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이야기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

오늘 우리의 ‘기념(commemorate)'에도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
둘째는 토마스 목사가 걸어갔던 믿음의 길을 기리는 일

이 목적을 위해 우선 토마스 목사가 살아갔던 삶의 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과 삶,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출생과 가정 배경, 학교교육

로버트 저마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1810-1884)와 메리 윌리암스(Mary L. Williams, 1817-1895)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는 당시 웨일즈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웨일즈 부흥을 주도한 윌리엄 윌리엄스의 제자인데, 중부 웨일즈에 있는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837년 4월 18일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39년 여름 라야더(Rhayader)의 터바나클 교회 부임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둘째 아들 저마인 토마스가 출생했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강력한 성령의 역사 일어났고 교회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1795년에 창립된 런던선교회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하는데, 후에 그의 아들이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관련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1848년에는 몬머스셔(Monmouthshire)의 하노버교회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저마인 토마스는 8살이었다. 토마스는 이곳 하노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토마스의 교육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초의 공교육이 이루어 진 곳은 란도버리(Landovery) 칼리지에 3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가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은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후 토마스는 오스포드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보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도제식 의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스텔라 프라이스(Stella Price)에 의하며 토마스는 외과의사가 되는 교육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워터만(Waterman) 의사 휘하에서 2년간 의학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왕실의사면허 시험 제도가 있어 공인된 의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2년여 이런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고, 육신의 치료자보다는 영혼의 치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든 중 잉글랜드 노스헴톤 지역 온들(Oundle)에 있는 알프레드 뉴스 학교(Alfred Newth’s school) 보조교사로 부름을 받고 약 1년간 일하게 된다. 이 학교 교장 알프레드 뉴스는 중국선교를 준비했던 사람으로 로버트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배운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알프레드 뉴스를 통해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토마스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캐를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였다. 토마스는 주일에는 온들 회중교회에 다녔는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중 존 갓프리의 외동딸 캐를라인 갓프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여성은 토마스보다 2살 연상으로 후일 아내가 된다.
일 년 간의 교사생활을 마감한 토마스는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고, 이때 아버지 청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히브리서 13장 8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본문의 설교였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1857년에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온들에 있을 때 교장이었던 알프레드 뉴스의 친형인 새무엘 뉴스가 당시 학장이었다. 이곳에서 2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3년간 최고의 금액인 밀스장학금을 받았다. 이 시기가 웨일즈의 영적 부흥기였는데 토마스는 교수드르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 년 간 휴학했는데, 휴학기간동안 지역교회에서 설교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복학한 그는 중국선교에 대한 조바심으로 학교에 조기 졸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가 선교의 이상을 갖게 된 데는 귀츨라프의 영향 또한 없지 않았다. 토마스는 1832년 충청남도 보령시의 고대도와 조선 해안을 방문했던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성경을 보급했듯이 후일 토마스도 동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1859년 10월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록하르트(Lockhart) 선교사의 설교 듣고 큰 감명을 받는데, 그의 설교 또한 선교사의 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록하르트는 1861년에는 영국공사관의 공의로 베이징에서 활동하게 된다.
 
2. 선교사로의 길

토마스는 1863년 5월 뉴칼리지 졸업했다, 휴학기간을 포함하여 6년이 소요되었다. 졸업 후인 5월 29일에는 런던의 회중교회에서 온들에서 만난 캐롤라인 갓프리와 결혼했다. 이때 토미스는 23세, 아내는 25세였다. 결혼 6일 후인 6월 4일에는 목사안수 및 선교사 파송식이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7주 후인 7월 21일 토마스 부부는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항구 떠나 상해로 출발했다. 그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은 몇 가지 연쇄적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중궁은 인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선교지였고, 가장 많은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이었다.

토마스는 영국을 떠난지 4개월 만인 1863년 12월 첫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런던선교회 상하이 지부장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의 충심의 영접을 받았으나 두 사람 간의 친밀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2개월 후인 1864년 2월 4일 자로 부모님께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서에는 당시 정황을 헤아리게 해 주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도착 4개월 후인 1864년 3월 11일 런던선교회의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한커우(漢口)로 갔는데 그 기간동안 임신 중이던 부인은 유산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864년 3월 24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마스는 타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 일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사별의 아픔이치유되기도 전에 토마스는 또 다른 고뇌에 빠졌는데, 상하이지부장 무어헤드와의 갈등이었다. 선교관의 차이에서 유래한 갈등은 토마스에게는 심각한 현실이었다. 상하이에 주제하는 영국인을 위해 목회했던 무어헤드는 상하이가 선교 중심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토마스는 자국민보다 중국인 선교가 우선해야 된다고 보았고, 한커우로 가고 싶어 했다. 토마스에게 신설되는 학교 교장직 요청을 받았으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이 사역은 그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결국 토마스는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1864년 12월 7일이었다. 곧 이 일을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후회하게 되지만 토마스에게는 성급함과 무모함이 없지 않았다. 고무송 박사는 토마스에게는 모험정신, 강한 의무감, 무모함, 성급함, 엘리트 의식 등 몇 가지 기질 혹은 특징이 있다고 보았는데,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런던 선교회를 사임한 그는 현제 엔타이(煙臺)라고 불리는 지푸(Chefoo)로 이동하여 이곳 세관의 통역 및 감독관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1865년 8월 31일까지 약 8, 9개월간 일했다.
 
