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Judges) / 12. 01. 2021 - 12. 24. 2021


12월 24일(금)


♦ 12월 24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21: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춤추는 여자(23절)
♦ 성구 : 베냐민 자손(子孫)이 그같이 행(行)하여 춤추는 여자(女子) 중(中)에서 자기(自己)들의 수효(數爻)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自己)  기업(企業)에 돌아가서 성읍(城邑)들을 중건(重建)하고 거기 거(居)하니라.  

“춤추는 여자(the girls were dancing)”란 베냐민 지파의 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아내를 맞이할 방법을 제시한 것을 말합니다.  

사사기란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부터 왕정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방 민족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원하도록 부름 받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사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사 시대의 순환 고리는 “하나님의 징계, 부르짖는 회개, 구원자 사사, 평화로운 시대”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런 순환 고리가 마지막 사사 삼손 때에는 블레셋에게 40년 동안 억압을 받으면서도 부르짖는 회개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노아”의 집안에 삼손이란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사사 시대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합니다(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표현은 사사기에 모두 네 번 소개됩니다(17:6, 18:1, 19:1, 21:25).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강력한 힘을 갖고 지배하는 사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소견”이란 히브리 단어는 “아인” 이라고 합니다.

“아인”이란 단어는 “눈(eye)”이란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눈에 좋다고 판단되는 대로 살았습니다(everyone did as he saw fit).

사람마다 각자가 왕처럼 행동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따른 사회 정의와 질서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레위인이 첩을 얻는 것도 그 사람에게는 옳은 행동이었습니다.
기브온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밤새도록 농락한 것도 옳은 행동이었습니다.
레위인이 첩의 시신을 12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의 영역으로 보낸 것 또한 옳은 행동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회 질서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처럼 오늘날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기만 하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가질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합니다.
소수의 강자들이 다수의 약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고 흔들어대는 세상에서 진리를 회복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지난 날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났던 모든 죄악과 잘못을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새 날을 위한 새 역사가 펼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찬양 / 기도하는 이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MWpiPyJggcI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21: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아멘

 맹세하다(솨바, shâba) שָׁבַע / oath
  사사기 21:1, 5, 7, 18

 2가지 맹세 :
  a.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1, 7, 18)
  b. 여호와의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인다(5)

  1절  /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7절 /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18절 /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여호와의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인다 


 5절 /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사사기 21:11
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진멸하다(하람, charam) חָרַם
    닫다, 보이지 않게 하다, 멸절시키다
* 가나안 족속을 진멸할 때 사용하는 용어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17:6, 18:1, 19:1, 21:25

야고보서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오늘의 기도

거짓 맹세하지 말자!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시옵소서!


몸 속의 독약

빅토르 위고의 단편 중 "93"이란 것이 있다.
큰배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났다.
배의 선창에는 수송용 대포가 실려 있었다.
대포를 묶었던 쇠사슬은 큰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다.
대포들은 배를 파괴하며 무섭게 굴러다녔다.
몇 명의 선원이 결사적으로 선창에 내려가 제멋대로 굴러 다니는 대포를 붙잡는다.
작가는 이 배를 인생에 비유하고 있다.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서 오는 풍파가 아니다.
배 안의 대포인 "미움"과 "원한"과 "분노"가 사람을 망가뜨린다.


보쌈문화 / 약탈혼

남편을 둘 이상 섬겨야 할 팔자의 딸을 위하여 조선시대 양반집에서 행하던 것으로서, 잡혀온 남자는 함구령이 내려진 채 방면되거나 때로는 죽음도 당한다. 보쌈은 이처럼 대체로 처녀를 위한 것을 말하지만 조선시대 하류층의 수절과부가 노총각이나 홀아비를 같은 방식으로 납치하여오는 일도 보쌈이라고 하였다.

처녀를 위한 보쌈은 불경이부(不更二夫)라는 과부의 재가금지제도에서 나온 일종의 약탈혼과 같은 것이었다.
보쌈한 총각과 동침하면 그 처녀는 과부가 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되어 과부의 액운을 면하였다고 믿으며, 따라서 다른 곳으로 안심하고 시집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남정네들이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와 혼인하는 풍습도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약탈혼으로 과부보쌈 혹은 과부업어가기라고 하였다. 과부보쌈에는 과부 본인이나 과부의 부모들과 내약 끝에 보쌈해가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합의 없이 보쌈하여 약탈해가는 방식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은밀히 과부와 정을 통해오다가 혼인을 하기 위하여 보쌈의 형식을 빌려 주변의 이목을 속이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와 같이 강제로 보쌈할 때는 사전에 과부의 거처를 탐지해두었다가 밤중에 침입하여 보쌈한 뒤 억지로 정을 통하여 배우자로 삼는다. 이럴 때 가끔 가족과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법적인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는다. 이 밖에 소박맞은 여인이 친정에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이른 새벽에 성황당에서 기다리다가 보쌈해가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소박녀는 남편이나 자기자신의 저고리 옷섶을 세모꼴로 찢은 ‘나비’를 지니고, 등에는 이불보를 진 채 성황당에서 서성거린다. 이 소박녀를 최초로 만난 남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데리고 살아야 하는 관습적인 의무가 지워진다.

소박녀는 성황당에서 서성거리다가 남정네를 만나면 ‘나비’를 내보인다. 그러면 남정네는 소박녀의 등에 진 이불보로 보쌈하여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러한 소박녀의 보쌈풍습은 여자가 귀했던 함경도지방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과부보쌈이나 과부들의 남성보쌈은 유교적 영향으로 불경이부라는 유교적 질서가 고착되면서 여성의 경우 비록 남편을 사별하였다고 해도 재혼하지 말고 수절할 것을 강요당한 결과 파생된 풍습이다. 과부의 재혼을 금지한 제도는 대체로 고려 말에 등장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어,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에까지 깊이 뿌리내린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는 자녀안(恣女案)이라 하여 양반의 여자로서 부정한 행위를 하거나 세 번 이상 개가한 여성의 소행을 기록하여 그 자손의 관직등용을 제약하였으며, 조선시대 성종 때에는 『경국대전』에 재가하는 부인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다는 조문을 제시하여 과부의 공식적인 재혼을 금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1895년 갑오경장에 의해 부녀의 재혼이 허용된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보쌈이 과부의 재혼금지제도 속에서도 비공식적으로 행해진 이유는 노총각이 죽어서 몽달귀신이 되거나, 과부가 죽어 원귀가 되면 가뭄이 자주 들게 된다는 믿음이나, 노총각이 많으면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관에서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쌈이 행해졌다고 해서 재혼금지의 제도가 실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조관념 및 과부의 수절을 강조한 전통사회의 문화적 풍토 속에서 음성적으로 행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도 많아서 혹시 수절을 결심한 열녀가 이러한 일을 당하면 자살 및 살인의 비극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보쌈)]






12월 23일(목)

 ♦ 12월 2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20:1∼48
♦ 묵상을 위한 주제 :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13절)
♦ 성구 :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匪類)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中)에 악(惡)을 제(除)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子孫)이 그 형제(兄弟) 이스라엘 자손(子孫)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미스바”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가 열렸을 때 칼을 빼는 보병의 수가 40만명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열리게 된 동기는 기브아 거민의 만행으로 인하여 기브아가 속해 있는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11지파가 베냐민을 응징하기 위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20:1∼3, 9∼11).  

이스라엘 지파는 베냐민 지파에게 기브아 비류들을 처형할 수 있도록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20:12∼13).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의 요구를 거절하며 오히려 그들과 싸울 준비를 합니다(20:14∼17).

드디어 이스라엘 11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베냐민 자손 중에서 칼을 빼는 자는 2만 6천명이었으며 기브아 거민 중에서는 7백명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연합군(40만 명)과 비교할 때 베냐민 지파는 상대적으로 엄청난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2만 2천명 전사)와 2차 전투에서(1만 8천명 전사) 이스라엘 연합군은 패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급하게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울까?” 하며 주님의 뜻 보다는 감정을 앞세웠던 것이 패배의 원인입니다.

결국 3차에 전쟁에 임할 때는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의 작전에 의지한 이스라엘 연합군은 결국 베냐민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베냐민의 남은 군사는 6백명 이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의해서 좌우 됩니다.

오늘날도 영적 싸움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매일 아침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따라 기도하며 하루의 삶을 시작하며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경주하므로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나는 예수 따라가 가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20장은 레위인과 그의 첩이 기브아에서 유숙 할 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레위인의 첩을 능욕한 후 레위인이 머물던 노인의 집에 버려두었을 때 아침이 되어 레위인이 첩의 시신을 싣고 집으로 돌아와 그 시신을 12조각을 내어 각 지파에 보내므로 이스라엘 총회가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결의된 것은 베냐민 지파에게 불량배를 넘기라고 제안하였으나 베냐민 지파에서는 불량배들을 내어주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질서가 베냐민 지파의 가족주의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총회는 용사들을 선발하여 베냐민 지파를 공격합니다.
1차, 2차 공격에 실패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3차 공격을 시도하기 전에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드디어 3차 공격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 12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진멸하게 되는 불행한 역사가 펼쳐집니다.






12월 22일(수)

♦ 12월 22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9: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망령된 일(23절)
♦ 성구 : 집 주인(主人)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兄弟)들아 청(請)하노니 악(惡)을 행(行)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妄靈)된 일을 행치 말라.  

사사기 19장은 왕이 없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에 붙잡힌 삶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레위 사람이 첩을 얻었고 그 첩이 낯선 마을의 사람들에게 밤새도록 시달리다 죽은 후에 레위 사람이 그 첩의 시신을 열 두 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게 보낸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7:6, 18:1,19:1, 21:25)”


사사기 17∼21장은 약속의 땅 분배 이후 열 두 지파 중 “베냐민 지파”와 “단 지파”가 가나안의 “여부스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을 진멸하지 않아 결국 얼마나 큰 위협에 빠지게 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레위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사람들로 엄격한 규정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이 첩을 맞이하였으며 그의 첩이 친정으로 돌아간 후 4개월이 지난 뒤 찾으러 가서 처갓집에 머물며 5일을 지냈을 무렵 장인의 계속되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은 에브라임으로 떠났습니다.

레위 사람은 에브라임 산지 기브아에 거류하는 노인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때 성읍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리며 낯선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겠다고 합니다.

집주인이었던 노인은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으니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들 임의대로 하되 이 사람에게는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냐민의 젊은 남자들은 레위인의 첩을 붙잡아 밤새 능욕한 후에 첩은 집 문 앞에 엎드려진 채 버려졌습니다.

레위인은 첩의 시신을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가 시신을 열 두 덩이로 나눈 후에 이스라엘 사방 온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레위 사람은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 첩을 맞이하고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때를 “왕이 없을 그 때” 라고 합니다.
이 끔찍한 시대를 성경은 가장 부패한 “기브아의 시대”라고 합니다(호 9:9).


오늘의 시대를 이렇게 정의해 봅니다.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시대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버린 시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시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대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살아갈 때 비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인식하며 자기 소견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성자의 귀한 몸

https://www.youtube.com/watch?v=RbyeLcrljnQ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외적 부흥에 붙잡힌 교회

교회는 외적인 부흥이 성과의 긍정적인 면으로 비춰졌고 본래의 사명보다 자신의 발전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제도주의화 되어버렸다. 

성경의 가르침은 나그네, 고아, 과부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부흥과 성장에 붙잡힌 교회는 오히려 부자와 지위와 권력과 명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12월 21일(화)

 ♦ 12월 2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8: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때에 왕이 없었고(1절)
♦ 성구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王)이 없었고 단 지파(支派)는 이때에 거(居)할 기업(企業)의 땅을 구(求)하는 중(中)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支派)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企業)의 땅 분배(分配)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사사기는 사사들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서는 제사장들의 실패를 거짓 없이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서는 역대 왕들의 실패를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그 결과는 영원불변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위대한 왕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실패한 사사와 제사장과 왕을 대신하여 친히 사사처럼 제사장처럼 그리고 왕처럼 오셨고 그와 같은 삶을 온전하게 계시하셨습니다.

그 때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실패한 인간의 변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복은 잠시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치 삼손처럼 또는 미가처럼 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은 예수님 때문에 순종하며 살아가면서 때로는 손해를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장차 받을 상급과 영생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단 지파는 제비뽑기에 의해서 얻은 기업(땅)이 있었습니다(수 19:40∼48).
그 위치는 유다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사이의 한 지역과 해안 평야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18장에서는 단지파가 땅 분배를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18:1).
그 이유는 분배 받은 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삿 1: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 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영생이란 복은 예수를 믿을 때에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삶의 터전에서 믿음으로 지키지 못하므로 마치 영생을 빼앗긴 것처럼 사탄은 우리들을 조롱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영적으로 긴장하여 자기를 낮추고 부정하면서 오직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은 많은 사연을 갖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정탐꾼 10명 때문에 10일이면 들어갈 수 있었던 그 땅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으며 불순종했던 630,548명은 모두 죽고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가 그 땅을 가나안 족속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므로 단 지파를 통하여 우리의 영적 상태와 신앙생활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업으로 받은 땅을 빼앗긴 것처럼 매일의 영적 전투에서 패배했던 것이 우리들의  영적 생활이 아니었습니까?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지난날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채워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실로에 있었습니다(31절).
실로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단 자손들은 그들이 원하는 곳에 우상을 세우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땅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에 나아가 예배드리기보다 자기 임의로 우상을 세우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단 자손이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편리한 것이 기준이 아니라 진리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기준이 되는 진리 편에 서야 할 때에 진리 편에 설 줄 아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편에서 승리하는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현대인은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진정한 왕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영원무궁하도록 왕”(시 10:16)이시며 “영광의 왕”(시 24:10) 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그를 왕으로 여겨야 할 그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의 왕 되심을 실제 생활에서 인정하지 않는 소위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s)가 되고 있다. 자애로운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임자 잃은 소처럼, 그 주인의 풍성한 구유를 잊어버린 나귀처럼, 현대인은 혼돈 속에서 속절없이 방황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의 중심부에는 결국 “우리의 왕이 누구인가”라는 피할 수 없는 권위(authority)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적 문제도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주권(sovereignty)을 가지는가’, 내 삶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받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나님의 주재자 되심을 망각한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의 왕좌에 올라가 이기적 왕국을 운영하고 있다. 아니면 이 세상은 허탄한 왕, 즉 우상들을 섬김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면서, 마땅히 신실한 충성과 존중을 받아야 할 왕 하나님을 떠나고 있다.

약 1,000년 남짓한 국가의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은 세계의 정치사에서 특이한 실례를 보여준 나라이다. 왜냐하면 이 작은 나라가 주변에 있던 국가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왕권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은 세속적 왕권을 뛰어넘는 구별된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분명한 의식이 존재했다. 진정한 왕은 정치적 인물로서의 왕이 아니라, 오직 온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이면서 섭리주인 영원하신 왕 하나님이었다. 이 같은 하나님 왕권 사상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부터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모세에게 있어서, 왕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려는 분이시다(출 19:6). 이스라엘의 사사인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을 격파한 후에 자신의 가문을 왕으로 세우려는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고 말한다. 사무엘에게도 하나님 왕권사상은 그대로 남아있다.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백성을 대면하면서, 사무엘은 그것이 여호와의 왕 되심을 거절하는 의도임을 알고 왕을 세우기를 주저하였다. 성군 다윗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은 영원하신 왕이었다. 이사야 선지자 또한 오직 하나님만이 “보좌에 높이 앉으신 왕”(사 6:5)이라고 주장한다. 선지자 다니엘의 하나님은 “모든 왕의 주재”(단 2:47)이시며, “자기의 뜻대로 나라를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지극히 높으신 이”(단 4:17, 25, 32, 34)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 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대리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영원한 왕으로 세우시는 것이다(요 18:37). 그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계 19:16)이시며, 그를 왕으로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13).

영원무궁토록 왕이신 하나님은 그 권세와 능력을 홀로 가지신 분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으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왕권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된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마 28:18).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은 그러므로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처럼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왕적인 존재가 된다(계 5:12).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다스리는 권위를 사람 가운데도 세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으니(롬 13:1), 이는 하나님의 위임일 뿐이다.

하나님은 권세를 가지신 분일뿐만이 아니라 그 권세를 나누시는 분이시므로, 역사 가운데 많은 왕과 방백을 세우시고 이스라엘 가운데 제사장과 선지자와 같은 중보자(mediator)를 세우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왕을 비롯한 모든 권세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면,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

그러므로 주권은 국민에게로부터 시작된다는 인민주권론(popular sovereignty)이나, 국가로부터 시작된다는 국가주권론(state sovereignty)과 같은 세속적인 주권론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주권론은 “하나님 주권론”(God’s sovereignty)이다. 이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권을 이양하면서 드리는 고백 속에 분명히 나타난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구체적인 정치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세상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억압적 신화를 해체하시고 자유를 주시는 가장 높고 유일하신 왕이시다.


12월 20일(월)


 ♦ 12월 2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7: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자기 소견(6절)
♦ 성구 :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王)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自己) 소견(所見)에 옳은 대로 행(行)하였더라.

사사기의 내용을 두 부분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전반부(1장-16장)
전반부는 사사들을 세워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둘째는 후반부(17장-21장)
후반부는 사사 시대의 사회 환경은 종교적 및 도덕적 타락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everyone did as he saw fit)”

신앙생활을 위한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십계명(Ten Commandments)”은 삶을 위한 기준입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Lord's Prayer)”는 기도 생활을 위한 기준입니다.

셋째는 “사도신조(The apostle's creed)”는 신앙의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신알을 위한 기준입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신앙과 삶과 기도의 기준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그 한 예를 본문에서 "미가"의 집안에 대한 사례를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이 세상에 여호와와 같으신 이가 누구냐?" 라는 뜻입니다(히브리식 발음 “미카예후”).

'미가'라는 이름대로 살아가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최고로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읽다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 1,100세겔을 잃어버렸습니다.
1세겔은 대략 3돈에 해당합니다.
당시 건장한 노예 한 사람의 값이 30세겔이었으므로 은 1,100세겔은 대략 36명의 노예를 살 수 있는 상당히 큰 금액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돈을 잃어버린 후에 돈을 가져간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미가는 어머니가 저주하는 말을 듣고 그 돈을 자기가 가져갔다고 고백합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돌려받은 돈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다며 아들을 위해 은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며 저주하는 것과 아들을 위하여 신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당시 미가의 집안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사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의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매일의 삶에서 추구하는 것들은 건강과 행복과 지위와 명예와 재물 그리고 성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한다면 미가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것과 다를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미가의 어머니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머물다가 에브라임까지 오게 된 한 레위 청년을 자신의 집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성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레위인이 떠돌이 신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각 지파의 사람들이 그들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은 그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떠돌이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사사기의 저자는당시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정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며 타락한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청교도 신앙을 기초로 출발한 미국과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 세워진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혼란과 어지러운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마치 사사시대가 다시 나타난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과 삶의 기준이 무너진 사사시대처럼 오늘날도 진리와 가치의 기분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분별력이 아닐까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며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구하며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삶을 회복하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영원하신 기업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람은 세 종류의 눈이 있다.

첫째, 육안(肉眼)
사물을 보는 눈

둘째, 지안(知眼)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깨닫는 눈

셋째, 영안(靈眼)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이나 지식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이나 뜻을 깨달을 수도 없다.

시편 119편 18절에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다윗이 그토록 사모하며 열리기를 원했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령한 영적인 눈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눈이 있다.
영적인 눈은 유전자가 다르다.
믿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유전자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지난번 독일에서 경주마를 훈련하는 것을 보았다.
경주마와 일반 말이 어떻게 다르냐고 했더니, 챔피언 경주마의 혈통을 가진 말은 일반 말에 비해 500배가 넘는단다.
경주마는 승자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경주마의 혈통을 지닌 말은 성장하면서 성격이 다르고, 눈매가 다르고, 움직임의 민첩함과 기질이 다르다.
승자의 혈통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앙도 이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세상 사람들과 혈통이 다르고 유전자가 다르다.
평소에는 모르지만, 문제를 만날 때 경주마와 같은 야성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유전자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믿음은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만날 때,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문제를 보고 환경에 빠져 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복병 같은 장애물도 많고 돌풍이 불어올 때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엘리사는 불말과 불병거를 탄 하나님의 군대가 도단성을 에워싼 아람군대보다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절 2절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잠언 21장 23 "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란에서 보전하느니라"






불신(不信)과 미신(迷信)

하나님의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불신이라면 사실 아닌 것을 사실처럼 믿는 것이 미신이다.
따라서 참 사실을 참 사실대로 믿는 것이 참 신앙이다.

