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Nahum) 충분한 위로 / 08-05-2023(토)



요나서와 나훔서 소개

피터 림(Peter Lim) 박사는 요나서와 나훔서를 소개하며 하나님의 원대한 사명에 대한 메시지와 세상의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선교대학원의 글로벌 리더십 개발학의 부교수입니다.
기독교 구약성경의 소예언서 섹션에 있는 책 두 권 요나와 나훔을 리더십 개발의 관점에서 소개하겠습니다.

나훔은 칠십인역(헬라어로 번역된 히브리 성서)에서 요나서 바로 뒤에 나옵니다.
이 순서는 꽤 적절합니다.
특히 요나와 나훔 둘 다 자신의 사역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발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청중에게 전했습니다.

요나는 나훔보다 한 세기 전에 니느웨에 있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훔은 기원전 7 세기에 남유다 왕국에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압제자가 곧 멸망할 것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때쯤 앗수르는 이미 유다의 이웃인 이스라엘 왕국을 지도에서 지웠습니다.
앗수르의 정치 지도력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청렴과 잔학함이었습니다.
이는 나훔서 3 장 1 절에서 4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초강대국으로서 앗수르 사람들은 다른 나라를 속였습니다.
다른 나라를 소멸시키고 스스로를 더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조약과 약속을 어겼습니다.
무고한 피를 흘리게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무시했습니다.
이는 구약성경 전반에서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심각한 범죄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요나는 니느웨에서 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복음주의자들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구원 대신 파멸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 중 일부는 이슬람 혐오증을 조장하고, 이슬람교도들이 미국으로 오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까지 제안합니다.
그들은 요나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변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선교는 더 이상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선교는 어디에서나 시작되고, 어느 곳에서나 갑니다.
좋든 싫든 우리가 있는 곳은 이제 선교의 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움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선지자를 지도자라고 부르기를 꺼려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종으로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로버트 그린리프는 자신의 저서 "서번트 리더십"에서 섬기는 지도자는 먼저 하인이라고 말합니다.
섬기는 지도자가 되는 것은 봉사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봉사하고자 하는 감정에서요.
그린리프는 가장 효율적이지만, 가장 하기 어려운 시험은 다음과 같다고 말합니다.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성장하는가? 섬김을 받는 동안 더 건강해지고, 더 현명해지고, 더 자유로워지는가? 더 자율적이고, 그들 자신이 섬길 가능성이 더 높아졌는가?"
저는 이것이 예언사역에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결과에 감사하지는 않았지만요.
요나의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둘 다 질문으로 끝납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훔의 연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노아몬(Thebes, 애굽 제18왕조 시대의 수도)의 함락(661년)이다.
다른 하나는 니느웨의 함락이다(612년).

나훔의 활동 시대는 이 두 사건의 중간 시대일 것이다.
본서 나훔 3:8-10을 보면 노아몬의 함락이 과거사로 기록이 되어있는데 노아몬은 661년에 앗수르왕 아술버니팔 (Ashurb- anipal) 에게 점령되었다.
또 본서에는 니느웨가 함락 되던일을 목격자 처럼 묘사해 있는데 니느웨는 612년에 바벨론왕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함락 시켰다.
그러므 로 나훔은 661년과 612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나훔은 메소보다미아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고 되어있으나 본서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이며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사람 인(人)


믿을 신(信)
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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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영국에서활동한 조지 프레드릭 왓츠(George Frederic Watts)의 이 그림은 2004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보고 감동을 받아 대권에 도전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유명해졌다.

오바마는 이 그림을 소개하며 미국은 "담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외쳤다.
그림을 가만히 보면 한 여인이 둥근 공 위에서 슬픈 듯이 고래를 숙인 채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여인은 하프에 기대어 앉아 가까스로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눈은 가려져 있고, 하프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세히 보면 47개의 줄 중에 마지막 한 줄만 남은 상황이다.
이 여인이 앉아 있는 공을 화가는 무엇으로 묘사했는가?
바로 지구다.
지구 위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여인, 볼수도 없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나 하프를 연주해야 한다.
지구에서 내 사정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고, 더 이상 버틸 힘도 없는 상태.
그런데 이 그림의 제목이 ‘희망!’이다.
절망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 같은데 희망이라니, 그것도 아직 한 가닥의 하프 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 가닥으로도 연주는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한 가닥으로 연주가 가능한가?
클래식 음악 중에 잘 알려진 곡으로 G선상의 아리아 라는 작품이 있다.
왜 그 곳이 ‘G선상의 아리아’일까?
이 작품은 바이올린의 4개의 현 중 ‘G선’이라는 하나의 줄로만 연주하는 곡이다.
하나의 선으로만 연주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한 가닥만 남겨진 하프와 같아도 괜찮다.
내가 붙들 것이 하나밖에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마지막 한 가닥이 되어 주시는 주님이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른다.


희망, 조지 프레드릭 와츠

희망 뒤에 있는 희망은 없다.

절망 뒤에만 희망이 존재한다

'희망 Hope', 조지 프레드릭 와츠 George Frederic Watts,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42.2 x 111.8 cm, 두 번째 버전, 현재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in에서 전시 중.

실명을 나타내는 붕대 감은 눈먼 장님, 한 줄 남고 모두 끊어진 류트, 무엇인가 소리를 들으려고 고개 숙여 귀 기울이고 있지만 그녀의 노력은 지쳐갑니다.
희망이라 말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달까?
슬픔이나 황폐함, 절망에 가까운 블루, 우울의 색조가 지배하고 있는 미지의 별 위에 앉은 그녀, 초록과 파란색의 우울한 렌더링은 불과 5년 후 악명 높은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예고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류트에 현 한 줄은 남았지, 노래하기에는 아직도 희망은 있지, '희망을 가져요, 테이크 호프!' 엄밀함과 순수를 숭상하는 '하이 아트'의 와츠 그림 중에서 아마도 가장 서정적이고 시적이며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입니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희망'. 눈가리개를 쓰고 거대한 오렌지 같은 별 위에 앉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소녀, 끈이 끊긴 한 가닥 남은 류트를 안고 절망 속에서도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무엇인가 귀 기울이는 이 버전의 유화는 11년 후 영국 전역에 순회 전시에 나섰다. 1959년에는 자유의 행진에서 마틴 루서 킹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 주제로 등장했다. 1990년에는 젊은 청년 버락 오바마 Barack Obama는 자신이 출석하는 시카고 연합교회에서 이 그림을 만나 충격을 받았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오바마가 외치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희망'의 열광적인 제목이 되었고, 2년 뒤 그의 베스트셀러의 선언문 메시지 제목이 되었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이 그림 한 장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치는 민중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그림이 되었다. ​​

조지 프레더릭 왓츠의 ‘희망’

누가 나를 위로해 주나

저 소녀, 각박한 현실에 뒤통수를 맞았을까요, 냉정한 사랑에 상처 입었을까요? 어찌 됐건 지독한 상실감에 세상과 맞서지도 못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남루하지만 소녀의 옷이 섬세하기도 하지요? 누추한 옷이지만, 어떤 화사한 옷보다도 소녀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단애의 끝에서 통곡도 잊은 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소녀의 마음과 공명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작가는 꿈을 잃어버린 아픈 자리에서 보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맨 발의 곡옥(曲玉) 자세로 현이 끊어진 수금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소녀의 마음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있는 거지요.

악기는 사람을 닮습니다. 현이 끊어진 수금은 바로 저 소녀의 마음일 겁니다. 기댈 것이라곤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금밖에 없네요, 저 소녀는! 슬픔과 고독을 수금에 실어보고 싶었으나 끊어진 수금은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줄 모르니 또다시 억장이 무너집니다. 단장(斷腸)이라 해도 좋을 깊디깊은 절망감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럴수록 소녀는 자기 자신 속으로 아득히 숨어들고 있습니다. 저 풍경이 도피일까요, 치유일까요?

    1886   142112

조지 프레더릭 왓츠 ‘희망’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42×112㎝, 테이트 브리튼, 런던

소녀의 눈을 보십시오.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보지 않는 거지요. 그거 아십니까?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만 보는 신전의 사제들은 대부분 장님이었다는 것을. 오이디푸스의 운명의 실타래를 풀게 도와주는 타이리시아스가 장님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상처 받았다고 느낄 때는 더더욱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예 희망이 없으니까요. 그 때는 오히려 바깥으로 향하는 모든 시선을 차단하고 자기 숨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도피는 치유는 아니지만, 종종 도피가 치유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소녀가 구(球) 위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저 원은 지구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상처 입은 소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부드러운 선이라 느껴집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지쳐버린 소녀를 무심하게 드러내는 저 구가 동굴 같습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헛디디다 상처투성이가 된 내가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신을 숨기는 자신 속의 동굴 말입니다.

동굴의 시간을 가져보셨습니까? 그 시간은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접는 시간입니다. 행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머무는, 혹은 미친 듯 떠도는 시간이지요. 웃고 떠드는 시간이 아니라 침묵하는 시간이고, 비판하는 시간이 아니라 참회하는 시간입니다. 그 동굴의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동굴로 숨어들게 했던 두려움으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을 비축케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심지가 굳은 내 친구가 겹쳐집니다. 끊어진 수금 대신 말 못하는 강아지를 안고 위로를 받았던 외유내강형의 친구가. 친구의 강아지 초롱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슬픔에 찬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지요. 아, 이 친구는 한 마리 개를 잃은 게 아니라 가족을 잃었구나, 초롱이와 함께 보낸 한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나는 우리가 초롱이를 돌봐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초롱이가 우리를 지켜줬던 거야. 한참 어려울 때 집안에 들어온 강아지거든. 힘들어서 집에 들어가 그저 핸드백을 툭, 던져놓고 20분씩, 30분씩 초롱이를 안고 있었던 적이 참 많아. 그러면 초롱이는 내 아픔을 아는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는 거야. 생각해보면 그게 내겐 기도였던 거 같아. 초롱이는 울 수조차 없을 때 가장 낮은 자리에서 편안히 나를 위로해준 사랑이었어!”

희망은 그렇게 예기치 않았던 낮고 어두운 자리에서 싹을 틔웁니다. 우리에게는 동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견디는 시간이. 제대로도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때까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의 실체를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때까지.




역사(歷史)의 교훈(敎訓)

역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라는 말은 단순히 “이야기”라는 뜻의 story가 아니고 history이다.
history는 어원상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historia』에서 유래했다.
historia는 histor를 어원으로 하는데, histor는 나라에 중대한 일이 발생했을 때 자문을 구했던 학식이 깊은 연장자, 즉 현자를 뜻한다.
따라서 역사 history는 “현자의 이야기”라는 뜻을 갖는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직 깊은 학식이 있는 연장자만이 들려 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즉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은 현자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이 담긴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과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해석된 사실이고, 역사학은 그러한 해석을 통한 과학, 즉 주관성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즉 역사의 교훈은 무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첫째로 역사는 윤리를 상기시킨다.

역사는 시험을 치기 위해서 외우는, 나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는 그런 지식 나부랭이가 아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지평, 즉 당시의 경제적 여건으로부터 문화, 사회, 심지어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까지 보여 준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 주는 그러한 중층의 의미지평 속에서 우리는 삶과 인간성,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성찰을 하게 된다.
즉 역사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 즉 윤리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이미 여러 지식인들, 특히 이율곡의 ‘십만양병설’로 예견되었던 전쟁이었다.
일본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보냈던 조선통신사가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외교문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칠 테니 길을
비키라는 침략의도가 드러나는 문구가 있었다.
그럼에도 동인은 서인이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왜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당파적 정략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왜가 쳐들어 왔을 때 부산성을 사수하던 정발 장군은 전사하고 성을 빼앗겼고,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에 맞서 동래부사 송상현 이하 군민들이 항전했으나 순국했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는 파죽지세로 서울로 북상해 들어왔고,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만에 서울이 위험하게 되었다.
충주에서 신립의 패전보가 전해지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왕이 도성을 버린 게 알려지자 민심은 흉흉해져 민란이 일고,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창덕궁과 창경궁의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해갔다.
개성에서 평양, 평양에서 임진강, 그리고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지자 선조는 의주로 향했고, 급히 명에 원병을 요청했다.
그리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왕세자 책봉을 광해로 하고, 광해군은 의병과 군량의 확보에 열중하도록 했다.
이렇게 육군이 수세로 몰리고 있을 때 해군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한 왜군을 무찌르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편제는 고려시대부터 왜구 방어위주로 잘 정비되어 각 도의 수영(水營)을 근간으로 했다.
물론 경상 좌수영과 우수영은 싸움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대패했지만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옥포해전의 첫 승리를 필두로,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전과를 거둔 이유는 거북선이라는 함선에 있다고 말해지는데, 거북선은 태종 때 기록으로 처음 전해지지만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 새롭게 건조된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 즉 곽재우, 정인홍, 고경명, 김천일, 조헌, 정문부 그리고 휴정, 유정 등이 진주싸움 등지에서 왜병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명의 원군의 도움을 받아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왜를 물리치자 서울에서 철수했고, 이후 두 번의 진주성 싸움이 있은 후 왜는 강화회담을 제안했다.
결국 회담이 결렬되어 정유재란이 발발했으나 왜는 북진하지 못했고, 수군에서는 이순신이 소극적이라는 죄목으로 하옥되어 원균이 그 후임을 맡았으나 수군이 전멸하자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명량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는 총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노량대첩에서 이순신은 최후를 맞는다.

임진왜란의 역사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돌보느라 진실을 외면하여 전쟁을 불러온 당시 당쟁으로 얼룩진 위정자들의 파렴치, 심지어 궁궐을 버리고 피란을 가는 선조의 무책임함, 게다가 거기서 버려진 민초들의 고통과 그것이 야기한 궁궐방화사건, 뿐만 아니라 전쟁의 폐색을 염려하여 왕의 신변을 위해 왕세자 책봉을 서두른 일, 그 가운데 이순신이 수군을 통제하고 전과를 이루었으나 또한 소극적이라 하여 하옥된 일, 그는 홀로 영웅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결국 노량에서 죽음을 맞는다.
여기서 위정자들의 파렴치와 민초의 고통, 선조와 이순신에게서 보이는 인간성의 문제, 선으로 향하기 보다 악으로 빠지는 인간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인간과 삶 그리고 그 의미와 윤리까지 총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다른 예로 영국의 헨리8세를 보자.

그는 15세기 영국의 절대주의 시대의 왕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성에 대해 눈뜨면서 유럽은 종교로 통일되어 있던 중세를 벗어나 국가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에 국가의 수반으로서 왕은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는데, “짐이 곧 국가다”라는 루이14세의 말처럼 왕의 권력은 신이 그에게 부여한 절대적 파워를 가졌다.
이러한 시대에 헨리8세는 형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과 결혼했는데, 스페인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 부왕에 의한 정략적 결혼이었다. 그러나 캐서린이 딸 메리 튜터밖에 두지 못했고 그러한 가운데 헨리는 그녀의 시녀였던 앤 불린을 사랑하게 된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20년만에 이혼을 신청하는데 가톨릭 교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헨리8세는 로마 가톨릭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를 탄생시키는데 이것이 영국에 있어서의 종교개혁이다.
대륙에서는 루터와 칼뱅에 의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이룩되는 종교개혁이 영국에서는 한 사람의 왕의 개인적인 사랑의 치정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그것은 또한 당시의 절대왕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헨리8세는 교회뿐만 아니라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등의 신뢰를 보였던 토마스 모어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혼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관직에 해직되어 반역죄를 이유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결혼한 앤 불린은 전처소생인 메리에게 쌀쌀맞게 대했고 딸 하나를 낳은 후 연속으로 두 아들을 사산하자 헨리는 그녀를 불륜과 외도의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한다.
세 번째 왕비도 아들을 낳았지만 산욕열로 죽고, 네 번째 부인은 독일과의 친선을 위해 들였으나 금방 이혼하고, 앤 불린의 사촌누이였던 하워즈를 들여 좋아했으나 근위대 시종과 외도한 것이 밝혀지자 참수형에 처하고 끝내 두 딸의 가정교사이자 청상과부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절대왕이라는 시대적 조건에서 헨리의 변덕을 보며 인간성과 선악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의 가진 위정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할 수 있는가를 잘 드러난다.
다음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데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다.
당시 프랑스 구체제(앙시앙 레짐)는 귀족과 성직자가 대토지를 소유한 가운데 면세까지 받았지만 일반 시민과 농민은 온갖 세금에 시달려 나무껍질까지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90% 이상의 농민과 시민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는 이 특권층의 모순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었다.
그런데 루이16세는 미국의 독립운동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지원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성직자, 귀족, 그리고 시민의 삼부회의를 소집한다.
이때 시민의 대표로 참석한 이들은 이른바 테니스코트 선언을 통해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시민의 권리가 인정되는 법을 통과시키고자 한다.
왕과 귀족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두려워했다.
이에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는데 그러자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국왕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죄수를 풀어주었다.
바스티유 습격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에 일어났다기 보다는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선언에 평등사회를 추구하여 불평등 사회에 저항하는 사회개혁 의지가 표출된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물결은 농촌으로 이어져 농민들이 귀족의 저택을 습격하고 전국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선언된 것이 바로 ‘인권선언’인데, 바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고 귀족은 그들의 특권을 버려야 하며 국가의 권력은 왕으로부터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에 영주제를 폐지하고 봉건적 특권층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러한 인권선언을 용납할 수 없었던 왕은 도피하여 왕비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가서 프랑스를 반격하고자 할 계획을 세우는데, 마침 참모였던 미라보의 죽음으로 실패하고 만다.
왕이 다시 프랑스로 끌려오면서 국민을 버린 왕을 존경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왕의 단두대 처형을 두고 강경파와 보수파 간의 대립이 격했다.
강경파는 점차 파리코뮌(자치 시회)를 만들면서 시민 속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고, 보수파가 투표에서 패하여 왕은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이렇게 강경해진 산악파 혹은 자코뱅파는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공포정치를 시행한다.
왕이 처형된 프랑스를 주변의 국가들은 호시탐탐 노렸고, 외국의 공격을 받게 되면 어렵게 얻은 자유와 평등이 사라지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은 ‘라 마르셰예즈’를 부르며 자진해서 전장에 나갔다.
혼란한 정국속에 물품을 사재거나 외국과 손잡고 혁명세력을 타도하려는 자들은 발견 즉시 단두대에 처형되었는데, 여기에 마리 앙투아네트도 끼어 있었고 1년 동안 처형된 사람의 수가 1만에 달한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결국 “폭군을 타도하라”는 구호 속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는 걸로 끝난다.
이렇게 불안한 정국을 진압하고 “혁명은 끝났다”라고 외치며 군사적 독재를 확립한 것이 나폴레옹이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에서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과, 그 속에 얽힌 인간의 운명과 그 비극, 그러면서도 권력이 갖는 무상함 등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비감이 비슷하게 드러나는 것이 한국사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이 아닌가 한다.
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숨죽이며 산 사람이다.
그는 유방의 근위대장이었던 한신이 가랑이 밑을 지나갔다는 말처럼 안동김씨의 가랑이 밑을 지나갈 만큼 모자라는 행세를 하며 지냈다. 그가 임진왜란 후에 소실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했다.
그리고 그는 난초 잘 치기로 유명했고 그가 지냈던 곳은 운현궁으로 불리며 고종이 즉위 10년 동안 합파로 치세하며 왕 위에 군림하는 일종의 세도정치를 했다.
그러나 그는 격동의 시대적 상황에서 외세를 인정하지 않고 쇄국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에 반해 개화에 대한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담한 것이 명성왕후 민비였는데, 그녀는 친일과 친러를 오가면서 고종의 정치적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고종에게 간하는 첫 번째 신하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등으로 쇄국정책을 주도하던 대원군의 세가 복귀하는 듯했으나 민씨 일파가 청의 세력을 들여오면서 대원군의 치세는 단명에 가고 청국에 볼모로 잡혀갔으며, 일본과 청국의 조선에서의 세력만 넓혀 주는 결과가 됐다.
그리고 갑신정변에서 청국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의 힘을 얻어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던 것이 실패하고 이후 갑오경장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나아가 청일 전쟁 이후에 일본의 세력이 내정간섭으로까지 번지면서 급기야 조선의 국운이 몰락의 견지로 가는 마당에 명성황우는 일본의 깡패집단에 의해 살해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러한 번민의 세월 동안 한 여인으로서 명성왕후가 쓴 편지와 그녀의 생가가 경기도 여주에 보존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장희빈이라는 인물과 숙종, 인현왕후 그리고 숙빈 최씨의 조선 중후반기 역사에서 조강지처를 내쳤다가 다시 들이면서 용서를 구하는 숙종에서 오류많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당파와 신분제 사회 속에서 모친 명성왕후에 의해 계비로 들여진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편견, 또한 속절없이 후궁에서 왕비로까지 등극하며 세자를 낳은 모후를 결국 사사하는 인간의 변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여러 가지 의미지평을 보여 준다.
그 의미지평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심각하게 묻는 질문의 장을 마련하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의미는 윤리성까지 묻는 것이다.

둘째로 역사는 역사성을 노정하고 그것을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시킨다.

언급했다시피, 역사는 의미지평을 제시한다.
그 의미지평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역사성을 인식하는 것을 ‘역사의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단순한 사건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의식을 갖기 위해서, 즉 그것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역사의식은 한 국가와 민족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의식은 문화의식의 기초이고 문화의식은 곧 한 사회의 혼과 넋, 정신세계이다.
한 개인에게 정신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듯이 한 국가나 민족에게도 그 정신세계를 이루는 역사의식이 중요하다.
이러한 정신세계가 올바르게 갖춰지지 않은 민족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이에 김구 선생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중국 자금성에 있는 건청문에 가면 ‘건청문(乾淸門)’이라고 적힌 한자 옆에 이상한 글자가 적혀 있다.
이 글자는 만주어인데요, 이것은 청나라 만주족이 사용했던 문자로 지금은 만주족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 사어(死語)가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를 300년가량이나 지배했는데도 그들의 역사의식, 즉 정신세계가 뚜렷하지 못해서 중국에 문화적으로 동화되는 바람에 글자만 덩그렇게 남은 채 민족은 사라지고 말았다.
만주족뿐만 아니라 중국변방의 여러 민족들, 예컨대 10-11세기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도, 12-13세기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들은 자신만의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까닭에 그들의 정체성이 정비되지 못했기에 역사의 현장에서 사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독일은 철저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독일은 자신들의 과거사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무릎 꿇고 사과하는 장면은 너무나 유명하다.
지금의 메르켈 총리 또한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영원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정도이다.
독일이 1870년 통일 이후에 제2의 산업혁명이라는 성과를 이루고, 1,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유럽의 금융위기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철저한 역사의식으로 드러나는 민족적 정신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2006년 독일과 프랑스는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는데요, 이는 역사적으로 라이벌로서 서로의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양국이 70년 동안 양국이 교류하면서 일구어낸 성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세계 경제 대국이지만 역사의식에 있어서는 저열하다.
독도 망언이나 위안부 문제, 그리고 역사교과서 문제로 우리민족의 공분을 살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아베 정부는 집단자위권이나 신사참배 등으로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며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의심케 하고 있다.
일본뿐만이 아니다.
최근 안중근 기념관 건립과 관계하여 중국과 한국 간에 역사적 교류가 호혜적 물결을 타는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중국은 이미 2000년부터 동북공정이라는 명목 하에 중국변방의 역사를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 라오닝 성에 있는 고구려 성산산성 입구에 있는 표지석에는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이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고, 중국 헤이룽 성에 있는 발해의 옛 도읍지의 발해국 안내 현판에는 “발해가 옛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관광기념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유엔에 등재된 고구려 유물이 중국 지역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중국의 역사로 소개되고 있다.
이렇게 일본과 중국의 강국 속에서 한국의 존립을 보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필요하고, 더욱이 이들의 퇴행적 역사의식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역사의식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 강국들이 역사왜국에 이토록 광분하는 것은, 곧 역사가 한 국가와 민족의 정신세계의 기저를 이루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들의 민족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역사를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역사가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된다.

셋째로, 역사는 사회정의의 바탕이다.

역사는 역사적 정의 실현을 통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여 한 사회의 도덕성을 형성하는 기본이다.
예컨대 과거사 청산과 같은 역사문제는 곧 그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의로운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이다.
우리의 경우 친일파 척결이나 국가 유공자 처우 문제가 보여 주듯이, 한국사회는 과거의 역사의 공과가 제대로 심판되지 않은, 따라서 도덕적으로 그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이다.

물론 이승만 정권 당시 반민특위(반민족 특별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친일파를 척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초대 총리를 비롯하여 친일세력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위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해방 이후 우리사회는 친일세력이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아 그들의 이세와 삼세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잘못된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은 것은, 곧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오히려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결국 사회의 도덕성을 타락시킨다.
즉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사회가 가진 도덕성이 저열할 경우 그 개인의 삶이 타협하거나 파멸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경제적 양극화를 비롯한 경제적 정의뿐만 아니라 관피아로 불리는 관료사회의 부패와 같은 적폐(積弊)로 비정상이 정상으로 행동하는 사회가 된 것은, 바로 역사적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아 기본이 바로 서지 않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정의의 기본은 역사적 정의실현에 있고, 역사적 정의는 곧 사회의 도덕성을 담보하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세월이 흐르더라도 사회가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응징하고, 과거에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을 한다는 역사적 정의가 바로 서야 하고, 그럴 때에만 개인은 그 사회를 신뢰하고 그의 도덕성을 발휘해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정의는 사회의 도덕성을 바로 세우는 바탕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해석을 요구하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사실을 통해 중층적 의미지평을 보여 주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반성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역사는 역사의 의미지평인 역사성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 즉 역사의식을 형성한다.
역사의식은 곧 한 사회의 문화의식으로서 그 사회의 정신세계의 기저를 이룬다.
이런 까닭에 일본과 중국의 퇴행적 역사의식은 곧 그들의 국가적 야심을 실현하고자 하는 방편으로서 자국의 정신을 결속하려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사회의 도덕성을 재는 기본으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역사의 잘못이 바로잡히지 않는 곳에서 개인의 도덕성을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우리에게 단순한 지식 이상의 의미로서 우리의 집단적 삶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소중한 인문학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08-08-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피 성이여(나훔 3:1)

화 있을찐저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Woe to the city of blood, full of lies, full of plunder, never without victims!

"피 성이여(the city of blood)"
이르 다밈(עִיר דָּמִים)

성(5893) 이르( ʽîyr)  עִיר   

1. 이스라엘인 ‘일’,  2. 화,  3. 두려움
발음 / 이르[ ʽîyr ]
어원 / 58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일(대상 7:12, 렘 15:8, 호 11:9).
구약 성경 / 3회 사용

* 5892. 이르(ʽîyr)  עִיר   

1. 도시
2. עִיר הַמֶּלַַח
3. עיר נָחָ
발음 / 이르[ ʽîyr ]
어원 / 57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창 4:17, 출9:29, 삼상30:3), 성읍(창19:25, 레25:33, 민13:19), 고을(창35:5, 신3:5), 도성(창36:32, 민21:26, 대상1:43), 집(삼하17:23), 성주(왕상22:26, 왕하10:5), 성중(대하23:21), 영문(느2:8), 읍(에8:17, 9:2, 합2:12),촌락(렘19:15).
구약 성경 / 1042회 사용

*. 5782. עוּר 

1. 깨다,  2. 일어나다,  3. 깨우다
발음 / 우르[ ʽûwr ]
관련 성경 / 깨다(삿5:12, 욥14:12, 시73:20, 사51:17), 일어나다(아4:6, 슥2:13), 격동시키다(욥41:10, 단11:2, 슥9:13), 통하다(욜3:12), 깨우다(시108:2, 아8:5, 슥4 :1), 들다(삼하23:18, 대상11:11), 치다(사10:26), 소동하다(사14:9), 내다(시80:2), 일으키다(대상5:26, 잠10:12, 사45:13, 호7:4), 부르짖다(사15:5), 감동시키다(대하36:22, 스1:1), 감동받다(스1:5), 부추기다(렘51:11), 떨치다(시35:23, 단11:25), 격려하다(욜3:9), 어지럽게 하다(신32:11), 흔들다(아2:7, 8:4), 분발하다(사42:13, 64:7), 깨우치다(사50:4), 떨치다(단11:25), 흥분시키다(학1:14), 뽐내다(욥31:29), 놀라다(욥17:8).
[명] 격동(렘50:41).
구약 성경  / 80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826.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구기 15:16.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나훔 3장 : 니느웨 멸망의 원인과 멸망의 필요성

1장에서 나훔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고 유다는 구원하실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2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과 약탈을 당할 것인가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3장에서도 2장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격앙되어 있는 강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 예언의 초점은 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이유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한때 번창했던 교만한 도시 니느웨의 영적인 부패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3장의 내용을 세부분으로 구분합니다.
3:1-7, 니느웨의 폭력과 속임수가 수치를 가져올 것
3:8-11, 테베(노아몬)에 대한 니느웨의 태도가 자기 자신의 패망을 불러 올 것을 예언
3:12-19, 니느웨의 방어 노력이 전부 무용지물이 될 것을 선포

"피의 도성(the city of blood)" 니느웨를 히브리어로 "이르 다밈(עִיר דָּמִים)"이라고 합니다.
'이르((ʽîyr. עִיר)'는 "도시(city), '다밈'은 "피(dâm, דָּם)"를 말합니다.

피의 도성 니느웨는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에 대하여 “너는 망한다!”라는 말은 큰 슬픔의 일이나 임박한 죽음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감탄사입니다.
니느웨는 문자 그대로 ‘피의 성’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살인으로 그 성은 피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Maier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니느웨는 포로들에게 온갖 잔학 행위를 떡 먹듯이 일삼았다.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고, 눈을 뽑아내고, 목을 쳐 떨구는가 하면, 나무에 매달아두거나, 성문 앞에 쌓아두었고, 심지어 산 사람에게 말뚝을 박고, 아주 천천히 최후의 한 조각까지 온 몸의 껍질을 벗겨내는 따위의 마성(魔性)을 드러내었다.”

니느웨는 또한 궤휼, 즉 속임수와 거짓말의 도시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앗수르가 써먹은 책략을 보면 이 궤휼의 특성이 아주 명백히 드러납니다(왕하 18:28-31).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나훔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다시금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니느웨가 요나의 경고를 받아 잠시 회개했지만,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바로 그들의 잔혹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피난처가 되신다는 진리를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넘치게 됩니다.
나훔의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으로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 심판의 원인이 된 니느웨의 죄악상

▶ 잔혹한 피의 성 니느웨

1.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니느웨 성은 망합니다. 니느웨 성은 피의 도성입니다.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입니다. “너는 망한다!”라는 말은 큰 슬픔의 일이나 임박한 죽음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감탄사입니다. 니느웨는 문자 그대로 ‘피의 성’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살인으로 그 성은 피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Maier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니느웨는 포로들에게 온갖 잔학 행위를 떡 먹듯이 일삼았다.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고, 눈을 뽑아내고, 목을 쳐 떨구는가 하면, 나무에 매달아두거나, 성문 앞에 쌓아두었고, 심지어 산 사람에게 말뚝을 박고, 아주 천천히 최후의 한 조각까지 온 몸의 껍질을 벗겨내는 따위의 마성(魔性)을 드러내었다.”

니느웨는 또한 궤휼, 즉 속임수와 거짓말의 도시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앗수르가 써먹은 책략을 보면 이 궤휼의 특성이 아주 명백히 드러납니다.(왕하 18:28-31).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열왕기하 18:28~31)

▶ 행한 대로 당하는 니느웨

2.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훔 선지자는 1절에서 니느웨의 죄를 개괄적으로 지적한 다음, 2~4절에는 이어 몇 가지 신랄하고 생생한 묘사로 이 도시에 대한 마지막 죄목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점층법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채찍’에서 ‘병거 바퀴’로, 다시 ‘말’로, ‘병거’로, ‘기병’과 ‘칼’과 ‘창’으로, 그리고 살육 당한 떼와 큰 무더기 주검(무수한 시체)으로 강도가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바로 니느웨가 당한 공격을 의미하는데, 놀랍게도 이것은 다 니느웨가 자기들의 전술로 써먹던 잔인한 방법들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서 많은 시체 무더기를 쌓았던 니느웨는 이제 자기 시체들이 무더기로 쌓일 차례가 된 것입니다. 찢어지는 듯한 말채찍 소리, 요란하게 울리는 병거 바퀴 소리. 말이 달려옵니다. 병거가 굴러옵니다. 기병대가 습격하여 옵니다. 칼이 번쩍이며 불이 납니다. 창은 번개처럼 번쩍입니다. 떼죽음, 높게 쌓인 시체 더미, 셀 수도 없는 시체. 사람이 시체 더미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 3세는 적들 앞에서 사람의 머리를 잘라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려놓고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왕들은 정복한 도성의 입구에 시체를 마치 장작처럼 쌓아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그와 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

4.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이렇게 심판을 받는 것은 니느웨가, 창녀가 되어서 음행을 일삼고, 마술을 써서 사람을 홀린 탓입니다. 음행으로 뭇 나라를 홀리고, 마술로 뭇 민족을 꾀었기 때문입니다.

마술’이란 자신들의 잔인함을 미화시키는 니느웨의 외교정책을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살육이 임하게 되는 이유는 마치 음녀가 음행을 탐하는 것처럼, 니느웨가 권력을 탐해왔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열국을 자기 수하로 유혹하기 위해 군사적인 지원과 권력을 팔았습니다. 음녀는 니느웨가 섬기던 여신 이스달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매우 음란하고 야만적인 일들을 많이 한 신이라고 합니다. 열국에 대한 니느웨의 통제력 행사는 마법과 마술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열방을 정복한 후 그 민족들을 음행과 마술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통치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미래를 알기 위해 점을 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무수한 주문(呪文)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한 새나 동물이나 구름의 움직임, 간밤에 꾼 꿈 등에서도 징조를 읽곤 했다고 합니다. 바벨론이 니느웨 성을 공격합니다. 여기서는 니느웨를 음녀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가 영적인 간음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을 떠난 것 자체가 바로 우상 숭배이며, 이 세상의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행동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7:5절과 19:2절에서 이 죄악 된 세상을 ‘음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 부끄러움을 당하는 니느웨

5.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이제 여호와께서 니느웨를 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니느웨의 치마를 그 얼굴 위로 걷어 올려서 그의 벌거벗은 것을 뭇 나라가 보게 하고, 그의 부끄러운 곳을 뭇 왕국이 보게 하십니다. 니느웨가 다른 나라들을 대적하여 저질렀던 염치없는 행위들은 이제 그 부끄러움과 수치가 백일하에 노출됨으로써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권력과 여신을 섬겼지만, 그에 의해서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대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2:13) 어떤 나라든 그 나라가 아무리 부하고 강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믿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인간의 생명을 짓밟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대적이 되실 것입니다.

니느웨는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여 그들에게 불명예와 수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수치를 당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물을 니느웨에게 던져서 그를 부끄럽게 하고, 구경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더러운 것’ 즉 인간의 배설물과 ‘능욕’으로 불명예와 망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럽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을 가리켜 사용되는 말입니다. 특히 우상을 지칭하여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신 29:17 렘 4:1 겔 20:7-8). 따라서 이제 니느웨의 영광은 더러운 것으로 탈바꿈하고 말 것입니다.

▶ 니느웨를 위로할 사람이 없음

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니느웨가 망하였다만, 누가 그를 애도하랴?" 하면서 애도할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사람들이 니느웨를 피하여 달아나니, 그를 위로할 자들을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니느웨 성읍이 요나시대(BC. 793-753)에는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지만, 이제 100년이 지난 후(나훔; BC.640-612)에는 전혀 동정을 받지도 못한 채 완전히 멸망할 것을 수사적인 질문으로 강조합니다. 니느웨가 수치를 당하고, 마침내 황무하게 되고도 위로할 자가 전혀 없게 되는 그 날 그들의 멸망은 절정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가 얼마나 잔인했었던지 이제 그토록 큰 피해를 입고 있어도 누구 하나 와서 거들떠 봐주는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한때 매력을 뽐내던 기생이 이제 그 수치가 다 드러나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매력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이웃 나라들을 유혹하며 음녀처럼 부도덕한 행위들로 타락시켰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 노아몬 멸망의 예를 통한 니느웨 멸망의 필요성

▶ 자신이 망하게 한 이집트처럼 망하는 앗수르

8.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9.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10.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1.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니느웨가 이집트의 테베(노아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테베는 나일 강 옆에 자리 잡은 테베, 강물에 둘러 싸여 그 큰 물이 방어벽이 되고, 그 큰 물이 성벽이 된 그 성읍입니다, 이제 니느웨의 힘은 앗수르가 주전 663년에 정복했던 애굽의 도시 테베 또는 노아몬 보다도 도덕적으로 나을 것이 전혀 없는 도시이므로 마땅히 테베처럼 패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이 도시를 노아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몬 神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호머의 일리아드에 의하면 이 테베라고 하는 도시는 문이 백 개나 있었던 이집트 남쪽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전들, 스핑크스 그리고 오벨리스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도성이었다고 합니다. 그 위치는 지금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6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 가면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나일 강의 동편 제방 위에 건설되었으나 그 외곽 지역은 양쪽 해안에 다 퍼져있었습니다. 테베의 한 가지 장점은 전략적인 위치였다고 합니다. 사방이 물로 둘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운하와 수로가 여기저기 많은 지역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시 방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적군들은 도시 심장부에 들어가려면 수많은 운하를 건너야만 했는데, 그것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와 이집트가 얼마든지 그들의 힘이 되어 주고, 붓과 리비아가 이집트를 도와주었습니다. 테베의 또 한 가지 강점은 정치적으로 유력한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니느웨에게는 아무런 동맹국도 없었습니다. 테베는 당시 구스(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이 구스는 나일 강 상류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오늘날의 이집트 남부, 수단, 그리고 에티오피아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나일 강 하류 지역은 애굽에 속해 있었지만, 테베는 당시에 구스에 속해 있었습니다.

‘붓’과 ‘리비아’는 때로 같은 이름으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처럼 함께 언급될 때에는 ‘붓’이 홍해와 맞닿은 해안을 가리키고 그 남방 끝은 오늘날의 소말리아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테베의 동맹국들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니느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새의 테베의 성읍의 주민도 사로잡혀 가고, 포로가 되어서 끌려갔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길거리 모퉁이, 모퉁이에서 나동그라져서 죽고, 귀족들은 제비 뽑혀서 잡혀 가고, 모든 지도자가 사슬에 묶여서 끌려갔습니다.

여러 가지 지리적 외교적인 강점에도 불구하고 테베는 앗수르의 앗수르바니팔 왕에게 함락되고 맙니다. 테베의 백성 대부분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갑니다. 테베의 어린아이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됩니다. 앗수르 군인들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길모퉁이마다 이 일을 자행합니다. 백성들 사이엔 극도의 공포와 고통이 하늘에 사무쳤고, 테베의 뒤를 이를 후세대의 씨가 마르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테베에 대한 이런 극악무도한 잔학 행위들이 니느웨의 죄를 더하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간 테베인들 중에 일반 백성들은 그대로 포로 상태로 집단 거주하게 된 반면,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어졌습니다. 아마도 니느웨인들의 노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귀족들로서는 매우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 포로 중 제비 뽑히는 자들은 주로 평민이었는데, 여기서는 귀족들이 평민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앗수르의 ‘니느웨’도 또한 술에 취해서 갈팡질팡하고, 원수를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아, 허둥지둥 할 것입니다. 니느웨가 테베에게 한 일이 이제 니느웨에게 그대로 되돌아 올 것을 예언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공격을 받을 즈음에 ‘취한’ 사람들처럼 의식과 방향을 잃은 채 피난처를 찾아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사실 니느웨 사람들은 술에 취해 있었는데(1:10), 그 바람에 그들은 방어 능력을 상실한 채 향방 없이 좌충우돌하여 큰 피해를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숨을 곳을 찾아’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은 흔적도 없이 멸망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니느웨의 유적지는 1842년 그곳이 발굴될 때까지 숨겨져 있었습니다.

◈ 메뚜기 비유를 통한 니느웨 멸망의 필연성

▶ 불에 타는 니느웨

12.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13.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니느웨의 모든 요새가 무화과처럼 떨어질 것입니다. 흔들기만 하면 먹을 이의 입에 떨어지는,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될 것입니다. 적들이 공격을 감행해올 때, 니느웨는 자기의 모든 산성이 허약해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봄에 맺히는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는(민 13:20) 나무를 살짝 흔들기만 해도 우수수 땅에 다 떨어집니다. 조금만 손을 대어도 먹는 자의 입으로 무화과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의 수비도 침략자의 발 앞에 이렇게 쉽고 빠르게 무릎을 꿇게 되고 말 것입니다. 과연 이 일은 주전 612년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앗수르의 군인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군인들은 모두 여자들처럼 연약합니다. 밀어닥치는 대적들 앞에서 니느웨 땅의 성문들은 모두 열리고, 빗장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침략자들을 보는 순간, 성 방비를 힘쓰고 있던 장정들이 일시에 용기를 잃고 ‘여자’같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인은 두려움이 많고 방어 능력이 없습니다.(사 19:16 렘 50:37 51:30) 한때 사자처럼 날뛰던 앗수르인들이 두려움에 질려 무력해지고 맙니다. 범람하는 물에 의한 성벽 유실에 힘입어 적군들은 쉽게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문과 빗장에 불을 지르고 물밀듯이 성안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 대비책이 소용없이 망하게 됨

14.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15.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이제 니느웨가 에워싸일 터이니, 물이나 길어 두라고 하십니다. 옛날에 전쟁을 할 때 도시가 포위를 당하게 되면 가장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깨끗한 식수를 충분히 공급하는 일이었습니다. 니느웨의 요새를 탄탄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수렁 속으로 들어가서 진흙을 짓이기고, 벽돌을 찍어 두라고 합니다. 니느웨가 아무리 수비책을 찾아 애를 쓴다 하더라도 여호와의 심판을 막을 도리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제 파멸의 장면은 산성과 성문에서(12-13절) 성 내부로 옮겨집니다(14-17절). 조롱조의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나훔은 니느웨의 군인들에게 한번 수비를 잘 해보라고 명령합니다. 적군이 도시의 성벽을 허물게 되면, 수비하는 도시는 새 벽돌과 진흙으로 이 부분들을 수리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탄탄하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수리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니느웨의 잔해를 발굴했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적군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렸을 때 그 인근 지역을 방비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쌓았던 2차 방벽의 흔적들도 발견해 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앗수르는 멸망할 것임을 나훔 선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느치가 풀을 먹어 치우듯이, 산성에서 불이 나와 니느웨를 삼킬 것입니다. 칼이 니느웨를 벨 것입니다. 느치처럼 숫자나 불어나 보라고 합니다. 메뚜기처럼 숫자를 많이 불어나 보라고 하십니다. 모든 방비의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이윽고 ‘불’과 ‘칼’을 동반한 재난이 니느웨를 강타하게 됩니다. 시내로 들어온 적군은 많은 사람들을 칼로 살육합니다. 그 군대는 마치 온 사면의 농작물을 완전히 다 먹어치우는 ‘느치’와도 같을 것입니다.

‘느치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하라’는 나훔의 명령은 니느웨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숫자를 늘려서 어떻게든 방어를 해보라는 말이지요. 그게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이 말씀을 적군들에게 주어지는 명령으로 본다면, 이것은 숫자를 늘려서 니느웨 정복을 성공리에 끝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 많은 수의 상인과 방백들이 다 도망갈 것임

16. 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17. 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니느웨는 상인들을 하늘의 별보다 더 많게 하였습니다. 느치가 땅을 황폐하게 하고 날아가듯이 그들이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나훔 선지자는 다시 ‘느치’이야기를 합니다. 니느웨는 수많은 ‘상고(商賈-상인)’와의 무역을 통하여 부를 엄청나게 모았으나, 이제 그 거래처 상고들은 채소밭을 죄다 갉아먹는 많은 느치 떼와 같이 될 것입니다. 비록 니느웨가 무역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이제 그 거래처 상인들이 부정 이득을 통해 똑같은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니느웨 상품들을 도로 취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군대도 부(富)도 니느웨 사람들을 구해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의 수비대가 메뚜기 떼처럼 많고, 그의 관리들이 느치처럼 많아도, 추울 때에는 울타리에 붙어 있다가 해가 떠오르면 날아가고 마는 메뚜기 떼처럼,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격의 ‘메뚜기’가 등장합니다. 니느웨가 공격을 당하게 되는 날, 방백들과 대장들은 너무나 두려워 야반도주를 할 것입니다. 메뚜기는 저녁에 추울 때는 울타리에 달라붙어 있지만, 아침에 해가 뜨면 곧바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성벽(울타리)을 지키던 장수들도 공포에 질려 순식간에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1845년이 될 때까지 니느웨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도 발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 니느웨는 회복이 불가능함

18.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아시리아의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의 목자들이 다 죽고 그의 귀족들이 영영 잠들었습니다. 그의 백성이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졌으나, 다시 모을 사람이 없습니다. 18~19절에는 마치 장송곡 가사와도 같은 마지막 예언이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왕’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 당시인 주전 612년에 앗수르를 통치했던 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니느웨가 함락된 지 3년 뒤인 주전 609년에 앗수르 제국을 다시 일으켜 보려고 노력했던 앗수르 우발릿 왕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대개 후자 쪽이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앗수르우발릿 왕은 황무하게 되어버린 제국을 둘러보면서, 그의 지도자들(목자와 귀족)은 다 죽었고,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백성들은 다 흩어져서, 그들을 다시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난공불락을 자랑해 온 이 제국이 이제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니느웨의 상처는 고칠 길이 없고, 그 부상은 치명적입니다. 그의 소식을 듣는 이들마다, 그가 망한 것을 보고 기뻐서 손뼉을 칩니다. 그의 계속되는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불살라지고 약탈당한 도성 니느웨의 참상은 마치 ‘치명적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 함락된 정도가 너무도 고칠 수 없고 중하여, 이제 니느웨의 재건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고고학이 아주 잘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잔인하고 포학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압제를 당한 적이 있는 모든 열국들은 이제 니느웨가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그 악행을 늘 받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이제 니느웨가 함락되어 그 악행도 끝이 났다고 하니, 이는 누구보다도 특히 유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여호와께서는 니느웨에게는 진노하시고, 주를 의뢰하는 백성들은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보이실 것입니다.

오늘날 이 나훔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다시금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니느웨가 요나의 경고를 받아 잠시 회개했지만,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바로 그들의 잔혹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피난처가 되신다는 진리를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넘치게 됩니다. 나훔의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으로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08-07-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괴하는 자(나훔 2: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찌어다.
An attacker advances against you, Nineveh . Guard the fortress, watch the road, brace yourselves, marshal all your strength!

"파괴하는 자(an attacker)"는 당시 세계를 제패하고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던 앗수르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예비한 연합군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파괴하는 자(메피츠. מֵפִיץ)"는 문자적으로는 "승리의 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앗수르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일어난 바벨론 "나보폴리살"과 메대 "카카레스"의 연합군을 말합니다(렘 51: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의 철퇴 곧 병기라 내가 너로 열방을 파하며 너로 국가들을 멸하며."

연합군의 모습을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3-4절)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

6. 25 전쟁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후 70년 동안 전쟁이 멈춘 상태에서 성경적인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방법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긴 전쟁 보다 낫다"는 거짓 슬로건을 주장하며 모든 사람들을 미혹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성경적 평화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과 은혜로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맡은 일을 위하여 충성하는 진실한 일군으로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파괴하는 자(6327) 푸츠(pûwts)  פּוּץ  

1. 부수다
2. 흩어뜨리다.
3. 에스겔 34:5. /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발음 / 푸츠[ pûwts ]
관련 성경 / 흩어지다(창 11:4, 삼상 11:11, 겔 34:12), 흩다(민 10:35, 신 4:27, 겔 11:16), 흘러가다(잠 5:16), 넘치다(슥 1:17), 퍼지다(삼하18:8), 부숴뜨리다(욥 16:12, 렘 23:29), 헤치다(렘 9:16), 쫓다(욥 18:11), 뿌리다(사 28:25), 쏟다(욥 40:11), 흩어버리다(사 41:16), 파괴하다(나 2:1), 전율하다(합 3:6).
구약 성경 / 64회 사용



나훔 2장 : 니느웨 멸망의 참상 예언

1장에서 나훔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고, 유다는 구원하실 것에 대해 개괄적으로 말씀했습니다.
2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과 약탈을 당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2:1-7, 당당한 세력으로 세계를 다스리던 니느웨가 적군의 침입으로 인하여 왕궁이 파괴되고 존귀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을 예고
2:8-13, 위세를 당당하게 떨치던 니느웨가 그들이 자랑하던 젊은 용사들까지도 모두 적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예언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도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니느웨를 통해 보여 주려고 합니다.

1장에서는 조용하지만 위엄이 있는 톤에서,
2장은 좀 더 감정적으로 생생한 묘사의 톤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편이므로 유다를 대적하는 앗수르를 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라면 우리의 대적이 아무리 무서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본질상 공의로우시므로 악과는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이는 이방 민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택함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은 언제나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악에 빠져 있을 때는 가차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악 중에 빠져 있을 때마다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선지자를 통해 끊임없이 예고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주변 국가들을 권고해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일깨우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의 세력에 대해 심판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악한 백성들을 우선적 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예고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신다. 또한 이러한 긍휼을 베푸심은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인근 열방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 한 예로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니느웨의 심판을 예고하셨고 니느웨의 회개로 심판은 유보되었다. 니느웨는 당시 고대 근동을 지배하던 앗수르의 수도였다. 따라서 니느웨는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찼으며 이스라엘에게는 철저한 원수였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한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니느웨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는 또다시 죄악 가운데 거하게 되었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따라서 본장은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분노하시는 하나님임과 동시에 회개하는 자에 대해서는 긍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시는 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영적교훈]
사람은 살아가면서 언제나 죄를 짓습니다.
평생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하게 뉘우치고 다시는 같은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과거 심판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마저 놓쳐 버린 니느웨는 결국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시지만 결코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평소의 삶 속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지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 니느웨 멸망 당시의 참상 예언

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BC 612년경,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성벽의 길이는 13km로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성벽의 높이는 30m 였습니다.
성벽 위로 6대의 마치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성 주위에 18m 깊이의 연못이 둘러쳐져 있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이었습니다.
9b를 보면 “노략한 금은으로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했습니다.”
침략군이 이런 앗수르를 치러 올라왔습니다.
앗수르가 성을 지켜보아도, 길을 지켜보아도, 허리를 질끈 동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이제 공격을 받아 곧 멸망할 니느웨에게 스스로 방어할 테면 해보라고 조소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다 2절에는 유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렇게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와 유다를 번갈아 언급하는 교차 표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니느웨를 치러 파괴하는 자가 올라온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올라왔다는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올라왔다’는 동사는 군사 용어입니다.

​파괴하는 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메대(메디아)의 키악사레스(Cyaxares)와 함께 니느웨를 정복한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어서 나훔은 말합니다.
‘성을 지켜보려무나. 길을 지켜보려무나. 허리를 질끈 동 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려무나.’
이 말은 사실 매우 신랄한 조롱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방어를 위해 발버둥을 쳐도 결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니느웨의 자기 방어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심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약탈자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포도나무 가지를 없애 버렸지만, 주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시며,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공격에 대한 묘사는 야곱과 이스라엘에 관한 언급에 의해 잠시 중단됩니다. 야곱이 남왕국 유다를 가리키고 이스라엘은 북왕국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두 단어는 모두 백성 전체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니느웨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낮아지고 겸비해진 자리에서 다시금 영광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메시야가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란 하나님의 기업인 유다를 가리킵니다.

▶ 앗수르를 공격하는 바벨론

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앗수르의 적군들은 붉은 방패를 들고, 자주색 군복을 입었습니다. 병거가 대열을 지어 올 때에 그 철갑이 불꽃처럼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물결칩니다. 이제 나훔은 그 ‘파괴하는 자’들이 어떠한 장비를 가지고 공격해 오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메대와 바벨론의 방패들은 붉은 색이었는데, 그것은 피가 묻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나무 방패에 구리를 입혔거나 붉게 염색된 가죽을 입혀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사들의 붉은 (겔 23:14) 군복 옷은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자아내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무사들의 구브로에서 난 노송나무로 만든 창이 거친 공격 때문에 흔들렸고, 병거는 차축에 직각으로 낫을 부착시켰기 때문에 쇠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고 합니다. 병거들이 질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광장에서 이리저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습니다 포위군의 달리는 병거는 격분하여 미친 듯이 달리는 것 같았습니다(렘 46:9). 그들의 움직임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칼로 정복한 앗수르는 칼로 망합니다.

5절의 주어(그)는 앗수르 왕을 가리킵니다. 그가 정예 부대를 앞세워 성벽을 방어하고 막을 것을 예비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을 지키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정예부대를 앞세웠으나, 폐르시아 군대는 거꾸러지면서도 돌격합니다. 벼락같이 성벽에 들이닥쳐 성벽 부수는 장치를 설치합니다. 마침내 강의 수문이 터지고, 왕궁이 휩쓸려서 떠내려갑니다.

‘수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도시를 통과하여 티그리스 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고스르(Kosher) 강의 유량을 조절하기 위해 있던 수문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 왕은 도시 외곽의 강에 물을 막아두는 둑을 설치하고 그곳을 저수지로 삼았으며 니느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 개의 두꺼운 수문을 설치하여 강물의 유량을 조절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문은 고고학적으로도 발굴되었습니다. 적군들이 니느웨를 포위하면서 수문을 다 닫아 저수지에 물이 찬 후 일제히 수문을 다시 열어 물이 넘침으로 왕궁이 소멸되었습니다. 아니면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니느웨 성의 자연적 요새가 되었던 강물이 이제는 니느웨를 파멸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들은 다 이와 같습니다. 많은 나라들의 왕궁을 소멸시켰던 앗수르의 마지막 왕 앗수르-바니팔은 이제 자기 왕궁이 파멸되는 운명을 맛보게 됩니다. 앗수르의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고, 시녀들이 비둘기처럼 구슬피 울면서 가슴을 치는 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실제 여왕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이스달 여신상을 가리킬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시녀들이 비둘기같이 슬피 울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니느웨의 운명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니느웨는 함락되고 그 사람들은 이제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 니느웨가 멸망한 후 참상 예언

▶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진 니느웨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니느웨는 생길 때로부터, 물이 가득 찬 연못처럼 주민이 가득하였으나, 이제 모두 허겁지겁 달아납니다. "멈추어라, 멈추어라!" 하고 소리를 치나, 뒤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시가 홍수에 잠기게 되자, 니느웨 사람들은 모든 소유를 뒤에 버려둔 채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연못’이라는 단어는 물이 넘쳐 물난리를 겪고 있는 지역으로서, 니느웨의 상황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물이 넘치자 사람들은 이제 혼비백산하여 도망합니다. 공포 가운데 달아나는 그들을 향해 서라고 하여도 아무도 돌아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서라고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지휘관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적군일수도 있겠습니다.

적군은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금과 은이 얼마든지 쌓여 있다고 합니다. 온갖 진귀한 보물이 많기도 하구나! 말합니다. 이제 나훔은 승전한 침략자들에게 전리품을 수확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약탈한 엄청난 전리품이 니느웨에 있었을 것입니다. 은과 금의 보유량이 엄청났고, 기타 공물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도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많은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했던 니느웨가 이제는 오히려 약탈을 당하게 됩니다.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집니다. 그가 행한 대로 자기가 당합니다. 앗수르는 털리고 털려서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의 떨리는 가슴, 후들거리는 무릎, 끊어질 것같이 아픈 허리, 하얗게 질린 얼굴들이 보입니다. 이렇게 되자 니느웨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낙담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무릎이 후들거리며 허리가 아프고 얼굴이 하얗게 질립니다.

▶ 수사자 같은 앗수르를 멸하심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사자들과 같은 앗수르 사람들의 굴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사자들이 그 새끼들을 먹이던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수사자와 암사자와 새끼 사자가 겁 없이 드나들던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수사자가 새끼에게 먹이를 넉넉히 먹이려고, 숱하게 죽이더니, 앗수르는 수사자처럼 암컷에게도 많이 먹이려고, 먹이를 많이도 죽였습니다. 사냥하여 온 것으로 바위굴을 가득 채우고, 잡아온 먹이로 사자굴을 가득 채우더니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나훔은 파멸된 니느웨를 바라보면서 조롱 섞인 물음을 던집니다. ‘이제 사자들의 굴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다시 말해 니느웨는 더 이상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자가 자기의 암사자와 새끼 사자들을 위해 먹이를 사냥하듯이, 앗수르도 다른 나라들을 그렇게 노략했습니다. 사자는 앗수르의 상징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왕들은 사자 사냥을 나가 사자를 죽이면서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자만하고, 자신의 용맹을 사자에 비유하곤 했다고 합니다. 산헤립은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면서 ‘내가 사자처럼 포효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부조와 장식품들에는 사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자굴이 텅 비게 되었다고 나훔은 선포합니다. 즉 사자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앗수르가 이제는 곧 잡힐 사자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대적이 되심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치겠다고 여호와 만군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앗수르의 대적이 되십니다. 앗수르 병거를 불살라서 연기와 함께 사라지게 하십니다. 앗수르의 새끼 사자들은 칼을 맞고 죽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앗수르 먹이를 남겨 놓지 않으십니다. 앗수르가 보낸 전령의 전갈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니느웨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적의가 아주 강력한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치겠다, 즉 하나님 자신이 니느웨를 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불이 병거들을 사를 것이고, 칼로 군사들(젊은 사자들을) 멸할 것이며, 이제 니느웨는 힘없는 다른 나라들을 괴롭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만한 도시는 항복을 요구하거나 공물을 수탈하기 위해, 두 번 다시는 전령을 보내는 일도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칼로 일어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시는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단 한 문장이지만 깊은 역사 철학을 담고 있는 진리입니다. 역사가 이 말씀의 진리 됨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역사를 교훈 삼아 회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앗수르의 편이 되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현재에 적용한다면 죄악 된 세상과 교회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을 것이며, 동시에 교회는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예비 된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 편이 되어야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서 우리를 도우 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날을 대망하며 흠 없는 신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 의지할 때,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저 막강한 니느웨 도성도 하루아침에 쓸어버리시듯 모든 악한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08-05-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길(나훔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The LORD is slow to anger and great in power; the LORD will not leave the guilty unpunished. His way is in the whirlwind and the storm, and clouds are the dust of his feet.

