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12-06-2022 / 01-13-2023)



1월 13일(금)

여호와의 말씀대로(신명기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 '여호와의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알 피 예호와, 알 피 아도나이'(대로 말씀 여호와)는 직역하면 '여호와의 입을 따라'란 뜻이다.
이 말은 모세가 '여호와의 종'이라는 사실에 매우 걸맞는 표현이다.
즉 그는 죽음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자진하여 거룩한 땅의 경계 밖인 '모압 땅'에서 죽은 것이다.

* 말씀(입) 6310. 페(peh) פֶּה

1. 입,  2. 창세기 8:11,  3.출애굽기 4:11
관련 성경 / 입(창 4:11, 민 30:2, 말 2:6), 명령(창 41:40, 민 3:39, 수 21:3), 먹이(창 42:27), 말(창 43:7,출 34:27, 민 20:24), 자루(창 44:8), 식량(출 16:16), 구멍(출 28:32), 말씀(민 3:16, 신 34:5, 시 19:14),

* 대로(알)( ʽal) ) 5921 עַל 1. 전치사

1. 사무엘하 4:7,  2. 옷을 입은




모세는 수명(壽命)을 살았던 인물이 아닙니다.
모세는 사명(使命)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 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모세가 120살이 되었을 때 기력이 쇠하지 않았고 눈이 흐리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활동을 할 수 있는 육체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무덤도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죽었지만 장례를 치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묻었다고 합니다.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
- '벧브올'(Beth-peor)은 모압의 신(神) 브올을 예배하던 산인데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다.
한때 이스라엘도 이곳에 거한 적이 있었으며(3:29; 4:46), 후에는 르우벤 지파의 소유가 되었다(수 13:20).
많은 학자들은 모세가 장사된 모압 땅의 골짜기가 느보 산(비스가 산) 근처의 어느 한 골짜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Hengstenberg, 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장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서 1:9은 이러한 사실의 근거가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천사장 미가엘을 보내어 모세의 시신(屍身)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곳에 장사하도록 명하셨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무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를 위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Calvin, Stanley).
한편 혹자는 모세가 엘리야와 더불어 변화산상에 나타난 사실(마 17:3;막 9:4;눅 9:30)에 의거하여 모세가 부활, 에녹과 엘리야처럼 승천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Matthew Henry).


1. <모세의 죽음>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으로 올라가 여리고 건너편에 있는 비스가 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곳에서 모든 땅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는 길르앗에서 단까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2. 모세는 납달리 모든 땅과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보았고, 지중해까지 유다 모든 땅을 보았습니다.

3. 그리고 남쪽 광야 네게브와 여리고 모든 골짜기에서 소알까지 보았습니다.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이라고 부릅니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땅이다. 나는 그들에게 ‘이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말하였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보여 주기는 했지만, 너는 이 땅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5. 여호와의 종 모세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압에서 죽었습니다.

6. 모세는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 어느 골짜기에 묻혔는데 지금까지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7. 모세는 백이십 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어두워지지 않았고, 그 때까지도 기력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8.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죽음을 슬퍼하며 삼십 일 동안 울었습니다. 그들은 슬퍼하는 기간이 끝날 때까지 모압 평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손을 얹었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가 가득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따랐습니다.

10.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그 뒤로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신 사람이었습니다.

11.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이집트에 보내셔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이집트 모든 땅에 표적과 기적들을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12. 모세에게는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놀라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신명기 34장은 모세의 임종에 관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길르앗 온 땅을 보여주십니다(1).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온 땅을 보여주신 것은 비록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모세의 소유로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셨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그 땅의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미 그 땅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후일에 성도는 믿음의 눈으로 본 것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믿음의 것들을 바라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었습니다(5).
그러나 그의 육신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7).”
모세의 평생에 하나님은 그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충분한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한 것은 백성들이 죽은 모세를 섬길 가능성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조치일 것입니다(6).

모세의 죽음 이후에 여호수아의 승계를 다루는데, 실제로 이것은 모세가 죽기 전에 한 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9~12).
모세의 마지막 임무는 여호수아를 세워 안수함으로 그를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 안수를 통해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들은 것처럼 여호수아에게 순종하였습니다(9).
하지만 모세 이후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성경은 밝힙니다(10).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던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험악한 인생을 살고, 수없이 많은 난관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임종의 시간에는, 자녀들(영적이고 육적인)을 그 앞에 두고, 그들을 맘껏 축복하는 죽음이 되도록 준비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바라보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삶을 사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에 이끌리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한 일을 행하십시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모세가 평생을 하나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다가 주님 앞에 간 것처럼, 저희들도 부르시는 날까지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다가 주님 앞에 가게 하옵소서.
영적 축복을 자손들에게 많이 남기고 갈 수 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힘을 주시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바라보고 살게 하시고 훗날 그것을 얻게 하옵소서.


여호와의 종(신명기34:1-12) 

 
오늘 본문은 모세가 죽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모압 평지에 있는 느보산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북쪽으로는 단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서쪽으로는 서해 지중해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남쪽으로는 네겝 광야까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느보산에서 눈 앞에 내려다 보이는 종려 나무가 무성한 성읍 여리고 골짜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모세가 서 있는 느보산은 해발 800m 정도 됩니다. 모세가 북쪽으로 단까지 보았다고 하는데 느보산에서 단까지의 거리가 180km입니다. 모세의 시력이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모세가 육안(肉眼)으로 단까지 보았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서쪽으로 지중해까지가 보았다고 했는데 느보산에서 지중해까지의 거리가 100km입니다. 모세가 육안으로 지중해까지 본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또 모세는 남쪽으로 네겝까지 보았다고 하는데 느보산에서 네겝까지의 거리가 150km입니다. 모세가 육안으로 네겝까지 보았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북쪽으로 단까지, 서쪽으로 지중해까지, 남쪽으로 네겝까지 보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이 모세의 눈을 열어 주셔서 모세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 주신 후에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는 주지만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모세의 죽음과 관련하여 세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혹시 누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목사님, 모세가 모압에서 죽으면 안 되기라도 하나요?”
안될 것은 없죠. 그러나 가나안 땅은 말 그대로“엎으러지면 코 닿을데”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었다니 그것이 이상합니다.

“5절.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사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고 싶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신명기 3: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

그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3:26-27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러니까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들어 간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대하여 “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일까요? 
직접적인 이유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데스 광야에서 물이 없어 백성이 모세를 원망할 때 모세가 화를 내면서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을 냈던 적이 있습니다(민 20장).
모세는 마치 자기가 물이라도 주는 것처럼 혈기를 냈습니다.
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순간 마치 자기가 물을 주는 것처럼 착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 가는 표면적인 이유가 되겠지만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 가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모세의 이름을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율법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입니다.
모세하면 율법이고 율법하면 모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으로 완벽하다고 할지라도 율법의 의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구속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모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이상합니다. 


6절.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어서 장사됐는데 모세가 묻힌 장소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 모세가 누굽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출애굽의 영웅입니다.
아니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아니고 군인 한 명이 죽어도 끝까지 그 시체를 찾아서 무덤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은 자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출애굽 영웅입니다.
아니 그 이상이죠.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모세가 거의 신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사람이 모세를 장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모세를 장사했다면 모세가 묻힌 곳을 모를 리가 없죠.
그러면 모세를 누가 장사했죠?
성경학자들은 모세를 장사한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6절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가 그(모세)를 묻었다”
영어성경(KJV)은“ he buried him”으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주어“he(그)”가 정확히 누군인지는 모르지만 성경학자들은 궁극적으로“그”를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묻어 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모세의 시체를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이 직접 모세의 시체를 묻어 주셨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시체를 가져다가 거창하게 장사지내고 그들이 보았던 애굽에 있는 피라미드 정도는 아니지만 큰 무덤을 만들고 모세의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고 모세를 우상으로 만들려는 가능성을 막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 유다서는 바로 이런 것을 추측하게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다서 1: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모세가 죽었을 때 모세의 시체를 가운데 놓고 천사장 미가엘과 마귀가 다투었습니다.
왜죠? 마귀가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자기 것이라고 권리 주장을 하면서 모세의 시체를 가져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유명한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의 시체를 우상으로 만들어 오직 하나님 한분께만 돌려져야 할 존귀와 영광을 빼앗아다가 사람 우상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마귀의 수법은 오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무리 재능이 많고 똑똑하고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가 우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자기를 숨기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모세는 몸이 건강하고 기력이 왕성한데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7절.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는 비록 그의 나이가 120세 여서 나이는 많았지만 그의 신체 나이는 젊었습니다.
눈도 흐리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제일 먼저 눈이 침침해지고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몸에 기운이 다하여서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죽을 때 종종 이런 표현들을 썼습니다. 

8절.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창 25:8, 창 25:17, 창 49:33)

나이가 많고 늙고 기력이 다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눈이 흐리지 않았습니다.
기력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모세가 죽을 때가 아닌데 죽었다는거죠.
모세가 죽을 때가 아닌데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데려가셨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자연사(自然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데려가셨죠?
모세의 사명이 모압까지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수명(壽命)을 산 사람이 아니라 사명(使命)을 산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공은 내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다해내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만 잘하면 그것이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정리합니다. 
모세의 죽음은 사람 편에서 보면 이상한 점이 많지만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생각대로 살고 자기의 생각대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은 모세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

모세의 죽음은“여호와의 말씀대로”죽은 죽음입니다.
모세는 죽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순종하면서 산 사람입니다. 

모세가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바꾸거나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거죠. 
1.  하나님, 하나님의 뜻은 내가 이곳 모압 땅에서 죽는 것이지만 내가 이곳 모압 땅에서 죽지 않고 가나안 땅에 한 발자국만 밟아 보면 안 되겠습니까?
2. 하나님, 하나님은 저를 조용히 불러 가시지만 제 아들만이라도 저의 죽음을 알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3. 하나님, 저 아직도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살면 안 되겠습니까? 

모세가 얼마든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죠. 
그러나 모세는 죽음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조금도 거스리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그래서 모세의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모세의 별명은“여호와의 종”입니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

“여호와의 종”이란 별명은 모세가 죽을 때 처음 붙여진 별명입니다.
만약에 만약에 모세의 무덤이 있고 무덤 앞에 묘비가 있었다면 그 묘비에는 이렇게 쓰였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 여기 잠들다”

신명기 이후 여호수아서에서 계속해서 모세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반드시 모세의 이름 앞에 “여호와의 종 모세”라고 불려지는 것을 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모세에게 “여호와의 종”이란 별명이 붙여졌다는 것은 모세가 얼마나 겸손했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 빼고 가장 큰 기적을 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의 기적을 행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홍해 바다를 지팡이로 가른 사람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200만 명이 마실 물을 공급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 말입니다. 
물론 기적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지만 그 기적의 중심에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몸소 본 인물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던 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친구처럼 이야기 해서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광채가 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 ”

모세 이후에는 모세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정도 되면 우리는 모세를 반 신(semi God)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죽는 것 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여호와의 종 모세”입니다.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지만 종교개혁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은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독교를 사람쪽으로 쏠렸던 것을 하나님쪽으로 끌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가까이 하면 사람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종이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 신앙은 타락합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신앙이 살아납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갈라디아 1:10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셔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종,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미 카터가 쓴 ‘살아있는 신앙’이라는 저서에서 그의 신앙생활에 대해 적혀 있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들, 특히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보다 높은 삶의 표준과 기대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복음서를 통해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삶의 원칙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원칙은 일반적인 종교 규범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개인의 행동과 일생을 기준 하는 유일한 규범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기준들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자진해서 때로는 억지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탁월한 삶, 그것은 율법을 순종하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치관, 그 가치관의 실현을 위해서 드려지는 최선의 삶, 우리는 그 이하일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카터가 이러한 삶의 좌우명을 갖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을 받기 전에 유명한 해군 제독인 릭오버 제독과 면담을 갖게 됩니다.
이 해군 제독은 젊은 해군장교인 카터에게 전술과 전략에서부터 군인의 자세, 태도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카터는 땀을 흘리면서 대답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제독이 화제를 돌려서 해군사관학교 시절에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공부했는가를 물었습니다.
또한 웃으면서 성적은 어떠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카터는 성적에는 자신이 있어 점수와 등수를 대답했더니 대뜸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카터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야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요.”
이때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카터는 더 이상 답변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카터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인생을 다 살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이 해군 제독이 던진 것과 비슷한 질문을 나에게 던지실 지 모른다. 이때 만약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그날 그는 인생의 좌우명을 얻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성경을 바르고 쉽게 주석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그가 쓴 책 중에 Daily Celebration의 서문에서 행복한 삶에 대하여 다음 같이 썼다.

"행복한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세 가지 요건이 있다.

첫째, 희망을 갖는 것
둘째, 할 일이 있는 것
셋째, 사람을 사랑하는 것

희망은 오늘의 시련과 불운을 극복하는 디딤돌이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독일의 철학자 Ernst Bloch가 쓴 희망의 원리(Prinzip Hoffnung)란 저서가 있습니다.

"희망은 연습하여야 한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려면 희망을 가르치고 배우고 연습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교육으로 변하여야 한다.


1940년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골드리라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선교를 하던 중 쫓겨나 인도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귀국하기로 하였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독일 나치 군인에게 쫓겨 사는 유대인 집단을 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유대인들을 돕지 않았다.
그들은 다락이나 창고에서 숨죽여 살고 있었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선교사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고국으로 돌아갈 배 티켓 한 장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티켓을 팔아서 유대인을 위해 빵을 사서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숙소로 돌아오는데 선배 선교사가 야단을 쳤다.
"당신은 왜 그 딴 짓을 해! 유대인들은 예수를 안 믿잖아?"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다.
"네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지요. 그러나 저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땅의 관점으로 본 성경

서론 / 통일성 속 다양한 주제

성경은 66권으로 된 한 권의 책이다.
수많은 저자가 기록했지만, 단 한 분 성령 하나님이 참 저자시다.
그렇기에 다양성 안에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이야기와 수많은 사건은 나름의 일관성을 따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성경은 방대하다.
그렇기에 성경이 다루는 주제를 하나로 말하기 어렵다.
하나님 나라, 언약, 예수 그리스도 등 그 어떤 것도 구약 전체를 다 포괄할 수는 없다.

땅이라는 주제

앞서 언급한 주제들은 그나마 많이 취급된다.
반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주제가 있다. ‘땅’이다.   
성경에는 땅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성경은 땅 이야기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땅’이 나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즉, 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
2절도 ‘땅’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0절에도 ‘땅’(뭍)이 나온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 땅에 관해 명령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
구속사의 중심인물인 아브라함 이후로는 땅 이야기가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후에는 누가 어떻게 언제 땅을 소유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시 37:11).   

"오직 온유한 자는
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이렇게 성경에는 땅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들이 서로 아무런 상관 없이 마구 나열된 것은 결코 아니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야기는 점점 발전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서 땅을 약속하시고, 백성이 땅을 차지하고, 땅을 빼앗기고, 다른 땅으로 옮겨가고, 원래의 땅으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성경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성경에는 왜 땅 이야기가 많이 나올까?
성경에서 말하는 땅은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I. 창조부터 아브라함 이전까지

에덴의 동산과 땅에 대한 명령

창세기는 땅 이야기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 1:1).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2:7).
이렇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람을 땅에 두시는데(창 2:8), 그러면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라고 명령하신다(창 1:28).
이것이 하나님께서 땅에 대해 첫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요 사명이다. 

이 땅이 어디일까?
창세기 2:7에서 아담을 지으시고 2:8에서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나서 사람을 거기에 두신다.
2:22에서 여자를 지으시고 나서 1:28에서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니 1:28에서의 땅은 동산이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장소이자 또한 동시에 사람이 거하는 장소인 동산이라는 땅에서 시작한다.  

창세기 1~2장에서 ‘땅’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대상이요 장소였다.
사람은 땅을 잘 가꾸고 지키고 충만하고 정복해야 했다.
동산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교제하는 장소다.
그래서 에스겔은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고 표현한다(겔 28:13; 참조. 사 51:3).

타락

사람은 땅을 잘 가꾸고 지키고 충만하고 정복해야 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히 맛보면서, 그 임재를 누려야 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그 일에 실패한다.
땅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아담은 땅에 죄가 들어오게 만든다. 

땅이 저주를 받음

이로 인해 하나님은 아담에게 벌을 내리시는데, 그 벌의 내용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것이었다(창 3:17-18).
땅, 즉 동산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아담의 실패로 인해 동산이 더럽혀졌다.
땅은 이제 더 이상 복의 통로나 도구가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 되었다.
땅은 이제 복이 아니라 고통을 낳는 묘지가 되었다.
사람이 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사람을 정복하게 되었다(창 3:17-19; 롬 8:18-25).

땅에서 쫓겨남

하나님은 사람을 땅(동산)에서 쫓아내신다(창 3:23-24).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물인 땅에서조차 죄로 인하여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신다.

아담이 쫓겨난 이후(창 3:24),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다.
이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는다(창 4:10-12).
가인은 땅과 관련하여 벌을 받는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流離)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이와 유사한 일은 창세기 11장의 바벨 사건에서도 반복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땅)에서 흩으시는 것으로 마무리하신다(창 11:8-9).

땅을 회복하는 것, 구원

아담은 동산에서 쫓겨났다(창 3:24).
실낙원(失樂園/Paradise Lost)이다.
실낙원은 복락원(復樂園/Paradise Regained)으로 향해야 한다.
창세기는 동산에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에서 마친다.
성경은 동산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사이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구약교회의 역사를 담고 있다.

동산에서 추방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간다.
약속의 땅은 태초와 종말을 연결한다.
동산과 새 예루살렘이라는 역사의 시작과 끝 사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사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신다.
성경에서 땅을 회복하는 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낸다.

II. 아브라함부터 솔로몬 시대까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땅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 후 땅을 약속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람은 원래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다(창 15:7).
이제 창세기 12장 이후의 이야기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야기다. 

첫 사람 아담이 땅을 받았으나 하나님은 그를 땅에서 쫓아내셨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고 하신다.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이 땅에서 추방되었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면서 땅을 약속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간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이후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은 땅 위에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성취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땅의 상실이라는 아담의 타락 이후 계속된 저주를 되돌리고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진전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다.

아브라함에게 계속되는 약속

아브람이 이집트를 지나서(창 12:10-20), 요단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때 조카 롯이 함께 했다.
두 무리가 땅을 선택하게 된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으로 간다(창 13:10).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13:14-15).
이에 따라 아브람은 헤브론으로 간다(창 13:14-18).
헤브론은 가나안 땅 마므레 곧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다(창 23:2, 19). 

하나님은 창세기 12:1-2에서 주셨던 약속을 계속해서 반복하신다.
15장에서 횃불 언약을 맺으실 때도 주신다.
“내가 이 땅을 ...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
17장에서 할례 언약을 맺으실 때도 주신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이삭과 야곱에게도 이어지는 약속

이 약속은 아브라함 때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아들과 자손, 즉 이삭과 야곱에게도 이어진다.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이 살 동안에 흉년이 들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하신다(창 26:2). 

야곱에게도 약속하신다.
창세기 28:4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28:13-15; 35:12에서도 같은 약속을 반복하신다.

막벨라 굴을 구입하여 매장함

약속의 땅에 대한 족장들의 소망은 무덤을 통해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자기의 시체를 매장할 장지(葬地)를 구입한다.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다(창 23; 25:9-10).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다(창 23:19).
그게 아브라함이 얻은 가나안 땅의 전부다.
이는 약속의 땅에 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낸다. 

그곳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이 되었고(창 23:19),
아브라함을 장사 지낸 곳이 되었으며(창 25:7-10),
이삭(창 35:27-29)과 야곱을 장사 지낸 곳이 되었다(창 50:12-13).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요셉을 비롯해 야곱과 그의 자녀들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다(창 47:27).
그 땅은 육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땅이다(창 47:6, 11).
나일강의 풍요로움이 있는 땅이다.
그러나 그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다.
그곳은 그들이 거주(居住)할 곳이 아니라 우거(寓居)할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출 1:7).
한편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성취되었다(참조. 창 1:28).
그런데 그곳은 진정으로 충만할 장소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번성하여 가득 해야 할 땅은 이집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충만해야 할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요셉의 유언

요셉은 이집트에 살다가 죽을 때 유언을 남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 자신의 해골을 매고 올라가라는 것이었다(창 50:25).
요셉은 출애굽을 예언했다(창 50:24).
그 이유는 이집트는 약속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 곳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약속의 땅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출애굽

그들은 출애굽을 해야만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출 3:8, 17; 13:5;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3-14; 신 6:3; 11:9; 26:9; 렘 11:5; 32:22; 겔 20:6, 15 등등)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을 인도하실 것을 알리신다(출 3:7-8, 17; 6:2-8).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줄기로 맹세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으로 데려가려 하노라”(출 3:17; 6:8).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그 땅이 풍요롭다는 말이다.
실제 열두 정탐꾼이 에스골 골짜기에서 갖고 온 포도송이는 장정 둘이 채를 꿰어 메어야 할 정도로 거대했다.
석류와 무화과도 그 땅이 정말로 비옥하고 좋은 땅임을 입증했다(민 13:23-27; 신 1:25).
모세도 그 땅에서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등이 날 뿐 아니라 철과 동 등 지하자원도 많아 모자람이 없는 땅이라고 소개한다(신 8:7-10).

그런데 가나안의 풍요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풍요와 달랐다.
성경은 과일이나 곡식이 어디서 나는지, 지하자원은 어디에 있는지, 젖과 꿀은 또 어디서 어떻게 흘렀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 땅이 어떠했는지를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관심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나안을 풍요의 땅이라 부를 때는 유독 한 가지를 강조한다.
그 땅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기후에 달려 있다.
그 땅에서 누리는 풍요의 가능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었다(레 26:4-12; 신 11:11-17).
그들이 떠나온 이집트에는 ‘나일’이라는 거대한 강이 있어서 그 옛날에도 언제든지 물을 공급받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나안은 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호 6:3; 욜 2:23).
그리고 엄밀히 말해, 가나안 외에도 전세계에는 훨씬 좋은 땅이 많다.
그럼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해 이동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 신명기에는 여호와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정복할 것에 대한 명령으로 가득하다(신 9:5; 11:8-12).

반면, 약속의 땅을 향하여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하다(출 16:8; 민 14:1-3).
그들은 땅에 대한 약속이 주는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한다.
이때 첫 관문은 여리고 성이다. 여리고 성은 전쟁으로 쟁취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얻는다.
힘이나 책략으로 땅을 얻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선물로 땅을 받는다.
땅이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며, 구속사의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가나안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다(수 11:23).
여호수아서는 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수 21:45).
여호수아서는 땅의 약속을 현저히 진전시키며, 땅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보여준다.

요셉의 유언 성취

요셉의 유언에 대해 언급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 자신의 해골을 매고 올라가라고 했다(창 50:25).
그 예언에 따라 모세가 출애굽 할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간다(출 13:19).
마침내 이집트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가나안 땅 세겜에 장사지낸다(수 24:32).
요셉은 죽어서 해골이 되어 비로소 가나안 땅을 얻게 되었다.

사사 시대

여호수아 때에 가나안 땅을 정복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이들을 몰아내고 완전히 정착하는 사명이 이스라엘에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땅을 선물로 받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다.
사사기는 바로 그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사사 시대를 살던 한 집안의 일이 룻기에 나온다.
엘리멜렉 가정이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건너가 버린다(룻 1:1).
결국 이 엘리멜렉 가정은 아버지도 죽고 아들도 죽고, 나오미의 말대로 비참한 형편에 처한다(룻 1:3, 5).
하지만 다시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비참함이 풍요로움으로 바뀐다(룻 1:19; 4:11).

왕국 시대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국 시대가 임한다.
사무엘이라는 마지막 사사를 끝으로 사울-다윗-솔로몬이라는 왕의 시대가 열린다.
다윗의 때에 어느 정도 평안이 임하고, 궁극적으로는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다. 

솔로몬 시대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땅을 차지한다(왕상 4:2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된다(왕상 8:56).

III. 바벨론 포로 시대

땅을 빼앗기다

땅을 선물 받았다면 그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
거저 받은 땅이라도 잘 돌봐야 한다.
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참조. 창 2:15).
이를 위해 순종이 요구된다(사 1:19-20).
그렇지 못할 때 땅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아담을 통해서 이미 보았다(창 3:24).

레위기 18:24-30과 20:22-24에서도 이미 경고하셨다(참조. 신 28:58-66; 왕상 9:4-7).
“너희가 범죄하면 약속의 땅도 너희를 토해 내리라”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레 20:24).
약속의 땅은 언약의 복이 임하는 장소다.
그러나 저주가 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미 암시되었다.
거룩한 땅은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다.
땅이 그들을 토해 버릴 것이다(레 18:24-30; 20:22-24; 신 28:58-66).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나안 땅에 겨우 도착하여 정착하려 한 이스라엘은 결국 가나안 땅의 토해냄으로 인하여 땅을 빼앗긴다.
이스라엘은 아주 잠시 땅을 얻었을 뿐이었다.
이스라엘은 땅을 선물 받았음에도 땅을 더럽혔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겔 7:2; 33:28).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하고, 남쪽 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멸망 당하여 포로로 끌려간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을 토해 버린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건은 단순히 땅을 잃어버리게 된 위기가 아니다.
죄로 인해 더 이상 약속의 땅에 살 수 없게 된 것은 삶의 희망과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땅을 빼앗긴 것의 의미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은 단순한 땅이 아니다.
단순한 거주지도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임재와 언약의 복이 임하는 장소다.
그렇기에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냥 단순한 땅의 상실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을 잃게 되는, 심지어 땅에 대한 소망을 잃게 되는 포로 됨이란 모든 언약이 공허한 것으로 되는 영점(null point)이었다.
시편 137편은 땅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마음을 잘 드러낸다.

상실 가운데도 희망이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가운데도 희망의 여명은 그들을 비추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기도 하셨지만, 또한 동시에 약속의 땅을 회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셨다(사 65:17; 사 66:22; 렘 16:15; 29:14).

그러는 중에 아주 특이한 일이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라고 하신다(렘 32:7).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터인데, 이 땅은 사서 무엇할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렘 32:15)
바빌론 포로 생활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언하신다.
포로 시대에 에스겔을 통해서도 땅의 회복을 예언하신다(겔 36:33-36; 37:24-28). 

약속대로 회복되는 땅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신 대로(렘 25:12-13; 29:10-11), 포로 생활 70년을 마치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대하 36:21-22; 스 1: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약속의 땅을 다시 얻게 된다. 그러나 포로 귀환 이후 차지한 땅은 선지자들의 약속에 못 미쳤다.
이 부분은 신약을 통해 해결된다.

믿음과 순종으로 얻는 땅

구약에서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땅을 얻는 방식은 믿음과 순종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그들의 믿음과 삶의 중심에 있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은 약속-소유-상실-회복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언제나 땅의 소유에서 상실, 상실에서 소유, 삶에서 죽음, 죽음에서 삶으로의 변화 도상에 있었다.

IV. 신약과 땅

사라진 땅 이야기

신약으로 와서 땅 이야기가 현저히 적어진다.
구약에는 ‘땅’을 가리키는 단어나 단어들이 1,600회 이상 나오지만, 신약에는 50회 미만이다.
심지어 ‘가나안 땅’이라는 말도 신약성경에는 딱 2번 나오는데(행 7:11; 13:19), 그것들 모두 다 구약의 이야기를 설명할 때 사용된 말일 뿐이다. 

예수님은 이곳저곳 이동하시지만, 그 장소에 대해 중요한 의미 부여를 많이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땅에 대한 열망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침묵하신다.  
신약의 대부분을 기록한 바울 역시 로마제국 전역을 누비지만, 지리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지역을 언급하지 않고, 중요한 복음 사건을 말할 때도 지역을 드러내지 않는다(참조. 고전 15:3-8).  

바울 다음으로 신약의 중요한 인물인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을 흩어진 나그네로 묘사한다(벧전 1:1; 2:11).
어느 한 지역을 중요하게 여긴 구약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땅의 약속

왜 그럴까?
구약의 땅은 사실상 예표요, 그림자였다.
구약에서 중요한 주제였던 약속의 땅은 구약의 다른 주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연결된다.
약속의 땅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결과로 성취될 것이다.
땅과 그로 말미암는 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취될 것이다(사 65:17; 66:22; 벧후 3:13; 계 21:1).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바라본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새 땅, 새 예루살렘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을 주시는 분이다. 

히브리서, 땅, 안식

이 사실을 히브리서가 설명한다.
히브리서 4:8을 보면 헬라어로 예수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안식과 연결시켜서 말한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히브리서 4:8-9

8 만일 1)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 헬. 예수

여호수아 21:43-45에 보면 분명히 여호수아가 안식을 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가나안 땅은 아직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의 모형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훨씬 위대한 것을 가리킨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 모형의 본체는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의 복을 누리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식을 누린다.

스데반의 증언

이 사실을 스데반도 증언한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증언은 아브라함과 땅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도행전 7:5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은 땅을 받지 못했다.
약속만 받았을 뿐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땅은 고작 그가 매장된 막벨라 굴이었다(창 25:9-10).
히브리서 11:13이 말하는 대로 약속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요한복음 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땅을 못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땅을 받았으니, 아브라함이 받은 것은 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롬 4:3; 갈 3:8-9, 14).
영원한 하나님 나라다(히 11:10). 

그리스도 : 약속의 실체

이처럼, 구약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약속의 땅은 예표였고,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장차 가져다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사 65:17; 66:22; 벧후 3:13; 계 21:1).
구약교회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고 소유했던 땅은 장차 모든 시대의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관련해 새 창조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더 위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흩어진 나그네(벧전 1:1; 2:11)라고 표현하는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13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히브리서 11:8-10에서도 약속의 땅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한다.
“(8)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창 12:1)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히 11:8).
그런데도 그가 간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간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는 법을 배웠다(히 11:10).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나안 땅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상징하는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도성(히 12:22),
흔들리지 않는 나라(히 12:28),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도성, City of God, 하나님 나라(de Civitate dei)를 꿈꿨다.

가나안을 넘어 온 세계로

신약에 와서 땅 이야기가 사라진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런데 땅의 개념이 조금 다르게 나타나는 곳을 볼 수 있다.

로마서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구절은 분명 구약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분명 아브라함에게 땅의 상속자라고 했지, 세상의 상속자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의 상속자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없다.
그런데 바울은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이라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바울은 구약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고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은 표면상 가나안 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통해 성취될 온 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 구절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 전체에 근거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언약을 바르게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이라고 표현한다.
구약에는 분명 ‘가나안 땅’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은 ‘세상’이라고 바꿈으로써 구약에서 말하는 가나안 땅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의미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받은 약속은 장차 그의 후손인 교회를 통해 성취하게 될 세상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단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 곧 온 우주를 상속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옛날 아브람을 부르심으로 그를 통해 아담의 저주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복이 온 세상에 미치게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신자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 개념은 가나안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나안 땅이 ‘세상’으로 바뀌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땅 개념은 이제 땅끝까지 확대된다.

이 일이 성취되기 위해서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강림하실 때 유대인들이 각국에서 몰려온 것을 볼 수 있다(행 2:8-12).  

그리고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1:8은 나중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뤄졌다(행 8:1, 5, 25; 9:31; 11:19-22; 롬 15:28). 그리고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됨으로써 가나안 땅의 언약적 의미는 완전히 사라진다. 

이렇게 되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한 땅의 약속은 가나안 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롬 4:13).

V. 성경에서 땅의 의미 / 성경이 말하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땅은 예표였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5절).
옛 언약 아래에서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는데 있어 그림자나 예표에 속하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이요, 장차 우리에게 임할 새 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은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분을 통해 세워질 하나님 나라였다.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땅을 못 받았지만(행 7:5), 사실은 받았다(히 11:13).
그들은 믿음으로 땅을 상속했다(히 11:9). 

모든 땅이 거룩하다

개신교는 성지(聖地)가 없다.
성지순례를 하지도 않는다.
어느 특정한 땅을 거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20세기에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다시 탄생한 것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말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모든 땅이 거룩하다.
우리가 상속받는 것은 땅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으로부터 누리는 은혜다.
하나님 나라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영토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어느 땅을 차지할 필요도 없다.
어디에 있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오늘날 신자들의 성취와 기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 약속의 땅이 바라보는 최종적인 운명,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  

구약의 성도들이 가나안 땅에 소망을 두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며 장차 우리에게 허락하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영원한 도시를 바라본다(계 21:1-2).

결론

성경은 하나님의 땅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야기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은 동산에서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의 장소를 진척시키며,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모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결과로 임할 더 위대한 땅,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비된 땅을 예기(豫期)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약속의 땅과 그로 말미암는 복은 그리스도가 이루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취된다.

땅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초월적으로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새 예루살렘을 지칭한다.

구약교회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받고 소유했던 땅은 장차 모든 시대의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관련해 새 창조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더 위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땅에 관한 약속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이 온 땅을 채우고 거주하는 때에 완전히 성취된다.







1월 12일(목)

하나님의 사람(신명기 33:1)

신명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축복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모세의 유언적 축복은 일종의 기도로서 예언적 성격을 띤다.
한편 이 모세의 축복은 노아의 축복(창 9:26), 이삭의 축복(창 27:27-29), 야곱의 축복(창 48:15, 16; 49:2-27)과 비슷하다.

2절.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시내산에서 나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추시고

- 출애굽 40년 여정의 대표적인 장소

시내에서...세일 산에서...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
'시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위해 친히 영광 중에 강림하신 곳인 '시내 산'(Mt.Sinai)을 가리킨다(출 19:18).
'세일 산'(Mt.Seir)은 이스라엘이 모압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통과 했던 에돔 인의 산지를 가리킨다(1:2).
'바란 산'(Mt. Paran)은 바란광야의 고지대를 가리킨다(1:1; 민 10:12; 13:3).

따라서 본절의 이 표현은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현현(顯現)이 어찌나 장엄하고 장중한지 그 영광의 빛이 시내 산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세일 산과 바란 산까지도 퍼져 나갔다는 시적(詩的) 표현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드보라의 노래(삿 5:4)하박국의 기도(합 3:3) 등에서도 나타난다(Keil, Wycliffe).

일만 성도
:
1. 지명 -
2. 거룩한 무리 - 천사로 번역하기도 한다.

직역하면 '거룩한 자'란 천군 천사들을 가리킨다(Calvin, Keil, Matthew Henry).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는 스데반과 바울의 말(행 7:53; 갈 3:19)은 바로 본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이를 앞에서 언급된 지형들(시내, 세일 산, 바란 산)과 관련, '가데스의 고지에서'로 번역하였다(Knobel).
그리고 공동 번역도 이와 유사하게 '가데스 므리바에서'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견해는 모두 본문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해석들이다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 불타는 율례, 불타는 말씀
성경에서 불은 자주 심판, 소멸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강력한 영향력을 주지만,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심판 아래 놓일 수 있다.

'불 같은 율법'(에쉬다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만일 '다트'가 아람어의 '다트'와 동일개념이라면 '법령'이나 '왕의 칙령'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에 4:11; 단 2:9; 7:25).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열방의 통치자이시라는 점에 상당히 부합된다.
아무튼 이 말은 그러한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주신 율법'(4:33; 출 19:16)이란 뜻이거나 혹은 '불 같은 역할을 하는 율법'이란 뜻이라고 하겠다(롬 3:19)(Matthew Henry).

7절. 유다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기도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유다(Judah)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은 여호와께 대한 기도의 형식으로 선포되고 있는데, 그 축복 내용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왕권(王權)에 관한 것이다.
야곱도 일찍이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유다 지파를 축복하였다(창 49:10).
모세의 축복은 야곱의 축복을 재확인하는 축복이었다.
훗날 이 예언적 축복은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의 왕족(王族) 지파가 됨으로써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삼하 5:1, 2).
그러나 이 예언의 최종적 성취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즉 유다 지파를 통해 태어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든 원수를 물리치시고 만왕의 왕이 된 사실에서 마침내 이 예언은 온전히 실현된 것이다.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 유다 지파가 다른 지파들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서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 여기서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Lange).
따라서 이 역시 유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대적들과 싸우게 될 것을 의미한다.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 원수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창세기 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찬송이 될찌라 네 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 야곱은 유다에게 그의 형들과는 대조적으로 처음으로 풍성하고 순수한 축복을 하였다. 유다는 그 이름 자체로도 '찬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29:35). 뿐만 아니라 그는 형제들이 요셉을 해치려 할 때 피를 흘리는 것보다 파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제안하였으며(37:26이하), 자신을 베냐민의 담보물로서 제공하였고(43:9) 총리 대신 요셉 앞에서 진실하고 의젓하게 변호하였었다(44:16-34). 이와 같이 그는 행동에 있어서도 형제들에게 찬송을 받을만 하였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 성경에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힘을 가진 존재를 비유하기 위해서 사자를 등장시킨 절이 많다(시 7:2;57:4;사 5:29 ; 겔19:2-9). 이 예언은 유다 지파의 다윗 왕이 수행한 정복 사업(삼하 8:1-10:19)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며 유다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타나셔서 원수들을 멸망시킨 것에 대한 예언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계 5:5).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 홀은 왕권을 상징하는 증표물을 가리킨다. 왕은 공중 집회 때에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항상 '홀'을 휴대하였다.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 70인역은 '치리자의 지팡이'에 해당하는 '하카크'(*)를 '통치자'로 번역하고 있다. KJV도 이러한 입장에 따라 이 단어를 '입법자'(a lawgiver)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입법자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한다'는 번역은 문맥상 어색하다. 또한 히브리어 '하카크'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까지 가리키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마땅히 '다스리는 자의 지팡이나 지휘봉' 정도로 번역하여야 한다. 개역 성경과 RSV가 이러한 관점에서 번역하였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 이 말은 혈통적인 유다의 통치권이 끝나는 기간을 선포한 말임과 동시에 영적 유다 왕권의 통치권이 시작되고 완성되는 시점을 예언한 말이기도 하다(계 5:5).

그런데 그 같은 분기점이 되는 때는 실로가 현현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여기서 '실로'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지명(地名)으로 보고 유다의 통치권이 실로까지만 미친다는 견해이다(Delitzsch, Furst).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상황과 맞지 않는다.

추상적인 명사로 이해하여 '평안의 때'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이다(Gesenius, Kurtz).
그러나 이 역시 개념이 불투명하다.

가장 합당한 견해로 장차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메시야'를 의미한다는 견해이다(민 24:9, 17, 24; 대상 28:4).
이는 여러 학자들이 지지하는데(Aal-ders, Calvin, Lange) 역사적인 정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유다 지파의 지상 왕권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예표하며 여인의 후손 언약 이래로(창 3:15) 계승되어 온 '메시야 언약'(12:3; 22:17, 18; 26:4; 28:14)은 야곱의 네째 아들 유다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8절의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라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귀절로서 이 예언 역시 이스라엘 각 지파를 모아서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하였던 다윗을 통해 성취되었다.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 히브리인들은 평화시에 나귀를 타고 여행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러한 나귀는 대개 잡목에 매어두기 마련이다.
그러나 본절은 장차 비옥한 가나안 땅에 포도나무가 너무 흔하게 되어 나귀를 그 나무에 매어 두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그 옷을...희리로다
- 일차적으로는 장차 가나안 땅에서 유다의 후손들이 향유하게 될 평화롭고 풍성한 축복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유다의 후손, 즉 메시야를 통해 누리게 될 성도의 평화롭고 풍부하며 건강한 삶을 묘사한 말이다.

왕이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율법으로 통치하시려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발 앞에서 그 율법을 행복하게 듣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즉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행복합니다.
이스라엘(여수룬)의 왕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하여 축복을 빕니다(6~7, 11, 20, 22).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고 멀지 않았습니다.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승패는 숫자나 군사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싸우셔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축복한 것입니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 백성의 삶의 우선순위를 말합니다(8~10).
그들에게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특별히 레위인들은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이는 물론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백성에게 가르치며 예배를 드리는 일에 자신들을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삶의 최우선순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축복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웁니다.

첫째,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품에 안으십니다(12).
하나님은 수적으로 부족하고 연약한 베냐민을 자기 어깨 사이에 안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풍성한 열매를 약속하십니다(13~17).
야곱의 축복에서와 마찬가지로(창 49:22~26) 요셉 지파를 향한 약속과 축복은 유난히 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풍성한’ 결실을 강조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안정을 약속하십니다(18~19).
낯선 땅으로 들어가는 스불론과 잇사갈에게 하나님은 안정을 약속하십니다.
그들은 행복과 안정과 풍성함이 보장된 미래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20~21).
갓은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함께 먼저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었지만, 요단을 건너 목숨을 걸고 형제들의 전쟁과 기업을 위해서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한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도움을 보장하십니다(22~29).
하나님은 여수룬의 가까이에서 그들을 도우실 것입니다(26,27).
여기에 승리의 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안심하며 행복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어느 민족이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과 같은 신을 모신 민족이 있습니까?
비록 앞에서 모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좇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다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리고 이 말씀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가슴 떨리는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29)”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 진정하고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God spot

신을 느끼게 하는 뇌의 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뇌의 다양한 부위가 어느 한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부위에서 경험하게 한다.
뇌 안의 신
신을 믿는 사람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의 뇌는 다른가?

논리적 사고와 직관적 사고의 차이
신을 믿게 만드는 요인
1. 영원이 있다
2. 사후 세계가 있다
3. 예배에 감동을 받는다

스탄디나비아 반도의 국가
평은, 안정, 인권, 복지국가 -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적은 나라

1월 11일(수)

옛날을 기억하라(신명기 32:7)

44절. 모세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노래(쉬르. shîyr) שִׁיר     

1. 노래,  2. 시편 33:3,  3. 이사야 23:16

Pronunciation / 쉬르(shîyr)
Etymology/ 7891에서 유래

Bible verse / 노래(민 21:19, 삿 5:12, 잠 25:20, 사 5:1, 24:9), 찬송(대상 6:31, 대하 7:6), 노래(시 137:4, 사 26:1), 음악(전 12:4), 악기(느 12:36), 아가(아 1:1).

* 7891. 쉬르(shîyr) שִׁיר 
1. 노래하다,  2. 시편 7:1,  3. ~의 명예를 노래하다,  4. 기억하여 기록하고 가르치다

pronunciation / 쉬르(shîyr ]
Bible verse / 노래하다(삼상 18:6, 대하 5:12, 느 7:67), 화답하다(출 15:21), 찬송하다(출 15:21, 욥 36:24, 시 98:1), 노래부르다(시137:4, 사 26:1), 울다(습 2:14). [명] 찬송(시 106:12), 악사(시 68:25).

신명기에 사용된 "노래" : 5회(31:19, 21, 22, 30, 32:44)

(31:19)  이 노래
- 이스라엘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 내용(16-18절)을 주제로 하여 지은 '모세의 노래'(32:1-43)를 가리킨다.

이 노래로...증거가 되게 하라
- 훗날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환란과 재앙을 당하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외면하고 도와 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것이다. 그러한 때 이 노래를 이스라엘이 당하는 모든 환란과 재앙의 원인이 오직 그들의 관영한 죄악 때문임을 깨우쳐 주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1984 할랄(hâlal) הָלַל

1. 명백해지다,  2. 빛나다,  3. 과시하다

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 신명기 31:16-19
  •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 왜 노래를 부르게 하셨는가?(31:19)

    첫째, 신앙의 타락(16절) -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고 언약을 어길 것이라

    둘째, 은혜의 부재(17절) -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신명기 31장 - 모세의 기념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라
    신명기 32장 - 모세의 기념 노래
    신명기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신명기 32:9-10
  •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신명기 31: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가르쳤더라
    - 하나님의 명령(19절)을 모세가 신속히 수행했음을 보여 준다.
    한편 '노래'(쉬라)라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사상을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볼때 노래에는 그 시대의 상황이 압축되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히브리인들의 노래 역시 마찬가지로서 대부분 예술적인 표현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출애굽 직후 지어진 모세의 노래(출 15:1-18), 미리암의 노래(출 15:20, 21), 브엘 우물가에서부른 이스라엘의 노래(민 21:17)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노래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고 있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께 순복해야 할 타당성을 노래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노래들은 대개 교훈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신명기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 엘 엘리욘(El-Elyou. אֵל עֶלְיוֹן) 창세기 14:17-20

    창세기 서두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으로 나타난다.

    1. 엘(El) :
    엘은 하나님을 지시하신 단순한 명칭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고 우주 위에 위엄과 권위의 대주재(大主宰)가 되신다.
    강한 능력을 가진(Almighty)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데 주로 복합어로 사용된다.

    2. 엘로힘(Elohim) :
    엘로힘의 하나님은 강하고 유력한 자, 즉 자기를 경외의 유일한 대상으로 가르치고 세계의 창조주와 통치주로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으로 그의 일반적인 면을 지시한다. 하나님이 자기 창조, 권능, 능력을 나타내실 때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창조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지게 하셨다.

    3. 엘 엘리욘(El-Elyon) :
    엘 엘리욘이라 불리워지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The Most High God)이라고 표현했다(시 9:2, 민 24:16, 사 14:14).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분은 피조물 된 인간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대상이시다.

    4.  엘 샤다이(El-Shadai) :
    엘 샤다이라고 불리워지는 하나님은 출애굽기 6장 3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 하였고’라고 말씀하셨다. ‘엘 샤다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궁핍을 채워 주시는 축복과 위로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시다.

    5. 엘 올람(El-Olam) :
    엘 올람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창세기 21장 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The Everlasting God)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라고 기록되었다. ‘엘 올람’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하나님」이라는 명칭의 표현의 다양성은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는 기도를 더욱 풍부하게 하며 생활에 적용을 준다.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게 하신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가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살아 드려야 함을 확인케 하신다.

    엘(El) 혹은 엘로힘(Elohim)의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 능력, 권능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능력 있는 삶, 창조적인 삶, 죄악에서 승리하여 날마다 능력 있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기를 원하신다.

    엘 엘리욘(El-Elyou)의 하나님은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경배의 대상자이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순간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지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의 연속을 원하신다.

    엘 샤다이(El-Shadai)의 하나님은 자신이 축복과 위로와 안위의 근원이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만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고난 많은 땅에서 그분의 위로를 기다리며 사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원하신다.

    엘 올람(El-Olam)의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으로 영원한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에 현주소를 두고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구약성경에는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여호와’라는 명칭이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이라는 명칭과 교차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이란 명칭처럼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필자는 시편 23편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삶 속에 구체적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적 7대 명칭 (Compound Jehovah Title)을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 여호와 라하(Jehovah-Raah) :
    여호와 라하라고 불리워지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The Lord is my shepherd)라고 기록한다. 「여호와」는 우리 삶의 나그네 인생길에 목자가 되신다. 「목자」는 양의 삶을 돌보아 주듯 목자 되신 여호와는 우리의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돌보아 주신다.

    2.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
    여호와 이레라고 불리워지는 여호와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want)는 말씀은 창세기 22장 14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대신 한 마리 양을 예비하셔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시므로 「여호와 이레」의 여호와로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 이레」라고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 삶에서 그의 백성이 믿음의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 주심의 은혜로운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체험하게 한다.

    3. 여호와 샬롬(Jehovah-Shalom) :
    여호와 샬롬이라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2절에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신다’라고 평화의 주이신 여호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사사기 6장 24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한다.

    「여호와 샬롬」이라고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쌓이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평강이 되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삶에 평안을 영위할 수 있다. 「평화」는 화평(peace)이라는 말로 신약성경 산상수훈에서 팔복 중에 하나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Children)’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다. 하나님은 화평을 구하는 자에게 자녀로서 그 복을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이 있게 하신다.

    4. 여호와 라파(Jehovah-Rapha) :
    여호와 라파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치료자」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He restoreth my soul)라고 영혼을 치료하시어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출애굽기 15장 26절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면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는 병 고침의 근원자이신 여호와이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때문에 「여호와」를 부를 때 영적 이스라엘 백성 된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죄악과 질병에서 고침받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게 된다.

    5. 여호와 지드케누(Jehovah-Tsedegenu) :
    여호와 지드케누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우리의 의(義)」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2절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우리의 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 23장 6절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불의한 죄 가운데 있었던 자들이다. 우리는 죄를 깨닫고 의(義)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한다. 그때 우리의 의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의의 자녀로서 거하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게 하신다.

    6. 여호와 삼마(Jehovah-Sammah) :
    여호와 삼마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거기 계시는 분」 「같이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4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여호와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에스겔 48장 35절에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The Lord is there)라 하리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여호와와 함께 거한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같이 거하시기 위해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대로 「임마누엘」(God with us)로 오셨고,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삶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그 나라 천국에 거할 때까지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기를 원한다.

    7. 여호와 닛시(Jehovah-Nissi) :
    여호와 닛시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승리, 깃발」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5절의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는 말씀처럼 원수 마귀와 영적 싸움에서 승리케 하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신다. 출애굽기 17장 15절 말씀에는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라고 기록한다. 적군 아말렉과 싸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가 되셨던 여호와는 오늘 세상의 많은 원수 마귀가 적군 아말렉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압제하고, 어려움과 고통을 줄 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의 깃발」 되시는 여호와를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원수 마귀와 싸워 날마다 승리의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후일에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기게 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될 때, 증거로 삼으라고 한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31:19, 22, 30). 그들이 이 노래를 배워 부른다면 우상을 섬기지는 못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기게 된다면 이 노래는 우상숭배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 노래는 본질적으로는 애가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의 성격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주권을 더욱 노래하고 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살아야 하는(신 8:3) 하나님의 말씀을 비로 비유합니다(2).
    이스라엘을 적시고 그들로 농사의 수확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공급되는 한 그들은 풍요를 경험할 것입니다. 후일 이사야 선지자는 이 말씀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4~5).
    반석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완전하고 모든 행사가 의롭고, 신실하고 공의로우며 정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함이 없는 반석이신 하나님은 신뢰할 만합니다. ‘반석’은 이 노래에 7번 등장합니다. 광야에서 반석은 물을 내어 주었듯이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대적들도 아는 사실입니다(3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들, 딸처럼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부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창조하신 아버지이시고(6)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십니다(10). 하나님은 비와 반석에 이어서 다시 독수리로 상징됩니다(11~14).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시켜 강하게 하듯이, 하나님도 환난과 연단으로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고 연단하십니다. 높은 곳을 날아다닐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여수룬’(정직한 자, 사랑받은 자)이라는 애칭으로 부르십니다(15).
    이는 ‘올바른 자’라는 의미인데, 이 애칭은 이스라엘의 범죄와 반역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킵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물질주의와(15) 우상숭배로(16~18)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였던 물질적 풍요는 오늘날 우리도 조심해야 할 영역임에 분명합니다. 물질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게 만드는 거짓 만족을 갈망하게 합니다. 이 물질주의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수의 근원이고 축복의 근원임을 부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불성실한 자녀들을 징계하십니다(19~33).
    하지만 진노 중에도 하나님의 자비는 드러납니다(34~4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섬기는 우상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증거하십니다(37~38).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39).

    “내가 그인줄 알라”는 말씀은 여호와, 즉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39). 그 하나님은 대적들을 향해 복수하는 하나님이십니다(40~43).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구원과 죄사함을 보장하십니다(43).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이 노래의 결론부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 속에서 빛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노래는 유일하고 강력하며 동정심이 많고(39) 신실하고 늘 살아 계시며 영원하고(40) 주권적이시며 자비로우신(43)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를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48~52).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일에 실패하는 것은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순례자들은 모세가 없어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미래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실 분임을 확신하고, 그분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징계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끝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신자의 삶에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인생을 적셔주고 풍요를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반석, 아버지, 독수리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면합니다. 물질주의와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이 넘어진 문제였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1월 10일(화)

    그 땅을 얻게 하라(신명기 31:7)

    모세의 나이가 120세가 되었습니다.

    “하임 메아 에스림!” (하임 : 생명, 메아 에스림 : 120)

    - 120세까지 장수하란 축복의 말이다.

    모세가 120세까지 산 것을 기억하며, 모세 만큼만이라도 살라는 기원인데, 사실 120세는 인간이 살 수 있는 기적 같은 ‘나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은 누구나 좋아하며 건배 때 장수를 기원하는 축복의 말로 통한다.

    그런데 최근 이 축복의 덕담이 현재 적어도 두 사람에게는 대단할 실례가 된다며 최대 일간지 예디옷 아하로노트는 두 분을 소개했다.
    올해 119세를 맞이한 두 할머니. 자칫 120세가 되는 내년까지만 사세요, 또는 내년에 죽으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장수자에 대한 통계가 가끔 신문에 소개된다.
    지난 예디옷아하로놋 5월 11자 12면의 기사에 의하면 현재 이스라엘 100세 이상 장수한 사람은 모두 334명이다.
    (3분의 2가 여성) 이 중 22명은 이미 110세를 넘었고, 2명은 119세까지 사시고 계시다.

    현재 이스라엘 인구 700만 명에 비하면 아주 높은 장수 나라인 셈이다.
    65세 이상만도 67만여 명이다.
    이스라엘인들 또는 유대인들, 왜 이렇게 장수할까?
    전쟁과 테러로 매일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가족과 지인을 잃은 슬픔이 매일같이 텔레비전 화면을 채우는 사회 현실에 오히려 수명이 짧아 질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 중 종교인들 더 장수하고 있다는 통계를 보니 더 흥미롭다.
    종교인들은 사회 동화를 거부하고 외골수적인 삶은 경제적으로도 세속인들에 비해 훨씬 더 열악한 것이 현실이다.
    좁은 거주 공간과 최저생활비를 볼 때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결국 장수의 비결을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정신적인 삶의 질이 더 중요하며, 정신적인 건강 유지가 더 헬스장 유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문은 장수 노인들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는데, 개인마다 생활환경이 다르지만 공통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식사는 주로 채식 위주로 하며 과식을 피한다.
    2. 끊임없이 움직이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주로 농업 관련이나 자연 친화 직업)
    3. 분노를 피하고, 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한다.


    모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이제부터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 백성들을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시대에 따라 지도자는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백성들을 이끄는 것은 지도자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든지 강하고 담대하게 환경을 극복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선포한 율법의 내용을 백성들이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하도록 구체적으로 지시합니다.
    모세는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에게 쓰여진 율법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손들로 하여금 이 말씀을 듣고 배우고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라고 부탁합니다.
    특별히 매 칠년 면제년의 초막절에 모든 율법의 말씀을 모인 백성들에게 낭독함으로 배우게 하여 그들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것입니다.
    초막절은 광야를 기억하는 절기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죽은 후에 대한 경고를 합니다.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영적 암흑의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하루가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로 나와서 예비하신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또 이들의 죄된 본성으로 쫓아가는 실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하나님께서는 훗날 하나님의 이 말씀이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나의 노래를 그들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십니다(19,22).
    이런 상황에서 이 백성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는 여호수아의 마음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23).

    율법을 다 쓴 모세는 언약궤 곁에 율법을 두라고, 언약궤를 메는 레위인들에게 명합니다(24~26).
    모세는 이미 전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소회를 밝힙니다.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27).”
    모세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장로와 관리들 즉 지도자들을 불러 이 경고를 들려주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는 것입니다(28~29).

    첫째, 지도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행하는 사람입니다.

    탁월한 지도자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후계자를 세우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후에 일어날 반역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니 후계자를 세우는 모세의 마음은 착잡할 것입니다.
    또한 일어나게 될 반역을 알고 지도자의 직임을 떠맡는 여호수아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옆에서 백성들의 패역함과 반역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지 않고 붙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비록 미리 예견된 불리한 상황이 있을지라도, 낙심하거나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 상황이 좋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흥분할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만이 그를 붙들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 영적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는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합니다.

    후계자를 세우는 과정에 모세가 율법을 보관하라는 명령을 거듭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인간 지도자인 모세나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한, 그 말씀을 후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는 한, 그들은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인간 지도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백성들의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 배부르고 살찔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 때가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며, 언약을 깨뜨리고 살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놓치면 그때는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

    신명기 31-34장은 신명기의 결론, 더 나아가 모세오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31장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을 이양합니다.
    리더십 이양은 어느 공동체에서나 중요한 문제이지요.
    이스라엘의 경우는 조금 특별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을 때에도 진짜 이스라앨의 지도자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3절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요단을 건널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보다 앞서 건너 가셔서 가나안 민족을 멸하시고 그 땅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성공은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없어도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멸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도 동일하게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 지도자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백성들의 성공과 실패가 자기에게 달렸다고 부담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해야 할 일은 백성들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이 율법을 기록하여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줍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말씀을 7년 마다 온 백성들 앞에서 낭독하여 듣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제사장과 장로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모든 부모에게 주어진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녀들이 이 말씀을 듣고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해야 하는 의무가 부모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죽을 날이 가까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회막으로 부르십니다.
    먼저 모세에게는 한 노래를 가르쳐 주십니다.
    노래를 가르쳐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더 감사하고 순종하기는 커녕, 우상을 좇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노래가 증거가 되어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할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주신 은혜의 노래인 것이지요. 이어서 여호수아에게는 확신을 위한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죄와 연약함, 실패로 인해 미리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었습니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할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23절)

    모세는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기록하여서 언약궤 곁에 두어 이스라엘 대대로 증거가 되게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 주심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교훈을 주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귀에도 계속 들려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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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로스(Meroz)

    여호와를 도우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천사의 저주를 받은 장소. (판 5:23) 메로스의 주민들은 시스라 휘하의 가나안 사람들과의 실제 전투에서 여호와께서 지명하신 지휘관인 바락을 돕지 않았던 것 같다. (판 5:5-16) 또는 메로스가 패배한 시스라의 도주로에 있었다면, 아마 그 주민들이 시스라를 붙들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판 4:17) 이어지는 성서 기록이 시스라를 죽인 야엘의 용기 있는 행동을 알려 준다는 사실은 다소 후자의 견해를 지지한다. (판 5:24-27) 그 저주를 발한 천사는 이스라엘을 위해 싸운 천사였을 것이다.

