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踰月節)


유월절(踰月節)


유월절이란 한마디로 ‘재앙이 넘어간다’라는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영어로는 Passover(패스오버),
히브리어로는 פֶּסַח(페사흐),
헬라어로는 πασχα(파스카)라고 하며 모두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출애굽기 12:11
~13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절기다.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며 비참한 삶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통해 ‘해방’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이란 희망 그 자체이자 구원의 절기인 것이다.

유월절이란 단어는 구약과 신약성경에 수차례 등장한다. 특히 출애굽기 12장 13절에서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유월절이 가진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공동번역에는 “내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보면 너희를 넘어가겠다. 내가 이집트를 벌할 때에 너희에게는 아무 해가 미치지 않을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전 1498년경 애굽 전역에 통곡과 비명소리가 가득했던 날, 오직 유월절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무서운 재앙이 넘어갔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에서 넘김’을 받는 유월절의 참뜻을 체감하며 그 중요성을 마음 깊이 새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1년 된 어린양의 고기를 구워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였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는 천사들이 보고서 그 집을 넘어간 것이다.

열 번째 재앙이 내리던 날, 애굽의 온 나라는 통곡과 애곡으로 가득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에서 보호받았고 애굽에서의 완전한 해방을 누릴 수 있었다.

유월절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것이다.
이 역사는 이스라엘이 최초로 지켰던 유월절이었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유월절의 유래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이란 기쁨의 절기이자 희망의 절기인 것이다.

세계 고대역사를 살펴보면, 강국이 약국을 지배하여 포로로 삼은 후 온갖 학대와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이스라엘은 애굽의 식민지가 되어 무려 43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박해와 서러움을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모세를 택하셨다.
당시 모세의 나이는 80세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했고,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고된 노동을 시켰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갖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첫 번째 재앙은 모든 물을 피로 변하게 한 재앙이었다.

이어서 개구리, 이, 파리, 가축 돌림병, 악성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다. 애
굽은 순식간에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여전히 강퍅하여 이스라엘의 해방을 허락하지 않았다.

열 번째 재앙이 애굽에 내렸다.

모든 장자들과 가축의 초태생이 일시에 죽음을 당했다.
애굽 왕 바로의 첫째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퍅했던 바로의 마음이 맥없이 무너져내렸다(출애굽기 12:29~30 참조).
하나님의 능력에 놀란 그는 실성한 듯 패물과 의복까지 내어주며 모세에게 애굽을 떠나라고 재촉했다.

신기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장자를 멸하는 재앙에서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열 번째 재앙이 내리기 전,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다.


유월절과 부활절은 관련이 깊다.

실제로 많은 포털사이트에서는 유월절의 연관 검색어로 ‘부활절’을 추천한다.
많은 교회에서 유월절과 부활절을 구별하지 않는 탓이다.
유월절과 부활절은 정말 같은 절기일까?
성경을 통해 이 두 절기를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옳은지 살펴보자.

유월절과 부활절 예식

유월절 예식

유월절은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지킨다.
구약의 유월절에는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을 떡과 포도주로 예배를 드리는 새 언약으로 변역시켜 주셨다.
또한 운명하시기 전날 밤, 유월절 예식을 친히 본보이시며 제자들에게 그대로 지킬 것을 명하셨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28)

이제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에 참예하면 하늘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게 된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도 새 언약  유월절을 소중히 지켰다.
그뿐 아니라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도 부지런히 전파했다(고린도전서 11:23~26).

부활절 예식

유월절과 부활절은 그 날짜부터 다르다.
유월절은 성력 1월 14일이며 그 다음날인 15일은 무교절이다.

그렇다면 부활절은 언제일까?
부활절은 ‘무교절 후 첫 안식일의 다음날’이다.

2021년 유월절
2021년 3월 27일 ~ 4월 4일

2022년 4월15일 - 23일

2023년 4월 5일 ~ 13일

2024년 4월 22일-30일

2025년 4월 12일-20일




흔히 부활절을 ‘춘분 후 첫 만월 뒤의 첫 번째 일요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에 의해 결정된 내용으로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부활절에는 축사한 떡을 먹는 의식을 진행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있었던 사건에서 유래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자리에서 친히 축복하신 떡을 떼어 주셨다.
이 떡을 먹은 제자들은 그제야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누가복음 24:13~35).

이후 제자들은 매년 부활절에 모여 떡을 떼며 이날을 기념했다.
부활절에 계란을 먹는 의식 등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이교의 풍습이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일요일)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 (사도행전 20:6~7)

유월절과 부활절의 의미
유월절의 의미

성경에 따르면,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히브리서 9:22).
죄 사함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모세 시대부터 1,500년 동안은 짐승이 그 역할을 감당했다.
짐승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던 역사는 장차 예수님께서 희생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절기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살리시려 당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셨다.
죄 사함의 길인 유월절을 꼭 기억하여 지키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다.

부활절의 의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가 감당해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셨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셔서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까지 주셨다(고린도전서 15:20).
부활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수모와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부활절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다.
우리도 부활절을 기억하여 지키면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된다.

유월절과 부활절은 다른 절기
부활절은 유월절을 대신할 수 없다

‘죽음’과 ‘부활’은 서로 상반된 개념을 지닌 단어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을 생신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이 두 날은 서로 구별하여 기념하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도 부활절은 유월절을 대체할 수 없다.
유월절과 부활절은 각각 다른 예수님의 명령을 담고 있는 절기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올바로 지켜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유대인의 유월절

오늘날 유대인의 유월절에도 3,500년 전처럼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를까. 아니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 각지로 흩어지면서 양을 잡는 풍습은 사라졌다. 대신 가족 단위로 각 가정마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음식을 먹도록 바뀌었다. 다만, 일부 사마리아 공동체에서는 그리심(Gerizim)산에서 여전히 양을 잡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유월절은 페사흐(פֶּסַח)라고 부른다. 페사흐의 또 다른 이름은 ‘무교병의 절기’다. 그래서인지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하나의 절기로 여긴다.

유월절은 니산월(유대력 1월) 14일 저녁에 시작된다.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은 7일, 그 외 디아스포라(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들은 8일간 유월절을 지킨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8일인 이유는, 그들이 정확한 유대력을 알지 못해 니산월 14일을 잘못 계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탓이다. 유월절 기간의 첫째날과 마지막 날은 신성한 휴식의 날이다.

이 시기에 거의 모든 이스라엘 가게들은 문을 닫는다. 많은 사무실과 사업체는 주로 오전에만 근무한다. 이 기간은 휴교 기간이기 때문에 많은 여행지가 당일 여행을 하는 유대인 가족들로 붐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레스토랑은 평상시 음식을 대신하여 유월절을 위한 코셔(כָּשֵׁר‎, 정결한 음식)를 제공한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까지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유월절 엄수는 최근 완화되어, 빵이나 케이크 혹은 파스타를 파는 음식점들도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준비

하메츠(חָמֵץ) 태우기

유대인의 유월절은 하메츠를 태우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메츠란 일상적인 음식을 가리킨다. 즉 유월절을 앞두고 인공적 또는 자연적으로 발효된 밀, 호밀, 맥아, 보리, 귀리 등으로 만든 음식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이 의식은 유대인들이 애굽을 급히 떠나느라 누룩 넣은 빵을 만들 시간조차 없었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누룩을 제거하는 행위는 부정을 제거하고 악을 말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각 가정에서는 누룩 성분이 든 음식이 집에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이 청소한다. 어린이들도 빵 부스러기, 과자 부스러기들을 치운다. 유월절 몇 주 전부터 유월절 정오까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동네 공터마다 모여서 빵이나 비스킷을 태운다. 절기 기간 동안에 유월절 음식이 아닌 것은 집에 둘 수 없다.

하메츠(일상적인 음식)를 불태우는 유대인들

누룩이 제거되면 유월절에만 사용하는 특별한 접시들과 그릇, 포크, 나이프, 요리 도구들을 창고에서 꺼낸다. 일상에 쓰던 그릇들과 요리 도구들은 모두 자취를 감춘다. 가정에 따라서는 유월절에만 사용하도록 가장 좋은 그릇들을 가보로 남겨 대대로 물려준다.

하메츠를 불태우지 않고 파는 경우도 있다. 랍비들은 멀쩡한 음식을 버리지 않기 위해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유대인 가정이 이웃의 이방인들에게 하메츠를 팔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 역시 이방인에게 하메츠를 상징적인 가격에 판 적이 있다. 몇 해 전 재무장관 베냐민 네타야후와 최고 랍비 2명의 입회하에, 이스라엘 안의 모든 하메츠를 2만 세겔(약 550만 원)에 팔았다. 이렇게 판 하메츠들은 절기가 끝나면 곧바로 다시 구입할 수 있다.

