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냐(Zephaniah) 여호와가 보호하신다, 여호와가 숨겨주신다
스바냐(Zephaniah)는 구약성경의 36번째 책이다. 선지자 스바냐가 기록했으며 요엘이나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주의 날(여호와의 날)'을 주제로 하는 예언서다. 경건치 못한 자는 심판을 받지만 혼란하고 부패한 현실 속에서도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1]
스바냐서 기록자
스바냐는 유다 왕 히스기야의 현손(고손자)으로 왕가 출신이며, 요시야가 집권하던 때 활동했던 선지자다.[2]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작성 배경 및 시기
스바냐서는 요시야왕이 통치하던 초기에 기록되었다.
당시 히스기야왕이 죽은 후에 므낫세왕은 히스기야가 무너뜨린 바알 제단을 다시 지었다.
그 아들 아몬은 범죄의 정도가 더했다.
뒤이어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 사회는 극심한 우상숭배와 사회적 부패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유다에 만연한 우상숭배를 질책하는 내용으로 보아 본서는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니네베)에 대한 심판도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니느웨 멸망(기원전 612년경) 이전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스바냐의 내용 구성
1장 |
유다에 대한 심판
|
2장 |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
3장 |
남은 자의 구원 |
스바냐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 유다에 대한 심판과 블레셋, 모압, 암몬, 앗수르 등 유다를 괴롭힌 이방 나라의
멸망을 예언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보호받을 것이며 대회로 인해 근심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시 모아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로 세상에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열왕기하 22장, 역대하 34-35장
요시야 왕
요시야는 여덟 살의 나이로 유다의 왕이 되었어요.
요시야는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왕이었어요.
그는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더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게 돕고 싶었어요.
요시야 왕이 성장했을 때, 그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수리하고 다시 아름답게 정비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성전 공사를 하고 있을 때, 대제사장 힐기야는 경전이 들어 있는 두루마리 율법책을 발견했어요.
왕의 종은 요시야 왕에게 율법책을 읽어주었어요.
율법책에 적힌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그의 백성이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슬퍼했어요.
요시야는 너무 슬퍼서 자신의 옷을 찢기까지 했어요.
요시야는 힐기야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 여쭈어보라고
했어요.
힐기야와 왕의 신하들은 훌다를 찾아갔어요.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충실한 지도자이자 여선지자였어요.
훌다는
요시야가 백성들이 순종하도록 도운 일로 주님께서 요시아를 기쁘게 여기신다고 말했어요.
주님은 요시야 왕이 평화롭게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어요.
요시야 왕은 백성들이 주님께 한 약속을 지키기를 바랐어요.
요시야 왕은 주님께서 오래전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일을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유월절을 지키라고 했어요.
예레미야(Jeremiah)
예레미야서는 구약 성경 39권 중 24번째 책으로 대선지서에 속합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BC 627년) 부터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BC 586)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불순종과 그로 인해 닥칠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경고와 훈계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대신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며 예레미야를 박해합니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가거나 애굽으로 망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대 뿐 아니라, 이웃 나라에 대한 경고도 하십니다.
다른 선지서와 비교하여,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는 개인적인 삶과 힘겨운 몸부림을 깊고 자세하게 적고 있어,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 불립니다.
08-15-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의한 자 (스바냐 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The LORD within her is righteous; he does no wrong. Morning by morning he dispenses his justice, and every new day he does not fail, yet the unrighteous know no shame.
불의한 자( the unrighteous)
불의한 자(5767) 아발(ʽavvâl) עַוָּל
관련 성경 / [명] 불의한 자(욥 18:21, 29:17, 31:3, 습 3:5), 악인(욥 27:7)
구약 성경 / 5회 사용
스바냐 3장
3:1-7. 하나님의 경계에 따르지 않는 유다 백성의 죄를 책망하다.
3:8-13. 의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기다릴 것을 권하다.
3:14-20. 그들의 구원의 기쁨.
수치(1322) 보쉐트(bôsheth) בּשֶׁת
어원 / 어미활용 בָּשְׁתִּי, 9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수치(삼상 20:30, 시 70:3, 습 3:5), (낯이) 뜨거움(대하 32:21), 부끄러움(욥 8:22), 욕(합 2:10).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아니하며 / 로(3808) <lôʼ> לֹא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심판과 미래의 구원[습 3장]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그리고 그의 구원과 이에 대한 찬양이 함께 어우러져 소개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패역과 탐욕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으며 동시에 심판의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거듭 강조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양면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다와 이방 국가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받게 될 것이지만 유다의 남은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언급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사랑으로 보호하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과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열방 모든 민족에게도
포함됩니다.
뿐만 아니라 극한 환경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회복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악인들은 영원히
멸절되지만 그의 자녀들은 그의 은혜 가운데 회복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를
통하여 다시 그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완전한 선민의 위치까지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회복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랑의 극치요 구원의 완성임과 동시에 불완전한
세상을 완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불변적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며 이 사실을 믿는 한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그의 완전한 축복의 자리까지 나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하려는 거룩한 사람들이여
이 믿음 더욱 굳세라는 찬양을 들으며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열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뿐만 아니라 열방까지도 구원시키길 원하신다.
즉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열방들이
깨닫고 구원에 동참하도록 역사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의롭고 순전하며 하나님을 신실히 찾는 자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베푸신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날엔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거움의 절정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날에는 심판과
응징이 사라지고 모든 대적들이 쫓겨나게 되며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인한 최후의 승리의 날까지
소망을 가지고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남은 역사를 계속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앗수르제국
<앗수르제국의 영토>
분열왕국시대에 강력한 나라로 등장하는 앗수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국들 중의 하나로 남방 왕국인 바벨론이 바그다드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평지를 차지한 반면에 앗수르는 대체로 시리아 사막과 남쪽으로 베벨로니아와 북쪽과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및 페르시아 산과 접경을 이루었습니다.
셈의 아들 앗수르의 후손인 이들은 족장 시대 이전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벨론 북쪽에 고대 왕국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능한 왕이었던 다윗 왕 시대에 극도로 쇠약해 있었던 앗수르는 그 후 수도 니느웨를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고 특히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물론 그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던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여 자유를 찾아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지만 앗수르 제국의 재건을 시도한 디글랏 빌레셋 3세와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의 공격으로, 결국 북 이스라엘왕국은 멸망하여 앗수르의 속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세력은 B.C.8세기에 황금 시대를 이루었으나 그 후 B.C. 612년에 신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의 함락과 동시에 멸망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왕국에 대한 성경에 나타나는 앗수르의 위협을 살펴봅시다.
B.C. 853년에 살만에셀 3세는 앗수르 군대를 이끌고 아람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왕 아합을 포함한 동맹군과 싸우러 왔습니다. 하지만 B.C.841년에 이르기까지는 이렇다 할 전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을 앗수르와 정면으로 충돌시켰습니다. 이때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속국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값진 조공을 바치는 예후의 사절단이 살만에셀의 흑색 방첩탑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앗수르는 다메섹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관계로 이스라엘이 이웃나라 다메섹의 압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B.C. 800년경 요아스가 조공을 바치던 때에 앗수르의 출정한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결과 이스라엘은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와 유다 왕 웃시야는 그 뒤로 앗수르의 운명이 바뀌었을 때 남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주도권을 쥔 군주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B.C. 745년에 이르러서는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수르 제국의 지위를 회복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조공을 바쳤으나 반앗수르 요인들로 인하여 그의 아들 대신에 베가가 왕으로 지명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베가도 앗수르가 인정하는 호세아에게 왕위를 내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왕 때인 B.C.722년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가므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 유다왕국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을 살펴봅시다.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반앗수르적인 태도는 남 유다의 왕 아하스로 하여금 앗수르의 품에 들어가 보호받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왕 히스기야의 독립정책은B.C.701년에 있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무자비한 보복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므낫세는 바벨론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다음 앗수르에 줄곧 충성하였고 그로 인하여 오랜 기간의 통치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앗수르가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유다를 강화하였으나B.C. 609년 앗수르의 마지막 왕을 돕기 위하여 진군하던 애굽 군대를 저지하려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산헤립은 앗수르의 왕 사르곤2세의 아들로서 그 부친 사르곤이 살해되므로 앗수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엘람을 정복하고 B.C. 701년 서방 여러 나라를 원정하기 시작했으며, 유다왕 히스기야는 애굽에 원군을 청하여 앗수르에 도전하였습니다.
산헤립은 유다를 공격하여 46도시를 점령하고 200,150명을 포로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루살렘 포위 작전때 전염병이 생겨 전쟁을 포기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되어진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B.C. 681년 니느웨에서 산헤립은 그의 두 아들의 손에 암살 당하였습니다.
유대왕국의 멸망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경로>
애굽과의 갈그미스전쟁을 승리로 끝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B.C. 605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은 유대의 여호야김왕의 목숨은 살려 주었지만 유대인들 중 일부를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 여호야김은 요시아왕의 둘째 아들로서 유대왕 여호아하스를 바로느고가 애굽으로 잡아가고 그 대신으로 왕으로 추대 되었는데 그의 본명은 엘리아김이었습니다.
그는 25세에 즉위하여 국민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였고, 애굽왕 느고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후 바벨론왕 느부갓네갈이 느고를 격파한 후에는 바벨론왕에게 조공 바쳤습니다.
당시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것을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서기관 바륵을 시켜 모든 예언을 기록하게 하고 백성 앞에서 읽었으나 여호야김은 이 두루마리를 뺏어 불에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로 유명한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모두 바벨론식의 이름입니다.
사드락의 유대식 본명은 하나냐이며, 메삭의 본명은 미사엘이며, 아벳느고는 아사랴였습니다.
여호야김이 죽자 그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긴은 겨우 석 달 밖에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B.C. 597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약을 어기고 자신의 나라를 배반한 유다를 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야긴은 자기 모친과 궁궐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데리고 가서 느부갓네살에게 항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전과 유다 왕궁에 있는 모든 기물들을 부수어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대규모 공사에 동원될 많은 기술자들도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는 약 115년 전 히스기야 왕 때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로 왕을 세웠습니다.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의 막내아들 시드기야는 제19대 왕인 여호야긴의 숙부였습니다. 그는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조카를 대신해 바벨론 왕에 의해 유다의 20대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시드기야의 원래 이름은 ‘맛다니야’로서 바벨론 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이름을 바벨론식인 ‘시드기야’로 고쳤습니다. 하지만 즉위 3년 뒤에 시드기야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에돔 등 유다 주변에 있는 군소 국가들의 권유를 받고, 또한 친 애굽파인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대항하는 반바벨론 음모에 가담하였습니다.
