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29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4: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 신을 벗는지라(8절)
♦ 성구 :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
“그 신을 벗는지라(he removed his sandal)”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의 흉년으로 모압으로 이주하였던 엘리멜렉의 가족들은 십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죽었고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모압의 며느리 룻과 오르바가 남았습니다.
베들레헴 땅에 먹을 것이 풍성하다는 소문을 듣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며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엘리멜렉 집안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 기업을 무를 자가 그 신을 벗어버림으로 그 다음 기업 무를 자는 보이스로 결정됩니다.
기업을 무를 자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물질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된 것은 물질적인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영적인 가치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삶을 풍년과 흉년으로 구분할 때 평생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음식으로 지냈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흉년의 삶과 매일 풍성한 잔치를 즐겼던 풍년과 같은 부자의 삶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와 같은 삶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세속의 가치가 아니었기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일시적인 즐거움에 붙잡혀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모압 여인 룻이 고향 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옮겨와서 풍성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룻은 베들레헴 땅에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를 만났기 때문에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으며 메시아 족보에 그 이름을 새길 수 있었습니다.
룻이 바라본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며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흉년의 인생을 풍년의 인생으로 갈아엎을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잃은 것으로 그녀의 삶이 막을 내린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삶은 슬픔이 기쁨으로 눈물이 웃음으로 뒤집어지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소망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룻기서는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은 다윗 입니다.
다윗 왕은 오벳의 손자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벳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일 인생의 흉년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그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새로운 깨달음 때문에 아직도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회복시키는 생명과 나눔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기근과 같은 자연에서(1장)
우연으로 보이는 일에서(2장) 그
인간의 계획에서(3장) 작용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4장에서는 그 손길이 사람들이 함께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당시 성문은 넓은 공터가 있어서 각종 사건들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공공장소였으며, 길목이기도 해서 만남의 광장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문”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 때 “마침”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인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습니다(1).
‘마침’은 ‘보라’는 히브리어 감탄사를 의역한 단어인데, 바로 ‘지금 여기’에 그가 때마침 등장했음을 강조합니다.
보아스는 그를 초청하여 성문에 앉혔고, 기업 무르는 일을 공식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성읍 장로 십 인”을 증인으로 초청했습니다(2).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에게 상황부터 설명합니다.
3절에서 “관할하므로”는 완료형 동사 ‘팔았다’(hr'äk.m', 마케라)의 의역입니다.
히브리어 완료형은 시간 개념보다는 동작의 완료를 의미하기 때문에, 미래의 일일지라도 확실하게 행해질 약속이나 결심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여기서도 ‘팔려고 결심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우리의 친족 엘리멕렉이 가지고 있는 밭을 팔려고 내놓았소”라고 번역합니다.
보아스는 이름이 감추어진 ‘아무개’에게 나오미의 친족 권리를 사용하여 고엘의 의무를 수행하려는지 의사를 묻고, 그가 원치 않으면 다음 고엘은 자기뿐임을 밝힙니다.
아무개는 선 듯 “내가 무르리라”고 답합니다(4).
그러자 보아스는 그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5)할 의무가 있음을 추가적으로 알려줍니다.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경우 룻을 아내로 맞이해서 고인의 이름으로 기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고 답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율법에 따라 자식 없이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유지시키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형수나 제수와의 결혼이므로 수혼(嫂婚, levirate) 제도라 불렀고, 대를 잇기 위한 결혼이므로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도 합니다.
수혼 제도는 고인의 ‘형제’에게 부여된 의무였는데, 여기서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고엘에게 계대 결혼의 의무까지 말한 것이 좀 의아합니다.
하지만 아무개나 증인들이 이의를 제기치 않은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형제’라는 의미를 친족에게까지 확대해서 해석했던가봅니다.
혹은 룻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야만 엘리멜렉의 기업이 보존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고엘의 역할을 한 것이므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매년 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땅 값을 갚아 나가면서 나오미만 챙겨준다면, 몇 년 후에는 상속자 없는 그 땅이 영원히 고엘의 기업이 되니 상당히 득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룻 때문에 계대결혼의 의무가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은 땅 값 지불에 두 과부를 먹여 살리는 수고를 한 후에도 결국 고엘이 그 땅의 실제 소유자가 되지 못함을 의미했습니다.
아무개는 추가된 정보의 의미를 재빨리 파악했습니다.
자기 재산만 축내는 일임을 알고 고엘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며 권리를 이양의 관습적 증표로 신을 벗어줍니다(7-8).
반면 보아스는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즉시 선언합니다.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9-10).