여호와의 길(the Lord's Way)

아도나이 다르코(דַּרְכֹּו יְהוָה)

길(1870) 데레크(derek)  דֶּרֶךְ   

1. 여행,   2. 길,  3. ∼로향하는 길
발음 / 데레크[ derek ]
어원 /18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길(창 3:24, 삼상 4:13, 겔 48:1), 행위(창 6:12,삼상 8:3, 왕상 8:32), 도(창 18:19, 신 13:5, 시 18:21), 도리(창 19:31, 욥 21:14), 생리(창 31:35), 도중(왕하 10:12), 도로(레 26:22, 애 1:4), 여행(민 9:10, 수 9:13), 행사(욥 26:14), 중도(시 102:23), 때문(시 107:17), 행실(잠 8:13, 13:6), 소행(잠 12:26, 호 4:9), 바른 길(잠 23:19, 사 30:11), 옳은 길(말 2:8), 자취(잠 30:19), 사정(사 40:27),행동(겔 14:22,23), 풍속(겔 20:30).
[동] 향하다(겔 20:46, 21:2, 40:6,22,46), 위하다(암 8:14), 여행하다(수 9:11), 가다(삿 4:9), 행하다(잠 14:2, 28:6), 본받다(사 10:24).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 1869. 다라크(dârak)  דֶּרַךְ  

1. 밟다,  2. דָּרַכְ יֶקֶב 압력을 가하다,  3. דָּרַכְ קֶשֶׁת
발음 / 다라크[ dârak ]
관련 성경 / 나오다(민 24:17), 밟다(신 1:36, 수 1:3), 당기다(시 7:12, 대상 5:18), 겨누다(시 64:3), 쏘다(대상 8:40), 짓밟다(삿 20:43), 지도하다(시 25:5, 9), 행하다(시 119:35), 건너가다(사 11:15), 다니다(합 3:19).
[명] 타작마당(렘 51:33).
구약 성경 / 62회 사용


경고(4853) 마싸( massâ)  מַשָּׂא 
1. 실어나름,  2. 짐,  3. 고양
발음 / 마싸[ massâ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짐(출 23:5, 사 46:2, 렘 17:21), 누(삼하 15:33,19:35), 일(왕하 9:25), 노래(대상 15:22), 경책(대하 24:27), 해(욥 7:20), 잠언(잠30:1, 31:1), 경고(사 13:1, 나 1:1, 슥 9:11), 중벌(렘 23:36),묵시(겔 12:10).
[동] 메다(민 4:15, 대하 35:3),싣다(왕하 5:17, 8:9), 노래하다(대상 15:27), 바치다(대하 17:11), 탈취하다(대하 20:25), 엄중하다(렘23:33, 34, 36).
구약 성경 / 66회 사용

* 5375. נָשָׂא    
1. 들어올리다, 2. 물이 많아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3. 깃발을 세우다
발음 / 나사[ nâsâʼ ]


묵시(2377) 하존(châzôwn) חָזוֹן  
1. 이상,  2. 신적인 계시, 3. 신탁
발음 / 하존[ châzôwn ]
어원 / 23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이상(異像)(삼상 3:1, 사 1:1, 단 8:2), 계시(대상 17:15), 묵시(대하 32:32, 겔 7:13), 환상(사 29:7), 예언(렘 14:14).
구약 성경 / 35회 사용

* 2372.  חָזָה  
1. 보다, 2. 하나님을 보다, 3. 민수기 24:4
발음 / 하자[ châzâh ]
관련 성경 / 보다(욥 15:17, 시 58:10, 겔 12:27), 우러러보다(욥 36:25), 바라보다(시 63:2, 미 4:11), 받다(사 2:1), 이상(異像)으로 받다(암1:1, 합 1:1), 보이다(사 30:10), 들어가다(욥 8:17), 뵙다(욥 23:9, 시 11:7), 깨닫다(욥 34:32), 보게 하다(아 6:13).
구약 성경 / 55회 사용

나훔 선지자의 하나님(나훔 1:2-3)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투기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길"이란 영어 단어는 '웨이(way)'라고 합니다.
'웨이'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의미는 "방법"이란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길이란 '여호와의 방법' 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기원전 722년에 망합니다.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트린 앗수르는 기원전 612년에 신흥 강국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선지자 나훔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앗수르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민족주의자적인 선지자라고 하겠습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은 "충분한 위로" 라고 합니다.
앗수르라고 불리는 앗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주전 2500년경에 시작된 고대국가입니다.
한때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였지만, 많은 나라가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나며 약해지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잊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앗수르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잠시 회복하는 모습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 나라의 멸망을 선포했을 때 입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는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회복하는 듯하더니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희생적인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자신의 안일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삶이 아니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한다는 확고한 믿음과 결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앗수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이사야  19:22-25).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에 이스라엘이 애굽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우리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향한 안양의 삶을 사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예언하시며 애굽과 이스라엘과 앗수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마지막 때에 쓰임 받음도 심지어 애굽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백성이라 불림을 받음도 애굽의 콥틱 크리스찬의 모습을 접하며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지만 앗수르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나라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앗시리안 크리스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앗시리아는 그저 구약시대에 한 시대를 풍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이기에 오랫동안 그 민족들 또한 함께 사라졌다고 여겨졌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관심이 부족해서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앗시리안은 역사 가운데 계속 이 땅에 존재 해왔고 우리는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복음 가운데로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현재 중동 지역과 심지어 미국 시카고 지역까지 세계에 3백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하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크리스찬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1세기 도마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잊고 기억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수많은 나라를 핍박하고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사마리아인이라 불리게 되는 혼합인을 만든 앗시리아를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복음 안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십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주권을 봅니다. 내가 알지 못해도, 내가 들어 본 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이 땅과 우리를 향한 그의 섭리와 주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앗수르와 나훔 선지자(B.C. 7세기)





150년 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의 전도를 받고 왕에서부터 모든 백성이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150년 만에 앗수르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즉 하나님께 중한 경고를 들어야 할 만큼 타락해 버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신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 1:1)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가 범람한 물로 진멸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흑암으로 쫓아내실 것이라고 완전한 멸망을 말씀하신다.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나 1:8)

티그리스 강의 강물이 니느웨를 덮어 그 위에 토사가 쌓여 있었기에 니느웨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0년 전 요나 선지자를 통해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던 하나님은 이제 나훔 선지자를 통해서는 니느웨에 대한 완전한 멸망을 가차 없이 말씀하신다. 반드시 멸절하시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멸절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롭게 할 것도 없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니라.”(나 1:12)

나훔서가 기록되기 약 100년 전(B.C. 760년 경)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그들이 회개를 하자 심판을 유보하여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멸망 받아 마땅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손을 거두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의 결과였다. 그런데 회개 운동이 일어난지 약 100여년이 지난 나훔 선지자 당시의 니느웨 사람들은, 지난 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하고 도리어 이전보다 더 교만하며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이웃 민족에 대하여 매우 포악했고 간교했으며, 지극히 교만했다.

디글랏빌레셀 3세 치하의 앗시리아 제국

즉 앗수르는 부흥기였던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5-727’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B.C. 727-722)’ 때에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고,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성격을 호전적이고 무자비한 것으로 만들어 다른 민족에 대한 학대와 착취, 그리고 약탈을 서슴치 않게 되었다.

성경에서 때로는 ‘불’로 알려지기도 한 ‘디글랏빌레셀 3세(B.C. 745-727)’ 가 아시리아(앗수르)의 왕 위에 오른 이후로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 의 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종주국의 위치에서 군림했던 아시리아는 단순히 종주국들의 정치에 관여하며 조공을 받는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회, 종교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약소국가인 유다와 이스라엘의 처지는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열왕기하는 유다의 아하스와 이스라엘의 므나헴이 디글랏빌레셀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북 왕국의 므나헴은 디글랏빌레셀로부터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주었다.

“앗시리아의 불 왕이 그 땅을 치려고 올라오니, 므나헴은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왕국의 통치권을 굳게 하려 함이었다. 므나헴은,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부자에게 한 사람당 은 쉰 세겔씩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더 이상 그 땅에 머물지 않고 되돌아갔다.”(왕하 15:19-20, 새번역)

유다 왕 아하스는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반아시리아에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그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사람들을 보내 디글랏빌레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아시리아의 신을 숭배하는 제단이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며(왕하 16:10-16), 이들의 정치 경제적인 압박은 나훔 선지자가 활약하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아하스 시대부터 유다는 100여 년 동안 아시리아의 종속국으로 존재했다. 아시리아는 유다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을 억압하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종주국이었다. 이스라엘에게 한없이 잔인하기만 했던 아시리아는 니느웨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였다.

니느웨(니네베)는 도시 중심을 흐르는 코서 강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나뉜 곳이었다. 북쪽 지역은 면적이 남쪽 지역의 두 배에 달했으며,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니느웨의 면적은 1,800에이커(총 225만평) 정도 되었다. 당시 도시국가치고는 매우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니느웨가 주전 5,000년부터 도시로 존재했으며, 3,000년 이후부터 이 도시에 이스타르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한창 가나안에 정착하던 B.C. 1400~1200년에 이르러 살만에셀(1세)과 디글랏빌레셀(1세)이 대단한 건축 사업을 통하여 니느웨의 규모를 키웠다. 주전 700년경에 산헤립이 니느웨에 새 궁궐을 세우고 아시리아의 수도로 삼으면서 도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때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는 앗술이었다). ‘산헤립’은 도시에 정원들을 세웠고, 약50Km에 달하는 수로 시스템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인 ‘에살핫돈’과 ‘아술바니발’도 꾸준히 건축사업을 지속해 나갔다. 특히 아술바니발의 도서관은 수만 점의 흙판 문서가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되어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에 산헤립은 유다를 공략하여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마치 ‘새를 새장에 가두듯이’ 가두어 둔적이 있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모면했다(사 36-39장, 왕하 18장). 그러나 산헤립이 유다에서 철수한 다음에도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유다 땅에서 지속되었다.

므낫세(B.C. 697-643)는 바알과 아세라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의 종교를 지향했으며(왕하 21:3), 그의 아들 아몬은 암살될 때까지 2년 동안 아버지보다 더한 배교행위를 지향했다(왕하 21:23). 아몬이 왜 암살을 당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유다의 외교정책에 변화를 추구하던 자들의 음모에 의하여 저격되었을 것이다(Malamat).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B.C. 641년) 아시리아는 유다의 종주국으로 이미 100여년 동안 군림해 오던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때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은 옛적 다윗시대에 누렸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갈망했을 것이다. 이러한 갈망 속에서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술바니발이 B.C. 627년에 죽자, 요시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34:3).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방 종교들의 흔적을 뿌리뽑고자 했으며, 바알제단과 아세라 상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부수도록 했다(대하 34:3-7). 이같은 행위는 아시리아의 신들을 거부하며 므낫세의 종교적 복합주의를 지탄하는 것을 의미했다(Bright).

앗수르 왕조

이런 정황에서 볼 때 B.C. 627년은 고대 근동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아술바니발의' 죽음은 곧 아시리아의 쇠퇴로 이어졌다. 그의 죽음은 아시리아의 내부적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반유목민으로 분류되는 키메리오스족, 스키타이족, 메대족 등이 압력을 가해왔다. 지금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있었던 바벨론에서는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왕이 되었으며, B.C. 623년에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아시리아 공략에 나섰다. 아시리아는 B.C. 614년에 앗술을 메대 사람들에게 빼앗겼으며, B.C. 612년에는 갈그미스 전투를 통하여 아시리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아시리아(앗수르)의 이스라엘 침략

'아술바니발(아슈르버니팔)'이 죽은 B.C. 627년에 유다에서는 ‘예레미야’와 ‘스바냐’, 두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했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국제 정세가 불안한 시기에 유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훔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보다 더욱더 강도 높게 아시리아의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니 그때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게다가 성전을 보수하던 제사장 '힐기야'가 B.C. 621년에 율법 책을 발견한 사건은 이러한 기대와 함께 종교개혁에의 의지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율법책이 발견된 후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고 점술가들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열왕기 저자는 ‘요시야’를 전무후무한 왕으로 평가하였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유다의 왕 요시야 통치기간(B.C. 641-609년)이 나훔 선지자의 사역 후반기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힘들어하던 요시야 왕이 나훔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하여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요시야는 종주국으로 섬기기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던 아시리아가 곧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앓던 이가 빠지는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시리아의 최종적인 종말은 보지 못하고 B.C. 609년에 므깃도에서 죽었다. 아시리아가 B.C. 625년에 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B.C.. 605년에야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메대 연합군에 퍄하여 지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앗수르 제국의 민족혼합과 강제이주정책

고대 사료에 의하면 앗수르는 적국을 완벽하게 초토화하거나 폐허로 만드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으며, 반란자들에 대해서는 살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각을 뜨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앗수르는 약소국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속이기를 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그들의 간교함과 다른 민족의 피 위에 건설된 국가였다.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를 고칠 수 없고, 앗수르가 망햇다는 소식에 모두들 손뼉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 앗수르로 인해 고통 받지 않은 나라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나 3:18-19)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발흥

​앗수르 제국의 멸망(B.C. 609년)|
앗수르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적다운 적의 대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앗수르(아시리아)는 B.C. 732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를 멸망시켰으며, 사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B.C. 722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B.C. 701년에는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을 차지한 적이 있다. B.C. 663년에는 천연의 난공불락 요새로 알려졌던 이집트의 수도 테베를 점령했다.

그러나 B.C. 609년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앗수르는 수백 년을 이어온 상 아시아의 주인 자리를 완전하게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이미 바벨론에게 함락되었고,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바벨론의 하란 공격으로 인해 B.C. 610년 하란까지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 제국을 계승할 야심을 품고 앗수르 패잔병들과 함께 바벨론을 대항하려 했던 애굽의 바로 느고가 B.C. 609년 하란을 재탈환하려다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앗수르는 B.C. 609년 제국으로서의 깃발을 완전히 뽑아야만 했다. 그렇게 잔인하고 무섭던 앗수르의 왕들도 모두 사라지고, 앗수르의 마지막 모습은 왕궁에 불을 질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비겁함 그 자체였다.

나훔의 예언대로 앗수르의 멸망은 고대 근동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박수를 칠 만큼 기쁜 소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오랜 세월 제국주의를 펼치면서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피지배 민족들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앗수르 왕의 어느 기념비에서 새겨진 문구이다.

『나는 귀족들의 겁데기를 벗겼고, 3000명의 포로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나는 한 명의 포로도 남겨 두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고, 코와 귀를 베어 내기도 하였다. 수많은 병졸들의 눈을 도려내기도 하였으며, 처녀들을 통째로 굽기도 하였다.』

그후 바벨론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던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니네베)는 나훔의 예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해 도시 위로 6m나 토사가 쌓여 B.C. 609년부터 A.D. 1846년까지, 2,450년 이상 그 존재를 깊은 땅 속에 묻어두게 되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려 혼혈족을 만들어 각 민족의 독특성을 소멸시킴으로 반란의 근원을 도려내, 그들의 제국을 영원하게 하려고 했다. 사마리아가 그 예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심해지자, 앗수르를 몽둥이로 들어 사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과 거주의 경계는 대제국에 의해 재편성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주의 경계를 이미 태초부터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고유한 각 민족들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일찍이 앗수르 민족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하고 앗수르 민족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요나를 설득하셔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게 함으로 니느웨의 12만 명의 생명과 가축들을 살리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점령한 앗수르가 남유다로 공격해올 때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의 뜻은 앗수르가 사마리아까지는 정복했으나, 예수살렘까지는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지켜주신다는 것이었다. 앗수르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경계는 사마리아까지였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앗시리아의 영토 변화

주전 700년경의 아시리아 제국

앗수르와 신바빌로니아의 영역

※ 참고 문헌

- 「 이스라엘사 」 최창모 지음, 미래출판사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구약편-1, 고대근동~사사기(B.C.3300-B.C.1050)」 류모세 지음, 두란노.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구약편-2, 통일왕국시대~분열왕국시대 3기(B.C.1050-753)」 류모세 지음,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구약편-3, 분열왕국시대 4기~페르시아 시대(B.C.753-331)」 류모세 지음,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신약편-1,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부터 헤롯대왕의 죽음까지(B.C.331-B.C.4)」 류모세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신약편-2, 헤롯대왕의 죽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B.C.4-A.D.30)」 류모세

-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신약편-3, 초대교회의 탄생에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까지(A.D.30-A.D.70)」 류모세

- 「 성서 그리고 역사 」 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황소자리.(내셔널지오그래픽)

- 「 성서의 역사와 지리 」 김흔중 지음, 엘맨.

- 「 성서지리 」 권혁승 지음,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 「 바이블로드 」 장종현 지음, 백석.

- 「 고대 이스라엘 역사 」 레스터 L. 그래비 지음, CLC.

- 「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 이안 프로반 V. 외 지음, CLC.

- 「 이스라엘 역사 」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역, 컨콜디아사

- 「 이스라엘의 역사와 지리 」 이병렬 지음, 요단출판사.

- 「 이스라엘의 역사사천년 」 맥스 디몬트 지음, 김재신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 「 유대인의 역사 1- 성경 속의 유대인들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유대인의 역사 2 -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유대인의 역사 3 -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이스라엘 왕정 멸망사 」 이병렬 지음, 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

- 「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 이병렬 지음, 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

- 「 고대 근동 역사 」 마르크 반드 미에룹 지음, CLC.

- 「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임미영 지음, CLC.

- 「 성서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 임미영 지음, 자체제작.

- 「 성경역사, 지리학, 고고학, 아틀라스 」 앤손 F. 레이디 지음, 강성열 옮김. 이레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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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있는 것(사뮈엘 타퐁 예화) - 출애굽기 4: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 출4:2

세상에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 할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뮈엘 타퐁'이라는 사람은 큰 포도밭을 갖고 있던 돈 많은 양조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1934년 7만 5천만 달러를 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구두쇠였는지는  그가 자살하기 위해 밧줄을 사러 갔다가 그 밧줄 값을 깍았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가격을 깍은 밧줄로 그는 목을 메고 자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금고에는 약 200만 달러(약 23억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투자로 잃은 돈은 7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고 남은 돈은 200만 달러가 있었는데 그는 자살한 것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잃은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으로 자살을 한 것입니다.
남아 있는 것이 더 많은데도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부르실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모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소중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잃어 버린 것에 집중하며 살기보다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잃어 버린 것에 마음을 두면 불행해집니다
오히려 내 손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하고, 복된 인생의 비결입니다

스스로에게 늘 질문을 던지십시요

'내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손에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나훔서의 개론

▶ 내 용 : 하나님께서 압제와 잔인함과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니느웨(앗수르)를 심판하

실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으며, 니느웨 성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남.

▶ 선 지 자 : 나훔, 유다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음(그의 고향도 불확실함)

▶ 활동시기 : 주전612년 니느웨가 함락되기 전, 유다가 앗수르의 봉신 국가로 예속되어

있던 시기(대략 B.C 640- B.C 612)

▶ 강 조 점 :

- 모든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 앗수르의 잔인함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공의,

- 스스로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

▶ 구 조 :

나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니느웨 멸망 선포(1장) :

나훔은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의 권능은 위대하시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나훔은 공의의 하나님의 치리로 니느웨는 멸망하고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임을 예언한다.

2. 니느웨 멸망(2-3장)

나훔은 대적들에 의해 파괴될 니느웨 멸망의 참상을 예언한다. 그러면서 나훔은 니느웨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함임을 밝힌다. 아울러 그들의 죄악상 즉, 거짓과 포악과 탈취, 그리고 우상 숭배로 가득한 니느웨와 죄악을 고발하고 이러한 앗수르의 멸망은 기정사실화 되었다고 예언하면서 글을 마무리 한다.

12소선지서 중 일곱 번째 책인 나훔서는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열방의 맹주인 앗수르를 향해 무서운 경고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이 책은 백여 년 전에 기록된 요나서와 대조를 이룬다. 요나서에서는 더 이른 시기에 가장 잔인한 원수들(앗수르)에게까지 관심을 보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앗수르의 죄가 “가득 찼고”(창 15:16) 여호와 하나님의 잘 알려진 인내도 한계점에 도달했다. 나훔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1:7-8이다. 이 구절은 유다에게 위로를 전하는 동시에 니느웨의 파멸을 선언한다.

예언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나훔서는 신적인 전사의 승리를 찬송하는 것(12-8)으로 시작하는데, 이 찬송의 마지막 행들(7-8절) 역시 첫 번째 주요한 말씀(19-2:2)을 소개하는 구실을 한다. 이어서 니느웨의 파멸에 관한 이상(2:3-10)과 조롱(11-13절)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니느웨의 멸망이 절대적으로 확실함을 선언하는 말씀들과 조롱이 이어지고(3:1-17), 멸망당한 제국에 대한 풍자적 만가(18-19절)로 마무리한다.

나훔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선하심과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나훔의 이름은 ‘하나님의 위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훔의 고향은 ‘엘고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고향 ‘엘고스’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논쟁이 있어 왔다. 초대교회 교부 제롬(히에로니무스)은 갈릴리 근처 엘세시(Elcesi)가 나훔의 고향이라고 주장했으며, 크노벨(A.W.Knobel)과 히찍(F.Hitzig) 같은 학자는 가버나움 근처에 엘코쉬(Elkosh)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초대 교회 문서에는 벧 구브린 남쪽에 엘케시가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엘케시는 라기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엘고스가 어딘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는 나훔이 주전 660-620년 사이에 활동한 것 같다고 보고 있는데, 이 책에서 주전 663년의 테베(노아몬) 함락을 과거사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전 612년의 니느웨 함락을 미래형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이유로 기록 연대를 주전 663-612년으로 좁힐 수 있다. 그러나 주전 654년 테베 재건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과 나훔의 사역했던 시기의 왕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데베 함락과 재건 중간 즉, 므낫세 통치시기에 기록된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유다 사람이었고(1:15, 2:2) 엘고스가 그의 고향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주전 660-655년 경 엘고스에서 기록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나훔서의 시기

▶ 시대적 배경 :

① 정치적 상황 ;

앗수르는 요나의 경고를 받아들여 온 국민이 회개했다. 그러나 디글랏빌레셀 Ⅲ, 살만에셀 Ⅴ, 사르곤 Ⅱ, 산헤립, 에살핫돈, 아슈르바니팔 등 강력한 왕들이 통치하는 100년 동안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점점 마음이 높아졌다. 특히 아슈르바니팔(주전 669-633) 통치 시절에는 주전 663년 애굽의 테베를 함락시킬 만큼 세력이 강해졌다. 따라서 불과 50여년 뒤에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망해 없어졌으며, 한 때 남 유다 왕 므낫세도 아슈르바니팔의 군대의 침공을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다.(대하 33:10-19)

② 종교적 상황

유다 왕 므낫세는 우상숭배와 완악함과 무죄한 자의 피 흘림 등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왕하 21:1-16) 그는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기 위해 성전 뜰에 제단을 세웠으며, 무당과 점쟁이와 신접한 자를 가까이 했으나, 포로에서 돌아와 회개한 다음에는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산당을 없애며, 백성들로 여호와만 섬기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③ 같은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 :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 기록 목적 :

① 유다의 평화는 앗수르나 애굽에 대한 외교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으로 얻어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② 니느웨 멸망을 통해 세상의 모든 신들과 우상은 헛것임을 드러내므로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도전하기 위해.

▶ 니느웨 멸망에 대한 성취 :

앗수르 왕 산헤립 때부터 니느웨가 앗수르의 수도로 지정되어 25년에 걸친 대규모 공사를 벌인 결과, 높이 30M에 마차 세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길이가 120km에 이르는 성벽을 갖추었다. 거기에 200개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넓이가 45m에 깊이가 18m의 삼중해자로 성벽을 둘러쌌으며, 철통같은 15개의 성문을 설치하여 적들의 포위공격에도 20년을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로 무장시켜 놓고 있었다. 그리고 티그리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가지고 도시 가운데 난공불락의 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 나훔의 예언은 한낱 약소국가 선지자의 푸념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니느웨 성

그러나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주전 612년 나보폴라살이 이끄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나훔이 예언한 대로 티그리스 강의 범람한 물을 메대와 바벨론 군대가 니느웨의 성벽을 파괴하는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2:6) 그리고 신샤르이쉬쿤 왕(주전 629-612)이 왕궁에 불을 질러 자살하므로, 나훔의 예언처럼 니느웨 성은 마치 마른 지푸라기가 불에 타는 것과 같고, 벽돌 가마에 불이 타는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1:10, 2:6, 3:15,15)

더욱 놀라운 것은 니느웨가 사람들의 눈에 감춰질 것이라는 예언대로(3:11), 주후 1820년 일단의 학자들이 고대 니느웨 지역에서 유물을 몇 점 발견하기까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철저히 사라져 심지어 니느웨의 존재조차 믿지 않으려 했을 정도였다. 주전 333년 페르시아 정벌을 위해 출정했던 알렉산더는 니느웨의 폐허에서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했던 것이다.

(좌) 주후 1834년 발굴된 니느웨(니네베)성, 현재 복원된 니느웨 성(우)

▶ 참고자료

- 니느웨(현재, 이라크 모술)

※ 참고 문헌

- 「 성경과 5대 제국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성서 그리고 역사 」 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황소자리.(내셔널지오그래픽)

- 「 성서의 역사와 지리 」 김흔중 지음, 엘맨.

- 「 왕국시대의 예언자들 」 김인철 지음, 그리심.

- 「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 이병렬 지음, 페트라 성경연구원.

- 「 이스라엘의 선지자 」 레온우드 지음, CLC.

- 「 엑스포지멘터리 - 나훔편 」 송병헌 지음, EM. 외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다(열왕기하 23:31-24:16)

1. 요시야의 아들들

유다가 멸망하기까지의 계보를 간략히 정리해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가 죽은 뒤에 그 나라를 요시야의 아들이 물려받았습니다.

열왕기하 23장후반부 부터 25장까지를 읽어보면, 요시야가 죽은 뒤에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 까지 모두 4명의 왕이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왕이 요시야의 아들인 23세의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33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버리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25세의 엘리야김여호야김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왕으로 앉혔습니다.

그런데 이 여호야김은 왕이 된 다음에 자기를 세운 애굽를 배반했습니다.

왜냐하면 24:7절에서 설명하듯이 이때 이미 바벨론이 앗수르를 물리치고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애굽이 그 뒤로 다시는 자기 나라 밖으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도 애굽을 버리고 바벨론을 섬겼는데, 24:1절을 보면 3년 만에 다시 바벨론을 배반했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결국 바벨론 왕이 군대를 보내서 여호야김을 폐위시켜버리고, 대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것이 열왕기하 24:1-6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야긴여호야김의 아들이기 때문에 요시야의 손자입니다.

그러나 24:17-18절을 보면,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디야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친 뒤에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여호야긴의 아자비라면, 삼촌이라는 말이니까 이 사람도 요시야의 아들입니다.
이 시드기야 시대에 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결국 요시야의 아들들 대에 유다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16대. 요시야(31년)

17대. 여호아하스(3개월)

18대. 여호야김(11년)

19대. 여호야긴(3개월)

20대. 시드기야(11년)






2. 여호와 하스(왕하 23:31-35절)

여호와 하스는 요시야의 아들로 유다 17대 왕이 되었습니다. 23살의 비교적 성년이 되어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고작 3개월입니다. 유다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통치한 왕으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그는 포로로 애굽에 잡혀가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요? 왜 바로느고는 여호와 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만 것일까요? 일단 요시야가 반 애굽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바로느고는 보복성 벌금을 물립니다. 아마도 요시야의 반 애굽 정책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여호와하스가 비교적 똑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권을 잃은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처음 왕정이 시작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걸었던 슬로건 말입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정이 끝나갈 무렵에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나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이 모욕을 받으면서까지 이 나라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도록 이들은 철저하게 부패했으며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개혁을 하고 나라가 강건해 졌음에도 아버지가 믿었던 하나님, 그 말씀을 따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포로가 되어 애굽에 죽는 비참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3. 여호야 김(23:34-24:7절)

여호와하스의 뒤를 이은 왕은 요시야 왕의 배다른 아들 엘리야김이었습니다. 이 왕은 애굽의 바로느고가 세운 일종의 섭정왕인 셈입니다. 아무런 실권이 없고 그저 애굽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힘없는 군주가 바로 여호야김이었습니다. 이름을 개명한 것은 일종의 모욕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가 세상 나라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배상금을 요구했습니다. 애굽에 의해서 왕이 된 여호야김은 거절한 능력도 믿음도 담력도 없는 그야 말로 최악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조공을 바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더 나갑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할 초호화 왕국을 건설하는 무모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렘22:13-14절).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는 이 말씀이 바로 여호야김의 악행을 고발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 우리야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렘 26:20-23절입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참 부끄러움의 대명사가 되는 사람입니다. 애굽에까지 사람을 보내 연행 해다가 죽일 그 열정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들의 이런 선택이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멸망시키시려는 예언을 성취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행동하고 있지만 이런 행동들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나라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결국에는 열강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바로 이런 모습을 보지 않고 죽게 되는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여호야김이 통치했던 11년은 그렇지 않아도 기울어지는 국가의 수명을 재촉하는 어둠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재위 기간 내내 애굽의 눈치를 보며 백성을 압제했던 여호야김은 통치 말년에는 바벨론의 압박까지 받게 됩니다. 주전 605년 당시 국제 정세의 판도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로느고가 신흥 강자인 바벨론 군대에 참패한 것입니다. 이때 애굽을 무너트린 장수가 바로 느브갓네살입니다.

그는 신바벨론의 창시자인 나보폴라살의 아들로 무적으로 일컬어지던 앗수르를 물리치고 이어서 애굽의 바로느고까지 꺾어 버려 명실상부한 중동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 갈그미스 전투를 시작으로 바벨론은 애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서진 정책을 마음껏 밀어붙이게 됩니다. 이때 유다도 점령 당하게 됩니다. 멸망의 서곡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위시한 일련의 영재들입니다.

느브갓네살은 뛰어난 장군이자 대단한 리더로서 관제를 정비하고 궁전과 저수지, 대운하등을 건설하여 위대한 바벨론 제국의 기틀을 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복국에서 인재들을 데려다가 최고의 시설에서 훈련 받게 하고 국가의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다니엘이 그 나라의 셋째 치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느브갓네살의 열린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호야김은 죽은 듯이 3년을 바벨론이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애굽에 이어 바벨론의 속주가 되는 기막힌 경험을 하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3년 후에 돌연 태도를 바꿔 바벨론을 배반합니다. 이것이 왕하24:1절입니다.

왜 여호야김은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한 것입니까? 성경은 이 결정이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유다에 임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여호야김의 선택은 예언을 이루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이 이런 결정을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전 602년 경에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전진기지로 애굽을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애굽은 결사 항전을 해서 간신히 느브갓네살의 공격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본 여호야김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애굽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애굽은 거의 죽을 힘을 다해서 버틴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을 거역하지 말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친애굽파의 말을 듣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때 느브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 군대는 결사 항전하는 애굽 군대를 죽자고 물리쳐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작전상 후퇴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유다를 징계하지 못할 정도로 군사력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김의 이런 정책에 바벨론은 득달같이 몰려오게 된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 본대와 유다 변방이 아람, 모압, 암몬 족속의 연합군들까지 몰려와 유다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이사야, 미가, 나훔, 하박국, 예레미야 등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유다의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이 경고를 하나같이 무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토굴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선택...

그들의 그런 끊임없는 불신앙과 악행이 멸망을 향하여 점점 더 다가가게 만든 것입니다.

이 침공으로 유다는 철저하게 유린 당합니다. 여호야김은 느브갓네살의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갑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털어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뒷날 벨사살이 바로 이 성전 기구들을 가지고 술판을 벌이다가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받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4. 여호야긴(왕하8-17절; 대하36:9-10절)

유다의 19대 왕은 여호야 긴입니다. 여고냐 라는 이름을 가진 여호야긴은 왕이 되어 석달 열흘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 아버지 여호야김의 뒤를 따라 멸망의 길을 재촉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재위 100일만에 바벨론의 2차 침공이라는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런데요? 바벨론은 이미 정복한 나라를 왜 다시 정복한 것입니까? 여기에는 앞서 여호야김의 잘못된 선택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야김이 포로로 끌려간 해가 주전 602년이라면 바벨론의 2차 침공시기가 주전 597년이라고 할 때 5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야긴은 100밖에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차 침공과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가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한 홍목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른 시기는 아버지인 여호야김이 포로로 끌려간 직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5년 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5년의 공백은 누가 다스렸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를 한 홍목사는 여호야김이 바벨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바로 풀려났다고 봅니다. 그렇게 충성을 맹세했다가 5년 후에 다시 배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격분한 바벨론 군대가 2차 침공을 감행하게 되고 그 결과는 훨씬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여호야긴은 100일을 통치하고 무려 37년이라는 긴 세월을 포로로 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이렇게 포로로 잡혀 있었던 것이 저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포로로 잡혀 있음으로 유다 왕조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 기막힌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멸망한 나라의 왕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의 37년 포로 생활은 왕족의 대통을 잇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으로 2차 침공을 당한 유다는 철저하게 유린을 당하고 훨씬 많은 사람이 2차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때 잡혀간 사람들이 바로 모르드개, 에스더, 에스겔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때 포로의 규모가 1만 명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인물들은 거의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국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학자, 군인,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에 유다는 아예 재기할 힘을 일어 버릴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자, 우리는 세 왕이 국제 정세 속에서 계속 잘못된 결정을 하는 장면을 차례로 살폈습니다. 결과는 이미 말씀에 기록된 대로 멸망을 향해서 치닥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호와하스나 여호야김, 여호야긴은 모두가 자신이 최선을 다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국제 정세를 읽었습니다. 나름대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의 왕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계획을 짜고 하나님 없이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것이 열방을 쫓아간 인생들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열왕기는 결국 열방을 쫓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정이 그들 스스로를 심판의 구덩이에 던지게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극단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타락한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성품이나 삶이 저절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그대로두면 이렇게 세상을 쫓다가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옳게 인식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매일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곁길로 가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21-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21)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 이시다”
구약의 선지서 17권이 있다.
이사야서를 제외한 16권 가운데 “구원” 이라는 단어 딱 7번 쓰인다.
그런데 이사야 서에만 “구원” 이라는 단어는 26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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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한 말씀, 그 이름만큼, 구원에 대한 말씀을 많이 허락하고 있다.
이게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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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약 주전 739-681 에 대략 50년동안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했다.
이 당시는 북동쪽에 앗수르, 남서쪽 애굽제국  그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었다.
양쪽에 메소포타미아, 나일강의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쪽에도 기울수 없고, 한쪾이 강력해지면 반대편을 의지해서 나라를 지켜야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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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그런 가운데 두려움이 없이 구원에 대하여 선포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이 예루살렘 함락.
그리고 바벨론으로 3차레 포로로 끌려간다.(주전 605, 597,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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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레미야 포로에서 “해방, 귀환할것이다.”
이사야는 이때에 앞으로 150년후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예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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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샤야 44장까지 가서보면 바라, 고래스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동방사람, 메사 _바사, 페르시아 제국, 바사에서 매데까지 다스리게 된다.
쓰임 받는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 “공의로 불러서” (41:2)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역사가 진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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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을 무너 트린다.
그리고 말씀 하신다.
공의를 통해서 우리를 보호 하시는것이다.
세상의 공의와 다르다.
공의롭게 일하시겠다는거다.
심판과 회복 두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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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이스라엘의 나라와 민족의 회복이 아니다.
나의 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하는자.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자들은 두려워말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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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자들에게 임하는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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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람들은 고래스를 가볍게 여겼었다.
바벨론을 무너질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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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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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면 누구도 막을수없다.
그렇지만 나의 종들은 두령워하지말라.
이게 어제 본문이다.
.
“우상들은 소송하라.
우상의 허무함을 알아라! 뜻이다.
보이라, 진술하라,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했는지 알게하라.”(21-24)
.
우상은 존재자체가 없다.
이전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다.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바라보는게 허망한것이다.
.
우상에 빠져있는 자들은
예언의 능력도 없고,
하나님의 일을 말하지 못한다.
아는것도 없고, 들어본것도 없는것이다.





아도나이 다르코(יְהֹוָה דַּרְכֹּו )

길(1870) 데레크(derek) דֶּרֶךְ 

1. 여행,  2. 길, 3. ∼로향하는 길
발음 / 데레크[ derek ]
어원 / 18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길(창3:24, 삼상4:13, 겔48:1), 행위(창6: 12,삼상8:3, 왕상8:32), 도(창18:19, 신13:5, 시18:21), 도리(창19:31, 욥21:14), 생리(창31:35), 도중(왕하10:12), 도로(레26:22, 애1:4), 여행(민9:10, 수9:13), 행사(욥26:14), 중도(시102:23),때문(시107:17), 행실(잠8:13, 13:6), 소행(잠12:26, 호4:9), 바른 길(잠23:19, 사30:11), 옳은 길(말2:8), 자취(잠30:19), 사정(사40:27),행동(겔14:22,23), 풍속(겔20:30). [동] 향하다(겔20:46, 21:2, 40:6,22,46), 위하다(암8:14), 여행하다(수9:11), 가다(삿4:9), 행하다(잠14:2, 28:6), 본받다(사10:24).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징벌 심판을 내리실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겨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포학을 행하는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에 멸망을 선포하면서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권능과 선민 유다 민족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특히 본장에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면서, 죄악을 행하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다에 평화의 소식이 전하여진다는 메시지로 본장을 마무리 짓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본장은 자연계와 이방 백성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보여주는 전반부(1-8절)와 니느웨에는 심판을 행하시지만 반면에 유다에는 구원을 베푸실 것임을 보여 주는 후반부(9-15절)로 나눌 수 있다. 

나훔 1:1-8
나훔 1:9-15


[신학주제]
모든 피조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학과 사상의 주제는 존재하는 피조 세계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의 존재 근원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의 삶의 목적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류의 시작으로부터 제기된 질문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피조 세계가 어떤 알 수 없는 절대자로부터 지배되고 있다는 선험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대로부터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사상을 주장하였지만 시대가 지나가면 언제나 사람들의 관념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런데 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정확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방 족속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본장이 처음부 터 하나님을 피조물의 주관자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므로 그들을 심판하실 자격이 있으시고 그들에게 찬양을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신 것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려 함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찬양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주권과 그 솜씨를 노래하며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자이신 만큼 만드신 그 모든 것들을 심판하실 권한도 있으시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속 깨우치고자 하신 것이 바로 심판의 메시지이다.
또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
본장에 언급된 이방 족속들이 심판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피조물의 사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창조 솜씨를 찬양하고 높이는 것이다.  


[영적교훈]
본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향한 안양의 삶을 사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이사야 40:2-5)

가. 절망 중에도 희망의 길을 열어야 한다.

2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본문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랜 포로생활에 지친 나머지 절망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시기를 절망 중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희망의 길을 열라고 하셨다.

* 본문에서 ‘사막’(아라바)은 ‘해가 지다’ 또는 ‘방황하다’를 뜻하는 ‘아라브’에서 유래하였다. 즉 사막은 희망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를 암시한다. 이것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도 하나님은 절망하지 말고 희망의 길을 열라고 하신다.

* 현재 우리들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삼포시대’ 또는 ‘오포시대’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헬(hell)조선’이라는 괴이한 용어가 등장하고,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

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시다.

3절,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본문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외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곳에 희망이 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온전히 따를 때에 희망이 있다.

* 본문에서 ‘광야’(미드바르)는 ‘말하다’ 또는 ‘인도하다’와 ‘따르다’를 뜻하는 ‘다바르’에서 유래하였다. 광야는 양이 목자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인도하시고 백성들은 양같이 그의 말씀을 온전히 따를 때에 안전하고 평화롭다.

*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에 있다. ‘꿈이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약속은 이루어진다’가 신앙적인 표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확실하게 성취되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도 확실하게 성취되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참조하라.

다. 주님이 오실 길을 잘 예비하여야 한다.

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본문 3절에 이어 4절에서도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한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파나, 피엘형)는 ‘제거하라’ 또는 ‘깨끗하게 하라’는 뜻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맞으려면 속사람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 여호와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야사르, 피엘형)는 ‘똑바르게 하라’는 뜻이다. 성도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절망의 땅에서 비열한 야합, 술수, 음모 등이 판치는 것과는 대조적인 말씀이다.

* 여기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는 낮은 자들이 높여지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는 힘 있는 자들이 몸을 낮추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는 뒤에 처진 자들이 이끌어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공평을 이루는 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라.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은 그의 영광을 본다.

5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임재를 상징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없으나 그의 영광을 보고 그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소에 임하실 때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출40:34).

* 에스겔서에 보면 이스라엘을 벌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를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겔10장 참조).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의 환상과 같고...”(겔43:2-3a)

* 여호와의 ‘영광’(카도쉬)은 ‘풍부’라는 뜻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그가 임재하시면 백성들은 구원을 받고 부요케 하시는 은총을 입는다. 하나님이 오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며,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다.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들이 이 영광을 본다.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이사야 40장 3절은 우리 교회가 매우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안에서 이 본문이 차지하고 있는 분위기 역시 뭔가 희망적이고 소망의 느낌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마태복음 3장 3절에서 세례요한에게서 다시 인용되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1] (마 3:3.)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치 시의 노래처럼 평행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광야와 사막이 평행되는 의미를 가지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길과 우리 하나님의 대로는 같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우리가 “대로”라는 의미를 생각할 때 그 의미는 앞의 법칙에 의해서 “길”이라는 의미를 가진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그 앞의 “주” 또는 “여호와”라는 말로 수식되어서 “주의 길”, “여호와의 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로는 길인데.. 이 이사야서에서 표현하는 대로는 여호와의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라는 것으로 번역된 “메씰라” 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하이웨이”…. 고속도로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 메씰라 라는 길은 길인데 다듬어진 길입니다. 평탄하게 다듬고 곧게 닦은 길은 고대에 대규모 군사 원정을 떠나는 이들이 다녔던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속하고 편안하게 길을 떠나기 위해 그 길은 곧게 뻗어야 했고, 다듬어 지고 평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 다시말하면 너희가 고속도로를 닦아라 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사야는 유다가 앗수르에 위협을 당하는 시기에 사역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는 유다의 심판 뿐만이 아니라 열방에 대한 심판을 예언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에둠, 블레셋, 앗수르.. 바벨론까지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으며 그들이 심판에 의한 재앙을 맞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재앙이라고 하면 포로 또는 국가의 멸망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 유다도 포함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심판이 끝이 아니라 오늘 40장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이 심판으로 포로가 되지만 곧 그들이 구원과 회복을 얻게 될 것을 또한 예언합니다.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비록 포로기 전에 활동했지만 유다의 포로를 내다 보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로잡은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 할 것이라는 소망과 구원을 앞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소망을 노래하는 가운데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오늘 본문은 앞서 심판에 대한 내용의 반전이자 새로운 구원을 노래하는 시작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오늘 광야에서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이 길을 따라서 포로된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본문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제2의 출애굽으로 말합니다.
이집트의 포로에서 벗어난 첫 번째 구원 사건이 첫번째 출애굽 이었다면 베발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을 제2의 출애굽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치 첫번째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의 길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듯이… 오늘 두번째 출애굽에서도 이스라엘은 광야의 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와 다른 것은 이스라엘에게 길을 준비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사막입니다. 실제로 상인들과 군대가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사막을 바로 통과하지 못하고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으로 올라간 다음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동경로를 보면 아시겠지만 아브라함도 우르에서 가나안땅으로 올 때 터키 남단에 위치한 하란을 거쳐서 멀리 돌아온 이유가 바로 이 사막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막에 이 광야를 가로 질러서 메실라 … 대로 라고 번역된 고속도로가 생긴다면 이제는 전혀 우회할 필요가 없이 가장 가깝고 신속한 직선 도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길을 통해서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마음의 할례를 받고 준비되어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이 왕의 대로를 통해서 지체없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 하나님의 대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이야기 합니다.

아까 이야기 했지만 이 포로귀환은 제2의 출애굽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가지면에서 이스라엘의 첫번째 출애굽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대로와 출애굽당시 이스라엘이 지나가고자 했던 왕의 대로입니다.
민수기 20:17-18절입니다.
17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고 하라 하였더니
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1]
민수기 21:21-23절도 읽겠습니다,.
21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22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리이다 하나
23 시혼이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 출애굽가운데 왕의 대로를 지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말씀처럼 이방 나라는 이스라엘이 왕의 대로를 지나가는 것을 거절합니다. 굴욕적인 거절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왕의 대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우회하여 모압 지역에 도착을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 하나님의 대로를 통해서 곧바로 구원받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이 길을 지날때는 이민족의 방해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사자나 들짐승의 위협도 없을 것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보호를 받으며 신속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을 통해 돌아오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첫번째 출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다면 이 두번째 출애굽에서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합니까?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자입니다.
이사야 11장 11절입니다.
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사 11:11.
16절도 읽겠습니다.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1]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사 11:16.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자들은 오직 남은자들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오로지 여호와의 신앙을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 포로기 가운데 그 바벨론의 찬란한 문화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자들… 그들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8절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때는 수많은 잡족들이 함께 섞여 있으며 많은 가축들이 함께 출애굽의 경로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여호와의 길 대로는 어떤 길입니까? 이사야 35장 8절을 읽게씁니다.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1]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사 35:8.
대로는 거룩한 길이라 말합니다. 부정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며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이 구속함을 입은 자들에게 임합니다. 이 구속함은 거룩한 자들이고…. 온갖 우상숭배와 물질 주의가 팽배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붙들며 살아갔던 자들..... 남은자!!들 이 가는 길이 바로 이 대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사막의 한가운데 뻗은 이 대로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사막은… 광야는 배고픔과 결핍의 장소입니다.. 목마름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 광야 한가운데 시내산에 임재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도 이 광야에서 여호와의 영광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것이다!! (35:2)라고 선언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준비된 대로의 길을 통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이 바로 남은자들이 준비하고 닦은 그 거룩한 길을 통해서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길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너희가 구원을 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은 광야와 같고 우리의 환경은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한 바벨론과 같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남은자인가!!! 너희가 하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인가!! 하는 것을 보신다고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선포되어지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남은자이다…. 알곡과 쭉정이가 같이 자라지만 …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던지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지만…. 그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은자로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대로 교회에 맞는 남은자로서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인에 맞게… 대로라는 교회 이름에 맞는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며… 이 땅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타낼 수 있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11

7

30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212

7

31

월 

미가 3장

여호와의 신(8절)

213

8

1

미가 4장

여호와의 산(2절)

214

8

2

미가 5장

근본(2절)

215

8

3

미가 6장

영혼의 죄(7절)

216

8

4

미가 7장

주와 같은 신(18절)

217

8

5

미가 8장

여호와의 길(3절)








































































미가(Micah) 07-28-2023(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미가 6:8)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공의(4941) 미쉬파트(mishpâṭ) מִשְׁפָּט

공의(4941) 미쉬파트(mishpâṭ)  מִשְׁפָּט  

1. 판단.  2. 레위기 19:15  3. 욥기 9:32
발음 / 미쉬파트[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의(창18:19), 법(렘30:11), 공의(신16:18,시25:9), 율례(왕상9:4), 양식(출26:30, 왕상6:38), 판결(출28:15, 민27:11, 삼상8:3), 규례(레5:10, 민15:16, 삼상30:25), 법도(레18:4, 신4:1), 재판(레19:35, 신1:17), 법(레24:22, 왕하17:26,27), 사연(민27:5), 판결법(민27:21), 몫(신18:3), 권리(신21:17), 송사(신24:17, 왕상3:11), 방식(수6:15), 관습(삼상2:13), 계명(왕상2:3), 직무(왕상4:28), 일(왕상8:45,59), 모양(왕하1:7), 풍속(왕하17:33,34,40), 반열(대상6:32), 판단(대상16:12), 사정(욥13:18, 사40:27), 응답(욥19:7), 정당함(욥27:2), 판단력(시72:1), 뜻(습3:8), 작정(잠29: 26), 권리(사10:2, 렘32:7), 재판석(사28:6), 보응(사49:4), 심문(사53:8), 형벌(렘49:12, 습3:15), 화(렘51:9), 죄(겔7:23), 죄악(겔7: 27), 의로움(렘12:1). [동] 합당하다(신19:6), 공의롭다(신32:4), 재판받다(수20:6, 삿4:5), 심문하다(왕하25:6), 재판하다(욥14:3), 옳다(욥34:4), 정직하다(욥34:6), 공판하다(시35:23), 심판하다(시119:84, 사3:14), 정직하다(잠12:5), 작정하다(잠16:33), 적당하다(사28:26), 바르게 하다(사32:7), 송사하다(사54:17).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 8199. 솨파트(shâphat) שָׁפַט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솨파트[ shâphat ]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 16:5, 출 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명] 재판장(신1:16, 수8:33, 욥12:17), 사사(삿16:31, 삼상4:18, 대상17:10),방백(삼상6:16), 법관(창19:9), 재판관(삼하15:4, 대하19:6, 욥9:24, 시141:6), 심판자(욥23:7), 재판자(미5 : 1), 재판(시37:33), 심판(시9:19, 사66:16).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인자(2617) 헤세드( chêçêd) חֵסֵד

인자(2617) 헤세드( chêçêd) חֵסֵד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 19:19, 민 14:18, 시 18:50), 은혜(창 20:13, 삼하 3:8, 렘 32:18), 인애(창 47:29, 신 7:9, 렘 2:2), 은총(창 32:10, 삼하9:1, 호 2:19), 성실(왕상 3:6), 긍휼(느 1:5, 시 85:10), 아름다움(사 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 14:34), 선대하다(수 2:12, 삿 1:24, 룻 1:8), 은혜를 베풀다(룻 2:20), 인자하다(대상 16:34, 대하 7:3,시 59:10), 자비하다(대상 16:41, 대하 5:13), 선하다(대하 32:32, 느 13:14), 긍휼히 여기다(스 9:9, 시 59:17), 불쌍히 여기다(욥 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 2616. 하사드(châçad)  חָסַד 

1. 사랑하다,  2. 겨루다,  3. 피엘형 : 비난하다
발음 / 하사드[ châçad ]
관련 성경 / 꾸짖다(잠 25:10), 자비하다(삼하 22:26, 시 18:25).
구약 성경 / 3회 사용

겸손(6800) 차나(tsânaʽ)  צָנַע

겸손(6800) 차나(tsânaʽ)  צָנַע 

1. 겸손하게 행하다,  2. 미가 6:8.
발음 / 차나[ tsânaʽ ]
관련 성경 / [부] 겸손하게(미 6:8).
                  [명] 겸손한 자(잠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구약 성경 / 2회 사용


본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항목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1. 오직 공의를 행하며

- '공의'는 의로운 삶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인자를 사랑하며

- 이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언약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이지 못할 경우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얻게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속성인 '헤세드'를 보여주고 그로 인해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자기 백성들도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McComiskey).

3.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행하는 것이다(Delitzsch).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이상의 세 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 미가가 율법에 기록된 희생제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미가가 강조하는 것은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마음 자세와 행위를 동반하지 않은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절에서 요구된 마음의 자세와 행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사함을 얻는 조건들이 아니다. 분명히 죄사함은 희생제사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본절의 윤리적 행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곧 죄사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삶 가운데 마땅히 드러나야 할 삶의 규범들이다. 이것이 없는 희생제사는 아무런 용서도 구할 수 없는 자기 만족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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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와 같은 신(미가 7:18)

종교(宗敎) - 마루 종, 가르칠 교
religion -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Who is a God like you, who pardons sin and forgives the transgression of the remnant of his inheritance? You do not stay angry forever but delight to show mercy.

주와 같은 신(God like LORD)(Who is a God like)

엘 카모카(אֵל כָּמֹוךָ) 

이처럼, ~같이 / 키모우(kemôw) כְּמוֹ 

1.  이처럼,  2. ~같이,  3. 이사야 41:25. /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 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 같이 밟을 것이니.
발음 / 키모우[ kemôw ]
구약 성경 / 140회 사용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후에 미리암이 노래한 것이다(출 15:11; 시 86:8).
이는 하나님께서 유일하시며 전능하신 신이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풍성하신 인애의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Smith, McComiskey, Lange).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 본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낸다.

'사유하시며'는 없애버린다는 의미
'넘기시며'는 간과하신다는 뜻이다.

사유하시며(5375) 나사(nâsâʼ) נָשָׂא 

1. 들어올리다,  2. ‘물이 많아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3. 깃발을 세우다
발음 / 나사(nâsâʼ)
관련 성경 / 넉넉하다(창 13:6,7), 용서하다(창 18:26, 출 10:17), 듣다(창 19:21), 데려오다(창45:19),맹세하다(출6:8), 불러들이다(출10:13), 담당하다(출18:22, 민11:17), 메다(출28:12, 왕상2:26), 원하다(출36:2), 돌아가다(레5:1),당하다(레5:17, 24:15, 시88:15), 메이다(민4:25), 지다(레16:22, 사22:6), 사하다(민14:19, 시32:5), 이끌다(민31:49), 움키다(삼상17:34), 안다(신1:31, 삼하4:4), 받다(왕상8:31, 신33:3), 들다(삼하18:28, 대상12:24, 사40:26), 실어오다(왕상10:11), 들어가다(왕하2:16), 예언하다(왕하9:25), 교만하다(왕하14:10), 가져가다(왕하23:4), 조사하다(대상27:23), 교만하다(대하25:19), 비방하다(시15:3), 두다(시24:4), 높이다(시93:3, 사52:8), 칭하다(시139:20), 받들다(시143:8), 세우다(사5:26), 짓다(사14:5), 들어올리다(겔3:14), 무성하다(겔17:23), 부르다(겔26:17), 품다(겔39:26), 맺다(욜2:22, 학2:19), 가져가다(암6:10), 제하여 버리다(말2:3), 견디다(창4:13),싣다(창44:1), 태우다(창45:27), 집계하다(민4:2), 일어나다(시89:9), 참다(렘44:22,시55:12), 빼앗다(삼하14:14, 겔38:13), 일으키다(창21:18), 계수하다(민1:2, 31:26), 떠오르다(창7:17), (소리) 내다(창21:16), 떠나다(창29:1), 눈짓하다(창39:7), 몰아넣다(출10:19), 일컫다(출20:7, 신5:11), 전파하다(출23:1), 운반하다(민1:50), 돌아보다(신28:50),(소리를) 높이다(삿21:2, 삼하13:36), 허락하다(삼상25:35), 대면하다(삼하2:22), 나오다(삼하6:3), 보내다(왕상5:9), 떠들다(왕상13:29), 이끌어가다(왕상18:12), 뜨다(왕하19:22), 긷다(대상11:18), 장가들다(대상23:22, 24:3), 노략하다(대하14:13), 운반하다(대하16:6), 베풀다(에2:9), 소리지르다(욥2:12), 따르다(욥13:8), 물다(욥13:14), 노래하다(욥21:12), 보다(욥32:21, 시82:2), 내다(욥40:20), 부르다(시16:4), 들리다(시63:4), 주다(시72:3), 기쁘게 하다(시86:3), 치다(시133:9) 건너다(사15:7), 날리다(사41:16),탈취하다(호5:14), 제거하다(호14:2), 제하다(단1:16), 솟아오르다(나1:5), 쓰다(학2:12), 받아 주다(말1:8), 긍휼히 여기다(말1:9), 실리다(창45:23), 사모하다(신24:15), 잡다(수6:18, 삿9:54), 이끌다(삼상10:3), 바치다(삼하8:6, 대상18:2), 실어오다(왕상10:22), 짐을 나르다(느4:17), 뿌리다(시126:6), 사유하다(미7:18), 치우치게 하다(말2:9), 존귀하다(왕하5:1, 대하32:23, 욥22:8), 사함을 얻다(시32:1), 사죄함을 받다(사33:24), 달하다(렘51:9), 사로잡다(단11:12), 돋우다(사40:4), 안기다(사66:12), 뛰어나다(사2:2), 자고하다(사2:12), 거룩하다(사57:15), 높다(사57:7), 제공하다(왕상9:11), 끌어가다(암4:2), 형벌받다(레22:16), 높아지다(단11:14), 높은 체하다(잠30:32), 흥왕하다(민24:7).
[부] 높이(에 3:1)
구약 성경 / 650회 사용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남아 있는 모든 죄악을 완전히 제거하시며 동시에 기억지 아니하신다.

넘기시며(5674) 아바르(ʽâbar) עָבַר

1. 건너다
2. 창세기 31:21 /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산을 향하여 도망한지
3. 여호수아 3:11 / 보라 온 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발음 / 아바[ ʽâbar ]
관련 성경 / 지나다(창 15:17, 수 15:3. 삼상 14:23), 오다(창18:5), 건너다(창 32:10, 삿 3:28), 나아가다(창 33:3, 삿 19:12), 다니다(출 12:12, 왕상 18:6), 두루 다니다(출 12:23, 수 3:2), 생기다(민 5:14), 건너가다(민 32:21, 수 4:13), 범하다(신 26:13, 사 24:5), 통과하다(민 20:21, 신 29:16, 왕하 6:26), 행진하다(신 2:8), 어기다(수 7:11, 삿 2:20), 이르다(수 15:4, 삿 9:26), 건너오다(삼하 19:40), 따르다(삼하 20:13), 왕래하다(욥 15:19), 가다(삼상 26:13, 왕상 22:24), 넘치다(시 38:4, 104:9), 떠나다(아 3:4, 렘 11:15), 휩쓸다(시 42:7), 잠기다(시 124:4), 물러가다(아 5:6,사31:9), 헤매다(사 8:21), 악하다(렘 5:28), 잡히다(렘 23:9), 넘다(렘 48:32), 통행하다(사 33:21, 겔 39:15), 나아오다(단11:10), 메우다(호 10:11), 없어지다(렘 8:13, 나 1:12), 받다(나 3:19), 참여하다(신 29:12), 나오다(삼하 15:24), 멸망하다(욥 33:18), 내려가다(욥33:28), 용서하다(잠 19:11), 범람하다(사 54:9), 상달하다(애 3:44), 들어가다(수 4:5), 순행하다(겔 9:4 ,5), 순찰하다(창 41:46), 맡기다(신24:5), 대다(민6:5), 앞서다(삼상9:27, 삼하18:23), 보내다(삼상26:22), 마치다(삼하11:27), 두루행하다(삼하20:14), 배반하다(왕하18:12), 출정하다(대하21:9), 변개하다(에1:19), 폐하다(에9:27), 마르다(욥6:15), 당하다(욥13:13),망하다(욥36:12), 넘어가다(욥14:5), 범죄하다(시17:3), 동행하다(시42:4), 면하다(시141:10), 거스르다(잠8:29), 수리하다(사40:29),제거함을 당하다(욥34:20), 돌아오다(사45:14), 순복하다(렘2:20), 진멸하다(렘8:13), 주다(겔48:14), 통용하다(창23:16, 왕하12:4), 들다(출30:13), 거역하다(대하24:20), 불려가다(사29:5, 렘13:24), 옮기다(창 47:21, 삼하 3:10), 새끼를 배다(욥21:10), 돌리다(출13:12, 민27:8), 밀다(민8:7), 가지다(수4:3), 인도하다(수7:7), 사하다(삼하12:13), 끌어내다(삼하12:31), 거두다(에8:2), 잃다(렘46:17),깎다(겔5:1), 사르다(겔23:37), 제거하여 버리다(욥7:21, 슥3:4), 반포하다(대하30:5),제거하다(에8:3), 돌이키다(시119:37), 공포하다(출36:6, 스10:7), 소리를 내다(레25:9),쫓아내다(왕상15:12), 벗다(욘3:6), 범죄하게 하다(삼상2:24), 분내다(시78:62), 노하다(시78:21, 89:38), 진노하다(신3:26), 방자하다(잠14:16), 간섭하다(잠26:17).
[부] 빨리(삼하 17:16).
[명] 행인(잠 9:15), 즙(아 5:5,13), 행인(사 33:8).
구약 성경 / 547회 사용

그분은 노를 항상 품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즐겨하신다.