당시는 예레미야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선지자는 시드기야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벨론과의 동맹을 깨뜨리지 말 것을 역설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은 1년6개월 동안을 힘겹게 버티다가 결국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되었습니다. 이때 시드기야는 포위망을 뚫고 요단계곡쪽으로 몰래 도망치다가 여리고에서 붙잡혀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시드기야는 모진 고문을 받고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의 감옥에 갇힌 채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성은 황폐화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B.C. 586년으로서 유대왕국이 망한 때입니다. 이로써 분열왕국시대가 끝이나고 바벨론 포로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시대(B.C. 1095-975)와 분열왕국시대(B.C.933-722)로 이어지던 나라가 망하였습니다.바벨론 포로시대
<바벨론 제국 영토>
북이스라엘왕국이 앗수르제국에게 멸망하고, 이어서 남유다왕국도 바벨론제국에게 멸망하므로서 이스라엘의 분열왕국시대도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유다왕국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살던 70년을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분류합니다. 유다왕국의 사람들은 바벨론에 세 번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는데, B.C. 605년에 1차 포로, B.C. 597년에 2차 포로, 그리고 B.C. 586년에 3차 포로가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가나안지역은 바벨론제국의 총독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부름받은 선지자 다니엘과 에스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벨론제국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 612년 바벨론와 메데의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의외로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이로써 앗수르 제국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것이 바벨론 제국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축도 북부의 니느웨에서 남부의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사실 바벨론이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보다 약 1100년전에 바벨론에 유명한 왕이 등장했었습는데, ‘함무라비 법전’으로 인류 역사에서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었습니다(B.C. 18세기).
함무라비 왕을 전후한 시대의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장악했던 권력의 핵심부였다. 그러나 그 세력은 오래 가지 못했고B.C. 1600년보다 약간 후에 헷왕국(힛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앗수르 제국이 차지해 오랜 기간 메소포타미아의 맹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함무라비 왕 시대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 바벨론의 영광의 날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역사가들은 과거 함무라비 왕 시대와 1000년 뒤에 일어난 제국 시대를 구별하기 위해서, 후자를 ‘신바벨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신바벨론 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100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습니다(B.C. 626∼539년). 그러나 이 제국은 고대 어느 제국보다도 더 큰 권세와 영화를 자랑했습니다.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왕에 이어서 등장한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왕은 제국 역사의 중심인물로서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제국 역사의 절반이나 되는 40년이 넘는 기간에 메소포타미아의 절대적 제왕으로 군림했고(B.C. 605∼562년) 그의 이름 뒤에는 ‘왕’ 대신 ‘대왕’이라는 호칭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바벨론 제국은 B.C. 539년 벨사살왕 때에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게 망하였습니다.
앗수르제국, 바벨론제국 등 우리가 ‘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 제국이라는 말은 일개 국가를 훨씬 초월하는 막강한 지배력이나 권력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영어로 제국을 엠파이어(empire)로 표현하는데 그 기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라틴어로 임페리움(imperium)은 권력이나 권한을 의미합니다. 그 말에서 최고사령관을 의미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 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황제를 의미하는 엠퍼러(emperor)가 되었고, 그 황제가 지배하는 영역을 empire(제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영어의 황제라는 말이 엠퍼러(emperor)라면 독일에서는 황제를 ‘카이저’로, 러시아에서는 ‘차르’로 불렀습니다. 카이저나 차르라는 말도 로마시대의 말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로마시대에 율리어스 카이사르(시이저) 이후 카이사르는 황제를 뜻하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이 존엄자라는 존칭인 ‘아우구스투스’라는 말을 쓰면서 그 후 황제를 칭할 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한글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로 표현됨)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08-14-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치를 모르는 백성(스바냐 2: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
Gather together, gather together, O shameful nation,
수치를 모르는 백성(O shameful nation)
학고이 로 니크사프(הַגֹּוי לֹא נִכְסָף)
백성(1471) 고이(gôwy) גּוֹי
어원 / 1465와 동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한 덩어리가 된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나라(창10:5, 민14:12, 시83:4), 여러 나라(민14:15), 민족(창12:2, 신4:34, 수23:13), 고임(창14:1), 만민(창18:18), 백성(창20:4, 수3:17, 사60:12), 국민(출34:10), 족속(창48:19, 출33:13), 이방나라들(출34:24, 레26:33,45), 주민(레18:28, 합2:8), 이방인(레25:44, 느5:8), 나라 사람(신4:6), 무리(왕하6:18), 이방 사람(왕하17:8), 만국(대상16:35), 만방(사2:2), 대적(사18:2), 조상(겔2:3), 이방 신(말1:11).
구약 성경 / 556회 사용
모르는(3808) 로(lôʼ) לֹא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수치(3700) 카사프(kâçaph) כָּסַף
관련 성경 / 기다리다(욥 14:15), 찢다(시 17:12), 사모하다(창 31:30, 시 84:2).
[명] 수치(습2:1).
구약 성경 / 6회 사용
개만도 못한 인간
현대
국어 ‘개새끼’의 옛말인 ‘개삿기’는 16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개삿기’는 명사 ‘개’와 ‘삿기’가 결합한
합성어입니다.
한편 17세기에는 ‘가희삿기’의 예도 나타나는데, 이는 ‘개’의 옛말인 ‘가히’와 관형격 조사 ‘-의’, 명사
‘삿기’가 결합한 것입니다.
‘가히>개’의 변화에 따라 18세기 이후에는 ‘개삿기’로만 나타납니다.
근대국어 후기에 ㅣ모음
역행동화 현상에 의해 ‘삿기>새끼’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개삿기’도 현대 국어와 같은 ‘개새끼’로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참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온라인가나다)
한편 조선시대 임금들도 개새끼(狗子/狗雛/狗兒)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욕설에 속한다고 합니다.
곰 같은 남자 : 곰 같은 여자
스바냐 1장에서는 유다에 대한 혹독한 심판의 심각성을 알리며 멸절하리라 전멸하리라고 선언했습니다.
스바냐 2장에서는 먼저 회개를 권고한 후에 유다의 이웃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2:1-3. 회개의 권고.
2:4-7. 블레셋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블레셋은 5부족의 수도인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이라는 5도시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수 13:3, 삼상 5:1-12).
그 도시마다 방백으로 번역된 지도자가 있어서 자치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여호수아 13:1-3
-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온 지방과 그술 사람의 전경
- 곧 애굽 앞 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방 에그론 지경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방백의 땅 곧 가사 사람과 아스돗 사람과 아스글론 사람과 가드 사람과 에그론 사람과 또 남방 아위 사람의 땅과
2:8-11. 모압, 암몬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모압 :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롯의 맏아들(창 19:37).
암몬 :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롯의 둘째 아들(창 19:38).
(창 19:36, 킹흠정) 이와 같이 롯의 두 딸이 자기들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니라.
(창 19:37, 킹흠정) 맏딸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는데 바로 그는 이 날까지 모압 족속의 조상이며
(창 19:38, 킹흠정) 작은딸도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는데 바로 그는 이 날까지 암몬 자손의 조상이니라.
2:12-17. 구스(에디오피아), 앗수르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애굽 남쪽에 있는 땅인데, 수에네(=아스완, 겔 29:10)에서 남쪽으로 수단에까지 이른다.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 역본)에서는 '에티오피아'라고 옮겼다.
창 10장에 나오는 민족들의 계보에서 구스는 한편으로 애굽(6절의 미스라임)과 밀접히 관련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 홍해를 넘어서서 - 아라비아와도 관련된다(7절의 스바, 하윌라, 라아마, 스바, 드단. 대하 21:16; 사 43:3; 45:14도 참조).
이와는 달리 8절의
구스는 주전 2,000년경 메소보다미아로 이주해 온 코커서스 기마 민족 '카시트' 사람들(바벨론 말로 '카스')을 가리키는
듯하다.
애굽 남쪽의 나라 구스의 수도는 나파타였는데, 주전 2,000년대에 구스는 여러 차례 애굽의 지배를 받았다.
주전
8-7세기에는 구스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애굽 통치권을 차지하여 그 세력으로 심지어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도전하기조차 했다(왕하19:9; 사 20장; 37:8-9).
그렇지만 애굽 사람들은 주전 6세기에 다시 제 나라의 주인이 된다.
구스는 계속 메로에를 수도로 하고 제사장 계층의 통치를 받는
독립적인 나라로 존속하다가 이 제사장 계층은 주전 3세기에 무너진다. 구스 사람들은 용병으로 애굽 군대에 들어 있었지만(대하 12:3; 14:8-14; 16:8; 렘 46:9), 또한 유다 임금을 섬기기도 했다(삼하18:21-23,31-32; 렘38:7-13; 39:15-18).
로마 시대에는 여왕들이 - 곧 태후*들이 - 간다게라는 칭호를 지니고 다스렸다(행 8:27).
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스는 가장 먼 나라, 곧 세상 끝으로 통했다(에 1:1; 8:9에서는 '나일' 대신에 '구스'가 나온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고(암 9:7; 사 11:11), 또 구스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그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사 18:7; 습 3:8-9; 시 68:31; 87:4. 행 8:26-39 참조). 관련용어 : 에티오피아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분노의 날이 미치기 전에 자신들의 죄악을 뉘우치고 돌아오라고 권고하셨습니다(1-3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비웃고, 그들을 괴롭히며, 심지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했던 이방 국가들을 향한 심판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받게
될 이방 국가는 블레셋과 모암과 암몬, 그리고 구스와 앗수르입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교회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또다시 과거의 삶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교회에서 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을 것이라고 믿고 안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겉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심령)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내용을 보시고 듣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의 마음에 진실이 있는가를 살피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회개에 걸맞는 행동이 없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한마디의 기도보다 한번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변화될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참된 구원의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위하여 겸손하라고 권면합니다(3절)
겸손이란 영어로 험블(humble) 이라고 하며 히브리어로는 아나브(ʽânâv. עָנָו)라고 합니다.
'아나브'를 예수님께서는 산상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팔복의 내용은 한 마디로 아나브라고 하겠습니다.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겸손한 자들아(6035) 아나브(ʽânâv) עָנָו
어원 / 60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유한(민 12:3).
