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우나(삼하 24:16)와 오르난(대상 21:15)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삼하 24:16).“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선지라”(대상 21:15).
다윗이 인구를 조사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불쾌히 여겨 염병을 보내시므로 70,000명이 죽었다.
파멸하는
천사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의 진노는 누그러지고 그 천사가 여부스 사람의 타작마당에 섰다.
그러나 사무엘하와 역대상은 이
타작마당의 주인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기록하기 때문에 질문이 생긴다.
그 천사가 누구의 타작마당에 섰는가?
그 여부스 사람은
아라우나인가 아니면 오르난인가?
두 이름을 갖는 관습
여호와의 천사가 누구의 타작마당에 나타났는지를 알기 위해선 분석이 조금 필요하다.
이 두
기사에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이라는 두 이름이 언급된다.
구약에서 두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예컨대, 아브람/아브라함, 야곱/이스라엘, 이드로/르우엘, 요람/여호람, 요아스/여호아스, 여호야긴/여고니야
등등).
이런 관습은 고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왕하 15:29)은
불(Pul)로도 불렸다(대상 5:26).
한 사람의 개성, 기능, 경험, 혹은 삶의 정황 등이 바뀌면 제2의 이름이 주어지기도
했다.
야곱(“빼앗는 자”)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뤄 이김“)이 된 것이 그런 예에 속한다(창
32:28).
그러므로 아라우나가 오르난과 동일인이라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아라우나라는 이름이 왕의 공식적 칭호였다고
제안하는 자들도 있다.
아라우나라는
이름이 “자유인” 또는 “귀족”을 뜻하는 힛타이트어라고 설명되어 왔다.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이 “주인”을 의미하는 후르어에서 파생했다고 여긴다. 삼하 24:16에서 이 이름은 정관사와 함께 나오고, 따라서 23절은 “아라우나 왕”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라우나는 여부스 족의 예루살렘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J. D. Douglas, ed., The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3 vols.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80], s.v.“Araunah”). |
또한 원래 히브리어 본문은 자음으로만 기록돼 있었고, 따라서 자음만 보면 이 두 이름은 거의
똑같다.
모음 부호는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가 기록된 후 거의 1,000년이 지나서야 본문에 붙여졌다.
모음과 어미는 이
기사들이 기록되던 시기에 동일한 자음을 다르게 발음한 것에 따라 붙여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이름은 언어학적으로 관련돼
있고, 따라서 동일한 히브리어 어근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는 아버지가 되신다
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Zeraiah)의 아들로 아비새(Abishai), 아사헬(Asahel)와 형제(삼하 2:13).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여부스족을 이기고 다윗의 지휘관이 되었다(역대상 11:6).
다윗이 이르되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우두머리와 지휘관으로 삼으리라 하였더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갔으므로 우두머리가 되었고.
요압은 다윗을 도와 여러 업적을 이루지만 반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비롯 다윗의 친인척을 죽이며 다윗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인물 중이 하나입니다.
요압은 결국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처형당합니다.
'여호와는 아버지 이십니다.'
'여호와는 하나님 이십니다.'
다윗 왕 시기 때 활약하며 여러 이민족들을 무찔렀으나 다윗의 허락없이 두 장군을 죽인 죄로 솔로몬 왕 원년에 숙청당했다.
1. 요압은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잔인한 사람이다
(삼하 3:27-30) 세상에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모습 중 하나가 무정함과 무자비함이다(롬 1:31). 바울도 말세에 하나님을 떠난 악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무정함’, ‘원통함을 풀지 않음’, ‘사나움’이라고 말하였습니다(딤후 3장).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납고 폭력적이고, 망각적인 모습이 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죄가 없었고 양과 같이 폭력성과 공격성이 없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아담의 DNA가 후손들에게 전달되면서 폭력성, 잔악성, 잔인함,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속성들이 인간 안에 들어와 인간 세계를 망쳐버리고만 것이다. 가인과 아벨을 보면, 형이 동생을 쳐 죽였다(창4:8). 배워서 죽인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살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라멕은 가인의 후예로 전쟁에 나가서 자기 몸에 입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해 젊은 소년까지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창4:23-24).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이집트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숫자가 늘어나고 점점 더 강성해지자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두 하숫가에 던져버리라는 대학살 명령을 내린다.
마태복음 2장에도 보면,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했던 유대의 분봉왕 헤롯이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여 버리라는 집단학살을 명령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공격성, 야수성, 잔악함, 포악함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 포악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요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1) 요압의 아브넬 살인사건(삼하 3:27-30)
다윗 왕은 적들을 품어주는 포용과 융화정책을 썼다. 그런데 요압은 그렇지 않았다. 사울이 죽고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자 아브넬이 2년 동안 섭정을 했다. 왕이 이스보셋이라도 정치적인 힘은 아무것도 없고 아브넬이라는 군대 장관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다윗이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다윗은 대세가 자신에게 이미 기울어졌지만 사울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끌어안기 위하여 그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축복한 후 그를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요압은 이 같은 다윗의 결정에 대하여 불복하고 사람을 보내서 다시 아브넬을 헤브론에 유인해 온 뒤에 칼로 그를 죽였다.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이 국가 통일에 방해를 받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사실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은 아브넬 입장에서는 정당방위였습니다. 아브넬을 죽이려고 쫓아간 아사헬에게 아브넬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추격하다가 창에 찔려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압은 그 일에 대하여 책임이 동생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아브넬에 대하여 복수심을 갖지 않았어야 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일진데 전쟁에서 동생의 경솔한 행동으로 죽임 당한 것을 모두 원수로 적대시하고 보복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요압의 아마사 살인사건(삼상 20:4-6)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윗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난을 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때 다윗이 압살롬에게 붙어서 군대 장관을 하던 변절자 아마사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준다. 다윗의 융화정책입니다
그러나 요압 대신 아마사가 군대 사령관이 되었을 때, 요압의동생 아비새는 세바의 반역을 진압할 때 자신의 형인 요압을 불러들였고 요압은 아마사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다. 이 사건은 다윗의 융화정책을 또한번 지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번에도 요압은 자기가 다윗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대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요압은 그 소식을 듣고 아마사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다. 자기가 다윗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대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자기 지위에 걸림돌이 된다면 친인척도 마다하지 않고 죽이는 그런 잔인한 사람이다. 아마사는 요압과 사촌 관계입니다(이모의 아들: 삼하17:25).
요압은 무죄한 두 사람을 살인하므로써 다윗의 국가통일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3) 에돔 땅의 남자를 전멸시킵니다(왕상 11:15-16)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다윗 왕이 에돔 지역에 전쟁을 하러 나가서 그 백성들을 통치하려고 했는데 에돔 사람들이 대적하게 되어 전쟁을 하면서 많은 유대의 군대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6개월 동안 에돔 땅에 주둔하면서 에돔 땅의 모든 남자들을 전멸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요압의 잔인성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무정한, 무자비한, 사나운, 동물적인 폭력성과 공격성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 잔인함, 포악함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맹수가 아니라 공격성이 없는 양입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그런 DNA를 우리는 버려야 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힘으로 양처럼 변하는 역사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요압은 제어가 안 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삼하 3:30, 39)
요압은 통제 불능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이 너무 힘이 강하여 제어하기가 힘드니 주께서 그 악한 일을 행한 대로 갚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30절). 즉, 요압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통제 불능이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쓴 편지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면서 부흥시켜 놓은 다음에 자신의 후임자였던 디모데에게 교회를 맡기고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목회를 잘 하라는 의미에서 편지 두 편, 즉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를 씁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썼던 디모데후서 4장에서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니 그를 주의하고"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사법권이 없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마디 합니다. "주께서 그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과 온유의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는 교회는 들어왔지만 거듭나지 못하고, 옛 사람이 살아 있는 통제 불능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이나 알렉산더처럼 누구의 말을 안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어가 안됩니다. 그는 저주스러운 인간입니다. 이 정도까지 가면 갈 데까지 다간 사람들입니다.
존 오웬(John Owen)
그가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시골사람, 땜장이였던 존 번연(John Bunyan)목사입니다.
가끔 존 번연이 런던에 와서 설교할 때마다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고 합니다.
찰스 왕이 존 오웬을 불러 물었습니다.
당신은 학식과 지위와 권위 있는 사람인데 왜 시골에서 온 땜장이 설교자, 존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가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존 오웬은 할 수 있거든 제 학식, 학위, 모든 지식, 신학을 모두 팔아버리고 존 번연이 가지고 있는 그 영성을 사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이 존 번연이 『천로역정』을 쓴 사람입니다.
존 오웬은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들을 귀가 있어야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안 듣고, 제어가 안 되는 요압과 알렉산더와 같은 인물들을 통하여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율법도, 권면도 안 통하는 교만한 사람은 갈데까지 간 통제 불능의 저주받은 인간입니다.
바로 요압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3. 요압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1:7-8, 2:5-6)
에스키모인과 늑대 사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단 칼을 늑대를 유인하는데 쓰일 동물의 몸에 쩔러 넣습니다.
그 칼에 피와 기름이 엉겨 붙으면 끄집어내서 밖에 내놓으면 추운 영하 날씨의 모두 얼어붙습니다.
그 후에 동물에 두 번째로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30번, 40번 해서 피와 기름이 엉겨 붙어 이것이 칼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지면 칼을 세우고 손잡이를 땅에 묻습니다.
늑대가 피냄새를 맡고 다가와서 칼을 계속 핥으면서 얼음이 녹아 칼날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래도 늑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칼을 빨게 됩니다.
자기가 마시는 피가 자기 피인데도 착각하고 계속 빱니다.
그렇게 몇 시간 뒤에 나가보면, 늑대가 죽어 있습니다.
에스키모 선조들의 지혜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탐심, 권력의 냄새를 쫓아가다가는 자기를 파괴시킨 늑대 같은 인생이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이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지만 후임자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다시 반역을 일으킵니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였고 아버지 다윗이 섭섭하게 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때 아도니야와 함께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던 자가 바로 요압입니다(왕상 1:5-8).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어도 요압은 다윗 왕을 떠나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아도니야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뒤를 이어서 막내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압은 자신의 권력욕망 때문에 정치적인 줄서기를 잘못하여 아도니야를 옹립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2:5-6, 28-35).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참하게 죽습니다.
요압의 인생은 이렇게 살지 말라는 거울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요압의 인생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결정적 실수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맹수처럼 잔인하게 살지 말고 양처럼 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통제불능의 교만함을 버리고, 겸비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욕심에 이끌려 죽는 자리에 줄서기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바르고 성경적으로 판단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열어주십니다.
요압을 거울삼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성도, 성령 충만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3월 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4: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인구를 조사하라(1절)
♦ 성구 :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向)하여 진노(震怒)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感動)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人口)를 조사(調査)하라 하신지라.
“인구를 조사하라(take a census)”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령한 목적은 이스라엘의 힘을 과시하고 스스로 위로를 얻고 자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전쟁 욕구와 승전에 대한 과신으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지고 다른 민족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에게 인구 조사의 명을 받은 군대장관 요압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터인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충고했습니다. 요압의 충고는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무시하고 악을 강행하였습니다.
인구 조사 후 다윗은 인구 조사의 동기가 교만과 자기 과시욕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잘못을 깨달은 것은 290일 간의 인구 조사가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다윗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어둠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세 가지 재앙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칠 년의 기근
둘째는 삼 개월의 전쟁
셋째는 삼일의 온역 이었습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 범죄의 대가로 세 가지의 징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다윗은 삼 일 동안의 온역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결과는 극심하여 칠만 명이 온역으로 죽어갔습니다. 칠만 명이나 되는 인구의 감소는 인구 조사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 했던 다윗 왕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온역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탄식하자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윗에게 다시 보내셨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값을 지불하고 그 땅을 사서 그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재앙이 그쳤습니다.
새벽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늘의 뜻을 이루어가는 진실한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PWmBJY_d0Y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3: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다윗의 마지막 말(1절)
♦ 성구 :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者),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者),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者)가 말하도다.
“다윗의 마지막 말(the last words of David)”
다윗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지난 삶을 회고합니다.
22장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3장은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의 글을 남겼습니다(열왕기상 2장).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백성과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1절).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 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이새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왕이 아니라 이새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신을 낮출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 아니라 이새의 아들이었으며 기름부음을 통하여 그 능력이 자신에게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내려 온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며 낮고 천한 자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세워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고백함은 노래 잘하고 찬양 잘하는 그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인생에서의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축복받는 자의 삶과 저주받는 자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삶과 저주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과 뜻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축복 받은 자들은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가정에서, 일터에서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마지막 삶의 여정 속에서 마지막 깨달음을 고백하였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위대한 유산은 우리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웠던 용사들이라며 그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23:8∼39).
우리는 모두 주님의 군사요, 주님의 용사들입니다.
다윗은 그의 마지막에 자신을 위하여 싸운 37명의 용사들을 한 명, 한 명 이름을 소개한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자신을 위하여 동행하며 매일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싸웠던 그의 용사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늘도 능력의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십자가 군병으로 힘차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예수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2:1∼51
♦ 묵상을 위한 주제 : 큰 구원(51절)
♦ 성구 : 여호와께서 그 왕(王)에게 큰 구원(救援)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者)에게 인자(仁慈)를 베푸심이여 영원(永遠)토록 다윗과 그 후손(後孫)에게로다 하였더라.
“큰 구원(great victories)”
사무엘하 21장, 22장, 23장, 24장을 학자들은 "부록" "후기" "삽입"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부록과 같은 말씀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헤세드(자비, 은혜)에 대한 깊은 신앙적 교훈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8편의 표제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라고 소개합니다.
한편 사무엘하 2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시편 18편의 표제와 사무엘하 21장 1절의 내용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다음의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8편과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같은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내용이 같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분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환난의 때를 여호와께 간구하므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능력 있는 왕이었지만 자기의 힘과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팔 즉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문턱과 극심한 환난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며 응답하셨다고 찬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는 분노를 터뜨리시며 그들을 멸하십니다.
다윗은 강한 원수와 많은 물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셔서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신 까닭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깨끗한 심령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상을 내려주십니다.
구원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한 양심에 기초한 경건함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미하여 그것을 의지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정미하다는 것은 일체의 흠도 없이 완전함을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룬 많은 성공과 업적을 열거하며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얻은 것이며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립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존하시며 찬양을 받으실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입에서는 항상 감사와 찬양이 흘러넘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날마다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비결은 능력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시며 선한 결과를 이루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에 새롭게 경험하는 은혜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양 / 내가 매일 기쁘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1: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 후에야(14절)
♦ 성구 :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墓)에 장사(葬事)하되 모두 왕(王)의 명(命)대로 좇아 행(行)하니라 그 후(後)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爲)하여 기도(祈禱)를 들으시니라.
“그 후에야(After that)”
사무엘하 21장의 표제는 “다윗이 기브온 사람의 말을 들어주다”이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 후에야'라는 말씀은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후를 말합니다.
과연 무엇을 실천한 후를 의미할까요?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에 3년간 기근이 계속되므로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렸습니다.
다윗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전에는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심각할 때는 “기우제(祈雨祭)”를 드렸습니다.
다른 용어로는 “무우(舞雩), 무우제(舞雩祭), 우제(雩祭), 한제(旱祭), 수제사(水祭祀)”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기청제(祈晴祭)”는 비를 멈추게 해 달라는 제사를 말합니다.
기우제보다 빈도는 낮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몇 번 등장한다고 합니다.
또 겨울 가뭄 때는 “기설제(祈雪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근의 원인을 해결하려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며 백성들의 의식주를 책임져야 합니다. 따라서 백성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 책임이 막중한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사람만이 지도자로 나서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임하게 된 원인은 “사울과 그 집안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시 기브온 사람들은 여리고와 아이 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들에게 해어진 전대와 찢어져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낡은 신과 옷을 입고 다 마른 곰팡이가 난 떡을 예비한 후 여호수아를 찾아와 아주 먼 곳에서 왔으니 우리와 약조하자고 제안하므로 여호수아는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릴 것이라고 언약을 맺었습니다(수 9:1-15).
그런데 사울 왕과 그 무리들이 그 약속을 무시하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약속은 어떤 경우에든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인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보장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이며 비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10:9∼1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에 대한 경험이 내 생각을 바꾸며 내 삶을 바꾸도록 역사하므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은 죽느냐 사느냐의 치열한 싸움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은 생명을 지키려는 선한 싸움과 같습니다.
블레셋의 거인들과 같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세력들은 예수 안에서 약속된 생명을 빼앗으려고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는 것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힘과 생명을 보존하려는 신앙은 매일같이 영적 전투 현장에서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최후의 영광을 얻기까지 영적 긴장과 강한 영적 야성을 갖춰야 합니다.
이와 같은 환경을 조성하려면 나라의 지도자를 세워야 할 때 올바른 선택과 결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지도자를 잘못 세우면 그만큼 영적 싸움의 현장은 더 치열해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하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협력하고 노력하여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눠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마귀들과 싸울지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6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0: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기업(19절)
♦
성구 :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和平)하고 충성(忠誠)된 자(者) 중(中) 하나이어늘 당신(當身)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城)을 멸(滅)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當身)이 여호와의 기업(基業)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기업(the LORD's inheritance)”
'여호와의 기업'이란 반란을 일으켰던 '세바'가 도망한 성 "아벨"을 말합니다.
19장에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던 압살롬이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전사한 후에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고 결의합니다. 이때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는 다윗을 왕으로 모실 수 없다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동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았으나 다윗은 유다 사람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복귀합니다.
이때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예루살렘 궁에 남아있던 후궁 열 명을 별실에 가두고 죽는 날까지 동침하지 않으므로 생과부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마사"를 군장으로 임명하고 유다 사람을 동원하여 지키라고 하였으나 왕이 정한 기한에 지체 되므로 "아비새"에게 '세바'가 더 위험한 인물이므로 그를 쫓으라고 명령합니다.
요압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 기브온 큰 바위 근처에서 아마사가 맞이하러 나오므로 요압은 아마사에게 "형은 평안하뇨?" 하며 문안하는
것처럼 말하며 아마사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합니다. 그리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들이 아마사의 시체를 보고 동요할까봐 시체를
밭으로 옮기고 옷을 그 위에 덮었습니다.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세바를 잡으려고 아벨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할 때에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크게 외쳤습니다.
아벨 성의 여인은 반역자 세바만 내어주면 아벨 성을 무너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후에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졌습니다.
요압은 무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로 나갔습니다.
요압은 이스라엘 군대 장관으로,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도니람은 감역관으로,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었으며 스와는 서기관,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었습니다.
아벨 성의 지혜로운 여인처럼 한 사람으로 인하여 성이 초토화되려 할 때 지혜를 발휘하여 아벨 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나라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지혜로운 여인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혜로운 여인처럼 시대의 흐름과 궤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꿰뚫고 올바른 분별력으로 나라와 민족의 위기를 지켜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나 맡은 본분은
https://www.youtube.com/watch?v=5bb3rVpLcA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5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9:1∼43
♦ 묵상을 위한 주제 : 왕은 돌아오소서(14절)
♦ 성구 :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一齊)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王)께 보내어 가로되 왕(王)은 모든 신복(信服)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은 돌아오소서(Return YOU)”
다윗 왕의 백성들은 압살롬의 반란군을 쳐부수고 승리의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 기쁨을 다윗에게 알려 함께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매우 슬퍼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다윗의 슬픔으로 인해 조용히 성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요압은 반역자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왕에게 만일 왕이 반란군을 쳐부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않을 것이며 왕이 젊었을 때부터 당한 모든 화보다 더 심한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성문에 앉아 백성들을 맞이했습니다.