노(639) 아프( ’aph)  אַף  

1. 호흡하는 곳
2. 코
3. 민수기 11:20.
발음 / 아프[ ’aph ]
어원/ 5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코(창2:7, 삼하22:9, 시115:6), 얼굴(창3: 19, 삼상25:41), 분노(창27:45, 신29:20, 렘12:13), 노(창30:2, 삼상11:6, 겔22:20), 분기(창49:7), 콧김(출15:8), 진노(민11:10, 스8:22, 사3:8), 머리(민22:31), 노염(시30:5), 분(욥37:11). [동] 노여워하다(합3:8), 노하다(창39:19, 출 11:8, 욥27:3), 분노하다(신9:19, 단9:16, 호 13:11), 울분을 터뜨리다(욥18:4).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 599. 아나프(’ânaph) אָנַף  

1. 성내다
2. 이 말은 더 고상하고 시적인 언어로만 사용됨.
3. 힛파엘형 : 화가 나다
발음 / 아나프[ ’ânaph ]
관련 성경 / 진노하다(왕상 8:46, 시 2:12, 신 1:37), 분노하다(시 60: 1), 노하다(왕하 17:18, 사 12:1, 시  79:5).
구약 성경 / 14회 사용

인애(2617) 헤세드(chêçêd) חֵסֵד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 19:19, 민 14:18, 시 18:50), 은혜(창 20:13, 삼하 3:8, 렘 32:18), 인애(창 47:29, 신 7:9, 렘 2:2), 은총(창 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 14:34), 선대하다(수 2:12, 삿 1:24, 룻 1:8), 은혜를 베풀다(룻 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 9:9, 시 59:17), 불쌍히 여기다(욥 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미가 선지자는 육적인 이스라엘이 죄악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지만 인애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는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한 백성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평생 경배하고 더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방법이 있는데,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세 가지는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갚으신 나의 구주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둘째, 나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십니까? 
소망이 있으십니까? 
사랑이 있으십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가서는 12개 소선지서 가운데 6번째 책입니다. 

선지서들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옛 언약에 실패해서 포로가 되는 형벌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어겨서 하나님께 징벌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만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20세기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육적인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난다고 해석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리아산에 다시 여호와의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 예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는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결국 예언서의 내용은 육적인 이스라엘이 망해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미가서의 마지막 3절도 새 언약의 핵심을 증거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가 7:18).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1:33-34).

미가서 7장과 예레미야서 31장의 새 언약에 관한 내용이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원수들을 모두 부끄럽게 하시며 새로운 출애굽의 기적을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해서 미가 선지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이것은 또한 미가 선지자 이름의 뜻과 같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연구해서 쓴 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방서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면 손이 저절로 움직여 글자가 써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도 그런 방법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영감을 주실 때 성경 기록자들의 언어와 인격과 감정 모두를 사용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책과 베드로가 쓴 책의 어휘와 표현이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Ⅰ.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Incomparableness) 

미가 7장 18절에는 미가 선지자의 감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미가 선지자가 감탄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비교 종교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를 연구하여 이해하고 선교전략을 세운다는 의미로 연구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평면적인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은 생각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자체적인 속성을 갖고 계십니다. 

  미가 선지자뿐만 아니라 모세도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을 여러 곳에서 증거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1).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는데 200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다 지나갔습니다. 만약 10명씩 일렬로 지나갔다면 지금까지 건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천 명, 몇만 명씩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홍해를 가르셔서 200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다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애굽 군대가 보고 따라 들어가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홍해를 합치셔서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모세가 도대체 여호와와 같은 신이 어디 있느냐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또 모세는 죽기 직전 신명기 33장 26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신 33:26). 

여수룬은 내 의로운 백성이라는 의미인데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귀신, 잡신과 비교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비교 대상도 안 됩니다. 비교도 비슷해야 하지 비교할 수준도 안 되는데 무슨 비교를 합니까?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입니다. 요담과 아하스는 16년 통치했고, 히스기야는 29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요담, 히스기야 때는 아니더라도 아하스 시대 16년은 계속해서 예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유다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입니다. 성전 문을 닫아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릇들을 다 창고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 있던 곳에 다메섹 귀신을 숭배하는 제단을 갖다놓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을 숭배하고 힌놈 골짜기에 자기 자식들을 불에 태우면서까지 귀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러자 미가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아!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마라. 하나님을 그런 잡신, 귀신들과 비교하지도 마라. 하나님과 바알이 상대가 되느냐? 하나님과 다메섹 귀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그런 잡신들과 비교하지 말고 너희는 하나님을 경배하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메시지를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기뻐하시고 인애(Mercy)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둘 중 하나입니다. 사탄이 만들었거나 인간의 부패한 영혼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에게도 없고 인간의 부패한 영혼에게도 없는 것이 바로 긍휼인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다 겁을 줍니다. 두려움을 줘서 벌 받지 않으려면 자신을 섬기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집에 못도 함부로 박지 못했습니다. 집에 못을 박으면 삼신할머니가 노하셔서 눈에 핏발이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핏발 서는 것은 밤에 잠 안 자고 공부해서 그런 것이지 못 박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섬기지 않으면 집에 불행이 생길 것이라고 겁을 줘서 경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 종교의 특징입니다. 전도해보면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동안 섬겼던 귀신이 우리 집을 괴롭히면 어떻게 하냐는 것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신들이 괴롭히려 해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괴롭힐 수 없습니다. 상대도 안 되고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말한 것은 현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지옥 갈 사람도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종교와 다릅니다. 겁을 줘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가니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겔 33:11). 에스겔 18장 32절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Ⅱ.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하시느냐?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누구의 허물을 넘기신다고 했습니까?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용어로 보면 성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용서하십니다. 계획된 사람들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5).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긍휼히 여기신다면 이런 말씀을 왜 기록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있고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히 기분 나빠합니다. 왜 차별을 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이것은 주제 파악이 아직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히 여기시고 어떤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1). 

토기장이도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데 하나님께서 그럴 권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인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피조물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7).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다시 한 번 확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은 아무한테나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계획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 7:20). 

여기서 ‘옛적’이라는 단어는 미가서 5장 2절에도 나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 5:2). ‘태초’라는 말은 영원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영원 전에 인간을 창조하기도 전에 벌써 인간의 타락을 다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패한 인류 가운데 구원할 자를 미리 예정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성질을 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구속 언약은 영원 전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 가운데 구원할 자를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에게 택한 자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와 피를 흘려 택한 사람들의 죗값을 갚아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택한 자들의 영혼에 역사해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 언약을 택한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했을 때도 앞으로 여자의 후손이 와서 택한 자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에게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도 네 씨가 영영히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내 백성의 목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속 언약을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점진적으로 택한 백성에게 보여주시고 맹세하셨던 것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 13:20).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신 것도 영원한 언약 때문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이유도 영원한 언약 때문입니다. 침례교의 위대한 스펄전 목사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라는 제목으로 히브리서 13장 20절을 설교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에 따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피를 흘리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에 따라 택한 자에게 죄 사함과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맹세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받을 이유나 조건이나 업적이나 공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의 피 값을 치렀지만 우리는 순 공짜로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헌금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내서 천국에 가려면 일조 원을 내도 못 갑니다. 우리에게 지옥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격은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 갈 자격이나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영원 전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택하신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언약의 자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하면서 보니까 99% 믿는데 1%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안 믿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면 믿는 것입니다. 도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아십니까? 고재봉, 김대두. 이런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변해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 다 전도하다가 결국 사형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망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애의 내용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인애를 베풀어 주시는데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함을 주시는 칭의의 은혜(Justifying Grace)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죄악을 사하신다는 동사의 히브리어는 ‘라사’인데 이것은 죄 짐을 들어 올리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 올려서 어깨에 메고 씨름선수가 하듯이 확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하신다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입니다. 저는 참 죄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죄가 없으신 표정으로 앉아계시는데 저는 죄 짐이 엄청나게 커서 아무리 들려고 해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더니 내 죄 짐을 잡아서 어깨에 메시고 그것을 등 뒤로 던져버려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을 사하신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허물을 넘기신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오베르’인데 출애굽기 12장 23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으면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의 죄 짐을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그 죄를 잊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의 죄를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옛날에 지은 죄 때문에 악몽을 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잊어버리시기 때문에 그런 악몽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악몽은 무엇이냐? 사단이 죄를 복사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꾸 송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단에게 미가 7장 18절을 붙들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내 죄의 복사본을 가지고 와서 괴롭히는 사단아 물러갈지어다!’ 이렇게 명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뭘까요? 배고픈 것이 문제입니까? 배고파도 굶어 죽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가난이 문제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모두 불행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행복합니다. 이번에 우리 성도들이 캄보디아에 다녀왔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해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죄인인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는 마귀를 아버지로 만들고 비참을 친구로 만들고 사망을 대가로 만들고 지옥을 영원한 운명으로 만든다.” 죄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고 용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지옥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영향력을 벗어나 점진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성화의 은혜(Sanctifying Grace)를 주시는 것입니다.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8-19).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어 의롭다 함을 받으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지옥에 가기는 다 틀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죄에 빠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롭다함을 입은 성도들을 거룩하게 해주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세 가지 행동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진노하시지만 우리가 회개하면 진노를 풀어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죄를 지으면 진노하시다가도 회개하면 진노를 푸시는 과정이 성화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강력한 원수처럼 쫓아오는 죄들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죄로 음란, 도박, 술, 담배와 같은 것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쉽게 끊지 못하고 따라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들을 하나님께 맡기면 발로 밟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아오는 대군들은 깊은 바다에 빠뜨려버리십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9). 이것이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은혜인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 기업에 남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신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육적인 이스라엘이 죄악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지만 인애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는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한 백성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평생 경배하고 더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방법이 있는데,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세 가지는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갚으신 나의 구주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둘째, 나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십니까? 
소망이 있으십니까? 
사랑이 있으십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옴팔로스(Omphalos)

옴팔로스는 그리스어로 "배꼽(ομφαλός)" 이란 뜻이다.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세상의 중심을 알고 싶어, 두 마리 독수리를 세상에 날려보냈는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서 세상을 돌아 그 중심에서 만나게 하였다.
이 마주친 장소가 바로 파르나소스 산 기슭에 자리한 도시 '델포이'였다.
이곳이 세계의 중심인 것을 안 제우스는 옴팔로스라 부르며 돌을 놓아 표시했다.
그리고 이곳을 신탁을 받는 장소로 보았다.

여기서 델포이라는 말은 대지의 자궁을 뜻하고, 옴팔로스는 세상의 배꼽, 세상의 중심을 상징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옴팔로스(돌)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인 석조물로 아주 반구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기록들에 따르면 지중해 지역에서는 신탁소가 있는 장소들에는 의례 이 옴팔로스 돌이 있어서 성스럽게 여겨졌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옴팔로스는 아폴론의 신탁이 있었던 델포이에 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신인 바알(Baal)과 관련된 "광휘의 돌(stone of splendor)"로부터 옴팔로스가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광휘의 돌과 옴팔로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신과의 대화를 가능케 해주는 능력에 있다.

옴팔로스 증후군

옴팔로스 증후군은 자신이 사는 곳이 지구의 배꼽이라고 믿는 일종의 자기과신 증세를 말한다.
이 증후군의 용어는 사회, 경제, 역사, 정치, 종교에 걸쳐 많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지중해(地中海)'라는 말 역시 지구 중심에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여기에도 옴팔로스 증후군이 엿보인다.
지중해라는 말이 오래 전부터 '마레 노스트룸(우리의 바다)'라고 불리던 것을 로마 제국이 번영하던 그 시기 솔리누스에 의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맥락으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옴팔로스 증후군의 사례다.
다분히 콜럼버스의 입장에서 그가 발견한 대륙은 이전에도 존재하던 대륙이지 전혀 새로운 신대륙은 아니다.
정복자의 시각, 강자의 역사에 의해 서구 중심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옴팔로스" 라는 단편 소설은 "테드 창"의 작품.
단편집 "숨"에 처음 수록되었다. 

창조설이 진실인 세계에서, 교회 고고학자인 주인공 도로시아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야기.
이 지구는 창조의 과학적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나무의 나이테를 세는 방법으로 추적하면 8912년 전이 가장 오래된 나이테며, 이는 8912년 전에 지구가 창조되었으며 그 때의 나무는 이미 자란 상태로 창조되었기에 최초의 나무들은 바깥쪽에는 나이테가 없고 안쪽에만 나이테가 있다.
비슷하게 성장판이 없는 조개나 뼈 등이 발견되며, 배꼽이 없는 최초의 인간들의 미라도 발견된다.
이렇듯 창조의 증거가 발견되기에 기독교의 존재감이 막강한 것으로 보이며, 과학과 종교가 심하게 반목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 방법론으로 창조의 증거를 찾을 수 있으니 교회가 딱히 반과학적인 스탠스를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 이유로 보이며, 이렇기에 전세계에서 많은 태초의 인간들이 발견되자 아담과 이브만이 신이 직접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비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도 보여준다.

실제로 주인공도 교회 고고학자며, 과거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함으로 인식했다.
다만 세속적 과학자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모든 과학자가 종교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도로시아가 자기 사촌 로즈마리가 최근에 태초 유물을 샀다며 사슴의 다리뼈를 보여주는데, 로즈마리의 남편 알프레드는 진짜 유물이라면 그렇게 쌌을 리 없다며 부정한다.
도로시아는 사슴 뼈에 성장판이 닫혀서 생긴 흔적이 없음을 확인하여, 이 뼈는 성체 상태로 만들어졌기에 태초 유물이 맞다고 인증한다. 도로시아가 유물을 어디서 샀냐고 묻는데, 로즈마리는 박물관 기프트샵에서 샀으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을 싸게 팔고 있었으며 전복 유물이 있어서 신기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태초 전복 유물은 발견된 적이 단 한 번이며, 알타 캘리포니아 대학의 산타 로자 섬 발굴인데, 대학에서 유물을 땡처리할 리가 없으니 수상하게 여긴 도로시아가 조사에 나선다.

기프트샵 주인은 기부를 받았을 뿐이라며 기부자의 신상 정보를 알려준다. 마틴 오스본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집주소도 모르며, 우체통 주소만 안다고 밝혔다. 도로시아는 기프트샵 주인의 이름으로 해당 우체국으로 전자 메일그램을 보내 네가 기부한 유물이 장물이라는 의심 때문에 반송하겠다는 메시지를 전송하고, 우체통에서 소포를 가져가는 사람을 잡기로 한다. 이 작전은 성공했는데, 마틴 오스본은 가명이었고 유물을 보낸 사람은 윌헬미나 맥컬로라는 소녀로, 오클랜드 소재 알타 캘리포니아 대학교 자연철학[1] 박물관장인 네이선 맥컬로 박사의 딸이었다. 관장의 딸이었기에 의심을 사지 않고 박물관 유물들을 빼돌릴 수 있었던 것. 왜 이런 일을 했냐는 추궁에 윌헬미나는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사람들의 믿음을 더 확고하고 신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곧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논문이 발표될 것이고, 그렇기에 이런 유물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면서. 무슨 논문이냐고 도로시아가 묻자, 윌헬미나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리뷰 요청이 온 천문학 논문이 있는데, 아버지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고, 자세히 알고 싶으면 아버지랑 얘기하라면서 집주소를 알려준다.

다음 날 도로시아는 맥컬로네에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네이선이 윌헬미나에게 화내는 모습을 본다. 딸이 말한 당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뭐냐고 도로시아가 묻지만, 네이선은 이건 가족의 개인적인 일이기에 당신 알 바가 아니라고 쏘아붙인다. 그러자 도로시아는 입장 바꿔 생각하면 이런 일이 발생했는데 당신 같으면 그런 설명으로 만족하고 박물관에 보고 안 할 수 있겠냐고 반박하고, 네이선은 크게 불편해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어차피 발표될 논문을 보여주라는 아내의 설득에 논문 내용을 공유한다. <자연 철학>이라는 학술지의 논문을 리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논문의 제목은 "태양과 에테르의 상대적 운동에 관하여 (On the Relative Motion of the Sun and the Luminiferous Aether)"이다.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 에테르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고 빛의 속도가 모든 관성기준계에서 동일하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현실 세계와 달리, 이 소설 속의 세계에서는 에테르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관찰되고 그 속도도 관측할 수 있다. 관측 결과 태양계에는 일정한 에테르 바람이 불고 있는데,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딱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결과지만 아서 로슨이라는 천문학자는 태양계에 에테르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태양계 자체가 정지해 있는 에테르에 대해서 움직인다고 해석한다. 도로시아는 사막에 바람이 불면 바람이 움직이고 사막이 가만히 있는 거지, 공기는 가만히 있는데 사막이 움직인다는 해석이 말이 되냐고 바로 반박하지만, 네이선은 일단 끝까지 들어보라고 한다. 로슨의 가설에 따르면 에테르에 대해 정지해 있는 항성이 있을 것이며, 그 항성은 절대 공간의 기준인 에테르에 대해 정지해 있으므로 절대 정지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항성들은 있었지만 완벽히 에테르를 기준으로 정지 상태인 항성은 없었는데, 그러다가 로슨은 에리다누스 별자리의 58 에리다니라는 항성의 속도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초속 몇천 마일 정도의 속도로 지구에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는 이상한 항성이었던 것이다. 다른 관측소와 정확히 대조해본 결과, 이 항성은 24시간을 주기로 속도가 변하고 있고, 로슨은 24시간을 58 에리다니가 원형 궤도를 돌고 있다고 추측한다. 도로시아는 그러면 더 무거운 천체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하자, 네이선은 그렇게 운동하는 천체는 중력에 의한 공전일 리 없다고 답한다. 여태까지 우리의 천체 역학에 대한 모든 지식을 부정한다면서. 로슨의 가설은 58 에리다니가 우리가 관측하기 너무 작은 천체, 즉 지구 크기의 행성을 24시간 주기로 공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58 에리다니가 이렇게 공전하는 이유는 행성에게 24시간의 밤-낮 주기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58 에리다니는 천동설적인 태양계를 이루며, 58 에리다니가 공전하고 있는 이 행성은 에테르에 대해서 정지 상태이며 이 행성에서, 그리고 오직 이 행성에서만 빛의 속도가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다는 것이 로슨의 가설이다. 이 행성에 생명이 있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 로슨은 생명이 있다고 추측하며, 이 행성의 생명이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태양이 24시간 주기로 행성을 공전하는 기적이 존재하는 행성, 절대적 정지 상태에 있는 이 행성이야말로 신이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창조한 특별한 행성이 아니겠냐는 것.

로슨은 추가로 지구의 인간이 존재하는 가설로 세 가지를 꼽는데,
1. 진짜를 만들기 위한 연습 창조였다.
2. 의도치 않은 부작용으로 58 에리다니의 행성을 창조할 때 창조되었다.
3. 사실 우리가 진짜고 58 에리다니의 행성은 연습이거나 부작용이었다.
세 번째 가설은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주의 관심이 있는 곳이라면 항성이 행성을 공전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행성이 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아니겠냐는 것. 즉 지구는 어찌 됐든 의도치 않는 창조물로서, 신은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다는 핵폭탄급 결론이 도출되는 논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로슨도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추측이 많은 논문이지만, 설득력 있는 이론이며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네이선은 말한다. 대표적인 언어학의 난제로 전 세계의 언어가 몇 천년의 시간 만에 이토록 달라졌냐는 것이 있었다. 태초의 인간들이 하나의 언어를 말하고 있었다면, 전세계의 언어에서 어느 정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기엔 관련 없는 언어들이 존재하기에, 태초의 인간들이 쓰던 언어가 여럿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대체 왜 신이 태초에 인간들에게 여러 언어를 쓰게 만들었는지가 난제였으나, 애초에 우리가 신의 관심 밖이었다면 난제가 해결된다. 신은 태초의 인간들에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줬지만 언어를 내려주진 않았고, 세계 각지의 태초 인간들은 독립적으로 언어를 개발했기에, 세계의 언어가 이토록 다른 것이다.

이어서 네이선은 자신은 이 논문을 리젝하고 싶었지만 리젝할 명분이 없으며, 과학자로서의 양심이 이 논문을 게재 승인토록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계획에 우리가 아예 없었다면 어찌 되는 거냐면서 거의 울음을 터뜨리고, 도로시아가 위로하려 하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소리친다. 네이선의 부인은 우리에게 윌헬미나보다 10년 정도 오빠였던 마틴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인플루엔자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네이선이 이 큰 아픔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이것도 신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믿음 때문이었는데, 애초에 지구라는 행성부터 신의 관심 밖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버틸 수가 없었던 것. 자신의 태양 연구에서 신의 지문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성취를 느꼈는데 모든 항성에서 이런 파동이 발견될 것이라면서, 과학은 목적을 잃었다고 한탄한다.

도로시아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으나, 스스로도 발굴 작업의 의미에 대해 흔들림이 생겨 일을 쉬게 된다. 태초 시절의 창을 발굴해 그 이후의 기술 발전 수준을 파악해, 하느님이 인간 지식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유추하는 작업이었으나, 신이 우리에 대한 의도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집중이 안 되었던 것.

시간이 지난 후, 생각이 정리된 도로시아는 자신의 다짐을 기도로 올린다. 도로시아는 자신이 평생 연구를 하며 느낀 성취감을 하느님의 뜻과 자신을 창조했던 의지에 부응했기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자신이 하느님의 의도 밖어였다면 자신이 느낀 성취감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느낀 것이라 한다. 자신은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시던 그렇지 않던 다시 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우주가 창조된 것이 인간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며. 이 여정이 자신의 목적이며, 하느님이 이 목적을 내게 내려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아멘.

해석과 편집

신앙과 과학에 대한 다양한 화두를 던지는 소설.
현실의 과학사는 종교가 인간이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지위를 주창하고, 과학이 신이나 기적, 지구/인간의 특별함을 찾지 못하며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펼쳐 온 대립의 역사가 있다. 교회의 천동설/과학의 지동설이 그러했고, 교회의 창조설/과학의 진화론이 그러했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신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증거 (적어도 지구가 8천 년 이내로 창조되었다는 증거)가 존재하는데,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증거도 존재해, 어찌 보면 더 절망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실의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지만 반증하지도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과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신은 우리 행성에 관심이 없고 신의 관심을 받는 기적이 존재하는 특별한 행성은 우주 저 멀리에 따로 있다. 이랬을 때의 신앙은 어때야 하며,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아야 하냐는 것이 주제다. 마지막 기도에서의 결론은, 삶의 의미는 신이 있더라도 신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폴 브랜드라는 크리스천 의사와 필립 얀시가 함께 저술한 우리 시대의 기독교 명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만한 책이 있습니다.
오묘한 육체’(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The Mystery of the Body and Soul)

이 책에서 폴 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놀랄 것이 많이 있지만, 먼저 우리는 우리의 탄생에 대하여 놀래야만 한다.
인간의 탄생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요, 신비 중에 신비가 아닐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단 하나의 수정난 세포에서 10조개에 이르는 세포가 생성되고 드디어 거기에서 한 생명이 탄생한다.
바로 한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신비를 어떻게 말할 수가 있을까?”


솔트 라인’(salt line)은 흐르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을 이르는 말이다.
이 솔트라인은 수시로 변한다.
가뭄으로 물이 줄어들면 솔트라인은 강 위쪽에 형성이 되고 비가 와서 강물이 많아지면 솔트라인은 바다쪽으로 깊이 들어온다.
뉴욕에 허드슨 강에도 솔트라인이 있다.
날이 가물어서 강물이 약해지면 바닷물이 역류해서 허드슨 강쪽으로 올라온다.
그러면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가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비가 적당히 내려서 어느 정도 강물이 많아지면 민물이 바닷물을 밀어내어 수원지를 안전하게 보호하게 된다.
지금도 허드슨강의 ‘쏠트 라인’은 끊임없이 당기고 있습니다.


깨달음만이 꿈과 희망이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수많은 물질을 개발하였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들은 행복하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전 세계 5만 여 종의 종교는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하는데 동조하였고 인류의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25시』라는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1949년에 루마니아의 신부인 '게오르규'가 쓴 소설입니다.
『25시』의 의미는 인간성을 상실한 인류를 구원할 황금 타임을 1시간이나 지난 시간을 말합니다.

설상가상으로 74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제3차 전쟁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들은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간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도 죄 의식이 없고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사라지고 무능한 인간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2015년부터 2023년까지 8년 동안 베이비 박스에 맡겨진 아동은 1,418명이고,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는 2,236명이라고 합니다. 

출생 미신고 아이 중 20명을 표본 조사하는 과정에 발견된 사건이 ‘수원 아기 시신 냉장고 보관 사건’이라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많은 인류 학자들은 전쟁과 괴질과 자연 생태계 파괴, 인간성 상실로 인해 21세기 인류는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결국은 공멸할 것이라고 경고한 지 오래되었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류는 인간다움이 점점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은 불면증, 우울증, 공포증 등 뇌 신경 질환으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멀지 않은 시기에 인류는 공멸이다.
『25시』가 아니라 『26시』가 되었다.

대안은 무엇인가?

기존의 종교와 정치적인 시스템으로는 현재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석가, 공자가 다시 부활한다고 해도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예수, 석가, 공자가 다시 부활한다면 인류는 더 혼란에 빠질 것임이 불을 보듯 명약관화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2천 년 전에 지구를 다녀 간 성인들을 기다리며 애원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연약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지구에 살아가는 당신이 당신 삶의 유일한 전문가이며 책임자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나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당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을 스스로 변화 시킬 때 모든 인류는 변화될 것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모든 사람들의 뇌 속에 이미 내려와 있지만 잠들어 있는 신성(神性)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신성이 회복될 때 신이 나고 신명이 나는 사람이 되고,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뇌 속의 신기(神氣)가 발동될 때 우리 모두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게오르규 신부는 대한민국은 21세기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열쇠의 나라’라고 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류는 공멸할 것이라 했다.

인지학(人智學)의 창시자이며 녹색운동의 창시자인 독일계 오스트라인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21세기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 인간의 새로운 삶의 양식을 결정할 원형(Archetype)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은 ‘한국’이라고 했다.

21세기 표류하고 있는 인류에게 신인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꽃 피울 수 있는 나침반을 한민족의 창세신화가 기록된 부도지(符都誌)에 기록된 마고복본(麻姑復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한민족의 첫 번째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의 본심본태양앙명 인중천지일(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과 두 번째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의 강재이뇌 신(降在爾腦 神)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거듭 얘기하지만, 21세기 신인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꽃 피우는 변화의 시작은 모든 사람들의 뇌 속에서 부터 이루어진다. 

뇌 속의 신성을 깨우는 사람은 신인류의 문명인이 될 것이고, 신성을 깨우지 못한 사람은 원시인이 될 것이다. 신성을 회복한 사람의 삶은 예술이 될 것이고 신성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통이 될 것이다.

본심본태양앙명 인중천지일(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사람의 마음이 태양처럼 밝아지면 그 사람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된다.

강재이뇌 신(降在爾腦 神)

참 하나님은 뇌 속에 이미 내려와 있다.

굼벵이 속에 매미가 있고, 누에 속에 나비가 있듯이
뇌 속에 내려와 있는 신성을 회복한 사람은 신인(神人)이 된다.

누에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 것이 힘들다고 고치를 가위로 잘라주면 나방은 날개에 힘이 없어서 날지 못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키우는 것이나 뇌 속의 신성을 회복하는 것이나 모두가 같은 이치다. 수행을 통해 내가 나를 찢고 스스로 나오는 것이 깨달음이고 진정한 구원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라.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류 문명의 대전환기에 모든 것이 혼란 속에 있다.
지금은 난법(亂法) 시대이고, 무법천지(無法天地)의 시대다.

뇌 속에서 신성을 회복하는 깨달음만이 꿈과 희망이다.
신인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황금 천년의 정신 문명을 향해가는 새로운 시대, 그 변화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완전한 지혜


지혜(2451) 호크마(chokmâh) חָכְמָה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호크마[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2449. 하캄(châkam)  חָכַם

1. 현명해지다,  2. 피엘형 : 지혜롭게 만들다,  3. 푸알형 : 지혜로워진
발음 / 하캄[ châkam ]
관련 성경 / 지혜 있다(신 32:29, 슥 9:2), 지혜롭다(잠 9:12, 23:15, 욥 32:9), 지혜를 얻다(잠 6:6, 21:11, 27:11), 지혜롭게 하다(욥 35:11), 능숙하다(시 58:5), 지혜가 있다(전 2:15, 19, 시 105:22), 지혜자가 되다(전 7:16, 23).
구약 성경 / 27회 사용




잠언 2: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잠언 3:21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미가 6: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08-03-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혼의 죄(미가 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Will the LORD be pleased with thousands of rams, with ten thousand rivers of oil? Shall I offer my firstborn for my transgression, the fruit of my body for the sin of my soul?

"영혼의 죄(the sin of soul)"는 구체적으로 내 영혼의 죄(the sin of my soul)"라고 하겠습니다.
하타트 나프쉬(חַטַּאת נַפְשִׁי)  

* 영혼(5315) 네패쉬( nephesh)  נֶפֶשׁ 

1. 숨,  2. נֶפֶשׁ חַיָּה 생기,   3. 냄새
발음 / 네패쉬[ nephesh ]
어원 / 어미활용 נַפְשִׁי, 복수 נְפָשִׁים ףנְפָשׁוֹת, 겔13:20], 53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물(창 1:20, 2:19, 9:16), 생명(창1:30, 출4:19, 민35:31), 사람(창12:5, 레7:25), 목숨(창12:13, 삼하1:9, 왕상20:42), 뜻(창23:8, 왕하9:15), 마음(창27:4, 출15:9, 레26:30), 혼(창35:18, 삼하11:11), 명(창46:15), 사정(출23:9), 죽은 자(레19:28), 몸(레21:1), 시체(레21:11, 민6:6, 합2:13), 주검(민5:2), 기력(민11:6), 명(名)(민31:35), 영혼(삿5:21, 욥10:1), 죽음(삿9:17), 심정(삼상1:15, 사58:10), 왕(삼상17:55), 중심(왕하4:27, 시131:2), 홀로(에4:13), 기력(욥6:11), 탐욕(시78:18, 사56:11),소원(잠11:23, 19:2), 음식을 탐하는 자(잠23:2), 식욕(전6:7), 욕심(사5:14), 성욕(렘2:24), 생기(겔37:9), 힘(암2:14), 욕심(합2:5).
구약 성경 / 753회 사용

죄(2403) 하타트(chaṭṭâʼth)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29:14, 민15:27, 왕하12:16), 속죄 제물(레4:32, 민8:8, 대하29:23), 속죄 희생(레4:25), 허물(레5:6), 잘못(레5:10,11), 속죄(레10:19, 민8:7), 속건제(레7:7), 번제(레4:29), 죄악(시32:5, 애4:6), 죄인(잠5:22,13:6), 벌(슥14:19). [동] 범죄하다(느1:6, 욥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 2398. 하타(châṭâʼ) חָטָא 

1. 벗어나다,  2. 사사기 20:16,  3. 비틀거리다
발음 / 하타[ châṭâʼ ]
관련 성경 / 범하다(창 20:9, 출 32:31, 렘 33:8), 죄를 짓다(창 39:9, 삼상 19:4, 욥 8:4), 범죄하다(창 40:1, 삼하7:6, 애 5:16), 죄짓다(창43:9, 삿 11:27), 잘못하다(레 5:5,15), 죄를 범하다(삼하 12:13, 24:10, 왕상 18:9), 잃다(잠 8:36), 해하다(잠 20:2), 보충하다(창 31:39), 깨끗하다(출 29:36, 레 8:15), 정결하다(레 14:52, 겔 43:22), 제사 드리다(레 6:26), 깨끗이 하다(민 31:19), 달아나다(욥 41:25).
[명] 죄(출 5:16, 레 5:7,16, 민 12:11, 신 9:18, 호 8:11), 죄인(잠 11:31, 13:22, 전 2:26).
구약 성경 / 238회 사용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죄를 꾸짖기 위하여 본문에서 특별한 두 개의 단어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말씀- 다바르와 아마르(6: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이란 주된 단어는 "다바르(דָּבַר)" 라고 합니다.
다바르의 말씀은 순종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마르(אָמַר)"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마르는 권고하다는 뜻으로 순종하지 못하므로 깨우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는 변론 - 쟁변과 변론(6:2)

너희 산들과 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쟁변이란 단어는 "리이브(רִיב)" 라고 합니다.
그러나 변론이란 단어는 "야카흐(יָכַח)"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쟁변이란 주로 변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변론이란 잘잘못을 구분하여 조목조목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하고 깨우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어 가르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깨우치고 가르쳐서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공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에 돌아오지 않으면 징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말씀하다(1696) 다바르( dâbar)  דָּבַר 

1. 정돈하다,  2. 안내하다,  3. 뒤따르다
발음 / 다바르[ dâbar ]
관련 성경 / 말씀하다(대상17:17, 시51:4, 사1:2), 명령하다(삿1:20), 이르다(창16:13, 신5:31, 겔37:21), 안위하다(에10:3), 명하다(욘3:2), 말하다(욥33:2, 미7:3), 진술하다(창24:33). 허락하다(창28:15, 출12:25), 고하다(신20:2, 겔2:7), 기도하다(민21:7), 선포하다(신1:1, 렘35:17,36:31), 강론하다(신6:7, 11:19), 언약하다(신23:23), 확언하다(신26:18), 대답하다(왕상2:30, 창34:13), 전하다(왕하1:17, 20:19), 고발하다(에7:9), 아뢰다(삼하22:1), 베풀다(렘1:16), 선언하다(렘11:17, 22:1, 25:13), 비방하다(민12:8), 여쭙다(삼하14:15), 구하다(왕하4:13, 삿8:8), 이야기하다(출33:11, 욥41:3),공포하다(레23:44), 담화하다(삼상9:25), 쟁론하다(왕상3:22), 위로하다(대하30:22), 질문하다(렘12:1), 권하다(대하33:18), 복종하게 하다(시18:47, 47:3). [명] 말(민27:7, 삼하13:36, 사65:24), 말씀(민36:5, 수24:27, 욥11:5), 명령(창44:2).
구약 성경 / 1137회 사용


말씀하다(559) 아마르( ’âmar)  אָמַר


1. 말하다,  2. 소명하다,  3. 권고하다
발음 / 아마르[ ’âmar ]
관련 성경 / 이르다(창12:12, 삼하18:12, 미3:1), 지시하다(창22:3, 26:2), 청하다(창24:43, 느8:1), 대답하다(창26:9, 대하10:10, 삼상17:58), 말씀하다(창31:29, 왕상2:4, 대상17:7), 묻다(창46 :33, 삼하9:4, 암6:10), 명을 받다(출6:26), 명하다(민15:38, 수11:9, 대하29:24), 전하다(삼하18:18), 아뢰다(신26:5, 대상21:8), 간구하다(신3:23, 대하6:37), 인정하다(신26:17,18), 부르다(왕상1:34,39, 대하23:11), 내리다(에 9:25), 선포하다(시40:10), 생각하다(수 22:24, 삼상27:1), 증거하다(왕상21: 10), 언약하다(대하7:18), 전파하다(에1:17), 권하다 (에3:4), 구하다(에6:4, 5:14), 속담을 말하다 (겔16:44), 외치다(대하23:13), 말을 전하다 (출18:6), 여쭈다(출32:31, 삿10:15), 울다(욥 39:25), 간청하다(왕하2:17), 결심하다(대하2:1), 논하다(민23:23), 맹세하다(렘16:14), 허락하다(에9:14), 칭하다(사4:3). [명] 대답 (창24:44), 말(창41:54, 삿12:4, 삼상20: 7, 시 42:3), 명(창43:17, 시106:34).
구약 성경 / 5298회 사용.

쟁변하다(7378) 리이브(rîyb)  רִיב  

1. 다투다,  2. 주먹질하며 싸우는 경우,  3. 말로 싸우는 경우
발음 / 리이브[ rîyb ]
관련 성경 / 다투다(창26:22, 시35:1, 사45:9), 논쟁하다(욥33:13), 시비하다(삿21:22, 호2:2), 변론하다(욥9:3, 미6 : 1), 징벌하다(암7:4), 변호하다(사1:17), 대답하다(창31:36), 싸우다(출21:18), 복병시키다(삼상15:5), 꾸짖다(느5:7, 13:11), 억울함을 풀다(삼상24:15, 잠22:23), 책망하다(느13:25), 견책하다(사27:8), 대적하다(삼상2:10, 사49:25). [명] 원통(시74:22, 애3:58), 변호(시119:154), 원한(잠23:11), 다툼(렘2:29), 송사(렘51:36).
구약 성경 / 68회 사용.

변론하다(3198) 야카흐(yâkach) יָכַח 

1. 앞에 나서다,  2. 히필형  הוֹכִיחַ
3. 다투다
발음 / 야카흐[ yâkach ]
관련 성경 / 변론하다(욥23:7, 사1:18, 미6:2), 해결되다(창20:16), 책망하다(창21:25, 욥13:10, 잠9:8), 정하다(창24:14,44), 징계하다(삼하7:14,잠3:12), 꾸짖다(왕하19:4, 대상16:21, 시105:14), 견책하다(잠19:25, 시6:1), 판결하다(사2:4, 미4:3), 판단하다(사11:4, 창31:37), 견책받다(잠15:12), 경계하다(합1:12), 징계받다(욥5:17), 아뢰다(욥13:15, 16:21), 증언하다(욥19:5), 징벌하다(시94:10), 꺾다(욥32:12),경책하다(잠28:23). [명] 책망(욥6:25, 잠25:12), 판결자(욥9:33), 꾸짖는 자(겔3:26).
구약 성경 / 59회 사용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러 세우고 그들에게 반역의 길을 걷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의와 부정으로 옷 입고 있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우상을 따라 살아가는 패역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형식뿐인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며 그를 믿고 따르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의 율례를 지키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감각을 갖고 그와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들이 짓는 죄에 대해서 보다 심도 있게 꾸짖고 있는데 첫째 자연계를 증인으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꾸짖습니다.
즉 '작은 산', '땅의 견고한 지대'라는 용어들을 쓰면서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다 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이미 온 땅에 만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들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자신의 죄에 대해 부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죄란 어떤 경우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증언처럼 인간의 모든 행위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죄를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상기시키며 백성들의 죄악을 꾸짖고 계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과거에 그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시면서 죄로부터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 이다.
둘째는 과거에 그들의 조상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를 상기시키시면서 결코 범죄하지 말도록 충고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과 과거의 잊을 수 없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섬김과 경외를 바라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에 대한 협박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구원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의 표현이다. 
 

미가 6: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아론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 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
'인도하여 내어'(헤어레티카)는 '괴롭게 하였느냐'(헤레티카)와 동음이어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언어적 유희(word play)를 통해서 역설적인 증언을 하신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히신 적이 없으며 도리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속량하여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증거하는 선지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근거였으며 역사 신학이 되었다(McComiskey).

인도하여(5927) 알라( ʽâlâh)  עָלָה 

1. 올라가다,  2. 이사야 14:14, 3. 출애굽기 24:13
발음 / 알라[ ʽâlâh ]
관련 성경 / 동트다(창 19:15, 삼상 9:26), 치솟다(창 19:28, 삿 20:38), 새다(창32:26), 피다(창40:10), 오르다(창49:4, 신5:5), 올라가다(창49:9, 수2:8, 암9:2), 가다(출1:10, 수18:11, 호8:9), 올라오다(출8:3, 삿12:3, 아8:5), 나오다(출13:18, 아4:2), 뽑다(레16:9), 메다(민19:2, 삼상6:7), 나아가다(신25:7, 삿4:5), 닿다(수8:20, 욥20:6), 이르다(수15:6, 삿21:5), 대다(삿16:18), 일어나다(삿20:40, 호13:15), 들리다(왕하19:28, 사37:29), 들어오다(삼상14:21), 기록하다(대상27:24), 중수되다(느4:7), 나타내다(시78:31), 퍼지다(잠24:31), 들다(잠26:9,슥14:13), 뛰어나다(잠31:29), 기어오르다(렘4:29), 덮다(사8:7), 생각하다(렘7:31), 두다(렘32:35), 치료받다(렘8:22), 뜻하다(렘19:5), 넘치다(렘51:42), 올리다(왕상10:29, 에1:14), 솟아오르다(사34:3, 암8:8), 상달하다(출2:23, 욘1:2), 돌다(수6:15), 드리다(왕상18:29, 왕하3:20), 미치다(대하36:16), 달다(시62:9), 움돋다(암7:1), 솟아나다(민21:17), 타다(창31:10, 렘46:4), 달리다(렘46:9),치다(렘49:31), 올려 보내다(창44:33), 마르다(출16:14), 떠오르다(출19:18, 사34:10), 행하다(출33:5), 입다(레19:19, 겔44:17), 지나가다(민20:19), 높아지다(신28:43), 사무치다(삼상5:12), 물러가다(삼하23:9), 맹렬하다(왕상22:35, 대하18:34), 승천하다(왕하2:11), 떠나가다(왕하12:18, 렘34:21), 진척되다(대하24:13), 일으키다(전10:4), 날리다(사5:24), 자라나다(사53:2), 떠나다(렘21:2, 겔11:24), 날아오다(렘49:22), 들이다(겔14:7), 자라다(겔47:12), 강성하다(단8:8), 뛰다(암3:5), 가리다(욘4:6), 통하다(대상26:16), 품다(겔20:32), 지존하다(시47:9), 초월하다(시97:9), 머물러 있다(민9:22), 데리고 오다(스1:11), 인도하다(창50:24, 출17:3), 가지다(출13:19), 켜다(출27:20, 민8:3), 이끌어내다(민16:13, 수24:32), 나오게 하다(민20:5), 주다(삼상2:19), 메어올리다(대상15:12),데리다(대하8:11), 가지고 오다(스1:11), 기도하다(욥42:8), 끌어내다(시30:3, 겔29:4),인도하여내다(출32:4, 삿6:8, 렘16:15), 인도하여 올리다(민21:5, 왕상12:28, 암3:1), 무릅쓰다(애2:10, 겔27:30), 입히다(겔37:6), 거느리다(겔23:46), 굽이치다(겔26:3), 옮기다(삼상 7:1, 렘 27:22), 옮겨가다(삼상 6:21), 가져오다(삼상19:15), 불러올리다(삼상28:8),몰아오다(렘51:27), 새기다(대하3:5), 쌓다(대하32:5), 고치다(렘30:17), 키우다(겔19:3), 건지다(욘2:6), 새김질하다(레11:3,5, 신14:7),채우다(삼하1:24), 제사하다(렘48:35), 충돌하다(나3:3), 기록되다(대하20:34), 끌려가다(나2:7), 서다(렘51:3).
구약 성경 / 890회 사용

올라가다
- 1.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 2. 종에서 자유자로
- 3. 세상에서 천국으로




속량하셨고(6299) 파다(pâdâh) פָּדָה 

1. 몸값을 치루고 석방하다,  2. 대속하다,  3. 자유롭게 하다.
발음 / 파다[ pâdâh ]
어원 / ‘자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무르다(레 27:27, 민 18:16, 신 9:26), 속량하다(신 21:8, 사 35:10, 미 6:4), 건지다(삼하 4:9,욥 33:28), 구속하다(삼하 7:23, 대상 17:21, 시 34:22), 구원하다(삼상 14:45, 왕상 1:29), 대속하다(출 13:13, 34:20, 민 18:15), 취하다(민18:16), 구속되다(사 51:11), 속량하게 하다(출 21:8).
[명] 구속(사 1:27), 속량(레 19:20),구원(삼상 14:45).
구약 성경 / 63회 사용

속량하다
- 1. 몸 값을 지불하다


육체의 죄는 죽음이지만(로마서 6:23), 영혼의 죄는 영벌이라고 하겠습니다(마태복음 25:46).

육체의 죄는 자범죄(고범죄)라고 합니다(시편19: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Yet it was the LORD's will to crush him and cause him to suffer, and though the LORD makes his life a guilt offering, he will see his offspring and prolong his days, and the will of the LORD will prosper in his hand.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항목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1. 오직 공의를 행하며
- '공의'는 의로운 삶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인자를 사랑하며
- 이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언약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이지 못할 경우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얻게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속성인 '헤세드'를 보여주고 그로 인해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자기 백성들도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McComiskey).

3.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겸손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행하는 것이다(Delitzsch).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이상의 세 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 미가가 율법에 기록된 희생제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미가가 강조하는 것은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마음 자세와 행위를 동반하지 않은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절에서 요구된 마음의 자세와 행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사함을 얻는 조건들이 아니다.
분명히 죄사함은 희생제사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본절의 윤리적 행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곧 죄사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삶 가운데 마땅히 드러나야 할 삶의 규범들이다.
이것이 없는 희생제사는 아무런 용서도 구할 수 없는 자기 만족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08-02-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근본(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근본(根本)이란 한자의 훈은 "뿌리 근" "근본 본"으로 첫째는사물(事物)의 생겨나는 근원(根源), 둘째는어떤 것의 본질(本質)로 되거나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바탕, 셋째는 시초적(始初的)인 것이나 주가 되거나 기본(基本)이 되는 것, 넷째는 초목(草木)의 뿌리라고 사전에서 정의합니다.

미가서 5장에서의 근본이란 "메시아의 기원"을 말합니다.

4163. 근본(모차아흐.  môwtsâʼâh) מוֹצָאָה   

1. 태생
2. 복수 מוֹצָאוֹת 하수도
발음 / 모차아흐[ môwtsâʼâh ]
관련 성경 / 변소(왕하 10:27), 근본(미 5:2)
구약 성경 / 2회 사용

뜻풀이부

  • 1. 태생, 가문, 혈통, 출신, 미5:2
  • 2. 복수 מוֹצָאוֹת 하수도, 지하배수로, 변소, 왕하 10:27.

본절은 1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침략자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어 더 이상 패배도 수치도 당하지 않게 하며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다스릴 자이신 참된 왕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리고 마태복음 2:6과 연관되어 인용되고 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 '에브라다'는 '떡집'을 뜻하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으로 '열매를 많이 맺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미가가 '베들레헴'의 옛 이름 '에브라다'를 첨가한 것은 본절의 베들레헴이 스불론의 베들레헴과 다른 지명이며(수 19:15) 다윗의 집을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하기 위함인 듯하다. 미가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을 통해서 본절의 내용이 다윗의 집에서 나온 메시야 왕과 연관됨을 암시하고 있다.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나올 것이라
- '작을지라도'(차이르)는 크기가 작은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천하고 보잘것없는 상태를 나타낸다(시 68:27). 메시야가 천한 곳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자들을 높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눅 1:52). 한편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의 화자(話者)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메시야가 천한 베들레헴에서 자신에게로 나온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과 메시야의 밀접한 관계를 시사하신다(McComiskey).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 '그의 근본'(모차오타이오)은 문자적으로 '그의 나옴'을 뜻하는 것으로 메시야의 기원을 의미한다.
한편 '상고'(케뎀)와 '태초'(예메 올람)는 영원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만큼이나 오래됨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근본(根本)이란 한자의 훈은 "뿌리 근" "근본 본"으로 첫째는사물(事物)의 생겨나는 근원(根源), 둘째는어떤 것의 본질(本質)로 되거나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바탕, 셋째는 시초적(始初的)인 것이나 주가 되거나 기본(基本)이 되는 것, 넷째는 초목(草木)의 뿌리라고 사전에서 정의합니다.

미가서 5장에서의 근본이란 "메시아의 기원"을 말합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하셨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도리는 다음과 같이 셋이다.

1.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מָשַׁל 스트롱번호4910

1.

통치하다

2.

창3:16

3.

잠28:15.

발음 [ mâshal ]
관련 성경
☞통치하다(시103:19), 다스리다(삿9:2, 잠17:2, 단11:3), 주장하다(시19:13), 팔다(출21:8), 거느리다(대하23:20), 주관하다(잠22:7),맡다(창24:2). [명] 통치자(창45:8, 사16:1),총리(창45:26), 다스리는 자(삼하23:3, 잠16:32), 권세(단11:5,43), 권세 잡은 자(겔19:14), 주재(대상29:12, 시22:28), 주권자(전10:4), 관원(잠23:1, 28:15, 렘51:46), 주권(욥25:2).
구약 성경
81회 사용


2. 그의 근본은 상고에

קֶדֶם 스트롱번호6924

1.

앞면

2.

동쪽

3.

고대

발음 [ qedem ]
어원
6923에서 유래
관련 성경
☞동방(창2:8, 25:6, 민2:3, 수18:20, 삿6:3, 겔25:4), 동쪽(창3:24, 출27:13, 민3:38, 23:7, 수19:12, 욘4:5), 동(왕상17:3, 겔8:16), 옛적(느12:46, 시68:33, 미7:20), 건너편(민34:15),옛날(시44:1, 77:5, 애1:7), 옛(시55:19), 예로부터(시74:12, 사45:21), 태초(잠8:22, 사37:26), 이전(렘46:26), 만세전(합1:12), 영원(신33:27), 예전(렘30:20).
구약 성경
87회 사용


3.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

그리스도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라는 말씀이다.

‘상고’는 무엇이며 ‘태초’는 무엇인가?
상고(케뎀)는 “창세 전의 태초”
태초(예메 올람)는 “창세의 태초”

1.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그리스도(마태복음 2:1-1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선지자로 기록된바 그리스도를 말씀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본체(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이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로새서 1:14-17)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이시다.

2. 그의 근본은 상고에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하셨다. 즉 태초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말씀이다.

‘요1:1에서 태초’는 창세 전의 태초 곧 상고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상고이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 창세 전의 태초 곧 상고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말씀이 다음의 요17:5과 골1:14-17의 말씀이다.

2.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 전 곧 상고이다.

3.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골1:14-17)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 전 곧 상고이다.

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요일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 하셨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요17:5에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17:5)’하셨으니 곧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 전의 태초 곧 상고이다.

3.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

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셨다. 즉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게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의 태초이다.

2.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골1:14-17)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에게 창조되었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의 태초이다.

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셨다.

(요1:2-3)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하셨다.

(골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하셨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창1:1)하실 때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고(요1:2-3), 만물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에게 창조(골1:16-17)되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의 태초이다.

(문답)

문1: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무엇인가?

답: 그리스도(마2:1-11)이시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2:5-8)이시며, 만물이 그에게 창조(골1:14-17)되었다.

문2: ‘그의 근본은 상고에’는 무엇인가?

답: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3)이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17:5)이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1:14-17)이며,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요일1:1-2)이다.

그러므로 ‘그의 근본은 상고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곧 “창세 전의 태초”를 말씀한다.

문3: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는 무엇인가?

답: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1:1-3)이며,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1:14-17)이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창1:1)이다.

그러므로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곧 “창세의 태초”를 말씀한다.





본장에서 보여 주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장차 오실 시온의 완전한 회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메시야의 오심은 곧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요, 사단 왕국의 멸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속에 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악과의 투쟁 속에 있다.
그 이유는 현재 속에서는 여전히 사단의 왕국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증거하기를 사단은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회복은 메시야의 재림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예언된 메시야의 초림은 사단의 왕국을 일차적으로 정복하심이요, 그의 완전한 궤멸은 장차 있을 종말의 심판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의 메시야를 통하여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는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지상에서는 끊임없이 악의 세력과 영적 전쟁을 펼쳐 나가야 한다.
이는 지상의 메시야 왕국에 속한 성도들도 세상 속에서는 악한 세력과의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에게 두 가지의 사상을 전달하고 있다.

첫째는 완전한 소망이다.
즉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이므로 결코 악의 세력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러면서도 성도들은 지상에서 악과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세력을 확장시켜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의 사명은 또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널리 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단의 세력이 창조 세계에 만연시켜 놓은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현상들을 타파함으로써 세계를 공의와 사랑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있어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긴장과 이미 얻은 구원 사이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관장하는 신앙의 원리인 것이다.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감격만을 누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성도들에게 주실 구원의 기쁨과 영원한 생명의 축복만을 고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보장받았지만 이 땅에서 여전히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성도들은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결코 긴장을 놓지 말고 복음의 전파를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심리학 용어중에 '워비곤 호수 효과'라는게 있다.

1970년대 미국의 작가 게리슨 케일러는 라디오쇼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을 진행했다. 
그것은 '워비곤 호수'라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마을은 '여자는 모두 강인하고, 남자는 모두 잘 생겼으며, 아이들은 모두 평균 이상인' 허구의 세계다.
그런 세계를 가상하고 허구로 만든 마을인데 현실의 사람들도 이런 착각에 빠져 산다.
"우리애가 노력을 않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아요~"
"착한 우리애가 나쁜 친구를 만나 이렇게 된거죠."
"저는 제대로 갔는데 저 사람이 운전을 험하게 한 겁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과대평가하거나 약점에는 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실제보다 나아 보이게 만들기 일쑤이다.
이처럼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착각하는 경향을 심리학에서는 ‘워비곤 호수 효과’라고 한다.
즉,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란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믿는 일반적인 오류를 말한다.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는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믿는 일반적인 오류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창조적이고 매력적이며 성실하고 공정하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자기 집단에서 평균 이상이라면 누군가 평균이나 평균 이하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평균이상이라고 생각하면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은 논리적 오류이며 비현실적이다.
이 말은 게리슨 케일러가 지은 이야기로 가상의 마을 '워비곤 호수'에는 모두 평균 이상의 아이들이 산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Lake Wobegon Effect'라고 했다.

풍자 작가인 개리슨 케일러(Garrison Keillor)는 그의 라디오 쇼인 'Prairie Home Companion'의 배경으로 워비곤 호수 마을을 설정했다. 자신의 쇼를 청취하면 워비곤 호수 마을처럼 ‘여자들은 힘이 세고, 남자들은 잘생겼으며 아이들은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유혹했다. 청취자들은 인간이기에 워비곤 호수 효과로 자신의 프로그램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케일러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 이후 웨스트버지니아 주에 살던 소아과 의사이자 교육학자인 John Cannell 박사는 워비곤 호수 효과로 알려진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서 그는 미국의 50개 주가 발표한 각 주의 학생들의 시험성적 평균 하나 하나 모두가 미국 전체의 평균보다 높은 것은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모든 주 정부가 하나같이 자기네 주 학생들의 평균 성적이 전국 평균보다 높게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가 처음 의심을 하게 된 계기는 그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주가 발표한 CTBS(Comprehensive Test of Basic Skills)시험 결과 때문이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성인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주로서 미국 대학 입학시험(ACT: the American College Testing)의 성적도 하위권이었고 1인당 소득 수준도 두 번째 낮은 주였다. 그런데 웨스트버지니아 주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전 학년의 시험 성적 평균이 전국 평균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가 쓴 ‘사회심리학’도 워비곤 호수 효과의 가설을 입증하는 연구 사례들을 소개한다.
기업 임원들 중 90%가 자신의 성과를 평균 이상이라고 자평하는 것이 좋은 예다.

해리 베키스의 저서 ‘보이지 않는 것을 팔아라’에서도 80%의 직장인이 스스로를 평균 이상이라고 여긴다.
부모들이 흔히 ‘우리 아이도 혹시 수재가 아닐까’하고 착각하는 것도 워비곤 호수 효과에 속한다.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이익을 볼 가능성은 과대평가하고, 손해를 볼 가능성은 과소평가한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능력과 행운을 지나치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그가 200년 전에 갈파한 인간 본성은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특히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 자기 자신을 더욱 과신한다. 실패 가능성은 가급적 낮춰 보고 성공 가능성은 가급적 높여 보니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산(2022) 하르(har) הַר   

1. 복수 הָהָר
2. 시내산 출애굽기 3:1
3. 시온산
발음 / 하르[ har ]
관련 성경 / 산(창 7:20, 출 19:2, 시 2:6), 산지(민 13:29, 신 1:7, 수 15:48), 산골(삼상 23:14), 산악(시 98:8), 산중(대하 27:4).
구약 성경 / 547회 사용



     MA MAQuigley Quigley      FC BmbA Bm    -- D 1GA 2D7 A    G -   G A   Bm  Em       rght Scripture Song Intergrity Hosarnal Music Adm CapyCare Lised Permission


08-01-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산(미가 4: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Many nations will come and say, "Come, let us go up to the mountain of the LORD, to the house of the God of Jacob. He will teach us his ways, so that we may walk in his paths." The law will go out from Zion, the word of the LORD from Jerusalem.

