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Jonah) 비둘기 07-24-2023(월) /



요나서

요나서구약성경 네비임 소선지서 중 한 권이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나는 니네베의 파괴를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으나 이를 벗어나기 위해 위해 보내지만 이 신성한 사명을 벗어나려 시도하다가 결국 받아들인다.

유대교에서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성찰을 심어주기 위해 욤키푸르 오후에 읽는 하프타라로 남아 있다.
코란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서 여로보암 2세 통치기에 요나가 등장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 통치기인 기원전 793-753년 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배경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에 살았던 여로보암 2세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왕하 14:23-29).
일찍이 앗수르는 근동에서 군림하는 자리를 차지하였고 예후로부터 조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앗수르)는 아람 족속들을 쳐부순 다음에 내부적인 다툼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대제국이 되기를 희망하던 아시리아가 잠시 쇠퇴해진 틈을 타서 여로보암 2세는 일찍이 아람에 속해 있었던 영토를 장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다른 예언서에서 지금까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죄악이 극심했기 때문에 호세아아모스를 보내어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다. 요나는 후일에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적들을 돕는 일에 자신이 쓰여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니느웨는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로부터 약 55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티그리스강 동쪽 제방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니느웨는 큰 성읍으로서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외곽의 성벽과 내곽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보호를 받고 있었다. 요나가 이렇게 난공불락의 도시처럼 보이는 철옹성에 도착하기 전에 두 가지의 재앙이 이 도시를 덮쳤고(B.C.765과 759), 이 일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으로 받아들여졌고, 또 759년경에 왜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에 속히 응답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신행일치(信行一致)
언행일치(言行一致)

신행일치 (faithfulness)
언행일치 (word and deed match)

요나서 – 개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요나서 2:9
표제: 이 책은 주요 등장 인물인 요나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되었는데 그 의미는 “비둘기 -dove”라는 뜻이다.
요나 즉 비둘기라는 말은 아가서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아 2:14; 5:2; 6:9)

저자 : 요나서 자체에는 요나가 저자라고 명시된 구절이 없지만 그가 저자라는 사실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목적 : 주권자이신 야웨(YHWH)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놀라운 자비로 수 많은 죄인들을 쫓으시는 구원하심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으로 도망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물에 빠져 죽게될 이방 선원들, 그리고 악한 니느웨 성읍 시민들을 찾으신다.
배경 : 이스라엘이 남유다(Southern Kingdom)와 북이스라엘(Northern Kingdom)로 갈라지고 나서 쇄약했던 북이스라엘이 다윗 이후에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BC 780-760 년 경에 요나 선지자가 활동했고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로는 아모스가 있다.

이 당시 왕은 요아스의 아들인 여로보암 2 세였다.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신 니느웨 성은 이스라엘 주변 강국 중의 하나였던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있는 강한 나라였으나 당시 내부적 분열과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쇠약해 있었고 이 때에 여로보암 2 세가 앗수르 주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것은 요나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일이다(왕하 14:23-29).
그리고 40년 뒤에 BC 722 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다.
이 당시에 영토 확장과 타국들의 쇄약을 통하여 강국이 되고 나라와 백성들도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기에 다윗 이후에 제 2 의 전성기라(Golden Era, Silver Era)고 불린다.
그러나 풍요로움 속에 백성들을 하나님을 떠났고 우상 숭배가 넘쳐나던 상황이었다.
외부적으로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부패하여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시대였다.
자비의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회개와 회복을 선포하셨으나 백성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로 보내신다.
자비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귀한 메세지가 있다.

중요 등장 인물 : 요나, 이방 뱃사람 (선장, 사공), 니느웨 사람들 (백성, 왕, 대신) –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어떻게 반응 하는가?

중요한 테마 (THEMES)
• 하나님의 주권 (Sovereignty) : 폭풍 (1:4, 1:15), 제비 (1:7), 물고기 (1:17, 2:10), 구원 (2:9), 넝쿨 (4:6), 벌레 (4:7), 동풍 (4:8)
• 기도 : 사공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1:5), 선장의 부탁 (1:6), 무리가 여호와께 (1:14), 요나의
기도 (2:1), 니느웨 백성들의 기도 (3:8), 요나의 분노의 기도 (4:2-3)
• 여호와의 말씀 : 요나에게 임함 (1:1), 두번쨰로 요나에게 임함 (3:1),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 (3:4-5)

1:1-2:10.  도망하는 요나, 구원하시는 여호와
  1:1-17.  반항하는 선지자와 쫓으시는 하나님
  1:1-3. 하나님의 부르심에 도망하는 요나
  1:4-17.  하나님의 쫓으심에 물에 빠지는 요나
2:1-10. 기도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2:1-6a.  요나의 고통과 하나님의 응답
 2:6b-10.  요나의 감사와 하나님의 구원
3:1-4:11. 선포하는 요나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10. 선포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3. 부르시는 하나님과 순종하는 요나
 3:4-10. 선포하는 요나와 회개하는 니느웨
4:1-11. 삐진 선지자와 가르치시는 하나님
 4:1-4.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질문
 4:5-11.  죽음을 구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자비

(1:1-2:10) 도망하는 요나, 구원하시는 여호와
(1:1-17) 반항하는 선지자와 쫓으시는 하나님
(1:1-3) 하나님의 부르심에 도망하는 요나
(1:4-17) 하나님의 쫓으심에 물에 빠지는 요나
(2:1-10) 기도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2:1-6a) 요나의 고통과 하나님의 응답
(2:6b-10) 요나의 감사와 하나님의 구원
(3:1-4:11) 선포하는 요나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10) 선포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3) 부르시는 하나님과 순종하는 요나
(3:4-10) 선포하는 요나와 회개하는 니느웨
(4:1-11) 삐진 선지자와 가르치시는 하나님
(4:1-4)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질문
(4:5-11) 죽음을 구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자비




구약의 대다수의 선지자들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했다면, 요나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합니다.
특히 요나는 본서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객관화시키는 특별한 이야기식 서술을 통해 이스라엘의 왜곡된 선민 의식을 질타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선지자적 사명을 무시하고 이방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할 때 하나님은 기어이 이방 전도자로 세웠습니다.

1:1-3.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의 의도
1:4-10. 바다의 풍랑으로 인하여 선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요나
1:11-17. 바다에 던져진 요나로 인해 풍랑이 잔잔해짐

요나는 적대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선지자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망합니다.
이와 같은 요나의 행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불러왔고 요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큰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예정하신 것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요나가 선원들에게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바다와 육지를 지은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라고 소개합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당시의 고대 근동은 종교가 매우 융성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가정의 신을 믿고 있었으며 국가도 바알이나 아세라, 밀감을 비롯한 국가의 수호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세상을 다스리는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폭풍의 원인을 신의 분노로 생각한 것도 이런 사상적인 배경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여호와를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요나의 신앙은, 여호와야말로 모든 신들을 지배하는 참된 신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나의 이러한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으며 그 하나님을 피해 도피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회개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신 지식은 자신과 자신의 허물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며 인간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또한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인간의 지혜나 힘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신 지식은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판단하고 계획할 때 우선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 여부를 결정합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한 요나가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었듯이,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7월 24일(월) 요나서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낯(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But Jonah ran away from the LORD and headed for Tarshish. He went down to Joppa, where he found a ship bound for that port. After paying the fare, he went aboard and sailed for Tarshish to flee from the LORD.

요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창세기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구약의 대부분 선지자들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하여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이방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던 요나가 배 밑창에 누워 잠이 들었을 때 갑작스런 바다의 거센 풍랑에 의해서 선원들은 요나를 깨우며 네가 믿는 신을 찾아 도움을 구하라고 합니다.
요나는 이러한 풍랑의 원인이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임을 깨닫고 풍랑을 잔잔케 하려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요나를 풍랑을 위한 제물로 던졌을 때 거센 파도도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에덴  동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아야 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시므로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 3:8).

선지자 요나도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할 때 바다의 풍랑으로 요나를 찾으셨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나가려면 언제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에 따른 회개와 더불어 새 생명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기쁨이란 영어 단어 죠이(JOY)에서 신뢰하는 믿음의 순서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먼저 예수님을 기쁘게 하라(Jesus)
둘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라(Others)
셋째는 네 자신은 가장 마지막에 기뻐해야 한다(Yourself)

어렵고 힘든 인생길에서 갑작스런 풍랑을 만났을 때 혹시 내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가를 살펴본 후에 하나님의 궤도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으로 세워지기를 다짐합시다.


보통 사람은 평생 동안 약 10만 여명의 사람과 만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첫 인상(first impression)이 주는 영향은 상당히 큽니다.
첫 인상이 어떠냐에 따라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첫인상에 대해 연구했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알버트 메라비안의 연구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언어적인 요소가 7%, 외모, 표정, 태도 등 시각적인 요인이 55% 그리고 목소리등 청각적인 요인이 38%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칙은 첫 만남에서도강하게 나타나는데 누군가를 만날 때 웃는 얼굴을 하면 그 웃는 모습과 웃음소리가 좋은 첫인상을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인 대니얼 맥닐이 쓴 [얼굴]이라는 책을 보면 가장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는 재판정에서도 판사들이 미소를 짓는 피고인에게 더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판결이 내려져야 하는 법정에서도웃는 얼굴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요즘 현대인들은 첫인상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첫인상을 만들까? 고민합니다. 호감가는 첫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재정을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첫 인상이 좋지 않았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여기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낯을 피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는 선지자 요나가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첫 인상은 도망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습니까?
요나에게 큰 성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기별을 전하라고 하는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성 백성들은 ‘악독’하기로(욘 1:2)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한테 가서 회개의 기별을 전하라고 하니 그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낯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얼굴’이라는 뜻과 함께 남을 대할 만한 ‘체면’, ‘면목’이라는 뜻이 같이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을 볼 체면, 면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기로 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깊이 더 깊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바로 내려가고 항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배로 내려갑니다.
한글 성경에는 배에 올랐다고 되어 있지만 유대적 표현은 배로 내려간 것입니다.
배에서도 아주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점점 더 하나님의 얼굴을 멀리하며 죄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렇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내려가서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의 낯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대풍을 보내사 잠자고 있는 요나를 깨우는 것입니다.
요나는 대풍이 밀려온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욘 1:10)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를 찾으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찾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볼 낯이 없어서 도망하는 요나를 향하여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여기 하나님께서 아가서의 기록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얼굴 좀 피하지 말고 네 얼굴 좀 보자.”
선지자 요나, 그의 이름 ‘요나’의 뜻이 바로 ‘비둘기’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선지자 요나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나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나에게 지워지는 것 같은 부담이 밀려 올 때우리는 하나님 볼 낯이 없어서  피하여 도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






하나님의 낯 곧 정체성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하나님,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고, ‘너는 어디(존재의 정체성)에 있느냐?’를 물으시는 하나님을 사람의 행위를 보시는 분으로, 무엇을 해야 은혜 주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니느웨로 가는 대신 주님을 피하여 욥바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종들도 그들의 사명(의무)에서 뒷걸음 칠 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요나는 그의 행동에 의하여 무엇을 잃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행복한 하나님의 사랑의 즐거움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신자(믿는 자)의 도리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비록 온 세상이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한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즉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키잡이(pilot) 없는 바다에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몹시 신음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어디에 가셨습니까? 제가 어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피할 만큼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이 대가는 너무 큽니다. 제가 주님의 임재 안에서 기뻐하기 위하여 주님께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또한 요나는 마음의 모든 평안을 잃었습니다. 죄는 곧 신자의 위로를 파괴합니다. 요나는 그가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위로를 잃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언약)을 요구(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 나는 나의 사명 수행의 과정에서 이 고난을 만났습니다. 이 고난의 시간 내내 나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는 그 자신의 결실을 거두고 있었습니다.[즉 자기 행동에 대한 보수(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자신의 의지(뜻)로 충만했습니다.(즉 하나님의 뜻을 전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가 모든 파도와 그대의 머리 위에 구르며 소용돌이치는 큰 물결들(파도들)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요나 같이 행동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그대 자신을 하나님의 일과 뜻에 즉시 맡기는 것보다 그것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마침내, 요나는 그의 때를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시 요나는 다시스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겨루는 것(싸우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주인과 객의 위치가 바뀐다.'는 말로서 사전에는 '사물의 경중이나 선후관계나 완급 따위가 서로 뒤바뀐다는 의미'

주인은 주인의 자리나 입장을 지켜야 하고 객은 객의 자리와 입장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 생활에서는 그 '당연한 순서가 뒤바뀌는' 부조리하고 몰상식한 일들이 흔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인과 객의 위치가 바뀌는' 일은 비단 사회생활뿐 아니라 종교생활에서도 발생합니다.

종교란 '신과 인간과의 관계 정립'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신이 '주인'이 되고 인간이 '객'이 되어야 마땅한 '선후관계'를 뒤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곧 '인본주의(人本主義) 종교'입니다.

사실상 철두철미하게 '신본주의(神本主義) 종교'인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교들은 다 '인간이 주인이 되어 있는 인본주의 종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신을 찾는 종교'는 예외가 없이 '주객전도의 인본주의 종교'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인본주의는 단지 우상 종교에서뿐 아니라 놀랍게도 바로 기독교 안에까지 만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아니라 오로지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하여'에 머물러 있는 교회나 목사나 교인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옳은 생각이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신앙생활이란 철두철미하게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되어야 한다고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소명하시어 선지자로 사용하실 때에 시종일관 당신께서 홀로 모든 주도권을 행사하고 계셨음을 속속들이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왜 참된 신앙생활은 반드시 '신본주의 종교'가 되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교는 '인간의 구도(求道)'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주도하는 종교입니다.

1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1a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고 했습니다.

요나서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당연히 '요나'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 1절의 말씀은 '요나'가 '주어'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여호와의 말씀"이 주체로, "요나"는 그 말씀이 "임하게" 된 객체로 나옵니다.

즉 이 요나서는 그 첫머리에서부터 누가 '주인'이며 누가 '객'인지 그 '선후관계'를 이처럼 뚜렷하게 명시해 놓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가 "여로보암" 왕과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가드헤벨'이란 지명을 통해서 요나가 스블론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북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당시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동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그저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고만 했습니다. 당시에 '누구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오늘날 어떤 사람 이름의 '성(姓)'에 해당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는 말은 그냥 '이름 석 자'로만 되어 있는 소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기 전'까지 요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별 의미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그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놀고 있던 백수건달이었든지 아니면 무슨 다른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던 성실한 사회인이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일단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요나를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이 요나에게 임한 바로 그때부터 이전에는 그저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 불과했던 그가 '하나님께서 파송하시는 선지자'로 순식간에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말 번역에는 없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1절의 첫 시작이 '또'라는 접속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발동됨으로써 '선지자를 소명'하시는 일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예외가 없이 반복되고 있는 패턴인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 쪽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선지자가 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항상 하나님 쪽에서 당신께서 사용하실 자를 말씀을 통하여 '부르셔서 명령을 내리시고 보내심'으로써 선지자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요나 역시 '스스로 도를 닦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선지자'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서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종교인들은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구도(求道)'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이 소위 득도라는 것을 하기 위하여 명상을 하고 사람이 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 곧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이 아니라 사람이 '주체'가 되고 '시작'이 되고 있으니 갈 데 없는 '주객전도의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신본주의 신앙'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가 됩니다.