드디어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율법과 사회 도덕에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100% 자기 뜻대로 생각하며 결정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100% 당신님의 뜻을 성취해 가셨습니다.
룻기는 눈에 보이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을 ‘비상 섭리’라 하는데, 룻기의 하나님은 비상 섭리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황폐한 삶이 풍요로워진 것은 일상의 삶 중의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판단과 결정을 주관하셔서 당신님의 뜻이 이루어지게끔 하셨습니다.
그 손길에 의해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인애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 백성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분 나라답게 만들어간 사람은 신비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 체험이 없어도 묵묵히 그분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판단의 기준을 ‘자기 이익’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데 둔 사람들이지요.
실상 그 암흑 같은 시대 속에 그러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룻기 저자는 아무개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상식을 뛰어넘는 결정을 한 보아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개는 ‘자기 이익’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이득이 있으면 권리를 행사하고 손해가 예상되면 미련 없이 의무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악행이 아니며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인애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반면 보아스는 ‘하나님 말씀대로’가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고엘의 정신과 규례대로 행했습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라면 재산상의 손해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지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은 그들 공동체 속에 룻과 보아스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룻과 보아스를 크게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1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날 때 기쁩니다. 그보다 더 기쁠 때는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지속적인 손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 타락한 시대 속에서도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사람을 발견할 때면 성문에 모인 사람들처럼 존경과 축복의 마음을 감추어두고 싶지 않습니다.
축복 속에 언급된 “베레스”는 보아스의 직계 조상입니다. 그는 다말과 그녀의 시아버지 유다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창 38장). 감추고 싶은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룻은 롯과 그의 큰딸 사이에서 태어난 모압의 후손입니다(창 19:30 이후). 룻 역시 수치스런 집안 내력을 가졌던 셈이지요. 모압 족속은 대대로 우상을 섬기며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 했던 족속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레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백성들과 장로들의 축복대로 룻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헤세드는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신앙을 주셔서 귀히 사용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들 ‘오벳’을 주셨습니다(13). 동네 아낙네들은 아픈 과거를 가진 나오미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헤세드를 목격하고 찬송하며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14-15). 나오미는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16).
나오미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장면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막 돌아와서 아낙네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의 장면과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텅 비었던 나오미가 채워졌습니다. 괴롭게 하는 분인 줄 알았던 여호와께서는 그녀에게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를 주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오벳을 양육할 기쁨을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괴로움을 많이 겪은 것 같았던 그녀가 실상은 누구보다 많은 복을 받은 사람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이 반전되는 순간이지요. 하나님의 은총적 기적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의 승리가 돋보이지요.
룻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향한 헤세드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손길은 그 시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는 하나님 섭리의 일차적인 수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은 통합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 “다윗” 조상입니다(22).
텅 빈 사사시대를 살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의 헤세드를 통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되므로 이차적인 수혜자기 됩니다.
룻기 저자는 하나님 섭리가 다윗까지 연결됨을 중요한 결론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분의 백성 모두가 궁극적인 수혜자가 되었음을 압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먼 옛날 몇몇 사람을 축복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봐야할 이야기지요.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손길이 지금 여기까지 미치고 있음을 배웁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성도는 ‘자기 유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눈에 뚜렷이 보이는 기적은 없을지라도 은밀한 기적의 역사가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의 손길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며 손해 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 하나님 백성다운 삶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하나님의 헤세드가 드러나길 바랍니다.
♦ 12월 2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3: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기업을 무를 자(9절)
♦ 성구 :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기업을 무를 자(you are a kinsman-redeemer)”
‘기업을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키 고엘 앝타”라고 합니다(for thou art a near kinsman).
“룻”은 “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정의 ‘기업무를 자(NIV, a kinsman-redeemer)’이기 때문에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는 표현은 룻이 보아스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Matthew Henry, Hervey, Atkinson).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보호하셨던 것처럼 룻은 보아스의 날개 아래서 보호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보호를 받는 길은 보아스와 결혼하므로 가능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 관계를 맺을 때에도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겔 16:8).
결혼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 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룻이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라는 말은 구혼(求婚)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기업을 무를 자가 되는 것은 강제성이 없습니다.
만일 당사자가 기업 무를 자격을 포기할 때는 신을 벗음으로 그 자격을 포기한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규정된 의무를 득(得)과 실(失)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처럼 오늘날도 이 세상이 점점 삭막해져 간다고 탄식(歎息)합니다.