여호와의 산(the mountain of the LORD)은 시온(Zion)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할 아도나이. הַר־יְהוָה)은 여호와의 전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는 곳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여호와"는 "야훼" 하나님을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을 말합니다.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와 '엘로힘'을 함께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 가지로 함께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야훼 하나님은 역사 속에 이미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둘째는 엘로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 구원을 위하여 인간을 돕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또한 선지자 미가는 "말일에 이르러는" 이라고 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소개합니다.
"시온"이란 "예루살렘"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원래 시온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이름으로 그 곳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시온은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회복이란 이방 나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며, 하나님의 임재는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시온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세상을 회복할 메시야의 도래를 말합니다.
신약에 나타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회복을 의미하며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완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말씀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통치권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시온이 갖는 궁극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신약의 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약의 시온 즉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지만 이것은 종말에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상적 표본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완전한 시온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실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임재가 이 땅위에 풍성하게 거할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 '시온'은 여호와의 전이 소재한 여호와의 산이다.
그러므로 산 자체에 강조점이 있다기보다 여호와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시온은 곧 여호와의 임재와 현존을 뜻한다.
열국들이 시온에 매료되어 몰려드는 것은 시온 자체에 매료시킬 만한 요소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일에' 열국들은 시온에서 흘러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며 그 말씀을 받기 위해서 시온에 현존하시는 여호와 앞에 몰려들게 된다.
열국은 그 때에 여호와의 앞에 몰려들게 된다.
열국은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해서 완전히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며 죄와 사망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를 따른 여호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Delitzsch).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

평화라는 말에는 두가지가 있다. 팍스(pax)와 샬롬(shalom)이 그것이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다. 로마는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결국 그 힘과 물질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는 로마 식민백성인 히브리 민족의 것으로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이다.히브리인들은 건강한 자나 성공한 자는 물론 병든 자나 실패한 자들과도 ‘샬롬’이라는 인사를 기꺼이 주고받았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구해야 할 평화는 팍스가 아니라 샬롬이다.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새해에는 샬롬의 평화가 우리 삶속에 넘치기를 기원한다.

마음의 평화(平和)
- 평평할 평(平) =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있는 것, 화할 화(和) = 입 구(口) + 벼 화(禾)
평(平) = 한 일(一) + 열 십(十) + 점 주(
)

일본의 ‘하루야마 시게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글을 쓰는 작가인데,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30년 동안 책을 쓰면서 건강의 6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이 여섯 가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피곤하지 않게 하라!
둘째는 적절한 잠을 자라!
셋째는 식욕을 절제하라!
넷째는 화를 내지 말라!
다섯째는 두뇌를 계속적으로 사용하라!
여섯째는 적당한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후에 이 사람은 “뇌내혁명((腦內革命)“이라는 책을 쓰면서 정말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 여섯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첨가했는데,
그것은 ‘마음의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평화가 건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55%로 보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뇌내 腦內 혁명
하루야마 시게오

머리말

프롤로그

제1장 의학으로 증명하는 플러스 발상의 효과

제2장 근육이 붙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

제3장 항상 뇌를 젊게 보존하는 식생활

제4장 뇌가 젊으면 125살까지 살 수 있다

머리말

  현재 우리 의사들이 의료 활동을 통해서 실제로 고칠 수 있는 병은 전체의 약 20%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80%는 의료비만 물쓰듯 낭비하고 있는 실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의료비는  머지않아 200조원을 상회하게  될 것이며,  2010년에는 700조원에 달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 중 80%가 잘못 쓰인다면  이 얼마나 무의미한 낭비란 말인가.

의료 행위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동양의학과 접해왔으며 성장해서는 서양의학을 공부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전혀 다른 분야이며 서로 상반되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으나, 뇌 생리학이나 분자생리학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 현대의학의 과학적인 방식으로 동양의학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동양의학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침술이 뇌에서 마약 모르핀과 비슷한 형태의 호르몬을 분비하게 만드는 의술의  하나라는 사실이 현대 과학에 의해 밝혀진 것이 좋은 사례이다 (뇌에서 분비하는 이 호르몬이야말로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이 호르몬을 ‘뇌내 모르핀’이라 명명하겠다). 뿐만 아니라 분자 생리학 분야에서는 기공이나 명상과 같은 동양고유의 건강법이 호르몬 분비를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현대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처럼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이 결합하여 의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자, 지금까지 병을 치료하는 데  초점을 맞추던 의사들 역시 환자들이 병에  걸리기 전, 즉 ‘미병’의 단계에서 병을 미연에 방지하여 건강과 장수를 유지하게 하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내가 설정한 궁극의  목표 역시 ‘병을 미리 예방하는 의술 행위’이다. 병을 미연에 방지하면 의료비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며, 병원에서 산더미처럼 약을 받아오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동양의학에 ‘의사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에게 두 손 모아 사죄하라’는 말이 있다. 건강한 사람을 병들게 방치한 것 자체가 의사의 책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의사가 거만한 자세로 환자를 진단하는 태도는  현재의 의료가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이  잇따라 개발되고 있으나,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부작용 역시 커다란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본래 인간은 자신의 체내에 모든 질환에 대한 방어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이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면 암이나  심장병 또는 뇌혈관 장해  등의 질병은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대체로 평소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식생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른 식생활을 하면서 호르몬이나 면역체를 효과적으로 조절한다면 우리 인간은 의약품 등의 인공적 물질에 의존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의 건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은  뇌에서 분비하는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나는 바로  이것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동양의학에  뿌리를 두고 서양의학의 과학적인 방식에 근거하여 인간의 건강과 장수, 행복한 삶, 나아가 인류의 존재 목적까지 새로운 시각에서 규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의료를 사상 혁명으로 유도해 가려는 목적을 갖는 것이다.

고령화 추세가 날로 심화되어 가고 스트레스가 곳곳에 널려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인류가 건강하고 바람직하게 삶을 살아가는 데 이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덧붙여  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특히 나의 삶의 태도나 인생관 교정에 큰 도움을 준 후나이 종합 연구소의 후나이 회장을 비롯하여 출판사 임직원 일동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저자 씀.

프롤로그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접점에서 치료한다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학

내가 의사가 된 동기는 일조의 아쉬움 때문이었다. 나는 대대로 동양의학을 가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침구, 지압술을 배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문의 비법을 전수받아 여덟 살 때 침술사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할아버지가 환자를  치료할 때 보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동양의학이 인간의 병을 치료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서양의학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서양의학이 아주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서양의학은 기본적으로 ‘병리학’이므로 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은 물론 치료 과정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 게다가 X-레이를 찍거나 기타 검사 방식을 통해 데이터를 뽑아서 정확한 수치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동양의학과 달리 대단한 설득력을 갖는다.

반면에 동양의학은 허와 실, 음과 양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탓에 왠지 모르게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뭔가 철학적인  냄새까지 풍겨 일반인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성인 병이나 피로성 어깨결림,  요통 등은 동양의학이 단연 우세한 효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나로선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동양의학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효능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 문제가 나에게 늘 무거운 과제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서 결국 동경대 의학과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그 후 서양의학이라는 과학적인 표현 방식으로 동양의학을 설명해내는  방법에 관해 오랫동안 모색하게  되었다.

서양의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동양의학의 효능에 관해  한층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의학부를  졸업하자마자 병원을 만들어서 내가  생각하는 의술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그러나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면 안  되니까 단념하라는 선배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개업의로서의 경험이나 병원 경영의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커다란 장애 요인이었다.  좀더 경험을 쌓아 훌륭한 의사로 인정받은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선배의 충고에 따라 나는 몇몇 병원에서 소화기 계통의  외과의로 수업을 쌓은 후에 드디어 내 병원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때가 8년전으로 ‘전원도시 후생병원’이 바로 그 병원이다. 현재 이 병원은  입원실 260개실에 내과, 외과, 소아과를 갖춘 종합병원이다.

동양의학에 ‘미병’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병이 나기 일보직전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목표이며 동시에 우리 병원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병원은 병에  걸리지 않으면 진료조차 해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은 미연의 방지하는 것인데도 거의 모든 병원이 이 사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앞둔 28세의 남성이 우리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103킬로그램의 비만  체질인 이 남성은 약혼녀에게  ‘너무 뚱뚱해서 싫다’라는 말을  듣고 그저 단순히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환자도 아닌 사람이  입원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세운 나는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입원 후, 40일에 걸친 치료를 통해 약 15킬로그램을 빼고 80킬로그램  정도의 체중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살이  빠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본인은 물론 약혼자도 크게 기뻐했다.  물론 체중이 줄어들었다는 건 아주 만족할  일이다. 그러나 본인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만 상태가  지나쳐 대단히 위험한 발병 상태에 놓여  있었다. 간 기능이 나쁘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았다. 중성 지방도 과대한  상태였다. 간염,만성췌장염,고 콜레스테롤혈중,고 지혈증 등 그럴싸한 병명을 얼마든지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처럼  위험한 상태가 다이어트 입원 중에 모두  정상으로 회복된 것이다. 본인은 자신이  그렇게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도, 완전히 치료받아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단지 살이 빠졌다는 결과만 만족스러워하며 퇴원했다. 이것은 내가 이상으로 삼는 의료의 한 단면이다. ‘미병’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병에 걸리지  않는 정상인 상태로 되돌려 퇴원시키는 것이 내가 의사로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기 때문이다.

뇌에서 모르핀을 분비시키자

  도대체 우리 병원에서 이 남자를 어떻게 치료했길래 이러한 결과를 얻었는지 몹시 궁금하게 여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이 사람에게 ‘식사’와 ‘운동’ 그리고 ‘명상’이라는 세 가지 치료 방식을 제시했다. 식사는 고단백·저칼로리에 초점을 맞추고, 운동은 근육을 붙이고  지방을 없애는 데 주력했으며, 명상은  플러스 발상을 생활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플러스 발상이란 모든 것을 긍정적·발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처음부터  본격적인 명상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이므로 우선 명상실 에 차분히 앉아서 플러스 발상을 하도록 만들면서 뇌파를 측정한 것이다. 여기서  덧붙여 동양의학의 지압법을 응용한 메디컬 마사지를  적절히 사용했다.

나는 위와 같은 방법만으로도  성인병 발병 위기에 있는 사람을 건강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불면과 환청, 우울증으로 정신병에 걸리기 일보직전에 있던 58세의 한 여성도 거의 같은 치료법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간 기능 장해가 있던 46세의  여성은 비만체질이 아닌데도 고혈압과  지방간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근육질이 없고  지방만 많은 야윈 체형이었으나,  이 여성 역시 4주간의 통원 치료를  통해 지방간과 총 콜레스테롤 수치를 정상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다. 당뇨병과 고혈압  증상으로 입원한 63세 남성은  의식까지 몽롱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하는 수  없이 인슐린을 사용했으나, 곧 약으로  바꾸었으며 이제 둘 다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회복했다. 이 환자 역시 앞에서 말한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했다.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치료 사례에는 공통적인  비밀 하나가 있다.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뇌내 모르핀’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뇌는 모르핀과 비슷한 물질을 분비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 뿐만 아니라  노화를 방지하고 자연 치유력을 높여 주는 아주  뛰어난 약리 효과를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을 ‘뇌내 모르핀’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호르몬을 계속 분비시키면 그  효과가 뇌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확산되어 신체의 여러 기관을 건강하게 만든다. 즉 우리 인간은 그 어떤 약보다 우수한 제약 공장을 몸 속에 지니고 있으며, 나는 바로 이 제약 공장을 철저하게 이용하려 한 것이다.

뇌내 모르핀의 존재는 이전부터 알려져 왔으나, 진통 효과 이외의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생각되어 오랫동안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여  굉장한 효력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인간은 화를 내거나  강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에서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강력한 혈압 상승제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 물질)이라는 물질이 분비된다. 이 물질은 호르몬의 일종으로 대단히 극렬한 독성을 갖고 있다. 자연계에 있는 독으로는  뱀 다음으로 그 독성이 강하다고 한다. 물론 뇌에서 분비하는 호르몬은 극히 소량에 지나지 않지만, 항상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자주  받으면 이 호르몬의 독성  때문에 노화가 촉진되어 오래 살수 없다.

우리 병원을 찾아온 환자는 물론, 인간이 질병에 걸리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뇌에서 분비하는 노르아드레날린 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물질은 우리  인간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뇌는 β-엔돌핀(β-endorphin)이라는 호르몬도 분비한다. 이  호르몬은 뇌에서 분비하는 호르몬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물질인데, 현대 과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노르아드레날린과 β-엔돌핀은 아주 기묘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면 뇌는 독성이 있는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면 β-엔돌핀을 분비한다.

뇌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β-엔돌핀을 분비하는 것이 좋은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불쾌한 일을 겪더라도 사태를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뇌는 신체에 이로운 호르몬을 분비한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행복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증오하는 불쾌한 감정을 가지면 몸에 해로운 물질을 분비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플러스 발상으로 받아들여 늘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항상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면서 질병 없이 편안하게 일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담배도 ‘건강에  나쁜데……’ 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피우면 좋지 않지만,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작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며 ‘아 – 좋다’라는 기분으로 피우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인간은 대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성관계를 할 때 쾌감을 느낀다. 어떤  일이든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 몸이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뇌내 모르핀은 성인병도 막아준다

  뇌내 모르핀은 뛰어난 효능을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β-엔돌핀은 면역력을 높여 효과가 뛰어나다. 세균에  의해 감염된 질병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아무리 마음가짐으로 노력한다 해도 소용없으리라 생각할지 모르나, 뇌내 모르핀은 면역 세포를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심지어 에이즈와 같은 병에도 강한 저항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에이즈라는 병은 감염자와 접촉해도 어떤 사람은  감염되고 어떤 사람은 감염되지 않는다. 또한  감염 초기에 의사를 찾아가서 호들갑을 떨어도  흐지부지한 치료를 받아 결국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 명상이나 기공에 열중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발병되지 않고 감염 초기 상태를 유지 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는 뇌내 모르핀에 의한 면역력 향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에이즈라는 병은 누구나 걸리는 병이라고 할 수 없으나, 혈관이나  심장 계열의 질환은 성인병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질병에 걸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뇌에서 분비하는 뇌내 모르핀은 이 같은 성인병에도 경이적인 플러스  효과를 발휘해 준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스트레스가  곳곳에 널려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뇌는 앞에서 말한  아드레날린(adrenalin/ 척추동물의 부신 피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교감신경 흥분제.혈관 수축제.혈압 상승제 따위로 작용) 계열의 독성 호르몬을 분비한다. 이 호르몬은 적정량이  분비되면 신체에 긴장과 활기를 주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과잉 분비되면 혈관을 수축시킨다.  혈관이 수축되면 혈압이 오르고 혈액 흐름에 장해가 일어난다.  뇌에 있는 굵은 혈관이 막히면 뇌경색(cerebralinfarct/뇌의 동맥이나 정맥의 폐색으로 인해  허혈성 괴사가 일어나는 현상)을, 가는 혈관이 막히면 기억 상실 및 치매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뇌내 모르핀은 수축된  혈관을 원상태로 되돌리고 혈액의 흐름을 순조롭게 도와주는 작용을  한다. 성인병 발병은 대부분  혈관이 막히는 데서 시작하는데, 뇌내 모르핀은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작용을  하므로 결국 성인병을 예방 혹은 치유하는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악성 산소 중에 활성 산소라는 것이 있다. 활성 산소  가운데는 우리가 호흡한 산소가 그렇게 바뀌는 경우도 있고, 자연계에 그대로 산재해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체내에 들어가서 노화 물질을 만들거나 유전자를 해치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활성 산소는 달리기를 하는 등 인체가 에너지를 사용할 때  반드시 분비되어 나오기 때문에, 인체에는  산소독(활성   산소)을  중화시키는  기능이  갖추어져   있다.  SOD  효소(supe-roxide dismutase/ 유해 산소 중화 과정에 관여하는 효소)가 바로 활성 산소 중화에 관여하는 물질이며 이것은 인체 내에서  합성된다. 따라서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 해도 그것을  중화시킬 만한 SOD가 만들어지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뇌 운동이  저하되면 SOD를 생성하는 능력도 저하된다 따라서  해로운 활성 산소가 점차 확산되어 노화와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노르아드레날린과 같은 아드레날린  계열의 호르몬의 분비는 활성 산소의 발생을 촉진시키므로  가급적이면 이런 물질이 분비되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뇌를 젊게 유지하는 관건이  된다. 뇌세포가 젊으면 활성  산소의 해악 역시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그런데 뇌세포의 젊음을 유지시키는 물질이 바로 뇌내 모르핀이므로 늘 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생활 방식, 즉 플러스 발상을 한다면 우리  인간은 노화와 질병이라는 인류 최대의 적을 물리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덧붙여 기억력을 향상시키거나 인간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인내력 및 창조적 사고 역시 뇌내 모르핀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는 그 사람이 분비하는 뇌내 모르핀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뇌내  모르핀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지 효능과 뇌내 모르핀을 효율적으로 분비시키는 방법 등을 이  책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르핀은 일종의 마약으로 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뇌내 모르핀은 독성이 없다. 반면에 효력은 마약 모르핀의 5-6배나 된다. 개중에는 법을 어기고 폐인이 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마약 모르핀에 손을 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물주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충분한 쾌락을  즐길 수 있도록 우리 인간에게 뇌내 모르핀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조물주는  이 선물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인생을 유쾌하게 살아라. 유쾌하게  살면 병에 걸리지 않으며,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 준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물주가 내려 주신 최대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제부터  조물주가 내려 주신 최대의  선물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제1장 의학으로 증명하는 플러스 발상의 효과

마이너스 발상은 왜 병이 되는가

  최근 플러스 발상법이나 긍정적  발상 등의 개념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수용하면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다’.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결과도 좋다’는 정도의  의미로 사회 일반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분위기는 의학계에도 널리 퍼지고 있다. 육체와 마음은 늘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 상태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구체적인  물질로 변화되어 ‘육체에 작용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남에게 어떤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면 체내에서는 노화를 촉진하고 암을 유발시키는 물질이 생성된다. 반대로  ‘고맙다’고 생각하면 젊음을 유지하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물질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체내에서 이러한  메커니즘(mechanism)이 작용한다는 사실은 의학적으로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따라서 무엇이든 플러스 발상을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면역성이 강하여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늘 마이너스 발상만 하는 사람은 한심스러울  정도로 쉽게 병에 걸리고  만다. 똑같은 라이프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생기  있고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기운이 없고 병약한  사람이 있다.

이같이 차이는 모두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생성되는 체내 물질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호르몬으로 알려진 물질이 바로 그것인데 이 가운데에서 마음가짐에 따라 좌우되는 주요 호르몬으로는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 그리고 β-엔돌핀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이 화를  내거나 긴장하면  뇌에서는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공포감을 느끼면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호르몬이란 세포 사이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뇌에서 내린 지령을 세포에 전달하는 물질이다. 분노라는 정보가 전달되면  육체는 경계 상태에 들어가 매우 활동적인  상태가 된다.

이렇게만 작용한다면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을  터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물질은 대단한 독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화를 자주 내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그로 인해 발생되는 노르아드레날린의 독성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노화가 촉진되어 그만큼 빨리 죽게  된다. 반대로 늘 미소를 띤 얼굴로  사물을 바라보며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한다면 뇌 안에서는 뇌세포를 활성화시키고 육체를  이롭게 만드는 유익한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들 호르몬은 인체를 젊게 만들 뿐 아니라 암세포를 파괴하고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따라서  인생을 즐겁고 건강하게  그리고 암이나 성인병에도  걸리지 않고 장수하기를 바란다면 뇌에서 좋은  호르몬을 많이 분비하는 삶의 내용을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유익한 이 호르몬이 바로 내가  말하는 ‘뇌내 모르핀’인데, 이런 명칭을  붙인 이유는 물질의 구조식이 마약 모르핀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쾌감을 주는 호르몬은 약 20종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그 작용이나 강약의  차이는 있으나 약리 작용은  거의 같다. 우리 인간은  나쁜 것을 생각하고 실제로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 가령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려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자. 또는 지위나  명예를 얻었다고 하자.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면 그 사람은 큰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맛보면  뇌에서는 몸에 이로운 호르몬이 분비된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러한 기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반드시  어디선가 이상하게 꼬이게 된다.  이웃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거나 남에게 원망을 사는 행동을 하면 무슨 까닭인지 잘  알 수 없으나, 뇌는 그 사람을 서서히 멸망의  방향으로 유도해 간다. 나는 이것을 조물주가  바람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남고 그것에  역행하는 사람은 소멸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유전자라는 형태로 인간의 몸 안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싶다. 사실 뇌 속에는 선조의 선행이나 악행에 관한 기억까지  모두 입력되어 대대손손 누적된다. 따라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르겠다.         

일벌레가 일찍 죽는 이유는?

  인류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갖가지 종교나 철학사상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자연계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공생’하자는 사고를 가진 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미래 사회를 생각할  때 이것은 매우 발전적이고 바람직한 경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의사로서 새로운  사회를 위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웃이나 사회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뇌는 그 인간을  멸망으로 유도해 가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EM (electorn microscope/ 전자 현미경) 발견자인 후나이 사치오 씨는 ‘우주 전체에 창조주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 의지가 유전자라는 형태로 우리 몸 안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창조주의 의지에 합당한 사람은  살아남고 합당하지 않은 자는 소멸하는 메커니즘이 인간의 몸 안에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의욕적으로 일을 할 때는 뇌가 매우 활성화되어 도파민(dopamine  / norpinephcine합성의 중간 단계로 중추 신경에서 신경전달  물질의 기능을 한다)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도파민이라는 물질은 인간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호르몬이지만, 분비가 과다할 경우는 에너지가 필요 이상으로 소비되어 그만큼  일찍 죽게 된다.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신분열증이나 간질병 같은 증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이 호르몬이 적게 분비되면 파킨슨병(parkinsonism /운동기능  감소증.전진.근육 경직을 특징으로 하는 질환)이나 치매 현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지만 과다한 분비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천재로 일컬어 오던 사람이 일찍 사망하거나 뇌 질환  계통의 병에 많이 걸렸던  이유도 도파민 과잉 분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이나 실적을 쭉쭉 올리는 사업가 가운데에서도 도파민  분비 과잉 현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경쟁에서 이기려면 투쟁심에 불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악착스럽게 일해서 성공한다 해도 뇌내 모르핀을 잘 활용하지 못해 일찍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치계나  경제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유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죽는  사람 역시 뇌 분비 호르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투쟁 호르몬의 과잉 분비가  명을 재촉한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키워 큰일을 하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에너지 출력을 너무 높이면 질병이나 단명이 찾아온다. 이것은 극히 이율배반적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차차  밝히겠지만,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굉장한 비법이 있다. 뇌내 모르핀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그 비법이다. 도파민을 많이  분비하면 에너지가 소멸되어 녹초가 된다.  하지만 이럴 때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키면, 적은 양의 도파민으로 10-20배나 되는 양의  도파민이 분비된 것과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뇌내 모르핀은 지렛대의 원리와  비슷한 에너지 증폭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 해도 도파민을  과다 분비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도파민이나 노르아드레날린은  활성 산소를 대량으로 방출시키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뇌내 모르핀은 몸에  해로운 활성 산소를 방출하지 않기 때문에 소량의 도파민에 뇌내 모르핀을 결합시키면 별다른 부작용 없이 그 효과를 증폭시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이상적인 뇌 활용법이라  할 수 있다

옛 부터  이름있는 고승들은 높은 식견으로 세상을 관망하고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으며 통계적으로 볼 때 질병 없이 장수했다. 득도한 고승들이 대부분 질병 없이  장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질병에  강한 면역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들의  생활 방식이나 사고방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뇌내 모르핀을 유용하게 활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악성 에이즈에  감염되더라도 보통 사람처럼 쉽게 발병하지 않을 것이다. 면역력이 높고 자연 치유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암세포를 불러오는 스트레스, 모든 악의 근원

  업무로 긴장하면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이다.  이것 또한 병의 원인이 된다. 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쥐를 이용한 유명한 실험이  있는데, 그 데이터를 보면 스트레스의 강약에 따라 암 발병율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암 물질로 인한  암의 발병률이 10%라면, 발암 물질에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발암률은 50%까지 높아진다.

득도한  사람들은 일반인이 스트레스를 받는 일에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킬 수 있다. 뇌내 모르핀은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며 발암율을 극단적으로  감소시킨다.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질병에도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인병은 신진대사 장해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혈액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뇌내  모르핀에는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효능도 있다.

혈액  흐름이 방해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를 받아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혈관이 수축되어 혈액의 흐름을 막는다.  이러한 변화  자체도 마이너스이지만, 이로 인해 활성 산소가 대량으로  발생되어 유전자를 손상시키거나 과산화지질을 생성시켜 성인병 발병률을 더욱 높이게 된다. 혈액 순환  장해의 또 다른 원인은 콜레스테롤이나 중성 지방 등에 의한 혈관 막힘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혈관이 막히는 물리적 이유 역시 결국에는 스트레스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성인병 계통의 거의 모든 질환은 스트레스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옛날 고승들의 깨달음의 높은 경지는 병을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많든 적든 때때로 긴장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생기며, 그로 인해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누구나 노르아드레날린 계의 호르몬을 분비한다.  적절한 양을 분비하면 나름대로 우리 몸에  자극을 주어 긍정적인 효능을 발휘하지만, 그 한도를 넘게 되면 몸에 해를 끼치게 된다. 혈압이 상승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죽음에 임박한 급박한 상황에는 심장 속에 노르아드레날린을 주입시켜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던 혈압을 급격히 상승시킨다. 긴급 상태에  한하여 독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높은 혈압이 몸에  좋을 까닭이 없다. 혈압이 오르면 피의 흐름이 나빠진다. 뇌세포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산소와  영양분을 각 세포에 효과적으로  공급해야 하는데,혈압이 높다는 것은 혈관이 수축되거나 막혀서 피의 흐름이 정체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만큼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리고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혈액 성분 가운데 하나인  혈소판이 파괴되고, 혈소판이 깨지면  혈병이라는 부스럼딱지 같은 것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이 부스럼딱지가  혈관을 막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혈관 수축은 뇌의 건강을 해치는 적신호이기도 하다. 뇌혈관을 수축시키는 가장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가 노르아드레날린 호르몬인데,  이 호르몬은 마음가짐이나 감정 상태에  따라 분비량이 결정된다. 이것만으로도  플러스 발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꾸중을 들어 화가 난다.  사업에 실패하여 좌절감에 빠진다. 부인과 다투어 혈압이 오른다. 아이의 성적표를 보니  어이가 없다. 이런 상황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동반하게 되는데, 이 모든 상황을 전부  마이너스 발상법으로만 받아들인다면 노르아드레날린은 그만큼 과다하게 분비될 것이다. 하루 중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은 15-16시간인데 이 깨어있는 동안에  계속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혈압은 점점 높아지고  혈관도 막히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뇌만이 아니라 인체 각 기관에 영향을 미쳐 노화를 촉진하고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다른 방법이 없다. 뇌를 유용하게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든 한 번 경험한 기억은  전부 뇌에 축적되므로 같은 상황이나 경험을 당하게 되면 뇌는 과거의 기억을 끌어내 과거와 동일한 대응을 하게 된다. ‘사장님이 부르십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경우, 전에 야단 맞은 일이 있는  회사원은 ‘또 야단 맞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칭찬 받으리라’는 생각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머리 속에서는 우선 나쁜 상상이 일어나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고 그와 동시에 뇌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하게 된다. 이럴  때는 되도록 정반대로 발상하도록 애써야 한다. 우선 ‘이번에는 칭찬 받을 거야’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쾌감을 촉발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불쾌한 생각을  중화시키기 때문에 수축된 혈관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든다. 실제로  사장실에 불려가 꾸중을 듣게  된다 하더라도 사장이 자신을  위해 꾸중하는 것이니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플러스  발상으로 전환시킨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면 무시당하는 일은 있어도 꾸중 듣는 일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어쨌든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뇌내  모르핀이 분비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간단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의 지각이나  기억에 따라 주어진 자극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길거리에서 개와  마주쳤을 경우, 개를 키우거나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개에게 말이라도  건네려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뇌내  모르핀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에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극도의 경계심이 일어나면서 교감신경이  최고도로 활성화되고, 하수체는 면역체에 영향을 주게 되어  스트레스 호르몬을 방출하게 된다. 그러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동공이 흐릿해지며 좀더 많은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기관지가 확대된다.

또한 혈액이 근육으로 흐르고  공격과 도피 상황에 대비하여 아드레날린 계 호르몬이 혈관  속에 다량 투입된다. 이렇듯  개와 마주친 상황은 같아도  개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에 따라 그  반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과거의 나쁜 기억에만 집착하지 않고, 개는 온순해서 결코 사람을 물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주입시키려 노력한다면 부정적인 결과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욱 중요한 법이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이나 자극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을  플러스 발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면 몸과 마음의 반응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활성 산소의 독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와  동시에 갖가지 욕망을 품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건강과  장수에 대한소망과 욕망의 만족은 대부분 이율배반적인 경우가  많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기분 좋게 적당량의 알코올을 섭취한다면 뇌에서  모르핀을 분비하겠지만, 늘 적당량만 마실  수 없는 법이다. 과음이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최근 세계적으로 금연 운동이 확산되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나,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일에 몰두하다가 모처럼 찾아온  휴식 시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담배를 피운다면 뇌에서는 β-엔돌핀을 분비한다.  이 β-엔돌핀은 기분을 좋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체 각 기관의  노화를 막고 암세포를 파괴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담배가 인체에 해롭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담배를 좋아하고 흡연으로 인해  즐거움을 느낀다 하더라도  하루에 몇 십 개피를  피워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젊은 나이에 흡연을 시작한 사람의 사망률은 비흡연자의 약 2배에 달한다.

성행위도 마찬가지다. 섹스의 쾌감이 뇌 활동을 좋게 한다는 이야기를 가끔 접하게 되는데, 단순한  속설에 불과하다고 외면할 수만은 없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젊음이나 건강에 플러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운동량으로 따져  보면 섹스는 상당히 격렬한 운동에 속한다. 그런데 격렬한 운동은  활성 산소를 대량으로 발생시킨다. 활성 산소는  건강에 매우 해로운 물질이다.  따라서 나이가 지긋한  사람은 과도한 섹스를  삼가는 것이 좋다.

활성 산소라는 물질은 우리가 호흡할 때  들이마신 산소가 분자 상태로 변해 활성화된 것으로서  모든 질병이나 노화를 유발하는  인류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활성 산소는 언제 가장 많이  생겨나는 것일까? 우선 피의 흐름이 나빠질 때 활성 산소가 다량으로  만들어 진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단 혈액의 흐름이 나빠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때 활성 산소가 분비되는 것이다.  바로 이때 활성 산소에  의해 혈관의 내피가 상하거나  조직 또는 유전자가 다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몸은 언제나 적정 수준의  혈류량을 유지해야 한다.  내피가 상하면 염증을 일으키며  유전자가 상하면 암을 유발시킨다.

또한 활성 산소가  지방과 만나면 몸을 노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을 분비할 때에도 활성 산소가 다량 발생된다. 따라서 마이너스  발상을 피해 이런 호르몬이 가급적 적게  분비되도록 하는 것이 뇌를 젊게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뇌세포를  젊게 유지할 때 활성 산소의 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로 밝혀졌다. 따라서 항상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사물을 받아들이고 지나치거나 무리한  생각을 피한다면 활성 산소의 해는 거의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활성 산소가  인체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몸 안에 침투한 병균을 퇴치하는  무기로 활용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활성 산소는 인간이 갖고 있는 면역 시스템의 일부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많아지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럴 때는 인체  내부에서 SOD라는 해독 효소를  만들어 산소독을 중화시킨다.  따라서 인체의 자연 정화 기능에 이상이 없으면 활성 산소 때문에 해를 입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성장기에 해당 필요가 없다. 그러나 중년기 이후에는 SOD가 활발하게 생성되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중년기 이후에는  SOD를 생성하는 능력이 쇠퇴하기 때문에 활성 산소의 해가 점차 확대되어 노화나 성인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이것은  나이가 들수록 플러스 발상이 한층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에 죄의식을 갖지 말자

  시원하게 트인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폭주족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스피드를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앞차도 보이지 않고  뒤따라오는 차도 없다. ‘안심하고 마음껏 달려볼까’하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어디선가 갑자기 순찰차가 뒤쫓아온다. 아마 이런 경험을 겪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규정 속도를 위반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스피드를 내게 되는가. 그것은 마음껏 엑셀러이터를 밟아 속도를 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뇌에서 β-엔돌핀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지만, 뇌를 잘 활용하려면 우선 ‘인간은 쾌감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머리 속에 넣어둘 필요가 있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연가는 도저히 담배를 끊을 수  없다. 흡연을 통해 커다란 쾌감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직접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저녁 무렵 술집의  네온사인만 보아도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이런  습관이 붙으면 쉽게 술을 끊을  수 없다. 술을 끊는다는 것은 쾌락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간장 계통의 전문의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소위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람과 많이 접촉해  왔다. 그들에게 알코올이  해롭다는 사실에 대해 입이 닳도록 떠들어 봤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마시면 당신은 곧 죽는다’고 말해도 ‘내가 좋아하는  술이니 마시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니 별 도리가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식하면 비만 체질이 되고 그러면 성인병에 걸릴  확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그런데도 맛있는 음식만  찾아 다니며 배가 터지도록 먹어대는 미식가가 허다하다.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끊지 못하는 이유 역시 대부분 뇌내  모르핀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화된 인간에게서도  동물과 같은 본능적  행동 양상이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욕구는 무엇인가.  심리학자 A.H.마즈로 박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5 F’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5 F’란 F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 단어를  의미한다. 퍼킹(fucking/성욕), 피딩(feeding/식욕),  플로킹(flocking/집단의식 욕구),  파이팅(fighting/공격.정복 욕구),  프리잉(fleeing/도피욕구) 등 다섯 가지가 본능적인 행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본능적인 행동이란  ‘의지력으로 억제하지 못하는 원시적  충동’이라 정의하는데, 최근 연구 발표에 의하면  이것도 결국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식사는 성행위 등을 통해  쾌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물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단을 형성하는 행위 역시 인간에게 쾌감을 준다. 그리고  파이팅은 상대방을 공격하고 정복하여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려는  욕구인데, 이것이 쾌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인류사가 투쟁의 역사였다는  사실만 상기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싫증을 느끼지 않고 전쟁을  되풀이해 온 것은 승리라는 결과를 포함해 근원적으로 그것이 쾌감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도피.도주의 욕구를 들 수 있다. ‘도망치는 것이 어째서  쾌감을 일으키는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도피나 도주는 반드시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한다는 사실이 이미 실험으로  밝혀졌다.

이상이 마즈로 박사가 말하는 ‘5 F’  이론인데 인간의 원뇌(원시적 뇌)는 이 같은 본능적 욕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을 마시면 된다. 물론 정도에 지나치면 건강에  해롭지만 좋아하는 것을 무리하게 끊을 필요도  없다. 단 적당량을 유지하는 동시에 한가지 덧붙여 당부하고 싶은 것은 술이나 담배에 죄의식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담배와  술에 포함된 독의 영향도  해롭지만, 죄의식으로 인해 발생되는 활성 산소는 인체에  더욱 해롭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연가가 작업을  마친 후나 식사 후에 즐거운 마음으로 담배  한 대를 피운다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술도 적절하게 마신다면 ‘백약의 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담배나 술을 접할 때마다 꺼림직해 하거나 죄의식을 갖는다면 플러스 효과는 사라지고 마이너스 결과만 나타나게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적당히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또 피웠군. 폐암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혹은  ‘또 술을 마셨어. 이러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면’ 이라고 걱정하면 실제로  인간의 뇌는 병에 걸리게  만드는 호르몬을 분비하게 된다. 연애를 할 대도 마찬가지다. ‘실연 당하지 않을까’하고 늘 걱정하는 마음으로 만나면 실제로 실연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이유는 걱정할 때마다 실연 당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불안이나 걱정 혹은 죄의식을 느끼며 행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뇌 활동법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불행과 죽음을 부르는 전주곡이기 때문이다.

마즈로 박사의 5단계설과 뇌의 활동

  마즈로 박사가 말하는  ‘5 F’ 이론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욕구가 없으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뇌는 ‘5 F’  이론에 관계되는 모든 활동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서 뇌 구조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기로 하자. 인간의 뇌는  3중 구조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5 F’를 관장하는 뇌이다. 이 뇌는  모든 동물이 소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뇌를 원뇌라고 한다. 뇌간-연수, 시상하부 그리고 시상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원뇌를 감싸는 듯한 형태의 뇌가 있다. 이것은 개나 고양이 정도 이상의 지능  동물이 가지고 있으며, 동물뇌(대뇌변연계)라고  한다. 세 번째는 제일 바깥쪽에 있는 대뇌신피질 이다. 인간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대뇌신피질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  전체의 활용 측면에서 볼 때,  대뇌신피질의 활동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아무리 대뇌신피질을 잘 활용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으며 인생의 즐거움  역시 제대로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의 활동을 논할 때  우리는 자칫하면 인간 특유의 대뇌신피질에만 관심을  갖기 쉽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라고 불리는  인간의 고상한 사고는 뇌 전체 활동 중에서 고작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95%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과 사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와 같은 본능적 욕구를 충적시키기 위한 사고를  하며, 바로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인 것이다.

파충류는 원뇌만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다. 먹이를 보면  덤벼들고 암컷을 보면 생식 활동을 한다. 거의 조건 반사적인 행위가  지배하는 세계인데 우리 인간 역시 이와 똑같은 뇌를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개나 고양이는 좀더 발달된 대뇌변연계라는 동물뇌를 갖고 있다. 그래서 주인을  알아보고 자기집을 찾아오며 이름을 부으면 알아듣는  정도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대뇌신피질 덕분이다.  하지만 뇌의 활동이나 욕구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때 파충류나 개와 고양이의 뇌도 염두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본질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욕구를  갖고 있는 동물일까. 쾌감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인가. 파충류 차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단 말인가. 마즈로 박사는  ‘욕구 단계설’이란 설득력 있는 이론을 통해 인간의 욕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즈로 박사는 인간의  욕구를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1)생리 욕구 (2)안전  욕구 (3)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 (4)인정(승인)을 받으려는 욕구 (5)자기 실현의 욕구 . 이 다섯 가지 욕구는 계단을 오르듯 낮은 차원의 욕구에서 점차 높은 차원의 욕구를 향해 단계적으로 상승한다. 가장 낮은 단계는  ‘생리 욕구’ 이다. 성욕.식욕.수면욕 등이 바로 이것인데, 생존하는데 절실하게 필요한 가장 본능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 욕구를  절대적으로 충족시켜야 하는데,  의학계에서는 이 생리 욕구가 나오는  곳을 파충류뇌라 추측하고 있다.

기본적인 생리  욕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에는 ‘안전 욕구’가 나타난다.  배가 고플 때는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일 틈도 없이 먹을 것만  찾게 된다. 먹을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기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충족되고 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안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욕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으로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가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사회 귀속 욕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을 필요로 하는  사랑의 행위도 여기에 속한다. 공복도 채우고  안전도 보장받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만족할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마즈로 박사는  세 가지가 충족된 다음에 네 번째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등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존심을 지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자기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 뛰어난 업무  실적, 높은 자립도 바로 이런 요소를 통해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동시에  그런 자신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표창을  받거나 지위,명성을 높이거나 좋은 평판을 받고  싶어하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네 번째 욕구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표출된다. 인간은  단지 사회적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타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정도의 욕구만 채워진다  해도 상당한 수준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다섯 번째  욕구인 ‘자기 실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욕구를 달성한 사람은 그  다음으로 최고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마즈로 박사)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실현의 욕구’라는 것이다. 자기 실현의 욕구는 신의 영역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나이  칠십이면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고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다’라는 세계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살다  보니 세상과 이웃을 위해 바람직한 행동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이상향의 세계는 없을까. 마즈로 박사는  ‘자기 실현의 욕구’를 포함한 위의 다섯 가지 욕구가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라 말하고 있다. 이것을 ‘욕구 단계설’이라 명명한 이유는 첫 번째 욕구를 충족시킨 다음 두 번째 욕구로, 다시 세 번째 욕구로 나아가듯 반드시 앞 단계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된 다음에 비로소 그 다음 욕구로 발전되어 가기 때문이라  한다. 현재 여러분은 어느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여기서  설명한 마즈로의 이론은 20여년  전부터 널리 알려진 욕구 이론인데, 여기에서  이것을 인용한 이유는 최근에 밝혀진 뇌의  활동과 이 욕구 이론이 상당히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즈로 박사가 이 이론을 생각할 당시는  아직 뇌의 활동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를 볼 때, 이 이론은 뇌생리학 측면에서 인간의 기본 욕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욕구 수준이 높을수록 쾌감도 크다

  현대 사회에서 다섯 번째 단계의  욕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 번째 단계의 욕구인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만 대부분 여기에서  멈추거나 아니면 네 번째 욕구인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서 멈추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뇌의 활동 특히 뇌내 모르핀은 인간에게 다섯 번째 욕구,  즉 ‘자기 실현의 욕구’까지  달성하기 위해 도전하라고 촉구한다.

이 부분은 이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의 뇌를 유용하게 활용하려고 시도할 여러분에게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할 것이다. 자기  실현의 욕구라고 하면 왠지 깨달음의 경지와 같은  생각이 들어 ‘너무 어려운 일이다’ 혹은  ‘나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안 돼도  상관없다’라며 겁부터 집어먹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뇌내 모르핀은 자기  실현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 최고의 기쁨이며 동시에 항상 마르지  않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열쇠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여러  욕구가 병렬적으로 놓여 있으며 서로 상치되는 관계에 있다고  오해해 왔다. 그러나 욕구는 나름대로 단계가 있는 법이다. 어떤 인간이든 식욕과 성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권력욕과 명예욕도 있다. 남을 위해 봉사하거나  자신을 바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숭고한 차원의 욕구도  있다. 그러나 인간욕구의 상당 부분은 숭고한  차원의 욕구가 아닌 저 차원적  욕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낮은 수준에서 만족하기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욕구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은 극히 바람직한 일이나, 낮은 차원의  욕구를 추구할 때 만족도나  쾌감의 정도가 훨씬 높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방심하면 우리 인간은 끝도 없이 낮은 차원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욕구 단계 이동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최근의 뇌내 모르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일반적 견해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인간은 병렬적으로 나열된 욕구 가운데서 몇  개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마즈로가 말한 대로 욕구는  낮은 차원에서 높은 쪽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욕구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뇌내 모르핀이 많이 분비되며 그만큼 쾌감도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를 거쳐 높은 수준의 욕구에 도달하면 인간은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한 마음으로 오래 살 수 있게 된다. 마르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 타인에게 도움을 부는 사람은 항상 젊고 건강하게 질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뇌내 모르핀 연구를 통해 증명된  것이다.

이것을  물질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체는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항상성, 생체 항상 상태)라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항상성이라고 하는 조정  시스템이 바로 이것인데, 추우면 피부의 숨구멍이  수축하여 체열의 발산을 막고 더우면 숨구멍을  열어 땀을 흘려 체온의 상승을 막아주는 등의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호메오스타시스라는 메커니즘은  인간 신체 곳곳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것으로  인해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그런데  호르몬 역시 이같은 메커니즘의 적용을  받는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이 나오면 반드시 그것을 억제하는 세로토닌   (serotoni/ 호르몬이자 신경전달 물질)이라는 호르몬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네가티브 피드백(negative feedback/ 한쪽 많아지면 그것을 억제하는 현상)이라 부르고 있다. 전기 난로에 자동 온도 조절장치가 있어 과열을 방지하는 것과 비슷한 장치가 인간의 육체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뇌내 모르핀에도 역시 이러한  억제 물질0이 작용한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예외  현상이 있다. 인간의 뇌 가운데에서 가장  진화된 전두연합야가 자극을 받아 뇌내모르핀이  분비될 경우에 한해서는 이 네거티브 피드백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뇌내 모르핀은 아무런 장애 없이  얼마든지 분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억제 물질이 반드시 분비된다는  네거티브 피드백의 원리가 어째서 이  경우에는 작용되지 않는가?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어쨌던 나는 인간이 가장 진보된  뇌를 사용하여 어떤 일을 할 때 β-엔돌핀이 아무런 제한 없이 분비되어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은 ‘그런 세계를 지향하라’는 조물주의  메시지라 해석하고 싶다. 성욕이나 식욕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식욕이 충족되지 않으면  배고픔을 채우려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일단 배가 부르면 만사가  귀찮고 음식을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성욕 역시 강한 욕구 가운데 하나지만 충족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또한 이런 욕구는 너무 집착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는 공통점이 있다. 과식은  비만과 성인병을 유발시키고 과도한 섹스는 활성 산소를 발생하는 요인이 되어 생명을 단축시킨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욕구는 강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반면 너무 집착하면 반드시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네거티브 피드백은 바로 그런 결과를 막기 위한 장치  가운데 하나라 볼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이 사회와 이웃을 위해 살아가며 상위뇌를  활용하면 아무런 제지도 없고 부작용도 없다. 아니, 뇌내 모르핀이 더 많이  분비되어 기분을 최고로 만들어 준다.

나는  이 같은 생리 현상 속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창조주의 강한 의지를  느낀다. 마즈로 박사는 고차원적인 자기 실현의 욕구를 달성한 사람들이 느끼는 최고의 정신적 상태를 ‘지고경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뇌에서 β-엔돌핀을 끊임 없이 분비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뇌를 잘  활용하면 누구나 ‘지고경험’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약이 되는 것과 독이 되는 것

  외부의 자극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든 이것은 단순한 추상적 사고에 지나지 않으므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람들은 흔히 ‘단지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인데…..’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은 아무 한계 없이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사고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하지만 뇌가 활동하고 판단하는 사고의  결과물은 모두 물질화되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생각하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이 같은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예로 공부라는 행위는 뇌에서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싫다.’ 혹은 ‘좋다’ 고 생각하는 데도  기본적인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죄가  에너지를 사용할 때는 POMC라는  단백질 분해 현상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사고할 때와 부정적으로 사고할 때의 단백질  분해 방법은 서로 다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하나의 시련이다,좋은 경험이다’라고 받아들이면 단백질이  부신피질 호르몬과 β-엔돌핀으로 분해된다. 부신피질 호르몬은  육체적인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β-엔돌핀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작용을 한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β-엔돌핀과 신체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부신피질이 분비 되지만,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경우에는 신기하게도 β-엔돌핀이나  부신피질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한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이 바로 그것인데, 이 물질 자체도 독상  물질이지만, 이 물질로 인해 더욱 강한  독성 물질인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

이제  여러분도 외부의 어떤 자극에 대해 마이너스  발상을 하는 것이 얼마나 건강에 해가 되는지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스트레스라는 자국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뇌의 생성 물질이 상이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 두기 바란다. 플러스 발상을 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인체에 좋은 약으로 작용하는  물질이 체내에  생성되지만, 마이너스 발상을 하여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약  대신 독으로 작용하는  물질이 생성된다. 인간의  사고는 습관의 지배를 받는 경향이  있다. 플러스 발상을 하는 사람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이너스 발상을 하는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므로 동일한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본인의 컨트롤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지갑에 있는 돈을 세어보고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라고도 ‘아직 이 만큼이나 남았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쪽으로 생각하든 지갑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 즉 현실 상황  그 자체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자칫하면 마이너스 발상을 하기 쉽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통계적으로 70∼80%는 마이너스 발상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안정을 바라는 본능적인 사고 태도(마즈로)’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뇌내 모르핀의  효과를 알고 난 지금부터는  매사를 플러스 발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곧 당신의 건강과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최고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호르몬은 뇌 안의 정보 전달자

  뇌는 호르몬 덩어리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뇌는  신경 덩어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신경 세포로 가득 찬 뇌는 전기 회로처럼  얽히고 설켜 있으며, 세포와 세포를 연결하는 전선 같은 돌기가  뻗쳐 있어 거기에 미약한 전류를 흘려서 뇌의  명령을 전달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뇌는 신경 세포가 가득한  전기 회로와 전선 같은 돌기만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이 없으면  뇌는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다. 신경 세포가  전기 배선처럼 얽혀 있다는 것만으로는  신경 세포가 어떤 표적  세포에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될 수 없다. 신경 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에는 틈새가 잇기 때문이다. 그 틈새를 연결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호르몬의 역할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지역에서 B라는 지역으로 전보를 쳤다고 하자. 물론 그 내용은 C라는 전보국으로 송신되지만 최종적으로  수신자가 그 전보를 받을  수 잇는 것은 우편 배달부가 전보를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호르몬이 바로 이 전보  전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호르몬이란 뇌 안에 있는 정보 전달자이다. 뇌가 몸 전체에 명령을 보낼 수 있는 것  역시 뇌의 각 부분이 적절한 호르몬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체 각 기관에서도  동일한 호르몬이 분비되고 거기에서 정보를 전달받은 세포가 그 명령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호르몬은  이처럼 정보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잇다. 다시  말해 인간이 생각하거나 행동하거나 느끼는 모든  행위는 호르몬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호르몬은 백 수십 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호르몬도 상당히 많다. 그것을 모두  알게 되면 뇌의 메커니즘도 보다 확실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뇌내 모르핀 역시 호르몬의 일종이다. 호르몬은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진다. 뇌내 모르핀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분은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다. 아미노산은 단백질을 합성하는  기본 요소로서 그 종류는 전부 20종이  있다. 이중 8종은 체내에서 합성되지 않기 때문에 필수 아미노산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이미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복습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필수 아미노산 8종은 이소류신, 류신,  발린, 리신, 페닐알라닌, 트레오닌등이다. 티로신은 체내 합성이 가능한 아미노산으로 나머지 12종 안에 들어 있다. 뇌내 모르핀은 현재까지 20종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이중에서 구조식이 가장 간단한 뇌내 모르핀은 엔케팔린(강력한 모르핀과 비슷한  효과를 갖고 있으며 신경전달  역할을 하는 물질)으로, 티로신을  비롯한 5종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티로신은 중요한  신경전달 물질 가운데 하나인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 그리고 아드레날린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물질이며 실제로 이러한 물질은 티로신이 중심이 되어 합성된다.  그리고 각성제로 쓰이는 메탄페타민(이른바 히로뽕)과 안페타민도 티로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좀더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뇌내 모르핀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쾌감을 주는  β-엔돌핀은 티로신을 포함한 아미노산 31종으로 구성된다. 또한  뇌내 모르핀에 해당하는 호르몬은 반드시  티로신을 포함하고 잇다.  그리고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  분자가 두 개 모이면 마약 모르핀이 된다. 이 정도  설명이면 뇌내 모르핀과 마약 모르핀이 얼마나 유사한 화학 방정식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은 원래 마약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독으로 존재하면 곧 산화해버리므로 분자량이 약간 큰 펩티드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β-엔돌핀의 분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뇌내 모르핀에 관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β-엔돌핀은 아미노산 31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미노산 5종 정도가 각각  다른 단위를 형성하여 서로 상이한 역할을  수행한다. 제일 먼저 발견한 한 단위는  앞에서 말한 뇌내 모르핀과 동일한 구조로  모르핀(엔케팔린) 역할을 하는 부분이고, 그 다음은  α-헤릭스 구조를 띄고 있어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주는 부분이다. 그 다음  단위는 β-엔돌핀을 안정시켜 활력을  잃지 않도록 작용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 부분은 아직  잘 밝혀지지 않았으나, 뇌내 모르핀을 활동시키는 리셉터(receptor/수용기관.생물체 내에서  자극을 수용하는 기관·세포 등)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미국 체스터 대학의 신경 생리학 교수  테이비드 펠톤의 ‘뇌와 면역계에  관한 연구 논문’에 의하면 이 뇌내 모르핀은 뇌의  리셉터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체내  곳곳에 리셉터가 존재하며 사람의 면역체  가운데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백혈구의 일종인 내추럴 킬러(NKcell,natural killer cell / 임파구 중의 하나로써 특정한 암세포나 바이러스에 전염된  정상 세포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 세포)  세포의 표면에도 리셉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바로 여기에도  뇌내 모르핀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펠톤 교수는 뇌 안에서  β-엔돌핀을 분비하면 내추럴 킬러  세포의 활동이 좋아져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β-엔돌핀의 분비가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지켜 주는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한 최근  의학 잡지에 실린 논문에서 리셉터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많은 세포에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 많다. 특히  정소세포에 많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같은  최근 연구 결과를 통해, 뇌내 모르핀은 단순히 사고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신체 각 기관의  반응에 밀접하게 관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뇌내 모르핀은 몸과 마음을  이어주는 화학물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뇌내 모르핀은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고 잇는데,  과거에 대한 기억 등의 정보도 호르몬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β-엔돌핀 역시  단순히 쾌감을 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면역력 향상이나 기억력의 강화, 인내력 향상 등에 관여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단지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인데……’라며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서 설명한 β-엔돌핀 역할 하나만 보더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뇌 내 모르핀에는 뛰어난  진통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것에 근거하여 한의학  침술의 효능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수술을 할 때 마취약 대신  침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침술이 어떻게 진통  효과를 내는지는 최근까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뇌내 모르핀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동양의학의  침술이 가지고 있는 치료 효과를 물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호르몬을 방출할 것인가, 나쁜 호르몬을 방출할 것인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뇌내 모르핀은 면역력을 높이는 구조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말초 호르몬계는 뇌가 컨트롤하고 있기 때문에 뇌에서 면역력을 높이는 호르몬이 나오면 몸  전체의 면역력이  높아지게 된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질병이 스트레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병이라 불리는 질환  가운데 약  70∼80%는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며, 특히 성인병은  거의 100%가 스트레스 때문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몸과 마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체내의 POMC라는 단백질 분해 현상이 상이하게 달라지며 이에 따라  화학 반응도 달라지는 것이다. 가령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라고 생각하면 몸은  점점 나쁜 상태로 변화하고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거야’라고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결과를 맞게 될 가능성이 그 만큼 높아진다.

‘병은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옛사람의 격언은 뇌내  모르핀의 물리적 작용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저하시키는 정도를 나타낸 것의 예로, 졸업  시험을 보는 동안과 시험을 마친 후를 살펴보면 앞서 말한  내추럴 킬러 세포, 즉 NK세포의 활성이  현저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 중에는 면역력이 현격히 떨어진다. 이런 면역력 저하 현상은  시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생활이나  연애 등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인생의 모든 상황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육체적인 스트레스가 면역 세포에  미치는 영향은, 학생에게 전력 질주를 시킨 결과 70분  동안 달린 후에는 달리기 전에 비해 NK세포의 활성이  크게 저하되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달리게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예로 우리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스트레스가 얼마나 면역력을 저하시키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  여하에 따라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구도 있다는 사실이다.  졸업시험을 준비하거나 전력 질주를 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졸업시험을 앞두고 ‘합격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하는 것과 ‘이젠 취직도 결정되었으니 시험을 잘못 치르더라도 졸업이야 시켜주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은 결과가 현저히 다르게 나타난다. 이점에 주의해  주기  바란다. 

NK세포에는  암세포를  죽이는  효능도  있다.  퍼포린(perforin/세포막 안에  구멍을 형성하여 세포를 융해시키게  만드는 단백질)이라는 물질을 분비하여  암세포에 구멍을 뚫는데, 그 구멍으로 수분과  염분이 들어가면 암세포가 몇 분 안에 죽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NK세포 한 개가 몇 개의 암세포를 파괴시킬  구 있다. 일정한 시간에 암세포를 얼마나  파괴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 활성도를 측정하는데, 인체가 가지고  있는 이처럼 강력한 기능은 우리의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더욱 높일 수도  있고 약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한  우리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학생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게 싫더라도 시험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험 때마다 ‘싫다, 싫어’하고 과민 반응을  보이며 불안과 걱정에 휩싸이게  되면 면역력은 계속 떨어지게 된다. 반면에 똑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느긋하게 생각하면 면역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사고방식의 차이는 이처럼 인생살이에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 불안  초조 증세가 있는 사람은 항상 불안과 초조의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런 사람은 늘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낙천적인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β-엔돌핀의 세계에 있을  수 있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러한 플러스 발상과 마이너스 발상의 차이는 건강과  인생의 성공, 실패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다양한 부분에 깊게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 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소망실현 성공법칙’의 기본  원리는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좋은 생각을  하면 뇌에서 좋은 호르몬이 분비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뇌에서 나쁜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내용이 될 것이다.

소망실현 이론에서는 잠재의식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잠재의식은 인간의 상념으로 구체화되어 인생을 결정짓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과학적 근거를 명확히 밝히지 못 했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는  마음이란 것을 불질로  해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잠재의식 또는  잠재능력이 발휘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속으로  좋은 생각을 하면 어째서 실제로  좋은 결과가 나오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가능해졌다. 좋은 생각을 하면  뇌에서 좋은 호르몬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잠재뇌를 활용시켜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게다가  견디기 힘든 상황에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강한 인내력도 길러 준다. 이렇게 된다면  자신이 바라는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마음을 과학으로 해명한다

  인간은 뛰어난 자연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이 면역 기능이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과 면역 기능은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의 육체와 마음은 하나의 개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매사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효력이 극히 뛰어난 약’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체 내부에 그 어떤 제약 회사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제약공장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플러스 발상을 하면 체내에  있는 제약 공장은 순식간에 몸에 이로운  약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약은  인체를 괴롭히는 모든 질병을 물리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해서 마이너스 발상을 하게 되면 체내의  제약 공장은 곧바로 몸에 해로운 약을 만들어낸다. 이  점을 확실히 명심하여 매사를  플러스 발상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소박한  신앙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한 예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면  영양 상태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이 생각은  일정 정도 타당성을 가진다. 몸이 건강할 때는 먹고 싶은 음식만 먹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선량한 존재가 아니다.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자신의 목을 조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증거가 바로 호르몬이다.

시종 초조해하고 화만  내는 사람에게 호르몬은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는다. 호르몬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충실한  하인이 되어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을 묵묵히 분비할 뿐이다. 그로 인해 주인이 암에  걸리든 말든 ‘알 바 아니다’라는 것이 신체 메커니즘의 특징이다. 단,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이 결코  해로운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체 기관에서 발생하는 물질은 반드시 그 나름의 긍정적인  목적과 필연성을 갖는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은 도파민의 친척으로 인간에게 의욕과 활력을 일으켜 주는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체 안에서  어떻게 이런 강한 독을 분비할 수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따라서 항상  불안·초조의 세계에 틀어박혀서 살아가는 사람은 뱀의  독에 필적할 만큼 강한 이 독으로 인해 인생을 원만하게  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래  살수도 없다.

