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Jonas) 비둘기


호세아 - 요엘 - 아모스 - 오바댜 - 요나 - 미가

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운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 니느웨(Nineveh)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현재의 이라크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도시로 앗시리아(BC 705-612)의 수도였다.


니느웨 사람들은 아주 지독한 백성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패잔병들을 껍질을 벗겨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고 합니다.

견고한 성읍으로 성벽의 높이는 대략 10m 정도, 성벽의 넓이는 당시 마차 3대가 다닐만큼 넓은 성벽이었다고 한다.
요나가 니느웨에 도착하기 전에 완전 일식이 일어났다(BC 763. 6. 15).
도시에 재앙이 닥쳐왔다(BC 763. 759)

 


 ♦ 7월 1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나 1: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의 연고(12절)
♦ 성구 : 그가 대답(對答)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潺潺)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暴風)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緣故)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나의 연고(It is my fault)”란 “나의 잘못”이란 뜻입니다.
한 때 “내 탓이오!” 라는 구호가 유행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사회의 문제는 곧 교회의 문제이며,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요나(Jona, 비둘기)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BC 793∼753) 시대에 활동했습니다(왕하 14:25). 이 시기는 큰 번영을 누렸으나 영적으로는 심히 부패하여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하던 시기이었습니다. 이 때 요나는 이방 나라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공격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명령을 요나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공교롭게도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항구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배는 삼년에 한 번씩 운행하는 무역선이었습니다(왕상 10:22).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에게 이런 배를 쉽게 탈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만일 잘못된 계획을 시도하려는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승선했던 그 배가 큰 풍랑을 만나 매우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풍랑의 원인이 “나의 연고(It is my fault)”라고 고백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면 문제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해결의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 풍랑의 원인이 내 탓이오!

요나의 이와 같은 영적 위대함의 고백이 사회 도처에서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누가 먼저 이런 외침을 외쳐야 할까를 계산하지 말고 나부터 먼저 이런 외침을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이 세상 풍파 심하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나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 연고(잘못, 실수)삼하 6:7 / 샬(shal) שַׁל

열왕기하 14: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방인(선장, 사공)

1. 자기 신을 부르고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5절)
2. (선장)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6절)
3. 심히 두려워하여(10절)
4. 힘써 노를 저어(13절)
5.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14절)
6.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제물, 서원(16절)

요나(유대인)

1.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1절)
2.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3, 10절)
3. 깊이 잠이 든지라(5절)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9절)
5. 바다에 던지라(12절)

낯(얼굴) 파님(pânîym) פָּנִים

오늘의 기도 

너는 일어나라!(2절)
신앙적 결단의 때(영적 자각)
영적생활에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자
주관, 생각, 고집, 버릇, 약점, 교만, 신학, 아집….  

요나서는 예언서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예언자들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사건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화적 방식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요나서를 읽을 때는 이 책 안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가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새겨보는 묵상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요나는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유대인, 히브리 사람)
니느웨는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이방 민족,
다시스는 땅끝,
바다는 세상 전체,
폭풍은 전쟁,
물고기는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간 나라를 상징

문학적인 방식의 묵상을 하게 되면, 요나서가 전하는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요나서를 묵상하게 되면 이 책이 단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가 큰 변을 당한 후에 회개하여 돌아왔다는 간증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요나서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 세계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책임을 바르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6절과 같은 말씀은 이스라엘의 멸망이 오히려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온 세계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알게 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게 한 계기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멸망이 오히려 그 주변 민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방 민족들은 요나의 몰락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계 전체를 주관하는 분으로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시는 공평하신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선택하신 민족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포용을 보여주시고 그렇지 않은 이방 민족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로 일관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나의 불순종을 통해서 ‘유일하고 전능하신 온 우주의 주인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이 그 백성의 특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사명을 나타내는 것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든 배타적인 특권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며, 모든 종류의 차별적인 행위를 경계하는 신앙을 지향해야 합니다. 잘하든 못하든 “믿습니다” 카드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의 잘못된 믿음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병들게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택받았다는 믿음이든, 구원받았다는 믿음이든 믿음은 특권이 아닙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만,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요나서는 열두 권의 소선지서 가운데 하나인데 다른 소선지서와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른 소선지서들은 선지자들이 메시지를 받아 증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요나가 어떤 메시지를 증거한 것이 아니라 요나가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인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이 요나서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나서를 황당한 전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요나의 아버지 이름이 아밋대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1:1).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그가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 14:25).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요나가 이스라엘 국경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하는 역사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역사가들은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존재들을 실제 인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북 이스라엘 예후 왕조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약 40년(B.C. 790-750) 동안 요나가 실제로 살아 있었고 실제로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나가 실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정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 11:3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0). 예수님께서 실제 인물인 것처럼 요나도 실제 인물이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흘 동안 죽은 상태로 계셨던 것처럼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사흘을 있었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요나서는 요나라는 선지자가 겪은 경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계신가를 살펴보며 읽어야 합니다. 

Ⅰ. 요나의 불순종의 네 가지 특징 

요나는 신앙의 초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불경건한 불신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했는데 요나는 욥바에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불순종은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애국적인 불순종

요나가 살고 있던 시대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때로 이스라엘이 번영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강했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당시 선지자였던 요나와 호세아는 그런 번영이 영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번영이고 이스라엘은 조만간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방의 앗수르라는 나라가 최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이미 아람이라는 나라를 정복했고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을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앗수르가 잘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메시지는 40일이 지나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0일이 지나기 전에 회개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기가 40일 동안만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가 오면 앗수르가 망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애국적인 동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나는 망하더라도 나라는 살려야겠다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간 것입니다. 배를 타고 일단 지중해에 들어가면 40일 이내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라 애국적인 동기로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둘째, 죄악된 불순종

아무리 애국적인 동기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요나는 이스라엘만을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더 컸습니다.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앗수르의 죽어가는 사람들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해야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불순종은 그 동기가 아무리 애국적이라도 죄인 것입니다.

셋째, 어리석은 불순종

요나는 바다에 배가 뜨면 하나님이라도 40일 만에 자신을 바다에서 육지로 데리고 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과소평가 한 것입니다. 요나는 바다의 운송수단이 배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다의 운송수단이 배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큰 물고기도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갇혀 니느웨로 돌아가게 될 줄은 요나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7).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넷째, 편협한 마음의 불순종 

요나는 앗수르가 멸망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 요나에게 앗수르 사람들은 원수였지만 하나님께는 불쌍히 여길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여러 부분 어그러져 있었기 때문에 요나는 도망간 선지자가 되었고 불순종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어리석은 죄입니다. 

Ⅱ. 요나의 불순종이 가지고 세 가지 결과

 요나의 불순종은 세 가지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첫째, 수치(shame)

하나님의 선지자가 불신자들에게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가는데 풍랑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풍랑을 어떻게 해서든지 잔잔케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각자 자기 신께 빌고 배를 가볍게 하기위해 짐을 모두 바다에 던집니다. 그런데 선장이 배 밑으로 내려가 보니까 한 사람이 거기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욘 1:6). 지금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어떻게 혼자서 잠을 자고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는 배 밑에서 잠을 자다가 망신당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풍랑이 잠잠해지지 않자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제비를 뽑아 누가 불순종해서 그런 것인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거기서 요나가 딱 걸린 것입니다. 그러자 선원들이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욘 1:8).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욘 1:9-10). 그것을 알고 선원들은 요나를 야단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욘 1:10). 얼마나 부끄럽고 망신입니까? 목사가 불신자에게 야단맞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순종은 영광을 가져오지만 불순종은 수치를 가져옵니다.

둘째, 큰 위험(great danger)

요나의 불순종으로 선원들도 죽게 되었고 요나도 죽게 되었습니다. 풍랑이 심해져서 배가 뒤집히면 모두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불순종하면 우리도 위험하고 불신자들도 위험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죄를 지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순종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위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징계(chastisement)

바다가 점점 더 흉흉해지니까 선원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욘 1:11). 그러자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 1:12). 선원들은 어떻게 산사람을 바다에 던지느냐며 자신들의 기술로 육지에 닿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진 줄로 믿습니다. 캄캄하고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질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요나는 아마도 거기서 자신의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하나님의 징벌은 무서운 것입니다. 

Ⅲ. 요나를 바다에 던진 것은 누구인가? 

