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교회는 말씀은 있었는데 사랑이 식었다고 꾸짖습니다.
여기서 교회갱신의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회복하기 위하여
♪ 찬송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예수 내 구주!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옛날 옛적에 깊은 산골에 어머니와 어린 오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서운 호랑이가 나타났습니다.
호랑이는 어머니를 잡아먹고는 어머니의 옷을 입고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얘들아, 엄마 왔다. 문 열어라.”
아이들은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엄마, 손을 보여 주세요.”
호랑이가 손을 내밀자 아이들은 그것이 엄마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습니다.
호랑이는 아이들을 찾아 나무 아래까지 쫓아왔습니다.
아이들은 하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튼튼한 동아줄 하나가 내려왔습니다.
오빠와 누이는 그 줄을 붙잡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도 아이들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붙잡은 줄은 썩은 줄이어서 그만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에 올라간 오빠와 누이는 각각 해와 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이는 밤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밤이 무서워. 오빠가 밤을 맡아 줘.”
오빠가 말했습니다.
“나는 밤이 무서우니 네가 밤을 맡아 줘.”
결국 오빠는 해가 되고, 누이는 달이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해는 낮에 세상을 밝히고, 달은 밤에 세상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그 오른손의 일곱 별”이 있다는 것은 ‘인자 같은 이’가 곧 “교회의 주권자”가 되심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권능과 권세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는 것은 “말씀으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11장 4절의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라는 말씀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자 같은 이로서 그리스도는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그 말씀 자체가 심판의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보는 인자 같은 이 예수님은 십자가 이전에 인간의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지만, 이제는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믿음의 현장을 말씀으로 굳게 지키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계시를 배경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권세와 심판과 위엄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발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정복과 통치와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이란 정확한 재료가 무엇이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문맥상 매우 순수하고 빛나는 금속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풀무에 단련한”이라는 표현에서 불은 시험과 정결과 심판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의 임재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연결됩니다.
“발”과 “빛난 주석”을 합치면
여기서 불꽃 같은 눈과 빛난 주석 같은 발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장의 예수님의 모습이 에스겔의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니엘 10:6에는 한 신적 존재가 등장합니다.
믿음이란 세상에서 받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연단의 과정을 거치며 더욱 순결한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나팔 소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흰 머리털과 불꽃 같은 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권세로 재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계시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14의 **“흰 머리”와 “불꽃 같은 눈”**은 설교에서 함께 묶으면 매우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특히 흰 머리 = 영원성과 지혜, 불꽃 같은 눈 =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심판과 거룩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1. 흰 머리 — 세월이 아니라 영원
한 노인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머리가 온통 하얗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흰 머리를 보며 말합니다.
“저 머리카락 하나하나에는 살아온 세월과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머리가 **“흰 양털 같고 눈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흰 머리는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간의 지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7:9에서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옷은 눈같이 희고 머리털은 깨끗한 양털 같습니다.
설교 포인트
“사람에게 흰 머리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지만, 예수님의 흰 머리는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2. 불꽃 같은 눈 — 감출 수 없는 시선
어두운 방에서 손전등을 비추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까지 보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보십니다.
요한계시록 1:14은 예수님의 눈을 **“불꽃 같고”**라고 표현합니다.
불꽃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냅니다.
불은 불순물을 태웁니다.
따라서 불꽃 같은 눈은 완전한 통찰력과 거룩한 심판의 눈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그 눈이 불꽃 같고”**라고 표현하고, 2:23에서는 그분이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설교 포인트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신경 쓰지만, 성도는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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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령과 나무꾼
가난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실수로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습니다.
나무꾼이 자신의 쇠도끼를 잃어버리고 슬퍼하자 산신령이 나타나 물었습니다.
“네가 잃어버린 도끼가 이것이냐?”
산신령은 먼저 금도끼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닙니다. 제 도끼는 쇠도끼입니다.”
이번에는 은도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도 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쇠도끼를 보여주자 나무꾼이 대답했습니다.
“예, 그것이 제 도끼입니다.”
산신령은 나무꾼의 정직함을 칭찬하며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함께 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나무꾼이 욕심을 내어 일부러 도끼를 물에 던졌습니다.
산신령이 금도끼를 보여주자 그는 얼른 말했습니다.
“예! 그것이 제 도끼입니다.”
