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들은 “이거 신제품인가요?”
한국 사람들은 “이거 진짠가요?”
얼마나 ‘가짜’에 속고 살았으면, 이렇게 ‘진짜’인지를 묻는 것이 생활화가 되었겠는가?
그러다보니 기름도 참, 진짜, 순, 100%, 원조 등의 말이 붙어야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묻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날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도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 진짜요?’
▲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 ⓒ 김영사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영어 원제 The God Delusion)이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또는 <눈먼 시계공>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다.
그런데 7,000권만 팔려도 대박이라는 작은 한국 인문학 출판 시장에서, 이 책은 2007년 7월 중순에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4만 권 이상이 팔려나갔고, 그해 연말 40만 권을 훌쩍 넘어섰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이후 인문학 도서 분야에서 최대의 돌풍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의 돈지갑을 흔쾌히 열게 한 이 두껍고 비싼 책의 맨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 한다.”
저자는 가수 존 레넌(John Lennon)의 노랫말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한번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자살 폭파범, 9·11도,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 전쟁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도, 또한 보스니아 인종청소도 없었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과감히 종교를 버리고 “행복하고 도덕적이며 지적인 무신론자가 되라”고 주문한다.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란 우스개가 유포되는 사회
왜 한국인들은 이 책에 열광하는가?
요즘 우리사회에 ‘안티 기독교’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안티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는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인데, 반기독교 정서의 조직화 및 운동화 수위가 심상치 않다.
아마 22세기의 한국 역사학자는 21세기 초 한국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 안티 기독교를 꼽을지 모르겠다.
이화대학교에서는 비기독교인 학생들 사이에 '기독교 전도자 퇴치법 10계명'이라는 우스개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제1계명은 ‘절대 혼자 식당에서 밥 먹지 않기’
왜냐하면 학생들의 약 15분 동안의 평균 식사 시간 동안에 최소한 5명 정도의 전도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제2계명은 누가 다가와 ‘교회 나가시느냐’고 물으면 ‘네~’ 하고 말꼬리 내리지 말고 ‘넵’하고 단호하게 말하기
제3계명은 또 누군가 다가와 ‘나와 같이 성경공부 해보지 않겠냐’고 물으면 ‘아니오~’ 하고 말꼬리 내리지 말고 ‘아니욥’ 하고 확실하게 거절하기 등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초대 교회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 있다.
이때는 베드로가 입을 열어 설교하면 하루에 3,000명씩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던 때였다.
그 이유가 44절에서 47절에 소상히 설명되어 있다.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대로 나누어 가지며,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또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느니라.”
성도들의 본이 되는 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 결과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말을 표준새번역 성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 ‘호감’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종교 호감도 조사가 있었다.
1970년대에 조사에서 종교 이미지 선호도는 개신교가 1위, 불교가 2위, 가톨릭이 3위였다.
그런데 2000년도에는 순위가 바뀌어 가톨릭이 1위, 불교는 그대로 2위, 개신교는 3위로 떨어졌다.
개신교에 대한 비호감도가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감도의 변화는 실제 신도 수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2005년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전 10년간 우리나라 3대 종교 중에서 천주교 신자는 74.4%, 불교 신자는 3.9%가 증가한 반면, 개신교 신자만 1.6% 감소했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국 개신교의 신도 수가 줄었다는 충격적인 발표였다.
그때 매우 신기했던 일은 그 -1.6% 성장률을 실제 사람 수로 환산하면 ‘14만 4,000’명이 된다는 통계였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상징적인 숫자가 아닌가?
잘 알다시피, 14만 4,000은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 나오는 말세 때의 공중 휴거 숫자다.
그렇다면 이번 한국 개신교인 숫자의 감소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보내신 가히 ‘종말론적’ 메시지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교회인가 아무개 목사의 교회인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설득당하는 데 말이나 논리가 차지하는 비율은 5%에 불과하다고 한다.
60% 이상은 첫인상의 호감도가 좌우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을 잘해도 첫인상에 왠지 호감이 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3분의 2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의 이미지가 갈수록 비호감이 되다보니, 아무리 담대히 길거리에 서서 복음을 외쳐도 사람들은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좋은데, 기독교는 싫소.”
왜 이렇게 한국 개신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는가?
무엇이 그 원인인가?
말하기 힘들고 또 듣기 힘든 고언(苦言)이지만 참회하는 심정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고자 한다.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이 없이 우리는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니 한국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악화된 가장 큰 원인은 일부 교회의 세습 문제로 나타난다.
성공한 제1세대 목회자들의 일부가 자기 자식들에게 교회를 기업처럼 물려주었다.
사회적 질타를 맞자 맞바꿔 물려주었다.
자기 교회는 친구 목사 아들에게, 친구 목사 교회는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보지 않는다.
아무개 목사의 교회로 생각한다.
*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습(世習)이란 단어가 어떻게 한국교회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습(世習)이란 한자의 훈은 "인간 세(世)" "엄습할 습(習)" 입니다.
그 의미는 "재산, 신분, 직업 등을 한집안에서 자손 대대로 물려받음" 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합니다.
그런데 '세습'이란 용어가 2005년 북한에서 한국교회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선동 용어로 지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북한에서 간첩을 남파하기 위한 공작 책임자로 있던 '김국성"씨가 탈북 후 한국에 들어와서 밝혀낸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를 부흥 성장시켰던 1세 목회자들이 모두 은퇴하면 그 다음 세대 중에서 과거의 한국 역사와 고난의 시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내세우면 교회가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는 정치적 책략에 의해서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전통은 "세습"이 아니라 "승계(承繼)" 라고 해야 합니다.
승계란 이을 승, 이을 계라는 훈으로 "선임자나 선대의 업적, 유산, 전통 따위를 뒤이어 물려받음." 또는 "다른 사람의 권리나 의무를 뒤이어 물려받음."을 의미합니다.
잘 알다시피,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성 박사의 말대로 사제들의 결혼금지는 11세기까지만 해도 권장 사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교회가 세속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갖게 되자, 가톨릭교회는 교권의 세습을 막기 위해 사제들의 독신을 의무화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 개신교회의 세습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방법은 신학생들도 독신을 서원해야 안수를 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교회의 물질적 세속화
교회가 대형화되었고 기업이 되었으며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세속화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면 부자도 되고 성공한다고 믿고 나가는지 몰라도, 사람들은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잘 섬길 수 있다고 설교하는 교회로부터 아무런 영적 신비도 느끼지 못한다.
이 세상의 시류와 정확히 일치하는 교회의 메시지에서 아무런 희망과 위안을 얻지 못한다.
가짜 박사의 절반이 목사님들
도덕성의 위기
몇 년 전 신정아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필자는 당시 신 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불려 다니던 서부지방검찰청사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TV 방송차량이 포진한 그 건물 앞을 지나다니며 당시 국민적 관심사와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신 씨의 예일대 박사학위 위조였다.
서부지검 앞을 지나다니면서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고 다녔다.
한국에 가짜 미국박사 학위 소지자가 968명이 있는데(정말 믿기지 않지만) 이들의 45%가 신학박사라고 한다.
이 나라 가짜 박사의 절반이 목사님들인 것이다.
가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목사님들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면, ‘교인들의 학력이 높아져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599불에 석사학위증을, 799불에 박사학위증을 사 오신 목사님이 단상 위에서 ‘정직하게 살라’고 설교하면 과연 어느 교인이 그 말씀대로 살려하겠는가?
잘못된 단기 선교
몇 년 전 여름 서울의 한 유명 교회가 전 세계 27개국 53개 도시로 무려 103개나 되는 단기 선교팀을 보내 ‘땅 밟기’ 선교라는 것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는 봉은사 땅 밟기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된 적도 있다.