우리가 요나서 1장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누가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까? 요나 1장 15절을 보면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 큰 물고기가 하품한 것인지 밥을 먹으려고 한 것인지는 몰라도 입을 벌린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입속으로 들어가 뱃속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도록 소화액을 막아주셨습니다. 소화불량에 걸린 물고기는 결국 니느웨 근처에서 요나를 토하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욘 2:3). 누가 자신을 바닷속에 던졌다고 합니까? 요나 1장 15절에는 분명히 선원들이 던졌다고 나와 있는데 요나는 주님께서 자신을 바닷속에 던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를 누가 던졌습니까? 선원들이 던졌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던지신 것입니다.

만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게 요나를 누가 바다에 던졌냐고 물어보면 하나님께서 던지셨다고 할 것입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지만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37세에 형들이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때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자 형들은 복수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자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 45:5). 노예로 판 것은 형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요셉은 17세에 노예로 팔려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노릇하다가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13년 동안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그것을 누가 하게 한 것이냐?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총리로 세워 자신의 가족도 살리고 애굽 사람들과 만민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침공했다가 잡아온 계집아이가 빨래를 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계집아이는 나아만 장군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 엘리사를 만나면 나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이 눈이 번쩍 뜨여서 이스라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찾아가지 않고 요람 왕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요람 왕이 옷을 찢으면서 자신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문둥병을 고쳐주겠냐며 이것은 분명 시비를 걸어 쳐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종 게하시를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은 당연히 마중 나와서 안수도 해주고 대접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엘리사는 나오지도 않고 종 하나가 나와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나아만이 화가 난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화를 잘 냅니다. 자기가 아주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남들이 높은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아만은 문둥병 환자로 왔지 장군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화를 내니까 종들이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해도 해야 될 상황에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는 것을 왜 못하냐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을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자 문둥병이 완전히 낫고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아람에 있는 신들은 다 가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계집종에게 요나를 누가 바다에 던졌는지 물어본다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신을 잡아온 것이 나아만 장군인 줄 알았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오게 하셔서 결국 나아만 장군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요나를 던지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요나의 경험을 통해서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도 물어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병정이 못 박았다고 그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못 박았다고 합니다. 감상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못 박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못 박았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사 53:10).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택하신 자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구원하시고자 그런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는 우리의 어리석은 불순종으로 인해 초래되는 망신과 위험과 징계가 많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저는 나이가 육십이 되어도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불순종으로 초래되는 위험과 망신과 징계가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형벌은 불신자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시고 수치와 위험이 임하면 사람들은 자책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자책하지도 마시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내 삶에 고통이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도 모두 선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고난이 도리어 다른 사람의 구원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불순종하여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 삼 야를 있다가 니느웨에 토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이것을 영어로 하면 여덟 글자이고 히브리어로 하면 다섯 글자입니다. 요나는 가장 짧은 설교로 큰 부흥을 본 사람입니다. 다섯 글자의 설교를 통해서 니느웨 사람들이 왕부터 시작해서 짐슴까지 모두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구원하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하여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꾸어 앗수르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고난이 많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 5:7). 그러나 죄로 인한 고난이 와도 낙심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바꾸어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페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지 6주 만에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영구히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915년 95세로 생을 마감하는데 95년 동안 살면서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영혼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찬송 9000편을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 된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까?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28세에 새벽기도를 나가게 된 것은 새벽기도 시간이 되면 동네 감리교회에서 카세트테이프에다 확성기를 연결해 찬송가를 틀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새벽기도를 갔는데 그때 들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이란 찬송이 얼마나 은혜가 됐는지 모릅니다. 동서남북 모두 막혀서 답답해도 위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위에서 도움을 주시고 우리의 악을 선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낙심하거나 답답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7월 2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나 2: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의 서원(9절)
♦ 성구 : 나는 감사(感謝)하는 목소리로 주(主)께 제사(祭祀)를 드리며 나의 서원(誓願)을 주(主)께 갚겠나이다 구원(救援)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요나의 서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나의 소원은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열매를 드리려고 “불낙지 목회”를 하겠다고 다짐하며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불낙지”란 “불신자” “낙심자” “지체하며 머뭇거리는 자”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이 좋아할만한 열매를 드리지 못하여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고 기도하는 “불낙지”들을 생각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따라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기도 한다”고 합니다(2:2).

기도하려면 여호와 말씀을 받았을 때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도하려면 다시스로 가기 전에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도하려면 배 밑창에 눕기 전에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도하려며 바다로 던져지기 전에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때를 지내고 있습니까?
기도의 때를 붙잡고 풍랑이 오기 전에, 바다에 던져지기 전에 미리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때 기도했으면 좋았을 텐데......
때 늦은 후회 보다는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신앙적으로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고 미리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기도하는 이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nL5n45PYqJ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탈무드)
하나님과 천사들이 회의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숨어야 하겠는가?
다양한 대답이 있었다.
숲속에, 땅속에, 하늘 꼭대기,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든지 찾아온다.
그 때 한 천사가 하나님에게 "사람의 마음에 숨으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을 나의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니느웨 / 합의

다시스(히-תרשיש(타르쉬쉬), 영-Tarshish)라고 불리운다.  / 전쟁, 정련, 해변
금속 '정련', '전쟁'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특히 산스크리트어(Sanscrit)나 아리안어(Aryan)로는 '해변'(the sea coast)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나 1:17(히브리 성경 2:1)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예비하다(마나, mânâh) / מָנָה 
나누어지다. 할당하다. 준비하다

4:6, (박 넝쿨)준비하사
4:7, (벌레) 준비하사
4:8, (뜨거운 동풍) 준비하셨고

요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구원으로 인한 세 가지 변화 

1. 언어(감사), 2. 예배(제사), 3. 순종(서원)

감사(토다. tôwdâh) תּוֹדָה / 감사, 고백

제사(자바흐. zâbach) זָבַח  / 살륙하다, 제사드리다

서원(네데르. neder) נֶדֶר /


구원(예슈아. yeshûwʽâh) יְשׁוּעָה  / 구원, 복지, 구원받은 것

요나의 기도(1:17-2:9)

1. 물고기 뱃 속에서(2:1)
- 스올의 뱃속(2:2)

* 기도는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다!

앗수르의 주신(主神) : 다곤(물고기 형상)
3일 : 변화의 시간(지하 세계를 내려가는 시간)
이삭의 번제물 3일의 길
예수님의 부활의 시간

2. 깊음속 바다 가운데(2:3, 5)
- 선원들 / 주께서 던지셨으므로 

* 기도는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다곤(Dagon) 또는 다간(Dagan)은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에 살던 셈족(아카드, 아시리아, 바빌로니아)과 동부 셈족의 다산의 신이었다. 곡물, 생선, 어업의 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슈도드와 가자에 신전이 있었고 구약성서의 삼손이 죽은 곳이 가자의 다곤 신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3.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2:4)
-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 기도는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4. 영혼의 회복
-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

* 기도는 영혼의 회복이다!

환경을 극복
역사의 주인을 아는 것
주님만 바라보는 것
영혼의 회복

오늘의 기도

신앙생활을 영적생활로 전환하자

언어, 생각, 행동, 습관, 삶


앗수르(Ashur, Assur)

1. 셈의 둘째 아들 이름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삭과 룻과 아람이요”  (창 10:22)

2.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던 主神의 이름, 앗시리아의 최고의 신이며 앗시리아의 수호신이다.
고대 앗시리아 제국 시절에는 앗수르 신이 수메르 신화의 엔릴(Enlil)과 같은 신으로 숭배되다가, 중 앗시리아 제국시절에는 바벨론의 마르둑(Marduk) 신과 같은 위치로 숭배되다가, 신 앗시리아 제국시절에는 엔릴의 아버지인 ‘하늘 전체’를 뜻하는 안샤르(Anshar) 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이 말은 앗시리아가 오랫 세월 동안 존속하면서 강성해져서 고대근동의 최강자로 군림할 때 마다 그들의 주신 앗수르의 위치를 타민족이 섬기던 최고 신과 같은위치로 숭배했다. 그들이 정복한 나라의 만신전에서 섬기던 최고신이 바로 앗수르 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앗수르를 때로 엔릴, 때로 마르둑, 때로 안샤르로 여긴 것이다.

3. 고대 앗시리아(Old Assyrian Kingdom)의 최초의 수도 (도시 이름), 티그리스강의 상류  서쪽 제방에 위치하며 현재 이라크의 자브 천의 북쪽이다. (앗수르, 니느웨, 하란, 갈그미쉬 등 천도)

앗수르의 발굴은 1898년 독일 고고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델리츠시에 의해 시작되어 1903~1913년까지 계속되었다. 16,000개 이상의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굴되었다. 대다수가 베르린의 퍼가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앗수르의 주신에 대해 살펴보자.

