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말라기(나의 사자)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학개(쾌락, 축제)
스바냐(여호와께서 숨기신다)
하박국(씨름하는 자)
나훔(긍휼, 자비)
미가(Micah)(여호와 같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요나(비둘기)
오바댜(주의 종)
아모스(무거운 짐을 진 자)
요엘(Joel)(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호세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

7월 27일(화) 내게로 돌아오라(1:3)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1: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게로 돌아오라(3절)
♦ 성구 :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告)하기를 만군(萬軍)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게로 돌아오라(Return to me)”
스가랴와 학개는 에스라서에 함께 언급되는 (스 5:1; 6:14) 동시대의 인물로 동일한 정치적, 역사적 상황속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선지자들입니다.
학개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15년이라는 기간이 지나도록 성전을 완공하지 못하고 핑계를 대며 성전 짓기보다 자신의 집짓기에 분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현실적인 이슈들에 대한 선포라면, 스가랴는 성전 재건의 중요성과 의미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학개서는 보이는 성전 건축에 관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스가랴서는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스가랴"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시다” 라고 합니다.
그의 이름처럼 그는 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얼마나 진노하셨었는지를 기억하라고 전합니다.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떠나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명령에 불순종하였고 귀를 기우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메시아 왕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성전 재건에 힘쓰기 보다는 자기들의 집만 짓고 있는 백성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라고 묻습니다(5절).
불순종한 선조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선지자들도 모두 오래전에 죽었고, 남은 것은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심은대로 거둔 것이 바로 폐허로 남겨진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불순종의 결말은 폐허라고 합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며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스가랴서 1장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칭호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에서 80회 이상 소개됩니다.
특별히 스가랴에서 47회 반복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칭호는 이스라엘이 처음 세워진 이후부터 사용되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수 많은 왕들, 전쟁의 신들 중에 ‘주인’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모든 전쟁들의 승패를 정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심을 뜻하는 성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명하셨습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명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에게 돌아오리라”
오늘날도 모든 성도들과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세상은 지그몹다 더 좋은 곳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 찬양 / 돌아와 돌아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스가랴 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스가랴 1-8장                              스가랴 9-14장

        (제1스가랴)                                 (제2스가랴)


       8개의 환상                                   묵시적 계시 


    제사장 역할 강조                                 부정적


      지도력 강조                                 신정 통치 / 하나님 직접 통치



스가랴 1: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체바오트 아도나이) 46회 반복

- 역사의 주권자 


돌아오다(슈브. shûwb) שׁוּב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우상숭배 신앙에서 돌아와야 한다!
(사랑의 대상이 흔들린다)
집을 나간 아들의 사랑은 물질과 세상이었으나 집으로 돌아올 때는 아버지가 최고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개의 힘

1. 세속적인 힘(중력)
- 끌려 내려오는 것(교만)

2. 영적인 힘(은혜) / 은혜를 받았다!
- 위로 올라가는 것(겸손)

첫번째 환상(1:8-17)
- 하나님의 다양한 방법의 역사(홍마, 자마, 백마)
- 요한계시록 6장의 말은 상징적
흰말(정복), 붉은말(전쟁), 검은말(기근), 청황색말(죽음)

붉은 말(홍마), 자주빛 말(자마), 흰 말(백마)

화석류나무(상록수) : 초막절 지붕을 만드는 나무
회복의 상징(이사야 41:19, 55:12-13)  / 가시나무 

이사야 41:19-20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싯딤나무와 화석류와 들 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무리가 그것을 보고 여호와의 이 지은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창조한 바인줄 알며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이사야 55:12-13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히브리서 6:1, 2b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오늘의 기도

믿는대로 행하고
행한대로 열매맺는 신앙 



7월 28일(수) 어디로 가느냐?(2:2)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2: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어디로 가느냐(2절)
♦ 성구 :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對答)하되 예루살렘을 척량(尺量)하여 그 장광(長廣)을 보고자 하노라.


“어디로 가느냐?(Where are you going?)”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나는 본향(本鄕)을(파트리스, patris. πατρίς. The place of one's father or ancestors. fatherland, hometown, native city, native country)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본향’이란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마지막 종착역과 같습니다.

스가랴 2장은 선지자 스가랴가 본 세 번째 환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 환상은 화석류나무(상록수) 사이에 선 사람(1:8∼17)

두 번째 환상은 네 뿔과 네 대장장이(1:18∼21)

세 번째 환상은 측량줄을 잡은 사람(2:1∼13)

2장의 내용을 세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1∼5, 측량줄 환상

2:6∼9, 북방 땅에 대한 심판의 말씀

2:10∼13, 회복될 예루살렘

두 번째 환상은 대적들에 대한 파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환상에서는 예루살렘의 번영과 성장을 말씀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49,897명이었습니다.

측량줄을 잡았다는 것은 무너진 성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측량하는 것을 말합니다.

솔로몬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목격했던 노인들의 눈에 다시 세워지는 스룹바벨 성전은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측량줄을 잡은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불 성곽으로 세워주실 것이라고 합니다(5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 성곽이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구름 기둥은 주간에 보호하는 기둥인 것처럼 불기둥은 야간에 보호하는 기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 성곽은 재건하는 성전이 초라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때는 사람이 쌓은 높고 견고한 성보다 더 강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2:11∼13)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이여!

코로나 바이러스가 돌연변이 형태로 또다시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불 성곽(a wall of fire)”이 되신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주의 백성들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오늘도 담대하게 세상에 나가 맡겨진 본분 잘 감당하시고 승리하는 십자가 군병으로 돌아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스가랴 2: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아멘

스가랴 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예루살렘 성을 회복하기 위한 먹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먹줄이 아니라 척량줄을 사용합니다(1절).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 줄을 그 에 잡았기로."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

1st.  화석류 나무 사이에 붉은 말 탄 사람(1:7-17)
- 성전과 성읍을 회복하실 것이다

2nd. 네 뿔과 네 대장장이(1:18-21)
- 유다를 괴롭혔던 주위 강대국을 꺾을 것이다

척량줄을 잡은 사람의 환상(2:1~13)

스가랴 2:2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 

먹줄과 척량줄을 비교하면 먹줄은 작은 것을 지을 때 사용합니다.
척량줄은 더 큰 것을 지을 때 사용합니다(4-5절).

스가랴 2:4-5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

1. 회복될 것이다 :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2. 확장될 것이다 :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성곽이 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3. 영광이 될 것이다 : 불 성곽이 되며 영광이 되리라

이제는 나는 그 성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11절a)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12-13절,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나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혈기 있는 자들아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

새번역 성경에서 "
육체를 지닌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잠잠하여라."

열왕기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

영의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소서 



7월 29일(목) 스가랴 3:1-10, 예표의 사람(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새번역 성경)  여호수아 대제사장은 들어라. 여기 여호수아 앞에 앉아 있는 여호수아의 동료들도 함께 잘 들어라. 너희는 모두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제 새싹이라고 부르는 나의 종을 보내겠다.



♦ 7월 29(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3: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표의 사람(8절)
♦ 성구 : 대제사장(大祭司長)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同僚)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豫表)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스가랴 3장은 선지자 스가랴가 본 네 번째 환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전의 환상들은 예루살렘 성의 회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환상은 새로운 시대에 나타날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고 그 오른편에 는 사탄이 대적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는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을 참소하는 사탄은 그의 오른편에 서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을 책망하며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합니다.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것은 “죄과를 제하고 아름다운 옷 즉 사죄의 은총으로 덧입혀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표의 사람”은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을 말합니다.
“예표(모페트)”는 “예언적인 의의” 혹은 “예언적 가능성을 지닌 징조”를 말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진정한 구원자인 메시아를 예표 합니다.
진정한 구원자를 “순(싹)”과 “돌”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순(싹)”은 예레미야서를 인용한 것입니다(예레미야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가지”와 “싹”은 히브리어로 “체마흐”라고 하는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돌”은 또 다른 메시야의 상징을 말합니다.
메시야는 그를 대적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었고, 버림받은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피난처가 되셨고, 교회의 모퉁이돌이 되셨으며(머릿돌) 기초석이 되셨습니다.

돌에는 “일곱 눈”이 있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무한하고 전지전능하신 메시아의 사역은 이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제거하겠다는 약속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러한 메시야의 사역으로 인해 평화와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늘도 순(싹)과 돌이 되신 메시야의 은총을 힘입어 험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https://www.youtube.com/watch?v=xT1HDblQkp0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9일(목) 스가랴 3:1-10, 예표의 사람(3:8)


스가랴 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아멘

* 예표의 사람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는 사람)


스가랴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베드로전서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요한계시록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스가랴 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스가랴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스가랴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스가랴 3: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오늘의 기도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하소서! 


7월 30일(금) 스가랴 4:1-14, 두 감람나무(4:3)


 ♦ 7월 30(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4: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두 감람나무(3절)
♦ 성구 : 그 등대(燈臺) 곁에 두 감람(橄欖)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周鉢) 우편(右便)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左便)에 있나이다.

스가랴 4장은 다섯 번째 환상으로 “순금 등대(a solid gold lampstand)”와 “두 감람나무(two olive trees)”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째 환상은 "화석류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탄 사람"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부터 자유롭게 할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여주셨습니다(1:7-17).

둘째 환상은 "네 뿔과 네 대장장이"를 보여주신 것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주위 강대국들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합니다(1:18-21).

셋째 환상은 "척량줄을 잡은 사람"이 나타나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것이라고 합니다(2:1-13).

넷째 환상은 "예표의 사람"을 세우실 것이라고 합니다(3:1-10). 예표의 사람은 좁은 의미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구약의 모든 제사장들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말합니다.

스가랴 4장은 다섯째 환상으로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를 말합니다(4:1-14).

순금은 변하지 않는 금속으로 하늘의 것을 상징합니다.
등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두 감람나무는 기름부음을 받은 두 사람 즉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레위기 21장, 사무엘상 10장). 그러나 마지막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스룹바벨이 재건하는 성전은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건축할 수 없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머릿돌을 놓을 때에 모든 백성들은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외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전의 지대(기초)를 놓았으므로 그 손이 마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스룹바벨이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그 일을 시작하게 하셨고 그 일을 마칠 수 있도록 돕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에 의해서 재건된 성전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지구촌 위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서 시작한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하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11. 24~1677. 2. 21)

믿음이란 무엇인가?
"사과씨 하나에서 과수원을 바라보는 것이다!"

스가랴 4: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아멘

스가랴서에저 주목할 내용은 여덟 개의 환상과 열 개의 메시야 예언입니다.
메시야 예언에 대한 말씀은 수요성서학당 시간에 소개합니다.
새벽 시간에는 여덟개의 환상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첫째 환상은 "화석류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탄 사람"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부터 자유롭게 할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여주셨습니다(1:7-17).

둘째 환상은 "네 뿔과 네 대장장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주위 강대국들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합니다(1:18-21).

셋째 환상은 "척량줄을 잡은 사람"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것이라고 합니다(2:1-13).

넷째 환상은 "예표의 사람"
예표의 사람은 좁은 의미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구약의 모든 제사장들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말합니다(3:1-10).

다섯째 환상은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
순금 등대는 재건되는 성전으로 오늘날의 교회를 말하며, 두 감람나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포로 귀환 시 총독으로 임명을 받은 스룹바벨을 말합니다(4:1-14).


성령(하나님의 영)이란?
힘을 의미합니다.
힘을 영어로 표현할 때 두 가자 단어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파워(Power)
둘째는 포스(Force)
파워는 포스라는 힘 보다 더 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4:2-3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아멘

스가랴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스가랴 4: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스가랴 4:11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스가랴 4:14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현대인의 성경)
이것들은 기름 부음을 받아 온 세상의 주를 섬기는 두 사람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기도 

주 성령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소서!

성령은 힘을 말합니다.
어떤 힘을 말합니까?

스룹바벨이 성전을 지을 수 있는 힘이 없다고 생각할 때 성전을 지을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복음을 전할 힘이 없을 때 복음을 전할 힘을 제공합니다.
내가 믿는 주님을 전하려 할 때 힘이 없다고 약해진 나에게 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힘을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간구(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령이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의인과 기도, 2가지 선제조건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고, 죄를 말끔히 씻겨주시는 그리스도를 삶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칭의를 받아 누구든지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죄인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아 의인이 되는 것이다.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만으로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려면 기도라는 도구와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하지만 기도는 쉽지 않다. 초보신앙인에게도 어렵거니와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 온 신자들조차 기도할 때면 어려움에 직면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당신이 열정적인 마음으로 그를 향해 손 뻗길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크리스천은 누구라도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며 배워야 한다.

운동을 꾸준하게 하면 신체 근육이 붙듯이 기도 근육을 늘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도운동법이 필요하다. 아래에는 해외기독교블로그 One Thing Alone에서 성경말씀에 근거한 몇 가지 효율적인 기도운동법을 나열한 것이다.

1. 기도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자
스스로가 아직까지 기독교의 근본적인 기도 훈련에 익숙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자. 누가복음 11장 1절에 나타난 제자의 요청처럼 "주여, 제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라고 고백해보자. 이는 겸손하면서도 용기있는 기도다. 우리에게 좋은 소식은 하나님은 항상 이런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이전에는 우리 스슬가 헤아리지도 못했던 풍성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2. 친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 말을 건네보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진실되고 정직한 모습으로 하라고 가르치셨다. 다시 말해서, 본연의 자기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라고 하셨다. 친구에게 전한 좋은 소식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보자. 또, 나쁜 소식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도와달라고 기도해보자. 뿐만 아니라 분노, 좌절, 혹은 간혹 느끼는 의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아뢰보자. 하나님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가 느끼는 솔직한 감정을 숨기기보다는 하나님께 그것들을 다 고백해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일, 나쁜 일 모두를 감당하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시다.

3. 기도 일기를 작성해보자
주의가 산만한 사람이라면 오늘 해야 할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도문을 적어보는 게 도움이 된다. 처음 시도하는 거라면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라고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기도문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도에 어떻게 응답해주시고 우리를 성장시켜주셨는지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려보자.

4. 성경인물들의 기도를 따라해보자
자기 기도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경 인물들의 기도를 공부하고 이를 자신의 신앙에 적용시키면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바울의 기도, 시편 기자 다윗의 기도 등을 통해 기도에 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의 기도는 신선할 정도로 솔직하기도 하며, 깊고 풍부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성경을 읽으면서 당신의 마음을 울리는 기도에 밑줄을 그어보자. 이를 기도 일기에 적어두고 자신의 삶에도 적용시켜보자. 진리의 기도를 평생동안 쉬지 않으면 우리의 사고 패턴이 바뀔 수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 신뢰할 수 있는 기도 파트너를 찾아보자
타인과 함께 기도하면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기도할 때 반드시 그 자리에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함께 하는 기도는 힘이 있다. 기도 파트너가 없다면 이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보자. 우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주저하지 말고 좋은 기도 파트너를 달라고 기도해보자.

6. 평생 동안 배우는 학습자가 되자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영적 자만심을 경계하면서 날마다 하나님께 더 많이 가르쳐달라고 부탁하고, 열심히 배우는 사람이 되자. 기도에 관한 서적을 읽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기도문도 읽어보자. 매일 더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유지시키자. 우리의 내적 기도를 발전시켜 나가면 우리 삶과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작은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게 될 것이다.


연애는 크리스천이 맺는 여러가지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측면을 차지한다. 그러나 달콤한 연애를 즐기던 남녀가 결혼해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갖게 되고, 치열한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하면 여러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크리스천 부부가 신앙 안에서 결혼 생활을 헤쳐나간다면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성경 속 가르침을 통해 서로의 추한 모습을 받아들이는 법과 서로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을 축하해주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크리스천 부부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진실된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결혼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전진하는 두 사람의 사랑을 기념한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결혼을 행복하게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연결고리다.

미국의 작가이자 복음주의 목사인 게리 토마스(Gary Thomas)는 기독교 결혼의 특징에 관해 많은 부부들에게 강연해왔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신성한 결혼'(Sacred Marriage)에서 "우리는 완벽한 행복, 갈등 없는 결혼생활, 서로에 대한 우상숭배적 집착 등 하나님이 결코 우리에게 하라고 허락하신 적 없는 것들을 결혼에게 요구하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크리스천 부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서로의 모든 행복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 모습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서로와 함께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배우자가 자신을 완성시켜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영적으로 우상숭배"라며 "배우자가 자기에게 '하나님'이 되기를 기대한다면 결혼생활은 매일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에게 결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해외 연애사이트 'Yourtango'가 성경구절을 통해 제시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를 알아보자.

1.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맥락 안에서 공유된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다.

마가복음 10장 8절은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크리스천은 결혼을 통해 교회 안에서 단일한 독립체가 된다. 이것은 창조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드셨다. 둘은 함께 지내기 전까지 불완전한 존재였다. 단일한 정체성을 통해 크리스천 부부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헌신을 드러낼 수 있다.

2. 두 사람의 가치관이 일치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3장 8절에는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종교적 결혼에는 여러 층위가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부부는 자신들의 공유된 믿음(가치관)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라는 큰 계명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게끔,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과 믿음을 나누라고 우리에게 파트너를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애로운 마음을 타인에게 열어주고, 믿음의 길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재합류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부부는 가장 책임이 큰 동반자다.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가 믿음 안에 머물도록 격려해야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큰 목적을 서로가 달성하도록 도와야 한다.

3. 부부는 서로를 가지고 있다.

전도서 4장 9절 - 10절에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겁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혼한 크리스천은 교회의 지원 속에서 유대감을 형성시킨다.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통해 좋은 시간이든 나쁜 시간이든 서로를 응원한다.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함께 있으면 더 행복하다. 그들은 서약을 통해 서로를 응원하겠다고 약속한 사이다. 그들은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자신들을 인도해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7월 31일(토) 스가랴 5:1-11, 날아가는 두루마리(2절)



스가랴 5: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아멘 


스가랴의 환상

1.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사람(이스라엘의 회복)
2. 네 뿔과 대장장이(주위 강대국의 심판)
3. 척량줄을 잡은 사람(성의 재건)  
4. 대제사장 여호수아(제사장직의 확립)
5. 금등잔대 두 감람나무(정치와 종교의 조화)
6. 날아가는 두루마리(온 땅에 내릴 저주)
도둑질(물건, 사람, 하나님의 것)
거짓 맹세하는 자(망령되이 일컫는 것)
7. 에바 가운데 앉은 여인(이방 여신)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의 만연한 이방신을 바벨론으로 옮긴다
* 에바(뒤주)(22리터)(곡물을 담는 그릇)


6. 날아가는 두루마리(온 땅에 내릴 저주)
스가랴 5:1-2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열왕기상 6:3

성전의 성소 앞 주랑의 길이는 성전의 너비와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너비는 성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

솔로몬 성전 현관의 크기 


6. 날아가는 두루마리(온 땅에 내릴 저주)
스가랴 5: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6. 날아가는 두루마리(온 땅에 내릴 저주)
스가랴 5:4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7. 에바 가운데 앉은 여인(이방 여신)
스가랴 5:6-7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스가랴 5:8-9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왔는데 학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고 그 날개에 바람이 있더라
그들이 그 에바를 천지 사이에 들었기로.


스가랴 5:10-11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를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매.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오늘의 기도

예수와 함께 하는 삶을 위하여!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만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을 때도 죽을 때도 오직 예수를 찾아야 한다.


(예화)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이때 어거스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원합니다."

8월 2일(월) 스가랴 6:1-15, 하늘의 네 바람(5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6: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늘의 네 바람(5절)
♦ 성구 : 내게 말하는 천사(天使)가 대답(對答)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對答)하되 내 주(主)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늘의 네 바람(the four spirits of heaven)”

스가랴서에는 여덟 개의 환상이 소개됩니다.
6장에 소개되는 “내 병거(four chariots)”의 환상은 마지막 환상입니다.

네 병거는 전쟁과 하나님의 뜻을 신속히 이루기 위하여 예비 된 것입니다.

네 병거들은 “붉은 말(red horses)” “검은 말(black)” “흰 말(white)” “어룽지고 건장한 말(dappled)”들이 병거를 메었다고 합니다.

병거를 끄는 말들의 색깔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 또는 방법을 상징합니다.

“붉은색”은 “전쟁, 피 흘림, 진노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검은색”은 “곤고함, 죽음, 슬픔”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승리, 번영”을 상징합니다.
“어룽진 것”은 “기근, 질병, 혼합 상태”를 상징합니다.

말들이 건장하다는 것은 심판이 철저하다는 뜻입니다.

병거들은 성전 주변에 주둔해 있으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명령을 받은 후에 사방으로 나아가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심판을 이행할 것입니다.

스가랴 1장의 첫 환상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께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라는 호소와 탄원으로 시작했습니다(1:2).

그런데 마지막 환상에서는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마음(영)을 시원케 하였다”고 선포하므로(6:8),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였던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는 악인들을 심판하고 의인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세력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손이 높이 들릴 때 그 세력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불이익 때문에 죄의 유혹이나 악의 세력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상이 끝나고 스가랴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요시아의 집에 가서 바벨론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고 그것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면류관”은 복수형으로 총독 스룹바벨이 아니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씌워졌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씌울 면류관이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 단순히 인간 제사장인 개인의 영광을 위한 면류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예표로 받을 면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다른 제사장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예표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리스도의 왕권과 대제사장직을 동시에 갖는 인물이었습니다.

면류관이 총독 스룹바벨이 아니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씌워진 것은 참된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라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메시야의 나라는 정치적으로 회복된 혈통적인 나라가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가 계승해야 할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면류관을 쓰는 사람도 정치적인 지도자 스룹바벨이 아니라 영적 지도자인 여호수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심으로써 메시아의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참된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의해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며 유일한 통치자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섬기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세워져 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거룩한 교회로 세워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시온 성과 같은 교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늘의 네 바람 / 스가랴 6: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아멘

스가랴서에는 여덟개의 환상이 소개됩니다.

첫째,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붉은 말을 탄 자(1:7~17)
-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치고 실망한 이스라엘에게 용기와 소망을 줌

둘째,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1:18~21)
- 때가 되면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치실 것임

셋째, 측량줄을 잡은 사람(2:1~13)
- 예루살렘이 완전히 재건됨

넷째, 여호와 앞에 선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를 참소하는 사탄(3:1~10) 
- 택한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됨

다섯째,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4:1~14)
- 낙심한 스룹바벨에게 용기를 줌

여섯째, 날아가는 두루마리(5:1~4)
- 율법을 깨뜨린 자들은 그 율법에 의해 징계 받음

일곱째, 에바 안에 앉아 있는 여인(5:5~11)
- 모든 죄악이 제거됨

여덟째, 두 놋(구리) 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6:1~8)
- 이스라엘의 대적을 정복하시는 하나님

네 병거의 환상은 마지막 환상입니다.
네 병거는 전쟁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신속히 이루기 위하여 예비 된 것입니다.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
둘째 병거는 검은 말이,
셋째 병거는 흰 말들,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각 병거를 메었다고 합니다.

각 병거를 끄는 말들의 네 빛깔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 또는 방법을 상징합니다.
붉은색은 전쟁과 피흘림 또는 진노의 심판을 상징하며,
검은색은 곤고함과 죽음과 슬픔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승리와 번영을 의미하며,
어룽진 것은 기근과 질병의 혼합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이 건장하다는 것은 심판이 철저하다는 뜻입니다.



이 병거들은 성전 주변에 주둔해 있으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명령을 받은 후에 사방으로 나아가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심판을 이행합니다.

한국교회정론(대표 소기천 교수)이 30일 오전 개최한 제5차 포럼에서 장충국 박사(프린스턴대학교 생화학 Ph.D, 노스이스턴 바이블 칼리지, 콜롬비아 신학교 수료)가 ‘미국장로교(PCUSA)와 프린스톤 신학교의 동성애 결정과 교단분열상’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장 박사는 “최근 유럽연합(EU)은 동성애 반대 입법을 낸 헝가리를 향해 비판성명을 낸 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이에 따른 믿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며 “하나님은 동성애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셨고, 로마서 1장 26절에선 동성애 등은 사형에 처할 죄로 포함시켰다”고 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결혼을 통해 결합된다는 사실은 일반 사람들도 알고 법으로 지키는데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죄가 아니라고 한다”며 “미국 개신교 인구는 전체 중 30% 가량이다.

전체에서 약 15%를 차지해 미국 개신교단에서 가장 큰 교단인 침례교는 동성애를 반대한다.
두 번째로 큰 미국연합감리교(UMC)에서의 입법총회는 동성애를 곧 찬성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3·4번째로 큰 루터란교회·미국장로교회(PCUSA) 모두는 동성애를 지지한 상태”라고 했다.

“미국이 독립하던 해인 1776년 직후 창설된 PCUSA에는 미국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인 NCC가 속해 있다.
해당 교단이 독일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1920년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분립했다”며 “이에 교단은 2010년도에 이르러 찬성 373명, 반대 323명으로 동성애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동성애자도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라고 했다.

장충국 박사는 “이듬해 노회에서 공식 비준된 뒤 2011년 교단에선 게시 윅스라는 첫 레즈비언 목사가 탄생했다.
그러나 PCUSA에서 분립된 PCA, RCA 등은 오직 동성애는 죄라는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동성애자 목사 안수를 현재도 반대하고 있다”며 “동성애를 인정한 2010년 당시 PCUSA는 1만 2천개 교회, 200만 성도가 속했지만, 지난해 조사 결과 9000개 교회, 120만 성도만 남아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교회 4곳 중 1곳, 성도 약 40% 정도가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이라고 했다.

장 박사는 “이 통계는 동성애 지지 선언 이후 PCUSA 교단 소속 교인 대부분이 다른 교회로 이적하거나 시험에 들어 신앙에서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교단의 동성애 찬동 선언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 총장이었던 토마스 길레스피 교수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50표 차이로 교단은 동성애자 목사 안수를 결의했고 이에 반대한 교회들은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캘리포니아주 소재 PCUSA 소속으로 동성애를 반대했던 딘 베어드 목사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성애에 반대한 교회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했다. 교단은 교회 건물을 닫고, 은행계좌를 닫았다. 하지만 목사와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 겪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고 밝혔다”며 “PCUSA는 은행에서 저금리 대출을 알선해 주는 방식으로 교회당을 교단 소속으로 귀속시켜 교단 중심의 교회 운영을 하고 있다. 때문에 PCUSA 소속 교회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교단 입장에 따라 동성애를 찬성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의 모습”이라고 했다.

특히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처럼 교회의 배도 이후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는데 현재 전 세계적으로 배도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이 자유주의신학과 동성애를 수용한 결과”라며 “이들은 요한계시록에서처럼 큰 음녀의 교회가 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까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이처럼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했다.

장 박사는 각 교단 소속 한인 목회자들과 가진 인터뷰 녹취를 들려주며 “현재 동성애 지지 움직임을 보이는 연합감리교단(UMC) 소속 교회들도 동성애 문제로 분열 직전에 있다고 한다. 동성애 지지에 반대하는 교회들의 교단 탈퇴가 이어질 것이고, 한인교회들도 동조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하지만 현재 미국 침례교단은 말씀에 기초해 동성애, 낙태 등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개교회 중심의 자율적 분위기로 동성애를 지지하는 교회들은 알아서 나가는 분위기”라고 했다.

