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여호와께서 감추신다) 여호와께서 보호하신다


7월 21일(수)
내가 진멸하리라(스비냐 1:2)

스바냐의 의미 :
1. 여호와께서 감추신다. 2. 여호와께서 보호하신다. 3. 여호와께서 숨기신다.

스바냐 1:2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아멘

진멸하리라(쑤프. çûwph) סוּף 
- 완전히 쓸어버리다(창세기 6:7, 7:4) 

창세기 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7:4,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스바냐(Zephaniah)
(의미) 야웨께서 숨기신다.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1:3
내가 사람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와 바다의 고기거치게 하는 것(우상)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멸절하다(카라트. kârath) כָּרַת

참조 / 스바냐 1:4-6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스바냐 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히스기야(13대 왕?) - 아마랴 - 그다랴 - 구시 - 스바냐

히스기야 : 야웨께서 강하게 하셨다
아마랴 : 야웨께서 약속하셨다
그다랴 : 야웨께서 위대하시다
구스 : (이디오피아 사람)
스바냐 : 야웨께서 감추어 두셨다
              야웨께서 쌓아 두셨다
백성들의 죄를 쌓아놓으시고 훗날 벌하실 것이다(1:12)

신앙의 뿌리가 깊은 가문 

스바냐 1: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우상)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진멸의 대상 : 짐승, 새, 고기 

멸절하다(카라트. kârath) כָּרַת 

스바냐 1: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손을 펴서(하나님의 권능을 펴신다) 모세의 지팡이 

그마림(바알의 제사장을 의미)


스바냐 1:5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말감(암몬 족속의 신 밀감)

스바냐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

우상(바알, 말감) : 욕망, 이기적, 배타적
야웨 신앙 : 경외심, 포용, 협력  

남 유다의 왕들 

       13대 : 히스기야
  14대 : 므낫세
15대 : 아몬
    16대 : 요시야

혼합주의 시대 : 개인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한 임금 요시야(예레미야 선지자의 평가)
가난한 자, 불쌍한 자를 위한 신앙의 통치
이 시대에 스바냐의 등장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

기복신앙을 창조신앙으로
개인구원을 사회구원으로


1.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멸절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신으로,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알은 농경신으로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을 섬겼습니다.
여기서 '바알의 남아있는 것'은 개혁을 추구했던 요시아가 많은 바알 숭배 사상이 남아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바알 우상을 파괴하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2.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멸절

'그마림'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던 칭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알의 남은 것들만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방 제사장들조차 모조리 파멸시키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3.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별과 달을 숭배하는 의식은 가나안과 바벨론에서 흔히 행해졌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왕정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신 4:19; 왕하 21:3,5; 렘 8:2; 19:13; 44:8-10).
하나님은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서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도 예외 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4. 야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

'말감'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왕'을 의미합니다.
'말감'은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어(왕상 11:5-8,33; 왕하 23:13)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악에 빠지게 했던 우상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말감을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를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는 예루살렘에서 흔히 자행되던 죄악이었기에 이들도 심판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5.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결정하신 대상은 배교자들과 불신앙자입니다.
여호와를 찾고 구하는 자는 내적으로, 도덕적으로 여호와만을 바라며 그 계명을 즐겨 행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들 중에는 하나님을 바라기는 커녕 도리어 내면적, 도덕적으로 배교하거나 불신앙에 빠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지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절대자 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이나 사람들은 그 앞에서 복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가 세우신 법이요,

창조의 질서이기에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1:17절에서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고 심판의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을 하나님 처럼 섬긴 이유 때문입니다.(18)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겨한 때문입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그렇게 추구했던 은과 금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왜, 다른 신상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일이, 과연 엄청난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도 대가를 지불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창조주 하나님과 죽임 당하신 어린양 예수님 외에 진정한 경배의 대상은 없습니다. 창조자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우상숭배와 죄의 결과는 반드시 '심판'이라고 하는 엄중한 경고를 마음속에 새기며 주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

심판하실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를 기억하여 구별된 주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영적 암흑기였다.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물들었다. 요시야가 개혁을 이끌었지만 유다 백성의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다. 예배 형식을 정비하고 우상을 몰아냈지만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수가 없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의 죄악을 고발하고(4-5), 심판 날의 모습을 예언한다(7-13). 불의한 권력자들, 우상 숭배자들, 예루살렘에서 포악을 행한 자들, 돈을 의지한 자들은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심판의 날이 무척이나 가깝고 빠르게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호와의 큰 날에 멸절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따르는 자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멸절하신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 멸절하신다는 말씀이 귀에 더 쟁쟁하게 들려온다.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인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목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이방신을 섬기는 패역한 선민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데에 전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악에 빠진 경우 거의 대부분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 즉 가식적 ·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섬기거나 종교 혼합주의적 · 종교 다원주의적 유혹에 미혹되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쫓아다니는 삶들이 너무 너무 많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보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예배의 형식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축제와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각본에 짜여진 대로 연출을 한다.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배의 형식은 뛰어나다. 현대 문화의 발전을 교회 예배 의식에 도입하여 엄청나게 화려하다.

그러나 예배를 준비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것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종교 혼합주의, 다원주의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연출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기 위한 예배가 대부분임을 볼 때 안타까울 뿐이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성경대조 및 주해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심판 날의 선포(1-6절) ;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심판 받는 이유가 선포된다. 이들은 우상숭배를 하였다.

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 때에, 주께서 스바냐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의 아버지는 구시이고, 할아버지는 그달리야이고, 그 윗대는 아마랴이고, 그 윗대는 히스기야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말끔히 쓸어 없애겠다. 나 주의 말이다.

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도 짐승도 쓸어 없애고, 공중의 새도 바다의 고기도 쓸어 없애겠다.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과 악한 자들을 거꾸러뜨리며, 땅에서 사람의 씨를 말리겠다. 나 주의 말이다.

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내가 손을 들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겠다. 이 곳에 남아 있는 바알 신상을 없애고, 이방 제사장을 부르는 그마림이란 이름도 뿌리 뽑겠다.

​‘그마림’은 히브리어 ‘케마림’의 음역이다.
‘케마림’은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왕하 23:5),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호 10:5)로 번역되고 있다.

/ 아람어, 시리아어, 그리고 우가릿어에서 ‘케마림’은 ‘제사장들’을 일컫는다.

/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케마림’이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은 틀림이 없다.

/ 문제는 본문에서 ‘케마림’과 ‘그 제사장들’을 뜻하는 ‘학코하님’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한글개역 성경 및 개역개정판 성경과 KJV가 ‘케마림’을 고유명사처럼 ‘그마림(Chemarims)’으로 번역한 반면 대부분의 다른 영역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NASB, the idolatrous priests)’, ‘우상의 제사장들(AB, the idol priest)’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 만일 후자의 번역을 따르면 ‘햄 학케마림’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의 이름’ 곧 ‘우상을 숭배 하는 제사장들 개개인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제사장들 개개인의 이름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더욱이 ‘이름’을 뜻하는 ‘햄’이 복수형이 아니라 단수라는 사실은 이러한 해석을 더욱 부적절하게 만든다.

/ 그러므로 ‘케마림’은 한글 개역 성경이나 KJV의 번역처럼 일종의 고유명사로서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즉 본문은 ‘그마림이란 이름’, 즉 ‘그마림이란 호칭’ 자체를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 이러한 표현은 앞선 ‘바알의 남아 있는 것’까지 완전히 멸절할 것이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 바알에 관계된 모든 것을 그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에 앞장섰던 그 제사장들과 그 제사장들을 지칭하는 호칭까지 완전히 말소시키겠다는 것은 모두 우상 숭배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의 해석에 있어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제사장들(학코하님)’에 대한 해석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들’이 어떤 제사장들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제사장들’은 타락한 여호와의 제사장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문맥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문제의 해답은 의외로 간단히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본문을 직역한 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제사장들과 함께 그 그마림이란 이름을’이란 표현은 ‘우상 바알을 섬기는 그 제사장들과 함께 그들을 지칭하는 그마림이란 호칭을’이라는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코하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NIV, the idolatrous priests)’로 해석하여야 한다.

본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우상 바알을 멸절시키시되 그 남아 있는 뿌리까지 철저히 진멸할 것이며, 또한 그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멸절시키시되 그들을 가리키는 이름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5.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을 섬기는 자들, 주에게 맹세하고 주를 섬기면서도 말감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는

/ 문자적으로 ‘그리고 경배하는 자들을,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그럼에도 말감으로 맹세하는(자들을)’이란 뜻이다.

/ 여호와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자들로 상징된 ‘경배하는 자들’의 두번째 부류를 지목하고 있다.

/ 본절 전반부에서는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인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본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명목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이방신을 섬기는 패역한 선민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데에 전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악에 빠진 경우 거의 대부분 본문에서 언급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식적 ·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섬기거나 종교 혼합주의적 · 종교 다원주의적 유혹에 미혹되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말감’은 ‘왕’을 뜻하는 ‘멜레크’에서 나온 말로

/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왕’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래서 이 표현을 가나안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이며 왕으로 섬겼던 바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 (LXX)과 수리아 역본과 라틴어로 번역된 벌게이트 역본에서는 이것이 암몬 족속의 국가신인 밀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 바알에 대해서는 이미 4절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문맥상 밀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 이 ‘말감’ 곧 밀곰은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 산당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어(왕상 11:5-8 ; 왕하 23:13) 바알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격노케 한 우상으로 소개된다.

겉으로는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감으로’ 맹세를 하는 혼합주의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만연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혼합주의를 극도로 싫어하신다.

/ 출애굽 당시 시내산 아래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들을 구원한 신이라 말하면서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하고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었다(출 32:1-6).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신앙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가장한 우상숭배일 뿐이었다. 때문에 그것은 여호와를 진노케 했으며 결국 이에 연루된 무수한 악인들이 심판을 당해야만 하였다(출 32:25-35).

/ 이와 같이 종교 혼합주의는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한다 해도 그것은 우상 숭배의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이러한 혼합주의는 오히려 참된 여호와 신앙을 더욱 빠르고 무섭게 허물어뜨릴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주를 등지고 돌아선 자들, 주를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여쭙지 않는 자들을 내가 없애 버리겠다."

심판 날의 모습(7-13절) ; 심판 받는 날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습이 나온다. 이들에게 임할 심판의 내용이 무겁고 엄중하다.

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주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다가왔으니, 주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어라. 주께서는 제물을 잡아 놓으시고서, 제물 먹을 사람들을 부르셔서 성결하게 하셨다.

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나 주가 제물을 잡는 날이 온다. 내가 대신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하겠다.

9.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그 날이 오면, 문지방을 건너뛰는 자들을 벌하겠다. 폭력과 속임수를 써서, 주인의 집을 가득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겠다.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그 날이 오면, 물고기 문에서는 곡성이, 둘째 구역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산 위의 마을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11.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막데스에 사는 너희는 슬피 울어라. 장사하는 백성은 다 망하고, 돈을 거래하는 자들은 끊어졌다.

12.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그 때가 이르면, 내가 등불을 켜 들고 예루살렘을 뒤지겠다. 마음 속으로 주는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술찌꺼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서 벌하겠다.

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그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집도 헐릴 것이다. 그들은 집을 지으나, 거기에서 살지 못할 것이며, 포도원을 가꾸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심판 날의 성격(14-18절) ;
미리 선지자를 통해 이 날이 가깝고 빠르다고 경고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준다.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주께서 심판하실 그 무서운 날이 다가온다. 득달같이 다가온다. 들어라! 주의 날에 부르짖는 저 비탄의 소리, 용사가 기운을 잃고 부르짖는 저 절규.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그 날은 주께서 분노하시는 날이다.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이다.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나팔이 울리는 날, 전쟁의 함성이 터지는 날, 견고한 성읍이 무너지는 날, 높이 솟은 망대가 무너지는 날이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내가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니, 그들은 눈먼 사람처럼 더듬거릴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나 주에게 죄를 지은 탓이다. 그들의 피가 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오물처럼 널릴 것이다.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은과 금이 그들을 건질 수 없다.
주께서 분노하시는 날, 주의 불 같은 질투가 온 땅을 활활 태울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없애실 것이다.


유다에 임할 심판의 날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영적 암흑기였다.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물들었다.
요시야가 개혁을 이끌었지만 유다 백성의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의 죄악을 고발하고(4-5),
심판 날의 모습을 예언한다(7-13).

불의한 권력자들, 우상 숭배자들, 예루살렘에서 포악을 행한 자들, 돈을 의지한 자들은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심판의 날이 무척이나 가깝고 빠르게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유다에 임한 심판의 날'을 설교할 수 있다.
심판의 모습을 말하며 경고하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 경고는 윽박지르는 위협이 아니라 회개하길 기대하는 사랑의 경고이다.
심판의 강도와 엄중함을 강조할 수 있다.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심판 받을 것이며,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니 아직 기회가 남았다.
그러니 외형만 그럴듯하게 바꾸는 회개가 아니라 전심으로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돌이켜야 한다.

​주제 / 여호와의 날

​오늘의 말씀은, 유다에 임한 심판의 날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서 말씀이 주는 교훈이 그렇듯이, 우리는 심판을 받는 유다 왕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적용적 해석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시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예배 형식을 정비하고 우상을 몰아냈지만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보다 돈과 권력을 추구했던 부패한 지도자들은 더욱 철저히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했던 성벽과 높은 망대
는 무너질 것이고 돈과 은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다고 선지자는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전 경고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심을 보여줍니다. 이 말을 들은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청중을 향한 해석적 적용

​오늘의 말씀은, 유다에 임한 심판의 날입니다.
외형에만 머무르는 변화와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요구하셨던 회개처럼 전심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심판이 무척이나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우상이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권력자를 의지합니까?
은과 금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심판의 날에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 즉시 버리고 전심으로 돌이킵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돌이킬 때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결론과 도전

​하나님께서는 심판만을 즐기는 무자비한 폭군이 아니십니다.
선지자를 통해 미리 심판을 예고하시는 이유는 자신의 백성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심판 경고를 들으신 모든 분들이 하나님께로 즉시 돌이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7월 22일(목)
구하라 찾으라 얻으리라(스바냐 2:3)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기신다"는 뜻입니다.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니느웨가 함락되고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던 시기라고 합니다.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아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남은 자에 대한 보상 심판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요셉의 남은 자(유다) :  세상(에레츠. erets) אֶרֶץ
                                     땅, 여러나라, 각국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바카쉬. bâqash) בָּקַשׁ                                          
                            - 믿음 생활의 근본                   

아모스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Seek the LORD, and ye shall live                   
삶이란 다양한 문제와 부딪치는 것
그때마다 누구를 먼저 찾는가?


둘째,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바카쉬. bâqash) בָּקַשׁ
  - 믿음 생활의 핵심(예수의 의와 마음)

시편 105:3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Glory ye in his holy name: let the heart of them rejoice that seek the LORD.

셋째,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싸타르. çâthar) סָתַר
- 믿음 생활의 결과(노아의 방주)

마태복음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But he that shall endure unto the end,
the same shall be saved.

누가복음 21:19 /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의 기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이루게 하소서!


스바냐는 유다 백성들을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에 몰입하므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사리 분별력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숭배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와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여 있고,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극에 달해있는데 백성들은 전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지금 내 몸의 일부분이 썩어가고 있는데 이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생명이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패역한 무리를 향해 "모이라"고 외칩니다.
모이되 하나님의 격렬한 분노가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3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하고 온갖 이방신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수치를 모르는 백성"인 유다 백성을 향해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첫째는 반어법의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규례를 어기고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들이라는 것을 반어적으로 강조함으로 그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기 위해 이처럼 반대되는 호칭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다 백성들이 아무리 패역했다 할지라도,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한다면 유다 백성의 신분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라는 선포성의 뜻을 지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셨습니다.
우리가 의인 이였기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과연 의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왜 의롭다고 하셨을까요?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을까"해서입니다.

암에 걸려 죽어야 할 사람이 한 순간 암이 치료되어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가 과연 과거처럼 허랑방탕한 삶을 살까요?
아니면 매 순간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에 감격해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까요?

본문은 갑자기 주변 나라들이 심판받은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유다의 서쪽에 있는 블레셋인 가사와 아스글론(4-7), 동쪽에 있는 모압과 암몬(8-11), 남쪽의 구스와 에티오피아(12), 북쪽의 앗수르(13-15)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는 주의 날이 임박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8)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졌음이라”(10)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15)

즉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은 주변 국가들이 교만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고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했다고 이들을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소위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고 있었나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이방신들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니 당연히 이웃국가들로부터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오히려 잘못을 범하고 있는 유다를 비방하고 모욕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어야 하지 않나요!

자녀들을 키우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되었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부모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보다 더하십니다. 자신을 아무리 배반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유다가 저지르고 있는 죄에 비하면 이방국가의 죄는 죄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 이방국가들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즉 본문에서 스바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바는 단 한 가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여호와를 찾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여호와를 찾고 올바르게 살려고 힘쓰고 겸손하게 살아간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열방을 차지하는 복을 누리게 되지만,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될 주변국가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애절하지 않습니까! 본문은 자신을 끊임없이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이스라엘을 향하신 사랑보다 더 작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의 생명을 내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로 내모실 만큼 우리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인가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괴수의 삶을 살아가던 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인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기를 인내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우리는 여전히 나약한 존재입니다. 세상적 유혹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 세상의 가치를 우상으로 섬기며 수치를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겸손한 내 아들, 딸아, 너희는 나 하나님을 찾고, 올바로 살도록 힘쓰며 겸손하게 살도록 애써라”


스바냐서 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1-3절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선포와 그 심판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주시는 말씀이며,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이 재난을 겪게 되는 일에 일조했거나 그 재난을 기뻐했던 몇몇 이웃 나라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절대자의 존재를 거부하고 자기가 모든 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교만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며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은 되었으나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는 명목상의 신자, 이름뿐인 성도들도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으니, 모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심판이 임하면 모이지 말고 오히려 숨을만한 곳을 찾아 흩어져 도망쳐야할 것인데, 스바냐 선지자는 모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파멸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라는 것이며, 민족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스스로를 낮추고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생존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으라는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그 방법으로 다음 세 가지를 권하고 있습니다.


3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주님의 은총과 은혜를 구하며, 모든 일을 주님께 고하고,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며, 부지런히 찾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
이것이 믿음 생활의 근본입니다.
세상의 것, 인간을 찾아다니지 말고 여호와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새벽마다 말씀으로 모이는 우리들을 주님은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라

하나님께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어 주시도록 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할 본분을 제대로 행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값없이 죄의 대가를 치러주심으로 받은 그 구속의 의, 예수 공로로 구원 받게 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때 성령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셋째, 겸손을 구하라

겸손은 자랑, 교만, 자고(自高)의 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사람이 홀로 있을 때의 자기 내면에서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외부 사람들을 향한 행동에서 나타나는 그 사람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겸손이 온유와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각하여 낮은 데 처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됩니다.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와 같은 세 가지 자세와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도 우리가 숨김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숨김을 얻는다는 이 표현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게 합니다.
땅의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 노아와의족들을 살리시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사야서 20장 26절에 보면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환난과 심판을 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환난과 재난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고, 공의를 구하며,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숨김을 받고, 특별한 보살핌을 받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죄악이 만연하고, 재난이 횡행할 때에 믿는 사람들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깨어 있고, 하나님께 안전하고 평안한 피난처를 간구하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김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2장의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4절에서 7절까지는 블레셋 국가 안에 있는 도시와 지역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며,
8절부터 11절에는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는 구스와 니느웨 국가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방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침탈하고, 주님의 백성들을 조롱하며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8절,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을 모함하고, 조롱하며, 비방할 때 하나님이 갚으시며 심판하심을 믿으며, 굳건히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 

12절과 13절에는 구스와 니느웨에 대한 멸망과 심판이 나옵니다.
강력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함으로써 하나님의 분노의 날, 닥칠 심판이 결코 작은 규모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심각한 것이며, 임박한 것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찾고 의뢰하는 이들에게는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심판의 날, 여호와의 분노의 날과 같은 커다란 고통과 시련의 시기가 다가올 때,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처럼, 우리는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살아계신 하나님, 임박한 심판의 날이 다가왔는데도, 수치를 모르는 백성처럼 무디고 강퍅한 심령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죄악과 불신앙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이기에 힘쓰게 하시고, 민족적인 회개, 공동체의 돌이킴을 허락하옵소서.
그리하여 환난 날에 숨김을 얻게 하시고, 주님의 은총을 입게 하소서.
겸손하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만을 나의 의지할 분으로 섬기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7월 23일(금)
나를 기다리라(스바냐 3:8)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할 때는 남 유다 제16대 요시야 시대였습니다.
요시야는 영적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불과 8세에 왕이 되었으나 20세에 이방신과 우상을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제거해 버렸으며, 종교개혁의 범위를 북이스라엘까지 확장시켜 벧엘에 있는 제단까지 헐어 버리고, 사마리아 지역의 산당 제사장들을 모두 죽이기도 한, 참으로 대담한 믿음의 선각자였습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는 도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을 보고서, 그 이후 그것을 엄격히 지켜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이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은 유다에 내리실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2장에서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3장에서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선지자를 통해 전달하십니다.

