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04 /29 / 2024 - 05-18-2024 )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

사회의 구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세워가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경제구조는 인간을 경제와 시장에 의하여 그 가치를 돈으로 매수해 버린다.
이러한 세상을 일컬어 "악마의 맷돌(새터닛 밀스)"이라고 한다.

1. 칼 폴라니의 관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홍기빈 옮김, 책세상)을 읽었다.

폴라니는 1940년대에 쓴 글들을 통해, 19세기 말 시장이 정치적으로 규제를 받는 상태에서 아예 정치적인 규제에서 벗어나 자기 조정을 바탕으로 한 시장이 생겨난 것이 인류의 재앙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자기 조정 시장이 생겨나 사회를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제도적으로 분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해서 분리된 경제 영역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활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던 시장이 경제활동 전반을 지배 ‧ 규정하는 것으로 격상되고, 무수히 많은 시장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총체적 시장을 형성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모든 사회적인 가치의 생산을 판매와 구매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게 됨으로써 상품이 될 수 없는 노동 ‧ 토지 ‧ 화폐마저 상품으로 만들어 인간 삶 자체를 근본에서부터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노동을 제반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하고, 토지는 자연 전체를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이며,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기 때문에 본질상 상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현실의 시장에서 노동 ‧ 토지 ‧ 화폐가 상품으로 묘사되고 실제로 거래되는데, 실은 이 세 가지 상품은 전적으로 허구적인 상품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장이 자기 조정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품 허구의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 이후 사회는 상품 허구가 사회 전체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조직 원리를 제공하고, 그 조직 원리가 사회의 거의 모든 제도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 시장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 상품 허구의 원칙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폴라니는 이러한 자기 조정의 시장에 내재된 재난에 맞서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폴라니는 19세기가 끝날 무렵 보통선거가 보편화됨으로써 노동 계급이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본다.
그래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한쪽에서는 정부와 국가를 권력 거점으로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경제와 산업을 권력의 거점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을 둘러싸고서 사회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2. 21세기 악마의 맷돌의 위기

폴라니는 상품 허구의 원칙에 입각한 자기 조정 시장을 그 속에 모든 인간의 삶과 가치를 집어넣어 분쇄해 버리는 ‘악마의 맷돌’이라고 말한다.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오늘날 전 세계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탈규제’, ‘자유무역’ 등을 내세운 가운데 폴라니가 말하는 ‘악마의 맷돌’을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동일 실시간이라는 어처구니를 통해 훨씬 더 높은 속도로 돌리고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21세기 ‘악마의 맷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가 엔진을 달아 현기증 나게 돌아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를 담당하는 ‘영웅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은 물론이고, 개별 기업이나 국민국가나 정부마저 이 ‘악마의 맷돌’ 속에서 갈아엎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라 할 수밖에 없는 21세기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목도하면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30년대에 진행된 파시즘과 전쟁이 그 귀결로서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에 이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더블 딥의 가능성에 대한 공포는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거덕거리면서 전체가 와해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자기 조정 시장을 통해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과 분리되면서 동시에 경제 영역이 정치 영역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는 시장이 사회 전체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마의 맷돌’이 갑자기 멈추면서 와해된다는 것은 세계 전체의 사회적 삶의 영역 전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포, 마치 일본의 원전 폭파와 같은 직접적인 공포를 훨씬 능가하는 대대적인 공포가 세계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8년의 위기에 이어 계속되어 온 경기부양책으로도 그다지 큰 효과가 없자 이번 9월 9일에 또 4천500억 달러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이는 자기 조정 시장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허구인가를 여실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한번 속도를 내기 시작한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악마의 맷돌’이 계속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어떻게 정치를 비롯한 사회의 전 영역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가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3. 악마의 맷돌 속 한반도

문제는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이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묘하게도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거센 파찰음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외적으로 이 파찰음은 분명 한반도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국내의 정치에서 ‘복지’가 사회정치적인 이슈로 정확하게 자리매김 된다는 것이 과연 더 이상 자기 조정 시장에만 삶을 맡겨놓을 수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성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조선일보에서 연재하는 ‘자본주의 4.0’처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이 크게 삐걱거리는 것에 대한 기계적인 수리에 의한 것인지를 지금으로서는 그 귀결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 전반적인 추세를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 조정 시장은 이미 마치 절대적인 존재인 양 자리를 잡고 있어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만큼이나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역시 ‘절대적인 진리’인 양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 ‘복지 이슈화’의 기회를 자기 조정 시장의 ‘악마의 맷돌’에 저항하는 강력한 장치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시장으로부터의 인간 삶의 해방구’를 확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을 위한 국회 청문회에서 여실히 확인했다. 이 청문회에서 특히 조남호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비인격적인 기계성을 통해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세계화된 악마의 맷돌’이 얼마나 강고하고 무서운가를, 그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데 노동에 관련된 법률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사라지고 없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스스로 돌아가는 ‘악마의 맷돌’에 삶을 의존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복지 이슈화’를 어떻게든 인간 삶의 해방구를 마련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복지 이슈화’를 정확하게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는 주변 상황이 너무 힘겹게 돌아가고 있다. ‘한미 FTA의 국회 비준’에 대한 찬반의 논의 틀이 ‘절대적 존재인 악마의 맷돌’을 근본적으로 문제로 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찬성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중국 중 누가 이 ‘악마의 맷돌’의 어처구니를 장악할 것인가를 놓고서 대대적인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한반도 내의 남북의 분단 문제가 이명박 정권 들어 크게 교착됨으로써 미중 간의 어처구니 장악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돌쩌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또한 일본은 묘하게도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 등에 대해 영토 분쟁을 계속 재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평화헌법 9조를 어떻게든 폐지 내지는 대폭 개정하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이 역시 동아시아 권역에서의 자기 조정 시장을 둘러싼 주도권 투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군사력을 내세운 영토적인 제국주의에서 경제력을 내세운 순수 시장적인 제국주의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그래서 법적 ‧ 형식적으로는 제국주의적 대외관계를 벗어났다고는 하나, 실질에 있어서는 자국의 경제 영역의 확대를 위해 여전히 정치군사력에 입각한 무력경쟁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서, 특히 한반도의 남북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격발되고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대내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무슨 마술적인 해법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철저히 상식에 입각한 ‘이상 아닌 이상’을 모든 정책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경제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활동하기 위해 경제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격을 갖추는 것은 즉 인격을 갖추는 것은 의식주의 욕구를 더 많이 더 과시적으로 경쟁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일 수밖에 없는 의식주의 욕구를 넘어서서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인류가 남겨놓은 사회문화적 ‧ 인문예술적인 가치들을 함께 향유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코 유토피아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비록 억압된 형태로건 하나 이미 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하버마스(Ürgen Habermas, 1929- )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생활세계를 사회적 삶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고, 폴라니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이는 전인격적인 사회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버마스의 관점을 소개하기로 한다. 하버마스는 폴라니의 위 글보다 약 40년 뒤 80년대에 쓴 『의사소통행위이론: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장춘익 옮김, 나남)에서 나름의 사회역사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흔히 말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를 체계이자 동시에 생활세계로 파악한다. 그러면서 하버마스는 체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시장과 국가를 들고, 시장은 화폐를 매체로 해서 작동하고 국가는 권력을 매체로 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런 반면, 생활세계를 상호이해에 입각한 의사소통적인 것으로 보면서 그 상징적인 구조들로 비축된 지식으로서의 문화, 소속과 연대를 가능케 하는 질서인 사회 그리고 언어와 행위 능력을 갖춘 인간성 등 세 가지를 든다. 중요한 것은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관계이다. 시장과 국가라고 하는 체계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인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이 요체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생활세계를 화폐와 권력을 매체로 작동하도록 함으로써 진정한 상호이해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공의 장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폴라니가 시장과 국가를 대립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면, 하버마스는 시장의 자본을 중심으로 국가가 결합된 역사적인 단계에서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것은 폴라니가 자기 조정 시장이 ‘악마의 맷돌’이 되어 일체의 인간 삶을 갈아엎어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더욱 철학적인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하버마스가 국가기관들이 폴라니가 말한 ‘악마의 맷돌’을 돌리는 데 대거 동원된다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표현함으로써 폴라니에 비해 더 비관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할 것이다. 폴라니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결코 ‘악마의 맷돌’ 속으로 순응적으로 완전히 포섭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고, 그것에 저항하는 계급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국가와 정부에 대한 계급적인 장악 여부에 따라 나름의 해방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그동안 국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근대화 극복에 관한 사회이론이라든가 이와 맞물려 있으면서 동아시아의 연대와 평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론이 갖는 함의는 크다 할 것이다. 다만,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 중심의 자기 조정 시장이라고 하는 ‘악마의 맷돌’을 전제로 한 것일 경우에는 연대도 평화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말하자면, 지역주의에 의거한 블럭화라고 하는 세계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세계화 된 악마의 맷돌’이 결정적인 위기에 처할 때,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과 그에 따른 전쟁이 예고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대대적인 재난을 피하기 위한 국가적인 정책을 도모하는 데 국내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위한 강정 마을의 투쟁은 분명히 한미일 연합의 ‘악마의 맷돌’을 강화하기 위한 군사전략에 대한 투쟁이다. 이에 대한 투쟁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억압되는 광경을 보면서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우려를 금치 못하는 까닭이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에 우리는 이미 시작된 내년의 선거 국면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말이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왜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어떤 근본적인 정책들을 마련해 실천해야 하는가를 잘 느끼고 알고 있는 지혜롭고 탁월한 지도자, ‘악마의 맷돌’을 더 잘 돌리고자 하는 국회위원과 대통령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악마의 맷돌’이 낳는 재난을 벗어나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평화를 위한 연대, 연대를 통한 공감의 모듬살이를 구축해 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국회위원과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









블레이크와 폴라니의 ‘악마의 맷돌’

       1791           wikipediaorg

일러스터 새뮤얼 윌슨 포레스가 그린 '앨비언 방앗간 화재'(1791). 그림에 묘사된 악마들은 물론 인간을 도와 불을 끄려는 중일 것이다. wikipedia.org

2012 런던올림픽 개막식을 연출한 영화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은 2,700만파운드(약 480억원)를 들인 3시간짜리 행사의 얼개를 산업혁명기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시상(詩想)에서 차용했다.
중세적 이상을 지키고자 계몽의 이성에 한껏 저항한 듯 여겨지는 저 화가 겸 시인은 몽환적ㆍ예언적 메시지를 풍부한 이미지의 언어 속에 부려 넣는 데 능하다는 평을 듣는다.
대니 보일이 주목한 건 블레이크가 글과 삽화를 그려 출간한 서사시 ‘밀턴’ 서문의 ‘아득한 옛날 저들의 발길은(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s)’이란 시였다.

거기서 블레이크는 아득한 옛날 예수가 거닐었다는 잉글랜드의 ‘푸르고 복된 땅(green and pleasant Land)’과 러다이트 운동(기계 파괴 운동)의 표적이자 산업혁명의 부정적 상징이던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을 대비시켰다.
대니 보일은 개막식 1부에서 잉글랜드의 복된 과거를, 2부에서 산업혁명으로 파괴된 자연과 훼손된 인간성을, 3부에서 저 모두를 극복한 복지 번영의 영국을 그렸다. 물론 3부는 ‘예언가’ 대니 보일의 축원이었다.

‘악마의 맷돌(방앗간)’은 블레이크가 12세이던 1769년, 그가 살던 런던 서더크 인근에 문을 연 ‘앨비언 방앗간(Albion Flour Mills)’에서 유래했다.
증기기관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가 제분 기술자와 함께 세운 그 방앗간은 엄청난 생산력으로 영세 업소들을 압도했으나 2년여 만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도산했다.
당시 그 업소는 경쟁업자들 사이에서 악마의 방앗간으로 통했다.

‘악마의 맷돌’의 상징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헝가리 출신의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4.23)였다.
그는 1944년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결코 상품화할 수 없고 역사적으로 상품이었던 적도 없는, 자연과 인간과 화폐를 상품화한 시장자유주의 메커니즘을 ‘악마의 맷돌’에 비유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개인이나 신자유주의의 시장이 아닌 공생적 가치의 주체인 ‘사회’가 중심이 돼 거대한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악마의 맷돌’은, ‘앨비엇 방앗간’ 화재처럼, 모든 것을 갈고 스스로도 가루가 돼야 멈추는 것일지 모른다.





05-18-2024(토) 요한일서 5:13-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망에 이르는 죄(16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성경은 죄의 결과는 분명하게 죽음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일까요?
사망에 이르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말합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하던 그 시대에 교회와 신앙을 흔들었던 신앙은 "영지주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지주의란 플라톤의 철학 사상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데아 즉 영은 선하지만 물체 즉 사람의 육체는 악하다고 하는 사상에서 사람의 육체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일서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첫째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

그리스어로 "보이다"라는 뜻인 '도케오'(δοκέω)가 어원으로 예수의 몸은 환상일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의 몸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의 사람이 아니라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교리를 주장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이며 그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둘째는 적그리스도(敵그리스도. Anti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시하는 대상을 뜻하며, 특정한 시대의 특정 인물이나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시공간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선포한 복음을 적대하는 존재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말하며 거짓 그리스도, 가짜 그리스도, 반그리스도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상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죄를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둘째는 사망에 이르는 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위해서는 기도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아무리 간구하고 매달려도 돌이키지 않으므로 기도할 이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죄악된 인간의 완고함 때문에 잘못된 교리와 사상에 붙잡혀 마치 내가 붙잡은 것이 진리인 줄 알고 그것에 몰두하는 사람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를 한마디로 "성령 훼방 죄"라고 합니다(마 12:31. 막 3:29).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죄에 유혹된 심령을 "양심에 화인 맞은 것"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 이라고 합니다(딤전 4:2).

다양한 신학사상과 이론들이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흔들고 있는 시대에 정신 차리고 진리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올바른 믿음의 길을 선택하여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의 반열에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며 부탁합니다.

내 주를 가까이 가게 함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심을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적그리스도" 또는 "배교(背敎)"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유혹에 넘어갔으나 다시 돌이켜 주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죄를 말합니다.
이러한 죄를 위하여는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

요한 사도는 죄를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사망에 이르는 죄
둘째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의 내용은 무엇일까?
구하라 하지 않는다는 것과 구하라는 것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하지 말라는 이유는 아무리 간구하여도 구할 수 없는 죄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를 "성령 훼방죄"라고 합니다(마 12:31. 막 3:2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를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구하려고 하셨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이신데,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어떤 죄이기에 그럴까?

먼저 그 죄는 요한 사도가 언급한 바와 같이 형제 곧 신자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형제가 아니라면 다르게 말하자면 애초부터 신자가 아니라면 두 종류의 죄를 말할 이유가 없다. 그냥 사망인 상태일 뿐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모두 신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는 타락을 말씀하였다(히 6:6).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였다. 이전에 한 번 비췸을 받았다. 단순히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은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내용이다. 단순히 복음을 듣고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택들이다. 하나님의 은혜 곧 그 마음을 열어 귀에 들린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누리게 된 은택들이다.

그러한 은택들을 체험하고도 타락한 경우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의 역사를 펼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몇 가지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배교이다.

배교는 그 당시의 관점에서는 순교와 대비되는 것이다. 신자로 살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맞는다.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이다. 그 당시의 유대교와 로마가 신자를 핍박하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저버리고 계속적으로 이 땅에서 살겠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서의 삶을 끝내겠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경우에 믿음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는 것이다. 이는 죽을지언정 믿음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해서 죽는다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계 2:10)이다. 곧 순교하고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

만약 그 순간에 믿음을 저버린다면 곧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저버린다면 이 땅에서의 생명은 지속된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다. 이 땅에서 사는 길을 모색하여 일단 죽는 것을 피한 후에 다시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니시다. 배교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적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불신자였을 뿐이다. 적그리스도는 복음을 받아들였다가 어떤 이유로든지 바뀐 경우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그 당시에는 어떤 영지주의자들이 그랬다. 영지주의자는 일단 신자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이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독생자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담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가 어떤 이유로든지 그것을 부인하게 된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중대한 결정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있었던 음행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알린 것이다. 바울 사도는 주 예수의 능력으로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하였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고전 5:5). 여기에서 육신과 영은 한 존재의 서로 다른 두 영역을 뜻하지 않는다. 육신은 그 죄를 범한 사람 전체이고 영은 주 예수님과 합한 사람들(고전 6:17) 곧 고린도 교회이다. 헬라어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몸을 뜻하는 소마가 아니라 타락하거나 하나님의 뜻과 멀리 떨어진 어린 사람을 가리키는 사륵스를 사용하였다.

이어지는 내용과 같이 고린도 교회가 그를 내쫓는 것 곧 출교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몸에서 한 지체를 끊어 내는 것이다. 몸에서 끊어진 지체는 사망이다. 다시 접합할 수가 없다. 그를 멸하신 것이다. 그 지체를 끊은 몸은 그 지체의 악한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묵거나 악의에 찬 누룩이 없는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세움을 입을 수 있다(고전 5:8).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무조건적인 견인의 근거 구절로 사용되고 있다. 육신과 영을 한 존재의 두 부분으로 이해하고 영은 구원을 얻는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본문을 잘못 읽었다. 정반대이다. 조건적인 견인의 근거 구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한번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면 조건 없이 영원한 구원을 반드시 받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성경과 칼뱅 사이에서 선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는 칼뱅을 선택할 의사가 없다. 반면에 칼뱅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다.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같이 잘못 읽었다. 견인에 대한 구절이 아닌데 견인의 근거로 제시하거나 그 구절의 문맥에 담긴 예수님을 주님을 받아들이는 믿음 다르게는 순종이라는 조건을 읽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경의 구원론은 400여 년 이상 양쪽으로 갈리어서 싸워야 할 만큼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다.
아주 쉽고 명쾌하며 단순하다.

성경은 명백하게 사망에 이르는 죄를 말씀하고 있다.
다시는 회복이 없는 죄이다.
불신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불신자는 처음부터 그냥 쭉 사망이기 때문이다.
신자에게만 해당된다.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의 역사를 행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도 그를 구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러한 죄를 범한 이후에 스스로 돌이킨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돌이킴으로 보지 않으신다.
회복이 이루어지는 돌이킴으로 보지 않으신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것으로 끝이다.
영원한 멸망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도 용서 안 되는 죄(요한일서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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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우리는 여러가지 죄를 지으며 산다. 그런데 크게 두 종류의 죄가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용서가 안 되는 죄가 있다.

그러니까, 죄를 지어도 결국 용서 받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어떤 죄는 결국 영원한 사망(지옥)으로 떨어지고 마는 죄가 있다는 말씀이다.

캐톨릭 전통에서는 2가지로 분류한다.

[Venial Sin] 가벼운 경죄(輕罪) 와[ Motal Sin] 무거운 중죄(重罪)

다시 말하면, 작은 소죄(小罪) 와 큰 대죄(大罪)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을 수 있는 일반적인 죄가 있고,

그러나, 절대로 지어서는 안 되는 중죄가 있다.

(16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

즉 기도해 주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는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이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무엇인가?

캘리포니아의 그레이스 채플의 존 맥아더 목사님은 해석하기를 :

본문의 사망신체적인 죽음 (physical Death)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망은 신체적인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1서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신체적인 사망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원한 사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죄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어떤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고,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럼, 그 죄가 무엇인가?

(마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이다.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지만,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영원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죄가 있다.

예수님을 잘 모를 때에는, 말로 거역했지만, 나중에 깨닫고 회개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으면서도 예수님을 거역하면, 한번 밖에 없는 내 인생에

찾아 오시고,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으니 생명에

이르게 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2장의 문맥에서 성령을 훼방한 죄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면서도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이것은 귀신의 왕,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말한

유대지도자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 훼방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죄들을 짓는다.

그러나 회개하면 모든 죄를 도말하고 용서해 주시며, 의롭다고 까지 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의(義),

완전한 구원의 은혜선물로 주실 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그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은 참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또 다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Once for All] [단번에 전부, 한번에 영원히] 이루어 놓으셨다.

(히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롬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히 9:12)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부활을 통해서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구을 받아들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이것을 끝까지 완고하게 거절한 그런 사람에게는

다시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훼방죄[이고, [하나님도 용서가 안 되는 죄로],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것이다.

다음 성경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세요.

(히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짓는 것인가?
살인 강도... 등등의 죄와 비교할 수 없다.

은혜의 복음을 거절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의 사망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이요, 지옥 형벌을 말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수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죽음을 당하고 있다.

그래도 예수 믿고 죽은 사람들은 그 영혼이 구원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의 세계로 들어갔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나 죄 사함 받지 못하고 죽은 인생들은 지금 어디로 떨어져 있을까?

(요한계시록 21:8)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모든 죄가 인간을 사망으로 이끌어간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를 지으면 어떤 죄이든지, 그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오셔서

우리의 모든 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사

완전한 구원을 성취해 놓으시고, 찾아오셔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고,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다.

얼마나 내 편에서는 간단한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끝까지 거부하고 안 믿겠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이며,

이 죄는 용서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죄를 짓고 살아간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나, 인간이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단 한가지 죄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안 믿기 때문에 지옥가는 것이다.

(요 16:8-9) (성령님)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 죄, 예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죄는 그 영혼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씻어 주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셔서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주신다.(요 5:24)

(예화) 집 안에 아버지와 두 아들이 있다.

둘째 아들은 망나니로서 말도 잘 안듣고, 밖에 나가 나쁜 짓도 많이 한다.

그래도 회개만 하면 아버지는 다 용서해 주신다.

그런데, 큰 아들은 착실하고, 공부도 잘 한다. 전교에서 1등 한다. 운동도 잘한다.

이웃 사람들이 칭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은 아버지아버지로 부르지 않는다.

아저씨라고 한다. 끝까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아들의 죄는 용서가 가능하나, 큰 아들의 태도는 아버지를 버리는 가장 큰 죄가 된다.

아버지 편에서 도무지 용서가 안 되는 죄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는 죄가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람마다 를 짓고 산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

하나님도 용서가 안되는 죄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렸다.

[성령 훼방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도록 역사하는데, 끝까지 훼방하고 거부하면 구원의 길이 없다.

이것이 성령 훼방죄이다.

이것은 하나님도 용서가 안되는 죄가 된다.

이제, 사망에 이르는 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성령 훼방죄, 예수님을 거부하는 죄,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이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구원의 선물 받아들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말씀 따라, 생명의 길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 멘) ​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인가?

요한일서 5장 16절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이 구절에 대한 모든 해석 중에 이 구절에 관한 모든 질문에 답하는 해석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도아마 사도행전 5장 1-10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일어난 일과 비교될 때 가장 잘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참조, 고전 11:30). "사망에 이르는 죄"는 고의적이고 연속적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거룩으로 부르셨습니다(벧전 1:16).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지을 때 그들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잃거나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의미로 우리의 죄에 대해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징계를 받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요한일서 5장 16절은 신자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 범죄할 때 하나님이 더 이상 허락하지 않으시는 시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시점에 이르면 하나님은 완고하게 죄를 짓는 신자의 생명을 거두기로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사망"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의적으로 그분에게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분의 교회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와 "사망으로 인도하지 않는 죄"를 구별합니다.
교회의 모든 죄는 동일하게 처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모든 죄가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의 수준까지 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 1-10절과 고린도전서 11장 28-32절을 보면, 하나님이 죄인의 육신의 삶을 취하심으로써 교회에서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진행된 죄를 다루십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 5절에서 말한 "육신의 멸망"이 의미했던 바일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는 신자의 생명에 대해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기로 결정하시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고집 센 사람을 위한 기도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우십니다. 그분은 마침내 우리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엡 5:27) 만드실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십니다. 주여!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우리 마음이 강퍅하여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옵소서.


사망에 이르는 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에 이어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성경은 앞뒤가 잘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도 요한의 말씀하시는 바가 이렇게도 같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보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형제가 사망에 이르는 죄 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기도인지 다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의 말씀 중에 사람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고 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 범하는 것에 대하여는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보여준 디테일이 여기서는 좀 약하다는 점이다. 아주 상세하게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온 것에 비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항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신학적 고찰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형제>이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고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형제가 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사회적으로 또한 나라의 법이나 회사의 규칙과 같은 것에 명시된 죄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 안에 있으면 아무리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 여겨져도 죄인이다. 그것은 멋있는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해적 사회에서 아무리 법을 잘 지켜도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 어떤 범죄들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형제라 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어떤 죄 범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상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범하는 어떤 범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형제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죄는 형제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누구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가 그것을 버리고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던 사람이 이를 버리고 이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앞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렇듯 용서 받지 못하는 죄와 같이 그것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자리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염려만 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대표가 어쩌면 <예정론>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했다면 다 된 것이지 사람이 할 것이 있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면 이미 종친 것인데 더 이상 세상 선하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예정론이라는 것이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라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된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간구도 체휼도 없는 사람이 '나는 예정되었을까?' 고민하는 것이 예정론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모든 사람, 오고 가는 모든 역사 속의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허투루 지은 사람이 없고, 어떤 생명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은 다 예정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이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따라 맘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정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그 경륜 안에 들어 간 사람은 돌아보면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고백하고 예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망에 이르는 죄, 사함 받지 못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삶,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삶,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삶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고민일 뿐이다.

그런 것을 잘 알 수 있는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라 할 수 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라 스스로 규정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정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예정론을 논하고, 죄 사함을 받지 못했는데 사함 받지 못하는 죄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이것을 디테일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 역시 알 수 있다. 생명이 있고,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굳이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도 알고, 형제가 무엇인지 안다면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본능처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형제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버렸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의 정체성에 관해서 말이다.

죄와 사함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면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대 전제가 기본이다. 다시 말해서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굳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알고도 여기서 떠나는 것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가 세월 보내면서 고양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그것을 버리고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이어 나오는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곧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범죄치 않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 보지 않고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인지, 예정된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그것을 스스로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는 죄와 그렇지 않은 죄는 머리로 연구하고 신학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인지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뜻 안에 순종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지도 않고 자신이 예정되었다는 것도 알고, 또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도 알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05-17-2024(금) 요한일서 5:9-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증거(9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We accept man's testimony, but God's testimony is greater because it is the testimony of God, which he has given about his Son.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증거(證據)라는 한자의 의미는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말합니다.
'증거'의 훈(訓)은 "증거 증(證)' "근거 거(㨿)"
영어 성경에서는 "testimony"라고 번역합니다.

창조주이시며 절대자가 되신 하나님이 증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드러난 증거이기에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내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는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시겠습니까?
탈무드의 이야기 중에 어느 랍비를 찾아와서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큰 소리를 치는 젊은이에게 랍비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맑은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가리키며 "저 태양을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랍비님, 저렇게 밝고 빛난 태양을 어떻게 눈을 뜨고 볼 수 있습니까" 하고 말할 때 랍비는 젊은이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저 태양도 두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느냐" 하며 젊은이의 교만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내가 믿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왜 믿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증거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그 예수님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습니까?
증거에는 직접 증거와 간접 증거가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깨닫지 못한 것을 나보다 먼저 경험하고 깨달은 사람들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나 보다 더 많은 배움과 경험과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왜 나는 믿을 수 없을까요?
그것은 나의 어리석음 이거나 아니면 나의 무지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주장이 될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나 보다 월등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였다는 증거를 생각한다면 믿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나도 믿는다는 고백이 가능합니다.

셋째는 성령님의 능력

성경은 성령이 마치 바람과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바람과 같이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이야기는 사람들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주관적인 이야기 보다는 객관적인 이야기가 더 유익하다고 하겠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나타났던 수 많은 사례들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한국 땅에 호랑이가 있다와 없다는 증명한다면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호랑이가 없다!
호랑이가 있다!
호랑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한국 땅 전체를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호랑이 발자국, 호랑이 털, 호랑이 똥만 있어도 얼마든지 증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있다와 없다를 논증할 때에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쉽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아직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나 보다 먼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왜 나는 믿지 못하는가 그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내는 생각의 전환과 지혜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성경에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진리를 전하는 중요한 요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증거는 법정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단서가 됩니다.
증거는 진실과 거짓을 판결하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의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증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에 돌아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다시 시내산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의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증거궤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궤는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증거궤에는 세 가지의 물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계명이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맺은 언약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약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십계명과 율법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고라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반역했을 때에,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인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아론의 지팡이를 통하여 증거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들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성소에 두자 그 다음날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론을 영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순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가 든 항아리였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양식을 공급하신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물이 언약궤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증거궤라고 부르셨습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 십계명이 두 돌판에 기록된 이유는 언약의 증거를 위해서 였습니다. 고대 시대에 두 나라가 언약을 맺으면 문서를 두 개 기록하여 쌍방이 증거로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두 개의 돌판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돌판을 성막의 언약궤에 넣어 보관했습니다. 두 돌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언약의 증거였습니다.

구약에서 증거를 중요시 한 이유는 신명기 말씀에 “...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 19:15)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증거에 대하여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8).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 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에 절대적인 반석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떻께 알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셋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피로 임하신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8).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물로 임하신 것은 요단강에서 침례 받으실 때에 하나님이 증거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 올라 오시자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하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물로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두 번째로 증거한 것은 피라고 했습니다. 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피흘려 죽으실 때에 하나님의 증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땅이 진도하는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무덤이 열려 성도가 부활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하나님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로마의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군사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님을 증거한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의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침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에게 임한 후에 예수를 통하여 사역을 하시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전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떠나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40일이 지난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이단들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리로 인하여 재림 예수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신천지입니다. 그들의 교리는 예수님에게서 떠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이만희에게 임하여 이 시대의 목자라고 하는 거짓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만희 씨는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영혼들을 미혹하고 지옥으로 인도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을 속박할 구원의 교리는 이만희 씨를 통하여 해결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 것은 물과 피가 있으며, 성령이십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7-8). 성령은 진리이시기에 우리는 성령의 증거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보내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를 진리되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요 16:13-14).

우리에게 끊임없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게 하시며 그 분 안에서 자라가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심을 증거하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5-16). 성령은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우리가 말씀을 듣고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주시는 내적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예배드리거나 교제하면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로 서로를 향하여 은혜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은 물과 피, 그리고 성령이십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성령과 물과 피의 증거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요일 5:9).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통하여 사실의 여부를 확증하는데,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에 관하여 증거를 했다면 그 증거가 참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는 것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침례 요한의 증거였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며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2).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는 예수님이 하시는 역사가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라”(요 5:36).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기적들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친히 주님을 위하여 증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요 5:37). 아버지께서 주님을 위하여 친히 증거하신 것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실 때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증거는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입니다. “ ...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9, 11-12).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분명한 것은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사람에게 침례 받을 때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떠나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구주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하나님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셨다고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아들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면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 5:10).

하나님으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증거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아들이심을 보여주신 증거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침례 받을 때에 증거를 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 분의 사역을 통하여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아들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 안에 증거가 있듯이, 외적으로도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는 증거에 대하여 요한1서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의를 행합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면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의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불의를 미워하고 의로운 삶을 향하여 새로운 여정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서로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이시듯이, 하나님과 같이 우리는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셋째,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우리는 죄를 습관적으로 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하나님의 의로우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삶의 변화는 소중한 출생 증명서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믿는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말의 진실성은 삶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등록한 증서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보십니다. 우리의 진실된 믿음에서 진실된 열매가 영생의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 비전의 사람 블로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5가지 증거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이를 이제는 인간의 학문과 지식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를들어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에 창조주가 존재함을 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창조주의 부재를 증명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과학적인 사실의 타당한 결론이 창조주 이어야 함을 인정합니다. 많은 분들이 관념적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냐고 반문하지만, 창조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자동적으로 믿어야 하는 어려움에 놓이게 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증거 1 – 우주의 미세 조정

지난 50년동안 과학자들은 하나 하나씩 발견되는 사실들에 의해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우주의 물리 상수가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과 달랐다면, 우주에 생명 특히 콩 이상의 크기의 생명체는 발생할 수 없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주의 물리 상수는 우주를 구조를 결정하는 변하지 않는 수 인데, 이가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과 달랐다면 우주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거나, 생명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우주 상수(cosmological constant)는 진공의 에너지 밀도를 나타내는 값인데, 이 상수가 10-120 만큼 더 작았다면 우주는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했을 것이고, 그만큼 더 컸다면 우주는 너무 빨리 팽창해서 별이 만들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주가 없거나 별이 없다면 당연히 생명의 발생은 불가능 했겠죠.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강한 핵력 상수의 편차가 10-31 만큼 더 높았다면 수소가 만들어질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더 약했다면 수소외에 다른 원소들은 만들어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명체에는 수소가 반드시 필요하기에 수소가 없다면 생명이 발생 할 수 없고, 또 수소만 있다 해도 당연히 생명이 발생 할 수 없었겠죠.

이런 놀라운 미세 조정을 부정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BGV Theorem으로 유명한 Alexander Vilenkin 박사는 미세 조정이 당연히 사실이며 이에 대한 논쟁은 없다고 얘기 합니다. 또 아래에 링크 할 Why some scientist embrace the multiverse?(왜 어떤 과학자들은 다중 우주를 주장하는가?) 라는 기사에서는 컨퍼런스에 참가한 30여명의 저명한 과학자와 수학자들을 인터뷰하며, 그 중 우주의 미세 조정을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기 싫어하는 과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객관적으로 어떠한 설명이 가능한지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얘기한 Alexander Vilenkin, 노벨상 수상자인 Steven Weinberg,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 Leonard Susskins 등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미세 조정에 대한 설명은 사실상, 창조주가 존재하거나 무한한 수의 다중 우주가 있어서 그 중 우연히 우리가 생명체가 존재 가능한 우주에 살게 되었다는 두가지 가능성만이 있음을 제시 합니다.

리차드 도킨스가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븐 와인버그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우주의 미세 조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상당히 불편해 하고 거북하다(disturbing)라는 표현까지 쓰면서도 그는 창조주가 미세 조정에 대한 유이한 설명임을 얘기해야만 했습니다.




창조주 혹은 다중 우주….

인간이 과학적으로 창조주를 관측한 적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리고 관측할 능력도 안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한한 다중우주를 관측한 적이 없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관측할 능력도 안됩니다.

그렇기에 과학은 미세 조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 그 원인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제 부터는 믿음과 논리 추론이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미세 조정에 대한 결론이 창조주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는 창조주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또 일어났기 때문 입니다.

증거 2 최초 생명의 발생

우리는 미세 조정된 우주를 통해 이 세상은 무한한 다중 우주를 통해 생긴 우연의 산물이거나 창조주의 미세한 조정의 산물이다라는 무신론 과학자들의 결론에 동의를 하고 과연 무엇이 더 합리적인 생각인지를 하나하나 따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하나의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한 우연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최초 생명의 발생 입니다.

우유로 잘 알려진 파스퇴르의 연구로 우리는 생명은 생명에게서만 나온다과학적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단 한번도 무생물에서 생명이 나온 것을 관찰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주가 창조주 없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면 최초 생명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과학자들은 아직도 그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최초 생명 이 발생 하는 것은 미세 조정 우주보다 훨씬 더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단백질 하나가 우연히 만들어 지기 위해서는 20가지의 아미노산이 100~수백개의 적절한 조합을 일으켜야 하는데 엄청난 경우의 수에 비해 단백질을 만드는 조합은 굉장히 적습니다.  게다가 그 조합은 적합한 모양을 구성해야 비로소 단백질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 확률 또한 아주 낮습니다.

Doug Axe 박사는 150개 아미노산이 연결되어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조합에 대한 확률을 연구하고 계산한 결과 대략 10-77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아미노산 사이에 펩타이드 본드로 연결되지 않거나 L형 아미노산이 아닌 D형 아미노산이 하나라도 연결된다면 단백질이 되지 않고 붕괴가 됩니다. 150개 (실제는 149개)가 모두 펩타이드 본드 그리고 L 형 아미노산일 확률은 2-150 혹은 10-45 입니다. 즉 아미노산 150개가 우연히 합성되어 단백질이 될 확률은 10-166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죠.

많은 무신론자들이 존경하는 과학자 칼 세이건은 아미노산 100개가 연결되는 단백질 하나가 우연히 만들어 만들어 질 가능성을 10-130으로 계산 했습니다. 만약 그런 단백질이 수백개가 필요하다면 최초 생명은 확률적으로 대략 10-40,000 정도가 됩니다.

      -   이는 단지 확률적으로만 불가능 한게 아닙니다. 저명한 진화론자 Michael Ruse는 한 토론에서 자기의 눈으로 볼때 아주 단순한 세포 하나 역시도 디자인 된 것 처럼 보인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그는 이런 구조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 수 없으니 포기하지 말고 창조주가 아닌 다른 원인을 통한 발생의 가능성을 알아보자고 주장할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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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생명의 복잡성 그리고 정교함은 누군가가 설계를 통해 만들었음을 나타내지 우연히 생겨났음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를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창조주를 인정하기 싫은 인간의 죄성이 발현되는 것일 뿐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창조주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왜 과학적인 증거들은 알라가 아닌, 제우스가 아닌, 비슈뉴가 아닌 성경의 하나님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증거 3 과학이 발견한 아담과 이브

1987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 팀은 전 세계에 다양한 민족 여성의 DNA를 채취해 조사했고, 그 결과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성에게서만 유전 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다양한 민족의 모든 여성이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만 유전이 되는 Y 염색체를 조사한 결과 이 세상의 모든 남성 역시 한명의 공통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를 성경의 이름을 따서 미토콘드리아 이브, 그리고 Y 염색체 아담이라고 명명합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 둘을 성경의 아담 그리고 이브과 연결시키기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이 있었던 연대를 10만~20만년 전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이 두 사람은 전혀 만난적이 없으며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었지만, 오직 이 두사람의 자손만 남고 나머지 사람들의 자손은 모두 멸절했다는 다소 황당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들이 10만~20만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을까요? 어떻게 이런 계산이 나오게 된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의 진화론적 시간을 바탕으로(인간과 침팬지의 서열차이에 진화의 시기를 적용)  미토콘드리아 DNA에 약 600세대 마다 돌연변이가 하나씩 발생할 것이라고 가정 했습니다. 이에는 어떠한 과학적 실험이나 관찰이 없는 순수한 가정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직접 인간 사이의 변이를 연구 합니다. 그들은 327세대를 나타내는 134개 가족에서 357명의 MtDNA를 조사했을때, 그들은 40세대에 한개 정도의 돌연변이가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Nature Genetics에 보고 되었죠. 즉 돌연변이는 진화론자들의 예상보다 15배나 빨리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를 단순 적용시키면 아담과 이브는 6,000년에서 10,000년 사이에 있었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또 2008년에 있었던 연구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21.6개 뉴클레오티드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이는 수십만년을 가정했던 진화론자들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작은 숫자이며 공통 조상이 20만년보다 훨씬 더 가까이 살았다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Ann Gibbons라는 진화론자는 자신의 논문 Calibrating the Mitochondrial Clock 에서 이렇게 씁니다.

“원인이 무엇이던 진화론자들은 빠른 변이 속도의 영향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 예를들어 10~20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살았다고 여겨지는 미토콘드리아 이브를 새로운 시계를 사용하면 6,000년 전쯤 살았다고 계산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게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하지만 변이 속도에 대한 연구 몇개로 모두가 진화 역사를 다시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빠른 변이는 기껏해야 몇백년 정도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옥스포드 대학의 유전학자 Martin Richards는 “아무것도 아닌일에 소란 떨고 있다.”고 말한다.

 DNA    -

과학은 공통조상이 6,000년 전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지만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론 대신 자신들의 관념을 선택합니다. (그림을 누르시면 논문 원문 링크가 되어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의 공통 조상이 6,000년전쯤 사람이라고 가리킵니다. 이는 성경에서 얘기하는 연대와 거의 비슷하게 일치 합니다. 만약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맞다면, 약 3,500년전 성경의 저자는 어떻게 공통 조상의 존재를 예측했으며, 그 시기는 왜 6,000년 전 쯤이라고 쓰여졌을까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요?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증거 4 – 정확한 하나님의 예언 성취 – 70 이레

성경에는 다양한 형태와 장르의 글들이 있지만,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예언의 성취 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함과 성경의 정확성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것 같습니다. 특히 성경은 예수님께서 직접 “나에 대해 쓰여졌다. (요한복음 5:39 & 요한 복음 5:46)” 라고 하신것 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 대한 책 입니다. 성경에는 아주 많은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 되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언을 소개해 드리기 원합니다.

다니엘서에 있는 70이레 예언은 예수님이 언제 이 세상의 왕, 메시아로 드러나시고 또 죽음을 당하게 되는지에 대한 예언 입니다.

아래에  이해하기 쉽게 만화로 그려진 설명에 대한 링크를 아래에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글이 지겨우시면 재밋게 그려진 만화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 9장은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발견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놓고 다니엘이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다니엘이 기도 할때에 천사가 와서 다니엘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합니다. 그것은 24절부터 있는 하나님이 이세상의 70 이레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레는 7년입니다. 즉 이 세상이 앞으로 70×7년 즉 490년이 남았다는 것입니다.그런데 490년을 세개로나눕니다. 49년(7이레)과 434년(62이레) 즉 69이레와 장차 있을 한 이레… 즉 언제인지 모르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후의 마지막 한 이레 (7년) 입니다.

그런데 이 70 이레의 시작을 언제로 얘기했냐면,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하라는 명령이 있을때부터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메시야-즉 예수님을 가르킵니다.)가 올때까지 69이레가 지날것인데, 그때에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가 죽임을 당할것이다. (26절)

오늘 이 날자 계산을 하기를 원합니다. 정리하면 이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파괴 되고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던 때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다시 복원하라는 명령이 있은후 483년에 메시야가 죽을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언제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AD30~33년중의 한 해이고,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AD32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월절에 즉 니산월 14일날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에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하라는 내용이 네번 정도 나오는데, 세번은 예루살렘에 성전 즉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을 재건하라는 명령이었고, 오직 한 군데만 예루살렘 도시를 재건 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 년 니산 월 에 일어난 일입니다. 왕이 포도주를 달라고 해서 나는 포도주를 가져다가 왕께 드렸습니다. 전과 달리 슬픔에 가득 찬 나의 모습을 보고…. 왕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여행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소?” 왕은 나를 기꺼이 보내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말씀드렸습니다. <느헤미야 2:1,2:6>

느헤미야 2장에 보면 아닥사스다왕  20년 “니산”월에 일어난 일이라고 1절에 설명하면서  6절 왕이느헤미야에게 성을 재건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 때가 역사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BC 445년 혹은 BC 444년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 날자가 없이 달만 적혀져 있을때는 그 달의 1일인 경우가 많기에 니산월 1일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이때 이후 483년이면 메시야는 왕으로 선포되고, 죽임을 당해야 맞습니다. 
70  -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은 1년이 365일이지만 지금의 달력은 저 때 보다 한참 나중인  4세기 쯤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1년을 360일로 계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첫번째 책인 창세기에도 한달을 30일로 잡아서 계산했 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도 한달을 30일로 잡아서 계산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달을 30일로계산합니다.

어떤 분들은 윤달을 계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만약 윤달을 넣어야 한다면 3년반을 42개월 그리고 1260일로 얘기한 요한계시록의 경우 윤달이 중간에 들어가야 하는 기간이므로 43개월로 얘기를 하거나 1260일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한달은 30일 1년은 360일 입니다.

483년x 360일은 173,880일 입니다. 즉 BC 445년 니산월에서 173,880일이 지나면 지금 우리의 달력으로 어느날일지 계산해 봤으면좋겠습니다. 1년은 거의 정확하게 365.2477일 입니다. 대충 365.25일이라고 잡죠.
그러면성경의 483년은 우리의 달력으로 약 476.057년 입니다. 0.057년은 날로 계산하면 365.25x.057=약 20일~21일 이정도입니다.

BC445+476년+20일=AD32년입니다. (31년이아닌이유는 AD 0년은 없기때문에)
그리고 20일정도 추가된다면 똑같은 니산월일 가능성이 높죠.

저는 이 70 이레 예언이 하루도 다르지 않고 정확하게 일어났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니산월이라고 달까지 정확하게 표기한 것으로 봐서 이 정도라면 하나님의 역사가 아주 정확하게 일어 났을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날자까지 정확하지 않더라도 다니엘서에서 메시아가 죽어야 한다고 예언한 시간에 예수님 외에,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이 70 이레 예언은 우연히 발생했다고 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이 예언이 성취가 될수 있었을까요?

증거 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역사성 입니다. 세상에 많은 성경학자들이 있지만, 그 중에는 기독교인이 아닌 성경 학자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성경이 역사서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성경 “학자”가 되지도 않았겠지요.

오히려 그들은 성경이 다른 어떤 역사서 보다 사본이 잘 보존되어 있고, 원본에 가까운 책임을 인정합니다. 단지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일들을 그대로 보지 않을 뿐 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역사로 인정하는 5가지 팩트들이 있습니다.

첫번째 의문 :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면 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다고 기록했을까?


성경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 나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제자들이 가장 치를 떨었을 예수님을 잡아 죽인 바로 그 기관이죠.

이건 마치, 일제 시대에 고종 황제의 시신을 갖고 있는 일본 황실에 조선 사람은 두려워서 차마 시신을 달라고 하지 못하는데, 일본 순사가 와서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로마의 반역자로써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장사 지내도록 그 시신을 달라는 것은 “나도 반역자요!” 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자신의 목숨을 건 행위죠.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독립 투사같은 영웅적인 행동 입니다. 그런 행동을 예수님의 11제자가 아닌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 했다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제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며, 당시 가장 않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단체 사람이 했다고 지어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사실 성경 기록이 거짓이라면 왜 신뢰를 받을수 없는 여자들의 목격을 기록했는가?

지금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에 유대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굉장히 낮았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여자들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참여하는 것 조차도 허용 받지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이 지어낸 얘기였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믿게 하고 싶었다면, 왜 성경의 저자들은 그 것을 발견한 것이 여자들이라고 했을까요? 당시의 문화에 비추어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자들의 증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신빙성이 없는 얘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번째 사실 : 다양한 장소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여러 개인들과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부활 하여 나타났습니다.

사실상 모든 역사 학자들은 다음 증거들을 통해 이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합니다.

1)  사도 바울이 얘기한 예수님을 본 증언자들의 이름들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 났음을 보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묻히셨다가 구약의 약속대로 3일 후에 살아나셔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으며 그 사람들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얘기 합니다. 또 예수님을 믿지 않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에게, 또 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 증언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이란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 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바울은 사도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고, 그들 모두의 증언을 듣고 기록한 고린도서가 신화처럼 무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나타나신 얘기들은 여러개의 독립적인 증언들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얘기는 누가와 바울이, 12 제자에게 나타난 얘기는 누가와 요한과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또 여자 제자들에게 나타난 얘기는 마태와 요한에 의해 증언 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대해 부정적인 독일의 신약 성서 비평가 Gerd Ludemann 마저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 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네번째 사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부활에 대한 믿음과 다른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제자들은 하나님이라고 믿던 예수님이 죽었을 때, 그들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갖고 있던 믿음은 현재의 이스라엘 민족이 갖고 있는 메시아 상과 같았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부탁을 했었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에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회복 하실 때가 지금이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당시의 로마보다도 더 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사람이었지, 십자가에서 로마의 반역자로써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사후 세계관은 이 세상에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이 살아나 부활하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경에 분명히 드러나는데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날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렇게 대답 합니다.

“마르다가 그분께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할 때에 그가 다시 일어날 줄 내가 아나이다, 하매” <요한복음 1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갑자기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켰다고 믿기 시작 하고 그들의 목숨까지 내놓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사랑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다고 해서, 미쳐 갖고 그 자식이 부활했다고 믿는 부모를 보신적이 있습니까? 혹은 아내나 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나 남편이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미쳐 가지고 부활했다고 믿는 사람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던 사도 바울까지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고, 당시에 살고 있던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칩니다.

Emory 대학의 신약학자 Luke Johnson은 “무언가 엄청나게 강력한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어야만 초대 기독교 당시 있었던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섯번째 사실 : 1세기 기독교의 폭발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예수님은 공식적인 로마 반역자 이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당시 유대인의 개념상 로마를 정복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면 메시아가 아니며, 나무에 달렸다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심지어 이방인들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했을까요?

당시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핍박했으며, 전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은 말 그대로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왜 심지어는 이방인들 까지도 자기들과 상관없는 아주 작은 유대라는 나라에서 반역자로 처형당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을까요?

저명한 신약학자 N.T Wright 역시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지 않았다면, 초기 기독교의 부흥을 설명할 수 없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부흥은 불가능 했다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제시한 다섯가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팩트들은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역사학자 Bart Ehrman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위에 제시된 다섯 가지 팩트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만, 단지 부활은 기적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동안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모든 자연적인 시나리오는 역사적인지 여부를 검증하는 기준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설만 검증 기준을 통과 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자연적인 가설들 예를들면, 음모론 가설, 죽음을 가장했다는 가설, 헛것을 봤다는 가설 등은 학문적으로 사실로 여겨지지 않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성경학자 Bart Ehrman 박사 역시 그 중 어떠한 가설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단지 기절했다가, 인도로 갔다던지, 다른 곳으로 갔다는 식의 가설을 신뢰합니다.

그런 가설은 흥미롭고 부활이라는 기적보다는 그럴듯 하게 들릴수 있을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우선 예수의 죄명은 로마에 대한 반란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제패한 규율이 엄격한 군대였고, 사형수가 죽지 않았을 때는 담당 병사가 대신 죽어야 하는 규율이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지 않은것이 발견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음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내용을 확인해 줍니다.

예수 님께 이르러서는 그분께서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분의 다리를 꺾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군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로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 그것을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의 증언은 참되니라. <요한복음 19:33~35a>

원래 로마 군인들은 죄수가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반드시 다리 뼈를 꺾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이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하며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고, 다만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다고 증언 합니다.

이는 법의학적으로도 정확한데, 심장이 파열 되었을때, 24시간 이전에 파열된 심장에서는 피가 흐르고 심장 주위에 피가 고이는 주머니가 생기며 혈청이 가라 앉으면서 액체가 생겨 그 주위를 찌르면 많은 양의 물이 나온 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는 가설은 역사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
신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 亻)"과 "말씀 언(言)"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경 몇 구절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도록 하려면 암송이 아니라 말씀을 움직이는 능력이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움직이는 능력은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믿음이란 말씀을 움직이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 믿음의 그릇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링게르병을 가지고 왔고, 또 어떤 이는 스페아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군인들이 가지고 온 빈병에 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박카스병은 박카스병만큼, 링게르병은 링게르병만큼, 스페아통은 스페아통만큼 꿀을 부어 주었
습니다. 그후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랬더니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소? 나는 빈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 빈 그릇대로 채워 줬을 뿐이오."하는 것이었습니다.

 
● 깨어 믿음 위에 굳게 서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外飾)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벧전 2:1,2.
시기와 비방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비방을 할 때, 사람들은 문제가 되는 그 사건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주변 것들을 긁어 모아 어찌 되었든 무조건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조금 섭섭한 일을 했다고 해 보십시오. "그래, 그 사람 눈 좀 봐. 냉정하다 못해 독기가 서려 있쟎아."하고 애매한 눈까지 들먹여 그 사람을 눌러 버리려고 합니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 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라는 식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가 갑자기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낮은 사람으로 전락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낮은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조심하십시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주님, 저희로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판단함으로써
스스로 파멸해가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 믿음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기쁨에서 내세의 소망을 품고 사 는 그 날까지 열심히 일해야 하겠다는 사상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쉽게 돈을 벌겠다는 엉뚱한 생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돈을 벌겠다는 상업적인 발상에서 신앙을 약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를 복이나 받게 하는 물질의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부자 되는 종교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려 기독교를 구속의 종교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게 하였다.


● 기도와 믿음 -마틴 루터

종교개혁 당시 강력한 원수들이 온 힘을 합하여 개혁파의 신앙을 뒤집어 엎으려고 하고 무수한 칼날이 칼집에서 뽑혀지려고 할때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단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승려들은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전쟁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사람들을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뿐이다." 온 세계를 동요시킨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투쟁의 기간 동안에도 루터는 적어도 하루에 세시간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하였다.


●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

가끔 자동차 안에 열쇠를 놓아둔 채 문을 잠갔다가,후에 문을 열기 위해 고생한 경험이 있다.아무리 고급 승용차라 할지라도 그 열쇠가 없다면,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고,운전을 할 수도 없고,원하는 곳에 갈 수도 없다.