맛짜(מַצָּה) 만들기

유대인의 유월절, 무교절에는 물과 밀가루로만 만든 맛짜(무교병)를 쓴나물과 함께 먹는다. 맛짜를 만들기 전에는 곡식을 완전히 삶는다. 곡식에서 효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만든 곡식으로 가루를 내서 물과 함께 반죽한다. 반죽을 불에 넣고 구워 내면 맛짜가 완성된다.

고대의 맛짜는 직경 30센티미터의 원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길이 25센티미터 정도인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뀌었다. 맛짜를 굽는 풍경도 제각각이다. 원래는 성인 남성들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서 맛짜를 구웠다. 현대에는 맛짜를 기계로 굽기도 한다. 일부 율법학자들은 기계로 맛짜 굽기를 반대하기도 한다. 일부 정통파 집단에는 1년에 한 번 맛짜 굽는 것 외에는 문을 열지 않는 빵집도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 세데르(סֵדֶר)

맛짜를 굽는 유대인 남성. ChameleonsEye / Shutterstock.com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은 히브리어로 세데르(סֵדֶר)라 한다. 세데르는 질서, 장치라는 뜻이다. 그 말대로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규칙과 관습을 중요시한다.

세데르에 참여하는 이들은 흰색 계열의 옷을 입어야 한다. 또한 유월절 만찬상에는 여섯 가지의 특별한 음식들이 올라온다. 각 음식들은 출애굽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430년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의 고통을 상기시킨다. 과거 조상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현재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나아가 장차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유대인들은 쓰고 맛없는 거친 음식들을 먹는다.

세데르 음식들

일 년 된 숫양의 고기와 정강이뼈 – 고대의 성전 예배 시 유대인들이 희생 제물로 드린 유월절 양을 나타낸다.

구운 달걀 – 고대의 축제 희생물을 나타내는 것이며 1, 2차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기억하고 애도한다

세 장의 맛초트(맛짜의 복수형) – 출애굽의 긴박성을 상징한다. 또한 유대인의 세 종교적 집단인 제사장, 레위인, 이스라엘인을 나타낸다.

마로르(מָרוֹר‎‎) – 서양 고추냉이처럼 맵고 쓴맛이 나는 허브다. 조상들이 애굽에서 겪은 노예 생활을 상기시킨다. 또한 유대인들이 신앙에 따라 사는 것을 존중받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하로셋(חֲרֽוֹסֶת‎) – 사과, 호두, 잣 등을 으깬 것에 꿀, 포도주를 붓고 계피 등을 섞어 만든 일종의 잼. 유대인들이 애굽인을 위해 빚었던 회반죽을 나타낸다. 앞서 소개한 마로르를 찍어 먹는다. 잼은 단 맛을 내므로 한편으로는 자유의 달콤함을 의미한다.

카르파스(כַּרְפַּס‎‎) – 보통 파슬리나 샐러리 또는 양상추를 가리킨다. 애굽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의 빈약한 식단을 나타낸다.

소금과 소금물 – 카르파스 조각을 담가 먹기 위해 준비한다. 노예로 지배를 받을 때 유대인들이 흘렸던 눈물을 나타낸다.

세데르 음식들

유월절 만찬은 율법서인 하가다(הַגָּדָה)에 적힌 단계별로 진행한다. 위의 음식 가운데 구운 달걀, 마로르, 하로셋, 카르파스, 소금물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탈무드에 기록된 유대인의 전승이다. 음식을 먹을 때는 비스듬히 기대어 먹는다. 이 자세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무교병과 쓴 나물은 유월절 양의 고기를 먹기 전에 먹는다. 딱딱한 무교병과 쓴 나물은 아주 곤혹스러운 맛이다. 그러나 이 경험이 과거 못 먹고 못 살았던 쓰디쓴 노예 생활을 잊지 않게끔 한다.

그 외의 준비물

페사흐 하가다(Pesach Haggadah) – 유월절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담고있는 율법서

시편이 들어있는 성경책

찬송가나 페사흐 노래집

포도주와 포도주 잔

축제용 촛대

꽃과 꽃병

손 씻을 물과 물잔

출애굽 그림이 그려진 어린이용 색칠하기 책

크레용이나 색연필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페사흐 세데르)는 각 가정의 가장이 주관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순서는 어린 자녀들과 함께 출애굽 사건을 재연하는 시간이다. 성경에는 총 네 번에 걸쳐 반드시 자녀에게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출애굽기 12:26~27)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 하고 (출애굽기 13:8)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출애굽기 13:14)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 (신명기 6:20)

전통에 따라 가장 어린 자녀에게 네 개의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들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기억하도록 고안되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계승한다.

왜 이 밤에 우리는 맛짜를 먹습니까?

왜 이 밤에 우리는 쓴 나물을 먹습니까?

왜 우리는 이 밤에 파슬리를 소금물에 두 번 찍어 먹습니까? 또 쓴 나물을 왜 하로셋에 찍어 먹습니까?

왜 우리는 유월절 음식을 비스듬히 기대어 먹습니까?

이 질문들에 아버지들은 선조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노예 생활을 시작으로 답변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행하신 기적들과 이스라엘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 또한 질문 순서에 따라 하가다를 읽음으로 답한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 가정. ChameleonsEye / Shutterstock.com

3,500년 전의 출애굽 사건은 유월절 만찬을 지키는 유대인들에 의해 해마다 재연되고 있다. 그들은 고통스러웠던 조상들의 과거를 잊지 않고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전승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온 인류에게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메시아가 올 때까지 유월절을 지키려 할 것이다.



유월절.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대한 규례이자 영원한 절기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유월절을 제정해주실 때 “영원한 규례로 대대히 지켜야 하는 절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되기 직전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세 번의 유월절을 지킨 역사가 있다.

첫 번째 유월절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켰다. 집집마다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쥔 채 서둘러 고기를 불에 구워 먹었다.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출애굽기 12:27)

유월절 밤,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를 멸하는 재앙에서 보호하심을 얻었다. 반면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죽음을 당했다. 심지어 애굽 소유의 가축의 첫 새끼까지 죽음을 당했다. 하나님의 권능에 놀란 애굽 왕은 그제야 모세의 요구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었다. 패물과 의복까지 내어주면서 애굽을 떠나라고 재촉했다. 단 한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생 없이 절대권력자의 무릎을 끓게 만든 역사였다.

두 번째 유월절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

니콜라 푸생 作 홍해 건너기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광활한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 최대 수심이 3,040m에 달하는 홍해바다가 떡하니 이스라엘 백성 앞에 펼쳐진 것이다. 다행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고, 깊은 바다 한가운데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다.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정월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으로 유월절을 그 정기에 지키게 하라 ··· 정월 십사일 해 질 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다 좇아 행하였더라 (민수기 9: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온 지 2년째 되는 해, 그들은 시내 광야에 도착했다. 1월 14일이 다가오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유월절 지킬 것을 당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1월 14일 저녁에 시내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결함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역대하 30:17~18 참조).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무척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영원한 규례로 명하시고 출애굽 이듬해에도 지키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이다.

세 번째 유월절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

니콜라 푸생 作 가나안의 포도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이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평야에서 세 번째 유월절을 지켰다. 가나안 입성을 코앞에 두고 지킨 유월절이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여호수아 5:2~12)

할례를 행하라는 의미는 유월절을 지키라는 의미와 상통된다. 유월절은 할례를 행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출애굽기 12:48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 중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다. 이는 곧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기에 앞서 할례부터 행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평야의 ‘길갈’이라는 곳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그리고 다음날 드디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세 번의 유월절을 지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레스(Cyrus, 太陽. 神殿)



성경(聖經)의 역사(歷史) 요약(要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은 스스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큰 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심판하셨고 또 교만해진 인간들을 바벨탑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이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애굽에서 큰 집단을 이룬 히브리 민족은 모세의 영도(領導) 아래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며 배우고, 시험을 당하고, 벌을 받고, 다시 배우다가 마침내 여호수아를 따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원래 히브리 민족에게는 왕이 없었다.
간헐적으로 사사(士師)들이 일어나 그들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14명의 사사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마침내 왕정이 시작되어 사울, 다윗, 솔로몬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솔로몬이 죽은 뒤, 히브리 민족은 남쪽 왕국(유다)과 북쪽 왕국(이스라엘)으로 분열되었다.
북이스라엘은 19명의 사악한 왕들의 통치를 받은 뒤에 앗수르(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여(BC 722년)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남유다는 20명의 왕들의 통치를 받은 다음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여(BC 586년) 수많은 백성들이 바벨론 땅으로 잡혀갔다.
그런데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남유다 백성들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귀환했고, 바사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적의 위협으로부터 동포를 구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침묵기’(신구약 중간기)라 불리는 4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등장했다.

