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 03. 04. 2022(Fri) - 03. 29. 2022(Tue)


♦ 3월 29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22:1∼53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짓말하는 영(22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靈)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先知者)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거짓말하는 영(a lying spirit)”이란 ‘거짓말을 하게 하는 영’을 말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사회는 진실만이 인정을 받습니다.

왕의 권력에 붙잡혀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 더구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선지자들마저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예언을 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징계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원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그 이유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이 거짓말하는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이란 내 안에 있는 거짓 것을 찾아내어 진실한 것으로 교환하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짓 것을 진실한 것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풍요로운 환경에서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의 태도가 올바른 사람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만을 인정합니다.
때로는 어려운 환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좋은 환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타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좋으신 주님으로 찬송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이 기쁨을 이웃에게 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영은 지금 너의 환경은 감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네가 감사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미혹합니다.
감사하는 것은 지금만이 아니라 장래에도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을 심은 곳에 팥이 난다.”는 말처럼 내가 감사를 심으면 반드시 감사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창조적 삶을 즐기지만 원망과 불평은 저주와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감사하며 찬송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우정(友情)

사형수 "피시아스"와 그의 친구 "다몬"의 이야기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의 피시아스라는 젊은이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효자였던 그는 집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피시아스에게 작별 인사를 허락할 경우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형수들도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가 멀리 도망간다면 국법과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피시아스의 친구 다몬이 보증을 서겠다면서 나섰습니다.

"폐하, 제가 그의 귀환을 보증합니다. 그를 보내주십시오."

“다몬아, 만일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제가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너는 피스아스를 믿느냐?"

"폐하, 그는 제 친구입니다."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피시아스는 돌아오면 죽을 운명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올 것 같은가? 만약 돌아오려 해도 그의 부모가 보내주지 않겠지. 너는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

"저는 피시아스의 친구가 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오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다몬은 기쁜 마음으로 피시아스를 대신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피시아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보 같은 다몬이 죽게 됐다며 비웃었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졌습니다.
다몬이 교수대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자 다몬의 친척들이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시아스를 욕하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목에 밧줄을 건 다몬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습니다.

“나의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라. 당신들이 내 친구를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앞둔 다몬이 의연하게 말하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집행관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은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습니다.
집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재촉하여 달려오며 고함을 쳤습니다.
피시아스였습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피시아스가 말했습니다.

“다몬,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에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피시아스, 자네가 먼저 가는 것뿐일세.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 우리는 틀림없이 친구가 될 거야.”

두사람의 우정을 비웃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다몬과 피시아스는 영원한 작별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왕은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뒤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바로 곁에 서있던 시종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귀어보고 싶구나!"

아리스토텔레스
친구란 누구인가?
두 개의 몸에 깃든 한 개의 영혼이다.

영혼이 같은 것이 친구라고 하였다.
서로의 생각과 행동과 삶이 같은 것이다.

♦ 3월 2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18:1∼46
♦ 묵상을 위한 주제 : 어느 때까지(21절)
♦ 성구 : 엘리야가 모든 백성(百姓)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萬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萬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百姓)이 말 한마디도 대답(對答)하지 아니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여 그 말씀대로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속에서 거부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나의 생각과 다른 것일지라도 그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순탄한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역경과 고난이 하나의 은혜의 창구가 되기 때문에 순종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본문에는 엘리야 이외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오늘 묵상의 주제 “어느 때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오바댜(Obadiah, 여호와의 종)

오바댜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들을 도모하는
아합 왕의 궁내 대신이었지만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왕비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위험을 무릅쓰고 100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몰래 보호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 오바댜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아합(Ahab, 부친의 형제)

아합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권력과 여자에 취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열중했습니다. 왕이 잘못된 신앙의 길에서 방황하므로 백성들은 심각한 가뭄과 기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the People of Israel)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는 신앙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넷째, 바알의 선지자들(the prophets of Baal)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제물로 바친 송아지를 바알신이 불로 태워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들의 기도가 무산되자 저녁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외치며 춤을 추며 그들의 규례에 따라 자신의 몸을 칼과 창으로 자해했건만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합니다. 그리고 송아지 제물이 있는 제단에 흥건하게 물을 채운 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인 것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이중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심을 깨닫게 하므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후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유대인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 11:42).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나를 드러내려는 욕망이 있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하나님께 간구하며 다시 쌓았듯이 그리고 악의 덩어리인 바알 선지자들을 단호하게 죽인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들을 회개하며 악한 것을 끊어버리고 무너진 기도의 단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생명이 있을 동안에 믿음의 제단을 수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모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려운 일 당할 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어느 때까지(시편 13:1-6)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다윗은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 언제까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나의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진정 ‘나를 영영히 잊으셨나이까?’라고 절규하고 있다.

우리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이 절박할 때, 우리가 고통으로 신음할 때 하나님은 마치 우리 자신을 잊으신 분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가 있다.
정말 우리 영혼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운 순간까지 침묵하신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 즉각 개입하시지 않는 걸까?
하나님은 나의 상황을 알고 계시는 걸까?
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다윗은 자신의 영혼 속에 맴도는 생각과 번민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토설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나의 눈을 밝히소서!"
하나님은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절실히 갈구하는 인생에게 어는 덧 찾아오셔서 근심. 걱정을 찬양으로 바꾸어 주신다.

사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다.
우리의 믿음이 정금 같은 신앙으로 잘 단련되어 성숙되기를 원하신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도록 처절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그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할 때 어느 덧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하신다. 그 크신 사랑 때문에 마침내 고통 속에 있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의지하고 마음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신다.

고통의 연단은 내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축복의 기회임을 기억하자!
그 고통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크게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겠다.

이세벨(Jezebel) 정숙한, 고상한, 계집아이

열왕기상 16:31-33

느밧
의 아들 여로보암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비 : 이세벨

Ⅰ. 이세벨의 인적사항

 1. 이세벨의 뜻 : “고상한, 정숙한”
 2. 시돈 왕 엣바알의 딸
 3.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4. 베니게 종족 출신

Ⅱ. 시대적 배경

북이스라엘이 베니게와의 조약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누리고, 다메섹에 있는 아람에 대항할 힘을 획득하고자 했던 시기(B.C. 874~853년경)에 아합 왕과 이세벨의 정략결혼으로 북이스라엘 내에는 바알 숭배가 만연하게 됨.

Ⅲ. 이세벨의 특징

이스라엘은 사울 - 다윗 - 솔로몬을 잇는 단일왕국시대로 이어지다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때 르호보암의 악정으로 인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게 됩니다.

남유다는 유다지파의 계보를 잇는 왕조가 되지만 북이스라엘은 10개의 지파가 연합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왕조를 형성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의 왕조가 시작되는데 그의 아들 나답 때에 바아사가 모반을 일으키고, 바아사의 아들 엘라 때에 시므리가 모반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 모반은 7일천하가 되고 맙니다.
시므리의 모반소식을 듣고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군대 지휘관이었던 오므리를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하여 시므리의 모반을 평정하게 됩니다.
그때 또 다른 모반을 꾸며 디브니가 모반을 하나 오므리가 모든 모반을 평정하고 오므리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모반에 모반을 반복하면서 세운 왕조이다 보니 오므리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기게 됩니다.