뇌내  모르핀은 1983년에 처음 발견되어 그 해에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쳐>를 통해 최초로 소개되었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발견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과학의 눈이라는 구체적인  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진보가 아닐  수 없다. 사람 가운데에는 근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차이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지금까지는 대부분 정신력의 차이로 여기고 질타하거나 격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뇌내 모르핀을 이끌어내는 보다 합리적인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체내 지방량이 수명을 결정한다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고  독성 호르몬을 분비하지 않으면 뇌세포를 항상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좀더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뇌의 무게는  대개 1.4킬로그램 정도다.  체중이 60킬로그램인 사람이라면 전체 체중의 2.3%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생김새에 비해 혈액과 산소를  몇 배 혹은 몇 십 배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혈액과 산소의 원활한 공급은 뇌의 활동에 그만큼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뇌세포가  활달하게 움직여서 인체 각 기관으로 하여금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명령하려면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소와 혈액을 항상 충분하게 공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산소와 혈액 가운데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그  영향이 곧바로 나타난다. 따라서 혈관이 막히는  현상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혈관이  막혀 혈액 흐름을 방해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에서 가장 커다란 원인은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혈관을 수축시키고 혈소판을 파괴시켜 부스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지방 역시 또 다른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한다. 지방은 인간이 먹는  음식 중에서 가장 맛이 좋은 영양분이다. 따라서 입맛을 충족시켜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시킨다는  점에서는 지방이 플러스로 작용할 수 있지만 지방은 혈관을  막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건강을 위해서는 지방 섭취량을  줄이는 식사법이 최상이다.

하지만  담배와 마찬가지로 지방  역시 해롭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쉽게 줄이지 못한다. 게다가 무리하게 지방 섭취를  중단하게 되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되어 그만큼 독성 호르몬을 많이 분비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직까지 많이  알려진 방법은 아니지만, 우선 근육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게 가장  좋다. 근육이 지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아해할는지 모르겠으나, 지방은 근육 안에서만 연소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같은 양의 지방을 섭취하는 경우  근육이 튼튼한 사람은 그만큼  빨리 지방을 연소시키지 못해 결국 과잉 지방질이  몸 안에 축적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체중이 60킬로그램인 사람이 매일 2000칼로리씩  식사를 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일찍 죽느냐  오래 사느냐 하는 것은 체내에 얼마나 많은 지방질이  누적되느냐에 따라 좌우 된다. 오래 사는 사람은  당연히 지방량은 근육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근육이 튼튼한 사람은 지방을 연소시키기는 능력 역시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에 지방이 누적되는 양을 줄일 수 있다. 따라서 근육이 튼튼하면  지방으로 인한 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려면  상당히 격렬한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격렬한 운동을 하면 활성 산소가  많이 발생되는 부작용이 뒤따른다. 따라서 근육  상태가 좋은 사람은 부드러운 운동을 계속해서  몸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으로 지방을 산화시키는 것이 좋다.  근육을 유지하는 운동으로는 맨손 체조와 같이  너무 격렬하지 않은 가벼운  운동이 적합하다. 반면에 몸에 지방이 많아도  근육량이 극단적으로 부족해서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뚱뚱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뚱뚱하지 않다고  안심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혈관의  막힘은 겉보기와는 상관 없으며, 이런 사람일수록  혈관이 언제 막힐지 몰라 더욱 위험하다. 따라서 근육량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그만큼 강도가 강한 운동을 해서 근육을 일정 정도 키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인병에 걸릴 위험도 높아지고 오래 살 수도 없다.

뇌내 모르핀에 유익한 식사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는데 근육  다음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식생활이다. 나는 머리말에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 상태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구체적인 물질로 변화되어 육체에 작용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물질은 그 구성 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재료를 섭취하는 과정이 바로 식사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현대  사회는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던 과거와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일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식사량을 줄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칼로리 섭취량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고단백질 식사를  많이 해야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뇌내 모르핀을 구성하는 재료가 단백질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백질은  20종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식사를 통해 섭취한 단백질은 몸 안에  들어가 일단 아미노산으로 분해된 다음 인체의 구성 재료와  효소로 재합성된다. 20종 중에서 필수 아미노산 8종은  체내에서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섭취해야 한다.

이것은 한 번에 많이  먹어둘 수 없을 뿐 아니라,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면 그만큼 빨리 소비된다. 그러므로 식사를 통해  매일매일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식사법이 뇌세포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한다. 인체가 분비하는  호르몬은 현재 백 수십 여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호르몬은 아미노산이 수십 개 연결된 단백질의 일종이므로  식사를 통해 질적, 양적으로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 못하면 플러스 발상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뇌내 모르핀을 제대로 분비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뇌내 모르핀이라 불리는  호르몬 물질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부 20종이  알려져 있는데,어느 것이나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티로신이 없으면  뇌내 모르핀 계통의 호르몬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티로신은 필수 아미노산이 아니기 때문에 몸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재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고단백질 식사를 일상화하여  항상 재료를 충분히 보충할 필요가 있다. 고단백질  식사가 중요한 이유를 이제 어느 정도  납득하리라 믿는다. 뇌내 모르핀에 유익한 식사법은 제3장에서  좀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포인트 식사.운동.명상 세가지

  뇌내 모르핀에 관해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뇌파와의 관계이다. 뇌내  모르핀이 분비될 때는 반드시 뇌에서 α파인  뇌파가 동시에 방출된다는 사실이다. 뇌파가  β파 상태가 되면 β-엔돌핀은 사라진다. 그런데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뇌파 역시 α파나 β파로 다르게 방출된다. β파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β파만 방출한다면 인간은 오래 살 수 없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반면에 α파를 방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슨 일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감사하며 플러스 발상을 하도록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α파 상태를 만들 수  있다. α파와 뇌내 모르핀은 닭과 계란같이 어느 쪽이 먼저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α파 방출에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이다. 따라서 명상에 임하는  훈련을 많이 하면 α파를  그만큼 쉽게 방출할 수  있을 것이다.

α파를 방출한다는 것은 β-엔돌핀 같은 쾌감 물질을 분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자유자재로  가능해지면 인생의 빛깔  역시 그만큼 멋지게  바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무의식적으로  긴장한다. 그래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 못하게 되는 이른바  ‘노력 역전의 법칙’이 작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아드레날린 계통의 신경전달  호르몬 때문이다. 이때 플러스 발상을 하여 의식적으로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키면 그와  동시에 뇌에서 α파를 방출하여 대뇌의 전두연합야가  활성화된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의식  세계와 잠재의식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성공을 향한 긍정적인  발상을 프로그램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잠재의식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도 있다.

잠재의식을  자극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고 정신 상태를 예민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그만큼 뛰어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식사.운동.명상 세 가지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 의미를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뇌내 모르핀에 유익한 ‘식사’, 근육을 붙이는 ‘운동’,α파를 방출하는 ‘명상’  이 세 가지는 정말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병은 마음에서’ 라는 옛말은 의학적으로도 타당하다

  뇌내 모르핀의 효능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뇌 안의 뇌관과  대뇌변연계 그리고 대뇌신피질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마음을 관장하는 이 뇌에는 에이 텐(A10)이라는 신경이 들어 있다. 에이 텐 신경은 쾌감신경이라고도 하는데, 이 신경이 어떤 자극을 받으면 우리 인간에게  쾌감을 전달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신경이 성욕과 식욕, 체온 조절과 같은 극히 원시적인 생리 욕구에서 운동과 학습, 기억은 물론 지고한 인간  정신을 관장하는 전두연합야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성행위를 하면서 굉장한  쾌감을 느끼며 스포츠나 학습을 통해서도  커다란 쾌감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이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통해서도 차원 높은 정신적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인간의 사고나 행위에서 발생하는 이 같은 쾌감은 모두 에이텐 신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이 텐 신경은  약 17-8년 전에 발견된 신경으로, 이것은 β-엔돌핀 등의 뇌내  모르핀의 존재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에이 텐  신경에 대한 계속된 연구는 또 다른  굉장한 사실을 발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뇌가 에이 텐 신경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개나 고양이는 물론 파충류도 에이 텐 신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만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동물에게는  에이 텐 신경을 조절하는 상위뇌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대뇌신피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에이 텐 신경을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고방식 여하에 따라 에이 텐 신경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에이 텐 신경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 바로  뇌내 모르핀의 하나인 β-엔돌핀이다. 대뇌신피질을  제거해 버리면 인간은 개나 고양이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또한 개나 고양이의 상위뇌인 대뇌변연계까지 제거한다면 인간의 뇌는 파충류나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인간이  식생활이나 성행위에 동물과는  다른 의미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도 대뇌신피질  덕분인 것이다. 또한 더욱 차원이 높은  사랑의 감정이나 자기 실현 같은 것으로 욕구 수준을 높여갈 수 있는 것도 대뇌신피질이 있기 대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이처럼 지고한 수준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원인은  그것이 그만큼 커다란 쾌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이 일정한 쾌감을 수반하지 않는 한 아마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바람직한 행위를 하면  이로운 호르몬이 분비되는 조직을 체내에 갖추고  있다. 그래서 연인이나 아이를 위한 행동  혹은 아내나 조직을 위한 행위라면 아무리 괴롭고 힘들다 해도 그것을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뇌파는 α파 상태가 되고 그만큼 많은 β-엔돌핀을 분비하게 된다. 또한  β-엔돌핀은 기억력을 향상시키거나  인간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의욕이나 인내력, 창조력을 발휘하는 분야에도 관계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사고방식 여하에 따라 정신 활동을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플러스 발상을  하도록 노력하면 β-엔돌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  β-엔돌핀은 분비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병은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옛사람들의 정의가 의학적으로도 극히 타당하다는 사실이다. ‘행복하다’ 거나 ‘기쁘다’ 혹은 ‘운이 좋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β-엔돌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에서도 ‘싫다’ 거나 ‘밉다’ 혹은  ‘복수하겠다’ 고 생각하면 불쾌감과 질병, 돌발사고, 적대감, 실패, 실의  좌절감과 같은 자기 파멸의 골짜기로 빠지게 된다. 뇌내 모르핀의 세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신비에 싸여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은 아마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단 하나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뇌내  모르핀의 정체 규명과 활용법  개발이 21세기를 향한 의료계의 최대 목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제2장 근육이 붙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

지방을 섭취해도 성인병에 걸리지 않는다

  지방은 성인병의 커다란 원인 중의 하나다.  여기에 스트레스가 겹쳐지면 거의 대부분 질병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  두 가지가 쉽게 누적될 위험이 많기 때문에 성인병이 증가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과식이 원인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대상은 인간과 가축 그리고 동물원의 동물밖에 없다. 가축이나  동물원의 동물도 인간이 관리한다는 점을 볼 때, 결국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반성을 거듭해도 인간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를  억제하기 힘들다. ‘알고 있지만……’이라고 말하면서도 나쁜 식생활 습관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은  예외 없이 지방을 포함하고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과식으로 인한 죽음은 결국 지방질 누적(지방독)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방독은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방질 섭취를 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지방질 음식을 멀리하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맛있는 음식은 기분을  좋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어 그만큼 플러스 효과가 되는 반면,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그  자체로 노화나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 어느  쪽이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지방독의 해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을 통해 적당한 근육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육과 산소만  있으면 지방은 완전 연소되어  탄산가스와 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정한 근육  상태만 유지한다면 지방독에 침해 당할 위험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중년이 되면 금방  뚱뚱해지고 쉽게 성인병에  걸리는 원인도 근육량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근육은  몸의 형태를 잡아주고 몸이 움직이도록  도와주는 역할 외에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돕는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혈액은 펌프 역할을 하는 심장 박동에 의해  전신으로 흘러가서 각 세포에  영양소와 에너지를 공급한 다음, 세포의 노폐물을 담은  정맥혈이 되어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이 정맥혈이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때 전신 근육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근육을 제2의  심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인체 내부의  혈액 순환은 심장과 전신  근육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근육이  줄어들면 혈액 순환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이 성인병의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근육의 유지 상태는 자신의  복부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배가 많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근육이 줄어들고 지방질은  그 이상 누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배가 많이 나온 사람은 그만큼 혈액 순환이  나쁘다 할 수 있다. 배를 복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빈 공간에 내장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배에는 빈 공간이 많아 지방이 쌓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물론 지방은 피하에도 쌓이지만 복강에 특히 많이  쌓인다. 그래서 배를 보면 지방이 쌓인  정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배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이미 뇌세포가 상당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의 상태 하나로 노화의  진행 속도나 성인병에 걸릴 위험 정도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격한 운동은 25세로 마감 짓자

  그렇다면 배가 나온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배가 나왔다는 건 근육이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근육을 붙이기 위해 운동을 하면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러면 독성 활성 산소가 동시에 발생되므로 이것을 완전히 중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25세를 넘지 않은 젊은 시절에는 인체 내부에서 SOD를 충분히  생성하여 활성 산소의  독을 중화시키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뇌의 발육이 멈출 무렵이 되면 어떤 이유 때문인지 SOD의 발생도 멈추어 버린다.  그러므로 근육을 단련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뇌가 한참 성장하는 젊은 시절에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젊을 때는 격렬한 운동을 해도 SOD를 생성하여 활성  산소를 곧바로 중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근육 단련법은 이 시기에 근육을 충분히 발달시키고, 그 이후는  그것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뇌가 발육을 멈추었다 해도 근육을 단련하면 된다. 어쨌든 25세 이후에는 가급적 과격한  운동을 피하고 지방을 산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부드러운  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드러운 운동은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켜 활성 산소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호르몬을 제대로 분비하여 독성을 중화시키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뇌는 의외로 나약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뇌는 몸 전체에 비해  아주 작은 기관에 불과하지만 에너지  소비량은 상당한 양에 달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산소 소비량만 하더라도  전체의 20%를 육박하고 있다. 따라서 항상  산소의 원활한 공급이 필요하며 잠시라도 중단되면 그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다. 뇌는 산소 공급이 중단될 경우,  단 3분도 견뎌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장기는 살아 있더라도 뇌사 상태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또한 한번  죽은 뇌는 두 번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뇌는 이렇게 나약하기 때문에  뇌혈관 곳의 혈액 흐름이 나빠진다는 것은 다른 부분의 혈액 흐름이 나빠진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제 1장에서  뇌내 모르핀을 분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찮을 정도로 강조한 이유는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면 뇌혈관이  수축되어 뇌 속의 혈액 흐름이 저하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혈관을 수축시키는 가장 커다란 주범은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이다. 이것을  많이 분비하면 혈관이 수축되고 급기야는 막혀버릴 수도 있다. 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혈관이 수축되면 혈액이 원활하게  흐르지 못한다. 혈액 흐름이 나빠지면 산소  공급량이 줄어든다. 산소가 부족하면  혈액 성분 가운데 하나인  혈소판(platelet/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혈구 중의 하나)등이 쉽게  파괴되고, 파괴된 혈소판은 혈병(thrombus/혈액 성분들에 의해  형성된 집합체)으로 변해 혈관  수축을 가속화시킨다. 또한 혈관에 지방이 침투되더라도 혈액의  흐름만 원활하면 지방은 좀처럼 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혈관을 막는  가장 큰 원인은 호르몬에 의한 혈관  수축이라 할 수 있다. 뇌의 굵은 혈관이  막히는 것을 뇌경색이라 하는데, 뇌경색 전단계에는 반드시 가는 혈관이 막히는 현상이  일어나며 막힌 부근에 있는 세포는 점차 죽어간다. 이것이 이른바 치매의 시작이다. 30대 후반이 되면 이런 형태로 하루에 약 20만개 정도의 뇌세포가 죽어간다고 한다. 하루에 20만개는 대단히 많은 양이다.

그러나 뇌를 젊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뇌세포가 죽는 양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생체학상  120년을 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고난 기능을 손상하지 않는  한 수명에 관해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근육을 단련시키는 데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운동으로 근육을 단련하려면 다량의  에너지가 필요하며 에너지를 사용하면 활성  산소의 발생도 동반된다. 따라서 활성 산소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근육을 단련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활성 산소가 발생되는 과정에 관해 상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혈액이  재관류할 때 활성 산소가 가장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재관류란 일단 혈액의  흐름이 멈추었다가 다시 정상적으로 흐르는 것을 말한다. 모세  혈관의 굵기는 혈구 한 개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갑자기 모세 혈관이 수축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혈액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멈추게 된다. 그러나 심장이 펌프 역할을 하여  계속 일정한 압력으로 혈액을 내보내기 때문에 혈액은 곧바로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활성산소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발생한 활성  산소는 우선 세포를 공격하여 유전자에 상처를  입힌다. 그러면 상처 입은 부분에서  암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으며, 설사 유전자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혈관 내피에 상처가 생겨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어떤 경우든 혈액이 봄날 시냇물처럼  원활하게 흐르지 않으면 만병의 근원이 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빨리 죽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가 오래 사는 이유는 이처럼 사고방식에 의해 다르게 생성된 물질로 인하여 혈관 수축의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운동 후, 곧바로 쉬지 않는 것이 요령

  앞에서 설명한 대로 혈액을 항상 원활하게 흐르게 하려면 단단한 근육을 유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운동이 필요하다. 이때 활성  산소의 해악을 최소로 줄이는 요령  가운데 하나는 갑자기 운동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는 사례로 적절할지 모르나 남녀간의  성행위를 한 예로 삼아 설명해 보겠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행위는 상당히 격렬한 운동이다. 따라서 활성 산소가 대량으로 발생한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섹스 행위는 기분을 좋게 하여 뇌내 모르핀의 분비를  촉진시킨다. 그래서 점점 더 격렬한 행위로 나아갈 가능성이 많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분비된 뇌내 모르핀은 몸에 이롭게 작용한다. 몇몇 고지식한 사람은 부정하겠지만, 예로부터 섹스가 미용과 건강에 좋다는 설이  있다. 뇌내 모르핀이 많이 분비된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이것을 단순한 속설로 외면할 수는 없다. 욕구를  충족시켜 뇌를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들면 누구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격렬한 운동을  어떻게 수습하느냐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을 하면  혈액의 흐름이 빨라진다. 그런데  그 운동을 갑자기 멈추면 이제까지 순조롭게  흐르던 혈액에 갑자기 산소 결핍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을 산소부채(O2 debate)라 부르는 데,  이것은 운동할 때 평소  여분으로 비축해 두었던 산소의  양까지 모두 소비해 갑작스럽게 산소가  부족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전력으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나면 숨이 차서 헉헉거리게  된다. 그것은 달리는 동안  몸에서 빌려 쓴 산소를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서둘러 산소를 보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혈관 속에서는  재관류와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 활성 산소가  대량으로 발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것은 건강에 매우 해롭다.

따라서  섹스가 끝났다고 등을 돌려 곧바로 코를  골며 자는 습관 역시 건강에  좋지 않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안을 걸어 다니거나  샤워를 해서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것을 피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섹스가 끝나자마자 동작을 멈추는 행위는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행위가  끝난 다음 두 사람이 함께  기공을 하는 것이지만 보통 사람은 좀처럼 실천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간단히  목욕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서로 몸을 씻어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벼운 운동이 될 수 있다.

야구 선수 가운데 투수는 경기를 마친 다음날 어깨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투구 방법이  잘못된 탓이기도 하지만 경기를 마친 후에 가벼운 피칭을 하여 급격하게 흐르던 혈액의 흐름을 서서히 늦추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합 후에 몸을  가볍게 움직여 주면 심한 피로감이나 고통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섹스를 한 다음날 심한 피로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행위가 끝난  뒤에 그대로 자버리기 때문에 피로가 그대로  쌓이는 것이다.

어떤 운동이든 이튿날 가장  피로감을 느끼는 곳은 전날 사용했던 근육 부분이다. 그러나 실제로  피로가 쌓인 곳은 사용한 근육만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자각을 못하지만, 뇌  역시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다. 운동을 한  다음, 특히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갑자기 동작을 멈추어 휴식 상태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활성 산소의 해를 줄이면서 근육을 단련하는 요령이다. 이 점을 조심한다면 운동은  인체 각 기관과 뇌를 젊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격렬한 운동은 백해무익

  격렬한 운동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지옥 훈련의 폐단에 관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지옥 훈련이란 하나의 수행과정이라  볼 수 있다. 소위 극기 훈련이란 것도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분분하다.

지옥 훈련에는 대부분 종교적인 신심이나 자기 단련을  위한 수행 등이 많다. 폭포수를 맞거나 한겨울의 혹한 추위에 얇은 옷만 입고 산 속을 뛰어 다니는 등의 훈련도 지옥 훈련의 좋은 예다. 또한 운동량이  극히 격렬한 운동 선수들의 지옥 훈련이 있는가 하면 운동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심리적으로 매우 힘든 극기 훈련도 있다. 이 같은 훈련을 모두 한데 묶어 지옥 훈련이라 할 때, 과연 이런 훈련이 인간에게 좋은가  나쁜가 하는 문제를 한 번  검토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우선 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지옥 훈련의 경험을 몇 자 적어 보겠다.

나는 어릴 때  보통 사람들이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맹훈련을 받았다. 프롤로그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우리 집안은 대대로 동양의학을 가업으로 이어왔기 때문에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은 특수한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일종의 왕위 전수 수업과 같은 힘든 과정이었는데, 나는 고작해야 대여섯 상에 불과한 어린  나이부터 이런 고된 수행을 억지로 받아야 했다.  감나무에 하루 종일 묶여 있거니 밤중에 산  속에 앉아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밤새껏 별을 바라보아야 했다. 폭포수를 맞는 일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온갖 힘든 수행을 강요당했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수  없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렇게 고달픈  수행을 받다 보면 너무 힘들고 괴로운 나머지  죽고 싶은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처음에는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은  물론 활성 산소도 많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왜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도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는 훈련을 쌓기 위한 것이다. 

극한 상황을 계속 체험하다 보면 은연중  기쁨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  체험을DNA(deoxy ribonucleic acid/디옥시 리보 핵산)와  RNA(ribonucleic acid/ 리보 핵산)에 주입시키면 다음부터는 쓰라린 체험을 하더라도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게 되고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단식이라는 수행 과정을 하나의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식욕이라는  본능을 억제하는 상당히  힘든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5-6세부터 단식을 했으며, 국민학교에 입학한 다음에는 1주일 동안  단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는 물만 마시고 식사는  일체 하지 않는다. 몹시 배가 고프고  의식이 몽롱해 지지만, 정신은 아주 깨끗하고 맑아진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귓전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가 그대로  마음에 전해지고 서서히 행복감에 빠져들게 된다. 일반인들은 그다지  실행하지 않는 이런 수행을 한 덕분에 나는 나름대로 집념과 인내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이런 수행을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옛날에는 뇌내 모르핀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극한  상황만 극복하면 그 너머에 이상야릇한 행복감과  쾌감의 세계가 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번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나면 다음에는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기에 대처하려는  근성이 생겨난다고 믿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심신을  단련하는 방법으로 수행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자신이 처한 쓰라린 상황을  플러스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을 마이너스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동시에 활성 산소가 분비되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나 역시 처음에는 마이너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행이 선조 대대로 이런 수행을 통해 쌓아온  긍정적 요소들의 흔적이 유전자 속에 들어 있어 비교적 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마이너스  결과만 초래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 가끔 세간에 화재가  되고 있는 극기 훈련이라는 것도 그 취지와 효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보호를 받고 자라는 요즘 아이들에게 합숙 과정을 통해 평소와 다른 검소한  식사나 불편한 생활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의학적으로  볼 대 뇌가 발육  단계에 있는 동안은 틀림없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뇌는 대부분  열 살 정도까지 성장하므로 이 같은 훈련을 하려면 열 살 이전에  하는 게 좋다.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볼 때 세 살,다섯 살,일곱 살,열  살은 하나의 성장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얘기가 다소 옆길로 빠졌으나 어쨌든  극단적인 수행방식은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뇌내  모르핀의 메커니즘이 밝혀진 현재로서는 구태여 위험이 따르는 격렬한 운동이나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뇌내 모르핀에 관한 지식을 익혀서  잘 응용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사고,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사랑, 플러스 발상 등을 행동으로 옳기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 선수를 모방한 힘든  운동이나 지옥 훈련은 그다지 권장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훈련 자체의 좋고 나쁨을 떠나, 혜택 받은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나 수행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갑자기 혹독한 수행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30대 이후에는 가벼운 맨손 체조가 이상적

  젊었을 때는 과격한  운동을 해도 상관없지만, 대개 25세 이후의  과격한 운동은 득보다 해가 많다. 이  점을 명심해 두기 바란다. 그렇다면 30세 이후에는 어떤 방법으로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 좋은가. 가장  좋은 방법은 체조 계통의 유연한 운동이다. 체조는 평상시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움직여주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근육에는 근긴장성섬유 (tonofiboil/ 근긴장에  관여하는 근육섬유)가 있는데, 이것은 뇌의 시상하부(hypothalamus)와 이어져 있다. 그래서 이  근육이 자극을 받으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히는 도중에 행복감은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근육은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근육을 펴주면 다른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뼈 속에 많은 혈액이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근육을 펴준다고 해서 어떻게  뼈 속에 피가 흘러 들어가게 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가령 대나무 통 한 개가 있고  겉에 구멍 몇 개가 뚫려 있다고 하자. 그  대나무 통을 물에 젖은 수건으로 싸고  바깥쪽을 비닐로 감는다. 그리고 나서 두 손으로  꽉 눌렀다고 하자. 그러면 물은 당연히  구멍을 통해 통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근긴장성섬유를 펴주면  위의 대나무 실험과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뼈 속에 많은 피가 흘러 들어 가면 뼈의 노화를  방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골다공증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데도  아주 뛰어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맨손 체조란 관절을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으로 근육의 긴장을  높여가는 운동을 말한다. 맨손 체조는 본격적인 운동 전 단계에  하는 워밍업이므로 이것이 끝나면 근육을 단련하는 본격적인 운동에 들어간다. 근육을 강화하려면  일정한 힘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파워트레이닝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가의 문제이다.  사람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힘을  너무 과중하게 사용하게 활성 산소의 해를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연령.성별 등에 근거한 다음과 같은 공식을 참조하여 자신에게  적절한 운동량을 산출해서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다.

남성의  최고 심박수=209-0.69×연령  여성의 최고 심박수=205-0.75×연령

위에 제시한 공식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심박수를 산출하여 그 심박수의 60-75%를 유지하도록 운동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만약 지나치게 힘을  사용하면 근육은 붙지만 활성  산소의 독으로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근육을 붙이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피의 흐름을 좋게 하고 몸에 해로운 지방질을 산화시키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목적에서 벗어나  과도하게 운동을 하면 오히려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뇌를 사용하는 인문계 사람들이 오래 산다

  운동 선수는 겉보기에  상당히 건강하고 강인해 보인다. 그리고 잘  단련된 근육은 아름답기조차 하다. 하드 트레이닝을 통해 육체를 단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렬한 훈련은 반드시 활성 산소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포츠 의학을 공부한 사람은 잘 알겠지만, 스포츠맨들은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 증거로 일반인들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정년 60세까지 별 탈없이 근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스포츠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 가운데에서는 6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프로 야구만 하더라도 30세가 넘으면 베테랑이며 40대 현역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마라톤 같은 운동은  20대가 황금기이며 40대에게는 극히 무리한 운동이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맨은 일반인에  비해 신체에 자주 이상이 생기고 수명도  짧다. 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돈과 명예를 얻는 대가로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혹사하기로 단단히 각오하고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이 이들을 흉내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아마추어 마라톤이 유행이라 일반인도 많이 참가하고 있다. 마라톤이 너무 좋아  몸을 해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만일  건강을 위해서 마라톤을 한다면  당장 그만 두는 게 좋다. 아마추어  마라톤은 백해무익한 일이다. 여성마라톤 선수의 경우, 그것으로 청춘을 불사르며 자신의 길을 닦아나간다는 의미에서는 나름대로 선택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통해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여자의 행복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선수 대부분이 생리불순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생리를 한다고 해도 무배란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정자나 난자는 활성 산소의  공격을 쉽게 받기 때문에 과격한 운동을 하는 선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낳더라도 기형아를 낳는 마이너스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높다.

지나친  운동이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은 운동과 수명의  관계를 나타낸  자료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운동과 수명의  관계를 나타낸 그림인데 장수라는  측면에서 확실히 스포츠계 사람들이  불리하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몸을 단련해서 튼튼한 근육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맨 출신이 일찍 죽는 이유는 활성 산소로 인한 피해를 그만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문계와 이공계를 비교한다면, 인문계가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사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인문계가 우뇌를 많이 사용하는 반면 이공계는 논리. 계산 등으로 좌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뇌를 많이  사용하는 인문계가 더 오래  사는 이유는 뇌내 모르핀이 우뇌에서 먼저  분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뇌내 모르핀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잇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란다면 지속적인  운동을 통해 근육을 단련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운동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과 지방을 없애는 운동

  요즘은 남녀를 불문하고 살을  배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성인병의 원인  중의 하나가 비만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말 바람직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운동으로 지방을 줄일 수 있다고 믿는 소박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격렬한 운동을 해도 지방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지방은  오히려 부드러운 운동을 할 때 많이 빠진다.

근육  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근육을 붙이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을 없애는 운동이다. 이 둘은 전혀  별개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근육을  붙이는 운동은 파워 트레이닝이다. 무거운 역기를 들어올리는 등의 운동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에  비해 가벼운 워킹(wal-king/걷기)을 장시간 하는 것은  지방을 없애는 운동에 속한다. 어째서 격렬한  운동으로는 지방을 연소시킬 수 없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을 연소시키려면 많은 양의 산소가 필요한데 격렬한 운동은 대량의 산소를 소모하므로 정작 지방 연소에 필요한 산소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100m 전력 질주와 같은 격렬한 운동으로는 지방을 전혀  소모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살 빼기가 목적이라면  격한 운동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다. 그런 운동은  아무 효과도 없을뿐더러 도리어 활성 산소의 공격을 받는 계기로 작용할 뿐이다.  고른 호흡을 하면서 부드러운 운동을 장시간 계속하면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어  지방을 점차 연소시킨다.

지방을 없애는 운동으로 가장 좋은  것은 워킹이다. 매일 한 시간 정도  워킹을 하면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부드러운 운동은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여 운동 자체를 편안하고 즐거운 행위가 되게 한다.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한 다음 산책을 하면 다소  과식을 했더라도 지방을 충분히  연소시킬 수 있다. 걷는  양은 하루에 총 1만 3천보  정도가 적당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기본적으로 걷는  양이 있으므로 운동 삼아서 걷는 양은 약 8천보에서  1만보 정도가 적당하다. 각자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하루에 걷는 양을 계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설명한다면 총  1만 3천보라고 하는 운동량은  미국의 한 병원에서 환자에게 걷기 운동을 시키며 질병을 치료한 결과에서  나온 수치이다. 1만보를 걸을 때는 병이 재발되었으나 1만 3천의 운동량에서 는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걷는 양이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부드러운 운동은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좀처럼 실행하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기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함께 걸을  사람을 만들어 매일  주기적으로 산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자신에게 좋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좀처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거나 격려해 준다면 혹은 함께  산책을 한다면 그 자체가 유쾌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활성 산소를 대량으로  발생시키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보면 격렬한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은 일찍 사망한다. 그렇지만  지방독을 해소하려면 근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근육을 키우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근육이 부족한 사람은 우선 맨손 체조로 가볍게 근육을 풀어 준 다음 파워 트레이닝을 하는 방법이 좋다. 그런 다음 다시 부드러운  운동을 한 시간 정도 해서 지방을 연소시키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필요 없는 지방을 연소되고  혈액 순환이 좋아져 성인병에 걸릴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비만도 사라지고 콜레스테롤도 낮아진다

  또 한가지 성인병 예방에 큰 효과가 있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기공과 함께 동양의학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효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질병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환자에게 가벼운 운동과 명상을 권하고 싶다. 여기에  식이요법과 메디컬 마사지를 적당히 덧붙여서 실시하면 어떤 고질적인  성인병이라 하더라도 기적처럼 치료할 수 있다.

이런 요법을  통해 개선된 사례 몇  가지를 아래에 소개하겠다. 명상에 의한 효과는 뇌파 측정기를 이용해서  α파가 방출되는 양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확인했다.

사례 1)  58세의 한 부인은 진단 결과 고혈압과  우울증으로 판단됐다. 비만 정도는 플러스 25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또한 총콜레스테롤  수치도 275로서 이것 역시 정상을  훨씬 웃도는 수치였다.(정상치 120-220). 증상은 불면과  강박관념으로, 이렇다 할 원인도 없는데 늘 쫓기고  있는 듯한 불안과 초조감에 시달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이 환자에게 식이 요법과 운동요법 그리고 명상  세 가지에 메디컬 마사지를 덧붙여서 실시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비만도는  3.5까지 내려갔는데, 이것은 정상치 범주에 속한다(정상치는 ±10). 총콜레스테롤 수치도 215까지 내려갔다. 정상치가 120-220이라  할 때, 이것 역시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환자를 치료할 때는 명상이 특히 효과적이었다.  이 부인은 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꽃을 보면 안색이 딴 사람처럼 변할 정도였다. 그래서 꽃이 가득  찍힌 이미지 비디오를 보여 주어 꽃에 관한 이미지를  뇌리에 심어놓은 다음 명상실에서 명상을 하게  했다. 이런 훈련을 몇 번 되풀이 하다 보니, 어느덧 꽃에  대한 이미지를 쉽게 뇌리에 떠올려 α파를 그만큼 많이  방출하게 되었다. α파를 방출하는 정도는 그림과  같은 방법으로 측정한다. 우선 α파가 50% 이상 방출될 때를 1점으로 하고 이것을 점수로 환산한다.  다음에는 전체 면적에 α파가  차지한 비율을 계산하는데, 이것은 클리어 레이트(clear rate)라 한다. 그리고 양쪽 점수를 합쳐서 전체 점수(토털)를 뽑아낸다. 만점은 100점인데, 이 환자는 처음에 1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료 후에 60점까지 늘어났다. 11점이란 상당히 위험한 질병권 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건강의 기본이  되는 뇌내 모르핀이 거의  분비되지 않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렇다 할  원인이 없는데도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 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우울한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다시 말해 플러스  발상이 불가능한 것이다. 낮에는 꾸벅꾸벅  졸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망상이 일어나고 환청이 들리기도 하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면 정신병으로 발전될 가능성도 높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거의 하루 종일 자는 경우가 많다.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도파민 호르몬이 고갈되어 거의 분비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파킨슨 병이라고 부른다. 파킨슨 병의 반대는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는 경우인데 이것을 ‘분열증’ 이라  부른다. 약물을 먹으면 순간적으로  반짝하는 정도의 치료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환자는  명상과 식이요법 그리고 운동을 통해 매우 좋은  상태를 회복했다. 이런 질병은 비록 그  증상이 신체적으로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 마음의 병이라  할 수 있다. 정신 신체 장애(psychosomatic disease)라  하는 게 바로 이것인데, 지금은 이 같은 심신증 역시 뇌가 분비하는 물질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뇌내 모르핀에 대한 억제 물질이  과도하게 분비될 때 이런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 환자가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할 수 있도록 치료했다. 정신 신체 장애는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여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만들면 거의 대부분 호전 된다.  뇌 속을 혁명할 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의사들은  이런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명상에 빠지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울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운 상태를 명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웬만큼  훈련하지 않으면 이런 상태에 접근하기  어렵다. 머릿속을 비우려고 하면 오히려 잡념만  생겨 더욱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사례에서 잘 나타나듯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에 대한 이미지를 명상 전 단계에 미리 뇌리에 심어놓은 과정이 필요하다. 명상을 할  때 즐거운 이미지를 떠올리면 뇌내 모르핀이  나와서 기분이 좋아질 뿐 아니라, 잡념 역시  비교적 쉽게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잡념이 생길 여지를 없애면 진정한  명상의 영역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설사  그런 단계에 접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뇌내 모르핀의 작용으로 심신이 호전되어 자연 치유력이 높아질 것이다.

 사례 2) 46세의 중년 여성이다. 이 사람은 나이에 비해  간 기능이 엉망이었다. 뚱뚱한 몸이 아닌데도  고지혈증과 이로 인한 지방간 증상이 있었던  것이다. 야윈 몸매에 비해 근육은 적고 지방이 아주  많았다. 단명하기 쉬운 유형으로 암에 걸릴 확률이 아주 높은  체질이었다. 나는 이 사람 역시 앞의  환자와 같은 방법으로 치료했다. 그  결과 273에 달하던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통원  치료 4주만에 207까지 내려갔다. 간기능  상태를 나타내는 효소량인 GOT.GPT(간기능을  나타내는 효소,둘 다 0∼40까지를 정상으로 보고 있음)가 77과  88이었으나, 이것은 32와 34까지 떨어졌으며 간기능  장해를 나타내는 효소로 대개 30까지를 정상으로 봄)는 325에서 123으로 내려갔다.

이 여자는 개를 너무 좋아해서 개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행복스러워했다. 병원에 올  때도 늘 개를 데리고 올 정도였다. 이 환자의 경우는 개 얘기를  하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환자로 하여금 아침에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게 한 후,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에 명상실로  들어가서 명상하도록 권했다. 이 환자를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그  자체로 상당한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례 3) 63세의 한 남성은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공복시의  혈당량이 273이나 되어 결국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입원할  당시만 하더라도 의식이 몽롱할 정도로 상태가 아주  나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그후 내복약으로 바꾸고 인슐린 주사는 중단했다. 혈당치가  273에서 126까지 떨어진 다음부터는 운동과 명상을  병행시켰다.

이 사람은 전에 항공 회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 비행기를 무척 좋아했다. 비행기 얘기가  나오면 옛날 일을 회상하며 즐거워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에게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해보라고 권했다. 눈을  감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만든 것이다. 이  사람은 비행기를 탄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후지산이 보인다거나 날씨가  맑아서 기분이 좋다는 등의  이미지를 쉽게 형성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몇 번 명상실을 들락거리는 사이에 약도 주사도 필요 없게 되었다. 혈당치는  인슐린 주사를 중단한 상태에서도 110이하를 유지하게 되었다.

사례4) 역시 당뇨병이 있는 43세의 남성이다.  그의 당뇨는 유전상일 뿐 아니라 통풍(gout/acid/gout 정도를 나타내 주는 수치가  됨)은 9.7로 높은 편이었다. 건강을 위해  조깅을 계속했는데, 사고로 무릎을 다치면서 운동을 못하게 된  것이 증상 악화의 원인인 것 같았다.  나는 이 환자에게도 처음에는 인슐린을 투여했다. 그리고 식이요법과 운동, 명상을 통해 α파를 많이 발산하도록 만들었다. 입원  당시에는 스트레스가 많이 누적되어 있었고, 어두운 것이 싫은 나머지 밤에  잠을 잘 때도 불을 켜놓을 정도였다.  그러나 치료를 시작한 다음부터는 생활  스타일이 개선되었고 건강 상태도 많이  향상되었다. 200이상이던 혈당치도 치료한 결과 투약하지 않은 상태에서 150이하를 유지하게 되었고, 요산치도 8.0이하로 떨어졌다.  명상에는 특별한 유형이 없다. 우리 병원명상실에서는 의자에 기대거나 옆으로 눕는 등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게 하고 머리에 헬멧를 씌워 뇌파 상태를 측정하고  있다. 명상 도중에 α파가 50%이상 방출되면 찌륵찌륵 하는  벌레 신호음이 울린다. 그러면 환자는 자신의  뇌파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어떤 기분이 되면 좋은 뇌파가 나오는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동양의학은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의학

  우리 병원에서는 명상과 운동 그리고 식이요법 세 가지가 주된 치료 내용인데 또 하나 독자적으로 메디컬 마사지를 실시하고  있다. 이것은 동양의학의 지압과 서양의학의 마사지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장점을 혼합한 것으로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성인병 원인의 대부분은  혈관의 노화와 혈관 막힘이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혈관이 약화되어 경색 증세가 일어나면 심장병과 뇌졸중, 협심증,  암, 통풍, 고지혈증 등 갖가지 장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혈액만 원만하게  흐른다면 성인병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근육을 강화시키고 지망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나 명상을 해서 뇌파를 조정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동양의학은 전통적으로 피가  잘 흐르도록 돕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압 요법이나 기공이라 불리우는 건강법이 바로 그것이다. 심호흡과  체조를 통해 체내의 기와 피의 흐름을 좋게  만드는 기공은 성인병 예방에 특히 효과적이다.  기공은 단순한 호흡법이나 체조방식이  아니다. 개중에는 심리요법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너무 단순한 규정이다.  기공은 전신 이완법이라는 내향적인 방법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방법이며 자기 조절을 통해서 자연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동양 특유의 운동이다. 그래서 기공은 오래  한 사람은 인간 본연의 상태, 즉 천인합일(사람과  하늘이 일체화되는 것)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은 인체 내부의 잠재능력을  끌어내고 생명력의 근원을 강화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를  의학적으로 해석하면 결국 기공이 뇌내 모르핀을  그만큼 많이 분비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위암은 심한 스트레스나  알코올로 찌든 위에 염증이  생기거나 어떤 발암 물질이 침투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 발병한다. 혹은  활성 산소가 발생되어 유전자에 상처를 입히는 경우에도  발병할 수 있다. 그런데 염증이란 것은  피가 원활하게 흐르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혈액 흐름이 원활한 사람이라면 암에 걸릴 확률 역시 그만큼 낮아질 것이다. 메디컬  마사지는 동양의학의 지압요법에 서양의학의 마사지 요법과 검사 방법을 도입하여 혈액의 흐름 상태나 울혈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치료하는  방법이다.

인간에게는 좌우 대칭으로  31대의 척수 신경이 있으며 이  신경은 전신의 말초신경으로 퍼져 나간다. 인체  어딘가에 이상이 있으면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척수 신경을 통해 뇌로 연결된다. 동양의학에서 볼 때, 인체는 365개소의 경혈(신체의 표면에  침이나 뜸으로 자극을 가하는 자리)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경혈은 경로라는 신경  대동맥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경혈을 자극하면 특정기관의 혈액 흐름이 원활해진다.  또한  경혈은   뇌의  상행망양부활계(ascen-ding  reticuloactivating system)라는 신경계를 경유해서 뇌 속의  에이텐 신경과 연결되므로 경혈을 자극하면 뇌내 모르핀 분비를 촉진할 수 있다. 

특별한 병이 없는데도 마사지를 받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건강을 지키는 좋은 방법이다. 마사지를 하면 뇌내 모르핀이 나와서 혈액 순환을 좋게  만들기 때문에 인체의 좋지 않은 기관이 자연스럽게 치유된다. 병에 걸리기 직전, 즉 미병의 단계에서 다시 건강한 상태로 되돌린다는 동양의학의  기본적인 사고방식도 바로  여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정한  경혈에 침을 놓아서 진통 효과를 발휘시켰다. 침을 놓아서  마취 효과를 강화시킨 후에  외과 수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특정한 경혈을 자극하면 진통 효과가 창출되는 이유는 오랫동안 의문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의학적인 성과에 의해 그것이 바로 뇌내  모르핀 덕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뇌내 모르핀은 에이 텐 신경계를  자극하게 되는데 이 신경계는 인간의 창조력과 의식, 의욕,  기억, 감정 등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능을 높여 주는 효과도  동반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동양의학은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의학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기억력이 향상된다. 또한 면역력이 높아지고 창조력이 생기며  긴장이 완화되고 염증도 고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기본  개념이다.  메디컬  마사지를   할  때는  우선  MRI(magnetic resonance imagination/자기 공명 영상)  등의 첨단 의료기기를 사용하여 혈관이 막힌 상태를  검사하거나 내시경으로 위  내부 조직을 검사한다.  여기에서 나온 각종 데이터를 수집·분석하여  적절한 처방을 내리게 된다.  기본적으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결합할 때 비로소 가능한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치료는 발의 경혈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장딴지와 넙적  다리 그리고 등의 경혈로, 하부에서 점차 중추로  상승하여 마지막으로 복에서 끝낸다. 이 마사지는 한 번 하는데 약 두 시간이 걸린다. 얼굴의 경혈을 마사지하는 경우도 있다. 얼굴은 경혈 덩어리이기 때문에 이곳만  제대로 마사지해도 호르몬 분비를 상당히 좋아지게 만들 수 있다. 어깨가 뻐근할 때 그  부분을 만져 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 아니라  우드득거리는 소리도 난다. 동양의학에서는  이것을 ‘나쁜 기가 뭉쳐 있다’라고 말하지만, 서양의학의 입장에서 설명하면  유산이 뭉쳐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나쁜 기의 정체가 바로 한곳에 똘똘 뭉쳐 빠져나가지 못하는 유산 등의 여러  가지 불완전 연소 물질인 셈이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혈관이 수축된 결과 더러운 피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동시에 신선한 피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소가 부족하게 되고 불완전 연소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불완전  연소는 산성 물질을 발생케 하고 혈관  수축을 가속화시킨다. 이 같은 악순환이 일정 정도 진행되면 성인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메디컬 마사지는 이러한 악순환을 막아  미연에 성인병을 방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병에 걸리기 전에 치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동양의학은 뇌내  모르핀을 끌어내는 의학이며  그 지표로 삼는  것이 뇌파다. 뇌파가 α파 상태가 되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그러나 뇌파를 쉽게 α파 상태로 만들  수 있는 환경에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조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뇌파를 α파로 바꿔주는 기계를 사용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뇌파를  α파 상태로 만들어 주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기공이나  명상이지만 좀처럼 그럴 기회나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해소하는 편이 건강에 훨씬  유익할 것이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각자  나름대로 해소법을 찾아내며 살아가고 있겠지만, 개중에는 자각이  불가능한 스트레스도 있다. 특히 오랜 시일에 걸쳐 먼지처럼 조금씩 쌓여 가는 스트레스는 그만큼 포착하기 힘들 것이다. 특별히 아픈데도 없고 건강 진단을 받아도 별  이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나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건강은 의료 검사에서 나온 수치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보건기구, 즉 WHO(World Health Oranization)는 건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의를 내렸다.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에 걸리지  않거나 병약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도 안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건강에 대한 매우 바람직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내가 진찰한 사람 가운데에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 충족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진찰해 보면 매사에  의욕이 넘치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별다른  부정적인 징후가 나타나기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볼 때, 이런 사람은 병원에 찾아올 필요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병원에 찾아오는  이유는 대개 건강 진단을 받기 위해서인데,  현재의 의료계 수준이라면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내려 되돌려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곧 질병으로 발전하고 말 요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들 중에는 굉장한 투쟁형의 인간이나 공격적인  인간 혹은 염세주의적인 사람이 많다. 아직은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대로 두면 가까운 장래에 성인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런 사람을 대하면 뇌내  모르핀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사고방식을 전환하도록 넌즈시  권유한다. 공연한 말참견이라 생각하겠지만, 특별히 아픈 데가 없더라도 곧 병에 걸릴 위험에 놓여 있거나 단명으로 끝날 요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그런 판단은 거의 적중했다. 메디컬 마사지를 하면서 몸을 만져  보기만 해도 질병에 걸릴 징후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병원은 병에 걸린 사람이 찾아오는 곳이므로 의사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한 나는  많은 환자를 상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환자를 마주할  때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씻어 버릴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내게 ‘환자가 찾아오면 두 손 모아 사죄하라’ 는 사상을 늘 강조했었다. 동양의학에서 의사는 기본적으로 환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 미병의 단계에서 예방.치료하여 질병을 미연에 방지하는 존재인 셈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본인은 전혀 병을 자각하지 못하고 단지  살을 빼기 위해 입원했는데  결과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게 된 청년과 같은 사례가  앞으로 펼쳐 나가야 할 의술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동양의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동서양의 울타리를 허물어 인류  전체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의술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위의 청년이 치료받은 의료 데이터를  아래에 적어보겠다. 그러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만난 의료 행태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치료  사례이므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이 청년은 신장이 173센티미터, 입원  당시에 체중은 103킬로그램이며 연령은 28세였다. 결혼을 앞둔 그는 약혼자가 살을 빼라고 해서 입원하게  되었다. 이 청년은 자신은 상당히 건강하지만 살이 많이 찐 것이 문제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찰한 결과 곧 질병에  걸리게 될 징후가 여러 가지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 병원은 칼로리 제한과  근육 트레이닝을 중심으로 청년을 치료했다. 영양사가 짜 준 식단에 의해 식이요법에 충실하고, 아침 저녁 매일 두 차례씩 워킹 머신과  카이오 바이크(운동 부하용 자전거)를 가지고  운동을 실시했다. 여기에 명상을 덧붙여서  약40일간에 걸친 치료를 했다. 그 결과는 입원과 퇴원 당시의 두 데이터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입원할 때 이미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상태였다. 그대로  두면 성인병에 걸릴 게 불 보듯 뻔했다. 30대나 40대가  되면 매우 심각한 성인병에 시달릴 상황이었다. 곧 결혼하여 아이도  생길 터인데,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아버지가 병에 걸려 장기  입원하게 된다면 젊은 부인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의 걱정이고  본인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하루에  1600∼1800칼로리의 식이 요법과 근육 트레이닝으로 체중을 15킬로 그램이나 줄였으며 다른 수치도 거의  정상치로 되돌렸다. 그러나 청년은 자기가 병에  걸릴 위험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도, 그것이 나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이 빠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퇴원했다. 사실 체중 15킬로그램을  줄인 정도의 다이어트는 아주 만족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다. 체중 감량  20킬로그램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수치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체중을 급격하게 줄이지 않았을 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뚱뚱하다는  이유 하나로는 입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청년 역시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약혼녀가 원한다는 특수한 계기로 인해 입원했다.  그러나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입원하지 않아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는 것은 검사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건강 상태만  체크하면 지금 같은 생활 방식을 계속할 경우  몇 년 후에는 어떠어떠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가르쳐 줄  수 있다. 또한 병에 거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활 지도도 해줄  수 있다. 지도 사항을 잘 지켜 실천에 옮긴다면 대부분의 질병은 미연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병에 걸린다면  그때 병원에 가는 것이다. 나는 현재처럼 질병에 걸린 다음에야 치료하는  형태의 의술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라도 몸을 단련시켜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여러 가지 시설과 의료 시설을 하나로 통합한  의료 시스템을 만들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α파를 일으키는 명상법

  지금까지 소개한 치료법을 모면 명상이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명상이야말로  동양의학의 중심 사상이며 이것만 가능하다면 뇌내 모르핀이나 α파는 물론 근육이나 혈관에 관한 문제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아니 명상은 여기에서 설명한  그 이상으로 대단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명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 설명으로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간에는 선이나 요가 등에서  수행하는 명상법을 명상의 전부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명상이란 그렇게 틀에 박힌 것이  아니며 또한 머리를 깨끗이 비우는 등의 어려운 행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그 자체도  하나의 명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생각하거나 젊은  남녀가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는 그 자체도 명상이다. 옛일을  생각하며 추억에 젖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거나,  건전한 취미에  몰두하거나, 아름다운 음악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물론 시냇물 소리나 산새의 지저귐  소리, 낙수가 떨어지는 수리, 바람이 부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 일도 명상의 하나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공항이나 항구의 소음도 기분을  좋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α파를 발산하도록 자극하는 대상이라면  모두 명상의 재료가 될 수 있다. ‘푸리에의 α파 법칙’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물결 모양의 중심선이 ‘f 분의  1’선상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어 명상에 도움이  된다. 이 법칙은 1920년경에 전기  공학 분야에서 많이 논의된 ‘f분의 1  소음’이라는 진동관의 열 잡음에 관계된 소음의 한 형태에서 시작되었다.  열 잡음은 일정한 경향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규칙적인 진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f분의 1 진동’은 그 잡음 연구의 원리에서 힌트를  얻어 창안한 이론으로, 최근에는 우주 창조의  원리도 이 이론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발표되고 있다. ‘f분의 1 진동’이 원자나 분자의 운동은 물론 생명의 탄생에 이르는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음악을 예로 들어 ‘f분의 1  진동’이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겠다. 음의 주의 주파수를 Y축으로 하고  음의 강도를 X축으로 할 때, 음의  강도와 주파수가 반비례하여 경사각 45도를  나타내는 직선이 있는데, 템포나 리듬의 중심이  이 직선 위에 자리하는 음악은  정서적으로 사람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우주가 만들어진 이래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는 ‘f분의 1 진동’ 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것은 오감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안정시킨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증명 되었다. 그러나 개인차가 있어서  누구나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병원에서는 α파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400가지 정도 개발해  놓았다. 누구에게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어떤 대상이  있을 것이다. 명상은 바로 그런 대상을 머리에  떠올리는 행위라 해도 무방하다.

반면에 어려운  말이나 학설은 전부 이해한다고 해도 뇌에 무리를 주어 β파를 발산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명상의 목적은 뇌파를 α파로 만드는 데 있다. α파가 많아지면 뇌내 모르핀이 나온다. 차츰  익숙해지면 명상하는 도중에 그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수도 있다. 따라서 명상을 하다 보면 매우  커다란 행복감을 맛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인체를 위협하던 징후는 서서히 꼬리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매우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악이 필요할 때는 내부의 제약  공장을 가동해서 필요한 만큼 공급해 준다.  그러므로 인체 내부의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이상이 생기거나 병에 걸릴 위험은 거의 사라진다. 동양의학은 본래  인간이 갖고 있는 능력을 철저하게 활성화시키는 것을,  만일 스스로 그런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  없다면 지압이나 명상 그리고 호흡법이란 기술을 통해서 그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반면에  서양의학은 인간의 육체를 상세히 관찰하여 여러  가지 징후를 밝혀내고 만일  좋지 않은 징후가 있다면  약을 투여해서 고치거나 절단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약의 발상도 마찬가지이다. 약은 당장은 인간을 괴롭히는 증상에 대해서 효과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는 불필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몸 전체로 볼 때  결과적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혈당치를 내리는 인슐린이  좋은 사례이다. 당뇨병이란 인슐린이  부족해서 생기는 병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주사를 통해 인슐린을 인체 내부에  주입하면 일단 급한 고비는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인슐린 부족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췌장이 이 호르몬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외에서 이 호르몬을 주사기로 투입하면 췌장의  인슐린 생성 기능은 그만큼 더 후퇴하게  된다. 결국에는 장기 자체가 퇴화해 버리는 위험도 있다.  이것은 당장의 고비를 넘기기 위한 조치가 인체 전체에는 커다란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되는 서양 의술의 한계를 잘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 당뇨병 환자를 만나면 단단히 각오하고  인슐린 주사를 중단하라고 권유한다. 물론 적절한 시기를 설정해서 행동에 옮겨야 하겠지만, 앞에서 소개한  사례에서 잘 나타나듯이,  당뇨병은 인슐린 주사  없이도 충분히 완치할 수 있다.  대부분은 절절한 운동과 식사 그리고 명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정도로 가능하다.  이 같은 방식은 당뇨병은 물론  소화성 궤양이나 고혈압, 지방간, 암 등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에도 상당한 효과를 올리고 있다.

하루 최저 5000보, 우뇌를 활동시키며 걷는다

   인간의 육체는 대개 25세를  전후로 발육을 멈추고 점차 노화의 단계로 들어선다. 노화의 진행을  그대로 방치하면 뇌 세포는 하루에 10만개  꼴로 죽어가고 근육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회생활에 시달리다 보면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인체를 단련할 여유가 점차 줄어든다.  그렇다면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뇌세포를 지키고 근육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 하나가  있다. 하루에 최소한 5000보를 걷는 것이다. 걷는 운동은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원래는 1만 3천보를 기준량으로 잡고  있지만 최소한 5000보를 걸어야 한다. 이것을  꾸준히 실천하면 위에서 말한 목적은 거의 실현할 수  있다. 일상 생활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걷는 양이 있긴 하지만  현대인의 생활 패턴으로 볼 때 아무래도 그 양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부족한 양을 의식적으로 보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걷는 양이 부족하다고  느낀 날은 퇴근한 다음에라도  산책을 해서 부족한 양만큼 보충해야 한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고 걸어야  한다. 심한 폭풍우가 불지 않는 한 매일 5000보 이상  걷는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 산책 코스를  여러 개 만들어 놓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선택하는 것도 싫증나지 않게 걷는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걷는 동안에는 명상을 하는 석이 좋다. 편하게 눕거나 좌선으로  이완시켜야 명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산책을  하면서 명상을 하면 오히려 3∼4배 이상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꿈이나 희망 그리고 장래 계획에 관해서 생각한다. 앞으로 병원을 어떻게 경영해 갈  것인가, 이상적인 병원을 만들려면 어떤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가 등의 생각을  떠올려 본다. 일단 이런 생각을 시작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쉽게 멈출 수 없다. 심지어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때가 있다. 

이런 상태에 빠져든다는 것은 우뇌가 그만큼  바쁘게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α파는  우뇌에서 나오므로 우뇌를 활동시키려면  좌뇌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좌뇌를 진정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걷는 운동이다. 좌뇌가 잠잠해지면  우뇌에서 지혜가 솟아오른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명상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가만히 있으면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잡념이  생긴다. 그러므로 산책을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관해 생각하는  습관을 일상화하는 것이 몸에도 좋고 머리에도  좋다. 창조적인 생각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는 몸을  움직이면서 명상할 때  불쑥 튀어나온다.

철학자 칸트는 매일 빼놓지 않고 산책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칸트의 위대한 철학 사상은 산책을  통한 명상의 결과물인지도 무른다. 인간에게는 의식할  수 있는 세계와  의식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의식할  수 있는 세계에서 도출한 사고의 내용은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지 말고  몸을 천천히 주기적으로 움직여 좌뇌를 진정시키면서 모든 기억이 담겨 있는 무의식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경험한 일체의 기억은  물론 DNA에 새겨진  선조의 지혜까지 뒤섞여  있는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며 거기에서 굉장한 착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지에 들어설 때 뇌파는 α파 상태가 되며,  뇌내 모르핀이 충분히 분비된다는 사실을 현대  의학은 증명해 보이고 있다.

성인병에 걸리는 원인은 대부분 지방 때문이다. 누적된 지방에 강한 스트레스가 더해지면 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근육만 적당히 유지할  수 있으면 지방독의 해를 막을 수 있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은 혈관을 수축시키는 주요 물질이다.  이것을 많이 분비하면 혈관이 수축될 뿐만  아니라 급기야 막힐 위험도 있다. 항상  혈액을 원활하게 흐르게 하려면 근육이 튼튼해야 한다.