땅만 밟고 와도 그 땅에 선교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도 하지 못한 일을 하겠다는 이 기괴한 발상의 선교에 필자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
기피1호 신부감이 ‘교회 다니는 여성’인 이유
한국 개신교의 오만함이 이제는 하늘을 찌르는 것에 경악하고 만다.
한국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 교회의 여러 선교대회에 참석하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두 단어가 있다.
선교란?
첫째, Life-long commitment
둘째, Equal partnership
첫째로 ‘뼈를 묻는’ 평생 헌신이다.
지금도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에 가보면, 거기에는 우리보다 이 땅을 더 사랑한, ‘조선 사람을 더 나은 조선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헌신하다 이 땅에 뼈를 묻은 많은 분들이 누워있다.
둘째로 ‘평등한 동반자 관계’
선교란 문화적·경제적·복음적으로 우위인 자가 앞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과 함께 겸손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땅 밟기 선교라니 이런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이화대학 학생들을 면담해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펼쳐지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의 전도 앞에 상처 입지 않은 학생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인가. 최근 발표된 한 결혼정보회사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신랑 후보들의 기피1호 신부감이 ‘교회 다니는 여성’이라고 나왔다 하지 않는가.
그들이 뽑은 두 이유가 재미있다.
‘왠지 배타적일 것 같아서’
‘왠지 생활비를 헌금으로 빼돌릴 것 같아서’ 라고 한다.
‘밥 퍼주는 시인’ 최일도 목사의 일화가 생각난다.
속칭 청량리 588 굴다리 밑에서 노숙자와 행려자들에게 밥 먹이기 운동을 시작한 그가 그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하루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신학대학교에 강연 초대를 받아 전철 1호선 타고 가던 중이었다.
자리가 없어 서서 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날 과로를 한 탓에 하염없이 졸음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전철이 흔들리는 대로 함께 흔들리며 한참을 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옆구리를 콱 찌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보니 이마가 약간 벗겨지고 아주 깐깐하게 생긴 초로의 아저씨 한 사람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무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느닷없이 ‘예수 믿어!’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최 목사는 ‘나 목사인데요’ 라고 말도 못하고 ‘저, 믿고 있는 데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또 한참을 노려보더니 이렇게 또 한마디를 콱 내뱉고 옆 칸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졸지 말고 바로 믿어!’
그때 최 목사는 너무 창피해서 자신이 목사라는 사실도 잊고 달리는 전철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 그는 거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다고 한다.
‘나 다시는 저렇게 입으로 예수를 증거 하지 않으리라!
나 다시는 저렇게 자신의 확신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리라!’
한국 개신교가 비호감이 된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종교가 생활화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것’
한 다른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반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는 느낌을 가지는 이유 중 1위는 “교인들이 진실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34%)이고, 2위는 “교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11.8%)이며, 3위는 “타종교에 배타적이기 때문”(10.7%)이다.
1920년대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김활란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혹자(或者)는 종교란 모든 실생활과의 관계를 떠나 자기 혼자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고 일요일에 예배당 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이나 다른 방식으로 착취를 하다가도 주일에 양심에 아무 저촉도 없이 예배를 드린다. 그 원인은 종교생활이 실제화 되지 못하고 실생활이 종교화 되지 못한 까닭이다.”
종교가 생활이 되지 못하고 생활이 종교가 되지 못하니까 (달리 말하면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하나가 되지 못하니까) 요즘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독교인이란 누군가. 그들은 토요일까지 한 일을 일요일에 회개하고 월요일부터 다시 하려는 사람들이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회개하는 것이 일주일에 단 한 번도 회개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가 진정한 회개라면 우리는 우리가 회개한 일을 다음날 또 반복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진정성’(authenticity)이 의심을 받기에, 사람들은 교회에 등을 돌린다.
어느 도시에 목회를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다.
맨 땅에 개척해서 열심히 목회를 하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그런데 그만 과로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콩팥 두개를 다 떼어내고 다른 사람의 것을 이식받아야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평소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으니 교인들 중 누가 콩팥 하나 떼어주지 않을까 싶어 주일 설교 시간에 상황을 설명하고 콩팥을 떼어줄 사람 손을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수석 장로님부터 조심조심 손을 들더니 급기야 예배당을 가득 메운 3,000명의 교인이 다 손을 들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목회를 잘못하진 않았어!’ 목사님은 마음이 흡족해졌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3,000개의 콩팥이 다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제안했다.
자기가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서 공중에 날릴 것이니 모두가 ‘주여 삼창’을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동안 그 머리카락이 자기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사람이 콩팥을 기증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눈을 감고 열심히 통성으로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몇 시간이 지나도 그 머리카락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 아무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교인들 모두가 이렇게 기도하더란다.
(머리카락이 가까이 오면 입으로 바람을 불며) “주~여” “아~멘” “믿~습니다.”
은퇴하신 박종순 목사님의 설교에서 기억하고 있던 예화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신구교를 포함해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200년이 넘었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기독교는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소외되어 살아가던 이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았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가히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소개함으로써 급속히 전파되어 나갔다.
특히 가난하고, 힘없고,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급속히 퍼져나갔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양반과 남성을 세상의 중심으로 믿어온 조선의 유교 체제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미천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글자그대로 ‘복음’(福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의 이와 같은 변혁적이고 인습타파적인 특성들을 점차 잃기 시작했다. 한 종교가 소종파적 형태를 지니고 있을 때는 평등적이고 변혁적이며 예언자적 특성을 지니다가도, 그 소종파가 점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한 사회에 무리 없는 안착을 시도할 때가 되면 초기의 특성들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점 강한 현상유지적 성향을 가지게 되고, 변화를 위한 어떠한 시도도 위험시 하게 된다.
성차별의 보루가 된 한국 교회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한국 교회는 성차별의 보루가 되었다.(한 교회여성단체가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는데, 설문자 1,000명 중 51%가 청소 및 음식 만들기, 7.3%가 행사 준비라고 응답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여성의 약 60%가 집안일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교회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항목에서 청소 및 음식 만들기를 택한 사람은 겨우 0.3%에 불과했다.) 언제부턴가 한국 개신교회는 지극히 배타적 신앙 행태를 강화해 왔고,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도덕적 타락과 권력 사유화의 길을 걸었으며, 개 교회들은 수평 이동을 통한 교회 성장을 추구하면서 교인들을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인 경쟁에 몰두해 왔다. 그렇게 교회는 점점 자신의 원래의 모습에서 멀어져 갔고, 교회의 성장이 곧 복음 선포라는 환상 속에 살다가 급기야 성장 자체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 종교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는 다수 종교이며 주류 종교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risky) 일이 아니다. 초대교인들과 달리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변에 아무 위협도 느끼지 않고 서슴없이 ‘예수는 나의 주’라 말할 수 있다. 이제 교회 나가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회생활에 보탬과 이득이 된다. 기독교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좁은 문’이 아니라 가장 넓고 평탄한 길이 되었다. 그러면서 신앙은 서서히 ‘일상적인’(routine) 일이 되어 갔다. 판에 박힌 일과가 되어 갔다. 그리고 마치 중년의 부부들에게 권태기라는 것이 찾아오듯이, 첫 신앙의 감동도 사라져갔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는 제도교회의 안락함과 기득권 속에 거하게 되었다.
예수는 따르지 않는 3가지 완벽한 신학적 알리바이
실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다.
교회는 종종 ‘예수 닮지 않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신학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기독론(基督論)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한다.