지글러라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그의 저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정직한 사람,원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성실한 사람,신념이 넘쳐 있는 사람,충성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성공의 공통점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은 믿음의 기도 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복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열쇠를 주었다.
삶의 놀라운 열쇠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복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모두 기도하는 시간을 우선 순위를 삼고 생활하자.“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5)”

● 믿음의 기도는 실패가 없다 / 조지프 스크리븐(죄짐 맡은 우리 구주)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익사하는 아픔을 당했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 빠졌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이 청년은 아픔의 장소를 피하여 캐나다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 안주하기도 전에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중병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죽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자기를 향하여 토네이도처럼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 청년은 힘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흐느끼며 부르짖었다.
“예수님!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세요. 응답해주세요.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고 결단의 기도를 드렸다.
그 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평화가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이때 떠오른 영감은 뒤에 “시험 걱정 모든 괴로움없는 사람 누군가.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찬송가 487장)라는 유명한 찬송가가 됐다.

그는 고향에 전화해서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중병을 앓던 어머니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치료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이 청년이 바로 조지프 스크리븐이다.
스크리븐이 울부짖으며 드린 기도는 어머니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다.
이처럼 기도에는 실패가 없다.
우리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는 말씀을 믿고 기도해야 하겠다.

● 믿음과 기다림

존은 열 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할머니로부터 우표 앨범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 왔지만 우표앨범은 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다 놀러온 친구들은 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경하길 원했다. 존은 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할머니에게 받은 우표 앨범...이 건..."
"존, 아직 할머니에게서 우표 앨범이 오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니?"
존은 이상한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우표 앨범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받은 것과 같아요."
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났으나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존의 어머니는 왜 할머니가 우표 앨범을 보내지 않는지 마음에 강한 의심을 가지고 아들에게도 이렇게 떠봤다.
"존! 할머니께서는 너에게 약속한 것을 잊으셨나보다."
"엄마,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할머니께서 잊어버리시다니요."
존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존의 어머니는 아들의 신뢰에 찬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엄마, 할머니께 앨범 고맙다고 하는 편지를 보내면 어떨까요?"
"그래,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자, 한번 써 볼까?"
존의 어머니는 이렇게 용기를 주었다. 순식간에 편지를 쓴 후 우체통에 넣었다. 존은 할머니를 믿으며 휘파람을 불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 후 며칠 안되어 답장이 날아왔다.
"존에게... 존! 할머니는 너에게 우표 앨범을 사 준다고 한 약속을 잊은 게 아니란다. 너의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하려고 찾아보았으나 좀처럼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뉴욕에 주문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뉴욕에서 보내온 앨범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도착한 데다 너무 좋지가 않아서 다른 것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여기 3달러를 보내니까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그곳에서 사가지렴. 할머니로부터."
편지를 읽은 존의 얼굴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엄마, 제가 말한 대로지요?"
존은 할머니와의 약속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그가 믿고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는 노력하고 있었다.

● 고난을 회피하지 않는 믿음

성 구 " 가라사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막 14:36)
마틴 루터 킹 Jr. 목사님의 자서전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킹 목사님이 '몽고메리 버스 스트라이크'를 주도하고 계실 때 많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와 폭파 협박에 시달리셨다. 그들의 테러와 폭파 협박은 너무나 거칠고 험하여서 우직한 킹 목사님도 두려움에 옴짝달싹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목사님이 공포에 사로잡혀서 '이제는 이 일에서 손을 떼어야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그 순간 기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다. 지금 혼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난에 처해 있다는 것을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때 머릿속에서 조용히 확신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 마틴 루터, 정의를 위해서 일어서라. 평등을 위해 일어서라. 진리를 위해서 일어서라.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결코 너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 싸움을 계속하라. " 는 목소리를 들은 마틴 루터 킹 Jr. 목사님에게 고난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의연히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 부부의 믿음

한 농부가 부인의 동의를 얻어 더 좋은 말과 바꾸려고 키우던 말을 끌고 시장으로 나갔다.가는 도중에 살진 암소에게 마
음을 빼앗겨 말과 바꾸었다.또 길을 가다가 그 암소를 양과 바꾸었고,조금 더 가다가 양을 거위와 바꾸었으며 또 그 거위
를 붉은 벼슬을 가진 수탉과 바꾸었고 마지막으로 수탉을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바꾸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방에서 만난 귀족 두 사람이 농부의 사연을 듣고는 “집에 돌아가면 부인이 화가 나서 당신을 받아들이
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그러나 농부는 “참 잘했다고 할 것이오”라고 반박했다.그러자 귀족은 만약 그렇다면 자기
가 가진 금화를 몽땅 주겠다고 했다.
이튿날 집에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농부의 아내는“그러잖아도 식초를 만들기 위해 썩은 사과가 필요했는데 참 잘되었군
요”라고 말했다.결국 농부는 내기에 이겨 부자가 되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배우자의 능력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를 존중하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안데르센
의 동화다.


● 배울 것은 믿음과 낙천적 사고방식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7)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목사님 당신은 낙천적 사고방식을 외치십니다. 당신은 믿음만 가지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산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수 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건가요?"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야 합니다. 특히 믿음과 낙천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에 문제 없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하는 것이 중 요하다.

나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명심하고 문제들을 처리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 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니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나는 인내를 가지고 있다. 인내의 복음을 믿는 나는 인내로 많은 일을 처리할 것을 확신한다.


● 한 사람의 믿음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80세 생일 잔치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허황된 계획을 꾸민 적도 있었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진 때도 있었소.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불평을 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를 믿어주었답니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나를 믿어준 아내의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입니다.
당신을 언제나 믿어주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감사는 믿음의 척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니므이 뜻이니라](살전5:18) 기독교의 신앙은 '감사'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사란 다름 아닌 "창조와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감사하는데 바로 이 감사가 예배의 동기이다. 구약성서에서 감사라는 말은 동사 [야다](감사를 드리다)와 명사[토데](감사를 드림)로 표현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쓰이고 있는 이 [야댜]와 [토데]는 "마음의 샘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에서 샘줄기가 흐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유카리스테오스](감사한 마음을 가지다. 감사를 드리다),
[카리스](감사)라는 말이 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감사라는 말은 또 영어로는 THANKS인데 이 말은 "생각한다"란 뜻을 지닌 THINK에서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서 감사는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저절로 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지를 보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감사의 표현은 구약과 신약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구약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신약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구속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먼저 구약성서에서의 감사는 모든 시편마다 언급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주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감사 드림'은 이스라엘의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민족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잇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민족은 감사함으로 성전에 들어갔으며, 예배를 드릴 때에도 감사의 노래를 불었으며, 서원을 드리는 제사를 올리면서도 감사를 하였다. 또한 그들은 감사를 번제 대응으로 하였으며, 야훼의 제단 앞에서 행하는 "재판"에도 감사드림이 따랐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다름 아닌 야훼의 이름에 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민족의 감사는 바로 신앙에서 온 것이었다. 이스라엘민족은 야훼가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을 지키는데 신실하게 언제난 감사를 표했다.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신들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약의 감사는 신약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감사가 구약에서의 감사였다면 신약의 감사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구속적 감사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신약에 보면 생전에 예수를 안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일과 그의 인격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예수를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도래하는 왕국에 참여할 것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 데 대하여 ◇특별한 영적인 은사에 대하여 ◇ 육적인 음식에 대하여 ◇ 세상데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하여 ◇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 형제들의 사랑과 신앙에 대하여 ◇하나니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감사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에게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역설했다. 바울이 감사생활을 강조한 것은 감사가 믿음을 온전케하기 때문이다. 감사는 은혜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은예에 감사하게 될 때 교인들은 더욱 더 그 은혜안에서 귿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감사는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며 우리의 미래를 확실하게 해준다. 감사는 또다른 감사의 역사를 경험케 하며 이러한 계속적인 감사는 우리의 영혼을 살찌누게 한다. 우리들이 가진 것 중에서 아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감사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이밖에도 일반적인 생활에서의 감사(살전5:18)가 있는데 이 감사야말로 긍정적인 신앙생활의 원동령이다. 말세의 특징 중 하나는 감사가 없다는 것이다.

● 절망 속에서도 가질 수 있는 믿음의 기도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분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로다(시55:22).
기도를 계속하면 당신은 계속 어떤 것을 추구하여 달성시키는 능력도 얻게 된다.
나는 세계 2차 대전 때 한 유대인이 독일의 지하실 벽에 새긴 이 말을 좋아한다.
"햇볕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태양을 믿는다. 비록 느끼진 못하더라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비록 잠잠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것은 기도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다.


●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하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1,12.
“...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 는 이것이니라”-요 4:34.

봄이 되면 농촌에서는 못자리를 만들어 볍씨를 뿌립니다. 볍씨는 일정 기간 동안 못자리에서 잘 자랍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면 더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못자리가 좁기 때문입니다. 그때쯤되면 농부들은 못자리 에서 모를 뽑아 큰 논에 이양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는 무럭무럭 자라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내놓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의 초보 단계에 있을 때는 목사나 선생의 양육을 받으며 자랍니다. 그러나 일정 기간 동안 양육을 받았으면 모내기를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을 모내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것만 너무 좋아한 나머지 늘 피양육자 노
릇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은 대체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양육을 받았으면 피양육자의 단계에서 벗어나 교사로, 직분 맡은 자로 봉사함으로써 성장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로 젖먹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게
하옵시고, 성장하는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옵소서.”


● 믿음의 승리
나폴레옹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휘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포위했다. 펠드리히 시는 비상의회를 소집하고 사태를 논의했다. 미리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한 사제가 일어나 말했다. “우리의 힘을 의지한다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활절인 오늘의 예정대로 교회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는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립시다”
그 사제의 말에 시의회 의원들은 모두 찬성하였고 펠드리히 시에는 우렁찬 종소리가 울리고 기쁨에 찬 찬송소리가 퍼져나갔다. 이 소리를 들은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오스트리아의 구원병이 온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돌려 다른 곳으로 퇴각하였다. 펠드리히 시민들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막강한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승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낸다. 당신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 믿음으로 감사하는 참된 삶
염려와 근심은 믿음없는 행위이며 소유욕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염려는 세상일의 특징이며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염려하는 자들에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들꽃을 가리키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화려한 영화를 대표하는 솔로몬도 들꽃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들꽃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들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을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염려와 근심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나 헛된 망상이 아니라 내 의지와 욕심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원칙에 충실한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에 광야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많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광야길은 힘들 때나 형통할 때나 믿음의 행진이어야 했습니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고픔 때문에 모두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떡과 고기를 생각하며 불평했습니다.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 16:3)고 약속하셨습니다.약속대로 하나님은 저녁에는 메추라기,아침에는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필요에 따라 거두도록 하셨습니다.처음에는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있었지만 부족함이 없이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었습니다. 둘째는 거둔 양식을 다음날 아침까지 두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탐욕에 빠진 자들이 약속을 어기고 다음날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은 것으로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을 믿고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상은 눈에 보이는 것,물질의 풍요를 갈망하는 상징입니다. 또한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을 섬길 수 없도록 하나님이 엄히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우상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곡물의 신이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에 빠진 자는 믿음으로 살거나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세상이 감사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소유욕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소유하는 것이 많아지면 교만하기 쉽고 자기를 채우면 채울수록 염려가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자기 주변을 가볍게 그리고 단순하게 하십시오. 빈틈이 좀 있어야 여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소유욕에서 생기는 염려와 근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 교육의 바탕은 믿음이다
조선조 영조(英祖)때 이재라는 이름난 학자가 있었다. 이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컸다. 어머니는 이재가 12살 되던 해 시동생인 당대의 정치가 이만성에게 데리고 가 올바르게 키워줄 것을 부탁했다. 며칠 후 이만성은 "공부를 안 해 매를 들어 때렸는데 그만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재의 어머니는 슬퍼하면서도 "가르치다 그런 걸 어떡합니까.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만성은 "사실은 죽지 않았고 나를 얼마나 믿고 맡기나 보려고 했다."고 하며 이재를 열심히 키워 대학자가 되게 했던 것이다.

● 두려움의 안경과 믿음의 안경
중세기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다. 그의 학창시절에 독일 고학생들은 노래를 잘하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나 창문 안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척 열고 바라보더니 냅다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다. 결국 발이 빠르지 못한 루터는 붙잡혔는데,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길,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 라는 열등의식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고 했다.
사실이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진다.
미국의 한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두 명의 사원을 시장조사차 보냈다. 그때 한 사원은 보고하기를 "이곳은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판매 불가능" 하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다른 한 사원은 "이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가능 무진장"이라는 보고를 띄웠다. 전자의 불가능 사원은 평생을 말단 사원으로 마쳤지만, 후자의 무진장 사원은 그 신발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차이이다.

● 시련과 믿음의 성취
본문: 단 3:13-18

아이들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병고, 즉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홍역을 앓기도 하면서 자라는 것과 같이 신자들의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시련과 장애물들이 있어서 이것들과 싸워서 이겨야 믿음이 점점 자라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용사가 되고 큰 일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기도원에 갔었는데 그 곳에 계신 전도사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큰 목적을 가지고 산 속에 들어가 며칠 동안 울부짖으며 기도하다 소나무를 뿌리채 뽑아냈는데 그 후 응답이 왔다는 간증을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어느 사람이 자기도 문제가 있는데 산에 가서 소나무를 하나 뽑아야겠다면서 산에 올라가서 과히 어렵지 않게 뽑을 수 있는 소나무를 붙잡고 그날 밤 끙끙대다 하나 뽑고서 내려와 하는 말이 "나도 소나무를 뽑았는데 응답이 오지 않는데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믿음은 "믿습니다"하고 고성(高聲) 기도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믿음의 성취는 몇 개의 고비를 넘겨야 응답을 받게 됩니다.

● 행함이 없는 믿음
성경: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설원이라는 중국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맹수지만 의심이 많아서 머뭇 머뭇하여 실천하는 일이 적은데 , 그렇다면 벌이나 반딧불이 독을 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헛된 이론만 숭상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시원치 않는 사상과 말로 실행한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형편에 따라 잘도 인용하면서 실제 행동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여우는 조그마한 벌 한 마리 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늘도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산을 옮긴 믿음

미국 알라스카의 스티브라는 청년이 처음 교회에 나갔다. 그날 목사는 마태복음 17장 20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 길 수 있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그의 집 뒷산에는 겨울이면 눈사태가 나서 골치를 앓고 있던차, 그 설교를 들은 스티브는 눈이 확 뜨였다.
그는 자기가 그런 일을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시작했다. 이 소식이 설교를 한 그 목사의 귀에 들어갔다.
목사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서 설교는 했으나 아직까지 산을 옮겼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스티브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요, 그리고는 낙심할 것이 뻔한 일이므로 그 목사는 그의 뒷처리를 좀 잘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스티브의 기도는 열흘이 가도 스므날이 가도 후퇴하지 않았다.
목사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40일째 되던 날 스티브는 벙글벙글 웃으며 목사실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 20세기는 산을 번쩍 들어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옮기시더군요"라고 하고는 새로 생긴 고속도로에 흙이 필요하다고 하며 큰 트럭들이 와서 그 흙을 계속 실어간 산이 거의 다 없어져 가는 것을 보고 왔다고 했다.


● 믿음의 선언

1812년 3월 12일, 인도의 세람포르에서 화제가 발생했다. 윌리암 케리와 그의 동료들이 수 년에 걸쳐 갖은 고생을 감수하여 번역한 책들이 삽시간에 연기 속에 사라져 버렸다.
성경 번역을 위한 원고들의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다.
새로 주조된 타이프와 중국 금속타자기가 전손(전손)되었다.
애를 써서 편집한 원고, 문법책, 사전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 때의 손실에 대해 케리는 이렇게 썼다.
`인쇄기 외에는 아무것도 건져 내지 못했다.
이것은 너무 큰 타격이어서 앞으로 오랫동안 성경을 인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12개월 동안 열심히 일한다 해도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재산, 원고 등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상황은 쉽게 극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원고의 손실에는 거의 모든 인도 성경과 카나레스 신약 성경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2권의 구약 성경과 많은 페이지의 벵갈어 사전과 테루구 문법책 전부와 푼자비 대부분과 산스크리어트어 고급사  전부와 그의 언어 사업의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동역자들에게는 믿음의 선언이 뒤따랐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이 좋지 않은 일을 통해서 우리의 이익을 증진시 키실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났다.`
그 재해는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귀를 열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들은 그 사업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이와 같이 파멸은 선교열에 불타 는 친구들을 증가시키는 횃불인 것이 입증되었다.`


●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곷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 떨어뜨려 깼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던째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글일 것이다.


● 두려움의 안경과 믿음의 안경

중세기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다.
그의 학창시절에 독일 고학생들은 노래를 잘하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나 창문 안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척 열고 바라보더니 냅다 뛰어나오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다.
결국 발이 빠르지 못한 루터는 붙잡혔는데,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길,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 라는 열등의식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루터는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고 했다.
사실이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환경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서 행복이 달라진다.

미국의 한 신발회사에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두 명의 사원을 시장조사차 보냈다.
그때 한 사원은 보고하기를 "이곳은 모든 사람이 신발을 신지 않으므로 판매 불가능" 하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다른 한 사원은 "이곳은 아직 아무도 신을 신지 않았으므로 판매가능 무진장"이라는 보고를 띄웠다.
전자의 불가능 사원은 평생을 말단 사원으로 마쳤지만, 후자의 무진장 사원은 그 신발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이것은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가치관의 차이이다.


● 믿음으로 얻는 구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어떤회사에서 물만 부으면 되는 케익용 가루를 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측에서는 그 제품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기대 이하로 그 제품의 인기도는 너무나 저조했습니다. 이에 고심을 하기 시작한 회사측은 수많은 여론조사 끝에 드디어 그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케익을 만드는 방법이 너무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측에서는 부랴부랴 제품의 내용물을 바꾸어 물과 계란을 넣으면 되는 케익용 가루를 만들어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구원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건 너무 쉬우므로 그것에 선행을 곁들여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저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 믿음의 모본
성경: 엡6:4 * 찬송: 305장, 492장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그 근처에 사는 교인댁 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 댁을 심방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목사님의 방문을 받으니 심방 받는 집에서는 반갑게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아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어서 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책을 좀 가져오십시오" 그때에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가정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고 있는지 목사님께 보여 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얘, 너 안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주겠니?" 목사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들고 나오는 책은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 가정의 신앙정도는 그 가정의 어린아이 말과 행동에서 밝혀집니다. 자녀교육의 첫 번째 법칙은 가르치는 교훈이나 개념보다는 본보기에 훨씬 많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됨됨이가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우세합니다. 자녀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정보원"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자녀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시면 기도하는 모본을 보이고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으시면 부모가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부모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처럼 자녀에게 아름다운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로서의 나의 모습이 자녀에게 과연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돌아보고 믿음의 모본을 보입시다. 자식은 부모의 행위를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신6:1-9)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이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 믿음의 분량대로 섬김
본문: 로마서 12:1∼8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메트로폴리탄 타버나클(교회)이 있습니다. 100년전만 해도 세계 최대의 교회, 최고수준의 회중, 최고의 건물, 몇 세기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설교자를 갖추었던 그 교회가 1세기도 가기 전에 얼마나 초라하게 몰락했는지 모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까요? 런던도 바뀌고 사람들도 바뀌었지만 교회만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변화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삶이 뒤따르는 변화입니다. 인격과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음에 인격적으로 모신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고전3:16)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변화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생활이 따라주는 인격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무엇을 하려고 하는 데에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나 어떤 신앙인은 직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직분이란 하나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지 그 직분이 계급의식을 갖거나 차별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할 것들 하나가 바로 계급입니다. 교회는 계급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서로 섬기는 곳이요,서로 높여주는 곳이요, 서로 세워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과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무엇입니까? 다양성이 인정되는 교회를 말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분들이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첫째,타성에 빠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야 합니다. 옛것을 우려먹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둘째, 내가 섬기는 교회에 희망과 환희 그리고 영적인 감동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늘 처음 만났던 그 감격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셋째, 겉늙음으로 인하여 안일과 자기 만족에 도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잔칫집에서 잔치를 벌이다 보면 접시 하나 깨지고 밥그릇하나 깨지는 것은 보통입니다. 그것을 깨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잔치가 아니라 그릇이 깨져도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잔칫집입니다. 정말 신실하게 섬긴 이는 실수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밤잠 못 자고 애태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수가 유익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고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부를 수 있다면 돌파구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 기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저에게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섬기게 하옵소서 아무도 모르는 자리라 해도 감사함으로써 섬기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노력인가 믿음인가

어느 날 화이트 부인에게 한 손님이 찾아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중에 화이트 부인은 “저는 확실히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화이트 부인이 구원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손님은 “부인은 화이트 부인이 되려고 노력하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녀는 “아니요, 제가 화이트 부인인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나 화이트씨의 부인이셨습니까?”라고 손님이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있는 결혼 반지를 만지며 “이 반지를 끼었을 때부터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손님은 구원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 믿음은 손해보며 사는 것 입니다.

미국의 선교사 중에  제임스 엘리어트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분은 학교를 졸업하고 뜻을 같이 하는 네 명의 친구와 함께 남미 에콰도르 인디안 부족이 사는 마을로 선교를 위하여 떠나게 된다.
그러나 저들은 그곳에서 선교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창을 든 인디안들의 공격을 받아 현장에서 모두 순교 하고 말았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정글의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 하기 위하여 허리에 총을 차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디안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 총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에 맞아 순교의 피를 흘렸다.
만일 저들이 정당방위였다고는 하지만  '자기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총을 꺼내어 인디안들을 죽였다' 라고 하면 그곳에 선교의 뿌리는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저들은 그것을 생각하고 총이 있었지만 총을 쓰지 않고 창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초에 있었던 이 사건은 미국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 기독교 잡지사 기자가 그 엘리어트 선교사 부인에게 찾아가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분노하며 선교사 부인을 위로하기 시작 했다.
그때, 선교사의 부인은 그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을 한다.
"말씀을 삼가하여 주십시요.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어트 부인은 남편이 대학 다닐때에 썼던 큐티 노트 한 부분을 공개했다.
그 글은 미국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국 붙들고 있을수 없는 그것을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을 위하여 바칠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날 구원 하신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내 삶을 결산하기 위해 이 부족한 모습 그대로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나를 부르신 소명 앞에 부족한 대로 최선을 다하겠다. 놓쳐서는 안될 그것을 위하여 결코 끝까지 붙들고 있을수 없는 그것을 바치겠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명성도 자기만족과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수가 없다. 그리고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소서."

● 행함이 없는 믿음은…

6·25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부산의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었다. 미군 당국은 당황했다. 말이 묘소이지 황량한 벌판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늦겨울이어서 잔디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현대상사의 정주영 사장이 그 소식을 듣고는 미8군 당국자를 찾아가 자신이 묘지에 풀이 나게 할 테니까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급한 나머지 그에게 실비의 3배를 주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그 길로 정주영 사장은 그 주위의 보리밭을 모두 사들였다. 때마침 보리싹이 새파랗게 솟아오르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파내어 묘지를 입혔다. 예정한 날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엔군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묘지마다 새파란 싹이 덮여 있었으니까 보기에는 좋았을 것이다.그러나 사흘 뒤 묘지는 누렇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보리에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결국은 그 영혼이 메말라 버릴 수밖에 없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자.


● 마음으로 믿는 믿음- 순종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하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머리와 마음으로 그리고 삶 전체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것과 그의 전기에 나오는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를 믿거나 의지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당신이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거하기 위해 그분을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당신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용납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하여 해주신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원해달라고 그분께 기도로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10:13). 당신이 부르짖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는 마음 때문이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하고자 하는 새로운 태도가 없다면, 그는 구원받을 만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 임마누엘의 믿음과 순종
본문: 여호수아1:1-9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이 16년동안 아프리카에서 험한 세월을 보내고 자깐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27번째로 열병을 앓아 몸이 몹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또한 사자에게 물린 한쪽 팔은 힘없이 몸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글래스고 대학생들 앞에서 설교하면서 감동적인 간증을 했습니다.
"힘이 들고 고독한 선교사 생활 가운데서 저를 지탱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었습니다."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 그는 몇 년 후 치덤보라는 작은 마을에 임시로 마련된 오두막에서 새벽 4시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주님이 기다리시는 영광의 나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켜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그가 그처럼 영웅적인 삶을 살며 사역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으면 그 믿음 자체가 엄청난 생의 에너지를 갖게 합니다.


●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곷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 떨어뜨려 깼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던째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는데 이것은 분명히 어떤 전쟁 포로가 장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글일 것이다.


 ● 믿음의 삶으로 부르신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그네 타기 곡예를 즐겨 보았다. 당시 89세이시던 아버지가 이곳(데이브레이크)에 방문하시면서부터 나는 서커스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난 서커스 구경을 가기로 결정했고, 그날 저녁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그네 타기 곡예사 다섯 명이 진행하는 서커스를 보았다. 세 명은 ‘나는’ 역이었고, 두 명은 ‘잡는’ 역이었다. 한마디로 공중 무도회였다! ‘나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치솟았다. ‘잡는’ 이의 강한 손에 붙들리기 전에는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다.
공연 때마다 나는 곡예사들의 용기에 끊임없이 감탄한다. 곡예사들은 잡아 주는 이의 든든한 손에 자기 손이 빨려 들면서 비행이 끝나리라는 것을 믿는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튼튼한 그네를 놓아야 반대편 그네까지 우아한 반원을 그리며 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상대방이 나를 잡으려면 일단 놓아야 한다. 이렇게 기꺼이 내려놓으려는 자세로 사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도전 중 하나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명성이든 우리는 수많은 영역에서 어떻게든 움켜쥐려 한다. 내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움켜쥐어야 한다는 신념은 인간이 고난을 겪는 커다란 원천 중 하나다. 그러나 소유와 계획과 사람을 내려놓으면, 비록 모험이 따를지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자유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꺼이 내려놓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는 또 하나의 스텝은 지금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는 것이다. 안심할 수 있는 안전 지대를 확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나 다른 이의 삶을 스스로 안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따르고 싶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다 내어 드리는 것이다.


● 소망과 믿음의 승리
약 100년 전 애굽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 있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사람의 실수로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쯔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다. 전문가들 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다. 3천년간 묵을 지킨 생명이 집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분명히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은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지고 만다. 그러기에 세계 제 2차대전 때 독일 콜론의 지하실에는 `나는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을 때도 그 태양을 믿으며,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해도 믿으며,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도 그를 믿는다.`라고 쓴 글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버리지 않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이뤄주실 것이다. 히뉴원굴 기자는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며 휘장안에 들어간다`(히6:19)고 하였다.


● 믿음의사랑
리챠드 범브랜드 목사가 약 30명의 크리스챤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김옥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밀 쳐 던져졌는데,침침한 감방 속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감방 속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비밀경찰의 대위였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 왔는지 너무나 의아해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 보내라고 했다. 수줍어하며 자기의 사무실에 들어 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져 있었다.
소년은 입을 열어서 말했다.`대위님,당신이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에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예요. 나는 엄마의 생일이면 꼭 꽃다발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 왔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당신이 우리 부모님을 체포해 갔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나에게 늘 가르쳐 주시기를,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에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 꽃으로 대위님의 애기들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이 꽃다발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대위는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소년을 부둥켜 안고 눈물로 울었다고 한다.
그 후로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 믿음으로 사랑
믿음과 기도는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바퀴처럼 서로 의존적이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의 밀도와 열도는 항상 정비례한다. 믿음이 식어지면 기도도 식고 기도가 뜨거우면 믿음도 뜨겁다. 또한 믿음과 기도는 근육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강해지나 쓰지 않으면 무위해진다.
한편 믿음과 기도는 성도의 생산과 창조의 도구이기도 하다. 믿음과 기도의 펌프로 지하의 무진장한 하나님의 유전에서 능력과 지혜를 퍼내야 하겠다.
재정도 퍼내고 사랑도 퍼내자. 두가지 개념을 주목하라. 1.명령과 2.약속이다. 성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약속이 있다.(요일 5:14)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 뜻 행할 것을 기도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으로 사랑의 생산자가 되자.


● 믿음 속의 사랑
스위스의 어느 심리 학자가 많은 임상 케이스를 기록한 가운데 30여 세가 되도록 사람을 전혀 믿을 수 없고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의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너무나 심한 천대와 학대와 사기를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의 고민은 자기가 사랑한다는 진정을 남편이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3-4년이 걸려서야 비로소 자기의 진실과 사랑을 그의 마음속에 깨우쳐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자기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람을 믿지 아니하면 사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라는 자명의 진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무한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인 인식입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2)


 ● 믿음
믿음은 두 가지 요소,
 즉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으로 이루져 있습니다.
 당신은 은행이 당신을 위해 당신의 돈을 보관할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의 돈을 은행에 맡길 때까지는 은행에 대한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기차가 당신을 어떤 곳에 태워다 줄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이 기차를 타고 그것이 당신을 목적지에 데려다 줄 것을 신뢰할 때에만 기차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그의 모든 전투 때마다 그를 따라다닌 좋은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의사를 질투한 어떤 사람이 그를 없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의사가 어느 날 아침 알렉산더 대왕의 컵에 독약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의사를 당장 처형시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식사 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 편지를 모인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자기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컵을 집어 그 안에 든 것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믿고 그 의사를 신뢰하였습니다.
 복음은 그처럼 단순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 믿음
 캐나다에 '성(聖) 앤"이라는 아일랜드의 성자가 살았습니다. 소녀였을 때, 그녀는 대단히 잔인한 주인 부부 아래에서 매우 빈약한 급료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소녀에게 일 마일이나 떨어진 가파른 언덕에서 물을 길어오게 했습니다. 한때는 근방에 샘이 있었으며 지금은 메말랐으나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는 아주 피곤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읽었습니다. “내가 골짜기 가운데 샘들을, 솟게 하리라. 마른 땅에서 물이 솟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소송을 일으키라.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이 말씀은 앤을 감동시켰으며 그녀는 주님 앞에 탄원을 했습니다. 물이 그들에게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가파른 언덕을 물을 지고 나르는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고된지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리고는 누워서 잠들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기도를 탄원했고 그녀의 확실한 증거를 보였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녀가 물통을 가지고 샘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녀는“샘에 물 길러갑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그건 말랐는데”라고 그 사람이 놀라서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앤은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를 믿었는지 누구에게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샘 속에는 팔십 삼 피트나 되는 깊고 맑은 찬 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탄원을 하십시오. 확실한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런 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 믿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무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는 의식을 주는 마귀의 미소 루이스는 유명한 [악마의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마음밭 비유를 가장 탁월하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실에 들르는 그의 습관적인 태도로 그날도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손에 쥐어진 책이 신앙에 관한 책이었고, 이 책을 읽어 보다가 노신사의 마음 속에는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 속에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점심 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그는 잠시 전 마음 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던 하나님에 관한 의식을 누르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 때에 악마는 그 마음 속에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악마에게 감동을 받은 노신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루이스는 이런 인상 깊은 그림을 그립니다. 마치 자신에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이 노신사 뒤에서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 믿음과 두려움
 시 56:3; 사 12:2; 눅 8:50; 막 5:36
  한 스코틀랜드인 신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여보게, 나는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아주 훌륭한 교훈을 발견했다네.""오, 그래? 그럼 내게도 그것을 들려주게."
 "그래, 읽어 주지."
 말을 건넨 친구는 의기양양하게 그가 발견한 성구를 읽기 시작했다.
 "그 말씀은 바로 시편 56:3이라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도 동의하면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참 훌륭한 말씀이군 . 그런데 말야, 나도 오늘 아주 훌륭한 교훈을 발견했지. 자네가 발견한 것보다도 더 훌륭한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네. 자, 이사야 12:2을 보게나. 그 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네.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자, 어떤가?" (MOODY MONTHLY)
 
 ● 믿음과 순종
 심상 15:22; 딛 1:6; 롬 1:5; 느 9:34
 멕시코에 있는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의 방언에는 `믿는다'라는 말과 `순종한다'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 단어에 두 의미가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초기 선교사들은 미개한 인종의 언어라서 언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언어는 불완전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들은 두 단어를 구별하려는 문명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사실 그들 언어의 불완전성은 문명인들에게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두 말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믿으면 순종하게 되지 않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만문한다. 그들의 생각은 옳다. 오히려 문명인들이 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뻔뻔스러운 존재, 즉 외식자(외식자)로 우리 자신을 만들고 있다. 오히려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이 비록 미개한 민족이라 하더라도 문명인들보다 진리에더 접근해 있다. 적어도 그들은 문명인들이 빠져 있는 종교적 자가분열증에는 걸려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문명인들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불열신앙은 갖지 않은 것이다.
 
 ● 믿음과 의심
  어느 교회 사모님이 몸이 허약해서 늘 근심이었다. 병원에 검진을 하고 의사의 진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인 목사인들 편할 리가 있겠는가?
 말씀보고 기도하고 안정 부절 못했다.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하나님 말씀에 두려하지 말라 주께서 붙들어 주신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불안을 감출길 없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 다음날 결과를 알아보려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의사가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상입니다."그러자 사모의 얼굴에 화기가 돌고 얼굴이 밝아 졌다. 다음주 설교 시간에 남편이 강단에서 사람이 의사의 과학적인 토대로 한 말에 대해서는 금방 쉽게 받아 드려진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 기도한 목사의 말, 아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디 믿는다고 꼬집었다. 그렇다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연약하다. 목사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그날 진단을 하던 날 사모님이 먼저 병원에 가고 목사님이 병원에 뒤 따라 갔는데 시간이 남고 해서 혈압을 쟀는데 평상시 혈압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목사가 말로는 하나님께서 붙드신다고 아내에게 위로했지만 목사 역시 불안했던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믿음이 강한 것이 아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고 의심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다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주시리라."...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 믿음앞에 능치 않음은 없다
링컨은 게티스버그의 결정적인 전투전야에 매우 침착했고 자신에 차 있엇다.
 그의 이런 모습은 장교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다.
 "국가의 장래가 불투명한 기로의 시간, 어떻게 이처럼 담대하고 평온하실 수 있습니까?"
 장교들이 링컨에게 물었다. 링컨은 신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금까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국가의 장래를 맡겼소. 그분은 국가가 보전되리라는 것과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내게 주셨다오."

 ● 믿음에는 노력이 포함되지 않는다
 행 27:25; 요 20:27; 막 16:14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너력하는 것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오늘 일어난 일을 내게 말햇다고 하자. 나는 그를 향하여 "나는 당신이 말한 것을 믿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진실하다고 생각하면 그의 말 역시 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를 성실치 못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믿는다는 사실 중에는 `노력한다'는 요소는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다."라고 선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거나, 혹은 믿지 않아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거나 하는 둘 중의 한쪽을 선택해야 된다.(C. H. 스퍼전)
 
 ● 믿음으로
  1973년 2월. 그때는 버스 사역이 대단하던 시기였는데 그때 나는 버지니아 주의 린치버그에서 열린 교역자 회의에 참가했었다. 제리 포웰 목사의 버스 사역에 대한 간증을 통해 그 자리에 모인 우리 5천 명은 버스 사역에 대한 꿈을 갖도록 도전받았다. 나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존. 너는 1년이면 네가 처음 왔을 때의 교인 수만큼을 이 버스 사역을 통해 더 얻을 수 있을거다.” 당시 우리 교회 평균 교인 수는 418명이었다. 그런데 나는 버스 한 대조차도 없었다. 나는 나의 숙소로 돌아와 누우면서 말했다. “하나님. 정말로 제가 버스 사역을 하길 원하십니까.” 포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내일은 여러분에게 카드를 나눠드릴 겁니다. 여러분은 1년 내에 버스로 사역하고 싶은 신입 교인의 숫자와 여러분의 이름을 적어 제출하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앞으로 가져다가 여러분에게 읽어드릴 겁니다.” 나는 생각했다. “아냐. 말도 안돼. 온 세계에서 온 5,000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것을 발표하겠다고.” 나는 밤새 씨름했다 그 다음날 나는 그 카드를 받아들고는 418이라고 기록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는 카드를 제출 했고 그것은 5,000명 앞에서 읽혀졌다. 나는 “내 생애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연고로 나에게는 전도의 동기가 주어졌다. 포웰 목사는 우리 교회 임원회에 편지를 보내서 나의 목표를 알렸고. 나는 이 계획이 임원회에 상정되기도 전에 버스 구입을 위한 기금 마련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년의 기한 내에. 글자 그대로 그날로부터 딱 1년 만에 우리는 버스 사역으로 438명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서 꿈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에게 도전이 되는 것들은 감싸안고 앞에 놓여질 난관을 그려보라. 그리고 부정적이 아닌 적극적인 태도로 대응하는 연습을 하라. 그래서 그 도전들로부터 발견하는 법을 터득하도록 하라.

 ● 믿음으로냐, 두려움으로냐
 대하 20:20; 막 4:40; 약 1:3
  청년들이 보트를 타고 물가의 휘어져 굽은 곳을 건너자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런데 도중에서 풍랑이 심해지자 보트가 몹시 흔들렸다. 그러나 청년들은 침착하고 힘차게 노를 저음으로써 보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리어 풍랑과 싸운 것을 통쾌하게 여기며 즐겼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소녀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물결이 보트를 휩쓸때마다 놀라 떨며 부르짖었다.
 어쨌든 그녀도 배와 함께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단지 차이점이있다면 한편은 걱정과 공포로 여행했고, 다른 한편은 신념과 용기로 여행을 즐겼다는 것이다. (린드벅)
 
 ● 믿음은 생명을 지켜주는 빛
 어느 날 영국의계관시인인 테니슨이 친구와 같이 후원을 거닐며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친구는 테니슨에게 물었다.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테니슨은 말없이 한참 걷다가 가장 아름다운 꽃앞에 와서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여보게, 나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이 꽃과 저 태양의 관계와 같다네. 이 꽃은 태양의 빛과 열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 믿음은자라난다
  나는 1947년에 처음 내가 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지금이 더 많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믿음 자체의 성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947년에는 적은 믿음이었던 것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둘 다 적은 믿음이며. 단지 지금은 약간 더 커진 상태의 적은 믿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두 종류가 모두 풀어놓아지기를 기다리는. 내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성취하였을 때마다. 나는 내가 좀더 많은 믿음을 풀어놓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또다시 물 위를 걸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금광 탐색자가 귀한 광물을 아주 조금밖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 이상으로 당신이 적은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 낙심하지 마십시오. 금탐색자는 아주 적은 금부스러기라도 나온 곳에는 그보다 더 많은 양의 금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는 그것으로 인해 계속 금을 채굴하는 것입니다. 폭풍우가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하여 내리칠 때.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계속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줄까요. 그것은 당신이 가진 적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아주 작고도 작은 조그만 부분입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는 단지 적은 믿음을 가지고서 그처럼 엄청난 일을 했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도 의심과 섞여 있었던 믿음이란 사실을. 이처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받으셔서 그것으로써 이적을 행하시는 아주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 믿음의 격려
 윈스턴 처칠 수상은 후배들과 수행원들을 잘 격려해 주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한 번은 자기의 후배 중 국회의원이 된 사람 하나가 국회에서 처녀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연설이라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읍니까. 그래서 말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처칠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쪽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연설 도중에 이 사람이 메모를 받았습니다. 그 메모의 맨 밑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너는 해낼 것이다. 처칠.”
 이 격려로 그는 용기 백배하여. 연설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믿을 만한 한 사람의 격려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만물을 손에 쥐고 계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삶이 형통하지 않겠읍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내 음성을 들어라.
 그리고 내 음성에 순종하라.”
 만약 이런 말씀이 나에게 들려와 내가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있다면..
 우리의 눈이 열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의 귀가 열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인생은 황무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황무지를 가나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황무지와 계곡이 도사리고 있는 험준한 땅 속에 젖과 꿀이 흘러내리는 기적을 창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믿음의교훈
  어린이들은 아주 작은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스미쓰씨 가정의 잭키는 사랑하는 개가 갑자기 죽어버려 몹시 슬퍼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잭키를 위로하였다. “잭키야. 네 마음이 어떨지 잘 안다. 그렇지만 이걸 기억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다 아시고 보살피고 계신다는 걸. 성경에서 이렇게 말했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 개에 관한 일도 알고 계시지 않겠니? 잭키야. 주님께서는 어떤 목적없이는 결코 아무것도 우리에게서 빼앗아가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대신 더 좋은 것을 주실 때가 참 많단다.” 이틀 후 친구가 조그만 콜리종 강아지를 가져다 주었을 때, 잭키는 믿음의 교훈을 얻게 되었다. 잭키는 언제나 콜리종 개를 가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에게는 그 개를 사줄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제 잭키는 아버지가 설명해 준 바로 그대로, 주님께서 그 강아지를 자기에게 보내주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전쟁, 폭동, 휴전위반, 불신앙과 그외 수많은 일들은 그들에게 극심한 당황을 가져다 주게 된다. 그들은 이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여러 시대를 거쳐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왔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모가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에 비추어 해석해 주는 가정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훨씬 더 평화로울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

 ● 믿음의 그릇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타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링게르병을 가지고 왔고, 또 어떤 이는 스페아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군인들이 가지고 온 빈병에 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박카스병은 박카스병만큼, 링게르병은 링게르병만큼, 스페아통은 스페아통만큼 꿀을 부어 주었습니다. 그후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를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소? 나는 빈 그릇을 가져 오라고 했고 그 빈그릇대로 채워 줬을 뿐이오."하는 것이었습니다.

● 믿음의 기도
  중요한 수술로 어머니가 3주 동안 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었읍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생전 처음으로 목격했읍니다.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읍니다. "네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 몇 시간을 주기로 크게 위급한 상태가 반복되고 있단다. 심장의 박동이 멈춘 적도 있었다고 하더라. 의사 선생님은 네 어머니가 얼마 더 살지 못할 거라고 하는 구나.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읍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읍니다. 그 이튿날 아침, 마치 내 기분을 말해 주고 있기나 하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읍니다. 나는 속으로 흐느끼며 길을 걸었읍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럴 수는 없어요. 제발 우리 엄마가 죽지 않게 해 주세요. 내게는 엄마가 있어야 돼요. 아빠에게도 엄마가 있어야 돼요. 우리는 모두 다 엄마를 필요로 해요... 나는 주님께서 엄마를 고쳐 주실는지 정말로 알고 싶어요. 엄마를 살려 주실지 제게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제발 어떻게 해서든지 제게 좀 보여 주세요. 주님!" 이렇게 나는 간절히 기도했읍니다. 이렇게 기도해 놓고서 나는 난처해졌읍니다. 어떤 방법으로 보여 달라고 한다지? 하는 머리 위에 시커멓게 몰려 있는 구름을 쳐다보면서 얼결에 "주님, 엄마를 낫게 해주실 것이라면 지금 저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치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읍니다. 거의 순간적으로, 구름이 갈라지면서 햇빛이 쏟아져 내렸읍니다. 곧이어 틈은 다시 메꿔져 버렸읍니다. 그렇지만 나는 알았읍니다. 사흘 후 우리 형제들이 거실의 낡은 청색 카펫트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읍니다. 아빠의 기뻐하시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 왔읍니다. "위험한 순간은 지나갔다. 엄마는 곧 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내가 어찌 의심할 수 있었겠읍니까?

● 믿음의 기도
 어떤 가련한 과부는 많은 액수의 요금 청구서를 받아들고 큰 낙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요금을 이미 다 치뤘는데도 청구서가 다시 날아왔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미 치룬 영수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요금을 다시 지불해야 되지 않을까 두려워 했습니다. 그녀가 가진 돈은 자기 남편의 장례비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영수증을 찾게 해달라고 주님께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수금원이 그 과부의 집을 방문하여. 만일 그녀가 며칠 안으로 요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법정에 고소하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바로 그 때 나비 한 마리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이걸 본 그녀의 어린 아들은 그것을 잡아 학습 과제물에 보탤 욕심으로 그것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그것을 잡으려 하자 나비는 소파의 등 위에 내려 앉았다가 그 뒤로 기어들어가 버렸습니다. 소년은 그 무거운 가구를 혼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수금원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가구를 밀어제끼자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집어든 과부의 눈은 기쁨과 흥분으로 동그랗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영수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간절한 믿음의 기도를 존귀케 하셨던 것입니다.

● 믿음의 깊이
 블론딘이라는 유명한 곡예사가 세계 최대의 폭포인 나이애가라에 쇠줄을 매달고 그 줄위를 자전거로 건너가는 묘기를 선보였다. 수천명의 관중들은 환호했다. 블론딘은 "이번에는 아이를 업고 줄을 타겠소.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관중들은 "할 수 있소"라고 외쳤다.
 그러나 블론딘이 "여러분의 자녀중 일곱살 미만의 아이를 올려보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관중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인생을 맡기라"고 하면 침묵하는 것이 현대인의 나약한 모습이다.

● 믿음의 나락
  코끼리를 산채로 잡는 사냥법입니다. 먼저 코끼리를 정글로부터 유인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우리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코끼리의 발목에 든든한 쇠사슬을 매어 놓고 한 끝은 튼튼하고 굵은 나무기둥에 묶어 놓습니다. 그후 우리를 치우면 야생의 코끼리는 정글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발목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몇발작 걷다가는 저지를 당합니다. 처음에 코끼리는 쇠사슬로부터 놓여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있는 힘을 다 동원해 보지만 계속 실패를 하게 되고 결국엔 체념하며 비록 코끼리가 끊고 도망갈 수 있을 정도의 기둥과 줄에 묶어놔도 조금만 줄이 팽팽해지면 힘쓰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대로 줄을 잡아당겨 코끼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체념은 소망을 포기하는 행동이며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처음의 고통이나 고난이 비록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다리며 노력하면 결국에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믿음의 모본
  저는 “아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간첩”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귀찮은 손님이 찾아와서 “주인 양반 계십니까?”하고 묻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침에 일찍 나가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 광경을 아이가 봤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 저럴 때 저렇게 거짓말을 하시는구나.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데도 안 계시다고 하는구나. 거짓말을 해도 되는구나.' 그래서 거짓말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전화로 옆집 부인 흉을 봅니다. “우리 옆집 새댁은 어른을 봐도 인사는 커녕 본 척도 안해요.” 아이가 옆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그 말을 들었습니다. '아, 전화로는 저렇게 남을 흉보는 것이구나.' 부모의 사소한 행동을 모두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려주면 아이는 '아니 어떻게 된 일이지? 아빠, 엄마는 안 그러시면서 흉보는 것이 사랑하는 건가 뭐'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자녀 앞에서 위선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모른다고 생각되겠지만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아이들은 똑똑합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때 첫째는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원하시면 기도하는 모본을 보이십시오.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으시면 당신이 먼저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많은 아버지들은 “교회 가서 손해볼 것 없으니까 애들이나 데리고 가. 나는 안갈래”합니다. 그것이 무슨 본입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가르쳐야 됩니다.

● 믿음의 모험
  얼마 전 워싱톤에 있는 조폐공사에 한 관광팀이 도착하여 녹인 주물을 동전의 모형에 부어넣는 과정을 견학하였다. 직
 공은 한 남자에게 이렇게 제의하였다. "선생님, 당신이 손을 물에 대고 있으면 제가 이 주물을 붓겠읍니다. 그래도 손
 이 화상을 안입게 되지요. 한 번 시험해 보실까요?" 그랬더니 "천만예요, 그러나 당신 말은 그대로 믿겠읍니다"라고 그
 남자는 대답하였다. 그 때 그의 아내가 왔으므로 직공은 그녀에게 같은 제의를 했다. "네, 좋아요"라고 그녀는 선뜻 동의하였다. 실험이 안전하게 끝나자 그 직공은 남편되는 사람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저를 믿는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사모님은 저를 신뢰하셨답니다." 아내는 직공의 말과 기술을 믿고 대담하게 모험을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모든 것을 걸었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믿음은 어디로 인도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희생제물로 준비했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이 이삭을 원하시며 '어떻게'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루실 것인지를 몰랐다. 모험적인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신실한 자의 아비가 되게 하였다.

 ● 믿음의 비교
  5월달에 우리 나라에 들어온 둘로스라고 하는 선교선이 있습니다. 350명의 선교사들을 태우고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선교를 하는 배입니다. 작년 8월10일 토요일에 텝리핀 잠보앙가라고 하는 곳에 선교사들이 내려서 전도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회교도인 젊은이가 나타나서 수류탄을 던져서 선교사 두 명이 즉사하고 32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선교사는 스웨덴 출신인 18세의 소피아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19세의 카렌이란 아가씨인데 뉴질랜드에서 왔습니다. 꽃다운 젊은이들이 죽은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들은 배에다 전보를 쳤습니다. 뭐라고 쳤는지 아쁠니까? “우리는 이 비참한 일에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 내용을 직접 읽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어떻게 이처럼 대범할 수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교한 것입니다. 자기 딸이 죽은 것하고 장차 주님께서 약속한 영광하고 비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 딸이 피지 못하고 꺾였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한 것이니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비교를 한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딸을 잃은 슬픔을 가누기 어려웠겠지만 이 슬픔은 장차 주님께서 나타나실때 주실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더 복음을 열심히 전하시오”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믿음의 선물
주여 제게 믿음을 주소서
매일 매일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평온한 마음을 주시고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손을 붙잡아 주소서
모든 것 가운데서
당신을 찾을 수 있는 고요한 마음을 주소서
주께서 원하시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순전한 영혼을 주소서
미래는 주께서 주신 선물
주의 사랑을 믿기에
두려움 없이 그 앞으로 나아갑니다
-영국 시인 J.옥스남의 '믿음'-


● 믿음의 연단
  뮬러의 기도로 운영하는 사업이 외관상으로 화려한 것 같으나 실은 믿음의 연단 속에서 맺어진 결실이었다. 어떤 때는 육 년을 연달아 극한 믿음의 시련을 견뎌야만 했다. 한 번은 아이들에게 아침끼니를 이어주어야겠는데 양식이 떨어져 버렸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굶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뮬러는 아이들 전부를 빈 식탁 둘레에다 않혀놓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오늘도 아침 식사를 주시니 감사 합니다. 아멘."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으나 식탁 위엔 빵조각 하나 얹혀져 있지 않았다. 그 때였다. 대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힘겹게 들어서는 사람은 빵이며 고기를 잔뜩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가까스로 들어오는 이웃 음식점 사람이었다. "어젯밤까지 손님을 다 치르고도 남은 것들을 주체할 데가 없어 고아원으로 끌고 온 것이다"고 했다. "믿음을 강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연단뿐이다."는 것은 뮬러가 늘 즐겨 쓰는 말이었다. 믿음의 연단이 아니고는 참 믿음, 거짓 믿음을 분간할 수 없다. 믿음이 참 믿음으로 나타나기는 연단을 통해서 뿐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연단 하신다. 연단 뒤에 오는 축복은 너무나 광명스럽고 놀라워서 말을 못 한다.

● 믿음의 열매
 1955년 미국에서 흑인가수로는 처음 메트로폴리탄에 출연, 영감있는 노래로 관중을 사로잡은 여가수가 있었다.
 마리아 앤더슨. 그녀의 대표적인 곡은 '그 누가 나의 괴로움 알며'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인종과 피부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불행한 날을 보냈다. 그러나 기독신앙은 모든 고난을 이기고 더욱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
 "내 괴로움을 아무도 모르나 오직 주님은 아신다."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며 현실을 극복했다. 주님이 내 괴로움을 아신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 믿음의 열매
 1811년 영국의 바드게이트라는 한 지방, 조그만 빵집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이 소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19세기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의학자'라는 칭송을 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심프슨.
 현대의학의 시금석이 된 마취제를 발견한 주인공이다.
 그는 앞날을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힘든 현실을 극복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그와 함께하신 것이다.

● 믿음의 위력
 오래 전 평안북도 정주에 살던 가난한 농부가 열병을 앓앗다. 이웃에 살던 크리스천이 이 사람에게 신앙을 가지라며 전도했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완강히 거부했던 농부는 나중에 외국인 선교사의 방문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날 이 농부의 열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진짜 '유익한 일'이 후세에 나타났다.
 이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복음 안에서 성장, 1946년 지금의 연세대 초대 총장이 된 것이다. 백낙준 박사 이야기다.