주신인 앗수르 명칭은 표기에 따라 Ashur, Assur, Aššur, A-šur, Aš 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앗시리아 만신전(pantheon)의 최고신이다.
출토된 한 석비에 각인된 양각(陽刻) 은 신 앗시리아에 속한 것으로 앗수르 신(Ashur)이 두 날개를 달고 손에 활을 가진 모습(figure)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원반(disc)이 있다. 수레(wheel)처럼 보이기도 한다. 태양신의 전사의 모습이다. 이 석조(relief)는 주전 9세기 혹은 8세기에 속한다 (9th or 8th c. BC relief).

앗수르(Ashur) 신은 메소포타미아 남쪽 수메르에서 섬기던 니푸르(Nippur)의 주신인 엔릴(Enlil)로 간주되기도 있다. 엔릴신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만신전(萬神殿 pantheon)에서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로, 아내는 닌힐(Ninhil) 신이었다. Enlil + Ninhil = Ninurta, Zababa가 태어났다. 앗수르의 배우자는 물리수(Mullisu) 여신이다. 중기 앗수르 제국시절에 발달된 신화가 주전 13세기에 자리를 잡았고, 주전 8세기와 7세기 까지 앗수르의 신화는 계속 전해내려 왔다.

Anshar + Kishar = Enlil
Enlil + Ninhil = Ninurta, Zababa

앗시리아인들은 타민족을 정복하고서 그들에게 앗수르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지 아니했다. 그 대신 앗시리아인은 피정복민들에게 선포하기를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들을 버렸다고 선전했다. 앗시리아가 사르곤시대(the Sargonid period, 주전 8~7세기)때 신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앗수르 신의 이름을 설형문자로 안샤르(Anshar, 아카드언어로 “하늘 전체”)신의 기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만신전에 앗수르신을 최고의 주신으로 모실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바벨론 만신전에 안샤르신과 그의 배우자 키샤르(Kishar, "땅 전체“)가 엔릴과 닌힐신 보다 서열이 앞섰다. 바벨론의 국가 창조신화(the Babylonian national creation myth)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의 사르곤 판에서, 마르둑(Marduk 바벨론의 주신)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에 앗수르가 혼돈의 신 티아맛(Tiamat, the chaos-monster)을 죽이고 인간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나온다.

어떤 학자들은 앗수르가 앗시리아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태양원반(the solar disc)로 대표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태양신 샤마쉬(the sun god Shamash)를 가리킨다. 앗시리아 왕들 중 앗수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슈나시르팔(Ashurnasirpal), 에살핫돈(Esarhaddon = Ashur-aha-iddina),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7월 3일(토)
                                                                              

 ♦ 7월 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나 3: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감찰(10절)
♦ 성구 : 하나님이 그들의 행(行)한 것 곧 그 악(惡)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監察)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災殃)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감찰(監察)”이란 한자는 “볼 감(監)” “살필 찰(察)”이란 훈(訓)으로 “보살피고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위에서 전개되는 모든 것을 보살피고 살펴주십니다.

요나의 생(生)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한다면 전반기의 생은 요나서 1∼2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나의 후반기 생은 요나서 3∼4장에서 찾습니다.

전반기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불순종했던 모습으로 “자기중심(self centered)”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반기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습으로 “하나님 중심(God centered)”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inspection)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는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나에게 두 번째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2절)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요나서 3장의 초점은 니느웨 백성들만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에 거주하는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는 순간 회개하므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위에 앉으니라”(4∼6절)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고 나왔을 때 권력자들과 귀족들 그리고 왕에게까지 전달되면서 그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 과정이 간단하게 묘사되었지만 한 국가 전체가 주님 앞에 돌아와 구원을 받기까지 다양한 복음 전달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니느웨 백성들의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몇몇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며, 모든 인류가 구원 받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구원 섭리 역사에 따라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곳이 어디든지 구원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요나처럼 불순종하며 살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도 갖지 못한 우리들을 요나를 다시 부르신 것처럼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주님이 예비하십니다.
무슨 기대를 갖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예비하신 일을 위하여 무조건 순종할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요나처럼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눈을 들어 살피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나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감찰하다(라아, râʼâh) רָאָה /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
창세기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10년이 지났을 무렵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남편에게 하나님이 자식을 주지 않으므로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라고 합니다. 아브람은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에게 들어갔고 하갈이 잉태하므로 여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사래는 네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한다며 바가를 긁자 아브람은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므로 하갈을 여주인의 집을 떠나 도망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에게 네가 낳을 아들은 이스마엘이라고 하며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하므로 하갈은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
시편 3: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저는 하나님께 2)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2) 구원 


사도행전 2:40b-41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요나 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성을 삼일 동안 돌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룻길 즉 통계적으로 1/3에게만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의 외침을 들었던 니느웨 성의 사람들 전부에게 그 외침이 전파되어 심지어 왕까지도 회개에 참여합니다.
니느웨 성의 짐승들도 금식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박국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대각성 운동
제1차 1735-1755, 영국 웨일즈 지방

에반 로버츠(Evan Roberts). 10만 명의 회심을 마음에 품고 기도
그 집회에 하워드 존스톤(Harward Johnston)
평양 장대현교회를 방문하여 설교 할 때 길선주장로의 결단 

오늘의 기도

니느웨의 회개
니느웨의 결단을 내 삶의 현장에서 

마을을 새롭게
도시를 새롭게
각 나라와 각 족속을 새롭게 

7월 5일(월)

요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 생명(네페쉬. nephesh) נֶפֶשׁ 
숨, 생기, 냄새, 목숨 


생기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있어서 절정은 사람을 만드신 예사롭지 않은 창조의 순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7).

하늘과 땅을 만드신 최고의 창조자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두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첫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둘째,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 사람을 구별시켰습니다.

이 한 구절에 인간 창조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비인격적인 힘들이 모여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세포, DNA, 원자, 분자, 수소, 양자, 중성자, 전자들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직 사람의 육체를 형성하는 물질들일 뿐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물질들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그 물질들을 사용하셔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지으시고 라는 말은 “틀, 모형, 또는 형태를 만들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트사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창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능과 능력을 가진 토기장이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형상을 염두에 두고 그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과 지능을 가지신 대장 토기장이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셨던 것을 정확하게 이루어내실 수 있는 전지 (모든 것을 아는)와 전능 (모든 능력을 가진)의 소유자이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의 호흡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이나 물질적 존재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방금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만드신 아담의 몸, 즉 땅 위에 생명 없는 인간 육체로서 누워있는 몸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몸을 구부리셔서 그 사람의 코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직접 사람 몸 안에 생명을 넣으셨습니다.
이 생명을 넣어 주는 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시는 요한복음 20:22 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창세기 2:7은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은 히브리어 네페쉬 로서 그 의미는 “살아있는, 숨쉬는, 의식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기 전까지는 생령이 되지 못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움직이며 이성적이고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땅 위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보다도 특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불어넣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입니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로서 “바람, 숨결, 공기, 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며 사람의 무형적 부분은 영원히 살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오직 남는 질문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4b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함이니이다.

* 생명(네페쉬. nephesh) נֶפֶשׁ 
숨, 생기, 냄새, 목숨 

믿음의 갈등

도시 문화 : 광야 문화

광야의 삶
-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 불가능한 곳
(하나님 중심)

도시의 삶
-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
(물질 중심) 

요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의 기쁨은 무엇인가?



엘리야는 왜 죽여 달라고 합니까?

일반적으로 죽여 달라는 말은 두 가지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여 달라는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경우
다른 하나는 의견은 맞지 않고 맘대로 할 수도 없는 불편한 관계일 경우

그렇다면 ‘상황만 보고 기도하지 않은 경우’와 ‘승리에 도취하여 허를 찔려 일을 그르친 경우’ 모두 엘리야가 잘못하였기 때문에, 죽여달라는 엘리야의 말은 ‘이 죄인 면목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북왕조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왜 남왕조 유대 땅 최남단의 브엘세바까지 내려왔으며, 다시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까지 와서야 그런 소리를 합니까?

그냥 아무데서나 석고대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엘리야의 말투는 무언가 불만스러워 투정하는 듯한 느낌은 들지언정, 죄인의 자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못합니다.”

