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 03. 30. 2022(Wed) -






구약의 일곱 가지 유대 절기



구약에 일곱 가지 유대 절기 즉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을 소개하고 있고,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참고: 레위기 23장).

  • (레 23:3)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분의 영광을 기념하고 찬양하며 백성으로 기쁨을 누리기 위해 정해 주셨습니다.

  • (레 23: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유대 백성은 무교절, 칠칠절(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 (신 16: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자신이 메시아 임을 알리시기 위해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선지서를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선지서와 절기를 비롯해 여러 상징은 예수님을 가르키고 있기에 구약을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데 도움이 됩니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대하 35:22 ,23)


 요시야는 쇠락해 가는 남방 유다 왕국의 마지막 등불이었다.
그는 불과 8살에 왕위에 올라 부친 아몬과 조부 므낫세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
그는 재위 18년인 BC 621년에 율법서인 신명기서를 발견한 후 대대적인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고 우상을 일소하고 성지를 회복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특히 신명기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는 그 자신이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으며 가나안 정착 이후로 가장 큰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사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그런 그가 아직도 젊은 39세인 BC 609년에 쓸데없는 외교 분쟁에 휘말려 전사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조부 므낫세의 엄청난 죄악 때문이었다(왕하 23:26~27).
그러나 역대하 35장의 본문에서는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찌 요시야 같은 이가 그렇게 하였을까?
그는 왜 그런 어리석은 결정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을까?

그것이 아마도 이방 왕인 느고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는가?
여하튼 역대개의 본문은 그의 죽음을 전하는 므깃도 전쟁 기사를 시작하면서까지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대하35:20)라고 하여 요시야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헌신하였음을 보여준다.

 

 요시야가 최후를 맡은 소위 므깃도 전쟁을 바르게 이해하기 이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요시야가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그 시대에는 바벨론이 고대 근동의 신흥 패권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바벨론은 이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와 하란을 정복하였다.

 

 그 후 앗시리아의 장군들이 앗수르-우발릿(Ashur-uballit)의 지휘 아래 갈그미스를 수도로 삼았다. 이에 애굽은 근동 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는 바벨론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앗수르 왕국을 돕고자 갈그미스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BC 609년 여름에 애굽의 바로느고는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틴의 므깃도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성경의 “애굽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agianst)하여”(왕하23:29)라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알(לؽ)은 그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치고자”(ahainst)가 아니라 “위하여”(on behalf)로 번역되어야 한다.그래서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무두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 왕을 도우려고”라고 번역하였다.

 

 여하튼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려고 올라오는 바로느고와 므깃도에서 맞섰다. 이는 애굽이 앗수르와 동맹하여 바벨론을 물리치면 팔레스틴에 대한 애굽의 지배권이 부활되고 결국 통일 히브리 왕국의 꿈이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때 바로느고는 요시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다 왕이여 내가 오늘날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잇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35:21)고 하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호와에 대한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여호와의 제지하시는 음성을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기가 무엇 이였든지 간에 요시야는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대하35:22)였다.

 

 이때 요시야가 느고의 말을 듣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선민 국가의 왕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것은, 마치 큰 부흥과 개혁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경견하고 영감적인 목사에게 어떤 세속적인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할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요시야는 바로느고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사실 하나님은 전에도 이방의 왕들에게 기별을 주신 것이 있었다.(창12:17-20;20:3~7; 단4:1~3)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귀를 이용하시어 경고를 주시기도 하셨다.(민22:28~31).

 

 요시야가 비록 바로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애통하게 전사하였지만 성경은 여전히 그를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일찍이 하나님께서 여선지자 훌다의 입을 통해 예언한바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대하34:28)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성경은 요시야 왕의 삶에 대해 심지어 이 므깃도 사건 이후에도 그가 “행한 모든 선한 일과 그 시종 행적이”(대하 35:26) 기록되었다. 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미국은 인구 비례 60만명 당 1인의 국회의원
이러한 실예를 한국에 적용할 경우 85명 정도가 적당하다. - 이춘근박사(국제정치학 전공)

여야가 검찰의 6대 범죄 수사권 중 부패·경제범죄에 대한 수사권만 중대범죄수사청 설립 전 1년 6개월간 유지하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여야 원내대표가 중재안대로 합의한다면 다음 주 본회의에서 관련 법안이 처리될 전망이다.

더불어민주당은 22일 오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검수완박' 법안 관련 박병석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논의하고 이같이 결정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이후 기자들과 만나 "국회의장이 중재안으로 제시한 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중재안에 필요한 것은 향후 보완해 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그동안 민주당은 검찰에 과도하게 집중된 국민 기본권 침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하에 기소권과 수사권을 반드시 분리돼야 한다는 원칙을 강하게 주장했다. (또) 시기를 끌 수 없기 때문에 4월 내 처리해야 하고, 국가의 반부패 수사 역량 강화를 위해 한국형 FBI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요구해왔다"며 "크게 이 세 가지 부분이 기본적으로 반영됐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의장의 중재안을 여야가 수용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법제사법위원회 법안 심사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안건조정위에서 하는 방법도 있고, (혹은) 조정위는 철회하고 법안소위에서 심사해 전체회의서 심사한 뒤 본회의 처리하는 과정을 밟을 것"이라며 "본회의를 다음 주에 열어 검찰개혁 관련 법을 처리하고, 5월 3일 국무회의에 최종 이송돼 의결될 걸로 본다"고 했다. 

공직·선거·방위사업범죄, 대형 참사 수사권 이달 내 폐지 제안 




 
국민의힘도 이날 오전 의원총회를 통해 박 의장의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후 기자들과 만나 "치열하게 논의한 결과, 우리 당은 의장 중재안을 수용하기로 했다"며 "의장 중재안은 의장과 양당 원내대표가 서너 차례 회동을 통해 합의한 안"이라고 말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앞서 이날 검찰의 부패·경제범죄 등 2개 중대범죄에 대한 수사권만 유지하고, 1년 6개월 내 중대범죄수사청(한국형 FBI)가 설립되면 수사권을 모두 폐지하는 안을 포함한 최종 중재안을 양당에 전달했다. 

중재안은 총 8개 항으로 구성됐다. 중재안에는 검찰의 직접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대신 검찰의 직접 수사권은 한시적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다만 직접 수사의 경우에도 수사 검사와 기소 검사를 분리하며, 검찰 외 다른 수사기관의 역량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검찰의 직접수사권도 폐지하도록 했다. 

또 검찰의 수사범위가 명시된 검찰청법 4조 1항 1호 가목 중 공직자범죄, 선거범죄, 방위사업범죄, 대형 참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기존 검찰의 수사 범위였던 6대 범죄 중 부패범죄와 경제범죄 등 2대 범죄만 한시적으로 남기도록 한 것.

정의당 "의장 제안 존중, 여야 합의 통한 법안처리 촉구"




 
더불어 박 의장은 검찰의 직접수사 총량을 줄이기 위해 6개 특수부를 3개로 축소하고, 3개 특수부의 검사수도 제한하자고 했다. 경찰의 송치사건에 대해서도 범죄의 단일성과 동일성에서 벗어나는 수사는 금지하도록 했다. 검찰의 시정조치 요구사건과 고소인이 이의를 제기한 사건 등에 대해 사건의 단일성과 동일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검사가 수사하도록 했다.

박 의장은 법률안 심사권을 부여하는 '사법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중대범죄수사청 등 사법 체계 전반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중대범죄수사청은 특위 구성 후 6개월 내 입법을 완성하고, 입법 조치 후 1년 이내 발족하자는 안도 제시했다. 중대범죄수사청이 출범하면 검찰의 직접 수사권은 폐지된다.

특위는 민주당 7명, 국민의힘 5명, 비교섭단체 1명 등 13인으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민주당이 맡도록 했다. 이들은 중수청 신설에 따른 수사기관 권한 조정과 함께 수사기관의 공정성 및 중립성을 담보할 방안도 논의하게 된다. 중재안에는 검찰개혁법안을 이번 임시국회 4월 중에 처리하고, 공포된 날로부터 4개월 후 시행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한편 정의당에서도 이번 의장 중재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여야 합의를 촉구했다. 이동영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국회에서 브리핑을 열고 "검찰개혁을 놓고 양당의 강대강 대치 국면을 해소하고, 시급한 민생 현안으로 국회가 전념하자는 국회의장의 제안을 존중한다"며 "시민의 기본권 보장과 견제와 균형을 통한 실효적 검찰개혁이 추진될 수 있도록 여야 합의를 통한 법안처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검수완박 :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
윤석열 / 검수완박 부패완판
한동훈 / 검수완박 야반도주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에 타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원수라도 협력하게 된다.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같은 장소와 처지에 함께 놓임.   

손자(孫子)라는 책은 중국의 유명한 병서(兵書)로서 춘추시대 오나라의 손무(孫武)가 쓴 것이다.
손무(孫武)는 오왕(吳王) 합려(闔閭) 때, 서쪽으로는 초(楚)나라의 도읍을 공략하고 북방의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격파한 명장이기도 했다. 

오(吳)의 합려(闔閭)와 월(越)의 윤상(允常)이 서로 원한이 있었고 윤상이 죽자 그의 아들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침략하여 합려를 죽이고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구천이 회계산에서 항복당하여 서로 물리고 무는 관계로 오나라와 월나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었다. 

이에 대해 손무(孫武)의 손자(孫子) '구지편(九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병(兵)을 쓰는 법에는 아홉 가지의 지(地)가 있다. 
 그 구지(九地) 중 최후의 것을 사지(死地)라 한다. 

주저 없이 일어서 싸우면 살길이 있고, 기가 꺾이어 망설이면 패망하고 마는 필사(必死)의 지(地)이다. 

그러므로 사지에 있을 때는 싸워야 활로(活路)가 열린다.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필사(必死)의 장(場)에서는 병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능한 장수의 용병술(用兵術)은 예컨대 상산(常山)에 서식하는 솔연 (率然)이란 큰 뱀의 몸놀림과 같아야 한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날아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벼든다. 또 몸통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덤벼든다. 이처럼 세력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 

옛부터 서로 적대시해 온 '오(吳)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吳越同舟]' 강을 건넌다고 하자.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큰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 한다면 오나라 사람이나 월나라 사람이나 다 같이 평소의 적개심(敵愾心)을 잊고 서로 왼손, 오른손이 되어 필사적으로 도울 것이다. 

전차(戰車)의 말[馬]들을 서로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퀴를 땅에 묻고서 적에게 그 방비를 파괴 당하지 않으려 해봤자 최후에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의지(依支)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필사적으로 하나로 뭉친 병사들의 마음이다." 

夫吳人與越人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遇風 其相救也 如左右手.  
 
吳 오나라 오. 越 넘을, 월나라 월. 同 한가지 동. 舟 배 주. 
 
[동] 同舟濟江(동주제강) : 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즉 원수라도 한가지 일을 위해서는 돕게 된다. 
     同舟相救(동주상구) : 이해관계에 얽혀 있으면 자연히 돕게 된다. 
     오월지쟁(吳越之爭), 오월지사(吳越之思), 
     호월동주(胡越同舟), 오월지부(吳越之富) 

[출전] '孫子兵法' 九地篇



치료하시는 하나님(출애굽기 15:22-27)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16세기 프랑스에 암브로스 파레라고 하는 유명한 외과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한평생 많은 환자를 돌아보았는데 그 때마다 그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이 말을 묘비에 새겨놓았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 묘비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묘비명은 이렇습니다.

"나는 상처를 싸매어줄 뿐이다. 상처를 고쳐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한평생 이 마음으로 환자를 돌아보았다는 말입니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이사야 38:16.

성 프란시스가 자기 고향에 있을 때, 하루는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인은 물을 길을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행동을 했습니다.
큰 물통을 내려 물을 가득히 담은 후 끌어올릴 때 항상 조그마한 나무토막 하나를 그 물통 안에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프란시스는 하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하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을 퍼 올릴 때 나무토막을 물통 안에 넣으면 물이 요동치지 않게 되어 물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수 있어요.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서 나중에 반통 밖에 안 될 때가 많거든요."

하인의 설명을 들은 프란시스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자기 친구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이것은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과 같은 것이지.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막대기를 던져보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져주시고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예레미야33:6

젊은 자동차 정비사가 헌차를 한대 싸게 샀습니다.
거의 굴러가지 않을 정도의 고물차를 열심히 수리해서 타고 달리니 기분도 좋았고 자기의 기술이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그 차를 운전하여 약간의 장거리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엔진 이 털털 거리더니 딱 멎어 버렸습니다.
젊은이는 차에서 내려서 엔진의 뚜껑을 열고 고장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지나던 차 한대가 옆에 대고 정차하더니 노인 한 사람이 내려와 젊은 정비사의 곁에 와서 엔진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청년 정비사는 그 노인을 바라보고 "문제없습니다. 그냥 가세요. 나는 정비사이니까요."라고 하면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여기 저기를 찾아 만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장을 고치지 못하고 발동은 여전히 안 걸렸습니다.
그때까지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말했습니다.
"젊은이, 내가 좀 도와주지."그러면서 손가락 한 개로 엔진의 한 부분을 톡, 친 후 "자, 발동을 걸어 보시요."라고 했습니다.
의심쩍은 얼굴로 청년이 발동을 걸어보니 엔진이 붕, 붕 하며 잘 돌아갑니다.
기가 막혀진 정비사 청년은 그 노인을 향하여 의아스러운 눈으로 물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네. 나는 이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입니다."
만든 사람은 그것을 잘 고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와 질병을 능히 치료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병과 영혼의 병과 생활의 병을 다 고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세상의 모든 질고와 인간의 모든 삶의 슬픔을 짊어지려 오신 것입니다(사 53:4).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 개인과 직장과 나라에 마라 같은 쓴 것이 홍수같이 밀어닥친다 해도 모세처럼 엎드려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단 세상이 됩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었다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땅’도 고치시는 분입니다(역대하 7:14).

옛날 어른들이 아주 좋은 일이 생기면 “인생 도처 유청산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푸른 산이 있다는 쾌가의 소리입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고 수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처음에는 쓴물을 만나 심히 아파 고생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징조와 말씀(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은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출생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은 700년 후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 예수의 탄생으로 성취됩니다.
예수가 그의 공식적인 이름이라면 임마누엘은 그의 이 땅에 오셔서 행할 미션을 나타내는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 이 땅에 오신 미션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 구원의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이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거룩한 구원자가 되시고자 이 땅에 오신 분,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00년 전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 구원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 가운데 오신 것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현존의 체험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만난 순간부터 이 하나님 현존의 체험 속에 평생을 살아갑니다.
구원의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를 우리는 구주와 동행자로 만나야 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태복음 8:5~13)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며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이처럼 한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칭찬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10절에서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라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을 놀라게 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주님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까? 사고를 쳐서 그렇거나, 주님 앞에 고집을 부려서 말고,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까? 백부장의 믿음에 주님이 완전히 감동을 먹었습니다.

감동이라는 것은 의례 그럴 것이라는 상식 적인 판단을 벗어날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부부나 부모 자식의 관계가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 가다 한 번은 서로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아 이 남자가 이런 줄 몰랐어.’, ‘아 이 여자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하고 감동을 해야 그 사랑이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다시 보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게 만듭니다. 부부도 서로 존경을 하는 사랑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남편의 믿음직한 모습 때문에 평생을 사는 것 아닙니까? 맨 날 사고만 쳐서 놀라게 하는 남편이라면 어디 같이 데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아내의 위로의 한마디나 깊은 서랍 속에서, 오래 동안 틈틈이 모아둔 통장 하나를 꺼내 들 때 남편이 감동을 먹는 것 아닙니까? 이제 올 한 해도 몇개월 남지 않았습니다. 부부간에 감동적인 사건을 하나씩 만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백부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감동시켰는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백부장의 모습을 보면 그가 예수님을 감동케 한 것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인격과 믿음을 보며 우리의 인격과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 겸손한 사람

백부장은 부하 100명을 둔 중대장급의 장교입니다. 아마 그는 가버나움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파송된 로마 장교로 이방인임에 분명합니다. 로마 군단은 백부장의 위치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실제 전투력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죽음을 무릎 쓰고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워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이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던 것을 볼 때 백부장은 이 지역 사회에서 꽤나 권세 있는 자리라 할 것입니다. 로마군단에서 존경받는 백부장이 식민지의 점령자로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권세가 대단할 것입니다. 우리 일제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칼을 찬 일본 순사가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아이들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이 일본순사입니다. 상대는 식민지 백성이고 자신은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거들먹거리겠습니까? 우리들도 그렇잖아요. 조그만 권세만 쥐어주면 그것 가지고 얼마나 교만합니까? 물질의 권세가 주어지면 그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나 되는 냥 수준을 따지고 무시를 합니다. 교회에서 조그만 직책이 주어지고 동네에서 반장 완장이라도 차게 되면 얼마나 목에 힘이 들어갑니까?