[명] 가난한 자(욥 24:4, 시 9:12, 사 61:1), 겸손한 자(시 10:17, 사 11:4, 습 2:3), 온유한 자(시 25:9, 69:32, 76:9), 빈곤한 자(잠 14:21),
가련한 자(사 32: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6031. עָנָה 스트롱번호6031
관련 성경 / 애쓰다(전3:10), 수고하다(전1:13), 곤란하다(시119:67), 고난당하다(시119:71, 사53:4,슥10:2), 겸비하다(출10:3, 스8:21), 굴복하다(사31:4), 괴롭다(사53:7), 괴로워하다(사58:10), 욕보이다(신21:14, 삿20:5), 굴복하게 하다(삿16:5, 시90:15), 쇠약하다(시102:23), 상하다(시105:18), 고생하다(애3:33), 관계하다(겔22:10,11), 해롭다(출22:23), 노래하다(출32:18), 낮추다(신8:2,16), 학대하다(창16:6), 박대하다(창31:50), 학대받다(출1:12), 굽히다(욥37:23), 괴로움 받다(시64:12), 근심하다(시132 : 1), 벌받다(왕상8:35, 대하6:26), 복종하다(창16:9). [명] 곤란(시116:10), 고난(시119:107), 온유함(삼하22:36),
구약 성경 / 80회 사용
1. 겸손한 마음, 2. 자비
어원 / 60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겸손(잠 15:33, 22:4, 습 2:3), 온유함(삼하 22:36).
구약 성경 / 7회 사용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찾으며(1245) 바카쉬(bâqash) בָּקַשׁ
관련 성경 / 구하다(민16:10, 대상4:39, 삼상13:14), 찾다(대하15:15, 왕상2:40, 렘50:20), 요구하다(느5:18, 사5:12, 잠15:14), 수색하다(시54:3,삼상26:20), 내다(전7:29), 묻다(단1:20, 창43:9, 삿6:29), 간구하다(대하20:4, 스8:21, 단9:3), 살피다(전7:25), 알아보다(전8:17),얻다(렘2:33, 잠11:27), 물어내다(창31:39),추종하다(레19:31), 벌하다(수22:23), 꾀하다(삼상19:2), 명령하다(대상21:3), 힘쓰다(잠17:11, 슥12:9), 따르다(잠18 : 1), 앙모하다(출33:7), 원하다(왕상10:24, 대하9:23), 걸식하다(시37:25). [명] 바라는 자(시69:6), 구하는 자(시105:3, 잠29:26), 찾는 자(잠28:5, 렘2:24, 겔34:6).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공의(6664) 체데크(tsedeq) צֶדֶק
어원 / 66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공의(레 19:15, 시 15:2, 사 11:4), 의(욥 36:3, 시 4:1, 사 26:10), 정의(시 45:7, 48:10), 공평(시 98:9, 잠 2:9, 사 16:5), 의로움(사 45:8), 불의(렘 22:13).
[형] 공평한(레 19:36, 욥 31:6, 겔 45:10), 공정한(신 25:15), 의로운(신 33:19, 잠 8:8).
구약 성경 / 119회 사용
- * 6663. צָדַק 스트롱번호6663
관련 성경 / 옳다(창38:26, 욥27:5, 사43:9), 의롭다(욥9:15, 사45:25, 겔16:52), 정결하다(단8:14),의롭게 하다(잠17:15). [명] 의(사43:26, 사5:23), 의로움(렘3:11), 정의(삼하15:4), 공의(시82:3), 정직(창44:16).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정의(正義)와 공의(公義)
한글역본 성경들에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란 용어가 자주 나온다.
이 두 단어가 한 문장 안에 함께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약 48회).
이 두 용어의 개념이 모호해서 한글역본들에서 서로 엇갈리게 번역된 경우가 많다.
아모스서 5:24
개역개정, 오직 정의 를 물 같이, 공의 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새번역, 너희는 다만 공의 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 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이
구절에서 ‘정의’와 ‘공의’가 개역과 새번역에서 서로 엇갈리게 번역되어 있다.
개역은 <미쉬파트>מִשְׁפָּט 를
‘정의’ 라고 번역했고 <처다카> צְדָקָה 를 ‘공의’ 라고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그 반대로 번역했다.
창세기
18:19
개역개정, 공의 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새번역,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새번역은
이 두 용어들을 풀어서 의역하였다.
개역개정역에서 ‘정의’ 란 단어는 오경에서 다섯 차례 언급되며(창 18:25; 출 23:6;
신 10:18; 32:4, 41).
새번역 오경에는 ‘공의’ 란 역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정의’ 란 역어는 다섯 차례
사용했다(창 18:25; 출23:6; 신10:18; 32:4, 41).
이 두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서 일관된 용어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번역이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온다.
독자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한글 사전을 보아도 이 두 단어의 뜻을
서로 구별하기 어렵다.
‘정의’(正義)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공의’(公義)란 ‘공평한
도리’
히브리어 원어를 찾아보자.
‘의’ 또는 ‘공의’ 라고 번역되고 있는
<처다카>는 여성명사이고 남성으로는 <체데크>이다.
이 명사는 본디 나무 막대기를 가리켰다.
길고 짧은 것을
재어볼 때 막대기를 도구로 사용하다 보니 <처다카>는 ‘자’(尺)가 되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판단을 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규범을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행동할 때 판단의 기준이 되는 척도가 곧
<처다카 / 체데크>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의인’ 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썼던
사람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다(창 6:9).
아브라함이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더니
주께서 그를 ‘의롭다’ 고 인정하셨다(창 15:6).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법적인 정의(justice)는
<처다카>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서방의 많은 성경학자들은 <처다카>를 righteousness 내지는
Rechtigkeit라고 번역한다.
사법적인 정의는 <미쉬파트>의 개념에 가깝다.
<미쉬파트>는
‘재판하다’ 란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이므로 법정의 소송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는 대개
justice, ordinance, judgment 라고 옮긴다.
우리말 역본들에는 ‘정의’, ‘율례’, ‘법규’, 등으로
번역했다.
고대사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성문법 제도가 없었다.
지역사회에서 오래 전수되어오던 관습법을 중심으로 재판하였다.
관습법을 표현하는 <미쉬파트>란 용어가 성경에 채용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하였다.
시내산에서 선포된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계약법이다.
<후크>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 <호크 우미쉬파트>란
상투어가 구성되었는데 ‘계약법’ 을 칭하는 표제가 되었다.
<후크>는 대개 ‘규례’ 라고 번역된다.
<미쉬파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관습법이다.
<미쉬파트>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준행하며 살려고 모인 말씀공동체의 관습법
<차디크>는 모든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
<미쉬파트>는 <차디크> 없이는 실천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미쉬파트>와 <처다카>는 사람 사이의 윤리 도덕을 규정하는 세상의 법률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엮어진 인간의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규범에 관련된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 <미쉬파트>는 용서와 사랑이다.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미쉬파트> 와 공의 <처타카> 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9)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정확하게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말씀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
<체데크>로 인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로 현존하고 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 <체데크> 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 <미쉬파트> 로 다스릴 것이며"(사 32:1).
공의와 정의의 차이점
의는 사적 / 개인적인 덕목이다.
정의는 공적 / 사회적인 덕목이다.
공의는 공적 / 법적인 덕목이다.
의는 어원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온순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만 가리키는 아닙니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그런 힘/능력으로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용처럼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후대에 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의 능력이라고 정리됐습니다. 맹자님은 의를 수오지심, 즉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셨지요. 부끄러운 내 잘못은 고치고, 미운 남의 잘못은 내가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의는 대체로 개인적인 수신의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仁) 사람,' '예절 바른(禮) 사람,' '슬기로운(智) 사람'과 함께 군자의 도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의(義)로운 사람은 자기와 자연과의 관계,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설정합니다. 그런 올바른 관계 안에서, 즉 자기 분수 안에서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런 의의 실천은 군자지도를 이루는 수신 덕목입니다. 수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신의 덕목이 결국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의 바탕이 됩니다. 수신과 제가는 사적인 활동이지만 치국과 평천하는 공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의를 알고 행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를 잉어권에서는 주로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의의 한국말 새김이 '옳음'인데, '롸이쳐스니스'의 어근 '롸이트(right)'도 '옳다'는 뜻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에서도 사람의 두 손 중에서 일반적으로 더 능숙한 손을 '옳은 손 --> 오른손'이라고 부르는 데, 잉어권에서도 그런 손을 '롸이트 핸드(right hand)'라고 부릅니다. '의'와 '롸이쳐스니스'의 긴밀한 상응 관계가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정의(正義)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따르면 정의는 그냥 의와 별반 다름이 없는 개념입니다.
바를 정(正)자가 수식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의'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일본식 한자어로 탄생한 정의개념은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정의는 '준법 행위'를 가리킵니다. '저스티스'가 '법'을 가리키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는 전통적인 한자어 정(正)이나 의(義)개념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 한자 의미론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개인적/사적 덕목이 아니라 법적/공적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는 그런 좁은 뜻의 '저스티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법행위'라는 사법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 개념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요즘의 '정의'개념은 '의'와 '저스티스'의 중간지점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때는 잉국말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스티스'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소 모호한 정의 개념은 한국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 성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나서 출판됐습니다. 그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역이 됐지만 주로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표현만 바꿨을 뿐 사용된 낱말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1967년에 개정된 것인데, 거기에 사용된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1911년에 출판됐던 이른바 '구역' 성경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말들은 때로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래 인용한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구절을 한번 보시지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아서 23:5)
(I will raise unto David a righteous Branch, and a King ... shall execute judgment and justice in the earth.)
시편 33:5에 나오는 '정의'는 영어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이지만,
예레미야서 23:5에 나오는 '정의'는 영어 '저스티스'의 번역어입니다.
롸이쳐스니스는 도덕적 / 윤리적 / 종교적 옳음이고, 저스티스는 법적인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롸이쳐스니스는 개인적 / 사적인 덕목인 반면에 저스티스는 사회적 / 공적인 덕목이라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한국말로는 똑같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번역상의 실수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영어 성경이 저질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킹제임스 역본)이 시편 33:5에서 '롸이쳐스니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체다카"입니다.
"옳다"는 뜻을 가진 동사 "차다크"의 명사형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 23:5에서 영어 성경이
'저스티스'라고 번역한 말도 똑같은 "체다카"입니다.
그것을 한국말 성경에서는 다시 똑같은 말을 써서 "정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정의"의 번역을 보면 킹제임스 잉어 성경보다는 개역 한글판 성경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23:5에는 "체다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번역됐고, 다른 하나는 "정의"라고 번역됐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義)"와 "정의(正義)"가 결국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체다카"를 "의"와 "정의"로 따로 번역했을까요?
그점을 미루어 짐작하려면 '체다카'가 적어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낱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5천년 전의 언어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사회가 단순하고 사람이 단순하고
사상이 단순했으니까 언어와 그 뜻도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때는 개인적인 의이든 사회적인 의이든 모두
"체다카"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과 사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언어도 더욱
분화되어서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5천년 전에는 모두 "체다카"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으로 나누어 불러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게 바로 영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같은 "체다카"를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나누어 번역했던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체다카"를 때로는 "의"로 번역하고 때로는
"정의"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정의는 개인의 수신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부모 자식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한다는 게 오륜의 하나입니다.
