로 “주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스스로 자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직고하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먼저 직고하는 겁니다. 즉 미리 회개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아주 원초적인 복음입니다. 세례 요한도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도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백하면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용서를 받습니다. 천국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차피 들통 나고 직고해야 하는 죄를 자꾸 숨기려고 하고 오리발을 내밀면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회개를 미루면 미룰수록 재앙은 더 커지게 됩니다. 반면 회개가 빠르면 빠를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집니다. 가장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하고 오리발을 내미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죄인이라고 말씀했는데 나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하면 도리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괘씸죄가 추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 죄를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는 것이지 정죄하려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고로 지혜로운 자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모든 죄를 청산하고 갑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죄를 청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욕심쟁이는 여전히 욕심을 부리고, 교만한 자는 계속 교만하고, 불평하는 자는 계속 불평하고, 못된 자는 여전히 못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때 자기 죄를 청산하고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겪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자기 죄를 그쳤음이라.” 사람이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에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고난을 당하거나 육체의 고난이 임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죽을 때 병들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대부분 육체의 고통이 따릅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그 동안 지은 죄를 철저히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고 천국에서는 의인의 상급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경에 보면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의 고통이 오고 병들 때에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죄를 그쳤습니다.
그러자
전염병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땅을 고치셨습니다.
즉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므로 하나님의 치료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이 땅에서 하나님께 직고하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심판의
자리에서 직고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변화가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취조하는
수사관처럼 여겨졌으나 이제는 나의 죄를 변호해주는 변호사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호를 들으시고 그 죄를 용서해주는 판사입니다.
그리고 그 판사 분은 다름 아닌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늘 기도하며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을 직접 보고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오늘은 이랬어요. 이 사람을 만나서 이랬고요. 이 일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아버지가 순간마다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니 항상
고마워요. 이제 잠 좀 자려고 합니다. 꿈속에서도 가르쳐 주실 것 있으면 한 수 가르쳐 주세요... 고주알 메주알... 이러쿵
저러쿵...”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직고해야만 합니다.
심판을 당할 때가 되어서야 직고하려면 너무 당황스럽고 위험합니다.
죄는 미리미리 이
땅에서 가장 빠르게 직고하므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정하신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를 날마다 직접 해야
합니다.
무엇을 직접 하나님께 고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은 솔직하고 정직하게 고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고하십시오.
너무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고, 격식을 차리며 어색하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아들과 함께 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고하면 하나님은 또한 직접 들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고함으로 이 어지러운 세상 중에서도 큰 위로와
잔잔한 행복을 얻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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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로마서 13:8)
빌린 돈은 갚을 수 있어도 받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
χρόνος, ου, ὁ 5550
χρόνος, ου, ὁ 5550
1. 시간, 2. 유예발음 / 크로노스(chrŏnŏs)
- 어원/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때(마 2:7, 행 1:7, 벧전 4:2), 시대(행 17:30), 얼마간(행 19:22), 시간(11:32),
기회(계 2:21), 동안(막 2:19), 기한(눅 1:57),
시대(행 17:30), 항상(행 20:18), 날(행 27:9), 영세(롬 16:25).
καιρός, οῦ , ὁ 2540
καιρός, οῦ , ὁ 2540
발음 / 카이로스(kair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때(마 8:29, 눅 8:13, 딤후 3:1), 날(마 16:3, 눅 1:20, 고후 6:2), 세월(골 4:5), 연대(행 17:26), 틈(행 24:25), 현재(롬 8:18, 히9:9), 기회(갈 6:10), 항상(엡 6:18).
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신약 성경 / 86회 사용
사랑의 빚이란 예수를 영접한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잊지 말자!
엄마가 물건을 사는 동안 그는 가만히 서서 체리 파는 할아버지 앞에 놓인 체리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인 할아버지가 "먹고 싶으면 한 줌 집어 먹으렴"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가만히 할아버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카네기의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한 줌 집어도 돼." 라고 말했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체리를 한 움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제서야 고맙다고 말하며 두 손으로 체리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어머니는 카네기에게 왜 할아버지가 집어주기 전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카네기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손이 저보다 훨씬 크니까요"
할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잊을 수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자!(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단계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웃의 영역에 침범하지 말라
성의 성역, 생명의 영역, 물질의 영역, 마음의 영역에 대해서 인정하라고 합니다.
율법을 완성하라(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마태복음18:23-35
하나님 나라는 자기 종들과 회계를 하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습니다. 왕이 회계를 시작하니, 1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며 애원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당장 갚아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라며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몰차게 몰아붙여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습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사실을 다 일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당장 불러다 놓고 말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으로,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기준은 이 지상에 현존하는 사회법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용서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 종들은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자들’을, 그리고 ‘회계’는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 결산하는 ‘심판의 자리’를 의미합니다.(고후5:10)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라 선악간에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왕이 회계를 시작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가 끌려왔다고 했습니다.
1달란트는 당시 순금 34kg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합니다.
그러므로 1만 달란트는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평가됩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유대 전역에서 거둬들인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1만 달란트는 하나님께 대해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큰 죄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보면,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헬라어로는 “우리에게 빚는 자를 탕감하여 준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를 갚아야 하는 ‘빚’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기 전에는 죄로 남아 있습니다. 빚은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지만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갚아 줄 수도 있습니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됩니다.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부채를 채권자로부터 탕감받을 수 있듯이 죄도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되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십니다.(사 43:25)
하나님께서 정하신 죄에 대한 법은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하심으로 인간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사”, 곧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영생,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엡1:7) 인간이 죄 사함을 받아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을 ‘의인(義認)이라고 합니다. 이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2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일만 달란트 빚는 자가 숨어오다가 발각되어 끌려왔습니다. 그에게 왕은 그 종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과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는 앞서 말씀드린 엄청난 금액으로 그 종이 자신을 비롯해서 가족들과 가진 모든 것을 다 처분해도 도저히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노예 값은 기껏 많아봐야 10분의 1달란트 수준 이하였기 때문입니다. 다 갚으라는 왕의 명령에 종은 끝내 왕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을 기다려 주시면 다 갚겠다고 호소했지만 이는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왕의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보려는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은 이를 불쌍히 여겨 완전히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종의 간절한 호소에 감동되기보다는 오로지 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 빚을 탕감해주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죄인의 간청에 따르기 보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그야말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단번에 죄를 완전히 탕감, 사해주신 것입니다.(롬8:33) 이같이 죄인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죄 사함을 위해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요일4:10)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왕에게 전혀 상환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주시면 다 갚겠노라며 간청했던 것처럼,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진실히 구하는 간청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간청함도 없이 탕감해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용서하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빌지도 않았는데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누가복음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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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예배(로마서 12:1)
로기코스 라트레이아
* 3050. 영적인(λογικός)
λογικός, ἡ, όν 3050
발음 / 로기코스(lŏgikŏs)
어원 / 305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영적(롬 12:1), 신령한(벧전 2:2)
- 신약 성경 / 2회 사용
* 2999. 예배(λατρεία)
λατρεία, ας, ἡ 2999
발음 / 라트레이아(latrĕia)
- 어원/ 300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섬기는 일, 예식(요 16:2, 히 9:6), 예배(롬 9:4, 12:1), 섬기는 예법(히 9:1)
- 신약 성경 / 5회 사용
* 3000. λατρεύω
1. 섬기다, 2. 예배하다
- 어원 / 미래 λατρεύσω, 제1부정과거 ἐλά- τρευσα, λάτρις ‘고용된 하인’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섬기다(마 4:10, 행 7:7, 딤후 1:3), 봉사하다 (빌 3:3), 받들다(행 26:7)
- 신약 성경 / 21회 사용
-
4983. 몸(σῶμα)
σῶμα, ατος, τό
발음 / 소마(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15:37, 38, 40), 종(계 18:13).
- 신약 성경 / 142회 사용
* 4982. σώζώ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 어원 /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구원하다(마 1:21, 요 12:27, 딤전 1:15), 구원 받다(마 9:21, 행 14:9, 딤전 2:4), 구원을 얻다
(마 10:22, 요 10:9, 고전 1:18),
구하다(막 3:4, 눅 6:9, 9:56), 보전하다(눅 17:33), 낫다(요 11:12), 성함을 얻다(막 6:56), [명] 구원(행 27:20).
- 신약 성경 / 107회 사용
-
* 육체(σάρξ, σαρκός)
σάρξ, σαρκός, ἡ 4561
발음 / 사르크스(sarx)
- 어원/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 관련 성경 / 몸(마 19:5, 막 10:8), 육체(마 24:22, 요 8:15, 고후 1:17), 육신(마 26:41, 롬 1:3,
딤전 3:16), 살 (눅 24:39, 요 6:55, 56),
육정(요 1:13), 육(요 3:6, 6:63, 고전 15:50), 골육(롬 11:14).
- 신약 성경 / 147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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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사도(로마서 11:13)
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 그러므로 / οὖν 3767
발음 / 운(ŏun)
어원 / 3756과 445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그런즉(마 1:17, 롬 3:31), 그러면, 이에(요 1:22, 2:18), 거기에 대해서(요 4:9, 6:53), 실로 그러나(마 3:8, 요 9:18),
그러므로(마 18:4).
- 신약 성경 / 501회 사용
-
* 사도 / ἀπόστολος 652
ἀπόστολος, ου, ὁ
3. 하나님의 사자
발음 / 아포스토로스(apŏstŏlŏs)
어원 / 64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사도(마 10:2, 눅 17:5, 롬 1:1), 사자(使者)(빌 2:25), 보내던 사람(행 15:33).
- 신약 성경 / 80회 사용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를 증거하기 위하여 다른 사도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습니다.
교회의 기둥이라 불리는
사도들과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며, 예수의 구제자인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한 일 등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으며 베드로와 동등한 책임과 임무가 주어졌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교훈의 권위를 세우고 이신득의의
교리를 강조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1.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감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복음을 소개하였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의 받은 복음은 다른
사도들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계시받은 것이기에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에게 증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이방인들에 관해서는 다른
사도들보다 많은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야고보와 게바를 만나고 십사 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을 만났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전하는 교훈이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a. 이방인에게 나타난 표적을 고함(행 15:12)
b. 사도들에게 바울을 소개했던 바나바(행 9:27)
c.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함(행 15:2)
2.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을 받은 바울
바울은
베드로가 할례자의 복음 전도를 맡은 할례자의 사도라면 자신은 이방인의 전도를 맡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이
베드로의 사명과 동등함을 밝혔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자신과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사도들도 인정하였으므로 갈라디아에 있는 성도들도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고 교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a.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행 2:14)
b. 이방인의 사도직을 영광스럽게 여김(롬 11:13)
c.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함(고전 15:10)
게바를 책망한 바울
1. 게바의 실수
바울은
게바가 실수하였을 때 자신이 그를 책망한 사건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교훈의 권위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하였고, 그로 인해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도 실족하여 외식에
유혹되었음을 밝혔던 것입니다.
게바의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치 않은 행위였는데 이는 복음을 따르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의 율법을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직을 대표하는 자로서 모범을 보 여야 했으나 오히려 할례자들을
두려워함으로 실수를 범하고 다른 사람들도 실족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a. 율법이 금한 이방인과의 교제(행 10:28)
b. 유대인들의 비방을 두려워함(행 11:2-3)
c. 유익하지 못한 규례(히 13:9)
2. 바울의 책망
게바의
실수를 목격한 바울은 그를 심하게 질책하였습니다.
이방인들로 유대인과 같이 행할 것을 요구하여 복음의 걸림돌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비록 베드로가 예수의 수제자로서 큰 권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복음 진리 앞에서는 그의 행위가 책망받아야 함을
증거함으로써 율법주의적 행위에 대한 경계를 주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a. 예수 안에서 할례가 무익함(갈 5:6)
b. 범죄자를 꾸짖음(딤전 5:20)
c. 복음에 합당한 생활(빌 1:27)
이신득의의 구원
1.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교훈하면서 율법주의자들의
거짓 교훈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다시 율법을 행하면 스스로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서로 공존할 수 없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a. 율법으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함(행 13:38-39)
b.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됨(롬 3:27-28)
c.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빌 3:9)
2. 믿음 안에서 사는 성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도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율법에 얽매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신학 사상은 그의 글에서 자주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용어사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a.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삶(롬 6:11)
b.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함(롬 6:4)
c.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김(롬 7:6)
결론
바울의
사도들에 대한 행동에서 진리의 확신을 갖는 자의 담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비록 교회의 기둥과 같은 자들 앞에서도
그리스도께 받은 진리에 대해서 만큼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진리를 확신하는 데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게 잡아 이러한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거짓 교훈이 공격해 올지라도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단호히 대처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어떠한 시도 앞에서도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복음을
변증할 있는 용기와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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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마서 10:13)
1. 부르다, 2. 명령하다
발음 / 에피칼레오마이(ĕpikalĕŏmai)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εκάλεσα, 미래 중간태 ἐπικαλέσομαι,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πεκαλεσάμην, 완료수동태 ἐπικέκλημαι, 완료분사 ἐπικεκλ- μέηνος, 과거완료3인칭단수 ἐπεκέκ - λητο,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πεκλή- θην, 1909와 2564에서 유래
[명] 이름(마 10:3), 별명(행 1:23).
신약 성경 / 30회 사용
이름(ὄνομα). 3686
ὄνομα, ατος, τό
발음 / 오노마(ŏnŏma)
신약 성경 / 231회 사용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그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면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진짜로 주여, 주여 라고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의미를 알고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가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살려달라고 부르는 그런 부름이 아닙니다.
미리 주님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불러야 합니다.
1.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기들 스스로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창세기 4장 25-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셋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경건한 후손인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왜 하필이면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에노스라고 지었을까요?
그들은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100여년쯤 살면 죽으니까 당연히 인간이 죽는 줄 알지만 그 때는 1000여년씩이나 살던 시대이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잘 몰랐던 시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인생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다 압니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고 매일매일 사람들이 죽어가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이 참 이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함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죄에서 나를 건져주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데 그 이름을 불러야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렇게 바빠서 뭐가 그렇게 급해서 죽음 앞에 서 있는 인생이 그 죽음의 절벽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2.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알고 그 죽음에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들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가지 종교들도 만들어 보고 훌륭한 사람을 교주로 세워보기도 하면서 이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간절하게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한 길인데 다른 길이 없는데 대강 적당히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3.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전파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에 와서 무엇을 듣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바른 설교를 듣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바르지 못한 엉터리 설교를 듣는 사람은 엉터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교인들의 믿음은 엉터리들이 많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엉터리 설교를 하니까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다 엉터리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잘살게 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하면 100% 다 응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착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믿습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편리하게 만들어 낸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인들 모으려고 목사가 편한 대로 편집한 것이지 참 설교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도 착한 일 많이 하면서 살아도 성공하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의 교인들이 많아도 세상은 더욱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실수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죄도 지으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노력을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내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이 오히려 더 나쁜 짓만 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게 합니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이 죄악 된 삶에서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을 믿는 믿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습니다.
그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4.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많은 시들이 주님의 이름 하면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8:1)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시63:4)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시86:12)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나의 평생에 주의 이름을 송축하고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주의이름에 영광을 돌리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내 손을 들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찬양이 없이 이런 감사 없이 이런 감격도 없이 환난 날에 구원만 받으려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염치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죽음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 사람도 의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심판을 면할 수가 없고 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구원을 받고 크고 작은 심판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일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주님 밖에 없음을 알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날 대신 죽어주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의 위대함 그 이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우치는 말씀으로 구약 요엘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2:32)
첫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 이름을 부를 때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둘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간구하는 것입니다.