사마리아 : 오므리가 세멜에게서 은 두달란트로 산을 사고 성읍을 건축한 후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

엣바알 : 엣바알은 본래 바알신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히람 왕가의 펠레스 왕을 암살한 후 왕이 되었다.
엣바알은 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엣바알의 본래 이름은 이도발이었다.)


왕권을 견고히 하기는 했지만 오므리는 악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므리 밑에서 보고 자란 아들이 아합입니다.
아합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자 더욱 악한 정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합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장인(이세벨의 아버지)이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으니 바알을 섬기는 우두머리, 바알의 최고 선지자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한 것이다. 그러니 이세벨이 어떤 여자였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왕후가 되어 북이스라엘 역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세벨은 과연 어떤 여자였을까요?

1.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에 만연하게 했던 여인

아합왕이 다스릴 당시에는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라 전체가 모반을 거듭하면서 국력은 많이 약화되었고, 남쪽으로는 남유다가 버티고 있고, 북쪽으로는 아람이 진을 치고 있고, 북서쪽으로는 베니게가 동쪽에는 암몬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아합은 정략적인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베니게와 동맹을 위해 베니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한 아합왕은 이세벨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이세벨과 결혼 할 때 바알을 섬겨 거기에 예배하고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해 주었던 것이다. 이에 이세벨은 바알신전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제단을 쌓게 하고, 아세라상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모든 제사를 집례하고 바알 종교의 포교를 위해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를 불러 들였다. 그 수가 무려 850명이나 되었다.

이세벨은 아합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여인이었다. 그래서 아합으로 하여금 자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게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진짜 목표는 온 이스라엘을 바알을 숭배하는 나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이세벨은 아합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는 매력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수장인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이세벨은 이스라엘 전체를 쥐락 펴락하는 권세를 누리게 된 것이다.

적용

이세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의 딸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과 정략적인 계약을 맺는 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세벨을 이용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세벨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겨서 국정을 파국으로 이끌고 나라를 망쳐버리게 됩니다.

우리도 악한 것들과는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위협이 있어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는 평안을 누리고 회복되는 줄 믿어야 합니다.

2. 이세벨은 여호와의 신앙을 말살하는 정책

이세벨은 단순히 바알종교를 전하는 전도자에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스라엘 모든 민족에 뿌리내리고 있는 여호와의 신앙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우선 적으로 선지자들을 숙청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열왕기상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이세벨의 권세는 아합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아니 아합의 모든 마음을 사로 잡아 수렴청정(垂簾聽政)하듯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고, 심지어 색출하여 죽이는 일에 앞자서게 되었다. 이에 당시에 왕궁을 맡은 궁내대신 오바댜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몰래 굴에 숨겨 100여명을 돌본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세벨의 막강한 세력앞에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세벨은 사악한 여인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아합의 눈과, 귀를 다 막은 여인이다. 아합은 이세벨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적용

악이 들어어면 그 악이 얼마나 무섭게 번식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세벨은 악의 화신이었습니다. 암세포같은 존재였습니다. 모든 건강한 세포를 공격하여 죽이기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찾아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3. 이세벨은 사악한 변신의 귀재

이세벨은 변신의 귀재였다. 자신의 남편 아합에게는 아주 연약한 여인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아합이 없는 곳에서는 자신이 숨겨온 발톱을 드러내고 천하를 호령했다.

● 엘리야을 겁박하는 이세벨.....

아합의 악정을 보고 한 번은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에게 찾아가 말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정말 이스라엘 땅에 비와 이슬이 그쳐 버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고의 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뭄이 시작 된 지 3년 째 되는 해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불로 대결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엘리야의 갈멜산 대첩이 시작됩니다. 물론 무기없는 싸움이지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엘리야와의 대결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결이 아니라 신의 전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대결에서 엘리야가 이깁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를 다 잡아 기손시내로 끌고 가서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나자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크게 노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을 협박합니다.

열왕기상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렇습니다. 이세벨은 당장 엘리야 선지자를 잡아 죽일 듯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이세벨의 분기와 혈기가 짐작이 가는 내용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엘리야를 잡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이 잡듯이 뒤지겠다는 것입니다. 국가적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는 비상망을 총동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허풍을 떠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한다면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모습을 철저히 보여 준 것입니다. 이세벨의 이 선전포고가 얼마나 떨리는 일이고 무서운 일이었으면 금방 놀라운 기적을 행사한 엘리야까지 간담이 서늘해서 도망을 쳤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을 빠져나와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렇듯 이세벨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막강한 권세였습니다.

● 나봇의 포도원을 뺏은 이세벨...

한 번은 아합이 거주 하는 왕궁 근처에 나봇이라는 사람을 농사를 짓는 포도원이 있었다. 아합은 그 포도원이 탐이 나서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팔라고 한다. 그러나 나봇이 그 포도원을 팔지 않자 아합은 속이 상해 단식하고 침상에 들어가 고민을 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보던 이세벨이 아합을 위로합니다.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랄르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이렇게 왕의 마음을 살살 녹입니다. 얼마나 요염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 자기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인을 치고 봉해서 그 성읍에 있는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그 내용은 그 성읍에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들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한 후에 나봇을 돌러 쳐 죽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사악한 행위입니까? 그러자 모든 장로들과 귀족들이 이세벨의 명대로 합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진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세벨의 악의 극치를 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곧 법입니다.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곧 걸어다니는 법이고 신입니다. 그러니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겠습니까? 상상을 초월할 일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의 눈만 가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은 심약한 존재입니다. 이세벨의 꼭두각시 역할만 했던 왕입니다. 참으로 비참한 노릇입니다.

이렇게 이세벨은 사악한 변신의 귀재였습니다. 남편에게는 애교 많고, 연약한 여인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위하고 왕을 위하는 척 합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 전체를 병들게 만들고 망쳐버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적용

이세벨은 사악한 여인이 대명사였습니다. 그녀는 음녀였습니다. 그녀는 요녀였습니다. 괴녀였습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정략적으로 잡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과 타협하고, 무엇과 계약을 맺겠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내 마음속에 이세벨을 품는 다면 순간은 좋아보이나 그것이 곧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이세벨의 비참한 최후

이세벨의 사악한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게 합니다.

[왕상21:23]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네 결국 이스라엘에 또 다른 모반이 생기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운 예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후가 모반을 하여 아합의 아들을 제거하고 온 이스라엘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한 이세벨을 잡으러 옵니다. 예후가 온 것을 본 이세벨은 화장을 하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죽을 준비를 합니다.