'친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친함이 있는 부모 자식 관계'가 바로 정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친하지 않음'이고 따라서 불의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선거
때에는 투표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투표를 하지 않고 먹고 놀러 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투표를 통해서 뽑아놓으면 그의 임기
동안에는 소신껏 일할 기회를 주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기업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품을 광고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과대 광고나 소비자들의 눈속임을 일으키는 광고를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상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이윤을 볼 수 있다면서 매점매석을 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서 사용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근로 조건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불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 예수님 성직자의 관계는 양 목자 양치기 개(sheep dog)의 관계입니다.
그게 옳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만일 '양치기 개'가 '양'의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양'이 '양치기 개'를 '목자'로 여기게 되면 이것도 사단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의
출발점입니다.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공의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는 점점 전통적인 의 개념으로 옮겨가면서도 사적 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의와는 구별되는 사회적 공적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다분히 '법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뜻이 이렇게 특화된 이후에도 공의는 일상어로 널리 유포되지 못했고, 단지
그리스도교 내에서만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말로 살아 남았습니다.
일종의 은어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으로만 주로 쓰이는 제한적인 용법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공의'는 주로 '젓지먼트'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젓지먼트'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벌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입니다.
또 재판이나
통치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는 보았기 때문인지, 미슈파트에는 "공정하다"라는 파생적인 뜻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에 왜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그 점을
알려면 또다시 히브리어가 5천년 전의 원시 언어였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언어의 뜻이
그다지 분화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도 그렇게 다양한 인접 의미를 다 가리킬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킹제임스 잉어성경이 번역됐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젓지먼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 '미슈파트'의 뜻을 거의 다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거의 예외없이 잉어 '젓지먼트'로 번역됐었지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질 못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미슈파트' 혹은 '젓지먼트'를 번역하기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을 동원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와 사상이 5천년이나 5백년 전에 비해 매우 복잡해 졌기 때문에 하나의 낱말로 그런 복합적인 현상을 모두 가리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 번역어는 공의(公義)를 비롯해서 공법(公法), 공도(公道), 공평(公平), 심판(審判) 그리고 벌(罰) 등이었습니다. 그런 번역어의 예들을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서 하나씩만 찾아서 아래 옮겨 놓았습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아모스 6:12)
(ye have turned j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hemlock.)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창세기 18:19)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
(Keep ye judgment, and do justice.)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기 8:3)
(Doth God pervert judgment? or doth the Almighty pervert justice? )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욥기 36:17)
(But thou hast fulfilled the judgment of the wicked)
이중에서 심판과 벌, 그리고 공평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법/공도/공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모두 합쳐져서 법을 집행하는 사법(司法)의 전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公法)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법은 사회적
도리(公道)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과정(審判)이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런 심판은 공평(公平)해야
합니다.
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벌(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 과정을 가리켜 공의(公義)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사법의 전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정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명시적인 법(法)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법에 비추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공적인 심판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원래적 의미의 '저스티스,' 즉,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특히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하고,
그 법대로 살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법은 율법(律法)이라고 불립니다.
그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과 탈무드까지 합친 문헌을 모두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를 해라"는 명령보다는 "--하지 마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오늘날의 형법(刑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 금지
율법을 어기면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는 그런 공의적 특성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영생이나 영벌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둡니다.
공의와 정의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공의’라고 부르는 말을 영어 성경 속에서 찾아보면 ‘righteousness’이며, 히브리어로는 ‘쩨다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공의’와 함께 따라오는 말은 ‘정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 ‘justice’이며, ‘미슈파트’라는 히브리어에 해당합니다.
공의란?
공의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하고 의로운 도의’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품성’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보면 공의는 관계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이를 대체할 단어들로는 ‘긍휼’‘공평’ 등을 들 수 있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것’‘동의하는 것’ 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보시고 불쌍하게 여기시며, 바로잡으려고 하는 의로운 하나님의 마음이며, 일반적인 ‘정의’의 개념에 ‘긍휼’이 포함된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을 ’정의‘롭게 여기셨다”보다는 “아브라함을 ’공의‘롭게 여기셨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공평‘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가난하고 약하며,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김으로서의 공평한 하나님 마음, 또는 억압하고 착취하는 폭력에 대해 참지 않으시는 ’공평‘한 마음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란?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입니다. 따라서 정의는 실제적 개념이며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에 비추어보면 ’심판‘’법도‘’재판‘’규례‘’공평한 저울‘ 등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공의‘가 관계나 그 성품(마음)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한다면, 정의는 실제적인 법과 규례 그리고 집행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한 정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규례, 즉, 올바른 삶의 원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으며, 무제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렘 7장 :5~6절)”
아울러 위 말씀과 같이 ’약자를 억압하지 않은 것‘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여, 상거래 시 ’저울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정의‘로 표현할 수 있으며, 소작농에게 급여를 제날짜에 정확히 주는 것도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잠언‘을 통해 우리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려고 공의와 정의를 적절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하며...(잠언 1:3)
이 두 말들을 적절하게 사용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고자 합니다.
-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공의‘의 선물이고,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 우리는 정의를 행함에 있어서 ’공의‘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뜻은 죄는 ’정의‘롭게 심판하되, 죄인은 긍휼함, 즉, ’공의‘로 대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끝으로 실제 생활 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동시에 실천한 재판관의 명판결 예화를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1930년 어느 상점에서 빵 한 덩이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빵을 훔친 이유를 물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지금 이혼한 딸과 살고 있는데 딸은 병들었고 두 손녀딸이 굶고 있습니다.
빵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나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방청객들은 노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법의 집행을 내려야 하는 판사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잠시 후에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10달러는 노인에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노인의 딱한 사정에 선처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실망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법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자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10달러를 제가 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50센트를 이 모자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거두어 이 노인분에게 다 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서 57달러 50센트의 돈이 모였고,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의, 공의, 정의'의 원어와 그 개념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
[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 15:26; 시 119:142; 마 6:33; 계 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 85:11; 빌 3:9; 계 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 3:25; 행 13:38; 롬 4:3).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 119:14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 16:20; 시 106:3; 창 18:25; 요7:24; 눅 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 37:28, 99:4; 사 61:8, 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 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 29:4; 렘 5:1; 합 1:4; 습 3:5), 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 7:5; 암 5:15; 미 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 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06:3).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
[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 33:15; 암 5:24; 시 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겸손(6038) 아나바(ʽănâvâh) עֲנָוָה
어원 / 60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겸손(잠 15:33, 22:4, 습 2:3), 온유함(삼하 22:36).
구약 성경 / 7회 사용
* 6035.
겸손한 자들아(6035) 아나브(ʽânâv) עָנָו
어원 / 60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유한(민 12:3).
[명] 가난한 자(욥 24:4, 시 9:12, 사 61:1), 겸손한 자(시 10:17, 사 11:4, 습 2:3), 온유한 자(시 25:9, 69:32, 76:9), 빈곤한 자(잠 14:21),
가련한 자(사 32: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6031. עָנָה
관련 성경 / 애쓰다(전3:10), 수고하다(전1:13), 곤란하다(시119:67), 고난당하다(시119:71, 사53:4,슥10:2), 겸비하다(출10:3, 스8:21), 굴복하다(사31:4), 괴롭다(사53:7), 괴로워하다(사58:10), 욕보이다(신21:14, 삿20:5), 굴복하게 하다(삿16:5, 시90:15), 쇠약하다(시102:23), 상하다(시105:18), 고생하다(애3:33), 관계하다(겔22:10,11), 해롭다(출22:23), 노래하다(출32:18), 낮추다(신8:2,16), 학대하다(창16:6), 박대하다(창31:50), 학대받다(출1:12), 굽히다(욥37:23), 괴로움 받다(시64:12), 근심하다(시132 : 1), 벌받다(왕상8:35, 대하6:26), 복종하다(창16:9). [명] 곤란(시116:10), 고난(시119:107), 온유함(삼하22:36),
구약 성경 / 80회 사용
- 본 구절에서 스바냐가 권면하는 대상은 오직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뿐이다.
왜냐하면 그 외의 사람들은 도저히 여호와의 날에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Von Orelli).
모든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들을 지키는 자들이다.
스바냐는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겸손한 자들이 단순히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이방인이나 유다 백성이나 그 혈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간절히 기대하며 겸손히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규례를 즐겨 찾는 이들이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 스바냐는 겸손한 자들조차도 심판이 행해지는 여호와의 날에 겨우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것인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아모스에게도 나타나는 것으로(암 5:15) 모든 것이 여호와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Smith).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기독교는 단순히 내세 지향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천국이 전부가 아닌 겁니다.
그렇다고 오늘 우리 삶의 형통함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목적이 불분명하면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선택과 부르심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 걸까요?
소위 기독교 신앙을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릅니다.
끝을 향해 가고 있지만, 종말은 오늘과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 순간, 그 끝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했었다가 아니라 수없는 오늘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단면이 아닌 전체의 우리를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한없이 주어질까요? 성경은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 바로 심판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스바냐 선지자가 선포하고 있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특정한 시대를 향한 말씀이 아닌, 오고 오는 모든 시대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경고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이것은 궁극적인 종말의 날로써 모든 시대에 선포되는 심판의 경고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심판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곤 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도 일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경고의 시한이 닥쳐와도 변화된 행동을 취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곤 했던 겁니다.
인간의 좋지 않은 특징 가운데 하나가 다 끝났는데도 끝까지 버텨 보려는 행동입니다. 어리석게도 “설마 이것이 끝이겠어? 그래도 조금의 시간은 있지 않을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시고 명확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습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미 하나님은 계획하셨고 계획하신 대로 심판을 실행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는 다른 변명과 핑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습니까? 긴박한 시간에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멈추시지 않겠어요.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분명히 크게 잘못하였음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뻔뻔하고 안하무인 격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끄러운지 모르고 더 큰소리칩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죄는 사람을 뻔뻔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니크샤프”는 부끄러워 하다는 뜻도 있지만 “사모하다, 갈망하다, 바라다”는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도 갈망하지도 사모하지도 않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대신에 사람의 구원을 의지하곤 하였던 거죠. 따라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은 스바냐 1장 6절에서 언급한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1:6)을 다시금 지적한 것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스바냐는 하나님을 찾도록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백성을 향해 당신을 사모하고 찾으며 또한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셨음에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습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하나님은 저들을 멸절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고자 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동사의 반복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모이는 길이 살길이라는 거예요. 그냥 저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예배로의 부르심입니다. 즉 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 범죄 한 모든 백성이 다 같이 하나님 앞으로 모여 나아와 한 가지로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매우 중요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 가운데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급합니다. 언제 우리 주님 다시 오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속히 임하리라는 그래서 언제라도 맞이할 준비 된 종말론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2절에서 임박한 심판 앞에서 우리가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습 1: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항상 준비된 자만이 주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긴박함을 잃어버리고 느슨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놓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비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서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느순하게 있다가 문제가 닥친 다음에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날을 대비하는 것은 수치를 모르는 이들이나 구원받은 자들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어요.