“동성애자들은 미워하면 안 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동성애자 같은 죄인들이다. 지금은 은혜의 시대로 예수님은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유황이 타오르는 지옥 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길 원하신다”며 “그렇기에 동성애는 분명히 죄라고 말해야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회개해 예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게 동성애자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다.

한국교회정론 대표 소기천 교수(장신대)는 “PCUSA 교단의 동성애 지지 선언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 총장이었던 길레스피 교수가 동성애를 반대했다. 주요 지도자들의 반대 입장에도 교단의 동성애 지지 선언을 막지 못 했다. 현재 총장인 크레이그 반스 교수는 동성애 찬성 입장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러자 장충국 박사는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 침례교단은 개교회 중심이다. 하지만 PCUSA는 개교회 예배당을 교단에 귀속시키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어, 동성애를 반대하면 교회가 쫓겨나는 구조”라고 했다.

8월 3일(화) 스가랴 7:1-14, 참된 금식(5절)


 ♦ 8월 3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7: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참된 금식(5절)
♦ 성구 : 온 땅의 백성(百姓)과 제사장(祭司長)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七十年) 동안 오월(五月)과 칠월(七月)에 금식(禁食)하고 애통(哀痛)하였거니와 그 금식(禁食)이 나를 위(爲)하여, 나를 위(爲)하여 한 것이냐.

스가랴서 7장은 “금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참된 금식(True Fasting)”이란 무엇일까요?

다리오 왕 사년 구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였고, 그 때에 벧엘 사람들이 사람을 보내어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며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과거에 행한 대로 오월에 울며 근신하여야 하느냐고 묻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지만 그 금식이 진정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물으시면서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너희를 위하여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공의의 재판과 인애와 긍휼로 과부와 고아와 귀화한 자들을 돌보고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모의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여 듣지 않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큰 진노를 촉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도 듣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듣지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을 열방에 흩으시고 그 아름다웠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왕래하는 자가 없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예루살렘 성전의 함락과 유다 총독의 암살에 대한 애도를 위한 금식을 계속해서 지켜야 하느냐는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금식 뿐 아니라 먹고 마시 것조차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책망하시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적 형식과 자신의 경험과 습관에 얽매여 철저하게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종교 생활 버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고전 10:3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금식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으로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해치지 말라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외면하여 강퍅하고 불순종하므로 여호와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야고보서 1:27).

위기가 닥쳐와서 하나님을 찾고 금식하려고 달려갈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와 동행하며 경건과 순종의 길을 선택하므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스가랴 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아멘

스가랴 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금식 기간(禁食期間, the Fast)

​개역개정판은 ‘금식하는 절기’(행 27:9). 대속죄일을 가리킨다.
유대 종교력으로 7월 10일인데, 이스라엘 민족과 지도자와 백성과 제사장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회개하는 날이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오직 이날에만 희생 짐승의속죄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출입할 수 있었다(레 23:27; 25:9). 

​율법에 의하면 공식 금식 기간은 일 년에 단 한 번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칠 일(삼상 31:13), 삼 일(에 4:16), 사십 일(출 34:28), 하루 낮이나 밤 동안(삼하 3:35) 자신이 기간을 정하고 금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공식적으로 일 년에 네 차례 금식일이 선포되었고, 훗날 신약 시대에 와서 바리새인들은 그것도 부족하여 주 2회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 기간으로 정하고 금식하였다(눅 18:12).

네 차례 금식일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던 지난 역사를 되새기며 슬픔 가운데서 지켰던 공식적인 네 차례의 금식일을 가리킨다(슥 8:19).

​1. 사월 금식 -
남유다 시드기야왕 11년(B.C. 586년) 4월 9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된 것을 회상하는 날이다(왕하 25:3-4; 렘 39:2; 52:6-7).

​2. 오월 금식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19년(B.C. 586년) 5월 7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탄 것을 회상하는 날이다(왕하 25:8; 렘 52:12-15).

​3. 칠월 금식 -
시드기야 왕 11년(B.C. 586년) 7월 유다 총독 그달랴와 많은 백성이 학살당한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왕하 25:25; 렘 41:1-3).

​4. 시월 금식 -
시드기야 재위 9년(B.C. 588-587년) 10월 10일에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시작한 것을 회상하는 날이다(왕하 25:1-2; 렘 52:4).

이레에 두 번하는 금식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연 4회 정기 금식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하여 바리새인들은 주 2회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하였다(눅 18:12).
이는 모세가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던 날이 일주일 중 다섯 번째 날(목요일)이고,
시내 산에서 하산한 날이 일주일 중 둘째 날(월요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겨난 전통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금식은 하되 사람에게 보이는 형식적 금식, 자기를 공로화하는 금식을 삼가라고 하셨다(마 6:16-18).


8월 3일(화) 스가랴 7:1-14, 참된 금식(5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7: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참된 금식(5절)
♦ 성구 : 온 땅의 백성(百姓)과 제사장(祭司長)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七十年) 동안 오월(五月)과 칠월(七月)에 금식(禁食)하고 애통(哀痛)하였거니와 그 금식(禁食)이 나를 위(爲)하여, 나를 위(爲)하여 한 것이냐.

스가랴서 7장은 “금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참된 금식(True Fasting)”이란 무엇일까요?

다리오 왕 사년 구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였고, 그 때에 벧엘 사람들이 사람을 보내어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며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과거에 행한 대로 오월에 울며 근신하여야 하느냐고 묻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지만 그 금식이 진정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물으시면서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너희를 위하여 먹고 마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공의의 재판과 인애와 긍휼로 과부와 고아와 귀화한 자들을 돌보고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모의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여 듣지 않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여호와의 큰 진노를 촉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도 듣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듣지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을 열방에 흩으시고 그 아름다웠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왕래하는 자가 없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예루살렘 성전의 함락과 유다 총독의 암살에 대한 애도를 위한 금식을 계속해서 지켜야 하느냐는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금식 뿐 아니라 먹고 마시 것조차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책망하시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적 형식과 자신의 경험과 습관에 얽매여 철저하게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종교 생활 버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고전 10:3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금식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으로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해치지 말라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외면하여 강퍅하고 불순종하므로 여호와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이라고 합니다(야고보서 1:27).

위기가 닥쳐와서 하나님을 찾고 금식하려고 달려갈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와 동행하며 경건과 순종의 길을 선택하므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4일(수) 스가랴 8:1-23, 진리의 성읍(3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8: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진리의 성읍(3절)
♦ 성구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居)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眞理)의 성읍(城邑)이라 일컫겠고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산(山)은 성산(聖山)이라 일컫게 되리라.  

“진리의 성읍(the City of Truth)”

내가 거주하는 마을은 진리의 성읍일까? 아니면 거짓의 성읍일까?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나는 진리에 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거짓의 삶을 진리로 위장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선지자 “스가랴”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억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기억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기대하며 소망합니다.

스가랴서는 모두 14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전반부는 여덟 가지 환상을 말씀합니다(1∼6장).
후반부는 몇 가지 주제를 갖고 말씀합니다(7∼14장).
특별히 7장과 8장은 “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7장과 8장의 역사적 배경은 바사(페르시아) 다리오 왕 제4년 입니다(BC 518년).

BC 520∼516년까지 4년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주어진 때는 성전 재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라고 하겠습니다.

7장 1∼17절은 포로에서 돌아온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주시는 회복의 약속과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내용입니다.  

8장 18∼23절은 7장에서 질문했던 금식에 대한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죄를 범함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매우 중요한 두 동사 “돌아오다”와 “거하다”입니다.

“돌아오다”는 “회개하다”와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미 먼저 돌아와 계셨다는 것입니다.

“거하다(사칸)”는 “임시적으로 체류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랫동안 거주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살고 있는 도시를 “진리의 성읍”으로, 여호와의 산(시온 산)은 “성산” 즉 “거룩한 산”이라고 부르겠다고 합니다.

“진리와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속적 가치관이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여 구별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마을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좋은 마을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삶을 회복하면 그 마을은 반드시 좋은 마을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마을을 먼저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한 어디에도 좋은 마을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고를 바꿀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변하므로 내 주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작은 불꽃으로 아름답게 타 오르기를 소망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생명 진리 은혜 되신 하나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8월 5일(목) 스가랴 9:1-17, 구원을 베풀 왕(9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9: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구원을 베풀 왕(9절)
♦ 성구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王)이 네게 임(臨)하나니 그는 공의(公義)로우며 구원(救援)을 베풀며 겸손(謙遜)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와 국가를 기대했습니다.

영국의 “토마스 모어(T More)”의 “유토피아(Utopia)”와 같은 “이상향(理想鄕)”
그런데 “유토피아”란 단어는 헬라어의 “없다(우)”와 “장소(토파스)”가 결합된 용어로 이 세상에는 그런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의 “이상적인 국가(The Ideal Republic)”는 “선(善)을 이데아화 할 수 있는 철인(哲人)이 등장해야만 가능하다”고 하기 때문에 현실 정치 세계에서는 꿈과 같은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는 “나귀를 타고 오실 겸손한 왕”은 반드시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분은 곧 "구원을 베풀 왕" 이라고 합니다.

스가랴서 9장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현실은 고달프고 어려움이 많지만  장차 메시아(구원을 베풀 왕)의 통치가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000년 전 메시아로 예언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가증한 죄악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스가랴서의 예언처럼 구원을 베풀 왕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예언이 성취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과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하던 “이상적인 국가”에서 살아볼 수 없었던 절망적인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으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힘들고 지겨운 세상 환경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날마다 꿈을 갖게 하는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작은 꿈이 실현되는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주님과 더불어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말씀하면 상황이나 조건과는 상관없이 반드시 그리고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현실이 갇혀 있는 것 같고 물 없는 구덩이 같을지라도 눈을 들어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믿음으로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피로 맺은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9:11∼12).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 찬양 /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아멘  


스가랴 9장

1-8절 : 이웃 나라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하드락, 다메섹, 하맛, 두로, 시돈,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

9-17절 : 구원을 베풀 왕
공의, 구원, 겸손, 화평, 언약의 피


스가랴 9:4

주께서 그를 쫓아 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찌라.

2절, 넓은 지혜
3절, 은을 티끌 처럼, 정금을 진흙같이 사용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공의 - 인간이 죄로 파괴한 것을 회복하는 것(공의, 정의)

구원 - 값없는 은총(베푸신 은혜)  

겸손 - 맡겨진 일을 두렵고 떨림으로 완수하는 것(성실, 충성)

화평 - 전쟁을 멈추게 하는 것

언약의 피 -  유다 지파에서 홀이 등장 할 것


창세기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스가랴 9:13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스가랴 9: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오늘의 기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말씀대로 뜻대로 순종하므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8월 6일(금) 스가랴 10:1-12, 모퉁이 돌(4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10: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모퉁이 돌(4절)
♦ 성구 :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權勢) 잡은 자(者)가 다 일제(一齊)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모퉁이 돌(the cornerstone)”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주로 “반석”이라고 하였고 때로는 “보배로운 산 돌”(벧전 2:4), "뜨인 돌"(단 2:45), "한 돌" "시험한 돌" "기초 돌"(사 28"16), "무거운 돌"(슥 12:3) 이라고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표현은 구원을 베푸시는 은총도 다양하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머릿돌이란 건축자들이 버린 것을 하나님이 건물의 주초가 되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귀를 타시고 겸손한 왕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 이어 10장은 유다 지파를 통해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말씀합니다.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는 모두 중추적이고 큰 힘을 가진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즉 미래에 오실 메시아를 뜻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에서 나오셨습니다(창 49:10).

유다 사람들은 용사와 같이 원수를 밟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힘은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힘을 주실 때 원수를 이길 수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얻는 힘입니다(12절).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오늘도 질병과 사건과 사고와 풍파가 심한 세상에서 안전하고 강건하게 삶을 유지하며 지켜가는 거룩한 주의 자녀들로 굳게 자리를 잡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스가랴 10:4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아멘  

스가랴 9장 : 왕으로 오실 메시아(9절)
- 공의, 겸손(나귀 새끼), 평화 

스가랴 10장 : 메시아의 사역(4절)
- 모퉁이돌, 말뚝이,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

스가랴 11장 : 메시아의 팔리심(13절)
- 은 30


스가랴 10: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비구름)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자라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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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말코쉬, malqôwsh) מַלקוֹשׁ
- 늦은 비(추수 전에 내리는 비) 4-5월

구하라(샤알, shâʼal) שָׁאַל  / 문의하다 

* 하나님이 주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기도하게 하셨고 일을 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내가 기도한 것을 자랑할 이유가 없다.

스가랴 10:2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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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빔 : 가정 수호신(점 치는 우상), 상속권                                    
목자(라아, râʽâh) רָעָה    

스가랴 10: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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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 수염소들 : 거짓 지도자들

스가랴 10:4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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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돌(핀나, pinnâh) פִּנָּה 

메시아(모퉁이 돌, 말뚝이,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라(7b)
- 맴돌다, 기뻐 날뛰다(길,  gîyl) גִּיל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라(12a)
- 강하다(가바르, gâbar) גָּבַר


(여호와를 의지하여) 왕래하라(12b)
- 동행하다(할라크, hâlak) הָלַךְ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오늘의 기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


8월 7일(토) 스가랴 11:1-17, 못된 목자(17절)



스가랴 11:17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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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목자(로이 하엘릴) : 영적 지각이 어둡고
                                      영력이 쇠하여진 목자

the worthless shepherd : 무가치한 목자 


스가랴 11:1-3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잣나무여 곡할찌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목자의 곡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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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건축에 사용된 나무가 무너졌다.
유대나라가 로마에 의해서 무너질 것을 예언(델리취) 


스가랴 11: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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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힐 양 떼를 먹이라  :
하나님을 떠나버린 내 양들을 깨우쳐라

스가랴 11:7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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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노암. noʽam) נֹעַם  : 즐거움, 총명. (은총)
연락(하발. châbal) חָבַל : 단단히 감다, 맹세하다. (연합) 


스가랴 11: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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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노암. noʽam) נֹעַם :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


스가랴 11: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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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하발. châbal) חָבַל  :
유대인들끼리 서로 연합하는 것


스가랴 11:15-16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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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 로마 정권(딜리취), 교회 일군(칼빈)


스가랴 11:17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베드로전서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오늘의 기도

신령한 지혜를 사모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회복하게 하소서!

8월 9일(월) 스가랴 12:1-14,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10절)


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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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의 임재(회개)


스가랴 9-14장
메시아 오심으로 인한 구원과 통치

9-11장 / 초림의 메시아

12-14장 / 재림의 메시아
  12:1-9 /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모습 
  12:10-14 / 메시아의 고난 

스가랴 12: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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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하나님은 누구
        - 창조주(하늘, 땅, 사람)

둘째, 나는 누구 / 호모 루아흐(하나님의 숨결로 만들어진 존재)
- 영적 존재, 죄인


스가랴 12:2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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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취케 하는 잔 : 하나님의 진노(취하게 하는 음료) 이사야 41:17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스가랴 12: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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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 : 열국의 민족
무거운 돌 : 예수 그리스도

스가랴 12:4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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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내릴 재앙 





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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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이 임할 때 죄를 깨닫고 회개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 

깨끗한 마음과 견고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 스가랴 12:11 /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 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므깃도 골짜기의 애통 :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선한 왕 요시야가(16대) 애급 왕 바로 느고가 북진 할 때 그를 막으려고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애통

하다드 림몬 : 바알이 신이다
하다느 / 바알의 이름
림몬 / 신

이방인들은 추수한 후 아무 것도 없는 들판은 곡식의 신이 땅속으로 들어갔다(죽음을 상징)
그러므로 그 들판에서 눈물을 흘려야 내년에 다시 곡식이 돋아날 것이며 풍년을 맞게 될 것이라는 이방 종교 의식의 애통



8월 10일(화) 스가랴 13:1-9,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1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13:1∼9
♦ 묵상을 위한 주제 :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1절)
♦ 성구 : 그 날에 죄(罪)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族屬)과 예루살렘 주민(住民)을 위(爲)하여 열리리라.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a fountain that to cleanse from sin and impurity)”
스가랴 12장에서는 회개의 영이 임할 때(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비로써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스가랴 13장에서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인위적인 방법의 회개는 잠간의 느낌과 감정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悔改)는 인위적인 방법이 아니라 반드시 위로부터 회개하도록 강력하게 이끄는 힘이 작용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이와 같은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 땅의 2/3가 멸절하고 1/3만 남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13:8∼9).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는 남은 자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의 길을 걷고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길이 아니라 좁은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엉뚱한 길에서 방황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남은 자가 되려면 좁은 문으로 방향을 정하고 그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도 좁은 문을 향하여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무장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십자가 군병들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스가랴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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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언제인가? (과거, 현재, 미래)(2절, 4절)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요 74:14, 7:38)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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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과 웅덩이

예레미야 2:2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스가랴 13:8-9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남은 자의 하나님

‘남은 자’ (A remnant)에 대하여 말씀의 뜻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 ‘남은 자 교리’는 어떤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그룹의 사람에게만 한정된 사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도리어 이 ‘남은 자’교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되어지는 교리인 것입니다.

<웨스터 민스트 신학사전>에서 보면 ‘남은 자’ (remnant)는 [원래 (=전체)그룹에서의 한 부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남게 된 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약속하신 그의 후손을 통하여 그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을 보게 됩니다. 그럼으로 성경 전체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믿음으로 남게 된 자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남은 자’라고 말하고 있느냐는 것에 우리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남겨 두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사 1:9) 라고 이사야가 고백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크리스챤들로서 “어떻게 우리는 남은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How may we become a remnant?)

첫째, 여호와께로 돌아옴으로(By returning to the Lord)

하나님은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21절)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날마다 죄와 허물을 회개함으로 그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둘째,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By receiving circumcision of the heart)

사도 바울은 <로마서 2:28~29>에서 ‘육체에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마음에 받는 할례’를 통해 참된 유대인 즉 ‘구원받은 백성’이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 받은 자는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고, 오직 예수를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라고 그는 밝히고 있습니다 (빌. 3:3)

셋째, 하나님께 은혜 받음으로(By receiving the grace of God)

모든 성도는 우리 스스로 남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겨진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직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임을 감사하며, 날마다 그 분께로 나아와 산제사를 드리며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이 시대의 남은 자로 살아가시 길 기대합니다.

 

‘남은 자 교리’는 어떤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그룹의 사람에게만 한정된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원합니다.
도리어 이 ‘남은 자’교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구원’이라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되어지는 교리인 것입니다. 개인이나 혹은 민족의 삶이 비록 어둡고 절망적이라 할찌라도, 베어내고 남은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남은 자로 남겨 두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 감사와 소망이 넘치는 시간되기를 기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사. 1:9) 라는 이사야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 남은 자에게 허락하신 주의 은혜와 믿음의 능력으로 이 어두운의 시대를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먼저, 저는 ‘남은 자’의 개념과 그것과 관련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웨스터 민스트 신학사전>에서 보면 ‘남은 자’ (remnant)는 [원래 (=전제)그룹에서의 한 부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남게 된 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은 자’라는 사상은 사람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다소 다를 수는 있지만 대부분 공통되는 점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둔 자’ (롬. 11:5)가 남은 자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남은 자’의 사상은 곧 ‘구원받은 자’에 대한 교리요 또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라는 큰 그림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이스라엘과 기독교회의 전체역사에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구원과 믿음의 역사에서 성경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출발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 우상을 만들던 아비 집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복의 근원’ 곧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거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셀 수 없이 많게 하셔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서 번창케 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허락하신 것인데, 그냥 말 한마디로 끝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75세에 그를 이끌어 내시고 25년의 기간동안 구체적으로 그를 훈련하셔서 그가 100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으며, 10여년이 흐른 후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번제로 드리라” (창. 22:2)는 명하심을 통해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치루게 하시고 그 시험을 통과한 후에 그를 다시 한번 복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가 곧 성경 대부분에서 보게 되는 약속하신 그의 후손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의 육적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한 구원의 역사가 구약성경이라면, 그의 영적 후손인 우리 그리스도인에 관련한 구원의 역사가 신약성경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 그의 자손 이스라엘민족이 어떻게 살았는지 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창세기> 중반 이후에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서 출발하여 구약성경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대략 2000여년 동안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 유대인들의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시는 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의 믿음을 평가하셨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들의 믿음은 학점으로 표현한다면 ‘F 학점’입니다. 낙제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민족의 믿음 없음과 불순종에 대해 질책하셨듯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결코 살지 못했습니다. ‘결혼한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응당 순결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숭배와 육체적 타락을 끝없이 일삼으며 신랑 되신 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순결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하여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의 자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시고 그 죄에서 회개함으로 그분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심판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선포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의 긴 역사 가운데서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각한 죄를 강하게 책망하시고 엄중히 심판하실 것을 여러 선지자를 통해 집중적으로 선포하신 시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바로 앗시리아에게 북 이스라엘이 멸망 (BC 722년)당하고 대략 130년이 지난 후 남 유다 왕국이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의 하나로 불리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는 사건 (BC 586년)을 뜻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스바냐, 오바댜, 나훔, 하박국 등과 같은 여러 선지자들이 거의 동시대에 하나님의 이런 엄중한 심판을 예언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인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 가질 점은 하나님은 이런 엄중한 심판 가운데서도 불구하고 그들을 완전한 멸망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은혜로 유다 민족 중 얼마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를 영적으로 함축한 것이 바로 ‘남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멸망하는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를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된 후에 70년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남은 자를 통해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감격적인 귀환 (BC 538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그 은혜를 따라 남은 자를 통하여 그 깊고도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 10:21~22)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께서 ‘남은 자’를 남겨 주신 것이 진정으로 감사와 은혜가 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을 것)” (사. 1:9)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귀환 이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도전하는 한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약속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 시대상황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닷가의 모래 같은 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남은 자로 남을 것인가? 하는 중대한 ‘남은 자’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이것이 대략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이어져 내려온 ‘남은 자’에 관련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남은 자’의 교리가 주는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이제 “어떻게 우리는 남은 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How may we become a remnant?) 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께로 돌아옴으로” (By returning to the Lord)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v. 21) 고 말입니다. ‘남은 자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그는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라고 ‘남은 자’를 정의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무엇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뜻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돌아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인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비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또한 <시편 51편>에서 보듯이 자신이 지은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눈물과 통회함으로 고백했음을 보게 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라고 다윗은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정직하고 깨끗한 영을 회복하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남은 자로 살아가는 그 첫 걸음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경외함으로 그의 얼굴을 구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 가고자 하는 영적 자세일 것입니다.

둘째,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 (By receiving circumcision of the heart) 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9장>에서 ‘누가 과연 진정한 이스라엘인가?’를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6,8)는 참된 이스라엘에 대한 영적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으로 유대부모에게서 태어났거나 육신의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자격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 여기심을 받게 되는 자가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그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이스라엘 즉 ‘영적 이스라엘은 누구일까요? 사도는 이미 <로마서 2장>에서 분명하게 이점을 설명한바 있습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참 유대인이 아니며 육체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인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롬. 2:28~29/ 현대인의 성경) 라고.

어떤 분들은 이러한 사도 바울의 주장은 구약에서의 율법의 요구가 아닌 단순히 우리 기독교인들 만의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에 할례가 아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지키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그들 조상들에게 주었을 때 이미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신. 10:16)고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례는 육체에 행하기 전에 마음에 행하는 것임을 율법을 주신 그 첫 순간부터 명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시했거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음에 행하는 할례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 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빌. 3:3)라고 사도는 마음에 할례를 정의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내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성도가 마음의 할례를 행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할례를 행했습니까?

셋째, “하나님께 은혜 받음으로” (By receiving the grace of God) 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가 남은 자인가?’ 그리고 ‘어떻게 남은 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말씀을 마무리해 가면서 ‘남은 자’에 대해 이해해야만 하는 사실은 ‘남은 자가 되게 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그 주체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데로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 1:9> 말씀을 인용하여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29) 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남김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로 말한다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할수 밖에 없지만, 오직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르고 남은 그루터기처럼 남김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약시대에나 초대교회 시대에나 현세대에나 그 어떤 시기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는 바울의 선언은 ‘내가 남은 자,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결코 나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그분의 택하신 은혜에 있음’을 겸손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 (엡. 2:8)이요,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고전. 15:10)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의 합당한 믿음으로 날마다 그 분께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육신에 행하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행하는 할례를 받음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아브라함의 합당한 영적 후손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여러분의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 어둡고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 오직 그분의 은혜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남은 자로 삶을 살수 있게 되었음을 증거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8월 11일(수) 스가랴 14:1-21, 여호와께 성결(20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스가랴 14: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께 성결(20절)
♦ 성구 :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聖潔)이라 기록(記錄)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殿)에 모든 솥이 제단(祭壇) 앞 주발(周鉢)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선지자 “스가랴”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 하신다”는 뜻입니다.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더불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깨우친 “회복의 선지자”라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스가랴 14장은 성전 재건의 의미를 결론적으로 말씀하면서 “여호와께 성결(HOLY TO THE LORD)”을 강조합니다.

왜 여호와께 성결을 강조할까요?
그 이유는 역사의 종말이 있을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 또는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특별한 날로 성도들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괴로움과 큰 시련을 당하게 되지만, 드디어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셔서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들이 멸절되며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절).

지금까지 그들을 다스린 왕은 바벨론 왕과 바사의 왕이었으나 그 날 곧 여호와의 날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 날에 비로써 악한 무리들은 멸절시키나 의인들은 영원히 평강만이 넘치는 나라에 살게 되고 절대자 여호와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부활과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소망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숲속 작은 연못에 애벌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불안해진 애벌레들이 모여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애벌레가 침통한 얼굴로 “우리의 동료들이 하나씩 둘씩 자꾸만 실종되는데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모두들 영문을 알 수 없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는데 그때 “제가 보기에는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간 후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라고 어느 애벌레가 말했습니다.

도대체 왜 동료들이 연꽃 위로 올라 간 뒤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이제부터 누구든지 먼저 연꽃 위로 올라가면 반드시 연못 속으로 돌아와 밖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약속하고는 헤어졌습니다.

며칠 후 한 마리의 애벌레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잎 위에 앉았습니다. 그의 몸은 점차 변화하여 완전히 다른 잠자리로 바뀌었고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연못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고 연못 주위를 빙빙 돌며 친구들이 자기를 알아보기를 기대했으나 연못 속의 벌레들은 하늘을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잠자리가 자기의 옛 동료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우리들의 모습이야말로 애벌레가 잠자리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여호와께 성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팬데믹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머지않아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그 날의 소망을 품고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거룩하게 다듬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스가랴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아멘 

여호와께 성결(코데쉬 아도나이)
모든 것이 거룩해 질 것이다!


스가랴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이방인들도 초막절을 지킬 것이다 


스가랴 14:17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 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비를 내리지 않는다 : 자연계의 재앙



스가랴 14: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7월 15일) 


스가랴 14:19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마지막 날의 심판

스가랴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스가랴 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재림 후에는 모든 것이 거룩해 질 것이다
가나안 사람 : 죄와 저주 아래에 있는 사람들
새번역 : 상인, 공동번역 : 장사꾼 / 돈에 붙잡힌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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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와 스가랴서 지진은 사실이었다…고고학적 증거 나와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151532&code=61221111&sid1=chr

구약성경 아모스와 스가랴서에 언급된 지진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고고학 증거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발견됐다.
당시 지진은 BC 8세기 때 발생한 것으로, 학자에 따라서는 BC 760~750년경으로 본다.
지진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발생했으며 규모 6~7로 추정한다.