인간을 신앙의 면에서 세 가지로 분류한다면 무신(無信), 미신(迷信), 진신(眞信)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사실은 하나인데 안 믿거나 잘못 믿거나 옳게 믿거나 셋 중 하나인 셈이다.

더 생각해 보면 바로 못 믿거나 바로 믿는 양자 택일인 것 같다.
하나님은 존재하든가 존재하지 않든가 둘 중 하나이지 제3의 입장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진리가 인간의 무지와 미지 속에 잘못 믿어져 왔던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할 때까지 전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천동설을 믿었다.

불신자의 미지(未知)와 무지(無知)와 오지(誤知) 속에서 예수가 못 믿어지고 있다.
사실을 안다면 안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3일 동안 어디에 계셨을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지옥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통전적 구원으로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근 ‘믿음인가, 미신인가(넥서스CROSS)’ 책을 펴낸 조성노 목사(푸른교회)는 “사도신경의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지옥에 내려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성경에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반대 의견에서는 신학적 성찰이기보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경계하거나 ‘신성모독’으로 여겨 이러한 내용을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

조 목사는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아는 만큼만 믿는다는 것

“바른 지식이 우리의 신앙을 결정한다.
성경은 덮어두고 자기 소신껏 예배하는 것은 미신일 뿐이다”라고 일침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소원을 위해 예배에 나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미신스럽게 믿는 것이며
신앙으로 제 욕심을 채우려는 행태는 우상숭배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미신에서는 ‘대상’을 알 필요가 없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상’을 성실히 알아야 한다.
어떤 대상의 정체를 알 때 신뢰가 생기는 것처럼 기독교도 분명한 믿음의 대상을 알 때 신뢰가 생긴다”고 밝혔다.
알지도 못한 채 무턱 대고 믿으며 신뢰한다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소위 ‘미신’과 다를 바 없다는 것.

한국교회의 ‘믿음과 행함’의 이원화로 사회적 신뢰도가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종말론에 대한 그의 시각은 눈에 띄는 부분이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위기의 믿음이 필요한 때”
“‘종말론’에 대한 결여가 한국교회 신앙의 한계이자 약점이다.
이 시대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건강한 종말론에 대해 설교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이를 위해 ‘마리아와 마르다(눅10:38~42)’ 이야기를 예로 든 그는 “당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최후의 만남으로, 마리아와 마르다가 손님 대접을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맞이할 때라는 것을 분별하기 원하셨다”고 말했다. 마리아가 자신의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도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

또한 “지금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마르다처럼 ‘때’에 대한 감각이 결여된 것 같다”고 지적한 그는 “아무리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도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날마다 종말의 때로 여기고 깨어 근신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지나친 은혜의 추구와 감동 위주의 설교로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적인 타협을 하지 않고 담대하게 설교하길 바란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순간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가 아닌, 제대로 된 ‘말씀’의 전파에서 출발한다.”

‘천일야화’로 불리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보면 마법의 램프가 나옵니다.

램프를 문지르면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거인이 튀어나옵니다.
배고프다 하면 먹을 것을 가져오고 원하는 것을 모두 해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마치 알라딘 램프의 거인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언약궤를 앞세워 싸웠습니다.
결과는 전쟁에서 패했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나온 영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물건에 힘이 있다고 보고 앞장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인하라는 명제를 제일 앞에 두게 했습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된 사람은 자신의 헛된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미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입니다.
반면 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신명기 18:14)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미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펼쳐 처음 들어오는 말씀에 의해 인도를 받을 수 있다고 믿거나, 십자가에 액운을 쫓은 신비로운 힘이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경건한 목회자가 쓰던 물건을 취하면 귀신을 쫓는 영험이 있다고 믿기도 하고, 십자가 앞에서 기도해야 기도가 더 잘 상달된다고 믿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한마디로 부적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을 위장한 미신이라는 것이지요.

사무엘상 4장에서도 이러한 부적신앙을 가진 자들이 등장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기 보다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가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적신앙은 결국 그들을 멸망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거룩과 성결을 상실한 채, 법궤를 부적처럼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상이나 성물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부적신앙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의 부재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장은 당시의 시대에 대해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하지 않은 시대로 규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이 없었던 것이 타락과 멸망의 원인이었던 것이지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감행했던 이유 역시 그 시대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놓았습니다.
성경은 라틴어로만 기록이 허용되었으며 라틴어를 잘 알지 못했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는데에 이용해먹었던 것이지요.

말씀의 결핍은 결국 교리적 타락을 야기하고, 그것은 반드시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독신제도를 고착화 시켰지만 고위 성직자들은 대부분 실질적인 아내를 두었습니다.
성직은 세습되었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매매되었습니다.
물질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였고 심지어 면죄부를 팔아 치부를 하였습니다.
가장 심각한 타락은 신앙이 미신적인 우상숭배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의 효험을 믿었으며, 그 효험을 늘 발휘하게 하기 위해 성호를 만들어 그었습니다.
십자가의 나무조각이나, 바울의 손수건, 교황이나 신부가 축복한 물질 등이 능력이 있는 것으로 판매가 되었습니다.
성자숭배에 빠져 성자들의 무덤에서 기도했으며, 천사들을 숭배하여 천사들을 위한 찬송과 기도를 따로 만들어 읊조리고 다녔습니다.

마리아를 숭배하여 마리아 무오설, 마리아 종신 처녀설, 마리아 승천설 등의 거짓 신화를 창조해내었고 마리아의 상을 만들어 신상처럼 숭배했습니다. 각종 성상과 성물과 성화들을 만들어 냈으며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말씀을 알지 못하니 신앙이 미신으로 변질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속에도 독초처럼 잔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바로 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말씀이 흘러나오지만, 그 말씀은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다만 지적 욕구를 충족해줄 뿐이며 자신을 치장해주는 장식에 머물러 버리고 맙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실상은 말씀과 진리가 희귀한 역설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유익이 신앙의 초점이 되면 우리의 신앙은 미신이 되고 맙니다.

말씀이 우리를 가루처럼 부셔야 합니다.
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남아야 합니다.

사무엘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버린 법궤는 그저 도금된 나무궤짝에 불과 했습니다.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떠나버리면 성도는 아무런 매력도 능력도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부적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머무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바로 맞은편 집이 무당 집이었다. 일주일에 한 두번 집 마당에서 무당이 굿을 했다. 그 당시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무당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이후, 무당이 굿을 할 때 그 마당에 가서 열심히 주기도문을 외웠다. 무당이 굿을 못하도록 말이다. 물론 무당이 굿을 못한 적은 없었다. 당시 나의 믿음이 부족했었던 것 같다.

무당에게 굿을 부탁한 사람은 굿이 진행되는 동안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모른다.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보다 더 열정적이고 경건해 보인다. 굿을 잘하기 위해서 무당에게 내는 금액은 얼마인지 아는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금액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람들이 용한 무당에게 받은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아는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긴다.

무당의 말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아는가? 무당의 말 한마디에 한국의 대기업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삼성동으로 사무실을 이주하거나 건물을 짓고 본사를 옮길 정도였다.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가리켜 누구도 신앙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미신을 좇는 자라 말한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미신은 인간이 자기에게 있는 돈이나 능력 혹은 재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는다. 그래서 귀신의 마음을 잘 달래면 자신들에게 축복을 선물하고, 그렇지 않으면 해코지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부단히 귀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며 재물 또한 바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자기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재주껏 귀신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이 바로 미신의 특징이다. 이에 비해 참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그분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이 늘 변화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는 더 중요하다. 자기 변화가 없는 믿음이란 결국 미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 하며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요즘도 사람의 병을 고치는 신유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지 아는가? 저는 한국에만 그런 줄 알았다. 한국에는 샤머니즘이 삶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병을 잘 고치는 기도원 원장님이 있다면 돈을 싸 들고 찾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맹목적인지, 또한 안수 한 번 받으려고 머리를 얼마나 들이미는지 모른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23절을 보면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은 행했지만, 그들 자신은 변화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은 말하였지만 정작 주님의 뜻대로 행한 자들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운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21절에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의 삶이 날로 날로 변화되어 가는 참 신앙의 사람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요즘 한국 뉴스에서 자주 교회의 문제점을 보도한다.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세상에서 저지르는 죄들이 교회에서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그렇게 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잘못을 한 사람들만 그렇게 조롱을 받는다면 괜찮은데 문제는 교회 전체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몇몇 대형교회만의 문제인가? 현재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고 있다면 먼저 나 자신의 신앙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참된 신앙의 소유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달래고 얼러 나의 목적만을 성취하려는 미신적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 평생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나를 믿은 것이 아니기에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 당한다면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미신이 아닌 참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참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속에 새겨야 할 세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땅’이라는 뜻의 ‘아담’이라고 하셨다. 히브리어로 ‘아다마’(adamah)는 ‘땅’이라는 뜻이다. 먼지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서 존귀한 자녀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먼지와 같은 존재로 되돌아 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도 아담을 유혹한 사단은 끊임없이 흙으로 빚어진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은 끊임없이 사단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사단은 호시탐탐 인간을 노리고 멸망시키려 할 것이다. 종국에는 우리를 사망으로 끌어 내릴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태어나면서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은 죽음에서 예외일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 이번 한 주간의 스케줄을 생각해보라. 그 약속을 한 시점이 몇일 전이든지, 아니면 일주일, 혹은 한 달 전일 수도 있다. 앞날에 약속을 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약속의 날까지는 죽지 않으리란 ‘착각’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는 사람은 있고, 노인뿐 아니라 청년과 어린아이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급히 들어오면서 한국에 인사 드려야 할 목사님들을 찾아 뵙지 못하고 오게 되었다. 그 중에 선교단체에서 사역할 때 섬겼던 목사님이 계셨다. 중국에서도 가끔 전화통화는 했었지만 미국에 와서는 한 번도 통화를 드린 적이 없었다. 미국 온지 4년이 되어서야 전화를 드리려고 인터넷에 이름을 검색했는데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나이는 60대 초반이셨다. 건강한 분이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다.

사실 죽음은 우리 삶에 아주 가깝게 밀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피라미드의 속에 있으면 죽음을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가? 피라미드는 도굴 당하고 그 시체들은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들이 피라미드를 쌓아 올릴 때 사람들이 자신들의 묘실까지 들어와서 짓밟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과거로 올라갈수록 묘지들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또 카톨릭 국가일수록 묘지가 웅장하다. 유럽에 갔을 때 유명한 공동묘지를 학생들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 묘지에는 유명한 음악가들의 무덤이 있었다.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바티칸 성당 밑에도 역대 교황들의 관이 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관들이다. 그러나 화려하고 웅장하든 초라하든 묘지엔 죽음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어느 묘지나 그 속에는 썩어 가는 시체나, 이미 다 썩어져 버리고 흙만이 있을 뿐이다. 살아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묘지를 부러워할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오늘 밤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할 때에야 비로서 미신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으며, 그분의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변화되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죽음 앞에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살아온 삶에 후회가 있을 뿐이다. 사람답게 살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함에 후회를 가지고 있는 거지,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더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하는 사람은 없다.

둘째, 크리스천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다. 그들의 시체는 흙이 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지 결코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죽는 것으로 끝난다면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도록 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체는 죽어 흙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있다. 이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다. 지옥에 간 부자가 천국을 보았을 때, 자기 집 문 앞에 있던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아브라함의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예수님이 오시기 1500년 전에 죽었다.
그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모세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그대로 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한편의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강도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공동묘지에 버려졌겠지만 그의 영혼은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육체는 죽는 육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사람의 육체는 죽게 되었다.
그렇기에 영혼만 살아서는 완전한 구원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정하신 마지막 때에 우리의 몸마저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완전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때 몸의 부활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범죄 이전의 영원한 육체로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영원한 몸의 부활 역시 이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살이 중요하다.

매일 학교를 다녀도 자신이 학생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학생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가 매를 들어도 안 된다.
자신이 학생임을 자각하는 학생만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천 역시, 자신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아는 자만이 영원한 것을 추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썩어 사라질 화려해 보이는 ‘거대한 것’을 추구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아브라함의 목동들과 롯의 목동들은 양들이 먹을 꼴 때문에 다툼이 생겼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한다. 그러면 자신은 그 반대편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유대 문화에서 작은 아버지가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줄 수가 없다. 오직 작은 아버지가 먼저 선택을 하면 그 다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시의 문화였다. 그런데 롯은 당시 중동의 문화와 예절을 무시하고 먼저 땅을 선택하였다. 왜 그런가? 그 안에 탐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했다.

눈에 보이는 소돔 땅은 에덴 동산처럼 물이 넉넉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그러나 성경은 그 땅이 애굽 땅과 같았다고도 평가를 했다. 세상적이라는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타락했으면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을 하셨을까? 그러나 롯에게는 그러한 분별을 잃어버린 자였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좋아서 쫓아가는 불나방 같은 자였다. 이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자는 결코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참된 신앙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돈이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쇠사슬에 묶여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바울은 참수형으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그보다 더 처참한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당시 거대한 것을 추구하던 로마의 황제나 부자나 정치인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이름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진심을 다해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베드로의 이름이나 바울의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들은 자녀들이 태어나면 제일 많이 짓는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이름이다. 그들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참된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 있든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시편 139:7-8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다윗의 고백이다. 또 이사야 52:12절에는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서도 계시고 내 뒤에도 계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행동을 어떻게 할까?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은 진실할 수 밖에 없고 경건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경건의 시간을 가지며 주님의 뜻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비로서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에 그분의 뜻을 구하며 믿음으로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은 다윗이 왕위에 이을 때 고백한 것이 아니다.
사울의 칼날을 피해 이웃나라 아비멜렉을 찾아가 살기 위해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 흉내를 냈을 때의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심이 아니라, 그 같은 상황 속에서 더 굳건한 신앙의 용사로 세워주시기 위함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훈련이 끝났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세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불러 주셨고 그분을 알며 믿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미신과 신앙을 혼동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일평생 참된 신앙을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삶을 바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서 멋지게 살다가, 호흡이 끝나는 날 멋지게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란다. 아무 후회 없이 말이다.




12월 18일(토)

 ♦ 12월 1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6: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번만 강하게 하사(28절)
♦ 성구 :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主) 여호와여 구(求)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求)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强)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怨讐)를 단번(單番)에 갚게 하옵소서.


기생에게 빠지고,
자신이 받은 축복을 이방 여인 때문에 잃어버리고,
결국엔 눈이 뽑혀 연자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된
삼손의 모습에서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는 삼손과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삼손과 같은 길을 가며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내 삶의 주위가 천국처럼 느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여전히 고된 맷돌을 돌리면서도 부정한 것을 부정하다고 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은 뽑히고 말았습니다.
봉사해야 할 두 손은 개인적인 일에 묶여 있습니다.
힘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은 아름답게 보이려고 다듬기만 합니다.

삼손이 가졌던 인간적인 장점들을 전혀 쓸모없게 만들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것입니다.

나의 눈이 뽑히고
나의 두 손이 묶이고
얽매인 것들에 의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환경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일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 속에서도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때로 삼손보다 더한 죄를 짓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이 떠나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은 날 수가 얼마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오늘이란 기회가
나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맡겨진 시간에 최선을 다 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

♪ 찬양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2월 17일(금)

 ♦ 12월 1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5: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라맛 레히(17절)
♦ 성구 :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사사기 15장은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 사건은 삼손으로 하여금 큰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블레셋에게 보복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여우 300마리를 붙잡아 그 꼬리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넣어 곡식단과 곡식과 감람원을 태워버렸습니다(1∼8절).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려고 유다에 진을 쳤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묶어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으나 오히려 삼손은 결박했던 줄을 끊고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 일천 명을 죽였습니다(9∼17절).

블레셋과의 싸움 후에 심한 갈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고 울부짖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히의 한 우묵한 곳을 터쳐 물이 솟아나게 하므로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을 회복하였고 소생하였으므로 그곳을 엔학고레라고 하였습니다(18∼20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40년 동안 심각한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부르짖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마노아 집안에 삼손을 보내주셨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나서 위로부터 받은 힘의 원천을 사용할 때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경솔한 모습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하도록 이 시대에 부름을 받은 삼손과 같은 사명의 사람입니다.

삼손의 모습에서 과연 우리들은 특히 나는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한 믿음의 길을 걷고 있었는지 깊은 성찰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교회가 많고 성도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지만 세상은 이전보다 더 악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으로서 삼손이 나실인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세상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주의 백성의 삶을 보여주지 못하므로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미친듯이 달려갑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깊이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자리가 과연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날 거룩한 자리인가를 점검하며 믿음의 터를 진리의 말씀 위에 더욱 견고하게 세워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연약한 삶의 자리에
하늘 새 바람 일구어
믿음의 터전에
생명의 씨앗 뿌리게 하옵소서

♪ 찬양 /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의 결론을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라맛 레히"와 "엔 학고레"라고 하겠습니다.

'라맛 레히
'란 "높은 곳"이란 "라맛" "턱뼈" "뺨"이란 "레히"라는 두 단어가 결합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라맛 레히의 뜻은 턱뼈의 산이라고 합니다.

'엔 학고레'란 "우물"이란 "엔"과 "부르짖다"라는 "학고레"라는 두 단어가 결합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엔 학고레의 뜻은 부를짖은 자의 샘이라고 합니다.

라맛레히(Ramath-lehi)(사사기 15:17)
턱뼈의 산
소라(zorah)와 딤낫 근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삼손이 나귀 턱뼈를 사용하여
블레셋 사람 일천명을 도륙한 곳.

엔학고레(En Hakkore)(사사기 15:19)
부르짖는 자의 샘
엔(우물) + 학고레(부르짖다) 

사사기 15: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 라맛레히(Ramath-lehi) / 턱뼈의 산 

사사기 15: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엔학고레((En Hakkore) / 부르짖는 자의 샘
엔(우물) + 학고레(부르짖다)
* 우묵한 곳(하마크테쉬) : 블랙홀(어두운 구멍)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사사기 15:18~19)

엔학고레(En-hakkore), 부르짖는 자의 샘

우물(엔) + 부르짖다(학고레)

1. 엔학고레의 기원

삼손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옆에 있던 나귀 턱뼈를 주어 들고 블레셋을 물리쳤다.
그러고 기진한 삼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물이 솟아나는 샘물을 주셨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기력을 회복했고, 그 샘을 엔학고레라고 불렀다.

2. 엔학고레의 뜻

엔학고레란 무엇인가?
엔학고레(En-hakkore)는 우물을 뜻하는 ‘엔’과 부르짖는다는 뜻의 ‘학고레’를 합친 것으로 ‘부르짖는 자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삼손이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응답은 삼손을 소생(revive)시켰다.

3.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삼손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삼손을 소생시키셨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부르짖어 아뢰는 우리 기도에 응답하신다.

지금 내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우리가 모를 뿐, 하나님께서는 늘 응답하신다.
내가 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면 응답이 없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에 세 가지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그래(Yes)’, ‘아니(No)’, ‘기다려(Wait)’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 뜻과 내 뜻이 같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래’ 하고 답하신다.
지금이 알맞은 때가 아닐 경우 기다리라고 하신다.
하나님 뜻에 전혀 부합하지 않을 때는 ‘아니’라고 답하신다.
빠른 기도 응답의 비결은 내 뜻을 하나님 뜻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아모스 3:3)

우리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뜻이 같지 않으면 동행할 수 없다고 하신다.

‘하나님 뜻만 뜻이고 내 뜻은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무엇이 언제 좋은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

우리도 어린아이들이 밥 먹기 전에 사탕을 달라고 하면, ‘밥 먹고 나서 먹자’하고 대답한다.
밥 먹기 전에 단것을 먹으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잘 알아듣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저 욕구에 휩싸여 계속 떼쓰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르고 가르치면서 조금이나마 하나님 마음을 알 게되는 것 같다.