    메로스가 납달리 영토 내의 게데스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쯤 떨어진 히르베트마루스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지만, 메로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23절).

    메로스라는 지명은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옵니다.
    그럼에도 저주받아 마땅한 메로스의 죄는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기손강 부근에 있었던 메로스는 뭐로 보나 압제자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싸우는 이스라엘을 도와줘야 옳았음에도 도리어 방해하며 크게 누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런 메로스를 저주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와줌으로써 축복을 받은 야엘(24-27절)과는 몹시 대조적입니다.

    야엘은 자기의 남편이 압제자와 절친이었고, 자신 또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특히 압제당하는 자를 위해 봉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각별하신 관심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마땅히 협조하고 적극 힘을 보태야 할 사람이 도리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처신으로 해를 끼칠 때는 반드시 벌하시고 저주하십니다.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그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은 참 간단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픔을 겪고 있을 때 그를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고 또 그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게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사회와 이 시대의 풍조인 무관심에 젖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은커녕 무관심과 외면만을 주고 있을 뿐입니다. 갈수록 주님의 가르침은 작아지고 우리는 서로 남이 되어 갑니다.

    주님의 말씀, 성경의 깨우침은 분명합니다.
    "메로스가 아니라 야엘이 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메로스>와 <야엘>, 어느 쪽입니까?
    주님의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 대한 당신의 소감을 적어 보십시오.
    드보라 시대 이스라엘이 몇 년간 평온했다고 합니까(31절)?

    ​주님, 메로스는 이스라엘을 돕지 않아 거듭거듭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엘은 다른 그 어던 여인보다도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야엘은 메로스와는 달리 여호와의 전쟁에 용감하게, 담대하게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도 주님의 일에 선한 싸움에 힘껏 참여하고 강도 만난 이웃을 돕는 일에 용감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야엘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큰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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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산 언약과 모압 땅의 언약

    A. 시내산언약

    출애굽은 애굽에서의 해방이라는 관점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 들어가는 것은 출애굽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애굽 땅에서의 시간들은 이스라엘이 숫자에 있어서 민족으로 형성되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는 것과 출애굽은 그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더 중요한 목적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을 언약이라는 최종 목적을 위한 과정이나 수단과 같은 것이다. 출애굽기의 19장 이전의 사건들은 모두 시내산 사건을 정점으로 집중된다. 19장 이전의 본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시내산에서의 언약체결이 완벽히 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19장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애굽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이스라엘의 범죄가 쌓여 감을 볼 수 있다. 결국 17장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심각한 범죄에까지 이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죄악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를 찾아볼 수 없다.  이스라엘의 죄악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시내산 언약을 기점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시내산 언약 본문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공적인 관계형성이 이루어진 후에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여러가지 준비를 거쳐서 드디어 언약을 맺을 수 있도록 예비된 현장인 시내산에 도착하였다.(출19장) 이 사건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해 저자는 이스라엘이 이 산에 도착한 사실을 강조하여 두 번이나 언급한다.(19:1,2) 먼저는 애굽에서 시내산까지의 시간과 여정을(19:1), 두 번째는 바로 앞의 이스라엘의 출발점인 르비딤에서 시내산까지의 여정을 표현한다. 또 모세가 하나님의 별도의 명령 없이도 주저없이 시내산에 올라간 것은(19:3)은 이미 이 산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예견이 있었기 때문이다.(3:12)
      19장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맺는 것을 일관성 있게 묘사한다. 이 가운데 어떤 한 부분도 언약을 맺는 일에 불필요한 것도 없고, 또 중복된 부분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언약 당사자의 역사성(출19:4)
        고대의 공적인 문서의 출발은 항상 역사적인 서언으로 되어있다. 과거에 이 당사자들이 어떤 관계를 맺었던가를 표현하는데는 주로 조약 당사자의 조상들끼리 어떤 관계가 있었던가가 말해준다.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지금 맺으려는 공적인 관계의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19장에서도 4절의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출애굽 시킨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행동에 근거하여서 이스라엘의 현재가 있게 된 것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역사적인 관계들은 3절에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야곱 족속”,“이스라엘 자손”) 이것으로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맺은 언약을 이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성취하고 계심을 나타내신다.

        2)언약 당사자의 관계(출19:5-6)
        언약 당사자들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있어서 시내산언약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떤 관계로 서는가에 대한 서술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언에 있어서 근본적인 언약관계 정의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세가지로 표현된다.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백성)가 될 것이다.(19:5b) 이러한 정의가 가지는 가치는 그 대상인 이스라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의 특별한 관계 속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므로 그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엄청난 권위와 영광을 가지신 분으로 언약의 상대방을 스스로 택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바로 그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개념이 첫 번째 정의 안에 있는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19:6a)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하는 역할(functionn)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는 가장 높은 위치(position)fm 차지하는 것이다. 이 말은 제사장이 왕과 같은 위치에 있거나 거의 그와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하던 고대의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셋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19:6b) 이 표현은 ‘거룩하다(qadosh)'는 히브리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인 ’구분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로 선택함을 받아 구분된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언약의 당사자들의 관계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개념 속에서 강조되어진다. 첫 번째 정의를 두 번째, 세 번째 정의가 보충하는 형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하신 가장 근본적인 언약적 선포는 첫 번째 약속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귀중한 소유가 될 것이다.    

        3)중재자 모세(출19:7-8)
        모세는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19:5-6)을 가지고 백성에게 내려갔고, 백성은 그것에 대하여 화답하였다.(19:7-8) 그리고 다시 모세는 그 말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가고(19:8), 하나님은 그런 백성을 향하여 다음의 행동을 명령하신다.(19:10 이하) 그 이후에 모세가 계속 산에 오르내리면서 언약당사자를 중재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모세만이 하나님 앞에 서있을 수 있었으며(19:9), 이것으로 인해 모세가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된다.

        4)언약 당사자 대면(출19:9-25)
        언약은 중재자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에는 언약 당사자들이 직접 대면함으로 성사되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온 백성 앞에 강림하시는(19:11,16) 장면은 이스라엘이 가졌던 가장 원초적이고 놀라운 것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늘 회상되고 기억되었다. 시편(50,24편)과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보통 신현(神現, theophany)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19장 10-25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본문은 언약의 당사자끼리의 직접대면을 나타낸다.
          시편과 선지서에서 응용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언약적인 만남의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다시 회상하는 것이고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하는 효과를 가진다. 즉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을 경우에 있어 이스라엘이 엄위롭게 임재하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림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이 원초적으로 만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심판을 각오해야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위태로울 때에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엄위롭게 임재하실 것을 나타내신다. 

        5)언약조건(1) : (출20:1-17)
        19:10-25의 본문을 ‘단순한 신현’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그 다음 구절인 십계명과의 관계에 있어 아무런 설명을 할 수 없다. 이 본문은 단순히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내려오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언약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당사자들의 직접 만나는 장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신현’이 아니라 ‘언약관계조건의 규정’을 위한 신현으로 이해해야되며, 이제 백성들은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이 하시는 직접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9장에서 언약의 당사자들이 만나서 언약의 조건을 결정한 것 가운데 가장 처음 것이 바로 20장의 십계명으로 이해한다면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따라야할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적인 조건이다. 20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킬 언약적인 조건이 명시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이는 이미 19:4절에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자신의 유일한 언약의 대상으로서 절대적인 보호와 섭리로 역사를 통하여 인도하신 것이다. 19장 5절에 표현된 “(보배로운) 소유물”로 이스라엘을 삼으신 것 자체가 이미 이스라엘이 누리는 절대적인 권리임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십계명에는 두가지 내용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규범(1-4계명)이고, 또하나는 언약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규범이다.(5-10계명) 전자는 후자의 기초가 되며, 후자는 전자가 없이는 무의미하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져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온전해진다. 그리고 이 두 내용은 앞으로 중재자를 통하여 줄 언약조건의 주제들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6)언약조건(2) : 중재자를 통하여 준 조건․규범(출21-23장)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나머지 언약의 세부적인 부분들(21-23장)을 중재자인 모세가 전달해줄 것을 청원하였고 이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재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어진 언약의 조건인 것이다. 이것은 조약이나 관계를 맺을 때에 원칙적인 사항만을 당사자들이 정하고 세부적인 사항은 중재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고대와 현대의 외교적, 정치적 전례와도 일치한다. 이 본문은 20장과 언약의 조건이라는 주제 하에 연속성을 가진다.

        7)언약비준예식(출24:3-8)
        이제 백성들은 언약의 근본적인 조건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고, 또 언약의 세부적인 조건들을 중재자 모세를 통하여 간접으로 들었다.(24:3) 이어서 나오는 본문은 언약비준예식을 보여준다. 두 번의 예식이 나오는데 이 두 예식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명확하게 구별된다. 전자(24:3-8)는 어떤 공식적인 관계가 수립되는 것, 즉 비준예식을 나타내고 후자(24:9-11)는 그 관계가 합법적으로 수립된 이후에 가지는 비준 축하 예식이다. 따라서 이 두 예식을 한 사건(언약수립) 속에 연속된 두 국면, 즉 언약비준예식 자체(24:3-8)와 언약비준 축하연회(24:9-11)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공적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언약을 지킬 때에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임할 것이며 깨어버릴 때에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따를 것이다. 시내산 언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최초의 언약이라는 점에서 축복과 저주의 요소가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역사가 진행될수록 그러한 부분들은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8)축하연회(출24:9-11)
        시내산언약의 마지막 본문은 언약비준을 축하하는 축제이다.(24:9-11) 고대나 현대나 공적인 관계형성은 엄숙하여서 생명을 담보로 한다. 그러나 이제 그 엄숙한 순간이 지나가면 긴장이 완화되고 그렇게 어렵게 해서 완성된 관계를 축하하는 기쁨의 시간이 찾아온다. 이 상태는 보통 관계에 있어 ‘샬롬’의 상태로 표현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24:11) 외형적인 표시로 드러난다. 이 본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언약의 축하 피로연’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두가지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체결된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의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알현과 경배, 둘째로 언약적인 공동 식사의 두 요소로 볼 수 있다.
          이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의 대표들인 “존귀한 자”들이 하나님을 보고 만날 때 죽거나 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의 언약이 완성되었으니 이스라엘의 대표들은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축제를 벌이는 것이 허용되었다. 첫 만남은 긴장되고 위험한 것이었으나(19:10-25), 둘째 만남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공적인 언약 관계는 형성되었다.


    B. 모압언약

     
    신명기 29:1을 모압언약의 결어로서 이해할 때, 이 절 가운데 표현된 두 언약인 시내산언약(호렙언약)과 모압언약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전제되어 있는 것은 첫째 언약인 시내산언약의 신적인 권위이다. 첫째언약과 둘째 언약의 동질성을 드러냄으로서 둘째 언약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언약, 모압언약의 새로운 변화는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갈 때’(11:30, 27:10), ‘에발과 그리심’(11:29, 27:12-13), 그리고 ‘장로와 레위인 제사장들’(27:1,11)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것이다. 현재 모세와 함께 모압에서 언약을 맺는 기초를 세우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래에 건너고 나서 미완성된 언약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 즉 첫 언약의 ‘현재화’나 ‘현실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언약을 갱신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압언약의 도입부는 1:5-4:43이며 이 거대한 도입부에 대한 결어는 4:44,45이다. 4:45-49까지는 모압언약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언급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4:45,46), ‘요단강 저편’(4:46,47,49). 신명기의 현재적인 상황은 사막여행 끝의 모압 땅인데, 이제 이스라엘의 가장 본래적인 출발점인 출애굽의 상황에 들어가서 거기서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사건에 기초하여 중대한 내용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신명기에서는 드물게 쓰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시간일치’는 과거의 시내산에서의 사건의 본질이 여전히 현재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간일치의 통일성은 5:2-3에서 호렙산에서 첫 언약에 참여한 세대와 현재 모압평원 위의 세대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을 나타낸 것과 일치한다. 결국 현재의 특수한 목적인 언약갱신을 위하여 모압평원 위의 현재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호렙산(시내산)위의 상황과 다를바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1)언약관계 정의(신26:17-19)
        26:17-19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선포된 언약관계 정의의 가장 명확한 형태를 읽는다. 동시에 여기서 ‘신명기의 심장부분’을 읽는다. 26:17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서 선언하는 내용이며(“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 선언은 “우리는 다른 어떤 신도 우리의 신으로 삼지 않겠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스라엘이 한 선언의 실제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제시하는 언약적인 조건에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26:18-19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선언한 것(“너는 내 백성이다”)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세가지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서약하신 것이다.(보배로운 백성, 지존자, 거룩한 나라) 
          시내산언약에서는 언약관계에서 한 당사자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졌으나, 모압언약에서는 양 당사자의 입장이 다 반영된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신26:18-19이 출19:5-6을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중재자 모세를 통한 교섭(신5:1-6:4)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것을 모세가 명령하는 것이 5:1에 시작되었다가 자신의 말로 명령하는 것이 시작되는 것은 6:5이다. 이 과정을 통해 모세가 신적권위를 과정이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의 주요 관심사는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중재자 모세이다. 5:4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했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는 방식의 관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당사자인 이스라엘을 만나시는 과정 속에서 모세를 택하시고 그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신다.

        3)언약당사자의 만남(신5:4-5)과 언약조건(신5장-26장)
        모압언약 역시 시내산언약의 전례를 충실히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백성들은 직접 대면함으로 언약이 체결되어진다. 5:5는 모세가 언약의 중재자요 언약법의 교사로서 백성에 의해서 요구되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인준된 사실이 다음의 단락에서 취급되는 준비를 한다. 이런 구조를 통하여 십계명(신5장)―주요법설교(신6-11장)―모압언약 세부법(신12-26장)의 연관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지만 그 이후의 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신 것이다.

          언약조건(1) : 언약 당사자가 직접 준 조건․규범(신5:6-22)
          언약조건(2) : 중재자를 통하여 준 조건․규범(신6-26장)

        하나님의 언약적인 약속과 백성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신명기에서 볼 수 있는 두가지 핵심주제이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관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오늘날’ 모압에서 근본적으로 선언되었다.(26:18-19)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서 이스라엘이 특혜를 누리는 위치는 오직 하나님이 제시하는 언약의 조건에 머물 때만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언약관계는 한편으로 이미 ‘성취된’ 것으로서(27:9-10) 언약조건을 지킬 권면의 근거가 된다. 또 한편으로 언약관계는 ‘조건적인’ 것으로서(28:1,9) 언약조건의 계속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조건에 대한 결과의 내용들이 26:16-28:69의 본문에 나타나 있는데 모압/현재와 세겜/미래의 언약갱신제사로 구분되어 관련되어진다. 이 본문을 시간과 장소와 관련하여서 다음과 같이 배열할 수 있다.

           26:17-19 모압/현재
           27:1-8 세겜/미래, 27:9-10 모압/현재, 27:11-26 세겜/미래
           28:1-2 모압/현재, 28:3-6 세겜/미래, 28:7-15 모압/현재, 28:16-19 세겜/미래,
           28:20-68 모압/현재

        이 본문들의 주제는 축복과 저주, 서약 등이 포함된 언약갱신제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언약갱신이 두 장소(모압/세겜), 두 시간대(현재/미래)에서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문이 가지는 의도는 언약의 중재자 모세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기 전에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결코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러므로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는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고 나서 견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언약갱신을 죽기 전에 준비하여야 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세대교체가 언약갱신의 또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특히 5:2-3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시내산언약의 출애굽 1세대와 현재 모압언약의 출애굽 2세대를 동일시하는 것은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모압언약의 실제적인 언약갱신제의를 서술하고 나서 29:11-15에서 다시 현재의 언약이 미래의 세대를 위한 것임을 말한다. 즉 과거와 현재의 시간일치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일치가 신명기 내에서 일어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요단강이라는 자연적인 경계로 인해 두 그룹으로 나누어질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경계로 말미암아 생긴 긴장에 대해서 보고하는 수 22장의 경우와 같은 사건이 하나님나라의 통일성을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언약갱신을 요단 동편과 서편의 두 장소에서 나누어 행하게 되었고 이로서 미래의 통일성이 보장되었다.
          이러한 본문의 특성들은 모압언약이 최초의 언약이 아닌 갱신되는 언약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중요한 과제는 이렇게 시간적으로, 장소적으로 차이가 난 가운데 형성되어져야 할 언약갱신이 사실상 하나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두 언약이 아니라 ‘두 장소/두 시간대’에서 일어나는 한 언약‘임을 드러난다.
           모압에서 한 일 : 1. 언약법(5-26)  2. 언약관계의 선언(26:17-19)
           세겜에서 할 일 : 1. 언약제사, 공동식사, 언약문서작성(27:1-8)
                            2. 축복과 저주의 선언(28:3-6, 16-19)
                            3. 12서약(27:15-26) 

        4)언약비준예식(신27-28장)
        모압과 세겜에서의 언약갱신 예식은 다음의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언약문서의 작성(27:2-4,8), 언약체결제의(27:5-7), 언약의 공동식사(27:7), 축복과 저주의 선포(27:11-13, 28:3-6, 16-19), 서약(27:14-26)


    C.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의 비교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은 각각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체결과 언약갱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두 본문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같은 신학적 구조를 가지며, 동일한 언약형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두 언약은 서로를 보충하며 증명한다. 여기에서는 각 본문의 통일성과 주제를 중심으로 비교하되, 두 본문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라는 관점에 살펴볼 것이다.

      1. 언약관계의 정의(출19:3-8/신26:17-19)

        1)백성이 여호와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언약체결의 첫 번째 관건은 언약 당사자가 쌍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즉 서로의 관계 정의를 밝히는 것이다. 여호와 편에서는 이스라엘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백성은 여호와는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시내산언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부분에서 모압언약과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시내산언약은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대신에 그것을 전제로 하고 필수적으로 따라야하는 언약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출19:5)
          따라서 이러한 외형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 언약의 실제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출애굽기의 시내산언약이 언약의 한 당사자인 여호와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고대 근동의 불평등조약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서 쌍방간의 선포 대신에 약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의 선포의 실제적인 의미, 즉 이스라엘의 순종에 관심을 둔 것이다.

        2)여호와는 백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두 언약의 유사성 가운데 가장 특이한 부분이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세가지 약속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시내산언약 : 출19:5-6 ― “보배로운 자․제사장나라․거룩한 나라”
          모압언약 : 신26:18-19 ― “보배로운 백성․지존자․거룩한 나라”

        이 세 약속은 실제로 세가지 다른 종류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약속,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보배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약속의 내용은 첫 번째 약속을 보충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약속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제사장나라/지존자), 시내산언약의 ‘제사장나라’는 기능적인 의미(제사장의 역할)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특권,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이런 의미에서 모압언약의 ‘지존자’의 의미와 유사하다. 이렇게 두 언약의 약속들은 사실상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약속들은 하나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두 약속 사이에 역사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모압언약의 약속들은 철저히 시내산언약의 약속들을 의식하고 있고 그것에 근거하여서 모압언약의 문맥 속에서 재정리하고 있다.
     
        3)언약관계 정의의 역사적인 관련성과 본문 속에서의 위치
        역사적인 관련성을 생각할 때 쌍방의 선언으로 된 모압언약이 실제적으로 표현된 시내언약 보다 후대의 것이고 시내산언약의 표현에 의존하여서 신명기의 신학적인 목적에 맞게 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시내산언약의 표현은 고대근동의 현실적인 표현에 가깝고 모압언약의 표현은 훨씬 더 신학적으로 정리되어서 원리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또한 시내산언약과는 달리 모압언약에서 언약관계정의(신26:17-19)를 모압언약본문의 후반부에 위치한 것을 볼 때, 시내산언약은 ‘시간적 순서’로 표현하였으나 모압언약은 ‘신학적 순서’로 표현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출19:3-8이 현실 그대로의 표현이라면, 신26:17-19은 후대의 것으로 출애굽기를 의존하고 그것을 새롭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언약 당사자들의 직접 만남(출19:9-25/신5)

    출19:16-19은 단순한 신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당사자들의 직접만남을 의미한다. 언약관계를 공적으로 수립하기 위하여 언약당사자들이 대면하는 것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당사자로서의 연약함 때문에 중재자로서의 모세가 이 만남을 위하여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모압언약에서는 백성들이 그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신5:4에 이 만남이 명확하게 표현되었으며(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여호와께서 너희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이 만남의 현장을 짧게 보고하고 있는 것은 모압언약의 보고가 시내산언약의 보고의 압축형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백성의 즉각적인 반응은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백성들은 중재자를 요구하게 된다. 이것은 또한 시내산언약 본문에 비하여 모압언약 본문에 새로운 요소인 ‘주요법에 의한 모세의 설교문’(신6-11장)이 도입되었다. 모압언약에서의 새로운 요소는 백성들이 언약조건에 순종하면 누리게될 번영(신5:29,33, 6:3)이었다. 이것은 모압언약에서 법에 대한 순종이 강조된 것과 연관되며 신44:45-28:68에 많이 나오는 축복에 대한 암시와 연관된다.

       시내산언약의 법체계 : 1.십계명(출20장)  2. 시내산언약 세부법(21-23장)
       모압언약의 법체계 :
         1. 십계명(신5장)  2. 주요법에 의한 모세의 설교(신6-11장)  3. 모압언약 세부법(신12-26장)

    모압언약에서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일 뿐 아니라(신5:28) 그것을 가르치는 자로서 서게 된다.(신5:31, 6:1) 양 본문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모든 것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논리적이며 조직적이며, 새로운 요소인 ‘주요법에 의한 설교’(신6-11장)가 있는 모압언약 본문은 시내산언약 본문의 묘사를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3. 하나님의 법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모세의 권위(출19:9,20, 20:18-21/신5:23-6:3)

    중재자로서의 모세의 권위가 준비되어지는 과정은 시내산언약에 잘나타나 있다.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 의해서도 요구된 것이다.(출19:19-20:21)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과정을 통해서 된 것이다. 모압언약에서는 이러한 준비과정은 보이지 않지만, 모세의 중재자로서의 위치는 십계명이 언급되기 전에 이미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신5:5)
      모압언약에서 준비과정은 생략되었지만, 언약법이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주어지던 것이 중재자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과정은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중재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주시게 된다. 출20:19, 24:3에서 모세는 ‘전하는’ 혹은 ‘선포하는’ 역할을 하는데 비해, 신5:31, 6:1에서는 ‘가르치는’ 기능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모세의 권면적 말과, 법에 순종할 경우 축복이 주어질 것도 추가되었다. 이것들은 모세가 받은 법의 교사로서의 사명과 부합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모세의 권위에 대해 모압언약은 시내산언약을 자세히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 언약조건 : 십계명(출20:1-17/신5:6-22)․세부법(출 20:33-23:19/신6:4-11:25, 12:1, 26:15)

    두 언약에 있어 이 부분에 관한 공통점은 십계명이 인용상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의 우선성에 연관된다. 시내산언약에서 십계명의 우선성은 출24:3-8의 법적인 용어의 사용을 통하여 나타났다. 즉 ‘여호와의 모든 말씀’(출2:43) 자체는 십계명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직접, 간접으로 주신 모든 말씀을 가르킨다. 모압언약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발견한다. 십계명목록 뒤에 신5:22에서 “더이상 추가하지 않으리라”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십계명의 완결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언약조건으로서 십계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신명기에서 주요법을 통한 모세의 긴 설교(신6-11장)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명기가 출애굽기를 의존하고 있으며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압언약에만 있는 주요법을 통한 모세의 긴 설교는 모세가 맡게된 ‘교사’로서의 역할과 직결된다. 이 주요법에 의한 모세의 설교는 십계명 중에서 1계명에 기초한 것이며 신명기 세부법(신12-26장)도 십계명을 따라서 정리된 것이라면 십계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는 모압언약이 시내산언약을 모체로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5. 언약비준예식(출24:1-11/신27, 28:3-6, 16-19), 축복과 저주(출23:20-33/신11:8-28, 28장)

        1)언약문서의 기록(출24:3,8/신27:2-4,8)
        모압언약에서 동일한 목적을 가진 행동이 시내산언약에 비해서 길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모압언약에서 차이나는 점은 문서가 쓰여질 재료(‘거대한 돌’)가 명시되었고, 기록에 대한 세밀한 준비가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모압언약의 신학적인 주제인 언약법에 대한 순종의 강조와 관련된다.

        2)언약의 증인(증거물, 출24:4/신4:26, 30:19, 31:28, 32:1)
        모압언약의 ‘증인’에 대한 언급은 모압언약 본문(신4:45-28:69)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오직 그 밖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돌이 아니라 다른 대상이 증인으로 역할한다.(하늘과 땅) 시내산언약에서도 증인(증거물)이 약하게 표현되었다. 모압언약에서는 예식부분이 많이 축약되었고 그 주에 증인(증거물)이 생략되었다. 이것은 신명기의 주제인 언약법에 대한 순종의 강조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모압언약에서도 거대한 돌이 세워졌지만 이것은 증거물로서가 아니라 언약법의 문서로 건립된 것이다.

        3)언약체결제사(출24:4/신27:5-7)
        두 언약에서 제사는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 혹은 여호수아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책임있는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 그 중에서 그들의 대표들이 드리는 것이다. 두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그룹은 둘이다. 시내산언약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젊은이들’과 ‘이스라엘 자손의 존귀한 자들’이고, 모압언약에서는 ‘장로들’과 ‘레위인 제사장들‘이다. 모압언약에서 장로들이 모세의 명령에 참가하는 것은(신27:1) 그들이 미래/세겜에서 언약체결 예식의 어떤 부분의 수행을 감당할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레위인 제사장들이 모세의 권면에 동참하는 것이(신27:9) 미래/세겜에서 그들이 어떤 부분을 수행할 것을 의미하는 것과 상응한다.(신27:11-13, 14-26)

        4)축복과 저주(출23:20-33/신27:11-13,28:3-6,16-19)
        시내산언약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축복과 저주의 균형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축복만을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언약체결예식이 진행되기 전이다.(출23:20-33) 시내산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첫 번째 언약이기 때문에 아직 저주의 위협이 필요없다. 오직 피 뿌림을 통한 서약에 이스라엘이 참여해야하고 여기에 어느 정도 저주의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약체결예식에서의 피의 예식은 언약을 지킬 때의 생명을 의미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의 죽음을 의미하여 죽음은 저주의 요소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내산언약에 있어서 저주에 대하여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고 오직 격려하는 축복의 선언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반면 모압언약에는 두 종류의 축복과 저주가 나타나있다. 첫째는 모세가 현재의 모압에서 설교형태로 제시하는 축복과 저주(신11:8-28,28:1-2,7-15,20-68)이며, 두 번째는 레위인 제사장들이 미래의 세겜에서 선포할 축복과 저주(신11:29,27:11-13,28:3-6,16-19)이다. 이는 시내산언약과 명확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러한 차이는 시내산언약을 맺고 난 뒤 얼마 안되어 이스라엘이 황금송아지를 섬긴 것과 같은, 여러 가지 범죄로 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5)서약(출24:6-8/신27:14-26)
        출24:6-8의 피의 제사가 공적인 관계형성에서는 서약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제단에 피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서약을 의미하고(출24:6), 백성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백성의 서약을 의미한다.(출24:8)
          모압언약에서는 하나님 편에서의 서역을 볼 수 없다. 신27:15-26을 서약으로 간주한다면 이것은 백성 편에서의 서약인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점을 고려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고대근동의 불평등 조약들은 강대국의 서약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조약들에 약소국만이 서약에 참여하며 이 현상이 모압언약에서 발견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모압언약에서는 언약의 특별한 면, 언약법의 준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첫언약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 엄중히 언약법을 지킬 것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6)결론―“이스라엘과의 언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
        이 모든 것을 정리할 때 두 언약에 대한 각 본문의 역사적인 상관성을 정리하면 시내산언약 본문은 모압언약의 기본으로서 먼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언약은 모든 내용에서 거의 대부분이 서로 일치한다. 전체적으로 시내산언약 본문은 보다 원초적인 표현을 쓰고 있고 연대기적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모압언약 본문은 더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며 신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기술되었다. 중요한 차이점은 하나는 첫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갱신된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압언약은 시내산언약을 철저히 근거하고 있으며 그 위에 갱신되어야 할 언약의 내용들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택하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점진적인 계시의 발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호렙산 언약, 모압땅 언약

    요단강 이쪽 편에서 못들어가는 저쪽 편 약속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을 해요.
    오늘 신명기 5장에서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에 대해 말씀하세요

    그 내용은 잘 아는 십계명으로 이어지는데요. 출애굽기에서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것으로 나오죠. 신학에서 여러 설이 있는데 시내 산과 호렙 산은 같은 산의 의미로 보고 이 산의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답니다

    신명기 5장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호렙산에서 주신 언약은 이스라엘의 조상과 세운 것이 아닌 것과, 출애굽한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 한정이 되는 것을 꼭 알아두어야 해요. 그리고 또 이 말씀은 신명기 29장에 대구가 되어요

    신명기 29장
    1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13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서 있는 자와 #오늘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이니

    호렙에서 세운 언약 외에 모압 땅에서 세우신 언약이 신명기 29장에 나오는데요.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신다고 하구요. 대상이 오늘 함께 있는 자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 라고 해서 이 언약의 대상에 현재의 우리가 포함되어요

    이렇게 신명기의 서로 다른 두 언약을 숙지하지 않으면 성경에서 반복해서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왜 언급이 되는지, 나는 어떤 언약의 대상인지 알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8장도 이해가 되지 않죠

    히브리서 8장
    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8:9에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 이것이 호렙 산에서 한 언약이예요. 10절에 그 날 후에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이라고 미래형으로 적혀 있는 것은 신명기 29장의 대상이 거기 있지 않던 당시로 보면 미래인  현재 우리가 그 언약의 대상에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내용으로 히브리서 8:10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것을 신명기 30:6에서는 마음에 할례로 말씀하세요

    신명기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이 두 언약이 결국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이 됩니다.
    신명기 30:6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다는 복음과 신명기 6:5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이 각각 신명기 29장 언약과 신명기 5장 언약의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일전에 신약을 묵상하며 정리한 적이 있던 내용이지만 최근 신명기를 묵상하며 다시 정리하게 하시네요. 새신자 분들이나 교회에 오래 다니셔도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일년에 한 두번은 주일 설교에 반복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생각이 되는데요. 실제 강단에서 잘 들을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있어요


    신명기(한국신학, 김윤아)

    1. 들어가는 글

    신구약을 망라하여 그 존재감이 분명한 책을 꼽으라면 단연 신명기다.
    신명기는 모세오경을 결론짓고 이어지는 역사서를 열어 준다.
    신명기에 언급된 구절이나 내용은 구약 안에서 언약신학의 중심적인 틀을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신약에 와서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때 세 번 모두 신명기 구절을 인용한 것을 비롯하여 83회나 등장할 정도로 성서신학적 근거를 함축한다.
    그럼에도 독자에게 신명기는 ‘반복된’ 율법전서로서 딱딱하고 복잡한 책이라는 인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명기는 반복 편집된 두 번째 율법이 아니라 광야 시대를 마감하고 가나안 시대를 목전에 둔 이스라엘의 신세대를 향해 외치는 모세의 고별 설교집이다.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모세가 광야 세대에게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갱신을 주지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강화하고자 전한 메시지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명기로의 접근을 시작하는 본고는 신명기 개관을 통해 복잡해 보이는 신명기 본문에 쉽게 다가서도록 안내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신명기의 명칭을 살펴보고, 모세오경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신명기의 위치를 짚어본 다음, 신명기의 구조를 통해 모세의 세 설교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 제시된 핵심적인 메시지인 언약-순종-생명의 관계를 통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2. 신명기의 명칭

    우선 신명기라는 제목에 드러난 신명기의 성격을 살펴보자.
    칠십인역(LXX)의 중국어역을 그대로 따른 우리말 성경은 책명을 ‘신명기’(申命記)1)로 옮겼는데 이는 원문의 의도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맛소라(BHS)는 히브리문학 관례에 따라 첫 절 ‘엘레 하드바림’(‘이것은 그 말씀들이다’) 혹은 단순히 ‘드바림’(말씀들)을 신명기의 제목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칠십인역(LXX)은 신명기 17:18의 히브리어 ‘미쉬네 하토라 하조트’(‘이 율법서를 등사하여’)를 “두 번째 율법”(토 듀테로노미온 튜토 에이스 비블리온)으로 오역했는데, 이 용어를 따라 영어는 ‘Deuteronomy’로 명칭했다.
    이는 오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Deuteronomy’란 이름이 계속 사용된 것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율법의 많은 부분이 신명기에서 반복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이 신명기를 ‘두 번째 율법’으로 명명할 정도로 신명기는 출애굽기의 ‘계약법’(20:22-23:19)에 평행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오경 속에서 신명기가 ‘두 번째 율법’으로 다뤄진 데는 ‘첫 번째 율법’이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두 번째 율법”(듀테로노미온)보다 신명기의 본질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제목은 ‘엘레 하드바림’이다.
    신명기는 ‘드바림’(), 즉 말씀이다. ‘드바림’의 어근인 동사 ‘다바르’()는 1:1 “엘레 하드바림” 다음에 6절까지 세 번이나 등장한다. 즉, 말한 자는 모세이며(1절), 그는 여호와가 말하라고 명한(3절) 내용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이는 여호와시며 모세는 단지 그분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6절). 바꿔 말하면 그 말씀의 근원은 하나님이요, 말씀의 내용은 여호와가 명한 것이며 모세는 내용을 전달하는 중재자임을 명시한다. ‘다바르’는 신명기 전체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수사학적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는 헬라어 ‘로고스’()2)와 동일하다.3)
    신명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율법(, 토라)으로 삼아 모세가 설명한 ‘두 번째’ 말씀이다. 모세는 지난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회상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 당부를 한다. ‘엘레 하드바림’에는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꼭 이대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비장한 분위기가 서려 있다.4) 그러나 그것은 강압적인 촉구가 아니라 다양한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한 설득이며 격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명기는 하나의 율법책이기에 앞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설명하는 책으로 주시해야 한다.

    3. 모세오경 속의 신명기

    전통적으로 유대 랍비들은 신명기를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의 기획적인 회고로 시내산 언약의 조항들을 새로운 상황에서 확대 설명한, 독립적5)이면서도 연속적인 오경 속의 한 책으로 이해했다. 원래 한 두루마리였던 오경을 다섯 부분으로 구분한 목적이 무엇이든지간에 오경 구분의 기원은 칠십인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6) 오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학적 구조는 상당 부분 상호 연관성과 통일성이 있으며 동시에 각각의 독립적 문학 단위로도 분리될 수 있다.
    모세오경 전체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창세기 1-11장은 오경의 서론 역할을 하며 태초의 역사를 다룬다. 창세기 12장 이후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묘사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민족과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신 이래, 오경에서 이 약속이 거듭 나타나며 각 책을 연결한다. 오경의 각 책에서 나타나는 주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과 연결되는데 그것은 자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그리고 땅에 대한 약속으로 요약할 수 있다.7) 이러한 주제는 오경의 각 책에 산재되어 나타나지만 주로 창세기는 자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출애굽기와 레위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민수기와 신명기는 땅에 대한 약속을 전개한다.
    오경을 통일시키는 하나의 신학 주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오경 신학의 핵심이 시내산 언약과 연관해 구성된다는 데에는 대다수의 학자가 동의한다. 그 가운데서도 오경을 모세가 기록한 한 권의 책으로 보는 입장에서 전체의 문학 구조를 분석하고 오경 전체의 중심 사상과 주제를 추적하려고 시도한 세일해머(J.H. Sailhamer)의 작업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8) 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시작되는 창세기의 기록들과 출애굽, 광야 생활,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한 선상에 놓고 저자의 관점을 놓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오경의 중심점을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으로 제시한다.9)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 19장에서 민수기 10:10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직접 선포한 말씀이다. 오경 속에서 시내산 언약은 첫 번째 말씀, 즉 제1의 법이고 그것을 상기시키고 재차 설명하는 신명기는 제2의 법이 된다. 첫 번째 법은 시내산에서 주어졌고, 두 번째 법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모압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법은 1세대인 출애굽 세대를 위한 법이고, 두 번째 법은 2세대인 광야 세대에게 선포한 법이다. 그러므로 신명기(Deuteronomy)라는 명칭은 오역에서 비롯되었지만 오경의 전체적 입장에서는 그것마저도 다분히 의도된 듯 적절하게 여겨진다.

    4. 신명기의 구조

    신명기의 구조에 관한 연구는 시대와 신학적 경향에 따라 신명기 구조의 성격과 강조점도 변화를 거쳐 왔다. 전반적으로 학자들은 신명기 본문을 통시적인 접근보다는 고대근동의 법과 신명기의 법을 비교함으로써 조약 구조로 해석하는 데 이의가 없다. 이는 고대근동의 힛타이트 조약문서의 구조를 신명기 본문의 구조와 해석에 도입한 것이다. 코로섹()은 힛타이트 종주 조약 문서를 여섯 항목으로 분석하였고, 클라인(M.G. Kline)은 이 조약 구조를 다음과 같이 신명기에 적용하였다.10)
    이러한 구조는 신명기가 힛타이트 종주 조약 양식과 다소 유사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오경의 전체적인 틀 안에서의 기능과 본문에서 강조하는 내용을 고려한다면 자연스럽지 않은 구조이다. 더욱이 노트(M. Noth)에 의해 신명기가 단일 작품이 아니라 서론과 결론이 후대에 편집되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이 견해는 차츰 힘을 잃게 되었다.
    신명기 연구가 오랫동안 본문 자체보다 신명기를 해석하기 위한 그 이면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주력해 옴으로써11) 결과적으로 뒷전에 밀려나 있던 신명기 본문의 문학적 구조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이르러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크리스텐센(D.L. Christensen)의 작업은 신명기의 통일적인 짜임새를 보여주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신명기를 다섯 단락으로 나누고 각각이 12-26장의 언약 규정을 핵심으로 하는 교차대칭구조를 이룬다고 분석한다.12)

    A 외부 구조: 과거 회상(1-3장)
    B 내부 구조: 대 연설(4-11장)
    C 중심 내용: 언약적 규정(12-26장)
    B´내부 구조: 언약 의식(27-30장)
    A´외부 구조: 미래 전망(31-34장)

    즉 A-B-C-B´-A´의 교차(chiasm)로 C(언약 규정, 12-26장)를 중심으로 네 단원이 펼쳐진다. 이 구조에 의하면 신명기의 핵심은 언약 규정, 즉 율법이다. 그러므로 신명기가 언약을 중심으로 한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명기 본문의 여러 구문론상의 장치가 이러한 구조를 수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B와 B´의 연결이 분명치 않은 점으로 인해13) 크리스텐센이 신명기를 이 구조 안에 인위적으로 집어넣은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신명기 구조에 대한 이해는 곧 본문에서 모세가 전달하려는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도 신명기는 자체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을 모세의 설교 구조라 할 수 있다. 즉, 설교를 도입하는 각 부분은 신명기가 모세의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① 1:1-4:43
    ‘’(엘레 하드바림) ‘이것은 모세가 …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다’(1:1)

    ② 4:44-28:68
    ‘’(브조트 하토라)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이다’(4:44)

    ③ 28:6914)-30:20
    ‘’(엘레 디브레 하브릿트) ‘이것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언약의 말씀이다’(28:69)

    이 구조는 31-34장은 포용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지만 설교에 관한 한 신명기 자체의 구조를 그대로 따른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31-34장은 모세의 노래와 모세의 축복 그리고 모세의 죽음에 관한 서술이 담긴 후기라 할 수 있다. 32장의 모세의 노래와 33장의 모세의 축복은 산문체인 본문과는 달리 운문 형태를 띰으로써 모세의 첫 번째 설교와 31-34장은 신명기 사가에 의해 후대에 첨가된 자료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2장은 모세가 ‘노래’로 전하는 마지막 설교라 할 수 있다.

    각 설교에는 제목이 있어 첫 번째 설교는 ‘말씀’(드바림)으로, 두 번째 설교는 ‘율법’(토라)으로, 세 번째 설교는 ‘언약의 말씀’(디브레 하브릿트)으로 시작하는데, 네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31:1-34:12에는 이러한 형식이 생략되었다. 이렇게 볼 때 신명기는 말씀, 율법(토라), 언약이라는 제목이 붙은 세 개의 설교인 셈이다. 비평주의에서는 세 설교의 제목이 삽입된 것은 여러 시대에 걸쳐 책이 편집된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분량으로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설교는 짧은 데 비해 시내산 언약(12:1-26:19)이 포함된 두 번째 설교는 긴 편이다. 그래서 노트는 1-4장을 신명기적 역사서15)의 신학적 서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4:44-30:20이 본래의 신명기이고, 1:1-4:43과 31-34장은 신명기 역사가가 첨부한 서론과 결론이라고 본 것이다.16) 이러한 비평적, 편집사적 주장은 신명기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전선지서의 역사신학과 신명기의 신학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주지만 오경을 사경으로 만든다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5. 신명기의 메시지

    신명기를 설교 구조로 볼 때의 장점은 청중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짚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세의 설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별 흐름과도 연결되는데 이러한 시간적 배열에 주목하여 신명기를 살펴본다면 본문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데 유익할 것이다. 첫 번째 설교(1:6-4:43)는 과거를 회고함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다루고(1-4장, 9-10장), 두 번째 설교(4:44-28:69)는 현재에 이루어지는 시내산 언약 갱신에 대해(5장, 11장, 12-26장), 세 번째 설교(29:1-30:20)는 미래에 약속의 땅에서의 삶(27-33장)에 대해 다룬다. 마지막으로 후기(31:1-34:10)에서는 모세의 죽음을 보도한다. 복합적 형태를 띠는 후기를 제외하고 세 설교는 각각 서론과 서언으로 시작해서 본론인 모세의 말씀이 이어지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17) 본 장에서는 설교 구조에 따른 내용을 정리하고 그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를 살펴볼 것이다.

    5.1. 모세의 제1설교(1:1-4:43)

    일반적으로 1-3장을 신명기적 역사서의 서론으로 보는 신명기 사가는 첫 번째 설교에서 1-3장을 독립적인 단원으로 구분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본고는 신명기의 설교 구조를 따라서 1-4장을 첫 단락으로 다루고, 모세의 설교와 도피성에 관한 서술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1. 서론(1:1-5)
    2. 모세의 말씀
    1) 역사적 반성: 호렙산에서 모압 평원까지(1:6-3:29)
    2) 순종에 대한 권면(4:1-40)
    3. 도피성(4:41-43)

    모세는 요단강 맞은편인 광야에서 애굽에서 나온 지 제40년 11월 1일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호렙산에서 가네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그러한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 사십 년이나 걸렸다는 사실과 대조시키려 한 것 같다.18)
    첫 번째 설교의 초점은 이스라엘이 호렙산19)에서 모압 평원에 도달하기까지 최근의 사건들을 회고함으로써 시내산 언약과 관련해 과거의 사례들을 재조명하여 그들의 조상이 왜 모세를 포함해 가나안 진입에 실패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먼저는 역사적 교훈에 있어 가장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최근의 일을 언급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모세 외에 새로운 지도자들을 허락하신 사건, 정탐꾼과 이스라엘의 반역, 트랜스요르단을 통과하여 일어난 전쟁 등으로 그 내용은 민수기에 나오는 것과 거의 유사하다.
    과거 그들의 역사는 순종과 불순종, 신앙과 불신앙의 반복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신명기 9-10장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가데스와 시내산 사이에서 사십 년을 방황하게 된 것이다. 세일해머는 이러한 역사적 반성은 과거는 이미 이루어지고 지나간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시작으로서, 본 설교는 전반부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에 강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20)
    전반부인 1:6-3:29이 실패한 이스라엘의 과거사를 반추했다면, 후반부 4:1-40은 실패한 과거사에 대한 평가를 기초로 하여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교훈한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실패를 통해 언약의 성취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피할 땅과 정복할 땅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하며 순종해야 함을 훈계한다. 모세의 첫 번째 설교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면 복을 받아 장수하리라’는 긍정적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즉, 역사적 교훈을 오늘 이스라엘에게 적용하면서 다음 설교인 언약 규정으로의 전환을 준비한다.
    4장 마지막 부분인 41-43절의 도피성에 관한 내용의 문맥적 위치는 신명기 구조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 중 하나다. 4:1-40은 모세의 설교이지만 41-43절은 해설자의 해설이다. 게다가 내용적으로는 신명기 19:1-13에서 요단강 서쪽의 도피성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는데 왜 굳이 이 지점에 기술되었는지가 문제다. 그로 인해 41-43절은 모세의 설교와는 상관없이 첨부된 부록으로 간주되거나21) 민수기 35:9-13과 여호수아 20:1-9의 도피성 규례를 잘 알고 있는 편집자가 이 지점에서 요단강 동편의 도피성을 후기삽입22) 했을 것이라고도 추정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가 불분명하다.
    세일해머는 요단강 동편의 도피성이 요단강 동편 지역 정복과 십계명 사이에 놓임으로써 율법 해석을 위한 가교적 문맥을 제공한다고 설명하는데 신명기의 구조를 고려할 때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23) 고의적으로 살인을 범한 것이 아니라면 율법에 따라 살인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한 자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어 또 다른 살인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도피성에 대한 기사는 다음 부분인 율법으로 진입하는 디딤돌이 되면서 동시에 함부로 살인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는 것이다.
    도피성의 이러한 율법적 기능을 복음적 의미로 한층 더 고조시킨 김기동의 해석은 매우 역동적이다.24) 과실로 살인한 자가 ‘피의 복수’(the avenge of blood)에서 벗어나 해 떨어지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달려 도피성에 들어가면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살게 된다. 김기동은 이를 율법과 복음의 관계로 다룬다. 곧 율법은 도피성으로 도망치는 자를 돌로 쳐 죽이려고 쫓아오는 자요, 복음은 살려고 죽을힘을 다해 뛰어온 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자와 같다. 그러므로 살인자를 정죄하여 죽이려는 율법의 부정적 이면에는 도피성을 통해 살 마음을 자극하여 생에 대한 애착을 불어넣어주는 긍정적 측면이 함께한다. 도피성은 율법의 한계인 사망을 극복하고 생명을 향해 열린 비상구인 셈이다. 이처럼 율법은 그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 죄에 따르는 저주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게 함으로써 살기 위하여 생명으로 뛰어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도피성 해석에는 김기동만의 각별함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에 대한 애착’이다. 그는 생명에 대한 애착을, 살인한 자로 하여금 도피성을 향해 달리게 하는 동인(動因)으로 그리고 죄를 능가하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그가 살고자 하면 살려 주신다. 그러므로 살려 하지 않는 자는 율법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나 누구든지 자기 양심을 앞질러 생명에의 애착을 가진 자는 살 수 있다. 김기동은 ‘가인의 표’(창 4:13-15)나 ‘십자가의 우편 강도’(눅 23:39-43)의 경우 역시 도피성의 이러한 의미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 그는 도피성으로부터 생에 대한 애착을 포착해내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풀어냄으로써 통전적(統全的) 시각을 견지한다.

    5.2. 모세의 제2설교(4:44-28:68)

    두 번째 설교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이라고 달린 부제가 말해주듯 율법에 대해 다룬다.

    1. 서론: 율법 소개(4:44-49)
    2. 모세의 말씀
    1) 권고와 경고(5:1-11:32)
    2) 신명기 법전(12:1-26:19)
    3) 축복과 저주(27:1-28:68)

    5-26장은 전반적으로 신명기 법전(Deuteronomistic Code)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5-11장은 율법의 일반적인 원리를 다루고, 12-26장은 가나안 땅의 새로운 상황을 반영해 시내산 언약을 확장 설명한다. 학자들은 12-26장이 신명기의 핵심 부분이라는 견해에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카우프만(Stephen A. Kaufman)은 신명기 12-26장의 신명기 법전과 십계명 사이의 평행 구조 분석을 시도했다.25) 실제로 신명기 12-26장의 규례와 법도가 십계명의 순서를 계승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십계명과 일관되게 부합되지는 않는다. 폰 라트(G. von Rad)는 출애굽기의 계약법이 신명기 내에 50퍼센트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26) 이는 신명기 법전이 가나안에 정착한 상황을 전제한 다양한 율법과 사례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출애굽 세대에서 광야 세대로의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는 양상을 반영해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목전에 두고 새로운 상황에서의 언약 갱신이 필요하다. 그래서 모세는 서론(4:44-49)에서 이스라엘의 현 위치와 과거 시내산 언약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더불어 그 시내산 언약은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신 5:3)임도 강조한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출애굽 세대와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들은 광야에서 소멸되었다. 그러나 그 언약은 지금도 순종하고 믿는 자들에게 항상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어 본론은 5장의 십계명을 시작으로 신명기 법전이 펼쳐진다. 학자들은 신명기 5장을 신명기 전체의 토라(율법)를 ‘캡슐 형태’로 정리한 본문으로 이해할 만큼 중요하게 다룬다.27) 신명기 법전은 십계명의 연장으로서 그 범위와 내용을 확장하여 해설한다. 하나님과 관련한 우상숭배 금지를 시작으로 하여 성결법, 구제법, 절기(신 11:26-16:17), 지도자와 재판장과 관련된 제사법,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 대한 법, 법정에 대한 법(신 16:18-21:9), 개인과 사회에 대해서는 결혼과 성(性)에 대한 법(신 21:10-26:19) 등을 기술함으로써 경제와 정치, 가족 관계와 상업의 질서, 이웃과 타민족에 대한 태도까지도 상세히 다룬다.
    두 번째 설교의 마지막 부분인 27-28장은 언약 준수와 불순종에 따르는 축복과 저주를 보여준다. 축복과 저주에 대해 다루는 27-28장은 축복보다는 저주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게 제시되었는데, 세일해머는 이는 결국 이스라엘이 언약에 순종치 않고 축복을 향유하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28) 이한영은 심각한 저주 부분은 궁극적으로는 언약 준수와 언약 갱신에 따른 축복의 길을 제시하기 위한 장치로 본다.29) 또 장일선은 28장의 축복과 저주는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30) 만약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다룬다면 축복과 저주가 절반씩 등장했어야 할 것이다. 모세는 설득의 설교자다. 그는 저주에 관한 부정적 내용을 나열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순종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설득의 비밀이 있다.

    5.3. 모세의 제3설교(29:1-30:20)

    모세의 세 번째 설교는 언약의 말씀들로서 앞서 말한 신명기 법전의 준수를 촉구한다.

    1. 머리말(29:1)
    2. 모세의 말씀
    1) 권고: 언약 체결(29:2-29)
    2) 경고: 언약의 내용(30:1-20)

    모세는 마지막 설교에서 마치 1-28장을 요약하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광야에서의 과거를 회상한다. 이는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구원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마지막 경고와도 같다. 본문은 역사적 회고(29:2-8)와 역사적 전망(30:1-10)이 짝을 이루면서 언약 갱신과 함께 이스라엘로 하여금 순종할 것을 당부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워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새 언약을 세우신다. 이 새 언약의 대상은 지금 모세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선 자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신 29:15)까지 포함시킴으로써 미래의 자손까지다. 시내산 언약의 실패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이다.
    모세는 이 마지막 설교에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살고 회복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재확인시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그들은 생명을 얻고 약속의 땅을 얻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망할 것이고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장구치 못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 놓인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모세의 소망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세일해머는 모세오경의 결론 부분인 신명기 30:1-10에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본다.31) 즉, 이스라엘 백성은 언젠가 실패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들이 쫓겨간 모든 곳에서 그들을 다시 모아 약속의 땅으로 불러들이실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순종의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마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세는 하나님과의 새 언약을 준행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를 위해 그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신명기 30:15-20에는 신명기의 메시지가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앞에 놓인 언약은 생명과 복, 사망과 저주의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택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의 애착을 가져야 한다. 즉 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명기 전체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이 부분은32)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순종을 역설한다. 순종의 결과로 얻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5.4. 모세의 행적(31:1-34:12)

    모세의 세 설교 뒤에 이어지는 31장 이하는 모세의 마지막 행적을 다룬 에필로그(epilogue)다.
    31-34장이 ‘후기’로 다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의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모세의 설교 이후에 첨가된 편집상의 흔적은 분명하다.
    31-34장은 신명기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오경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

    1. 모세의 고별사
    1) 모세의 마지막 지시(31:1-13)
    2) 모세의 노래(31:14-32:47)
    2. 모세의 죽음 보도(32:48-34:12)

    여기는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움, 모세의 노래와 모세의 죽음 예고, 모세의 유언, 모세의 죽음 보도 등 4개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모세의 설교가 끝나고 이제는 모세에 관해 설명하는 이야기가 묘사되는 것이다.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세 설교는 또한 모세의 고별사이기도 하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은 민수기에서 이미 예고되었고(20:12), 신명기는 이를 마무리한다.
    자신의 사명을 다한 모세는 물러나고, 이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의 몫이 주어진다. 또한 신명기 법전을 정기적으로 낭독함으로써 여호와의 계명을 잊지 않도록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책망, 경고, 호소, 약속 등이 담긴 모세의 노래 역시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모세는 노래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계약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할 것을 당부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율법의 말씀을 잘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세의 죽음에 대해 기록한 부분인 34:1-9은 신명기 본문에 덧붙여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도 획을 긋는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모세는 떠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권위가 아닌 그가 남긴 말씀에 의해 인도될 것이다. 신명기의 화자는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34:10)라는 평가로 신명기를 끝낸다.


    6. 나가는 글

    오경의 출애굽기-민수기가 주로 역사적 서술로 구성되었다면 신명기는 이와는 달리 신약의 요한복음처럼 신학적 관점과 그에 대한 내용을 풍부히 담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언약-순종-생명”의 메시지는 신명기 전체를 관통한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계속해서 강조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부여된 의무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순종과 불순종, 신앙과 불신앙, 신뢰와 반역 사이를 오가며 사십 년을 이어왔다.
    모세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이스라엘에게 유언과 같은 세 편의 설교를 전하고 있다. 제1설교는 광야에서의 실패와 배신의 과거를 회고함으로써 순종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하고, 제2설교에서는 확장 적용된 율법의 계명을 통해 순종의 당위성을 깨닫게 하며, 제3설교에서는 언약 갱신을 통해 다시금 순종에 대해 결단하게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언약에 순종하는 자는 생명을 얻으며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이스라엘 앞에는 늘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그것은 생명과 복, 사망과 저주에 대한 선택이다. 이 선택과 결단은 누구도 대신해 주지 않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순종은 생명을 택하는 법이요 첩경이다. 모세는 순종을 강조하되 율법적 강요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원하여 우러난 순종을 하도록 도전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새롭게 순종하도록 주문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스라엘보다 더 큰 순종의 의무와 책임이 있다. 신명기는, 우리가 비록 광야길 인생에서 불순종으로 인해 실패하고 좌절에 빠져 있을지라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이스라엘은 첫 언약 앞에서도 순종의 결단을 요청받았거든, 하물며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분량은 어떠하겠는가? 지금 우리는 모세의 메시지에 깊이 귀 기울여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각주

    1) 왕대일은 ‘신명(申命)’을 ‘거듭 강조하여 명령한다’라는 동사로 해석하여 신명기(申命記)는 ‘거듭 강조하는 계명,’ ‘제2의 계명’ 의 의미이며 신명기 17:18의 “등사하여”라는 의미보다도 신명기의 성격을 더욱 잘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왕대일, 『다시 듣는 토라』(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08), 32-33.
    2) 요한복음 1:1의 로고스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을 말씀으로 표현할 때 사용된 용어다.
    3) Duane L. Christensen, Deuteronomy 1-11, WBC 6A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2001), 7-8, 12-13.
    4) 왕대일, 『다시 듣는 토라』, 27.
    5) 신명기는 출애굽기-민수기와는 달리 서두에 ‘바브’(, and)가 빠져서 시작된다는 것으로 인해 오경 가운데 독립적인 책으로 다루어졌고 오경의 초기전승 과정과 관련된 가설을 양산해 냈다.
    6) J.H. Sailhamer, 『서술로서의 모세오경 (상)』, 김동진 역 (서울: 새순출판사, 1994), 28; Herbert Wolf,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entateuch (Chicago: Moody Press, 1991), 17-18.
    7) D.J.A. Clines, The Theme of the Pentateuch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78). 전정진, 『신명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12-15에서 재인용.
    8) John H.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Grand Rapids: Zondervan, 1992).
    9) Sailhamer, 『모세오경 (상)』, 72.
    10) 성주진, “신명기의 언약신학과 순종의 메시지,” 『교회와 문화』 22 (2009), 44.
    11) 19-20세기에 이루어진 신명기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Christensen, Deuteronomy, xlix-lxii.
    12) Christensen, Deuteronomy, 6.
    13) 송제근도 5-28장(모압 언약)을 중심으로 하는 유사한 구조로 분석한다. A(1-3장); B(4장); C(5-28장); B´(29-30장); A´(31-34장). 송제근,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서울: 두란노, 2003), 297-328.
    14) 맛소라(BHS)에서의 구절이며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29:1이다.
    15) 신명기를 기존의 역사서인 전선지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에 포함시켜 지칭한 것이다.
    16) J.A. Thomson, Deuteronomy: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History,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74), 15.
    17) 이러한 구조 분석의 틀은 왕대일의 견해를 차용한 것이다. 왕대일, 『다시 듣는 토라』, 73-74.
    18) Thomson, Deuteronomy, 82.
    19) 호렙산은 시내산과 동일한 산으로 호렙은 시내산의 신명기적 명칭이라 할 수 있다. 한동구는 신명기에서는 민족의 기원, 즉 민족정신의 출발점으로서 호렙산을 설정하였으므로 시내산과는 달리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설명한다. 한동구, “신명기의 역사적 사유와 신학,” 『구약논단』 17 (2011), 23.
    20) J.H. Sailhamer, 『서술로서의 모세오경 (하)』, 정충하 역 (서울: 새순출판사, 1995), 377.
    21) Jeffrey H. Tigay, Numbers, The JPS Torah Commentary Series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2003), 58.
    22) G. von Rad, Deuteronomy, Old Testament Library (London: SCM Press, 1966), 51.
    23) Sailhamer, 『모세오경 (하)』, 396. 왕대일도 비슷한 견해이지만 41-43절을 신명기사가의 입장에서 좀 더 미래지향적으로 해석하여 포로기와 연관하여 해석한다. 왕대일, 『다시 듣는 토라』, 178-9.
    24) 김기동, 『베뢰아원강』(서울: 베뢰아, 2005), 415-7.
    25) Stephen A. Kaufman, “The Structure of the Deuteronomic Law,” MAARAV (1978-79), 107.
    26) 계약법이 신명기 안에 적용된 예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Rad, Deuteronomy ,13-14.
    27) D.T. Olson, Deuteronomy and the Death of Moses: A Theological Reading (Minneapolis: Fortress, 1994), 40.
    28) Sailhamer, 『모세오경 (하)』, 463.
    29) 이한영, 『역사와 서술에서의 오경 메시지』(서울: 크리스챤 출판사, 2008), 297.
    30) 장일선, 『신명기』(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424.
    31) Sailhamer, 『모세오경 (하)』, 82.
    32) Patrick D. Miller, Deuteronomy,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0), 213. 장일선, 『신명기』(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447에서 재인용.