1- 2절입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당시 예언자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이미 1장에서 심판을 선포했는데도 또 다시 패역하고 더럽다느니, 포학하다느니 하는 거친 표현까지 써가며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 스바냐의 심정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스바냐는 자신의 고조할아버지가 히스기야 왕이었던 왕족 출신의 선지자였습니다. 자신이 왕족이면서도 또한 최선을 다하는 왕 요시야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바냐를 선지자로 보내어 3가지 싫은 소리를 직접적으로 전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압제하는 것이 포학이요,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것이 패역이었고, 종교적으로 우상을 섬기며 순결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과 재판장들을 향해서 탐욕에 가득 찬 굶주린 사자요, 저녁에 잡은 먹이를 아침이면 다 먹어치울 정도로 만족을 모르는 이리에 비유하였습니다. 4절에서는 심지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조차 경솔하고 간사하고 거만할 뿐 아니라, 우상숭배와 일월성신의 숭배로 말미암아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말씀까지 불순종함으로 내면의 태도까지 더럽혔다고 선포합니다. 2장 말미에서 그렇게 타락했노라고 선언한 이방나라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가 똑같이 유다에서도 적용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 놈이 그 놈이다’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의 말씀은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주목을 톡톡히 받고 있으며, 일거수일투족의 행동거지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냥 그저 주님의 말씀에 순수하고 진실되게 반응하며 신앙생활 하려고만 했던 우리들로서는 이러한 주목이야말로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개혁의 기치를 외친 자답게 말씀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기에, 거침없이 개혁하는 젊은 왕 요시야 시대였음에도 여전히 그 왕의 턱 밑에 있던 지도자들은 그의 고군분투하는 노력에 비해 한없이 타락해 있었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와는 전혀 먼 얘기인 듯한 ‘포학과 패역, 그리고 더러움’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도 버젓이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겸허히 주님의 말씀으로 허리를 동이는 이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여전히 탐욕스런 눈빛의 사자와 이리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들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냉정히 되짚어보는 우리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들의 진정한 몸부림을 통해 신앙과 삶이 다른 이중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아침마다 빠짐없이 공의를 비추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수치를 알지 못하는 자를 심판하시되, 사람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성읍을 초토화시켜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방인들과 비교해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나은 점이 별로 없는 자들을 향해 따로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에게 일렀다. 너만은 나를 두려워하고, 내가 가르치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내가 벌하기로 작정하였다가도 네가 살 곳을 없애지는 않겠다고 하였는데도, 너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못된 일만 골라 가면서 하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서 어떻게 하여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향해 불 같은 진노를 내리기로 하셨음에도 그 심판을 거두시고 용서해주셨는지를 말입니다. 마치 엄마는 자식을 너무 심하게 혼내준 것은 아닌가 하면서 좀 살갑게 대하려 하면, 오늘 표현처럼 새벽 같이 일어나서 못된 짓만 골라가면서 하는 여전히 자라지 않는 아이 같은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으며 그 이름을 부를 때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2절, 13절에서는 남은 자,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남을 억울하게 속이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 간사한 혀로 사기 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잘 먹고 편히 쉬도록 해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해주십니다. 이 약속이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다짐하는 우리 자신들과 100주년기념교회에 그대로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4절부터 말씀의 어감, 즉 톤(tone)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14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또한 17절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방나라들과 똑같이 죄악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나 완전히 멸하지 아니하시는 주님. 이방나라들은 온 성읍이 황폐해지고 멸하여졌으나,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여전히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남은 자들로 새 역사를 준비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진노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이 이제는 사랑의 대상, 그것도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의 격한 사랑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태도는 눈물 쏙 빠지게 혼내시다가도 다시금 그 큰 가슴으로 한없이 안아주시는 우리들 부모로서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한, 비록 우리 인생이 혼탁한 일들로 뒤죽박죽 되고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운전대를 결코 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찾는 한, 어디서부터 잘못이 되었는지 교훈해주실 것이고 그 가르침대로 순종하려고 부단히 애쓰기만 하여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 등 뒤에서 우리를 꼭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넘쳐나는 오늘 이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주님. 오늘은 개혁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히스기야 가문의 두 개혁적인 젊은 왕과 선지자였던 요시야, 그리고 스바냐를 통해 얼마나 더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각자의 삶에서 개혁되어가야 하는지를 주님 말씀으로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이만큼 하면 되겠거니’ 하고 자기만족에 빠질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에, 늘 허리를 동이며 자만하지 않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향해 진노하는 하나님이시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우리 인생을 능히 구원해내주시는 능력있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자신들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기쁨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믿으며 처음 가졌던 그 첫사랑의 격한 감격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그 주님의 사랑이,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는 한없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새록새록 다시금 새겨지는 이 기도의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남 유다 16대 왕 요시야 통치 18년에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그 율법책을 읽다가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읽고 깨달음을 얻은 후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들려주고 백성에게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도록 명령하며 각종 우상 등 가증한 것들을 제거했습니다(대하34장). 이것을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라고 말합니다. 중세 종교개혁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었을 때 시작된 것처럼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발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사람은 요시야 왕의 친척인 스바냐 선지자로 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히스기야 왕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셨습니다.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만연한 시대에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예언하였습니다. 스바냐 1장에서 남 유다의 심판을, 2장에서 모든 민족에 대한 심판을 앞두고 회개할 것과 구원받을 자들의 구원을, 3장에서는 앞 두 장과 같이 예루살렘의 죄와 회복과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1-8절)

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성’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킵니다. 이 성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명령과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백성이 말씀을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가까이 하지도 않았기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3절은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켜 부르짖는 사자와 저녁 늑대로 비유합니다. 지도자들의 잔인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4절은 종교 지도자들의 경솔함과 간사함과 불경건함과 율법위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5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에도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매일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정의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정의의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심에도 불의한 자는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정의의 빛을 비추실 때 그 빛으로 정의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6 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의 망대가 파괴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나라를 심판하셨는데 예루살렘은 이를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교훈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시기로 작정하셨지만 그들이 살아갈 터전을 남겨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습니다. 그것도 부지런히 더럽혔습니다. 악을 행하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지 않고 선을 행하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작정하셨더라도 회복을 위하여 살 터전을 남겨두실 정도로 택한 백성들이 멸절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는데 부지런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벌할 날’이 ‘여호와의 날’이며 ‘분노와 진노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자주 하시는 말씀은 ‘그날에’ 모든 민족과 나라를 모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악을 행했던 자들은 질투의 불로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그날’, ‘여호와의 날’에 질투의 불로 인한 심판만이 있지 않고 구원받을 자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내용이 9-13절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9-13절)

9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11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과정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구원을 베푸시지만 구원을 베푸실 때 구원받을 자를 먼저 변화시키십니다.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십니다(9절). 예물을 바치도록 하십니다(10절). 교만을 제거해 주시고 다시는 교만하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11절). 곤고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도록 하십니다(12절).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구원받을 자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만드십니다. 주목할 점은 11절에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범죄 행위로 인해 정죄함과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범죄 행위로 인해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노래합니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14-20절)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구원받을 백성, 거룩한 곳에 거하는 사람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기뻐하고 노래하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를 알려줍니다.

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누가 받으셨습니까? 누가 우리의 원수를 쫓아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었다면 우리는 영벌에 처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를 믿는 자마다 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16절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7절에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십니다.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하시니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18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위로하실 것과 대적들을 벌하실 것을 다시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각 절마다 ‘모으다’라는 동사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시고(18절), 쫓겨난 자를 모으시고(19절), 너희를 모으신다(20절)고 합니다. 근심하는 자들이란 예배드릴 때 예배의 장소로 가지 못하여 근심하는 자들입니다. 예배를 갈망하지만 예배드릴 처지가 되지 못하는 사람의 근심입니다. 이러한 근심이 사라진다는 것은 예배가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괴롭힘을 당하였지만 칭찬과 명성을 주셔서 위로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20절은 명성과 칭찬을 재차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으실 때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실 때에는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회복시켜 주십니다. 요시야 왕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은 후 회개를 통한 정결의 과정을 거쳐서 신앙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실천함으로 신앙개혁을 이루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멀리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자,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 미래에 있을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게 해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에게 경외함을 주시고 구원의 소망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광선을 보고도 정의를 외면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정의 회복에 중심이 되게 하시옵소서. 범죄한 모든 행위에도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마음으로 죄의 법을 따르려고 하는 육신을 이겨나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정의의 빛을 비추시는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면 누리게 될 은혜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푸시는 구원과 회복의 과정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그 날에’ 우리를 모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나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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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


다른 소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서도 단순히 그 저자의 이름을 따서 불리워진다.
히브리어로 스바냐(Sephanyah)는 “여호와께서 숨기셨다”, 혹은 “여호와께서 간수하셨다”라는 뜻이다.
구약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몇 사람이 있다(대상 6:36; 렘 21:1; 슥 6:10, 14).

 2. 저자

우리는 스바냐가 자기 책에서 자기에 대해 말한 것 이외에는 이 선지자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습 1:1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 가문의 출신인 것이 확실한 것같다.
그가 그의 조상을 히스기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밝힌 사실은 그 이름을 가졌던 유다의 왕에 관하여 언급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그가 왕족의 혈통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선지자는 자기가 예언한 시기(습 1:1)가 유다왕 요시야의 시대라고 알려준다(B.C. 640-609).
스바냐가 B.C. 612년에 있었던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으므로(습 2:13) 아마도 그는 요시아 통치 초기에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도 하박국과 동시대 사람인 것같다.

 4. 주제

스바냐서는 요엘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날”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표현에 대한 의미는 사 2:12에 나와 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 임박한 심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 임할 징벌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스바냐가 그의 가혹한 심판들을 말하며 경고하는 것은 단지 백성들이 회개하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습 2:3)여 심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5. 개요

Ⅰ. 유다의 죄 때문에 받게 될 심판 1:1-18
     1. 표제 1:1
     2. 심판의 엄격함과 범위 1:2-18

Ⅱ. 은혜의 시기 동안에 여호와를 찾으라는 호소 2:1-3

Ⅲ.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들 2:4-15
     1. 블레셋 2:4-7
     2. 모압과 암몬 2:8-11
     3. 구스 2:12
     4. 앗수르 2:13-15

Ⅳ. 예루살렘이 죄 때문에 견책받음 3:1-7

Ⅴ. 모든 민족들이 받게 될 심판 3:8

Ⅵ. 회복의 약속들 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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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냐 분석


1. 저자

스바냐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들 보다는 자신의 배경에 대해 많이 말해 주고 있다.

① 스바냐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그를 감추셨다”는 뜻이다.

② 그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으로서 왕족 출신이다(1:1).

③ 구시의 아들이다(1:1).

④ 그는 요시야 왕(B.C. 640-609)때의 선지자이다.

⑤ 그는 포로시대 이전 선지자들 가운데 마지막 선지자로서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이다 (렘 1:2).

⑥ 그는 주로 유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다.

⑦ B.C. 640-622년경, 즉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이전에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2. 역사적 배경

스바냐는 B.C. 630-625년경, 남유다 제 16대 왕인 요시야 통치(B.C. 640-609년)때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당시 근동의 패권국인 앗수르는 신바벨론 제국(B.C. 625-539년)의 등장과 함께 그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져 가던 때였다.
이 때에 요시야 왕은 대외적으로 선왕들이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과는 달리 강력한 반앗수르 정책을 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데 크게 주력하였다.
그러나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유대민족의 상태는 매우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는 요시야가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을 개시하기에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그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3. 중심 메시지

스바냐의 중심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의 죄에 대한 심판의 필연성과 양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스바냐의 예언은 유다와 그 주변의 열방들을 함께 다루고 있지만, 주된 내용은 유다에 대한 경고와 격려다.
스바냐가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불러모아 심문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입증하실 분이다.
스바냐는 온 세상에 두루 임할 여호와의 날의 심판에 대해 2:4-15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3:9-20에서 주의 날은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심판이 완수된 다음에 주의 심판의 날은 축복의 날이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든지 이방인들이든지 마지막까지 남은자들은 구원받아 넘치는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①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필연성

② 하나님의 심판의 양면성(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의 구원)

4. 스바냐서의 특징

① 다른 선지자와는 달리 선지자의 족보가 구체적으로 4대조까지 기록되고 있다(1:1).

② 여호와의 날이 가지는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의 양면성을 극명히 대조시키고 있다.

③ 이방 나라들 보다는 남유다에 대한 경고와 격려를 주로 다루고 있다.

④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2:3,11 ; 3:9-12).

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스바냐 선지자의 진술은 장엄한 장송곡과도 흡사한 생동감 있는 운율로서 매우 음악적인 성격을 지녀 오늘날 진흔곡에 사용되어 널리 연주되고 있다.

5. 구조 분석

(1) 유다의 죄에 대한 보응 (1장)

(2) 유다의 이웃나라에 대한 보응 (2장)

(3) 유다의 회복에 대한 약속 (3장)

 

6. 주요 장과 구절

(1) 장

(2) 구절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 를 멸절하리라”

1:12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 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 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 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 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3:20 →“내가 내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기타 주요 구절〉

1:1-5, 1:10, 1:12, 1:14-15, 2:1-2, 2:9, 2:15, 3:3-5, 3:12, 3:14-15

 

7. 기본적인 내용 파악

 

(1) 스바냐가 예언 활동을 하던 시기는?(1) →유다왕 요시야의 시대

(2) 스바냐의 출신 배경은?(1:1)

→ 왕족 출신으로서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구시의 아들이다.

(3)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무엇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가?(1:18)

→ 그들의 은과 금

(4)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 의 고기와 . . . 멸절하리라”(1:2-3).

‘멸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스바냐서의 내용은 어느 시대를 연상케 하는가? → 노아 홍수 심판 시대

(5) 심판의 날을 스바냐 선지자는 무엇이라 표현하는가?

→ ① 여호와의 날 ② 희생의 날

③ 여호와의 큰 날 ④ 분노의 날

⑤ 환난과 고통의 날 ⑥ 황무와 패괴의 날

⑦ 캄캄하고 어두운 날 ⑧ 구름과 흑암의 날

(6) 심판의 때에 장차 어느 민족이 소돔같고 고모라 같이 될 것이라고 했는가?(2:9)

→ 모압, 암몬

(7) 습 3장 17절 말씀이 무엇인가?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 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 . ”

(8) 스바냐 선지자는 장차 유다가 사로잡힘에서 돌이킬 때에 그들로 천하만민 중에서 무엇 과 무엇을 얻게 하리라고 예언했는가? → 명성과 칭찬



스바냐 분석 2

[제목]
본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표제는 선지자 ‘스바냐’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으로 ‘세판냐’이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에 의해 감추어 졌다’이다. 70인역(Lxx)에서는 ‘소포니아스’라 하였다.

[저자]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1:1에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저자는 자신을 특별히 히스기야의 현손(손자의 손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건대 스바냐는 신실한 왕 히스기야의 왕통을 이은 유일한 선지자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요시아 왕의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했으며 국내사정은 물론 국제 사회에 대해서도 비교적 식견이 넓었을 것이다.

[기록연대]
본 서의 저자인 스바냐가 어느 시대에 예언을 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시기를 결정할 만한 내적 증거가 습1:4-6에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에서는 므낫세 왕때 유행했던 이방신에 대한 제사와 바알 숭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운동은 주전 62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예언의 시기가 요시야의 종교 개혁 시대 이전이냐 이후이냐가 초점이 된다.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B.C.622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본 서의 기록 연대는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인 주전 640-622년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배경]
므낫세와 암몬의 사악한 통치가 끝나고 요시아 왕이 즉위했으나 근 50년 가량 만연해 있던 배교의 상황에는 어떤 도전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그의 나라 백성들에게는 물론, 인근 나라 백성들을 향해서도 강력히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B.C. 722년의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전능과 공의를 상기시키는 엄숙한 사건이었다.

[특징]
본서는 유다와 그 주변 열국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되 심지어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시는데 이것 또한 그의 사랑의 발로이다.

[목적]
본 서의 기록 목적은 요엘이나 아모스와 같이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본 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을 상징한다. 일반 민중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민으로서의 구원이라는 관념에서 생각하고 있으나 선지자들의 이날에 대한 관념은 두려운 심판의 날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본 서는 여호와의 날에 구원받을 남은 자(습3:13)들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로 다가오나 그 처절한 심판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간직한 자들인 남은 자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구조]
스바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주의 날에 있을 심판(1장-3:8)과 주의 날에 있을 구원(3:9-3:20)이다. 전자는 진노의 날이고 후자는 기쁨의 날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란 궁극적으로는 신약에서 가르쳐 주는 최후 심판의 날과 동일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신약의 최후 심판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뒤이은 최종적 심판 그 자체만을 말하고 있는데 반해서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이나 회복 등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과 동시에 최종적인 심판을 한꺼번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로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양면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짧은 본서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그 여호와의 날에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겠다.

[내용]
모든 세대에 있어서 오직 소수의 비교적 신실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따릅니다. 그렇지만 몇몇은 항상 믿음의 선에서 살아 있다.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되기 직전에 스바냐는 남은 자들이 구속받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시는 비와 햇빛이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똑같이 떨어지지만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향하여 있다. 비록 유다가 곧 심판받게 되었지만 그들 중 남은 자들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었다. 스바냐의 말(습3:17)은 70년간의 포로 생활 기간 중 계속 외쳐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셨다. 하나님은 때가 이르러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확고히 하셨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하셨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 본서는 유다와 열방에게 그들의 죄 때문에 닥칠 임박한 환난에 관하여 경고하고,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 교리적인 교훈 : 본서는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심판의 목적은 정화적인 차원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 기독론적인 교훈 : 본서에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는 의로우신 주님으로(3:5), 열국을 대항하는 증인으로(3:8) 이스라엘의 ‘왕과 주’(3:15)로 나타나 있다.

C. 스바냐 세부 내용

1. 제1과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습 1:1~18)

 

성경을 처음 읽으시는 성도님이면 먼저 제가 기록한 『기독교신앙백과』의 스바냐 개론(p592)을 읽으십시오. 스바냐서의 전체적 내용을 요약한다면 “죄악을 인한 유다와 온 세상과 이방족(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장의 말씀에서도 선민의 많은 범죄 행위와 이로 인한 진노와 멸절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① 1절은 “스바냐의 족보”요, ② 2~3절은 “종합적 심판 또는 모든 것을 멸절함”이며, ③ 4~6절은 “선민의 우상들을 멸함”이요, ④ 7~18절은 “벌 받을 자들과 벌 받는 형편”입니다.

 

1. 스바냐의 족보에 대하여(1절)

“스바냐”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숨기시다”라 하고, 그는 아몬 왕(유다 18대 왕, 2년 재위)의 아들 요시야(19대 왕, 31년 재위, 좋은 일을 많이 하였음) 시대(주전 598~568, 연대 계산은 다양함)에 사역하였은즉 요시야 왕의 선정과 정화사역(왕하 22:1~7)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선정을 하였을지라도 100% 개혁(정화)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며, 또 그의 선정이 조상들의 죄값을 다 만회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시야의 선행을 인하여 그 시대에 멸망을 주시지 않고 연기하셨습니다(왕하 22:20, 대하 35:20~25). “스바냐는 히스기야(16대 왕, 17대는 므낫세)의 현손(손자의 손자, 4대손)이요, 아마랴의 증손, 그다랴의 손자, 구시의 아들이라” 하시므로 족보의 명확성을 나타내셨는데, 이는 역사와 왕족임을 확실히 나타내는 뜻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가 증거하였느냐?” 하는 것은 사람 따라 다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 와서 일반 대학에도 가짜 학력, 가짜 학위 교수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같은 이름으로 혼돈하지 않게 하려면 족보를 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현재 주민등록번호처럼…

 

2. 종합적 심판을 경고하심입니다(2~3절). 이 말씀이 종합적 심판인 이유는 “지면의 모든 것 즉 사람, 짐승,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전멸할 것”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선민도 징계하시고, 이방인도 심판하시며, 때가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인즉(벧후 3:10) 누구의 어떤 악이라도 공의로운 심판에 제외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요, 특히 죄 없는 동물들까지 없애시는 것은 그것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땅이나 만물도 심판 받을 사람이 거한즉 하나님이 필요를 느끼시지 않는 것입니다.

 

3. 선민의 우상들을 멸함(4~6절)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은 것을 멸절하시고 ‘그마림’이란 이름(바알 종교의 제사장 또는 단체 이름)과 제사장들을 멸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만 거론하신 것은 북왕국이 멸망된 후이기 때문이며, 남아있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무슨 우상이 그리 많겠나? 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적 종교가 기초를 이루었다 하여도 대부분 우상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솔로몬왕의 타락 시에도 이미 아스다롯과 밀곰 신이 들어왔고(왕상 11:3~8, 33), 여러보암왕 때에 이질적 종교로 갈라졌으며(왕상 12:27~33), 아합왕 때에도 바알이 성행하였고(왕상 18:19), 유다와 아하스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 구조까지 개조했으니(왕하 17:10~1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통적 종교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5절에서 우상주의자들은 “지붕 위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였고 하나님께 맹세하면서도 동시에 말감(바벨론 신, 왕이란 뜻이라 함)에게도 맹세하였으니” 역시 두 신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마 6:24). 또 6절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배반한 자요 하나님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는 자로서 다 멸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거나 의지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한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무관심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이 반성하고 살피셔야 할 일일 줄 압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을 어떻게 멸하실까요? 물론 일시적으로 망하게 될 때 훼파되기도 하겠지만 최종 심판을 받을 때에라야 아주 멸절 당하게 될 것입니다(계 19:20~21, 12~13).

 

4. 벌 받을 자들과 벌 받을 형편입니다(7~18절). 7~10절은 예루살렘의 벌 받는 형편인데, 이 말씀이 예루살렘을 지목한 근거는 8절의 “여호와의 희생의 날(벌 받을 자를 죽이는 날)에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 입은 자들을 벌하신다”는 말씀과 10절의 “어문(예루살렘 북쪽문, 다메섹문, 느 3:3)과 제2구역(예루살렘의 행정구역)에 곡성과 부르짖음이 있을 것”을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7절의 “여호와의 날”은 그 당시(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때)를 의미하고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심”은 죽을 자와 벌 받을 자를 하나님이 구별하여 처리하신다는 뜻이요,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합 2:20의 뜻처럼 하나님이 주권자요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8절의 “이방의 의복 입은 자”는 신앙의 정통을 벗어나서 이질적 종교 또는 세속 문화를 답습하는 자들이니, 이런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고유적 입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9절의 “그날에(심판 날) 문턱을 뛰어넘어(불법행위)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왕실)에 채운 자들을 벌하신다” 하셨으니, 이들은 무법한 방백들일 것입니다. 10절에서 “작은 산들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남”은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산들(예루살렘 주위의 산들)로 도피하였으나 그곳에서도 화를 피하지 못한즉 그 곡성이 대단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1절은 예루살렘에 근접하여 사는 백성들이 먼저 화를 당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데스 거민”은 영어 성경에서 낮은 땅에 거하는 자들로 번역하였고, “가나안 백성”은 관주 표기에 “장사하는”으로 표기되었습니다. 그들은 은을 수운(수송, 운반)하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12절에서는 “그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 하는 자를 벌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로 찾는다” 하심은 하나님이 악인이나 그의 악행을 빈틈없이 찾아 심판하시는 일을 주밀하게 표현한 뜻이고, “찌끼 같음”은 깊이 숨겨진 죄악 즉 잘 씻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때처럼 끈질긴 죄악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성도들 마음이 어느 부분이라도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공의를 무시한 뜻)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다 캐내어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물질과 현실주의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13절에서 “그들의 재물은 노략되고 집은 황무할 것이며 집을 건축하나 거하지 못하고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혹 찌끼처럼 가라앉아있는 고정적인 죄(자존심, 고집, 세속, 현세욕 같은 것들)가 없는 지를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14~18절에서는 “여호와의 큰 날(여호와의 날, 7절)”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는 상태를 거듭 묘사하였으니 곧 “가깝고 빠르며(계 1:1 참조) 소리가 있고 용사의 애곡하는 소리요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이고 황무와 파괴의 날이며 어두움과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절망의 표현) 나팔 경고가 있고 견고한 성읍(예루살렘)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라” 하셨고(14~16절), 17~18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범죄를 인하여 고난을 내리시되 소경같이 행하게 하시며(피할 길을 모르는 뜻) 피와 살이 분토가 되게 하시고 그들의 은금도 건지지 못하며 온 땅이 질투의 불(악인이 평안한 것을 못 보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삼키워 놀랍게 멸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멸망을 깨닫도록 경고하신 것입니다.

