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묵시문학


유대 묵시 문학 / 묵시문학에 관하여

묵시, 묵시주의, 묵시문학

1. 개념 정의

묵시란 일종의 문학 장르이다.
묵시록 ,또는 묵시문학이란 묵시를 일정한 체계 속에 담고 있는 글의 총체적으로 일컫는 명칭이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초월적 실재를 사람에게 은밀히 소개하는 형식의 계시를 담은 언어 표현이다.
묵시주의는 일종의 "사고형태" 또는 묵시(문학)에 담겨 있는 사상이나 주제 따위에 조종되는 세계관이다.

묵시란 문학적인 유형을 일컫는 용어이다.
하나의 유형으로 정리할 때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사항이 보충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묵시란 일종의 계시 문학이라는 사실이다.
묵시의 저자는 자기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계시의 수령자는 과거 유명한 영웅들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이 보통이다.

셋째, 묵시의 내용은 수평적이고도 수직적인(또는 시간적이고도 공간적인) 차원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즉 종말론적 구원을 애타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이고, 저 세상 혹은 다른 초자연적 세계를 희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간적인 차원을 지닌 초월적 실체의 계시가 그것이다.

'묵시'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칼립시스'는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 보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인류 역사 가운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고 인간세상에서 겪는 고난의 의미를 상징이나 은유로 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묵시와 묵시문학 의미

묵시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칼립시스'는 '덮개를 벗기다', '밝히다', '드러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칼립토'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가려져 있는 것을 펼쳐서 나타냄', '숨은 것을 드러냄', '덮개를 벗김', '조명' 등을 뜻하며, 하나님께서 감춰졌던 자신의 뜻을 성령을 통해 알려주시는 것을 일컫는다. 

묵시는 주로 선지자에 의해 드러내셨고 드물게는 솔로몬의 경우처럼 선지자 이외의 인물을 통해서 전달하기도 하셨다(왕상 3:5).

묵시라는 말은 '계시'(렘 14:14), '이상'(삼상 3:1)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지만 일반적으로 그 쓰임새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즉 계시가 포괄적이고 광의적인 측면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전 역사를 어떻게 나타내 보이느냐 하는 데 초점이 맞춰있다면, 묵시나 이상은 다소 협의적으로 사용되어 세상 종말, 그중에서도 특별히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관련된 사건들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일종의 문학적 술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이사야 24-27장, 요엘 3장, 스가랴 9~14장, '소계시록'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마 24장),

요한계시록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묵시록이라고도 하는데,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그리고 묵시는 꿈(왕상 3:5)과는 달리 주로 깨어 있는(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선지자(대하 26:5; 사 21:2; 합 2:2)를 통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는 묵시를 받지 못한 거짓 선지자(애 2:9)나 그릇된 묵시를 본 선지자(애 2:14)가 많았다. 이들은 자기 마음의 생각을 묵시라 하며 백성을 미혹한 것이다(렘 23:16).

2. 역사적인 묵시와 묵시적 종말론

"역사적인 묵시들"은 "저 세상 여행"을 다루고 있는 묵시들과는 달리 공관보다는 시간을 '저 세상의 탈출보다는 천년왕국의 임박한 도래를 설파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묵시적 종말론이란 묵시,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적 묵시"에 들어 있는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특별한 관점을 지칭한다.

예언자적 종말론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역사를 장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역사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정치적 사건들 안에서, 여러 세계 지도자들을 통하여 활동하신다. 이때 예언자들의 선포는 어느 날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부가 되게 하고 거기에 다윗의 후손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앉히시리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스라엘의 적들은 파괴하고 말리라. 경건한 무리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나 사악한 무리들은 심판을 당하고야 말 것이다. 이런 모든 사건들이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가시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매개자로 하여 그런 일들을 이루시게 될 것이다. 예언자적 종말론은 역사 안에 성취될 "마지막"을 기대한다. 이 점에서 예언자적 종말론의 역사관은 역사에 대해서 퍽이나 낙관적이다.