지도자 앞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왕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왕에게 아뢸 것을 아뢰고 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사람입니다.
요압은 다윗 왕에게 왕이 왕으로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충신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요압과 같은 일군이 필요합니다.
요압과 같은 일군이 없기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어지럽습니다.
예루살렘 궁으로 돌아오는 다윗 앞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는 반란군에 쫓겨 피난가던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하며 저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이를 처단해야 한다는 말에 다윗은 오늘 같은 날 어찌하여 사람을 죽이겠느냐 하며 시므이에게 너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섹에게는 전후 사정을 모두 듣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사울의 기업을 얻었던 것을 시바와 기업을 절반씩 나누라고 합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왕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만족하니 시바에게 모든 것을 갖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므비보셋의 너그러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에게 다윗은 함께 요단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함께 지내자고 합니다.
그러자 바르실래는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으므로 내 고향 땅에서 머무는 것이 좋다며 나를 대신하여 김함을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바르실래와 같이 내가 누릴 부귀영화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추천하여 그 자리를 얻게하는 부드러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잠시 다윗은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정리된 후에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멋진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잘못된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혀 질서를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므로 모두가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오 주여
이곳에 오셔서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서로 다른 것 때문에
빼앗고 속이는 전쟁과 같은 삶이 아니라
협력하며 나누는 마음으로
손에 손을 잡고 다 함께
평화의 나라를 세우게 하옵소서.
♪ 찬양 / 돌아와 돌아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다윗의 부성애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한 문제
정치는 반대 세력을 이겨야만 가능하다.
신앙은 반대 세력을 용서해야 승리한다.
정치와 신앙을 혼돈하면 세상을 점점 더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도 전해진다(삼하 14:25).
그리고, 지혜가 있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죄를 저질러서 일단 용서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윗이 압살롬을 계속 만나주지 않자 다윗 왕의 총애를 받는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서 요압을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요압을 설득해서 왕에게 나아간 사례도 있다.
그러니 아비의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에 품고 싶고 사랑하는 존재였겠는가?
다윗은 압살롬에게 여러 특권을 베푼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예쁜 누이가 있었다.
그런데, 자기의 형 즉 다윗의 맏아들인 암논이 자신의 누이를 좋아해서 겁탈하였다.
암논에게 올무를 놓고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하인들을 시켜서 죽여 복수를 한다.
여러 자식의 부모의 입장이 되면, 그 자식들이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을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진다고 한다.
자식들이 갈라져 싸울 때에는 이마에 기러기가 한마리씩 그려 진다고 한다.
더구나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는 것을 들은 다윗은 심히 통곡하고 마음에 안타까움이 가득해진다.
이대로 부자 사이가 멀어지나 했었다.
그러나, 압살롬이 다윗의 눈을 피해서 3년간 다른 곳에서 지냈기에, 다윗은 압살롬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생기게 되었다(삼하 13장).
다윗은 결국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압살롬을 용서한다.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반기를 들다
압살롬은 점차 야심을 드러낸다.
자신을 위해서 병거와 말을 준비하고,
백성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왕의 이름을 팔아서 행동하게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인심은 압살롬에게로
흐르게 되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아비 다윗을 죽이려는 압살롬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진행 되었다.
압살롬은 계교를 써서
헤브론으로 아버지 다윗왕의 부하들을 데려가서 제사를 지내는 척 하면서 왕 즉위식을 한다.
헤브론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장소이기도 하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준비를 거의 마친 압살롬은 다윗의 고문이요, 지혜가
충만한 아히도벨을 자신의 조력자로 만들어 내서 다윗을 몰아내고 자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큰 원동력으로 삼았다.
다윗이 예루살렘성에서 도망하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에 손 쓸 겨를도 없이 예루살렘 성에서 도망하게 된다.
사람이 위기를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의 깊이를 알게 된다고 했다.
다윗은 자식에게 쫓겨 나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조차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제사장에게 다시 돌아가 있기를 명하였고, 밀정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후새를
압살롬쪽으로 잠입시켜서 자신의 밀정으로 삼는다.
어려운 상황에서 믿기 어려운 이방사람이 함께 있기를 청했을 때에도 믿음으로 그를
거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의 깊이가 깊어도 어려움을 바로 피할 수는 없는 바 다윗은 자신의 낳은 자식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쫓김을 당하게 된다.
전열을 정비한 다윗. 다윗과 압살롬의 최후의 전투와 압살롬의 죽음
마하나임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윗은 군사들을 정비하고 최고의 장수 요압에게
압살롬과 싸우도록 지시한다.
다윗도 출전하고자 하나 사람들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말린다.
다윗은 그 말을 들으면서 모든 장군들과
백성에게 다음 내용을 명령한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사무엘하 18:5)
부모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칼날을 들었던 자식에게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너그러이 대우하라(살려주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 이해할 수도,
행할 수도 없는 대목인이다.
다윗의 대장군 요압은 압살롬의 머리가 나무에 걸려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다윗의 명을 어기고 결국
죽이고 만다.
다윗은 싸움을 전하는 전령이 도착하면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오직 압살롬의 안부만 물었다.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
삼하 18:32 …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
다윗은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시점 만큼은 다윗의 관심의 전부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었던 것이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할까.다윗의 마음을 너무도 자세히 나타낸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과 압살롬에 대하여 그 다윗의 내리 사랑을 마음 속에서부터 깊이 새길 수 있다.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자신에게 칼을 겨눠 죽일려고 했던 자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대성통곡을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리고 아프고 쓰려 온다.
온 왕국의 미래가 걸린 싸움에서도 오직 다윗의 관심은 압살롬이었고, 압살롬은 다윗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고, 하늘에서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8: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왕은 나가지 마소서(3절)
♦ 성구 : 백성(百姓)들이 가로되 왕(王)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逃亡)할찌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注意)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折半)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注意)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王)은 우리 만명(萬名)보다 중(重)하시오니 왕(王)은 성(城)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왕은 나가지 마소서(You must not go out)”
‘왕은 나가지 마소서’ 이 말은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을 가늠케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 왕은 큰 충격을 받고 좌절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협력과 도움에 인해 용기를 회복했습니다.
다윗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사람들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압살롬의 반란군은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이 피난해 있는 곳까지 쫓아왔습니다.
뛰어난 전략가인 다윗은 자신에게 속한 군사들을 재편하여 군대를 정비한 후 군을 삼 대로 나눠 각각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가 통솔하도록 합니다.
군대를 재편하여 적극적인 공세 작전을 명령한 다윗이 전투에 참여하려고 할 때 백성들은 왕은 전쟁에 참여하지 말고 후방에서 지켜보는 것이 바람직한 작전이라고 제안한 것이 "왕은 나가지 마소서!" 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군장관들이 다윗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세 장수들에게 비록 반란을 일으켰던 아들이지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할 것을 부탁합니다.
다윗의 군대가 출정하여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웠습니다.
이 전투에서 압살롬의 반란군은 2만 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이 큰 상수리나무에 걸린 것을 본 다윗의 군사가 요압 장군에게 보고했을 때 요압은 그 군사에게 왜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군사는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분부를 상기시키면서 요압의 명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요압은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 쳐 죽였습니다.
압살롬은 생전에 자식이 일찍 죽어 자기 이름을 남길 방법이 없었으므로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비석을 세웠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요압에게 승전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는 제사장 사독의 아들로서 평안과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의 역할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히마아스 대신 구스 사람을 전령으로 보냅니다. 그 이유는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다윗이 그 전령에게 화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아히마아스를 귀하게 여겼으므로 혹시 당할지도 모르는 화에서 그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구스 사람을 대신 보냈습니다.
구스 사람의 뒤를 이어 아히마아스가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습니다.
다윗이 두 전령에게 압살롬의 안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며 슬퍼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비통함을 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무너진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후퇴하는 역사를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어지러움과 혼돈과 거짓된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무너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질서를 반드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믿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일에 모두가 함께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첫째, 개인이나 국가가 권세욕에 날뛰면 반드시 망한다.
하나님과 백성이 무서운 줄 모르고 권세욕에 사로잡혀 날뛰는 지도자가 나타날 때면 이미 역사는 망조로 접어든 것이다
둘째,하나님의 공의의 맷돌은 천천히 도는 것 같지만 모든 악을 빠짐없이 분쇄한다.
역사의 맷돌이 너무 천천히 돌아 하나님이 계신지 의심하기도 하지만 결국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나뉜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에 정의와 불의가 반드시 드러난다.
셋째, 벌이 꽃에서 꿀을 도둑질해 가지만 오히려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강탈하는 자가 나타나 악을 행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전개된다.
넷째, 날이 어두워질수록 별이 선명하게 보이듯이 세상에 암흑과 혼란이 깊어 갈수록 진리의 가치와 희망의 깃발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모두를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악으로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보지 못할뿐이다. 인간과 역사의 위기는 자원이 바닥나 굶주리거나 전쟁이 발발하는데 있지않다. 인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데 있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 의와 불의를 판단하시는 공의의 신이 누구인지 아는사람에게는 위기는 위기가 아니다
벌은 꽃이 만들어 놓은 꿀을 탈취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
하나님의 맷돌이 너무나 천천히 돌아가서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넷째는 하나님이 망하게 하실 때는 교만하게 하신다
역사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이 어떠한 것을 멸하려 하실 때는 개인이건 국가이건 막론하고 교만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역사는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이 않는다.
절대 희망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어라고 하겠다.
희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가 올 것이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7: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께서(14절)
♦ 성구 :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謀略)은 아히도벨의 모략(謀略)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禍)를 압살롬에게 화(禍)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謀略)을 파(破)하기로 작정(作定)하셨음이더라.
“여호와께서(For the Lord)”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궁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전략가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지지하므로 압살롬의 반역은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의 전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과 같은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16:23).
아히도벨은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눈과 통찰력을 갖춘 아주 유능한 전략가 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을 지지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깨우치기 위한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일만 이천 명의 용사들을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겠다는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이때 압살롬은 후새를 찾았습니다.
후새는 다윗 왕이 압살롬의 진영에 머물며 압살롬의 전략을 사전에 알기 위하여 심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압살롬의 반역과 다윗의 도망이라는 극과극으로 치달은 급박한 상황속에서 압살롬에게 유리했던 전세가 급속하게 다윗에게 유리하도록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전략보다는 오히려 후새의 계획을 선택했습니다.
아히도벨의 제안은 다윗 왕만 제거하면 민심이 압살롬에게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의 피만 흘리고 반역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아주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압살롬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옳다고 했습니다.
아히도벨의 전략을 모두가 찬성하였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면 반역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아렉 사람 후새를 불러 후새의 전략을 들어보자고 합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 예루살렘을 떠날 때 함께 동행하지 말고 압살롬의 진영에 머물면서 압살롬 진영의 전략을 파악기 위하여 보냈던 심복이었습니다(15:37).
압살롬이 후새를 불러 그의 의견을 물은 것은 다윗 왕을 죽이려는 계획을 신중하게 진행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압살롬의 반역을 실패로 돌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4절)
후새는 압살롬에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라’고 합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이스라엘 전역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후새는 이와 같은 표현으로 압살롬의 왕권이 이미 이스라엘 전역에서 인정되고 있으며, 압살롬의 말 한마디면 온 백성이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압살롬을 추켜세웠습니다.
뿐만아니라 후새는 계속해서 ‘친히 전장에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압살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압살롬을 전장으로 유인하여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후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다윗 보다 더 큰 공을 세워 왕위를 더욱 견고히 하려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이여,
사람은 누구나 헛된 영광을 쫓아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압살롬과 같이 패망의 길을 좋아하는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 보다는 겸손히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소금과 빛의 비밀을 간직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맘이 낙심되며
https://wwww.youtube.com/watch?v=TO0y8-Kj-NQ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농부의 기도
어느 마을의 농부들이 하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들이 원하는대로 일년만 날씨를 변화시켜 주세요.'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좋다. 일년동안 너희 원하는대로 날씨를 변화시켜 주마.'
그래서 농부들은 자기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비를 주세요.'
'하나님, 지금은 햇빛을 주세요.'
'하나님, 지금은 바람을 주세요.'
가을이 되어 들판에 곡식이 잘되어 추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농부들은 신이 나서 추수를 하고 탈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막상 탈곡기에 넣어 탈곡을 해보니 알곡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 왜 알곡이 하나도 없습니까?' 농부들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다 주었다. 비를 원할 때는 비를, 햇빛을
원할 때는 햇빛을, 바람을 원할 때는 바람을 주었다. 그런데 너희가 언제 나에게 알곡을 달라고 하였느냐? 너희들은 알곡 달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농부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께 주문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6: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12절)
♦ 성구 : 혹시(或時)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冤痛)함을 감찰(監察)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詛呪) 까닭에 선(善)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The LORD will see my distress.)”
시바(Ziba)는 므비보셋의 사환입니다.
특별히 다윗 왕이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위하여 사울 왕의 기업을 모두 므비브셋에게 상속하도록 배려하고 시바를 사환으로 임명했습니다.
시바는 많은 음식을 나귀에 싣고 다윗을 찾았습니다.
실은 그 많음 음식은 므비보셋의 소유물입니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시바는 다윗의 환심을 얻으려고 이와 같은 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후에 알게 되지만 시바는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이 함께 오지 않고 시바만 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네 주인(사울 왕)의 아들이 어디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을 속였지만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을 따라나섰으므로 므비보셋의 기업을 넘겨받았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다리가 불편하여 시바의 숨은 의도를 알면서도 쫓아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할 때 마침 사울의 집 족속 시므이가 다윗을 향하여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아비새가 다윗에게 저 사람의 머리를 자르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때 다윗은 "여호와께서 저 사람을 통하여 다윗을 저주하라" 하신 것이므로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다윗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압살롬의 반역과 시므이의 저주로 나타났다는 분명한 믿음과 생각이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게 다듬었습니다.
나의 고통과 아픔을 해결해주고 나를 높여야만 하나님을 인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를 이끄실지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영광을 돌리겠다는 믿음이 다윗의 위대함이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자신의 죄를 알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의 원수를 갚아주실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그렇게 하실지도 모른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윗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만사형통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만사불통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 날을 기다리는 변함없는 믿음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 주여
믿음의 지도자
소망의 지도자
사랑의 지도자를 세워주셔서
남과 북을 하나로 묶어
세계 선교를 위한
복음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이 주인되는 세상
이루게 하옵소서.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생명!
텍사스 낙태금지법,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임명하면서 미국 대법원은 보수 6 대 진보 3의 구도로 재편됐습니다.
보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이 올해 뒤집을 것으로 예상되는 판결 중 하나가 여성이 임신을 중절할 권리를 인정한 로(Roe) 대
웨이드(Wade) 판결입니다.
* 로대 웨이드 판결이란?
임신 중절 여부를 선택할 권리는 아이를 밴 여성에게 있으며, 임신부의 선택을 정부가 강제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한 미국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이 지난 1일 예고한 대로 발효됐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법의 시행을 막아달라며 낙태 클리닉과 시민단체가 제출한 긴급 청원을 기각했습니다.
임신 중절 여부를 선택할 권리는 아이를 밴 여성에게 있으며, 임신부의 선택을 정부가 강제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고 명시한 대법원의 로(Roe) 대
웨이드(Wade) 판결 이
나온 게 지난 1973년의 일입니다.
이후 공화당과 종교 단체를 비롯한 보수 세력은 줄기차게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약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텍사스주의 새 낙태금지법은 보수 진영에는 지난 반세기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볼 수 있는 획기적인 법입니다.
반대로
진보 진영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동안은 1992년에 있었던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대 케이시(Casey) 판결에 따라 아이가 태어났을 때 스스로 연명할 수 있는 시기로 간주하는 임신 22~24주가 낙태를 허용하는 기준이었습니다. 24주 이후의 낙태는 아이는 물론 산모도 위험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대체로 금지돼 있거나 엄격한 제약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전에는 임신부가 임신을 중단하기로 할 때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텍사스 낙태금지법과 함께 임신 6주로 앞당겨진 겁니다. 임신 6주에는 임신 사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텍사스주는 어떻게 법과 다름없는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법안을 제정할 수 있던 걸까요? 여기에는 보수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법원의 대법관 구도도 한몫했지만, 기존의 낙태 금지 시도와 달리 새로운 전략을 반영한 법조문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의 디테일을 찬찬히 뜯어보면, 보수 진영은 진보 진영이 그동안 써온 전략을 훌륭히 벤치마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텍사스주의 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미국 대법원과 대법관의 구성을 잠깐 생각해 봅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지만, 4년 임기 동안 무려 3명의 대법관을 지명했고, 지명한 대법관은 모두 논란 끝에 의회의 비준을 받았습니다. 특히 지난해 (진보 성향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며 생긴 공백을 (보수 성향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으로 메우면서 대법원은 보수 6대 진보 3의 구도로 재편됩니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여성의 임신 중절을 금지하거나 제약하는 판결을 여러 차례 내린 코니 배럿 판사가 대법관이 되면서 6:3의 구도가 확립되자, 가족계획연맹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엎는 건 시간 문제라며 우려했습니다. 반대로 대법원은 어디까지나 헌법을 해석하고 법을 제정, 집행한 절차가 적법했느냐를 따지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의사결정 과정이 느릴 수밖에 없는 기관이므로, 벌써 반세기 가까이 이어지며 자리를 잡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대법원이 앞장서서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공화당이 다수인 텍사스주 의회와 그렉 애봇 주지사가 효과적으로 공략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즉, 지난 5월에 애봇 주지사가 서명했고, 지난 1일 발효된 낙태금지법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비롯해 여성의 낙태를 국가가 금지하고 제약해선 안 된다는 미국의 현행법을 실질적으로 어긴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 자체에 관한 소송이 벌어져 지방법원, 항소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빠르지 않으니까요. 또 매년 7천여 건의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되지만, 이 가운데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사건은 100여 건에 불과합니다.
안전한
임신 중절은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가족계획연맹 등 시민단체들은 대법원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식 재판 대신) 긴급 청원을
넣었습니다. 헌법을 명백히 어긴 법을 텍사스주가 제정했으니, 대법원이 이 법을 무효로 되돌려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6:3이라는 보수 우위의 구도가 위력을 발휘합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의 효력을 대법원이 당분간
정지해야 한다며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같은 의견을 냈지만, 로버츠 대법원장이 없어도 여전히 다수인 보수 성향 대법관 다섯 명이 이
사안은 대법원이 아직 판단할 사안이 아니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법과 관련해 하급 법원을 거친 정식 재판이
있던 것도 아니며, 구체적으로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이 헌법의 어떤 점을 어떻게 어긴 건지 따져보고 다퉈봐야 하는지도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대법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위헌 소지가 다분한 법을 주가 제정, 집행하는 걸 방관한 셈이 됐습니다.
소수
의견 편에 선 대법관 4명은 이례적으로 각자 서면으로 의견을 제출했습니다.
