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하루 한 구절 암송 자료 / 요새화(要塞化) / 요긴할 요(要), 변방 새(塞), 될 화(化)


9월 16일(수)

에베소서교회(요한계시록 2:1~7)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초대교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네 가지 요소는 ‘말씀과 교제와 성찬과 기도’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소개된 일곱 교회는 초대교회의 특징 네 가지가 흔들렸을 때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교회는 사랑을 잃은 교회
서머나교회는 고난을 이기는 교회
버가모교회는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
두아디라교회는 사랑은 있으나 진리가 약한 교회
사데교회는 이름만 살아 있는 교회
빌라델비아교회는 말씀을 지키는 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미지근한 교회라고 합니다.

에베소교회는 말씀은 있었는데 사랑이 식었다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칭찬도 들었습니다.
분별력이 있었기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배척할 수 있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한 분별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정적인 책망을 하십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여기서 교회갱신의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말씀만 있고 사랑의 교제가 없으면 교회가 차가워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과 교제와 사랑과 성찬과 기도가 함께 살아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회복하기 위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즐겁게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새롭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날의 행적은 모두 벗어던지고
이제부터 처음 사랑을 되찾아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송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9월 15일(화)

일곱 별과 일곱 촛대(요한계시록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하셨습니다.
사자에 대한 해석을 세 가지로 이해합니다.
첫째는 천사, 둘째는 목사, 셋째는 대표자
그런데 별은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촛대는 모양만을 갖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한편 일곱 별과 일곱 촛대를 목회적인 입장으로 해석하면 “교회는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목회자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붙들린 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별은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린 교회의 사명자”를 말합니다.
“일곱 촛대는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는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목사를 목사답게 세워가는 비결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목회자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로 다듬어가는 것으로 네 가지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말씀(무엇을 믿는가?)
둘째는 예배(누구를 섬기는가?
셋째는 교제(어떻게 함께 사는가?)
넷째는 사명(왜 존재하는가?)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영적 공동체를 세우며, 사명을 바르게 감당할 때 교회를 교회답게 회복할 수 있습니다.
목사를 목사답게 하려면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진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는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하며 교인들을 사랑하고 양무리의 본이 되는 삶을 회복하면 목사답다는 평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을에는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지고
목사다운 목사가 일어날 때 세상은 복음의 평화를 조성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목사는 예수님을 따라가며
성도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 위하여 모두 함께 노력하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능력이 되십니다.
♪ 시온성과 같은 교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9월 14일(월)

기록하라(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으로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에 대한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문학의 장르라는 관점에서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서신서(書信書)’ - 편지(便紙)
요한계시록은 ‘계시서(啓示書)’ - 묵시(默示)
요한계시록은 ‘예언서(豫言書)’ - 예언(預言)
그런데 이러한 말씀은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통제된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서신의 형식을 가진 묵시적 예언서”라고 하겠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보내진 편지이며, 하늘의 현실을 보여주는 계시서이고, 성도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예언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거나 듣거나 가르칠 때 중요한 것은 “계시서”라고 하여 오직 미래만을 예측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일곱 교회의 현재 신앙을 변화시키기 위해 전달된 회람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회람이란 어느 한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이 서로 돌려가며 읽고 가르치고 깨우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거룩한 의무를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계시를 통하여 하늘을 보여주셨습니다.
서신을 통해서 모든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을 통하여 오늘을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그 결과는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어린양을 높인 후에는 반드시 세상에 흩어져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특정한 인물을 세워서 그를 통하여 비밀을 알려주고 그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워간다는 하황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시작도 예수 마지막도 예수만을 드러내야 하는 성경의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능력이 되십니다.
♪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9월 12일(토)

사망과 음부의 열쇠(요한계시록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성경은 두 개의 열쇠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천국의 열쇠
둘째는 음부의 열쇠
천국의 열쇠는 교회에게 맡기신 복음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음부의 열쇠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지신 죽음에 대한 절대 권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활 신앙과 직접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죽음에 붙잡히지 않으셨고,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열쇠를 헬라어로 ‘크레이스(kleis. κλείς)’ 라고 합니다.
‘크래이스’는 출입을 결정하는 권한을 뜻합니다.
따라서 음부의 열쇠는 음부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의 열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심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음도 경험하셨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주셨습니다.
음부와 천국 그리고 천국과 음부를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열쇠를 소유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음도 예수님의 지배 아래 있고, 음부도 예수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음부의 열쇠는 “죽음의 세계까지 다스리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절대적 권세”를 보여줍니다.
오늘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수 많은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고 믿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일어나서 진리를 외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후일에 생명 끝날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9월 11일(금)

처음과 나중(요한계시록 1:17)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으로 ‘처음과 나중’ 또는 ‘시작과 마지막’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라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시작을 잘하고, 과정을 충실히 살며, 끝을 아름답게 맺읍시다.
신앙적으로는 “끝까지”
성경은 시작만 잘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24:130
또 바울은 자신의 인생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 4:7)
여기에서 중요한 세 가지 의미를 찾아봅니다.
“싸웠다, 달려갔다, 지켰다”
곧, 시작과 과정과 완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은 더 중요합니다.
유종의 미와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의 표현으로 연결하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알파(Α)는 처음
오메가(Ω)는 마지막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 24자 중에서 첫 문자와 마지막 문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22개의 문자가 있습니다.
처음과 나중을 위하여 중간에 22개의 다양한 과정과 삶이 있다는 교훈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요한계시록 2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도 예수님
과정도 예수님
마지막도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는 신앙의 삶을 위하여
시작을 하나님께 맡기자
과정을 믿음으로 걸어가자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치자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어떻게 시작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끝내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믿음의 마지막이 되게 합시다.
우리의 삶이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합시다.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믿음을 지키며, 아름답게 마칩시다.”
“시작은 은혜로, 과정은 믿음으로, 마지막은 유종의 미로!”
♪ 후일에 생명 끝날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옛날 옛적에 깊은 산골에 어머니와 어린 오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호랑이는 어머니를 잡아먹고는 어머니의 옷을 입고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얘들아, 엄마 왔다. 문 열어라.” 
아이들은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엄마, 손을 보여 주세요.” 
호랑이가 손을 내밀자 아이들은 그것이 엄마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습니다. 
호랑이는 아이들을 찾아 나무 아래까지 쫓아왔습니다. 
아이들은 하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튼튼한 동아줄 하나가 내려왔습니다. 
오빠와 누이는 그 줄을 붙잡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도 아이들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붙잡은 줄은 썩은 줄이어서 그만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에 올라간 오빠와 누이는 각각 해와 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이는 밤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밤이 무서워. 오빠가 밤을 맡아 줘.” 
오빠가 말했습니다. 
“나는 밤이 무서우니 네가 밤을 맡아 줘.” 
결국 오빠는 해가 되고, 누이는 달이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해는 낮에 세상을 밝히고, 달은 밤에 세상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9월 10일(목)