     




    1월 9일(월)

    살기 위하여(신명기 30:19) 레마안 티흐예(마안 하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살기 위하여(Now choose life)
    이제 삶을 택하라!


    살기(2421) 하야(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위하여(4616) 마안(maʽan)  מַעַן

    1. 목적,  2. ~때문에,  3. 열왕기하 8:19(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접속사 ~때문에, ~을 이유로, ~할 목적으로,~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움직이게 되는 원인에 대해 사용 / 왕하 8:19, 19:34, 시 6:5(4), 23:3, 25:7,11, 31:4(3), 44:27(26), 97:8, 122:8, 사 37:35.

    1절.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 기억 나거든(슈브) : 7725, 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슈브(shûwb)

    5절. 돌아오게 하사 - 보(bôw’) 935 בּוֹא

    1. 들어가다


    1-10 이스라엘이 장래 회복과 축복의 예언(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 임하는 은혜).
    11-14 계명은 알기 어렵거나,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복음의 도의 암시).
    15-20 생명과 축복을 택하라는 엄숙한 결론적 권고.

    본장은 모세의 마지막 설교를 마무리하는 부분으로, 이스라엘이 율법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저주를 받을지라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모세는 만일 불순종으로 저주를 받더라도 다시 율법을 기억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10절).
    이런 율법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지킬 수 있고 언제나 마음에 두고 행해야 하 큰 것이다(11-14절).
    천지를 증인으로 삼아 축복과 저주의 맹세를 하고 율법을 준수할 것을 다시 한번 권고하고 있다(15-20절).


    전장에 이어 본장에서도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모압 평지에서의 언약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장에서는 특히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조항은 법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는 90년대 중반 한인 사회 운동을 통해 탄생한 곡이다.
    청년학교의 최용탁이 가사를, 청년학교의 정승진이 곡을 만들었다.
    가사에 미주 한인 민권 운동이 마주한 반이민 물결이라는 도전과 거기에 대응하는 다민족 연대 전략을 담아냈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떠밀려서 왔더라도
    떠밀려 살지 않기 위하여
    씨 뿌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이제 새 맘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오천년의 쓰라린 역사
    꺽이지 않는 질경이 처럼
    이 땅에 자랑스런 코리안으로
    수많은 형제들과 어깨를 걸고

    당당하게 거대한 이 대륙에
    꿋꿋히 서기 위하여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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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를 불러서...증거를 삼노라

    -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축복과 저주의 언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모세가 천지(天地)를 증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1. 지금 맺고 있는 언약이 마치 언제나 요지 부동한 천지처럼 확실하고 불변하며 영구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함이다(4:26).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2. 이 언약 체결이 전우주적인 관심사가 될 만큼 중차대한 사건이란 점을 나타내기 위함이다(4:26).
    아무튼 이처럼 하늘과 땅을 의인화한 표현은 구약 성경에 종종 나타난다(창 4:11; 시 19:1; 사 1:2).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과 저주를 반길리 없다.
    모두가 다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작 참 생명과 참 행복을 향유(享有)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그것은 곧 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시 27:1), 그리고 참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시 16:2)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는 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생명의 도(道)를 따라 걷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백성들은 29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나라에 내던짐 당하게 됩니다(29:28).
    신명기 30장은 이렇게 포로된 자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자기의 땅과 집과 터전을 잃어버리고 포로된 이들의 처지만큼 처량한 처지는 없을 것입니다.
    포로들은 오직 다스리는 이들의 핍박아래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며 삽니다.
    나의 꿈이나 나의 내일, 미래의 계획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앞을 내다보아도 앞은 캄캄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포로들이 마주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어둠만 가득한 것 같은,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절망 앞에서 모든 인간은 깊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가축의 사료를 먹으면서 느꼈던 좌절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아들이 그 때 자신이 돌아갈 유일한 공간 아버지를 생각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2, 3절입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에게, 다시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시고, 마음의 껍질을 벗겨 할례를 베푸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5-7절).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그들이 돌아오면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몸의 소생과 심지어 가축의 새끼까지도 많게 해주신다고 하십니다(10절).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면인 마음에서부터 심지어 그가 기르는 가축의 새끼에 이르기까지 한량없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신명기 30장의 본문의 소제목은 ‘복 받는 길’인데, 그 핵심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가 누리는 삶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의 삶 입니다.
    나의 목소리도 아니고, 주위 사람들의 말도 아니고, 시대의 트랜드도 아닌 태초부터 있었고, 지금까지 한결같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는(14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 땅의 풍요로움과 하나님이 주신 복에 취에,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복의 터전이 아니요 망하는 터전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에서 방랑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혀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다면, 광야와 포로 된 땅은 복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입성을 앞에 두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15절과 16절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라.

    19절과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하나님은 날마다 당신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의지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한 삶에만 생명이 깃들고 복이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느냐, 광야에 있느냐보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청종하는 삶을 사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0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우리의 삶의 자리를 생명과 복이 머무는 터전으로 가꾸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님들이 살아가시는 터전이 생명과 복이 머무는 터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30장은 29:28에서 말하였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준비하시고,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하여 돌아오라(1~2).

    그들이 범죄하고 멀리 쫓겨 갔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습니다.
    ‘돌아온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온전한 회개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말씀을 순종하되,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집으로 데려 오실 것입니다(3).

    하나님은 자비하십니다(4~10)

    아무리 먼 곳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찾아 반드시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고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마음에 할례를 해주셔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들로 생명을 얻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바로 그리스도와 성령을 주시겠다는 새 언약의 약속입니다.
    이 짧은 본문(4~10)에서 세 번이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라고 강조합니다(2, 6, 9).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취할 온전한 자세입니다.
    중요한 것은 행동 이전에 마음입니다.
    신앙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11~14)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이 어렵고 순종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 안에 자리를 잡도록 의도된 말씀입니다.
    마음에 두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에게 매우 도전적입니다(15~18)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길로 행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생명을 택하라(19~20)

    이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을 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자신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의 용서’가 보장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키는 것’ 곧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입술이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분의 용서하시는 긍휼과 은혜를 믿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터넷으로만 기억하지 말고 마음에 집어 넣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은혜로만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넣을 수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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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의 십일조(신명기 14:22-29) 

    십일조는 "드나베의 삶"
    드나베드리고, 나누고, 베풀고의 삶의 축약형을 말합니다.

    십일조(十一條)의 세 종류

    제1십일조 : 레위인의 생활을 위한 것(민수기 18:26-29)
    제2십일조 : 축제의 십일조(신명기 14:23)
    제3십일조 : 구제의 십일조(신명기 14:28)

    제2십일조는 축제의 십일조 (Festival Tithe)입니다.
    이것은 제1십일조를 드리고 남은 것(9/10)에서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당시 가나안 종교들은 추수와 관련해서 많은 예식이 있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는 상당히 민감한 부분입니다.
    십일조를 감사로 생각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부담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심에 대한 고백으로 드려집니다(창세기 14:18-20)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소속 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히브리서 7:4-10)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을 십일조에 근거를 둡니다(히브리서 7:9-11)

    십일조를 받는 것은 신적 권위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데 어떤 사람이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을 볼 때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존경의 표입니다.

    십일조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제 1, 2, 3의 십일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십일조 드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1십일조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레위인의 생활을 위한 것(민수기 18:26-29)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십일조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내가 너희의 거제물을 타작 마당에서 받드는 곡물과 포도즙 틀에서 받드는 즙 같이 여기리니.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너희의 받은 모든 예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찌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레위인들의 십일조도 하나님께 드려집니다(민수기 18:26)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십일조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제2십일조는 축제의 십일조 (Festival Tithe)(신명기 14:23)

    두번째 십일조는 백성들이 성소에서 함께 먹으며 즐기는 것입니다(신명기 14:23)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이것은 제1십일조를 드리고 남은 것(9/10)에서 드리는 십일조입니다.

    성소에 너와 네 권속 (종들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함께 즐겼습니다(신명기 14:26)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같은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들과도 함께 나누었습니다(신명기 14:27)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찌니라.

    당시 가나안 종교들은 추수와 관련해서 많은 예식이 있습니다.
    바알 우상을 섬기며 음란한 축제를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집으로 초대하여 추수의 기쁨을 함께 즐기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십일조로 백성들과 함께 나누시며 즐거워 하셨습니다.

    제3십일조는 구제의 십일조(신명기 14:28)

    이것은 추가로 더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매 삼년째 제2십일조를 구제 십일조를 돌립니다(신명기 14:28)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이때는 제2십일조를 성소로 가져가지 않고 각 성읍에서 관리합니다.
    삼년째 십일조는 각 성읍에서 사용합니다.
    이것으로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성중에 거하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해 사용합니다(신명기 14:29)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약속의 땅에서는 누구도 굶주리지 않게 준비하셨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이 말라기입니다.
    포로 귀환 이후 회복하던 이스라엘이 다시 타락합니다.
    말라기의 영적 타락과 쇠퇴를 십일조와 연결하고 있습니다(말라기 3: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 파기가 영적 타락으로 이끌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십일조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말라기 3:9-10)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조로 문을 열고,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십일조로 구약의 문을 닫습니다.

    십일조가 강요이고 부담이면 구약은 부담의 책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이고 감격입니다.
    십일조의 감사로 구약의 문을 열으시고, 감격으로 문을 닫으셨습니다.
    십일조가 감사와 감격이 된다면 복된 신앙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이웃을 돌아보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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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에서 나오는 힘

    아브라함은 작은 사람이었지만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 힘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조그만 일이든지 큰 일든지 항상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기도는 유명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죄악이 너무나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의인 50명만 있으면 구원시켜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찾아 보았으나 없었습니다.
    45명으로 줄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45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40명, 30명, 20명, 10명으로 줄였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을 구하지 못 하여 다 유황불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끈기 있는 기도는 대단한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작은 사람이었지만 큰 사람이 된 힘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그렇게 크게 된 이유도 기도에 있습니다.
    유대인의 특징은 기도입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9시, 12시 그리고 3시에 기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오후 3시에 기도하러 가다가 앉은 뱅이를 고친 것입니다.

    유대인의 어느 책방에서 있었던 사례라고 합니다.
    오후 2시 55분이 되었을 때 책방 주인은 "기도 시간입니다!" 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유대인들이 책을 고르던 일을 멈추고 모두 모여서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다시 책을 고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어느 비행기 안에서도 기도 시간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기도를 하더랍니다.

    기도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스라엘이 가장 작은 나라 가장 작은 민족이며서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가장 큰 민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곧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토라에서 나오는 힘

    작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큰 사람이 된 비결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붙들고 사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 갔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 하고 말씀을 좇아 갔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1-4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직장을 따라 이사한 것이 아닙니다.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정을 따라 이주한 것도 아닙니다.
    금은을 찾으러 방랑길을 떠난 물질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니까 갔습니다.
    말씀만 붙잡았습니다.
    작은 사람이었지만 큰 사람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100살에 난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히브리서 11:17-19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로마서 4:19-22

    유대인들은 조상 아브라함을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유대인들의 말씀 교육은 탁월합니다.

    미국 땅에 도착하면 우선 회당을 짓고, 두 번째로 성경공부 학교를 지었습니다.
    다음에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와서 세운 학교가 있습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톤은 모두 이들이 성경공부하기 위하여 세운 학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 최우수 대학이 되었습니다.
    이 학교들이 300년 간 미국의 교육을 주도하고 세계 선교를 이끌고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하자 아놀트 토인비(Arnold Toynbee.1852-1883)는 인류 역사속에 일어났던 문명은 모두 28개였습니다.
    그 중에 18개는 이미 사라져 버렸습니다.
    9개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문명 하나만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철저히 유대인들이 문명을 지킨 민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 원인 교육입니다 토라 교육입니다.
    1900년 동안 나라를 잃어 버리고도 이 나라 저 나라로 유랑하면서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은 성경 토라와 탈무드였습니다.
    아버지가 철저히 자녀에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세대 격차가 전혀 없는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요한나 벤 자카이 랍비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크게 활약하였던 랍비입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나 벤 자카이 랍비는 어떻게 하면 유대인이 승리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매파비둘기파 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로마에 아부하는 매파는 로마와 대항하는 비둘기파를 항상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나 벤 자카이 랍비는 비둘기파였기에 늘 매파의 감시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벤 자카이는 그 때 민족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는 길을 깊히 생각한 끝에 마침내 로마의 유력한 장군과 협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 안에 모두 감금당한 상태였습니다.
    밖으로 나갈 수 없이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나 벤 자카이 랍비는 아프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벤 자카이는 널리 알려진 랍비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병 문안하러 몰려 들었습니다.
    며칠 뒤 벤 자카이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죽었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관 속에 넣은 뒤 성밖의 묘지에 매장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였습니다.
    성 안에는 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파에서는 벤 자카이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칼로 찔러 죽었나를 확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반발하였습니다.
    "그런 짓은 죽은 사람을 모독하는 행위다."
    유대인들에게는 시체조차 눈으로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관을 들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치고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가자 로마 군인들은 관을 칼로 찔러 보아 확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만일 로마 황제가 죽었다면 당신들은 그 때도 칼로 관을 찌를 것인가?"
    제자들은 전혀 무장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로마 군인들에게 받아드려졌습니다.
    마침내 로마 군인들은 장례를 치루도록 길을 내주었습니다.
    벤 자카이는 관 속에서 나와 로마 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면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요한나 벤 자카이 랍비는 사령관 앞에 앉았습니다.
    그는 사령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장군에게 로마 황제에게 표하는 경의를 보냅니다."
    그러자 장군은 황제 폐하를 모독하였다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벤 자카이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닙니다. 장군은 반드시 로마의 황제가 됩니다."
    확신에 찬 랍비의 말에 장군은 얼른 입을 막았습니다.
    "그런 얘기는 그만 둡시다. 나를 찾아온 목적이나 말해 보시오."
    벤 자카이는 말했습니다.
    "장군! 나는 오직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장군이 물을 때 벤 자카이는 말했습니다.
    "성전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 댓가로 야브네 거리만은 파괴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방 한칸의 교실이라도 좋으니 조그만 학교 하나만 그 곳에 지어 주십시오.
    그리고 것만은 없애지 않았으면 고맙겠습니다."

    야브네는 지중해안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 곳에서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토라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은 반드시 로마에 점령당하고 말 것을 알았습니다.
    성전도 파괴될 것을 내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라 학교만 가지고 있으면 유대 민족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장군은 랍비의 청이 별로 대단치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 정도는 들어 주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둘이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로마에서 파견된 사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 와서 말했습니다.
    "황제가 돌아 가셨습니다. 원로원에서 장군님을 황제로 선출하였습니다."
    장군은 요한나 벤 자카이 랍비의 통찰력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작은 학교만은 절대로 없애지 말라."
    그 날밤 아키바는 성안으로 들어 와서 모든 사람들을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 성을 열어 줄 것입니다.
    로마가 우리를 지배할 것입니다.
    성전은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토라만은 건드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토라를 지켜야 합니다.
    후에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이튿날 예루살렘은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약탈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야브네만은 고스란히보존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학교에 있던 학자들이 유대 민족의 지식과 전통, 신앙, 그리고 유대인의 얼을 지켜나가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의 유대인들의 생활 규범도 모두 그 학교에서 앞장서 선도해 나갔습니다. 여기에서 미슈나가 나왔습니다. 요한나 벤 자카이 랍비는 토라와 토라를 가르치는 학교만 가지면 유대인을 보호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문에 말씀 상자 메주자를 달아 두고 나갈 때 들어 올 때 입을 맞춥니다. 이마에 말씀상자 메주자를 달고 다닙니다. 팔에는 테피린을 맵니다. 말씀 중심으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말씀 토라 공부를 합니다. 그들은 늘 말합니다.

    "어릴 때 토라를 배우면 그 말씀이 피로 흡수되어 입으로 깨끗하게 나올 수 있으며, 노년에 배우면 피로 흡수되지 못하여 깨끗한 말씀이 되지 못 한다."

    유명한 랍비가 한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책임자는 이 곳 저 곳을 보여 주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작은 진지가 있었고 군인들이 그 마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울타리 방어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 온 랍비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마을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 지 아직 알 수 없었어요. 병사나 울타리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가 지키는 것입니다. 왜 내게 학교를 안내하지 않았습니까?>
    토라 학교가 유대민족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이들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영화 배우 남궁원 자녀 교육은 한번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아들 홍 정욱이가 하버드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졸업할 때 3개 중요한 상을 혼자 휩쓸었습니다. 어머니 양춘자가 밝힌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단 한번도 과외공부를 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성경 과외공부를 시켰습니다. 선생님으로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매일 와서 성경을 인물중심으로 가르쳤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남들은 세상 공부에 열중할 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한 선생님에게 지루한 감을 느끼면 다른 선생님을 부를 지언정 성경 공부를 중단시키지 않았더니 그렇게 지혜로운 아들이 되어 천재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유대인들의 힘은 말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절대로 신뢰합니다.
    토라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출 19;3-6)

    그래서 유대인들은 온 세계를 자기들이 지배할 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책인 <시온 장로들의 의식들>이라는 책입니다. 1903년 러시아 신문은 이 내용들을 보도하였습니다. 비밀 계획을 새롭게 다룬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 내용은 유대인들이 세계를 인수하고 정복하기 위하여 서로 만나고 있다는 보도였습니다. 내용은 유대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하자고 꿈을 가진 유대인들이 만든 초고 원고를 연극화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시온 장로들의 의식들>은 반 셈족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끊임없이 화제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스페인에서 나왔습니다. 발단은 1903년입니다. 책은 스페인에서 나왔지만 화제가 된 것은 러시아였습니다.

    1840년 클라코우 시에서 유대인들은 세계 지배를 토의하기 위해서 비밀 회의를 가졌습니다.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지를 토의하였습니다.1944에는 이런 말이 돌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입니다.
    <유대인으로 300명 왕을 비밀리에 세우면 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그러면 온 세계는 평화로워질 것이다> 독일 내각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잡는다면 세계는 평화로워 질 것입니다. 세계가 혼란스러운 것은 유대인의 잘못 때문입니다.>
    1934부터 1937년까지 유대인들 재판이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음모는 웃기는 것이고 무의미하며 부도덕적이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유대인들을 규탄하는 사건들이 일어 났습니다. 이런 소문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1933년 마드리드와 스페인에서 이 내용들이 공개되고 알려졌습니다.
    로마에서도 공개되었습니다. 베오그라드, 부큐레스티, 부다페스트, 비엔나, 프라하, 라이프치히, 베를린, 바르샤바에서 1920년, 1923년, 1930년, 1934년에 인쇄되어 퍼져 나갔습습니다.
    런던에서는 1920년과 1921년 <시온 장로들의 의식들>의 날개돋힌 듯이 팔려 나갔습니다. 온 세계에 이 책을 공개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슬로, 스톡홀름,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코바에서도 1911년, 1917년에 공개되었습니다. 온 유럽에 이 책이 출판 배포되었습니다.
    이 세상 책중에서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인 책이 이 책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토라를 확실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토라는 힘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토라를 강대상에 가지고 올라 갈 때에는 <써서> 가지고 올라갑니다. 인쇄된 토라는 금물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이 토라를 쓰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신 31:24)

    그래서 토라를 쓰는 법칙이 생겼습니다.
    1. 소가죽에 쓰지 말고 송아지 가죽에 써라.
    2. 죽인 송아지 가죽에 쓰지 말고 죽은 송아지 가죽에 써라.
    3.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면 목욕을 하고 써라.
    4.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오면 새 붓을 가지고 써라.
    5. 다른 글자가 트리면 수정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라는 글자가 틀리면 지금까지 쓴 것이 무효다.
    6. 두 사람이 보는 앞에서 써라.

    유대인들에게 토라는 생명입니다. 토라에서 힘이 나왔습니다.

    유모어에서 나오는 힘

    아브라함은 99살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고 할 때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17;17)

    유대인들은 조상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웃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은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유대인이 있는 곳에는 웃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정에서도 웃고, 직장에서도 웃고, 길거리에서 웃고, 학교에서도 웃습니다.
    특별히 웃지 말아야 할 절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영을 괴롭게 하는 회개의 절기인 대속죄일이나 성전 파괴일외에는 항상 웃고 삽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비극적인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가장 박해를 많이 받아 온 민족입니다. 19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으로 쫓겨 다니던 민족입니다. 그래도 항상 웃습니다.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혀 살았습니다.

    다른 곳에서 살 수 없는 거주의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항상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자기들을 억압하는 민족은 찡그리고 있는 유대인들은 항상 웃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미워하였습니다. 이래 저래 미움을 받는 중 너무 웃는다고, 너무 즐거워한다고 미움을 더 받았습니다.
    부모상을 당하여도 한 달 이상 슬픔속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웃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태양처럼 밝고 즐거우신 분이시고, 항상 웃는 분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에도 유모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가 웃으면 하늘과 땅 모두가 웃는다>
    웃음은 힘입니다.

    가정에서 나오는 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교회보다 가정이 더 거룩한 성소다.>

    유대인들이 사는 집에 가면 출입문 오른쪽 문설주에 메주가가 붙어 있습니다. 땅에서 약 1.5m 지점에 약 10Cm 길이의 윷 모양의 장식입니다. 나무나 금속 유리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메주자(mezuzah)가 달린 집은 다 유대인이 사는 집입니다. 2천년이상 된 풍습입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집안에도 방마다 붙여놓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집을 출입할 때마다 메주자를 만지거나 입맞추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메주자가 달려 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집을 성소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회당에는 특별한 때만 갑니다. 그러나 신앙적이 행동이나 예식은 가정에서 더 많이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회당보다 집에서 더 많은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이 성소입니다.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은 자녀들에게 자연스럽게 종교생활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모는 훌륭한 교사입니다.식탁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조상들이 애급에서 노예 생활하였던 것을 회상시켜 줍니다. 하누카명절에는 선물을 서로 주고 받으며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모든 회당이 없어지면 유대종교가 순수하게 지속적으로 살아 남습니다. 그러나 종교생활을 가정에서 하지 않고 오로지 회당에서만 한다면 유대 종교는 그 세대에서 명맥이 끊길 것입니다>

    이런 농담아닌 농담을 하곤 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파괴시켰지만 유대인들의 가정만은 파괴하지 못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대차가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1900년 동안 스페인에서 산 유대인과 아프리카 예멘에서 산 유대인과 이스라엘에서 만났는 데 유월절 예식이 같았습니다. 얼마나 세대차가 없고 정확한 가정 교육입니까?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 가게 합니다.
    이런 가정 교육은 유대인들의 힘입니다.

    이스라엘로 돌아 가기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합니다. 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습니다. 나라찾기 운동이 맹렬히 벌어졌습니다. 시오니즘을 자극한 것은 쏘련이었습니다. 쏘련 짜르 정부는 유대인 말살정책을 썼습니다. 외무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유대인 문제 해결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을 수행할 것입니다. 자국내 유대인의 3분의 1을 개종시키고, 3분의 1을 살해하며, 나머지 3분의1을 추방할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가정 교육으로 유대인들을 파괴시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힘은 가정입니다.

    돈에서 나오는 힘

    탈무드에는 돈에 대한 속담이 많습니다.
    돈, 돈, 돈.
    우리는 돈없이는 살 수 없다.
    성경은 빛을 주고 돈은 온기를 준다.
    돈은 어떤 더러움도 씻어 주는 비누다.
    몸은 마음에 의지하고, 마음은 지갑에 의지한다.
    돈으로 열리지 않는 문이 없다.
    돈이 소리를 내면 욕이 그쳐진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행복을 불러 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돈이 쌓이지 않는다.
    집안에 돈이 있으면 집안에 평화가 있다.
    인간의 동물과 다른 점은 돈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돈걱정을 하는 동물은 하나도 없다.
    랍비가 길거리에 설교하는 것보다 10불씩 준다면 더 인기가 좋다.
    좋은 수입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늙어도 돈을 많이 가지면 젊어진다.
    돈은 어떤 문제도 열 수 있는 황금 열쇠다.
    부자가 되는 길이 있다. 내일 할 일을 오늘 하고, 오늘 먹을 것을 내일 먹으면 된다.
    겨울 장작 살 돈을 여름 휴가비로 사용하지 않으면 부자가 된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이 적고, 부자에게는 친구가 적다.
    오리를 먹고 쫓겨 다니는 것보다 양배추를 먹고 당당하게 사는 편이 낫다.
    돈을 빌릴 때 웃으면 갚을 때 울게 된다.
    남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 데 그 사람이 도저히 갚을 길이 없음을 알면 그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 명의는 가난한 사람만 못 고치고 다 고칠 수 있다.

    유대인들의 별명이 있습니다. <공기 인간>입니다. 공기는 조금만 틈이 있으면 들어가서 결국 다 점령하여 버리고 맙니다. 유대인도 같습니다. 돈벌 틈만 있으면 공기처럼 파고들어 가서 결국 그 돈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승부 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그 곳 상권을 쥐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 가든지 상권을 쥐게 되는 데에는 그만한 돈에 대한 집착력이 공기처럼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은 가게를 경영하는 유대인이 중병으로 이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가게 문을 닫고 온 가족이 임종하는 아버지를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여보! 어디 있어?>
    <여기 있어요?>
    <아들아! 너도 있니?>
    <네. 여기 있어요. 아버지>
    <딸도 여기 있느냐?>
    <네 아버지 저도 여기 있어요>
    가족이 다 옆에 있는 것을 알고난 남자가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그럼 가게는 누가 보고 있니?>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돈 집착력, 공기 인간이란 별명을 받게 된 동기입니다.
    유대인은 두 직업을 가지며 돈벌기를 좋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양치기였습니다. 유명한 메일 랍비는 경전을 베끼기로 돈을 벌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기록될 만한 랍비 힐렐은 땔나무 장사였습니다. 그 위대한 바울도 텐트를 수리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예수님도 목수였습니다.
    탈무드는 돈은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돈은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돈은 인생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돈벌기는 쉽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을 간직하는 것이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돈을 움켜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랑이가 마을로 내려와서 사람을 물고 산속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뒤따라 가고 있습니다. 아들이 총을 가졌습니다. 호랑이가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총을 조준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다리를 쏘아 죽여라.>
    <왜요?>
    <가죽값 많이 나가게.>
    이런 순간에서 돈을 버는 이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과 한국인과 중국인이 맥주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파리가 중국인 맥주잔속에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빨아 마셨습니다. 중국인은 건지놓고 마셨습니다. 그 파리가 한국인 맥주잔속으로 들어 왔습니다. 한국인은 주인에게 소리질렀습니다.
    <불결해요. 다른 맥주를 가져 오시오.>
    한국인은 다른 맥주를 마셨습니다. 그 파리가 유대인 맥주잔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유대인인 말했습니다.
    <너 두 맥주잔에서 마신 맥주 토해내.>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돈을 벌 수 있는 공기인간입니다. 유대인들의 힘은 돈입니다.
    돈이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은 돈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지혜에서 나오는 힘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그늘에서 사는 것이 돈의 그늘에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지혜가 있어야 틀림이 없다. 인생의 길을 깨친 사람이라야 이런 이득을 본다>(전7;12)

    그래서 유대인들은 늘 지혜를 구합니다. 몸을 흔들면서 토라를 읽으며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들은 우렁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생각의 동맹 경화를 뚫어라.>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혜가 들어 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드려 봅니다.

    1억 가방
    정직하지만 가난한 남자가 회당에 갔습니다. 들어가려다가 가방을 주웠습니다. 열어보니 1억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양식 걱정하는 아내, 옷 사달라는 딸, 등록금 달라는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빨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숨겨 놓고 다시 회당으로 갔습니다. 예배중에 랍비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돈이 들어 있는 가방을 주워 보관하고 있는 사람은 주인을 찾아 주시면 후사하겠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도로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방을 찾은 사람은 보상금을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2억이 들어 있었는 데 1억만 가지고 오고 1억을 미리 가졌다는 것이 보상을 거절하는 이유였습니다. 찾아 주고 도둑으로 몰리는 것이 억울하여 랍비에게 재판을 요청하였습니다. 랍비는 두 사람을 불러 이야기를 다 들어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는 지 랍비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양 쪽에 앉혀 놓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2억 들어 있는 가방을 잃어 버렸나요?>
    <네. 분명합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1억을 미리 가졌습니다. 그러니 보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네. 그렇군요. 나는 당신은 2억 들어 있는 가방을 잃어 버렸음을 인정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1억 들어 있는 가방을 주웠습니까?>
    <예. 분명합니다. 나는 한 푼도 떼지 않았습니다. 1억 들은 가방 그대로입니다>
    <나는 당신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 랍비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판결하겠습니다. 당신이 주운 1억 가방은 저 사람이 잃은 2억 가방이 아닙니다.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사용하여도 좋습니다>

    의사가 뛰라고 했습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수많은 독이 유대인들이 쏘련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쏘련에는 영주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유대인이 많았습니다. 히틀러는 도망간 유대인을 잡아 넘길 때마다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쏘련 경찰들은 돈벌이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만 보면 영주권 조사를 하였습니다.
    유대인 두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본 경찰은 영주권 조사를 하려고 따라 갔습니다. 한 명은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고, 한 유대인은 영주권이 없었습니다. 영주권 없는 유대인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지혜가 떠 올랐습니다. 그는 영주권있는 유대인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습니다.
    <네가 도망쳐라>
    그 유대인은 이유도 모르도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찰은 생각하였습니다.
    <저 놈이 영주권이 없구나>
    뛰었습니다. 그 유대인은 한참을 뛰었습니다. 이만하면 영주권 없는 유대인 친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섰습니다.
    <너 영주권 없지?>
    경찰이 물었습니다.
    <있어요>
    <어디 봐>
    그는 영주권을 보여 주었습니다. 있었습니다. 경찰이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쳤어?>
    유대인이 말했습니다.
    <의사가 나에게 약먹고 뛰라고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따라가는 것을 보았으면 서야지?>
    유대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 경찰님에게도 약 먹고 뛰라고 그랬는 줄 알았어요>

    가불
    안식일은 다가오는데 허셀 오스트로폴리에르는 안식일 빵과 물고기와 닭을 살 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동 사회의 재정 담당관에게 가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유대인들이여! 끔찍한 불행이 나에게 닥쳤습니다. 나의 아내가 방금 죽었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제가 어디서 그녀를 위하여 수의와 관 살 돈을 구하겠습니까?>
    공동 사회의 원로들은 그가 당한 불행을 가엾게 여겨서 10루블을 주었습니다. 그런 뒤 얼마 있다가 그들이 그 착한 여인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허셀의 집에 가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아내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맛있는 닭고기 요리를 걸신들린 듯 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 거짓말쟁이야! 이 사기꾼아! 우리의 동정심을 이용하여 10루블을 사기 쳐! 그게 잘한 짓인가?>
    허셀은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습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상관 있습니까? 저는 단지 당신들에게서 가불을 받았을 따름입니다. 나중에 당신들은 위로금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사형 제비뽑기
    로마가 이스라엘 지배할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로마인 한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범인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인은 아무 남자나 한 명 잡아 사형시켜야 질서가 생긴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한 남자를 잡아 사형시키려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살려 주는 가를 시험하여 보고 싶다. 이 항아리에는 제비 둘이 들어 있다. 하나는 ‘사형’이고 다른 하나는 ‘사형 면제’다. 자! 뽑아라. 제비뽑히는 대로 한다>
    그런데 사실은 두 제비 다 사형이었습니다. 장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유대인은 이런 사실을 뻔히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빨리 한 장을 집어 입에 넣고 씹어 먹어 버렸습니다. 로마인이 놀라 물었습니다.
    <그 것을 먹으면 어떻게 알아?>
    유대인이 말했습니다.
    <간단합니다. 저 항아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 보면 내가 집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살아 났습니다.유대인들의 힘은 지혜입니다. 그래서 천재가 제일 많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유대안들은 말하고 있습니다.<지혜가 없는 사람에게 운명의 여신은 미소를 주지 않는다.>

    교육에서 나오는 힘

    유대인들의 교육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육입니다.
    그들은 교육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교육에서 힘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은 탁월합니다.
    미국 땅에 도착하면 우선 회당을 짓고, 두 번째로 성경공부 학교를 지었습니다.
    다음에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와서 세운 학교가 있습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톤은 모두 이들이 성경공부하기 위하여 세운 학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 최우수 대학이 되었습니다.
    이 학교들이 300년 간 미국의 교육을 주도하고 세계 선교를 이끌고 있습니다.

    탈무드 교육 이야기입니다(Tokayer. 1989a. 222 페이지)
    유명한 랍비가 한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책임자는 이 곳 저 곳을 보여 주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작은 진지가 있었고 군인들이 그 마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울타리 방어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 온 랍비가 말했습니다.
    <나는 이 마을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 지 아직 알 수 없었어요.
    병사나 울타리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가 지키는 것입니다.
    왜 내게 학교를 안내하지 않았습니까?>

    토라 학교가 유대민족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이들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영화 배우 남궁원 자녀 교육은 한번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아들 홍정욱이가 하버드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졸업할 때 3개 중요한 상을 혼자 휩쓸었습니다.
    어머니 양춘자가 밝힌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단 한번도 과외공부를 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대신에 성경 과외공부를 시켰습니다.
    선생님으로 가정으로 모셨습니다.
    매일 와서 성경을 인물중심으로 가르쳤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남들은 세상 공부에 열중할 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한 선생님에게 지루한 감을 느끼면 다른 선생님을 부를 지언정 성경 공부를 중단시키지 않았더니 그렇게 지혜로운 아들이 되어 천재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교육의 일차 교사는 아버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를 때에 아버지에게 물어라. 아버지가 모르면 랍비에게 물어라>
    아버지는 네 기능이 있습니다.

    1. 공급자(Supplier)
    2. 보호자(Protector)
    3. 인도자(Guider)
    4. 교육하는자(Instructor)

    탈무드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람은 시내산에서 직접 받은 것처럼 실감나게 가르쳐야 한다.
    자손에게 그것을 그대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시내산에서 너희 하나님앞에 섰던 날(신 4:9-10)이 토라를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심정으로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쳐라(Cohen.1983. p. 66)
    유대인들은 책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옷을 팔아서 책을 사라"(Solomon,1 992, 93)
    그렇기에 이스라엘에는 헌 책방이 없습니다.
    한번 산 책은 팔지 않습니다.
    줄망정  팔지 않습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만일 책과 돈이 동시에 떨어져 있으면 책부터 집어 올려라"(Solomon,1992, 95)
    "20년 배운 것도 배우기를 중단하면 2년이면 다 잊는다." 

    유대인들의 교육은 "남을 이기라"가 아니라 "남과 다르게 되라"
    유대인 어머니 교육유대인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합니다.

    얼마나 극성스러운 지 "쥬이시 맘(Jewish Mom)"이라는 단어가 생겨날 정도입니다.
    자녀들에게 최초의 교육자는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부심과 의무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의 교육관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남들과 똑같이 키우지 말고 각자의 장점을 찾아 개발해 준다"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네 살 되도록 말도 제대로 못해 저능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아인슈타인은 부진아였습니다.
    학교에 입학을 시켰는 데 제대로 적응도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적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지적능력이 낮아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그러나 이런 성적표를 받고도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게 격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을 그렇게 천재로 만들었습니다.
    유대인의 공동체 의식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고리론으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쇠사슬이 길어도 한 개만 끊어지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나 하나를 강조합니다.
    너 하나를 강조합니다.
    다 중요합니다.
    다같이 잘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 신앙이 강조하는 생활 철학으로 유대인들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한 유대인들이 미국에 처음 이민와서 다른 민족의 이민자들보다 쉽게 일자를 찾습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보다 빨리 돈을 벌고 빨리 자리를 잡습니다.
    그 이유는 이같은 종교적 생활 철학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지금도 러시아등지에서 유대인 이민자가 오면 히브리인 이민지원협회의 자원봉사자들이 아파트를 구해줍니다.
    그리고 일거리를 찾아 줍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수 있도록 조언하여 줍니다.
    자금을 만들어 줍니다.
    밀튼 허쉬가 필라델피아 공장을 중심으로 막대한 돈을 들여 공동체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록펠러가 침례교회 교인이 된 이유

    유대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회당에 보내어 정통적인 유대인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간 마을에 유대인 회당인 시나고그가 없으면 주로 침례교회를 보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선 침례교회가 유대인의 성서인 구약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록펠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가 침례 교회로 그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침례교인이 되었습니다.
    록펠러는 98세까지 살았습니다.
    평균 수명을 훨씬 웃도는 장수를 누린 셈입니다.
    유대인이 장수를 기원하는 말을 할때는 이렇게 말합니다.
    "120살까지 사시길 기원드립니다"
    가장 위대한 유대인 모세가 120살까지 살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나이를 얘기해서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모세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한 실례가 됩니다.

    티쿤 올람(Tikun Olam)유대인 신앙의 기본 원리중 하나입니다.
    "세계를 고친다"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세상을 개선시키고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의식을 강조한 말입니다.

    유대인 어린이는 남자 13세, 여자 12세가 되면 성인식을 거행한다.
    이때 랍비가 “사람은 왜 사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정답은 “티쿤 올람”(티쿤 : 고친다, 올람 : 세상).
    즉 “세상을 개선하기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세계 제2차대전 후 팔레스타인에 아랍 유대의 개별 국가를 건설한다는 UN의 결정에 따라 1948. 5. 14. 지중해 동남쪽 연안과 아라비아반도 서북쪽 일대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국토는 220만 7,000ha(세계 151위)요 인구는 878만 9776명(세계 98위)으로서 히브리어(일부는 아람어)를 국어로 쓰고 GDP는 4만 3,610$ 수준이다. 종교는 유대교(74.8%), 이슬람교(27.6%), 기독교(2.0%), 드루즈(1.6%) 순이고 국경은 데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와 맞대고 있다.
    기원전 10세기 때 북왕국(이스라엘)과 남왕국(유대)으로 나뉘었다.
    바벨로니아 포로기를 거쳐 귀국한 후엔 모두 유대인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유대인 어린이는 남자 13세, 여자 12세가 되면 성인식을 거행한다.
    이때 랍비가 “사람은 왜 사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정답은 “티쿤 올람”(티쿤 - 고친다, 올람 - 세상).
    즉 “세상을 개선하기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지만 불완전한 미완성 상태로 창조했기에 자신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협력하여 이 세상을 더 완전한 이상 세계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자 인간의 의무(도리)라고 믿는다.

    유대인들은 평생 동안 끊임없이 공부한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헌신이자 충성이라고 믿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역(사업)에 동참하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를 정확히 이해해야 하기에 공부를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공경이 배우는 것이요, 배움이 곧 기도라고 생각한다.
    유대인에게 배움은 곧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이다.
    배움이 곧 신앙 지혜인 것이다.
    그래서 회당(시나고그)의 주요 역할도 배움의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배움은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하나님께 다가가는 신앙 행위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자녀에게 ‘티쿤 올람’ 사상을 가르친다.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자 사명이다.
    이것이 곧 현대판 ‘메시아사상’이기도 한다.
    메시아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라 유대인들이 협력하여 미완성의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완성해 가는 분이라고 본다.
    유대인들이 창조성이 강하고 발명에 탁월하며 노벨상을 많이 받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티쿤 올람’ 사상과 ‘집단 메시아사상’이 과학이나 학문에 탁월성을 보이는 것이다.
    19세기에 발표된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기독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원숭이의 이미지로 격하시켰다고 비난하지만 유대인은 진화를 단계별로 이루어 가는 또 하나의 창조로 해석하여 지지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통적으로 단기 년호(2023년은 단기 4356년)를 사용했듯이 유대인도 자기들의 유대력을 사용한다.
    2023년은 유대력으로 5784년이다.
    기원전 3761년에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때부터 계산한 달력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후 계속하여 개선하는 일에 동역자로 일해야 한다는 ‘티쿤 올람’ 사상에 의해 유대인들은 지금도 세계의 경영, 관리, 개선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다.

    혈액형을 발견한 의과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오스트리아. 1868~1943년)는 대학교에서 의학과 화학을 공부하고 병리해부학과에서 활동하면서 사람들의 혈청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의사이면서 의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혈액형을 발견하고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가 혈액형 분류를 규명해주기 전까지 수혈은 죽음과의 도박이었다.
    많은 환자들이 출혈로 죽어가고 있었을 때에 의사들은 위급 환자에게 마지막 희망의 하나로 다른 사람의 피나 송아지 또는 염소 피를 수혈하기도 했지만 사람들을 살리지 못했다.

    이런 위급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수혈을 할 수 있는 혈액형을 발견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생화학, 면역학, 병리해부학, 바이러스학, 혈청학, 알레르기학 등을 연구하여 생명을 구하는 일에 많은 공헌을 한 의과학자였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외동아들로 자라면서 의학의 길을 갔다.
    유대인 가운데 특히 의사나 의학 연구자가 많은 이유는 그들이 신봉하는 ‘티쿤 올람’ 때문이다.

    ‘티쿤 올람’은 히브리어로 ‘세계를 고친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을 믿는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창조한 세상에서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재능과 능력을 준 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창의성의 뜻이 담겨 있다고 가르친다.
    티쿤 올람의 마음을 가진 유대인들은 인간의 병든 몸을 고치는 것도 티쿤 올람이라 생각한다.
    유대인 어린이가 13세 성인식 때 랍비와 하는 문답이 있다.
    “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 “티쿤 올람에 기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계를 고친다’는 창의성과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 

    ‘티쿤 올람’의 사상을 가진 의과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의학 전문가들을 찾아가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그가 이룬 가장 큰 공헌은 혈액에 대한 연구였다.
    인간의 혈액에는 항체 반응을 일으키는 항원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혈액형을 1901년에 A형, B형, C형(후에 O형으로 변경)으로 분류했고, 1년 뒤 그의 제자들이 두 항원을 모두 갖고 있는 AB형도 찾아냈다.
    1940년에 Rh-형 혈액이 있음을 밝혀내어 안전한 수혈 방법을 완성했다.
    그는 동료와 함께 폐렴 구균을 발견하고, 매독의 면역학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으며, 알레르기 반응이 면역계 반응이라는 증거를 최초로 발견했으며, 소아마비가 세균이 아닌 바이러스성 질병임을 최초로 밝혀냈다.

    의사는 수만 명을 살리지만 의과학자는 수억 명을 살린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목회자들은 누구를 살려야 하는가?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써 죄악으로 죽어가는 전 인류를 살려 놓았다.
    이제 목회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속에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 있음을 알고 이 일을 전파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오늘도 이단과 사이비들은 예수 그리스도 피의 생명이 아닌 것을 전하여 영혼을 죽이고 있다.
    의사들도 혈액형을 모를 때에 짐승의 피를 수혈하여 많은 사람을 죽게 했지만 혈액형을 알고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있다면 목회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전하여 죄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야 한다. 





     

    구글의 비전은 세계 전체를 하나의 정보 공유 동아리로 묶는 비전을 갖고 그동안 인터넷망이 없는 곳에 인터넷 사용을 지원하는 방안으로 자체 개발한 100여 개의 소형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아프리카에서는 테니스 코드 면적 크기의 열기구를 띄워 통신 중계기를 운영하기도 한다. 일론 머스크는 ‘스타링크 프로젝트’에 10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메타(페이스북)의 비전도 인류를 하나의 정보 교류 동아리로 묶는 것이다. 2002.5. ‘투아프리카 프로젝트’로 무려 3만 7,000km에 달하는 해저 광케이블을 설치해 아프리카의 인터넷 환경을 개선해가고 있다. 돈이 되는 사업은 아니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하나님과의 천지창조와 개선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미완성 상태로 두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완성된 세상을 위하여 계속 창조행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유대인들의 창조성을 강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자녀 교육 25 가지

    1.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다.
    2.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피해는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
    3. 부모에게 받은 만큼 자식들에게 베풀어라.
    4.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은 아이들의 문화적 유산이다
    5. <내 것> <네 것> <우리 것>을 구별시킨다.
    6.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
    7. 용돈을 줌으로써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인다
    8.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위생상, 외견상 목적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9. 편식 버릇을 방관하면 가족이란 일체감을 잃게 된다
    10. 한 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와 함께 식탁에 앉히지 않는다
    11. 외식을 할 때는 어린 자녀를 데려가지 않는다
    12.가족 모두가 모이는 식사시간을 활용한다
    13. 어떤 일이든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는 습관을 길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우쳐 줍니 다
    14. 자녀들의 잘못은 매로 다스린다
    15. 협박은 금물이다. 벌을 주든 용서를 하든지 하라.
    16. 최고의 벌은 침묵이다 ㅣ
    17. 자녀를 꾸짖을 때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18.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헛된 꿈을 갖게 하지 않는다
    19. 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은 보여주지 않지만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는 꼭
    20. 어릴 적부터 남녀의 성별을 자각시킨다
    21. 성문제는 사실만을 간결하게 가르친다
    22. 음식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해 감사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3. 돈으로 선물을 대신하지 말라
    24. 자선행위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25. 친절을 통해 아이를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운다

    연합에서 나오는 힘

    지구상에서 유대인들만큼 단결이 잘 되는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이를 <고리론>이라고 말합니다.
    고리는 한 개만 끊어져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한 명 한 명이 다 고리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가다가 유대인이 빠져 시체가 떠내려가면 돈이 얼마가 들든지 찾아 내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곳이 통곡의 벽입니다.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을 24시간 인터넷으로 중계합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을 보며 같이 기도합니다.
    연합이 유대인들의 힘입니다.


    유대인은 정말 작은 민족이지만 큰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지만 큰 나라입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가요.

    1. 믿음에서 나오는 힘
    2. 기도에서 나오는 힘
    3. 말씀에서 나오는 힘
    4, 웃음에서 나오는 힘
    5. 가정에서 나오는 힘
    6. 돈에서 나오는 힘
    7. 지혜에서 나오는 힘
    8. 교육에서 나오는 힘
    9. 연합에서 나오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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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7일(토)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신명기 29:4, 마태복음 16:1-12)

    깨닫는 마음 - 각심(覺心) / 깨달을 각(覺)
    보는 눈 - 관안(觀眼) / 볼 관(觀)
    듣는 귀 - 청이(聽耳) / 들을 청(聽)

    시이불시(視而不視) : 보기는 하되 보이지 않음.
    볼 시(視), 말 이을 이(而), 아니 부(不), 볼 시(視)

    불청(不聽) : 듣지 아니함

    불각(不覺) : 깨닫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함.

    신명기 29장은 광야에서 태어난 광야 2세대들에게 전하는 모세의 고별설교입니다.
    광야 2세대들은 홍해를 건넌 것과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 등 자기 조상들이 고생한 것, 말로는 들었지만, 눈으로 보지 못해서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몇 대째 믿었어도, 명문대를 나왔어도, 재벌이라 해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존재가 없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고 하셨습니다(시편 49:20).

    애급에서 기적같은 체험을 갖고 광야로 나왔던 백성들입니다.
    온갖 신비한 체험을 모든 백성들이 함께 누렸지만 아직도 세 가지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 가지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라고 합니다.
    깨닫는 마음은 각심(覺心)이라고 합니다.
    듣는 귀는 청이(聽耳)라고 합니다.
    보는 눈은 관안(觀眼)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민족이 경험할 수 없었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고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었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를 받았을지라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의 지름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청각(視聽覺) / 볼 시(視), 들을 청(聽), 깨달을 각(覺)

    경각심(警覺心) / 깨우칠 경,  깨달을 각,  마음 심

    見(볼 견) 視(볼 시) 觀(볼 관) 覽(볼 람) 看(볼 간) 監(볼 감) 診(볼 진)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냥이라더니 '본다'는 뜻의 한자가 참 많기도 하다.

    그 만큼 봐야 할게 많다는 뜻도 되겠지만, 잘 구별해서 보고 배우란 뜻도 될 것이다.
    우린 참 많은 것을 보고 산다.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공연도 보고, 운동경기도 보고, 텔레비전도 보고 때론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의 녹화 장면을 보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오페라 같은 경우는 보러 가는 건데 '청중'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데 왜 똑같이 '보는' 것인데도 영화, 연극, 공연, 운동경기 등은 '관람'하고 텔레비전은 '시청'하고 녹화장면이나 공판 등은 '방청'하는 것일까?

    먼저 '관람'을 보자  觀은 자세히 잘 본다는 뜻이고
    覽은 두루 본다는 뜻이니
    觀覽은 두루두루 자세히 봐야 한다고 '관람'일 것이다. (관람 : 연극, 영화, 운동경기 따위를 구경함)

    다음은 '시청'이다. 말 그대로 보고 듣는다는 뜻인데 聽(들을 청)은 소리가 잘 들리도록 귀를 기울여서 듣는 것을 말하고 視는 가만히 앉아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텔레비전은 가만히 보고 듣는 것이라 '시청'하는 것이다.

    視와 見은 같은 뜻이면서도 상대되는 개념을 가지니 視는 이쪽에서 가만히 보는 일이고, 見는 저쪽에서 보여 오는 일을 말하니 視는 시청과 시계(시야의 한계)등으로 쓰이고 見는 견본품 따위의 단어에 쓰인다.
    방청은 傍(곁 방)에 聽(들을 청)인데 회의나 토론, 공판 따위를 가서 듣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녹화 장면은 '방청'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 看은 본다, 돌본다는 뜻이나 간호, 간판 등에 쓰이고 監은 대야의 물에 자기를 비추어 보는 것에서 유래, 비추어 살펴 본다는 뜻이고 감시, 감독 등에 쓰인다.
    그리고 診은 신중히 보아 판단을 내린다는 뜻이니 진료, 진단, 진찰 등의 말에 쓰인다.

    - 중부동 매곡서당 -

    신명기 29장은 광야에서 태어난 광야 2세대들에게 전하는 모세의 고별설교입니다.
    광야 2세대들은 홍해를 건넌 것과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 등 자기 조상들이 고생한 것, 말로는 들었지만, 눈으로 보지 못해서 실감이 안 납니다.

    사람에게는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몇 대째 믿었어도, 명문대를 나왔어도, 재벌이라 해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존재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고 하셨습니다(시편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사람에게는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 정확해야 합니다.
    분명히 보고도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말을 놓치지 말고 잊지 말고 늘 귀에 담아 두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9: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세 가지가 결여된 이스라엘 백성들

    신명기 29장은 출애굽한 뒤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한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왜 하나님은 당신의 선민(選民)에게 세 가지를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들의 마음 자세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심보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끼리도 “들을 마음이 있어야 바른 얘기를 해 주지, 저 사람한테는 말해 줄 필요도 없어.”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수많은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목도하고도 이 세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셔야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됩니다(시편 119:130).
    출애굽 때 열 가지 재앙의 목적과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저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대...” 하면서 이웃집 불구경하듯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열어 주실 만한 자격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세 가지가 결여된 예수님의 제자들

    마태복음 16장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하는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표적은 겉 표(表), 발자취 적(迹), ‘겉으로 나타나는 흔적 (sign)’입니다. 그들은 12장에서도 예수님께 같은 요구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마태복음 12:39) 고 답하셨습니다. 16장 사건 직전 예수님은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일곱 광주리를 거두셨습니다 (마태복음 15:32-39). 이에 앞서서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고 남은 열두 광주리를 거두셨습니다 (마태복음 14:13-21). 이 두 사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것도 모르면서 말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선 안 됩니다.

    16장의 표적 요구 사건 직후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고 가르치자 제자들은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고 동문서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16:5-10) 고 탄식하십니다. 3년 동안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목격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그들의 마음에는 온통 세상뿐이었습니다.

    성경 읽고 기도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생각은 모두 사망입니다(로마서 8:5).
    인류는 물욕과 정욕과 인생의 자랑만 좇으며 살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습니다(시편 49:20).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으라고 성경을 주셨습니다(로마서 10:10).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죽어라고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3).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기도하면 개인과 가정과 생업이 다 잘 됩니다.
    말씀을 믿지 않으니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않았고(사무엘상 12:23).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7).
    깨어서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누가복음 18:1, 21:36, 로마서 12:12, 골로새서 4:2-3).
    감사가 없어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과 땅을 바꿔 놓습니다.
    기도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시편 1:1-2).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하지 않습니까?
    사랑에 미치면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지나서라도 연인을 만나러 갑니다.
    뭐든지 미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 미쳤던 사람입니다.
    은혜의 말씀에 미치면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수천 번 들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은혜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임하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습니다.
    싱숭생숭 어지럽던 마음도 다 정리해 주십니다.

    성경을 읽어야 예수님을 바로 알고 종말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9:39-41, 마태복음 13:14-15, 17, 로마서 10:10).
    그 나라 갈 때까지 말씀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내 중심에 머무르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비참하고 가련합니다.
    노아 때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물이 콧구멍에 들어올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습니다(마태복음 24:39).
    지금도 사람들은 정말 귀중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허무한 세상의 흔적만 좇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시편 39:6, 고린도전서 7:31).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야 그인 줄 깨닫겠느냐”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고린도전서 14:19).
    세상에는 진실로 깨달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다 치우쳐서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 3:10-12).
    “소와 나귀도 깨닫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한다” 는 하나님의 눈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영적으로 간음하는 그들을 깨닫게 하시려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를 부인으로 맞게 하셔서 표적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십시오(호세아 5:1, 7:9, 이사야 1:3).
    은혜와 사랑을 그렇게 받고도 깨닫지 못해 매 맞으려고 패역한 길로 가느냐고 탄식하십니다.
    인자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다가 인자를 든 후에야 그인 줄을 알겠느냐고 책망하십니다(요한복음 8:27-29).
    말씀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8:43, 10:39-40).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13:11-15).

    경건의 비밀을 알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모든 생활에 경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비밀을 알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디모데전서 3:16).
    경건하지 못하므로 세상의 것이 눈과 귀와 마음을 가려서 참 보배이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이사야 44:18).

    남편이 눈을 가리고, 아내가 가리고, 자식이 가리고, 물질, 장사, 권력, 지위가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다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베드로전서 1:23-25).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요한복음 8:43).
    말씀을 듣는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기도하면 깨닫게 해주십니다.
    사람은 모두 양심에 불도장[火印]을 맞아서 감각이 없어져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디모데전서 4:2).
    그러나 하나님은 “내 말을 들으면 산다고 하십니다(이사야 55:3).

    시대의 징조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하나님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이사야 1:2).
    하늘과 땅은 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의 소리를 듣고 회개했고, 발람 선지자는 나귀의 입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고 하니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
    이스라엘의 국화(國花)인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보고 깨달으라고도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32).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젊은 시절 친구가 옆에서 벼락을 맞아 횡사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목사가 됐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괴롭게 하셔서라도 깨닫게 하시는 은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남보다 죄가 많아 죽은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똑같다.”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4-5)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괴롭게 하셔서라도 깨닫게 하십니다(예레미야 10:18).
    은혜를 주시는 대신 괴롭게 하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괴롭다고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합니다(호세아 4:14, 마태복음 24:37-39).
    죄 짓다가 멸망할 지경에 처했을 때, 그때라도 회개하면 망하지 않을 텐데 그때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며 육신의 즐거움에 빠져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 재미에 빠져서 부모도 처자식까지 잊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모든 것을 깨닫지만(잠언 28:5, 시편 119:100, 요한복음 7:17, 고린도전서 2:15, 야고보서 1:5, 요한일서 2:20,27)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합니다(잠언 28:5).

    교만하지 말고 “나 때문이다” 하고 회개하십시오.

    말씀을 깨달은 자는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잠언 16:18). 느부갓네살 왕이 “이 모든 것이 내 힘으로 한 것이다.”하고 외치는 순간 미치광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서 4:29-33).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아오십니다 (야고보서 4:6). 교만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도, 부부생활도, 자녀교육, 사업도 할 수 없습니다.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욕심 부리지 않고 정당하게 근심 없는 재물을 얻는 능력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신명기 8:18, 잠언 10:22).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배를 타고 도망가던 요나는 태풍이 일어 모두 죽게 됐을 때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다.” (요나서 1:12) 하고 고백했습니다. 내 집안과 교회, 그리고 나라의 문제들에 대해 ‘나의 연고다’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무지개같이 떠올라 모든 문제들이 형통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표적은 무엇입니까.