죄인이라기엔 너무 뻣뻣해 보이지 않습니까?
내용인즉 ‘넉넉하니 죽여 달라’는 것과 자신이 ‘열조보다 못하다’는 것인데, 잘못했으면 ‘면목 없으니 죽여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엘리야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자책하는 모습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오만하다고 할 만큼 당당하게 불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갈등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누구와의 갈등이며 무슨 갈등일까요?

1.  또 재앙입니까?(열왕기상 17:17-24)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이상한 말을 덧붙입니다.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또 과부에게 재앙을 내렸다’고 하는데 암만 생각해도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말씀드리는 장면이 여기가 처음입니다.
기도를 안 했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이 대목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답을 찾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느껴집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곳과 로뎀나무 아래서와 호렙산에서의 세 번에 걸친 하나님께 대한 언사(言辭)엔 일관되게 불만과 회의가 짙게 깔려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태도가 죄인이라기엔 너무 당당합니다.

하나님은 흔히 말하듯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왜 아들을 죽였느냐고 불평하며 항의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어서 안 될 특별한 약속이나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냥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지 ‘왜 이 아이를 죽였느냐’고 항의하거나 ‘또 재앙을 내리시느냐’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당사자인 여인이거나 혹 우리 같으면 따지고 대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엘리야가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래서 안 되는 엘리야가 그런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십니다.
아합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셨고 비와 이슬이 그쳤습니다.
기근이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고통당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입니다.
사렙다 과부도 한 끼 식량을 끝으로 죽음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매 끼니마다 까마귀를 통해 먹이셨으며, 과부의 집에서도 밀가루 통과 기름병의 기적으로 먹이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종이면서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도 사랑합니다.
자신을 매일의 기적으로 보살피시는 하나님이 감사하기 짝이 없지만, 자기 백성은 기근으로 굶주리며 고통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 백성은 굶주리는데 백성의 어른이며 선지자인 자신만 매일 배불리 먹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괴롭습니다.
차라리 백성과 함께 굶주리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종이고 이스라엘의 선지자라면 마땅히 가져야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부모에게는 고통입니다.
자식이 고통을 당하는데 음식이 넘어가겠으며 잠인들 편히 잘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배불리 먹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요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매 끼니마다 기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왜 백성을 위해서는 재앙으로 밖에 내리시지 않으시는가?
아합 왕과 그 추종자들과 백성들까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기에 기근이라는 재앙을 내리신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고작 이 재앙 밖에 달리 하실 방법이 없단 말인가?

하나님은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능력도 가지신 분이 아니신가?(18:37)
이런 생각들이 엘리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을 것입니다.

설사 재앙이 유일한 답이라고 해도, 재앙으로 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작 처벌의 대상인 왕과 그 추종자, 이세벨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끄떡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힘없는 불쌍한 백성들뿐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준 떡과 고기의 출처가 어디겠습니까? 아합 왕의 궁궐이나 바알과 아세라 제단에서가 아니면 어디에 떡과 고기가 있겠습니까? 엘리야의 눈에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인 재앙으로는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왕과 이세벨이 달라집니까, 바알 제사장들이 달라집니까? 그렇다고 백성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만 굶주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아이가 죽었을 때에 마음에 담아두었던 불만을 토로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있어도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아이가 죽자 기회로 알고 하나님께 항의하는 엘리야로 제 눈에는 보입니다. “또 재앙입니까?”

2. 또 숨으십니까?(열왕기상 19:1-4)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알 선지자들을 처단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곧 비가 올 것이니 식사를 하십시오’라고 권하였고, 또 비를 위하여 기도한 후 구름 조각을 보고 큰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준비하라고 권합니다. 자기를 대적이라던 아합 왕이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면서 엘리야는 한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왕이 자기 말을 들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므로,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도래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는 서울과 인천만큼 먼 거리입니다.
엘리야는 폭우가 쏟아지는 그 먼 길을 이 기쁨과 감격 때문에 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사람을 보내 자기를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엘리야는 그녀의 협박에 겁을 먹고 도망할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기도도 해보지 않고 도망하였다는 발상은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히려 엘리야는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네가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확신이 넘쳐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세벨을 처단하십시오.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것을 저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불길한 생각이 스칩니다. 응답이 없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또 잠수(潛水)하셨음을 그는 감지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재앙이나 내리시면서 숨어 계시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진두지휘를 하시며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손을 빼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부득이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고, 로뎀나무 아래서 죽여 달라고 하기에 이릅니다.

형편을 보고 도망하였다는 것을 기도도 안 해보고 상황만 보고 도망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를 그렇게 신앙의 왕초보로 보게 되는 이유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앞뒤도 없이 토막내서 보는 습관 때문입니다. 기도로 죽은 자를 살려내는 엘리야입니다. 불을 내리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 때문에, 제물을 태울 나뭇단에 12동이의 물을 퍼붓는 엘리야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마른 하늘 아래에서 3년이나 오지 않던 비를 달라고 기도하고, 손바닥만한 구름 한 조각을 보고 큰 비가 내릴 것이라고 말하는 엘리야입니다. 이런 엘리야가 그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겠습니까? 그 동안의 엘리야를 보았다면 이런 해석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엘리야가 사태를 낙관했다가 이세벨에게 허를 찔렸다는 해석도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이 싸움은 숫자 싸움이나 세 불리기 쪽으로 끌고 갈 문제가 아닙니다. 산야를 덮은 적진을 유린하는 관운장처럼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홀로 싸웠던 엘리야입니다. 또 갈멜산의 대결 후 며칠이 지난 것도 아니고 지금이 그날 밤일 것입니다. 낙관을 안 했다면 무슨 대책을 세워야했으며, 대책을 세운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쪽으로 가다가는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거나, 초점을 딴 곳으로 호도하는 우를 범하기 십상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떼를 쓰는 이유는 엘리야 자신이나 이세벨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백성들도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이라는 자신의 명령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아합 왕도 하나님의 선지자인 자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왜 입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전방위로 나서셨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에게 큰 소리를 치면서 조롱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전방위 복귀에 대한 약속 때문입니다(18:1). 제단 나무 위에 물을 12통을 붓게 한 것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늘에서 불이 내립니다. 그 불이 나무는 물론 물을 핥았고 흙도 태웠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오지 않던 비가 구름 한 조각 보이더니 폭우가 되어 쏟아집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고 당신의 위대하신 모습을 수면위로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하나님을 바알 선지자도 보았고, 백성도 보았고 왕도 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숨어 계시지 않고 앞에 나타나셔서 이 나라를 다스리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엘리야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아합 왕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백성들은 순종하였으니 이 땅에 재앙이 그치고 복이 내릴 것입니다. 백성은 굶주리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의 이름은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 감격으로 갈멜산에서 이스르엘에 이르는 먼 길을 폭우 속에서도 달릴 수 있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선지자 된 기쁨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백성이 화목하여 복을 받는 나라를 보는 선지자의 기쁨. 그런데 이 기쁨이 순식간에 공수표가 되어 날아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세벨 때문이 아닙니다. 엘리야 자신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제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 분이, 12통의 물을 기름처럼 태우시는 분이, 3년 동안 비와 이슬을 그치게 하시던 분이, 마른 하늘에 구름 한 조각을 뜨게 하시더니 삽시간에 폭우로 마른 땅을 적시게 하시는 분, 이 하나님께서 발을 빼시는 것이 문제지 그까짓 이세벨 따위가 문제이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이세벨 하나만 제거하시면 온전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는 속담처럼,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다 되었는데, 이세벨 하나만 제거하면 다 끝나는데, 여기서 또 발을 빼십니까?