“부르다”는 헬라어 단어는 “에피칼레오마이(ἐπικαλέομαι)” 라고 하며, “부르다, 일컫다, 호소하다, 간원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부르는 것은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속으로 할 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들리게 해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주님을 불렀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것까지 예언했습니다(욜 2:32, 습 3:9, 슥 13:9).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또한 신약의 성도들에게 발견하는 일상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오순절 날 성도들은 주의 이름을 함께 불렀으며 그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강한 바람과 같고 불과 같은 성령이 임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신약의 모든 성도들도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고전 1:2∼3)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주의 이름을 부르던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은(행 9:14)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바울이 되어 그도 역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침묵하는 그리스도인”이며, 다른 하나는 “부르짖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믿음의 사람은 부르짖음으로 응답 받고 그 응답에 따라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습니다.(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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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로마서 9:27)
κατάλειμμα, ατος, τό 2640
발음 / 카타라임마(katalĕim- ma)
어원 / 2641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남은 자(롬 9:27)
* 2641. καταλείπω
καταλείπω 2641
발음 / 카타레이포(katalĕipō)
어원 / 미완료 κατέλειπον, 미래 κατα- λείψω, 제1부정과거 κατέλειψα, 제2부정과거 κατέλιπον, 완료수동 부정사 καταλελεῖφθαι, 완료 수동 분사 καταλελειμ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κατελείφθην, 2596과 3007에서 유래
놓다(행 6:2), 머물다(살전 3:1)
신약 성경 / 24회 사용
남은 자(שאר, λειμμα, λοιπος, remnant) 사상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아르’(שאר)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레임마’(λειμμα) 혹은 ‘로이포스’(λοιπος)라고 하고, 영어로는 ‘렘넌트(remnant)라고 합니다.
‘남은 것’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노아 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여 물로 심판 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노아와 그 식구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 6:6-8, 눅 17:26-27, 벧전 3:20).
롯 때에도 소돔성이 사람들이 타락하여 불로 심판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롯과 그 식구들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19:29, 눅 17:28-29).
아합왕 때에도 북이스라엘이 아합왕과 이세벨의 학정으로 모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엘리야와 7,000명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왕상 19:18, 롬 11:2-5).
포로기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한 가운데 사로잡혀간 자들 중에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앙을 가진 자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사 6:13, 10:20, 11:10-12, 렘 23:1-4, 31:7-8, 단 1:8-9).
하나님은 음란과 우상숭배로 타락했을 때 심판을 하면서도 언제나 신앙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신실한 신앙을 가진 ‘남은 자’를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엘 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28-32, 행 2:1-21).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9:27, 29).
사도 요한은 종말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 6:6).
구약시대에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여 사로잡혀 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부흥시켰습니다.
신약시대에 모두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로마의 박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성령의 충만하여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켰습니다.
그처럼 종말에도 사탄의 온갖 핍박과 유혹에도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참 생명력을 가진 ‘여자의 남은 후손들’ 곧 ‘남은 자’와 더불어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선 것입니다.
‘바다 모래 위’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는 장소라기보다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기 위해 여자의 남은 자손을 공격하게 할 짐승을 부르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13장에 보면 두 짐승이 나옵니다.
1-10절에는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짐승이 나오고 11-18절에는 땅에서 두 뿔을 가진 짐승이 올라옵니다.
용이 그 두 짐승을 이용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합니다. ‘용’은 사탄을 상징하고, ‘바다에서 나온 열 뿔 달린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땅에서 올라온 두 뿔 가진 짐승은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상징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을 의미하고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는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울 자들을 남겨 놓습니다. 사탄은 그들이 구원역사에 생명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을 앞세워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남은 자‘들은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거나 미혹당하지 않고 신앙을 지킵니다.
남은 자들은 증거를 가지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이른바 ‘남은 자손’은 어떤 성격을 가진 자들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분인 것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양보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며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증언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주되심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양보하지 않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이 이용하는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종말에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 쓰임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1:3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했습니다 (11:5-6).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영광을 누립니다. 요한계시록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고 했습니다 (14:12).
신약 복음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로마서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는 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해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환난 가운데서도 보호하고 원하시는 때에 영적 권세를 주어 사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양보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모두 힘든 가운데 있지만 남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신실한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목적 하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목적 때문에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은 현찰이 아니라 약속어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장장 25년이 걸렸습니다.
이삭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출애굽 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믿음이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을 지금도 신뢰하며, 미래에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믿음이란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은 인간의 바람이 아니라 믿음에 기초한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약속의 성취를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닻을 내리며 미래에 대해 이같이 확신하는 것을 성경은 소망이라 일컫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삶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시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드러내 믿음을 완성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게 하심으로 소망을 완성합니다.
이제부터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존재해 왔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믿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대다수에게서 일관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기란 힘듭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믿음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통해 유지되고 전달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면 새 이스라엘인 이 시대의 교회 모습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전 538년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길에 오릅니다. 감격스런 귀환이었습니다. 믿음이 주는 교훈을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소망을 품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이 교훈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터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을 기꺼이 그리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백성을 창조하시기 위해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역경 속에서 자신들의 창조주이시며 공급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믿음의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직후 광야에서의 이스라엘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 도달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끝없이 흔들렸습니다. 유혹이 밀려올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신들과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을 추종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드러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 중 남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다는 사실입니다(시 106:6-43, 렘 7:23-26, 겔 20:5-31).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경고하셨듯이 이스라엘은 언제나 “패역한 백성”이었습니다(겔 2:3).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상황적으로는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셨지만, 영적으로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신 29:4, 사 6:9-10, 롬 11:7-8, 고후 3:14).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듯이, 불신에 대한 형벌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시내 산 언약 또한 깨진 것입니다(출 16:28, 32:1-20).
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시고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신 것처럼(창 3:15,20), 바벨론 포로 생활 또한 이스라엘 역사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언약을 파기한 후에 처음으로 선언된 진리, 곧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시 103:8)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을 멸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패역하였기에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보존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
그러한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 신실한 소수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당신의 약속을 이어가셨습니다. 불신이라는 죄에서, 불신으로 야기된 자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렘 31:1-40, 겔 36:22-38).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이스라엘을 깨끗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사 48:9-11). 바벨론 포로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진노는 “남은 자들”을 불러 깨끗케 하였고, 그들의 믿음을 튼튼하게 세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들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무리들이 회개하면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사1:19-27, 미 7:18-20).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회개와 관계없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남겨두십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지만 그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을 제외한 이스라엘은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습니다. 그들은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3:3-4).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통해 이어집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해나가십니다.
남은 자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했을 때 조국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538년의 귀환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방의 왕인 고레스의 정치적 책략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슥 1:1-4, 사 44:28-45). 그들의 귀환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제1차 귀환이 너무 미미했기에 에스라는 그보다 더 많은 무리를 이끌고 2차 귀환에 오른 스룹바벨에게 자신의 권한을 넘겨 주어야 했습니다(슥 1:11-2:2).
하나님께서 찬란히 빛나는 독립국가로 세우셔서 이방 민족들을 다스리게 할 것이라는 기대는 보잘것없는 도시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것도 주변 세력들과 투쟁을 벌인 끝에 폐허 위에 간신히 세워졌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바사 제국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실은 약속과 너무 달랐습니다. 해가 갈수록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으며, 공동체의 사기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 재건 사업도 22년 동안의 온갖 고생 끝에 주전 516년에야 가까스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사 제국의 도움을 통해서였습니다(슥 6:1-12). 솔로몬 성전을 익히 알고 있던 사람들은 새 성전의 규모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습니다(슥 3:1-6).
그런데 예루살렘은 어수선하고 새 성전은 보잘것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개와 스가랴와 같은 예언자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선포했습니다(학 2:5). 학개 선지자는 조금 있으면 하나님께서 땅과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시고 모든 나라의 보물을 성전에 들이실 것이며 그 성전을 솔로몬의 옛 성전보다 더욱더 영광스럽게 하실 것(학 2:6-9)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스가랴도 같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무리들은 소수였지만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학 1:12-14). 현재의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케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슥 8:2-8). 믿음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의 하나님의 백성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역경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려는 처절한 투쟁을 기록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학 1:1-2:9, 슥 1:16, 4:6-10, 6:15). 한쪽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이러한 약속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약속을 지키기 시작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성전이 건축되었고, 예루살렘은 차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 신실한 남은 자들은 믿음을 이어갔습니다. 상황을 바라보고 믿음을 저버리기보다 기대의 방향을 미래로 바꾸었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들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불완전하게 성취될지라도 훗날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습니다”(히 11:1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에 기초합니다. 따라서 믿는 자는 현재 성취되지 않은 약속들이 미래에는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경을 당할 때 소망은 “영혼의 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확신이 서면 현재의 고난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망을 갖는 것은 순진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를 알기” 때문입니다(딤후 1:12).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를 변함없이 믿으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하셔서 백성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가르치셨듯이, 지금도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자를 창조하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십자가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의 남은 자들처럼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성취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겪는 시련은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구속을 더욱 사모하게 만듭니다. 고난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 저 세상으로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 앞에 놓인 것을 굳게 확신할 때 고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4)는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이사야 10:20-23에서 기억해야 할 단어는 남은 자 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을 추구하며 자기의 욕망을 좇는 이들은 패역한 백성이 되어 파멸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오직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약속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남은 자 구원 (로마서 9:27-33) The Salvation of the Remnant
1. 희망의 소수 (The Minority of Hope) (Romans 9:27-29)- 포로의 ‘남은 자’ (The remnant from the captivity)
- 고난당하는 소수 (The suffering minority)
- '거룩한 씨’ 희망 (‘The holy seed' of hope)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이사야 37:31-32).
2. 믿음의 소수 (The Minority of Faith) (Romans 9:30-33)
- 믿음은 인간의 책임 (Human responsibility)
- 행위가 아니라 믿음 (Faith, not works)
- 거침돌 혹은 디딤돌 (Stumbling block or stepping stone)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8: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희망이다.
You are saved by believing in Jesus Christ, who is the only hope of humanity.
남은 자 구원 (로마서 9:27-33)
하나님이 유대인의 경우, 예언하신 대로 ‘남은 자’만 구원하셨습니다.오늘 본문은 ‘남은 자’ 구원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본문 27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0장 22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시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망할 때에 오직 ‘남은 자’만 그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도 이스라엘 대중(majority)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남은 자(minority)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아들 ‘스얄야숩’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는 진리를 전했습니다(사 7:3).
‘남은 자’는 소수입니다. ‘남은 자’는 고난당하는 소수입니다.
우리는 ‘남은 자’란 말만 들으면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일까, 다수일까 하는 질문부터 던집니다. 우리가 ‘남은 자’만 생각하면 소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생각해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계시록 7장 9절을 보면 구원받을 사람들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즉 다수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잘 모릅니다. 우리가 다만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계 20:15; 21:27).
‘남은 자’ 구원 문제를 다룰 때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소수인가, 다수인가 하는 문제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남은 자’는 고통당하는 소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도 고통이었습니다. ‘남은 자’ 구원은 고통당하는 소수의 구원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남은 자’입니다. 6.25사변 때는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손동신 손동인이 공산당의 핍박에 굴하지 않은 ‘남은 자’입니다.
초등학교 때 약 60명 급우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등치 큰 제 친구 김모씨는 저를 늘 핍박했습니다. 제가 땅바닥에서 뭔가를 그리고 있을 때 그는 제 머리에 오줌을 싸기도 했습니다. 저는 군대생활 중에도 신앙을 지키느라 두들겨 맞았습니다. 내무반장은 자기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작은 성경책으로 제 머리를 툭툭 치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그 때 ‘나 혼자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으실 때에 ‘나 혼자네!’라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남편과 시댁 어르신들이 박해하실 때에 ‘나 혼자네!’ 하는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따돌릴 때에 ‘나 혼자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괴롭지만 낙심하지 마십시오. 외롭지만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왕 중 왕’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VIP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신의 눈동자같이 지키십니다(슥 2:8). 여러분은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총애하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예언을 28절 말씀대로 “이루시고 속히 시행”하실 것입니다.
29절에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장 9절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씨”라는 단어입니다. “씨”는 얼른 보면 한 알이지만, 그 속에 수많은 열매가 들어 있습니다. ‘남은 자’는 소수이지만 그 속에 앞으로 구원받을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남은 자’에게 벅찬 희망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루터기’라는 말도 사용했습니다. 이사야 6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둥치가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아 있어도 후에 그 그루터기가 움이 돋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남은 자’는 ‘거룩한 씨’와 ‘그루터기’입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여기에 감격과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혼자 남아 있지만, 앞으로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거야. 내가 지금 우리 가정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고 박해를 받지만, 앞으로 많은 우리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을 거야. 나의 많은 후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을 거야.”
제가 양지 캠퍼스에서 가르칠 때에 어떤 여학생이 자신은 ‘나무의 썩은 그루터기 같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학생은 썩은 그루터기에서 움이 돋는 것을 보고 희망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썩은 그루터기가 움이 돋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집안의
‘거룩한 씨’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친구들 중에 ‘그루터기’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족들과 여러분의 친구들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37:31-32).
하나님이 ‘남은 자’를 구원하시는 열정은 하루 밤에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시체로 만드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민을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을 자신의 눈동자 같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남은 자’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바울은 위에서 다수가 멸망하는 중에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그 남은 자를 추수의 ‘씨’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30절부터는 시각을 달리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결코 인간의 책임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결코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공존합니다.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의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켰는데 이제 여기서는 인간의 책임을 부각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결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기계의 바퀴들이 반대 방향으로 돌지만 공동의 목적을 이룹니다. 마찬가지로 얼른 보면 반대되는 진리도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이룹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순종하는 인간의 책임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 30-31절을 보면 스스로 의(義)를 이루겠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공을 쌓지도 않고 도를 닦지도 않은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의 행위를 의지하다가 거침돌에 부딪혔습니다. 33절에는 이사야 28장 16절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멸망의 수치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는 예수님에게 넘어가서 예수님이 처리하시고, 예수님의 의는 우리에게 넘어와 우리의 의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義)의 전가(imputation)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의를 추구하던 유대인들은 거침돌에 걸려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침돌(stumbling block)이면서 동시에 디딤돌(stepping stone)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의롭게 사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거침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디딤돌입니다.
지금도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여전히 거침돌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내가 뭔가 좋은 일을 해야 구원을 받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저 받기만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는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거침돌에 걸려 넘어집니다. 스스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내시지 않으면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신 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피난처(sanctuary)입니다(사 8: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자들이 의에 이르고 의를 추구하는 노력을 한 자들은 의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길은 인간들의 길과 너무도 다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의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이것은 이상해 보여도 하나님의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인간의 길과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의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은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지칠 대로 지쳐서 간수들이 자신을
죽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낯선 사람이 그의 옆에 앉았습니다.
솔제니친은 전에도 그를 본 적이
없었고 후에도 다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낯선 사람은 막대기로 땅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솔제니친은 그가 그린 십자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면서 “나는 저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음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솔제니친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인간의 구원과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20세기 문학계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인
솔제니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난당하는 소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남은 자’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는 ‘거룩한 씨’입니다.
‘남은 자’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남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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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의 영(로마서 8:15)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회개한 강도와 다른 하나는 회개하지 않은 강도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강도라고 합니다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레스테스(λῃστής) 폭도"라고 합니다.
강도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범과 같은 죄인을 말합니다.
두 명의 강도 중에서 회개한 강도를 "디스마" 라고 하고 회개하지 않은 강도를 "게스다"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경이란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λῃστής, οῦ, ὁ 3027
발음 / 레스테스( lēstēs)
어원/ ληΐζομαι ‘노획하다’에서 유래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당시 사람들의 조롱을 살펴봅시다.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태 27:39-40).
(대제사장, 서기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빠하시면 저를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두 강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회개한 강도)
우리는 죄값에 의해서 십자가 형을 받지만 이 사람은 죄가 없도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누가복음 23:42)
종의 영(프뉴마 둘레이아스) πνεῦμα δουλείας
양자의 영(프뉴마 휘오데시아스) πνεῦμα υἱοθεσίας1절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There is no condemnation!