그러자 산신령은 금도끼는 물론이고 자신의 쇠도끼도 주지 않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도끼의 상징
| 도끼 | 상징 |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
|---|---|---|
| 금도끼 | 최고의 가치, 부와 명예 | 탐욕의 유혹 |
| 은도끼 | 중간 가치, 성공과 인정 | 비교와 욕망 |
| 쇠도끼 | 평범하지만 자기 것 | 정직·진실·만족 |
이 민담을 성경적으로 연결하면 상당히 좋은 설교 소재가 됩니다.
특히 “금도끼를 얻는 것이 복인가, 자기 도끼를 지키는 것이 복인가?”라는 질문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 일곱 교회 → 오늘의 교회 회복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면,
“교회가 금도끼를 찾다가 자기 도끼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라는 매우 강력한 설교 질문이 나옵니다.
즉, 화려한 프로그램·건물·숫자·명성보다
말씀 → 교제 → 떡을 뗌 → 기도라는 초대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On the Lord's Day I was in the Spirit, and I heard behind me a loud voice like a trumpet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성령에 감동되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주의 날에” — ἐν τῇ κυριακῇ ἡμέρᾳ
헬라어로 ἐν τῇ κυριακῇ ἡμέρᾳ
(en tē kyriakē hēmera)
- ἐν — ~안에, ~때에
- κυριακῇ — 주님의, 주께 속한
- ἡμέρᾳ — 날
따라서 단순히 “일요일”이라는 시간 개념만이 아니라, “주께 속한 날”, 곧 주님의 통치와 임재를 의식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하여” — ἐγενόμην ἐν πνεύματι
직역하면 “내가 성령 안에 있게 되었다”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자기 생각으로 계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날 → 성령 안에 있음 → 하늘의 음성을 들음 → 계시를 받음이라는 흐름입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
요한은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나팔 소리 같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나팔은 성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 하나님의 임재를 알림
- 백성을 소집함
- 전쟁을 알림
- 왕의 도래를 선포함
- 심판과 종말의 사건을 알림
따라서 여기의 나팔 같은 음성은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들으라!”는 강력한 선언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주의 날에 → 성령 안에 → 주님의 음성을 듣고 →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바로 여기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90초 쇼츠 제목 - 「주의 날에 들려온 나팔 소리」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의 날에 들려온 나팔 소리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섬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외로운 섬에 유배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환경은 절망적이었지만 요한은 성령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뒤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여기서 나팔은 단순한 음악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팔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며, 중요한 하나님의 사건을 선포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음성이 요한의 앞이 아니라 뒤에서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바라보던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고,
환경은 막혀 있고, 고난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가입니다.
성령 안에 있을 때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까?
잠들지 마십시오.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주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9월 2일(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I, John,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he suffering
and kingdom and patient endurance that are ours in Jesus, was on the
island of Patmos because of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제목: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의 책이 아닙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짐승, 666, 심판, 재앙…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두려운 책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시작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요한계시록은 재앙의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여기에 신앙의 중요한 세 단어가 있습니다.
환난, 나라, 참음.
첫째, 환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둘째, 나라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셋째, 참음입니다.
참음은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참을 수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러므로 교회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으로 끝나는 책이 아닙니다.
환난을 지나
나라를 바라보고
참음으로 견디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책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고백하시겠습니까?
성도의 정체성과 신앙생활의 세 가지 핵심으로 "예수의 환난" "예수의 나라" "예수의 참음 "을 말씀합니다.
예수의 환난 — τῇ θλίψει τοῦ Ἰησοῦ
θλῖψις (thlipsis)는 ‘환난, 압박, 고난’을 뜻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믿으면 환난이 전혀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적용 :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가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고 있다”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헬라어 θλῖψις는 ‘압박, 고난, 환난’을 뜻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세상의 반대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한복음 16:33
신앙의 질문:
“나는 편안할 때만 예수님을 따르는가, 아니면 고난 중에도 예수님을 따르는가?”
예수의 나라 — τῇ βασιλείᾳ
βασιλεία (basileia)는 ‘나라, 왕권, 통치’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환난과 나라를 함께 말한다는 것입니다.
환난 → 나라
현재는 환난을 경험하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골로새서 1:13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합니다.
βασιλεία는 ‘왕권, 통치, 나라’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이 환난과 나라를 함께 말한다는 것입니다.
환난 →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 되신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라.”
— 데살로니가후서 1:5
예수의 참음 — τῇ ὑπομονῇ
ὑπομονή (hypomonē)는 단순히 가만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인내입니다.