 

2. 제2과 이방족 심판과 선민 격려 (습 2:1~15)

 

1~2절을 보시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을 모이라” 하셨고, 3절에서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를 구하라” 하셨으니까 이 말씀은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2절)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1~3절은 “선민의 회개를 촉구하심”이고, 다음의 대부분의 말씀이 이방족(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해변 거민, 4~5절; 또 모압, 암몬, 8~9절; 구스, 니느웨, 12~13절)의 멸망(아주 망하는 것)과 심판(벌을 받으나 아주 멸망하지는 않음, 12절의 구스)을 예고하신 것인데, 그 중에서 유다 족속을 위로하시는 말씀이 있고(7, 9절), 또 이방인 구원에 대한 말씀(11절)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족이 망하는 큰 원인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따라서 총제목을 “이방족 심판과 선민 격려”로 정하였습니다. 이 제목 속에 빠진 것은 이방인의 죄와 이방인 구원을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우선 4대지로 나누어 ① 회개를 촉구하심(1~3절), ② 가사 지경의 멸망(4~7절), ③ 모압, 암몬의 멸망(8~11절), ④ 구스와 니느웨의 심판(12~15절)으로 정한 다음 7, 9절(유다의 남은 자 위로)과 11절(이방인 구원)은 따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선민의 회개를 촉구하심입니다(1~3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은 죄의 심각성과 죄로 인한 불행을 잘 모르는 자를 의미하고, 이들은 선민과 모든 멸망 대상을 뜻할 것입니다. 선민이 회개의 우선자이지만 하나님은 이방족 니느웨도 회개시키셨으니까 이방인도 제외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이고 모여서(회개할 것을 촉구하심)” 하신 것은 욜 2:15~17과 욘 2:5~8을 상기하십시오. 2절은 “하나님의 심판 명령이 있기 전에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광음이 겨같이 날아감”이나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는 다 전쟁을 연상한 환난의 심각성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3절에서는 회개를 촉구하시되 건전한 자들이 앞장설 것을 권장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은 타락한 세대에서 끝까지 믿음과 양심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회개자는 먼저 하나님을 찾는 태도(죄를 깨닫고 돌이킴, 말씀 기도를 사모함, 하나님의 뜻대로 삶)를 알아야 하고 공의와 겸손도 깨달아 시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음”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여 진노를 거두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혹시”란 말을 쓴 것은 욘 1:6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앞세운 성도의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니까요(단 3:17~18).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찾아 가까이 모시며 공의와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깊이 유의하십시오.

 

2.가사 지경의 멸망입니다(4~7절). 지도를 보시면 사해바다 서쪽 4/5가 유대 땅이고, 지중해변 1/5쯤이 불레셋 땅인데, 그 남단이 ‘가사’이고, 중간이 ‘아스글론’이며, 북쪽이 ‘아스돗’입니다(모두 욥바 남쪽에 있음). “이들이 백주에 쫓겨나고 에그론(가사와 아스글론 중간 동쪽에 위치함)은 뽑히며 해변 거민 그렛 족속(영어 성경에는 해변 거민이라고만 하였음, cherethites, 삼하 8:18, 20:23)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대부분 블레셋족들입니다. 5절에서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가나안 땅의 대표족)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하나님)가 너희를 멸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하시므로 블레셋의 멸망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팔레스틴’이란 말이 블레셋에 근거를 둔 말이지만 실제 혈통은 이스마엘과 에돔 족에 해당하고, 블레셋 족은 없다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6절에서 그들의 근거지인 “해변(지중해)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초막)과 양떼의 우리가 있을 것이라” 하신 것은 그들의 도성이나 성읍이 없어지므로 짐승 서식지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그 지경(블레셋이 망한 곳)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감”은 전쟁의 환난 후에 남아있는 선민족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을 예언하신 것이요(바벨론 포로 후), “그들이 거기서 양을 먹이고 저녁에 아스글론(블레셋 성읍이지만 그곳을 차지한 뜻)에 누울 것인즉 이는 하나님이 그들(선민)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민을 권고하여 바벨론 포로 해방 이후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이 그 지역을 차지할 것을 예언하심인 줄 압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도 선민을 위로하시고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합 9:2).

 

3. 모압과 암몬의 멸망입니다(8~11절). 모압과 암몬에 대한 예언은 렘 48:26~31, 49:1~6, 겔 25:1~11을 참고하십시오. 8절 말씀에서 “모압이 선민을 훼방하고 또 암몬이 선민을 후욕(멸시하며 욕되게 함)한 사실과 그들이 스스로 커서(자만) 그 경계(선민의 영토)를 침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족속과 선민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성경사전』의 모압과 암몬을 찾아 읽으시면 많은 참고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이 그 지역의 여인을 취한 일도 있었으나(왕상 11:1, 대하 12:13) 적대 관계로 싸우고 정복한 사례도 있었습니다(삿 3:12~14, 10:7~11). 그러나 본문에 해당하는 교만, 후욕, 경계 침범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알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9절에서 “내(하나님)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같이 되고 암몬 자손은 고모라같이 될 것이라” 하시므로 아주 망하여 없어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 지역에) 찔레가 나고 소금 구덩이가 되며 영원히 황무할 것이라” 하셨는데 사실 그렇게 되었고, “나의 끼친 백성(은혜 받은 선민의 뜻)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역사가 흐른 후에 남은 선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하시므로 모압과 암몬은 없어지고 장차(바벨론 포로 이후) 선민이 그 지역을 차지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10절에서는 “그들이 스스로 커서(교만)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였기 때문이라” 하시므로 멸망의 원인을 교만이라 하셨고, 11절에서는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하나님이 그들을 두렵게 하신 뜻) 세상의 모든 신을 쇠진케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아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은 이방인의 우상 종교가 기독교에 정복당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란 서유럽지역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복음은 유대인의 것만은 아닙니다. 때가 될 때 이방인에게도 나누어주신 것입니다(롬 11:25).

 

4. 구스와 니느웨의 심판입니다(12~15절). 12절에서 “구스는 살육을 당하였을 뿐 아주 멸망되지는 않았으므로” 오늘까지 에디오피아가 존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13절의 니느웨 멸망 예언은 “나훔의 예언”과 같은 내용이요, 14절은 니느웨가 황무하여 고슴도치가 깃들일 곳도 없음을 예언하셨습니다. “고슴도치가 기둥 꼭대기에 깃들이고 창에서 운다”는 뜻은 폐허된 주택이 짐승의 소굴 됨을 나타내신 말씀이고,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은 주택의 황폐를 뜻합니다. 15절은 앗수르가 세력을 떨칠 때 니느웨 백성들은 자만에 빠져 살았지만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후에는)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하며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고 손을 흔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치소와 손을 흔듦”은 과거에 멋모르고 교만하며 사치한 죄에 대하여 망한 후에 비난 받고 지적 받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제3과 예루살렘의 범죄와 경고 (습 3:1~8)

 

본 장은 두 과목에 나누어 상고하기로 하였고, 본문 1~8절의 말씀을 “예루살렘의 범죄와 경고”로 총제목을 정하였습니다. ① 1~4절은 “예루살렘의 죄”이고, ② 5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백성들의 무지”요, ③ 6~8절은 “열국의 멸망 예언과 경고”입니다.

 

1. 예루살렘의 죄에 대하여(1~4절)

본문에 예루살렘이란 말은 없으나 “방백들, 재판장들, 선지자들, 제사장들의 죄를 거론”하셨은즉 그들이 거처하고 행사하는 도성의 죄를 대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그곳은) 패역하고 더러우며 포악한 성읍이므로 화 있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패역”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악이고, 죄악이 많으면 다 더러운 곳이며, “포악”은 법을 떠난 무질서한 폭력 행사를 의미합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자는 다 포악한 자로써 화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2절에서 “그가 명령(하나님의 계명)을 듣지 않으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않으며 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도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이런 자들이 선민 세계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화 받을 일입니다. 성도의 가정에도 믿음이 없는 식구는 하나님의 명령(말씀, 설교)을 듣지 않으려 하고, 교훈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데도 관심이 없고, 기도나 예배를 피하는 자들이 있는 것은 큰 유감입니다. 이런 자들을 믿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만 화를 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실 일인즉 성도는 그런 가족들을 위하여 은총과 긍휼을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3~4절에서 “방백들을 부르짖는 사자라”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말씀한 포학하고 무법한 행위요, “제사장들을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로 비유하신 것”은 이기주의에만 급급한 것을 의미하고,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위인들이라” 하시므로 인격의 무게와 진실함이 없이 말만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함”은 제사행위를 나타낼 때 율법대로 거룩과 부정을 구별하지 않고 편의주의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모두가 무질서한 인본주의를 의미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성도의 생활 주변을 살펴 불의를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와 백성들의 무지입니다(5절). “그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뜻이 많은 줄 압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은 본질적 순결(거룩)을 의미하고, “불의를 행하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죄(모순)를 짓지 않으시며(고후 5:21), “아침마다 간단없이 공의를 나타내심”은 수시로 또는 끊임없이 범죄에 대한 점검과 처리(심판, 징계, 권고 등으로)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중(범죄하는 백성들 세계)에 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거역하며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또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2:1에서도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라” 하셨지요. 범죄 의식이 없는 백성, 죄에 민감하지 않은 성도, 심지어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 백성들(빌 3:19)이 있음을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3. 열국의 멸망 예언과 경고입니다(6~8절). 열국의 멸망 예언은 6절에서 하셨고, 선민에 대한 경고는 7~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열국을 끊어버렸다” 하심은 많은 나라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민에 대한 징계와 함께 열국도 심판을 하실 것이란 뜻입니다. 이 열국이 어느 나라들을 의미할까요? 바벨론 침략에 의하여 망할 나라들이고, 2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 등이 다 열국에 속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면 “그 나라들의 망대가 황무하여질 것이고 그 거리가 비게 될 것이며 지나가는 자 없이 그 모든 성읍이 황폐되어 사람이 없이 될 것이라”(6절)고 하셨습니다. 꼭 될 일을 된 것처럼 나타내신 것입니다. 7절에서 “너(선민)는 오직 나(하나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를 정하였을지라도 너희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선민이 자신들의 죄악과 열국의 멸망을 듣고 회개할 때(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훈을 받을 때) 심하게 벌하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뜻입니다(라 9:13). 그러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약속과 결과가 함께 기록된 것은 선지자의 예언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회개하면 벌을 경하게 하신다” 하였는데도 듣지 않은 것입니다. 8절에서도 같은 뜻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뜻은 완악한 자들에 대하여 정하신 뜻대로 진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회개하지 않으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다 쏟으려고 나라들(열국, 6절)을 소집하여…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악인의 형통을 못 보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소멸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민과 관련된 국제적 재난의 섭리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4. 제4과 나중에 주실 은혜 (습 3:9~20)

 

본문 말씀은 “나중에 주실 은혜”를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먼저 선민을 징계하시고 아울러 선민을 괴롭힌 이방 나라들도 심판하신 후 작정하신 때에 선민과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예언한 심판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성취된 일이고, 또 나중에 주실 은혜는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시기에 일시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일도 있지만 궁극적인 은혜는 신약시대에 베푸신 하나님 나라의 건설(교회의 부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본문은 두 대지로 나누어 상고하실 수 있습니다. ① 9~13절은 “선민과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약속”이고, ② 14~20절은 “은혜로 회복되는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의 백성들로서 크게 위로되는 말씀입니다.

 

1. 선민과 이방인 구원에 대한 약속(9~13절)

9절에서 “그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게 하여(이방인들이 우상을 찬양하던 입술을 청화 또는 변화시키시는 뜻) 그들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할 것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이 곧 이방인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는 욜 2:28의 “그 후에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신다”는 약속과 같은 뜻이고,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하였습니다(사 11:10). 이 예언은 바벨론 포로 후 시대에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10절) 완전한 성취는 오순절 이후 사도행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0절에서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방인의 자손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구스 하수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드리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이방인 구원의 사례를 지적하신 것으로 구스(에디오피아)의 백성들이 하수(홍해)를 건너 예루살렘에 와서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1절의 “그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때에 하나님이 너희 중에서 교만하고 자랑하던 자(무법한 포악자들)를 제하여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강포한 자가 많으면 수치를 당할 일이 많지만, 그들이 회개하면 평안해지겠지요. 또 징계를 받은 백성이 구속의 은혜를 받아도 역시 수치를 면하게 될 것입니다. 12절은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희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구원을 받을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총이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마 4:13~16과 11:4~5을 읽어보시면 확실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나중에 주시는 은혜를 받을 자, 롬 9:27~29)”가 은혜를 받았을 때 변화될 상태를 말씀하신 것으로 “그들이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고 먹으려고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이 변화되면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대적하거나 놀라게 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2. 은혜로 회복되는 변화입니다(14~20절). 14~17절은 “시온의 땅” 곧 선민 백성들을 위로(회복과 변화로) 하신 말씀이고, 18~20절은 특별히 경건한 사명자들(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을 위로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시온의 딸,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딸”로 선민을 호칭하시고, “노래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15절에서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셨고 너의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하시므로, 권고의 때가 임하여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평안 주실 것을 예언하셨으니, 이는 영적으로 받는 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16~17절도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셔서 구원을 베푸시니 두려워 말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약해지지 말라)” 하셨고, 또 “하나님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넘치게 기뻐하시는 뜻)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선민을 기뻐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도 그 성도를 귀한 자식처럼 기뻐해주시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신약시대에 베푸실 영적 축복과 성령 충만의 은혜가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18절에서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심”은 어렵게 믿음을 지킨 사명자를 모아 위로하시는 뜻입니다. “그들이 네게 속하였음”은 선민의 지도자란 뜻이고, “너희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된 것”은 경건한 지도자들이 선민의 징계 받는 일 때문에 근심하고 기도한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19절은 “선민의 대적을 벌하시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수욕 당하는 자와 쫓겨난 자를 모아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심”은 권고하시는 때에 남아있는 경건하고 약한 자를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20절도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너희를 이끌고 모음”은 구원의 대상을 모으시는 뜻이요, “너희 목전에서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때를 지적하신 듯하고(영적 해방을 연상함), “그때에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심”은 성도의 궁극적 승리를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은혜는 오직 성령 충만으로만 체험할 수 있는 영적 축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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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강 스바냐 1: 1- 6 두려운 경고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하는 책은 스바냐를 공부하게 됩니다 지난주 까지 하박국 공부를 했고 스바냐를 공부하는데 스바냐는 익숙하지 않은 책인 것 같아요 스바냐를 본문으로 설교한 들은 기억들이 있는지요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에 들은 기억이 있다면 그 노래 때문에 스바냐서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이시라 스바냐 3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로 스바냐를 기억하기 때문에 스바냐는 굉장히 따뜻한 사람인처럼 느껴 집니다 스바냐 전체 내용은 그렇지 안해요 어두운 터널을 지난 다음에 나오는 고백이기 때문에 그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첫 머리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베푸시지요 창세기 1장 28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것은 생명이 점점 번져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떠 올리게 하여주지요
 
그런데 스바냐서는 2절부터 무엇이냐하면 멸절하라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여호와의 날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런 구절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스바냐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1장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아몬의 아들 유다왕 요시아의 시대에고 하고 있습니다 아몬의 유다왕 요시아의 시대라고 말하는 데 요시아 시대는 앗시리아가 멸망하기 직전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앗수리아의 세력이 약화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었고 아직은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큰 세력을 얻지 못한 세대입니다
 
특별히 요시아 하면 유다의 임금 가운데 기억되는 분 가운데 이분들은 괜찮은 분이었어 기억되는 분이 몇 명이 있어요 요시아도 그렇고 히스기야도 이런 분들이 종교 개혁을 단행한 사람들입니다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순수성을 심어 주기 위해서 애 쓰는 사람으로 기억이 날 것이어요 왜냐하면 요시아는 임금이 된지 18년이 되던 해에 개혁을 단행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성전을 수리하도록 시켰는데 성전을 수리하던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요 그 동안 잊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임금에게 가지고 오거든요
 
왕하 22장 8절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힐기야가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훌다라는 예언자가 여기 모든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왕하 22장 16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왕이 읽은 모든 말대로 하리니
 
요시아는 정말 참회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였는가 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 우상 숭배하던 사람들을 우상 숭배를 금할 것을 요구하고 여러 가지 조치들을 취합니다
 
왕하 24장 4절 바알과 아세라의 목상들을 찍어 버리고 불 살라 버리고 일월 성신을 섬기는 풍조가 이스라엘도 들어와 있었는데
왕하 23장 5절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바알과 아세라를 찍어 버리고 일월성신을 섬기는 풍조가 들어와 있었는데 그러한 기구들을 분향단을 폐하고 산당들을 폐하고 아스다롯과 밀골과 제사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산당들을 다 폐하여 버리고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갖지 못하도록 조치를 합니다
 
왕하 23장 13절 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 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사람들이 그 우상들에게만 자기 마음을 바친 것이 아니고 야훼 하나님에 대해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상 숭배를 해요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혼합주의 섞는 것이야
 
사실은 이런 혼합주의적인 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교회에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신앙의 내용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은 모두가 연약하기 때문에 복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우리가 아프면 하나님 낫게 해 주세요 내가 인생의 곤경을 만나면 이 어려움에서 해결해 주세요 당연해 하나님께 청하는 것은 그러나 그것만이 신앙의 목표인것 처럼 생각하면 일종의 우상 숭배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더 성숙해 져야 되지요 우리의 신앙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시를 바라는 것도 신앙이지만 그러나 더 깊은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더 깊은 믿음이어요
 
그 자리까지 성장해 가야되지요 그러지 못하고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나 혼자 먹고 싶은데 나누어 먹어야 돼 그러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런 삶을 요구를 하신단 말이어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게 다른 게 없습니다 그런 삶이어요
하나님이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아가지 못할 때 우리가 그의 설 땅이 되어 주기를 하나님은 바라셔요
 
내가 누군가에게 책임적 존재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사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다 버리고 나의 문제만 해결되기를 바랄 때 자칫하면 우리가 혼합 주의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겠다하는 이야기여요
 
예레미야는 그런 노력을 요시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예레미야 22장 15절 정의와 공의를 하나님의 세계가 타원형의 두 가지의 초점 정의와 공의 이것이 무너진 예레미야의 평가에 의하면
 
이 예레미야의 평가에 의하면 요시아 임금은 정의와 공의를 행한 임금이다 정의와 공의 세웠다는 말을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했다 그 말입니다 힘 있는 사람들만 뒷 받침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힘있는 짓눌리고 그들의 살 권리를 뒷 받침해 주었다 요시아의 통치입니다
 
그 시대에 스바냐가 등장했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몬의 아들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성경에 다른 곳에는 안 나옵니다 매우 어려운 분입니다 그를 소개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요하고 말합니다
 
굉장히 길게 소개를 하고 있지요 보통 누구의 아들 아버지가 소개 되는 데 고조 할아버지까지 이렇게 4대까지 이야기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4대를 불러 주시겠어요 히스기야 아마랴 그다랴 구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보면 그 다음에 스바냐이지요
이게 다 야 랴 랴 냐 어떤 모음의 특색들이 보입니다 대게 저 글자는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이지요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야훼 이름이어요
 
그 이름들이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는 어떤 뜻이냐 하면 야웨께서 강하게 하셨다 아마랴는 야훼께서 약속하셨다 그다랴는 야훼께서 위대하시다 이게 전부 하나님과 관련된 그런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안이 대단해요 구시가 문제야 야나 냐가 없어 그런데 이름에 있는 저런 특색들을 보니까 사실은 구시라고 하는 것은 구스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스바냐의 아버지는 어쩌면 구스 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사람일 수도 있고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어떤지 어쩼던 조상들의 길게 언급된 까닭이 무엇이야 하면 구시의 아들하면 왠지 이방적 배경을 가진 것 처럼 아들도 사람들에게 전통성을 인적 받기 어려워 예언자들을 이야기할 때 4대까지 거슬려 가면서 뿌리 깊은 집안이야 아닐까 보게 됩니다
 
이 구시라고 하는 분의 불필요한 오해 때문에 스바냐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조차도 사람들이 별 것 아닌것 처럼 여길까봐 그래서 이렇게 의도적으로 4대까지 거슬려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히스기야는 우리가 알고 임금 일 수도 있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스바냐는 설명 안해 그 임금님이 고조 할아버지다 안해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는 것이어요 임금님 아닐까 가타 부타 이야기를 안해 무엇인가 의도적이라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의 이름이 조상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자아내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 시키기 위해서 4대까지 거슬려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볼 수가 있습니다
 
스바냐라고 하는 뜻은 다른 이름들은 이야기 했지요 히스기야 야훼께서 강하게 하셨다 아마랴 야훼께서 약속하셨다 스바냐의 뜻은 야훼께서 위대하다 스바냐의 뜻은 야웨께서 감추셨다 이런 의미로 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언자의 이름속에 메시지가 이미 담겨 있어요 어떤 의미이냐 하면
(1) 환난날에 야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험으로부터 감추어 주셨다 그런 이름일 수 있는 것이지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숨겨 놓으셨다
 
그 말은 긍정적으로 본 이야기 이고 달리도 볼 수 있습니다
(2) 여호와께서 쌓아 두셨다 보이지 곳에 쌓아 주셨어
무엇이냐 백성들의 죄를 그 때 그 때 처벌하지 않고 쌓아 주셔 때가 이르면 칠려고 두 가지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장 12절 끝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등불을 들고 죄 지은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찾아가는 하나님의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등불을 들고 죄인들을 찾아가는 하나님의 이미지 이것도 한번 형상화 해 볼만 하겠지요 실지로 프랑스의 어느 성당에는 그렇게 이미지화 되어 있는 하나님의 상이 있다고 해요 죄를 찾아가시는 그 모습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렇게 죄인들을 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습은 사실은 그리스 비극에도 등장하거든요
 
아리스킬로스 자비로운 여신들이라는 작품을 보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죽이는 오레스테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인 아가멥논을 죽였어요 아들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엄마를 죽입니다
 
그런데 윤리적으로 아들이 어머니를 죽일 수 없어 달아 납니다 정의이의 여신이 따라가요 오레스테스를 코러스로 말합니다 그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손을 매미는 자에게는 결코 우리의 노여움이 다가가지 않으리 그는 무사히 인생을 통과할 수 있다네 그러나 여기 이 자처럼 죄를 짓고는 피 묻은 손을 감추는 경우 우리는 정직한 증인으로서 피살자를 돕기 위해 나타나시는 결국 그 자에게 우리가 유혈의 복수자임을 보여주게 되리라
 
이게 정의의 여신들 이야기입니다 어떻던 어떤 문화 속에서도 죄 지은자는 벌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하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죄 지은 자에게는 등불을 켜 들고 찾아다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절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띵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진멸하고 멸절시키고 무서운 말입니다 진멸하고 멸절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요 그러니까 엄중한 심판이 이 땅에 올 것이다 예언자의 언어는 처음부터 따뜻하게 안 갑니다 우리가 짓고 있는 죄의 값이 얼마나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보 없는 단호한 태도를 말합니다
 