● 믿음의 응답
 두려움이 많은 세상이다. 불행이나 고통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불쑥 우리에게 찾아와 삶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영원한 약속」인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55:22).외국에서는 이런 글귀가 적힌 액자를 현관 입구에 걸어놓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불안이 노크할 때 믿음으로 응답하며 나아가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 믿음의 잔
  믿음은 두 가지 요소, 즉 믿는 것과 신뢰하는 것으로 이루져 있습니다. 당신은 은행이 당신을 위해 당신의 돈을 보관할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의 돈을 은행에 맡길 때까지는 은행에 대한 믿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기차가 당신을 어떤 곳에 태워다 줄 수 있다고 믿지만 당신이 기차를 타고 그것이 당신을 목적지에 데려다 줄 것을 신뢰할 때에만 기차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그의 모든 전투 때마다. 그를 따라다닌 좋은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의사를 질투한 어떤 사람이 그를 없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의사가 어느 날 아침 알렉산더 대왕의 컵에 독약을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의사를 당장 처형시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식사 때 알렉산더 대왕은 그 편지를 모인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자기가 의사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컵을 집어 그 안에 든 것을 마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믿고 그 의사를 신뢰하였습니다. 복음은 그처럼 단순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 믿음의 전도는 영원하다
 스펄전(1834-1892)은 널리 알려진 영국의 대중전도자.
 어느 날 스펄전이 택시를 탔을 때 기사가 "손님. 아주 오래 전에 손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군요."
 스펄전의 말에 기사는 주머니에서 빛바랜 신약성경을 꺼내며 정중히 말했다.
 "10여년 전이었으니 기억하시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요. 그때 손님께서 이 조그마한 성경을 주시며 읽어보라고 하셨지요. 저는 이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다시 태어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 믿음의 축복
 이스라엘 우화.
 창조주께서 처음 새들에게 날개를 주셨을 때 새들은 그것이 '창공을 나는 특혜'인 줄 모르고 "뭐 이런 것을 달아주셔서 다니기 불편하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불평했다.
 "그것은 날개다. 힘껏 펼쳐 보아라."
 창조주께서 말씀하셨지만 새들은 불평만 하고 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용감한 독수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 힘껏 날개를 펼쳤다.
 이렇게 최초의 비상은 섭리에 따른 믿음에서 이루어졌다. '고통의 짐'을 '은혜의 날개'로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 복을 얻는다.


● 믿음의 행보
  한 세균학 검사실에서 3백여 종류의 우유 견본 검사 의뢰가 들어왔는데 조수가 교수에게 일이 벅차겠다고 걱정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한 번에 하나씩만 하면 벅차지 않아”라고 말했다. 이 평범한 말 가운데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산더미 같은 일생의 과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다가 부담이 되어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고 해보면 쉽게 풀리는 것을 기억하고 꾸준히 끝까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오게 된다. 하루 한 시간씩 집중적으로 성경을 일생 동안 공부하면 신학자가 될 수 있고 하루에 한 사람 전도하면 최대의 전도자가 될 수 있다. 거북이처럼 걸어가야 한다. 신앙은 인내이기 때문이다. 욥은 졸지에 재산을 잃고 자녀도 건강도 그리고 아내도 잃고 친구의 공격을 받았지만 믿음의 행보를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면 후 일에 보람을 지닐 수 있다. “보라! 난 이겨냈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번이라도 패배가 싫으면 아예 시합을 말아야 되듯 고통과 패배가 없는 삶을 원한다면 차라리 삶을 포기해야 한다. 주검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 패배, 고난, 슬픔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탕자를 찾고 계신다. 머리에 과학의 모자를 쓰고 허리에 이성의 칼을 차고 등에는 재물의 배낭을 메고 손에는 쾌락의 지팡이를 짚고 사는 현대의 탕자를 부르고 있다. 하루에 한 발자국만 주님 앞으로 나아가자.

● 믿음이 슬픔을 덜어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나는 절친한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의 동료 목사인 그는 방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발지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사망 통지서를 받은 터였다. 그 아들도 목사가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고 충분한 성직자의 자질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그와 내가 침묵 속에서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는 차분하고 사랑스럽게 아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나는 한탄하거나 하나님께 반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 아들은 가 버렸다오. 언젠가는 그 애를 다시 만날 수가 있겠지요. 한 가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제 그 아이가 여기 없기 때문에, 내 몫의 목사직뿐만 아니라 아들 몫까지 두 몫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할 작정입니다." 그는 이 불가피한 사건을 용기있게 받아들였으며 그를 좌절시키는 힘과 싸워서 승리한 것이다. 우리가 슬픔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지닌 믿음의 크기에 따라 그 슬픔을 유발하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존 수더랜드 보낼]


● 믿음이 지켜지는 좋은 세상

터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옛날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을 때 한 가난한 여인이 왕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제가 잠든 사이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달아났습니다"라고 말했다.
"물건을 생각하면 잠들지 말았어야지. 어찌 잠들었는가?"
왕이 묻자 여인은 "저는 폐하를 믿고 편히 잠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늘 깨어 백성을 보살펴 주시리리라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이 '믿음의 여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
하나님을 이처럼 믿고, 서로가 서로를 이처럼 믿는다면 '좋은 세상'이 될 텐데….

● 믿음이라는 줄

한 소년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연이 너무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타래에 묶인 실이 곧바로 서 있는 것을 보고 연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소년을 쳐다보며 "연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는구나. 너는 아니?"라고 물었다.
소년이 대답했다. "그럼요. 이 줄을 잡아보세요. 팽팽하잖아요. 연은 보이지 않지만 제 머리 위쪽에서 푸른 하늘을 날고 있어요. 줄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지요."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키시고 복 내려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안다. 우리의 '연줄'은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 믿음 있고 사랑 없는 것이

바리새교인이란 반드시 위선자는 아니었다.
모범적 바리새인이란 믿음 있고, 사랑없는 자였다.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 라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면 구원되리라고.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충돌은 사랑과 믿음과의 충돌이었다.
보다 좁은 믿음이, 보다 넓은 사랑의 우선권을 인정할 수 없어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양자가 한가지로 하나님께 쓰이려했다.
바리새인은 믿음으로써, 예수님은 사랑으로써 그러므로 저 신성한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 믿음 표

어떤 교우가 꿈에 새 예루살렘성에 가 보게 되었읍니다.
높은 시온산 꼭대기는 새 예루살렘성을 잘 지었는데 금강석과 홍보석과  가지 각색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성이었읍니다.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성에 가까이 왔구나.”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올라가 보니 큰 문이 있는데 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된 문이었읍니다.
“야. 내가 새 예루살렘성에 왔구나” 생각하고 문을 두드렸읍니다.
두드리자마자 문이 곧 열리더니 베드로가 척 내다봅니다.
“저는 아무 교회에서 온 아무개올시다.”
그러니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성에 들어오려면 믿음표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표 가지가 왔느냐.”
이 분이 “네. 가져왔읍니다”하며 안주머니를 만져 보니 믿음표가 없어졌단 말입니다.
옆 주머니를 보니 거기도 없단 말입니다.
아무리 뒤져도 믿음표는 없었읍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졌읍니다.”
그러자 장사꾼이었던 이 분은 사정을 해보았읍니다.
“나에게는 믿음표가 없지만 아무 교회에 십년 이상을 다니고 했는데 좀 들어갈 수 없읍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안되네. 아무리 오래 다녀야 쓸데 있나 믿음표가 있어야지.”
“그런게 아니올시다. 사실은 제가 그 교회에서 장로 일을 십여 년이나 봤읍니다. 그래도 좀 들어갈 수 없읍니까.”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이 “아니. 장로 십여년이나 믿음 없이 했으면 말썽꾸러기였겠구먼. 그게 무슨 쓸데가 있어”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읍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질이 급한 분입니다.
문을 꽝 닫는 소리에 깨 보니 꿈이더랍니다.
그것이 꿈이었기에 다행이지 꿈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읍니까.







05-16-2024(목) 요한일서 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을 이기는 자(5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Who is it that overcomes the world? Only h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아들의 믿음인가?
아니면 종의 믿음인가?
아들의 믿음은 은혜와 축복
종의 믿음은 억지로 하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의 간증
"내가 회심을 하고 중생을 체험하기 전에도 선교사였으며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열심으로 믿었고 온갖 교회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들의 믿음이
아니요 종의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종의 믿음은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믿음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는 메세지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도 동일하게 선포합니다.
사도 요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선포하셨습니다(요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세상을 이긴다는 말씀이 바르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과 부정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말씀이 세상을 이기지 못한 때에 위로가 될 수 있지만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제각각 흩어질 제자들을 보면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을까요?
이제 출발한 연약한 믿음의 공동체들에게 요한서신을 마감하면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선언이 잘못된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다는 선포에 대한 의심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선포에 대한 의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이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싸움도 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의심이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의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사단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믿음으로 승리하셨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들은 싸움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의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의심을 걷어내고 나를 위하여 먼저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승리하셨던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승리할 것을 굳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이기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 따라가며









의심을 물리칠 수 있는 강한 믿음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가열갛

이런 이유로 인해 종종 우리들이 이단들의 접근에 대해, 그들의 확신 있는 질문과 선포에 대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결국에는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의심을 깨뜨리고 다시금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신 있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아니 우리에게 주어진 다섯 가지 분명한 확신을 반복해서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다섯 가지 확신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13절부터 20절까지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13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구주(메시야)로 영접한 순간 우리에게 영생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첫 번째 확신은 늘 우리에게 제기되는 두 가지 질문을 상기 시킵니다.  첫째는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과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구원 자체와 또한 구원 받은 사실에 대해서 많이 의심하고 있음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외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구원과 구원의 확신은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하나님의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에 의지하여 구원에 대해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제기되는 질문은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영생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질적인 문제와 양적인 문제가 대두됩니다. ‘영생을 얻는다’, ‘영생 안에 산다’라는 말은 결코 변하지 않는 최고의, 최상의 조건 속에서 저희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라는 말을 의미합니다. 육신으로서 우리의 인생의 항해가 끝나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다시금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눈물도 슬픔도 그리고 고통도 없는 그런 영원한 삶을 저희가 누리게 될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초대교회 사람들이 살았고, 우리 모두도 이런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소원합니다.

두 번째 확신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처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 우리에게 특권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에서 그 특권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은 우리를 아신다는 말이며, 우리의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의를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정욕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는 간절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방법과 때를 따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볼 단어가 하나 있는데 ‘담대함’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함,  의심과 불안에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당당함을 표현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저 응답해 감사하고 안들어 주시면 안들어 주시는 대로 체념하는 믿음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이 특권을 누리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번째 확신은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로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앞서 있는 3장 6-10절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반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예수 믿는 우리들을 가르킵니다. 악한 영이, 사탄의 권세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키시기에 우리가 범죄할 수 없고, 영원히 그것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노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죄의 유혹의 손길을 과감히 뿌리칠 수 있는 확신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네번째 확신은 우리는 누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으며, 누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이 말씀은 우리의 소속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다’라는 말은 사탄이 도무지 침범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릴 때 보면 보이는 환경은 그러할 수 없지만, 그 평안과 기쁨과 감사는 도무지 다른 것이 침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편견과 눈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그에게 속했기에 하나님의 식과 방법을 고집하는 중요하지,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를 좌지우지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섯번째 확신으로 넘어갑니다. 우리에게 주신 다섯번째 확신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20절) 사실 13절부터 20절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보면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의 확신까지는 모두 ‘오이다’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직관적으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라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해서 있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우리 안에 확신을 심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20절에 쓰인 ‘안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그노스코’입니다. 경험적, 습득적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들을 보다 더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우리를 향한 끊을 수 없는 사랑과 자비를 가지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마음 속 깊이 각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4-5)

사도 요한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확신들에 대해 재차 강조하면서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권면을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던집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21절). 얼핏 보면 불쑥 튀어 나온 말이고, 편지의 맺음말로 보기에 다소 엉뚱한 것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앞의 다섯 가지 확신의 가장 기초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진 믿음은 결국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를 질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분명할 때 그것은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안에 잘못된 믿음의 대상들(이것들이 우상이지요)을 담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오히려 세상에 져서 괴롭고 왜곡된 삶을 살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준 권면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되 우리의 모습과 형편과 처지가 제각각 다르지만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다면 우리가 세상의 편견과 자존심 싸움에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그 믿음이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로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망하여 자녀들 때문에 행상을 해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금 그전의 부의 노예가 아닌 믿음의 자유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이 증폭되어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인생 가운데 펼쳐지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혹 우리의 믿음을 연약하게 하는 우상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숨긴채 우리 안에 계속 담고 있지 않습니까? 혹 그것이 사라질까 두려워하고 의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믿음 안에서 이런 우상들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이 우리 가운데 역사해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간섭을 경험해서 아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05-15-2024(수) 요한일서 5: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명들을 지키는 것(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This is love for God: to obey his commands. And his commands are not burdensome,

계명 -
계명(誡命) - 경계할 계, 목숨 명 / 종교(宗敎)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條件)

엔토래(ĕntŏlē) ἐντο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785

1. 계명. 2. 요 11:57. 3. 눅 23:56
발음 [ ĕntŏlē ]
어원 / 178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계명, 명령.
 a. [사람의] 요 11:57.
 b. [하나님의] 눅  23:56, 롬 7:8, 고전 14: 37, 엡 6:2, 딤전 6:14, 벧후 2:21.

계명(마 5:19, 막 7:8, 눅 1:6), 명(눅 15:29), 명령(막 10:5, 요 11:57, 딤전 6:14), 명하신 것 (벧후 3:2), 말씀(마 15:6).


계명(미츠와) = 도덕법(Moral Law)
​- 구약에 기록된 내용
- 십계명
- 계명 = 하지말라 365개(1년) / 하라 248개(뼈, 장기의 수)

율례(호크) = 종교법(Religious Law)
​ - 구약에 기록된, 십계명을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내용
- 성막, 제사, 절기 등

법도(미쉬파트) = 사회법(Social Law)
 - 법 실천을 위한 세부적인 적용(십계명 중 인간 사이의)



율법 = 계명 + 율례 + 법도
 - 미쉬나(약 AD 200년 경 구전 율법 정리 집대성)
 - 미쉬나(=반복) = 6분류(농경법, 절기법, 여자에 관한 법, 손해에 관한 법, 성물(聖物)에 관한 법, 정결 의식법)
 - 탈무드 = 미쉬나의 주석
 - 탈무드 = 예루살렘 탈무드(단순 간결) + 바벨론 탈무드(섬세, 지루한 편집) 
 - 미드라쉬 = 율법 해석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동 경기로 비유합니다(육상 딤후 2:5. 씨름 엡 6:12).
때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씨름과 흡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권세자와 통치자 그리고 마귀와 귀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 육신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철저하게 공격을 시도합니다.
그 싸움 즉 영적 씨름의 결과는 때로는 이길 때도 있지만 질 때도 있습니다.
만약 영적 싸움에서 실패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원인을 계명대로 싸움터에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기는 자(니케. nike)를 위한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승리할 때 받을 상을 먼저 생각하며 힘든 과정과 어려움을 참고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신다(계 2:7)
에베소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둘째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계 2:11)
서머나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셋째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주십니다(계 2:17)
버가모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넷째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계 2:26)
두아디라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다섯째는 흰옷을 입으며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계 3:5)
사데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여섯째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계 3:12)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일곱째는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게합니다(계 3:21)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약속입니다.

모든 교회가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것을 약속을 통하여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매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믿는 자”의 ‘믿다’ 라는 동사 시제는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믿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서 ‘나다’ 라는 동사 시제는 완료형으로 이미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시작되어 계속해서 그 결과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신 자,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따라 거듭난 자는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해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행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역시 그렇습니다.
자기 노력과 열심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곧 하나님이 낳은 것입니다(요 3:8).
‘원하는 자,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셨습니다(롬 9:16;. 요 1:13).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것입니다(약 1:18).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본문에서도 요한은 맹목적으로 믿는 믿음을 말하지 않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했다(1, 5절). 예수님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모두 다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반드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 스스로 혹은 남이 만든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승리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연합한, 그래서 영원히 사귐을 갖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셔서 반드시 그들을 이기기 때문이다(요일 4:4).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고(요 16:33), 바울은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확신했다(롬 16:20).

그리스도인은 싸움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계시록 20장과 21장을 보면 마귀와 그 수하들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고(계 20:10), 사망과 음부, 마귀와 세상을 좇던 자들(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 역시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0:14-15).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친밀한 사귐 곧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인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을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두라. 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도저히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 힘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을 확신하라(롬 8:37).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고전 15:57). 지는 것처럼 느껴져도 절대 지지하는 팀을 바꾸지 말라. 결국엔 하나님 편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풍성한 은혜로 당신을 하나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이 당신이 끝까지 믿고 따를 분이다.

2. 이기는 자는 사랑하는 자다(1-3)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참된 믿음, 산 믿음은 그에 따른 ‘행함’을 맺는다(약 2:26).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께 믿음을 둔 자가 이기는 자이고, 그 믿음이 참되면 당연히 그에 따른 열매가 나타난다. 성경은 그 모든 행함을 요약하여 ‘사랑’이라 부른다.

1-3절까지 사랑은 두 가지 대상을 향해 나타나는데, 먼저 성도를 향한 사랑이다(수평).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3절에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주목한다(수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절). 2절에선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서로 별개의 행함이 아니라 단단히 결합된 행함이라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여기서도 논리적인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앞서 우리의 믿음(신앙)이 새로운 출생을 가져오고 그 결과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시고 그 결과 하나님께 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갖게 하신다고 배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이 승리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참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열매다.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사랑이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가 사랑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사랑은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맺고 있는 영생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자라는 걸 계속해서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이를 분명히 한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신 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 곧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벧전 1:22). 영적으로 태어난 자는 영적인 형제, 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된다(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요한은 그래서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했다(3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또 주시기 때문이다(빌 4:13).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무겁지 않은 명령인가? 

실제로 느끼기엔 그렇지 않을 수 있어도, 몇 가지 면에서 확실히 그렇다. 첫째, 유대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만든 여러 가지 규칙과 전통은 사람을 옭아매고 결국 아무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지옥 자식이 되게 하지만(마 23:15),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형제자매 사랑은 이미 온전히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법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갈 5:1). 그래서 훨씬 가볍다.

둘째, 우리가 성도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마 11:30).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성도를 기쁨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사랑과 순종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한다’ 말하면서 불순종하는 자를 악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고(요 14: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본문에서 요한도 아멘으로 화답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3절).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2절).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래서 사랑하기 쉬운 형제자매, 어려운 형제자매 모두를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 4:8). 그러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뜨겁게 사랑하실 것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거처를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요 14:23). 무슨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영생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귀와 세상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모든 자가 불못에 던져질 때,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자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적용

앞에서 다룬 믿음 그리고 사랑이 우리가 승리한다는 소망을 보게 한다. 그러면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시작하신 사랑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기는 자답게 살 수 있을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이기는 법을 이렇게 제시했다.

절제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향해 공격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규모 없고 무절제한 삶, 게으른 삶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 적으로 성공한 자도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남들 다 알고 남들 다 하는 일을 과감히 버리고 관심 두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한다.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그러는데 썩지 아니할 것을 얻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절제해야겠는가? 모든 뉴스, TV 프로그램, 유튜브, 화제의 인물, 정치 경제적 이슈, 돈 많이 쉽게 버는 법, 예뻐지고 잘생겨지는 법 등을 알 필요는 없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더욱 알아가는 일, 그래서 하나님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라.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라.

기도하라. J. C. 라일은 기도를 가리켜 믿음의 호흡이라고 말했다. 우리 믿음이 숨을 쉬려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오직 하나님께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신뢰하며 아뢰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믿음이 점점 연약해지고 거의 없는 것처럼 희미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 믿음으로 마귀와 세상을 대적하며 산다면 우리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평생 패배자처럼 힘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성공적인 설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런 설교는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거룩을 불러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이기는 자로 살려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원에 이르는 열매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면에서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절제와 더 많은 기도를 요구한다. 더 많이 절제하여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사랑을 기도와 절제로 더욱더 굳건하게 만들어 승리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가 적은 무리, 힘없는 패배자처럼 여겨질지라도, 결국엔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들과 딸로 승리의 보좌에 함께 앉아 다스리며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되길, 이기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계명

한자: 誡命, 영어: Commandment, Command(KJV, NASB, NIV)

하나님의 선민(選民)에게 지키라고 준 명령

계명의 종류

하나님의 계명
모세 율법

모세
를 통해 출애굽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언약의 말씀을 두 돌 판에 기록하여 주셨다(출 19:5~6, 출 34:28).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계명을 지켰을 때와 지키지 않았을 때의 결과인 과 저주를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신 28장).
솔로몬왕 때 온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좇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 곧 언약을 어겼다(왕상 11:9~11, 호 6:7).

1.1.2.

자유 율법(새 계명)

사람의 계명(장로의 유전)



가장 큰 계명



가장 큰 계명 (또는 대계명)은 신약 마태오 22:35–40, 마르코 12:28–34, 루카 10:25-28에서 예수가 인용한 두 계명 중 첫째를 설명하기 위해 쓰이는 이름이다.

마르코에서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리스어 신약은 예수가 둘째 계명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를 언급하기 전에,[1]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했다고 기록한다.[2]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는 이 두 계명이 올바른 기독교인 생활 양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3]

신약 설명

마태오의 복음서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에는 셰마가 포함되어 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루카의 복음서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의 복음서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주실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구약 언급

레위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마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주님이다.

신명기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여라.



사랑의 A, B, C, D, E, F, G

Accept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상대방을 고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존 그레이 박사는 "결혼이란 화성인인 남자와 금성인인 여자가 지구에서 만나 함께 지구인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Believe
믿는 것.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된 가정이 행복합니다.
의심하면서 한 지붕 아래 산다면 마치 어느 영화제목처럼 '적과의 동침'과 다름 없습니다.

Care
돌보는 것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돌봄'은 곧 관심입니다.
기쁘고 행복할 때보다 어렵고 힘들 때에 돌보는 것이 더욱 값진 것입니다.

Desire
기대하는 것. 요구하는 것
소망을 갖고 꿈을 갖는 일입니다.
서로가 잘되기를 위하여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크게 될 것을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Erase
지워버리는 것
상대방의 허물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약점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자꾸 들추어 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Forgive
용서하는 것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용납해주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Give
주는 것
주고받는 것이 사랑입니다만 더 큰 기쁨을 주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줄 때입니다.



05-14-2024(화) 요한일서 4:17-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사랑(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

온전한 사랑(Perfect in love)
온전한이란 헬라 단어는 "헤 텔레이아 아가페(η τελεια αγαπη)" 라고 하며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온전한 사랑(the perfect love)"이라고 하겠습니다.

온전한(텔레이오스. tĕlĕiŏs) τέλειος, α, ον 스트롱번호 5046

1. 목적을 달성한.  2. 히브리서 9:11. 3. 로마서 12:2
발음 [ tĕlĕiŏs ]
어원 / 5056에서 유래

온전한(마 5:48, 고전13:10, 약1:4), 장성한 (고전14:20, 히5:14). [부] 온전히(빌3:15, 약1:4).

(이야기) 어느 스님과 냉수 한 사발 및 사과 한 개
사랑으로 주는 것은 버릴 것이 없다!
스님의 질문 /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기독교에는 용서가 있다.
불교에는 용서가 없다.

(이야기) 어느 자매의 이야기
언니가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야 한다.


온전한 사랑의 결과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첫째는 기쁨의 충만을 위하여(joy complete)(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둘째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you will not sin)(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셋째는 영생을 위하여(you have eternal life)(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온전한 사랑을 회복하면 세 가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세 가지 결과를 위한 질문에 대한 나의 신앙을 바르게 검증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생활이 즐겁습니까? (예, 아니오)

일상의 삶에서 죄를 범하지 않습니까? (예, 아니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셨습니까? (예, 아니오)

세 가지 질문에 모두 긍정적인 고백이 가능하다면 온전한 사랑을 유지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만일 부정적인 대답이 하나라도 있다면 좀 더 실천적인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혼예식을 진행할 때 주례자는 신랑과 신부에게 사랑의 약속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모든 신랑과 신부가 예라고 대답하면서도 살아가면 '예'가 '아니오'로 변질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온전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온전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온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 의해서 찾아볼 수 있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징표를 보여줄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행 9:31; 롬 3:18; 고후 5:11; 7:1; 엡 5:21).
그러나 본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 19:38; 20:19; 롬 8:15).
이러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 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반의 접속사인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특징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있지요?
요한일서가 기록된 목적을 세 부분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요한일서를 얼마나 많이 읽으셨는지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은 요한일서에 관한 성경공부를 했든지 그것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요한일서가 기록되어지는 목적을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뿐만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목표가 있지요?
그것이 과연 나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여러분이 늘 확인해야 되는 기준이 돼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지기를 원해요.
여러분 지금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기쁨으로 충만합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요한일서를 잘 공부한 거예요.
믿은 겁니다.
요한일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받은 것이에요.

1:4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

교제의 결과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안에 세 분이 하나 되는 교제가 가능해요. 그 하나님의 교제 안으로 초청하신 것이 성도들을 향한 그 교제이지요?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니까 가능한 것이에요. 성도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니까 가능한 것이에요. 우리는 말씀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이 기쁨이 충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죄 때문인데 요한일서가 기록된 두 번째 목적은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요한일서가 기록이 되어 있어요.

여러분 지금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 앞에 담대합니까?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간구할 그런 준비가 되어있어요? 아니면은 필요하기는 필요한데 그 제목을 하나 아뢰기에는 무엇인가 좀 해결해야 될 것이 있는 것처럼 그런 부분이 있습니까? 그 부분을 요한일서 2:1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그 삶을 가능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의 목적은 우리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할 목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일서 5:13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 말씀은 온전한 사랑에 대해서 다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 장에 불과한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46번 기록되는 것으로 보아서 요한일서에 해당되는 주제는 사랑임에 틀림이 없지요?
문제의 해결책도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온전한 사랑이에요. 사람 마음 안에 발견된 적도 없고 또 세상의 제도 가운데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사랑이에요.

그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에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볼 수는 있어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어요.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에요.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안다라고 시인할 수 있어요. 그건 경험이에요. 100% 경험입니다. 경험되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켜버려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언가 되는 줄로 그렇게 아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특징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담대합니다(17절)

17절 따져보십시오.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졌나니, 이는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되지요?
그래 구원받은 사실과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됩니다.
그 구원의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에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 무엇인가?
여러분이 하나님 입장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 가장 사랑스러운 그런 사람이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마귀는 많은 무기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첫 번째 제시했고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에 말씀에 의심하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 의심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을 가장 귀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요한일서 4:17).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어요.
보내주신 목적은 죄로만 이루어진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고, 저주를 면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죄인들의 자리에 대신 서게 하신 것이지요. 그 목적으로 보내주신 거예요.

​그 거룩하신 분이 가장 가증스러운 죄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으신 것이지요.
그분은 죽으셨고, 성경의 예언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어떠셨다고요?
그러 하셨어요. 그분이 그러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는데, 그분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이에요.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졌나니, 이는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요한일서 4:17) 이 사실에 의심하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담대해요. 세상에 아무리 위협하고 공갈로 협박으로 세상 풍조로 그렇게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결코 그 두려움의 영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분은, 어떻게 그분처럼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아들의 형상과 일치시키는 겁니다. 로마서 8:29절에서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보장돼 있습니다. 고정된 진리의 말씀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고요.

요한일서 1:4절에 기록된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으로 교제가 가능하지요? 그래 우리가 기뻐하는 거예요. 아들의 형상과 일치된다라고 하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가운데 놓고 여러분은 지금 현재의 상황들을 그 옆에 비교해 보아요. 돈 문제가 걸려 있겠지요? 건강 문제가 걸려 있겠지요? 여러 가지 갈등의 문제가 걸려 있겠지요? 불확실한 미래가 걸려 있겠지요? 어떤 문제가 비교의 대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충만하지 채워지지 않고 거기에 두려움이 있고 염려가 있고 그렇다고 그러면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거예요.

아! 하나님의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에 있지요? 그 정도는 안다고요.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무 역할도 못해요. 왜냐하면 인생의 살의 문제는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앞으로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했다고 요한일서 3:1절에서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나니, 이는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2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그가 나타나시면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해가 동쪽에 떠서 서쪽에 질 것이에요, 내일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에요. 그것보다도 절대적으로 더 확실하고 분명한 사건이에요. 무엇이라고요? 그가 나타나시면. 반드시 나타나실 것이라고요. 왜 그렇습니까? 그분께서 태양을 창조하셨잖아요?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어느 날은, 어느 날은 안 떠오르겠지요? 베드로후서 3장에 의하면.

요한일서 3장에 의하면. 2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3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 그분이 그러하세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요. 그분이 어떠하시다고요? 하나님의 아들이에요.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거에요.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왕들 가운데 왕이시지요? 만왕의 왕이시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고백하는 대제사장이요 두 가지 직책을 갖고 있으세요. 그래 그분이 왕이시라고요. 그분이 대제사장이에요. 우리는 어떻지요? 그분이 그러하심과도 같이 우리도 그러하는 거예요.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담대하다고요.

하나님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신 그분께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1장 6절 말씀이에요. 그분이 왕인 것처럼, 제사장인 것처럼 우리도 왕과 제사장이 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주의 천사였지요? 부활 때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천사들처럼 될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속의 말씀이니까 그가 천사잖아요? 그래 우리도 천사들처럼 된다고요. 부활 때에는 그들은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22:30절 말씀이지요.

일단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면, 사람은 중간에 마치지 못할 수 있어요. 변경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고 한다면, 끝나지 않은 채, 일을 마치지는 결코 않으실 거예요. 약속의 말씀이지요. 우리가 이것을 아노니,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 (빌립보서 4:6) 그래 이 부분을 놓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을 거셨어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요.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성취하는 것입니다.

화평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5:23)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도들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책망할 것이 없이 보존하실 거예요. 그 시점은 언제이지요? 그리스도 심판석을 지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점과 흠 다 주름진 것 다 바로잡혀지지요? 당부의 말씀은 뭐예요? 대비하라 이거예요. 준비하라. 근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실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24너희를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그가 또한 이것을 행하시리라. 이것이 뭐예요? 약속의 말씀이라고요. 영과 혼과 몸 책망할 것이 없이 보존하실 것이라고요. 쉬운 말로 집으로 데리가시겠다 그 말입니다. 반드시 집으로 데려가서 자신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담대한 사람이지요?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고백할 수 있지요? 요한일서에서 두 번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돼요? 입으로만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의 염원은 무엇이지요? 우리의 사랑도 온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초신자 때에는 극히 최소한의 믿음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겨자씨 한 알 만 해요. 믿음만 그렇게 작은 것이 아니라 사랑도 그렇게 작아요. 그러나 점점 더 성장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배운 결과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장성한 분량에까지 잘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에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값없는 선물로 우리가 받은 것이지요. 그것을 의심하지만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인은 담대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경험해야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지요?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지요? 완전히 의탁할 때예요. 헌신이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없이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거예요. 그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18절 보십시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느니라. 이는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였느니라.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두려움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려움이 있어요. 이것을 잘 분별해야 되겠지요.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됩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되는 대상을 반드시 두려워하고 무서워해야 돼요.

코로나 바이러스, 코로나19라고 부르나요, 그것 때문에 온 세상이 휩싸여져 버렸지요? 이것은 잠깐 보여주는 그림이에요. 대화난때에는 어떻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체가 돼서 전염병을 확산시키잖아요. 어떻게 감당을 할까요? 그 사실을 우리가 미리 아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두렵다고요. 무섭지요. 개인도 그렇고 조직도 그렇고 국가를 포함해서 전 세계가 다 휩싸여졌습니다. 경제생활에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고, 문화생활에 제한을 받는 사치이지요, 지금. 극장을 못 가느니 뭐 무슨 공연을 못하느니 사치라고요.

그리스도인에게 심각한 것은 모임에 방해를 받는 것이에요. 현실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이 부분들은 매우 어려운 부분이지요. 어째든지 간에 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을 경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것들로 가득 채워져야 됨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틈을 노리고 비집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에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이방 민족들과 전쟁을 벌였지요? 조카를 구해오기 까지는 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문제가 이제 현실적인 문제로 하나씩 하나씩 계산해보니까 밤에 잠이 안 와요.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 정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 나라들을 대상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때에 말씀하신 것이 창세기 15:1절에서 무서워 말라, 두려워 말라 말씀하신 거예요. 하나님을 제시한 것이 방패라고 말씀하셨다고요. 어떤 무기로도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시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나 반신반의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돼요? 믿음이 입증되지 못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이 지상의 사역을 하면서 두려워 말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두려워 말라 말씀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삶이 다 망가져버려요.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각나는 것은 두려움과 무서움과 염려뿐이에요. 거기에 집착된 하루하루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결코 아닌 것이지요?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를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의심
둘째는 두려움

의심은 강력한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두려움을 주었을 때 위축됩니다.
거의 무한대의 능력이 있다하더라도요 그것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거예요.
믿음으로 행해야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든 믿음으로 행할 수 없어요.
보는 것으로만 걸어갈 뿐입니다.
그 결과 주를 바라보지 않아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이 그리스도인인데 바라보지 않아요.
무엇만 바라보는 거예요.
경제 상황만 바라본다고요.
제일 먼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지요?
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사람은 세 끼를 먹어야 사는 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빵이 보장되지 않으면 두렵다고요.
노후대책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은요, 별거 아닐지 몰라요.
먹고사는 문제가. 지금 현재 보면 그래요.
그러나 그 먹고사는 문제가 앞으로 계속 보장이 될 수 있느냐? 그건 다른 문제에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잘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저금하지요?
그거 잘하는 겁니다. 해야 돼요. 대비를 해야 되지요. 그러나 그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섭리적인 영역까지도 침범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셔야 되는 그런 부분까지도 염려로 가져와 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인가? 원점으로 돌아가지요?
하나님의 존재하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요. 생태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요 마태복음 6장에 의하면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통치 역역 가운데 벗어나는 새가 없어요. 다 보장해 주신다고요.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겠는가?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온통 두려움에 휩싸이는 거예요. 오늘은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지만, 내일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라고 말하며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6:31)

염려가 언제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의식주가 목적이 될 때예요. 수단으로만 자리 잡혀야 돼요. 수단으로.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될 때 염려하게 되는 것이지요? 의식주가 삶의 목적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거예요. 삶의 우선순위가 망가질 수밖에 없겠지요? 급하다고요. 그 사람의 삶이 안정이 안돼요. 그냥 급해버린 거예요. 조금 괜찮은 거 같다 하더라도 조금만 위기 상황이 오면 다 무너져버리는 거예요. 그 부분을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그분의 의, 그것이 해결책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은 영적 존재에요. 물질로만 이루어진 몸이 목적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부차적으로 채워주시는 영역에 있어서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은 뭐예요? 최선을 다해서 땀을 흘리면 돼요. 땀만 흘리면 된다고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빌 4:6) 그런데요, 가장 부지런해야 되는 영역이 실상은 기도입니다. 말씀은 어떻게 그럭저럭 읽을 줄 몰라요. 부지런하지 않으면요 기도생활이 없어요. 여러분 개인의 삶을 한번잘 살펴보세요.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게으른 사람인가? 부지런한 사람인가? 기도 하나만 측정하면 돼요.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목자는 목자니까 기도해야 되는 것이 있고요, 가장은 가장이니까 기도해야 될 것이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니까 기도해야 될 것이 있다고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니까 기도해야 될 것이 있다고요. 그 목적을 위해서 지상의 생명을 계속 하루하루 연장시켜줄 뿐이라고요.

그런데 게으름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거 다 까먹어 버린다고요. 뭐 생존이 목적이 되어버려요. 바로 마귀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빌립보서 4:6절에서 마땅히 간구해야 될 것 그것을 다 알려드리고 하나님 앞에 알려지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 빌립보서 4:19절 말씀이지요? 이거는 거듭거듭 계속 확인해야 되는 말씀의 본질이에요.

나에게 뭐가 필요하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제일 먼저 본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영생이고요, 그 영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내가 이런 것들을 씀은 그렇지요? 너희가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요한일서 5:13)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을 것이에요?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야 돼요. 지혜가 있어야 뚫고 나가지요. 지혜가 있어야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을 살아 나가지요. 그래 지혜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그 어려운 여건들, 고난의 연속들, 하나님의 위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된다고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못하면 사람에게 달려가는 거예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사람에게 위로받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필요에요. 그리스도인에게 정말로 가장 필요한 필요에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넘치도록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그 가장 기본적인 그 사람의 필요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오늘 하루도 열심히 공부하는 거예요. 열심히 일하는 거예요. 열심히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잘 살다가 죽으면 하늘나라 가는 것이라고요. 주님께서 오시면 들림 받아 올라가는 것이에요.

바로 이 고난에 대한 두려움, 그때에 성경에서는 절대적으로 해결책으로 기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난받으면 두렵잖아요? 무섭잖아요? 너희 가운데 고난받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야고보서 5:13) 기도가 응답이 되었어요. 즐겁잖아요. 그러면 찬양하면 돼요. 하나님을 높여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어떤 기도를 하지요? 제일 먼저 이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에요. 심지어 그 기도도 안 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그러면 그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고난이 닥치면요 구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를 해야 돼요.

그러나 육신은 너무나 끈질기게 그 사람을 억압하고 자신의 몸으로 해보려고 한다고요. 그러다 안되면 다른 사람 찾아가는 거예요.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 그 사람 찾아간다고요. 그래도 하다 하다 안되니까 제일 마지막에 이제 하나님 찾는 거예요. 초신자때는 다 그래요. 초신자가 그 기간 동안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좋지 않다고요. 고난받으면 기도해야 돼요. 고난에서 구해주시도록 기도를 해야 되는 것이에요. 많은 부분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요? 그래 감사한 거예요.

그러나 그 닥친 고난이 길게 길어질 때가 있습니다. 두 가지 기도를 더해야 돼요. 하나는 이 고난이 유익이 되도록 기도해야 돼요. 반드시 고난이 유익이 돼요.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 이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목적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빨리 구원받으라는 겁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거예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것은 다양해요. 하나님의 목적이 아주 다양하다고요. 결론은 욥의 고백처럼 금처럼 나오는 것입니다. 순수 100%의 금으로 연단되어서 잘 나오는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사람마다 다 달라요. 또 같은 동일인이라 하더라도 각각 겪는 고난에 경험들이 다 다르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유익이 돼요. 어떻게 고난은 지나갔는데 아주 씁쓰름한 쓴 뿌리가 남았다고요. 사람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자신에 대해 원망하고 자학하고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에요. 소중한 하나님의 훈련의 기간을 망쳐버리는 거예요.

또 하나는 예수님의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돼요. 기도라는 것은 그 정의가요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기도는 그것이라고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 초신자때는 마찬가지로 어때요? 반대로 하지요? 내 뜻을 기필코 관철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든지 간에, 이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 그 기도도 거의 다 들어주시지요. 거의 다 들어주신다고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충만에 이르기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에게 No라고 하는 응답을 주신 것처럼, 겟세만의 동산에서 예수님께 No라고 하는 응답을 주신 것처럼 세 번씩이나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응답을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경우에 있어서나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나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요. 왜? 하나님의 뜻을 알았잖아요. 그럼 기도는 끝난 거예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지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시도를 못해요.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 실패를 극복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능한 거예요.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져 있지요. 경험하는 것은 죽음밖에 없기 때문에 죽음을 대단히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 제외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제외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본질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 내느니라. 이때의 두려움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이는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지 못하느니라.(요한일서 5:18)

하나님께서 주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려움을 반드시 잘 배워야 되지요. 지금 구원받아서 하늘나라로 가고 있는 중인데, 그 가운데서 이 두려움을 배우지 못한다고 한다면,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통증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또 연구하는 그런 의사가 글을 썼어요. 제목이 동전의 양면인 통증. 동전의 양면 통증. 거의 대부분은 통증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요. 유전적인 병이 있는데 선천성 무통각증이에요. 감각을 못 느껴요. 어떤 일이 일어나지요? 겨울철에 난로에다가 손을 대도 통증을 못 느끼니까, 만약에 밤에 자다가 그렇게 되면 손 다 태워버리고 자신의 손을, 그 정도 통증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통증은 반드시 느껴져야 돼요. 그래서 이 뇌 속에서 유전적변이를 확인해서 감각을 전달하는 이 신경세포가 이상이 생겨버린 거예요. 신경세포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지요. 환자에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라고요. 치료를 해야 되겠지요? 치료방법은 무엇이겠어요. 통증을 느끼게 해줘야 돼요.

수는 통증을 느끼는 사람에 비해서 이 무통각증을 지닌 사람은 수가 현저히 적겠지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정 반대에요. 정반대라고요, 정반대. 영적인 무통각증,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거의 거기에 다 빠져버렸다고요.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에요. 정말로 무서워해야 될 것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빌립보서 2:12)

구원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성화의 구원이에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지요. 이제 의롭게 되어지는 구원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단번에 영원히 다 이루어졌지요? 들림 받아 올라갈 그때까지 몸에 구속의 구원은 이루어질 것이에요. 남은 구원은 무엇이에요? 영이 계속 자라는 것입니다. 성화의 거룩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목적이라고요, 구원이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도 않고 존귀히 여기지도 않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서 의롭게 됨이라고 하는 그거 하나만 받으면은 다 되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내 멋대로 살란다. 그래 산 믿음을 거부해버리고 종교를 취해버리니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 있다고요? 통증을 못 느껴요. 무서움이라고 하는 통증을 느껴야 되는데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에요.

여러분도 한번 적용시켜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가장 인생의 삶 가운데 본질적인 것이 성장을 방해하는 그 요소들이 내 삶에 침범한 거예요? 그렇게 여러분이 동의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가장 안전한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안전한 안전장치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쓰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야 돼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얼마만큼 버려질 것에 대해서, 쓰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왜 자신의 몸을 그렇게 억제한다고 그랬죠? 들림 받아 올라갈 그때까지 계속 절제의 성령의 열매를 왜 그렇게 간구했겠어요? 쓰임 받지 못하면은 비참하다고요. 그것을 두려워한 것이에요. 무서워한 것이에요.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두려워했지요? 고린도후서 5:9절 이후에서 모든 사람은 반듯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설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계시 받은 바울은 본인 포함에서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구원받은 이후에 왜 그리스도인이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건전한 두려움이 그 원인이 되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에요.

본문 말씀과 관련되서 왜 형제를 실족시키면 안 돼요? 형제 사랑과 관련돼서 왜 형제를 실족시키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그대로 다루고 있는 로마서 14장에서 경고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것은 반드시 판단 받을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우리가 추구해야 되는 목표가 되어지기도 합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 사람의 특징, 마지막 세 번째로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다.
19절 보십시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순서가 중요하지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런데 그분의 사랑은요 사랑할만한 대상이기 때문에, 무슨 근거가 있기 때문에 사랑한 거가 아니라 이해가 안 돼요. 전혀 아름다운 것도 없고, 의가 단 한 군데도 발견되는 것도 없고, 사랑 자체이신 분이에요.
의 자체이신 분이세요.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상을 사랑하신 것이에요.
대가를 전혀 바라지도 않으세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물론 그 순수한 동기에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답례를 표하면 마음이 흐뭇하고 그러잖아요? 안 그런가요?
그 정도가 아니라 또 사람은 답례를 바란다고요. 하나님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20절에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
눈으로 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 받은 계명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하느니라.
가장 비참한 대상일지 모르지만요, 그래 가장 비참한 대상이니끼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어있는 사람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 지내게 하라. 다 죽어버렸다고요. 다만 몸만 살아있을 뿐이지,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을 뿐이지 그 영이 죽어버렸어요.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그런데 일단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돼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이 되어지게 되면요, 그 존재보다 더 가치 있는 대상은 없어요. 그런 관계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닿기 전에는 완전히 쓰레기라고요. 태워버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가장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아들과 똑같이 대우해 주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 자체만으로 놓고 보았을 때는 죄로만 이루어진 죄의 몸인데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견되잖아요. 예수 그리스도처럼 똑같이 대우해 주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본문은 교리적으로 적용해 볼 때에 본문에서 나오는 형제는 유대인 형제이지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와있는 것처럼 대환란 때에 이 형제를 사랑해야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형제 사랑이라는 행위가 있어야 구원이 유지가 되는 것이지요. 요한일서에서 많이 나오지요? 특히 요한일서 3장 10절이라든지 14절 이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이 발견이 안되면 사망에 이르러요, 구원을 잃어버린다고요.

영적인 적용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안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 제대로 사랑하는 거 아니다 언급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명제를 놓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자신을 평가해 보세요.
여러분 자신은 사랑을 주는 사람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사랑을 받는 사람에 가깝습니까?
단 하나라도 나는 우리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어떤 사람에게도 그렇고 나는 사랑을 받아야 되는 사람이다.
그럼 하나님 사랑 모르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하게 받았어요.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나누어 주는 일밖에 없어요.
반드시 그 위치를 찾아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요 이 교회는 섭섭 마귀가 인수해버려요.
목사도 예외 아니에요.
아! 그렇게 성도들을 위해 헌신했는데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그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으로 해서부터 어떤 특정한 사건만 터지면 그것이 폭로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성도들 말할 것도 없어요.
내가 어떻게 교회에 헌신하고, 어떻게 교회 일에 가담하고 했는데!
처음에는 특권으로 알고 시작했잖아요?
아닌가요? 가르치는 일, 특권이고 가장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하실 수 없는 특권이라고요.
그러다가 이 형제 사랑에 대한 영적인 적용을 잘못했을 때에 제대로 하나님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대로 살아갈 거예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어요.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셨어요. 그분이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따라가는 제자에요. 선생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그런 제자가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시지요? 주인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종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하시지요? 거기에 내가 100% 동의할 수 있다면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담대한 사람이어야 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은 바로 무서움을 극복한 사람이에요.
두려움의 영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이기적인 삶에서 탈피한 사람이지요.
하나만 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면 돼요.
우리의 기도 제목이에요.
오늘 기도하시기 전에,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시기 전에 제일 먼저 우리 하나님 말씀 살펴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더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상과 관계하는 데서 어려운 것은 제가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랑 안에는 용서도 포함되어 있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포함되어 있고, 또 짐을 나누어지고자 하는 동역의 마음도 있고, 다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저희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저는 반드시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풍성히 채워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구한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간구가 되겠지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들일 수 있는 기도이니만큼 또 그렇게 여러분들 기도하시고, 또 준비해 온 기도의 제목들 기도하시는 기도 모임 시간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미워하는 자에게

네 원수를 친구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네게 무관하고 낯선 사람 일지라도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 가까이에 있게 될 것이다.
네마음에 끌리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고 네마음에 받아들이라 하나님께서 너를 영접하실 것이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네게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이다.
너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을 초청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게 하는 영광문을 넓게 여실 것이다.

미움이 부른 비극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 [올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기에 '레이디'와 '제이브'라는 주인공이 나타납니다.
레이디라는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양조장과 큰 과수원을 경영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거대한 저택에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아가던 어느 날 한 난폭한 젊은이가 과수원에 불을 질러 집도 불에 타고, 레이디의 아버지도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세월이 흘러 레이디는 한 젊은 청년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남편 제이브가 과수원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를 죽인 살해범이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에 대한 적개심과 보복심이 생겨 제이브를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제이브가 불치의 병에 걸려서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매일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는데 레이디는 남편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도 돌봐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둡니다.
아파서 고통스럽게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대로 죽어가기를 기다립니다.
잔인한 아내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저 남자,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스럽게 죽여야 한다는 보복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적개심에 찬 아내의 모습에서 남편 제이브는 결국 권총으로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넓은 세계 속에 살도록 만들어주지만, 분노, 적개심, 시기, 다툼은 전체보다는 한 부분에, 적은 곳에 자기를 놓게 합니다.

용서와 사랑의 세계는 넓은 곳이지만 분노와 적개심은 좁디 좁은 세계밖엔 안됩니다. 전체보다 부분에, 넓은 곳보다 좁은 곳에 집착하게 되면 결국은 마귀의 유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마이어 목사의 시기심

찰스 해던 스퍼전 (Charles Haddon Spurgeon, 1834년 6월 19일 ~ 1892년 1월 31일 )
캠벨 몰간Campbell G. Morgan(1863. 12. 9-)

챨스 스펄젼 목사님과 켐벧 몰간 목사님, 그리고 마이어 목사님
이 세분 목사님은 모두 기독교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분들이시다.
그런데 스펄젼목사님과 켐벧몰간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룰 때 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기도를 드리는데 그 자신이 스펄젼 목사님과 켐벧 목사님을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회개하여 시기심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질투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마이어 목사님은 "주님! 시기를 없애고 평화의 영을 갖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이어 목사님께서 이 시기의 마음을 극복할 수있었을까?
그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던 것이다.

주님! 스펄전 목사님과 캠벧 목사님의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고 축복 해주세요”라고 기도 드린후 참 평화를 경험했다.
프레더릭 마이어 (F. B. Meyer)

마이어 목사님, 찰스 스펄젼 목사님, 캠벨 몰간 목사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
'비국교도의 대주교'라 불린 목사.
1847년 영국에서 태어나 브라이튼 칼리지를 거쳐 런던 대학을 졸업했다. 경건주의 노선을 따라 케즈윅 부흥회에 자주 참석해 설교와 강연을 진행했다. 1870년 초 미국 복음주의 부흥을 이끌던 드와이트 무디를 만나 영국의 여러 강연, 교회, 사역을 소개해 주었고 무디 역시 그를 미국으로 초대하면서 북미 사역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무디와 마이어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남아프리카, 아시아, 북미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고 주로 성경의 인물 중심으로 주석을 작성하여 75권이 넘는 책을 썼다. 1918년에는 7명의 성직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다는 런던 선언문에 서명하기도 했다. 80세의 나이에도 목회를 활발히 하며 미국으로 향할 만큼 열심히 했다. 1929년 8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세 분의 유명한 목사님
19세기 말 영국의 런던에는 세 분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님, 뉴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찰스 스펄젼 목사님,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이셨습니다. 이들 세 분의 목사님들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각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분들 가운데서 교회의 교세면에서나 영향력이 조금은 뒤지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프레데릭 마이어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어 목사님의 마음 속에 열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스펄젼 목사님만큼 설교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몰간 목사님처럼 카리스마적으로 권위있는 목회도 못하는구나."

이러한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 생기면서 그는 다른 두 분의 목사님에 대해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단에서 사랑을 외치는 설교자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러다가도 누군가가 옆에서 스펄젼 목사님이나 몰간 목사님에 대해서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의 마음이 다시금 불편해 지고는 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시기심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써도 자기 힘으로는 그 문제를 풀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제 마음에서 불일 듯 일어나는 시기심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그는 간절히 기도를 드리던 가운데, 그의 마음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기껏해야 시기를 없애는 것으로 만족을 삼으려고 하느냐? 그 두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들과 그들이 섬기는 교회가 잘 되도록 축복하는 기도를 해 줄 수는 없단 말이냐?"

마이어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다른 두 분 목사님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무조건 무릎을 꿇고, 그들이 섬기는 교회를 위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공식석상에서, 심지어는 자신의 교회에서 대표기도를 할 때도 이렇게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스펄젼 목사님과 몰간 목사님의 목회사역에 큰 복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목회하시는 두 교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크게 부흥할 수 있도록 채워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교회들이 넘치도록 채워지고 나서 남은 사람들이 있거든 우리 교회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마음에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뒤부터 이 세 분의 목사님은 친구처럼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들은 함께 힘을 합쳐서 런던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 교회 모두를 크게 복 주셨습니다. 세 교회 모두가 아주 크게 성장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마이어 목사님에게 글을 쓰는 좋은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는 좋은 책을 많이 저술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분노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더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혀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큰 불행을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자란 막연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클레토스라는 그의 친구는 알렉산더 대제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이 친구가 술에 취해 알렉산더의 많은 군졸들 앞에서 대제를 모욕하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순간적으로 알렉산더는 옆에 있던 병사의 창을 빼앗아서 클레토스에게 던졌습니다.
물론 죽이려고 시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그 창은 자기의 친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더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그 후회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다 옆의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했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그는 전 세계를 정복했지만 자기의 분노를 다스리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다툼을 없애는 방법

하루는 헤라클레스가 길을 가다 괴물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헤라클레스는 그 괴물을 두들겨 쓰러뜨린 후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조금 후 3~4배 더 커진 괴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더 센 힘으로 괴물을 때려 눕혔는데 이번에는 더 커진 괴물이 나타났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커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자 헤라클레스는 아테네를 찾아갔다.
그때 아테네는 말했다.
“그 괴물의 이름은 「시기, 질투」인데 때릴게 아니라 못본 척 놔두면 저절로 작아져 힘을 못 쓴다네”

질투의 두 얼굴

희랍어의 질투(ζηλοs)는 성경에서 두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하나는 질투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열심의 뜻이다.
이 말을 어근으로 해서 나온 영어가 jealous (질투)와 zeolous (열심)이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말하는데 영어 성경은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열심을 낸다고 번역하였다.