한인철 교수는 한국 교회가 예수는 잘 믿어도 예수는 따르지 않는 3가지 완벽한 신학적 알리바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감히 신이신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인간에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를 따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죄를 다 짊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를 절대 따라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를 따라 무엇을 하려는 것은 ‘오직 은총’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교묘한 3불(三不) 원칙이다.
참으로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라”(롬 15:1-6)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도 부정되고 있다.
문제의 뿌리는 종교개혁 신학 안에 잉태해 있고 그에 대한 우리의 불철저한 사유(思惟)와 전유(專有)에 있다. 우리는 “sola fide”를 이유로 행함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sola gratia”를 이유로 이웃에 대한 책무로부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sola scriptura”를 이유로 자연을 하나님 계시의 통로에서 배제해버렸으며 그 결과 자연을 자기 맘대로 착취하게 되었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신학적 유산 안에 있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성찰하지 못한 신학자들과 신학 교육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닌 ‘크리스천’
필자 자신부터 참회해야 한다. 그 결과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 안에서 하나님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 당한 슬픈 예수를 본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자리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이 메워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위기를 운운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를 향하는 우리들을 향해 길거리의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던졌던 바로 그 질문, 즉 ‘당신 진짜요?’를 우리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진짜 크리스천인가? 우리의 믿음은 진정성이 있는가?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참된 크리스천인가?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을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이 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과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때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다가가 묻는다. “What is your name?” 그러자 그가 대답한다. “My name is Christian.”
그때 그는 자기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총탄에 맞아 죽을 지도 모르는 사지 한복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나가게 만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렇게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결코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목숨을 건 이름이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이유는 혹 이런 ‘진짜’ 크리스천의 수가 적어서는 아니겠는가?
찐빵집 경영철학을 본받자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3:23)
'안흥찐빵'집 주인 심순녀씨(55)는 강원도 횡성에서 30년간 전통적인 방식으로 찐빵을
만들어
오고 있다. 심씨는 우연히 길거리 호떡장수에게 호떡 만드는 방법을 배워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심씨의 찐빵집은 전국에서
단골손님의 발길이 끓이지 않는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심씨가 찐빵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법은
남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차별화된 맛과 전통음식을 팔면서 지역 연고 판매에 만족하지 않고 최신 물류시스템과
택배서비스를 접목시켜 전국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비법은 찐빵 하나 하나에 들어있는 심씨의
'정성'이었다.
최근 매출 1조 7천억원이 넘는 대기업 LG의 부회장 권문구씨는 이러한 안흥찐빵론을 직원들에게 강의했다.
작은 장사에서도 대기업이 배울 수 있는 많은 경영 기법이 숨어있다는 얘기다. 권부회장은 안흥찐빵집이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호떡장사로부터 호떡 만드는 법을 배워 찐빵에 원용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종의 '벤치마킹'이었다는 것. 그러나 권부회장이 특별히
강조한 것은 역시 '정성'이었다. 세계적인 LG전선에서 아직 불량품이 나오는 것은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안흥찐빵의 '정성'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09-08-2022(목)
신이라(사도행전 28:6)
유라굴로 광풍으로 알렉산드리아 호는 파선되었고 승선했던 276명은 모두 "멜리데" 라는 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풍랑이 일어났던 바다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사람들을 정중하게 맞이하여 옷을 말리고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모닥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때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땔감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독사가 바울을 물었습니다.
섬의 원주민들은 이 사람이 거센 풍랑에서는 살아남았으나 결국은 독사에 물려 죽는구나!
아마 말못할 중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며 바울이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독사를 모닥불에 떨어트리고 태연하게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을 지켜보던 원주민들은 " 이 사람은 신이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바울이 뱀의 독성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를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행들과 함께 그 섬에서 석 달을 머물면서 멜리데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역사하셔서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을 때 안수하여 그를 낫게
했습니다.
또한 멜리데 섬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다음 항해에 필요한 것들을 대접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바울은 그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군사의 감시를 받았지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며 형제들이 자기를 위해 마련해 준 편안한 숙소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몇 가지 요청을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유대의 관습에 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유대에 있는 로마
권력자들은 바울이 무죄임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공정하게 판단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못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을 송사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무죄 방면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가 지도자들을 부른 우선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해 함께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의 말을 들고 유대 지도자들은 우리가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너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공연한 일에 끼어들어 황제의 분노를 사거나 백성의 원망을 듣게 될까봐 이렇게 대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두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도자들이 복음에 순종치 않음을 보고 이사야의
말을 적용해서 최종적으로 두려운 선언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택함받은 민족이고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지만 영의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두워 예수님을 배척하여 이 귀한 은혜가 이방인에게 넘겨지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 이 년 동안 아무런 방해 없이 복음을 전파했다는 기사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는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짐을 의미합니다.
로마로 온 이유(16-20절)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가 출발한 바울 일행은 마침내 제국의 심장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주며 사도행전의 막이 내려옵니다.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당시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는 로마에 도착하면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수인계되어 황제근위대 감옥에 감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감옥 밖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은 황제의 명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왜 바울에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셨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30절에서 증거하듯이, 이때부터 바울은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머물렀습니다.
‘셋집’은 돈을 주고 빌린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 공간적으로는 ‘싸구려 헛간’
같은 곳이었습니다.
17a.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가장 먼저 초대한 사람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얼핏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초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에는 처음 왔기 때문에 로마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가택연금을 당할 셋집을 얻었다는 것은 누군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도와주었고, 그들이 곁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흘이 지나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초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자신이 로마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일일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7b-19.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2년에 걸쳐서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에게 거짓된 내용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로마에 있는
유대교 공동체에 바울을 모함하는 편지를 보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왜
자신이 왜 황제에게 상소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소는 바울이 자기 민족,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이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가택연금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쇠사슬’은 ‘쇠사슬에 매인 것과 같은 억압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쇠사슬_chain’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이 바울에게 감옥 밖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도, 미결수인 바울이 도망칠 수는 없도록 쇠사슬로 묶어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감옥 밖에서 머무는 미결수에게는 그 미결수의 한쪽 팔과 그 미결수를 지키는 군인의 한쪽 팔을 쇠사슬로 연결해
두곤 했습니다.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쇠사슬에 매여 있는지에 대해 해명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려온 그 소망,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복음에 대한 반응(21-29절)
그에 대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바울의 변론을 들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울에 관한 편지를 받은 적도 없고,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해 험담한
사람도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바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한 말은 아니라 다소 사탕발림이었습니다.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는 지금과 같은 정보가 빨리 오가던 때가 아니니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무작정 배척하지는 않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날 날짜를 정했습니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약속한 날짜가 이르자, 바울을 처음 방문했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까지, 많은 사람이 바울이 가택 연금되어 있는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모였습니다.
본문의 ‘강론하다’는 ‘자세히 설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은 ‘구약성경’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심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즉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특히 ‘아침’이라는 말은 ‘새벽’ 또는 ‘동트는 시각’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과 약속한 날이
밝자마자 바울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인생 말년에 접어들었고, 지병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팔에는 쇠사슬도 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던진 것과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 경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동일한 목회자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으며
신앙생활 했음에도, 우리는 지금 주님 앞에 있지만, 지금 주님과 등지고 있는 사람도 참 많지 않습니까?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때 바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25-28.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삶으로 들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구원해 주시려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귀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함으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연금 생활 2년 요약(30-31절)
28장으로 구성된 사도행전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
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2년 동안 연금되어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을 다 영접했다고 합니다.
‘영접하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왔고, 바울을 계속해서 그들을 영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전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사도행전의 막이
올라갔습니다.
물론 이때 제자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증거합니다.