당신은 구약의 역사서 17권(창세기에서 에스더서까지)이 이 이야기 중 각각 어디에 해당하는지 아는가?
그러면 이제 신약의 역사를 한 단락으로 요약해보자.

하늘이 다시 열리고 천사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출생을 준비했다.
그로부터 30년쯤 후에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촉구했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3년 동안 사역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이셨고 또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세워 땅에서 자신의 일을 지속하도록 준비시키신 다음,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후에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체험하여 성령의 권능을 힘입었다.
그들은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했으며, 사도 바울은 광범위하게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은 신약성경 가운데 적어도 13권의 서신서를 기록했다.
사도 요한은 종말까지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록한 책 ‘요한계시록’을 썼다.

성경은 시작할 때와 똑같이 끝난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로 시작한 것과 같이 어떠한 악(惡)도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끝을 맺는다.





고레스 대왕(大王)


아버지 : 캄비세스 Ⅰ세(Cumbyses Ⅰ)
어머니 :  메대 왕 아스디아게스(Astyages)의 딸 만다네

파사제국의 초대 왕(B.C 546-529)
바벨론을 정복한 사람.
유대 백성의 귀국을 허락한 사람으로 B.C 549년 메대의 속박을 벗어나 BC 546년 리디아를 물리치고 동시에 그리스의 이오니아 제도시를 정복, 동으로 옮겨 인도 지경에까지 확장했다.
이사야는 고레스를 “기름부음 받은 자”로 보았다(사 44:27, 28. 45:1-5).
고레스 B.C 539년 10월 29일에 바벨론에 입성했으며, 자신을 백성들의 해방자로 자처했다.
바벨론에 남겨 두었던 신상들을 원래 있던 성읍들로 되돌려 보냈으며, 포로된 사람들을 귀향시키는 인정어린 정책을 시행했다.
온건한 정치는 자연히 히브리인에게도 파급되었다.
이스라엘민족에게 유다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권면했다(대하 36:22, 23. 스 1:1-6).
아들 캄비세스에게 왕위를 물려준(BC 530) 후 원정을 나갔다가 그 해 가을 전투에서 전사했다.(사 44:28, 45:1, 대하 36:22, 스 1:1-8, 4:4, 단 1:21, 6:28, 10:1).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King Cyrus)

이방의 왕인 바사왕 고레스는 아무 대가도 없이 오히려 보호까지 해 주면서 유대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을까요?
자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을 믿는 유대백성들이 언제 다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다니엘의 영향력 때문이었을까요?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정독하며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십시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예레미야 25:1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예레미야 29:10)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4:26-28)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45:1,2,13)

만약 고레스 왕이 위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들을 보았다면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성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말씀으로부터 바벨론 성을 공략할 때 성 주위의 물을 마르게 하신 것(이사야 44:27)과 놋쇠 문을 열어놓아(이사야 45:2) 그 난공불락의 성을 정복케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까지 정확히 부르시며 “그(고레스)가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45:13).” 하시는 예언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경악했을 것입니다. 고레스 왕 때로부터 약 200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부르시며 자기가 이루었던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예언하셨음을 보고 그 하나님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고레스가 그 때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언들과 그것들의 성취를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를 거부하십니까?

역대하 36:22-23와 에스라 1:1-11에 고레스에 관한 그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에스라 1:1-3,7)

유대 사람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돌려보내는데 무슨 대가나 조건이 있었습니까? 위의 예언들의 이중적 조명을 고려할 때, 고레스는 결국, 죄의 권세아래 종 되었던 우리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그 피로 구속하시고, 그 결과로 우리를 사단의 결박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니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역대하 20:6)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재로, 고레스 왕의 치정과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축하라는 칙령(decree)이 새겨진 돌기둥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아직도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우신 능력을 한치라도 의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7)


전설 같은 이야기기 있다.
그리스의 정복자 알렉산더가 헬라제국을 확장시키면서 당시 페르시아의 고도(古都), 파사르가대(Pasargadae)로 진격하였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며, 부수고 불사르며,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다. 파사르가대에서도 궁궐을 파괴하고, 페르시아제국의 창시자인 고레스왕(Cyrus II, 재위 BC. 550-530)의 무덤가에 당도하였다. 제국의 건설자 고레스의 묘지는 궁궐처럼 파괴와 노략 및 도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레스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알렉산더는 고레스의 묘지를 파괴하기에 앞서 묘지 앞에 있는 비문을 해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비문에는 이와 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나 고레스는 한 때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서 점령될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구에겐가 점령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묘를 건드리지 말아주시오.” 알렉산더는 무덤을 파헤치러 왔다가, 오히려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고레스왕의 묘실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그 묘지의 외형은 아직도 그대로 존재한다.

바벨론에 이어 당시의 세계를 제패했던 페르시아제국의 황제 고레스가 남긴 사적은 특별한 점이 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인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를 각각 멸망시켰다. 앗시리아는 북조를 혼혈정책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시켰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민족의 중심인 지도자를 제국의 도시로 흩어 국가의 명맥을 단절시켰다. 그러나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자 고레스는 유대인을 고국으로 보내어 다시 민족을 형성하게 하고, 유대인 스룹바벨 총독을 보내어 성전을 짓도록 한다. 느브갓네살이 가져온 수많은 금 그릇을 보내서 다시 사용하게 한 것은 놀라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고레스의 유물 가운데서 성경과 맞닿아있는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는 “고레스의 원통”(Cyrus Cylinder)이다. 진흙으로 만들어져서 그의 업적을 기록한 9인치 길이의 원통에는 성경에 있는 고레스의 역사와 일치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전쟁의 승리자로서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기록, 자신이 베푼 관대한 일에 대한 공로가 기록된 것이다. “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안 주는 것과, 사회적 신분을 안 주는 [바벨론의] 제도를 폐지한다.” “나는 그들의 무질서한 주거 생활에 안녕을 주었고, 티그리스 다른 편에 있는 헌납됐던 도시들을 돌려주었다.” “그 땅은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온 거룩한 땅으로... 나는 역시 이전의 원주민들을 모아서 그리로 돌려보냈다.”

고레스 원통의 내용은 고레스가 다스리던 제국의 정책을 반영한다. 역대하 36장 22-23절에는 유대인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는 고레스의 명령이 등장한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레스는 놀랍게도 즉위 원년에 원통의 내용처럼 유대민족의 귀환과 신앙의 회복을 명령하고 있다.

고레스의 종교는 유대교가 아니다. 그가 믿음이 독실한 왕으로서 평생 다윗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거의 신앙고백에 가까운 칙령을 내리고 물심양면으로 유대인을 배려하는 것을 보면, 유대인에 대한 문화적인 행정적인 연결고리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다니엘이라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539년 바벨론이 망하던 그 밤에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이다. 그리고 그는 제국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레스에 의하여 왕이 된 다리오 왕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총리로서 고레스왕에 대한 예언, 이사야 44-45장의 내용을 전하였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선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사 44:27). 제국을 멸하고 세우는 일을 하는 고레스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자”요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가 될 것을 이사야는 예언하고 있다(사 44:28-45:1). 다니엘은 고레스왕을 섬기면서 그가 150년 전에 예언된 운명적인 하나님의 일꾼임을 전하였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큰 변곡점에 서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은 경제적 타협을 지났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기회로 하여, 이제는 미국과 중국만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 참여하여 정치, 군사의 영역까지 확장되는 상황에 있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 남북관계의 갈등과 미군사력의 한반도 집결, 그리고 친미 서방국의 연대가 국제질서의 변동을 가져오는 징조처럼 느껴진다. 이 어려운 때에 이사야나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이 더욱 그립고 고레스와 같은 강하나 약한 민족을 돌아보는 걸출한 정치가를 더욱 바라게 된다.