우덴 카타크리마(οὐδέν κατάκριμα)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신 로마서
3:10-12의 선언은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진리의 전제가 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 적게 지은 사람, 끔직한 죄를 지은
사람, 좀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 등으로 죄인들을 구별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밤중에는 촛불과 전등불이 그 밝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밝은 태양빛 아래서는 둘 다 아무런 존재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가진 의로움이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모든 인간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하신 율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두 강도 사이에 높이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는 사실인즉 저와 여러분이, 아니 전 인류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두 강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두 강도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한 강도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강도는
모든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웃고 욕하고 대적하는 마당에도 묵묵히 그 모든 모욕을 참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 이 분이야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 왔고 성경을 들어왔기 때문에 메시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습니다. 비록 강도가
되었을망정 태어날 때부터 강도였던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십자가에 달렸을 때 성령님께서 이 강도의 영안을 열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자 이 강도는 비로소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강도는 다른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을 때 그 동무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런 다음,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두 강도가 똑같이 흉악한 죄를 저질렀고 그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두 사람이 시작은 같았으나 그 결과는 천양지차가 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첫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를 향하여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네가
일생에 지은 죄도 많은데 마지막 죽어가면서까지 이 거룩한 분을 비방하다니 너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어떻게 당하려고
그러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믿음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마시듯 죄를 짓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존재하시며 불꽃같으신 눈으로 모든 인생을
살피십니다.
이 강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아무 준비도 없이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며, 바로 이 두려움이 그를 회개의 단계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유혹을 받아 죄 짓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엄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러분을 죄 짓는 자리에서 떠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를 구해 줄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러나 회심한 강도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예수님을 향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잠 14:27) 하신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자기가 받는 형벌을 정당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강도는 처음 십자가에 달렸을 때만 해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곁에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대하면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과연 자기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제 죄를 깨닫지 못하고 분위기에 편승해서 덩달아 예수님을 조롱하는 다른 강도를 보고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임금이 감옥엘 시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을 면담하면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죄수들은 하나같이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노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데 죄수 하나가
줄곧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는 정말 몹쓸 죄를 지었으므로 감옥살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임금은 그 회개하는
죄수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치면서 “너 같은 죄인은 결백한 사람만 있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바깥으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지옥에 가면 이곳저곳에서 ‘억울하다’는 소리가 진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대가를 달게 받습니다.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한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나중에 그가 빈털터리가 되어 들에서 돼지치기가 되어 쥐염 열매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드디어 회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아버지를 만나서 드린 첫 말씀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 지은 것을 원통히 여기고 눈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이 강도는 예수님께서 그를 저주하고 욕하고 비웃는 자들을 향하여 비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의 무죄하심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님께서 이 사람의 마음에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속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무죄성은 구세주의 기본적인 자격 요건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으므로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다 걸머지게 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당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복음서를 읽어보시고, 거기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시되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되 속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지니신 주님. 인격적이나 편협하지
않으신 주님의 모습을 대하면서 이 강도와 같이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네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감히 자기를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단지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만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기억하시든지 그것은 예수님께 다 맡겼습니다.
로마 당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 강도가 자기 영혼을 부탁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강도가 이처럼 예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생명이 남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처럼 이 강도에게 복스런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서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 들으면서도 마음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지내다가 멸망으로 떨어지는 마당에 이
강도는 십자가에 달렸던 짧은 시간에 구세주를 믿고 영생을 보장받았으니 복 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강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사정하고 애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말을 하는 데는 아무리 천천히 말할지라도 십 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강도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오랜 세월이 소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더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신 대로, 나사렛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으시는 부모님이 계시거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는 일단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할 때 처음에는 핍박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완고한
분들은 그러려면 부모 자식의 의리도 끊겠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계속 전하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병상에 누워서, 임종을 기다리면서 여러분이 전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게 될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강도가 지옥에 떨어지려던 순간에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비유컨대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무너진 건물 무더기 속에서 건짐 받은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과 받지 못한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더 큰
것입니다.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영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도 좀 더 늙어서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다 이 강도와 같은 행운을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가 따로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니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이라는 시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강도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던 그 순간이 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였으며,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 강도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리고 멸망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 강도의 믿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지상의 나라가 아니요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다른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이 세상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단지 육신의 삶만을
바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잘되고 윤택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여야 합니다. 로마서
14:17에 보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거룩한 나라요 영적인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이 땅의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연후에 이 땅의 축복도 구하십시오. 이 순서가 올바로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실된 성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강도를 통해서 우리는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둘 다 동일한 죄를 짓고
세상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순간에, 한 강도는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또
한 강도는 끝까지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다가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도 받아 누리지 못한다면 이처럼 아쉽고
후회막급한 일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구원받는데 우리의 공로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진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결과는 영생과 영벌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졌다고 가벼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대가로
지불하고서 얻은 것입니다.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3에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상에서 회심하고 구원받은 이 강도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이 강도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너무나
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님들이야말로 이 강도보다 수백배 수천배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강도는 불타는 건물잔재에서 겨우 건짐 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성도님들께서는 이미 구원을 보장받고서 영원한 천국의 상급을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이 큰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답게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시면서 봉사와 전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종의 영에 붙잡혀 시달리던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양자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후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주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지혜와 믿음을 더항 주시고
마지막까지 인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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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양자의 영
곤고한. ταλαίπωρος
ταλαίπωρος, ον 5005
발음 / 타라이포로스(talaipōrŏs)
어원/ 5007의 어간과 3984의 어간의 파생어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곤고한(롬 7:24, 계 3:17).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책망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새번역)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 신약 성경 / 2회 사용
* 로마서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깨달았노니 / εὑρίσκω
εὑρίσκω 2147
발음 / 휴리스코(hĕuriskō)
관련 성경 / 나타나다(마 1:18), 찾다(마 2:8, 눅 4:17, 요 1:41), 보다(마 2:11, 8:10, 막 14:37, 눅 8:35), 만나보다(눅 7:9), 얻다(마 10:39, 막14:55, 눅 15:32), 발견하다(마 13:44, 행 23:29), 만나다 (눅 2:46, 요 9:35), 보이다(눅 9:36, 행 5:23, 계 5:4), 이루다(히 9:12), 깨닫다(롬7:21), 발견되다(고전 15:15, 고후 5:3, 빌 3:9)
신약 성경 / 176회 사용
하나님의 율법의 기본 원칙은 무엇인가?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우리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율법은 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한다.
갈라디아서 2: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율법과 죄의 관계는 무엇인가?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모든 율법을 다 지킬 필요가 있는가?
야고보서 2:10-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계명을 지키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가?
요한일서 2:4-6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가?
로마서 3:27-31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613계명은 유대교에서 지키는 율법으로 유대민족의 출애굽과정에서 광야를 떠돌아다니던 시절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세분화한 것이다.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하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된 계명 248개와, "하지 말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 된 금지 계명 365개로 편집된 버전과 모세오경의 순서대로 편집된 버전이다.
성경순서대로 편집된 버전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1~3계명)
1.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
2. 모든 유대인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창 17:10).
3. 환도뼈의 큰 힘줄을 먹어서는 안 된다(창 32:32).
출애굽기 (4~114계명)
4.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출 12:2).
5.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니산 월 14일 오후에 흠이 없는 1년된 수양이나 숫염소를 잡아야 한다 (출 12:5-6).
6. 유월절 양으로 바친 제물은 니산 월 15일 밤에 먹어야 한다(출 12:8).
7. 유월절에 먹는 양고기는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된다(출 12:9).
8. 유월절 양고기는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출 12:10).
9. 유월절에는 누룩을 제거해야 한다(출 12:15).
10. 누룩없는 떡(무교병)을 니산 월 15일에 먹어야 한다(출 12:18).
11. 유월절 기간동안에는 누룩으로 만든 떡을 먹어서는 안된다(출 12:19).
12. 유월절에는 조금이라도 누룩이 섞인 떡을 먹지 말라(출 12:20).
13. 변절한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은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3).
14. 임시로 거주하는 타국인이나 고용된 타국인 품꾼도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3).
15. 유월절 희생 양의 고기는 집 안에서만 먹어야 한다(출 12:46).
16. 양고기의 뼈를 꺾어서는 안된다(출 12:46).
17.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유월절 양을 먹지 못한다(출 12:48-49).
18.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출 13:2).
19. 유교병(누룩있는 떡)을 먹어서는 안된다(출 13:3).
20. 유월절 이레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이나 누룩을 다 없애야 한다(출 13:7)
21.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유월절 저녁 식사 자리에서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출 13:8).
22.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해야 한다(출 13:13).
23. 나귀를 양을 통해서 대속하지 않으려거든 그 목을 꺾어야 한다(출 13:13).
24.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의 한계에 관한 규정(출 16:29).
25.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출 20:2).
26.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
27.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4).
28.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출 20:5).
29. 우상을 섬기지 말라(출 20:5).
30.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출 20:7).
31. 안식일을 기억하라(출 20:8).
32. 안식일에는 가족이나 종이나 객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일도 시켜서는 안된다(출 20:10).
33.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34. 살인하지 말라(출 20:13).
35. 간음하지 말라(출 20:14).
36. 도적질하지 말라(출 20:15).
37.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3).
38. 탐내지 말라(출 20:17).
39. 너희는 나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은이나 금으로 신들의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출 20:23).
40. 제단을 다듬은 돌로 만들어서는 안된다(출 20:24-25).
41. 제단에 올라가는 층계를 놓아서는 안된다(출 20;26).
42. "히브리 종은 일곱째 되는 해에 자유케 하라"(출 21:2).
43. 종의 보호에 관한 규정.
44. 주인이 아내로 취하려고 산 여종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그녀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야 한다(출 21:8).
45. 그녀를 다시 파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출 21:8).
46. 여종을 아들에게 주려고 샀으면, 그녀를 딸처럼 대하여 한다(출 21:9).
47.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출 21:12).
48.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출 21:15, 17).
49. 이웃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18-19).
50. 종을 상해하거나 죽였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20-21).
51. 소가 받아서 사람을 상해한 경우에 관한 규정(참조. 출 21:28-32, 35-36).
52. 소가 사람을 받아서 죽인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28-32, 35-36).
53. 구덩이에 짐승이 빠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1:33-34).
54. 도둑에 관한 규정(출 22:1-4).
55. 남의 농작물을 가축이 뜯어먹은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5).
56. 불을 내서 이웃의 농작물에 피해를 입힌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6).
57. 보관물에 대한 규정(출 22:7 이하).
58.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9).
59. 맡긴 집짐승이 다치거나 없어지거나 죽거나 맹수에게 물려 죽은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0-11).
60. 빌려 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을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4-15).
61. 처녀를 꾀어서 건드린 경우에 관한 규정(출 22:16-17).
62. 마술을 부리는 여자는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출 22:18).
63. 함께 살고 있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출 22:21).
64. 그들을 억압하지 말라(출 22:21).
65. 과부와 고아의 보호에 대한 규정(출 22:22-25).
66.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어야 한다(출 22:25).
67. 돈을 빌려주었으면 빚쟁이처럼 독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출 22:25).
68.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된다(출 22:25).
69. 재판장에게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0. 하나님께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1. 지도자들에게 욕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2:28).
72. 첫 것을 바치는 것에 관한 규정(출 22:29-30).
73. "들에서 맹수에게 찢겨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지 말라"(출 22:31).
74.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출 23:1).
75. "거짓 증언을 하여 죄인의 편을 들어서는 안된다"(출 23:1).
76.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출 23:2).
77.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에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출 23:2).
78. 다수를 따라야 한다(출 23:2).
79.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된다"(출 23:6).
80.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울려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내버려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 다"(출 23:5).
81.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된다"(출 23:6).
82. "거짓 고발을 물리쳐라. 죄 없는 사람과 의로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출 23:7).
83. "너희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된다"(출 23;8).
84. 안식년에는 농경지에 아무것도 심어서는 안된다.
85.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86.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불러서도(기억해서도) 안된다(출 23:13).
87. 다른 신들의 이름은 입밖에도 내서도 안된다(출 23:13).
88. "너희는 한 해에 세 차례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출 23:14).
89.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쳐서는 안된다(출 23:18a; 34:25a).
90. "절기 때에 나에게 바친 기름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도 안된다"(출 23:18b; 34:25b).
91. 첫 열매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바쳐야 한다(출 23:19a; 34:26a).
92.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된다"(출 23:19b; 34;26b).
93. 팔레스타인의 7 민족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된다(출 23:23).
94. 팔레스타인의 일곱 민족에 속한 사람들은 히브리인들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출 23:34).
95. "나에게 제물을 바치려거든, 너희는 흙으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다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너희의 양과 소를 바쳐라. 너희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내가 정하여 준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출 20:24).
96. "채들을 궤의 고리에 그대로 두고, 거기에서 빼내지 말아라"(출 25:15).
97. "그 상은 언약궤 앞에 놓고, 상 위에는 나에게 바치는 거룩한 빵을 항상 놓아 두도록 하여라" (출 25:30).
98. 증거궤 앞에 쳐 놓은 휘장 밖에 올리브 기름으로 등불을 밤에는 늘 켜 두어야 한다(출 27:21).
99. 대제사장의 예복에 대한 규정(출 28:2).
100. 가슴받이가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출 28:28).
101. 대제사장이 입을 옷은 목을 위하여 파 놓은 구멍의 둘레를 찢어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출 28:32).
102. 제사장만이 속죄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출 29:33).
103. 제사장은 아침 저녁으로 분향단 위에 향을 피워야 한다(출 30:7-8).
104. 분향단 위에다가는 향기로운 향을 피우는 일 이외에는 어느 것도 해서는 안된다(출 30:9).
105. 회막 세금에 관한 규정(출 30:13).
106. 제사장은 회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반드시 물로 씻어야 한다(출 30:19-20).
107. 성별하는 기름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규정(출 30:25)
108. 성별하는 기름은 아무에게나 부어서는 안된다(출 30:32a).
109. 성별하는 기름을 만드는 방법으로 똑같은 기름을 만들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출 30:32b).
110. 사사로이 쓰려고 유향을 만드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향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출 30:37).
111. 우상숭배자들과 언약을 맺어서 그들이 우상에게 바친 제물들을 먹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출 34:15).
112. 안식일에는 밭갈이하는 철이나 추수하는 철에도 일해서는 안된다(출 34:21).
113.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된다"(출 34:26).
114.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출 35:3).
레위기 (115~361계명)
115. 번제(burnt offering 또는 holocaust)에 대한 규례(레 1장).
116. 곡식제물에 대한 규정(레 2장).
117. 곡식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이 들어 있어서는 안된다(레 2:11).
118. 모든 곡식제물에는 소금이 빠져서는 안된다(레 2:13a).
119. 어떤 제물에도 소금을 빠뜨려서는 안된다(레 2:13b).
120. 이스라엘 온 회중이 산헤드린의 잘못된 결정으로 죄를 범하게 되면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4:13).
121. 개인이 실수를 한 경우에도 속죄제물을 바쳐야 한다(레 4:27-28).
122. 증인이 자기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고 은닉하면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레 5:1).
123. 속죄제물을 바쳐야 하는 경우
124. 새를 속죄제물로 가져오면 그것은 다른 짐승을 제물로 가져온 경우와는 달리,제물을 바친 사람이 잡지 않고 제사장이 직접 그것의 목을 비틀어서 잡아야 하는데, 이 때 목이 떨어지게 해서는 안된다(레 5:8).
125. 가난하여 속죄제물로 짐승이나 새를 바칠 수 없는 경우에는 밀가루를 바칠 수 있으나,이 때 제사장은 거기에 기름을 섞어서는 안된다(레 5:11).
126. 또한 거기에 향을 얹어서도 안된다(레 5:11).
127. 제물을 바치다가 실수하여 죄를 범하면 바친 것의 20 %에 해당하는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레 5:15-16).
128. 부정적인 계명(금지 계명)을 실수로 어긴 경우에도 속건제물을 바쳐야 한다(레 5:17-18).
129. 다른 사람의 물건을 불의하게 취한 경우에 관한 규정(레 6:1-5).
130. 남의 물건을 불의한 방법으로 취한 자는 모두 물어내야 한다(레 6:5).