그 이유는 치열한 경쟁과 이기적인 욕망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은 보아스와 같이 소리 소문없이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보살핌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웃에게 나눔과 베푸는 진실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하루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나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태도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께로 나오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2월 2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복(20절)
♦ 성구 : 나오미가 자부(子婦)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福)이 그에게 있기를 원(願)하노라 그가 생존(生存)한 자(者)와 사망(死亡)한 자(者)에게 은혜(恩惠)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近族)이니 우리 기업(基業)을 무를 자(者) 중(中) 하나이니라.
“여호와의 복(The LORD bless)”을 누가 누구에게 줄 것인가?
‘생존한 자’는 “나오미”와 “룻”을 가리킵니다.
‘사망한 자’는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을 말합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Keil. Goslinga).
이러한 견해에 따라 영어성경(NIV, Living Bible)에서는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은혜를 베풀 자를 “보아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Matthew Henry, A. C. Hervey).
이러한 주장에 따라 ‘보아스’는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이 살아 있었을 때에도 호의를 베풀었으며 또한 지금도 여전히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합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보아스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나오미’의 근족이며 기업을 무를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גֹּאֶל)”이라고 합니다.
‘고엘’이란 “되찾다” “구속하다” “무르다”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받았을 경우 이것을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위한 목적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엘(Goel)이 된 사람은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고엘의 의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합니다(레 25:25∼26)
둘째는 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민 35:12, 19, 21)
셋째는 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어야 하며 죄 값을 대신 받기도 합니다(민 5:8)
고엘의 자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혈연적 관계(신 25:5∼7)
둘째는 자원해야 할 것(룻 3:13)
셋째는 고엘로서의 능력을 갖출 것(레 25:25)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오미와 룻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당시 베들레헴 성에서 유력한 자이며(2:1), 친족에게 은혜를 베풀 줄 아는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가정을 위한 고엘로서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근족의 의무 참조 / 레 25:8∼55)
베들레헴 성의 유력자 ‘보아스’처럼 이 세상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자리에서 보아스처러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마음과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살기에 좋은 곳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함께 모여 정답게 살아갈만한 세상으로 가꾸는 일에 정성을 쏟아낼 수 있는 은총의 하루를 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2월 2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1: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손(13절)
♦ 성구 :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因)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因)하여 남편(男便)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因)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룻기서는 두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는 룻이란 주인공이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입니다.
둘째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사시대의 순환 고리를 즉 “징계, 부르짖음과 회개, 구원자 사사, 평화”를 파괴한 내용으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이렇게 시작합니다(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를 말합니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절대 진리를 잃어버리고 ‘사람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처럼 어두운 시대에도 신앙을 지켰던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손길은 암흑의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음을 말씀합니다.
또한 이 아름다운 신앙과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룻이 다윗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섭리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본문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소개합니다(1:22, 2:2,21, 4:5,10).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었으며 정통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the LORD's hand)”이란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고 “나오미”가 남겨졌다고 표현함으로 이 땅에 비참한 존재로 남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을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향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행을 겪은 “나오미”가 이스라엘 땅으로 귀향하는 것과 더불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셨음으로 자신을 “나오미” 즉 “감미로움”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고 “마라” 즉 “괴로움”으로 부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나오미”의 고백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탄식과 함께 여호와께서 자신의 삶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신세 한탄이나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의 표현이 아닙니다. 룻기 전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나오미는 일관되게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탄식 어린 고백은 오히려 불행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섭리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애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처럼 애가를 불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다가도 때론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만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사람의 생명보다 이익, 재산, 돈을 중시하다가 유라굴로 광풍 같은 고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시련이든 고통이든 그 어떤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애가를 부르는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유라굴로와 같은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그때 비로소 바쁘게 걷다가 지나친 소중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이정표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풍랑은 때때로 우리들에게 유익입니다. 애가를 찬가로 바꾸시는 살아서 역사 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복된 하루가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https://www.youtube.com/watch?v=O7zmjMpKTMw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룻기는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별로 장면의 전환이 비교적 분명하게 이루어집니다.
1장은 모압 땅과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는 귀향길을 배경으로 합니다.
2~4장은 이스라엘 베들레헴을 배경으로 합니다.
2장은 보아스의 추수밭
3장은 타작마당
4장은 베들레헴 성문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3절과 5절입니다.
1:6~18절은 이스라엘에 흉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면서 나오미는 자신의 두 며느리에게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에 며느리들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시어머니의 종용에 결국 오르바는 모압에 잔류하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여기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갖게 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압의 신과 민족, 그 땅의 문화, 재혼하여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모두 포기한 채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 낮설은 이국 땅 이스라엘로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런 룻의 결심은 일차적으로는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19절부터 마지막절까지는 무대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바뀝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귀향한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20절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