질투는 인간이 세상에 탄생되면서부터 가지는 인간성이다.
질투라는 뿌리는 천사적인 사랑과 열심으로 발전되기도 하고, 악마적인 미움과 파괴로 발전되기도 한다.

질투가 가지는 두 개의 얼굴은 천사와 악마의 얼굴이다. 질투는 가정을 파괴하고 직장생활을 누더기로 만들고 교회를 파괴하기도 한다. 질투만큼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도구도 드물다. 이런 질투의 악마적인 얼굴을 천사의 얼굴로 바꾸는 예술이 인생의 행복과 보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에 젤로스가 사용되었다.

2. 고후 7:10-11,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근심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간절하고 때로는 격분하고 두려워도하며 사모하고 열성을 기울이는 정열과 진실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젤로스이다.

3. 고후 11:1-3, 내가 하나님의 젤로스를 가지고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서 신랑이신 예수에게 중매하려고 열심을 내고 있다고 했다.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다.

ζηλός, ου, ὁ, ζηλό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2205

1. 열심.   2. κατὰ ζ : 열심에 관한한
발음 [ zē- lŏs ]
어원  / 2204에서 유래

1. [좋은 의미로] 열심, 열정, 고후 9:2.

  • a.
    κατὰ ζ.: 열심에 관한한, 빌3:6.
  • b.
    ζ. θεοῦ: 하나님을 향한 열심, 롬10:2.
  • c.
    ζ. τοῦ οἴκου σου: 당신의 집에 대한 열심, 요2:17등, 고후7:7, 히10:27등.
2.  [나쁜 의미로] 시기, 질투, 롬13:13, 고전3:3, 고후12:20, 갈5:20,
πλησθῆναι ζή- λου: 시기로 가득 차게 되다, 행5:17, 13:45.

열심(요 2:17, 롬 10:2, 빌 3:6), 시기(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거짓의 가면을 벗어라

프리드의 글을 보면 영국의 마까르네 경이 군대의 명예직으로 있을 때의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따금씩 자기는 아직 한번도 벼슬을 하려고 청탁해 본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는 벼슬도 싫다고 거절하였노라고 하면서, "세상의 누구에게도 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편한대로 사는 것보다 더 편한 일은 없다."고 말하곤 하였는데, 이 말이 돌고 돌아급기야는 왕의 뒤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그 말이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인가를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서 하루는 마까르네 경을 따로 불러 놓고는 그에게 은근히 스페인 말을 할 줄 아냐고 물어 보았다.
이때에 마까르네 경은 대답하기를 "네, 아직은 할 줄 모르지만 폐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즉시라도 배워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경이 스페인 어를 배우고 나면 좋은 일이 있을것일세!" 하고 한마디 던졌다.

마까르네 경은 이 단순한 대답 한마디에 왕께서 자기를 어떤 중대한 외교 사절로 뽑으려는 줄로 지레 짐작하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그리고는 석달이 지난 뒤 왕을 찾아 뵙고는 이제는 스페인어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보고 드리고는 기대에 찬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이때에 왕은 대답하기를, "그러면 그대에게 일을 한가지 줄 터이니 스페인 원어로 되어 있는 이 글을 한번 읽어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만이 존경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네“

요화(妖花)  - 요사할 요, 꽃 화

어떤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고 백성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면서 화분에 심어 잘 가꾸어 제일 꼿을 예쁘게 피우게 한 사람에게 상을 많이 주고 그대신 꽃을 도무지 못 피게 한 사람에게 벌을 주겠다고 했다.
그 꽃이 다 피일 때 쯤 되어서 모두 그 화분을 가지고 길가에 나와 진열해 놓고 임금님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기로 했다.
다 진열된 후 임금이 지나가면서 보니까 모두 훌륭하게 꽃이 피어 있었다.
그 중 어느 소년이 꽃 없는 화분을 들고 나와서 그대로 그 옆에서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데 임금님은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은 다 눈을 찡끄리며 보더니 이 꽃 없는 화분을 보고 기쁜 얼굴로 그 소년을 불러 칭찬하여 큰 상을 주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꽃씨를 받아 심었으나 나지 않음으로 벌 받을까 두려워 또는 상을 타려고 부정하게도 다른 꽃씨를 심었던 것이나 이 한 소년은 나지 않는 것을 정직하게 꽃 없는 화분 그대로를 가져왔던 것이다.
많은 화분에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은 요화(妖花) 즉 부정을 통한 요사스러운 꽃들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큰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그는 간이 중학교 2학년을 중퇴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 나라의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성학교를 세웠는데 '죽을지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이 대성학교의 교훈이었다.
도산 선생은 예배당을 세워 전도사 일까지 했다.
그는 "우리 백성이 다 손에 성경을 쥐는 날에는 우리나라가 바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형무소에서 나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우리 백성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물고 찢으면 망합니다." 라고 말했다.

05-13-2024(월) 요한일서 4:7-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사랑이시라(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하나님의 본성(The Nature of God)과 하나님의 속성들(The attributes of God)

하나님의 본성(本性)이란 무엇인가? 

'본성(nature)'은 '하나님 존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특성'을 말합니다.
영과 사랑과 빛입니다.

신약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고(요일 4:8), 빛이시다(요일 1:5). 

1.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ㅡ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
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ㅡ 하나님의 본질의 본성
3.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ㅡ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표현들은 은유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서술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 영과 사랑과 빛이시다. 영은 하나님의 인격의 본성을 나타내고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의 본질을 나타내며,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을 나타낸다. 사랑과 빛은 모두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있는데, 그 생명은 그 영에 속한 것이다(롬 8:2). 하나님, 영, 생명은 사실상 하나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은 생명이다. 그러한 생명 안에 사랑과 빛이 있다. 이 신성한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것은 은혜가 되며 이 신성한 빛이 우리에게 비췰 때 그것은 진리가 된다.

하나님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속성(attribute)'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특성을 말합니다.
좀더 말하면 38가지 이상의 특별하고 다양한 특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감 팔렛트 아시죠?
기본 색에서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지않습니까?
그것이 속성(attribute)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네 가지ㅡ 빛, 의, 거룩, 사랑

1. 빛 ㅡ 하나님의 표현
2. 의 ㅡ 하나님의 외적인 행동이나 방법
3. 거룩 ㅡ 하나님께로 분별됨과 하나님 자신으로 적셔짐
4. 사랑 ㅡ 하나님의 본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 

속성(屬性) - 단어의 의미

1. 속(屬) 의 의미 : '하나님의 속성' 할 때 '속'은 '하나님께 속한 다양한 특징들'을 말한다. 
여기 '속'은 '무리 속, 속할 속'자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다양한 특성들을 총합하여 말한 것'이다.  

屬 무리 속, 이을 촉  : 
1.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2.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3. 벼슬아치 
4. 혈족(血族) 
5. 붙다 
6. 부착하다(附着ㆍ付着--) 
7. 거느리다 
8. 복종하다(服從--)
9. 수행하다(遂行--)

2. '속성(attribute)'은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특성을 말합니다.
좀더 말하면 38가지 이상의 특별하고 다양한 특징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물감 팔렛트 아시죠? 기본 색에서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지않습니까? 그것이 속성 attribute입니다.  하나님께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고 이것은 신성하고 풍성하다. 신성하고 풍성한 속성들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3. 신성한 속성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속성은  네 가지 '사랑, 빛, 거룩함, 의'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와 같은 그분의 풍성하고 다양한 속성들에 있어서 넘치신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사람 예수님을 통해 살아 나타났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사람 예수님의 미덕들이 되었다.

4.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 - 38 가지 속성

⓵ 생명(엡 4:18, 창 2:8-9, 행 11:18, 요 3:16, 요 1:4, 10:10, 11:35, 14:16, 요일 1:2, 5:12) 조에 zoe
⓶ 사랑(요 3:16, 딤전 1:15, 요일 4:10, 엡 2:4) 아가페 agape
⓷ 빛(계 21:23, 사 30:26, 계 22:5, 계 21:11, 18, 요일 1:5-7)
⓸ 풍성(롬 2:4, 엡 2:4, 1:7, 2:7, 3:16, 롬 9:23, 롬 11:33)
⑤ 충만(골 1:19, 골 2:9, 엡 3:19, 엡 1:23, 요 1:16)
⑥ 거룩(계 4:8, 사 6:3, 히 12:10, 벧전 1:15, 16, 히 12:9-10, 계 21:2, 10)
⑦ 의(義, 계 15:13, 롬 1:16-17, 요일 1:9-10, 행 10:43, 롬 3:21, 시 89:14)
⑧ 지혜(롬 16:27, 엠 3:10, 고전 1:30)
⑨ 총명(엡 1:8)
⑩ 신실하심(고전 1:9, 요일 1:9, 고전 10:13, 살전 5:23-24)
⑪ 진실하심(롬 3:7, 15:8)
⑫ 단순하심(고후 1:12, 고후 11:3)
⑬ 성실하심(고후 1:12)
⑭ 선하심(눅 18:18)
⑮ 긍휼(롬 9:15-16, 롬 11:32, 눅 15:20-24, 히 4:16, 엡 2:4) 엘레오스 eleos
⑯ 불쌍히 여기심(연민, 롬 9:15, 고후 1:3) 오이크티르모르스 oiktirmos
⑰ 은혜(엡 2:7, 8, 요 1:16-17, 고후 12:9, 벧전 4:10, 5:10)
⑱ 평강(롬 16:20, 빌 4:7, 요 16:33, 살전 5:23, 엡 1:2)
⑲ 기쁨(롬 15:13)
⑳ 소망(롬 15:13) 
㉑ 위로(안위, 롬 15:5, 고후 1:3, 4)
㉒ 인자하심(롬 2:4, 롬 11:22, 엠 2:7, 딛 3:4-5)
㉓ 용납하심(관용, 롬 2:4)
㉔ 오래 참으심(롬 2:4)
㉕ 오래 견딤(롬 15:5)
㉖ 질투(고후 11:2)
㉗ 엄위하심(롬 11:22)
㉘ 공평하심(행 10:34, 롬 2:11, 엡 6:9)
㉙ 죽지 아니함, 불멸, 아타나시아 athanasia(딤전 6:16)
㉚ 불변하심(약 1:17, 히 6:17)
㉛ 영광(행 7:2, 55, 창 12:1, 4, 벧전 1:3, 5:10, 딤후 2:10, 롬 8:21, 히 2:10, 요 1:1, 14, 롬 3:23, 고전 2:7, 살전 2:12, 히 2:10, 롬 8:17, 30, 롬 9:23, 계 21:11)
㉜ 존귀(계 4:9, 5:13)
㉝ 위엄(유 25)
㉞ 주권(롬 9:20, 21, 19, 딤후 2:20-21, 롬 9:22-24)
㉟ 권위(유 25, 눅 12:5)
㊱ 능력(고전 1:24, 엡 1:19, 행 2:24, 엠 1:20-21) 
㊲ 힘(엡 1:19, 계 5:12), 이스쿠오스 ischuos 
㊳ 강력(엡 1:19, 계 1:6, 5:13, 유 25, 딤전 6:16) 크라토스 krotos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단일성, 무한성, 영성, 영원성, 불변성, 주권성, 전지성, 전능성, 편재성, 사랑 등으로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속성과 도저히 고유할 수 없는 속성으로 분류합니다.
사랑이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속성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교사며 번역가였던 위클리 도우거 멜란드 부부가 브라질의 인디언 마을로 이주했을때의 일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말투가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배타적인가 알아보니 이들 부부가 오기 전에 다른 백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고 집에 불을 놓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인디언들의 말을 익히며 의술과 다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우거가 상처가 나서 피가 엉켜붙은 한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겨 주다가 자신을 보고 원주민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는가?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도우거가 인디언 집에 갈때면 인디언들은 그가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사랑안에서 인디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같은 백인이지만 약탈하고 방화하고 억압하는 백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주는 백인, 그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볼수 있는 백인이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 속에서 인디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큰 변화의 체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환상으로나 꿈으로라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상으로는 볼수 없으되 하나님의 실상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울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분류

속성

정의

성경구절

단일성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 6:4

무한성

하나님은 제한도 종료도 없으시다.

왕상 8:27,

행 17:24

영원성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끝이 없으시다.

창 21:33,

시 90:2

영성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나눠질 수도 없다.

요 1:18,

딤전 1:17

불변성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불변하시다.

말 3:6,

약 1:17

주권성

하나님은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최고의 통치자이시다.

엡 1:21

전지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시 147:4-5,

마 11:21

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마 19:26,

계 19:6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

시 139:7-12,

렘 23:23-24

사랑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푸신다.

엡 2:4-5,

요 4:8

유복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신 7:7-8

정의성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로우시다.

행 10:34-35

은혜성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때를 따라 은혜를 입히신다.

출 34:6,

딛 2:11

 

 

하나님의 속성 도표

하나님의 속성 도표

능력

전지, 전능, 무한성, 불변성, 주권성, 완전성, 무오성, 단일성, 초월성, 단순성, 영성, 생명성, 내재성, 불가시성

도덕

사랑, 정의성, 자비, 유복성, 거룩성, 진실성, 거룩, 공평, 성, 선, 자비, 은혜, 인내, 신뢰성, 도덕적 존재

시공간

영원성, 자존성, 편재성, 무한성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로서 마땅히 알아야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분의 인격과 성품 즉, 그 분의 속성을 닮아야 만이 장차 우리가 갈 신령세계에서 닮은 그 양에 따른 그 나라의 누림과 영광과 존귀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분류하기를 자연적 속성과 도덕적 속성, 또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본원적 속성과 파생적 속성, 또는 적극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 또는 자동적 속성과 타동적 속성, 그런가 하면 특별히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으로 분류를 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1. 무한하심 :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하심을 가르쳐줍니다.
2. 영이심 : 성경이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3. 인격이심 : 하나님의 인격성. 하나님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결정 등을 가지신 분입니다.
4. 통일체이심 :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의 통일체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본성에서 나온 속성을 다음과 같이 분류합니다.(로이드존스 목사)
비공유적 속성(인격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도덕적 속성)으로 크게 분류하는데 이것을 분류한 것을 보면.

1. 비공유적(인격적) 속성.

① 영원성과 불변성: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② 편재성: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③ 전지하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하나님의 지식은 언제나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④ 전능하심: 하나님은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⑤ 완전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탁월함의 총합입니다.
⑥ 영광: 이것은 성경에서 그 분의 위대하심, 그 분의 광휘, 그분의 엄위하심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2. 공유적(도덕적) 속성.

① 거룩하심 : 우리는 거의 대부분 거룩함을 소극적 의미로 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룩함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계시며 관계가 없으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거룩함에는 적극적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이고 완벽한 순결입니다.
②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 의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 가운데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사법적 거룩하심입니다.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정의는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라는 것입니다.
③ 선하심과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다루도록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이 자신을 다른 존재에게 영원토록 전달하도록 만드는 속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스스로가 자신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은혜는 자비는 인내와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④ 신실하심 : 이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의 불변성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이 당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이 부르신 모든 사람들을 악한 자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인데, 기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분류는 이와 대등소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김석준목사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인격성이라 하고, 이 인격성에는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이 있는데, 인격성이라 하면 그의 활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활동성 이전에 마치 인간에 비하면 내적 정신적 느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의 지식으로 혹은 용어로 형언키 어려운 생존적 활동적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1. 비공유적 속성에는
① 자존성 ② 영원성 ③ 완전성 ④ 단일성으로 이 속성은 인간은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2. 공유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가질 수 있는 속성으로 여기에는 크게
(1) 지혜지식성 (2) 도덕성 (3) 능력성으로 분류하고.

이것을 다시,

(1) 지혜지식성은 ①지식성 ② 지혜성으로 분류합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속성이라고 말합니다.

(2) 도덕성은 ①선 ② 사랑 ③ 거룩 ④ 진실로 분류합니다. 이 도덕성은 신적인 도덕인데 신 자신이 자신을 규제하는 도덕이 아닌 근원적 발생적 신 자체적 도덕성으로 이 도덕성은 상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신의 이 도덕성은 자기를 위한 자위적 자애적 도덕이 아니고 상대적 도덕입니다.

(3) 능력성은 ①의 ② 주권으로 분류합니다. 이 신의 능력은 완전적 능력으로 이 완전적 능력은 수동적 능력이 아니고 자체적 능동적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을 세밀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비공유적 속성.


(1) 자존성: 신은 자존자가 되어야 하는 고로 자존성이라는 용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유출물이거나 발생물이 아니고 자존자인고로 자존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영원성: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졌으니 과거적 영원, 미래적 영원입니다. 이 영원성이라는 말은 그의 존재만이 영원이라는 말이 아니고 속성적 존재적 영원을 말합니다.

(3) 완전성: 완전성이라는 말은 지혜 지식 인격성의 성질적 완전을 말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완전성 대신에 무한성 불변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변성에는 모순성이 있습니다. 완전성이 가장 적절한 용어입니다. 이 완전성 속에 절대성이 들어있습니다.

(4) 단일성: 단일성이라는 말은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완전성은 필연코 단일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부인하거나 무식하면 하나님을 이해치 못하게 되니 하나님을 바로 알 길이 없고 구원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신의 속성 중에 중요한 것이 이 단일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계가 됩니다. 고로 이 단일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구원은 잘못됩니다. 실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이 구원이 이 단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에서 단일성을 제하면 우리의 구원은 바른 구원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곧 통일성을 이룹니다.(엡1:10)

 

이상의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지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속성이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2. 공유적인 속성.


공유적인 속성이란 하나님 외의 피조물들도 가질 수 있는, 혹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공유적인 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신학적 용어로는 인격적 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신고로 물질적 고정적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계시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1) 지식성: 과거와 현재를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의 어떤 존재성이나 사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을 지식성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완전한 지식성의 분이신데 완전한 지식성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입니다. 완전한 지식성이란 과거와 현재를 절대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2) 지혜성: 지혜성은 미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정도 계획도 설계도 이 지혜지식성에서 나옵니다. 지혜지식성이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미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계에서의 성장을 보고 천국에서의 누림을 압니다. 농부가 가을추수를 내다보고 종자를 뿌리는 것은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전한 지혜성이란 완전한 인격성이란 말인데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완전 정확하게 아심을 말합니다.

 

(3) 선성: 일반적으로 선이란 남에게 유익을 입혀준다는 말인데, 이 속성은 단순히 남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타가 다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갑에게는 유익이 되고 을에게는 손해가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참 선은 그 사건과 관련성이 있는 존재는 다 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선은 자기가 자기를 유익 되게 하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상대와 관련 없는 자기의 단독적 관련적 사건일 경우 자기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선이요, 이 사건이 他에게 미쳐서 他에게 관련됐을 때에 자타가 유익이 되는 선입니다.

 

어떤 사역을 자타에게 유익을 줄 목적으로 했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서 그것이 자타에게 유익과 행복이 아니면 선이 아닌 것입니다. 최종적 영원적 결과적인 목적이 아닐 때는 선이 아닙니다. 영원히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선입니다. 선성이란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는 성질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격성에서 선성이라고 말합니다.

 

(4) 애성(愛性): 이 애성은 선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애성은 선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성이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동적 동화적인 사랑이 아닌 내발적 발생적 사랑입니다.

 

한국어로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원어로는 아가페 스톨게 필레아 애로스 등으로 각각 표현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용어는 인간이 쓰는 용어로 번역하기가 빈약합니다. 과거분사 현재 진행형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의사가 이 애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구원의 발작 선택 예정 진행 방편 결과가 사랑이십니다. 예정도 사랑으로, 진행도 사랑으로, 도성인신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한 것 모두는 사랑의 발작에서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5) 성성(聖性): 하나님의 성성은 외래적 평가적 상대적 성성이 아니고 당신 자체로서 구별함을 받은 자체적 능력적 성성입니다. 하기오스: 자체적 절대적 영원적인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인데 동사로 구별한다는 말보다는 명사형으로 구별이라는 말입니다. 또 존재적으로 구별되었다 라기 보다도 자체가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구별성을 가진다는 말은 다른 어떤 존재가 소유할 수 있는 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혹 피동적 수동적 구별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누가 구별해놓은 것이 아니고 자체적으로 구별되어 있는 구별된 존재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도덕성은 일반적인 도덕성과 구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어떤 능력자가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혹은 도덕성을 혼잡 혼돈을 시킨다 해도 혼돈도 혼잡도 될 수 없는 자체적 완전 구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구별성은 인간의 용어로는 정확히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거룩은 자체적 구별인고로 혼잡 혼돈 시킬지라도 혼잡 혼돈되지 않고, 지옥 같은 죄악의 소굴에서도 그것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거룩을 입혀 당신과 같은 거룩한 자로 만들어 거룩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6) 진실성: 이 진실성은 자체적 능력성을 가진 것, 독단적인 가치성을 가진 것, 자체적 가치성을 가진 것입니다. 진리가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은 자체적으로 진리시요 우리에게 대하심도 진실이십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입니다. 이 참이라는 말은 절대 정확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시대의 어떤 존재도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부족이요 비뚤어진 것입니다. 성질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은 이질이요 전부가 죄라는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정확에 절대성을 가진 말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말은 존재적으로 사건적으로 성질적으로 능력적으로 진실이란 말이니 영원히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진(眞)이다. 참이다’ 하는 절대 정확의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히 절대 표준입니다.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 성격적으로 분량적으로 이 진실성이 아닌 것은 기쁨도 향락도 명예도 영광도 사랑도 행복도 부요도 모두는 자기에게 앙화요 고통이요 불행이요 눈물이요 심판거리입니다.

 

(7) 의성(義性): 이 의성은 완전적 의, 생명적 의성입니다. 의적인 능력이란 말은 하나님의 성품적 의성이 아닌 모든 의는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의를 능가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의와 동등 동질인 의도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모든 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적인 본질적인 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와 합치되는 의는 없습니다. 모든 의라고 하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는 전부가 정죄를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의라고 해도 그 의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주권성을 말합니다. 의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주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절대적인 의인고로 이 의가 아닌 모든 의는 이 하나님의 의 앞에 전부가 악으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

 

(8) 주권성: 이 주권성은 절대적인 주권성입니다. 이 신의 능력은 주권적 자체적 능동적 능력이니 이 주권성은 그 무엇에게도 그 어떤 존재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침해치 않고 외계의 그 무엇에게도 침해를 받지 않는 주권적 능력입니다. 이런 주권적 능력인고로 당신은 외계의 그 어떤 의사에게 제재를 받지 않고 당신 자체와 다른 어떤 의사에게도 침해를 받음이 없습니다.

 

이상이 김석준목사님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볼 때 주의할 사항.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할 때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모든 속성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속성을 다른 속성과 대치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를 대조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면서 언제나, 그리고 동시에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찌하든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덧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런 저런 분류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어떻게 분류를 하건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역적인 면에서 볼 때는 비록 어느 한 면의 속성이 두드러져 보이거나 혹은 각 속성이 각각의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동시에 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하는 듯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한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무리 잘 분류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제한된 지성과 제한된 이해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쭈그러뜨려 놓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좀 더 많이 닮아보겠다는 뜻에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분류를 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다른 모든 속성을 전체로, 그리고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크나큰 비극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공의롭고 의롭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울 때 단순히 지식충전에 머물거나 이론이나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속성을 믿는 내가 배운 바대로 정신과 사상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김석준목사님이 분류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가 성화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실천 실행에 도움이 되는 가장 유익한 분류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1)



■본문 롬11:36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인간과 유사한 인격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과 전혀 다른 무한한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특성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성적 탐구에 의한 합리적 방법이나 경험적 방법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유사한 면이 전혀 없는 비공유적 속성과 인간 속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공유적 속성으로 나눕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인 속성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존(自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며(출 3:14), 그 독립성에 의해 모든 행위를 스스로 행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천지는모두 없어지나 하나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는 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분에게  기대는 모든 존재는 영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 불변(不變)하신 하나님



인간은 변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예속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모두 변합니다. 인간과 피조물은 생성, 발전, 쇠퇴, 소멸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나 목적, 약속 그리고 완전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므로 하나님의 뜻도 영원하며,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시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대한 12대 증거]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출3:15)
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풂(신5:10)
3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정확히 성취됨 (왕상8:56)
4 태초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심 (시90:2)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름(시103:17)
6 태초부터 영원까지 우주의 주권자이심 (사41:4)
7 택하신 백성을 영원토록 변함 없이 선대하심(애3:31-33)
8 한번 맺으신 언약은 결코 변개치 않으심 (단9:4)
9 한번 행하신 일은 결코 후회하시지 않음 (롬11:29)
10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불변하심(히13:8)
11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 (벧후3:8)
12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계1:8)


3. 전능(全能)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범위에 있어서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감당하며 품어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하나님의 전능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있어서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다 감당 하는 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사랑한 대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세상의 끝이 올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 무한(無限)하신 하나님



무한성은 외부의 어떤 요소로부터도 전혀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리킵니다. 무한성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본질적 무한성 : 절대자로서의 무한한 완전성을 보여주는 이 속성은 하나님이 무궁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2) 시간적무한성: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시간적 제한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성(eternity)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시간을 현재, 과거, 미래로 파악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현재로 소유하십니다.



시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공간적 무한성: 하나님께서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으심으로 모든 공간의 각 부분에 임재하심을 가리키며

또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공간에 계심을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 능력의 특징]


1 모든것이 가능함 (마19:26)
2 지극히 큼 (시79:11)
3 매우 강력함 (시89:13)
4 지극히 영광스러움(사63:12)
5 영원하여 소멸치 않음(사26:4)
6 주권적임 (롬9:21)
7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음 (롬15:11)
8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음(욥5:9)
9 모든 능력의 근원임(시62:11)
10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없음 (합3:6)
11 대적할 자가 없음 (욥11:10)
12 탁월함 (신32:39)




하나님의 속성(성품)(2)

 
■본문 벧후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창 1:27).
그러기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1. 사랑이신 하나님



1)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묘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는 묘사입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2)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극치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사건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 하시며, 피조물을 가슴에 품으셔서 대신에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또한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변화된 것은 기적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매우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는 아무런 보상 없이 베푸시는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 인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구원의 대상이 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구원이나 영적 행복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신인 동성론적 표현들]
1. 좋아하심(창1:31)

2. 휴식하심(창2:2-3)

3. 근심하심(창6:6)

4. 후회하심(창6:7)

5. 기억하심(창9:16)

6. 살피심(창18:21)

7. 진노하심(출22:24)

8. 질투하심(출24:14)

9. 싫어하심(잠6:16)

10. 미워하심(신16:22)

11. 염려하심(신32:27)

12. 선한 싸움을 하심 (신33:27)

13. 아심(왕상8:39)

14. 웃으심(시2:4)

15. 주무심(시44:23)

16. 슬퍼하심(시78:40)

17. 보복하심(렘51:56)

18. 뜻을 돌이키심 (욘3:10)

19. 원수를 갚으심 (롬12:19)

20. 사랑하심(계3:19)





4. 거룩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카도쉬’는 ‘분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다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분으로 지칭되며,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어 존재하십니다.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2)거룩함이란 하나님의 이름일 뿐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곧 거룩한 무리라고 부릅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고 불리며,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은 성일(聖⽇)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운명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5. 의로우신 하나님



성경에서 ‘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데크 ’는 ‘기준에 부합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 의 의로움이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지 않으며 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내적인 거룩함에 합당한 성품을 갖고 계시는데, 이를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 율법, 사망에 반대가 되는 분으로서 의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


【마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이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생각과 마음속에 모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의 존재 속에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화되어 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에 동화되는 것은 모든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공로 없는데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는 그것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 했음에도 행복을 베풀어 주실 때에 그것은 ‘자비’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게 하는 반역을 참으 실 때에는 그것은 ‘오래 참으심 ’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때에는 그것은 ‘진리 ’이다.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에는 그것은 ‘긍휼’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때에는 그것은 ‘후대’이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를 도와주실 때에는 그것은 ‘의’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실 때에는 그것은 ‘자비’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선하심이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통합되어진다.    -E.스탠리 존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무슨 뜻인가?

성경이 사랑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의 본질이심을 여러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고전 13:4-8a ).
이것이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서술이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 4:8), 이 서술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려줍니다.

사랑(하나님)은 자신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응하여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입니다.
사랑(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두루 행합니다.
사랑(예수님)은 남들이 가진 것을 탐하지 않고, 불평 없이 겸손한 삶을 삽니다. 사랑(예수님)은 육체 가운데 거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압도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예수께서는 기꺼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사랑(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였으며, 지금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장 8절은 똑같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의 가장 큰 바람은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집,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값을 치름으로써 그 길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그분의 뜻에 따라 택하셨습니다. 사랑은 용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분의 위격과 성품의 핵심적인 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하심,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심지어 그분의 진노와도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의롭고 옳듯이, 그분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완벽한 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들의 개인적 구세주 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요 1:12; 요일 3:1, 23-24).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신을 연구하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참 신자이고, 참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에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첫 번째로 태어나는 것이고,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딸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거듭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증거가 나타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수록 부모를 점점 닮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을수록 성품이 변하고, 사랑이 많아집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맛은 직접 경험해 보아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 사랑할 줄 모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불의한 짓을 하던 사람이 하지 않게 되고,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던 사람이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거듭났다는 증거, 진짜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다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지고, 영안이 밝아지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우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밝은 빛으로 인해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행하시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창세기 1장, 2장만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가득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만드시고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시면서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 도대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기에 이 어마어마한 우주와 만물을 다 만들어 주셨는지,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합니다. 잠언 3장 11~12절에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으시고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히 살면 좋을 것 같지만, 생각 밖의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편하게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맛이 좋은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그것이 독약이고, 고통을 몇 배로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악가 파바로티와 함께 3대 테너 가수 중 한 사람이었던 호세 카레라스는 41세 때 오페라 <라 보엠>을 공연하다가 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병원에 가서 백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그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시대의 히스기야처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히스기야의 하나님은 호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기적처럼 병이 나아서 1년 반 만에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과거와 달랐고, 그의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중들 앞에서 “질병도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 다.’라는 것과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입 전부를 바쳐서 백혈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은혜 받은 사람들은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과 목숨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모든 계명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2~13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잔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이 곧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 좋은 차, 높은 지위와 명예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절대로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우리에게 잠시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하며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행복이 따라옵니다. 우리 가정에 사랑이 넘칠 때 행복해집니다.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이 세상에 사랑이 넘칠 때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이상적인 사회는 사랑이 넘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행복한 세상으로 만드는 길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머리로는 알지만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요한 이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계명대로 살지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의 열매가 없어서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할지 모르지만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생각만 하면 뭐합니까? 실제로 물을 주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돌봐야 열매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머리로는 사랑해야 된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행함이 없습니다. 옆의 사람이 굶고 있어도 ‘아이고, 안됐다, 안됐다, 사랑하는 아무개가 굶고 있구나.’ 하고만 있습니다. 실제로 사랑한다면 무엇이라도 갖다 주어야 하는데, 행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며 받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게 되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사랑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만이 아니라 행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성령 충만하니까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성도들이 함께 모여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32절에 보면 누구도 자기 재산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두 나누어주고 함께 쓰면서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이나 형제지간에도 내 것이라고 싸우는데 예루살렘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하면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도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15절에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 嗤?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눈병이 있었다고도 하고, 간질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다 보니 온 몸이 형편없게 된 것입니다. 그 볼품없는 모습을 믿음이 어린 사람이 보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거지 같고 중환자 같고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은 업신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와 같이 섬겨주었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것입니다.

서울 강북에 수유리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목회를 아주 잘하셔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열심히 목회를 하시던 중에 쓰러지셨는데, 5년이 넘도록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지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들 중에 시험에 들어 안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정말 사랑하니까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전 교인이 기도하며 목사님을 극진히 간호하자, 성도들의 사랑이 담긴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여서 목사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다시 하시니 교회가 더 부흥되었고, 몇 년 전에는 성전을 크게 지어 하나님 앞에 헌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교회는 사랑이 충만합니다. 

미국 오렌지카운티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몸이 약해서 새벽기도에도 잘 못 나오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정재훈 장로님이라는 분은 새벽 4시만 되면 다른 장로님들을 불러서 함께 교회를 위해, 목사님을 위해 날마다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이 목사님이 중풍에 걸려 은퇴하시고, 다른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정재훈 장로님은 일주일 동안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것을 가지고 주일 아침에 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아침 식사를 수년간 함께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로님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큰 회사의 사장이 되게 하셨고, 또한 이 분이 우주선을 발사할 때 폭발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장치를 개발하게 하셔서 미국 대통령과 비밀회의를 하고, 전 세계에서 이 장치를 주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새벽마다 기도하고, 곳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십자가로 통해 나타나신 사랑
사랑의 생각, 말, 행동 실천해야

선교사며 번역가였던 위클리 도우거 멜란드 부부가 브라질의 인디언 마을로 이주했을때의 일입니다.
당시 원주민들은 말투가 거칠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배타적인가 알아보니 이들 부부가 오기 전에 다른 백인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고 집에 불을 놓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멜란드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인디언들의 말을 익히며 의술과 다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도우거가 상처가 나서 피가 엉켜붙은 한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겨 주다가 자신을 보고 원주민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는가?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도우거가 인디언 집에 갈때면 인디언들은 그가 온다는 말 대신에 “우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사랑안에서 인디언들은 비로소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다같은 백인이지만 약탈하고 방화하고 억압하는 백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주는 백인, 그들 속에 하나님을 찾아볼수 있는 백인이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랑 속에서 인디언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큰 변화의 체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평안과 행복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환상으로나 꿈으로라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형상으로는 볼수 없으되 하나님의 실상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배울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

사랑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7절로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모신 사람마다 사랑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샘물이 있으면 바깥으로 그 샘이 흘러 넘쳐 나오듯이 사랑이 있으면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로 불리우던 테레사 수녀는 1910년 건축업자이며 시의원인 아버지 슬하에서 태어나 18세에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캘거타로 건너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나중에 그 고등학교 교장 선생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리야 산에서 요양을 한후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을 섬기며 일생을 보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 돈으로 5루피를 들고 인도 캘거타의 빈민굴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테레사 수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가 돌보았습니다.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수상축하연을 열지 않고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쓴다는 조건으로 수상식에 모습을 들어냈습니다. 그녀가 실천한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이신지라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리는 알버츠 슈바이처 박사는 1875년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목사로 대학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바하 음악에 심취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29살 때 그는 우연히 기숙사 책상위에 놓인 잡지를 통해 아프리카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마음이 극히 아팠습니다. “우리는 구라파에서 이렇게 문명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저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니 불공평하기 짝이없다. 내가 가서 도와 주겠다”라고 고백하며 사명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후 슈바이처는 의학을 공부하고 1913년에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기로 유명한 랑바레네라는 곳에 병원을 설립하여 주민들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했습니다. 하루는 한 부인이 그를 찾와서 “저는 정말 이해할수 없어요. 훌륭한 의사요, 위대한 학자인 당신같은 사람이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저는 말로써 감동시킬 만한 말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사랑을 베푸는 동안 저는 하나님을 바로 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에 와서 의술을 통해서 환자를 치료해 주므로 사랑을 베풀고 그 사랑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도록 전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52년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많은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기 위하여 그가 탄 기차에 올랐습니다. 특등실에 가서 보니 슈바이처가 없었습니다. 1등칸과  2등칸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해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탄다는 3등칸에 갔더니 슈바이처 박사가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청진기를 대고 진찰과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기자들이 놀라서 “박사님! 상을 받으러 가는 이때에 가시면서까지 왜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는 내가 즐길 곳을 찾아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다니며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이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천민들이 타는 기차칸에서 저들을 돕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볼수 있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 머무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 인생들을 돌보시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아 줄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 역사하는 그곳에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모습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하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절로 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죄와 더러움, 병, 저주, 죽음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시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통해 나타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더러움을 몸소 짊어지시고 병을 감당하시고 저주를 당하시고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한없는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매달린 형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서 강물처럼 넘침을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 처한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의 모든 죄의 부채를 청산하시고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의 역사를 볼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끝까지 매달리게 한 사실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함을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씁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아키발드 디 하트는 용서란 나를 해친 사람에게 내가 원수 갚을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히 그를 못박고 조롱하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갚는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그 끝없는 사랑에 우리는 감격하지 아니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을 받을때가 있습니다. 원수가 잘못되는 것과, 원수가 심판 받기를 원하며, 원수가 불행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용서 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는데 나는 용서받고 남을 용서 안한다면 주님의 용서가 어떻게 내 생애 속에 효과를 발생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용서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믿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울이 햇빛을 받으면 반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사 안하는 거울은 거울이 아닙니다. 그처럼 예수믿는 사람은 주님께 용서를 받았으므로 용서를 베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에 서로 용서하라고 오늘날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므로 그리스도의 용서를 마음 속에 받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요한일서 4장 11절로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오시면 사랑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고 사하여 주시는 속성이 있습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야훼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허물을 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미워하는 사람은 자꾸 발가벗기고 다투고 논쟁을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물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8절에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점을 보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와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이웃을 못살게 굴고 이웃의 약점을 들춰내고 허물을 들춰내면서도 본인에게는 “나는 잘믿는 사람이다. 내가 제일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착각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이웃을 감싸고 사랑하고 덮어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대경을 하나 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확대경은 두가지 역할을 합니다. 멀리 적게 보이게 하는 것과 아주 가까이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과 단점은 멀리 보십니다. 장점은 크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한없는 은혜를 쏟아부어주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확대경을 들고서 내 장점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장점을 보시고 사랑 해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묶여 사는 것 원치 않습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세상과 마귀의 종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병에 묶여서 평생을 고통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가난과 저주에 묶여서 종살이 하기를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속성은 심신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름은 야훼 라파다. 나는 치료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데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신 그의 사역의 3분의 2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유언으로 남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치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출신의 호세 까레라스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전세계가 알아주는 삼대 성악가 중 한사람입니다. 그런데 은빛 테너라고 불리우는 그는 한때 불치의 병을 앓았던 적이 있습니다. 성악가로서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그의 나이 41살 되던 해에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서 한참 연습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에 실려가서 조사해 보니까 치명적인 백혈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의사는 고개를 흔들면서 살 가능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문득 성경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동안 성경은 읽지도 아니하고 그저 의무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고통가운데 처하게 되니까 구약의 하나님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세상 의사들이 포기하고 이제는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나는 너의 의사’라고 말하니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께 소망이 있다고 그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제 생명을 조금만 더 연장시켜 주시면 남은 생애는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투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이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찬송하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골수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도 믿음으로 잘 견뎌내어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백혈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까레라스는 자신이 다시 살게 된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감사하고 전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까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워서 미국과 독일 스위스 등지에도 지사를 두어 백혈병 환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그들에게 치료의 은총을 베푸는 선한일을 했습니다. 비로소 까레라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된것입니다.

지금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 나보다 남을 생각할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있을 동안에 하나님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축하하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심신을 치료하실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성은 또한 용기와 희망과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고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한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공이시며, 복이시고, 하나님은 은혜이신데 하나님께 나가서 복을 안받으면 누구에게 복을 받겠습니까?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 당당히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복을 받을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고 평안을 주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용기요, 희망이요, 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은 영생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가 시간 저 건너편 영혼으로 이 제한된 공간 저 건너편 무한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살다가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바울선생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결코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우리가 비로소 삶을 행복하게 누릴 수 있고 평안을 가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우리하고 다릅니다. 미움은 마귀의 속성이기 때문에 미움이 들어오면 우리 마음에 불안과 공포, 좌절과 절망이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미움이 가져오는 파괴의 행동이란 얼마나 무섭습니까? 미움은 마귀의 형상이요,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은 반드시 그속에 사랑이 넘쳐나고 사랑안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이상 미움은 물러가고 사랑이 들어온 것을 감사합니다. 미움의 어두운 밤이 사라지고 사랑의 태양이 떠오른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의 생각을 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의 행동을 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사랑 안에서 참 평안과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05-11-2024(토) 요한일서 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6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과 미혹의 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과 미혹의 영(the Spirit of falsehood)
토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스 카이 토 프뉴마 테스 플라네스
το πνευμα της αληθειας και το πνευμα της πλανης

진리(225) 알레데이아(alēthĕia) ἀλήθ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

1. 진실성.   2. 진실. 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alēthĕia ]
어원  / 227에서 유래

참(마 22:16), 사실(막 5:33), 진리(요 1:14, 4:24, 롬 2:2), 실상(요 16:7), 과연(행 4:27), 참 됨(행 26:25), 진실하심(롬 15:8),
[동] 진실 하다(롬 15:8), 참되다(롬 3:7).


미혹(4106) 플라내(planē)  πλάνη, ης, ἡ 스트롱번호 4106

1. 4108의 여성형 : 배회.  2. 잘못.  3. 미혹
발음 [ planē ]

유혹(마 27:64, 엡 4:14), 간사(살전 2:3), 미혹(살후 2:11, 벧후 3:17, 요일 4:6), 어그러짐 (유 1:11), 그릇됨(롬 1:2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 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 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오늘날 교회 밖은 물론이고, 교회내에도 미혹의 영이 만연한 가운데 있습니다.
미혹의 영이라는 것은 악한 영, 사단의 영을 말합니다.
특별히 미혹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과 더불어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미혹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4).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마지막 때에 사단은 뉴에이지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의 영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가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단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입니다.

“새로운 시대(New Age)” 라는 말이 뭔가 새로운 좋은 시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은 뉴에이지적인 영성훈련입니다.
이 명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명상은 말씀은 전혀 없는 미혹의 영이 주관합니다.

음악과 찬양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뉴에이지 찬양을 들어보면 그 가사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가사 자체가 건전해 보이지만 경배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빠진 노래는 찬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교회에서 이 노래를 찬양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를 작곡한 Secret Garden 밴드와 작사한 Brendan Graham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도 이 노래는 장르가 ‘뉴에이지 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곡조가 좋으니 찬양처럼 부릅니다.
이런 전형적인 뉴에이지 찬양이 교회에 많이 보급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힐송 찬양이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뉴에이지 스포츠라고 하여 요가를 통한 심신 단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가는 인도의 이방신을 부르는 접신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뉴에이지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사랑과 평화, 화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의 사상은
“feel goodness”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 내가 좋은 것을 행하는 것),
“moral relativism” (상대적 윤리),
“pluralism” (다원주의}이고 또한
“Humanism” (인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입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지친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참 평안으로 이끌어준다는 명목하게 이러한 운동을 적극 장려하며 심지어 교회 프로그램으로 사용하는 교회들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진리의 영은 오직 하나뿐 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거룩한 성령의 지배를 받아 거짓된 가르침과 길에서 벗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뉴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다원주의에 해당하는 WCC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의 특징은 설교도 사람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본주의에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달라스의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인 번영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조엘 목사외에도 대형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뉴에이지 목사들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사전에 찾아보면 뉴에이지 운동은 “1970년 80년대에 주로 신비주의 이단이나 형이상학적인 종교단체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New Age)” 라는 말이 뭔가 새로운 좋은 시대를 의미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단이 마지막 때에 교회와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많은 연관이 되어있는 뉴에이지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는 우리가 접하는 문화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문화에 빠지게 합니다.
또한 교회에 침투해서 뉴에이지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가게 합니다.
현재 많은 교인들과 교회들이 뉴에이지에 감염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은 뉴에이지적인 영성훈련입니다.
이 명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명상은 말씀은 전혀 없는 미혹의 영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유명한 목사의 영성훈련에 다녀온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영성훈련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명상만 하라고 했다.’
잘못된 전형적인 뉴에이지 영성훈련입니다. 이런 영성훈련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음악과 찬양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뉴에이지 찬양을 들어보면 그 가사에 ‘예수님’이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가사 자체가 건전해 보이지만,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이 빠진 노래는 찬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You raise me up”이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교회에서 이 노래를 찬양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를 작곡한 Secret Garden밴드와 작사한 Brendan Graham이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위키 백과사전에도 이 노래는 장르가 ‘뉴에이지 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사와 곡조가 좋으니 찬양처럼 부릅니다.
이런 전형적인 뉴에이지 찬양이 교회에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힐송 찬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즘 일부 CCM 노래들은 그냥 들으면 가요인지 찬양인지 분간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뉴에이지 스포츠가 있습니다.
요가가 그렇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건강을 위해서 요가를 합니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어떤 미국교회는 요가가 아예 교회의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가는 인도의 이방신을 부르는 접신 행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뉴에이지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사랑과 평화, 화합 이런 것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뉴에이지의 사상은 “feel goodness”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한 내가 좋은것을 행하는 것), “moral relativism” (상대적 윤리), “pluralism” (다원주의}이고 또한 “Humanism” (인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뉴에이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다원주의에 해당하는 WCC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인본주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교회의 특징은 설교도 사람중심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인본주의에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달라스의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인 번영 설교자입니다.
그러나 조엘 목사외에도 대형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뉴에이지 목사들의 설교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또한 동성애를 옹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성경의 말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윤리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지지하면 상대적으로 교회도 그것을 받아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뉴에이지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용납하게 됩니다.
왜냐면 교회는 모든 이념을 다 수용해서 평화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좌파(사회주의)의 이념은 유물론에 입각한 반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고 사랑이 아니라고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말씀을 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또한 마지막 때에 동성애나 혼합주의와 같은 배도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니 미혹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 2:3)

교회가 사회주의를 용납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고, WCC와 같은 혼합주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단이 ‘New Age’ 즉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에 뉴에이지의 영을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침투시켰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New World Order(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고 모든 인류가 사단 루시퍼를 섬기기 위한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New World Order(새 세계질서)’라는 단어가 1980년대 말부터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사단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지 ‘새 세계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도, 동성애와 WCC도 루시퍼를 섬기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사단은 뿔달린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온순한 양과 같이 때로는 평화의 사자같이 우리를 미혹하고 교회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내세우는 뉴에이지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4-15)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단의 일군들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가짜가 진짜같고 진짜가 가짜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가운데 깨어서 분별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한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도 동성애자들도 혼합주의자들도 모두 사랑과 평화와 화합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뉴에이지영, 즉 사단의 영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화합은 오직 한분이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진리되신 말씀안에 있을 때만 참 사랑과 평화와 화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있어야지만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뉴에이지영)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하인츠 프레히터>라고 하는 독일계 미국인이 있습니다.
그는 접시닦이 출신으로서 억만장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원래 전기와 수도도 없는 독일의 시골벽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정비소를 개업했는데, 그 때에 자동차 천장에 여닫을 수 있는 ‘선 루프’를 개발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36개나 되는 회사를 소유하는 거부가 된 것입니다.
그는 22개의 언론사도 소유하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호텔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섬 하나를 통째로 사서 초호화 저택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처럼, 부러울 것이 하나 없는 그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이유란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게 된다 할지라도,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아무리 좋은 집에서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으며, 또한 아무리 많은 쾌락을 즐기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만으로 체울 수 있는 마음의 공허는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인츠 프레히터>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 한마디만 남겨놓고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세상에서 웰빙의 삶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여 이 세상과 이별한다는 것이지요/

사도 요한이 지금 이 서신을 쓴 목적이 1:4절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이 기쁨은 진정한 웰빙,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의 진정한 웰빙의 삶 즉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삶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빛 가운데 거하는 삶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특징은 빛 가운데 거하는 깨끗한 삶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이런 증거가 없다면 자신의 신앙의 삶을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우리를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인지 아니면 미혹의 영에 속하지 아니했는지,
나의 신앙의 삶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요1서에서 가장 강조하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의 특징 즉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실천을 말하려고 하면서
왜?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까?
1. 사도 요한은 왜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까?(1절)
신앙생활과 또는 목회에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가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1: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은혜와 진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게 잘 되지를 않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7절 이하 말씀에서 보듯이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즉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 면이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이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장로교는 진리와 전통을 강조하다 보니 사랑의 실천이 약합니다.
사도 요한이 2:18절에서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가 약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바로 세우고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고 합니다.
이것은 에베소 지역 교회가
사도 요한의 경계에 따라 이단의 침투를 막다 보니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계2:2-4절에서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에베소 교회가 이단들의 침투를 막은 것은 잘한 일인데
그러나 보니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그 반대로 사랑을 강조하기 전에 <3>
거짓 영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을 먼저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사랑과 진리가 균형을 이뤄야 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우리가 영들을 시험하느냐? 하면
2.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까?(2절)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먼저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확신합니까?
무엇으로?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증거가 뭡니까?
2절에 [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즉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믿는 자는
바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고
가현설 - 즉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영체이지 육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신 사실을 인정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거의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들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의 존재에 있어서,
있었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존재하신 분이라면
그 분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곧 하나님으로 존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만약 이런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면 진리는 설자리가 없어지며
우리의 구원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영, 사탄의 역사는
이같이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극력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의 교리는 이 비진리의 토대 위에 세워집니다. <4>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그럼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럼 우리를 미혹하는 영을 어떻게 시험해 볼 수 있는가?
3.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하는 첫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3절)
3절 [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요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아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변화 받고 나면 우리는 자칫 영적 주관화 경향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이라고 하면 다 믿으려고 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그렇지 않는지도 살펴보지도 않고
무조건 수용하여 잘못된 신앙적 모습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영적인 기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항상 말씀이 세운 기준을 중심으로
자신의 영적인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고 놀라운 일을 눈을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일이 예수님을 시인함으로 일어나는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도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결코 영적 감상주의에 빠져서 기적이나 신비를
모든 영적인 기준으로 삼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들도 영적인 일을 말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그분으로 인하여 행하는 것인지를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민감합니다만
생활 속에 파고들어오는 마귀의 유혹은 잘 물리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가 잘못되어지면 신앙의 삶이 삐뚤어지지만
삶이 잘못되어도 교리가 변질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여집사가 쇼핑하러 갔다가 멋진 옷을 보았는데 가격이 엄청나게 비쌉니다.<5>
사고 싶은 욕망을 도저히 꺾을 수 없어서
카드로 그 드레스를 사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저녁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그 멋진 드레스를 보여 주었습니다. 남편은 드레스 값이 얼마라는 것을 듣고는 질려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 당신, 도데체 이렇게 비싼 옷을 어떻게 살 수 있냐? ]
[ 마귀가 나를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
[ 그러면 당신이 그처럼 열심히 읽는 성경 말씀대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는 하지? ]
[ 내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더니
내 뒤에서 다시 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요?
'뒤에서 보아도 그 옷을 입고 있는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소!' ]
우리는 교회 안에서는 또는 성경을 놓고는 아멘!도 잘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뒤에서 들려오는 마귀의 말에 더 솔깃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그리고 하나님 말씀마저 자기에게 맞추어 버립니다.