131. 제단의 재에 대한 규례(레 6:10-11)
132. 제단의 불은 항상 피워져 있어야 한다(레 6:12).
133. 제단의 불을 꺼뜨려서는 안된다(레 6:12).
134. 곡식제물을 드리고 난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어야 한다(레 6:16).
135. 제사장은 곡식제물에 누룩을 넣고 구워서는 안된다(레 6:17).
136. 대제사장도 다른 사람들처럼 곡식제물로 밀가루를 드려야 하는데, 그는 매일마다 그래야 했으며, 그것으로 아침 저녁 빵을 구워 바쳐야 한다(레 6:20 이하).
137. 제사장이 드리는 곡식제물은 아무도 먹지 못한다. 그것은 다 태워 버려야 한다(레 6:23).
138. 속죄제물은 번제물을 드리는 장소에서 드려야 한다(레 6:25 이하).
139. 성소에서 속죄해 주려고 제물의 피를 회막 안으로 가져왔을 때에는, 어떤 속죄제물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6:30).
140. 속건제물을 드릴 때의 규례(레 7:1 이하).
141. 감사의 뜻으로 화목제물을 바치는 경우에는 빵을 곁들여 바쳐야 한다(레 7:11-12).
142. 화목제물로 드린 것 가운데 감사제물로 바친 고기는 그 날로 먹어야 하며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레 7:15).
143. 화목제물로 드린 것 가운데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로 바친 고기는 이틀째 되는 날까지 다 먹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까지 그 희생제물이 남아 있으면, 불살라야 한다(레 7:17).
144. 어떤 종류의 것이든(감사제물, 서원제물, 자원제물) 화목제물로 드린 고기 중 사흘째 되는 날까지 남은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레 7:18).
145. 어떤 종류의 화목제물이든 불결한 것에 닿은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 7:19a).
146. 그리고 그것은 불에 태워야 한다(레 7:19b).
147. 동물의 기름기는 먹지 못한다(레 7:23).
148. 어떤 피든지 먹어서는 안된다(레 7:26).
149. 제사장은 머리를 풀어서는 안된다(레 10:6),
150. 그는 옷을 찢어 애도를 해서도 안된다(레 10:6).
151. 제사장은 성전(성소)에서 일하는 동안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레 10:7).
152. 제사장은 성전(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레 10:9, 11).
153. 땅에서 사는 짐승들 가운데 새김질을 하면서 동시에 굽이 갈라진 것만 먹을 수 있다(레11:2-4, 7).
154.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 등과 같이 새김질을 하지 않거나 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은 먹지 못한다(레 11:4).
155. 물 속에서 사는 동물 중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다(레 11:9,12).
156. 그러나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12).
157. 새 가운데서 먹지 말아야 할 것(레 11:13).
158. 곤충 가운데서 네 발로 걷는 날개 달린 것들은 먹지 못한다(레 11:21).
159. 길짐승에 대한 규정(레 11:29 이하).
160. 요리가 된 젖은 음식에 죽은 길짐승이 닿으면 그것은 먹어서는 안된다(레11:34).
161. 먹을 수 있는 짐승이라도, 그 주검을 만진 자는 저녁 때까지 부정하다(레11:39).
162. 땅에 기어다니는 길짐승은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41-42).
163. 과일이나 채소에 붙어사는 벌레는 먹지 알아야 한다(레 11:41-42).
164. 물 속에 기어다니는 것들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11:46).
165. 흙에서 생긴 벌레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 11:44).
166. 산모의 정결 예식에 관한 규정(레 12:1 이하).
167. 제의적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은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레 2:6).
168. 아이를 낳은 여인이 정결 예식을 위해 바쳐야 할 제물(레 12:6-8).
169. 제사장이 나병의 여부를 확인하여야 한다(레 13:2).
170. 백선이 머리나 턱에 생긴 경우, 백선이 난 자리만 빼고 털을 민 다음에, 백선이 생긴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격리시켜야 한다(레 13:33).
171.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하며,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한다(레 13:45).
172. 천이나 가죽 제품에 곰팡이가 생긴 경우에 관한 규정(레 13:47-59).
173. 악성 피부병이 나은 경우에도 제사장이 확인을 해야 한다(레 14:2, 3).
174. 악성 피부병이 나은 사람은 이레 후에 모든 털을 다 밀어야 한다(레 14:9).
175. 또한 그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한다(레 14:9).
176. 악성 피부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바쳐야 할 제물(레 14:10 이하).
177. 건물에 생기는 악성 곰팡이에 관한 규정(레 14:34 이하).
178. 성기에서 고름이 계속 흐르는 남자는 부정한 사람이며, 그와 접촉하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레 15:1-12).
179. 고름이 멎은 경우에는 정결례를 행해야 한다(레 15:13-15).
180. 남자가 실수로 정액을 흘린 경우에 관한 규정(레 15:16-18).
181. 월경에 관한 규정(레 15:19 이하).
182. 여자가 계속 피를 흘리면 부정하게 여겨야 하며,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레 15:2 이하).
183. 그녀의 병이 다 난 다음에는 정결례를 행해야 한다(레 15:25 이하).
184. 보통 때는 지성소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레 16:2).
185. 속죄일에 드리는 제사에 관한 규정(레 16 장).
186. 희생제물은 성전(성소)에서만 드려야 한다(레 17:3-4).
187. 짐승의 피는 땅에 묻어야 한다(레 17:13).
188. 가까운 살붙이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6).
189. 아버지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7).
190. 어머니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7).
191. 아버지가 데리고 사는 여자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8).
192. 누이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 누이가 아버지의 딸이든지 어머니의 딸이든지 그녀를 범하면 안 된다(레 18:9).
193. 손녀나 외손녀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10).
194. 아버지가 낳은 딸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레 18:10).
195. 딸의 몸을 범하면 안된다(참조. 레 18:10).
196. 아버지가 데리고 사는 여자가 낳은 딸을 범해서는 안된다. 즉 배다른 누이를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1).
197. 고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2).
198. 이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3).
199. 숙모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4).
200. 숙모의 몸을 범하는 것은 삼촌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레 18:14).
201. 며느리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5).
202. 형수나 제수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6).
203. 데리고 사는 여자의 딸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4. 데리고 사는 여자의 손녀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5. 데리고 사는 여자의 외손녀의 몸을 범해서는 안된다(레 18:17).
206.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내의 형제들을 첩으로 데려다가 살아서는 안된다(레 18:18).
207. 여자가 월경을 하는 경우에는 그녀와 동침해서는 안된다(레 18:19).
208. 자녀를 몰렉에게 바쳐서는 안된다(레 18:21).
209. 동성 연애 금지에 관한 규정(레 18:22)
210. 남자들은 짐승과 교접해서는 안된다(레 18:23).
211. 여자들도 짐승과 교접해서는 안된다(레 18:23).
212. 부모를 두려워하라(레 19:3).
213.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라(레 19:4).
214. 쇠를 녹여 신상을 만들어서도 안된다(레 19:4).
215. 제물로 바친 것들은 그 날로 다 먹어야 한다(레 19:6).
216. 농작물이나 과수를 거두어들일 때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9-10),
217. 그것들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9-10).
218. 농작물을 거두어들일 때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9),
219. 그것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9).
220. 포도원의 포도를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10),
221. 그것을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레 19:10).
222.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는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하며(레 19:10),
223. 그것을 다 주워서는 안된다(레 19:10).
224. 훔치지 말라(레 19:11).
225. 사기하지 말라(레 19:11).
226. 속이지 말라(레 19:11).
227.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레 19:12).
228. 이웃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레 19:13).
229. 이웃의 것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레 19:13).
230. 품삯은 그날로 지불해야 한다(레 19:13).
231.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레 19:14).
232.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된다"(레 19:14).
233. 재판관은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된다(레 19:15).
234. 누구도 편들어서는 안된다(레 19:15).
235. 그는 반드시 공정한 재판만을 해야 한다(레 19:15).
236. "남을 헐뜯는 말을 하고 다녀서는 안된다"(레 19:16a).
237.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레 19:16b).
238.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레 19:17a).
239. 이웃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레 19:17b).
240. 그리고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그를 부끄럽게 해서는 안된다(참조. 레19:17a).
241. 이스라엘 백성끼리 원수를 갚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며(레 19:18a),
242.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레 19:18a).
243.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레 19:18b).
244. 가축 가운데서 다른 종류끼리 교미시켜서는 안된다(레 19:19).
245. 밭에다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함께 뿌려서는 안된다(레 19:19).
246. "할례 받지 못한" 과일에 관한 규정(레 19:23)
247. "거룩한 과일"에 관한 규정(레 19:24)
248. 피째로 먹어서는 안된다(레 19:26).
249. 점을 쳐서도 안 되며(레 19:26),
250. 마법을 써서도 안된다(레 19:26).
251. 관자놀이의 머리를 둥글게 깎아서는 안된다(레 19:27).
252. 구레나룻을 밀어서는 안된다(레 19:27).
253. 몸에 문신을 새겨서는 안된다(레 19:28).
254. 성소를 속되게 하지 말라(레 19:30).
255. 혼백을 불러내는 사람에게 가지 말아야 한다(레 19:31).
256. 점을 치는 사람에게 가서도 안된다(레 19:31; 20:6).
257. 어른을 공경하라(레 19:32).
258.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에 바른 기구를 사용하여야 한다(레 19:35).
259. 그리고 정확하게 재야 한다(레 19:36).
260.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레 20:9).
261. 남자가 그의 아내와 장모를 함께 취하면 그들은 모두 화형에 처해야 한다(레20:14).
262. 이교도들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레 20:23).
263. 제사장이 주검을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264. 그러나 가족의 주검은 만질 수 있다(제 264 계명; 레 21:1-4).
265. 주검을 만져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의적인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에는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다(레 21:6; 22:7).
266. 제사장은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15).
267. 제사장은 부정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7).
268.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7).
269.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레 21:8).
270.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레 21:11).
271. 대제사장은 가족의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레 21:11).
272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해야 한다(레 21:13).
273. 대제사장은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
274. 대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14).
275. 아론의 후손 가운데 몸에(영구적인)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할 수 없다(레 21:17).
276. 일시적인 흠이 있는 제사장도 그것이 날 때까지는 제사 드리는 일을 할 수가 없다(참조. 레 21:17).
277.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레 21:23).
278.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수 없다(참조. 레 22:2).
279. 그는 성물(聖物)을 먹을 수 없다(레 22:4).
280. 제사장이 아닌 여느 사람들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0).
281. 제사장이 데리고 있는 나그네나 품꾼도 성물을 먹을 수가 없다(레 22:10).
282. 할례 받지 않은 제사장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참조. 레 22:10 이하).
283. 제사장의 딸이더라도 여느 남자에게로 시집 간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22:12).
284. "테벨"(tevel)은 먹지 말아야 한다(참조. 레 22:16).
285. 흠있는 짐승을 거룩하게 해서는 안된다(레 22:19).
286. 모든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라야 한다(레 22:20-21).
287. 제물에 흠이 생기게 해서는 안된다(레 22:21).
288. 흠이 있는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려서는 안된다(레 22:22).
289. 흠이 있는 짐승을 잡아서는 안된다(레 22:22).
290. 흠이 있는 짐승의 내장을 불살라서는 안된다(레 22:22).
291. 거세(去勢)해서는 안된다(레 22:24).
292. 이방인이라도 흠이 없는 짐승을 바쳐야 한다(레 22:25).
293. 제물로 바치는 짐승은 난지 여드레가 지난 것이라야 된다(레 22:27).
294. 제물로 짐승을 바칠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 잡아서는 안된다(레 22:28).
295.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레 22:32).
296.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한다(레 22:32).
297. 유월절 첫날은 쉬어야 한다(레 23:7).
298. 유월절 첫 날은 생업을 위하여 일해서는 안된다(레 23:7).
299. 유월절 기간 동안에는 계속 번제를 드려야 한다(레 23:8).
300. 유월절 기간중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쉬어야 한다(레 23:8).
301. 그날은 생업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된다(레 23:8).
302. 유월절 둘째 날에는 첫 곡식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야 하고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어 바쳐야 한다(레 23:10).
303. 첫 곡식 단을 바치기 전에는 거두어들인 곡식을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된다(레23:14).
304. 첫 곡식 단을 바치기 전에는 볶은 곡식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23:14).
305. 또한 햇곡식도 먹어서는 안된다(레 23:14).
306. 곡식단을 흔들어 바친 그 날부터 49일이 되는 때까지 매일매일 날을 세어야 한다(레 23:15).
307. 오순절에는 햇곡식으로 만든 빵 두개를 바쳐야 한다(레 23:17).
308. 오순절에는 쉬어야 한다(레 23:21).
309. 오순절에는 생업을 위해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레 23:21).
310. 새해 첫날(일곱째달 초하루)은 쉬어야 한다(레 23:24).
311. 새해 첫 날에는 일해서는 안된다(레 23:25).
312. 새해 첫날은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25).
313. 속죄일에는 금식해야 한다(레 23:27).
314. 속죄일에는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27).
315. 속죄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레 23:28).
316. 속죄일에는 어떤 것도 먹거나 마셔서는 안된다(레 23:29).
317. 속죄일에는 쉬어야 한다(레 23:32).
318. 초막절 첫날에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레 23:35).
319. 초막절에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해서도 안된다(레 23:35).
320. 초막절 절기 동안 매일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36).
321.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야 한다(레 23:36).
322.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살라 바치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레 23:36).
323. 초막절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생업을 위해 일해서는 안된다(레 23:37).
324. 초막절 첫날에는 좋은 나무에서 난 열매와 종려나무 가지, 무성한 나뭇가지, 갯버들을 가져와야 한다(레 23:40).
325. 초막절 기간에는 이레 동안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레 23:42).
326. 안식일에는 땅을 놀려야 한다(레 25:4).
327. 안식년에는 포도원을 가꾸어서도 안된다(레 25:4).
328. 안식년에 저절로 열린 곡식들도 거두어 드려서는 안된다(레 25:5).
329. 안식년에는 저절로 열린 과실들도 거두어 드려서는 안된다(레 25:5).
330. 안식년을 일곱번 세어야 한다(레 25:8).
331. 속죄일에는 뿔나팔을 불어야 한다(레 25:9).
332. 50년째 되는 해(희년)를 거룩히 여기라(레 25:10).
333. 희년에는 심거나 거두어서는 안된다(레 25:11).
334. 희년에는 저절로 열린 포도를 거두어들여서도 안된다(레 25:11).
335. 희년에는 저절로 맺힌 열매를 필요 이상으로 거두어들여서는 안된다.
336. 무엇을 사거나 팔 때에 부당한 이익을 남겨서는 안된다(레 25:14).
337. 속이지 말라(레 25:14).
338. 말을 함부로 하여 이웃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레 25:17).
339.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레 25:23).
340. 희년에는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야 한다(레 25:24).
341. 성곽 안에 있는 집을 판 경우에는 일년 안에는 언제든지 다시 살 수 있지만, 일년이 지나면 그렇게 할 수 없다. 희년이 되어도 집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레25:29, 30).
342. 레위 사람의 땅과 집에 관한 규정(레 25:32-34).
343. 가난한 사람에게서 이자를 취해서는 안된다(레 25:36, 37).
344. 가난하여 종이 된 동족(同族)에 대해서는 노예 부리듯 해서는 안된다(레25:39).
345. 동족인 종은 팔 수 없다(레 25:42).
346. 동족인 종을 심하게 부려서는 안된다(레 25:43).
347. 종이 가나안 사람인 경우에는 그를 영원히 부릴 수 있다(레 25:46).
348. 이교도들에게 동족이 종으로 팔려 갔으면, 값을 치르고 그를 다시 되돌려와야 한다(레 25:53).
349. 조각한 석상에게 절을 해서는 안된다(레 26:1).
350. 하나님께 사람을 바치기로 서원해 놓고 돈으로 바치는 경우에 관한 규정(레 27:2-9).