3. 제1차 조선 방문 1865년 9월 4일

지푸는 산동성 북부의 해안도시로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당시로 볼 때 외국과의 무역을 허용한 유일한 항구였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두 사람의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두 한국인을 만나게 되는데, 김양선에 의하며 그 두 조선사람 김자평(金子平)최선일이라고 한다.
윌리암슨은 이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토마스도 함께 초대되었고, 이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듣게 된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 신자는 5만 명에 이르고, 11명의 신부들이 비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런 접촉을 통해 토마스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되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자격으로 1865년 9월 4일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조선방문인데, 윌리암슨으로부터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 받았고 또 약간의 경비 지원도 받았다.
이때 김자평이 동행했고, 중국인 우웬타이가 항해를 맡았다.
그 달 13일에는 황해도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황해도 옹진 자라리(紫羅里) 근포(近浦)였다.
이곳에서 성경을 나누어 주며 전도했고 한양까지 가려했으나 배가 파선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떠난 그는 만주의 피쯔워 항구를 거쳐 도보와 말을 타고 여행하여 1866년 1월 4일 혹은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지푸를 떠난지 4개월 만이었다.
조선에 체류한 기간은 2달 반 정도였고, 체류한 곳은 서해안, 곧 황해도나 평안도에 속한 도서지방이었다.

김양선 교수의 지적처럼 토마스를 인도했던 김자평이 황해도의 ‘육도’였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지역으로 안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성경책과 기독교 문서를 배포했다.
이점은 토마스가 두 번째 조선으로 향하기 일주일 전에 런던선교회 지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재가입 되었고 근무지는 베이징 지부로 결정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즉 재가입된 것은 1865년 9월에서 11월 사이로 판단되는데 이 점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을 방문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토마스가 런던 선교회 티드만 회장에게 보낸 조선방문 보고는 당시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스텔라, 100).
 
4. 제2차 조선 방문 / 1886년

고종 3년인 1866년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있었던 해였고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압했을 뿐 아니라 약 8천명의 천주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하여 9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참수되었다.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으로 감시했고 해안은 봉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두 번째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토마스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행을 시도했다.
그러든 중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으로부터 통역관으로 조선으로의 동행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베이징의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는데,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소식, 특히 프랑스인의 처형 소식 알려주었다.
벨로네는 로즈에게 조선 진격을 요구했고, 약간의 조선어를 알고 있는 토마스에게 로즈 제독의 통역관으로 조선 동행을 요청한 것이다.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서 텬진에서 로즈 제독과 합류하여 지푸를 거쳐 조선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즈 제독은 베트남 사이공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그리로 가게 됨으로 원래 계획이 취소되었다.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길을 찾기 위해 일단 지푸로 갔다.
여기서 필요한 경비도 마련할 계획이었다.
여기서 다시 윌리암슨과 한국인 김자평을 만났는데 이들을 통해 조선방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든 중 1884년 7월 29일 지푸에 커다란 선박이 나타났다.
그것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원래 이 배는 1861년 영국에서 건조한 범선으로 ‘프린세스 로얄’호로 불렸으나 1863년 1월 미국으로 넘겨져 미 해군에서 사용하였고, 1865년에는 경매에 넘겨져 상선으로 개조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위력을 떨친 남군의 장군 셔먼으로 이름을 따 제너럴 셔먼으로 개칭되었으나 더 이상 해군 함정이 아니라 영국의 메도우 사(Meadows Company) 소속 상선이었다.

이 배는 조선에서 팔릴만한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을 싣고 텬진항을 거쳐 지푸로 온 선박이었다.
토마스가 어떻게 이 배에 승선하게 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행을 의도했던 토마스에게는 조선행의 호기였다.
그 배가 어떤 성격의 배인지, 조선 방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베이징을 떠난지 26일 만인 1866년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고, 이날 셔먼호는 조선으로 향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양의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공급받았다.
제너럴 셔먼 호는 무장한 상선으로 승선인은 선주 미국인 프레스턴(W. Preston)을 비롯하여 항해사 윌슨(Wilson), 선장 페이지(Page), 화물관리인 영국인 호가스(G. Hogarth), 토마스 선교사, 두 사람의 중국인 이팔행 등 항해안내원, 그리고 중국인과 말레시아인 선원 등 24명으로 파악된다.

후의 일이지만 고종실록에는 프레스톤을 보래돈(普來敦)으로, 페이지를 파사(巴使)로, 호가스를 하갈특(何噶特)으로, 토마스를 최란헌(崔蘭軒)으로 표기했다.
물론 최란헌이라는 표기가 토마스를 표기한 것이 맞느냐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다.

지푸를 떠난 제너럴 셔먼호의 첫 경유지는 백령도의 두무진 항이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성경을 나눠주었고, 이때 제너럴 셔먼호를 목격했던 한 조선인의 목격담이 스텔라 프라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124쪽).

곧 백령도를 떠나 돛섬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중국인 선장 우웬타이(Yu-Wen-Tai) 만나게 된다.
그는 여러 차례 조선의 해안을 왕래하며 장사했던 중국인이었다.
다시 배는 대동강 안쪽으로 행진했다.
외국선박의 입항이나 접촉을 금지했던 조선의 사정을 알고 있던 선원들은 안전을 위해 더 이상 진출 우려했으나 선장과 선주는 우웬타이의 경고를 무시했다.
조선 사정이 밝은 우웬타이는 더 이상 안내할 수 없다며 지푸로 돌아갔다.
그러나 셔먼호는 자만했다.
 