9일 이스라엘문화재청(IAA)에 따르면 최근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2800년 전 이스라엘을 강타했던 지진의 고고학적 증거를 발견했다. 당시 지진의 증거는 그동안 하솔, 가드 등 이스라엘 곳곳에서 발견됐으나 예루살렘에서 지진의 증거를 발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모스와 스가랴서에 등장하는 지진은 동일한 지진으로 해당 구절 내용은 이렇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암 1:1)

“그 산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하리라.”(슥 14:5)

이들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번 발굴은 예루살렘 올드시티 남동쪽 다윗성국립공원(City of David National Park) 발굴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IAA는 부서진 그릇과 램프, 조리기구, 항아리 등을 포함해 건물의 벽이 무너진 이후 파괴된 층이 드러났다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발굴 책임자인 조 우지엘과 오르탈 칼라프는 이번 지진이 고대에 발생한 지진 중 가장 강력하고 피해가 큰 지진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장신대 강후구(성서고고학) 교수는 “이번 발굴이 2800년 전 지진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지진으로 인한 건물 벽의 무너진 모양과 그 지층에서 발견된 당시 유물”이라며 “이스라엘은 수백년에서 1000년 정도의 기간마다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스가랴서의 여덟가지 환상


환상

        의미

여호와께서 두루 다니심

      성전을 재건하다가 지치고 실망한 이스라엘에게 용기와 소망을 줌

네 뿔과 네 공장

      때가 되면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치실 것임

척량줄

      예루살렘이 완전히 재건됨

대제사장 여호수아

      택한 백성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됨

등대와 감람나무

     낙심한 스룹바벨에게 용기를 줌

날아가는 두루마리

     율법을 깨뜨린 자들은 그 율법에 의해 징계 받음

에바 속의 여인 

     모든 죄악이 제거됨

네 병거

     이스라엘의 대적을 정복하시는 하나님








첫째,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붉은 말을 탄 자의 환상(1:7~17)

스가랴가 첫번째로 본 환상은 붉은 말을 탄 사람이 골짜기 가운데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람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서 있었습니다.
스가랴가 놀라며 천사에게 묻습니다.
이들이 무엇입니까?
화석류 사이에 선 사람이 대답합니다(10절).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홍마를 탄 사람 뒤에 있는 일단의 말을 탄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땅을 살피도록 보낸 무리들, 즉 천사들로 구성된 여호와의 군대였습니다.

11절의 내용으로 보아 붉은 말을 탄 사람이 “여호와의 사자”로서 다른 말을 탄 사람들의 우두머리입니다.
바로 이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 자신과 동일시 되며 삼위의 제 2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 16:11, 13; 18:1-2, 13, 17 참조)

천사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말탄 천사들이 이제 여호와의 사자에게 자신들이 행한 일을 보고하는 장면이 전개 됩니다.
그들은 온 땅이 평온하다고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보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국 땅에서 신음하고 있는 동안 그들을 압제하던 열강들은 오히려 평안하고 번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포로상태에서 풀려 본국으로 돌아 왔지만 아직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예루살렘은 아직도 페허가 되 상태로 버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보기에 지금 세상의 형편은 모순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언약의 백성은 아직도 곤고한 상태이고 열국은 평온한 것이 모순인듯 보인다는 뉘앙스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기한이 다 찼다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예레미야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신 이 말씀의 기간이 다 찼으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일어 나셔야 합니다 라고 간청합니다.
물론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이 70년을 계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차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 간 것은 주전 605년이고,
2차로 함락되어 다시 백성들이 끌려 간 것은 주전 598년이며,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주전 586년이므로 어느 때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계산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준으로 하면 아직도 4년이 남게 되고 1차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준으로 하면 이미 6년이 지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천사들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의 백성들을 위해 중보합니다.

하나님께서 위로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13-17절)

여호와의 사자의 간구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은 세 가지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1. 이스라엘에 향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라는 13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노예처럼 살았던 것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어쩔 수 없는 징계 때문이었습니다.
“질투(킨아)”라는 단어는 사랑에 대한 열정의 표현으로 여기서는 물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징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용서하시고 치료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 이방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가 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스라엘을 지나치게 다루었고 마구 짖밟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보다 훨씬 더 심하게 징계의 막대기를 휘둘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로 향했던 하나님의 진노는 자신을 신뢰하고 교만한 가운데 마구 무력을 행사했던 나라들에게 돌려질 것입니다.

3. 이스라엘에 베푸실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이 원하는 몇 가지 긍휼을 기쁨으로 베푸신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1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집이 예루살렘 가운데 건축되리니”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등을 돌리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돌아 오셔서 그들의 성전을 다시 세우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어 주전 515년 드디어 성전의 완공을 보았습니다.

다음 말씀은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는 것으로 이것은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말씀입니다. 페허가 되었던 예루살렘의 거리에 측랼기사들이 가옥이 들어설 자리를 측량하게 될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이는 예루살렘에 다시 부흥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풍부하다는 단어는 “좋은 것으로”라는 의미로 예루살렘 성읍이 다시 좋은 것들로 넘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이것은 바벨론에서 돌아 온 백성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의 도성으로 그 분의 거처로 선택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징계의 고난의 시기를 마친 백성들은 하나님의 더욱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 올 때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얼싸 안고 그에게 새신발과 새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즐기자고 살찐 송아지를 잡습니다. 이 아버지의 기쁨이 바로 매를 맞고 회개하고 돌아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둘째,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 환상(1:18~21)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어서 두 번째 환상은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를 괴롭혔던 세상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뿔과 네 대장장이(工匠)에서 넷(4)라는 의미에 대하여

본 환상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4 즉 넷이라는 숫자입니다.
네 뿔과 네 공장(工匠)이 나오는데, 모두 4라고 하는 숫자입니다.

히브리 수비학으로 본 성경에 나타난 4(넷)

히브리어 알파벳 4(넷)은 Daleth(문door)를 상징하는데, 이는 땅의 네 귀퉁이인 동서남북을 가리킵니다(욥 3:11-12, 암 3:11, 계 7:1, 창1:19).

성경에 나타난 4(넷)이라는 숫자를 보면,

*(넷)째날에 물질 창조가 끝남(창 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며(사 11:12)

*하나님께서 하늘의 (사)방에서부터 (4)방의 바람을 엘람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4)방으로 흩으신다(렘 49:36, 단 7:2, 슥 2:6)

*스가랴에게 나타난 병거(兵車)는 (넷)이며(슥 6:1-8)

*하나님은 (네)가지 벌을 내리심(칼, 기근, 사나운 짐승, 온역)이며(렘 15:3)

*구약성경에 지구는(네) 귀퉁이와 (4)방이 있다(삼하 7:1)

*방위는 동서남북(4)방이 있고(대상 2:24)

*하루는 아침, 점심, 저녁, 밤(4)로 구분하며

*1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있으며

*음력은 초승달, 반달, 보름달, 그믐달(4)로 구분합니다.

 (넷)째 계명은 ‘땅’에 관련된 것이며,
4수는 특별히 땅 즉 지상세계에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4의 수는 세상 수이며(World number), 창조수(Creation number)입니다.
이와 같은 근거를 들어 성경학자들은 스가랴가 본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넷(4)라는 개념을 동서남북으로 사방 곧 방향을 의미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의를 다는 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네 뿔과 네 대장장이는 이 세상의 권력과 정치 그리고 나라의 일어서고 무너지는 세상의 이야기이며, 그러나 이 세상의 흥망성쇠는 사람들이 이루어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스가랴의 환상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스가랴서는 BC522-486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스가랴가 이 환상을 볼 때는 이 때보다는 한 참 이전으로 1장 12절의 첫 번째 환상에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라는 말씀을 근거로 볼 때 바벨론이 무너지기 바로 직전으로 보여지는데 그렇다면 BC516-520년이란 계산이 나옵니다.

바사의 고레스가 유다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칙령이 내려지기 전에 이 환상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끌려온 지 70년이 지났지만 아직 고레스의 해방 선포령이 발표되지 않은 시점 그러하기에 유다인들은 고통으로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스가랴로 하여금 환상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비전을 통하여 이 땅의 권세와 정치, 군사 등 모든 것은 이 땅의 권력자들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숫자 4(넷)를 등장시키며, 세상 역사를 세상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그러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경제력이 곧 힘입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세상을 자기들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하는 것처럼 교만합니다.
일본도 경제력을 통하여 자위대를 만들고 자기 일본 땅뿐만 아니라 동남아의 패건 국가로 미국처럼 동남아 경찰국가로 행사하려고 합니다.

땅의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하는 줄로 착각합니다만 사실 이 모든 것은 마지막 때를 위하여 하나님이 군대를 모으는 과정일 뿐입니다.

7년 대환난 때 이 세상을 파괴하기에 수많은 군대와 핵무기 등 첨단 군사무기가 필요합니다.
나라간의 갈등도 필요합니다.
세상 군왕들과 나라들은 그것을 모르고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한다고 말을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대로 세상 나라들은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뿔에 대하여(18절)

뿔이란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주로 ‘힘의 상징’으로 보았는데 성경에도 <뿔>은 힘과 권세의 상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시 18:2)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신다는 다윗의 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열 뿔 달린 짐승이 나옵니다.

보라 한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계 12:3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계 13:1)

뿔은 힘과 권세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나, 힘을 상징할 때도 뿔로서 표현하고 있고, 적그리스도나 세상 군왕들의 권세나 힘을 말할 때도 성경은 뿔로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뿔에 대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때문에 스가랴의 이 환상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뿔의 의미’는 명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의 두 번째 환상인 네 개의 뿔은 어느 나라를 의미할까요?

스가랴의 지나친 상징어 때문에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하며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각기 다릅니다.

어떤 학자는 이스라엘(유다) 나라를 중심으로 동서남북(4)에 위치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로서 모압과 암몬(동), 불레셋(서), 애굽(남), 앗수르(북) 을 가리킨다 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유다)을 괴롭힌 바벨론, 메대와 파사, 헬라, 로마 등 세상나라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를 괴롭히는 세상 모든 나라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들의 주장에 다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본문을 보면,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이라고 한 것을 보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 버린 나라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또한 당시 스가랴가 환상을 본 그 시점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스가랴가 이 환상을 본 시점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지 약70년이 되었을 때라는 것을 보면 문자적으로 이 네 뿔, 네 나라는 바벨론과 앗수르와 애굽 그리고 모압과 암몬 또는 불레셋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흩어버린 나라요, 바벨론은 유다를 패망시키고 포로를 끌고 온 나라이며, 애굽은 끊임없이 유다를 괴롭히고 흩어버린 역할을 한 나라이고, 모압과 암몬 그리고 불레셋은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우리가 모압과 암몬하면 지금의 조그만 요르단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중부지방까지 다스렸던 대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스가랴의 환상 가운데 나타난 네 뿔은 문자적으로는 앗수르, 애굽, 바벨론, 그리고 불레셋과 암몬과모압 중 한 나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히고 흩뜨린 세상 권력 모든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장장이(공장工匠)에 대하여(20절)

네 공장(工匠) 즉 4명의 대장장이는 자기의 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나라들을 혼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도 정확한 나라를 지목할 수 없고 유다와 이스라엘을 흩뜨리고 대적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몽둥이로 사용한 나라를 의미합니다.

대장장이 즉 공장(工匠)은 나무를 자르고 깎는 목공과, 쇠를 녹이고 다듬는 철공 등을 통칭해서 말합니다.
즉 그들은 잘못되고 필요 없는 부분을 자르고 다듬으며, 버릴 것은 버리고, 또 때로는 쓸모 없는 것들도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본 환상의 네 명의 대장장이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흩뜨리고 괴롭혔던 나라를 정복하여 없애버리기도 하고, 쓸모 있는 나라로서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를 돕는 역할을 하는 나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닌 세상 나라를 힘 있는 나라로 만드시고 그런 나라를 들어서 몽둥이로 채찍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징계하셨고, 또한 유다와 이스라엘을 흩뜨린 나라들을 정복하여 그 교만한 뿔을 꺾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고, 혼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나타난 네 명의 대장장이는 바벨론, 메대와파사, 헬라, 로마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강대국을 대장장이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환상이 주는 교훈

1.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관자라는 것입니다.

스가랴를 통하여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수 많은 세상 권력과 나라들이 자기의 힘과 지혜를 자랑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와 세상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때 애굽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호 아래 이스라엘로 하여금 민족 국가의 틀을 짜며 성장하도록 애굽을 그늘로 사용했으며,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를 징계하는 도구로서 사용했고, 또한 이 때 회당 문화가 발달되어 장차 예수님의 복음 사역과 사도들의 전도사역에 유용하게 했습니다.

헬라는 기독교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끼침으로 1세기 때의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헬라어로만으로 온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신약성서 대부분이 헬라어로 기록되었을 정도입니다.

로마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기독교 복음 전파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은 1세기 때의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유익한 길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강대국들이 스쳐가면서 예수님의 복음의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회당과 언어(헬라어), 도로 등은 초대교인들이 복음을 전하기 가장 유익했으며, 로마가 기독교를 많이 박해 했지만 그래도 단일국가 로마가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복음 전파하는데 유익이 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라들을 대장장이 사용하셨습니다. 각 나라들은 자기의 힘을 자랑하고 교만한 뿔을 드러냈지만 그 뒤편에서 세계를 지배하시고 계획하시는 분이 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나라를 이용하시고, 그들이 좀 과하다 싶으면 바벨론을 무너뜨렸듯이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셔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이 시대를 조율하시고 다스리신 다는 것입니다. 사탄과 세상 주관자들과 지혜자와 왕들은 자기의 지혜와 힘을 자랑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의 백성 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정국가를 세우셨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록이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느냐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신정국가를 세우시고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기근이나 질병으로 그들을 징계하셨으며, 이방나라를 의지하면 그 나라를 통하여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으로 여기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눈동자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들을 심판하셨는데, 이것은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신 것 중의 하나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를 대적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원수로 생각하시고 보복하셨습니다.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은 나라입니다.

ex) 아말렉, 에돔, 불레셋, 모압, 앗수르, 애굽, 바벨론 등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을 통하여 네 명의 대장장이를 통하여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여러 나라의 뿔들을 떨어뜨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보복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거나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눈동자를 해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보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싸워주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강림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을 죄로부터 분리시키고 악한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함이며, 사탄의 세력과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들이 주님의 강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그 날 그 순간을 위하여 우리는 철저히 준비하면서 기다려야겠습니다.

셋째, 측량줄을 잡은 사람의 환상(2:1~13)

세 번째 환상에서 척량하는 사람의 작업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건축될 것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앞의 두 환상이 마무리 되면서 앞으로 오게 될 예루살렘의 회복과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 건축을 가르키지만 이와 함께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스가랴가 환상에서 본 사람은 측량(척량)줄을 손에 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인지 보려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예루살렘 성을 척량하고 확장할 것이다 (2-5절)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행위는 그가 도성의 소유권과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집이나 도시를 세우기 위해 먼저 크기나 규모를 정하고 설계도를 만들고 측량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의 삶과 환경에 대한 배려로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게 하신 이는 특별한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삶의 터전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페허처럼 무너지고 불탄 자리는 선하신 하나님에게는 그의 긍휼을 퍼 부으시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히브리서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얻게된 것과 같이 이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르라엘에서 끝나지 않고 궁극적으로 메시야를 통해 그 분의 나라를 온전히 세우는 데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실향민의 한 사람인 스가랴는 예루살렘이 다시 크게 확장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놀라고 있을 때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나서 말합니다.
그 천사는 이 예루살렘의 부흥의 소식을 소년에게“달려가서 전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소년 (young man)은 누구인가로 의견이 나누어 집니다.
주석가들은 여기 소년은 스가랴일 것이다 라는 의견과 함께 소년은 바로 측량줄을 잡은 사람이라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의견으로는 소년은 바로 유다의 회복과 부흥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스가랴 자신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소년에게 전해지는 소식, 즉 스가랴를 통해 전해지는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의 부흥과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영광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은 실제로 스가랴 당시는 물론이고 느헤미야 때에도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 때에는 에루살렘의 거민들의 너무나 숫자가 적어서 제비를 뽑아 백성들이 성안에 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환상이 보여주는 메시지의 완전한 성취는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때야 비로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가 보호할테니 바벨론을 떠나라(6-9절)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바벨론에 남아 잇는 사람들을 향하여 새로운 명령을 하십니다.
이제 바벨론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희는 피할지니라” 7절의 말씀입니다.
북방 땅은 바벨론입니다. 이 북방 땅은 곧 멸망할 것이니 아직도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이 땅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책없이 그들에게 떠나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8절 말씀입니다.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니라”
눈동자는 매우 소중한 몸의 지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을 “나의 눈동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건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여기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인이 젖먹이를 돌보는 것처럼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9절에서는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대신 원수를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움직이시니 대적이 거꾸로 유다에게 노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들이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사자, 즉 메시야를 보내셨음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분임을 만천하가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임할 것이다(10-13절)

낙심하고 아직 상처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임합니다.
10절 말씀은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 머물것이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심으로써 그들의 한숨은 노래로 바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제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가 이 땅에 놓아졌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 즉 “온 세상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라는 여호와의 말씀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열방은 그 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많은 이방이 주님께 속하게 되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 중심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어서 12절에서는 포로기 이 후 유다를 다시 회복시키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이며 택하신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할 수가 없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분의 기업이며 하나님은 이 기업을 위해 독생자의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이로서 스가랴의 세 번째 환상은 권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성소, 즉 하늘로부터 일어나셔서 자신의 뜻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혈기 있는자들은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왜 잠잠해야 할가요?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고 죄의 길을 고집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스가랴가 본 환상은 그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앞두고 선포된 이 메시지는 요한 계시록에도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이는 성경의 모든 경고와 약속은 모두 마지막 시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며 마지막 심판 날을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넷째, 여호와 앞에 선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를 참소하는 사탄의 환상(3:1~10)






다섯째,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환상(4:1~14)


여섯째,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5:1~4)


일곱째, 에바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의 환상(5:5~11)


여덟째, 두 구리 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의 환상(6:1~8)


첫번째 환상은 무엇인가?  (1:7~17)

스가랴가 본 첫번째 환상은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는 붉은 말 탄 사람"에 대한 환상(1:8~17)이다.
우리는 이 첫번째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어떤 행정을 펼치시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떠나버린 성읍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성읍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함께 알 수 있다.

스가랴가 보았던 첫번째 환상은 "붉은 말 탄 자"의 환상이다.
한 명의 붉은 말을 탄 자가 골짜기에 있는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여기서 화석류나무라 함은 '은매화'나무로서, 하얀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 비슷한 나무다.
그리고 그 뒤로는 붉은 말들과 자줏빛 말들과 흰 말들이 쭉 서 있었다(물론 그 등에는 천사들이 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스가랴서는 자기와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보게된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이들이 무엇인지 보여주리라"고 하였다.
그때 붉은 말을 탄 자가 말하기를 "이들은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라고 했다(1:10).
그렇다. 이들은 이 땅을 순찰하는 순찰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세상으로 내려가서 이 세상을 순찰한 다음에 그 내용을 하나님께 보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은 몰라도 예루살렘은 성전 건축으로 인하여 북적거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은 아무 잠잠하고 조용하더라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붉은 말을 탄 사람(이는 "여호와의 사자"다)이 하나님께 호소하기 시작한다. "만군의 여호와여, 당신은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당신이 이를 노하신 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슥1:12)."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스가랴에게 말하던 천사에게 대답해주셨다. "너는 외치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시온을 위하여 열심을 많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평온한 여러 이방나라들 때문에 주님이 심히 진노할 것인데, 이는 여호와께서는 조금 노하였지만,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거 돌아왔기에 이제는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집이 건축될 것이며, 예루살렘 성읍 위에도 먹출이 쳐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성읍들도 넘치도록 풍부해질 것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다시 시온과 에루살렘을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1:14~17).

  이 환상은 당시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언 천사들(순찰자들)이 땅에 두루 돌아다녀온 것을 대장 천사(붉은 말을 탄 천사)에게 보고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에 당신의 종들인 천사를 보내 세상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감찰하시고 그리고 보고를 받는다. 그런데 뭔가를 더 잘 알고 있는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께서 질문을 던진다. 언제 예루살렘과 유다성읍들을 회복시켜 줄 것이냐고 말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이미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기에 곧 여호와의 집(성전)이 건축될 것이며, 예루살렘 성읍이 건축되고, 유다의 여러 성읍들도 건축될 것이라고 했다(슥1:16~17). 이것은 성전공사가 무려 16년동안(B.C.536~520) 중단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첫번째 붉은 말 탄 자의 환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 온 우주와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알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천사들을 온 세상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시온에 매우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이다.
넷째,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되면 기적은 저절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째, 부가적으로 모르는 환상이나 계시 등은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하늘에 있는 말들은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천사들의 이동수단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환상은 무엇인가? (1:18~21)

두번째 환상은 "네 뿔과 네 대장장이"에 대한 환상이다(슥1:18~21). 하나님께서는 첫번째 환상에 이어 두번째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때에 스가랴의 눈에는 "네 개의 뿔"이 보였고 이윽고 "네 명의 대장장이들"이 보였다. 그래서 스가랴는 그에게 말하던 천사에게 네 뿔이 무엇이며, 왜 대장장이들와 왔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스가랴에서 말하던 천사는 "네 뿔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어버린 뿔"이라고 하였으며, "네 명의 대장장이들"은 유다를 땅에 흩어버린 여러나라들의 뿔들을 떨어뜨리려 온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가 "네 뿔"들은 "네 나라"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4"는 사방에 있는 대제국들을 가리키고, "뿔"들은 원래 권세와 힘을 상징하므로, "네 뿔들"은 네 나라의 권세와 힘을 가리킨다. 이 뿔들이 결국 유다를 흩어버려서 유다사람들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에 져서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포로로 잡아간 대제국들(앗수르, 바벨론 등)의 뿔들을 대장장이를 보내어 그들을 두렵게하고 그들을 다 흩어버릴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슥1:21).

  이것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비록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여 대제국에게 포로로 끌려가겠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어떤 기능공들을 보내어 네 뿔을 쓸어버린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대제국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괴롭힌 그들을 다시 없애버릴 자들을 세워 그들을 없애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들의 대장은 열뿔을 가진 짐승과 같은 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승리는 일시적일 뿐 계속 가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세번째 환상은 무엇인가? (2:1~13)

눈을 들어 "측량줄을 자기의 손에 잡고 있는 한 사람"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된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스가랴에게 말하는 천사가 떠나갔고, 이어 한 다른 천사가 나타나, 스가랴에서 말하던 천사에게 외쳤다.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스가랴)에게 말하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성 가운데에 영광이 되리라(슥1:4~5)" 이것은 무슨 뜻인가? 예루살렘이 장차 융성하게 발전한 큰 성읍이 되므로, 예루살렘은 그만 성벽이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불성곽이 되어주시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성 가운데에 임재하시겠다고 했다. 이는 지금은 예루살렘 안에 성전도 존재하지 않고, 성읍의 틀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예루살렘도 규모가 매우 커질 것이며, 광할한 성읍으로 변모할 것임을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B.C.520년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 도시가 단 한 번도 이 예언처럼 되어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환상의 의미를 이 환상후에 주어진 다른 천사의 음성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어서 어떤 천사(?)가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하지 않고 살고 있는 바벨론성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한다. "화로다. 화로다. 너희는 북방땅에서 도망할지어다.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도망할지어다.(슥2:6~7)" "여호와께서 나를 노략한 여러나라로 보냈는데, 너희를 범하는 것은 그분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 내가 손을 들어 움직이면, 그들의 종들에게 오히려 노략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슥2:8~9)". 그리고 이제는 어떤 천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기를 "이제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왜냐하면 내가 와서 네 가운데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많은 이방나라들이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의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실 것이다"고 외쳤다.

  그렇다면, 천사들의 이러한 외침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첫째로, 유대인들은 빨리 바벨론성에서 도망치라는 것이다(슥2:6~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곧 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B.C.519년과 514년에 바벨론은 바사에 의해 침공을 받아 완전히 멸망당하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성전에 돌아오셨던 하나님께서는 다시  떠났다가 또 와서 예루살렘 가운데 머물 것이라는 예언이다(슥2:10~13). 이것은 결국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에는 이방나라들도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세번째 환상후 주신 첫번째의 말씀 곧 "예루살렘의 번영"에 대한 약속과 두번째의 말씀 곧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이 되고 그때 이방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뜻은 결국 예루살렘은 물질적인 예루살렘으로 예언이 성취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예루살렘 곧 영적으로 하나님을 모신 교회 가운데서 성취될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 에루살렘은 남유다의 멸망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평안한 성읍이 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크게 확장되어 성곽을 치지 못할 정도의 도시가 된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은 성도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전 세계가 교회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실 것을 가리키며, 그때에는 이방나라들이 하나님께 속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후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합류할 것임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렇다. 그분은 당신의 종들은 천사들을 통하여 온 세상과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천사들은 지금 이 시간도 자신이 감찰한 것들을 하나님께 보고하느라고 바쁘다. 그렇다면 그들은 현재 어떤 소식을 주님께 보고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임을 흰 꽃이 만발한 화석류(은매화)나무 사이에 선 순찰자들의 환상을 통해 알려주셨다. 이것이 스가랴가 본 첫번째 환상이다. 그리고 이 세상제국의 흥망성쇠도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 스가랴가 본 두번째 환상의 핵심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스가랴는 예루살렘이 곧 측량되어 성이 건축될 것인데, 그 성이 얼마나 확장되어 융성할른지 예루살렘이 성곽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성의 불성곽이 되어 지켜주실 것이고, 그 가운데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벨론에 남아있는 포로민들은 빨리 바벨론에서 도망쳐나오라고 하였다. 그 성이 파괴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환상에 대한 예언은 육적인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지 못했다. 결국 이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으니,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뒤 성령을 보내주실 때에는 이방인들까지 다 구원받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은 1차적으로는 교회(하나님의 성령의 전)를 통해 성취되었고, 완전한 것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서 성취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스가랴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6장까지는 B.C.520년 제2성전 재건사업이 시작될 무렵에 젊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하룻밤에 주어진 8가지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7~8장까지는 B.C.518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기념 금식일 준수와 관련된 4가지 질문과 답변이 기록되어 있다.
9~14장까지는 B.C.480~470년경 이제 나이가 50대를 넘긴 스가랴가 받았던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장차 도래할 메시야의 공생애와 수난 그리고 재림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스가랴서의 제일 첫번째 부분은 8가지 환상 중에서 4번째와 5번째 환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2가지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행하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의 궁극적인 실체가 누군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스가랴서에 나오는 8가지 환상은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가?

  스가랴서에 나오는 8가지 환상(슥1:7~6:15)은 수미쌍관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첫번째 환상과 마지막 여덟번째 환상을 처음과 끝으로하여, 두번째 세번째 환상과 여섯번째 일곱번째 환상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고, 중간에 네번째와 다섯번째 환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 중에서 첫번째와 여덟번째 환상은 말이나 병거 위에 탄 자에 대환 환상으로서, 하나님께 지금도 이 땅에 천사들을 보내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와 세번째 환상은 성전재건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으로 배치되어 있다면,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환상은 부정적인 환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중간에 네번째와 다섯번째 환상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성전재건의 핵심인물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총독 스룹바벨에 대한 환상으로서, 이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오실 메시야가 누군지를 말해주고 있다.