즉 사도행전의 주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꿈꾸고 살아야 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임하는 곳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도행전의 주역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했고, 마침내 성령님께서 임하신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언어로 말하게 되었고, 또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이 3,000명, 5,000명이나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로마제국이
복음화가 되었다든지, 사도들이 다 대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든지로 마침표를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고,
바울도 가택 연금된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셨고, 지금까지 이어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세상의 나라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힘이 되심을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변질의
인생이 아니라 변화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이 각자의 사도행전으로 엮어지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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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와 숭어의 대한 우화
게에게는 늘 옆으로만 걷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게의 부부가 그의 자식을 위하여 걱정하던 끝에 물고기 숭어네 집으로 아들을 보내서 바로 걷는 교육을 시키도록 결론을 얻고 보냈답니다.
아들 게는 숭어네 집에 가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아들 게는 똑바로 걸을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교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러나 웬 일인지 아들 게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다시 옛날처럼 다시 옆으로 걷는 거예요.
게의 부모는 다시 아들 게를 숭어네 집에 보내 교육을 다시 받게 했다.
아들 게는
숭어네 집에 가자마자 다시 정상으로 잘 걷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옆으로 걷는 것이었다.
이에 속이상한 게의 부모가 아들 게에게 야단을 쳤다.
야단을 맞은 아들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숭어네 부모는 바로 걷는데 엄마 아빠는 옆으로 걸으시니까 나까지 모로 걷게 되쟎아요?"
여러분 ! 그렇습니다.
윗 사람들이 본을 보이는 것이 최상의 교육이됩니다.
09-07-2022(수)
그대로 되리라(사도행전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Wherefore, sirs, be of good cheer: for I believe God, that it shall be even as it was told me.
그대로 되리라
(it will happen just as) NASB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21장에서 끝이 났습니다.
22장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사도행전 22장에서 26장은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이 복음에 대해, 자신에 대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변론하고 변호한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7장에서 바울은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로마로 가는 것은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심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를 넘어 이제 로마까지 향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에 보면 그의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 일이라는 것은 에베소에서의 복음 사역을 말합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로마를 향한 복음의 비전을 품게 됩니다.
로마를 향한 복음은 사실 바울만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부분입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바울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고, 그는 에베소 사역 가운데 그 비젼을 구체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2년의 기다림 끝에 그는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됩니다.
가이사랴를 출발한 배는 시돈, 구브로해안, 길리기아, 밤빌리아 바다, 무라시 등의 구체적인 위치와 항로를 가리키며 항해를 시작합니다.
누가가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가지 않았다면 기록될 수 없는 꼼꼼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로 가는 길에 누가는 바울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의 흔적은 28장 16절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마지막으로 등장하며, 그가 로마로 가는 길에 바울과 끝까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복음을 향한 바울의 열심도 중요하지만, 누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함께 복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 자존심도, 내 시간과 계획도, 내 물질도 포기해야 할 때가 분명히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14절의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어려움에 처한 바울의 일행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가지고 배에 올랐던 음식과 각종 도구들을 바다에 던지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저에게 버려야 할 것이 있는지 물어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함께 로마로 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항해의 과정, 그리고 태풍을 만나 나 자신을 버리는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의 가는 길은, 복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광풍이 우리를 덮쳐오기 때문이며, 수많은 삶의 짐들이 아직도 우리 내면의 배에는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마다 오늘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27:24-25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로 가는 길에 누가만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음을 믿으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오늘 하루 로마로 향하는 복음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또한 가족과 이웃들과 함께 걸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항해의 첫 부분에서는 백부장, 선장, 선주가 행해를 지휘했다면,
풍랑 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 풍랑의 중반까지는 풍랑이 항해를 지휘했고,
항해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울이 항해를 지휘했다.
항해의 주역이 마지막에는 죄수인 바울에게로 옮겨간 셈이다.
비록 바울은 그의 법적인 자유를 점차로 박탈당했지만, 그의 예언 속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주권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점차로 확대되어가고 있다.
바울의 구금(拘禁)은 복음의 운반 기구(carrier)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이 14일간의 풍랑은 선장과 선주 그리고 백부장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도착지인 말타 섬으로 바울 일행을 인도했다.
바다를 통하는 이 항해 여행은 어떤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가?
첫째, 1장 8절에서 주님이 알려주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의 성취
둘째,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셋째, 복음은 풍랑 속을 통과하며, 전도자는 풍랑 속에서 절대 절명의 훈련을 거쳐 사명을 재다짐 하는 기회를 맞는다.
넷째, 하나님은 전도자의 여정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이 예기치 못한 여정에서 하나님은 전도자를 사용하여 전도자가 계획하지 않았던 동승한 이방인들과 그리고 말타 섬 주민들의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신다.
마침내 바울은 이달리야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군인들의 호송하에 로마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의사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을 했습니다.
이들의 항해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
배는 폭풍 이는 겨울 항해철이 접어들기 전에 이 취항지를 향해서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가이사랴를 떠나
첫 기항지인 시론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 친구들을 만났고 또한 백부장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 일행은 지중해 동부에서 서부로
항해하는 데 바람을 거슬리며 항해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났습니다.
이 배는 276명을 태울 만큼 큰 곡물 운반 선이었습니다.
바울이 탄 이 두번째 배의 항로는 무라에서 출발하여 니로에
이른 다음 그레데의 남서 해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를 향한 바울은 우기로
행선하기가 위태로운 때라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뿐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겨울을 지내고 나서 항해를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스르디스는
그레데 섬 서쪽에 있는 얕은 바다로, 이 바다에는 유동하는 모래가 깔려 있어 줄로 선체를 둘러감고 연장을 내렸습니다.
풍랑을
만난 사흘째는 배의 기구를 내어버렸습니다.
이때 바울은 ‘안심하라 너희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고 배만 상할 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긴 했지만 위로자가 되어 줄 수 있었습니다.
난파선에서의 바울은
용기를 내어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용기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었던 바울은 먼저 열 나흘 동안 불안과 공포에 떨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폭풍과 파도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또한 배가
깨어짐으로 인해 바울에게는 커다란 위기였지만 백부장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백부장은
바울 사도를 구하고 죄수들도 살해 당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27장 1절에 우리라고 표기된, 사도 바울과 누가는 이제 배편으로 로마로 향하게 되며, 백부장 율리오가 그들과
다른 죄수들의 호송 책임을 맡게 됩니다.
아마도 의사였던 누가가 노쇠하고 병약한 바울의 곁에 필요했기에 누가가 동행했을
것입니다만 이 길고 어려운 항해의 길에 두 사람 외에도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게 되었음을 2절이 기록해
줍니다.
감사하게도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고, 이후 몇 개의 항구를 거쳐 로마로 가기 위해 미항이라는 곳에
다다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당시 9월이나 10월에 있는 금식하는 절기라고 표기된, 유대인의 속죄일이 이미 지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백부장 율리오에게 권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이미 여러 번의 파선 경험을 가진 바울은 당시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바람과 파도가 거세어 지고, 항해 가운데 큰
폭풍을 만날 수 있는 것을 알았기에 무리한 항해의 위태함을 알아 백부장에게 10절의 말씀으로 권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부장은 바울의 권고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11절입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이 머물렀다가 겨울이 지나면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한 항구는 겨울을 지내기에 비교적 작은 항구라 불편했고, 뵈닉스라는
그레데의 항구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임박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남풍이 순하게 불어 순조로운 항해가 시작됩니다.
이 배는 곡식을 가득 실은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배로 추정되기에 제법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도 이후 37절 말씀에 보면 276명이나 탄, 커다란 규모의
배입니다. 커다란 배가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크게 일어납니다.
배의 크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파도와 광풍으로
위기 가운데 처하고, 선원들은 배 곁이나 뒤에 매달던 거루라고 하는 작은 거룻배 형태의 구조선을 간신히 끌어 올립니다.