그러나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7장 1절 이하에도 동일한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간청하면서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7:5)고 칭찬합니다. 백부장은 자기의 권세로 위력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그 지역 사람들을 위해 겸손히 수고하였습니다. 자기 돈과 시간을 내어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 올 때의 태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주님” 이라 부르며 겸손하게 간청을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야 당연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인정을 하지만 예수님이 막 공생애를 시작하던 당시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아서 주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활동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상대가 아무리 현인이요 능력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까무잡잡한 식민지 백성의 한 사람인데 “주여”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진리되신 예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에 가시려 하니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며 사양합니다. 존귀한 주님이 누추한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도 황송하여 감당 못한다는 태도입니다. 자고로 겸손한 사람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물은 낮을 곳을 향하여 흘러 흘러갑니다. 그러다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 바다를 이룹니다. 세상에서 바다보다 크고 힘이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수용성을 말합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고 완고하면 그 안으로 어떻게 예수님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백부장이 겸손히 그 마음을 비웠을 때 은혜가 그 속에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사람

6절의 백부장의 말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지극한 사랑의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자기 종의 고통을 마치 자기의 아픔이나 된 것처럼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종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하인은 주인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라는 학자가 농사 기구를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첫째는 소리 없는 도구(농기계)요 둘째는 말 못하는 도구(소 말)요, 셋째는 말하는 도구(종)였습니다. 종은 말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을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우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은 주인이라도 자기 하인이 아프다면 형식적으로 의원에게 몇 번 보일 뿐이지 예수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주인이 친히 나아와 이렇게까지 머리를 조아리겠습니까? 

사랑이 기적을 만듭니다. 한 사람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백부장을 예수님과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소중합니다. 그 한 사람을 정성껏 대하십시오. 회사에서 부하 직원들을 단순히 노동력을 착취하는 대상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사랑의 대상으로 알고 그들을 위해 주십시오. 상사를 월급이나 주는 존재로 보지 말고 그를 한 사람으로서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서로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그러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상사는 부하의 앞길을 열어줄 것이요, 부하 직원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중국의 고사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오기(吳起)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가 중산국을 공격할 때, 한 병사가 심하게 다쳐 상처가 진무르고 고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오기 장군은 그 병사의 고름을 자신의 입으로 빨아주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그 어머니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하서 그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장군이 당신 아들을 그처럼 아끼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통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기 장군이 예전에도 그 아이 애비의 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장군을 위해 용감히 앞장서서 싸우다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장군이 다시 내 아이의 고름을 빨아 주었다고 하니 이 아이 역시 생명을 걸고 장군을 위해 싸우다 죽고 말 것 아닙니까?” 

사랑을 보여주면 그 열배, 백배로 보답하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인색하여 자기 계산이 너무 빠르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탐합니다. 백부장은 지극한 사랑의 사람이었고 이 사랑이 예수님을 감동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한 것은 백부장의 믿음이었지만 믿음 이전에 백부장은 이처럼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믿음과 인격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인격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둘 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 주위에 믿음은 좋은데 인격이 좋지 않은 사람하고, 믿음은 별로인데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친구로 두고 싶습니까? 저는 단연코 믿음은 별로이지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믿음이야 시간이 지나가면 생길 수 있지만 인격이라는 것은 좀처럼 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좋지 못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면 나중에 또 그 인격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만큼 우리 인격을 수양하고 가꾸는 일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격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인격의 좋고 나쁨은 하나님 보시기에 도토리 키재기일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생활하기에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편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에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는 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그의 인격입니다. 생활에 절제가 있고 가정에 모범이 되는가? 사람들로부터 선한 증거를 얻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성경의 원리를 벗어나 장로를 선출할 때 겉으로 드러난 믿음, 그것은 주로 헌금이나 교회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는데, 그것만 보고 그 인격이나 능력은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이후에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맙니다. 백부장처첨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사람

백부장의 뛰어난 점은 그가 이처럼 인격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은 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군인들이 그렇지요. 군인들은 명령에 절대복종합니다. 심지어 최전선에서 돌격 명령이 떨어지면 죽음을 무릎 쓰고 공격하는 것이 군인정신입니다. 군대에서는 명령불복종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상관의 명령 한 마디가 이처럼 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백부장은 주님이 집에 오실 것도 없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8) 하고 요청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는 “다만 명령만 내리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아무리 중풍병이라도 순종하여 떠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확신입니다. 거리가 멀고 가깝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리가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그대로 집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백부장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부장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를 때 그는 형식적인 호칭으로 “주님”이라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주님이라 할 때는 첫째 나는 당신의 어떤 명령에도 따르겠습니다는 순종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둘째, 당신은 온 땅과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당신의 어떤 명령도 그대로 성취된다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나 불순종합니까? 성경이란 것은 주님의 명령과 약속으로 가득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백부장은 오실 것도 없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십시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말씀으로는 부족합니다, 직접 오십시오, 직접 보여주십시오.”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군인정신으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옛날 군대에서 군인정신이 무어냐고 물으면 농담 식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무대뽀다.” 라고 답을 했습니다. 군인 정신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무대뽀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 판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군인 정신은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장되십니다. 우리 대장되신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성 프랜시스의 예화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수도원에서 농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마침 배추 모종을 심고 있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 두 젊은이들에게 배추 모종을 주며 “뿌리는 하늘로 향하게 하고 그 잎은 땅에 묻히도록 심으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명령하고는 그에 대한 질문도 받지 않고 성 프랜시스 사라졌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두 젊은이는 처음에는 순종하여 성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배추를 심었습니다.
그러다 그 중 한 젊은이는 도무지 그런 불합리한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뿌리를 하늘로 향하도록 심는 경우가 어디 있나 싶어 정상적으로 뿌리가 땅을 향하도록 심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젊은이는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계속 해서 심었습니다.

누가 성 프랜시스의 수도자로 받아 들여졌겠습니까?
한참 후에 돌아온 성 프랜시스는 자기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심은 젊은이를 수도사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젊은이는 돌려보냈습니다. 프랜시스는 순종하는 마음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유혹이 많은 수도 생활을 하려면 생각이 복잡하면 안 됩니다.
스승의 말에 단순히 순종할 줄 알아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모순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라도 우리 판단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우리 문제가 풀립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사실 인생의 문제는 생각이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그래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보더라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따르다 보면 길이 보이는 법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기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그대로 빛이 있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뉘어라 하면 그대로 나뉘었고, 식물이나 새나 동물이 있으라 하면 그대로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씀에 가장 순종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 하여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회개하라고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이 성경이란 것은 말 안 듣는 인간들을 향하여 제발 내 말 좀 들으라는 하나님의 답답한 호소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도 부족하여 하나님 우리에게 직접 음성으로 또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님 직접 보여주십시오 하고 떼를 씁니다. 백부장은 우리 집에 오시는 것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예수님을 억지로 우리 집까지 끌어들이려 합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주님은 백부장을 향하여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3)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던 백부장에게는 그 하인이 그 즉시로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네 믿은 대로’가 진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우리 인생은 기적으로 가득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거나,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결과는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퍽퍽하고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더라도 자기가 좋은 부분만 취해서 믿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나라와 그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백부장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으로 고친 이 이야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주권자로서의 권능입니까?
아니면 백부장의 믿음입니까?
이 이야기의 초점은 백부장의 믿음에 있습니다.

11절과 12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백부장의 믿음과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소속해 있는 이스라엘 나라의 본 자손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주님을 믿지 않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은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점입니다.

학자들은 마태복음 8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50년이 넘은 때입니다.
물론 전승이라는 형태와 직접 본 증언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사건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마태복음을 기록 할 때 순전히 예수님 시대의 상황만 문제가 되었겠냐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며 마태교회의 당시 상황들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라의 본 자손”은 단순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에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찍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내가 교회에 직분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부장에게 주어졌던 칭찬처럼 “이 만한 믿음”의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만한 믿음”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평범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칭찬하신 “이 만한 믿음”에 도전하십시오.
이 믿음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교회가 크건 작건, 내가 큰일을 하건 작은 일을 하건, 내가 높은 자리에 있건 낮은 자리에 있건, 내가 부유하건 가난하건,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만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백부장과 같은 “이만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나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나 유대인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자선을 하며 회당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등 경건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나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하인을 위하여 예수님께 나와서 간절하게 빌었다는 것은 좀 이례적입니다.

하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주여’ 라는 최고의 존칭을 사용하며 찾아 나온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의 부탁을 들으신 후 더 이상 세세히 묻지 않으시고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직접 백부장의 집으로 찾아가 들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의 통념상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죄인 취급되었고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시의 통념을 깨고 이방인 집에 들어가시려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백부장의 하인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에 감동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방인의 집에 찾아오시겠다는 예수님의 반응에 놀란 것은 백부장입니다.
그리하여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을 심히 놀라게 한 것은 단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하는 다만 말 한 마디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는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단순한 치료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말씀 한마디로 병자를 고치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이루어지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말씀으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입니다.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고,  ”하늘이 있어라“고 하시니 하늘이 있고,  ”땅이 있어라“고 하시니 땅이 있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이미 나흘이나 무덤에 놓여 있던,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도 문둥병자가 치료받은 것도,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하늘에서 만나를 이슬비처럼 내리시고 동풍 바람을 불어 메추라기( 鹌鹑 )을 지면에 가득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을 놀라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자비의 행동입니까? 아니면 그의 믿음입니까?
자선과 선행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권면하고 힘쓰고 칭찬하는 일입니다.
자선과 선행,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돕는 일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제아무리 많은 자선과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해지고 병자가 나음을 받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 한마디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란 것은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내게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니까?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어서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까?
만약 기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없고 문제도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가 믿음으로 자라도록 끊임없는 도전과 갈등 속에서 자라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기도하게 하시고 더 순수한 믿음으로 단련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 마다, 예수님께 구하기만 하고, 매일 마다, 예수님께 청하기만 하고, 매일 마다, 예수님께 원하기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야고보서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때로는 나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는 없는지… 믿음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된 신앙인의 특징은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고 봉사도 많이 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정해진 시간에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다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묵상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 세상사에 분주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 스스로를 좋은 신앙의 소유자로 자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여 주여 하는 습관적인 신앙인의 특징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스라엘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의 믿음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백부장은 자신의 사랑하는 하인을 위하여 모든 약을 써보고 유명한 의사를 다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으나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재물로 지혜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라는 말은 ‘인간의 일의 끝에 곧 하나님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이 아직 무엇인가 의지할 만한 것이 있을 때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력이나 연약함을 깨닫게 되어서야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 위에 권위가 있음을 알고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정한 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萬事는 주님이 원하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한다.’라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의 뜻과 시기, 권능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날 모든 일은 봄에 봄눈 녹듯이 풀어질 것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절)

이곳에서는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백부장의 믿음과 확신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애쓰고 분내고 다투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관이 명령하면 그것은 그대로 실행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병이 순종하여 물러나가리라 믿었습니다.

생각하건대, 그는 분명히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읽되 유대인 학자나 일반 유대인처럼 지식을 위해서 라든지, 아니면 암송을 위해 읽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알고 국가의 권위를 알고 상사의 권위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권위가 어디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의 말이 예수님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1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큰 믿음 입니다.
믿음이란, 단지 내가 주를 향하여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고 봉사생활을 하는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한없이 부족하고 실수 많은 사람이며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폐부를 꿰 뚫어보시는 분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재능과 가졌음을 자랑하지 말고 그분 앞에 날마다 나아가는 사람이 되십시다.

믿음이란 예수님은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내가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예수님과 나 사이의 관계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그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고 사랑 안에 구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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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의 바일 종교(신명기 7:1-5)


하솔 왕 야빈이 주도하였던 북부지역 연합군에는 당시 원주민이었던 여섯 종족이 포함되어 있다(수 11:3).
이들은 가나안 족속, 아모리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 히위 족속들이다.
여호수아서 다른 곳에서도 이들은 이스라엘과 대항하여 싸운 종족들로 언급되어 있다(수 9:1).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이었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 :

성경에서 가나안인과 아모리인은 자주 혼용되어 사용된다. 그렇다고 이들 두 종족 사이에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인은 무엇보다도 가나안 땅과 관련이 있다.
가나안땅은 요단 동편을 제외한 서부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뵈니게 지방(오늘날의 레바논)과 시리아의 남부 지역을 지칭하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가나안인은 지중해 해안지대와 이스르엘계곡 및 요단계곡 등지에 밀집하여 살았던 서북셈족을 의미했다.
이들은 산지 쪽으로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반면에 '서부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모리인은 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시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서북셈족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이들은 주전 2000년대 초 유랑하는 유목민 형태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와 주로 산간지역에 정착하였다. 후에 이들은 요단동편 고원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여 그곳에 아모리 왕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성경이 아모리인들은 주로 산지에 사는 사람들로, 가나안인들은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로 구분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민 13:29; 신 1:7). 그러나 아모리인들은 여러 세기를 거쳐 그 땅에 살면서 가나안의 언어와 사회와 문화에 잘 동화되어 엄격하게 이 두 종족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2. 헷 족속 :

헷 족속은 오늘날의 터키 중부지역에서 주전 17세기부터 이집트제국과 세력을 겨룰 만큼 강대한 히타이트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전 13세기 이후로는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에게해 주변의 해양민족들이 이들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헷 족속들은 히타이트 제국시대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하여 살았다. 그런 종족의 이동은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 이후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 당시 헤브론 지역에 살던 사람들도 이들 헷 족속들이었다(창 23:10; 25:9). 여호수아 당시 북부지역에도 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헷 족속의 생활영역이 널리 분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3. 브리스 족속 :

브리스 족속에 관하여는 역사적 자료가 빈약하여 그들의 기원이나 역사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족장시대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 거주하였던 가나안의 원주민임이 분명하다(창 13:7; 15:20; 34:30).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하여온 아모리족의 한 분파로서 가나안의 산간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살았다. '브리스'라는 명칭은 히브리어로 '산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4. 여브스 족속 :

여브스족은 함의 아들이었던 가나안의 후손들로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였던 소수민족이다(창 10:16). 이들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여브스는 예루살렘의 별칭이 되기도 하였다(삿 19:10, 11; 대상 11:4, 5). 그런 점에서 여부스 족속은 남부지역의 아모리 연합군 결성을 주도하였을 뿐 아니라 하솔의 야빈이 주도하였던 북부지역의 연합군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한 셈이다.

5. 히위 족속 :

히위 족속과 호리 족속은 같은 종족일 가능성이 높다. 성경 자체도 그런 점을 증거하고 주고 있다. 히위사람 시브온(창 36:2)이 바로 뒤에서는 호리사람 시브온(창 36:20)으로 지칭되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서로 비슷한 두 이름은 칠십인역에서 혼용되기도 한다(창 34:2; 수 9:7).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호리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것은 이집트인들이 팔레스타인을 '후루' 곧 호리사람들의 지역이라고 지칭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히위족들은 팔레스타인 내의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살았음이 분명하다. 기브온과 세겜, 레바논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이 히위족들과 연관되어 있다(창 34:2; 수 9:7; 11:3; 삿 3:3).

영적 순결이 승리의 비결(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여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보다 먼저 살던 일곱 족속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보다 수가 많고, 신체적으로 강했으며, 성읍들도 월등하게 우세한 위치에 있었습니다(1).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2).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기겠다고 결정하셨기 때문에 결국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군사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려면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들과는 어떤 방법으로든 결코 타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2-5). 이 원칙을 지키면 하나님의 군사들에게 승리가 보장됩니다.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의 영적인 순결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의 선택(6-1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무척 기뻐하셨는데
(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신 까닭은 그들의 숫자가 많거나 자랑할 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비하여 풍족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선택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이스라엘이 적다는 것은 단지 숫자가 적었다는 뜻만이 아니라 무가치하다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7).
이스라엘은 수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대단할 것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구출하셨기 때문에(8), 특별한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출애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예표하는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이라는 이름

가나안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없다.
그러나 가나안만큼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이름도 없다.
가나안 땅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우상숭배와 음행과 타락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땅이요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나안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이 두 가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요소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가나안의 이름은 얼마든지 왜곡과 도용이 가능한 이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나안이라는 이름의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매우 사악하고 거칠고 공격적이다. 그들은 여러 개의 분산된 개체로서 이합집산의 산발하는 떠돌이로 출몰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나안은  하나의 이상향이자 소망의 대상이지만 실제의 가나안은 안락함이 있는 낭만적인 곳이 아니라 치열한 전투장이고,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타락의 땅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저주받은 땅으로 등장한다.

가나안이라는 이름으로 시대마다 지역마다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는 이들은 이스라엘을 역사적으로 시종일관 괴롭히고 성가시게 한다. 결국 그들의 유일한 공격 대상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었다. 족보상으로는 분명히 가나안은 노아의 후손으로서 동족의 피를 나누고 있지만, 이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은 오직 원수일 뿐이다. 특히 일명 '가나안 7족'으로 호칭되는 부족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략질과 침공과 탄압으로 일관한다. 이스라엘과 가나안 부족은 단 한 번도 평화의 시기를 보낸 적이 없다.