아주 악한 여인은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나 봅니다. 그러자 예후가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고 소리치자 두 명의 내시가 창으로 내다봅니다. 예후는 이세벨을 내려 던지라고 하자 두 내시가 이세벨을 창 밖으로 내어 던집니다. 그러자 그 피가 담과 말에 튀었습니다.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난 이후에 저주받은 여인을 장사하려고 보니 이세벨의 시체를 찾을 길이 없고, 오직 그녀의 두골과 발과 손 만 있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육체는 개의 식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악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댓가를 지불하게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자의 악행은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혹시 이 땅에서 그 댓가를 받지 못했다면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악의 괴수가 되지 말아야 하고 그러한 자와 계약을 맺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악을 제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악은 엄청난 번식력이 있습니다.
악이 우리의 삶의 귀퉁이에서 번식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Ⅳ. 결론

1. 하나님 외에 다른 것과 타협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2. 내 안에 이세벨과 같은 사악함이 없는지 점검하자
3. 악은 엄청난 번식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제거하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mam of God)’을 히브리어로 ‘이쉬-하엘로힘’(אִישׁ־הָאֱלֹהִֽים-iysh-hā’ĕlōhîm)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쉬’(אִישׁ-ʼîysh)는 “남자, 인류, 남편, 위인”이라는 뜻의 남성명사 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수 없이 많이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으로 불리운 사람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선지자들(삼상 9:10; 왕상 13:1; 대하 25:9)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만.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모세(신 33:1; 수 14:6; 대상 23:14; 대하 30:16; 스 3:2; 시 90:1), 다윗(대하 8:14; 느 12:24, 36), 엘리사(왕하 4:7; 5:8; 7:2; 8:2), 그리고 스마야(왕상 12:22) 정도이고,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딤전 6:11)를 그렇게 부르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로마서 8:9)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4:1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칭된 다윗을 통하여 이 단어가 가지는 몇 가지 의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행 13:22),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부분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둘째, 조상 아브라함과 맺으신 땅의 언약을 성취한 사람

여호수아의 주도하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했습니다만, 그 이전까지는 부분적으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수 많은 전쟁을 통해 해당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함으로 온전하게 땅의 언약을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셋째, 율법의 제사 제도를 완벽하게 구현했기 때문

모세를 통해 제정해 주신 율법에 따라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성전과 제사의 직무에만 전담하도록 함으로, 율법의 제사 제도를 완벽하게 구현하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의 규례에 따라서 이를 그대로 시행했을 뿐입니다(14절).

넷째,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셨기 때문(삼하 7:8-16)

이 언약의 주인공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성육신 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의 사람이란, 다윗이나 모세처럼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너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람이 것이다.
더구나 내가 다른 보혜사인 성령으로 내주하고 있는 성전(고전 3:16; 6:19)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문제는 너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사람 답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왜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을까?

아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같이 온전하였다고 하지만 다만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오뎃의 말 듣고 용기를 내어 개혁 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아사 왕 안에 산당이 들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산당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아사 왕은 예루살렘에서 41년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남색 하는 자를 쫓아내고, 그 열조의 모든 우상을 없앴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에서 폐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없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사 왕이 엄청난 개혁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찍어 불살라버렸습니다.
심지어 태후인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만들었다고 폐위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아사 왕은 그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였습니다.
그는 그 부친이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은과 금과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도 다만 산당은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산당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엄청난 개혁을 한 아사 왕도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입니까?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까지는 여러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산당의 제사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다고 드린 제사였습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사무엘도 솔로몬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산당들이 여호와의 제사와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의 제사와 혼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그 속 내용을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과 주변 나라들의 우상숭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산당을 다 제거한다는 것은 민간신앙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전 국민적 반발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사 왕은 개혁을 하면서도 산당만은 남겨둔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개혁을 한 아사가 산당을 남겨둔 것은 자신의 마음에도 산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22절을 보면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한지라.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그 신복의 손에 붙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치고 디르사에 거하니라. 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영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 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아사와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사이에 일평생 전쟁이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 유다로 가는 길목을 막기 위하여 예루살렘 위의 라마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기들의 요새를 건설한 것입니다.
르호보암 왕 때에도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를 섬기게 하자 남으로 내려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 때도 북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남쪽 아사 왕에게로 온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아사가 라마에 요새를 건설한 것입니다.

역대하 15:1-19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으나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그 때에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셨음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아사 왕 십 오년 삼월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저가 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한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아사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자 아사가 선지자 오뎃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모든 우상들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사람들 중에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남으로 가는 길목을 막기 위하여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라마에 성을 건축합니다.
그런데 이때 아사가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 아니라 아람 왕에게 성전의 은금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합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을 아람이 공격하니 바아사는 물러가게 되고 아사는 라마를 건설하려던 재료를 가지고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합니다.
아사가 이렇게 한 것이 바로 아사의 마음에 있던 산당입니다.

역대하 16:7-10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 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을 하나님의 선견자 하나니가 책망을 하자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선견자의 편을 든 몇 사람도 함께 학대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뎃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었던 아사 왕이 전쟁의 승리로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이 계속되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된 줄로 착각하고 교만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이 공격하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전에 아사는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 규모가 북 이스라엘 군대보다 더 큰 대군이었지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아람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사의 산당입니다.

그러면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역대하 14:8-15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 팔만이라. 다 큰 용사더라.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더라. 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약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이 말씀에 보면 58만대 100만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여 이긴 사람이 아사 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을 한 아사 왕이지만 자기 안에 산당을 온전히 제거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5:23-24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무릇 그 행한 일과 성읍을 건축한 것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저가 늙을 때에 발에 병이 있었더라. 아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그 조상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사 왕이 늙었을 때에 발에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아사 왕은 여호와께 묻지 않고 의원에서 물었습니다.

역대하 16:11-14
“아사의 시종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사가 위에 있은지 사십일 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아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같이 온전하였다고 하지만 다만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오뎃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개혁을 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아사 왕 안에 산당이 들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산당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머리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아사의 공격 때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의 힘을 빌려 물리쳤습니다.
자신의 발에 병이 들었을 때도 여호와께 구하지 않고 의원에게 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병원에도 가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사 왕에게 들어 있는 산당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16:13-16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네가 네 의복을 취하여 색스러운 산당을 너를 위하여 만들고 거기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에스겔 16장은 태어나면서부터 거리낌을 받아 탯줄도 자르지 못한 상태에서 버려진 계집아이를 예루살렘으로 봅니다. 이런 계집아이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고 왕후로 만들어 놓았더니 하는 짓이라고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자기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아사 왕이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처럼 우리 안에도 산당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산당들은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도무지 무너뜨려지지가 않습니다. 이 산당은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로 나갑니다.