이 세상 망할 수 밖에 없어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것을 하나님은 어떤 시대를 상기 시키지요 노아의 홍수 시대를 우리에게 떠 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모든 생명들이 다 죽어가는 이 광경은 머리 속에 그려 보기만 해도 묵시 문학적 광경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묵시 묵학적 광경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지요 가난에 내 몰린 사람들 전쟁과 테러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종말이 온 것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절 거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진멸하신다 결국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우상들에 대한 심판을 수행할 것이아
 
종교조차도 자칫 잘못하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자랑스러워 하고 기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만 진리가 있어 이렇게 말하면 맞아요 틀려요 안 되어요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우리 교회 그래서 남의 교회 교인에게 가 가지고 우리 교회 가자 가자 우리 목사님 설교가 최고야 이런데다든지 우리 교회 친교가 최고야 이러면서 자기 교회를 이렇게 우상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때로 종교나 교회가 우상이 되어서 사람들이 진리이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가로 막올 때도 믾이 있습니다 그릇된 신념 특정인데 대한 맹목적 지지 그 속에 있으면 안 보여 그분이 어떤 모습인지 그가 어떻게 우상이 되고 있는지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를 사람들이 우상화 하려고 할 때 한사코 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해 그 영혼이 자기를 우상 처럼 떠 받드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야 이미 이게 중요하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 목사님 좋아 그것 까지는 좋아 그분이 정말 애들 하는 속된 말로 하나님하고 동기동창인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아니고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 다 형편 없는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것 이것이 철저한 우상화라고 볼수 있어요
 
정현종 선생님이 우상화는 죽음이니 시를 썼는데
우상화는 죽음이니 우상화 하지 말라 위대하신 누구이든 우상화 법석 속에서는 우상도 시체요 우상화하는 사람들도 시체이니 제발 우상화하지 말라 그저 좋아하고 그저 사랑하고 사뭇 찬탄은 할이로되 섬기지는 말아야지 우상은 암이요 우상화는 에이즈요 하여간 전면적인 죽음이니 사람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 하나밖에 없으면 말할 나위 없이 전면적인 죽음이니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든 사상이든 그것을 우상화 하는 순간 자유가 없어져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게 돼 교회 다니는 이는 특정인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우상으로 사람으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사코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망하는 것이야 영혼이 망할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모든 생명들 그리고 거치게 하는 것 다 없에고 그 다음에 악인들 까지도 진멸할 것이라고 합니다
 
악인들은 간단해요 악이라고 하는 글자가 버금아 밑에 마음 심자가 있는데 타자에게 무덤을 안겨 주려는 마음이어요 누군가에게 무덤을 안겨 주려는 마음 무덤을 안겨 주는 것은 누군가를 생명을 가진 존엄한 주체로 바라보지 않고 그를 무생물 취급하는 것이야 인격이 없는 취급을 하는 것이어요
 
악인은 악한 행위를 가장 젊잖은 사람도 악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젊잖아요 사람 취급을 안해요 겉으로 비추어진 모습은 아주 괜찮아요 그런데 그 마음속에 교만함이 가득차 있어요 아랫 사람들을 하대하고 그가 악인이어요
 
그 사람이 법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해요 그런 사람이 악인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격멸한다고 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격멸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정말 기독교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나하고 생가깅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해 가지고 그 사람을 격멸하고 혐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받은 사람을 격멸하는 일은 결국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격멸하는 일이다 창조조 하나님의 격멸이어요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 그 때 겸허하게 하나님은 이 일은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게 기독교인들의 마땅한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 있는 것도 그렇고 땅에 있는 것 사람과 징승 바다의 고기 모든 것들을 멸절하는 데 결국은 그 모든 일들이 공중의 새가 잘못해서도 아니고 바다의 물고기가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켜서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요
 
이 모든 심판이 누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어요 사람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슬픈일입니다 공중의 새가 무엇 잘못 저지르면 얼마나 잘못 저지르겠어 가다가 가끔 똥 싸지요 바다의 물고기가 무엇 잘못을 저지르겠어요 자기들에게 주어져 있는 본능대로 사는 것이니까
 
지금 결국은 하늘도 오염되어 있고 바다도 오염되어 있고 백화 현상이 일어나고 전부 물고기가 만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공의와 정의를 버리고 하늘과 바다와 강의 오염으로 나타나고 그 생명들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지요
 
그러므로 인간이 반성해야 될 부분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야기 한 기억이 있는대요 어떤 생물학자가 하는 이야기여요
 
세상의 생명의 구조라는 것이 이렇게 되어 있데요 생산자가 있고 소비자가 있고 분해자가 있어요 이 지구상에 생산자는 무엇이냐 하면 식물 세계입니다 식물들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과 물기를 받아 드리고 광합성을 하면서 잎도 만들고 열매를 만들어서 먹게 해 주어요 이들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소비자는 동물입니다 동물들 가운데서 가장 큰 소비를 하는 것은 누구이냐 하면 인간입니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식물이든 다 죽어요 그렇지요 죽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끔찍한 일이지요 죽음은 복입니다
 
죽었을 때 시신이 그대로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가 땅에 묻히고 그러면 미생물들이 열심히 분해해 가지고 다 양분으로 돌려놓습니다 그것을 식물이 먹고 새로운 것을 생산해 내지요
 
그러니까 정말 내가 빚지고 살고 있구나 내가 이 우주 가운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존재이구나 하는 생각을 품어야 돼 그렇지요 내가 잘난체 해 보아도 이 친구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어떤 분이 이야기하지요 한 숯가락 흙속에 미생물이 수 억마리여 이 애들 덕분이 인간이 산다고 인간을 함부로 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알고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고 하는 것은 인간 때문이야 공중의 새와 물고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 세계가 실판을 받고 있는 이것을 생태학적으로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더욱 더 적실하게 느깨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절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6절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멸절하리라 누군가를 향하여 손을 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내고 있는데요 여러분 손을 펴신다고 하는 것은 모세가 출애굽기 당시에 손을 펴시므로 열가지의 재앙을 내리셨고 모세가 지팡이를 내 밀므로 바다가 갈라진 것 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4장 16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 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하나님의 권능을 멸정의 대상은 모든 피조물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특별히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축소해 갑니다 죄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점점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남아 있는 바알을 철저히 끊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바알을 끊겠다는 말은 바알만 끊겠다는 말이 아니라 바알로 상징되는 모든 우상을 끊겠다 바알이라는 것이 바알의 영향력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어떤 것이 바알의 영향력이냐 하면 다른 것이 없습니다
 
바알을 믿는 신앙과 야훼를 믿는 신앙의 기초가 달라요 바알은 욕망을 자기의 중심에 놓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까닭이 내게 다산과 복을 달라고 해요 욕망입니다 야훼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따라서 믿는 것이 아니어요 경외심입니다
 
욕망은 늘 이야기하지만 배타적이어요 내 배고픈 사정만 알고 저 사람 배고픈 사정은 잘 몰라요 욕망은 배타적이어요 배타적이기 때문에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경쟁적이어야 해요 경쟁한다고 하는 것은 타자 부정이야
 
그런데 경외심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말은 나라고 하는 존재도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저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 삶을 살펴보기 때문에 포용적입니다 경쟁적이 아니라 협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결과는 타자 부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의 존재의 바탕이 되어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느 것을 내 삶의 원리로 사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인생이 되는 데 사람들은 여기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떨쳐 버리겠다
 
지금도 똑 같습니다 욕망을 바탕을 두고 사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악마적인 것인지 보여 주깁니다 욕망을 바탕을 사는 삶입니다
 
골로세 3장 2절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욕망을 바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위엣 겻을 생각하고 그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5절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의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치시겠다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마림을 치시고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치시고 여호와께 맹세하면서도 말감에게도 맹세하는 자들 혼합주의 자들 그들을 하나님이 치신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않는자들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고 따르지 않는자를 하나님이 멸절할 것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것은 자기의 삶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자꾸만 접속해 그럴 때 어떻게 됩니까? 접속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길을 묻는 것이어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길을 묻는것이어요 하나님께 길을 묻는다는 이야기는 나 좋을 대로 안 한다는 것이어요 나 좋을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길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을 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어떤 일을 하실까 하는 설레는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이지요
믿음의 사람들은 결국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의 정체성의 뿌리를 과거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의 새로운 세상에 꿈 거기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 꿈을 주시지요
출애굽기 19장 6절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꿈을 주시지요
 
제사장 나라야 그들이 언제는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감을 보여 주고 있어요 정체성의 근거가 과거에 있지 않고 실현의 가치에 있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그게 바로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야 됩니다
발터 베냐민이라고 하는 독일의 사상가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EDY 구원이라는 것은 역사에 대한 초월성의 침입니다 이런 말을 해요
 
역사라고 하는게 내제적으로 발전을 해 가지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고 이 발터베냐민이 하는 이야기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엇하는 사람이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이 속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오기 시작할 때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 2강 스바냐 1: 7-13 등불을 등고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때때로 살다보면 캄캄한 어두움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 어둠 속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더듬 더듬 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누가 불 하나를 켜면 고맙지요 등불이 된 사람도 있지요 누군가의 마음속에 등불이라고 하면 아련한 기억들이 있어요
 
늘 호롱불 밝히고 심지가 타고 석유를 올라오면서 불을 피우는데 석유를 채워 놓지 않으며 올라오다가 꺼져요 제사나 있을 때 그 때는 많이 밝혀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껴 두렀던 램프 시골에서는 남포라고 하는 것에 불을 켜요
 
그러면 그게 끄름이 안고 그러면 닦아내고 그게 일이었던 그런 기억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등불을 밝혀 들고 있으면 안심이 되지요 오늘 보고자 하는 스바냐에서는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이것 무엇이냐 하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신다는 말이어요 결국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 그런 이야기이지요
 
지난주에는 1절부터 6절까지 공부를 했거든요
오늘은 7절부터 13절까지 공부를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따뜻한 위로와 격려와 말보다는 아주 엄중한 말씀이 있는데
먼저 7절을 보면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지어다 이는 주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라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지어요 아도나이 야훼인데 7절을 유의있게 보세요 거기에 여호와란 이름이 몇 번 등장하지요? 3번 등장하지요 여호와란 이름이 3번 등장하고 여호와를 그라고 해서 대명사로 받는 구적이 나오지요
 
여호와란 이름이 세 번 나오고 대명사까지 등장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짤막한 구절인데 앞에 말씀과 대비하기 위해서 여호와란 이름이 세 번 등장하고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반복합니다
 
6절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홓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그 말씀과 대비하게 위해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글쓰는 사람이 피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반복이어요 글 써 놓고 글을 퇴고할 때 나도 모르게 똑 같은 말을 쓴게 나타나요
 
그 글을 쓴 사람들은 예민하게 그것을 알아차려서 똑 같은 의미이지만 다른 말로 바꾸어 놓고자 합니다 그래야 글이 꼴이 되거든요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반복을 할 때가 있어요 그것은 리듬을 만들거나 내용을
 
세 번씩이나 반복함을 볼 때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사람과 대조되기 위해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여호와라는 주어를 잠잠하라고 할 때 세 번씩이나 반복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첫 마디가 무엇이냐 하면 잠잠할지어다 말한 것이어요
 
어떤 게 잠잠한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끟고 있는 생각들 그 모든 것들을 내어 놓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때 어디에서 드러내시지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등장하시지요
 
그 때 무엇이라고 했지요 네 신을 벗으라고 하지요
출애굽기장 5절 왜 하필이면 신을 벗으라고 하지요
신발이라고 하는 게 옛날 문헌들 같은데 보면 정체성과 관계가 됩니다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나면서 내 아들이 자라거든 나를 찾아 오라고 하고 내 아들인 증표로 신발은 가져오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행위는 네 생각 일체의 것 내려놓고 그 앞에 엎드리라는 이야기이지요
 
여호와 앞에 잠잠하라고 한 그 말은 내가 이렇게 봅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순전한 마음으로 그 앞에 있어 보라는 것이어요 그 권능 앞에 엎드려야 돼 들뜬 생각과 행동을 잠시 그쳐라 달리 이야기 하면 네가 잃었던 경외심을 회복하라 내가 절대 앞에 서 있다는 사실
 
 
내 삶이 유한한 삶이기는 하지만 앞에 있는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한번 돌이켜 봐라 이게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천사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될 재앙을 나타내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특별히 일곱 봉인 되었던 하나 하나 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곱 번째 인을 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 졌다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변전앞에서 온 우주가 고요해 지는 것입니다
 
계시록 8장 1절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
태풍의 눈 태풍의 뭐 거대하게 휩쓸고 있는 데 그 한 복판은 고요하다는 이야기여요 원심력 때문이지요 밖에 나 있는 원심력이 있으니까 한 복판은 조용한 기상 현상이 나타나는데 온 우주가 들 끊고 있는데 잠잠하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이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잠하다는 말 속에 담겨진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조용하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 하고 말합니다 성서에서는 여호와의 날은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날이고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말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그런 이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이지요
 
그러나 주님만을 바락 살았던 사람들 그래서 낙심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지요 세상에는 그런 것 같아요 똑 같은 소식이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고 누군가에는 슬픈 소식이 되는데 여호와의 날 그 날이 가까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개입에 의해서 역사가 궁극적으로 변화하는 그 날이 다가온다
 
하나님의 백성과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수행되는 날이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날은 심판의 의미가 더 강해 심판하는데 그 이미지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n제사를 바치지 않아요
 
제사 바칠 때 꼭 있어야 되는 것이 무엇이지요 제물 번제 같은 제사를 하나님께 바치되 다 태워 드리지 않아요 속죄제도 태워 드리는데 특히 화목제 같은 것을 네가 자원해서 하나님께 바칠 때는 남은 고기들은 제사장도 먹고 바친 사람도 먹어요
 
먹을 때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제사를 바친 당일 날은 먹어도 돼 그 다음날도 먹어도 돼 예를 들어서 내가 소를 잡았어 제사장도 드리고 태울것은 태우고 기름이나 이런 것은 태우지 않아요
 
제사장도 먹고 내 가족도 먹는데 소 한 마리를 이틀 동안 다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요즈음 식당에도 보니까 소 한 마리 써 놓고 팔기는 한데 그런데 먹을 수가 없지 않아요
 
레위기 7장 17절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제 삼일까지 두면 안 돼 이것은 위생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어요 사흘 째 되면 부패할 가능성이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친교의 식탁에 이웃들을 초청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초대해 가지고 함께 기뻐하라고 한 그런 이야기이지요
나는 이게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데 일종의 나눔이 벌어짐으로 분배 정의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먹을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옛날 절기 가운데 어떤 절기를 보면 머슴들을 위한 날도 있거든요
농사 짓기에 앞서서 머슴들을 위한 날이 있어요 머슴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합니다
 
불교적 제의이기도 합니다마는 특정한 날을 정해 가지고 제사를 드려요 그 음식은 마을에 있는 어려운 사람과 함께 너누는데 부유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그런 뜻에서 이런 제물을 나누어 먹기도 했는데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왔어요 하나님이 제물을 잡아요 그리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1장 7절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 때 청할 자들이 희생당할 사람들인지 아니면 심판의 결과를 누릴 사람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애매해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심판 자리에 누군가를 청하고 있다 그 말은 심판이 틀림없이 시행 될 것이다 보여 줍니다
 
제가 퀴즈를 낼 터니까 8절을 읽고 맞추어보세요
8절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들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절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여기에서 이 문장을 이끌고 있는 핵심 단어가 무엇이지요? 벌한다 맞았어요 8절의 말미 9절의 말미에 벌하다고 하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희생의 날에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제물이 된 사람들을 여기에 이야기 하고 있는데 누구입니까? 방백들 왕 같은 사람들을 이야기 하지요 그 다음에 왕자들 왕의 자식들이기도 하지만 귀족 집단들 이야기 합니다
 
그 다음에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 그렇게 말하지요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또 이방인들 이방인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이방의 옷을 입은 자들이라는 것은 외국 복장을 입어 화려한 옷을 이방 사람들의 옷 그러니까 우리가 평범한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특별한 외국의 옷을 입어 명품을 입은 것이야 그 옷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들의 복색을 받아 드리는 순간 그들의 문화와 종교까지 받아 드릴 가능성이 있어요
 
이방의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방의 생활 방식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내면화하고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삼은 사람들
 
방백들 왕자들 이방의 옷을 입은 사람들 그 다음에
9절 문턱을 뛰어 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문텩을 뛰어 넘는 다고 하는 것은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우는 자들 문턱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남의 집을 약탈하기 뛰어 넘는 그런 요소가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다곤 신전을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은 문지방을 뛰어 넘는다고 하는 것은 남의 집을 약탈하기 위해 들어가는 행위일 수도 있겠고 블레셋에 다곤 신전 앞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행태를 모방하는 사람들
 
결국 블레셋에 관습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관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성경에서 십계명에서 출 20장 3절 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 하는 데 여기 블레셋의 신은 다른 신인데 다른 신과 하나님의 차이가 있어요
 
여기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다른 신들은 사람들에게 항상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그 신에게 정성을 바치면 그 사람의 도덕적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에게 복을 주고 정성을 기우리지 않으면 화를 내리고 그렇다고 믿어요
 
야훼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무리 제물을 많이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삶이 정의와 공의를 해칠 경우에 이사야 1장 13절 너희의 제물의 향기 역겹다 그러지 않아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제물이 아니야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인데 그것 가지고 내가 기뻐할 것 같으냐 내가 정말 기뻐한 것은 무엇이냐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것이어요
 
정의와 공의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결국 무엇일까요 이웃 사랑이지요 그러니까 나 외에 세상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 차려야 하고 나 좋을 대로 행하지 않고 남 좋은 대로 행하는 연습을 해야 되어요
 
문턱을 뛰어 넘는자라고 하는 것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지요 넘어가지고 이방의 습관을 따르든 저 삶과 사욕의 무관한 삶인 것이지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살육의 제물로 삼겠다 그렇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자기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은 이웃들을 목적 자체로 보지 않고 이용 가치로 보게됩니다 그것을 말씀 드렸다 싶이 그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보다 못돼 보이는 사람들도 정말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왜냐하면 저 사람도 하나님의 작품이어요 이것을 늘 명심해야 해요 기독교인들은 함부로 대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메스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아파트 경비원들이 모욕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술 취해서 70대 노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주인이 개를 보고 짓는 것을 보았느냐 당신은 개이고 이런 것이지요 이런것이 돈이 만들어 내고 있는 악마성입니다
 
이것을 절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 인 것이지요 너무나 많이 돈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엄한 존재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어요 교회가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냐 하면 존중하는 삶을 연습하여야 해요
 
정말 존중하고 아껴주고 귀히 여기고 이것을 연습해야 해요 교회에 모든 사람들 전부 그런 마음으로 산다고 하면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사람들을 그런 방식으로 대하는 일이 있다고 하면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는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어요
 
너무 과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신과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불의에 연결이 되고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10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진 소리가 일어나리라
 
10절을 이끌고 있는 단어는 어떤 단어이지요? 소리 소리어요 이것이 반복되고 있지요 여기 어문 어문이 무엇이어요 말 그대로 피쉬 게이트입니다 어문 물고기 물고기의 문이라는 뜻이어요
 
이게 어떤 이야기냐 하면 옛날에 사대문이 있지 않아요 우리나라도 보면 유교 이념에 의해서 만들어 졌거든요 조선이 인의예지를 가지고 문들을 만든다 말이어요 동대문이 흥지문 의는 돈문 예는 숭문 지는 홍문 그 다음에 신은 무엇이냐 하면 보각 이게 유교 이념을 가지고 만든 도시이어요
 
이 도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자기를 자부하는 말이 있어요 나는 문안 사람이야 사대문 밖에 사는 사람들은 문 밖 사람 그런데 문들로 사람들이 드나들지만 그 모든 문이 똑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왕래가 빈번한 문도 있지만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었어요 시신이 밖으로 나가야 돼 그러면 어떤 문으로 나갔어요 요즈음 광의문이 있는 데요 광의문 족에 옛날에 시구문이라고 있었어요 수구문이라고 했는데 물이 흘러가는 곳이라고 했는데 시체를 뜻하는 시구문이기도 하고 시신이 나가는 문이어요 이런 문들이 있었던 것이어요
 
미국에 가서 보니까 휴스턴에 있는 어떤 농장에 갔는데 그 농장d에 사람들이 어떻게 발전해 갖는 가를 보여주어요 1920넌대에 지어진 집이 있는데 안내문이 그렇게 이야기 해묘 여기 출입문이 가족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친구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저 문은 하인들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문도 정해져 있어요
 
우리도 학교 다닐 때 생각해 보면 중앙 현관으로 못 다니게 했어 선생님들이 우리는 옆문으로 다녀야지 중앙 현관문으로 못 다니게 했어요 전부 계급이지 어문이라는 게 물고기 비린네 나는 것이지 않아요
 
양문이라는 게 양 떼들이 어문이라는 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 어문이라는 것은 느헤미야서에
느헤미야 3장 3절 어문은 하스니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느헤미야 13장 16절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삼렒에서도 유다 자손에게 팔았다
 
그곳은 물고기이지만 상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어요
거기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나요
 
스바냐 11장 10절 제 이 구역에서는 하고 말하지요
제 이 구역은 신시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도시가 이렇게 있는데 팽창을 하다 보니까 더 수용이 안 돼 옆에 달아서 새로 만든 것이어요
 
제 2구역도 어떨까요? 굉장히 사람들이 많이 가고 그리고 요즈음으로 이야기하면 투기지역이지요 그러니까 어문도 그렇고 제 이구역도 그렇고 그런 의미가 있어요 그게 무너질 것이다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온통 경제적 가치에 눈에 팔려 있던 그것들이 무엇인가 생기가 있는 그 곳에서 오히려 비명 소리가 들린 것이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수행 될 때 하나님을 잊고 살았을 번 한 그런 상황속에서 비극들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11절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
 
막대스라고 하는 곳도 예루살렘의 한 구역이거든요 특별히 우리가 절구 같은 것들이 있지 않아요 절구하고 공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움푹 들어간 지역이어요 막데스라고 하는 곳은 움품 들어간 지역인데 그 곳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다고 하는 사실이 상기하는 것은 이 지역이 상업 지구였구나 이렇게
 
어문도 그렇고 제이 구역도 그렇고 막데스라고 하는 곳도 그렇고 사람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상행위를 하고 있었던 그런 장소 늘 이야기하지만 이익이라고 하는 동기가 내 삶을 사로잡는 순간 진리에 대한 관심은 멀어진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럽니다 내가 누구와 만난 관계에서 이익이 우리의 관계를 규정할 때 우리는 서로를 존엄한 인격으로 대하기 어려워요 내가 이용해야 될 대상으로 보이기 쉬어요 이게 세상의 거의 모든 지역이 그런 이익이 인생에 중심인 지역인 것을 보여 주고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때에 12절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지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예루살렘에서 찌꺼기같이 가라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찌꺼기 같이 가라앉았어 이것 무엇이냐가 자기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사로 잡혀서 변화를 향해 자기를 개방할 생각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그들을 표현하여 찌꺼기 같이 가라앉았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개방하고 남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를 변화 시킬 수 있을 때 사람은 성숙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겠다고 하는 자들은 무엇이냐 하면 찌거기 같이 가라앉았어
 