(원래는 한 명이 대표로 의견을 내는 게 보통) 소냐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헌법을 명백히 위반한 법이 버젓이 시행된 걸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상황을 개탄하며, 좀처럼 쓰지 않는 격정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텍사스주의 법은 헌법이 보장한 여성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충격적인 법이다. 이런 법을 막지 않고 있다니, 다수 의견에 선 대법관들은 지금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The majority of the courts are burying their heads in the sand.) – 소토마요르 대법관
우리말로는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보수 진영은 오랫동안 낙태를 금지하거나 최소한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주 수를 앞당기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임신 중절 권리를 제약하는 법은 그 자체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어기는 셈이 돼 연방법원에서 효력이 취소되곤 했습니다. 주 의회를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어 법이 통과되더라도 거기까지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왜 연방 법원은 텍사스주가 제정한 이번 낙태금지법을 막지 못했을까요? 법조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텍사스 낙태금지법에는 임신 중절을 못 하게 하는 주체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낙태금지법들은 주지사나 주 법무부장관 등 임신 몇 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는 주체를 명시했습니다. 명시된 주체는 곧바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비롯해 연방법, 나아가 헌법을 어긴 주체로 특정돼 소송 대상이 됐죠. 그러면 연방 법원이 나서서 법을 무효로 한 겁니다.
그런데 텍사스 낙태금지법은 임신 중절을 금지하는 주체가 주지사나 법무부장관이 아니라고 오히려 명확히 제외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직접 낙태를 못 하게 막는 법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송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거죠. 그렇다면 누가 낙태를 막죠? 텍사스주 의회는 그 권한을 주 정부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위임(deputize)했습니다. 누구나 임신 6주 이후에 낙태하려는 사람, 임신 중절 수술을 해주는 클리닉 등 낙태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찾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겠다고 한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가 직접 포상금을 주는 건 아니고, 낙태를 시도하는 사람이나 임신 중절 수술을 하는 클리닉 등 낙태금지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이들에게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소송에서 이기면 최소 1만 달러의 배상금과 소송 비용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피고는 재판에서 이기더라도 소송 비용을 원고에게 청구할 수 없습니다.) 임신 중절을 돕는 사람의 범주도 매우 넓은데, 낙태 클리닉을 소개해주거나 클리닉까지 우버를 타고 갈 때 우버 기사도 피고가 될 수 있습니다.
법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임신 중절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막대한 비용 부담을 질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terrorize) 낙태를 막겠다는 거죠. 법이 발효된 뒤 실제로 텍사스주에서는 임신 중절 수술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낙태 클리닉과 시민단체들은 법이 위헌이라며 연방 법원에 소를 제기했지만 잇따라 기각됐습니다. 주지사나 주 법무장관이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고 명시됐기 때문에 이들에게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죠.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대법원에 긴급 청원을 제기하는 것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앞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텍사스 낙태금지법이 성공을 거두면서 공화당이 주 의회 다수당인 다른 주들에서도 비슷한 법이 잇달아 제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진보 진영에는 악몽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죠. 흥미로운 건 정부가 직접 나서서 법을 집행하는 주체가 되는 대신 특정하기 어려운 개인들에게 법을 집행할 권한을 위임한 보수 진영의 전략이 실은 진보 진영에서 오랫동안 써온 전략이라는 점입니다.
덴버대학교 조슈아 윌슨 교수가 워싱턴포스트 멍키 케이지에 한 분석을 보면, 특히 인종 차별을 금지한 민권법(civil rights laws)을 정착시키는 데 진보 진영은 개인 차원에서 줄기차게 소송을 제기하는 전략을 세워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보수 진영은 민권법을 어겼다며 소송을 제기할 유색인종이나 여성 등 소수자들이 소송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워할 거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진보 성향의 젊은 인권 변호사들이 인종 차별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모아 소송을 대리하고 나서면서 민권법은 꾸준히 판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경험을 쌓고 성장한 대표적인 법조인이 고 긴즈버그 대법관일 겁니다.
법조계가 진보 성향 일색으로 바뀌는 데 두려움을 느낀 보수 진영은 1980년대부터 보수적인 변호사, 법조인을 양성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고 로스쿨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노력이 낳은 대표적인 법조인이 코니 배럿 대법관입니다.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을 고안하고 제정하는 데는 이런 보수적인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들이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임신 중절 권리를 옹호하는 시민단체들은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겁니다. 먼저 대법원에 긴급 청원이 올라갔던 사안이 여전히 연방 항소법원에 계류 중이므로, 해당 판결이 나면 이 문제를 법원에서 다툴 수 있습니다. 또한, 텍사스주의 낙태 클리닉이 소송당할 것을 각오하고 임신 중절 수술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럼 보수 단체들이 해당 클리닉을 고발할 테고, 법정 공방이 시작되겠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5: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6절)
♦ 성구 :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He stole the hearts of the men.)”
압살롬은 다윗 왕에게 백성들이 송사하려고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묻고 난 후에 “네 일이 옳고 바르지만은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않으셨다” 하고 송사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일이 앞으로 17일 남았습니다.
그동안 주사파 세력들에 의해서 사회 여러 분야가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무상복지'라는 슬로건에 의해서 국가부체가 1인당 약 1,800만원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머지않아 국가는 파산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압살롬은 4년 후에 헤브론에서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의 인심이 모두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압살롬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간 사람은 모두 이백 명이었습니다.
헤브론에 입성한 압살롬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정탐꾼들을 보내고 나팔 소리와 함께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고 외치게 합니다.
압살롬의 계획대로 반역은 시작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의 반역에 합류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가 다윗을 배반한 이유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은 아히도벨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최선전으로 보내어 전사하게 했던 사건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그때부터 다윗에 대하여 몹시 분개했을 것입니다.
한편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떠날 때 블레셋에서 귀화한 “잇대”는 다윗과의 신의를 소중히 생각하고 함께 동행했으며 언약궤를 가지고 따라온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기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독은 선견자이기 때문에 압살롬에게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고 또 성 안에 있으면서 압살롬의 정황을 살펴 다윗에게 알려줄 수 있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시기에 “후새” 라는 귀한 충신을 만나게 됩니다. 후새는 다윗과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다윗은 이를 만류하고 새로운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의 신하로 머물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음모를 살펴서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진실이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힘과 지혜를 모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에게 후새와 같은 충신과 사독과 같은 선견자가 있었다는 것은 흔들리는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바로 잡을 수 있는 희망의 등불과 같습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몹시 흔들릴 때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는 후새와 사독과 같은 믿음의 성도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곧 우리의 소망이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나의 귀중한 한 표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교회를 지킬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권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마라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기도와 더불어 행동하는 신앙으로 올바른 주권을 행사하여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복음통일을 이루어 자유대한민국이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국가로 세워질 수 있도록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대 대통령 선거일 D-17일
♪ 찬양 /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본문은 마음을 도적질하는 압살롬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반역을 일으켜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합니다.
여섯째 천사의 나팔 심판에 이어 "살인 , 복술, 음행, 도적질" 이란 죄를 말씀합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에 도적질의 유전인자를 집어 넣어 죄를 짓게 합니다.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요압을 이용하여 다윗과 거짓으로 화친한 척 한 압살롬은 반역을 위해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준비한 것은 군사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압살롬은 정치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리 반역을 하여 왕이 된들 진정한 왕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것이 본문의 내용인데, 그것은 송사가 있어서 다윗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 자신은 백성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자신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수완은 참으로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3절의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보면 먼저 압살롬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네가 바르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말을 틀렸다고 반박을 하면 기분이 상하고 마치 그가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나를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내 편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압살롬은 먼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의 행한 것이 옳고 바르다고 함으로써
압살롬이 그의 편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지만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함으로써 현재 다윗의 정치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네가 옳다고 해도 지금의 왕은 너의
옳음을 들어주지를 않을 것이라는 말로써 다윗에 대해 불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4절)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자신만이 백성들 편에 서서 모든 송사를 공정하고 바르게 판결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각 시킨 것입니다.
이같은 압살롬의 수완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자신에게 돌려놓기 위해 그는 백성들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자로 행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라는 말씀처럼 압살롬은 사람들 앞에서 왕자라는 권세를 내세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절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압살롬을 신뢰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정서는 도덕적이고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정치인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겸손이라는 것이 압살롬처럼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겸손의 행위에 대해 속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굴복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는 하나님의 뜻에 북종 할 뿐입니다’는 마음이 겸손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보면서 감히 자신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만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앞에 나올 수 없는 죄를 범한 처지면서도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요압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절을 하는 것을 막으며 그들의 입을 맞추는 것은 백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겸손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볼 때에는 자신들의 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왕자의 신분으로 자신들의 손을 잡아주며 입을 맞춰 환대하는 압살롬이 지극히 겸손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또 그것이 압살롬을 신뢰하게 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보다는 그러한 압살롬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렇게 겸손한 압살롬이 왕이 되어 자신들을 다스린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압살롬의 겸손과 자신들을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으로 인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압살롬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압살롬이 무엇에서 크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겸손을 가장한 것보다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보다 더 크게 잘못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했다고 말하는데, 왜 마음을 도적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도적했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친 것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까?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의 여부는 결국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의 주인이 내 마음의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무작정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답을 내릴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살아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도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입니다. 또한 홍해라고 하는 죽음에서도 이스라엘은 살았습니다. 이것을 안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을 노래하면서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 까지였나이다”(출 15:16)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홍해에서 살아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셨기 때문임을 안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피로써 살려낸 민족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고전 7:23절에서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산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든 우리이든 마음은 나도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들을 다스리고 권면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뺏고자 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신을 섬기는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압살롬이 잘못됨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압살롬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 않고 살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둔 채 하나님을 섬길 뿐입니다. 이것을 돕기 위해 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도적하기 위한 수단을 부린 것입니다. 백성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간과한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모습이 교회 내에서도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과 같은 수완은 목사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힘있는 목사로 군림하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마치 교인들의 편인 것처럼 행세하고, 또한 겸손을 가장하여 행동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지 못하고,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 목사의 본분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고 자신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일한다면 그는 압살롬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만 복종해야 할 마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신자입니다.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즉 어떤 사람도 신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를 크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신뢰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돕는 것이라면 신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은 어린양의 피를 향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피를 향해야 합니다. 이 일을 돕는 자가 곧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왕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왕이 어떤 존재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들을 돕는 것인가를 모른 것입니다. 신자라면 나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전해지기를 원해야 할 것이고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도적맞지 말라!조선 말기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상도」를 보면 한 대감이 수수께끼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둘로 나누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냐?”
아무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곁에 있던 시중드는 여인이 말한다.
“이롭게 하는 ‘이자’(利資)와 해롭게 하는 ‘해자’(害者)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슬렁거리고, 자기에게 꼭 필요한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한 대감은 여인에게 상을 내린다.
영적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적용을 할 수 있다.
‘이자’는 예수님이고 ‘해자’는 마귀다.
마귀가 도적보다 무섭다.
재물은 도적맞아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믿음과 평안을 잃어버리면 절망이 들어오고 급기야 생명까지 잃게 되기 때문이다.
멀쩡히 회사 잘 다니던 가장이 도박에 빠져 이혼하고 살인까지 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얼마나 허탈하고 어이없는 일인가 싶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그처럼 마음을 도적맞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 역시 며칠만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기도를 쉬면, 마귀는 믿음과 평안을 도적질해 간다.
우리가 방심하면 마귀는 끊임없이 파고 들어와 우리 것을 도적질하고 결국 우리를 죽이려 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고 마귀는 도적이다. 우리 영혼을 도적맞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옛사람을 십자가에 처리하고 새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영혼과 삶을 지켜 줄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중국 송나라 때 숭양현이라는 지방에, 장괴애라는 현지사(도지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하에게 매우 엄격했습니다.
한 번은 관리 한 사람이 돈 1전(오늘날 화폐가치로 1천 원 미만)을 모자 속에 감춘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그 관리는 그로 인하여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그 관리는 놀란 나머지 "불과 1전의 돈으로 천황의 관리에게 지독한 벌을 준다는 것은 심하지 않습니까?"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어 "현지사께서 내린 형벌은 참으로 가혹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 벌한 대도 나의 목숨까지는 뺏지 못 하리이다."하고 원망만 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일 없이 원망만을 하는 것을 본 장 지사는, 곧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판결문을 썼습니다.
"하루에 일전이면 천 날이면 천 전, 새끼줄을 톱 삼아 나무를 자를 수도 있고, 물방울이 계속 떨어짐으로써 돌을 구멍나게도 할 수도 있다.
더구나 반성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1전을 훔친 관리는 목을 잘리는 형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생각하여야 할 일은 작고 큰 것에 상관없이 도적질이란 무거운 죄(중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일 역시 큰 죄입니다.
미국의 일반 도서관에서는 한 해에 200내지 500권의 책을 도적 맞는데 국가적인 통계로 본다면 연간 2,500만 불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낙망한 사서들이 붉은 손을 가진 도적들을 잡기 위해 새롭게 고안해 낸 것이 (센트로 책 탐지기)였습니다.
이는 자석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서 자기(磁氣)를 넣은 금속조각을 책 등의 내부에 살짝 넣고 그 책이 정당한 방법으로 반출이 되는 경우에는 도서관 사서가 전자 코일의 전류가 흐르는 위를 슬쩍 통과 시켜서 그 책 등에 있는 자석의 자기를 없애 버립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반출되는 책은 자기를 없애지 않았으므로 출구를 이용할 때 비밀장치에 의한 회전문이 자동적으로 잠기며 사서가 앉은 곳에 붉은 불이 켜집니다.
그러면 사서가 즉각 도서대출계에 통고하고 도서 대여장을 가지고 나와 확인하여 그를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자석을 부착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낱낱이 보고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자코일을 통하여 그 죄를 씻음 받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로 남아 있다가 심판의 문을 통과할 때 양심이 그대로 송사하여서 모조리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의 죄의 기록을 확인하여 형벌을 줄 것이므로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자와 같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 가운데의 탐욕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과 말씀으로만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작은 탐심이라도 제 마음 안에 머물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면의 작은 싸움에서부터 주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우리도 탐욕에 끌려 다니는 노예가 아닌가를 다시금 살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받는 자가 있으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있는 나쁜 것을 제거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가득 채워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탐욕에 젖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없게 해 주시옵소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으면서 살게 해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4: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14절)
♦ 성구 : 우리는 필경(畢竟)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生命)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方策)을 베푸사 내어 쫓긴 자(者)로 하나님께 버린 자(者)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we must die)”
다윗은 훌륭한 인물이 아니고 그도 하나님 앞에 죄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필경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성경은 이미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왜 다윗의 거짓된 모습을 들추어야 합니까?
다윗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 된 모습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살필 줄 아는 믿음과 지혜를 갖추려는 믿음의 거울로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강조한 모세가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4장의 말씀은 다윗을 아주 초라하고 부끄럽게 소개합니다.
다윗과 요압, 압살롬의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강조하려는 것이 성경을 기록한 의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거나 묵상할 때 사람의 성품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어떻게 드러내고 계시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라고 손꼽는 다윗의 통치 이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그의 자녀들이 서로를 겁탈하고 죽였으며 이로 인해 틀어진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마음은 맞닿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보낸 2년 동안 다윗과 압살롬의 갈등은 오히려 깊어졌습니다. 이 시간을 지내며 압살롬은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반역을 일으켜 다윗의 가문을 흔들었습니다.
다윗의 왕권을 흔드는 불씨가 된 압살롬의 분노는 다윗의 통치 아래서 사랑하는 누이 다말이 당한 성폭력 사건이 정의롭게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억울한 자의 울음을 외면하는 나라에서 눈물 흘리는 자는 스스로 복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 암논을 죽인 압살롬의 행위는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이 불의를 바로잡지 못하고 외면한 지점에서부터 이 불씨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불러주신 내 자리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혹시 내가 다윗과 같이 외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덮어두고 있는 갈등은 없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와 가정과 이웃들 중에 불의와 억울함 속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살펴야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불의와 억울함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의 분노와 아픔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그곳에 정의를 세워 주실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으로 마음 아파하는 그곳에 공의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여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이제는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나라와 민족을 덮고 있는 어둠의 장막을 벗겨버리고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힘을 모아 기도합시다. 그리고 응답의 열매를 기다립시다.
자유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예수 한국
복음 통일을 이루어
선교의 깃발을 온 세계에 휘날리며
젊은 아들과 딸들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3:1∼39
“미움과 연애(hated and loved)”
“암논(Amnon, 충성스럽다)”은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에게서 난 다윗의 맏아들이었는데(삼하 3:2) 이복누이였던 “다말(Tamar, 종려나무)”을 사랑하였으나 만날 수 없어 속으로 앓고 있을 때 친구였던 “요나답(Jonadab, 여호와는 관대하심)”으로부터 간교한 꾀를 얻어 다윗을 속이고 다말과 강제로 동침한 후 마음이 변하여 다말을 심히 미워하여 내쫓아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말’의 친 오빠 “압살롬(Absalom, 내 부친은 화평) ”에 의해 양털 깎는 날 성대한 잔치 자리에 초대되어 압살롬의 부하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다윗이 암논을 법대로 처형하지 않은 것은 장자로서 왕위 계승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인간의 생각을 앞세운 이런 그릇된 태도야말로 더 큰 죄악을 부르는 것입니다.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노여움을 피해 외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피신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죄를 생산하고 생산된 죄는 더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를 낳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죄를 미워하여 멀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찬양 / 너 주의 사람아
예수 내 구주!
우리아는 누구인가?
“밧세바(Bathsheba)”라는 이름의 뜻은 “맹약의 여자”라고 합니다.
헷이란 히타이트 사람 즉 가나안 족속에 속하므로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의 용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충실하고 경건한 다윗은 그의 아내 유다의 밧세바와 사랑에 빠졌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여 그를 전쟁터로 보냈지만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사무엘하 9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므비보셋"과 같이 죽은 개와 같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 하며 겸손한 모습
사무엘하 10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암몬 왕 "하눈"과 같이 조문객을 정탐군으로 판단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오만한 모습
사무엘하 11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왕의 지위를 사용하여 어둠에 갇히는 모습
왜냐하면 "우리아"는 헷 사람 즉 이방인으로 다윗의 용사되었는데 '우리아'라는 이름은 "빛"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어둠에 갇혀 있을 때 이방인 헷 사람 우리아를 통하여 그 실체를 드러나게 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윗과 같이 어둠에 갇혀있기 때문에 세상이 더욱 혼돈하게 되었습니다.
키아즘(Chiasm)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라
역사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신약 성경과 바울이 기록한 서실들에 대하여, 그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그의
문장 표현력이 당시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때로는 중복되는 것이 많고 조잡스럽기까지 하다고 혹독한 비평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언어의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모르는 무지한 이방인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편가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이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과 중복 표현된 부분들이 대부분 ‘교차 병행 구조’ 라고
부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식인 히브리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들의 무지에 대하여 인정하지 결코
그런 혹평을 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여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사고를 가진 성경의 기자들이 사용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먼저 배운 다음에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도 바울
이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헬라 사고의 문화권에 속해 있는 이방인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사고방식인 수사학적 접근으로 바울 서신을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본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이백여 년 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문학적인 시각을 회복하기 위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에 접근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히브리 사고로 성경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불분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많은 문제적이 해결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히브리 사고에 입각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성경해석의 본문의 개념을 도출하는 작업은 극히 일부분의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로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을 체계화하고
시각화하여 성경의 원어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특별히 저자는 히브리
사고가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까지 쉽게 설명할 것을
약속한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를 따라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도 히브리 문장구조의 설교를 활용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쓴다.