그리고
풍랑에 깨져 버릴 것 같은 배를 밧줄로 감고, 스르디스라고 하는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장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
다닙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어도 풍랑은 잠잠해 지지 않아, 사공들은 이제 배의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까지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아니 더욱 악화되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도 여전해, 구원의 남은 소망마저 없어져 기진맥진한 상황이 됩니다.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뿐 아니라, 풍랑에 따라 이리 저리 구르며 탈진하였기에 이제 아마 배에 탄 어느 누구도 살아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바울이 사람들 가운데에 일어납니다.
광풍 가운데, 한치 앞도 볼 수 없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사로잡혀 소망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바울은 안심과 소망의 말을 전합니다. 22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은 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이 반대했던 시기에 무리해서 항해를 진행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얘기를 하며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울이 낙관론자이거나 긍정적인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죽음의 풍랑 속에 바울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독대하였습니다.
그 풍랑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계시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통해 위로와 믿음과 평안을
회복한 것입니다.
23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모두가 두려워하는 가운데 담대함을 소유한 삶은, 오직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독대를 통해서만
우리는 오늘도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 앞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걸음을 주님과 함께 바르게 해석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허락하신 고난 속에 하나님을 깊이 만난 바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의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안심시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셔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까지도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깊이 만날 기회를 허락해 주십니다. 두려움 가운데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와 독대 속에
우리는 비로소 풍랑 속에서도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만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깊이 교제하시는 또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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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2022(화)
나와 같이 되기를(사도행전 26:29) 자부심(自負心) 자존심(自尊心) 자긍심(自矜心)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너희도 나처럼만 살아보라!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내가 먼저 예수님을 본 받는 삶에 성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나를 본 받으라"고 깨우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그립바의 허락을 받은 바울은 손을 들어 예의를 표하고 자신이 회심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는 뾰족한
쇠나 동물의 뼈가 박힌 채찍으로, 밭가는 소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사용하는데 이때 소가 반항하며 뒷발질을 하면 더욱 채찍을
가하게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대적하면 할수록 바울 자신이 더욱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박해에서 바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생명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지되었고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변명에 대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서 뚜렷한 죄를 찾지도
못하고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되자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선언하고 일단은 심문을 마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한 회심의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는 좁은 의미라고 한다면 회심은 넓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회개는 수시로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심은 일생에서 단 한 번으로 돌이킨 후에 다시는 잘못된 길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을 향한 권력자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바울이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오직 예수에게만 미친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예수에게만 미쳐봅시다.
이제부터 예수님만 따라갑시다.
절대 진리와 가치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9-12).
지금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합니다.
9-12절에 보면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
여기 사울은 예수 믿는 자,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칙령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이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약 230km, 그 당시 상당히 먼 거리인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과 같은 9장 1절에 보면 ‘그가 칙령을 받으러 들어갈 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살기등등한 마음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할 그 때에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얘기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이름을 부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죄 지은 아담을 부르셨던 하나님, 살인한 가인을 부르셨던 하나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살기등등해서 찾아가는 사울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한 선지자를 택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얘야, 너 오늘 가서 저 창녀와 결혼하라!" "아니, 하나님, 제가 목사인데 창녀와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할 수없이 그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녀가 옛 버릇을 못 버리고 도망을 갔어요. 그렇게 사랑해 주었는데, 목사가 창녀를 데려왔는데... 하나님이 또 명령을 하십니다. "가서 돈을 주고 찾아 오라!" 포주에게 속했던 그를 다시 돈을 주고 찾아와 아내를 삼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평생을 감사하며 그를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터인데, 그 창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도망을 갑니다. 이번에는 이름도 모르는 한 남자와 동침을 해서 아들까지 낳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와서 다시 그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너무나 괴로웠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순종했습니다. "여보, 이제는 도망가지 마라! 내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당신을 이렇게 사랑했잖아! 내가 가진 재산을 다 버리고 당신도 누군지 모르는 아들을 내가 키우지 않소! 여보, 이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음으로 내 평생 내 가슴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살아주오!" 애원했지만 얼마 세월이 지나지 않아 이 여자는 또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또 갖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그 목회자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가서 그 창녀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상상이나 가는 일입니까? 오늘날 한번만 외도를 해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 이혼을 하겠거든, 몇 번씩이나 외간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 여자를 데리고 와 같이 살라니요? 아내로 같이 데리고 살라니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소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성경에 기록된 호세아 선지자의 얘기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이 잔혹한 일을 선지자 호세아에게 시켰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정을 호세아 선지자 스스로가 한번 겪어보라는 겁니다.
네가 내 사랑을 안다고 설교하느냐?
정말 네가 내 가슴을 알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이러한 여자와 한번 살아보아라!
수없이 하나님을 떠나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되풀이하시며 쫓아다니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는 겁니다.
호세아가 이 메시지를 받고는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려는 것
호세아를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오늘 바로 당신을 향한 메시지가 여기에 들어있는 겁니다.
"얘야, 내가 너를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 줄 아니?
네가 계속해서 내 곁을 도망가는구나!
데려다 놓으면 또 죄를 짓고, 세상에 빠지고, 쾌락에 빠지고, 물질에 빠지고...
그러나 나는 너를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단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친히 보여 주셨던 하나님은 그것으로도 되지 않아서 마침내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은 과연 듣고 계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울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 머리 속의 하나님이 아닌, 성경 속에 기록된 제3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아야합니다.
예수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왜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원수가 자신입니다.
모든 판단의 주인이 자신이었어요.
자신의 견해로 볼 때 예수님은 가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저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믿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말의 상처를 입힙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사울 역시 자신의 의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것입니다.
때가 정오라고 얘기합니다.
낮이 얼마나 밝습니까?
태양이 얼마나 밝은가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날 이 태양보다도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환한 빛이 사울에게 쏟아졌습니다.
홀연히 쏟아졌습니다.
그 빛을 받은 사울이 도저히 견딜 수없어 그 자리에서 시력을 잃어버리고 땅에 고꾸라집니다.
그리고 사울이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인가 하면 "주여! 뉘시오니까?" 옛날에 예수가 나타났으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너, 누구냐?"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사도 바울이 그를 구세주로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존경의 표시였겠지요. 무한한 힘을 바라보고 자기를 부르는 그 위대한 분을 향해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대답합니다. 훗날 이 사건을 돌이켜보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일컬었습니다. 나는 율법적으로 흠이 없고, 도덕적으로 예수 믿는 너희보다 낫다. 이만하면 내가 너희를 정죄할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했던 사울, 그래서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 그러나 그는 오늘 이 다메섹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도 저 멀찌감치서 만났어요. 여기에 아무리 환한 빛이 있어도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반짝거리는 불빛 아래 깜깜한 밤에 옷을 보십시오.
아무런 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밝은 빛에 오면 올수록 깨끗해 보이던 옷과 얼굴이 더러워져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 후, 날마다 날마다 간증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 남은 인생을 그는 이렇게 간증하며 살았습니다. 변화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바라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보십시다. 나를 보십시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면 허물이 나에게만 있고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고, 아내에게 있지 않고, 자녀와 부모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르신 그 부름 앞에 일관되게 복음의 간증자로 살아갑니다.
바울은 행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선 후 순교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여행에 헌신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약 2년 여 갈라디아 지역 224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는 약 3년 여 기간 동안 약 5000키로의 먼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때는 약 6년여 기간 동안 5000키로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로 가서 긴 투옥생활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습니다.