이러한 가나안의 상징성과 의미는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경각심을 깨우쳐 주는 도구다. 지금도 가나안의 이름을 가진 실체 없는 악한 대적이 살아있는 신앙인들을 쉼 없이 공격하고 괴롭히고 공격하고 넘어뜨리고자 유혹하고 있다. 이에 가나안의 정체를 살피고 연구하고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일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사악한 영의 도전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비법을 터득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가나안(Canaan)은 히브리어로 '케나안'인데 이는 '법률, 혹은 평평한 땅'을 뜻한다. 가나안은 사람 이름에서 유래하여 지역의 이름과 한 부족의 이름이 되었다. 원래 가나안은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막내 아들이다(창 10:15). 가나안족은 바로 그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 따르면 가나안은 그의 아버지 함이 노아의 벗은 몸을 보고 버릇없이 행하여 노아로부터 아버지 함과 함께 저주를 받았다(창 9:24). 노아는 함과 가나안을 향해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5)"고 했다. 이 저주는 당장 가나안에게 실행된 것이 아니라 후손에 이르러 이루어진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가나안족들을 종들로 삼아 부리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가나안족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결론나지 않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가나안 7족만을 가나안족으로 삼아야 할지, 그들이 살았던 지역은 또 어느 곳인지에 대해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일부 학자들은 주전 5세기 알라라크(Alalakh) 왕 이드리미의 비문에 있는 '마 아트 키 인 아 님(ma-at ki-in-a-nim, 가나안의 땅)'이라는 언급을 기초로 갈대 혹은 진한 자줏빛을 뜻하는 악카드어 어근 키나(Kina)와 가나안을 동일시한다. 또 주전 15세기 누지문서에 표기된 '키나후'(kinahhu, 가나안 사람의)라는 형용사가 원래 '자줏빛의 염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가나안족과 진한 자줏빛 직물과의 상관관계를 논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학자들은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가나안족의 고향 혹은 정신적 명사로 상징되는 이름이라는 해석을 지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어떤 특별한 사회 계층, 즉 상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히브리어 '케나아니'는 상인, 혹은 통상하는 자를 일컫는다. 상인으로서 가나안의 이름은 애굽의 아멘호텝 2세(주전 1449-1433)의 비석에도 나오고, 18세기 발견된 '마리서신'에는 도둑질하는 상인에 대한 언급을 하는데, 이때 상인이 가나안인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다.

성경과 함께 역사 속에서 가나안 족속은 갖가지 사회 정치 문화적 분류 속에 열거된다. 이는 노아의 손자 가나안이 낳은 자녀들과 그 후손들의 번창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이다. 성경에는 가나안의 후손이 무려 11개 부족에 이르고, 그 분포지역이 팔레스타인 전체를 뒤덮는다고 보도한다.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창 10:15-19)

저주 받은 떠돌이들

상기 기록에 의하면 우선 노아의 손자 가나안은 11명의 자녀들을 낳고 이 자녀들이 그 이름대로 각 후손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후예는 모두 11개 부족이 되는 셈이다. 이들은 모두 저주 받은 함의 후손들이기도 하다.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과 격리된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저주는 마귀의 자녀들의 출현과도 상관성이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연모하여 그들을 아내로 삼은 것에 대해 진노하시어 홍수 심판을 단행하셨고, 그 결과 생존한 사람은 노아와 그 아내와 아들 삼형제와 세 며느리를 합해 8명이었다. 만약 함과 가나안이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이 후손들 모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 복락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함과 가나안은 노아의 벗은 몸을 보고 그것을 힐난하는(?) 잘못을 범하여 저주를 받게 되고 하나님은 가나안족속의 경계를 정하고 난 다음 여러 곳으로 흩어지도록 심판하셨다.

가나안 족속의 영토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민수기 34:1-12절 에스겔 47:15-20절과 48:1-28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하살에난에서 바산까지, 서쪽으로는 지중해까지, 남쪽으로는 사해, 북쪽으로는 아무르왕국과 접경을 이룬 하맛 어귀까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위 성경에 기록된 가나안 족속의 경계는 현재의 지명으로 확인이 정확히 되지 않는 지역들이 대부분이다. 시돈과 그랄, 가사와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라사가 정확히 어디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직까지 모두 파악하지 못한다.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고대할 뿐이다.

대신 역사 문헌에 나타나는 가나안 지역에 대한 언급은 가나안 영토에 대한 간접적인 지식을 제공한다. 주전 14-13세기 애굽 문서에 의하면 가나안의 남쪽 경계는 '와디 엘 아리쉬(애굽 시내)'라고 밝히고 있다. 이곳은 실레(sile)로 부터 가사에 이르는 군사로가 있는 곳으로, 여호수아 15:1-4절에 의하면 사해 남동 해변까지 연장되어 있다. 즉 가나안 족속의 영토가 서로는 지중해, 북으로는 하맛 어귀까지요, 동으로는 하살에난에서 바산까지, 남으로는 사해까지로 나타난다.

여러 곳으로 흩어진 이들은 셈족, 비 셈족 요소로 이루어진 다양한 종족의 문화적 집단으로 성장한다. 후대에 이르면 가나안 족속이라는 말은 베니게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청동기 시대 때엔 특별히 가나안 문화의 계승자들이 나타남으로 하나의 독특한 문화의 양식을 소유한 부족으로 이해되기도 하며, 이후 가나안 족속은 갖가지 사회·정치·문화적 분류 속에 열거된다. 성경은 이들의 다양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창 36:2-3)".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 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접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개척하라 하니라(수 17:15)".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겔 16:3)".

그런데 평화로웠던 초기 가나안의 촌락과 성읍은 주전 2,300년경 애굽 제6왕조의 침입으로 파괴되기 시작한다. 이후 주전 2,000년부터 약 1,800년까지 가나안은 애굽 제 12왕조의 지배에 놓인다. 주전 18-17세기에는 힉소스 왕조와 함께 가나안 지역에는 강력한 성벽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도시들이 등장한다. 이들에 의해 주전 16세기 힉소스 왕조가 추방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애굽은 투트모스 3세 등이 가나안을 재침공하여 탈환을 시도하지만 이후 애굽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가나안 지역에는 헷 족속의 도시들이 성장하여 중심 세력이 되었다.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지도 아래 출애굽하고,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에 들어갔던 때가 바로 애굽과 가나안이 갈등을 겪던 시기였다.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열악하기 그지 없던 히브리인들이 강력한 도시국가로 무장한 가나안 지역에 들어가 정착한 것은 한 마디로 기적이었다.

애굽을 물리치고 앞선 문명국가였던 가나안은 그렇게 힘 없이 오합집산에 불과한 이스라엘과 주전 13세기경 지중해 연안에 정착한 블레셋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가나안 역사는 이렇게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문화와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가나안 인들이 사용하던 알파벳은 히브리어와 우가리트어, 페니키아어에 영향을 미쳐 현대 서양 알파벳의 기초가 되었다. 또 가나안인의 신들은 히브리 문학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오직 현세에서의 번영과 자손의 축복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존재한 가나안 신들은 이스라엘을 현혹하기에 다채롭고 매력적인 우상으로 군림했다. 이를 위해 가나안 신들은 매춘행위를 종교적 의식으로 격상시켜 매춘에 대한 죄의식을 무디게 했다.

비와 폭풍의 신인 '바알(주인)', 천둥의 신 '하닷', 곡물의 신 '다곤', 사랑의 신 '아세라' 등이 이스라엘 족속을 유혹한 대표적인 우상들이었다. 특히 '엘'이라는 용어는 구약 성경에도 그대로 차용되어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 '엘 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로 유입되었다.

교훈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안에서 일명 '가나안 성도'라는 별칭이 공유되고 있다. 나름대로 여러 이유로 기존 교회에서 이탈한 채, 교회 출석을 미루거나 탐색하거나 저항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물론 이런 용어가 합당하다거나 이들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런 부류의 성도들이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엄연한 현실이고, 마땅히 기존 교회와 지도자들과 책임자들이 이들이 제기하는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탐구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노아는 가나안에게 저주를 행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가나안 족속을 저주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마치 야벳이 셈의 장막 안에 거할 때 축복을 받는 것처럼 가나안 족속에게 영원히 저주를 내린 것이 아니라, 훗날 헷 족속으로 하여금 셈의 후예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헷 족속으로부터 매입했고(창23장), 다윗은 그의 수하에 헷 사람 아히멜렉(삼상 26:6)과 우리아(삼하 11:3)를 두었으며, 솔로몬 왕은 헷 사람과 혼인동맹을 맺고(왕상 11:1) 그들과 무역거래를 하였다(왕상 10:29). 이것이 가나안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大구원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속히 '떠돌이 성도'들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들에게 바른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고 참된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증거해야 한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참된 경건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모든 주의 종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너무 많은 실망감을 안겨준 것이 사실이다. 강제된 헌금과 각종 기부금 등에 얽힌 돈 문제, 교회 권력을 놓고 벌인 아귀다툼들, 성적 문제 등 차마 인정하기 싫은 부끄러운 사건들의 주인공이 되어 추태가 되고 세상으로부터 질타를 받는 초라한 신세가 된 것이 사실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大개혁'을 선언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교단과 교회가 앞장서서 새로운 선언문을 작성하고 신앙을 새롭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앞세우고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 새로운 한국교회의 깃발을 높이 쳐들어야 할 것이다.

'진리의 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이다. 이 성령의 바람은 회개한 자의 심령에 부는 바람임을 명심하자.

가나안의 종교는 부정하고, 잔인하고 부도덕 했다


그 이유는 그 종교의식은 다신적이고, 인위적이고, 정욕적이며, 제물로는 인간의 귀중한 생명이 드려졌기 때문이다.
또 종교의식 중에는 추잡한 성적인 행위들이 성행되어 사회의 부패타락을 조장했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를 볼 때 알 수 있다(신 7:1, 20:1-3~20 출 34:13, 수 11:14).

또 가나안의 문화적 발달로 가나안 족속들의 유적에서 발굴된 신전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를 뒷받침하고 하나님의 뜻을 해명하여 주는 고고학적 업적을 살펴보겠다. 

가나안 종교에 대한 이론적이고, 변증적인 연구는 엉거(Unger)교수가 그의 저서 “구약과 고고학”(Arcjaeology and the Old-Testament)에서 설명하였다(p. 167~177). 

그는 가나안 종교의 의식과 가나안 신전과 신에 대해서만 아니라 가나안 우상의 보편적인 성격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가나안 종교의 제신과 고고학적 증거와 우상의 성격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겠다.

1. 가나안 제신들

가나안 제신들 중에 중요한 신은 바알이라 하겠다.
바알에게는 아내 신이 있는데, 아스데라라는 여신이다.
이 여신은 자연의 생산을 의인화한 것이며, 바벨론(Babylon)에서는 이슈달이라 불리웠고, 헬라 및 로마에서는 아스달데라고 불리워졌다.
바알을 복수형으로 한 바아람은 바알의 상을 의미한다.
아스달데의 복수형의 돌, 또는 나무의 줄기를 야수리라고 부르며 여신을 상징했다(신 7:5, 출 34:13)
바알의 신전과 아스다롯의 신전은 일반적으로 같이 있었다.
그 신전의 여사제는 신전 매춘부이며, 소돔인 중에는 신전에 남성 매음자도 있었다.
바알 예배는 엉터리 축제였다.
그들의 신전은 악덕의 중심지였다. 

2. 고고학적인 증거

악덕한 가나안 종교는 고고학의 발달로 햇빛을 보게 되었고, 우리들의 눈으로 정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

1904-9년에 머카리스타가 팔래스틴 탐험 기금에 의하여 행한 게셀발굴에서 주전 1500년경 이스라엘이 가나안 점령하기 전 가나안인의 문화지층 중에서 가나안 인들의 남신 바알과 여신 아스다롯을 예배한 신전 “높은 곳”의 페허가 발견되었다.

그곳은 돌담으로 둘린 노천인데 45미터와 36미터의 위곽으로 되어 있고, 주민들은 그곳에서 종교에서 종교적 향연을 행하였다.
돌담의 내면에도 높이가 1.5미터에서 3미터가 되는 10개의 돌출한 기둥들이 있어서 그 앞에 희생을 드렸다.

“높은 곳”에 있는 퇴적물 밑에서 마카리스타는 바알에게 희생으로 바쳐진 아이들의 유해가 든 대를 다수 발견했다(렘 20:1~, 19:5 ~ ).

그리고 그 지역 전체는 생후 얼마 안 된 아이들의 묘지인 것이 드러났다.

이외에도 그들은 ‘정초의 희생’이라 부르는 무서운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집을 세울 때 남은 가족에게 행운을 가져오게 하기 위하여 유아를 죽이고 그 사체를 벽속에 발라버렸다. 이런 것 다수가 게셀에서 발견되었고, 무깃도와 여리고에서 발견되었다.

희생된 유아의 시체는 함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에게 제사 드려졌다. 그 후에 매장되었다. 그러므로 바알과 아스다릇 선지자들은 유아들의 공적인 살인자였다.

또한 마카리스타는 이 “높은 곳”퇴적물 밑에서 수다한 아스다롯상과 부속물들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성욕의 유발을 시도한 듯한 심히 과장된 성기가 불어 있었다. 이와 같이 가나안인은 종교의식에서 부도덕을 일삼았으며, 이것이 그들의 신들에 대한 예배로 드려졌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자기들의 낳은 첫 아들을 죽여 바친 것이다.
이런 일은 가나안 땅 대부분의 국가들이 행했는데, 소돔과 고모라 같은 곳도 그와 같이 행했다. 

3. 가나안 우상숭배의 성격

① 부도덕   
그들의 예배는 잔인하고 정욕적이고 미신적 타락현상이었다.

② 쇠퇴하고 부패한 것
생명력이 없고, 추잡하고 무위한 것이었다.

③ 하나님 명령을 파괴하므로 하나님의 공의의 불을   끌어내린 것  
소돔과 고모라와 이웃 도시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일으킴과 같이 그들의 죄악이 가나안 멸망을 초래한 것이다(창 6:1, 9 수 15:13, 14)

④ 가나안 숭배의 무서운 악에 물들게 했다  
그러기 때문에 공의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망하게 됐다.

“이리 하고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멸망시킨 것에 대하여 의심할 수 있는 것인가? 가장 가증하고 어지럽고 야수적인 행위에 가득찬 문명이 더 이상 존재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역사상 국가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낸 하나님의 실예이다.
가나안의 페허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하나님은 왜 좀 더 빨리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나”하고 놀랐다.

4. 가나안의 세속적 풍습

신명기 14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아이들은 죽은 자를 위한 슬픔의 표시로써 스스로의 몸을 베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이 침입하려는 그 땅에 살던 가난안 족속들이 그와 같이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 비평가들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 회의를 표명하고 있으나, 가나안민족들 가운데 이러한 습관을 따랐다는 기록이 우가릿 문학(원문 67: VI: 19~22)에 실제로 나타나 있다.

원문에 의하면 바알(Baal)신의 신화적 죽음에 대해 엘(EI)신과 아나트(anat)여신이 스스로의 뺨과 턱, 팔뚝, 가슴 등을 잡아 찢으며 바알신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표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38장 25:26절에서 우리는 한 달란트가 3000세겔(Shekel)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고등 비평가들은 바벨로니아 지방에서는 한 달란트가 3690세겔이었으므로 성경이 틀린 것이라고 오랫동안 주장했었다. 그러나 우가릿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중량 단위의 발견으로 한 달란트는 3000세겔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역사적 정확성을 가졌는가를 완전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신명기 3장 11절에는 바산(Bashan)의 옥(Og)왕이 철로 만든 침대를 갖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성경 고등비평가들은, 옥 왕은 주전 1400년경에 살았었고, 가나안지방에서는 주전 1200년경까지는 철기가 사용된 적이 없었을 것이므로 이것 또한 성경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가릿시대로 추산되는 철제도끼나, 창촉, 괭이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로 미루어 보아도 가나안에서 주전 1400년 전에 철기를 사용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은 역사적 정확성을 갖고 있다.

구약에 언급되어 있는 당시의 전쟁에 관한 몇 가지 습관들도 오늘에 와서는 우가릿문학을 토대로 사실임이 입증되고 있다.