'말씀이 임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신자'가 되고 '직분자'가 되고 '전도자'가 됩니다.

아니 태초에서부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창조했으며, 오늘날 역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닫게 하고 '생의 목적'을 바로 찾아서 출발하게 만들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기 전의 '나'라는 존재는 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저 '이름 석 자'밖에 없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 인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기 전의 나'는 입시지옥, 취업경쟁, 생활전선에 찌들던 고달픈 인생에 불과했지만, '복음의 음성이 내게 임함'으로써 이제는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기쁨만 충만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오기 전의 나'는 무력한 술꾼 남편, 바가지나 긁는 아낙네, 욕심쟁이, 놈팡이, '제 잘난 멋으로 살던 놈'에 불과했지만, '소명의 명령이 내게 임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거룩한 도구와 의의 병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 당신의 택자를 부르시는 말씀으로 먼저 찾아와 주신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비로소 '하나님과 사귀는 그의 자녀', '하나님을 따르는 그의 백성'이 되었음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교는 '인간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최고의 사랑을 구현하는 종교입니다.

1절 하반절부터 2절에 "1b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요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전도의 사명을 그에게 부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씀은 '앉아 있는 상태에서 일어서라'는 뜻이 아니라 '즉시 행동하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하신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요나가 선지자로 활동했던 '여로보암 2세' 시대는 주전 8세기 상반기였는데, 이때 니느웨는 이미 성곽으로 둘러싸여 요새처럼 강력하게 방어되어 있는 도시 즉 "큰 성읍"으로 티그리스 강의 동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그 니느웨를 중심으로 하여 북조 이스라엘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고 정복하면서 그 판도를 확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쳐서 외치라'는 말을 그 니느웨 성을 '파괴하듯이 외치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대항하여 외치라'(preach against it)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가리켜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니느웨 성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으로만 가득 차 있는 성읍이었고 그런 까닭에 요나는 그 성의 악독함을 '대항하여, 반대하며, 정죄하면서' 외쳐야 마땅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요나뿐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라면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선지자는 당연히 '악을 쳐서' 외쳐야 합니다.

악을 달래거나 악과 화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자신은 악과 대적관계에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그 악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공격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곧 이어지는 3절에 나오듯이 그런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앗수르 제국이 당시 북조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던 원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니느웨가 요나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적국의 수도라면 그 '원수를 쳐서 외치는' 일은 오히려 발 벗고 나설 일 같은데 왜 요나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요나는 그처럼 '하나님께서 쳐서 외치는 말씀'을 듣고 니느웨의 왕과 온 백성들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게 될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미운 니느웨 사람들을 '그냥 한방에 싹쓸이해 버릴 저주'를 내려 주지는 않으시고 그 대신에 오히려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말씀'을 전해 주라고 하시니 요나로서는 어이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놀라운 사랑은 아낌없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죄를 미워하고 악을 책망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식의 진정한 사랑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을 얻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다 악인이라면 혐오할 뿐이며 원수라면 미워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아주 당연하고도 정당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니느웨의 12만여 명의 죄인'들을 지극히 "아껴"(욘 4:11) 주시는 놀라운 성품의 소유자이십니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조차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 죄인들을 당신과 '화목케' 해 주시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사랑을 발휘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 전체의 주제는 사랑이다.'라는 말을 즐겨 쓰는 목사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왜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이 무슨 '사람 사이의 사랑', '나눔과 이해와 용서와 화목 따위를 통해서 성취되는 인간적인 사랑', '기독교뿐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들도 똑같이 말하고 공감하는 흔한 사랑'이라는 말입니까?

오직 성경만이 증거해 주는 최고의 사랑은 바로 '죄인을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일 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양심적인 사람'이 행하는 사랑도, 이 인간사회의 그 어떤 '마음 착한 사람'이 베푸는 사랑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해 주려 하시는' 이 지고한 사랑에는 감히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한 양심을 따라 베풀고 서로 나누는 가운데 인간사회에서 완전한 사랑을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저 인본주의 종교에 불과하며,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만이 진정한 최고의 사랑임을 뜨겁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교는 '인간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종교입니다.

3절에 기록하기를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했습니다.

'즉시' 행동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요나는 즉각 "일어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종의 반응이 아니라 반항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행동을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면전을 피하려고'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여호와의 존재하심으로부터 피하려고'(to flee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라는 뜻입니다.

즉 그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요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거부 의사'를 명백히 반영해 줍니다.

그는 적국의 나라에 가서 전도를 하여 그 왕과 백성들을 회개시켜 구원받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즉 '그런 일을 시키시는 것은 너무 심하다.'라고 반발하면서 자기로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없이 아예 하나님께로부터 "도망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욥바"는 요나가 살고 있던 곳에서 남서쪽으로 약 80k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던 항구도시였는데, 지중해 연안이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상선들이 오가고 있던 무역항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시스"의 정확한 위치는 사실 아직 미확인 상태이지만, 예레미야 10장 9절의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 에스겔 27장 12절의 "다시스는... 은과 철과 상납과 납을 가지고 네 물품을 무역하였도다"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것들을 미루어 추정해 볼 때에 다시스는 그 당시 세계 무역의 주역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이 스페인 남부 연안에 만들어 놓았던 식민지 항구였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갈" 때부터 지중해 반대편 서쪽 끝에 있는 그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는" 의도가 이미 확고부동하게 세워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렇게 작정을 하고 욥바에 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여기 '마침'이라는 말은 어떤 영어 성경에 'about to'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요나는 '마침 지금 막 다시스로 떠나려 하는 배'를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려는 요나에게 문자 그대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만 보였던 그 '다시스로의 줄행랑'이 '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니느웨 성'으로 가는 해변의 육지에 '토해' 놓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요나의 고집'이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무슨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고 자시고 할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시 교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 딴에는 하나님과 온갖 '밀당'(밀고 당기기)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야말로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는' 즉 예배당만 떠나면 마치 하나님께서 못 보실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만 깊이 숨어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찾으실 수 없다는 듯이, 즉 자기가 집안에서는 무슨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든지, 멀리 휴가를 가 있는 피서지에서는 그 어떤 불경한 행동을 저지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도 알 재주가 없을 것이라고 아주 태연자약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같은 날은 가족들과 함께 좀 좋은 시간도 가져야지.'하고 순전히 '자기 기분'대로 따라갑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말 3:10)는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데도, '이런 어려운 형편에 도대체 어떻게 십일조를 내고 살라는 말이냐?'라고 오로지 '자기변명'만 내세우면서 정말 간도 크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화목해지고 가계가 넉넉해지는 것을 두고 마치 '마침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만난 것'처럼 매사가 순조롭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교인들은 요나와 똑같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 양심에 거리낌 없이 그저 '하나님이 너무 심한 요구를 하신다.'라고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고집'에 질 분이시라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죄인인 우리들 가운데 구원받게 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이미 택해 놓으신 자'를 결코 그렇게 내버려두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감히 '중지(衆智)'니 '신앙양심'이니 하면서 내세우는 '자기주장'에 1밀리미터도 밀리지 않으시고 '오로지 그 작정하신 뜻'대로만 당신의 구속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아무리 자기를 전도하는 며느리를 핍박하던 시어머니라도 하나님의 택자인 한에는 휠체어에 태워서라도 반드시 교회로 나오게 하고야 마십니다.

아무리 건축헌금하기가 싫어서 '아예 배를 타고 최대한 멀리 다시스까지 도망하려' 해도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이미 작정해 놓으신 일꾼이면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서라도 오직 당신의 계획하신 그대로 사용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투정'에 꺾이고 '인간의 고집'에 지장이나 타격을 입는 신은 오직 '인본주의 종교의 우상'일 뿐 결코 우리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십니다.

참 하나님은 구속사를 비롯한 모든 세상만사를 100퍼센트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섭리하심으로써 필연적으로 성취하고야 마시는,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절대주권자이심을 철저하게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인본주의적인 주장과 고집을 가지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시도했던 요나는 이처럼 '여호와의 말씀, 하늘 아버지의 사랑, 절대주권자의 의지' 앞에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가 '진실한 신앙인'이 되고 '충성스러운 사명인'이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펼치실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라, 시종일관 '하나님께서 모든 이니셔티브를 꽉 잡고 계시는 가운데'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이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되는 '주객전도의 신앙생활'이 현대사회에, 현대교회 안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창조주'가 주인이시고 '피조물'이 객이지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심부름꾼이나 서비스맨이나 종'이 될 수 있다는 소리입니까?

정말이지 어처구니 짝이 없는 '객주도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인본주의적인 신앙'이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슨 나무 밑에 앉았다.'로 시작되는 불교나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기 위해 무슨 산으로 올라갔다.'로 시작되는 이슬람교와 사실상 오십보백보인 것입니다.

진짜 종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로만 시작되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에서만 출발합니다.

'사람의 신심(信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매사를 전적으로 주도하며, '사람의 선한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압도적으로 작동되며,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신 의지'대로만 모든 것이 관철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체험하는 것만이 바로 '신본주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성경 그 어디에도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단 한 군데도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씀들만 충만한 것입니다.

'주인과 객'의 순서도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이 '하나님과 사람'의 선후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종교심이나 선행이나 요구를 앞세우는 것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본주의적 발상임을 깨닫고, 그 시작과 근본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현재 영위하고 있는 은혜와 축복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그런 까닭에 모든 영광을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리는' 진정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루아흐,숨, 바람, 영, 개역성경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파님, 얼굴 face)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바람이 불 때(루아흐,숨, 바람, 영)

루아흐는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한다.

(a)  숨, 호흡 breath.

① 입의 숨: 욥 15:30 하나님의 입'김'; 참조: 욥 19:17 내 '숨'; 코의 숨 애 4:20 우리의 콧'김'(왕을 가리킴); 우상에 대하여 렘 10:14 "그곳에 생기가 없다"는 것은 '호흡'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시 135:7, 렘 51:17, 합 2:19.

② 명령적인 말, 루아흐는 입의 호흡 곧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1) 하나님의 명령, 시 33:6, 참조: 사 34:16. (2) 메시야 왕의 명령, 사 11:4.

③ 단순한 숨(인 말), 욥 6:26, 욥 16:3, 렘 5:13.

④ 분노의 거친 콧 숨: (1) 하나님에 대하여, 출 15:8, 삼하 22:16, 욥 4:9, 시 18:16, 사 30:28, 사 59:19. (2) 사람에 대하여, 사 25:4.

⑤ 생명의 표시와 상징, 창 6:17, 창 7:15, 창 7:22, "기식": 겔 37:5, 겔 37:6, 겔 37:8, 겔 37:9, 겔 37:10, 겔 37:14(숨 또는 영).

(b)  바람 wind.

① (하늘의) 바람 창 8:1, 출 15:10, 민 11:31, 왕상 18:45, 렘 10:13, 렘 51:16, 시 135:7, 호 13:15, 사 40:7, 참조: 욥 26:13. 동풍 출 10:13, 출 14:21, 시 48:8, 렘 18:17, 겔 17:10, 겔 19:12, 겔 27:26, 욘 4:8. 북풍 잠 25:23. 해풍(서풍), 출 10:19. 낮의 바람, 창 3:8. 사방 바람, 렘 49:36, 겔 37:9, 단 8:8, 단 11:4, 슥 2:10, 슥 6:5. 광풍, 시 107:25. 광풍 시 148:8, 겔 1:4, 겔 13:11, 겔 13:13, 시 55:9. 뜨거운 바람, 사 11:15. 바람의 인격화, 삼하 22:11, 시 18:11, 시 104:3, 참조: 호 4:19, 시 104:4.

② (바람의) 방향 quarter, 편 side. 겔 42:16 (동)편; 겔 42:17 (북)편; 겔 42:18 (남)편; 겔 42:19 (서)편; 대상 9:24 (동서남북) 사방; 렘 52:23 사면.

③ 공기 air, 가스 gas, 사 26:18, 사 33:11.

④ 무익, 공허한 것. 욥 7:7("호흡"), 나의 생명은 바람이다. 욥 15:2("헛된 지식"). 바람의 지식은 헛된 지식이다. 사 41:29. "우상은 바람이요" 우상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다. 전 1:14, 전 2:11, 전 2:17, 전 2:26, 전 4:4, 전 4:6, 전 6:9. 바람을 잡은 것은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을 잡은 것이다. 참조: 전 1:7, 전 4:16, 전 5:15.

(c)  마음의 자세, 기질, 성질, 생기(활기, 기운), 기분, 감정, 정신.

① 정신, 생기, 왕상 10:5, 대하 9:4 숨을 더 쉴 수 없는 정신 상태, 곧 넋을 잃는 것을 뜻한다. 창 45:27, 삿 15:19, 삼상 30:12 기운을 회복하는 것, 왕상 21:5 마음의 근심.

② 용기 courage. 수 5:1, 시 76:12(표준-군왕들의 "호흡"), 개역-방백들의 "심령". 사 19:3, 시 77:4, 시 142:4, 시 143:4, 수 2:11, 잠 18:14.

③ 기(성)질, 기분, 특히 분노, 수 9:23, 수 8:3, 잠 16:32, 참조: 잠 25:28, 잠 29:11, 욥 15:13, 슥 6:8, 전 7:9, 전 10:4.

④ 성마름(조급함)이나 참을성, 출 6:9. 참조: 미 2:7, 잠 14:29, 욥 32:18, 욥 21:4, 전 7:8.

⑤ (번민하거나 근심하는, 불만하는) 마음, 기질. 창 41:8, 창 26:35, 사 54:6, 참조: 겔 3:14, 욥 6:4, 욥 7:11, 삼상 1:15.

⑥ (압도당한, 꺾인) 마음, 기질. 겔 21:7, 참조: 사 61:3, 잠 15:4, 잠 15:13, 잠 17:22, 잠 18:14, 시 143:7.

⑦ 기타 성질 및 성향, 충동적인 성질. 대상 5:26, 대하 21:16, 대하 36:22, 스 1:1, 스 1:5, 렘 51:11, 학 1:14, 왕하 19:7 = 사 37:7, 민 14:24, 말 2:15, 말 2:16, 신 2:30, 민 5:14, 민 5:30(시기), 호 4:12, 호 5:4, 사 19:14, 사 28:6, 창 41:38, 잠 17:27.

(d)  예언의 영. 민 27:18, 왕하 2:15, 왕하 2:9, 사 29:10(참조: 창 2:21, 창 15:12, 사 19:14). 깊이 잠들게 하는 영. 미 2:11, 슥 13:2, 참조: 겔 13:3.

(e)  생물의 영, 숨쉬는 존재.

① 하나님의 선물과 창조. 슥 12:1, 욥 27:3, 참조: 사 42:5.

② 하나님은 영을 보존하신다. 욥 10:12, 욥 12:10, 민 16:22. 민 27:16, 잠 16:2.

③ 그러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창 6:3,

④ 영은 죽을 때에 떠난다. 시 78:39, 사 38:16(생명의 원리), 시 146:4, 시 104:29, 시 104:30, 욥 17:1, 욥 34:14(참조: 15절), 사 57:16, 전 8:8, 전 11:5, 전 3:21, 전 12:7, 시 31:6.

⑤ 육체를 떠난 영혼. 욥 4:15.

(f)  하나님의 영, 곧 삼위일체의 제 3위인 성령.