4.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하나님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찌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민수기 10: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은으로 나팔 두 개를 만들라고 하셨다.
회중을 소집할 때나 앞으로 나아갈 때도 나팔을 불어야 했고, 대적을 치러 나갈 때도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나팔을 불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대적에서 구하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 백성들에게 주신 기도의 모범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다.
위기의 순간에 부르짖기만 하면 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5. 우리에게는 마르지 않는 엔학고레가 있다

응답이 없을까봐 두려운가?
아니면 그저 게으른가?
무엇이 됐건 극복하자. 하나님께서는 나팔을 불듯 그저 부르짖으라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응답하신다. 우리 안의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신다. 그 샘물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4)


엔학고레의 영성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사사기 15:18-20)

 

영어에 ‘번 아웃(burn out)’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탈진한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어떻게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 달려갈 수 있을까요?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모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택정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이 삼손을 움직여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용하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므로 사자를 염소 새끼 같이 죽이는 장사가 되었습니다.

삼손 같은 천하무적의 장수도 번 아웃 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여 일천 명을 쳐 부셨지만 너무 힘이 빠져 나귀 턱뼈를 땅바닥에 던져버리고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사기는 ‘야훼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이라는 것을 여러 번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짓고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 고통 중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그 부르짖는 기도의 소리를 들으시고, 사사를 세워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목말라 죽게 된 삼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우묵한 곳(하마크테쉬)’을 터뜨려 주셨습니다.
우묵한 곳, ‘하마크테쉬’는 어두운 구멍이란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두운 구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블랙홀(black hole)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블랙홀에 한번 걸려 들어가면 나올 수 없습니다.
빠져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빠져 들어가는 곳이 바로 수렁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잡아 끌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삼손이 번 아웃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우묵한 곳이 터져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의 샘’입니다.
삼손이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움직여 우묵한 반석을 터뜨려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누굽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 광야를 지낼 때 물이 없어 목이 마름으로 모세를 원망하고 돌질을 하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호렙 산의 우묵한 반석을 쳐서 생수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엔학고레의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회복됩니다.
정신은 얼입니다.
기(氣, spirit)입니다.
기는 채울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수 천 명을 죽인 삼손의 영성이 왜 빠져 나갔습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면 얼이 빠져 나갑니다.

사사기 16장에는 삼손이 하나님과의 나실인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하나님의 기, 얼이 빠져 블레셋 사람들에게 사로잡히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손의 영성의 원천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머리카락을 잘렸습니다.
머리카락을 삭도당한 삼손은 어두운 감옥에 갇히고 블레셋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은 자라났습니다.
고통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영성은 충전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여 아둘람 굴에서 새벽을 깨우는 영성을 얻었습니다.
삼손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사사기 16:28)  

삼손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힘을 주셨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냄으로 블레셋 사람들로 가득히 채운 다곤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사사기 16:30)

신명기 사가들이 삼손을 마지막 평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쓰시는 사람도 번 아웃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싸워 이긴 불의 사자 엘리야도 이사벨에게 쫓겨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탄원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호렙 산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렙 산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불랙 홀에 빠져 있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지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모여 힘을 회복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아시아 유럽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마가의 다락방이 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심으로 합심으로 기도함으로 영성을 충전하였습니다.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은 정신이 살아났습니다.

삼손은 나귀 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삼천과 대적하여 싸우다가 지쳐 나귀 뼈를 집어던지고 주저앉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엔학고레’ 의 생수를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었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번 아웃 된 사람이 있습니까?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까?
엔학고레의 샘물을 마시고 소생한 삼손처럼 성령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고 일어나 힘차게 다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어야 쇠잔한 영성이 살아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갖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십시오.
영적 충전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현장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말씀을 묵상하고,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합니다.
각자가 왕이 된 시대, 자기의 소견대로 하는 시대, 스스로 주인이 돼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인간은 광대한 우주의 비밀까지 파헤치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누군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성의 가치가 극대화되고 과학주의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갈망이 팽배하고 신비주의가 득세하는 혼란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인격이 파괴되고 정신적으로 공허해지며 극단화돼가고 있습니다.



12월 16일(목)

 ♦ 12월 1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4: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수수께끼(12절)
♦ 성구 :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일(七日) 동안에 너희가 능(能)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三十) 벌과 겉옷 삼십(三十)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수수께끼(a riddle)”란 히브리 단어 “후드(חוד)”를 번역한 것입니다.

‘후드’란 “어려운 문제(왕상 10:1)” “은밀한 말(민 12:8)” “오묘한 말(시 49:4. 잠 1:6)”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수수께끼는 고대 사회에서 기지나 기량을 시험할 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삼손이 낸 수수께끼는 오락의 한 형태로서 고대 근동이나 헬라 사람들 가운데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 널리 행해진 풍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삼손이 수수께끼를 낸 이유는 결혼식에 모인 하객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순수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베옷(세디님, סדינים)”은 일상적인 옷이라기보다는 피부에 닿는 “세마포 속옷”을 말합니다.

“겉옷(베가딤, בגדים)”은 평상복이 아니라 축제나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에 입는 예복을 말합니다.

고대 동방에 있어서 “베가딤”은 존귀와 부의 상징이었으며 귀중한 선물로 많이 이용되었습니다(창 45:22, 사 3:6, 7).    


삼손이 제시한 수수께끼는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상식과 지식을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은 약속된 칠 일의 기간 동안에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삼손의 아내를 협박하게 됩니다.

삼손은 단순히 잔치를 즐겁게 하려는 목적으로 수수께끼를 냈으나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신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삼손의 아내가 될 동족 여인을 협박하였습니다. 이 위협으로 인해 삼손과 블레셋 족속 간의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삼손으로 하여금 블레셋을 공격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히브리 시의 대구법적인 형태로 “먹는 자와 강한 자” 그리고 “먹는 것과 단 것”은 서로 같은 내용을 가리키면서도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풀어쓰면 “다른 짐승을 잡아 먹고 사는 동물에게서 먹는 식물이 나왔는데, 그 동물은 매우 강하고 그 식물은 달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여인의 부모들이 삼손의 아내를 블레셋 사람에게 주어 버린 행위는 삼손이 블레셋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사슬에서 자유하게 하려는 방법은 참 놀랍습니다. 삼손이 이방여인을 사랑하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방법을 보여주신 은총을 찬양하며 오늘도 우리들을 통하여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분명하게 깨닫고 아름다운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14: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아멘

  • 선입견(편견)을 버리자!
    Let's get rid of prejudice!

       삼손(Samson)
          1. 나실인(포도주, 독주, 주검, 머리)
        2. 이방여인을 사랑한 사람
          3. 부모의 말을 거역한 사람
         4. 힘의 비밀을 알려준 사람
          5.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사사기 14:4

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4: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19절 /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사사기 14: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4:15

제 칠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사사기 14:19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에베소서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오늘의 기도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불. 낙. 지교회로 세워주옵소서!



사사기 14:18

제 칠일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2월 15일(수)

 ♦ 12월 1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3: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이름은 기묘(18절)
♦ 성구 :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奇妙)니라.

“기묘(奇妙)”란 NIV 영어 성경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It is beyond understand)” 이라고 소개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네가 알 수 없는 묘한 이름”이라고 소개합니다.

사사기 13장은 “삼손”의 출생을 알려주는 “삼손의 수태고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라는 단어는 “이끌다”는 라틴어 동사 “아눈티아레(anuntiare)”에서 유래한 고유명사입니다.

수태고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천사 가브리엘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고지”라고 하겠습니다(눅 1:26∼38).

“삼손”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 단지파의 “마노아”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녀가 낳게 될 아들은 태어나면서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으로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포도주와 독주와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미리 구별된 나실인으로서 그가 할 사명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자식이 없었던 “마노아”는 앞으로 낳게 될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났을 때 남편을 급히 불러왔습니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는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낞겠으며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여호와께 드리라고 합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여호와의 사자가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마노아가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을 반석 위에 올리자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며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제서야 마노아는 그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 아내가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으셨으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을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 알려주는 것은 다른 사사들에게는 언급되지 않는 특별한 내용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수태를 알린 여호와의 사자, 리브가에게 쌍태를 알린 여호와의 사자 그리고 사사 삼손의 탄생을 알리는 여호와의 사자와 훗날  세례 요한의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수태고지는 이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구속사 속에서 삼손이란 사사가 등장합니다.
삼손은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 출신도 아닌 단지파의 후손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나면서 나실인으로 구별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삼손은 태어나면서 특별한 사명 즉 블레셋으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는 신약의 수태고지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 삼손은 구약에서 그의 출생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할 목적을 갖고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나실인은 자기 헌신의 결정에 의하여 구별됩니다.
그러나 삼손과 같은 나실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즉 구속사적인 부르심으로 사람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벧전 2:9).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할 거룩한 주의 백성의 반열에서 맡겨주신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두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 믿음으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십자가 군병들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아멘

* 기묘(필리) - 기묘자(펠레) 이사야 9:6

(현대인의 성경) 네가 알 수 없는 묘한 이름이다
beyond understanding, wonderful

사사들의 이름 / 대사사, 소사사

  1. 옷니엘(유다) 40년      2. 에훗(베냐민)
  3. 삼갈                            4. 드보라(요셉) 40년  
  5. 기드온(요셉) 40년      6. 돌라(잇사갈) 23년  
  7. 야일 22년                   8. 입다 6년 (11:1)
  9. 입산 7년                    10. 엘론 10년
11. 압돈 8년                    12. 삼손(단) 20년


사사기의 순환 구조
          불순종 - 징계 - 부르짖음 - 구원 - 불순종


사사기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 블레셋(Philistines) - 팔레스타인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갓

사사기 13: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사사기 13: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 수태고지 /
아브라함과 사라(창 17:19, 18:10, 14)
한나(삼상 1:17),
엘리사벳(눅 1:13),
마리아(눅 1:31)

사사기 1:4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찌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찌니라.

7절 /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사사기 13: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사사기 13:21-22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사사기 13:23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 


사사기 13:24-25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삼손(Samson) / 태양과 같음 

1. 세메쉬(태양) :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

2. 쉐마쉬(봉사하다) : 나실인으로 헌신

3. 쉬므셈(강하다, 귀하게 여기다) : 역사가 요세프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의 기도
분별의 은사를 주옵소서!
불.낙.지 교회로 세워주옵소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54225

12월 14일(화)

 ♦ 12월 1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2: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십볼렛(6절)
♦ 성구 :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能)히 구음(口音)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者)가 사만 이천 명(二千 名)이었더라.

“십볼렛(Shibboleth)”이란 “에브라임(Ephraim)” 사람들이 바르게 발음을 할 수 없는 단어를 말합니다.

길르앗 족속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에브라임이 입다에게 몰려가 불평합니다.

결국 길르앗과 에브라임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싸움은 에브라임의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이처럼 어이없는 이해관계에 의헤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에브라엠 족속 42,000명이 죽었습니다.
그 배경은 요단 나루터에서 “십볼렛(시냇물)” 이라는 단어를 발음하게 하여 “씹볼렛”이라고 하면 모두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사람들은 “십볼렛”이라고 발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소통(疏通)을 위한 것입니다.
소통할 수 없는 언어는 발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교만은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무모한 계획을 무너트리려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도록 언어를 분열시켰습니다.

그 결과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민족과 민족 그리고 나라와 나라가 서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인간의 과학 기술에 의해서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믿음에 의해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철학자 “하이덱거( Martin Heidegger, 1889. 9. 26~1976. 5. 26)”는 “언어는 존재의 집((das Haus des Seins)”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이란 어제의 연장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소통을 위한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일상의 언어는 생명을 유지히기 위한 필요를 요구하거나 채워가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육체적 생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을 회복한 후에 그 언어를 사람들과 소통하며 하늘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하늘의 뜻을 알려주며 구원해야 할 사람을 찾아 구원의 범위를 넓혀가는 선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찬양 / 나의 영원하신 기업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들의 이름

  1. 옷니엘(유다) 40년      2. 에훗(베냐민)
  3. 삼갈                            4. 드보라(요셉) 40년  
  5. 기드온(요셉) 40년      6. 돌라(잇사갈) 23년  
  7. 야일 22년                   8. 입다 6년 (11:1)
  9. 입산 7년                    10. 엘론 10년
11. 압돈 8년                    12. 삼손(단) 20년


사사기 12: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

* 십볼렛(이삭, 물줄기)

사사기 12: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 요셉 / (장자) 므낫세, (차자) 에브라임(창 48:1)
                                        여호수아, 드보라, 압돈, 사무엘


사사기 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사사기 12:2

입다가 그들에게(에브라임)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고로.


사사기 12:3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고.

사사기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오늘의 기도

섬김의 겸손으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시옵소서!


사사기 12장은 사사 입다가 이방 민족과의 싸운게 아니라 이스라엘 지파 중에 에브라임과 싸워서 이긴 내용과 사사 입산, 엘론, 압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12:1-7절은 입다가 에브라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성격이 참 특이한 것 같습니다.
사사기 8장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는 내용이 나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화를 낸 이유는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 에브라임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이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에브라임 사람들을 늦게 부른 건 사실입니다.
미디안과 싸우고 적군을 추격하는 일은 납달리, 아셀, 므낫세가 담당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는 일에 에브라임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뒤늦게 합류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벳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기까지의 나루들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들이 미디안의 두 우두머리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계속 미디안을 추격하였습니다.
그들이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있는 기드온에게 가져 왔습니다.

미디안을 이기는데 에브라임 사람들도 큰 역할을 감당했지만 그게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와서 왜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냐고 따집니다.
그들의 말이 정당한 요구인지 그냥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거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기드온은 아주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성질을 건들지 않고 달랩니다. 

“이번에 내가 한 일이 여러분이 한 일에 비교나 되겠습니까?
에브라임이 떨어진 포도를 주운 것이 아비에셀이 추수한 것 전부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미디안의 우두머리 오렙과 스엡을 여러분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한 일이 어찌 여러분이 한 일에 비교나 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트집을 잡습니다.
별 것도 아닌데 시비를 걸어옵니다.
급기야 말다툼이 일어날 상황입니다.
이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상대방의 말을 맞받아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질 건드려서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
성질을 돋우지 말고 부드럽게 달래듯 말해야 합니다.
기드온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말을 하니까, 그들의 노여움이 풀렸습니다.


사사기 12:1-6절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트집을 잡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사사 입다를 찾아와서 암몬 자손과 싸우러 갈 때에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난리를 칩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 싸울 준비를 하고 요단 강을 건너 사본으로 와서, 입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입다와 그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너는 왜 암몬 자손을 치러 건너갈 때에, 우리를 불러 같이 가지 않았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을 같이 불태워 버리겠다.”

그러자 입다가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힘겹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너희는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너희가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내가 목숨을 걸고 암몬 자손에게 쳐들어가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나의 손에 넘겨 주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 너희가 이렇게 올라와서 나를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느냐?”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과 싸워 무찔렀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평소에 늘 길르앗 사람들을 보고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자들이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속한 자들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평소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을 무시하고 놀렸다는 말입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을 앞질러, 요단 강 나루를 차지하였습니다.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이 강을 건너가게 해 달라고 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그에게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그에게 볼렛이라는 말을 발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볼렛이라고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요단 강 나루터에서 죽였습니다. 
쉽을 십으로 발음하는 것을 보고 에브라임 사람들을 골라내서 죽였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을 로 발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에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42,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6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입다는 죽어서,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에 묻혔습니다. 

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이렇게 기드온에게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었을까요?

사사기 8장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을 때는 기드온에게 잘못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12장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트집을 잡습니다.
사사기 12장에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는 것도 모자라 불질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에브라임 사람들의 트집은 상습적이요, 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이렇게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았을까요?
그들이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의 후광을 업고 깝죽거린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바로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거든요.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을 향해 “감히 네가 우리를 무시해?” 뭐 이런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여호수아를 배출한 지파인데, 기드온이 무시했다고 생각하고 엄청 열 받은 것 같습니다.
사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입니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법조계에서 정관예우하는 것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파에게 특별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특혜를 바라는 갑질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챙겨주고, 사람들 앞에서 세워주고, 언제 어디서나 일등석, 상석을 내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할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오직 대접만 받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의무는 무시한 채 자기 권리만 찾아 먹겠다고 난립니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일 하기보다는 자기 자랑하면서 싸돌아 다니기 좋아합니다. 좋은 일 하나 해놓고 온갖 생색 다 냅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6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입다는 죽어서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에 묻혔습니다.
입다에 대한 설명 중에서 시작과 끝에 나오는 설명이 바로 길르앗 사람 입다입니다. 

입다를 처음 소개하는 부분에서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11:1)라고 표현되어 있고, 입다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12: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입다를 소개하면서 입다 이야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입다를 길르앗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길르앗 사람 입다는 굉장한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입다는 길르앗이 창녀(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길르앗의 본처도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자라서 입다를 내쫓았습니다. 입다의 아버지가 길르앗인데, 단지 기생이 낳은 아들이라서 아버지 길르앗의 유산을 받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자기의 이복 형제들을 피하여 도망가서, 돕이라는 땅에서 살았는데, 건달패들이 입다에게 모여들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그 시절, 입다가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외친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입다의 정체성입니다. 


사사기 12:8-10절은 열 번째 사사 입산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뒤에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30명과 딸 30명이 있었는데, 딸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가나안 민족의 가문으로 시집보내고, 며느리들 30명 역시 이방 사람 집안에서 데려왔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입산은 죽어서, 베들레헴에 묻혔습니다. 

입산을 소개하면서 자기 아들과 딸들을 다른 집안(가나안 민족)의 자녀들과 결혼시킨 이야기를 왜 기록했을까요? 입산이 하나님께서 세운 사사인데 자식들을 이방 사람들과 결혼시켰다는 말입니다. 입산이 자신의 아들딸을 이방인의 아들딸과 결혼시켰다는 말은 결국 그가 사사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30이란 숫자는 입산이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입산은 아들과 딸의 결혼을 부귀영화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입산은 그의 아들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정략결혼을 통해 지지 기반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과 통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사기 12:11,12절은 열 한 번째 사사 엘론에 대한 설명입니다. 

입산이 죽은 뒤에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사사로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스불론 사람 엘론은 죽어서, 스불론 땅에 있는 아얄론에 묻혔습니다.

사사 엘론이 입산 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입산이 7년 동안 사사였는데, 엘론이 10년 동안 사사로 활동해서 낫다는 말이 아닙니다. 입산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는 말만 나오지만 엘론은 10년 동안 사사로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2:13-15절은 열 두 번째 사사 압돈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사 엘론이 죽은 뒤에 에브라임 지파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40명의 아들과 30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나귀 70마리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는 8년 동안 사사로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은 죽어서, 아말렉 사람의 산간지방에 있는 에브라임의 땅 비라돈에 묻혔습니다.          

사사 압돈에게 40명의 아들이 있었고, 30명의 손자가 있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압돈의 아들과 손자들 70명이 나귀 70마리를 타고 다닌 것이 사사에게 그리 자랑할 일인가요? 압돈을 소개하는 숫자 70/70은 압돈이 사사였지만 사사의 본분(책임과 의무)을 다하기 보다는 그냥 부자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는 자랑질 같아 보입니다. 


사사기 10-12장에 나오는 사사들 -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 그 누구도 사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요, 함량미달입니다. 입다와 그의 아들 아비멜렉도 마음에 안 들지만, 입다를 기준으로 앞에 언급된 사사 돌라와 야일과 뒤에 언급된 입산, 엘론, 압돈은 정말 사사로 생각할 만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10-16장에 나오는 7명의 사사들 –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 의 이야기 속에는 앞에 사사기 3-8장에 나왔던 사사들 – 옷니엘, 에훗,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 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사가 다스리는 동안에 평온했다’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문제가 있는 사사들이었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사들의 이야기를 왜 사사기에 기록해두었을까요? 사사기의 주인공이 사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 아닐까요? 사사기에 여러 번 나오는 구절이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입니다(17:6; 18:1; 19:1; 21:25).     

작은(minor/소) 사사들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사울 왕이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이 왕이 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활약상이 두드러진 사사들이나 이름뿐인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부분 몰상식하고 비윤리적이고 함량미달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사사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믿고 스스로 일어난 사사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사들을 볼 때, 그들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의 고통과 압제 속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12월 13일(월)

♦ 12월 1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1: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민의 머리(8절)
♦ 성구 : 길르앗 장로(長老)들이 입다에게 대답(對答)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子孫)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居民)의 머리가 되리라.