미가서 1:1-5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야곱의 허물이 사마리아이며, 유다의 산당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즉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나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 다 산당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밝아버리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불 앞의 밀초 같이 녹아져 내리며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이 흘러내리고 말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북 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다 멸망하였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그들 안에 있는 산당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자기를 위한 욕망의 산당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도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산당에서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산당들을 파괴하여 버리심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안에 있는 산당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수어 내십니다. 성도는 자기 안의 산당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역사 속에서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빈손 들고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민수기 23:19).
이 하나님에서 우리 속에 있는 산당을 제거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굳게 붙잡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있는 자기를 위하는 모든 산당이 무너지게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며,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산당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열왕기하 12:3-4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위의 구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왜 산당들만 내버려 두었을까?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아직 ‘중앙성소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산당들이 제의적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솔로몬 성전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지방에 있는 레위의 도성들에서 산당들이 가동되었을 것으로도 본다.
종교적 중심지는 늘 권력과 정치와 물질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지방의 세력들이 이 권력을 쉽게 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은 지방의 세력들의 정치적인 이유나 사회적인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산당들이 다 제거되지 못한 이유들이 될 것이다,

나는 이외에 또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신 임미영 교수의 강의를 통해 산당(히: במה bamah)에 대해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었다.

바마에 대한 정의에 대한 견해에 일치된 의견이 없기 때문에 바마를 쉽게 정의내리기는 쉽지 어렵지만, 바마는 단순히 높은 장소만이 아니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바마가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곳인데 바마는 산에도 있고 평지에도 있고 심지어 집에도 있을 수 있다. 길거리나 성문 앞 광장에도 있었고, 솔로몬이 갔던 바마는 산중턱에 있는 넓은 광장에도 있었다. 심지어 때로는 신상이 있기도 하고 신상이 없어도 산당이었다.

산당이 제거되기 힘든 이유는 집안에도 산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당은 일종의 가정 재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산당은 큰 장소도 산당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자기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 놓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신주단지처럼 모셔놓듯이. 다른 장소보다 조금 더 높게 세우면 그 모든 것이 다 산당이었다.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가까운 요단강 근처의 벳세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신상은 성문 앞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성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상거래가 잘되도록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위의 그림은 벳세다 성문에 있는 바마이다.
이 돌(Matzevah)의 하나에는 바알하닷이 새겨져있고 다른 하나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우상이 그려져 있지 않는 것도 우상 신상이다.
보통 이 둘이 같이 있을 때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돌은 여신상으로 간주한다.

리차드 S. 히스가 펴낸 ‘이스라엘의 종교’(원제, Israelite Religions: An Archaeological and Biblical Survey, CLC, 2013년)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주전 750년 하솔의 가정집에서 종교물품이 적게 발견되다 후에 제의 물품의 수가 증가하였다.
가정집에서 발견된 제의 물품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텔 베잇 미르심((Tell Beit Mirsim/ Debir))에서도 발견된다.
그것도 남왕국 말년에 45퍼센트가 가정주거에서 제의 물품을 포함하고 있다.
이 관찰들은 가정 주거에서 발견된 분향 수발과 석회석 제단에 관한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북왕국과 남왕국이 멸망할 즈음 가정 제의가 늘어난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가정에서 다양한 신들에 대한 예배가 드리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비주류 가정의 성소에서도 많은 수의 등잔과 음식준비, 섭취, 음용을 위한 그릇을 발견했다.
데버는 (2001)산당이 공식 종교에서 소외당한 여성들이 가정종교를 시작했다고 말한다.(pp. 382-384)
공식적인 산당에서 가정 산당까지 깊이 뿌리내리는 모습이라고 리차드 S. 히스는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고대 남왕국 유대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산당은 어떤 면에서 로마시대의 라레스 숭배와 관련된 라라리움(Lararium)과 비교해볼만 하다.

라레스는 로마시대 때 유명한 주신이 아닌 하급신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더 자주 등장한다. 라레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보통 죽은 조상 중 일부가 살아생전 훌륭한 일을 한 것이 인정되어 정령으로 추앙받은 존재이다. 이 정령들은 보통 후손들이 숭배했는데 집안의 자손들이 가정 안에 설치해놓은 작은 제단인 라라리움(Lararium)에서 매일 제물도 올리고 기도를 하며 숭배하였다. 이 신은 기본적으로는 가족 수호신이지만 장소를 수호하는 라레스도 있고, 심지어 로마 국가를 수호하는 라레스 아우구스티도 있었다. 이 라라리움 같은 것이 산당과도 비교될만하다.

산당이 제거되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산에 있거나 큰 장소에 있는 것은 없애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간신앙으로 뿌리 깊게 파고들어가 각 가정에까지 파고 들어갔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것을 다 파괴하여 제거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텔 아라드의 고대 신전 유적지. 그 안쪽이 성소 지성소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고고학 수업을 배울 때 흥미로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아랏(오늘날의 아라드)에 자리한 텔 아라드에서 발견된 제단은 2번에 걸쳐서 제단(바마)이 무너진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최남단에 위치한 텔 아라드의 요새 자체는 586년에 파괴되어 무너졌다. 그런데 이곳에 자리한 신전은 그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무너져서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파괴된 시기는 탤 아라드에 있던 성이 무너진 시기와 달랐다.

이곳의 신전이 무너진 시기는 주전 700년경(히스기야 시대)과 주전 650년경(요시야 시대)에 2차례 파괴되었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 시기가 요시야 시대와 히스기야 시대와 일치한다. 성경의 시대와 아랏의 바마가 무너진 시기가 일치해서 이 아랏을 배울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실제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아랏의 제단을 보았을 때 큰 감동이 있었다.

위의 사진은 텔 아라드(아랏)의 신전 구역이다. 그 안쪽이 성소이다. 아랏의 성소 안에 있는 곳을 보면 두개의 돌이 있다. 이 2개의 돌이 원래는 무너뜨려서 쓰려져 있었는데 그것을 세워보니 신상으로 쓰여 졌던 돌이었다. 돌(Matzevah)은 그림이 새겨져 있든 없든 그 자체로 이미 우상이다. 2번이나 무너졌던 흔적이 보인다.

이처럼 산당이 그대로 남아있던 이유데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이것을 보면 큰 장소나 대중적인 장소는 산당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뿌리 깊게 퍼진 민간 신앙 때문에 각 가정에 모신 산당은 파괴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다가온다.




아히야(Ahiah) : 여호와는 나의 형제이다
- 아히둡의 아들.
그는 사울의 통치 때 대제사장이었다(삼상14: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있었는데 그는 이가봇의 형제인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 있던 {주}의 제사장 엘리의 증손이더라.

사울이 죽인 아히멜렉 즉 그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의 형제였을 것이다(삼상 22:9).
그때에 사울의 신하들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에돔 족속 도엑이 응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 아히야(Ahijah)
솔로몬과 여로보암 시대의 대언자, 역사 기록자(왕상 11:29; 대하 9:29).
왕상 11:29,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던 그때에 실로 사람 대언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는 새 의복을 입었고 그들 둘만 들에 있었더라

그는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솔로몬에게 말을 전하고(왕상6:11) 또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에게 말을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왕상 11:11).
(왕상 6:11)  {주}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왕상 11:11) {주}께서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러한 일을 행하였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한 내 언약과 내 법규를 네가 지키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반드시 왕국을 네게서 빼앗아 찢어서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는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이 유다에서 떨어져나갈 것과 그의 집이 세워질 것과 또 그가 몰락할 것에 대해 예언을 했다(왕상14:1-14).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단되어 분열왕국 시대로 접어들 무렵 무명에 가까운 한 선지자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솔로몬의 정략결혼은 후궁들과 첩들이 가져온 온갖 이방신들로 왕궁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을 이교신앙(異敎信仰)으로 물들게 했다.