열왕기상 13:2를 보시면 어느 예언자가  요시야라는 아이가 왕으로(다윗의 집에)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그가 제단을 향하여 주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오 제단아, 제단아,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나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들의 제사장들을 네 위에 헌물로 드릴 것이요, 또 사람들의 뼈를 네 위에서 태우리라, 하고

이 예언은 열왕기하  21:24에 성취 되어  요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 땅의 백성이 아몬왕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민 자들을 다 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더라. <열왕기하 21:24>

다만 이건 예언이 성취가 된 후에 쓴 글로써 성경을 진리로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봤을때는 하지도 않은 예언을 했다고 한 후 나중에 예언이 성취가 되었다고 할수 있지 않나 의심할 수 있는 예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위와 비슷한 즉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그 사람의 이름과 할 일을 예언하고 그 이후에 성취된 사례가 더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BC 7세기 쯤 쓰여진 책으로 구약의 예언서 중 가장 위대한 예언이 많이 있는 으로 여겨집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적나라하고 문자적인 예언을 많이 한 책으로써 신약에서도 많은구절이 인용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임을 입증하는 예언서 이사야!

이사야서 43:9는모든 민족들아, 다 모여라. 그들의 신 가운데 누가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하였느냐? 어떤 신이 옛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 그 신들은 증인을 데려다가 자기들이 옳음을 증명해야한다. 다른 사람들 이듣고 ‘그 말이 옳다’라고 말하게 해야한다. (쉬운성경) 

즉 어떤 신이 앞으로 일어 날일을 얘기할 수 있는가? 라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구원자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44장 말미와 45장 초반에 하나님은 고레스가 왕이 되게하여 세상을 다스릴 통치권을 줄 것이며 13절에 그가 아무 조건없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유다)백성을 풀어줄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해방할 것임을 예언한 이사야서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구부러진 곳들을 곧게 하고 놋 문들을 쳐서 산산조각 내며 쇠 빗장을 꺾고네게 어둠의 보화와 은밀한 곳의 감추어진 재물을 주어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나는 주니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으며 나 외에는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네게 띠를 띠어 주었으니 <이사야 44:28~45:5>

내가 고레스를 보내어 의로운 일을 하게 할 것이고 그의 일을 쉽게 해 주겠다. 고레스가 내 성을 다시 쌓을 것이며, 포로로 잡혀 간 내 백성을 아무런 대가 없이 풀어 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사야 45:13>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

이 예언은  150년 후인 BC 538년 쯤 성취됩니다에스라 1장을 보시면

이제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제 일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에 두루 선포도 하고 또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 곧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을 내게 주시고 또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해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너희 모든 사람 가운데 누가 그분의 백성이냐?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니 그는 유다에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남은자가 누구든지 그가 머물던 모든 곳에서 그의 처소 사람들이 은과 금과 물건과 짐승으로 그를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자원 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에스라 1:1~4>

많은 역사 비평가들은 이런 성경의 주장에 대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비웃었습니다. 당시에 강대국이 나라를 정복하고 포로된 자들을 풀어주고, 그들의 성전을 짓기 위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렸죠.

고레스 원통의 발견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원통

하지만 고레스의 원통이 발견된 이후 비평가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으로도  유명한 원통에는 고레스가 어떻게 바벨론의 도시를 저항 없이 취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구부러진 곳들을 곧게 하고 놋 문들을 쳐서 산산조각 내며 쇠 빗장을 꺾고네게 어둠의 보화와 은밀한 곳의 감추어진 재물을 주어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이사야 45:1~3>

또 그와 함께, 외국 포로에 대한 자유와 사회적 신분을 바로 잡아 주고 그들을 고국 땅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레스 원통의 내용

      -

나는 고레스 세계의 왕, 위대한 왕, 정정 당당한 왕, 사방의 왕이며 위대한 왕 안샨의 왕이신 캄비세스의 아들이며… 고레스의 손자이며… 

나는 오랫동안 황폐 되어온 성소들과 그 안에 있던 신상들을 티그리스강 저편에 신성한 도성들로 귀한 시켰으며 그들을 위하여 영구적인 성소들을 지어 주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모아서 저들의 거주지로 귀환 시켰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왕 고레스 (키루스 2세)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내고 그것은 BC 7세기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을 예언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왕이되어 어떤 일을 할지, 특히 그가 당시에 가장 강한 나라를 누르고 지역을 통치하게 될지, 또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즉 자신의 종으로 삼은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을 할것 인지를 알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전지함과 함께 이 세상의 통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예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스라 1:1-4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기원전 586년 남유다가 망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지만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앞서 예언하신 말씀대로 70년이 지난 후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을 향해 떠났던 조상들처럼 포로된 이스라엘백성에게 갑작스럽게 날아온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귀환하게 된 것에 대해 역사적 배경은 참 흥미진진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사전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데 특히 구약을 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속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어떻게 그 시간속에 또 연대기속에 참여하여 일을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가시는지 그 오묘한 전개과정을 보게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의 여러 강대국들 마저도 너무나도 훌륭하게 활용하시면서 언약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스라엘의 귀환을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으로만 본다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왕의 의해 귀환명령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바사라고 하는 나라의 왕으로부터 귀환명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레스는 지금의 이란 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거대한 나라였던 메대의 남동쪽 변방에 조그맣게 달라붙어 있던 안샨라고 하는 나라의 캄비오스왕의 아들으로 태어난 인물인데 기원전 6세기에 활약했던 역사적으로 대제라고 불릴만큼 위대했던 이 고레스 왕의 출생배경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메대 왕국의 공주였는데 공주는 결혼전에 두번의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은 공주에게서 태어날 아들이 메대왕의 왕위를 빼앗게 되는 꿈이었고 이 꿈을 알게 된 메대왕 아버지는 이를 두려워해 자기 딸을 저 멀리 변방의 조금만 나라의 왕과 결혼시켜 그럴 힘을 처음부터 배양하지 못하게 하려합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고레스였는데 고레스는 어릴적에 외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양치는 목동의 아들로 위장되기도 했지만 결국 성장해 외할아버지 왕에게 반란을 일으켜 메대왕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바사라고 이름을 바꾼 후 남유다에게는 원수와 같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동쪽으로는 인도로부터 서쪽의 터어키까지 이르는 거대한 왕국을 이루게 됩니다.

고레스가 죽은 이후로 역사적으로 위대한 왕으로 칭송을 받은 이유는 정복한 지배지와 융화하기 위해 종교적 관용과 포용정책을 기꺼이 폈고 피정복지 나라에서 배울 것이 있으면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취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남겨 역사적 유물의 가치는 지금도 참으로 대단하게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1. 고레스를 세워 쓰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고레스왕의 마음을 하나님이 감동시키어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을 명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절에서 고레스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세상 모든 나라를 주셨다고 했고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고레스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추정을 해보면 고레스의 평소 마음자세로 보아 어느 누군가로부터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오게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과정에 100년전 선지자 예레미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이야기도 담겨 있었을 것이고 70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도 또한 들었을 수있습니다. 더 거슬러 가서는 근 2백년이나 이전에 자신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맞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사야 44장 28절, 45장 1절)에 대해서도  어쩌면 들었을 지 모릅니다. 자신에 대해 예언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목자라고 하였고 또 여호와께로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라는 하는 2백년전의 예언의 말씀을 고레스가 접하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동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3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니라고 인정하고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은과 금 그밖에 물건과 짐승으로 또 바벨론에 의해 빼앗겼던 성전 그릇까지 지원하는 전폭적인 지지로 예루살렘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건축을 독려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위해 먼 옛날 고레스라는 변두리 변방의 한 나라의 왕을 세우시고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우연곡절끝에 거대한 나라의 왕조를 이끄는 위대한 왕으로 만들어 사용하셨고 그를 통해 바벨론을 하나님의 심판대로 멸망시켜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의 귀환까지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레스같은 자를 세워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도 하시지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세우시고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이루시고자 하는 씨줄과 날줄같이 그 촘촘하고 세밀하게 엮긴 이 세상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에이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어디에 쓰실라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처 우리가 다 깨닫고 헤아리지 못할 뿐이지만 하나님은 이 거대한 세상속에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아주 작은 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지금도 사용하고 계시는중입니다. 이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염려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지금 내가 언제나 어느때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상태인지 나를 살피고 점검해야 할 뿐이지 나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쓸모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는 하지도 말고 갖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쓰고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를 감사하고 기쁘게 합니까? 이렇게 확신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내가 가까이 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있습니다.
하나님께 기꺼어 나를 내어드릴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십자가고난의 의미를 잊지않고 내 마음안에 심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 되는지 알게 하십니다. 이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시길 간절하게 바랍니다
 