5. 대치상황과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

8월 16일에는 용강면 다미면 주용포항에, 8월 17일 금요일에는 황주 송산에 정박했다.
예상되는 바이지만 강둑에는 이양선을 보기 위해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조선관리는 긴급 회합하여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입항을 고집했다. 고종 3년, 곧 1866년 음력 7월 15일자 고종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배는 더 진행하여 8월 20일에는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서양 선막은 구경꺼리였다.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다. 오문환에 의하면 홍신길이라는 소년도 작은 배로 셔먼호 근처로 접근했고, 토마스는 갑판에서 그를 맞이하여 방으로 데리고 기독교 문서를 주고 그에게 케이크를 맛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감자를 보았다고 한다. 또 그날 밤에는 인근 쑥개마을에서 장인국 지달수 지달체 지택구 지택붕 지택주 장용국 지달해 표명보 등 아홉 사람이 토마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들 중 장용국 외에는 천주교 신자들인데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해 줄 프랑스 선박을 기다리고 있던 중 셔먼호로 찾아간 것이다. 토마스는 자기는 천주교 신자도 프랑스 함대도 아니라고 말하고 개신교 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성경과 기독교 문서, 그리고 빅토링여왕 얼굴이 새겨진 동전까지 주었는데, 천주교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상으로로 오인했다고 한다. 오문환 장로 기록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인과의 접촉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얼마 후 지달수와 지달해는 서양인 접촉했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조선관리가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 셔먼호는 교역을 원한다며 비단, 유리, 망원경, 자명종을 조선의 쌀, 인삼, 종이, 호랑이 가죽 등과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교역을 금하는 정책에 따라 이를 거절했다. 거듭된 경고를 무시한 것은 제너널 셔먼호의 오만이었고 신중치 못한 처신이었다. 대치상황은 약 2주일간 계속되었다. 조선 관리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행을 고집하고 8월 21일에는 평양 신장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구경꾼들이 몰려오았고, 토마스는 성경책 나눠주었다. 토마스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경 받은 김영섭은 후에 기독교신앙을 받아드렸고, 두 아들 김종권과 김성집은 후일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조선 관리 김낙수는 선박의 도래경위를 조사하고 철수를 요구했다. 8월 22일 셔먼호는 평양 만경대의 작은 선 두로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 이곳에서 100권의 성경 배포했다고 한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경대를 둘러싸는 방어선 구축 지시했다. 그럼에도 셔먼호 대동강으로 계속 진입했다. 8월 27일에는 보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셔먼호 승무원들이 순시대장 중군(中軍) 이현익을 억류한 것이다. 조선에 무단 침입했을 뿐 아니라 퇴거를 거부하고 조선관리를 억류한 일은 심각한 일이었다. 셔먼호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혹은 물이나 식량, 연료를 공급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없지 않으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선원 중 한 사람은 이현익의 관원 명찰을 빼앗은 일을 더욱 그러했다.
이현익의 억류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셔먼호에 돌을 던졌고, 석방을 요구했다. 관군은 사격을 가했다. 셔먼호 측에서도 발포했다. 이런 와중에서 박춘권(朴春權)이 혼자 배를 저어 가 이현익을 구출했다고 한다. 오문환에 의하면 그가 후에 평양의 장로교회 첫 인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셔먼호가 수세에 몰리자 더욱 낙폭하게 대응했다. 8월 28일 발포를 시작했고, 8월 31일에는 조선인 7명 사살되고 5사람 중경상을 입었다. 사태는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고종의 허락에 따라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 공격을 지시했다. 9월 3일이었다.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방론자였으나 셔먼호의 무단접근은 용인될 수 없었다. 곧 강 수위는 낳아졌고 배는 좌초되었다. 9월 4일 달빛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결국 선원은 쑥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작은 거룻배에 나무를 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로 접근시켜 셔먼 호 불태웠다. 선원들 불길을 피해 강밖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강변에 정렬해 있는 군인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주임을 당했다. 토마스 목사도 남은 성경책을 안고 배에서 띄어 내렸다. 강가로 끌려나온 그는 모래사장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성경을 관군에게 내밀었다. 관군의 칼은 토마스의 가슴을 내리쳤고 토마스는 9월 5일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토마스의 시신은 대동강변에 묻혔다.
 
6. 토마스의 순교 이후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할 때 토마스는 뱃머리에서 홀로 야소(耶蘇)를 외치고 남은 성경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한석진 목사는 토마스가 순교한지 26년이 지난 1892년 당시 목격자로부터 제널 셔먼호가 불탈 때 토마스가 성경을 던지며 ‘야소’를 외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겨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백기를 흔들며 목숨을 외국인도 한 두명 있었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이 토마스였을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을 균형 있게 판단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토마스의 죽음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제너럴 셔먼을 구경하라 갔던 소년 최치량(崔致良, 1854-1930)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는 12살 때 숙부와 함께 1866년 9월 3일 토마스 순교장면을 목격하였고, 토마스 목사가 뿌린 한문성경 3권을 주었다고 한다.

책 소지자에 체포 명령이 내려 대부분 성경을 소각하거나 강변에 버렸다.
최지량도 이 성경을 집으로 가져 오지 못하고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고 한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가져와 찢어 벽지로 사용했다.
오랜 후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물상객주(物商客主)가 되어 평양 대동문 안에 집을 사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전 주인이 박영식이었다. 최치량은 이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고 또 한석진의 전도로 회심하였고, 평양에서 최초로 마펫에게 세례를 받고 평양지역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널다리골의 홍종대(洪鐘大)의 집을 사서 예배처소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평양장대현교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서구와의 불행한 접촉이었으나 그 이후 역사는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미국간의 외교문제로 발전하였고, 널리 알려진 바처럼 이 일이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6)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대결과 접촉이 후일에는 조미 양국 간의 통상조약(1882)으로 발전하여 외국인의 조선 거주를 보장 받게 된다. 결국 1884년에는 알렌이 입국하게 되는데, 토마스 순교 18년 후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용규 교수는 토마스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자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고 했다.
 
7. 남은 문제 :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침략자인가?