습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그냥 겸손한 이들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도 세상적인 겸손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낮아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낮아짐이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겸손일 때만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뜻의 우선되고 세상의 것들이 우선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겸손한 자라면 여호와를 사모하고 그분 앞에 거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수치를 모르는 자들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음에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삶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십니다. 그것은 그 삶에 대한 갈망과 연속성이 우리에게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이젠 죽으면 천당 가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을 내려놓고 매순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날을 알지 못합니다.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에게는 영적 긴장 필요합니다.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종하며 사는 이들은 여호와의 공의 가운데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겸손한 자들임에도 다시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중함을 암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견지하며 계속해야 할 합당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 신앙적 덕목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은 어느 순간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순간까지 끊임없이 견지하고 실천해야 할 성도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 그것도 후회함 없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부끄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항상 이사야의 심정인 거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한다면 물론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겠지요.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그의 구원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스바냐는 회개를 촉구하고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3b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거저 주는 구원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전제된 것입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아무리 우리 행위가 완벽해도 말입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러기에 우리는 수치를 모르는 자여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한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인지하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벧후 2: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혹시 구원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더욱 깨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서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수치를 모르는 강퍅한 백성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신 우리 자신의 존재를 지켜냅시다. 이를 위해 우리의 회복을 이루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날마다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수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악행을 행하고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
목사라는 틀 안에서 나는 수치를 모르고
살아간다.
목사이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지 생각하며 제 맘대로 살아간다.
목사이지만 기도하지 않고 목사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더욱 쫑긋 세우고 듣지 않는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부르는 저 스바냐의 외침이 나를 향해 부르는 외침으로 들린다.
마치 확성기로 내 귀에 대고 부르는 듯하다. 제발 정신 차려라! 넋놓고 있지 말아라! 정신이 바짝 든다. 정신줄을 놓고 있던
것을 이제 다시 주어담는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 아니라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로 세워지길 소망한다.
목사로써 깨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한다. 겸손함으로... 어쩌면 손가락질 당할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준비해 본다.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렇기에 나의 수치도 모르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오늘도 저를 깨워주소서! 불의와 불공정 앞에 하나님이라는 틀로
뒤짚어쓰고 수치를 외면하고 모른척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하 나님께서 창조하신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해 버리시겠다고 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세상을 멸절하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멸절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절의 이유가 나 자신에게서도 발견된다면 ‘나 역시 멸망을 받아야 하는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선지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멸망을 받는 것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했기 때문이고,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1:4-6).
유다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고 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사 제도는 성실히 실천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가 제사 드리는 날이 되면 성전에 모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은 모이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절을 보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유다가 하나님 앞에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부지런히 모였으되 하나님은 그 모임을 부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다가 자기의 수치를 모르는 인간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인간으로써 행하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 규례는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은혜가 담겨 있고, 그것은 흠없는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 행하는 제사는 단지 종교 의식일 뿐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종교 의식 자체를 믿음으로 간주합니다. 유다가 제사라는 종교 의식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결국 종교 의식을 실천하기 위해 예배당에 모이고,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하는 현대 교회나 멸망을 받은 유다가 같은 수준에 있다면 현대 교회 역시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치를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수치를 아는 자로 하나님께 나올 때 수치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것이고,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의 모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임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자신의 속이 아니라 겉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불의하고 더럽고 악하다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불의하고 더러운 존재로 표현을 하면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속을 위장할 수가 없습니다. 표면적인 것은 얼마든지 감추거나 위장할 수 있지만 속마음은 위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온갖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의 속입니다. 만약 자신의 속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수치를 아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위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할 자격조차 없음을 압니다. 오직 수치를 덮어주시는 은혜만을 구할 뿐입니다.
2절을 보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은 수치를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수치를 아는 것은 생명과 연관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절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면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겸손을 구하라는 말은 겸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이 실상은 겸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겸손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교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은 자기 수치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치를 모른다면 아무리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위장하고 겸손한 척해도 교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겸손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은 의롭지 못하고 교만한 존재일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겸손은 자신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현대 교인들이 여호와를 찾으면서 공의와 겸손을 구할까요?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육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는 것, 세상에서 높임 받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고 구할 뿐이지 공의와 겸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켜주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은 자기 수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있습니다. 자기 수치를 안다면 수치를 덮을 수 있는 것이 돈도 권력도 아님을 알 것입니다. 큰 집에 살고 큰 차를 탄다고 해서 수치가 가려지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수치가 가려지고, 자신의 교만을 알기 때문에 겸손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를 분노의 날에 숨기신다고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드러내는 것은 수치라는 것을 아십니까? 말씀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잊고 있었던 우리의 수치가 발각되고 드러남을 실감하십니까?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으로도 수치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치가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되어 굳게 감추어질 뿐입니다. 돈과 권력 또한 수치스러운 인간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가 보지 못하던 수치를 보게 하면서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로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말씀은 교만한 자로 살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멸망에 해당되는 우리의 실제를 보게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은혜입니다.
롬 1:29-32절을 읽어 보십시오. 왜 자신을 수치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 아실 것입니다. 자기 수치를 앎으로써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덮어주시고 가려주신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는 신자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백성입니다.하
08-12-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큰 날(스바냐 1:14)
스바냐(Zephaniah) - 여호와께서 간직하셨다, 여호와께서 숨기셨다, 여호와께서 보호하셨다
스바냐의 시대 / 16대. 요시야(31년)
15대. 아몬(2년) - 16대. 요시야(31년) - 17대. 여호아하스(3개월) - 18대. 여호야 김(11년). - 19대. 여호야 긴(3개월) - 20대. 시드기야(11년)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The great day of the LORD is near-- near and coming
quickly. Listen! The cry on the day of the LORD will be bitter, the
shouting of the warrior there.
여호와의 큰 날(The great day of the LORD)
욤 아도나이 학가돌(ום־יְהוָה הַגָּדֹול)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푹 빠졌습니다.
요시야가 개혁을 이끌었지만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사 형식을 정비하고 우상을 몰아냈지만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의 죄악을 고발합니다(4-5).
여호와의 날 즉 심판 날에 대해서 예언합니다(7-13).
불의한 권력자들, 우상 숭배자들, 예루살렘에서 포악을 행한 자들, 돈을 의지한 자들은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가깝고 빠르게 올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에 멸절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따르는 자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멸절하신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 멸절하신다는 말씀이 귀에 더 쟁쟁하게 들려온다.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인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목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이방신을 섬기는 패역한 선민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데에 전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악에 빠진 경우 거의 대부분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 즉 가식적 ·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섬기거나 종교 혼합주의적 · 종교 다원주의적 유혹에 미혹되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쫓아다니는 삶들이 너무 너무 많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보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예배의 형식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축제와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각본에 짜여진 대로 연출을 한다.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배의 형식은 뛰어나다. 현대 문화의 발전을 교회 예배 의식에 도입하여 엄청나게 화려하다.
그러나 예배를 준비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것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종교 혼합주의, 다원주의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연출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기 위한 예배가 대부분임을 볼 때 안타까울 뿐이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스바냐 선지자는 각종 우상 숭배와 죄악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성에 대해 보여 주고 있는데 심판이 온 지면에서부터 시작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전반부(1-6절)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의 양상을 언급하고 있는 중반부(7-13절), 그리고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기록하고
있는 후반부(14-18절)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본장에서는 심판이 유다에 집중되어 있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있다.
주일이면 도처에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행렬이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모여서 예배하며 설교를 듣고 헌금을 바치고 때로는 직분에 따라 봉사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원을 받은 외적인 모양은 될 수 있지만 내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증거하려고 율법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여호와의 날 즉 여호와의 두렵고 큰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신앙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과 생활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이 길만이 여호와의 날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날로 인류 역사의 마지막으로 벌어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능으로 악을 징계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여호와의 날은 종말 혹은 최후의 심판이라도 불립니다.
심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날은 가장 두려운 날이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옳았음을 입증해 줄 것이기에, 간절히 기다리는 날입니다.
스바냐는 요시아 왕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 포로 기간 중에도 살아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임박한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해 백성에게 경고하고, 다가오는 구원을 예언하였습니다. 1장은 여호와께서 온 땅과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멸절시키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2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3장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을 알리고 다가오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스바냐는 유다 민족이 이방 민족들과 함께 파멸을 당할 것이지만 때가 오면 그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린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 우주적인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여호와의 날은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심판장으로 재림하실 날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날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큰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어떤 자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I.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1-6)
완전히 진멸하리라(아소프 아세프) - אָסֹף אָסֵף
완전히(622) 아사프(’âçaph) אָסַף
관련 성경 / 저축하다(창 6:21), 씻다(창30:23), 모으다 (출3:16, 렘40:12, 사33:4), 거두다(출23:10, 욥34:14), 얻다(신11:14), 오다(신22:2), 받아 들이다(수20:4), 줍다(룻2:7, 사10:14), 고쳐주다(왕하5:6), 고치다(왕하5:11), 모아들이다(렘21:4), 빼앗다(렘16:5), 거두어들이다 (신16:13), 주다(렘8:13), 소집하다(습3:8), 꾸리다(렘10:17), 멸하다(삼상15:6), 불러모으다(삼상14:52), 영접하다(시27:10, 삿19:15), 호위하다(사58:8, 52:12), 돌아가다(왕하22: 20, 삿2:10, 신32:50), 멸망하다(겔34:29), 모이다(창29:3, 레26:25, 렘4:5), 들어가다(왕하22:20, 대하34:28, 렘47:6), 모여오다(대상 11:13), 빼앗기다(렘48:33), 들어오다(민12: 14,15), 돌아오다(출9:19, 민11:30), 물러가다 (시104:22), 회집하다(사43:9), 없어지다(호 4:3), 모이게 하다(사49:5), 함께 하다(신33: 5), 모여지다(슥14:14), 모이게 되다(사24: 22). [부] 반드시(미2:12). [명] 후진(민10:25), 후군(수6:9, 13).
구약 성경 / 200회 사용
진멸하리라(5486) 수프(Ws çûwph) סוּף
관련 성경 / 무너지다(암 3:15), 폐하다(에 9:28), 망하다(사 66:17), 진멸하다(렘 8:13, 습 1:2, 3), 전멸하다(시 73:19).