열왕기하10장 1~11절에 의하면 예후(Jehu)는 사마리아(Samaria)의 지배자들에게 그의 명을 받들어 70명에 달하는 적군의 목을 바구니에 담아 자기에게 바치게 했는데, 이때부터 전리품으로써 군인의 목을 성문 앞에 쌓아 놓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이 같은 피비린 내나는 전쟁의 풍습은 우가릿문학(Anat 11:7-13)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토판에 의하면 전쟁의 여신인 아나트(Anat)는 적군을 죽여서 승리의 상징으로 그들의 머리를 높이 쌓아 올렸다는 것이다. 사무엘상 11장 2절에는 전쟁에 관한 또 다른 풍습을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암몬사람(Ammonite)인 나하스(Na-hash) 가 길루앗야베스(Jabash-Gilead)에 사는 모든 남자들의 오른쪽 눈을 뽑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 풍습 역시 우가릿문학(IAqhat: 165~157)에 의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즉 그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왕이 자기 아들이 살해당한 그 도시에 가까이 가서 복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는 “바알신이여! 이곳이 모든 사람들이 애꾸눈이 되게 하소서”하고 저주에 찬 소리를 외쳤다는 것이다.

신명기 3장 9절에는 헬몬산(Mt, Hermon)이 언급되었다. 헬몬산은 우연히 “시돈 사람들이 시돈이라고 부른다”는 점이 첨가되어 있다. 이점 역시 성경의 기록이 놀랄 만큼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우가릿 원문(51:VI:19)에 의하면 시돈시 근처의 우라릿 지역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들은 헬몬산을 시돈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5. 가나안인의 윤리관

 

우가릿 문학이 구약성서의 진실성을 입증해주는 또 다른 분야가 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자기 선민에게 되풀이 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 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0:7).

이스라엘민족은 항상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만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내려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비록 타락해 있던 시절에도 이방 민족이 완전히 흑암시대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구제불능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주어지는 한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민족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선지자가 일어났다. 또한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성경 말씀에 복종하고자 하는 남은 자들이 항상 있었다.

가나안족에게는 그러한 요소들이 없었는데, 제신들을 숭배하고 제신들이 사악행위를 범하는 것 등은 사실로 보다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다․․․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4, 8).

우가릿 문학에는 제신이 인간들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아주 재미있는 예가 나와 있다. 우가릿 문학원문(2Aqht: VI: 15~3, Aqht:40)에 보면 아낫(Anath)여신이 어떤 왕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마술 활을 탐내었다는 얘기가 있다. 여신은 그 무기를 사려고 왕자와 흥정을 벌였으나 그가 팔기를 거절하자 여신은 왕자를 살해할 계획을 꾸며놓고 그가 죽은 후에 그 활을 차지했다. 가나안의 제신들은 선악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었고, 가나안 족속 역시 그러하리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얘기가 쓰여지기 몇 해 후에, 이세벨이라는 가나안여인이 이스라엘 왕 중의 하나인 아합왕과 결혼하게 되었다. 한 번은 아합왕이 나봇(왕상21: )의 포도밭을 차지했다. 이세벨은 한편으로는 가나안족속의 종교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파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한 선지자의 깨우침이 바알신의 선지자 450명과 가나안 종교의 몽매함 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이 있으므로 해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고대 근동의 이방신들

 

 

명칭

나라

지위

성경의 언급

성경에 

언급된 

팔레스틴의 

신들

바 알

가나안

젊은 폭풍의 신

다산, 음란

왕상 16:31, 18:18-46등

아스다릇

가나안

모신, 사랑, 다산

삿 2:13, 10:6

삼상 12:10; 왕상 11:5

그모스

모압

국가의 전쟁 신

민 2:29 삿 11:24 왕상 11;l7 렘 48:7

몰록

(말감,밀곰)

암몬

국가의 신

습1:5 렘49:1 왕상 11:5 7:33

다곤

블레셋

국가의 곡물 신

삿 16:23 삼상 5:2-7

하늘 황후

가나안

이스다롯과 동일

램 7:18 44:17-25

성경에 

언급된 

메소포타미아 의 신들

므르닥

바벨론

젊은 폭풍신, 주신

램 50:2

바벨론

마르둑의 다른 명칭

사 46:1

렘 50:2, 51:44

느보

바벨론

마르둑의 아들

사 46:1

담무스

수메르

젊은 폭풍신

겔 8:14

성경에 

없는 

주요신들

애굽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시리아

 오시리스 - 죽음

 이시스 - 생명

 호루스 - 태양

 하골 - 모신

 레 - 태양

 세트 - 악, 폭풍

 프타 - 명장,

      멤피스 창조자

 아누- 만신전의 우두머리

 엔릴 - 폭풍

 에아엔키 - 태초의 깊음

 신(난다) - 달

 이쉬탈 - Sex, 다산

 타아밋 - 염수(소금물)

 엘 - 만신전의 우두미리

 아나트 - 전쟁

 모트 - 죽음, 황무, 불모

 아닷 - 폭풍신(수리아)

 데슘 - 힛타이트의 모신

 아린나 - 힛타이트의 태양여신

 









신앙인(信仰人)과 종교인(宗敎人)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종교와 신앙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종교는 인간들이 자신의 복을 위해 만든 것이요, 신앙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믿도록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여  믿는 길을 알려주신 것이다.

종교생활은 인간들이 자신의 만사형통의 복을 위해 자신이 택한 신을 향해 자신의 온 힘을 다해 갈고닦은 헌신과 노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구원과 하늘의 백성 삼아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지, 내가 착하게 살고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는 종교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축복을 받아 잘 살게 하는 곳이라면, 예수를 안 믿는 우리나라 수많은 재벌들이나 세계의 모든 재벌들과 권세를 잡고 세상을 뒤흔드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며, 평생을 예수를 믿고 신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며 살아오는 사람들 중에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과 지금도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특별히 수 십 년 동안 공산독재 치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수용소에서 혹은 지하교회에서 숨을 죽이며 예배드리며 살아온 북한의 성도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들은 죄가 많아서일까요? 믿음이 없어서 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남한의 교회를 염려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이 증거 되는 곳이요, 그의 이름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 인간은 한 점 의도 없는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요, 또한 인간은 어떤 선한 행위로도 결코 의를 행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죄를 짓는 일에는 발이 빠른 금메달 선수들이며, 날마다 마음의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죄만 생산하는 죄 공장들임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 교회이며, 거기 모인 모든 자들이 “그렇습니다.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고백하고 회개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하게 하는 곳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사모하고 오직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이제 나를 점검하며 고민해 봅시다.
나는 종교인이었나? 아니면 신앙인으로 살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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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
마태복음 7:20-27


이렇게 묻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 때문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
‘너희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늘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인의 특징

22절과 23절을 통해 예수님은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①주여 주여
②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③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④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전형적인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종교인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둘째,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분명한 직분이 있습니다.
셋째,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습니다.
넷째,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누가 보아도 신앙인요, 예수님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직분을 행사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꾸짖고 내쫓아 버립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뭔가요?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21절, 26절).
즉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의 이름으로 직분을 행하면서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많은 권능을 행하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안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행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을 듣고 행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들이 전형적인 종교인입니다.

신앙인의 특징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을 듣고 행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가 신앙인입니다.
고백보다, 직분보다, 권능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떠나는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관을 버려두고 떠나는 마태처럼 말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순교할 때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삽니다’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이 신앙인입니다.

종교인의 수가 얼마나 될까?

겉보기에는 신앙인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종교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국교회 안에 종교인이 하나도 없기를 바라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묻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님들 가운데 종교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신앙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장로님들 가운데 종교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신앙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 가운데 종교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신앙인이 많을 것 같습니까? 22절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아닌 비난을 받고 있는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신앙인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라는 외침은 하늘에 메아리치고, 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임직식은 화려하고, 다양한 악기와 프로그램을 통한 예배는 축제화 되어 가고 있지만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살아야할 교인들이 아닌 예수님은 죽고 나로 사는 종교인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들 때문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기독교에서 발간된 신문마다 광고를 보십시오.
가장 많은 광고가 뭡니까? 전도훈련이요, 전도세미나입니다.
그래도 전도가 안 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인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종교인들이 생명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모든 교우들이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참 신앙인으로 거듭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종교인입니까? 신앙인입니까?’
주님 만나는 순간까지 물어야할 질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신앙인이 됩시다.





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얼마 전에 ‘오키나와 평화기행’이라는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안내인 포함 열한 명이 오키나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기지 반대운동 현장을 직접 보고 평화운동가들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태평양전쟁의 끝 부분)의 참혹함을 가장 심하게 경험해야 했던 이들은 정작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는데,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 3분의 1이 죽음을 당했고 장대비처럼 내리는 포탄으로 인해 대부분 형체를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본 본토를 대신해 미국과 대리전을 치른 땅, 오키나와의 사람들은 군대가 민간인을 보호하는 집단이 아니라 죽이는 집단이라고 이해합니다.
당연히 조상과 자신들과 아이들의 땅에서 군대가 없어야 진정 평화가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귀국하기 전날 평화운동에 대해 그곳 운동가들과 만나 활동 설명 및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간담회 형식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가톨릭 사제라고 소개했는데 우리 그룹의 여행 가이드 친구는 자기 차례가 오자, 자기는 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더군요.
순간 제게는 ‘그 친구가 가톨릭 신자인데 왜 종교인이 아니라고 하지?’ 하는 질문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종교인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고 저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인은 특정 종교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사제, 목사, 수도자 등과 같이)을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도 종교인의 개념을 세속적으로 직업과 연결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던 것입니다.
인터넷 상의 계정을 만든다거나 이력을 요구하는 서류를 작성하다 보면 직업란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직업군 목록에 ‘종교인’ 부류가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지만, 없을 때는 그냥 기타로 표시합니다.
그러니 저 역시 종교인을 일정 부분 직업으로 이해하도록 유도됐던 셈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종교인은 직업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 즉 소명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를 물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솔직히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특정 종교는 특정 신앙을 바탕에 두고 세워진 제도이니……. 둘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신앙이 좀 더 큰 거겠죠.
집보다 집이 들어서는 땅이 더 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은 사랑하는데 집에는 안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안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단 신앙인이라고 해두죠.

이에 정반대로 대비되는 사람들, 즉 교회에는 나가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 집에는 열심히 들어오는데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결혼은 했으나 배우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엔 이런 사람들을 종교인이라고 해두지요.

제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종교인’보다는 ‘신앙인’이란 말을 선호하실 것입니다. 아무래도 전자가 규범적인 틀을 더 요구하는 인상을 준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의식해야 할 것은 전자나 후자나 균형을 잃고 위에 언급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인다면, 세속적인 삶, 곧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왠지 딱딱하니) 참된 신앙인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나가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는 현장에도 나가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과 끊임없이 함께하고 화해를 시도하는 사람, 자신과 이웃이 맺은 약속(하느님과 맺은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국 기도와 실천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는 수도자는 종교인일까요? 여러분이 한 번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종교인과 신앙인

강덕영 | 상상나무 | 206쪽 | 10,000원

다국적 제약기업 한국유나이티드 강덕영 대표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생활하며 정리한 생각을 모아 신간 「종교인과 신앙인」을 출간했다.
강 대표는 “초신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 책은 기업인인 강덕영 대표의 일상이 이야기의 토대가 되고, 그 일상에서 퍼올린 신앙적인 묵상들을 잔잔한 문체로 담아냈다.

저자는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때로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따끔하게 질책하기도 하지만, 결국 저자의 소원은 평신도나 목회자 모두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야경의 절반이 십자가일 정도로 교회들이 많은 우리나라지만 신앙의 질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중략)… 지금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세대인 것 같다.”(p 45~47)

“이 할머니는 우리 회사 공장이 있는 앨라배마 주립대 근처에 사는데, 슈퍼마켓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한국 학생들만 자기 집에 하숙시키며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크리스천이 되도록 전도해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고 했다. 그들이 한국에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 없는 돈에 한국에 들렀다고 한다. 그 유학생들이 이제는 성공해서 할머니를 자기 가정에 초청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늙은 부인이 바로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분이 바로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본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p 14



또한 모태신앙인으로서 65년 동안 4대에 걸쳐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저자는, 믿음의 뿌리가 된 어머니의 믿음생활을 전하며 신앙의 유산을 나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앓던 폐병이라는 몹쓸 병에 걸리셨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기도와 찬송이 전부였다. 그리고 기도 내용은 ‘불교 집안인 친정집 식구와 남편이 예수님을 믿게 해 달라’는 기도 뿐이었다. …(중략)…

어머니는 건강이 좀 좋아지시면 봄, 가을에 수십 명의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가정부흥회를 열었고, 모든 경비는 아버지가 아무 불평 없이 후원해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께 금반지, 목걸이 등 패물을 선물하셨는데, 몇 달이 지나면 패물은 하나 둘 없어졌다. 부흥집회가 끝나면 금반지는 헌금이 되고 패물은 승인동 판자촌의 쌀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가 패물을 해주시면 그것은 어느새 연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머니는 결국 병마와 십여년 동안의 싸움 끝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 때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때 그렇게 염원했던 어머니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완고했던 외갓집 전 식구가 하나 둘 기독교로 개종했고, 지금은 외갓집 자손 어느 누구도 신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그리고 우리 집안도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다. …(중략)… 무의미하게 보이던 한 여인의 기도는 그 당시 쓸모 없어 보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위대한 기도의 힘을 알게 되었다.”(p 25~27)

강덕영 대표는 “책을 통해서 저는 씨를 뿌리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이시니 저는 씨만 뿌리는 것”이라고 전했다.

덧붙여 “종교인 같으면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하고, 목사님이라고 하면 성도를 늘리고 헌금을 많이 받고 싶을 수 있지만, 저는 목회자도 아니고 종교인도 아니고 신앙인이니, 다른 무슨 목표가 있겠는가”라며 “책을 통해 전도가 많이 됐으면 좋겠다”고 기대를 밝혔다.

난 종교인인가 산앙인인가?

수년 전 유럽의 종교 개혁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체코를 비롯해 종교개혁의 중심지 독일, 스위스, 프랑스 교회를 방문했는데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는 유럽을 중심으로 서구문명의 주체, 그 자체였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모두 좋은 자리에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들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교회인데도, 젊은이들은 아주 적고 노인들만 수십 명부터 수백 명이 출석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매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인들이 십일조를 의무화하여 열심히 헌금을 하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십일조는 없어지고 종교세를 국가에 납부하면 국가에서 목사 봉급과 운영비를 준다고 한다.

그리고 큰 교회 중에서는 성도가 떠나서 매물로 내놓은 교회가 있었고, 특히 영국에서는 큰 교회가 술집과 식당으로 팔려간 것을 보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큰 문제는 교회의 교인들이 떠나니 이혼 가정이 늘고, 가정이 깨어지니 어린 자녀들의 교육을 국가가 책임져야 되고, 의지할 곳 없는 젊은이들은 마약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우울증 환자도 증가하고 물질적인 풍요 속에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현지인의 설명을 듣고서 또 한번 교회 역할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수년 전 우리 집에 한 미국 할머니가 손님으로 오셨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촌스럽고 가난해 보이는 평범한 미국의 할머니였다. 그런데 정말 많은 곳에서 할머니를 찾는 전화가 왔다. 주로 대학 교수들이었다.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갈 예정이었는데, 그 교수들이 서로 자기 집에서 묵고 가라고 계속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이 할머니는 아주 난감한 모양이었다.

결국 인천의 모 교수가 모셔갔다. 왜 이렇게 인기가 많으냐고 물었더니 이 할머니는 우리 회사 공장이 있는 앨라배마 주립대 근처에 사는데, 슈퍼마켓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한국 학생들만 자기 집에 하숙시키며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인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다고 했다.

그들이 한국에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을 보고 싶어서 없는 돈에 한국에 들렀다고 한다. 그 유학생들이 이제는 성공해서 할머니를 자기 가정에 초청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 늙은 부인이 바로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분이 바로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본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인과 종교인의 차이를 나는 이 할머니를 통해서 정의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 반성해보았다. 또 ‘나는 성경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생활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종교인보다는 신앙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을 높이는 진짜 크리스천이 되고 싶다”라는 것이 진정한 나의 신앙고백이다.







종교인과 참 신앙인은 구별된다.
그것은 빛과 어두움의 차이요 생명과 죽음의 차이와 같다.
조화와 생화의 차이와 같다.
산헤드린 공회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를 대표하는 집단이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주도하였고 초대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다.

본문에도 스데반을 재판하는 일에 이 공회가 주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은 서기관들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필사하고 가르치고 지키는데 전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일을 하는 제사장 집단들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기둥과 같은 하나님말씀인 율법과 하나님의 성전에서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죽이고 성령이 함께하는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 말씀을 거스려 행동하고 있다.
이것을 가르켜 종교인이라고 한다.

종교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자기안에 부족과 두려움, 막연한 죽음이후의 염려와 불안을 극복하고자 좀더 선해지려고 하고 신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하고 그 신앞에 도리와 의무를 다하려고 힘쓰는 것이다.
다시말해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안에 헛된 이기심과 욕망을 덮고자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하나님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킬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인과 참 신앙인의 차이를 계속 살펴보자.

종교인과 참신앙인의 차이는 그가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않았느냐로 알 수 있다.

유대 종교인들이 왜 주님을 불신하고 성령을 거스려 행동했는가?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죄악중에 출생한 상태에서 복음진리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음으로 이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주님의 은혜에 고마워 그 주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며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중생한 사람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주님앞에 복종하게 된다.
중생하지 않는 사람은 귀(지성)와 마음(감정)에 할례를 받지 않고 목이 곧은(의지) 사람이다.