히브리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신구약 성경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학적인 운율과 구조의 독특성은 오래 전부터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렇게 정리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들이 이 책을 읽는 목회자들에 의해서 신구약 성경 적용하여
설교로 선포될 것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우리도 히브리 사고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실
때의 본래의 의도와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계시록과 사복음서 및 공동 서신들을 넘어
구약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여 특히 시문학의 범주에 속한 말씀을 가지고 히브리 문장구조로 적용하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풀러 신학대학원의 김세윤 교수는 “주기도문 강해”에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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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히브리 문학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는 히브리 문장 구조의 특성을 좇아 본문을 문장의 가장
핵심이 되는 중앙에 해당하는 위치에 구성하고 있습니다.
왜 마태는 주기도문을 산상 수훈의 핵심 중의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마태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틀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기록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의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의 문장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이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모종의 암시를 미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기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청원과 마지막 송영이 짝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인클루지오(Inclusio)
- 앞과 뒤의 문장의 일치(짝) - 라고 합니다. 마태가 기록한 주기도문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김세윤 교수가 주기도문을 강해하는 처음 부분에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정의한 ‘히브리 문장구조’ (Chiasm)라는 용어는 이 부분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교차 병행 구조’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1. 히브리 사고의 시작,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사고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자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먼저 히브리 문장구조의 특징을 설명하고 난 다음에 성경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이 글을 진행할 것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히브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문장의 기본적인 형태로 성경의 한 문장 안에서 각 단어가 교차적으로 배열되어진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분야에 많은 연구를 한 일랜드(Yelland)는 그의 책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란 글의 후반부가 전반부에 관해서 도치되고 평형을 이루는 구정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교차 병행 구조라고 부르는 병행적인 형태나, 혹은 반의적인 형태로 기록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의 원리인 교차 구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나는데 이는 역(반의)과 편행이다. 하지만 모든 문장마다 역에 해당하는 반의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 관해 서로 반의적일 수도 있고, 또는 서로 보충적인 수도 있다. 이는 히브리 문장이 기본적으로 구절, 문장 또는 문장 구조의 전체 내용 중에서 단어나 혹은 생각들이 도치되어 나타나는 병행 구조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간단한 예는 아래에 나타난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교차 구조의 요소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 구조는 첫 줄과 마지막 줄이 서로 대응되고, 둘째와 마지막 전의 요소가 대응한다. 이러한 형태는 히브리 문장에서 짧은 길이에서부터 몇 문장, 그리고 심지어 성경의 각 권의 전체의 시작부터 끝ㄲ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구조는 문법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구조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에서도 조직적으로 언제나 심미적 표현에 집중하게 한다.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이루는 평가 기준은 도치 순서, 병행, 그리고 중심부이다.
히브리 문장구조가 점점 연구되고 발전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교차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교차 구조의 종류는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연구한 학자가 붙인 이름을 따라 다르다. 그 구체적인 이름을 살펴보면 에파노도스(epanodos), 또한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확대된 내향구조(extended introversion), 집중 구조(concentrism), 키 구조 (the chi-form), 페리스트로페(palistrophe), 봉투구조(envelope conetruction), 델타구조(the delta-form), 반복구조(recursion) 등의 여러 가지 으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모든 형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교차구조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후반부가 전반부의 거울상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차구조는 강조하려는 내용을 중심부에 위치시키며, 다른 부분은 병행적인 틀로 배치되어 이를 보충 설명하는 문장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하여 왔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간단한 것부터 성경을 통하여 예를 들어 보자.
예) 마가복은 2장 27절
A 안식일은
B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B` 사람이
A`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예) 마태복은 7장 6절
A 거룩한 것을 게에게 주지 말며
B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B` 돼지들이 진주를 발로 밟고
A` 개들이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글에서 마태복음의 기자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기록하면서 마지막 요소와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처음이 서로 내용상 그것이 설명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중간은 중간끼리 서로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교차적으로 나타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유사한 단어가 역으로 나타난다.
아래의 시편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는 조금 독특하게 병행되어 있다.
그는 너를 도와 주시고 / 성소에서 도와주시고 / 붙드시며
시온에서 / 그는 너를 붙드시며 시온에서 / 성소에서
그는 기억하시며 /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 원하노라
너의 번제를 /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번제를 / 소제를
그는 너를 주시고 / 너의 마음대로 주시고 / 이루시고
너의 모든 도모를 / 그는 이루고 도모를 / 마음대로
우리가 개가를 부르며 / 당신의 구원 안에서 부르며 / 세우리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 우리 기를 세우리니 이름으로 / 구원 안에서
위 문장의 시편 20편 2-5절에서 보면 명사와 동사가 쌍으로 도치되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의 저자는 히브리 문장에서 두 문단끼리 서로 쌍을 이루어 명사와 명사가 서로 병행되어 있고, 동사와 동사가 서로 도치되어 교차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교차와 도치 구조로 배치된 것을 모르고 해석하게 되면 엉뚱한 방행으로 설교할 가능성이 높다.
예) 시편 135편 15-18절
A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B 사람의 수공물이라
C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D 눈이 있어도 듣지 못하며
D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C`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B` 그것들을 만든 그들은 그것들과 같고
A` 그들의 신뢰를 그것들에 두는 그들과 같도다
예) 골로새서 3장 3-4절
A : 이는 너희가 죽었고
B : 너희 생명이
C : 감추어져 있음이니라
D : 그리스도와 함께
E : 하나님 안에서
D` : 그리스도께서
C` : 나타나실 때
B` : 너의 생명이
A` :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 구절은 A B C D-E-D` C` B` A`의 대칭적 구조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바울은 이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확산되면서 서로의 관계를 보완하는 대칭적 히브리 문장구조를 사용하였다. 우리가 이 문장을 가지고 짧은 메시지를 만든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문장 구조의 중심 주제를 제목으로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E)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교차대친 구조를 적용해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D-D`)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런 신비한 영적인 연합은 복음 안에서 ‘감추어진 것으로’ (C) 이것은 그리스도계서 ‘나타나실 때’ (C`)에 ‘우리의 생명’ (B-B`)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었고’ (A)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나타날 때 (A`)만 가능하게 된다. 이상에서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따라 본문 그대로 간단하게 저자는 설교로 적용해 보았다.
예) 로마서 2장 12-15절
A(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B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B`(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A`(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병하며
이 구절은 A B-B` A` 의 교차 병행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12절에서 두 개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전체가 언급되어 있고, 이것은 대칭적인 교차 구조를 가지고 13-15절에서 각각 율법에 관해 변증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예) 디모데전서 1장 19절
A 믿음과
B 착한 양심을 가지라
B`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A`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
예) 갈라디아서 2장 7–8절
A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고
B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B`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A`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예) 고린도후서 1장 3절
A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B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오
B` 자비의 아버지시오
A`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오
예) 로마서 11장 21-23절
A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B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C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D 엄위를 보라
D`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C`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B`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A`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상의 성경의 예들은 모두 교차 구조에 대해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히브리어,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문장구조란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특히 구약 성경에 많이 나타나며,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도 같은 패턴의 히브리 문장구조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 분야를 연구한 독일 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 성경에도 히브리 문장구조가 나타난다고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현재까지 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나름대로 연구한 신학자들에 의해 다른 이름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일은 아직까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저자가 모든 용어를 통일하여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이라고 부를 것이다. 비록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 내용적인 의미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몇 가지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교차구조라고 부르는 A B – B` A` 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편 8편 3-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 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여 서로 연관성이 없이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교차 병행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속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 문장구조의 틀
키아즘(Chiasm) 즉 히브리 문장 구조한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키아즘에 해당하는 병행 구조는 많은 구약성경과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는 독일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이 제시되었으며 히브리 민족(셈어족)으로부터 서장으로 문화적인 유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독일 신학자 바레이는 히브리 별행 구조로부터 자신의 병행 구조를 세웠으며, 그는 신약성경에 있는 문학적인 구조의 형태를 분류하였다. 그는 키아즘을 연구하고 결론 내리기를 도치구조(Inversion)형태야 말로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라고 말했다. 초기 키아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가 학자들에 따라 약간씩 의미가 다른 여러 가지의 용어로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병행 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의 분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연구한 이름은 대침구조, 도치 병행구조(Inverted parallelism),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회귀구조(regression), 원격 병행구조(봉투 구조, envelope figure), 대응구조(correspondence)등 여러 가지로 연구한 학자들마다 다른 이름으로 자신의 책에 붙였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이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키아즘의 ‘대칭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AB-A`B`의 구조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만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병행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이는 관계로 서로의 연관성이 없이 해석되고 설교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키아즘의 기본적인 형태부터 시작해서 복잡한 내용들조차 히브리 문장구조로 인해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처음부터 차근 차근 쉬운 구조부터 복잡한 구조까지 하나씩 배우면 여러분도 성경의 전문가가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시편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 시편 8편 3-4절
3절 A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B 주의 하늘과
A` 주의 베풀어 두신 B`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절 A 사람이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A` 인자가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기자는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와 사람이 어떤 존재가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A의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것에 대하여 A`는 주께서 이 땅에 베푸신 하늘과 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4절에 가면 사람과 인자가 병행되고 있고 주께서 생각하고 권고하는 것이 키아즘이 되어 반복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3. 히브리 문장구조 – 키아즘의 역사
17세기부터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몇 명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에 관한 연구는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연구는 대개
성경의 원어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으로 그들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 정도 찾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련된
학자들은 대부분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찾는데 있어서 바울 서신과 복음서에 집중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 아니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워서 문장의 구조를 연구하는 수준에 있어 아주 초보적인 단계로 접근한 한계가
분명하였다.
그들의 접근방법도 대부분 전통적 방법을 히브리 문장구조에 익숙한 유대인들의 책을 통해서 적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연구는 역사적으로 세 시기로 분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초기 교부시대, 종교 개혁시대,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연구로 구분한다.
키아즘에 대한 관심이 17세기가 되면서 증폭되어 독일과 영국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초대교회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구약 성경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분하여 춥애굽기 15장,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가 “운문 절”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 다윗의 시편들이 “여러 종류의 운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롬(Jerome)도 유사한 말을 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들은 이것들이 단순히 히브리 문학의 시 형태라고만 보면서, 이런 키아즘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히브리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장 구조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수사학의 교사로서 성경의 문체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특별히 구약의 예언서들과 바울 서신에 관심을 가졌다. 한편 제롬도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는 특히 바울 서신 중에서 디도서 1장 12절, 고린도전서 15잘 33절, 사도행전 17장 28절 등을 깊이 연구했다. 그렇지만 초대교부들은 주로 성경 안에서 이러한 히브리적인 문장구조를 찾으려는 노력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과 락탄티우스(Lactantius)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이런 현상은 초대 교부들이 주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의 시각으로 성경을 처음으로 설교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로 보여 진다.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무지한 결과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부인 오리겐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설교하면서 최초로 영해라고 알려진 알레고리로 해석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쉽게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했던가를 유추할 수 있다.
콘스탄틴(Constantine)시대에 교회는 만개한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어 점차 수사적 방법론의 사조에 밀려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점점 더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르네상스 시대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에 의해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주로 독일 신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독일의 로이흐린(Reuchlin)과 종교 개혁자인 루터(Luther)가 히브리 문장구조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과 히브리 문장구조를 아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 어떤 책에도 소개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운데도 에라스무스(Erasmus)는 신약 성경을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근대에 와서 블래스(Blass)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 서신은 다른 성경들과 구분되어 문장의 구조에서 독특한 히브리 리듬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광범위한 형태의 바울 서신의 히브리 문장구조 연구는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에 의해서이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결과 바울 서신들이 눈이 위함이 아니라 귀를 위하는 문체임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이스의 공헌은 바울의 설교가 병행요소를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복음서의 연구에 있어서 저스틴마티(Justin Marty)는 히브리 성경과 헬라의 그리스 회상록을 비교하여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후 마틴 알버츠(Martin Albertz)는 성경은 문학 작품의 일반적인 역사 즉 양식사에 포함 될 수 없다고 했다.
한편 그때까지 만해도 그들이 신약성경에서 헬라어의 수사학 양식의 관점을 가지고 관찰해도 히브리 문장구조(chiasmus)라고 알려진 문학 양식에 관한 연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특수한 문학적 양식은 성경 사전에 의하여 “내향적 병행구조”라고 불리 운다. 이것은 브리그(Briggs)와 몰튼(Moulton)의 작품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체계화 작업은 정통 유대인으로 신학자였던 로우스(Lowth)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설교에 적용하게 되었다. 로우스는 신약성경이 전총적인 헬라 문화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의 유산이 함께 융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해석 방법의 헬라의 수사학을 배제하고 히브리어 즉 유대인의 문학 양식인 병행 구조를 현대까지 발전시킴으로 성경 이해에 대한 진일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는 병행 구조는 그것이 산문이던 운문이던 간에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임을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인 키아즘에 관해서 유대인으로 16세기의 드로시(De Rossi)의 작품 ‘눈의 빛’(Meor Enajim)에서 최초로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과거 교부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언급 되어왔던 것들과 비교하여 볼 때 획기적인 적용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벵겔(J.A.Bengel)dl 1742년에 저술한 주석에서 이 구조에 대해 언급 및 활용되고, 그가 처음으로 병행 구조(chiasmus)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벵겔은 사상이나 용어의 ‘병행 구조’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않은 ‘교대 병행 구조’(alternating parallelism)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예로 로마서 3장 9절 – 4장 12절을 7개의 부분으로 병행 구조로 배열하고 중심에 3장 22절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배치하였다.
키아즘의 비약적인 발전은 1752년 영국에서 유대인으로 기독교 신학자였던 로버트 로우스(Robert Loeth)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인의 거룩한 시”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이 현대적 히브리 문장구조라고 불리는 병행구조 연구의 본격적인 장이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우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라는 히브리 시의 리듬의 본질을 발견한 공로가 있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다음과 같이 “각 주기 안의 구성 요소간의 어떤 동일성, 닮음, 관계성으로, 같은 주기의 구성 요소들이나 줄 들 안에서, 어떠한 규칙들에 의해서 상호 간에 일 들이나 단어들이 대답되어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더 발전시킨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동의적(synonymous, gradational : 눅 1:46-47), 반의적(antithetic, opposite : 잠 27:6), 종합적(synthetic, construction: 시 19:7-9)으로 세분화한 신학자로 기록된다. 이러한 많은 예들이 로우스(Robert Lowth)의 저작인 “이사야서의 새로운 번역”에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그가 히브리 문장 구조에 익숙한 유대인이기 때문에 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는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정작 로우스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독일 학자인 믹카엘리스(J. D. Michaelis)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 1758년과 1761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그들의 공로로 인해 우리는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의 분야에 기초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로우스에 의하여 키아즘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로우스가 유대인 신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로우스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비약적인 발전과 아울러 더 많은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 신학자들인 랍비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의 유대적인 배경이 이방인 신학자들의 책상에서 성경을 연구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자기 민족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던 원리들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을 히브리적인 문장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적용했기 때문에 키아즘의 비약적인 방전이 가능했다고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대인인 로우스가 기독교 신학자로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리에게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그의 유대적인 배경에 입각한 해석학의 적용으로 다른 신학자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차 병행구조’에 대한 연구의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로우스의 연구를 이어 받은 영국의 존 제브(John Jebb)는 1820년에 발표된 “거룩한 문학”(Sacred Literature)에서 로우스가 말한 동의적 병행을 “같은 어원의 병행구조”(coganate parallelism)로 대치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로우스에 의해 제안된 세 가지 종류 외에 한 가지를 추가하여 이것을 “내향적 병행 구조”(introversion, introverted parallelism)라고 명명한 것이 그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종의에 의하면 키아즘은 “시의 문장 가운데에 그 줄이 얼마이든 간에 처음이 끝과 병행하고, 두 번째가 마지막 전 것과,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져서, 밖에서 안 쪽 중심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편 135편 15-18절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는 이 원리를 더욱 발전시켜 병행원리를 구약에서 신약으로 확대 적용하여 많은 문장들을 문단이나 연으로 집단화 하였다.
한편 로우스는 줄 만으로의 병행 구조를 다룬 반면, 독일신학자 제브는 병행조를 긴 본문 부분에도 적용한 것이 공헌이라 하겠다. 계속해서 제브는 “앞에서 열거한 각 형태는 많은 부속 변형과 상호 결합이 존재하며, 여러 절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상호 결합되며, 분위기가 상호 문장에 생기를 띠게도 하며, 사고의 흐름을 특수하게 부각시키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외에도 병행 구조에는 여러 가지의 변형 형태가 존재하며 각 줄들은 2행 배열, 3행 배열, 4행 배영 또는 그 이상의 형태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는 이 구조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American Standard Bible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제브는 실로 키아즘을 대중화시키는 일에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의 토마스 보이스(Thomas Boys) 목사는 1824년 그의 저서 “Tactica Sacra”와 1825년의 “Key to the Book of Psalms”에서 도치 순서(inverted order)에 관하여 연구한 것을 발표하였다. 보이스는 이러한 형태인 도치 순서 병행은 히브리인의 문학작품, 대화, 토의 등에서 두루 발견된다고 하였다. 보이스는 제브의 ‘내향적 병행구조’란 용어를 버리고 “대응(correspondence)”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현상들이 줄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나 책 전체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병행 구조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켜 같은 문단에서 각 대응되는 줄들 간, 뿐만 아니라, 전체 문단 간에서도 이와 같은 상호 대응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모든 구조를 분류하면서 1) 교대적인 2)내향적인 3) ‘교대적인 + 내향적인’ 결합형의 형태로 분류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존 포비스(John Forbes)는 1854년에 “성경의 대칭적 구조”(The Symmetrical Structure of Scripture)를 출판하여 신구약에 나타난 도치 구조를 찾아냈으며, 그의 책에는 로우스와 벵겔과 보이스 및 제브를 자주 인용하였다. 또 다른 스코틀랜드 학자인 윌리엄 밀리간(William Milligan)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여 그의 저술에서 도치 순서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는 제브나 포비스가 사용한 용어들은 사용하지 않고, 단지 “도치 병행 구조”라는 단어만 사용했으며 이러한 구조에 관해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에 룬드(Nils Wilhelm Lund)가 1942년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Chiasmus in the New Testament”를 시작으로 이에 관련된 여러 눈문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는 1922년에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벌린저(E.W.Bulliger)의 감수 아래 “동료성경(The Companion Bible)”을 출간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도치 구조’를 많이 적용해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책은 세대주의 입장에서 편집되어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고로 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1978년에 웰치(John W. Welch)가 “Chiasmus in Antiquity”라는 책을 통하여 그 간의 동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전체를 종합해서 모았으며 여기에 자신의 연구를 포함시켜 편집 발표하였다.
4. 단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종류
아래의 분류는 단문의 경우 나타나는 키아즘 병행구조에 적용된 기본적인 분류이다. 정말 히브리 문장구조에는 확실히 절과 간 사이에 병행구조가 있다. 여기서 각 문장의 단락들은 그 글의 중심 문단으로부터 서로 병행하고 대칭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대칭에 대해서 병행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문장 구조의 병행은 많은 다양성과 등급이 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는 여러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래의 여러 가지 구조들이 교차 병행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생하게 구성되어 있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 몇 가지 기본적인 병행에서 파생되어 다른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병행 구조가 포함된다.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기본적인 형태를 알고 있으면 성경에 나와 있는 다른 형태의 것들은 어렵지 않게 적용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병행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병행되고 있는 내용과 단어 사이에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동의적 병행
근대의 최초로 유대인 신학자가 된 로우스는 정의하기를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로 대응하는 곳에 묘사된 단어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실제로 그 의미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문장의 서로 대응되는 병행구조는 같은 의미를 가지나 반복을 피하고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구체적인 뜻을 설명한다. 따라서 어떤 문장에서 한 주제가 정해지면 그 전체 또는 일부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용어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 뜻은 동일한 어원(cognate)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후대의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은 같은 개념이 점진적으로 상승 또는 하강한다는 의미에서 동의적 병행을 점진적 병행(gradational)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하였다.