구약 성경 / 7회 사용
멸절하리라(3772) 카라트(kârath) כָּרַת
관련 성경 / 세우다(창15:18, 출24:8, 대하23:3), 베다(민13:24, 삼상24:5), 만들다(신20:20), 맺다(수9:16, 시89:3), 파괴하다(삿6:30), 찍다(왕하18:4, 렘22:7), 없이하다(왕상11:16), 맹약하다(삼상22:8), 벌목하다(대하2:8), 베이다(사44:14), 언약하다(삼상11 : 1), 조약을 맺다(수9:6), 끊어버리다(렘50:16, 왕상14:10), 깨뜨리다(출34:13), 빼다(삼상17:51), 깎다(삼하10:4), 베어내다(왕상5:6), 자르다(대상19:4), 계약하다(욥41:4), 끊다(렘11:19), 참여하다(신29:12), 끊어지다(삼상5:4, 삼하3:29, 대하6:16, 출22:15, 민9:13, 레17:14), 부서지다(사22:25), 진멸되다(나1:15), 멸하다(창9:11,레26:22), 멸망하다(창41:36), 씹히다(민11:33), 멸절되다(옵1:9), 진멸하다(미5:9, 삿4:24), 멸절하다(슥13:8, 왕하9:8), 찍히다(삿6:28), 멸절시키다(삼상28:9), 떨어지다(나3:15). [명] 언약(학2:5, 신7:2), 조약(왕상20:34), 파괴(호8:4).구약 성경 / 285회 사용
1절을 보십시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스바냐는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었고, 어려서부터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20살에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26살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읽다가 유다가 쇠락한 것이 언약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임을 깨닫고 온 백성들과 함께 애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루의 국내 혼란을 기회로 국토를 넓혀나갔습니다(왕하 22:1-23:20). 그러나 유다에는 선왕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사 대 조상인 히스기아까지 언급함으로서 자신의 예언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세상을 진멸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판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지면에서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십니다.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거치게 하는 것을 진멸하십니다. ‘거치게 하는 것들’은 우상을 가리킵니다. 우상들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하십니다. 땅 위에서 사람을 멸절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시되 그들에게 맡기신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들까지 함께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악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십니다. 저자는 '진멸하고' ‘진멸할 것이라’ ‘멸절하리라’고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엄격하며 철저함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상숭배자들을 진멸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하나님은 심판의 손길을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펴십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합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농경의 신이요,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농경생활로 접어들면서 농사의 신 바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농사 월력이 모두 바알 숭배와 관련되었습니다. 점차로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바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요시아 왕은 철저하게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거부하고, 은밀히 바울을 숭배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마림이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킵니다(왕하 23:5; 호 10: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절하시고 바알 제사장들까지도 모조리 파멸시키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천채숭배 의식은 가나안과 바벨론에서 흔히 행해진 우상숭배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왕정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습니다(신 4:19; 왕하 21:3,5; 렘 8:2; 19:13; 44:8-10).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죄악입니다. 이는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끌어올리는 신성모독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스바냐를 통해서 이들도 예외 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또 어떤 자들을 멸절하십니까? 5b,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말감은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합니다. 밀곰 숭배는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어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왕상 11:5-8,33; 왕하 23:13).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돌아서서 또 밀곰을 섬겼습니다. 이런 종교적 혼합주의는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때에 흔히 자행되었습니다(왕하 16:3).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자들을 멸절하십니다. 이들은 배교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적인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타락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가축과 코로 숨 쉬는 모든 생물을 진멸하신 것처럼 멸절시키십니다. 노아시대에는 물고기들은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임할 심판 때에는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멸절시키십니다. 이는 우주의 종말에 있을 철저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진멸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들만이 살아남습니다. 또한 그날에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이 거민이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펼쳐집니다. 그날에는 회개를 거부하고 타락한 본성을 따라 행하던 은밀한 일들까지도 다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맹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밀곰을 숭배하는 거짓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주여, 주여”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하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롬 12:3).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자들은 다 하나님을 기만하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준엄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II. 주 여호와 앞에 잠잠할지어다(7-13)
7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스바냐는 온 백성들에게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불의를 심판의 날입니다. 그 심판의 날이 임박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희생을 준비하셨고,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희생은 유다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가 청할 자들은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작정한 바벨론 군대입니다. 그들은 심판의 도구로 유다 거민들을 멸망시킬 자들입니다(사 13:1). 하나님은 이들을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벌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먼저 방백들과 왕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방백들은 유다 거민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닌다. ‘왕자들’은 요시아의 친족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 개혁을 반대하고 대적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벌하시고,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경건한 옷차림을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항상 말씀을 기억하며 살도록 옷 술을 달도록 명하셨습니다(민 15:38; 신 22;11,12). 의복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방백들과 왕자들이 이방인들이 입는 의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이는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불신자들처럼 살아하는 자들을 벌하십니다.
또 어떤 자들을 벌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그날에,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의 문턱을 뛰어 넘어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문턱을 뛰어 넘는 자들은 왕자들과 방백들의 하수인들입니다. 이들은 남의 집의 문턱을 침입하여 포악과 거짓으로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주인의 집을 채운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포악한 자들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그들을 벌하실 때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어문은 다메섹 문 가까이에 있는 북쪽 성문을 가리킵니다(대하 33:14; 느 3:3; 12:39). 이는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입니다. 제 이 구역은 어문 가까이에 있는 성읍 안쪽에 있는 문인데 그 구역에서도 울음소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산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호와의 날’에 이방 군대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읍이 파멸되고, 그곳 거민들은 곡하게 될 것입니다.
스바냐는 호소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예루살렘 남쪽 저지대에 사는 막데스 주민들을 향하여 슬피 울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막데스는 상업으로 이름이 난 지역입니다. 그런데 상거래의 중심이 되었던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했습니다. 더 이상 은을 거래하는 자들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찾아내어 심판하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여호와를 멸시하는 말을 하는 자들을 등불로 두루 찾아내어 벌하십니다. 찌꺼기같이 가라앉는다는 말은 쾌락에 취해있고 악을 조장하며 숨어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서 계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그들은 여호와는 살아계시지 않으며, 생화화복을 주장하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지도 않고, 거역하는 자에게 화도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포도주와 독주로 만취되고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고 생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사 56:1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숨어있는 곳을 아시고 등불을 들고 두루 찾아내어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 30:15-18)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는 분이십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내리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큰 교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등불을 들고 찾으시는데 누가 그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에게 어떤 벌이 내려집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재물이 노략질당하고, 그들의 집이 황무하게 됩니다. 그들은 집을 건축하지만 그 집에 살지 못합니다. 포도원을 가꿀 것이지만 포도주를 마시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완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신들이 받았던 축복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들이 ‘여호와의 날에’는 재물을 약탈당하고, 집이 불타고, 포도원까지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드러내십니다. 그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III.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14-18)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이 너무나 심각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심판이 가까이 왔습니다. 너무나 가까이 왔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미 여호와의 날의 소리가 들립니다. 심판의 소리가 들입니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울고 있습니다. 이만큼 여호와의 심판은 우리 가까이 와 있고, 긴박하게 일어날 것을 알고 항상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도 심판의 긴박성을 경고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녹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히브리서도 말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다”(히 9:27). 주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인데 그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날과 시는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습니다. 이는 심판의 긴박성을 인식하고 하루하루 오늘이 심판의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긴장하고 언제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된 상태로 살아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그날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그날은 하나님에게는 분노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 대한 진노가 너무 커서 멈출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환난과 고통의 날입니다. 온 땅은 황폐하고 패망하는 날입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하심이 진노로 나타나십니다(출 19:16; 20:21;신 4:11). 여호와의 날은 구원을 받을 사람에게는 은혜의 날이요, 형벌을 받을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또 16절을 보십시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그날에 그들은 나팔을 불어 경고할 것입니다.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이요, 높은 망대를 치는 날입니다. 견고한 성읍이 무너집니다. 높은 망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날에 전쟁의 나탈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전쟁처럼 처절하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리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행하게 하십니다. 맹인들은 고난의 날에 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큰 날에 아무도 그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피가 쏟아져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겨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엄정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합ㄴ다. 그들은 은과 금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하수인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포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도 그들을 구원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날에는 이 온 땅이 여호와의 분노의 불길에 삼켜질 것입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집니다.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유다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다가 모든 세계 만민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40여년 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땅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의 불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으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때에 일어날 모습을 다음과 같에 기록했습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여호와의 큰 날입니다. 재림 나팔이 울려 퍼질 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던 사람들 모두 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습니다. 모든 징조들이 급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고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욱 더 깨어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상숭배는 패망의 길입니다. 여호와를 찾지도 안고 구하지도 않고, 거짓과 위선으로 살면 반드시 살면 패망합니다. 우리가 이방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언약의 백성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은과 금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온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서론]
밤이 깊고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춥니다. 제 2의 도약과 도전의 시간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악인이 심판을 받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1] 멸망과 회복의 날
멸망과 회복의 분기점이 무엇일까? 언제 멸망하고 언제 회복되는가?
1) 인류의 멸망의 날
인류의 멸망이 창세기3:1-6에서 시작됩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류의 타락이요 나의 타락입니다. 하나님 떠나 죄와 사단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입니다. 영적 죽음, 영적 무지에 빠짐으로 우상, 점술, 미신, 종교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지고 사람의 지배를 받으면서 온갖 정신병이 생겼습니다. 육 신과 삶이 병들고 가난, 우환, 고통, 상처, 중독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결국 영원한 멸망 지옥에 빠지고 후손들이 그 길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2) 회복의 날
창세기3장 아담의 후손이 멸망에 빠지자 바로 창세기3:15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단을 멸 한 왕으로, 죄와 저주에서 해방하신 제사장으로, 하나님 만나는 길 되시는 선지자로 회복의 길을 여셨습 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 사단이 주 인 되는 날이 멸망의 날의 시작이요 그리스도가 주인 되는 날이 회복의 날입니다.
[2] 여호와의 큰 날
1) 우주적 심판 - 전 세계가 끝이 나는 우주적 심판이 있습니다. 복음이 다 증거 되면 끝이 옵니다. 말세가 되면 점점 악으로 빠지는 사람들과 반대로 믿음으로 가는 자들로 갈라지게 됩니다.
2) 심판의 원인과 대상 - 남 유다의 심판의 가장 큰 원인은 우상숭배와 혼합종교 입니다. 하나님을 배교하 고 세상에 빠진 자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세속과 향락에 쪄들어 자기 만족에 도 취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 모든 것을 잃고 포로가 됩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의 날 - “가깝고 빠르도다” 의 뜻은 즉시 행할 만큼 임박하다는 뜻입니다. 악인들의 어떤 기회도 없이 매우 신속하게 심판이 행해질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타올라서 온갖 죄악과 불의를 다 태울 것이며 혼란과 공포로 우왕좌왕 길을 못 찾고 무너질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범죄 입니다.