토마스 목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60년이 지난 1926년 평양의 오문환 장로는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것이 토마스의 생애와 조선 기독교사의 분수령이 되는 양란(洋亂)에 대한 기록이었다. 1927년에는 토마스 기념회가 조직되었고, 1927년 5월 8일 토마스 목사가 묻힌 쑥섬에서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이때 1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1932년 9월 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마스기념예배당을 건립했는데, 1933년 10월 14일 봉헌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10여년 이래로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그 의 죽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감리교의 존스(G. H. Jones) 이래로 초기 선교사들은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이정해 왔고, 설사 게일의 경우처럼 순교자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복음을 위한 그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 있고, 그를 정치적 희생자라든가 침략자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거나 심지어는 침략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토마스는 무장상선을 타고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 와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그가 죽은 이유가 기독교 복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제너럴 셔먼호의 부당한 처신과 횡포에 기인하는 정치적인 죽임이라고 주장하다. 일견 고려할 점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1860년대 상황에서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토마스가 복음의 열정, 곧 조선 선교의 이상을 가진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로는 조선 입국 방법이나 경로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설사 무장상선이라 할찌라도 셔먼호 승선이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신중치 못한 점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셔먼호로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선교사가 내한 한 이후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1863년 이래로 선교사 신분이었고, 이미 조선을 방문하바 있고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내한 즉시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의 죽음이 복음전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도 고려할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가 금압된 당시 상황에서 서양인의 죽음, 특히 서양선교사의 죽음을 비종교적 행동으로만 취급할 수 없다. 1866년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죽음은 정치적 성격이 강했고,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 누구도 프랑스 신부의 죽음을 순교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선교사의 현존’ 자제가 정치적 행위일 수 있고, 정치적 침략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셔먼호로 입국한 일이나 셔먼호의 부당한 혹은 불법적인 행위는 지탄받을 수 있지만 토마스 목사는 조선인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한 의지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가 죽임을 당한 후 초기 선교사들을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간주하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기념해 왔다. 1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토마 목사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우리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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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복 선교사 이야기

한 젊은 선교사(프랑크 윌리엄스) 부부가 미국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다. 이 젊은 선교사 부부는 공주를 기반으로 선교하기 시작했다. 먼저 1907년 인천에서 첫아들을 낳았다. 프랑크 윌리엄스 선교사는 첫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한국명으로 우광복(禹光復, George Z. Williams, 1907~1994)이라고 지었다. 

 

그 후 프랑크 선교사는 올리브라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이듬해 2월경 논산지방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상여 집에서 비를 피해 잠시 쉬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하고 그 장례용품을 보관하였던 터라 프랭크 선교사는 즉시 감염이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졸지에 프랑크 선교사 사모는 과부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간다. 놀라운 사실은 2년 후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공주에 돌아왔다. 그리고 공주에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고 47년 간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런데 딸인 오리브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1908~1919)는 11살에 죽어서 영명동산에 묻혔다.

 

그런데 우광복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인천에서 태어난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은 공주 영명학교 졸업 후에 조부모가 있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치고 돌와왔던 것이다.  

 

그때가 바로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 책임자로 한국을 다스릴 때였다. 바로 1945년경이었다. 하지 장군은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이 하지 장군의 참모가 되어 정부수립에 관여하게 된다. 그때 하지 장군이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광복은 어머니와 이 일을 상의하였고, 우광복의 어머니는 즉각 금식기도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50명 중 48명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물론 그 명단 안에는 믿음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적혀 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 명단을 받아 든 하지 장군은 미군 정부 요소요소에 그들을 임명하였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믿음의 기독교인들이 곳곳에 들어가서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이다. 특히 문교부 장관을 기독교인이 맡아서 미신 타파를 시작했다. 또 국방부장관에도 기독교인이 맡아서 군대안에 군선교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들이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회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8년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개회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문하였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이윤영 의원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 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 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때 우리나라 전체의 기독교인이 전국민의 1% 도 안 되는 때 였다. 그런데 윌리엄스 사모가 추천해준 48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20년 만에 5백만 성도가 되고, 30년 만에 1천만 성도를 헤아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미군정 시절 우광복 Geroge Williams이 추천한 48명으부터 시작했다. 우광복의 48명을 누가 추천했는가? 바로 우광복의 어머니 윌리엄스 사모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어버리고 (Frank Williams)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Oliver Williams)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 된 사모 때문이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의 일기로 소천했는데, 마지막으로 유언하기를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공주 영명동산에 묻혀 있는데, 내 동생 올리브 옆에 나를 묻어 달라."고 했다. 공주 영명학교는 영원한 광명(eternal light)이란 뜻이며, 아버지 프랭크 윌리엄스가 1906년에 세운 학교이다. 이 학교의 모태는 명선학당인데, 그 설립자는 엘리스 하몬드이며, 이 학당에서 유관순이 1913년부터 공부했다. 엘리스 선교사 밑에서 배웠던 것이다. 우광복이 이렇게 유언한 것은 아마도 한평생 동안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동생이 가슴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우광복의 묘가 동생 앨리스의 묘 옆에 나란히 있다.

 

공주시 영명중학교 연역에 보면, 1906년 10월 15일에 윌리엄스 선교사가 이 학교를 설립했다고 나와 있다. 그 뒷산에 가보면 우광복 선교사의 묘를 볼 수 있다. 그는 비록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사의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평신도 선교사로서 특히 해방 후 한국 건국기에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던 한국정부와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다.

 

이런 의식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나와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 자기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줄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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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선교회 역사 -농촌 계몽가 최용신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요구한다.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도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 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배운자로서 그 어느곳보다도 배움이 절실한 농촌을 외면할 수 없었던 최용신, 가난과무지 속에 갇힌 농촌을 계몽하는 것이 완전한 사회로 가는 기본임을 알리며 짧은 생을불살랐던 그녀의 결의가 돋보이는 글귀이다.