온갖 건축공사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솔로몬이 부과한 지나친 과세와 악정(惡政)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원성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탁한 시기에 종교혼합주의를 배척하고 순수한 야훼신앙을 고수한 선지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아히야였다.

아히야는 솔로몬의 죄악에 대한 임박한 심판을 예언하였는데 그는 실로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선지자였다.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초기 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의 센터였고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였다.
오래전부터 실로는 법궤가 있던 중앙 성소의 역할을 담당해 왔기에 야훼종교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철저한 야훼신앙을 고수한 아히야는 솔로몬의 반(反) 야훼적 신앙과 통치로 인해 솔로몬 왕국의 뿌리에 놓인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를 보았다.

솔로몬이 벌인 공사의 감독관이었던 여로보암을 만난 아히야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새 옷을 벗어 열 두 조각으로 찢으며 여로보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만은 솔로몬이 다스리도록 남겨 주겠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이 장차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솔로몬 통치시절에 왕국의 심판과 새로운 왕의 탄생을 예언한 아히야는 대단한 배포를 지닌 선지자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후 솔로몬까지 3대째 내려온 통일 왕국은 아히야의 예언대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으니 야훼를 떠난 지도자의 실정(失政)이 낳은 참담한 결과였다.

솔로몬의 실정으로 왕에 등극한 여로보암은 종교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 왕국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할 새 예배 처소를 만들었다.

그 예배 처소에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웠다.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을 막으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야훼신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책을 시행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라는 야훼의 명령을 무시한 채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고 자기 임의대로 레위인 아닌 자로 제사장까지 삼았으니 솔로몬 실정의 재판(再版)이 아니던가?

오히려 솔로몬보다 더 악행을 자행했으니 아히야는 여로보암과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 심판을 선언하였다.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아히야 선지자는 장차 200년 후에 일어날 이스라엘의 파멸을 예고하고 있으니 야훼 신앙의 '중심/과녁'을 벗어난 죄('죄'는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로 그 뜻은 '과녁을 벗어나다'이다.)의 결과는 이스라엘 역사의 탈선과 파멸이었다.

슈펭글러와 토인비는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죄로 물든 역사의 악순환 속에서 궁극적 희망은 밑둥치 잘리고서 그루터기만 남은 인간 역사에 여전히 새 싹을 틔우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긍휼이 아니던가?


이때는 틀림없이 솔로몬이 경건한 신앙과 번영의 절정기에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바 여왕을 남방여인이라고 하셨다(마태복음 12:42)

심판 때에 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스바가 가나안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오피아에서는 그 여인의 후손이 간다게(사도행전 8:27)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복지국 아라비아 남부(현재 인도)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자 요세프스는 스바를 이디오피아라고 합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그녀는 물론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인 협력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솔로몬 왕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소문의 진실성을 알아 보고저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시험하고자” 했다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방문 목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정치에 대한 금언(金言)을 듣기 위해 왔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가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왔었다고 했습니다(마12:42, 눅 11:31).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지혜”라는 표현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출처가 하나님으로 부터라는 소문을 듣고 하나님 신앙에 상당히 마음이 끌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유대인들을 경고하면서 그 여인의 방문을 인용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그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너희는 솔로몬보다 큰 이를 눈앞에 두고도 거절하고 있으니 너희 유대인들은 얼마나 몽매한가? 그에 대한 심판이 지엄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녀는 신분에 어울리게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였고 일행의 체재비를 부담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황금과 보석과 향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얻고저 하는 것에 가치를 알고 있었으니 구걸하는 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 지혜라면 어떤 값이라도 치르고 사려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영생에 이르는 진리를 너무 값싸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는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는 것(3절)과 건축한 궁과 솔로몬 왕 앞에서 시립(侍立: 윗 사람을 모시고 서 있는 것)하는 신하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솔로몬의 경건한 신앙에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하여 스바 여왕은 당신의 행위와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다고 감탄했습니다.(6-7절) 또 “솔로몬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듣는 당신의 신하들은 복되다”고 (8절) 거듭 감탄하며 여호와를 송축까지 했습니다.(9절) 그것은 장차 메시야 시대에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계21:24절)

그녀는 헤어지면서 솔로몬에게 금과 향품을 귀한 선물을 바쳤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그리스도께 선물로 가져 온 황금과 유향은 바로 이 스바 여왕의 선물에서 상징됩니다(마 2:11).
이와 같이 그녀는 자기가 깨우침을 얻은 지혜에 대한 값을 지불하였으며 그것을 비싸게 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가르침 받은 자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스바여왕이 선물 한 것은 그녀에게는 비싼 것이었겠지만 실상 솔로몬에게는 이미 넉넉하게 있어 별 것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것도 사실 그 분에게 아무 필요가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라도 감사하도록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의 주요 수입원은 외국과의 무역 거래였습니다.(14-15절) 또 이스라엘에게는 남북을 연결하는 무역로가 있었기에 통행료와 조공물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15절) 나아가 이스라엘 12지역에서 매월 1회씩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당시의 그의 부와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24-25절)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재물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계속 더 많이 가지려고 탐내었습니다. 딤전 6:9절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떨어진다”고 경고했는데 이와 같은 일이 바로 솔로몬의 생애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명성과 행운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10:7절에서 “지혜와 복” 순서가 10:23절에서는 “재산과 지혜”로 순서가 바뀜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물질적인 것에 더 치우치자 영적인 면은 점점 쇠퇴 해 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군대의 병력을 더욱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의 풍성함에 감사치 않고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켜 줄 훌륭한 사치품을 구하려 사람들을 멀리 보냈습니다. 애굽에서 말과 병거를 수입하여 자국의 병력을 보강했고 나머지는 두로와 암몬 등지로 수출했습니다. 사실 왕이 말과 병거를 모으는 일을 모세 율법에 금지된 일이었습니다.(신17:16절)  그러나 1년에 금 666달란트를 받은 일은(14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계13:8) 그는 성별된 그릇이면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시는 주님(딤후2:20-31절) 과는 달리 금 그릇만 사용하였고(21절) 진정 영광과 호화로운 속에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호화로웠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백합꽃의 가치를 말씀하시며 솔로몬의 영화와 비교 하셨겠습니까? (마6:29절) 신명기서 17:16-20절에 보면 왕들에게 어떤 경고를 했습니까?