‘당신이 이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이 말은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밭을 후한 값을 주고 사겠다는 데도 거절당하자 속이 상해서 식사를 거절했을 때에 이세벨이 한 말입니다(왕상 21:7).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이방 여인의 눈에는 아합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왕이라는 사람이 백성이 거절한다고 속이 상해 밥을 안 먹어? 그러고도 당신이 왕이요?’ 그녀는 즉각 거짓 증인을 세워 ‘왕에게 땅 팔기를 거절했던 나봇’을 간단히 제거하고 아합 왕에게 그 밭을 차지하게 합니다. 아합의 통치 방법과 이세벨의 통치 방식의 차이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에 대한 엘리야의 불만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야 무능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밖에 못하십니까? 3년 동안 기근을 명하시고, 3년이 지난 지금 그 엄청난 기적을 베푸셔서 백성과 왕의 마음을 돌이키게 해 놓으시고서는 여기서 손을 떼십니까? 여기서 손을 떼시면 이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지 않겠습니까? 이세벨이 득세하면 우상을 섬기는 일이 횡행할 것이고, 왕이 다시 우상에게로 백성 또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아합 왕이 자기의 대적이라던 나의 말을 듣기 시작하였고, 백성들이 모처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하면서 여호와를 부르며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건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어느 세월에 이 나라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3. 내 생명을 취하소서(열왕기상 19:3-8)

하나님께서 발을 빼신 이상 이스라엘에 더 머무를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 이스라엘을 떠나는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하겠습니까?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의 먼 길을 걸으면서 그간의 일을 곱씹어 보면 볼수록 너무 아쉬워서 저절로 탄식이 나옵니다.
‘세상에, 그런 때가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사모하였던가?’
그렇다고 달리 방도도 없는 일, 이 모든 결정권이 하나님 손 안에 있고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들어 가시거늘...

브엘세바에 도착한 엘리야는 사환을 떼놓고 홀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청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넉넉하다는 말은 할 만큼 해봤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일을 할 만큼 해봤습니다.
그런데 더는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즉 얼마나 답답하시고 꽉 막힌 분이신지 이제 알만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목숨을 취하십시오.
하나님의 종이 자살할 수는 없는 일이고,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일을 하자니 속이 터져서 더 이상은 하나님과 같이 일은 못하겠고... 그러니 죽여 달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열조보다 못하다는 말은 이렇습니다.
모세나 많은 선지자들은 성공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하였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다른 선지자들도 나름대로 맡겨진 사명을 다 해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비가 왔지만 그것 뿐, 이뤄진 것이 아무 것도 없잖습니까?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법, 백성들이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며 환호하고, 아합왕이 순한 양같이 고분고분 말을 듣는 이 기회를 놓치면, 백성도 왕도 우상에게로 되돌아갈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 그래서 이쯤에서 손을 떼고 싶으니 나를 죽이십시오. 이런 뜻이 아닙니까?

오래 전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교도소에서 간수가 녹녹치 않은 죄수를 길들이고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으로 땅을 파게 합니다.
가로 얼마, 세로 얼마, 깊이는 얼마. 다 팠을 때에 도로 메우게 하고 다시 파는 일을 반복합니다.
노동의 의미를 빼앗아서 꼿꼿한 죄수를 무너뜨리고 길들이는 방법입니다.

안타깝고 원통하고 착찹하고 아쉽고 분하고... 마음이 상한 엘리야는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죽여 주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죽여 달라는 엘리야를 천사를 통해 보살피십니다.
안마를 해주고 떡과 물을 공급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매달릴 때에는 외면하시더니 이제 죽기를 원하는 엘리야를 보살피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종이 엘리야 밖에 없기 때문일까요?
그래도 쓸모가 있다는 뜻일까요?
‘기도도 안 해보고 도망한’ 한심한 엘리야가 아닙니까?
‘의기양양해서 낙관하다가 일을 그르친’ 교만한 종이 아닙니까?

우리는 너무 일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되어짐’에 대해 놓칩니다. 즉 사람에 대해 놓친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불만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불만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백성을 위한 열정을 가진 엘리야가 귀하고 사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마음이 상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엘리야를 아끼는 마음으로 천사를 보내 보살피시는 것이며 호렙산으로 부르셔서 설득하시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이해시키려고 그를 놓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느냐는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일의 분량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분은 일의 질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엘리야는 아직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고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죽여 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이런 중심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아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설득하셔서 동의를 받아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이해 받고 싶으신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신명기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요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네가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요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의 기쁨은 무엇인가?


요나의 어리석음 

1.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요나
2. 하나님의 자비를 모르는 요나
3. 심판의 메시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요나

요나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오늘의 기도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마음으로 주소서!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는 은혜
하나님의 뜻 및 구원의 섭리를 깨닫는 은혜 




광야 신앙으로 무장하라(신명기 8:1~4)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문명화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문명사회, 문명국가, 문명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매력적입니다. 사람들이 왜 도시로 몰려들까요? 그만큼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촌에는 사람들이 떠나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도시화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도시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도시에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도시는 언제나 매력적이고, 유혹적입니다. 도시로 가야 먹을 것이 있습니다.

도시는 힘을 모으고, 힘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듭니다. 사람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사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이 작동하기 아주 좋습니다.
도시는 사탄이 활동하기에 편리한 무대입니다. 그리고 도시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저항하는 문화로 가득 차있습니다. 세상의 힘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사람이 신(神)이 되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인간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곳이 도시입니다. 도시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사람들은 광야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됩니다. 광야는 잠시 거쳐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광야는 싫지만, 광야를 잘 통과하면, 매우 유익하고, 파워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광야를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반드시 광야를 거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의 길로 몰아가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광야가 없습니다. 광야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광야로 몰아가십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필수코스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수 중의 필수입니다.
최고의 스펙(spec)는 광야의 경험입니다. 다른 것이 다 있다 해도 광야를 체험한 스펙이 없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도 광야를 경험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지내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라비아에서 3년 간 광야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사도 바울을 새롭게 빚으시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광야생활 40년은 매우 유명합니다. 모세의 생애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애굽의 궁에서의 시간, 광야에서의 시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시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광야에서의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광야를 체험하기 이전과 광야를 체험한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다릅니다. 모세의 생애의 한가운데에 광야에서의 시간이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다윗은 왕이 되기 전까지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체험을 비롯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과정 속에 광야가 놓여있습니다.
광야의 체험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왜 광야가 필요합니까?
신명기 8장 전체를 읽어보면, 광야를 경험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무엇일까요?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만을 엄격하게 다루는 이유는 교만해지는 순간,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교만합니까?
하나님을 망각(忘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쉽게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스스로 교만해집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내 힘과 내 재주, 내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내가 노력했기 때문에, 내가 땀 흘렸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라고 말하지만,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생각 속에서 하나님이 없어져버립니다.

교만이 왜 무섭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들고 다녀도,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신명기의 키워드(keyword)는 ‘기억하라(remember)’, ‘잊지 말라(don't forget)’입니다.
이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1세대가 실패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기적을 밟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매일 기적 속에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황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시며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보셨습니다.
모아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대로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보셨습니다.

내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죽습니다.
만나가 오늘로 끝난다면, 내일은 하늘이 닫혀서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면,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냥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벼랑 끝에 놓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지 않으시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매우 절박한 순간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광야의 경험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아찔한 순간입니다.
매우 힘들고 어렵고 까다로운 경험입니다.
모든 것이 시험이고 유혹입니다.

시험에 지면, 졸지에 최악의 순간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합격’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시험의 한가운데에 생존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존의 문제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생존하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옵니다.

처자식이 있고,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고, 신앙생활은 유지해야 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갈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막막합니다. 전세가는 올라가고, 돌려줄 돈은 없고, 집에서 나가야 할 상황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 삶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기미라도 보인다면 괜찮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급할 때 도시에서는 고리대금이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의 레슨(lesson)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훈련입니다.
광야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광야 훈련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의지할 데가 많습니다.
기댈 언덕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광야 훈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보이는 곳은 광야가 아닙니다. 광야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생존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의 특징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급으로 만족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공급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광야 훈련입니다.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공급을 통해 생명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야 광야를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체험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을 경험해보셨습니까? 기댈 언덕도 없고, 도움을 구할 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인생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언제 예배가 가능합니까? 광야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광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빵보다 하나님을 먼저 배우는 곳입니다. 작은 것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시험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될 것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할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삶의 도구로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광야를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볼 것도 없고, 붙잡을 것도 없고, 귀에 들리는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삶은 이와 반대입니다.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고, 붙잡을 것도 많고, 귀에 들리는 것도 많습니다. 만날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도시의 삶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많습니다. 많은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단시켜버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나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내 문제를 풀 수 있는 환경이 주위에 널려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 외에 경험할 것이 없는 환경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곳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관계 맺을 이가 없는 곳입니다. 불안정한 삶의 환경은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광야는 힘들고 위험한 곳이지만, 그곳에서 살아남는다면, 그곳이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광야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의 시간을 보내신 후에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마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우리는 광야 체험을 통해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 많다고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의 삶이 안전합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지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쌓아놓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쌓아놓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열심히 운동한다고 해서 건강이 보장됩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지시지 않으시면, 실핏줄 하나가 터져도 죽을 수 있습니다.