351. 제물은 바꿔치기 할 수 없다(레 27:10).
352. 바꿔치기한 제물은 본래의 제물과 바꿔치기한 제물 둘 다를 드려야 한다(레 27:10).
353. 제물로 바치기로 했던 짐승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대한 규정(레 27:9-14)
354. 주께 바치기로 한 (또는 바친) 집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관한 규정(레 27:14).
355. 주께 바치기로 한 (또는 바친) 땅 대신에 돈으로 바칠 경우에 대한 규정(레 27:16).
356. 짐승의 맏배 대신 더 좋은 것이라 하여 다른 것을 바쳐서는 안된다(레 27:26).
357. 주께 바친 것은 무를 수 없다(레 27:28).
358. 주께 바친 땅은 팔 수 없다(레 27:28).
359. 주께 바친 땅은 무를 수도 없다(레 27:28).
360. 가축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관한 규정(레 27:32).
361. 십일조로 드려야 할 가축을 팔아서는 안된다(레 27:33).
민수기 (362 - 413계명)
362. 악성 피부병 환자와 고름을 흘리는 사람과 주검에 닿아 부정을 탄 사람은 모두 진에서 내보내야 한다(민 5:2).
363. 하나님이 머물고 계신 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민 5:3).
364. 남에게 잘못을 한 사람은 그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민 5:6,7).
365. 아내의 간통을 밝히는 절차에 관한 규정(민 5:12-28).
366. 아내의 간통을 밝히기 위해 바치는 제물에는 기름을 부을 필요가 없다(민 5:15).
367. 그 제물에는 향을 얹을 필요도 없다(민 5:15).
368. 나실 사람은 포도주와 독한 술을 삼가야 한다(민 6:3).
369. 나실 사람은 포도를 먹어서는 안된다(민 6:3).
370. 그는 마른 포도를 먹어서도 안된다(민 6:3).
371. 나실 사람은 포도 씨를 먹어서도 안된다(민 6:4).
372. 그는 포도 껍질을 먹어서도 안된다(민 6:4).
373. 나실 사람은 머리를 깎아서는 안된다(민 6:5).
374. 그는 머리를 길게 자라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민 6:5).
375. 나실 사람은 죽은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민 6:6).
376. 그는 가족이 죽었을 때에도 죽은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 없다 (민 6:7).
377. 나실 사람은 서약 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자르고 제물을 바쳐야 한다(민 6:13-14).
378. 제사장은 매일마다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한다(민 6:23).
379. 법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한다(민 7:9).
380.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한 달 후에 다시 지켜야 한다(민 9:10).
381. "두 번째 유월절"(또는 "작은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들은 누룩을 먹지 않고 만든 빵과 쓴 나물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어야 한다(민 9:11).
382. 그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는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된다(민 9:12).
383. 희생 양의 뼈를 부러뜨려서는 안된다(민 9:12).
384. 성소에서는 날마다 나팔을 불어야 한다(민 10:8).
385. 처음 거두어들인 곡식으로 만든 과자를 제사장에게 헌납물로 드려야 한다(민 15:18-20).
386.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어 달아야 한다(민 15:38).
387.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거나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민 15:39).
388.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소를 지켜야(보호해야) 한다(민 18:4).
389. 제사장과 레위인은 각각 각자가 할 일을 해야 한다(민 4:19)
390. 아무나 성소에서 일해서는 안된다(민 18:4, 22).
391. 일반 사람이 성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민 18:40).
392. 짐승의 맏배는 제사장의 몫으로 바쳐야 하되, 사람과 부정한 짐승 가운데 처음 난 것들은 그것을 바치는 대신에 속전을 바쳐야 한다(민 18:15, 16)
393. 정결한 짐승의 맏배는 속전을 받고 돌려주어서는 안된다(민 18:15).
394. 회막 일은 레위인이 하여야 한다(민 18:23).
395.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돌아간다(민 18:24).
396. 레위인도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민 18:26).
397.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규례(민 19:2).
398.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부정을 타게 된다(민 19:14).
399. 부정을 탄 사람은 물로 정결하게 하여야 한다(민 19:20).
400.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딸에게 유산을 상속하여야 한다(민 27:8).
401. 번제로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1년된 숫양 한 마리씩 바쳐야 한다(민 28:3).
402. 안식일에도 평상시와 같이 번제를 드려야 한다(민 28:9).
403. 매달 초하루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 숫양 한 마리, 일년된 숫양 일곱 마리를 번제로 바쳐야 한다(민 28:11).
404. 오순절(칠칠절)에 드려야 할 제물(민 28:26-31).
405. 신년(새해)에는 나팔을 불어야 한다(민 29:1).
406. 서약이 효력이 없어지게 되는 경우에 관한 규정(민 30:3-9).
407. 서약한 것은 지켜야 한다(민 30:2).
408. 레위 사람에게 그들이 거할 성읍을 주어야 한다(민 35:2, 7).
409. 사람을 죽인 자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민 35:12).
410. 살인 혐의자를 도피성에 보내는 것에 관한 규정(민 35:25).
411. 살인 사건의 경우에는 혐의자에게 사형을 내리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민 35:30).
412. 살인자를 돈을 받고 목숨을 살려주어서는 안 된다(민 35:31).
413.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고 그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살게 해서는 안 된다(민 35:32, 33).
신명기 (414 - 613계명)
414. 토라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재판관이 될 수가 없다(신 1:17).
415. 재판관은 아무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신 1:17).
416.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서는 안된다(신 5:21).
417.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선언하는 것에 관한 규정(신 6:4).
418.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
419. 자녀에게 부지런히 주의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라(신 6:7).
420. 매일 쉐마를 암송하라(신 6:7).
421. 경문(테필린)을 손에 매라(신 6:8).
422. 경문(테필린)을 이마에도 붙이라(신 6:8).
423. 집 문설주와 대문에 메주라(mezura)를 붙여라(신 6:9).
424. 하나님과 예언자를 시험해서는 안된다(신 6:16).
425. 가나안의 7 민족을 진멸해야 한다(신 7:2).
426.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신 7:2).
427. 가나안의 7 민족과 결혼해서는 안된다(신 7:3).
428. 이교도들의 신상을 불태우고, 그 위에 입힌 보석들을 탐내서는 안 된다(신7:25).
429.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것들을 집 안에 끌어들여서는 안된다(신 7:26).
430. 먹을 것을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들 드려야 한다(신 8:10).
431.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신 10:19).
432.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신 10:20).
433. 하나님을 섬기라(신 10:20).
434. 하나님에게만 가까이하라(신 10:20).
435. 맹세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신 10:20).
436. 이교도들이 신을 섬기는 장소는 어느 곳이나 다 허물어야 한다(신 12:2).
437. 거룩한 것들을 없애서는 안된다(신 12:4).
438.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갈 때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한다(신 12:6).
439. 번제는 성전에서만 드려야 한다(신 12:13).
440. 다른 모든 제물도 마찬가지로 성전에서만 드려야 한다(신 12:14).
441. 마음에 원하는 대로 짐승의 고기를 성 안에서 먹을 수 있다(신 12:15).
442. "두 번째 십일조"로 바친 곡식은 예루살렘 밖에서 먹어서는 안 된다(신 12:17).
443. "두 번째 십일조"로 바친 포도주를 마셔서도 안된다(신 12:17).
444. 기름도 마찬가지이다(신 12:17).
445.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도 예루살렘 밖에서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6. 속죄제나 속건제로 드린 것도 성전 밖에서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7. 번제물로 드린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8. 제물의 피를 뿌리기 전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49. 첫열매로 바친 것은 일반 사람이 먹어서는 안된다(신 12;17).
450. 레위 사람을 저버려서는 안된다(신 12:19).
451. 짐승을 잡는 것에 관한 규정(신 12:20, 21).
452. 산 짐승의 신체 중 일부를 먹어서는 안된다(신 12:23).
453. 제물은 성전으로 가져가야 한다(신 12:26).
454. 토라에 하나라도 더해서는 안된다(신 12:32).
455. 토라에서 하나라도 빼서는 안된다(신 12:32).
456. 우상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라(신 13:1).
457. 유혹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신 13:7-10).
458. 이방 신에게로 유혹하는 자를 증오하라(신 13:9).
459. 그들을 죽여야 한다(신 13:9).
460. 그들을 감싸주어서도 안된다(신 13:9).
461.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숨겨서도 안된다(신 13:9).
462.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자는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13:10).
463.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조사하고 잘 알아보아야 한다(신 13:14).
464. 하나님을 섬기다가 우상에게로 빠진 성읍은 불살라야 한다(신 13:15).
465. 그런 성읍은 다시 세워서도 안된다(신 13:16).
466. 그 성읍에서 어떤 물건도 취해서는 안된다(신 13:17).
467.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서는 안된다(신 14:1).
468. 죽은 사람을 애도한다고 머리를 밀어서는 안된다(신 14:1).
469. 부정한 것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4:3).
470. 새는 그것이 정한 것인지 알아보고 먹어야 한다(신 14:11).
471. 날개 달린 기어다니는 곤충은 먹어서는 안된다(신 14:19).
472. 저절로 죽은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신 14:21).
473. "두 번째 십일조"에 관한 규정(신 14:23-27).
474.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에 관한 규정(신 14:28-29).
475. 안식년에는 동족(同族) 유대인의 빚을 삭쳐 주어야 한다(신 15:2).
476. 안식년이라도 이방인에게 준 빚은 받아야 한다(신 15:3a).
477. 안식년에는 유대 동족의 빚을 삭쳐 주어야 한다(신 15:3b).
478. 가난한 동족에게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신 15:7).
479.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신 15:8).
480. 안식년이 가까온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신 15:9).
481. 종을 놓아줄 때에는 빈 손으로 보내서는 안된다(신 15:13).
482. 그들에게 넉넉히 주어 내보내야 한다(신 15:14).
483. 하나님께 바칠 짐승의 맏배를 부려서는 안된다(신 15:19a).
484. 제단에 바칠 첫새끼 양의 털을 깎아서도 안된다(신 15:19b).
485. 니산 월 정오가 지나서는 누룩이 들어 있는 빵을 먹어서는 안된다(신 16:3).
486. 유월절 양의 고기를 다음 날까지 남겨서는 안된다(신 16:4).
487. 유월절 양을 성전 이외의 곳에서 바쳐서는 안된다(신 16:5).
488. 3대 절기는 기쁨으로 지켜야 한다(신 16:14).
489. 모든 성인 남자는 일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신 16:16).
490. 제물이 없이 성전에 올라가서는 안된다(신 16:16).
491. 모든 성읍에는 재판관이 있어야 한다(신 16:18).
492. 성전에는 나무를 심어서는 안된다(신 16:21).
493. 어느 곳에도 석상을 만들어 세워서는 안된다(신 16:22).
494. 흠있는 짐승을 제물로 바쳐서는 안된다(신 17:1).
495. 산헤드린의 결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신 17:10).
496.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신 17:11).
497. 이스라엘의 왕은 산헤드린에서 임명받아야 한다(신 17:15a).
498. 외국 사람을 왕으로 세워서는 안된다(신 17:15b).
499. 왕은 군마를 필요 이상으로 가져서는 안된다(신 17:16a).
500. 왕은 이집트로 내려가서는 안된다(신 17:16b).
501.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는 안된다(신 17:17a).
502. 왕은 재물을 너무 많이 가져서는 안된다(신 17:17b).
503. 왕은 율법 책을 복사해야 한다(신 17:18, 19).
504. 레위 지파는 땅을 유산으로 이어받지 못한다(신 18:1).
505. 레위 지파는 전리품을 취할 수 없다(신 18:1).
506. 제사장은 제물의 특별한 부위들을 가질 수 있다(신 18:3).
507.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신 18:4).
508. 처음 깎은 양털도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신 18:4).
509. 각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각기 다른 시간에 일해야 한다(신 18:6-8).
510. 점쟁이를 용납해서는 안된다(제 510 계명).
511. 복술객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2. 주문을 외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3. 마법사를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4. 마술하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515. 죽은 사람에게 물어 보는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11).
516.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신 18:15).
517. 거짓 예언자를 삼가라(신 18:20).
518. 우상의 이름으로 예언해서는 안된다(신 18:20).
519. 거짓 예언자는 죽여야 한다(신 18:22).
520. 여섯 개의 도피성을 마련해야 한다(신 19:3).
521. 살인자를 동정해서는 안된다(신 19:13, 21).
522. 이웃의 경계를 침범해서는 안된다(신 19:14).
523. 한 사람의 증언만 가지고 재판해서는 안된다(신 19:15).
524. 거짓 증언을 하는 자에게는 그가 이웃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벌을 내려야 한다(신 19:19).
525. 전쟁에 나가서 적군을 두려워하지 말라(신 20:1).
526. 전쟁터에서 되돌려 보내야 할 사람들에 관한 규정(신 20:5-7).
527.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제의하라(신 20:10, 11).
528. 가나안의 7 민족을 진멸하라(신 20:16).
529. 성읍을 점령할 때 나무들을 베버리지 말라(신 20:19).
530.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에 관한 규정(신 21:1-9).
531.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을 위해서 송아지를 죽인 험한 계곡에서는 일도 하지 말고 그곳에 씨도 뿌리지 말라(신 21:4).
532. 포로로 잡혀 온 여인을 아내로 취해도 된다(신 21:10, 11).
533. 그러나 그 여인을 팔아서는 안된다(신 21:14a).
534. 그에게 힘든 일을 시켜서도 안된다(신 21:14b).
535.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당한 사람의 주검은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한다(신 21:22).
536. 그러나 그 주검을 밤까지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21:23).
537. 그 주검은 그 날로 파묻어야 한다(신 21:23).
538.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을 때는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신22:1).
539. 그리고 그것을 못본체 해서는 안된다(신 22:3).
540. 이웃의 짐승이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을 도와 그 짐승을 일으켜 주어야 한다(신 22:4).
541. 짐승에게 짐을 싣거나 내릴 때 도와주어야 한다(신 22:4).
542.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5a).
543. 남자도 여자의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5b).
544.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새를 잡아서는 안된다(신 22:6).
545. 새끼를 잡기 전에 먼저 어미 새를 날려보내야 한다(신 22:7).
546.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신22:8a).
547. 그리고 집에서 사고가 나 사람이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신 22:8b).
548. 포도나무 사이사이에 다른 씨를 뿌려서는 안된다(신 22:9a).
549. 그리고 거기에서 거둔 곡식도 먹어서도 안된다(신 22:9b).
550. 소와 나귀에게 한 멍에를 메워 같이 밭을 갈게 해서는 안된다(신 22:10).
551. 양털과 무명실을 함께 섞어서 잔 옷을 입어서는 안된다(신 22:11).
552. 결혼의 성립에 대한 규정(신 22:13).
553. 아내에게 그녀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하는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 경우에 관한 규정 (신 22:14-18).
554. 아내에게 그녀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거짓 누명을 씌운 사람은 평생 그 여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신 22:19).
555. 성 안에서 한 남자와 다른 사람에게 약혼한 여자가 성관계를 가졌을 때에는 둘 다 돌로 쳐죽여야 한다(신 22:24).
556. 그러나 성 밖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남자만 돌로 쳐죽여야 한다(신 22:26).
557.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욕보인 남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신 22;29).
558. 그리고 그는 그녀와 결혼해야 하되, 그 여자와 이혼해서는 안된다(신 22:29).
559. 신낭이 터졌거나 신(腎)을 베인 사람은 주의 총회 회원이 될 수 없다(신 23:1).
560. 사생아는 주의 총회 회원이 될 수 없다(신 23:2).
561. 유대인은 암몬 사람이나 모압 사람과는 영원히 결혼할 수 없다(신 23:3).
562.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는 평화 관계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된다(신 23:6).
563.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신 23:7a).
564. 이집트 사람도 미워해서는 안된다(신 23:7b).
565. 제의적으로 부정한 사람은 진(陳)에 들어갈 수 없다(신 23:10, 11).