 

스가랴서를 공부해야 하는 2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스가랴서를 공부하는 이유는 사실 2가지다.

첫째, 우리는 스가랴서를 통해서 메시야가 누구시며 오셔서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보다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하셨다(요 5:39).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 메시야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구약성경을 읽는 읽었으나 잘못 읽은 것이 된다.

둘째, 우리는 스가랴서를 통하여, 묵시문학과 계시의 핵심이자 결론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보다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구약성경 가운데 묵시문학과 계시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역시 요한계시록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환상이나 상징들은 거의 다 구약성경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약성경 3권을 들라고 하면, 그것은 에스겔서, 스가랴서, 다니엘서다.
사실 이 세 권의 구약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요한계시록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짓이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단으로 빠지는 이상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 권의 책에 나오는 환상들과 상징들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계시들은 전부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어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네번째 환상은 무엇이었는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사탄이 참소하는 모습을 보여준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탄을 책망하신뒤에,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게 하고 그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게 하시며, 정결한 관(터번)을 그의 머리에 씌우게 하신다. 그리고 그때에 여호수아 곁에 서 있던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에게 전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먼저, 사탄은 누구며, 사탄이 참소하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구약성경 가운데 "사탄"에 대한 명칭은 욥기서 1~2장(11회)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의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나머지 4회). "사탄"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은 딱 네 속 뿐인데, 첫째,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하는 대목(대상21:1), 둘째, 다윗이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들 가운데 사탄이 그들의 오른쪽에 송사하는 자가 서기를 기도하는 대목(시109:6)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가랴 3:1절과 2절에 각각 한번씩 나올 뿐이다. 우리가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대적하는 자는 활동하는 사탄의 모습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성도들을 밤낮으로 참소하는 자고 있던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나 땅 속(음부)으로 내어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계12:9~10). 그렇다면, 적어도 B.C.520년까지는 아직 사탄이 하늘에서 참소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로 우리는 구약시대에 사탄이 계속해서 하늘에 거주하면서 인간을 참소하는 역할을 했다가, 적어도 예수께서 이땅에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땅 속과 지상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불법을 저지르게 되어 결박을 받아 무저갱 속으로 떨어뜨려졌고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는 제한조치를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성도들의 하늘에서의 천년왕국이 끝날 무렵 하나님께서는 그를 잠깐 놓아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사탄은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인간을 참소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 가운데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사탄은 여호수아의 오른쪽에서서 그를 대적하고 있었다. 사탄을 여호수아가 보았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분명한 사실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을 사탄이 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징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누군지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그가 그것이다(슥3:2). 그랬다. 거의 탈 뻔 했는데 완전히 전소하기 전에 꺼내든 나무가 바로 대제사장 여호수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 에서 건져내신 후에 그의 더럽혀진 옷을 벗기고 그에게 깨끗한 옷과 정결한 관을 쓰게 하셨다. 그동안에 그가 죄악으로 인해 옷이 더럽혀졌는데 그간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셨고 징계가 끝나자 그로부터 징계를 거두시고 그에게 다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작게는 여호수아 개인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제사장 나라로 부름받았으나 그 사명을 감당치 못하고 죄만 짓다가 바벨론에 끌려가서 죽을 고생 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거지가 되어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언한다. 이것은 앞으로 그가 곧이어 실천해야 할 직무이자 이스라엘의 사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렇다. "네가 만일 내 도(길)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를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그렇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바라는 길을 걷지 않았다. 그리고 규례를 지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거의 파멸에 가까운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여호수아는 시드기야왕과는 달리 하나님의 집(이스라엘 공동체)를 계속해서 다스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성전)이 더이상 파괴되지 않도록 지킬 수가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천사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온 인류의 죄악이 제거되고 인류를 죄짓게 만들고 대적하는 사탄마귀의 권세가 깨지고 그가 불못에 던져지게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그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시대의 평화로운 한 장면을 들어내어 말씀하신다(슥3:10). 그 날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여 평화롭고 한가로이 살아가는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왕상4:25). 이는 곧 메시야의 재림으로 인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얼마나 평화로운 것인지를 비유적으로 말씀해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대제사장 여호수에게 주신 메시야 예언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스가랴서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스가랴서는 모든 환상과 계시마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번째와 다섯번째 환상에도 역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들어 있다. 스가랴가 보았던 네번째 환상 속에는 중보자로서 "여호와의 천사"가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존재로서, 그가 여호수아에 들려준 말씀은 장차 누가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할 것이며 사탄마귀를 박살낼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예언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장차 하나님의 종인 "싹"을 나오게 하여 이 땅의 모든 죄악을 제거할 것이라는 예언이다(슥3:8). 구약성경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싹"이라고 표현하는 곳이 많은데, 사4:2, 11:1~2, 53:2, 렘23:5, 33:15에도 싹이 등장한다. 특별히 메시야를 "싹"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2가지인데, 하나는 연하고 순하다는 것이다(사4:2,53:2). 이는 죄가 하나도 없으신 메시야를 상징하며, 그분은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셨기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해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메시야는 장차 혈통적으로 볼 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분이지만(렘23:5,33:15), 그분은 사실 줄기에서 나오는 "가지(호테르)"가 아니라, 뿌리에서 나오는 "싹(네째르)"이라고 함으로서, 그분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시는 메시야이신 것을 말해준다(사11:1~2).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세운 돌 곧 일곱 눈들을 가진 돌을 통하여 사탄의 머리를 박살낼 것이라는 예언이다(슥3:9). 이는 메시야가 강력한 권세와 능력을 지닌 분으로서(민20:11) 원수들을 쳐부수는 심판자가 될 것임(단2:35~45)을 말해주는 예언이며, 특히 돌에 일곱 눈들이 있다는 것은 그분은 온 세상을 완전히 감찰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은 누구를 때려부숴야 하는지를 정확히 잘 아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시 오실 예수님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악의 삼위일체인 용(사탄마귀)와 짐승(바다짐승)과 거짓선지자(땅짐승)을 철장권세로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음녀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음녀는 교회의 성도들 중에서 타락한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 음녀가 바로 [첫째]짐승(바다짐승)을 타고 있다고 했고, 그래서 짐승보다 먼저 심판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장차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께서는 먼저 음녀를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악의 삼위일체를 심판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도들이라도 그 돌에 맞아 불의 형벌을 받지 않으려면 빨리 음녀에게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다섯번째 환상은 무엇이었는가?

  이제는 스가랴가 보았던 다섯번째 환상을 살펴보자.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스가랴는 네번째로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이어서 다섯번째로 유다총독"스룹바벨"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로 볼 때, 이 환상에 등장하는 '스룹바벨'은 유다총독을 가리키지만 실은 그는 장차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차 오실 메시야는 2가지 역할을 통해서 비로소 성전(교회)을 건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중에서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히5:5~10), 동시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분은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계17:14,19:16).

  그렇다면, 스가랴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순금등잔대와 그 등잔대 곁 좌우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를 보게 된다(슥4:2~3). 이때 순금등잔대에는 일곱개의 등잔이 있었으며, 이 등잔대의 위쪽에는 기름그릇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양쪽에 있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이 공급되고 있었다. 그리로 기름그릇에 모인 기름은 일곱개의 관을 통하여 일곱개의 등잔에 기름을 대주고 있었다. 그러자 스가랴는 그와 말하는 해설천사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보게 된다.

 

7. 순금등잔대와 기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순금등잔대"와 "기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천사는 그것을 슥4:6~10에서 해석해주고 있으며, 이어서 '두 감람나무'가 무엇인지는 슥4:11~14에서 해석해주고 있다. 먼저, "순금등잔대"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결론적으로 "순금등잔대와 일곱개의 등잔"은 일차적으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이 땅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의 온전하고도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세워지게 될 바림직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일곱금촛대 사이를 거니시고 있는데, 그때 일곱금촛대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때까지 일곱개의 등잔에 등잔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등잔대 노릇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은 '완전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꿈을 성전의 일곱순금등잔으로 구성된 순금등잔대를 통하여 예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곱금등잔에 공급되고 있는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스가랴에게 말하는 천사는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셨다. 그 천사는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성전공사는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그렇다. 조금 있다가 배우겠지만 두 감람나무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은 두 사람 곧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쓰임받게 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이었던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쓰임받지 못했다. 다만 간신히 그것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남은 자에 의해 메시야를 낳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스룹바벨이 성전을 완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인 것이지 인간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하시면 어떠한 대적이라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큰 산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확인시켜주셨다(슥4:7a). 그러므로 그 천사는 스룹바벨이 이미 성전을 다 지어 머릿돌에 세울 것임과 백성들이 그것을 보면서 환호성을 친다고 하였다(숙4:7b). 성전의 기초를 놓았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결국 자기들의 손으로 그 일을 마칠 것이라고 한 것이다(스3:10, 슥4:9).

  그리고 이어서 그 천사는 스룹바벨의 손에 새 성전을 짓기 위해 측량하는 돌로만든 다림줄이 있는 것을 보고서, 백성들이 그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했다(슥4:10a).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다림줄에 매달린 돌 추에 일곱개의 눈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개의 눈들은 온 땅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들이라고 했다(슥4:10b). 이것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완전한 통제력으로 성전공사를 주관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8. 두 감람나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이어서 스가랴와 말씀하는 천사는 등잔대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준다(슥4:11~14). 그때 두 감람나무는 기름을 흘러내려 큰 기름그릇을 채우고 있었는데, 그 기름이 일곱개의 관을 통해 순금등잔대의 일곱등잔에 기름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감람나무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시다(슥4:6). 고로 오직 성령으로만이 성전도 지을 수 있고, 하나님의 온전한 공동체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며, 신약에 들어와서 온전한 교회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감람나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천사는 "이것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들이니라"고 했다(슥4:14). 그들은 곧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총독인 스룹바벨"을 가리킨다(스3:10). 여기서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있는 대제사장을 가리키고, 스룹바벨은 여호야긴왕의 아들이었던 스알디엘의 아들로서, 사실은 메시야의 조상이자 다윗왕의 후손으로서, 왕과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고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은 대제사장의 직무와 왕직을 수행하는 두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햐 할 것은 비록 기름이 두 감람나무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서 기름을 감람나무가 생산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사람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어서 기름을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슥4:14). 그들도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로서 성령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지, 그들 자신이 기름을 생산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서 성령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흘러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이들로 인해 성전이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주의 종들 중에는 기름부음을 받아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흘러보내주는 종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의 종들을 가르치는 주의 종, 주의 종들에게 성령의 기름을 공급하는 주의 종들이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9. 나오며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었고 유다총독 스룹바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두번째 예루살렘 성전이 이 두 사람에 의해 세워질 것임을 네번째와 다섯번째 환상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스가랴서 3장과 4장의 말씀다. 그렇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것도 성령의 기름을 충만한 받아 그것을 흘러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하나님 우편에서 일하고 계시며(히1:3, 8:1~6, 요일2:1~2),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때에는 심판주이신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오실 것임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신약의 '예수'라는 이름의 히브리어식의 표현이다. 이것은 장차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사람들의 지도자와 더불어 성전을 지을 것인데, 그분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일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이 오셔서 지은 성전은 곧 교회로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전3:16).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오늘도 성령충만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교회에서 사역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스가랴는 B.C.520년에 포로귀환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사역했던 선지자였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아마도 20대초반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 같고, 약 50년간 사역했던 선지자였다. 그리고 그의 부르심의 초기에는 이미 "학개"라는 노선지자가 있어서, 16년동안 중단된 제2성전건축에 대한 독려예언을 같이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학개보다 약 2개월 뒤에 있었다. 스가랴의 예언은 환상과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은 스가랴서 선지자가 초기에 보았던 8가지 환상들 중에서 여섯번째 환상인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과 일곱번째 환상인 "에바 속에 앉은 여인"에 대한 환상 및 여덟번째 마지막 환상인 "두 구리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에 대한 환상이 무엇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스가랴 보았던 여섯번째, 일곱번째, 여덟번째 환상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스가랴는 다리오왕 제2년 11월 24일 밤에, 8가지 환상을 보게 된다(슥1:7~6:15). 이때 그가 본 8가지 환상은 긴 환상은 아니었고 짧게 짧게 보여진 환상이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는 자신이 보았던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자기에게 말하는 천사에게 그 의미를 물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도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스가랴가 보았던 환상은 8가지는 무엇이며, 그 환상들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환상은 우선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환상과 여덟번째 환상을 좌우의 끝으로 하고, 가운데의 양쪽에 2번째와 3번째 환상 그리고 6번째와 7번째 환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한가운데에 네번째와 다섯번째 환상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다. 이 8가지 환상의 좌우 끝에 배치되어 있는 첫번째와 여덟번째 환상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천사들에 관한 환상에 해당한다. 그리고 2번째와 3번째 환상이 그 내용이 긍정적인 환상이라면, 6번째와 7번째환상은 그 내용이 부정적인 환상이다. 그리고 한 중앙에 4번째와 5번째 환상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스가랴가 보았던 8가지 환상은 제2성전건축을 독려하기 위한 환상이므로, 이 환상이 성전건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4번째와 5번째 환상은 성전건축을 주도했던 두 사람에 관한 환상으로서, 4번째 환상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환상이고, 5번째 환상은 유다총독이었던 스룹바벨에 대한 환상으로 일곱금등잔과 두 감람나무에 대한 환상이다. 당시 건축될 수 있었던 제2의 성전은 이 두 사람의 지도력에 의해 건축되기에 이른다.

 

3. 스가랴가 본 여섯번째 환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가랴보았던 여섯번째 환상은 "날아가는 두루마리"에 대한 환상이다. 이것은 일곱번째 환상은 "에바 안에 앉아있는 여인"에 대한 환상과 더불어 부정적인 환상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스가랴에서 보여주었을까?

  스가랴가 눈을 들어 보았을 때, 그는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았다. 두루마리는 상당히 컸다. 가로의 길이가 이십규빗(약9m)이었고, 세로의 길이가 십규빗(4.5m)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자도 안팎으로 쓰여 있었다. 이에 스가랴 선지자가 그 두루마리가 무엇인지를 묻자 그에게 말하던 천사는 그것은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가 쓰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더불어 도둑질한 자와 거짓으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는 이쪽 글과 저쪽 글에 나와있는대로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저주가 쓰인 두루마리가 그 집안으로 들어가서 그 집의 나무들과 돌들을 불살라버림으로 실행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서 두루마리 환상을 보여주었으며, 그리고 두루마리에 쓰인 글자는 도둑질한 죄(제8계명)과 거짓 맹세한 죄(제3계명)를 언급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주권적인 은혜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할지라도 만약 또다시 십계명을 어기는 자가 있을 때에는 십계명에서 나와있는 말씀에 따라 그에게 저주를 퍼붓겠다는 뜻이다. 특별히 "도둑질한 죄"는 십계명 중에서 인간계명인 제5계명에서 10계명을 대표하는 죄이고, "거짓 맹세한 죄"는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계명인 제1계명에서 4계명을 대표하는 죄인 것 같다. 특히 십계명 중에서도 왜 제8계명과 제3계명을 스가랴에게 보여주었는지는 그것이 당시 포로에서 귀환했던 자들이 흔히 범하고 있는 죄였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사람이 가진 것이 없고 가난하게되면 도둑질을 하게 되고, 남의 것을 빌리기 위해 거짓된 맹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구 내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전건축후 나아지지 않는 예루살렘의 새 환경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도덕법을 잘 준수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여섯번째 환상을 보여준 것 같다.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마저 무너뜨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상과 대적의 도시였던 바벨론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왔고 또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만을 해서는 아니 된다.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제2성전건축하 포로귀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도덕적인 계명을 스가랴에서 환상으로 보여준 것이다.

 

4. 스가랴가 본 일곱번째 환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는 일곱번째 환상을 들여다보자. 일곱번째 환상은 "에바 속에 앉은 여인"에 대한 환상인데, 이것도 부정적인 환상에 속하며, 여섯번째 환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 스가랴라는 여섯번째 환상을 본 이후 곧바로 일곱번째 환상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커다란 "에바"가 등장한다. "에바"는 곡식을 재는 단위체(항아리?=22리터)로서,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큰 크기였다. 그런데 정말로 그 에바 안에는 한 여인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애써 그 에바에게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가 그 여인을 에바 안으로 집어넣더니, 둥근 납 조각으로 만든 두껑으로 덮어버렸다. 그러자 이제는 학과 같은 거대한 날개를 가진 두 명의 여인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은 그 에바를 하늘과 땅 사이로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날개로 날아서 바람을 타고 시날땅으로 가려고 했다. 왜 그리 가려는지를 물으니, 시날땅으로 가서 에바를 위하여 집(신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집(신전)이 준공되면 그것이 자기의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에바 속의 여인의 환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감사하게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스가랴와 함께 말하고 있는 천사가 일러주었다. 먼저 에바 속의 여인은 "악"이라고 했다(슥5:8). 즉 새로이 성전을 건축하여 그곳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어도 악은 내재되어 있어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나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악이 그곳에서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환상의 핵심이다. 정말 악이 사람에게서 나오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시켜 악의 본고장인 시날 땅 곧 바벨론의 신전 안으로 내보낼망정 예루살렘에서는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불리는 예루살렘  성 안에 다시는 악이 창궐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 나오려 한다면, 그 악은 이스라엘에게서 나와서는 아니 되고, 장차 악의 총본산인 바벨론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학의 날개를 가진 천사를 시켜 에바를 바벨론으로 이동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바벨론은 시날 땅에 있었던 것이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 처음 영걸 니므롯과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거주하고 있던 장소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의 총본산을 뜻한다. 그런데 장차 종말의 때에 진입하게 되면 다시 바벨론이 득세할 것이라고 사도요한은 예언하고 있다(계16~17장). 그리고 바벨론의 실체는 악을 품고 있는 음녀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계17:1).

 

5. 스가랴가 본 여덟번째 환상은 무엇이며, 그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가랴가 보았던 마지막 환상(슥6:1~8)은 사실 첫번째 환상(슥1:7~11)과 조금 비슷하다. 다만 말이 병거(전차)로 바뀌었을 뿐이다. 개별적인 말들이 집단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는 것 외에는 거의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여덟번째 환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스가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환상은 "두 구리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종류의 병거들"이었다.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메어있었고,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진 말들(회색의 억룩말들)이 메어 있었다. 그러자 스가랴선지자는 그에게 말하고 있는 천사에게 묻는다.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천사는 이것은 "하늘의 네 바람(영들)"이록 했다. 이들은 온 세상의 주이신 만군의 여호와 앞에 서 있다가 세상으로 나가는 것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나가는 방향이 조금 달랐다. 검은 말들은 북쪽 땅으로 나갔고, 흰 말들은 서쪽 땅으로 나갔으며, 어룽진 말들은 남쪽 땅으로 갔다. 그런데 붉은 말들은 나오지 않는다. 만약 붉은 말들이 나갔다면 그들은 응당 동쪽 땅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명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동쪽 땅으로 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건장한 말들은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 천사는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땅 여기 저기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 천사가 스가랴에게 외치며 말했다. "보라. 북쪽으로 나가는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으니라(슥6:8)"

  우선 병거를 몰고있는 말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스가랴에게 말하던 천사는 "병거를 몰고 있는 말들"은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셨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세상으로 나가는 천사들"이라고 했다(슥6:5). 다시 말해서, 네 종류의 전차와 말들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갔는가? 그것들은 그들의 해야 할 임무가 각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붉은 말들과 검은 말들과 흰 말들과 어룽진 말들은 각각 동쪽과 북쪽과 서쪽과 남쪽으로 나갔다.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파송을 받아 지상에 내려가서 어떤 일을 수행할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임무를 수행할까? 그것은 첫째로는 정찰의 임무를 수행하고, 둘째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령한 임무를 집행하고, 셋째로는 어떤 현상들을 일어나도록 집행하고 넷째로는 감시하고 보고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중국에서 발생한 신종 전염병을 두고 이 세상 사람들은 우한 폐렴(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곧 코로나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동물에서 인간을 감염시키고 그것이 점점 더 퍼져나가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고 있는 현상이라고 본다면, 하늘의 네 병거와 같은 환상의 측면에서 이것을 본다면, 이 현상은 전염병을 담당하는 말들(여기서는 어롱진 말들로 추정됨)이 중국의 우한으로 내려가더니 중국 땅에서 온 세상으로 전염병을 퍼뜨리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언제까지 이러한 전염병을 확산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그들의 손을 거두라고 할 때까지다. 그럼 언제 천사들은 자신의 임무를 중단하는가? 2가지 사항을 가정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다윗과 같은 경우로서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제사를 올리자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중단시킨 경우다(삼하24:10~25). 이런 경우는 범죄한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경우다. 둘째로,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왕과 같은 경우로서,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살아계신 하나님을 능멸하면서 그들의 군사들이 다 죽어서 엎드려질 때까지 전염병이 창궐하는 경우다(왕하18:13~19:35). 이런 경우는 지도자가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 뿐 자기 단독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시103:20~22). 그러므로 현재 중국 정부의 경우,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상당한 기간동안 즉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기까지는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매우 많아 보인다.

  그렇다면, 네 병거를 모는 말들의 색깔은 어떤 의미일까? 스가랴가 환상으로 보았던 네 병거의 말들은 색깔들이 달랐다. 붉은 색, 검은 색, 흰 색, 어롱진 색(슥6:2~3).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 6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어린양께서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기록된 일곱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열어젖히는데, 첫째부터 넷째인을 열어젖힐 때에 말들과 그 말들 위에 탄 자가 튀어나왔는데, 첫째 인을 열어젖힐 때에는 흰 말이 나왔고, 둘째 인을 열어젖힐 때에는 붉은 말이 나왔으며, 셋째 인을 열어젖힐 때에는 검은 말이 나왔고, 마지막 네째 인을 열어젖힐 때에는 청황색 말이 나왔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말들의 색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까지 같이 나온다. 흰 말을 탄 자는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이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사람을 죽이는데 칼로 죽인다. 결국 이는 "전쟁"을 의미한다. 검은 말을 탄 자는 손에 저울을 가졌는데, 밀과 보리가 아주 비싸게 취급되고 있었다. 이는 검은 색은 '기근'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이 '사망과 음부'였다. 이는 전염병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다만 흰 말을 탄 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자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적그리스도의 미혹이라고도 하고,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고도 한다. 어찌 되었든, 요한계시록에서는 말들의 색깔들은 천사들이 맡은 각기 다른 임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북쪽으로 나간 검은 말들이 하나님의 영을 쉬게 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6장의 해석을 그대로 따와서 말하면, 그 말들이 나가서 "기근"을 일으켰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나갔던 "북쪽"을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모여서 회의하는 자리"라고 해석한다면(시48:2, 사14:12), 요한계시록 12:7~9의 말씀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그의 천사들을 쫓아버려서  땅 속으로 던져넣는 장면일 수 있는 것이다.

 

6. 스가랴가 8가지 환상을 본 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이어지는 장면은 하나님께서 스가랴에서 어떤 명령을 하시는 장면이다. 그것은 면류관들을 만들어 그의 머리에 씌워줌으로 성전완공에 힘을 쓴 여호수아를 위로하라는 말씀이었다(슥6:9~15).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서 요시아(=헨)의 집에 들어가 거기에 있는 자들 곧 헬대(=헬렘)와 도비야와 여다야로부터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들을 만들고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씌워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였다.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의 곳(자리)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장차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의 자리(보좌)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한 제사장이 자기의 자리(보좌)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는 말씀이었다(슥6:12~13). 이것은 여호수아로 예표되고 있는 메시야가 장차 "싹(체마흐)"으로 올 것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메시야를 "싹"으로 표현한 것은 사53:2에 따라, 메시야가 연한 순과 같아서 그분이 원래는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시어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죽음으로 인류의 죄들을 속죄한 뒤에, 그가 여호와의 전 곧 교회를 건축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게 될 때에는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께서도 죽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셨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 교회를 건축하셨으며,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 왕노릇하시고 중보자의 일을 하고 계신다.

  한편, 여호와께서는 스가랴에게 "여호수아의 대관식에 사용했던 면류관들을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고 하신다(슥6:14). 이는 면류관을 영원히 보관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은과 금을 헌물하여 면류관을 만들도록 했던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의 헌신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간직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 헌신자들이 만약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들의 헌신이 영원토록 기억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먼데 사람들도 와서 여호의 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했다(슥6:15). 이는 "먼데 사람" 곧 "이방인들"이 교회건축에 합류할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으로 세워진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는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의 교회로 세워졌지만, 장차 세워질 교회는 이제 먼데 사람들 곧 이방인들에 의해 세워진다는 뜻이다. 이 예언의 말씀때로 이방인의 교회가 세워졌으니, 그것이 바로 안디옥교회요 사도바울이 소아시아와 유럽에 개척한 교회들을 가리킨다. 또한 지금까지도 이 예언은 살아있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방인의 교회는 계속해서 세워질 것이다.