ὑπομονή는 단순히 ‘참는다’는 뜻을 넘어 어려움 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않고 견디는 인내와 인내의 지속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견디는 힘은 소망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 로마서 5:3–4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9의 구조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환난(θλῖψις) → 나라(βασιλεία) → 참음(ὑπομονή)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시간적 순서라기보다 성도의 현재적 삶의 세 영역입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 예수의 나라에 속하여 → 끝까지 참는 것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성도
-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 우리는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다.
- 나라를 바라보라 — 우리는 예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다.
- 끝까지 참으라 — 우리는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요한은 이 고백을 한 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라”고 말합니다(계 1:9).
즉, 환난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성도는 환난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 예수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참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환난(θλῖψις) → 예수의 나라(βασιλεία) → 예수의 참음(ὑπομονή) →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
요한계시록 1:9은 결국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환난에 참여하고, 예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참음으로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에 살펴보신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와도 연결됩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 나라를 바라보고 → 인내하며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가르치는 마라나타 신앙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환난(들립시스. θλῖψις) → 예수의 나라(바실레이아. βασιλεία) → 예수의 참음(후포모네. ὑπομονή) →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
헬라어 표기 및 문법적 설명과 성구 그리고 적용
요한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헬라어 핵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ἐγὼ Ἰωάννης, ὁ ἀδελφὸς ὑμῶν καὶ
에고 이오안네스, 호 아델포스 휘몬 카이
συγκοινωνὸς ἐν τῇ θλίψει καὶ βασιλείᾳ καὶ ὑπομονῇ
슁코이노노스 엔 테 들립세이 카이 바실레이아 카이 휘포모네
ἐν Ἰησοῦ…
엔 이에수
핵심은 συγκοινωνός(슁코이노노스) 입니다.
συγκοινωνός — “동참자, 함께 참여하는 자”
- σύν = 함께
- κοινωνός = 참여자, 동료, 동참자
따라서 요한은 단순히 “환난을 겪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의 환난 — 들립시스(θλῖψις)
θλῖψις (thlipsis, 들립시스) = 환난, 고난, 압박, 고통, 시련
동사 θλίβω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θλίβω = 누르다, 압박하다, 짓누르다
따라서 성경적인 “환난”은 단순히 어려운 일이 생겼다는 의미보다 신앙 때문에 압박을 받고 믿음이 시험받는 상황까지 포함합니다.
관련 성구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서도 환난은 피해야 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현실로 제시됩니다.
적용 / 환난 가운데서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에서 “이 환난 가운데서 나는 예수님과 어떻게 동행하고 있는가?” 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의 나라 —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
βασιλεία (basileia, 바실레이아) = 왕권, 통치, 왕국, 나라
중요한 것은 단순히 “천국이라는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βασιλεία에는 특히 왕의 통치와 왕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나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영역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관련 성구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예수의 나라는 장차 완성될 나라일 뿐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적용 /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 중에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 나라의 시민이기 전에 예수의 나라의 백성이다.”
세상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참음 — 휘포모네(ὑπομονή)
ὑπομονή (hypomonē, 휘포모네) = 인내, 견딤, 참음, 끝까지 견디어 냄
단어를 구조적으로 보면
- ὑπό = 아래에
- μένω = 머물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아래에 머물러 견디는 것” 이라는 그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의 인내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관련 성구 /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인내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 → 인내 → 약속의 성취 입니다.
세 단어의 놀라운 연결
요한계시록 1:9의 구조를 설교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θλῖψις → βασιλεία → ὑπομονή
환난 → 나라 → 참음
그런데 이것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하기보다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삶의 세 영역으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 헬라어 | 의미 | 성도의 삶 |
|---|---|---|
| θλῖψις | 환난 | 무엇을 당하는가 |
| βασιλεία | 나라/통치 | 누구의 다스림을 받는가 |
| ὑπομονή | 참음/인내 | 어떻게 견디는가 |
따라서 이렇게 설교할 수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지만 예수의 나라에 속하고, 예수의 통치 아래서 끝까지 참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연결
여기에서 재림으로 연결하면 매우 아름다운 구조가 됩니다.
요한계시록 1:9
환난 → 나라 → 참음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요한계시록 22: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성도의 응답: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즉,
환난 중에도 → 예수의 나라를 바라보고 → 참음으로 견디며 →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다
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
재림 신앙은 단순히 “언젠가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재림 신앙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다.
②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11–12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은 거룩한 생활로 나타납니다.
③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일을 중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의 핵심 문장
이 네 가지를 하나의 문장으로 묶으면 매우 힘 있는 메시지가 됩니다.