566. 화장실은 진 밖에 만들어야 한다(신 23:12).
567. 군인은 무기와 더불어 삽을 항상 같이 가지고 다녀야 한다(신 23:13).
568. 도망온 종을 되돌려 보내서는 안된다(신 23:15).
569. 그리고 그들을 압제해서도 안된다(신 23:16).
570. 이스라엘 자손은 창녀나 남창이 되어서는 안된다(신 23:17).
572. 동족에게서 이자를 취해서는 안된다(신 23:20).
573.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있다(신 23:21).
574. 하나님에게 서원한 것은 지체함이 없이 지켜야 한다(신 23:21).
575.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신 23:23).
576.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먹을 만큼 실컷 따먹는 것은 괜찮다(신 23:24a).
577. 그러나 그릇에 담아 가면 안된다(신 23;24b).
578. 이웃의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곡식에 낫을 대면 안된다(신 23:25).
579. 이혼 증서에 대한 규정(신 24:1 이하).
580. 이혼한 아내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여서는 안된다(신 24:4).
581. 새신랑은 1년동안 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신 24:5a).
582.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는 그는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하다(신 24:5b).
583. 맷돌을 저당 잡아서는 안된다(신 24:6).
584. 악성 피부병의 조짐이 보이면, 그것을 무시하지 말라(신 24:8).
585. 담보물을 잡으려고 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신 24:10).
586. 담보물은 그날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신 24:12).
587. 담보물을 그것을 잡힌 사람이 필요한 때에 즉시로 돌려주어야 한다(신 24:13).
588. 품꾼에게는 그날로 품삯을 지불해야 한다(신 24:15).
589.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의 증언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신 24:16).
590. 외국 사람과 고아에게 억울하게 재판해서는 안된다(신 24:17).
591. 과부의 옷을 저당 잡아서는 안된다(신 24:17).
592.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잊어버리고 거두어들이지 않은 단을 다시 가서 취하여 와서는 안된다(신 24:19).
593. 그것은 올리브 나무의 열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신 24:20).
594. 형벌로 매를 맞을 경우에는 재판관은 매 맞을 사람을 자기 앞에 엎드리게 하고 죄의 정도에 따라 매를 때리게 해야 한다(신 25:2).
595. 그러나 40대 이상 때려서는 안된다(신 25:3).
596. 곡식을 밟으면서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는 안된다(신 25:4).
597. 남편이 아들이 없이 죽은 경우, 그의 아내는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는 안된다(신 25:5a).
598. 죽은 남편의 형제가 그녀와 결혼을 해야 한다(신 25:5b).
599. 죽은 형을 대신해서 형수와 결혼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에 대한 규정(신 25:7-10).
600. 음낭을 잡는 자를 보고도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신 25:11).
601. 그에게는 동정심을 보여서는 안된다(신 25:12).
602. 집에 크고 작은 두개의 되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신 25:14).
603. "아말렉 사람이 너희에게 한 일을 기억하라"(신 25:17).
604.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라(신 25:18).
605. 그리고 절대로 그들이 한 일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신 25:18).
606. 햇곡식을 예물로 바칠 때 드리는 고백(신 26:5-10).
607.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를 드린 것에 대한 고백(신 26:12-15)
608. 십일조를 애곡하는 날에 먹어서는 안된다(신 26:14a).
609. 그리고 제의적으로 부정한 상태에서 먹어서도 안된다(신 26:14b).
610. 또한 그것을 죽은 자를 위해 사용해서도 안된다(신 26:14c).
611. 하나님의 길을 따라 걸으라(신 26:17).
612. 안식년 장막절에 모든 이스라엘 회중을 다 모아야 한다(신 31:12-13).
613. 토라(율법)를 써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신 31:19).
죄의 삯
7월 26일(화)
죄이 삯(로마서 6:23)
삯. 3800. ὀψώνιον
ὀψώνιον, ου, τό 3800
발음 / 옾소니온(ŏpsōniŏn)
- 어원/ 3795와 동일어로 가정되는 파생어에서 유래
신약 성경 / 4회 사용
ὀψάριον, ου, τό 3795
발음 / 옾사리온(ŏpsariŏn)
- 어원/ 3702의 어간의 파생어에서 유래
신약 성경 / 5회 사용
ὀπτός, ἡ, όν 3702
발음 / 옾토스(ŏptŏs)
- 어원 / ‘담그다’와 유사한 동사에서 유래
신약 성경 / 1회 사용
삯은 군사들이 복무하는 동안 받는 급료.
군인은 철저하게 명령에 복종하여야 하듯 죄의 삯은 철저하게 죄에 복종하므로 얻는 댓가로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
은사. 5486. χάρισμα
χάρισμα, ατος, τό 5486
발음 / 카리스마(charisma)
- 어원 / 548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은사(롬 1:11, 고전 7:7, 딤전 4:14), 선물(롬 5:16).
- 신약 성경 / 17회 사용
전쟁서 패망한 줄도 모르고 땅굴 속에서 '28년' 동안 숨어 지낸 일본 군인
한 일본군이 적에게 목숨을 빼앗길까 두려워 28년 동안 땅굴 속에 숨어 살다 발각돼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다.
1915년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난 요코이는 제2차 대전 발발로 1944년 괌에 일본군 병장으로 배치됐다.
같은 해 미군이 괌을 점령하면서 일본군 2만 명이 전사했다.
당시 살아남은 대부분의 일본군은 보급이 끊기면서 굶어 죽거나 항복했다.
하지만 요코이와 동료 2명은 항복을 하는 대신 산속으로 도망쳐 땅굴을 파 숨어 살았다.
이들은 낮에는 땅굴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작은 물고기를 잡거나 열매를 따다 배를 채우곤 했다.
군복이 낡아 찢어지자 요코이는 나무껍질의 섬유질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 같이 숨어 살던 동료 두 명은 8년 만에 목숨을 잃었다.
요코이는 끈질긴 생존능력으로 28년을 땅굴에서 생존했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일분군의 전진훈(戰陣訓)을 지키기 위함이었던 것.
요코이 쇼이치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해 항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1952년 종전했다는 미군의 전단을 발견했지만, 항복은 치욕이라며 계속 동굴 생활을 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던 1972년, 섬에 살던 주민들이 요코이의 모습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당시 요코이는 오랜 시간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말하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고, 동굴에서 숨어 살았던 탓에 똑바로 서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후에야 언어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으로 귀환한 요코이는 첫 인터뷰에서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자신을 군인이라 여긴 요코이는 살아서 나라로 돌아오는 것을 치욕이라 생각한다며 눈물까지 보였다.
일부 현지 언론에서는 요코이의 탈영 의혹을 제기했으나 시민들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그를 영웅이라 칭하며 환대했다.
이후 요코이는 일본 정부에서 지급한 보상금으로 평범한 생활을 시작하며, 결혼하며 가정을 꾸리다가 1997년 83세 나이에 심장병으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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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表象)
7월 25일(월)
오실 자의 표상(로마서 5:14)
이제까지 아담은 대표성(代表性)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표상이란 단어에서 유추해야 하는 신앙은 아담을 통해서 보여주신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첫째는 아담은 선악과를 직접 따 먹은 것이 아니라 하와로부터 선악과를 받아서 먹었다(이사야 53:6)
예수께서는 직접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지은 죄를 전가 받았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둘째는 아담은 죄를 범하므로 죄값을 받았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아담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창세기 5:4-5)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째는 아담은 흙에 생기가 들어가므로 산 영이 되었다(고린도전서 15:45)
-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께서는 성령이 마리아라는 흙속에 들어가서 생명이 되셨다.
아담(흙 + 생기), 예수(마리아 + 성령)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마태복음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라는 말과 창세기 2장 7절의『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그 말과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특별히 누가『당신은 죄를 지었소이다, 죄인이요』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면 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이 시편에서『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죄를 졌기에 죄인인가 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땅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에서 행한 자기 행위 만을 가지고 죄를 논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못하는 사이에 다 죄인이 되었다. 나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고 가르친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렇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을 한다. 로마서 5장 19절에『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있는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했다. 아담 안에서『모두 죽었다』 라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라고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아담은 모든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교회다니는 사람이나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왜 죄인인가? 라고 말을 한다면 아담의 원죄를 말한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이 죄를 전가받아서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신명기에 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식들 때문에 아비가 죽거나 아비 때문에 자식이 죽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에 보면『신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신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했다. 에스겔서 18장 2-4절에 보면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라고 했다. 이 말은『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모든 후손이 다 죄인이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된다 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주실텐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고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고, 그 생각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게되고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사는 것이지 너희가 말하는 대로 아비가 잘못해서 자식이 죽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아담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죽는다』라는 생각은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5장 12-21절에는 그런 뉘앙스가 많이 풍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로마서 5장 12절을 살펴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에서『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라는 표현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말씀하고 있다. 즉『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생긴 것이 아니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세상에 들어왔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다른 세상 밖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만이 존재했는데,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 이해하면 원래는 세상에 죄가 없었는데 죄가 세상 밖에서 들어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바로 쫒겨난다. 바로 쫒겨난 곳이 이 세상이며 그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게 아담을 통로로 해서 들어온 것이다. 세상 밖에서 아담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본래 죄가 없는데 죄가 들어와서 악한 상태가 되고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처럼 죄가 만연해서 더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될 것 같은가? 아니고 죄가 쫒겨나는 것이다. 죄가 들어온 이 세상은 죄가 만연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더불어 함께 유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데 왜 하나님이 안계시고 간섭을 하지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이 안계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은 다 그림자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물리적 빛도 하나님의 빛에 대한 그림자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죄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 밖으로 부터 아담을 통로로 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에서 이와 같이 라는 말은『아담을 통로로 해서 죄가 세상 밖으로 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 밖으로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죄가 들어왔으므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범한 죄가 후손에게 전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의 모든 초점을 에덴동산에 맞추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는데, 12절에 『이러므로』라고 이야기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까지 살펴보면『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사도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이러므로』라고 말했는데, 앞에 있는 내용을 받는다. 앞에 있는 내용은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죄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조차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확정하셨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하나님의 사랑하는 방법』이 바로『이러므로』라는 것이다. 『이러므로』는 앞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그 결과를 말할 때『이러므로』를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라고 생각해야 한다.『이러므로(이러한 방법으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에서 즉, 앞의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제물로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방법으로 아담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이 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은 대속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사람들은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법을 어긴 것)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의 후손들도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한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과 같은 그런 범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사망이 저희들 위에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즉 아담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아담과 같은 죄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이 저희들 위에서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죽는 것은 아담 때문이 아니라 지신들의 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연좌제 같은 것을 없애고 있는데, 하나님을 연좌제를 하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판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도장을 찍을 때 같이 나오는 그런 의미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아담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 무시하고 아담을 죄인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다. 아담과 하와도 본래 하나다.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사도바울이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온 것에 대해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한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 비밀이 크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볼 때, 아담이 왜 세상에 왔는가? 자기 지체 즉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을 말해준다. 그 지체가 왜 세상에 왔는가? 그 지체인 교회를 상징하는 하와는 교회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하면서 이것이 큰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담은 죄의 대명사인데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명사이다. 구원의 대명사는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아담은 인간에게 다 죄를 주고 갔는데, 예수님은 죄를 다 가져가셨다 라고 한다면 서로 짝이 안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졌는데, 아담도 뭔가 다 짊어져야 맞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를 짊어지고 최초로 육체 속에 들어와 육체의 생명체로서 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기록된 바는 성경에 기록된 것같이 라는 것이고, 산영은 창세기 2장 7절에 생령이라는 말로, 생명체라는 의미이다.
아담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모든 책임을 지고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올 때, 육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흙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흙
속에 들어간 아담은 그 영이 죽은 것이다.
영이 흙 속에 들어가면 영은 죽고 흙이 생명체가 된다.
영들이 하나님의 처소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하니까,『가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처소를 벗게 하고 세상의 처소인 흙을 덧입혀 주는 것이다.
하늘의 처소도
싫고 세상의 처소도 싫다고 입지 않은 영들은 말하자면 귀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육체의 생명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령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이 있는데, 생령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한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첫 아담은 육체적 생명체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리시는 영이 되어, 영생을
얻게되었다 라는 말이다. 아담은 범죄한 자들의 육체적 생명체의 통로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통로로 된다는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 맞는 말이다. 아담이 범죄한 영들의 책임을 지고 최초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자기를 따라 오는 모든 범죄한 영들이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생을 아담 안에서는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을 얻지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생도 없는 것이다. 아담을 통한 육체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의미를 담고있다.
표상(表象). 5179. 투포스(τύπος)
τύπος, ου, ὁ 5179
발음 / 투포스(tüpŏs)
어원 / 518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자국(요 20:25), 형상(행 7:43), 양식(행 7: 44), 모형(롬 5:14), 본(롬 6:17, 살후 3:9, 벧전 5:3), 본보기(고전 10:6, 11)
- 신약 성경 / 15회 사용
* 5180. 투푸토(τύπτω)
-
1. 때리다, 2. 치다, 3. 마태 24:49
오실. 3195 멜로(μέλλω)
발음 / 멜로(mĕllō)
관련 성경 / 임박하다(마 3:7), 오다(마 12:32, 16:27), 하려 하다(마 2:13)
신약 성경 / 109회 사용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창세기 2:7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아담은 흙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므로 살아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역시 혼을 갖는다.
아담이 죄로 인하여 죽은 것처럼 모든 사람들도 역시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기독교인은 누구나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가 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땅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에서 행한 자기 행위 만을 가지고 죄를 논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는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 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있는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 안에서모두
죽었다는 것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모든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모든 세상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교회다니는 사람이나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가 왜 죄인인가? 라고 말을 한다면 아담의 원죄를 말한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이 죄를 전가받아서 다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신명기에 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식들 때문에 아비가 죽거나 아비 때문에 자식이 죽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에 보면『신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신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했다.
에스겔서 18장 2-4절에 보면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이 말은『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모든 후손이 다 죄인이다』라는 말은 성립이 안된다 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30절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주실텐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고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고, 그 생각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게되고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 사는
것이지 너희가 말하는 대로 아비가 잘못해서 자식이 죽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고, 아담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서 죽는다』라는 생각은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잘못된 것이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표현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말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생긴 것이 아니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다른 세상 밖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만이 존재했는데, 세상 밖으로 부터 들어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로 부터 죄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못 이해하면 원래는 세상에 죄가 없었는데 죄가 세상 밖에서 들어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바로 쫒겨난다.
바로
쫒겨난 곳이 이 세상이며 그 하나님 나라에서 발생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게 아담을 통로로 해서 들어온 것이다.
세상 밖에서
아담을 통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죄가
발생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상처럼 죄가 만연해서 더러운 하나님의 나라로 될 것 같은가?
아니고 죄가 쫒겨나는 것이다.