농촌 계몽가 최용신, 우리에겐 소설 상록수의 여자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그녀는 1909 년일찍이 서양문물과 기독교가 유입된 개항장 함경북도 덕원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조부는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해 구국의 길을 찾으려 노력한 교육 운동가였으며 아버지도 교육에 종사하였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최용신은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기독교 신앙 속에서 성장하였다. 1918 년 고향의사립학교에서 원산의 루씨여자 보통학교로 전학한 그녀는 농촌계몽 운동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1928 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독립운동가 황애덕 교수를 만나게 되면서 일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펜실베니아주립대학에서 농촌사업과 관련된 공부를 한 황애덕 교수는 협성여자신학교에서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 농촌의 실상을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농촌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황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최용신은여름 방학에 농촌 현장 실습을 지원하였다. “제까짓 여자가 우리를 가르치러 왔느냐”며 그녀를 무시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않는 현실 속에서도 농촌을 향한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학 수업을 중단한 최용신은 YWCA 의 지원을 받아 1931 년 10 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로 마침내 농촌운동의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샘골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나의 몸과 마음을 남김없이 태워 이 마을을 밝히도록 해 주소서’라고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교회 부속의 야학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헌신과 노력으로 이듬해에는정식으로 강습소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학생 수도 점점 늘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운영되었고 밤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한글과 산수, 그리고 재봉과 수예를 가르쳤다.

강습소 신축에 대한 그녀의 설득에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고 마을의 유지가 기증한 뒷동산 솔밭이터가 되어 1933 년 1 월 천곡학원이 완공되었다. 샘골은 나날이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변화해 갔다. 생활 개선, 농가 부업장려를 위한 부녀회가 조직되었고 공동생산을 늘려가며 공동체적인 경제 토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샘골에서의 농촌 계몽 운동이 성공적으로 정착될수록 최용신은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더욱 절실해졌다. 샘골을 농촌 운동의한 도화선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유학을 결심한 그녀는 1934 년 3 월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입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인 약혼자 김학준을 만나 약혼한 지 10 년이 되는 1935 년 4 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같이 계몽운동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약혼자 김학준과 최용신은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 활동을 하면서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그녀의농촌 활동에 대한 열정으로 결혼이 늦어졌지만 둘은 신뢰와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유학 생활이었지만 갑작스레 각기병에 걸려 그녀의 유학 생활은 6 개월 만에중단되었다. “누워만 있어도 곁에 있어 달라” 는 샘골 주민들의 간청으로 최용신은 샘골로 돌아왔다. 그러나 몸을 어느 정도추스려 그녀가 다시 일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YWCA 로부터 지원이끊기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도시의 여러분이여! 당신들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스럽고 얼마나안락 하십니까? 우리 농촌의 아이들은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목이 마릅니다. 곡식을 심으면 일 년의 계가 되고 사람을 심으면100 년의 계가 된다고 하였거든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 겨레를 발전시킬농촌의 어린이들을 길러주소서” 도움을 요청하며 그녀가 한 잡지에기고한 글이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마지막까지 불꽃을 태우던 그녀는 결국 누적된 과로로 쓰러져 1935 년1 월 23 일, 27 세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유언대로천곡학원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영원히 잠들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시대에 농촌 계몽을 위해 청춘을 바친 최용신, 모두가 외면한 가난하고

무지한 농촌을 향한 그녀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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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붕선교사

 
 고촌 제자들과 강당 앞에서 송해붕 선교사.


 
1952년 7월. 14세 소녀 송해숙은 천주교 선교사였던 오빠 송해붕의 시신을 찾기 위해 천등고개를 올랐다.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현재는 김포시 고촌읍)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km 가니 천등고개가 나왔다. 높지는 않은 곳이지만 한여름이라 일행들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다.

김포 천등고개에서 숱한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은 진작 있었지만 학살 당시인 1950년 10월에는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빨갱이가 죽어 묻혔다는 인식에다 고촌지서의 감시 때문이었다.

그날 송해숙 가족과 천주교 고촌공소 신자, 송해붕의 제자 약 200명이 시신 수습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지난달 재판 덕분이었다. 즉, 1952년 6월 28일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의 '송해붕 외 5인 살해 및 사체유기' 재판에서 치안대원 및 고촌지서 순경이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송해붕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가족과 관련자 들이 시신 수습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시신수습에는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학살 지점을 명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고촌성당에 묻힌 송해붕 선교사
 
 선교사 송해붕


 
송해붕을 학살해 실형을 선고받은 임OO 등의 치안대원들은 법정에서도 학살 장소를 이실직고하지 않았다. 결국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고, 학살지를 찾는 것은 유가족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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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십여 명씩 나뉘어져 천등고개 이곳저곳을 삽과 곡괭이, 가래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송해숙이 있는 곳에서 "아"하는 탄식이 터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구덩이에서는 여성으로 보이는 유해가 나왔다. 살은 썩었지만 머리카락, 옷가지 등은 그대로였다. 잔인하게도 머리카락은 전깃줄로 위로 묶여 있었고, 두개골 주변에는 핏자국이 널려 있었다. 주변에는 피가 묻은 돌멩이가 보였다. 