예언자적 종말론이 묵시문학의 종말론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 준다. 그렇지만 묵시문학이 토로하는 마지막에 관한 신념은 예언자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그 무엇이 물거품에 불과하다고 판명나게 될 때 태동되게 되었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지나갈 것은 "이 세계", "이 역사", "이 땅"에 대한 희망이 묵시문학 종말론의 등장과 함께 "저 세계", "저 땅". "저 역사"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낙관론적 신뢰가 상실되게 될 때, 묵시 주의자들의 머리 속에 떠올랐던 생각은 이제 하나님은 결코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세력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신다. 묵시문학의 종말론은 그러기에 궁극적 희망을 미래에 둔다. 이 희망은 사악한 현실 세계에 종언을 고하게 하는 형태를 취한다. 새 세계가 창조되리라. 아니면 최소한 현실 세계가 새로운 형태로 모습을 전환하게 되리라. 거기에서 새 시대의 도래가 이루어지게 되리라. 그리고 묵시문학이 개진하는 종말론은 현 세계의 파멸에 관심하기 보다는 죽음 이후에 맞는 응분의 보상에 더 큰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역사적인 묵시의 종말론은 사악한 현실세계의 종언을 꿈꾸는 희망을 강조하는 신념이고 또하나는 사악한 현실세계의 파멸보다는 그 세계에서 당한 의인의 "원수갚음"을 강하게 희구하는 신념이다.

3. 묵시주의

묵시주의는 일종의 "사고의 형태"또는 묵시에 담겨 있는 사상이나 주제 따위에 조종되는 세계관이다.
묵시주의는 항상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4. 묵시문학의 기원 논의의 재 검토

묵시문학의 기원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2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유대 묵시문학이 "이방종교의 영향"이 낳은 산물이라는 주장과 묵시문학은 이스라엘 옛 전승의 열매라는 주장이다.
후자의 노력은 묵시문학의 사고구조가 지혜 전승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폰 라드)

"묵시문학이란 포로기 이후 유대인 귀환 공동체에 의해 태동된 초기 예언에 대한 종말론적 재해석이다" -  찰스, 로울리, 러셀 폴핸슨. 

누가 묵시문학 운동을 일으킨 주체 세력인가, 또는 유대인 묵시문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는 "다양한 묵시적 공동체들"을 기대해야만 하며 아울러 묵시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계층과 지위에서 다양할"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묵시문학은

성경(정경), 외경, 위경 등에 들어있는 유대 종교문학의 한 유형이요, 또 초기 기독교 문학의 한 형태로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 특별히 신구약 중간기에서 예루살렘 멸망(A.D.70년)을 전후 한 때인 B.C.200-A.D.100년 사이에 다양한 묵시 문학 작품이 집중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나라를 회복하지 못한 채 외세의 침탈에 의해 고통당하던 시대로 정치, 사회적 억압과 종교적 박해 아래 앞날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유대 민족을 지배하던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아페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정결규례에서 금기시하던 돼지고기를 희생 제물로 드리게 하며, 할례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등 신앙적으로 혹독한 박해를 가하던 시기였다(이로 인해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다).
그 후 예수의 탄생 즈음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로마에 저항하다 A.D.70년경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고 나라는 멸망하여 결국 유대인들은 유리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바로 이 기간 동안 묵시적 형식을 빌어 고통당하던 자들의 신앙관과 메시아의 도래 및 그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묵시문학이다.
그런 맥락에서 묵시문학은 신, 구약 중간기 이스라엘의 역사적, 종교적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한편, 묵시문학은 많은 경우 작자의 이름이 가명이라는 것도 한 특징이다. 

성경의 대표적 묵시문학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이사야 24-27장, 요엘 3장, 스가랴 9-14장, 마태복음 24장 등이 묵시문학에 속한다. 또한 외경 에스드라 2서와 위경 바룩묵시록, 에녹 2서 등도 묵시문학에 속한다.
그러나 이 책들은 정경성이 미흡하여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묵시문학의 특징

1)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메시지를 선포했다면,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각자가 설정한 꿈과 환상적 천국 순례 등을 통해 계시의 메시지를 산출해 냈다. 

2)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대부분 구약 선지자들(특히 다니엘)의 환상을 모방하여 하나님의 계시라는 미명으로 그 내용을 구성했는데, 그것은 개인적 바람이나 소원의 경건한 윤색에 불과했다. 

3) 구약의 예언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메시지를 선포했으나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써냄으로써 내용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4) 구약의 선지자들은 각자 실재의 역사적 상황과 무대 위에서 메시지를 선포했지만, 묵시문학은 대부분 비역사적, 초역사적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5) 묵시문학은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이나 에스겔 같은 환상의 영향을 받아 상징들을 많이 사용했다. 