 

7. 나오며

  어찌 보면 스가랴서의 말씀은 온통 메시야 예언으로 가득찬 선지서라고 할 수 있다. 환상 중에서도 메시야의 예언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즉 스가랴 보았던 8가지 환상 중에서도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싹"(슥3:8, 6:12), "일곱눈을 가진 돌"(슥3:9), "두 감람나무"(슥4:3,14)라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호의 전을 건축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총독 스룹바벨은 두 감람나무로서 장차 제사장이자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야로 오실 예수께서는 연한 "싹"이 되셔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죄들을 속죄하실 것이고, "돌" 곧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승천하신 후에도 여전히 하늘에서 왕직과 제사장직을 수행하시면서 성령의 기름을 보충하고 계시며, 성령으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계시고, 교회를 성령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약의 경륜을 이해하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스가랴서를 공부해야 하며, 장차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계시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역시 스가랴서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스가랴서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북 이스라엘 및 남 유다 왕들




왕 이 름

왕 조

시기

즉위방법

아 버 지

통치기간

업 적

1

여로보암




백성의

선출

느 밧

22년

북IS 10지파 →아히야외 예언성취. 두금송아지(단, 벧엘) → 혼합적제사(바알), 수도:디르사, 아들 아비야 병사

2

나 답

상 속

여로보암

2년

블레셋땅 깁브돈 점령시 바이사(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의 반란으로 피살

3

바 아 사

암 살

아 히 야

24년

선왕(여로보암)의 죄악을 답습. 유다왕 아사와 일평생 전쟁상태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멸절 → 아히야의 예언 성취

4

엘 라

상 속

바 아 사

2년

깁브돈 점령하기 위해 군대장관 오므리 파송. 엘라왕 자신은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 군대장관 시므리 반란 → 피살

5

시 므 리

시므리

암 살

평 민

7일

엘라 암살. 온집을 멸절 - 남자는 온 족속과 친구까지 멸절

6

오 므 리

군대의

선출

평 민

12년

876~869

시므리의 즉위소식 듣고 깁브돈 군대들이 왕으로 추대

(수도 디르사 포위 → 시므리 자살 : 왕궁에 불) 긴장해소 외부적 안정. 번영 → 종교적 암흑기. 은 두달란트로 사마리아를 삼

7

아 합

상 속

오 므 리

22년

869~850

가장 나쁜시기 부왕의 강력한 정책 확대. 유다왕 여호람에게 화친. 아내:이세벨, 종료적 암흑기:바알숭배 엘리야, 엘리사 활동시기. 아람왕 벤하닷과 트렌스, 요르단 긴장 → 길르앗 라못에서 전사. 은두달란트로 사마리아 삼 → 사마리아성 건축

8

아하시야




상 속

아 합

2년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전사

9

여호람

(=요람)

상 속

아 합

12년

아하시야의 동생. 어려운 환난 때 회개(자신의 죄, 부모의죄 →철저한 회개는 아님), 엘리사를 저주-아람왕 벤하닷이사마리아 포위했을 때 죽이려고 함(엘리사-아람군대장관 나아만을 치료함)

10

예 후

암 살

여호사밧

28년

부상 치료중인 여호람 암살. 유다왕 아하시야 죽임. 이세벨을 처참하게 죽임→엘리야 예언성취. 바알 제사장. 산당, 목상 전멸→여로보암의 길을 버리지 못함

11

여호아하스

상 속

에 후

17년

다메섹 아람왕 하사엘의 압박→앗수르의 다메섹 침공으로 해방(왕하8:12∼15)

12

요 아 스

상 속

여호아하스

16년

유다왕 아마샤의 공격. 엘리사 동쪽 창을 열고 3번 쏘라고 했다. 엘리사 죽음

13

여로보암

2세

상 속

요 아 스

41년

안정된 황금시대. 표면적, 형식적인 종교지도자. 아모스,호세아,요나 활동기. 가장번성기

14

스 가 랴




상 속

여로보암2세

6개월

살롬에 의해 죽음. 예후왕가 몰락

15

살 롬

살롬

암 살

야 베 스

1개월

므나헴의 혁명으로 죽음

16

므 나 헴

암 살

가 디

10년

답사에서 많은 사람을 죽임→답사 사람들의 반감. 앗수르왕 "불"이 공격→일천 달란트 조공

17

브가히야

상 속

므 나 헴

2년

부하 군대장관 베가의 반란으로 죽음

18

베 가

베가

무력정변

르 말 랴

20년

앗수르왕 디호랏 빌레셀이 이스라엘 공격. 트렌스 요르단, 납달리 온땅 점령→포로

19

호 세 아

호세아

암 살

엘 라

9년

베가왕을 죽임 앗수르의 보호받고 영토 축소 살만에셀 침공→조공바침B.C. 722멸망





통치기간

시기

업 적

1

르호보암

17

BC931~913

유다. 베내민 지파(약간의 레위지파) 솔로몬 말기의 영향-우상숭배

애굽왕 시삭과 전쟁으로 피해 금방패를 다 빼앗김. 세겜에서 즉위 선지자:스마야

2

아비얌

(=아비야)

3년

913~910

르호보암의 죄를 행함

40만의 군대로 80만의 여로보암 군대 이김→IS의 중심지 벧엘점령(종교중심지)-점점 강하여짐

3

아사

41년

910~872

개혁운동-선지자 아사라의 영향 우상을 철저히 제거(궁중에서 모범 모친 마아가(미가야)의 우상숭배로 태후의 위를 폐함) 남색제거-일평생 여호와 앞에서 온전-평안, 제단수축, 베냐민 유다지파의 성회선포→언약 새롭게, 큰전쟁;;①애굽, 구스군→하나님께 기도. 승리 ②IS바아사→다멕섹의 아람왕 벤하닷에게 의뢰→선지자 하나니 옥에 가둠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병이 남

4

여호사밧

25년

872~848

개혁운동. 레위사람 제사장. 방백들과 성읍을 순회하며 율법책 가르침. 암몬, 모압, 에돔연합군 침입→온백성 금식기도로 승리. 신앙과 정치를 분리시킨 실수 북IS왕 아하시아와 배를 지어 다시스에 가려다 파산.

대하20:12,22→찬양군대 조직 IS아합왕의 딸 아달랴를 자부로 맞음

5

여호람

32세-8년

848~841

비극. 부왕의 세속적 정치정책 따름. 북IS아합왕의 길(아내의 영향:아달랴)→다윗 언약으로 유지. 친동생(아사랴,여히엘,스가랴,아사랴,미가엘,스바댜)를 죽임. 바알의 우상종교 시작 국세약화(블레셋, 아라비아 침략-에돔과림나가독립함) 엘리야가 에언한대로(하21:20)비참한 최후(창자가 빠져 죽음).열왕의 묘실에 두지않음.

6

아하시야

42세-1년

841

여호람의 말째 아들. 22세 즉위 모친 아달랴의 영향. 북IS과 긴밀한 교제→아합의 길 북요람왕의 전쟁도움. 부상당한 요람을 병문안 하던 중 예후의 반란으로 므깃도에서 죽음(왕하9:27)

7

아달랴

6년

841~835

여왕. 아하시야의 모친 왕족의 씨 전멸(요아스만 살아남). 피의 숙청(모친 이세벨의 영향)바알종교, 부흥→종교적 암흑기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란으로 유다 국민들의 칼에 죽음

8

요아스

7세-40년

835~796

여호람의 딸 여호사브앗(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 6년간 숨겨키움-유다왕국 6년간 끊어진 것 계승. 북IS과 평행시대 파괴된 성전수리-영적부흥(여호야다의 생존시에만)-여호야다 죽은 후 아세라 목상 세움. 경고한 선지자 스가랴(여호야다의 아들)를 돌로쳐 죽임:우상숭배 허락

9

아마샤

25세-29년

796~790

국력 쇠약.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 IS공격실패-포로가 됨(에돔신에게 기도했음) 백성들의 모반으로 피살

10

웃시야

(=아사랴)

16세-52년

790~752

유다의 번성. 가장 강력하고 유능한 왕 잃었던 땅 탈환. 영토확장. 산업정책, 군대조직 재편성. 백성들의 사치, 물질주의 와의 교만-제사장 직분 무시. 제사장 아사랴의 충고를 듣지 않고 분향하려다 문둥병으로 죽음-이사야가 기록-문둥병으로 묘실곁에 장사함.

11

요담

25세-16년

752~742

부왕의 좋은점을 계승. 신앙적 경건 부왕의 신축공사 완공. 군사적 유지→계속적 번영은 종교를 타락시킴. 이사야가 심판경고

12

아하스

20세-16년

742~725

국력쇠약(아람IS왕의 압력12만이 죽고 20만이 포로됨-오뎃의 만류로 돌려보냄), 친앗수르 정책→선지자 이사야 잘못된 정책 책망.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에 재물을 주고 앗수르왕 다글랏 빌레셀에게 도움 청하였으나 궁박만당함.종교적 타락(예루살렘 성전 폐쇄).열왕의 묘실에 들지 못함.

13

히스기야

25세-29년

725~697

조상 다윗의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함. 성전청결(정월초하루~16일). 유월절 행사(때 늦은 2월에, 전이스라엘/유대백성을 모음)-솔로몬이래 가장즐거운 행사(부정한사람을 위한 히스기야의기도).종교개혁-유다성읍의 주상과 아세라목상을 찍고 산당과 단을 멸하고번제를 지키고 십일조를 명확히함.앗수르와 산혜립 침략시 방벽을 쌓고 이사야와 함께 기도로 물리침-산혜립은 귀국 후 아들에게 살해됨.기혼샘에서 히스기야터널을 파

14

므낫세

12세-55년

697~642

암흑시대 긴 통치기간이 유다 부패. 우상숭배. 사술을 즐김. 정책 반대한자→무고한 피흘림. 하나님의 징계로 앗수르 포로→귀환.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임

15

아몬

22세-2년

642~640

부왕의 타락한 정치 반복. 신복의 반역으로 살해됨.주변정치 경제→격동기 신흥 바벨론 두각(앗수르 약화)

16

요시야

8세-31년

640~609

유다 창건이래 가장 행복했던 시기. 온백성이 하나님만 섬기기로 서약. 철저한 개혁운동-솔로몬 우상. 신당. 북여로보암1세 우상제단 빻아 가루로 만들어 뿌림. 우상숙청작업(북IS까지 영향). 성전수리시 제사장 힐기야가 율법책 발견  서기관 사반에게 주어 왕 앞에서 읽음→옷을 찢으며 회개 여자선지자 훌다에게 묻게함. 사무엘 이후 모세율법에 의해 가장 성대하게 유월절(정월 14일) 지킴. 애굽왕 느고가 갈그미스치러 롱라가는 것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호ㅓㄹ멎아 부상 예루살렘에서 죽음.요시야 13년에 소명받은 예레미야가 애가를 지음.

17

여호아하스

23세-3개월

609~608

요시야의 4째 아들. 요시야왕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백성들이 왕으로 추대→애굽왕 느고가 폐위(포로로 잡아가 죽임)

18

여호야김

25세-11년

608~597

요시야 둘째아들. 애굽의 조공 위해 백성을 득징. 사치한 마음(큰 궁전. 재물소배).선지자 우리야 죽임. 예레미야의 두루마리 불태움→암흑정치.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침입. 포로로 잡고 성전기구 가져감.

19

여호아긴

(=여고냐)

8세-3개월

597

바벨론 1차 포로시 에스겔과 함께 끌려감. 바벨론 왕궁에서 먹으며 일용할 모든 것을 일평생 공급 받음.

20

시드기야

21세-11년

597~586

여호야긴 숙부. 여호야긴 포로 후 섭정자(통치력 부족), 반 바벨론파, 친애굽파→바벨론 배신→공격(느브갓네살). 예루살렘성 함락. 남은자의 총독:그답리야B.C. 586 멸망


바벨론의 포로 시기


바벨론의 포로 시기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언급하자면, 천지창조, 아브라함의 소명, 출애굽, 다윗왕조의 흥왕(興旺)과 몰락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그 귀환 등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의미에 관하여 잘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구약이해와 성경이해 더 나아가 역사이해를 위해서 귀중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건에 관한 이해나 평가가 단순치 않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관한 자료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으며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이지만, 더 큰 이유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정확하게 70년으로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수차례 언급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혹은 그것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객관적인 70년으로 수용하지 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심도있게 다루면서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관련하여 우리가 풀어야할 문제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스라엘의 포로시기를 살펴보려면, 그 역사의 전후를 조사하여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 후(B.C.722년)로부터 남왕조 유다가 멸망당할 즈음의 역사1)가 간단치 않으며 또한 열왕기와 역대기 외에도 여러 선지서자들의 글들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와 함께 그 정황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앗수르의 바니팔(오스납발, B.C 668-632, 역대하 33:11-13;  에스라 4:10) 왕이 죽은 이후, 앗수르에서는 온 나라를 내란으로 몰고가는 큰 혁명이 일어났다(B.C 627-624). 그리고 이 혁명은 결정적으로 앗수르의 파멸을 초래하였으며 당시의 바벨론은 이러한 혼란 상태를 이용하여 독립을 되찾았다.

북왕조 이스라엘이 무너진 지 110년이 지난 후 유브라데스 강변의 신흥국가인 바벨론이 결국 메데제국을 몰락시키고 세계 정세에 있어서 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2)

그 후 바벨론은 B.C. 612년에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시키면서3) 결국 구약성경의 중심 배경이 되는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 지역은 애굽과 바벨론의 세력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4) 즉 고대로부터 계속이어져 오던 근동지역의 패자인 애굽의 세력과 신흥 바벨론의 힘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당시 국제정세를 흔드는 두 축이 되었다.

비록 예전의 최고 강국이었던 앗수르가 신흥 바벨론과 메데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으나(B.C 612), 아직도 앗수르 지역에는 앗수르의 잔류군이 남아 있었으며 또한 바벨론도 아직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이 틈을 타서 고대 근동의 전통적인 강국인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회복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로 알아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을 치려하였다. 그러자 앗수르의 남은 백성들은 하란으로 모여서 전력을 재정비하였고 애굽과 대항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거점을 확복하기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항거하며 하란을 탈환하려 하였다. 이 때 바벨론의 바포폴리살 왕은 이를 감지하고 군대를 이끌고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들을 쳤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마저 격퇴하였다.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패권(覇權)의 윤곽이 완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사건에서 남왕조 유다의 요시야 왕은 애굽 군대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갔다가 전사하고 만다(B.C.609).5) 이러한 상황은 B.C. 605년까지 계속이어 오고 있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갈그미스(Carchemisch) 전쟁에서 애굽의 주력 부대를 완전히 격파하였고, 또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가고 애굽의 하수까지 남하하였다(왕하 24:7). 따라서 이 전쟁을 계기로 바벨론은 명실공히 고대 근동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 역사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갈그미스 전쟁 중에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1차 포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B.C.605년)6). 성경에서는 분명히 유다가 완전한 멸망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러 징조들을 보이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B.C.605년의 제1차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씀하셨고 70년 동안 포로가 될 것이라 하셨다.7)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바벨론의 활동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의 세력 판도가 달라짐에 따라 애굽왕 바로느고의 봉신이었던 여호야김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B.C. 601년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왕하 24;1), 이로 인하여  B.C. 598년 12월에 다시금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왔다. 그 결과 유다의 여호야김 왕은 죽고, 이어서 18세인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계승한다. 그러나 여호야긴왕의 통치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가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갔으며(B.C. 597년), 시드기야(B.C. 597-587년)8)를 왕으로 세운다. 시드기야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하여 바벨론에 항거하였는데, 결국 B.C. 586년에 느브갓네살의 친위 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온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각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 역사를 정리해보자면 B.C. 605년의 갈그미스 전쟁에서 바벨론은 유다를 치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를 잡아갔는데, 이때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상류층의 인사들이 함께 끌려간 것으로 보는데(단 1:1-6) 이것이 이스라엘의 제1차 바벨론포로가 된다. 제2차 바벨론포로는 B.C. 597년에 일어났는데, 이 당시에 끌려간 유대인 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에스겔 선지자를 언급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말과 관계되는 제3차 바벨론 포로는 B.C. 586년에 이루어졌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짓밟히게 되고 또한 예루살렘성전은 시드기야 9년에 포위되어 결국 시드기야 11년(B.C. 586년 7월)에 완전히 함락되고 만다. 이 때 시드기야 왕은 몰래 도망을 치다가 잡혀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갔으며, 자신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왕은 두 눈을 뽑히고 또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갔다. 이런 일련의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400여년 전통을 이어온 솔로몬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때부터 디아스포라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한 기한이 차게 되어, 그들이 포로 잡혀간 지 약70년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허가를 받았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이 세 차례(B.C.605, 597, 586)에 걸쳐 진행되었듯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의 귀환하는 것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 제1차 귀환은 B.C.538년에 왕통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그의 인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49,897명이 귀환하였다(1:5-2:70)9).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제2차 포로귀환은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B.C. 457년(아닥사스다왕 7년)에 일어났는데, 에스라의 인도 하에 1,754명이 귀환하였다(스 8:1-14)10). 그리고 제3차 귀환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B.C. 444년에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귀환하였다.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그 귀환에 관하여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서 9:1-2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11)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12) 하신 것이니라”

 

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는 에스라서13)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스1:1-2)14)

 

여기에 등장하는 고레스15)는 B.C.559-530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은 왕으로 B.C.538년에 조서를 내려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포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B.C.605-538년이므로 67년이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제2차 혹은 제3차 바벨론 포로로부터 바벨론포로 기한을 규정한다면, 그 기간은 훨씬 더 많이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수차례 강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란 것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에 관한 많은 글들을 살펴보면,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간과하고 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경향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고 지나간다. 첫째, 실제로 67년이지만 마치 70년으로 생각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67년이나 70년 별 차이가 없고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작업인 듯이 보일지 몰라도, 이 부분을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연구에 있어서 자료의 빈곤과 풀리지 않는 다른 많은 문제들 속에 파묻혀 슬쩍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바벨론 포로의 70년이란 것은 상징적인 수로 인식하며 그 해석을 첨부한다. 이것은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1).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이스라엘의 달력에 따르자면, 매 7년이면 안식년이고 또 이런 안식년의 10번(완전수)을 곱하는 것(7X10=70)으로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를 통하여 충분한 안식을 취한 후에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세 번째의 설명으로는 그 동안 이스라엘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만큼 안식을 취하게 하였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근거와 타당성이 미흡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종합하고 발전시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으로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심판 중에 가장 혹독한 심판으로 철저한 징벌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에서 뽑혀 이방의 땅으로 그리고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권과 관련된 것으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심판사상과 관계된다. 두 번째 입장은 이것에 더 나아가 대하 36:21에서처럼 ‘안식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로생활 70년은 심판의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의 자리에 영원히 버려두시지 않고 회복시키는 분명한 소망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황무한 토지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며 새로운 경작을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 심판을 통하여 정화되고 정결케되어 새로운 시대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며 소망을 가지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동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67년을 70년으로 주장하기에는 그 마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가능성을 다음 단락에서 다루고자 한다.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의 사명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학개서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사실 ‘학개’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나 혹 그곳에서부터의 포로귀환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학개서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다만 제2성전건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16) 그러나 이 성경을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먼저 학개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포로이후의 역사에 관하여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B.C.539년에 고레스는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였고, 그 이듬해에 모든 유대인들은 고국에 돌아가도록 선포하였다. 당시에 약 5만 가량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열정과 의욕을 가지고 황폐한 땅에 돌아와 정착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면서 성읍들도 다 재건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만들고 또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수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먼저 제단을 쌓아 번제를 드렸고(에스라 3장) B.C.536년에 이르러서는 성전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의 기초만 공사하고(B.C.534년)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17)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흘러 B.C.520년이 되었다. 다리오가 왕으로 등극한 그 다음 해인 당시까지도 제2성전 공사에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부호들은 안락한 대궐을 짓는데 많은 투자를 하지만 성전은 돌보지 않았고(학 1:4), 일반 백성들은 또한 여러 재해와 어려운 일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 공사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학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재난과 농사일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며(학 1:10-11) 이것이이 주의 성전 건축을 게을리 한 그들의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너무나 바빴다(학 1:9). 이 때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로 성전 건축을 하라고 명령하신다.

 

결국 학개와 스가랴의 권고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성전재건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으며 결국 B.C.516년에 제2예루살렘 성전이 완공하게 된다. 새롭게 완성된 성전이 비록 예전의 솔로몬 성전과 같은 위용이나 웅장함이 없으나18) 더 영광스러울 것을 말씀19)하시며 이 부분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와 은혜와 감격의 말씀으로 부어주신다.20)

 

물론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이 B.C. 520년 이전이나 혹은 그 이후에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21)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 1:1-2)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권면하는 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우리의 사고를 더 확대해보자.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이라고 하였으나, 그 년수가 실제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무너지고 성전이 재건되기까지의 기간을 따져보면 공교롭게도 70년이 된다(B.C.586-516). 만일 이 문제를 우연에 의한 70년으로 보지 않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해하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전이 훼파되고 성전이 재건되는 이 기간이 70년이 되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강조되는 개념 중의 하나가 “남은 자 사상”이기에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이전 혹은 이후의 역사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혈연적 이스라엘이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선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지역적으로 혹은 혈연적으로 한정되는 그룹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많은 본문을 볼 때,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본질과 관계된 것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한 범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선포 등이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더 나아가 진정한 이스라엘로 등장하는 것을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것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진행된 나라의 백성으로 예배 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 이스라엘은 혈연이나 지연에 의한 이스라엘은 아니다. 물론 혈연과 지연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즉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전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는 없지만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시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70년이 가지는 의미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 문제가 이스라엘의 본질과도 밀접한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과 관계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즉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그분의 간섭과 인도와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인데,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절망의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 기간은 성전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던 영적인 방황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이 바로 70년이다.

 

이러한 성전의 문제는 구약으로 끝나지 않고 신약에서도 중요한 논쟁으로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되심을 말씀하는 것과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나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그것이다. 물론 신약시대에 와서는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구약시대의 사고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만나며 또 그분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성전이 있었던 것이다. 성전 개념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회막을 보아도 그것은 언제나 이스라엘 진중에 있었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회막은 평상시에는 이스라엘의 중앙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사상) 또 그들을 다스리는 상징이기에,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회막은 이스라엘의 이동시에는 온 백성보다 앞장서서 나가기에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아가는, 즉 이스라엘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결국 이스라엘의 정체성과도 분명히 연관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통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학 1:5-7)

 

하나님의 영광으로서의 교회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지 약 100여년 후에 바벨론의 침입이 있었고 또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는 견고하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훼파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이며 거룩하고 장엄하고 찬란하게 여기던 성전,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온 천하가 다 무너져도 살아계신 이 하나님이 계신 이 성전은 결코 무너지거나 패함이 없을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안전할 것이라고 하며,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치며 확신하며 보증하며 보장했던 그 성전(렘 7:1-10)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용되던 그릇과 모든 것들은 이제 이방신들을 섬기는데 이용되게 되었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왕은 눈이 뽑히고 목배임을 당하였다.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그 이스라엘과 왕족들은 또 노예처럼 이방 땅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사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며 이방 사람들을 개나 돼지처럼 인식하며 대하였는데, 이제는 다 그들의 포로가 되어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 힘든 포로 생활을 끝내고,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는 그 기간 역시 여전히 힘든 기간이며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이스라엘 중심에 있어 그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이끌던 성전이 없어진 지 오래며 또 그 성전을 재건하자니 방해도 있고 또한 각자의 일들이 많아 그 일은 더욱 외면당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며 또 그와 함께 활동하였던 스가랴와 함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의 회복 곧 성전의 재건을 무엇보다 먼저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22)

 

이 문제를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학개의 등장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일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수차례 경고로 주신 어려움 가운데서 그 어려움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더더욱 성전 건축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 진척 또한 시키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시는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 즉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곧 그들이 성전이 없이 지내야만 하는 70년의 기한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 성전재건의 일을 담당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이것을 일깨우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제2성전은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결국 이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학개 2:9에서의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라는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기도 하다.23) 그러나 이 일은 옛 조상 다윗이 많은 돈으로 준비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국가적인 정책으로 대대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스스로를 자각하며 또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감당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백향목이나 은금과 같은 호사스러운 재료가 아니라24) 주위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학 1:8a). 즉 그들이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즉시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외형에 있어서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의 말씀으로 은혜를 더하신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 1:8b),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9).

 

이 성전의 재건이란 단순하게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의 재건의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무너진 옛 다윗 왕권의 회복이나 그 영화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간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솔로몬 성전과 같거나 비슷한 재료로 짓도록 명령하였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스가랴서나 신약성경과 연관하여 볼 때, 장차 도래할 메시아 시대에 대한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5) 즉 다시 세워진 성전 곧 회복된 시온과 예루살렘에 그 나라를 다스릴 왕이 찾아오시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26)

 

적용 : 한국교회사에서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교회사를 정리하다 보면 여러 사건에 대하여 “바벨론 포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간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포로는 아니지만, 이런 용어가 실제로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13세기 말부터 세속권력에 의하여 교황이 로마에 있지 못하고 프랑스에 체류한 ‘교황의 바벨론 유수’를 들 수 있겠다.27)

또 다른 유명한 예가 바로 루터에게서 발견된다.
루터는 1520년에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와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세편의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등장하는 제목이 바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카톨릭의 성만찬론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세 가지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벨론 포로’ 상태28)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문맥을 같이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도록 하자. 현시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북한” 혹은 “북한교회”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 부분은 첨예한 주제여서 논자가 감히 화두를 던지기가 쉽지 않으나, 역사를 전공하는 자로서 역사이해에 관한 조심스러운 시도를 펼쳐 보이고자 한다. 우리는 북한의 실정을 여러 통로를 통하여 듣고 또 북한교회가 당하는 핍박과 고통을 안다. 이런 상황도 “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는가?

 

만약 이렇게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명명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그 원인 분석에 관한 것인데, 우리는 쉽게 북한의 공산당을 큰 원인의 하나로 설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타당성을 가지며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이 ‘교회(敎會)’라는 것을 고려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다시금 짚어보고자 한다.

오늘의 논지와 관련하여 논자는 1938년 9월9일 평양의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를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말하자면, 삼엄한 경비 곧 193명의 총대들 틈에서 약 100명의 경찰들이 그 총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가운데 각본대로 진행된 총회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한국교회는 교회 스스로가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으로 가결하고 말았다.29)
물론 일제시대에 일본의 핍박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아직도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고 있다.
주기철 추모사업 등 여러 행사들이 있었음에도, 그 동안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에 대하여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에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물론 나중에 남북이 분단되고 공산당의 억압과 핍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라는 영적인 단체를 고려한다면,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곧 교회의 교회됨을 스스로 무너뜨린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문밖교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이 있은 지 벌써 83년이 지났습니다(2021년 기준).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남북한의 문제 통일문제 등에 관하여 고려해야할 시기이며 또 여전히 북한을 위하여 여러 가지 물질로 혹은 다른 무엇으로 돕고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사를 생각하면서 현재 한국교회가 제일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문제를 넘어서 마치 학개서에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처럼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곧 “자신의 소위를 돌아보라”라는 말과 같이 우리의 모습과 과거사를 추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학개 1:5, 7).

교회가 교회답게 서기 위하여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고, 먼저 한국교회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 된 교회를 이루어가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평양에 대하여 “동방에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그 명성과 영화보다 더 큰 영광과 위로와 은혜로 한국교회 위에 부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 중에 기다린다.

 


1) 바벨론왕: 느부갓네살(B.C.605-562);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와 예루살렘 성전파괴,
   페르시아(바사)왕: 고레스(Cyrus, B.C.558-530); 제1차 포로귀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다리오1세(Darius, B.C.522-4860); 제2성전 완공. 아하수에로(Xerxes, B.C.485-465); 에스더와 모르드개. 아닥사스다1세(Artaxerxes, Iongimanus, B.C.464-424); 에스라와 느헤미야.

2) 나보플라사르(Nabopolassar) 역대기를 참조하라.

3) 이 사건에 관하여서는 구약 성경의 ‘나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4) P. M. Masters, A tour of biblical evidience in British Museum, London, Sword & Trowel, 1983, P.15.

5) 왕하23:29-30과 대하35:20-27. 두 성경 본문을 비교하여 살펴보면 요시야 왕이 죽은 곳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6) 이 부분에 관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 시대적 배경은 여호야김은 아버지(요시야)와 동생(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유다 18대 왕으로 등극한다. 요시야가 전사하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애굽에 의해 폐위되어 잡혀가고 형인 여호야김이 왕이 된다. 여호야김은 애굽과 앗수르의 남은 군사들이 연합하여 바벨론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를 통하여 바벨론을 배반했고(왕하24:1) 애굽편을 들었으나, 갈그미스 전쟁이 바벨론의 승리로 끝나자 결국 유다는 바벨론의 노여움을 샀으며 예루살렘은 점령되고 왕족과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관하여 성경은 두 가지로 말하기 때문이다. 왕하 24:1절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올라오매....."에서 보듯이 예루살렘에 대한 느브갓네살의 정복은 열왕기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왕하24:1, 대하36:6,7 B.C. 605년). 그런데 이것을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렘25:1).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유다와 바벨론의 연대기 산출방식의 차이로 인정하며 B.C. 605년으로 인정한다.