2.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자
 
고레스의 귀환 명령을 통해 앞서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말씀이 성취되었듯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결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2장까지 읽어보면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그 수가 4만2천3백6십명이라고 2장 6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를 생각헤보게 됩니다. 기원전 607 또는 605년 1차 바벨론의 포로가 이루어지고 난 후 586년에 남유다가 멸망하게 될 때까지 3차에 걸쳐 바벨론에 의해 끌려가게 된 포로수는 대략 만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70년이 흐른 후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 4만명이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사만명이면 왠지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방인의 왕이었던 고레스마저도 인정할 만큼 참 신이신 그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실행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생각보다 적었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객관적인 수치로 적었다 많았다 그리 평가할만한 자료를 근거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1893년에 바벨론의 고대도시였던 니푸르라는 지역을 발굴하다 발견된 당시 5세기 기록인 상업활동문서인 무라슈 문서를 통해 추정해볼 수있는 것은 유대인들은 28개의 집단 공동체를 만들어 바벨론 여기저기에서 정착촌을 이루며 상업과 농업 그리고 은행업에 이르는 경제활동에 종사하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야가 이미 예언한바대로 바벨론에 가서 그곳에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렘 29:5)라고 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있습니다. 한마디로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롭게 여러 경제활동을 하면서 상당한 부를 이루고 잘 정착해 많은 가족을 이루며 잘 살았다라고 할 수있다는 것입니다. 70년이 지난 후에는 그럼 더 많은 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 시작에 제 경우처럼 이제 이곳 미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사는 것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바벨론에서 이룬 모든 것을 정리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라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어쩌면 에스라는 하나님꼐 감동을 받은 자들이 돌아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세에 의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민족은 장정 6십만 기준으로 삼아 추정하면 250만에서 300만에 이루는 커다란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시겠다라고 하신 약속의 땅으로 향했지만 결국 1세대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40년 광야에서 고생하다 죽고 말았고 광야 2세대만 들어갔을 뿐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다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왕조 솔로몬을 이어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민족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과 짬뽕이 되는 혼혈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탈락하였고 남아있던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전에 상당수가 애굽으로 도망가 버리고 많은 수는 예루살렘에 그냥 남게 되고 일부는 포로가 되어 끌려가면서 산산히 쪼개져 분열되고 맙니다. 그나마 예루살렘에 남아있게 된 백성은 모든 것이 파괴된 척박하고 버려진 땅속에 마치 죽은 신앙인처럼 살아야 했고 나중에는 귀환해 성전을 건축하는 남유다과 베냐민의 대적이 되어 성전공사를 방해하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라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이끌려갔던 남유다의 백성은 그곳에 정착해 적당하게 잘 살게 되었지만 막상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할때는 그중의 일부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의 성전 그곳은 자원하며 기쁨으로 드리는 은과 금과 그밖의 많은 물건과 짐승의 예물로 이루어진 곳이며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시대 하나님을 만나는 회막 즉 장막이었고 더 거슬로 올라가면 그 원형은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드신 금과 은으로 가득한 에덴과 같은 곳이 바로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돌아간 수는 수없이 갈때기에 거르고 거른 것처럼 결국 적은 수만 남은 사만이천여명의 백성이었습니다.
 

 









라마나욧(사무엘상 19:18-24)


라마나욧(사무엘상 19:18-24)

'라마'는 사무엘의 출생지이자 고향이다.
이곳에 사무엘의 관저가 있었고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벧엘, 길갈, 미스바 등지를 순회하였다(삼상7:15~17).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곳에서 사무엘에게 그들의 왕을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다(삼상 8:4~55).
이에 따라 첫 번째로 사울을 택해 기름부음을 준 곳이며(삼상 10:1),
이후 다윗을 택해 기름부음을 주었다(삼상 16:13).

사무엘은 사울이 타락하자 결별하고 고향 '라마'로 돌아왔는데(삼상 15:34~35)
이때 이곳에 '나욧'을 세워 후학들인 선지자들을 가르쳤다.

'나욧'은 "거주지, 거처, 초원지대"라는 뜻으로 지금의 '기숙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무엘은 말년에 사울이 타락하자 훗날을 기약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명에 따라 기름 부어 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미갈의 도움으로 도피한 곳도 '라마'였다(삼상 19:18).
사무엘은 사울의 행태를 고하는 다윗을 '나욧'으로 데리고 가서 말씀으로 교육했다(삼상 19:19).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는 것을 안 사울은 세 번에 걸쳐 다윗을 잡아오라고 사람들을 보냈으나 그때마다 '라마나욧'에 온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언하게 된다(삼상 19:21).
이때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선지자적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황홀경 상태로 성령이 임한 현상이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으러 직접 가는데 그가 '라마나욧'에 도착하자 그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예언하며 벌거벗고 종일 누워있게 되었다.
이는 성령이 임하여 사울의 죄와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 다윗은 피신하였다.

'라마나욧'은 선지자들을 가르친 말씀 공동체요, 교육기관이다.
또 말씀의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지성을 위해 성령의 은혜가 함께하고 역사하는 영성 훈련장이요, 성령 공동체였다.

아마도 다윗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며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라마나욧'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두란노서원'을 통해 2년 동안 후학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흩어져 가정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순회 전도자가 되어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성경 공부는 말씀을 지식적으로 공부할 뿐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라마나욧'은 지명과 장소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여기서 라마는 지명으로 사무엘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그와 함께 하면서 사역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사울과 결별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과 결별하기 전에 한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께 불순종했던지,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 15:35).
아마도 이 말은 사람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아닐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런 사울을 버릴 것이라고 선포하고 라마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 19:18).

다윗은 사울의 딸이요 자신의 아내였던 미갈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생명을 보존한 후, 사무엘을 만나러 라마나욧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물론 사무엘에게 자신을 지켜줄 세상적 권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다만 사무엘이 하나님과 깊이 교류하는 참 선지자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라마로 이끈 것입니다.
이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그에게 나가는 자를 돌본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삼상 19:18)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여기 살았다는 단어에 사무엘은 물론 선지생도들도 다윗을 환영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실 같은 장소에서 몸을 부딪기고 산다는 것은 환영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관계에선 쉽지 않습니다.
다윗은 당시 살아있는 권력 사울 왕의 눈에 난 자이니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반역죄가 되는 것이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무엘은 물론 그의 제자들도, 인간적인 두려움을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하나님의 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라마나욧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역할과 관련해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라마나욧은 사단이 힘쓸 수 없는 곳이요, 죄인의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라마나욧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믿음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황혼 녁, 한 농부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황톳길을 걸어 귀가하는데, 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뒤로 황토 먼지가 폭폭 일어났습니다.
그때 마침 붉은 석양 빛이 그 먼지 위에 내려앉자 황토 먼지가 금가루처럼 빛을 냈습니다.
한 사진 작가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사진에 담아 “먼지도 아름답다!”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더러운 먼지도 빛을 입으니 아름다운 작품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티끌 같은 인생도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면 밝게 빛을 내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변화되어 세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후

여호와의 영이 다윗의 걸음 걸음을 아주 치밀하게 인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처음에는 여호와의 영께서 다윗을 왕실로 입궁시키는 것을 봅니다.
악신 들린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은 수금 타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엔 골리앗 앞으로, 그 다음엔 사울의 군장이 되여 이스라엘 앞에 출입시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미갈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신혼생활은 한갖 꿈일뿐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니 사울은 자기의 사위 다윗을 일컬어 자기 대적(원수)이라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도 자기 딸 미갈 앞에서 말입니다.

이제 다윗은 왕의 대적으로 죽어 마땅한 국가적인 죄수가 된 것입니다.

다윗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간 곳은 사무엘이 있는 라마입니다.
그에게 다윗은 사울이 자기에게 어찌 행하였는지 말했다 합니다.
만일 사무엘이 다윗과 사울에 관한 사전정보 없이 있다 갑자기 왕의 군졸들이 쳐들어 오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다윗은 사무엘에게 미주알 고주알 다 일러바치고 난 후 대단히 홀가분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은 자신의 기름부음에 관하여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무엇보담 더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왕의 대적자로 몰리게 된 것인지 가장 질문하고픈 난제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갓 결혼한 신부 미갈를 두고 이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과연 기름부음 받은 자의 모습인 것인지..
도대체 기름부음이 뭐길래 이토록 괴로운 것인지...
다시 물리고픈 심정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 그는 예전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정치판에 들어가게 된 것을 봅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의 기름부음이 아닌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응당 그리 되어야 할 것이지만 무척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낮 양 치는 목동임에 불과한 자신에게 정치적인 자질이 있기나 한 것일까?
아니 그 무엇보담 더 정치적인 소명감이 있는 것일까?
길지 않은 시간들이였지만 다윗의 눈에 들어 오는 왕권과 야합한 세력들을 보며 그는 절규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정치판에 뛰어 들어가느니 차라리 다시 목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상에 좋다 싶었을 것입니다.