광야 체험을 통해 삶의 무게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존의 문제로 인해 삶이 흔들리지 않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받고, 기다리라고 하시면 기다리고, 주시는 대로 받고, 물질로 인해 휘둘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하게 살아가는 능력을 부여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광야로 몰아가시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시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인생의 위기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려움에서 빠져나가려고 생각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에서 빨리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문제가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려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중심을 문제에 두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놓을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것을 확실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안정된 삶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체험하고,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때, 그 안에서 삶의 안정감이 찾아올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돈이 적다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의 많고 적은 것으로 인해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광야를 통과한 삶입니다.

생존의 문제를 영적으로 극복하고 나면, 우리에게 강력한 힘이 주어지고, 한 수 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생존의 문제를 통과하고 나면, 한 수 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를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존의 문제를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차원이 다른 인생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숨는 것을 훈련하는 것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 훈련을 통해 주리게 하시므로 훈련시키시고, 낮추시므로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시간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많은 거품을 제거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허영심을 걷어내십니다. 교만을 제거하십니다.
살다 보면, 우리 안에 불순물이 많이 생깁니다. 찌꺼기가 많이 생깁니다. 우리는 우리를 과시하려고 하고, 드러내려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왜 상처를 잘 받습니까? 사람들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은 열등감에 빠져 살아갑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열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알아주어야 존재감이 생깁니까? 사람들은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런데 광야는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신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아가 죽는 것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더 이상 주장하고 고집할 수 없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랑말랑하게 만드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혈기가 죽게 만드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만의 뿌리는 매우 깊습니다. 광야가 아니면, 우리의 교만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지 않으면, 교만을 제거할 방법이 없습니다.
광야를 지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습니다. 누가 한 마디만 해도 발끈합니다. 완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했습니까. 목이 얼마나 뻣뻣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몰아가셨는데도 그들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우리를 정금 같게 만드는 곳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광야의 시간을 충분히 보낸 사람은 쓸데없는 일에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광야는 침묵하는 곳입니다. 광야에서는 자신을 증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함을 내밀 곳도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계급장이 다 떨어집니다. 어디에 사는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등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러납니다. 섣불리 드러내는 것은 위험합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성공했거나 자신이 일찍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많이 신경을 씁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팔에 완장을 찹니다. 어깨에 계급장을 붙입니다. 화려한 훈장을 달기 위해 애씁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혈안(血眼)이 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곳이지,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충분히 준비되지 않고 나가면, 다시 광야로 돌아오게 됩니다.

모세도 다윗도 준비를 위해 숨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를 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되지 않은 모세를 광야로 집어넣으셨습니다. 다윗은 오랜 세월 동안 지루할 정도로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자신감이 가득했던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는 인간적인 야심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다윗은 어두운 동굴을 전전했습니다. 아무나 왕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드러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두렵고 위험한 일입니다.
광야는 자아의 죽음을 온전히 경험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충분히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생활입니다. 우리는 숨어있으면서 홀로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매우 심심해합니다. 어른들도 재미를 찾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은 재미없는 것을 반복하고 홀로 지낼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홀로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홀로 지낸다는 것은 무지하게 어렵습니다. 광야가 힘든 이유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말할 곳도 없고, 홀로 있기 때문에 힘듭니다.
홀로 있으면, 처음에는 혼돈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홀로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혼돈 속에 있는 자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홀로 있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준비되지 않은 나와 만난다는 것은 매우 곤욕스러운 일입니다.

홀로 있음의 끝, 고독의 끝은 죽음입니다. 미쳐버립니다. 홀로 있는 광야의 시간을 잘못 보내면, 병들게 됩니다. 우울증, 각종 중독 등은 홀로 있는 시간에 실패한 후유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별짓을 다 합니다. 홀로 있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홀로 있게 하시는 데에는 의도하신 바가 있습니다. ‘혼란한 너에게서 빠져나와 나를 만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독대(獨對)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 계시는, 유일하시고 지존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일대일입니다. 하나님은 청중과 만나시는 분이 아니고, 일대일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있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그룹으로는 하나님을 만나는데, 하나님과 일대일로 독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전(尊前)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의식에는 참여하는데, 하나님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분위기는 느꼈는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단순히 흥분하는 것은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코너(corner)로 모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코너로 모시는 것은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딴청을 피우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붕붕 떠다닙니다. 요란하고 복잡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가려고 합니다.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에서는 멀어져갑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과 친밀하게 보내는 곳입니다. 광야에 있으면, 단절로 인해 고통이 찾아오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그 후에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회복이 일어납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 가운데 자기 존재감을 잃어버렸던 삶에서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해 자존감이 회복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 안에서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매우 외로워서 사람들을 만나는데, 우리가 만난 그 사람은 오히려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상합니다. 위축되고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지존자이시면서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정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자매가 귀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는 그 형제를 만나고 나면,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그 형제와 계속 만나면 안 됩니다. 그 형제를 만나고 나면, 자신이 못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집안 배경이 대단하고, 사회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의 자존감이 상승하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질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지존자이시면서 우리에게 따뜻하게 다가오셔서 마치 연인이 품어주는 것처럼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홀로 지낸다는 것은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도록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절대고독, 외로움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 찼던 자아중심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후에는 사람에게 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스럽습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레슨을 경험하게 됩니다.

셋째, 광야는 단순하게 사는 법을 깨닫는 것

광야는 삶을 정리하게 합니다.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합니다. 충분히 비워내게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금세 복잡해집니다. 도시의 삶은 매우 복잡합니다. 삶이 복잡해지면 힘듭니다. 우리가 가려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인생이 힘들어지고 무거워집니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누르고 있는 것들을 수시로 정리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광야로 몰아가십니까? 우리의 삶을 가볍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끌어 모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삶이 힘듭니다.
그런데 광야로 가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삶이 가벼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광야의 삶을 살아가게 하셔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게 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가볍게 하십니다. 이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는 삶을 살면 안 됩니다. 목적을 위해 살 수 없게 만드는 무거운 짐들을 벗겨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삶이 가벼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삶이 가벼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필요 없는 것을 위해 일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모으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투쟁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별것 아닌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치렁치렁 감고 살아가게 됩니다. 단순해지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면, 바쁘기만 할 뿐입니다. 단순한 삶을 통해 삶의 군더더기가 떨어져나갈 때, 삶이 명료해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아가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단순해져야 합니다. 왜 머리가 복잡해집니까?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궁극적인 것이 아니면,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줄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십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한 수 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에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숨기십니다. 완전히 감추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잊힌 존재처럼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시면,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코너로 몰아가십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몰아가셔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우리의 삶의 무거운 것들을 다 내려놓게 하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삶이 무겁습니다.
왜 염려하고 근심합니까? 왜 우울합니까? 왜 절망합니까? 세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으세요. 내려놓아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내려놓게 하시는데, 우리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죽는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광야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의도적으로 광야를 찾아갑니다. 여기서 ‘광야’는 지리적인 광야가 아니라, 상황적인 광야입니다.
광야는 자신도 모르게 쌓인 노폐물을 긁어내어 삶을 맑게 하고, 힘 있게 만드는 곳입니다. 세상에 대한 포만감으로 영적 기력을 잃었을 때, 영적 허기를 채우려면, 광야로 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광야가 싫었지만, 광야를 체험해본 사람은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가장 원색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를 나답게 만들었던 광야를 일부러 찾아갑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광야와 같이 만들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을 갖습니다.
삶에 노폐물이 쌓이고,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언제든지 광야로 가야 합니다.

도시의 한가운데서도 광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집착하던 것에서 떠나는 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광야를 만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곡기(穀氣)를 끊어버리고 금식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도시 가운데서도 언제든지 자신을 광야로 몰아가야 합니다. 내가 의존하고 있는 것, 내가 붙들고 있는 것,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 내가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 집요하게 매달렸던 것들을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광야를 찾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억지로 광야로 몰아넣어버리십니다. 그때는 좀 더 혹독해집니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들로부터 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붙들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휴대폰도 놓아버리세요.