    보는 눈,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습니다.
    만유(萬有)보다 크신 하나님의 품에 계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육신을 입고, 좁고 보잘것없는 팔레스타인 땅에 임하셔서 당신의 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는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표적입니다(사도행전 20:28).
    교회는 하나님의 몸입니다(골로새서 1:18).
    예수님의 머리이며, 하나님 자신이고, 성령이 계시는 전(殿)입니다.
    악령과 어두움의 세력들에게는 교회가 표적(標的)이기도 합니다.
    온 천지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적(表迹)입니다.
    참 교회에는 말씀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히브리서 4:12).
    우리 교회에는 말씀의 검(劍)이 있습니다.
    심령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는 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의 권세까지 무찌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역사하는 교회는 은혜와 감사와 성령과 사랑이 충만합니다.
    말씀은 점점 흥왕하게 돼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값을 주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역사인 구속사(救贖史)의 기록입니다.
    사탄은 세력을 총동원해 구속사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사탄의 머리를 부수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 교회, 그리고 은혜로 주신 구속사의 말씀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시대의 표적이요, 대한민국의 등불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등에 불만 켜면 됩니다.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모든 민족에게 역사의 표적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맡은 바 직분에 충성하십시오.
    구속사의 말씀을 읽고 듣고 전해서 많은 영혼을 주 앞에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소망,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분이 여러분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보무당당하게, 눈 하나 깜짝하지 말고 전진하십시오.
    늘 감사하고 끝까지 충성하고 기도하고 믿을 때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 잊어버려도 하나님 말씀만은 가슴에 품고 말씀과 동행할 때 오늘부터 집안이 형통으로 펴지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금 모든 이스라엘이 목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 동안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목도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아버지, 어머니한테 들어보니까 옛날에 그러한 일이 있었다, 이웃집에 불난 것 이야기하듯이 지금까지 한 사람도 그 재앙의 목적과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영부영 지나갔습니다.
    듣긴 듣고 보긴 봤으나 신 29:4에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믿지 못하고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눅 9:44에 내가 말하는 것 놓치지 말고, 잊어버리지 말고 너희 귀에 담아두라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늘 예수님 곁에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기사이적을 체험하고, 충격적인 사건들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 마음이 세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일을 좇지 않고 물욕과 정욕, 이생의 자랑에 급급한 삶을 사는 자는 시 49:20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립니다.
    인간적인 지식, 이것저것 안다, 예언한다, 방언한다고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전 14:19에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어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무엇으로 가리어져 있습니까?
    세상, 남편, 아내, 자녀, 물질, 장사, 돈, 권력, 지위로 다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보물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에 두게 되고 귀한 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고,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벧전 1:23-24).
    남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여도 믿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실로 깨달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아담 타락 이후로 오늘날까지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10-12).
    왜 깨닫지 못합니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딤전 3:16에 말씀하고 있듯이 모든 삶에 경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 다 타버려서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딤전 4:2).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철두철미하게 회개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나귀 입을 통해 발람 선지자를 깨닫게 하였습니다(민 22:28).

    누가복음 13:1-5
    예수님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많아 죽은 것이 아닌 너희들도 회개치 아니하면 저와 똑같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냥 듣고만 있지 말고 우리도 똑같은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게 하셔서 나를 깨닫게 하시려고(렘 10:18) 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환경 가운데서 우리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잠 28:5).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야 하며, 사무엘 선지자처럼 기도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롬 10:9-10, 삼상 12:23).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바로 구속사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교회, 이것이 하늘나라의 표적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십자가 위에 세워진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시대의 표적, 이 나라 민족의 등불입니다.
    성도 여러분. 등불은 불만 켜면 됩니다.
    믿음으로 불만 켜면 됩니다.
    누가 등불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하지만 전 세계에 구속사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가 역사의 표적이고, 어느 민족, 어느 나라 표적이 된다는 것을 믿고 자부심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고 맡은바 직분에 충성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믿을 때 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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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6일(금)

    성민(聖民) holy people / 암 카도쉬( עַם  קָדוֹשׁ )

    5971. 암( ʽam) עַם

    1. 백성,  2. 복수형 עַמִּים : 신 28:10,  3. 민족

    6918. 카도쉬(qâdôwsh) קָדוֹשׁ

    1. 거룩한, 2. 욥기 6:10,  3. 레위기 21:6

    공감능력(共感能力)
    공감(共感)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상의의 경험한 바를 이해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능력이다.
    공감의 종류에는 크게
    인지적 공감(cognitive empathy)
    감정적 공감(emotional empathy)

    학자에 따라 여러 세부적인 분류가 존재한다.

    세 가지 조심할 것 

    동양의 성현 공자는 "군자유삼계(君子有三戒)",
    즉 군자에게는 세 가지 경계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첫째, 여색을 경계하라

    청년기는 혈기를 주체할 수 없는 때이므로 혈기를 다스리지 아니하면 인생의 방향이 빗나갈 수 있음을 주의시켰습니다.

    둘째, 싸움을 경계하라

    장년기는 혈기가 왕성한 시기이므로 싸우는 일에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일에 열심을 내면서 앞으로 전진만 하다 보면 좌충우돌하며 사방에 대적을 만들 수가 있음을 경계했습니다.

    셋째, 욕심을 경계하라 

    노년기는 혈기가 쇠한 때인데, 이때는 욕심이 많아지므로 재물이나 명예를 얻는 것에 주의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사람이 늙을수록 혈기는 쇠하지만 욕심은 반비례하여 커지므로 그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명예를 잃게 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君子有三戒(군자유삼계)
    小之時 (소지시)
    血氣未定 (혈기미정) 이라 戒之在色(계지재색)하고
    及其壯也 (급기장야)
    血氣方剛 (혈기방강) 이라 戒之在鬪 (계지재투) 하고
    及己老也 (급기로야)
    血氣旣衰 (혈기기쇠)라  戒之在得(계지재득)이니라.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경계할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젊을 때는 혈기가 왕성해서 그 정도를 알 수 없어 여색(女色)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에 이르러 장성함에 따라 혈기가 또한 왕성하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늙어 감에 따라 혈기가 이미 쇠약해졌으므로 욕심을 내어 얻고자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양심의 법이 있어 자기를 다스리고 죄로부터 자신을 정결히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사람은 하루에 세 번씩 자기를 반성하며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알고 끊임없이 정결하게 살도록 애써야 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세속을 경계할 때, 경건의 능력을 지닌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축복과 저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신명기 28장은 율법 준수 여부에 따른 저주와 축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28장의 내용 구조

    1-14.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임하는 여러가지의 축복.
    15-68.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여러가지 저주.

    1.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신다(1절)
    2. 들어가도 복 나가도 복을 받는다(6절)
    3. 대적들을 패하게 하신다(7절)
    4. 성민이 되게 하신다(9절)
    5. 꾸어 줄 수 있는 삶(12절)
    6. 머리가 되게 하신다(13절)

    28장은 27장에서 선포한 율법 준수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합니다.
    순종에 따른 개인적인 축복의 내용이 나타나는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1-6절).
    축복의 내용은 만민 위에 머리가 되고 뛰어날 것이라고 합니다(7-14절).

    반면에 불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저주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패할 것을 말합니다(15-24절).
    저주의 내용은 대적에게 수탈을 당할 것(25-35절).
    만민 중에 낮아져서 비웃음거리가 될 것(36-45절).

    이와 같은 저주는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방 민족에 의해 멸망당하고 비참한 지경에 놓이게 되며 온 땅에 흩어져서 노예가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47-48절).

    모세는 축복과 저주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도록 권유합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도 모세의 권면에 귀를 기우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유명한 축복과 저주의 목록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서 결정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순종의 축복보다 불순종의 저주의 내용이 왜 더 많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죄성과 연약함을 드러내줍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율법 아래서 실패한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본문에서 축복의 목록을 좋아하겠지만, 사실 순종하여 복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오를 수 없는 나무와 같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열심히 종교적인 행위들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쉽게 말합니다.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축복 목록에서, 하나님은 하늘의 보물 창고를 여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12).
    하나님은 그 열쇠를 가지고 계신 주권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땅은 천수답이죠.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해서는 경작할 수 있는 논과 밭입니다.
    그러니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땅입니다.
    이렇게 율법에 대한 순종은 그 사람 혹은 그 백성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축복을 미치게 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인생이고 이보다 더 나은 삶은 없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저주 목록은 길고도 많습니다(15~68).
    그 내용은 재앙(20~22),
    가뭄(23),
    침략(23~35),
    추방(36~52),
    기근(53~57),
    질병(58~61),
    황폐함(62~68)
    마지막 구절은 절망의 절정입니다.
    모든 절망 속에서 자기 몸을 노비로라도 팔아보려고 하지만 그 몸을 살 자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전에 네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 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적군에게 남녀 종으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68).”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핵심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20).
    하나님이 풍요의 복을 주실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저주의 내용이 자기 삶에 찾아오게 되면 곧바로 경고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만일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저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즉, 본문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고된 심판’입니다.
    왜냐하면 지키지 못할 만큼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심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변함이 없고, 모든 복과 저주는 모두에게 동일한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임합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원리로 적용됩니다.

    심판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신체적 불편(20~22, 27~28, 35, 58~61),
    농업의 재난(23~24, 38~40,42),
    전쟁의 패배(25~26, 33~34, 48~57),
    경제적 몰락(29,31),
    결혼의 실패(30),
    가정의 근심(32, 41),
    사회적 불명예(43~44) 등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에 심판이 미칩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풍성한 삶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불순종(45, 62),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지 않는 배은망덕(46~47),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불경건(58) 등입니다.

    오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들으면서,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때는 이렇게 지키면 되겠구나고 생각하다가, 반복하여 읽을수록, 결코 이 명령들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은 지킬 수 있는 자들(결코 지킬 수 없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참 ‘복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과 복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오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그 생명과 복으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이루신 순종을 통하여 얻으신 의로움을 거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신명기 28장의 모든 복을 누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전혀 지키지 못하니 저주의 길에 설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정죄함도 저주도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은 피할 수 없는 저주를 우리에게 선고하지만, 복음은 피할 수 없는 축복을 믿는 자들에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당신은 알고 누리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이 은혜를 영원히 감사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저주를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시고, 더 이상 어떤 정죄함도, 저주도, 형벌도 없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A People Holy to the Lord)
    신명기 7:6-11, 베드로전서 1:15-17

    거룩이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성(聖)과 속(俗), 창조자와 피조자,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가리킵니다.
    즉 전적인 타자(他者)를 거룩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몇 가지 단계에서 이스라엘의 신앙역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중심하여(창 18:27),
    야곱의 벧엘에서 가진 꿈에서(창 28:17),
    모세에 대한 계시사건에서,
    그리고 아모스는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로 보았고(암 4:2),
    호세아도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라고 했습니다(호 11:9).

    특히 이사야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보았습니다(사 1:4, 5:19).
    제 2이사야도 야훼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보았습니다(사 41:14-16).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격적인 거룩이며, 그 거룩은 이스라엘에 국한하지 않고 역사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는 적극적인 거룩으로 되어있습니다.

    신약에서 ‘거룩’은 하그우스(hagws)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전 희랍어인 하고스(hgos)에서 왔는데 공포의 대상, 존경의 대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신약성서의 거룩 관념은 구약성서의 전제인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가 거룩하고,
    둘째는 하나님의 영이 거룩하며,
    셋째는 교회와 신자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은 성서에서 ‘성령’으로 많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이라 할 때, 그리고 신도를 ‘성도’라고 부를 때에도, 그것은 그들 자신의 내적 거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야훼와의 관계점에서 그렇게 불려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구약본문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간곡히 당부하는 설교 중 한 부분입니다. 모세는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나안 땅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의미심장한 자세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의 백성, 즉 성민(聖民, a people holy)으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고 했습니다.
    ‘성민’이란 거룩한 백성(holy people), 하나님께 바쳐진 백성(consecrate people)이라고 했습니다.
    어근(語根)으로 보아 ‘분리’(separation), ‘구분’(divide) 외에도 ‘새로움’, ‘순수함’, ‘빛남’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구분하여 하나님께 드려짐,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하나님이 지상(地上)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특별히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씀한 하나님의 성민이란 그 뜻은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시편 115:12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생각은 마음으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백성은 결코 자기 의지에 따라서 생각하거나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에 따라 행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의식(意識)은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을 창출하는 동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능력의 샘터가 됩니다.

    둘째는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이유와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 세 가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수적인 힘이나 양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난하여 온유한 자와 겸손한 자를 선택하십니다. 민수기 12: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선택받은 이유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은총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어떤 공로나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agape)는 영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사랑, 다함이 없고 제한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조건이 어떻게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미쁘시고 일향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9절에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千代)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조들과 약속하신 것을 지키기 위하여 애굽 왕 바로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을 속량했습니다. 속량(贖良, redemption)은 원래 나의 소유였던 것이 무슨 일로 말미암아 타인의 소유가 되었을 때 거기에 해당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찾아와서 나의 소유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지(意志)에 따라 행하여진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함의 동기(動機)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구원사건은 십자가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는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11절)

    이 말씀은 거룩한 나님의 백성의 책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히 성별된 하나님 백성의 책임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일입니다.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은 천대(a thousand generation)에 이르도록 복을 주시고 인애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지키지 아니하면 당대에 징계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우리는 오늘의 삶의 상황과 역사에서 새 이스라엘이 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현주소와 체온(體溫)을 재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이겠습니까?
    믿음이 기초가 되고 인격의 품위를 아름다고 가치 있게 높일 수 있는 조화된 신앙인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벧후 1:3)

    신의 성품을 나누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짐입니다.
    곧 그의 도덕적 품성, 그의 거룩한 목적, 그의 구원하는 사랑, 그의 새롭게 하는 빛, 그의 공정에 대한 관심, 그의 무한한 연민, 그의 순결한 정의와 평화를 만드는 일, 그의 승리적이요 우주적인 섭리 속에 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 뿐 아니라 그의 본성을 나누는 삶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브룩스 아담스는 미국의 건국 공로자들 또는 초기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아담스,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메디슨 등 이분들의 공통점은 높은 도덕성 인권감각을 가졌다는 점이고, 이들의 도덕성과 인권의식이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 정신적 힘이 되었고 건국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권력과 돈, 지식과 힘을 가진 자일수록, 특히 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도덕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인격 존엄의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때 아모스 선지의 외침처럼 “정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하는” 사회를 이룩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과 나라가 혼란되고 전쟁을 일삼는 것도 높은 도덕성과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삶과 평화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우수(憂愁)의 도식(圖式)’으로 역사를 관찰했는데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인간의 비참한 역사는 일종의 구속사가 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갈대아 메소포타미야 문명이 한 바퀴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시대의 깊은 우수를 체험한 이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같은 높은 영성을 가진 이가 났습니다.
    애굽 문명의 수레바퀴가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때에 역사의 비극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에서 모세가 났습니다.
    바벨론 문명의 바퀴가 넘어가는 시절에 제 2이사야가 났으며, 헬레니즘의 비극적 종막에 사도 바울이 났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의 영원한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알라릭의 말발굽에 유린당하고, 그 불길에 무섭게 타오르는 시절에 성 어거스틴을 산출한 것입니다.
    시대의 우수를 이렇게 경험할수록 사람들의 영은 더 높은 경지로 승화합니다.
    그렇기에 토인비는 최고 최종적인 영도자는 나사렛 예수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한 개인 한 사람의 심령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 방법은 ‘서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방향이며’ 시대와 역사의 고뇌, 짐을 짊어짐으로써 입니다―이것이 현대문명, 역사를 구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는 ‘몸을 단련시키는 체육학교도 있고, 머리를 단련시키는 지식학교도 있지만, 가슴을 단련시키는 마음의 학교가 없으니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면서 우리의 교회가 이 땅의 마음의 학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마음의 학교이며, 병든 마음을 고치는 마음의 병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학교의 최고 스승이시며, 마음병원의 최고 의사이십니다. 사도바울을 말씀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했습니다. 오늘 새 이스라엘이 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암아 마음이 거듭나고 새로 변화되어야 하고, 새로워진 하나님 백성이 된 우리는 우리와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책임의식(責任意識)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부활신앙과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1장에 의하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심으로써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부활해 내신 주님이셨습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 신앙에 눈 뜬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일흔 살이 넘는 나이에 마지막 걸작품 「부활」이란 작품을 썼습니다. 일찍이 그의 「참회록」에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젊은 시절은 공명심, 권세욕, 사욕,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이런 정열에 불태우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는 전쟁에서 숱한 사람을 죽였고 도박을 했으며 유부녀와 간음했으며 만취, 폭행, 살인 등 저지르지 않은 죄악이 없었습니다. 내가 글 쓰는 것은 오직 명예와 돈을 얻기 위해서였으며 문인들과 교제함으로써 추파와 아첨을 소나기처럼 덮어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성과 부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열 번에 가깝도록 자살을 기도한 바 있습니다.”

    말년에 톨스토이가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고 탄식하였듯 어둠의 무덤 속에 이미 죽어있던 톨스토이에게 어느 날 “톨스토이야 나오너라”고 한마디 함으로써 톨스토이를 부활시킨 빛의 주님이십니다.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죽음에서 일어난 새 사람이 되어 마침내 부활이란 소설까지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입구(入口)는 돌로 막혀 있는 무덤 속에서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톨스토이의 표현처럼 ‘공명심, 권세, 이기심, 애욕, 자만심, 분노, 복수심, 쾌락’의 어둠 속에 갇혀서 우리들의 몸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나 맡을 수 있는 악취까지 나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 군상의 현상 아닙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소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고 큰 소리로 외쳐서 우리를 부활시켜 주소서.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으로 일으켜 주소서.

    그리스도인 영성에 독특한 주장을 한 사람은 히틀러의 독재와 인종주의의 악에 항거한 본회퍼 목사입니다.
    그의 결정적 인생의 계기는 그가 미국에 온 1939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였습니다.
    그가 떠나온 것은 히틀러의 징병을 피해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그러나 불과 5주 동안 미국에 머물며 그의 친구 에베르하드(Eberhard Bethge)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결론을 내린 것을 봅니다.
    1939년 7월 뉴욕에서의 서신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기도하며 도달한 결론은 내가 미국에 온 것은 실수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국가적 고난의 시기에 독일에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머물며 살아야 했다. 내가 만약 이 시기에 나의 백성들과 함께 시련을 겪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그리스도인 생의 재건을 위한 참여의 자격이 없게 될 것이다.”

    이런 결론을 얻은 본회퍼 목사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여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본회퍼는 한 독일인으로서,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조국의 악을 중지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습니다.

    교회가 못하기에 그는 정치적인 항거운동(resistance movement)에 자신이 가담했습니다. 히틀러 살해 음모단의 대표 도난이(Dohnany)가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에 관해 질문했을 때, 본회퍼는 물론 히틀러 제거를 위해 칼을 쓰는 우리도 아무리 극단의 악한 여건 속에서라 해도 신의 심판은 면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누군가 자기들의 생명을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는 폭력은 죄라는 확신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히틀러살해 음모 결단을 정당화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목숨을 끊는 방아쇠를 다른 사람이 잡아당기며 그가 신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지 않기에, 그 신의 징벌에 해당하는 살인죄를 자신이 지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가 갈 천국에 저 지옥에 떨어진 한 영혼을 보내 달라던 갸륵한 기도와 맥을 같이 한 기원입니다. 이는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사랑하는 살인죄로 자신의 구원을 희생하는 위험을 스스로 자초하는 의지의 행위였습니다. 살해음모죄로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보낸 서신에서 본회퍼는 “참으로 신앙으로 복종하며 하나님께 충성스럽고 책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름과 요구에 그의 전 생명을 바치는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시간을 위해 책임지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과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신학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 영성은 속세를 떠나 거룩하고 신비한 세계에서 고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의무, 문제, 성공과 실패, 고통과 외로움, 좌절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세상을 위해 세상적(worldliness)으로 사는 것입니다. 테젤 감옥에서 본회퍼는 이것이 믿음이요 회개요 그리스도인의 생이며 영성이라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이를 이루어 줄 그의 사람들을 계속 필요로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오늘날 어떻게 구별된 자로 사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오늘 역사 한가운데서 때로는 홀로 외로이 설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선택된 자요 고귀한 자이며 능동적인 삶의 소유자요

    만인을 섬기는 종이나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끊임없는 훈련의 과정을 갖는 예외적인 사람입니다―이 길, 순례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 다르게 사는 자입니다. 의무가 아닌 사명의 길입니다. 신의 성품, 영성을 나눈 자의 다름은 윤리적인 다름입니다. 불의와 부정 속에서도 정의를 지키는 다름, 이기적 탐욕 속에서도 남을 돕는 봉사와 헌신의 다름, 실망과 낙심 속에서도 희망을 주는 밝음의 다름, 죽음의 선상에서도 노래하며 넘는 다름입니다. 얼마나 숭고한 도덕적 영적인 다름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 역사 속에서 가지는 거룩한 백성의 길입니다.

    구한말, 일제 강점기하의 교회는 고난 받는 민족의 희망이었습니다. 3·1운동을 비롯하여 일제에 대한 항거와 독립운동에서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난 받는 민족과 함께 했고, 세상과 연대하며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선교부와 함께 의료, 학원, 복지 등 각 분야에서 나라 잃고 신음하는 민족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교회에 대한 일반대중의 반응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예수는 예스(Yes), 교회는 노(No)가 아닐까 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지난 1970년대~80년대 군사 독재정권하에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한국교회가 왜 이런 질책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한편으로 ‘세속화의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적인 힘과 유행에 자신을 맞추려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다른 한편의 위험은 교회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신성화의 위험’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앞에서 자기 영화에 몰입할 때 일어납니다.
    전자의 위험 앞에서 한국교회는 세상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비슷해졌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 두 종류의 위험의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교회가 교회 안팎의 뜻 있는 사람들로부터 호된 질책과 비판을 받는 것은 한편으로는 바로 이같이 세상을 동경하다가 결국 세상과 구별할 수 없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당연한 결과로 세상을 향한 자신의 채임과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이 교회 자신에게 규정(規定)하는 과제(課題)를 다시 새롭게 확증해 나갈 때 교회 본연(本然)의 자리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길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하고 새 출발을 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사회 양극화’ 혹은 ‘격차사회’로 특징됩니다.
    WCC 벤쿠버 총회(1983)는 당대 선교의 과제를 구체적으로 JPIC(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으로써 인식하고, 오늘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평화는 전쟁의 종식뿐만 아니라 사회 각층간의 차별, 특히 사회적 및 경제적 차별의 근절이 급선무라고 파악한 바 있습니다.

    이는 사회정의와 경제정의가 함께 하는 평화를 이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 상황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남북미 정상 혹은 남북미중 정상이 ‘평화협정’을 선언하고, 남북 간에 항구적인 평화 체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온갖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하고 그 실현에 총력을 다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100년 전의 3·1운동 당시의 교회의 의거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계개혁교회의 시발점의 교회로 돌아가 교훈을 삼아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칼빈의 제네바 교회는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재정을 4분할하여, 각각 교회당 보수 관리비, 목회자 생활비,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금, 긴급을 요하는 이방인 난민 구호금으로 사용했습니다. 교회 재정의 50%가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과 이방인 난민들을 위한 구제기금으로 지출되었습니다. 이는 성서의 출애굽 공동체와 사도적 교회의 정신을 따르려는 데서 기인했습니다. 만약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성만찬의 의미를 되새기며 제네바 교회의 모델을 따라서 교회 안팎의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이방인 난민들과 연대한다면, 교회 재정의 절반을, 아니 형편에 따라 최대한의 재정을 기꺼이 그들을 위해 내놓을 수 있다면,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협하는 맘몬의 위세는 절로 꺾이게 될 것이며,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평화와 안전을 선취한 ‘샬롬’ 공동체로써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를 펴낸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이야기.

    그는 6년 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란 이름의 ‘저서평 전기’를 통해 한국에도 인도의 테레사 수녀 같은 인물이 있었음을 일깨웠습니다.

    의사인 포사이드(1873-1918)는 1905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돼 병을 얻어 1911년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불과 5년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지울 수 없는 빛을 남겼습니다.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에는 두 탕자를 구원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떠들면서 행실은 뒷받침되지 못하는 그런 류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은 이보한이라는 사람인데, 당시에 포사이드는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진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포사이드는 자신의 귀를 자른 범인을 용서했고, 그의 한센병 환자를 부둥켜안고 치료해 주는 모습에 ‘걸인의 아버지’ 이보한(1872-1931)은 감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이후 이보한은 광인 흉내를 낸 채 독립운동을 하면서 부자들에게 돈과 음식을 탁발해 걸인들에게 나눠주었는데, 늘 <거두리로다>라는 찬송을 불렀기 때문에 ‘이 거두리’로 불렸습니다. ‘이 거두리’는 나라 잃은 망국민들과 자신처럼 상처 입은 영혼을 거둔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동네 깡패였다가 개과천선한 최흥종(1880-1966).
    포사이드는 1908년 목포에서 활동하다가 광주진료소의 선교의사 오웬이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오다가 거적때기 위에 누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한 한센병 환자를 만납니다.
    당시 천형(天刑)인 문둥병 혹은 나병으로 불린 한센병 환자들은 전염을 두려워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은커녕 돌팔매질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포사이드는 이 여인을 부둥켜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병원에 들어섰습니다.
    그것이 나환우들을 돌본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 돌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때 오웬의 조수로 병원에서 포사이드를 지켜본 최흥종은 큰 변화를 일으켜 ‘나환우들의 아버지’가 됩니다.

    저자는 “포사이드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말로 가르친 게 아니었다”며 “그의 내면에서 우러난, 소리 없는 행동이 보는 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선에 2천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왔지만, 다 서서평이나 포사이드 같은 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두 선교사는 마치 조선 사람들처럼 친히 가난한 삶을 살면서 헌신했었다고 하였습니다.

    서서평이나 포사이드가 우리 가슴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건 마지막까지 주님에게 자신을 던져버리고 다 비워버리고 헌신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며 평화 위해 의한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인 것입니다.


    신명기 28:1~68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ㅇ삼가 듣고 - 원문상 이는 '경청하다'는 뜻의 '솨마'가 반복된 문장으로, 직역하면 '듣고 듣다'이다. 그러나 '솨마'란 단어가 중복되어 쓰일 때에는 대개 '주의하여 경청하다'(carefully listen)는 관용적 의미를 지닌다(출23:22). 그러므로 KJV는 본절을 '성실하게 듣다'(hearken diligently)로 번역하였다.

    ㅇ지켜 행하면 -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전제 조건으로 무엇보다 '순종'이 제시되고 있다. 사실 인간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의한 무조건적이고 단독적인 역사이지만, 한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해 반드시 보응하신다(욥 34:11;잠 24:12;롬 2:6).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ㅇ순종하면...미치리니 -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는 따로 특별히 복(福)을 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주어질 것임을 보여 주는구절이다. 후일 예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아뭏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와 그에 따르는 축복은 유기적인 함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복(베라카) - 기본 동사 '바라크'는 '무릎을 꿇다'(kneel)란 뜻이다.
    이것은 곧 복(福)의 기원을 말하는 바, 모든 복은 위로부터 임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순종의 상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경을 주의깊게 고찰해 보면 복(福)에는 두 가지 차원(次元)의 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차원의 복 - 부차적(副次的), 상대적, 일시적인 복

    둘째, 영적이고 내세적인 차원의 복 - 근원적(根源的), 절대적, 영원한 복 

    계시(啓示)가 발전되어 있지 않은 구약 시대에는 복의 개념이 주로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으로 강조되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완전 계시된 신약 시대에는 내적이고 영적인 측면으로 강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복에 대한 성경의 근본 개념은 동일하다.
    곧 참된 복은 인간이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곧 순종에 기반을 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성립'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즉 복이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어떤 유익의 단계를 넘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참된 복의 근원이요, 복 그 자체란 뜻이다(창 15:1. 요 15:5).

    말씀에 대한 순종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이 되어 주신 데 대한 의무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 성도가 추구하여야 할 복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는 영적이고 내세적인 복이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 수훈의 8복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마 5:3-12).

    따라서 오늘날 개인의 장수, 부귀, 명예, 득남(得男)등이 복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끊임없이 개인의 물질적 축복만을 비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나 또는 '신앙=물질적 축복'의 복사상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한 부차적인 복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때로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거두시기도 하시며 (삼상 2:7), 오히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자에게 그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물질적 궁핍이나 역경을 일부러 허락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히 12:5-13).

    그러므로 성도는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전적으로 맡기고, 매일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참되고 복된 생활을 추구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ㅇ성읍에서도...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성읍'은 항상 많은 사람들이 붐비며 각종 사건과 소문이 빠르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따라서 그러한 곳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뭇 사람들이 역력히 알 수 있는 공개적이고도 큰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들'은 사람이 매우 드문 한적한 장소이다. 따라서 그러한 곳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지라도 사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여기서 '성읍'과 '들'은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모든 환경과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어디에 있든, 그리고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입게 되리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Delitzsch, Lange).

     

    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ㅇ네 짐승의...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가축의 증산(增産)이 원활히 이루어져 그 수효가 크게 번성하리라는 것을 가리킨다. 유목(遊牧) 민족에게 있어서 이는 실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7:13).

     

    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ㅇ광주리 - 땅에서 거둔 곡식과 과실, 그밖의 모든 토지 소산(所産)을 담아 두거나 저장해 두는 데 쓰이는 각종 용기(容器)를 가리킨다.

    ㅇ떡반죽 그릇 - '부풀다'는 뜻의 '솨아르'에서 파생된 말로 곧 반죽을 부풀리는 '반죽 통'을 가리킨다. 히브리인의 주식은 밀가루로 만든 빵이었으므로, 곧 이는 포괄적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데 사용되는 모든 그릇'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주식으로 삼은 것은 만나였다(출 16장). 그러나 가나안 정착 후에는 '떡반죽 그릇'에도 복이 임하리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식생활을 만족시켜 주사, 가나안에서는 개개인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먹도록 하시었다는 의미를 지닌다(수 5:10-12).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ㅇ들어와도 복을 받고 - 일을 마치고 귀가하거나 또는 휴식을 취하러 집으로 들어 올 때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입을 것이란 뜻이다.

    ㅇ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하여 일터로 나가는 길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그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케 되게끔 도와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절 역시 3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은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그리고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그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형통케 될 것이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7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ㅇ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7'이란 숫자는 '완전'을 뜻하는 상징수이다(창 2:1-3;마 18:21, 22). 따라서 이는 대적들이 완전히 패배하여 제각기 산산이 흩어지리라는 뜻이다(32:30;레 26:7, 8). 이러한 실제적인 예는 가나안 정복 전쟁시 이스라엘과 아모리 연합군간의 싸움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수 10:10, 11).

     

    8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ㅇ여호와께서 명하사...복을 주실 것이며 -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복이 네게 있도록 명령하시어'이다. 이처럼 '복'을 의인법적(擬人法的)으로 표현하고 있는 원문은 마치 '축복'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즉시 찾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ㅇ창고(아삼) - '저장하다', '함께 쌓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특히 '곡식 창고'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ㅇ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 하나님의 축복은 결코 두손을 놓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들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안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자들이 차지하게 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 (12:7).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10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ㅇ이미 출 19:5, 6에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언약 백성, 곧 거룩한 민족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부분이다(7:6;26:19).

    ㅇ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두려워하리라 - 어떠한 사물을 그 누구의 이름으로 일컫는다는 것은 곧 그 사물이 그 사람에게 속하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호와'란 이름은 열방 중 언약 관계하에 있는 구별된 백성 이스라엘에게만 독특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이다(출 3:15;6:2, 3). 따라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성호(聖號)로 이스라엘을 부르시겠다는 것은 곧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인(印)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열방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두려워 떨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새끼를 돌보고 있는 어미 사자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같다.

     

    11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ㅇ많게 하시며(야타르) - 원뜻은 '돌출하다', '두드러지다'이다. 이는 곧 다른사람의 눈에 띌 정도로 풍부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자손 번성의 축복은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도 거듭하셨던 하나님의 축복이다(창 12:2;13:16; 15:5;17:6;22:17).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ㅇ하늘의 아름다운 보고 - 공동 번역은 '당신의 풍성한 보물 창고인 하늘'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NIV는 '그의 긍휼의 창고인 하늘'(the heavens, the storehouse of his bounty)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뒤에 나오는 '비'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네게 하늘 보고(寶庫)를 열어 비를 내려 주시므로 철을 따라 풍성한 수확을 거두도록 해 주겠다'(Living Bible)는 약속으로 이해할수 있다.

    ㅇ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 팔레스틴의 절기를 따라 '이른비'와 '늦은비'를 적절히 내려 주시겠다는 뜻이다(레 26:4). 이는 곧 언제, 어디서든 성도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시고 돌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마 6:26-32). 11:14 주석 참조.

    ㅇ네가...꾸어 줄지라도 - 하나님의 축복이 이스라엘 중에 넘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차고 넘치는 그 같은 축복을 타 민족에게 확산시키는 복의 전수자가 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15:6;창 12:3).

     

    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ㅇ머리...위 - 여기서 '머리'(로쉬)는 '명예'와 '존귀'를 상징한다. 그리고 '위'는 '머리'에 대한 병행구로서 강조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ㅇ꼬리...아래 - 여기서 '꼬리'(자나르)는 '부끄러움'과 '비천'을 상징한다. 그리고 '아래'는 '꼬리'의 병행구로서 강조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14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ㅇ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말씀만을 인간 삶의 유일한 정도(正道)요 푯대로 삼아 줄곧 좇아가는 것을 가리킨다(5:32).

    ㅇ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 이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행할 수 있는 근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을 자신의 유일한 참신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자세를 갖춰야만 비로소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겠다는 마음이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6:14;11:28). 십계명 중 제 1, 2계명이 모든 우상을 금지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출 20:3-6).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ㅇ여호와의 말씀을...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 이는 곧 영(靈)의 일과 선한 일에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엡 4:19) 행하는 짓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대로 살지 않는 자,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는 자에게는 무서운 진노와 심판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마 23:16, 25;히 10:26, 27).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저주를 받을 것이요 - 27:16 주석 참조.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ㅇ네 몸의 소생...저주를 받을 것이며 - 율법은 분명히 자식이 그 부모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을 뿐임을 천명하고 있다(24:16;렘 31:29, 30;겔 18:2). 그러나 부모들의 죄악된 행위는 그것을 보고 자라는 자녀들의 죄성(罪性)을 자극하여 자칫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쉽다. 본절 역시 바로 이런 뜻에서 한 사람의 불순종이 그의 자녀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인 듯하다(5:9, 10). 출 20:5 주석 참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ㅇ이 부분은 3-6절에 나오는 '순종에 따른 축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으로서의 '불순종에 따른 저주'가 언급된 부분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복 또는 저주가 의인화되어 당사자를 끝까지 '따라 다니는'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본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6절 주석을 참조하라.

     

    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ㅇ저주와 공구와 견책 - 불순종에 따르는 하나님의 '징계'를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중언법적 표현이다. 하지만 굳이 그 의미를 세분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저주'에 해당하는 '메에라'는 '축복'의 반대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끊겨진 상태'를 뜻한다. 다음으로 '공구'에 해당하는 '메후마'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인간이 겪는 '큰 소동'이나 '혼란스러움', '당혹감' 등을 가리킨다(7:23;삼상 14:20). 그리고 '견책'에 해당하는 '미그에레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심한 책망'을 의미한다.

     

    21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ㅇ염병(데베르) - '파괴하다'는 말에서 온 단어로 '흑사병' 또는 '악역'(惡疫, pestilence)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을 가져다 줄 수 있을 정도의 치명적이고 혹독한 질병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이런 점에서 70인역(LXX)은 이를 '죽음'(싸나토스)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다.

     

    22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ㅇ폐병(솨헤페트) - '여위게하다', '소모하다'란 뜻의 '솨하프'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몸의 기력을 소진시켜 사람을 죽게하는 병으로서 일명 '결핵'(tuberculosis)으로도 불리운다.

    ㅇ열병(달레케트) - '불붙다'는 뜻의 '달라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뒤이어 나오는 상한 및 학질과 마찬가지로 심한 열을 발생시키는 '염증'(inflammation)을 가리킨다(Delitzsch, Keil, Lange).

    ㅇ한재(헤렙) - '황폐하다', '파멸하다'란 말에서 온 단어로 '칼'이나 '예리한 도구'를 가리키기도 한다(13:15;창 27:40;수 5:2). 그러나 여기서는 '아주 극심한 가뭄'을 의미한다.

    ㅇ풍재(쉬다폰) - '말라 죽게 하다'는 뜻의 '솨다프'에서 파생된 단어로 마르고 시드는 '고조병'(枯凋炳)을 가리킨다. 이는 농작물을 시들게하는 건조한 바람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므로 공동 번역은 '열풍'으로도 번역하고 있다 (창 41:23).

    ㅇ썩는 재앙(예라콘) - '창백'이란 뜻의 '예레크'에서 온 단어이다. 찬 이슬로 젖어 있는 잎사귀가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나 태양열로 인해 썩어버리는 현상을 가리킨다(Keil). 한편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곰팡이'(mildew)로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

    ㅇ너를 치시리니 - '치다'에 해당하는 '나카'는 '살해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심한 적대 행위를 의미한다.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ㅇ하늘은 놋이 되고...땅은 철이 될 것이며 - 이는 오랫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땅이 쇠덩이처럼 굳어 버리는 극심한 한발(旱魃) 현상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레 26:19). 팔레스틴은 비교적 우기(10-4월)와 건기(5-10월)가 명확히 구분된다 (11:14). 따라서 우기(雨期)에 적당한 양의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들기 쉽다. 또한 건기(乾期)에는 이따금씩 내리는 비와 이슬만이 식물에게 수분을 제공하는 공급원이 될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때 가뭄이 들게 되면 초목들은 말라 죽고 땅은 메말라 갈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적절히 내리는 비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표현이라면(12절), 본절의 표현은 하나님의 저주를 상징하는 말이다. 따라서 결국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될 가나안 땅이 비록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라 할지라도(26:9)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땅이 그 소산(所産)을 내주기를 거절하는 피폐한 땅으로 변모하게 되리라는 무서운 경고임을 알 수 있다.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

     

    ㅇ티끌과 모래 - 황폐한 토양에 바람이 급하게 불 때 일어나는 흙먼지를 가리킨다. 팔레스틴에는 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쪽으로 부는 뜨거운 바람인 '시로코'(sirocco) 때문에 이러한 먼지가 자주 일어난다(Robinson, Thomson). 그러므로 이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안질이나 오한(惡寒) 등의 병에 걸리기 쉽다.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내왔던(8: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탓에 결국 가나안 땅에서 이러한 현상에 시달리게 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5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

     

    ㅇ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 누리게 되는 축복과는 정반대되는 저주이다(7절).

    ㅇ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 - 여기서 '흩음을 당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레자아와'의 기본형 '제와아'는 '진동하다', '움직이다'란 의미이다. 여기서부터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란 의미가 파생되어 결국 본절의 의미는 땅의 모든 나라들이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공의 신세가 될 것이란 뜻이다(Schultz, Keil, Pulpit Commentary). 그런데 모세의 이 말은 다분히 예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이 말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실제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왕국 유다가 각각 멸망당하므로 세계 각지에 흩어지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A.D. 70년경 로마 제국에 의하여 또다시 멸명당하므로 말미암아 세계 각처에 완전히 흩어지게 되고 말았다. 물론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이 재건되므로인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귀향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디아스포라)은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무수히 많다. 따라서 이는 실로 하나님의 말씀의 엄중성을 생생히 증거해 주고 있는 역사적인 실례가 아닐 수 없다.

     

    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을 것이며

     

    ㅇ네 시체가...짐승들의 밥이 될 것 - 전쟁에 패배하는 것도 비극이지만 이처럼 시신(屍身)이 야수의 먹이가 되는 것은 사자(死者)에게 있어서 가장 큰수치이자 모멸이 아닐 수 없다(왕상 14:11;렘 7:33;16:4). 특히 시신이 무덤에 안장되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저주로 생각하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선 더욱 그러하다.

     

    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료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ㅇ종기(쉐힌) - 부스럼(Living Bible, boil)이나 염증, 독종 따위를 가리킨다. 출 9:10 주석 참조.

    ㅇ치질 - 여자에게 생기는 '자궁병'까지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으나(Lange) 분명치 않다. 종종 '종창'(Living Bible, tumour)이나 '궤양'(RSV, ulcer)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유대 랍비들은 이를 '항문의 질병'으로 이해한다(Keil).

    ㅇ괴혈병 -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인하여 빈혈이나 출혈 증상이 생기고, 전신 피로 혹은 무기력 증세가 따르는 병이다(레 21:20). 공동번역은 '옴'으로 번역하고 있다.

    ㅇ개창 - 애굽, 수리아 등 고대 중.근동 지역에 흔한 질병으로서 일반적으로 피부가 마르므로 인해 생기는 '가려움증'(KJV, itch)을 가리킨다.

     

    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ㅇ미침(솨가) - '날뛰다'란 뜻으로, 정신이 혼란해져 정상적인 의식(意識)활동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킨다.

    ㅇ눈멂(아와르) - 원뜻은 눈을 덮고 있는 '막'을 가리킨다. 그런데 카일(Keil)은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육체적 소경 뿐만 아니라, '정신적' 또는 '영적 소경 상태'라고 주장하였다(Op. cit. p. 439).

    ㅇ경심증(타마) - '간담이 서늘하도록 놀라다'는 뜻으로, 터무니없이 자주 깜짝깜짝 놀라는 증세를 가리킨다.

     

    29 소경이 어두운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ㅇ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 인간사(人間事)에 있어서든 영적 구원 문제에 있어서든 올바른 지향점이나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방황하는 것을 의미한다(Delitzsch). 한편 하나님을 떠난 자가 겪게 될 이러한 어려움에 대하여 성경은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사 59:10)라고 묘사하고 있다.

    ㅇ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품을 떠나 불순종의 패역한 길을 걷게 될 때, 그들은 치료의 하나님이시요(출 15:26), 구원의 하나님이신(대상 16:35;시 18:46) 여호와께 버림당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이다. 이 말은 반대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치료하시며 구원해 줄 자는 천지간에 오직 한분 여호와 뿐이심을 일깨워 주는 말이기도 하다.

     

    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

     

    ㅇ여자...집...포도원 -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소유가 하나도 남김 없이 원수들에게 약탈당하리라는 경고이다. 특히 자신과 약혼할 처녀를 원수에게 빼앗기거나, 자기 품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가장 가슴 아프고도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은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이 신랑인 남편을 저버린 데 대한 가장 합당한 처벌임에 분명하다.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아감을 당하여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대적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ㅇ소...나귀...양을 대적에게 빼앗길 것이나 -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러한 가축들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대적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곧 경제적 파산(破産)을 의미한다(4절).

     

    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봄으로 눈이 쇠하여지나 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며

     

    ㅇ네 자녀를...빼앗기고 -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 무서운 장자(長子) 재앙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보호해 주셨었다(출 11:7).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에는 그러한 보호의 손길을 거두고 그자녀들을 이방민족에게 포로로 넘기겠다니 이는 실로 엄중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자식은 한 가정의 기쁨일뿐 아니라 한 국가의 미래이니 더욱 그러하다.

    ㅇ눈이 쇠하여지나 - '쇠하여지다'에 해당하는 '칼라'는 너무도 간절하고도 애타는 마음으로 인해 눈이 극도로 피곤해지거나 상한 상태를 가리킨다(시 119:81; 사 38:14).

    ㅇ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며 - 대적들의 노략질에 대하여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하고 앉아서 당하기만 해야 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무능한 상태가 될 것이란 뜻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열방의 머리가 되고(13절) 또한 세계 만민이 보고 두려워 떨게 될 것이라는 말(10절)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33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ㅇ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라니 - 이 경고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었던 지긋 지긋한 400년간의 종살이 생활을 상기시켜 주는 말이다. 이제 겨우 어렵게 벗어난 그같은 압제와 학대(출 1:8-22;5:6-14)의 노예 생활을 이스라엘이 다시금 받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소름끼치는 저주가 아닐 수 없다.

     

    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

     

    ㅇ네 눈에 보이는 일로...미치리라 - 삶의 나날이 희망이라고는 도무지 없고, 눈만 뜨면 오로지 고통과 압제와 학대의 연속이라 할때 결국 인간에게 찾아드는 것은 극도의 절망과 공포로 인한 정신 분열일 수밖에 없다.

     

    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ㅇ종기 - 출 9:10 주석 참조.

    ㅇ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 혹독한 재앙이나 온갖 질병으로 인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처참한 상태를 나타내는 강조적 표현이다(욥 2:7;사 1:6).

     

    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ㅇ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 - 이 말은 현재 신정(神政) 체제하에 있는 이스라엘이 장차 세속적인 정치 체제인 왕정(王政) 체제를 수립하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는 말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B.C. 1050년경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옹립하였다(삼상 8-11장).

    ㅇ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 -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를 B.C. 722년과 B.C. 586년에 각각 멸망시키고, 그들 왕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갈 앗수르와 바벨론(왕하 17:1-18;25:1-7)을 가리킨다(25절). 그런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요단을 건널 때가 대략 B.C. 1405년 경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이스라엘은 B.C. 1354년 경에 건국된 앗수르와 B.C. 625년경에 건국된 바벨론(신바빌로니아)을 알지 못했다.

    ㅇ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 - 앗수르와 바벨론인들이 섬기던 주된 우상으로는 므로닥(렘 50:2), 벧 (사 46:1), 느보(사 46:1), 담무스(겔 8:14)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사사기 2장 강해, 고대 근동의 신들을 참조하라.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ㅇ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 여기서 '놀램이 될 것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으로부터 큰 두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한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면 타민족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는 경고는 훗날 실제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애 2:15, 16;겔 36:4;단 9:16).

     

    38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ㅇ메뚜기가 먹으므로 - 여기서 '메뚜기'를 가리키는 '아르베'는 '증가하다', '너무 많다'는 뜻의 '라바'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는 곧 거대한 무리를 형성한 채 바람을 타고 이동하면서 농작물을 닥치는대로 먹어 치우는 메뚜기를 가리킨다. 이러한 메뚜기 재앙은 오늘날의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목격되곤 하는데, 고대 근동에 있어서는 가장 무서운 자연 재해 중의 하나였다(출 10:12-15). 한편 성경상에는 종종 이와 같은 메뚜기 재앙이 언급되고 있는데 대개 하나님의 징계와 관련하여 나타난다(출 10:12-15;대하 7:13;시 78:46;105:34, 35;욜 1:4;2:25).

     

    39 네가 포도원을 심고 다스릴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ㅇ포도원을 심고...포도를 따지 못하고 - 지중해변에 위치한 팔레스틴 지방은 기후상 포도 재배에 알맞다. 따라서 일찍부터 산지를 개간하여 만든 포도원이 발달하였다. 여기서 생산되는 포도나 포도주는 이스라엘인의 식생활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으며, 포도주는 일상생활의 주 음료로 애용되었다(삼하 16:2;요 2:1-11). 또한 포도주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기도 하였으며(삼상 1:24;10:3), 때로는 약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눅 10:34;딤전 5:23).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이러한 포도를 거둬들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ㅇ벌레(톨라아트) - '분홍색 벌레', '유충'이란 뜻이다. 혹자는 과수(果樹)나 벼 따위에 기생하면서 작물에 피해를 끼치는 흑갈색 갑충인 '바구미'(rice-weevil)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Pulpit Commentary).

     

    40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ㅇ감람나무...기름 - 감람나무(olive tree) 역시 히브리인들에게는 포도나무 못지 않게 생활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무이다. 왜냐하면 열매의 수확량이 많은데다 이 열매에서 짜낸 올리브유는 식용유(食用油), 등잔 연료(민 4:16), 약재(막 6:13;눅 10:34) 등과 같이 다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름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사용되는 관유(灌油)를 제조하는 데에 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출 30:24, 25). 한편 이러한 감람나무는 팔레스틴중에서도 특히 베들레헴이나 헤브론 근처에 많이 자란다.

    ㅇ떨어지므로 - 이에 해당하는 '나솰'은 '잡아 뜯다', '벗기다'(출 3:5)란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적인 심판에 의해 떨어지는 것임을 강조해 준다(Schultz).

     

    41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네게 있지 못할 것이며

     

    ㅇ자녀...네게 있지 못할 것이며 - 32절에 언급된 저주의 재강조이다. 이는 가정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장래의 소망이 사라지는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32절).

     

    42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ㅇ메뚜기(첼라찰) - '딸랑거리다', '윙윙거리다'는 뜻의 '찰랄'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메뚜기가 날 때 날개에서 나는 소리에서 따온 낱말임에 분명하다(Lange, Keil). 38절의 '아르베'와 비교해 보라.

     

    43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44 그는 네게 꾸일지라도 너는 그에게 뀌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ㅇ본절들은 12, 13절에서 언급된 축복의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상황이다.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ㅇ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 - '이방인'을 가리키는 '게르'는 '나그네','손님', '타국인' 등과 같은 뜻으로, 이스라엘에 귀화(歸化)하지는 않았으나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同化) 되어 오랫동안 함께 살고 있는 이방 잡족(雜族)을 의미한다 (10:18).

     

    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ㅇ앞서 언급된 경고의 거듭되는 주지(主旨)이다(15절).

     

    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

     

    ㅇ표적(오트) - 원뜻은 '깃발', '신호'(sign)를 가리키나 상징적으로는 어떤 사실에 대한 '증거'(사 19:20)를 뜻한다. 70인역(LXX)은 이를 '세메이온'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초자연적 현상'을 뜻하는 '이적'(miracle)과 같은 말이다(마 12:38).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이 말이 이스라엘의 파멸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으니 '경고' 또는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ㅇ감계(모페트) - '증표', '징조'(omen)란 뜻인데 사실상 '표적'과 같은 말이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경이'(wonder)로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

     

    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ㅇ모든 것이 풍족하여도...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 하나님께서 애굽의 압제하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건져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가나안 땅(27:3)으로 인도해 들인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세웠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출 2:23, 24). 그리하여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언약의 땅에서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서였다(출 19:5, 6).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저버리므로 말미암아 결국 대적들에게 비참하게 멸망 당하고마는 비극을 초래하고야 말았다(25절).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ㅇ철 멍에 - 매우 견디기 힘든 무겁고도 견고한 속박을 의미한다. 사실 목이 굳을 대로 굳은 이스라엘(왕하 17:14)에게 있어 그 같은 철 멍에의 속박(대하 36:17-20)은 아주 적합한 형벌이었다.

     

    49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ㅇ원방에서...한 민족 -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지리에 어두웠기 때문에 지금의 중동지방에 위치했던 앗수르나 바벨론은 '원방' 혹은 '땅끝'에 있는 나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여기서의 '한 민족'을 후에 일어난 '로마'로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독수리'는 로마군의 군장(軍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를 꼭 앗수르(사 5:26)나 바벨론(렘 28:14;49:22;겔 17:7), 아니면 로마와 같이 특정한 한 나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패역할 때마다 그들을 괴롭히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든 열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바람직하다(Keil).

    ㅇ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자고(自高)할 때, 강력한 이방 군대가 마치 독수리처럼 '매우 신속하고도 빠르게' 그들을 멸망시키러 올 것이라는 뜻이다.

    ㅇ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 - 실제로 히브리어는 서셈어군에서 기원하였으며, 알파벳으로 구성된 방언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앗수르어나 바벨론어는 동셈어군에서 유래하였으며, 음절로 이루어진 방언이다. 따라서 의사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다(Vol. I. p. 59, 구약의 언어).

     

    50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유치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ㅇ용모가 흉악한 민족 - 여기서 '용모가 흉악하다'는 것은 외형적 모습을 묘사한 말이 아니라, 노약자나 어린아이도 무자비하게 해칠 정도로 '성질이 매우 거칠고 포악한 것'(잠 21:29)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대하 36:17-21에 잘 나타나 있다.

     

    51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서 필경은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필경은 너를 멸절시키리라

     

    ㅇ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 - 이는 가나안의 3대 소산물이자(7:13) 생필품으로서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대적이 침입하여 이를 모두 거두어 간다면 당장의 생계가 치명적으로 위협당하는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33절).

     

    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ㅇ네가 의뢰하는...성벽을 다 헐며 - 이 예언은 B.C. 586년 남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 성읍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 있다가 결국에는 함락되고 만 역사적 사실(왕하 24:20-25:12;대하 36:13-21)로 성취되었다(25절). 실제로 당시유다 왕국은 하나님보다도 자신들의 견고한 성읍과 높은 성벽을 더 의지하고 이로써 충분히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었다(사 25:12;렘 50: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셨던 것이다.

     

    53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ㅇ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 이러한 예언은 엘리사 선지자가 활약했던 시기에도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즉 여호람(B.C. 852-841) 치하의 북 이스라엘 왕국은 한때 아람군대의 침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 수도 사마리아가 한동안 포위되 었었는데, 성 안의 사람들이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게 되자 자녀를 삶아 먹은 일이 발생했었다(왕하 6:24-33). 그러나 이 예언이 보다 구체적으로 성취된 때는 선지자 예레미야 당시 남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때이다. 이때는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오히려 나았을 정도였기에, 부모가 자녀를 삶아 먹는 일이 허다했었다(애 2:20;4:9, 10).

     

    54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하여  

    55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

     

    ㅇ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질시하여 - '질시하여'(테라)란 말은 '악한 눈으로 보다' 또는 '~에 대하여 악한 눈을 가지다'란 의미이다. 곧 이는 자녀를 더 이상 자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먹을 고기 덩어리로만 보는 극악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가족끼리도 서로 자녀의 고기를 혼자만 먹겠다고 질시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만큼 야만적이며 야수화(野獸化)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 준다. 아울러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의 대가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생생히 증거해 준다.

     

    56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하여  

    57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ㅇ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 -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란 까닭에 가마나 나귀 또는 기타 탈 것만을 타고 다녀 별로 신발에 흙을 묻혀 보지 아니하던 이스라엘의 귀부인들을 가리킨다(Delitzsch, Hengstenbery, Pulpit Commentary).

    ㅇ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 배고픔이 그 극치에 이를 경우, 평소 우아한 품위를 자랑하던 귀부인들조차도 모든 품위와 자제력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심지어 자기 태의 자녀까지 식용으로 잡아먹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식인(食人)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팽개쳐 버린 짓일 뿐 아니라, 그 어떠한 이유로도 변명될 수 없는 불신앙적 행위이다. 즉 이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적 통치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멸망할 짐승 같은 짓이다(시 49:20).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ㅇ이 책 - 비단 본서인 신명기만을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다. 모세는 십계명(5:6-21;출 20:1-7)을 비롯하여 언약서(출 20:22-23:33), 성결 법전(레 11-26 장), 제사 법전(레 1-10 장) 등도 기록하였었다. 따라서 이는 모세가 백성들에게 전해준 '토라'(Torah, 모세오경) 전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Keil, Pulpit Commentary).

    ㅇ율법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바로 '모세 오경'을 지칭하는 '토라'이다. 그런데 이 말은 광의적으로는 '구약 성경 전체'를, 협의적으로는 '십계명'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여러 법적 조문 및 교훈을 의미한다.

    ㅇ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 - '여호와'란 이름에 대해서는 출3:15;6:2 주석을 참조하라.

     

    59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ㅇ극렬하게 하시리니 - '극렬하다'에 해당하는 '팔라'는 '크다', '구별하다', '경이롭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그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크고 두려운 재앙을 내리실 것이란 말임을 알 수 있다.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ㅇ애굽의 모든 질병 - 혹자는 모세가 바로 앞에서 행하였던 열 가지 재앙(출 7:14-12:30) 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으로 보아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기 백성을 징계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징계의 모든 수단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따라서 이에는 애굽에 발하였던 것과 같은 재앙 뿐아니라, 지금까지 언급된 것과 같은 각종 질병(22, 27, 28 절)도 포함될 수 있다.

     

    61 또 이 율법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ㅇ율법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 - 하나님께서 하시고자만 하신다면 인간이 지금까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질병으로 타락한 백성을 징계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실로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패역 무도한 죄악을 쌓으면 쌓을수록 온갖 극악한 종류의 질병은 더욱더 창궐하여 마침내는 인간을 멸망의 길로 내몰 것이다.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되지 못할 것이라

     

    ㅇ별같이 많았을지라도...남는 자가 얼마 - 일찍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약속, 곧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는 축복의 말씀과는 대조되는 구절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대로 번창했다. 즉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진군하기 시작하던 당시 이스라엘의 수효는 장정만 60만 가량이었다(출 12:37). 그러나 정작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모두 포로로 잡혀 갔을때(B.C. 586년), 본토에 남은 자는 불과 2만명 안팎이었다고 한다(W. F. Albright). 또한 더 훗날 유대 민족이 로마에 의해 망하게 되었을 때(A.D. 70년)에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은 자외에 무참히 살륙당한 자만도 200만 명에 달했었다고 한다(Josephus). 결국 이상과 같은 사실은 본문의 하나님의 예고가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지를 단적으로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경고를 발하실 때 즉시 깨닫고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야 할 것이다.