해 같은 얼굴(요한계시록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그 오른손의 일곱 별”이 있다는 것은 ‘인자 같은 이’가 곧 “교회의 주권자”가 되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1장 20절에서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별들이 주님의 오른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권능과 권세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를 붙드시고 통치하시며 보호하시고 동시에 판단하신다는 메시지가 됩니다.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는 것은 “말씀으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11장 4절의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라는 말씀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사야 49장 2절에서는 여호와의 종에 대하여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말씀의 검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인자 같은 이로서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그 말씀 자체가 심판의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난다”는 것은 “변화산과 하나님의 영광”을 연상하게 합니다(마태 17:2).
한편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을 때 얼굴에 광채가 나타났던 출애굽기 34장도 배경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보는 인자 같은 이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에 인간의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지만, 이제는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믿음의 현장을 말씀으로 굳게 지키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9월 9일(수)

주석과 같은 발(요한계시록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계시를 배경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권세와 심판과 위엄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발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정복과 통치와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메시야의 발등상으로 삼으십니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시편 110:1)
따라서 본문에서 주석과 같은 “그의 발”은 모든 원수를 밟고 다스리는 왕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이란 정확한 재료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문맥상 매우 순수하고 빛나는 금속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풀무에 단련한”이라는 표현에서 불은 시험과 정결과 심판을 상징합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언 17:3)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말라기 3:2–3)

여호와의 임재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풀무의 불은 정결과 순수함과 빛남과 심판의 권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발은 더럽혀진 발이 아니라 불을 통과하여 완전히 정결한 심판자의 발을 의미합니다.

“발”과 “빛난 주석”을 합치면
특히 계시록 2:18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꽃 같은 눈과 빛난 주석 같은 발이 함께 등장합니다.
즉, 불꽃 같은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눈을 말합니다.
빛난 주석 같은 발은 악을 심판하고 밟으시는 분이라는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에스겔 1:24)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에스겔 43:2)

이것은 요한계시록 1장의 예수님의 모습이 에스겔의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요한계시록 1장의 “인자 같은 이”를 이해할 때 다니엘 10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다니엘 10:6에는 한 신적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리고 다니엘 10:6 후반부는 그의 음성을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1장의 모습과 놀랍게 겹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세상에서 받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연단의 과정을 거치며 더욱 순결한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믿음의 현장에서 거룩한 믿음의 사람으로 일어서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의 나팔 소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9월 8일(화)

흰 머리와 불꽃 같은 눈(요한계시록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흰 머리털과 불꽃 같은 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권세로 재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계시를 말합니다.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과 같다”는 것은 재림하실 예수님의 ‘거룩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흰색”은 순결과 거룩과 영광과 존귀를 나타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다니엘 7장 9절과의 연결입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으며…”
다니엘 7장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모습과 요한계시록 1장의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한편 “그 눈은 불꽃 같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눈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전지적(全知的) 시선과 죄를 심판하시는 거룩한 심판의 권세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전지전능(全知全能)과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말하는 것처럼 불꽃과 같은 눈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으로 그 눈을 통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주님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믿음의 현장을 지키는 거룩한 생활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9월 7일(월)

인자 같은 이(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에 "인자와 같은 이(like a son of man)”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는 환상을 목격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먼저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봅니다.
이제는 환상을 책으로 써서 기록합니다.
따라서 음성은 무엇이며, 환상의 내용은 무엇이고 이어서 문자로 기록된 내용을 살펴야 합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는 두 가지 이미지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촛대
촛대는 교회라고 합니다.
따라서 촛대 사이는 예수님께서 교회 중심이시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촛대 밖에서 교회를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촛대 사이에서 교회를 바라보십니다.
주님은 교회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인자 같은 이
인자같은 이는 다니엘 7장 13절의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라는 배경으로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자 같은 이는 하나님께 권세와 나라와 영광을 받는 종말론적 통치자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장의 “인자 같은 이”는 단순히 “사람처럼 보이는 존재”라는 뜻을 넘어 다니엘이 본 종말의 인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시적 연결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의 그리스도는 단순히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교회 가운데 계시며 교회를 살피시고 말씀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납니다.
교회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주님은 교회 가운데서 교회를 살피시며 교회가 빛을 발하도록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
그리스도인의 지상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믿음의 현장에서 소금과 빛처럼 지상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 온 세상 위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요한계시록 1:14의 **“흰 머리”와 “불꽃 같은 눈”**은 설교에서 함께 묶으면 매우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특히 흰 머리 = 영원성과 지혜, 불꽃 같은 눈 =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심판과 거룩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1. 흰 머리 — 세월이 아니라 영원

한 노인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머리가 온통 하얗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흰 머리를 보며 말합니다.

“저 머리카락 하나하나에는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머리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흰 머리는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간의 지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7:9에서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옷은 눈같이 희고 머리털은 깨끗한 양털 같습니다.

설교 포인트

“사람에게 흰 머리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지만, 예수님의 흰 머리는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2. 불꽃 같은 눈 — 감출 수 없는 시선

어두운 방에서 손전등을 비추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까지 보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보십니다.