고촌지서에서 전깃줄로 머리카락을 위로 묶어 고문을 가하다가 천등고개에서 총으로 쏜 다음 그것으로도 모자라 돌멩이로 머리를 짓찧은 것이었다. 참혹한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없어서 수습을 하지는 않고 다시 흙으로 묻었다. 이후에도 여기저기서 시신이 발견되었지만 송해붕의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절(약 4시간)쯤 지났을 때 "여기 선교사님이 있어요!"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는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 아래로 신학생복이 보였다. "오빠", "요한아", "선교사님"을 외치는 목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요한은 송해붕의 세례명이었다. 송해붕의 윗주머니에서는 묵주가 나왔고, 평소에 찼던 허리밴드도 그대로 있었다. 2년 가까이 천등고개에 묻혀있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1950년 10월 12일 새벽 0시에 학살된 시신이 세상의 빛을 본 때는 1952년 7월경이었다. 이날은 시신을 인근에 가매장했는데 경황이 없어 시신 매장지를 미리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송해붕의 유해가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56년 6월 15일의 일이었다. 계양 선산으로 이장을 하던 날, 소복을 입은 여성과 천주교 고촌공소 어린 제자들이 뒤를 따랐다. 하관미사를 때 송해붕의 부친 송희진은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고 참석자들은 통곡을 했다. 이후 송해붕의 유해는 1999년 4월 김포성당 묘지로 이장했다가 2004년 3월 9일 고촌성당 동산에 이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촌성당 내에 있는 송해붕의 묘


 
인민군 사격연습했는데...

경기도 김포는 3.8선 접경지역으로 전쟁 3일 만에 북한군에게 함락됐다. 마을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밥을 해달라고 했고 부상당한 군인들은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1950년 7월 인민군은 의용군 모집을 시작했다.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참가한 이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수가 강제적으로 끌려갔다. 송해붕의 동생 송해용(1929년생)은 후자의 경우로, 7월 10일 강제로 끌려갔다.

동생이 끌려가자 송해붕은 천주교 고촌공소 강당 옆에 굴을 팠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송해붕은 밤에는 산언덕 콩밭으로 가 바위틈에 숨어 잠을 잤다. 또 송해붕은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로 피신을 하기도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자 선교사였으며 김포군 고촌공소 창립자였던 송해붕은 자신의 신앙에 비추어봤을 때 북한군에게 협조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1950년 9월 말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탈환 전투를 벌일 즈음 송해붕은 고촌의 한 굴에 있었다. 송해붕의 5촌 조카 송영식의 증언이다.

"인공 때 동네 수수밭에서 국군이 버리고 간 MI 총 세 자루와 칼빈 총 한 자루를 주웠어요. 공깃돌(小石. 송해붕의 아호) 선생한테 그 말을 했더니, 고촌으로 가지고 오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것을 대빗자루 만드는 대싸리 잎새 사이에 잘 숨겨가지고 걸망으로 메고 갔지요. 지름길로 가면 빠르겠지만 일부러 한적한 길로 돌아서 갔어요.

선생님은 그 총으로 제자 몇을 데리고 굴속에서 사격 연습을 하셨지요. 국군들이 일선에서 싸우고 있으니, 우리도 후방에서 싸울 수 있으면 싸우도록 준비를 하자는 거였어요. 그런 분이 웬 공산당입니까? 환도 후 너무 억울하니까 그냥 있을 수 없다며 당숙 댁에서는 임○○ 씨 등을 상대로 재판을 걸었지요.(안영, 『스물넷, 못다 사른 불꽃』)"

천주교 신자(황〇〇)의 집 벽장에 숨어 낮에는 굴에서 사격연습을 하던 송해붕은 1950년 10월 10일 오후 3시 치안대에게 발각되어 끌려갔다. 고촌면사무소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는데, 그곳엔 이미 수십 명이 있었다.

창고 안은 연일 비명소리로 아우성이었다. 송해붕의 제자 임병열도 연행됐다가 창고 안에서 송해붕을 만났다. 임병열은 치안대원과 지서 경찰들에게서 "송해붕을 따르지 마라"고 강요당하며, 창고에서 3일 동안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을 당했다. 그는 다른 주민들이 전깃줄로 손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물고문을 당하는 것도 목격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그렇다면 송해붕은 치안대에 왜 연행됐을까? 당시 치안대와 경찰은 송해붕이 '고촌면 면장 암살을 기도하고, (고촌면 천주교) 신자에게 적기가 등을 가르쳤다며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1952년 6월 28일,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형사합의부, <임OO 외 판결문>, 형공 제351호)

하지만 송해붕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인민군을 상대로 교전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또 수복하는 국군을 환영하려 제자들과 감자로 태극 문양을 만들어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송해붕이 치안대에 공산주의자로 밀고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기존에 개신교를 믿던 고촌면의 한 성씨 지도자들(지역 유지 그룹)은 6.25 전부터 천주교 선교사였던 송해붕을 질투하고 질시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송해붕의 야학과 선교에 관심을 갖고 지역의 지도자로 받들자 그들은 송해붕을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송해붕을 학살한 이들은 훗날 재판을 받고 실형까지 선고 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51년 연합국 일원이었던 벨기에 군인들이 계양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둔했다. 이들은 학교에서 군종신부 주관으로 미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송해붕 선교사 사건을 접하게 됐다.

사병 조지가 이 경악스러운 이야기를 군종신부(중령)에게 전했는데 이후 군종신부는 고촌지서와 김포경찰서에 가 항의하고 조사를 촉구했다. 군종신부는 송해붕의 가족에게 경찰서에 진정을 넣도록 권유했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해서 가족은 진정서를 제출했고 인천지검이 정식으로 기소해 형사재판에 이를 수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움터 열어

송해붕은 계양국민학교와 인천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성직자의 길을 가기 위해 1944년 원산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엔 신학교에 입학하려면 해당 교구 주교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데, 노기남 주교는 송해붕에게 "너는 장남이고 가계를 이어야 하니 취업을 하라"고 했다. 성직자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송해붕은 경성(서울) 명동성당 주교관 앞에서 다섯 시간 무릎 꿇고 있었다. 다음날 노기남 주교는 송해붕의 부모를 만나 최종 허락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의 배움은 쉽지 않았는데 라틴어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고, 방학이라 집에 왔던 송해붕은 3.8선이 그어지는 바람으로 신학교가 있는 원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송해붕은 성직자가 아니라 천주교를 전파하는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는 계양면 굴현리에서 야학을 시작했는데 1949년에는 고촌에 공소강당 겸 야학교사를 건립했다. 그의 열정은 주민들을 감화시켰고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다.