이익이라고 하나의 동기에만 움직일 뿐 진리 앞에 마음을 개방하지 않은 그 마음을 찌꺼기 가라 앉았다 진리가 완고하게 찌꺼기 같이 가라 앉은 마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그들을 하나님이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아 그 말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야 하나님은 안 계시지 않아 그 말이어요
 
이 말이 누가 한 말인지 알아 맞추어 보세요 신은 죽었다 니체가 하는 말이지요
우리가 신학 다닐 때 퇴수회라는 곳을 가보면 신학생들의 낙서가 있어요
신은 죽었다 그리고 니체 그 밑에 니체는 죽었다 신 이렇게
신은 죽었고 하는 말이 니체가 무신론자이기 떼문에 한 말인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사실은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에 등장하는데 광인 하나가 대 낯에 등불을 밝혀 들고 다닙니다
 
미치광이어요 그가 외칩니다 나는 신을 찾노라 나는 신을 찾노라 라고 말합니다 광인이 시장 거리에서 등불을 들고 나는 신을 찾노라 할 때 많은 무신론자들이 놀리기 시작합니다신이 집을 나갔나 신이 우리 집 막네 처럼 길을 길을 잃었나 보다 다른 사람도 이야기 합니다 아직도 숨박꼭질을 어쩌면 신은 배를 타고 떠났는가 아니면 그냥 걸어갔는가
 
미치광이를 외워 쌉니다 미치광이는 외칩니다 신이 어디로 갔나고 내가 알려주지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알려 주지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어요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죽인 것이야
 
다시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무시하고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고 제 멋대로 사는 그것이 신의 죽음이다는 것이어요
 
아 불경한 그렇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살면서 하나님 죽게 만들 수 있어요 하나님 죽을 수 없는데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무가 있다면 무엇이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시실을 드러내는 것을 보여 주는 삶을 살아야 돼 인간의 의무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 조차도 부유해지면 마음이 평안해 져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든단 말이어요 하나님이 하신 일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지 않아요 해방하시고 억눌리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시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런지 율법을 부여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놀라운 것은 인간과 연약을 맺으시지 않아요
 
언약을 맺는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너와의 관계속에서 유보하겠다는 것이어요 절대적 존재이고 지존한 하나님이 우리와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어요 왜 매일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이 개입하고 있는데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어요
 
하나님이 화도 내리지 않고 복도 내리지 않아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들을 등불을 들고 찾겠다는 이야기는 샅샅이 찾아 내어서 벌할 것이다
 
13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폐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에 살지 못하며 포도원을 가꾸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하나님이 주시는 벌도 믿지 않는 완고함 이것이 우리 문명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12졸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고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말은 어떤 말과 관련이 되느냐 하면 예언자들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우상들은 말고 못하고 우리에게 화를 내지도 못하고 복도 주지 못하고 화도 내리지 못한다고 예언자들이 이야기 하거든요
 
우상에게 하는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하고 있어요 하나님을 우상의 지위로 벌어지고 있었다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니체가 이야기 하는 신의 죽음이라는 말은 그런 삶을 방식을 행태를 가르키는 말이었을 것이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학자인 필 주커먼이라는 사람이 신 없는 사회 종교 없는 사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종교 없는 삶을 선호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흐름처럼 보여집니다 세상이 좋아졌나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삶으로 입증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지위 격하 시키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재물은 노략되고 집을 건축하지만 거기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가꾸지만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었기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남는 것이 없다 이것이 스바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엄중한 삶의 현실입니다
 
프레드린 니체의 광인 시장에 등불을 들고 신이 어디 있는가 찾았던 그 광인은 광인이지만 사실은 무엇이냐 광인은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이거든요 시장 거리에서 이익에 밝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광이이다는 것이어요
 
그는 보고 있어요 그들의 삶이 신을 무존재처럼 만드는 사실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가시적 존재로 드러나도록 나를 주님의 통로로 삼는 그런 일이 필요하겠지요 바로 그런 삶이 복된 삶인 것이어요 오늘 스바냐는 그런 교훈을 우리에 주고 있습니다.

제 3강 스바냐 1: 14- 2: 3 여호와를 찾으라

지난주에 우리가 등불을 들고 악인들을 찾아 나선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 했어요
사실 성경이라는 책은 끝없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또 그런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나는 인간의 숨바꼭질 그런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절박할 때 하나님을 찾지만 절박함이 사라질 때 사람은 하나님에게 등 돌리기 일 수 이지요 그 때도 하나님이 찾아 오시지요 이것이 구원사의 이야기라고 봅니다
 
프랜시스 톰슨 시 하늘의 사냉개라는 시가 있습니다
난 그분을 피하여 달아났습니다 이런 말로 시작이 됩니다 시간 속에서 장소 속에서 끝 없이 하나님을 피하여 달아나 내 인생의 곤고함을 맛보게 되는데 유일한 희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그것이 하늘의 사냉개라는 시 속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끈질기게 찾으셔요 오늘 하나님이 지난 주에 보았듯이 화가 많이 나셨는데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지만 화로 끝나지 않아요 언제나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인간을 대해 주시는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인내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 같은데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4절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하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다 하고 말합니다 큰 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압도적인 그런 날을 이런 표현으로 쓰고 있지요
 
그 날이 가깝다 가까울 뿐 아니라 빠르게 다가오는 그래서 어떤 번역은 그 날이 득달 같이 득달같다는 말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이것이 득달 같다는 말인데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은 반드시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날은 소리와 더불어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이 소리로다 하고 말합니다 심판의 소리이겠지요 그 날이 다가오면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 도다 슬피 운다는 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이지요 용사 용맹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용사조차도 압도적인 하나님의 도래 앞에서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대조가 되고 있어요
 
가장 용감하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지금 비명을 질러대는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여기 보면 어떤 날 분노 환난 고통 황패 패망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
 
16절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날이 날이요 날이요 날이요라고 반복합니다 이런 문장이 무엇과 같은 가하면 폭포가 쏟아지는 것과 같은 날이며 날이며 이야기 한단 말이어요 우리가 폭포가 쏟아지는 것을 이것은 급박한 문장이기 때문에 날이요 날이요 쓰고 있단 말이어요 마치 이 말이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고 문장의 형태를 통해서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절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가 쇼와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쇼와라고 하는게 유대인을 전멸 시키는 것 홀로코스트 유대인을 대 말살 정책이 홀로코스트인데 그게 히브리어로 이야기 하면 쇼와 온전히 불 태워지는 것이어요 남지 않는 것이어요 그 날이 패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나 아렌트 철학자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쓰는데 악은 틀별한 사람 저지른 줄 알았어요 생긴 것이 우락 부락하고 유난히 나쁜 사람들이 저지르는 줄 알았는에 나치의 수용소에 갇힌 사람의 고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박해하는 저 사람들을 증오하면 내가 견딜 수 있갰는데 독일 사람들이 만든 문학 그들이 만들었던 음악을 들으면서 교양을 키워 왔는데 나의 나됨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통해서 형성된 것인데 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어요
 
이것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어요 나 스스로를 이런 참담함을 경험하는 데 한나 아렌트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특정한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군중 심리에 몰려가고 악한 사람들의 선동에 의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어요
 
동화 되는 것이어요 평상시에 보면 선한 사람입니다 꽃도 사랑하고 짐승들을 보아도 사랑하고 또 크레시칼 뮤직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요 그들을 사람을 죽이는 것에 가담하고 왜 그들이 악을 저지느냐 왜 악을 저지르냐 한나 아렌트가 했던 말은 생각 없음입니다
 
쇼트니스라고 하는데 사유하지 않는 것이어요 생각하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 그러니까 생각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데 오늘 대중문화의 시대의 살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의 주체가 되어 살기 보다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외부에서 주고 있는 감각적인 자극에 반등하는 일 이게 우리의 삶인줄 알고 살지요
 
그래서 남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관 속에 자기를 투입하려고 하니까 늘 고단하고 힘겹고 그런 것인데 이게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어요 홀로 코스트 사실 홀로 코스트에 피해를 받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그 작품 이름이 쇼아입니다
 
그 다뮤멘타리를 보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해 상영시간이 무려 556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번 볼만 해요 그런데 왜냐하면 그 속에서 나의 모습도 있고 이웃들의 모습도 있고 그들이 어떻게 고통을 겪었고 상처를 극복하였는지 이런 이야기들이 등장한단 말이어요
 
여호와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압도적으로 다가와 신속하게 다가와 죄 지은 모든 사람들이 황폐하고 패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난다 압도적인 날이기가 캄캄하고 어두움의 날이 구름과 흑암의 날이고
 
16절 이 날이 올 대에 나팔을 불어 경고하고
견고하다고 믿었던 성읍들이 무너진 날이 적들이 오는 지를 바라보는 망대들이 무너지고 압도적인 심판이 수행됨을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이 다가올 때
17절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행하려 하리니
맹인같이 행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제가 종종 드는 비유가 그런 것인데 어떤 문제가 내 앞에 다가오면 눈 앞이 캄캄하지요
 
모든 판단이 정지가 돼 어떻게 해야 할런지 이 문제가 성큼 내 앞에 다가와서 압도적은 불행을 겪고 나면 사람은 그런 것이어요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서는 순간 내가 무엇인가를 내다 보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판단이 서지 않아요 이것이 맹인 같이 되었다 더듬더듬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편에서도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135장 18절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그들의 입에는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될 것이다 삶에 대한 전말을 가지 못할 것이다 도무지 바라볼 수 없는 어두움이 사로잡을 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 볼 때 무엇으로 보지요 눈이 있어요 보지 않아요 눈만 있으면 보아요 빛이 있어야 보지요 빛이 없으면 못 보지 않아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못 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캄캄한 심판의 날에 자기만 알고 살던 사람들에게 무엇이 사라졌는가 하면 빛이 사자진 것이어요 이것이 맹인이 되었다는 말이어요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없는 것이 빛이 없는 것이어요 그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17절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되니라
무서운 이야기인대요 공동 번역은 그들은 피를 땅에 뿌리고 배알을 거름덩이처럼 쏟게 될 것이다
 
여기 분토라고 하는 것 분토는 무엇인지 알지요 오물 썩은 흙 주로 똥 그러니까 범죄의 결과가 이렇게 될 것이다 정말 두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18절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다
은도 금도 심판의 날 그들을 도울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저금통장 적금통장 보험문서 땅 문서 이런 것들이 재앙의 날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인간의 한계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한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걸어갈 때 절벽 앞에 서면 여기가 한계이지요 벼랑 끝이야 인간에게 있는 한계 상황이라고 하는 게 서양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죄칙감 죄책감이라는 것도 있고 한계상황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어요
 
내가 정말 유한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이런 게 주로 언제 오느냐 하면 질병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질병 같은 것이 찾아와요 실패도 있습니다 무엇 보다 심각한 것은 죽음입니다
 
이런 한계상황 속에 도달할 때 사람은 비로서 무엇하느냐 하면 자기가 지금까지 세우고 있었던 가치관이 순위가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어요 이전에는 이게 나에게 제일 중요했어요 저 앞에 서는 순간 그렇게 애지 중지 하던 것들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나에게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세상이 달리 보이겠지요 내가 소홀히 했던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고 일상적 풍경으로 보고 넘어간 것들이 내가 이제 다시는 이것과 접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애뜻한 의미로 다가오요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져 버리는 그러나 이것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이 은과 금 사회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명예 권세 이런 것들이 내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은과 금 이야기를 할 때 요한과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한 말 기억 나시지요
 
행 3장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예수 그리스도ㅢ 이름으로 일어나라
삶의 방편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 갈 수 있는 내적 힘을 주는 것이어요 선교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야고보서에 보면 금과 은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교보서 5장 2절 너희 재물은 썩었고 금과 은예 너희 재물은 썩었고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말은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될 품 삯을 떼어 먹는 것 사치스러운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헐 벗음을 돌보지 않은 것 그런 현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어요
 
너희의 금과 은은 녹슬었다고 합니다 제가 터키의 이스탄불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 저는 어떤 여행지에 가면 그 지역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그 지방에 가더라도 그 지방에 어떤 분이 있으면 군청이나 이런 데 가서 자료를 구하기도 하고 서점에 가서 자료를 구해서 열심히 읽고 그리고 그 다음 날 가서 보곤 하는데
 
이스탄불에 갔을 때 제가 정말 열심히 읽은 것이 누구이냐 하면 4세기와 5세기 초에 살았던 콘스탄티 노플에 대 주교였던 요한네스 크리스소토무스분이 있어요 그 분의 별명이 황금의 입입니다 설교를 잘하는 분이셔요 골든 마우스라는 소리를 듣는데 설교를 잘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 만질 것처럼 생각이 되지요
 
이분이 그렇지 않아요 호랑이 사자 같이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분이 콘스타틴 대 주교로 와서 보니까 주교 주교관에서 정기적으로 연회가 열리는 것이어요 화려한 음식을 차리고 주교의 손님이 되는 것은 굉장히 영예스러운 일이어요 그 영예도 있지만 맛 있는 것 먹거기 가면 이 분이 보니까 가자 마자 연회를 폐합니다 밥을 혼자 먹었요
 
연회에 초대 받아서 자랑스러운 사람은 저 사람은 왜 이래 이런 표정이어요 옛날 방식으로 안 하니까 그러지요 어떤 사람들은 보석으로 장식된 금 성작이나 제단보 같은 것들을 기증해요 예배당에 가져 오지요
 
크리스소토무슨는 오셨어요 그렇게 안해 그 속에서 자기 기념비를 세우려는 교만한 마음을 보는 것이어요 이것을 갖다 바침으로 이 사람 괜찮을까요 그리고 자기 예배당에 있는 값 비싼 것들을 매각하고 비용들을 줄여서 가난한 사람들 돌봐 주라고 하고 상류층들의 호사스러운 삶을 비난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심지어는 황제의 아내 황후에게 당신 그렇게 살면 안 돼
결국 결과적으로 미움 사서 귀양가서 죽어요 이 분이 상류층들의 호사스러운 삶을 비난하며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짓을 부끄럽게 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그런 호사를 누 누리고 있습니다 아니 더 옳게 말하면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당신의 동료인 인간이 추위에 얼어죽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런 세간 살이 따위나 마련하고 있습니까? -크리소스 토무스의 설교중-
 
부유한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설교시간에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까요? 쫓겨날 것 같은 대 어떻게 보면 이게 예언자의 모습이어요 금과 은이라고 하는 게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해 이게 스바냐가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8절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질 것이라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라고 하는데 질투라는 감정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볼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가 발생하지 않아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투라는 감정은 부정적인 것이 많아 시기심도 그렇고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하기에 발생하지요 사랑하기에 내가 내 손자 손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애가 원하는 것 다 해 주어야 합니까?
 
애가 사탕 주세요 그러는데 할아버지 사탕 그러는데 사탕을 주어야 하느냐 때때로 욕망을 꺾어 주어야 해요 안 주어야 해 자기 욕망대로 살면 하나님이 무엇해야 하느냐 금지 네가 어긋날 길로 가면 안돼하고 이야기해야 돼
 
때때로 사랑은 안 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돼 이것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이어요 하나님은 이 질투에 그 불에 삼켜지는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주민에게 재앙이 와서 그들이 놀랍게 멸정 당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 합니다
 
여기까지가 무시 무시한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그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이 등장합니다
2장 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자기가 벗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인간이 인간인 것을 무엇이냐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어요
 
여러분 우리가 사람과 인간 약간 헷갈리기도 하지만 어느 학자가 이야기 한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으로 산다 이것을 바꾸어서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내가 생물학적으로 태어나서 인간입니다
 
사람과 인간입니다 생물학적으로 그러나 나는 나 좋을 대로 수 없이 많은 관계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나라고 하는 사람은 자유롭지만 나의 자유라는 것은 타자라는 한계 앞에서 잠시 멈추어야 돼 나 좋을 대로 해서는 안 돼 타자 때문에 나를 다 내려 놓는 것이 잘한 것이라고 볼 수 없지만 어떻든 타자의 존재를 생각하면 살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님이 씨알의 소리 권두언에 당신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써요
그 글을 쓸 무렵에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 글의 제목이 나야 뭘 당신 아내는 늘 그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이어요 좋은 것을 누릴 수가 있을 때 나야 뭘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다 내려 놓는 삶을 사는 것이어요
 
이것이 헌신적인 어머니의 삶이지 않아요 너무나 숭고해요 하지만 너무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머니들 다 그렇게 사셨는데 자기 것도 챙길줄 알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의 자유라고 하는 게 타자 앞에서 약간 유보되기도 하고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알 때 나의 나됨이 발생하는 것인데
 
수치를 모르는 것은 염치없는 것 그러니까 인간의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홀로 있는 것이 도덕이 아니어요 남들과의 관계속에 발생하는 것이어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도덕이 사라졌을 때 그게 무엇이냐 하면 수치를 모른 것이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야 염치를 모른 것이어요
 
이것이 왜 수치를 모르느냐 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너와 나 사이에 타자와 나 사이에 언제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심급을 모시면 나는 너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나 좋을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무엇이 없느냐 하나님이 없는 것이어요
 
그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모일지라 모일지라 너희들 자기 좋을 대로 살던 욕망의 노예가 된 삶에서 벗어나라 이제는 모이라 현재의 참상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삶을 도모해라고 하는 것이어요
 
서양적 주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철학자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서양적 주체는 외로워요 지금도 프랑스나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많이 느낍니다 개인주의가 심화되어 있어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요
 
저 사람은 왜 옷을 저렇게 입지 안해요 사나보다 다 인정해요 그런데 외로워 이게 서양적 주체입니다 이 서양적 주체의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나르시시즘이라는 이야기 들어보았지요 나리키소스의 이야기인데 아주 잘 생겼어요
 
자기에게 빠져 있어 자기가 근사한 것이야 숲속에 사는 임프가 너무 매력을 느낀 것이어요 나를 좀 봐줘 나를 좀 봐줘 하는 데 자기에게 온전히 사로 잡혀 가지고 이 님프에 눈 길을 안 주어요 이 님프가 너무 속 상해서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소리만 남겨 놓고 그 님프의 이름에 에코야 에코 울림이지 않아요 그게 님프인데 사라졌어요 나르시소스가 하고 있는 몹시 마음에 안 들었어 신들이 보기에 그래서 신이 저주를 내립니다 그에게 자기에게 홀딱 빠지게 만들어요
 
그래서 나르시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매력적인 것이야 그래서 입을 맞추려고 다가 가가가면 없어져 흔들리고 맨날 거기 들여다 보가 있다 거기 빠져 죽지 않아요 그리고 그가 그가 떠난 자리에 무엇이 생겼다고요 수선화가 피어납니다
 
나르키소스 수선화가 피어났다 그 이야기인데 결국 인간이 인간인 것은 무엇인가 하면 누군가의 부름에 대해서 응답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데 응답의 능력을 잃어 버린 것이어요 그렇기 때문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 모일지어다
 
다시 한번 모여봐 타자 앞에서 나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데 이것이 다 무너졌으니 다시 한번 모여 가지고 새로운 삶을 누려랴 이렇게 이야기 하고
 
2절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에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 지니니
 
무엇 무엇하기 전에 그럴 지어다 하고 말합니다 날이 겨 같이 날아간다는 것이 무슨 소리여요 속절 없이 흘러가는 겨 시간의 은유 겨 겨가 무엇인지 알지요 왕겨 그런 것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냐 하면 재앙이 닥치기 전에 지금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예고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재앙이 닥치기 전에 돌이키라는 것이어요 지금은 어떤 시간이냐 하면 지금은 다른 시간이 아니어요 유보된 시간이어요 하나님의 심판이 유보된 시간이어요
 
지금은 돌이켜야 할 때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켜야 할 그 때다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버릇은 무엇이냐 하면 돌이키지 못해요 도박 중독에 걸린 사람 멈추지 못하는 것이어요 나중에 후회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처럼
 
아이데커라는 전제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다 이것이 평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한계를 인식하며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는 것이지요
 
죽음의 한계를 의식할 때 내 삶의 의미를 물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게 인간이어요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살지 않아 죽음을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죽어본 적이 없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은 내 죽음이 아니어요
 
우리의 의식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어요 나도 언젠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것이 인간의 버릇이어요 나는 언젠가 죽을 것이야 아직 시간은 있어 돌이킬 시간이 있어 하나님이 아니야 시간이 없어 여기 금방 이야기한 대로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에 여호와의 진노가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모여오라 하나님의 존전이라고 절대적인 현존 앞에 모여와 이렇게 해야 살 수 있어
여호와 앞에 모인다고 하는 말은
3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모여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합니가? 여호와의 규례에 미쉬파트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겸손하다는 것이 제가 뭐 이게 겸손한 것이 아니어요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평생 겸손하게 살았지 않아요 굉장히 겸손한 것을 자랑해 이게 겸손한 것이 아니어요 여기에서 겸손하다고 하는 것은 가난하고 약하고 짓밟힌 존재들이다는 것이어요
 
무시당하고 그런 사람들이어요 짓 밟히고 보니까 짓 밟힌 사람의 마음 아픔을 알 수 있어요 공감하게 되어요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겸손함이어요 겸손한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공감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정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사람이야 말로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게 생명의 길이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 나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이게 지자 겸손이어요
 
칭찬하면 제가 요 이게 겸손이 아니어요 진자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한계를 있는 존재이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 겪고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그런 이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3절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다시 이야기 하면 자기를 자꾸 낮추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다니엘이 정신이 나간 느부갓네살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니엘 4장 27절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하하소서
 
우리가 모여서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받았어 아니고 여기는 그것 아니어요 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이어요 공의와 겸손을 그 삶은 이웃에게 덕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다 하는 이야기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살 때 우리 구원 받을 것이야 그 이야기가 아니고 혹시 숨김을 얻으리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속에 있지요 하나님의 절대 은혜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 분의 긍휼하심을 의지해서 내 삶을 바꾸면 하나님이 혹시 우리를 구해줄 수 있지 않겠나 이게 스바냐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정말 겸손한 사람이 누구인지 이야기 했는데 너무 늦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으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4강 습2:4-15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의 운명

인접한 나라들 끼리 사이좋은 나라들이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요? 미국과 카나다 깨 괜찮은 전통적으로 보면 인접한 나라들이 친해지기가 어렵지요 이웃 사촌이 되는데 이권 때문에 이스라엘이 있었던 파레스타인 땅에도 그 곳에도 여러 민족들이 있었지요
 
그 민족들이 평롸롭게 지낸 시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정복하고 착취하고 보복하고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있는 그 자리가 전쟁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자리였지요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아 문명권이 있지요 티그리스강과 유브라데스 강가에서 이루어진 문명 스메르 문명 아카니아 문명 나중에는 신 바빌리아까지 강대한 제국들이 등장했거든요 \
 