나도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자각할정도로 받은 이후 맨 처음에는 예수 믿는게 참 쉬워보였습니다.
허나 날이 갈수록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예수 믿는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예수님을 내가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날 떠나지 않고 늘 십자가의 못박히신 예수와 함께 죽고 또한 그분과 함께 사는 복음의 비밀을 삶속에서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나는 벌써 오래전에 예수님을 배도하였을 것입니다.
아님 십자가와 세상을 적당히 야합한 폼새나는 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하길 나욧에서 사무엘이 다윗과 함께 살았다 합니다.
사울과는 사무엘이 함께 살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허나 다윗만큼은 사무엘이 곁에 품고 살았습니다.
비록 다윗은 사울의 핍박이 원인이 되여 왔지만 그 핍박은 가장 축복스러운 만남을 갖도록 만든 희망 가득한 핍박이였습니다.
삶이 우리를 핍박할 때, 그것은 가장 축복된 만남으로 나를 인도해 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게 정답일 것입니다.

왜 사무엘은 다윗을 곁에 두고 살았을까요?
사무엘이 일평생 살면서 알게 된 하나님과 그 나라에 관한 여러가지를 소상히 가르쳐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사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왕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예요.
결국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도를 배우게 된 셈이지요.
더불어 왕으로서의 소명 의식도 새롭게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앞으로 통과하게 될 고난의 터널을 넉넉히 지나갈 수 있는 자양분들을 많이 많이 섭취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무엘과 라마나욧의 공동체를 통해 배울 것들을 배웠을 때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오도록 허락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어찌 보호해주시는가를 다윗 평생에 기억할 수 있도록 놀라운 일을 보여주십니다.
그런 걸 직접 눈으로 보면서 살았으니 다윗이 어찌 다윗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역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리 당신이 만드셨는데도 다윗을 두고 두고 당신과 마음이 합한 자라고 칭찬하시는 것 보면 울 아버지 참 재미있으셔요.
사울이 세 번씩이나 다윗을 잡아 오라고 보낸 전령들과 네 번째로 찾아 온 사울에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하도록 만드는 것을 봅니다. 사울은 세구라는 큰 우물가를 떠나 라마나욧을 향해 가는 길 내내 예언을 했다 합니다. 라마나욧 사무엘 앞에서는 옷을 벗고 온종일 누워서 예언 했다 합니다.

누구를 위한 예언인 것인가?
무엇을 예언하였을까?
분명 그 예언은 하나님을 위한 예언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함은 그가 기름을 부은 다윗 왕과 그 나라를 위해서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 그 예언들은 사무엘과 그의 생도들에게 라마나욧 신학을 정립하는데 엄청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라마나욧의 실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라마나욧의 실체인 말씀보다 기도를 더 중요시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길이요,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이 우선시 되지 않는 기도는 모두 인간적인 기원에 불과한 종교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를 지켜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다윗이 그 때 라마나욧이 아닌 다른 곳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해주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라마나욧이란 공동체원들이 기도를 하도 많이 한 결과 그 터가 특별히 영빨이 세기 때문에 악한 사울도 넘어져 예언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기도 빨 하나도 없는 다메섹 석상에서 꼬꾸라져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누군가 다메섹에서 열심히 기도를 한 자가 있었기에 특별히 예수님께서 그 장소를 택해 사울을 꼬꾸라지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필요하셔서 다메섹 석상에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라마나욧을 엉뚱하게 해석하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게 됩니다.
라마나욧의 실상인 예언, 즉 말씀을 붙잡지 않고 그곳에서 나타난 성령의 현상만 본다면
우린 얼마든지 지극 정성 기도 많이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할 것이라는 헛된 영광과 헛된 꿈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도구화시키는 대단히 큰 죄를 범하게 된답니다.
사탄은 이런 자를 미혹합니다.
말씀을 붙잡지 않고 나타난 표적과 기사만 붙잡고 기도할 때 미혹의 영이 왜 아니 오겠습니까?
미혹의 영이 주는 기적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자랑하며 다닐 때 그 말을 듣는 자들이 미혹되고 그러다 보면 미혹의 영들이 집단화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미혹의 세력이 형성된 것이지요.
라마나욧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영낙없이 미혹의 영들이 틈타 종내는 미혹의 세력 장소로 전락해버리게 되지요

주님!
소명이 있는 자를 보호해주시는 주님.
소명을 다 이루기까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주님.
라마나욧에서 사울과 그의 전령들이 예언한 그대로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라마나욧은 오늘도 내가 껴입은 두터운 옷들을 벗고 다윗의 사자이시며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 말씀과 상관하며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능히 벌거벗은 자로 만든다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입혀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입혀 주시기 위함입니다.



질병



출애굽기15: 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모든 질병이 영적인 치료가 우선이 되어야 그와 동시에 육적인 치료도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
먼저 우리 마음의 문이 열려야 주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며 비로소 그 때 영적인 치료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말은 질병과 싸워 이긴 한 신앙인이 고백한 말입니다.
그에게는 치사율이 90%가 넘는다는 병이 있었습니다.
백혈병으로 진전되어 가고 있지만 백혈병은 아닌 병, 그래서 치료약이 없이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한다는 병, 골수 이식만이 유일한 치료법이지만 타인과의 골수가 맞을 확률은 20000:1. 그는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었습니다.
희망이 없었기에 세상을 향한 분노도 컸습니다.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만 이런 불행이 겹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찾게 된 교회에서 그는 희망을 찾았습니다.
고통 가운데 눈물 흘리는 그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그는 2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그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지금껏 살려주신 하나님 사랑에 보답합니다.
세상 가운데 서서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의지할 곳도 없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수없이 많은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에게 문 밖에 서서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서 당신의 마음을 열어 줄 때까지 문 두드리며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뿌리치지 않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을 책임지는 이는 당신의 아버지 여호와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아직까지 계속됩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질병, 병에 관한 성경 말씀

 

0 (출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0 (시편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0 (전도서 5: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0 (마태복음 19: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0 (누가복음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0 (누가복음 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0 (누가복음 5: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0 (누가복음 7: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0 (누가복음 9: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0 (사도행전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0 (야고보서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질병, 병에 관한 금언

*  결정적인 질병에는 결정적인 치유법이 있다.

* 질병은 지나친 방종에 대하여 치루는 형벌이며, 또한 건강증진법에 소홀한 데 대한 벌이다.(강원용 목사)

* 마음의 병도 육체의 병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병을 이해하기 전에 절반 쯤 죽게 되고,
우리가 병을 이해하면 반 쯤은 낫는다.(C. 콜턴)

질병이 찾아오면

질병이 찾아오는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병을 고치는 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생은 건강만으로 다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을 멈추어 세우고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 더 깊은 믿음, 영적인 자기 성장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적개심과 질병

가정의학 전문의인 돈 콜버트 박사는 어느 날 심각한 고혈압 증세 때문에 다량의 혈압약을 복용하고 있었던 목회자 한 분과 상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혈압을 일으킬만한 소위 비만과 같은 신체적 결함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그와 상담하면서 콜버트 박사는 과거 이 목회자가 섬기던 교회 안에 심각한 분쟁이 생기면서 교회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몇몇 사람들과의 갈등 때문에 그 교회를 떠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적개심으로 나타나면서 그의 혈압이 오르게 된 주된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극심한 적개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실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용서가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는 권고를 담당의사로부터 받게 된 이 목회자는 스스로 용서의 필요를 깨닫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그의 마음을 토해내면서 회개와 용서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평안을 갖게 되자 그들을 직접 만나 용서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평안과 함께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고혈압 증세가 사라지고 혈압이 정상을 되찾은 것은 물론 한 때 험상궂게 보였던 그의 얼굴 모습도 전혀 딴 사람처럼 평온하게 변해 갔습니다. 적개심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화가 나있거나 누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로 실망해서 좌절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자신의 감정을 감쌉니다. 그렇지만 그 실망자체가 사실은 분노의 일종이지요.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적개심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가 높은 지경에 이르게 되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각한 해악이 생겨나게 됨을 예상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이 치명적인 적개심의 문제를 해결해야합니다. 그가 바로 은혜 받은 지혜자입니다.