사단이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을 죄짓게 만들 때,
예수 믿는 사람을 유혹할 때에 쓰는 방법이 네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바로 다윗 이미지를 가지고 나옵니다.
다윗 왕을 봐라,
그렇게 범죄했지만 회개한 다음에 훌륭한 왕이 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지금 죄 짓다가 때가 되면 회개하면 된다고 유혹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모세의 이미지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혈기가 있었다.
모세를 보아라,
그는 사람을 쳐 죽이기도 했고, 십계명을 깨뜨리기도 했고,
사람들 앞에서 반석을 땅땅 내리치기도 했던 혈기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위대한 사람이었지 않느냐,
네가 혈기 좀 부렸기로서니 그것 가지고 뭘, 괜찮다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세째는, 베드로의 이미지를 가지고 나옵니다.
베드로를 보아라,
그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만 잤다,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 받은 다음에 큰 일을 하지 않았느냐,
지금을 잘 때이니 푹 쉬어라.
나중에 기도해서 성령받으면 된다- 이래가면서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무서운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바울 이미지입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들어보라, <6>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행위는 상관이 없다, 마음대로 살아라, 이미 구원을 받아놓은 것이다,
나는 구원받기로 이미 예정된 사람이니까
거꾸로 가건 말건 천당 가기로 정해졌다. 걱정 말아라 -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이런 유혹을 통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지고 자기변명으로 미혹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을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신앙고백은 하지만 삶에는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의 말씀도 없는 교인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들입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아니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를 미혹하고 있다는 것 꼭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실천적 무신론자로 몰고 가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미혹의 영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4. 하나님께 속한 자의 신앙의 승리는 어디로부터 옵니까?(4절)
하나님께 속한 영적 성도의 특징은
그들의 삶이 세상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이깁니다.
4절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 주님을 의지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다 크신 분 - 어떤 분이십니까?
공중 권세를 잡고 세상을 좌우하는 사탄의 권세를 깨뜨려 놓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 부귀와 명예보다 크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귀담아 들어시기 바랍니다.
[ 마귀는 인간을 악마로 만드는데
돈보다 더 성능이 좋은 무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돈은 그 성능 이 얼마나 뛰어난지 사람들 앞에 이것을 흔들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지 다 통하는 전천후의 무기라서
한 번도 손질을 하거나 개량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는 무서 운 독약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
우리가 언제 신앙생활에 철이 들어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마귀가 무기로 내 세우는 돈 보다 더 크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에 <7>
눈이 뜨여질 때입니다.
여기에 눈이 뜨여지지 못하면 마귀의 유혹에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거짓된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듣기에 좋은 말을 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영에 속한 바른 믿음의 성도가 되기 위하여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라 행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14: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니
멜기세덱 왕이 나와서 영접할 때에
아브라함이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며 하는 말이
[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라 ] 합니다.
다윗이 성전건축 준비를 다 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대상29:11-12절에
[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게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다.
부과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
모든 것이 주에 손에 있을 만큼 크신 분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요 나의 주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의지하여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한 자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신 주님이 세상에 있는 이(마귀) 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러한 승리의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사탄이 등장한 후로 미혹의 영이 나타났습니다.
사탄과 그의 사자들이 천국에서 쫓겨난 후,  이들은 인간이 거주하는 이 세상에 그들의 있을 자리를 펴고 인간을 대상으로 미혹하는 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미혹의 첫 대상은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그 후 미혹의 영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인간들을 미혹해 왔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미혹의 영은 사탄의 영으로 이 영을 유혹의 영, 혹은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혹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말을 따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미혹이란 말은 그럴듯하게 속여서 가짜를 진짜처럼 속여 그것을 믿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진리의 영 인양 자기 존재를 위장합니다. 혹은 천사 인양 외모로 가장합니다. 우리가 이 같은 미혹의 영의 역사에 대처하지 않으면 그들의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
1) 깨어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약해지면 마귀가 그 틈을 타는 것입니다. 마13장에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사람들이 잠 잘 때 악한 자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하셨습니다.
잠잔다는 말은 기도하지 않는 생활을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 할 수 있는 방법을 6절에서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 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고 합니다.
요한이 이곳에서 '우리의 말을 듣는다'는 말은 당시 교회에 보낸 사도들이 서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나아가 교회의 법을 말합니다.
근래에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기도하는 종들이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종들에게 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신비주의 신앙에 빠진 사람들로 이들의 결국을 살펴보면 이단으로 흐르거나 잘못된 신앙으로 빠져들어 결국 자기 영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1:8에서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고 경고했습니다.

몇 해 전 이탈리아 한 수녀가 카메라로 예수님을 찍어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안나 알리라는 수녀가 자기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 내가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내가 모습을 보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이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한 것을 쥐어 주기 위해 예수님이 실물과 다름없는 사진을 찍어 증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사진을 찍었다고 말하는 안나 알리 수녀는 무려 예수님을 이백 회 정도 만나 뵈옵고 또한 그때마다 예수님이 친히 주신 말씀을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성스러운 호소>라는 제목을 달고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친히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 내 말은 인쇄되어지고 읽혀질 것이며 그것을 읽는 이들에게 나는 ‘특별한 은총’을 내리겠다. ]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으로는 부족하다. 라고 감히 이 책이 선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특별한 은총’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성경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저들의 신비체험이나 기적체험을 성경보다 더 우선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은 성경이 우선이고 나아가 교회의 법도가 우선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교회의 질서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혹의 영에 미혹되면 성경 말씀도 교회의 권면도 듣지 아니하고 독선적인 신앙적 아집에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6절에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말을 듣고 ] 합니다.
성경과 교회의 지도를 받는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성경 말씀과 교회의 법도를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화) 조선인 '거지 대장'과 결혼한 日관료 딸…목포 울린 위대한 사랑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일제 강점기였다.
버려진 고아들을 보살피는 조선인 ‘거지 대장’과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결혼했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답이 전남 목포의 공생원(共生園)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주최로 지난달 22~24일 전남 일대의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답사를 갔다.
전남 영광과 신안, 목포를 거쳐 순천과 여수를 찾아가는 순례였다.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목포의 공생원이었다.
거기에는 계급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었다.

거지 대장과 총독부 관료의 외동딸

윤치호(1909~?)는 14세에 소년가장이 됐다.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을 마쳤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가 됐다.

이듬해였다.
길을 가던 그는 고아들을 보았다.
다리 밑에서 기거하며 굶주리는 떠돌이 고아들 일곱 명이었다.
19세의 윤치호는 고아들을 데리고 유달산 자락으로 갔다.
유달산은 돌산이라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날부터 윤치호는 고아들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시작했다.
식량이 없을 때는 직접 동냥까지 했다.

갈수록 찾아오는 고아들이 늘었다.
윤치호는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공생원’을 세웠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거지 대장”이라고 불렀다.
공생원의 고아는 100명까지 늘었다.
아이들에게는 교육과 선생이 필요했다.

마침 목포 정명여고의 일본인 음악 선생이 공생원에 와서 도와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다우치 지즈코(윤학자).
기독교인이었다.
함께 일하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고아들의 대부이자 ‘거지 대장’이었고, 여자는 조선총독부 일본인 관료의 무남독녀.
누가 봐도 건널 수 없는 다리였다.

결혼 의사를 밝히자 지즈코의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하늘나라에선 일본인도 조선인도 구별이 없다.
모두가 형제, 자매이지.” 그렇게 둘은 결혼했다.

한교총 이철(감리교 감독) 공동대표회장은 “지금도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1%밖에 안 된다.
당시에는 더 적었다.
지즈코 여사의 가문이 기독교 집안이었다.
남편 윤치호와 고아들을 향한 숭고한 열정의 바탕에는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고아들, 인민재판에서 아버지 구해

1945년 8월 해방이 됐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윤치호는 친일파로 몰리는 봉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구해주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우치 지즈코는 조선에 남았다.
윤치호와 지즈코는 2남 2녀를 두었다.
공생원의 고아들과 똑같이 입히고 먹였다.

5년 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부모 잃은 전쟁고아가 급증했다.
공생원의 고아는 500명을 훌쩍 넘어섰다.
목포에도 인민군이 들어왔다.
군인ㆍ경찰 가족과 목사ㆍ전도사는 마을 공터에서 인민재판을 받았다.
윤치호 전도사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500명의 고아가 찾아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마을 사람들도 한목소리였다.

인민군은 그를 살려주었다.
대신 그 지역의 인민위원장을 강제로 맡겼다.
몇 달 뒤에 국군이 들어왔다.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윤치호는 ‘빨갱이’로 몰렸다.
옥고를 치르는 등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밑거름

1951년 윤치호는 공생원 고아들에게 줄 식량을 구하려고 전남 도청으로 갔다가 행방불명됐다.
남편이 실종됐지만 지즈코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공생원 고아들을 자식처럼 계속 돌보았다.

1960년이었다.
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지즈코 여사는 15년 만에 일본을 찾았다.
당시 일본 공영방송 NHK에서 모녀의 극적인 상봉을 방영했다.
그 방송을 보고서 일본에 여러 후원회가 생겼다.
덕분에 공생원은 남녀 고아들을 중고등학교에도 보낼 수 있었다.
60년대에는 공생원 바깥에서도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1968년 다우치 지즈코 여사가 소천하자 목포시는 첫 시민장으로 치렀다.
당시 목포시 인구는 17만 명, 그중 3만 명이 목포역에 마련된 영결식장을 찾았다.

다우치 지즈코 여사는 196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병석의 무의식 상태에서 일본어로 “우메보시(일본식 매실장아찌)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NHK에서 2000년에 방영됐다.
이걸 본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직접 공생원에 전화해 “너무 고맙다.
내가 한국에 가면 꼭 들르겠다”며 매실나무 20그루를 보냈다.

공생원 이연 상임부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때 한일관계를 회복하며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했다.
김 대통령도 목포 공생원을 무척 아꼈고, 오부치 총리는 매실나무까지 보냈다.
두 정상 간 만남에서도 공생원이 주된 대화 소재였다”고 설명했다.

총신대 허은철 교수(역사교육과)는 “지금껏 공생원을 거쳐 간 고아가 3000명이 넘는다.
거지 대장 윤치호와 지즈코 여사가 함께 일군 공생원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모델을 제시한다”며 “여기에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인류애가 있다”고 강조했다.

▣ 행함과 진실로

어느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되어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주일 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 명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 것이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분 후,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사람을 신장기증자로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에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답니다.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맙시다.

▣ 행위 있는 믿음(누가복음10: 30-37)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야고보서에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온전케 함이라.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너희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불교와 같이 산 속에서 명상하고 앉아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내 감정의 의식구조, 행동 등 내 전체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말하기를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들여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 불교의 승려가 보름동안 훈련을 받게되었다고 합니다. 교육을 받은 후 이 승려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앉아만 있는 부처를 부수고 호미를 들고 서있는 부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행위의 종교입니다. 서양 격언에 "나태는 신자의 무덤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 기도: 행함이 있는 신앙생활만이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사오니 믿음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 행함이 없는 믿음(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설원이라는 중국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맹수지만 의심이 많아서 머뭇 머뭇하여 실천하는 일이 적은데 , 그렇다면 벌이나 반딧불이 독을 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헛된 이론만 숭상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시원치 않은 사상과 말로 실행한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형편에 따라 잘도 인용하면서 실제 행동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여우는 조그마한 벌 한 마리 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 행함이 없는 믿음

경상도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던 한 목사님이 서울에 있는 교회의 초대를 받아 설교를 하게 되었다.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설교는 성도들에게 많은 은혜를 주었다.
예배가 끝날 때 설교를 하신 목사님이 축도를 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설교맨치로 살라꼬 다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항상 함께 하실찌어다.”

웃음으로만 넘기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축도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 말씀이 없어서인가?
그렇지 않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함이 문제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많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화려함과 요란함은 있지만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고 했다.

▣ 더 좋은 아내가 되어야죠

어느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남편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한 사실을 안 선교사는 그 여인에게 남편이 화를 낼 때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쎄요, 저는 남편을 위해 더 좋은 음식을 만들고, 남편이 불평할 때 면 마루를 더 깨끗이 닦고, 남편이 퉁명스럽게 말하면 더욱더 부드럽게 대답하지요.
선교사님, 저는 제가 크리스천이 된 후로 더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방 청소하는 것만 보아도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여종이 있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여종의 주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여종의 어떤 행실을 보고 진실된 신앙인임을 아십니까?"

이 말을 듣고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이가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진실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딤전 4:2, 벧전 1:15, 2:12)

▣ 그리스도인 사공의 노

두 신사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과 행함에 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
한 사람은 선한 행위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다른 반대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서로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조용히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던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 사공이 그의 견해를 말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좋다는 허락을 받은 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노를 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내 오른손에 쥐고 있는 노를 '믿음'이라고 부르고 내 왼손에 쥐고 있는 노를 '행함'이라고 합시다.

신사분들, 잘 지켜보십시오.
나는 믿음의 노만을 젓습니다.
보십시오! 이 배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고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지요.
이번에는 행함이라는 노만 저어 보지요.
결과는 마찬가지지요.
잘 보십시오! 두 노를 함께 젓겠습니다.
배는 쑥쑥 앞으로 나아가 몇 분 후면 우리가 내리고자 하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행함이 없는 믿음, 또 믿음이 없는 행함.
그 어느 것 하나도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제 변변찮은 견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 우리는 분명히 영원한 안식의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열매가 매달리기 전에 꽃이 피는 것처럼 선한 행함이 있기 전에 믿음이 있다.
믿음은 행함의 아버지고, 자녀인 행함은 그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시계의 내부 부속이 제아무리 잘 조립되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숫자판과 바늘만 있는 것으로도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내부 부속이 시계 바늘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행함은 손의 움직임을 단속해야 한다.

▣ 행함이 없는 한국교회

지난 한주간 필자는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에 나오는 보드만여사의 이야기 때문에 깊은 감동에 젖어서 지냈다.
35년간 다섯 명의 한국인 자녀를 입양하여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중의 하나는 심장병을 앓는 아이였고 또 하나는 뇌성마비에 간질의 장애를 가진 소녀여서 2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밥 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을 돌보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입버릇처럼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의 사명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를 마지막 제사장 나라라고 자랑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가.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가정에 뇌성마비소녀를 입양해 달라고 공문을 보낸다면 과연 몇 가정에서 그것에 동의할 것인가?
가수가 무대 위에서 테이프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벙긋 하는 것을 립싱크(lip sync)라고 한다.
주로 격렬한 춤을 추는 댄스그룹가수들이 립싱크를 사용하는데 외국에서 립싱크는 관객을 우롱하는 용서받지 못할 사기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더구나 요즈음 컴퓨터 녹음기술로 잘된 부분만 짜집기를 하고 음색과 음정까지도 다듬어서 완성해 낸 한 개의 테이프를 공연 때마다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불공정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강대국의 압제와 전쟁의 고난을 기도로 극복해 가면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 가보아도 한국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에 와서 한국교회는 말로만 사랑하는 립싱크의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시대의 제사장 나라보다는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나라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 행함이 있는 믿음

아테네의 한 극장에서 국경일을 기념하는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좀 늦게 극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초만원이라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때 두리번거리고 서 있는 노인을 본 아테네인들은 "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여기저기서 수군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누구 한 사람 자기 자리를 양보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외국인석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스파르타인들이 벌떡 일어나 서로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이때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테네인도 선(善)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은 그 선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어린아이의 행동을 보면, 그 아이의 품성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성경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아무리 "주여, 믿습니다. 할렐루야!"하고 외쳐도, 정작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믿음입니다. 구원받고 나서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 아는 것과 행하는 것(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인간이 많은 것을 발명했지만 땅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땅을 창조하셨으며 더 이상의 땅은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만이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오직 분배와 사용방법의 권리를 갖고 계십니다.”
2002년 세상을 떠난 대천덕 신부의 말입니다.
돌아가신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 신부가 만든 영성 공동체 예수원과 함께 대 신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는 자기가 한 말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한국을 방문한 대 신부는 성공회신학대의 전신인 성미가엘신학원을 설립합니다.
이후에 영적인 공동체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강원도 태백시에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코이노니아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100% 공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그는 선교에 전혀 후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 신부의 코이노니아 신학에 영향 받아서 이후부터 믿는 사람들의 성향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개인생활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며 한 지체로서 인정하고 행동하는 차원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70이 넘는 나이에도 자신이 세운 원칙대로 기도와 일을 번갈아 가며 하고 하루에 세 번은 반드시 예배를 드렸던 대 신부는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본을 보이던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였습니다.

‘사상과 말이 일치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야말로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다.’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는 행동으로 주님을 전하십시오.

주님! 말보다 행실로 주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묵상 : 하루에 한 가지씩 선행을 정하고 실행하십시오.

▣ 바늘 없는 시계

어떤 사람이 친구 집에서 큰 벽시계를 구경했다.
삼 대째 내려오는 가보라면서 친구는 그 시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조부께서 75년간 그 시계 소리를 들으면서 주무시고 일어나셨으며, 부친께서 75년을 더 사용했고 자신도 그 시계를 보고 학교에 다녔다면서 정확해서 믿을 만한 시계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벽시계에는 바늘이 빠지고 없었다.
태엽을 감아주니 똑딱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바늘이 없으니 시간을 알려주지 못했다.
금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은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래 되었으면 어떻고 과거에 잘 맞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 몇 시인가를 알려주지 못하는 벽시계!

바늘 없는 벽시계는 믿음 없는 그리스도인과 비슷하다.
똑딱거리기는 하면서 시간은 못 알리는 벽시계는 주장만 하고 믿음을 못 보여주는 사람과 흡사하다.
아무리 가문이 수대에 걸쳐 예수를 믿었어도 보여줄 수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얼마나 아는지, 얼마나 멋있는지가 중요치 않다.
믿음이 내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게 중요하다.

▣ 행함을 통해 받는 축복

부산에서 목회할 때 교회에서 급식소를 운영했습니다.
구걸하러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진탕 술을 마시고 교회에 와서 온갖 행패를 부리는 걸인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경찰을 불러 끌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끌려 나가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하는 이야기가 "교회에 와서 도와 달라는 사람을 경찰을 불러 끌어내다니, 이게 교회냐?"라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나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 후 앞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면 어떻게든 돕기로 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오면 밥을 해 주고, 약이 없어서 오면 약을 사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매일 200명이 넘는 사람이 급식소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교인 수만큼의 걸인이 매일 아침밥을 먹으러 교회 마당을 밟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 후 교회가 복을 받기 시작했고, 성도들이 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IMF 시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주변에 필요한 땅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재정의 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곰곰히 생각하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급식소에서 밥을 먹고 나가는 사람들마다 연방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바로 그 말을 하나님이 갚아 주셨다고 나는 믿습니다.
교회가 베푼 대접에 갚을 능력이 없는 그들이 품은 감사를 하나님이 다 들으시고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고 받는 축복입니다.

▣ 행함, 실천에 관한 성경 말씀

0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0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 22:5)

0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 1:7)

0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0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0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

0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며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지어다(시 37:3)

0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잠 20:7)

▣ 행함, 실천에 관한 금언

0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 자는 그 실행에서는 가장 충실하다.

0 자기 인생의 의미를 알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들의 맹목이 부자연스럽다면 신을 사랑하면서도 제멋대로 나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맹목은 한층 더 무서운 것이다.(파스칼)

0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0 너도 행하고 나도 행하고 우리도 다 행하자(안창호)

0 많은 일을 성취하는 비결은 우선 즉시 한 가지 일에 착수하는 것이다.(리차드 세실)

0 사람은 일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명상하고 느끼고 또 꿈만 꾸기 위한 것이다.(토마스 칼라일)

0 인생은 짧은 날이다. 그러나 일하는 날이다.(모아)

0 정복에 필요한 것은 첫째도 단행, 둘째도 단행, 셋째도 단행뿐이다.(돌튼)

0 기독교는 먼저 입증되고, 다음에 실천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병행해야 한다.(일링워드)

0 우리에게 말은 필요치 않다. 국가의 건설은 결코 입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실천을 하는 것뿐이다.(벤구리온)

0 1파운드의 원리보다는 비록 1온스일지라도 실행이 낫다<말보다 실천>(영,미 속담)

0 늦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독일 격언) 0 실행은 교훈보다 낫다(영, 미 속담)

0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행동을 말한다.(스펄전)


05-10-2024(금) 요한일서 3:1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행함과 진실함으로(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Dear children, let us not love with words or tongue but with actions and in truth.

행함(2041) 에르곤( ĕrgŏn)  ἔργον, ου, ὁ 스트롱번호 2041

1. 행위.   2. 히 4:3, 4, 10.  3. 표시. 
발음 [ ĕrgŏn ]

행실(마 5:16, 딤전5:10, 벧후2:8), 행위(마11:2, 요3:19, 롬2:15), 일(마26:10, 눅24:19, 롬13:12), 사무(막13:34), 역사(요5:36), 소행(행5:38), 사업(롬14:20, 계2:19), 공적(고전3:13,14), 실천함(약1:25), 이룸(약1:4), 지음(히1:10), 행함(롬2:6).

진실함(225) 알래데이아(alēthĕia) ἀλήθεια, ας, ἡ
스트롱번호 225

1. 진실성.  2. 진실. ψεῦδος.  3. 일반적 진리
발음 [ alēthĕia ]
어원 / 227에서 유래
참(마22:16), 사실(막5:33), 진리(요1:14, 4:24, 롬2:2), 실상(요16:7), 과연(행4:27), 참 됨(행26:25), 진실하심(롬15:8), [동] 진실 하다(롬15:8), 참되다(롬3:7).

▣ 그리스도인 사공의 노

두 신사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과 행함에 관해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했다.
한 사람은 선한 행위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만이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와는 다른 반대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서로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조용히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던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 사공이 그의 견해를 말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좋다는 허락을 받은 사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노를 손으로 잡고 있습니다.
내 오른손에 쥐고 있는 노를 '믿음'이라고 부르고 내 왼손에 쥐고 있는 노를 '행함'이라고 합시다.

신사분들, 잘 지켜보십시오.
나는 믿음의 노만을 젓습니다.
보십시오! 이 배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고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지요.
이번에는 행함이라는 노만 저어 보지요.
결과는 마찬가지지요.
잘 보십시오! 두 노를 함께 젓겠습니다.
배는 쑥쑥 앞으로 나아가 몇 분 후면 우리가 내리고자 하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로써 보건대 행함이 없는 믿음, 또 믿음이 없는 행함.
그 어느 것 하나도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제 변변찮은 견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 우리는 분명히 영원한 안식의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열매가 매달리기 전에 꽃이 피는 것처럼 선한 행함이 있기 전에 믿음이 있다.
믿음은 행함의 아버지고, 자녀인 행함은 그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시계의 내부 부속이 제아무리 잘 조립되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숫자판과 바늘만 있는 것으로도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내부 부속이 시계 바늘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행함은 손의 움직임을 단속해야 한다.

행함과 진실함이란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때로는 물질을 사용하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로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이 땅에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를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랑의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1:19).


둘째는 사랑은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셋째는 사랑은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핵가족 시대에서 이제는 독립세대 즉 나 홀로 세대로 급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은 오직 나 혼자만 즐겁고 편하고 행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먼저 형제를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보살펴야 한다고 외칩니다.

굶주린 육체는 먹을 것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굶주린 사랑은 먹을 것만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말과 행실과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오늘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살피는 일에 보람을 찾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래 전에 한 주일에 1불 절약 운동을 시작하고 그 돈을 모아 이웃 사랑의 현장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그것마저 멈추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여 무너진 사랑의 현장탑을 다시 쌓아야 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주의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1. 주의 계명이 무엇인가?(23)

1)“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십계명의 중심도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어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를 믿어 새롭게 된 자로서 주의 사랑으로 주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2)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인가? 먼저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고 하였다. 자신이 가진 부가 자신의 자랑거리로 여기고 형제를 외면한다면 진정 사랑이 그 마음에 없다.

3)오히려 진정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말로만 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한다. 야고보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였다. 사도 바울은 원수라도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하였다. 하물며 주께서 사랑하는 형제를 어찌 외면하겠는가? 가장 미천한 자라도 주의 형제를 도와주면 주를 도우는 것이 된다. 행할 때라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에 진실함을 담아야 한다. 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2.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어떤 은혜를 받게 되는가?

1)주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19-21) 진정 주 앞에 담대함을 얻을 자가 누구인가? 우리 마음도 우리 안에 죄를 알고 책망할 것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죄를 씻어 주셨기에 우리는 주를 의지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다. 주를 사랑함이 주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마지막 날 주의 백 보좌 심판 앞에서도 우리는 주의 의의 옷을 입고 주 앞에 나아가니 두려움이 없이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2)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서 얻게 된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 앞에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사랑하여 그가 구하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신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한 예수님이 이제 우리가 주의 계명에 순종할 때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아들이 구하는 것을 아버지가 거절하지 않으신다.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시는 우리 주님이심을 날마다 고백하게 된다. 이런 큰 사랑을 우리 마음에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 계명을 실재로 행할 때 우리 마음에 깊이 깨닫게 된다. 이것은 구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셨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게 된 것을 알게 된다3)


우리의 삶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심든지 거두게 하십니다. 농부가 봄에 벼를 심으면 가을에 벼이삭을 추수하여 열매를 얻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심은 것에 대하여 그 열매를 얻게 하십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 중에 누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까요? 당연히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베푼 사랑으로 인하여 사랑과 존경을 받고 마음에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이 많은 가정과 다툼이 많은 가정 중에 어느 가정이 더욱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릴까요? 여러분이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많은 가정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사랑이 많은 교회와 냉담한 교회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교회가 더욱 기쁨이 넘치는 교회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여러분은 당연히 사랑이 많은 교회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가족이 행복하며 교회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1. 사랑은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19-20).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1:19).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태어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가 사랑하면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랑하지 않는자는 사망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요일 3:19).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형제를 남들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은 부모님을 통하여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가족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 안에서의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속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 주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굳세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지만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곤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일 3:20).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게 사랑하지 못한 것을 일깨워줍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우리의 마음과 행실까지 모두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선한 양심이 우리를 책망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도록 인도합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 일깨워주십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진리에 속한 줄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 구원의 확신으로 담대히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여 마음에 책망할 일이 있지만, 그때 우리의 선한 양심이 일깨울 때에 회개하고 다시 형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디모데후서는 “...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백성을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은 자는 불의에서 떠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우리가 마음에 책망할 일이 있었지만 우리가 순종하여 형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게 되고 담대함을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담대함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을 응답받게 하는 은혜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순종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비결은 우리의 순종에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의 열쇠는 사랑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분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얻게 하는 비결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하여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주님께서 주신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로서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이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행하는 것의 반대는 말하는 것이고, 진실함의 반대는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5-16)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필요를 보고도 말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기도해 줄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단지 말 이상으로 희생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혀로 사랑하는 것은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의 반대입니다. 혀로 사랑하는 것은 신실하지 않는 모습이지만,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그 분의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행함과 진실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담대함을 얻게 합니다.

3.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최고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에서 주님의 계명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인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23). 우리의 바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바른 교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주 안에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하여 주님은 포도 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구원받은 자는 주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포도 나무와 가지가 하나이듯이, 주님과 우리는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지고 포도 나무에 붙어 있으면 이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그 가지는 말라지고 농부가 불에 던져 사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주님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의 비결은 우리가 계명을 지킴으로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줄을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내적으로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과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서로 미워하면 성령이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에 불순종하여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하거나 다투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근심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지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켜야 합니다.








05-09-2024(목) 요한일서 3: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자녀(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that is what we are! The reason the world does not know us is that it did not know him.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어떠한 사랑을 베풀어주셔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자녀는 주를 향한 소망을 갖습니다(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주를 향한 소망은 죄를 떠난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첫째는 선을 행하라(신명기 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외면적으로는 죄를 멀리하는 생활이며 내면적으로는 거룩한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 이름을 믿으라(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씨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의 가르침은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셨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증거를 받으라(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예수를 알고 따르던 제자 베드로는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할 때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것이라고 다짐하였으나 곧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한 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굳센 믿음의 사람이 되어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부른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오늘이란 하루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오직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 [호세아 1: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3. [누가복음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4.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5. [요한복음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6.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7. [로마서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 [로마서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요한1서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10. [요한1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11. [요한1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요한1서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풍족함이 문제이다

호주는 사계절 모두가
온화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름(12월~2월)에는
우리나라 초여름 정도 되며
겨울(6월~8월)의 경우도
우리나라의 가을 정도여서
사계절 모두
꽃이 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창기 호주를
처음 밟은 유럽인들은
호주 땅을
양봉으로 성공할 수 있는
천혜의 땅이라 믿고
벌통을 유럽으로부터
 옮겨 왔다고 합니다.

첫 1년간
이주해 온 벌들은
유럽에서 거둘 수 있는
몇 배의 벌꿀을 생산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는
웬일인지 벌들이
꿀을 따러 나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기보다는
벌 통속에서 놀기만 할 뿐
벌꿀의 생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1년 내내 피어 있는
꽃이 널려 있는데
굳이 힘써가며
꿀 수집을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풍족할 때
게으름을 피우다가
부족할 때 힘겨워하는
어리석음은 경계해야 합니다.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경계를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의 성과에 만족하고
미루고 있는 일들이
훗날 우리에게
위험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오늘의 명언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 논어 선진 편





예수 그리스도의 적(요일 2:18-29)

이미 우리가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만,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려 할 때 혹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가지려 할 때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사단의 공격이 있습니다.

이 적그리스도를 경계하고 대처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 우리와 성도 사이의 교제는 자연히 단절되고 성도 사이에는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루고 있는 요한일서 2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신앙의 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자녀들, 아이들, 청년들, 혹은 아비들이란 말로 나누어 표현했던 사실을 보았습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아이들아”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의 문제는 세상과의 문제지만, 아이들의 문제는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자마자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첫 번째로 직면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올바른 신앙을 분별하고 진리의 말씀 위에 신앙을 견고하게 세우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14절 말씀을 보세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요동하기 쉽고, 잘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꼬임에 넘어가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유괴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린애들은 낯선 사람이라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좋아하는 것을 주면 그 사람에게 끌립니다. 어른이 되면 낯선 사람이 친절하게 대하면 오히려 경계하게 되고 상식 밖에 지나친 행동을 하면 아예 멀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유혹을 당하기 쉽고, 마음이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들이 요동하지 않고 견고하게 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성경 기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 아직도 내 신앙이 어린아이의 신앙이라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여 내 신앙을 진리의 터전 위에 견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1장과 2장에 세 가지 대조가 나오는데 1장 1절에서 2장 6절까지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대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어두운 데 거하지 말고 빛 가운데 행하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2장 7절에서 17절까지는 사랑과 미움을 대조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생각하게 되는 요한일서 2장 18-29절에는 진리와 거짓에 대한 대조가 나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잘못된 가르침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고, 진리 가운데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질문 앞에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빛과 사랑으로만 끝나는 것이 왠지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진리 가운데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빛, 사랑만을 강조하는 신앙은 자칫하면 신앙이 아닌 거짓된 인본주의로 인도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혹은 감상적인 도덕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빛과 사랑은 진리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여기서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간호사가 정성과 사랑으로 간호해 드린다고 합시다. 환자는 간호사의 치밀한 간호와 돌봄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극약을 의약으로 잘못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갖다 환자에게 드렸습니다. 환자는 간호사가 가져온 약을 정성스럽게 받아 먹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진리에 서서 적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공격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목회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 5절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름에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 길이 거칠고 험하고 위험합니다.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습니다. 그런데 힘들지만 목자를 따라 고지를 향해 올라가면 거기에는 상을 차려 놓은 것처럼 공해 없는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고지를 올라오느라고 피곤하던 것이 가시고 시원한 바람에 흐르던 땀이 식게 됩니다. 양들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그 아름다운 풀밭에는 일찍이 보지 못한 아름다운 꽃이 피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풀이 여기저기 있어서 양들의 시선을 끕니다. 그런데, 목자는 양들이 가까이 가기 전에 그 먹음직스러운 풀들을 다 뽑아 버립니다. 이유를 모르는 양들은 투덜거립니다. 불평합니다.
그러나 목자에게는 그렇게 하는 뜻이 있습니다. 양들이 보기에 먹음직스러운 풀을 먹으면 온몸이 스름스름 마비가 되어 결국 죽고 맙니다. 보기에 먹음직하고 꽃이 아름답지만 그 풀은 독초입니다. 목자는 독초를 알기 때문에 양들을 위해서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늘도 여기저기 있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적그리스도의 역사를 막아 하나님의 양무리인 성도들을 독초에서 건져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2장 18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 말씀에 두 가지 개념이 나타납니다. “마지막 때”라는 말과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때”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부터 마지막 때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부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긴 시간 같지만 영원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인간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여 오셨던 그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 찾아오신 그때부터 역사는 완성기를 향하여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이 마지막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지금은 마지막 중에도 마지막, 그래서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그 마지막을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그때를 말씀하지 않았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의식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재촉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놀라운 부흥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때 성도들에게 재림의 때를 솔직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가령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상상해 보세요. “얘들아, 1998년 몇월 몇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때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비밀로 붙여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인 긴장을 가지고 살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밤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마지막 때임을 강조하면서 바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역사를 통해서 태초부터 활동해 왔지만 가장 맹렬한 활동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진짜가 있으면 반드시 가짜가 생깁니다. 수많은 가짜 종말론과 재림의 예언과 심지어 재림의 날짜들을 예언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의 영광스런 종말론이 많이 격하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종말론을 포기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가짜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에 관한 굳은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가짜가 많습니까? 가짜가 많기 때문에 진짜가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가짜가 많은 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분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어두움의 세력은 이 사실을 교묘하게 모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어두움은 자기를 포기하기 전에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적그리스도라는 말의 “적”이란 말은 영어로 “anti”인데, 이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대신 그리스도를 가장하고 온 자”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으로서, 한마디로 사단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종말에 관한 많은 책자들이 나도는데 거기에 보면 한 명의 적그리스도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말세에 등장할 한 결정적인 적그리스도로서 그 적그리스도가 유럽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건전한 해석 방법은 아닙니다. 성경은 유일한 적그리스도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적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사단에 의해서 사단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진리를 왜곡하는 수많은 거짓 교사들을 총괄적으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적그리스도가 누구며, 어디 있으며, 몇 년도에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특정한 시대에 성경을 뜯어 맞추려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은 삼가야 할 뿐더러 사실 귀담아 들을 것이 못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오류를 저질러 왔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마지막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핍박하던 네로 황제를 결정적인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666이란 숫자를 뜯어 맞추기 위해서 광분했습니다.
중세에는 교황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뜯어 맞추다가 부합되면 그 교황을 가리켜서 적그리스도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히틀러가 한참 교회를 박해할 때 히틀러를 666이란 숫자에 맞추어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666이란 숫자를 가지고 그러한 실수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건 하나가 생기면 그것으로 해석을 끄집어내는데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고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이 적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면 적그리스도가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게까지 의견이 분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그 특색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의 교제를 거부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19절을 보세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 파고들어 올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만히 들어왔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은연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못된 신학, 잘못된 사상, 잘못된 교리의 영향력을 확산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가운데 끼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중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 자신이 불편하고, 견딜 수 없고, 언젠가는 그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저희와 우리를 구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근본 진리의 문제가 아닌 이상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이고 성경적인 연합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계속 깨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려고 하는지 그 사실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적그리스도는 참된 성경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본문 20-25절을 같이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성경 교리 중에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지엽적인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확실히 말한 어떤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땅위에 있는 모든 교회의 모든 교리가 똑같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으로 영감되었기 때문에 오류 없이 기록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근본 교리에 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기독교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기독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와 그리스도는 누구신지에 관해서 대답을 달리 하는 사람은 사단에게 속한 적그리스도의 영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를 삼는 교리는 두 가지입니다. “그리스도론”과 “신론”입니다.
본문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그가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데 이의가 없어야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체험적인 종교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 이전에 계시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체험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체험이 곧 기독교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 위에서, 말씀이 허락한 범주 안에서, 말씀이 승인하는 체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만을 적합한 체험으로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리에 대해서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교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뼈가 있기 때문입니다. 뼈가 없으면 몸은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리는 우리 몸의 뼈와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미국의 부흥사 중에 죠지 휫필드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떤 교인을 만나서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교인이 “저는 교회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당신의 교회는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우리 교회는 제가 믿는 것을 믿지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휫필드는 “그러면 당신은 둘 다 믿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네, 우리는 둘 다 똑같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정말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깊이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강력하게 부인하던 이단인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철저한 이원론에 입각해서 영혼과 육체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영혼과 육체는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인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주님의 성육신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인 기독론을 왜곡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교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 2장 20절과 2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기름 부으셨다고 말씀했는데, ‘기름 붓는다’는 말은 그 당시에 방을 밝히는 등잔에 기름을 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 안에 기름을 넣고 불을 붙이면 환하게 비칩니다. 이 빛 앞에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우리 안에 찾아오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진리를 조명합니다. 성령이 누구를 조명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으신 바가 되면 모든 것이 밝아집니다. 확실해집니다. 주님을 밝히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셋째로, 적그리스도는 성도를 미혹합니다.
이단이 누구를 찾아다닙니까? 모든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역사하는 공통된 특성 중의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찾고 성도를 미혹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누가 찾아와서 신앙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면 떠나라고 말하세요. 그 시간을 아껴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도전하세요.
적그리스도의 영은 불신자들보다 성도를 미혹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요한은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특색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미혹하는 영”이라는 말은 바른 진리에 있던 사람을 탈선시키는 영이란 말입니다. 신앙의 궤도를 걷고 있는데 이 신앙의 궤도에서 탈선시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사역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아니하고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우선 성령의 가르침에 거해야 합니다.
27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고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에게 빠지는 사람을 보면 대개 인간의 가르침에 너무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신기한 소리 때문에 망합니다. 진리를 가르쳐 주는 최대의 교사는 성령님 자신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잘 깨닫게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 은사를 주어서 어떤 직임을 가진 사람을 세우신비다. 신앙의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27절 마지막 부분에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라는 것은 주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 안에, 그리고 진리의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 안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인격과 삶을 지녀야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우리를 유혹하려 하다가도 우리의 삶을 보고 할 말이 없도록,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만족하고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만족이 없고 답답함을 해결할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을 적그리스도가 유혹합니다. 신앙 생활에 행복하고 만족한 사람은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만족과 행복이 없는 사람이 여기에, 아니면 저기에 행복이 있을까 기웃거리다가 유혹의 손길이 미치게 되면 그만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주 안에 항상 거하는 생활을 해서, 원수들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고 하는 이 혼돈된 상황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05-08-2024(수) 요한일서 2:18-2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 안에 거하라(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As for you, the anointing you received from him remains in you, and you do not need anyone to teach you. But as his anointing teaches you about all things and as that anointing is real, not counterfeit--just as it has taught you, remain in him.

오늘의 시대를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은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 즉 죽음입니다.
둘째는 역사의 종말 즉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사랑이 식어가는 시대" 라고 하며 동시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시대"라고 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하던 시대는 "영지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은 거룩고 육은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종교다원화주의가 사람들을 자극합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지주의 시대에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까?
오직 주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며, 빛이시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빛의 자녀로 서로 사랑하며 믿음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특징은 거짓말과 교활함과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려면 항상 주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첫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주님께서 의로우신 것을 아는 만큼 의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거짓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되 먼저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미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일하는 사람 안에는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곧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영접할 준비가 다 되셨습니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오늘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이렇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안에 거하자!
성령 안에 거하자!
주님 안에 거하자!

내 주여 뜻대로


5월 8일 어버이 날에

엄마는 절대로 널 떠나지 않을 거야

1970년 1월,
당뇨병을 앓고 있던
17세의 '에드워다 오바라(Edwarda O'Bara)'는
감기를 앓던 중에 먹은
당뇨병 치료 약이 혈류에
녹아들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에드워다는
즉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고
병원 침대에 누워
점점 의식을 잃어갔습니다.
신장 기능이 상실되고
심장박동도 멈췄다가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뇌에 손상을 입어
안타깝게도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올 불행을 의식했는지
에드워다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속에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엄마, 정말 떠나지 않을 거지?"

"그럼, 엄마는 네 곁을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그것이 모녀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의사는 에드워다가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거라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고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엄마는 종기나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두 시간마다
딸의 몸을 뒤집어 주었습니다.
네 시간마다
딸의 혈액을 채취해 혈당을 체크하고
인슐린을 주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12번에 걸쳐
음식을 튜브로 주입해 주고
대소변을 처리해야 했으며
한 번에 2시간 이상 잠들지 못하고
쪽잠을 자며 딸을 돌봤습니다.

무려 38년 동안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된 딸을
그렇게 돌보며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너무도 무정했습니다.
에드워다를 38년 동안 쉬지 않고
지키던 엄마는
몸이 늙어 쇠약해졌고,
2008년 팔순을 넘긴 엄마는
딸 곁에서 손을 꼭 잡은 채
에드워다의 여동생 콜린에게
언니를 부탁한 후 숨을 거뒀습니다.

영원히 네 곁에 있겠다는
엄마의 약속은
이렇게 동생 콜린에게 이어졌습니다.

콜린은 직업을 그만두고
엄마의 약속을 이어받아
언니를 지극 정성으로 돌봤고,
에드워다는 그 후 4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얇게 입어도 춥지 않으며,
잠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습니다.
엄마니까요......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 어느 것보다
가장 완전하며, 가히 희생적이고
영원하고 숭고합니다.

* 오늘의 명언
신은 곳곳에 가 있을 수 없으므로
어머니들을 만들었다.
– 탈무드



말세 성도의 신앙

1.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들
2. 너희는 기름부음을 받았다
3. 주 안에 거하라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제자가 사도 요한이다.
제자들 중에 가장 오래 살았던 제자도 사도 요한이다.
종말의 계시를 종합적으로 받았던 제자도 사도 요한이다.
요한복음, 요한 1, 2, 3,서 ,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분이다.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이 서신에고 종말의 경고가 많이 기록돼 있다.

1.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들

이 사도 요한이 지난 시간에는 우리들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이라 했다. 또 지나가는 것과 주님을 함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주님만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제 말세지말에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18절에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분명히 전재되어야 할 사건이다. 그것도 재림 바로 직전에 있을 사건이다. 그럼 적그리스도와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함은 바로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요즘 밤 시간에 적그리스도에 관하여 함께 연구하고 있다. 상세한 것은 밤 시간에 말씀을 드리겠다. 오늘은 적그리스도의 속성만을 살펴보겠다.

19절에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적그리스도의 속성

첫째로 우리에게서 나간 자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적그리스도는 특별하게 별나서 오는 게 아니다. 다 우리에게서 출발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문선명 집단인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엘리야 제단 등등... 이런 이단의 무리들이 다 많은 적그리스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처음에는 우리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에게 속한 자는 아니었다. 19절을 자세히 보면 이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 처음에는 우리들과 함께 있기는 있었으나 우리들에게 속한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예수와 또 제자들과 한 Member 였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장 본인이다. 저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는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22절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 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하도 묘하게 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가려내기 어렵다.

요일 1: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6절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아야 하겠다. 그리고 나도 남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다. 남들도 나를 믿어주는 그런 사람 또 주님께서 인정해 주는 성도가 되자!

2. 너희는 기름 부음을 받았다.

20절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 모두는 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함은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말을 줄여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을 하시는 분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20절 하반절에 성령의 사람은 모든 것을 안다고 했다. 성령의 사람은 영분별의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성령의 사람은 또 진리를 안다고 했다. 진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21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아니함이라" 우리 모두는 한 서령으로 한 진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옆 사람을 돌아보시라. 그리고 교회 전체를 둘러보시라. 느껴지는가? 나와 한 영의 사람임을 나와 한 사랑의 사람임을 나와 한 지리의 사람임을 나와 한 몸임을 느껴지는가? 만약에 이것이 느껴지지 못한다면 어느 편엔가 하자가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상대가 잘못되지 않았으면 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지리를 아는 사람이다. 성경의 참 지식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우리를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를 미혹하는 무리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실패의 길을 가게 만드는 자들이다.

정말 여러분들은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교인들이 교회는 왔다 갔다 하는 역사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또 세상의 학식이나 상식이나 경험 같은 것이 남들보다 뒤처지면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을 하면서도 신기하고 이상한 것은 성경을 남들만큼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무런 가책을 못 느끼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러고도 정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말씀을 배워야 한다.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모태신앙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 다닌 지 20년 30년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을 깊이 아는 일이다.

말씀 깊숙이 파묻혀 사는 길이 중요한 것이다.

3. 주 안에 거하라!

사도 요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주 간단 명료하게 고백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둘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넷째는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따라서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안에 거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해야 합니다.

둘째는 빛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려면 어두움이 없어야 합니다.
어두움을 대표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랑안에 거하려면 먼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무엇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생명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생명안에 거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을 위하여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27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먼저 기름 부음을 받으라고 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들과 싸워 이기려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하고 또 말씀이 되시는 주 안에 거해야 합니다.

24절이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며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처음에 들은 말씀 안에 거하는 일이다. 처음에 들은 말씀 위에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와서 속삭이는 것은 거의 거짓이기 쉽다.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기 쉽다. 처음에 붙잡은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처음에 들은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때가 바로 마지막 때이다.
많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 날뛰고 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케 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덤비고 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다.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미혹케 하는 자들이다.
교활한 자들이다.

창세기 3:1, 2절에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뱀의 이름이 나하쉬인데 그 뜻은 교활하다는 뜻이다.

28-29절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첫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영원한 생명 안에 거함이라 했다(25)
둘째는 주님 안에 거함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셋째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주님께서 의로우신 것을 아는 만큼 의롭게 살라는 것이다.

의를 행하는 자는 주안에 거하는 증거라고 하셨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거짓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온전히 실행된다.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미워할 사람이 없다.
일하는 사람 안에는 불평할 시간이 없다.
그것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제 곧 오실 때가 다 되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영접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할 수 있는가?
지금 살고 있는 생활에서 자신이 있는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말씀 안에 거하자!
성령 안에 거하자!
주님 안에 거하자!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2장에서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아비들, 청년들, 어린아이들” 세 분류로 나누었습니다. 교인이라도 영적인 성숙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아비입니까? 청년입니까? 어린 아이입니까? 다른 사람의 믿음도 지켜줄 만한 사람이면 아비일 것이고, 자기 믿음 하나 지킬 정도면 청년일 것이고, 자신의 믿음 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흔들흔들하면 어린 아이일 것입니다. 자녀들 믿음보다 못한 부모도 있습니다. 그저 부끄러워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 목회 여정 중 마음 아픈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교육목사로 섬길 때, 대학부의 회장을 지냈던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형제는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생각할수록 감격스럽습니다. 그런데 또 한 형제를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그 형제는 장로 아들로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형제입니다. 참 착실했던 형제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제가 부산에 부임한 지 얼마 후, 그가 대학가에 유행하던 모 신흥종교에 넘어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형제가 구원받은 것은 당연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느냐 하는 단계라고만 여겼지, 복음에 분명이 서 있는지, 아닌지 확인보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 회개했습니다. 그 청년에게 미안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이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말씀했습니다. 미혹은 영적으로 어린이들에게 더욱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학원복음화협의회 헌신예배 후, 한 대학교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대학에 합격했다고 무조건 좋아하지 말고, 기도와 말씀훈련을 잘 시켜서 보내세요. 대학이 영적으로 무서운 곳입니다.”대학만 보내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청년이 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새가족에게 일대일 말씀 양육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겪은 어려움 중에 핍박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미혹이었습니다.

요일 2:18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회를 혼란케 하다가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고 큰 상처를 주고 떠났습니다.

19절 그들이 우리에게서 갔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었더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22절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기가막힌 일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인인데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지만 여전히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교회를 깨뜨리려고 침투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역사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만 다니는 신앙생활에 머무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1992년 10월 시한부 종말론이 극성일 때, 믿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주님의 계시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그후 종말론에 대하여 정말 많이 공부하였습니다.

종말론에 대하여 인터넷에서 배우면 안됩니다. 제대로 공부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왜 그리스도인지 정확히 고백할 수 없는 사람, 전할 수 없는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일대일 양육을 받고 제자훈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음학교도 추천해 드립니다.

다른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복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한번은 대학생인 한 자매를 상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한때 대학 캠퍼스에서 대단한 세력을 확장시키던 JMS(정명석) 이단집단에 속했던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서 너무나 안타까왔던 것은 이무리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쳐도 자신이 처음 들었던 이단의 메시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녀 안에 악한 자가 들어 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자매가 복음을 먼저 알고 그들의 메시지를 들으면 영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른 채 이단을 받았기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입니다. 누가 먼저 그 마음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입으로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만으로 분별하려고 하면 오판하게 됩니다.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면서 삶으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딛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부산에서 청년 연합집회 강사를 선정할 때, 세 분을 추천받았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제안하셨습니다. 그 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면서도 불법을 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이요 주님이요 왕이라는 말인데 어떻게 불법을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삶으로는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욕심을 부리고 거짓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도 그렇습니다.

요일 2:11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이 교회에서 분열시키고 나간 자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교회를 분열하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이처럼 미혹하는 영을 조심해야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는 주시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가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에겐 어떤 마귀의 미혹이 있을지라도 능히 이길 힘이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과 우리 안에 임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바른 지식을 갖게 해 주십니다.

20절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아,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됩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27절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가 기름 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 속에 머물러 있으니, 여러분은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맏은 사람은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는 독불장군, 외고집장이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진리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혼자만 남은 때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도 있고 목회자도 성도들도 함께 있지만, 혼자 남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 예수님을 믿는 경우와 같습니다. 불신 직장인들 사이에 홀로 주님과 동행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이단들이 미혹들이 횡행할 때도 있습니다.

다 미혹에 빠질 때, 그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전히 마음에 주님이 계시니, 주님이 친히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5절)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절) 대답했을 때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7절)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의 판단으로 알 수 없었지만 성령님께서 알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바른 지식만 알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신앙고백을 하였던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예수님 그리마옵소서.’ 하고 가로막았습니다. 그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 하시는 예수님의 엄청난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바른 지식을 가졌지만 아직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귀의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할 일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만으로는 결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사람 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바로 그 허점, 알기는 하지만 실제 살지 못하는 모순을 파고 들어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안에 거하는 삶,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하여 마귀의 미혹 앞에서 당당히 승리할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반복하여 권합니다.

27절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28절 그러므로 자녀 된 이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다는 말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며 친밀히 동행하며,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자신은 압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누구였습니까?

두바이 한인교회 신철범목사님께서 집회 중에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집중하여 바라보면 바라보는 대상이 우리 눈동자에 비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목하는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눈동자에는 그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동자에는 주님이 보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바이 한인교회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의 간절함을 보았습니다. 무슬림 나라인 중동에서 선교사로 성도로 사는 이들, 그들은 주님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북한의 성도들의 주님을 향한 갈망은 더욱 클 것입니다. 예배 한번 마음껏 드릴 수 있어도 기도 한번 큰 소리로 드릴 수 있어도 소원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이제 성찬식을 하겠습니다. 성찬식은 가장 거룩한 주님과의 사귐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주님과 거룩한 사귐을 갖는 사람이며, 어떤 미혹이 와도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28절 ...그렇게 해야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경인 마카비2서에 보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황제의 박해 때, 일곱 형제 순교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로마 관리들이 마지막 남은 막내 아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보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막내 아들에게“이 학살자를 두려워 말아라.
그리고 네 형들의 기개를 보여 줘라.
내가 하나님의 자비로 너를 네 형들과 함께 되찾을 수 있도록 죽음을 받아 들이라.”고 말함으로 어머니와 막내 아들 마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어떻게 이런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마음의 주요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거한다(abide. meno)는 것의 의미(요한복음 15:1-8)

μένω 스트롱번호 3306

1. 남아있다 2. 기다리다.
발음 [ mĕnō ]

머물다(마 10:11, 요 1:32, 행 21:8, 딤후 4:20), 유하다(막 6:10, 눅 24:29), 거하다(눅 8:27, 요 8:35, 요일 2:27), 계시다(요 1:38, 2:12, 히7:24), 머물러 있다(요3:36), 붙어있다(요15:4), 두다(요19:31, 행5:4), 붙다(행27:41), 지내다(고전7:8,40), 영존하다(히12:27), 계속하다(히13:1).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배경을 알아두는 게 좋다.
첫째, 이 설교는 고별 설교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포도농장의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라, 임종을 앞둔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비장하면서도 슬프면서도 감사한 분위기다.