7) 렘 25: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하되”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8) 요시야의 아들이며 바로 앞 대의 왕인 여호야긴의 숙부.

9) “유다의 목백(왕자)”라고 하는 세스바살에 의해 42,360명, 노비 7,337명 그리고 노래하는 자 200명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슬바살과 스룹바벨과의 관계도 논의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본 논고에서는 다루지 않음.  

10) 남자 1,496명, 레위인 38명 ,수종자 220명.

11) 다니엘 6:1에 나오는 다리오와 동일 인물로 보이며, 그가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Astyages왕)을 이어서 왕이 되었다고 하며 이를 원년(元年)이라고 규정하는데, 다리오가 부친을 계승하여 매데의 왕으로 취임한 것으로 보지 않고 대신에 고레스가 물려받은 뒤이며 여기의 다리오는 바벨론의 한 지역인 갈대아 지방의 왕으로 취임한 것으로 간주한다.

12) 렘 25:11-13과 29:10의 내용을 가리키며 실제로는 70년이 아니라 아무리 많이 잡아도 67년이다.

13) 에스라서에 기록된 것은 연대적 순서에 따라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성전 건축 때의 일과 성벽 건축 때의 일이 겹쳐서 등장하며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00여년의 이스라엘 역사를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 성경이 일반 역사의 기록을 따르지 않고 구속사라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역사 기록이라고 한다.

14) 비교. 대하 36:22-23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15) 참고. 이사야 44:28-45:4. 페르시아(바사)왕인 고레스(Cyrus)는 B.C. 558-530년 동안 왕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다. 스5:13에서는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묘사하고 있고, 더 특이한 것은 스6:22에서는 “앗수르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표면적인 역사 이해로 본다면, 이것은 분명히 역사적인 오기(誤記)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각주에서 언급하였듯이 독특한 구속사적인 안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분명한 역사적인 오기처럼 보여도 그 문맥에 있어서 더 타당성을 지닌다. 왕하 17장에 나타나는 “앗수르 왕”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을 들어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심판하고 천지 사방으로 흩으시는데, 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을 새로운 언약공동체로 회복시키는 것이기에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고레스는 비록 페르시아 왕이지만 앗수르 왕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라5장에 나타나는 “바벨론 왕”이란 표현은 그 문맥에서 본다면 성전파괴와 관련된 표현으로 “바벨론 왕”을 언급하고 있다. 즉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기구가 옮겨졌는데, 고레스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실패와 징벌에서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기에 고레스를 “바벨론 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분명한 의도를 가진 역사기록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6) B.C.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79) p.464.  

17) 참고 W.E. Hogg, 제2성전의 기초, 윤영탁 역 in: 구약신학논문집(5) (합동신학교 출판부, 1988) p.219-228.

18) 학 2: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

19) 학 2:6-9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0) 참고 F.I. Anderson, 누가 제2성전을 재건하였는가? 윤영탁 역 in: 구약신학논문집(5) (합동신학교 출판부, 1988) p.229-260.

 

 

21) 이 시기를 정확하게 언급하자면 다리오 왕(Danus Hystapes, B.C.522-485) 2년 6월 1일에 있었다. 그리고 공사는 1:15절에 나타나듯이 24일에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달력에 의하면 유월은 1년 중에 가장 바쁜 계절인 추수기에 해당한다. 결국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지막 추수에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기인데, 성전 공사를 재개한다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전건축은 육체의 생명과 관계되는 추수보다 더 중요하며 근본적인 것이기에 이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2) C. Hassell Bullck,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rophetic Books, 류근상 역, 크리스챤출판사 2001, p.419-430.  

23) 이 사실에 대한 더욱 분명한 증거는 학개의 동역자이며 동시대의 선지자로 부름받았던 스가랴에 의해서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슥 6:12-13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돌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참고 T.V.  Moore, 스가랴주석, 윤영탁 역 (서울: 엠마오 1983). p.96-102.

24) 왕하 6:11-7:51

25) 윤영탁, 학개 2:18과 제2성전 재건, in: 구약신앙과 신학, (엠마오, 1991), p.156.

 

26)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와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와 비슷한 구절로는 사 2:1-2을 고려해 볼 수 있다.  

27) 프랑스 왕인 필립 4세 세속 권력이 신장하자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 싸워 아나니 사건(1303)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1305년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인 클레민스 5세를 강력하게 간섭하여 로마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교황은 초기에 아비뇽 북동쪽에 있는 카르팡트라스에 정청을 설치하고 클레멘스 6세 때인 1348년 프로방스 백작 겸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파리 왕궁을 모방한 호화스러운 교황청 궁전을 건조하였다. 우르바누스 5세 때 일시적으로 로마에 복귀하였으나, 교황청의 주요 기능은 여전히 아비뇽에 잔류하였다. 결국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의해 교황청이 본격적으로 로마의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28)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금하는 것과 화체설 그리고 미사가 희생제물이라는 것에 대하여.

29) 총회 60년사, 1973, p. 30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 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追)히 국민 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항국 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암송해야 할 10가지 성경구절'(10 Bible verses every Christian should know by heart)

영국 교계 유력지 크리스천투데이 마크 우즈(Mark Woods) 객원 에디터는 4일(현지시간) 게재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암송해야 할 10가지 성경구절'(10 Bible verses every Christian should know by heart)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성경 구절을 암송해야 하는 이유와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10가지 필수 암송 구절을 소개했다.

우즈는 "어린 시절부터 성경의 구절들이 늘 떠오를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한다"라며 암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암기는 정말 특별한 일"이며 "당연하게 그 과정을 받아들이지만 암기가 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론에 암기의 놀라운 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최근 신경과학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영국의 세 명의 연구가들은 암기를 통해 정보가 두뇌에 저장되는 그 비밀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우즈는 "암송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다"며 "구글(google)이 있는데 암송할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가? 두뇌의 정보처리 능력을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는데 단순 사실을 저장하는 일에 낭비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러나 컴퓨터가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해 줄 수 없으며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 꼭 들어야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나는 어린 시절 주일 학교를 다니면서 성경 구절을 암송했다. 그것이 주일학교 교육 과정의 핵심( key)중 하나였다. 반복해서 구절을 읽고 암송하면서 얼마나 많은 성경 구절이 내 마음에 심겨졌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끝으로 마크 우즈는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성경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유이다. 내가 가장 필요할 때마다 성경 구절들을 쉽게 떠오르고 찾을 수 있다"라면서 "성경 구절들이 내 마음에 심겨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주일 학교 선생님께 감사하다"며 성경 암송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을 가르쳐야 하는가?"

다음은 마크 우즈가 제안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외워야 할 10가지 필수 성경구절'이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신31:6)

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시119:103)

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6.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7.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8.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9.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10.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3:1)


학개


학개(Haggai)

1. 명칭

파사의 고레스왕이 주전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하여 파사 제국에 통합하고 정복한 모든 민족에게는 회유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그들의 고유의 종교를 믿는것과 고국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 하였다.
이 정책은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그리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들이 큰 희망을 안고 돌아왔다.
그러나 어려 움이 많았다.
15년간이나 성전 재건을 힘썼으나 결과는 실망적이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즉 다리오왕 제2년(520년)에 두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났다.
바로 학개스가랴이다.
에스라서에 의하면(스 5:1, 스 6:14)이 두 예언자의 활동의 결과로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번영하였다.

에스라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에스라 6:14-15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고레스다리오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다리오
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성전 재건 시작일 : 6월 1일
성전 재건 재개 : 6월 24일(학개 1:15) 다리오 왕 2년 6월 24일
성전 재건 완성 : 9월 24일

학개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길이 없다.
짐작컨대 포로시기에 바벨론에서 출생하여 살다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사람인것 같다.
만일 이 가정이 옳다면 그는 바벨론에 있을 때 다니엘과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7월 24일(토)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학개 1: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찌니라.

 ♦ 7월 24(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학개 1: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5절)
♦ 성구 :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萬軍)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自己)의 소위(所爲)를 살펴볼찌니라.  

선지자 “학개”라는 이름은 “축제” “절기”라고 합니다.
B.C. 586년에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편 137:1∼4)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비로써 예루살렘에서 자유롭게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 큰 즐거움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바사(페르시아)제국에게 패하고 고레스 왕은 즉위한 후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BC. 538년).

스룹바벨의 인도를 받아 약 50년 만에 5만 명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편 126:1)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감격 속에 훼파된 성전을 다시 세우시기 시작했습니다(BC 536년). 성전이 다시 세워질 때 모두 기쁨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신들도 성전 건축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스룹바벨과 지도자들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아시리아 제국의 혼혈 정책으로 이미 이방인의 피가 섞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심 산에 그들의 성전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건네기도 하고, 투서를 보내기도 하며, 성전 건축을 집요하게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다 백성들도 건축하다가 만 성전이 방치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6년이 흘러 BC 520년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가 학개입니다.

1:1∼6, 성전 재건하는 일을 태만히 하던 백성들에 대한 질책
1:7∼11, 성전 재건에 대한 격려
1:12∼15,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증거

처음 사랑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완전히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믿음의 길을 걷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그 은혜를 증거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남은 생애가 복되고 보람된 날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 찬양 /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7월 26일(월)
평강을 주리라(학개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 7월 26(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학개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평강을 주리라(9절)
♦ 성구 : 이 전(殿)의 나중 영광(榮光)이 이전(以前) 영광(榮光)보다 크리라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平康)을 주리라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의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성전 재건을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학개는 성전 재건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7월 21일). 성전을 짓기 시작한 날이 6월 24일이었으므로 27일이 지나는 마침 장막절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제1의 성전(솔로몬 성전)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에게 제2의 성전(스룹바벨 성전)은 너무 초라하였기에 실망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3절).

당시의 상황을 에스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에스라 3:12∼13).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믿음의 사람은 성전의 겉모양이 아니라 성전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일지라도 그곳에 모일 수 없는 현실은 성전이 아니라 초라한 건물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초라하고 작은 성전일지라도 그 안에서 날마다 찬송과 말씀과 기도가 끊임이 없다면 그곳은 거룩한 처소가 될 것입니다.

성전이란 주님이 늘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외부의 압력에 의해 모이지 않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실까요?
그러나 외부의 압력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배가 생명이라고 확신하며 순교자적 믿음으로 모여서 예배할 때 주님은 그곳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비록 초라하게 보이는 제2의 성전일지라도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찬란하게 될 수 있으므로 멈추지 말고 성전 재건을 계속해야 한다고 격려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 안의 성전을 지금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요?
나를 주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에 따라 오늘도 먼저 안에서 무너지는 성전을 새롭게 세워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학개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솔로몬 성전을 목격했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다시 건축하는 스룹바벨 성전이 너무 초라하기 때문에 실망하였다.
이때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에게 이르시기를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는 말씀을 전한다.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 엩텐 샬롬 / I give peace!

이곳 : 초라한 성전(솔로몬 성전과 비교 할 때)

평강(샬롬. shâlôwm) שָׁלוֹם
온전한, 충분한, 안전함, 건전함, 평화, 일치, 조화, 친교 

평강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학개 2:4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찌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굳세게 하라!
하자크(châzaq) חָזַק

1. 단단히 매다   2. 굳게 유지하다

학개 2:7b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학개 2:12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 2:13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근묵자흑 근주자적 거필택린 취필유덕
近墨者黑 近朱者赤 居必擇隣 就必有德

먹을 가까이 하는 이는 검어질 것이요, 인주를 가까이 하는 자는 붉어질 것이니
살 곳을 택할 때는 이웃을 살펴야 하며, 나아갈 때는 덕이 있는 이를 향하여야 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언 13:20)

영어 속담으로는 "If you lie down with dogs, you get up with fleas"
개와 함께 뒹굴면 벼룩을 덮어쓸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개 2:14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평강이란?
거룩을 회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거룩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은
재건하는 성전이다!

학개 2:19b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오늘의 기도

거룩한 백성의 삶에 참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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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강 학개 1: 1- 6
너희 행위를 살피라

예루살렘에 성전을 최초로 지은 사람 이름이 누구이지요?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제1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재건한 성전을 제2의 성전 또는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을 때에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 대왕이 수리를 하였으므로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는 여건이 좋았어요 아버지 다윗이 막대한 부를 축적해 놓고 아들이 그 조건 아래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스룹바벨 성전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지었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 재건되었습니다.
성전 건축이 계속 된 것이 아니었스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정치적 모략에 의해서 멈출 때도 있었습니다
 
외국에 있는 예배당들 보면 백년 이상 건축해온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수 백년을 건축해온 예배당도 있습니다.
스페인에 가면 바로셀로나에 사그라다 파밀리아라고 하는 성 가족 교회가 그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가우디라는 건축가가에 의해서 100년이 넘도록 지금도 짓고 있습니다.  

성전 건축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자 중단하기도 하거든요.
그 때 성전 건축을 해야 될 이유를 깨우친 선지자가 학개입니다.

학개 선지자와 더불어 성전 재건을 깨우친 선지자는 스가랴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참담한 기억이 있다고 하면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경험일 것입니다.
 
바벨론이 여러차레 침략하면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갔는데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 것은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부터 귀환하게 된 것은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서 주전 538년경에 돌아오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간지 70여년만에 돌아옵니다.

돌아 온 시간이 그만큼의 세월은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습니다 그만큼의 포로로 잡혀가 있다  인생의 상당한 기간을 전반 이상을 포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씁씁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해서 돌아와서 예배를 회복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성전을 지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제단을 만들고 에스라 3장 4절 최초로 초막절 절기를 지켰어요
 
 
  얼마나 감동적이었겠어요  상당히 큰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와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이 제단을 만들고 초막절 축제를 하고 그러자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우리도 비용을 낼게 우리를 동참할게 하는 것이어요
 
  유다인은 물론이고 사마리아인들도 우리도 도울게 고맙지 않아요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 드릴 생각이 없었어요 왜냐 하면 우리는 저 당에 잡혀 갔어도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의 습속을 신앙의 순수성이  무너졌을 것이다
 
  이들의 도움을 받는것은 성전을 짓는 일에 적절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문제는 우리가 일제에 해방이 되었을 때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분들이 신사 참배에 동참한 사람들을 저 사람들은 변절된 사람들이야 이렇게 이야기하고
 
  신사 참배한 사람들은 참해 하면서 속 상해하던 일이 있거든요  똑 같은 일이 역사속에서 반복이 되고 있는데 나도 동참 시켜줘 안 돼 너희는 너희는 더러워 거룩이라고 하는 게 더럽혀짐과 관련된 개념이거든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거룩하지 않아 하는 말이지요  그 때 여러분 나는 더럽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 사람들이 싫어져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들을 끌어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해하고 위에 편지를 보내는 것이어요 이 사람들이 성전 건축한다고 하는데 페르시아 임금에게 복종하기 보다는 다른 임금에서 복종하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 것이야 이것 막아야 돼 이런 식으로 합니다
 
  에스라 4장 이런 식으로 무기를 들고 위해를 가하려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니까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졌어요 그래서 중단이 됩니다 얼마동안 중단이 되느냐 하면 근 20년 가까운 시간 중단이 됩니다
 
  시작을 해 내놓은 데 20년간 방치를 해요 정말 흉물 스럽습니다 기원전 516년에 준공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바로 학개 예언자입니다 그 무렵 20년이 지났을 때 돌아온 사람들도 삶에 지쳤어요 돌아올 때는 희망이 있지 않아요 내 고향에 돌아오면 우리가 자유인으로 멋지게 살 것이야 삶이 너무 힘들어 흉년이 들고 먹을 것 부족하고 인심이 흉흉하고 머물러 있던 사람하고 갈등 때문에 삶이 힘겨워요
 
  그 때는 공적인 어떤 일을 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 너무 힘든 것이야 거기에만 몰두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 건축에 대한 열정도 싫고 성전을 건축할 만한 여럽이 없다고 스스로 느껴요
 
 
  바로 그 때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어요
  1절 다리오왕 제 이년 여섯째 달 곧 그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가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우리가 예언서를 보다 보면 예언자가 부름을 받았던 때를 늘 적시를 하지 않아요 대게의 경우에 그 때 무슨 무슨 임금 시대에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에 이야기 되고 있는 임금 이름이 누구지요 다리오 왕
 
  그런데 이미 다 아시겠지만 다리오는 유다의 임금이 아닙니다 유다의 임금이 아니어요 이 사람은 다리오는 누구냐 하면 페르시아의 임금입니다 성경에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를 이야기 할 때 이렇게 유다 임금이 다른 나라 임금 이야기 하는 것이 드물지요
 
  학게는 다리옹 때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임금이어요 페르시아라는 나라는 고레스라는 임금으로 유명합니다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 세속의 역사 속에서는 고레스라고 안 하고 씨루스 임금이라고 하는데 씨루스라는 사람이 대 제국으로 성장을 시켜요 페르시아는 영토를 확장 시킨 왕입니다
 
씨루스 고레스를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이 캄비세스라는 왕인데 이 캄비세스 왕은 애굽까지 정복해요 애굽까지 정복을 함으로서 제국의 영토를 넓혀가고 있는데  그 다음 그를 이은 임금이 다리오어요
 
  이 다리오 임금은 인더스 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 합니다  대 제국을 형성한 것이지요  어마 어마 어마한 제국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어요 페르시아가 다른 제국과 다른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어떤 것일까요? 페르시아는 다른 제국들의 특색은 무엇이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 내가 가지고 있는 문화속에 들어와야 돼 그렇게 제국을 운영을 했어요
 
  우리가 바벨탑 이야기를 할 때 바벨탑의 재료를 무엇이라고 했느냐 하면 벽돌이라고 했거든요 이것을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없으나 이전에는 자연석을 썼어요 벽돌이라는 게 규격화 된 것이거든요
 
  이것은 무엇이냐 도량형의 통일과 관련이 되어요 길이를 젠다든지 부피를 젠다든지 마차 바퀴 사이의 간격을 만든자든지 이런 것들이 도로 건설하고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제국들은 도량형의 통일을 하려고 합니다
 
  중국의 진시왕도 도량형을 통일하려고 합니다 바벨탑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용납되지 않아요 규격화 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 페르시아는 달랐다 그 이야기여요
 
 
  다양한 언어 문화 경제 시스템 종교 이런 것들을 그래 너희들이 누리고 있던 그것을 그대로 누려 이렇게 허용을 해 주는 것이어요  그 조직들을 잘 융합을 해  페르시야 문명은 무엇과 같은 가 하면 물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 조그마한 지천이 와서 합류하지 않아요 다른 물이 와서 합류를 하지 않아요 큰 강이 되지 않아요
 
  이것처럼 페르시아 문명은 흘러가면서 융합하는 문명이었어요 다름을 이렇게 포함하는 문명이었어요 어어느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결혼한 사람에게 강을 가지고 이야기 했어요
 
  강을 가지고 이야기 했어요 북한강이 흐릅니다 충주 저 쪽에서부터 남한강이 흘러요 어디에서 만나느냐 하면 양수리라는 곳에서 만나요 양수리를 두물머리라고 하지 않아요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한강이 되는 것이어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더 큰 나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신비한 부부가 된 것이 그것인지 모르겠는데 그렇지요 나는 끝까지 갈 것이야 그러면 곤란하지요 페르시야 문명이라는 다양한 것을 받아 드림으로 자기를 크게 만들었어  문화적인 것이 컸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어요
 
  다리오 왕이 중요한 왕인데 그 왕이 즉위한지 2년 여섯째달 초하루에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이렇게 본문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 하면 누구에게 주어졌어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했다
 
  스알디엘은 첫 번째 총독인 것으로 보여요 스룹바벨이 그 아들이고요 그 다음에 여호수아는 바벨론에 태어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임했는데 이 다리오왕 2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 하면 항상 이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권력 교체기에 위기를 맞이 할 때가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왕이 물려나고 아직 리더쉽이 확정되지 않은 후임 왕이 들어올 때 자기 세력을 키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리오 왕은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압을 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그 반란에 가담한 벌주면서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총독 제도를 두기 시작 합니다 이런 전환기에 학개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학개가 예언한 시기는 어떤 예언자는 상당히 긴 시간 예언하지 않아요 그런데 학게가 예언한 것은  6월 1일부터 시작에서 9월 24일까지 날자가 딱 있어요 3개월 넘은 4개월 안 되는 그 정도의 시간동안 활동을 합니다 분명한 포커스가 있지요
 
 
  이제 어쩼던 4개월 정도인데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때가 며칠 날이었다고요 다리오왕 2년 6월 1일 그런데 성전 건축이 재개 된 날자는 언제이냐 하면 6월 24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겨우 세주 지난 다음에 일이 시작이 된 것이어요
 
  상당히 빠른 진척을 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개라는 사람은 보통 예언자를 이야기 할 때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나오더근요 아니면 할아버지 이름이 나오고 증조 할아버지가 나오는데 학개는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안 나타납니다
 
  이것을 보면 학개라고 하는 사람이 종교 귀족이 아니었구나 종교 귀적이 아니었고 명문 가문 출신도 아니었구나 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흙수저 출신이어요 학개가 그렇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학개라는 이름은  학가이라는 것이 히브리어 발음입니다마는 축제를 뜻하는 하그라는 말과 연결이 되지요 학개와 스가랴 성전 건축을 독려한 선지자들로 성전이라는 게 절기 축제를 바치는 고것이고 순례의 중심이었음을 생각할 때  성전 건축을 촉구했던 학개의 이름이 축제와 연결된다는 것이 상당히 적절한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개는 철저히 가문의 전통에 의지한 것이 아니고 우리 조상이 대단한 사람이어요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신빙성이 있어요 이렇게 안 하고 오로지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런 선지자였던 것이지요
 
  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 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짜증이 나신 것이어요 여기 하나님을 일컷는 말이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전사로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셔요 적을 무찌리시는 분으로 여기에 등장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은 의미는 있는 것이어요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패배주의 무기력 절망감  그것과 맞서 싸우시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 여기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때때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나의 내면이 무너질 때 사람이 무너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남들이 저 사람 살만한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있어요 열악한 환경이 있는데 씩씩하게 살아가는 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기력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져 있기 때문에 빅터 프랭클이라고 하는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가 있는데 이 분은 나치 수용소에 갇힌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가진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을 포인트라는 사람이 인간이 무엇 때문에 살아갈 쾌락에의 의지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이야기 합니다  아플레라는 사람은 권력의 의지가 인간을 살게 만든다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수용소에 갇혀 보니까 쾌락의 의지도 아니야 권력의 의지도 아니야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느냐 하면 내 삶이 의미가 있다고 할 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어요
 
  빅터 프랭클이 자기가 수용소에 내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이 사람은 바로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고 노동 사역에 쓰이게 되어요 살아 남았지요 그런데 비밀을 말하자먄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빅터 프랭클의 가족들은 이미 죽었어요 같이 끌려 간 가족들이 바로 죽었어요
 
  프랭클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강제 노역은 너무 힘들어요 그가 노동하면서 힘겨울 때 만도 그가 생각한 것은 내 가족이 평안하기를 바래 그러니까 힘겨운 노동이 즐거운 노동이 되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니까 어떤 일이 의미있다고 느낄 때는 사람들이 살아 그가 한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윌 투 미닝 Will to meaning 의미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의미의 의지를 가진 인간 미닝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그가 나치가 망한 다음에 돌아와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는 데 결국 무엇이냐 하면 삶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찾아 주므로 그들이 치료 되도록 해요
 
  그것을 로고 테라피라고 하는 데  로고스 말씀이거든요 내 속에 의미가 돌아올 때 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매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무기력과 절망 그것과 맞서 싸우도록 하셔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의미가 채워지는 순간 사람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의미를 주는 일 이게 중요해요
 
  만군의 하나님은 외부에 적과 싸우시기도 하지마는 우리 마음속에 떠 오르고 있는 무의미 고통 무기력 절망과 이런 것들과 싸워서 우리가 삶의 의미를 되 찾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어요 그 하나님이 이야기 하는 것이어요
 
  그 하나님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 백성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우리가 그 백성들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최초의 열정이 남는 것은 곤고한 삶의 무게일 수 밖에 없어요
 
 
  열정이 식고나면 남루한 이 현실만 남지 않아요 미국에 라스베가스에 가면 그렇다면서도 밤중에 화려하고 번쩍 번쩍하고 우아하고 그러는데 다음 날 아침 보면 조명이 꺼진 그 도시는 사막 가운데 있는 적막할 도시일 뿐이지 그런 것입니다
 
  열정이 식고 나면 남는 것은 곤고한 삶의 무게 밖에 없는 것이야
  그 다음에 성전 재건을 안해야 할 이유가운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성전 건축이 자칫하면 페르시야 당국의 의혹을 살 수 있어 페르시아의 반역을 저지르기 어떤 중심을 만드는 것이 아니야 이런 의혹을 살 수 있다 백성들은 그런 핑계를 생각한 것이어요
 
  세 번재는 이런 것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우리의 삶이 죄를 하나님이 흔연히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아닐까 우리의 삶이 곤고한 것은 주님이 아직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니 성전을 짓는 것은 그 분의 뜻에 반하는 일일 수도 있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안할 핑계는 얼마든지 있어 그래서 제 테드 강연에서 어느 미국의 대학 교수님이 강의를 하는 것을 듣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할 것인가 하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에 잘 노출 되도록 해야 돼 그래야 사람들이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어 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이게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핑계를 댈 수 있는 여지를 없도록 만들어야돼
 
  그러니까\  12월이 되면 구세군 자선남비가 딸랑 딸랑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거기 지나갈 때 약간 질리거든요 어떻게 하냐 하면 저기 있네하고 돌아가지요 돌아가면서 못 봤다고 하고 무엇이냐 하면 핑계를 댈 수록 여기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데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유치하게 어쩼던 그렇게라도 선을 행한 게 좋은 데 금방 이야기 한 것처럼 무엇인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요 이게  백성들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용기가 꺾이면 안 할 수 있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인간의 재능입니다  
  그 때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이어요
  4절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제 판벽한 집에 거주한 것이 옳으냐
  성전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내 버려지고 무너지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판벽한 집이라는 게 백향목으로 지은 집이야 아름답고 튼튼하게 잘 꾸며진 집이 판벽한 집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이렇게 퇴락했는데 너희들 사는 집은 좋은 것으로 꾸미려고 그렇게 지내고 있느냐
 
  그게 옳으냐 어떤 사람이 옳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대책이 없겠지요 그것은 한 대 맞는 수 밖에 없어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자기의 집을 꾸미는 일에는 열중하면서 하나님의 집을 꾸미는 일은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언약 공동체의 비젼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백성을 선택하셨을 때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 꿈을 실현하도록 주는 중심이 성전인데 그 성전에 퇴락을 방치했다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그 꿈을 버린 것이어요
 
 
  내가 누구인지 잃어버린 것이어요 자기 망각이어요 결국은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공의 문제보다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성 프란치스코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어요 성 다미아노 성인이 누더기를 걸린체 울면서 오는 것이어요 프란체스코가 놀합니다 성인님 천국에 어찌하여 울고 계셔요 이렇게 물어요
 
  천국에 계신 분이 울고 있다니  천국에도 눈물이 있단 말이어요 그러자 다미아노가 대답합니다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오 그것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메고 있는 사람의 눈물이다네 이렇게 말해요
 
  그리고 다미아 성인이 이야기 합니다 지금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그런데 너는 이렇게 평안한 잠 자리에서 잠만 자고 있을 것이냐 가서 무너지는 교회를 세워 이렇게 이야기 해요
 
  프란체스코 성인은 하나님의 계시로 알아 듣고 수리하는 일에 나섭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 다미아노가 프랑체스코를 그렇게 부른 것은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인 건물을 고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스스로의 부요함 속에서 도전 없이 왔던 카도릭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였고 그것을 어깨를 떠 받혀 일으키라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프란 치스코 성인이 13세기에 교회에 가지고 들어온 것은 가난이라고 하는 본질을 잃어버리지 말하야 한다고 들어오거든요 이것이 공공의 문제보다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탄식하였다
 
  5절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 행실을 돌아보라는 것이어요 돌아봄을 자기를 돌아보는 것 반성이라고 하지요 어디에서 나온 말이어요
 
  논어에서 증자가 한 말입니다 五日오일 三省삼성五오 나는 하루에 세 번 나를 돌아 본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지 않았는가 불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게 첫 번째이고
 
  벗과사귀면서 진실하지 배운것을 불신 믿음직하지 않은 것이어요
  그 다음에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 불 습입니다
 
  불신 불충 하지 않았는가 자기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맑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지금 그 백성들에게 너희 행위를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결국은 무엇이어요 내가 고백하고 있는 그 내용을 삶으로 번역한 과정인데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정 반대로 왜곡하고 있는 그 현실을 하나님은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일상적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되어요
  6절에 너희가 많이 뿌릴 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 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결국 백성들이 선택한 삶은 풍요로움이었지만 본인의 행복이었지만 그들의 행복을 추수하지 못해요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흉년이 찾아오기도 하고 제국의 수탈 때문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라는 삶의 중심성이 바로 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삶이 구멍 뚫어진 전대에 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이 바로 서지 않는 경우에는 말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우리의 삶이 본이 무엇인지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은 말을 추구하기 위해 본을 버린 것이야
 
  오늘 우리의 삶을 어떻습니까? 인간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본 그 본을 내가 정말 굳게 붙들어야 하고 내 속에 가물 가물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하는 데 우리는 무엇이냐 내 속을 성찰하기 보다는 바같에 있는 외부적 조건들을 바라 보느라고 본을 상실한 본말이 뒤집힌 삶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아픔을 우리들이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마음속에 크게 와 닿은 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신 것인데 우리 속에 있는 절망 우리 속에 일어나는 무의미 나는 할 수 없어 무기력 이런 것과 맞서 싸우면서 우리 속에 숨을 불어 넣으셔서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꿈을 불어 넣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제게는 크게 다가옵니다.