요한계시록 1:14은 예수님의 눈을 **“불꽃 같고”**라고 표현합니다.

불꽃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냅니다.
불은 불순물을 태웁니다.
따라서 불꽃 같은 눈은 완전한 통찰력과 거룩한 심판의 눈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그 눈이 불꽃 같고”**라고 표현하고, 2:23에서는 그분이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설교 포인트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신경 쓰지만, 성도는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산신령과 나무꾼

가난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실수로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습니다.
나무꾼이 자신의 쇠도끼를 잃어버리고 슬퍼하자 산신령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네가 잃어버린 도끼가 이것이냐?”

산신령은 먼저 금도끼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닙니다. 제 도끼는 쇠도끼입니다.” 
이번에는 은도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도 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쇠도끼를 보여주자 나무꾼이 대답했습니다. 
“예, 그것이 제 도끼입니다.”

산신령은 나무꾼의 정직함을 칭찬하며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함께 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나무꾼이 욕심을 내어 일부러 도끼를 물에 던졌습니다. 
산신령이 금도끼를 보여주자 그는 얼른 말했습니다. 
“예! 그것이 제 도끼입니다.” 
그러자 산신령은 금도끼는 물론이고 자신의 쇠도끼도 주지 않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도끼의 상징

도끼 상징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금도끼     최고의 가치, 부와 명예        탐욕의 유혹
은도끼        중간 가치, 성공과 인정       비교와 욕망
쇠도끼     평범하지만 자기 것   정직·진실·만족

이 민담을 성경적으로 연결하면 상당히 좋은 설교 소재가 됩니다.

특히 “금도끼를 얻는 것이 복인가, 자기 도끼를 지키는 것이 복인가?”라는 질문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 일곱 교회 → 오늘의 교회 회복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면, 
“교회가 금도끼를 찾다가 자기 도끼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라는 매우 강력한 설교 질문이 나옵니다.

즉, 화려한 프로그램·건물·숫자·명성보다
말씀 → 교제 → 떡을 뗌 → 기도라는 초대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9월 5일(토)
일곱 금 촛대(요한계시록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1:20).
성경에서 금은 값비싼 금속이라는 의미를 넘어 “귀함, 거룩함, 하나님께 드려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금 촛대”라는 표현은 교회가 세상에서 인간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교회가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오히려 언론과 세상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으로 질타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촛대는 빛이 아니라 빛을 담고 있는 비추는 자리를 말하며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은 교회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별은 그리스도의 오른손에 있고, 그리스도는 촛대 사이에 계십니다.
이것은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그림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떠나 계시는 분이 아니라 교회 가운데 거하시며, 교회의 사자들을 붙드시고, 교회를 살피시는 분이시라고 강조합니다.
촛대(교회)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촛대가 실제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예수님은 각 교회를 칭찬하고, 책망하고, 권면하십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따라서 촛대는 교회의 존재 자체뿐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증언을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도록 부름받은 일곱 교회를 상징하며, 그 촛대 사이에 서 계신 인자 같은 이는 교회의 주인이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부르심에 따라 오늘도 믿음의 현장에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전도인의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의 진리 등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9월 4일(금)
일곱교회(요한계시록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일곱교회의 현상을 살펴봅니다.
에베소교회는 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식은 교회
서머나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충성하는 교회
버가모교회는 믿음은 있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
두아디라교회는 사랑과 봉사는 많지만 거짓을 허용하는 교회
사데교회는 이름은 살아 있지만 실제로는 죽어가는 교회
빌라델비아교회는 작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키는 교회
라오디게아교회는 부요하지만 영적으로 미지근한 교회
일곱교회가 우리들을 향하여 어렇게 질문합니다.
에베소교회의 질문
“너는 아직도 예수님을 처음 사랑하는가?”
서머나교회의 질문
“고난 가운데서도 충성할 수 있는가?”
버가모교회의 질문
“세상과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가?”
두아디라교회의 질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데교회의 질문
“사람에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나님 앞에서도 살아 있는가?”
빌라델비아교회의 질문
“작은 능력이라도 말씀을 지키고 있는가?”
라오디게아교회의 질문
“주님이 정말 내 교회의 중심에 계시는가?”
이민교회의 무거운 짐은 대다수의 부모들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시스템이 갖추어진 교회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시스템에서 자란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세상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며 올바른 고백과 가르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주의 진리위해 십자가 군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9월 3일(목)

 주의 날에(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On the Lord's Day I was in the Spirit, and I heard behind me a loud voice like a trumpet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주의 날에” — ἐν τῇ κυριακῇ ἡμέρᾳ

헬라어로 ἐν τῇ κυριακῇ ἡμέρᾳ
(en tē kyriakē hēmera)

  • ἐν — ~안에, ~때에
  • κυριακῇ — 주님의, 주께 속한
  • ἡμέρᾳ — 날

따라서 단순히 “일요일”이라는 시간 개념만이 아니라, “주께 속한 날”, 곧 주님의 통치와 임재를 의식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하여” — ἐγενόμην ἐν πνεύματι

직역하면 “내가 성령 안에 있게 되었다”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자기 생각으로 계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날 → 성령 안에 있음 → 하늘의 음성을 들음 → 계시를 받음이라는 흐름입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

요한은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나팔 소리 같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나팔은 성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 하나님의 임재를 알림
  • 백성을 소집함
  • 전쟁을 알림
  • 왕의 도래를 선포함
  • 심판과 종말의 사건을 알림

따라서 여기의 나팔 같은 음성은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들으라!”는 강력한 선언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주의 날에 → 성령 안에 → 주님의 음성을 듣고 →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바로 여기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90초 쇼츠 제목 - 「주의 날에 들려온 나팔 소리」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의 날에 들려온 나팔 소리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섬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외로운 섬에 유배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환경은 절망적이었지만 요한은 성령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여기서 나팔은 단순한 음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팔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며, 중요한 하나님의 사건을 선포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음성이 요한의 앞이 아니라 뒤에서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바라보던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고,
환경은 막혀 있고, 고난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가입니다.