“성도는 환난(θλῖψις)을 당하지만 예수의 나라(βασιλεία)에 속해 있으며, 예수의 참음(ὑπομονή)으로 끝까지 견디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말라 θλῖψις
예수의 나라를 바라보라 βασιλεία
끝까지 참으라 ὑπομονή
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라 Μαράνα θά —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이렇게 하면 요한계시록 1:9의 “환난–나라–참음”이 요한계시록 22:20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수렴하는 재림 설교 구조가 됩니다.
9월 1일(화)
알파와 오메가(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중요한 것은 본질과 기초
조셉 B. 스트라우스 — 총괄 기술자
Joseph Baermann Strauss (1870–1938)
금문교의 Chief Engineer(수석 기술자)였습니다. 1929년 공식적으로 수석 기술자로 임명되어 설계와 건설을 총괄했습니다.
그는 1921년부터 금문교 건설을 추진했고, 처음에는 캔틸레버-현수교 혼합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이후 설계가 현재의 거대한 현수교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미국의 금문교를 만든 사람인 레드우드는 아이디어를 2000년된 나무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무를 보니 세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첫 번째가 다른 나무보다 뿌리가 더 깊이 뻗어 있더라는 것 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나무보다 잔뿌리가 많은데, 잔뿌리가 습기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가 수분을 나무로 공급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그 뿌리가 큰 바위를 칭칭 감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2000년 동안 온갖 변하는 환경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은 거지요. 그래서 금문교를 만들 때 반석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위에 교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 많은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까지 건재한 이유 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 중요한 것이 본질이고 기초입니다. 기초없이 제대로 성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단순히 “처음부터 끝까지 계신다”는 시간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창조의 주권(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둘째, 역사의 주권
역사의 시작과 결말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셋째, 구원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마지막까지 완성하십니다.
넷째, 영원성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과거·현재·미래를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알파와 오메가”와 재림
앞에서 말씀하신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와 연결하면 아주 아름다운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요한계시록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
요한계시록 22:12–13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역사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완성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기 → 복음서 → 사도행전 →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매우 강력한 성경신학적 주제가 됩니다.
창조의 시작 → 십자가의 구속 → 승천 → 구름을 타고 오시는 재림 → 새 하늘과 새 땅
즉, 알파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메가이신 그리스도로 역사를 완성하십니다.
8월 31일(월)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요한계시록 1: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Look,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and every eye will see him, even those who pierced him; and all the peoples of the earth will mourn because of him. So shall it be! Amen
헬라어 원문
Ἰδοὺ ἔρχεται μετὰ τῶν νεφελῶν
Idou erchetai meta tōn nephelōn
직역하면:
“보라, 그가 구름들과 함께 오신다.”
- Ἰδοὺ (ἰδού, 이두) — “보라!”, “주의하여 보라”
-
ἔρχεται (erchetai, 에르케타이) — “그가 오고 있다/오신다”
- 동사 ἔρχομαι(오다)
- 현재시제, 중간태/디포넌트, 3인칭 단수
- μετά + 속격(τοῦ/τῶν) — “~와 함께”
-
τῶν νεφελῶν — “구름들과”
- νεφέλη(구름)의 복수 속격
따라서 μετὰ τῶν νεφελῶν은 “구름들과 함께”라는 뜻입니다.
“구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νεφέλαι (νεφέλη의 복수형)는 단순히 하늘에 떠 있는 자연적인 구름만을 의미한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구약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이 있습니다.
특히 다니엘 7:13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헬라어 요한계시록 1:7의 표현은 바로 이 **다니엘 7:13의 ‘인자와 구름’**을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1:7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오시는 왕적·종말론적 사건을 선언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시리라”가 중요한 이유
ἔρχεται는 현재형입니다.
한국어로는 “오시리라”라고 미래적으로 번역하지만,
헬라어에서는 현재시제를 사용하여 확실하게 다가오는 사건을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이를 현재시제의 생생한 표현(현재적 미래, prophetic/present tense)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오실 것이다”라는 단순한 미래 예고를 넘어 “보라! 그분이 오고 계신다!” 라는 긴박성과 확실성을 전달합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이어지는 말이 더욱 중요합니다.
καὶ ὄψεται αὐτὸν πᾶς ὀφθαλμός “그리고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다.”
- ὄψεται — “볼 것이다”
- πᾶς ὀφθαλμός — “모든 눈”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은 일부 사람만 경험하는 은밀한 사건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모든 눈이 그를 보겠고” 라는 보편적이고 공개적인 재림의 성격이 강조됩니다.