근육은 제2의 심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섹스가 끝난 후에  곧바로 잠들면 그대로 피로가 누적되어  몸에 해롭다. 어느 운동이든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에는 사용한 근육을 서서히  풀어주는 것이 피로를 막는 가장 좋은  요령이다. 근육은 물론 폐나 뇌 역시  갑자기 활동을 멈추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러면 활성 산소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30대 이후에는 맨손 체조와 같은  가벼운 운동을 통해 근육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맨손 체조는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움직여 주는  아주 좋은 운동이다.

근육에는  근긴장성섬유가 있는데, 이것은 뇌의 시상하부와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근육이 자극을 받으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운동 선수가 운동을 하는  도중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1만 3천보를 걸으면 근육을 유지하고 지방을 연소시킬 수 있다. 아마 이보다 좋은 건강법은 없을 것이다.

이때 명상을  하면 효과가 더욱  커진다. 동양의학은 전통적으로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압  요법이나 기공이라 불리는 건강법이 바로 그것이다.  심호흡과 체조를 통해 체내의 기와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기공은 성인병 예방에 특히 효과적이다.  동양의학은 뇌내 모르핀을 끌어내는 의학이며  그 지표로 삼는 것은  뇌파이다. 뇌파가 α파 상태가  되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그러나 뇌파를 쉽게 α파로 바꿀  수 있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조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는  뇌파를 α파로 바꿔 주는 기계를 사용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쫓기는 속에서도 뇌세포를  지키고 근육을 유지하기 위한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하루에 최소한  5000보를 걷는 것이다. 걷는 운동은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제3장 항상 뇌를 젊게 보존하는 식생활

뇌내 모르핀을 만드는 단백질

  동물이 이리저리  배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대부분 먹이를 구하기 위한 것이거나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암컷과  수컷이 만나 생식을 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정해져 있으나,  먹이를 찾는 작업은 따로 정해진 시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동물은 일생을 먹고  사는 문제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옛날에는 인간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음식물을 확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했으며, 이는 모든 투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먹을  것이 남아돌 지경이어서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확실히 우리는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본래  인간의 육체는 굶주림 상태를 전제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불시에 영양 보급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대비하여 식욕 기능이나 지방 비축 기능이  가동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음식물이  과잉 공급되는 상황에 대한 대응책은 의외로 미흡하다. 식료품이  남아도는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스스로  식생활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의 식생활에서 우선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칼로리  과잉이다. 다행히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구태여 강조할 필요는 없겠으나, 다만 꼭  한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그것은 양질의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백질은 뇌내 모르핀을 구성하는 곳이 뇌내 모르핀을 충분히 분비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미노산은  뇌 안에 극소량밖에 축적할 수 없으며  곧 소모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한꺼번에 많은 양의  단백질을 섭취해서 아미노산을 비축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뇌가 건강하고  활기차게 활동하도록 만들려면 양질의 단백질을 매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때  저칼로리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식사가 바람직한가. 좋은 식생활의 모델로 승려들이 먹는   정진요리를 들 수 있다. 전통적인 정진요리는 뇌의  젊음을 유지하는데 가장 좋은 식사 형태이다. 특히 콩을 가공한 두부나 밀병 그리고 삶은 나물 등은 양질의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하여 옛날 스님들이 치매를 예방하고 장수하는데  최고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식료품이 풍부한 시대에  옛날 승려와 같은 정진요리 식사법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식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먹는 것 역시 인생의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런 즐거움을 빼앗아 버리면 스트레스가 쌓일 수 있다. 맛 없는  음식만 먹거나 먹고 싶은 양을 마음껏  먹는다면 편식이나 과식으로 인한 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는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하더라도 편식이나 과식은 활성 산소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신체에 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고단백·저칼로리 식생활이 이상적 

  우리가 음식에서 섭취하는 영양소  가운데에서 단백질은 그다지 맛이 좋은 편이 아니다. 단백질 그 자체가 맛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맛있는 영양소는 지방이고 그 다음이 탄수화물이다. 단백질 식품이 맛있는  이유는 그 음식에 지방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단백질이 많이 들어 있다는 스테이크나 장어가  맛있는 이유도 지방질 때문이다.  따라서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이런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이 뚱뚱해지기 쉽다. 지방은 에너지원을 비축하는 데 가장 효율적이다. 인간의 몸은 지방이 체내에  들어오면 곧 저축 체재로 돌입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일 수밖에 없다.  지방이 아닌 다른 물질로 에너지를 축적하려면  체중 60킬로그램인 사람은 315킬로그램의 거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이라는 편리한 영양소로 에너지가  축적되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체구로 생활 가능한 것이며, 며칠 동안 굶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넘치는 것보다는 모자라는 것이 낫다. 지방 역시  필요 이상으로 축적되면 혈관을 막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식생활에서 한가지  주의할 일은 고칼로리  식사를 하면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등  남아도는 모든 영양소가 지방질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에너지로 축적되는 영양소가 모두 지방질로 바뀐다.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등 남아도는 영양소가 전부 지방으로 바뀐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지방 섭취만을 줄이는 방식으로 비만을 막는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3대 영양소는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어느 경우나  과식은 지방을 축적시키는 원인이 된다. 단백질은 체내에 들어가면 일단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각용도에 따라  재합성 되는데, 이때 아미노산이 100개 이상 합성된 분자를 단백질이라  부른다. 바로 이것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반면에 100개  이하인 경우에는  단백질이라 하지 않고  펩티드(peptide)라고 부른다. 뇌내 모르핀은 바로 이  펩티드 형태이기 때문에 에너지로 바뀌지 않고 호르몬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런데 뇌내  모르핀에는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며, 티로신 단체(홑원소 물질)만으로도 뇌내 모르핀과 거의 같은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금방  산화해 버리는 특성이 있어  유감스럽게도 티로신 단체만으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백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사용하고 남은 단백질은 모두 지방으로 변해서 혈관을  막게 되고 이것은 성인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항상 저지방·저칼로리 식사를  하도록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사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식료품이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영양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어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결국 칼로리 과잉이 되기  쉽다. 다행히 최근에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양학 책이 많으므로 이런 책을 참고하여 식생활  패턴을 조절하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다시 강조하지만, 고단백·저칼로리 식단을 생활화해야 하며 될 수 있는 한  지방의 섭취를 줄여가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방은 근육 내부에서 산화되므로 운동을 통해 지방을 연소시킬 수 있다면 적당량의 지방을  섭취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혈당치가 높은 사람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혈당치가 높으면 지방을 근육 속에 집어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방을 근육 안에  넣을 수 있는 혈당치는 일반적으로 100밀리  이하이며 아무리 높더라도 150밀리 이하가 되어야 한다. 혈당이 이 정도 수치라면 지방을  근육 내부의 대사경로로 보내 산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쌍 갈래 길에 선 것과 같아서  오른쪽으로 가면 지방이 산화되고, 왼쪽으로 가면  에너지로 비축되는 것이다. 지방은 당연히 파란 신호등이 켜진 길을 선택하게 된다. 바로 이때  신호등 역할을 하는 것이 혈당으로 150밀리 이하면 지방을  연소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있는 반면,  그 이상이면 섭취한 지방은  모두 비축 창고 쪽으로  가게 된다.

이러한 누적  현상을 막으려면 식후에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게 좋다. 식후 30분 후에 산책이라도  해서 가볍게 몸을 풀면 혈당치가 현저히 낮아지므로 지방을 연소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빨리 뚱뚱해지는 지름길은  식후에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일이다. 식사로 혈당치가 높아진  상태에서 다시 디저트로 혈당치를 높이고,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은 채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습관은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초원의 사자는 배가 부르면 벌렁 드러눕는다. 그것이 너무나 편안해 보여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눕게  된다. 그러나 사자나 기타 동물들이 식후에 바로 눕는 행위는 우리 인간과 정반대의 의미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언제 먹느냐 먹히느냐를 예측할 수 없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한 지방을 많이 축적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상황이 전혀  다른 우리 인간이 그것을 흉내 낸다는 것은  오히려 수명을 단축하는 지름길이 될 뿐이다. 

뇌 건강에 바람직한 식생활은  고단백·저칼로리 식사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하지만 눈앞에 먹을 것이 쌓여 있고 본능적으로 미식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매일매일 수도승 같은 식사를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미식 자체는 그다지 해롭지 않다. 단, 미식으로 인한 해를  막으려면 식후 30분이 지난 다음 가볍게 몸을 움직여 주어야 한다. 20분 정도 운동하면 충분하다. 가장 좋은 운동은 적당한 산책이나 파워  트레이닝이다. 여기서 식후  30분이란 시간을 설정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식사를 마친 직후에는 아직  위 속에 음식이 들어  있으므로 바로 움직이면 오히려  소화기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분쯤  지나면 먹은 음식이 소장으로 옮겨지므로 운동을 해도 무방하다.

  미식을 해도 살찌지 않고 근육을 붙일 수 있다. 미식을 하면서도  비만을 피하고 근육을 붙일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잠들기 전에 즐거운 생각을 하여  편안한 수면 상태에 들어가는 방법이 바로 그 것이다. 즐거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명상을 의미하므로 뇌파가  α파 상태가 되고 몸이  이완된다. 이런 상태에서 수면에 들어가면 체내에서  성장 호르몬이 분비된다. ‘잘 자는 아기가 잘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수면시에는 성장기에 있는 아이뿐 아니라  성인의 인체 내부에서도 성장 호르몬이 분비된다.  물론 성인의 경우는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 해도 키가 크거나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비된 성장 호르몬은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어 지방을 연소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성장 호르몬은 깨어 있을 때도 분비되지만, 이는 극히 소량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수면 중에  분비된다. 또한 명상 중에도 많이 분비된다.

일반적으로 식사  후에 명상을 하면 혈액 순환이 좋아지고  근육 안의 피의 양도 증가하며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는 효과가 덧붙여지기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고도 근육을 붙일 수 있다. 물론 운동이라는 능동적인 수단도 좋으나, 명상이나 수면으로 α파 상태를 유도해도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α파의 또 다른  흥미로운 효능은 혈당치를 억제하는 힘이 잇다는  것이다. 혈당을 낮추는  호르몬으로는  인슐린이 있고  혈당을  높이는  호르몬으로는 글루카곤(glucagon)이 있다.  그런데 글루카곤이 분비되기 전에는  반드시 다른 호르몬이 먼저 분비된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몹시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그것은 다시  췌장으로 하여금 글루카곤을 분비하도록 유도해서  혈당치를 높인다. 그러므로 자주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일이 되풀이  되면 점점 비대해진다.

위의 메커니즘에서 알  수 있듯이 식후에는 되도록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면 혈당치가 내려가고 지방이 잘  연소될 뿐 아니라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어 근육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  명상은 동양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인데, 이를 습관화하면 뇌내 모르핀의  분비는 물론이고 그 저장 창고도 커지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 검소한 음식과 가벼운  운동만 덧붙인다면 매우 효율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고령화 사회가 시작되자 노인의  건강법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론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노인들에게 ‘운동을  자주해서 몸을 단련하라’고 권장하는 방법은 조금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운동은  전혀 안 해도 해롭지만 지나치게 하면 더 해롭기 때문이다. 과격한 운동은 25세 정도로 마감 짓고, 그 이후에는 근육을 유지하는 정도의 가벼운 운동으로  만족해야 한다. 지방을 연소시키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운동도 효과적이지만 무엇보다 효율적인 것은 뇌내 모르핀을 잘 분비시키는 것이다. 명상이나 기공을 통해  뇌내 모르핀을 원활하게 분비한다면 얼마든지 건강한 근육을 유지할 수 있다.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뇌내 모르핀

  뇌 안에는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해마라는  부분이 있는데, 뇌내  모르핀은 이 부분을 활성화시켜 건망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효능도 가지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에이 텐 신경 즉 쾌감신경은 해마를 지배하고 있으며 뇌내 모르핀을 활성화시키는 신경  덩어리의 근본 역시 에이 텐 신경이다.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지  않으면 머리가 나빠진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  이것은 학습이나 기억력에 관계하는 해마 역시 뇌내 모르핀을 관장하는 에이 텐 신경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에이 텐  신경은 최종적으로 대뇌신피질의 전두연합야와 이어지는데 기억에  관한 한 해마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시각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굉장히 많은 사물을 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바로 기억에서 사라진다. 전철이나  길거리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접하지만 얼굴은커녕 마주친 기억조차 깨끗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뇌는 한 번 본  내용을 최소한 무의식의 형태로라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 기억을 담고 있는 저장 창고가 해마이다. 나중에  어떤 필요에 의해 저장 창고에서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뇌내 모르핀 덕분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뇌내  모르핀은 증폭 효과(앰플리파이어)를  발휘하기 때문에 해마에  담겨 있는 희미한 기억을  마치 라디오의 볼륨을 올리듯 증폭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그때그때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력이 좋은가 나쁜가는 머리의 좋고 나쁨이라기 보다는 뇌내 모르핀을 얼마나 분비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뇌내 모르핀이 원활하게 분비되지 않으면  기억력이 둔화되는 것이다.  물론 뇌혈관이 막히거나  뇌를 다치는 등의 물리적  타격으로 인하여 기억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뇌내  모르핀 역시 기억력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뇌내 모르핀이 기억력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한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  조로증으로 고생하는 58세의 남성이 찾아왔다.  이 남성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건망증이 매우 심했다. 1분전에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알츠하이머(흔히 노망이라고 일컫는 병으로  뇌기질 이상으로 생김. 정확한 원인이나 치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음)와 비슷한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을 진단해 보니 비만 상태는 플러스 21, 콜레스테롤 수치는 263이나 되었다.

이 환자 역시 우리 병원의 고정 메뉴인 식사와  운동, 명상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 환자는 대단한 낚시광이었다는 사실이 명상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낚시 얘기만 나오면 대단한 흥미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낚시를 이메이징 훈련 대상으로 이용했다. 우선 낚시에 관한 비디오를 본 다음  자신이 겪은 낚시 에피소드를 자랑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몇 번을 되풀이해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낚시에 관한 한 기억력이  정확히 되살아나는 게 분명했다. 그런 다음 명상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치료를 지속한  결과, 전에는 산책을 나갔다가 집을 찾아오지 못해 부인이 집 전화 번호를 항상  주머니에 넣어 줄 정도로 심했던 건망증이 이제는 30분 정도  산책하는 것은 아무 문제  없이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 흥분하여 자주  가족들과 말다툼하던 습관도  고쳤다. 비록 완쾌시켰다고 볼  수 없지만, 다른  방법이었다면 이 정도의  치료도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전에는  간호원이 쌀쌀맞다거나 아내가 오지  않았는데도 아내가 가져온 세탁물이라며 남의 세탁물을 가져가는  등 상당히 문제가 많았으나, 낚시를 이용한 명상 요법으로 어느 정도 기억력을  되찾게 된 것이다. 뇌파를 측정한 결과 아주 낮았던 α파의 비율도  상당히 높아졌으며, 총콜레스테롤 수치는 263에서 정상 수준인  207로 떨어졌다. 그리고 비만 상태도 플러스  21에서 마이너스 3까지 내려갔다. 일체의 부작용 없이  이만큼 향상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뇌내 모르핀 덕분이다. 인간의 뇌는 발육이 멈추는 단계부터 쇠퇴기로  들어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50∼180억개나 되는 뇌세포가  하루 10만개씩 죽어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차가 있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되면 활성 산소를 빈번하게 발생시켜 뇌세포의 노화를 가속화시킨다. 그러나 뇌내  모르핀은 기억이나 학습과 연관된 뇌를 – 특히 해마를 – 항상 자극시키므로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면 항상 건강한 뇌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활성 산소의 독을 중화시키는 물질

  인간이 일생 동안  들이마시는 산소량은 2천 1백만 리터라고 한다.  이것이 체내에서 소비할 수 있는 산소의 양이다. 그런데  체내에서 어떤 물질을 생성할 때 산소 가운데 일부가 활성 산소로 변화된다. 칼로리가  높은 식사를 하는 것 역시 인체에 많은 일을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 활성 산소는 적게 발생할수록  좋다. 활성 산소 자체가 몸에 해로운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인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소의  양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급적 스트레스를 피하고 산소  소비량도 최소한으로 줄여서 활성 산소가 발생할 요인을 줄여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식사량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인간이  먹는 음식 역시 산소와  마찬가지로 일생 동안 체내에서  소비할 수 있는 양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죽을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양이 저축의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는 것은 저축한 양을 조금씩 찾아 쓰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축 액수가 1억원일 경우 1년에 백만 원씩 꺼내  쓴다면 100년을 쓸 수 있는 반면, 2백만원씩 쓴다면 50년만에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과식을 하는 것은 ‘가늘고 길게’ 사는 대신 ‘굵고 짧게’ 사는 쪽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음식물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많이 먹는 것은  몸에 해롭다.

가급적 적은 양을  효율적으로 먹고 동시에 이미  발생한 활성 산소를 중화시켜 활성 산소의 해를 최소한으로 줄여가야 한다.  가능하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키는 방식으로 활성  산소를 줄여나가는 게 좋으나  활성 산소를 중화시키는 다른 물질도 많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활성  산소를 중화시키는 데  가장 좋은 물질은 수소다.  수소를 무공해 에너지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산소는 820밀리볼트의 플러스 전위를  갖고 있는데 비해 수소는 마이너스 420볼트의 전위를  갖는다. 가급적이면 마이너스 전위를 갖는  물질이 우리 몸에 이롭다. 갓 태어난 아기는 대개  0에서 100밀리볼트 이내의 전위 상태를 유지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차차 플러스 쪽으로  바뀐다. 따라서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물질이 마이너스에  가까우면 그만큼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수돗물이 플러스 상태가 가장 높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수돗물이  약보다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백분(염소)이 투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염소를 투입하는  이유는 세균을 죽여 물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의 일환인데 이 같은 발상이야말로 현대인을 온갖 질병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최대의 함정이라 할 수 있다. 세균을 죽이기  위해 염소를 투입한다는 발상은 벌레에게 살충제를 뿌리고 세균성  질병에 항생물질을 투여하는 것과 똑같은 대증요법(원인 치료는 하지 않고 그때그때 증상에 맞는 치료를 하는 것)적 발상이다.

당장은 효과를 볼지 모르나 이런  방법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고질적인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항생 물질에  의지한다는 것은 영원히 쫓고  쫓기는 게임을 계속하는  결과이며 오히려 사태는  점점 악화된다.

염소를 넣은 수돗물은  인체 내부에서 새로운 화학  반응을 일으켜 발암 물질을 발생시킬 위험성도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염소를 쏟아 부은 수영장이다. 보건소가 이것을 의무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한심스러울 뿐이다.

수영이 건강에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염소를 많이 투입한 물에서 수영을 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운동 선수가 일반인에 비해 수명이 짧다고 했는데, 수영 선수는  다른 운동에 비해 현역 활동 기간이 비교적 짧아 그 해를 조금은 피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어린이를 상대로 한 수영 교실이 유행이며 중년이나 노인들 가운데에도 건강을 위해 수영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수영장 측이 지금처럼  많은 염소를 물에 쏟아 붓는다면 수영을 통해 얻는 플러스 효과와 염소로 인한 마이너스 작용을 비교하면 수영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 될 정도다.

물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염소를 넣어야 한다는 것이 보건 당국의 주장이지만, 노송 나무 에센스(essence)나 자외선 살균법으로도 얼마든지 물을 깨끗이 할 수  있다. 최근 질병에 걸리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살충제·농약·항생  물질 등의 약품류와 수영장의 염소·수돗물 같은 것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아이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물은 몸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매일  보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질이  나쁜 물은 노화를 촉진시키고 성인병의 원인이 되므로 될 수 있는 한 정수된 물을 마셔야 한다. 시판 중인 미네랄 워터(mineral  water)는 수돗물보다 안전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매번 사서 마신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반면에 수돗물은 한 번 끊이는 정도로  상당히 안전해지므로 좀 귀찮더라도 건강을 위해서 꼭 끓여먹는 것이 좋다.

최고의 자연 식품인 된장

  뇌세포 활성화에 특히 도움이 되는 식품으로  된장을 들 수 있다. 자료를 보면 된장은  마이너스 전위 200선 가까이  있는데, 이것은 된장이  최고의 자연 식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님들이 콩을 가공한  식품을 많이 먹는다는 사실은 콩과 관련된  식품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콩은 양질의 식물성 단백질일 뿐 아니라 값도 저렴해서 상당히 경제적이다. 청국장이나 된장국  등 콩을 이용해서 만든 음식은 아미노산  밸런스가 극히 뛰어나 뇌내 모르핀을  만드는 재료로 가장 적합하다. 이런 음식은  쌀밥과 같이 먹으면 특히 좋은데 쌀에 부족한 아미노산은 콩에  들어 있으며, 콩에 부족한 아미노산은 쌀에 들어 있어서 서로 결점을 보완해 최고의 아미노산 밸런스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된장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동물의 간이나 신장 등의 장기류 식품도 권장할 만하다. 닭이나 돼지, 소등의 내장은 재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활성 산소의 해를  퇴치하는 좋은 소재로 작용한다. 녹차의 전위는 0이며, 이보다 약간 우수한 식품이 클로렐라(chrorella)이다. 일반 식물은 햇빛을 받으면 대량의  활성 산소를 발생시키지만 클로렐라는 햇빛을 받아도 활성 산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과다한 일광욕은 건강에 해롭다는  발표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자외선은  생명체에 위험한 존재다. 그러나  식물은 자외선 에너지를  이용하여 광합성 작용을  하므로 태양 광선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식물은 태양 광선에 시들지 않는  방어 기구를 갖추고 있다. 그 비밀이  바로 엽록소이며 엽록소 덩어리가 바로 클로렐라인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클로렐라를 복용하고 있는데 그 효과가 뛰어나다.  50대 중반인데도 흰머리가 없고 나이에 비해 너무 젊다며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다. 녹차 역시 클로렐라와 더불어 항산화식품으로 권장할 수  있다. 그리고 녹황색 야채도 엽록소와 항산화 비타민(비타민  C, A, E)을 얻을  수 있으므로 신선한 것을  잘 조리해 먹으면 좋다.  건강 식품 가운데에서는 로얄제리 같은 것을  추천할 만하다. 참고로 설명한다면, 도표에 있는 황송죽은 한방 약의 일종이다.

α파를 발생시켜 기억력을 좋게 하는 식품

  프랑스에서는 한 식품을  대상으로 한 흥미 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북대서양 심해 1500∼2000미터  지점에서 서식하는 ‘모르바 가디데아’라는 생선의 내장에서 추출한 영양  보조 식품이 바로 실험 대상이었는데, 이것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줄고 뇌파가 α파로 바뀐다는 것이다. 모르바(심해어)가 바로 그것이다.  뇌파가 α파가 된다는 것은 뇌내 모르핀이 그만큼 잘  분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는 것만으로 플러스  발상이나 명상을 한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바쁜 현대인에게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프랑스 국립  뇌 노화 방지 연구소’가 행한 임상 실험의 개요를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실험 대상은 35세에서 75세에 달하는  남녀 백 명이었고, 실험 목적은 기억력 저하를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모르비라고 하는 심해어 캡슐(이하 모르바  캡슐이라 한다)을 투여할 경우에 일어나는  변화를 조사하는 것이다. 별도로 플라시보 그룹(placebo, 비교  대상으로 삼기 위해 가짜 약을 먹인 그룹)을 만들어 60일간 매일 모르바 캡슐을 투약하고, 투약 전·15일째·60일째 세 차례에 걸쳐  기억력 테스트를 했다.

위 연구소는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실험 결과  우리는 모르바 캡슐이 심리적 안정과 집중력을 증진시켜 장단기간에 걸쳐 기억력을  개선시킨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 병원에서도 모르바 캡슐을 사용해 보았다. 위염·간염·췌염  환자를 재상으로 석 달 동안 매일 모르바 캡슐을 복용시킨 다음 뇌파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30일이 지난 다음부터  α파가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60일,  90일 기간이 지나면서 더욱  좋아졌다. 이것은 모르바 캡슐이라는 영양 보조  식품이 뇌의 에이 텐 신경(쾌감신경)을 자극시켜 기분을  전환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에서 실시한  연구에서는 기억력 향상이 확인되었고, 우리 병원에서 실시한 연구에서는 릴랙스(relaxation)효과를 확인한 셈이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뇌파를 측정한 결과, 계산이 잘  되고 있을 때에는 뇌파가 α파 상태고 계산이 잘못된 순간  바로 β파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뇌의 계산  기능은 좌뇌로 알려져 있는데, α파가 방출된다고  하는 것은 우뇌가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뛰어난 주산 실력의 소유자가  암산을 할 때도 뇌파는 α파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고도의  사고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는 좌뇌가 아닌 우뇌가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뇌는 선천뇌라고도 한다. 그래서 우뇌를 잘라내면 본능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젖을 빨 수 있는 이유는  선천뇌에 그 본능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간혹 전생에서 겪은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 역시 선천뇌에 담겨 있는  기억이 의식 표면에 나타난 현상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그런 기억을 끌어낼 수 없다. 그 기억은 DNA와 RNA에 새겨져  있어 쉽게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의 자아는 모두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본능이나 생리적인 욕구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본능적·생리적 욕구에는  원초적 욕구뿐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정보도 입력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명상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나름대로 접근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이나  뉴턴도 순간적인 번득임을 통해  위대한 법칙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뇌에 입력되지 않은  것이나 기억에 없는 정보는  발휘할 수 없다. 반면에  이것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도 놀라운 능력이 잠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정보를  의식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 열쇠가  지금까지는 기도나 명상 또는 편안한 수면이었다. 그러나 모르바 캡슐처럼 기억력을  개선시키고 집중력을 증강시킬 뿐 아니라 α파까지 분비시키는 식품이 발견된다면, 그런 식품을  섭취하여 무의식의 세계로 접근해 가는 시대가 올는지 모른다. 현재는  ‘β-엔돌핀 연구회’라는 곳에서는 모르바 캡슐에 관해 구체적으로 연구한다고 한다.

바둑의  명인들이 대국할 때도 뇌파가 α파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 천재란 뇌파를  α파 상태로 바꾸어 뇌내  모르핀을 그만큼 쉽게 끌어내는  요령을 체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는 생활을 일상화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내 모르핀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천재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평화롭고 안전하고 풍요롭게 변할 것이다.

스트레스가 장기간 누적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통풍이란 병이 있다.  요산이 체내에 일정 정도 고이면 바늘처럼  뾰족한 결정체로 변해 신경을 건드리게 되는 몹시 통증이  심한 병이다. 요산이 고인 정도가 이 병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요산은 세포가  새로 만들어질 때 생기는 일종의 가스로 오줌이나  담즙의 형태로 배설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것이 갑자기 많이 발생하거나 배설이 원활하지 못해 체내에 고이면 바람이 불기만 해도 심한 통증을 일으키는 통풍이라는 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요산은 신장 장해나 요로결석(vrinary stone) 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요산이 고이는 원인은 지나친 운동이나 강한  스트레스 그리고 음식 때문일  수 있는데, 생선의 내장  및 육류나 조개류에 포함된 퓨린(purine)이라는 물질이 그 주범으로 밝혀졌다.  통풍은 미식을 삼가는 것이 좋다. 또한 요산은 활성  산소를 아주 많이 발생시킨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과잉 누적된  요산은 단순히 인체 내부에 고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량의 활성 산소를 발생시켜 세포에 상처를  입히고 염증을 유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신장  기관에 발생하면 오줌이 잘 나오지 않게 되며  급기야 만성 신장 장해로 발전하여 생명을 위협할 위험도 있다.

병에  걸리면 약을 먹는다.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  신세를 진다. 약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철썩 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거북하지만,  약은 대부분 우리 몸에  독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진통제를 먹었다고 하자. 그러면 진통제는 혈액안에 들어가서 세균을 물리치는  호중구라는 백혈구를 활성화시킨다. 그러면  백혈구는 퇴치할 세균이 없는  상태에서도 활성 산소를 발생시킨다. 또 위  속에는 헤리코박터(helico bactor pylori)라는 세균이 있는데, 백혈구가 이 세균에 닿으면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 그러면 이 활성 산소는 과산화수소로  변해서 뇌 안에 있는 염분과 뒤섞여 차아염소산이라는 물질을  발생시킨다. 차아염소산이란 앞에서 인체에 해롭다고 설명한 염소  가루를 말한다. 만일 체내에 염소 가루가  생겨나 요소와 섞이면 맹독성  발암물질로 변한다.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체내에 생성되는 발암  물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담배를   피우면  벤즈파이렌(benzopyrene)이란 발암 물질이 나온다. 이 물질은 담배뿐 아니라 훈제 식품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햄의 발색제로 사용되는  아초산염은 위 속으로 들어와서 단백질 분해 물질과 만나 니트로소아민(nitrosoamine)이라는  발암물질을 만든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대를 사는 우리  인간은 발암성 물질을 끝없이 자기 입에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물질이  활성 산소를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활성 산소를 분비시키는  물질은 너무나 많다. 저절로 발생하는 경우를 포함시켜 모두  다 조사한다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활성 산소를 가장 많이 발생시키는  원인은 뭐니뭐니해도 스트레스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식품이나  약품 등도 원인으로 작용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스트레스인  것이다. 게다가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까지 분비시킨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결국 이 스트레스는 현대인을 질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원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암도  발생시키고 뇌혈관도 막히게 하는 등  모든 질병의 근원으로 작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본래 타고난 120년의 수명을 고작 80년에서 마감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활성 산소는 인류의 가장 커다란 적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에는 스트레스가 자리잡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할 때 우리 인간의  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은 스트레스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심리적·생리적으로 일그러진  상태, 간단하게 말해서 정신적으로  ‘싫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불안이나  걱정, 욕구 불만이나 증오,  질투나 부러움, 열등감 등의  모든 마이너스 발상이  여기에 속하는데, 바로 이럴 때  달려드는 스트레스가 우리 인간을 병약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을 피하게 하는  것이 뇌내 모르핀이다. 뇌내 모르핀이 나오면  스트레스는 마이너스로 작용하지 않는다. 스트레스에는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스트레스와 플러스로 작용하는  스트레스가 있는데, 이것은  수용하는 자세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찬  생선을 보고 ‘발암 물질이 있을 텐데  괜찮을까’라고 걱정하면서 먹으면 마이너스 스트레스가 된다. 간이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술을 마시면 정말로 간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담배를 피울 때도 폐암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등의  자책감을 느꼈다고 하자. 그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으로 발전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그로 인해 활성 산소가 발생하고, 그 결과 우리 인체가 어떤  해를 입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더라도 ‘아, 이제  일이 끝났구나. 담배 맛 정말  좋군!’이라고 생각한다면 뇌내 모르핀인 β-엔돌핀이  분비되어 인체에 그만큼 이로운 작용을 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습관의 지배를 받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마이너스 발상을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마이너스 사고를 하고 플러스 발상을 하는 사람을 계속 플러스 사고를 하게 된다.

플러스  사고와 마이너스 사고가 일정 기간 누적되면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뇌의 성장 완성기인 25세 전후까지 육체적으로 동일한 조건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이 ‘플러스 발상’의 인간형과 ‘마이너스 발상’의 인간형으로 나뉘어 생활하다  20년 후에 만났다고 하자. 외관상 나타나는 연령이나 건강 상태 그리고 노화의 정도 등을 볼 때 전자와 후자는 상당한 차이를  나타낼 것이다. 이것은 뇌내 모르핀을 정복한  사람은 인생을 정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증명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산화는 두렵다, 오래된 음식은 피하자

  산소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보면 산소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산소는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물질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몸 밖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그것을 산소로 연소시켜 에너지를  얻는다. 만약 산소가 없다면 인간은 물론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물이 멸종하고  말 것이다. 산소는 이렇게 모든 생물에게 에너지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산소는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반면 앞에서 설명한 활성 산소로 변화되어 질병을 일으키고 노화를 촉진시키며 끝내는 생명까지 앗아가기도 한다. 공기  중에서 산소가 일으키는 다음의 작용을 보면 산소가 얼마나 나쁜 역할을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쇠에  녹이 슨다.

② 고무가 탄력을  잃는다.

③ 버터나 식용유가 변한다.

④ 껍질을  벗겨 놓은 사과가  변색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소가 독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지구에서 제일 먼저 생명체의 형태로 생겨났던 미생물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지구상에 최초로 생겨난 미생물은 처음에는 산소 없이도  살 수 있었다. 오히려 산소가 있으면 곤란한 생명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태양 광선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드는 마름이 번식하기 시작했고, 이 수초는  노폐물로 산소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인간이 산소를 들이마시고 탄산가스를  토해내는 것과 정반대 현상이다.

이렇게  마름이 산소를 점점 토해내자 산소가 없이도  잘 자라던 미생물은 산소독의 해를 입어 모두 멸종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에 산소를 이용하는 미생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소가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는 미생물을 호기성 미생물이라 하는데, 산소로 구성된  대기권이 지구를 에워싸게 되면서 이 같은 호기성  미생물이 지천에 퍼지게 되었다. 한편 산소가  있으면 살지 못하는 미생물을 혐기성 미생물이라 하는데, 이런  미생물은 거의 사라지고 공기가 닿지 않는 깊은 땅  속이나 바다 속 혹은 인간의 내장 속에서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의 체내에는 산소를  꺼리는 혐기성 미생물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포 핵이 바로 그것이다.  세포 핵 주변에는 에너지 발전소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미토콘드리아의 활력이 떨어지면 세포의  핵과 산소가 닿게 된다. 그것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면 핵은 산소와 부딪치는 순간  바로 죽어버린다. 이 현상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산소는 인간이 사랑하는 에너지를  만드는 데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지만 동시에 독으로 작용하는 부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산소를 캡슐로 싸서 에너지를 만들 때만 조금씩 사용하고 그 외는 공기가 없는 환경에서 살 수 있다면 인간의 생명이 몇 백 년으로 연장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소는 생물에게 독약이나 다를 바 없는  물질로 작용하는 것이다. 식품을 공기 중에  두면 점점 상하게 되는 것이 그  증거 가운데 하나다. 고기나 생선은 산소에  닿으면 10초 단위로 상태가 나빠진다. 이것이 산화라는 현상이다.

산화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체내에 산화물을 집어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녹을 체내에 집어넣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그 인체 역시 그만큼 산화가 촉진된다. 이 같은 산화를 억제하는 물질을 항산화 물질이라  하는데 비타민C,비타민A 그리고 비타민E 등이  이 같은 작용을 한다. 야채나 허브(herb)  등의 식품은 자체 내에서 스스로 산화를 막는 항산화 물질을 만들고 있으므로 이런 식품을 섭취하면 항산화력을 키울 수 있다.

참고로 식품을 섭취할 때 가장 이상적인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주스를 마실 경우에는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즉석에서 갈아  미시는 것이 가장 좋다. 캔에 넣어 아무리  잘 저장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일정 부분의 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밥도 미리 썰어 놓은  생선은 이미 상당 정도  산화가 진행된 상태이므로 즉석에서 잘라 만든 초밥은 그 신선도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흔히 식이요법을 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얼마나 먹느냐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기 쉬우나 실은 그 재료가 얼마나 신선한가 하는 점에 제일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는 오래  된 식품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신선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식품 가운데서 특히 주의할 식품은 기름을 사용한 가공 식품이다. 기름을 사용한 가공식품은 대개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는데, 식물성 기름은 불포화지방산이 많기 때문에 분자 구조가 불안정한 상태로 체내에 들어가서 역시 분자 구조가 불안정한  활성 산소와 섞이기 쉽다. 이 양자가  결합되면 과산화지질아라는 녹 성분으로 변화되어 노화와 성인병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일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 정년 퇴직 후에 성인병에 걸리는 이유

  식사가 건강이나 젊음을 유지하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기 나름대로 올바른  식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고령화  사회가 되어 전보다 오래 살 수 있다고  해도 건강하지 않으면 즐거운 노후를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암·심장병·뇌혈관 장해라는 이른바  3대 성인병은 변함없는 위세로 사람들의 인생을  괴롭고 음울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뇌의 노화나 치매 현상까지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심각하게 걱정할 나이가 아닌데도  건강이 나빠져 고생하는 사람 역시 늘어나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성인병으로 도중하차하는 사례나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던 회사원이 정년 퇴직을 고비로  갑자기 쇠약해지는 예도 흔히 보게 된다.  WHO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일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시간과 돈을 충분히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실험 대상으로 선정된 사람들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음껏 놀아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얼마 안 가서 성인병 형태로 나타났다. 

일을 하는 것은 건강에  좋다. 이것이 WHO의 실험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일을 좋아하고 기기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한테는 열심히 일하는 과정 자체가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  계기가 된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일할 기회를 빼앗기면 중성 지방이 증가하거나 혈당치가 높아져서 쉽게 질병 위험 권에 들어간다. 의학적으로 볼 때, 정년 후에 치매 현상이 나타나거나 질병에 걸리는 현상은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현대 사회는 WHO의 실험에서  부여한 상황을 정년이 지난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떠안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60세라는 연령은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충분히 건강한 나이다. 그런데도 강제로  일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돈만 있다면  먹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굶어 죽는 상황을 체험하기가 오히려 힘든 시대라 할  수 있다. 돈도 연금이라는 형태로 일정액을 지급받고 있다. WHO의 실험과 너무나  비슷한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환경에 처하면 어떤  인간이든 성인병에 쉽게 걸린다는 WHO의  실험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건강과 장수는  병행한다. 유일한 예외는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식물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것뿐이다. 이것을 제외하면  건강과 장수는 거의 대부분 병행한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창 일할 나이인 60세 고참 대부분은 아주 쉽게  질병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다. 통계적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억지로 생명을 부지하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이 같은  사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부는 국가 시책이나 법률 문제를  떠나 국민 개개인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주는  차원의 행정을 펼쳐야 할 것이다.

마즈로의  욕구 단계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는 갖가지 욕구가 있다.  그리고 그 욕구는 각기 단계가 있어 저 차원적인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다음 단계의 욕구로 발전한다. 따라서 개개인이  욕구를 느끼는 단계는 각자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을 한데 모아 관리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욕구를  파악하면 총체적인 관리가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 일반은 과연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을까. 건강  분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다.

②치매를 예방하고 싶다.

③오래 살고 싶다.

④기억력을 유지하고 싶다.

⑤노화 속도를 늦추고 싶다.

⑥퇴직 없이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

⑦피로를 풀고 싶다.

⑧암을 비롯한 기타 질병에서 해방되고 싶다. 

⑨살을 빼고 싶다.

⑩스트레스를 피하고  싶다.

⑪여유를 즐기고 싶다.

⑫정력을  유지하고 싶다.

대충 이런  내용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욕구를 전부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즐겁고 활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며, 이런 사람이 늘어난다면 사회 전체에 활력이 생길 것이다.

뇌를 활성화시키는 식생활의 세 가지 포인트

  병이란 ‘생물체의 몸에 생리적으로 이상이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 종래의 견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를 통해 병이 인간의 마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잇달아 밝혀졌다. 인간의  마음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및 시대와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다. 사회 환경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고 한 인간의 마음은 그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의사가 한 인간을 진찰할 때, 육체를 살펴보고 혈액이나  심전도를 검사하는 등의 의료  행위 그 자체만 중시하면 그 사람의  질병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신봉하는  사회 이념과 사회나 가정에서의 위치도 자세히  파악하여 질병이 생기게 된 원인을 다각도로 규명하여야 한다.  물론 의료 행위 그  자체만 충실히 하면 현재의  건강 상태는 파악할 수  있겠으나, 앞으로 전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단선적인  예측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와 ‘몸’과 ‘마음’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진정한 건강이라 말할 수 없다. ‘병은 마음에서’라는 옛말에 나오는 ‘마음’은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 시대의 환경에 따라 영향력을 발휘하는 양태가 다르다 할 수 있다.

병의 유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으로  의료 행위가 끝나는 시대는 지났다. 앞으로는 병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즉  예방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병을 미연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영양 보충, 적당한 운동 그리고 스트레스의 해소가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명상으로 이완 상태를  만들어서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고 적당한 운동을 통해 근육을 붙이고  기존의 근육을 유지시켜야 한다.

그리고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착실하게 지키는 식생활이 필요하다. 

①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한다.

②혈관 막힘을 예방한다. 

③활성 산소를 중화시킨다.

식생활로 뇌의 건강을 유지하려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우선 항목 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설명해 보겠다. 

뇌내 모르핀은 누차 말했듯이 단백질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사슬처럼 엮여 만들어지는 물질이므로 아미노산이 필요하다.  반면에 아미노산은 식사를 통해서  섭취한 단백질이 분해되어 생겨난다. 아미노산은  20종이 있으며 그 중 8가지는 체내  합성이 불가능한 필수 아미노산이므로 음식물에서 섭취해야 한다.  나머지 12종은 체내 합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양질의 단백질을  매일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지칠 뿐 아니라  뇌가 금방 망가져서 노망하거나  빨리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뇌가  지치거나 망가지는 데는 개인차가 있다. 뇌세포를 활성화시켜 주면  망가지는 세포 수는 현저하게 감소한다. 여기서 뇌세포 활성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뇌내 모르핀이므로 뇌에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현재  뇌내 모르핀은 20종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티로신은 아미노산  한 개로 이루어진 극히 단순한 물질이지만 마약 모르핀과 아주 흡사하며 그 작용도 거의 같다. 마약 모르핀은  중독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르지만  이것은 그런 위험이  전혀 없다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 티로신이 뇌내  모르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단백질은 지방처럼 한꺼번에 많이  먹어둘 수 없는 영양소이므로 필수 아미노산을 많이 포함한 음식을 매일 충분히 먹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육류와 생선류  그리고 콩류가 좋은데, 이 식품들은 단백질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티로신 그 자체는 필수 아미노산이 아니지만, 뇌내 모르핀은 티로신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므로 각종 아미노산을 골고루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식생활에서 항목 ②를  충족시킬 방법에 대해 정리해 보자.

혈관을 막히지 않게 하는 데는 제 2의 심장이라 불리는 근육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제 2장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물질은 식사를 통해서 체내에 들어오므로 식생활 역시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혈관이 막히는  원인으로 우선 지방을 들 수 있다. 지방은 음식 맛의 원인으로 작용하므로 인간은  지방이 많은 음식을 즐겨 먹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지방질이 적은  음식은 혈관에 좋지만 맛이  없어서 식사하는 즐거움을 잃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을  섭취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지방 자체를 피하는 식사법보다는 전체적으로 저칼로리를 지향하는 식사법을 통해 음식 맛도 느끼고 체내로 들어온 지방  자체도 소모시키는 방식이 가장 무리가 없는  것이다. 저칼로리 식사법은 예로부터 수도를 쌓는  사람이 지켜야 할 철칙 가운데 하나로 알려질 정도로 중요하다.  반면에 과식은 젊음과 건강을 해치는 최대의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과식은 몸에 해로운 것인가. 남아도는 영양소가 모두 지방으로 변해 혈관에 누적되기 때문이다. 지방은  우선 혈관에 고인 다음 간장과 피하의 순서로  고이게 된다. 이처럼 누적되는 지방의 특성  때문에 우리는 몸을 움직여서라도 소모시켜야  한다. 지방을 산화시키려면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 역시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세 번째로 식생활에서 항목 ③을 충족시킬  방식에 대해 정리토록 하겠다.

활성 산소를  중화시키는 대책으로 바람직한 것은 항산화 물질이 많이 들어  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항산화물질이란 산화를 억제시켜 주는  물질로 비타민 C, A, E 등이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최근에 녹차나 참깨,  녹황색 채소나 각종 식물, 어패류 등에서도 새로운 항산화물질이 발견되고 있다.  또 하나는 체내에서 활성 산소 중화제  SOD를 충분히 합성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SOD는 효소 즉 단백질이므로  여기서도 단백질을  충분하게 섭취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한다.  또 하나는  미네랄(mineral/광물질. 생리  기능에 필요한 광물 화합물이나  광물 원소)이다. 음식을 통해서 철이나  아연 그리고 셀레늄(selenium)  같은 미네랄을 충분히  섭취하면 체내에 SOD 합성 능력을  증가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다음으로 몸을 녹슬게  하는 성질을 가진 기름, 특히  식물성 기름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식물성 기름에는 불포화성 지방산이 많은데, 이것이 체내에  들어가면 활성 산소와 결부되어 과산화지질이라는 일종의  녹을 만들게 된다. 이 녹이 단백질과  합쳐져서 노인성 검버섯의 노화 색소를 만든다. 물론  불포화지방 가운데에는 인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있으나, 평소 식생활을 통해서 충분히 섭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방을 포함한 식품은 물론 드레싱이나 마요네즈 같은 형태로 기름을 과다 섭취하는 식생활은  적극적으로 피하는 것이  좋다.

활성 산소는  체내에서 에너지를 발생할 때 반드시  발생한다. 이것은 피할 방법이 없다. 그뿐  아니다. 활성 산소는 자연계에서도 발생한다.  저기압이 되면 공기 중에서 다량의 활성  산소가 발생하여 지병으로 시달리는 사람의 증상을 악화시키는  정도의 영향을 미친다. 원래 공기 중에는 0.2%의 활성  상소가 있다. 즉 활성 산소는 천재와 같은 것이어서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살아 있는 한 그 해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독을 중화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음식의 재료와 먹는 양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고칼로리 식사를 하면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등 남아도는 모든 영양소가 지방으로 변한다. 뇌를 위해서는  고단백질 식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이에 따른 지방의 섭취가 문제가 된다. 지방은 혈관  막힘의 큰 원인이 되므로 그것을 막으려면 저칼로리 식품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쾌적한 수면을 취하면 체내에서 성장호르몬이 분비된다. 성장 호르몬은 잠자고  있는 사이에도 근육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식후에 흥분하게 되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나오고 이것은 글루카곤이라는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켜  혈당치를 높인다. 기억력에  관여하는 뇌 속의 해마는 에이 텐 신경(쾌감신경)의 지배를 받는다. 뇌내 모르핀을 이끌어 내는 신경 덩어리의 근본도 에이 텐 신경이다.  산소는 플러스 전위를 가지며 수소는 마이너스 전위를 갖고 있다. 마이너스 전위를 갖고 있는 물질이 몸에 좋다.

수영 자체는 건강에  좋으나 염소 분말을 투입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행위가 된다. 식수로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 될 수 있는 한  정수된 물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

된장은 뇌세포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최고의 자연 식품이라 할  만큼 건강에 도움을 준다.  콩을 사용한 식품은 아미노산 밸런스가 뛰어나 뇌내 모르핀의  재료로써 가장 적합하다. 특히 쌀밥과 콩을 곁들이면  쌀에 부족한 아미노산은 콩이 함유하고 있고,  콩에 부족한 아미노산은 쌀이 함유하고 있어 결점을 상호 보완하여 최고의 아미노산 밸런스를 이룬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젖을 빨 수 있는 것은 이미  뇌 안에 그러한 노하우가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DNA, RNA에 새겨져 있으며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아는 늘 자각하고 있다. 이것은 본능이나  생리적 욕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독성인 활성 산소가 많이  발생되는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란 신체에  가해진 심리적, 생리적 일그러짐을 말한다.   매사에 마이너스로  받아들이면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불안이나 근심, 욕구불만이나 증오, 질투나 부러움, 열등감  등의 마이너스 발상은 모두 스트레스의 원천이 된다.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면 스트레스가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일을 즐기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면, 중성지방이 증가하여 혈당치가 높아지고 곧 질병 위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샐러리맨이 정년 퇴직 후 치매나 성인 병에 걸리게 되는  원인은 좋아하는 일로부터 소외 당한 결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뇌내 모르핀을 잘 분비시킬  수 있는 식생활의 포인트는  다음 세 가지이다.

①양질의 단백질(아미노산)을 섭취한다.

②혈관 막힘을 예방한다.

③활성 산소를 중화시킨다.

제4장 뇌가 젊으면 125살까지 살 수 있다

 지금까지 간과되어 온 뇌의 건강

  최근 평균 수명이  80세에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은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의 수명은 이보다 훨씬 긴 120∼125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물체로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다. 가끔 개나 고양이의 수명은 어느 정도이며  말의 수명은 몇 년인가 궁금할 때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명’이란 한계 수명을 말한다. 인간의 한계 수명은 대충 계산해 보더라도 100년이  넘는다. 동양의학에서는 ‘160세설’이라는 말도 있으며, 신선도 같은  책에는 장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근거가 없으니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일본만 하더라도 백 살 이상의  노인이 5천여명이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초장수로 볼 수는 없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인간 본래의 수명을 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25살이라는 한계 수명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이것은 뇌의 발육 기간을 근거로 산출한 수치이다. 인간의 뇌는 대개 25살까지 성장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계  수명은 뇌 성장 기간의 5배이므로 25×5=125년이라는  기간이 산출 되는 것이다.  척추 동물 모두가 이  등식의 적용을 받는다. 우리 집안에는 109살, 107살,  105살로 100살 이상 장수한 선조가 세분이 계시나, 아직 110살  대로 들어간 사람은 없다. 나는 금년에 56살인데 어떻게든 그  선을 돌파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학문 수준으로 볼 때 이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욕심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한계 수명보다 일찍  죽는가. 평균 수명을 나타내는 통계 수치는  사고와 유아의 사망도 포함한 것이므로  실제보다 낮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00살 이상 장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해도 아직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다. 분명 어딘가에 수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대부분  라이프 스타일에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식생활이다. 과식이나 편식, 화학 물질의 영향 등이 특히 수명을 단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 철야를 하거나 밤낮을 거꾸로 사는 생활도 바이오 리듬(biorhythm/육체·감정·지성 등을 통해  일정한 주기로 나타나는 생명  활동 리듬)를 깨뜨려 몸에  무리를 준다. 세 번째는 부족한 운동량이 몸을 녹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뇌라고 할  수 있다. 뇌가 튼튼하고 근육만 어느 정도 붙어 있다면 100살 이상 사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뇌를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몸을 단련하고 식사에 신경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뇌를 단련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흔히 머리를 쓰라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누누이 설명했듯이 무턱대고 쓴다면 아무 효과도 없다.

건강과 장수를 위해 머리를 쓰라는 것은 플러스 발상을 습관화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플러스 발상을 하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면 뇌세포가 활성화된다. 그래서  라이프 스타일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  언제나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성인병도 예방할 수  있다. 장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대의 적은 성인병이다.

현대처럼 의료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서도 성인병은 좀처럼 고치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현상일는지  모른다. 성인병은 만성 질환의 일종이기 때문에 아무리  퇴치시키려고 노력해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인병은 그  원인의 80∼90%가 누적된 스트레스, 즉 마음의  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학은 병이  난 국소만 치료하고 가장 중요한 마음의 치료는  소홀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어떤 면에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서양의학은  병이 난 국소는 얼마든지 진단할 수 있지만, 마음을 판단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가능하다. 뇌생리학의 발달로 마음의 변화를  상당 부분까지 물질적으로 해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뇌내  모르핀을 잘 분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뇌 안의 물리적 환경도 변화된다. 이런 변화를 관찰하면 그 사람이  건강한 몸으로 지낼 수 있는 지, 가까운  장래에 어떤 병에 걸리게  될 것인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아직도 질병 부위에 초점을 맞춘 치료만 고집하고 있다. 위에 염증이 생기면 염증을 가라앉히는  약을 준다. 하지만 그 약이 염증을  가라앉히는 동시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염증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암이 발생하면 환부를 잘라내거나 방사선으로 태워버린다. 하지만 발병 원인을  파악해서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암이 재발할  건 너무나 뻔한 사실이다. 이런 관행이  잘못된 의료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현재의 의료 제도가 이미 병이 난 환자만 상대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은 병원에 찾아오지 않는다. 찾아오는 것은 병에  걸린 사람뿐이다. 반대로 건강 관리를 위한  시설에서도 환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쇠약해 보이는 사람도 없다. 건강한 젊은 이들만 모여서 육체를 단련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고령화 사회로 전환해 가는 이 시점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하려는 발상의 전환과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시설이다. 병을  치료하는 시설도 중요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휴식을 취할 시설도 필요하다.  이런 시설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생활 지도를 한다면 노인을 괴롭히는 건강상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인간의 한계 수명인 125살까지 살 수 있으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간이 병에 걸리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병에 걸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나이가 들어 병에 걸리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병은 우리에게  가까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의술과 의료  기관은 환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런데 의술이 발달하고  의료 기관이 이렇게 많아졌는데도 환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점차 늘어나는  실정이니 정말 어이가 없다. 인간은 본래 병에 걸리지 않는 건강체로 한계 수명까지 살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갖가지 질병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치병이 점점 증가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병에 걸리는 게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는  사고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병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서양의학의 발달이 가져다 준 웃지 못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404병’이라고 해서 병의 수를  나타내는 말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의사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병의  종류가 많아졌다. 이것은  국소·장기별 의학이 가져다  준 크나큰 폐해이다. 장기별 의학은 병의 가짓수만큼 치료법도 많아진다. 게다가 그 치료법은 국소의 병을  치료하는 데만 전념하기 때문에 그  병은 낫지만 또 다른 병을 유발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변한 이유는 의사도 일반인도 병에 걸리는 것이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최근에 밝힌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자신이 사고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볼 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는 현상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병이나 환자의 수가 점점 증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동양의학은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동양의학이 이렇게 사고하게 된 배경에는 ‘인간은  본래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건강관이 깔려 있다.

나는 동양의학의 이 같은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지지한다. 동료들  가운데에 의학은 참으로 멋진 것이라고 늘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고쳐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동료는 병이 난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며, 의사는 병을 고쳐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의학의 배경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이다.

사회적 상황도 이런  사고를 부추기는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한다.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지도해서 미연에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면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의사가 먹고 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동시에 거대한 자본을 투자한  의료 재단 역시 경영상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서 더욱  위험한 것은 그 치료 방법이다.  병원끼리 혹은 의사끼리 치료 성과를 다툰다고  하면 이상하겠지만, 어쨌든 국소의  병만 신속하게 치료하고 끝내려 하기 때문에  몸 전체 상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료 형태 때문에 암세포는 없앴지만, 환자는 죽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병을 고친다고 해서 환자가 건강을 되찾는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모든 현상은 결국 ‘병에 걸리는 것이 이상하다’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개선하지 않는 한, 질병의 종류와 환자의  숫자 그리고 의료비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생물계 전체를  볼 때, 인간만큼 병치레를 많이 하는 동물은 없다. 동물은 의사가 없어도  종족을 보존하며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계의 동물들이 질병에  대해 전혀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뇌 안에 새겨져  있는 본능에 따라 유익한 것은 받아들이고 해로운 것은 배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몸에 갖추고  있는 자연 치유력과 체내의 제약 공장을 풀가동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건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동물과 같은 이런  생활 방식, 즉 인간의 육체가 갖추고 있는 생명력을 최대한 살려나가는  것이 동양의학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낡은 사고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혈에 침을  놓으면 통증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혈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어떻게 병을 낫게 하는가. 이 같은 의문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양의학은 과학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린 서양의학의 방법론에  늘 우위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음양이나 사기라는 것은 전위이며  활성 산소이고 호르몬이었다. 동양의학의 원리를 이렇게 물질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자, 성인병 계통의 질병을 고치는 데는 서양의학보다 동양의학이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병이  늘어나는 두 번째 이유는 지난 200∼300년 동안 인간이 저질러  온 형태와 관련이 있다. 특히 지난  100년 동안의 영향이 크다.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벌레나 세균이  자라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인간도 살 수 없는  법이다. 인류는 농약을 사용해서 곤충이나 작은  동물은 물론 세균까지 모조리 죽여가면서 겉보기에만 훌륭하고 먹음직스러운 야채나 과일을 재배하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부작용의 한  예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아토피(atopic, allergie/선천적으로 과민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과민성 피부염)를 들  수 있다. 아토피는 항상균과 공존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사람의 피부에는  이로운 균과 해로운 균  등 여러 가지 균이 있으며, 이 균은  서로 상호 작용을 하며 피부를 보호한다. 그런데 그 균형이 깨졌을 때 아토피 증상이 일어 나는  것이다.

인간의 내장 안에서는 백 종 이상의 균이 서식하면서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 공존하다 보면 서로  해가 되기도 하지만 이익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소 치료를 하는 약물이나 화학 물질이  섞인 식품·음료수 등이 이 같은  공존을 깨뜨려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이나 곤충 혹은 미생물이 살 수 없는 토양에서 자라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곤충과 세균 그리고 동물과 먹을 것을  다투는 환경이 오히려 인간의 건강에 유익하다. 다행히 최근에는  그런 환경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방법론을 연구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몇 번씩 강조하지만 본래 인간은 건강하게 120년  이상 살아갈 수 있는 신체적 구조를  갖고 있다. 간장이라는 장기는 80%까지 잘라내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 그만큼 뛰어난 수용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건강체로 태어난  인간이 한계 수명인 125년을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건강관이다. 인간은  필요한 모든 것을 체내에 갖추고 있으며 늘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슴속에 담아두기 바란다.

장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끙끙 앓지 않는 것’

  그러나 지나치게  자유롭게 제멋대로 살아가는 생활  방식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래  살려면 세 가지 포인트에  유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 세 가지 포인트에  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식사를 들 수 있다.  동양의학에는 ‘의식동원’이란 말이 있다. 여기에서 ‘의’는  치료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의학적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질병을 치료하는 식품이 있다’는 뜻이 되겠지만, 실제로는 ‘먹는 것이  곧 치료’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잘못된 식사법은 건강을 해치지만 올바른 식사법은 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유지시킨다는 뜻이다. 여기서 올바른 식사법이란 고단백·저칼로리 식사를 의미한다.

식생활이 건강의 열쇠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찰의 정진요리가 좋은  참고가 된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확실히 그것은  좋은 식사법 가운데 하나지만 사람은  개개인에 따라 각자 그 신체적 조건이  다르다. 요산치가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뇨기가 있는 사람도 있다. 혹은  간장이 약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은 물론이고 질병에  걸릴 위험권에 들어 있는 사람 역시 자신의 신체적 특성에 맞는 식생활을  해야 한다. 개개인에 맞는 식생활 지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올바른 식생활을 지도하는 기관은  거의 없다. 일단 질병에 걸리면  여러모로 보살펴 주지만, 질병에 걸릴 위험이 있더라도 아직 증상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식사법에 대한 적절한 지도를 해주는 기관이 없다.