성령 안에 있을 때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까?

잠들지 마십시오.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주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9월 2일(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I, John,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he suffering and kingdom and patient endurance that are ours in Jesus, was on the island of Patmos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제목: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의 책이 아닙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짐승, 666, 심판, 재앙…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두려운 책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시작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요한계시록은 재앙의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여기에 신앙의 중요한 세 단어가 있습니다.

환난, 나라, 참음.

첫째, 환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둘째, 나라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셋째, 참음입니다.
참음은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참을 수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러므로 교회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으로 끝나는 책이 아닙니다.

환난을 지나
나라를 바라보고
참음으로 견디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책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고백하시겠습니까?



성도의 정체성과 신앙생활의 세 가지 핵심으로 "예수의 환난" "예수의 나라" "예수의 참음 "을 말씀합니다. 

예수의 환난 — τῇ θλίψει τοῦ Ἰησοῦ

θλῖψις (thlipsis)는 ‘환난, 압박, 고난’을 뜻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믿으면 환난이 전혀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 요한복음 16:33 —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 빌립보서 1:29 —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 적용 :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가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고 있다”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헬라어 θλῖψις는 ‘압박, 고난, 환난’을 뜻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세상의 반대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한복음 16:33

    신앙의 질문:
    “나는 편안할 때만 예수님을 따르는가, 아니면 고난 중에도 예수님을 따르는가?”




    예수의 나라 — τῇ βασιλείᾳ

    βασιλεία (basileia)는 ‘나라, 왕권, 통치’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환난과 나라를 함께 말한다는 것입니다. 

    환난 → 나라

    현재는 환난을 경험하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골로새서 1:13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합니다.  


    βασιλεία는 ‘왕권, 통치, 나라’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환난과 나라를 함께 말한다는 것입니다.

    환난 →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 되신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라.”
    — 데살로니가후서 1:5



    예수의 참음 — τῇ ὑπομονῇ

    ὑπομονή (hypomonē)는 단순히 가만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인내입니다.

    ὑπομονή는 단순히 ‘참는다’는 뜻을 넘어 어려움 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않고 견디는 인내와 인내의 지속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견디는 힘은 소망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 로마서 5:3–4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9의 구조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환난(θλῖψις)  → 나라(βασιλεία)  → 참음(ὑπομονή)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시간적 순서라기보다 성도의 현재적 삶의 세 영역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 예수의 나라에 속하여 → 끝까지 참는 것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성도 

    1.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 우리는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다.
    2. 나라를 바라보라 — 우리는 예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다.
    3. 끝까지 참으라 — 우리는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요한은 이 고백을 한 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라”고 말합니다(계 1:9).

    즉, 환난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성도는 환난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 예수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참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환난(θλῖψις) → 예수의 나라(βασιλεία) → 예수의 참음(ὑπομονή) →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

    요한계시록 1:9은 결국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환난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참음으로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에 살펴보신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와도 연결됩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 나라를 바라보고 → 인내하며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가르치는 마라나타 신앙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환난(들립시스. θλῖψις) → 예수의 나라(바실레이아. βασιλεία) → 예수의 참음(후포모네. ὑπομονή) →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
    헬라어 표기 및 문법적 설명과 성구 그리고 적용  


    요한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헬라어 핵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ἐγὼ Ἰωάννης, ὁ ἀδελφὸς ὑμῶν καὶ
    에고 이오안네스, 호 아델포스 휘몬 카이
     συγκοινωνὸς ἐν τῇ θλίψει καὶ βασιλείᾳ καὶ ὑπομονῇ
    슁코이노노스 엔 테 들립세이 카이 바실레이아 카이 휘포모네
     ἐν Ἰησοῦ…
    엔 이에수

    핵심은 συγκοινωνός(슁코이노노스) 입니다. 

    συγκοινωνός — “동참자, 함께 참여하는 자”

    • σύν = 함께
    • κοινωνός = 참여자, 동료, 동참자

    따라서 요한은 단순히 “환난을 겪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의 환난 — 들립시스(θλῖψις)

     θλῖψις (thlipsis, 들립시스) = 환난, 고난, 압박, 고통, 시련

     동사 θλίβω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θλίβω = 누르다, 압박하다, 짓누르다

     따라서 성경적인 “환난”은 단순히 어려운 일이 생겼다는 의미보다 신앙 때문에 압박을 받고 믿음이 시험받는 상황까지 포함합니다.  

     관련 성구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서도 환난은 피해야 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현실로 제시됩니다.  

     적용  /  환난 가운데서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에서 “이 환난 가운데서 나는 예수님과 어떻게 동행하고 있는가?” 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의 나라 —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 

     βασιλεία (basileia, 바실레이아) = 왕권, 통치, 왕국, 나라

     중요한 것은 단순히 “천국이라는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βασιλεία에는 특히 왕의 통치와 왕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나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영역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관련 성구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예수의 나라는 장차 완성될 나라일 뿐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적용  /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 중에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 나라의 시민이기 전에 예수의 나라의 백성이다.”  
    세상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참음 — 휘포모네(ὑπομονή)

    ὑπομονή (hypomonē, 휘포모네) = 인내, 견딤, 참음, 끝까지 견디어 냄

    단어를 구조적으로 보면

    • ὑπό = 아래에
    • μένω = 머물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아래에 머물러 견디는 것” 이라는 그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의 인내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관련 성구 /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인내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 → 인내 → 약속의 성취 입니다.   