그 후 서바나와 기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바울은 이 여행 도중 자기가 겪었던 그 고초를 고후 12: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나는 이번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세상이 미쳤다해도 결코 위축됨이 없이 복음을 증거하는 은혜의 사람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누가 미친 것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여 그 영생을 위해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투자한 사람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 후면 사라져 버릴 명성을 위해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채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의 바람에 자신의 목숨을 다 걸어 놓고 사는 사람들, 자신의 목숨을 깍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미친 것입니까?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10대는 사랑에 미치고, 20대는 야망에 미치고 30대는 소유에 미치고, 40대는 정욕에 미치고, 50대는 늙음과 고독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 오늘 교회와 이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똑바로 미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미칠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들의 뜨거운 정열,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감격과 열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감격도 열정도 없는 고드름 같은 믿음 가지고는 어떠한 역사도 변화도 기적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독생자를 날 위해 보내 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역시 예수님께 미치고 싶습니다. 완전히 미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해서라도 그들을 세우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에 미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에 취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복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계절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은 기쁨을 줍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총 진력을 할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가지고 우리 모두 또 하나의 열매를 맺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4:15b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 : 엄마, 선생님
바울의 위대함 : 복음 전하는 일에 나를 본 받으라
자신을
변론하라 주어진 시간에 예수를 전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지켜본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이 “네가 미쳤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 라고 혹평을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말에 굴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들도 나와 같기를 원한다.”
“나와
같기를 원한다”는 것은 “나를 본 받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나와 같기를 원한다.”, “나를 본 받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를
본 받으라” 권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은혜 충만, 감사 충만해야 하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니 복음을 전해도 세상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는 겁니다.
한국 교회도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안 좋은 일에 본이 되고 있어서 부끄럽다 하는 것입니다.
평상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당당히 복음을 전하고 “나와 같기를 원한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형 교회 50개를 선정한 후 1위부터 23위까지는 모두 한국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선교 역사 130년 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계 적으로 본받을 만한 교회가 있느냐 라고 질문할 때 큰 것은 자랑할 수 있지만 본 받을 만한 것은 큰 것만큼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큰 것과 더불어 내세 울 수 있는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신앙을 "나를 본 받으라"는 외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자부심(自負心)
자부심(自負心) / 스스로 자, 질 부, 마음 심 - self-respect pride, self-esteem,
- 모든 것을 가진 자
고린도후서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골로새서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자존심(自尊心)
자존심(自尊心) / 스스로 자, 높을 존, 마음 심 - one's pride, self-respect, self-esteem
-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자긍심(自矜心)
자긍심(自矜心) / 스스로 자, 자랑할 긍, 마음 심 - self-pride
눅 16:19-31
- 불쌍히 여기는 심정
누가복음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헬라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집이라고 는 나무통 하나가 있었는데 다닐 때는 통을 굴리면서 다니다가 적당한 데 세우고서 그 나무통 안에 들어가 하루 밤을 자고 또 아침이 되면 굴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헬라에서 유명한 철학자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어느 날 만났습니다.
대왕은 디오게네스에게 무슨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디오게네스는 "특별한 소원은 없습니다만 굳이 말한다면 지금 내가 햇빛을 쪼이고 있는데 국왕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방해가 되오니 조금만 옆으로 비켜주셨으면 합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때 알렉산더 대왕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걸세." 만일 내가 왕이 아니라면 네가 되고 싶다라는 말입니다.
자기 존재, 자기 가치, 자기 처지를 깊이 알고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다윗 왕은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읊었습니다.
원문에는 아무 소원도 없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다고 하지만 기도하는 것을 보면 소원이 너무 많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이대로 좋습니다. 이대로 만족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자기 불만의 발산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자기 노력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자기 된 바에 대한 감사와 만족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의 절정을 살아가는 인생이 신앙인입니다.
본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바울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헌신하고 사는 자에게는 만사형통 해야 하는데 왜 이런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이상하게도 얽혀서 법정에 서게 됩니다. 로마 총독 앞에서 생사 문제를 놓고 바울은 일장 연설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 말을 다 들은 베스도 총독은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이렇게까지 비난을 했습니다.
고난도 당하고, 환난도 당하고, 핍박당하고, 매맞고, 투옥되고, 억울함을 당하고, 마침내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는 이 순간에도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하고도 놀라운 신앙을 이 순간에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와 같게 되기를 원하노라." 즉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한 고난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미래적 의미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매맞은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 훈장으로 바뀔 것이고, 오늘 내가 능욕을 당한 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는 영광으로 바뀌어질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에는 이 모든 것이 자랑스럽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행복했고 만족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믿는 바에 대하여 확실하고 절대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내가 믿고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천벌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내가 믿는바 십자가의 도리가 너무나 확실했기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자신만만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을 지녔기에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믿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지금까지 그가 좋아하던 지식과 명예와 족보를 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즉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기에 그 동안에 얻은 많은 지식은 다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러운 얘기입니까? 그는 복음에 대한 지식의 완전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잘했고 그 감격이 넘쳐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자기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은 영원히 가치의 것이고, 언제 생각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 어떤 분들은 녹음해 놓은 설교 테이프를 한꺼번에 10개씩 사가는 것을 봅니다. 내가 들은 말씀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고, 내가 받은 그 감동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그 마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내가 들은 것을 얼른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내가 들은 귀한 복음의 말씀을 꼭 누군가에게 전해야 하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행복입니다.
나의 나 됨, 은혜로 된 나, 현재 이대로의 나를 감사하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니 무한히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영광과 긍지와 자랑에 살았습니다.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에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서 일생동안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기뻐하며 살아갔습니다. 새 술에 취하고 그리스도에 붙들린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뿐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인 자세로서 "당신뿐만 아니라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즉 나처럼 믿고, 나처럼 알고, 나처럼 행하고, 내가 가는 길을 여러분도 가기를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전도가 있고, 여기에 선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적극적인 면이 없습니다. 내가 나가는 교회에 자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한 번만 같이 가보자고 권면할 수 없습니까?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라고 하면 성경을 잘 몰라서 전하지를 못하니 우선 성경공부를 하고 전도하겠다고 합니다. 설교는 목사가 할 일이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까지 데리고만 오면 됩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이 은혜를 다른 사람도 깨달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 그것으로 전도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벅차고 넘쳐서 외국까지 좇아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여러분, 내 자녀도 나 같기를 바라고 내 친구도 내 마음 같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가 아니라 "지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행복할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이대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즉 나를 닮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참 지혜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나와 같기를 바란다는 자체는 만족이요, 행복이었습니다.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치지 못할 과거를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벅찬 감격과 내 생애 최고의 절정을 누리며 벅찬 은혜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좀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며 살고 있습니까? 은혜 안에서 나의 나 됨에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누구인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벤자민 비.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등과 더불어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작고한지 이미 80년이 지났지만 그의 신학적인 영향력은 자신의 모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강력하게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신학적 대작인 『개혁 교의학(gereformede dogmatiek)』은 여전히 정통적인 개혁신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그 신학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바빙크의 저술들을 소개하려는 노력은 박윤선 박사와 차영배 교수 이래로 지금까지도 간헐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바빙크의 신학과 한국 장로교회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교의신학 수업 시간이나 교재들을 통하여서 그의 이름을 너무나 많이 들었고 보았기 때문에 전혀 그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박형룡박사는 빠빙크라고 발음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도 빈번하게도 참조되고 있다면 그의 신학적인 비중은 남다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1955년 2월 25일(금) 오후 늦은 시간에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를 흐르는 운하중 하나인 꺼이저스흐라흐트 가에 위치하고 있던 자유대학교를 방문한 박형룡 박사는 이사회실에 걸려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화상(portrait)을 가장 유심히 보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헤르만 바빙크의 사상적인 배경
1. 헤르만의 아버지는 1834년 화란 국교회(nhk)에서 분리(afscheideing)하여 생겨난 기독교 개혁교단(cgk)의 목회자였다.