     

    63. 이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ㅇ이제는 여호와께서...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속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인조차도 그 죄악 중에서 멸망당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겔 18:23;33:11;벧후 3:9).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께서 하물며 열국 중에서 고르고 뽑아 자신의 자녀로 삼은 이스라엘이 그 죄악중에서 멸망당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실 리 만무(萬無)했다.
    결국 본절은 끝내 회개하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엄한 징계의 채찍을 가해서라도 마침내 회개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하고도 애타는 심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64.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ㅇ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 이 예언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유대 민족이 멸망당하므로 말미암아 완전히 성취되었다. 25절 주석 참조.

    ㅇ목석 우상 - 앗수르인과 바벨론인들 등이 섬기던 이방 각종 이교 우상들을 가리킨다. 36절 주석 참조.

    65.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ㅇ네 발바닥을 쉴 곳도...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 영원한 안식처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자는 외적인 평안 뿐 아니라, 내적인 마음의 평안조차 누릴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제로 그들은 바람에 혼들리는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고 마는 병약한 자들이 될 뿐이었다(레 26:36, 37).

    66.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ㅇ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 마치 천길 낭떠러지를 가느다란 밧줄 하나에 매달려 있는 목숨처럼 '네 생명을 잠시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Lange, Keil).
    이는 생명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범죄자들이 자기 목숨에 대하여 얼마만큼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를 잘 시사해 준다(Luther).

    ㅇ확신할 수 - '확신하다'에 해당하는 '아만'은 '견고케 하다'(대상 17:23)란 뜻과 더불어 '양육하다'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이는 자기 생명을 보존할 뿐 아니라, 생명의 참된 의미를 고양시켜 나가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7.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ㅇ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 극도의 고통과 괴로움으로 인해 오직 시간 흐르기만을 고대하는 처참한 생(生)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말이다(욥 7:3, 4).
    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종의 생활이 그 어디서나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이 안타까운 천국 생활이라면,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매 순간 매 상황이 지겹도록 긴 지옥 생활임을 잘 시사해 준다.

    68.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비로 팔려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ㅇ배에 실으시고...그 길로 -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은 시내 반도 남부를 거쳐 가나안에 도달하는 육로(陸路)로 이루어졌었다(민 33:1-49).
    따라서 이스라엘이 배에 실려 그같은 육로를 되밟게 되리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이는 배를 이용하는 해상(海上) 교통이 육로 교통보다 빠른 점에 빗댄 말로서 '급속히 되끌려 가리라'는 뜻인 듯하다.
    또한 당시 해상을 이용한 노예 무역에 비추어볼 때 이는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리라'는 뜻인 듯도 하다(Keil, Hengstenbery).

    ㅇ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 출애굽의 은혜를 망각하고 시내 산 언약(출 19:5-8)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더이상 자유민으로서 하나님의 신정 통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이 다시금 그들을 애굽의 비참했던 노예 상태로 되돌리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실로 "출애굽이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을 의미한다면 입(入)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의 죽음을 의미한다"(Schultz).

    ㅇ노비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면, 그들은 더이상 쓸데없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 것이라는 풍자적 표현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할때 '보배로운 백성'이 되리라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26:18).
    한편 실제 역사는 본절의 성취를 생생히 보여 준다.
    즉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의 살만에셀에 의해(왕하 17:3-6),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왕하 25:1-21), 그리고 로마의 디도(Titus) 및 하드리안(Hadrian)에 의해 수없이 노예로 잡혀갔으며 또한 노예로 매매되었다(Jerome, Philo, Josephus).
    심지어 히틀러 당시에는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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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5일(목)

    여호와의 백성(신명기 27:9)

    모세와 레위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아 잠잠하여 들으라 오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1-4. 에발 산상에 율법을 기록한 기념석을 세울 것.
    5-8. 돌단을 쌓고 제물을 드릴 것.
    9-10.  율법을 지키라는 권고.
    11-13. 열 두 지파 서로 그리심 산과 에발산으로 갈라서서 축복과 저주를 선언할 것.
    14-26.  레위인이 선언할 열 두 가지 저주의 말.

    여호와의 백성은 보배로운 백성입니다(18절).
    보배로운 백성은 반드시 행해야 할 명령과 규례를 지켜야 할 의무를 갖습니다(10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찌니라."

    신명기 27장은 에발 산(Ebal, 벌거벗은 산. 해발 920m))과 그리심 산(Gerizim, 제거하다. 해발 854m0에서의 의식에 대한 명령입니다.

    세겜(수가, 나블루스)을 가운데 두고 에발산(해발 920m)은 북쪽에 그리심산(해발 854)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
    에발은 민둥산을 의미하고 그리심은 제거하다를 의미한다.
    모세는 신명기 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여섯 지파로 나누어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27장은 모세의 마지막 설교를(제3차 설교) 시작하는 말씀으로 율법의 내용을 이야기한 앞부분과 달리 주로 축복과 저주라는 두 가지 상반된 결과의 선택을 놓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본장의 첫 부분은 율법을 기록한 돌비와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에발 산에 세부고 거기서 번제와 화목 제를 드리라고 합니다(1-10절).
    두번째 부분은 에발 산에서 온 백성이 모여 율법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준수 여부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합니다(11-26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규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릴 제단을 쌓는 것이었고, 율법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해 선포하는 축복과 저주에 관한 규례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여호와의 백성 : 천국백성 

    People of God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신자를 말합니다.      

    * 여호와의 백성 (the Lord's people)
    *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

    구약에 있어서는, 직접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씌어져 있지 않은데, [여호와의 백성](the Lord's people)으로 표현 되어 있다(민 11:29,신 27:9,삿 5:11).
    이것은 주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사상은 [내 백성](출 3:10,시 50:7기타), [(그) 백성](신 33:3), [자기 백성](시 149:4), [주의 백성](신 26:15) 등의 표현에 보여지고, 이러한 것은 구약 전권에 번번히 나오고 있다.

    신약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백성](the people of God)이라는 표현이 씌어져 있는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서는 [내백성](마 2:6), [그 백성](눅 1:68,히 10:30) 등의 표현이 있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현이 씌어져 있는 것은 신약의 특징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새로운 전개이다(히 11:25,벧전 2:10,계 21:3).
    이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내 백성]이라는 표현도 씌어져 있다-(롬 9:25,26,계 18:4).

    신명기 27장. 모든 백성은 아멘할지니라(축복과 저주의 선포)

    지금까지 선포된 모든 언약의 내용을 기록하는 절차와, 언약을 맺게 되는 절차가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언약의 내용을 기록하라고 명하십니다(1~4,8). 이것은 언약에 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단을 세우라고 명하십니다(5~7).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들의 언약을 확정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다른 나라와 언약을 맺지 말라고 명하신 것은 그들의 신에게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단에서 화목제를 드리고 먹으며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명하십니다(7).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은 세상의 어느 강대국과 맺는 언약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안전보장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언약식을 인하여 기뻐할 이유가 너무나 충분합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는 즐거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말씀을 행하여 사는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9~10).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중에 요단강을 건너게 되면 만나게 될 두 산,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각 지파를 둘로 나누어 세우고 레위 사람이 큰 소리로 율법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응답하게 하라고 하나님은 명하십니다(11~15). 두 산에 각각 여섯 지파 씩 나누어 세웠는데 그 구별의 기준은 알 수 없습니다만,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요셉 지파 하나로 계수되고 레위 지파가 포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자지파라고 할지라도, 제사장지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직분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기서 선포되는 율법의 축복과 저주의 내용이 16절 이하부터 시작하여 28장 전체에서 전개됩니다.

    먼저 12개의 저주와 응답이 나옵니다(15~26). 어떤 기준에서 이 열 두 개의 저주문이 선택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문장처럼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것이 율법의 분명한 선언입니다(26).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결단을 요구합니다.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서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한 길을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신명기를 통해서 들은 모세의 설교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율법에 근거한 복과 저주의 내용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이어지는 28장에서 명확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 속에서 이 저주와 축복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 선포 앞에서 대답해야 할 말은 오직 ‘아멘’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멘’ 외에 우리의 대답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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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4일(수)
    주와 동행 365 오늘 읽을 말씀 / 창세기 10-12장, 마태복음 4장

    소산의 맏물(신명기 26:2)

    맏물(7225) 레쉬트(rêʼshîyth)
    רֵאשִׁית

    1. 처음,  2. 이전의 상태,  3. 처음 것
    어원 / 7218과 동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태초(창 1:1), 시작(창 49:3, 욥 8:7, 전 7:8), 처음(출 23:19, 느 10:38, 겔 48:14), 첫(레 23:10, 겔 20:40), 으뜸(민 24:20, 욥40:19, 렘 49:35), 장자(신 21:17), 맏물(신 26:2,10), 가장(삼상 2:29, 15:21), 근본(시 111:10, 잠 1:7, 미1:13), 제일(잠 4:7).
    구약 성경 / 51회 사용

    * 7218.  로쉬(rôʼsh)רֹאשׁ  

    1. 우두머리,  2. 최고의 것,  3. 방백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맏물"이란 히브리어 "레쉬트(rêʼshîyth. רֵאשִׁית)"는 토지 소산물뿐만 아니라 시간, 장소, 서열, 그밖에도 모든 분야의 "첫째" 혹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수확한 "최초의 열매"를 말합니다.
    이것을 성별하여 여호와께 바치라는 것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소유권과 통치권을 인정하며 깊이 감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고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가 가진 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의 콩팥의 기능이 약하여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해야 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내 장기를 주겠다고 나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대신하여 그 아들을 대신 죽게 하셨기 때문에 내가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면 생명의 은인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아깝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환대"를 잊지 마세요.
    그리고 그 환대에 대한 나의 반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백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가나안 원주민들이 점령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그 원주민들을 내쫓을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이 안전하게 정착하여 직접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삶을 누리면서 처음 소산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환대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었습니다.

    2023년 새해를 맞이한 것도 하나님의 환대에 의한 것입니다.
    나를 환대하신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나의 반응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동행 365 오늘 읽어야 할 말씀을 읽고 환대에 대한 나의 반응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를 점검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26장 내용 분해

    1-11. 약속의 땅에서 얻은 첫 수확을 드릴 것과 감사 기도
    12-15. 제삼년 십일조 제이의 십일조와 함께 드릴 감사기도.
    16-19. 두 번째 설교의 결론.

    기업으로 주셔서 차지할 땅에 들어가 거주할 때 그 땅의 소산물의 첫번째 수확물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아 중앙 성소에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면서 여호와께서 주시기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이르렀다고 하고 제사장은 그 광주리를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고 말하기를 우리 조상 야곱이  메소보다미아 즉 아람 땅에 거주하다가 적은 사람들이 애굽에 가서 거류하였다가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괴롭히며 중노동을 시킴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자 그 기도를 들으시며 당하는 고통과 수고와 억압을 보시고 여호와의 능력과 기적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젖과 꿀이 흐는 땅으로 인도하여 주셨으므로 이 토지 소산의 첫 번째 수확물을 가져왔다고 하고 여호와 앞에 두고 경배할것이며 여호와께서 온 집에 주신 복으로 말미암아 레위인과 이방인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안식년 후 세번 쨰 해에 십일조를 드린 후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먹고 배부르게 하며 여호와께 성물을 드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에게 줌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았다고 말하며 초상 기간 동안 이 성물을 먹지 않았고 부정한 몸으로 성물을 떼어 두지 않았으며 성물을 장례 음식으로 쓰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청종하여 그대로 행하였으므로 하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주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마음과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고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도를 행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도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지킴으로 여호와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어 그 말씀을 지키라고 확언하였고 그렇게 하면 여호와꼐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삼으시고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토지의 첫번째 수확물을 광주리에 담아 중앙 성소의 제사장에게 주어 여호와의 제단 앞에 드리게 하고 우리 조상들이 아람 땅에 거주하다 애굽에 가서 큰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들이 학대하고 괴롭히며 중노동을 시킴으로 여호와께 기도하여 응답하심으로 우리의 고통과 수고와 압제를 돌아보시고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인도하셨으므로 이 토지 소산의 첫번째 수확물을 드린다고 하면서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주신 축복으로 인해 레위인과 이방인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안식년이 지난 삼 년 후에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구제용 십일조를 드려 그들로 배부르게 먹게 한 후에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거나 잊지 않았으며 장례 기간동안 이 성물을 범함으로 부정하지 않았고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땅에 복을 주시기를 구하라고 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명령과 율법에 순종하여 여호와의 보배롭고 존귀한 백성이 되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며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받으실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약속의 땅의 첫번째 수확물을 성소의 제사장에게 두어 여호와께 드리면서 소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번성하게 되었지만 그 곳에서 당하는 학대와 괴로움과 중노동에 대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능력과 기사로 출애굽하게 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이르러 첫 수확을 드리며 경배하라고 하심을 보며, 지금 내가 누리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들이 결코 나의 노력의 댓가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형편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안식년 후 삼년 뒤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구제용 십일조를 드려 그들로 배부르게 먹게 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거나 잊지 않았음과 장례 기간 동안 성물을 부정하게 하지 않고 말씀을 지켜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땅에 복을 주시기를 구하라고 하심을 보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은 나의 전유물이 아니며 주신 그것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나누라고 하신 것임을 잊지 하고 베풀기에 힘쓰며, 죄와 죽음의 권세가 도사리는 세상 가운데 정결하고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를 보배롭고 존귀하며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 하나님께서 찬양과 명예와 영광을 받으실 거룩한 백성 삼으실 것이라고 하심을 보며,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또한 그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며 모든 자들 중에 뛰어나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고 그 말씀을 듣고 읽고 지켜 행하기에 힘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토지 소산의 맏물

    신명기 26:1-11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가나안이란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가나안 땅에서 거둔 첫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든 <맏물>은 하나님의 것이고, 따라서 성별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의 오랜 전통이자 이스라엘의 오랜 문화였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권 뿐 아니라 그 땅에서 생산된 모든 소산물에 대한 여호와의 절대적 주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행위를 뜻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10절). 

    맏물을 드리는 행위야말로 나의 모든 수확물과 내 수중의 모든 물질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실천적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대상 29:11) 했던 다윗의 고백도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이라는 진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수확하고 내 소유의 부가 어느 만큼 축적됐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은>(11절) 것입니다. 따라서 맏물을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일이야말로 택하신 백성의 도리며 마땅한 의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맏물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소유에 대한 당신의 신앙을 진심으로 고백하십시오.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맥추절은 보리를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을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초실절은 처음 열매를 드리는 절기 즉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초실절입니다.
    이렇게 처음 열매를 드리는 것은 감사와 연결됩니다.
    맥추절에 처음 열매를 드리는 것과 감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절기의 의미를 새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설교하는 지금 이 시점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일어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약속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5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그 언약이 실현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들어갈까? 과연 가능한 일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간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음성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신자는 이 땅에서 언약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와 같은 생활의 염려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경건의 자세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십니다. 광야 40년 동안에 수도 없이 경험한 일입니다. 사막의 갈증과 추위나 각종 맹수와 독충이나,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목마름이 이스라엘 백성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할 단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신자가 살아가는 동안 고려해야 할 대상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약속의 땅에서 복된 삶을 누리느냐 아니면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빠져서 계속하여 방황하고 훈련을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모든 훈련을 마치고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세의 말을 통하여 분명한 확신가운데 경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어갈 수 있을까 없을까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들어가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집중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여리고 성이 강대하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흔들리거나 의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청하여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 모든 소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그 맏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취한 소산의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라고 했습니다.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이라고 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얻은 모든 소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수확의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광주리에 담을 만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허락하셔서 얻은 첫 소산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임을 고백하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그 예물을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대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형편과 처지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곳으로 가지고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장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됩니다. 자기 편한 방법과 자기 좋은 방법대로 드리는 것은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법과 각종 규례는 인간을 얽어매는 방법이 아니라 그 모든 순서와 각종 제의법을 통하여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분명한 고백을 드리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현대의 편리하고 다양한 문화가 파생되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큼은 그 정신과 방법에서 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기에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자는 항상 겸손하며 감사의 고백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예배를 평가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예배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의 각종 순서에 인간이 드러나는 망령된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신앙 고백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절에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소산의 맏물을 드리면서 행하는 신앙 고백을 말합니다. 가장 먼저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그 땅에서 취한 예물입니다. 즉 그 예물이 드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소산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와 자비로우심으로 인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가 정한 예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것은 죽을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없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아깝고 억울합니다. ‘내가 땀흘려 일한 것인데… 이것을 드리면 그만큼 손핸데…’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참된 감사로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하는 것은 그 물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심입니다.
    4절에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소산의 맏물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단에 놓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다’는 말은 ‘맡겨서 보관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보다는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을 가지게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산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가지고 와서 드리는 것은 그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곳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 함입니다. 애굽에서 영원히 종살이 하면서 살아야 했을 인생들을 구원하여 자유의 몸으로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신 축복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건축헌금과 선교헌금을 작정하여 실행합니다. 지난 한 주간을 기억하며 예물을 준비하는 그 시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이러한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곳에서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었더라면 나는 과연 이러한 소득이 생길 수 있었을까?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드릴 수 있는 재물이 있음을 감격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지못해 드리게 되고, 온갖 핑계와 합리화로 온전한 예물을 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이 말에 거부감이 들고 동의할 수 없다면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맏물의 소산을 여호와의 단 앞에 놓으며 어떠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까?
    5절에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이 이곳 저곳 방황하며 나그네처럼 떠도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좋은 땅에서 정착하여 땅에서 나는 소산물을 먹는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은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없습니다. 선택 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몇 푼의 재물이나 작은 성공에 취하여서 이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의 본래는 죽었던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라고 신앙 고백을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6절에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라고 했습니다.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여’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대적하는 ‘학대’를 당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에 의해서 핍박을 받았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당면하는 현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자신들과 반대하는 방향으로 가는 우리들을 핍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면 신자로서 받는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과 벗하여 친하게 지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7절에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하감하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의 법과 제도나 인간적인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의 하나님께만 모든 희망을 걸고 간구했다는 말입니다. 신자는 그래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기에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이 참된 희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올바른 판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음성을 듣고 하감하십니다. ‘하감한다’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통찰하신다는 뜻입니다.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학대나 아픔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과 육체가 괴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하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의하여 받는 여러 가지 노역으로 인한 ‘신고’를 하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들로 인하여 겪는 고생인 ‘압제’를 하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그러한 고통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에 이르면 구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노역에서 극심하여 견딜 수 없을 때에 여호와께서 하감하셨습니다. 사내 아이를 낳아서 기르지 못하는 고통으로 괴로울 때에 하나님께서 하감하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에 받는 온갖 종류의 모욕과 조롱과 핍박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 이름이 아니면 받지 않을 고통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육체가 괴롭고 힘듭니다. 하지만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통을 하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제 기도를 들으시고 내 모든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고통을 하감하셨다는 말은 구원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다음 고백이 바로 구원의 감사입니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8-9절)

    ‘여호와께서’ 인도하셨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인도하심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고, 여호와의 능력으로 진행되었고, 여호와의 약속이 이루어짐으로 완성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애굽으로 대표되는 세력들이 아무리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혀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구원하여 주심을 믿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인도하여 주셔서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으니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가지고 왔음을 고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주신’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얻은 땅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주권적 계획과 크신 능력의 인도하심으로 주어진 땅입니다. 따라서 그 땅에서 얻은 소산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직장과 기업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고, 인도하여 주셔서 받은 것임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얻은 모든 소득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주신’이라는 고백적인 믿음이 없으면 십일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로 드리는 예물이 될 수 없습니다.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고백으로 예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고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지금 이곳에 있음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와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아니면 우리가 약속의 땅에서 소산을 인하여 감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임을 깨끗하게 고백하여 감사함으로 소득의 맏물을 드리고 경배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11절)

    ‘모든 복을 인하여’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인하여’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지파이기 때문에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과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갖지 못한 채 남의 집에 우거하는 객들은 거둘 것이 없기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도 마땅히 돌아보아 함께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자신만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그 얻은 모든 좋은 것들도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과 함께 거하는 레위인과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나누며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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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3일(화)

    재판(裁判) 4941. 미쉬파트(mishpâṭ) מִשְׁפָּט

    1. 판단,  2. 레위기 19:15(재판),  3. 욥기 9:32(재판)

    발음 / 미쉬파트(mishpâṭ) 
    어원 / 8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의(창 18:19), 법(렘 30:11), 공의(신16:18,시 25:9), 율례(왕상 9:4), 양식(출 26:30, 왕상 6:38), 판결(출 28:15, 민 27:11, 삼상 8:3), 규례(레 5:10, 민 15:16, 삼상 30:25), 법도(레 18:4, 신 4:1), 재판(레 19:35, 신 1:17), 법(레 24:22, 왕하 17:26, 27), 사연(민 27:5), 판결법(민 27:21), 몫(신 18:3), 권리(신 21:17), 송사(신 24:17, 왕상 3:11), 방식(수 6:15), 관습(삼상 2:13), 계명(왕상 2:3), 직무(왕상 4:28), 일(왕상 8:45,59), 모양(왕하 1:7), 풍속(왕하 17:33, 34, 40), 반열(대상 6:32), 판단(대상 16:12), 사정(욥 13:18, 사 40:27), 응답(욥19:7), 정당함(욥 27:2), 판단력(시 72:1), 뜻(습 3:8), 작정(잠 29: 26), 권리(사 10:2, 렘 32:7), 재판석(사 28:6), 보응(사 49:4), 심문(사53:8), 형벌(렘 49:12, 습 3:15), 화(렘 51:9), 죄(겔 7:23), 죄악(겔 7: 27), 의로움(렘 12:1).
    [동] 합당하다(신 19:6), 공의롭다(신 32:4), 재판받다(수 20:6, 삿 4:5), 심문하다(왕하 25:6), 재판하다(욥 14:3), 옳다(욥 34:4), 정직하다(욥 34:6), 공판하다(시 35:23), 심판하다(시 119:84, 사 3:14), 정직하다(잠 12:5), 작정하다(잠 16:33), 적당하다(사 28:26), 바르게 하다(사 32:7), 송사하다(사 54:17).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 8199.  솨파트(shâphat) שָׁפַט

    * 8199. שָׁפַט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솨파트(shâphat)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 16:5, 출 18:16, 시 98:9), 재판하다(출 18:26, 왕상 3:9, 잠 31:9), 판결하다(민 35:24, 신 1:16, 왕상 3:28), 다스리다(삼상 8:20, 왕하 23:22), 심판하다(왕상 8:32, 겔 7:3,시 10:18, 사 11:4), 신원하다(잠 31:9, 애 3:59), 징벌하다(대하 20:12, 22:8), 다스리다(왕하 23:22, 대하 26:21), 변론하다(사 43:26), 다투다(잠 29:9).
    [명] 재판장(신 1:16, 수 8:33, 욥 12:17), 사사(삿 16:31, 삼상 4:18, 대상 17:10), 방백(삼상 6:16), 법관(창 19:9), 재판관(삼하 15:4, 대하19:6, 욥 9:24, 시 141:6), 심판자(욥 23:7), 재판자(미 5:1), 재판(시 37:33), 심판(시 9:19, 사 66:16).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재판(裁判)이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이 대외적으로 법적 판단 내지 의사표시에 관한 사항을 알리는 것을 말한다.
    재판에서는 보통 피고와 원고 두 측이 공방을 벌이며 판사나 배심원등이 판단을 내리게 된다. 형사소송, 민사소송등이 대표적인 재판이다.

    1. 재판의 의미 :

    구성원 간에 법적 분쟁이 발생했을 때 사법부가 공정하게 법을 적용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과정

    2. 재판의 기능 :

    분쟁 해결 /  분쟁이 발생했을 때 가장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하여 갈등을 해소

    사회 질서 유지
    /  사회에서 일어나는 개인 간, 집단 간, 개인과 집단 간 분쟁을 예방하고 이를 원만하게 해결

    국민의 권리 보호 / 다른 사회 구성원이나 국가 기관에 의해 침해된 국민의 권리를 구제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함

    재판의 종류와 절차

    1. 재판의 종류

    • 분쟁의 내용이나 성격에 따라 달라짐
    • 민사 재판 : 개인과 개인 사이 권리와 의무에 관한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
    • 형사 재판 : 범죄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범죄 사실을 밝히고 형벌의 종류와 정도를 정하는 재판
    • 행정 재판 : 국가 행정 기관을 상대로 침해된 권리에 대한 구제를 요구하거나 행정 법규의 적용과 관련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재판
    • 가사 재판 : 이혼이나 상속 등 가족이나 친족 간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
    • 선거 재판 : 선거 및 당선의 유‧무효를 결정하는 재판
    • 소년 보호 재판 : 소년의 범죄사건 등에 대해 보호 처분 등의 조치를 내리기 위한 재판
    • 헌법 재판 : 재판에 적용되는 법이 국가 최고 법인 헌법에 어긋나는지를 판단하는 재판

    2. 민사 재판

    • 의미 : 사적 생활에서 발생하는 권리 또는 법률관계에 대한 다툼을 해결하는 재판
    • 당사자 : 원고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 피고 (원고에 의해 민사소송을 당한 사람)
    • 절차 : 원고 소장 제출 -> 피고의 답변서 제출 -> 원고와 피고의 증거 제출 -> 증인 심문 및 원고와 피고의 변론 -> 법원의 판결

    3. 형사 재판

    • 의미 : 절도, 폭행, 강도 등 범죄 행위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범죄자를 가려내어 형벌을 가하는 재판
    • 당사자 : 검사 (국가를 대표해 특정 형사 사건에 대한 재판을 청구하는 사람) / 피고인 (검사에 의해 형사 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사람)
    • 절차 : 고소 또는 고발 -> 피의자에 대한 경찰 수사 -> 검사의 공소 제기 -> 검사의 신문, 변호인의 변론 -> 법원의 판결

    공정한 재판을 위한 제도

    • 공정하고 정확한 재판은 곧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호와 직결

    1. 사법권의 독립

    • 공정한 재판을 위해 헌법을 통해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
    • 법관의 신분 보장 / 법관의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함
    • 다른 국가기관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게끔 독립적으로 구성

    2. 공개 재판주의와 증거 재판주의

    • 공개 재판주의 : 재판의 심리와 판결을 소송 및 재판 당사자 이외의 일반 국민에게도 투명하게 공개하는 원칙
    • 증거 재판주의 : 재판 과정에서 법원이 반드시 구체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

    3. 심급제도

    • 법원에 급을 나누어 한 사건에 대한 재판을 여러 번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
    • 우리나라는 3심제를 원칙으로 일반적으로 한 사건에 대해 총 3번의 재판까지 받을 수 있음
    • 상소(항소+상고) : 재판 결과에 불만이 있을 경우 상급 법원에 다시 재판을 청구하는 것 -> 1심에서 2심 사이에는 '항소', 2심에서 3심 사이에는 '상고'로 표현

    법적 쟁송(爭訟)의 구체적 해결을 위해 법원 또는 법관이 내리는 판단 내지 그러한 판단을 하기 위한 절차. 법원이 하는 재판에는 쟁송의 목적이 되는 사실의 성질에 따라 민사·형사·행정 재판의 세 가지가 있으며, 그 형식에 따라 판결·결정·명령 등이 있다.

    25장 내용 분해

    1-3. 태형에 대하여.
    4.  곡식 떠는 소에 대하여.
    5-10.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일에 대하여.
    11-12. 여자의 손을 찍어버릴 죄.
    13-16. 부정한 저울추와 되를 쓰지 말 것.
    17-19. 아말렉인을 멸할 것.

    성경에서“4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땅의 고난의 수자인 “4”에다 꽉 찬 수인 “10”을 더한 “40”이라는 수자는 성경에서 이 땅에 있어서의 시험과 환난을 나타내는 숫자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40”이라는 숫자는 반드시 통과하고 승리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신앙인이 되는 숫자입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 올라가 “40일 40야”를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면서 여호와의 명을 기다렸고(신 9:9)
    예언자 엘리야는 “40일 40야”를 먹지 않고 같은 호렙 산에 이르렀고(왕상 19:8),
    노아의 홍수는 “40일”일 동안 계속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이 “40년”동안“광야“를 방황했고(민 14:33)
    “애급“은 “40년”동안 황무한 땅으로 있으리라고 했습니다(겔 29:12).
     
    또 예언자 에스겔은 “40일” 동안 유다의 죄를 지고 엎드렸고(겔 46)
    악인의 형벌로서 매 “40대“를 때리게 하였고(신 25:3)
    사도바울도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고후 11:24)
    산모는 산후 ”40일“을 지나지 않으면 성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레 12:1-4).

    예수께서”40일 40야“를”광야“에서 금식하셨다고 하는 것도(마4:2)이 예를 본받은 것입니다.
    즉 고난이나 괴로움이라고 하면"40"이라고 말했으며, 반드시“40”의 정수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40일”동안 금식하셨다는 것을 보고, 즉시 이 사실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초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모세도 엘리야와 같이“40일”동안 금식했다는 것입니다.
    “40”은 고난을 잘 통과할 때에만 빛나는 수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40일”동안"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의 시험을 슬기롭게 통과함으로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40”으로 상징되는 고난과 시련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보여 주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시련을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숫자입니다.

    이것을“십자가의 도”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
    니느웨는 종교적인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습니다. 니느웨에는 하나님께 닿게 하기 위해 하늘까지 높이 쌓았던 바벨탑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당시생활을 지배했으므로 그 사회는 질서와 안전을 보장 받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제사와 의식을 지키고 규율에 복종함으로써 위험요소를 제거했습니다.
    그렇게 신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람들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로 모여듭니다. 또한 편리함과 예술과 음악과 문학으로 하늘의 기쁨을 만끽하고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도시를 선호합니다,“40”이라는 숫자는 그 핵심에 소망이 담겨 있는 전형적인 성경 용어입니다.“40일”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험을 치루는 기간입니다. 나를 낮추시며 시험하셔서 내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달아 보는 기간입니다.“40일”은 자기 삶의 실체를 시험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자신이 따르는 진리와 온전 성을 시험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자신의 삶이 진정한 삶인가, 아니면 교묘한 문화가 만들어낸 하찮은 모조품인가?
    나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을 나보다 더 알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능숙하게 다듬어 나가고 지혜롭게 인도하시는가, 아니면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나의 변덕과 어린아이 죄악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약화시키고 있는가?
    이런 식으로 나의 여생을 보내야 하는가?
    우리의 모든 경우에서“40”이라는 숫자는 종말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지막 날인“40번”째 날이 도래하려면 그 이전에 서른아홉 번의 날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서른아홉 번의 날 동안“40일”의 현실성에 걸 맞는 종말론적인 압박감을 경험합니다.
    그날들을 신앙으로 예배하는 삶을 위한 훈련장이 됩니다.
    그날들은 십자가에 순종해야 한다는 인식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40일”의 기간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면 생명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40일”을 무시하면 생명은 파멸됩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일상 용어로 기록했으나 글자 하나 하나가 깊은 뜻이 감춰져 것입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여 주셨다는 믿음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셨는 데 누가 건드리요>라는 믿음이 고무풍선처럼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 땅에 살면서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한 시도 한 눈를 팔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작은 사람이었지만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 피가 유대인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받아 지금도 작지만 큰 나라입니다. 작지만 큰 사람들입니다. 위대한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 백성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요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원수 민족인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하였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서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게다가 순풍이 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가는 데 일이 참 순조로웠습니다.

    폭풍이 불었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배에 누군가가 죄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에게 제비가 뽑혔습니다.

    요나도 나때문이니까 나를 바다에 던져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죄로 평탄하던 생도 언젠가는 종말이 있었습니다.
    죄는 용서받아도 벌은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고래라고 하여도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고래는 4시간이면 어떤 음식물도 소화시킬 수 있는 소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속에서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고래가 요나를 삼켰으나 고래는 요나를 소화시키지 못 하였습니다.
    드디어 고래는 요나를 요나가 가야할 곳인 니느웨에 토해놓았습니다.
    고래는 요나를 삼켰으나 소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애급이 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화시키지 못 하고 토하였습니다.
    바벨론이 삼켰습니다. 그러나 토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가 삼켰습니다. 그러나 소화시키지 못 하였습니다.
    로마가 삼켰습니다. 그러나 뱉아 놓고야 말았습니다.
    사라센 제국이 삼켰습니다.그러나 먹지 못 하였습니다.
    그 후 독일도, 심지어 쏘련도 삼켰었으나 소화는 시키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요나민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누가 삼킨다고 하여도 소화시키지 못 하고 토해놓을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이 믿음에서 유대인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민에 대한 규례들

    신명기 25장은 일반 사회 규례 중에서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공의를 확립하기 위해 제정된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태형을 집행할 때는 40대까지만 때려야 합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는 망을 씌우지 말라.
    가문의 후사가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계대 결혼법을 명령합니다.
    남자의 음낭을 잡은 여자는 손을 잘라 풍기 문란을 방지하라고 합니다.
    상거래 시에는 도량형을 속이지 말고 공정하게 거래하라고 합니다.
    아말렉 족속을 철저하게 도말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방해한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같은 규례들은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상세하게 일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독특한 정체성을 가져야 할 것을 여러 가지 규례들을 통하여 소개하였습니다.

    "휴대전화에 집착하지 말라"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규례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휴대전화에 의해서 생각하는 기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휴대전화에 빼앗겨버리면 사람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잘 발달된 문명의 기기를 존재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직접 내 손을 말씀을 펴서 읽고 묵상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매일 읽어야 할 말씀을 소개합니다.

    1월 1일(주일)
    창세기 1-3장, 마태복음 1장

    1월 2일(월)
    창세기 4-6장, 마태복음 2장

    1월 3일(화)
    창세기 7-9장, 마태복음 3장

    이렇게 말씀을 읽어가며 시대를 따라가는 것보다 시대를 넘어서는 영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신명기 25장. 보호에 관한 규정들.

    재판에 대한 규례입니다(1~3).

    재판장은 공정한 판단을 하고 악인은 경중에 따라서 벌하되, 태형을 줄 경우에는 40대 까지만 때리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벌을 받는 사람이 ‘지나치게’ 가볍게 여김을 받게 될 것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유대인들은 40대까지 때리라고 한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39대까지만 때렸습니다(고후 11:24). 혹시라도 때린 숫자를 잘못 세서 40대를 넘어갈 것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고,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입니다(4).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짐승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노동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원리로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구절을 통해서 자신과 같은 영적인 지도자들과 교회를 섬기는 자들에게 사례를 해야 할 책임을 가르쳤습니다(고전 9:9이하).

    죽은 형제의 대를 잇게 하는 규정(계대 결혼)입니다(5~10).

    전제가 중요합니다. 형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경우입니다. 그러면 죽은 형제의 동생이 형수를 통하여 자손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형제가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형수는 장로들에게 고하고 장로들은 형제의 의견을 듣고 그가 거부하는 것이면 형수로 하여금 장로들 앞에서 시동생의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은 후, 그 집안은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불리는 불명예를 받게 하셨습니다.

    사별한 여인을 죽은 형제와 가장 가까운 자를 통하여 보호하시려는 의도이며, 적극적으로 죽은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에, 그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이 이 땅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규정이므로, 이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남겨진 형제는 죽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모욕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남편의 싸움에 아내가 끼어드는 경우에 대한 규례입니다(11~12).

    자기 남편이 다른 남자와 싸울 때 남편을 보호하려고 상대의 급소(음낭)를 잡은 여인의 손을 찍어버리라는 것은 일면 가혹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감정적인 다툼으로 인해, 이스라엘 공동체 한 일원의 생산 능력을 훼손함으로써 가계가 끊어지게 하는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저울에 관한 규례가 이어집니다(13~16).

    장사하는 사람은 두 개의 저울추나, 두 개의 되를 쓰지 말고 공정하게 장사해야 합니다. 두 개의 저울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악을 행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악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탐욕에 의해 움직이지 말고, 정직과 공의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축복하시고 부정직한 자를 저주하십니다. 두 개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중장부를 작성하거나 세금 회피를 위해서 행하는 모든 편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금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아말렉을 기억하고 그를 도말하라고 명하십니다(17~19).

    이스라엘은 언제나 대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약점을 이용해서 치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이 아말렉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말렉을 쳐서 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대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 영적 싸움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그리스도인은 대적이 있음을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돈을 사랑하는 것—을 치기를 좋아하고, 교회 안의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치기를 기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공동체가 서로 돌아보고 격려함으로 강해져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신명기 25장은 올바른 재판,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 정직한 상거래에 관한 내용

    신명기 25:1-3, 재판 규례 중에서 태형(매를 맞는) 규례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옳은 사람에게는 무죄를, 잘못한 사람에게는 유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재판의 목적은 죄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재판을 통해 구별된 죄인을 벌할 때, 그도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유죄를 선고 받은 사람이 매를 맞을 사람이면, 재판관은 그를 자기 앞에 엎드리게 하고, 죄의 정도에 따라 매를 때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매를 마흔 대가 넘도록 때려서는 안 됩니다.
    마흔이 넘도록 때려서, 형제가 천히 여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25: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명령

    일한 삯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인용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구절이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9:9-14) 


    신명기 25:5-10,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 계대결혼법에 관한 말씀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에, 그 죽은 사람의 아내는 딴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지 못합니다. 남편의 형제 한 사람이 그 여자에게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게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남자(죽은 자의 형제)가 자기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경우에, 홀로 남은 그 형제의 아내는 성문 위의 회관에 있는 장로들에게 가서 ‘남편의 형제가 자기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잇기를 바라지 않으며, 남편의 형제의 의무도 나에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성읍의 장로들이 그를 불러다가 권면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고, 그 여자와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하면, 홀로 남은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말하기를 ‘제 형제의 가문 세우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의 이름이 ‘신 벗긴 자의 집안’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이런 경우 정말 창피한 일이지요.


    신명기 25:11-12, 싸우는 중에 얻어 맞고 있는 남편 구하겠다고 상대방 음낭을 잡았을 때 그 여인에게 어떻게 하라는 규례

    두 남자가 싸울 때에, 한쪽 남자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음낭을 잡거든, 그 여인의 손을 잘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조금도 동정심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신명기 25:13-16,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과 추에 관한 규례

    주머니에 크고 작은 다른 저울추를 두 개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집에 크고 작은 다른 되가 두 개 있어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르고 확실한 저울추와 바르고 확실한 되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서 이스라엘이 오래 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틀리는 추와 되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신명기 25:17-19, 아말렉에 관한 규례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나오던 길에, 아말렉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일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에, 길에서 만나, 이스라엘 뒤에 처진 사람들을 모조리 쳐죽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유산으로 주셔서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방의 적들을 물리치셔서 안식을 누리게 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 사람을 흔적도 없이 없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출애굽기 17:14, 16에서 하나님께서 천하에서 아말렉을 도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웠던 사실을 출애굽 2, 3세대는 모릅니다. 
    그들이 어려서 모르거나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2, 3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아말렉을 도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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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일(월)

    이혼증서(離婚證書) 세펠 케리투트

    5612. 세페르(çêpher) סֵפֶר

    1. 집필,  2.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것,  3. 학문

    발음 / 세페르(çêpher) 
    어원 / 어미활용 סִפְרִי, 복수 סְפָרִים, 복수 연계형 סִפְרֵי, 560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출 32:32, 신 28:58, 시 56:8, 렘 36:13), 두루마리(민 5:23), 증서(신 24:1, 렘 32:10,44), 편지(삼하 11:14, 왕상 21:8, 에9:30), 역대지략(왕상14:19, 왕하 8:23, 느 12:23), 글(왕하 5:6, 렘 29:29, 나 1 : 1), 조서(에 1:22, 3:13, 8:10), 일기(에  2:23, 6:1, 10:2), 학문(단 1:4,17).
    [동] 기록하다(삼상10:25, 느 7:5).
    구약 성경 / 185회 사용

    3748. 케리투트(kerîythûwth) כְּרִיתוּת

    1. 갈라섬,  2. 중단,  3. 이혼

    발음 / 케리투트(kerîythûwth)
    어원 / 37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이혼증서(신 24:1, 3, 사 50 : 1), 이혼서(렘 3:8).
    구약 성경 / 4회 사용

    성민의 일상 규례들(II)[신 24장]

    각종 사회 규범 중에서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규례를 다루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 주고 공동체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이혼하고 재가한 여자는 다시 전남편에게 돌아갈 수 없게 하였다(1-4절).
    또한 신혼 남자는 일 년간 군징집을 면제하고 유괴하여 인신 매매한 자는 죽이도록 하였으며, 문둥병자는 제사장의 가르침에 따르도록 명하였다(5-9절).
    한편 이웃에 대재 저당물을 잡지 말고 품꾼의 삯을 지연하지 못하게 하였다(10-15절).
    처벌에 있어서는 연좌제를 금지하고 재판 시에는 공정해야 하며 추수 시에 객과 과부, 고아를 위해 일부를 남겨 놓도록 하였다(16-22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있는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 상세한 교훈을 주는 율법이 명해지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끊이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연약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늘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다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24장 문단 분해

    1-4. 이혼과 이혼당한 부인에 대하여
    5. 신혼자는 군에 내보내지 말 것
    6. 맷돌을 저당 잡히지 말 것
    7. 후려낸 자는 죽일 것
    8-9. 문둥병을 삼갈 것
    10-13. 가난한 자의 전집물에 대하여
    14-15. 가난한 고용인을 학대하지 말 것
    16.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의해서만 죽임 당할 것
    17-18. 객, 고아, 과부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
    19-22. 떨어진 이삭을 객, 고아, 과부를 위해 남겨둘 것

    7절. 후려다가(1589) 가나브(gânab)  גָּנַב  - 훔치다, 속이다, (공동번역) 유괴하다

    1. 훔치다,  2. 속이다

    8절. 문둥병(6883) 차라아트(tsâraʽath)  צָרַעַת - 나병(악성 피부병)


    10절. 전집물(5667) 아보우트(ʽăbôwṭ) 
    עָבוֹת  -  담보, 저당, 보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수여받은 백성으로서 마땅히 이웃 민족들과는 구분되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 본장의 규례들은 잘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 된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율법이 요구하는 법 정신을 염두에 두고 늘 말씀에 입각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신갑수인 구원의 확신과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전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엡 6:10-20).

    공정한 저울 추. 고대 근동에서 상거래를 할 때는 저울을 사용하여 무게를 측정하였다.
    그런데 종종 상인이 저을 추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였다.
    본 장에서 거래할 때 공정한 저울추를 두라는 것은 이런 관습을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정한 상거래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상 모세의 율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이 불의한 상거래를 지적하고 정직하게 행할 것을 선포하였다(잠 16:11,겔 45:10).
    이와 같은 공정 거래에 관한 규례는 현대의 성도들이 지켜야 할 경제 원칙의 표준이 된다.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대상임을 보여 준다.

    사람이 엿새 동안 열심히 노동하여 경제적인 소득을 얻는 것은 성경의 원리이다.
    그러나 경제적 소득은 정당한 방법에 의해서 얻어야 한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공평한 저울 추를 사용하라고 명하셨다.
    오늘날 성도들이 사업을 할 때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고 고용자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착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록 그가 번 돈으로 하나님께 바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시대에 도덕적이고 정당한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음으로써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그의 아내를 내보내려면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주어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아내를 내보내려는 모든 자는 그녀를 간음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보내진 사람과 결혼하는 자도 간음하게 된다. (마태복음 5:31-32)

    아내를 내보내려 할 때 이혼 증서를 주라는 법은 신명기 24:1-4에 나옵니다.
    이혼 증서는 쫓겨난 여자에게 재혼할 자유를 주는 증서입니다.
    신명기의 이 말씀은, 이혼 증서를 가진 여자는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으나, 재혼한 후에는 다시 전 남편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혼에 쌍방의 합의가 필요 없었고 재산권은 거의 대부분 남성에게 있었으므로, 쫓겨난 여인은 생계에 위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아내를 내보낼 때는, 결혼 계약서에 따라서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여자가 가져온 결혼 지참금도 돌려주도록 했습니다.1) 그래도 재산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이혼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의 이혼 증서 법은 자주 오용되었고, 이 법을 핑계로 재산이 있는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로도 트집을 잡아서 아내를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2)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행동을 하면서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식의 오용을 피하려면, 성경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세의 법을 빙자하여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아예 금지하십니다.3) 그런데 한 가지 예외로서 음행이라는 조건을 붙인 것은, 이혼이 절대 불가한 것은 아님을 의미합니다.4) 음행은 오늘날의 간통을 의미하며, 한쪽이 간통과 비슷한 수준으로 결혼 언약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깨뜨려 버렸을 때는, 고통스럽지만 이혼이 최종적 선택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관계 안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생명과 안전에 위협이 있을 때, 교회는 신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이혼을 도와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음행은 죄이지만 이혼은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니며, 사회적 낙인을 받아야만 할 일도 아닙니다.

    이어서 나오는 표현은 조금 해설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음행의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아내를 내보내려는 모든 자는 그녀를 간음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보내진 사람과 결혼하도 자는 간음하게 된다. (마태복음 5:32)5)

     

    첫 번째 수동형 동사(“간음 당하게”)의 의미는 일어난 이 간음의 책임이 여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남자에게 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맺은 결혼 언약을 파기하고 아내를 내쫓는 사람은, 그 자체로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의 본질이 결혼 언약의 파괴라면, 그 죄책은 원인 제공자인 남자에게 돌아가며 여인은 책임에서 자유롭습니다. 이어서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경우 그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간음의 죄책은 누구에게로 돌아갈까요? 모세의 법에 의하면 이혼 증서를 가진 여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간음의 책임도 첫 번째 남자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다른 두 사람은 책임이 면제될 것이지만, 첫 번째 남편은 두 사람 분량의 간음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아내를 내쫓은 남자는 두 사람 분량의 간음죄로 두 번 사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혼 증서 계명을 해석하시면서 예수님은, 남편은 아내가 그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아내를 버리지 말고, 아내는 남편이 그를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후반부는 당시 문화에서는 선택이 불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사람들은 아내를 버리는 데 어떤 합당한 조건이 있는지를 궁금해 했지만(마 19:3), 예수님은 그런 질문은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단호하게 질문 자체를 폐기하십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삼위일체적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인데, 이 언약 관계는 서로를 자발적으로, 상호적으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관계입니다. 결혼 언약에서 사랑의 ‘자발성’이 사라지면 결혼은 아름다운 빛을 잃고 묶어놓는 사슬이 됩니다. 또, 각자 사랑을 받고자 요구하고 사랑의 양을 계산하며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면, 결혼의 ‘상호성’은 금방 사라지고 결혼은 불평등하고 견디기 힘든 의무가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각 상대방을 먼저 자발적으로 사랑하려고 하면, 사랑의 상호성이 성취되며, 삼위일체 관계에서처럼 세 번째 실체가 나타납니다.6) 혼합되지 않은 둘이면서도 또 온전히 한 몸이 된 새로운 삼위일체적 존재 양식으로부터, 즉, 두 사람의 하나 된 사랑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밖으로 흘러나가는 생명수의 강이 됩니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에서 흘러넘친 성령님이 두 분으로부터 나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두 사람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따로따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결혼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랑을 닮은 삼위일체적 언약 관계입니다.


    1) 스캇 맥나이트, 『하나님의 이야기 성경주석: 산상수훈』, 최현만 옮김 (에클레시아북스, 2016), 119.

    2)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한국신학연구소, 1988), 463.

    3) 참조: “그러니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니고 한 육체다. 하나님이 짝지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게 하여라”(마 19:6).

    4) 참고로 바울 사도는 조건을 달아서 불신자와 신자의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고전 7:15).

    5) 이 구절에서 ‘간음하다’(모이큐오)라는 동사가 한 번은 수동태로, 한 번은 중간태로 쓰였다. 버림받은 여자는 ‘간음을 당하게 된다’(수동태). 또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도 ‘간음하게 된다’(중간태: 능동태와 의미가 유사하지만 약화 됨).

    6)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낳으신 분’(성부)과 ‘태어나신 분’(성자)과 그리고 두 분을 하나로 묶는 ‘사랑’(성령)으로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6:7; 15:27, 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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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렘법(herem) חֵרֶם

    헤렘(2764) (chêrem)

    1. 그물,  2. 돌이킴,  3. 비유적으로 여자들의 ‘아첨’에 대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음
    어원/ 27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드림(레 27:21, 민 18:14), 바친 것(레 27:28, 수 6:18, 7:12), 진멸 당할 것(신 7:26), 진멸할물건(신 13:17), 멸할 것(삼상 15:21),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왕상 20:42), 진멸시킬 물건(대상 2:7), 그물(전 7:26, 겔 26:14, 합 1:15), 진멸(사 34:5, 사 43:28), 저주(슥14:11, 말 4:6).
    구약 성경 / 29회 사용

    * 헤렘 : ‘헌신하다’ ‘바쳐진 것’         

    전쟁에서의 노획물을 번제나 희생제물로 야훼께 바치는 것.          
    즉 헤렘법은 전쟁에서의 노획물에 적용되었다.

    거룩한 전쟁(헤렘법)은 하나님의 명령인가?

    여호수아서는 오랜 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시민들 -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 - 을 상대로 조직적인 전쟁을 감행하는데, 거의 인종 학살에 가까운 수준이다.

    여호수아 6: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그리고 산지 위에 있는 아이(Ai)를 취하려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에게 모든 도시를 홀로코스트 혹은 “번제”로 “드리지” 못한 때문으로 설명된다.
    범죄자 중의 하나인 아간은 그의 자녀 그리고 심지어는 짐승들과 함께 돌에 맞아 죽게 된다.
    그런 다음에, 두 번째 공격이 성공하게 되고, 전체 인구 12,000명이 학살되는데, 도망가는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였다(여호수아 8:24-25)

    여호수아의 전쟁은 모든 땅에 걸쳐서 마찬가지로 진행된다.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전멸 당했다.
    오로지 세겜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족장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부족 간의 동맹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창세기 12:4-9).
    그리고 기브온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이든지 간에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종이 되었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여호수아 10:40, cf. 11:10-11, 11:23)

    가나안 족속들

    이 말이 문학적인 과장일까?
    아니면 이야기하고 있는 바대로, 이런 끔찍한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과연 민감한 현대의 독자들이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 - “인종청소” -를 묵과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진멸’(헤렘)에 대해 당연시하기도 했다.

    정복자인 이스라엘 민족이, 원시적인 에너지와 생존을 위한 무자비한 욕망을 타고난, 거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유일신 신앙의 미래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학살로 인해서, 야휘스트의 기준들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주저앉히고 말았을 것이 거의 확실한, 두 유사한 백성의 완전한 융합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들은, 그들의 술 마시고 법석을 떠는 자연-숭배, 뱀 상징물과 호색적인 나체로 진행하는 풍요제의, 그리고 조잡한 신화와 더불어서, 목축적인 단순성과 정결한 삶, 숭고한 유일신 신앙, 그리고 엄격한 윤리적인 법률을 갖춘 이스라엘로 대체되었다.(1940: 281)  -윌리엄 올브라이트

    그러나 사사기에 보면 가나안 6족속은 건재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삿 3:5)
     
    또한 단순히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군사임무를 맡기도 했으며(삼하 11:3), 이들은 솔로몬의 역군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아닌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남아 있는 모든 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않았으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역꾼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렀으되 (역대하 8:7-8)

    따라서 헤렘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신명기 역사서

    여호수아서는 “신명기 역사”(즉, 신명기에서 열왕기 하에 이르는)에 속해있는 성경으로 많은 학자들이 이 위대한 민족적 서사시의 구성과 첫 번째 편집 시기가 이스라엘 왕조의 마지막 부분, 아마도 요시야의 통치시기 동안(640-609 B.C.)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나안 정복 전쟁 기사가 주를 이루는 여호수아서에 있는 통일성들과 불일치들을 해석하려는 시도들은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그리고 열왕기 상하가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신명기 역사”로 저술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성서학자들 간에 점차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즉 하나의 작품으로 읽혀지도록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신명기 역사가 본질적으로 최소한 두 단계를 거쳐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점차 늘고 있다. 첫 주요한 구성은 포로기 이전인, 요시야 시대(기원전 640-609년)에 있었으며, 두 번째 구성은 포로기 이후이다.  만약에 여호수아서를 거대한 전체의 일부분으로 형성되게 한 것이 요시야 시대의 정치적 역학들이었다면, 요시야적 역사(Josianic History)의 근간들이 여호수아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렘 법은 가나안 족속들과 이방 신(상)을 향해서 명령되었다.
    그런데 가나안 민족들을 향한 헤렘 법은 여호수아서에서 실행되지만, 신명기 7:5, 16, 25-6; 13:6-18의 이방 신(상)에 관한 헤렘 법은 여호수아서에서는 실행되지 않았다. 아세라 상을 비롯한 이방 신상의 파괴의 명령은 열왕기하 23장에서 묘사하는 요시야의 이방 신상 파괴 기사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므로 헤렘 법을 요시야 개혁과의 정치․경제 역학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서의 헤렘법은 신명기 7장, 20장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명기 7:1-20)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신명기 20:16-17)

    ‘진멸’에 관한 명령은 광신주의와 완고성을 암시한다. 이 어투는 시적으로 읽혀져야 한다. 야웨의 백성들에게 ‘거룩’에 대한 관념을 확고하게 알려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거룩성과 구별성에 관한 메시지이지, 이방 민족에 대한 ‘학살’의 실행의 명령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헤렘 법의 정치적 측면

    여호수아는 땅의 정복과 소유 과정에서 지도력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이스라엘의 다양한 집단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군대와 족장뿐만 아니라 언약궤를 운반하는 제사장에게도 방향을 지시한다(수 3:6; 6:8; 8:3-4).
    신명기사가의 역사에 있어서 율법에 대한 엄격한 순종의 문제에 있어서 요시야의 앞선 전형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여호수아다(수 11:15).
    많은 학자들이 여호수아서 전체를 통해 요시야 왕과 여호수아를 비교 분석했다.  

    요시야 왕이 얼마나 북이스라엘의 영토와 친 앗시리아 지방 세력의 영토 등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고, 또 그것들을 치밀하게 준비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줄 수 있다.
    신명기 사가가 묘사한 여호수아의 역할에는 다윗 왕정을 회복하려는 요시야의 통치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게하고, 영토 회복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 신명기의 진멸법(헤렘법)


    I. 들어가는 말

    여호수아는 신의 이름으로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사건들로 가득하며, 그중에서도 소위 ‘진멸법’의 시행이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은 기독교인의 윤리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쳐 왔던 이 무서운 법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석해 보고, 이 법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자.

    II. 대표적 진멸법 관련 구절과 일관성 문제

    ‘진멸법’이란 용어는 생소한 말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은 그렇지 않다. ‘진멸법’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명령으로, 가나안의 그 누구와 어떤 언약도 맺지 말고, 가나안 사람이라면 누구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반드시 모두 죽이라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이 법은 신명기에서 주어졌으며, 신명기에서 요단 동편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미 실행되었고, 나아가 여호수아서에서 요단 강을 건너가 요단 서편 땅에서 실행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법의 내용과 실제 시행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대표 구절

    먼저 대표 구절들을 보고, 그 법의 내용과 실행에 있어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 보자.

    신명기의 진멸법

    신 7: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하하렘 타하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 20: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하하렘 타하리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18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개역개정

    신명기에서의 진멸법 시행

    신 3:6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 성읍(바산의 60개 성읍)들을 멸망시키되(나하렘) 각 성읍의 남녀와 유아를 멸망시켰으나(하하렘) 7 다만 모든 가축과 그 성읍들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개역개정

    여호수아서의 진멸법 시행

    수 6:21 그 성(여리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바야하리무)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개역개정(원문에는 ‘멸하니라’에 해당하는 동사가 없음)
    2. 구체적 내용에 있어 일관성 결여의 문제

    첫째, 오경에서 ‘진멸법’은 오직 신명기에만 등장한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모두 ‘율법'(토라)을 포함하는 책들이지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령하는 ‘진멸법’은 오직 신명기에만 나온다. 특히 출애굽기의 ‘계약법전'(Covenant Code, 20:22-23:19)과 신명기법전(12-20)은 같은 법조항들을 담고 있는데(물론 세부 사항에서 차이가 있다), 계약법전에서는 ‘진멸법’이 주어지지 않은 반면, 신명기법전에는 진멸 명령이 주어진다.

    둘째, 진멸법에서 구체적인 진멸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우선 신명기 자체에서 실행된 진멸법(위 3:6을 보라)의 경우 사람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지만 가축을 포함한 다른 전리품들의 경우 죽이지 않고 이스라엘의 소유로 삼았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신명기 13장 15-17절에 따르면 진멸의 대상은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축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17절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심 같이 너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

    개역개정

    물론 신명기 13장은 가나안을 점령하는 과정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그후에 일어날 사건,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 내부에서 배교가 일어나는 경우 그 성읍을 진멸하라는 내용이라 가나안 정복시 주어진 진멸법과 다르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 13:15-17에 역시 가나안 점령시 주어진 ‘진멸법’과 같은 어휘인 ‘헤렘’이란 단어가 쓰였고, 그 목적도 진멸법의 본래 취지인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혹은 가나안의 종교와 풍습)을 따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로, 가나안 정복시 주어진 진멸법과 정복 후 실행할 진멸법은 둘 다 같다(위 20:18을 보라). 따라서 신 13의 진멸법을 특수한 진멸법으로 볼 필요는 없다. 여호수아서의 아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이유 역시 신13장에서 명령한 것처럼 진멸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온전히 바친 물건’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간은 신 13:15-17의 내용대로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의 모든 재산까지 돌에 맞게 되었다. 이는 ‘헤렘법’이 가축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 죽이고 전리품도 취하지 말아야 함을 뜻한다. 요단 동편을 점령할 때(신 3:6) 이스라엘은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신 13과 상충된다. 나아가 여리고 성에서 라합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준 것 역시 진멸법에서 명령한 바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말 그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셨다.