동의적 병행이 되는 시편에서 그 예를 살펴보자.
예) 시편 8편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니이까
사람과 인자 그리고 생각과 권고가 서로 동의적으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이나 잠언은 이런 동의적 병행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같은 문장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보다 그 뜻을 더 분명하고 강조하는데 동의적 문장이나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동의적인 병행은 단순한 반복을 피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문장이다. 특히 어떤 사실을 말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동의적인 표현을 써서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한 히브리 문장구조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동의적 병행을 살펴보자.
시편 19편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한다
본문은 내용적으로 볼 때 병행되는 단어들이 서로 동의적이다. 다른 예로는 시 21:1-2; 24:3-4; 107:1, 사 55:6-7 등을 예시하였다. 동의적 병행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로 보면 된다. 우리가 동의적 병행의 구조를 보면 하나님께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단어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단어나 같은 의미의 단어를 통해서 강조하고 반복할 때 많이 쓰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다.
반의적 병행
반의적 병행은 문장 구조 안에서 서로 두 줄이 병행이 되고 있으나 서로 간에 단어나 감정이 반대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반의적 병행 구조를 자주 사용하는 덧은 바로 반대적인 개념을 언급하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없어도 성경을 읽는 사람이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흰색과 검은색을 대조하여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는 것과 같다. 아래의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은 서로 반대적인 의미로 설명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쉽게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로 잠언에서 하나님께서 자주 쓰는 방법으로 동의적 병행과 아울러 반의적 병행은 매우 중요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의 형태의 예를 살펴보자.
예) 잠언 27장 6 - 7절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본문은 서로 대칭되는 단어와 내용이 서로 반대가 되는 단어를 통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반의적 병행의 패턴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친구와 원수가 서로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더 발전하여 친구는 충고할 때 충성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원수의 가식적인 사랑의 행동은 거짓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반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배부른 자와 주린 자가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꿀과 쓴 것이 반의적으로 병행되어 그 의미가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예들은 잠언에 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더 연구하고 싶으면 잠언 10장 1, 7절과 29장 26절 그리고 시편 20장 7 - 8절에서 찾아보기 바란다.
종합적 병행
키아즘은 근대에 와서 유대인 신학자 로우스에 의하면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가 건축물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사이에 동의적 병행이나 반의적 병행이 직접 존재하지 않지만, 본문의 전체 문장과 각 부분들의 주제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구조의 형태에서 서로 대칭 및 동질적으로 종합적인 내용으로 병행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사는 명사에게, 동사는 동사로, 의문사는 의문사로, 구성 요소들은 구성 요소들에게, 반대는 반대로, 질문은 질문으로 등 유사성이나 동일성이 상호간에 종합적인 형태로 병행이 되는 형태를 말한다. 히브리 문장 구조에서 종합적 병행을 통해서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래의 예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합적 병행에 대한 예를 시편에서 살펴보자.
예) 시편 1편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고
본문은 단어나 동사가 직접 대칭은 되지 아니하나 비유적이거나 은유적인 같은 사상을 가지고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어떤 점진적인 병행과 종합적인 병행을 동시에 히브리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좀 더 쉽게 이해할 구 있도록 돕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행동의 동사를 통해서 복 있는 자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 그곳이 복된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자리는 죄와 악인들이 있는 복 없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들이 아닌 의인들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술 먹는 자리는 복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없고 은혜 받는 자리가 복 있는 가리라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너무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고백하고 있다. 물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교차적 병행
교차적 병행은 제브에 의해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로 제시된 4번째 구조이다. 교차적 병행은 대칭적 병행구조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문장에서 줄이 아무리 길더라도 글의 중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첫 줄이 마지막 줄과 병행이 되고 둘째 줄은 마지막 전 줄과 병행이 되고 그런 식으로 전체가 배열되는 형태를 말한다. 키아즘은 신구약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CHIASMUS(키아스무스, synchysis, epanodos)라고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이 불러왔다.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에 해당하는 이러한 형태를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chiasm)란 용어로 통일한다. 주님께서 저자에게 키아즘이라는 한 가지 형태의 히브리 문장구조만 배운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고의 전반적인 내용을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종합해서 키아즘 프리칭이라는 책을 쓸 수 있는 큰 축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문장에 나타나는 글의 형태를 통해서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키아즘 병행구조는 신구약 성경에 적용할 수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적인 원리가 된다. 따라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는 성경의 모든 문장에 망라해서 적용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이상의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모르면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성경은 번역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행구조의 원리는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교차적 병행구조는 우리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 마태복음 6장 24절
A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B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B`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A`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A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언급하면서 A`는 구체적인 설명의 형태로 한 사람은 우리로 적용하고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이라고 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는 형태가 교차적 병행구조의 키아즘이다. 실제로 우리가 키아즘을 모르면 두 주인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하는 존재이지 둘 다 섬길 수 없도록 지음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존재를 섬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주님은 하나님을 섬길 것을 암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키아즘의 형태인 교차적 병행은 가장 많이 나오는 형태로 긴 문장이 아닌 짧은 문장에서 즐겨 쓰는 방법이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10장 16절
A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B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고다
B`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A`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위에 나타난 예를 보면 AB-B`A`로 기록하고 있는 교차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태는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 구조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병행 구조는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해당한다.
교대적(alternating) 병행
교대적 병행은 전반부의 내용이 그대로 후반부에서 같은 순서로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 형태의 문장이 반복되면서 성경의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그 뜻을 밝힘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르게 해석하는 실수를 막고자 함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저자는 교대적 병행의 구조를 통해서 자신이 A라고 말한 것은 A`라는 의도의 뜻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는 적용된 설교의 문장구조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교대적 병행의 짝을 찾으면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를 저자 자신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엉뚱한 내용으로 설교할 수 없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6장 34절
A 그러므로 내일 일을
B 염려하지 말라
A` 내일 일은 내일
B` 염려할 것이요
교대적 문장구조는 병행이 나타날 때 같은 순서로 반복되어 설명하는 수순을 따라 기록된다. 본문은 짧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로 되어있다. 다시 말해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일이기에 내일 것까지 오늘 가져다가 염려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예) 에베소서 1장 15절
A 주 예수 안에서
B 너희의 믿음과
A` 모든 성도를
B` 향한 사랑을
본문은 아주 단순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7장 7 - 11절 [기도의 명령]
A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B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C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A`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B` 찾은 이가 찾을 것이요
C`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이 문장의 예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ABC-A`B`C`의 순서로 교대적 병행구조로 본문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저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첫째로 이 본문은 앞에 등장하는 ABC의 문장과 A`B`C`의 교대적 병행구조가 단순히 강조하기 위한 서술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의미의 설명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로 이 본문이 기도에 대한 약속인데 같은 내용을 다른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르게 표현한 기도의 점층적 표현인가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이 본문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진수를 알려주는 기법으로 우리가 이 패턴을 잘 이해하면 다른 성경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먼저 ABC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적인 약속임과 동시에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명령형 동사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형 동사는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명령형 동사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명령의 약속대로 순종할 것을 전제함과 동시에 순종할 때 그 말씀이 실행이 되도록 결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백번 천 번 암송하고 가슴에 품고 있어도 이 말씀은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히브리 사고에서 명령형 동사는 순종할 때 일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그 기도하라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타이밍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대해서 순종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아는 것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우리가 기도할 때, 순종할 때, 믿음의 반응을 할 때 일을 시작하신다. 그것이 명령형 동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 원칙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진행하신다. 이 원칙은 히브리 사고의 명령형 동사가 가지고 있는 전제이며 원칙이다. 이 원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사실은 ABC가 주님께서 보편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명령형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ABC 단계는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약속하는 명령일 뿐 응답 자체는 A`B`C`의 단계에서 우리 자신이 기도할 때 성취되는 응답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ABC가 보편적인 기도하라는 명령의 약속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도의 능력이나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기도의 응답은 A`B`C`의 단계에서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세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본문의 히브리 문장 교대구조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다. 이 본문은 성경 각권을 다룰 때 마태복은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하나 더 살펴보자.
예) 고린도전서 3장 6-7절
A 나는 심었고
B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되
C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느리라
A` 그런즉 심는 이나
B`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C`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언급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 키아즘 구조이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분쟁의 원인은 제일 먼저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에서 시작된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지지하는 바울파가 득세했고, 그 다음은 초대교회의 정신적 지주인 베드로를 지지하는 베드로파가 도전했고, 바울을 이어 목회학 아볼로를 지지하는 아볼로파가 만만치 않았고, 마지막으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자신은 누구의 파도 아닌 그리스도파라고 만날 때마다 큰 파벌 싸움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대적 병행구조를 가지고 한 방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울은 A에서 나무로 고린도 교회의 개척을 비유하면서 자신은 심었을 뿐인데 그 심었다는 의미를 A`에서 심은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위치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가 지도자의 문제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자신의 존재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은 목회자의 현재의 위치가 어떤 모습인지를 깨닫고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복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완벽한 샘플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란 자리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의 문제만 있다는 인식이 고착화된다면 많은 교회의 자리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울은 계속해서 B에서 아볼로를 지지하는 성도들을 향해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B`에서 설명하기를 물주는 이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 바울 자신처럼 아볼로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키아즘 구조인 것이다. 지도자가의 자기 부인은 오늘날 메가톤급 교회의 목회자가 하나님의 위치처럼 높아진 상황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는 단지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의 역할만 존재하고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설명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순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문을 선언하는 히브리 문장 교대적 병행구조를 보여준다. 바울은 C에서 ‘오진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였으니’라는 선전포고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오직이라는 유일무의한 단어를 선포하고 있는데 이 단에서 반발하거나 거부할 자가 없어야 한다는 경고적인 말씀이다. 오직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고,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그 어떤 개인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은 C`에서 오직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뿐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성도인 양떼도 주님의 양이지 그 어떤 지도자나 목회자의 양이 될 수 없고, 교회 자체도 하나님만이 주인이라는 선언적인 병행구조의 설명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은 사탄적인 발상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결국 바울은 심는 자나 물을 준 자는 하나님께 그 행한대로 상급을 받을 뿐, 이 땅의 그 어떤 목회자라고 할지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설명하였다.(고전3:8)
5. 장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순차적 병행
순차적 병행은 저자가 신구약 성경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또한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전체를 키아즘(Chias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일시켜 신학적으로 처음으로 붙여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순차적 병행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장구조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쉬운 구조조차 설교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도 키아즘을 배우고 설교에 적용하고 가르치면서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순차적 병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키아즘을 연구하면 할수록 지금까지의 병행적 분류로 해결할 수 없는 본문이 많다는 것에 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다가 순차적 병행 문장으로 설명한 본문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발견했다. 그 후 신구약 성경 가운데 순차적 병행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본문의 병행구조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발견은 저자가 우직스럽게 성경 본문만을 붙잡고 한길만을 걸어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순차적 병행은 긴 본문 안에서 각 절 별로 병행적 구조가 같은 패턴으로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A 와 A`가 순서적으로 설명되어지고 계속해서 B 와 B`의 패턴으로 C C`, D D`로 연속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구조임을 저자가 찾아낸 원리이다. 순차적 병행구조는 이야기 형태의 글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짧은 본문만 가지고 키아즘의 형태를 찾았다면, 긴 본문에서 순차적 병행구조로 접근할 때 전체적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는 병행구조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이런 예들은 이 책에서 많이 접하겠지만 이렇게 글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 주면 좋겠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순차적 병행은 지금까지 획일적인 형태만을 고집한 사람들의 선입관을 깨고 새롭게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틀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새롭게 분류하여 키 구조와 브이 구조로 구분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이는 성경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주신 설교의 현태를 가진 문장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라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미 성경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되어진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해석하고 주석해서 오늘날의 환경에 적용을 덧붙여 설교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물어 보아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 설교해 온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마땅한가 말이다. 저자는 이제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를 이해한 목회자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해석한 설교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설교한 문장구조를 가지고 선포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믿는다.
히브리 문장의 키(X, Chi) 구조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교차병행구조라는 부르는 키 구조이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의 많은 분량이 키 구조의 형태라고 보면 틀림없다. 이것은 히브리 문장에서만 나타나는 형태로 다른 언어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약 우리가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성경을 번역해보면 이런 구조로만 번역이 가능하게 되어 히브리 문장의 형태로 글이 구성된다. 성경이 이런 형태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형태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결국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하나님의 사고로만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설교 형식의 문장에서는 반복과 점층적인 상승과 설명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 구조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키 구조의 예들은 앞에서 많이 언급했고 앞으로도 성경의 각권에 나타나는 예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의 현태가 나올 때 해석자가 가장 주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자의 자격이 없다. 키 구조의 해석은 이미 성경 자체가 해석적인 문장의 구조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자는 그 구조의 분석만 잘해도 이미 설교의 내용은 다 준비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듯 키 구조의 형태는 우리가 많은 실습을 통해 습관적으로 찾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 구조에 전문적인 안목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V구조)
브이 구조의 히브리 문장구조는 저자가 새롭게 찾아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이다. 저자는 브이 구조를 키 구조에 넣기 보다는 너무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히브리 문장구조 안에 배치하였다. 특히 브이 구조는 순차적 병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자가 분류하였다. 물론 브이 구조는 키 구조의 형태에서 변형된 것으로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히브리 문장구조이다. 이는 저자가 십년동안 키아즘 즉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면서 찾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결과하고 고백하고 싶다. 이런 형태는 앞으로 설교자가 앞 뒤 문장의 형태를 잘 보면 찾을 수 있는 원리이다. 정말 좋은 설교자가 되길 원하면 이런 브이 형태의 키아즘을 찾으면 된다. 한편 브이 구조의 설교의 형태는 실제로 헬라 사고의 문장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의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쉽게 친숙할 수 있다.
브이 구조의 형태의 문장은 아주 단순하게 성경의 기록자가 한 문장을 설교하고 바로 다음 문장에 연속해서 자신의 해석을 달아 놓은 형태이기 때문에 찾기도 쉽고 접근하기도 쉬운 글이 분명하다. 이방인의 문장의 사고에도 아주 숙달된 문장으로 우리가 좀 더 찾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브이 구조의 문장 형태는 특별히 논리성이 강한 서신서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 이유는 서신서가 주로 내러티브 문장이 아닌 서술적인 문장으로 된 설교의 형태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로 작성할 때 좀 더 쉽게 이 편지를 읽어주고 들려주고 이해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문장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브이 구조의 키아즘의 해석은 키 구조의 해석보다는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고 익숙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다. 성경의 기록자가 이미 설교로 해석해서 적어 놓았기 때문에, 설교자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애쓰지 않고도 쉽게 설교할 수 있는 형태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브이 구조만 찾으면 이미 성경의 원저자가 기록해 놓은 순서대로 설교의 뼈대가 완전하게 있기에 우리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힘쓸 필요가 없이, 설교자는 그 내용의 순서를 따라 잘 적용하여 설교하면 될 수 있다. 이번에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 전체를 통해 브이 구조의 형태의 설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익숙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말 특이한 점은 브이 구조가 다시 키 구조의 문장 형태로도 도치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브이구조의 본문을 가지고 그 예를 살펴보자.
예) 눅 16장 17-31정
A(19절) 한 부자 A`(20절) 한 거지 나사로
B(22절) 그 부자의 죽음 B`(22절) 그 거지도 죽음
C(23절) 그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C`(23절) 그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
D(24절)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간구 D`(25절) 하늘 아버지의 대답
E(27절) 또 다른 간구(영혼구원) E`(29절) 하늘 아버지의 또 다른 대답
F(29,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
본문은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준다. 비록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 저자가 작성한 본문의 구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특히 본문은 처음에는 두 사람의 대칭적 관계를 대비하면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면, 중반부에 가면서 천국과 지옥의 병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후반부에서는 한 부자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한 이여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인 구조는 도표로 표현되고 그 주제나 제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도하고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순차적 병행구조를 모르고 읽거나 설교하면 그 내용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결국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를 알고 어떤 구조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말씀의 핵심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이 키아즘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다.
6.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 및 적용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병행구조’는 현 시대에서 보면 비효율적이고 문장이 너무 복잡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을 가볍게 취급하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히브리 문장구조가 이렇게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는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억하기 쉽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문서가 발달하였으나 그 당시는 구전 문화로 모든 것이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진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당시 문화적인 역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특성상 한번 들으면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구조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성경은 모든 사람등의 필수적인 법과 질서를 가진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를 모르면 본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해석해 놓은 책 성경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형편을 따라 시대에 맞게 적용해서 히브리 기록자들을 통해서 직접 설교한 본문을 기록한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의지를 따라 단어와 문장을 잘못 해석하는
일은 더 이상하면 안된다.
물론 목회자 자신도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조심하고 또한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인위적인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향해야 할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행해야 할 설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작성하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따라 충실히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직접 말씀하신 설교를 제쳐두고, 자기의 신학의 틀을 가지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설교하는 것은 자신도 괴롭고 듣는 사람도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곤란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원고를 가지고 설교자인 우리가 현 시대의 쉬운 언어로 적당한
예화를 삽입하여 잘 전달하는 순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설교 가운데 자신도 느끼고 듣는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사무엘 11장과 12장의 키아즘(Chiasm) 구조 분석
장 |
장절 |
내용 |
묵상 |
11장 |
11:1 |
다윗의 군사 파병(랍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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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
다윗과 밧세바 동침(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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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7 |
다윗의 우리아에 대한 음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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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25 |
요압이 다윗에게 심부름꾼 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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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6∼27 |
다윗을 악하게 보신 하나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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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
12:1∼14 |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단을 보냄 |
헷사람 우리아(이방인 우리아) |
12:15∼23 |
다윗의 아이를 치심 |
죄 없는 아이를 치셨나? |
|
12:24∼25 |
다윗과 밧세바 동침(솔로몬) |
여디디야 |
|
12:26∼31 |
다윗의 랍바 점령(요압의 요청) |
|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2: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디디야(25절)
♦ 성구 : 선지자(先知者)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因)함이더라.
“여디디야(Jedidiah)”
‘여디디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 이라고 합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심히 앓다가 이레만에 죽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와 동침한 후 낳은 아들은 “솔로몬”입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보시기에 악하게 행동했던 다윗에게 당신의 대언자인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나단이 다윗 왕 앞에서 전한 이야기는 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이웃의 가난한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빼앗았다는 비유였습니다.
나단이 비유를 들어 말한 이유는 간음과 살인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다윗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은 크게 노하여 그 부자를 죽이고 사 배나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는 엄한 목소리로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는 사하셨으나 아이는 죽을 것이며 후손들에게 비극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나단의 말을 듣고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아무런 변명이나 핑계도 없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앓자 다윗은 금식하고 밤새도록 엎드려 칠일 동안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아이가 앓자 밤새도록 울며 간구하던 다윗은 아이가 죽자 몸을 씻고 여호와께 경배하고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 신하들은 다윗이 크게 실망하고 슬퍼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겸허히 수용한 것입니다.