죄가
들어온 이 세상은 죄가 만연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더불어 함께 유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인데 왜 하나님이 안계시고 간섭을 하지않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은 곳으로서
하나님이 안계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은 다 그림자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물리적 빛도 하나님의 빛에 대한
그림자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신데 인간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죄가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 밖으로 부터 아담을 통로로
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을 통로로 해서 죄가 세상 밖으로 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 밖으로부터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죄가 들어왔으므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범한 죄가 후손에게 전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12절)
로마서 5장 6절에서 11절까지 살펴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에서『이러므로』라고 말했는데, 앞에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앞에 있는 내용은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속죄물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조차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확정하셨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하나님의 사랑하는 방법』이
바로『이러므로』라는 것이다. 『이러므로』는 앞 문장의 원인에 대해서 그 결과를 말할 때『이러므로』를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라고 생각해야 한다.『이러므로(이러한 방법으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에서 즉, 앞의 로마서 5장 6-11절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속제물로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방법으로 아담이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모든 사람이 아담과 같이 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아담은 대속제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에 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에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사람들은 아담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은 범죄(법을 어긴 것)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의 후손들도 사망이 왕노릇 했다고 한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과 같은 그런 범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사망이 저희들
위에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즉 아담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아담과 같은 죄를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이 저희들 위에서 왕노릇 했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죽는 것은 아담 때문이 아니라 지신들의 죄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세상에서도 연좌제 같은 것을 없애고 있는데, 하나님을 연좌제를 하시는 분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판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도장을 찍을 때 같이 나오는 그런 의미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아담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을 다 무시하고 아담을 죄인의 대명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다. 아담과 하와도 본래 하나다. 에베소서 5장 30-32절에서 사도바울이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온 것에 대해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요, 하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말한바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 비밀이 크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볼 때, 아담이 왜 세상에 왔는가? 자기 지체 즉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을 말해준다. 그 지체가 왜 세상에 왔는가? 그 지체인 교회를 상징하는 하와는 교회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고 하면서 이것이 큰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담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담은 죄의 대명사인데 그리스도는 구원의 대명사이다. 구원의 대명사는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아담은 인간에게 다 죄를 주고 갔는데, 예수님은 죄를 다 가져가셨다 라고 한다면 서로 짝이 안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졌는데, 아담도 뭔가 다 짊어져야 맞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를 짊어지고 최초로 육체 속에 들어와 육체의 생명체로서 죄의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기록된 바는 성경에 기록된 것같이 라는 것이고, 산영은 창세기 2장 7절에 생령이라는 말로, 생명체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아담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모든 책임을 지고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올 때, 육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흙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흙
속에 들어간 아담은 그 영이 죽은 것이다. 영이 흙 속에 들어가면 영은 죽고 흙이 생명체가 된다. 영들이 하나님의 처소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떠나겠다고 하니까,『가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처소를 벗게 하고 세상의 처소인 흙을 덧입혀 주는 것이다. 하늘의 처소도
싫고 세상의 처소도 싫다고 입지 않은 영들은 말하자면 귀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육체의 생명이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생령이라는 표현 때문에 혼란이 있는데, 생령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첫 아담은 육체적 생명체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리시는 영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담은 범죄한 자들의 육체적 생명체의 통로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아담이 범죄한 영들의 책임을 지고 최초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자기를 따라 오는 모든 범죄한 영들이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생을 아담 안에서는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을 얻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생도 없습니다.
아담을 통한 육체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7월 23일(토)
복(福) 있는 사람(로마서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ever count against him.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방법 / 도 사 등 기 덮어버리다
1. 도말하신다(시편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Hide your face from my sins and blot out all my iniquity.
2. 기억하지 않는다(이사야 64:9)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
Do not be angry beyond measure, O LORD; do not remember our sins forever. Oh, look upon us, we pray, for we are all your people.
3. 등 뒤로 던져 버린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Surely it was for my benefit that I suffered such anguish. In your love you kept me from the pit of destruction; you have put all my sins behind your back.
4. 덮어버린다(시편 85:2)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You forgave the iniquity of your people and covered all their sins. Selah
5. 사하신다(골로새서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When you were dead in your sins and in the
uncircumcision of your sinful nature, God made you alive with Christ. He
forgave us all our sins.
7월 22일(금)
믿음의 법(로마서 3:27)
믿음의 법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므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율법 : 행위(行爲) 2041. 에르곤(ἔργον)
ἔργον, ου, ὁ 2041
발음 / 에르곤(ĕrgŏn)
- 관련 성경 / 행실(마 5:16, 딤전 5:10, 벧후 2:8), 행위(마 11:2, 요 3:19, 롬 2:15), 일(마 26:10,
눅 24:19, 롬 13:12), 사무(막 13:34),
역사(요 5:36), 소행(행 5:38), 사업(롬 14:20, 계 2:19), 공적(고전 3:13, 14), 실천함(약 1:25), 이룸(약 1:4), 지음(히 1:10), 행함(롬 2:6).
- 신약 성경 / 169회 사용
믿음의 법 : 은혜(恩惠). 카리스(χάρις) 5485.
χάρις, ιτος, ἡ 485
발음 / 카리스(charis)
어원 / 546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은혜(눅 1:30, 행 4:33, 몬 1:3), 칭찬(눅 6:32, 34), 칭송(행 2:47), 은총(행 7:10), 호의(행 25: 3), 은사(고후 9:15), 기쁨(몬 1:7), 아름다움(벧전 2:19, 20), 사랑스러움(눅 2:52), 감사 (눅 17:9, 롬 6:17, 고후 8:16, 골 3:16).
- 신약 성경 / 156회 사용
* 5463. 카이로(χαίρω)
1. 기뻐하다, 2. 안녕, 3. χαῖρε
- 관련 성경 / 기뻐하다(마 2:10, 고후 6:10, 빌 4:10), 즐거워하다(마 5:12, 눅 19:6, 벧전 4:13), 평안하다
(마 27:29, 눅 1:28, 요 19:3),
즐겁다(눅 15:5), 문안하다(행 15:23, 23:26), 기쁘다(고전 7:30, 요이 1:4), 기쁘게 하다(고후 7:7)
- 신약 성경 / 74회 사용
1.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인간 존재의 부패함은 목구멍은 열린 입술이요 혀로는 끊임없이 속이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 사람의 말의 악함과 부패함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 마음에 담은 악, 죄의 경향성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에서 나온 말들이 실제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발은 피를 흘리는 데 빠른,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지금 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부패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죄악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함이 없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결론은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19절)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온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
성경은 인간에게 소망이 없음을, 인간의 행위에 의로움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해 가감 없이, 에누리 없이, 드러내고 나타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만 깨달을 뿐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을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한 이후에 인간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율법,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이렇게 살아갈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계명이요 율법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혹은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해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요?
말씀대로 사는 것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물론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말씀대로 사는 사람의 삶은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지키며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연약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주님을 의지할 뿐인 것이죠.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믿었고, 이것을 통해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로써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연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한계만 드러낼 뿐입니다.
그래서 20절 마지막 부분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을 통해, 계명을 통해, 말씀을 통해 나의 나 됨, 죄성을 깨달을 뿐입니다.
내 힘의 한계와 부족을 여실히 느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결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아무리 내가 노력하고 애써도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겸손함을 배울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조그만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충만하게 되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로 채워졌다고 느끼면…
금방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나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율법은, 말씀은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내 힘으로는 주 뜻대로, 주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드는 것입니다.
주의 힘으로, 주의 능력으로 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힘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겸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행위로써 완전할 수 도, 완전해질 수도 없는, 결코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으로는 결코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행위로서는 한계에 이를 수 밖에 없다 했습니다.
다만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요, 우리의 한계를 발견할 뿐입니다.
율법으로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자 하지만 그 행위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죄된 인간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의 회복은 행위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합니다.
다른 방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입니다.
24절은 이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고 결코 하나님의 의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상태인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옳은 행위를 통해,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도 안됩니다.
아무리 수많은 선한 행위를 했을 지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그 죄로부터 우리를 구속> 하셨습니다.
<구속으로> 로 번역된 ‘아폴뤼트로세오스απολυτρωσεως’ 의 원형 ‘아폴뤼트로시스(απολυτρωσις)’ 는 ‘~로부터(from)’ 라는 분리의 개념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 (åπo)’ 와 ‘풀어줌’ 이라는 의미를 지닌 ‘뤼트로시스(λύτροsis)’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인간을 얽어 매고 있던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완전하게 분리하여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대속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즉 자기의 무죄한 몸을 ‘속전(購錢)’ 으로 십자가에 바치고 인간을 사온 것입니다(딤전 2:6).
예수님은 자기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치고 대신 우리를 그 값으로 사온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인간의 죄를 씻음 받기 위해서는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의 대속의 피가 필요했죠(출 12: 1-13).
하지만 이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온전히 해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육신하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흘려 인간을 구속하셨던 것입니다(마 20:28 ; 고후 5: 15).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24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 번역된 ‘디카이우메노이δικαιουμενοι’는 ‘디카이오오(δικαιόω)’의 현재 수동태 분사이며, <의롭다고 취급되다>, <의롭다 함을 얻다>(NASB, being justified ; NIV, are justified)’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셔서 우리를 죄를 속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자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 칭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칭의>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이신칭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속을 받고, 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칭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놀라운 것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 곧 <칭의>를 통해 우리는 신분이 바뀝니다.
앞에서 죄의 한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완전한 부패와 타락으로, 아무리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죄의 아들, 죄의 종의 신분에서 이제는 신분의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죄인의 신분, 죄의 종에서 이제는 <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의인의 신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사면을 받은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진 선물, 곧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라고 말합니다.
그 은혜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 <율법과 선지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획득하게 된다는 사상이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도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고(창 15 :6), 바울이 증거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 17)>는 말씀도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합 2:4).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미 의인이 되기 위한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뿐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었던 유대인들의 얼마나 율법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코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키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왜곡해서 스스로 율법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여겼고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들이 그 율법의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외식과 형식에 치우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자신들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고 겉으로 드러낸 행위로써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를 통해 우리의 의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 중심입니다.
동기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의로운 척, 바른 척 해도 그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멀면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내가 온전해졌고, 또 앞으로도 온전해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의인의 신분, 의로운 존재, 하나님께 인정받은 존재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믿음의 놀라움입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굳게 세운다(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화목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화하게 된 우리를 친히 제물이 되셔서 죽으심으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죄인된 인간을 위해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심판의 의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의이며, 구속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법으로도, 행위로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법, 오직 믿음으로만 얻은 의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에서 이제는 온 백성으로, 모든 열방으로 확대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수 있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진 의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중국 교회의 지도자 워치만 니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석한 세 사람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카드놀이를 하기로 하고 그 형제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그러니까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카드놀이 할 줄 모르십니까?" 라고 묻더랍니다.
형제가 조용히 웃으며 "할 줄은 알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손은
두었다가 무엇을 하시게요?"
즉시 돌아온 반문에 그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은 제 손이 아니라서요.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세 사람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가 최근 예수 믿게 된 동기와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의 몸이 주님의 몸이 되고
자신의 손도 주님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님의 손으로 카드놀이 하는 것을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은 무엇보다 성경적인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손으로든 입으로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손으로 입으로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의 일에 드려 보십시오.
죄를 지을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삶의 진정한 기쁨을 느껴 보십시오.
행위로써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행위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죄의 영향을 받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그 죄의 영향, 죄인의 신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죄인의 신분인 우리를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7월 21일(목)
이면적(裏面的) 유대인 로마서 2:29
유대인 :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행하는 사람 / 선민(선민) - 12절, 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이방인 : 율법을 받지 못했으며 할례를 행하지 않는 사람 - 14절, 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내 복음 - 16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참 유대인 : 이면적 유대인
유대교의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할례를 받은 사람은 비록 지옥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져 준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은 백성들이요, 할례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특수 민족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보장되었다는 우월감을 가진 이유로 이런 사상이 전해 내려온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우월감과 특권을 누리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실생활에서 율법을 받은 자답게, 또 할례를 받은 자답게 살지 못하면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하면서 이방인들을 향해서는 몹시 경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신앙생활을 즐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모태 신앙이다.
또는 나는 몇 대째 기독교 집안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신앙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세례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가졌지 자기들이 받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은 유대인들의 죄악을 지적하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을 받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2:17-29)
1. 형식적 율법(17-24)
2. 형식적 할례(25-27)
3.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받은 할례(28-29)
1. 형식적 율법(17-24)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애급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애급으로부터 구출해주셨으며 홍해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으며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고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을 체험했던 백성들입니다. 그리고 지도자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는 완전히 구별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고 자부심만 갖고 이방인들을 깔보는 유대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부터 20절까지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대조되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란 율법과 하나님과 연계된 민족으로 그들이 가진 율법과 하나님은 바로 자기네들의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나 선지자들을 통해 율법의 교훈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 자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라 믿었습니다.
또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어두운데 있는 소경 된 자들에게 빛이 되어주어 길을 인도하는 자들이며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고 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선생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퍼붓기를 남을 가르치는 자가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남에게 가르치기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네가 도적질을 하며 간음하며 심지어 우상에게 드려진 물건들을 도적질하느냐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백성이라고 율법을 자랑하고 또 하나님을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범하니 이런 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천대했지만 율법이 있다고 한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범했으니 이것을 보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꼴이 되었다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남쪽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로 포로로 잡혀가 종의 생활을 하게 했는데 이런 일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결과가 되었던 것과 같은 그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의 백성들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분산된 정신과 사상으로 갈등 구조를 형성합니다.
북한의 주민들은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적 장애를 갖고 자기 의지와 판단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2. 형식적 할례(25-27)
유대인들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물론 맨 처음 할례가 시행될 때에는 아브라함은 99세에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의 징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 행할 때에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들이 앞부분에서 지적된 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할례가 무익하다는 사실을 25절에서 27절까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방인과 차별화 하기 위해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을 두고 무할례당이라고 경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어서 할례를 받지 못한 무할례당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할례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겠다는 전제 아래 받은 징표이므로 만일 무할례자가 할례는 받지 않했지만 언약을 지킨다면 그는 무할례자가 아니라 바로 할례자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무할례자가 온전히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나 다름없게 될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은 할례자 유대인들을 오히려 비판하지 않겠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3. 이면적 유대인, 마음에 받은 할례(28-29)
누가 참 유대인이며 누가 참 할례자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들만 구원을 받고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들인양 믿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하나남의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잘못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으로 율법을 받아 그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가 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과적으로 할례를 받은 자가 참 할례자가 아니라 참 할례자는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드려 죄 사함 받은 자가 참 할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6 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했는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혈통과 상관없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한 구원의 역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린 것은 신약시대부터 되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이미 그 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경고를 받고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이방인이었으며 룻과 욥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땅히 믿고 행해야 할 것을 행함으로 구원이 이뤄지는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 즉 참 신자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은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갖는 대단한 자부심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도 유대인이지만 자기 동족들이 자부심만 가졌지 내적으로 참 유대인이 되지 못한 그들의 죄악들을 폭로하며 그들이 그런 죄악에서 벗어나 참 유대인 그리고 참 할례자가 되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퍼붓는 그 공격을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연관시켜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인 또는 성도라 부릅니다.
당신은 참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예라는 대답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참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참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받은 그 말씀을 몸으로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 못을 저질렀을 때에 남을 가르치고 충고했던 그대로 내가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못했을 때에 비록 그를 두고 충고를 직접 못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참 성도답지 못하다고 마음에 걸렸다면 나는 그런 행동을 내가 삼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인인가?
나는 성도인가?
성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려는 것은 서바나로 가려는 것이었다.
서바나로 가려면 로마교회가 바울을 전적으로 지원하며 후원이 필요하였다.
로마서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7월 20일(수)
복음(福音)의 능력(能力)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098. 복음(복음) εὐαγγέλιον
εὐαγγέλιον, ου, τό
발음 / 유앙게리온(ĕuanggĕ- liŏn)
어원 / 2095와 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음(마 4:23, 막 16:15, 롬 1:1)
- 신약 성경 / 76회 사용
* 32. 앙겔로스, ἄγγελος
ἄγγελος, ου, ὁ
발음 / 앙겔로스(anggĕlŏs)
어원/ ‘소식을 가져 오다’에서 유래
* 2095. 유(εὖ)
발음 / 유(ĕu)
1411. 능력(能力) δύναμις.
δύναμις, εως, ἡ
어원 / 1410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권세(마 6:13, 행 4:7), 권능(마 7:22, 막 6:5, 행 1:8), 능력(마 13:54, 눅 1:17,
롬 1:4), 재능(마 25:15), 권능자(막 14:62),
뜻(고전 14:11), 힘 (고후 1:8, 8:3, 히 11:11), 세력(히 11:34).