    셋째,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했던 ‘헤렘법’은 단순히 보면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죽여야하는 것이지만, 성경을 더 종합적으로 살펴 보면 반드시 그렇게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야웨께서는 ‘의도적으로’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예고하시기도 했기 때문이며, 여호수아를 포함한 많은 본문에서 오랜 동안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아 갔기 때문이다. 예컨대 삿2:3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개역개정

    가나안의 모든 사람을 다 죽여야 한다는 명령과는 달리 이 구절에서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헤렘법’을 진멸법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그 목적이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와 문화적 악영향으로부터 피하기 위함인데, 위 구절은 그와 정 반대로 오히려 그들이 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을 잘 따르는지 시험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

    나아가 신명기의 명령은 외부인에 대한 배타적 정서만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포용과 환대의 명령도 포함하고 있다. 아래 구절을 보라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개역개정

    신명기의 헤렘법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포함한 ‘외부인’을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위험 요소로 여긴다(물론 다른 의미도 있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인들을 공동체 내부로 수용하고 환대하는 것은 ‘진멸법’과 상충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헤렘법’은 단순히 진멸이나 아니냐로 판단할 수 있는 법이 아니란 말이 된다.

    헤렘법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종교적 순수성에 위협이 되는 모든 요소를 완전히 없애야만 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율법적 근거는 십계명에도 등장한다.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 중 다음 구절을 보라.

    신 5:17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살인하지 말라)(=로 티르차)

    개역개정(참고: 위 계명은 신명기와 출애굽기에서 모두 정확하게 같은 어휘로 쓰여졌다. 한글 번역에서는 신명기와 출애굽기가 ‘말지니라’와 ‘말라’로 다르지만 원문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살인’ 혹은 ‘살생’을 금하셨으며, 외부인인 ‘나그네’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나그네는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공동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존재로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으로서의 나그네가 아니라 거기에 상주하여 살며 그 인구가 크게 불어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은 ‘외부인’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런 부분을 차치하고 단순히 ‘헤렘법’을 ‘진멸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3. ‘진멸’ 혹은 ‘헤렘’이란 단어의 의미의 문제

    위에 대표 구절로 제시한 본문에서 ‘진멸’ 혹은 ‘멸망’이란 말로 번역된 모든 곳에는 ‘하람'(ḥrm)이란 동사가 활용된 형태가 나타나며 이 동사의 명사형이 곧 ‘헤렘’이다. 그런 이유로 ‘진멸법’은 곧 ‘헤렘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하람’ 동사는 표면적으로는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금하다'(put under a ban)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이 용어는 진멸법의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을 ‘금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종종 ‘온전히 바쳐진 것’ 혹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번역이 된다. 아래 구절들을 보라.

    레 27:21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하헤렘)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레 27:28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 중에서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헤렘 아쉐르 야하림)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헤렘)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29 온전히 바쳐진(헤렘 아쉐르 야하림)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개역개정

    위 구절들의 경우 가나안 정복과 관계 없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 즉 사람이 손대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을 표현하는 말로 ‘헤렘’ 혹은 ‘하람’이 쓰였으며, 그 자체로는 ‘죽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아가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이야기에서도 그 성에 사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다’라는 말을 위해 ‘하람’ 혹은 ‘헤렘’이 쓰였다(6:21).

    수 6:21 그리고 그들이 성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남자로부터 여자까지, 아이로부터 노인까지, 그리고 소와 양과 나귀까지 칼날로 온전히 바쳤다(바야하리무).

    사역; 개역개정에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칼날로 멸하니라’라고 번역했다. 원문에서는 ‘바치다'(하람) 외에 ‘멸하다’라는 동사가 등장하지 않아 사역을 제공했다.

    여리고 성에서 아간이 범한 죄는 죽이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기보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것에 손을 댔다는 데에 있다. 물론 바치는 행위는 결국 칼을 쓰는 것이지만 ‘하람’ 혹은 ‘헤렘’을 쓴 것은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이 목적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7장 1절은 아간의 죄에 대해 ‘진멸하지 않아서’라고 표현하지 않고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했다고 묘사한다.

    수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헤렘)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헤렘)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개역개정

    위 구절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헤렘’ 혹은 ‘하람’은 죽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표현이라기보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사람이 더이상 손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물론 ‘온전히 바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그 생명을 취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에 ‘죽임’과 관련이 있지만 죽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바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III. 나가는 말

    여호수아서를 비롯한 신명기적역사서의 저자와 편집자는 성경에 존재하는 헤렘법을 둘러싼 다양한 불일치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을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이런 문서를 생산해 냈을까?
    여호수아의 저자/편집자는 그들의 독자로 하여금 과연 이스라엘의 ‘진멸’ 행위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행동 기준으로 삼기를 바랐을까?
    여호수아서의 진멸 행위를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헤렘의 1차적 의미는 온전히 바치는 것에 있으며 죽이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다.
    2. 헤렘 관련 본문들과 그와 연관된 다른 법들을 살펴 보면 헤렘법을 단순히 ‘진멸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기독교가 헤렘법과 여호수아서의 정복 관련 서사를 기반으로 행해왔던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행위는 결코 ‘정답’이 아니다.







    노획물을 야훼께 바치는 이유?               

    야훼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성전(聖戰)을 주관하시고 실제로 싸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획물 또한 야훼의 것이며, 그 중 하나라도 취하면 야훼의 것을 사취한 범죄 행위가 되었다.

    헤렘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부족 연맹체제와 관련되어 이해해야 한다.                   

    이 체제 안에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영도자가 되며, 이 인물 안에서 하느님은 전쟁을 수행하셨다.

    헤렘법의 완전한 준수를 위해서

    1. 호흡하는 모든 것은 죽여야 한다.
    2. 가연성 물질은 태워야 한다.
    3. 귀금속은 성소의 금고 속에 보관해야 한다.

    성서의 사례 /             

    1. 전리품을 착복한 아간(여호수아 7:11-15)과 아말렉 왕                
    2. 아각을 살려 준 사울은 하나님께 단죄를 받았다(사무엘상 15장)
    3.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함락(여호수아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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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 31일(토)

    여호와의 총회(신명기 23:1) 카할 아도나이 the assembly of Jehovah

    카할(6951) קָהָל 

    1. 회중,  2. 무리,  3. 대중

    발음 / 카할(qâhâl)

    어원 / 695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족속(창 28:3), 백성(창 48:4, 렘 44:15), 집회(창 49:6, 시 26:5), 회중(출 12:6, 왕상 8:14, 느 5:13, 민 16:33, 신 23:2, 삿 20:2), 무리(민 22:4, 삼상 17:47, 겔 16:40), 회(스 10:8, 12, 느 8:17), 성회(애 1:10), 대회(시 35:18), 군대(겔 23:24, 46, 47), 떼(겔 38:15).
    구약 성경 / 122회 사용

    * 6950. קָהַל 

    1. 함께 모으다,  2. 히필형 : 모으다

    발음 / 카할(qâhal)
    관련 성경 / 모이다(레 8:4, 대하 20:26, 에 9:18), 함께모이다(에 8:11), 모여들다(렘 26:9), 모으다(민 1:18, 신 4:10, 대상 13:5), 모아놓다(민 16:19), 소집하다(왕상 8:1, 대상 28:1, 대하 5:2), 잡아 가두다(욥 11:10).
    구약 성경 / 39회 사용

    아도나이(3068)  יְהֹוָה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예호바(Yehôvâh)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961.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하야(hâyâh)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 13:3), 임하다(창 15:1, 수 22:20), 계시다(창 31:5), (싸우고) 있다(삿 12:2), 섬기다(삼상 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 9:9), 따르다(왕상 16:21, 호 3:3), 같다(시 50:21), 두다(출 25:15), 더하다(출 9:3), 성취하다(잠 13:19), 이루다(겔 21:7, 39:8), 지치다(단 8:27), 얻다(슥 8:10).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신명기 23: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총회(1절)
    ♦ 성구 :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No one who has been emasculated by crushing or cutting may enter the assembly of the LORD. 

    신명기 23장은 이스라엘 총회의 거룩과 자비에 대한 규정입니다.

    1-6.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서는 안될 자.
    7-8. 에돔 및 애굽인은 삼대에 이르기까지 들어가지 못함(삼대 후에 들어갈 수 있음.)
    9-14. 전시진영을 정결하게 보전할 것.
    15-16. 도주해온 종을 보호할 것.
    17-18. 창기나 남창이 있어서는 안될 것.
    19-20. 동포에게서 이자를 취하지 말 것.
    21-23. 서원은 반드시 지킬 것.
    24-25. 이웃 사람이 포도나 밀을 먹을 수는 있다는 것.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총회에 합당한 자, 즉 ‘예배자로 합당한 자에 대한 규정’(1~8)과 군사 진영에 관한 거룩의 규정들(9~14), 15절 이후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 기타의 규정들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합당한 예배자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1~8).
    누가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즉 누가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요?
    언약 공동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격을 규정해주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구별된 사람들인데,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언약 공동체입니다.
    언약 공동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정결한 예배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외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외되는 경우들은 이스라엘 언약공동체가 얼마나 분명하게 그 거룩함을 보존해야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제외되는 자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고환이 상한 자입니다(1)

    이들은 거세당한 자들을 말하는데, 단순히 성적인 불능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종교가 남자를 거세하는 부패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의식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생자입니다(2)

    이것은 단순히 고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가나안의 신전에 있는 창기들이 음란한 의식을 통해서 낳게 된 자식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17~18절에서 언급한 창기나 남자 동성애 창기들에 대한 언급이 바로 그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셋째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입니다(3~6)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올 때 영접하지 않았고(암몬), 발람을 불러서 저주를 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바알브올의 음행 사건으로 이스라엘을 거의 무너지게 하였던 일로 인하여(모압) 영원히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압과 암몬의 모든 저주를 선과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5).

    넷째는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입니다(7~8)

    에돔은 조상 이스라엘(야곱)의 형제이기에, 그리고 애굽은 전에 이스라엘이 객이 되었었기 때문에 미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이들의 삼대 후의 자손은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고 선언되었습니다.

    군사 원정에 관련된 규정

    이 규정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된 규정들입니다(9~14).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하나님의 군대에 하나님의 임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군사력으로 싸우는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는 군대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요, 거룩함이었습니다.
    아주 사적이며 사소한 부분까지도 거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첫째 개인위생의 문제입니다(9~11)

    몽정과 관련된 규정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이스라엘 진영에서 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둘째로 공중위생의 문제입니다(12~14)

    오물 처리에 관한 말씀인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공중 보건의 차원에서 질병이 전체에 퍼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고, 그들 중에 있는 어떤 더러움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초한 추가적 규정들이 나옵니다(15~25)

    첫째는 주인을 피하여 도망친 종들에 대한 태도입니다(15~16)

    이런 종이 만일 피신해오면 그를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지 말고, 성읍 중 원하는 곳을 택하여 그와 함께 살며 그를 압제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이방인 종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주인을 피하여 도망한 자들을 향한 이런 온정주의적 접근은, 오늘날 난민에 대한 문제나, 불법체류자의 신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인 태도가 어떠해야 하며, 기독교적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을 보호하며 그들을 도우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로 예배와 돈에 관한 말씀입니다(17~18)

    이스라엘의 예배는 가나안의 타락하고 성적 방종으로 가득한 예배와는 구별되어야만 했습니다.
    또한 비정상적인 성적 행위들을 통해서 벌어들인 수입은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돈을 버는 방식은 중요합니다.
    돈을 버는 방법과 과정이 모두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것이어야 함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이자놀이를 금하십니다(19~20)

    형제(동포)에게 돈을 빌려줄 경우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은 형제의 불행을 자신의 이익의 기회로 삼지 말 것과 형제가 원금보다 불어나는 이자로 말미암아 더욱 불행해지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넷째로 서원을 지키라고 하십니다(21~23)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책임지고 성취하시는 분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관대하고 후한 나눔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24~25)

    가난한 사람들은 포도원이나 곡식밭에서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나가는 것은 도둑질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살피시고 배려하시지만, 과도한 욕심을 내는 것은 공동체를 깨트리는 것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괜찮지만 본격적으로 추수하듯이 낫으로 베는 행위는 금지된 것입니다.
    이런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그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라는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신약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나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자연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의 선교지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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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 30일(금)

    형제의 잃은 것(신명기 22:3)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신명기 22: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형제의 잃은 것(3절)
    ♦ 성구 : 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무릇 형제의 잃은 아무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체 하지 말 것이며. 
    Do the same if you find your brother's donkey or his cloak or anything he loses. Do not ignore it.  
     

    형제(兄弟) <251> 아흐( ’âch) אָח

    1. 형제,  2. 친척,  3. 같은 동족
    관련 성경 / 아우(창 4:2, 수 15:17, 대하 21:4), 형제(창 9: 5, 신 1:16, 삿 9:3), 형(창 10:21, 45:15, 삼상 17: 17), 조카(창 12:5, 14:16), 골육(창 13:8, 37:27), 오라비(창 20:5, 삼하 13:8), 동생(창 22:21, 삼하 14:7), 오라버니(창 27:43), 외삼촌(창 28:2, 29:10), 생질(창 29:12,15), 남자 형제(창 34: 11), 동족(레 25:39,47, 신 2:4), 쌍방(신 1:16), 숙부(대하 36:10), 동포(삼하 15:20), 동료(학 2:22).
    구약 성경 / 629회 사용

    문단 분해

    1-4. 길 잃은 가축에 대하여.
    5. 변장을 금하다.
    6-7. 새 집에서 새끼나 알을 취할 때의 주의할 것.
    8. 지붕에 난간을 만들 것.
    9. 다른 두 종자를 섞지 말 것.
    10. 소와 나귀를 같은 멍에를 메게 하지 말 것.
    11-12. 털과 베실을 섞어 잔 것을 입지 말 것(옷술에 대하여).
    13-21. 처녀의 명예와 그 신성을 보전하기 위한 율법.
    22-29. 간음자에 대한 형벌.
    30.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지 말 것.

    신명기 22장은 성민으로서의 바람직한 규례 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켜야 할 도덕법에 관한 규례는 언약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정결을 목적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면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야 합니다.
    남녀는 서로 의복을 구별하여 입어야 합니다.
    짐승들을 대할 때도 자비로 돌보아야 합니다.
    한편 남편이 아내의 처녀성을 의심하여 소송을 제기할 경우 그것을 처리하는 규례와 함께 각종 성 범죄에 관한 처벌 규정을 제정함으로 성적인 타락에 관해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랑과 순결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른 여러 민족과 달리 독특한 두 특성인 이웃 사랑과 순결의 율법을 명합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일상적 인 사항을 규정합니다.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규정입니다(1~4)

    보통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주운 사람이 임자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 잃어버린 가축이나 물건을 보면, 그것을 본 사람이 그것을 돌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정직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탐욕을 금하십니다.
    심지어 주인을 찾지 못하면 찾을 때까지 돌보아야 할 책임이 주운 사람에게 주어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누군가 잃어버린 물건을, 마치 내 잃어버린 물건처럼 소중하게 다룰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의 것을 소중히 여기며,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심을 금해야 합니다.

    부적절한 의복을 입는 것을 금하십니다(5)

    남녀가 옷을 혼용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남자가 여장을 하거나 여자가 남장을 하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명령은 무엇보다 도덕적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 도착적이고 동성애적인 관습들을 금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명령은 종교적 의미도 가지고 있는데, 이교에서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으로서 남녀가 서로 옷을 바꿔 입는 의식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교적 관습을 금하신 것입니다.

    새를 보호하는 문제도 언급하셨습니다(6~7)

    새끼를 돌보거나 알을 품어야 하는 어미 새와 새끼를 한꺼번에 죽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일 꼭 잡아야 한다면 알이나 새끼를 취하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연 보호와 관련될 뿐 아니라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타인을 보호하는 규정(8)

    하나님께서는 건축을 할 때 안전설계를 할 것을 명하십니다.
    얼마나 필요한 규정인지 모릅니다.
    생명의 귀중함과 아울러 그에 대한 책임의 막중함을 설명해줍니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안전설계가 되지 않고 정직하지 않게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주전1400년경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질이 같지 않은 것을 혼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분을 깨뜨리지 말라는 명령을 하십니다(9~12)

    농사와 관련해서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서 부리지 말고,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 메우지 말라는 명령과, 의복과 관련해서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들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구별된 백성임을 보여주는 증거를 주시는 것입니다.

    결혼관계와 성(性)의 신성함에 대해서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13~30)

    남편이 아내를 미워하여 처녀가 아니었다고 누명을 씌우거나 실제로 처녀가 아닌 경우입니다(13~21)

    만일 누명을 씌운 남편의 거짓이 드러나면, 그는 장로들 앞에서 매를 맞고 은 100세겔을 벌금으로 장인에게 내고, 아내를 평생 끊지 못할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아내가 실제로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 아내는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유부녀와 간음한 자는 둘 다 죽여야 합니다(22)

    남자의 성적 유혹에 저항하지 않은 약혼한 여자에 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23~27)
    성읍 안에서 사건이 일어난 경우에는 둘 다 돌로 쳐 죽여야 하지만, 들에서 일어난 경우에는 여자가 소리를 질러도 보호받을 수 없었으므로 남자만 죽여야 합니다.
    여기서 약혼한 여자는 결혼한 아내로 간주되었습니다(‘이웃의 아내’ 24절)

    혼전 성관계의 문제도 이루어집니다(28~29)

    성경은 혼전 성관계를 금합니다.
    이것을 범한 남자는 여자의 가족에게 보상을 재정적으로 하고, 그 여자와 결혼하여야 하며 마음대로 여자를 버릴 수 없습니다.
    계모와의 성관계와 같은 근친상간은 엄격히 금하여졌습니다(30).
    이런 성에 관련된 계명들은 결혼 관계의 신성함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관심을 보여줍니다.

    22장에 세부적으로 드러난 조항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

    하나님께서 그어놓으신 선이 우리의 삶 속에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우리는 이런 기준들을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기준과 원리가 희미해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율법의 조항들은 결국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것들입니다.
    인간들은 이 기준선들을 깨뜨림으로서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결국 불행하고 비참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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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 29일(목)

    무죄한 피(신명기 21:8)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신명기 21: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무죄한 피(8절)
    ♦ 성구 :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하면 그 피 흘린 죄가 사함을 받으리니  

    Accept this atonement for your people Israel, whom you have redeemed, O LORD, and do not hold your people guilty of the blood of an innocent man." And the bloodshed will be atoned for. 

    신명기 21장은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에 대한 처리 규례를 언급합니다.

    사회와 가정에서 발생한 각종 문제에 대한 처리 규례를 언급합니다.

    1. 범인을 알 수 없는 피살자가 발견된 경우의 처리 규정(1-9절)
    2. 전쟁 포로인 여자를 아래로 삼고자 할 때의 규례(10-14절)
    3. 가정 문제 중에서 다처인 경우의 유산 상속은 장자에게 우선권을 주도록 규정(15-17절)
    4. 부모를 거역하는 패역한 자식은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18-21절)
    5. 범죄자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 때는 밤새도록 두지 말고 진 안의 땅에 매장하는 것을 금지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 그의 시체로 인해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였다(22-23절).

    첫 번째 규정은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에 대한 속죄 규정입니다(1~9).

    이것은 죽은 자를 들에서 발견하였는데 살인자를 찾을 수 없을 경우입니다(1).
    이때는 장로들과 재판장들이 그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에 대한 거리를 재서(2),
    가장 가까운 성읍에서 장로들이 아직 부리지 않은 암송아지를 취하여 경작되지 않은 계곡에 가, 물이 흐르는 데서 송아지 목을 꺾어 잡아야 합니다(3~4).
    제사장들도 동행해서(5) 그 성읍 장로들이 목이 꺾인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았음을 선언하고 속죄를 구할 때, 이스라엘에 부정한 죄가 제하여질 것입니다(6~9).

    두 번째는 이스라엘 남자가 포로된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 경우에 대한 규정입니다(10~14).

    포로라 할지라도 결혼을 전제로 한 경우입니다.
    결혼을 원하는 남자는 포로된 여인을 집으로 데려가 머리를 밀고 손톱을 깎고 포로의 의복을 벗고 한 달간 부모를 위해 애곡하게 한 후에 아내로 취해야 합니다(12~13).
    나중에 혹 그녀를 버리려고 한다면(이것은 인간의 죄성으로 허용하신 것이다) 종으로 팔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더 이상 그녀는 종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14).
    이것은 철저하게 포로된 여인의 인권과 감정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장자의 권리 문제가 이어집니다(15~17).
    이 경우는 남자가 두 아내를 두었을 때를 가정하되, 두 아내 중 더 사랑하는 아내와 덜 사랑하는 아내가 있겠지만, 장자는 누구에게서 나든지 아버지의 마음대로 차별하거나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감정과는 상관없이 장자가 장자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패역한 자식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규례입니다(18~21).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징계와 책망을 듣지 않는 경우, 이 자식을 부모가 성읍 장로들이 있는 성문으로 데려가 이 자식이 패역하다고 말하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은 이 자식을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기 위함입니다.

    죽을 죄를 범하는 경우들이 다루어집니다(22~23).

    나무 위에 달되,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하나님이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3).”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그 백성들이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죄를 어떻게 예방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가르침들입니다.
    죄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또한 포로라 할지라도, 미워하는 아내라 할지라도, 미워하는 아내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권리는 반드시 보호되어야만 합니다.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약자에 대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오해

    모세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규정합니다.
    이 규정은 신약 시대 사도 바울에게 심각한 오해를 유발했을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려 죽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해하고 율법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 신 아들이요 메시야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갈등 상황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후에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 그 생각이 바뀌기는 했지만 일단 이 구절로 인해서 바울은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대로 나무에 달리셔서 우리 인간들이 당할 하나님의 모든 저주를 홀로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저주받으심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통한 속죄에 대한 말씀은 특이하게 구약 민수기에서 단 한번 등장합니다.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산산조각내서 온전히 모두 태워 올리는 번제(Burnt Offering)
    피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써 감사의 헌물인 소제 (Grain)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표현하는 제사로써 제사 후에 제물을 나눠 먹는 화목제(Fellowship)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속죄제(Sin)
    이웃에게 해를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죄와 보상에 대한 제사인 속건제 (Guilt)

    제사들은 각각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예배에 대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한 것이라면,
    붉은 암송아지를 통한 속죄는 특별히 죽음이라는 운명을 앞둔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해 내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자체를 집중해서 계시해줍니다.    

    붉은 암송아지가 상징하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긴 복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민수기 19:2
    흠 없는 온전한 붉은 암송아지, 곧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것

    온전하여 흠이 없음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있는 제물을 드리는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라기 1:6-10에서 이렇게 진노하셨습니다.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1:6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1: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1:9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짐승을 통한 속죄의 한계

    인간은 무한대로 죄를 짓습니다.
    그렇게 사는 날 동안 무한대로 죄를 지어대는 인간이 현재 지구위에 약 77억 명 (7.7 billion)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위해서 매일 매일 동물들로 제사를 지내려면 지구위에 동물들을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중에 흠없는 제물로만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동물로는 인간의 죄를 다 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을 통한 속죄의 한계

    또한 같은 사람끼리도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죄로인해 죽어야 할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속죄를 위한 조건

    인간의 죄를 속죄하려면 그 제물은 동물과 같이 아무런 죄가 없어야 합니다.
    동물은 죄를 지을 수 없지요.
    또한, 인간을 위해 희생하려면 동등한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살리겠다고 집앞에 사는 개미를 대신 죽일 수는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조건에 맞는 제물을 <횃불언약> 때 이미 우리에게 계시해주셨습니다.
    흠없으신 하나님 자신이 제물이 되어 둘로 쪼개지고, 불타서 재가 될 것을 이미 창세기 15장에 선포하셨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흠이 없고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론 (Christology)>의 내용을 통해 살펴봅시다.

    1.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에서 시작된 죄의 저주아래 <아다마>로 태어나는 원죄가 있습니다.

    아다마(אדמה)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에서 나오는 땅, 지구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단어 아다마와 단어 아담 사이의 어원 관계는 사람이 세상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식과 그가 "흙의 먼지"에서 나왔음을 둘 다 강조하여, 인간과 땅 사이의 목적론적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됐다.[1] 사람이 모두 아다마에서 만들어졌으며 서식하기 때문에, 그의 지구로의 의무에 해당하는 것과 관련된 잠재력을 실현 시키기 위해서이다.[2] 아다마와 아담의 긴밀한 관계는 지상을 기는 뱀의 동물의 특성을 강조해, 그를 비유로 해석되었지만, 에덴에서 아다마는 주로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3]

    시편 51편에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성령에 의해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신 예수님은 원죄가 없으십니다. (Virgin Birth)

    a.     마 1:24-25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1:34-35)”

    b.     벧전 2:22-25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c.      벧전 1:18-19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

    d.     히 9:13-14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

    2)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a.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셨고 유전적 족보를 가진 인간이셨습니다.

    b.     예수님도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

    c.      예수님도 육체로 인한 한계가 있으셨습니다 (오감을 잃듯 육체의 제약을 가지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2)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 19:28)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요4:6)

    d.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요 8:40)

    e.     사람들이 그를 보았고 만졌다고 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따라서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인간으로써 “온전하고 흠이 없는” 제물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2.  붉은색 암송아지

    성경속에서 붉은 색이 상징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 - 사 1:18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scarlet)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red as crimson)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예수님의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건넜던 바다가 홍해 (Red Sea)입니다.
    바울사도는 홍해바다 를 건넌 사건이 ‘세례’였다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1-2)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홍해를 다 지나자 쫓아오던 애굽의 군사들이 말과 병거와 함께 물 속에서 죽습니다. 홍해바다가 예수님의 를 상징하듯,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해 애굽 (이세상)에 속한 우리의 <옛사람, 죄성>은 물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피를 통과한 우리들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2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인해 주홍같던 인류의 모든 죄가 싹 덮여버렸습니다. 그리고 하얀 눈처럼, 하얀 양털처럼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보혈은 시대와, 장소와, 죄의 크기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다면 그들을 은혜로 덮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멍에를 메지 아니한 것     

    멍에를 멘 소는 주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사탄의 멍에를 멘 종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사탄의 통치아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갈4:8)”.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8:34). 따라서, 인간의 죄의 멍에를 대신 메기 위해 붉은암송아지는 한번도 멍에를 메지 않아야 했습니다.

    1)     <멍에>(עֹל 올)라는 단어에는, “노예상태 (servitude), (transgressions), 고난 (hardship)”이란 뜻이 있고, 동사인( עָלַל 알랄)에는 “모욕하다, 더럽히다, 조롱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고 있던 멍에가 없었기 때문에, 죄의 종인 나를 위해 대신 모욕당하시고, 더럽혀지며, 조롱당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2)     <메다> (עָלָה 알라)라는 단어는 “치료받다, 옳기다, 인도하다, 올라가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멍에를 메어주심으로 인해 우리를 치료하시고, 무거운 죄를 우리로부터 자신에게로 옮겨주시며,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올라가게 하십니다.

    3)     알기쉬운 그림 => “멍에를 멘 상태”: 놋뱀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으로부터 10가지 재앙을 통해 극적으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보다는, 당장 오늘 걸어가는 길이 험하고 힘드니까 마음이 상했습니다.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을 쏟아냅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이와같은 원망과 불평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누가 우릴 구원하래? 세상에서 살 때는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은 안 살아도 됐는데!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며? 그런데 왜 난, 돈도 없고, 직장도 별로고, 하고싶은 것도 못하고, 그런데 자꾸 종이 되어 섬겨라, 십자가를 지라는 소리만 하고… 이런 궁상맞은 삶은 싫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8절)”

                왜 구지 뱀형상을 만들어서 나무위에 달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적하고 죽이려는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우리의 아비가 사탄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사탄은 곧 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신이 인간들은 뱀의 자식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뱀의 자녀가 된 아다마들을 하나님의 자녀인 아파르로 되살려내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뱀이 되시는 과정이 바로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십자가 위에서 죄덩어리인 뱀이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6). 죄 없으시던 예수님께서 뱀과 같던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내 멍에를 메고 죽으셨습니다. 진노의 불에 활활 타서 새까만 재가 되셨습니다.   

    아파르들의 멍에

    아다마의 멍에가 사탄의 통치아래 메어야 했던 <죄의 멍에>였다면, 이제 아파르들의 멍에는 예수님의 통치아래 주어진 멍에를 멥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말씀하시길,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9)”라고 하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나에게로 와서 쉬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섬기며 그분의 통치 안에서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 메지 말라.” (갈5:1)

    Summation

          유대인들은 아직도 붉은 암송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모세이후로 9번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만, 세상에서 황소, 흰소, 젖소, 까만소는 자주 볼 수 있지만 새빨간 소를 본적이 있나요? 그것도 흠없고 온전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996년에 ‘멜로디’라는 이름의 붉은 암송아지의 후보가 실제로 태어나서 이스라엘에서 난리가 났다고합니다. 그런데 랍비들이 정밀히 검사해본 결과 꼬리에 흰털 두가닥이 있었고, 흰색 코털이 있어서 기준미달로 탈락했습니다. 최근에 유전공학의 힘으로 이스라엘 성전연구소에서는 그런 소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고 어느정도 성과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소를 염색하든지해서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단언컨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를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흠이없고 온전하며, 멍에를 메지 않고, 붉은색으로써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인류를 구원 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제물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또다시 이 은혜를 기억합시다.

    *눈먼자를 눈뜨게 해줬는데 눈이 부시다고 선글라스도 달라고 하겠습니까?

    *평생 앉은뱅이였던 자를 걷게해줬더니 에어조던 신발도 사달라고 하겠습니까?

    *죽어가던 자를 살려줬더니 먹고살 수 있도록 좋은 직장도 주고 차도 주고 집도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창조주께서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는데 우리는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하면서 수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지 않았습니까?

    사실, 맞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매일 넘어집니다.

    육신을 입고있는 우리는 배고픔과 같은 육신의 욕구에 눈이 뒤집힐때가 있습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마트에 갔을 때 정말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것을 막 사는 저를 보게 됩니다. 밀려오는 수면욕 때문에 운전하다가 몇번 죽을뻔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육신은 너무나도 강렬한 욕구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식욕, 성욕, 성취욕, 모두 매우 강력한 육신의 욕구들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뤄가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우릴 구원할 수 있습니까? No. 구원은 오직 예수님만 주십니다. 주님은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구원을 이뤄주십니다. 우리는 이전에 단한번만 은혜를 받은자들이 아닙니다. “언제까지 은혜에 감사해야 하냐고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매순간 상처입은 모습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구원이 이뤄지는 은혜를 누립니다. 오늘은 오늘 십자가를 통하여 받은 구원에 감사하십시오.

    ·       흠없고 죄도없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낮고 낮은 땅에 인간모습으로 와주셨습니다.

    ·       주홍같던 우리의 죄를 자신이 흘리신 빨간 피로 완전히 덮어주셔서, 우리를 흠없고 온전한 모습으로 만들어주신 분.

    ·       뱀의 자식들로 살던 우릴 살리려고 자신이 뱀이되어 우리의 죄의 멍에를 메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

    ·       하나님 앞에서 나를 가치있게 만드시기 위해 자신이 세상에서 똥보다도 가치없는 <재>되어주신 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이뤄내신 이 구원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살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속에서 오늘도 아파르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이 겪는 모든 절망속에서, 모든 죄와의 싸움에서, 모든 고난에서 우릴 살려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까지 우리들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 복음에 대해 천번을 들어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흠없고 온전하며 멍에를 메지않으신 붉은 암송아지’가 되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오늘도 여전히 당신을 살려내시는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창세기 2:4-7)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만드시는 중에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니라"(창1:27-28)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였습니다"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시며 자기의 형상대로의 창조의 신비를 부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넷째날까지 천지와 바다와 하늘과 산천초목과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고 다섯째날의 생물을 만드실때에 '생물' 즉 히브리어로 '네페쉬카야'로 표현하여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생물입니다.

    1.하나님은 인간에게 생기를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인간 육신에 대한 창조의 내용인데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아파르 민 하 아다마)인데 흙 즉 '아다마'를 직역하면 땅의 티끌 곧 "먼지"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티끌과 같은 무가치한 존재임을 말합니다. 흙에서 아니 티끌에서 먼지에서 존재된 인간 그대로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고 그럼으로 육체가 영혼보다 앞선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Delizsch)
    여기에 생기는 하나님이 직접 불어 넣으신 (네솨마) 영혼(잠20:27) 호흡(사2:22) 기운(욥33:4) 등으로 번역되어 일반적으로 인간의 혼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모든 생명체의 기식(氣息)을 의미합니다.

    "불어 넣으시니"(나파흐) 숨을 내쉰다. 부풀리다, 불붙이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의 근원되는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으셨다는 점에서 인간 몸은 하나님의 거하는 전(殿)이라 할 수 있다(고전6:19) 그러므로 사람은 각종 생물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 움직이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 것은 창1;21, 24의 생물(living soul) 또는 호흡(breath)의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의 같은 생물이 아닌 생령(living spirit)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생령이 된 것은 창 1:26의 하나님이 형상 즉 하나님이 영성을 지닌 영원한 존재로서의 영혼을 소유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영원한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흙, 티끌, 먼지로 된 육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이 부여된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이 존재하는 생령인 것입니다. 동물의차원이 아닙니다. 사람의 차원 인간의 차원을 벗어나 영원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영세복락을 누릴 것을 확신합시다.

    2.생령이 될 사람에게 주도권을 주셨습니다.

    창1:26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는 주도권의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창1:28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소유권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통치권, 다스리는 권리를 주셨으니 우리는 모든 것을 모든 생물을 잘 다스리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물과 동물을 사람에게 위임 통치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뜻을 따라 지배하고 통치하고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통치,정복, 다스림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 좋게 해야 합니다.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하여 아름다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주도권을 주셨습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주도권을 잡다, 지배하다 세력을 떨치다 통치하다"의 뜻인데 즉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주관할 수 있는 통치권과 권위와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입니다.
    창1;19에 보면 아담에게 각종 짐승과 새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주도권과 권리를 부여하여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짓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생물의 이름이 발음 표현이 다르지만 아담으로 이름지은 것으로 세계만민이 소,개,말,토끼,양,닭,돼지,오리,사자,곰,코끼리등등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임해 주신 그 뜻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생령으로서의 중차대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주도권의행사를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3.주도권을 주심과 같이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생물을 다스리는 자유,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자율권을 주셨습니다. 동물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자율권을 주시고 "에덴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6) "임의로 먹되" 먹고 싶은 대로 먹되, 자유롭게 섭취하다"란 뜻입니다. 이것은 에덴의 허락이요 에덴의 자유입니다.
    생물을 다스리고 바다육지와 하늘을 정복하고 짐승들의 이름도 마음대로 지으시고 에덴동산도 다스리게 하는 엄청난 자유를 하나님께서 육신의 양식으로 실과를 주시고 영생이 양식으로 생명과를 주셨습니다. 임의로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정말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단 한가지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좋은 자유입니다. 의지와 행동,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강한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좋은 행위와 행동으로 순종하여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자유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자유가 정지될 수 있습니다. 자유가 제한 될 수 있습니다. 불순종의 결과 로 주도권도 자율권도 생령되었던 하나님의 형상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참된 자유를 주었건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행위언약 에덴의 언약을 어김으로 인하여 에덴의 허락과 에덴의 자유를 빼았겼습니다. 다스리는 권한도 지키는 권한도 빼았겼습니다. 이때로부터 아담은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었던 영성과 주도권과 자유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구속의 역사를 계획하셨습니다.

    4.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에덴의 허락을 누리는 자유를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에게 인생행로의 고난으로 허락하여 이마에 땀을 흘러야 먹고 살고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것과 에덴의 행위언약의 불순종으로 자유와 주도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에 대한 변화는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 산천초목, 모든 짐승과 새들, 일월성신은 계속해서 밤과 낮,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계속하여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12개월로 구성되어 새 천년 시대가 누적되고 21세기를 맞이하여 계속됩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구속역사와 구원사역에 대한 것은 수천년을 이어오면서 메시야 사상과 함께 속죄원리를 제정하사 구약의 각종 제사제도를 통하여 죄를 속하게 하고 메시야를 통하여 대속의 제사로 인하여 인류구원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요일서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을 사랑하십니다.
    범죄 한 나를 사랑하십니다. 자유와 주도권과 영성을 잃어버린 나를 사랑하십니다.
    엡2:1-10말씀 중에 특별히 4-5절에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범죄하여 자유를 잃어버린 인생은 완전 부패, 전적 타락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엡2:1)
    이와 같은 인생의 가치는 체중65kg 기준하여 계산하면 98센트요, 석회가 새(鳥)장 한 번 씻을 수 있고 화약장난감 총 한방 분, 마그네시아가 한 모음, 인이 성냥개비 2000개, 철이 못 한 개분 설탕1컵, 지방은 세수비누 5개만드는 양 밖에 안 되는 가치입니다.
    과대평가하여 인체의 잠재적 에너지 파운드당 1140kw을 산출하며 65kg의 몸에 855억불의 가치관을 평가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만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생은 무상합니다. 안개와 그림자와 이슬과 지렁이와 하루살이 같습니다.
    고라자손의 시49:12절에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과 같도다"
    아삽의 시73:22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오니 주의 앞에 짐승이니이다"
    다윗의 시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이니이다"
    아굴의 잠언 30;2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도다"
    이와같은 존재를 하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영성회복을 위하여, 주도권을 회복시키려고 사랑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자율권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로마서 8장)

    5.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셨습니다.

    생령이 된 것도, 주도권을 주신 것도, 자유를 주신 것도, 회복케 하는 것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 자신이 행복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의 교제로 신앙성장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사48: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고전10:31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감복하면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순종하여 겸손하게 섬기며 낮아져야 합니다.
    창1;22,28, 2:3의 생물의 복, 사람에게 복 안식일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요리문답 제일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잃었던 영성을 찾고 빼앗겼던 주도권을 회복하고 제한된 자유를 다시 찾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을 힘입어 성령의 역사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를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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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 28일(수)

    겁내는 자(신명기 20:8)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신명기 20: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겁내는 자(8절)
    ♦ 성구 :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찌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하여 

    Then the officers shall add, "Is any man afraid or fainthearted? Let him go home so that his brothers will not become disheartened too." 

    신명기 20장은 전쟁에 대한 규례를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이방 민족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지켜야 할 전쟁의 규례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방 민족과의 전쟁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승리케 하 실 것을 믿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1-4절).
    한편 전쟁 시에 병역을 면제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규례(5-9절)
    전생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화친을 제의하고 상대방이 거절할 때만 싸우라고 합니다(10-15절).
    그러나 특별히 가나안 족속들은 모두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상 숭배와 타락한 풍습에 이스라엘이 오염될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무자비한 파괴는 금지하셨습니다(16-20절).

    사회 생활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는 문맥에 있어서 본장은 전쟁에 관한 윤리와 규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요단 강을 건넌 후에 곧 시작되게 될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에 있어서 지켜야 할 사항을 언급하며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전쟁에 있어서 기본적인 방침이 될 원칙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의 자세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1~9).
    “대적이 너보다 많고 힘이 강해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1).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제사장은 전쟁터에서 백성에게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3~4).”
    이 말씀은 백성들에게 힘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병 기준도 말씀하십니다(5~8).
    책임자들은 전쟁에 임할 군인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조건에 있는 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전쟁의 성패는 군사의 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쟁은 하나님께서 진행하는 영적인 전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원하는 군사들에 의해서 전쟁을 치루게 될 것입니다.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못한 자(5),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먹지 못한 자(6),
    약혼하고 결혼하지 않은 자(7),
    그리고 두려워서 겁내는 자를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8).
    앞의 세 조건은 삶에 대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와도 비교할 수 없는 배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조건은 이 모든 전쟁이 믿음의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들을 더욱 낙심하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했던 모든 전쟁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마음을 실을 수 없는 자들과, 두려워서 겁내는 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수적으로는 부족할지라도 이들은 믿음으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전쟁의 원칙이 두 가지로 제시됩니다(10~18).
    먼저 멀리 있는 성읍과 전쟁을 하는 경우인데(10~15),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고 하십니다(10~11).
    이것은 투항을 권하라는 말씀입니다.
    투항하면 피를 흘릴 필요 없이 그들로 조공을 바치게 하면 됩니다.
    만일 투항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하되, ‘하나님께서 그들을 손에 붙이실 때’ 그들을 쳐서 남자들을 다 멸하고 나머지는 취하라고 하십니다(12~14).

    두 번째 경우는 가나안 땅의 민족들과 전쟁을 하는 경우입니다(16~18).
    이 경우, 하나님은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을 가나안 땅에 단 하나라도 남겨놓으면, 반드시 우상의 가증한 것을 가르쳐 본받게 하여서,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 성읍을 포위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주변의 과실수를 찍어내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는 나중에(전쟁에서 이기게 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19~20).
    그러나 과실수가 아닌 것은 일반 수목은 찍어내어서 무기를 만들어도 괜찮습니다.

    군대의 힘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많은 성도보다 헌신된 소수의 신실한 성도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소수의 성도입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주변 이방 민족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시고 끊어내시기를 바라시는가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전쟁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승리를 약속받고 싸운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 언약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도 이 승리가 약속되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전쟁(戰爭) The Holy War

    거룩한 전쟁은 히브리어 동사 חָרַם(하람)에서 나온 명사 헤렘으로써 모든 것을 진멸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람(charam) 2763  חָרַם

    1. 닫다,  2. 보이지 않게 하다,  3. 분사 חָרוּם
    관련 성경 / 코가 불완전하다(레 21:18), 전멸시키다(수 2:10), 멸하다(민 21:2, 왕상 9:21), 진멸하다(수 8:26, 대하 32:14, 사 34:2), 말리다(사11:15), 구별하여 드리다(미 4:13), 치다(대하 20:23), 멸절시키다(사 37:11), 바치다(레 27:28, 29, 수 6:18), 적몰하다(스 10:8).
    구약 성경 / 51회 사용

    헤렘(chêrem) 2764 חֵרֶם

    1. 그물,  2. 돌이킴,  3. 비유적으로 여자들의 ‘아첨’에 대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음
    어원 / 27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드림(레 27:21, 민 18:14), 바친 것(레 27:28, 수 6:18, 7:12), 진멸 당할 것(신 7:26), 진멸할물건(신 13:17), 멸할 것(삼상 15:21),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왕상 20:42), 진멸시킬 물건(대상 2:7), 그물(전 7:26, 겔 26:14, 합 1:15), 진멸(사 34:5, 사 43:28), 저주(슥14:11, 말 4:6).
    구약 성경 / 29회 사용
    모든 전쟁이 다 거룩한 전쟁이 아니다.
    한국전쟁(6.25)은 거룩한 전쟁이 아니라 민족의 비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아무리 나쁜 평화 일지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전쟁은 참혹하고 비참한 일임에 틀림없다.
    6.25 동족 상잔의 비극은 우리 한반도에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평화일지라도 전쟁보다는 낫다더불어 민주당의 주장은 잘못된 말이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전쟁보다 낫다!
    일본의 지배하에 사는 것이 전쟁하는 것 보다 낫다!(이완용의 말)

    예레미야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할 때 하나냐는 뺨을 때리며 비겁한 놈이라며 왕에게 참소하여 자기들은 애국자이나 예레미야는 매국노라고 진흙구덩이에 던지게 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다 할지라도 항복은 싫다는 것이다.
    요나처럼 하나님의 명령보다도 적군이 망하는게 낫다는 주장이었다.

    맛사다의 용사들이 목숨걸고 싸우다가 자살한 것이 진정한 애국자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주변국과는 싸우라고 하셨지 항복하라고 한 적은 없다.
    맛사다에서 왜 그들은 3년 정도 먹을 것이 있는데 죽기까지 싸우다 결국 자살했을까?
    로마군이 동족을 붙잡아다가 토성을 쌓고 공격할 때에 로마군에게 끓는 기름을 부어 성벽을 기어오르다 죽게 했지만 동족은 죽일 수 없었고 항복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용사 10 명을 선출하여 부녀들과 자녀들 그리고 남은 용사들을 죽이고 최후에 1인이 죽이고 자기도죽었다.
    나는 이들의 죽음을 보며 과연 이들이 어리석었나를 생각해본다.

    나쁜 평화는 항복이요 좋은 평화는 싸워 지키는 것이다.

    항복과 맹종이 나쁜 평화다.
    캄보디아나 월남은 항복의 결과로 엄청난 인원이 사살 되었다.
    그러므로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민주당은 폭주당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나도 전쟁은 싫다.
    그러나 문재인씨의 삶은 소대가리, 특등머저리 등등 비난해도 굴종한 결과는 미사일 발사에 핵개발을 도왔을 뿐 무슨 소득이 있었나?
    대화를 시도한 후 조만식과 이주하 김삼룡을 교환하자더니 6.25가 터졌고 평화 무드를 일으킨 다음 땅굴을 판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땅굴을 파고,
    드론을 띄워 전쟁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북한 괴뢰들의 야욕을 알면서도 평화를 약속하는 것은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정권은 반드시 무너트려야 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신명기 7장을 중심으로 거룩한 전쟁의 여섯 가지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부요를 누리게 될 때 그 부요를 주신 하나님을 잊게 되면 영적인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신명기 7장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겪게 될 외적인 위험, 즉 가나안 7족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7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 신명기 7:1~5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가나안 7족과 전쟁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거룩한 전쟁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신명기 7:6~16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누리게 될 특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신명기 7:17~26
    가나안 7족과 전쟁할 때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원리를 말씀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은 좋은 것으로 가득한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가면 아무 수고도 없이 차지할 수 있는 땅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 이미 살고 있는 가나안 7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들의 땅을 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과정을 거쳐서 그 땅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전쟁은 단순한 물리적인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7족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매우 부패하고 악한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치를 전쟁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리적 전쟁뿐만 아니라 영적 전쟁까지 포함한 이중적인 전쟁을 대비하기 위하여 철저히 정신적 무장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전쟁이 끝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단 9:26).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인류의 역사를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갈등의 역사라고 요약하셨습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믿음의 사람들이고 뱀의 후손은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의 역사는 신명기 7장에도 나타났고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물리적인 전쟁도 있지만 그 배후에는 항상 영적인 전쟁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천국은 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신명기 7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행해야 할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었습니다.

    거룩한 전쟁은 히브리어 동사 חָרַם(하람)에서 나온 명사 헤렘으로써 모든 것을 진멸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다 거룩한 전쟁은 아닙니다.

    6.25와 같은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은 비극이지 거룩한 전쟁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전쟁, 즉 헤렘이 되려면 다섯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전쟁을 하라는 하나님의 승인이나 명령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전쟁을 하라고 할 때에만 거룩한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언약을 이루려는 목적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가나안 7족과의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원수를 진멸하는 전쟁

    거룩한 전쟁은 포로도 살려두어서는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
    원수를 완전히 진멸하는 것이 거룩한 전쟁인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

    하나님이 이 전쟁을 하기만 하면 이긴다고 하실 때에만 거룩한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영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전쟁인 것입니다.
    천국을 차지하고자 하는 영적인 전쟁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전쟁이 되려면 이처럼 5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명령했고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수행한 물리적인 전쟁으로서의 거룩한 전쟁은 예표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성도들이 수행해야 할 영적인 전쟁의 예표인 것입니다.

    가나안 7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전쟁의 예표이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천국의 예표이고 거룩한 전쟁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영적 전쟁의 예표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성도들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전쟁을 하다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전쟁인 것입니다. 

    신명기 7장의 거룩한 전쟁의 원리는 신약시대 성도들의 영적 전쟁에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여섯 가지 원리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I.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함 

    첫째, 승리 의식

    거룩한 전쟁에서는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해야 합니다. 이긴다는 승리 의식을 가진 사람과 패한다는 패배의식을 가진 사람과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당연히 승리 의식을 가진 사람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더 확실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 7장 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라고 했고, 2절에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만일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다면”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네게 승리를 주실 때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if(만일)이 아니라 when(때에)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가나안 7족은 반드시 쫓아내시고 반드시 치게 하신다는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겨도 겨우 이기는 자가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자들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에서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미 졌습니다. 우리 원수 마귀는 하늘에서 쫓겨날 때 머리통이 터지고 계급장도 뜯기고 땅으로 쫓겨나서 지금은 땅의 성도들을 괴롭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기신 존재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패배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는 이긴다는 승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승리의식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의지

    가나안 7족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교해 볼 때 숫자나 군사적인 능력으로 살펴보게 되면 가나안 7족이 훨씬 숫자도 많고 힘도 강했습니다. 물리적인 능력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7족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열세이지만 이 전쟁은 군사적인 숫자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너희는 자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질 수도 없고 망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3~6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약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전쟁의 첫째 원리는 승리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적이 누군가를 분명히 알아야 함 
      
      첫째,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적은 분명합니다. 전쟁에서 적이 누구인지를 모르면 전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셋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기르가스 족속, 히위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이라는 분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너무나 부패하였고 죄악의 분량이 다 찼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때가 된 족속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잘못했을 때에 금방 벌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분량이 차면 그때는 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괴로움을 당할 것이고 그 후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가나안 땅의 주민들은 죄악이 관영해서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원수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복음서와 서신서들은 성도가 개인적으로 전쟁 대상으로 삼아야 할 원수가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교회가 전체적으로 전쟁 대상으로 삼아야 할 원수가 다섯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부터 14장까지는 이러한 다섯 원수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꼭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원수의 두목 용입니다. 이 용은 마귀라고도 불리우고 사단 또는 옛뱀이라고도 불리우는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2) 바다에서 나온 짐승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정치세력입니다. 3) 땅에서 나온 짐승입니다. 이것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연합하여 복음진리를 대적하는 종교세력, 이단, 거짓된 종교 세력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서로 연합해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단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이 왜 이렇게 세력이 큰가 들어가보면 그들이 정치 세력들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지옥에 가서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4) 큰 음녀라고 불리우는 바벨론입니다. 정치 세력도 아니고 종교 세력도 아닌데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문화와 경제 세력입니다.  대중 문화나 경제적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큰 음녀 바벨론이라고 하였습니다. 5) 짐승의 수 666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끝까지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훼파하는 불신자들입니다. 6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숫자요 실패의 숫자요 패배의 숫자입니다. 그러나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숫자요 성공의 숫자요 승리의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666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단순히 이마에 666을 그려 넣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인생이 하나님을 “안 믿어, 안 믿어, 안 믿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의 인생은 “멸망, 멸망, 멸망”으로 철저하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다섯 원수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요한계시록은 ‘여자가 낳은 남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자 이들은 핍박의 대상을 교회로 삼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를 핍박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의 말씀처럼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즉 성도는 이러한 영적인 전쟁을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으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다섯 원수는 결국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모두 전멸 당하고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말씀을 붙들고 날마다 기도로 영적인 원수들을 이겨야 될 줄 믿습니다. 

    III. 원수들과 조금도 타협할 여지를 주지말고 진멸해야 함 

      첫째, 거룩한 전쟁은 원수를 진멸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기 때문에 진멸해야 합니다. 신명기 7장 2절에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진멸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하람(חָרַם)으로부터 ‘헤렘’이라는 명사가 나왔습니다. 바로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 거룩한 전쟁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3절에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사무엘상 15장 9절에서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사무엘상 15장 23절에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거룩한 전쟁의 원리를 버리므로 왕에서 폐위 되었고 악신이 그에게 들어가서 미친 짓을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둘째, 원수를 진멸해야 할 이유는 살려 두게 되면 악한 영향력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7장 4절에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원수들을 진멸하지 않으면 그 악한 영향력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진멸당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셋째, 성도들도 마귀의 일을 멸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고 에베소서 4장 27절에도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단사설이나 거짓말과 같은 것에 빈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카톨릭이나 불교에서도 자원봉사나 구제와 같은 좋은 일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것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잘못 가르쳐서 사람들을 지옥에 가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원수의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IV. 원수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아야 함 

      신명기 7장 2절 후반에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언약이란 상호 간에 맺는 협정이나 약속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도 원수들과는 타협이나 약속을 맺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9장에서는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과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으려고 심히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인 것처럼 속여서 화친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3일 후에 그들이 가까운데 사는 기브온 거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거민들을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회중들이 언약을 맺은 족장을 원망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기브온 거민들을 진멸시키지 못하고 그들을 나무를 패며 물 긷는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5절은 신약시대에도 이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이단들과 어떤 협정도 맺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을 타협하면서까지 타종교나 이단들과 대화라든가 연합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WCC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비성경적인 성경론으로 성경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다른 종교들과 연합하여 종교적 다원주의나 혼합주의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성경적인 에큐메니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과 일치를 통해 인류를 정의롭고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 원리에 입각한 해방신학이나 여성신학과 같은 것들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꿈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WCC는 교회의 연합이 아니라 종교의 연합인 것입니다. 심지어 WCC 총회에서 한국의 한 여성 신학자는 그 자리에서 한풀이 굿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신앙을 파괴하는 이러한 것들을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과 같이 오직 성경의 원리만을 따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구원자이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V. 원수들과는 절대로 혼인관계를 맺지 말아야 함 


    다섯째 원리는 네 번째 원리를 결혼과 가정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절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7:4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혼인관계는 매우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에 유혹해서 여호와를 떠나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그 대표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내가 700명이고 첩이 300명 도합 1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족속의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그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서 우상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죄로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불신자와의 혼인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7족과 혼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자녀들이 불신자들과 혼인하지 않도록 하는 책임은 근본적으로 ‘아버지’에게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아버지에게 명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책임자로서 그런 자에게 딸을 주지도 말고 그런 며느리를 받아들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 꼭 신앙 안에서 결혼시켜야 합니다. 

    VI. 원수들의 종교와 관련된 우상들과는 완전히 단절해야 함 

    신명기 7: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이방 예배의 장소나 우상을 모두 파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상을 파괴하거나 마리아상을 불사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큰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성도들이 이 말씀을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나 마음이나 삶의 모든 영역에 우상숭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바울은 성도의 삶의 영역에 ‘우상숭배’의 흔적이나 냄새 조차도 없애버리라는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영광가운데 천국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냥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은 영적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차지하게 됩니다.
    사단은 우리의 삶의 곳곳에 견고한 진을 만들어 놓고 물러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단의 견고한 진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다 파괴해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깨끗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날마다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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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피성(逃避城) city of refuge

    동쪽 : 골란, 길르앗 라못, 베셀
    서쪽 : 게데스, 세겜, 헤브론


    도피성 존재의 이유

    이스라엘의 요단강을 기점으로 하여 48개의 성읍 중 6곳을 택하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곳(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요단강 서편에 3곳(게데스, 세겜, 헤브론)이었습니다(수20:7-8).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지명의 뜻까지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도피성은 골란과 길르앗 라못, 그리고 베셀에 두었고 서쪽에는 게데스와 세겜, 그리고 헤브론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이스라엘 지도를 참조하여 보면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하여 있어서 부득이 도피성으로 피해 가야할 경우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으며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이 도피성은 무슨 이유로 세워놓은 것일까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살인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죄에 대한 형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다 연속적으로 살인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죄가 중할수록 그리고 그 형벌이 엄할수록 의도적인 살인과 과실로 발생하는 사고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은 누명을 쓴 사람이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즉각적인 보복을 당하기 전 까지 자기 결백을 증명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피신할 장소도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다 그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의로 이웃을 모살하였으면 살인자가 거룩한 단에 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령하신 바 있습니다.(출21:12-14) 따라서 이 도피성은 중한 과실죄를 지었으나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피성에도 운영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로 살인자가 과실로 죄를 지었다는 것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도피성에 들어가 숨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의도적으로 살인하지 않았음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살인에 대한 도구가 있거나 계획적인 살인을 하였다면 구제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실로 살인한 자는 도피성에서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받게 됩니다.

    둘째, 반드시 도피성으로 스스로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는 도피성 안에 있을 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피하는 도중에 보복을 당하거나 도피성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 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은 도피성에 대한 규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죄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할지라도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으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하는 보수(報酬)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내어준바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죄 값을 치루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해 있던 자들에게 사면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어 사면령이 내려지면 보수자가 살인자를 만나도 보수의 원칙에 따라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민 35:27,28)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은총이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이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의 과실에 대한 보수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오기만 하면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과 도피성의 의미 

    게데스(Kedesh)

    - 구별하다 (납달리 산지)

    서쪽 경계지의 산들 가운데 있고 갈릴리 바다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다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구별된 그리스도요 구원자이심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그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하여 주신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우리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세상의 죄에서 구별되어 거룩한 성도로 사는 은혜를 받게됩니다.

    세겜(Shechem)

    - 어깨 짐 (에브라임 산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동서 경계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볍고 쉬움이라(마 11:28)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헤브론(Hebron)

    - 연합, 동맹, 교제

    기럇 아르바로 알려진 곳으로 유다의 예루살렘 남쪽 약 3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을 연합하게 하시는 자요 또한 우리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웃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으리니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20:7
    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베셀(Bezer)  

    - 요새 (르우벤 지파)

    사해바다로 흘러가는 요단강 입구 동쪽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요새가 되십니다.
    특히 환난을 당한 자에게 요새가 되십시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자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와 돌에 맞아 죽을 여인에게도 요새가 되어 주셨습니다(시 91:2).

    시편 91: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I will say of the LORD, "He is my refuge and my fortress, my God, in whom I trust."

    길르앗 라못(Ramoth in Gilead)

    - 언덕, 고지 (갓 지파)

    길르앗 라못 산지의 약 80km이상 북쪽에 위치했다.
     