① 대부분의 표현에서 여호와의 신(영)은 가장 완전한 기독교적 의미에서 성령이라는 것을 문맥이 명백히 입증하며, 신약성경에서 강력한 유비(analagy)로 쓰여진다. (A. F. Kirkpacrich cambridge Bible. Psalms 11. P 293).

② 최초로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으로서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는 성령께서 한 인격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음을 시사한다. 창 1:2. 참조: 민 11:17, 민 11:25.

③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시 51:11, 참조: 사 63:10-11).

④ 이사야는 그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자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료 화자로 생각하든지 간에 메시야,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를 인용하면서 그가 말할 때 그의 분명한 인격체를 말한다.

⑤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나(욥 26:13)나 섭리에서(욥 33:4, 시 104:30), 우주적이며, 중생에 있어서 구속적이다(겔 11:9, 겔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 하시며(느 9:20, 시 143:10, 학 2:5), 지도권(민 11:25,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미 3:8, 슥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사 11:2, 사 42:1, 사 61:1)와 그의 백성들(욜 2:28, 사 32:15)에게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하신다.

(g)  초자연적 존재, 천사 같은 존재.

① 악한 영. 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② 참소하는 큰 영. 왕상 22:21.

③ 바람이나 불을 천사로 삼음. 시 104:4(참조: 왕상 19:11-12).

(참조: BDB; TWOT).

'루아흐'(헬라어 프뉴마)의 기본적인 개념은 '움직이는 공기' air in motion이다. 여기서 공기란 악어의 비늘 사이로 나올 수 없는 공기(욥 41:16 )로부터 한 바탕의 폭풍(사 25:4, 합 1:11 ASV, RSV)에 이르기까지의 공기를 가리킨다.  '네 바람', 루호트는 세상의 네 방위를 기술한다(렘49:36, 겔 37:9).  동물이든(창 7:15, 시 104:25, 29), 사람이든(사 42:5, 겔 37:5) 혹은 양자 모두이든지(창 7:22-23) 생물에게 있어서 루아흐는 호흡을 가리킨다.  여기서 호흡은 흡입한 것일 수도 있고(렘 2:24) 입술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사 11:4, 욥 9:18, 죽은 우상들과 대조, 렘 10:14, 렘 51:17).  하나님은 '루아흐'를 창조하신다. '하나님의(하나님으로부터 온) '루아흐'(영 spirit, 한글개역 "기운")가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 27:3).

호흡은 능력(왕상 10:5, 여기서 시바의 여왕은 '더 이상 '루아흐'가 없었다', 즉 그녀는 '숨을 쉬지 못했다', 압도당했다), 담력(수 2:11, 수 5:1, 이스라엘의 적들의 '영' spirit이 낙담했다), 가치(애 4:20, 여기에서 다윗 왕은 '우리 콧구멍의 호흡'[한글개역, "우리의 콧김"] ) 등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루아흐'(바람)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렘 5:13). 여기에서 '루아흐'는 '단순한 호흡'의 헛됨, 무익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욥 7:7, 사 41:29). 

공기의 돌진, 어떤 사람의 코를 통해 나오는 거센 콧바람처럼 '루아흐'는 호전적인 감정(사 25:4)이나 분노의 감정(삿 8:3, 잠 29:11, ASV, RSV)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호흡은 활동과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이 병들거나 쇠약할 때 그 '영'이 쇠한다(욥 17:1). 그러나 그 영은 '두번째 바람'으로 되돌아 오며 그는 '소생한다'(삿 15:19, 삼상 30:12, 참조, 창 45:27). 전 인류의 호흡(루아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욥 12:10, 사 42:5). 

그러나 인생의 독특한 성질은 물질적(육체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 즉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것에 있다. 인간의 '호흡', '숨'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 활동에 의해 주어졌다(창 2:7, 창 1:2에 나오는 짐승들과 대조하라).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우리, 창 1:26)의 형상을 반영하며, 다른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다(창 2:20)-이다.   

'루아흐'는 마음의 성향 혹은 태도를 묘사한다. 갈렘의 마음은 그의 불신실한 동료들의 마음과 달랐다(민 14:24, 참조, 산헤립의 영, 즉 왕하 19:7에 나오는 결심). 사람의 '루아흐'는 슬플 수도 있고(왕상 21:5), 압도당할 수도 있으며(시 77:3), 회개할 수도 있다(사 57:12). 사람의 '루아흐'는 '차가울'(억제될) 수 있고(잠 17:27), 질투할 수도 있으며(민 5:14), 인내하거나 교만할 수도 있다(전 7:8). 사람의 지혜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고(신 34:9) 매춘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다(호 4:12).

끝으로, '루아흐'는 인간의 완전한 영적인 의식을 나타낸다. '내가 내 안에 있는 내 영으로(한글개역,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마음을 다시리며'(잠 16:32, 참조, 단 5:20). '마음에 간사가 없다'(시 32:2).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다루긴 하지만(참조, 네페쉬 '영혼', 종종 단순히 '자아' self라고 번역된다)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이원론을 인정한다(A.B. Davidson, The Theology of the OT, p.202). 

영과 육이 결합하여 '자아' self를 이루며, 따라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루아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또한 인간은 '네페쉬'이다(그러나 때때로 인간은 네페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 '네페쉬'는 죽을 때 인간의 몸에서 떠난다고 한다). '루아흐'는 그 몸 속에 담겨 있다(단 7:15, 아람어, 슥 12:1). 몸은 죽을 때 티끌로 되돌아 가지만 불멸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창 3:19, 전 12:7). 이와 관련하여 '루아흐'와 '네페쉬'는 여기서 분명히 '영혼' soul을 의미하며, 중복되는 경향이 있다(욥 7:11, 사 26:9, 참조, 출 6:9, 민 21:4). 

'네페쉬'와 '루아흐' 양자 모두 죽을 때 몸을 떠날 것이며 몸에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창 35:18, 시 86:13, 영혼이 그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는 드문 실례에 대해 왕상 17:22을 참조하라).

보다 더 높은 영역에서 '루아흐'는 초자연적인 존재, 천사같은 존재,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가리키기도 한다(삼상 16:23, NASB).  적당히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루호트'(바람 winds, 시 104:4, 히 1:7) 로 이용하기도 하셨다. 사탄은 '참소하는 큰 영'이다(왕상 22:21). 다른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임할 수 있다(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영적인 인격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하나님이시다(사 31:3).  하나님의 '호흡'(한글개역, "기운")은 강한 바람일 수도 있다(사 40:7, 사 59:19, 참조, 민 11:31).  주의 '영'은 단순히 활동적인 능력이나 분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사 40: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느냐", 혹은 '누가 여호와의 마음[의도]을 알았느냐', 70인역본과 고전 2:16도 마찬가지임). 하지만 대부분의 면에서 '루아흐 야훼'(YHWH, 여호와의 신)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성령이다.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시 51:11, 참조, 사 63:10-11). 

태초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처럼'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창 1:2).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욥 26:13)나 섭리를 계속하심에 있어서(욥 33:4, 시 104:30) 우주적이며, 중생(regeneration)에 있어서 구속적이다(겔 11:19, 겔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하시며(느 9:20, 시 143:10, 학 2:5), 지도력(민 11:25,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미 3:8, 슥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사 11:2, 사 42:1, 사 61:1)와 그의 백성들(욜 2:18, 사 32:15)에게 장차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한다. 

['루아흐'와 '네페쉬'의 차이점, '루아흐'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원리이며, 이성, 의지,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전해주며 고무적인 활력을 만들어낸다. 이 활력은 결국 개인적인 삶의 주체로서 인간의 '네페쉬'가 된다. 개개인에 독특한 인격은 인간의 정서와 욕구의 자리인 '네페쉬'에 원래부터 있다. '루아흐'는 그 자체내에 그 활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다. '네페쉬'는 보다 주관적이고 조건부적인 생명을 갖는다. 신약성경은 '프뉴마'(루아흐)와 '프쉬케'(네페쉬)를 분명하고 실질적으로 구별하는 것 같다. - G. L. Archer.]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파님, 얼굴 face) 피하여

(a)  이 독특한 단어 파님은 항상 복수형으로 등장하는데 아마 얼굴이 수많은 부분들의 결합체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듯하다.

파님은?
① 사람의 얼굴(창 31:2), "그의 외모"(창 4:5), 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대용어(신 7:10)로 사용되었다.
② 관찰자에게로 향해진 면, 예를 들어 '지면'(창 2:6),
③ 이 단어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전치사들과 함께 사용된다. 예를 들면, ~의 면전에서 before the face of, ~앞에서 before, ~속으로 into, ~의 정면에서 in front of, ~의 반대편에 opposite 등이다.(참조: E. Tiedtke)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식별하게 해주고 그 사람의 마음 가짐과 감정을 반영해 준다.
따라서 파님은 자아 또는 자아 감정의 대용어가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얼굴은(신체의 여타 부분들과 함께) 사람의 생리 기능을 담당하는 외적 기관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동 방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격성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 얼굴이 상대방의 감정, 기분, 성격을 묘하게도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하다.

"굳은" 얼굴은 반항(렘 5:3), 뻔뻔스러움(잠 7:13), 무자비함(신 28:50)의 표시이다.  "빛나는" 얼굴은 기쁨의 증거이다(욥 29:24).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패배, 좌절, 굴욕을 가리킨다(삼하 19:5). "불꽃같은"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사 13:8). "나쁜" 얼굴은 근심 걱정으로 찌든 얼굴이다(창 40:7). "낙담한" 얼굴은 매우 강렬한 분노와 불쾌감에서 연유한다(창 4:5). 누군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를 달래거나 또는 그의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하나님께 대해, 왕상 13:6, 왕하 13:4). KJV는 이 마지막 문구를 "~가 여호와께 구했다/탄원했다" X sought/entreated the Lord라고 의역하였다(한글개역: "여호와께 간구하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문자적으로 "~가 여호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로 된다. 마찬가지로 이 관용구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잠 19:6).

"얼굴을 숨기다"라는 문구는 혐오감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며(사 53:3) "얼굴을 돌리다"라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시 132:10).
역으로 타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는 호의, 존중, 수락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거나(삼상 25:35, 한글개역, "청을 허락하노라") 또는 편파성 편애를 드러낸다는 뜻이다(레 19:15, 한글개역, "편을 들지", "두호하지").
얼굴을 숙인다는 빈번한 표현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님은 동물의 얼굴들에 해당하는 말로 역시 때때로 사용되었다(겔 1:10).(V. P. Hamilton)

(b)  파님은 특히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①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얼굴에 관한 관용구들과 문구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도 적용되었다.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신의의 표시로서 "환히 빛난다"(시 4:6). 그의 얼굴이 분노로 "침울해진다"(렘 3:12).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숨기기도" 하신다(시 13:1).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평강(즉,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감추거나 돌리실 때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시사한다(참조: 시 13:2, 시 104:29).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예외적 가능성으로 언급되어 있다(창 32:30,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창 16:13, 출 24:9 이하, 신 4:12, 삿 6:22 이하도 역시 참조하라).( E. Tiedtke)

"하나님의 얼굴을 뵙다"라는 구절이 5회 발견되는데 아마 종교 예배를 위해 성소를 찾아간다는 뜻의 전문 용어이다.
다섯 구절은 출 23:15, 출 34:20, 신 31:11, 시 42:2, 사 1:12이다.
이 보기들의 각 경우에서 동사 라아('보다' to see)는 니팔형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나타나다" to appear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개념을 "앞에 나타나다" appearing before라는 개념으로 유화시킨 것이다. 한 용례에서(삼상 1:22) 니팔형이 자음 본문에 의해 명시되어 있다. 여기를 니팔 부정사형 레라오트 파나이(하나님 "앞에 나타나다" to appear before God)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칼 부정사형인 리로트 파나이의 가능성은 출 33:20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몇몇 예외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야곱(창 32:30)과 모세(출 33:11)의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face to face 보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또는 그 음성을 듣기만해도 그는 죽게 된다(출 19:21).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항상 강조하고 있다. 죄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출 33:20, 참조: 사 6:5).

이러한 이유로 모세(출 3:6)와 엘리야(왕상 19:13) 그리고 스랍조차도(사 6:2) 하나님 면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놀람과 감사(창 32:30, 신 5:24), 두려움(삿 6:22, 삿 6:23, 삿 13:22, 사 6:5)으로 압도당하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출현하셨으며 그만이 아버지를 보았다(요 1:18, 요 6:46, 요일 4:1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통로가 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다.(참조: V. P. Hamilton)

출 33장에서 여호와의 얼굴(파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신다(출 33:14 이하). 이는 여호와의 인격적 임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다.

② 하나님의 얼굴이 성전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질 때, 이 용어는 제사와 관련된다. 성경의 범위를 넘어선 이 단어의 용법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은 신의 얼굴을 성전 우상의 얼굴로 만들어 이를 보고 예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사용되어진 우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예배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고 했을 때 비유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시 24:6, 시 42:2[마소라 42:3], 슥 8:21[마소라와 70인역본], 말 1:9[마소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의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특히 그것을 추구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사를 아주 떠나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편 기자는 시 105:4에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하고 있다. 진설병(출 25:30)의 문자적 의미는 "얼굴의 떡"("임재의 떡" RSV)이다. 이런 떡덩이들이 이교도 제사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제사에서는 이 떡들이 신의 음식 역할을 했다(참조: 렘 7:18). 이스라엘이 이 관습을 이어받았을 때 떡 Bread(아토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음식으로가 아닌 예물로 유향과 함께 특별히 마련된 식탁 위에 놓여졌다. 

③ 랍비 유대주의에서 사람의 최고의 소망은, 죽음에 임한 시각이나 메시야의 날 후에 다가올 세상에서,  셰키나의 얼굴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의 반사를 받아 의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지만(단 12:3) 불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주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포악하고 강포했습니다. 살인과 저주와 거짓과 늑탈이 그들 속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의 잔인한 죄악은 하늘의 하나님 앞에까지 상달되었습니다(욘 1:2). 죄악이 극에 달한 시대나 사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창 6:5~7:24, 18:20~19:29).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 얻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히 10:38~39).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의 말씀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왜 하필 요나가 니느웨로 가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요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셔도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엡 2:4~5). 죄는 인생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주었습니다. 영생하는 하늘나라의 한 시민이 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말씀을 거역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너희 죄가 진홍 같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심으로(사 1:18) 우리가 그에게 돌아와 용서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중대한 사명이 요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받은 사명은 외면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욘 1:3). 도망하는 요나를 보십시오.

첫째,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하였습니다.

본문 3절에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또 10절에는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반복하여 나오는 말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라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낯'(히: 페니 여호와 יהוה פבי)은 '여호와의 얼굴'(the face of Jehovah), '여호와의 앞'(before of Jehovah). '여호와의 현존'(presence of Jehovah)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성도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민 6:25, 시 17:15, 89:15~16). 여호와의 얼굴이 축복임을 아는 성도는 절대로 그 앞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의 기도 중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 17:15).

여호와의 얼굴이 축복임을 아는 성도는 항상 그의 얼굴 뵙기를 소원합니다. 그 얼굴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삽니다(창 39:8).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렸다고 생각하였을 때는 괴로워하며 그 얼굴 뵙기를 갈망하였습니다(욥 13:24, 34:29). 요나의 도망,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얼굴을 피하자고 하는 목적성을 띈 의도적인 도망이었습니다.

