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룬(Jeshurun) : 곧은 자, 옳은 자
이스라엘에 대한 시명 또는 별명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읽어 드린 노래와 축복중에 있는 명칭인데 이스라엘의 대명사로 사용한 듯하다.
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신명기 33: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한 때에로다.
신명기 33: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이사야 44: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모세는 그의 120년 생애를 마무리하고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마무리하는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애칭 '여수룬'이라고 불러 그 호칭으로 잊어던 하나님의 정과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있습니다.
'여수룬'이라고 불려 덕 좀 본 것 있을까요?
아니 '여수룬'-의로운 자라는 애칭답게 살기나 한 것일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도 참 많았던 민족이었습니다.
힘들다고 늘 아우성쳤습니다.
부추와 생선을 먹고 싶다고 그것을 못먹어서 힘들다고 아우성쳤습니다.
민수기 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그들은 음식이 혀를 통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몇분의 쾌락과 그 몇 cm의 쾌락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불평했습니다.
물론 그 몇 분과 몇 cm가 중요한 것이긴 합니다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행복의 측정지수였습니다.
그 정도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좀 잘 살게되고 걱정이 없게 되면 또 하나님을 발로 찼습니다.
신명기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히브리어 '바아트'는 실제로 Kick-발로 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에게 너는 행복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개역성경에서 11번 나타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는 한국어 번역자들의 신학이 들어간 것입니다.히브리어로는 주로 '토브'가 '행복'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냥 복있다고 해도 될 것이요, 축복받았다고 해도 될 것이며, 부요함이라고 해도 되는 데 성경번역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원 문맥이 의도하는 뉘앙스(nuance-미묘한 차이)에 가장 근접한 단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우리가 이해하고 인지하고 상식적으로 쓰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쓰겠습니다.)
한해를 보내시며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뭐가 되기를' 정말 바란 것은 맞습니까?그리고 그랬다면 분명히 행복했을까요? 이 부분은 좀 생각해보고 깊이 대답하셔야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준 것도 없고 내가 하나님 믿고 된 것도 없는 것은 또 사실이요, 진실인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기적도 능력도 베풀지 못한 것인가요? 그것도 대답해야합니다.
물론 믿음이 좀 있는 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기적도 능력도 베푸신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고 되고 싶은 것을 다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정말 그대는 뭐가 되기를 원했고 뭘 해주기를 원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바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이 그리 현명하지 않습니다. 된 것이 없고 해준 것이 무엇이냐고 불평하면서도 막상 뭐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으며 무엇을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느냐고 물으면 그리 잘 대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복이란 참 얇습니다. 남편만 잘만났으면, 부모만 잘만났으면 잘살았을 것이라고 믿는 아이큐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나마의 행복도 과거 때문에 오늘을 망치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늘의 행복을 스스로 박탈합니다.
미래의 걱정 때문에 오늘을 망치며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의 행복을 스스로 잃어버립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만 신경쓰다가 정작 자기 자신의 내면의 행복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비교의식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서 행복을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수룬은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원망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불평은 하면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들을 지켜보신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믿음, 이것이 여수룬-이스라엘 백성들의 축복이었을까요 짐이었을까요?
남들은-무신론자들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이라는 분은 없다하면서도 잘만 사는 듯 한데 왜 나는 내게 뿌리박힌 이 의식, 그 끈질긴 생각들이 나를 이것도 저것도 못하게 할까라고 탄식해보셨습니까? 그 숙명론적 인식의 끈 때문에 고민해보셨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평생 버리지 못하고 따라다니는 이 생각은, 또는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교회에서 또는 부모에게서 주입된 것일까요, 세뇌교육 탓일까요 영적본능일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꼭 편치만은 않았을 그 생각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또 행복이었을까요 불행이었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운명론적 섭리론적 그 사랑의 끈,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아우성 치면서도 떠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떠나지 못했을까요? 남들은 안믿고도 잘 사는데 왜 나는 믿고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할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그들의 마음 속에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생각이었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의식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그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켰습니다. 부담스럽고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것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맞았습니다. 긴 세월을 살며 세상 모든 것들의 거품이 사라지면 다시 이 믿음 하나가 남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는 고백을 하는 데 아마도 모세에게는 120년이 걸렸겠고 이스라엘 광야생활에서도 40년이 걸린 고백이 되었습니다. 오늘 감사한 것은 이 행복을 찾아낸 모세의 깊은 경지입니다.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행복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온 고백인가요? 아닙니다. 그냥 광야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요,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라보면서 나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할수 있어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을 받을 사람입니다.
마음에 새겨야할 문신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사야 44장은 43장의 어려움을 겪은 끝에도 그러나 믿음을 다시 회복한 이스라엘 백성 즉 여수룬의 신앙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런데 다시 그들 즉 여수룬은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문신을 새깁니다.
이사야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44:5
그 때에는 "나는 주의 것이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야곱"의 이름을 써서 그의 자손임을 자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팔에다가 "나는 주의 것"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새번역 성경]
자기가 야훼의 것임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곱의 후손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손에 '야훼의 것' 이라고 문신을 새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후손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