제국이 자기를 확장해 가는 대 욕구이니까 서편지역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 꼭 거쳐가는 그 지역이어요 그런데 어디까지 치고 싶은가 하면 애굽을 치고 싶은 것이어요 애곱도 또 마찬가지이지요 메소포타미아와 자궁를 겨룰 때 꼭 지나가야돼
 
그 사이에 끼어 가지고 강대국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민족끼리 우리 끼리 평화롭게 지내면 좋은 것인데 맞고 큰 사람이 누군가를 꼭 때리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하두 그러다 보니까 서로 치고 받고 일이 잦아요
 
이게 이스라엘이 평화가 없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러한데요 지금 스바냐를 공부하는데 스바냐의 예언도 이스라엘만 한정되지 않슨비다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향하거든요
 
참 무서운 이야기들이 반복이 되고 있는대요 오늘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이 받을 벌에 대해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 4절부터 7절까지는 대게 어떤 도시국가들이냐 하면 블레셋의 5국가들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터 잡고 있는 쪽에서 남서쪽 자리 잡고 있는 블레셋 5 부족의 연맹체이거든요 중앙 집권 연맹이 아니고 연맹을 만든 게 블레셋이라는 나라입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대게 문명이 상당히 달라요 이스라엘이나 중 근동의 문명과 다른 문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애당초 터 잡고 사람들이 아니라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대게 어떤 사람들이 이주해 왔는가 하면 그리스를 보면 아테네라는 본 반도가 있고 고린도라고 하는 좁은 지역 밑으로 반도가 있는데 거기를 펠레포네스 반도라고 해요 그래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펠레포네소스의 중심 도시인 전쟁이 벌어진 것이 그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밑단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만든 문명이 미케네 문명이라고 하고 있는데 미케네 문명이라는 게 상당히 발달한 문명이었어요 전쟁이 잦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이주를 해 가다가 저도 가 보고 싶은 섬인데 크레타라는 곳으로 사람들이 이주해 오고 그리고 크레타에서 배를 타고 넘어와서 지금의 파레스타인 블레셋이라는 지역에 정착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대게 그 때를 주전 13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이주해 왔을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사람들이 밝혀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팔레스타인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곳이 미케네 문명 사람들이 맞겠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기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이 있어요 문명마다 토기를 만들곤 했는데 거기에 사용되고 있는 문양들 기하학적 무늬같은 것들이 있는데 미케네 문명의 그 토기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로 되어 있어요
 
이 사람들이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맞겠다 생각을 갖게 듭니다 이주해 온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하고 사이가 안 좋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사실 성경을 보면 블레셋과 이스라엘과 갈등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싸웠던 골리앗 거인 장수가 블레셋이었어요
그러니까 골리앗으로 상징되는 것이 블레셋이었지요
사무엘상 5장에 보면 블레셋과 전쟁이 벌어져요 전쟁에서 패배하자 법궤를 모시고 전쟁에 나가여 그런데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사무엘 4장 3절 전쟁에 법괘를 모시고 가 가지고 전쟁에 패배했어요 법궤를 빼앗겼어요
그들이 신이 이겼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괘를 어디에 갖다 놓느냐 하면 그들의 신전에 갖다 놓습니다 다곤 신전입니다
 
5장 2절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신전에 다곤 신전입니다 다곤 신이라고 하는 신은 사실은 바벨론이아와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는 신입니다
 
다곤 신은 풍요를 상징해요 물고기 모양으로 형상화하기도 했습니다 다곤신은 비늘이 해양 민족이니까 물고기 신과 관련된 어떤 신앙을 발전 시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무엘 상이 흥미로운 것이 그것이지요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야훼가 패패한 것처럼 보였어요 야훼는 법궤이지만 사로 잡혀서 적들의 심장부인 굴복당한 것 처럼 보여요 어떻게 되었어요 결과는 다곤 신상이 넘어져요 마치 야훼 하나님께 절을 하는 것 처럼 이게 누가 그랬어 다시 세웠놓아는데 다음날도 보니까 도 넘어져 있어요
 
5장 4절 다음날도 이 야훼 법궤를 다른 도시로 옮겨요 네가 맡아 줄래\ b가는 곳마다 그 곳에 재앙이 내립니다 이 법궤는 블레셋의 다섯 나라를 다니면서 그들에게 벌을 내려요 이게 사무엘상은 굉장히 강력한 메시지를 보여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이 블레셋과 관련된 것을 이야기 하자면 사사기도 공부했는데 사사가운데 힘이 세고 술을 좋아했던 삼손 술을 잘 들었던 것 같어요 그래서 포도주를 마시고 잔치하고 사람 사귀기 위해서 내려 간대가 블레셋 땅이어요
 
거기에서 머리 각이고 눈도 뽑히고 이런 불행을 당하는데
사사기 16장 28절 마지막에 나의 힘을 회복케 하소서 하고 신전 기둥 사이에 기대어서 밀어서 무너뜨렸는데 그 신전이 다곤 신전이어요
 
블레셋이라는 문명과 이스라엘이 어떻게 엮었는지 대체로 알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성서 기자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변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떻게 심판 받고 어떻게 벌을 받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예언 속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모티브임을 볼 수 있어요
 
그 다음에 보면 지금도 여러분 지금까지 이야기 할 때 팔레스타인 그랬지 않아요 b고대 세계는 그곳을 팔레스타인이라고 안 했어요 유대라고 했어요 유다인들이 사는 땅이어요 유대라는 것은 땅 이름입니다
 
유대인 그러면 유대 땅에 사는 사람들이어요 지금도 우리는 그 땅을 팔레스타인이라고 하지요 역사가 좀 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지 않아요 에이디 70년에 헤롯 성전이 파괴되고 3년동안 항전하던 사람들이 마사다라는 사해 근처에 있는 요세위에 올라가서 3년 동안 항전하다가 마지막 정복될 위기에 처하게 되지 그 마지막 날 밤에 사실은 로마 군인이 바로 가서 정복할 수 있었어요
 
로마 장군이 자기들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었어 하루 종도 묶혀 두었다가 하루를 공격 안하고 딱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밤에 마사다 성에 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 자결을 합니다 자살이 죄라고 여겨 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자살한 것이 아니고 재비 뽑기 한 사람이 자살하고 해서 전부 죽여요
 
거기에서 두려워서 숨었던 여인들 아이들 두 세사람만 살아 납니다 그것이 마사다의 최후의 증언이 되었던 것이지요 마사다 항전을 통해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거든요
 
유대인들은 국가가 소멸 되었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후 135년에 바르코크바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유대 독립 운동이 벌이게 됩니다
 
반란이 벌어지게 되지요 로마 황제가 하드리아누스라는 사람인데 군대를 보내 가지고 진압된 그 곳에 행저우 구역을 개편하면서 유대라고 땅 이름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해요 왜냐 하면 반란의 씨앗이 될까봐 그것을 펠리스틴 사람이 머문 땅이라고 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명명한 것이어요
 
어쩼던 이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본문 속에 등장하는 데
4절 가사 그 다음에 아스글론 아스돈 이렇게 일단 이 세 도시 국가가 등장하고 있는데
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헤그론은 뽑히리라
 
사실 히브리어로 이 본문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라임을 맞추는 것이지요 이 속에 라임이 있거든요 우리는 라임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어요 똑 같이 라임이 되는 것이 아니고 두 도시는 라임이 있고 한 도시는 라임에 가까운 뿌리들이 등장해요
 
예를 들면 가사라고 하는 표기는 사실은 아자라고 있는 것과 관련이 되는데 보이다는 뜻에 아자브라는 동사에서 나오건요 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가사라고 하는 이름 속에 버리다는 라임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절묘하게 말 놀이를 하고 있단 말이지요
 
아스글론이라는 말도 황폐를 뜻하는 테마마 라는 그 속에 들어 있어요
그 다음에 아스돗은 쫓아 낼 것이다고 하는데 쫓아내다는 뜻의 뿌리가 그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 도시의 이름이 원래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런 단어들로 빗대어 이야기 하지요 아스돗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고요 이제 뒤에 등장하는 대 버림받고 폐허가 되고 쫓겨나고 뽑힐 것이다 하고 있는데
 
4절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대 낮이 상징하는 것은 안전함이어요 블레셋의 영화로움이 절정에 달해 있는 그 때 스스로의 자부심이 커질 때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하게 된다 이것을 시간적 표현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5절 해변 주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말하는 데 그렛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우나 해변 족속 그러지 않아요
 
그렛이 무엇인지 알지 어려우나 해변 족속 크레타 일 것이다 그 주민들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하고 말하는데 이 가나안이라는 땅은 우리가 가나안 하면 좋은 느낌이어요? 나쁜 이름이어요?
 
사실은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사용하지 안항요
노아의 아들이었던 함의 막네 아들이 가나안이고 그 함이 가나안과 더불어 저주를 받아 가나안은 약간 부정적이어요
 
창세기 9장 그들이 살고 있던 땅이 가나안인데 가나안이라는 이름 속에는 상인이라는 뜻도 장사하는 사람 뜻도 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이 가나안 땅인데 그래서 호세아 12장 7절에 보더라도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 도다
 
이게 가나안에 대한 부정적 평가인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여기 그렛 주민들도 그렇고 가나안 사람들도 그렇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을 칠 것이다고 이야기 하고 결국 너로 인하여 주민이 없어질 것이다고 말 합니다
 
풍요로운 땅 사실은 바다에 가까운 곳은 사람이 정착하기가 좋은 곳이거든요
6절 해변은 풀 밭이 되어 목자의 움막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을 것이며
7절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에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보살피사 그들이 사로 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라
 
해변지역에 머물면서 아주 강고한 문명을 형성하고 있었던 블레셋의 도시국가들은 결국은 폐러가 되었기 때문에 목자의 움막 짐승들이 자라는 곳이 될 것이고 양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는 것이야 사람들이 들 끊던 그 도시들이 텅빈 곳이 되고 짐승들이 사는 지경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남은 지경은 유다 족속들이 차지할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고 거기에서 양떼를 먹을 것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이 누우리니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던 그 도시 거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안히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여호와가 그들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부터 보면 모압과 암몬 이야기를 하는데요 사실 모압과 암몬이라고 하는 이 나라는 아브라함 족속과 관련이 있어요 없어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 롯이 소돔성이 멸망할 때 소알로 달아나서 그리고 산에 머물다 그리고 소돔성이 멸망하고 나서 두려워 졌어요 그래서 이 딸들이 외로운 곳에 있으면서 이러다가 자식들도 못 낳겠다 하면서 우리가 아버지를 옆에 누움으로 자식들을 낳지 않아요
 
큰 딸과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름이 모압이고 작은 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벤암미인데 거기에서 낳은 아들이 암몬이어요
 
창세기 19장 37-38절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 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인접해 있는 국가인대도 불구하고 서로 싸워요 성경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준 것은 무엇이냐 하면 뿌리를 거슬려 올라가면 구지 싸울 이가 없어 우리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야 그 이야기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8절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모압이 비방합니다 암몬이 조롱한 것이어요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자기를 크게 여겼다 그런 이야기여요
 
예레미야 48장 42절 모압이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과 맞섰다
여호와를 거슬려 자만하였으므로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자기를 높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맞섰다 스스로 어떤 자신을 가졌는가 하면 자기들이 용사요 능란한 자라고 자부 했다는 것이어요 그들은 약탈한 보물로 자부심을 삼는 그런 나라이다 이것이 예레미야고 보고 있던 그 나라의 문제입니다
 
예레미야 48장 14절 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용사라 하느냐
스스로 자부했어요 그들은 약탈한 보물로 자부심을 삼는 나라이다 결국은
 
예레미야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예레미야 48장 37절 모든 사람이 대머리가 되었고 모든 사람이 수염을 밀었으며 손에 칼 자국이 있고 허리에 굵은 베가 들렸고 지붕과 거리 각처에서 큰 소리가 들릴 것이다
 
모든 사람이 대 머리가 되고 머리 깎이었다 그리고 수염을 밀고 수염이 밀렸다는 것은 위엄의 상징이어요 이것이 밀렸다는 이야기는 제국의 위엄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 이고
 
에레미야 48장 38절 모압의 지붕과 거리 각처에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니 내가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같이 깨트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백성들의 운명을 모압과 암몬이 그대로 보여 주고 교만했던 벌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9절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은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이 성은 사해 인근에 있어요 그래서 지형적으로 보자고 한다면 소돔과 고모라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기가 어려워요 고대에 있었던 문명이기 때문에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해 보니까 여기가 상당한 규모의 도시들이 있었는데 그 도시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어요
 
그리고 그 도시의 흔적이 있는 그 곳이 대게 무엇이냐 하면 소금 산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불 심판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불 심판이 내렸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옛 사람들이 지각 변동 같은 것들이 문명이 덮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것이다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소돔이 멸망한 까닭이 어디 있었지요?
 
흔히 소돔의 멸망을 이야기할 때 남색하는 것 때문에 멸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소돔의 멸망은 남색만이 아니고 어떤 이야기냐 하면 낯선 사람들을 환대하지 않은 무정함 때문이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왔을 때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 드리고 환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
어요 환대라고 하는 것이 낯선 자들이 설 땅을 허락해 주는 것이 환대여요 그리고 나그네 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두렵지 않아요
 
고아나 과부 같은 사람들이 설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지요 그러니까 고아나 과부 나그네를 우리의 삶속에 환대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인간이 인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이다
 
그 사람들이 이 속에 들어와서 편안하게 나도 여기에서 존중을 받고 있어 이 느낌을 받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고대 세계는 환대 보다는 적대가 일반화 되어 있었고 이 적대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을 목적을 가진 존귀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고 그러니까 수단으로 여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박탈하는 일이다는 말이어요
 
이것이 소돔성이 멸망할 수 있는 이유인데 모압과 암몬을 두고 소돔과 고모라 같은 그것이 모압과 암몬이라고 하는 그 나라에 이런 환대가 아니라 적대가 넘치는 곳 이웃으로 따뜻하게 이웃으로 대접하기 보다는 그들을 이용 가치로 바라보는 그들의 그릇된 문명이 있단 말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이 대목을 보면 정말 무지한 자들이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왜냐 하면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는 것이어요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낯선 사람들이 우리의 삶속에 들어와 가지고 자기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해 가면서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우리가 공간과 마음을 베풀어 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수 없는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상황 속으로 밀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 자민족 중심주의가 점전 전 세계에 번지고 있지 않아요 유럽 같은 대에서도 난민 같은 사람들에 대한 배척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이 점점 황폐해 지고 위험속에 있다는 징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현실을 예쁘게 봐 줄 이가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어요 어쩼던 거기가 영원히 황패하게 될 것인데 그래서 그들의 황폐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한 까닭이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8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 졌음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천대하고 힘으로 누루려고하고 이것이 그들의 멸망을 제촉했다 누군가를 억압했는데 자기가 당하는 그런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11절 여호와가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결국은 교만함의 대가 조롱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의 그 조롱과 비방이 자기를 무너뜨리는 덫이 되었어요 이것은 언제나 그래요 우리 어렸을 때 시골에서 놀 때 심심하고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길에다가 이렇게 함정을 파고 풀로 이렇게 덮어 놓고 그러면 누가 함정에 빠지면 그가 빠지는 것인데 궁금해서 가다 보면 꼭 내가 빠져요
 
옛날에 작난할 때 풀로 이렇게 나 있는 도로에서 이쪽 풀과 저쪽 풀을 묶어 놓아요 가다가 보면 걸려 넘어지게 우리가 경험한 것은 꼭 내가 걸려 풀들이 그런 인생인데 결국은 남을 못 살게 할려고 하는 그들이 탁 걸려서 넘어지게 결초 보은에 고사도 있기는 합니다마는 꼭 자기가 걸려 넘어가는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어요
 
남을 못 살게 굴려는 그들이 어쩔 수 없는 남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를 군대에서 훈련을 받는 데 유격 훈련을 받게 되는 데 일주일 동안 가 가지고 훈련을 세게 받아요 빨간 모자 쓴 조교들이 얼마나 겁을 주고 그러는지 몰라요
 
내가 조교 몇 년에 너희 같은 놈들 처음 봤어 기압주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산 위에 올라가서 도르래를 타고 강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야 내려가는 그것을 하는 데 옷이 흠벅 젖지 않아요
 
마지막에 훈련에 끝나고 나면 기분이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젖은 옷을 다 벗고 마름 옷으로 갈아 입으면 기분이 좋아요 끝났어요 이제 끝나는 기념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면 교관과 조교들을 물속에 던지는 의식이 있습니다
 
우정이지 물속에 집어넣으려면 자기도 들어가야 돼 그것을 보면서 남을 빠트리려면 자기도 빠져야 돼 그런 생각이 들어요 누구를 미워하려면 내 마음을 가시 돋히게 만들어야 되거든요
 
남을 미워하는 사람들 보면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이어요 정말로 그래요
이런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대요
그 다음에 같은 이야기 반복인데요
12절 그 다음에 구스가 등장해요 구스는 이디오피아 나라로 보여 집니다
그들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요 북쪽에 앗수르도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13절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가만히 보니까 지금 이야기 할 때 블레셋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서쪽 그리고 모압과 암몬은 동쪽 앗수르는 북쪽 구스는 남쪽 동서남북을 다 이야기 해요 이스라엘의 사방 동서남북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 나라들을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쩼던 교만한 이에 대한 주어진 대가를 14절과 15절에 스스로의 황폐하고 메마름일 수 밖에 없다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13절 스스로에 대한 메마름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의 교만의 대가가 그 문명이 황폐하게 상황을
 
14절 각종 짐승이 그 가운데에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데기에 깃들이고 그것들이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15절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 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리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 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려 손을 흔들리로다
 
당아는 갈 까마귀 까마귀 종류인 것으로 보여요 어쩼던 고슴도치가 기둥 곡대기에 깃들이고 그것들이 창에서 울 것이며 인간들이 살고 있던 곳이 짐승의 차지가 되는 심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문턱이 적막하고 그 다음에 구상적 언어가 등장하는데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하고 말합니다 백향목은 최고의 건축재료 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벗겨지고 거기에 새가 깃들고 고슴도치가 깃들고 그런 적막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나만 있고 다른 이가 없다하 라고 이야기 했어요 이게 무엇과 관련이 되느냐 하면 출애급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 그 이야기에 뒤집힌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들이 오직 나만 있고 다른 다른 이가 없다 말하므로 야훼 하나님의 그 절대성을 거꾸로 뒤집고 있는 현실임을 보여 주어요 국가도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나는 나다 나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이 얼마나 오만해요 그런데 그렇게 기쁜 성읍 모든 것 누리고 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던 그곳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옆드릴 곳이 되었다 그래서 지나는 사람마다 비웃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결국은 다른 것 없습니다 예언서 우리들이 보고 있지만 사람들을 환대하지 않는 문명 나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를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오늘 예언서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을 지극한 마음으로 환대하고 내 곁에 누군가가 다가 올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줄 수 있는 삶이 하나님의 복 받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5강 습3:1- 7 예루살렘의 죄악


어느 꽃을 제일 좋아하세요 제가 좋아는 꽃은 백합이어요 저는 안개꽃이어요 저는 이인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거든요 옆에서 일인자를 보았을 때는 안개꽃 같은
 
봄에 피어나는 꽃 가운데 순백의 꽃 있지요 목련 목련 꽃이 봄에 아주 아름답데 피지요 잎조차 나지 않았는 대 목련 꽃이 피어 있으면 예쁘지 않아요 목련이 질 띠는 예쁘지 않아요 바닥에 떨어지면 변색되고 발로 밟히고 그러면 좋지 않아요
 
목련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해요 처음에는 사람이 좋은데 끝이 좋아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해 보여요 이것이 인간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진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들면 기독교는 얼마나 아름다운 종교여요 종교로 이야기하자면 그런데 이 기독교가 본래 가야할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간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추하게 보이거든요
 
한 나라 한 종교가 타락하고 왜곡된 까닭은 그 나라의 백성들이 나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혹은 그 종교의 신자들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해야 하는 지도자들이 그릇된 길로 가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 밖에 없겠지요
 
이것은 성서에서 보는 일관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언자들이 바로 하는 이야기가 지도자들의 죄 종교 지도자든 정치지도자든 그들의 죄가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지 보여 주거든요
 
참 가슴 아픈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데요 여기 보면 패역하고 더러운 곳 어디여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 받을 형벌과 보호 소제목이 있으니까 어쩼던 패역하고 더러운 곳 이 말이 참 슬픕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라고 일컬어 졌지 않아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순례자로 여겼고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곳이어야 합ㄴ미다
 
그곳에 가면 내가 받아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세상에 받은 상처들이 다 어루만져지고 내 마음에 상처들이 어름 같은 것들이 녹아져서 봄에 사람이 되도록 새로운 생명이 움터나오는 도시이어야 하지요 이게 예루살렘입니다
 
교회도 그런 공간이어야만 합니다 교회에 온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현존 앞에 서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하겠지요
 
메네딛토 성인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데 이 베나딛트라는 성인이 로마의 귀족출신인데요 로마의 귀족들인 누리고 있는 향락과 사치스러운 삶이 맑게 순수하게 살아야 하겠다고 하고 로마에서 떨어져 있는 수비아코라는 조그마한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문명과 단절하고 하나님앞에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수비아골 동굴 속에 들어가 가지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지내요 이 동굴에 얽혀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정신이 온전치 못했어요
 
어느 곳에 가든지 이 여인이 옷도 찢어지고 상처나고 가족들이 참 슬폈겠지지요 고칠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잘 낫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다 어느 날 그 여인이 떠 돌다가 베네딕토 기도 동굴에 들어와서 하루를 묶었습니다
 
하루를 묶고 그 다음날부터 정신이 온전해 졌어요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땅에 교회들이 이러면 참 좋겠다 세상에 사는동안 마음이 찢기고 상처가 많고 마음에 정처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 지고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에 통전성이 회복되고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면 좋겠다 생각하는데 오늘의 교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이것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데 이것이 교회에 이야기 했지만 예루살렘이라고 도성에 똑같이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도성이 어떻게 패역하고 더러운 곳 이런 말을 들어요 참 슬픈 현실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야 할 것이 가장 타락했기 때문에 그 성읍에 화가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왜 그곳이 패역하고 더러운 곳이 되었느냐 하면
2절에 4가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2절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의뢰하지 아니하며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하지 않은 것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 네가지가 열거되고 있지요 죄를 이야기할 때 죄는 두 가지가 있어요
 
어떤 것이냐 하면 저지른 죄가 있어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이어요 그렇지요 도둑질 하지 마 도둑질 했어요 행동을 통해 내가 저지른 것이어요
 
그러나 죄라고 하는 것은 여기만 있지 않아요 법률적으로 보면 내가 구체적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 마음속에 죄의 욕망이 있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저지른 것만 죄가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가 있는데 그 죄의 이름이 태만 죄여요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어요 누가 복음에 보면 부자의 문간에 있었던 나사로가 있습니다 나사로도 세상을 떠났고 부자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부자의 죄가 무엇이지요? 부자가 왜 지옥에 가 있을까요 자기 집 문간에 있는 나사로를 돌보지 않는 죄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어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나는 깨긋해 나는 이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어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있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
창세기 4장 9절 나는 동생 지키는 자 입니까? 나는 너를 동생 지키는 자로 만들었어요
하는 이야기이지요
 