광야는 힘들고 외로운 곳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내모십니다.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쳤습니다. 다윗도 쫓겨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광야는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잘 보내면, 한없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무엇인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면, 지금 광야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지 마세요. 그러면 광야에서의 생활이 길어질 뿐입니다. 그것에서 하나님의 레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생애 가운데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편에서 광야를 ‘나의 피난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가장 위험한 곳이지만,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광야는 다윗에게 피난처였고, 피난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순간, 우리의 삶은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로부터 지켜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광야에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되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육체적으로는 편하지만, 영적으로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적으로 세상적으로는 환경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렸는데, 알고 보니 그때가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인생에서 가장 혹독하고, 가장 힘든 순간이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고, 세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있지만, 가장 곤고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광야는 피난처가 되고, 피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라고 고백했습니다(시 61:3, 142:5).
광야에서의 삶이 힘들고 위험했지만, 그곳이 없었다면, 다윗은 왕이 될 수 없었고, 세상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광야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힘들고 의지할 것이 없습니까? 그러나 힘든 것을 빨리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나가야 할 광야라면, 피하지 마십시오. 광야의 경험이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만 누리는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첫째, 강해집니다.

광야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광야를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대충 하던 사람도 광야를 경험하고 나면, 파워가 생깁니다. 이전에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도 뒷걸음질 쳤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신앙은 늘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경험한 이후에는 그런 문제들이 더 이상 삶의 유혹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단단한 근육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는 말씀이 자신의 삶에 진리로 와닿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의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로 인해 유혹 받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뚫고 나아가게 됩니다.

광야를 경험하고 나면, 힘이 생깁니다. 광야를 체험하고 나면, 광야를 체험하지 않은 사람을 이끌어내는 리더(leader)가 됩니다.
생존의 문제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생존의 문제를 이긴 사람이 리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존의 문제에 끌려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진리로 생존의 문제를 극복한 사람이 이 세상을 진리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생존의 문제로 인해 허덕이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선포하며 그 말씀이 진리임을 확인시켜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삶이 풍성해집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퍽퍽합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나고 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다가옵니다. 광야를 통과한 이후에 가나안이 다가옵니다. 가나안이 그냥 주어지면, 가나안은 비극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이후,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예수님의 공생애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광야 생활 40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40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가 우리에게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이 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승리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병이어를 통해 5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키신 주인공이십니다.

광야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풍성해지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광야를 경험하지 않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면, 그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떡이 아니라, 진리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심으로 풍성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광야를 경험해야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 이후에 쓰임 받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인생의 광야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광야를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는 도구가 됩니다.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무게가 옮겨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광야는 피할 수 없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광야는 다가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광야의 피해자입니다. 광야에서 죽어갑니다.
출애굽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지 못하고, 여전히 광야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누가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광야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그들을 건져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광야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4).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광야에서 꽃이 피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직전까지 광야는 외롭고 두렵고 불안한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방황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광야에서의 방황은 끝납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방황합니다. 광야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정신을 잃습니다. 죽는다고 고함치고, 악담을 합니다. 하나님과 주변 사람을 원망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술술 풀리지는 않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무엇인가 잘 풀리지 않고,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이 올 때, 절망하지 마세요. 어렵고 힘든 순간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그 순간부터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도시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경이롭고, 강력하십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막에 길을 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도시에서 먹을 것을 먹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의 삶이 광야로 몰려있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광야가 다가온다면, 두려워하지 마세요. 광야를 거부하지 마세요. 광야를 피하지 마세요.
은밀히 말하면,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광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광야는 힘든 곳이지만,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함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십니다.

도시의 삶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희미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광야를 통해 깊어질 때, 광야는 축복의 장소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길들여진 영혼이 하나님께 길들여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환경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만 길들여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때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빚으시는 곳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피할 곳이 아니라, 반겨야 할 곳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광야가 없으면,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되찾게 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랑은 강력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독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광야의 신앙으로 무장하여 전천후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독특한 영적 세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곳 광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광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광야를 통해 여러분들이 강력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 광야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이끌어내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폴 브래드쇼라는 사람이 릭 워렌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인터뷰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들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
둘째, 이 세상에는 고난과 불행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
셋째, 삶의 목적은 부나 명예나 행복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성결의 인격이고 나눔의 삶이라는 것

“사람들이 저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한 마디로 삶의 목적은 영원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Life is preparation for eternity.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날 저의 심장은 멈출 것이고 저의 육체는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세상에 60년 또는 100년을 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수 조년 또는 수 백만 조년을 영원 안에서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을 위해 몸을 푸는 것이고 의상 입기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warm-up act - the dress rehearsal.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원 안에서 영원히 계속할 일을 지금 세상에서 연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다음,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문제들의 연속입니다.
Life is a series of problems.
우리는 지금 하나의 문제 안에 있든지, 하나의 문제로부터 벗어났든지, 또는 다른 하나의 문제 안으로 들어가든지 합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안보다는 우리의 인격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보다는 우리의 성결한 삶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God is more interested in your holy life than in your happy life.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행복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의 성장입니다.

지난 해는 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해였지만 제 아내가 암에 걸리는 가장 힘든 해했습니다.
저는 인생이 기차 길의 두 철로와 같다고 봅니다.
우리의 삶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제 아내를 치유하시거나 편안하게 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인격을 강하게 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을 주셨고, 간증을 주셨고, 그 녀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 해 제 책이 1500만부나 팔려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고 갑자기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과 명예를 주시는 것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돈의 수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새 것을 무얼 사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작년 중반부터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를 양성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병자를 돌보고 차세대를 교육하기 위해서 ‘평화 기획’(Peace Plan) 이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소유를 위해 살려고 하는가?’
‘인기를 위해서 살고 있는가?’
‘압력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죄책감과 증오와 물질주의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 제 침대 옆에 앉아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 만일 제가 오늘 아무것도 한 일이 없더라도 당신을 더 알게 되기를 원하며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 땅에 두신 것은 단지 할 일들의 목록(to-do list)을 완수하라고 하심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 보다는 나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He is more interested in what I am than what I do.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인적 존재들’ (human beings) 이라고 부르지 ‘인적 행동들’ (human doings)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아주, 아주 귀한 고백들입니다. 너무 긴 광고를 했지만 아주 유익한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고난과 불행이 있기 마련입니다. 삶의 목적은 부나 명예나 행복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성결의 삶이고 나눔의 삶입니다. 어떻게 미국에서 살고 있는 미국 목사님이 이런 귀한 고백을 했는지 놀랍습니다.

지난 주일 "욥의 인내와 결말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주일 욥에 대한 설교를 축복해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받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전 주일 히스기야에 대한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우리는 바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바로 느낄 수도 있고, 바로 설교할 수도 있고, 바로 설교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노인들 중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살고 싶은 소망이 끊어지고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뿐만은 아닙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오래 전에 여의도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여러 가지 일로 너무 힘이 들어서 건물 꼭대기에서 떨어져서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 때가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도 너무 힘이 들어서 죽고 싶어서 수면제를 많이 먹은 때가 있었다고 얼마 전에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19:4). 사실 이 비슷한 말을 욥도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을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이다.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요16:8,9). 이제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하려고 합니다.