요나가 왜 이런 생각을 하였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수단을 쓰든지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보자', '더 이상 하나님의 간섭이나 보호, 지도는 받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니느웨로 간다 하여도 나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나에게는 괴로움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고 있지 않는가', '지금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또 그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할 인생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여 벗어날 수 있는 장소나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시 139:1~10).

둘째, 도망하는 목적지는 '다시스'였습니다.

본문 3절에 "…요나가…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다시스로 가려고…"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자 하였던 최종 목적지는 '다시스'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시스는 어디입니까? 학자들의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스페인의 '타르테수스'일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구약성경 시대에 광물 자원이 풍부하여 정교하게 세공된 은, 철, 상납 등이 생산·수출되는 곳이었습니다(렘 10:9, 겔 27:12).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반대 방향의 옛 두로인이 살고 있었던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하는 것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성품이 유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이 두려워 도망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다시스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로 도망하든지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배 밑층 깊숙한 곳에 내려가 깊이 잠든 요나까지 하나님은 찾아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로 가든지 그곳도 하나님의 앞이요, 하나님의 영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본문 3절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욥바' 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유명한 항구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니느웨'와 그가 내려간 '욥바'는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그가 이처럼 다시스를 목적하고 욥바로 내려간 것은 혈과 육을 따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민족의 특권을 잃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싫었습니다(욘 4:2). 내려가는 길은 책망과 저주와 고통과 멸망의 길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은 수치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창 12:10,13).

블레셋으로 내려갔던 이삭은 불신자 이방 임금 아비멜렉으로부터 책망과 미움을 받았습니다(창 26:1~26). 블레셋 땅 딤나로, 가사로, 소렉 골짜기로 내려갔던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리고 힘 잃고 눈까지 뽑히고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삿 14:1, 16:1~4). 모압으로 내려갔던 나오미는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재물 잃는 마라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룻 1:1~6, 20~21).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던 사람은 강도 만나,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기고 죽음의 지경까지 놓였습니다(눅 10:30).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방인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물고기 뱃속에까지 내려갔습니다(욘 1:1~17). 내려가면 망합니다. 신앙은 계속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배하려고 올라가고(삼상 1:7,24),
기도하려고 올라가고(행 3:1),
찬양하려고 올라가며(행 3:8),
감사하기 위하여 올라가며(신 12:5~7, 눅 17:15~19),
천국까지 올라가고 올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시 40:31).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나 목적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나의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면류관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러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벨 과학수상자들 대부분 왜 창조주하나님을 믿는가?


왜 과학자들이 신을 믿게 되는가?
뉴톤, 페러웨이, 맥스웰  등 무수한 과거의 과학자들이 신을 믿었다.
그리고 현재 살아 있는 많은 수의 유명한 과학자들이 신을 믿는다.
일반인 보다 더 많은 비율의 과학자가 신을 믿는다.
왜 이렇게 신을 믿게 되는가?
그것은 과학 자체가 신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보통 세상에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은 세상의 진리를 찾기 위해 과학을 시작한다.

하지만 연구의 연구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결국 신이 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신을 부정하기 위해 시작한 연구가 그 정점에 이르러서는 신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정점에 맞다뜨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유신론자가 생각하는 세상은 하나의 신적인 존재가 원자에서 우주까지 세밀하게 설계했고 운행중임을 믿는 것이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그 가능성의 수를 봤을 때 신을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여기에 있다.
과학은 인과율에서 시작되었고 과학자는 인과율을 믿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세상은 너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로 유명한 <기하학원론>의 저자 유클리드는 “자연의 법칙이란 신의 수학적인 방법일 뿐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만유인력의 법칙’과 ‘미적분학’의 확립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은 “과학자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찰하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장쩌민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대통령 클린턴에게
“미국은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으면서 왜 또 이렇게 많은 종교와 신앙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이 발전하던 시기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데카르트(René Descartes),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뉴턴(Isaac Newton)을 포함하여 모두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신을 신앙한다고 인정했으며 이 세계는 신의 걸작이기에 법칙이 있으며 단지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실증하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 리처드 파인만 (1965 노벨 물리학상)-

역사에 이름을 남긴 상당수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종교를 신앙하는 ‘유신론(有神論)’자였다.
가령 현대 과학의 초석을 다진 케플러(Johannes Kepler), 근대화학을 창립한 보일(Robert Boyle), 전기분해의 원리를 발견한 패러데이(Michael Faraday), 전보를 발견한 모오스(Morse), 열당량을 발견한 줄(James Prescort Joule), 전자기학 이론을 집대성한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원자 이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돌턴(John Dalton), 현대 유전학의 기초를 다진 멘델(Gregor Johann Mendel),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Alexander Fleming), 미생물학을 창시한 파스퇴르(Louis Pasteur) 등은 모두 독실한 종교 신자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인 해리어트 주커만(Harriet Zuckerman) 교수가 1977년 저술한 『과학엘리트 :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들(Scientific Elite; Nobel Laureates in the United States)』 이란 책의 통계를 보면 1901년 노벨재단이 설립된 이후 미국에서 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수상한 286명 중에서 73%가 기독교 신자였으며 19%는 유태교 신자였다.

저명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파인만은 일찍이 “수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을 믿지만 또 하나님도 믿는다. 양자 사이는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 항공우주과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우주의 끝없는 신기는 조물주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앙을 실증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우주의 존재 배후에 초월적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는, 과학의 진보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다.” 

-美 로켓의 아버지 폰 브라운박사 -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텍사스大의 스티븐 와인버그는 77년 자신의 저서에서 우주론을 통해 우주를 이해하면 할수록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나 신을 ‘살해했던’ 바로 그 과학이 오늘날 신앙을 원상회복시키고 있는 것으로 신앙인들은 생각한다.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본래 예정에 따라 생명과 의식(意識)을 탄생시켰다는 징표들과 부닥치게 됐다.
중력과 전자의 전하(電荷), 양자의 질량 등과 같은 자연의 상수(常數)들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원자들은 현재와 같은 결합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며, 별들은 연소하지 않았을 것이고 생명체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82년 영국 성공회 사제가 되기 전까지 케임브리지大에서 저명한 물리학자로 활동했던 존 폴킹혼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의 법칙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조화를 이뤄 우리 눈 앞에 있는 우주를 탄생시켰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됐다는 확신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레이저 광선의 원리를 발견해 64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찰스 타운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법칙에 지적인 측면이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지적설계의 증거가 무신론자에게 설계자를 확신시키다
(Intelligent Design Evidence Convinces Atheist of Designer)
 
ABC News에서의 AP 보고에 따르면, 한 유명한 무신론자가 과학적인 증거에 근거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81세의 나이에, 수십년간 고집하던 믿음은 실수였다고 말하면서,

안토니 플루(Antony Flew)는 "우주는 어떤 종류의 지적 능력과 첫 번째 원인에 의해서 창조되어졌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플루는 영국으로부터의 전화 인터뷰에서 초월적 지성(super-intelligence)은 생명체의 기원과 복잡한 자연에 대한 유일한 좋은 설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생물체의 최초의 번식이 자연주의적 진화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라고 쓰고 있다. 

 거의 50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노골적인 무신론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안토니 플루는, "설계자가 있음을 가리키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와 경우들을 항상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DNA에 대한 연구는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도로 복잡한 정렬이 있어야함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어떤 지성이 개입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요나와 큰 물고기 (Jonah and the great fish)​  Russell Grigg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이야기는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true history) 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비유(allegory) 인가?
아니면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nonsense) 인가?

성경은 요나의 이야기를 진실된 역사로서 간주하고 있다.
요나서는 실제의 역사로서 기록되었다.
요나(Jonah)는 실제 있었던 선지자였고, 열왕기하 14장 25절에도 언급되었으며, 예수님 자신도 요나의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

예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요나의 경우에 비유하셨다. (마태복음 12:39–41, 누가복음 11:29–30).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그러므로 요나 이야기의 사실성은 예수님이 무지하셨던지, 아니면 잘못 알고 계셨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함 없이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다.”1 라고 하였다.

요나를 삼킨 바다 생물은 무엇이었을까?

요나서에서 바다 생물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인 ‘dag’ 는 ‘물고기(fish)‘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마태에 의해 사용된 그리스어는 ’ketos‘ 로서, 바다 괴물(sea monster)을 의미하며, 개정된 번역판에서도 그렇게 표기되었다.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에서 번역가들은 이 단어를 고래(whale) 로서 번역했는데, 고래는 그들이 알고 있던 가장 큰 바다 생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a great fish)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욘 1:17)”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은 요나를 안전하게 수용하기 위해서 하나의 특별한 창조 행위를 하셨거나, 기존에 있던 바다 생물을 조절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out of the fish's belly)” 하나님께 기도했다 (요나 2:1). 배(belly)는 고대 히브리어에서도 그렇지만 영어에서도 꽤 모호한 용어이다.

그래서 만일 요나가 향유고래(sperm whale)와 같은 생물에 의해 삼켜졌다면, 그는 굉장히 큰 후두 주머니(laryngeal pouch)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 생물이 상어(shark)였다면, 요나가 상어의 위액(gastric juices)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준비된 위에 있었을 것이다.

한 남자를 통째로 삼킬 수 있는 큰 턱을 가지고 있는 바다생물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호주 퀸즈랜드의 무루라바(Mooloolaba)에 있는 수상공원(Underwater World)에 있는 사진을 보라.
그리고 죠스 영화에서도, 고기잡이 배의 선주인 퀸트(Quint)는 상어에 의해서 통째로 삼켜지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른 설명?

1891년 포크랜드 섬(Falkland Islands) 근처에서 캡틴 킬람(Captain Killam)이 지휘하던 포경선인 ‘동방의 별(Star of the East)’ 호에서 작살을 던지던 제임스 바틀리(James Bartley) 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인용되고 있다.

고래 사냥 도중에 바틀리는 바다에 빠졌고 사라졌다.
한 고래가 잡혔고 다음 날 선원들이 배를 갈랐을 때, 놀랍게도 바틀리가 그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아직도 고래의 위에서 살아있었다.
그는 깨어났고, 시간이 흐른 후 회복되었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고래의 뱃속에서 체류된 동안, 위액에 노출된 바틀리의 피부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그의 얼굴, 목, 손들은 창백하도록 흰색으로 탈색되어 있었고, 양피지 종이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바틀리는 굶주릴 때까지 아마도 뱃속 안쪽에서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공포로 감각을 잃어버렸고 그곳은 공기가 부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2

이 이야기는 1892년 10월, 영자 신문인 ‘Great Yarmouth Mercury’에 처음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른 글들에서 재보도 되었는데, 1924년에 출판된 프란시스 폭스(Francis Fox) 경이 지은 책 'Sixty-three Years of Engineering, Scientific and Social Work” 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경비판자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박 주장을 하고 있다.
1906년에 캐논 윌리암스(Canon Williams)라고 불리는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이 이야기의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캡틴 킬람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1906년 11월 24일 캡틴의 아내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전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고, ”나는 남편이 ‘동방의 별’ 호에 있었던 해에 남편과 함께 있었는데, 남편과 함께 있는 동안 한 사람의 선원도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선원 이야기는 바다 사람들의 허풍이다”3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의 상반된 보고서로부터, 누군가는 이 사건에 대해 경제적 문제로 얽혀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명백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헤리 림머(Harry Rimmer) 박사는 영국 해협에서 트롤어선으로부터 바다로 떨어졌다가 거대한 Rhincodon 고래상어에 의해서 삼켜졌던 한 선원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전체 트롤어선 선단은 상어를 잡기 위해 출항했다.
사고가 나고 48 시간이 지난 후, 그 상어가 목격되었고, 갑판에 있던 1파운드의 작살 총으로 살해되었다.
사체는 너무 무거워서 배의 갑판에 있던 윈치로 다루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선원들은 그의 동료를 기독교 식으로 장례해주기 위해 그 상어 사체를 해안으로 끌고 왔다.
상어의 배가 열려졌을 때, 그 사람은 의식은 없었지만 살아 있었다.
그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고, 충격으로 한 동안 고통을 당하였지만, 후에 퇴원하였다.
그의 사진과 이야기는 1 실링의 입장료를 내야하는 한 런던의 박물관(London museum)에 전시되어졌었고, ‘20세기의 요나(The Jonah of the Twentieth Century)' 로서 광고되어 졌었다.4

사흘 밤낮은 무엇인가?

고대 히브리인들은 관용적으로 하루의 한 부분도 하루로서 간주했다.5
그래서 사흘 밤낮(three days and three nights)은 38시간 정도의 짧은 기간도 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기간(금요일 늦은 오후에서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을 요나의 경우를 비유로 들며 밤낮 사흘이라고 말씀하셨던(마 12:40)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마가복음 8:31절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따라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시간 척도를 교대로(interchangeably) 사용하셨다.
성경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시간과 비교되어진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시간은 아무런 오류나 모순이 없는 것이다.6 

요나의 이야기의 많은 놀라운 부분 중의 하나는 그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욘 2:1)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던 이유이다.
아마도 그는 기절을 했었고, 하나님이 마치 요나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시기 위한 의도인 것처럼, 그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하고, 믿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건이 기적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6 가지 기적적인 사건들도 이루어져 있다.
그 사건들의 일부는 자연 현상까지도 하나님에 의해서 조절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욘 4:6)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욘 4:7)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욘 4:8)

이러한 기적들은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대홍수 사건, 바벨에서의 언어의 혼란, 출애굽 시에 애굽 땅에 내려진 재앙들, 홍해의 갈라짐, 엘리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기적적인 치유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 예수님의 부활 등과 같은 기적보다 더 믿을 수 없어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경을 믿지 못한다면 무너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는 것을 결코 잊어버리거나 변명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토록 긴 시간 동안을 물고기 뱃속에 있도록 하셨어야만 했을까?
그에 대한 정당하고 충분한 이유가 되는 대답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필요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말로,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하신(벧전 1:18-19)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FOOTNOTES

1. Henry Morris and Martin Clark, The Bible Has the Answer, Creation-Life Publishers, El Cajon (California), 1976, p. 74.

2.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Zondervan, Grand Rapids, 1966, Vol. 4, p. 153.

3. Leslie Rumble, Questions People Ask, Cheval‍‍ier Books, Kensington (New South Wales), 1972, p. 25.

4. Harry Rimmer, The Harmony of Science and Scripture, Eerdman's, Grand Rapids (Michigan), 1952, pp. 188–189.

5. Unger's Bible Dictionary, Moody Press, Chicago, 1957, p. 1099.

6. Cf. in Matthew 27:63–64 the Pharisees tell Pilate that Jesus had said He would rise 'after three days'. They then ask Pilate for a guard for the tomb 'until the third day'. If 'after three days' was not interchangeable with 'the third day', they would have asked for a guard 'until the fourth day'—Adapted from Josh McDowell and Don Stewart, Answers to Tough Questions Skeptics Ask About the Christian Faith, Here's Life Publishers, San Bernardino (California), 1980, pp. 50­51.


요나의 이야기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이야기는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true history) 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비유(allegory) 인가?
아니면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nonsense) 인가?