 

▣ 난치병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을 흔히 셋으로 분류한다. 비교적 고치기 쉬운 병이 있는가 하면, 아예 고치기 어려운 불치병이 있다. 또 치료는 가능하나 그 과정이 매우 어려운 난치병도 있다. 그 중에서 난치병은 원인이 다양하다. 악질로 인해 발생하기도 하고, 환자의 체질이 워낙 약해 오기도 한다. 워낙 병세가 심한 상태에서 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병이 아닌데도 난치병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침을 맞아야 되는데 약을 쓰겠다고 고집하거나 그와 반대로 꼭 약을 써야 하는데 침만으로 고쳐달라고 주장하는 경우다. 이런 잘못된 선택이 난치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편작이라는 명의가 육불치(六不治)라 하여 여섯 가지 고치지 못할 병을 논한 바 있다.

첫째, 이치를 헤아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

둘째, 자신의 몸은 가벼이 여기고 재물은 중히 여기는 겨우.

셋째, 의식주 생활이 적절치 않은 경우.

넷째, 음양이 한곳으로 몰려 장기가 안정되지 않은 경우.

다섯째, 몸이 야위어 약을 먹지 못하는 경우.

여섯째,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경우다. 영혼의 병을 고치는 것은 이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불신앙도 어떤 의미에서는 심각한 영혼의 질병일 수도 있다.

/손수명 장로(동진한의원장)

 

불치병

중국의 고대 역사가 ‘사마천’의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병에는 다섯 가지 못 고칠 병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교만해서 도리를 무시하는 병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도 그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몸을 해하면서 돈을 벌겠다고 하는 병입니다.
재물은 아무리 가득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 없고 결국은 몸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 철학이 타당치 못한 병입니다.
생각이 잘못된 사람은 바로 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기운이 불균형한 병이라고 합니다.
깊은 병이 얼굴에 나타나면 이미 때가 늦어 고칠 수 없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무당과 박수의 말을 의사의 말보다 더 믿는 병입니다.
신비로운 체험만을 쫓는 사람은 그 병을 고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병의 원인은 잘못된 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런 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만이 옳다는 생각과 행동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고 고집과 독선은 능력 있는 사람의 소양으로 포장되곤 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이 항상 옳고 정당한 것인가를 묻고 또 묻는 지혜가 이기적인 현대 사회를 극복하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병

 

병은 오직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과 좋지 못한 음식을 먹는 사람을 공격한다. 병을 예방하고 내쫓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먹는 것에 달려 있다. 그 다음으로는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다.

- 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의《조화로운 삶》중에서 -

* '먹는 것'은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마시고 들이쉬는 물과 공기도 '먹는 것'에 해당됩니다. 먹는 것 따로 환경 따로가 아니고 좋은 음식, 좋은 물, 좋은 공기, 좋은 환경이 결국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 중 어느 것 하나가 깨지기 시작하면 다른 것도 함께 깨지게 됩니다.

질병의 의미

 

나는 의대에 입학한 후 우쭐대는 마음으로 2년간의 예과시절을 교회를 멀리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내 몸에 이상한 피부병이 생겼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비늘 같은 것이 생겨 약간만 건드리기만 해도 주위가 온통 하얀 비늘로 뒤덮일 정도였습니다. 유명한 대학병원 피부과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아토피성 피부염이라는 말만 할 뿐 전혀 치료 효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사람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던 내가 1년 동안 사람을 피해 다니며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복음을 읽던 중 내가 죄인임을 다시금 깨닫고 나의 교만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내 모든 죄악과 이기적인 마음을 회개하자 주님께서는 저를 용서해주셨고 그날부터 제 피부가 깨끗해진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질병을 가질 때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질병의 의미를 깨닫기만 한다면 그 질병은 더 이상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습니다.

/박상은 박사(샘안양병원장)

 

▣ 병을 앓으며 배운 가장 큰 것

 

모리 선생님은 미소지었다.

"미치, 내가 이 병을 앓으며 배운 가장 큰 것을 말해줄까?"

"뭐죠?"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거야."

- 미치 앨봄의《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중에서 -

* 엊그제 '간암 직전' 진단을 받고 놀란 어느 한 분이 "이제 진짜 술과 담배를 끊겠다"는 다짐을 굳게 하시더군요. 병을 얻고 나서 깨닫는 것도 더없이 소중하지만 병을 얻기 전에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암을 정복하는 방법

 

본문 : 엡 3:16 , 요삼 1:2

0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0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암 발생률과 암 사망률이 높아짐으로 인해 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암 전문의 장석원 원장은 암을 정복하는 방법을 「암 예방과 치료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01.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기 위해 삼림욕을 자주 하라.

02. 피로하다고 느끼면 바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

03. 자신의 명과 치료에 대한 궁금증뿐만 아니라 사소한 약물복용에 대해서도 주치의에게 꼭 물어본 후 실행하라.

04. 각종 항암물질이 함유된 식품을 골고루 섭취하라. 올바른 식습관이 중요하다.

05. 피곤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라.

06. 자신의 곁에는 항상 가족들이 있음을 명심하라.

07. 몸무게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08.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

09. 면역기능을 떨어뜨리는 스트레스를 줄이도록 노력하라.

10.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의사의 조언을 구하라.

건강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기도와 실천으로 건강을 잘 관리하여 건강한 몸으로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십시오.

* 기도: 주님! 영육간에 강건하게 하소서.

* 묵상: 영육간에 강건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김장환 목사

 

▣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 모든 민족을 오른 편에 속하는 양과 왼편에 속하는 염소로 구분할 것이라고 하신다.(마태복음 25:31~33)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자신이 병들거나 옥에 갇혔을 때 찾아오지 않은 자들은 왼편에, 자신을 찾아온 자들은 오른편에 서게 하셨다. 그러자 오른편에 선 자들이 말한다.

“우리가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태복음 25:39).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찾아가 보는 것’(go to visit), 그것이 먼저다. 아플 때는 누가 찾아와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감옥에 갇히면 나올 수 없다. 누군가 찾아와서 말이라도 걸어 줘야 한다. 그 자신이 고난당하는 자였던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 지니라”(야고보서 5:14).

겪고 보니 고난당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함께 묵묵히 하나님을 바라볼 친구다.

그가 버림받았다는 고립감에 빠지지 않도록, 함께 함으로 ‘나 혼자’가 아닌 ‘우리 함께’라는 소속감을 갖게 해 줘야 한다. 나는 밤마다 아이들을 투병 중인 엄마 방으로 모이게 한다.

큰 녀석은 엄마 오른손을, 작은 녀석은 엄마 왼손을, 그리고 셋째는 엄마 얼굴을 만지도록 한다. 아내가 외롭지 않도록, 우리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은 이렇게 함께하는 것이기에.

[난 당신이 좋아/ 김병년]

* 금언: 기도는 전능하신 분을 의지하는 연약함이다.(바우덴)

 

▣ 질병은 몸을 치료하는 한 방법

 

요즘 미국발 금융회사의 파산으로 전세계 경제가 흔들흔들 하는듯 합니다. 제가 경제는 잘 모르지만 제가 아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결국은 좋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요,

우리가 그동안 생각하던대로가 아니라서 그렇지 결국은 좋아지고야 말것입니다.

마음이 아프면 결국은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때에 몸으로 넘겨주고 그때부터 몸이 감당을 합니다. 그래야 충분히 경험되고 경험이 되어야 나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에 질병이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렇게 아픈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봅니다. 감정이입이 되면서 내안에 있던 아픔들이 씻어집니다. 정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에 질병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혹시 몸에 질병이 찾아와도 그 질병과 싸우지 않고 그 질병의 의미를 찾아 삶을 배우는 기회로 삼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관계가 힘들어 질 때거나 괜히 화가 나고 짜증이 올라올 때는 찬스라는 것입니다.

변화해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성장해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우주의 사인인 것입니다. 신이 그대를 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어려울수록 수련을 합니다. 힘들 때 일수록 기도를 합니다. 혼란스러울수록 명상을 합니다. 지혜롭게 사는 요령들입니다.

 

▣ 가장 무섭고 큰 질병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큰 질병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에이즈다. 암이다.

감기다. 등등.

일류 역사이래로 가장 크고 무서운 질병은 뭐니뭐니 해도 무지입니다.