결론적으로, 묵시문학은 신앙과 인생의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악인의 최후 심판과 장래에 도래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고 용기를 불어넣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시대적 상황이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박해받던 시기라 묵시문학은 대부분 상징이나 은유, 숫자, 자연계의 신비로운 현상이나 동물에 의한 의의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5. 유대 묵시문학 태동의 정치,사회적 배경

주전 587년 유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식민지살이의 시대를 이끌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유대 민족들은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외쳤던 예언자들의 비전은 그 땅 위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하늘은 비를 그쳤으며, 땅은 이슬을 못 내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겁탈과 강포, 시기와 분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수난의 역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선대 예언자들의 낙관주의적 신뢰가 회의와 실망, 분노와 저항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신뢰가 포기된 그 자리에 신화의 세계에서나 엮어 낼 수 있는 것 같은 새 우주의 창조가 환상적으로 제시되기 시작한다. 포로 후기 시대의 암울함에서 비관적인 묵시, 묵시주의, 그리고 묵시 문학적 종말론이 태동되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묵시문학의 태동은 예언자들의 낙관주의적 역사 이해가 벽에 부딪치게 되면서부터이다. 주전5-4세기이래 계속되는 포로 후기 시대의 수난은 현실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적 성격의 묵시 문학적 종말론을 탄생시키는 환경을 조성한다.

6. 묵시문학들---묵시문학의 다양성 ,기능 , 위기와 정화.

히브리 성서에서 묵시문학에 속하는 책은 다니엘서이다. 신약성서에서 묵시문학으로 분류되는 책이 비록 요한계시록 한 권뿐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의 저술들에는 묵시적 세계관이 보편화되어 있다.

묵시문학은 위기 문학이다. 유대 묵시문학은 유대 민족의 생존이 위협을 당하는 시절에 억압받는 유대인들에게 위로,권고,희망을 주기 위해서 생성된 문학이다.

묵시문학의 기능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묵시문학은 독자들을 위기에 처해 있다고 느끼는 자들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힘을 제공한다. 둘째, 묵시문학은 기존 질서에 대해서는 강한 저항 의식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이 두 가지 기능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위치에 있다. 묵시문학의 기능을 오직 위로와 희망의 책으로 단정한다면 묵시문학은 자칫 현재의 삶에서 각자가 책임을 져야 될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망각한 채 다가올 미래에만 매달리도록 독자들을 이끄는 함정 속에 빠지고 말 우려가 있다. 반대로 묵시문학의 "읽기"에서 오로지 현실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색깔만을 강조한다면 묵시문학이 설파하는 "역동적 초월의 힘이 상실되고 마는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 묵시 문학자들이 꿈꾸고 설계하는 새 세계는 결코 인간의 손과 발로 이룩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손과 발로 이룩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 세상, 하나님이 건설하시는 새 창조의 세상이다. 이와 같은 묵시문학의 두 가지 기능 - 위로를 주면서도 도전을 주고, 저항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 은 오래도록 묵시문학을 경건한 책의 일부로 존속시켰던 중요한 열쇠이다.묵시문학은 어떤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위로와 권고를 제공한다.

따라서 묵시문학은 절망,박해,수난의 현장에서 "희망과 위로를 선포"함으로서 현실 역사의 억압을 이겨 나가고 있는 것이다.

Ⅱ. 다니엘서의 지혜정신

1. 묵시적 지혜와 다니엘서

우리가 맛소라 본문( Masoretic Text,MT)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서는 다니엘서를 성문서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그러나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라틴어역 구약성서(Vulgate)이래 모든 번역본들은 다니엘서를 이사야서, 예레미야, 에스겔서에 버금가는 "대예언서"로 여겨 왔다. 그러나 정작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예언서가 아닌 성문서로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니엘서 본문의 최종형태,즉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현존하는 다니엘서 본문에 대한 연구는 구약성서의 두 정경--맛소라 본문( Masoretic Text,MT)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서과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안에서 다니엘서가 차지하는 위치의 확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이 두개의 정경은 다니엘서 본문에 대하여 각각 서로 다른 자리 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에는 구약성서 묵시문학이 수렴한 지혜가 담겨져 있다. "묵시적 지혜"가 듬뿍 담겨 있는 것이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다니엘이 기술하는 역사의 마지막에 관한 상징이 마카비 시대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관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로마 황제의 유대인 박해를 다니엘이 이미 정확하게 예고했다고 인정하게 되면서, 다니엘이 전하는 "마지막 때의 괴물"은 일종의 "유형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최후의 적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대적들의 표상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니엘서의 유형론적 해석, 재해석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다니엘은 "마지막 계시"라는 지위를 상실한다. 다니엘은 어느 상황, 어느 때이고 새롭게 적용될 수 있는 계시로 인정받게 된다.