“모든 거민의 머리(our head over all who live)”라는 의미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길르앗의 통치자"라고 소개합니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자(庶子)의 설움’을 받아 아버지의 기업을 받을 수 없다며 길르앗의 부인이 낳은 자녀들에 의해서 쫓겨나 “돕” 땅에 거주했습니다.

“적자(嫡子)와 적녀(嫡女)”는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남자와 여자를 말합니다.

“서자(庶子)와 서녀(庶女)”는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남자와 여자를 말합니다.

“얼자(孽子)와 얼녀(孼女)”는 천민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남자와 여자를 말합니다.

“서얼(庶孼)”이란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를 말하며 노비와 같은 천민의 대우를 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홍길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얼마 후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 하므로 길르앗의 장로들은 ‘입다’에게 “우리의 장관”이 되라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입다는 언제는 나를 미워하여 아버지의 집에서 쫓아내더니 환난을 당한다고 어찌 나를 찾아왔느냐 하며 묻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은 “만일 당신이 암몬과 싸워 이기면 우리들의 머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입다는 장로들과의 약속을 확인 후 암몬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올 때 나를 가장 먼저 반기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합니다.

입다가 암몬을 제압하고 돌아올 때 입다의 무남독녀 그의 딸이 춤을 추며 영접하므로 입다는 자기 옷을 찢으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로다.” 하며 탄식합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니 말씀대로 행하소서 다만 나에게 두 달의 시간을 허락하면 동무들과 산에 올라가 처녀로 죽음을 애곡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두 달 후에 입다의 딸은 약속대로 번제의 제물이 됩니다. 이때부터 해마다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길르앗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였다고 합니다.

함부로 서원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언 29:12)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전도서 5:5)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 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찌니.”(신명기 23:22∼23)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어떤 조건에 의해서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아직도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그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여 열매 맺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1년을 마무리하는 은총의 계절에 내가 맺은 열매는 무엇인가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라던 주님의 준엄한 책망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 찬양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11:8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아멘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현대인의 성경) 당신이 길르앗 사람의 통치자가 될 것이오

 (우리말 성경) 당신은 우리 길르앗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될  
것입니다

   길르앗(Gilead) : 강하다
     므낫세의 손자, 길르앗인의 조상(민 26:29, 수 17:1)
  입다(Jepthah) : 그가 열다

입다의 신앙 

        1. 큰 용사(1절)
        2. 서민들의 지도자(3절) / 사무엘상 22:1-2
        3. 여호와 신앙(9절)(24절)(27절)  
        4. 역사의식(14-22절)
        5. 서원하는 신앙(30-31절) / 사사기 11:37


사무엘상 22:1-2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사사기 11: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 입다의 딸은 성소에서 평생 처녀로 봉사하였다

사사기 11: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에베소서 5:17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오늘의 기도

주의 뜻을 끝까지 따르게 하옵소서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옵소서


묘서동처(猫鼠同處)

대학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택한 사자성어
묘서동처(猫鼠同處)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뜻이다.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됨을 의미한다."

교수신문은 전국 대학교수 88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 29.2%(514표)가 ‘묘서동처’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았다고 12일 밝혔다. 조사는 지난달 26일부터 지난 2일까지 응답자들이 6개의 사자성어 중 2개씩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묘서동처’는 중국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내용에 따르면, 한 지방 군인은 집에서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고양이가 쥐를 해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군인의 상관이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바쳤고, 중앙관리들은 ‘복이 들어온다’며 기뻐했다.
이 모습을 본 단 한명의 관리만이 “이것들이 실성했다”며 한탄했다.

통념상 쥐는 곡식을 훔쳐먹는 ‘도둑’에 비유되고, 고양이는 쥐를 잡는 동물로 여겨진다.
때문에 쥐와 고양이가 함께 있다는 것은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패거리(한통속)가 됐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 같은 의미의 사자성어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힌 것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 땅 투기 사건 등 정치 사회적 사건들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묘서동처’를 뽑은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는 “국정을 엄정하게 책임지거나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시행하는 데 감시할 사람들이 이권을 노리는 사람들과 한통속이 돼 이권에 개입하거나 연루된 상황을 수시로 봤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묘서동처 격이라면, 한 마디로 막나가는 이판사판의 나라”라며 “기본적으로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은 케이크를 취해선 안 된다. 케이크도 자르고 취하기도 하는 꼴, 묘서동처의 현실을 올 한해 사회 곳곳 여러 사태에서 목도했다”고 했다.

한 60대 인문학 교수 또한 “국가나 공공의 법과 재산, 이익을 챙기고 관리해야 할 처지에 있는 기관이나 사람들이 불법과 배임, 반칙을 태연히 저지른다. 감시자, 관리자 노릇을 해야 할 사람이나 기관이 호시탐탐 불법, 배임, 반칙을 일삼는 세력과 한통속이 돼 사적으로 이익을 챙기는 일들이 속출한 양태”라며 ‘묘서동처’를 뽑았다고 밝혔다.

두 번째로 많은 표를 받은 사자성어는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쳐 피곤하다’는 뜻의 ‘인곤마핍’(人困馬乏)이었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피난길에 ‘날마다 도망치다 보니 사람이나 말이나 기진맥진했다’고 한 데서 따온 사자성어다.

이를 뽑은 교수들은 코로나 팬데믹을 이에 비유하며 “코로나를 피해 다니느라 온 국민도 나라도 피곤한 한 해였다”
“코로나로 힘든 시국에 정치판도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인다” 등 반응을 보였다.

3·4위는 ‘이전투구’(泥田鬪狗), ‘각주구검’(刻舟求劍)이 뽑혔다.

‘이전투구’는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

‘각주구검’은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뱃전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가 나중에 그 칼을 찾으려 한다’는 의미다.

그 뒤로는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의 ‘백척간두’(百尺竿頭)와 ‘아이가 물에 빠지려 한다’는 뜻의 ‘유자입정’(孺子入井)이 올랐다.







히브리어 라(나쁜 악 역경)는 라아(괴롭히다)에 뿌리 둔 단어입니다.

라는 구약에 667번 나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 2:8)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창 13:13) 그들의 잘못(창 37:1) 참담한 말씀(출 33:4) 사나운 짐승(레 26:6) 곤경을 당하지 않게(11:15) 나쁜 일을 저질러서(신 9:18) 악한 영(삼상 16:14) 등에서 쓰였습니다.

영어 성경은 라를
디재스터(disaster· 화 참사)
이블(evil· 악)
애너미(enemy· 적)
리프로치(reproach· 나무람 비난)
디스그레이스(disgrace· 망신 불명예)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선지자 스바냐가 전했습니다.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습 3:14~17, 새번역)

다시는 화(禍)를 입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기쁜 그 날을 기다립니다.
 

무종교, 탈기독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이나 초월적 존재 대신, 인간 자신을 숭배하면서 불멸과 신성,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향해 의심과 비판의 질문을 던집니다. 기독교인 역시 신앙 난제를 호소하며 묻습니다. 국민일보는 창간 33주년을 맞아 이 같은 솔직한 질문에 대해 정직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5)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소망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변종 오미크론의 집단감염까지 확산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엔 질문이 쏟아진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왜 침묵하느냐’, ‘기독교인이라면 바이러스가 피해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조롱 섞인 것들이다. 박영선(73) 남포교회 원로목사는 이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내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가 믿는 신은 도대체 뭐냐.’ 이는 구약 시대부터 계속해 등장하는 질문이다.

박 목사는 최근 출간한 ‘고난이 하는 일’(IVP), ‘미안해, 잘해 볼게!’(무근검) 등을 통해 위드 코로나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깊이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순교의 시대를 지나 부흥의 시대, 별 노력 하지 않아도 성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를 거쳐 한국교회는 이제야 비로소 수치와 부끄러움을 감내하고 내적 수준과 깊이를 더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수많은 교회가 전도폭발 프로그램 등을 통해 새신자를 출산하는 부모의 역할에 치중했다면, 이제는 낳아놓은 자식들을 깨우쳐 길러내는 교사로서 신앙의 깊이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지난 4일 서울 송파구 교회에서 만난 박 목사는 예수를 믿는 것의 정의부터 다시 얘기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뭘까요. 코로나를 기회로 믿지 않는 이들뿐만 아니라 믿는 성도들에게도 이를 설명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죽음을 넘어 영생을 가지고 있다면, 이 정도 고난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셔서 안 믿는 당신들과 동일한 고통을 받게 하신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거기까지만 말해도 성공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못 알아 듣는 게 당연합니다.”

‘교회는 답을 가지고 있느냐’는 세상을 향해 ‘교회도 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통해 더 성숙해지고 깊어질 것이다’란 메시지만 줘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고난과 죽음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연함,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이 전통, 구원과 영생을 말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이 모습이 바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고 교회를 바라보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전한다. 박 목사는 “믿는 우리는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점,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시고,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출 34:6)이란 점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명설교가로 꼽히는 박 목사는 1985년 남포교회를 개척한 이후 지금까지 설교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83년부터 2013년까지 합동신학대학원대에서 설교학 교수로 강의하며 복음주의에 적을 둔 신학적 다양성을 폭넓게 모색해 왔다. 박 목사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 우리가 신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곡해들이 송두리째 부서지는 것이 바로 고난이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학자 유발 하라리는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서 종교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질서”일 뿐이라고 깎아내렸다. 후속작 ‘호모 데우스’엔 이렇게 적었다. 언젠가부터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창조하는 힘에서 반응하는 힘”만 과시하고 있다고.

하라리가 아니더라도 명망 있는 학자 중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가 수두룩하다. 영국의 리처드 도킨스는 ‘신, 만들어진 위험’ 말미에 이런 글을 적어두었다. “나는 우리가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성장함으로써 모든 신을 단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이 같은 주장들에 어떻게 응수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논리는 무엇인가. 지난 3일 경기도 성남 만나교회(김병삼 목사)를 찾아간 건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병삼 목사는 ‘하나님의 존재=인간의 상상’이라는 견해에 대해 “인류사에서 계속 제기돼 온 주장”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인간은 바벨탑을 지을 때부터 끊임없이 신의 존재에 의심을 품었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인간은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절망에 빠지곤 했죠. 인간의 힘으로 뭐든 할 수 있다며 교만에 빠진 순간마다 처절하게 실패를 맛본 게 인류의 역사였어요.”

그러면서 대화는 과학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뻗어 나갔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가 대립이 아닌 공존의 구도를 띨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김 목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과학은 그 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는 밝힐 수 있으나 왜 벌어졌는지에 대한 근본 원인은 하나님만 알고 있다”면서 “하나님이 계시를 할 때만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것, 그게 인간이 가져야 할 겸손한 태도”라고 말했다.

김 목사가 거듭 강조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었다. 그는 “기독교가 힘을 잃은 이유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드러난 ‘현상’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독교의 본질은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과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앞두고 준비한 자료를 건네줬다. 거기엔 영국 기독교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CS 루이스가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 썼던 문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여러분의 외부에 있는 것들(현미경이나 망원경)인 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도구는 여러분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들의 배후에 무언가-그 사물들과 다른 종류의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과학이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기독교인은 하나같이 뒤틀려 있다.
최근 방영된 ‘지옥’ 역시 마찬가지다.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대개 부정적이다.
세상이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들도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이중적이다’ ‘비합리적이다’ 등이 사회의 일반적 외침이 됐다.

이런 시선에 기독교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지난 3일 서울 강서구 이음숲교회를 찾아 손성찬 목사에게 답을 구했다.
손 목사는 “누군가 제게 ‘기독교인은 왜 이래요’라고 묻는다면 전 아마도 그분께 ‘정확하게 보셨고, 합리적인 비판이 맞습니다’라고 얘기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기독교를 변호할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었다. 손 목사는 “(그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 화가 나 있는 상태이지 않나. ‘우린 그렇지 않다’며 싸울 필요가 전혀 없다. 변명할 게 아니라 죄송한 게 맞다”고 했다.

손 목사는 “언어에는 말과 행동 두 가지가 있다. 사랑한다면서 때린다면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듯 우리는 둘 중 행동의 언어를 더 믿는데, 이게 메시지와 메신저의 문제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메시지가 복음이라면 메신저는 이를 전달하는 사람이 된다. 메신저의 부정적 행동을 통해 메시지 자체도 거짓이 돼 버릴 수 있다”고 전했다.

손 목사는 지금 한국교회에 결여된 것은 ‘솔직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이런 시선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는 이미 깔린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자꾸 아닌 척하는데 이 역시 교회의 책임임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손 목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같이 버리진 말 것”이라는 서양 격언을 인용하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주관적이라는 걸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손 목사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 맞대응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그 사람 개인적 맥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 목사는 “우선 그 사람의 상황에 공감해야지 않겠냐”며 “이 말을 왜 했을까, 이 질문을 왜 했을까 고민하고 같이 답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답을 주는 건 충분조건일 뿐 필요조건은 관심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은 한번 앉은 자리에 계속 앉는 경향이 있다.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자를 옮기는 때가 있는데, 의자가 망가졌거나 불편해졌을 때”라며 “기독교 신앙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삶의 어떤 부분이 고장 났다 느낄 때 주를 찾게 되는데, 그때 기독교인으로서 손을 잡아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12월 11일(토)


 ♦ 12월 1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0: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께서 근심하시니라(16절)
♦ 성구 : 자기(自己) 가운데서 이방 신(神)들을 제(除)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困苦)를 인(因)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근심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노예로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신분 사회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주위 여러 민족들이 강한 힘을 갖는 것은 그들을 통치하는 절대 군주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미디안 사람들과 전투에서 승리한 기드온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간청한 것처럼 강력한 군주의 존재를 갈망합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은 오직 단 한분 하나님이시라며 백성들의 간청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기드온은 유일한 통치자 왕을 말하면서도 금을 모아 에봇을 만들었고 첩을 많이 두어 칠십 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여전히 기드온에게도 또한 우리들에게도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겜의 첩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을 낳았고 아비멜렉의 탐욕은 기드온이 죽은 후에 스스로 왕이 되려고 기드온의 칠십 명의 아들들을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비멜렉도 그를 시기하는 세겜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러한 비극이 모두 끝난 후 정신 차린 이스라엘 백성은 한동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무릎 꿇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평화로운 삶에 만족하지 못한 백성들은 또다시 반복되는 악순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섬기지 않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지긋지긋한 악순환 고리를 끊지 못하는 백성들처럼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반복되는 삶의 악순환 고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결단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당장 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오, 주님
일어나 걷게 하소서
뒤를 돌아보지 않게 하소서
미련을 버리고
꿈을 찾아가게 하소서

♪ 찬양 /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10:16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아멘

* 하나님의 근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현대인의 성경 / 아파하셨다
새번역, 공동번역 /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

* 근심하다(카차르, qâtsar)  קָצַר    

견디지 못하다, 번뇌하다, 추수하다
이스라엘의 회개와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사사기 10:1

아비멜렉의 후에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도도(Dodo) 사랑함
* 부아(Puah) 입
      * 돌라(Tola) : 벌레

사사기 10: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 이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 야일(Jair) : 하나님이 교화시킴

사사기 10:6-7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사사기 10: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 8. 20~1965. 10. 22

 - 종교는 문화의 실체(내용), 문화는 종교의 형식
  - 타락한 문화
      1. 맘몬주의
      2. 소비주의
      3. 쾌락주의
      4. 성장주의
  - 종교다원화, 포스트모더니즘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오늘의 기도

근심을 회개로 바꾸게 하소서!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옵소서!


이스라엘의 문제

평화로울 때는 하나님이 가져다주신 평화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그 문제의 해결에만 목적을 두고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현안 해결이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왕으로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그 왕 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문제 해결, 현안 해결에만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소유화하고 도구화합니다.하나님이 사사 돌라를 통해서, 사사 야일을 통해서 행하시려는 바는 단지 그들을 어려움에서 구해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의 현장을 통해서 그들의 진정한 왕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없으므로 각자의 소견에 좋을 대로 하는 그 시대에, 사사 돌라를 통해 23년 동안, 사사 야일을 통해서 22년 동안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사를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근심

눈에 보이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듭니다.

11-13절에서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며 구원을 요청하는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15-16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신 하나님은 그들이 당하는 말 못할 수고와 고통을 보시고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십니다. 죄악에 대하여 엄격하시지만 그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여전히 실패와 죄악의 패턴을 반복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진노하시면서도 또한 그 죄악의 곤고함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때문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계신 하나님

오늘 우리가 선 자리는 어디입니까? 또 죄악 가운데 넘어져 주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의 실타래 한가운데 서 있습니까? 문제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좀처럼 찾아올 것 같지 않던 평화의 시대, 번영과 성공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평화와 권세, 번영과 성공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견고히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문제 해결에 혈안이 되어있는 나의 시선을 문제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지난 시간의 성공적인 결과에 도취되어 또 다른 성공과 더 큰 만족을 찾으려는 나의 시선을 들어 영원하고도 완전한 왕이신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보이는 그 현안 너머에 계신 왕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 땅과 하늘을 다스리시는 영원하고도 완전하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을 참된 내 인생의 왕으로, 내 개인을 넘어 가정, 교회, 국가와 민족, 세계의 진정한 왕으로 그분을 바로 볼 때, 오늘 우리는 죄악의 반복되는 실패의 패턴을 끊고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참된 승리와 안식의 삶,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X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아파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새 걸음을 시작할 때 비로소 오늘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펼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사사기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징벌의 도구를 들어 징계하시고,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지도자(사사)를 택하신 후 사사를 통해 구원하시고 평화를 얻어 생활하다가 다시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시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또한 후반부에는 애굽을 나와서 가장 잔악한 사건이 발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시기에는 총 13명(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을 포함할 경우)의 사사가 나옵니다.   

사사기 1장

사사기 1장, 여호수아 죽은 후, 각 지파별로 적과 싸우며 쟁취해 가는 과정.
가나안 사람과 전쟁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를 올려보내고, 유다지파는 함께 인접해 살고 있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갈 것을 요청하여 싸워 베섹에서 승리함. 왕인 아도니 베섹을 만나 수족이 여섯인 그를 잡아 수족의 엄지가락을 자르고 끌고 가니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죽음.(7절)

예루살렘을 쳐서 파하고 헤브론(기럇 아르바)을 취함. 기럇 세벨을 취함. 이 지역을 갈렙의 아우(조카임, 갈렙의 나이가 85세인데, 웃니엘이 친 동생이라면 결혼적령기의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게 되죠, 광야에서 20세 이상은 다 죽었을 것이니까 잘 맞지 않습니다.)인 옷니엘이 취하여 갈렙이 딸 악사를 아내로 줌. (13절)

모세의 장인은 겐사람으로 백성 중에 함께 거한 것이 나옴. (민수기 10장 29절에서 아마도 모세가 처남 호밥에게 같이 가자고 했던 때에 함께 했을 가능성이 높음)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해 지금까지 예루살렘에 거함.(21절)

요셉 족속이 벧엘을 취함.(25절)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들이 대부분 쫓아내지 못함.

사사기 2장

사사기 2장, 여호와의 사자(과연 누굴까?)가 길갈에서 보김에 이르러 그 땅 거민과 언약하지 말고 그들의 단을 헐라했는데 청종치 않았다고 책망하고,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올무와 가시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움.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일어난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함.(10절)(대단히 가슴아프고 의미있는 부분으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고 상관없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모습을 표현한 내용으로 이해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며 악을 행함.

여호와께서 노략당하게, 대적의 손에 패하도록 하시고, 재앙을 내리고, 괴로움이 심하게 놔두심.

사사기의 개요같은 내용이 2장 16절부터 19절까지임.

사사를 세우사 대적에게 건져내게 하셨으나 사사 말도 안 듣고 다른 신들을 섬김. 

사사를 세울 때는 사사와 함께 하셨고 사사가 죽은 후에는 패괴하였음.

여호수아가 죽을 때 이방 열국을 남겨 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도를 행하는지 시험하려 함임.(21-23절)  

사사기 3장

사사기 3장,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에게 가르쳐 알게 하기 위해 남겨두신 열국으로 여호와께서 명하신 명령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습니다. (4절)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이방 열국과 아들과 딸을 주고 받으며 그들의 신을 섬겼습니다.(6절)

 

첫 사사 옷니엘(7-11절)

1. 악을 행함,

2. 메소포타미아(구산 리사다임이 왕)를 사용, 8년간 섬김,

3. 부르짖음.

4.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을 택하심, 구원하시고 40년을 평안함.