할례란 무엇인가?
할례는 칼로 자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술한다는 의미다.
옛사람의 귀와 마음이 잘리고 의지가 잘리는 것을 말한다.
나 중심적이고 교만하고 완고한 내가 잘리는 것을 말한다.
할례는 침례와 같다.
침례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용서받는 것이요 내가 잘리고 죽는 것을 말한다.
침례는 거기에 머물지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가운데서 살리는 것을 말한다(롬6:1-4). 그러면 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가? 그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다(롬6:6).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왜 살아났는가? 사망이 다시 우리를 주장하지 않기 위해서다(롬6:9-10). 그래서 거듭난 성도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다. 그래서 말씀이 들리고 말씀이 마음을 찌르고 감동하며 선한일을 하고자하는 소원과 욕구가 일어나고 하나님말씀앞에 자신을 쳐 복종시키게 된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 종교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목이 곧아 제고집대로 행하는 것이다. 믿음과 순종은 분리할 수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2.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별할 수 있다.

고전2장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다. 거듭난 사람은 주님이 어떤 분이고 어떤일을 하셨는가를 분명하게 아는자다(고전2:2). 그리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믿음을 가진자다(고전2:4-5). 복음의 진리와 영적인 것들은 성령이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다(고전2:9-10). 우리 거듭난 자들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영적인 일은 거듭난 영적인 사람만이 분별할 수 있다(고전2:12-13). 육에 속한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으므로 영적인 것들이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고 알 수도 없다(고전2:14). 그래서 거듭난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전2:16).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데반과 산헤드린 공회가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성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본다. 종교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한다. 영적인 귀가 열리고 눈이 떠지자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을 알게 된다(요5:39). 영적인 눈을 뜨자 세상의 역사도 바로 분별하게 된다. 성경을 통해서만 역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미래의 역사도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음을 알게된다. 아브라함도 유대인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천하만민의 복을 주기 위함임을 알게 된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알게 해준다(갈3:24). 또한 성전은 이러한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이 어떻게 죽으실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배의 참된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스데반은 이 모든 것을 바로 이해하였지만 종교인들은 이 모든 것에 어두워 있었다.

3.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왜 주님이 스데반의 순교를 막지 않으시고 받으셨는가? 일반적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이후로 사도들의 핍박과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어느정도 관여하셨다. 그런데 스데반의 죽음은 막지 않으셨다. 어느모로 보나 스데반은 훌륭한 신앙인이요 충성된 자다. 성령충만하고 믿음과 사랑, 은혜와 지혜, 능력이 충만한 자였다. 그에 집사직분을 충실히 하고 전도에 열정이 있었다. 말씀에 능한 자였다. 고후3:7-16절에서 구약의 율법의 직분과 복음의 직분을 대비하고 있다. 율법의 직분은 결국 그리스도로 인도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의 얼굴에 영광이 나타났다. 율법은 장차 올 그리스도로 인도한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을 덮었다. 그런데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게 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고후4:5-12절에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든지 삶을 통해서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전파되는 것이다. 순교를 통하든 삶을 통하든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배(그리스도)가 육신인 질그릇안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질그릇이 깨어져야 한다. 자아가 죽든지 실제 육신이 죽어 순교하든지 이런 과정없이 생명이 드러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4: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하였다. 적색순교를 하든지 실제 자아만 죽는 백색순교를 하든지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만이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의 심각한 오해는 환난이나 고통, 십자가를 면하려는 생각이다. 이것이 유대종교인들의 신앙이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잘먹고 잘살고 돈벌고 건강하고 만사형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 잘 믿으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잘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이땅은 그리스도인의 훈련의 장소요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다. 촛불이 빛을 발하기 위하여 자기를 녹이듯이 항아리에 있는 향을 드러내기 위하여 항아리를 깨야 하듯이 스데반처럼 자기를 순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목숨을 건다. 거기에는 빛도 향기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주님 믿는 것이 고달프고 힘든 길이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행7:55~56절에서 스데반의 죽음 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비단 스데반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죽음앞에서 하늘이 열리고 그 영혼이 몸을 떠나 주님의 영광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 사람이 종교인인가 참 신앙인인가는 그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서 천사가 그들을 데려가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을 데려간다. 그래서 불신자의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의 휩쓸려 죽음을 저항하게 된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영접을 받으며 평안함과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된다. 스데반의 죽음의 이러한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은 스데반의 믿음을 지키고 자신을 드리는 마지막 승리를 환영하는 모습이다. 마치 부모가 운동장에서 자기 자녀가 달리기에 모든 사람을 제치고 일등으로 골인할 때 관중석에서 일어나 환호하는 것과 같다. 실제 있었던 일인데 미국에서 한 선교사가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복음을 위해서 힘쓰다가 두 아들을 질병으로 잃게 되고 아내도 이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두 아들과 아내를 땅에 묻고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배에서 내려오는데 그 때 마침 미국의 대통령이 아프리카에 사냥을 갔다가 그 배를 타고 같이 내려오게 된다. 그 때 미국국가군악대와 많은 환승객들이 환영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해변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 거닐고 있을 때 문득 그가 이 믿음의 경주를 다 마치고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 저 대통령을 맞이하는 군중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맞이해주실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 때 다시 주님께서 주신 그 영감`을 받고 그 내렸던 배를 다시 타고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게 된다. 그는 한 평생 최선을 다해서 선교를 하므로 아프리카의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문화적인 발전도 이루어지게 된다. 그가 죽은 다음 그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의 비석에 이렇게 새긴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이곳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을 떠날 때는 이곳은 빛의 세계가 되었다.”라고 새겼다고 한다. 스데반의 죽음 앞에 하나님과 주님께서 또 수많은 천사들이 그를 이렇게 환영했던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믿음으로 죽게 되고 하나님의 대환영을 받게 된다.

누가복음 20:41~47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종교를 믿느냐고 물어보면,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라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교회나 절, 성당에 다닌다고 대답합니다. 다니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누군가가 교회나 절에 다닌다고 하면 그는 그곳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에 그냥 다니는 것입니다.
이들은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릅니다.
종교인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지만, 신앙인은 그 종교를 전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인정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만은 자신이 믿는 신을 유일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며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나 종교인들과 부딪히곤 합니다.
지금 세상은 이미 종교 다원주의가 자리를 잡은 분위기여서 다른 종교들과 이해와 화합을 도모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풍조 가운데 기독교가 독단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는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종교적인 사회’였습니다. 그 나라에 살던 모든 유대인은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율법을 읽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종교인이 있었고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 서기관과 과부를 비교하시면서 우리에게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에 대한 교훈을 주시고자 했습니다. 종교인은 자기가 바라는 신을 찾지만 신앙인은 유일한 절대주권자를 믿습니다. 당시 메시아를 지칭하는 여러 이름 중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이 명칭에 대해 유대교의 서기관들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메시아는 분명히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도록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처럼 정치적으로 힘 있는 군주였으면 하는 기대를 했습니다. 다윗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강성하고 번영했던 이스라엘을 사모하면서, 오실 메시아가 바로 그 다윗왕의 통치 능력을 발휘해서 이스라엘에 또다시 정치적, 경제적 전성기를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메시아는 순전히 자신들이 스스로 바라는 존재에다 이름만 메시아라고 붙여놓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어야 할 신앙의 대상인 매시아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메시아는 당연히 이래야 할 것이다’라는 기대감으로 자신들이 마음대로 그려놓은 존재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 최후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는 메시아가 정치적 군주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타고 태어날 메시아지만 그 메시아는 다윗왕에게도 주가 되시며, 더욱이 이스라엘의 왕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장차 최후의 심판을 주도하실 심판주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자기 생각이나 자기 필요에 따라 인식하고 찾기 때문에 다른 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믿는 신이라는 존재를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되는 무력한 신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그런 식으로 신을 찾거나 만나지 않습니다, 종교인은 사람을 의식하지만, 신앙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헌금도 많이 하고 사람들 앞에서 긴 옷을 입고 잘난 척하는 서기관들은 종교인에 불과 합니다. 오히려 과부처럼 가난하지만 전 재산을 드릴 만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살아계신 분’이심을 유일한 전제로 삼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인은 자기 쪽에서 바라는 신들을 무수히 만들어내는 우상 숭배적인 종교인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일깨워 주셨고 성경이 밝히 말하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모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다로 나갈 준비가 된 연어의 변태를 ‘스몰트’(smolt)라고 합니다. 강가에 살던 연어가, 몸은 유선형이 되고 비늘은 은빛으로 바뀌며 아가미는 바닷물에 잘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변합니다. 과거의 모습으로는 바닷물에서 마음껏 헤엄치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스몰트를 경험해 거듭난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 스몰트를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도덕군자가 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 인격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성령과 피로 거듭나서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길 바랍니다.






히스기야

히즈키야(공동번역),
히스기야(개역개정)(히브리어: חזקיה , חזקיהו 야훼께서 강하게 하신다)

남유다 왕국 13대 왕으로 25세에 즉위하여 29년간 통치하였다.
유다 왕국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이며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재위기 때 활동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야훼를 섬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종교 의례를 회복시키고 북이스라엘의 민족들과 화합을 도모했고,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았으나 이겨내었다.
또한 잠언의 편집에도 기여를 하였다.

 주상(柱狀)을 부수었다.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렸다.
 산당과 당을 없애 버렸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와 안식일 등의 절기 제물을 드리는 일을 진행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을 쳐서 부쉈다.

여호와께 연합하여
열왕기하 18: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아멘

He held fast to the LORD and did not cease to follow him;
he kept the commands the LORD had given Moses.


연합하여(다바크, dâbaq.  דָּבַק )

합하다(창 2:24, 삼하 20:2), 붙다(신 28:60,욥 19:20, 시 22:15), 혼인하다(수 23:12), 붙좇다(룻 1:14), 묻다(욥 31:7),
밀착되다(욥 41:23),매달리다(시 119:31),
의지하다(신 11:22, 30:20),만나다(창 19:19),
친근히 하다(수 22:5, 신 10:20), 지키다(민 36:7,9), 대다(신 13:17), 들다(왕하 5:27), 붙들다(시 101:3),
따라가다(렘 42:16), 추격하다(삿 20:42, 삼상 14:22, 대상 10:2),
따르다(삼하 1:6), 속하다(렘 13:11), 쫓아가다(창 31:23)

열왕기하 18:4-5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 느후스단(놋 조각)

열왕기하 18: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연합하여 - 다바크(dâbaq.  דָּבַק )
* 주님과 연합한 신앙(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열왕기하 20: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절 /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히스기야  - 면벽기도(길, 방법이 없다)                            
 다니엘 - 면동기도                           
 예수님 - 입골기도(골방)

열왕기하 18:7-8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 4월 19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하 18: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께 연합하여(6절)
♦ 성구 :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聯合)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命)하신 계명(誡命)을 지켰더라. 
(He held fast to the LORD and did not cease to follow him; he kept the commands the LORD had given Moses.)  

“여호와께 연합하여(He held fast to the LORD)”
히스기야 왕의 시작은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신앙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히스기야의 신앙은 곧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한자어 사자성어에 “초지일관(初志一貫)”이란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2022년 새해의 첫 출발을 시작하여 4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과연 첫날 다짐했던 그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유지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히스기야 왕의 시대에 신흥 강대국 앗수르가 등장하여 북 이스라엘을 점령하였으며 남 유다도 패망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러한 믿음을 꾸준히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브리서 3:12)
믿음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연합하여 세상을 이기셨던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https://www.youtube.com/watch?v=2im3OSlPXoA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른 뒤에 여러 해 동안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히스기야 왕 제 십사 년에 앗수르 왕 산헤렙이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는 성전의 은을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18:15).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배반한 것은 십사년 동안 조공 바치던 것을 중단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이 아니라 애급을 의지해서 앗수르를 배반했다가 앗수르의 침략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으로 갔지만(19:1)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습니다.

1~5절을 읽어보시면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는 것 같습니까?
앗수르와도 관계를 끊고 애급과도 관계를 끊고 유다의 운명을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왕궁의 책임자도 하나님을 안 믿고 서기관과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안 믿을 때 과연 히스기야는 오직 하나님을 믿으며 백성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는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전혀 아닙니다.

첫째, 히스기야는 직접 기도한 것이 아니다.

히스기야는 신하들과 제사장을 이사야에게 보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뿐입니다.

둘째, 당신의 하나님에게 간구하였다.

히스기야는 자기의 하나님,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하들을 총동원하고 이사야 선지자까지 동원하서 자기가 믿는 하나님, 자기들 나라의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에 가기는 갔는데 직접 기도하지 않고 이사야에게 대신 기도해달라고 그것도 ‘당신의 하나님께’ 입니다. 자기가 직접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기의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에게 부탁해 달라고 합니다.

셋째. 혹시의 신앙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로 완전히 남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고, 하나님이 유다의 하나님으로서 유다에 대한 언약이 있고 유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히스기야의 전혀 믿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이 기적이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히스기야의 설렁설렁한 태도, 남의 신을 대하는 듯한 불성실한 태도, 하나님이 하실지 않하실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는 어영부영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주 명쾌하게 6절과 7절처럼 응답하십니다. 히스기야가 기대하고 소망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훨씬 정확하게 조치를 취해주십니다. 단순히 조취를 취할 뿐만이 아니라 히스기야를 위로까지 해 주십니다. 히스기야에게는 너무 과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이야기는 하지 않고, 히스기야의 기도, 하나님의 믿음, 히스기야의 간구 등 온통 히스기야를 띄우기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의 뜻을 왜곡하고, 성경의 의도를 변질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특정 인물을 신앙적 모델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어이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서 도와주시고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기도

하나님께서 7절에서 응답하신 내용이 하나는 ‘앗수르 왕이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본국에서 칼에 죽게 된다’는 것인데 첫 번째가 8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순간에 히스기야는 유다가 위기에서 벗어났으니까 당연히 만세를 불러야 하고, 하나님이 자신이 기대한 것보다 더 빨리 더 큰 조치를 취해주셨으니 당연히 할렐루야를 외쳐야합니다. 랍사게가 물러가면서 한마디 하는 것이 19~13절인데 일종의 큰 나라의 자존심이고, 강대국의 위세이지만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고 무시하면 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으로 나가 편지를 펴놓고 이전과는 달리 직접 기도합니다. 앞뒤를 무시하고 단지 19:15~19절의 기도만을 살펴보면 믿음의 기도, 신실한 모습,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의 상황과 연결해서 살펴보면 이 기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히스기야는 19:1~5절에서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하나님께서 6~7절에서 응답하셨고 실제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8절에서 랍사게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9절 이하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랍사게가 한마디 한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상황이 급하면서도 괜시리 가오를 잡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때 히스기야가 보여야 할 반응은 아주 평안함입니다. 협박하던 랍사게가 민망할 정도로 여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는 이미 모든 것의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랍사게가 마치 곧 돌아올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칼에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대로 행하시고 계심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기에 14절 이하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앗수르 왕에게

처음에 히스기야가 마치 남의 신에게 부탁하듯 이사야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하자 하나님은 아주 신중하고 정확하게 응답해 주셨고 실제로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랍사게의 허풍에 벌벌 떨면서 거창한 뒷북 기도를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상황파악을 전혀 하지 못했고, 반대로 하나님은 상황파악을 정확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엉뚱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는데 21절이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니까,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앗수르 왕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응답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앗수르의 왕이 물러갈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열심

20~34절까지가 모두 하나님이 응답,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의 선언인데 그 중간에 31절 끝에 지구상의 모든 종교들과 비교할 때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오직 하나님만 말씀하시는 선언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가 있습니다. 이 선언이 독특한 이유는 바로 ‘여호와가 열심을 낸다’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열심을 내라고 독려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열심을 내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고, 신 자신이 친히, 직접, 스스로 열심을 낸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신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의 보좌에 앉아 신의 위엄을 드러내며 이런저런 멋진 말만 해대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의 권위를 주장하며 인간들에게 심판을 행하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히스기야와 하나님 중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한 일이란 기껏해야 왕이면서도 하나님에게 신하들을 대신 보내는 무례한 행동이었고, 하나님이 이미 응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뒷북치며 어이없는 기도만 하는 불신앙적인 행동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요청을 들으셨고, 응답하셨고, 또 들으셨고, 거듭 거듭 반복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을 선언하셨고, 심지어는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선언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 4월 18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하 17:1∼41
♦ 묵상을 위한 주제 : 남은 자(18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So the LORD was very angry with Israel and removed them from his presence. Only the tribe of Judah was left.) 

“남은 자(The tribe of left)”
‘남은 자’는 “유다 지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열 두 지파로 구성됩니다.
남 유다는 두 개의 지파로 출발하였고, 북 이스라엘은 열 개의 지파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열 두 개의 지파 중에서 남은 지파는 오직 하나 “유다 지파”뿐이라고 합니다.
왜 유다 지파만 남았을까요?
메시아 혈통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17장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17:7∼23).