어떻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성경의 내용 중에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이야기는, 자신이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많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 물고기가 어떻게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가?
또 뱃속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어떻게 3일간이나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느냐? 라고 반문하면서 사실일 가능성을 전혀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부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크리스찬들은 이와 같은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는 결코 역사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솝의 우화와 같이 교훈을 주기 위해 풍유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풍유나 비유, 혹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할 경우에는 항상 그렇다고 명시하거나 전체 문맥을 통해서 그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요나는 가공인물이 아니라 열왕기하 14장 25절에도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로서, 기원전 8세기 경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prophet)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나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9-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41절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셨고, 40절에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요나의 기적처럼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거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큰 물고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는"물에 사는 큰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큰 물고기”는 고래나 상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만드신 물고기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큰 바다의 동물이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까요?

향유고래, 백상어, 고래상어와 같은 동물은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습니다.
잡아 올린 향유고래의 위 속에서 길이가 16피트나 되는 상어의 뼈가 실제로 발견된 일이 있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가능합니다.
고래의 위 속에는 항상 공기가 어느 정도 있을 뿐만 아니라, 공기로 호흡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머리 부분에 공기를 저장하는 큰 장소가 있습니다.
고래가 어떤 물체를 입에 넣었다가 삼키기에 너무 크면 이 공기 저장소로 보내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내뱉는다고 합니다.
어떤 큰고래의 공기 저장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4, 7, 7피트나 되는데, 이것은 사흘 동안 살아남기에 충분한 양의 공기입니다.

고래잡이 역사에는 고래에 사람이 통째로 삼켜진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 중에서 최소한 두 사람은 구출되어 생존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요나의 이야기는 자연적인 현상만으로도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요나의 생명을 구하신 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요나를,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셔서(욘 1:4) 바다에 던져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삼키게 하셨고(2;17), 요나가 회개하자 그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육지에 토하게 하심으로써(2:10) 요나의 생명을 건지시고, 그를 통하여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는다면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요나를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월 25일(화) 요나서 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올의 뱃속(2절)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He said: "In my distress I called to the LORD, and he answered me. From the depths of the grave I called for help, and you listened to my cry.

스올의 뱃속
밉베텐 쉐올(מִבֶּטֶן שְׁאֹול)
the depths of the grave

* 스올(7585)
שְׁאוֹל 스트롱번호7585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발음 / 스올[ sheʼôwl ]
어원 / 75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구약 성경 / 65회 사용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스올의 뱃속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베텐 쉐올'(*)은 '무덤의 깊은 곳에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요나가 죽었었다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는다(C. L. Feinberg).
다만 요나는 자신이 죽은거나 다름없다거나, 죽은 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벳느고, 사드락, 메삭은 평소보다 일곱배가 더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서 기도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굴에서 기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형 가운데서 기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교 현장에서 기도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이 배를 쪼개고 승선 인원 276명을 위하여 기도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유배되어 기도
사도 베드로는 깊은 감옥에 갇혀서 기도
부활하신 주님을 지켜본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
나는 지금 어디에서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기도하는가?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물고기 뱃속’이란 그의 인생의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진 자리였습니다.
2장 2절에 나타나는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올’이란 때때로 지옥으로도 표현되지만,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또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큰 물고기의 뱃속은 두 가지의 가능성, 두 가지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무덤이 되지만, 그곳을 탈출하면 그곳은 생명을 낳는 자궁이 됩니다.
마치 고난 속에서 무르익어 열매가 되는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바로 스올의 뱃속인 것입니다.

첫째, 말씀을 인용한 기도(2절)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시편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요나는 구약 시편을 인용하여 기도합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그 말씀이 요나를 지배하지 않았지만 스올의 뱃속에서는 그 말씀이 되살아났습니다.
평소에 내 마음에 새겼던 말씀이 기억에서 희미해질지라도 스올의 뱃속과 같은 환경이 나에게 닥쳐올 때 내 안에 있던 그 말씀이 순식간에 솟아나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니라 생명을 품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으로 바뀔 것입니다.

가장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은 유대인들입니다.
고난을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주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지켜주는 은혜를 경험하는 생명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풍성한 말씀, 풍성한 생명

둘째,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기도(4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 선지자는 평소에는 성전에 대한 마음이 형식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올의 뱃속에서 성전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향한 요나의 기도는 열왕기상 8:38의 말씀을 근거한 기도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봉헌한 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 9:3)

그리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왕상 8:38)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약속에 근거한 기도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그러나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사랑을 담아 기도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마음을 만지는 기도(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멀어진 관계를 가회복하려고 감사제와 서원제를 드립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감사를 드리며 서원을 갚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살펴주시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만 숨어 있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요나와 같이 감사와 서원의 제사와 기도로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요나가 이렇게 기도할 때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로 토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가 기도하지 않은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육지에 토하니라.

문제를 부르짖으라
문제를 넘을 수 있도록 회개하라
문제를 해결하는 감사와 서원의 제사를 드리라

자유대한민국의 역사는 스올의 뱃속과 같은 과정을 지나왔습니다.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또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 간코쿠 헤이고니 간스루 조야쿠[*])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에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

군사정전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
(韓半島 平和協定, Peace Treaty on Korean Peninsula, PTKP)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유엔의 중재하에 1953년 7월 27일 

스올의 뱃속에서 배운 교훈을 절대 잊지 않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3일을 보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은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간이었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죽음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 것이냐? 네 인생의 종착역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네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새롭게 도전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요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셔도 마지막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네가 결단해야 한다. 네가 그곳을 이겨 나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저할는지….”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셔도 마지막은 나,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닌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꾸기 위해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 2: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까?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용기가 있을 때,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있을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할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끝입니다. 제 인생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봐야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이 위기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제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인생의 종착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요나는 가장 깊은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입니다.

 2절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와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의 ‘주께서’가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3인칭 하나님이셨다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2인칭으로 요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에 머물게 하는 기도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내 아내의 하나님, 내 남편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2인칭이신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늘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내 영혼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고난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겁쟁이가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싫습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며 포기합니다. 때로는 숨어 버리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다가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3인칭의 하나님에서 2인칭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나갈 때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오만불손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이 내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과감히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스올의 뱃속을 새 생명의 자리로 만듭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어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압니다. 또한 시시각각 내 곁에 다가오는 춥고 시린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던 사람이 건강검진 결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며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곁을 떠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곳곳에 자리 잡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스올의 뱃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스올의 뱃속처럼 무덤과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자궁과도 같은 축복의 역사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의 암흑시대, 6·25 전쟁의 아픔,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북녘에 있는 백성들은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처럼 어둠과 외로움이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래서 생명의 자리로 오게 해 주소서”라고 개인의 삶과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삶의 자리는 개인에게도 있고, 가족에게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이 사회와 대한민국, 또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스올의 뱃속에서부터 토해 내게 하시어 우리가 생명의 사람으로, 부활의 존재로 일어설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기도하면서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나서 2장은 선지자 요나(Jonah, 비둘기)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요나의 기도는 개인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나서 2장의 내용 구분
2:1-4. 요나의 고난과 구원
2:5-10. 구원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다시스로 방향을 바꾸었을 때 심각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극한 반항으로 죽음을 선택한 요나였지만 물고기 뱃속 즉 스올의 뱃속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스올의 뱃속은 가장 낮은 곳에서 돌아오는 회개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사적인 의미로 볼 때 물고기 뱃속에서의 요나는 예수의 죽으심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구원을 얻은 사건은 예수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었던 것도 예수께서 죽으셔서 부활하시기까지의 기간과도 일치합니다.
물고기 뱃속은 사실상 지옥이나 무덤 속같이 절박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장사지낸 후 부활하시기까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하셨습니다(벧전 3:18-19).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했듯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때에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은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고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처럼 구워 받은 은총에 대하여 날마다 매 순간마다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 물고기(1710)
דָּגָה 스트롱번호1710

1. 물고기. 2. 보통 집합적인 뜻을 지님
발음 / 다가[ dâgâh ]
관련 성경 / 물고기(창 1:26, 출 7:18, 겔 47:9), 생선(민 11:5), 어족(신 4:18, 사 50:2).
구약 성경 / 15회 사용

요나는 하나님의 기회를 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돌이키기 위해서 요나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 “네가 내 메신저가 되어라. 니느웨에 가서 내 말을 증거하고 저들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해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했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싫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자비롭고 너무 착하십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 폭풍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방 뱃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요나에게도 기도하며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선장이 요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요나 1:6)

선장은 요나에게 기도를 요청했지만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풍 속에서 배가 깨지게 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세 번째, 요나는 이 재앙이 자신 때문에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배를 돌리는 등의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뱃사람들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습도, 용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대로 두면 요나는 끝장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자기 마음대로 도망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계속 요나를 추적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요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시면서 결국 요나가 다시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나가 당한 모든 일들의 주체와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며 요나서를 읽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요나를 움직이려고 하셨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 (요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 (요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요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 (요나 4:6)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 (요나 4: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 (요나 4:8)

요나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요나야, 내가 너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사랑한단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계속 도망가기만 했습니다.

결정은 요나가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물고기 뱃속’이란 그의 인생의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진 자리였습니다.

2장 2절에 나타나는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올’이란 때때로 지옥으로도 표현되지만,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또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큰 물고기의 뱃속은 두 가지의 가능성, 두 가지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무덤이 되지만, 그곳을 탈출하면 그곳은 생명을 낳는 자궁이 됩니다. 마치 고난 속에서 무르익어 열매가 되는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바로 스올의 뱃속인 것입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3일을 보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은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간이었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죽음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 것이냐? 네 인생의 종착역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네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새롭게 도전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요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셔도 마지막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네가 결단해야 한다. 네가 그곳을 이겨 나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저할는지….”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셔도 마지막은 나,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닌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꾸기 위해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 2: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까?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용기가 있을 때,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있을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할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끝입니다. 제 인생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봐야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이 위기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제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인생의 종착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요나는 가장 깊은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입니다.

 2절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와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의 ‘주께서’가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3인칭 하나님이셨다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2인칭으로 요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에 머물게 하는 기도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내 아내의 하나님, 내 남편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2인칭이신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늘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내 영혼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고난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겁쟁이가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싫습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며 포기합니다. 때로는 숨어 버리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다가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3인칭의 하나님에서 2인칭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나갈 때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오만불손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이 내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과감히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스올의 뱃속을 새 생명의 자리로 만듭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어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압니다. 또한 시시각각 내 곁에 다가오는 춥고 시린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던 사람이 건강검진 결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며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곁을 떠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곳곳에 자리 잡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스올의 뱃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스올의 뱃속처럼 무덤과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자궁과도 같은 축복의 역사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의 암흑시대, 6·25 전쟁의 아픔,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북녘에 있는 백성들은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처럼 어둠과 외로움이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래서 생명의 자리로 오게 해 주소서”라고 개인의 삶과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삶의 자리는 개인에게도 있고, 가족에게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이 사회와 대한민국, 또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스올의 뱃속에서부터 토해 내게 하시어 우리가 생명의 사람으로, 부활의 존재로 일어설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기도하면서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스올의 뱃속 - 요나 제 2장

​일부 신학자들은 이 책이 이방 나라를 상징하는 바닷속에 빠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탄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싫어하는 책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현신을 설명하는 창세기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요나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설명하는 다니엘서일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 - 불가항력(不可抗力) / 아닐 부, 옳을 가, 겨룰 향,  힘 력

"인간(人間)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저항(抵抗)해 볼 수도 없는 힘" 이라는 뜻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פָּלַל 스트롱번호6419

1. 심판하다,  2. 심판하다
발음 / 파랄[ pâlal ]
관련 성경 / 뜻하다(창48:11), 판결하다(삼상2:25), 유리하게 판단하다(겔16:52), 처벌하다(시106:30), 기도하다(민21:7, 신11:2, 삼상1:27),간구하다(왕상8:33, 대하6:24, 사45:14), 빌다(왕상8:35, 대하6:26, 욥42:10), 묵도하다(느2:4).
[명] 기도(삼하7:27, 왕상8:29, 대상17:25), 간구(왕상8:54, 대하33:13).
구약 성경 / 84회 사용


세 종류의 사람들

1. 신을 발견하여 섬기는 사람들 - 도리에 합당하고 행복한 사람
2. 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애써 구하는 사람들 -  도리에 합당하지만 불행한 사람 
3. 신을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 -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

기도하며 기도의 응답을 즐기는 사람(불가항력) 不可抗力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기도의 응답을 전혀 모르는 사람(운칠기삼) 運七技三
기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의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자포자기) 自暴自棄


공자(孔子)
생이지지(生而知之) - 배우지 않아도 아는 사람
학이지지(學而知之) - 배워서 아는 사람
곤이지지(困而知之) - 어려움을 겪어야 아는 사람

중간의 사람들은 도리에 합당하지만 불행하다.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위 구절에서 "스올(שְׁאוֹל. H7585)" (땅 깊은 곳, 스올)”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단어를 비롯해 하데스, 게헤나, 아부소, 타타루스  다섯 개의 단어들이 단 한 개의 단어 “Hell(지옥)”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한글 성경은 그나마 구분이 되어있습니다만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돈스럽기는 매일반입니다.

* 스올(7585) שְׁאוֹל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발음 / 스올[ sheʼôwl ]
어원 / 75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구약 성경 / 65회 사용

위에 스올이 언급되었기에 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겠습니다.
필자는 인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또 죽은 다음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 그동안 견딜 수 없는 궁금증을 갖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우선 영어의 지옥을 의미하는 Hell은 헬란(Helan)이라는 단어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덮어 놓은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의미합니다.
영국에서는 감자를 보관하는 구덩이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나쁘던 좋던 모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37:35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무덤을 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무덤은 "카바르(קָבַר H6912. 묻다, 무덤)”를 사용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땅속이 아니라 지상의 동굴이나 매장소에 시체를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언제나 땅 밑 깊은 곳을 의미했습니다(시편 63:9; 시편 14:9; 44:23; 에스겔 26:20; 31:14, 16, 18; 32:18, 24).

​묻는다는 의미의 “카바르”는 스올의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카바르”가 명사로 쓰일 때는 복수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단 한 번도 복수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무덤은 분명한 장소가 지정되어 있어 언제나 방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스올은 장소가 지정되어 있지 않아 방문이 불가합니다.
무덤은 사고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사고팔 수 없습니다(창세기 23:4-20).

​무덤에 있는 몸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부 구절들에서는 스올에 있는 영혼이 인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사야 14:4-7; 44:23; 에스겔 31:16; 32:21). 이 부분이 과연 모든 일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지 또는 상징적인 말인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의 회중입니다(잠언 21:16).
스올은 죄인들의 영역입니다(민수기 16:33; 욥기 24:19; 시편 9:17; 31:17 등).
선인들의 영역이기도 합니다(시편 16:10; 30:3; 49:15; 86:13 등).
스올은 깊은 곳 (욥기 11:8),
어두운 곳(욥기 10:21, 22);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민수기 16:30, 33; 에스겔 31:15, 16, 17).

​"하데스(Aδης G86. 음부)”는 스올의 헬라어 버전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데스는 크고 흰 보좌의 심판 때까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계시록 20:11-15).
그 외에도 감옥으로(베드로전서 3:19),
문과 철장, 잠금장치가 있는 곳으로(마태복음 16:18; 계시록 1:18),
지구 밑에 있는 곳으로(마태복음 11:23; 누가복음 10:15) 표현되어 있습니다.