    예수님은 언덕이요 고지가 되심으로 어떤 경우에 가까이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예수 믿으려하니 끊을 것도 많고 버릴 것도 많고 그대로 살려고 하니 힘든 것도 많습니다.
    예배 시간, 기도 시간, 봉사 시간에 참여하려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때로 비난과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곳이 곧 쉼의 언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를 높이 세우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암사슴 발을 높은 곳에 세워주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나, 롯, 에스더를 높이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골란(Golan)

    - 기쁨 (므낫세 지파)

    갈릴리바다 동쪽산지 어딘가에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수님은 최후 승리자요 기쁨이십니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에게도 승리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심으로 모든 성도에게 큰 기쁨이요 승리요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 20: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도입 이야기)

    김경록이라는 사람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 강간을 했는데,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는 이유로 소위 보복 살인을 한 것입니다.
    그를 잡기 위해 수만 명의 경찰들을 동원해 추적했지만, 얼마 후에 목매어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도망 다녀 보았지만 숨을 곳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쫓기는 사람들에게 피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도피성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그들이 차지한 성읍이 48개 성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여섯 군데를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였다 할지라도 쫓기다가 잡히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고살자', 즉 원한을 가지고 사람을 죽였을 때에도 반드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으로 가게 되면 안전한 보호를 받습니다.
    도피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고의로 살인한 사람이라도 오기만 하면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모두 6개였습니다 

    납달리 영내의 게데스입니다.
    이는 '성결의 성'이라는 뜻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오면 그의 죄는 성결케 되고 그의 의를 믿는 순간 거룩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영내의 세겜입니다.
    '힘'이라는 뜻으로 거룩함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힘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유다 영내의 헤브론입니다.
    '교통'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르우벤 영내의 베셀입니다.
    '안전'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피로 속죄함을 얻어 거룩함을 얻고 새 힘을 얻으면 하나님과 교통이 계속되고 더불어 안전한 생애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갓 지파 영내의 길르앗입니다.
    '고봉'이라는 뜻으로 높은 소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므낫세 영내의 골란입니다.
    '행복'이라는 뜻으로 죄를 사함받고 생명까지 구원받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무엇에 쫓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입니까?
    질병입니까?
    실패입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십니까?
    도피성 되신 예수님 품으로 오시면 행복의 안착지가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물론 이방인들에게도 활짝 열려 있습니다(민 35:15).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살길이십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찾아가기에 편리한 곳에 위치하였습니다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주어서 도피성이 되게 하라(민 35:11)고 하였고, 길도 넓게 닦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14미터의 길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되는 진리입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데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군데군데 '미클라트'라는 표식이 있었습니다.

    미클라트(4733) miqlâṭ  /  מִקְלָט

    1. 수용소,  2. 보호소,  3. 피나처

    발음 / 미클라트(miqlâṭ)

    어원 / 703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도피성(민 35:11, 32, 대상 6:57), 도피하는성(민 35:12), 피할 곳(수 20:3).
    구약 성경 / 20회 사용
    도피성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었습니다.
    가기만 하면 과거를 묻지 않을 뿐 아니라 살인자로 취급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누구라도 도피성이 되신 구주 앞에 오시면 살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어느 연예인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그가 9살 때 어머니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음독자살하는 것을 보았고 그로 인하여 모든 게 부정적이고 대인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사랑하여 결혼한 아내와도 심한 부부 싸움이 계속되고, 몸에는 결핵이라는 병까지 얻어 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최악의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아내가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아내가 교회에 지나치게 빠져드는 것 같아 반대를 하고 핍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겸손하고 순종하고 위로하는 자세로 자신을 대해 주는 아내의 달라진 모습 때문에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결핵이 치료되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임동진 목사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도피성이십니다.
    살길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오면 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부르신다는 사실! 오늘 하루도 좋은 날, 행복한 날 되기를 소망합니다.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민수기 35:25)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정착하게되면 레위인들에게 내어준 48 성읍 중에서 6개의 성읍들을 요단 동편과 서편에 각각 두어서 도피성으로 삼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도피성의 목적은 연쇄적인 피의 보복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보수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고엘” 입니다.
    이 말은 ”구속자” 라는 말로도 쓰입니다.
    당시 풍습은 가족이 죽임을 당했으면 다른 가족이 그 피에 대한 보수 (보복)을 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피에 피를 부르는 보수를 하나님은 막고 공정한 재판을 받아 그 공정한 판결대로 일들을 집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실수로 살인한자도 공정한 재판전에 피의 보수를 막기 위해 하나님은 도피성 제도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살인을 한 사람이 도피성에 피해있어도 고의로 사람을 죽였다고 판결이 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끌어내어 사형을 시켜야만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은 고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판 후 고의가 아닌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판결이 내려지면 그 사람은 대 제사장이 죽을때까지 도피성에서 살게해서 죽음을 면케해주었습니다.
    만약 도피성을 떠난다면 혹시 보수자에의해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보수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 제사장이 죽었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게 도피성을 나와 집으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발적인 살인자의 피 값을 대 제사장이 죽음으로 죄에 대한 값을 치루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민수기 35:33).
    이 말은 피 흘린 죄에 대한 심판은 고의적이든 우발적이든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의적이 아닌 실수로 살인한자를 위해 사사로운 보복을 행하지 않도록 도피성 제도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또한 그는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를 대신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1,12).

    도피성 제도는 사사로운 보복을 방지하고 공의롭게 심판을 행하도록 돕는 제도였습니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자는 대 제사장이 죽을때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고의로 살인한 자는 반드시 사형을 집행해야했습니다.
    이는 우발적으로 지은 죄나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실수로 지은 죄와 고의로 지은 죄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시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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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7일(화)

    도피케 하라(신명기 19:3) 

    도피성, 실수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

    본문은 이스라엘 안에 도피성을 둘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담고 있습니다(1~13).
    먼저 세 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지정하는데, 이것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2, 7).
    나중에 요단 동편으로 영토가 확장되면 세 개의 도피성을 더해야 했습니다(9).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각 구역에 하나의 도피성을 두되, 가는 길이 어렵지 않도록 도로를 닦으라고까지 명령하시는 세심함을 볼 수 있습니다(3).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경우와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피할 수 있는 경우는 부지 중에 사람을 죽인 경우이고(4~6),
    피할 수 없는 경우는 고의로 살인한 경우입니다. 후자,
    즉 고의로 살인을 한 경우에는 해당 성읍 장로들이 그를 요구하게 되면 그를 내주어 죽음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합니다(11~13).

    도피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며(10),
    원한이 더욱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지, 죄와 악을 보호하시려는 의도가 결코 아닙니다(13).
    그러함에도 도피성을 악용하려는 자들은 언제나 있었을 것입니다.

    도피성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께 피하는 모든 죄인의 완전한 도피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행하는 것이 죄이며, 부지 중에도 우리 입과 행동에서는 악한 것만 나올 뿐입니다.
    그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으나, 우리에게는 피할 도피성,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단지 그에게 피하는 것 외에 다른 살 길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명령이 더해집니다(14).
    이것은 도둑질과 탐욕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 명령이 함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근본적인 원칙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처음에 각 지파에게 분배하여 주신 것을 받아 자족해야 함을 가르치시는 것이며, 소유에 대한 욕심으로 이웃을 해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심입니다.

    마지막으로 증인의 규정이 제시됩니다(15~21).
    증인은 오늘날과 같이 모든 범죄 사건을 재판하고 다루는데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증인 규정이 도피성의 규정에 이어 나오는 까닭은 도피성에 숨을 수 있는 자격 여부와 관련하여서도 심리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증거의 요건은 한 사람으로서는 성립이 되지 않고 최소 두 세 사람의 증인이어야 합니다(15).
    이유는 분명합니다.
    원한을 품은 사람의 거짓 증거에 의해서 억울한 재판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위증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재판장과 제사장은 사실을 살펴 거짓이 드러난 형제가 행하려고 했던 악을 그대로 그에게 행하도록 판결해야 합니다(16~19).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본이 되게 하여 악이 그쳐지게 해야 할 책임이 재판장과 제사장들에게 있었습니다(20).

    모든 재판은 공의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21).
    그것은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매우 무섭게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 이상의 형벌을 금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더 큰 복수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원한과 복수로 가득해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도피성과 증인의 규정을 통하여 억울한 일이 없게 하심과 실수한 자들을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는 물론 세상에서도 억울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런 경우가 벌어지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피의 복수가 계속되는 고리를 끊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 때 그리스도인은 복수하는 마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거짓을 미워하시고 이웃을 해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위증을 하여 남을 해롭게 하는 경우는 그와 똑같은 대우를 자신이 받게 하심으로써 거짓과 이웃을 해함이 얼마나 나쁜지를 보여주십니다.

    탈리오법칙(lex talionis) 보복의 법칙
    lex : 법
    talio :
    a punishment equal to the injury sustained; retaliation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법칙'을 탈리오 법칙(lex talionis)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혹은 반좌법(反坐法)이라고 하며,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해를 당했을 때 복수하고자 하는 것, 더 나아가서 내가 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정도로 앙갚음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자칫하면 다시 반대편의 복수를 불러오고, 결국 대를 이은 복수의 연쇄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사투(私鬪)가 계속되면 사회가 무질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한 조치가 바로 탈리오 법칙이었다.
    권력 당국이 판단하여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똑같은 정도로만 복수를 허용하고, 다시 그에 대한 반대편의 재복수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제한의 복수가 가해지는 원시 상태보다는 한 단계 발전한 고대국가의 법질서 체제이다.

    탈리오 법칙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이 기원전 1750년경에 제정하여 쐐기문자로 석비에 새긴 함무라비 법전을 들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조문은 잘 알려진 대로 "다른 사람의 눈을 뽑은 자는 똑같이 눈을 뽑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 사례들이 많이 있다.
    "임신한 여자를 때려서 임신부와 태아가 죽으면 가해자의 딸을 사형에 처한다."
    "의사가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으면 의사의 팔을 자른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아들의 두 손을 자른다."
    "집이 무너져서 집주인의 아들이 죽으면 그 집을 지은 건축가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이슬람국가 중에 아직도 샤리아(이슬람법)에 규정된 대로 탈리온 법칙을 적용하는 나라들이 있다.
    최근 이란의 종교법정은 여성의 얼굴에 황산 테러를 가해 눈을 멀게 한 남자에게 똑같은 처벌을 하기로 결정했다.
    흉악한 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 눈에 황산 20방울을 떨어뜨리라는 판결은 너무 가혹한 느낌이 든다.
    다른 나라 다른 종교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는 결국 국가가 다시 한 번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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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6일(월)

    가증한 행위(신명기 18:9)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When you enter the land the LORD your God is giving you, do not learn to imitate the detestable ways of the nations there.

    가증한 행위(the detestable ways)

    가증한 행위를 다른 번역에서 살펴봅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더러운 습관"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발칙한 일"
    새번역 성경에서는 "역겨운 일"

    행위라는 단어를 NIV에서 "ways" 라고 번역합니다.
    웨이즈를 "길" "방법" 이라고 해석하면 "가증한 길" 또는 "가증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가증한 길 또는 가증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10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절.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절.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
    13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타밈 하야)

    완전(8549) - 타밈(tâmîym)  תָּמִים 

    1. 완전한,  2. 온전,  3. 건전한

    어원 / 여성 תְּמִימָה, 855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결한(겔 43:22), 흠 없는(출 12:5, 민 6:14, 겔 46:6), 완전한(창 17:1, 삼하 22:26, 시 101:2), 진실한(삿 9:16), 안전한(삼하22:33), 온전한(욥 12:4).
    [부] 종일토록(수 10:13), 진실로(욥 36:4), 정직히(시 84:11).
    [명] 진실(삿 9:19, 시 15:2), 실상(삼상 14:41).
    구약 성경 / 91회 사용

    * 8553. תִּמְנָה 
    1. 할당된 부분 : 고대 가나안 성읍 '딤나',  2. 창세기 38:12,  3. 여호수아 15:10

    발음  / 팀나(Timnâh)
    어원 / 448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딤나(창 38:12, 수 15:10, 57, 19:43, 대하 28:18).
    구약 성경 / 12회 사용

    * 4487. מָנָה 
    1. 나누어지다,  2. 할당하다,  3. 준비하다

    발음 / 마나(mânâh) 
    관련 성경 / 붙이다(사 65:12), 세다(창 13:16, 왕상 3:8, 대하 5:6), 계수하다(렘 33:13), 조사하다(대상 27:24, 삼하 24:1), 보충하다(왕상20:25), 헤아리다(사 53:12), 작정되다(욥 7:3), 지정하다(단 1:5,10), 예비하다(욘 1:17, 4:6, 7, 8), 맡다(대상 9:29).
    구약 성경 /29회 사용

    하라(1961) - 하야(hâyâh)  הָיָה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관련 성경 / (장막을) 치다(창 13:3), 임하다(창 15:1, 수 22:20), 계시다(창 31:5), (싸우고) 있다(삿 12:2), 섬기다(삼상 2:11), 만나다(삼상6:9), 속하다(삼하 9:9), 따르다(왕상 16:21, 호 3:3), 같다(시 50:21), 두다(출 25:15), 더하다(출 9:3), 성취하다(잠 13:19), 이루다(겔 21:7, 39:8), 지치다(단 8:27), 얻다(슥 8:10).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 3549. כָּהֵן 
    1. 제사장,  2. 스가랴 7:12,

    발음 / 카헨(kâhên)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제사장(스 7:12, 16, 21).
    구약 성경 / 8회 사용

    가증한 행위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자녀들을 몰렉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
    둘째는 무당(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을 용납하는 것

    가증한 행위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마태 5:48).

    아브람이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17: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이주함으로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셨고, 그 민족을 통하여 2000년 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부름은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원 역사를 향한 위대한 출발이었다.

    아브라함은 완성된 인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부족한 인물이었다.
    나이가 75세나 되었는데도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우한 가장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기근을 만난 아브라함은 부름 받은 땅을 버리고 애급으로 피난을 갔고, 피난길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범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그를 완전한 자로 성장시키시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들도 성장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완전한 자로의 성장과정은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성장과 성숙은 우리가 부름 받은 최우선 목적이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주신 말씀이다.
    99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격적 관계가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우리들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어야 한다.
    지나간 먼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만난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다.
    ‘전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다이’인데, 몇 가지 방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가슴’ 혹은 ‘모태’인데, ‘풍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생명에게 모태와 가슴은 풍요의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어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다.

    1. “내 앞에서”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으시면서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러한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요할 때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잘못된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앞에서”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늘 함께 하신다.
    그런 하나님을 제한시키지 말고 늘 그 분 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2. “행하여”

    행하여라는 히브리어는 ‘히트할레크’인데,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이것은 특정한 일을 위하여 바쁘게 다니는 것과는 다르게 여유를 갖고 걷는 산책을 의미하며, 일 중심의 주종관계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인격적 관계를 말한다.
    우리말 성경에서 이 동사는 ‘거닐다’ 혹은 ‘동행하다’로 번역된다.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을 거니는 산책 동반자 관계였다(창 3:8).
    에녹이나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창 5:23, 24; 6:9), 그들 역시 하나님과 산책을 즐기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사명)을 시키시기 전에 먼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산책로로 우리들을 초청하시는 분이다.

    3. “완전하라”

    완전하라는 히브리어는 ‘탐밈’인데, ‘완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함’ 혹은 ‘순수함’을 의미한다.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완전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열정과 순수함이 100% 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린아이 같아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마 19:14)고 하신 것도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순수함에서 완전하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
    ‘당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도르’는 ‘세대’를 의미하는데, 노아의 의인으로서 완전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통하여 우리들은 또 다른 단계로 올라설 수 있고, 그 단계에서 또 다시 온전해지려는 거룩한 노력을 다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고 하면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고 당부하였다.

    성장을 향한 거룩한 노력은 한 단계 높은 성숙을 낳고, 그런 성숙은 또 다른 성장을 향한 거룩한 노력을 낳게 된다.
    그것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의 비결이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 하라!(신명기 18:9-14)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명기 18:13)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빠지게 될 위험이 많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민족들이 행하는 가증한 행위를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위험을 예방하기 위하여 경고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완전 하라’는 말씀은 도덕적으로 정결하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여기 ‘앞에’라는 말은 ‘~과 함께’, ‘~에 의해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거룩해질 수 있는 길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된다는 것을 시사 하는 말씀입니다.

    레위기  20: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과 함께 흠이 없는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본받아서는 안 될 가증한 행위

    신명기 18: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증한’이라는 말은 ‘혐오스러운 것,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뉴스에 보면 중국에서는 시골 장터에서 사람들을 끌기 위해서 ‘나체쇼’를 한다고 합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초상집에서도 ‘나체쇼’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은 끌어 모으고 싶다고 해도 초상집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받아서는 안 될 혐오스러운 일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일

    신명기 12:31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이것은 몰렉 종교의 희생 제사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몰렉에게 자녀를 바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한 바 있습니다.

    레위기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20:2-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모압 왕이 자기 맏아들을 번제로 바친 사건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열왕기하 3:26-27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 찬 군사 칠백을 거느리고 충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능히 못하고.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아하스가 왕이 되었을 때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열왕기하 16:3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므낫세 왕의 치세 때도 이런 가증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32:35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케 한 것은 나의 명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이것은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경고한 말씀입니다. 명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복술자(卜術者)

    ‘제비뽑다’, ‘점치다’라는 뜻의 ‘카삼’이란 말에서 유래한 말로 곧 점을 치거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하는 자를 말합니다.
    아랍인들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이와 같은 방법으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떨어진 제비의 결과를 보고 그것을 신의 뜻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행위를 금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26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모압 왕 발락이 사람들을 보내어서 오게 한 발람선지자는 바로 복술을 행하는 이방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어떤 복술로도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22:7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로 그에게 고하매

    민수기 23:23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찐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셋째, 길흉(吉凶)을 말하는 자

    원어의 뜻은 ‘구름을 관측하는 자’, ‘징조를 살피는 자’를 가리킵니다.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고대 사회에서 흔하였고, 짐승의 내장, 구름의 색 그리고 그의 눈망울 같은 것으로 점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신녀(神女)’가 그와 같은 일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넷째, 요술(妖術)하는 자

    여러 가지 마술을 부려 사람을 현옥시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특히 잔 위의 물의 색을 보고 점을 치는 자입니다.

    창세기 44:5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데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창세기 44:1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 잘 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다섯째, 무당(巫堂)

    ‘속삭이다’, ‘호리다’는 뜻을 가진 ‘카솨프’라는 단어에서 온 말로 주문을 외우며 길흉을 말하는 점쟁이를 말합니다.
    특히 이들은 어떤 비방에 의해서 병을 고친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말라기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대하 33:6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여섯째, 진언자(嗔言者)

    주문이나 어떤 주술의 성격을 띤 끈 같은 것을 사용하여 소원 성취를 이루려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일은 로마 사회에서도 유행한 것입니다.

    일곱째, 신접자(神接者)

    죽은 사람의 혼이 신접하는 자 안에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그가 그와 접촉하여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영매를 말합니다.

    레위기 20:27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사무엘상 28:7-8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쌔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여덟째, 박수

    남자 무당을 가리킵니다.

    아홉째, 초혼자(招魂者)

    죽은 자를 불러내어 미래의 일을 물어 보는 사람으로 신접자와 유사한 사람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나님은 혐오스럽게 생각하시고 가증히 여겨실까요?
    가나안 종교의 행위는 순수한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에 해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아내기 위하여 각종 점치는 것이나 복술, 신접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가증히 여기시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래는 내 날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비밀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고 그분의 계획에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스려 인간 스스로가 그러한 비밀을 밝혀내려고 한 것이 복술입니다.

    더욱이 해나 달, 별들과 자연물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창조해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에 스스로가 미혹당하고 또한 그것들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행위가 곧 사술 행위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죽은 자의 영혼은 인간 세계와 접촉이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눅 16:19-31) 교령술사들은 그들 혼과 교신(交信)한다고 주장하니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방인들의 사술 행위는 인간들에게 건전한 정신과 과학적 사고를 고취시키기는 커녕 저속한 도덕의식 및 맹목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근절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사술행위는 오늘 우리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금해야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가증한 일을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

    첫째,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기 때문

    신명기 18:12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가증하다’라는 말은 ‘타아브’라는 말인데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심히 꺼리다’, ‘강력하게 거절하다’, ‘구역질 낼 정도로 혐오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정도로 싫어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만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우리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절대로 혼자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둘째, 가나안 백성들이 가증한 일 때문에 쫓겨났기 때문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은 겨우 매장지 정도 얻을 뿐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15:13- 1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하나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땅 백성을 쫓아내시는 무자비한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진멸당할 만큼 가증스러운 죄악에 빠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그들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레위기 18:24-25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 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의 행위를 가증한 것으로 단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서 쫓겨난 이유가 바로 이런 가증한 행위 때문이라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1.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야 합니다.
    2. 그와 같은 자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가증한 행위를 더더욱 본받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들을 본받는 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흠이 없는 완전한 삶을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신명기 18:15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선지자(5030) 나비(nâbîyʼ) נָבִיא

    1. 선지자,  2. 선지자의 직분을 하도록 뽑힌 자들,  3. בְּנֵי הנְּבִאִי

    발음 / 나비(nâbîyʼ)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선지자(창 20:7, 신 18:22, 왕상 18:4), 대언자(출 7:1), 예언자(렘 28:9), 예언(단 9:24), 예언하는 자(겔 13:2,3).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명기 18:13)

     - 성령님, 완전하라고 하셨는데, 완전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고 흠 없는 자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완전하라고 명령하신 이유와 뜻은 무엇인가요?

    -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의 말씀, 특별히 4절-5절의 말씀을 보라.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사랑으로 예정하사)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 곧 완전함에 대하여 나와 있군요!

    - 네가 완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언젠가 네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분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자로 서게 될 날이 올 것인데, 그날 너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야 할 것이다.
    그분의 얼굴 앞에 부끄럼 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 받은 자로서 당당히 서야 할 것인데, 지금 네 삶의 과정은 그날을 향한 연단의 시간들이다.
     
    너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피를 힘입어 깨끗함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그날 주 예수님께서 “저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자녀들을 보십시오”(히2:13) 하며 당당히 자신의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 소개할 것인데, 과연 그때 너 역시 당당할 수 았겠느냐?

    -......그렇지만 제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을 내가 믿음으로 그 피를 힘입어 나아가는 것 아닙니까?
     
    - 7절을 읽어 보거라.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단절되었기 때문인데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셨기에 그 피가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 아닌가요?

    - 물론이다. 피에 대해서는 레위기 17장 11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는 게 좋겠다.

    -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여기 말씀에도 분명히 피가 죄를 속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피가 죄를 속한다는 것인지, 이 사실을 분명히 믿지만,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 “For the life of the flesh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upon the altar to make an atonement for your souls: for it is the blood that maketh an atonement for the soul.”(KJV)
     
    -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과 같은 의미로, 히브리어로 네페쉬(nefesh)를 말한다.
    nefesh, 곧 혼이며 생명이며 생령을 말하는 것이다.
    nefesh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남에게 의존하는 생명을 뜻하는 것임을 네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은 하나님의 숨에 그 생명이 의존돼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자,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 어느 누구나 혹은 무엇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이 우주 안에 누가 있느냐?

    -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의 근원이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은 하나님의 숨(호흡)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시냐?

    -  예수님은 어떠시다니요?

    - 예수님은 사람과 똑같은 육체로 오시지 않았느냐?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이자 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생명이 스스로 말미암은 것이냐, 아니면 누군가의 숨(호흡)에 의존하는 것이냐?

    - 예수님은 당연히 스스로 생명을 갖고 계십니다.

    - 육체의 생명,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호흡을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살아 있는 생령이 되지 않았느냐? 생령, 다시 말해 생명이 피 안에(in the blood) 있다고 분명히 나와 있지 않느냐?
    생령과 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마치 중력의 법칙이 모든 물질계의 법칙으로서 중량을 갖는 것이라면 물질이든 생명체이든 중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듯이, 생령(생명)과 피는 중력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영과 혼과 육의 유기적인 결합체인데,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이 부어 주신 영과 진흙이 하나가 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되었는데, 그 존재가 아담이며 사람이며 nefesh이다. 
      그런데 이 생명, 곧 nefesh가 피 안에 (녹아)있는 것이다. 피가 온 몸을 돌고 흐르므로 사람은 존재하며 호흡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말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피 안에 있는 생명(nefesh) 역시 피를 타고 온 몸을 돌고 흐르는 것이다. 만일 피가 멈추면 사람의 육체의 생명은 끝나게 되고 피 안에 있는 생명(nefesh) 역시 멈추게 되는 것이다.

    - 그렇군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피가 멈추고, 혼이 빠져 나간다고 하는 것이군요? 그 혼(영)은 죽은 피 안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 오직 스스로 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사람이셨기에 그분 역시 피를 가진 존재였으며, 그분의 피 안에는 그분의 생명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단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쏟아 부으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피와 함께 쏟아 부으심으로 온 우주 공간에 자신의 생명을 방출한 것이다.
    이 피는 사람의 피이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피이기에 피조물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지금도 이 예수님의 피는 온 우주 공간을 물들여 충만히 채워져 있어서 그 누구라도 이 피를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다.
     
    - 아, 그런 심오한 뜻이......

    - 자,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너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심이 왜 너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까 보았던 에베소서 1장 7절의 말씀, 레위기 17장 11절 말씀도 그렇고, 또 로마서 3장 25절에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다”(KJV)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신구약 전체 수많은 말씀들이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고 약속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약속하시기 때문에 그걸 믿는 것입니다.
     
    죄는 네가 지었는데, 저주와 심판은 예수님이 받지 않았느냐?
       - 네, 맞습니다.

    -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죽음이 너의 죽음이 될 수 있단 말이냐?
       - 네가 죽어야 네가 죽는 것이 아니더냐?

    -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간주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냐?

    내가 어떻게 내 죄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내 죄에 대해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 피는 이미 죄로 오염돼 있어서 내 피 안에는 죄가 (녹아)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기 때문에(롬5:12), 내 죄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 죄에 대해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내 죄에 대해 내가 책임진다는 것은 곧 심판 받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죄에 대해 책임질 수 없고 죄를 해결할 능력도 없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죽으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값없이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 삼아주시는 것 아닙니까?

    - 그렇지 않다.
         - 그렇지 않다뇨? 왜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십니까?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민 23:19)

    - 네가 반드시 네 죄 값을 물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요?

    -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무엇이더냐?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잘들 외우더구나.
    그러나 이 말씀대로 자기 죄에 대해 책임지고 죽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어렵구나.
    예수님의 죽으심이 너의 죽음으로 여겨져 그대로 경험되지 않는 이상 너는 네 죄에 대해 네 스스로 책임져야 하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 몸이 벌거벗겨져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저주로 몸부림치며 죽어갈 때에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너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너에게 무효가 되느니라. 그 고통과 감당할 수 없는 저주의 몸부림이 너의 것이 되지 않았다면 그의 죽으심은 아무런 효력이 없느니라.
    너는 정녕 죽었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죽어갈 때에 너도 그와 함께 죽었느냐? 그분 혼자만 죽지는 않았더냐? 그분이 온 우주를 다 주어도 해결할 수 없는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놓아 고통 가운데 죽어갈 때에 너는 편안하게 앉아서 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을 앵무새처럼 읊조리고 있지는 않았더냐?
    너는 결코 죽지 않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너는 네 죄에 대해 네 스스로 책임지고 죽어야 하느니라.

       - 제가 죽지 않았다뇨?

    -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느니라. 죽는 시늉만을 했을 뿐, 결단코 죽은 것이 아니니라.
    그들은 언제나 죽기 직전에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렸느니라. 십자가를 지고 그 위에 매달리고 조롱과 고통을 맛보기도 하지만, 결코 완전히 죽지는 않았느니라. 언제나 완전한 죽음 앞에서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렸느니라.
    완전히 죽지 않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고 부활도 영생도 없느니라. 완전히 죽지 않은 자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느니라. 죽어야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죽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단 말이더냐?
    너는 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아들입니다.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무엇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느냐?

    - ........저는 예수님이 저의 죄를 대신해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 모든 죄가 사함 받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영생을 선물로 받는 것임을, 말씀을 믿음으로 제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그것 말고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몰아붙이지는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저는 제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때에 그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을 하나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내 안에 성령님 계시고, 또 성령께서 그것을 믿도록 저를 이끌지 않으셨던가요?

    - 나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하기를 원한다.

    - 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군요.
    그래요. 하나님 앞에서 제가 완전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명기 18장 13절의 그 말씀이 저를 계속 두드립니다.

    - 예수로 네가 사는 것이다.

    - 예수님 내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내가 성령으로 더불어 살고 있지 않습니까?

    - 너는 아직 죽지 않은 죽음이 있다.

    - 웬 또 말장난 같은 말들을 하십니까?

    -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이 십자가 위에서 중단되었느니라. 너를 위해서.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너에게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의 중단된 생명이 이제 네 안에서 계속 이어져야 하느니라.
    너의 삶은 이제 너를 살리기 위해 너로 말미암아 중단된 그분의 생명을 네가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너는 구원 받은 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도 아니니라.
      생각해 보거라.
    아들의 피를 갖고 나아오는 자를 어떻게 용서하여 그를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 피의 주인인 아들, 예수의 생명이 중단되었는데, 그 피를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통해 중단된 아들의 생명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를 용서할 수 있으며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이더냐?
    대신 죽은 아들이 원하는 것 또한 바로 이것이 아니겠으며, 이 때문에 그 아들이 대신 죽은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란 말인가요?
    예수님이 사셔야 할, 중단된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란 말인가요?

    네가 아직 죽지 못한 죽음이 있음을 깨달아 돌이킴으로, 아들 예수의 생명이 네 안에 충만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군요. 요즘 제가 이런저런 책망을 많이 듣습니다.
    제 본심과는 다르게 보는 것도 있고, 또 저 역시 미련하여 어리석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어서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 책망을 들을 때에 저를 사랑하시기에 주는 것임을 알아 감사함으로 받기는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막연한 감사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자로 세우시기 위해, 제게 부족한 모습들을 자꾸 들춰내심으로 그 부분에서 제가 완전히 죽기를 바라시는 것이군요. 제가 완전히 죽어야 완전한 생명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나저나 올해는 제가 너무 힘이 듭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제 안의 부족하고 모난 모습들이 너무 많이 들춰지고, 그래서 깨지고,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 어린 자에게는 젖을 물리지만 장성한 자에게는 딱딱한 음식을 먹이는 법이다.
    구원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다른 이에게 젖을 물리는 자로 네가 세워져야 할 것이다.

    - 그 말을 들으니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네요. 자극도 되고...... 그래도 정신을 차릴 정도는 해주세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잖아요? 여기저기서 저를 때려대니 저도 참 힘이 듭니다.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책망을 달게 받으라.
    책망을 사랑하라.
    좋은 것만을 네게 먹여주는 자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자이니라.
    책망을 사랑하는 자가 그를 사랑하는 자이니라.
    네가 책망을 사랑해 달게 받아 먹을 때에 네가 책망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를 위하는 것임을 네 스스로 입증하게 될 것이다.
    단순한 협력이나 동의, 도움을 주는 정도로는 결코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미 네 자신이 알고 있느니라.

    모든 것이 저를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이끄시기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임을 압니다.
    저를 사랑하시기에 저의 부족하고 모난 모습들이 자꾸 드러나게 하시는 것임을 제가 압니다.
    부족한 것은 채우고 모난 것은 깎아내야지요.
    그럼요.
    더 부서지고 깨어지고 깎아지지 않으면 절대로 제가 죽을 수 없으니까요.

    아, 십자가의 길이라는 게 달리 있는 게 아니군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들답게 살도록 계속해서 연단의 회초리를 맞아야 하는군요. 아버지 나라에 갈 때까지......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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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안 땅의 여신들

    아세라(Asherah), 아스다롯(Astaroth), 아낫(Anat), 아테나(Athena)

    아세라(아스다롯)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을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주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 21:33).

    <에셀>은 ‘살아있는 나무들로 조성된 작은 규모의 숲’을 의미한다.

    에셀의 복수형은 아세라이다.

    성경에서 최초로 바알, 아세라, 아스타롯 등 우상 숭배 사건이 재판관기 2:11,13; 3:7 등에 나타난다.
    아세라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는 ‘산당’같은 곳이다.

    히브리어의 ‘아세라’가 영어에서는 ‘grove’라고 번역 되는데, 그것은 어떤 목상이나 형상이 아니라 우상이 안치되어 있는 장소를 말하기 때문이다(신 16:21).

    아세라로 조성된 나무들은 신성한 나무들로 여겨졌다.
    배교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러한 아세라들은 ‘산당들’(왕상 3:2) 및 아스타롯(판 2:13)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었다(왕하 17:16,17).

    페니키아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신으로서 섬긴 여신이 있었는데, 이 여신상은 가지를 잘라낸 나무기둥(출 34:13)으로서, 바알의 제단곁에 세워졌다(판 3:7, 신 16:21).
    ‘아세라’안에 놓여진 우상은 바빌론에서는 이쉬타르(Ishtar)로,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여신으로, 로마에서는 비너스여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오늘날 로마 카톨릭이 푸른 나무로 작은 숲과 같은 일종의 정원을 가꾸어 놓고 그 안에 마리아 상을 안치해 두는데, 이처럼 우상을 섬기기 위해 살아 있는 나무들로 조성된 것이 아세라이며, 이 아세라 역시 신성시하여 섬김의 대상이 되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와 특히 아합왕 시대에는 페니키아 출신 엣바알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바알을 섬기고 경배 하였으며,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에 바알을 위하여 한 제단을 쌓고, 또 아세라를 만들어서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왕상 16:29-33; 18:19).

    당시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들과 아세라 숭배자 제사장들을 키손 시내에서 모두 죽여버렸다(왕상 18:19-40).
    이러한 극심한 바알 숭배와 아세라 숭배의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극심한 분노를 발하게 하였으며, 북왕국이 앗시리아에 멸망 당하여 포로가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왕하 17:7-23).

    아브라함이 창세기 21:33에서 에셀을 심은 것을 잘못 이해하여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우상 숭배를 했다.
    아브라함이 ‘에셀’을 심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으나, 이것이 훗날에 이스라엘이 배교하는 원인이 되었다. 

    노아는 ‘산당’을 지은 장본인 이었고, 그의 본을 아브라함도 따랐다(창 8:20; 12:8).
    이 두 가지 실행은 노아와 아브라함 당시에는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당’과 ‘아세라’는 이스라엘을 배교로 이끈 결정적인 우상 숭배의 도구들이었다(왕상 11:7; 12:31; 14:23, 왕하 13:6).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섬김이 왜곡되면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아스다롯(황금상, 주전 1600년경)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저녁별의 여신이다(렘 44:19) 아세라, 이슈타르 등으로 불리운다.
    가나안 선주민들은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농경신들을 총칭해 바알 Baal(토지의 소유자)이라고 불렀다.
    가나안 선주민들의 신 위계는, 상위의 지배자 El과 그 아래 하늘의 바알 Baal of Heaven, 그리고 엘의 배우자 아쉬라트 Ashirat(히브리인들은 아쉐라 Asherah라고 부름)였다.

    이 바알신들은 농사의 주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농사의 각 단계는 바알의 출생, 성장, 죽음으로 묘사되고, 이 때마다 제의를 수행했다.
    주요한 제의는 희생제의로, 증여의 희생제의 gift-sacrifice(수확 감사)와 친교의 희생제의 communion-sacrifice(신과 인간의 유대 강화)가 있었다.
    중요한 축제는 봄, 초여름, 가을에 있었는데, 풍요의 여신 아스타르테 Astarte(히브리인은 아슈토레트, 바빌로니아인은 이쉬타르)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아스타르테 숭배의식과 관련된 성창관습 temple-prostitution이 있었다.
    소수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신앙과 관습에 빠져들었고, 엄격한 유일신론자들은 이를 배교로 간주했다.
    야웨 신앙을 엄격히 지킨 자들은 산비탈에서 반유목생활을 하고 있어서, 농업을 주로 하는 사람들과 다른 상황에 있었다

     

    아스다롯(주전7세기)

     

    칼타고 타닛의 아스다롯

     


    칼타고 타닛의 아스다롯

     


    아스다롯


    아스다롯(시리아 주전3000년경)

     


    아스다롯

     


    아세라(우가렛), 풍요와 다산의 신

    가나안 신화에서 최고의 신은 신이며 그는 부방에 거처하며 신들의 총회의 의장이다.
    그의 아내는 아세라 여신이다. 성경의 에셀나무(창 21:33, 삿 6:25)는 아세라 여신을 상징하는 聖樹로 짐작된다.
    아세라는 그 나무가지의 무성함 같이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던 신이었다.
    보통 아세라를 우상이나 형상의 한 종류라고 알고 있으나, 사실 이것은 조각된 하나의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
    성경에서 아세라는 "형상"과 분리해서 언급된다(왕상 14:23, 왕하 17:10,16; 18:4).
    "아세라"는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인데, 영어 <킹제임스성경>에는 이것이 "grove"라고 번역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의 "숲" 같은 개념이다.
    조그맣게 수풀을 꾸며 숲처럼 만들고 그 안에다가 나름대로의 형상을 만들어 넣은 것, 이것이 아세라이다.

    열왕기상 15:13에는 유다 왕 아사의 어머니 마아카가 아세라 "안에" 우상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세라는 그 안에 형상을 담고 있는 하나의 세트이다.
    이 아세라는 산당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배도로 치달았던 당시에 하나님을 섬기던 소수의 유대인 남는 자들에게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이었다.

     

    아세라(쿠드수, 레세프 여신)

     

    이슈타르(바벨론)

    이슈타르(이쉬타르)는 고대 바벨론의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다.
    가나안에서는 아스다롯, 아세라 등으로 변촌 되었다.
    아누의 딸이라고 하고 신(Sin)의 딸이라고도 한다.
    이쉬타르는 스스로 ‘아침의 여신이면서 저녁의 여신’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앗시리아-바빌로니아의 수많은 신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이다.
    이쉬타르는 금성을 신격화한 존재로서 후대 그리스 로마의 비너스, 아프로디테와도 무관하지 않은 여신이다.
    이쉬타르는 상당히 복잡한 신이어서, 남녀양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바빌로니아-앗시리아 인들에게는 여신이지만 아랍 인들은 아타르라는 이름으로 남신으로 숭배하기도 한다.
    또한 이쉬타르가 신(Sin)의 딸이라고 할 때는 전쟁의 여신이 되지만, 아누의 딸이라고 할 때는 사랑의 여신이 되기도 한다.
    이쉬타르는 사랑의 욕망을 퍼트리는 신이기도 하다.
    이런 연관성에서 고대의 이쉬타르 제사에는 이른바 "성스러운 매춘"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이쉬타르의 사랑에 관한 신화를 보면 이쉬타르 여신이 젊었을 때 수확의 신 탐무즈를 사랑했는데, 길가메쉬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사랑은 탐무즈의 죽음을 초래했다.
    이쉬타르는 그것을 무척 슬퍼하고 애인에게 비탄의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의 사랑을 연상시킨다.
    이쉬타르는 탐무즈를 찾기 위해, 그를 살려내 끔찍한 저승에서 데리고 나오기 위해, 지옥에 내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땅에 일단 들어간 자는 다시 나올 수 없는 집’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쉬타르는 지옥의 문을 열게 하고 하나씩 하나씩 몸에 지닌 장신구를 빼앗겨 가며 일곱 개의 성문을 의연히 뚫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머리 위의 큰 관, 귀걸이, 목걸이, 가슴의 장식, 탄생석을 박은 허리띠, 손목과 발목의 장식, 끝으로 그녀가 입은 정결의 의상,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쉬타르는 지옥의 여왕 에레쉬키갈 앞에 다다라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에레쉬키갈은 자기 심부름꾼인 남타르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로 하여금 이쉬타르를 궁정에 유폐시켜 60가지의 병에 걸리게 했다. 이렇게 해서 이쉬타르는 저승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 사실이 지상에서는 고뇌요, 하늘에서도 무한한 슬픔이 되었다.
    이쉬타르의 아버지 신(Sin)은 에아에게 애원했다.
    에아는 이쉬타르를 구하기 위해 아수슈나미르를 만들어 마술의 주문을 가르쳐 '돌아오지 않는 땅'으로 보냈다.
    그 주문은 에레쉬키갈의 의지를 구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옥의 여왕은 이쉬타르를 석방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슈타르(바벨론, 루브르)

     


    이슈타르(바벨론, 주전 800년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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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4일(토)

    가증한 일(신명기 17:4)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찌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가증한 일(this detestable thing) 혐오스러운 것

    * 천자(擅恣) : 제멋대로하여 꺼림이 없음(17:12, 13) - 방자히(신 18:20, 22)
       멋대로 할 천(擅), 마음대로 자(恣)
       NASB. KJV. presumptuously / 주제넘게
       NIV. contempt / 경멸하다

    신명기 18: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신명기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방자(放恣) : 어려워하거나 삼가는 태도(態度)가 없이 건방짐.
    놓을 방(放), 마음대로 자(恣)


    가증한 것(17:1)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찌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가증한 것(8441) תּוֹעֵבַה  

    1. 질색,  2. 창세기 43:32,  3. 열왕기상 14:24

    발음 / 토에바(tôwʽêbâh) 
    어원 / 85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가증히 여김(창 46:34), 꺼리는 일(신 12:31), 싫어하는 바[것], 미워함(출 8:26, 잠 6:16, 20:10), 싫어함(잠 13:19), 부정(창43:32), 미움(잠 24:9, 29:27), 미운 물건(렘 16:18).
    [형] 가증한(레 18:30, 겔 6:11, 말 2:11).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 8581. 타아브( tâʽab) תָּעַב

    1. 몹시 싫어하다,  2. 몹시 싫어하게 되다,  3. 피엘형  תִּעֵב

    발음 / 타아브(tâʽab) 
    관련 성경 / 마땅치 않게 여기다(대상 21:6), 가증하다(신 7:26, 욥 15:16, 겔 16:52), 싫어하다(욥 9:31,시 5:6, 암 5:10), 미워하다(욥 19:19, 신 23:7, 미 3:9), 미움을 받다(사 49:7).
    구약 성경 / 22회 사용
    신명기 13: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우상숭배 또는 신성모독과 같은 행위를 가증하다고 합니다.











    신명기 17장 / 정치, 사회를 위한 규례들

    전장에 이어서 모세는 본장에서도 우상 숭배를 금지하며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법과 재판에 관한 규례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에 생겨나게 될 왕정 제도에 대해서 예언적인 규례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왕위에 세울 것과 왕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할 규례에 관한 계속된 언급 중에서 본장은 재판 제도와 왕 제도에 관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께 흠 없는 제물을 드릴 것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죽일 것에 대한 규례가 언급된 다음(1-7절), 재판에 관한 규례가 나타난다.
    재판은 레위 제사장이나 당시 재판장이 행하되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행해야 하며 소송 당사자들은 재판 결과에 반드시 승복해야 한다(8-13절).
    한편 왕이 될 자의 자격과 의무에 대한 규례가 나타나는데 왕은 동족 중에서 정하되 그는 축재와 축첩을 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스려야 했다(14-20절).

    1.  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 것.
    2-7. 우상 숭배자를 쳐죽일 것.
    8-13. 곤란한 사건은 제사장과 재판장에게로 가지고 가서 재판을 받고, 그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할 것.
    14-15. 장래 왕을 세울 때의 주의 사항.
    16-20. 왕으로서 택함받은 자의 주의 사항.

    재판에 관한 규례

    1. 중앙 재판소 제도를 지시함
    두 사람 이상의 증인에 의해 우상 숭배자를 처형하라는 규례를 명령한 후 모세는 재판에 관한 제도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등의 부장 제도를 제정하여 그들이 백성들간의 대소사를 판결해 줌으로써, 해당 지파나 지역에서 거의 모든 송사가 판결났습니다. 그러나 사안이 복잡하거나 판결이 어려운 사건에 대해서는 중앙에 세워진 제사장과 재판장으로 구성된 재판소에서 판결받도록 했습니다. 이 제도는 후에 산헤드진 공의 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중앙 재판소를 통해 적어도 이스라엘 사회는 2 심제의 복수판결 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a. 족장 시대의 재판은 족장이 행함(창38:24)
    b. 노로 귀환 후에 재판 제도가 부활됨(스7:25)

    2. 판결을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한 처벌

    중앙재판소에서 내려진 판결에 대해서도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를 죽여서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제사장과 재판장이 율법에 근거해 내린 그 판결은 하나님의 권위로서 판결된 최종적 판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판결에 불복종한다면 그것은 당시의 재판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도전과 같은 것이므로 죽음의 형벌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a. 사사 시대에는 사사가 재판함(삿4:5)
    b. 재판에 대한 법규(신16:18-20)

    3. 왕정 제도에 관한 규례

    1) 택하신 자를 왕위에 올릴 것
    본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왕이 필요 없는 정치 체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주시고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하여 그 정치 체제를 유지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다른 나라와 같은 군주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제도를 적극적이고 기쁜 뜻으로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참조, 삼상8: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것을 아셨고 왕정 제도가 이스라엘의 정치 제도가 될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모세를 통하여 그 상황에 대하여 예언적인 규례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왕을 세울 때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여야만 했습니다. 타국인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a. 왕위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단5:18)
    b. 공의로 보좌가 면고하게 됨(잠16:12)

     
    왕이 지켜야 할 규례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반드시 지켜야만 할 3대 규례가 있었습니다.

    첫째, 말(馬)을 많이 두지 말라

    당시 말의 주산지는 애굽이었습니다.
    때문에 말을 많이 두려면 애굽과 교류해야 하고, 그러면 애굽의 우상들이 유입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에게 말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말은 비유적으로 군사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보다 군대의 힘을 의존하지 말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둘째,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

    이것 역시 이웃 나라와의 정략 결혼으로 인해 그 나라에서 섬기는 우상이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고, 왕이 향락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금지 사항이었습니다.

    셋째, 은금을 많이 쌓아 두지 말라 

    이는 왕이 자신의 부를 추구해서는 백성들의 복지를 생각 할 수 없고, 하나님보다 부의 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멀어져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의 금지 사항 외에 모세는 왕에게 한 가지 중요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그것을 읽으며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왕이 말씀에 따라 살 때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른길로 잘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왕은 공의로 다스려야 한다(삼하 23:3-4)
    2. 재판도 왕의 업무(삼하 15:2)
    3. 왕을 폐하고 세우심은 하나님이심(단 2:2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선민으로 구성된 독특한 사회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본장은 하나님께 바른 경배를 드리고, 우상 숭배를 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또한 재판의 판결과 왕의 제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해서 행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정체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택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생활화하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재판장과 지도자를 세우라(16:18~17:13)

    올바른 재판과 시행을 해야 하는 책임을 짐으로써 언약을 집행하는 지도자들입니다.
    판단은 오직 공의를 따라서 해야 합니다(16:18).
    굽게 판단하거나 사람을 외모로 보거나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16:19).
    이렇게 재판장과 지도자들이 바른 판단과 시행을 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16:20).

    만일 우상을 섬겨 언약을 어기고 악행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세히 살피고 그 죄악상이 확인되면 성문으로 그 사람을 끌어내고 두 세 사람의 증거로 돌로 쳐 죽이되, 증인이 먼저 돌로 쳐야 합니다(2~7).
    또 분쟁이나 다툼이 일어날 때에는 판결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여호와의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과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을 받게 해야 합니다.
    백성은 판결에 순종해야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엄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중에서 이런 무법과 불순종의 악을 제거해야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율법을 두려워하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8~12).

    왕의 경우(17:14~20)

    왕은 언약의 보호자라 할 수 있는 지도자입니다.
    왕을 세우는 문제는 재판장을 세우라는 명령과 달리,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일이 나중에 있게 되면 그들의 말을 따라 왕을 세우라는 허용적인 명령입니다.
    다만 왕을 세우는 기준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어야 하고,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뽑아야 합니다(15).

    하나님께 세움을 받은 왕이 주의해야 할 명령들을 경고로 주십니다(16~17).
    세 가지는 부정적 명령이고, 한 가지는 적극적 명령입니다.

    부정적 명령의 첫째는 왕은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애굽은 말로 유명했는데, 이것은 국방력에 의지하여 통치하는 대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통치하라는 말씀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주권과 도우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명령은 하나님의 약속—“내가 돌봐 줄 것이다”—을 포함하고,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었습니다.

    두 번째 명령은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인들로 인하여 신앙과 생각이 미혹될 수 있을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참된 즐거움과 기쁨은 아내를 많이 두는데서 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왕은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라고 하십니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쌓게 된다면, 그는 결코 선한 통치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적극적 명령은 율법책을 늘 옆에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말과 규례를 지키라고 합니다(18~19).
    그렇게 하면 그의 왕위가 장구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만하지 않게 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20절).

    이스라엘은 재판장을 통하여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백성들을 외모로 판단하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공의가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재판관과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적용하여 재판을 하고 그것을 시행해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왕은 조건적으로 허용된 지위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은 언제나 하나님이심을 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권력자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당신의 기쁘신 뜻과 계획으로 섭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 권력자나 지도자는 다만 자신은 청지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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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3일(금)

    택하신 곳(신명기 16:2)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우양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되.

    택하신 곳(the place the LORD will choose)

    예배는 주님을 위한 축제의 날입니다.

    신명기 16장 - 택하신 곳에서 지키는 절기

    삼대 절기에 관한 규정(16:1~17)

    일상의 분주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결속과 하나됨을 경축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이런 절기(축제)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일과 절기들도 이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주신 삼대절기들의 특징(출 12, 23, 34, 레 23, 민 9)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6, 7, 11, 15)에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남자는 1년에 세 차례 이 절기들에 하나님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하나님께 오되 빈손으로 오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힘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16~17).

    유월절(1~8)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심으로 인한 해방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유월절은7일간의 무교절과 연결되는데, 이 기간에 그들은 무교병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유교병이 부풀기를 기다릴 만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고생의 떡입니다.
    또 누룩과 고기를 제하라(4)는 명령은 누룩과 고기가 한낮의 심한 더위에 부패하기 쉬웠기 때문에 예방책으로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룩은 영적인 의미로 백성의 부패와 죄를 상징합니다.

    누룩의 장단점

    1. 천국 비유에서는 좋은 누룩으로 비유(누가복음 13: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마태복음 16:11-12)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면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떡과 잔을 기념하는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는 신약 시대의 유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톰 라이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함으로서,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말한다.
    출애굽이 완전한 구속의 사건이었다면,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되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념하는 유월절은 완전한 구속이 아니기에 지속적인 제사가 필요하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을 위한 그림자로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으며, 그 가운데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도 구속의 은혜의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은 이스라엘의 포로 상태에서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용서를 받고 이 땅에 새롭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새롭게 세우신 하나님 나라는 바벨론 유수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확장된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의식으로는 언약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안에 머무를 수가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단번에 드려짐으로서,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념하는 유월절이 완성된 형태라면 유월절 제사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읺을 것이다.
    유월절 제사는 출애굽에 대한 기념이면서 동시에 실체로 오신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표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성전에서의 제사 모두는 유월절 제사가 재현되는 것이며,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문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실체이며, 이스라엘이 행하는 제사는 구원을 유지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단지 희생적 본을 보여주신 분에 불과하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위대함은,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증거를 가지고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의한 속죄 사역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부활의 의미까지 왜곡시키고있다는 것이다.

    칠칠절(9~12)

    칠칠절은 오순절, 초실절, 맥추절과 같이 다양한 이름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관대함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유월절 지난 안식일에서 오십일 후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불렸고, 이때는 보리추수가 시작되고(‘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9절) 밀 추수가 끝나기까지의 기간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로 이 오순절을 기념하였습니다.
    이 절기에는 자녀, 노비,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의 은혜와 복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초막절, 수장절(13~15)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절기는 오늘날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풍성한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칠칠절과 마찬가지로 성중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축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이 세 절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으로 예물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보여야 했습니다.

    재판관을 세우는 것에 관한 규례(18~20)

    이 본문은 사실 16:18~18:22절에 걸쳐 지도자와 리더십에 대한 큰 본문에 포함됩니다.
    본문은 네 종류의 지도자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들 지도자들은 언약 공동체에서 각각 독특한 역할을 부여 받았습니다.
    네 종류의 지도자는 각각 언약의 집행자인 재판관(16:18~17:13), 언약의 보호자인 왕(17:14~20), 언약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제사장(18:1~14), 선지자들입니다(18:15~22).

    하나님께서는 이 절기들을 지키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찮게 하거나 그들에게서 무엇을 받아내시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들의 행복을 위한 명령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5가지 제사와 7가지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5가지 제사와 7가지 절기의 의미들을 기억하는 것은 신앙에 매우 큰 유익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주일의 의미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하심(무교절)
    하나님의 관대하심(칠칠절)
    하나님의 신실하심(수장절)


    혹시 우리는 예배의 날, 주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은 우리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며, 그 어떤 날보다 행복한 감사의 날입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예일대학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르프(Nicholas Wolterstorff)는 인간을 “예배하는 존재”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로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즉 생각하는 존재요,
    호모 파베르 도구를 만들어 일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인간내면의 영적 진공은 오직 예배를 통하여 채워지고 하나님의 임재에 의하여 가장 큰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한 사람의 간구가 예배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응답되는 것은 역사 이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하고, 충만한, 가장 즐겁고 최고로 행복한 궁극적 경험이었습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즐거움도 그것에 필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화란의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가 말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은 축제하는 인간이요, 춤추는 인간이요, 찬양하는 인간이요, 교제하는 인간이며 연합하는 인간입니다.

    예배의 대표적 인물은 젊을 때부터 찬양에 능하고 수금을 타면서 사울에 임한 사악한 악령을 몰아낸 다윗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을 모셔드리는 제의에서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열정을 다하여 노래하면서 춤을 춘 예배자입니다.
    그는 예배를 축제로 드린 인물입니다.
    사회참여의 영성을 주창하는 논저의 결론에서 발견하는 기독교인의 존재양식의 독특성이 예배라는 주장은 매우 신선한 지적이기에 옮겨본다.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시켜 주는 것, 곧 이성적∙ 영적인 속성을 비롯한 그 모든 특징들은 하나님을 송축하는 능력에 그 구심점이 있으며 그 행위로 완성된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존재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 예배하는 존재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인간에 대한 기본적 정의는 그가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의 중심에 서서 하나님을 송축하고, 세계를 하나님에게서 받고 또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  
    또 세계를 이 성찬으로 가득 채움으로써, 세계로부터 받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안에 사는 삶으로, 그분과 교제하는 삶으로 변화시킨다.   세계는 물질, 곧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 하나의 성찬을 구성하는 재료로 창조되었고, 인간은 이 우주적 성례를 집행하는 제사장으로 창조되었다. 



    세 가지 절기

    일본의 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소통의 특징을 시작과 끝을 연속적으로 오가는 것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시간 순대로 문장을 듣지만 마지막이 되어서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의미를 확정 짓는 ‘왔다갔다’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또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한 음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왔다갔다’ 하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리듬이나 멜로디를 들을 줄 안다는 말은 ‘이제는 들리지 않게 된 음’이 아직 남아 있고, ‘아직 들리지 않는 음’의 예감이 떠오르는 과정을 즐길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지정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이 예배 받지 못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만물에게 찬송 받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법칙을 따라 태양이 뜨고 달과 교대하며, 동물도 식물도 하나님께서 제정한 생태의 리듬을 따라 살다 죽습니다.
    이렇게 자연은 하나닙의 법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가 아니어도 이미 예배 받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구걸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절기들을 주신 것은, 이를 통해 ‘우리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하나님과 역동적인 소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매년 세 가지 절기를 지키며 과거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 과거는 현재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나아가 과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미래를 고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은 다시 과거의 해석을 더해주고 현재를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절기는 어디서, 어떻게 보다 ‘무엇을 위해’ 지켜야 하는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사라는 제목의 곡을 연주 하십니다. 그 속에서 ‘이제는 볼 수 없는 절기’를 떠올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회복과 완성의 날’을 예감하며 오늘을 ‘하나의 과정’으로 즐기길 원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절부터 17절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유월절은 3월과 4월 사이인 아빕월 14일에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민족을 ‘하나님 백성’이라 칭하시고 구원해 주셨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본문은 유월절과 그 이후 한 주 동안 지켰던 무교절을 함께 묶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칠칠절은 보리 추수의 시작부터 밀 추수의 끝까지 일곱 주 동안 추수할 것을 허락한 하나님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레위기 23장 15절은 유월절 시작 소제를 바친 다음날부터 50일 내에 새 축제가 시작된다고 했기에, 이 축제를 맥추절 또는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나아가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육체의 양식 뿐 아니라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계명을 받은 영혼의 양식과 연결시키기도 했습니다. 초막절은 9월과 10월 사이인 티슈리월 15일부터 21일까지 수확의 절정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백성들은 텐트에서 지내면서 광야를 지나던 조상들을 기억했고, 광야에서 먹이고 입히셨던 분이 오직 하나님임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매년 세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1년이라는 생활의 리듬을 하나님께 맞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삶의 리듬이 무엇이 맞춰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출퇴근에 맞춰 핸드폰 알람을 설정하고 이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일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회사의 가치와 일정에 자신을 맞춰 살다가 자신의 리듬을 잊어버립니다. 그 장단에 맞춰 달리다 몸이 상해 쓰러진 사람이 있고, 은퇴나 퇴직 이후 따라야 할 리듬을 듣지 못해 멈춰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의 식사를 챙겨주거나 자녀의 공부 일정에 맞춰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전기밥솥이나 전자레인지 그리고 알람시계 정도로 격하된 스스로를 보며 마음 아플 때가 많아질 것입니다. 유행에 맞춰 자신을 가꾸는 것도 같습니다. 돌고 도는 유행 속에서 오히려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일도, 가족도, 자신을 위한 삶도 의미 있고 참 아름다운 가치이긴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라는 역사성에 스스로를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은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예배란 단순한 의식이 아닌, 하나님이 바라신 ‘정신과 가치’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1. 본문은 그 첫 번째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리듬을 맞춰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해야하기 때문입니다.