 

둘째 사사 에훗(12-30절)

1. 악을 행함,

2. 모압(에글론이 왕)을 사용, 18년 섬김,

3. 부르짖음,

4. 베냐민 지파 에훗(왼손잡이:오른손이 불구임을 의미하는 말임)을 택하심, 에글론을 칼로 암살, 구원하시고 80년을 평안함.

19절에 '돌 뜨는 곳'은 '신상 만드는 곳'을 의미하는 단어 '페실림'을 번역한 것임.

 

셋째 사사 삼갈(31절)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 

사사기 4장

넷째 사사 여 선지자 드보라

1. 악을 행함,

2. 가나안(야빈이 왕)을 사용, 20년간 학대,

3. 부르짖음.

4. 드보라를 선택, 전쟁에서 바락을 보내려하나 드보라와 함께가기를 청함. 바락과 드보라가 게데스로 가서 스불론, 납달리 만명을 택하고 전쟁을 치름.

다 이기고 적장 시스라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숨자 야엘이 시스라를 죽임. 그후 야빈을 진멸시킴. (24절)

그때, 모세의 장인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게데스에 살고 있었음. (11절)

 

사사기 5장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음. (2절, 9절)

*번역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겠으나, 헌신이라는 단어가 출애굽기에서 나오고(아론의 지도하에 우상을 만들었을 때 모세를 돕는 레위인들에게 사용된 단어임) 두번째 등장하고 있음.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31절)

40년간 태평하게 함.

사사기 6장

다섯째 사사 기드온

1. 악을 행함,

2. 미디안을 사용, 7년간 압제

3. 부르짖음.

4. 기드온을 선택, 40년이 평안함.(8장 28절)

11절부터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 사명을 깨워주는 순간입니다.

기드온 : 함께 계시는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항변하는 기드온.

여호와 : 내가 너를 보내니 미디안에서부터 구해내라.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14절)

기드온 : 므낫세 지파 중 가장 미약한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여호와 : 너와 함께 하리니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

기드온 : 당신이 주님이신 표징을 보여달라. 예물 준비해서 드릴 때까지 기다려달라.

기드온이 반석위에 고기와 무교전병을 두자,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 끝으로 사름.

기드온이 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이라고 함.(24절)

기드온이 사명을 감당하는 행사를 하도록 하나님이 지시하심.

즉, 밤에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고(목상이니까 찍어야 함) 한을 쌓은 후에 아세라 나무로 불에 태워 번제로 둘째 수소를 드림. (27절)

성읍사람들이 낮에 이 사실을 알고 항의를 하러 기드온 집에 옴. 아버지 요아스가 강변하고 끝냄.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칭함. (바알과 대항하다라는 뜻, 성경에서는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을 즉 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임.)(32절)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이 요단을 건너와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침.

여호와의 신(성령님)이 기드온에게 강림하고, 기별하여 백성을 모음.

기드온이 양털을 가지고 소명을 확인함. (36-40절) 타작마당에 둔 양털과 마당을 번갈아 가면서 한 쪽만 적시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고 확인하는 기드온. 양털먼저, 마당 다음에.  

사사기 7장

기드온 진영이 하롯샘 곁에 진치고, 미디안은 모레산 앞 골짜기에 진을 침 (1절)

하나님께서 사람의 힘으로 이겼다고 할까 두려워 너무 많다고 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니 2만 2천명이 돌아가고 1만명만 남음. (3절)

그래도 많다고 해서 물가에서 물을 핥는 자를 빼고 무릎을 꿇고 물을 먹는 자는 다 보내서 300명만 남김.(7절)

밤에 기드온이 부하 부라를 데리고 적진으로 가보니, 적은 메뚜기의 중다함같고, 해변 모래처럼 많더라.(12절)

적진에서 미디안 사람이 자기들끼리 꿈 이야기를 하면서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들어와 장막을 쓰러뜨렸는데 "그것은 기드온의 칼날이었다"라고 해석까지 하는 소리를 들고 확신을 가지고 돌아가 3백명을 3부분으로 나누고 나팔과 휏불을 감춘 빈 항아리를 들고 전진함.

나팔을 불때 손에 가진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 오른 손에 나팔을 불며,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포위하자, 적군은 서로 칼날로 치게 하고 미디안을 추격함.

에브라임에 기별을 보내 치게 하고 두 방백을 잡아 죽임. 요단 저편에서 기드온에게 나아옴. (25절까지)   

사사기 8장

사사기 8장, 에브라임 사람들이 시기한 마음으로 기드온에게 따지려할 때 기드온의 지혜로운 답변으로 갈등을 피하고 힘을 합함. *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기드온 집안)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절)

기드온 삼백용사들이 비록 피곤하나 따름(4절)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협조하지 않는 숙곳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을 세바와 살문나를 파하고 돌아오면서 징벌함. 세바와 살문나를 데리고 와서 장자 여델에게 처단할 것을 지시하나 두려워하자 기드온이 죽이고, 목에 있는 달의 형상을 장식으로 취함. (21절)

백성들은 기드온과 자식들이 자신들을 다스려달라고 했으나 기드온은 여호와께서만 다스릴 것이라고 말함.(23절)

한가지를 청구하는데, 대적이 차고 있던 금 귀고리를 달라고 함. 이스마엘 후손으로 그들은 금 귀고리를 하고 있었음) 그러자 탈취물을 줌. (금 귀고리, 새달 형상의 장식, 패물, 자색 의복, 약대 목에 둘렸던 사슬)(26절)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성읍 오브라에 두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음란하게 섬기고, 그게 기드온과 집에 올무가 됨.(27절)

기드온이 사는 날 동안 40년이 평온함.(28절)

부인이 많은 기드온이 아들을 70명이나 둠.

세겜에도 첩이 또 있는데 그의 아들이 아비멜렉임.(31절)

기드온은 죽고 아비 요아스의 묘실이 있는 오브라에 장사지냄.(32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음.(34,35절)

사사기 9장

기드온 사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모습, 하나님의 심판까지..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외가쪽의 형제와 친척들에게 자신이 다스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선동하고, 불량배를 사서 오브라로 데리고 가서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들 70명을 다 죽이고, 말째 아들 요담만 숨고 살아남.(5절)

세겜과 밀로 사람이 아비멜렉을 세겜에서 왕으로 삼자 요담이 그리심 산 꼭데기에 올라가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 비유를 설명하며,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은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 아니라고 호소함. 

그리고 아비멜렉과 세겜/밀로족속이 서로 불을 내어 사를 것을 예언하고 브엘로 도망함.(21절)

아비멜렉이 다스린 지 3년이 지나 악한 신을 하나님이 보내사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함.(23절)

이는 70인을 죽인 죄를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에게 돌아가게 하심.(24절)

에벳의 아들 가알이 세겜사람들에게 선동하며, "왜 아비멜렉을 섬기느냐 차라리 세겜 사람들은 하몰이 후손을 섬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아비멜렉을 저주하자, 세겜 성읍의 장관 스불이 사자를 아비멜렉에게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하여 결국 가알과 전투를 벌이게 하고, 가알은 쫓겨 도망하고, 가알을 쫓는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손에 많이 죽음.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 1000명까지 불질러 죽임. 

계속 추격하며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진치고, 성중 망대에 숨은 사람들을 또 불질러 죽이려고 할 때에,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 머리 위에 던져 두골을 깨뜨리자, 아비멜렉이 전령을 불러 자신을 죽이게 함. (여인의 손에 죽었다는 소리 듣기 싫다며).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이 형제에게 행한 악행을 갚으신 것임.(56절)

그리고 세겜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추종한 악도 갚으신 것임.(57절). 결국 요담의 저주대로 응한 것임. (57절)  

사사기 10장

아비멜렉(여섯째로 우선 분류) 후에, 도도의 손자 부아(일곱째 사사)가 사사로 일어남. (아비멜렉이 사사로 취급되는 것 같음)

23년 다스리고 죽음.

야일(여덟번째 사사)이 사사가 되어 22년을 다스림.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악을 행함.(6절)

2. 블레셋과 암몬의 학대를 18년 동안 당함.(8절)

3. 부르짖음.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니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너희가 택한 신에게 부르짖어 구원해달라고 하라. (13,14절)

    "이스라엘 사람들의 곤고를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6절)

    *정말 가슴 터지는 하나님의 마음아닌가? 이런 백성을 끝까지 데리고 가시는 하나님..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치고, 이스라엘 자손도 미스바에 진을 침.





12월 10일(금)


♦ 12월 10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9:1∼57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그늘에 피하라(15절)
♦ 성구 :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王)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避)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내 그늘에 피하라”는 말씀은 기드온의 첩이 낳은 아들 “아비멜렉”이 고향 사람들을 충동하여 기드온의 모든 아들을 죽였을 때 막내아들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는 왕이 되라는 것을 거절하였으나 가시나무와 같은 ‘아비에셀’은 다른 나무들에게 “너희가 내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는 비유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주었거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 아들들을 쳐서 죽인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다”고 빗대어 말했습니다.

에벳의 아들 “가알”은 세겜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아비멜렉”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데베스 사람들이 견고한 망대 위에 올라갔을 때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불사르려 할 때 마침 망대 위에서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트리자 아비멜렉은 병기를 잡은 소년을 불러 “나를 찔러 죽이라. 사람들이 그가 여인의 손에 죽었도다! 하고 비웃을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소년의 칼에 찔려 죽으므로 하나님은 칠십인의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아비멜렉의 악을 갚았습니다.

감람나무는 기름을, 포도나무는 맛 좋은 포도주를 공급하는 것이 그 나무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처럼 자기의 본분을 잃어버리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나에게 어떤 제안이 찾아왔다면 먼저 “이 일이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며 유익을 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직분을 얻기 위하여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며 섬김을 실천하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을 줄 수 있는 믿음을 배우고 훈련하는 곳입니다.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교회에서 날마다 영적으로 성숙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 찬양 / 시온 성과 같은 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zMdZAETMtcE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9: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아멘 


사사기 9: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 여룹바알(Jerubbaal) / 바알과 다툼
* 아비멜렉(Abimelech) / 왕의 아버지
* 세겜(Shechem) / 검은, 일부분

사사기 9:5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 요담(Jotham) / 여호와는 바르심 


사사기 9: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을 삼았으니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 행한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사사기 9: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사사기 9:26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 형제로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의뢰하니라.

* 에벳(Ebed) / 종
* 가알(Gaal) / 갚음, 혐오 

사사기 9:52-53
아비멜렉이 망대(데베스) 앞에 이르러서 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 데베스(Thebez) / 므낫세 지파에 속한 지역의
요새화된 성


사사기 9:56-57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의 기도

주여 진실하게 하옵소서!
불낙지교회를 세워주옵소서!



12월 9일(목)


 ♦ 12월 9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8:1∼35
♦ 묵상을 위한 주제 : 에봇 올무(27절)
♦ 성구 : 기드온이 그 금(金)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城邑)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淫亂)하게 위(爲)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금을 상납받아 스스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금 1700세겔은 대략 20kg을 말합니다.
금 1돈은 3.75g입니다.
금 1700세겔은 대략 5300돈입니다.
엄청난 양의 금으로 제사장의 옷 “에봇”을 만든 것입니다.

기드온은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에봇’을 만들었고 “우림”과 “둠밈”처럼 초승달 장식까지 달았습니다.

기드온은 겉으로는 겸손한척 하며 왕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만들고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미디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드온을 세상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만든 기념비와 같습니다.

왕의 버금가는 존경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공성이 불거(功成而 弗居)”란 “공을 이루고 머물지 않는다.” 뜻입니다.
공을 주장하면 이루어 놓은 공도 물러간다고 합니다.

기드온은 아주 작은 자로 포도주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드온을 “큰 용사여!” 하고 부르며 그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겼습니다. 마치 내가 위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일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기드온을 세워 미디안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가장 작은 자로서 부름을 받아 큰 용사로 사명을 잘 감당했으므로 자기를 나타내려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교만(驕慢)”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기드온 입니까?
바로 이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척 하면서
속마음에는 교만이 꿈틀거립니다.

주여,
나는 절망적인 사람입니다.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기드온의 거울로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기드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동시에 인간의 절망적인 삶도 봅니다.

주님,
내안의 기드온이 기어 나올 때
나를 성령의 바늘로 찔러 깨닫게 하시고
뇌성벽력과 같은 음성으로
멈춰라! 하는 소리도 듣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 찬양 /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2월 8일(수)




♦ 12월 8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7: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적진을 치라(9절)
♦ 성구 :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敵陣)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적진을 치라(against the camp)”

기드온과 그의 군대가 “하롯 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1절)
“하롯”이란 “떨림”이란 뜻입니다.
하롯이란 지명의 의미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기드온의 군대가 미디안 군 앞에서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에게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두려워 떠는 자들은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때 돌아간 백성들이 22,000명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백성들은 10,000명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기드온에게 아직도 백성이 많기 때문에 물가로 내려가서 물을 마실 때 “개가 핥는 것처럼 혀로 물을 핥는 백성”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백성” 그리고 “손을 움켜 물을 먹는 백성”을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백성들은 300명이었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메뚜기처럼 많고 심지어 해변의 모래처럼 수다한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300명의 사람과 무수한 사람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기드온과 300명의 사람들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기드온은 부라와 함께 미디안의 진을 정탐합니다.
미디안 진에서 어떤 사람이 꿈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기드온이 들었습니다.
그 꿈 이야기는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들어와 진을 무너트렸다”고 합니다. 그의 동무는 “이 꿈은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의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다”고 해석합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들을 세 대로 나누어 항아리 작전으로 미디안 군대를 무너트렸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모든 성도들은 기드온의 300 용사처럼 이 세상을 이겨야 할 주의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군사로서 날마다 삶의 자리에서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큰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큰 용사는 내 힘이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나를 강하고 담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엡 6:12∼13).

오, 주님
약한 나로 강하게
어리석은 나로 슬기롭게
늘 나와 함께 하셔서
삶의 자리에
승리의 기를 세우게 하옵소서
♪ 찬양 / 피난처 있으니

https://www.youtube.com/watch?v=Ug7s0IC4KzU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2월 7일(화)

♦ 12월 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6:1∼40
♦ 묵상을 위한 주제 : 큰 용사여(12절)
♦ 성구 :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勇士)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Gideon)"을 '큰 용사'라고 합니다.
정말 기드온이 큰 용사이었을까요?
기드온은 결코 큰 용사가 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디안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밀을 포도주 틀 안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어려워진 상황속에서 한없이 작아진 나 자신을 안타까워함 열등감속에서 괴로워하는가 하면 때로는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내 자신이 바뀌어진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앞에서 변화무쌍한 감정의 기복을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 11. 30~1745. 10. 19)가 1726년에 영국을 배경으로 쓴 ‘걸리버 여행기’라는 작품은 당시 영국의 정치, 경제 상황을 풍자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사로서 세상을 두루 여행하기를 즐기는 ‘걸리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배를 타고 여행하다가 뜻밖의 풍랑을 만나 특별한 네 나라를 여행하며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첫번째는 그가 탄 배가 큰 풍랑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가 낯선 섬에서 깨어납니다.
그곳은 15센티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사람들이 사는 ‘릴리풋’이라는 섬나라였습니다.
그 곳에서 걸리버는 갑자기 거대한 거인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사람들의 모순과 음모와 갈등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다시 영국의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걸리버는 다시 배를 탑니다.

두번째는 거인들이 사는 ‘브로브딩내그’라는 섬나라였습니다.
그 섬의 사람들은 얼마나 큰지 그들이 사용하는 침대의 높이가 7 미터이고 넓이가 18미터, 길이는 쉽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걸리버는 졸지에 인형처럼 작은 사람이 되어 노리개가 됩니다.
거인들은 걸리버의 귀여운 행동을 즐기며 사랑했습니다.
목사이면서 작가였던 조나단 스위프트의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거인으로 또는 소인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인 ‘릴리풋’에서는 자신이 갑자기 대단한 거인으로 변신하여 한 순간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다가 거인들의 나라인 ‘브로브딩내그’에서는 자신이 갑자기 한없이 작아져 열등감 속에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사기 6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7년동안 극심한 고통중에 있었을 때 기도온이라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 사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이방인의 압제속에서도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바라보며 늘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알게되면 모든 것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타작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기드온은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시는 하나님께 하소연을 합니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에 있습니까?"(13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앞에서 기드온은 아픈 현실을 그대로 내어놓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동문서답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너는 이제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14절)”

이 말씀속에서 스스로 작다고 여기고 있는 기드온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거인을 깨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결코 작은 자라고 생각하며 의기소침하여 포도주틀 밑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셔서 소명을 주십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그리고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14절)

그리고 함께하심속에서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16절)

기드온을 향한 소명과 사명과 승리의 확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안의 잠자고 있었던 믿음의 잠재력을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실때 그가 대단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
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인가 남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교만이 우리안에서 싹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앞에 부름을 받아 귀하게 쓰임받는 것은 스스로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큰 용사로 불러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속에 있는 거절감과 열등감을 몰아내주시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진 저희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큰 용사여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오늘 이 시대에 믿음의 거인으로 살아가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경험한다면 어떤 상황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요.
하나님은 범인으로 살고 있던 우리 속에 있는 거인의 모습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큰 용사 즉 거인으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 찬양 /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멘

* 기드온(Gideon) / 나무 찍는 사람(베히는 자)

*  큰용사여(깁볼 헤하일) - 능력 있는 용사
* 유력한 자(룻기 2:1)

믿음이란?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관점 

(예) 베드로 - 사람을 낚는 어부

사사기 6: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시니.

미디안은 누구인가?
창세기 25:1-2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 미디안(Midian) / 다툼

사사기 6:7-8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은고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사사기 6: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군의 모습
사사기 6: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모세 / 출애굽기 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떨기나무 불꽃(3:2), 나의 영원한 이름 나의 표호(3:15),
지팡이와 뱀(4:3), 손을 품에 넣으라(4:6-7)

베드로 /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10절)


바울 / 고린도후서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시편 86:17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오늘의 기도

은총의 표징을 주시옵소서!
불낙지교회로 세워주시옵소서!


12월 6일(월)

♦ 12월 6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5: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메로스를 저주하라(23절)
♦ 성구 : 여호와의 사자(使者)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詛呪)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居民)을 저주(詛呪)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勇士)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메로스를 저주하라(Curse Meroz)”
“메로즈(Meroz)”란 “물러가다”는 뜻으로 “드보라”와 “바락”이 철병거 900승을 보유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에훗 왕”이 “시스라”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도움을 거절했던 성읍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찬양을 드렸습니다(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란 말씀에서 저주하는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예레미야 48:10).

오늘의 메로스는 누구일까요?
원수 사탄 마귀는 마지막 때에 믿는 자들을 무너트리려고 달려들 것입니다(계 12:12). 이때 이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방관하거나 아니면 싸움을 회피하는 사람이곧 ‘메로스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메로스의 주민들은 이스라엘을 도와 함께 싸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그들의 안전만을 생각하여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전쟁 후에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에서 항상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때로는 진리 편에 서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것이므로 함께 고통과 아픔을 나눠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제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여 예수님께서 저주했던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외면하므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은 생명이 없는 죽어버린 신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불신자들과 낙심한 사람들 그리고 결단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찾아 하나님 편에 세워갈 수 있는 실천적인 믿음으로 하늘의 기쁨을 채워가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https://www.youtube.com/watch?v=BjIWxpXoxo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 5: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아멘

* 여호와를 돕다 /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메로스(Meroz) / 뜻 : 물러가다

에스드랄론 계곡이나 그 근처의 장소로 에스르엘 골짜기 남방 경사지 베이산(Beisan) 남서쪽 80km 지점.
이곳 주민들의 비애국적 태도는
드보라의 노래 가운데서 알 수 있다(삿 5:23).
이유는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락의 출신지(시기로 인한 불참)

사사기 5: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야엘(Jael) / 뜻 : 산양

겐 사람 헤벨의 아내(삿 4:17)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주하여온 시스라를
자기 장막에서 죽임으로
이스라엘측의 칭찬을 받았다(삿 5:24).
그 전말은 산문과 운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삿 4:17-22, 5:24-27).