둘째, 이 포도나무의 비유는 이사야의 말씀과 엮어서 이해해야 한다.
이사야 5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해서 다음과 같음 말씀을 선포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이사야 5:1-2)

예수님이 본인을 가리켜 ‘참포도나무’라고 했을 때,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뜻한다.
‘극상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알레씨노스’는 ‘신뢰할 만한’, ‘온전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극상품은 ‘눈이 부실 정도로 붉은 종류의 포도’를 일컫는 말로, ‘매우 가치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던,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바로 그 포도나무다. 이 두 가지, 참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의 고별 설교이고, 이사야의 말씀과 연관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사건 이후, 기독교의 복음이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은 가까운 지역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씀 자체에 대한 이해의 배경이 되는 문화적 유사성도 한 몫 했다.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도 그렇다. 포도재배가 주요 농업이 아닌 지역에 사는 자들은 포도재배의 중요성을 별로 알지 못한다. 포도재배가 정말 중요했던 지중해 지역의 나라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포도재배가 얼마나 지중해 지역 주민들의 삶에 중요하면, 포도재배를 주관하는 신이 있었겠는가. 그 신의 이름은 디오니소스 또는 바쿠스로 불린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비극은 포도주 재배를 마치고 국가적 수준에서 포도재배를 관장하는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축제에서 상연했던 연극이다. 국가 최고의 축제인 이 축제를 비극(연극)으로 빛낸 이는 그 당시 최고의 영예를 안았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은 포도 재배와 깊은 연관을 지녔다. 오죽하면,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제국이 점령한 나라는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나라’에 국한되었을까. 그 당시 땅끝은 단순히 어떤 지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한계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포도 재배가 되지 않는 땅은 땅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포도나무 비유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 지역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가 극상품의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나무라니! 이건 아주 귀가 쫑긋한 비유다. 극상품의 포도를 맺는다는 것은 삶의 풍요와 기쁨과 연결된다. 극상품의 포도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고,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맛이 좋았다. 지금도 극상품의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매우 고가에 팔린다. 이처럼, 극상품의 포도는 풍요와 기쁨을 상징한다.


사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굉장히 단순하다. 풍요와 기쁨이다. 가난과 절망을 바라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누구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풍요와 기쁨보다 가난과 절망이 많다. 훨씬 많다. 풍요와 기쁨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 말하지 않는다. 극도의 물질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생득적으로 안다. 물질적 풍요와 기쁨은 참 좋은 것이지만, 풍요와 기쁨은 그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풍요와 기쁨은 매우 총체적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미국의 어느 기관에서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연봉 7만 5천불 이상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에서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러니까, 연봉 7만 5천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20만불 버는 사람이나, 연봉 100만불 버는 사람이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만족도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번다고 그에 비례해서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적당히 벌면 된다. 하지만, 7만 5천불 이하를 버는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주는 만족도에서 그 이상을 버는 사람들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적 풍요가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으면 불행을 느끼는 세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위한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보려고 비즈니스에 뛰어는 것도 그렇고, 직장을 다니는 것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또는 독신으로 사는 것도 그렇고, 자식을 낳는 것도 그렇고, 또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도 그렇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는 노력도 그렇고, 또는 대학에 가지 않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도둑질도 풍요와 기쁨을 지향한다. 그런데, 삶의 풍요와 기쁨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가난과 절망이다. 이것이 인간 실존이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예수님이 인간 현실을 응시하면서 본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결국 가난과 절망을 경험하고 마는 인간들의 불쌍한 현실이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도 표현했다. “목자 없는 양.” 양도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양은 푸른 초장을 찾고 쉴 만한 물가를 찾는다. 그런데, 양은 눈이 어두워 푸른 초장을 찾기 힘들고, 쉴 만한 물가를 찾기 쉽지 않다. 목자가 데려다 주어야만 한다. 혹, 목자가 이끄는 양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데로 갈라치면, 이리나 늑대에게 잡아 먹히기 일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꿈꾼다. 그래서 세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우리를 인도하겠다는 삯꾼 목자들은 우리 더러 이렇게 다그친다. 풍요와 기쁨을 꿈꾸면,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우리를 다그친다.”(교회를 찾아서, 54쪽). 우리는 이러한 유혹들에 빠져, 이것이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길인 양, 우리는 그 길을 열심히 걸어간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이미 시간을 다 쓰고, 이미 인생을 다 쓰고 나서 깨닫는다. 그 길의 끝에는 풍요와 기쁨이 없었다는 것을!

아무리 남의 등을 쳐먹고 살던 인간도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말을 할 때는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풍요와 기쁨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러면 그들 중에 “부를 추구하라고, 권력을 추구하라고, 예뻐지라고, 명성을 얻으라고, 경건해지라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명예로워지라고, 올바르게 살라고” 다그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여기, 죽음을 앞둔 한 사람이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람, 우리 인간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제 2위격,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을 살고 싶는가?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내 안에 거하라!” 이는 우리가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위해서 행하는 그 많은 일들을 통해서 풍요와 기쁨을 얻지 못하고, 가난과 절망을 얻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그 헛된 일들을 전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헛된 일들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죽음을 앞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귀에 들린다면, 풍요와 기쁨을 얻고 싶거든,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안에 거하라!”는 이 말씀에 마음이 요동쳐야 한다.

왜 우리는 ‘그 안에’ 거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참포도나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극상품의 포도를 재배하려면 참포도나무가 필요하다. 참포도나무의 가지는 극상품을 얻을 수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하면, 가지인 우리는 극상품을 얻는다. 극상품 포도,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주는 바로 그것! 같은 포도여도, 참포도나무인 그리스도 안에 거해서 얻는 포도와, 그냥 포도나무에서 얻는 포도는 그 질이 다르다. 같은 돈을 벌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기에 거하며 버는 돈과, 그냥 버는 돈은 그 질이 다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포도열매를 얻고 있는가? 내가 지금 삶에 얻고 있는 포도열매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거해서 얻는 포도열매인가, 아니면, 그냥 포도열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것이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무슨 방법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참포도나무의 가지로서 그 안에 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야 할 것은 교회론이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 교회론이다. 교회에 대한 이해력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의 영향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복음이 아니라 자본(돈)에 휩쓸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근대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는 인간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립된 개인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 고립된 개인이 바로 노동자가 되고 동시에 소비자가 되기 때문이다. 노동력과 소비력을 동시에 갖춘 근대인,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게 교회론의 약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노동력과 소비력을 갖춘 고립된 개인은 교회를 고립된 개인의 연합 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 고립된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교회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헤쳐 모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교회를 개인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가고 들어올 수 있는, 하나의 회사 같은 조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그러한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유기체적으로 이어져 있다. 팔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심장이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리가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팔이 몸에 붙어 있기 싫다고 스스로 떼고 나가지 않는다. 심장도, 다리도 마찬가지다.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인 우리가 ‘거한다’라는 것은 반드시 교회론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한다’라는 말을 심리적인 것으로만 조그맣게 생각하고 만다. ‘거한다’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심리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삶 전체,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가 그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한다’는 것은 매우 육신적인 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한다’는 뜻을 매우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말 것이다.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레이첼 에반스의 저서 <교회를 찾아서 Searching for Sunday>에서 도움을 얻어보고자 한다.
이 책은 교회의 성사(sacraments / 성례전)에 맞춰 쓰인 책이다.
그 이유는 레이첼 에반스가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바로 성사(성례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실제였다.
그래서 레이첼은 성사(성례전)을 다음과 같이 아주 쉽게 풀이하고 있다.

교회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말한다(세례).
교회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한다(고백/고해성사).
교회는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성품/직분).
교회는 우리를 먹인다(성찬).
교회는 우리를 환대한다(견진/confirmation).
교회는 우리에게 치유의 기름을 붓는다(도유).
교회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혼인).
(교회를 찾아서, 26-27쪽)

특별히, 세례와 성찬 이외의 성례전은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례전’이라고 이름을 더 이상 붙이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곱가지의 성례전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받는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 우리는 직분을 받는다. 우리는 성찬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정체성)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아픈 이들을 심방한다. 우리는 결혼(사랑)을 한다. 이러한 성례전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가 참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이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우리는 삶의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ㅡ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해야 한다. (세례).

ㅡ 우리는 우리가 망가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 받는다. (고백/고해성사).

ㅡ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직분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성품/직분).

ㅡ 우리는 먹여 주시는 주님 안에서 늘 배부르다. 우리는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주님께 맡겨 놓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다. (성찬).

ㅡ 우리는 환대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환대한다. 누구든. (견진/confirmation).

ㅡ 우리는 치유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픈 이들을 돌본다. (도유).

ㅡ 우리는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서로 배려하며 아껴주고 사랑하며 산다. (혼인).

우리는 풍요와 기쁨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이 풍요와 기쁨을 주는지 알지 못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인생을 허비한다. 여기, 우리에게 참된 풍요와 기쁨을 주는 길이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지로서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거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다. 그것은,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과의 실제적인 관계 안에 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풍요와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면, 교회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교회는 우리의 풍요와 기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한다”라는 말은 “살다”,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살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다”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로마서 8:1; 고린도후서 5:16), 영원한 관계에 굳게 붙들려 있다고 묘사됩니다(요한복음 10:28-29).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별한 차원의 기독교적 경험이라기보다는 모든 참 신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과 거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와 같습니다.

요한일서 2:5-6이 그리스도 안에 거함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함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동일시됩니다(2절과 3절).
2장 뒷부분에서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영생의 약속을 받은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깁니다(24절과 25절).

성경에서 “안에 거함,” “안에 머무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라는 말은 피상적으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5:4-7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와 연합한 가지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만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구원이 주는 그리스도와의 생명 있는 연합이 없다면 생명도 풍성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다른 구절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몸과 머리의 관계에 비유합니다(골로새서 1:18). 또 다른 필수적인 연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복음 15:6의 경고(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는 가지는 버려지고 불살라질 것)를 크리스천들이 언제나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아도 “거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경우에 우리는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거함”이 구원과 개별적인 개념일 때만 성립됩니다. 마치 “거함”이 우리가 구원 이후에 반드시 얻어야 하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상태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주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은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갈라디아서 3:2-3). 또한 가지가 어쩌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하면, 즉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하면, 다른 분명한 성경 구절의 내용은 모순이 됩니다(요한복음 10:27-30 참고).

참 포도나무의 비유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편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그 안에 “거하는” 가지들은 참된 구원을 받고 구원자와 참되고 생명력 있는 관계를 누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시든 가지들은 구원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척 하지만 나무에서 아무런 생명도 얻지 못하는 위선자들입니다. 결국 위선자들은 예수님께 제대로 접붙여진 게 아니라 그냥 걸쳐져 있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도 잠시 동안은 그리스도 곁에서 서로 비슷한 행보를 보였지만 결국 베드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었고,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시든 가지의 원리를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그들[당시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이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구원의 증거 중 하나는 인내, 즉 그리스도 안에 계속해서 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계속해서 동행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26 참고). 즉,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거나”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그들 안에서 이루실 것이며(빌립보서 1:6)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요한복음 15:5). 떨어져 나가는 자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 그 안에 거하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구원받는 믿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 중 하나는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증거들(구원받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원받았다는 증거) 중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요한복음 15:10; 요한일서 3:24);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요한일서 2:6); 습관적 죄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요한일서 3:6); 삶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요한일서 4:13).









05-07-2024(화) 요한일서 2:1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을 좇아 온 것(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요한일서에서는 "세상" 이란 단어가 20회 사용됩니다.
구절 수로는 17구절입니다.

이때 세상이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대적하는 곳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세력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을 기독교 경건주의의 대헌장(Magna Carta)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 사랑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랑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랑은 세 가지,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됩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모든 인간을 사로잡은 세 가지 근본적인 욕심들, 즉 '성'(sex)과 '돈'(money)과 '권력'(power)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정욕(성)과 안목의 정욕(돈)과 이생의 자랑(권력)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 사랑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제 10권 후반부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情慾)을 시각의 유혹(誘惑)

사람의 감각(感覺)은 시각(視覺)과 촉각(觸覺)과 미각(味覺), 후각(嗅覺), 청각(聽覺)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쾌감을 주는 것을 접촉하고 만지기 좋아합니다.
촉감의 유혹이지요.

그 다음에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 얻는 미각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도 먹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성욕은 단 번에 끊을 수 있지만 미각은 끊을 수 없습니다.
음식 먹는 길을 포기하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적당량의
음식물만 섭취하면 되는데 문제는 그 식탐이라는 것이 우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뷔페 식당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냥 생명과 건강만 유지하자고 한다면 적당량만
먹으면 되는데 우리는 이것저것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하여 식탐이 건강을 위한다는 생각을 앞서 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거스틴은 만일 어떤 사람이 식탐을 버리고 자기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한계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못한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어거스틴 같은 성자가 그 정도니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후각의 유혹은 아마 5각 중에서 가장 미약한 유혹일 것입니다.
꽃향기나 향수의 유혹을 우리는 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꽃향기나 향수 냄새를 맞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의 유혹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어떤 노랫소리에 빨려 들어가면 때로 정신을 잃습니다.
서울서 부산 가는 고속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는 서너 시간 동안
차안에 유행가를 내내 틀어 놓을 경우, 그 가사와 멜로디가
우리 기억 속에 녹음이 되어서 오랫동안 우리를 따라붙습니다.
그밖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소리를 들으면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갈 때도 있기에 청각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마 가장 강렬한 유혹은 시각에서부터 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야한 장면을 보았을 때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음란 만화나 동영상은 너무도 강렬해서 우리의 마음을 쉽게 교란시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우리의 시신경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동인천같이 조용한 곳에서 살다가 남대문 시장 같은 곳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품 저런 상품, 이렇게 생긴 사람, 저렇게 생긴 사람, 우리의 시신경을
빼앗는 것이 수천 수만 가지이니 우리의 마음도 더불어 복잡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눈의 즐거움을 위하여 수 없는 물건들과 영화와 예술품들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외모를 꾸미는 일에도 엄청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 생활에 정말 필요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고,
더더군다나 경건 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거리, 시각의 쾌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둘째, 안목(眼目)의 정욕을 호기심(好奇心)의 유혹

육신의 정욕이 우리 육체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육체가 감각을 통하여 어떤 경험을 얻으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학문과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끝없이 유혹하는 호기심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쾌락은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냄새 좋고, 맛 좋고, 부드러워 만지기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호기심은 새로운 경험을 얻으려고 합니다.
호기심은 주로 눈을 통해서 얻어지므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호기심과 관련해서 어거스틴은 시체를 예로 듭니다.
만신창이가 된 시체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소름 끼치는
시체를 보고 쾌감을 느낄 사람은 정신병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집요한 호기심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괴로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코 그 시체를 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다 호기심 때문입니다.
아무개 연예인이 결혼했더라, 이혼했더라,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인터넷을
뒤지고 TV를 쳐다보고 하는 것이 다 그 호기심의 유혹 때문입니다.

길을 지나다가 누가 다투기라도 하면 그냥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
어느새 내 신경과 마음은 호기심 때문에 그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아, 호기심이란 얼마나 이겨내기 어려운 안목의 정욕인지요!

셋째, 이생의 자랑을 교만(驕慢)의 유혹과 칭찬(稱讚)의 유혹

이생의 자랑은 마음이 부풀어올라 자꾸만 뻐기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교만의 유혹입니다.
깊은 성찰 없이 우리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으로 부풀어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칭찬 받고자 하는 유혹은 아무도 뿌리칠 수 없는 최고의 유혹입니다.
칭찬은 돌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이 "잘했다, 잘했다!"하고 칭찬해주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육체의 쾌락, 즉 육신의 정욕과, 호기심, 즉 안목의 정욕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데, 이 칭찬 받고자 하는 유혹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진리 위에 서지도 못한 채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직하고 의롭게 살면서 비난을 받는 것이 거짓과 불의 속에 살면서
칭찬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칭찬을 받을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이웃에게도 선익이 되고 내 양심도 즐거워하는 칭찬일 때에는
그 이웃의 칭찬이 양약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 경우의 칭찬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결국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아첨이요 독일뿐입니다.

당신의 사랑의 무게는?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영원히 시들지 않지만,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금방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옳습니다.
육신의 정욕, 촉각과 미각과 후각과 청각과 시각의
유혹에서 생기는 쾌락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안목의 정욕, 호기심의 유혹도 알고 나면 별 것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 명예와 권력으로 자랑하는 교만도 오래 못 갑니다.
남들에게 듣는 수없이 많은 칭찬도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이지요.

어거스틴은 사랑은 무게라고 했습니다.
물체는 자기의 무게 때문에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돌을 던지면 밑으로, 불은 위를 향하여, 물 속에 부은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부은 물은 기름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모두 다 제 무게로 인해 제 자리를 찾아가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이 제 자리를 이탈하면 불안정해지고 제 자리에 다시 돌아가면 안정을 찾게 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무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지 간에 사랑의 무게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아니면 이생의 자랑?

아침에 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말 것에 사랑의 무게를 두지 맙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큰사랑의 무게를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무게 중심이 자연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어집니다.

버지니아 공과대학의 총격 사건을 계기로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05-06-2024(월) 요한일서 2:1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흉악한 자를 이기는 믿음(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I write to you, fathers, because you have known him who is from the beginning. I write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are strong, and the word of God lives in you, and you have overcome the evil one.

예로부터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을 신앙 성장의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Augustinus).

아이들의 신앙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활동에 의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기노스코)는 동사는 철저한 경험에 의해서 체험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청년들의 신앙은 흉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강하게 활동하여 흉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흉악한 자(포네로스)


아비들의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 흉악한 자(포네로스) πονη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4190

1. 허약한.  2. 아픈.  3. 나쁜
발음 [ pŏnērŏs ]
어원 / 4192의 파생어에서 유래

󰃨 자녀들아...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본문은 1, 2절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렘 31:34; 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21; 행 4;12; 10:43; 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 아비들아...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 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2.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3.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 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는 현재 완료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 청년들아...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단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14절; 3:12; 5:18, 19; 요 17;15; 엡 6:16; 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 10:18; 골 2:15; 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Stott, Smalley).

󰃨 아이들아...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12절에서는 '테크니아'(*, '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파이디아'(*, '아이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Barker).

󰃨 청년들아...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이'(*)는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 6:10;계 18:8). 청년들아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4:3-5;5:19;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본문은 요한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성장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육체가 자라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영적 생명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면 모순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성장해야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영적 성장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해 함께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맡은 분량대로 기능하는 가운데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가운데 스스로를 세워 갑니다”(엡 4:15~16).
“도리어 우리 주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해 가십시오.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빕니다”(벧후 3:18).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자라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도록 성장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길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편안한 삶, 더 안락한 삶, 더 쉬운 삶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고통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고, 연단하는 것은 새가 나는 훈련을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연단하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나를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신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영적 성장의 지표

영적 성장은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영성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성장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교회생활이 익숙해졌다고 그것이 곧 영적 성장에 이로운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활동이 많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이 영적 성장의 지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성경지식과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영적 성장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나타나야합니다.
그것이 지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을 계속 이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이 영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강조 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시제의 변화가 있습니다.
12절과 13절은 현재 시제입니다.
반면에 14절은 과거 시제입니다.

매우 중요한 것을 강조할 때 방금 전에 사용한 것을 과거형으로 바꿈으로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알았음이요, 이기었음이라는 과거형을 사용함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성도가 경험해야 될 세 가지 영적성장

세 가지 호칭이 나옵니다.
12절에 자녀들, 13절에 아버지와 청년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호칭은 육체적인 나이와 영적 성장의 단계를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어거스틴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호칭을 자녀의 신앙 수준, 아버지의 신앙수준, 청년의 신앙수준으로 영적 성장의 단계로 해석했습니다.
이 호칭은 모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여’라는 호칭이 특정 단계에 있는 성도들만 호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일컬을 때 ‘자녀들이여’ 라는 했습니다.
노년의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을 자녀들처럼 여겼습니다.
자녀들이 나오고, 아버지들이 나오고, 청년들이 나오는 순서는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내가 모든 사람 위에 내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될 것이다”(요엘 2:28).

여기서도 아들과 딸들이 나오고, 늙은이가 나오고, 젊은이가 나옵니다.
아들과 딸들은 자녀들이고, 늙은이들은 연세가 많은 분이고, 그 다음이 청년들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는 모습을 호칭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이 호칭이 구약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경험해야 될 세 가지 영적성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호칭의 변화에는 분명 영적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죄 사함을 경험하는 단계가 있고, 아버지를 깊이 알아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 단계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죄 사함의 은혜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성장해야 될 세 가지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역을 연령별, 호칭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로써의 영적 성장

우리가 영적 성장을 이뤄야 할 세 가지 영역이 무엇일까요. 첫째 자녀로써의 영적 성장입니다. 12절과 14절 초반부를 읽겠습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됐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12, 14절).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영적 성숙을 이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가장 큰 축복은 죄 사함입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부모의 품입니다. 때로 자녀들은 잘못을 해도 부모 앞에서 당당합니다. 그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용서에 대한 기대에서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들의 죄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옵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고, 그의 죄를 용서해주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죄 사함의 교리를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얻는 지식으로 여긴다면 그때부터 영적 성숙이 멈춥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는 은혜를 누려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그때부터 의인이라고 가르치는 구원파의 교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의롭게 된 것이지 죄가 없어서 의인이 아닙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득실거린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를 용서받는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영적 성장입니다. 영적 성장을 이루고 있는지를 측정해보려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누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영적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

둘째,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입니다. 13절 후반부와 14절 중간부를 읽겠습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3~14절).
아버지로써의 영적 성장은 육체의 나이와 믿음의 나이를 병행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도 영적 수준이 어린이에 머무는 사람이 있고, 젊지만 영적 아버지로 성장한 사람도 있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에 더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되어 있는데 스펄전 목사는 그것을 올바른 번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온 내용을 직역하면 ‘원로들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원로(장로)는 ‘자켄’인데 자켄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형용사가 많지 않습니다. 형용사적인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 명사를 씁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정의의 아들’이라고 쓰면 그것은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명사로 형용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원로들의 아들’이라는 것은 ‘원로 같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지혜와 성숙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여러 아들 중에 가장 늦게 태어난 아들은 베냐민입니다. 요셉이 느지막이 태어난 아들이라서 더 사랑했다면 요셉보다 베냐민을 더 사랑해야 하지 않습니까. 요셉은 아비의 마음을 가진 자녀였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 성숙은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깨닫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자신도 기뻐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을 품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자녀들이 아비의 마음을 아는 자녀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선생들은 많은데 아비는 많지 않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선생들은 많은데 한 영혼을 사랑과 인내로 양육하는 영적 아비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선생은 많은데 아비가 부족합니다. 아비가 많은 시대의 교회는 한 영혼을 책임지고, 양육하기 때문에 사생아가 없습니다. 버려진 자녀가 없습니다. 모두가 돌봄을 받으면서 건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선생이 많고 아비가 없는 곳에는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영혼은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십니다. 태초부터 계시는 분을 안다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예견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는 영적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청년으로써 영적 성장 

셋째, 청년으로써 영적 성장입니다. 13절 후반부와 14절 후반부를 읽겠습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3~14절).
청년들은 힘이 세고 강합니다. 육체의 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강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육체의 강함은 오히려 죄를 범하기 쉽니다. 넘치는 에너지가 과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실수가 많고, 잘못 행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삼손의 강함입니다. 삼손은 힘이 세고, 근육이 많고, 에너지가 많았기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함은 은혜 안에서의 강함입니다. 약함 속에서의 강함입니다. 육체의 연약함 속에서, 환경의 열악함 속에서, 고난 속에서 경험하는 강함입니다. 육체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강함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은혜 속에서 강하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뚝이 같다는 것입니다. 오뚝이는 넘어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쓰러져도 바로 일어납니다. 은혜가 회복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강함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강함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강함이 아닙니다. 이 강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고, 순종하는 강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할 때 악한 자를 이깁니다. 우리가 악한 자를 이기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해야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위기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평상시에 말씀의 지배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화된 말씀이 위기 순간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할 때 악한 자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죄 사함을 받는 은총을 날마다 누리십시오.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의 역사하심과 섭리, 계획과 뜻을 깨닫는 아버지로 성숙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악한 자를 능히 이기는 청년으로 성장하십시오. 영적인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죄를 이기고, 악한 자를 이기는 영적 성장을 이루십시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신승리(精神勝利) Spiritual Victory. Mental Gymnastics
본인에게 불리하거나 나쁜 상황을 좋은 상황이라고 왜곡하여 정신적 자기 위안을 하는 행위로, 실상은 자신의 망상으로만 이기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자기합리화가 있으며 정신승리는 일종의 은어라고 하겠다.

예를 들면 아큐정전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큐는 성격이 거의 찌질이에 가까운 인물인데, 길을 가다가 무뢰배를 만나 그들에게 폭행을 당해도 "저 녀석들은 내 아들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들에게 찍힌 것뿐이다" 라며 정신적 승리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 역시도 자기보다 약하거나 힘없는 사람 또는 비구니 등을 때리고 비웃는 전형적인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무자비한 모습을 보인다.

세상에서는 패배자처럼 살아가면서도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하며 마치 자기 자신을 승화시키는 생각으로 자기를 위로하는 것도 일종의 정신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때 고지론이란 말이 등장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높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자가 되고, 세상에 높은 자리에 오르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분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확실히 그런 것도 같습니다. 기독교 연예인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비와이라는 가수가 요즘 아주 독보적입니다. 시상식에서 요한복음을 암송하고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수가 클럽에서 공영한 영상이 유튜브나 이런데 올라오면 그 밑에 댓글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클럽을 기도원으로 바꾸어 버리는 가수라는 댓글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에 기독교인들이 참 많이 올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 열두명의 대통령 중에 3명이 교회 장로님들입니다. 또, 13명 중 7명이 개신교인 4명이거나 천주교인 3명입니다. 13명 중 7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에 장로를 위시하여 대통령님 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은 감옥에 계시죠. 원래도 전과가 많으신 분이신데 대통령 자리에 계시면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교회 장로라는 걸 전면에 내세웠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 사람들을 청와대 요직에 앉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범죄를 일으키니 교회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큰 문제는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사건 사고를 치면 교회 장로님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들도 뉴스에 자주 오르내려서 도리어 사고치고 유명해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냥 대충 기억나는 것만 봐도 우리 교단에서 총무까지하셨던 분은 가스총을 들지 않나 칼부림을 하질 않나. 또, 초대형교회들은 세습을 하면서 유명해집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 교단인데 모교회는 제자훈련을 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짓거릴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 왠지 작아지고 패배감에 젖어듭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왠지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런 제 정신승리를 마치 확정이라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한 번 다같이 12-14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에게 반복적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 세 그룹 중에 청년들에게 주는 말씀에 가장 강조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이 계속 마지막에 나오고 청년들에게 주는 권면에서 앞의 내용을 풍부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당당하게 악한 자와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때 당시 상황이 그랬을까요? 요한일서는 대강 1세기 후반에 써졌을 텐데 그때 로마는 무너져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1%나 됐을까요? 소수자들이 이겼다고 하는 꼴이 앞서 제가 말한 정신승리가 아닐까요?

그렇지만 조금 인내심을 갖고 요한의 말을 계속 들어봅시다. 그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한일서 1장 1-4절을 보면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계속해서 요한이 강조하는 사귐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시기에 사귈 수 있는 것이죠. 그 아들과의 사귐을 통해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믿음의 문제로 넘어옵니다. 과연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고 합니다. 태초부터 일하신 지금까지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삼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의 악한 자의 지배를 깨뜨리고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했다면 요한은 말씀 안에서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분과 사귐으로 이어져 내려온다면 우리 역시도 승리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믿으십니까? 교회사에서 내려오는 큰 가르침이 있습니다. 도나투스 논쟁입니다. 로마의 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교회를 배교했던 사람을 로마의 주교로 세웁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이 있었거든요. 당연히 순교의 거룩한 행위가 절대적으로 강조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가 이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인간이 순교라는 위대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거룩함은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외친 게 바로 어거스틴이었습니다. 순교를 통해 흐르던 기존의 신학 흐름을 완전히 뒤바군 것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몰지각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의 거룩함이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를 통해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나는 지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함은 목사와 장로, 집사나 성도들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게나 혹 이단에게 세례를 받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것을 행한 자들에게 권위를 두는 게 아니라 그 고백. 그러니깐 삼위일체 하나님께 한 그 고백에 권위를 둡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하나도 흠집낼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많은 연약함에 이제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들의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셨던 것과 일하심에 집중합시다. 우리도 그분의 이름을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가에 집중하십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교회가 이제 큰 분기점을 맞아 급격히 내리막길을 가더라도 우리가 집중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사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거기에 집중을 합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이 담대한 선언을 기억합시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12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 자녀들아(5040) 테크니온(tĕkniŏn)  τεκνί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40

1. 5043의 단축형 : 작은 아이.  2. 어린 아이. 3. 요 13:33.  4. 요일 2:12. 28. 3:7
발음 [ tĕkniŏn ]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작은 자(요 13:33), 자녀(갈 4:19, 요일 2:1, 4:4).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아비들아(3962) 파테르(patēr) πατήρ, πατρός, ὁ 스트롱번호 3962

1. 아버지.  2. 조상
발음 [ patēr ]
아버지(마 2:22, 눅 1:59, 요 5:17, 행 16:3, 살전 1:1), 조상(마 3:9, 눅 1:32, 고전 10:1), 열조 (히 3:9, 8:9), 부모(히 11:23).


* 청년들아(3495) 네아니코스( nĕaniskŏs) νεανίσκος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청년(네아니스코스.  nĕaniskŏs) νεανίσκ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495

1. 청년.  2. 종
발음 [ nĕaniskŏs ]
어원 / 3493와 동일어에서 유래

1. 청년, 젊은이, 마 19:20, 막 14:51, 눅 7:14, 행 2:17.
2.  종, 행 5:10.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청년(마 19:20, 막 14:51, 요일 2:13), 젊은이 (행 2:17).





율법, 율례, 규례, 법도, 계명의 차이

정확한 정의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준을 정한다면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계명(誡命, commandments) : 기초가 되는 율법
율례(律例, statutes) : 율법의 세부 사항
규례(規例, ordinances) : 심판이 포함된 율례



율법(律法, law)

출애굽기 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Come up to me on the mountain and stay here, and I will give you the tablets of stone, with the law and commands I have written for their instruction."

율례(律例, statutes)

출애굽기 21: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These are the laws you are to set before them:
KJV. Now these are the judgments which thou shalt set before them.

규례(規例, ordinances)
출애굽기 13:10
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이 규례를 지킬찌니라.
You must keep this ordinance at the appointed time year after year.

법도(法道, laws)
민수기 15:6
너희나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법도, 한 규례니라.
The same laws and regulations will apply both to you and to the alien living among you.'


계명(誡命, commandments)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but showing love to a thousand {generations} of those who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계명, 율례, 법도, 규례의 차이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law)과 율례(statutes)와 규례(ordinances)에 관해 자주 말한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완전치 않기 때문에 율례들이 보충한다.
이 때문에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례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계명 : 기초가 되는 율법 - 도덕법(道德法) / 하라, 하지말라
율례 : 율법의 세부 사항 - 종교법(宗敎法) / 제사법
규례 : 심판이 포함된 율례 - 사회법(社會法) / 법도. 사람이 서로 지켜야 할 관계법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 라이프 성경사전 ]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던지다’, ‘(물을) 뿌리다’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말로, 지시, 교훈, 법령, 계명, 법, 관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민 15:16; 시 19:8). 또 헬라어 ‘노모스’는 ‘분배...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율법, 정의 ,규례, 율례, 명령, 계명, 길, 법도 개념들


공의, 정의 : 미쉬팟 Mishphat -

 םשףט'ם      복수mishphatim םשפט 

심판, 정의의 판단, 재판, 사법정의, 정의의 심판

Judgment, Justice,  사사기는 이 샤팥(재판하다)에서 나온 쇼파팀 (재판관들)의 번역임

홐 Hok,복수 Hukimחק'ם חק        

   Statutes, Ordinances 규례, 율례, 응식

하나님이 처방해준 처방전, 하나님이 주신 그 처방대로 준행한 사람에게 당연히 돌아가는 응식(레 8:29, 10:13, 15 등에서 종전 개역한글에서는 응식으로 번역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소득, 몫 등으로 번역)

레위기 6장 11, 15절 또한 응식으로 번역됨이 더 정확하다고 분별됩니다. 즉 레위자손들은 성막 봉사로 당연히 그 받을 응식을 갖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응식을 당연히 공급하신다는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צדק 의 체뎈 Righteousness (Justice – 창 18:19) 

 멜기세덱은 원래 멜렉키체덱을 그리스어 표기법으로 쓴 것임

이 의는 죄에 대한 개념으로 죄를 사함받았을 때, 속죄되었을 때 의가 나타나므로 대개 속죄, 대속과 관련되고 노아의 경우 당대의 의인이었다는 말에서도 사용됨(창 6:9)

םצוות   םצוה  계명, 명령, 미츠바 ( 한글 성경 미스바) 복수 : 미츠보트

명령하다는 뜻의 차바에서 나온 명사형이므로 명령 혹은 계명으로 번역되는 것이 순리로 보임.

דרק 길

출애급기 18장20절

그들에게 율례(후킴)와 법도(토라)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데렉)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 개역개정)

신명기 26장 17절

네가 오늘 여호와가 네 하나님이라고 선언(보증)하였나니, 그분의 길들로 행하며 그분의 규례(율례= 훜킴)들과 그분의 계명들(미츠봇트)과 그분의 의의 판단들(미쉬파팀)을 지키며 그분의 음성(콜)을 청종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명령과 의의 판단들을 좇는 삶은 레일위를 달리는 것과 같은데 기차가 그 레일에서 벗어난 경우에는 그 기차를 기중기로 들어올려 다시 레일 위에 올려 놓아야 달릴 수 있습니다. 이일은 오직 성령님께서만 행하실 수 있습니다.

율법 (토라) = תורה    : 율법, 법도

1)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합쳐서 말할 때 토라, 율법이라 말함

2)  신약적으로는 로마서 8장 2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지, 어떤 법칙이나 무슨 법을 말할 때도 이 토라를 의미한 것임

3)  토라는 크게 네가지로 나뉘어진다고 분별합니다.

가)성전제사법 – 동물희생과 코르반을 드리는 행사에 관한 법 :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완벽하게 완성되고 대체되었으며 각 신자들은 십자가 희생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코르반을 드리는 행사를 매일 행하고 있습니다.

나)의식법 – 옷을 어떻게 입으라, 음식은 무엇을 먹지 말라, 몸을 깨끗이 목욕하라 뿐만아니라 성전시대에 관련된 법들, 할례, 안식일을 여기에 포함하여 지켜야 할지는 해석상의 차이로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안식후 첫날 예배를 보여주는 한편(행 20:7, 고전 16:2),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존귀하신 태양의 날에 모이도록 강요된 (서기 321년 3월7일부터) 역사적 배경도 있으며 이 둘이 겹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의식법은 성전제사가 대체 폐해졌으므로, 그에 수반되는 법으로서 폐해졌다고 보는 견해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롬 14:1-5은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 형사법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 이러한 형사법들은 그리스도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에 그대로 수용되었고 강화되었습니다

라)도덕법

탐내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 이 모든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법안에 수용, 포용되었고 강화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성경이 율법이 폐해졌다고 가르친다면 그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 완성(플레로), 성취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15, 갈 5:4, 2:16 절, 롬 13:9 등은 많이 오해되고 있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율법 중에서 동물희생들은 십자가로 완벽히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율법 이상의 명령들을 준행합니다.성령을 좇아 행하면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롬 13:9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지키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하는 계명을 안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등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여전히 율법은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어휘들의 공부를 마치기 전에 꼭 살펴볼 말씀이 신약에 있습니다.

마태 12장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의의 심판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하리니     ( 정의가 승리에 이르도록 인도하기까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미쉬파팀임은 분명합니다. 즉 정의의 심판이 승리로 종결되어 하나님의 사법정의가 실현되고, 사탄 마귀와 그 추종자들이 심판을 받으며, 의의 사역자들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보상받는 정의가 실현되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시고 자기 목숨을 바쳐 인생들의 죄를 담당하신다는 것과 상한 갈대를꺾지 아니하시고 인생들을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단어들이 갖는 어의를 중심으로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시간이 많이 허락될 때 좀 더 정리하여 각 개념과 내용들을 분석하여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아래 몇구절 킹제임스 성경 구절들을 뽑아서 예로 들어봅니다.

창세기 18장 19절

19 왜냐하면 나는 그가 그의 자손과 그 이후의 그의 집을 명하여 여호와의 길을 지키도록 하여 정의(=의, 츠다카)와 의의 판단(정의, 사법정의, 미쉬팟트)을 행하여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를 그에게 가져다 주도록 할 줄을 알기 때문이라.

Lv 6:11, 15 Gn 47:22 레위기 6:11, 15, 창 47:22

응식의 예들, 제사장들이 마땅히 받을 응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창 47:22에서는 이집트의 태양신 제사장들도 마땅히 공급되는 응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26:17
Thou hast avouched the LORD this day to be thy God, an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statutes(규례-후킴), and his commandments(계명 = 미츠보트), and his judgments( 사법정의 정의의 판단=미쉬파팀), and to hearken unto his voice(음성=콜)

Leviticus 25:18
Wherefore ye shall do my statutes(율례), and keep my judgments(의의 판단들), and do them; and ye shall dwell in the land in safety.

Deuteronomy 5:31
But as for thee, stand thou here by me, and I will speak unto thee all the commandments, and the statutes(규례), and the judgments(정의 심판), which thou shalt teach them, that they may do them in the land which I give them to possess it

Deuteronomy 26:16
This day the LORD thy God hath commanded thee to do these statutes(규례) and judgments(의의 판단): thou shalt therefore keep and do them with all thine heart, and with all thy soul.
Deuteronomy 26:15-17 (in Context) Deuteronomy 26 (Whole Chapter)

Deuteronomy 26:17
Thou hast avouched the LORD this day to be thy God, an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statutes, and his commandments, and his judgments, and to hearken unto his voice

Deuteronomy 30:16
In that I command thee this day to love the LORD thy God, to walk in his ways, and to keep his commandments and his statutes and his judgments, that thou mayest live and multiply: and the LORD thy God shall bless thee in the land whither thou goest to possess it.

Deuteronomy 32:4
He is the Rock, his work is perfect: for all his ways are judgment: a God of truth and without iniquity, just and right is he.


새 계명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요한일서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요한이서 1: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옛 계명

요한일서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옛 계명의 근거는 죄를 지었을 경우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속죄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새 계명의 근거는 죄를 지었을 경우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물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간접적인 속죄 방법에서 직접적인 속죄 방법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단번에" 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ἐφάπαξ 스트롱번호 2178

1. 한번에. 2. 한번에 다
발음 [ ĕphapax ]
어원  / 1909와 530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한번에, 단번에, 고전 15:6(일시에).
2. 한번에 다, 롬 6:10, 히 7:27, 9:12, 10: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단번에(롬 6:10, 히 7:27, 10:10), 일시에(고전 15:6).


히브리서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6.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7.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ἅπαξ 스트롱번호530
1.

한 번

2.

히9:7.

3.

ἔτι ἄ.: 한 번 더

발음 [ hapax ]
어원
537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뜻풀이부

  • 1.
    한 번[실제적인 수개념으로 쓰이는 경우], 고후11:25, 히9:26,27,28.
    • a.
      [소유격이 수반되는 경우] 히9:7.
    • b.
      ἔτι ἄ.: 한 번 더, 마지막으로, 히12:26,27.
    • c.
      ἅ. καὶ δίς: 반복하여, 되풀이하여.
  • 2.
    한꺼번에, 단번에, 히10:2, 유1:3, 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한 번(고후11:25, 살전2:18, 히6:4), 일(히9:7), 단번(히9:26, 벧전3:18, 유1:3).




8.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9. [히브리서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유다서 1: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성경에서 유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인 "법도" "율례" "율법" "계명"들 사이에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어떤 차이 때문에 문맥에 따라 각각 다르게 번역이 되어 쓰이는 것일까?

창세기 26:5에서 이러한 용어들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because Abraham obeyed me and kept my requirements, my commands, my decrees and my laws.

원어로 보더라도 법과 준수사항, 규칙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들은 다양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대략 아래 네 가지 정도라고 밝혔다.

법과 준수사항, 규칙 등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미츠바, 미쉬파트, 후카(호크), 토라 등 다양하다.
특히 "율례와 법도"라는 표현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어떤 차이를 지닌 법 용어들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들의 의미론적 범주를 명확히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이 정확한 개념적 구분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이 단어들이 다르면서도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이 그냥 동의어로 교차적으로 사용되는 사례들이 숱하게 많다.

영어 번역어로 옮길 때도 전혀 합의된 규칙 자체가 없다.
실제로 "세 단어가 각각 문맥에 따라 commandment, rule, statute, law, regulation, decree, ordinance, code, act, 등등 너무나 다양하게 번역된다.

법을 가리키는 이 영 단어들이 영어권에서 특정 범주의 법을 가리키기 위해 특화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경계선들은 정확하지 않다"며 "영어 원주민들도 헷갈려한다."

그러면서 "히브리어 단어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렇다.
베스터만과는 약간 다른 견해다.
하지만 역시 정확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1. 호크(후크) / 율례 : 사회적, 제도적 규범(전통과 관행이 제도화된 것)
2. 미쉬파트 / 법도 : 법률적 규범(법정에서의 판결과 판결 기준)
3. 미츠바 / 계명 : 지도자나 권위자에 의한 법령, 명령
4. 토라 / 율법 : 위의 모든 법령과 가르침, 교훈을 총괄하는 단어

미츠바(계명)는 '명령하다, 지시하다'를 뜻하는 동사 차바에서 온 단어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십계명은 대부분의 경우 미츠바(복수 미츠보트)로 지칭된다.
그러나 다른 여러 율법들도 역시 매우 빈번하게 미츠바로 지칭되며, 그 외에 율법들은 후카(호크), 미슈파트 등으로도 지칭된다.

보통 호크, 미쉬파트, 미츠바가 세 단어가 나란히 등장하거나 혹은 두 단어가 병행되어 등장하는데(율례와 법도, 계명), 대부분 별다른 이유는 없이 문학적 의도로 중복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율례들이 보충한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레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우리나라 법 체계에서 법, 시행령, 시행규칙 등과 같은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에 대하여]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법체계와 성경의 법체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 라이프 성경사전 ]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95685&cid=50762&categoryId=51387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05-04-2024(토) 요한일서 2:7-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계명과 옛 계명(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Dear friends, I am not writing you a new command but an old one, which you have had since the beginning. This old command is the message you have heard.

새 계명(엔톨렌 카이넨)

2537


1125


옛 계명(헤 엔톨레 헤 팔라리아)

3588

1785

3588

3820



󰃨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난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 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 안토레'(*)는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새 계명과 옛 계명(new command and old one)
옛 계명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셨던 계명을 말합니다.
새 계명이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계명입니다.

옛 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 너희가 들었던 것으로 강조하려고 "다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고 하셨습니다.
이전에 언급한 내용을 반복해서 다른 관점에서 그의미를 설명하거나 강조하려고 "다시"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하나님의 속성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라
둘째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셋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따라서 계명을 지키려면 먼저 영이 되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빛 가운데 머물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가장 가까운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출박합니다.

오늘도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ㅋ크게



②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③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1:5)(요 1:5; 엡 5:8): 옛 계명은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빛이 비침.





옛 계명은 들은 바 말씀
새 계명은 참 빛이 비추인 것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숙제로 주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계명에 대해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계명의 의미와 존재 이유에 대해 무지한 채로 계명을 실천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 즉 말씀을 실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명이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여 지켜낼 수 있는 약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이는 계명의 의미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고자 함이지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으면 합니다.

흔히 지금을 은혜 시대라고 말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 시대라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 시대로 말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율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변함없이 동일합니다. 다만 신약에는 은혜의 본질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를 확증하셨고 구약에는 다만 은혜의 예표가 주어진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신앙을 보면 교리는 은혜이면서도 실제 삶은 계명에 매어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즉 은혜로 시작한 신앙이 결국 실천, 행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을 자기 행함을 기준으로 확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행함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자기 신앙에 안심을 하지만 행함에 게을렀던 사람은 결국 낙심하기도 하고 자기 신앙에 대해 큰 의심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라면 예수님의 행하심과 같은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은 우리가 흉내 낸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고 해서 새벽 기도가 만들어 졌고, 40일 금식 기도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본받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기도라는 겉 행위를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는 무슨 뜻입니까?

7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쓰고 있는 계명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미 예전에 들었던 계명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용이 다를 바 없이 동일하다면 굳이 새 계명, 옛 계명으로 구분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계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7절과는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7절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들었던 옛 계명이지만 다시 새 계명을 쓴다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계명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본질상 뭔가 새롭기 때문에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시간에 중요한 것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34절에 보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옛 계명과 다른 새 계명입니까?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내용의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씀하시면서 새 계명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우선 구약에서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그 의도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소위 인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기껏해야 내 마음이 가는 사람에 대해 친절을 베풀고 조금 도와주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인간의 힘으로 이러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옛 계명과 새 계명의 다른 점은 계명의 내용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에 있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명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내가 살아있는데 그런 나의 모습으로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인 됨과 악함과 불순종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보여지는 열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6절의 말씀처럼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신자가 행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4-5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후螁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신자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절감하셔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계명을 지키라는 말을 하는 것도 신자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킬 수 있는 자를 향해서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신자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 때문임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람이 달라진 것을 뜻하지 않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 아니란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안에 거함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진 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은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말합니다. 행함이 있으면 믿음이 있는 것,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행함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가 말하는 사랑의 수준은 기껏해야 서로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어려운 자가 있으면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분이 사랑을 행한 대로 사랑을 행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웃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분명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없으니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상식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때 여러분은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 여러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함을 가슴 깊이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거나, 은혜를 받았다면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십시오. 십자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옛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된 새 사람은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삽니다.

새 계명'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4번 나오는데 모두 요한 사도가 사용하고 있다.(요한복음 1회, 요한일서 2회, 요한이서 1회)
새 계명이라고 하면 그냥 생각해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새 계명이 이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7-8)

사실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서 하신 말씀에 처음 나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서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요한 사도는 새 계명은 예전부터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말씀을 하는 것인가?

언뜻 위의 두 말씀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다고 하고,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 요한 사도는 새 계명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사실 이는 같은 말씀이다.

예수님과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이 새 계명이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은 이전부터 전해온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 안에서 새롭게 보이고 그 말씀의 의미가 전혀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달력의 시간, 곧 객관적인 크로노스적인 시간의 개념 안에서 예수님이 오신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옛 계명이고,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 이후를 새 계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간편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계명, 곧 새 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그 때부터 있는 하나님의 의가 한 사람 안에서 전혀 새로운 말씀과 계명이 되었을 때 태초부터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열리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옛 계명이고 그 이후에 주신 말씀은 새 계명이라고 하거나, 구약은 옛 계명이고 신약은 새 계명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일서에서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예 계명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몸으로 오셔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주신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표현하고 계시하신 것을 완전하게 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안에 열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새로운 계명이 된다는 것을 요한 사도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옛 계명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②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새 계명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다시”: 이전에 언급한 내용을 반복해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설명하거나 강조할 때 사용하는 말

이 옛 계명은 동시에 새 계명이기도 합니다.(깊이와 넓이가 한층 더 깊고 넓어져 승화된 의미)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②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③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1:5)(요 1:5; 엡 5:8): 옛 계명은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빛이 비침.










대언자(代言者)란 대신 말하여 주는 사람이란 한문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심판의 날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을 위하여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9: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시편 43: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예수님께서 대언자가 되셨기 때문에 항상 우리 곁에서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영이신 하나님은 육체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게 하신다.
요한복음 15:26



요한복음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출애굽 때 하나님은 모세의 대언자로 아론을 세워 애굽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출애굽기 7:1-2

초림 때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곧 보혜사이셨다
요한일서 2:1

예수님은 재림 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곧 다른 보혜사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요한복음 14:16

요한복음 14:26

요한복음 15:26

요한계시록 22:16






출애굽기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 여기서 신(*, 엘로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바로에 대한 모세의 우월성을 한마디로 압축한 말이다. 비록 땅에서의 바로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하늘에 속한 권세를 소유한 모세는 오히려 그에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바로를 가볍게 압도하며 호령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한 일 배후에는 모세를 강하게 하시고, 모세를 그 어떤 권위보다 탁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내재해 있음은 물론이다(3:14). 한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요 10:35).

󰃨 대언자 (*, 나비) - '영감에 의해 말하다'란 뜻의 '나바'에서 온 말로 '예언자'를 가리킨다(KJV, RSV, prophet). 여기서는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하고 그 뜻을 풀어 설명해 주는 '대변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공동번역, 대변자; Living Bible, spokesman). 출애굽은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 사역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인간의 협력이 결코 무시되지는 않았다.

נָבִיא 스트롱번호 5030

1. 선지자.  2. 선지자의 직분을 하도록 뽑힌 자들.
3. בְּנֵי הנְּבִאִים

발음 [ nâbîyʼ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315회 사용
선지자(창 20:7, 신 18:22, 왕상 18:4), 대언자(출 7:1), 예언자(렘 28:9), 예언(단 9:24), 예언하는 자(겔 13:2,3)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대언자’란 “대신 말하여 주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며,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으나 인간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간구하는 것을 말하여 주심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지막으로 대언자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란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요 15:16).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자'(summoned, called to one's side, especially called to one's aid)를 의미하며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보혜사)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 15:26; 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16)

*영어성경에서는, 대변자, 중재자, 변호사를 뜻하는 'advocate'로 번역한 역사가 많다(간혹 Counselor나 friend로 번역하기도 했다).

we have an advocate with the Father—Jesus, the Messiah, one who is righteous.

• 예수님과 성령의 중보사역의 차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

• 예수님의 대언자가 되실 수 있는 자격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되실 수 있다.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δίκαιος)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δίκαιος)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오늘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셔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로마서 3:26)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 보혜사 성령님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도고하여 주시는 대언자이시다(롬 8:26). 그 뿐 아니라, "보혜사"란 말을 위로자란의미도 가진다. 그가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음과 마찬가지의 힘과 평안과 기쁨과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실 그의 역사를 가리킨다. 여기 약속된 보혜사의 오심은, 오순절 임하실 성력을 가리킨다. 그가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으니,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단 한 번 있을 것이지만, 그 역사의 영구할 것이 알려진다(마 28:20). 예수님은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라 하셨다(요 14:17).


소문자와 복수 prophet(s) 단어, 여성명사 합쳐서 450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문자 Prophet 단어는 단 4구절, 대문자 Seer 단어는 단 1구절, 소문자와 복수 seer(s) 단어는 26 구절이 있습니다.
prophet 이라는 단어가 쓰인, 450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대언자(代言者) : 대신 말하는 사람
선지자(先知者) : 미리 아는 사람
선견자(先見者) : 미리 보는 사람
예언자(豫言者) : 미리 말하는 사람


모세

예수님

1

유대인

유대인

2

모세를 세우기 전까지 400년 정도의 노예 생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400년 정도의 침묵 기간

3

시내산에서 40일 금식할 때,

사탄의 시험(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음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사탄의 시험이 있으셨음

4

아기때 또래 아이들의 떼죽음이 있었음

아기때 또래 아이들의 떼죽음이 있었음

5

이적을 일으킴

이적을 일으키심

6

유월절에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뿌림

유월절에 직접 어린양이 되셔서 피흘려 죽으심

7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후 얼굴이 환하게 변함

부활 하시어 완전한 몸으로 변하심, 빛이 나심

8

이집트 왕가의 삶을 내려 놓음

하늘의 왕좌를 내려 놓으심

9

맛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심

10

율법을 받아서 알려줌

성령님을 보내 주심

11

율법의 시작

율법의 마침

12

가나안땅 정탐을 위해 12명을 보냄

12명의 제자를 세상에 보내심









출애굽기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05-03-2024(금) 요한일서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언자(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代言者)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래토스" 라고 합니다.
'파라클래토스'를 "보혜사(요 14:16, 26, 16:7)" 또는 "대언자(요일 2:1)"라고 합니다.

대언자는 마치 법정에서 판결을 받기 전에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하여 변호하는 변호사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을 때 대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을 위하여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이란 헬라어 '하마르테'는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시상입니다.
부정과거시상이란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말합니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요 14:16, 26. 15:26. 16:7).
그러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신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 롬 8:9. 빌 1:19)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 라고 하여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가 되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위하여 중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하늘 보좌에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오늘도 대언자가 되신 보혜사의 도움을 받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일에 성공하기를 다짐합시다.
그리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조용히 대언자의 음성을 들으며 새 날을 꿈꾸는 소망의 삶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2:1. 3. 요14:16,26
발음 [ paraklētŏs ]
어원  /  3870에서 유래

* 3870. παρακαλέω 스트롱번호3870
1. ~곁에서 부르다.  2. 행 28:20.  3. 청하다
발음 [ parakalĕō ]

위로받다(마 2:18, 5:4, 고후 13:11), 간구하다(마 8:5, 눅 8:31, 몬 1:10), 빌다(마 18:32), 구하다(마 26:53, 막 5:10, 눅 7:4), 권하다(눅 3:18, 행 11:23, 빌 4:2), 청하다(행 8:31, 13:42, 28:14), 간청하다(행 9:38), 권면하다(행 15:32, 고전 4:13, 살전 2:11), 위로하다(행 16:40, 고후 7:6, 엡 6:22), 여쭈다(행 24:4), 원하다(히 13:19), 위로하다(롬 12:8), 위안받다(골 2:2).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保惠師, parakletos. παράκλητος)
라틴어 파라클래투스(paracletus)
영어 파라클래테(paraclete)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 뜻이며,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의 한자 의역(어)로 번역되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가 또 다른 보혜사를 언급하며 처음 등장했다.