    세 단어의 놀라운 연결

    요한계시록 1:9의 구조를 설교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θλῖψις → βασιλεία → ὑπομονή

    환난 → 나라 → 참음

    그런데 이것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하기보다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삶의 세 영역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헬라어 의미 성도의 삶
    θλῖψις 환난 무엇을 당하는가
    βασιλεία 나라/통치 누구의 다스림을 받는가
    ὑπομονή 참음/인내 어떻게 견디는가

    따라서 이렇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지만 예수의 나라에 속하고, 예수의 통치 아래서 끝까지 참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연결

    여기에서 재림으로 연결하면 매우 아름다운 구조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1:9

    환난 → 나라 → 참음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요한계시록 22: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성도의 응답: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즉,

    환난 중에도 → 예수의 나라를 바라보고 → 참음으로 견디며 →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다

    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 

    재림 신앙은 단순히 “언젠가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재림 신앙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다.

      
    ②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11–12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은 거룩한 생활로 나타납니다.

      
    ③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일을 중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의 핵심 문장

    이 네 가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묶으면 매우 힘 있는 메시지가 됩니다. 

    “성도는 환난(θλῖψις)을 당하지만 예수의 나라(βασιλεία)에 속해 있으며, 예수의 참음(ὑπομονή)으로 끝까지 견디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말라  θλῖψις 
    예수의 나라를 바라보라 βασιλεία 
    끝까지 참으라 ὑπομονή 
    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라 Μαράνα θά —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이렇게 하면 요한계시록 1:9의 “환난–나라–참음”이 요한계시록 22:20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수렴하는 재림 설교 구조가 됩니다.



     9월 1일(화)

     알파와 오메가(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중요한 것은 본질과 기초  

    조셉 B. 스트라우스 — 총괄 기술자

    Joseph Baermann Strauss (1870–1938) 
    금문교의 Chief Engineer(수석 기술자)였습니다. 1929년 공식적으로 수석 기술자로 임명되어 설계와 건설을 총괄했습니다.

    그는 1921년부터 금문교 건설을 추진했고, 처음에는 캔틸레버-현수교 혼합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이후 설계가 현재의 거대한 현수교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미국의 금문교를 만든 사람인 레드우드는 아이디어를 2000년된 나무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무를 보니 세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첫 번째가 다른 나무보다 뿌리가 더 깊이 뻗어 있더라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나무보다 잔뿌리가 많은데, 잔뿌리가 습기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가 수분을 나무로 공급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그 뿌리가 큰 바위를 칭칭 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2000년 동안 온갖 변하는 환경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은 거지요. 그래서 금문교를 만들 때 반석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위에 교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 많은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까지 건재한 이유 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 중요한 것이 본질이고 기초입니다. 기초없이 제대로 성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단순히 “처음부터 끝까지 계신다”는 시간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창조의 주권(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둘째, 역사의 주권

    역사의 시작과 결말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셋째, 구원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마지막까지 완성하십니다.

    넷째, 영원성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과거·현재·미래를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알파와 오메가”와 재림

    앞에서 말씀하신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와 연결하면 아주 아름다운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요한계시록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

    요한계시록 22:12–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역사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기 → 복음서 → 사도행전 →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매우 강력한 성경신학적 주제가 됩니다.

    창조의 시작 → 십자가의 구속 → 승천 → 구름을 타고 오시는 재림 → 새 하늘과 새 땅

    즉, 알파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메가이신 그리스도로 역사를 완성하십니다.




     8월 31일(월)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요한계시록 1: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Look,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and every eye will see him, even those who pierced him; and all the peoples of the earth will mourn because of him. So shall it be! Amen

    헬라어 원문

    Ἰδοὺ ἔρχεται μετὰ τῶν νεφελῶν
    Idou erchetai meta tōn nephelōn

    직역하면: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신다.”

    • Ἰδοὺ (ἰδού, 이두) — “보라!”, “주의하여 보라”
    • ἔρχεται (erchetai, 에르케타이) — “그가 오고 있다/오신다”
      • 동사 ἔρχομαι(오다)
      • 현재시제, 중간태/디포넌트, 3인칭 단수
    • μετά + 속격(τοῦ/τῶν) — “~와 함께”
    • τῶν νεφελῶν — “구름들과”
      • νεφέλη(구름)의 복수 속격

    따라서 μετὰ τῶν νεφελῶν은 “구름들과 함께”라는 뜻입니다.

    “구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νεφέλαι (νεφέλη의 복수형)는 단순히 하늘에 떠 있는 자연적인 구름만을 의미한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구약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이 있습니다.

    특히 다니엘 7:13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헬라어 요한계시록 1:7의 표현은 바로 이 **다니엘 7:13의 ‘인자와 구름’**을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7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오시는 왕적·종말론적 사건을 선언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시리라”가 중요한 이유

    ἔρχεται는 현재형입니다. 
    한국어로는 “오시리라”라고 미래적으로 번역하지만, 
    헬라어에서는 현재시제를 사용하여 확실하게 다가오는 사건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이를 현재시제의 생생한 표현(현재적 미래, prophetic/present tense)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오실 것이다”라는 단순한 미래 예고를 넘어 “보라! 그분이 오고 계신다!” 라는 긴박성과 확실성을 전달합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이어지는 말이 더욱 중요합니다.  
    καὶ ὄψεται αὐτὸν πᾶς ὀφθαλμός “그리고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다.”

    • ὄψεται — “볼 것이다”
    • πᾶς ὀφθαλμός — “모든 눈”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은 일부 사람만 경험하는 은밀한 사건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보겠고” 라는 보편적이고 공개적인 재림의 성격이 강조됩니다. 

    설교용으로 정리하면

    구름 → 하나님의 영광
    오심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모든 눈 → 공개적이고 보편적인 재림
    ἔρχεται → 반드시 오시는 주님

    따라서 요한계시록 1:7의 핵심은 이렇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분의 재림은 감추어진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공개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계시록의 첫 장에서부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독자에게 선포하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MRA(Moral Re-Armament, 도덕적 재무장 운동 
    MRA의 핵심 슬로건 
    “절대적 정직, 절대적 순결, 절대적 무사심, 절대적 사랑”

    (Absolute Honesty, Absolute Purity, Absolute Unselfishness, Absolute Love)

    “정직하게, 순결하게, 이기심 없이, 사랑으로!”