설교용으로 정리하면
구름 → 하나님의 영광
오심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모든 눈 → 공개적이고 보편적인 재림
ἔρχεται → 반드시 오시는 주님
따라서 요한계시록 1:7의 핵심은 이렇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분의 재림은 감추어진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공개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계시록의 첫 장에서부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독자에게 선포하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MRA(Moral Re-Armament, 도덕적 재무장 운동
MRA의 핵심 슬로건
“절대적 정직, 절대적 순결, 절대적 무사심, 절대적 사랑”
(Absolute Honesty, Absolute Purity, Absolute Unselfishness, Absolute Love)
“정직하게, 순결하게, 이기심 없이, 사랑으로!”
誠實 · 純潔 · 無私 · 愛
8월 29일(토)
하나님을 위하여(요한계시록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and has made us to be a kingdom and priests to serve his God and Father--to him be glory and power for ever and ever! Amen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내 뜻과 유익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삶의 목적과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 목적과 방향
- 하나님과 함께 → 동행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 근원과 능력
- 하나님께 영광을 → 최종적인 목적
2. 대표적인 성경 말씀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위하여”는 헬라어 εἰς δόξαν θεοῦ
(eis doxan theou)입니다.
- εἰς = ~을 향하여, ~을 위하여
- δόξαν = 영광을
- θεοῦ = 하나님의
즉,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라는 방향성을 강조합니다.
3. “하나님을 위하여”의 신앙적 구조
하나님을 위하여 → 하나님과 함께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 하나님께 영광
이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위신이생(爲神而生0 —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흥신동행(與神同行) — 하나님과 함께 걷고
유신이행(由神而行) —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며
귀락어신(歸榮於神) —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특히 설교 제목으로는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를 위하여 하느냐”라는 주제로 발전시키기에 매우 좋은 표현입니다.
♪ 나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8월 28일(금)
예수의 피(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and from Jesus Christ, who is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has fre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예수님의 피가 왜 중요한가?
성경에서 예수님의 피는 단순한 육체의 피가 아니라 대속(代贖)과 속죄(贖罪)와 죄 사함 그리고 새 언약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기독교는 피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피의 종교란 피 자체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피 흘림에 의한 죄에 대한 용서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상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죽옷(창세기 3장)
2. 아벨의 제사(희생)
3. 유월절 어린 양의 피(출애굽기)
4. 속죄제와 피(레위기)
5. 고난 받는 종(이사야 53장)
6.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복음서)
7. 단번에 드린 그리스도의 피(히브리서)
8. 어린 양의 피(요한계시록)
결국 성경은 “피에서 시작하여 어린양에게서 완성되는 구속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의미하는 중요한 신앙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첫째, 죄 사함을 위한 언약의 피(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둘째,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피(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셋째,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피(요한일서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넷째,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피(히브리서 10:19)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예수의 피(αἷμα τοῦ Ἰησοῦ)는 보배로운 피(τιμίον αἷμα)라고 하여 특히 한국 교회에서는 ‘보혈(寶血)’이라고 부릅니다.
보혈의 능력이 피 자체에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구원의 효력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성경에서 “예수의 피”가 의미하는 것
| 의미 | 성경적 내용 |
|---|---|
| 속죄 | 죄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 |
| 죄 사함 | 죄를 용서받게 하는 근거 |
| 칭의 |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 |
| 화목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
| 새 언약 | 예수께서 세우신 언약 |
| 구속 | 죄의 종에서 해방됨 |
| 정결 | 죄와 양심으로부터 깨끗하게 됨 |
♪ 나의 죄를 씻기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예수의 피(寶血)
성경에서 예수의 피는 단순히 육체에서 흘린 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1. 예수의 피는 죄를 속량(贖良)합니다(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贖良)이란 죄의 종 되었던 사람을 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2. 예수의 피는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요한일서 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피의 지속적인 정결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습니다.
3. 예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합니다(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보혈은 용서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4. 예수의 피는 새 언약의 피입니다(마태복음 26:28)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구약의 제사에서 짐승의 피가 사용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5. 예수의 피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었습니다(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서 “예수의 피를 힘입어”라는 표현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예수의 피(寶血)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함을 얻으며,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보혈이 “사랑 → 피 → 해방 →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구원의 구조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요한계시록 1:5
사랑하셨기 때문에 피를 흘리셨고,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해방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백성이 됩니다.
8월 27일(목)
일곱 교회(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John, To the seven churches in the province of Asia: Grace and peace to you from him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and from the seven spirits before his throne.