다니엘을 예언서 중의 하나로 읽고자 노력했던 때에는 다니엘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역사의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으로 고정시켜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랍비들이 다니엘서를 예언서에서 끄집어내서 에스더나 에스라 같은 포로기 마지막, 포로 후기 시대의 시작 사이에 집어넣게 되면서, 다니엘서다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도는 종말론에서 일상 교육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위기에 처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가르치는 교훈서로 다니엘을 읽게 된 것이다.

보수적인 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의 환상부분은 기원전 167년과 164년 사이에 기록, 문헌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박해와 탄압이 종말에 대한 환상을 야기시킨 배경이다.

2. 다니엘서의 구조, 장르, 의도

다니엘서의 최종형태, 곧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다니엘서 본문은 유형상 "설화"를 보도하는 1-6장과 "환상"을 고백하는 7-12장으로 크게 구분된다. 1-6장의 설화는 히브리어로 씌어진 서론(1장)으로 시작하여 아람어로 씌어진 본론(2-6)으로 끝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반면 7-12장에 걸쳐 다니엘이 독백하고 있는 환상 보도는 아람어로 씌어진 서론(7장)으로 시작하여 히브리어로 기록된 본론(8-12장)으로 마감한다.

다니엘서는 분명 역사의 암울한 시기인 주전 167-164년이 겪었던 역사의 혼돈에 대한 반성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찌기 유포, 회람되던 전설적인 이야기에 후대의 환상의 기록을 첨가시킨 하나의 문학적 작업을 통해 생겨났다. 그것은 다니엘서가 통속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문헌들이라기보다는, 학식 있는 서기관들의 집필활동의 산물로 여겨질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점이다.

다니엘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의 개별양식들이 저자 편집자의 의도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그럼므로 묵시란 여러가지 양식들의 결합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서의 언어 표현은 어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언어를 듣는 자로 하여금 저자의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유대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 위기에 처한 유대인 사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고와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다니엘서가 독자들에세 주는 권고는 평화주의에 가깝다. 땅의 통치자를 거부하기보다는 그 밑에서 어떻게 하면 유대인으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권고가, 어떤 정치적, 종교적 혁명보다는 인내하며 때룰 기다리라는 권고가 전편에 걸쳐 공간적, 시간적으로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다니엘서는 주전2세기 중반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상이 아무리 암울해도 하나님께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말 것을 다짐시키고 있다.

Ⅲ. 비 평

1. 묵시 문학의 정의와 기본구조

묵시문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것을 만족할 만큼 定義하는데 지금까지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묵시문학 연구는 참으로 그 범위가 넓다. 아직 다니엘서를 포함한 계시록과 다수의 위경들이다. 우리가 묵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정의조차 희미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현재 구약학계에서 묵시 문학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은 많이 있다.특히 카나다의 Stanley B.Frost와 영국의 D.S.Russell 독일의 Otto Ploger, J. M Schmidt , J. Schreiner, Klaus Koch, Walther, 블란스의 Andre Lacocque, Marcel Delcor, 또한 미국의 J.Bloch ,Frank M.Cross와 그이 제자들 Paul D.Hanson, John J. Collins등이다.

이들은 다양하게 묵시문학을 접근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공통점 도출이 부족함을 느낌니다.

묵시문학은 고통과 비애로 가득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대망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미래에 그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기원전2세기 초에서 기원후 2세기 초까지의 시대에 생겨난 묵시문학에는 이러한 대망이 중심 주제가 되어 있다 묵시문학의 명칭은 요한 계시록의 첫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데 묵시적인 문헌이나 그 안에 표현되어 있는 표상들을 명명하기 위하여 희랍어 아포칼립시스, 즉 계시라는 말을 사용한다. 묵시문학은 역사의 흐름이 좋게 변화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무서운 경악 속에서 종말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이 일어 키시는 새로운 세상과 함께 시작될 것이고 경건한 사람은 무궁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묵시문학은 계시록 ,다니엘서,위경에서 알 수 있듯이 개별적인 문헌안에 있는 표상들과 진술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알게 되는 묵시 문학의 기본 구조는 이원론을 통해서 결정된다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는 구약 성서적 유대적 전승의 연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묵시 문학은 구약 성서적 전통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종말을 향한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처음 기독교인들의 종말 기대는 때때로 유대교가 만들어 낸 묵시 문학적 표상들과 개념들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묵시 문학적 문헌들을 읽었어며 그 안에 기록된 약속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하게 된 구원으로 해석하였다.대부분의 문헌들은 번역되어서 전승되었으며 그것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계속 전해졌다.