    誠實 · 純潔 · 無私 · 愛






     8월 29일(토)

     하나님을 위하여(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and has made us to be a kingdom and priests to serve his God and Father--to him be glory and power for ever and ever! Amen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내 뜻과 유익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삶의 목적과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 목적과 방향
    • 하나님과 함께 → 동행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 근원과 능력
    • 하나님께 영광을 → 최종적인 목적

    2. 대표적인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위하여”는 헬라어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eis doxan theou)입니다.

    • εἰς = ~을 향하여, ~을 위하여
    • δόξαν = 영광을
    • θεοῦ = 하나님의

    즉,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라는 방향성을 강조합니다.

    3. “하나님을 위하여”의 신앙적 구조

    하나님을 위하여 → 하나님과 함께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 하나님께 영광

    이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위신이생(爲神而生0 —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흥신동행(與神同行) — 하나님과 함께 걷고
    유신이행(由神而行)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며
    귀락어신(歸榮於神) —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특히 설교 제목으로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를 위하여 하느냐”라는 주제로 발전시키기에 매우 좋은 표현입니다.




    ♪  나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8월 28일(금)

     예수의 피(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and from Jesus Christ, who is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has fre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예수님의 피가 왜 중요한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피는 단순한 육체의 피가 아니라 대속(代贖)과 속죄(贖罪)와 죄 사함 그리고  새 언약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기독교는 피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피의 종교란 피 자체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피 흘림에 의한 죄에 대한 용서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상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죽옷(창세기 3장)
    2. 아벨의 제사(희생)
    3. 유월절 어린 양의 피(출애굽기)
    4. 속죄제와 피(레위기)
    5. 고난 받는 종(이사야 53장)
    6.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복음서)
    7. 단번에 드린 그리스도의 피(히브리서)
    8. 어린 양의 피(요한계시록)

    결국 성경은 “피에서 시작하여 어린양에게서 완성되는 구속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의미하는 중요한 신앙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첫째, 죄 사함을 위한 언약의 피(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둘째,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피(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셋째,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피(요한일서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넷째,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피(히브리서 10:19)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예수의 피(αἷμα τοῦ Ἰησοῦ)는 보배로운 피(τιμίον αἷμα)라고 하여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보혈(寶血)’이라고 부릅니다. 
    보혈의 능력이 피 자체에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구원의 효력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성경에서 “예수의 피”가 의미하는 것

    의미 성경적 내용
     속죄       죄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
    죄 사함      죄를 용서받게 하는 근거
    칭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
     화목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새 언약           예수께서 세우신 언약
     구속          죄의 종에서 해방됨
    정결    죄와 양심으로부터 깨끗하게 됨


    ♪  나의 죄를 씻기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예수의 피(寶血)

    성경에서 예수의 피는 단순히 육체에서 흘린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의 은혜
    를 나타냅니다. 

    1. 예수의 피는 죄를 속량(贖良)합니다(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贖良)이란 죄의 종 되었던 사람을 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2. 예수의 피는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요한일서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피의 지속적인 정결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습니다.

     3. 예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합니다(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보혈은 용서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4. 예수의 피는 새 언약의 피입니다(마태복음 26:28)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구약의 제사에서 짐승의 피가 사용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5. 예수의 피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었습니다(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서 “예수의 피를 힘입어”라는 표현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예수의 피(寶血)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함을 얻으며,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보혈이 “사랑 → 피 → 해방 →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구원의 구조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요한계시록 1:5

    사랑하셨기 때문에 피를 흘리셨고,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해방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백성이 됩니다.



      8월 27일(목)

     일곱 교회(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John, To the seven churches in the province of Asia: Grace and peace to you from him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and from the seven spirits before his throne.

    어느 주일 아침,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어진 교회 앞에 한 흑인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를 막으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백인들만 예배드리는 교회입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교회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계십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 교회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도 아직 저 교회에 들어가 보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교회는 건물이 아름답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있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는 공동체일 때 교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막 11:17)


    미국 남부에서 흑인을 배척하고 인종차별이 강했던 지역을 역사적으로 표현할 때 몇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1. 선다운 타운(Sundown Town)

    Sundown Town(선다운 타운)은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이 해가 진 뒤 그 지역에 머무르는 것을 금지하거나 사실상 허용하지 않았던 미국의 도시·마을을 가리킵니다.

    • 표지판에 “Nigger, Don't Let the Sun Go Down On You”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차별 문구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 법률로 명시된 경우도 있었지만, 폭력·협박·경찰의 묵인 등으로 사실상 흑인의 거주와 방문을 제한한 곳도 많았습니다.
    • 남부뿐 아니라 미국 중서부와 서부에도 존재했습니다.
    •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심각했습니다.

    2. Jim Crow South — 짐 크로 남부

    Jim Crow South는 미국 남부에서 흑인과 백인을 법적으로 분리하고 흑인을 차별했던 사회·법률 체제를 가리킵니다. 
    Jim Crow laws(짐 크로 법) 아래에서는 흑인에게 학교, 식당, 대중교통, 화장실, 공공시설 등에서 백인과 분리된 시설을 사용하게 하는 법적 인종분리(segregation)가 시행되었습니다.

    3. Black Belt — 블랙 벨트

    주의해야 할 표현입니다. Black Belt 자체가 흑인을 배척하는 지역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 미국 남부의 앨라배마·미시시피 등을 중심으로 한 비옥한 흑토 지역을 가리키던 지리적 명칭이며, 역사적으로 흑인 인구가 많이 거주했던 지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敎會)와 성전(聖殿)의 의미와 차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교회(ἐκκλησία)는 하나님께 부름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따라서 교회는 외형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이면 모인 공동체가 되고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면 흩어지는 공동체가 됩니다.  