제2강 학개 1:1:7-15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아기는 어떤 존재인 줄 알아요 아기 어른의 스승이다 그런 시도 있지요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다고 어른의 아버지도 하는 시도 있습니다 어느 시인이 있는데요 그 시인이 아기 천사께서 우리 집에 오신 다음에 모든 것이 만사 오케이다고 이야기 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대오 옹아리로 모든 것이 통해 그러니까 그 예쁜 아기 앞에서 모두가 용서가 되고 받아드리게 되고 집안에 있는 사람들도 화해하게 되고 그렇게 보면 연약함의 신비라는 것이 있어요
 
세상은 강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지만 연약한 사람들이 세상을 정화해 그러니까 아기가 어른의 스승이고 맞다 말이어요 성탄절로 비유해도 되겠네요 우리 주님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요
 
그 아기를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고 산다고 하는 것 연약하고 섬세한 존재를 우리들이 어떻게 품고 갈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차가운 북풍 앞에 서 있는 것 처럼 위태로와요
 
현실은 우리에게 절망감을 안겨 줄 때가 많이 있지만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다시 시작할 용기 나는 넘어져도 다시 시작할 힘을 우리 속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분이 있기 때문에 어떤 분이 말이 인간은 제 아무리 크게 넘어져도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넘어지는 방법은 없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사로 잡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실망할 수 있고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갖고 내 삶을 고쳐 세우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 행위를 살필지니라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고요 자기 행위를 살필지니라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 삻핌이지요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다른 것이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존재라는데 있습니다
 
성찰 사유라는 것은 나 좋을 대로 처신한 것이 아니고 타자와 관계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것이어요 내가 미란씨와 만났다면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이야 내가 친절하게 말해야 하는데 무뚝뚜하게 말한 것이 아닌가 내가 선한 표정을 가지고 타자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 시대에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반성 우리는 누구를 보고 판단은 잘해요
 
저 사람 옷 잘 입었네 저 사람이 화장이 잘 나왔네 이런 소리는 잘 하는데 저 사람은 저러면 안 돼지 이런 말을 잘 하는데 밖을 보는 일에 익숙해요 자기를 살피는 일에 너무 소홀해 이것이 우리의 습성처럼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단편 소설이 기억나는데 친구들이 제주도 갔데냐 술을 많이 먹었어요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이게 콘 텍즈 렌즈기 뒤로 돌아갔데요 큰 일 났지 않아요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몰라 어쩧던 소설이 그래요 친구들이 우수어 죽겠는지 친구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보고 무엇이라고 하더니 읽었던 기억이 나요
 
사람이 자기를 살피는 일을 잘 못하지요 성찰하지 않는 것이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내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라고 하는 대 타자 앞에 내 삶을 돌이켜 생각함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여요 이게 매우 중요해요
 
그러나 성찰을 한하는 것이지요 여기 하나님은 거듭 너희 자신을 살필지니라
5절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 행위를 살필지니라
 
8절 그리고는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나무를 비어오라는 것이어요 여기 산이라고 번역하는 단어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정관사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산이어요 그 산이 어떤 산인지 몰라요 그 이야기는 그 산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정관사를 가지고 그 산이라고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다 알아 나무가 있는 어떤 산이겠지요
 
사람들 생각하기에 성전을 지으려면 백향목 싯딤나무 이런 것들 가지고 지으리라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백향목에 접근할 수 없어요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지을 때도 백향목을 운송해 오거든요
 
그리고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 그 대도 에스라 책을 보면
3장 7절 레바론에서 백향목 가져오거든요 처음에 지금 그 길이 다 막혔어요 가져 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이
8절 그 산에가서 그 산은 백향목이 나는 것이 아니라 야산 같은 것 평범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이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성전의 의미는 건축 자재에 있지 않다 자재가 얼마나 훌륭하지 않아 하나님에게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보게됩니다
 
사실 성전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황폐해진 하나님에 선에 대한 송구스러움 죄송함 아픔 이런 것들이 있을 때 그게 성전의 핵심이지요
 
시편에서 우리들이 보았습니다마는 여호와께서 받으시는 제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물은 양도 소도 아닙니다 상한 마음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시편 51편 7절 파커 팔머라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우리 랍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두라고 하지 않고 머리 위에 두라고 이야기 합니까? 그러자 랍비가 대답합 평생시에 사람들을 말씀을 들어도 그게 마음속에 안 들어간데 머리 위에 두라
 
살다 보면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나의 자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 무너질 때 들어가 비로서 들어가 우리 가슴속에 들어간다 무너져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서 열리는 마음 이게 은총의 도구여요 하나님이 말슴이 그 때 결실해져 오히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상한 마음이다고 그것 가기조 가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다는 것이어요
 
성전 건축의 자재가 중요하지 않아
시편 51편 17절 상한 마음 성전 건축의 자재가 중요하지 않아 평범한 그 산에서 나를 무엇으로 보는 것이야 성전의 화려함 건축 자재의 화려함 이것은 하나님의 관심 사항이 아니어요 그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시작하려는 마음 하나님의 집이 황폐해 졌는데 이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 시작하는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스니다
 
제가 즐겨 인용하는 시가 있는데 함석헌 선생님의 님이 오신다는 시가 있습니다
님이 오신단다는 소리가 들여 옵니다 임을 맞이하는 설레임이 있습니다
님이 오신다 길 닦아 예비하자 내 집에 오시는 님으리 날 보러 오시는 님을 긎저 어찌 맞느냐? 집안 청소하고 이것을 해야되여
 
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 왔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지고 청소를 깨끗이 하고 할 수 있으면 은 모래도 깔아 놓고 물도 뿌리고 오시는 이 맞아야지 참 좋은 마음이지요
 
님을 기다리면서 그저 잤고니 이것 저것을 온 방인 하투루 늘어놓아 그저 앉으실 곳도 없이 했구나
 
늦잠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정말 일어나서 허둥 지둥거리는 것이야 그런데 그런 날일 수록 왜 그리 어지런 진 것이 많은 지 몰라 방안에 허트린 것이 있고 앉으실 곳조차 없는 것이야 쓸자 닦자 고치자 마음이 허둥 허둥하고 있는데 하면 할수록 묶은 먼지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천장에는 거미줄도 나 있고 저 길은 이렇게 풀들이 우거지고 야단이 난 것이어요
 
마음만 분주했지 다 마치지 못했는데 님이 오셨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이어요
아이구 님이 오시네 저기 벌써 오샤 이를 이를 어찌노 어딜 들어오시랄꼬 이 얼굴 이꼴 이 손은 아에
 
아 이를 어쩌노 어디 들어오라고 할 까 당황하고 있는데 오신 님이 이야기 하는 것이야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에 슬 지 않은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담아주마
 
그러니까 중요한 게 무엇이냐 하면 나를 위해 닦지 않은 그 마음을 받은 것이야 니미 그러니까 그 분이 오셔서 내 집을 쓸어주고 나를 주겠다는 그 방을 너에게 주겠다는 것이어요
 
이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밝히자면서 못 맑힌 맘 저절로 밝혀지고 나중에 맑아졌으니 내라곤 없소이다 님 곁에만 사오리
 
내가 나를 깨끗하게 하고 싶었는데 나는 못했어 그러나 깨끗하게 하려는 내 마음을 님이 보시고 오리려 나를 맑혀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셨어 그러니까 은총으로 사는 것이야 중요한 것은 얼만큼 깨끗해 시작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엣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게 아슬 아슬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솔로몬의 최대 치적을 이야기 할 때 성전 건축을 이야기 하지요 최대의 치적인 것은 맞으나 문제가 있어요 성전 건축을 위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물자를 동원하다 보니 백성들의 삶이 피해해졌어 그렇지요
 
그래서 솔로몬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백성들이 느흐보암에게 이야기 아지요 당신의 아버지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왕상 12장 4절 당신 아버지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강제 노역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느흐보암이 그 말 안 듣지요 분단이 되지요 성전 건축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치적처럼 보였지만 결국 분단이라는 것을 낳았어
 
그런데 성전 이전에 광야 공동체가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전이 아니라 회막이라는 것이어요 회막을 만들어요 회막 건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언약이 맺어지고 그리고 그들이 이제 하나님에게 지시를 받은 것이 회막을 만들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6장 1절 그래서 탈출 공동체가 마음을 보아서 한 최초의 행위가 회막 만드는 것이어요 한 백성이 지어지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회막 건축은 바로 그런 것이었고 분단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가 되게 했어 그들을 통합했단 말이지요
 
회막 건축할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백성들 모두가 기여를 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금은 붙이도 내 놓고 어떤 사람들은 아껴 두었던 좋은 가죽 같은 것도 내 놓고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실 조금 내 놓고 그러니까 각자가 할 수 있을 만큼 기여를 해요
 
그런데 이 공동체가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기여의 경중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어디 가 보면 건물 짓는데 돈 내놓은 사람 누구는 1억 크게 이렇게 누구는 5천만원 누구는 100만원 기타 등등 성경의 원리에 어긋나요
 
경중을 가리지 않는다 1억원을 냈기 때문에 큰 자리 차지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 돼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 되어요 경중을 가리지 않았기에 기뻐 여기에는 기여라고 하는 것이 자발적으로 낸 것이어요 인색한 마음이 아니어요 자발적으로 냈고 경중을 가리지 않았어 이것이 사회를 통합했어요
 
성전 건출이라는 것은 잘 지었지만 백향목 가지고 돌 뜨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잘 지었지만 결국은 분단으로 귀착되는 일이 벌어졌고 우리는 참 두렵게 생각을 해야 되어요 요즈음도 성전 건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이 많아요
 
정막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배당 잘 짓는 일도 매우 중요하나 회막 건설이 예2배당 건축의 핵심 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발적으로 기여하고 경중을 가리지 말고 어떤 사람이 성전 건축하는데 3억원을 내 가지고 공로패 이런 것 하지 말고 돈 많이 낸 사람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야 이런 것 하지 말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금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학개 1장 8절 그 산에 올라가라 그것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하라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영광을 얻으리라
 
여기 내가 기뻐하고 라는 말은 어떤 의미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바친 예물이 열납되었을 때 사용하는 단어여요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기쁘게 받아 드린다 백향목이 아니네 그것 안 하신다 겨우 그것 가지고 왔어 그것 안 하신다
 
그 마음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그것 때문에 영광을 받으신다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므로 지금 하신 그 말씀을 확증하시는 것이지요 마치 도장을 찍는 것처럼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기여의 겅중에 따라서 사람들 평가 안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핵심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 왔으나 내가 부어 버렸노리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인 황혜하였을 때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9절은 6절을 변형한 것입니다 많이 뿌릴 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수확의 말씀을 6절의 말씀을 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이 우리에게 일깨어준 말씀은 욕망을 중심에 둔 삶의 허망함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어요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한다고 하는 것은 결핍이 있기 때문이어요 내 속에 결핍이 있기 때문에 욕망이 벌어지는 것이어요 특별히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심리적 결핍입니다 마음 속에서 벌어진 결핍이어요 그냥 멀고 살만 한 대도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핍은 무엇이냐 하면 채움의 욕구여요 그런데 채움의 욕구라라고 하는 것은 내가 채워지기 남에게 줄 수 없어 그래서 배타적이야 배타적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이야 이것은 자기중심적이지
 
내 삶 속에 타자가 들어올 여지를 주지 않은 것이야 욕망에 사로 잡힌 사람은
우리가 믿음 생활한다는 것은 본 회퍼가 욕망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 내 욕망을 내 삶의 핵심으로 삼지 않고 사는 게 믿음의 삶이라는 말이어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떻다고 말하느냐 하면 자기 배 채우는 일에 몰두했어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욕망이어요 그러나 적었어 그것을 집으로 가져 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다 어마 어마한 이야기가 여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삶은 타자를 위한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요즈음 식으로 이야기 하면 이런 이들이 만들어진 세상은 각자 도생의 삶 내가 살아남아야 각자 도생이어요 각자가 생을 도모해야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살벌해 여러분 과거에 지금부터 50년 전에 우리는 참 가난한 나라였어요 50년 60년 전에 지금은 상당히 부요한 나라가 되었습니다마는 가난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어요 우리 생각해 보면 왜 그랬을까요? 골고루 가난해서 그래요
 
남과의 비교의 대상이 별로 없기 때문에 골고루 가난해 그러니까 골고루 가난하니까 그 때 무엇이 있었느냐 하면 정이 있어 배고픈 사정 헤아리고 그러니까 공동체가 살아 있는 것이야 가난해도 그런데 돈이 우리의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돈은 독점력이거든요
 
그러니까 돈이 들어간 곳에 공동체가 한결 같이 무너져 각자 도생의 사회는 공동체가 무너진 사회란 말이지요 이게 참 고통스러운데 그런 삶을 빈손이 되게 한다
 
1장 9절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읁 황혜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런 삶은 빈손이 되게 한다 집에 데리고 가서 불어 버리겠다
하나님이 어떻게 불어 버리겠어요 이런 것 아닐까요? 질병 예기치 않은 사고 재난 낭비 이런 것들이 그 집에 찾아오면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그것들이 다 사라지지 않아요 이게 하나님이 불어 버리셨다는 말일 것이어요
 
이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중심의 삶이고 타자에 대한 여지가 없도록 만들 때 그런 삶을 하나님이 후 불어 버린다 이게 무시 무시한 이야기여요 이 경고를 우리가 알아 들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지금 문제는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해 빨랐다 하는 말입니다 공적인 일 자기들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지향을 꼭 붙들지 않고 내가 살아남는 그 일에만 관심을 가짐으로 공동성은 무너지고 개인성만 강조된 사회 하나님은 그것을 타락한 사회로 보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중심으로부터 이탈한 그 사회를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시지 않는다
이게 본문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10절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절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돠 땅의 모든 소산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결국 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명하셔서 풀이 돋아나게 하시고 땅은 그런 역할을 감당했어요 죄가 들어오기 전에 땅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였어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지 땅이 어떻게 되었어요 창세기 3장 18절 엉겅퀴를 내고 가시 넝쿨을 내고 이것이 성서에서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땅의 황폐라고 하는 것은 그저 지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과 연결시키는가 하면 인간의 죄로 연결시키는 것이어요
 
레위기 25장 4절 하나님은 땅도 쉬게하라 안식년 되면 땅도 쉬게 하라고 하지 않아요 안 지켰어 사람들이 성경은 무서운 이야기가 나와요 그들이 땅의 안식을 허락하라는 말을 안 하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냐 하면 그 땅에 백성들을 이방 나라로 잡혀가게 했어
 
레위기 26장 34절 그러자 당이 안식을 누렸다 무시 무시한 이야기여요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여요
그러니까 땅의 황폐함은 인간의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어요
 
10절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은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이슬 내려주고 비를 내려 주어야 농사를 짓는데 자기 중심성 욕망을 중심에 놓고 사는 너희의 삶의 결과 하늘이 닫혔다 땅은 산물을 그쳐요 그리고 그 땅에서 자라나던 모든 것들이 결국 잘 자라 보이지만 한재가 들었어 전부 결실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이 땅을 회복하시는 이야기가 나와요 인간이 하나님앞에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호세아 2장 2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에 응답하고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결국 이 문제가 풀리면 땅도 회복된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거든요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고백하는 신자들조차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숨결이 닿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나의 욕망을 위해ㅓ 함부로 홰손하고 해친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여요
 
그래서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낌이야 이게 절제이지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절제가 들어가지 않아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 9가지 열매 그 9가지 열매 가운데 우리 시대에 가장 회복되어야할 열매는 절제의 열매여요
 
나 좋을 대로 내 욕망대로 가면 땅이 황폐해 질 수 밖에 없어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쌓아 올린다 하더라도 한재가 들어서 하나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관적 세계여요
 
12절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그들 스룹바벨 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었고 선지가 학개 말을 들었어 왜 바깥 귀가지고 듣는 게 그게 아니고 이 때 들음은 순종입니다
 
들음이라는 말 속에는 순종이라는 뜻이 들어 있어요 듣는다고 라는 말은 그런 의미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학개가 집안 축신으로 보이는데 그 학개늘 총독도 그렇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받아드린 것이지요
 
이게 중요한 것이지요 진리를 향해 그들의 마음잉 열리는 것이어요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던어가 있는데 12절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 두 번씩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여기에 표현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란 말은 그 하나님을 뜻하는 말인데 두 번이나 이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무저질번 했던 언약4이 다시 서게 되었다 라고 한 말이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13절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메시지의 내용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니 누구와 함께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어요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이 보재하였다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계셨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함께 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여호와께서 스루바벨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15절 그 때는 다리오 왕 제 2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을 감동 시키는 일이어요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었다고 할 때 그것이 르하흐이거든요 하나님이 그들 속에 숨을 불어 넣으신 것이어요 갱기를 불어 넣으신 것이어요
 
이 르하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들의 마음에 무기력과 절망감과 무의미를 제거하고 그들 속에 무엇인가를 수행하고 싶은 마음의 열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어요 이게 하나님의 영이하시는 일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 속에 그 마음을 불러일으키자
14절 그들이 와서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보여 주고 있어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 것이 우선이고 그러자 그들이 와서 하나님의 전 공사를 시작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해 전입니다마는 여수에 있는 어느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교회당이 참 예뻐요 참 좋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이야기 합니다 이 교회를 우리 교인들이 지었습니다 교인들이 이 교회를 어떻게 지어요
 
회사 출근하는 교인들이 퇴근하고 돌아와서 밤에 와서 공사를 하고 여 신도들은 밥을 짓기도 하고 자재를 날라주기도 하고 그래서 그 교회를 완성한 것이야 너무나도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은 것을 보고 마음이 감동인 되었는데 그들이 그 마음 속에 기쁨이 있기에 그래요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었기 때문에 그래요
 
서양의 속담 가운데 이런 게 있데요 성령 받지 못한 채 목회를 하거라 그런 말이 그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어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생기가 내 속에 없으면 모든 게 고역이어요
 
그런데 내 속에 하나님이 영을 불어 넣으시면 모든 것이 감사하고 기쁨이 돼 그러니까 내 궁리라고는 없소이다 이 말이 정말이어요 경험해 본 사람은 알 수 있어요 성 어거스틴이 내가 하는 일이 온통 악 뿐입니다 더러 내가 선한 일을 한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속에서 당신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당신이 기뻐하는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내가 했어 그렇게 안 해요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냥 겸양 떠는 말이 아니라 아는 것이야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속에서 그분이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생기가 여러부느이 마음을 가득 채우면 좋겠어요 여기 있는 분들이 하나님의 생기로 일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알아 차려요 아 저 사람은 출발이 다른데 무엇인가 달라 이 느낌이 있어요 하나님의 생기를 가지고 호흡하기 땝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이 재건이 시작된 그 날을 다리오왕 이년 제 6월 24일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한지 석주 남짓 지났을 대 정말 빠르지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숨을 그들 속에 불어 넣었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을 바탕을 둔 삶이라는 것이 내 것으로 확보했더 하는데 하나님이 훅 하면 다 날라가 그런데 하나님이 훅 숨을 불어 넣으시면 우리를 신명나게 만들어요 하나님이 술을 불어 넣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3강 학개 2:1,9
영광이 머무는 성전

일년 365일 가운데 특별한 날들이 있나요 특별한 날자 크리스마스 결혼기념일 나도 여러 가지 있는데 2월 15일 나에게 중요한 날인데 생전 처음 교회에 간 날이지요 나는 청년 시절에 교회에 갔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다른 일 하다가 청년 시절에 갔거든요
 
그날이 수요일날이었는데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지요 그래서 2월 15일은 특별한 날이고 사람마다 특별히 기억는 그런 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10월 27일이 중요합니다 2007년 10월 27일 성서학당이 시작한 날
 
이렇게 날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예언서 가운데 특정한 날짜를 탁탁 꼽아 가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학개서 밖에 없어요 우리가 학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학개가 소명을 받은 날자도 소상하게 나오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날도 나오고 다양한 날자들이 나오고 있는데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하게 된 것은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라는 나라가 들어서면서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해서 돌아오지요
 
그래서 귀환한 공동체가 돌아온 것은 주전 538년경으로 봅니다 돌아오자 마자 그들이 했던 일은 제단을 먼저 쌓고 그 위에서 제사를 초막절 제사를 드렸어요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지요
 
그리고 성전을 건축하려 했으나 내외의 많은 반대에 부딪치고 방해에 부딪쳐서 성전을 짖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언제나 그래요 초창기의 열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열정이 빠져 나가고 나면 환멸과 권태가 밀려오고 하는데 오랜 시간동안 성전을 짓고자 하는 그 마음의 열정이 사그라들자 사람들은 성전을 짓는 일 보다는 내가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해요 거기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몰두하면 행복한 일이 많이 벌어지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가뭄이 들고 질병이 다가오고 온갖 어려움이 역경이 지속되었던 것이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깊은 환멸 속에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학개가 부름을 받은 것이어요 그 때가 주전 520년경 귀환 공동체가 돌아온지 18년 그 정도가 지난 다음에 학개가 부름을 받았고 그 때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유다 왕을 가지고 말하지 않고
 
1절 다리오왕 제 이년 여섯째달 초 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학개에게 임했다
2장 일곱째달 그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했다
일곱째 달입니다 7월 21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 임했는데
 
7월이라는 달이 매우 의미 있는 달입니다
이 7얼이 왜 중요한지 이야기를 할께요
일곱째 달을 히브리에서는 티슈리월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날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 해로 시작을 해요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되는 데 우리로 이야기 하면 1월 1일이 새해인데 이 사람들의 새해라고 하는 것은 티슈리월에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까 티슈리월이라는 시작되는 달의 첫날을 로쉬하사나라고 불러요
 
유대인의 새해 그 날을 새해라고도 하고 무엇이라고도 하면 나팔절이라고도 합니다 왜 나팔절일까요? 뿔 나팔을 부는 날이기 때문에 나팔절인 것이지요
 
여러분 뿔 나팔 본적이 있나요 뿔 나팔을 보면 사실 불기가 쉽지가 않다고 해요 그래서 이것을 장단에 리듬에 맞추어서 부는 것이지요 그 장단 고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요
 
뿔 나팔을 부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시간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어요 뿔 나팔 소리는 어떤 소리이냐 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부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로쉬하샤라의 뿔 나팔 소리의 의미를 랍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잠자는 자들아 깨어나라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로쉬하샤라의 뿔 나팔 소리의 의미여요 사람들은 일상 속에 빠져서 살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살지 않아요 우리도 그럽니다 일상에 일들 루틴한 일들을 하다 보면 내가 순례자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내가 더 나은 존재로 초대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저 일상 속에서 하루 하루를 덫 없이 살아가기 쉽지요
 
그리고 우리 일상을 깨고 들려오는 뿔 나팔 소리는 너 잠자는 자여 이제는 깨어나라 그래서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회개하라 뿔 나팔 소리의 의미는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림자를 사냥하는 사람이 되지 말며 공허한 것을 찾느라 인생을 소비하는 자가 되지 말아라
 
뿔 나팔 소리가 담겨 있는 의미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내 삶이 여러분 일상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일상 데일이 라이프이지요 일상은 참 귀한 것이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 속에만 파 묻혀 살다 보명 방향을 잃기가 쉬어요
 
수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어요? 호흡이지요 호흡을 어떻게 합니까? 음파 음파 수영에서 중요한 게 호흡이지요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은 숨을 쉬기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물이 입에 들어오기 때문에 무서워하지요 수영 잘하는 사람은 아주 평안하게 수영을 하지요
 
그러니까 호흡이라고 하는 게 매우 중요한데 그 호습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일상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어요 저는 조금 시간이 나 가지고 외국에 나가면 수도원에 들어가서 머물 때가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있으면 참 좋아요 왜냐하면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회하고 점심 전에 기도회하고 저녁 먹기 전에 기도회하고 잠들기 전에 기도회하고 네 번 정도 드리는 그 기도회 리듬이 얼마나 좋은 지 몰라요
 
중간 시간에는 일도 하고 독서도 하고 하는데 기도 시간이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중단하고 기도에 동참해야 돼 그 리듬이 내 속에 베게 될 때 호흡이라고 하는 게 그런 것인데 우리는 살다 보면 일상의 코를 박고 사는 것이지요
 
무엇이냐 하면 호흡이 잘 안되기 때문에 수영할 때 호습이 안 되면 어떻게 되지요 숨만 차고 힘들고 가라 앉고 우리 삶이 그런 것이어요 호흡이 잘 안되기 때문에 자꾸만 우리 일상 속에서 이런 삶을 살게 되는 데 이 뿔 나팔 소리는 그것을 돌이키라는 말이지요
 
그 날은 너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자기 영혼을 들여다 보는 날이어요 그리고 너의 악한 받법과 생각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실 것이야
 