다윗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솔로몬이 바로 밧세바의 소생으로 여호와께서는 나단을 보내어 솔로몬에게 “여디디야 -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라는 이름을 친히 붙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암몬의 수도 랍바를 공략한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형통한 길이 열림을 보여줍니다. 이전에 간음과 살인을 계획할 때에는 암몬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지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서야 비로소 암몬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찬양 / 돌아와 돌아와
https://www.youtube.com/watch?v=PRBnoEZ10d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6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1: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3절)
♦ 성구 :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女人)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告)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the wife of Uriah)”
“우리아(Uriah)”라는 이름의 뜻은 “빛”입니다.
“밧세바(Bathsheba)”라는 이름의 뜻은 “맹약의 여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암몬은 전쟁 중이었을 때 다윗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왕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고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여인을 불러 들여 동침합니다.
그 여인 즉 밧세바가 잉태하자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급히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소환하여 아내와 동침하도록 시도합니다.
다윗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아가 집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 밧세바와 잠자리를 갖게 하므로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려고 하였으나 우리아는 다윗의 명을 따르지 않고 왕궁 문에서 다른 신복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다윗은 더욱 간교한 계획으로 우리아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집에 들어가도록 유도하였지만 우리아는 술에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궁 문 앞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시키려는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자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어 적군의 공격에 의해 우리아가 살해당하도록 합니다. 우리아는 자신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담은 편지를 요압에게 전달했고 결국 우리아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죄악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일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진전능 무소부재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아주 미약한 존재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잘못된 것을 고백하므로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의 반열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 찬양 / 신랑 되신 예수께서
https://www.youtube.com/watch?v=2mlMA_YAis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9장 / 은총을 수용한 므비보셋
10장 / 은총을 거부한 암몬 왕 하눈
은혜의 복음이 전파 될 때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는 므비보셋과 같이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다.
반면에 영생 얻기로 작정되지 않은 자는 하눈처럼 은총을 모독할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은총을 거스리는 반역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였다.
히브리서 10:28-29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세상의 심판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굳게 붙잡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 위에 굳게 서게 서서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멸망의 자식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 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므비보셋이나, 오늘 등장하는 하눈이나, 자격없는 자들이긴 마찬가지이다.
하눈은 암몬의 왕이었는데, 다윗이 하눈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조문하러 신하들을 보냈다.
므비보셋이나 하눈이나, 자신의 공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선행으로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겸손과 감사로 다윗의 은혜를 수용했고 암몬은 교만과 의심으로 다윗의 은혜를 발로 걷어차버렸다.
믿음이라는 은혜를 선물로 받았을 때 성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다.
우리는 값었이 예수님 보혈의 피로 죄를 씻는 은혜를 입었다.
천국 백성이 될수 있는 자격도 얻었다.
이것은 나의 공이 전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의 자세는 어떠한가?
기쁨과 감사함, 겸손함으로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는가?
교만함과 의심으로 은혜가 은혜인 줄을 모르고 복을 발로 차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은 은혜를 받았지만, 받아들이는 마음밭에 따라 은혜를 삶속에서 경험하기도 하고, 오히려 믿음을 속박과 굴레로 여기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기도 한다.
은혜를 온전히 내몫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겸손이다.
내가 죄인이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하나님 없이도, 믿음없이도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은혜가 고맙지 않다.
귀찮고 나를 간섭하는 굴레로 느껴질 뿐이다.
믿는자들을 핍박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교회는 점점 세상으로부터 배척 당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것 만으로도 핍박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은혜는 감히 세상이 줄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고 축복이다.
그 사실을 믿고, 은혜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은혜를 기쁨과 감사로 내 삶에 녹여내는 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홍제천'의 이름은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들이 숙식을 하던 최초의 국립여관이던 홍제원이 있어 홍제원천이라고 불렸고, 지금의 명칭도 이런 연유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홍제(洪濟)'로 쓰다가 조선 세종 이후부터 홍제(弘濟)와 함께 쓰였다고 한다.
홍제천에는 환향녀에 대한 아픈 사연이 전해진다.
병자호란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다행히 돌아온 여성들이 고국땅을 밟았지만 끝내 고향에는 돌아가지 못한 <환향녀>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17세기 중반 중국의 주도권은 북쪽에서 다시 일어난 여진의 후예 후금의 세력에게 넘어가 마침내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하여 사대(事大)를 표할 것을 요구했다.
완강히 버티던 조선은 결국 1637년 2월 인조임금이 청나라 태종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이났다.
치욕적 결말이었지만 이보다 더한 것은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조선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 수는 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볼모로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과 부인,그리고 관리들의자제들까지 포함되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 만주벌판을 지나 심양까지는 2천리길, 육로로 70일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추운겨울 만주벌판의 칼바람은 건강한 사람도 버티기 어려운 날씨였다.
그래서 포로의 대부분은 너무 어리거나 늙지 않은 청장년층이었으며,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은 혼인 유무를 가리지 않았는데, 청나라 병사들의 첩이나 노예로 삼기 위함이었다.
끌려간 여성들은 나이와 신분에따라 값이 매겨저 그 값을 충당해야만 돌려보냈다.
큰돈을 치르고 속환하여 겨우 돌아온 여성들을 '환향녀'라 불렀는데,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들을 기다린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유부녀들이 남편과 아이들이 그리워 돌아왔지만 시집에서는 그녀들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정절을 잃었다 하여 양반가정에서는 이혼을 요구하는 소송이 계속 제기되었다.
당시 사대부가의 이혼은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데, 인조는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무능함으로 백성을 곤경에 처하게 하더니 이제는 포로에서 풀려나온 여성들이 시댁에서 핍박받고 있는 꼴이었다.
인조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홍제천에서몸을 씻고 들어오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며 그녀들의 정절을 문제 삼는 이혼을 금지 시켰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0: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너는 담대하라(12절)
♦ 성구 : 너는 담대(膽大)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百姓)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城邑)들을 위(爲)하여 담대(膽大)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善)히 여기시는대로 행(行)하시기를 원(願)하노라.
“너는 담대하라(Be strong)”
다윗이 조문객을 암몬에 보낸 것과 조문객이 조롱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며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조롱과 조소를 받은 사건과 같은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암몬 왕 하눈은 다윗의 조문객을 조롱하였으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볼 때 복을 저주로, 승리를 패배로, 생명을 죽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언약의 사람들은 저주를 복으로,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언약으로 인하여 세상에서의 고통은 일시적인 어려움이지만 결과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이기에 항상 감사하며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결과는 약속된 복이 있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승리해야 할까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일어나야 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는 언약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 라는 개혁자들의 슬로건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마지막 날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감사와 은혜와 믿음만이 아니라 다윗처럼 언약으로 인한 공과 의를 행한 삶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회복할 때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담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믿음의 사람들이여!
이제는 믿음을 입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너지는 사회 질서를 믿음으로 세워 내일의 소망이 오직 믿음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일에 동참하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구약에서 246번 언급이 되고 있는 ‘헤세드’는 절반 이상이 시편에 나온다.
‘헤세드’의 용례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1. 일상적 용례 / 인간이 인간을 향한 태도
2. 신앙적 용례 /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3. 천상적 용례 /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
이런 용례 가운데 언약 이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언약 당사자들 상호 간의 의무 사항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느 1:5).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스라엘이 언약 유지를 위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관련하여 상벌 규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셨다.
그 대표적인 본문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다.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언약관계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실히 준수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로 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성경은 그에 대한
실제 증거들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상으로서의 복과 저주로서의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잘
지키는데도 복을 받지 못하거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종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정적 차원의 ‘헤세드’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부정적 차원의 ‘헤세드’이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후자는 본래의 위치로 돌이키는 회개의 기회가 된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헤세드’가 최종 목표인 셈이다.
언약의 상벌 규정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시행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그 때문에 ‘의’가 ‘헤세드’와 나란히 사용되는 동의어로 등장하기도 한다(잠 21:21).
‘헤세드’의 또 다른 동의어는 ‘성실’이다.
‘성실’은 히브리어는 ‘에메트’인데, ‘떠받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명사형이다.
기본적으로 확실성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에메트’는 대체적으로 ‘성실’로 번역되지만, 그 외에도 ‘견고함’
‘진실’ ‘진리’ 등의 번역이 있다.
‘에메트’의 부사형은 ‘아멘’인데, ‘참으로’ ‘진실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와 찬송의 말미에서 화답으로 나오는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서, 기도나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시편 25: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잠언 3:3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출애굽기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그것은 신뢰에 바탕을 둔 성실함이 ‘헤세드’의 기본적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을 언약의 동반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신 32:10; 시 17:8; 잠 7:2)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시 121:4)으로 표현한다.
♦ 2월 1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9: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총을 베풀리라(1절)
♦ 성구 :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因)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恩寵)을 베풀리라 하니라.
“은총을 베풀리라(I can show kindness)”
“므비보셋(Mephibosheth,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은 “요나단”의 아들이며 “사울”의 손자입니다. 두 다리를 절뚝이는 장애인으로 “미가(Mica)”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왜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을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전쟁을 치루면서 지난 날 받은 은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부족한 것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평화를 누리면서 먼저 하나님의 궤를 위한 전을 건축하려고 하였으나 그 계획은 다음 세대가 맡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예전에 신세졌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다.
가장 많은 은혜를 준 사람은 “요나단” 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집에 남은 가족이 누구인가를 찾게 됩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가족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아들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섯 살 때 유모가 안고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습니다(삼하 4:4).
은혜를 갚는 것은 철저히 성경적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러한 것을 “인간의 도리” 라고 합니다.
신세를 졌으면 신세를 갚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질로만 갚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라도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마움을 잊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도리와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겠습니까?
인간적인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를 모른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알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함께 살자고 합니다.
그리고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죄 많은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매일의 삶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불러 주셔서 그곳에서 영원히 살자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날을 기다리며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자비” “인자” “선대(善待)” “은총”이라고 번역되곤 하는데, 헬라어로 본다면 “아가페”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헤세드”의 사랑은 크게 세 가지 용례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
셋째,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
성경은 이 세 용례들을 각각 보여 주는데, 시편 136편 1절에서 26절까지의 경우에는 매절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인자”로 번역된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헤세드)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52:8, 역대상 16:34, 역대하 5:13, 에스라 3:11, 느헤미야 9:17, 예레미야 33:11 등 곳곳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헤세드”로 표현합니다.
호세아 6장 6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을 기록합니다: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헤세드”의 사랑을 다시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헤세드의 사랑이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헤세드”의 사랑을 기록합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헤세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룻 2:20).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헤세드)을 베풀리라”(삼하 9:1).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자신들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헤세드”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헤세드”의 대상이 누구이며, 방법이 무엇이든지 공통점은 “자기 희생”입니다. 제니 레이크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희생의 사랑처럼,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과 저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바로 “희생의 사랑”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헤세드의 사랑을 체험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그 헤세드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구약에서 246번 언급이 되고 있는 ‘헤세드’는 절반 이상이 시편에 나온다. ‘헤세드’의 용례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곧 일상적 생활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향한 태도, 신앙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그리고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 등이다. 이런 용례 가운데 언약 이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언약 당사자들 상호 간의 의무 사항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느 1:5).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스라엘이 언약 유지를 위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관련하여 상벌 규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셨다. 그 대표적인 본문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다.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언약관계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실히 준수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로 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성경은 그에 대한
실제 증거들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상으로서의 복과 저주로서의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잘
지키는데도 복을 받지 못하거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종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정적 차원의 ‘헤세드’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부정적 차원의 ‘헤세드’이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후자는 본래의 위치로 돌이키는 회개의 기회가 된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헤세드’가 최종 목표인 셈이다. 언약의 상벌 규정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시행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그 때문에 ‘의’가 ‘헤세드’와 나란히 사용되는 동의어로 등장하기도 한다(잠 21:21).
‘헤세드’의 또 다른 동의어는 ‘성실’이다. ‘성실’은 히브리어는 ‘에메트’인데, ‘떠받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명사형이다. 기본적으로 확실성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에메트’는 대체적으로 ‘성실’로 번역되지만, 그 외에도 ‘견고함’
‘진실’ ‘진리’ 등의 번역이 있다. ‘에메트’의 부사형은 ‘아멘’인데, ‘참으로’ ‘진실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와 찬송의 말미에서 화답으로 나오는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서, 기도나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 2월 12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8: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기게 하시니라(6절)
♦ 성구 :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守備隊)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租貢)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기게 하시니라(The LORD gave David victory wherever he went)”
다윗이 주변 국가들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모압과 소바 그리고 다메섹 아람을 쳐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전리품으로 취한 수많은 말과 병거를 무용지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말이나 병거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다윗의 신앙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이 소바를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맛 왕 도이는 자기의 적을 정벌해 준 다윗에게 그 보답으로 패물을 바쳤는데 다윗은 하맛의 패물뿐 아니라 모든 전리품을 남김없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습니다.
요압은 군대 장관으로, 아히멜렉은 제사장으로, 스라야는 서기관으로,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는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세상에서 영적 싸움을 위하여 선택받은 십자가 군병입니다.
오늘도 삶의 현장에 흩어져서 영적 싸움의 승리자가 되어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양 / 십자가 군병 되어서
https://www.youtube.com/watch?v=pEiKgh2Mpl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11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7: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집을 세우리라(27절)
♦ 성구 : 만군(萬軍)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主)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爲)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故)로 주(主)의 종이 이 기도(祈禱)로 구(求)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집을 세우리라(I will build a house for you.)”
‘집을 세우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궤를 안치할 집을 짓겠다는 다윗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모든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평안히 왕궁에 거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왕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장막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자신의 뜻을 나단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어야 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의사를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본질보다 형식이 더 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시고 모든 대적을 물리쳐 주셨으며 그의 후손을 통해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을 견고케 하시고 다윗이 건축하지 못한 성전을 솔로몬 때에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징벌은 받아도 은총은 영원할 것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놀랍고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받고 감격하였습니다. 다윗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며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에게로 부르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계시를 밝히신 것을 감격스럽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견고케 하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구하는 바를 받을 줄 확신했습니다.
자유롭게 주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환경가운데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이 은혜를 영원토록 누릴 수 있는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https://www.youtube.com/watch?v=FQmXxT8qxG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6: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베레스웃사(8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衝突)하시므로 다윗이 분(忿)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稱)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베레스 웃사(Perez Uzzah)”
‘베레스’는 “터짐”이란 뜻입니다.
‘웃사’는 “능력”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베레스 웃사는 “능력이 터지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정복하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당시
법궤는 “바알레유다” 즉 “기럇여아림”의 산 가운데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옮겨오기 위해 삼만 명의
무리와 새 수레 그리고 악단을 준비하여 기럇여아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했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일은 정성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데 쓰인 도구는 소가 끄는 새 수레로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가 끌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성소의 모든 기구를 운반하고 보관하는 책임을 맡은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에게 맡겨야 하며(민 3:27∼32),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규례를 어겼습니다.
웃사와 아효는 다윗의 명에 따라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놀라서 갑자기 뛰는 바람에 수레에 실린 법궤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잡았고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즉시 죽게 되었습니다.
웃사의 죽음으로 법궤 이동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법궤를 가드 사람인 오벧에돔에게 맡기었습니다. 오벧에돔은 웃사의 죽음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집에 두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벧에돔이 법궤로 인하여 하나님께 복을 받았음으로 다윗이 다시 법궤를 자신의 처소로 옮기려고 계획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법에 따라 먼저 순종과 기쁨의 제사를 드린 다음 법궤를 옮겼는데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도록 했습니다(대상 15:11∼15).
미갈이 법궤를 모셔오는 다윗을 업신여긴 이유는 다윗의 환희와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표현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므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나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하나님은 찬양했습니다.
팬데믹의 지루한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다윗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즐거움으로 지루한 삶의 자리가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https://www.youtube.com/watch?v=XbOKfMZYpAU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시너지효과(Synergy effect)
1+1=2 가 되는게 아니라 1+1=3 도 되고 그 이상도 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이론에도 적용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투입(input)이 0이면 산출(output)도 0 이외에는 다른 결론이 도출되지 않습니다.
즉 투입이 전무하면 시너지 효과는 어떤 경우에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이 시너지 효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선 선(good)은 최고, 최선, 최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가는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최고, 최선, 최대를 이루게 하십니다.
성경에 계속 나오는 말씀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으리라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 맺는 것을 즐겨
말씀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시너지 효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맺을 수 있는
결과입니다.
이 세상 어디서도 100배의 시너지 효과를 얻지는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 아버지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복입니다.
교회가 어렵고 성도들도 많이 어렵습니다.교회가 너무 많아서 교회들마다 빈 자리가 많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큰 교회 탓만 하지 말고 전도하는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익은 곡식이 널려 있는 현실에 놀라게 됩니다.
나가서 전도 해봐야 ‘요나’ 선지자의 마음이 어땠을지도 알게 됩니다. 10 만큼이라도 투입을 해야 합니다-물론 상황에 따라 더 많은 투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 말씀 전도에 10 을 투입하면 100 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주시기도 하시는 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분명 투입한 10 보다는 더 많이 산출물을 주실 것입니다.투입이 0 이면 아무 것도 하나님께 얻기 힘들 것입니다.
링겔만효과(Ringelmann effect)
원래 회사나 조직은 개인들이 각자 자기 일을 할 때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인위적 집단이다.
대체로 많은 기업들은 조직이 방대해지고 직원의 수가 늘어날수록 전체의 성과가 개인의 성과의 합보다 적어져 버린다.
다시말하면 능률과 생산성이 역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맞게 된다.
조직이라는 집단 속에 포함된 개인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 성과에 대한 1인당 공헌도가 비례적으로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을 "링겔만효과(Ringelmann Effect)"라고 한다.
즉 1+1=2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1.3이나 1.7처럼 2보다 적게되는 현상인데, 이것은 개인이 혼자 일할 때 100%의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 남들과 함께 집단 속에서 일할 때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내는 조직 심리학 측면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
주변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그로부터 범죄가 확산된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1994년 미국 뉴욕에서 이에 어울리는 사례가 발생했다.
뉴욕시장으로 선출된 루돌프 줄리아니와 윌리엄 브래턴 신임 검찰국장은 뉴욕의 지하철 범죄를 줄이기 위해 고심했다.
당시 뉴욕은 연 60만건 이상의 중범죄가 발생하는 지역이었으며 이들 중범죄의 90% 이상이 지하철 범죄였다.
여행자들도 “뉴욕 지하철은 절대로 타지 말라”고 말할 만큼 악명 높았다.
신임 시장과 검찰국장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전쟁의 주요 대상은 살인·강도 등 강력범죄가 아니었다.
우선 지하철역의 낙서부터 지웠다.
무단횡단·신호위반 등 교통질서를
바로잡았고, 쓰레기 무단투기를 근절했다.
그러기를 5년.
언론과 시민들은 “강력범죄와 싸울 자신이 없어 경범죄를 택했다.”며
시장과 검찰국장을 조롱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연 2200건에 이르던 살인범죄는 1000건 이상 줄었으며, 지하철 범죄율도
75%나 급감했다.
‘주일 근무 거부로 해고→소송 제기’
아마존 배달기사 통해 본 기독인 딜레마 ‘24시간 경제’ 시대, 기독인은 반문화적?
크리스채너티투데이(CT)는 4일(현지시간) 아마존이 ‘프라임’ 서비스를 위해 주7일 근무제를 시행하면서 주일에 일하지 않았다가 해고된 배달기사 사연을 소개하고 ‘24시간 경제’ 시대에 주일을 지키려는 기독교인들이 반문화적 시선을 받게 됐다고 전했다.
플로리다의 아마존 배달기사는 일요일에 근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직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일하는 제럴드 그로프씨도 일요일 근무를 다른 요일로 조정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17년과 2018년 총 24일간 일요일 결근을 했다는 이유로 2019년 해고됐다.