    성전(ναός / מִקְדָּשׁ)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나타나는 장소 또는 그 임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예배당(禮拜堂)"이라고 합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었던 일곱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일곱 교회들의 외형적인 모습만 살필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를 찾아서 오늘의 교회가 갖춰야 할 교회의 참다운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작업을 위하여 각 교회가 갖는 책망과 칭찬을 살펴야 합니다.
    부족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일곱 교회의 영적 진단표로 만들면 매우 선명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머나교회는 고난 속에서 충성했습니다. 
    버가모교회는 세상과 타협했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거짓을 용납했습니다. 
    사데교회는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켰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미지근한 믿음이었습니다.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칭찬만 들었던 교회는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이었습니다. 
    반면에 책망만 들었던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어떤 영적 진단서가 발급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단서에서 부복한 것은 채우고 넉넉한 것은 잘 관리하며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네 가지 날마다 행해야 할 목록을 소개합니다.

    첫째, 날마다 새롭게(고후 4:16, 5:17)
    둘째, 날마다 죽노라(고전 15:29-34)
    셋째, 날마다 새벽을 깨우라(마가 1:35-39)
    넷째,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라(마가 8:27-38)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우리 모두 함께 칭찬만 듣는 믿음의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훗날 내가 그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  나는 예수 따라가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8월 26일(수)

      예언의 말씀(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예언이란 한문자를 두 가지로 표기합니다.

    첫째는 예언(豫言)
    "미리 예, 말씀 언"이란 훈으로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하여 짐작하여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prophecy, prediction, forecast라고 합니다.

    둘째는 예언(預言)
    "맡길 예, 말씀 언"이란 훈으로 맡겨진 말씀은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prophetic word, prophecy 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요한이 천사들로부터 받은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이 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창세기의 생명나무(창 2–3장)가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다시 등장하면서 성경 전체의 구원 역사가 완성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받을 복을 일곱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1:3)
    둘째, 주 안에서 죽음(14:13)
    셋째, 깨어 자기 옷을 지킴(16:15)
    넷째,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함(19:9)
    다섯째, 첫째 부활에 참여함(20:6)
    여섯째, 예언의 말씀을 지킴(22:7)
    일곱째, 정결함을 입고 생명나무에 나아감(22:14)

    일곱 가지 복을 기억하기 쉽도록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을 지키며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죽음에서도 복되고, 부활에 참여하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마침내 생명나무에 이른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첫 번째 복과(1:3) 마지막 복을(22:14) 연결하면, 
    요한계시록 전체가 “말씀을 지키는 삶은 거룩한 생활을 유지하며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조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이여,
    혼돈과 어지러움 가운데서(카오스) 세상을(코스모스) 창조하신(바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승리하기 위하여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마다 약속된 복을 확인하며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8월 25일(화)

      자기의 본 것(요한계시록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Who testifies to everything he saw--that is,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사도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사도 요한은 세 가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본 것(1장)
    둘째는 이제 있는 일(2-3장)
    셋째는 장차 될 일(4-22장)

    사도 요한이 본 것은 20절에서 확인합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특히 1장과 21–22장을 서로 연결해서 보면 놀라운 구조가 보입니다.
    1장에서는 요한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합니다. 
    21–22장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완성된 세계를 봅니다. 
    요한계시록의 시작은 “그리스도를 봄”이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얼굴을 봄”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소개합니다(7대 구조). 

    1st. 1장 그리스도의 계시  → “본 것” 
    2nd. 2–3장 일곱 교회  →  “이제 있는 일”
    3rd.  4–5장 하늘 보좌와 어린양 → 역사의 주권    
    4th. 6–11장 일곱 인 · 일곱 나팔 →  심판과 증언   
    5th. 12–18장 용 · 짐승 · 바벨론   →  영적 전쟁과 악의 심판    
    6th. 19–20장 재림 · 승리 · 심판 →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  
    7th. 21–22장 새 하늘 · 새 땅 →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중요한 것은 7개 구조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다 → 교회를 살핀다 → 보좌를 본다 → 심판이 시작된다 → 악의 실체가 드러난다 → 그리스도가 승리한다 
    → 새 창조가 완성된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야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내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하려고 합니까?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다시 오실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  



    의심의 눈은 문자적으로는 무언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며 바라보는 시선을 뜻합니다. 

    1. 일반적인 의미

  • 의심의 눈으로 보다 = 사실인지 아닌지 경계하며 바라보다
  • 의심스러운 눈빛 = 상대의 말이나 행동을 믿지 못하는 표정
  • 영어로는 a skeptical eye, a suspicious look, a doubtful eye 등이 가능합니다. 

    2.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 성경에서는 눈(ὀφθαλμός, ophthalmos)이 단순히 시각기관만 아니라 인식하고 판단하는 내면의 시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의심의 눈”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의심하는 시선 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3장에서 뱀의 말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 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 “의심의 눈”과 “믿음의 눈”

    의심의 눈 믿음의 눈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믿는다”
    자신의 판단을 우선함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함
    두려움으로 바라봄                믿음으로 바라봄
    현실이 말씀보다 크게 보임       말씀이 현실보다 크게 보임

    그래서 신앙적으로는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졌고(롬 4:18–21),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합니다(고후 4:18).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의심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믿음의 눈은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바라본다.


    믿음의 눈”과 “의심의 눈”을 성경적· 언어적으로 표현 

    표현 한자 영어 헬라어
    믿음의 눈      信仰之眼 / 信仰의 目         eyes of faith       ὀφθαλμοὶ πίστεως
    의심의 눈       疑心之眼 / 疑惑之眼       eyes of doubt      ὀφθαλμοὶ ἀμφιβολίας

    1. 믿음의 눈 — 신앙지안(信仰之眼)

    信仰之眼 / 信(믿을 신) + 仰(우러를 앙) + 之(…의) + 眼(눈 안)

    영어로는 eyes of faith가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헬라어로는  ὀφθαλμοὶ πίστεως
                        ophthalmoi pisteōs
    → “믿음의 눈들”

    • ὀφθαλμός = 눈
    • ὀφθαλμοί = 눈들, 복수 주격
    • πίστις = 믿음
    • πίστεως = 믿음의, 속격

    즉 ὀφθαλμοὶ πίστεως는 문법적으로 “믿음에 속한 눈들 / 믿음의 눈들”이라는 구조입니다. 