묵시문학 전통의 역사 이해에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은 그 종말론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묵시문학은 예언 전통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나 학계에서 묵시문서을 종말론의 해답을 주는 교과서 처럼 해석하고 주장하고 있는데 비하여 본 서는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안에서 다니엘서가 차지하는 위치의 확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시작하면서 종말론의 해석 부분이 상당히 소외됨을 느낀다.

묵시문학 연구에서 역사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을 비교하여 설명할 때 묵시적 종말론이 이원론이라는 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어느 계급에서 발생했고 구약의 어떤 전승에서 이해해 하는지, 종말론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물론 지혜 문서로만 해석한다면 이해되어진다.

오늘날 묵시문학의 연구 동향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구약의 묵시문학이라면 일반적으로 다니엘 생각해 왔다.또한 묵시문학의 기원을 찾는 문제에 있어서도 종래 까지는 이스라엘의 신앙전통 밖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 했었다.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구약 묵시문학은 이스라엘의 신앙 전승안에서 자생적으로 배태된 것이 아니라 외래적인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말이 된다..즉 오늘날 묵시문학의 연구의 공통적인 경향은 구약 묵시문학의 기원을 포로기 직후의 예언서 안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결론은 구약 묵시문학의 뿌리는 이스라엘의 예언 전승에서 찾을 수있고 페르사의 종교의 영향과 같은 외래적인 영향은 구약 묵시문학의 기본적인 성격과 구조가 이미 형성된 이후에 받아 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는 다니엘서가 ( " 맛소라 본문( Masoretic Text,MT)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서는 다니엘서를 성문서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그러나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라틴어역 구약성서(Vulgate)이래 모든 번역본들은 다니엘서를 이사야서, 예레미야, 에스겔서에 버금가는 "대예언서"로 여겨 왔다. 그러나 정작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예언서가 아닌 성문서로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니엘서 본문의 최종형태,즉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현존하는 다니엘서 본문에 대한 연구는 구약성서의 두 정경--맛소라 본문( Masoretic Text,MT)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서과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안에서 다니엘서가 차지하는 위치의 확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이 두개의 정경은 다니엘서 본문에 대하여 각각 서로 다른 자리 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혜문서로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본서는 묵시문학의 태동이 포로 후기 시대의 암울함에서 비관적인 묵시, 묵시주의, 그리고 묵시 문학적 종말론이 그길을 열며, 묵시문학의 태동은 예언자들의 낙관주의적 역사 이해가 벽에 부딪치게 되면서부터이며, 주전5-4세기이래 계속되는 포로 후기 시대의 수난은 현실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적 성격의 묵시 문학적 종말론을 탄생시키는 환경을 조성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묵시묵학을 탄생시킨 자들은 누구인지 어떤 계급인 지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묵시문서는 6세기말 페르시아 바벨론을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집단들의 귀환이 수차례걸쳐 일어나며, 귀환의 동인은 주로 페르시아의 서부 지역 통치를 둘러싼 정책과 관련된다. 이 과정에서 페르샤 중앙 정부의 제국 서부지역에 대한 지배권 강화 전략과 유대의 舊지배층인 귀환계 집단의 정치적인 헤게모니 재획득 전략이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 서에서는 이부분의 설명이 약한것 같습니다.

*이상과 같이 본서를 비평하면서 느낀점은 다니엘서를 지혜의 글로 보았던 교수님과 그리고 G. von Rad와 J.J.Collins의 견해를 솔직히 수용하는 바이다.
그러나 암울했던 시대에 태동되었다는 묵시문학이 이시대의 모든 문학이 묵시문학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가 묵시문학의 대표성을 뛸수 있느냐 하는 의문은 계속 가지게 된다.

J.J.Collins는 묵시문학을 태동시킨 자들이 소외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 소외계층이였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경에서 많은 묵시문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나 소개가 미흡했음을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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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문학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성경을 읽는 모든 독자는 해석자입니다. 좋든, 싫든, 옳든, 다르든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성경책 속에는 율법, 역사, 지혜문학, 예언, 서신, 묵시문학 등 다양한 문학적 장르가 있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어떤 장르에 속하는 책인지 그 글의 성격을 분명히 알고 성경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장르에 속하는 작품일까요?

시 아니면 어제 일어난 신문 기사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 신화처럼 신화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학자들은 문자적인 해석을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는 시로 읽어야 하고,

신문기사는 신문기사로서 읽어야 합니다.

시를 신문기사 읽듯 한다면 시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겠지요.