북 왕국 이스라엘은 대략 200년 동안 존속하였으나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BC 930∼BC 722).


성경의 진가(眞價)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유대인의 역사라고 외면합니다.

물론 성경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맞습니다.
그런데 유다 민족의 역사를 읽고 배우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나라를 통하여 현재 지구상에 세워진 모든 나라와 역사가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나라와 역사의 본보기(sample)라고 하겠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이방 사람의 규례를 따랐기 때문” 이었다고 합니다(7∼8절).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제사장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기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것을 “종교혼합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마지막 날 심판의 주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종교혼합주의가 이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인 가르침으로 들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합리적인 교리가 아니라 비합리적일지라도 진리로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터툴리아누스(Tertulianus)의 고백처럼 합리적인 것만 믿는다고 주장하다가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외면했던 진리에 의해서 심판대에 서야 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역사와 양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rco1vI3Gr4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열왕기하 17:1-41
남은 자(18절)
남은 자는 유다 지파를 의미합니다.

열왕기하 17장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17:7-23).
북 왕국 이스라엘은 대략 200년 동안 존속하였으나 완전히 망하여 없어지고 말았습니다(BC 930-BC 722).
성경의 진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유대인의 역사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은 유대인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나라를 통하여 현재 지구상에 세워진 모든 나라와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나라와 역사의 본보기(샘플)라고 하겠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이방 사람의 규례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7-8절).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제사장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기도록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종교혼합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마지막 날 심판의 주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종교혼합주의가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인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합리적인 교리가 아니라 비합리적일지라도 진리로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앗수르 왕이 취한 조치가 ‘이스라엘에서 앗수르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가되 그가 이스라엘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그 땅의 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 땅의 신 여호와를 섬긴 적도 없는데 이방에서 온 사람들은 여호와가 그 땅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의 조치로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은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여로보암이 세운 제사장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섬기는 제사장이었을 뿐이요, 지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도 우상의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돌아와서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여호와, 자기도 해본 적이 없는 여호와 경외하기, 자기도 도대체 들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고 행해 본 적도 없는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어떻게 가르쳤을지 궁금합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언컨대 ‘종교 쇼(Show)’입니다. 


배반의 연속

1. 열왕기하 17장

성경에 유다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애굽, 블레셋, 아람, 모암, 암몬, 앗수르, 바벨론, 바사 등 많은 나라가 등장하는데 유일하게 북 왕국의 패망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언급이 열왕기하 17장입니다.

BC 930년에 세워지고 722년에 패망하였으니 대략 200년 동안 지속되던 나라가 완전히 망하여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렸는데 그 원인을 분석한 내용이 7절부터 23절까지 17절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대로 개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샘플이고,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또한 절대로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온 인류의 샘플입니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특정 민족이나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대상이고, 삶의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관계를 비교와 경쟁으로 설정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졌다고 평가하고,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다른 나라보다 더 강성해졌다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점과는 매우 다른 기준, 다른 마음,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16대 왕인 므나헴 시대에 앗스르 왕 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자 왕이 나라의 큰 부자들에게서 은을 강탈하여 왕에게 조공을 바쳤고(왕하 15:19, 20), 18대 왕 베가 때에는 앗수르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15:29, 30). 나라가 유지되고는 있지만 이미 나라로서의 기능, 나라로서의 명분을 모두 상실한 상태로 19대 왕 호세아가 왕 위에 올랐지만 거의 앗수르의 속국인 상태로 조공을 바치면서 근근이 이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앗수르에게 정치적 변화가 있어서 디글랏 벨레셀 왕에 이어 살만에셀 왕이 등장했습니다.
호세아가 처음에는 이 왕에게도 예전대로 조공을 드렸는데 정세변화를 관찰하면서 앗수르에게 보내는 조공을 중단하고 대신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호세아의 갈아타기는 실패해 당장에 앗수르 왕이 호세아를 옥에 감금하고 사마리아를 삼년간 에워쌌고, 결국에는 수도가 점령당하고 백성들이 포로가 된 것입니다.

대략 삼십년 전부터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애굽의 도움을 받아 정세를 바꾸어보려다가 도리어 폭삭 망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호세아 왕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텐데 앗수르에게는 배반자로 찍혀 정복을 당하고, 애굽에게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께서 행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권고, 하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로만 행동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기대 즉 이스라엘의 안정과 평화, 백성들의 자유와 평화와 정반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이든, 부탁이든, 권고이든, 소망이든 여하튼 어떤 말을 하실 때에는 반드시 먼저 은혜를 주시고, 먼저 복을 주시고, 먼저 인간을 좋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신 후에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없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어떤 행동도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바로가 지시한 노동에 힘들어 하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모든 것이 은혜와 복입니다.
그렇게 먼저 은혜와 복을 주신 이후에 하나님의 토라, 하나님의 규례가 주어지기에 하나님의 토라는 결코 상이나 벌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은혜와 복을 주셨기에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이미 받은 은혜와 복을 누리며 유지하며 지속하는 것이오,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이미 은혜와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땅 신의 법

6절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앗수스로 끌려가서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퍼져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24절은 반대로 이방의 백성이 이스라엘로 이주해서 이스라엘에서 살게 된 이야기입니다.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앗수르가 민족 이동정책과 민족 혼합정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25절을 읽고 문자 그대로,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으매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죽게 했다고 받아들이시면 성경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곳이 북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은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패망할 때까지 여호와를 경외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자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어 죽인 적이 없습니다. 25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26절의 이방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25절처럼 이방 방식으로, 우상의 방식으로, 죄의 방식으로 상황판단하고 분석까지 다 했습니다. 그들이 한 말 중에 중요한 표현이 ‘그 땅 신의 법’입니다. 바벨론이나 구다나 아와나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살던 사람들로서 이스라엘로 이주 해 왔기에 이 땅에는 이 땅을 지배하는 신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그 신은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법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요, 그 법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거나 병들게 하는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전형적인 우상의 방식, 죄의 방식입니다.

26절과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27절과 같은 조치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초대 왕 여로보암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 단과 벧엘에 둔 이래로 모든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에는 여호와 신앙이 없고, 여호와의 성전이 없고, 여호와의 제사장이 없습니다.
그들 자신도 여호와가 행하라고 하신대로 행하지 않았고, 행하지 말라고 하신대로 행하지 않아서 망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도 없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한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이 취한 조치가 ‘이스라엘에서 앗수르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한 사람을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가되 그가 이스라엘에 가서 거주하며 그 땅 신의 법을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입니다. 정작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그 땅의 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 땅의 신 여호와를 섬긴 적도 없는데 이방에서 온 사람들은 여호와가 그 땅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왕의 조치로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은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여로보암이 세운 제사장은 여호와의 제사장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섬기는 제사장이었을 뿐이요, 지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도 우상의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돌아와서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여호와, 자기도 해본 적이 없는 여호와 경외하기, 자기도 도대체 들어본 적도 없고 배워본 적도 없고 행해 본 적도 없는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어떻게 가르쳤을지 궁금합니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언컨대 ‘종교 쇼(Show)’입니다. 

여호와와 무관한 제사장이 가르친 종교의 현장이 29절 이하에 나오고, 하나님의 탄식, 하나님의 호소가 35절 이하입니다.
이것은 신의 영광에 집착하는 하나님의 배타적 선언이 아니고, 여호와의 주권만을 강조하는 독선적 주장이 아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35, 36절처럼 백성에게 일하며 수고하게 하는 신이 아니라 친히 일하시면 친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9절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즉 인간을 힘들게 하고 곤고하게 하는 모든 세력들, 더 나아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여 참으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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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5:1-30


배반의 결과

 

1. 유다의 패망

바벨론이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혀가는 대신에 유다의 왕으로 세운 사람이 20대 왕 시드기야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반했는데 불행하게도 배반을 실패했고, 배반의 결과는 아주 혹독했습니다. 어차피 바벨론에 의해 왕이 되었으니 이미 바벨론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아직 국가라는 명분은 있었는데 잠시 배반을 했고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받고 전쟁에서 패하여 왕이 사로잡혔으니 이제부터는 공식으로 나라가 패망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남은 것은 점령군의 강포한 행위와 패한 백성의 험난한 삶입니다. 8절에는 연도를 표현하는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그 동안은 모두 유다의 왕의 통치가 기준이었는데 8절부터는 모든 기준이 바벨론 왕의 통치년도입니다. 본문에 보면 ‘나라가 망했다, 주권을 이양했다, 항복문서에 서명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대신 사건을 표시하는 기준이 변한 것을 보고 나라가 망한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세 번에 걸쳐 일어납니다. 1차 포로는 24:2절에 기초합니다. 여호야김 삼년에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가 패하고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가고 다니엘이 이때 잡혀갑니다. 이때가 주전 605년경입니다. 2차 포로는 24:8절 이하로 이때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에스겔이 잡혀가고 이때가 주전 597년입니다. 그리고 3차 포로가 25장 이하이고, 이때가 주전 586년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하나 있는데 이스라엘이 3차에 걸쳐서 포로로 잡혀가는데 반대로 유다로 귀환하는 것도 3차에 걸쳐서 일어납니다. 1차가 스룹바벨의 인도로 주전 538년에 돌아오고, 2차가 에스라의 인도로 주전 458년에 돌아오고, 3차가 느헤미야의 인도로 주전 432년에 돌아옵니다. 70년을 이해할 때 하나는 포로 귀환을 기준으로 삼아 1차 포로가 608년 영이고 1차 귀환이 538년으로 계산하는 방식과, 다른 하나는 성전을 기준으로 삼아 성전이 파괴된 것이 주전 586년이고, 학개와 스가랴 시대에 성전이 재건되는 것이 주전 516년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새로 지어지는데 70년이 경과된 것으로 계산합니다.

 

2. 배반의 결과

왕하 17장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25장에서 남 왕국 유다가 패망하는데 두 나라의 패망을 소개하는 본문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배반’입니다. 17:4절에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가 앗수르를 배반한 결과로 북 왕국이 망했습니다. 18:7절에 유다의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배반하였는데 화친을 위해 성전의 은금을 털어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24:1절에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한 결과로 유다의 1차 포로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24:20에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한 결과로 유다가 패망하고 3차 포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북 왕국이 앗수르를 배반했다가 앗수르에 의해 망했고, 남 왕국이 바벨론을 배반했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의 징계로 이스라엘을 패망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고,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앗수르처럼 행동하셨다면, 바벨론처럼 반응하셨다면, 즉 인간들이 배반자를 다루듯 이스라엘을 다루셨다면 이스라엘은 진작에 망했어야 합니다. 왕정시대는 고사하고, 사사시대는 고사하고, 아예 광야에서 몰살당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고,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반자 다루듯이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책임자요,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과연 누가 이스라엘의 왕이며, 과연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여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어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왕정이 끝날 때에 더러는 바벨론으로 잡혀가고, 더러는 애굽으로 도망하고, 가나안에 남은 사람들은 포도원에서 노역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행한 대로 당하고 있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Ⅱ. 여호와의 성전

 

1. 여호와의 신앙

열왕기서는 나라가 패망한 것에 대해 독립을 잃었다는 것을 슬퍼하거나, 주권을 상실했다는 것을 애통해하거나, 영토를 빼앗긴 것을 탄식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나라가 패망한 것을 묘사할 때 한편으로는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후손들이 애굽으로 잡혀가고, 선조들이 갈대아 지역에서 나왔는데 후손들이 갈대아 지역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묘사해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 결과를 지적해 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대표,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택한 왕의 말로 즉 한 왕은 애굽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다른 왕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또 다른 왕은 눈이 뽑혀지는 모습을 통해서 왕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왕이 백성을 위해 싸워주기를 바랬던 백성들이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지적해 줍니다. 열왕기는 나라가 패망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바로 성전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한 후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알리시는 계시하신 내용이 창12장부터 호24장까지로 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성취하신 내용이 여호와 신앙의 핵심, 여호와 신앙의 정석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고, 결함이 없습니다. 당연히 수정이 없고, 개선이 없고, 보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사를 동원해 새로운 규정, 새로운 신앙, 새로운 종교 양식을 만드신 것이 없습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예언을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수정하지 않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성전이 없어서 여호와가 거주하기에 불편하신 적이 없고 이스라엘도 성전이 없어서 여호와께 간구하기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2. 이스라엘의 신앙

왕정제도 자체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왕을 자신들의 통치자로 세운 것이기에 왕정제도는 하나님을 버린 것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바른 모습이 아니라 모두 변질된 모습, 왜곡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하여 가르쳐준 여호와 신앙의 정석을 떠나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모습을 만든 것의 상징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성전이 필요했다면 진작에 하나님이 세우셨을 것인데 하나님은 성전을 언급하지 않으셨고, 성전 없이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기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왕정시대에, 왕이 여호와의 신앙, 여호와의 종교를 변질시킨 상징이 바로 성전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성전을 지어놓고, 자신들이 의도한 성전의 기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왕상 8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 할 때 여덟 차례에 걸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원해달라’고 아주 멋진 기도를 했지만 이스라엘은 왕정 시대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왕이 병이들면 도리어 다른 신에게 찾아갔고, 이스라엘이 이방이 쳐들어오면 도리어 다른 이방나라에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사용한 것은 이방에게 조공을 드리기 위해 성전의 은금을 거두어간 것과, 다른 이방의 신들을 수입했을 때 그 신들을 모실 곳이 없으면 여호와의 성전에 둔 것 뿐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본의 아니게 여러 신들이 모셔져있는 만신전이 되어버렸습니다.

 

3. 성전의 재건

여호와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인 관점에서 여호와 신앙의 중심, 여호와 종교의 중추인 성전이 무너졌다고 애통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이 무너질 것도 예언하시고 70년이 지나면 성전이 재건될 것도 예언하셨지만 백성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은 여호와 성전의 재건이나 여호와 신앙의 회복아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파괴됨으로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종교를 조롱하고, 왕정사 이후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성전회복이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마음을 회복하여 주십니다.



열왕기하 24:1-20

사로잡혀 가고

 

1. 16대 왕 요시야

요시야가 8살에 왕위에 올라 31년을 통치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딱 두건인데 하나는 22~3장에 나오는 성전 수리에 이은 종교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23장 28절 이하에 나오는 전쟁에서 죽는 사건입니다.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진행했으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이 소개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성경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요시야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면 여러 우상들과 신전들을 제거했다는 것을 강조할 뿐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선대 왕들 즉 14대 므낫세와 15대 아몬은 친앗수르 정책을 택한데 반해 요시야는 친바벨론 정책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요시야가 선택을 잘한 셈이 됩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이 주전 621년이고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주전 612년에 앗수르가 패망합니다. 애굽이 앗수르를 치기 위해 올라올 때 요시야가 막아선 때가 주전 609년, 그 전쟁에서 요시야가 죽습니다.

 

2. 17대 왕 여호아하스

요시야 시대에 성전을 수리하고 온갖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고 수백 년 만에 유월절을 지키기도 해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는데 실제로는 여호와의 신앙이 별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새로 왕이 된 여호아하스는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기를 선택했습니다. 죄인들의 기준에 근거하면, 신을 위해 대단한 일을 했으면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당연히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 강한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호아하스가 생각하기에 아버지 요시야는 여호와 이외에 그 많은 우상들을 모두 제거하였습니다. 여러 신들을 제거하는 것은 각 신들이 주관하는 각 영역을 포기하는 것이요 각 기능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과연 다른 신들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기로 했다면 여호와가 요시야를 얼마나 도와줄지 궁금해 하며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의 나라는 결코 강력해지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보다 커지지 못했고, 바벨론부터 강대국이 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동안 별로 힘이 없던 애굽보다도 세지지 못했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생각하기에 아버지 요시야의 종교정책은 완벽히 실패한 것이요, 여호와의 뜻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십삼 세에 왕이 되었는데 통치 기간이 불과 석 달이고 애굽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3. 18대 왕 여호야김

애굽에 의해서 왕이 엘리아김은 애굽에 의해서 이름도 여호야김으로 바뀌었습니다. 애굽에 의해 왕이 된 여호야김은 당연히 친애굽 정책을 써야 했고 우선은 애굽의 바로 느고가 요청한 조공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요시야의 두 아들인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두 살 터울이었는데 두 형제의 행적이 32, 37절처럼 똑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앗수르는 패망해서 거의 소멸되어 가고 있고 바벨론과 애굽이 서로 경쟁을 하니까 유다로서는 눈치를 보면서 상황에 따라 조금 유리해 보는 쪽에 붙었다가 상황이 바뀌면 다시 유리해 보이는 쪽에 붙는 것을 반복하다가 바벨론은 배반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큰 판단착오였습니다. 주전 605년에 애굽과 바벨론이 당시의 패권을 두고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데 바벨론이 이기고 애굽이 패한 것이 24장 7절입니다.