하나님이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하니까 나는 동생 지키는 자 입니까 하거든요 하나님은 나는 너를 동생 지키는 자로 만들었어 합니다 태만죄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을 책임지지 않는 것이야 이것이 태만죄입니다 이 태만죄가 나태한 죄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는 데 이 태만죄가 발생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2절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듣는다는 말 속에는 순종하다는 뜻이 담겨 있거든요 명령을 듣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반역의 충동이 내 속에 있어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생각이 없어요 때때로 보면 사람들은 성장을 해야 하는데 나무로 이야기 하자면 나무를 하나 심었습니다
 
나무는 두가지 운동을 해요 하나는 등치를 키어가야 하고 하나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나무는 두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요 나무는 자라기만 하면 무너질 수 밖에 껍질이 이것을 형식 형식이 필요해요
 
그런데 형식만 있으면 안 되어요 형식주의가 되면 안 되어요 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다이나믹입니다 다이나믹한 것 역동성이어요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해 지는 것이어요
 
역동성만 있고 형식만 있으면 엉망이 되는 것이어요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대도 애들이 신나게 놀게 해야 하지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해요 애들 기 죽이지 마 하지만 때때로 꺽어줄 수 있어야 해요 그 의지라고 하는 것을 이것이 명령이야
 
하나님도 그 백성이 인간이 죄에 끌리는 속성이 있거든요 어떤 분은 원죄를 설명할 때 원죄를 이야기 할 때 우리와 무관하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떠먹어 가지고 우리도 제수 없게 원죄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 처럼 우리 속에 있는 죄에 끌리는 속성이 우리 속에 있어요
 
모든 인간속에 죄에 이끌리고 있는 속성 같은 것이 있어요 왜냐 하면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으므로 생령이 되게 하였는데 사람이 욕망을 가진 존재여요 욕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끌리고 있어 결핍에 채우려고 하니까 나쁜 것에 이끌리는 속성이 있어요
 
여기에 있는 상훈씨나 여기 나운씨나 참 착한 사람들이지만 이 분들 속에 악의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어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그렇기 때문에 은혜 앞에 우리 자신을 자꾸 세워야 할 까닭이 악에게 이끌리기 보다는 선에게 이끌려 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때때로 명령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으냐 명령에 순종해야 사람 골이 돼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라고 말합니다 여기 교훈이라는 게 징계이고 교정이어요
 
내가 잘못된 것을 누군가가 깨우쳐 주어야 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것을 그러거든요 질자인데 꾸짖어서 바로 잡아 주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꾸짖어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그러면 안 돼 말한다든지 이게 무엇이냐 하면 교훈을 받는 것이어요 못난 사람의 특징이 남을 꾸짖을 것만 있고 못난 사람의 특색입니다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자기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살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니라 가까이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와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친밀함이어요 그 침밀함의 다른 이름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가까워져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은 마주 봅니다 젊은이들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서로 바라보는 것을 보면 참 좋다 그러거든요 진자 정말 사랑해서 눈빛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아요
 
이상하에 죄라고 하는 게 우리속에 들어오면 마주보지 못해요 등 돌리게 되지요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야기 합니다 사랑은 끌리는 힘이고 죄라고 하는 것은 힘이 밀어내는 힘이어요 밀어내는 힘이 청력인데 잡아당기는 힘이 인력이고 청력을 사회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소외 시키는 힘이어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 욕망을 이루는 일에 제동을 건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불편해 그러니까 가까이 안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않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태만죄 속에 빠지게 굳건히 되었고 그 결과 패역하고 더러운 것이 되어요 이것이 예루살렘에 내려진 하나의 아주 슬픈 진실입니다
 
3절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 까지 남겨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ㅣ
 
4절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자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한 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방백은 정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치 지도자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부르짖는 사자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 때문엔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권한 혹은 권력 혹은 권위를 우리에게 위임해 주실 때 세상에 모든 권력 권한이라는 것은 위임된 권력입니다
 
옛날에는 사적으로 어떤 갈등이 생기면 사람들이 보복하는 것이어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어요 이 보복이라는 것은 항상 악순환을 내 부모를 죽인 원수 산에 올라가서 원수를 처단하고 악 순환이 벌어지지 않아요
 
이 순환의 고리를 귾어야 돼 이렇게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네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법이어요 사적인 보복을 못하게 하고 법이 이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징계를 하는 것이어요
객관적으로 법은 제대로 되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여기 권력이라고 하는게 우리를 대신해서 정의를 세워 주세요 우리를 대신해서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할 권한을 그들에게 위임해 준 것이지요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회의원이 되었던 대통령이 되었던지 간에 우리 선거 때 되면 그분들이 겸손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겸손한 분들이 권력의 자리에 가면 참 달라지지요 참 묘한 이치입니다
 
이것은 위임 받은 권한이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해야 한 일은 위임된 권력을 가지고 공의를 세워야합니다 이 방백들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 권한 권위를 가지고 자기 이속 차리는 일에 다 활용한 것이어요 그것을 부르짖는 사자 이것이 정치의 타락을 보여 주어요
 
그다음에 재판장들 재판장은 저녁이리다 이튿날 까지 남겨 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라고 하는 것은 뇌물 받고 재판을 굽게 만들고 그래서 이 재판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정의의 여신 법원 앞에 가면 정의의 여신 동상이 서 있는데 한쪽 눈을 가리고 한 쪽에는 저울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지않아요
 
왜 눈을 가리었을까요? 이 사람이 돈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해 가지고 뭐 그럴 수 있지 넘어가면 안 된다고요 가난하다고 법률 어기면 안 되지 않아요 그것을 지켜야지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은 정의라는 것을 이야기 했지만 공의로움도 해야지요
 
재판장들은 정의를 세우는 일이어야 하는데 정의를 세우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해 그렇게 되면 세상에 신뢰가 무너져 이렇게 마땅히 세상에 기초를 잡아주어야 할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게 될 때 믿을 것 나 밖에 없어
 
세상에 믿을 인간이 없어 이렇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지요 이게 서야 할 사람이 서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이어요
 
가슴 아픈 것은 여기 있어요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하다 참 기가 막힙니다 선지자들은 눈이 불꼭 같아야 하지 않아요 세상에 이면을 꽤 뚫어 보고 때때로 잘못된 것에 냉엄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상처 입은 백성들은 따뜻하게 감싸 주는 것이 그래서 떠돌고 있는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경박하고 간사해
 
이런 헛된 종교인들 여러분 종교인들이 바로서야 역사가 바로 가는데 오늘의 종교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내가 바로 섰나 그래서 경박은 면해야 할 것 같아요
 
그 다음에 간사하면 안 되어요 종교인들은 간사하면 안 됩니다 간사하다는 것은 안에 질실과 밖의 진실은 다르다 그러니까 남의 비위 맞추기 위해서 간사한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안 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학자가 있는데요 그 분이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지식인이 자기의 말을 듣는 유력한 청중을 의식하여 말을 왜곡하는 순간 그는 지식인이 아니어요
 
이 지식인의 자리에 목사를 넣어 보자고요 목사가 자기 교회에 유력한 사람들 염두에 두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왜곡한다든지 그러면 목사가 아니어요 지식인 론에 현실을 어떠합니까? 힘 있고 유력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복음을 왜곡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종교조차 이 불의한 세상을 그 나라는 희망이 없다 여기 제사장은 무엇하는 사람입니까? 거룩을 지켜내는 사람이어요 사람들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내야 하지요 그러니까 경계라고 하는 것이 있어
 
제사장이 지켜야 하는 것은 경계인데 경계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더럽게 만드는 것들로 사람들을 지켜 내는 경계여요 이것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해야 합니다 더럽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오염 시킬 수 있는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어요 제사장운 성소를 더럽혔다 그리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심 전력을 기우려야 할 율법을 대수롭지 여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 했습니다 방백 선지자 제사장 그들이 무엇이냐 하면 최고 지도자들이어요 그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 놓은 것은 그들이 그렇게 불의를 연대를 맺었기에 가능한 것이어요
 
어느 한쪽이 노하고 이야기 하면 그렇게 못합니다 그들이 좋은 게 좋은 것이지 뭐 그러고 가는 것이야 여러분 제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제 전임자인 목사님이 우리 교인들에게 수 십년동안 귀가 닿도록 하신 말씀이 좋은 좋은 게 아니고 옳은 게 좋은 것이다 이 말씀을 하셨어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어요 옳은 게 좋은 것이어요 이들은 무엇이냐 하면 불의의 연대를 통해 서로를 이렇게 북돋아 주어요 정치인들은 종교인들에게 잘하십니다 하고 그들은 종교인들에게 서로가 불의의 연대를 형성함으로 나라 전체를 참 슬픈 일입니다
 
가끔은 예언자들이 등장해야 하는데 제가 4세기 위대한 교부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이 분은 황금 입으로 알려져 있어요 설교를 워낙 잘했어요 옛날에는 설교만 잘한 분으로 생각을 했어요
 
이 분의 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 졌어요 왜냐하면 예언자이어요 콘스탄니 토풀의 대 주교였는데 콘스탄티 노플의 대 주교였는데 콘스탄티 노플에 황제가 있어요 동 로마시대 거기에 이 크리스토 토무스가 황제의 부인 이름이 에브독시아입니다 교회에 잘 나온 사람입니다 유력자입니다 그런데 사치스럽고 허영과 불의를 일 삼아요
 
그러자 에브독시아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싱에게 황후의 권세를 주었다면 그것은 정의를 세우라고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흙과 재 풀과 먼지에 불과하고 인생 또한 그림자와 연기 그리고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듯이 황제도 그와 같습니다
 
이 지엄한 꾸중 앞에서 지금 종교 지도자가 하는 말이어요 황제의 지위 영원할 것 같아도 아니야 그것은 티끌과 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더 이상 고통과 불행을 지우지 마십시오 당신은 포도밭과 무화과 밭 기름돠 돈 그리고 권력을 가지 무덤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미움을 받아요 귀양가서 죽어요 크리스 토무스가 그러니까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은 이렇게 대가를 치룬다 말이어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람있기 때문에 해야 할 말 안하고 갈 수 없는 것이어요 이것이 참된 종교인이고 예언자이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교훈을 받지 않을 때 일들이
5절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집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 도다
 
여기 중요한 것이 그렇게 패역하고 더러운 도성인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처럼 보여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 계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이 머무는 곳이다 예언자가 들려주는 것이 그런 것입니됴
 
민수기 35장에도 보면 제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구절인데
민수기 35장 34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한 땅 돋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중에 있음이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하나님의 거주하는 땅이어요 그 이야기는 나는 지금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는 것이어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야 서 있는 사리인 것을 잊지 말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만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아요
 
이것인데 그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를 행치 않는 하나님이어요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불의를 일 삼는 것이지요
5절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가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마치 해가 떠 오른 것처럼 하나님은 끝없이 그 땅에 공의의 태양이 떠오르기를 바라고 그렇게 역사하고 계신데 그 지도자라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고 있다 이것이 예언자가 보기에 정말 슬픈 일입니다
 
더 더욱이 슬픈 것은 불의한 자들은 수치를 알지 모른다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가 염치를 모르는 데 있다 생각을 해 보는 데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사람인데 염치가 너무 없어요
 
그런데 수치를 모른다는 것도 참 문제입니다 인간에게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함부로 욕망의 강에 떠밀리지 않도록 하는 닻 구실을 해 주어요 수치심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양심의 법에 따라서 문제는 자기의 더러움을 알지 못한다 불의한 자의 특색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무디어진 사람들이어어요
 
영혼이 무디어 진 것을
디모데 전서 4장 2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뜨거운 그 인두로 지져진 것이야 그 영혼이 무디어졌어요 그래서 수치심을 알지 못하는 것이야 그래서 공의와 정의를 알지 못한다 이게 이 시대의 슬픔 가운데 하나입니다
 
6절 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이 망대가 파괴 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6절은 앞서 보았던 구절들과 관련이 있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등진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징계하고 심판했어요 그들이 높이 세운 망대가 무너지게 만들었고 그들이 융성하게 사람들이 융성하게 다니던 거리가 빈 곳이 되었고 짐승들의 거처가 되었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도 그 지경이 되고 싶니 그런 이야기여요
 
7절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리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기기로 정하기는 하였으나 너희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마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제는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가 돌이킬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경고를 사람들이 안 받아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앞의 말이 기가 막해 부지런히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고 하는 말 곳에 담겨있는데 의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수치를 그치고 약자들의 살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을 있는 그들을 그대로 존중하라는 말이어요
 
양심에 화인 맞은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조차 경청하지 않고 자기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 부지런히 악을 행합니다
 
결국 그들의 마침은 멸망일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게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 나라가 방백 재판관 선지자 제사장들 그들이 불의의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면 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이 불의의 연대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이 감시하고 비판하고 요청하고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이 패역하고 하나님이 사시는 땅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몫을 살아내는 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도전이고 책임입니다.


제 6강 회복의 꿈

(스바냐 3: 9-13)
 
사람이 야단만 맞으면 주눅들지 않아요 그런 것이 있지요 때때로 격려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보면 우리가 야단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사람이 될려면 그냥 야단 안치고 전폭적으로 받아 주는 사람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이게 역할 분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 아빠가 야단치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받아주고 이런 역할 분담이 아이를 균형있게 키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데 하나님도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속 야단을 쳐요 매를 많이 맞으면 주눅들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야단침은 언제나 무엇으로 귀착되느냐 하면 사랑이지요 정의가 전제되지 않은 사랑이라는 것은 잘못될 가능성이 있지요 바르게 사랑을 해야 하지요 사랑은 정의를 내포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스바냐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무서운 이야기들이 했어요 정의가 공의가 무너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을 향한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거듭 나왔어요 우리는 움츠려 들였어요
 
오늘부터 스바냐서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 가고 있는데 위로와 희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비교적 희망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9절 하나님이 민족들을 회복시키실 때 제일 먼저 어떤 일을 하시는 지가 9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케 하며 입술이 깨끗한가요? 하나님의 계획은 입술을 먼저 깨끗하게 하는 데 사실은 입술가지고 하는 일이 무엇이 있느냐 말 입술이 더럽다고 하는 말은 말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입술을 가지고 정말 거짓말을 하고 악한 말을 하고 남을 해치는 말을 하고 하는 것들이 더러운 입술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하나님이 맨 먼저 회복을 하시는 일은 말을 회복하신다 더러운 말이 사라지도록 만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를 보면 이사야 6장 5절 이사야가 성전에서 환상을 봐요 하나님의 환상을 보거든요 그 때 이사야가 탄식합니다 화로다 나여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주하면서 만국의 왕을 뵈었음이라
 
거룩함에 섰을 때 사람이 느깨게 되는 것은 참 좋다가 아니라 두려움이어요 내가 너무 어둡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비유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이 위에 빛이 있어요 내가 저만치 떨어져 있으면 빛의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있으면 내 몸에 묻은 것 잘 안 보이지요
 
나는 스스로 어떻다고 느끼느냐 하면 나는 깨끗해 그렇게 느껴요 그러나 빛을 가까이 다가가면 내 옷에 묻어 있는 것도 보이고 어두운 것들도 보이지요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빛에 가까이 갈수록 자신이 흠이 많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바울 사도가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아름다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면 스스로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면 디모데전서 1장 15절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해요 그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바울은 정말 나쁜 죄인이야 이렇게 말하면 그 말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요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는 말은 겸양을 떨기 위한 말이 아니어요 빛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자가 한 자기 하는 자기 인식이어요 그래서 빛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일 수록 나만큼 한 사람 누가 있어 나만큼 떳떳하게 사람 누가 있어 말한 사람은 잘 못된 것이어요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란다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안 했지요 죄짓고 들어가는 사람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야기 하고 들어가지 않아요
 
이사야도 거룩 앞에 섰을 때 아 나는 이렇게 이 땅에서 살면서 입술이 부정한 자인데 저 영광된 하늘의 세계를 보았으니 나는 죽을 수 밖에 없겠다 그 때 스랍하나가 제단에 숲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가져다 댑니다
 
그래서 정결하게 되지요 입술을 정화해 더 이상 이사야는 이전에 자기의 말을 하고 살던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정화된 입술로 하나님이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지요 소명이 그렇게 발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술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살리는 말 무엇인가 살리는 말 올바른 말 참된 말 친절한 말 이런 것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일전에 물은 적이 있는데 음 높이가 부드럽게 이어 부르려고 할 때 무엇이라고 이음줄 영어로는 스로우라고 하기도 하고 레가토라고도 하거든요
 
그런 표시가 있으면 어떻게 불러야 해요 이어서 부드럽게 이어서 불러야 하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래의 언어의 기능이라고 하는 게 그 레가토 이움을 줄을 닮았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데 오해도 말로부터 비롯되고 이해도 말로부터 비롯되어요
 
말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어야 하는데 말이 띠때로 사람을 멀어지게도 합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아담이 잠에서 깨어나니까 자기 앞에 낯선 존재가 있었어요 그 때 아담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창세기 2장 23절 새 번역 이제야 나타났구나 남자에게서 났으니 여자라 하리라 이 사람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인간이 누구인데 나를 보고 내 뼈 내 살 이렇게 안 하지 않아요 처음인데 누군가가 내게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가까워 지지 않아요 그런데 죄가 들어왔을 때 아담의 언어가 바뀝니다
 
창세기 3장 12절 너 왜 다먹었어 당신이 내게 주어 함께 살라고 한 여자가 먹었나이다
그 언어는 갈라지는 언어이지요 죄가 우리를 지배할 때는 갈라지는 언어로 상처를 주는 언어를 하게 되지요 죄가 우리를 지배하기 전에는 이어주는 말 서로 아름답게 다가서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아요
 
입술이 부정한 자는 갈라서는 말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부정한 말을 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단 숯불로 우리 입을 이렇게 지저 주면 좋겠는데 우리가 뭐 욕은 하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속에서 발화되고 있는 말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줄 때가 있고 이런 경우가 꽤 많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입술이 깨끗해 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입술이 깨끗해 지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깨끗해 졌다 입술이 깨끗해 지니까 하나님을 경외심이 생겨났다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음이 청결해 내 영혼에 드리워져 있는 더러워진 것을 닦아 지니까 하나님이 보여요 입술이 부정한 자리에서 그 입술이 깨끗해 지자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나온 것이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로 주님을 섬기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한 가지로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한 어깨로 그런 뜻이어요 우리가 어릴 때 친구들하고 놀 때 어떻게 하지요 어깨동무 내 동무 그러지요 이렇게 어깨 동무를 하지않아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어깨를 겪는다 함께 어깨 동무를 하는 것이어요 다정하게 가기도 하고 레미제라블 같은 데 보면 서로 어깨를 겪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지 않아요 한 가지로 나를 섬길 것이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이 전에는 어깨를 겪지 않았어 친구가 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말은 여기 섬긴다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에 관련된 단어에 주로 쓴 단어이어요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그들에게 주신 소명이 있었는데 그 소명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었지요
 
출애굽기 19장 6절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이었어요 흩어져 있던 뭇 나라 사람들이 입술이 깨끗해 지자 그들이 어깨를 함께 하고 하나님을 섬겼다 그 섬겼다는 단어가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된 사명을 보여 주어요
 
이 구절이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의 통치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적 중심 속에서 내 삶을 본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여호와의 통치가 받아 들여진 세상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미국이 굉장히 큰 상처를 받은 사건이 있지요 2001년 9 11 테러 사건 미국이 본토 공격을 받은 게 일본에 의해서 태평양 전쟁 벌어졌을 때 본토 받은 것 외에는 거의 처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멘허턴에 있는 다리들이 폐쇠개 되고 어려움을 겪었는데 특히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미국에 있는 무슬림들은 피잡을 하고 다니다든지 이러면 테러리스트인 것처럼 인식이 될 수 있어요 그 당시에는 그러니까 밖에서 나가면 공격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분들은 공포를 느낍니다
 
그 때에 뉴욕에 있는 교회들이 모든 교회는 아니지만 뉴욕에 있는 교회들이 무엇을 했느냐 하면 주변에 있는 이웃 무슬림들을 찾아가 그래서 필요하신 물건이 있으면 이야기 해 주세요 사다 줄게요
 
그분들이 밖에 나오지 못할 때 그분들을 위해서 장을 보아다주고 이런 것들을 했어요
이것이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고 사람은 누구나 미움의 표적이 되어 있을 때 그들을 품이 되어 감싸 주려고 한 것이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다 그 관계속에 이것이 여호와의 통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건으로 저는 보아요 이렇게 되면 서로 바른 말을 하고 상처주는 말을 하고 해해치는 말을 하고 이런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어깨를 겪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벨탑 사건의 역전이 일어난다
 
창세기 11장 8절 바벨탑 때는 언어를 혼잡해 가지고 흩어 졌어요
지금은 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언어적 통일이 일어나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함께 섬기게 되는 바벨탑의 역전이 벌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여주는 비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0절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으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 것이라
 
하나님께 구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품을 열고 맏아 드리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젠에 죄 때문에 흩어 버렸던 자들이 구스 강 저편은 아프리카 저 편이거든요 저 멀리까지 가 있던 사람들이 주님께 예물을 가지고 와서 바치게 될 것이다
 
구스 강 건너편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하면 그 당시에 땅 끝 가장 먼곳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중심을 가지고 나아와서 예물을 바치고 그런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11절 내게 네게 범죄한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내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 교만하지 않게 할 것이니라
 
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날은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말합니까? 하나님께 거역했던 행위로 인하여 더 이상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고 말핮ㅂ니다 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까?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들이 벌을 받을 만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파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것을 징계하시는 까닭은 분풀이를 심판의 목적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화이고 하나는 연단 그렇지요 이 둘이 함께 가도록 되어 있어요
 
심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서 자기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돌아보도록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심판을 자초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하면 본말을 뒤집기 때문에 인간이 심판을 자초해요
 
한자로 본이라는 글자 나무 목자가 있지 않아요 밑에 하면 본이야 여기에다 나무를 그렸어요 줄을 그으면 말자여요 본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땅이야 이것은 무엇이어요 뿌리 땅에서 올라오는 데 여기에 메달리는 것은 열매 본은 뿌리이고 말은 열매인데 말도 그러니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어요 이것도 매우 중요해요
 
그러나 나무를 지탱해 주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뿌리인 것이지요 문제는 본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아 밑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 보이지요 열매가 보이지요 사람들은 열매에 관심을 가져요 여기를 튼튼하게 하는 것인 말을 추구하는 말을 내 삶의 중심으로 추구하는 결국은 심판을 자초해요
 