[결론]
1. 세상에는 두 종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 되어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과 사단 숭배에 빠져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2. 가문, 민족, 세계가 사는 길은 우상, 미신, 종교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 며 저들을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라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첫째는 개인 종말 멸망과 회복의 날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이게 근본 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 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그 사람은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입니다. 함께 하면서 하나님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고 축복을 인간에게 다 주었어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만물의 영장이라. 이 어마어마한 축복과 권세를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인간에게 통치권을 줬습니다. 이런 축복된 인간이 이 땅에서 고통이 많을까?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 떠나서 그렇습니다. 근본이 무너져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복하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하나님 떠난 것을 죄라고 말해요. 죄란 말이 뭐냐면 근본이 무너진 걸 말합니다. 이게 원죄 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비참한 사건이 벌어졌는가? 원인자가 있어요. 그게 사단입니다. 사단이라는 악한 영 때문에 인간은 속아서 하나님 떠나게 되고 죄에 빠집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게 운명 그럽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운명에 묶여 있어요. 태어나면서 인간들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뿌리가 죄에요. 인간은 씨가 죄의 씨입니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죄로 잉태합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살아가고, 죄 중에 죽습니다.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근본이에요. 인간은 죄와 사단에 묶여서 태어났기 때문에 축복 아닙니다. 이미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이미 뿌리가 무너져버린, 근본이 무너진 인간 입니다. 사단 숭배에 빠져 버립니다. 우상 숭배라 말합니다. 왜 우상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합니까? 우상은 사단 숭배 입니다. 그리고 온갖 이 땅의 미신, 풍습, 제사, 고사, 전통 이게 다 한마디로 말하면 귀신을 섬기는 겁니다. 문제의 뿌리 입니다. 이걸 영적 문제라 그래요. 원래 하나님의 영이 함께했는데 사단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영이 병들고 잘못 되니까, 근본이 무너지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행복 안 나옵니다. 그래서 나오는 게 정신병이 오기 시작합니다. 뭔가 혼란스럽단 말이에요. 근본이 깨지니까 내가 나를 모르겠어. 정체성도 모르겠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늘 죄 속에서 죄책감만 있고. 죄의식 있지. 악령이 역사하니까 시달리지. 악몽, 가위 눌리지, 시달립니다. 우울증으로, 공황증으로, 조울증으로. 근본이 무너지니까 정신이 분열된다는 말이에요. 정신병 시대 옵니다. 이상한 짓도 합니다. 살인도 하고 자살도 하고 별짓 다 하잖아요 악령이 역사하니까. 육신도 병들어요. 대부분의 질병들이 몸이 아픈 게 아니에요. 영과 마음이 병드니까 몸으로 튀어나온 겁니다. 많은 병들의 뿌리는 여기서 와요. 육이 병들고 삶이 병들어요. 삶의 터전이 병들어 버리고. 가정이 병들어 버려요. 이 배경 때문에 부부 간에 얼마나 갈등이 많겠어요. 겉으로 포장하지만 포장이 됩니까? 화장 싹 하고 입술 칠하면 감쪽 같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안 되잖아요.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고 애를 쓰지만 남는 게 뭡니까? 조금 낫겠지, 낫겠지 하지만 근본이 그대로 있으니까 오는 게 고통이란 말이에요. 인간이 뭐냐고 묻는다면 고통입니다. 저는 이걸 찾았어요. ‘아 고통이구나’ 행복을 꿈 꾼 만큼 남는 거 하나 있습니다 상처. 인간은 고통, 상처. 포장하죠. 고통과 상처가 쌓여 가니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상처가 쌓여서 오는 게 분노 입니다. 그래서 못 참는 거예요, 못 견디는 거예요. 원망 하고 누구 때문에. 아닙니다. 이 뿌리에서 오는 거예요. 근본을 못 찾게 되면 누구 때문에 하고 평생 원망하다가 인생을 망쳐 버려요. 온 땅은 병든 세상이에요. 정신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육신도 병들고, 삶도 병들고 다 병들었어요. 사람들은 끙끙 앓아요. 어떻게 해결합니까. 몸부림치는 거예요. 너무 괴로우니까 하는 게 뭡니까? 도피처가 없잖아요. 술을 많이 찾습니다. 조금 세련된 사람은 마약을 먹어요. 도박에 빠지고, 학생들은 게임에 빠지고 어딘가에 빠져 가는 거예요. 점점점 사람들은 중독됩니다. 중독 시대 와요. 아무도 나를 치유할 수 없어. 가족도 도움이 안 돼. 어딜 가도 위로가 안 돼. 결국 학생들은 게임, 다 기계 중독이라. 왜? 위로가 안 돼. 그나마 개, 강아지는 속을 안 썩이고 상처 안 주네? 사람은 상처 줘도 개는 상처 안 주잖아요. 사람들이 외로우니까 강아지, 고양이 이런 걸 많이 키웁니다. 식물, 분재 많이 키우더라고요. 그렇게 사람들이 마음을 다른 쪽으로 쏟아 갑니다. 중독 시대가 와요. 그러면서 너무너무 괴로우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빠집니다. 죽으면 끝이라면 일찍 죽으면 괜찮죠 오래 살면 힘든데.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내세가 있단 말이에요. 지옥 간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건 못 끊어. 우리 후대가 또 가야 돼. 끝없이 계속 가는 문제에요. 악령 사단의 지배를 받는 그 날부터, 사단이 주인 된 그 날부터 인간은 멸망 길로 들어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어떻게 행복합니까? 행복한 척 하고 있죠. 다 속임수이죠. 사람들이 불쌍한 거예요. 회복의 날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와서 죄를 멸하고, 사단을 깬 분 이걸 구세주라고 불러요. 그 단어가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 만나는 길 선지자, 죄를 멸한 제사장, 사단 이긴 왕 이 말이에요. 그 분의 이름이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리스도는 뭐냐면 직책이에요. 예수는 이름 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잖아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 죄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사단을 이긴 왕 입니다, 빠져 나오는 길 입니다” 예수만이 길,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별짓 다 해도 답은 그리스도에요. 이거 모르면 헛일이라니까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주인을 교체해야 돼요. 우리가 사기 당했어요. 사단에게, 이 원수 마귀에게 속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원수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셔야 돼요. 길은 이거밖에 없어요. 영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돼요. 이걸 구원 그래요.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자 입니다. 영접할 때 해방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권세가 생깁니다. 악귀가 떠나간단 말이에요. 귀신이 굴복하기 시작합니다. 왜? 사단, 마귀, 귀신을 이긴 그리스도, 메시야가 왔기 때문에 무너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성령으로 함께합니다. 아예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해요. 영원히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갑니다. 회복의 날 이 말입니다. 언제 그리스도가 주인 된 날. 그 날이 회복의 날 입니다. 악령이 주인 되는 그 날은 멸망의 날 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 있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함이 있어요. 평안이 있습니다. 왜? 죄 사함 받았잖아요, 운명에서 빠져 나왔잖아요, 악령 떠나가잖아요, 천국 가잖아요. 근본 평안이 있어요. 이 배경을 가지고 가문을 세워야 돼요. 산업도, 나라도 이 배경위에 세워야 돼요. 나라가 우상을 많이 섬기게 되면 재앙 옵니다. 가문이 우상 많이 섬기고 제사 지낸다? 재앙 와요. 왜? 악령을 끌어 들이니까. 전도가 뭐냐면 이 땅에 가장 시급한 겁니다. 내가 돈이 필요한데요? 좀 불편한 거지. 가장 시급한 게 전도, 선교. 이것은 절대 명령이요 교회의 존재 이유 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 여호와의 큰 날.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 합니다. 왜 하나님이 심판할까? 1. 우주적 심판 2. 심판의 원인과 대상 3. 하나님의 심판 그리스도를
주인 삼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려야 돼요. 우상과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에 먼저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깨달아야 돼요. 복음부터 이해해야 돼요. 예수님이 그리스도 이거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그리스도” 사단을 이긴 왕, 귀신을 꺾은 왕, 저주를 막은 제사장,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선지자. 그리스도는 모든 저주를 없애 버리고 원래 인간 회복 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 회복이 돼요. 그래서 이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나야 돼요. 후대들이 미래 입니다. 다민족 입니다. 다민족은 선교 입니다. 탈북자 입니다. 북한 문 열리게 되면 북한이 선교지가 돼요. 같은 나라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문화가 달라서 이걸 염두에 두고 가야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자신, 우리 교회는 발판이 돼야 돼요. 우리는 배경 돼야 돼요. 무슨 배경? 복음적 배경 돼야 돼요. 나라가 안정 돼야지 국민과 산업 하는 분들이 똑같이 안정되고 또 우리 교회 성전건축도 해야 되는데 같이 맞물려 있습니다. 개인, 가정, 가문에 새롭게 뒤바뀌는, 어둠이 다 물러가는 복된 시작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스바냐 /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1. 인적 사항
(1)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 '보호하신 자'라는 뜻.
(2) 남 유다 제13대 왕 히스기야의 4대손, 아마랴의 증손, 그다랴의 손자 구시의 아들(습 1:1).
③ 남유다 제16대 왕 요시야 때 활동한 왕족 출신의 선지자.
④ 소선지서 스바냐서의 저자.
2. 시대적 배경
스바냐는 B.C. 630-625년경, 남유다 제16대 왕 요시야의
통치(B.C.640-609년) 때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당시 근동의 패권국인 앗수르는 신바벨론
제국(B.C.625-539년)의 등장과 함께 그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져 가던 때였다. 이 때에 요시야는 대외적으로는 선왕들이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과는 달리 강력한 반 앗수르 정책을 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데 크게 주력하였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는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그의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3. 주요 생애
사 역 이 전 |
||
출생 |
― |
― |
예루살렘 거주 |
― |
습 1:1,8-11 |
사 역 이 후 |
||
남유다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날 심판 경고와 회개 촉구 |
B.C.630-625년경 |
습 1;2-2:3 |
열방에 대한 심판 선포 |
〃 |
습 2:4-15 |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회복 선포 |
〃 |
습 3:9-20 |
스바냐서 기록 |
〃 |
습 1:1 |
죽음 |
― |
― |
4. 성 품
(1)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왕과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하여 일반 백성들의 사회적 부패와 종교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것으로 보아 불의에 대해 단호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자(습 1:4-13).
(2) 여호와의 날에 대한 그의 메시지가 매우 힘있고 선명한 것을 보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강한 확신을 소유한 매우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습 1:14-18).
(3)
여호와의 날의 심판 예언이 흡사 죽은 자를 위해 부르는 진혼곡이나 장엄한 장송곡과도 같은 만가체(挽歌體) 운율을 갖추고 있으며,
이외에도 매우 아름다운 문장들을 많이 사용한 것 등을 볼 때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자(습 1:12, 17; 2:4;
3:11-13).