신명기 17:16-19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1.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
2. 율법 책을 곁에 두고 읽으며 규례를 지켜 행할 것
3.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
4. 행위에 교만하지 말 것

그런데 솔로몬은 말들과 병거, 돈 아내들을 늘려 갔습니다.
솔로몬은 영적인 면이 쇠퇴해지자 하나님께서 금하고 경고한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받은 복을 감사하기커녕 헛된 야망만이 더 불타올랐으니 그렇게 스스로 파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바의 여왕은 누구?

세바는 남쪽에 있는 지명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세바’는 주로 상인들과 관련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바‘는 장사에 능한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이 ’세바‘가 정확히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지금의 예멘을 언급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디오피아를 언급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집트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여러 학설 중에서 이 여왕이 이디오피아와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여왕이라는 학설이 지지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바의 여왕은 시시한 여왕이 아닙니다. 여왕은 솔로몬에게 백이십 달란트, 심히 많은 향료와 보석을 주었습니다. 시바 여왕이 준 향료는 역대 최고였으며, 그 이후에도 이런 항료를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온 이유

세바 여왕은 그의 나라로 들어온 상인들로부터 솔로몬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세바 여왕은 이미 경제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들려오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명성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심히 많은 수행원들과 향료와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실은 낙타들과 함께 예루살렘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솔로몬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여왕이 그 어떤 문제를 내더라도 솔로몬은 지혜롭게 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해 보고자 이 먼 길을 왔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고통스럽고 풀기 어려울수록,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바 여인에게 있었던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시바 여왕의 왕궁이 이디오피아에 있었다면, 왕궁과 예루살렘의 거리는 족히 4000km가 됩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약 400km 이니까 서울과 부산을 다섯 번 왕복하는 거리를 가서라도 솔로몬에게 물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바 여왕 감탄

(1)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

세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과 함께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와야 했지만, 솔로몬과 같이 있는 사람들은 늘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솔로몬의 왕국의 번영에 감탄

세바의 여왕도 심히 강대한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 여왕도 솔로몬이 건축한 집과 그의 상의 음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앉는 것과 그의 일꾼들이 섬기는 것과 그들의 의복과 잔 나르는 자들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이는 극찬입니다. 동종 업계에 그것도 나름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자의 입을 통해서 칭찬을 듣는 것은 극찬입니다. 솔로몬 왕국의 번영에 세바 여왕은 너무도 놀랍습니다. 5절에 “정신이 없어서”란 의미는 “압도당하였다” 말입니다. 세바 여왕이 압도당할 만큼 솔로몬 왕궁과 집은 훌륭했습니다.

 

(3) 성전 건축에 감탄

5절에 “{주}의 집에 올라갈 때 쓰는 오르막 통로를 보고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여러 영어 성경들이 이 구절을 “화목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화물 제물이 하나님의 집에서 들여지는 것을 보고 압도당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주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해석합니다. 영어 KJV은 후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세바 여왕은 성전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수 있습니다.

 

세바 여왕의 소감 및 감사 예물

“6.왕에게 이르되, 내가 내 땅에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에 관하여 들은 소문이 참되도다. 7.그러나 내가 와서 내 눈으로 그것을 볼 때까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그들이 절반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당신의 지혜와 번영이 내가 들은 명성을 능가하는도다. 8.당신의 사람들은 행복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은 행복하도다. 그들이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듣는도다. 9.{주} 당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분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좌에 당신을 앉히시고 {주}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므로 당신을 왕으로 삼아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10.그녀가 금 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료와 보석을 왕에게 주었는데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준 이 향료처럼 많은 향료가 다시는 오지 아니하였더라.”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쌓지 말지니라(신명기 17:17)

솔로몬은 ‘오빌’에서 많은 금과 백단목과 보석을 가져왔습니다. “백단목”은 매우 귀중한 건축 자재였습니다. 또한 이 나무로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과 같이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열왕기상9:26)에 강력한 해군 함대를 육성하였습니다. 이 해군 함대를 통해 히람의 무역함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히람은 솔로몬에게 금과 각종 보석들과 귀한 건축 자재들을 자유롭게 실어 나를 수 있었습니다. 한 해 솔로몬에게 들어온 금의 무게는 육백육십육 달란트였는데, 이는 솔로몬이 상인들과 향료 상품을 무역하는 상인들과 아라비아의 왕들과 그 나라의 총독들에게 받은 것 외의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역의 융성은 솔로몬 왕국에 은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의 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주체 못할 금과 솔로몬의 사치

솔로몬은 이런 금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금을 쳐서 큰 방패 이백 개와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만들었습니다.
또 왕좌를 상아로 만들고 가장 좋은 것은 금으로 입혔습니다.
왕이 그릇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금과 귀한 자재들은 모두 다 왕의 사치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다윗도 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모은 금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와 시간을 사용하여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치와 능력을 과시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왕은 금과 은을 쌓아두지 말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검소한 생활을 통해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는 삶을 살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런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열왕기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말을 많이 늘리지 말며 말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지니라(신명기 17: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에게 말들을 늘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이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증시해야 할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아마 솔로몬은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로 말을 사로 보낸 것은 이웃 국가들과의 중계 무역을 위함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헷족속과 시리아에 되팔아서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궁색한 변명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의 명한 것을 자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물질적 부흥과 영적 타락을 지적하는 열왕기상 저자의 의도를 배웠습니다.
동종업계에 근무하는 최고의 전문가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은 극찬입니다.
스바 여왕도 시시한 여왕이 아니었지만, 솔로몬의 지혜와 그 번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했습니다.
이는 솔로몬 왕국이 얼마나 그 시대 번영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이런 물질적 번영의 시대에 자행된 솔로몬의 영적 타락을 우리는 또한 주의깊게 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오늘날 신약 교회의 모형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거룩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삶을 사는 것인지를 시청각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이스라엘을 부강케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이런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습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으니까, 굳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불편한 삶을 굳이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는 영적인 타락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구별하셔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나타내 보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큰 교회 건물입니까?
아니면 성도의 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광신적인 신앙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제로 어떻게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지를 증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기독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비록 믿지는 않았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가난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목회자들을 통해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헌금으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만큼 기독교가 비난 받는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성공으로 보고 달려왔을까요?
혹시 솔로몬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요?
모두가 한국 교회의 부흥을 말하지만, 실상은 영적인 타락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놓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치관도 솔로몬의 것과 같지는 않습니까?
오늘 신자는 이 땅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어떤 모습을 세상에 보여야 합니까?






 ♦ 3월 15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10: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당신의 하나님(9절)
♦ 성구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당신의 하나님(Your God)”

‘스바’는 아라비아 남쪽에 위치한 ‘사베안’ 왕국으로 오늘날의 예멘입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확인하고자 솔로몬을 방문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자신의 어려운 질문에도 솔로몬이 지혜롭게 답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의 규모에도 감탄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종교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통치 체계에도 감탄하며 이 모든 지혜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비록 이교도였지만 여호와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송축한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금 120달란트와 많은 향품과 보석 등을 바쳤고 솔로몬도 그가 원하는 대로 답례했습니다.