메로스와 야엘
- 저주의 대상 메로스, 축복의 대상 야엘

신명기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즐거이 헌신하라(5:2, 9)
나다브(nâdab) נָדַב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 자원하다(출 35:21, 느 11:2)
2. 기쁘다(출 25:2)
3. 드리다(대상 29:9, 스 2:68)
4.  헌신하다(삿 5:2, 9)
        (부) 즐거이(대상 29:5)

두령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영솔하였다
(공동번역 / 머리를 풀었다)

상징적 의미 :
힘을 과시하다, 힘을 발휘하다
 

찬송하라(5:2, 3, 9)
바라크(bârak) בָּרַךְ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찬송하다
4. 복을 받다 

사사기 5: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 대로가 비었다
통행세를 받기 때문에 오솔길로 다녔다

           

사사기 5: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역사가 요세푸스
시스라 군대 앞에서 일으킨 바람, 폭풍우, 천둥번개, 우뢰 


요한삼서 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오늘의 기도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불낙지를 찾아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복(福)

무형적(無形的) 복
유형적(有形的) 복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내 그늘에 피하라



가시나무의 공허한 약속
가시나무는 왕직의 제안을 받자 그것이 진심인지 여부를 조건으로 건다.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왕을 너희들 위에 삼겠거든." 여기서 '참
으로'를 직역하면 '진실로서'(in truth) 인데, '계약과 협정에 대한 충성'
을 가리킨다. '나무들이 가시나무를 왕 삼기로 협정을 맺고 이에 충성한다
면'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나서 가시나무는 자기를 왕으로 삼고 이 계약
을 충성스럽게 지키면 얻게 될 계약의 축복과, 그렇지 않으면 받을 계약의
저주를 언급하고 있다.
우선 자기와 맺은 계약의 축복으로서 가시나무는 지키지도 못할 보호의 약
속을 늘어놓고 있다: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여기서 그늘이란 단어는
'보호'와 '그늘'이라는 이중 의미를 갖는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그늘'로 표현한다(시 17:8).
2.과연 그늘을 제공할 수 있는가?
어찌되었든 가시나무 잎은 작은 잎사귀가 3∼5개 달려 있는 데다가 머리칼
같이 생겨서 그늘이 생기지 않는다. 나무라기보다는 초목에 불과하다. 따라
서 가시나무는 그늘이라고 제공할 것이 없다. 그러기에 "내 그늘 안에 피하
라"는 말은 깊은 아이러니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가시나무는 그늘
을 제공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진정한 그늘
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121편5절에서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라고 노래
한다.
3.가시나무의 협박
가시나무는 왕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주어지자 이를 적극적으로 움켜 잡
으면서 "와서 자기 그늘에 거하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이 정도
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에게 대항하는 이들을 가만히 놔
두지 않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가시나무는 자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
를 불로 사르겠다고 위협한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사실상 가시나무는 불에 쉽게 타는
관목이다. 가시나무에 불이 붙어 들판에 번지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가시나무는 진정으로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처럼 통
치를 통해 백성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는 커녕 파멸만을 가져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될 자격도 없는 자가 스스로 왕이 되고, 지키지도
못할 '그늘'의 약속을 남발하면서 허세까지 부리고 있다.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이나 교계의 지도자들이 함부로 자신이 마치 그늘이
되는 양 허장성세를 드러내고 있다. 자기가 아니면 마치 한국이 큰 불행이
나 재앙을 만날 것인 양 떠들고 있다. 과연 그들이 우리의 그늘이 될 수 있
을까? 만민들이 우리 우편에서 우리 그늘이 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이
심을 아는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적진을 치라


오늘 몬문은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가 미디안, 아멜렉, 동방사람의 군대 135,000명과 싸워 대승하는 내용입니다. 미록 작은 인원이지만 소수의 300명은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의 권능에 손에 쓰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자들인가?

첫째,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광야 길의 두 번째 영도자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5~9, 사 41:10)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자원한 자들을 향해서"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삿 7:3)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두려워하는 사람 때문에 다른 형제의 마음도 그와 같이 두려워 떨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여호와의 군대’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갖추어야 할 몇 가지 규례를 언급하실 때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신 20:8)

이 말을 들은 22,000명의 군인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사람들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남아 있는 10,000명의 군인 역시 너무 많았고 그들도 승리에 대한 자신의 공로들 주장할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시험이 다시 한 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둘째, 목적에 적합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300명을 남기는 과정에서 두 번째 시험을 합니다. 물을 먹는 모습을 통해서 군사들을 선정한 것입니다. 9700명은 무릅을 끓고 물을 허겁지겁 마셨습니다(삿 7:5). 무릅을 꿇었다 <카라>는 것은 단순히 무릅만을 꿇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무릅을 꿇고 허리와 고개까지 구프리고, 두 손은 바닥에 입을 댄 채 얼굴을 물에 처박고 정신없이 물을 마신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깨어  적을 경게하는 자세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전쟁에 적합지 않은 인원들입니다. 그러나 300명은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주위를 경계하며 핥아 먹었습니다.  얼마나 남았을까?

300명뿐. 135,000에 대항해서 고작 300명, 이것이 하나님의 남은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남은 소수의 사람들의 위력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의 힘과 계획을 아무런 의심 없이 의지할 무리를 찾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소수의 사람들만을 가져야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투방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300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심전력하여 오직 사명 완수에 깨어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깨어있는 자, 사명을 이루는 일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군사로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딤후 2:26, 벧전 5:8, 계 16:15) 

3백명의 군대는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이란 이스라엘의 미래를 책임질 자들입니다. 그들은 미디안에서 국가를 건져낼 전쟁의 영웅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 군인들에게 전투 계획과 그들이 사용해야 할 무기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승리한 자들이다 (삿 7:16~21)

300명을 뽑은 그날 밤 하나님은 기드론에게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삿 7:9)에 말씀하셨습니다. 100명씩 세 대로 이룬 300용사는 적진을 빙 둘러 원을 이루며 에워싼 채로 포위망을 좁히지도 않고 "각기 당처에 서서”전혀 요지부동하는 자세로 계속하여 나팔을 불며 횃불을 들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미디안 온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전우끼리 칼날로 서로 치면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삿 7:22). 이 전쟁에서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군인 120,000명을 죽이고 나머지 패잔병 15,000명까지 파하는 대승리를 갖고 왔으니,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렇다면 기드온과 300용사의 승리의 비결이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300명과 135,000명과의 싸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전쟁에서 대승을 하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따른다는 것입니다(삿 7:18~20, 대하 20:20). 

둘째, 300명 용사의 일치된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세 부대로 나눈 이후, 좌수에는 횃불을 항아리 안에 감추어 들고, 우수에는 나팔을 가지도록 했습니다(삿 7:16, 20). 그리고 기드온은 특별히 ‘나만 보고 나의 하는 대로 하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삿 7:17). 300명 중에 단 한삼이라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경우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00명 전원이 기드온을 따라 한 덩어리와 같이 움직이는 행동의 통일! 그것이 곧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부대가 동시에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로 나팔을 불며 외칠 때에, 하나님은 미디안 적군들이 자기들끼리 칼날로 서로 치며 도망가게 하심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삿 7:19~23).

결론 :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성,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마지막 날 나팔 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전 백성이 한 목소리를 낼 때 그 큰 성이 무너지듯이(수 6:20), 이스라엘의 승리는 항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날선 검에 의하여 이루어진 다는 것(계 19:21)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2

5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

12

6

월 

사사기 5:1∼31

메로스를 저주하라(23절)

12

7

사사기 6:1∼40

큰 용사여(12절)

12

8

사사기 7:1∼25

적진을 치라(9절)

12

9

사사기 8:1∼35

에봇 올무(27절)

12

10

사사기 9:1∼57

내 그늘에 피하라(15절)

12

11

사사기 10:1∼18

여호와께서 근심하시니라(16절)

 ♦ 12월 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4: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선지 드보라(4절)
♦ 성구 :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女先知)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士師)가 되었는데.

여자 선지자 “드보라(Deborah)”라는 이름은 “벌” 이란 뜻이며,
랍비돗의 아내입니다.

군대 장관 시스라가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침략했을 때 드보라는 바락을 격려하여 그와 함께 싸워서 가나안 군사를 물리쳤습니다.

이 승리가 드보라의 노래라는 아름다운 시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삿 5:20).

“별들이 하늘에서 싸웠다”는 시적인 표현은 “비가 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승이 있기 때문에 막강한 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강한 군사력을 갖춘 야빈과 싸워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철병거는 마른 땅에서는 잘 달릴 수 있지만 비가 쏟아져 진흙탕이 된 길에서는 잘 달릴 수 없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략은 사람의 지략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패하게 하신지라.”(4:23)

하나님의 작전을 미리 알 수 있는 드보라와 같은 선지자가 있다면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전염병이 강하게 닥쳐와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팬데믹의 고통과 오미크론의 변형에 의한 어려운 때를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을 알 수 있는 드보라와 같은 믿음의 사람을 찾아 고난의 시기를 단축할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주님
하늘의 뜻을
혼돈의 땅에 드러내어
어지러움에 질서를 세우게 하소서

♪ 찬양 / 어지러운 세상 중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의 악순환 고리는 불순종, 징계, 부르짖음, 구원자 사사, 태평성대, 불순종......
3장에서 세 명의 사사를 갈렙의 사위 옷니엘, 왼손잡이 에훗, 잡족 출신 삼갈을 만났습니다.

4장에서는 여자 사사 드보라(벌, 꿀벌)를 만납니다.

1절입니다.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80년 동안 태평성대의 세월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훗이 죽은 후에 가나안 족속들의 바알과 아세라에 매력을 느끼고 악한 일을 즐기게 됩니다.

죄는 순환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죄의 근원이 되는 요소들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편 1:1-2)

세속적인 복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강요합니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향하여 기대하는 복은 세속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견고하게 유지하라고 합니다.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근거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사사기 4:2-5)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내어주십니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은 이십년 동안 폭압속에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한 억압 속 울부짖는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시 사사로 활동하고 있던 드보라에게 구원의 메세지를 전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사 드보라는 바락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사사기 4:6-9)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에게 야빈의 군대를 기손 강가로 유인해 오도록 명령하십니다.
승리할 수 있는 전략적 지역으로 상대를 이끌어 오는 전술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에 따라 드보라는 당시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으로 있던 바락을 불러 적들을 기손 강가로 오게 하는 병법을 알려주며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줍니다.
이 전쟁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만 명의 군사를 이끌어야 함에 부담을 느낀 바락은 출정에 주저하게 되고 결국 드보라에게 동행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드보라는 그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 결국 전쟁의 승리에서 오는 영광은 야엘이라는 한 여인에게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결국 그녀의 예언처럼 야빈의 군대 장관이었던 시스라는 한낱 필부였던 한 여인, 야엘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결국 그 영광이 그녀에게 돌려지게 됩니다.

드보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었을 때 바락은 강한 남성이었지만 드보라가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여자 사사 드보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으나 남자 발락은 여전히 드보라와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연약한 드보라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와 분별력을 갖춰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우리의 순종속에 얻어지는 영적인 유익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분명히 역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나를 부르심에는 분명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목적이 있으십니다. 그 상황을 통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생하신 역사를 직접 목도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게 하심으로 그 일이 곧 나의 영광이 될 뿐 만 아니라 그를 통해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곧 봉사의 자리를 너무나도 쉽게 거절합니다. ‘나 아닌 누군가 그 일을 할 사람이 있겠지? 하며 등한시 합니다. 봉사의 자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또렷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적의 현장이요 우리 믿음을 진보시켜나가는 영적인 페달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섬김의 일에 나를 헌신할 때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함은 물론 그 일이 곧 나 개인의 영광이 됩니다. 더 나아가 그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이 성장하는 영적발판이 바로 봉사의 자리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따라서 바락이 누릴 수 있었던 개인적인 영광, 복된 영적 체험을 다른 이에게 건네 주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와 마음을 열고 순종하는 것, 바로 내 생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요 내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영적 도약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친히 싸워주심속에 결국 이스라엘은 기손 강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야빈의 군지휘관이었던 시스라는 패전후 도망을 치다 결국 겐 사람 헤벨의 아내였던 평범한 여인 야엘에 의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드보라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제 전쟁은 마무리되고 그에 대한 성경의 평가를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사사기 4:23-24)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죄악을 범했던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 가나안 왕 야빈을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진멸시키기 위함이 아니셨습니다.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해 그들을 영적으로 제련해 나가기 위한 선하신 계획의 일환이셨습니다.
반대로 잠시 사용하셨던 악인 야빈왕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결국 멸망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징계는 우리를 새롭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으시기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법입니다. 징계의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편 악은, 악인은 철저하게 굴복시키며 진멸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압제와 형통속에서도 인내하며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저희 모두에게 또 새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붙드심으로 죄의 순환성의 고리, 즉 4화를 끊어 내심으로 주님의 4복을 경험하시는 복된 날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든 응답하심으로 봉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시며 믿음의 진보를 이루시는 귀한 날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편으로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고통가운데 있으실 지라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임을 믿으시며 소망을 잃지 않으시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도 귀한 한 날을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주의 말씀을 붙듦으로 죄의 고리를 끊어내고 역설의 4복을 경험하는 귀한 날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 부르심에 순종하며 봉사하는 현장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며 영광을 얻게 하시고 더불어 영적 성장의 은총을 경험하는 이 날 되게 해 주십시오. 설령 지금 징계의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더라도 주님의 새롭게 빚어주시는 사랑의 손길임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가운에 이 하루를 살아내게 해 주십시오 신실하신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또 악한 일을 저지르고야 맙니다(1절). 이스라엘 자손과 나와 유사점은 없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방법으로 그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2. 드보라의 단독 출정 권면에 바락은 그녀에게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아닌 야엘이 시스라를 처단함으로 그녀가 영광을 취하게 됩니다(6-9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해 본 적은 없습니까? 만약 그 때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면 이후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거라 생각하십니까?

3.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영적 제련인 반면에 악인에 대한 징계는 결국 악인의 멸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24절). 이 사실이 오늘 내게 주는 영적메세지와 그에 따른 영적 유익은 무엇입니까?


♦ 12월 3일(금)

♦ 12월 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3: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남겨진 열국(2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의 세대(世代) 중(中)에 아직 전쟁(戰爭)을 알지 못하는 자(者)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列國)은.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래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었습니다.

남겨두신 열국은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는지 알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가나안 땅의 주민들과 가까이 지내지 말고 혼인시키지도 말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 주민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 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므로 이기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사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급하고 어려울 때는 “아이구 하나님!” 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런데 급한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이전의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옷니엘은 대단히 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옷니엘이 사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80세였습니다.
갈렙은 85세 때 헤브론을 정복했는데 옷니엘은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구산 리사다임을 제압했습니다.

옷니엘은 헤브론에 정착해서 이미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다 지파의 최고 지도자로서 평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는데도 안일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평안한 노년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힘들고 어려운 여생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결단으로 이스라엘이 향후 40년간 평온했다고 합니다.

갈렙과 옷니엘의 희생적인 삶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갈렙의 희생으로 가장 껄끄러웠던 헤브론이 정복되고, 옷니엘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의 40년이 평화로워졌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오늘도 나의 헌신으로 나의 가족들이 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가족들의 평안이 세상의 소금과 빛 되어 팬데믹과 오미크론을 평정하여 모두가 평화를 누리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날 대속하신 예수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2월 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보김(5절)
♦ 성구 :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祭祀)를 드렸더라.  

“보김(Bokim, Pokim)”이란 “우는 자들”이란 뜻으로 “바카”의 분사형 입니다.
“바카”는 “눈물”이란 뜻으로 “바카의 골짜기”는 “눈물의 골짜기” “통곡의 골짜기” 즉 통곡의 장소를 말합니다(시편 84:6).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에게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급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의 사자가 전한 말씀을 듣고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보김”이라고 불렀습니다.

“보김”이란 지명에서 형식적인 회개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는 동일한 잘못과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사귀며 심지어 바알과 아스다롯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의 사자의 준엄한 메시지를 듣고 많이 울고 눈물을 흘렸으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종교 행위만 강화시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감성에 기초한 신앙은 위험합니다.
자책감을 갖고 회개하는 것처럼 울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회개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신앙의 자세입니다.

산상복음에서 말씀하신 애통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비록 울기도 하였고 제사를 드렸지만 변화된 것은 없었습니다.

정서적인 카타르시스를 회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완전하게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아직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 요소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말씀하신대로 믿고 순종하므로 보김의 눈물이 헛된 눈물이 아니라 참 회개를 위한 거룩한 눈물로 바쳐지기를 기도합시다.

♪ 찬양 / 울어도 못하네

https://www.youtube.com/watch?v=yA4yiLYis7M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의 내용 구분

1~3:6, 사사시대의 배경
3:7~16:31, 사사시대의 역사
17:1~21:25, 사사시대의 대역


♦ 12월 1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사기 1:1∼36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1절)
♦ 성구 : 여호수아가 죽은 후(後)에 이스라엘 자손(子孫)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中)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After the death of Joshua)”
흥(興)하는 나라와 집안의 공통점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나타납니다.

흥하는 나라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던 나라의 지도자가 죽은 후에 드러나는 사회적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잘되는 집안은 가장이 죽은 후에 남은 가족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갈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다만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비느하스”가 지도자의 역할을 모세처럼 또는 여호수아처럼 잘 감당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흥하는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느하스”의 역할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출애굽의 역사와 가나안 정복과 분배의 역사를 계승하지 못하고 “사사시대”라는 혼돈의 세상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사사기에서 사사 시대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사사기 21:15, 17:6).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출애굽시대와 가나안 정복과 분배의 시대에도 왕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신정국가(神政國家)”입니다.
이제까지 버텨온 신정국가의 틀을 “왕정국가(王政國家)”로 바꾸려는 백성들의 열망 때문에 지도자가 없는 어지러운 세상이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한 분명한 통치 이념이 있었습니다.
그 이념을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전통을 포기하고 “인민사회민주주의(人民社會民主主義)”라는 틀로 바꾸려는 좌편향(左便向) 집단에 의해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나라의 기틀을 바르게 유지할 수 있는 확실한 기관은 오직 교회뿐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외쳐야 합니다.
좌편향 소수 집단에 의해서 성장과 발전의 틀을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진리의 횃불을 들어야 합니다.

“가나안 사람과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워야 할까요?”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혼돈과 어지러움의 시대에 유다와 같은 지파는 곧 교회와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교회가 외치지 못한다면 혼돈과 어지러움의 대가를 치루고 난 후에 새로운 시대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진보와 후퇴라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시렵니까?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이렇게 외쳤던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https://www.youtube.com/watch?v=BjIWxpXoxo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사기를 유대인들은 전기 예언서로 분류합니다.
전기 예언서에 분류되는 책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후기 예언서에 분류되는 책들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12소선지서"

예언(豫言)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언이란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과거를 통하여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서는 사사기를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역사서에 해당하는 책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사사기, 룻기, 열왕기상. 하, 역대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사사기가 여호수아의 성공적인 후편이 되려면
가나안 땅을 아직도 완전하게 점령하지 못한
지역을 정복하여 평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후편이 될 수 없는
가나안 땅의 족속들의 풍속을 따르므로
나타난 사회적인 병폐라고 하겠다.


사사기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아멘

후계자(後繼者)가 없는 시대의 비극
역사의 퇴보


여호수아 1: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후계자(後繼者)가 있는 시대 
정복과 분배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In those days Israel had no king;
everyone did as he saw fit.
                                                                      ref, 17:6 

사사의 역할에 대하여 

   사사기(士師記) / 선비 사, 스승 사, 기록할 기
   판관기(判官記) / 판단할 판, 벼슬 관, 기록할 기
  Judges / 심사위원
 쇼페팀(םטפשׁ) / 다스리다, 재판을 베풀다

   사사기 2: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ref, 2:16-19


사사기 2:11-12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사사기 2:13-14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사사기 2:15-16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사사기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 /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사사기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1,  27,  28,  29,  30,  31,  32절 


히브리서 5:9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오늘의 기도

온전한 순종의 삶을 이루게 하옵소서!
불낙지 온라인 교회를 세워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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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사는 누구인가?