5. 구속사적 지위
(1) '여호와의 날'의 심판 예언을 통해 의인과 악인이 종말에 맞이할 운명의 대조적인 모습을 매우 선명하게 예언한 선지자.
(2) 백성들의 죄악과 도덕적 결함과 신랄한 비판으로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습 1:2-3; 대하 34:3-8).
6. 평가 및 교훈
(1) 스바냐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로서 '여호와의 날'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이 날은 궁극적으로 세상 끝날에 세계 만민에게 시행될 최후 심판의 날을 예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최후 심판의 날에 영원한 멸망에 이를 악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영원한 구원과 축복을 받을 의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볼 일이다.
(2) 남유다 전 지역에 걸쳐 사회·경제·종교 전반적인 부패함이 퍼져 있던 때 왕족 출신의 스바냐는 안일하게 그 사태를 방관한 것이 아니라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먼저 왕국 주변의 사람들이 부패와 종교 지도자들의 범죄 함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였는데, 범국민적인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는 부정 부패와 타락과 향락의 일변도로 치닫는 오늘의 이 사회 속에서 성도된 우리가 행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습 2:1-3).
(3)
스바냐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 예언을 준엄하게 선포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한 백성을 결코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징계 중에도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도 확신 중에 선포한다. 이는 실로 현재 시험으로는 고난받는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힘써 전해야 할 것이다.
7. 핵심 성구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스바냐는 어떤 책인가?
하나님의 그루터기를 희망한 스바냐는 유다의 가장 유명한 왕 중의 한 사람인 히스기야의 증손자입니다. 그의 혈관에는 왕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의 입술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전하는 자였습니다.• 스바냐서의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숨기심”,
또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이란 뜻입니다.
이는 스바냐서의 메시지의 주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에 겸손한 자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이라고 하였는데(1:1), 그렇다면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야의 조카뻘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카로서 삼촌(요시야)에게 예언 활동을 했으며,
우상 숭배에 대하여 심하게 책망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활동했던 기간은 요시야가 종교 개혁(주전 627년)을 하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히스기야 이후에 약 60년간이나 계속되었던 영적인 암흑기를 깨트리고 요사야 왕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 스바냐서의 배경
스바냐는 경건한 왕 요시야가 통치하는 동안에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이 때는 신앙의 큰 “부흥“이 일던 시대였습니다(왕하 22-23장).
요시야는 8세에 보좌에 올랐으며 16세에 자신을 여호와께 헌신하였슶다.
20세 때에는 그 땅에 큰 개혁을 시작하였으며 우상을 헐고 거짓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심판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성전을 재건하여 그 민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크게 지키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외관상으로 나타난 일들로 보아서는 신앙적인 관심과 정화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표면보다 더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았으며, 그들의 신앙적인 열성이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혁은 얄팍한 것이었으므로,
백성은 가정에서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에 있는 우상들은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불순종하였으며 예루살렘성은 온갖 사악함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스바냐서의 개요
1)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1:2-3:8)
-모든 생물에 대한 심판(1:2-3)
-유다의 심판과 회개에의 권고(1:4-2:3)
-이방 열국들에 대한 심판(2:4-15)
-예루살렘의 범죄를 책망함(3:1-8)
2) 회복에 대한 약속(3:9-20)
-열국의 회복(3:9)
-유다의 회복(3:10-20)
• 스바냐서의 메시지
스바냐의 멧세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분은 심판을 다루며 한 부분은 자비를 다룹니다.
1.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다(1:1-2:3)
그들의 죄 때문인데 특히 우상 숭배의 죄 때문입니다(4-6절).
이 선지자는 세 종류의 죄인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버린 사람들과 우상만을 섬기는 사람들(4-5상반절)과,
여호와와 우상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5하반절),
또한 여호와를 공개적으로 버리고 그와 아무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사람들(6절)입니다.
장차 임할 심판은 7-18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스바냐는 이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지역적으로는 과거에 유다와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또한 예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퍼부으실 장차 임할 심판(계 6-19장 참조)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주전 606년의 바벨론의 침략과 주전 586년의 성읍과 성전의 마지막 멸망이 될 것입니다.
2장 1-3절에서 스바냐서의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하여 백성이 여호와께 돌아와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것을 탄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칙령이 통과되기 전에 시간이 아직 있을 때, 여호와를 향하여 자비를 요청하라.“
그를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그러나 슬프게도 이 민족은 “종교적인“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이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다(2:4-3:7)
선지자는 유다 주위에 있는 여러 이방 나라들의 이름을 말하며 그들의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것임을 알립니다.
블레셋(4-7절), 애굽(12절),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는 완전하게 파괴되어 그들의 땅은 황야가 될 것입니다(13-15절).
스바냐는 자기의 백성에게 다시금 호소함으로 그의 메시지를 끝맺고 있습다(3:1-7).
만일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유다의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욱 심판하실 것인가?
그는 예루살렘이 음란하고 오염되었다고 말합니다. 요시야가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으시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반역을 보셨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이다(3:8-20)
스바냐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멧세지를 끝맺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다시 모을 것이며 이방 나라들을 벌하실 것이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기의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스바냐는
3장 8절은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때는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모이게 될 마지막 때입니다(계 19:11-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이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는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시 모을 것이며, 그들의 죄에서 정결케 하실 것이고,
그의 의로운 왕국을 창설하셔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슥 12-13장 참조).
• 스바냐서의 남은 자 신앙
스바냐는 “남은 자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2:7/2:9/3:13)
그 당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적은 무리의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그와 같이 남은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말세에 모든 유대인이 주님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남은 신앙인들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지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끝이 나면 그는 이 민족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괴롭힌 자들을 괴롭힐 것이며(3:19)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는 시온의 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벌을 제하시고, 원수를 쫓아내시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기쁜 노래를 부르라고 권면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 14-18).
스바냐 개요
1. 서론
모든 성경들은 본서의 중심인물인 ‘스바냐’를 표제로 삼았으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기시다’ 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는 날에도 그분의 참된 백성은 안전하게 숨겨주
실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2. 저 자
전통적으로 스바냐 선지자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으며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말씀을 선포했다고 증거하고 있다(1:1).
유다의 히스기야왕의 4대손(현손)으로 왕족 출신이며 왕실과 귀족사회의 타락상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3. 기록시기와 시대적 배경
유다의 요시야 왕(B.C.640-609) 시대에 사역을 하였다.(1:1)
앗수르은 아슈르버니팔 왕(B.C.669-633년)이 다스리던 시대로 앗수르가
점점 쇠퇴해 가던 때였다.
므낫세와 아몬 왕의 우상숭배에 반하여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할 당시 도와 신앙부흥 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대략 B.C.640-622년 어간에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4. 기록목적
요엘서나 아모스서와 마찬가지로 스바냐서 역시 ‘여호와의 날’이 중심주제다.
‘여호와의 날’은 불법하고 경건치 못한 자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고난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의 날임을 말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만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에 참여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5. 구조
초 점 |
하나님의 심판 |
하나님의 구원 |
|
구 분 |
1:1-2:3 |
2:4-3:8 |
3:9-20 |
유다심판 |
열방 심판 |
남은 자들을 구원하심 |
|
주 제 |
여호와의 날 : 진노의 날 |
여호와의 날 : 구원의 날 |
|
핵 심 구 절 |
[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
6. 여호와의 날 : 심판의 날
어떤 선지자들보다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강렬하고 직접적인 묘사로 이루어졌다.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1:7,14), 또한 미래에 범우주적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의 구원을 통해 성취됨을 선포한다.(3:16-20)
군사적 용어들로 묘사하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날로 묘사한다.
자신의 백성을 포함한 세상 만민들이 회복되어 여호와께 참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하여 이 날을 행하신다.
7. 중요 메시지
스바냐는 유다 사회를 오염시킨 종교적, 사회적 불의를 질타한다.
여호와의 날에 범죄 한 유다는 참혹하게 심판 받을 것이며, 이방나라들도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까닭에 초토화 될 것이다.(2:14-15)
온전히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 마음을 겸비하고 공의와 겸손하게 살려고
힘쓰면 ‘혹시’ 심판을 면할 수도 있다.(2:3)
8.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범죄 한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중에도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남겨두시고 보호하실 것이다.(3:12)
남은 자들은 입술이 깨끗하고 행실이 의로운 자들이 될 것이다.(3:13)
때가 되면 사방에서 ‘남은 자’들을 모으셔서 구원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그들을 보고 기뻐하실 것이다.(3:17)
9. 결 론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하지만 회개하여 죄사함 받은 모든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
예언서는 거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 탄식, 분노, 절망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으나 스바냐는 하나님의 ‘기쁨’을 말한다.(3:17)
한낱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슬프게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
스바냐
저자 : 스바냐 1장 1절은 스바냐서의 저자가 선지자 스바냐라고 알려줍니다. 스바냐라는 이름은 "하나님에 의해 보호를 받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작 연대 : 스바냐서는 주전 635-625년 사이, 즉 요시야 왕이 통치하던 초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록 목적 : 스바냐의 메시지는 심판과 격려를 포함하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교리를
알려줍니다. 1)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다. 2) 심판 날에는 악인이 처벌되고 의인은 신원을 받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핵심 구절 :
스바냐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요약 :
스바냐는 온 땅과 유다와 주변 국가와 예루살렘과 모든 나라에 대한 주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 후 모든 민족, 특히 유다 백성의 신실한 남은 자를 향해 주의 축복을 선포합니다.
스바냐는 자기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고 노골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의 책은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그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수많은 신들도, 앗수르 군대의 힘도 그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든 경고가 무시될 때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성경에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날에 이루어질 사건들로서 예루살렘의 몰락과 같은 여러 사건들을 언급했는데, 그 사건들 각각은 궁극적인 주의 날을 가리킵니다.
예표 :
3장 14-20절에서 선포된 시온에 대한 마지막 축복은 아직 거의 다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그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성취될 메시아적 예언들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의 형벌을 제하여 버릴 수 있으셨습니다(습 3:15, 요 3:16).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 진정한 구세주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발생해야 합니다(롬 11:25-27).
그들의 왕이 그들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자신을 위해 구속하시기 위해 재림하시는 때
이스라엘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 가셨듯이, 그분은 다시 오셔서 이 땅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
그때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적용 :
이름과 상황을 약간 조정만 하면, 주전 7세기경의 이 선지자가 오늘 우리의 강단에 서서 악한
자들을 향한 심판과 신실한 자들을 위한 소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바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죄로 인해 모독을 당하시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고의로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징계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형벌보다는 구속적일 수 있습니다.
악이 반드시 처벌되는 것은 악이 맘대로
휘저으며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때에 위로를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자유가 있지만 불순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는 자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