솔로몬은 매년 들어오는 금 666달란트로 큰 방패 200개와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어 레바논 나무 궁에 두어 관리하도록 합니다.

솔로몬은 상아로 만든 6층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화를 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자를 보좌에 이르는 층계 양끝에 세웠습니다. 이처럼 솔로몬 왕국은 금과 은이 너무나 풍부하여 그릇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었고 은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견고히 하기 위해 병거(1,400)와 마병을(12,000) 준비하여 예루살렘에 두었습니다.

병거는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가공할 만한 무기였으므로 주변 국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군비 확장을 위해 애급에서 말을 수입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헷 족속과 아람 사람들에게 이 말들을 수출했습니다.

화려한 것도 초라한 것도 모두 영원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코람 데오(Coram Deo) /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 사람 앞에서
코람 문도(Coram Mundo) / 세상 앞에서

우리들의 삶의 특징을 세 가지 양식으로 살펴봅시다.
첫째는 코람 데오
둘째는 코람 호미니부스
셋째는 코람 문도
 
코람 데오(Coram은 "앞에"  Deo는 "하나님")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
영어로는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 라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기나긴 유배생활과 극도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켜냈습니다.
선생이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조선 명종때 문신이었던 임권 선생의 ‘독처무자기-해동소학’ 즉 ‘홀로 있는 곳에서 자신을 속이지 마라’는 인생철학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중 하나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남의 눈에 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다가 홀로 있을때는 여지없이 양심을 팔고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요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박재희, 나를 돌아보는 모멘텀 ‘3분고전’중)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였던 칼빈(Calvin)의 일생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좌우명가운데 하나가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입니다.

코람 데오 = 라틴어로 ‘Coram’ 즉 ‘앞에’라는 뜻 + ‘Deo’ 즉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영어로는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 앞에서(coram hominibus)”
세상 앞에서(coram mundo)’의 명예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며 분별하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이 말은 부패가 극에 달했던 16세기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가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의 방식을 요약했던 말입니다.

아울러 이 말은 동시대 개신교(Protestant)를 탄생시킨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내세웠던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만)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산 속 깊은 곳,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머물더라도 더욱 더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다산 정약용의 ‘독처무자기’ 평생 가슴에 새겨 잊지 말고 실천해야 할 선현의 말씀입니다. 아울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코람데오의 신앙생활’ 즉 내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겨울에도 피어나는 동백꽃과 같이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가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인정을 불러오며 나중까지 잘 사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실 때의 기준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은 특별히 H.I.G.H.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찾으십니다.

Holiness(거룩) : 죄에 대해 민감하며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는가?
Integrity(정직) : 작은 일에도 성실하며 정직함을 보이는가?
Gratitude(감사) : 부족함의 현실가운데에서도 감사하는가?
Humility(겸손):  섬김을 받는 자인가? 아니면 섬기는 자인가?


지혜란 무엇인가?
- 성경에서 강조하는 지혜의 의미

성경에서 지혜에 해당하는 것을 "소금"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소금을 사용할 때 소금은 그 형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만일 소금이 그 형체를 유지하면 소금의 기능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소금이 왜 지혜와 같을까?

첫째, 변화의 능력
둘째, 무언의 능력
셋째, 헌신의 능력

주원장의 황후

주나라 황제 주원장의 황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어느 날 궁에서 왕후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나, 주원장이 황제가 될 줄이야. 나도 상상치 못했단 말야!”
그리고는 기쁜 나머지 뛰어 일어나 춤을 추면서 옛날 변변치 못했던 시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 마디로 황제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추태를 부린 것이다.
그 때 두 명의 관리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주원장이 밖으로 나가자 황후는 두 관리를 불렀다.

“황제가 곧 돌아오실 것이다. 너희들 중 하나는 벙어리 행세를 하고, 하나는 귀머거리 행세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둘의 목숨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주원장은 밖으로 나가다가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해 보니 대단히 부끄러웠다.
그런 추태가 밖으로 소문이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급히 궁으로 돌아와 관리를 불러들였다.
주원장이 곧 관리 중 하나는 벙어리이고 하나는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어 관리는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지혜를 얻으려는 젊은이를 깨우친 왕의 이야기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있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 주면서 "자, 이 금잔에 기름이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전에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도 그 기름이 흘러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 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좇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른다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 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 왔단 말입니다.

"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 
"네 안 흘렸습니다."

그 때에 왕이 묻기를 "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를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가 있는데 보았나?" 물어 보았습니다.
"그만 못 보았습니다."
"아니 못 보았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
"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

그때 노 왕이 웃으며 하시는 말이 "그러면 자네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배웠나?"



시벌로마(施罰勞馬)

주마가편(走馬加鞭)과 의미 상통하는 고사성어로 이 역시 그 유래를 아는 자가 거의 없다.
열심히 일하는 부하직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상사의 뒤통수에 대고 흔히 쏘는 말.

중국 당나라 시대,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한 농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갈고 있는 말에게 연속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하는 광경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나그네는 매를 맞는 말이 너무 안쓰러워 그 연유를 농부에게 물었다.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왜 채찍인가?”
농부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자고로 말이란 가혹하게 다루어야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법이지요.”

남의 말을 놓고 가타부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어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그네는 매 맞으며 일하는 말이 못내 불쌍하여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그리고는 긴 탄식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 시벌로마(施罰勞馬).”
번역하면 “아,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상 대신) 벌을 주는구나.”

모름지기 직장상사들은 시벌로마의 유래를 각골명심해야 부하직원들의 원성을 사지 않으리라.
씹어 제키는 “시~벌~로마.” 소리가 잦아지는 곳에 노사분규도 녹아내리지 않겠소?

중국 관광을 가서 가이드에게 배운 인사말 “조~따꺼, 쯔발로마?”는 “조 선생, 식사했소?”하는 소리다.
따라서 쯔발로마는 시벌로마와 어원이 상이함을 아울러 밝혀둔다.

우리는 말 안 듣는 말에게 채찍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을 그렇지 않다.
달리는 말을 더 잘 달리도록 해 주라고 하신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언 9:9)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신다”고 하셨다.

믿음의 성격은 언제나 미래적이고 소망적이고 긍정적이다.
똑 같은 장소 똑 같은 시간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아도 두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은 창문을 내가 보며 이제 죽으면 저 흙 속에 뭍이겠구나….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두려워한다.
다른 한 사람은 이제 죽으면 이 감옥을 벗어나 참자유를 얻고 저 높은 푸른 하늘 저편의 천국으로 올라가겠지….
긍적적이고 미래적인 소망으로 밝은 미소를 띠며 죽음 건너편의 천국을 기다린다.
부정적인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다.

영국 속담에 “태도가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주어진 사실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관이 달라진다.
나쁜 습관이나 나쁜 태도나 고착된 부정적인 생각은 참으로 고치지 힘들다.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모짜르트는 음악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전에 다른 데서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수업료를 두 배로 내십시오. 그러나 배운 적이 없다면 수업료를 반만 내십시오.”
그러자 사람들과 학부모들이 항의를 했다.