 • 히브리어 : 쇼페트(shâphat /  שָׁפַט) (재판관, 통치자)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 비세습적,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언약의 중재자

2. 사사기의 구조신명기적 역사관

3. 팔레스타인의 정세와 문화

 • BC 1200-1000 철기 1시대 : 이집트와 헷 제국의 몰락과 세력확대, 해양민족들의 유입(블레셋 민족), 가나안 잔존세력, 이스라엘 백성
 •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 – 농업: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 
 • 바알 : 봄의 의인화 , 못 : 겨울의 의인화
 • 성적인 쾌락 – 신적 행위의 모방 및 동기를 부여 – 풍년의 기원
 
4. 12사사의 이야기

 • 시간적인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님. 
 • 각자의 상황에 따라 사사의 등장이 다르고, 성경 내의 분량도 다름. 
 • 영웅들이 등장했으나 죄의 경향성은 계속 가속화되고 증가됨 
 • 19장은 당시 최악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

 5. 사사기의 신학    

 • 과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할 것인가? 
 •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반복적인 불순종 구조를 통해 예언자적인 특징을 지님 – 회개의 촉구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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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는 사사들이 주인공일까?

(사사기의 구조)
책의 이름 자체가 “사사기”이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사사들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중요한 관심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사들이 살았던 삶의 이야기가 “사사기”라는 책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좋은 소재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긴 책에서 사사 개인의 삶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3장부터 16장까지입니다(사사기 3:7-16:31).
그럼 나머지 1-2장은?
17-21장은요?

사사기 전체가 스물 한개 장(章)인데,
그 중에서 일곱 개 장(章)이 사사들의 일화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정확하게 2/3는 사사들의 이야기, 그리고 1/3은 사사들이 아닌 다른 이야기들로 짜여진 책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모든 지도자들이 "사사(쇼페트)"라고 불렸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옷니엘" "에훗"은 "구원자"라고 불렸다.
"삼갈" "기드온"은 "사사" 또는 "구원자" 그 어느 것으로도 불리지 않았다.

이런 형태를 “보따리 형태”라고 부르고 싶어요.
"보따리 형태"란 3장부터 16장까지의 사사들의 이야기를 보따리로 싸서 묶은 것이 라고 하겠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사사들과 함께 살면서 마치 전기문(傳記文)처럼 기록한 책이 “사사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던 사사들에 대한 기억과 기록들을 오늘날 우리들이 읽는 성경과 같이 두루마리 하나로 엮어서 기록한 것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라는 두루마리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그러니까 이 두루마리를 기록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와 목적을 바탕으로 사사들의 이야기를 구성했겠지요?

사사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꾸릴 때, 사사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을 텐데, 사사들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보따리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읽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에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사사기가 예언서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타낙”(תנ”ך)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구분할 때
1. 율법서(토라)
2. 예언서(느비임)
3. 성문서(케투빔)

이렇게 세 가지 분류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율법서를 ‘토라'(תורה), 예언서를 ‘네비임'(נביאים), 성문서를 ‘케투빔'(כתובים)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 분류의 히브리어 첫 글자들을 모아서 만든 단어가 “타낙” 입니다.

이렇게 나누다보니, 좀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는 누가 읽어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벌어진 전쟁과 사건들을 나열한 역사 기록”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경 분류에 따르면 예언서(전기예언서)에 속한다는 거지요.
그러고보니, 전기 예언서에 들어가는 책들이 다 이상해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모두 예언서라니 말입니다.

❖ ‘예언’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유대인의 시각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옛 이야기가 아니라, 그 과거의 역사 이야기가 미래를 보여 준다는 생각과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예언’ 하면, 대개 “무슨일이 앞으로 벌어질까?” 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내가 네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히 이런 일을 당하겠구만. 운명은 피할 수 없어. 이미 신(神)이 정해 놓은 것이니까. 그래도 꼭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액땜한다손 치고 이렇게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을 말하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런 사람들을 ‘무당’과 ‘박수’라고 불렀지요.

율법에 의하면 이렇게 운명적인 미래를 점치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사형에 처해야 되는 사람들로 분류해 놓았습니다(출 22:18; 신 18:9-12).

그러면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이 하는 일들은 무엇이었을까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율법의 교사이자 일종의 역사가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이런 모양이거든요.
그런데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이미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한번쯤 다 해보았던 것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던 과거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옛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우리 선조들이 과거 바알브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세요. 광야에서 했었던 일을 생각해보세요. 잘 알다시피, 우리 선조들은 이러이러했잖아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했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요렇게 된 것 다 알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요?”

만약 잘못된 길을 걸었던 조상들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들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선조들이 걸었던 그릇된 길을 그대로 따라 걷고 있다면, 예언자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여러분들의 현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았던 우리 선조들과 별다를 바 없지요? 똑같지요? 심지어는 그보다 더 어긋나 있지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옛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되었지요? 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구나! 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었구나.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 것같아요? 하나님의 기준은 바뀌지 않을테니… 여러분도 옳지 않은 길을 걸었던 우리 선조들과 별다를 바 없는 미래를 맞이하겠군요.”

구약 시대의 예언자는 과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율법)과 그 말씀을 받고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의 열매를 배우고, 그 역사를 기준 삼아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을 비평하고, 내일 우리가 걸어가야할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예언자는 과거를 배워 오늘을 비평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누가 참 예언자인가, 그리고 누가 거짓 예언자인가?” 구약 성경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참 예언자라고 한다면, 그 예언자가 한 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참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신 18:22)

그런데, 이것 만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기준이라면, 구약 성경에는 거짓 예언자의 글이 떡허니 있는 셈이 됩니다. 요나(Jonah)요. 니느웨가 40일 뒤에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욘 3:4)은 틀렸습니다. 요나가 예언을 하자, 니느웨 왕과 대신,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회개를 하였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는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예언자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서 거짓 예언자로 만든 셈이지요.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을 말합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렘 28:9)

이 구절을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언자가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평화가 이루어져야만 참 예언자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언자가 “걱정마. 잘될꺼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길에 있지 않으니, 네가 걸어가는 길에서 돌이키라. 돌이키지 않으면 너희가 이러 이러하게 되리라.” 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사람이 그 예언을 듣고, 돌이켜서 예언자가 말했던 그 미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예언 성취의 여부와 관련없이 그는 참 예언자이다.”

❖ 예언자의 역할, 역사의 역할, 그리고 사사의 역할

예언자의 역할은 피할 수 없는 미래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율법을 기억하고 읽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내고, 지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을 날카롭게 비평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비추어 잘한 일에는 칭찬하고 축복하고, 과거에 그릇된 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길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이 잊고 있었던 과거(율법)를 다시 기억하게 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었다면, 예언자의 격려로 더 큰 힘을 얻고,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예전처럼 지금 이 길을 쭉 걸어가면 되는 것이죠.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면, 예언자의 경고에 정신 차리고 지금 걷는 길에서 돌아서면 됩니다. 격려를 듣고 그대로 걷다가 하나님의 복을 얻으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 그가 참 예언자가 되는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결국 하나님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질책을 듣고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면, “결국 하나님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예언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품은 예언자”로 인정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가장 큰 사명을 사람들의 미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게하는 촉매제는 과거의 역사이며 율법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언은 곧 “역사를 되짚어 보면, 내 미래를 직시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같네요.

이스라엘 역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사사기를 읽으면서 “아, 사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하나님을 그토록 쉽게 잊을 수가 있는거야?”라며 분노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 사람들이 살았던 그 때의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되, 현재 나의 삶을 직시하고 비교하면서, 나는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늘 마음에 품고 사사기를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앞 날이 어떨지가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 사사기는 예언서입니다.

그러면, 역사이자 예언서인 사사기 두루마리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사기를 영어로는 The Book of Judges 라고 합니다. “사사”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해 놓기는 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재판관”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카톨릭 교인들이 읽는 성경에서는 이 책을 “판관기”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사들이 재판을 하던 사람들이었나요? 물론 드보라처럼 재판하는 일을 했던 사사들도 있습니다만, 그에 못지 않게 전쟁 지휘관의 이미지가 더 빨리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사치고 전쟁 한번쯤은 치루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거든요. 물론 전쟁을 치루지 않은 사사도 있지만 말이죠. 사사들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재판관”, “군사 지휘관”이라는 이미지가 모든 사사들의 특징과 역할을 모두 아우른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의 최종 책임자”(Decision maker)라는 말이 제일 적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민족이 곤경에 처했을 때,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수행해야했던 사람.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앞에 나서야했던 사람이 바로 사사라는 말입니다.

❖ 사사기가 순환구조라고?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낸 “사사기”를 공부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사사기가 순환구조(Cyclical framework)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또 교회에서도 사사기를 공부할 때 그렇게들 말합니다. 순환구조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1]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어요. 가나안 땅에 정착하며 살다보니 삶이 조금씩 좋아지거든요. [2] 경제적인 측면에서 삶의 질이 좋아지다보니, 여유도 생겨요. 그러다보니 슬슬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길로부터 멀어져 가지요. [3] 결국은 고난을 당합니다. [4] 그러고나면, 그제서야 하나님께 울부짖어요. [5] 그러면 참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사사가 이스라엘을 구원해요. [1] 다시 평화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그 다음부터는 [2]-[3]-[4]-[5]-[1]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순환 구조라고 부릅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사기의 큰 맥은 그 순환구조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두명의 사사 중에서 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이야기는 다섯명 밖에 없고요,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옷니엘 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는 사사들의 이야기는 순환구조라는 틀 안에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억지로 끼워입은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사사기의 순환구조는 사사기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삶,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그 사사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군상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순환구조가 사사기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전체 사사 이야기들의 절반에도 해당하지 않는 구조이니까요.

앞서서 “사사기”라는 책이 “보따리 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내는 보따리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이라고도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읽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사사기 1장부터 3장까지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왜 사사기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소개하는 도입부이구요. 17장부터 21장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말로 고발하고 싶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현주소를 농축해 놓은 총정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은, 중간에 끼어있는 사사들의 이야기들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강력한 메세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례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 사사기 1-2장

사사기 1장과 2장은 시간의 순서로 보았을 때, 여호수아 23, 24장과 서로 포개어집니다.
시간 순으로 역사를 나열한다 손쳤을 때, 사사기 1장과 2장은 여호수아서 쪽에 들어가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내용을 볼까요?
여호수아가 23장부터해서 마지막 고별 연설하시고 돌아가시거든요.
그런데 사사기 보면은요, 사사들의 시대의 첫 출발을 알리는 과정에서 아직 여호수아가 죽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사기 2장에 가야지 여호수아가 죽습니다.
그럼 왜 이리 모호하게 여호수아서의 뒷 부분과 사사기의 앞 두분이 겹쳐지게 기록했을까요?
아마, 이 두개의 책이 나뉘어진 책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책으로 연결시켜 함께 보아야 할 역사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지 않을까요?

그럼,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앞의 두루마리인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포개 놓으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

첫번째,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고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삿 2:2-3)

신명기 20장 10절부터 15절에는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전쟁 규정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11.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5.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첫째, 먼저는 무력이 아니라 항복할 것을 권유합니다.
둘째, 권유를 따라 항복하면, 서로 화평을 이루고 성문을 연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셋째, 그러나 항복하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는데, 성 안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겁니다.
넷째, 전쟁 중에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그냥 탈취물로 삼습니다.

진멸시키는 전쟁(헤렘, חרם)을 선언하셨는가?
가나안 정복 전쟁에는 전혀 다른 전쟁 명령을 내리십니다.

히브리어로는 “헤렘”חרם이라고 부르는 “진멸”시키는 전쟁입니다.

하람(charam, חָרַם) 1. 닫다, 2. 보이지 않게 하다, 분사(חָרוּם )
전멸시키다(수 2:10), 멸하다(민 21:2, 왕상 9:21), 진멸하다(수 8:26, 대하 32:14, 사 34:2),

남여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그리고 그 성읍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거예요.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이것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을 제외한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모든 가축들과 재산들은 “전리품”이예요.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얻게 되는 전리품이 전쟁 최대의 관심사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멸”을 말씀하시는 것은 전쟁에서 얻게될 개인의 “전리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실 그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의 욕심이 그런가요?
성경에서는 아간으로 대표되는 한 인물의 사리사욕을 소개하고 있지만(수 7),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옆구리에 가시를 하나 박아 두었습니다.
손바닥에 박힌 아주 작은 가시 하나가 그리 아프지 않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만질 때나, 살짝 스칠 때, 따끔거리면서 그것에 주목하게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가시처럼 박아 두어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땅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말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

-두번째, 현실점검을 위해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삿 2:20-23)

사사기 역사가가 말하는 두번째 대답 “현실점검”입니다.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 땅의 사람들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라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시험”이라는 모티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이스라엘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의 현주소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아실겁니다(출 16).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서 이스라엘의 진 주위에 있게하고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출 16:4).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해 보고 싶으셨던 거지요.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미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만나 뜨러 나간 사람들 있었습니다. 만나를 주시는 은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시험하시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꾸짖으셨습니다(출 16:28-30).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이유는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나락으로 떨어뜨려서 어떻게든 벌을 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의 목적은 현실 점검입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걸음 걸음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의 목소리를 잘 들으며 옳은 길로 제대로 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사사기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하나님의 율법)를 잘 지키나 그렇지 않나현실 점검을 하기 위해서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두었다.”라는 거에요. 그게 그 땅의 사람들을 남겨두신 두번째 이유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

세번째, 역사를 알게 하려고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삿 3:2)

출애굽하고 광야에 40년을 보냈습니다. 이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는 잘 아실 거예요.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1세대와 2세대의 교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출애굽 1세대가 없었다고 하니(민 14:30) 아마 여호수아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출애굽 1세대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출애굽 2세대, 출애굽 3세대가 섞여 살던 시대였을 겁니다. 출애굽 3세대는 모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보았다손 치더라도 아주 어린 나이에 잠깐 스치듯 보았을까요? 이들은 선조들이 광야에서 아말렉 사람들과 싸우고, 모압사람들과 싸우던 이야기를 선조들의 입을 통해서 옛날 이야기 듣듯이 들으며 자랐던 사람들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아예 이런 이야기 조차도 몰랐던 사람들도 있었던 같아요(참조. 사사 입다 이야기).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눈에 “전쟁의 이야기”는 곧 “역사”였습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쟁을 알게 한다는 것은, 지금 이들을 모두 전쟁 용사로 키우겠다는 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알게 하겠다”는 말로 이해하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같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할 또 다른 전쟁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니, 이 역사가 제일 중요한 역사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사기 3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이라며, 그 땅에 남겨진 민족들의 명단을 나열하고는 그 이방 민족과의 결혼 이야기를 하지요. 성경을 통틀어 가장 예민한 가정 문제가 이방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큰 곤혹을 겪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1-3)

이방인들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 국제 결혼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민수기의 예와 같이 간단하게 가정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광야의 생활을 하며 안정적이지 않은 생활을 하던 출애굽한 사람들이 한 땅에서 정착하면서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그들과 결혼을 한다면 그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십수년을 떠돌이 생활하던 출애굽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매우 매력적인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종해야할 의무 뿐 아니라, 그들의 일원이 되어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들과 함께 모압의 신들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간 거예요. 안정적인 삶과 신앙을 바꾼 것이지요. 뭐,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려? 우리가 잘 취했다가 하나님께 드리면 되지. 아니 그 사람들이 이룬 선진 문화를 왜 죽이면서까지 없애? 잘 가다듬어진 문화를 흡수해서 우리 문화를 성장 시키면 되지”. 이렇게, 이방 문화와 타협했던 사람들, 그리고 “아니다. 우리는 조금 늦게 가더라도 하나님의 정체성을 지켜야 겠다.”는 사람들이 성경에서는 늘 싸우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싸우고 있지요. 타협했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우상 숭배의 길로 가고,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계속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거지요.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4-5)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의 눈에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는 것은 “정체성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 향한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전쟁 말입니다.

물질 문명의 화려함은 늘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만나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물질 문명이 좋아보이고, 그들이 누리는 문화가 더 나아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가나안의 것들을 선택하던 시대가 사사들의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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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개론


제목 /

사사기는 퇴보와 실패의 책,
반복되는 범죄하는 책,
불완전한 승리의 책이다.

본서의 히브리어 표제는 '쇼페팀'(사사들, 재판관들, 통치자들)이다.
이 명칭은 여호수아 이후부터 사무엘 시대까지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그들은 정치, 경제, 전쟁, 종교의 다방면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저자 /

구약의 다른 역사서들처럼 성경 자체에서 분명한 언급이 없음으로 본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사무엘이나 그의 선지 생도 중 누군가가 기록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한편 랍비들의 전통인 탈무드에 나타난 유대 전승에 의하면 본서를 사무엘이 기록하였다고 말한다.

기록연대 /

본서의 기록 연대는 본서 속에 나타나는 사건 정황들과 그 사건의 고고학적 역사 연대로 추측하여 가늠해 볼 수 있다.
본서 속의 사건들을 고려하여 볼 때 사사기의 기록 연대는 사울이나 다윗이 통치하던 시기인 B.C.1050년에서 1000년경으로 여겨진다.

사사기 1:29의 '게셀'에 대한 언급은 바로가 이 땅을 솔로몬에게 주기 이전으로서(왕상 9:15~17), 이는 본서가 적어도 솔로몬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사기 17:6의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는 기사는 여부스족이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다는 사사기 1:21의 기록과 더불어 다윗이 그들을 쫓아내기 이전에 본서가 기록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배경 /

본서는 여호수아의 죽음으로부터 사무엘 시대에 이르는 하나님 백성의 종교적 사회적 형편을 알려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본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 하나님의 심판, 회개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인간의 악한 죄성과 더불어 택한 자를 결단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함받은 백성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놓여있을지라도 언제라도 회개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특징 /

본서는 당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필연적으로 심판을 가져오며 회개는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또한 의로운 지도자가 지속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사울과 다윗에 의해 확립된 왕권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려울 때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을 예비하시고 세우신다는 것이 사사기의 주제이다.

목적 /

사사기의 목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먼저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가져온 결과로 왕정 정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반과 배교가 끝없이 순환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압제와 구출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사무엘 시대에 예언자 제도를 낳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사사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그분의 계명을 굳게 지키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만약 언약의 관계를 인간 스스로가 파괴하게 되면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구조 /

사사기의 사상적 구조는 특징있는 것으로 각 사사의 시대가 배신, 곤욕, 회개, 구원이라는 순서로써 기록되어 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김으로써 배신한 사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붙이시사 그들로 곤욕을 당하게 하신 사실
셋째로 이스라엘이 회개한 사실
넷째로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사실로 되어 있다.

사사기의 내용 구분

1~3:6, 사사시대의 배경
3:7~16:31, 사사시대의 역사
17:1~21:25, 사사시대의 대역

이것은 타락(부패의 역사), 구원, 다시 부패함으로 연결된다.
달리 말하면 부패의 원인(설명), 부패의 과정(명시), 부패의 상태(예증)라고 볼 수 있다.

내용 /

사사기에서는 반복해서 죄를 지어 왔던 유대 민족이 다섯 단계의 죄를 일곱 번이나 되풀이했던 기록이 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우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고 있다는 것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과거를 무시하면 지은 죄를 반복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에 사람들의 성공에 관한 것과 함께 실패에 관해서도 기록하신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역사(History)를 통해서 배우기를 원하시는데, 이 역사는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History)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모범을 따르고 성경의 훈계를 가슴에 새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실패에 의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되지 않을 것이다(고전 10:~14).

반복되는 죄의 순환 과정

첫번째는 이스라엘의 첫번째 사사가 세워지기 전에 일어났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여호와를 잊어 버리고 바알 들과 아세라를 섬긴지라"(<삿 3:7>).

둘째 단계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년을 섬겼더니"(사사기 3:8).

셋째 단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사사기 3:9).

넷째 단계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사사기 3:9~10).

다섯째 단계

"그리고 그들이 이전보다 더 즐겁게 여호와를 섬기었더라"
이 죄의 순환 과정은 구약 시대의 유대 민족에게만 특별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는 불행하게도 신약 시대 신자들의 개인적 생활 체험 속에도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루는 것과 같은 죄이다. 노예화는 시험이나 마감시간 같은 형태로 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다음 번에는 잘 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강한 청원을 한다.


하나님께서도 이 청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교훈

역사적인 교훈 :

본서는 여호수아와 사울 및 다윗 왕 시대 사이의 이스라엘의 쇠퇴, 압박, 그리고 구원으로 순환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는 이스라엘의 이른 군주정치 시대에 대한 설명과 이론적인 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교리적인 교훈 :

본서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또는 불완전한 순종까지도 고난과 외적의 침략을 가져 온다는 분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의 압박 당하는 백성의 회개와 기도에 구원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계시해 주고 있다.