[동] 능하다(막 9:39, 눅 19:37), 강하다(고전 15:43), 힘있다(계 1:16)
- 신약 성경 / 119회 사용
1. 할 수 있다, 2. 마태복음 6:24, 3. δύ- νασθαι... εἰ σελθεῖν
발음 / 두나마이(dünamai)
어원 / 수동. 디포넌트. 현재2인칭단수 δύ- νῃ와 δύνασαι, 미완료 ἠδυνάμην과 ἐδυνάμην, 미래 δυ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δυνήθην과 ἠδυνάσθην, 불확실한 유사 어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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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배경본서의 기록 연대는 A.D.57년 이른 봄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울은 이때 제3차 전도 여행중이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해 이방인 교회들이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가려던 중이었다.
15:26에 의하면 바울이 본서를 쓸 때는 이미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의 헌금을 받아 가지고 고린도에 도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3개월 체류해 있는 기간 동안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바울의 사상은 '이신득의(以信得義)'이다.
유대인은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교리를 본서에서 아주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신득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은 물론 죄책과 거듭남과 성화와 성도의 견인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바울은 특별한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말하면서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인 문체를 사용하였다.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보다
본 서신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에 부여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복음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서신이 조직 신학의 총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기독교 교리의 핵심 교리를 말하고 있다. 본 서신은 서신서이면서도 신학적인 성격을 띤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위대한 로마서는 종교 개혁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본 서신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목적
바울은 본 서신을 로마 교회 방문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방문하려 한 것은 자기가 받은 영적인 은사를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강하여지고 또 서로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특히 본서에는
이신득의의 신앙원리를 가장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 원리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의를 믿음으로서만이 모든 인간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구조
바울 서신의 특징적인 구조는 교리편과 생활편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1~11장 : 교리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
12~16장 : 실천편 /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교리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냐?"를 밝히고 있는 데 반해 실천편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를 밝히고 있다. 전자는 "믿음에 의한 삶"이라면, 후자는 "믿음에 의한 섬김"이다.
바울 서신들
중에서 처음에 위치한 로마서는 구원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짜임새 있게 기록하였고 아울러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마땅히 행할 바에
대한 실천적 권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깊이 있는 내용과 체계적인 전개로 말미암아 본서는 "바울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진다.
즉
복음서가 예수의 삶과 행적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면, 본 로마서는 예수의 탄생과 사역들의 의의를 성도의 구원 과정과 연결하여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질문과 응답의 형식으로 먼저 현재의 상황에 따른 구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 칭의(稱義), 성화(聖化) 등에 관하여 설명한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신앙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본서는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1~8:39 / 인사와 더불어 구원의 필요성과 이에
이르는 방법
9:1~11:36 /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 상황을 이야기하며 하나님의 의가 역사 가운데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12:1~16:27 /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백성이 그 은혜에 대한 감사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의의 실천과 이에 따른 변화된 삶
1. 표제
바울이 이 편지서를 기록했을 때 원래는 아무런 표제가 붙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단순한 한 통의 편지였다.
그러나 이윽고 이 서신은 초기의 사본들에게 붙여진 “로마인들에게”(헬, Pros Rhomaious)라는 표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기의 사본들은 좀 더 확대된 표제 곧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한”이라는 표제를 갖게 되었다.
이 표제는 오늘날에도 몇개의 영역(英譯) 성경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2. 저자
사도 바울이 이 편지서의 저자라는 사실이 심각하게 의심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로마로 보내진 원래의 편지에 로마서 제16장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한동안 일한 적이 있는 에베소(행 19장)에 보내진 별개의 편지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이론은 주로 16장에 열거된 사람들의 명단의 길이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또한 바울이 아직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도시인 로마에 그토록 많은 친구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추측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로 말하자면 제국의 각처에서 사람들이 로마로 자연스럽게 이주하던 때이므로 바울이 세계의 수도인 그 도시에 많은 친구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 이 모든 초기의 사본들이 제16장을 그 편지서의 온전한 부분으로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보수적인 입장은 이 편지서 전체가 사도 바울의 로마의 신자들에게 쓴 것으로 믿고 있다.
바울은 다소(Tarsus)에서 출생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바리새인의 위대한 교사인 가말리엘의 수제자로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다른 모든 유대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의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피장”(천막 만드는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첫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는 현장에 있었으며, 그 광경은 분명히 젊은 사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이 젊은 바리새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그의 기적적인 회심이 있은 다음에 그는 침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후 그는 아라비아로 물러나서 연구와 준비에 몰두하고 3년이란 세월을 보내었다.
그는 그의 고향 다소에서 3년을, 안디옥에서 1년을 보낸 다음 성령의 지도를 받아 이방인들을 위한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3차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하여 그는 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또 편지서들을 썼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과 헬라의 교육과 히브리의 종교를 한 몸에 종합한 매우 갖춰진 선교사로서 그의 위대한 사업을 위한 최고의 자격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자질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은혜와 사도권만을 신뢰하며 복음 사업에 임하였다(롬 1:5).
희생과 고난으로 점철(點綴)된 여생을 다 보낸 다음에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이 전한 기별을 증거하였다.
네로 황제의 결정에 의하여 그는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지하 묘지(catacomb)에 장사되었다고 전해진다.
3. 역사적 배경
로마서는 제3차 선교 여행 동안에 바울이 석달 동안 체류한 고린도에서 기록된 것이 확실시된다(행 20:1-3 참조).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가 A.D. 57-58년의 겨울일 것으로 믿고 있으나 또 더러는 그보다 좀 이른 시기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편지서가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가이오(롬 16:23; 고전 1:14)와 에라스도(롬 16:23; 딤후 4:20)에 대한 언급과 고린도의 동쪽 항구인 겐그레아의 교회에서 특별한 봉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바울이 묘사하는 뵈뵈에 대한 추천(롬 16:1)등으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있다.
이 편지서를 기록할 당시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로부터 거둔 의연금품을 가지고 팔레스타인으로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다(롬 15:25, 26; 행 19:21; 20:3; 24:17; 고전 16:1-5; 고후 8:1-4; 9:1, 2).
그 사명을 다한 후에 바울은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으로부터 계속해서 스페인으로 여행하고자 했다(행 19:21; 롬 15:24, 28).
바울은 로마 제국의 수도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가졌으나 아직 한번도 방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롬 1:13; 15:22).
그러나 이제는 아시아와 헬라에서의 그의 선교 사업을 마쳤다고 생각해서(롬 15:19, 23), 그는 이탈리아의 사업을 강화하고 스페인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해 서쪽으로 옮겨 가고자 애쓰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바울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의 축복과 협력을 받고자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불원간 그 도시를 방문할 것을 기대하면서 그들에게 이 서한을 써 보내게 되었다. 이 편지를 통하여 바울은 매우 강하고 분명한 어조로써 그의 복음의 위대한 원칙들을 개괄하고 있다(롬 1:15; 2:16).
4. 주제
이 편지서의 주제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성과 죄인인 인간이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완전하고 성결하게 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길”이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영원히 살아 계셔서 인간을 회복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바울이 이 편지서를 기록할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유대화주의자들과의 논쟁 가운데서 야기된 여러가지 문제들이 꽉 차 있었다.
그는 그 문제들 중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다루면서 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하여 광범한 예증들로써 대답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므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스런 이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롬 3:23).
이것에 대해서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상당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롬 1:2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정죄아래 있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게다가 죄된 인간은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낼 능력이 도무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의 타락한 형편하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롬 8:7).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려는 율법주의적인 시도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연약성과 구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기를 거절하는 이른바 오만한 자기 의(義)에 빠지게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제책을 강구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은 이것을 당신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 곧 그의 죗된 과거를 덮어주기 위해 이미 마련된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과 그로 하여금 의의 생애를 살도록 인도하시고자 제공된 능력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사하는 것, 오직 그것 뿐이다.
이것이 이 편지서의 첫 부분에 전개된 바울의 복음이다. 그 나머지 부분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그리스도 교회 신자들을 취급하는 문제들에이 복음을 실제적으로 적용시키는 면을 다루고 있다.
5. 개요
Ⅰ. 서론 1:1-15
1. 인사 1:1-7
2. 개인적인 부언 1:8-15
Ⅱ. 교리적인 주석 1:16-11:36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 1:16-5:21
(1)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 1:16, 17
(2) 의에 대한 보편적인 필요 1:18-3:20
① 이방인들의 실패 1:18-32
② 유대인들의 실패 2:1-3:20
(3)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된 의 3:21-31
(4) 구약의 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4:1-25
(5) 칭의의 복스런 결과 5:1-11
(6) 칭의의 효과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의 대조 5:12-21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의 교리 6:1-8:39
(1) 죄에 대해 죽고, 새 생애로 부활함 6:1-11
(2) 율법과 죄의 속박에서 벗어남 6:12-23
(3) 죄에 대한 율법의 관계 7:1-13
(4) 육과 영 사이의 갈등 7:14-25
(5) 성령 충만한 생애 8:1-39
3. 이스라엘의 선택 9:1-11:36
(1) 이스라엘의 거절에 대한 바울의 유감 9:1-5
(2) 거절의 정당성 9:6-13
(3) 하나님의 뜻은 의심할 수 없음 9:14-29
(4) 거절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의 불신 9:30-10:21
(5)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 11:1-36
Ⅲ.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의 실제적 적용 12:1-15:13
1. 그리스도인의 자아 희생 12:1, 2
2.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그리스도인 12:3-8
3.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 12:9-21
4.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 13:1-7
5.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빛-사랑 13:8-10
6. 재림이 가까움 13:11-14
7.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상호 관용이 필요 14:1-15:13
Ⅳ. 결론 15:14-16:27
1. 개인적인 부언 15:14-33
2.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인사 16:1-16
3.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 16:17-20
4. 바울의 동료들과 대필자의 인사 16:21-23
5. 축도와 송영 16: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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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 12. 20. - 1981. 3. 1
영국의 의사 출신의 복음주의 설교자
존 스토트와 함께 한국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많았던 목회자.
거룩함과의 만남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열정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이 주장해야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들을 하고 안 하는 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아이디어나 행위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우리들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목표 미달입니다.(복음의 핵심, 132쪽.). | ” |
"종교오락"에 대한 거부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회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간증하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의 모습들에 대해 "종교오락"이라는 말을 썼다. 즉, 교인이라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게 설교하고 목회하는 종교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설교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 | 간증자로 초대되는 사람들 중에는 해군 제독이나 육군 장성처럼 특별한 직함을 가진 이들도 있고, 야구선수나 연극배우, 영화배우, 가수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설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그런 이들의 간증 듣는 일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오락’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눈치 채셨습니까? 저는 이런 일들이 당연히 오락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설교에 등을 돌리고 이런 오락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설교와 설교자 26). |
” |
신학에 대한 존중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인 신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를 잘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거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별히 조직신학과 교회사를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부흥에 대한 견해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부으심이 말씀 선포로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며, 칼빈주의가 만일 메소디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성주의와 스콜라주의로 흐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고백이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열광주의 즉 감정 조절이 한되는 상태를 옹호하며, 이것을 칼빈주의자들이 반박한다고 주장하였다.[1]
로이드 존스의 저서로는
- 목사와 설교, CLC
- The Miracle of Grace, 은혜와 기적, 백합출판사, 1987
- 영적 침체와 치유, 이용태 역,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01
- 하나님 나라(복있는 사람)
- 사도행전 강해시리즈(승리하는 기독교 등, 복있는 사람)
- 설교와 설교자(복있는 사람)
- 내가 자랑하는 복음, 복있는 사람, 2008
- 로마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서문강역, 생명의 말씀사 2002.
1921. 4. 27 - 2011. 7. 28
성공회 사제로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
‘톨레 레게’(tolle lege)
“나는 내 자신을 깊이 응시하여, 나의 가장 깊은 은닉된 장소에서 창피한 기억들을 모두 꺼냈다. 내 마음이 볼 수 있도록 진열하였다. 그 순간 거대한 폭풍이 바로 그 기억들을 강타하였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기억들을 구역질하듯 모두 토해냈다. 옆에 있었던, 알리피우스부터 급히 뛰쳐나왔지만, 나는 울기 위해서 혼자 있어야만 했다.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이동하여, 그의 존재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고백론> 8권 28단락a
‘톨레 레게’tolle lege.
이 라틴어 표현은 ‘취하여 선택하여라!’란 의미다. 취사선택하라는 신의 목소리이자 동시에 눈물로 정화되고 변화된 어거스틴 자신의 목소리였다. ‘톨레’tolle는 고속도로의 톨게이트tollgate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벌금을 부과하다; 사용료를 지불하다’란 의미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기 위해, 특정한 고속도로를 상용했기 때문에, 그 사용료를 지불해야한다. 라틴어 ‘톨레레’tollere는 ‘선택하다; 집어 들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다’란 의미다. ‘레게’lege는 ‘읽다’란 라틴어 동사 ‘레게레’legere에서 파생한 단어로 더 근본적인 의미는 ‘선택하다; 추리다’란 의미다. ‘톨레 레게’tolle lege를 번역하자면, ‘(한 가지 원칙을 선택하여) 집어 들고 (그 선택한 것을 너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알려라!’란 의미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기뻐 날 뛰었다. 그는 신적인 무엇이 그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여, 성서를 ‘들어올려’ 아무렇게나 펼쳐진 성서의 첫 문장을 ‘읽었다.’ 그는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우스도 이런 식으로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였다. 안토니우스가 들은 소리를 이것이다. ‘너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였다. 어거스틴이 성경책을 들고 펼쳐 읽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그가 읽은 내용은 <로마서> 13.13-14였다. 어거스틴이 이 구절을 읽자, 빛이 등장하여 그를 감쌌다.
어거스틴은 과거의 어거스틴이 아니라 미래의 어거스틴이 되었다. 그의 삶은 단정端正해졌고, 타인과 경쟁하여 제압하려는 삶이 아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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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1546.2. 18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를 주장했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으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당시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5. 8. 31 ~ 1791. 8. 31)
영국 개신교계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 창시자다.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또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은 감리교의 활동만이 아니라 19세기 성결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학공부와 목회활동
차터하우스 학교와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fellow)가 되었으며, 1725년에는 부제가, 1728년에는 사제/장로목사가 되었다.
잉글랜드국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이었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교구에서 사제로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신성회는 신학 공부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을 연마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동생 찰스 웨슬리가 처음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고, 존 웨슬리도 가입한 후 모임을 지도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아미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동안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독일을 방문해 모라비안 교회와 독일 경건주의 교회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전도여행과 사회개혁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예정론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자유의지론을 바탕으로 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모임인 속회를 조직하여 소모임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선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교도소 개혁과 노예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신학사상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공교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수단인 성례전과 예전을 존중하는 성공회 고교회주의(High church,Anglo-catholic)와 개인의 종교경험을 존중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감리교와 잉글랜드 성공회 요한 웨슬리의 회심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잉글랜드 성공회 성직을 유지하였고,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는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 하였으나,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를 안수할 감독을 웨슬리가 파송하며 미국에서는 분리적 태도를 취했다.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는 미국 감리교회처럼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구세군,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이 생겨났다.
웨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한다.
요한 웨슬리의 회심
저녁기도, 루터의 로마서 주석1738. 5. 24
이른 아침 존 웨슬리는 성서를 묵상하는 중에 성서 구절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4
이 날 오후 웨슬리는 세인트 폴 교회에서 있었던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찬양대는 푸셀의 "오!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나아갑니다(Out of the deep have I called unto thee, O Lord)"를 불렀다.
이 곡은 마음의 고뇌와 거룩한 열망에 휩싸여 있던 웨슬리의 영적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웨슬리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의 네틀턴 코트(Nettleton Court)에서 모이는 모라비아 교도의 기도회에 가기 위해 저녁 기도회에서 빠져 나와 성서를 펴니 "네게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도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기도회 장소에 도착한 웨슬리는 뒷자리에 앉아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뿌리요, 수액이며, 최고의 기도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8시 45분, 마지막 구절을 읽는 소리를 듣는 순간 웨슬리는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였다.
존 웨슬리가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심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날 저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썼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웨슬리는 곧 마음에서 경험한 것을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간증하였고 밤 10시쯤 되어서는 신도회 회원들과 함께 동생 찰스에게로 가 이 기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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