나는 직업상 백 살까지 장수하는 사람과 만날 기회가 많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나 잘 먹는 다는 것, 둘째는 식사량을 정량의 80%정도로 억제한다는 것, 셋째는 동물성 음식에  치우치지 않고 야채를 많이 먹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몸을 많이 움직여 주는 것 등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사항은 동물성 지방은 물론  식물성 지방도 지나치게  섭취하면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식물성 기름에는 불포화 지방산이 많아  체내에서 활성 산소와 합성되어 몸을 산화시키고 세포막을 상하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성  기름은 특별히 섭취해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좋다. 한식과  양식을 비교하면 한식이 훨씬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내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식이 성인병을  예방하는 데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염분을 줄이고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에 유의한다면 한식은 최고의 장수식이라 할 수  있다.

장수의 두 번째 조건은 혈관이  막히는 현상을 예방하는 일이다. 성인병은  대부분 혈관 이상에서 시작된다. 당뇨병이나  통풍, 고혈압이나 동맥 경화도  결국은 혈관 막힘으로 인해 생기는 병이다.  그런데 혈관이 막히는 현상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근육을 쇠퇴시키지 않는 것이다.  근육은 심장과 마찬가지로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근육이  약해지면 피의 흐름이 그만큼 나빠진다. 이것이 혈관 막힘 현상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또 다른 하나는 혈관을 막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지방의 섭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콜레스테롤이나 중성지방은 혈관에  쌓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연소되면  큰 문제는 없으나, 지방은 근육 속에서만 연소되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지방을 연소시키기 위해서라도  근육을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운동량이 줄어든다. 그러나 이것을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나이 많은 사람이 과격한 운동을 하면 활성  산소의 해를 입을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운동량이 감소하는 현상은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역시 동물이기  때문에 운동을 중단하면 안 된다.  움직이지 못하면 동물은 죽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건강에 결정적인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나이가 들어도 평소대로 자연스럽게 활동하면  젊었을 때 붙은 근육이  줄어드는 일은 별로 없으며 근육을 유지하는 한  혈액 역시 원활하게 흐를 것이다. 성인병이  늘어나는 원인중의 또 다른 하나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교통 수단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수의  세 번째 포인트는 뇌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뇌의 명령을 받는다. 면역체의 기능 역시 뇌의 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뇌를  쇠퇴시킨다는 것은 건강을  악화시킨다는 것과 직결된다. 그러나  현대인 가운데 뇌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머리를 쓰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면 좋은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건강과 장수에  도움이 되는 뇌 활용 법은  플러스 발상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오래  사는 사람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끙끙  앓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플러스 발상이 생활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내 모르핀을 그만큼 많이 분비할  수 있는 것이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시킨다면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  기준은 바로 α파인데, 뇌파를  α파 상태로 만들려면  항상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너무  바빠서 좀처럼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다. 잠자는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하루에  한 번은 잠을 잘 수밖에 없다. 바로 이때를 활용해야 한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 처했다 해도  잠자리에 들 때는 미래의 꿈이나 희망  혹은 인생의 계획 등을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 좋다.  과거의 즐거운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좋다. 편안한 기분으로  잠들면 뇌세포가 활성화되고 근육에도 좋은 자극을 주어  운동한 것과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심한 스트레스가 쌓여 그것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플러스 발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처음에는  힘겨울지 모르나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이것이 건강과  장수를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기 바란다.

그저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식사와 근육 유지 그리고  플러스 발상에 유념한다면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고령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사회적 문제가 조금씩 파생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약자가 된  노인을 젊은 노동력이 받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령화 사회는 힘든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사회 제일선에서 물러났을 뿐, 노인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생 경험이 풍부한  선배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꼭 필요한 존재다. 체력이 필요한 일은 젊은 이들이 담당하고, 고령자들은 경험이 필요한 일을 담당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역할 분담이 가능 하려면 노인도 건강한 육체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노인은 자신은 물론 사회를 위해서라도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의사는 삼기 중에서 약과 메스만 사용하고 있다

  세상에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치게 건강해서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돈 버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를 탐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 자체는 크게 비난할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산 속에서 조난을 당하게 되면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손에 넣은 것들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돈이나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는 상상외로  좁다. 거액의 수표를 끊는다 해도 조난을  당한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10배, 100배의 돈을 벌었다 해서 10배, 100배를 먹은 것은 아니다. 역시 10배, 100배를 더 사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성공한 사람일수록  고독하게 살기 쉽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주위에 없기 때문이다. 직장인도  회사 일에만 열중하면 당시는 만족할지  모르나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하는  회의를 품게 된다. 이런 회의가 생기는 이유는  기존의 생활 방식에서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일에 열중하는 생활 방식이 꼭 허무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만큼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마즈로의 욕구 단계설로 설명한다면, 전쟁 후 우리는  제 1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단계에서 시작하여 안전과 소속의 욕구도 충족시켰고,  현재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자기 실현의 욕구로 전환하고 있는 단계라 할 수 있다. ‘내가 잘 되고 회사가 잘 된다면야……’라는  생각은 더 이상 현대인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 돈과 명예를 획득했다고 가정하자. 과거에는 그런 성공을 향해 모두가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박수를 받을 수 없다. 남을  짓밟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공생의 규칙이 확립되지 않는 한 인류는 멸망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 파괴 등의 행위는 자신 스스로 목을 조이는 행위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건강할 때나 성공을 거두고  있을 당시에는 좀처럼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기분이 최고조일 때도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  이와 반대로 구사일생을 했거나 실의의 밑바닥에 빠져 있을 때 혹은 큰 병을 얻어 죽음에 대한 체험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서면 기존의 사고는  백팔십도 달라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질병이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살다가 생사의 고비를 헤매게 하는 질병과  맞닥뜨리는 순간, 정신이 번쩍 뜨이고 이제까지 굳어 있던 사고에  균열이 생긴다. 그 시점이 언제인가가 문제다. 죽음의 병상에서  뉘우친다면 이미 늦은 것이다. 가능하면 더 빨리 깨우치는 게 좋다. 

건강이 지나치게 좋아서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계란을 줄줄이 낳는 양계장의 닭과 같다. 그 닭은 머지않아 알을 못 낳게 되고 결국 닭고기로 팔리는 신세가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중에 어이없이 일찍 죽어버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 역시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내 인생이니 어떻게 살아가든 내 마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지금까지 아무리 자기  멋대로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누구나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심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혹은 이웃을 위해 뭔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가끔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뇌내 모르핀 이야기를 해준다.  건강한 사람이나 현재 자기 생활에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은  처음에는 좀처럼 수긍하지 않지만 어떤 계기가 생기면 갑자기 순수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다. 바로 이럴 때 나는  의사가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릴 확률을 현저하게  줄이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사는 삼기  중에서 주로 약과  메스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화를 통해서도 치료가 가능하다.  대화를 통한 치료는 환자의 몸 속에 있는 본연의 치유력을 이끌어내서 병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아무 부작용이 없으므로 의사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치료법이다. 전통 무예에서는 흡기와 호기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바로 내뱉는 것은 좋지 않으니,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내뱉는 동작을 잠시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면 혈관이 확장하여 대사 작용이 좋아진다. 내뱉을 때는  가슴 안의 혈관이 확장되지만 그 밖의 부분은 수축된다.  따라서 숨을 멈추었을 때  밸런스가 가장 좋다. 바로 이때 나쁜 기가 빠져나간다. 무도를 하는 사람은 바로 이 호흡법을 활용하고 있다.

기공 역시 동양의학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태극권을  기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태극권을 기공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태극권만 기공은 아니다.  넓은 개념에서 태극권이나 기타 무술을 비롯  명상도 기공에 포함된다. 즉,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편안한 상태에서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기공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기공이며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나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할까 상상하는 것도 기공이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것도 기공이다. 자연계의  에너지 리듬에 맞게  뇌내 호르몬의 밸런스를 조정하는 것은 모두 기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플러스 발상을 하는 법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 최고의 조건은  플러스 발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플러스 발상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기 않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성공보다 실패를, 즐거운 일보다는 괴로운 일을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플러스  발상을 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실패했을 때나 혹독한 환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플러스 발상을 하는가. 바로 이것이 뇌내 혁명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플러스 발상의 진수는  좀처럼 플러스로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을 플러스  발상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설령 육친과 사별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최선의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좀처럼  그런 경지에 이르기 힘들겠지만, 마이너스 상황을 플러스 발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테마이므로 이 점에 대해서  잠시 숙고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자기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이나 본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갑자기 죽었다고  가정하자. 부모의 슬픔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이 아이는 왜 태어났을까. 잠시 동안 부모에게 기쁨을 주었다가 그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비탄의 나락으로 빠뜨리기  위해서 태어났는가. 그렇다면 너무나 가혹하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느냐며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와 비슷한 사례가 성경의 욥기에 나와 있다. 재물과  가족, 명예와 출세 등 사회적으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고, 또 독실한 신앙심 역시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하는 욥. 그는 갖가지 재앙이 닥쳤을 때 한때는 하늘을 저주하지만 이윽고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의학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인체 구조에는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간 하나만 보더라도 전체의 20%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80%를 제거해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이다. 뇌세포 역시 전체 180억개 가운데에서 극소수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일반  세포는 헤이프릭의 한계라고 하는 수명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암세포는 영양만 공급되면 영원히 살 수 있는가. 이것도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 이런 의문에  대해 아직 명확한 해답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한가지 사실은 명확하게 밝혀졌다. 뇌는 우리 인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 가기를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인생을 불행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방향으로 살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뇌내 모르핀의 발견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다만 전제 조건은 창조주의 의지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주의 의지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면 아무리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점차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뇌의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과  일맥상통한다. 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창조주가 바라는 세상은 결국 자기  실현을 향한 세계로 귀착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기 실현이란 무엇인가. 마즈로 박사의 해석을 빌리면 그것은  진, 선, 미, 약동, 개성, 완전, 필연, 완성, 정의, 질서, 단순, 풍부, 즐거움, 자기 충실 등의 개념이다.  말하자면 누가 보더라도 올바르고  훌륭한 생활 태도, 남에게 비난 받지 않고  즐겁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생활 태도를 몸에  갖추는 것이 자기 실현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행동을 할 때  최고의 행복과 기쁨을 느끼게 되는 이유 바로 이것 때문인 것 같다. 지나치게  거창한 해석이라 뭔가 속아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뇌내  모르핀에 관련된 에이 텐 신경의  활동 유형을 살펴보면 역시  이것이 인생의 진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에이 텐 신경은 원뇌에 있으며 파충류나 개나  고양이도 갖고 있는 신경이다. 이 신경은  쾌감신경이라 불리는데, 이 신경 세포가  자극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섹스나 식욕의 만족감을 쾌감이라 부르는 이유도 모두 이 신경  세포가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뇌내  모르핀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경은  불가사의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일반  신경은 자극을 받는 방향이 플러스로 나가든  마이너스로 나가든 일정 정도에 도달하면 브레이크가 걸린다.  아무리 성욕이 강하더라도 일단 충족되면 그것을 억제하는 호르몬이 나와서 욕구를  멈추게 된다. 이것을 네거티브 피드백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식욕의  경우에는 글루카곤이라는 호르몬과  인슐린이 그러한 관계에  있다. 뇌내 모르핀의  경우에도 억제 물질이 작용한다.  그러나 에이 텐  신경이 인간 특유의  전두연합야와 연결되어 작용할 때는 브레이크 기능을 하는 물질이 생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인간이 진선미에  관계되는 행위를 하거나 정의로운 행동을 할  때는 그것을 방해하는 물질이 분비되지  않는다. 뇌내 모르핀이 계속 분비되어 나온다. 그런데 뇌내 모르핀은 마약 모르핀에  비해서 그 효력이 훨씬 크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실현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커다란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 같은 물리적  현상에서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 같은 것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예술가가 오래 사는  이유는 이들이 진선미에 관계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뇌내 모르핀이 끊임없이  분비되어 창작 의욕을 고조시키며  나아가 창작의 기쁨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이팅게일이나 슈바이처가 90세까지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원인 역시 그들이 세상과 이웃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괴로운 일 투성이로 보이지만, 그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고도의 쾌감을 느끼며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위인이나 현인들의 발자취를 보고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는 것은 속인들의 얕은 생각에 불과하다. 그들  자신은 실제로 굉장히 풍부한 마음의 재산을 누렸던  것이다.

20세기도 다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  뇌내 모르핀의 커다란 효능이 밝혀졌다는 것은 세상이 크게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과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의지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다. 너무나 훌륭한 대상을 보면 이제까지  우리는 외경심을 품을 뿐 자신이 직접 도전하려는 용기는 좀처럼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길은 너무  힘들고 고되게 보일 뿐 조금도 즐거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인간은 전두연합야와  에이 텐 신경을 연관시켜 활동시킬 때  최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이 바로 마즈로 박사가 말한 ‘자기 실현’의 경지인 것이다.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고체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마즈로 박사의 통찰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병에 걸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목적

  나는 병원 사업 이외에 건강 의료원, 헬스  클럽, 메디컬 에스테, 건강 호텔 사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확대 주의자란  말도 듣고 있으나, 이것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건강 의료원은 병원과 별 차이 없으나, 이곳을 찾는 사람은 환자가 아니라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혹시  고질적인 질병이 발견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찾아온다. 그런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심리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편안하게 왔다가 ‘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려고 약간 정성을 기울인 것이 소위 ‘건강 의료원’이다. 

우선 내부 장식을 완전히 우리 식으로 꾸미고 안내하는 사람도 간호사 복장 대신  전통 의상을 입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통 음악을 틀어주고 검사 후에는 즉석 요리도 서비스 하고 맥주도 마실 수 있게 했다. 너무 파격적이라서  처음에는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가격이 예상외로 저렴했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일반 종합 병원에서 실시하는 검사 가운데에는 검사 대상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많다. 특히 위 내시경은 그 자체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건강 진단을 하는  단계에서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스트레스를 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병을 예방하기  위한 장소에서 병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와  같다. 이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건강한 사람은 좀처럼 종합  병원을 찾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질병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건강할 때 진단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종합 병원에 찾아오는 부담감을 덜어 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편안한 호텔 같은 공간을 연출해 보았던 것이다.

경영상의 적자는 각오하고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초만원 사태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은 헬스 클럽과 메디컬 에스테 시설도 갖추게 되었고, 앞으로 건강 호텔도 만들 계획이다. 나는 이런 것을 통틀어서 ‘토탈 헬스 엔지니어링’이라 부르고 있다. 환자만 찾아오는 병원에서는 동양의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충분히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건강 의료원에서는 그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찾아내서 어디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충분히 살핀다. 또한 ‘이 상태가 계속되면 곧 뇌가 상하게 됩니다’,  ‘심장이 나빠집니다’, ‘암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처방해 준다.  처방 내용은 올바른 식사와 운동, 명상 그리고  메디컬 마사지이다. 일반 종합 병원에서는 여러 가지 수치만 제시하는데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은 그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른다.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경영상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며 현재의 의료보험 제도가 잘못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강을 회복시키면 그만큼의 보험료를 지불한다’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면 의사도  올바른 의료 행위를 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의료 형태는 본래의 보습을 많이 역행하고  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의사에게 굽실거려야 하는  현상도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의사가  으스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동양의학에서는  환자에게 머리 숙여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날 그것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에 인폼드 컨센트(informed consent/환자의 동의·승낙)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의사로 일해온 지 30년, 그 동안 내가 추구해온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겨우  내 의도를 이해하는 것 같다. 다행히 나는 어려서 동양의학을 접할 수  있어 남보다 빨리 그런 치료 방식을  실천할 수 있었다.

동양의학이 전반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으로  볼 때, 나는 앞으로 의료 행위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고쳐야 할 것은 건강을 위해 뭔가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약물 요법이 하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어린이가 천식 발작을 일으키거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약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인슐린  주사를 맞던 당뇨병 환자가 찾아오면 인슐린과 내복약을 최대한  빨리 중단시킨다. 식사 요법과 운동과 명상  그리고 메디컬 마사지로 대신한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병이 나서  의사 신세를 지는 일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의사에게 배워 일상 생활 속에서 실행하면 성인병은  대부분 예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인병에  걸리는 원인은 대개 그  사람의 문란한 일상 생활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건강했던 사람이라도 좋지 않은 생활 습관이 붙게 되면 차츰 질병의 골짜기로 빠져들게 된다. 만일 의사가 그  진행 과정을 알게 되면 그 단계에서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단계에서  처방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사와 아주 친한 사람만  그 단계에서 처방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병을 예방하는  차원의 전문의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동양의학은 건강을 증진시켜 질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환자의 자연 치유력을 끌어내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일반 의사 역시 그런 사고를  갖는 것이 사회 전반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의료 행위가 병만 치료하던 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에 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의사나 환자도 그런 생각에 의견을 일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상당한 의료비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뇌를 많이 사용하면 α파 상태를 만들 수 있다

  뇌파가 α파일 때  뇌내 모르핀이 나온다. α파와 뇌내 모르핀이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뇌파가 α파를 유지하는  상태는 깨어 있는 것도 자고 있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정도의 상태다. 잠에서 깨어나  일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을 때는 잔뜩  긴장하게 되므로 뇌파는 β파 상태가 된다.  반면에 깊이 잠들어 있을 때는 θ파, δ파  상태가 된다. 하지만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잠을 자는 것처럼 뇌의 활동을  떨어뜨리면 매우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잠재 뇌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DNA에는 본능 이외에 선조의 경험이나 지혜는 물론  정보까지 입력되어 있다고  설명했는데, 바로 그것이  우뇌에 저장되어 있다. 편안한 상태로 긴장을  이완시키면 잠재 뇌가 활동하고, 그러면 우뇌 역시 활발해져 α파를  방출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뇌파가 α파  상태가 되어 β-엔돌핀이 분비되면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재능이 활동하여 우뇌에 저장된 기억이나 정보를 자유자재로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β파 상태에서는 상상도 못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α파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뇌파를 α파로  바꾸는 요령은 좌뇌를  진정시키는 것이다. 우뇌와  좌뇌를 비교해 보면 평상시에는 좌뇌가  우위에 있다. 말이나 계산 논리를 관장하는  좌뇌는 말하자면 이성의 뇌이며,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활동하고 있을 때는  거의 좌뇌를 사용하게 된다. 좌뇌는 태어난  이후에 받은 모든 자극을 저장한다. 그러나 반복해서 동일한 자극을 받게 되면 그 자극이  우뇌로 입력되어 간다. 우뇌에 입력된 이것은 유전자에 새겨져 영구 보존된다. 천부적으로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리듬 감각이 예민하다는 등의 천재적인 재능은 과거에 선조의 선천 뇌에 새겨져 있던 능력이 그 사람의 단계에서  발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의 선천 뇌에나 훌륭한 재능은 감추어져  있다. 소위 잠재 능력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능력을 끌어낼 수 있다면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이 훌륭한  재능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재능을 계발하기는커녕  그 싹을 잘라 내 버리는 현재의 획일적인 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학교는 죽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활달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계발하게 만드는 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규격에 따라 평균 점수가 나오고  그 점수만 좋으면 괸다는 식이므로, 어느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다른 부분이 떨어지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그런 교육은 전근대적인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인간만 길러왔을 뿐이다. 그것은 좌뇌만 사용하는  효율적인 기계 부품을 만들어낸 것과 같다. 전쟁 후에 비로소  발전의 틀을 다지기 시작한 우리  현실을 볼 때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는  그런 교육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의학적으로  볼 때도 우뇌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좌뇌는 의식적으로 에너지를 발생시켜야 하지만 우뇌는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도파민을  작용시킬 수 있다. 사람이 개성을 가지고  자신의 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욱  살기 좋은 사회로 변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는 교육, 뇌파를 α파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교육,  우뇌를 많이 사용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그런 상태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근에는  뇌파계가 있어서 그것을 사용하면 자신의 뇌파 상태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계를  이용해서 자신의 뇌파가 어떤 때 α파  상태가 되는지 파악한 다음, 그런 상태를  최대한 오래 지속하도록 훈련하는 방법이 좋다.

또 하나는 신념을 갖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신이나 절대적인 존재 혹은 동경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신념이라  부른다. 신념이 있으면 사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플러스 발상  역시 그만큼 쉬워진다.  이런 상태는 신앙심이  독실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종교에 깊이  빠지면 남이 보기에 이상하지만  본인을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어떤 종교든 나름대로 신자를  획득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 그 자체로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킬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태가 되려면  신앙심도 좋지만 신념이나 사명감을  갖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신념을 갖고 있으면 뇌를 컨트롤하기 쉬워진다.

현재의 교육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신념을 길러 주지 못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최근 교내  폭력과 동료 학대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신념이 없는 사회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피해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지나친 동정을  보이는 반면 가해자를 규탄하는 데 열중하고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가해자 역시  피해자인 것이다.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나중에 피해자  이상의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교내 폭력도 이와 같다. 친구를  학대하거나 구타하는 아이들의 뇌 발육 과정을  보면 정신구조가 마즈로의  첫 번째 욕구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아직 안전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마음의  안정에 대한 욕구는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보아도 잘못된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친구를 협박해서 돈을 빼앗다가 발각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를  태연하게 되풀이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저급한 단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망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그  욕구 자체가 어린이  당사자에게는 살아가는 보람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보람을 누리기 위해 무척이나  애쓴다. 그것을 추구하지만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자포자기한 나머지 자기 학대를 향해 내닫기도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더욱 막막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극도로 초조해진다. 그러나 뇌가 좀더 발육하면 자기가  저지른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안전에 대한 욕구가 생겨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행위에 제동을 걸게 된다.

최근에 교내  폭력이 증가하는 또 다른 배경으로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을 들 수 있다. 학생들은 자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를 강요당한다. 정말로  공부가 좋아서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아이들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어 더욱 열심히 공부에 임할 수 있다. 부모들은 툭하면 ” 를 봐라,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부가 싫은 아이를  강제로 시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의 세계에 빠져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친구들과 놀면서 몸을 단련시키고, 인간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범을 배워 성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게 된다. 운동  경기를 통해 다른 아이와 경쟁하면서  ‘나보다 뛰어난 아이가 있다’ 든가  ‘노력하면 그 나름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며 성장한다. 그런데 현대 교육은 절대적 가치 평가의 잣대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상대보다 좋은 점수를 얻기만 하면 최선이다. 이런 경쟁 구조에서는 상대를 밀어내는  것이나 적대시하는 것밖에 배우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사고 그러면 일류 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 그런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발상의 빈약함을 뜻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인간의 유형과 인생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할 뿐이다.

어느 학급이든 학업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한두 명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적이 형편없는 아이도 한두 명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힘이 센 아이가 있는가 하면 친구를 잘 사귀는 아이도  있다. 갖가지 개성이 하나의 학급 속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 이외에는 모두 쓸모 없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 현재의 교육 현실이다. 이런 학교에서는  학업 성적 이외의 재능을 가진 학생은 무척이나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공간이 없어진 학생은  급기야 쇠막대로 부모를 때리거나  살인 강도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다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다. 수준을 한 단계 높여서 우리 인간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것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 일반인은 물론 교사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이런 문제점을 차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반도체나 자동차를  잘 만들어서 수출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이것은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필요한 역할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만 혈안이 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인간 교육은 뿌리 채 뽑혀나가고 말았다.

뇌내 혁명은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노골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원래 쾌감 법칙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동물이다.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자는 이유도 이 법칙에  충실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저 차원적 욕구만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인간은 파충류나 개나 고양이와 별 차이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뇌내 모르핀이 뇌의 전두연합야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두연합야네는 인간의 예지가  들어 있어 이것이 에이 텐 이라는 쾌락 신경과 연결되면 인간은 쾌락을 즐기면서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진흙땅에 넘어졌다고 하자. 이때 자신의 옷을 더럽히면서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르는 체  지나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아이를 도와준 사람의 심리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옷을 더럽히면서까지 아이를 도와주는 행위는  어디로 보나 훌륭하다. 그러나 이것도 뇌가  그런 행위를 명령했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 사람은 그만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그냥 지나친 사람은 뇌가 그냥 지나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모른 척 한 것이다.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아이를 도와준다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결국 원하지 않는 행위를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커다란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뇌내 모르핀을 잘 분비하는 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나 쉽게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부럽다면 부러운 일이겠지만 자진해서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유명한 마술사를  만난 것 같은 놀라움은 있겠지만, 결코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분비하는 뇌내 모르핀  역시 그다지 높은 레벨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뇌내 모르핀이 많이 나오더라도 신의 선물을 받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독특한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각할 수 있을 때 신은 그 인간에게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게 해주고,  지칠 줄 모르는 활력과 성실함으로 발전적인 사고를 펼쳐나가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파악하려면 DNA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뇌파를 α파 상태로 만들어 잠재의식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뇌내혁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며, 그것은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무한한 기쁨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평안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것과 같지 아니하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유대인 랍비 조수아 리브만의 책 '마음의 평화'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현명한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노인이 젊은이에게 물어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젊은이가 대답합니다.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며,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
듣고 있던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 모든 것을 얻고 싶겠지만 마음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다네."
평안은 평강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데, 걱정이나 탈이 없다는 뜻으로 주로 개인의 내적 상태를 일컫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살롬',
헬라어에서는 '에이레네'를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평안은 삶의 가장 본질적인 복이며,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안녕, 평안일 것입니다.
평안은 내면의 감정이나 외부의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성품입니다.
살다 보면 미래에 대한 염려, 과거에 대한 후회, 그리고 현재의 불안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평안은 모든 동요를 포함하여 평정심을 잃지 않는 성품입니다.
급변하는 상황에 휘둘리고 평정심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평안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마다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됩니다.
주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알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속죄받은 믿음의 사람에게 하늘의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평안에 머물고 또한 나누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골 3 :15)."



 




이 세상에 없는 필수품 다섯 가지
시인 강월도(1936-202)



이 세상에는 도망쳐 숨을 곳이 아무 데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편히 쉴 곳이 마땅치 않데요.
이 세상에는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사는가 죽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데요.



독일 제친 K-장갑차…한화에어로, 호주서 2조원 '잭팟

  • 한화에어로, 호주서 잭팟 2조원 규모 장갑차 수출

    獨 제치고 '레드백' 129대 계약
    자주포 이어 K방산 위상 재확인
      K-  2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5년간 공들여온 보병전투장갑차의 호주 수출에 성공했다.
    총 129대로 약 2조원 규모다.
    특히 독일 방산기업인 라인메탈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한국 방산의 높아진 위상을 재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호주 언론사인 디 오스트레일리언은 26일 “패트릭 콘로이 호주 방위산업부 장관이 이날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 전화를 걸어 한화의 보병전투장갑차 ‘레드백’ 129대를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디 오스트레일리언은 이번 계약이 24억호주달러(약 2조 676억원) 규모라고 전했다.
    독일 라인메탈의 입찰가가 더 낮았지만, 성능 면에서 한화의 레드백이 라인메탈의 ‘링스’ 장갑차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호주는 2019년 9월 ‘랜드(LAND) 400 3단계 사업’을 발표하며 장갑차 보급 계획을 확정했다.
    한화의 레드백은 라인메탈의 링스와 함께 최종 공급 후보에 올랐다.
    초기에는 라인메탈이 호주 브리즈번에서 다른 장갑차인 ‘복서’를 생산하고 있어 한발 앞섰다는 평가가 많았다.
    호주는 최근 독일 정부와 브리즈번에서 생산되는 복서 100대를 독일로 역수출하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 규모로 호주 무기 수출 사상 최대였다.
    독일은 호주가 생산한 무기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납품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호주 정부는 양사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최종 결정을 계속 미뤘고, 그 사이 정권이 교체되며 계약 규모는 당초 450대에서 129대로 줄었다.
    지난해에는 호주에 장갑차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결국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장갑차 공급 업체로 선정했다.
    레드백은 K-21 보병전투차량을 기반으로 호주 지형에 맞춰 제작한 보병전투장갑차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021년 12월 호주와 K-9 자주포 수출 계약을 맺었으며 호주 절롱시 아발론 공항 내에 최첨단 장갑차 생산시설(H-ACE)도 짓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호주의 차세대 장갑차 사업에 뛰어들어 5년간 수출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이에 대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관계자는 “관련 수주에 입찰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

한수원, 폴란드에 원전 수출 사실상 확정… 최대 20조원 규모


입력 2022-11-01 03:00업데이트 2022-11-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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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민간사와 협력의향서 체결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최대 약 20조 원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폴란드 수출을 사실상 확정했다.
아직 법적 구속력이 없는 협력의향서(LOI) 단계이지만 폴란드 정부가 본계약 전까지 경쟁 입찰을 부치지 않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유럽으로의 첫 원전 수출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이후 13년 만에 한국형 원전(APR1400)을 수출하게 됐다.

31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수원은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폴란드 국유재산부, 폴란드 전력공사(PGE), 민간 에너지기업 제파크와 원전 개발계획 수립 및 지원을 위한 LOI와 양해각서(MOU)를 각각 체결했다.
이번 사업은 폴란드 퐁트누프의 기존 화력발전소 부지에 최대 4기의 원전을 짓는 것으로, 앞서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수주한 폴란드 정부 발주 원전 사업(6기)과는 별개다. 민간 주도 사업으로 폴란드 정부의 ‘에너지정책 2040’에 포함된 원전 건설 프로젝트를 보완하는 성격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대미 관계가 한층 중요해진 폴란드 정부가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정부 발주 원전 사업자로 선정하면서 한국에도 사업 기회를 주기 위해 별도의 민간 주도 사업을 만들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2020년 8월 미국과 폴란드가 정부 간 협정(IGA)을 체결한 후 한국 프랑스가 폴란드 정부 발주 원전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웨스팅하우스로 사업권이 넘어갔다.

박일준 산업부 2차관은 “폴란드 정부가 당초 계획한 6기에 더해 추가로 민간 주도의 원전을 건설하기로 했다”며 “폴란드 정부가 민간 추진 사업은 한국과 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별도의 입찰 과정 없이 곧바로 사업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박 차관은 “미국과 폴란드 정부 간 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과 프랑스가 수주 경쟁에 나섰지만 (이미) 절반 이상 미국에 넘어간 것”이라며 “(정부 발주 원전 사업을 따내지 못한 것을) 고배를 마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업은 원전 건설 예산, 공정 등의 기본 계획이 수립되지 않아 건설용량이나 사업비는 확정되지 않았다.
정부는 1.4GW(기가와트) 원전 2∼4기로 추정하고 있는데, UAE 바라카 원전 4기 건설비용이 1기당 약 5조 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최대 20조 원 이상의 수주가 예상된다.

박 차관은 “UAE 원전 수주는 13년 전이고 지금과 달라진 부분이 있어 구체적인 금액을 산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수원의 폴란드 원전 사업은 이르면 2026년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번 원전 수주는 국내 원전업체들에 일감을 공급해 고사 상태에 빠진 원전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의 2030년 원전 10기 수출 목표에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한국과 폴란드 양국은 최근 글로벌 공급망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원전 협력을 토대로 방산, 배터리, 수소·전기차 등 다양한 분야로 협력을 확장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세종=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



07-31-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신(미가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But as for me, I am filled with power, with the Spirit of the LORD, and with justice and might, to declare to Jacob his transgression, to Israel his sin.

여호와의 신(the Spirit of the LORD)
루아흐 아도나이(רוּחַ יְהוָה)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기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눈에는 총기(聰氣)
둘째는 얼굴에는 화기(火氣)
셋째는 마음에는 열기(熱氣)
넷째는 몸에는 향기(香氣)
다섯째는 끈기(忍耐) 
선지자 미가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기(氣)에 하나를 더 추구하여 신기(神氣)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기를 오기(五氣)라고 합니다.
신기(神氣)를 갖는 사람을 "성령인(聖靈人)" 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교인들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肉)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을 자연인(自然人)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이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영(靈)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가 망(亡)한 까닭은 제사장을 비롯하여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이 그들의 본분(本分)을 망각하고 탐욕(貪慾)에 붙잡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유명한 저서 이상 국가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덕(悳)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덕이란 곧 본분과 같습니다.

농사군은 농사군의 덕
상인은 상인의 덕
군인은 군인의 덕
왕은 왕의 덕
목사는 목사의 덕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덕

세상이 망할 징조는 모두가 덕을 버리고 욕망과 탐욕에 붙잡혀 이기적인 삶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모두가 자기의 덕을 버리고 탐욕에 시달릴 때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내가 맡은 본분 즉 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신 즉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나는(자아) 깨어지고 부수어져서 새로운 존재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주 노련하고 존경받는 수도사 한 사람이 젊은 수도사의 교육을 막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좀 건방지고 교만한 구석이 있는 젊은 수도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는 흙을 만지면서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아주 견고하고 딱딱한 흙을 만지면서 젊은 수도사에게, “여보게, 여기 물 좀 붓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흙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딱딱한 흙이라서 그냥 옆으로 흘러내리고 맙니다.
노련한 수도사는 “이 딱딱한 흙은 물을 받지 못하네”라고 말하면서 옆에 있는 망치를 집어들더니 그 딱딱한 흙덩이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에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물을 부어 보라고 합니다.
젊은 수도사가 부서져서 부드러워진 그 흙 속에 물을 붓자 그 물이 흙을 응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수도사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여기다가 말이야. 씨를 뿌리면 틀림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니겠나? 우리는 이것을 수도하는 사람들은 깨어짐의 영성의 법칙이라고 말하지.”


미가 3:4. 부르짖다(2199) 자아크

זָעַק 스트롱번호2199
1. 소리 지르다
2. 니팔형 : 소집하다
3. 히필형
발음 / 자아크[ zâʽaq ]
관련 성경 / 부르짖다(삿 6:7, 겔 21:12, 욥 35:9), 울다(삼하 13:19, 렘 48:31), 부르다(삿 12:2, 호 7:14, 욘 1:5), 슬피 울다(사 14:31), 애곡하다(렘 25:34), 외치다(삼상 28:12, 합 1:2), 소리 지르다(왕상 22:32, 대하 18:21), 통곡하다(에 4:1, 겔 27:30), 모이다(수 8:16, 삿 18:22, 삼상 14:20), 모으다(삿 18:23, 욥 35:9), 선포하다(욘 3:7)
구약 성경 / 71회 사용

출애굽기 2:23 /  개역개정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2199)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7775)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 7775. 부르짖는 소리(솨바) שַׁוְעָה 
1. 고함소리
2. 도움을 청하는 외침
3. 시편 18:7
발음 / 소바[ shavʽâh ]
관련 성경 / 부르짖는 소리(출 2:23), 부르짖음(시 18:6, 렘 8:19. 삼상 5:12, 시 145:19, 애 3:56).
구약 성경 / 11회 사용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스캇 팩은 악에 대해 말하기를
“악이란 자신의 병든 자아를 방어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데 정치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악의 근원을 ‘거짓’으로 보았고, 모든 악의 증상도 ‘거짓’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말씀과도 대단히 일치한다(요 8:44).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천한 마음이 전혀 없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하였을 때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돌을 들어 예수님을 쳐 죽이려고 하였으니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짓의 아비 마귀의 자식들로 자기 스스로도 속은 거짓의 사람들이었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회사나 국가, 심지어 교회조차도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캇팩은 거짓의 사람의 특징을 열 가지 언급했다.

첫째, 거짓의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거짓의 사람은 남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책임을 전가한다.
셋째, 거짓의 사람은 자기도취에 빠져 살아간다.
넷째, 거짓의 사람은 변장의 전문가다.
다섯째, 거짓의 사람은 자기 성찰이 없다.
여섯째, 거짓의 사람은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일곱째, 거짓의 사람은 교만하다.
여덟 번째, 거짓의 사람은 심각한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있다.
아홉 번째, 거짓의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열 번째, 거짓의 사람은 자기 망상 속에서 살아간다.

내 속에도 이런 특징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짓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내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악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거짓의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죄 때문에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없애버리려고 해서는 안되겠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거짓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거짓의 사람이 될 확률은 대단히 높다.
왜냐하면 마귀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을 속여 서로 서로 상처를 주게 하고, 그 상처를 이용하여 거짓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죄악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라.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사람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거짓의 삶을 살지 말고, 죄 용서함을 받고 타인의 죄를 용서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6588. 허물(페솨)
'거역하다, 범죄하다, 반역하다'는 뜻으로 계약 위반의 행위를 듯하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행위를 말한다.

허물(6588) 폐솨(pesha)
פֶּשַׁע 
1. 반역
2. 잘못
3. 죄에 대한 대가에 사용되어
발음 / 폐솨[ peshaʽ ]
관련 성경 / 허물(창 31:36, 왕상 8:50, 잠 10:12), 악(출 34:7, 겔 33:12), 범함(레 16:16), 죄악(민 14:18, 욥 35:6, 사 24:20), 죄(욥 34:37, 시 19:13, 잠 28:2), 죄과(잠 17:19, 사 59:20), 범죄(잠 29:6, 22), 패역(사 57:4)
구약 성경 / 93회 사용

2403. 죄(하타트. chaṭṭâʼth)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 4:6), 죄인(잠 5:22,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2398. 하타(châṭâʼ) חָטָא 
1. 벗어나다
2. 사사기 20:16.
3. 비틀거리다
발음 / 하타[ châṭâʼ ]
관련 성경 / 범하다(창 20:9, 출 32:31, 렘 33:8), 죄를 짓다(창 39:9, 삼상 19:4, 욥 8:4), 범죄하다(창 40:1, 삼하 7:6, 애 5:16), 죄짓다(창43:9, 삿 11:27), 잘못하다(레 5:5,15), 죄를 범하다(삼하12:13,24:10, 왕상18:9), 잃다(잠8:36), 해하다(잠20:2), 보충하다(창 31:39), 깨끗하다(출 29:36, 레 8:15), 정결하다(레 14:52, 겔 43:22), 제사 드리다(레 6:26), 깨끗이 하다(민 31:19), 달아나다(욥 41:25). [명] 죄(출 5:16, 레5:7,16, 민 12:11, 신 9:18, 호 8:11), 죄인(잠 11:31, 13:22, 전 2:26).
구약 성경 / 238회 사용




오직 나는...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 본 구절은 미가가 자신에 대해 변호한 내용이다. '오직 나는'(웨우람 아노키)은 '그러나'라는 반의 접속사와 '나'라는 인칭 대명사가 합쳐진 강조 용법의 표현이다. 미가는 '웨우람 아노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사역과 선포가 거짓 선지자의 선포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계시임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미가는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여호와의신, 곧 성령의 감동함으로 인해서 '권능'과 '공의'와 '재능'을 소유하였다. '권능'(코흐)은 사역을 감당하는 잠재력을 뜻한다(Von Orelli), '공의'(미쉬파트)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법적인 차원에서는 '율법'이나 '규례'를 의미하였으며(출 24:3; 레 5:10),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방법'이나 '관습'으로 이해되었다(창 40:13; 왕상 18:28).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이 '미쉬파트'는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윤리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서 예레미야는 '미쉬파트'를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렘 5:28; 7:5). 그리고 '재능'(게브라)은 '힘'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람들의 위협이나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사람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용기를 뜻한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 생각과 허망한 환상을 보고 점을 치며 미래를 예측하였으나, 참된 선지자인 미가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과 공의와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였다.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을 선포하여 백성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도 하고, 전쟁을 선포하여 백성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자신의 부(富)와 번영 그리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그들이 선포한 것은 사람의 만족을 전제로 한 인간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가의 사역은 거짓 선지자의 사역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미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전체가 범죄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언약 속에 내재된 공의를 저버리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죄악을 범하였다. 거짓 선지자는 이들의 죄를 개인적인 안락을 위해서 옹호하였으나 미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였다.


캐나다軍 10월 K잠수함 실사…韓 '80조 수주전' 올라탔다

최대 80조 원 안팎의 잠수함 도입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캐나다 해군이 한국을 방문해 국산 잠수함에 직접 승선하고 조선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5월 방한해 조선소 현장을 찾은 데 이어 다시 국내 잠수함 현황과 건조 시설을 다시 둘러보는 것이다.
캐나다 당국이 아직 구체적인 도입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한국 잠수함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며 사업 추진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이번 사업은 사실상 한국일본의 수주전이 될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양국 정부의 수주를 위한 물밑 작업 역시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캐나다 해군 당국자들은 10월께 잠수함 도입 사업을 위한 사전 실사 성격으로 방한할 예정이다.

캐나다 군 당국은 국내 최신 잠수함인 도산안창호급 잠수함에 승선해 성능을 점검한다.
HD현대중공업(329180)한화오션(042660) 등 울산·거제 소재 조선소를 방문해 잠수함 제조 현장을 둘러볼 것으로 알려졌다.

캐나다 군 당국은 5월에도 한국과 일본 조선소를 방문한 바 있다.
당시 해군 잠수함 사령부 등을 찾아 관계자들을 만나 국산 잠수함 현황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이 관계자들은 방한 전 일본을 찾아 미쓰비시, 가와사키중공업과 해상자위대에 들러 잠수함 운용 현황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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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해군 잠수함 도입 사업은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았지만 캐나다순찰잠수함프로젝트(CPSP)라는 이름으로 총 12척의 잠수함을 발주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잠수함 획득 비용은 1척에 2조 원 안팎으로 추정되고 수명 주기 비용, 교육 훈련까지 더해 총 600억 달러(79조 6200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캐나다 군 당국은 디젤 추진 재래식 잠수함에 관심이 있다.

방산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많은 국가들이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 관심을 보이지만 사실상 한국의 도산안창호급 잠수함일본의 다이게이급 잠수함이 유력할 것”으로 말했다.

도산안창호급 잠수함을 개량한 DSME 3000 잠수함은 캐나다 당국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잠수함은 리튬 배터리를 탑재해 잠항 시간을 늘리고 수직발사관도 있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운용 가능하다.
특히 선내에 많은 기능이 자동화돼 있어 잠수함 승조원이 부족한 캐나다 해군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의 다이게이급 잠수함은 DSME 3000보다 더 크고 잠항 능력도 우수하지만 상대적으로 자동화 기술이 덜 적용돼 승조원이 더 필요하다.
일본은 아직 잠수함을 수출해본 적이 없다.
캐나다 수출에 있어 승조원 교육과 잠수함 운용 훈련 등을 지원해야 하는데 잠수함 수출 경험이 있는 한국이 다소 유리한 위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면서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하자 캐나다 군도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다.
캐나다 해군은 호위함 12척, 잠수함 4척 등을 운용하고 있다.
긴장 상태에 있는 유럽 및 아시아 지역과 가깝지만 현재 해군력을 미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정부 역시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물밑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6월 이종섭 국방부 장관도 9일 방한한 웨인 에어 캐나다 국방참모총장을 만나 양국 국방 협력 발전 방안을 논의했다.

업계에서는 잠수함 수출 성사를 위해 정부 당국과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등이 한 팀을 이뤄 수출 총력전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문근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함정 수출이 기술력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교력과 조선소 간 기술 교류 등 한뜻을 모아 수출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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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의 자질과 외교 능력에 따라 미래가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 이러한 한국의 방위 산업이 시작된 계기는 1979년 6월  미국 대통령 카터가 방문한 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 후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제안. 그 이유는 당신과 같은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에 미군을 계속하여 주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에게 북한에는 김일성이 계속하여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을 주둔시켜야 한다고 반박.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결단하기를 방위산업체를 육성하려고 대전 과학단지에 한국 방위 산업을 위한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총, 수류탄과 같은 것을 개발하였으나 지금은 세계적인 방위 산업체로 육성되었다.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해서 국가의 미래가 분명하게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11

7

30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212

7

31

월 

미가 3장

여호와의 신(8절)

213

8

1

미가 4장

여호와의 산(2절)

214

8

2

미가 5장

근본(2절)

215

8

3

미가 6장

영혼의 죄(7절)

216

8

4

미가 7장

주와 같은 신(18절)

217

8

5

미가 8장

여호와의 길(3절)



























































































































































































인간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선지자 세상을 바르게 보고 아는 자.
바르게의 기준은 하나님.        
욕망은 절제 될 때 유용하지만 절제되지 않으면 위험하다.
욕심이 죄가 되고 죄가 죽음으로 몰고 간다.
거짓 선지자는 권력과 타협하여 진리를 거짓으로 만든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권력에 대하여 쓴소리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특징은 그 시대의 권력자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와 일반 사회 속에서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는 열심이고 많은 헌금과 봉사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자신이 속한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부정을 일삼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도들에게 교회와 세상은 결코 다른 곳이 아니다.
그 곳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곳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한다.
특히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공의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비록 자신에게 물질적인 손해가 있다 하더라도 불의를 물리치고 바르게 행동함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가서 2장 말씀은  세상의 권세잡은 자들,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에 대해서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크건 작건 간에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격에 의해서 적절하게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배우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여기서 그들은 누구겠습니까? 유대의 권력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 종교인들입니다. 이른바 힘이 있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어떤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침상에서 죄를 꾀하고 악을 꾸미고 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런 일을 해야지. 그런데 그들이 꿈꾸고 꾸미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백성들을 괴롭히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참으로 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그들 손에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그들에게도 불행이고 백성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 손에 힘이 없었다면 이것은 한낱 몽상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꿈꾸고 계획하는 것을 이룰 힘이 없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에게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힘이 있었기 때문에 잠자리에서 악을 꾀하고 죄를 꾸몄던 것을 실행해 버렸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 때문에 백성들은 신음하고 고통스러워야 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죄를 범하고 살았을까요? 2절을 보십시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밭과 집을 빼앗고 강탈하고 심지어는 사람까지 빼앗았습니다.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무지막지하게 행했습니다.

 어찌 이런 사람들이 미가 선지자가 예언했던 시대만 있었겠습니까? 오늘도 역시 이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세금만 강탈하려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선거철만 되면 나타납니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조아립니다.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을 기세로 끝까지 허리를 굽히고 인사합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여전히 권력으로 자기 뱃속을 채웁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전쟁도 결국은 힘을 가진 독재자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 강대국들 때문에 참혹한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힘이 없었더라면 권력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많이 배우지 못했더라면 이러한 참상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 응당한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을 가졌다면 더 많은 사람을 섬길 의무가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도 예언했고 이사야도 예언했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예언했던 호세아, 아모스도 목청을 높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외침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미가 선지자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입을 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말했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정치인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종교지도자들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자신들의 힘이 하나님을 능가한다고 착각했습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기 이를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경고하시고 책망하시고 여러번 기다리시고 사랑으로 품으시고 때로는 내버려 두시다가 때가 되면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은 무서운 심판이고 처절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면서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너희들이 살고 있는 성전은 이제 더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 내가 너희들이 살고 있는 성전을 붙태워 버리겠다.

하나님의 무지막지한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그전에 하나님은 끝까지 기다리고 책망하시고 또 기다리셨지만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성전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아 있는 양들입니다. 양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들은 권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배우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쓰여있다고 하니 그렇게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들에 대해서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모을 것이다. 앞서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선두에 가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들이 타락하고 교회를 맡은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한다는 소식이 계속 들릴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목자되시기에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신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제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핑계를 대서는 안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 각 자도 심판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적 몰락을 다른 이들에게 핑계댈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심을 기억하십니다. 사람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는 믿음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 세상 힘을 가진 자들이 힘으로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게 하소서.

2. 세상 권세와 부를 가진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그들이 기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자, 이와 같은 선지자의 경고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겸손하게 반응하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수치를 당하게 되는 이런 일이 자기들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미가 선지자를 향해서 “이와 같은 예언은 하지 말아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6절 말씀을 봅시다. “(미 2:6)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본인들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란 경고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집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가 선지자의 경고를 어떻게 거부하는지, 7절을 보겠습니다. “(미 2:7)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가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화가 임할 것이라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성급하시단 말이냐?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인내심이 짧으시단 말인가?”하고 오히려 선지자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꾸지람을 가볍게 여기고 도리어 하나님을 조롱하는 듯한 말로 선지자 미가를 꾸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7절 후반절에 미가 선지자의 말을 보십시오.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이 말은 “여러분, 제 말대로 여러분이 정직하게 행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백성을 향한 미가의 애통함과 탄식하는 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택함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 봅시다. 8절입니다. “(미 2:8)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도망치고 있는 동족 피난민들을 길거리에서 몰래 공격해서 그들의 옷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빈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도 행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과부들을 얕잡아 보고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집을 빼앗아 버리고 그들을 집 밖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또한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어린 아이들을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의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것이 9절 말씀입니다. “(미 2:9)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당연한 의무이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고 그들을 착취하여 이익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회의 죄악상을 고발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더 이상 안식과 평강이 머무는 땅이 아니라 심판으로 멸망할 땅으로 선포하십니다. 10절입니다. “(미 2:10)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본래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땅이요 안식처입니다만, 이제 이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악을 행함으로 그 땅은 멸망 당하는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가 하면, 미가 선지자처럼 바른 말을 하고, 죄를 고발하고 회개를 종용하는 자의 경고는 멀리했습니다. 대신에 거짓 메시지로 평화를 노래하며 ‘포도주’와 ‘독주’와 같이 세상의 복락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은 참 선지자라고 여기며 그들을 따랐습니다. 11절입니다. “(미 2:11)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귀를 듣고, 허망한 말, 즉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거짓 평안을 선포하며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자들만을 선지자로 삼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을 일삼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악한 무리 가운데서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모음 같이 다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로 모아주십니다. 12절입니다. “(미 2:12)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보스라는 매우 비옥하고 푸른 풀밭이 있어 유목하기에 좋기로 소문난 에돔 족속의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을 보스라의 양 떼처럼 돌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과거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남은 자들을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십니다. 13절입니다. “(미 2: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여기서 ‘길을 여는 자’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심판으로 인해 대적이 길을 막고 백성들을 괴롭히지만,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성문을 여시고 앞서 선두로 행하시어 남은 자들, 즉 회개한 백성들을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혹시 우리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골라서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시고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서 들으려는 잘못된 습관은 버리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7:21-22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해석의 차이

수도원에서 수도승 네 명이 명상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수도원의 깃발이 펄럭였다.
이것을 본 가장 어린 수도승이 말했다.
"깃발이 나부낍니다."
조금 더 경험있는 수도승이 말했다.
"그건 바람이 나부끼는 것이야." 
수련경험이 훨씬 많은 셋째 수도승이 말했다.
"네 마음이 나부끼는 것이니라." 
가장 나이가 많은 넷째 수도승이 말했다.
"입만 나불거리기는."


라기스(Lachish)

라기스는 예루살렘의 서남쪽 셰펠라에 있는 성읍이다.
이스라엘 땅을 서쪽부터 동쪽의 요단강으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나누면 지중해(Mediterranean), 해안 평야(Coastal Plain), 셰펠라(Shephelah), 중앙 산지(Central Mountains), 광야(Wilderness), 열곡(Rift Valley), 요단강(Jordan River) 그리고 요단강 동편(Transjordan)이다.

셰펠라는 ‘저지대’라는 뜻이지만 중앙 산지에 비해서 낮다는 것이지 해안 평야처럼 완전한 평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해안 평야에는 유명하고도 매우 중요한 해안 도로(Via Maris)가 있다.
이는 남쪽의 애굽과 북쪽의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해서 역사 내내 강대국의 표적이 되었다.
이스라엘 내 해안 도로의 맨 아래, 즉 최남단에 있는 중요한 성읍은 블레셋 족속 성읍 가사(Gaza)였다.
라기스는 이 해안 도로에 있는 가사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중해 근처에 있는 가사에서 동쪽으로 연결된 동서 도로 상의 성읍들을 나열하면 가사-라기스-헤브론인데, 이 헤브론은 예루살렘으로 연결되는 족장들의 도로, 즉 남북 도로 상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면에서 라기스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성읍이며 내륙으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를 지키는 방어 진지였다.

그래서 라기스는 항상 고대 제국들의 정복 대상이었다.
라기스는 성경은 물론 고대 문서에 자주 등장했다.

성경 이외에 라기스가 제일 먼저 언급되는 고대 문서는 기원전 1400년경의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이다.
아마르나 서신은 382개의 토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사들 간의 통신을 담고 있어서 바벨론, 앗수르, 미타니, 히타이트, 시리아, 가나안 등과 애굽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원전 14세기 중반 애굽 왕 아케나텐(Akhenaten)이 애굽을 통치할 때 하비루(Habiru)를 언급하는데, 하비루는 낱말과 지역적 유사성 때문에 히브리인들(즉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말이다.
아마르나 서신에서 라기스는 하비루에게 음식과 기름을 공급하여 도와주었다고 비난당했다.

출애굽한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공격하는 연합군, 즉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 헤브론 왕 호함, 야르뭇 왕 비람, 라기스 왕 야비아, 에글론 왕 드빌을 물리쳤다(수 10장; 12:11). 후에 여호수아는 라기스를 유다 지파에게 할당했다(수 15:39). 이상하게도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에는 라기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여호수아 시대 이후 곧바로 솔로몬의 아들 남유다 초대 왕 르호보암 시대로 넘어간다. 르호보암은 유다 땅과 베냐민 땅에 있는 성읍들을 요새화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라기스였다(대하 11:5-10). 르호보암은 아마도 이 요새화된 성읍들에 음식과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방패와 창과 같은 무기들을 갖추었을 것이다(대하 11:11-12). 이후 유다 왕 아마샤는 예루살렘에서 반역이 일어나자 라기스로 피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왕하 14:19-20; 대하 25:26-28).

유다 왕 히스기야 때, 즉 기원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은 유다로 남하해서 유다의 48개 성읍을 파괴했는데, 거기에는 라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왕하 18:13; 대하 32:9). 산헤립과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스기야를 위협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를 통해서 구원을 약속하셨으며, 그 밤에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사를 치셨다(왕하 19장; 대하 32:21-23; 이사야 36장). 이로써 예루살렘은 앗수르의 공격에서 구원을 얻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 앗수르의 니느웨에 있는 왕궁 벽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유다의 히스기야는 내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성벽을 갖춘 요새, 그의 강한 성읍 46개와 그 주변의 작은 수많은 마을들을 잘 다져진 경사로와 성벽으로 끌고 온 공성퇴로 정복했다. 나는 남녀노소 200,150명을 몰아내고, 셀 수 없이 많은 말들, 노새들, 나귀들, 낙타들, 크고 작은 소들을 끌고 왔으며, 전리품으로 여겼다. 나는 예루살렘, 그의 왕궁을 마치 새장의 새처럼 가두었다. 나는 토루로 그를 둘러싸고 성문을 떠나고 있었던 사람들을 폭행했다. 나는 그의 나라에서 그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취했으며, 그것들을 아스돗의 왕 미틴티, 에그론 왕 파디, 가사 왕 실리벨에게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나라를 축소시켰지만, 여전히 그의 지배자로서 이전 조공보다 후에 내가 부과했던 나에 대한 조공과 선물들을 늘였으며 매년 전달되었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내 주권의 영광은 히스기야 그를 압도했으며, 그가 강화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그의 왕궁으로 끌어들였던 그의 비정규군과 정예군은 그를 저버렸고, 후에 나의 위풍당당한 도시 니느웨에 있는 나에게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보석들, 안티몬, 커다란 붉은 보석들, 상아로 세공한 침상들, 상아로 세공한 의자들, 코끼리 가죽, 흑단목, 회양목, 온갖 보물들, 그의 딸들, 첩들, 남녀 음악가들을 보냈다. 그는 조공을 바치고 노예로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라기스를 정복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아마르나 서신 중 일부는 라기스 군 지휘관 요아쉬(Yoash)와 외부에 떨어져 있는 수비대의 지휘관 호쉬아(Hoshiah)가 서로 연락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바벨론과의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남왕국 유다가 어떻게 황폐화되어 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서신에 따르면 외부 수비대에 있는 파수꾼은 라기스의 봉화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지만, 바벨론이 마지막으로 정복한 아세가(이 블로그 “아세가” 참고)의 봉화는 더 이상 보지 못했다(렘 34:7). 봉화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그 성읍이 바벨론에게 함락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이후 라기스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성경 구절

여호수아 10:3, 5, 23, 31, 32, 33, 34, 35; 12:11; 15:39; 열왕기하 14:19; 18:14, 17; 19:8; 역대하 11:9; 25:27; 32:9; 느헤미야 11:30; 이사야 36:2; 37:8; 예레미야 34:7; 미가 1:13

 

라기스(Lachish)는 이 지도 왼쪽 하단부에 있는 브엘세바(Beersheba) 위에 있다. 

라기스에서 왼쪽(서남쪽)에 있는 점선을 따라가면 지중해 해변을 따라 나 있는 점선과 만나는 지점이 나오는데,  비록 이름이 지도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곳이 가사(Gaza)이다. 

그래서 가사에서 라기스, 라기스에서 헤브론(Hebron)으로 가면 남북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나게 되는데, 

그 남북 도로는 예루살렘(Jerusalem)으로 연결된다.


미가서 1장에 나오는 지명들

본문에서는  미가의 '언어유희'가 나타난다.

10.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1, '*가드'에서 '*나가드(고하다)' 하지 말고

가드라는 지명은 히브리어 *나가드 라는 단어와 음이 비슷하다.
나가드는 고하다란 뜻이니 가드에서 고하지 마라


2. '*베들레아브라(베이트 레 아프라 ; 티끌의 집)' 에서 '*아프라(티끌)' 에 굴지 마라

먼지 속에서 뒹군다는 것은 슬픔과 애통의 표현이다.

11.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3. 수치스럽고 벌거벗은 *사빌(아름답다 라는 뜻) 거민아/ 예) '불꺼진 이태원' 이런 느낌

이 도시의 사람들은 침략자들에 의해서 벌거 벗기고 수치를 당할 것이며 포로가 될 것이다. 

4.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떨고 있는 주민은 두려움 속에서 싸우러 나오지 못한다. 

사아난은 (전쟁에) '나가는 자'란 뜻이다. 이 용감한 성읍도 적이 접근할 때 싸우러 나가지 못할 것이다. 

5. *벧에셀(*베이트 하 에젤 ; 지도자의 집)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지도자의 집,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벧에셀을 (빼앗음의 집)은 그 마을이 빼앗김, 즉 멸망으로 당함으로 인한 애곡을 표현한다. 

돕는 자 혹은 피난처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12.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6. *마롯(쓰라림, 가혹함)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마롯은 쓰라림, 가혹함 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따라서 쓰라린 마을은 복을 버린다. 

이 성읍은 행복을 찾지만 여호와로부터 재앙만이 내려와서 예루살렘 성문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13.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7.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히, '라레케시' , 직역하면 '준마에게')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에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준마 (레케시)는 라기스와 발음이 비슷하다.
라기스는 남서 유다 지방의 중심 도시였다.
이 성읍은 요새였다. 
미가는 전쟁을 치를 날이 다가왔기 때문에 라기스의 말들을 병거에 매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제주도에서 말을 준비하라. ' 정도 되겠다.