요한계시록을 읽는 독자의 자세

요한계시록은 문학 형태를 갖춘 한 권의 책으로 주어졌습니다. 계시(묵시)록을 처음 읽었던 1세기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도 요한 당시의 사람들은 계시록을 읽고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대로 반드시 속히 일어나게 해달라는 기대와 소망 속에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을 외치며 기도하며 그 말씀과 함께 살았습니다. 계시록은 현재를 사는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헷갈리게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문학 형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 요한계시록의 세 가지 문학적 특징 ★

사도 요한은 가장 먼저 ① 계시(1:1) 다른 표현으로 묵시 문학적 표현 속에 ② 예언(1:3)을 담아 ③ 편지(1:4) 형식으로 일곱 교회에 보낸 책이라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부분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묵시문학이 태동된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맥락이 요한계시록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 시대의 상황과 사상적 맥락을 파악하고 있을 때 요한계시록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시문학이란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이라고 하는데요 묵시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1. 묵시문학의 기원과 시대적 상황

유대인들의 역사 가운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 선지자들이 선포한 예언과 새로운 나라의 구상은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계획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실망하기 시작했고 희망을 예언한 선지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백성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는 시편 126편에서 다루었으니 살펴보기기 바랍니다.

◈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시대적 상황 이해 ◈

기원전 333년 무렵에 마게도냐(마케도니아) 알렉산더가 원대한 꿈을 안고 동방 원정을 떠나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와 동양 문화의 교류는 크고 작은 도시 국가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상 혼합주의 문화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플라토니즘, 영혼 불멸과 사후 심판, 내세 신앙은 헤브라이즘(Hebraism)의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상이 유대 사회에 흡수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죠.

2. 묵시문학의 특징

묵시문학 운동은 BC 200 ~ AD 100년경 사이에 유대 역사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묵시 문헌이라는 매우 독특한 문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 시기에 유대는 정치적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지배 아래 있게 되었어요. 그가 유대인 학살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의 피로 제사드리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구약 다니엘서는 안티오코스 4세가 상징적으로만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원전 6세기의 사람인데 그가 본 환상은 기원전 2세기의 일을 다루고 있어요. 다니엘서 후반부는 환상과 계시, 상징,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묵시(Apocalypse)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셀레우코스 핍박에 대항한 마카비의 다섯 형제와 백성들은 이방신 숭배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아 정화시켜 다시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때에 이르러 헬라화 정책을 펼치던 왕가는 뼛속까지 헬레니즘화되어 자녀들에게 헬라식 이름을 지어줍니다. 하스몬 왕가의 계보를 보면 더 이상 히브리식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죠. 나아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들의 신앙을 보호해야 할 제사장 직분을 왕이 직접 임명하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없었죠.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묵시 문학적인 문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강국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하스몬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두매인 헤롯에게 유대 왕위가 넘어가고 백성들은 억압과 탄압 속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민족 독립의 투쟁을 펼치다가 결국, AD 70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열망은 묵시문학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3. 묵시문학의 사상

문화 사상적으로는 헬레니즘의 영향권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헬레니즘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이에 반대하여 율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지요. 묵시문학은 이렇게 경건한 삶을 사는 의인의 보상과 그렇지 않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는 헬레니즘과 페르시아 종교의 도전을 유대교적으로 흡수한 결과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하스몬 왕가의 헬라화 정책과 사독 계열이 아닌 제사장 집단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기원전 2세기 중엽과 말기에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와 쿰란 공동체가 생겨나고 열심당과 같은 분파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 자체 내에 있는 민족주의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 안에 있는 어떤 공동체에 내부 내분과 관련되어 있는 현상이 짖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묵시문학의 시대적 배경과 주요 내용들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계시록 본문 속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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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여는 세 개의 열쇠

열쇠가 없이는 자물쇠로 굳게 닫혀진 창고의 문을 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연약한 손일지도 그 손에 열쇠가 쥐어 진다면…,쉽게 문을 열고 필요로 하는 물건을 꺼낼 수가 있는 것이다. 흔히 계시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한다.  열쇠 없이는 그 누구도 계시의 비밀로 닫혀진 요한계시록의 문을 열기는 어렵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두워져 가는 이 시기를 밝힐 수 있는 진리의 빛을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여기 요한계시록의 문을 열 수 있는 3개의 열쇠를 드리오니…

요한계시록에 담겨져 있는 말씀의 참 의미를 바로 찾아 마귀의 궤계를 멸하는 말씀의 검, 승리의 검으로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Key 1: 요한계시록의 구성 (계 1:19) 

요한계시록 1:19절은 본서 해석을 위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여 준다.