​"게헨나(Γέεννα G1067. 지옥불)”은 원래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계곡을 의미했습니다.
이곳은 짐승의 사체와 쓰레기 하치장이었습니다. 이곳은 소독을 위해 늘 유황 불길이 유지되었습니다. 이곳은 죄인들을 심판하는 “영원한 불의 못”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타타루(Ταρταρόω. G5020. 지옥)”는 한글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베드로후서 2:4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이곳은 하데스 또는 스올의 영역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창세기 6장에서 등장하는 타락한 천사들을 가둔 곳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부소스(ἄβυσσος. G12.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계시록에서 짐승이 나오는 곳입니다 (계시록 11:7; 17:8). 이곳은 사탄이 천년 간 구속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20:1, 3). 계시록 9장에 등장하는 황충의 무리가 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타타루와 같은 곳으로 생각되나 굳이 다른 단어로 표현 한 것으로 봐서는 그리 간단히 결론을 내릴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곳에서 이 단어들의 의미와 그것이 시사하는 인간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릴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실 때 여러분도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가 경험하고 있는 이 폭풍이 하나님의 의한 것임을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 이는 자신이 겪는 모든 시련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아는 욥과 (욥기 1:21; 2:10) 다윗의 (사무엘하 16:5-11) 기도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본 2장은 아래와 같이 시편의 구절들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요나 2:2 - 시편 120:1 /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요나 2:3 - 시편 42:7 /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요나 2:4 - 시편 31:22 /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요나 2:5 - 시편 69:1 /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요나 2:7 - 시편 142:3; 18:6 / 내 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요나 2:8 - 시편 31:6 /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요나 2:9 - 시편 116:17, 18, 3:8 /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산의 뿌리란 해저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인간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깊은 죽음의 골짜기까지 갔다 온 것입니다.
요나의 이 기도는 히스기아의 기도에서 인용되었습니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용하시기 위해 배에서 분리 시키셨고 물고기를 보내 그의 신변의 안전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위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이 왜 그토록 어려운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우리 성도들의 단골 메뉴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다니엘 3:16-18, 24-25)

내 죄에 대한 징계 또는 훈육: 히브리서 12:5; 야고보서 4:17; 로마서 14:23; 요한일서 1:9

죄에 빠지는 것을 예방: 베드로일서 4:1-2

우리의 자만을 없애기 위해: 고린도후서 12:7-10

믿음을 키우기 위해: 베드로전서 1:6-7

성장을 위해: 로마서 5:3-5

복종과 단련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행전 9:15; 빌립보서 4:11

타인을 위로할 능력을 얻기 위해: 고린도후서 1:3-4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고린도후서 4:7-11

천사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욥기 1:8; 에베소서 3:8-11; 베드로전서 1:12

인간은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그 어려움은 어느 누가 겪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뒤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은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고난을 어려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견디면 자원입니다.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는 기차이기도 합니다.

이옥 선교사 그는 북한에서 인민군 하사로 근무했던 사람인데 탈북하여 우리나라에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에 온 사람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에 국가 배급이 끊어지자 먹을 것이 없어 다 죽게 될 위경에 빠졌습니다.
너무 굶으면 헛 것이 보이고 모래도 곡식으로 착각하고 먹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는 강냉이라도 원없이 먹어보는 것을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탈북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다가 물에 빠져 정신을 잃고 물에 떠내려가게 되었는데 강 하류에서 조선족에 의해 건짐을 받아 중국에 있는 우리 나라 목사님을 만나 복음을 받아 들이고 우리 나라에 온 사람입니다.

사업하면서 겪는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역자가 겪는 고통이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오늘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사역을 했던 요나 선지자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합니다(왕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1. 요나는 사명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로서 티그리스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지방으로부터 동쪽으로 700km 떨어진 곳입니다. 
3:3에 보면 성읍 둘레는 걸어서 3일 이상 걸리는 큰 도시입니다.
카알 델리취에 의하면 15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4:11에 보면 어린아이만 해서 12만 명이었으므로 총 인구는 100만을 육박하는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우상숭배가 성행했고 포로를 다루는데 잔인했습니다.
당시에 니느웨는 역병이 2번이나 돌고 있었고(B.C. 765, 753년) 일식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B.C. 763년)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에 대한 암시를 느끼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멸망을 선포하므로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욥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1:1-3).
 '욥바'는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변 항구입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에서 서쪽으로 3,000km나 떨어진 스페인 지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했으나 요나는 정 반대 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자신이 죽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원수들이 멸망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만 한 것입니다.

 2. 요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명을 거절하고 도망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을 잊어버리기 위해 배 밑창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풍(大風)을 만나 폭풍이 대작(大作)하므로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이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의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神)을 부르며 배 밑창에 들어가 깊이 잠들어 있던 요나에게도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바다는 점점 흉용해져 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온 것인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그 원인자로 뽑혔습니다.
그들은 요나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온 것인지 묻자 요나는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연고인 줄 알고 그들에게 자기를 바다에 던지면 폭풍이 잔잔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다가 점점 더 흉용해짐에 따라 하나님께 요나 한 생명 때문에 자기들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으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요나가 던져지자 하나님께서 준비한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흑암의 고난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1:4-17).

3. 요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흑암 가운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스올 뱃속이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죽음, 무덤, 음부, 지옥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호소하며 죄를 회개하며 서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회개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떠났던 것,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버리고 거짓되고 헛된 것을 따랐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한 서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고통 중에 회개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명한 바를 선포하게 했습니다.
요나는 3일 길을 걸어 니느웨로 갔습니다.
하룻동안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치고 다녔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금식을 했으며 심지어는 어린 아이와 짐승들까지 금식을 시켰습니다.
니느웨의 모든 사람이 무론대소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 금식을 하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전에 지은 죄를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진노를 거두시고 멸망치 않게 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보고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리라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3:1-10).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나 우리 하나님이 시킨 일이 마음에 부담이 되어 거절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서 서원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고통을 주는 환경이 우릴 토해내게 할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진입금지’를 의미하는 표지판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표지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 초보 운전이었을 때, 나는 경황없이 들어선 길에서 마주 오던 차들이 유난히 나를 노려보며 경적을 울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얼마간 진행을 하다가 마침내 주차단속을 하던 경찰이 나를 세웠다.

‘일방통행로입니다. 
면허증을 좀 보여주시지요.’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했었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범칙금 고지서를 발부 받았으나 나는 오히려 미안해하고 또 감사하면서 즉시 유턴을 하여 제 길로 바로 가게 되었다.

선지자 중에서 하나님의 순리와 명령을 거역하고 나의 경우처럼 역주행 하던 선지자가 있으니 아시다시피 바로 ‘요나’이다. 
니느웨로 가라시던 명을 거스려 다시스로 향하던 요나는 경찰의 제지(대풍’ 大風’)를 받아 ‘스올(음부, 무덤)의 뱃속’으로 불리는 물 고기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물고기를 생각하면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한 선생님께서 보여주시던 그림 속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 그림은 고기 뱃속을 자그마한 다락방의 이미지로 형상화 한 다음, 호롱불 아래에서 성경책을 펴 놓고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이었다.
어두운 고기 뱃속에서도 성경책을 볼 수 있도록 해 준 선생님의 배려가 참 세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내가 다 시 한 번 요나의 상황을 재현해 볼라치면 그 그림은 동화 수준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고기의 뱃속 상황은 그리 호락하지는 않 았으리라 생각한다. 
위(胃)의 연동운동으로 인한 물리적인 압력, 지속적으로 내뿜는 강산성 위액, 뜨거운 내부 온도, 밀려오는 온 갖 해조류며 작은 고깃덩이까지… 그가 느꼈을 고통의 깊이란 것은 당해보지 않은 내가 상상하기에 너무 가혹하고, 어쩌면 죽음의 위기 감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직접 체험한 심각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요나의 처신이다. 
그 와중에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기도한 요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절망적 고통 앞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곳을 택하시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세상 사람들이 만날 때 즐겨 찾는 화려하고 아늑한 곳이 아닌, ‘스올’과 같은 절망적인 곳, 상처와 고통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는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길 원하신다.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고통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고통 속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체험 해 보라. 
그리고 그 길에서 돌아서라. 
시인하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 여러분 앞에 기 다리고 있다. 

기도할 수 있는 한 절대로 완전히 절망에 빠진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는 차라리 자신의 고통의 깊이를 먼저 느껴보라.”고 역설한 유진 피터슨의 말이 오늘따라 귀에 쟁쟁하게 들린다.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는 요나(요나 2:1-10)

요나는 광풍이 불어오는 바다 한가운데서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선지자로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성경도 쉬지 않고 읽었고 남들보다 기도도 많이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환란가운데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멋대로 살았던 못된 죄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아 내가 바로 그렇게 증오하며 비판했던 외식주의자였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찾아가는 환자는 한결같이 자신의 몸에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거센파도와 광풍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절)

그도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에서 비로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죄때문에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큰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각오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광풍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자기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광풍앞에서 자기의 욕심도, 자기의 자존심도, 자기의 생명조차 내려놓고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겉 사람이 강합니다.
끈질깁니다.
그래서 그냥 말로 해서는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경의 풍랑을 통해서 우리를 겉사람을 깨트리고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하나님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듭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비로소 하나님앞에 엎드려 진정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역경이 바로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경이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도 지금까지 기도한다고 했지만 매우 형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마음을 터놓고 기도한 적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깊은 기도를 드린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눈물로 기도했던 기억이 아득합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기도합니다.

1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의 얼굴이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회복입니다.
비록 물고기 뱃속이지만 요나의 영이 깨어난 것입니다.
비로소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삶이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을 위해서도 물고기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물고기는 내 가정의 풍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내가 당하는 육체적인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내 자식들이 당하는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내가 마땅히 배워야 할 교훈을 알게 하십니다.

 

2절,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영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과 교통의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고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요나의 죽음을 선택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의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이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요나, 여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요나에게 엄청난 고난이 왔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고난이 모두다 징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또한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징계하십니다.
징계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나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징계는 모든 성도에게 찾아옵니다.

징계가 없으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나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을 드십니다.
내게 하나님의 채찍이 가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의 질책이 나를 향해서 찾아올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영혼이 깨어난 것입니다.

2. 징계는 나자신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징계 그 자체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나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죄덩어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 징계를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3. 징계의 목적은 나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는 나의 믿음을 자극시켜서 믿음의 연단을 만들어 냅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를 통해서 무너지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앞에 엎드리고 요나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징계가 은혜입니다.

징계가 내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다 제거하고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나의 교만이 깨어지고 나를 거룩하게 하는 데 절대 필요한 과정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그가 받는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스올'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말합니다.
죽은 바와 다름없는 곳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비로소 찾았습니다.
요나는 죽음의 골짜기에 갇힌 것입니다.
탈출할래야 할 수 없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밀폐된 어둠 속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더러운 냄새로 숨이 막히고 어둠이 가득한 고통의 장소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반드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기서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잃어버렸던 신앙을 찾은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자기를 찾은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기도를 찾은 것입니다.
평소에 요나는 선지자라고 하면서도 진실한 기도를 하지 못했고, 신앙은 형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것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도하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전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과 내 삶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선지자이니까 겉으로는 좋은 신앙인처럼 보였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이론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내 생각과 같았을 때는 순종하는 것 같았지만 내 생각과 다를 때는 여지없이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마음의 꺼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메마르고 그의 심령이 메말라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고,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캄캄한 환난의 밤을 만나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기도를 배울 수 없는 "요나"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는, 큰 풍랑을 당하지 않고는, 파도를 만나지 않고는 기도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캄캄한 뱃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이렇게 외쳤을지 모릅니다.
"내가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저 평안한 땅에서, 저 아름다운 땅에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 때,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을 때 나는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요나가 이제라도 기도를 배우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일 때, 한계상황에 부딪쳐 앞에 캄캄할 때에도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서 내 음성을 듣고 계시다는 사실은 은혜가 아닙니까?

이때 요나는 기도하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1.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3-4절).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이 모든 역경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위에 넘쳤나이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앙망하며 간구합니다.
요나의 기도 속에서 중요한 낱말은 "다시"라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얼마동안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다시 성경을 펼치겠습니다. 다시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은혜를 사모하기 시작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앙망합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거기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다시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여러분이 앉아 있어 교제가 단절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잃어버렸던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가 회복되었습니다(7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요나는 여호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편안할 때 자주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곳이 물고기의 뱃속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이 절박한 상황에 던져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구세군의 창설자이신 월리엄 부드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는 여러분이 지금 드리는 그 기도에 생사가 달린 것처럼 생각하십시오"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멈추지 하십시오.
기도하실 때 지금 드리는 이 기도에 여러분의 생사가 달린 것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절박해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에 필요없는 수식어는 얼마나 많이 떨어지겠습니까?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높고높은 보좌 위에서‥" 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했을까요? 오히려 그는 원색적인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정신 똑똑히 차리고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한번만 더 내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요나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나의 의식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있는 신앙은 그 생각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생각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갖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당연히 먼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 생각대로 고집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감사가 회복되었습니다(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그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편안한 삶을 살 때 일찌기 그의 입술에는 감사의 언어가 없었습니다.
그가 마음대로 자기의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 그는 감사의 언어를 잊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의 캄캄한 뱃속에서 그는 감사의 언어를, 감사의 노래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역경 속에서 자기의 삶이 끝날 듯한 고통의 한밤중에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나면 그저 기도는 감사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배부른 기도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합니다.
그는 비로소 '감사'라는 단어를 깨닫습니다.
더이상 요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그저 감사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서원을 갚겠다고 결심합니다.
그의 서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신 사명,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이 명하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순종하겠다는 다짐과 맹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회개에 이르렀다면 외면했던 사명의 길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생을 살면서 한 번도 서원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도 어딘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고 감사의 고백이 흘러나올 때 "하나님, 제가 나머지 생은 다르게 살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가 이렇게 살아 보겠습니다" 하는 결심도 없이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구원받은 성도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앤드류 러코크라는 구약 신학자는 물고기 속에 들어가 있던 요나의 모습을 이와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물고기야말로 요나의 인생을 다시 빚어 만드는 새로운 삶의 모태였다.
마치 어린아이의 생명이 어머니의 태내 어둠 속에서 빚어지며 그 속에서 인생이라는 놀라운 날을 예비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기 물고기의 뱃속이라는 고난의 한 심연에서 요나에게 새로운 삶을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고난만 예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의 빛나는 내일의 새벽까지도 예비하셨음을 깨닫고 주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시편기자의 고백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감사를 배우고 하나님을 향한 결단으로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요나, 그를 위해서 하나님은 마지막에 어떻게 하십니까?

10절,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그 물고기가 요나를 다시 빚기 위해서 주께서 예비하신 교육의 현장이었다면, 이제 요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감사를 배웠고 새로운 미래를 결심했기에 그곳에서 배울 것은 다 배운 셈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물고기로 요나를 토하게 하심으로 고난을 끝내십니다. 스올의 뱃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아버지앞에서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잃어버린 영적인 은혜를 회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드려 보았습니까?
심정을 통하는 깊은 기도를 드려 보았습니까?
지금은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할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서원을 갚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감사함으로 주 앞에 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월 26일(수) 요나서 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말씀대로(3절)



요나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Jonah obeyed the word of the LORD and went to Nineveh. Now Nineveh was a very important city--a visit required three days.