성경 번역판마다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다소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글성경의 개역한글판표준새번역판에서는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판에서는 협조자로, 가톨릭성경판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고 있다. 영문성경의 킹제임스판YLT에서는 Comforter ("위로자")로, NIVRSV에서는 Counselor ("상담자" 또는 "고문")로, NRSV에서는 Advocate ("변호사")로, NASB에서는 Helper ("돕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보통명사이기에 성경에서 약속하신 보혜사(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의 사명을 하는 존재를 이와 같이 부를 수 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은 초림 당시,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는 말로 16절에 "다른 보혜사"라는 낱말이 나오며 17절에서 이를 "진리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 두 가지는 "다른 보혜사"를 주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초림 당시의 보혜사는 육신이 있는(사람) 예수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과 예수님의 기도로 오게되는 다른 보혜사는 "영"이라는 사실이다.

초림 당시 예수가 보혜사라는 점은 〈요한1서〉 2장 1절에서 사도요한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남긴 말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예수를 대언자,곧 보혜사라고도 하였다. (개역한글판 난하주 참고)

요한복음 14장18절(하)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다시 돌아온다고(I will come to you)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자신이 성령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고, 요한복음 14장26절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But the Comforter, which is the Holy Ghost)이란 표현을 보아도 보혜사는 곧 "성령"(the Comforter, the Holy Ghost)이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요한복음 16장7절과 8절에서 "내(그리스도)가 그(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는데"라는 표현이 있는데 곧 그리스도가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 즉 보혜사로 다시 오는 성령은 요한복음 20장22절에서 그리스도가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으로 최종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주로 이단의 교주들이 본인을 보혜사라고 칭하곤 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 (아래의 판본들은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개역한글 (1961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공동번역 (1977년, 신약은 1971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표준새번역 (1993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개역개정 (1998년)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가톨릭성경 (2005년)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 화목제물(힐라스모스. hilasmŏs) ἱλασμ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2434

1. 속죄. 2. 속죄를 위한 제물
발음 [ hilasmŏs ]

화목제물(요일 2:2, 4:10).


죄(하마르티아. hamartia)  ἁμαρτία, ίας, ἡ 스트롱번호 266

1. 죄.  2. 고후 11:7.  3. 요 9:41
발음 [ hamartia ]
어원 / 264에서 유래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 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모스'(*)는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다.

2.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 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럽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 3:16;4:4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이 헬라어 '하마르테'(*)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 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주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나의 자녀들아” (테크니아 무)!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도 요한의 마음이 이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향해 얼마나 사랑과 애착이 큰지를 보여주는 진실한 표현입니다.

저도 제 손주를 보면 “나의 자녀들아”라는 말이 어떤 감정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없이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있으니, 이런 감정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표현이 다른 여러 곳에도 있고 요한일서에도 더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읽을 때 매우 어색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주 예수께서 (테크니아)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사용하시는데 이는 이런 깊은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

33 작은 자들아 (테크니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0-31, 34-35)

자기 생명을 이제 곧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바치실 텐데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기에 이런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자기 피 값으로 사신 제자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아기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엄마는 자기 아기가 병에 들어 죽을 고비를 지나게 되면 진심으로 그 아기 대신에 죽더라도 아기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물며 예수께서 그런 마음을 이미 갖고 계시니 자기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그 제자들이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을 향해 부르십니다.

“작은 자들아!”

“아,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바울도 그러한 심정을 갖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부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갈 4:19).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라고 말하고 있으니 “나의 자녀들”은 내 생명을 다 주어서라도 바르게 세워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런 자녀들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을 향해 이러한 사랑을 반복적으로 표현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아들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요일 3:7).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심지어 요한일서의 마무리도 이 표현으로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아무튼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하며 깊은 사랑 가운데 간곡한 부탁을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 편지를 너희에게 쓴 이유는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요한은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고 말합니다. 즉,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할 이유와 또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일서는 요한이 거의 죽음에 가까운 때에 쓴 것입니다.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하기 전에 보낸 서신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인류의 역사를 담은 웅장한 서신이라면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의 유언과도 같은 내용을 담은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 유언과 같은 사도 요한의 글이 목적한 바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사도 요한이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 품고 명심해야 하는 말씀 중 하나는 “아, 어떻게든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구나.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요한의 가르침을 꼭 붙들어야겠다”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우리의 본문 바로 앞에서 신자라도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 1:8-10)

즉, 우리는 죄성을 지닌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또한 범죄한 후에 죄책이 들 때마다 죄를 자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약속에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죄를 사하여 주시고 또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셔서 다시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쓴 것은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지만, 그러나 죄를 범하게 되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새언약의 대제사장 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는 않지만 당장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되면 우리는 곧바로 마귀와 죄에게 종노릇 하는 상태로 전락합니다.
이때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인한 죄 사함 및 죄 씻음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양심 때문에 자책 및 우울증에 빠져 어둠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양심의 고함소리를 묵살하면서 위선자의 삶을 살면서 죄의 노예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양심이 화인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신자라도 죄성 때문에 이런 상태에 떨어지는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면서 그럴 경우 어떻게 마귀와 죄에게 종노릇하는 상태에서 다시 나올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이때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죄와 마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회개와 믿음 그 자체가 나를 구출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약속에 따라 죄와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책이 사라지고 성령으로 인해 죄 씻음을 확신하게 되면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여기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진실로 의로우신 예수님께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실에 기인합니다.
즉, 우리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과는 달리 우리 주 예수님은 평생 주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인하여 실제로 의로우신 분이라고 하나님께 인정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롬 2:13).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로우니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7-8).

십자가의 죽음까지 마다하고 평생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에 대해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그렇게 완전한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죄를 범하여도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우리가 범한 죄 문제가 해결되고 신속히 하나님과 사귐을 회복하게 되면서 새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개역개정이 ‘대언자’라고 번역한 원어는 (파라클레톤)입니다.
원형으로는 (파라클레토스)인데 그 헬라 원어의 뜻은 “나를 돕기 위해 곁에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법적으로 증거를 가지고 나를 변호하는 분, 옹호하는 분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인 의미로는 상담자, 돕는 자, 보호하는 자,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이 동일한 단어를 성령께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이신데 원어로 (알론 파라클레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도 보혜사이신데, 또 다른 보혜사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너희를 고와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우편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십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대언자’로 번역된 ‘보혜사’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의 영을 보내셨으니 그 영은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보혜사”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지금 ‘대언자’는 우리가 범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관점에서 언급된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언자로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자기의 생명으로 치른 영원한 속죄를 근거로 하여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실 것을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보혜사 또는 대언자 역할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사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역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중보의 역할을 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여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성령을 따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이렇게 말씀하신 주 예수께서는 지금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한없이 끝까지 용서해 주십니다. 자신의 속죄를 근거로 주의 죄사함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와 새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자의 죄악을 아들의 속죄를 근거로 하여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흘러나와서 우리의 죄를 한량없이 사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원칙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마련해 주신 복음의 원칙을 의지하여 우리가 행여 어떤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당장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사귐을 다시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기계적, 또는 악용하는 자세로 복음의 원칙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치 못할 것입니다. 즉, “아, 많은 죄를 짓고도 보혜사되시는 대제사장에게 나아가면 죄사함과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더욱 많은 죄를 짓자”라는 논리를 펴는 악한 심보는 복음의 은혜를 더럽히는 간교한 사탄적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논리와 자세를 가진 자들이 바울에게도 도전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력하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우리는 이와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가 지은 죄악에 대해 나의 죄성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신자라면 지은 죄로 인해 너무 오래 낙심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지은 죄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거나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아파하며 자신을 환멸하되, 하나님의 새언약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심지어 주의 징계를 받는 상태라도 계속 회개하며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2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선포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그분의 화목 제물 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을 원어로 보면 (톤 하마루티온)이라 하여 복수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아니라 ‘죄악들’로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즉, 우리 신자들이 짓는 죄악들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또는 대언자로서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시는데 그 근거는 자기 자신이 화목 제물이 되신 희생양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은 원어로 (힐라스모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량의 효력은 대언자의 역할과 함께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얼마든지 화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그런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무한한 화목의 효력을 가진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을 통일 시키는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신자가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나아가면 대제사장이시며 또한 영원한 희생제물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신자의 범죄가 완전하게 해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안의 있는 옛사람에게 져서 비록 범죄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서먹해지더라도 내 안의 옛사람이 주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내가 지은 죄악들에 대해 철저하게 사함 받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범죄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에게서 나는 향기는 하나님께 더러운 죄의 냄새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악의 냄새가 제거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우리의 제사장 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가서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오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살아있는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오직 그 제물과 제사장의 역할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만족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죄하였더라도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과 다시 사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를 누가 하셨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많은 죄악을 범하고 자신을 혐오하는 가운데 빨리 새롭게 일어나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힘차게 달리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화목제물이시며 영원한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은 죄악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께 나아가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의 속량을 치르신 화목제물이며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신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환상 가운데 “일찍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9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계 5:6-10)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슬픔 가운데 있더라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는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도리어 죄 사함과 죄 씻음으로 인한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신자들이여! 당장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소망과 기쁨과 평강의 반석이십니다.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그리고 무한하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된 자들은 그들이 어떤 죄악을 범하였더라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중보 기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버림 받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3-35, 37-39)

이와 같은 화목 제물 되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3절부터 6절은, 이러한 참 사랑이 보장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죄 씻음을 받은 상태에서 하늘 아버지와 사귐을 갖게 되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은 상태에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평강하며 감사와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으로써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 편지를 쓴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너희도 주의 사랑 안에서 주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한편, 3절의 말씀을 원어로 보면 “그를 안다”라는 말이 완료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를 알아온 상태로서 이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고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미 과거에 예수님과 언약을 맺은 소위 하나님의 참된 자녀요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바로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 속의 깊은 의도를 알려주는 표현법으로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1절부터 보면 우리는 비록 죄인들이라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럴 경우 참 신자들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범죄를 합법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온 사람은 주의 계명들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모든 계명들을 항상 지키는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참 신자라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계명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사실에 대해 아파하면서 회개하고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께 나아와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 후 다시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나아간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한, 또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있는 한, 그는 주의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서는 신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도록 되어 있기에, 만일 그리스도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선포합니다.

한편, 4-5절에서는 거짓말하는 가짜 신자를 드러내고 진짜 신자를 구별해 냅니다. 다같이 4-5절을 읽겠습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보면 그를 “아노라”고 할 때 원어는 (에그노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알아왔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참 신자라는 뜻입니다. 이에 NLT 성경은 완료형으로 된 “아노라”를 “belong to”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은 참 신자라고 말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는 뜻입니다. 즉, 가짜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짜 신자를 분간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인데 원어로 (테레온)이라고 하여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계명들을 늘 지키지 않는 자라는 뜻이고, 주의 계명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며, 그 계명들을 진지하게 지킬 의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하신 명령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실 그리스도를 감사하지 않는 자이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 제물 및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 바른 인식과 감사와 충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 마음이 가 있는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가짜 신자입니다.

하지만 참 신자들은 비록 내 안의 죄성으로 인해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은 죄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량을 치르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더욱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의 상태에서 다시 주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계명들을 하나씩 더 많이 더 오래 지켜나가는 성장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 것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점점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연합함으로 더욱 주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쓴 의도처럼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진행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주와 연합한 상태에서 주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그대로 우리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니 비록 이 땅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지는 못할 지라도 우리의 삶과 성품에서 사랑이 계속 무르익으면서 사랑의 결실들을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6절을 통해 참 신자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된 사람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되었다”라는 번역의 원어를 보면 (텔레이오우)라는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뜻은 “완성되다, 성취되다, 실행하다. 성공적으로 마치다. 이루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졌다, 완성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완전하며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현재든, 과거든, 미래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주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주를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지키면 이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즉, 우리 안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지키는 깊이와 시간이 많아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더 우리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이러한 주의 사랑의 성취가 우리에게 나타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과 세상과 역사에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열매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열매는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에 추수로 따 먹을 수 있는 열매라기보다 다만 분명하게 성장하며 변화하는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복음과 관련해서 “자라게 하는지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머리를 붙드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19).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30-32).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막 4:26-28).

히브리서 6장 7-9절은 우리의 본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자라나면서 보여주는 열매들이 그 사람의 정체입니다. 참으로 그 사람에게서 자라나는 열매에 의해 그가 주 예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닌 자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일 인생의 세월을 보내면서 계속 죄악과 관련하여 악화되면서 결국 쓴 열매를 맺는 신자라면,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룟 유다와 같은 가짜 신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처음에는 여러 죄악이 드러나며 엉성하고 투박한 성품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선한 열매가 자라나고 결국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그 사람은 참 신자인 것입니다.

[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히 6:7-9)

이러한 변화는 우리 주 예수님께도 있었습니다.

[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진행형입니다)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주의 사랑이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 5:8-10)

그러므로 남은 삶은 더욱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계속 변화하여 자라나기 바랍니다.

[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1-14)

그리고 주의 추수 때에 우리가 맺어 놓은 열매의 풍성함에 따라 영원한 영광이 결정 날 것입니다. 즉, 내 안의 성품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는지, 또한 세상을 향해 얼마나 선한 영향을 끼치고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켰는지에 따라 영원한 영광이 결정 날 것입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그러나 그리스도를 모르는 거짓 신자들과 불신자들은 그들이 지은 죄악의 분량에 따라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

7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살후 1:7-10)

그러므로 주 하나님을 경외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면 주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살아계신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죄사함을 받고 죄씻음을 받으면서 새롭게 일어나서 또 달려갈 것입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0-11).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행하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행여 마음에 가책이 생기는 실수나 범죄나 사건들이 있으면 신속히 하늘에 계신 우리의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의 영원한 속량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 우리 주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나아와 죄사함과 죄씼음을 받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귐을 갖는 상태를 유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더욱 주의 계명을 지키고자 온 마음을 다하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의 성취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즉, 범죄하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의 성취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이 귀한 사도 요한의 말씀으로 더욱 세월이 지날수록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까지 자라나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는 참된 신자의 삶이 이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개(悔改) : 뉘우칠 회. 고칠 개

1.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

2. 신앙생활(信仰生活)로 들어가는 데 필요(必要)한 요건(要件)의 하나.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自覺)하여 죄인(罪人)임을 반성(反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生活)로 들어가는 일을 이른다

뉘우칠 회
1. 뉘우치다 2. 스스로 꾸짖다 3. 한이 맺히다
부수 忄  (심방변, 3획)
총획 10획

고칠 개
1. 고치다 2. 고쳐지다 3. 바꾸다
부수 攵  (등글월문2, 4획)
총획 7획

회개(悔改)

1.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
2. 신앙생활(信仰生活)로 들어가는 데 필요(必要)한 요건(要件)의 하나.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自覺)하여 죄인(罪人)임을 반성(反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生活)로 들어
    가는 일을 이른다.

회개지심(悔改之心)

1. 회개(悔改)하려는 마음.

종불회개(終不悔改)

1. 끝내 회개(悔改)하지 않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은 어두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너무나 밝은 완전한 빛이 되시는데 그 빛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다 들어내어 놓고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또 만일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즉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진리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행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10절 말씀에도 반복해서 말씀을 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다 죄가 있는데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진리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죄인들을 보고 시커멓게 죄로 물든 사람들을 보고 빛 가운데로 나오라고 하고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귀라고 하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지저분한 모습으로 빛 가운데로 챙피해서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추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어떻게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있습니까
모든 죄악을 보실 수 있는 밝은 빛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사귀시면서 동행하시면서 사실 자신이 있습니까

거기에 대한 해답이 9절 말씀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방법을 오늘 본문에 말씀을 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빛 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1.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본문 9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을 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특하신 치료방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의 처리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하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는 죄를 자백하면 큰일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꼼짝없이 정죄함을 받고 그 죄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잡혀 가면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벌을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국법을 어기는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숨기고 사는 것보다는 자백을 하고 벌을 받는 것이 평생을 숨어서 고생하는 것 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죄를 짓고 도망 다니면 참으로 더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자백하면 거기에 대해서 문책을 하시거나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용서를 해 주시기 위해서 자백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니까 얼른 자백을 하면 마음도 편하고 용서도 받고 떳떳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백하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어합니다.
속에서는 그 죄가 곪아 가고 있지만 겉으로는 깨끗한척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치료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최대한의 관용의 조치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만일 네가 네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은 빼고 설교를 듣습니다.
아 저건 김 집사님한테 하는 소리구나 아 저건 이 집사님한테 하는 소리구나 라고 생각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거기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남의 이야기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성경말씀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도 남에게만 적용을 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기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서신을 기록한 사도 요한같은 사람은 우리들에게 비하면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배운 사람이고 특별한 은혜도 많이 받은 사람이고 신앙에 관해서라면 큰소리를 칠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말을 하기를 너희들 너희 죄를 고백해라 그러면 용서 받는다라고 하지 않고 나를 포함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를 다 깨끗하게 용서를 하신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서 있는 목사를 비롯해서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죄를 자백할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자백을 해야 합니다.

자백을 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죄를 짓고도 뭐가 죄인지 내가 그 죄를 짓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면 무엇을 자백하겠습니까

겉모습만 가지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만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내가 더 나아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가 없어 떳떳해라고 생각을 해 버리면 죄를 자백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자기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추한 죄인인가를 깨달을 때까지 자기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아직 뭘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예수님도 신앙도 모르는 왕초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자백을 하기 위해서 죄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백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 그렇게 인정을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정말로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먼저 댑니다.
죄를 짓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어쩔 수 없었다거나 사실은 더 잘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이 핑계를 대지 않고 자인을 했다고 하면 용서를 받을 기회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었느냐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을 때 얼른 아이쿠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놈의 욕심이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한번만 용서를 해 달라고 빌었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짓고도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가 주는 바람에 그만 먹었습니다.
왜 여자를 만들어서 먹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죄를 짓고 핑계를 대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아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주일날 교회에 못 왔습니다.
잠을 못자서 피곤해 가지고 교회를 못 왔습니다.
어째서 뭐는 못합니다 
싫어서 안 합니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들어보면 다 그럴듯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이유들을 대고 변명을 하고 핑계를 대는 한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실컷 하고도 그런 핑계들 때문에 용서 받지 못하고 상을 받지 못하면 억울합니다.

또 자백을 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이런 완전하지 못한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사는 한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로 통회하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육체를 붙잡고 안타까워하면 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를 핑계대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인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애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깨끗하게 완전히 사하여 주시고 더 큰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2.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본문 9절 말씀에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해 놓고 다 자백하면 야 이놈아 네거 그렇게 흉악한 놈인 줄 몰랐다 어느 정도라야 용서를 하지 그렇게 큰 죄를 지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또 어떤 조건을 붙여서 좋다 용서를 해 줄 터이니 앞으로 내 말 잘 듣고 내 시킨 대로만 해라 만약 내가 하는 말 잘 안 들으면 그 때는 죄를 묻겠다라고 하시면 큰일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죄를 시인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해 놓고서 그것 약점으로 잡고 별별 것 다 요구하고 결국 더 나쁘게 해 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절대 나만 알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천지에 다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죄를 시인하고 자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 앞에서 자백을 해야 용서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악한 신부들은 고해성사를 한 그것을 빌미로 잡고 공갈협박을 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죄를 자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만 은밀하게 말씀을 드리면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지만 우리가 인정하는가를 보시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과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달리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시거나 약속을 어기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우리 나라 말에서 "믿음성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서도 이 말은 믿을 만 하고, 충실하고, 신실하고, 의지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믿을 만 하신 분이십니다.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이 약속의 말씀에 대해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그 약속이 믿을 만 한 진실된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의롭다"라는 말은 정확하다 공의롭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확하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뭘 하다가도 어 잘못됐네 그러면 그만입니다.
내가 착각을 했어 그게 아니야 미안해 그러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정확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몇 일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상식들 중에 잘못 된 것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을 보면 눈이 나빠진다고 다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텔레비전 본다고 눈 나빠지는 것 아니라고 합니다.
유전이나 영양관계로 나빠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약속을 하시고 실행을 하시는 일은 조금도 오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됐다 미안해 다시 하자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미쁘고 의로우신 그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 모든 죄들을 안심하고 자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3.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은 탕감하여 준다는 말입니다.
죄지은 것이나 빚진 것을 탕감해 주고 허물을 제거해 주고 책임을 해제시켜 주신다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모든 허물들을 제거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죄 문제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용서를 해 주시는 것 보니까 죄라는 것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는가 보구나 라고 생각을 하십니다.

또 간단하게 용서를 받을 길이 있다고 하니까 쉽게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 죄가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사망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아주 지독한 것입니다.
쉽게 용서를 받게 해 주신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쉽게 받지만 용서를 해 주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쉽게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대신 죽게 해 주시면서 우리의 죄값 치르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미쁘시고 의로우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참된 기쁨의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05-02-2024(목) 요한일서 1:8-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를 자백하면(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죄를 자백하면(If we confess our sins)

호모로게오( 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스트롱번호 3670

1. 약속하다.  2. 동의하다. 3. 고백하다.
발음 [ hŏmŏlŏgĕō ]
어원 / 미완료 ὡμολόγουν, 미래 ὁμολο- γήσω, 제1부정과거 ὡμολόγησα, 3674의 어간과 3056에서 유래

말하다(마 7:23, 요 9:22), 시인하다(마 10:32, 딛 1:16, 요일 4:2), 고백하다(행 24:14), 증언하다(딤전 6:12, 히 11:13, 13:15), 자백하다(요일 1:9), 드러나게 말하다(요 12:42), 약속하다(마 14:7).

시인하라 - 나는 죄인입니다.

(예) 독사가 겨울 잠을 자고 나온 후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사람을 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독사가 아니다.
       독을 내 뿜지 않아도 독사로 존재하므로 독사가 분명한 것처럼 내가 죄악 중에 태어난 죄인이므로 갓난 아기도 죄인일 수밖에 없다. |

말하라 - 나는 죄를 지었다

(예) 죄를 지은 후에 입을 다물고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은 것 뿐이다.


* 3674

ὁμοῦ 스트롱번호3674

1. 함께. 2. 동시에
발음 [ hŏmŏu ]


* 3056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미쁘시고(4103)

πιστός, ἡ, όν 스트롱번호4103
1. 믿을 만한.  2. 마 25:21. 3. 고 전1:9
발음 [ pistŏs ]
어원 / 3082에서 유래

충성된(마 24:45, 딤전 1:12, 계 1:5), 충성하는(마 25:21, 계 2:10), 진실한(눅 12:42, 엡 6:21), 미쁜(행 13:34, 고후 1:18, 살후 3:3), 믿는(행 16:1, 고후 6:15, 딤전 4:3), 신실한(엡 1:1, 골 1:9, 히 3:2, 벧전 5:12, 계 22:6). [명] 충신(계 19:11), 충성(고전 4:2), 믿음(요 20:27, 딤전4:12), 신자(행 10:45).

의로우사(1342)  δίκαιος, αία, ον 스트롱번호 1342

1. 올바른.  2. 법대로 사는. 3. 눅 1:6
발음 [ dikaiŏs ]
어원 / 1349에서 유래

의로운(마 1:19), 옳은(마 23:28, 27:19), 무죄한(마 27:24), 마땅한(빌 1:7), 공의로운(살후 1:5), [명] 의로운 자(마 5:45), 의인(마 9:13, 10:41, 벧전 3:12), 공의(요 7:24), 의(골 4:1).



자백한다는 헬라어 동사 호모레고는 "같은(호모)" "말을 한다(레고)"는 두 단어거 합성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같은 말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범죄자가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 분명하게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범죄자가 검사 앞에서 자기가 말한 것을 번복하여 재판정에서 자기가 한 말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를 아뢸 때에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잊어버렸던 죄들과 더불어 생각나는 모든 죄를 말하는 것을 자백한다(호모레고)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용서의 은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면 거룩하신 주님은 모든 죄를 깨끗하에 용서하십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은 죄 많은 인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분이 선지자요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진실한 말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네 말이 참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담긴 용서의 말씀입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여인을 주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기뻐하며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 “와보라 여기 내가 만난 그분 메시야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은 부끄러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 어떤 수모와 멸시와 천대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 마른 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끄러운 마른 손을 회중들 앞에서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마른 손이 펴지며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는 물론이고 손 마른 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손을 든다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더 큰 용기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손 마른 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는 그 용기는 치유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셋째는 변화와 갱신의 은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난 사자와 같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난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에 사람들은 찔림을 받고 그 여인을 떠나갔습니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회개를 넘어서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기폭제가 된 것은 회개였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은혜를 받았을 때 마음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지난 날 지었던 모든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회개하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찾아가 죄의 용서를 구하고 물질적인 손해를 배상해 주었습니다.
부흥회를 마치고 난 다음 날은 평양 시내가 더욱 분주해졌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서로 죄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2,10-11)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고 인정하셨던 믿음의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구약의 가장 뛰어난 믿음의 사람 다윗, 그러나 그도 연약한 인간이었으며 죄의 유혹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홀로 궁에서 지내고 있을 때 다윗의 눈에 아리따운 여인의 아름다운 몸이 들어 왔습니다.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 본 다윗은 욕정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드렸습니다. 다윗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7계명과 제10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늘 죄의 유혹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도 죄의 유혹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기도방을 지나가던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계속 똑 같은 기도가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어거스틴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행위의 범죄만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범죄를 행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돈과 여자라는 말씀을 하신 선배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하면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장 큰 시험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해보니까 그 두 가지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유혹과 시험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훌륭한 신앙의 사람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더군다나 죄가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더욱 큰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의 충복이었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 몰아 죽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임에 틀림없습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모든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였고 살인하며 쾌락의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저는 사울왕의 죄와 다윗왕의 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전히 다윗왕의 죄가 더욱 크다고 여겨집니다.
간음하고 살인하고 행위로서 계명을 명백히 어긴 죄가 다윗의 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울을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오히려 더 명백한 죄를 지은 다윗은 용서하시고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느냐 아니면 죄를 부인하고 회개치 아니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죄를 지적하시며 사무엘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므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 죄를 시인하며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본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숨기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회개하는 자를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00)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서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00)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00)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사람을 위하여 있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독생자를 보내서 죄와 사망에서 나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과 피를 흘리심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님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기에 또한 끝없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죄를 시인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예화의 말씀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던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먼 길에 오는 남루한 거지가 아들인 것을 아시고 달려가 끌어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이미 우리가 지은 모든 죄까지도 용서하시기로 결심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죄인임을 자백하는 것이 필요하며 죄인임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백하는 순간 자기의 모든 좋았던 이미지는 땅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심한 책망과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도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자백하지 못하고 감추고 깊은 고뇌와 아픔을 속으로 삭이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자백하는 것,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시인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이 도우시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나를 감동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자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역사가 회개였다면 그들의 회개를 가능케 한 힘은 성령이셨습니다. 그들이 은혜 가운데 성령을 받고 감동되었을 때 자기들의 죄가 생각났고 아팠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추었던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내주하시고 감동하시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어두운 죄의 마음속에 밝은 빛으로 임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함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죄를 자백하고 난 후에는 엄청난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혜는 한 개인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가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은혜는 용서

무한한 용서를 받습니다.

다윗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다윗이 죄를 시인하고 자백함으로 하나님은 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사울이 용서받지 못한 이유는 그 죄가 더 큰 것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용서받은 자의 기쁨을 아십니까? 용서받은 자의 기쁨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은 죄 많은 인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분이 선지자요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게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진실한 말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네 말이 참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랑이 담긴 용서의 말씀입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여인을 주님은 이미 용서하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기뻐하며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 “와보라 여기 내가 만난 그분 메시야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용서 받은 자의 기쁨은 부끄러움을 이기게 합니다. 그 어떤 수모와 멸시와 천대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인은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도 어렸을 적에는 일반 소년들처럼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궁리 끝에 집에 돌아와서 엉뚱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몰래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가서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 상점으로 달려가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그것이 너무 맛이 있어서 단번에 먹어 치우기는 하였지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밤에 아버지께 찾아가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작은 종이 조각에 몇 줄을 적어서 그 것을 돌돌 말아 가지고 아버지의 침실문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이 밝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자 어쩐지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급히 아버지의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 조각은 없어지고 그 구멍을 통해 방안을 살피니 아버지께서 그 종이 조각을 읽으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때 그는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였고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시는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용서입니다. 무한한 용서는 그를 감동과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입니다.

2.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은혜는 치유와 회복

마가3장에는 손 마른 자를 치유해주시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은 손 마른 자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손 마른 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끄러운 마른 손을 회중들 앞에서 높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마른 손이 펴지며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는 물론이고 손 마른 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손을 든다는 것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지만 더 큰 용기는 안식일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손 마른 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용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드러내는 그 용기는 치유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며 아버지께로 돌아와서 고백합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나이다. 나를 아들이라 생각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써주시옵소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진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금가락지를 그 손에 끼워주셨습니다.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으니 함께 즐거워하자고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귀한 아들의 자리에 앉게 해주었습니다. 아들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다시 아들의 자리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주는 미쁘시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3.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은혜는 변화와 갱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성난 사자와 같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난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에 사람들은 찔림을 받고 그 여인을 떠나갔습니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당부하신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은 여인에게 회개를 넘어서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회개는 갱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입술로만 고백하는 정도의 회개라면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갱신이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회개가 갱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개는 변화이어야 하고 갱신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바람, 새 역사를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 놀라운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회개운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회개가 갱신의 삶으로 변화되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부흥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갱신의 삶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변화하였습니다. 이타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만 고집하지 않고 모두를 위한 것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들의 갱신은 자기를 넘어서서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한사람도 궁핍한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19장에는 회개를 넘어 갱신을 이룬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특히 남의 물건을 토색하며 갈취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데 힘썼습니다. 사람들을 돈으로 보고 형제도 배반하며 민족도 배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눈물로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다면 4배나 값겠노라고 결단했습니다. 착취하므로 축적했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회개를 넘어 갱신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게오입니다.

해비타트운동이라 불리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이 있습니다.
밀러드 풀러는 이 운동을 전세계적으로 이끌고 있는 국제 해비타트 설립자입니다. 그가 20대 백만장자에서 30대 자원봉사자로 일생일대의 변신을 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돈만을 최고로 아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결별선언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새로운 삶의 비전에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단체에 기부하며 무주택자와 극빈자를 위해 집을 짓는 봉사활동에 뛰어듭니다. 지금까지 의약^교육^식량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단체는 많았지만 막대한 비용과 인력 등의 부담으로 집을 짓는 활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운동으로 600여개 도시에서 집을 지었으며 밀러드 풀러는 최근 국내에 발간된 `망치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집짓기까지의 역사와 감동적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돈만 알았던 수전노에서 사회봉사자로의 변화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갱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자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받습니다. 회개는 기적을 시작하는 출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삶의 변화와 갱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새로운 삶으로 이러져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갱신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용서받은 자의 기쁨과 치유와 회복 갱신의 삶이 실현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를 자백해야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회개할 때, 죄를 자백할 때 우리 죄가 씻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씻는 능력은 예수님의 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지, 자백한다고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요한일서 1장 9절만 읽지 말고 7절을 읽어야 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예수의 피가 우리 죄를 씻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9절의 자백은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죄 안 지었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속죄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그 원칙이 레위기 4장의 속죄제사에 나와 있습니다.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레 4:27~28)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죄를 지어야 하고, 다음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지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속죄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한 것은 내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속죄제사를 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 지은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죄인이 아니라면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깨달은 사람은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옵니다.
그리고 염소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안수하면 죄가 염소에게 건너갑니다.
그 뒤에 염소를 죽여서 제사장이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번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이유는, 거기에 우리 죄가 기록되어 있다고 예레미야 17장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


성경에는 피를 발라서 죄의 기록을 지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죄악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6~17)


이처럼 우리가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하고,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백’이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예수님의 피’가 씻습니다.
만일 자백함으로 죄가 씻어진다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자백이라는 것은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사해지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자백한 뒤 그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씻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하면 그는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자백은 죄 사함 받을 자격을 갖추는, 죄 사함 받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 죄를 씻는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나의 어떤 노력으로 죄를 씻지 못합니다.
우리 노력으로 죄를 씻는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죄를 사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계시다가 마지막에 세상 죄를 지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의 말대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못 씻은 피를 믿지 말고 우리 죄를 씻으신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15가지 놀라운 속성: 그 의미와 중요성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와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그분에 대해 참된 것입니다. 제한된 존재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완전히 이해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시며, 말씀과 창조물을 통해 자신에 관해 계시하신 내용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경이로운 창조주께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

하나님은 우리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나 그 누구와도 다릅니다. 그는 독특하고 독특하며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단순한 말로 그분을 묘사하는 것조차도 그분이 누구신지 포착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말로는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알 수 있는 속성을 갖고 계시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15가지 속성 목록을 따랐습니다. 일부는 신학자들이 “비공유적”(하나님만이 소유하신 특성)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일부는 “전달 가능”(하나님과 우리 모두가 소유하지만 오직 그분만이 완벽하게 소유하시는 특성)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15가지 속성과 그 의미 및 중요성입니다.

1.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 그분은 기원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골로새서 1:17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풍부하시도다.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 시편 147:5

하나님이 자존하신다는 사실, 즉 그분은 아무것도 없이 창조되었으며 언제나 영원히 존재하셨다는 사실은 아마도 신자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의 본성을 붙잡는 것은 강물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토저는 하나님의 무한성의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운 속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우리 너머에 계시는 분, 우리의 모든 범주 밖에 존재하는 분, 이름 때문에 무시되지 않으실 분, 우리 이성의 한계 앞에 나타나지 않으실 분, 우리의 호기심 많은 질문에 굴복하지 않으실 분을 인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많은 겸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낮추거나 적어도 우리가 그분을 관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생각함으로써 체면을 세웁니다.”

Christian.com에 실린 기사에서 에이드리언 로저스 박사는 하느님의 자존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성서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약 6800번이나 사용됩니다.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개인적인 언약의 이름이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주 하나님(Lord God)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어원은 '자존함', 즉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나 항상 존재하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 “바로가 나를 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나는 바로 나다(I AM THAT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또는 야훼 는 유대인 서기관들에게 가장 신성한 이름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을 발음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이름을 사용합니다.”


2.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나 주는 변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자손은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말라기 3:6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속성은 창세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합니다. 그의 성격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더 좋아지거나" "더 나빠지지" 않습니다. 그의 계획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놀라운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샘 스톰즈(Sam Storms)는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본성에 대한 좋은 소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이 모든 것이 매우 간단하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확고한 신뢰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변하지 않으실 것이며 실제로 변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으며, 그분의 약속은 난공불락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불변하시므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우리를 사랑에서 끊을 수 없 느니라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므로 천사나 귀신이나 현재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세상에서 갈라놓을 수 없느니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롬 8:35-39 )!”


3. 하나님은 자급자족하십니다 – no needs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느니라.” – 요한복음 5:26

제한된 인간으로서 우리는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엄청난 욕구를 갖고 있으며, 그 결과 죽음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셨습니다. 팀 템플(Tim Temple)이  것처럼 , “하나님은 그 자신의 존재 안에서 완벽하게 완전하십니다.”

Reformation21.org의 블로그 게시물에서 스콧 스웨인은 하나님의 자급자족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무한한 부와 지혜와 선하심과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17:1; 요한  복음 5:26 ;  엡) 3:16 ). 그분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사랑 안에서 이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소유하셨기 때문에(마 11:25-27; 요한 17:24-26 ), 하나님은 "복이 있으신" 혹은 "행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딤전 1:11). ; 6:15).” 

하나님은 자급자족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분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끝없는 선하심과 평화 와 긍휼과 은혜의 샘이 마르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 에베소서 3:20 )


4.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 almight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입의 기운으로 별들의 군대가 이루었느니라.” – 시편 33:6

“당신은 하나님의 신비를 헤아릴 수 있습니까? 전능자의 한계를 조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늘보다 높으니 네가 무엇을 하리요? 그것은 아래 깊은 것보다 더 깊으니 네가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그 크기는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와서 여러분을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열면 누가 그에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그는 속이는 자들을 아신다. 그가 악을 보아도 깨닫지 아니하느냐?” – 욥기 11:7-11

전능함(omnipotent)은 무한한 힘을 갖는다는 뜻입니다(옴니 = 모든 것, 유력 = 강력함). 하나님은 자신의 노력 없이도 자신이 뜻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성과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어떤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 진술에서 “그분의 뜻은 무엇이든”이라는 부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6장 18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론 무어(Ron Moore)는 그의 신앙 서적  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 “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은 하나님이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무엇인가를 계획하시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목적하시면 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분의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어떤 일을 하려고 손을 펴시면 누구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전능함은 두 개의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옴니(Omni)는  "모든 것"을 의미하고  포텐스(potens)는 "강력하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항상 그분의 성품과 일치하며, 그분은 자신이 결정하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 성경은 하나님이 강하고 능하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시편 24:8 ). 그분이 성취하시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창 18:14 ; 예레미야 32:17 , 27; 누가복음 1:37 ). 종종 하나님은 모든 능력과 권위를 소유하신 분으로 묘사하면서 "전능자"라고 불립니다  고린도후서 6:18 ; 요한계시록 1:8 ). 사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에베소서 3:20 )라고 말합니다.  

“그런 능력이 무섭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그분의 무한한 능력에 따라 무엇이든 하실 수 있지만 그분 자신과 일치하는 일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고, 죄를 용납하실 수도 없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구원하실 수도 없습니다.” – 존 맥아더


5.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 그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다


“이전 일, 오래 전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나는 종말을 처음부터, 옛적부터, 앞으로 있을 일을 알게 하느니라. 내가 이르노니 내 뜻이 설 것이라 내가 나의 뜻을 다 이루리라” - 이사야 46:9-10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이는 그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다. 데비 맥다니엘(Debbie McDaniel)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그분은 동시에 어디에나 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자거나 졸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길을 아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지구상에서 그분이 보시고 아시지 않는 곳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Tozer는 하나님의 전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을 완벽하게 아시며 모든 것의 근원이자 저자이시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것을 즉각적으로 그리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든 우주 어디에나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 관한 모든 가능한 지식 항목을 포함하는 충만한 완전함으로 아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모든 일과 내일 겪게 될 모든 일을 그분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묵상할 때, 특히 그분의 다른 속성인 선함과 사랑 에 비추어 묵상할 때 , 매우 심각한 일부터 어리석고 평범한 일까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6. 신은 편재한다 - 그는 항상 어디에나 있다


“내가 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당신의 면전에서 어디로 도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늘 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내가 음부(히브리어: Sheol)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에는 주께서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7-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이 있는 하나님이요 먼데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사람이 은밀한 곳에 숨어서 나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나는 하늘과 땅을 채우지 아니하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예레미야 23:23-24

편재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장소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 장소에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Ligonier.org 웹사이트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는 물질적인 물질과 전혀 다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 “그는 오감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차원과 완전히 구별되는 차원에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충만한 임재는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까요? 아니면 내가 당신 앞에서 어디로 도망해야 합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아침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기자는 시편 137편 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선포합니다 .

이는 외로움과 깊은 슬픔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위로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시다고 토저는 썼습니다.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지식은 우리 삶의 험난한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우리 영혼에 평화를 말해줍니다.”


7.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 그분은 완전하고 변함없는 지혜로 가득하십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측량할 수 없도다!” – 로마서 11:33

지혜는 단순한 머리 지식과 지능 그 이상입니다.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실을 이해하고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기술과 능력과 함께 사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만큼 지혜롭게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한결같이 지혜로우시며, 완벽하게 지혜로우십니다. Tozer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무엇보다도 지혜는 완벽한 목적을 고안하고 가장 완벽한 수단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능력입니다. 처음부터 끝이 보이기 때문에 추측하거나 추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혜는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고 각각이 모든 것과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고, 따라서 예정된 목표를 향해 흠잡을 데 없는 정확성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런 지혜를 볼 때, 우리의 제한되고 유한한 지혜가 하나님의 무한하고 무한한 지혜와 얼마나 비교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사람이 깊이 생각하는 데 얼마나 위안이 되고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이보다 더 지혜로우실 수 없다는 사실은 그분이 항상 우리 삶에서 가장 지혜로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을 위해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어떤 계획도 그분이 이미 세우시고 우리를 위해 실행하고 계신 계획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하신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8.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진실하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느니라” - 신명기 7:9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디모데후서 2:13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분리되고 고립된 특성이 아니라 그분의 완전한 존재 전체의 상호 연결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불변성, 즉 그분이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떠나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므로 항상 신실하시다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이러한 속성들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결코 신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AW Pink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그분의 약속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당신의 백성과의 모든 관계에서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사람은 안전하게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분을 헛되이 신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진리가 성경의 거의 모든 곳에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백성은 신실함이 신성한 성품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고 변함없이 신실하시다는 사실은 그분이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시며, 하기로 작정한 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며, 결코 마음을 바꾸시거나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사랑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행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바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계획이 얼마나 신실한지 항상 이해하거나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과 유한한 생각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버림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죽도록 허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순간에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기억함으로써 위로 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시고 선하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지혜로우신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느니라. 이제 나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온전히 알려졌던 것처럼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9. 하나님은 선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친절하시며 선의가 가득하신 분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 시편 34:8

토저(Tozer)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을 친절하고 온화하며 자비로우며 사람들을 향하여 선한 뜻이 가득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마음이 부드럽고 동정심이 빠르며, 모든 도덕적 존재에 대한 그분의 확고한 태도는 개방적이고 솔직하며 우호적입니다. 그분은 본성상 축복을 베푸시는 경향이 있으시며 그분의 백성의 행복을 거룩한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불변성과 무한한 본성 안에 존재하므로, 하나님은 변함없이 항상 선하십니다. 그분의 자비는 그분의 선하심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선하심에서 우리는 그분이 그분의 백성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선하시려는 목적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Ligonier.com ).

하나님의 다른 완전한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일이 잘 진행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증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삶이 급락할 때, 그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시편 기자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시편 34편 )라고 썼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라고 권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Desiring God의 작가인 앤드류 윌슨(Andrew Wilson)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주제에 관한 자신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단언합니다. 19절에서 그는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주목할 만한 선언을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더라도 선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핵심은 다음 문구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원하시느니라.” 악한 일이 일어나도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정죄를 받지 아니하리라”(34:22).


10.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 그분은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무한히, 불변적으로 옳고 완전하시다


"반석이시여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길이 다 의로우시도다 신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 듀엣 32:4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가 단순히 공정한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분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의롭고 선한 일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라도, 그분이 악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지옥으로 선고하시는 것 역시 옳고 선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은, 그렇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우리 각자에게는 그리스도가 없듯이!). 토저는 우리가 기독교의 칭의와 구원 교리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음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이에 답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공의는 침해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실 때 만족됩니다.”

하나님의 다른 속성인 선하심, 자비, 사랑 , 은혜에 비추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처벌하기에는 너무 친절하다고 잘못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무한하고 변함없는 정의의 현실을 무디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죄에 대한 정의를 내리시거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에서의 영원한 진노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수많은 인류 중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들 중 일부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나머지는 무엇을 얻나요? 그들은 정의를 얻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비를 받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정의를 얻습니다. 누구도 불의를 당하지 않습니다.” - RC Sproul


11.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자비로우시며 친절하시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느니라.” 그러므로 원하는 사람이나 실행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 로마서 9:15-16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의 공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무한히, 변함없이, 변함없이 자비로우십니다. 즉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친절하십니다. 그는 지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정심이 많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에게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Spurgeon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실로 모든 참된 자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은 과분한 자비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한 자비는 단지 정의를 잘못 부르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자비를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반역자가 즉시 영원한 불에 던져질 운명에 처해졌다면, 그는 마땅히 그 운명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노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오직 주권적인 사랑 만이 원인을 찾았을 것입니다. 죄인 자신에게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자비가 없다면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순종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 .” 그러나 자비 때문에 우리는 마땅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토저는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 이렇게 썼습니다. “심판은 도덕적 불평등에 맞서는 하나님의 정의인 것처럼, 자비는 인간의 고통과 죄책에 맞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세상에 죄가 없고, 고통과 눈물이 없다면,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창조된 우주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분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비를 찬양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비참함과 죄입니다.”


12.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 하나님은 무한히 죄인을 용서하시는 경향이 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 시편 145:8

자비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저주)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은혜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자비는 인간의 비참함과 죄악에 맞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듯이, 은혜는 인간의 빚과 허물을 향한 그분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공로를 부여하시고 이전에 있었던 곳에는 빚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그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가 영원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가 얻거나 잃지 않는 것입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 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 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 그분의 은혜는 또한 주권적입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고”( 출 33:19 ).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신학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일반 은혜와 구원의 은혜를 구별합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작가 패트릭 마비로그(Patrick Mabilog)는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분의 일반은총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든 사람이 생명과 공급, 풍요의 축복을 누리는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은 '그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느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류가 일반은총의 혜택을 받는 반면, 그리스도를 믿고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13.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무한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 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요한일서 4:7-8

사랑. RC Sproul은 자신의 저서 God's Love 에서 “현실을 설명하기 전에 비틀거리는”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에 비추어 볼 때에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주권적이며 불변하고 무한합니다.

Tozer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유로우신 하나님의 이상하고 아름다운 기이함은 그분이 자신의 마음을 감정적으로 인간과 동일시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급자족하시므로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며 그것을 얻으실 때까지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유롭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영원히 묶어 두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활동적이어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끄십니다.
그의 사랑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는 어떤 막연한 의미에서 인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합니다. 
그분은 당신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14.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 그분은 무한하고 변함없이 완전하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이시로다” – 요한계시록 4:8

거룩하다는 말은 신성하다, 구별되다, 존경받다, 신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우리 하나님의 경이로운 거룩함을 묘사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서 거룩함은 그분을 가장 독특하게 묘사하는 것이며 실제로는 그분의 다른 모든 속성의 요약입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그분의 분리됨, 그분의 다름, 그분이 다른 어떤 존재와도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완전하고 무한한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거룩함은 다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끝없이, 항상 완전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기준도 완벽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8
 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토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요구하는 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관심은 우주의 도덕적 건강, 즉 거룩함이므로, 이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그분의 영원한 불쾌하심 아래 있습니다.
그분의 창조물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모든 것을 파괴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죄악을 진압하고 돌이킬 수 없는 도덕적 붕괴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어나실 때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세계 역사상 모든 진노의 심판은 보존을 위한 거룩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진노 , 피조물의 건강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타락하고 파괴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쏟아지는 것을 결코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죄값이 지불되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여겨졌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함을 보십니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눈부시게 순결하고 완전하며 거룩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랄 수 있는 이유입니다.

15. 하나님은 영광스럽습니다 – 그분은 무한히 아름답고 위대하십니다


“그분의 광채는 햇빛과 같습니다. 그분의 손에는 광선이 비치고 그분의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 하박국 3:4

존 파이퍼(John Piper)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다양한 완전성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위대함입니다. 무한한 아름다움, 그리고 나는 그분의 성품과 가치와 속성의 표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완전함과 위대함은 보이는 대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양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Ligonier.org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 눈부신 빛의 이미지가 종종 우리 마음에 떠오릅니다. 성경은 종종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밝게 빛나는 빛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히 적절합니다 .”

물론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다른 속성들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변함없이 영광스럽습니다. 그의 광채와 아름다움은 그의 존재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나옵니다. 이사야 43장 7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재와 목적은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다른 것에서 영광을 찾으려 하거나, 자신을 영광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에게 시선을 돌릴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

해리 할로(Harry Harlow)의 원숭이 애착 실험, 모성애 관련 연구, 모유 수유와 모아 애착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두 개의 인형 중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철사로 만든 인형 원숭이의 가슴에 우유 병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엄마 원숭이를 만들어 우유를 빨아먹을 수 있도록 가슴에 우유 병을 넣어 두었다. 그리고 나서 아기 원숭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첫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아기 원숭이들이 먹었다. 이러한 실험에서 보듯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는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는 것이다. 온유한 마음은 팔 복중에 하나이다. 온유함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면 경직된 관계도 부드러워 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사랑이 충만해지며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5월은 왜 ‘가정의 달’이 됐을까?

  • 5월, 따뜻해진 날씨와 함께 가정의 달이 돌아왔다. 가정의 달은 ‘세계 가정의 날’의 영향을 받아 제정됐다. 세계 가정의 날은 1989년 국제연합(UN)이 가정의 역할과 책임의 중요성에 대해 정부와 민간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날로, 지난 1994년을 ‘세계 가정의 해’로 설정하고 매년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지정했다.

    우리나라 또한 지난 2004년 2월 ‘건강가정기본법’에 따라 세계 가정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정부는 매년 이를 기념하는 기념식을 진행하며, 보건복지부와 한국건강가족실천운동본부를 비롯한 관련 민간단체도 공동으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영향력을 미치고,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곳으로 손꼽히는 ‘가정’.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답게, 5월은 특히나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은 기념일로 가득하다.


  • ◇ 5일 어린이날

    5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어린이날’일 것이다. 주인공인 어린이들은 물론, 달콤한 휴일을 맞은 성인들과 부모에게도 어린이날은 마음이 들뜨는 날이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고, 어린이에 대한 애호 사상을 앙양하기 위해 지정한 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어린이 인권 운동가 소파 방정환이 1922년 5월 제정했다.

    어린이날은 5월 중 가장 많은 행사와 축제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온 가족이 모여 웃고 떠들 수 있는 축제가 한 달 내내 가득하다.


  • ◇ 8일 어버이날

    떠들썩한 어린이날을 보내자마자 다가오는 것, 바로 어버이날이다. 어버이날은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고,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는 전통적 미덕을 기리는 날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1956년부터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정해 경로효친의 행사를 진행해왔다. 행사 과정에서 ‘아버지의 날’이 거론되면서 1973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어버이날’로 변경 지정됐다.

    어버이날에는 가정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전국 지자체에서는 경로주간 등 어버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어 지역의 어른들께 공경을 표하기도 한다.


  • ◇ 15일 스승의 날

    세계 가정의 날과 같은 날짜에 기념하는 스승의 날은 교권존중과 스승 공경의 사회적 풍토를 조성해 교원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지정됐다, 1958년 5월 8일,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적십자의 날을 맞아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한 데서 시작됐으며, 이후 1963년 5월 24일 ‘은사의 날’과 1964년 5월 26일 ‘스승의 날’을 거쳐 왔다.

    5월 15일은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다. 세종대왕은 즉위 34년간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특히, 한글을 창제하며 교육적으로 큰 업적을 세웠다. 이에 지난 1965년, 이러한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기억하기 위해 스승의 날을 5월 15일로 변경했다.

    스승의 날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세종대왕처럼, 이 땅의 교사들이 훌륭한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자리 잡을 수 있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 ◇ 21일 부부의 날

    부부의 날은 비교적 최근에 지정된 날이다. 지난 2003년,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제출한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청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결의되면서 2007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기념하는 날인 부부의 날은 핵가족시대 가정의 핵심인 ‘부부’가 화목해야 청소년 문제, 고령화 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아 매년 5월 21일을 부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도입 이야기)

5월의 첫 날을 맞이하는 새벽에
독일이 낳은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어진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가리켜 이성의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 합니다.
그 지혜 중에 가장 중요한 지혜는 새 출발의 지혜입니다.
시작이 가장 중요하듯이 첫발 짝을 내딛는 마음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노자는 "천리 길도 발 밑 한 발짝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길을 잘못 들면 아무리 잘 뛰어도 소용이 없다."는 격언도 있습니다.