<계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시록 1장은 마치 서언과도 같이 계시록의 의의, 쓰여진 동기, 배경에 관하여 기록하였지만, 계 1:19 이후에는 3가지의 내용으로 구성이 된다.

 ● 네 본 것: 요한은 1장에서 일곱 금 촛대와 일곱 별을 보았는데(과거), 예수님께서 이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계 1:20). 따라서 2, 3장은 요한이 과거에 보았던 일곱 촛대와 일곱 별에 관한 내용으로서 각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내어진 편지들이다.

 ● 이제 있는 일: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장차 되어질 일들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를 하늘로 부르신다(계 4:1). 4장은 당시 그가 하늘로 이끌려 그의 눈에 보여진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록한 것이며, 5장에서는 요한이 크게 우는 사건이 있는데 이 울음은 미래에 울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당대에 있었던 일임으로 이 우는 사건이 기록된 5장 역시 이제 있는 일, 현재에 포함된다. 

 ● 장차 될 일: 계 4:1에서 장차 될 일들을 보여 주시겠다는 약속은 계 6장에서 인들이 떼어지면서 이루어 지기 시작한다.


 Key 2: 장차될 일은 두 Parts 로 나누어진다. 

6장에서 22장까지는 장차 될 일에 대한 기록이다.

시간흐름 순으로 기록한 전반부(6장~11장)와 전반부의 중요한 사건들을 선별하여 이를 다시 설명하고 있는 후반부(12장~22장)로 나누어 진다. 

 이와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첫째, 계11장은 장차될 일에 대한 기록중 마지막 부분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 계 11:15에서 "세상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통치하신다”라는 선언이 있다. 이 세세토록 이라는 단어는 천년왕국 이후의 모든 시간까지도 포함한다.

둘째, 계10:11(Key 2)에서 다시 예언하리라는 선언이 있었다.

<계 10: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계10:8~11의 기록을 보면 요한은 천사로부터 책을 받아 먹고 그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장차 될 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다시 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다. (이는 선지자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받아 먹고 이스라엘 족속에 가서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달 하였던 것과 흡사하다. 겔3:3~4)

▶ 요한이 받아 먹은 책은 어린양이 갖고 있던 책(계5:1)이었으며, 이 책에는 미래에 이루어질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계5:2~5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7곱 인을 떼심으로… 그 책은 완전히 열리게 되어 (계10:2에서와 같이) 주님의 손에는 열려진 책(Opened Book)으로 놓여 있게 되었다. (7곱 인으로 봉한 책 --> 열려진 책)

▶ 따라서 요한은 천사의 "네가 다시 예언하리라”(계 10:11) 라는 말에 따라… 12장부터 22장까지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반복하여 다시 설명을 하였던 것이다.  

사도요한은 천사의 손에 들려진 책을 받아 먹는다.

그 책을 먹자 배에는 쓰나 입에서는 꿀과 같이 달았다.

요한은 책을 먹음으로 책속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대하여 다시 전달하여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 대하여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

에스겔 선지자도 같은 경험을 한 바있다. 에스겔의 이상가운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아먹는다. 그것을 먹자 입에는 달았다. 달았다는 의미는 모든 것을 깨달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나서 그에게는 한 의무가 생긴다. 그의 족속에 가서 두루마리에 적혔던 내용을 전달하여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가서 그들이 듣던지 말던지 상관치 말고 네가 깨달은 바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라고 전하라 명령하셨다.(겔 3:1-11)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받아먹는 자는 누구나 가서 전달하여야 하는 의무가 생기나보다. 

 유대계시문학(Jewish Apocalyptic Literatue)이란?  

먼저 장래의 일들을 (i)시간순으로 간략하게 소개를 하고... 나중에 이를 (ii)주제별로 다시 상세히 설명하는 기법이다. 

다니엘서도 이러한 유대계시문학의 패턴에 따라 기록이 되었고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창세기에서도 그 적용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사역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창세기 2장은 6일째 되던 날을 다시 상세히 조명하였다. 

다니엘서 1장~6장은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의 Activities 가 Historical Manner로 기록이 되었고, 

다니엘서 7장~12장은 다니엘의 이상이 Prophetical Manner 로 기록되었다.

Part 1은 다니엘의 포로생활이 시간진행 순서에 따라 기록된 반면, Part 2는 다니엘의 이상을 기록하였는데... 

7장-10장은 앞서 기록된 사건을 다시 재 조명하였고 11장과 12장은 미래에 발생할 이상을 기록하였다.