바빙크의 부모는 정통적인 신학과 화란적인 경건주의 혹은 청교도 운동인 나더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의영향을 공히 받은 인물들이었다.
2. 바빙크는 kampen에 소재한 교단 신학교에 진학하여 1년만 공부하고, 보다 더 폭넓은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아성이던 레이든 신학부로 옮겨간다.
네덜란드 근대주의의 아테네라고 할 수 있는 leidse school에서 스콜턴 교수의 지도하에 근대 신학의 진수를 배우게 된다.
존 칼빈과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바빙크의 노력과 자기 시대의 문화나 학문과 끊임없이 대화의 고삐를 늦추지 아니하는 바빙크의 열정은 이미 젊은 시절에 노출되고 있다.
레이든 대학교 신학부에서 <츠빙글리의 윤리>라는 연구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3. 학위를 취득한 바빙크는 당시 신설된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청빙을 받았지만 거절을 하고, 자신이 속한 개혁교단의 목회자로 안수받고, 화란 북쪽에 소재하고 개혁신학교가 한 때 소재했던유서 깊은 소도시 프라너꺼르(franeker)에서의 1년간의 짧은 목회를 하게 된다. 이 목회 동안에도 그는 독일 철학 연구등을 쉬지 않았다.
4. 개혁교단 총회는 바빙크를 깜뻔에 소재한 개혁파 신학교(theologische school te kampen)의교의학 교수로 임명한다.
그는1883년 1월에 <거룩한 신학의 학문>이라는 주제의 취임 연설을 함으로 교수직에 취임한다.
바빙크는 카이퍼의 거듭되는 초빙에도 응하지 아니하고,1902년까지 이 작은 교단 신학교에서 교의신학 교수로 머물게 된다.
약 20여년 동안의깜뻔 신학교 교수 재직 기간 동안에 바빙크는 열정적인 강의를 통해서 개혁교단 목회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에 최고의 결실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의 대작(magnus opus)인 [개혁 교의학(gereformeededogmatiek),4vols.(kampen: zalsman, 1896-1901)]의 집필과 출간이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깜뻔이라고 하는 전원적인 소도시에서 소규모의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에 머물지 아니하였다면 이와 같은 대작은산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빙크는 1906-11사이에 2판 개정판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것이결정판이 되었다.
그와 신학을 달리하는 레이든의 신학교수 베르코프(1914-95)는 바빙크의 주저에 대하여서 이렇게 평가한다:"
4권으로 된 개혁 교의학은 지금까지도 네덜란드어를 읽을 수 있는 신학자들에게 지식들과 통찰들을 제공하는 보고(eine fundgrube von kenntnissen und einsichten)로 남아있다"(h.berkhof,200 jahre theologie,120).
5. 바빙크가 깜뻔에서 교수하고 있는 동안 카이퍼에 의해서 주도된 또 한 차례의 교회 분열과 분열된 교회들간의통합이 이루어졌다. 1834년에 일어난 분열(afscheiding,영어로는 secession)에 이어서 1886년에 카이퍼의 주도로 일어난 분열(doleantie)로 nederduitsgereformeerde kerken이 조직되었고, 1892년에 양 교단은 통합 교단을 만들고 [화란 개혁교회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1892-2004)]라고 이름하였다.
1901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면서 부득불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교수직이 공석이 되고, 바빙크는 네 번째의 카이퍼의 초청을 수락하여 카이퍼의후임자가 되게 된다. 바빙크는 1902년에 자유대학교에 부임하여 1921년에 갑작스러이 서거하게 되기까지 약 20년간을 교의신학 교수로 사역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바빙크는 신학적인 저술들 뿐 만 아니라 교육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많은 저술들을 하게 되며,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인 활동도 하게 된다.
1. j. h. landwehr, in memoriam prof. dr h. bavinck(kampen:kok,1921)
2. v. hepp, dr herman bavinck(amsterdam:ten have,1921)
3. r. h. bremmer,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kampen:kok,1966)
4. 유해무,<헤르만 바빙크>(서울:살림사,2004)
바빙크
"나를 돕는 것은 나의 학문도 아니요 교리학 책들도 아니다.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제 정신임을 분명히 밝힌 다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아그립바는 궁지에 몰리자 바울의 말을 농담조로 받아넘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그립바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에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기꺼이 그 기회를 붙잡으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와 자기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결박된 것 외에는 자기와 같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대답함으로 변호를 끝맺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겨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말하기를, 바울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새롭게 부임한 총독 베스도와 분봉왕 아그립바, 그리고 그의 누이 버니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25장에 이어 26장에서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26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과거 유대교 믿던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10절과 11절에서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자신이 얼마나 기독교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심하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는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던 가운데 그가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을 고백합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일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바울은 그가 남은 생애를 어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됩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그를 만나주셨고, 그가 회심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고 그는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거스르지 않고 심지어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회개를 외치며 자신이 해야 할 복음 전파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습니다. 때로는 돌에 맞아 죽을 뻔 하기도 하였고, 자신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죄인으로 잡혀 로마로 압송되기 위해 기다리는 고립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지만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22절과 23절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선지자들과 모세가 장차 되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 바로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한 이것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열심에 대해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많은 학문을 공부하여서 미친 것 같다며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바울을 조롱하지만
바울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그리스도가 고난당하신 것과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것에 대해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위축되기 보다는 아그립바 왕에게 그가 전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난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목적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에 따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바울이었기에 그 자리에 있던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과
버니게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리를 떠나면서 바울은 사형이나 결박 당할만한 행위를 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며 돌아갑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도 베스도 총독에게 만약 이 사람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으면 석방도 가능했을 것이라 말하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한때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핍박자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그리스도를 친히 만난 이후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열심과 유익을 위해 살던 바울이었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확실히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고 열심히 그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그의 일생을 바친 모습은 비단 바울에게만 요구되는 모습은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에서도 그리고 신약에서도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선교의 명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24장 44절~4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그리고 시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내용을 요약하시면서 바로 그 내용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있는 사도행전 26장 22절과 23절은 바울이 그의 소명으로 여기며 일평생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의 삶을 잘 요약해 줌과 동시에 이 말씀은 신약 성경 역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선교에 관해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복음 전파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총독과 분봉왕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는 복음을 끝까지 전했습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아프리카로,
남미로, 공산권 국가로, 이슬람권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비록 선교지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바울처럼 그리고 많은 선교사님들처럼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선교사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선교”는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 주로 이루어진다고 여겨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교”가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 전해지는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를 통해,
우리의 직장, 가정 학교 등의 장소에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무언의 방법으로도 복음이 전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 내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의 말 한마디 나의 행동 하나로 그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자기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결박과 환난도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감수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에게 참 생명을 주신 성령님의 뜻이라고 해석하였기에
그가 감옥에 격리되어 있던 시간 가운데에도 그는 담대히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말
한마디와 그의 행동은 믿지 않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라기는 이 시간 우리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르게 해석하며, 마셔야할 쓴잔을 주님 안에서 기꺼이
마시고, 져야할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우리가 좋은 여건에 처해 있든지 아니면 격리된 상황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늘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전파할 수 있는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노동절 휴일을 맞이하는 오늘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던 바울이 어떤 환경에서든지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려는 굳센 믿음 본받아 저희들도 복음의 증인으로 나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건강한 삶’의 본보기를 아십니까
의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생물학자이자 예방의학의시조로서 “돈을 잃으면 적게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전부
잃어버린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성도들이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예방의학이란 병들기 전 예방한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예방주사를 맞듯이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물과 다른 영적
정신적 도덕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정신의학자 폴 토르니에는 ‘건강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첫째 남을 미워하는 마음과 증오심이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증오심으로 남을 미워하는 순간 오히려 자신이 큰
타격을 받아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범죄하여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라고 말했습니다.‘우리 몸속에는 기본적인
인간의 평화와 반대로 죄성 독성 악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을 미워하는 순간 기본적인 즐거움과 기쁨을 악에게
도둑맞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평화와 기쁨을 도둑맞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길 외에는 묘약이 없다는 것 입니다. 건강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자 노력하는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둘째로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치료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선택될 뿐이기에 병을 낫기 위해 치료의 본질과 수단을 혼돈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병원에 가든,약을 먹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에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주안에서
아름다운 꿈을 가질 때 건강해집니다. 퇴임을 앞둔 맥아더 장군에게 어느날 한 장교가 찾아와 건강의 비결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는 “사람은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늙지 않는다. 사람은 꿈을 포기 했을 때 늙는다.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생기게 하지만 인생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영혼에 주름살이 생기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꿈을 갖는 사람은 얼굴에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안에서 미소를 잃지 맙시다. 우리 한번 웃어봅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주안에서 건강한 삶을 사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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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2022(월)
황제의 판결(사도행전 25:15)
3절 /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
* 호의(5485) χάρις
χάρις, ιτος, ἡ
발음 / 카리스(charis)
- 어원 / 546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은혜(눅 1:30, 행 4:33, 몬 1:3), 칭찬(눅 6:32, 34), 칭송(행 2:47), 은총(행 7:10), 호의(행 25: 3), 은사(고후 9:15), 기쁨(몬 1:7), 아름다움 (벧전 2:19, 20), 사랑스러움(눅 2:52), 감사 (눅 17:9, 롬 6:17, 고후 8:16, 골 3:16).