어느 주일 아침,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어진 교회 앞에 한 흑인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를 막으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백인들만 예배드리는 교회입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교회 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계십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 교회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도 아직 저 교회에 들어가 보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교회는 건물이 아름답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있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는 공동체일 때 교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막 11:17)
미국 남부에서 흑인을 배척하고 인종차별이 강했던 지역을 역사적으로 표현할 때 몇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1. 선다운 타운(Sundown Town)
Sundown Town(선다운 타운)은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이 해가 진 뒤 그 지역에 머무르는 것을 금지하거나 사실상 허용하지 않았던 미국의 도시·마을을 가리킵니다.
- 표지판에 “Nigger, Don't Let the Sun Go Down On You”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차별 문구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 법률로 명시된 경우도 있었지만, 폭력·협박·경찰의 묵인 등으로 사실상 흑인의 거주와 방문을 제한한 곳도 많았습니다.
- 남부뿐 아니라 미국 중서부와 서부에도 존재했습니다.
-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심각했습니다.
2. Jim Crow South — 짐 크로 남부
Jim Crow South는 미국 남부에서 흑인과 백인을 법적으로 분리하고 흑인을 차별했던 사회·법률 체제를 가리킵니다.
Jim Crow laws(짐 크로 법) 아래에서는 흑인에게 학교, 식당, 대중교통, 화장실, 공공시설 등에서 백인과 분리된 시설을 사용하게 하는 법적 인종분리(segregation)가 시행되었습니다.
3. Black Belt — 블랙 벨트
주의해야 할 표현입니다. Black Belt 자체가 흑인을 배척하는 지역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 미국 남부의 앨라배마·미시시피 등을 중심으로 한 비옥한 흑토 지역을 가리키던 지리적 명칭이며, 역사적으로 흑인 인구가 많이 거주했던 지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敎會)와 성전(聖殿)의 의미와 차이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교회(ἐκκλησία)는 하나님께 부름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따라서 교회는 외형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이면 모인 공동체가 되고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면 흩어지는 공동체가 됩니다.
성전(ναός / מִקְדָּשׁ)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나타나는 장소 또는 그 임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예배당(禮拜堂)"이라고 합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었던 일곱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일곱 교회들의 외형적인 모습만 살필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를 찾아서 오늘의 교회가 갖춰야 할 교회의 참다운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작업을 위하여 각 교회가 갖는 책망과 칭찬을 살펴야 합니다.
부족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일곱 교회의 영적 진단표로 만들면 매우 선명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서머나교회는 고난 속에서 충성했습니다.
버가모교회는 세상과 타협했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거짓을 용납했습니다.
사데교회는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켰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미지근한 믿음이었습니다.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칭찬만 들었던 교회는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이었습니다.
반면에 책망만 들었던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어떤 영적 진단서가 발급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단서에서 부복한 것은 채우고 넉넉한 것은 잘 관리하며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네 가지 날마다 행해야 할 목록을 소개합니다.
첫째, 날마다 새롭게(고후 4:16, 5:17)
둘째, 날마다 죽노라(고전 15:29-34)
셋째, 날마다 새벽을 깨우라(마가 1:35-39)
넷째,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라(마가 8:27-38)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우리 모두 함께 칭찬만 듣는 믿음의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훗날 내가 그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 나는 예수 따라가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8월 26일(수)
예언의 말씀(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예언이란 한문자를 두 가지로 표기합니다.
첫째는 예언(豫言)
"미리 예, 말씀 언"이란 훈으로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하여 짐작하여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prophecy, prediction, forecast라고 합니다.
둘째는 예언(預言)
"맡길 예, 말씀 언"이란 훈으로 맡겨진 말씀은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prophetic word, prophecy 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요한이 천사들로부터 받은 요한계시록을 말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에게 반드시 복이 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창세기의 생명나무(창 2–3장)가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다시 등장하면서 성경 전체의 구원 역사가 완성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받을 복을 일곱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1:3)
둘째, 주 안에서 죽음(14:13)
셋째, 깨어 자기 옷을 지킴(16:15)
넷째,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함(19:9)
다섯째, 첫째 부활에 참여함(20:6)
여섯째, 예언의 말씀을 지킴(22:7)
일곱째, 정결함을 입고 생명나무에 나아감(22:14)
일곱 가지 복을 기억하기 쉽도록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을 지키며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죽음에서도 복되고, 부활에 참여하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마침내 생명나무에 이른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첫 번째 복과(1:3) 마지막 복을(22:14) 연결하면,
요한계시록 전체가 “말씀을 지키는 삶은 거룩한 생활을 유지하며 그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조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이여,
혼돈과 어지러움 가운데서(카오스) 세상을(코스모스) 창조하신(바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승리하기 위하여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마다 약속된 복을 확인하며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고전 16:22) 주 께서 임하시느니라
8월 25일(화)
자기의 본 것(요한계시록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Who testifies to everything he saw--that is,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사도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사도 요한은 세 가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본 것(1장)
둘째는 이제 있는 일(2-3장)
셋째는 장차 될 일(4-22장)
사도 요한이 본 것은 20절에서 확인합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특히 1장과 21–22장을 서로 연결해서 보면 놀라운 구조가 보입니다.