하루 계획은 아침에 있고,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있고, 인생이 계획은 청소년 시절에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05-01-2024(수) 요한일서 1:5-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빛(포스.  phōs)  φῶς, φωτός, τό 스트롱번호  5457

1. 빛.  2. 마 17:2. 3. 빛을 내는 물건
발음 [ phōs ]
어원 / φάω ‘반짝이다’에서 유래

빛(마 4:16, 눅 8:16, 딤전 6:16), 불(막 14: 54), 불빛(눅 22:56), 등불(요 5:35, 행 16:29), 광채 (행 12:7), 광명(고후 11:14)

어둠(스코토스. skŏtŏs)  σκότ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4655

1. 어둠.  2. 알려지지 않은 상태를 나타냄.  3. 종교적 도덕적 암흑
발음 [ skŏtŏs ]
어원  / 4639의 어간에서 유래

흑암(마 4:16, 골 1:13, 유 1:13), 어둠(행 26:18, 벧후 2:17, 마 6:23, 고후 4:6, 요일 1:6).

* 4639.  σκιά, ᾶς, ἡ 스트롱번호 4639

1. 그림자.  2. 예표
발음 [ skia ]

1. 그림자, 그늘, 행 5:15.
2. 그림자, 예표, 전조, 히 8:5.

그늘(마 4:16, 막 4:32, 눅 1:79), 그림자(행 5:15, 골 2:17, 히 10:1).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분이 아니신지를 알려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부정확하기 마련입니다(욥 42:7).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된다는 말도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단순화된 생각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실패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거짓 신들을 세우고, 쫓으며, 숭배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출 20:3-5).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 관하여 스스로 드러내기로 하신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혹은 특징 중 한 가지는 ‘빛’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에 관한 정보를 스스로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사 60:19; 약 1:17).

이사야 60:19
다시는 가 네 이 되지 아니하며 도 네게 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에 관한 지식을 계시해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히 4:1).
창조, 성경 그리고 말씀이 되신 육신(예수 그리스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의 일부이며(창 1:1; 시 24:1),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들보다 위에 있으며 그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창 1:26-28). 하나님의 창조는 타락으로 인해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창 3:17-18; 롬 1:19-20). 하나님의 창조하심의 광대함, 복잡함, 아름다움 그리고 질서를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몇 가지를 살펴보는 것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이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로힘 (Elohim) - 강한 자, 신성 한 자 (창 1:1)
아도나이 (Adonai) - 주(主),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인을 가리킴 (출 4:10, 13)
엘 엘리온 (El Elyon) - 지극히 높으신 자, 가장 강한 자 (창 14:20)
엘 로이 (El Roi) - 만물을 감찰하는 자 (창 16:13)
엘 샤다이 (El Shaddai) - 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엘 올람 (El Olam) - 영원하신 하나님 (사 40:28)
야훼 (Yahweh) - 주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출 3:13, 14)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으시고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불멸하시며 무한하십니다(신 33:27; 시 90:2; 딤전 1:17).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말 3:6; 민 23:19; 시 102:26, 27). 하나님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과 그분의 존재에 있어 하나님과 대등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분은 완벽하십니다(삼하 7:22; 시 86:8; 사 40:25; 마 5:48). 하나님은 불가해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누군가가 그분에 대해 완전히 알아내거나 그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사 40:28; 시 145:3; 롬 11:33, 34).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신 32:4; 시 18:30).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하심은 그분의 성품과 항상 일치합니다(계 19:6; 렘 32:17, 27). 하나님이 편재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의미이지 하나님이 곧 우주 만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시 139:7-13; 렘 23:23). 하나님은 전지하시기에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고 심지어 매 순간 우리가 하는 생각까지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분의 판단은 언제나 공정합니다(시 139:1-5; 잠 5:21).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으며 그분만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필요와 갈망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와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신 6:4).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우리의 잘못을 간과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정의로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출 9:27; 마 27:45-46; 롬 3:21-26).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최고의 자리에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힘을 합쳐도 그분의 목적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시 93:1; 95:3; 렘 23:20).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요 1:18; 4:24).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일체 속에 삼위(세 위격)이시고 삼위는 같은 본질이며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분은 부패하시지 않으시며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시 117:2; 삼상 15:29).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도덕적인 부패에서 분리되셨으며 그것을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보시며 그것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로 묘사됩니다(사 6:3; 합 1:13; 출 3:2, 4-5; 히 12:29).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그분의 은혜는 선하심, 친절하심, 인자하심과 그분의 사랑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얼굴로부터 우리를 막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출 34:6; 시 31:19; 벧전 1:3; 요 3:16, 17:3).

하나님은 무한하신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질문에 충분히 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온 마음을 다해 계속 하나님을 찾기를 기원합니다(렘 29:13).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앙겔리아'(*)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된 것으로 2, 3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이 선포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 소식에 대해 '저에게서 듣고'라고 표현함으로 생명의 말씀이 역사적인 예수의 생과 가르침 가운데 들려진 복음임을 강조한다(Smalley).

이 소식의 내용이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빛'은 진리와 의로움울 상징하는 것으로(시 27:1; 36:9; 119:130; 사 5:20; 미 7:8b; 말 4:2).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라(요일 4:8)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낸다.
요한은 자주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서(요 1:4; 8:12; 9:5; 12:35, 36) 하나님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생활, 즉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덕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6,8,10절; 2:4,6,9;눅16:8; 요 8:12; 엡 5:8-14, Houlden, Wilder, Barker).


시편 76:4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주는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요한일서 1:5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잠언 4장 18절에서는 의를 “돋는 햇살”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늘에서 빛나는 “순전하고 흠 없는” 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빛을 착한 행실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6)

하나님이 빛이라는 말씀은 어둠과 자연스럽게 대조를 이룹니다.
빛이 의와 선을 말한다면, 어둠은 악과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불빛 하나가 아니라 빛 자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숨김이 없으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죄도 없으시며, 죄악도 없으시며, 불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들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벧후 1:4).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아들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따른다”는 것은 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후 3:18 참조).

하나님은 빛이시며 믿는 자들은 그 빛을 세상으로 반사하여 어둠에 갇혀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밝은 곳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믿음의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하나님은 물리적인 빛의 창조자이시며 또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며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의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어둠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사 9:2; 합 2:14; 요 1:9).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드러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요 3:2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요 1:9).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행 26:18).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요한일서 1:6에서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라고 말합니다.
또 5절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불빛 하나가 아니라 빛 자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빛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요일 4:8).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숨김이 없으시며, 온전히 거룩하시고, 어떤 죄도 없으시며, 죄악도 없으시며, 불의도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있으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며”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벧후 1:4).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의 아들도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2).
“따른다”는 것은 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후 3:18 참조).

하나님은 빛이시며 믿는 자들에게 그분의 빛을 비추어 그들이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하나님은 물리적인 빛의 창조자이시며 또 우리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빛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며 그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이해하며, 의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어둠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둠에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죄의 어둠에 빠져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을 쫓아내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사 9:2; 합 2:14; 요 1:9).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을 드러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빛은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것입니다 (요 3:2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요 1:9).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신 우리는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그분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증거할 때 우리의 목적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예수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행 26:18).





나타내신바 된지라(1:2)
-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나타나게 하시고 보여주심으로 알게 하신다."

파네로오(phanĕrŏō) φανερόω 스트롱번호 5319

1. 나타나다.  2. 알게 하다. 3. 보여주다
발음 [ phanĕrŏō ]
어원 / 미래 φανερώσω, 제1부정과거 ἐφα- νέρωσα, 완료 πεφανέρωκα, 완료수동태 πε φανέρω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φανερώθην, 미래수동태 φανερωθή- σομαι, 5318에서 유래

롬 1:19, 고전 4:5, 고후 2:14, 엡 5:13, 딤전 3:16, 벧전 5:4.

로마서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후서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에베소서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이니라.

디모데전서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을 얻으리라.


* 드러내다(막 4:22), 나타나다(막 16:12, 요 21:14, 엡 5:13), 나타내다(요 2:11, 고전 4:5, 요일 1:2), 보이다(롬 1:19, 계 3:18), 알려지다(고후 5:11).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의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 상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3708), '증거하고'(3140), '전하노니'(518)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 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보았고'(3708) 호라오(hŏraō )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증거하고'(3140) 마투레오(martürĕō)  μαρτυρέω 스트롱번호 3140

1. 증언하다.  2. 입증하다.  3. 유리하게 증언하다
발음 [ martürĕō ]
어원 / 미완료 ἐμαρτύρουν, 미래 μαρτυ- 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ύρησα, 완료 μεμαρτύρηκα, 수동태: 미완료 ἐμα- ρτυρούμην, 완료 μεμαρτύρη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υρήθην, 3144에서 유래
증명하다(마 23:31), 증언하다(눅 4:22, 요일 1:2), 경계하다(살전 2:12), 칭찬하다(행 10:22).


'전하노니'(518) 아팡겔로(apanggĕllō)  ἀπαγγέλλω 스트롱번호 518

1. 보고하다.  2. 마 2:8.  3. 마28:11
발음 [ apanggĕllō ]
어원  / 미완료 ἀπήγγελλον, 미래 ἀπαγ- γελῶ, 제1부정과거 ἀπηγγέλην,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ήγγειλα, 575와 32의 어간에서 유래

고하다(마 2:8, 막 6:30, 행 23:16), 알게 하다(마 12:18, 28:8), 이르다(눅 8:36, 9:36, 요 20:18), 전하다(행 12:17, 15:27, 26:20, 요일 1:3), 전파하다(고전 14:25), 선포하다(히 2:12), 말하다(행 11:13), 할 말(행 23:16,17).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성공적인 삶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중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사는 길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04-30-2024(화)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요한일서는 1장부터 5장까지 구성된 매우 짧은 내용입니다(105궞ㄹ).
그렇지만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장 빠른 시간에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한번씩 요한일서 전체를 정독(精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묵상을 위한 주제가 되는 말씀을 집중적으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묵상을 위한 주제는 "생명의 말씀(The Word of life)"입니다.

들은바(191) 아쿠오(akŏuō)  ἀκούω 스트롱번호 191

1. 듣다. 2. 마 10:14
발음 [ akŏuō ]

듣다(마 2:3, 눅 4:28). 들리다(계 12:10).

'보았고'(3708) 호라오(hŏraō )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발음 [ hŏraō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 보다(블래포.  blĕpō) βλέπω 스트롱번호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발음 [ blĕpō ]

[기본형] 미래 βλέψω, 제1부정과거 ἔβλεψω
관련 성경
보다(마 5:28, 눅 6:41, 요 1:29), 보게 되다 (마 12:22), 뵙다(마 18:10), 주의하다(마 24:4, 막 8:15, 눅 21:18), 삼가다(막 4:24, 눅 8:18), 보이다(막 8:23), 조심하다(막 13:9, 고전 8:9), 돌아보다(눅 9:62), (눈이)밝아지다(요 9:7).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러 개가 있다.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 라는 '옵타노마이'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라는 '에이도'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가 있다.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데아오마이'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을 가진  '블레포'가 있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You are already clean because of the word I have spoken to you.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요 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Come," he replied, "and you will see." So they went and saw where he was staying, and spent that day with him. It was about the tenth hour.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가 된다(갈 2:20).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인 것이다(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Whoever believes in the Son has eternal life, but whoever rejects the Son will not see life, for God's wrath remains on him.



* 자세히 보고(2300) 데아오마이( thĕaŏmai)  θεάομαι 스트롱번호 2300

1. 보다.  2. 마 11:7
발음 [ thĕaŏmai ]

보이다(마 6:1, 막 16:11), 보다(마 11:7, 눅 5 27, 요일 1:11), 쳐다보다(행 1:11).



* 만진바라(5584) 프셀라파오(psēlaphaō) ψηλαφάω 스트롱번호 5584

1. 만져보다.  2. 다치다. 3. 손을 대다
발음 [ psēlapha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ψηλάφησα, 5567의 어간에서 유래

만져보다, 다치다, 손을 대다, 더듬다, 눅 24:39, 행 17:27, 히 12:18.

만져보다(눅24:39), 더듬다(행17:27), 만지다(히12:18, 요일1:1).






'증거하고'(3140) 마투레오(martürĕō)  μαρτυρέω 스트롱번호 3140

1. 증언하다.  2. 입증하다.  3. 유리하게 증언하다
발음 [ martürĕō ]
어원 / 미완료 ἐμαρτύρουν, 미래 μαρτυ- 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ύρησα, 완료 μεμαρτύρηκα, 수동태: 미완료 ἐμα- ρτυρούμην, 완료 μεμαρτύρημαι, 제1부정과거 ἐμαρτυρήθην, 3144에서 유래
증명하다(마 23:31), 증언하다(눅 4:22, 요일 1:2), 경계하다(살전 2:12), 칭찬하다(행 10:22).


'전하노니'(518) 아팡겔로(apanggĕllō)  ἀπαγγέλλω 스트롱번호 518

1. 보고하다.  2. 마 2:8.  3. 마28:11
발음 [ apanggĕllō ]
어원  / 미완료 ἀπήγγελλον, 미래 ἀπαγ- γελῶ, 제1부정과거 ἀπηγγέλην, 제2부정과거수동태 ἀπήγγειλα, 575와 32의 어간에서 유래

고하다(마 2:8, 막 6:30, 행 23:16), 알게 하다(마 12:18, 28:8), 이르다(눅 8:36, 9:36, 요 20:18), 전하다(행 12:17, 15:27, 26:20, 요일 1:3), 전파하다(고전 14:25), 선포하다(히 2:12), 말하다(행 11:13), 할 말(행 23:16,17).



생명의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투 로구 테스 조에스(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라고 합니다.


로고스 /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조에 /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죽음(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은 만들어졌고 사람은 그 세상에서 내가 태어난 날부터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만 세상이라는 공간과 시간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제한된 시간과 공간안에만 머물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생명의 말씀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므로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만 머물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초대장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에 이디오피아 황제가 초청을 받아 방문하였을 때 당시 대통령이 주관하는 영빈관 만찬회에 초청장을 가지고 온 관계자를 통하여 초청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청장의 내용에는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한 예복과 시간과 장소 그리고 앉아야 할 좌석 번호가 분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의 대통령이 초청을 할 때도 이와 같은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어떤 절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절차가 무엇일까요?
초청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청장은 그 나라의 주인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리를 위임받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송된 초청장입니다.

우리들을 초청하신 그 분을 "생명의 말씀" 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1:2)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어떻게 생명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까?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을 갖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

요한일서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의 613개의 조항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

이러한 사랑의 시작을 요한일서에서는 먼저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구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고 깨우치셨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확신하는 복된 하루 생활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04-29-2024(월) 요한일서 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태초(太初. In the beginning)(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우리 말에서 '태초(太初)"라는 단어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으로 "시간의 시작" 즉 "시초(始初)"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태초(太初. In the beginning)' 라는 단어가 사용된 세 개의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하늘(天)과 땅(地)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형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간(時間)을 만드셨습니다(太初, 始初).
하나님께서 공간(空間)을 만드셨습니다(天地).

둘째는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이 있기 전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하는 영원(永遠)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영원자(永遠自)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셋째는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때 사용된 '태초'는 만물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만드셨으며 그 말씀이 곧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나타내신 것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들에게 시간과 공간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한 삶을 얻게 될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승혁목사는 1949년 10월 16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그 날까지 나라는 존재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과 공간속에 살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시간과 공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다고 합니다.
만일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서 머문 그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내가 태어나서 죽는 시간까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신약 성경 요한일서의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 요한일서의 말씀을 읽으시고 매일의 주제가 되는 묵상의 주제가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소개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말씀'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며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존재하려는 목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태어난 후에 이 세상이 먼저 있었으며 그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사상 또는 신앙을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 또는 "영원성(永遠性. eternity)"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그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의 시작보다 먼저 존재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합니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구약에서는 "말씀" 즉 "다바르(dâbâr. דָּבָר)" 라고 하며 신약에서는 "로고스( lŏgŏs. λόγος)"라고 합니다.

로고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요 1:14).

"말씀이(로고스) 육신이(사르크스)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스케노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고스( lŏgŏs. λόγος)"는 우주의 근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다바르(dâbâr. דָּבָר)" דָּבָר 스트롱번호 1697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언어(창 11:1, 시 19:3, 잠 29:20), 말씀(창 15:1, 민 11:24), 일(창18:14, 출18:18), 말(창24:52, 출35:1, 신4:2), 명령(창44:2, 삼상15:11,13), 물건(출22:9), 대답(잠27:11), 사건(민25:18, 신19:15), 계명(신4:13), 규례(신15:2), 판결(신17:11), 뜻(신17:10), 직무(신24:5), 까닭(수5:4, 왕상9:15), 의견(삿20:7), 염려(삼상10:2),구변(삼상16:18), 이유(삼상17:29), 소식(삼하15:28), 식양(왕상6:38), 소문(왕상10:6),행위(왕상10:6, 16:20), 사적(事蹟)(왕상11:41,14:29), 행적(왕상14:19, 대하12:15), 지략(志略)(왕상14:29, 16:14), 독(왕하4:41), 불의(왕하17:9), 양(왕하25:30), 유언(대상23:27), 반(대상27:1), 글(대상29:29), 소행(느5:9), 생각(겔38:10), 한 마디(렘38:14), 조서(에1:19), 일기(에2:23), 소리(욥26:14, 시22:1), 용맹(욥41:12), 병(病)(시41:8), 목적(시64:5), 영광(시79:9), 표적(시105:27), 노래(시137:3),사물의 이치(전8:1), 불행(전8:5), 예언(렘28:6), 편지(렘29:1), 영(단9:25), 말미암다(창20:11, 신4:21), 조금(렘38:5), [동] 응하다 (겔12:23), 말씀하다(말1:1), 대하다(출8:12), 대답하다(민20:8, 삼하24:13), 이르다(창41:28, 왕상18:31), 상종하다(삿18:28), 상심하다(삼하13:33), 청하다(삼하14:15), 구하다(삼하14:22), 모의하다(왕상1:7), 허락하다(대하1:9), 무엇이든지(삿19:19), 구별하다(느12:47), 자세히(삼상3:18), 어찌(삼상11:12).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로고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말(마 5:37, 눅 1:20, 행 2:22), 말씀(마 8:8, 막 4:15, 행 6:2, 11:19, 14:25, 살전 1:6), 소리(눅 3:4), 소문(눅 7:17, 행 11:22), 이야기(눅24:17), 글(행 1:1), 언변(고전 1:5), 모양(골 2: 23), 일(행 15:6, 18:15, 19:40), 고발(행 19: 38), 전도(골 4:3), 결산(마 18:23, 25:19), 전파(막 1: 45), 말씀(막 2:2, 요 2:22, 행 20:35), 직고(벧전 4:5), 예언(벧후 1:19), 이유(마 5:32, 벧전 3:15).

보다 먼저 선재하는 "말씀(로고스)"을 말합니다.


우리 말에서 ‘태초’(太初)라는 단어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만물이 시작하는 처음으로 시간적으로 처음 시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시작을 알려주며 동시에 시작을 할 수 있는 "말씀" 즉 "로고스"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절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의 '태초'는 "영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 또는 "로고스의 영원성(永遠性)"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로고스,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존재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태어난 후에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우주만물도 우연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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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첫째 편지

요한의 첫째 편지(공동번역), 요한의 첫째 서간(천주교 성경), 요한 1서(표준새번역한글개역판)
첫 번째 요한서신이며, 네 번째 공동서신이다.
전통적으로 요한의 복음서와 나머지 요한 서신들과 함께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본 서신은 에페소에서 서기 95-110년경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
예수가 "육으로"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졌으며, 기독교인들이 참된 교사를 분별하는 방법으로 윤리, 성육신의 인정,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1]

내용

본 서신의 주제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동행하는 것이다.[2][3]
저자는 독자들이 하느님과의 친교가 참된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험을 기술하며, 영적 거듭남의 증거가 삶속에서 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4]
또한 본 서는 악으로 가득차 사탄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세상"과,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구분된 "하느님의 자녀"를 구분하고 있다.[5]

개괄

  • 1장 : 머리말 : 생명의 말씀, 빛 속에서 살아감 (2장으로 이어짐.)
  • 2장 : 빛 속에서 살아감, 사랑의 계명 준수, 그리스도인과 세상, 세상의 정의, 의로움의 실천 (3장으로 이어짐.)
  • 3장 : 의로움의 실천, 사랑의 실천
  • 4장 : 영의 식별, 사랑과 믿음
  • 5장 : 사랑의 뿌리인 믿음, 삼위일체의 정의, 영생의 정의와 구원의 영원한 보장 맺음말 : 영원한 생명

스타일

본 서신은 다른 서신들과는 다르게, 서신서 서두부와 종결부가 포함되어있지 않다.[6]
또한 본 서신은 문장구조의 다양성 없이 아주 간단한 스타일로 작성되었으며,[6]
접속사를 자주 생략(asyndeton)하였다.[7]
생각이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바오로 서신과는 다르게, 요한의 생각은 고리모양으로 움직이며 천천히 전개된다.[5]
이는 히브리 시가와 비슷하나, 대구의 두 번째 구절이 첫번째와 같은 의미를 갖는 히브리 시가와는 달리 본 서신에서는 첫 번째 구절에 살을 붙여가며 여러번 반복하여 재현부를 구성해나간다.[8]
정리하자면, 본 서신은 종교적 권고(paraenetic)의 스타일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권고는 "개인적인 간청, 옳고 그른것/참과 거짓의 대조, 수사적 질문의 사용" 등으로 대표된다.[6]

일부 학자들은 본 서신이 전통적인 2행 연구(parallel couplets) 선집에 대한 요한의 주석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에른스트 폰 돕쉬츠(Ernst von Dobschütz)와 루돌프 불트만이 처음으로 주장한 이 이론은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아모스 윌더(Amos Wilder)는 "최소한, 본 서신에서 시적 구조나 논리 구조에서 저자의 것과 구분되는 구절들이 꽤 많이, 종종 이어져서 나온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9]

저작성

본 서신의 저작성은 전통적으로 노년기의 사도 요한에 의해 에페소에서 쓰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10] 본 서신의 내용, 언어, 그리고 논리 전개 방식은 요한복음, 요한 2서, 요한 3서와 상당한 유사점이 있는데, 세 서신을 동일한 저자가 작성했다는 증거가 된다.[1] 19세기 말의 성서학자 에른스트 드윗 버튼(Ernst DeWitt Burton)은 요한 1서와 요한복음이 같은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데에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을 수 없다고 기술했고,[11] 아모스 윌더(Amos Wilder)는 이에 더해 "초기 기독교 전통과 현대 학자들의 대다수가 이 저작들의 저자가, 비록 사도 요한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같은 사람이라는데 동의해왔다"고 말했다.[2] 이와 같은 주류 시각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에 의해 대표되는데, 그는 "사랑을 받던" 사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요한 1서를 두고 "가장 순수한 복음"이라고 칭했다.[12]

그러나 다른 현대 신학자들은 본 서신의 이와 같은 위치에 도전하고 있다. 비록 세 서신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에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하인리히 율리우스 홀츠만(Heinrich Julius Holtzmann)과 C. H. 다드와 같은 학자들은 본 서신과 요한복음이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2] 이와 같은 시각에는 최소 두가지 요지가 있다. 첫째는 본 서신에서 문장의 서두에서 종종 지시 대명사를 사용한 뒤, 접속사나 불변화사(particle) 후에 앞에서 사용한 지시대명사의 정의나 설명문을 배치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스킬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6] 둘째로는, 본 서신의 저자가 "복음으로 알려지지 않은것들에 대해서 다양한 수사적 표현으로 조건문을 사용"한다는 것이다.[13]

목적


네번째 복음서는 예수가 아버지에 의해 보내진 창세 이전부터 존재했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요한 공동체 외부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도전받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요한 1,2,3서는 "요한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기술"하고 있다.[14]

저자는 본 서신을 청자들로 하여금 기쁨이 "충만"(1:4)하고, "죄를 범하지 않"고(2:1), "서로 사랑해야" 하며(3:11), "하느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음(5:13)을 알게 하기 위해 본 서신을 썼다. 따라서 우리는 본 서신을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일반적인 목적과, 저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험을 제공하는 특수한 목적으로 나눌 수 있다.[15] 저자는 그가 관리하는 교회에 영향을 미친 이단 교사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10] 이들은 한때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으나 이단적 가르침을 전한 적그리스도(2:18-19)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이 교사들은 예수가 육신 없이 영으로만(4:2) 이 땅에 왔고, 따라서 그의 죽음은 인류의 죄에 대한 진정한 속죄가 되지 못한다(1:7)는 가현설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10] 요한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케린투스라고도 불리는 원시 영지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출처 필요]

저자의 목적(1:1-4)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청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됨의 의미로, (1) 그리스도에 대해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그의 속량하심(1:7-9; 2:2,25; 3:5; 4:9,10,14; 5:11-13,20)과 그의 변호를(2:1; 5:6,7) 받고, (2) 사람에 대해선 성스러움(1:6; 2:15,16,29; 3:10,12), 복종(2:3; 3:6,24; 5:2,3,18), 순결함(3:3,18), 믿음(3:23; 4:3; 5:5), 그리고 사랑(2:4,7,8; 3:11,14,16; 4:7,8,12,19-21; 5:1)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불신자들에게 쓰여진 반면에, 본 서신은 신자(5:13)들에게 쓰여졌다.[15] 본 서신에서 구약성경과 유대적 표현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청자는 유대인보다는 이방인으로 보인다.[10] 본 서신은 아마도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는 선교사를 통해 전달되었을 것이며, 요한의 사도성과 장로됨을 고려했을 때 회중들에게 큰 소리로 읽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6]

요한의 콤마

4세기 라틴어 번역본에 첨가된 삼위일체에 대한 구절은, 중세시대를 거치며 본문에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는데, 이를 요한의 콤마라고 한다.[17]
15세기 이전의 어떠한 헬라어 사본에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그의 1522년 신약성서 판본에 본 구절을 첨가해 출판하였다.[18]
그의 판본을 번역한 성경들 중에는 킹 제임스 성경(1611)도 있는데,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첨가된 구절을 이탤릭체로 표기하였다.

7For there are three that beare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8And there are three that beare witnesse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8세기부터 본문비평에 의거해 만들어진 번역본들은 위 구절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각주로서 포함하고 있다.

  1. 각주


  2. Harris, Stephen L., Understanding the Bible (Palo Alto: Mayfield, 1985) "1 John," p. 355–356

  3. Wilder, p. 214

  4. Barbour, p. 346

  5. Barbour, p. 348

  6. Burton, Ernest DeWitt (1896). “The Epistles of John”. 《The Biblical World》 7 (5): 366–369. JSTOR 3140373.

  7. Wilder, Amos (1957). 〈Introduction to the First, Second, and Third Epistles of John〉. Harmon, Nolan. 《The Interpreter's Bible》 12. Abingdon Press. 211쪽.

  8. Barbour, J. H. (1896). “The Structure of the First Epistle of Saint John”. 《The Biblical World》 9 (5): 341–348. JSTOR 3140289.

  9. Barbour, p. 342

  10. Wilder, p. 212

  11. Burton, p. 367

  12. Burton, p. 366

  13. Johannes Oecolampadius, Sermons on the First Epistle of John (A Handbook for the Christian Life) (1523; ET 2017), p. 59.

  14. Dodd, C. H. (April 1937). “The first epistle of John and the Fourth Gospel”.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Library》 21 (1): 129–156. doi:10.7227/bjrl.21.1.5.

  15. 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Edited by Raymond E. Brown, S.S.,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NY, William J. Dalton, S. J.; Roland E. Murphy, O. Carm. (emeritus) The Divinity School, Duke University, Durham, NC; [The Johannine Epistles, Pheme Perkins], with a foreword by His Eminence Carlo Maria Cardinal Martini, S.J.; Prentice Hall, Englewood Cliffs, New Jersey, 1990

  16. Barbour, p. 341

  17. Wilder, p. 210

  18. Houghton, H. A. G. (2016). 《The Latin New Testament: a guide to its early history, texts, and manuscrip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78–179쪽. doi:10.1093/acprof:oso/9780198744733.001.0001. ISBN 978-0-19-874473-3.

  19. McDonald, Grantley (2017). 〈The Johannine Comma from Erasmus to Westminster〉. Dirk van Miert, Henk J. M. Nellen, Piet Steenbakkers, Jetze Touber (eds.). 《Scriptural authority and biblical criticism in the Dutch Golden Age: God's word questioned》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61–72쪽. doi:10.1093/oso/9780198806837.003.0003. ISBN 978-0-19-8806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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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중 ‘태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은 로고스의 신격을 논함에 있어서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εν αρχη ην ο λογος και ο λογος ην προς τον θεον και θεος ην ο λογος. en arche en ho Logos) 라고 말한다.

이 분절에서의 강조점은 로고스가 계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다는 데 있다.

로고스의 선재성(先在性) 또는 영원성(永遠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먼저 ‘태초’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태초’(太初)라는 말은 우리말의 문자 그대로는 ‘가장 처음’이라는 뜻이나, 결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칠십인 역본(LXX) 창1:1에서도 요한복음1:1의 arche 를 쓰고 있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같지 않다. 즉 창1:1에서는 천지 창조의 기사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시기를 ‘태초’라고 하여 시간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데 대하여 요1:1에서는 천지창조 이전까지의 영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1:1의 arche (아르케, 태초)는 aion (아이온, 영원) 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사실 태초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불트만은 이것을 단순히 ‘선재성’(先在性, pre-existence)으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선사성’(Vorgeschitiliche) 즉 영어의 pre-historical existence 로 표현하나, 로고스의 존재성에서의 그 개념은 오히려 영어의 atemporal (無時性) 또는 nontemporal 또는 비시성(非時性)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있어서 그는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agnnetos = ingenerate), 그는 무시간적(無時間的, timeless)이며, 불가시적(不可視的, invisible)이며, 무형적(無形的, impalpable)이며, 무감각적(無感覺的, impassible)인 분이었으나 우리를 위하여 시간 안에 들어오셔서 가시적(可視的)이고 유형적(有形的)이고 감각적인 분이 되셨다.

요1:1의 ‘태초’에 대한 원어를 보면 창1:1의 히브리어 bereshith 나, 그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본의 두 arche 나 신약 요1:1의 arche 나 모두 문자적으로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처음에’를 뜻하는 점에 똑 같다. 그러나 그 어휘가 요1:1에서는 창1:1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시도에서 해석적인 번역을 시도한 것이 몇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중국어역 성경 중 소위 ‘구어역’(1962년 홍콩성경공회 ‘神版’)에서는 창1:1의 ebreshith 를 요1:1의 ‘太初’와는 달리 ‘起初’ 로 하고 있다. 이것은 요1:1의 로고스의 영원성=무시간성(無時間性)과 항1:1의 창조 역사(役事)의 시간성을 구별하고자 한 시도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1:1의 ‘太初’에 ‘초’(初) 자가 있는 한 창1:1의 ‘起初’와 근본적으로 다른 영원성을 나타내지 못 한다. 중국어역 성경 문리역본(1854년 역)에서는 요1:1과 요일1:1의 ‘태초’를 ‘元始’로 번역하고, 창1:1에서는 ‘太初’로 번역하고 있어, ‘元始’가 ‘太初’보다 이전임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 ‘元始’의 ‘始,’자에도 ‘始作’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이 들어가 있으므로 로고스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데는 충분하지 못 하다. 또 ‘初’ 즉 ‘처음’이라는 말도 그 자체가 벌써 시간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거기에 ‘太’(‘가장’ 또는 ‘아주 크게’라는 뜻)라는 한정사가 붙을지라도 그 개념을 변경시키지 못 한다. 왜냐하면 ‘처음’이나 ‘크다’라는 개념은 거기에 아무리 그 정도가 큰 것이라고 할지라도 유한성(有限性)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영어의 ‘in the beginning,’ 독일어의 ‘Am Anfang,’ Au commencement,’ 일어의 ‘はじめに’(한자 표기로는 ‘始’ 또는 ‘太初’) 등 모두에서 같다. 우리말 성경에서 요1:1을 보면, 개역(1938년), 새번역 신약전서(1967년), 표준새번역(1993년), 개역 개정판(1998년) 등에서는 다 ‘태초에’라 하고 있으나, 예수셩교젼셔(1887년, 로스 역 신약전서)에서는 ‘처음에,’ 공동번역(1971년)에서는 ‘한 처음에,’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경(1992년)에서는 ‘맨 처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 19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쉬운 번역 또는 풀이역의 경향이 일어나, 여러 나라에서 그러한 번역을 볼 수 있다. 예컨대, 1966년의 ‘Good News For Modern Man'(소위 Today's English Version; 후의 Good News Bible) 초판에서는 "From the very beginning" 로, 제2판에서는 “Before the world was created”로 번역하였고, 독일어 번역 'Die Gute Nachricht'(1971년)에서는 “Am Anfang, bevor die Welt geschaffen”(처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으로 번역되어 있고, 香港聖經公會 발행의 現代中文譯本(1975년)에서는 ‘宇宙被造以前’으로, 當代聖經(1985년)에서는 ‘萬有之先’으로 번역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인의 성경(1985년)에서는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등 거의 같은 뜻으로 풀이역을 하고 있다.



태초에(太初)


1.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잠언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3.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4.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5.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6. [요한복음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7. [히브리서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창 1:1 (Genesis 1:1)

[개역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히브리어]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영어 KJ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영어AS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요 1:1 (John 1:1)

[개역성경]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헬라원어]  εν αρχη ην ο λογος και ο λογος ην προς τον θεον και θεος ην ο λογος
[영어 KJ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NI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영어 ASV]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요일 I:1 (John 1:1)

[개역성경]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헬라원어] ο ην απ αρχης ο ακηκοαμεν ο εωρακαμεν τοις οφθαλμοις ημων ο εθεασαμεθα και αι χειρες ημων εψηλαφησαν περι 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영어 KJ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영어 NI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영어 ASV]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that which we have heard, that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that which we beheld, and our hands handled,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창세기 1:1에 있는 “태초”라는 용어는 히브리 원어로 בְּרֵאשִׁית(베레쉬트)인데, 이것을 헬라어 ἐν ἁρχᾖ(엔 아르케)로 번역했고(LXX),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in the beginning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를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태초에”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태초”(ἐν ἁρχή)라는 말은 요한복음 저자의 서신인 요한일서에는 앞프 아르케(απ αρχης)'"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from the beginning로 번역되었는데, 우리말로 “태초부터”입니다.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용어) 자체가 시간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창세기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에서 말하고자하는 목표와 그 접근방식이 다른 것뿐입니다.

창세기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관한 것
요한복음의 목표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에 관한 것

문제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어원학적인 접근(etymological approach)과 신학적인 접근(theological approach)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 어원학적 접근 (Etymological Approach)

(1) 전술한 바와 같이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는 그 용어에 있어서 다른 단어들과 달리 별로 다양하게 사용되지 않고, 거의 대부분 모든 것들(시간, 장소, 질서, 계급 등)의 시작(beginning)과 첫째(the first), 우두머리(head), 주권(sovereignty), 권세(power), 원리(principle)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것의 첫째, 처음 곧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이렇게 본다면, “태초”는 모든 것 즉 만물(피조물)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의 태초에 관하여는 이견(異見)이 없이 “시간”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에 관하여는 시간의 시작으로 보지 않고, “영원”과 관련시켜, 시간 이전, 영원의 아득한 어느 순간(momentum)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원어에 있어서 tyviareB(베레쉬트)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는 분명히 시간의 시작의 한 지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tyviareB(베레쉬트)는 전치사 eB(베, in)와 명사인 tyviare(레쉬트, beginning)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tyviare(레쉬트)는 영어 beginning(시초), former state(이전 상태), former times(전번), 그 종류의 첫째로서 시간에 관련해서는 first fruit(초실), first born(장자)의 뜻으로, 위계(dignity)에 관련해서는 the first(첫째), chief(우두머리)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헬라어의 ἐν ἁρχή(엔 아르케)도 전치사 ἐν(엔, in)과 ἁρχή(아르케, beginning)로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ἁρχή(아르케)는 a beginning(시초), origin(기원), first cause(제1의 원인)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영원”은 헬라어로 αἰών(아이온)으로, 신학적인 의미로 존재의 기간(period of existence)을 말할 때, 시간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life(생명), life time(생명시간), life itself(생명자체)로 영원성(eternity)을 의미합니다. 질적인 의미라는 뜻입니다. 고로 “태초”는 영원의 어느 한 지점(a point of eternity)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 영원과 시간의 개념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연속이 아닙니다. 시간은 시작(알파)과 끝(오메가)이 있지만, 영원이란 그 본질부터가 다릅니다. 본질상 시간의 무한한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초시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시간과 영원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했기 때문에 영원을 시간의 연속으로 보고 구속을 논하다가 결국 구원사학파(Heilgeschichte School)로 낙인찍혔습니다. 영원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생명”(life)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무시간”(timelessness)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αἰών, 아이온)이란 시간을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것,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초월한 “생명” 곧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어원학적으로 “태초”는 시간의 시작, 시간의 시작점이지, 영원의 어느 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의 본질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시간은 본질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은 인간에게도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이지만, 영원은 하나님에게 관련된 말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있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전 3:1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시간의 존재인 인간의 탈을 벗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부활의 몸”이 되어야만 합니다.

2. 신학적 접근 (Theological Approach)

(1) 신학적으로 “태초”는 창세기나 요한복음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가 시간의 시작점인 것과 같이 요한복음에서의 “태초”도 시간의 시작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화육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화육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던 예수님의 근본을 설명하기 위하여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ent Christ)라는 의미에서 로고스(λογός)를 논하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적 존재에, 그리고 레이마(ῥῆμα, rJhvmato" Cristou)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존재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현재적 실존뿐만 아니라, 시간 전, 즉 창세전에 선재하신 영원 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요한의 “태초”에 대한 목표(goal)와 접근방법(the method of approach)이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주)에, 요한은 구속(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물론, 출발점은 동일합니다. 곧 그 출발점이 “태초”인데, 이 태초의 의미는 모세(창세기)에게 있어서나 요한(요한복음)에게 있어서 다른 지점이 아니라 동일한 지점으로서의 출발점(starting point)으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3) 그러나 그 목표(goal)에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요한은 출발점으로서의 “태초”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출발점(starting point)에서 모세는 “천지창조”를 논하고, 요한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논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4) 좀 더 신학적 논리로 말하자면, 모세는 “태초”에 관하여, 창조론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요한은 구속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의미로서의 출발점인 “태초”를 서로 다른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모세는 그 지점(태초)에서 천지창조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진행하여 “창조역사”를 말하고 있고, 요한은 그 지점(태초)에서 시작하여, 영원 전에도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유추하여 그 분이 바로 선재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여 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구속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태초로부터 영원 전에도 계시고, 육신이 되어 현재 우리 가운데에도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5) 다시 말하면, 모세는 “태초”가 아닌 영원의 세계에 스스로 계신 분(I AM THAT I AM, 출 3:14)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yhila)께서 영원, 즉 창세전에 신의 회의(Divine Council)에서 내적교통(intra-communication)을 통하여, 가지고 계셨던 창조의 컨셉(concept)을 의논하시고, 이 프로젝트(project)를 가지고 창조를 시작하신 시점이 바로 “태초”인데, 이 태초마저도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속한 것입니다. 이 “태초”가 창조세계와 구속세계의 출발점이 됩니다.

요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 시점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 비로소 계셨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계셨다”(ἦν)는 단어는 미완료형(imperfect)의 부정과거로, 자존의 영구성, 영원성을 나타내는 말로, 영원 전뿐만 아니라, 그때로부터, 태초라는 시간의 시점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시작인 태초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태초가 창조되기 전에서부터 계신 분으로, 창조의 시점인 “태초” 바로 그 때에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하여 존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계시론적 차원에서 개진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전제하고 있는 말씀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고, 계시론적 차원에서 언급하는데, 이것이 성경계시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그의 나타내심, 즉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에서 다루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태초”라는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운동이 시작되었고, 구속운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서의 “하나님의 시간” (God's time)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시점, 즉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태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출발점이 되는데,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이 시간적 시점에서 창조만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구속사건의 근원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구속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과 그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이 하나님의 창조운동과 구속운동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며,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본질(근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빌 2:6).

(6) 다음으로 요한일서의 태초도 역시 동일한 “창조의 시점”으로 생명의 말씀의 현존하신 시점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뿐만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로 계신 분으로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자이신 그리스도(계 1: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요 1:1~2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는데, 말씀이 계신 동일한 시점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하셨고, 그 때가 곧 “태초”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창세전에 계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창세전 영원히 계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과 함께 계셔서 그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시점이 곧 창세기의 태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재하신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만물을 창조하신 그 시점이 태초로, 바로 그 때에 하나님과 말씀과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요 1:3).

이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일서 1장 1절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 말씀은 창세전에 있던 생명의 말씀(선재하신 그리스도)이 창조 시, 즉 태초부터(창조하신 그리스도) 계셨고, 재창조시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성육하신 그리스도)로 이 모두가 동일하신 그리스도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으로서의 그리스도(계 1:4, 8)를 증거 하기 위한 요한의 논법입니다. 여기서 특히 창조 시인 태초부터, 즉 역사 속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본문에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실, 선재하신 그리스도(preexisting Christ)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성육하셔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시고 몸소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결 론 (Conclusion)

(1) 창세기의 “태초”나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태초” 역시 시간의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태초라는 말 자체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태초에”(έν ajrch)이거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pro; to;n kovsmon) 말씀이 계셨다거나 “창세전에”(pro; to;n kovsmon)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는 창조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태초에”(έν ajrch)와 “태초부터”(ajp! ajrch'")라고 언급한 것입니다.(cf. 요 17:5, 24; 엡 1:4; 마 13:35, 24:21, 25:34; 눅 11:50; 요 9:32; 롬 1:20; 엡 1:4; 벧전 1:20; 계 13:8).

(2) 창세기에서 모세는 “태초”라는 시점에서 천지창조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같은 “태초”라는 시점에서 삼위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근본을 바라보며, 그 근본으로부터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요한일서의 “태초부터”(ajp! ajrch'") 있는 생명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우리가 처음부터(구약과 신약시대) “들은 바요,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해서 성육하신 성자의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창조론에, 요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구원론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같은 시점인 “태초”이지만, 모세는 그 태초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요한은 그 태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세계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모세는 태초에서 창조세계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고, 요한은 태초에서 말씀(λογός)이신 하나님(!yhila)으로 선재하셨던 그리스도로부터 성육하신 구속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방향, 즉 양면의 방향으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전문용어로 “절대성의 태초”(Absolute Beginning)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태초와 요한의 태초는 동일한 것으로 전개방향과 목표가 다를 뿐입니다.

(4) 결론적으로, 모세가 사용한 창세기의 태초와 요한이 사용한 요한복음의 태초는 같은 시점으로 “시간의 시작”(the beginning of time)입니다. 단지 그들이 의도하고 있는 목표(goal)와 전개하는 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모세의 목표의 초점은 창조(creation)에, 요한의 목표의 초점은 구속(redemption/salvation)에 있기 때문에, 접근방법과 진행방향이 다를 뿐입니다.

태초에 관한 도표해설

<태초>

[창세기]

(영원) 창세전 .................................... ⇢ 창조 .......................⇢ 창세후 역사 (종말)
창세전에 계신 하나님이 ................ ⇢ 태초에 창세에 계셔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종말)

[요한복음]

(영원) 창세전 ⇠그리스도(선재) .................... ⇢ 구속 그리스도(화육) ⇢ 예수 ............ ⇢ (종말)
창세전에 계신 그리스도가 ............... ⇢ 태초에
(창세에)도 계심 창세전 영원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 ⇢ 말씀이 계속해서 존재해 오시며 바로
계시니라 창세, 즉 태초에 계셨다는 뜻
(선재의 X가 창조 시에도 계심)
......................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
계셨으니 (창세전에) 께서
................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
(요 1:1)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요 1:14) (성육신) (신약시대)

<>[요한일서]

(영원) 창세전 ⇠ ................말씀/그리스도 구속 그리스도(화육)⇢ 예수 ⇢............ (종말)
창세전의 생명의 말씀 ............... ⇢ 태초부터
창세부터 ...........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성육하신 그리스도)




요한일서(ⅠJohn)

Ⅰ. 배경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다.
요한이 노인이 된 후 90∼91년경 에베소에서 기록 하였다.
이 서신에는 구약의 인용문이 한 곳도 없다.

Ⅱ. 내용과 주요 사상

이 때는 교회와 회당이 완전히 분리 되었고 믿음과 행위의 논쟁도 끝난 때이다.
그러나 이때 거짓 교훈들이 들어 왔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상으로서 나중에는 “가현설”이란 이단으로 발전 되었다.
그리고 죽은 분은 인간인 예수 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고난에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서신의 목적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것
둘째는 교회에 침투해 온 거짓 교회를 타파시키기 위한 것

이 서신에는 “빛”(1:7, 2:9, 10)과 “사랑”(2:5, 7, 10, 15. 3:1, 2, 10, 11, 14, 16, 17, 18, 21, 23. 4:1, 7, 8, 9, 10, 11, 12, 16, 17, 18, 19, 29, 21. 5:1, 2, 3) 이란 두 단어가 두드러진다.


Ⅲ. 개요

서론 1:1∼4

 1.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친분을 선언함 1:1∼3

 2. 편지를 쓰는 목적 1:3

 (1)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북돋우기 위하여 1:3 하단

 (2) 기쁨이 충만케 하기 위하여 1:4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귐을 위한 요구사항들 1:5∼10

 1. 빛 가운데 행하라 1:5∼7

 2. 죄를 자백하라 1:8∼10


무죄한 생애에 대한 권면 2:1∼28

 1. 대언자이시며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 2:1, 2

 2. 그의 행하시는 대로 행함 2:3∼6

 3. 새 계명 2:7∼11

 4. 영적 자녀들에 대한 개인적 호소 2:12∼28

  (1) 쓰는 이유 2:12∼14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2:15∼17

  (3) 적그리스도들과 그들의 이단을 경계하라 2:18∼26

  (4) 그의 오심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2:27, 28

 하나님의 아들들과 마귀의 자녀들과의 대조 2:29∼3:24

 1. 하나님의 아들들의 의 2:29∼3:7
 2.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 3:8, 9 
 3.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게 속함 3:10∼18
 4.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구원을 확증하심 3:19∼24

 진리와 사랑과 믿음은 사귐에 필수적임 4:1∼5:12

 1. 진리의 영과 오류의 영 4:1∼6
 2.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함 4:7∼21
 3. 믿음은 승리와 생명을 가져옴 5:1∼12


Ⅵ. 결론 5:13∼21

1. 목적의 재천명 5:13
2. 무죄에 대한 권고 5:14∼17
3.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알라는 마지막 격려 5:18∼21 

요한일서는 2세기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그릇된 영지주의에 독자들이 직면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는 종교 철학으로서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이원론의 영향으로 오직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고 주장). 이 둘 사이의 긴장에 대한 해결책은 “영지(gnosis)” 또는 “지식”인데, 사람은 이 지식을 통해 세속적인 자리에서 영적인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적인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 그릇된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첫째는 가현설(Docetism)인데 사람 예수는 단지 유령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케린투스설(Cerinthianism) 예수님은 두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 때로는 인간으로, 때로는 신으로 활동한다는 이론입니다.

요한일서의 핵심 목적은 믿음의 내용에 경계를 정하고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핵심 구절 :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한일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핵심 용어는 “지식”으로,
관련 어휘와 함께 요한일서에서 적어도 13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약 : 

거짓 영적 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큰 문제였습니다.
신자들이 참조할 수 있는 완성된 신약 성서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스스로 지도자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문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관한 부분을 바르게 알렸습니다.

요한 서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기초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서신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자입니까?
요한은 우리가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언제나 헐뜯고 싸운다면, 또는 이기적인 자세로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완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은 신앙이 우리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죄책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잘못을 고치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연결 : 

죄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요한일서 2장 16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요한은 죄와 관련하여 성경 전체에서 가장 처음에 있었던 온 세상을 뒤흔드는 가장 끔찍한 유혹의 세 가지 측면을 묘사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처음 죄는 창세기 3장 6절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세 가지 유혹에 의해 무너진 결과였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먹음직도 함), 안목의 정욕(보암직도 함), 그리고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입니다.

적용 : 

요한일서는 사랑과 기쁨의 책입니다.
이 서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및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를 설명합니다.
이 서신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행복과 진정한 기쁨을 구분 지으면서 어떻게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만일 우리가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을 취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갈망하는 참된 사랑, 헌신, 친교와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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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1:1
태초
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전부터 선재하셨으며(요 10:30; 13:3)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Smalley, Barker).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
들은 바요'(*, 아케코아멘)와 '본 바요'(*, 헤오라카멘)는 완료시제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히 1:1, 2).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한편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Stott, Smalley).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 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위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산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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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 생명의 말씀이 나타나시다

1.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처음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보여 주셔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생명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을 널리 알리려 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는 까닭은, 여러분이 우리와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귐입니다.
4.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완전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써 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들은 소식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 소식을 전합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 빛 속에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이 씻어 줍니다.
8. 만일 우리에게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꼭 지키시는 분이며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 그리스도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

1.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짓지 않게 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그러나 혹 어떤 사람이 죄를 짓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몸소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음을 압니다.
4.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안다.” 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옛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이미 들은 말씀입니다.
8.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이 계명을 새 계명으로 써 보냅니다.
이 계명이 참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여러분의 삶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이 물러나기 시작하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누구든지 빛 속에 산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10.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사람 속에는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11.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12.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의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13. 세상의 아버지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세상 처음부터 계셨던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젊은이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14. 세상의 어린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된 여러분 내가 이 글을 여러분에게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계셨던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굳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어 그 악한 자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 줄 것들을 원하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원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17. 이 세상은 곧 사라집니다.
세상이 낳은 욕망도 세상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의 적을 따르지 마라

18. 사랑하는 내 자녀들이여, 지금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적이 오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대로 벌써 많은 그리스도의 적이 와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압니다.
19. 그리스도의 적들은 우리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속했던 자들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정말로 우리에게 속했더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떠났다는 사실이,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우리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 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진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 진리에서는 결코 거짓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아버지도 아들도 부인하는 자입니다.
23. 누구든지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버지 또한 모시는 사람입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배운 것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배운 그것이 여러분 안에서 살고 있으면, 여러분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서 살 것입니다.
25.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 곧 영원한 삶입니다.
26. 내가 여러분을 속이려 하는 자들에 관해서 지금까지 썼습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니, 여러분에게는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모든 것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셔서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28.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우리가 자신을 갖게 되고, 다시 오시는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29.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다면,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셨겠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러한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지킵니다.
4.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반항합니다.
죄는 곧 법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러므로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은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7.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여,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롭습니다.
8.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오신 까닭은 악마의 일을 쳐부수려는 것이었습니다.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아무도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10.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누가 악마의 자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

11.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어 온 계명입니다.
12.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마에게 속했기 때문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가 왜 동생을 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한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미워하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15.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그 누구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17. 살림살이가 넉넉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가 어렵게 사는 형제를 보고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 그리고 우리가 비록 마음에 찔림을 받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찔림 받을 일이 없을 때 자신 있게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하나님의 계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며,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

1.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모두 믿지는 마십시오.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해 보십시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은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라고 고백하는 예언자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3. 그러나 예수께 대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는 예언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습니다.
그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적의 영을 가진 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적이 세상에 오리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4.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이 거짓 예언자들을 이겨 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은 세상에 와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6.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리의 성령을 가졌는지 거짓의 영을 가졌는지 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시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누구든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은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10. 이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3. 하나님은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고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15.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사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삽니다.
16.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품으신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구든지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사십니다.
17.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됩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날에 우리는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명입니다.


요한일서 5장  /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기다

1. 누구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된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아버지의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면,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지키기에 너무 힘든 것이 아닙니다.
4.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5. 그러니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로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그 사람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6. 물과 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7. 예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이가 셋 있습니다.
8. 곧 성령과, 그분이 받으신 세례의 물과, 그분이 당하신 죽음의 피입니다.
이 셋의 증언이 한가지로 똑같습니다.
9. 우리는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증언은 훨씬 믿을 만한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해 주신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 증언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해 주신 증언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하여 하신 증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모신 사람은 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그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13.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청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청한 것은 이미 모두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16. 어떤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보거든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 형제의 지은 죄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 형제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17. 의롭지 못한 일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죄가 다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18.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은 계속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사람을 지켜 주시니, 악마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온 세상은 악마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0.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과, 우리로 하여금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고 그분이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나의 어린 자녀들이여, 거짓 신들을 멀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