"억울하게 죽은 오빠, 복자가 되기를"

1997년 7월 김포군 고촌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차동엽(노르베르또) 신부는 50년 전 고촌 토박이들에게 신앙의 씨를 뿌렸던 스물네 살 청년 송해붕을 알게 됐다. 고촌 어느 마을을 가던 송해붕, 송해붕 하는 것이었다.

송해붕은 고촌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파한 죄로 스물네 살에 천등고개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순교했다. 차동엽 신부는 송해붕 선교사를 복자(천주교에서 공경할 만한 성도에게 붙이는 존칭)로 추대(시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쉽지 않았다.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자가 복자 자리에 오르는 것은 드물었다. 시복은 교황이 신앙이나 순교로 이름 높은 사람을 복자품(福者品)에 올리어 특정 지역의 교회에서 그를 공경하도록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

송해붕의 여동생 송해숙(85세,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은 "오빠가 복자가 되고, 나중에는 성인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쟁 때 억울하게 죽은 송해붕이 진실규명되긴 했지만 한 발 더 나아가서 역사의 순교자로 자리매김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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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로아(F. S. 밀러) 선교사

밀러(Miller)라는 이름(姓)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여러 사람이 있다.

첫 번째, 프레드릭 S. 밀러(Frederick S. Miller)선교사는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민로아(閔老雅)라는 한국 이름으로 서울에서 예수교 학당 장과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충북 청주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두 번째, 휴 밀러(Hugh Miller)선교사는 1899년 영국에서 내한하여 민휴(閔休)라는 한국 이름으로 성서공회에서 성서의 편찬과 반포사업을 주도하면서 우리 나라 성서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세 번째, 에드워드 H. 밀러(Miller, Edward H.) 선교사는 1901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밀의두(密義斗)라는 한국 이름으로 경신학교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서교동교회 등에서 교역자로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한 선교사이다. 이밖에 한국에서 활동한 밀러 선교사는 더 있다.

양화진 묘역에는 프레드릭 S. 밀러의 부인 "안나 S. 밀러(Anna R. Miller)" 선교사를 제1묘역 사-16 위치에 안장하였다. 안나 밀러는 1892년 11월 15일 남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으며 1903년 6월 17일 38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그리고 밀러 부부의 첫 아들 프레드 밀러(Miller, Fred S., 18980∼1899)가 1898년 11월 7일 출생한지 8개월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사-17에 위치). 또한 그들의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Miller, Frank, 1902∼1902)도 1902년 3월 7일 출생한지 하루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사-18)에 묻혔다.

양화진 제2묘역에는 가문이 다른 에드워드 H. 밀러(Miller, Edward Hughes, 密義斗)의 가족(나-8에 위치)도 안장되어 있으며 이들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별도로 기술할 예정이다.

◇ 충북지방 최초 선교사 밀러(Miller, 閔老雅,1866-1937)


프레드릭 S. 밀러(Miller, Frederick Scheiblim, 閔老雅 1866-1937)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1866년 출생하여, 피츠버그대학(1889)과 유니언 신학교(1892)를 졸업하였다. 그는 1892년 11월 15일 부인(Anna Reinecke)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발전시켰다. 안창호(安昌浩)선생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1895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청주지역에서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장로회·감리회 연합의 찬송가 제정을 위한‘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작곡하였다. 이밖에도 94, 294, 379 516장 등이 현재 찬송가에 실려있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밀러는 현재의 양화진 묘역 주변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에비슨 선교사 등과 공동으로 별장용지를 구입하여 각기 방갈로를 짓고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지낸 일이 있어 양화진과는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첫 부인 안나 밀러가 별세한 후 F. S. 밀러는 1904년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Doty, Susan A.)와 재혼하였다. 1931년 도티와 사별한 뒤 딘(Dean M. Lillian)과 다시 재혼하였다.

그가 설립하였거나 시무한 교회로는 충북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전파한 청주 신대교회, 청원 북일의, 묵방리교회, 북일 화죽리교회(1921), 송파교회(1922) 등이 있다.
그는 1936년 정년 은퇴후 필리핀 중국을 여행하고 청주로 다시 돌아왔으며 1937년 별세하였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한 선교사 이야기
- 아버지 윌리암 얼 쇼, 아들 해밀턴 쇼 대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습니다.
1890년 미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던 J. W. 헤론(Heron 1850-1890)선교사가 전염병으로 소천하면서 묻히게 된 이후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 145명을 비롯하여 총 15개국 415명의 외국인들이 안장된 곳입니다.

그곳 ‘제 2 묘역 라-6’에 가면 우리 국군의 군목제도를 만드는데 산파 역할을 했던 숨은 공로자 윌리엄 얼 쇼(한국명 서위렴, William Earl Show 1890~1967)선교사와 그의 아내 아델린(Adeline H. Show 1895-1971)선교사, 그리고 그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1922~1950)의 묘지가 있습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1890년 8월 22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원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유럽 전선에서 군목으로 종군했는데 의무병으로 입대하여 군목으로 제대한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1년 아내 아델린(1919년 결혼)과 함께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를 자원하여 우리나라에 옵니다.

감리회 소속으로 남편 윌리엄은 평양 광성학교에서, 아내 아델린은 숭덕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방까지 다니며 선교 사역에 몰두하다 1938년에 제임스 무어(James Z. Moore) 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했고, 평양 보이스카우트 연맹 단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돼 잠시 필리핀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1947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한국인들에 대해 잘 알았던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주한미군 군목으로 자원입대하여 종군합니다.