“왜 음악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 수업료를 반만 받고, 이미 잘 아는 사람에게 두 배나 받습니까?”

모차르트가 대답했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잘못된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고치려면 내가 두배나 애를 먹으니까 두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르칠 수 있기에 노력이 적게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한 해를 아픔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욥처럼 특별한 잘못없이 억울한 좌절과 고통을 당한 사람이 예수님 말고 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사랑하는 자식들을 하루 아침에 잃고, 동방에서 가장 부자였던 모든 재물을 다 잃고, 동방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욥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온 몸은 썩어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끝까지 지켰다.
욥은 원망과 불평대신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지금은 비록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지만 후에는 정금같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욥을 갑절이나 더 축복해 주셨다.



전도서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 지혜는 생명을 보존하는 것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전도서 7:19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정보 홍수의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휴대전화는 온갖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우 편리한 도구라고 하겠습니다.
카톡, 페이스북, 트위터,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어느 하나의 사건을 수 많은 주관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객관화 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때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둔갑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 시켜 사회적으로 혼란을 야기 시키거나 심지어 여론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어 댓글에 대한 심각성을 야기합니다.

정보의 홍수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삶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도록 하는 지혜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24-25)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사하기시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흘려 돌아가신 것을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주님이 나의 구원자라고 믿어 주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사고력을 늘 지녀야 한다.





♦  3월 1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9: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속담거리(7절)
♦ 성구 :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爲)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區別)한 이 전(殿)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民族) 가운데 속담(俗談)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속담(俗談)거리(a byword)”

구약의 언약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인간의 공로가 필요 없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 언약을 말하며 천상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모세의 시내산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땅과 관련 된 언약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른 자태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라는 상과 벌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조건적 언약이며 지상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열왕기의 말씀은 '역사서'가 아니라 '선지서'로 분류하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신명기적 사관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저자의 의도는 “그가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였으나” 혹은 “자기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준행하며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이러한 축복과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7년 동안 성전을 먼저 건축한 후에 13년 동안 왕궁 건축을 마쳤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20년 동안에 마쳤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 뿐만 아니라 주위 여러 나라들과 교역이 활발하였고 외교 또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국력이 나날이 신장했습니다.

더구나 성전봉헌식도 마쳤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셔서 주의해야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드렸던 기도와 간구를 들으셨다고 하면서 솔로몬의 기도대로 여호와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성전을 향하여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성전에 두시며, 눈길과 마음을 항상 거기에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네 아버지 다윗처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만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보다도 말씀에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성전은 잘 지었지만 여호와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기에 경고하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을 섬길 때에는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끊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건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솔로몬에게 이것은 큰 충격이요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훗날 이 말씀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이방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으며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성전을 잘 지었어도 우상을 섬기면 망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전성기를 맞아 교회를 아름답게 건축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교회가 지금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킬 때는 언약의 약속이 유지될 수 있지만 말씀에서 벗어난 신앙으로 타락할 때는 솔로몬 왕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의 저주와 유럽 교회들의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지난날 부흥과 성장의 축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고 순종하는 신앙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 찬양 / 큰 은혜로 묶어 주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은 사순절 제8일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어떤 결과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 때문에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의 성전은 그 당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서 구하기 어려운 백향목이라는 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유명한 석수를 동원하여 돌을 다듬었습니다.
겉모양은 누구든지 부러워할 수 있고 자랑할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그 외양 때문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그 묻힌 것을 들추어보려고 합니다.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막은 이동하기 쉽지만 성전은 이동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성막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설계도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지만 성전은 사람의 욕망과 의도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백향목 궁에 거주하던 다윗이 언약궤를 생각할 때 나는 이렇게 화려한 궁에 거하면서 언약궤를 천막속에 두어야 하는가 생각할 때 다소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선지자 나단도 처음에는 성전 건축에 대해서 동의하였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성전 건축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다음에 태어날 자손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출애급 후 480년 솔로몬이 왕이 된 후 4년 만에 드디어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사역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480년 만에 왕이 된 후에 4년 만에 이라고 그 숫자를 정확하게 열거한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자랑하고자 할 때 숫자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한다는 상징입니다(출 25:8, 겔 37:27).
이와 같은 상징이 언제 완성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됩니다(요 1:14).

그렇다면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래 전 수정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규모와 웅장함에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지금은 가톨릭교회에 팔렸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자랑하며 그와 사고에 의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마치 신앙이라고 깨우쳤던 것이 무너져 버린 것을 깨닫게 합니다.

♦ 3월 1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6:1∼38
♦ 묵상을 위한 주제 : 전 건축(1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이 애급 땅에서 나온지 사백(四百) 팔십년(八十年)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王)이 된지 사년(四年) 시브월 곧 이월(二月)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殿) 건축(建築)하기를 시작(始作)하였더라.  

“전 건축(build the temple)”

열왕기상은 22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솔로몬’에 대한 말씀으로
5장부터 9장까지는 성전 건축과 낙성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에 관한 말씀은 거의 절반이 성전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5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소개하며 6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나온 지 480년이 되는 때 왕위에 오르고 4년 만에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B.C. 966년).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규모는 길이가 육십 규빗(약 27m), 너비가 이십 규빗(약 9m), 그리고 높이가 삼십 규빗(약 13.5m)입니다.
또한 건평은 대략 2,700 평방피트라고 합니다.

성전은 신약교회의 모형이고(고전 3:16, 고후 6:16, 엡 2:21, 히 3:6, 벧전 2:5)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요 2:21).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성전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조심하여 성전을 건축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성전 돌은 이미 밖에서 다듬어 가지고 들어왔기에 성전 내부에서 돌을 깎거나 다시 다듬을 필요가 없었고 오직 끼워 넣기만 했습니다.

이러한 건축 방식에 대한 영적 의미를 존 길(John Gill)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영과 은혜와 말씀으로 먼저 잘라내고 맞추어진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교회의 영적인 건물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믿음이 바르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소란이나 논쟁이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소동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교회의 교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임을 인식하는 거듭난 자들은 교회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도 본능적으로 알기에 교회는 소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은 성전과 교회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건축 하던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일에 빠지게 될 위험은 성전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우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적 건축물인 성전이 그들 중에 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그들의 믿음의 행위와 삶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자기들의 안전의 보장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것도 솔로몬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의 상호 경쟁은 교회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자원하기만 하면 가입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고 그 안에서 돌깨는 소리와 나무를 자르고 패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안으로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또 한 가지 교훈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사실을 기념하고 그것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에 그 어느 것도 대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나는 교회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정말 주님이 기뻐하는 믿음으로 바르게 성장하고 있는지 점검하며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다듬어 바르게 세워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시온 성과 같은 교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열왕기상(列王記上)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여 세웠던 왕들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어떠할까?
우리들의 모습도 열왕기에 소개된 역대 왕들과 다를바가 없는 신앙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