해고된 두 사람은 회사가 다른 요일에 일할 수 있는 ‘합리적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다며 인권법 제7장을 근거로 종교적 차별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상반되게 나왔다.
미국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는 플로리다의 배달기사를 대신해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 5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기로 했다.
이에 반해 그로프씨가 제기한 소송에선 지난해 지방법원이 회사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놨다.
그는 법원에 항소한 상태다.
CT는 그로프씨처럼 예배를 위해 모든 일을 제쳐두고 주일을 엄수하는 사람들은 생산성을 앞세우며 24시간 경제로 전환한 21세기엔 반문화적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로프씨의 소송 담당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인권법 7장을 통해 ‘합리적 조정’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퍼스트리버티 히람 사서 법률고문도 “고용주가 종교를 근거로 직원을 차별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종교적 면제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월 9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5: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스라엘의 주권자(2절)
♦ 성구 : 전일(前日) 곧 사울이 우리의 왕(王)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出入)하게 한 자(者)는 왕(王)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王)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百姓) 이스라엘의 목자(牧者)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主權者)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주권자(you will become their ruler)”
이스보셋이 죽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용사들과 장관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찾아와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며 다윗의 신실함에 온 백성이 복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1∼3절).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위에 오른 후에 이스라엘의 새 도읍지로 예루살렘을 내정하고 이곳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할 때 여부스 사람들은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성을 빼앗은 후에 “다윗 성” 이라 불렀습니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강성하게 만들자 두로 왕 히람은 백향목과 건축 기술자들을 보내 다윗 궁을 건축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다윗이 점차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힘의 근원이 무력이나 우수한 장비와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기 위해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비록 완전무결하지는 못했으나 다윗의 중심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고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블레셋은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습니다.
블레셋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을 내 손에 붙이시겠습니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올라가라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고 말씀하셨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닥쳐온 후에 그 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과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임하므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오늘 먼저 기도로 일을 시작하고 일을 한 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스라엘의 목자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는 다윗
- 목자(라아) רָעָה , 주권자(나기드) נָגִיד
첫째, 모든 지파(5:1)
둘째, 모든 장로(5:3)
왜 가룟 유다는 실패한 제자가 되었나?
가룟 유다는 어쩌다가 예수님을 팔아 먹은 저주 받은 인생이 되었을까요?
마가복음은 14장 10절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위한데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는 3년씩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그에 대해 여러 의문을 품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라고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귀가 그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궁금증이 더해만 갑니다.
필자는 결정적인 한 가지를 잘하고 못하느냐에 따라 신앙 여정의 승패가 갈린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도 하고 버림을 받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과 다윗 왕입니다.
사울은 삼상 15:9의 범죄로 인해 여호와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 왕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행동함으로써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됐다고 봅니다.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
-누가복음도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 입장-
마리아 향유 사건에서 드러난 가룟 유다의 행위 때문에 그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됩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향해 분을
내고 그녀를 책망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마 26:8).
그런데 그 제자들 중에서도 유다가 핵심 인물이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요 12:4~6).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 쓸 공금을 횡령한 도적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마리아의 마음이
읽혀질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리아를 향한 분노와 비난과 책망은 다름 아닌 예수님에 대한 그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헌신에 대해 제자들 특히 가룟 유다와 같은 처신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 속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을 훼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한(모독한) 서기관들이 성령님을 훼방한(모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막 3:29).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방해는 결국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는 불행한 인생이 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향유 사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준비하고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온 천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기념되는 복을 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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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과거를 한 번 돌아봅시다.
어린 시절에 사무엘이 찾아와서 기름 부어서 왕을 삼겠다고 약속을 했고 얼마 후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름을 날리고 그런 일을 계기로 해서 군대장관까지는 못됐지만 사울의 밑에 있으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 후에 사울에게 쫓기고 친구와 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해서 도망을 다녔는데 이 세월이 적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5장까지 오는 동안 다윗이 겪었던 험난한 세월을 말하자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 생이 다 끝나고 새로운 단계로 넘어갑니다.
다윗이 어려운 시기를 다 지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를 요약한 이야기라고 보면 됩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받은 축복이 뭐가 있는지 찾아 봅시다.
전쟁의 승패를 미리 알고 싸운다? 큰 복이네 그죠? 전에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에 전쟁 놀이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대요. 그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어요. 자기만 안 죽으면...... 안 죽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총알이 쏟아지고 대포알이 터지는 그 가운데를 총을 양손에 들고 뛰어다니면 세상 천지에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없을 거예요. 전쟁의 승패를 이길 것 알고 싸우니까. . . . . . . .
코메디언들은 소망이 하나 있죠? 자기가 만든 유행어를 하나 띄우는 것, 그것 하나 뜨면 큰 돈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속담을 하나 남겼단 말이죠. 그것보다 정말 좋아 보이는 것이 하나 있는데요.예를 들면 이런 비유를 하나 들어 봅시다. 연애하다 차였어요. '나중에 한번 보자 내가 네 억울한 꼴을 보여 줄거다' 이러면서 자기를 버린 그 장본인이 살고 있는 바로 앞에 으리으리한 집을 하나 짓고 거기서 보란 듯이 잘 살면요? 날 버린 그 사람은 어렵게 어렵게 살고 나는 그 앞에 으리으리한 집 지어 놓고 폼 잡고 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비유가 제대로 될는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어떨 것 같아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을 보고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 하죠.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그랬죠. 이것도 그 항목에 들어갈 겁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
아, 1·2절은 여론 이었고,, 3절은?
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할려고 했을까요?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봤을 때도 중심지이고, 헤브론은 유다 남쪽이고 예루살렘이 조금 올라오죠. 완전 중심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중간에 있고 또 하나는 수도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수도가 강가에 잘 있긴 하지만 그러나 옛날 같으면 가장 중요한 것이 수비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라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동안 그 땅을 점령해있는 그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점령을 안 당했다 말이죠.
오팔의 유래
상인이 여러 보석을 보여줬다.
하지만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아주 특별한 보석을 원했다.
잠시 고민하던 상인은 “마침 그런 보석이 있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금고에서 보석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보석은 아주 평범해 보였다.
“별다른 광택도 없고 세공도 별로인 것 같은데 왜 그 보석이 특별하다는 말씀입니까?”
“특별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상인은 손안에 보석을 쥐고 있다가 몇 분 후에 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평범했던 보석에서 영롱한 무지갯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보석은 오팔입니다. 그냥 보면 평범한 보석 같지만 사람 체온이 닿으면 이런 빛이 납니다.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이보다 더 특별한 보석은 없을 것입니다.”
정채봉 작가에 따르면 5종류의 만남이 있다고 한다.
첫째, 생선 같은 만남
처음엔 싱싱하지만 금방 상하고 비린내가 나는 만남이다.
생선처럼 시기 질투하고 싸우며 원한만 남기는 만남이다.
둘째, 지우개 같은 만남
아무 의미 없이 곧 기억에서 지워지는, 시간만 아까운 만남이다.
셋째, 건전지 같은 만남
쓸모 있을 때는 들고 있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멀어지는 수지 타산적인 만남이다.
넷째, 꽃송이 같은 만남
화려하게 피지만 금방 지고 마는 끝이 안 좋은 만남이다.
다섯째, 손수건 같은 만남
슬플 땐 눈물 닦아주고 힘이 들 땐 땀을 닦아주며 서로 의지하는 아름다운 만남이다.
오팔이 사람 체온을 만나야 빛이 나는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야 특별해진다.
하나님은 만남으로 일하시고, 만남 가운데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야 할 만남 중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 12:4)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승리자의 복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하나님이 다윗을 만나니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 되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루디아를 만남으로 유럽이 복음화되는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좋은 만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 2월 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4: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레갑과 바아나(5절)
♦ 성구 :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行)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Recab, 약대를 타는 자)과 바아나(Baanah, 슬픔의 아들)”
세상에는 점점 강하여 지는 가문과 점점 약하여 지는 가문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점점 약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림몬의 아들들입니다.
브에룻 사람 림몬의 아들인 레갑과 바아나는 길을 떠나 한낮에 해가 쨍쨍할 때 이스보네셋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 형제는 마치 밀을 얻으러 온 체하고 곧장 집안으로 들어와서 이스보넷의 배를 칼로 찌르고 그 길로 도망쳐 버렸습니다(5∼6절).
이들은 베냐민 족속 림몬이 낳은 형제로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지휘하는 기습부대의 군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집안에 들어갔을 때 이스보셋은 침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보셋을 칼로 쳐 죽여 목을 베었고 그것을 들고 밤새 아라바로 도망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바치며 말했습니다.
왕의 목숨을 빼앗으려던 왕의 원수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자손에 대해 내 주 왕의 원수를 갚아주셨습니다(7∼8절).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업적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상상외로 다윗의 반응은 칭찬이 아니라 질책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는 생각에 사울을 죽였다고 말했던 아말렉 소년병을 죽였다. 그것이 바로 그가 전한 소식에 대한 보상이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함부로 손을 들어 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죄 없는 사람을 자기 집 침대 위에서 죽게 한 악한 사람들은 어떻겠느냐? 내가 너희 손에서 그의 피 값을 구해 너희를 이 땅에서 없애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10∼11절).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레갑과 바아나형제는 다윗의 군졸들에 의하여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단순한 공명심 때문에 직속상관을 살해하는 것은 거룩한 전쟁(성전) 원칙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동족이나 혈육 간의 투쟁에 있어선 절대 칼을 쓰지 아니하고 믿음과 관용으로 대한 경력이 있습니다.
엔게디 황무지 토굴에서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그를 죽이지 않았던 일, 압살놈의 죽음을 슬퍼한 일은 그 좋은 실례입니다.
사건의 동기도 악하고 결과도 범죄이었기에 의로운 왕 다윗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온전히 드러내어 작은 부정한 것까지도 털어버릴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시다.
♪ 찬양 /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의인(義人)과 악인(惡人)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놀랍게도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악인들은 예수님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유명한 종교인들 곧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가?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영혼이 병들었음을 알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자칭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건강한 영혼을 가진양 스스로 의로운체 하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치료를 받아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와 고통과는 상관없는 듯 말하고 행동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실 수가 없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는 개념적인 차원이 아니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온전히 성화에 이른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의롭다고 의인이라고 인정은 받았지만
아직도 우리 모습은 죄인이요 죄를 행하는 악인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눈에 의인으로 보이는 신자일찌라도
그가 외식하는 바리새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회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분명코 의인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문둥병자나 세리나 창기를 시각적으로만 본다면
그들은 모두가 죄인이고 악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전혀 다르셨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코 의인이고 어떤 자가 악인인가?
의인이란 예수님을 영접한 가운데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그리고 악인이란 예수님을 전심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 말씀에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또한 의인도 타락할 수 있고 그 죄로 인해 심판과 사망이 온다고 말씀한다.
(겔 18:24,26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겔 33:12~13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히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벧전4:18~19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나는 의인인가?... 아니면 의인인 체 하는 악인인가...
아니면 의인에서 악인의 길로 접어든 사람인가?
아니면 악인인데 새롭게 의인의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인가?
할렐루야
창세기 18:23~26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사무엘하 4:11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시편 1:1,5~6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시편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편 34: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시편 37:12,16~17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시편 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시편 37:32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시편 75:10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시편 125:3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잠언 3: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10:3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잠언 10:6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거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언 10:7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잠언 10: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언 10:16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 10:20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10:28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잠언 10:30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잠언 10:32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잠언 11: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잠언 11:21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찌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잠언 11:23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잠언 11:31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잠언 12:5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
잠언 12:7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잠언 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 12:12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잠언 12:1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잠언 12:21
의인에게는 아무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잠언 12:26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기를 미혹하게 하느니라
잠언 13: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데 이르느니라
잠언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14:19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잠언 14:32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15:6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18:5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잠언 21:18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언 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잠언 28: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잠언 28: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잠언 28:28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잠언 29:6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잠언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언 29:16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잠언 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전도서 3: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전도서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도서 8: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21:3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찌라
에스겔 21:4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터이므로 내 칼을 집에서 빼어 무릇 혈기 있는 자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에스겔 33: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하박국 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말라기 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마태복음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시편 1편 1절에 따르면, 복된(blessed) 사람과 그 반대편 사람 곧 악인(cursed)을 뚜렷하게 대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된 사람이라면,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서 “악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악인이라고 하면, 품행이 못된 자로서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이라는 이 단어를 조금 특별한 뜻으로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라샤(rasha’)의 기본적인 뜻은 godless(=경건치 않은, 불경건한)로써, ‘하나님 없이 사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이란 세상 윤리나 도덕규범에 비추어서 그것에 역행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자를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세와 관계가 있으며, 일반 세상의 판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은 ‘악’을 근본적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자세’로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자신의 뜻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악인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악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속한 자를 가리키며 바로 불신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악인이라고 할 때, 성품이나 행실에서 이런저런 잘못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자(=불신자)를 가리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의인’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어떤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느냐가 그 판단 기준이라기보다, 그 전에(=행동 전에)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내적 자세가 어떠한가, 여기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biblically) ‘의’ 또는 ‘악’이라고 부르는 행위나 성품도 이런 내적 자세(=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자세)에서 파생하는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의인과 악인’ 세 가지 차이
잠언 28장은 대조법이 특이합니다.
악인과 의인의 성격과 행위,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결과의 차이를 서로 대조하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은 율법, 즉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을 기준으로 합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찾는 자, 명철과 지식이 있는 사람, 성실한 자, 지혜롭게 행하는 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등 여러 호칭으로 나옵니다. 이 호칭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하면서 ‘믿음의 담력으로’라는 제목으로 묵상합시다.
1.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1절에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지나치게 사람의 눈치를 본다, 지나치게 사람을 의식한다 등의 뜻으로, 오늘날에는 일종의 ‘대인공포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는 사람은 어떤 일을 올바로 해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론은 사람을 두려워하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사람을 두려워하다,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마 26:69-75). 그러면 이 말씀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의미입니다.
2.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
‘담대하다’를 사전으로 보면 ‘배짱이 두둑하고 용감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요즘 말로 ‘BGR 정신과 MH 정신’이 합쳐진
것입니다.
BGR은 ‘배째라’는 배짱을, MH는 ‘맨땅에 헤딩한다’는 용기를 말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시면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특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은 모세의
후계자가 되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고 한 것으로, 너무 유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세상에서 이른바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배짱과 용기로 가득찬 사람들입니다. 독일 문호 괴테는
“돈을 잃는 것은 가벼운 손실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중대한 손실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보상받을 수 없는 손실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두둑한 배짱의 믿음과 담대한 용기를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능력을 가지라
믿음의 능력은 믿음의 힘, 즉 위력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며 믿음의 위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능력, 즉 영적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능력을 가져야 힘든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엔진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힘들어도 뒤로 미끄러지거나 낙심하고 좌절하여 곤두박질을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능력과 관련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기수인 존 녹스의 예를 들고자 합니다.
존 녹스는 프랑스군에게 붙잡혀
1년 7개월 동안 배에 억류되어 고생을 했고, 영국왕 메어리 1세에게 박해를 받아 프랑스에 망명하는 등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한 사람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그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의 길에 믿음의 담력으로 승리하는 축복을 체험하여 간증하는 자리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느니라(잠 28:1)’.
단락구분
1~3절 : 이스보셋의 근황
4절 : 요나단 아들의 근황
5~7절 : 자신의 신복에게 죽임을 당한 이스보셋
8~12절 :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을 처형하는 다윗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방자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비판했지만 아브넬의 비열한 반박을 듣고서도 아브넬이 두려워서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3:11).
이스보셋은 왕이라고 하지만 군대장관 아브넬의 위엄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손맥이 풀렸다고 합니다(4:1).
또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넬이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堡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넬이 죽자 나라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럴 때
이스보셋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죽음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고, 4장
11절에서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면서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해서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에게 그 피를 갚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넬 죽음의 여파(4:1~3)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에 대한 여파가 나옵니다.
1. 이스보셋이 손에 맥이 풀렸다는 것
2. 온
이스라엘이 놀랐다는 것
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관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에 의해서
세워진 왕이기에 아브넬이 없으면 그의 정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죽음으로 권력 장악력을
잃었다
아브넬의 죽음은 온 이스라엘을 놀라게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정권이 붕괴에 이르렀다는 것
이제 다윗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이스보셋의 군대장군 두 사람의 이름 “바아나”와 “레갑”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브에롯 출신의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림몬(Rimmon)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기회주의자들이어서 북이스라엘이 붕괴될 지점에 오자 자기들이 모셨던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갔습니다(4:5~7).
이
두 사람의 출신 지역인 “브에롯”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은 원래 히위족의 네 성읍(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수 9:17).
그런데 사울 왕은 이곳에 있던 히위 사람들을 내쫓고 그곳에
림몬과 그 가족들이 살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새로운 정착지를 선사해 준 사울 왕을 림몬의 두 아들이 배신한 것입니다.
둘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4:4)
4절의 말씀은 이스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끊고서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킨 것입니다.
왜 갑자기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켰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보셋은 죽을 운명인 반면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Mephibosheth)은 자비를 받을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삼하 4:4의 말씀은, 다윗이 요나단과 약속한 부분(삼상 20:14~17)과 또한 그 약속을 성취한 삼하 9:1~8 중간 지점에 있습니다. 즉 다윗이 요나단을 향한 “자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므비보셋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은 그 약속을 성취해 가는 통로인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다윗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요, 자비(hesed)를 베푸는 사람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삼하 4:4에서는 어떻게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즈르엘에서 올 때에, 즉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다리를 절었다는 것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후에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므비보셋”인데 그 당시 왕은 전쟁의 영도자가 되어야 하고, 야전 사령관이 되어야 하는데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미흡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스보셋의 죽음(4:5~12)
① 5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이 한낮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이스라엘의 대낮은 매우 해가 뜨겁게 내리쬐므로 대개 집안에서 낮잠을 잡니다.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② 6~7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쳐서 죽이고 목을 베었습니다. 삼상 17:46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하러 나설 때 세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쳐서, 죽이고, 목을 베었다는 것입니다.
③ 7절에서 이스보셋의 머리는 전리품이 되었습니다.
ⅰ) 이것은 사울 세력의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며
ⅱ) 림몬의 아들들이 다윗에게 호의를 살 수 있는 근거처럼 보이며, 또한 자신들이 다윗에게 헌신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ⅲ)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를 잃고, 군대장관 아브넬을 잃고 가련하게 된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④ 8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가서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ⅰ) 여기서 이 두 사람은 하나님과 다윗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ⅱ) 하나님은 인간이 복수하게 하지 않습니다.
ⅲ) 이스보셋의 죽음은 다윗에게 기쁨이 아니라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10절).
ⅳ) 이 일은 두 사람에게 진보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자신들의 마지막을 가져왔습니다.
⑤ 9절에서 다윗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 ...”에서 자기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지 이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임으로, 무죄한 자를 죽임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지 인간의 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⑥ 10절에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였다는 아말렉 소년에게 “네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이고, 네가 한 일이 악한 일이라.”고 해서 시글락에서 처형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⑦ 11~12절에서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에서 죽인 것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이미 죽어 장사된 아브넬 곁에 묻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ⅰ) 다윗은 이스보셋을 의인, 그를 죽인 두 자객을 악인으로 부릅니다.