  첫째, 엘리야가 너무 큰 일을 한 것이 절망에 빠진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엘리야만큼 대단히 큰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모든 것을 태워버렸습니다. 엘리야는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 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18:36-40). 엘리야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엘리야를 거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또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 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18:42-46). 엘리야는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의 승리와 인기는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엘리야를 거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열왕기상 18장 마지막 부분이 기록한 엘리야의 승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9장 첫 부분은 갑자기 엘리야가 죽기를 구하는 극심한 절망에 빠진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렇게 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나 사도라도 너무 큰 일을 하고 너무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자만에 빠질 수도 있고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고 그리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너무 큰 승리를 거두고 너무 큰 인기를 얻을 때 자만에 빠지게 되고 허탈감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절망에 빠지게도 됩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할 때 너무 잘 될 때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극히 겸손해야 합니다. 릭 워렌 목사님처럼 소박하고 검소하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둘째,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에 기가 질려서 절망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아합 왕은 감히 엘리야에게 대항하지 못했는데 그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대항하며 협박까지 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왕상19:1-2). 아합 왕은 기가 죽어서 엘리야에게는 한 마디도 못하고 집에 가서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고해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악을 하며 엘리야에게 대들었습니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여자는 약하기도 하지만 아주 강하고 독합니다. 아주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그만 이세벨의 독기에 질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너무 큰 승리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져 있었는데 이세벨의 독기에 기가 질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왕상19:3-4). 멀리멀리 광야에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여자의 독기가 무섭기는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무서워서 도망을 쳤으니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와를 꼬여서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게 했고, 기생 들릴라를 꼬여서 삼손으로 하여금 머리 털을 깎게 했고, 밧세바를 사용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죄를 짓게 했고, 엘리야로 하여금 광야로 도망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한 참 도망가다가 로뎀 나무 아래 앉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하늘의 소낙비는 고사하고 마실 물 한 모금도 없었습니다. 뜨거운 모래 바람만 불고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화려했던 모든 승리는 한갓 꿈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것이 캄캄하게 보였습니다. 앞으로 가면 사막이요 뒤로 돌아가면 이세벨의 군대가 자기를 잡으려고 달려올 것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죽기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사람은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계집 종 앞에 선 사도 베드로의 모습도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했고 이세벨 앞에선 엘리야의 모습도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이와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죽기를 구하는 절망에 빠진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입니다. 히스기야가 항복할 때, 욥이 항복할 때, 엘리야가 절망에 빠져서 죽겠다고 탄식할 때, 바로 그때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갈멜산 위에서도 불로 그리고 비로 응답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엘리야를 찾아오신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는 성자 예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때는 불로 비로 응답하셨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친절하게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손으로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떡과 물을 먹여주셨습니다. 마치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친절하신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숫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왕상19:5-6).
  우리가 승리할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도 감사하지만 우리가 병들었을 때 우리가 쓸어져서 죽어갈 때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병든 몸과 죽어가는 몸을 어루만져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은 너무너무 값지고 너무너무 눈물겹고 너무너무 감동적인 체험입니다. 병들고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자기를 안아주시고 자기의 입을 맞춰주시는 아버지를 만난 체험은 탕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값지고 가장 눈물겹고 가장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지금 엘리야는 그와 같은 체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정신 없이 하나님의 사자가 어루만져주고 먹여주는 떡과 물을 받아 먹고 잠시 후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심령이 너무 절망하고 마비되어서 주님께서 오신 것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만 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오셔서 또 어루만져주고 또 떡과 물을 먹여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 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7,8).
  저는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새로 태어나는 엘리야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지극히 높아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지극히 낮아진 겸손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체험한 모습이었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어루만짐의 손을 체험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셔서 하늘로 데려가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셔서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의 절망도 필요합니다. 갈멜산 위에서 승리하여 바알의 선지들을 죽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이고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 주 동안 비슷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항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욥이 항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엘리야가 절망했을 때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절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면 됩니다. 떡을 먹여주시고 물을 먹여주시면 됩니다. 요사이 피곤하고 지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죽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가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어루만져 주시는 때입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강변의 모든 성도들을 어루만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살을 먹여주시고 피를 먹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삶이 주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달려가도 피곤치 않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에게 주셨던 친밀한 은혜, 어루만져주시는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모두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도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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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
2. 웃시아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지자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마태복음 9:13, 로마서 9:25, 베드로전서 3:10-12)


요엘(Joel)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1. 요엘서는 그 책의 저자가 선지자 요엘이라고 한다( 1:1).

2. 저작 연대는 주전 835-800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기록 목적은 유다는 어마어마한 메뚜기 떼에 의해 황폐화됩니다.
메뚜기 떼의 침략은 곡물, 포도밭, 정원 및 나무 등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요엘은 메뚜기를 통해 행군하는 인간 군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이 모든 파괴를 유다의 죄로 인해 그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주요 사건을 조명하여 줍니다.
하나는 메뚜기의 침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이 책에 대한 초기의 성취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것처럼 오순절날에 발생한 사건과 연관됩니다.

4. 핵심 구절
요엘 1: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5. 요약
메뚜기의 끔찍한 재앙 뒤에는 그 땅 전체에 임하는 심각한 기근이 뒤따릅니다.
요엘은 이러한 일들을 촉매제로 사용하여 유다에게 경고의 말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신속하고 온전하게 회개하지 않는 한, 적군은 메뚜기처럼 땅을 황폐화시킬 것입니다.
요엘은 모든 백성과 그 땅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금식하며 겸허해질 것을 호소합니다.
그들이 반응한다면, 그 나라에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이 새롭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열방이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와 비교할 때 끔찍한 메뚜기 떼들은 고작 하루살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요엘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날인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노와 능력과 거룩의 속성을 계시하시는 날이며, 그분의 원수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첫 번째 장에서 주의 날은 역사적으로 그 땅에 임하는 메뚜기의 재앙으로 체험됩니다.
2장 1-17절은 요엘이 메뚜기 재앙과 가뭄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여 회개에 대한 부름을 새롭게하는 과도기 장입니다.
2장 18절-3장 21절은 종말론적인 용어로 주의 날을 묘사하고, 회개에 대해서는 육체의 회복(2:21-27)과 영적인 회복(2:28-32), 그리고 국가적인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 답변합니다(3:1-21).

6. 예표

구약이 개인적인 죄이든 국가적인 죄이든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예표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회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를 했을지라도 그들의 회개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행함에 제한되었습니다.
그들의 성전 제물은 십자가에 달려 단번에 영원히 바쳐질 궁극적인 희생의 그림자였습니다(히 10:10).
요엘은 주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욜 2:11)고 말합니다.
그 대답은 우리 스스로는 그런 순간을 결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심판 날에 대해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7. 적용

회개가 없다면 심판은 가혹하고 철저하며 확실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뢰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기 위해 자연, 슬픔 또는 다른 일반적인 사건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와 은혜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확고한 계획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죄와 그분의 완전한 의를 교환해 주셨습니다(고후 5:21).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밤의 도적같이 신속히 올 것입니다(살전 5:2).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붙들어야 우리는 주의 날에 있을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오바댜(Obadiah) :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



1. 오바댜는 그가 살고 있던 유다와 가장 가까운 나라인 에돔 족속을 향한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는 책이다.

2. 배경

오바댜의 예언은 유다 백성이 바빌로니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주전 587년과 538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전해졌다.
이 예언은 사해 남단에서 남남동에 위치해 있던 에돔이라는 나라를 향하여 그 멸망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동안에 이스라엘은 에돔을 지배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에돔의 영토는 그 소유권을 둘렀고 자주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아카바만으로 통하는 주요 교역로가 에돔의 영토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전 4세기경에는 이들이 페트라를 그들의 수도로 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때 많은 에돔인들이 이두메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많은 에돔인들은 에돔 땅에 그대로 남아서 나바테아인들과 동화되어 그대로 살았다.

3. 내용

오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4. 구조

제1단원(1-9절)에서는 사탄적 삶을 사는 에돔의 오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선포(1-4절)와
이 선포의 성취 역사(5-7절)가 언급되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이 예고된다(8-9절).

제2단원(10-15절)에서는 에돔이 저지른 죄악의 역사적 실례를 통하여 에돔의 지혜의 부정적 실체를 고발하며, 에돔을 포함한 모든 민족들이 그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징벌을 받을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다.

제3단원(16-21절)에서는 에돔의 사악함과 무지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선민 이스라엘의 승리와 회복, 공의의 하나님 여호와의 주권 선포와 하나님의 통치 등을 함축적으로 전개하며 삼단 양식을 마감한다.

5. 제목

구약의 선지서 중 가장 짧은 책인 본서의 표제는 다른 선지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글 개역 성경의 표제 '오바댜'는 구약 히브리 원전의 표제 '오바디아'의 음역으로, 그 뜻은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이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에서도 히브리 원전의 표제를 음역한 '옵디우'와 '압디아스'를 본서의 표제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따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도 '오바디아'를 본서의 표제로 사용하고 있다.

6. 저자와 기록 연대

본서의 저자가 '오바댜'라는 사실은 본서 자체의 증거(1:1)만 있을 뿐 성경의 다른 내증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유대인들의 전승과 교부들의 증거 및 종교 개혁자들의 증거 등의 풍부한 외증으로 초대 교회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논란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왔다. 본서의 기록 연대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한 직후인 B.C. 586년경으로 볼 수 있다.

7. 신학적 주제

오바댜의 예언들은 묵시를 통해 오바댜에게 주어졌다.
거기에는 풍부한 신학적인 주제들이 담겨 있다.
10-14절은 형제관계와 인간관계 속에 내재된 의무들에 관한 것이고,
3-4,8절은 열방들의 죄악과 오만을 다루고 있으며,
15-16,21절은 여호와의 날에 최종적으로 드러날 모든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한다.
15절은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들을 다루고
17,21절은 남은 자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와 같이 오바댜서는 민족주의적이고 보복적인 냄새를 풍기는 편향된 냉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의 몇몇 기본적인 신학을 담고 있는 책이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0-31).
하나님의 은혜에 복종하고 응답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나, 그분의 은혜를 교만하여 져버린 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인 것이다.

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