1장에서는 요한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합니다.
21–22장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완성된 세계를 봅니다.
요한계시록의 시작은 “그리스도를 봄”이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얼굴을 봄”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소개합니다(7대 구조).
1st. 1장 그리스도의 계시 → “본 것”
2nd. 2–3장 일곱 교회 → “이제 있는 일”
3rd. 4–5장 하늘 보좌와 어린양 → 역사의 주권
4th. 6–11장 일곱 인 · 일곱 나팔 → 심판과 증언
5th. 12–18장 용 · 짐승 · 바벨론 → 영적 전쟁과 악의 심판
6th. 19–20장 재림 · 승리 · 심판 →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
7th. 21–22장 새 하늘 · 새 땅 →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중요한 것은 7개 구조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다 → 교회를 살핀다 → 보좌를 본다 → 심판이 시작된다 → 악의 실체가 드러난다 → 그리스도가 승리한다
→ 새 창조가 완성된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야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내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하려고 합니까?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다시 오실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
의심의 눈은 문자적으로는 무언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며 바라보는 시선을 뜻합니다.
1. 일반적인 의미
2.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성경에서는 눈(ὀφθαλμός, ophthalmos)이 단순히 시각기관만 아니라 인식하고 판단하는 내면의 시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의심의 눈”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의심하는 시선 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3장에서 뱀의 말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 3: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 “의심의 눈”과 “믿음의 눈”
| 의심의 눈 | 믿음의 눈 |
|---|---|
|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 |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 |
|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 |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믿는다” |
| 자신의 판단을 우선함 |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함 |
| 두려움으로 바라봄 | 믿음으로 바라봄 |
| 현실이 말씀보다 크게 보임 | 말씀이 현실보다 크게 보임 |
그래서 신앙적으로는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졌고(롬 4:18–21),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말합니다(고후 4:18).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의심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믿음의 눈은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바라본다.
믿음의 눈”과 “의심의 눈”을 성경적· 언어적으로 표현
| 표현 | 한자 | 영어 | 헬라어 |
|---|---|---|---|
| 믿음의 눈 | 信仰之眼 / 信仰의 目 | eyes of faith | ὀφθαλμοὶ πίστεως |
| 의심의 눈 | 疑心之眼 / 疑惑之眼 | eyes of doubt | ὀφθαλμοὶ ἀμφιβολίας |
1. 믿음의 눈 — 신앙지안(信仰之眼)
信仰之眼 / 信(믿을 신) + 仰(우러를 앙) + 之(…의) + 眼(눈 안)
영어로는 eyes of faith가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헬라어로는 ὀφθαλμοὶ πίστεως
ophthalmoi pisteōs
→ “믿음의 눈들”
- ὀφθαλμός = 눈
- ὀφθαλμοί = 눈들, 복수 주격
- πίστις = 믿음
- πίστεως = 믿음의, 속격
즉 ὀφθαλμοὶ πίστεως는 문법적으로 “믿음에 속한 눈들 / 믿음의 눈들”이라는 구조입니다.
2. 의심의 눈 — 회심지안(疑心之眼)
疑心之眼 / 疑(의심할 의) + 心(마음 심) + 之(…의) + 眼(눈 안)
영어는 eyes of doubt 또는 문맥에 따라 eyes of suspic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ὀφθαλμοὶ ἀμφιβολίας
ophthalmoi amphibolias
→ “의심의 눈들”
- ἀμφιβολία = 의심, 불확실, 주저함
- ἀμφιβολίας = 의심의, 속격
다만 “의심”을 “불신”이라는 의미로 강하게 표현하려면:
ὀφθαλμοὶ ἀπιστίας
ophthalmoi apistias
→ “불신의 눈들”
3. 중요한 성경적 구별
성경에서는 “믿음의 눈”이라는 표현 자체가 특정한 정형 문구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개념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 고린도후서 5:7
여기서 핵심적인 대조는
보이는 것 → 믿음
ὁράω(보다) → πίστις(믿음)
따라서 설교나 성경공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조 구조가 매우 좋습니다.