    2. 의심의 눈 — 회심지안(疑心之眼)

    疑心之眼 / 疑(의심할 의) + 心(마음 심) + 之(…의) + 眼(눈 안)

    영어는 eyes of doubt 또는 문맥에 따라 eyes of suspic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ὀφθαλμοὶ ἀμφιβολίας
    ophthalmoi amphibolias
    → “의심의 눈들”

    • ἀμφιβολία = 의심, 불확실, 주저함
    • ἀμφιβολίας = 의심의, 속격

    다만 “의심”을 “불신”이라는 의미로 강하게 표현하려면:

    ὀφθαλμοὶ ἀπιστίας
    ophthalmoi apistias
    → “불신의 눈들”

    3. 중요한 성경적 구별

    성경에서는 “믿음의 눈”이라는 표현 자체가 특정한 정형 문구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개념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 고린도후서 5:7

    여기서 핵심적인 대조는

    보이는 것 → 믿음
    ὁράω(보다) → πίστις(믿음)

    따라서 설교나 성경공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조 구조가 매우 좋습니다.

    믿음의 눈 — 信仰之眼 — eyes of faith — ὀφθαλμοὶ πίστεως
    ↕
    의심의 눈 — 疑心之眼 — eyes of doubt — ὀφθαλμοὶ ἀμφιβολίας

    그리고 “믿음의 눈”의 반대가 단순한 의심(doubt)인지, 불신(unbelief)인지에 따라 헬라어를 ἀμφιβολία와 ἀπιστία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요새(要塞) / 요긴할 요(要). 중요할 요(要), 변방 새(塞)  

    1. 군사적(軍事的)으로 중요(重要)한 곳에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방어(防禦) 시설(施設). 또는 그런 시설(施設)을 한 곳.
    2. 차지하거나 달(達)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대상(對象)이나 목표(目標).

    요새화(要塞化) / 요긴할 요(要), 변방 새(塞), 될 화(化)
    - 요한계시록과 새벽 묵상에 의한 예수화 

    고린도전서 16:22 
    Εἴ τις οὐ φιλεῖ τὸν κύριον, ἤτω ἀνάθεμα. Μαράνα θά.
    에이 티스 우 필레이 톤 퀴리온, 에토 아나테마. 마라나 타.

    여기서 마지막의 Μαράνα θά가 “마라나타”입니다.

     Μαράνα θά의 의미

    Μαράνα θά는 헬라어 단어가 아니라 아람어를 헬라어 문자로 음역한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מָרַנָא תָא — Maranā thā / Maranatha

    • מָרַן (maran) = 우리 주, 우리의 주님
    • א / ָא (ā) = “우리의”라는 소유적 형태에 포함
    • תָּא (thā / tā) = 오라!

    따라서  Μαράνα θά =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통적입니다.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아람어를 어떻게 분절하느냐에 따라 מָרַן אֲתָא (Maran atha)
    → “우리 주께서 오셨다/오신다” 또는 문맥상 “우리 주께서 오신다” 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6:22에서는 초대교회의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도와 고백, 
    곧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Εἴ τις οὐ φιλεῖ τὸν κύριον, ἤτω ἀνάθεμα.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리고 곧바로 Μαράνα θά!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고 외칩니다.

    여기에는 매우 강한 신앙적 긴장감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 →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따라서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 빨리 오세요”라는 말이 아니라, 
    “주 예수님,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종말론적 신앙고백입니다.

    요한계시록과 연결하면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과 매우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 22: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에 교회가 대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헬라어로는 Ἀμήν,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Amēn, erchou, kyrie Iēsou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핵심 정리

    표현 언어 의미
    Μαράνα θά 아람어 음역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מָרַנָא תָא 아람어 Maranā thā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헬라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Αμήν 히브리어/헬라어 음역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따라서 “마라나타”는 초대교회의 예배와 재림 신앙을 압축한 한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는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이것이 Μαράνα θά가 담고 있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마라나타(Maranatha)는 아람어 표현으로, 성경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 "주여, 오시옵소서." (Our Lord, come!)
    • "우리 주께서 오셨다." (Our Lord has come.)

    기독교에서는 문맥상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로 가장 널리 사용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드리는 소망과 기도의 표현입니다.

    성경에서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마라나타"라는 형태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와도 같은 의미의 신앙 고백으로 이해됩니다.







      8월 24일(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오늘부터 요한계시록을 하루에 한 구절씩 소개하며 묵상하려고 합니다.
    할 수 있다면 한 구절씩 암송하는 것도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22장 405구절로 구성된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는 "계시(啓示. revelation)"와 ''속히(速. soon)"라고 하겠습니다.

    계시라는 단어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때로는 "묵시(默示)"라고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계시(啓示. Revelation. 아포칼룹시스)는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낸 사건을 가리킵니다.

    계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합니다.
    특별계시는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지 않습니다.

    일반계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계시를 말합니다.
    이러한 계시를 자연계시라고도 합니다.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안에 하나님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도 관심을 갖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계시의 본질로 여깁니다.

    "속히(타코스. tachŏs)  τάχος"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시간적인 의미
    시간적 의미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주님이 오실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영적인 의미
    영적인 의미는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묵시가 필요할까요?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29:18)

    만일 묵시가 없다면 인간의 본성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시를 통하여 장차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한 묵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하여(계 1:1) 마지막에는 심판의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깨우치고 습니다(계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마지막 남은 성경의 예언은 하늘로 올라가셨던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날마다 주님을 기다리는 정숙한 신부와 같이 항상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내 등에 기름이 넉넉한지 가늠하며 부족한 기름은 채우고 언제든지 등불을 밝힐 수 있는 예비된 믿음으로 무장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하나님의 나팔 소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