 

4. 19대 왕 여호야긴

여호야긴은 왕이 된지 불과 석 달만에 바벨론에 의해 폐위가 되고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아직 유다라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망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애굽이 유다의 내정을 간섭해서 왕을 사로잡아 가고 대신 새로운 왕을 자기들 마음대로 세운 적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이 이번에는 바벨론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19대 왕 여호야긴은 왕이 된지 석 달 만에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바벨론에 의해 새로운 왕이 세워집니다.

 

 

Ⅱ. 누가 왕인가?

 

1.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이 국가 또는 민족 또는 공동체로서 역사에 등장하게 된 시초는 출애굽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약 400여년 간 노예생활을 하다가 애굽을 벗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들이 나라를 지켜보고 다스려보겠다고 시작한 제도가 왕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정의 끝이 이스라엘의 대표인 왕이 애굽으로 잡혀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하도록 진두지휘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선택한 제도와 스스로 선택한 정책의 결과로 입애굽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애굽에서 노예된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자유민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끌려가서 포로가 되어버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행하신 최초의 일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본토 친천 아비 집에 바로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지역적으로 따지자면 아브람은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 지역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아들을 낳고 민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에 은혜를 더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갈대아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는데 이스라엘의 후손은 정반대로 가나안을 떠나 갈대아 지역 즉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스라엘 역사의 앞과 뒤를 어떻게 대조하고 있는 지가 보이실 것입니다.

 

2. 왕정 제도의 의미

사사기의 마지막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나오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 표현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이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자신들이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사와 왕은 완전히 다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기에 이스라엘이 어려운 곤경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사는 하나님의 대행자요, 사사들의 사역은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입니다. 그러나 왕은 하나님이 제안하신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세우신 것도 아닙니다. 왕은 전적으로 인간이 선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을 자신들과의 관계에서 배제한 것입니다.

 

3. 누가 왕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정제도를 허용하시면서 ‘과연 누가 왕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하는 왕, 때로는 세습을 통해 이어지는 왕, 때로는 반역을 통해 이어지는 왕을 모두 허용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인물,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정책을 모두 해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왕정시대에 이스라엘이 해보고 싶은 것을 하나님이 막아서 시도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결론은 한편으로는 애굽으로 사로잡혀 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벨론으로 잡혀 가면서 나라가 패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존재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하나님이 왕의 책임과 역할을 해오셨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배우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패망을 또 다른 계시의 사역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책임과 역할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열왕기하 2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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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1:1-26


. 히스기야의 자만

 

1. 그 때에

왕하 20:1의 ‘그 때에’는 불과 몇 해 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패망했고, 그 동안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던 유다는 애굽을 의지하면서 앗수르를 배반했지만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거의 패망직전까지 몰렸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앗수르의 왕이 물러갔을 때입니다. 12절의 ‘그 때에’는 히스기야가 죽을 병이 걸렸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있을 때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이 걸렸다는 소문이 바벨론에게까지 퍼져서 바벨론에서 문병을 오는데 하나님의 치유가 너무 빨라서, 채 삼일도 걸리지 않고 벌써 다 낳았기 때문에 바벨론의 사자들이 출발할 때 이미 히스기야는 다 나아서 바벨론의 사자들은 문병을 오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치유를 축하하러 온 셈이 되었습니다. 여하튼 히스기야가 병들어 있는 그 순간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낸 것입니다. 19장과 20장은 같은 해, 즉 히스기야가 39세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다가 앗수르에게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유다와 바벨론, 히스기야와 브르닥발라단 사이에 친교가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남쪽의 애굽을 의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동쪽의 바벨론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2. 히스기야의 자만

불과 얼마 전에 앗수르에게 성전의 금은을 다 털어다 조공을 바쳤고, 또 얼마 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먹을 것을 걱정하며 생존을 위협받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앗수르로부터 구원해주셨고,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고, 그때에 바벨론의 사신들이 왔는데 왕이 거의 같은 시기에 어디서 이런 귀중품들이 생겨서 왕의 보물고를 가득 채웠을까요? 근거는 19:35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의 군사들을 물리쳐주어 히스기야가 전리품을 챙긴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엄청난 금은보화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와 싸운 것이 아니고,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물리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명을 치는 동안 히스기야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잠만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앗수르 군사가 모두 송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한 일이라곤 아침에 일어나 앗수르 군사들이 죽은 것을 본 것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가서 전리품을 긁어모은 것뿐입니다. 히스기야가 14절을 행한 것이 자랑질입니다. 당시 앗수르의 위협에 견딘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유다에 와서 패하고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이 죽었습니다. 지금 히스기야는 당대의 주변 나라들이 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앗수르를 물리쳤고, 자기가 앗수르에 승리했고, 자기가 앗수르 군사들을 죽였고, 자기가 엄청나고 대단을 일을 해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전리품입니다. 자기가 위대한 일을 해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가능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여줄 것이 많은 만큼 자기가 큰일을 해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신앙이 없고, 자기는 잠만 잤을 뿐인데 여호와의 사자가 이 모든 일을 행했다는 믿음의 고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누가 했느냐 바로 자신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Ⅱ. 진노를 일으켰음이니라

 

1. 아버지와 다르게

21:1절의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39세에 병이 들어 죽을 뻔했을 때 하나님께서 십오년을 더 살게 하셨는데 므낫세가 열두 살 때에 왕이 되었으니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치유 받은 후에 낳은 아들입니다. 므낫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전무후무하게 악한’입니다. 21: 2~6절에 의하면 므낫세는 마치 혼자서 세계 종교박람회를 개최한 듯합니다. 므낫세가 참으로 다양한 우상 종교행위를 했습니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사시대는 아예 건너뛰고 왕정시대부터만 살펴보아도 이미 솔로몬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여러 신들을 섬겼습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 뿐만 아니라 많은 신전을 지었습니다. 왕상 11:4절 이하에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 등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습니다. 왕은 언제나 백성의 대표입니다. 어떨 때는 왕이 먼저 백성을 선동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떨 때는 백성들의 요구에 왕이 따라가기도 합니다. 왕은 선했는데 백성은 악했거나 왕은 악했는데 백성은 선한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므낫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므낫세만 악한 것이 아니라 21장 9절과 같이 므낫세와 백성이 같습니다.

 

2. 이스라엘의 종교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유일하게 믿은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에서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구약시대는 유대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 나라가 된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후입니다. 유대교는 포로귀환 이후에 새로 생겨난 종교입니다. 왕정시대 내내 이스라엘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나라가 아니라 철저하게 여러 신, 많은 신을 믿었던 다신교 나라, 만신의 나라였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치 종교개혁을 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솔로몬이 수입한 각종 우상 신과 솔로몬이 지은 각종 우상 신전들은 히스기야 시대에도 제거되지 않고 멀쩡하게 세워져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외국에서 우상들을 들여왔고 므낫세는 새로 우상을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내에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우상 종교제도들을 왕이 직접 활성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다양한 우상종교가 만연되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다분히 다신교적이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신들의 정체성을 완벽히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히브리 민족 집단이 아니고, 이스라엘 국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정 민족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특정 나라를 건국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들 중에 아브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계시 사역의 결과로 형성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배운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 하나도 아닌 만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신앙 공동체의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3. 진노를 일으켰으며

죄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결과에 대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심판하셨다, 진노하셨다, 저주하셨다, 벌을 주셨다고 억지를 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도우시는 분이지 인간을 방해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인간의 행동을 보고 그 행동에 따라 장차 되어질 일을 말씀하시며 일종의 권고를 하십니다. 특히 불의한 행동, 악한 행동을 할 때에 ‘그렇게 하면 망한다’라고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내가 반드시 너를 망가뜨릴 것이다’라는 저주가 아니라 ‘내 말을 듣고 돌아서서 망하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합니다. 히스기야에 대해서 20장 17절과 18절에서 왕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자신이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므낫세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정말 므낫세와 백성들이 돌아서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상실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권고를 하십니다. 다만 그 표현이 마치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듯, 하나님이 직접 징계를 하시는 듯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6, 15절 끝에 “므낫세가 여보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입니다. 강조점은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가 아니라 므낫세가 진노를 일으킨 것이며,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지금까지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므낫세, 아몬은 하나님 대신 애굽이나 바벨론을 의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분명하고 안전한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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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 왕의 패역과 불신앙(역대하 28:1-15)

​요담은 끝까지 형통의 시대를 살았는데 그의 아들 아하스는 평생 끝까지 패역과 불신앙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아하스 시대에는 오히려 북 이스라엘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질문 : 아하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6)

결코 가서는 안 되는 지점(1-8)
남 유다 12대 왕 아하스는 그의 손자 므낫세와 더불어 사상 최악의 왕입니다.
아무리 악한 왕이라도 가끔은 선행을 하는데 아하스는 오직 악만 행합니다.
성경은 아하스가 남 유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갔다고 평가합니다(2).
최악의 평가입니다.
각종 우상 제조, 인신 제사, 산당 제사 등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짓을 전부 행합니다.
남 유다를 마치 이방 우상들의 박람회장처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다 못해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에게 유다를 넘겨버리십니다.
수많은 유다 백성이 아람의 수도 다메섹으로 끌려가고, 단 하루만에 북 이스라엘과 싸우던 유다 군사 12만명이 전사하고, 백성 20만 명이 포로가 되어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끌려갑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6) 결코 하나님을 버리는 지경까지 가서는 안됩니다.

질문 : 남 유다 왕 아하스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 깨어 있던 선지자는 누구입니까?(9)

반드시 가야 하는 지점(9-15)
아하스와 비교해 보라는듯, 성정은 북 이스라엘의 오뎃 선지자를 소개합니다.
남 유다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려 20만 명의 유다 백성을 포로로 끌고 오는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오뎃이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승리는 우리가 강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유다를 징계하시려고 행하신 일임을 모르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인데, 어찌 이렇게 살기 등등하여 함부로 유다 형제들을 죽이고 심지어 그들을 끌고 와서 노예로 삼으려고 하느냐? 하나님께 범죄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유다 형제들을 돌려보내라."(9b-11)

오뎃의 말을 듣고 지도자 4인방이 움직입니다.
지도자들의 말에 따라 군인들이 움직이고, 즉시 남 유다 형제들을 돌려 보냅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말씀이 통하는 지점에 서십시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말씀의 통로가 되십시오.


아하스의 악한 통치(역대하 28:1-15)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극도로 악한 왕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다윗과 달리 여호와 신앙 외에 모든 종교를 받아들인다.
아마도 아하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외교에 도움이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연합군으로 징계를 하셨다.
이사야의 기록에 따르면 연합군이 쳐들어오기 전 아하스에게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이사야 7-8장).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거절했고 결국 온 나라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와 달리 북 이스라엘 병사들은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

아하스는 왕이 되자마자 다윗의 길을 떠나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장려했다.
주변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나라가 회복될 길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방법으로 형통해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어야 살아날 수 있다.
아하스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스스로그 기회를 거절했다.
혹 세상을 의지하는가?
지금 회개의 기회가 선포되었다.
지금 즉시 회개하여 돌이키라.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아하스의 악한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좇을 때 맞이하는 결과는 심판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아하스는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장려합니다.
과거 외교 관계는 서로 섬기는 신들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만 의지해서는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연합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했지만 아하스는 듣지 않았습니다(사 7).
그가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는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다른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선지자 오뎃에게 말씀을 들은 북 이스라엘의 군대가 포로들을 돌려보낸 일입니다.
유다의 왕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북 이스라엘의 병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말씀만을 붙들고 살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고 구체적인 도움이 되어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 것인가?
이 질문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가 고민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아하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적인 방법을 더 의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태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혹시 자기 생각이나 세상적인 방법을 더 믿어 실패하고 침체에 빠진 분 계십니까?
지금 즉시 회개하기 바랍니다.
지금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말씀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예배자의 자리가 말씀대로 실천하게 하소서!

시대적 배경은 BC 732년경,
수백년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아람왕국앗수르제국에게 멸망당한 직후의 시점입니다.
당시 앗수르제국은 중동지역 거의 전체를 정복합니다.

중국 최초 통일국가인 진나라보다 500년 앞서서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일통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어 냅니다.

이제 남유다를 둘러싼 고대 중동지역은 앗수르라는 거대한 단일 국가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됩니다.
지난 수백년간 남유다가 경험해왔던 주변 세계가 모조리 부서지고 국가적 생존을 위한 전혀 새로운 환경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압, 암몬, 시돈, 블레셋,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람 등, 지난 수백년 동안 국경을 맞대고 숱한 전쟁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이웃 왕국들이 순식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한 사건은 남유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 중대한 시기에 남유다는 사악한 아달랴 이후로 요아스 – 아마샤 – 웃시야 – 요담으로 이어지는 130여년간의 선한왕들이 펼쳤던 선정의 시대가 끝나고 아하스라는 최악의 왕이 등장합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앗수르 제국의 파괴적인 남하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가나안 인근 국가들은 아람왕국과 북이스라엘이 중심이 되어 반 앗수르 연맹을 결성합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반앗수르 연맹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7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아하스 왕을 폐하고 다브엘의 아들로 새로운 남유다의 왕을 세워 반앗수르 연맹에 동참시키려고 하였고 남유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남유다를 침략합니다.

그런데 남유다가 아람왕국에게 모질게 당했던 이유는 앞서 설명드린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과 병행기록인 역대하 28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는...”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막나간 왕이라 해도 무방할만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가 이렇게 패역했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성경은 당시의 긴박했던 국제정세로 인해 아람이 침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하스의 패역을 돌이키시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께서 당시의 국제정세와 아람왕국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에게로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력해보이는 신을 찾음으로 자신의 실패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 그리고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하스 왕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그는 오히려 종교심, 경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 가지고는 자신과 유다민족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험난한 국제정세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아하스는 즉위하자마자 이방세계에서 영험하다고 이름난 온갖 우상들을 이스라엘에 들여옵니다.

심지어 자녀들을 불에 태워 우상에게 바치는 끔찍한 인신공양제사까지 드리는데 이는 종교적경건심이 지극한 민족들 가운데서나 나타나는 극단적인 제사방법이었습니다.

역대하 28장에 보면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였습니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불안감이 아하스를 자극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었던 초강대국 앗수르가 등장하였고, 앗수르의 위협에 아람은 국가의 생존을 걸고 남유다를 반앗수르 동맹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핍박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은 오히려 남유다를 궁지로 몰아갔던 막강했던 아람왕국이 섬기던 신들이라면 이 위기의 정국에서 나도 건져낼 것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정복당한 아람왕국의 수도 다메섹을 방문하면서 그 곳에 있는 아람의 신전을 본떠서 예루살렘 성전을 리모델링합니다.

아하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당시와 비교할 때 이미 그 구조와 웅장함에서 크게 퇴색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200여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애굽이나 블레셋, 아라비아, 북이스라엘 등의 주변국들에게 성전자체가 노략질을 당했던 적도 있었으며 아달랴 시대에는 바알을 숭배하는 장소도 성전 안에 있었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감안해볼 때 아람신전을 모방하여 예루살렘성전의 리모델링을 명령하면서 아하스 왕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예배 방식을 세련되게 업그레이드 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여호와와 더불어 강력한 아람의 신을 함께 섬길 수 있는 효율적인 예배방식을 만들어냈다고 뿌듯해 했을 것입니다.

아하스의 강렬한 종교심에 관하여는 이사야 7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인해 두려워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갑니다.

10절에서 12절을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곧 멸망할 것이니 걱정 말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징조를 하나님께 구하라고 명령 하십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거부하는 이유가 제법 경건해 보입니다.
내 주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구원의 징조라 할지라도 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면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외적들로부터의 구원도 구하지 않겠다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경건함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아 보이는, 어떻게 보면 절대자 앞에선 극도의 겸양으로 비췰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사람과 하나님 모두를 괴롭히는 큰~ 일이라고 단호하게 책망하십니다.

13절,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라고 하신대로만 해야합니다.

구하라고 하셨으면 구하고 멈추라고 하셨으면 멈추는 것이 경건이지 자신의 얕은 도덕적 잣대 따위를 하나님 앞에 들이대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무서운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내 생각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따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의 제사인 것입니다.

아하스 왕은 초월적인 그 어떤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경외심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도취적인 종교심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는데 고페르 나무보다 더 귀한 백향목으로 방주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값비싼 마감재로 교회를 지어놓고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 그리스도 안의 자유함이 아닌 자신의 수행과 고행을 통해 구원을 찾는 사람, 하나님께서 일하라고 세워두신 그 자리가 아닌, 자신이 서고 싶은 자리에 서려고 애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모두 아하스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현하려는 형식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괴롭히는 이 마음은 결국은 사람도 괴롭게 합니다.