"여호와의 말씀대로(the word of the LORD)"
키데발 아도나이(כִּדְבַר יְהוָה)

* 말씀(1697) 다바르(dâbâr) דָּבָר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다바르[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언어(창 11:1, 시 19:3, 잠 29:20), 말씀(창 15:1, 민 11:24), 일(창 18:14, 출 18:18), 말(창 24:52, 출 35:1, 신 4:2), 명령(창 44:2, 삼상 15:11,13), 물건(출 22:9), 대답(잠 27:11), 사건(민 25:18, 신 19:15), 계명(신 4:13), 규례(신 15:2), 판결(신 17:11), 뜻(신 17:10), 직무(신 24:5), 까닭(수 5:4, 왕상 9:15), 의견(삿 20:7), 염려(삼상 10:2),구변(삼상 16:18), 이유(삼상 17:29), 소식(삼하 15:28), 식양(왕상 6:38), 소문(왕상 10:6),행위(왕상 10:6, 16:20), 사적(事蹟)(왕상 11:41,14:29), 행적(왕상 14:19, 대하 12:15), 지략(志略)(왕상 14:29, 16:14), 독(왕하 4:41), 불의(왕하 17:9), 양(왕하 25:30), 유언(대상 23:27), 반(대상 27:1), 글(대상 29:29), 소행(느 5:9), 생각(겔 38:10), 한 마디(렘38:14), 조서(에1:19), 일기(에2:23), 소리(욥26:14, 시22:1), 용맹(욥41:12), 병(病)(시41:8), 목적(시64:5), 영광(시79:9), 표적(시105:27), 노래(시137:3),사물의 이치(전8:1), 불행(전8:5), 예언(렘28:6), 편지(렘29:1), 영(단9:25), 말미암다(창20:11, 신4:21), 조금(렘38:5), [동] 응하다 (겔12:23), 말씀하다(말1:1), 대하다(출8:12), 대답하다(민20:8, 삼하24:13), 이르다(창41:28, 왕상18:31), 상종하다(삿18:28), 상심하다(삼하13:33), 청하다(삼하14:15), 구하다(삼하14:22), 모의하다(왕상1:7), 허락하다(대하1:9), 무엇이든지(삿19:19), 구별하다(느12:47), 자세히(삼상3:18), 어찌(삼상11:12).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요나 3:1-10 여호와의 말씀대로(according to the word of God) לפי דבר אלוהים

요나서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 요나에게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요나 1:1-2)

첫번째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올의 뱃속에서 삼일 동안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듬은 후에 다시 두번째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두번째 말씀을 듣고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 40일 후면 니느웨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니느웨는 사일 동안 걸어다녀야 할만큼 매우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룻동안 니느웨 성에서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성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요나 3:5-6)

타락했던 니느웨 성 사람들과 심지어 왕까지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금식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곤 신을 숭상하는 악한 이방 족속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민족은 여전히 우리만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요나 한 사람이 순종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날도 순종해야 할 사람이 순종하지 않아 불행한 일은 계속하여 산불 번지듯 퍼져나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불러주신 목적은 바로 이 때를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순종의 자리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을 때 그 말씀은 곧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동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동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예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말만 잘 하는 사람들" 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받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겠습니다.

내 입의 말과 묵상과 행실이 먼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이 되어 구원의 증거가 열매되는 일에 성공하는 믿음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과 행위가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말은 해 놓고 행동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때의 상황에서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계속해서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씀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선포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되어야 합니다.
아니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신 하나님이 또한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또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제 요나에게 다시 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요나에게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게 되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요나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 한 개인을 중심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요나가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본문의 기록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요나에게 사명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나를 훈련시키신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훈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자가 잘 듣도록 바뀔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훈련으로 인간의 죄성을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요나 한 개인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나라고 하는 인물이 대표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요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 고정관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이렇게 이끄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어떻게 언약을 성취하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고 계신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죽이고 언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사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서 과거의 이스라엘을 죽이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창조하여 언약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요나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게 됩니다.
요나가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선포되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의도대로 드러나고 성취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처음 의도는 니느웨에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고, 니느웨에서 말씀이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심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선포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이 의논하여 절충된 다른 의견이 제시되어 실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요나가 말씀에 굴복된 자로 바뀌어져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거부한 선지자가 죽고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선지자로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제 말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 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말씀은 니느웨에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니느웨에 선포되게 됩니다.
 
3,4절의 말씀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선포한 말씀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큰 성읍이라 삼 일 길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서 삼 일이 아니라 하루를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상황을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5-8절).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삼일 동안 다니면서 선포한 것도 아니고 하루 선포하니까 온 성읍에 소문이 퍼지고 그 소식이 왕에게까지 상정되어 왕도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금식을 선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고 강포를 행하는 일을 그치도록 합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니느웨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니느웨의 회개가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회개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싶다고 해서 회개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입장에서 니느웨 백성들이 마음대로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회개하게 만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하였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에게서 회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유보시키신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했다가 심판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훔서 1:1 이하에 보면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나 1:1-3a)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가 외치던 이 상황은 요나 선지자가 외쳤던 시대에서 약 100년 후의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니느웨을 철저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심판을 유보하신 것은 결코 니느웨를 구원코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훔서를 통해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니느웨를 회개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요나 선지자를 보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니느웨를 회개하는 것을 보도록 요나를 참여시키신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나는 배에서 다시스로 도망하면서도 배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은 히브리 민족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라고 앞의 강론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 시대는 여로보암 2세 때로 다윗 이래로 가장 부유함을 누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누리는 부유함이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기고 있기 때문에 누리는 복이라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니느웨에 선포하라고 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요나에게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그러한 긍휼이 베풀어진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나의 모습 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만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은 멸망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그 고정관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회개시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죄가 많거나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의해 구원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는 방식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언약의 방식대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짐에 있어서 요나 같은 자를 보내시는 것은 고통과 희생의 과정이 포함되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안다고 하고 그 말씀대로 산다고 알고 있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이고 또한 모든 인간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은 모든 죄인들의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게 하심에 있어서 요나를 고통과 희생의 자리로 끌고 가셔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은혜와 긍휼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부유함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이지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자격이 이스라엘에게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니느웨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전례없는 강성함을 누리는 것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이 긍휼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도 벌써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느웨에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에 요나라는 존재가 고통을 당하고 희생되었듯이 이스라엘에게 계속적으로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은 언약의 실체가 오셔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39-41)라고 말씀하신 것은 요나의 고통과 희생 그것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거부하고 도망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그렇다거나 내가 잘 믿을 것 같아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 모든 순종의 삶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니느웨를 회개시킴으로 이스라엘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고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우습게 압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나무 십자가 자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대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홀로 십자가에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셨기 때문임을 믿는 자가 성도요 또한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 쪽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구원에 대한 어떤 근거도 날마다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이라는 근거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도, 목사나 장로, 집사, 권사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어떤 당위성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임을 고백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7-31)


1. [민수기 3:51]
이 속전을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

2. [신명기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 [여호수아 8:8]
너희가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였느니라 하고

4. [사무엘상 16: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5. [열왕기하 1:17]
왕이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저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 이년이었더라

6. [열왕기하 9: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7. [열왕기하 23: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8. [역대상 12:23]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러하였더라

9. [역대하 29:15]
저희가 그 형제를 모아 성결케 하고 들어가서 왕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명한것을 좇아 여호와의 전을 깨끗케 할쌔

10. [역대하 30:12]
하나님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저희로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일심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11. [예레미야 13: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요나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 (고전 2:14-3:3, 마태 13:3-2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4)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덕경(德經)」제 41장) :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上士聞道, 勤而行之)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간수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듯하기도 하며(中士聞道, 若存若亡)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으니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When the be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practices it assiduously;        
     When the average student hears about the way, it seems to him one moment there and gone the next;      
     When the wor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laughs out. If he did not laugh, it would be unworthy of being the way. 

 
사람들을 3가지로 분류합니다.
난사람, 든 사람, 된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인정받을만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난사람은 보통 평범한 사람보다 뛰어나 유명하여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을 말합니다.
든 사람은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세 사람가운데 인간으로서 필요한 모습은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유명해지는 것보다, 머리에 많은 지식을 쌓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사람됨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거미와 같은 사람, 개미와 같은 사람, 그리고 꿀벌과 같은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세상에는 거미와 같이 남을 이용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개미와 같이 일은 열심히 하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꿀벌과 같이 끊임없이 날라서 자기도 살고 남도 살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우월 의식과 특권의식이 강하게 내포된 구분입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옛날에는 더욱 그것이 심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면 모두 이방인이었고, 이방인은 사람이 아닌 동물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주님을 믿기가 매우 어려웠고, 그들의 우월의식과 고정관념이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이것을 깨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러 관점에서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사람을 어떻게 분류할까요? 본문은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유의하여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나의 모습을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구분은 크게 3가지로 나타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14절에서 이것을 잘 알려줍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한마디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요, 중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연인을 말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지금 세계 76억 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의 숫자가 약 20억 정도 됩니다.
전체 인구의 30%가 넘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카톨릭과 다른 종파를 모두 포함한 숫자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독교가 어떤 종교보다도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3분의 2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믿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하고, 전도할 대상들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늘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것을 한마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깨닫는 존재입니다.
결국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 자기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이가 점점 깨달아야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점점 깨달아야 철이 드는 것입니다.
인간 됨의 회복은 깨달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은 모두 깨달음의 사람입니다.
깨달음이 신앙과 삶에 너무도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중요한 깨달음은 하나님이 역사 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풍성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안됩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성령이 도우시면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고, 맹목적이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모습이 나오고, 인간임을 포기하는 행동들이 나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많이 발견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3장 1절과 2절에서 이것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요, 이미 거듭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도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징을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긴 했지만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막 태어난 생명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보다 조금 성장해서 이제 돌을 지나고, 걸음마를 하는 단계의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보다 조금 더 자라서 이제 말도 하고, 재롱도 피우고, 자기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단계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어린아이라 하고, 또한 이것이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입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이들을 젖을 먹는 자라고 강조합니다.
이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어린아이기에 젖을 먹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만큼 아직까지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물론 아이가 순수하고 깨끗하지만, 가만히 보면 어린아이의 약점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깊이 생각하거나 올바르게 판단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웁니다.
그런데 그 우는 것을 가만히 보면 모두 자기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배고프다는 것이고, 불편하다는 것이고, 놀아달라는 것이고, 딴 생각하지 말고 나만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을 때, 여지없이 웁니다.
물론 이렇게 자기의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행동에서 오는 모습입니다.
아이가 엄마 생각하고 우는 것 보았습니까?
지금 엄마가 몹시 피곤해서 잠을 자야 하는데 아이가 그런 엄마를 생각하고 울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이가 밤에 울면 대책이 없습니다.
다 일어나야 합니다.
한 두 번은 봐주는데 자꾸 그러면 나중에는 때려주고 싶을 때가 생길 정도입니다.
이게 어린아이입니다.
갓난아이는 자기밖에 모릅니다.

아이는 사색이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나 목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커서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것 보았습니까?
“아!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달픈가, 어떻게 해야 돈을 벌어 성공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상한 아이일 것입니다.
아이는 그저 아이입니다.
아이처럼 살면 됩니다.
요즘 아이들의 정신연령이 높아서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자기가 결혼할 친구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 나이에 질투도 하고 좋아하는 친구의 이야기만 나오면 어른처럼 얼굴이 빨게 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입니다.
생각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미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야 인생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방향을 정하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계시지만,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분쟁과 시기가 있었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편협한 삶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고, 폭넓게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교회를 세운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 이것을 알려줍니다.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야말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깊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우선, 15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16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주를 가르치겠느냐” 라고 반문하는데,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서 ‘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신령한 자는 뭔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마음을, 그의 사랑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잘 깨달아 인생을 후회 없이 살도록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 마음은 한마디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온유와 겸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깨달음이 있고, 남을 배려하고, 깊이 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의 약점을 모두 보안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운데 육에 속한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자라면 이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우리 모두 영에 속한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서 커다란 깨달음을 갖고, 이기심을 버리고, 깊은 사람으로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월 27일(목) 요나서 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박 넝쿨(6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Then the LORD God provided a vine and made it grow up over Jonah to give shade for his head to ease his discomfort, and Jonah was very happy about the vine.

7021. 박넝쿨(a vine) 키카욘  קִיקָיוֹן  
1. 조롱박.  2. 박 넝쿨. 3. 요나 4:6-10.
발음 / 키카욘[ qîyqâyôwn ]
어원 / 700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박 넝쿨(욘 4:6-10).
구약 성경 / 5회 사용

* 7006. 토하다(카야. qâyâhקָיָה  
1. 토하다
2. 예레미야 25:27.
발음 / 카야[ qâyâh ]
관련 성경 /  토하다(렘 25:27).
구약 성경 / 9회 사용

요나서 4장은 그릇된 선민 의식을 가진 요나와 공평하게 이방인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크게 대조되는 말씀으로 내용을 두 부분으로 소개합니다.

4:1-4. 니느웨의 회개에 불평하는 요나
4:5-11. 그릇된 요나의 생각을 바꾸려는 하나님

요나는 삼일 길의 큰 성읍 니느웨에서 단 하룻동안만 니느웨가 40일이 지나면 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그렇게 악독한 도성이 즉시 회개하는 놀라운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무너져야 할 이방인의 도성인 니느웨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어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적대국인 앗수르의 발전은 이스라엘에게 위험이 된다는 생각이 요나를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큰 도성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보고 오히려 불평하고 분을 내는 것은 편협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깨닫게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저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며 은근히 무시하고 저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요나를 깨우치려고 뜨거운 햇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는 박 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얼마 후 그 박넝쿨이 시들어서 그늘이 없어질 때 요나는 박 넝쿨 때문에 불평합니다.
이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네가 심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독한 도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단면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인간들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그의 자녀로 사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내 안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통하여 외부로 전달되고 증거되기를 위하여 결단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요나는 큰 성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 아니하자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을 하겠습니까.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요나가 얼마나 앗수르를 싫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가 망해야 이스라엘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갔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경고를 선포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중심적으로 판단을 하고 있으며, 자기가 원한대로 되지 않자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가 세상의 첫 번째 살인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찾는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는 하나님께 분노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요나와 가인처럼 자기중심적 분노를 표출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분노를 이 땅에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죄를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모든 저주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자가 된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요나는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기 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인 줄 알았지만 자기의 생각대로 그 은혜가 베풀어지길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자 그는 불평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평하고 분노한 이유는 자신이 받은 은혜의 깊이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나는 여기서 이 같은 왜곡된 인간 심성을 표출한다.
그는 국가적인 회개를 통해 심판이 연기된 니느웨 성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이스라엘의 대적국인 니느웨에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아직도 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편협한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은 박 넝쿨을 통해서 요나의 오해를 지적하셨다.

<요나 4장 개역한글>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4장 성경주석>

4:1 싫어하고.

 첫 번째 구절은 문자적으로 “그것은 요나에게 악, 곧 커다란 악이었다”이다. 제4장은 인간의 마음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현저하게 대비하여 나타내 준다. 요나는 싫어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뜻을 돌이키”신 것에 대해 몹시 분개했다(3:10).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음을 기뻐하는 대신, 그는 자기의 이기적이고 죄된 자존심 때문에 분개함을 나타냈다. 자기가 예언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간주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에게는 앗수르 수도에 사는 모든 영혼들보다도 자기의 명성이 더욱 소중했다. 그는 성취되지 않은 그 예언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미래를 아시는 여호와의 능력이 불신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추론했을지도 모른다.

4:1 노하여.

 . 니느웨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3:10) 요나를 격분하게 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가 불순종했을 때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건만, 하나님께서 동일한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베푸셨을 때 그는 그것을 질투했다.