믿음의 눈 — 信仰之眼 — eyes of faith — ὀφθαλμοὶ πίστεως
↕
의심의 눈 — 疑心之眼 — eyes of doubt — ὀφθαλμοὶ ἀμφιβολίας
그리고 “믿음의 눈”의 반대가 단순한 의심(doubt)인지, 불신(unbelief)인지에 따라 헬라어를 ἀμφιβολία와 ἀπιστία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요새(要塞) / 요긴할 요(要). 중요할 요(要), 변방 새(塞)
1. 군사적(軍事的)으로 중요(重要)한 곳에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방어(防禦) 시설(施設). 또는 그런 시설(施設)을 한 곳.
2. 차지하거나 달(達)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대상(對象)이나 목표(目標).
고린도전서 16:22
Εἴ τις οὐ φιλεῖ τὸν κύριον, ἤτω ἀνάθεμα. Μαράνα θά.
에이 티스 우 필레이 톤 퀴리온, 에토 아나테마. 마라나 타.
여기서 마지막의 Μαράνα θά가 “마라나타”입니다.
Μαράνα θά의 의미
Μαράνα θά는 헬라어 단어가 아니라 아람어를 헬라어 문자로 음역한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מָרַנָא תָא — Maranā thā / Maranatha
- מָרַן (maran) = 우리 주, 우리의 주님
- א / ָא (ā) = “우리의”라는 소유적 형태에 포함
- תָּא (thā / tā) = 오라!
따라서 Μαράνα θά =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통적입니다.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아람어를 어떻게 분절하느냐에 따라 מָרַן אֲתָא (Maran atha)
→ “우리 주께서 오셨다/오신다” 또는 문맥상 “우리 주께서 오신다” 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6:22에서는 초대교회의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도와 고백,
곧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Εἴ τις οὐ φιλεῖ τὸν κύριον, ἤτω ἀνάθεμα.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리고 곧바로 Μαράνα θά!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라고 외칩니다.
여기에는 매우 강한 신앙적 긴장감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 →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따라서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 빨리 오세요”라는 말이 아니라,
“주 예수님,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라는 종말론적 신앙고백입니다.
요한계시록과 연결하면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과 매우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요한계시록 22: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에 교회가 대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헬라어로는 Ἀμήν,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Amēn, erchou, kyrie Iēsou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핵심 정리
| 표현 | 언어 | 의미 |
|---|---|---|
| Μαράνα θά | 아람어 음역 |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
| מָרַנָא תָא | 아람어 | Maranā thā |
| 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ῦ | 헬라어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 Αμήν | 히브리어/헬라어 음역 |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
따라서 “마라나타”는 초대교회의 예배와 재림 신앙을 압축한 한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는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이것이 Μαράνα θά가 담고 있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마라나타(Maranatha)는 아람어 표현으로, 성경에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 "주여, 오시옵소서." (Our Lord, come!)
- "우리 주께서 오셨다." (Our Lord has come.)
기독교에서는 문맥상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로 가장 널리 사용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드리는 소망과 기도의 표현입니다.
성경에서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마라나타"라는 형태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와도 같은 의미의 신앙 고백으로 이해됩니다.
8월 24일(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할 수 있다면 한 구절씩 암송하는 것도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22장 405구절로 구성된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는 "계시(啓示. revelation)"와 ''속히(速. soon)"라고 하겠습니다.
계시라는 단어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때로는 "묵시(默示)"라고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계시(啓示. Revelation. 아포칼룹시스)는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낸 사건을 가리킵니다.
계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합니다.
특별계시는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지 않습니다.
일반계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계시를 말합니다.
이러한 계시를 자연계시라고도 합니다.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안에 하나님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도 관심을 갖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계시의 본질로 여깁니다.
첫째는 시간적인 의미
시간적 의미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주님이 오실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영적인 의미
영적인 의미는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29:18)
만일 묵시가 없다면 인간의 본성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시를 통하여 장차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날마다 주님을 기다리는 정숙한 신부와 같이 항상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내 등에 기름이 넉넉한지 가늠하며 부족한 기름은 채우고 언제든지 등불을 밝힐 수 있는 예비된 믿음으로 무장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하나님의 나팔 소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Amen. Come, Lord Jesus.
마라나타(Μαράνα 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