 요한계시록도 다니엘서와 같이... 이러한 유대계시문학 패턴을 따라 기록되었다. 

즉 계시록 6장-11장은 장래의 일을 시간순차적으로 기록한 제 1막이며... 

제 1막(Part 1)은 11장에서 끝나고, 12장에서 22장까지는 제 2막(Part 2)으로서 앞에 기록한 사건들을 주제별로 상세히 다시 재조명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유대계시문학’의 패턴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Key 3: '인'과 '나팔'과 '대접'의 관계 

자 이제 마지막 KEY이다.

앞의 key 2개도 중요하지만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의 구조를 앎은 너무 중요하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7곱인으로 봉한 책이 놓여 있는데(계5:1), 미래에 되어질 모든 일들이 다 이 책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미래에 되어질 일들 중 맨 끝에 나오는 사건은 '새하늘과 새땅이 새로 창조됨'일 것이다. 

물론 새하늘과 새땅에 관한 내용도 7째 인의 기록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에 발생할 모든 일들이 7인으로 봉한 책안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곱째 인을 떼면 7 나팔들이 등장하는데...  

나팔들은 7째인 밖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아니라, 7곱째인 안에 있는 사건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선지식이 있어 이를 받아들이지를 못하자…, 하나님께서는 곧 여고성 함락시의 사건으로 깨달음을 주셨다.


이스라엘 족속은 출애굽하여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6일동안 여리고 성을 매일 한바퀴씩 돌았다.

그리고 7일째 되던 날에는 일곱바퀴를 돌았다. 7곱 바퀴를 돌면서 나팔을 불었는데...  마지막 7곱째 나팔에 여리고 성은 무너지고 그곳은 이스라엘인들의 손에 떨어졌다.


요한계시록에서도 6인이 떼어지고 나서 7째 인이 떼어지자 일곱나팔들이 등장하였고, 마지막 7째 나팔이 불 때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계10:7) 라는 선포가 있다.

그 비밀은 계11:15장 에서와 같이 “세상나라가 이제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을 하시기” 때문이다. (비밀이라고 하였음에 유의하자.)

 그럼 7째 나팔과 7 대접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와 같이 7째 인과 7곱 나팔들의 관계가... 7째 나팔과 7곱 대접들에서도 다시 적용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7곱 나팔은 계8장~11장(Part 1)에서 설명되어졌다.

그리고 7곱 대접은 계 16장(Part 2) 기록되어졌다. 

따라서 7곱 대접의 재앙은 Part 1 에 있는 내용을 다시 반복하여 설명한 것이어야 한다.

 7째 나팔 재앙과 7 대접재앙을 비교하여 보면... 

7째 나팔의 재앙은 일곱대접 재앙들로 다시 상세하게 설명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7째 나팔재앙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7대접의 재앙들로 전개되어지는 것이다.


계 11장의 일곱째 나팔에서는 하나님나라의 도래(Good things) 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7곱째 나팔에서 있을 재앙들(Bad things)은 11장에서는 거의 다루지를 않았으나..., 요한은 7째 나팔의 재앙을 Part 2 일곱 대접 재앙으로서 상세하게 재조명 하였던 것이었다.

그럼 관련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자.

계시록 11:15~18절에서 7째 나팔이 불리우면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따른 찬송과 그 이후에 발생할 모든 사건(심판을 통한 상급과 정죄)을 포함하여 요한계시록의 제 1막(Part 1)은 끝이 난다.

15절에서 18절까지 찬송이 끝나자, 19절은 반전으로 7째나팔의 재앙에 대한 내용이다.

7째 나팔 재앙은 계 11:19절에 요약하여 기록되었는데... 

먼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 성전이 열리면서 성전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재앙의 내용으로서는 1)번개와 2)음성들과 3)뇌성과 4)지진과 5) 큰우박 있더라.

또한 7 대접재앙도 하늘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시작된다(계 15:5). (7째 나팔 재앙의 시작과 같다.)

그리고 7째 대접재앙은 계16장 17~18절에서와 같이 1)번개와 2)음성들과 3)뇌성과 4)지진과 5) 큰우박(21절) 재앙으로 마쳐진다. (7째 나팔 재앙의 끝과 같다.)

이와같이 7째 나팔재앙의 내용에 해당하는 계11:19절은 7곱대접 재앙의 시작과 마지막을 기록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여는 세번째 Key는 일곱인으로 봉한 책의 구조이다!    

 요한계시록을 여는 3개의 열쇠를 다시 정리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