이것은 욕망과 탐욕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탐욕적인 삶이라는 것이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심판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말이 아니라 이것을 얻는 것이어요 내 삶이 말이 아니라 본에 정화된 삶이라고 말하고 이런 일이 내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게 될 때 나는 연단된 존재가 되는 것이어요 이것이 중요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미 겪어 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는 것이어요 그래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제거 되었고 자기 힘에 도취되어 들떠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죄의 무게 때문에 스러졌기 때문에 이렇게 정화되고 연단된 사람들이 그 도성을 채우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의 잘못에 붙들려서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세상에 과거의 잘못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이 이야기 한 것은 애교스럽게 볼 수 있는 잘못들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의도하고 지은 잘못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것도 죄도 많이 있고 그렇게 보면 죄 없는 사람이 없지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죄라는 과거가 어두운 인력이 되어서 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는 죄 의식속에 살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이냐 과거에 저지른 그 죄들을 네 아픔을 내가 알아 너를 용납했어 용서를 해 주셨다고 하는대도
 
용서를 해 주셨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그 속에 묶여 사는 것은 바보짓이지요 그러나 너무 헤픈 용서 쉬운 용서 문제가 될 수 있어 그래서 하나님은 대가를 꼭 치루게 하셔요 그러면 용서해 주셔
 
더 이상 붙들리게 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정화하고 연단하심으로 사람들이 정말 교만하지 않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는 것이지요
 
12절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의 모습이 드러나지요 나는 그 거룩함에 가르쳐 주고 있는 레위기의 성결 법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어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어요
 
레위기에 성결 법전은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 행위에 국한 시키지 않았다 요즈음으로 이야기 하면 예배당 교회에 참석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금요 철야 기도회하고 그리고 금식 기도하고 또 성경 많이 읽고 은혜 받은 집회에 빠지지 않고 이러면 굉장히 거룩한 삶으로 사는 것 처럼 보여요
 
이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게 항상 성결 법전에서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윤리야 윤리적 삶이어요 윤리라고 하는 것은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고 한다면 윤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기독교적 윤리 성서적 윤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ㅁ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속에 하나님을 모셔 들임을 뜻해요
 
나 좋을 대로 저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의 관계속에 중심이 되어 드리기 바라는 윤리라는 말이어요 그는 거룩하긴 하나 윤리적이지는 않아 이것은 안 돼 어떤 사람이 성경을 백번을 읽었어 거룩해 보여요 은혜 받은 집회에 빠지지 않아 그러나 자기 회사에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갑질을 한다면 그는 거룩하지 않은 것이야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윤리적이기는 하나 경외할 줄을 몰라 나쁜 짓은 안해 그런데 그의 내면속에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이 있다든지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행위가 아니야 그 속에 무엇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경외해야 될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사회 속에서 윤리적 삶으로 드러나야 하고 사회 속에 드러나는 윤리적 삶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으로 나타나요 고아 과부 나그네로 상징되고 있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그래서 레위기 23장 22절 추수할 때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 두라고 하는 것이어요 그들의 몫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바로 저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족이 되기 쉬어
 
나는 신양 생활 정말 열심히 해라고 말하는 데 여기에 대해서 격멸한다든지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모르는 체 한다든지 내가 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 처럼 가난하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 기도를 한다든지 그것은 경건이 아니어요 거룩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거룩함은 반드시 이런 삶으로 나타날 때 진자 거룩함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일관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보아야 합니다
 
12절 하나님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 공동 번역은 그것을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들을 남겨 두었어 사회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들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들 또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그들 가운데 남겨 두시고 이것이 하나님이 정화한 세상이어요
 
그들이 기를 펼 수 있어야 돼 그들이 누구를 의지해서 사느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이 보호함을 입고 그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자기의 삶을 할껏 살아 가도록 만들어 하나님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어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 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악을 행하지 않는다 악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어요 타자에게 무덤을 안겨 주고 싶어 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타자에게 무덤을 안겨 준다는 것은 해고지 하는 것이어요 그의 생명을 축소시키려고 하는 모든 행동은 악이야
 
우리가 누구에게 욕을 한다든지 멸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든지 무시한다든지 그려면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은 생명이 위축되지 않아요 그것은 살인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말 염두에 두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누구를 대하든지 나는 저 사람에 생명을 키워 주는 일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 해 멸시하고 격멸하고 이런 일을 통해서 생명을 키울 수 없어요
 
여기 중요한 것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여러분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이 남겨둔 사람이어요 그 다음에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면 입에 거짓된 혀가 없는 것이어요 그 다음에 먹고 누울 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게 어떻게 방생하지요 왜 우리가 두려웁지요 우리 두려워요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두려워요 시간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특별히 성서적 의미로 이야기 하자면 우리가 에덴에 동쪽에 살고 있거든요 에덴에 동쪽에서 살면 불안이어요
 
창세기 4장 16절 가인이 에덴에 동쪽에 이주하여 놋 땅에 거주하더니 에 놋이야 이 말의 뜻은 유리하다 방황하다 이 뜻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등 돌이고 이웃에게 등돌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다 놋이야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두려워 방활 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도 때때로 두려워하고 불안해 빠져 삽니다 에덴에 동쪽에 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하나님이 십판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정화가 일어난 다음에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이것은 외적 침입에 대해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내면의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이익을 내면에 일고 있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어요
 
그러나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자기의 평안함을 위해 누군가를 어려움 속으로 몰아내지 않은 사람은 조금 가난할 수 있지만 마음에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데요
 
결국 인간들이 모두가 지향하고 있는 바는 불안이 없는 삶을 살고 싶다 불안 없는 삶 두려움이 없이 살고 싶지요 많은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주전 8세기에 굉장히 아름다운 비젼을 보여 주고 있지요 육식에 동물들과 초식에 사는 동물들이 꿈 꾸거든요 이사야 11장 6절 그 꿈 이야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라
 
그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자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어 그 말은 무엇이냐 하면 사자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 강자들이야 그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기들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일을 내려 놓고 다시 이야기 하면 그 육식성의 폭력성을 버리게 될 때 평화가 오는 것이어요
 
세상에 평화가 없는 것은 힘 있는 저 사람들이 세상을 불 안전하게 만들기 대문이 아니어요 힘 없는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먼저 힘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려는 욕망을 내려 놓고 섬기기 시작할 때 평화가 와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삶은 한결같이 높아지려는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리켜 주지요
 
마태복은 20장 27절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높임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그러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지요 이것이 이사야 11장의 신약 성서의 버전이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힘 없는 사람들 너희가 문제야 너희 대문에 세상이 소란 스러워 그럴 게 아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그 힘을 사용할 대 세상은 평화롭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세상이어요 정말로 평화를 꿈꾸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간단하게 이야기 할께요 첫째 기도안에 머무르라 다시 말하면 날마다 평화를 만드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돼
 
세상 도처에 있는 아픔들 아프리카에 곤고한 사람들이라든지 이 사람들을 우리의 기도속에 모시고 와서 하나님께 그들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해야 돼 이것이 첫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기도만 하면 안 되어요 죽음의 세력에 항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고통 스럽게 만드는 생명을 해치는 사람과 제도에 굴복하지 않아야 되어요 이게 우시 속에 있어야 돼
 
2018년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두분이 있는데요 데니스 무쉐거라는 콩고 공화국에 의사입니다 이 분은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전쟁을 통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치료하고 돌봐 주었어요 회복해 주는 일을 했어요
 
그러니까 세상은 끊임없이 여성들을 도구화 하지만 이렇게 끝끝내 그들을 지켜내는 사람들이 있어요기도만 하지 않았어어요
 
나다이 무라드 이라크 소수 민족의 여성입니다 아이에스에 납치 되어 가지고 집단 성 폭력을 당했어요 그리고 탈출한 다음에 전쟁을 반대하고 인신 매매를 막기 위해 매진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그들은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기도안에 머물러야 되지만 악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해야 되어요
세 번째는 삶을 축복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돼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내는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든든하게 매력적으로 살아가는지 보여 주어서 세상의 아름다운 삶의 표지를 세워가기 시작해요
 
그래도 소용이 없어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살것이야 저 사람들을 보니까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구나 이렇게 느길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미국에 민권 운동이 벌어지고 있던 1965년 3월 7일 아리바마 주에 셀바라는 곳에서 몽고메리를 행진하던 사람 가운데 한 노인이 한 말이 있어요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모험에 뛰어 들어 희망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고 결과는 사랑으로 감내하자
 
이것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해야 할 마음속에 세겨야 할 요소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세상에 만들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렇게 만들기 워하시거든요 기도 안에 머물고 그 다음에 이 불의와 죽음의 세력에 대해서항거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기뻐하며 경축하며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내적 능력이 내 속에서 생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증언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 여러분의 삶이 그런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7강 스바냐 3:14-20 시온에서 울려 나오는 찬양


여러분 기쁠 때 무엇을 하십니까? 저는 사람들 만나요 저는 가족들하고 지냅니다 거꾸로 슬플 때 무엇을 해요? 저는 혼자 있는 편이어요 사람은 슬플 때도 노래하고 기쁠 때도 노래하고 그러지 않아요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띠어 주는 것만이 음악의 역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역할 이런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돌아가셨지만 가야금을 타신 황병기 선생님이 계신데요 그 선생님은 자신의 음악을 사람들의 고양시키는 음악 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감싸 안은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고양 시킨 음악을 하는 사람은 그런 음악을 하는 것이고 어떤 상태에든지 노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정서를 드러내고 사람의 정서를 드러내는 것 같아요
 
시편이라는 책도 시편에는 두 가지 소리가 들려오지요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 바치는 기쁨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살다 보면 안 계신 것처럼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고 내 속에서 탄식이 터져 나올 때 하나님 어디 계셔요 탄식의 노래도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노래 가운데 초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어요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어요 나는 노래 잘 못하지만 합창단에 끼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어디 일것 같아요 요한 계시록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분이 계시고 네 생물이 있고 이십사 장로가 있고 네 생물이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면 이십사 장로가 따라 부르고 천군 천사가 따라 부르고 온 우주가 참여하거든요 나는 그 노래에 동참하고 싶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어서만 하는 노래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 분에 대한 찬미일 수 있어요
 
오늘 우리가 볼려고 하는 본문이 우리를 노래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14절 시온의 딸아 노래할 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지라
 
노래의 초대 시온의 딸아 노래할 지어다 이 명령이 참 좋으네요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노래할 지니라 전심으로 노래한다는 것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는데요
 
우리 신학교 다닐 때 신학교에서 퇴수회라는 것을 간 적이 있어요 요즈음으로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엠티같은 것이라고 할까 퇴수회라는 것을 갔는데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면 통나무 집 같은데 학년 별로 들어가서 자기들끼리 이야기 나누고 그러는데 누가 한 사람이 키타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따라서 노래를 부르지요
 
신학생들이 노래 잘 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열등감을 느낀게 노래를 너무 잘해 누가 한 사람이 켐퍼스 잔디밭에 앉아 가지고 키타치면서 노래 부르면 지나가던 사람이 앉아 네 사람이 앉으면 사부 중창이 되는 것이어요 노래들 정말 잘해요
 
그 날은 퇴수회의 기분이니니까 찬양을 안 하고 누구 하나가 무엇을 불렀느냐 하면
양희은씨가 불렀나
한 사람 여기 또 그 곁에 둘이 서로 바라보며 웃네
먼 훗날 위해 내미는 손 둘이 서로 마주 잡고 웃네
 
그 다음에 한 사람 곁에 또 그 곁에 둘이 좋아해 이런 곳이어요
후렴 부분을 반복하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야
그 무한 반복이야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이 그냥 종교 체험이야 찬양이 아닌데 정말 그 때 느꼈던 하나됨의 기쁨 우리가 한 길을 가는 동료들이구나 이것을 가슴 절절하게 느꼈는데 노래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묶어 주는 게 있는데
 
노래하라고 하나님이 불러요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이건 기쁨 속에 있는 사람이건 노래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그냥 노래해 이런 명령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노래 부를 마음이 있어서 부르지 않아요 슬픔을 그러나 스바냐서에서 오늘 노래하라고 하는 것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라
 
어떤 기쁨일까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들 힘 있는 나라가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근원적 확신 이것이 내 속에 있을 때 여기서 울려 나오는 기쁨 시온의 하나님의 하나님의 아름다운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할 때 노래하자는 기쁨을 노래하자 이것을 기쁨을 함께 노래하자
 
지금은 고통 가운데 있을지 모르지만 미구에 전개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반응은 기뻐하는 것이어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다른 게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하는 것 미리 취하는 것 하나님이 약속하는 바를 내 삶 속으로 끌어 당겨요 이것이 믿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전히 현실은 어려워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로 초대하셨느냐 하면 노래로 초대하셔요 함께 노래해 그 때 노래할 때 함께 솔로도 좋지만 부르는 노래들이 갖는 힘들이 있는데요 미구에 전개될 반응으로 노래를 부름으로 약속을 미리 앞당겨서 경험하자는 것이어요
 
여러분 타고르라는 인도의 시성 그분이 키단자리라고 하는 시를 섰는데 그 가운데 한 대목이 이렇습니다 당신은 나를 무한케 하셨으니 그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당신은 비우고 또 비우시고 끊임없이 이 그릇을 싱싱한 생명으로 세우셨습니다
 
나를 비우고 또 비워내고 그리고 그 속에 싱싱한 생명으로 세우셨어 그리고 노래합니다
이 가냘픈 갈대 피리를 당신은 언덕과 골짜기 너머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 - 기탄질리(니빈드리 타고르의 시)
 
갈대 피리 같아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그런데 그 님으로 표상되고 있는 하나님이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그리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신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피리야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순결을 불어 넣으셔서 부르시는 피리이다 놀라운 표현이지요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 손길의 끊없는 토닥거림에 내 가냘픈 가슴은 한없는 즐거움에 젖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합니다 때때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당신의 손길이 나를 토닥거려 주기에 무궁한 소리가 납니다
 
무궁한 선물은 이처럼 작은 내 손으로만 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당신은 여전히 채우시고 그러나 여전히 채울 자리는 남아있습니다 내 삶 속에 지속될 때때로 하나님은 은총을 내다보는 노래이지요
 
여러분 잊지 마세요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비우고 또 비워내 왜 비우시느냐 하면 더 새로운 생명을 채우기 위해서 비우신다 이것이 타고르라는 시인이 들려주는 노래야요 그것을 생각하면 내 삶에 근심 걱정이 가득차 있지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싱싱하게 채워 주실 것이야 하나님은 내 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셔서 하나님의 선율을 노래할 것이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노래해야 되어요 노래엔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15절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니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기뻐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이스라엘이 받아야 될 심판에 따른 형벌을 이미 제거하셨 그 다음에 원수를 쫓아 내셨어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포악과 거짓을 행하는 자들이 살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두려움이 없는 삶을 약속하셨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의 내용은 불안이어요 유한한 인간은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삶이 불 확실해요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러니까 불안해요 모호해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런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불확실하고 모호하다고 해도 우리는 나부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내 삶을 위탁하고 산다고 하면 자유가 내 속에 찾아와요 내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결실을 얻어야 해 하면 부자유가 나를 지배해
 
최선을 다해 살지만 결과가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겪어낸 삶이라고 보면 모호한 삶도 복이 될 수 있다 불확실한 삶도 복이 될 수 있어요 정답이 없는 삶 모호한 삶을 살아갈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강해요 그 삶이
 
고정희라는 시인이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신데 아주 훌륭한 시인이었습니다 시인답게 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지리산 뱀사골에서 급류에 휩쓸려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분의 시 가운데 제가 사랑하는 시가 있는데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시입니다 상한 갈대를 위하여라는 시인데 이렇게 노래합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에서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게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들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해가 문제fi
고통과 서름에 날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혼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거 있거니
 
우리의 삶이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처럼 때대로 밑둥이 잘린 것 처럼 내 삶이 외로울 대도 있어요 그리고 부평초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물 고이면 곷을 피어내는 저 식물들 처럼 외롭리로 작정하면 어디든 못 가랴 말하고 있는 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라 열정 이런 것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오늘 우리의 삶이 고통과 설음의 땅이라고 해도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고 그리고 희망이 있는 데 영원한 눈물 영원한 비탄은 없어 왜 캄캄한 밤하늘에 내가 서 있다고 하더라도 저편에서 마주 잡을 손 하나가 오고 있어
 
그게 어떤 사람일 수 있지만 영원한 마주 잡을 손은 주님이셔요 역사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그 분이 서러움의 땅 외로움의 땅이라도 거기에 지지 않고 간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든든함이어요 돈 많아야 든든하고 든든하지 않는 것이야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든든함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서 마주 잡을 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분 그 분은 때때로 나를 통해 상훈씨의 손을 잡아 주시를 원할 때가 있어요 이것이 삶의 보람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더불어 구원을 베풀고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어요
이런 기쁜의 순간들이 그들에게 올 것이다 두려움이 없이 살자는 이야기여요
16절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손을 늘어 뜨린다는 것은 기력이 완전히 빠져 늘어진 상태 파 김치처럼 다가오는 압도적인 재앙으로 말미암이 맥이 빠진 상태가 손을 늘어뜨리다 라고 하는 말이지요
 
우리도 살다보면 문제의 크기에 압도 되어서 자기의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요 정말 잊지 말아야 될 것 세상에서 내게 직면하는 문제보다 나의 존재가 더 크고 귀해 때때로 치욕적인 일이 내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이 나를 찾아 오기도 합니다
 
그 어려운 일이 살아갈 용기를 빼앗아 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받은 존재이다 나의 문제보다 문제가 나보다 큰 것으로 생각하여 문제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달아나지 말고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야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내게 주셨어요 내 속에 가능성에 눈 뜰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진자 믿음의 사람이어요
 
두려워 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 뜨리지 말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면서 낙심 될 때가 많아요 세상에 악이 너무 성행한 것처럼 보여요 선하게 사라려는 사람이 언제나 이용당하는 것 처럼 보여요 그리고 우리가 그러면 안 되지 않아요 하면 모난 돌이 정 맞는 다고 너 그래 가지고 사회생활 할 수 있겠어 좋은게 좋은 것이지 이렇게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듣는 소리가 무엇이냐 하면 가만히 있으라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안 달라져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어차피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야 우리속에 비관적 전망을 심어 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손을 늘어E 우리 속에 힘을 우리에게 존재의 용기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어요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잊지 맙시다 우리 가운데 계셔요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일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게 계셔요 그 분은 어떤 분이셔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어요 전능자라는 말은 용사라는 것이어요 하나님은 용사여요 세상의 어두움과 패배하는 분이 아니어요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는 분이시어요
 
시편 3편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빰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고 노래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정말 감격적인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게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실 것이다 어마 어마한 이야기여요 시련을 통과하면서 세상에 헛된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긍정이 이러한 언어로 등장하고 있어요
 
따지고 보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떳떳한 존재이겠습니까마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 수 없는 나의 곤고함을 주님의 은총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주님 앞에 우리가 두손들고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뻐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이 대목을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너를 구원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바라보면서 더덩실 춤을 추시는 이 상상력 시적 상상력 대단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심판이 지나갔어요 정화되고 연단이 되었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어요 새로운 삶이 시작이 됩니다
 
18절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내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의 절기를 지킬 수 없는 형편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았지 않아요 가난하든지 누군가에 눌려 있던지 먼곳에 흩어 있던지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며 정말 축제의 함성을 지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모으신다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주어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지난 날 치욕스러운 일이 그들을 사로 잡고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19절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다즐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역사의 역전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저는 자를 다 멸하실 것이다고 말합니다 저는 자를 구원한다 저는 자는 다리가 저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을 뜻합니다 그들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주어진다 남들하고 언제나 뒤 쳐지고 못나 보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각별한 은총이 함께 한다
 
그리고 쫓겨난 자를 모으고 주변화 된 사람들을 마지널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마지너리티 주변성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저는 자 그 다음에 이런 주변화 된 사람들 쫓겨난 사람들 중심에 설 가능성을 박탈을 당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각별하게 관심을 가지신다 하는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은 주변화 된 사람들 마지날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하세요 함석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인데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면 원하는 대학 들어가고 취직도 잘하고 원급 많이 받고 그렇게 살아요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좋은 대학도 못가 취직도 잘 안 되어서 어려워 그래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세상이 이러면 안 되지 않아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대게 잘 나간 사람들이 아니라 안 그런 사람들이어요
 
이것이 놀라운 점이어요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데 있어요 이 방송을 통해 공부 못한 다고 탄식하는 사람들 하나님은 함께 일하기 원하세요 그렇다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낙심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가면 되니까 세상에서 수모를 당하는 사람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한다고 말하는 데 바울 사도가 십자가 본질을 경험하고 나니까 이 세계여요
 
고전 1장 2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28절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시나니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 놀라와요 여기에 바울 사도가 이야기 했던 미련한 것 또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 없는 것 이게 스바냐서의 언어로 이야기 하면 저는 자 쫓겨난 자 수욕 받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려고 한다 이게 스바냐서라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 입니다
 
20절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은 19절에 거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 구절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시편이 있지요 시편 126편인데 1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 꾸는 것 같았도다
 
2절 그 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찿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시는 분 이것이 소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스바냐서의 시작은 참 암담했습니다 스바냐를 소개하는 말이 끝난 다음에 시작하는 2절을 어떤 말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라는 말로 시작이 되어요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화가 난 까닭은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의 기초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 그 세상에 하나님은 화가 나셨어요 그래서 그 세상을 진멸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도 정의와 공의를 저 버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도 다 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들을 언급했어요 이 나라들이 망하게 될 것이야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뿐만 아니라 가장 거룩해야 될 예수살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저주 받을 공간처럼 바뀌었어요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다 이제 쳐서 멸할 것이다 이야기 했어요
 
그 다음에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무엇과 이어져 있다고요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에게 베풀려는 더 큰 복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심판을 통과한 백성들에게 정화의 복이 다가 왔고 단련의 복이 다가왔고 더 이상 오만하지 않게 되고 정의와 공의를 구부러지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 없이 우리가 살 수 없어요 하고 진실되게 고백할 때 주님은 우리를 어디로 초대했느냐 하면 노래할 지어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하나님에 대하는 새로운 역사에 대한 찬미로 우리를 불러 주셨고 지난날에는 화를 당하기는 내가 너희 가운데 함께 있어 주겠다고 약속하여 주심으로 그 노래사 근거 없는 희망의 노래가 아니라 근거 있는 노래가 되었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기뻐하신다
 
공동 번역으로 이야기 하면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에 이런 이미지가 있을까 싶지요 하나님의 기쁨 그 타락한 백성들이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이것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목자가 목에 메고 돌아와서 너무 기쁜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는 것 같은 그런 분위를 보여 주고 있지요
 
오늘 우리 스바냐서의 결론은 이 이야기입니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새로운 시작이란 언제나 가능하다 우리의 죄가 주홍빛 보다 붉을 지라도 지난 날 우리들이 저질렀던 혹히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있언 상처가 어떠하든지 정말 그것을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우리가 꿈꾼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시작을 기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이루어갈 새로운 미래를 예비해 주신다 그런 존재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스바냐서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어요 우리의 삶이 제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 고통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약속하신 세계를 우리의 삶으로 선취하는 복된 삶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