기독론적인 교훈 :

본서에 나타난 각 사사는 정치가요, 구원자요, 왕으로 그들은 영적 및 정치적인 구원자로 사역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가진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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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


 사사기(士師記)는 그 표제를 여호수아의 사후에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람들의 직명에서 취한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들의 정부에 관하여 지시하는 중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사사)과 유사를 둘 것이요”라고 명하였다(신 16:18). 모세가 입법적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고 여호수아도 실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사사들이 임명되어 그 땅의 최고의 공민적 권위를 세우게 되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사후로부터 곧 이어지는 기간에 일어난 역사이다. 그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의 통치 권위가 사사들에게 부여되었다.
 이 책의 이름을 붙였던 직명을 가진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사사의 공민적 기능보다 더 광범한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거룩한 임명을 받고 그들의 큰 사업에 직접적으로 소환되었으며(삿 3:15; 4:6; 6:12) 백성의 통치자 보다는 외세의 속박에서 구원하는 자로서 더 많은 일을 하였다. 사실 그들의 부르심과 큰 공적의 필요는 일반화된 배교와 압박을 물리치려는 모든 정규 질서를 무익하게 만든 무정부 상태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에게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것은 공민적, 종교적 지도자로서보다는 민족적 영웅으로서였다. “장군” 또는 “두령”이 아마 그들에게 더 적합한 명칭일 것인데 그들의 업적이 주로 군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마다 백성을 “구원한” 다음에 그는 그의 여생 동안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므로 사사라는 이름은 기록 당시의 이 책의 이름에 가장 적합한 듯하였다. 여러 세기 후 히브리인과 같은 언어와 혈통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는 카르타고에서는 역시 정치 지도자가 “사사”(suffete)로 알려졌다.

 2. 저자


 사사기를 기록한 자는 알 수가 없다. 고대의 유대 전통에 따르면 사무엘이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추측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사실들과 부합되지만 다른 요인들은 그 견해에 방해가 된다. 사사기의 저자가 좋아하는 말은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21:25; 18:1; 19:1)였다. 이것은 저자가 왕위를 좋아하였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생각이다. 마치 그의 말은 사실 “그와 같은 일들은 묵인되지 못할 것이지만 때때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어서 질서가 없고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할 수 있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한 왕을 가진다는 생각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그가 이런 말들을 기록한 저자로 보기에는 있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적 증거를 보면 사사기가 기록되었을 가능한 시간을 제한해 준다. 앞서 인용한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삿 17:6)라는 진술은 이 책이 사울의 군주 정치가 세워진 후에 기록되었음을 가리킨다. 다른 편으로는 이 책이 다윗의 통치 전에 기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최소한 그의 통치 초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있다. 삿 1:21은 말하기를,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베냐민 자손과 함께 거하였다고 한다. 성경 역사는 여부스 족속이 다윗이 헤브론 7년 통치 후에 그 성을 빼앗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소유하거나 또는 최소한 시온에 본거지를 가졌다고 지적한다(삼하 5:6-9; 대상 11:4-9). 그러므로 사사기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노획하기 전 그의 첫 7년 통치 기간 동안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사사기에 기록된 사건들이 일어날 때의 근동사의 흐름에 있어서 정확한 특정 시간을 정하기가 불가능하지만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책이 B.C. 1400-1050년의 기간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정확한 시간은 출애굽의 시기가 확정되기까지는 확실하게 정할 수 없으며, 현재로는 대치되는 이론들 사이에 절대적 확실성으로 결정할만한 충분한 사적(史的) 자료가 별로 없다.
 아마르나(Amarna) 서판이나 다른 비문들은 보여주기를, 그 땅을 소유했던 가나안 족들은 히브리인의 침입에 앞서 수 세기 동안 그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들의 문명은 오래된 것이었고, 메소포타미아나 애굽 등의 대제국들의 영향을 받아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다. 사람들은 바로와 동맹 관계를 가진 군소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서로 끊임없이 싸웠고, 그와같이 그들은 전술에 있어서 숙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위험에 직면하면 하나의 지도자 아래 다소 연합하기도 하였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그들의 금속 문화에 대한 유물적 증거를 통하여 산 언덕에 그들을 보호하는 요새화된 도시들이나 그들의 철병거들은 평지에서 그들을 막강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술과 건축은 히브리인들의 침략 후에 즉각적이고도 현저한 쇠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적 진리의 영역에 있어서 그리고 인생의 도덕과 철학에 있어서 히브리인들은 원주민들보다는 탁월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근동 전역에 상인과 무역업자로 알려졌으나(후에 히브리어로 “가나안”은 “상인”으로 통하였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농사 기술에도 능란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필수적인 믿음의 부족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가나안 족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전쟁 초기 수년도 되지 못하여 이스라엘 곁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 모든 기간 동안 히브리인들은 일치 연합된 민족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두세 지파가 공동의 적을 대항하여 일시적인 연합을 이룰 수 있었다. 사사기 5장의 드보라의 노래는 큰 위기의 때에도 모든 지파가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 불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지파 사이의 내적 알력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삿 8:1-3; 12:1-6; 20:1-48). 이것은 일부 그 땅을 나누어 놓은 가나안의 요새들 때문에 지파간의 상호 교통의 부족에 기인된 것이었다고 본다.
오히려 새 입주자들이 원주민에게서 그들의 건축 방법을 신속하게 배웠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이 지금까지 주로 유목 민족이기 때문이었다. 가나안 종교는 땅의 산출에 대한 안전을 도모하는 의식이 중심이었다. 거기에는 농업신들이 주는 풍요한 수확을 위하여 그들을 높이는 의식들이 많았다. 많은 히브리인들은 그 땅의 백성들의 농사 방법을 인수하는 중에 이 방법들과 연결된 종교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4. 주제


 이 책은 여호수아의 사후에 군주 시대가 시작된 때의 사무엘 시대까지 히브리 백성의 갖가지 흥망성쇠를 열거한다. 여호수아는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모세가 시작한 계획을 수행하고 완성하도록 택함을 받았다. 여호수아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모세의 권위있는 지도나 여호수아의 행정적 경험을 다 버리고­그들이 새로 얻은 땅에 대하여 독립적 관리로 강화해 가는 기간에 들어섰다.
 이전까지 히브리인들은 노예로 있다가 광야의 유랑 생활을 하고 마침내 진영과 정복의 곤욕을 치루는 등 갖가지 불안하고 유동적인 상태에 살아왔었다. 주로 위대한 지도자의 자서전으로 꾸며진 여호수아서는 이 정복의 마지막 단계를 열거한다. 사사기는 다음 단계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며 그들이 방랑적인 유목민으로부터 정착적인 농민으로 전환하는 도전을 맞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책을 펴노라면 우리는 전쟁의 열기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우리는 즉시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아 연합된 진군을 한 후에 지파들이 흩어져 전쟁 준비를 서두르는 모습에 뛰어든다. 전쟁 회의가 열리고 지파들이 요단 골짜기에서 그들에게 정복하도록 분배된 지역을 소유하기 위하여 올라갈 때 휘두르는 무기 소리가 들리게 된다. 전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철병거들이 골짜기를 요란스럽게 지나가며 산허리는 무장한 군인으로 가득하다. 노래는 싸움과 전쟁에 속한 것들이며, 이스라엘의 대적을 분쇄한 자들은 영웅이 된다. 히브리인들이 산지대에서 승리하였지만 평야지대에서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없었다.
 전쟁 소리가 사라져갈 때 가나안 족들은 여전히 헤레스 산에서부터 아얄론, 샤알빔, 기브온, 비에롯, 기럇여아림, 그리고 예루살렘을 통하여 동서로 이어진 강력한 요새화된 일련의 성읍들을 소유하였다. 멀리 북쪽으로는 잇사갈, 스불론, 아셀, 그리고 납달리가 또 다른 장벽인 돌, 하롯셋, 므깃도, 타아낙 그리고 이블림에 이어지는 바다에서 요단강에 이르는 요새들에 의하여 중앙 가나안에 있는 지파들로부터 분리되었다. 벳산의 요새까지 요단으로 내려 뻗친 풍요한 이스르엘 계곡은 아직도 가나안 족들에게 속해 있었다. 그 땅을 가로지른 이 두 일련의 요새들은 지파들 간의 교통과 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같이 아직 정복되지 않은 성읍들에 의하여 상호간 두절된 상태에서 히브리 지파들은 공격에 노출되었으며, 그들이 적의에 찬 주민들 중에서 취한 중심지들을 수호하기 위하여 아주 어렵게 부분적인 연합을 이루어 그들의 대적을 대항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순환되는 호전적 백성들의 침략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투쟁과 부담을 안겨 주었다. 북동쪽에서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침략해 오고, 남동쪽에서는 모압인들이, 동쪽에서는 미디안과 암몬 사람들이, 그리고 남서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침략해 왔다. 배교와 우상 숭배가 그들의 종교에 대한 충성이 이루어 놓은 민족적 결속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맹렬한 공격을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속박의 고통이 회개를 일으켰고, 백성들은 다시 한번 여호와를 경배하도록 돌이키게 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자 또는 “사사”를 일으키셨으며, 그는 속박의 멍에를 깨뜨리고 그가 죽기까지 백성들을 다스렸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적 요소이다.
 사사기의 저자가 설명하는 주요 주제는 참 종교에서 벗어나는 죄와 배교가 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하여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돌이키게 할 수 있는 고통과 재난을 허용하신다. 참된 회개가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구조를 가져오는 사람들과 여건을 준비하신다. 그 기간의 역사는 이러한 광범위한 명제를 밝히는 체계로 기록된다. 의는 민족을 높이지만 죄는 백성의 수치이다. 악한 친구는 선한 의향과 훈련을 망친다. 도덕적 타락은 언제나 민족적 쇠약을 가져온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의 즉각적인 보호 아래 있었다. 민족적인 죄는 하나님의 처벌을 가져 온다. 죄에 대한 처벌은 여호와께서 교육적인 차원에서 내리신 것이지 보복적인 것이 아니다. 응징은 그것이 참된 회개를 일으켰을 때 철회된다. 구원은 무력한 인간 밖의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고취된 힘과 열심에서 나온다.
 저자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규범의 원칙은 이 기간의 역사에 나타난 배교와 속박이 회개와 구원으로 바뀌는 특성을 설명한다고 한다. 이러한 명제들은 저자가 열거한 이야기 가운데 아주 훌륭하게 예증되었기 때문에 사사기를 열거한 역사 문서의 영역에서 역사의 거룩한 철학의 위치로 높여준다. 이 책의 영감받은 저자는 역사 자체보다는 그가 기록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을 지적하는 일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사사기를 대충 읽어볼지라도 저자가 이스라엘이 새로 얻은 땅에서 만난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난 것을 증거할 의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 성과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들의 유일한 행복과 안전이 그를 섬기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배워야 할 그러한 길로 그들의 경험을 지도하셨다.
 이 책의 소 주제는 이스라엘의 문제들은 주로 이방인 이웃들의 악한 감화에 기인된 것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의혹을 느낄 것이다. 만일 그 땅의 우상 숭배하는 주민들이 히브리인들을 유혹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 족들과 아모리 족을 몰아내어 당신의 백성을 배교에서 보호하지 않으셨는가라고 한다. 저자는 결국 이 책의 일부(삿 3:1-4)에서 이런 이의(異議)에 대한 대답을 한다. 여기에서 그가 진술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품성 형성에 있어서의 역경의 가치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가나안 족속을 남겨두어 이스라엘이 그를 섬기는가의 여부를 입증하시고자 하셨다.
 나아가서 저자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도와 축복 아래 어떻게 소수의 지파들이 외지(外地)의 적개심이 가득 찬 땅에서 영구적 정착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영웅들은 어떻게 명성을 얻었는가? 그리고 갖가지 관심과 영향의 와중에서 그들의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다른 백성들에게 휘말리지 않도록 그들을 보호해 주었는가?
 사사기는 다섯 개의 부분으로 잘 구분된다. 일반 역사적 서문(삿 1:1-2:5), 또는 여호수아에 의해 그 땅이 여러 지파에게 분배된 후에 그 땅을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이야기로 장을 연다. 지파들은 그들의 특별한 유산을 단독으로 공격하거나 또는 때때로 강한 저항을 받을 때는 몇 지파들이 연합하여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소유하는 일에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하였다. 저자는 백성들의 실패는 그들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뢰와 성실이 부족한 탓이라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독자에게 뒤이어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며, 그리고 가나안 족들이 그 땅에 머물도록 허용된 이유를 밝혀준다. 이스라엘과 남아 있는 가나안 족들과의 관계는 계속 이어지는 장들의 역사적 배경을 형성하며 사사들의 필요성을 설명해 준다.
 이 역사적 개요에 이어 두번째 서론(삿 2:6-3:6)이 나오는데 그 목적은 여호수아의 사후에 뒤따른 종교적 배교가 어떻게 계속 감소되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나님의 응징을 격동시켰다. 백성들이 회개할 때는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계속 일으키심으로 구원해 주셨다.
 저자는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열 두 사사들 밑에서 지파들의 역사를 계속 열거한다(삿 3:7-16:31). 죄의 역사가 계속 반복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새로운 구원으로 맞선다. 이 구원자들 중 여섯 명의 영웅적인 행동은 충분히 서술되고 나머지 여섯 명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언급된다. 아비멜렉의 찬탈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시에 일치하지 않는 군주를 택하는 위험에 대하여 백성들을 경고하고자 충분히 다루어진다(신 17:15).
 이 책은 두 가지 부록으로 끝을 맺는데, 둘 다 사사 시대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한다. 첫째(삿 17, 18장)는 미가의 우상에 대한 이야기와 엘리가 죽을 때까지 단 지파에서 그의 우상을 보관한 북방 성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번째 부록(삿 19-21장)은 기브아의 베냐민 족의 악행 그리고 다른 지파들이 그 지파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베냐민 지파가 사악한 기브온 사람들을 지지한 것 때문에 사실상 멸절된 뒤에 그들을 멸종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하여 취한 수단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5. 개요


Ⅰ. 일반 역사 서문: 역사가 시작될 때의 사건에 대한 진술 1:1-2:5
     1. 지파들이 팔레스틴에서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강화하고자 노력함 1:1-36
       (1) 유다와 그나스 1:1-20
      (2) 베냐민 1:21
      (3) 므낫세와 에브라임 1:22-29
      (4) 스블론 1:30
      (5) 아셀 1:31, 32
      (6) 납달리 1:33
      (7) 단(남부) 1:34-36

     2. 그들이 실패한 이유 2:1-5

Ⅱ. 주제 서론: 이 기간의 히브리 역사에 대한 저자의 개요와 해설 2:6-3:6
     1. 여호수아서와 연결되는 역사적 서론 2:6-10
     2. 이제 시작되는 역사에 대한 저자의 해설 2:11-3:6

Ⅲ. 사사들의 이야기 3:7-16:31
     1. 옷니엘이 북동쪽에서 온 침략자들(메소포타미아인)의 압박을 끊음 3:7-11

     2. 에훗이 남동쪽에서 온 침략자들(모압인)에게서 백성을 구원함 3:12-30

     3. 삼갈 3:31

     4. 드보라와 바락이 북방 가나안 족들의 압박을 끊음 4:1-5:31

     5. 기드온 6:1-8:32
      (1) 동편에서 온 미디안 족의 침입을 격퇴시킴 6:1-8:21
      (2) 기드온의 생애의 후속 사건들 8:22-32

     6.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찬탈 8:33-9:57

     7. 돌라 10:1, 2

     8. 야일 10:3-5

     9. 입다 10:6-12:7
      (1) 동쪽의 암몬 족의 침입을 물리침 10:6-11:33
      (2) 그의 딸을 제물로 드림 11:34-40
      (3) 입다의 사사 수행 기간 동안에 나타난 지파간의 투쟁 12:1-7

     10. 입산 12:8-10

     11. 엘론 12:11, 12

     12. 압돈 12:13-15

     13. 삼손의 탄생과 모험 13:1-16:31

Ⅳ. 두 가지 부록: 사사 시대에 일어난 두 사건 17:1-21:25

     1. 미가의 우상의 출처와 단(북방)에 보관된 그의 우상 성소 17:1-18:31
      (1) 우상의 주조 17:1-6
      (2) 변절한 레위인이 제사장이 됨 17:7-13
      (3) 단 사람들의 이주를 따라 우상이 단으로 옮겨짐 18:1-31

     2. 베냐민 사람들의 악행과 그 무서운 결과 19:1-21:25
      (1) 기브아의 베냐민 사람들의 방탕과 레위인에게 속한 첩의 죽음 19:1-28
      (2) 다른 지파들이 베냐민 백성을 처벌함 19:29-20:48
      (3) 베냐민 지파의 멸종을 방지할 수 있도록 지파들의 서약을 우회하는 방법 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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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과 왕정체제의 시작 사이의 기간을 소개합니다. 
이 책의 독자들은 흠이 많은 사사들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고 자비로우심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배경

사사기 시대에 해당하는 주전 이천년기의 후반부에는 근동지방 전역에 걸쳐서 거대한 민족 이동들이 이루어지던 시대였습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도 익명으로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왕정체제가 시작된 이후의 어느 시기에 살았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작시기에 대한 단서를 18:30-31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모세의 아들 요나단의 후손인 제사장들이 계속해서 일을 했으며, 법궤가 실로에 있는 기간 동안 미가의 우상들이 계속되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물론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에 대한 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6세기의 늦은 연대를 주장하거나, 혹은 단 주변 지역이 빼앗긴 날 즉 이 부분이 이스라엘로 존재하지 않게 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아니면 사무엘상 4:1-11 이하의 내용과 관련해서 상당히 이른 시기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들 역시 연대와 관련된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의 연대는 왕국 분열 이후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장들의 역사 기록은 친 다윗적이자 반사울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성향으로 볼 때 이 이야기는 왕정시대의 상당히 이른 시기를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내적인 증거는 왕국의 분열 직후의 시기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연대적인 문제는 출애굽 연대와 관련해서 깊은 논란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사사들의 산술적인 연대는 410년이며, 또한 본문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한 기간에 대한 언급은 없기 때문에 출애굽 연대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조화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몇몇 사사들이 이스라엘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중복된 시기에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재구성을 위한 충분한 자료는 부족합니다.

문학적인 구조

지파들이 협력하여 정복활동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결론은 지파들이 연합하여 한 지파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서론에서는 이 책 전체의 주제, 즉 왜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름대로의 사이클을 가지고 있는데,
죄 - 압제 - 구원이란 구조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순환론적인 흐름은 아닙니다.
보다 바람직한 용어는 "나선형 하강(downward spiral) "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에훗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세우시듯이 에훗을 세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훗은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감동을 받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을 치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에훗은 속임수와 배반에 의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본문은 야웨의 뜻 및 그와 야훼의 관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보라가 사사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남자들의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드보라의 노래 말 속에는 분파주의와 지파간의 분열을 예상케 하며, 결국 이것은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들의 지도력을 가지고는 이스라엘 영토가 안전하게 보존될 수 없다는 것이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사사들도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연약하고 범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유산으로 남긴 통일된 이스라엘은 분파적이고, 지역주의적인 갈등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종교적, 정치적 혼란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지도력이 필요함을 내다 보게 합니다.


신학적인 메시지

1. 은혜와 율법, 조건성과 무조건성

사사기서가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조직 신학이 아니라 관계의 역사를 말합니다.
사사기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고 있는 관계는 조건적이자 무조건적이라는 역설을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이 양자 사이의 긴장입니다.

2.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사사기서는 비중앙집권적인 통치가 비록 국가의 지도권이나 전쟁 문제에 하나님께서 간헐적으로 개입하시는 식의 축복을 누린다 할지라도 결국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기서는 왕정 체제로서의 변천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으로의 접근

사사기는 일반 인간 군상을 잘 묘사합니다.
사사들은 농부, 여자, 왼손잡이, 쓸모없는 떠돌이, 성에 집착하는 나실인 등이었습니다.
중심 인물들의 약점과 실패들을 통해서 우리가 지나치게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경계하십니다(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그들의 모든 흠집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신앙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한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 덕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저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고 예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는 증인들의 허다한 구름 중의 일부입니다(히브리서 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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