ⅱ) 또한 다윗은 기회주의적인 배신자들이 생각하는 권모술수적이고 반역적인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ⅲ) 이처럼 림몬의 자손들과 브에롯 사람들은 사무엘서가 쓰여지던 시대까지 깃다임(gittaim)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외지인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즉 불의한 자들은 자신의 고향을 빼앗기고 타향살이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⑧ 1~4장에서 사울, 아브넬, 그리고 이스보셋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마음도 볼 수 있습니다.
죽음 대리인 다윗의 마음
사울과 요나단 아말렉 사람 애통함(1:7)
아브넬 요압 슬픔과 금식(3:31~35)
이스보셋 레갑과 바아나 처형(4:11~12)
다윗이 통일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에 있어서 전쟁의 길보다는 화해 통합으로 나아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인
아말렉 사람, 요압, 그리고 바아나와 레갑 등은 칼로 출세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통일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칼부림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반해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에 애절해하고, 아브넬의 죽음에 슬퍼하고,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해 심판한
다윗은 남북이스라엘의 통일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명령하신 평화의 대로를 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기회주의도 아니고, 칼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화해가 이루어졌듯이 바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즉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마 5:8 “평화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스보셋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바아나'와 '레갑'은 북이스라엘이 붕괴될 지점에 오자 모셨던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갔습니다(5-7절).
이 두 사람의 출신 지역인 '브에롯'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곳으로 원래
히위족의 네 성읍(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수 9:17).
그런데 사울 왕은 이곳에 있던 히위 사람들을 내쫓고 그곳에 림몬과 그 가족들이 살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새로운 정착지를 선사해 준 사울 왕을 림몬의 두 아들이 배신한 것입니다.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4:5-9)
다윗은 그들에게 “여호와는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져내셨나니.....”
자기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지 이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임으로, 무죄한 자를 죽임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지 인간의 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들에게 사람의 도움은 필요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내 세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다윗의 정적이라고 저들이 믿었던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다윗이 자기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다윗 군대의 장군쯤으로 임명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는 이스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끊고서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킵니다. 왜 갑자기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켰을까? 이스보셋은 죽을 운명인 반면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Mephibosheth)은 다윗이
요나단과 약속한 대로(삼상20:14-17) 약속을 성취할 때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게 되었는가 하면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즈르엘에서 올 때에,
즉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4:10)
전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렸던 사람도 그 소식을 전함으로써 상을 받을 줄 알았지만
그가 기대했던 상과는 정반대의 상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꼴이되고 말았었습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여 사울의 죽음을 알리려 했던 그가 그 기별에 대한 상으로 받은 것이
죽음이었거늘 이제 사울의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찾아온 이 두 사람에 대한 상이야 오죽하였겠는가?
"..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어달고...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4:11-12)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두 자객을 악인으로 부르며 그들을 기회주의적인 배신자들로 낙인을 찍습니다.
오늘은 사울왕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살해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집안도 참 안됐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해 그 아들들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1절에 보면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 듣고 ‘손의 맥’이 풀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의지하던 사람인데 자신을 배신하러 갔다가 허무하게 죽어 버리니 겁도 나고, 인생무상, 권력무상을 느끼며 낙심천만하게 된 것이겠지요.
사람 의지하는 사람은 ‘의지하는 사람’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집니다.
하나님 없이 살게 되면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친박, 친노하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는 많은데 친박하고,
친노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힘이 있고, 힘이 생기니까 모이는 거지만 의지하는 사람 무너지면 의지하던 사람들도 무너지게 되
있습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 심하게 의지하지 않았으면 맥까지 풀릴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자신이 왕인데 전열 정비해서 대처해 나가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일 당하면 그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보셋도 다윗처럼 하나님의지하고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윗보십시오.
이스보셋을 죽인 두 사람의 장교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
머리 들고 찾아 옵니다.
대적의 왕을 대신 죽여주면 다윗이 좋아할 줄 알았던 거고, 그런 자신들에게 대단한 보상을 해 줄 것을
기대했던 건데, 다윗은 이 두 사람을 처형합니다.
다윗도 사람 의지하고 그랬으면 얼씨구나 하면서 이 사람들을 환영했을 겁니다.
사람 의지하는 사람,
돈 의지하는 사람,
힘 의지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사람은 어려움이 와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 살펴 보세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있나, 아니면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살고 있나?
우리 교우들 모두 하나님 더 많이 의지해서 웬만한 어려움에는 손에 맥이 풀리지 않는 강함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사람 의지하고, 물질 의지하고, 등등 의지하다 무너지면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게 참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살하고, 어떤 사람은 술에 빠져 살고. 악해
지고. 몰락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다 떠납니다.
이스보셋도 보십시오.
의지하던 사람이 죽어 버리니까
무주공산(無主空山), 힘 못쓴다는 것을 아니까 당장에 공격이 들어 오지 않습니까?
이스보셋 집에 드나들 정도의 장교들이면
신복들일텐데 신복 두 사람이 대낮에 들어와서 암살을 하는 겁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때 자신의 주군을 대낮에
암살하고, 목을 자른 다음, 그 자른 목을 들고 밤새 달려가는 모습을.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세상
힘에 의지하면서 사는 인간의 처량하고 악하고 비참한 모습입니다.
힘든 일 있어도 무너지면 안됩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헤쳐 나가야 사람들도 함부로 못하지, 무너져 있으면 사람들은 더 배신 때리고 달려 드는 겁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허리 띠 띠고, 믿음의 방패 가지고, 구원의 투구 쓰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기도하면서 깨어 있어야 됩니다.(엡 6장)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의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다 좀 늦어지고, 실패하고, 부족하게 산다해서 조급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깊게 의지하고 하나님 방식대로 사는 삶만이 진정한 승리와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는 것, 한치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나가야 합니다.
무너지는 사울 왕가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사는 삶에 더 매진하는 오늘 아침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나님, 부족하지만 새벽을 깨워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의 모습으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깊게 의지하며 소망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분명히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만 의지하며 살던 사람은
의지하던 그 사람이 무너지면 손에 맥이 풀려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리는 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내 손에는 맥이 풀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계시니 담대하고 힘있게 살아가는 인생으로 우리 모두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세워진 나라는 자멸하고 맙니다.
내
장래와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뎌도 주님의 뜻과 방법을 붙잡을 때 속히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전 인생을 통틀어볼 때 지연된
얼마간의 세월은 인생을 망칠 만큼 위협적이지도, 늦지도 않습니다.
♦ 2월 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3: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점점 강하여 가고(1절)
♦ 성구 :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戰爭)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强)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弱)하여 가니라.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 가고(David grew stronger and stronger)”
본문에서 집이라고 부른 것은 “가문(家門, family)”을 말합니다.
다윗의 집은 다윗의 가문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왕(王, king)”이 된 가문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의 집은 다윗의 집과 같이 점점 강하여 가는 집입니다.
다른 하나의 집은 사울의 집과 같이 점점 약하여 가는 집입니다.
여러분의 집은 강하여 가는 집입니까?
아니면 점점 약하여 가는 집입니까?
누구나 점점 강하여 가는 집이 되기를 원합니다.
점점 강하여 가는 집이 되는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열 두 지파입니다.
다윗의 집은 오직 유다 지파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사울의 집은 열한 지파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수적으로 계산하면 사울의 집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점점 약해진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내 편에서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성경적인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성경적 사고는 “하나님이 신자 편에 서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나님 편인가?”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기를 원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설 때 세상의 온갖 환난 풍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다는 믿음으로 우환질고 많은 세상에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늘 강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너 주의 사람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헤브론으로 갈찌니라(1절)
♦ 성구 : 후(後)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城)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찌니라.
“헤브론으로 갈찌니라(To Hebron)”
‘헤브론’이란 지명의 뜻은 “연합(聯合, union)”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정처 없이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헤브론'으로 가서 모든 사람들과 연합해야 할 사명을 갖게 됩니다.
사울이 죽었습니다.
사울을 피해 시글락에 와 있었던 다윗은 이제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다윗은 임의대로 행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 "헤브론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1절).
다윗은 시글락에서 자기의 부하들과 모든 가족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다윗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 사람들이 몰려와 다윗을 자기 지파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었지만(삼상 16장)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록 한정적인 유다 땅이지만 다윗은 백성 앞에서 공식적인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다윗이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등극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 족속에게 위협과 큰 모욕을 당할 때 사울이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를 지지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죽자 길르앗 애베스 사람들은 사울의 장례식을 정성껏 치러주었습니다. 이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은 그들을 호의로 대했습니다.
강압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려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강제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해 칭찬하며 축복했고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든 다윗 자신은 그들에게 선을 베풀 것을 약속했습니다(5~7절).
또 한 가지 다윗이 해결해야 할 사람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군대 총사령관이었는데, 사울밑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권력에 눈이 먼 그는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습니다(8-10절).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세웠기에 그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의 왕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은 아브넬에 의해 세워진 무기력한 왕이었습니다.
재위기간도 2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넬을 중심으로 한 이스보셋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은 결국 전쟁을 초래했습니다(12-32절).
다윗은 이미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참 오랫동안 사울의 핍박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고, 또 사울이 죽어서도 7년 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다른 지파를 통합해야 하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무한한 인내가 요구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다윗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에도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먼저 하나님께 가야 할 방향을 묻고 하나님의 음답에 따라 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행하겠다는 다윗의 결연한 의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어떤 일을, 어떤 길을 선택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어떤 난관이 있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그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을 걷는 중에 난관을 만난다면 그 난관은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일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그 난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무너지지 않을 영적 용사로 무장시키시고 또 타인을 살리기 위한 통로로 삼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뜻하지 않는 난관을 만난다 하더라도, 시간이 멈춘 어두운 한밤중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있어도,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하루의 길을 먼저 주님께 묻고 주님의 지혜를 구하며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는 갈 길 모르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활 노래(18절)
♦ 성구 : 명(命)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族屬)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冊)에 기록(記錄)되었으되.
“활 노래(lament of the bow)”
히브리어 성경에는 사무엘서가 상하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한권입니다.
한글 성경은 사무엘 상하 두 권으로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사무엘상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31장).
사무엘상은 다윗의 생애 일부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무엘과 사울의 생애에 일어났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왕위 등극과 통치 업적 및 다윗의 범죄 그리고
반역자들의 반란과 다윗의 피난 등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장은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죽음과 장사를 기록한 사무엘상 31장과 다윗의 유다 왕 등극인 사무엘하 2장 사이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다윗의 반응에 관한 기록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던 길보아 산과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빼앗겼던 시글락과의 거리는 대략 80km 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사흘 째 되던 날 듣게 됩니다(1:2).
다윗은 그 소년에게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습니다.
소년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다가 사울이 내게 이르기를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시달리니 나를 죽이라고 하므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줄 알고 죽이고 면류관과 팔고리를 가져왔다고 합니다(1:10).
다윗은 그 소년의 말을 듣고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느냐 하며 저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이자 절친한 요나단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슬픈 노래를 만들어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애가를(활노래) 지어 유다 족속들에게
가르치라 명령하였고 또한 그 애가를 책에(야살의 책) 기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1:17-27).
다윗이 그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심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도 왜 이같이 애도를 하였을까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은 그가 비록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인간이 심판할 수 없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하여 선택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믿었기에 하나님만이 그를 벌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려는 믿음을 본받아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에 기쁨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저 하늘 나라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다윗의 눈물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던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도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 중에 하나도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이 진실의 상징이고 소박함의 상징이고 순수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세 가지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첫째,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서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태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음죄를 짓고서도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기는커녕 태연한 모습으로 위선을 떨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태연하게 위선을 떨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단 선지의 말과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상 12:7-13).
다윗은 그 후 평생토록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어두웠나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시 6:6-8).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그리고 죄 값으로 당하는 환난 때문에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대부분의 시에는 슬픔과 탄식과 울음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 22:1-15).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시 38:4-6).
다윗은 한 평생을 다음과 같은 참회의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후에 어거스틴이 그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었고, 김치선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그 분들의 흉내를 내면서 그 참회의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기를 바랍니다. 그 참회의 시는 시편 51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10). 다윗은 울다가 또 울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 다윗은 한 평생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회개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 30:4).
다윗은 시글락에 살던 자기의 동족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침략을 당하여 사람들이 붙잡혀 가고 온 성이 불 탄 것을 보고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 30:3,4). 자기의 동족이 불행을 당했을 때 울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권면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윗의 울음의 귀중함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어려운 때에 우는 것은 약자들의 하는 일이라고 한다. 더욱이 시글락에서 다윗이 통곡한 것은 일국의 대왕이 될 사람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 것같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울 수 있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보다 용이하게 신앙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울 때에는 그 심령이 부드러워져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울음이 없는 자는 대부분 심령이 마비되어 있는 자로 판단된다.”
다윗은 시글락 사건 바로 후에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사무엘하 1장 1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제 삼일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저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저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상 1:1-4,11,1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하던 사울 왕이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대신에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슬퍼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울 왕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윗은 근본적으로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착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착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을 바라보시면서 슬퍼서 우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2-4) 예수님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좋아서 기뻐하시지 않았고 슬퍼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지금 우리들의 가슴에는 원수들에 대한 분노만이 있고 슬픔과 눈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은 아닙니다. 니느웨 성을 바라보시면서도 하나님은 우셨습니다. 물론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을 바라보면서 우는 마음보다는 분노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것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좋아서 기뻐하지 않았고 슬퍼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슬퍼서 우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의 시편들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고 감탄하는 시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감탄사들을 계속해서 발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18). 마음이 부드럽고 감성이 풍부한 다윗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할 때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디고 강퍅한 저 같은 사람도 이 고백들을 읽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면 이 시의 원 저자인 다윗은 얼마나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까?
다윗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며 너무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감격의 시들 중에서 하나만 여기 옮깁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다윗은 자기의 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저의 금년도 기도 제목 중의 하나는 저의 가슴에 주님의 눈물을 품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메마르고 강퍅한 저의 가슴에 눈물을 조금씩 채워주시고 계십니다. 저의 허물을 바라보면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들이나 캄보디아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저의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어제 캄보디아에 같이 갔던 목사님 한 분이 캄보디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왔습니다. 그 사진들 중의 하나는 버스 고장으로 시골 길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중 지나가는 어린이 세 명에게 제가 스티커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세 어린이들이 스티커를 손목이 붙이고 저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어린이들이 귀엽게 보였는데 그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제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저도 다윗처럼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곡하며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 기력이 없도록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의 눈물을 내게도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우시던 주님의 눈물을 제게도 주옵소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던 그 눈물도 제 마음에 품게 하옵소서
사울 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던 원수 사울이 죽었는데 슬퍼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다윗 개인적으로는 춤이라도 춰야 할만큼 기쁜 소식입니다.
사울이 죽음으로 그의 오랜 피난 생활이 끝나고 이제 왕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슬퍼합니다.
어떻게 다윗은 원수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하며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28:4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마주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었다.
가나안 해변에 머물러 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격해 온 것이다.
사울은 다급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도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대화한다.
사무엘은
이렇게 답해주었다.
사무엘상 28: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내일 너와 네 아들 요나단이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울의 죽음은 예고된 죽음이었다.
사무엘상 31: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성경은 전투의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다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예고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글락에 있었던 다윗은 한 아말렉 청년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청년은 죽어가는 사울의
요청으로 사울을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로 가져온 것이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빈
왕관이 다윗 앞에 있었다.
아말렉 청년은 아마도 다윗이 좋아하며 자신에게 상이라도 줄 것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옷을 잡아 찢는다.
옷을 찢는 행동은 히브리어로 ‘크리야’다.
유대인들은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있을 때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표현하는 행위로 옷을 찢는다.
다윗만 옷을 찢은 게 아니었다.
다윗과 함께 했던 약
600명의 사람들도 다 옷을 찢었다.
쫓겨 다니느라 옷도 많지 않았을 텐데 온 공동체가 옷을 찢으며 사울을 잃은 슬픔에 동참한
것이다.
사무엘하 1:11-12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 족속이 블레셋에 패배하며 많은 사람이 죽은 것
때문에도 슬퍼했다.
여기서 다윗의 눈물이 조금은 이해된다.
그는 사울과의 개인적인 애증을 넘어 국가적인 상실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어서 그 아말렉 청년을 꾸짖는다.
사무엘하 1: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에게 사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다.
사울 때문에 다윗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했다.
사울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모든 악행보다 하나님이
그를 기름부어 세웠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사울이 죽고 나서 이런 시편을 남긴다.
시편 18:1-3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윗은 절대주권이 하나님게 있음을 노래했다. 그는 원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원수의 손에서 자신을 건지실 분이 하나님임을 신뢰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고 완전히 행하고자 결심했다.
시편 18:23-24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어쩌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힘들게 지켜왔던 자신의 원칙과 그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눈물 흘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사울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만 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만 그의 방패와 요새가 되시는 견고한 영혼이 되었다.
그는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하며 숱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기도를
심었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바울은 이런 권면을 한다.
로마서 12:14, 17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윗은 자신의 삶에 원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박해했던 사울왕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오랜 시간 축복했던
사울이 죽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슬펐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옷을 찢고 눈물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했던
것이다.
원수를 위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사람의 반응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영혼이다.
그의 앞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유대의 왕이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자신을 준비시킨 것이다.
우리 역시 살면서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만난다.
그럴 때 ‘복수는 나의 것’이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
원수가
망하도록 저주하는 것도 나의 기도가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견고한
영혼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야 할 것이다.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슬픈 노래를 지어 자신과 함께한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전체 유다 족속에게 그 노래를 가르치도록 명령한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한다.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들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였음을 기념한다.
다윗은 그들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 모두의 상실임을 노래했다.
상실을 슬퍼하는 시간을 통해 해결되지 않았던 묵은 상처들이 치유된다.
다윗
개인적으로도 슬픔을 노래함으로 사울을 통해 고통받았던 시간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왕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면서 이스라엘은 이제 서로를 격려하며 새로운 다윗 왕조를 향해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숨겨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눈물은 빨리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애통할 때 위로하시기 원하신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함께 애통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 우리 사회와 민족과 열방에 벌어지는 분쟁과 상실의 순간을 슬퍼하며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주님이 오시기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야살의 책
야살의 책'은 창세기부터 사사기 1장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성경에 짧게 나오거나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사건들 사이의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특히 창세기의 내용은 성경보다 약 두 배 정도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랍비들이 야살의 책을 연구 자료로 활용했다는 증거도 있다.
'세데르 올람(Seder Olam)'은 히브리어 역사서로 기원후 169년경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 랍비 엘리에셀이 그의 연대기를 기록할 때 야살의 책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온다.
이 책은 또한 그가 계산한 날짜와 절기가 가장 정확했는데 그것은 그가 야살의 책을 최고의 자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야살의 책이 기원후 2세기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고 잘 알려진 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야살의 책'은 한글이나 영어 성경으로는 알 수 없는 성경 원문의 히브리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야곱이 '조용한 사람'이고 '장막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창세기 25:27
이 두 가지 표현은 성경의 히브리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지만 번역된 성경으로는 그 뜻을 알 수 없다.
여기서 '조용한'은 히브리어로 '톰'인데 '흠이 없는, 완전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고 완전한 자'를 의미한다(창 17:1,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 1:1
또한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장막 안에서 그의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가 집에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7
야살의 책은 이 히브리적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야곱은 온전하고 지혜로운 자로 장막 안에 거하며 양 떼를 먹이고 주의 교훈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령을 배웠다
야살의 책 26:17
그러므로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 안에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중요한 가르침들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미상 | 이상준 옮김| 이스트워드 | 311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