자기를 모르고 자연을 모르고 신을 모르고. 그것들을 모르는 줄을 모른채 살아가는 무지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팔만대장경도 빨래판이고 고려 청자도 개 밥그릇이니까요.

▣ 당뇨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

당뇨병은 혈액속의 포도당 수치가 높아져 생기는 것으로 각종 합병증을 유발시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예방법으로는 혈당조절이 중요하므로 최대한 육류섭취를 제한하고 저단백 식사요법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가벼운 운동을 변행하여 몸의 커디션을 최상으로 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 운동법

권장하고 싶은 운동으로는 산책, 가벼운 체조와 같은 전신 운동을 매일 생활속에서 30- 60분 정도 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운동요법은 혈당조절에 도움을 주며 동맹경화증 예방과 비만을 막는 데에도 큰 몫을 합니다. 또한 스트레스 해소에도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심한 운동은 오히려 당뇬인들에게 해가 되므로 절대 무리하지 않는 운동이 좋습니다.

 

* 당뇨를 이기는 식품

노루궁뎅이 버섯, 상황버섯, 천마 등은 혈당치 강화작용으로 그 약효가 뛰어난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혈당치를 현저하게 내려 내려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칡뿌리, 가지, 검정콩, 인삼, 생지환, 뽕나무, 양파, 다시마 등이 있으며 꾸준히 섭취하여 건강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중풍

10명이 발병하면 2명이 사망하고 7명이 장애를 갖게 되며 1명만이 온전히 회복하게 된다.
음주와 흡연을 즐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발병율이 3 배 가량 높으며 채식보다 육식을 즐기는 사람이 2배 가량 발병 위험이 높다.
암, 심장병과 함께 3대 질병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1년에 20만 명 가량이 앓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뇌혈관질환인 중풍에 대한 설명이다.
계절적으로 온도차가 심한 겨울철에 비발하며 한번 발병하면 심각한 장애의 후유증을 남기게 되어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질병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뇌는 몸무게의 2.5% 밖에 되지 않지만 혈액은 10배 가량이 몰리는 특수한 부위이다.
그래서 뇌혈관은 정상혈압의 10배 정도인 1500mmHg 정도까지 견디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잘못된 식생활이나 격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약해진 뇌혈관벽이 터지거나 막혀서 발병되는 것이다.

내 몸은 지금 문제가 좀 있다

 내 몸은 지금 문제가 좀 있다.
대체로 좋은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간에는 열 개의 종양이 있고 살 날은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처한 상황에 낙담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하는 것은 나나 내 가족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 랜디포시의《마지막 강의》 중에서 -

답은 간단합니다.
지금부터라도 건강을 다시 챙겨보고, 할 수 있는 것부터 바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시작도 못 할 지경에 이르기 전에...
최고의 투자는 건강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건강해야 꿈도 이룰 수 있습니다.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하는 길

지인(至人)은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하고,
의사는 병이 생긴 다음에 치료한다.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하는 것은 곧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며,
수양하는 것이다.

-동의보감 내경편 신형

 

귀신과 병균의 유사점

우리교회에서 얼마 전에 지역주민을 위한 무료 건강검진을 했습니다.
거기에 오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한국인의 60%가 장내에 위염과 위암의 원인이 되는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균이 우리 장내에 있지만, 평소에는 내 안에 그 균이 있는지 없는지를 의식하지 못한 체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귀신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그 귀신이 어디에 있는지?
사람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체 살아갑니다.
내가 깨닫기로는 귀신은 병균과 매우 유사합니다.

첫째, 병균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귀신도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병균은 더러운 곳에서 잘 번식합니다.
마찬가지로, 귀신은 더러운 죄가 있는 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셋째, 병균은 사람 속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귀신도 사람 속에 침투해 들어옵니다.

넷째, 병균이 우리 몸 속에서 계속 번식하도록 그냥 두면 결국 우리는 병들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귀신이 내 생각 속에 계속 영향력을 끼치게 그냥 두면 내 영혼은 죽고, 내 인생은 파멸로 끝납니다.

다섯째, 병균은 빛을 싫어합니다.
빛에 노출되면 수초만에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귀신은 진리를 싫어합니다(진리 앞에서는 힘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요한복음 8:12)

귀신들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이 ‘빛과 진리’되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영혼을 죽이고, 내 인생을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끝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할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에베소서6장10절-12절 말씀)

조급한 마음은 병을 만든다

발명왕 에디슨은 80세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그 비결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불필요한 일에 몸을 혹사시키지 않았다.
또 시간에 초조해 하지 않았다.
쉬고 싶으면 쉬고 눕고 싶으면 누웠다.”
지나치게 분주하고 조급한 마음은 병을 만든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잠언 21:5)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14:29)

하나님의 여덟 가지 큰 언약



하나님의 여덟 가지 큰 언약


1. 에덴동산 언약

인간(아담)의 생육과 번성에 관한 언약.

자연을 다스릴 책임을 주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사항.

창1:26-31

창2:16-17

조건적

2. 아담 언약

아담이 범죄한 후 주신 언약.

최초의 메시아 언약이 포함됨.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정하심.

인간의 노동에 대한 의무를 규정함.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 예고함.

창3:14-19

무조건적

3. 노아 언약

자연법의 안정성에 관한 약속을 주심.

육식을 허용함.

생명(피)의 고귀함에 대한 언급.

노아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

창8:20:-9:27

무조건적

4. 아브라함 언약

씨(민족)에 대한 언약을 주심.

땅에 대한 언약을 주심.

* 아브라함 언약은 이삭(창26:4)과 야곱(창28:14)을 통해서 반복됨.

창12:1-4

창22:18

창15:18-21 등

무조건적

5. 모세 언약

율법(commandment)을 주심 - 십계명 등

규례(ordinance)를 주심 - 절기들, 제사들

판단의 법도(judgment) - 사회생활에 관한 법

출20:1-31:18

조건적

6. 팔레스타인 언약

약속의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조건들 제시하심.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 후의 회복을 예언함.

신30:1-20

무조건적

7. 다윗 언약

왕권에 관한 언약.

다윗의 왕좌가 영원히 견고할 것에 대한 약속.

삼하7:4-16

무조건적

8. 새 언약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를 위한 언약.

렘31:31-33

히8:7-13

무조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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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약(옛언약)과 신약(새언약)으로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옛 언약)은 히브리 백성들과 맺은 약속입니다.
신약(새 언약)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의 언약(에덴동산의 언약) / 조건적 언약
 
 1. 생육과 번성(창세기 1:26-31)
 2. 다스리라(창세기 1:26-31)
 3. 선악과 금지(창세기 2:16-17)

둘째, 범죄 후 언약(아담) / 무조건적
창세기 3:14-19

아담이 범죄한 후 주신 언약.

 최초의 메시아 언약이 포함됨.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정하심.

 인간의 노동에 대한 의무를 규정함.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 예고함


 

1. 에덴동산 언약

 인간(아담)의 생육과 번성에 관한 언약.

 자연을 다스릴 책임을 주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사항.

창 1:26-31

창 2:16-17

조건적

2. 아담 언약

 아담이 범죄한 후 주신 언약.

 최초의 메시아 언약이 포함됨.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정하심.

 인간의 노동에 대한 의무를 규정함.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 예고함.

창 3:14-19

무조건적

3. 노아 언약

 자연법의 안정성에 관한 약속을 주심.

 육식을 허용함.

 생명(피)의 고귀함에 대한 언급.

 노아의 후손들에 대한 예언

창 8:20:-9:27

무조건적

4. 아브라함 언약

 씨(민족)에 대한 언약을 주심.

 땅에 대한 언약을 주심.

* 아브라함 언약은 이삭(창26:4)과 야곱(창28:14)을 통해서 반복됨.

창 12:1-4

창 22:18

창 15:18-21 등

무조건적

5. 모세 언약

 율법(commandment)을 주심 - 십계명 등

 규례(ordinance)를 주심 - 절기들, 제사들

 판단의 법도(judgment) - 사회생활에 관한 법

출 20:1-31:18

조건적

6. 팔레스타인 언약

  약속의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조건들 제시하심.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 후의 회복을 예언함.

신 30:1-20

무조건적

7. 다윗 언약

 왕권에 관한 언약.

 다윗의 왕좌가 영원히 견고할 것에 대한 약속.

삼하 7:4-16

무조건적

8. 새 언약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를 위한 언약.

렘 31:31-33

히 8:7-13

무조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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