    2. ‘함께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성전에서만 유월절 예식을 거행해야 했습니다. 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모두 모여야 했습니다. 모두 모여야 한다는 것은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11절과 14절은 자신 뿐 아니라 자녀와 노비와 성 중에 있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한 예배와 신앙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자녀), 사회 가운데 자유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노예), 예배와 기도로 사회를 지탱하는 사람들을 위해(성 중의 레위인),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객), 사회 취약 층을 위해(고아와 과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11절) 예배할 수 있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삶의 예배’이자 ‘참된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누룩을 사방 어디서든 보이지 않게 함께 제거해야 했습니다. 제사 드린 고기를 남기지 말고 먹어야 했기에 모두 함께 배불러야 했습니다. 함께 죄악을 제거하고, 풍요를 누려야 합니다.

    3. 함께함은 ‘즐거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1절과 14절 그리고 15절을 통해 ‘함께 즐거워하고’, ‘온전히 즐거워해야 함’을 명령하십니다. 온전한 즐거움은 이미 주셨던 것뿐만이 아닌, 15절에서 나온 ‘앞으로 주실 복’을 소망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4.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10절이나 16-17절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 대로 힘을 다해 드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헌신 가운데 ‘쉼’이 있어야 합니다. 8절은 이스라엘이 절기의 마지막을 ‘성회로 모이고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쉼이라는 것은 생각 없이 먹고 잠만 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평화의 날을 묵상하고 소망함으로 내일을 달려갈 힘을 얻는 ‘안식’의 시간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쉼입니다.

    2절은 기존에 출애굽기에서 ‘양’과 ‘염소’를 통해 지키던 유월절이 ‘소’를 제물로 드림으로도 지켜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메시지가 전해지던 때는, 이미 요단 동편에 정착하던 백성들이 있었기에 ‘소’를 제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본질을 끊임없이 현실에 적용하며 발전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우리는 신명기의 백성들보다 더 풍성할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 맞는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을 향한 감격과 감사가 담긴 유월절의 정신을, 매일 수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따르는 칠칠절의 정신을,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광야에 있으며 주님의 먹이심과 입히심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다는 초막절의 정신을, 일 년과 한 주와 오늘에 적용해야 합니다.

    7대 명절

    - 레위기 7대 절기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

    유월절 - 이렇게 죽으리라!
    그리스도와 피, 구원

    무교절 - 무덤에 있으리라!
    자아의 파쇄, 죽음

    초실절 - 부활하리라!
    부활, 성화, 잘 될 것이다.

    칠칠절 - 성령을 부어 주리라!
    성령 세례(체험), 요나가 토함을 받는다(물고기 배속)
    오순절의 성도가 됩시다!

    나팔절 - 재림(再臨) 주님 다시 오시리라!
    그리스도의 신부(열 처녀의 비유), 휴거

    속죄절 - 심판(審判), 심판하리라!
    알곡과 죽정이로 구분할 것이다. 신부(거룩한 세마포 예비)

    초막절 -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예루살렘, 천년왕국이 임하리라!

    “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 라고 합니다.

    2282. 하그(châg)  חָג

    1. 축제,  2. 희생 제물

    발음 / 하그(châg)
    어원 / 228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절기(출 10:9, 왕상 12:32, 말 2:3), 절일(출 32:5, 민 28:17, 시 81:3), 희생(시 118:27)
    구약 성경 / 62회 사용

    * 2287. חָגַג 
    1. 선회하다,  2. 춤을 추다,  3. 절기를 지키다

    발음 / 하가그(châgag) 
    관련 성경 / 지키다(출 12:14, 나 1:15, 슥 14:16), 구르다(시 107:27), 춤추다(삼상 30:16).
    [명] 성일(시 42:4), 절기(출 5:1, 23:14, 신 16:15).
    구약 성경 / 16회 사용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4150 모에드(môwʽêd) מוֹעֵד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시간의 공간

    발음 / 모에드(môwʽêd)
    어원 / 325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계절(창 1:14), 기한(삼상 13:8, 시 102:13), 때(출 23:15, 수 8:14, 습 3:18), 회막(출 27:21, 레 24:3, 왕상 8:4), 성막(출 35:21, 40:2), 회막문(출 40:12, 민 16:18, 27:2), 성회(레 23:2,37, 겔 46:11), 절기(레 23:37, 민 29:39, 대하 8:13, 호 2:11), 절기제(민 15:3), 회중(민 16:2, 시 74: 4), 시기(민 28:2, 렘 46:17), 군호(삿 20:38), 날(삼상 13:11), 시간(삼상 20:35), 한 해(왕하 4:16), 회당(시 74:8), 기약(시75:2), 절기의 날(애 2:7, 호 9:5).
    [동] 돌아오다(왕하 4:17), 정하다(욥 30:23, 시 104:19).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 3259.  יָעַד 
    1. 지적하다, 2. 예레미야 47:7,  3. 사무엘하 20:5

    발음 / 야드(yâʽad)
    관련 성경 / 상관하지 아니하다(출 21:8), 정하다(렘 47:7, 미 6:9), 주다(출 21:9), 만나다(출 25:22, 29:42, 느 6:2), 모이다(민10:3, 왕상8:5, 시48:4), 뜻이 같다(암3:3), 가다(느6:10), 서로약속하다(욥2:11), 거역하다(민14:35), 소환하다(욥9:19), 다투다(렘49:19, 50:44), 놓이다(렘24 : 1).
    구약 성경 / 29회 사용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요한복음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위기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요?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급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친교를,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칠칠절(오순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를,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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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2일(목)

    면제년(免除年)(신명기 15:2)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면제년(8059) 쉐미타(shemiṭṭâh) שְׁמִטָּה

    1. 용서,  2. 면제,  3. 신명기 15:1(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관련 성경 / 면제하다(신 15:1, 2)
    [명] 면제(신 15:2), 면제년(신 15:9, 31:10).
    구약 성경 / 5회 사용

    자유하게(신명기 15:12-13) חָפְשִׁי 

    1. 허약한,  2. 자유로운,  3. 자유케 된

    발음  / 호피쉬(chophshîy)
    어원 / 266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유로운(출 21:2, 5), 놓아주는(출 21:26), 놓이는(욥 3:19), 던져진(시 88:5).
    구약 성경 / 17회 사용

    기억하라(2142) 자카르(zâkar) זָכַר

    1. 기억하다, 2. 잊지 않다,  3. 명심하다

    관련 성경 / 기억하다(창 9:15, 시 9:12, 겔 21:23), 생각하다(창 40:14, 겔 23:19, 렘 31:20), 기념하다(시 136:23, 출 13:3, 삼하 18:18),
    마음에 두다(사 17:10), 선포하다(렘 20:9), 부르다(사 12:4), 생각나게 하다(왕상 17:18), 칭송하다(대상 16:4), 전하다(렘 4:16), 자랑하다(시 20:7), 진하다(아 1:4), 분향하다(사 66:3).
    [명] 소문(사 19:17), 사관(삼하 8:16, 왕상 4:3, 대상 18:15), 서기관(대하 34:8).
    구약 성경 / 222회 사용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것?

    첫째, 애굽의 노예 생활 430년

    둘째, 출애굽의 은혜



    신명기 1-4장, 과거 회상
    신명기 5-26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12장부터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적용 방법에 대해서 말씀
     12-26장 / 신명기 법전

    사람을 정의하는 용어 가운데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는 말은 인간을 오직 경제적 합리성에만 기초를 두고 살아가는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상을 말합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경제인(経済人)" 이라고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 : 사유하는 인간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ce) : 놀이하는 인간
    - 놀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인
    -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인간

    호모 오란스(Homo Orans) : 기도하는 인간


    15:9, 호소하리니(7121)  카라(qârâʼ)

    1. 부르다, 2. 도움을 청하다, 3. 사사기 18:23

    구약 성경 / 755회 사용


    호모 오란스(Homo Orans) : 기도하는 인간

    “호모 오란스(Homo Orans)” 

    “기도는 하나님의 '마지못해 하심'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꺼이 하심'을 붙드는 것이다.” -마틴 루터

    우리는 우리가 원하거나 바라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사고 밖의 일을 목도하기도 하고, 우리 능력 밖의 일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도와줄 주변의 사람을 찾습니다. 가까운 이들의 힘을 빌려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근데 이도저도 되지 않을 때, 아무리 주변을 돌아보아도 꽉 막힌 막다른 골목 같을 때 우리는 기도합니다.
    신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간에 나약함을 깨달은 사람은 기도합니다.
    어쩌면 기도라는 게 생래적으로 인간 존재와 관련있기 때문일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은 후 그 코에 생기(the living spirit)을 불어 넣었다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 기도라는 것은 연어가 모천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갈망이 섞여 있는 기도의 길을 걷으며 바램을 올립니다.
    그러다 창조주 앞에서 그분의 뜻과 마주하며 자신의 뜻을 거둡니다.
    그분의 뜻에 자신을 맞추고 그 길로 방향을 정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분 앞에 서서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며, 그분의 전능하심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기도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인간, 호모 오란스(Homo Orans)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길 위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 입니다.


    한국고전문학사에 전개된 기원의 양상과 인문학적 의의에 대하여 논술해 보았다. 주로 개인적인 기원을 대상으로 한정하여 탐색하여 얻은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원(祈願)’은 한국문학사의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난 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단군신화> 또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부터 삼국, 남북국, 고려,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달리 표현하자면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기도 거르는 일 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 기원 모티프를 통해 통관해 보건대, 天(천), 上帝(상제), 神(신)등으로 표상되는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기원은 고려시대까지 드러나게 존재하다가,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수면 아래로 내려가고, 고인을 추모하는 제문(祭文) 일색으로 변화한다. 문집에 실린 허다한 제문들이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시대에 초월자에 대한 기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최부와 이문건, 박인로 등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시조, 민중의 주된 수용층이었던 고소설작품에서 보이는 기원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인 잠재화, 이면적인 지속 이라고나 할까? 사대부나 민중은 물론, 왕실에서 왕조 초기부터 말기까지 초월적인 존재에게 기원하는 의식을 계속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알려진 바이기도 하다. 기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겠다. 기원 대상 또는 목적도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만 나타나다가 나중에는 이타적인 기도도 등장 함으로써, 우리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보편성을 확보해 갔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셋째, 인간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만, 우리 문학사상의 근거를 보면, “호모 오란스(homo orans)”, 기원(기도)하는 사람(존재)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밝혀졌다.

    원시와 고대 시기부터 근대, 아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원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그 기원 대상에 대한 명칭이나 기원 내용과 형식 등에서 변이가 보이며,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통시적으로 기원이 있어 왔으며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기원이 중요한 키워드임을 확인하게 한다.



    신명기 15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에 적용하는 방법으로 물질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가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궁핍하고 가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경제적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실천하는 해를 "여호와의 면제년(免除年,  the LORD's time for canceling debts)" 이라고 합니다.

    "매 칠 년 끝에는 면제하라"(1절)

    사람이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면, 한 사람은 채무자(債務者, debtor)가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채권자(債權者, creditor)가 됩니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서 채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채무자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칠 년에 한 번씩 면제년을 맞이하면서 모든 채무관계를 없었던 일 즉 무효로 만들라고 합니다(2절).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채무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금액을 빚졌는지 상관없이 모든 채무를 면제해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법이 강력하게 시행된다면, 경제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있는 여윳돈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싶을까요? 아니면 빌려주기 싫을까요?

    당연히 이러한 법이 정해져 있는 나라나 도시에서는 돈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은행에서 이자를 높이 쳐주어야 예금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자는커녕 원금도 다 탕감해주어야 한다면 누가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계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또 하나의 규정을 말씀하십니다(7-8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칠 년마다 면제년을 실행하라!
    넉넉하게 빌려주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두 가지가 함께 실행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넉넉히 빌려주도록 하려면, 그들에게 높은 이자라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반대로, 돈을 빌려주더라도 면제년이 되면 모든 채무 관계를 청산하도록 명령하면 당연히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으로는, 특별히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항목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도 맞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어떠한 의도인지는 분명하게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주변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우리의 손을 벌려 도움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손해가 미칠 것을 뻔히 다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향해 움켜쥔 나의 손을 펼치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의 깨우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한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뿌리깊은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경제적 인간의 모습을 넘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나누며 베푸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궁핍한 이웃의 필요를 외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더구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이기적인 욕망이 날마다 솟구치는 현실에서 이와 같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시대를 역행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9절)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참 무서운 말씀이지요. 우리 주변에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아 그들이 괴로운 가운데 하나님께 호소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의 호소를 들으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죄를 정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오늘 밤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면 그것이 고스란히 우리의 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본성을 물리치고 나의 손을 펼쳐 궁핍한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10절)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약속도 주십니다.
    아끼는 마음, 인색한 마음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해 우리의 손을 펼쳐 나누고 베푼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친히 복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궁핍한 이웃에게 나의 소유를 나누는 것은 단지 나와 그 이웃과의 관계, 곧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궁핍한 이웃에게 나의 손을 펴 나누는 일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마 25:40, 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경외의 마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의 마음을 
    여러분 곁에 있는 이웃을 통해 표현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요,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입니다.

    매 칠년 끝에는 면제하라(1절)

    매 칠년은 안식년입니다.
    노동을 쉬며 하나님께 삶을 맡기는 기간입니다.
    이때, 노동만 쉬는 것이 아니라 빚도 버리라고, 돈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빚을 면제하는 순간 돈이 누군가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웃의 빚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웃사랑임을 말씀하십니다.

    빚을 7년마다 탕감해주면 내가 가난해지는 거 아냐? 하고 의심이 들고 두려운 마음이 들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행하면...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6장 19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즉 나의 재물을 하늘에 던져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재물에 묶인 나의 마음까지도 자유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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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1일(수)

    성민(聖民)(신명기 14:2) / 암 카도쉬.  A Holy People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성민(聖民) 암(5971) 카도쉬(6918)

    암(5971) ʽam. עַם

    1. 백성,  2. 민족,  3. 복수형 עַמִּים : 신명기 28:10
    어원 / 60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무리(창 11:6, 신 20:9, 삼하 2:26), 친척(창 14:16), 백성(창 17:14, 출 1:20, 룻 1:16, 대하 17:9, 에 1:5), 민족(창 17:16, 출20:18, 신 7:16), 주민(창 23:7, 느 7:4), 동족(창 23:11), 만민(창 27:29, 출 20:24, 신 2:25), 족속(창 28:3, 스 9:14, 느 9:22), 동행자(창 32:7, 삼하 10:13), 사람(창 35:6, 출 20:2, 신 2:10), 국민(신 4:33, 왕하 11:14), 군대(수 8:13, 겔 17:15, 단 11:15), 군사(삿 4:13, 삼하 1:4, 욜 2:5), 인구(삼하 24:2), 평민(왕하 23:6, 렘 17:19), 만방(대상 16:26), 민간(대하 19:4, 겔 18:18), 인생(욥 36:20), 나라(사 7:8), 이방(겔38:8), 장정(나 3:13).
    구약 성경 / 1850회 사용

    * 6004. עָמַם 
    1. 합치다,  2. 닫다,  3. 호팔형 הוּעַם : 어둡게 되다

    발음 / 아맘(ʽâmam) 
    관련 성경 / 깨닫지 못하다(겔 28:3), 가리우다(겔 31:8), 빛을 잃다(애 4:1).
    구약 성경 / 3회 사용

    카도쉬(6918) qâdôwsh.  קָדוֹשׁ

    1. 거룩한,  2. 욥기 6:10,  3. 레위기 21:6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룩한(출 19:6, 삼상 2:2, 사 4:3).
    [명] 성민(신 7:6, 14:2, 21), 성도(신 33:3, 시 16:3), 성일(느 8:9, 10, 11), 거룩한 자(시 78:41, 사 5:19, 호 11:9), 성소(시 46:4), 성전(시65:4), 거룩하신자(사 12:6, 30:11, 호 11:12).
    [부] 거룩히(레 21:8, 신 23:14).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 6942. קָדַשׁ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카다쉬(qâdâsh)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 22:9), 성별하다(느 3:1), 준비하다(렘 22:7, 미 3:5), 예비시키다(렘51:27, 28), 구별하다(민 8:17, 대상 26:27), 드리다(대상 18:11),   빼앗다(대상 18:11), 예비하다(렘 12:3), 깨끗하게 하다(삼하 11:4).
    [명] 성물(레 22:2, 대상 26:28), 성회(욜 1:14,  2:15), 성호(레 22:32), 성소(대하 26:18, 겔 7:24), 거룩한 자(사 29:23).
  • 구약 성경 / 71회 사용

    * 선민사상(레위기 20:22-27)
  •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 너희는 짐승의 정하고 부정함과 의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나 땅에 기는 곤충으로 인하여 너희 몸을 더럽히지 말라.
  •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 성민(聖民, 암 카도쉬, a holy people)이란 거룩한 백성을 말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성민이라고 불렀을까요?
    성민의 성경적 근거는 선민사상(레위기 20:22-27)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민이란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한 민족이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하고 그 수가 적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신명기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의 이와 같은 선택은 그 수가 가장 작기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바알이 주인이신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민족의 수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은총을 자주 잊어버렸고 심지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을 경배하는 배반적인 행동을 선호했습니다.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좋은 것은 은혜가 아니라 자기 공로와 자랑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심지어 나쁜 것이 닥쳐올 때는 그 나쁜 것을 해결해 달라고 울부짖으면서도 그 문제가 해결되면 또다시 옛 생활을 즐기는 본능적으로 죄성이 강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선택과 또 하나는 반대로 누군가에 의해서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쪽이든 그 선택에 대해서 의무와 책임이 따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그 내용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4장 2절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너를 택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번역이 안 되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2절 말씀의 시작이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바로 ‘왜냐 하면’에 해당하는 ‘키'라는 접속사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왜냐 하면’이라는 말은 앞의 문장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1절의 말씀에 대한 이유가 본문 2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1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1절 본문은 먼저 우리의 신분을 밝혀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바쁘게 살았던 젊은 시절에는 미처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당신의 인생에 대해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분 같이 자신을 객관화하는 작업을 하게 되면 반드시 따라붙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 본연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그 답을 영원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만나야 자신의 이해되지 않고 알 수도 없는 과거가 이해되고 알아지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한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본질적인 물음에 대해 오늘 본문은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아주 명확하게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본문 2절에서 번역이 생략 된 ‘키’ ‘왜냐 하면’ 이하입니다.

    결국 2절은 왜냐하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기 때문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근동의 풍습 가운데는 장례식 때 자신의 슬픔을 극도로 나타내고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음부의 신을 달래어 죽은 자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몸을 자해하거나 눈썹 또는 머리를 미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분히 미신적이고 우상 숭배적인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미 밝힌 것과 같이 너는 하나님의 성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성민에 관해서입니다. 성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도쉬 암’으로 ‘카도쉬’는 ‘거룩’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바로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구별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삶이란 바로 구별된 삶입니다.
    우리가 성숙자반에서 배운 것처럼 레위기는 모세오경 중 3번째 책에 해당하는데, 그 레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0장 2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두 번째는 이런 거룩한 구별은 말씀에 의한 제사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래서 레위기를 제사, 곧 예배의 책이라 부릅니다.

    이렇듯 거룩은 구별을 나타내며, 구별은 말씀에 의한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별된 삶을 살기를 선택받은 성민은 삶이 예배가 되어야하고, 예배가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선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본문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바로 2절 후반부를 보면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기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쎄굴라’는 개인의 소유물 또는 특별한 보물이란 뜻을 가진 말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지상 만민 중에서 우리를 택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인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는데 교우님들의 힘이요 큰 위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에게 속한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갑자기 본문 3절~21절에 걸쳐서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거론하시면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나누십니다. 예를 들어, 육축의 경우에는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쪽발이면서, 새김질 하는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부정하여 먹어서는 안 됩니다.
    어류의 경우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둘 다 있는 것은 먹을 수 있으나, 둘 중에 하나라도 없는 것은 부정하여 먹지 못합니다. 또한, 조류 및 곤충류의 경우에는 정한 새는 먹을 수 있으나,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새로 목록에 나열하신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곤충류에 대해서도 날개 달린 곤충은 먹을 수 있지만, 날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곤충류는 먹을 수 없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21절에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21절 상반절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바로 성민,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백성은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구별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별한 기준은 그것 자체의 선악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가운데 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6절을 제가 새번역성경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은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이십니다. 또한 모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났고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선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난 만물은 그 어떤 것도 악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규례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말씀을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하신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22절-29절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일조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주지의 사실대로,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천지 만물이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레위인을 봉양하며 구제 사업과 같은 일에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를 소득의 10분의 1을 드리고, 다시 거기에서 10분의 1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 모여 여호와를 경배하고 가족과 레위인이 함께 먹고 즐기는 데 사용되는 경비로 사용하는 제2십일조가 등장합니다.
    게다가 레위인과 가난한 자를 위해 매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가 나옵니다.
    이것을 제3의 십일조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당신께 받치라고 명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만이 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 하나님과도 같은 존재는 바로 물질, 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물질을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의를 위해 사용하는데,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도움은 전적으로 하늘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통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민수기 14장 말씀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백성인 성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그 거룩한 백성이 해야 할 일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으로, 그 삶의 실천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요, 세상이 하나님으로 섬기는 물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우리의 삶으로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적인 표현으로는 예수님의 "후페레테스"와 "마르투스"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휘페레테스(종, ὑπηρέτης)는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르투스(증인, μάρτυς)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후페레테스'(ὑπηρέτης) - 사랑의 노예로 살아보자!

    르투스(μάρτυς) -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보자!


    어제 우리는 마르투스- 증인- 순교자의 증언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진실이라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숨기지 않고, 피하지 않고 목숨을 걸어 전하는 사람, 마르투스였습니다.
    평생 가장 중요한 일로 전하는 사명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예수님 이름을! 마르투스의 각오와 결심을 마음에 새깁니다.

    오늘 휘페르테스를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일꾼이나 종이라는 뜻의 사명을 뜻하는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 
    그 중 임직식 때 가장 많이 읽는 본문이 바로 고린도전서 4:1-2절입니다.

    고린도전서 4: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휘페레테스)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바로 여기에서 휘페르테스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일꾼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후페레테스(ὑπηρέτης)입니다.
     '후페레테스' 는 영어로 'under' 곧 '밑'이라는 뜻과 'row' '노를 젓는다.'라는 두 단어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입니다.

    바울 당시, 큰 배-전함 밑창에서는 노를 젓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영화 벤허에서는 주인공 벤허가 노예가 되어 전투함 밑에서 휘페르테스가 되어 노를 젓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일꾼=휘페레테스'(ὑπηρέτης)= servants 종, 노예  

    사도바울은 이 '휘페레테스'를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어제 읽은 말씀에도 이 단어가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휘페레테스)과 증인(마르투스)을 삼으려 함이니.

    여기에서의 '종'도 휘페레테스였습니다!
    노예라는 말이 기분나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도 무엇인가의 노예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자기도 모르게 노예로 살아갔습니다.
    명예집착의 노예, 물질의 노예, 행복강박관념의 노예, 쾌락의 노예, 또는 분노와 미움의 노예...
    사도바울은 이제 주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주님 사랑의 노예로 살아가기를 자청합니다.
    그 사랑때문에! 그 은혜 때문에!

    그런데 배 밑에서 노를 젓는 것은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특히 전쟁 때 전투를 하는데 배가 느려서는 이길 수 없었기에 전속력으로 달리기 위해 전투함의 맨 밑바닥에서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습니다!

    휘페레테스- 주님의 뜻을 이루어내기 위해 함께! 마음을 맞추고 힘을 모으는 사역자!


    둘로스(δοῦλος) 종  / 주의 사랑에 매여

    성경에서 종이나 하인이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단어가 있다면 둘로스일 것입니다.
    다른 여러 단어들도 종과 하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둘로스는 더욱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운명적으로 종이 되어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는 처지를 말합니다! 다른 형태의 종들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자유로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둘로스는 그런 계약기간이 없는 관계입니다. 복무기간이나 계약기간이 없이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철저히 종된 인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영원한 가족같은 신뢰의 관계입니다.


    숨겨진 2%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
    인간관계에 있어 사람의 마음 속에는 98%는 사랑하고 신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숨겨진 2%의 불신과 의심과 갈등이 존재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에도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2%의 숨겨진 불신과 의심과 서운함과 갈등이 숨어져 있습니다. 바이러스처럼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2%에 불과한 바이러스가 작동하여 결국 사랑을 깨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둘로스는 운명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죽어도 주인과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삽니다. 주인이 잘되면 같이 행복하고 주인이 안되면 같이 어려워집니다.
    다른 종들보다 더 뛰어나지는 못해도 떠나지는 않습니다. 더 유능하지는 못해도 끝까지 곁에 있는 종입니다.
    바로 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초반부에 인사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종이라고 호칭합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둘로스 δοῦλος)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전적인 종의 고백입니다.
    거기에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철저히 이해한 이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둘로스’(δοῦλος)
    -
    ‘데오’(δέω) ‘끈을 묶다, 족쇄를 채우다

    둘로스(δοῦλος)라는 단어는 ‘데오’(δέω)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데오’(δέω)줄로 단단히 묶는다는 뜻입니다.

    ‘둘로스’(δοῦλος)
    ‘데오’(δέω) / ‘끈을 묶다, 족쇄를 채우다, to tie, to bind

    주님께서 우리와 당신을 서로 묶으셔서 함께 가고 계십니다.
    마치 2인 3각 경기처럼 우리를 묶고 함께 걷고 계십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운명적인 사랑의 줄로 묶고 이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동물을 줄로 묶어 끌어가듯이 사람에게도 줄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운명적인 줄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의 줄입니다.

    호세아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아멘.

    누구에겐가 매여있을 때 우리는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나를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δοῦλος)이라고 표현할 때는 ‘나의 소유권자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헌신하다 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의 유명한 고백에도 바로 이 매임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데오 δέω)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사도행전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주의 사랑에 매인 자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원한 행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묶여있다는 것,
    더구나 영원하신 주님께 묶여있다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매임은 속박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방황의 끝을 의미합니다.
    의심이 될 때 한번 당겨보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와 연결되어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으로 둘로스로 살기 원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주인이 충성된 종을 자기 자리에 대힌 앉히고 수종드는 그 감동적인 장면의 종도 바로 이 둘로스입니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둘로스 δοῦλος)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그 은혜에 사로잡혀 올 한해를 승리하기 원합니다.
    그 감격으로 평생을 살기 원합니다.
    그 둘로스의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소망의 언덕, 소명의 언덕을 넘기를 원합니다.

    신명기 14장 내용 분해

    14:1-2, 가나안의 이방적 관습을 따르지 말라(1-2)

    가나안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자해 행위의 규례와 눈섭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여 기업을 삼으신 여호와의 성민이기 때문입니다.

    14:3-21,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에 관한 규례를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음식에 대한 규례는 단순히 위생적인 측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별되는 정결의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먹을 수 있는 것도 스스로 죽은 동물들의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는 행위는 생명의 존엄성을 경멸하는 행위입니다(21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되었으므로 이 규정들을 더 이상 문자적으로 준수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여전히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14:22-27,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마다 토지 소산의 십일조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규례를 행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었습니다(22-23).

    14:24-27, 하나님의 성소가 멀 경우

    하나님의 성소가 너무 먼 곳에 있을 경우 돈으로 가져가서 성소 근처에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초태생을 사서 권속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모여 앉아 즐거워하며 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가 사용되는 가장 첫번째 사용처는 이스라엘의 지파들 중 기업이 없는 레위 지파의 생계비로 사용되었으며 두번째 십일조의 사용처는 이스라엘 백성이 친교를 나누는데 사용되었습니다.

    14:28-29,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

    삼 년마다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삼 년째 되는 해에는 십분의 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12월의 마지막을 향하여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으로 무질서와 혼돈의 세상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아가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월 20일(화)

    악을 제하라(신명기 13:5)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찌니라.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You must purge the evil from among you.)

    악(惡) 7451. 라(raʽ) רַע
    - 악을 "하라" 라고 하여 악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가 있기 때문에 막연한 악이 아니라 그악을 의미합니다(하라, הֵרַע )

    1. 나쁜,  2. 사악한,  3. 해로운
    어원 / 7489에서 유래
    * 7489. 라아(râʽaʽ) רָעַע

    1. 깨트리다,  2. 악하게 되다,  3. 히필형 הֵרַע

    제하다(1197) 바아르(bâʽar) (בָּעַר)

    1. 게걸스레 먹다,  2. 소실하다,  3. 소실되다

    바아르란 불에 태워 없에 버리라는 뜻이다.
    어느 사회이든지 반역자는 사형에 처한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이므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므로 거짓 선지자와 예언자는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그들로 말미암아 급속하게 초래할 이스라엘의 파멸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선지자(先知者)는 예언자를 말합니다.
    예언자(豫言者, 預言者)를 의미하는 한자는 "미리 아는 자(豫言者)"와 "말씀을 맡은 자(預言者)"로 구분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는 하나님이 말씀을 맡은 선지자가 아니라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
    "꿈꾸는 자"란 원어로 "홀렘할렘" 즉 "꿈속에서 사는자, 꿈에 취해 사는자" 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이면서도 이적과 기사를 행합니다.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는 이적과 말씀을 맡은 선지자들이 행하는 이적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기적을 일으키는 목적을 보면 구분할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 즉 꿈꾸는자들은 여호와께서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꾀어내려고 이적과 기사를 행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 아닌 곳에 눈을 돌리게 하려고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다른 신"이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다른 신처럼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봅니다.

    첫째는 종교다원화주의

    종교다원화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신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어느 길로 가든지 마지막 정상은 하나 뿐이므로 모든 종교와 신은 그 결국에는 그곳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찾아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聖肉身) 하셔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둘째는 물질만능주의

    현대인들에게 우상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 물질입니다.
    물질이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지만 그 물질이 창조주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자기 중심주의

    물질 다음으로 위험한 것은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내가 좋아하는것은?
    나의 선택은?

    세상은 끊임없이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하고 싶은것, 내가 즐기는 것만 하여도 다 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속삭입니다.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다보면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실체가 내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는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연약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무엇인가 이룰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삶은 피폐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재물이나 자기 숭배는 하나님의 도를 떠나게 하려는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그 어디에도 진리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사람을 가장 평안하게 하는 길이며, 변하지 않는 창세부터 지금까지의 진리입니다.

    다양한 것으로부터 들려지는 것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날마다 주 예수와 동행하며 주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려봅시다.

    세상에는 악이 가득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그런 사람이나 현상을 보기 어렵지만 살다 보면 자신이 악행의 피해자가 되거나 악인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악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악의 노예가 되어 영혼을 팔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도 악을 행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다.
    그렇기에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누군가 처벌하려 할 때, 부당함을 느끼고 자신이 지은 악보다 더 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복을 계획한다.
    반대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에 비하여 가해자인 악인이 충분한 벌을 받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다.
    자신이 본 피해에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처벌을 위해서 피해자의 피해를 어떻게 측정해야 정확할까?

    자연법으로서의 동해보복법(lex talionis)

    이러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족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그것이 동해보복법(lex talionis)이다.
    이 동해보복법은 성경에도 나온다.
    이것은 일종의 창조의 원리인 자연법과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또한, 동해보복법은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법 원칙에 속한다.
    그러한 이유로 이 법은 현실에서 지켜지기 어려운 법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사건 이후에 가인의 증손자 라멕에 의해서 행해진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라멕의 잔인한 복수는,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프고,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으로 여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해보복법은 자연의 인과 법칙의 원리지만, 인간의 자기 중심성의 주관성은 이를 결코 실현할 수 없도록 한다.


    이러한 자연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성경보다 먼저 문서로 남겨놓은 나라가 있다. 이것이 수메르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함무라비 법전이다. 기원전 16~17세기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에도 동해보복법이 나온다. 하지만 이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수메르의 동해보복법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노예나 이방인, 여자, 아이들은 법 적용의 예외 대상이었다. 이는 오직 성인 남자이며 귀족과 왕, 종교지도자에게만 적용되는 법이었다. 만약 노예가 귀족에게 상해를 입히면 동해보복법은 적용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노예를 죽여도 귀족 한 사람의 상처를 대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가치로 취급받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 적용은 다른 나라들과 민족들과는 전혀 달랐다(출 21:23-25; 신 19:21; 레 24:17-22). 십계명이 누구나 지켜야 하는 법이었듯이 동해보복법도 남녀, 아이, 성인, 이방인의 차별이 없었다. 모든 인간의 권리와 가치의 평등에 기초한 동해보복법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다. 이 법은 당시에 누구도 과도한 복수와 보복을 당할 수 없도록 했으며, 감정에 치우친 사적 복수나 부당하고 이기적인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이상적인 법 집행이 가능하였다.


    라멕 효과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에는 동해보복법의 이상적인 원칙에 따라 그 정신과 원리가 잘 나타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성경에서 말하는 동해보복법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이 풀려야만 보복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피해와 남의 피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라멕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이나 현재 우리 기독교인 모두에게 예외가 아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동해보복법은 유대교의 성경 연구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이끈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었다.
    또한 그리스 철학으로 계몽된 유대교 학자들은 동해보복법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랍비들은 동해보복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금전적 보상으로 전환하였다.
    그렇지만 금전적인 보상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부자들은 진정한 회개와 용서 없이 피해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만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보상과 보복에서 진정한 사죄와 처벌이라는 인격적 요소가 제거되고 단지 경제적 보상과 물질만 남은 것이다.

    동해보복법의 비관주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은 가해자가 악한 자라고 한다면 이들을 향해 동해보복을 요구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동해보복법으로는 결국 온전한 정의와 사랑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주의가 내재해 있다. 이것은 법치주의라는 이상이 현실에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관주의에서 절망으로 나아가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세상이 예상하지 못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셨다.
    바울은 이것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하였다(롬 12:21).
    예수님은 이를 산상설교에서 네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차례대로 소극적 방법 세 개와 적극적 방법 한 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1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6장 29절은 뺨을 때린다고만 하였지 그 방향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마태는 정확하게 오른편 뺨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어느 쪽 뺨을 맞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다.
    만약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왼손으로 때리지 않는 한 오른손일 경우 손등으로 때리는 수밖에는 없다.
    당시 이런 행동은 상대를 구타하려는 목적보다는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오른 손등으로 상대의 오른뺨을 툭툭 치면서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수모를 당할 때, 왼편을 돌려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상대가 나에게 도를 넘어 수치스럽게 하고 있다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본질이 아닌 것으로 약을 올리고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주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
    많은 경우 참고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들의 행동이 정말 나쁜 행동이었다는 것은 알려주라고 하신다.
    참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오른뺨을 살살 건드려 사람들 사이에서 나에게 수모를 주려면 차라리 그 오른손으로 내 왼뺨을 세게 후려치라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2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0)

    두 번째도 같다.
    이런 상황은 금전적인 문제로 채무 관계일 경우다.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채무 관계로 이자를 받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채무로 인하여 전당물을 잡아야 하는 경우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서 임의로 자기가 원하는 담보물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담보물은 채무자가 주는 것이어야 된다. 그런데 만약 채권자가 옷을 전당물로 잡았다면 옷은 반드시 저녁에는 돌려줘야 한다(출 22:26-27).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단벌이었다. 겉옷은 저녁에 담요 역할을 하였다. 즉,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최후에 어쩔 수 없는 경우며, 빌려주는 사람은 이것을 결코 요구할 수 없었다(신 24:10-13). 그런데 40절의 고발하는 자는 속옷을 요구하였다. 비록 겉옷은 아니기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해서는 안 되는 요구를 하여 상대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피하는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렇다면 겉옷도 줘버리라는 급진적인 행동을 명령하신다. 그래서 이 사람의 원래 의도, 겉옷을 원했지만 차마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그 악한 의도를 세상에 폭로하라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3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1)

    당시 로마 군인들은 식민지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노역을 시킬 수 있었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시켜 강제로 짐을 들고 약 2km(5리)를 가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럴 때 그 두 배의 거리를 가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부당함을 항변하라는 것이다. 부당함을 항변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러나 부당함을 항변하는 것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때다. 자신이 당한 손해에 대한 배상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으려 한다는 모습이 보이면 상대는 자신의 부당함을 깨닫지 못한다. 더하여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동해복수의 법칙은 객관적으로 정량화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피해는 대부분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대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고 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내가 손해를 감수하여, 상대나 주변이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4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이 마지막 명령은 이전의 세 개의 예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전의 예들은 피해자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가해자를 향하여 그들의 위선과 부당함을 폭로하는 것을 통해 동해보복을 하는 소극적인 방법에 대한 예였다.
    예수님은 일종의 갑과 을 관계에서 을이 당하는 구조적으로 허용된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동해보복의 예로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소극적인 방법을 제시하신 이유는, 사회 구조적인 악을 일시에 제거하고자 폭력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을 때 오히려 구조는 개선되지 않고 약자의 피해만 가중되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폭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보이지만 결국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깨고 갈라지게 하듯 변화를 일으킬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듯이 사회는 변하였다. 하지만 문제를 폭로하고 이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변화의 한계가 있다.

    변화는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돈이나 물건을 구하고 꾸려는 자들을 이들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차별한다면, 이 또한 신분에 따라 동해보복법을 차등하여 적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해보복법은 가난한 자도 그들의 필요만큼 돈을 빌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동해보복법은 노인과 아이, 과부와 고아, 여자와 노예, 이방인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손해를 보상하는 소극적 법인 동해보복법을 역으로 하면 이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고 차별하지 않는 적극적 법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레 19:10; 신 15:7-11; 24:19-22).

    긍정적인 실천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더 가속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자선 실천이 이전에는 자선이란 개념이 없던 로마 사회에 공적인 자선을 제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교회사가인 피터 브라운(Peter Brown)에 의하면 초기 교회는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의 명부를 관리하였다. 교회는 왕과 귀족들이 회심하여 교회에 맡긴 막대한 재물을 이 명부를 통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회복지를 실천하였다. 이를 통해 교회는 부의 불평등 구조 속에서도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교회가 약자들의 대변자라는 인식을 얻게 하였고, 자신이 어떤 이유로 과도한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도 교회가 이를 바로 잡아 주어 동해보복법이 올바로 시행되게 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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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의 구조와 신명기 법전

    오경 안에는 세 가지 법전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 오경이라는 말을 모른다.
    예수님 이후에 생긴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다섯 권의 책을 토라라고 말하며 한 권의 책으로 생각한다.
    토라의 뜻은 가르침, 혹은 법을 의미한다.  

    법전의 내용 

    1. 계약법전(출애굽기 20:22 - 23:33)
    2. 신명기 법전(신명기 12:1 - 26:16)
    3. 성결 법전(레위기 17:1 - 26:46)

    1. 계약 법전(출애굽기 20:22 - 23:33)  

    계약 법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 하나님이 제시하셨던 계약의 내용이었다. 
    거기서 계약이 성사되어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 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법전을 왜 계약 법전이라고 이름 지었는가? 

    하나님이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처음으로 계약을 맺으셨을 때 주신 법전이기 때문에 계약 법전이라고 부른다.   

    왕과 백성들의 계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백성은 왕을 섬기고 왕의 명령을 지키며 왕에게 세금을 내겠다고 맹세한다.
    왕은 백성들을 보호하여 주겠다고 맹세한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제시하고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출애굽기 24: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하나님이 제시하시고 백성들이 '우리가 준행하리이다'함으로써 하나님과 백성들과의 계약이 체결된 것이다.  

    2. 신명기 법전(신명기 12:1 - 26:16)

    신명기 법전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화를 당한다는 내용이다. 
    이 역사관은 열왕기서와 역대기 같은 역사책의 역사관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서를 보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아무리 경제를 발전시킨 왕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왕이면 나쁜 왕으로 평가하고, 아무리 약했던 왕이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소중히 여긴 왕이면 훌륭한 왕으로 평가한다.     

    신명기 법전은 다른 법전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계약 법전에서는 제사의 장소가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명기 법전은 오직 한 장소를 지명한다.

    신명기 12:5-7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신명기 법전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이후로 신앙생활의 중심이 된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3. 성결 법전(레위기 17:1 - 26:46)  

    이 법전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 것이냐에 대한 법전이다.  
    이 세 가지 법전은 작성된 시기가 다르다. 
    가장 오래된 법전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계약 법전, 그 다음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신명기 법전이고, 그 다음이 레위기의 성결법전이다.   

    레위기 법전을 왜 성결 법전이라고 하는가? 

    레위기 11: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거룩이라는 말은 성결이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 레위기에 나오는 법전의 정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법전의 이름을 성결 법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토라에 나타나는 세 법전은 서로 다른 시대에 주어진 법전들이다.
    그래서 그 내용도 조금 차이가 있다.

    세 법전의 차이

    동족을 노예로 샀을 때의 법 

    출애굽기 21:2-11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그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는 팔지 못할 것이요.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할 것이요.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
    그가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

    이 법에 따르면 남자 노예는 일곱 째 해에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는 반면, 여자 노예는 자유를 얻지 못한다.
    남자 노예도 자유를 얻을 수는 있지만 가족은 데리고 나가지 못한다.
    가족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평생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명기 법전은 다르게 말한다.

    신명기 15:12-18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가져다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구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그같이 할지니라.
    그가 여섯 해 동안에 품꾼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법전이 여자도 남자처럼 일곱 째 되는 해에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더구나 노예에 대한 표현이 ‘네 동족’이다. 
    주인과 노예가 형제, 가족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형제이고 평등하다.
    시내산에서 받은 계약 법전보다 38년 늦게 가르쳐진 모세의 설교인 신명기 법전이 하나님의 뜻을 더 명확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에 나타났다고 생각되는 레위기 법전은 가장 성숙한 법전이다. 
    레위기에는 '네 동족'에서 '네 형제'라는 말로 바뀌어 있다.

    레위기 25:39-42, 46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 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들이니 종으로 팔지 말 것이라.
    너희는 그들을 너희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소유가 되게 할 것이라 이방인 중에서는 너희가 영원한 종을 삼으려니와 너희 동족 이스라엘 자손은 너희가 피차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

    레위기에 나오는 성결 법전을 보면 동족의 경우 아예 노예로 부릴 수 없는 것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 
    노예에 대한 법을 말하면서 노예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신다.   

    십계명도 차이가 있다.
    그 중 열 번 째 계명을 비교해 보자.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신명기 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십계명은 이웃의 집, 즉 한 가족의 가장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하시면서, 소유한 목록을 나열한다.
    그 안에 그 남자의 아내가 들어가 있다.
    이것은 여자들이 보기에 평등하지 않는 면이 있다.
    여자가 남자의 물건과 같이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명기 십계명은 이것을 개선한 것 같다.
    신명기 십계명은 두 가지로 나눈다.
    한 가족의 가장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 하나이고, 그 가장이 가진 물건들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 하나이다.
    이로써 여자가 소유물과 같은 레벨로 나열 된 것이 개선된 것이다. 

    계약 법전과 신명기 법전, 레위기 법전이 서로 다른 이유?
    진화하거나 발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좀 더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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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9일(월)

    평안히 거할 때(신명기 12: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평안히(982) 베타흐(beṭach) בֶּטַח 

    1. 신임,  2. 확실히 

    Etymology / 982에서 유래

    Bible verse / 몰래(창 34:25), 안전하게(레 25:18, 삼상 12:11, 신 33:12), 평안히(신 12:10, 겔 34:25), 안심하고(삿 8:11).
     [형] 염려 없는(삿 18:7, 렘 49:31, 겔 30:9), 평안한(잠 10:9).
    Old Testament / 42회 사용
    거하다(3427) 야솨브(yâshab) יָשַׁב

    1. 앉다,  2. 창세기 21:16,  3. 창세기 19:1

    Bible verse / 머물다(창 13:12, 삼하 10:5, 왕상 17:5), 거주하다(출 12:40, 창 34:21, 수 9:22), 앉다(삿 5:16,왕상 1:35), 살다(왕상 2:36, 겔 28:26), 좌정하다(시 29:10, 사 14:13), 두다(시 122:5), 살리다(사 44:26), 서다(슥 14:11), 동거하다(출 2:21), 오르다(신 17:18, 왕상16:11), 나가다(신 23:13), 들어가다(삼상 7:2), 쉬다(룻 2:7), 계시다(왕상 8:30), 앉히다(대상 28:5, 왕상 21:12), 즉위하다(에 1:2), 눕다(시 127:2), 숨다(렘 49:8), 기다리다(출 24:14, 삼상 1:23), 거류하다(창 20:1), 머물러 있다(민 25:1), 이르다(삿 20:47), 지내다(삼하13:20, 왕상 22:1), 거처하다(왕상 7:8, 렘 35:7), 엎드리다(욥 38:40, 시 17:12), 매복시키다(삿 16:9), 매복하다(삿 16:12), 조용하다(슥1:11), 진치다(겔 25:4), 장가들다(스 10:14), 맞이하다(스 10:17, 느 13:27), 앉게 하다(삼상 2:8), 세우다(시 113:8), 삼다(스 10:10).
    [명] 원주민(대상 11:5), 주민(겔 36:35), 처소(출 15:17, 렘 9:6), 자리(암 6:3), 사람(창 34:30), 백성(수 2:9, 애 4:12).

    Old Testament / 815회 사용

    평안히 거할 때(you will live in safety) 위솨브템 베타흐 

    신명기 12-26장은  ‘신명기 법전(申命記 法典)’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법전이란 "신명기의 중심부"에 해당합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랑 생활을 끝내고 요르단 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행한 설교문 형식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이 설교에는 율법 자료와 역사 자료가 얽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가 기원전 621년에 있었던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명기는
    1. 하나님의 구원사를 회고하는 내용에 기초를 둔 설교문입니다.
    2. 하나님 한 분에 대한 경외와 순종 그리고 철저한 인도주의적 인간애를 강조합니다. 
    3. 천체 숭배나 人身 희생제 같은 비인도적 성격의 가나안적 異敎 제의를 철저히 배격합니다.
    4.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장소인 중앙 예배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제의만이 합법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제의(지방 제의)와 예배 행위(주로 가나안적 예배)는 반드시 철폐하여야 한다는 명령(12-14장)
    인도주의적이고도 사회적인 성격의 '약자 보호법’을 선포(16=5장, 22장, 24장 등)
    이 법을 성실하게 관리하고 지켜 갈 재판관, 왕, 제사장, 예언자의 올바른 직능을 강조(16장-18장)
    이러한 정신을 강력히 주입한 법령인 거룩한 전쟁의 법령을 선포(20=21장, 23장 등)

    신명기 법전은 예배 공동체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생활 영역과 관련되며, 
    사회 전반에 정의로운 질서를 수립하도록 요구하되 비인도적 이교주의와는 절대 불타협을 선언하는 등            
    강력한 개혁 의지를 담은 법령으로서 등장한다.

    깨끗한 음식과 깨끗하지 못한 음식에 관한 법령(14,3-21),
    부자연스런 결합을 금하는 법령(23,1),
    부당한 성관계에 관한 여러 禁令들(22,13-29 ; 24,1-4)도 포함하고는 있으나,
    이 법전에서는 이 모든 법령이 강력한 인도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동시에 비인도적인 이교주의(가나안 주의)에 대한 절대 불타협의 정신(혼합주의의 절대 불용납과 배척)도 강조한다.

    이 사실은 거룩한 전쟁 법령을 통하여(신명20장)        
    가나안적 요소에 대해서는 "완전 전멸(헤렘)"의  불타협을 요구하였다는 데서도 입증된다.
    이 법의 선포가 가나안 입주 직전에, 그리고 가나안 입구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꾸며져 있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가나안적 이념에 대한 이토록 철저한 배척은 :
    신명기 저자와 신명기계 역사서(여호수아서, 판관기, 1. 2사무엘서, 1. 2열왕기서)
    저자가 가진 가장 중심적인 정신이요 신학이다.

    가나안적 이념은 : 일반적으로 성(sex)을 기초로 한 물질주의 이념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힘의 논리를 절대시하는 지배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나안적 이념과 싸워 나가는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 "역사서"라고 말하는 "여호수아서, 판관기, 1․2사무엘서, 1․2열왕기서".


    출애굽기와 레위기 등에서 다루었던 율법의 내용을 새로운 상황 즉 출애굽 2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따라 설교의 방식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의 의도는 새로운 율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에 맞추어 다시 교훈하고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 갱신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명기 12장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반영합니다.

    1-4절과 29-32절은 이러한 주제를 되풀이하며 본문을 이러한 틀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신명기 12장은 예배에 관하여 시대를 초월하는 몇 가지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우상을 파멸하라(2-3절)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29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 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어 거기 거하게 하실 때에

    멸하다(6) 아바드(’âbad) אָבַד

    1. 길을 잃다,  2. 재물을 잃다,  3. 목숨을 잃다


    둘째,  택하신 곳을 찾으라(5절)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선택하다(977. 바하르, bâchar)  
    בָּחַר 

    1. 시험하다,  2. 선택하다,  3. 사랑하다  
    Bible verse /  좋아하다(창 6:2), 택하다(신 7:6, 느 1:9, 삼상 2:28), 택하다(왕상 3:8, 왕하 23: 27), 좋다(시 84:10), 즐거워하다(잠1:29), 선택하다(사 56:4), 뽑다(수 8:3), 고르다(삼상 17:40), 시험하다(삼하 15:15), 시험받다(욥 34:33), 따르다(잠 3:31), 기뻐하다(사58:5, 6), 얻다(대하 25:5), 귀하다(아 5:15), 낫다(잠 8:19), 기쁘게 여기다(잠 21:3), 들어있다(전 9:4).
    Old Testament / 172회 사용

    11절.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찌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14절.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찌니라.

    18절.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21절.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멀거든 내가 네게 명한대로 너는 여호와의 주신 우양을 잡아 너의 각 성에서 네가 무릇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먹되.

    26절. 오직 네 성물과 서원물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라.

    셋째, 함께 즐겁게 제사하라(7절)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12절.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찌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8절.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함께(519) 아마(’âmâh) אָמָה

    1. 어미활용 אֲמָתְךָ

    Bible verse / 여종(삼상 1:11, 시 86:16), 시녀(출 2:5, 룻 3:9, 나 2:7), 계집종(삼하 6:20), 종(레 25:44), 노비(신 12:12, 스 2:65, 느 7:67).

    Old Testament / 56회 사용

    즐거워하다(8055) 사마흐(sâmach)  שָׂמַח
    1. 기뻐하다,  2.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거워하다,  3. 피엘형 שִׂמַּח : 즐겁게 하다

    Bible verse / 기뻐하다(출 4:14, 전3:12, 사39:2), 즐거워하다(레23:40, 잠5:18, 렘31:13), 기쁘다(시16:9, 습3:14), 즐겁다(시90:14, 슥10:7), 즐기다(삿9:19, 욥21:12), 기뻐 아니하다(사9:17), 기쁘게 하다(시92:4, 잠10:1, 사56:7).

    Old Testament / 154회 사용


    결론(結論) 


    안식의 복을 누리라!(9-10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안식(5117) 누와흐(nûwach) נוּחַ 

    1. 쉬다,  2. 여호수아 3:13,  3. 출애굽기 10:14

    Bible verse /  머물다(창 8:4, 왕하 2:15), 평안함을 얻다(에 9:22), 동맹하다(사 7:2), 앉다(삼하 21:10, 사 7:19), 강림하다(사 11:2), 평안하다(사 14:7), 쉬다(출 20:11, 민 10:36), 멈추다(수 3:13), 이르다(출 10:14), 임하다(민 11:26, 겔 44:30),풀다(겔 24:13), 내리다(출17:11), 안식하다(수 1:15), 평안하게 하다(잠 29:17), 예정하다(사 30:32), 내려놓다(겔 40:2).
    [명] 안식(수 21:44). 평강(느 9:28), 평안(대하 14:7), 태평(왕상 5:4).

    Old Testament / 143회 사용


    창세기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창세기 22: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3절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예배의 자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택하신 곳입니다.
    택하신 곳이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수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수양은 장차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택하신 곳이란 희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실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너희 삶의 터전에서 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역대하 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삶의 자리(Sitz im Leben)

    최근에 짧은 책을 읽었는데, 영국의 더럼대학교에서 신학과 성경해석을 가르치고 있는 ‘월터 모벌리( R.W.L. Moberly)의 발람, 참예언자인가?’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모벌리는 우리에게 ‘성경 자체의 아름다움과 성경에 대한 해석의 탁월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4가지의 전제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첫째, 성경의 세계는 바로 우리의 세계라는 것.
    둘째,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라는 것.
    (물론, 성경은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의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셋째, 진지한 상상력(imaginative seriousness)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경 이야기를 읽을 것.
    넷째, 성경 이야기들은 실제적이고 기본적이며 반복되는 삶의 문제들을 다룬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모벌리가 제시한 4가지 중 첫째와 넷째에 집중하고 싶다.
    나는 신학생에게 있어서, 철학이든 신학이든 또 성서든 상관없이 책을 읽을 때,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 단어는 바로 “Sitz im Leben(삶의 자리)” 이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정 공동체가 어떤 생활의 상황가운데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
    성서에 있어서는 ‘양식비평’ 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기도 하다.

    모벌리가 말하는 것처럼 성경이야기들은 실제적이고 기본적이며 반복되는 삶의 문제들을 다루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전제를 머리로는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성경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 능력으로 발현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성경은 성경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성경인물들의 인생과 내 인생은 절대로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성경 본문의 관심사를 제대로 간파한다고 자신하지만, 실상은 성경의 관심사를 진부하고 도덕적인 이야기로 축소시킨다. 하지만 분명히 성경의 관심사는 바로 우리의 생사의 문제에 있다.

    ‘삶의 현실’과 ‘성경’에는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인 헤르만 궁켈에게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 용어는 신학적 연구 밖의 다른 영역에서도 사용되며, 특정한 텍스트의 사회학적인 상황을 규명하려는 관점을 지닐 때 필요한 개념이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을 마주하고 읽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시내 산 아래, 그리고 산상수훈이 선포된 산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음성을 놀람과 두려움과 떨림으로(출애굽기20: 18-21; 마태복음7: 28-29)들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래야 한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나를 주장하고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자신을 거룩한 자의 자리에 두려는 의도를 보여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심판자가 되어 남의 눈에 있는 들보만을 보고 그것을 흠집 내고, 신앙을 저울질하며 정죄하는 공격무기로 삼아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필요한 말씀만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부적 정도로 취급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불의와 불법, 불공정을 말씀으로 정당화 시키는 일도 마찬가지다.

    거룩한 결단, 영광스러운 서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대로 오늘 나의 삶의 자리에서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내겠다는 강한 마음과 의지를 자발적이며 자원함으로 뜻을 세우는 행위이다.

    그 말씀으로 나의 전 삶의 영역을 싫든 좋든,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길가와 같고, 가시밭과 같고, 바위 위와 같은 굳은 마음과 사막화된 삶을 옥토로 만들어 가겠다는 거룩한 결단이며 영광스러운 서원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울타리를 치는 것과 같다.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모든 유혹이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내 안에 깊이 잠들어 알지 못하는 나의 죄성이 울타리 너머에서 불어오는 유혹과 상황과 환경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깨어나 조우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살아내는 것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요한일서 3:18)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신명기 6:4-5; 요한복음 15:9-14; 요한일서 3:34-24)하는 것이다.

    주께서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지상 명령은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28: 20)”이다.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잘 전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행하며 가르치고 싶다.

    삶의 자리, 삶의 상황

    성서학계에서 주로 쓰는 용어입니다.
    특히 양식비평에서 쓰는 전문 용어로, 이스라엘이나 초대교회의 삶 안에서 사회학적 배경을 지칭합니다.

    맨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헤르만 궁켈(1906)인데 그는 이스라엘의 문학적 양식을 사회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Sitz im Volksleben Israel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배경 안에서 여러 양식들을 이야기하는데, 전설, 말씀, 전례문, 찬미가, 예언, 비유 등등이 있습니다.

    마르틴 디벨리우스라는 분은 교회의 삶 안의 자리(Sitz im Leben der Kirche)를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갖가지 전승의 내용을 창조하거나 일정한 양식으로 정식화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의 삶의 상황이 설교와 가르침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으니까요.

    도드요아킴 예레미야스는 교회의 사회학적 배경을 넘어 예수의 삶의 자리까지 추구해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 심판의 위기상황과 예수와 바리사이들의 논쟁을 그러한 부분으로 읽어냈습니다.

    그런데 한편, 신약성서 편집비평에서 이 용어는 사회학적 배경이 아니라 문학적 배경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즉 비유, 기적사화, 말씀 등과 같은 다양한 전승들이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주어진 복음서 내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저자들이 부여하는 양식들의 의미와 기능은 복음선포를 위한 목적, 또는 교리교육을 위한 목적, 또는 호교론적 목적 등으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주로 '삶의 자리'라는 말로 번역되어 쓰이는데,

    성서를 쓰는 데 이용된 다양한 양식들이

    어떠한 사회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지를 밝히려는 가운데 나온 말입니다.

    오늘날 성서학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자리란 매우 중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누구나 처한 삶의 자리가 다르고,

    그 삶의 자리를 이해하게 될 때

    그를 이해하고, 그의 표현을 이해하고,

    그를 더욱 사랑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