- 신약 성경 / 156회 사용
사람에게 호의(은혜)를 구하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 호소(1941) ἐπικαλέομαι
ἐπικαλέομαι 941
발음 / 에피칼레오마이(ĕpikalĕŏmai)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εκάλεσα, 미래 중간태 ἐπικαλέσομαι,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πεκαλεσάμην, 완료수동태 ἐπικέκλημαι, 완료분사 ἐπικεκλ- μέηνος, 과거완료3인칭단수 ἐπεκέκ - λητο,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πεκλή- θην, 1909와 2564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부르다(눅 22:3, 행 2:21, 롬 10:12), 일컫다(행 4:36, 약 2:7), 일컬음을 받다(히 11:16), 상소하다(행 25:11, 26:32, 28:19),
[명] 이름(마 10:3), 별명(행 1:23).
- 신약 성경
- 30회 사용
벨릭스와 베스도 (Felix and Festus)
벨릭스는 대략 AD 52년부터 60년까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으로써 유대지방을 다스렸다.
노예출신으로 자유민의 신분을 얻은 그가 유대의 총독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글라우디오 황제와의 친분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그의 형 팔라스(Pallas)의 지원 덕분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벨릭스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까지 동원할 정도로 잔인한 인물이었으며, 또한 총독의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과 여자를 탐하였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
벨릭스 이후 몇 년 뒤 유대를 다스렸던 알비누스(Albinus) 총독도 벨릭스가 뇌물을 받고 심지어 반란에 가담했던 죄수들까지 풀어주었다고 불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모든 역자자료들이 벨릭스의 부정부패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사도 바울에게도 뇌물을 기대하고 그를 계속 붙잡아 두었다는 누가의 기록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행 24:26).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가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휘둘렀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벨릭스는 낮은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3명의 왕실 출신 아내들을 차례로 두었는데, 헤롯 왕가의 자손으로 헤롯 대제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드루실라가 그 중의 한 명이었다(행 24:24).
드루실라는 가문적 배경으로 인해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분쟁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남편 벨릭스에게도 이런 내용을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행 24:22). 당시의 상류사회에서 매혹적이고 발랄한 미모로 유명했던 드루실라는 수리아의 작은 왕국의 왕과 먼저 결혼했었지만, 16세가 되던 해 벨릭스의 유혹으로 남편과 이혼 한 후 벨릭스와 재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사도 바울은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강론하였다(행 24:25).
당시 벨릭스는 '피의 대학살'을 통해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사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탐욕과 폭정을 일삼던 벨릭스는 결국 잔혹한 진압 사건에 대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진정서가 로마 황제에게 전달되는 바람에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며 총독자리를 물러나 로마로 소환 당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왜 벨릭스가 임기를 끝내고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도 바울을 석방하지 않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행 24:27).
벨릭스의 형 팔라스는 글라우디오 이후 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도 계속 영향력을 유지했고, 이 때문에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된 이후에도 큰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벨릭스의 실정으로 혼란과 긴장이 감도는 유대지방에 새로 부임한 베스도는 전임 총독보다는 훨씬 지방민들에게 협조적인 인물로, 부임한지 3일만에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유대 지도자들의 협조를 요청하였다(행 25:1). 원만한 통치를 위해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베스도는(행 25:9) 비록 그 자신이 바울의 죄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지만(행 25:25), 바울의 요청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손에서 로마 황제의 법정으로 '뜨거운 감자'를 떠넘기고 자신의 사법적인 판결을 보류함으로써 유대인 사회와의 충돌을 조심스레 피해간다(행25:12).
여러 인물들의 복잡한 정치적 배경과 정략적 계산 속에서도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주님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간다.
Here's a little mathematical formula that might help you answer these questions:
If: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Is represented a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Then : H-A-R-D-W-O-R-K = 8+1+18+4+23+15+18+11 = 98%
and K-N-O-W-L-E-D-G-E = 11+14+15+23+12+5+4+7+5 = 96%
But, A-T-T-I-T-U-D-E = 1+20+20+9+20+21+4+5 = 100%
AND, look how far the love of God will take you
L-O-V-E-O-F-G-O-D = 12+15+22+5+15+6+7+15+4 = 101%
Therefore, one can conclude with mathematical certainty that:
While Hard work and Knowledge will get you close, and Attitude will get you there, it's the Love of God that will put you over the top!
We have a question for groups c, d, and e ! How did you feel Thursday when Coach Linhares cancelled practice? A- So happy you were giving high fives. B- A smile broke out from ear to ear. C-You were somewhat disappointed.
How do you value practice? The correct answer is C.
You must realize the value of practice! When practice becomes your friend, then you will have an opportunity for greatness. You will never know how good you can be until you are willing to become the greatest worker on the team.
Your
attitude will determine your altitude!! When you expect to be great you will
push yourself towards that goal. You must never give in to a defeatist
attitude. You will never have a bad race if you have properly prepared
mentally, physically and spiritually. The only exceptions are injuries and
sickness. There is a reason for great races and that reason is proper
preparation.
Only one runner will be #1 on the team. All runners can be great workers and have a great attitude. That’s the real value of cc, everyone can be # 1 in work ethic and attitude.
Extra stresses in you life will nullify all your hard work. You will need to
eliminate extra stresses from your life like working and extra socialization.
During Sept and Oct school and running provide more than enough stress. Good is
no longer good enough!! You must strive for perfection. Our seniors need a
sense of urgency, because this is your last chance for a great season.
When you have a commitment to excellence you will do everything correctly. When we must constantly remind you to do things correctly it communicates one of two things. 1) You really don’t' believe us when we tell you something. 2) You are just hoping to be good, and it's not really that critical to you! If you are just hoping to get a state medal it's not going to happen
When
you are not doing one thing correctly it make us wonder how many other things
you are not doing, like not eating correctly, getting rest every night. When
you come to practice tired you will not impr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