뿔 나팔 속에 담겨 있는 뜻이 그렇게 오묘합니다 인간은 기호를 다루고 상징을 다루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 뿔 나팔 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원점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있어요
 
이런 기도를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향심기도 (관상기도)라는 것이 있어요 우리의 마음을 무엇인가를 향하는 것이지요 무엇인가를 집중하는 그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어요
 
침묵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리내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곳에 현존해 계신 하나님을 그냥 느끼고 앉아 있는 것이어요 그러면 여러분 우리 마음이 집중이 되어요
 
여러분 경험은 어떻던가요 나는 목사이고 항심 기도를 훈련함에도 불구하고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다른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것은 어쩔 수 없어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마음에 통합성이 깨져 가지고 그런데 분심이라고 그래요 늘 그게 찾아와
 
우리가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예배 드릴 때 예배에 집중해야 하는 데 내가 자동차를 잠그고 왔던가 무엇인가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아요 예배를 방해하지 않아요 이것이 분심이야
 
그런데 이 분심이 우리 속에 떠 오를 때 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하면 시크리트 워드라고 하는 것을 정하는 데 성스로운 언어를 하나를 택해요 어떤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평화 생명 그런 말을 자기가 정해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내 마음에 다른대로 떠 돌아 상대가 다리가 많이 아프겠다 하는 생각이 떠올라 그 때 평화라는 말을 내 마음을 세크리트 워드인 내게 평화라는 말을 평화 내 마음을 원점으로 갖다 놓는 것이야
 
마치 깃털이 내려 앉는 것 처럼 내 마음이 원점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필요한데 뿔 나팔 소리라는 것이 너희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라 그것이 뿔 나팔 소리의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7월 티수리월은 매우 중요한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7올 1일 로쉬하나아라고 하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절기가 돌아옵니다
 
욥 키르로하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 말로 번역한게 대 속죄일 이게 7월 10일 날 그래서 그 날을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데이스 오브 워라고 하는 데 두려움의 날이어요 하나님 앞에 내 삶의 무게를 달아보고 하나님앞에서 지금까지 지었던 모든 죄를 속죄함 받아야 하는 날이어요
 
경건해야만 하는 그 날이 대 속죄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 일곱째 달은 매우 중요하고 대 속죄일이 지나간 다음에 7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게 초막절이어요 초막절은 그 때 시작이 되어요
 
그러니까 티쉬리월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그리고 티쉬리월의 초막절의 마지막 날이 7월 21일이 됩니다 초막절의 마지막 날이 그 날은 토라를 암송하거든요 오늘 학개에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날이 언제이냐 하면 일곱째 달 그달 21일 7월 21일 초막절이 끈나는 날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너는 스알디알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우리는 이 말씀을 1장 1절에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할 대상들이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남은 백성들입니다
 
3절 너희 가운데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전 성전은 어떤 것이어요? 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이 바벨로니아에 의해서 무너졌거든요 이전 성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이가 제법 많은 사람들 나이가 많겠지요
 
숫자가 많지 않더라고 이전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기 스룹바벨이 만들어가고 있는 이 성전은 규모면에서 보면 보잘 것 없는 것 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레바논의 있는 백향목을 가지고 와서 지은 이전의 성전과 그들이 잘 알고 있었던 평범한 산에서 가지고 온 나무로 만든 성전은 달라요 그것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전 성전은 다윗 왕 때부터 모아놓은 재화로 마음껏 활용하면서 왕실에 적극적 도움을 받으면서 지은 것이 이전 성전이었지요 거기에 비하면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조건 속에서 짓는 두 번째 성전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그 성전을 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에스라 3장 12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에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전에 그 영화로웠던 성전을 생각하니까 마치 이게 초막처럼 너무 초라해 보인 것이어요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데 학개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3절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는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규모의 문제 그들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규모의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 이전에 성전이 이러다면 지금 성전이 이러니까 초라하다고 합니다
 
사람이기에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한 건물을 보면 굉장한데 규모가 주는 느낌들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사실 인간이 주고 있는 숭고함이라고 하는 미락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압도적인 큰 것 앞에 섰을 때 숭고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지금은 백층 넘는 건물도 있고 하지만 고대 세계의 쿠푸 왕의 피라믿과 같은 것들을 압도적인 높이와 크기를 바라보면 우아 숭고함을 느낀단 말이어요 그런 것들이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히말라야 있는 안나 푸르나 봉 앞에 흰 설상 앞에 서는 순간 오아 이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어마 어마한 것을 짓고 싶어하는 크기에 대해 압도되는 느낌을 주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 학개를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중요한 것은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고 말합니다
 
헤롯 대왕에 의하여 재건된 그런 성전을 바라 보면서 아 돌 하나가 이렇게 크다니 제자들이 놀랜 것이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삼일 안에 짓겠다
 
제가 담임하고 있는 청파 교회가 교회 지어진지가 올해로 꼭 40년입니다 40년 되었는대요 그래서 예배당을 봉헌하는 예배에서 제 전임자인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때 설교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성전을 허물라야
 
교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예배당을 지었어요 그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성전을 허물라 이 본물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야 놀랍지 않아요 우리가 여기에 사로 잡히면 안 돼 교회는 건물이 아니야 그 이야기를 그 목사님이 하시고 싶었던 것이어요 대단한 목사님이셔요
 
그 목사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우리가 헌신했지 우리 예배당 이렇게 안 하고 더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야만 했던 것이지요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갈 때 제자중 하나가 주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면 이 성전이 어떠 하나이까 네가 이 큰 성전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니라
 
주님에게 중요한 것은 규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있으면 초막이라고 해도 거룩한 공간이고 아무리 대단한 건물을 지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면 그것은 죽은 건물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학개를 통해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어요
 
4절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수룹바벨아 스스로 굳게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 제사장 여호수아가 스스로 굳게세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당의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 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굳세게 라는 구절이 3번 반복되고 똑 같이 여호와의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글쓰는 사람에게 가장 피해할 단어가 반복입니다.
제가 아내에게 지적을 받고 왔는데 이 단어가 반복되고 있지 않아요 고치고 왔어요
 
그런 엄중한 비평가가 옆에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글쓰는 사람이 피하여 할 것이 반복인데 어떤 때는일부러 반복합니다 아내가 이것은 반복인대요 하면 일부러 반복하는 가닭이 있지요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반복할 때가 있지요
 
굳게게 하라는 구절과 여호와께서 함께 하니라는 말씀이 세 번식 반복되어서 함으로 힘을 내서 일하라 규모의 의기 소침하지 말아라 다시 말하면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일이 작다고 생각해서 부끄러워서 일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머리 속에 포부만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미얼 죤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어요 좇은 뜻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아직 그 뜻을 펼치기에 내 역량이 적었어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좋은 일 할 것이야 여러분 교회 커져서 좋은 일 할 수 없습니다 뜻이 있어야 아주 작지만 어떤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벌어진 일을 우리는 압니다 굶주린 군중들을 바라 보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마가복음 9장 13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먹을 것을 사지 아니호는 할 없사옵니이다 하니.
 
그것 가지고 오병 이야기의 결론 이야기가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였다 모두 만족했다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 교회가 작다고 우리는 규모가 작아서 못해요 그것이 아니고 어떤 일을 내가 할 수 있을만큼 시작하는 것이어요
 
테레사 수녀님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이제 성녀가 되었습니다 마는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테레사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이 돌보고 있는 이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기는 한데 세상에는 고통을 받은 사람은 많은 데 돌몸을 받는 사람은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는데테레사 수녀가 이야기합니다.

맞아요 자매님 우리가 하는 일은 아주 작지요.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켄지스강에서 한컵의 물을 덜어내는 일 밖에 안 될 것이어요.
하지만 겐지스 강물은 한 컵 만큼 줄어져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어요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문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한 줌의 물을 덜어내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되어요
 
성전이 초라하다고 울지 말아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라.
하나님이 함께 하면 적은 것이 문제가 안 된다 이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그 메시지 속에 무엇이냐 하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가 반복되고 있어요
 
5절에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두 가지가 함께 있어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맺은 언약의 말이 함께 있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어 그것이면 되었지 그것이면 되었지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비젼이 에스겔이 깜짝 놀란것이
11장 23절 하나님의 영이 성전에서 빠져 나와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어요 형해만 남은 것이야 아무리 근사한 건물 지어 놓은다 할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어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머물느냐 이 작은 시작을 격려하면서 하나님이 학개를 통해 하신 말씀은 두가지이지요 언약의 말씀이 너희와 함께 있다 나의 영이 함께 있다 그러니 두려워 하지 말라 작지만 생명력 있는 성전이 될 것이다 합니다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들 가운데도 규모가 작은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다.
그것 밖에는 없어 그러니까 큰 교회라고 해도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다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큰 교회라고 해도 작은 교회라도 마찬 가지입니다
 
거꾸로 말을 할 수도 있어요 작은 교회인데도 언약의 말씀이 없고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거꾸로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겸허하게 가야만 합니다
 
6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가까운 미래에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실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뒤 바꾸어 놓을 그런 때가 온다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시대였지만 역사의 새로움은 인간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개입에서 일어난다 하는 것입니다
 
1989년이지 1990년인지 기억을 하는데 제가 학교 교목을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을 때인데 어느 교회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이 기도해요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도저히 무너지지 같지 않던 저 동부권의 장벽들이 샤베레리아서 불어오는 하나님의 바람이 불어오자 무너져 내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이어요 베르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막을 내리는데 그렇게 급격하고 공산주의가 몰락할 지는 아무도 모른 것이야 하나님의 바람이 한번 불어 오니까 와르르 무너진 것이어요
 
그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이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 시킨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인간의 계획 속에 역사가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인생의 역사가 개입되고 있구나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절망 처럼 절망처럼 느끼는 대서도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고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 하나를 들 줄 아는 사람이어요
 
7절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에 보배가 이르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모든 나라를 진동 시키고 그래서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를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은 의도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파괴 될 때 성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약탈 당했지요
 
성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약탈당했습니다 성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약탈당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야기하자면 솔로몬의 황금시대가 막을 내렸다 하는 뜻이거든요
 
솔로몬의 황금 시대가 막을 내렸어요 그런데 지금 나라가 망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세상을 진동 시킬 것이고 나라들도 진동 시켜서 결국 어떻게 한다고 이야기 합니까?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를 것이다 이전에 흩어졌다고 한다면 나라들의 보배가 이곳을 모여 들게 될 터인데 새로운 영광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작지만 초라하다고해서 낙심하지 말아라 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통하여서 온 민족이 하나님에 이를 날이 다사올 것이다 학개는 이렇게 가슴 벅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런 시대가 열리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차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7절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절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절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8절부터 9절까지도 무엇 무엇이니라 하고 선언한 다음에 후렴부처럼 선언한 말이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치 성 삼위 송영을 부르는 것처럼 당신이 일으키실 사건이 틀림없는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지금은 초라해 보이지만 금도 나의 것 은도 나의 것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드러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런 영광이 가져온 세상의 모습은 무엇이냐 하면 샬롬의 세상 평강의 세상 결국은 이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샬롬이 세상을 가득채우게 될 것이다 작지만 생명력이 있을 때 그 속에 언약의 말씀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면 결국은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샬롬이 빛살처럼 번져가게 될 것이다 학개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제4강 학개 2:10-23
거룩은 전염되지 않는다

성경 한 권 한 권을 끝날 때마다 마음속에 기쁨이 있어요. 
아 그래도 하나를 통과해서 내가 지나가고 있구나 하는 이야기 벌들이 일 벌 한 마리가 평생 모을 수 있는 꿀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반 스푼 정도 평생 몇 만 송이에 꽃을 찾아 다녀야 그만큼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 꿀벌들이 하고 있는 일은 꽃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왜 그래요 꽃이 가지고 있는 꿀을 가지고 가지마는 꽃의 수분을 돕는 역할을 하지 않아요
 
우리가 어떤 성경책을 읽어가고 통과해 나가면 벌의 다리에 꽃 가루가 묻어 있어서 우리가 무엇인가 잉태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신앙 가운데 가장 슬픈 신앙이 불임의 신앙이어요 무엇인가 생산해 내고 탄생시켜야 하는데 오랫동안 다니기는 했는데 그냥 그런 것이지 슬픈 것이지요
 
성경책 한 권을 끝내고 나면 우리 내면에 무엇인가 잉태되기를 소망합니다
10절 다리오 왕 제 이년 아홉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게에게 임하니라
 
아홉째 달 이십 사일 특정한 날이 등장하고 있지요
2장 1절 일곱째달 곧 그달 이십일일에 초막절이 끝나는 날로 이야기 했는데 아홉째 달 이십사일 두달 남짓 지난 다음에 학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 날로 학개에 하신 말씀이 그쳐요 그 이후에도 학개에게 어떤 말씀을 사신지 모르지만 기록에 의하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나중에 스룹바벨에 대한 신탁이 있지만 같은 날이거든요 두달이 지난 다음에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제사장들이 하는 일들이 어떤 일들이 있지요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도에 따라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제사뿐만 아니라 제사장에게 요구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분별하는 일이어요 어떤 것이 거룩한지 불결한 것인지 분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카도릭 같은 대서는 분별이라는 말보다 식별이라는 단어를 쓰거드뇽 이것과 저것을 알아차리는 일이지요
 
고전 2장 10절 여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성령의 은사 가운데도 중요한 은사가 영를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이런 것 아세요 제 후배 목사 책을 읽다가 매우 재미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가짜 휘발유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이 무엇일까요? 진자 휘발유여요 그러니까 진자에다가 조금 다른 것을 섞어서 가짜 휘발유를 만들어요
 
왜냐하면 진짜 휘발유가 많이 안 들어가면 사람들이 즉각 알아 차리거든요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하면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가져다 쓰면서 자기들의 나쁜 견해를 집어넣어가지고 퍼트리는 사람들 이것이 가짜 뉴스이거든요
 
이게 가짜 휘발유를 만들어 가짜에 진자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 진짜여요
그런 것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사이비 아닌데 그런 것처럼 보이는 사이비 비슷 사자야 비슷한데 아니야 가자가 너무 많아요 세상에 b가짜 뉴스도 많고요 그 뉴스에 사람들이 속아가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그 속에 진자가 많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예를 들어서 90퍼센트 사실에 10%에 가짜가 섞여 있으면 그것이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가짜여요 영적 분별력이 중요한 것은 그 10%가 모든 것을 망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를 기억하는데 어떤 종교적 현상이 종교적 열정이 교회를 부흥 시키는 데 열 개의 공적이 있는데 그 중에 90프로의 공이 있다고 해도 그 종교적 열정이 10 퍼센트의 페해를 가져 온다면 사람들은 90을 취하지요
 
이것이 효과적이기까 그 목사님 이야기가 그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 10%가 그 종교적 부정적인 요소 이것을 삼키고도 남아 정말로 그래요 꽁 잡는데 메라고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 10%가 전체를 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런 말을 우리가 들어 보았지 않아요 똑 같은 분별을 해 주어야 해요
 
분별을 해 주어야 해 이것이 옳은지 틀린지
그러니까 제사장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분별하는 일인데 무엇을 분별하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12절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상상을 해 보세요 세마포 같은데다가 고기를 샀어요 하나님에게 바칠 거룩한 고기를 쌌습니다 그런데 그 옷자락이 만약 떡에나 국에는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다았으면
 
옷자락에 싼 성물 거룩한 것 때문에 이 옷자락에 접촉했던 기름이나 포도주가 거룩하게 변하겠느냐
 
12절 답은 무엇입니까? 제자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이다 하는지라
어떤 거룩한 곳에 접촉했다고 해서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분별을 하게 되는데
13절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 진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성서의 세계에서 제사장은 분별을 하는 사람인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요 속된 것을 구별을 해요 구별의 기준으로 매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거룩한 것은 생명에 가까운 것이고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지오 그래서 부정하다고 하는 것은 속되다기 보다는 부정한 것은 무엇과 관견이 되느냐 하면 생명이 아니라 죽음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멸할 수 밖에 없는 사멸의 운명을 타고난 것들 이런 것들이 부정한 것으로 취급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멸할 것이 아닌 생명이 거룩함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제사장들이 하는 것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경계를 지켜 내는 일이었어요
 
우리가 입고 있는 의복도 중요해요 사람의 집 벽에도 무엇인가 부정한 것이 생겨나지 않았는지 그 경계를 지키기 위해서 제사장들이 노력을 합니다 피부라고 하는 것도 피부에 종양 같은 것들이 나서 투병하다가 나아지면 제사장에게 가 가지고 완치 되었는지 보여주고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어요
 
레위기 14장 2절 나병환자가 정결한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거룩한 것과 접촉했다고 해서 나는 거룩해 지지 않아요 그런데 부정한 것과 접촉했을 때는 부정해 지지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놀라운 분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부정해지는 것이 좋아요 꺼림직한 일이지요 부정해 진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나환자라든지 이런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물러서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의 부정을 감염시킬 까봐 사람들에게 갈 때에 입을 가리고 말하는 것이지요 불결 불경 여러분 병의 고통도 고통인데 자기를 불견한 존재로 세상앞에 말한다고 하는 게 얼마나 슬프겠어요
 
불결 불결하고 갈 수 밖에 없는데 예수님은 나 환자를 바라보면서 아 안 되었다 3미터 떨어져 내가 기도할 터인데 3미터 떨어져 그렇게 안 하잖아요 어떻게 했어요 그의 몸에 손을 데고 내가 말하노니 깨끗해 져라합니다
 
눅 5장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나으니라.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부정을 주님이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 것이야 그리고 정화 시키는 것이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 했던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내가 사랑 받는 사람이라고 부정한 사람을 보면 피하게 되어요
 
주님은 무엇이냐 하면 그의 아픔 속으로 들어가셔요 그의 몸에 타치를 한단 말이어요 타치가 중요한 것이어요 타치한다고 하는게 그래서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우리 후배 목사님이 있는데 아주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분이셔요
 
그분은 불경스럽게도 예수님을 걸레가 되신 주님 그렇게 말해요 걸레의 용도은 깨끗한 대에만 쓸 수 있습니다 바닥을 더러운 것을 닦으려면 걸레는 자기 몸에다가 더러운 것을 묻혀서 깨끗하게 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사장들은 분별의 기준은 명확했어요
 
제사장들은 분별을 하는 자인데 그 분별의 기준은 명확하지요 내가 거룩한 것과 악수를 했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 지지는 않아 어떤 분들이 이야기 합니다 예수 믿으셔야지요 이야기합니다 나는 괜찮고 우리 아내가 잘 믿으니까 아내 천국 갈 때 메달려서 가면 된다고 그런데 그런데 거룩한 곳에 접촉한 다고 내가 거룩해 지지 않아 거꾸로 이야기 하면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내가 부정해져
 
그래서 사람들이 꺼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은 무엇이냐 하면 꺼려지는 부정을 당신의 몸으로 받아 드림으로 정화시키는 것이어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이어요 부정하게 됩니다 하자
14절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에 모든 일도 그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야기입니까? 이 백성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부정하다 그들의 형편은 그런 것이어요 부정을 씻기 전에 하는 행동은 종교적인 행동은 소용이 없다 내 손에 숯 검덩이가 많이 묻어 있으면 상훈씨 먼지가 물었어요 털어주면 먼지가 털어져요 더 묻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이러하다 너희와 접하는 모든 것들이 더러워 지고 있다 하는 이야기 성전에 황혜함을 방치 한체 하나님 앞에 바쳤던 제물은 정결할 수가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예물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묻어 있는 때 때문에 그것은 부정할 수 밖에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배 행위가 매우 중요하지만 저는 예배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십분 이해하고 정말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늘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배 드리러 온 사람들 보고 어서 오세요 하고 마지하면 좋겠는데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실는지 모르는데
 
이사야서 1장 11절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 불렀고 나는 수 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너는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여러분 교회를 다닌다고 다 신자인 것은 아니고 마당만 밟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어요 이것이 참 두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복음 성가에도 그런 것 있나요 우리 입술은 주님 닮은 듯 하나 내 마음은 주님을 닮지 못한 일 입술은 주님을 닮은듯한데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은 주님을 닮지 못한 것이 있는데
 
내 마당만 닮은 이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13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하나님이 화가 나신 까닭이 어디 있느냐 하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고 말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 동시에 악을 행해 그러면 예배를 망치는 것이지요 더럽히는 것이지요
 
내 손에 있는숯 검덩이를 가지고 사방 묻혀 놓는 것이지요 이게 그릇된 종교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제사도 바치고 나는 꽤 괜찮은 신자라고 자부하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니라
 
14절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에언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의 파토스에 사로잡힌 자라 파토스라고 하는 말을 정념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이어요 예언자는 무엇이냐 하면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일까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 인데
 
예배드리러 성전을 찾아 오는 사람들을 예배드리기 위해서 나오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악을 행하고 있다면 이게 예배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러해 전에 조지아라는 나라와 아르메니아라는 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참 놀랬어요 조지아 사람들 정교회 신자들인데 아르메니아도 그렇고 정교회 신자들인데 가다가 십자가만 보이면 길을 건너가다도 여지 없이 이래요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어요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이콘들 앞에 촛불 켜 놓고 기도하고 이콘에 입 맞추고 앉아서 말씀 듣고 하는 것 보면 참 거룩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운전사들은 관광객들 속여 먹고 시장에 가면 시장 사람들 바가지 씌우려고 하고 오늘 교회에 나오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평형이 무너진 것 이것이 대단히 종교적인 것 처럼 보이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자기의 이익에 의해 움직이는 그런 것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래도 나에게 예배하러 오니까 좋아 그렇게 이야기 하실까
 
이사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어요
12절 내 마당만 밟는다 외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진실되게 설 것인가
15절 복이 약속되고 있는데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위에 놓이지 아니한 때를 기억하라
 
오늘과 이전을 구별하여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여호와의 전에 돌이 놓이던 날입니다 그러니까 이전과 이후를 한번 비교해 보라 기억하라라고 하는 것은 기억을 위해서는 인간은 늘 망각하는 동물이지요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알레테이야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어요 세상을 떠날 때 강을 건너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강을 건너는 것처럼 표상을 하고 있단 말이어요
 
건너는 그 강을 스틱스강이라고도 이야기 하는데 레테강이라고도 이야기해요 사람들은 그 강을 건너갈 때 강물을 마셔요 물을 마실 때 과거의 기억을 다 잊어요 레테는 망각의 강이어요
 
진리라고 하는게 알레테이야이어요 아라고 하는 것은 부정의 의미이거든요 그러니까 레스테이를 깨트리는 것이어요 알레테이라는 것은 진리를 비 은폐성 은폐되어 있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어요
 
은혜되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은혜 되었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 진리이다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망각의 우리의 기억속에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오늘과 이전의 삶을 너희들이 반드시 기억하라 그래야만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을 진실히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어떤 복이 오는 지를
16절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뿐이었고 포도주 틀에 오십 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고르 뿐이었느니라
 
성전에 기초가 놓이기 전에는 그렇게 수확이 빈약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수확이 빈약한 것이 있겠지만 가혹한 세금 정책 때문에 뜯기는 것도 많았겠지요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이 거두어 들인다 해도 빠져 나가는 것이 많으면 독은 비게 마련이어요 진실된 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빠져 나가는 대가 많았다
 
학개 1장 6절에 보면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운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보람이 없어요
9절 너희가 많은 것을 받았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 집으로 가져갔으나 불어 버렸느니라 이것이 인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빠져 나가지 않아야 채워지는 데 빠져 나가는 것을 막지 않고 하면 안 된다 옛날에 오성과 한음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어요 제가 즐겁게 보었던 만화입니다 장난 꾸러기이거든요 오성과 한음이 오성인지 한음인지 모르겠는데 구멍이 뚫어진 독에 물을 다 채우면 무엇을 준다고 냇가에 가 가지고 물을 떠다가 막 집어넣었는데 되어요 안 되어요 안 되어요
 
오성이라는 자가 깨를 내어요 가만히 구멍 뚫어진 것을 메워 그리고 물 갇다 부으니까 차 오르게 되지 않아요 빠져 나가지 않게 해야지 하나님 없이 복을 누리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독에 물을 넣은 것 처럼 허망하기 짝이 없어요
 
과거의 삶이 그랬다는 것이어요
16절 그 때에는 이십 고르 곡식 더미에 이른즉 십 고르 뿐이었고 포도주 틀에 오십고르를 길으러 이른즉 이십고르 뿐이었었느니라
 
17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으로 쳤으니 너희가 내게로 돌아카지 아니하였느니라
 
맡 뻐잔 독처럼 살림이 고달파졌으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살므이 이 곤고함의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했는데 사람들은 자기를 돌이켜 성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18절 너희는 오늘 이 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말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어떤 이야기입니까? 성전 지대를 쌓기 시작하는 그 날부터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 건축에 가서 일하느라고 노동력이 부족할지 몰라도 오히려 수확은 늘어나게 될 것이다 빠져나가는 일이 적기 마련이어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풍요의 상징이었던 나무들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그 나무들이 열매가 없었는데 오늘 이후에는 달라질 것이다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지대를 샇던 날부터 하나님이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날을 기억해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성전 지대를 쌓는 날은 어느날이어야할까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속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우상이란 어떤 것들이 우상이었지요
출 20장 4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에 있는 것들을 본 따서 만든 것들이 우상이지요
 
진자 우상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영향을 미쳐할 그 자리에 우리 영혼의 핵심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들어와 독차지 하고 앉아 있는 것 그것이 우상이거든요
 
그 우상은 현대 세계의 우상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돈입니다 오똔 뷴운 아여가 했어요 현대 세계의 우상은 출세이다 출세를 위해 못할 일이 없어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끊고 친구들도 이용가치로 바라보고 그러면 내가 아무리 교회를 내 마음에 지성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돈이어요 출세여요
 
우상 숭2배하고 이 우상을 척결해야 합니다 다시금 하나님이 내 마음에 중심 속에 들어오셔서 좌정하시도록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셔 드리기 위해 그림을 품고 다가설 때 학개 시대의 성전 지대가 놓이는 것과 같은 것이야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그 우상과 결별하고 내 마음의 핵심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그분과 맺은 언약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이웃의 사랑의 마음들이 내 마음속에 회복될 때 그 때는 포도나무 무화과 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 같은 풍요의 상징의 나무들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것이다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이 왜 이렇게 곤고할 까 생각하면서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야 되어요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성전의 지대가 놓이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스룹바벨에게 약속이 등장하는데

20절 그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1절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말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절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여러 나라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자를 엎드려뜨리리니 말과 그 탄자가 각각 그의 동료의 칼에 엎드려 지리라
23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가장 힘 있어 보이는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연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내 종이라 일컷는 스룹바벨을 내 세우실 때 하나님이 마치 그를 도장처럼 그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다양합니다.
종교인들도 있지만 때때로 정치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종으로 일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하 하나님이 생각하신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바로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를 복되고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우리의 삶이 황폐해 진 것이 아닌지 채워도 채워도 만족이 없었던 것은 내 마음속에 그릇된 것이 아닌지 다시 한번 그릇된 주인을 내 쫓고 하나님을 내 마음속에 모셔 들여서 마치 학개 시대에 성전 지대가 놓이는 것 처럼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 때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나무의 열매들이 맺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복된 역사에 나타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 찬미하고 우리의 삶이 이웃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