4:2 기도하여.

 2장의 기도와 비교할 때 이 기도를 드릴 때의 상황은 얼마나 다르며, 이 기도를 하게 만든 그 정신은 얼마나 다른가! 그때 그는 생명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때 그는 겸손했지만 지금은 화를 낸다.

4:3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나님께 드리는 요나의 간청은 모세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모세는 죄를 범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진정한 자기희생 정신으로 기꺼이 자기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호소했다(참조 출 32:31, 32). 요나는 완전히 낙담에 빠졌다.

4:4 성냄.

 요나의 성냄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내실 때에 나타내신 것과 같은 고결한 분노(참조 요 2:13~17)가 아니라 전적으로 이기심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선지자는 자기의 성급한 정신으로 인해 스스로 큰 축복을 빼앗겼다(참조 잠 14:29; 16:32).

4:5 보려 하니라.

 어떤 이들은 요나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절)라는 질문을 자기가 하나님의 의도를 성급하게 오판했으며 니느웨가 아직도 멸망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제시했으나, 다른 이들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진지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오히려 요나의 반응은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경고하셨던 것처럼 실행하셔야 한다는 요나의 완고한 태도와 주장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4:6 박 넝쿨.

 히브리어 키카욘(qiqayon). 알려지지 않은 식물. 아주까리, 일종의 오이 등 여러 가지가 그 정체로 제시되었다. 그 식물은 기적적으로 성장했으며, 비록 이것이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악갓어로 쿡카니투(kukka-ni-tu)라고 하는 미확인된 종류의 식물일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구태여 그 정체를 빠르게 성장하는 어떤 알려진 식물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4:6 준비하사.

 . 히브리어 마나(manah), “지정하다.”

4:6 괴로움.

 .히브리어 라아(ra‘ah). 악, 불운, 고생, 불행 등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 요나의 불편함은 육체적인 것이었기보다는 그가 당하고 있다고 느낀 속상함과 모욕과 실망으로 인한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이었다.

4:7 준비하사.

 참조 6절 주석.

4:7 시드니라.

 . 인생의 경험에서 얼마나 자주 기쁨과 즐거움의 새 날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일 때, 어떤 불행이나 슬픔의 벌레가 와서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 버리는가!

4:8 뜨거운.

 히브리어 하리쉬트(h.aris∨it). 단지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 “태우는 듯한”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개정표준역」은 “찌는 듯이 더운”이라는 의미를 제시한다.

4:8 준비하셨고.

 .참조 6절 주석.

4:9 내가…합당하니이다.

 선지자는 성급하고 완고하게 자기가 성내고 죽고자 결심한 것이 옳다고 항변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에 사리에 맞는 태도를 일깨우려고 애쓰고 계셨다.

4:10 네가 아꼈거든.

 히브리어에서 “네가”는 강조형이다. 화가 난, 동정심이 없는 선지자 요나는 자기가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를 들이지 않은 별 가치 없고 하찮은 박 넝쿨에는 기꺼이 동정심을 나타내고 아까워했으나, 큰 도성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배려를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다. 「70인역」은 이 절의 처음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것을 위해 고생하지도 않고 네가 그것을 기르지도 않은 박 넝쿨에 동정심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화를 냈고(1, 4절),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시들도록 허락하셨을 때도 화를 냈다(9절).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인가!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보다도 박 넝쿨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4:11 분변치 못하는.

 어떤 이들은 이 표현을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느 쪽 손이 더 강하고 유용한지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적용시켰다. 만약 그런 어린이들이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구성한다고 가정할 경우 니느웨는 약 600,000명의 인구를 가진 도성이었을 것이다. 그런 수치는 그 고대 도성의 알려진 크기와 조화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숫자이다. “분변치 못하는”이라는 표현은 선과 악에 대해 불완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을 지칭하는 은유적인 내용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더 좋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면 니느웨와 함께 그 주변 성읍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참조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4:11 십이만여 명이요.

 . 니느웨의 인구에 대하여는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4:11 아끼는 것이.

 . 히브리어 후스(h.us), “유감스럽게 여기다”, “~에 동정심을 나타내다.” 후스는 10절에서 “아꼈거든”으로 번역되었다.

요나서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4장은 요나에게 은혜를 가르쳐주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특별히 더 돋보이는 장입니다.
요나는 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운 것 같습니다.
요나가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배우는지 “요나, 은혜를 배우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3장에서 요나의 선포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을 본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고, 그는 평생에 가장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요나는 지금 그 현장에 있습니다.
정말 어메이징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 오산에 나가셔서 복음을 전하는데 듣는 사람마다 꼬꾸라지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한다면, 그래서 오산시 전체가 다 하나님 말씀으로 뒤집어 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요나는 그러한 일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가 감격합니다.
기뻐 날뛰면서 춤을 춥니다.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요나서 4장의 시작입니다.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싫어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못마땅한 겁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라는 그 감격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화를 냅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 수가 있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런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용서해주신단 말인가?” 요나는 그들이 심판받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겁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다니!” 이게 요나를 분노하게 한 겁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제사를 드린다며 난리를 쳤는데, 다른 사람이 그 은혜를 받으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정의롭지 않다며 하나님 앞에서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그럽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그냥 좀 넘어갔으면 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냥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랬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내게 상처 준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처벌당하기를 바라고 어떻게든 그 잘못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 화가 나는 겁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인가요? 요나인가요? 문제는 “요나”에요. 문제는요 “나”에요. 내가 문제입니다. 요나는 어쩜 이렇게 우리와 닮았을까요? 화가 난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쏟아 붓습니다. 2절에서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이 기도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합니다. 먼저 자기가 했던 잘못을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줄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는 이 같은 대형 사고가 일어날 줄을 예상하고, 자신은 이것을 막기 위해 도망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요나는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잘못이라도 되듯이 하나님을 몰아붙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요나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거는 좋게 말해 기도지, 보면 기도가 아니라 협박입니다. 요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거리며 하나님께 악을 쓰는 겁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들이밀면서 덤비는 겁니다. “하나님 그냥 나를 죽이세요!”

이거는 진짜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까부는 겁니다. 이런 요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래? 그렇게 네가 죽기를 원한다면 뜻대로 해주마!” 라고 말씀하시면서 커다란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를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철없는 아이를 설득하는 부모처럼, 슬픔과 실망과 분노의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반항하는 십대 아이를 설득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요나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러면서 질문하십니다. “요나야 한번 생각해보아라. 네가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거냐? 이 일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런데 이 질문에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는 대답도 안하고 성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완전히 막가자는 겁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훈계를 하는데 화가 난다고 확 나가면서 방문을 쾅 닫는 것과 같은 겁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는 니느웨 성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40일 후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 위해 앉아있습니다. “하나님! 저 니느웨 백성들을 벌하시든지, 나를 죽이시든지 알아서 하세요.”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빨리 자라는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나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표정이 풀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돕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갑자기 행복해졌습니다. 6절에 보면.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요나서에서 요나가 기뻐했다는 표현이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를 봤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나무 그늘 하나에 엄청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요나입니다.
문제는요 “나”입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았을 때도,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할 때도, 누군가 구원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트에서 1+1 상품을 제대로 하나 건지면 엄청 기뻐하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크게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다시마가 들어있는 라면 아시죠? 포장을 뜯었는데 다시마가 3개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 일은 잘 없잖아요. 2개도 아니고 3개라니! 저는 사진을 찍으며 아내에게 자랑을 합니다. 이거보라고 3개나 들어있다고 그러면서 엄청 기뻐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책임이 주어져도 기뻐하지 않는 제가 손가락만한 다시마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저도 요나와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화를 내던 요나가 박넝쿨이 주는 그늘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게 다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음 날 새벽에 벌레를 예비하십니다. 그래서 요나의 초막을 덮은 박넝쿨에 보내시고, 그것을 갉아먹게 하십니다. 박넝쿨은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그늘은 사라졌고 요나의 미소도 사라집니다. 이제 불타는 햇빛이 요나의 머리에 바로 꽂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온갖 거를 다 준비하십니다. 큰 바람을 보내서 바다에 빠뜨렸다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건지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셨다가 이제는 벌레와 뜨거운 동풍까지 준비하셨던 겁니다. 철없는 요나를 돌이키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겁니다.

뜨거운 동풍을 맞으며 뙤약볕 아래에 있는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요즘말로 멘붕 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또 화를 냅니다. 8절에 요나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서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감사하다가, 니느웨가 회개하니까 화를 내며 덤비다가, 박넝쿨 때문에 좋다고 기뻐하다가, 이제 그게 없어졌다고 또 화를 내면서 죽겠다고 소리 치고 있는 겁니다.

죽는다는 게 무슨 비장의 무기에요. 뭐가 그렇게 대단한 목숨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걸핏하면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요나가 원하는 대로 동풍의 온도를 300도로 올려가지고 요나를 바비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 아내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렇게 요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여러분, 이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인내심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4절에서 하셨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요나야, 이 일이 지금 네가 화를 낼 일이냐? 나의 말을 전하는 선지자인 네가 큰 성읍 니느웨의 회개를 직접 보면서도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화를 내며 죽기를 구하는 것이 어떠냐? 그런 일이 너에게 가당한 것이냐? 네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느냐?”

그런데 요나의 대답은 정말 가관입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가 대답합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정말 독이 제대로 올랐습니다. 못 말리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에게 마침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씀을 하십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게 요나서의 끝입니다. 혹시 찝찝하게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분명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뭔가 쓰다가 그만둔 거처럼 요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셨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요나야 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요나는 집착할 가치도 없고 권리도 없는 것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같은, 그것도 자신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박넝쿨을 아끼며 그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아끼는 것은 어떻습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것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요나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니느웨까지, 자기가 원수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아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박넝쿨을 통해서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시는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화를 냈던 요나가 어떻게 했을까요? 궁금하지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라는 질문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요나서의 요나가요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나도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삶으로 실천하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신지 알았습니다. 그가 2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알고 있는 것이 자신의 삶과는 잘 안 맞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데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넓고, 그렇게 파격적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는 영적 축제의 현장에서 오히려 화를 냈던 겁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되는데 저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은 안 돼,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화가 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요나처럼,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화를 냅니다. 기뻐하지 못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나는 받아도 되지만, 저런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파격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좀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바람을 일으키시고, 배, 물고기, 박넝쿨, 벌레 온갖 것을 다 동원하셨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빠뜨렸다가 건져내셨다가 다시 니느웨에 보내셨다가 훈계하셨다가 온갖 일을 다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것인지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니느웨 같은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니느웨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마음에 니느웨와 같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아무리 내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내 도덕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생활 방식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고, 두 번째 기회를 주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르쳐주길 원하셨던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 파격적인, 크고도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은혜로운 자가 되어 은혜를 베풀며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언제, 어디에서 맹수가 뛰어 나올지 모르는 밀림 속 같습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경쟁하고 밟고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이라도 흠 잡을 것이 있으면 찍어 내리고 비난합니다. 나에게 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 인상을 쓰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그렇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는 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운데는 뭔가 관대함이 있고 너그러움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한 대로 갚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 주고 안아 주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힘이고 우리의 경쟁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삶에 함께하셔서 앞서 준비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가 아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누군가의 삶을 도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 4:1-2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2587)
* 하눈(channûwn) חַנּוּן 

1. 은혜로운,  2. 자비로운,  3. 온화한
발음 / 하눈[ channûw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비한(출 22:27), 은혜로운(출 34:6, 대하 30:9, 시 103:8).
구약 성경 / 13회 사용

용서할 자를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

자비로우시며(7349)  

* 라훔(
rachûwm) רַחוּם 

1. 인정 많은.  2. 동정심이 많은. 3. 신명기 4:31
발음 / 라훔[ rachûw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비로운(출 34:6, 시 103:8, 욘 4:2), 자비한(신4:31, 시78:38, 145:8), 긍휼히 여기는(느9:17). [부] 긍휼히(느9:31). [명] 자비(대하30:9), 진실(시86:15).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7356. 자궁(라함.  racham)  רַחַם
1. 자궁.  2. 처녀
발음 / 라함[ racha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창43:14), 사랑하는 마음(창43:30),위하는 마음(왕상3:26), 긍휼(신13:17, 느9:27,28, 시51:1), 불쌍히 여김(왕상8:50, 슥1:16), 자비(대하30:9), 긍휼하심(시25:6), 은혜(느1:11), 태(창49:25, 잠30:16, 사46:3), 처녀(삿5:30).
구약 성경
6회 사용


639. 노하기를(아프.
’aph) אַף  

1. 호흡하는 곳.  2. 코. 3. 민수기 11:20.
발음 / 아프[ ’aph ]
어원 / 5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코(창 2:7, 삼하 22:9, 시 115:6), 얼굴(창3: 19, 삼상25:41), 분노(창27:45, 신29:20, 렘12:13), 노(창30:2, 삼상11:6, 겔22:20), 분기(창49:7), 콧김(출15:8), 진노(민11:10, 스8:22, 사3:8), 머리(민22:31), 노염(시30:5), 분(욥37:11). [동] 노여워하다(합3:8), 노하다(창39:19, 출 11:8, 욥27:3), 분노하다(신9:19, 단9:16, 호 13:11), 울분을 터뜨리다(욥18:4).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더디하시며(750)

750. 긴, 느린(아레크. ’ârêk)  אָרֵךְ 

1. 긴,  2. 느린
발음 / 아레크[ ’ârêk ]
어원 / 74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는(전 7:8), 더딘(출 34:6, 민14:18, 잠14:29), 긴(겔17:3). [부] 더디(느9:17), 오래(렘15:15).
구약 성경 / 7회 사용


인애가 크시사(2617)(7227)

2617. 인자함(헤세드. chêçêd)  חֵסֵד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7227. 풍성한(라브. rab) רַב 

1. 풍성한,  2. 복수형 : 출 19:21, 3. 큰
발음 / 라브[ rab ]
어원 / 여성형 יַבָּה, 복수 רַבִּים, 7231에서 유래한 압축형
관련 성경 / 가득한(창6:5), 큰(창7:11, 수11:8, 삼하24:14), 많은(창13:6, 신28:38, 대하14:14), 무거운(창18:20, 전6:1), 족한(창24:25, 신3:26, 삼하24:16), 높이는(민16:3), 풍부한(창30:43), 수많은(출12:38, 겔33:24), 번성하는(출23:29, 신26:5, 대상4:27), 오랜(민9:19, 신1:6), 강대한(신9:14), 허다한(신31:17), 풍족한(삼상2:5),먼(삼상26:13), 많아지는(삼하15:12, 욥5:25),용맹스런(삼하23:20, 대상11:22), 넉넉한(왕상19:4, 잠28:27), 광대한(에1:20, 시147:5), 풍성한(시4:6), 넓은(사51:10), 범람하는(시32:6), 후한(시86:5), 심한(전8:6). [명] 여러날(창21:34, 신2:1, 에11:4), 다수(출23:2), 무리(왕상12:28, 느7:2, 시31:14), (시위)대장(왕하25:10), 장수(대하1:11), 여러(번)(시106:43), 장관(렘41:1), (시위대) 사령관(렘52:14,30), 선장(욘1:6). [부] 오래(창37:34), 많이(출19:21, 민35:8), 후히(대하21:3), 흡족히(시78:15), 온갖(잠26:10), 만족히(사53:11), 가득히(욜3:13).
구약 성경 / 413회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