당시 연합군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일반인들로부터 용공 분자들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윌리엄 얼 쇼 목사는 피난민들이 용공 분자로 몰려 학살되는 일이 없도록 힘썼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국군에도 군목사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피난 시절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군목제도의 중요성을 수차례 역설하여 결국 승낙을 받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해군 대위로 자원입대하여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 탈환 작전에도 참여하고 있던 외아들 해밀턴이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아들을 양화진에 묻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아들 해밀턴 대위의 전사를 애도하는 물결이 일어나 5,925명의 사람들이 1만 4500달러를 모금해 아버지에게 보냈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현재 목원대학교의 전신인 대전감리교신학원에 기부하였고 학교 측은 이 모금액으로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를 기념하는 기념 채플과 한국 목회자들의 재교육을 위해 목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전후에도 계속 한국에 남아 목원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인재양성에 힘썼고, 1961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병원에서 78세의 나이로 소천하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생전에 유언을 따라 양화진에 먼저 묻혀 있는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는 그의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온 이듬해인 1922년 6월 5일에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자라난 그는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의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43년 졸업 후 해군 장교에 지원한 그는 1944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함대의 이동 상황과 해안 정찰 등 특수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공로로 미 정부로부터 퍼플 하트(Purple Heart) 메달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유능한 장교였습니다.

1946년 9월 1일 해군 중위로 제대한 그는 이후 미 군정으로부터 한국에서 활동해 줄 것을 요청받게 됩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평양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할 정도이며 한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미 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1947년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해양경비대 사관학교에서 항해술과 함정 운항술 민간인 교관으로 활동하며 초기 해군 간부들을 교육해 대한민국의 해군의 태동기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에는 경제협력청(ECA) 관리로 일하면서 미국의 원조를 이끌어내 대한민국의 탄생과 새로운 정부 수립에도 기여했다. 
  

이후 극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 한국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해 동아시아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연구에 전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해군 대위로 자원하여 재입대를 하게 되고 세 번째 우리 땅을 밟게 됩니다. 

그는 이전에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 해안에 매설된 기뢰 제거작업을 지도한 실전 경험자였고, 또 한국 해안 경비 상황과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군 장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경력으로 인해 그는 인천상륙작전 계획팀의 특별참모로 임명돼 맥아더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여러 가지 전장 상황상 성공 가능성이 1/5000이라고 했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하게 됩니다.

작전 성공 후 미 해병대는 서울로 진격했는데, 당시 미군의 최대 문제는 공산군과 일반인을 구별할 수 있는 인원이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 사투리를 사용하는 해밀턴 대위는 미 해병 5연대에 배속이 되어 서울 탈환 작전에 참여하였고 최전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일반인들과 공산군을 구별하는 위험한 일에 자원하여 김포반도, 행주산성, 신촌 노고산 전투를 승리를 견인합니다.

그러던 9월 22일 임무를 수행 중 녹번리 부근에서 숲속에 매복하고 있던 적의 흉탄에 전사합니다.
그의 나이 29세.
그는 김포공항 근처에 가매장됐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에게 인계돼 서울 수복 후인 9월 28일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한국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했던 아버지 윌리엄 얼 쇼 선교사와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인 한국을 위해 생명을 바친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부자

한국전쟁에 자원입대하는 아들을 걱정하던 부모에게 해밀턴 대위는 1950년 6월 “아버지, 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 후 평화시에 선교사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라는 편지를 쓰고 한국전쟁에 참여합니다.

또한 전사하기 1주일 전, 인천상륙작전에 함께 했던 당시 한국 해군 PC-703호 함장 이성호 중령(이후 제5대 해군참모총장 역임)과의 대화에서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사람입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겠어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해도 늦지 않아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녹번리 전투에서, 한국 땅에서 30년간 활동한 선교사 아들의 전사 6주년이었던 1956년 9월 22일 해밀턴 대위가 전사한 곳에 친지들에 의해 전사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비문에는 그로 하여금 한국전쟁참전을 결심하도록 도전했던 요한복음 15장 13절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후 2001년 10월 20일 해밀턴대위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해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며’라고 새겨진 좌대석이 더해졌고, 6·25전쟁 60주년인 2010년 6월 22일에는 은평구 녹번동 은평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그곳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동상이 세워집니다.

또 2014년에는 해군사관학교에, 작년인 2018년 9월 20일 그의 아버지 윌리엄 얼 쇼 선교사에 의해 건립된 대학 채플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었습니다. 
  

이 가문의 한국사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들 해밀턴 쇼 대위의 젊은 미망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 Show, 한국명 서화순)선교사는 1956년 두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외국인학교 교사로 봉직하였고 196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내며 세브란스병원에 의료사회봉사학과를 신설하는데 기여하였고 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한 후 오하오주에서 머물고 있으며 양화진의 남편묘역에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대위의 장남인 윌리엄 로빈슨 쇼(William Robinson Show)는 서울대학교 법대 초빙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그의 아내 캐롤 쇼(Carole Cameron Show)는 작가로 미 한국대사관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근대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 Independence’를 출간했습니다.

대위의 손녀 줄리는 1990~1991년 오산의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살면서도 오늘 누리고 있는 번영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평화와 자유가 어떻게 지금까지 지켜져 왔는가에 대해 무감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조국의 광복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신 분들, 한강의 기적을 열기 위해 밤낮없이 뛰었던 이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늘 깨어 눈물로 부르짖었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윌리엄 얼 쇼 선교사의 가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에 순종하여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였던 이들의 헌신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Think)하는 사람만이 감사(Thank)합니다.

감사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늘을 감당할 힘과 내일을 바라볼 소망을 함께 허락해 주실 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