아하스처럼 내 방식의 경건함을 추구할 때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은 사라지고 결국에는 자녀들을 헛된 우상 앞에서 불에 사르는 어처구니없는 거짓 경건의 참상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자신의 종교심에 도취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망령을 부리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하신 구원의 증거를 친히 드러내십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예수님의 수태를 예고하는 이 예언은, 바로 참담한 아하스의 죄악을 꾸짖으신 직후 선포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마음이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잊으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인간이 망가뜨리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런 사랑을 동일하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이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온라인 예배라는 2천년 기독교 역사가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장르의 예배방식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인께서 알아서 챙기십니다.
앞으로 달라질 것으로 예측되는 예배환경들에 대해 우려하는 대신에 이 새로운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어디에 있는지에 찾고 기도하는데 집중한다면 지난시간 우리가 본질 아닌 것, 하나님 아닌 것에게 빼앗겨 왔던 잘못된 형식들과 왜곡됐던 마음 자세들을 찾아내어서 예배의 본질 되신 여호와 하나님 자체를 더욱 정결하게 섬길 수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하스의 죄악의 면전에서, 아하스와 다윗 왕가를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궁극의 사랑의 약속은 오늘,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이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배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자리라면 그 곳이 어디라도 거룩한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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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꼬리는 항상 머리 뒤에 붙어 머리가 가는 대로 따라다니게 마련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꼬리가 화가 나서 머리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어째서 나는 항상 네 꽁무니만 무조건 따라다녀만 하고 나는 항상 네 마음대로 나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거지? 이건 공평하지 못한 일이야. 나도 붕명히 뱀의 한 부분인데도 항상 노예처럼 네게 달라붙어 끌려 다니기만 해야 된다니 이건 너무 부당해."

그러자 머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바보같이? 너에게는 앞을 볼 수 있는 눈도 없고, 위험을 알아차릴 귀도 없고, 행동을 결정할 두뇌도 없잖니, 나는 결코 나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너를 생각해서 끌고 다니는 거야. 알겠니?"

꼬리가 큰 소리로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지겹도록 들어 왔어.폭군이나 독재자들도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일한다는 구실로, 제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응수하자 머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정 그렇다면 네가 한번 내가 하는 일을 맡아 볼래."

그러자 꼬리는 매우 좋아하며, 신이 나서 앞에 나서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뱀은 곧 도랑으로 떨어졌고, 머리가 천신만고 끝에 뱀은 간신히 도랑에서 기어 올라올 수 있었다.

또 얼마를 기어다니다가 꼬리는 그만 가시투성이인 덤불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꼬리가 가시덤불을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가시에 점점 더 찔려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뱀은 머리의 도움으로 상처 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가시덤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다시 꼬리가 앞장서서 나가다가, 이번에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뱀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머리가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몸은 불타고, 머리도 함께 죽어 버렸다.

머리는 결국 맹목적인 꼬리에 의해서 희생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를 선택할 때에는 항상 머리와 같은 자를 선택해야지 꼬리와 같은 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

 

셈의 아들 앗수르(2)

인간의 역사는 늘 권력과 생명이 무한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만큼 인간은 교만하면서도 어리석다.
유럽 최고의 신,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터를 가보면 정말 앙상한 폐허만 남아 인간의 유한함과 허무함을 암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플루타크 영웅전은 "법과 정의는 제우스 신과 나란히 앉아 있다. 권력을 가진 이가 하는 모든 일이 곧 그대로 법이고 정의일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 소위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휘두르는 "마초"형 지도자들이 하는 행태가 아닌가.
앗수르의 흥망이 그랬다.
앗수르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잔인하고 교만하며 문화와 문명과 종교적 우상이 그득한 영원히 만세를 누릴 것 같은 자신만만한 사회였다.
그러나 제우스 신전처럼 앗수르도 석조 유물만 남기고 형해화(形骸化) 되어 버렸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앗수르와 대면한 이스라엘

성경은 먼저 아브라함의 자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앗수르 지역까지 나아가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들과 적대감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한다(창 25:18). 디글랏-빌레셀 1세(Tiglath-Pileser 1, 주전 1115-1077) 시대 지중해의 시돈과 비브로스, 아르밧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조공을 받던 앗수르는 아람의 강한 저항과 내부 문제로 잠시 주춤한다.

주전 1100년과 900년 사이에 일어난 앗수르, 바벨론, 엘람의 동시 권력 쇠퇴에 따른 중동 지역 권력의 힘의 균형 현상은 절묘하게도 다윗과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 민족의 융성기를 가져왔다.

이후 앗수르 제국이 본격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진 시대였다. 이 분열도 결국 원로들의 충고를 조롱하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교만 때문이었다.

아람왕 하사엘이 가드를 점령한 후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자 요아스는 선왕들과 자기가 하나님께 바쳤던 예물과 금을 몽땅 털어 하사엘 왕에게 예물로 보냈다. 성경은 하사엘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서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2:17-18).

하지만 요아스가 예물로 구원 받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요아스가 인간적 생각으로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함부로 자기 목숨 보전을 위해 아람왕에게 바친 것은 큰 죄악이었다.
역사는 앗수르의 아나드니나리 3세(주전 810-782)가 주전 804년 다메섹의 하사엘을 공격함으로 이스라엘이 구원 받았음을 알려준다. 당시 아나드니나리를 섭정한 삼무라마트(Sammuramat)는 훗날 그리스 전설에 아름답고 현명한 앗수르 여왕으로 알려진 세미라미스(Semiramis)였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에게 은 34톤을 주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자기 권력을 견고히 하려 했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왕하 15: 19).

불(Pul)이라고도 불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아나드니나리 3세의 아들이었다. 앗수르의 통치자 불은 우상 신들을 섬기던 므낫세 동쪽 반지파들인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 할리, 하복, 하라 그리고 고산 강가에 분산 수용하였다.

이 사건은 이 세 지파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공동체와 영원히 멀어지고 결별하는 슬픈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므나헴은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앗수르를 끌어들였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앗수르의 불왕은 북아람을 점령하여 한 도(道)로 편입하였으며 유대인들도 독립 국가가 아닌 앗수르어로 "울루부"(Ullubu)라 부른 지역에 기거하고 있는 포로로 취급할 뿐이었다. 그리고 불의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주전 727-722)는 호세아왕이 애굽을 의지하며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은 일을 핑계 삼아(왕하 17:4)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결국 함락시켜버렸다.

사마리아 성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과 메디아로 끌려갔다(왕하 17:6). 이때 함께 사마리아를 점령한 사르곤이 살만에셀 왕을 이어 왕위에 올라 앗수르의 마지막 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이렇게 앗수르의 두 왕에 의해 영원히 멸망당하고 말았다.

앗수르와 남왕국 유다

이때 남왕국 유다는 어땠을까? 풍전등화와 같았던 남 유다는 당시 히스기야의 치하에 있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열강 제국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히스기야는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은 아들 산헤립(주전 705-681)도 선왕들처럼 전쟁을 즐긴 왕이었다. 산헤립은 앗술을 거쳐 니느웨를 앗수르의 수도로 삼은 왕이기도 했다. 그는 바벨론, 갈대아, 엘람인들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므로닥 발라단이 앉았던 바벨론 왕의 자리에 자기 측근을 앉혔다.

므로닥 발라단("마르둑이 한 아들을 주었다"는 의미)이 히스기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왕하 20:2-19). 산헤립은 주전 701년 아람으로 진격하여 시돈을 공략하고 아스글론을 거쳐 라기스를 정복한다(왕하 18:13,14). 그리고 남은 예루살렘을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왕하 18- 19장; 대하 32장; 사 36-37장). 히스기야는 새장의 새처럼 갇혀버렸으며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공물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왕하 18:14-16). 인간의 권세란 얼마나 허망한 것이던가.

약소국의 슬픔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시대에도 이어졌다. 므낫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그는 한때 앗수르의 영역 안에 있던 바벨론에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했다(대하 33:11). 에살핫돈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앗수르바니팔(주전 669-633, 성경의 오스납발)이었다. 애굽으로 진격하여 테베를 약탈하고, 애굽 왕 바로 느고를 죽인 앗수르 왕이 바로 앗수르바니팔이었다.

앗수르 족의 종교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앗수르는 지정학적으로 민족적·문화적·종교적 혼합의 성격을 가질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잡신 문화가 별 차이가 없는 것도 이 같은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다.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기인한 이곳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원론적이었다. 판테온(Pantheon, 온갖 신들을 모신 만신전)이 발달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수메르의 판테온에는 3천 내지 4천여 신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수메르의 바람의 신 '엔릴'(Enlil)과 바벨론의 말둑(마르둑, Marduk, 렘 50:2)과 앗수르의 앗술은 민족 신인 동시에 최고의 신들이었다. 엔릴은 수메르의 하늘의 신 '아누'와 땅의 신 '키' 사이에 태어난 '니풀의 신'이었고 벨(Bel, 사 46:1; 렘 50:2; 51:44)은 말둑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대 앗수르 지역까지 진출한 수메르인들은 '앗술'에 '엔릴'을 위한 지구랏을 건설할 만큼 이 지역은 고대부터 종교적, 문화적 소통이 활발하였다. 니느웨의 앗수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발견된 주전 7세기 중엽 쓰여진 유명한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와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Epic)가 성경 창세기 기사나 대홍수 이야기와 유사하면서도 성경과는 상이하게 다른 다신론적 창조 신화인 것도 이 같은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배경을 반영한다. 유명한 월신(月神) '신'(sin)이나 전쟁과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Ishitar), 지혜와 문필의 신 '나부'(Nabu) 등도 모두 앗수르 땅의 신들이었다.

유일신을 섬기던 이스라엘과 우상 잡신을 섬기던 앗수르는 같은 셈족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있어 이렇게 판이하게 갈라졌다.

앗수르 족의 미래

오늘날 셈의 아들로서의 앗수르와 그 후손들은 앗수르 제국과 그 백성들의 이름 속에만 남아있다(민 24: 22, 24; 호 14:3). 그들이 숭배하던 신(神)의 이름조차 '앗술'이었다. 앗수르 제국이 융성할 때 앗수르인들의 지식과 예술과 문명의 불꽃은 크게 타올랐다.

반면에 앗수르의 황제는 교만하고 잔인하였다(사 10:11-12). 하나님은 이런 앗수르 왕의 교만을 가만히 두고 방치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자랑과 위세란 허망할 뿐이다(사 10: 16-19). 이제 과거의 제국들은 사라지고 오늘날 앗수르와 바벨론의 옛 땅인 이곳은 지금 주로 이라크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그들의 유적은 이슬람국가(IS)로 인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라크는 독재자 후세인 통치 시절 그나마 절묘하게 종교적 균형이 이루어져 왔었다. 한때 후세인 시절 부통령이 기독교(시리아정교회)인이던 시절도 있었다. 후세인 시절 모술의 시리아 정교회 소속 기독교인은 전체 모술 인구의 25%에 달하였던 적도 있었다. 이라크 전쟁 결과 후세인의 철권 정치는 종언(終焉)을 고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지역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과 위협이 점증하는 땅으로 바뀌어버렸다.

악은 악을 불러올 뿐이다. 과거 앗수르 제국 시절 신들의 상과 조각이 넘쳐 나던 이 지역에 과연 참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주전 759년 경 갈릴리 출신 선지자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 성에 가 성의 멸망을 예고하며 회개를 촉구한 사실을 알고 있다. 놀랍게도 니느웨 백성들과 왕은 함께 회개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집단적 회심의 놀라운 보기였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니느웨 성 백성들의 회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앗수르는 앗수르바니팔 왕과 그의 아들 앗수르에틸일라니의 치세 때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선 줄로 알 때 넘어지는 게 인간이다.

나훔 선지자의 예언대로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니느웨(앗수르)를 향한 요나의 외침과 니느웨 백성들의 대응은 작금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복음은 움직인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요나처럼 복음에 반응하고 행동할 것을 지금도 요구하신다. 이런 가운데 유엔 평화유지군 자격으로 대한민국 자이툰 부대가 모술에 진출한 일은 이라크와 쿠르드(야벳의 아들 마대 후손들)인들에게 세상에 대한 원망만이 아닌 사랑과 소망의 틈새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 앗수르 땅의 제 2의 요나는 누구일까? 21세기의 요나여! 21 세기의 니느웨여! 함께 일어나라! 지금은 마치 무슬림 국가처럼 변해버린 이곳에 복음의 빛이 다시 스며들기를 기도한다.





























































































































































































































































































































































































































































































































































































































































































































































































































































































































































































































































































































































































































































































































































































































































































쿠쉬너 소령은 미국인 군의관이었다. 
그의 포로생활 회고담은  절망과 죽음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1967년 월맹군의 포로가 되었다.
지독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체중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27명의 미군 중 10명이 죽어갔다.
죽은 병사중 로버트라는 하사관이 있었다.
그는 해병특공대 출신으로 억세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소령이 로버트 하사를 처음 보았을때 비사상태의 다른 포로들에 비해 그는 유난히도 생기가 넘쳐흘렀다.
체중은 40킬로 이라로 떨어져 수수깡처럼 말라있었지만 눈은 빛나고 중노동을 잘 곁뎌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희망때문이었다.

교활한 월맹군측은 포로들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하여 말 잘 듣는 미군 포로 몇명을 석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다음번 석방자는 로버트가 될 것이라고 했다.
석방에 대한 의망이 로버트 하사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극복할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희망은 육체적,생물학적 한계마저 극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6개월이 되었지만 월맹군측은 그를 석방시켜 주지 않았다.
1개월을 더 기다렸으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월맹군 장교의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다.
"다 틀렸구나!" 생각한 그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후 군의관에 품에 안겨 죽었다.
"어머님, 아버님. 정말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바바라 당신을 용서하오."
이것이 병사의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로버트는 질병때문이 아니고 절망때문에 죽었다고 군의관은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며 앞으로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을때 그는 마침내 죽고 말았다."고 쿠쉬너 소령은 회고하고 있다.


빅터 플랭클은 유명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다.

나치스에 의해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갇히게 되었다.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람들은 죽어갔다.
몸에 상처가 있거나 노동력이 없어진 유대인들은 모두 가스실로 보내졌다.
이가 득실거리고 이로인한 발진티푸스로 또많은 유대인들이 죽어갔다.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몸이 건강해서가 아니고 살아남아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개처럼 살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간의 존업성을 지키며 살았다.
공통적인 것은 살고자하는 의지를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수용된 이들 유대인들 가운데 닥터 라는외과 외과의사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밝은 얼굴로 프랭클 박사를 찾아와 간밤에 꿈을 꾸었다고 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추수감사절에 연합군이 진격해와 석방되는 꿈이었다.
이 꿈을 꾼 후로 그는 마치 충실한 식사를 한 사람처럼 원기왕성하고 명랑해졌다.
수개월이 지나고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나 연합군의 소식은 감감했다.
어느날 밤 그 닥터는 프랭클 박사에게 "다 틀린거야... 헛된 꿈이었어." 라고 힘없이 말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하게 열이 오르더니 수일만에 죽고 말았다.
자유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과 희망은 닥터로 하여금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원기왕성한 삶을 살게 해 주었지만 기다렸던 그날이 훨씬 뒤로 물러가 버리자 그를 유지시켜 주었던 정신적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이처럼 절망감은 인간을 병들거나 죽게 한다.
정신의학자들은 이에 대한 많은 근거를 갖고 있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우리를 짖밟고 개가를 부를때 절망감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저희는 풀과 같이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이이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유한한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변치않은 소망을 주신다.
불치의 병이라는 선고를 받았을때 인간은 절망하며 이 절망감 때문에 병을 극복할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어떤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안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은 우주 최대의 희망이다.




죽음에 관한 명언

죽은 자는 태풍 앞에서 벌벌 떨지만, 살아있는 자는 그 태풍과 더불어 함께 걷는다. 
- 칼릴 지브란 죽을 때에 죽지 않도록 죽기 전에 죽어두어라. 그렇지 않으면 정말 죽어버린다.
- 엥겔스 죽음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굳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준 존재의 의지에 순순히 따라야만 합니다.
- 톨스토이 죽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일어날 수 없다.
- 월트 휘트먼 죽음에는 내일이 없다는 하나의 두려움이 있다.
- 에릭 호퍼 죽음에 대한 혐오감은 우리들이 인생을 헛되이 보냈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비례하는 것이다.
- 윌리암 해즐릿 죽음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 전에 겪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 그것이다.
- 바키리데스 죽음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자유로워진다.
- 헤라클레이토스 죽음은 단지 한순간의 고통이지만, 삶은 기나긴 고통이다.
- 버나드 조셉 소린 죽음은 때로는 태산보다 무겁고 때로는 새털보다 가볍다.
- 사마천 죽음은 밤의 취침, 아침의 기상이라는 과정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커다란 과정이다.
- 힐티 죽음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삶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면서도.
- 바이런 죽음은 시간의 적이다.
- 도교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만이 유한한 인생에 있어서 기쁨의 근원이 된다. 죽음은 연금 후에 맞게 되는 단계이다. 그것은 어떤 돈도 지급받지 못하는 영원한 은퇴이다.
- 쟝 지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