14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8.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가드 모레셋은 미가의 고향이다. 모레셋이 히브리 단어인 "결혼 지참금"" 소유물" 혹은 "선물"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아마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남편의 집으로 향한 신부에게 주는 이별의 선물을 생각나게 해 줄 것이다. 미가는 그의 고향 사람들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9.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악십이란 이름은 '거짓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매우 유사하다. 지금 악십 성읍은 이스라엘 왕들을 속였다.


15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10. 마레사("소유자"란 뜻 소유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미가(Micah)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

미가는 ‘모레셋’ 사람이며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미 1:1).
모레셋은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35km 정도 떨어진 성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미 1:14).

유다 왕
11대. 요담(요람) - 12대. 아하스 - 13대. 히스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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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서론

미가(Micah)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입니다.
미가는 ‘모레셋’ 사람이며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미 1:1).
모레셋은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35km 정도 떨어진 성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미 1:14).



미가서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처럼 보이지만, 유다를 향한 예언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서두에 유다 왕들의 이름만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미 1:1).
다른 선지자와 달리 그의 아버지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미가는 비천한 가문 출신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사한 언어와 수사법은 탁월합니다.

미가서 1:14절에 보면, 모레셋의 이름이 ‘가드모레셋’으로 나옵니다.
모레셋은 블레셋의 도시 가드 근방에 있어서 얼마 동안 블레셋의 영토였다고 추측합니다.
모레셋은 예루살렘 남서쪽 35km 지점에 있는 마을로서, 농촌입니다.
미가는 농촌 출신 선지자입니다.

여호야김 왕 때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모의했을 때 몇몇 장로들이 예레미야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가의 사역을 언급했습니다(렘 26:18, 19).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렘 26: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미가가 활동했던 BC 8세기 무렵에는 남북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사마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던 미가는 BC 732년 아람의 멸망 BC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BC 745-727), 살만에셀 5세(BC 727-722), 사르곤 2세(BC 722-705), 산헤립(BC 705-681) 등과 같은 앗수르의 통치자들 아래 앗수르가 다시 불같이 일어나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이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 쇠퇴하기까지 한 세기가 넘게 고대 근동을 지배했습니다.
미가가 활동했을 때 강대국은 앗수르 제국이었습니다.

산헤립의 침공으로 히스기야 왕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지만, 이사야와 미가를 통해 회개하고 예루살렘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왕하 18장).
하지만 히스기야가 죽은 뒤 유다의 왕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고, 이로 말미암아 유다는 미가의 예언대로 BC 586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남 유다가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했습니다(미 7:15).

이사야는 주로 왕실과 도시에서 활동했던 궁정 선지자였고(사 7:3-12; 36-39장), 미가시골이나 촌락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시골 선지자였습니다(미 1:2).
하지만 선지자 미가와 이사야의 메시지에 공통적인 부분(심판, 소망, 메시아 왕국)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미가는 빈곤한 자의 돈을 착취하는 행위, 부패한 상도덕(商道德), 껍질만 남은 신앙 등을 지적하면서, 특히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부패와 불의를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시골 모레셋 출신이었던 미가는 수도에 사는 귀족들의 부패와 탐욕으로부터 민중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미가는 유다와 이스라엘 지도층의 이런 죄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덮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고, 유다도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망하고, 수많은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삶은 죄로 가득 찼으면서 겉으로는 그럴듯한 종교의식 행위를 계속하며 자기들이 의롭다고 자부했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미가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애절하게 선포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미가서 6:8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8)


죄악으로 가득 찬 삶과 종교적 위선으로 인하여 곧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바라보는 미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미가의 심장은 슬픔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절절한 안타까움이 미가서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동시에 예루살렘이 세계 모든 나라의 주목을 받게 되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봅니다. 그리고 작은 베들레헴 마을에 위대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가 태어나서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릴 것이라는 황홀한 비전을 선포합니다(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 5:2)


부패한 왕들 때문에 나라가 멸망합니다.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불법으로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한 목사 때문에 한국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정의와 사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다시 살아나고 교회가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나라나 교회나 가정이나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때문에 살아납니다.

미가서의 특징

1. 탁월한 수사법과 그림같이 생생한 언어들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미가 1:10-16절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취할 경로에 대한 예언적인 서술입니다. 여기에서 미가는 재미있는 언어유희 (word-play)들을 사용하여 장차 각 도성의 이름과 그 도성이 장차 처할 운명을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미 6:6-8).

이는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아모스(공의,  righteousness), 호세아(인자,  steadfast love), 이사야(겸손히 행함,  humility and faith)의 메시지 주제를 종합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 구속 받은 자의 윤리적인 교훈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탐심’과 ‘없는 자들에 대한 착취를 질책하는(미 2:1-5, 8-9) 한편 통치자들의 불의와 탈취를 질타하고(3:1-4, 9), 선지자들(3:5-7)과 제사장들(3:11,12)과 같은 지도자들의 부정과 욕심을 신랄히 비판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의 정치적 상황

1. 북이스라엘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전쟁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람(시리아)과 연합하여 반 앗수르 정책을 펴고, 반 앗수르 연합에 동참하지 않았던 남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 3세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빼앗기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왕하 15:29).
결국,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BC 722).

2. 남 유다

아람 왕 르신과 연합한 북이스라엘 왕 베가의 공격으로 유다는 엘랏을 빼앗겼습니다(왕하 16:6).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성전과 왕궁 보물을 예물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전쟁에서 벗어났습니다(왕하 16:7-9).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공격으로 유다의 46개 성읍이 함락되었습니다(왕하 18:13-37).

 이스라엘과 유대의 종교적 상황(미가서 본문 중심으로)

 

1:7

우상 숭배 -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2:6,7

하나님에 대한 오해 -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2:11

거짓 선지자 -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3:5,6

뇌물을 받는 거짓 선지자 -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3:7

술객들 -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3:11

뇌물을 받는 제사장과 선지자 -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5:12

복술과 점쟁이 -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5:13,14

우상과 주상, 아세라 목상 - 내가 네가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내가 또 네 아세라 목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빼버리고 네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

 

6:16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따름(바알과 아세라 숭배)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앗수르 시대의 선지자들과 그 시대 상황

요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선지서 중에서 이사야가 가장 먼저 나오지만, 이사야가 가장 먼저 기록된 건 아닙니다.
17권의 선지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은 ‘요엘서’입니다.
하지만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배열하지 않고 장수가 많은 것부터 앞에 두는 바람에 이사야(66장)가 첫 번째, 예레미야(52장)가 두 번째, 에스겔(48장)이 세 번째로 나오는 겁니다. 

아모스가 사역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남 유다의 웃시야가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전성기였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앗수르의 아닷니라리 3세가 BC 805년 이스라엘의 원수 아람을 정복하고, BC 745년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즉위하기까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앗수르가 강대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은 경제적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 가장 잘나가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릴 뿐만 아니라, 공의가 무너진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가 아모스입니다.

아닷니라리 3세와 달리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는 공격적인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제정세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앗수르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호세아, 미가, 이사야 모두 앗수르가 강대국이었을 때 사역했습니다. 이 세 선지자는 앗수르가 다섯 번씩이나 아람과 이스라엘(유다 포함)을 침략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1. 앗수르의 첫 번째 침략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3-738)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관련 내용은 열왕기하 15:19-20절에 나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 므나헴 왕은 앗수르에게 은 1천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치고 목숨을 건지고, 위기를 넘깁니다.

2. 앗수르의 두 번째 침략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반 앗수르 동맹을 맺고 남 유다의 아하스를 이 동맹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사 7:1-2).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군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가 거절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하스가 믿음이 좋아서 징조를 구하지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겠다는 거지요.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임마누엘에 관한 징조를 주십니다(사 7장).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아람과 북이스라엘과 싸워서 다메섹에 큰 타격을 입힙니다.
북이스라엘의 갈릴리 지역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 갑니다(왕하 15:29).
이때, 친 앗수르 정책을 펼친 남 유다 아하스 왕에게 독립을 보장받지만, 그때부터 아하스와 남 유다는 앗수르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맙니다.

3. 앗수르의 세 번째 침략

BC 725-722년에 살만에셀 5세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되었습니다(BC 722). 살만에셀 5세가 3년 동안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공격해서 사마리아가 함락되었습니다(왕하 18:9,10).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모두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4. 앗수르의 네 번째 침략

아스돗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사르곤 2세가 아스돗을 쳐서 취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가 이 반역에 동참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앗수르가 애굽과 구스(에티오피아를) 황폐케 하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3년간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녔습니다(사 20장). 그의 행동이 바로 애굽과 구스에 대한 징조와 예표였습니다.


5. 앗수르의 다섯 번째 침략

산헤립이 BC 701년 남 유다 왕 히스기야를 공격한 사건입니다(사 36-37장, 왕하 18:13-19:37, 미 4:6-13).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앗수르가 패배한 전쟁입니다.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한 히스기야는 큰 신앙적인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이사야 36,37장에 나오는 히스기야의 믿음과 승리 이야기는 이사야 7,8장에 나오는 아하스 이야기와 비교됩니다.


미가가 활동한 시기 – 유다 왕 아하스 시대

 

미가서의 정치/종교/사회 상황

아하스 시대

정치/종교/사회 상황

사회적

불의

약자를 돌보지 않음(2:8-9)

평안히 가는 자의 의복을 빼앗음

부녀자들의 집을 빼앗음

정의와 공의가 없는 사회

(2:1-2; 7:2-4)

침상에서 죄를 꾀하고 그걸 행함

밭과 집을 빼앗음/산업을 빼앗음

악을 부지런히 행함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가 끊어짐

약자를 돌보지 않음(사 1:17)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음

고아를 위해 신원하지 않음

과부 위해 변호하지 않음

 정의와 공의가 없는 사회

(사 1:21,26)

신실함, 정의, 

공의가 사라지고

살인자들뿐인 성읍

지도자들의 불의(3:2-3, 5, 9-11)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

선지자들의 거짓된 예언

뇌물을 위해 재판

제사장들은 삯을 위해 교훈

선지자는 돈을 위해 점을 침

지도자들의 불의(1:23)

 

고관들이 뇌물을

사랑하고 예물을 구함

고아 위해 신원하지 않음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않음

 

종교적

타락

우상숭배(1:7; 5:12-14)

우상을 섬김

우상 숭배를 통한

부의 축적

복술을 행함

 

종교지도자들의 타락

(3:2-3, 9-11)

선지자들의 거짓된 예언

재판을 굽게 함

제사장들은 삯을 위하여 교훈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침

우상 숭배

(왕하 16, 대하 28)

바알의 우상들을 만듦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

자녀들을 불사름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함

이방신을 섬김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음

종교지도자들의 타락

(왕하 16:11-16)

북이스라엘

멸망 예언

이스라엘 멸망 예언(1:2-7)

앗수르의 북이스라엘 점령

(왕하 17:5-6)

산헤립의 침공

산헤립의 침공 경로 예언

(1:8-15)

산헤립의 침공 기록

(왕하 18:13)


미가 선지자가 지적하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죄들)은 유다 왕 아하스 시대의 죄들과 상당 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미가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예언이 아하스 시대에 선포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26:18절에 미가가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원 청중을 넓게 잡아서 아하스가 단독 통치하던 BC 731년부터 히스기야 왕 14, 앗수르 산헤립이 남 유다를 공격한 BC 701년 사이에 남 유다 백성들로 볼 수 있습니다.


@ 핵심 구절(Key Verse)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 중심 내용(main idea)

1)형식적인 제사(종교행위)가 아니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한다.

2)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정의와 인자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라. 

 

기록한 주된 이유(목적)

1)하나님의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정의와 사랑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려고

2)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특히 지도자들의 부패를 지적하기 위해

3)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말하기 위해

4)하나님의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될 것을 말하기 위해

5)이방에 포로로 끌려가지만,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심을 말하기 위해 

 

강조하는 하나님의 성품

1)공의의 하나님(죄는 반드시 심판)

2)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사랑)

3)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혜와 긍휼)


미가서 한눈에 보기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1-3장)

메시야 왕국

(4-5장)

하나님의 회복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의 소망

(6-7장)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심판(1장)

이스라엘

 심판이유

(2장)

지도자들의

 죄와 심판

(3장)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4장)

메시아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5장)

이스라엘의 죄와 여호와의 심판

(6:1-7:6)

남은 자에 대한 회복약속

(7:7-20)


미가서 두 눈에 보기

이 사람아, 잘 살아야 하네! (6:8)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1-3장)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심판(1장)

이스라엘의 심판 이유(2장)

지도자들의 죄와 심판(3장)

메시야 왕국(4-5장)

메시아를 통한 

이스라엘 회복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는 나라(4장)

메시아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5장)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의 소망(6-7장)

IS의 죄와 여호와의 심판(6:1-7:6)

남은 자에 대한 회복 약속(7:7-20)

 







07-28-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의 근본(미가 1:13)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찌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You who live in Lachish, harness the team to the chariot. You were the beginning of sin to the Daughter of Zion, for the transgressions of Israel were found in you.

"죄의 근본(the beginning of sin)"

라기스(Lachish)는 북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지게 하는 원인이 된  "죄의 근본(the beginning of sin)" 즉 "죄의 출발지" 라고 합니다.
라기스에서 어떤 죄를 일으켰는가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라기스는 병거로 무장한 성읍

라기스 주민들은 그들이 소유한 철병거로 인하여 전쟁에 능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전쟁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는 우상들이 유입된 것

라기스에서부터 우상이 유입되어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졌다고 합니다(5-9절)
라기스 주민들은 말과 강력한 병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을 더 의지하므로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힘을 의지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쉬운 일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만들어 나가고 좀 어렵다고 판단되는 일만 하나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찾는 것은 곧 죄의 근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찾는 신앙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 '라기스'(라키쉬)는 '준마'(라레케쉬)와 운율을 이룬다. 라기스는 병거로 무장한 성읍이며, 그곳 거민들은 전쟁에 능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앗수르의 침략소식을 듣고 전쟁을 치를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멸이다. 그들은 준비를 타고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다.

󰃨 라기스는...네게서 보였음이니라 - 본 구절은 라기스가 멸망당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딸 시온, 곧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근원이 라기스에서 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 죄악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과 병거를 의지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라기스를 통해서 우상들이 이스라엘에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5-9절, Lange,Smith).



유다 출신의 선지자 미가(Micah)는 남 유다 예루살렘과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에 대해 예언합니다.
미가 선지자의 주된 메시지는 이스라엘 두 왕국 전체에 만연해 있던 부패와 타락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행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될 것을 예언하는 것(1-7절)
심판에 대한 선지자 자신의 반응을 보여 주는 것(8-9절)
백성들을 향한 경고를 예언하는 것(10-16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서 죄악의 길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시려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시며 죄악을 지적하십니다.
이것은 확정된 멸망의 선언 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용납하실 수 없기에 그의 백성들이 악에서 떠나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바로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만물의 유일한 창조주이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특히 당시 각종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있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우상 숭배에 관한 경고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의 모든 거민들을 완전히 멸하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종교적 문화에 물드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가나안의 전통적인 우상 숭배에 빠져 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언제나 받았습니다.
특히 번성하던 통일 이스라엘이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한 것도 솔로몬으로부터 시작된 각종 우상 숭배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본장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소선지서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통하여 끊임없이 선포된 것도 바로 우상 숭배를 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사마리아의 죄악도 바로 우상 숭배였고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우상 숭배는 신약에 넘어와서는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도 두 마음을 싫어하듯이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신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힘에 의지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쉬운 일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만들어 나가고 좀 어렵다고 판단되는 일만 하나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하였듯이 오늘날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에 자신의 인생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것에도 결코 눈을 돌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군가?” 라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눠진 후 약 200년쯤 지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번성하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결국 망하게 되었고, 자신들에게는 절대 문제가 없다던 남유다도, 주변 강대국들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기에 미가를 선택하셔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게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으며,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는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현재 기록이 전해지는 16명의 선지자들은 BC 800년경부터 400년까지 4세기 동안 활동했다.
그들 대부분은 봉사 기간을 최소한 대략적으로라도 확정지을 수 있도록 연대 자료를 남겼다.
그러나 두 사람(요엘과 오바댜)의 경우 사역 시기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매우 다르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 특별히 후기 왕들의 시대를 비교적 매우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16명의 선지자들이 봉사했던 시기에 다스렸던 여러 왕들의 통치 기간이 본 주석에서 채용한 잠정적인 연대기에 따라 이 도표에 편입됐다(참조 제3권, 107; 제4권, 54, 76, 99, 100, 322). 이 시기에 다스렸던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왕들의 비교적 잘 정립된 연대도 다른 난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왕들 대부분은 성경의 예언서나 역사서에 언급되어 있다. 또 한 난에는 이 기간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들의 목록이 나와 있는데, 일부는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국들에서 일어난 국외 사건에 관한 것이고 일부는 국내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 도표에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으며 예언적 기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들만 나와 있다.

 다음의 간략한 요약에는 여러 선지자들이 도표에서 각각 해당 연대에 표시된 것에 관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

이사야는 성경 기자들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이 사실은 여러 신약 기자가 인정하는 바, 그들은 이사야서를 90회 이상 인용했다.
이사야는 남방 왕국의 선지자로,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시기에 살았다.
그는 두 번의 결정적인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 아하스 치세 때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였던 시기(사 7~11장),

 (2) 히스기야 치세 때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포위했던 시기(36, 37장).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통해 히스기야와 백성을 독려한 그는 예루살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의 초기 봉사는 웃시야 왕 통치 말기와 일치하는 것 같지만(참조 이사야 서론), 공식적인 선지자로서의 부르심은 웃시야 왕의 마지막 해인 BC 740/739년에 있었다(6:1). 이어지는 세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치세 아래서 신실하게 봉사했던(1:1) 그는 히스기야의 악한 아들 므낫세에게 극도로 미움을 받았던 것 같다. 므낫세는 BC 686년경 그의 아버지의 사망 직후 단독 통치자로 보좌에 등극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그 신실한 선견자를 제거하였다(선지자와 왕, 382).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당하여 죽었다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37절이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웃시야부터 므낫세까지 이사야의 전 봉사 기간은 반세기 넘게 지속됐음에 틀림없다(선지자와 왕 310, 382,).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일대기는 다른 선지자에 비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나돗이 고향이었던 제사장의 가문에 속했다. 예레미야는 출생 전부터 하나님에게 택함 받아 직무를 맡았고(렘 1:5) 어린 나이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1:6, 7). 선지자가 자신을 가리켜 말한 “청년” 혹은 “아이”(1:6)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아르(na‘ar)는 예레미야가 정확히 몇 살에 부름을 받았는지 드러내 주지는 않지만, 이 단어가 들어있는 구절의 문맥이 적어도 20세 미만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는 해석을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이 부르심은 BC 627/626년 요시야 왕 제13년(1:2; 25:3)에 있었다. 그 당시 요시야는 불과 21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왕이었다.

 예레미야는 조국이 위기를 겪던 시기에 살면서 동포에게 책망의 기별과 앞으로 닥쳐올 파멸에 대한 엄중한 예언을 많이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여호야김 치세 때는 담대한 기별로 인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기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36:26).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치세 때는 바벨론인들에게 항복하라고 권고했다는 이유로 배반자로 여겨져 투옥됐다(37:11~16).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 후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가 유다에 남게 된 동포와 지내도 좋다고 허락했다(40:1~6). 유다의 새 총독 그다랴의 피살 후 미스바의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예레미야와 그의 서기 바룩을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갔다(43:6).

 애굽에서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행하던 우상숭배를 강하게 질타했다(43, 44장). 그는 나일강 지역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유대인의 전설 가운데는 그가 동포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적인 후기(後記)인 52장을 예레미야가 기록했다면 그는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Evil-Merodach)이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방면했던(참조 52:31) BC 561년까지 살았음에 틀림없다. 이럴 경우 그는 80대였을 것이다. 52장이 예레미야의 서기나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영감받아 기록한 후기로서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약 20년 앞선 BC 580년경에 죽었다고 믿는다. 도표에는 두 의견을 다 반영하여 실재했을지 모를 BC 560년 이전 20년의 봉사 기간을 점선으로 표시했다.

 에스겔

 선지자 겸 제사장인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압송됐던 BC 597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로 잡아갔던 유다인 10,00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호야긴이 포로 된 지 제5년인 BC 593/592에 에스겔은 바벨론 남부 닙푸르(Nippur)라는 유명한 도성 인근의 한 운하였던 “그발강”가에서 첫 번째 계시를 보았다(겔 1:1~3). 포로 된 지 제5년을 그가 “제삼십년”이라고 언급한 것은 수수께끼이다. 선지자가 자신의 나이를 그렇게 지칭했거나 아니면 그 해가 요시야 왕이 개혁을 일으킨 지 제30년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에스겔의 여러 기별은 정확한 연대를 매길 수 있으며 연대가 매겨진 예언 기별 중 마지막은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제27년(29:17)인 BC 571/570년에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BC 593/592년부터 BC 571/570년까지 적어도 22년의 봉사를 한 셈이 된다. 그러나 연대가 매겨지지 않은 일부 예언이 그 이후에도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BC 571/570년을 굳이 그의 봉사의 마지막 해로 구분지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니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즉위년인 BC 605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참조 단 1:1 주석). 하지만 젊은 다니엘이 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최초의 증거를 보여 준 사건은 느부갓네살 제2년 곧 그가 포로 된 지 제3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1:5, 17; 2:1, 19). 따라서 BC 603년을 다니엘이 선지자로 봉사하기 시작한 해로 볼 수 있다.

 한동안 그는 느부갓네살 정부의 고위직에 있었고(2:48) 그 위대한 왕에게 신임받는 모사가 됐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들의 치세 때는 다니엘의 조력이 요청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벨론이 멸망하던 밤, 벽에 기록된 신비스런 글자의 해석자로서 다시 한 번 역할을 담당한다(5장). 이 사건 직후 그는 새롭게 형성된 페르시아 제국에서 또다시 명예롭고 책임이 막중한 고위관직에 오르게 되었다(6장).

 

7~12장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다니엘이 말년에 받은 것인데, 첫 번째 계시(7장)는 벨사살 원년(BC 552년 혹은 그 후)에, 마지막 계시(10~12장)는 고레스 제3년인 BC 536/535년에 주어졌다. 그가 책을 마무리짓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가 이 시기였을 것이며, 이때 다니엘은 거의 90세였을 것이다(12:4, 13). 이런 이유로 다니엘의 광범위한 선지자 봉사 기간은 대략 BC 603년에서 535년까지로 산정할 수 있다.

 호세아

 선지자 호세아는 북방 이스라엘의 시민이었는데, 당시는 그가 “우리 왕”(호 1:1; 7:5)이라고 부른 여로보암 II세가 통치하던 때였다. 호세아의 예언 일부와 아모스의 예언을 비교해 보면 호세아가 동시대의 아모스보다 젊었다는 점이 드러난다(참조 호 4:3암 8:8; 호 4:15암 5:5; 호 8:14암 2:5).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호 1:1)에 봉사를 시작한 호세아는 유다 왕 히스기야 때까지 계속 활동했다(1:1). 그러나 그의 모든 기별은 북방 왕국에게 보낸 것이었다.

 호세아서에는 BC 723/722년에 일어난 사마리아의 함락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선지자의 마지막 기별은 사마리아의 멸망 전에 주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봉사는 약 BC 755년(혹은 그전)부터 BC 725년경까지로 산정할 수 있다.

 요엘

 선지자 요엘에 관해서는 브두엘의 아들(욜 1:1)이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저작은 능란한 말솜씨와 균형 잡힌 구문과 생동감 있고 인상적인 시(詩)라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책에는 선지자가 살았던 시기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선지자가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며 다가올 심판날의 두려움과 비교하는 파괴적인 황충 재앙의 시대를 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요엘이 봉사했던 시기에 관해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이전 세대의 학자들은 그를 BC 9세기 사람으로 보는 반면, 현재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의 시기를 요시야 왕 시대나 바벨론 유수 이후로 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의 세 가지 견해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모두를 여기에 제시한다.

 1. 9세기 견해

 대제국 앗수르와 바벨론은 이 선지자의 시계(視界) 안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그는 앗수르가 팔레스타인 정세에 어떤 역할을 하기 이전 시대에 일했던 것 같다. 이방 민족들이 유다에게 자행한 적대 행위들(3:4 이하)은 열왕기하 8장 20~22절역대하 21장 8~10절에 기록된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반면 왕하 12:17, 18대하 24:23, 24에 기록된 하사엘의 침공을 지적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요엘이 이 두 사건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에 기별을 전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더욱이 그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어린 왕 요아스를 위해 섭정하던 시절(왕하 11:17~12:2)에 봉사했다고 여겨지는데, 이 사실은 요엘서 어느 곳에도 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한편 그 당시에는 성전봉사가 잘 이뤄지고 있었다.

 2. 7세기 견해

 이 견해는 요엘의 봉사가 요시야 초기, 곧 앗수르 세력이 거의 끝나고 바벨론이 아직 약한 왕국이었던 시기에 들어맞는 것 같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두 왕국에 관한 언급을 이 선지자가 전혀 안 했던 것이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보좌에 올랐기 때문에 섭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요엘이 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에 대한 설명이 된다. 더욱이 두로와 시돈 백성이 유다 역사의 마지막 수십 년이 돼서야 적대국으로 등장하는 반면, 요엘이 그들을 유다의 원수로 언급한 사실은 이 선지자의 봉사가 늦은 연대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여기에 헬라에 관한 언급(욜 3:6)을 덧 붙일 수 있는데, 헬라는 BC 7세기 이전에는 근동 역사에서 활약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확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을지라도 본 주석에서는 7세기를 요엘서의 연대로 채택했다.

 3. 바벨론 유수 후 견해

 유다 왕이나 앗수르 혹은 바벨론에 관한 언급이 없으나, 두로와 시돈의 적개심과 헬라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을 일부 주석가들은 요엘서가 포로 후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대한 언급, 즉 그렇게 늦은 연대에 기록됐다면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요소도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로 인해 이런 늦은 연대를 지지하는 논거는 약해진다.

 아모스

 아모스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목자” 그리고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암 1:1; 7:14)로 제시한다. 책 서두에서 그는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II세의 치세 때 봉사했다고 밝힌다. 두 왕만 언급된 점으로 보아 아모스는 두 왕이 각자의 나라에서 단독 통치자로 있던 시대에 예언했던 것 같다. 웃시야는 유다에서 BC 767년부터 750년까지,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에서 BC 782년부터 753년까지 단독으로 통치한 왕이었다. 첫 번째 기별이 “지진 전 이년”(1:1)에 임했다는 언급이 있는데도 더 정확한 연대 추정이 불가능한 이유는 지진의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진은 매우 강력했음에 틀림없는데, 이는 스가랴 14장 5절을 보면 그 지진에 대한 기억이 250년 후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유다의 국민이었으나 이스라엘 왕국에도 기별을 전했다. 그의 기별 중 일부는 여러 이방 민족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성소가 있는 벧엘에 가서 이스라엘에 닥칠 운명과 경고와 견책의 예언들을 전했다.

 오바댜

 21절로만 구성된 짧은 책 오바댜는 연대가 나와 있지 않으며 연대적 배경도 불확실하다. 에돔에 대한 경고인 오바댜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이 최근에 일어났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오바댜가 BC 9세기 여호람 왕 시대에 예루살렘이 정복당한 사실(왕하 8:20~22; 대하 21:8~10, 16, 17)을 언급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일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그가 사용한 단어 일부가 예레미야(옵 1:1, 3, 4절; 참조 렘 49:14, 16)와 요엘(옵 1:15, 17절; 참조 욜 1:15; 2:1, 32)에도 나온다는 점이 늦은 연대인지 이른 연대인지 밝히는 증거로 사용되기 힘들다. 본 주석에서는 이른 연대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늦은 연대를 채택하고 있다.

요나

선지자 요나는 가드헤벨 출신의 갈릴리 사람이었다.
그의 책에는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시기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요나가 여로보암 II세가 성취할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에 관한 예언을 선포했다고 나와 있다.
이 예언은 여로보암이 즉위하기 전(약 BC 793년)이나 그의 통치 초기에 선포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요나는 여기서 논의하는 선지자들 중 가장 초기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요나의 봉사 시기를 BC 790년경으로 이른 연대로 잡는 것은 앗수르의 역사와 잘 부합한다.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사명과 그 결과가 부합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기간은 아닷-니라리 III세(Adad-nirari III, BC 810~782) 치세이다.
그의 통치 중 짧은 시기 동안 앗수르는 다신교 신앙에서 단일신 나부(Nabu) 숭배 신앙으로 돌아섰다(참조 제3권, 82).

미가

미가는 유다 남서부 텔 엣-주데이데(Tell ej-Judeideh)로 보이는 가드모레셋(미 1:1, 14) 출신의 선지자였다.
미가를 아합 시대(BC 9세기)에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초기 주석가들은 이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려고 했는데, 이는 그들이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미 1:2; 참조 왕상 22:28).
그러나 미가가 제시한 연대적 자료는 이렇게 보는 것과 부합하지 않으며, 두 사람 사이에 한 세기 이상의 시차가 있음을 보여 준다.

미가는 자기의 봉사가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미 1:1) 시대에 해당한다고 언급한다.
요담의 단독 통치가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죽던 BC 740/739년 후에 시작됐기 때문에, 미가의 선지자 봉사의 시작 연대도 웃시야의 사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사야보다 조금 어린 동시대 사람인데, 그의 예언은 어휘와 용어 면에서 이사야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난다(미 4:1; 참조 사 2:2~4).

예레미야(렘 26:18)도 미가서(미 3:12)를 인용하며 미가가 히스기야 시대에 봉사했음을 증언한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춰볼 때 미가는 약 BC 740년부터 700년경까지 예언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훔

나훔은 엘고스 사람이라 불린다(나 1:1). 엘고스라는 지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주석가들은 이곳이 갈릴리 북부에 있는 엘케시(Elkesi), 모술(Mosul) 인근의 알쿠쉬(Alkush), 유다의 엘류쎄로폴리스(Eleutheropolis) 인근 마을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남방 왕국에서 살고 일했으며, 그의 주요 예언이 전반적으로는 앗수르를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니느웨를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어떤 연대적 자료도 나오지 않지만 선지자는 노(No)의 멸망을 과거사로 말하고 있다(3:8). 헬라식 명칭인 테베(Thebes)로 더 잘 알려진 상(上)애굽의 이 수도는 BC 663년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에게 멸망당했는데, 이 해는 나훔이 예언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의 상한선이 된다. 반면 니느웨의 멸망은 장래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다(3:7).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가 멸망당했고, 따라서 이 해는 나훔이 예언한 시기의 하한선이 될 수 있다. 테베에 임한 파멸에 관한 선지자의 생생한 묘사는 그 사건이 백성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인상을 주는 반면, 앗수르는 세력이 기울고는 있었지만 아직 파국에 가깝지는 않았다. 그래서 테베의 멸망과 니느웨의 멸망 연대의 중간쯤 되는 BC 640년이 나훔의 예언적 봉사에 합당한 추측 연대일 것 같다.

 하박국

 하박국에 관해서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하박국 3장이 “영장”에게 바치기 위해 “내 수금에 맞춘 것”(합 3:19)이라는 기록을 보면 그가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연대적 자료도 하박국서에 나오지 않지만 하박국의 예언 시기를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 언급들이 일부 있다. 성전이 아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2:20) 하박국서는 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기록됐음이 드러난다. 더군다나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나 서방을 침략할 것이라는 예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1:5~7). 이 상황은, BC 626/625년에 통치를 시작하여 메대와 함께 앗수르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 치하의 갈대아 제국이 일어나기 전 시기에 가장 잘 맞는다. 갈대아 사람들이 주요 세력이 되기 전인 BC 630년경이 하박국의 예언 활동 시기로 매우 적절한 것 같다.

 스바냐

 선지자 스바냐는 유다 왕 히스기야(Hezekiah)로 보이는 히즈키야(Hizkiah, 두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같음)라는 중요 인물에 이르기 까지 자기 계보를 소급한다. 그는 BC 640년에서 609년까지 다스렸던 요시야 왕(습 1:1)의 치세 때 봉사했다고 진술한다. BC 612년에 일어난 니느웨의 멸망이 미래의 사건으로 언급된 점은 스바냐의 사역이 이 연대보다 앞서 진행됐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유다의 죄악이 당대에 엄청났다고 반복하여 언급한 것(참조 1:4~6, 8, 9, 12; 3:1~3, 7)은 BC 622/621년에 시작된 요시야의 개혁 이전 시대를 가리킨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스바냐는 아마도 BC 630년경 요시야의 통치 초기 곧 하박국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학개

 한동안 중단됐던 성전 재건(스 4:24; 5:1)은 학개의 담대한 봉사를 통해 다리오 I세 때 재개되었다. 학개서에는 연설 네 개가 들어 있는데, 각각에는 다리오의 정확한 통치 연월일이 나와 있다. 학개서의 이어지는 순서를 통해, 기록된 그의 봉사 기간은 BC 520년 8월 29일에 시작하여(학 1:1) 마지막 두 편의 연설(2:10, 20)을 했던 BC 520년 12월 18일까지 전부 3개월 반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학개의 사역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연대를 매길 수 있는 다른 선지자는 없다.

 스가랴

 스가랴는 제사장 가문에 속했던 것 같다(슥 1:1; 참조 느 12:12, 16). 소명은 BC 520년 10/11월 어느 날 그에게 이르러 왔는데, 같은 해에 학개도 처음 등장한다(슥 1:1). 여러 예언이 두세 달 후에 연이어 임했다(1:7~6:15). 그런 뒤 그의 활동은 거의 2년 동안 잠잠했다가, BC 518년 12월 6일(7:1) 7장8장에 기록된 또 다른 거룩한 기별을 받았다. 9~14장에 나오는 나머지 기별과 예언에는 연대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스가랴의 활동기간을 확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BC 520년에 사역을 시작하여 BC 518년까지 계속했음은 알려져 있는 반면, 선지자 봉사의 끝은 정하지 않은 상태로 유보해야만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봉사의 마지막을, 잠정적으로 BC 510년이라고 정한다. 9~14장 부분이 훨씬 후에 주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좀 더 오래 일했을 가능성도 있다.


 

말라기

 말라기라는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말라기가 저자의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히 익명의 저자에 대한 호칭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라면 그의 책은 구약의 선지서 가운데 유일한 익명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말라기를 왜 고유명사로 보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는 없다.

 말라기서는 선지서들의 배열에서 마지막 책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 저술된 마지막 예언서이기도 하다. 그 책의 기별은 유다 왕국 시대가 끝나고 총독이 나라를 치리하던 시대(말 1:8)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그때가 페르시야 시대임을 가리킨다. 성전은 분명히 재건됐고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제사가 정규적으로 드려졌다(1:7~10). 말라기가 꾸짖었던 여러 악습은 느헤미야가 두 번째 총독 임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발견했던 것들과 거의 동일하다(말 3:8, 9; 참조 느 13:10~12; 말 2:11~16; 참조 느 13:23~27).

 불행하게도 느헤미야의 두 번째 총독 임기의 연대를 추정할 수 없기에 말라기의 연대를 정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느헤미야의 첫 번째 총독 임기는 BC 444년부터 432년까지 이어졌다가, 이후에 페르시아로 소환됐다. 거기서 그는 얼마간인지 알 수 없는 여러 해를 보낸 뒤 유대로 돌아왔을 때 느헤미야 13장에 기록된 악습들을 보게 된다. 이런 악습들은 총독의 단호한 조치로 시정되었다. 이를 통해 말라기의 사역은 느헤미야의 첫 번째 총독 임기에 뒤이어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수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시기 이전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BC 42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저자 : 미가서의 저자는 선지자 미가(미 1:1)

저작 연대 : 주전 735-700년 사이에 쓰여졌습니다.

기록 목적 : 미가서의 메시지는 심판과 소망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악, 부패한 지도층, 그리고 우상 숭배으로 인한 이스라엘 심판을 예언합니다.
이 심판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책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변화와 영광을 선포합니다.
소망과 멸망의 메시지는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복과 변화는 심판 후에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핵심 구절 : 미가 1: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는 "여호와 같으신 이가 누구입니까?"라는 뜻의 미가야후(מִיכָיָ֫הוּ)를 줄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가는 주로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이사야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
주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해 예언했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부자들을 몹시 꾸짖고 가난한 자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미가 1:1은 예언자 미가가 예언 활동을 펼치던 때를 남 유다의 요담 왕(주전742-735). 아하스 왕,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로 소개한다.
미가가 활동할 당시에는 신 앗수르 제국의 힘이 상승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앗수르 제국의 왕들은 다른 주변 국가의 왕들과 달리 정복한 백성들로부터 받은 조공을 가지고 직업 군인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서방의 군인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군사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미가는 구약 소예언서 중 한 권이다.
미가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유다 왕국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기원전 739년~686년) 치세의 선지자이다.
모레셋 사람 미가(מִיכָה הַמֹּרַשְׁתִּי / Mīḵā hamMōraštī)으로 기록돼있다.
아합 왕에게 책망을 한후 미가는 아합 왕의 아들 요람에 의해 절벽에서 죽임을 당했다


미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구약의 예언서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적절히 혼합하여 해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1장 : 이스라엘의 악행의 원인인 사마리아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고, 예루살렘은 유다의 산당의 원인인데 예루살렘 근처의 성들이 정복당할 것이다.

2장 1-11절 :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나 들으며 악한 일들을 꾸미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2장 12-13절 :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을 모을 것이고, 하느님이 그들을 선두에서 이끄는 왕이 되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이끄실 것이다.

3장 : 타락한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과 선지자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4장 1-5절 : 마지막 날에 많은 민족들이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몰려올 것이고, 그 이후로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게 된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많은 민족들에게서 구원받는 자들이 나올 것이며, 그들은 영원히 평화로운 천국에 가게 된다.

4장 6-13절 : 마지막 날에 하느님이 다리 저는 사람들, 추방된 사람들, 환난을 당하던 사람들을 모으실 것이고, 그들을 시온 산에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바벨론으로 가게 될 것이고, 하느님은 그들을 그곳에서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많은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고 있으나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을 짓밟게 할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세상에서 고통 당하던 성도들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고통당하나 결국 구원받을 것이고, 재림의 때에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4장 14절-5장(5장) : 베들레헴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고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는데, 그는 앗시리아를 무찌를 것이다.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고, 원수들을 향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 날에 앗시리아는 멸망할 것이고, 우상들은 사라질 것이며, 하느님께 복종하지 않는 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고, 각 나라에 있는 구원 받은 성도들은 마귀들을 향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재림의 날에는 모든 마귀들과 죄인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6장 :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으로부터 구하신 하느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싯딤에서 길갈에 이르기까지 악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고,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겸손히 하느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7장 1-17절 : 미가 선지자는 죄로 심각하게 타락한 이스라엘의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이 결국 자신을 빛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며, 원수는 세력이 커지다가 결국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기독교적 해석 : 성도들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더라도 결국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에서 점점 악해지다가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7장 18-20절 : 죄악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








죄의 근본(레쉬트 핱타트. רֵאשִׁית חַטָּאת)

7225
רֵאשִׁית 스트롱번호7225
1. 처음
2. 이전의 상태
3. 처음 것
발음 / 레쉬트(rêʼshîyth)
어원  / 7218과 동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태초(창1:1), 시작(창49:3, 욥8:7, 전7:8), 처음(출23:19, 느10:38, 겔48:14), 첫(레23:10, 겔20:40), 으뜸(민24:20, 욥40:19, 렘49:35),장자(신21:17), 맏물(신26:2,10), 가장(삼상2:29, 15:21), 근본(시111:10, 잠1:7, 미1:13), 제일(잠4:7).
구약 성경 / 51회 사용



2403
חַטָּאָת 스트롱번호2403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4:3, 대하6:25), 죄악(창18: 20,사5:18), 속죄제(출29:14, 민15:27, 왕하12:16), 속죄 제물(레4:32, 민8:8, 대하29:23), 속죄 희생(레4:25), 허물(레5:6), 잘못(레5:10,11), 속죄(레10:19, 민8:7), 속건제(레7:7), 번제(레4:29), 죄악(시32:5, 애4:6), 죄인(잠5:22,13:6), 벌(슥14:19). [동] 범죄하다(느1:6, 욥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 '라기스'(라키쉬)는 '준마'(라레케쉬)와 운율을 이룬다. 라기스는 병거로 무장한 성읍이며, 그곳 거민들은 전쟁에 능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앗수르의 침략소식을 듣고 전쟁을 치를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멸이다. 그들은 준비를 타고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다.

라기스는...네게서 보였음이니라
- 본 구절은 라기스가 멸망당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딸 시온, 곧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근원이 라기스에서 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 죄악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과 병거를 의지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라기스를 통해서 우상들이 이스라엘에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5-9절, Lange,Smith).



미가서 1장은 사마리아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유다 출신의 선지자 미가가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의 수도인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에 대해 예언합니다.
미가 선지자의 주된 메시지는 이스라엘 두 왕국 전체에 만연해 있던 부패와 타락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행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될 것을 예언하는 것(1-7절)
심판에 대한 선지자 자신의 반응을 보여 주는 것(8-9절)
백성들을 향한 경고를 예언하는 것(10-16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서 죄악의 길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시려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시며 죄악을 지적하십니다.
이것은 확정된 멸망의 선언 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용납하실 수 없기에 그의 백성들이 악에서 떠나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바로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만물의 유일한 창조주이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특히 당시 각종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있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우상 숭배에 관한 경고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의 모든 거민들을 완전히 멸하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종교적 문화에 물드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가나안의 전통적인 우상 숭배에 빠져 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언제나 받았습니다.
특히 번성하던 통일 이스라엘이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한 것도 솔로몬으로부터 시작된 각종 우상 숭배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본장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소선지서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통하여 끊임없이 선포된 것도 바로 우상 숭배를 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사마리아의 죄악도 바로 우상 숭배였고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우상 숭배는 신약에 넘어와서는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도 두 마음을 싫어하듯이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신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힘에 의지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쉬운 일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만들어 나가고 좀 어렵다고 판단되는 일만 하나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하였듯이 오늘날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에 자신의 인생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것에도 결코 눈을 돌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군가?” 라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눠진 후 약 200년쯤 지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번성하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결국 망하게 되었고, 자신들에게는 절대 문제가 없다던 남유다도, 주변 강대국들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기에 미가를 선택하셔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게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으며,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는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가 있었습니다.



(1)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하나님의 임재(1-3절)
1절을 보면,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미가는 모레셋 출신의 선지자라고 하는데, 이 모레셋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34km에 위치한 작은 농업마을입니다. 이곳에 부패하고 타락한 예루살렘의 부자들이 와서, 부당한 방법으로 소산물을 착취하거나 땅을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모레셋은 힘도 없고 보잘 것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선지자가 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을 제대로 귀담아 들었겠습니까? 우리도 외적으로, 편견과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고, 피어싱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어느 성도님이 “청년! 어떻게 인생을 사려고 그래. 그렇게 해서 직장이나 제대로 다니겠어. 대체 학교는 다니긴 하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저 서울대 경제학과 다니는데요.” 라고 말하자, 순간 정적이 흐르며, “아~ 어쩐지, 창의성이 있게 보이더라”고 말하며, 그 분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이건 단적인 예지만, 우리는 평소 외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연 저 사람이 가능할까? 과연 저 상황에서 가능할까?”라고 편견을 갖습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가능합니다. 보잘 것 없는 모레셋 출신의 미가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을 때, 심판과 회개에 대해 선포하며, 결국 훗날 5:2에서 소망의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하게 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약함으로 심고 강함으로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19:26에서도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임재가 임하면, 주로 땔감으로 사용하는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이 십계명을 담는 법궤로 사용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 극렬한 죽음의 상징이어서, 쳐다보기도 싫었던 십자가를, 부활과 소망의 상징으로 변화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 걱정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삼상16:13에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크게 감동되다”라는 원어적 의미는 마치 ‘큰 태풍이 휘몰아쳐 와서 모든 것을 갈아엎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다윗에서 임하셨을 때, 혹여나 그가 갖고 있는 두려움과 근심을 몰아쳐주시고, 갈아 엎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함을 갖게 하셔서, 결국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임하십니다. 나약하고 힘든 상황일수도 있지만, 그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우리가 가진 두려움과 걱정을 평안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영이 소망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4-7)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말씀을 품는 자(4-7절)
미가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산들을 녹이고 골짜기들을 갈라지게 할 정도의 큰 형벌이었습니다. ‘우상 숭배, 음행, 이웃에 행악을 저지르며 공의와 정의를 어지럽히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5절에 “이는 다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 족속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에 쓰레기가 있으면, 그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허물과 죄들이 난잡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방관하고, 치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허물과 죄를 더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 이유는 5절과 7절에 설명되었듯이,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자행했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결국 교만입니다. 교만은 삼상15:23에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버린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미가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줄기차게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수의 강’이신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렘2:13) 심판이 오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거짓 선지자들의 허탄한 가르침에만 귀를 기울여 패망을 자초했습니다.
싱크홀 현상이 있습니다. 이는 도심이든 자연이든 땅이 갑자기 붕괴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땅이 무너져 그 위에 있는 사람과 건물 등이 주저앉아 심각한 사고를 유발합니다. 그런데 이 싱크홀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그 지반에 있어야 할 지하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물이 사라지니, 그 주변의 지탱하던 토양들이 소실되면서, 결국 가라앉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도 영적인 싱크홀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마음에, 우리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영적인 부분도 붕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가를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헛되이 살지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들을 생각하며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8-15)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앗수르보다 이스라엘을(8-16절)
8~9절에 미가는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겠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앞에 놓인 운명을 바라보고 처량하게 애통해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미가가 그렇게 애통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사마리아의 죄가 더 이상 치유될 가능성조차 없으며, 사마리아의 문제가 예루살렘까지 전염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제14년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침공하여 순식간에 무려 46개의 성읍을 함락하고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마저 함락시키기 위해 포위하였습니다. 10~15절에 나온 성읍들이 바로 이때 앗수르에 함락된 성읍들입니다. 이 성읍들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기업으로 받은 곳입니다. 거기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지만, 12절에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고 말씀하듯이, 원래의 아름다운 의미와 반대되는 부정적인 의미를 통하여, 삶의 자리가 재앙으로 가득한 저주로 변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침공한 앗수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이는 앗수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 처절한 형벌과 황폐함의 결과는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에서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없애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없애거나 기도의 내용을 먼저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없어질 수 있는 환경, 기도의 내용(본질)이 응답 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드십니다. 사사기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때 이들은 대적 미디안 등을 물리치는 강한 용사를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신 것은 강한 기드온과 같은 사사가 아니라, 이름 없는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상황입니다. 기도응답이 잘 못되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디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바탕(환경)을 먼저 만드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이 생겼는지, 근본적인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돌이킨 후에 보내주신 것은, 그들의 기도 응답인 기드온입니다. 천지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내용을 먼저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빛, 하늘, 산, 바다, 식물, 해, 달, 별’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생명이 살아갈 환경을 먼저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5-6일째, 거기서 살아갈 ‘새, 물고기, 동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기도의 내용보다 그 기도가 들어주는 바탕(환경)을 먼저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도를 할 때, 그 내용에 대해서만 기도하기 보다는,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바탕(환경)이 먼저 조성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순위며, 그럴 때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내게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감사하며, 그 말씀을 품고 주님의 죽으심이 헛되지 않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바랍니다.














































































































































요나(Jonah) 비둘기 07-24-2023(월) /



요나서

요나서구약성경 네비임 소선지서 중 한 권이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나는 니네베의 파괴를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으나 이를 벗어나기 위해 위해 보내지만 이 신성한 사명을 벗어나려 시도하다가 결국 받아들인다.

유대교에서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성찰을 심어주기 위해 욤키푸르 오후에 읽는 하프타라로 남아 있다.
코란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서 여로보암 2세 통치기에 요나가 등장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 통치기인 기원전 793-753년 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배경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에 살았던 여로보암 2세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왕하 14:23-29).
일찍이 앗수르는 근동에서 군림하는 자리를 차지하였고 예후로부터 조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앗수르)는 아람 족속들을 쳐부순 다음에 내부적인 다툼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대제국이 되기를 희망하던 아시리아가 잠시 쇠퇴해진 틈을 타서 여로보암 2세는 일찍이 아람에 속해 있었던 영토를 장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다른 예언서에서 지금까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죄악이 극심했기 때문에 호세아아모스를 보내어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다. 요나는 후일에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적들을 돕는 일에 자신이 쓰여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니느웨는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로부터 약 55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티그리스강 동쪽 제방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니느웨는 큰 성읍으로서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외곽의 성벽과 내곽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보호를 받고 있었다. 요나가 이렇게 난공불락의 도시처럼 보이는 철옹성에 도착하기 전에 두 가지의 재앙이 이 도시를 덮쳤고(B.C.765과 759), 이 일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으로 받아들여졌고, 또 759년경에 왜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에 속히 응답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신행일치(信行一致)
언행일치(言行一致)

신행일치 (faithfulness)
언행일치 (word and deed match)

요나서 – 개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요나서 2:9
표제: 이 책은 주요 등장 인물인 요나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되었는데 그 의미는 “비둘기 -dove”라는 뜻이다.
요나 즉 비둘기라는 말은 아가서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아 2:14; 5:2; 6:9)

저자 : 요나서 자체에는 요나가 저자라고 명시된 구절이 없지만 그가 저자라는 사실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목적 : 주권자이신 야웨(YHWH)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놀라운 자비로 수 많은 죄인들을 쫓으시는 구원하심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으로 도망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물에 빠져 죽게될 이방 선원들, 그리고 악한 니느웨 성읍 시민들을 찾으신다.
배경 : 이스라엘이 남유다(Southern Kingdom)와 북이스라엘(Northern Kingdom)로 갈라지고 나서 쇄약했던 북이스라엘이 다윗 이후에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BC 780-760 년 경에 요나 선지자가 활동했고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로는 아모스가 있다.

이 당시 왕은 요아스의 아들인 여로보암 2 세였다.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신 니느웨 성은 이스라엘 주변 강국 중의 하나였던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있는 강한 나라였으나 당시 내부적 분열과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쇠약해 있었고 이 때에 여로보암 2 세가 앗수르 주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것은 요나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일이다(왕하 14:23-29).
그리고 40년 뒤에 BC 722 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다.
이 당시에 영토 확장과 타국들의 쇄약을 통하여 강국이 되고 나라와 백성들도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기에 다윗 이후에 제 2 의 전성기라(Golden Era, Silver Era)고 불린다.
그러나 풍요로움 속에 백성들을 하나님을 떠났고 우상 숭배가 넘쳐나던 상황이었다.
외부적으로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부패하여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시대였다.
자비의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회개와 회복을 선포하셨으나 백성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로 보내신다.
자비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귀한 메세지가 있다.

중요 등장 인물 : 요나, 이방 뱃사람 (선장, 사공), 니느웨 사람들 (백성, 왕, 대신) –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어떻게 반응 하는가?

중요한 테마 (THEMES)
• 하나님의 주권 (Sovereignty) : 폭풍 (1:4, 1:15), 제비 (1:7), 물고기 (1:17, 2:10), 구원 (2:9), 넝쿨 (4:6), 벌레 (4:7), 동풍 (4:8)
• 기도 : 사공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1:5), 선장의 부탁 (1:6), 무리가 여호와께 (1:14), 요나의
기도 (2:1), 니느웨 백성들의 기도 (3:8), 요나의 분노의 기도 (4:2-3)
• 여호와의 말씀 : 요나에게 임함 (1:1), 두번쨰로 요나에게 임함 (3:1),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 (3:4-5)

1:1-2:10.  도망하는 요나, 구원하시는 여호와
  1:1-17.  반항하는 선지자와 쫓으시는 하나님
  1:1-3. 하나님의 부르심에 도망하는 요나
  1:4-17.  하나님의 쫓으심에 물에 빠지는 요나
2:1-10. 기도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2:1-6a.  요나의 고통과 하나님의 응답
 2:6b-10.  요나의 감사와 하나님의 구원
3:1-4:11. 선포하는 요나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10. 선포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3. 부르시는 하나님과 순종하는 요나
 3:4-10. 선포하는 요나와 회개하는 니느웨
4:1-11. 삐진 선지자와 가르치시는 하나님
 4:1-4.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질문
 4:5-11.  죽음을 구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자비

(1:1-2:10) 도망하는 요나, 구원하시는 여호와
(1:1-17) 반항하는 선지자와 쫓으시는 하나님
(1:1-3) 하나님의 부르심에 도망하는 요나
(1:4-17) 하나님의 쫓으심에 물에 빠지는 요나
(2:1-10) 기도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2:1-6a) 요나의 고통과 하나님의 응답
(2:6b-10) 요나의 감사와 하나님의 구원
(3:1-4:11) 선포하는 요나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10) 선포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3) 부르시는 하나님과 순종하는 요나
(3:4-10) 선포하는 요나와 회개하는 니느웨
(4:1-11) 삐진 선지자와 가르치시는 하나님
(4:1-4)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질문
(4:5-11) 죽음을 구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자비




구약의 대다수의 선지자들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했다면, 요나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합니다.
특히 요나는 본서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객관화시키는 특별한 이야기식 서술을 통해 이스라엘의 왜곡된 선민 의식을 질타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선지자적 사명을 무시하고 이방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할 때 하나님은 기어이 이방 전도자로 세웠습니다.

1:1-3.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의 의도
1:4-10. 바다의 풍랑으로 인하여 선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요나
1:11-17. 바다에 던져진 요나로 인해 풍랑이 잔잔해짐

요나는 적대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선지자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망합니다.
이와 같은 요나의 행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불러왔고 요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큰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예정하신 것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요나가 선원들에게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바다와 육지를 지은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라고 소개합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당시의 고대 근동은 종교가 매우 융성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가정의 신을 믿고 있었으며 국가도 바알이나 아세라, 밀감을 비롯한 국가의 수호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세상을 다스리는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폭풍의 원인을 신의 분노로 생각한 것도 이런 사상적인 배경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여호와를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요나의 신앙은, 여호와야말로 모든 신들을 지배하는 참된 신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나의 이러한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으며 그 하나님을 피해 도피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회개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신 지식은 자신과 자신의 허물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며 인간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또한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인간의 지혜나 힘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신 지식은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판단하고 계획할 때 우선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 여부를 결정합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한 요나가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었듯이,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7월 24일(월) 요나서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낯(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But Jonah ran away from the LORD and headed for Tarshish. He went down to Joppa, where he found a ship bound for that port. After paying the fare, he went aboard and sailed for Tarshish to flee from the LORD.

요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창세기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구약의 대부분 선지자들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하여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이방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던 요나가 배 밑창에 누워 잠이 들었을 때 갑작스런 바다의 거센 풍랑에 의해서 선원들은 요나를 깨우며 네가 믿는 신을 찾아 도움을 구하라고 합니다.
요나는 이러한 풍랑의 원인이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임을 깨닫고 풍랑을 잔잔케 하려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요나를 풍랑을 위한 제물로 던졌을 때 거센 파도도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에덴  동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아야 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시므로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 3:8).

선지자 요나도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할 때 바다의 풍랑으로 요나를 찾으셨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나가려면 언제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에 따른 회개와 더불어 새 생명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기쁨이란 영어 단어 죠이(JOY)에서 신뢰하는 믿음의 순서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먼저 예수님을 기쁘게 하라(Jesus)
둘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라(Others)
셋째는 네 자신은 가장 마지막에 기뻐해야 한다(Yourself)

어렵고 힘든 인생길에서 갑작스런 풍랑을 만났을 때 혹시 내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가를 살펴본 후에 하나님의 궤도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으로 세워지기를 다짐합시다.


보통 사람은 평생 동안 약 10만 여명의 사람과 만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첫 인상(first impression)이 주는 영향은 상당히 큽니다.
첫 인상이 어떠냐에 따라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첫인상에 대해 연구했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알버트 메라비안의 연구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언어적인 요소가 7%, 외모, 표정, 태도 등 시각적인 요인이 55% 그리고 목소리등 청각적인 요인이 38%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칙은 첫 만남에서도강하게 나타나는데 누군가를 만날 때 웃는 얼굴을 하면 그 웃는 모습과 웃음소리가 좋은 첫인상을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인 대니얼 맥닐이 쓴 [얼굴]이라는 책을 보면 가장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는 재판정에서도 판사들이 미소를 짓는 피고인에게 더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판결이 내려져야 하는 법정에서도웃는 얼굴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요즘 현대인들은 첫인상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첫인상을 만들까? 고민합니다. 호감가는 첫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재정을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첫 인상이 좋지 않았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여기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낯을 피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는 선지자 요나가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첫 인상은 도망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습니까?
요나에게 큰 성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기별을 전하라고 하는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성 백성들은 ‘악독’하기로(욘 1:2)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한테 가서 회개의 기별을 전하라고 하니 그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낯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얼굴’이라는 뜻과 함께 남을 대할 만한 ‘체면’, ‘면목’이라는 뜻이 같이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을 볼 체면, 면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기로 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깊이 더 깊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바로 내려가고 항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배로 내려갑니다.
한글 성경에는 배에 올랐다고 되어 있지만 유대적 표현은 배로 내려간 것입니다.
배에서도 아주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점점 더 하나님의 얼굴을 멀리하며 죄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렇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내려가서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의 낯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대풍을 보내사 잠자고 있는 요나를 깨우는 것입니다.
요나는 대풍이 밀려온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욘 1:10)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를 찾으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찾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볼 낯이 없어서 도망하는 요나를 향하여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여기 하나님께서 아가서의 기록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얼굴 좀 피하지 말고 네 얼굴 좀 보자.”
선지자 요나, 그의 이름 ‘요나’의 뜻이 바로 ‘비둘기’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선지자 요나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나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나에게 지워지는 것 같은 부담이 밀려 올 때우리는 하나님 볼 낯이 없어서  피하여 도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






하나님의 낯 곧 정체성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하나님,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고, ‘너는 어디(존재의 정체성)에 있느냐?’를 물으시는 하나님을 사람의 행위를 보시는 분으로, 무엇을 해야 은혜 주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니느웨로 가는 대신 주님을 피하여 욥바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종들도 그들의 사명(의무)에서 뒷걸음 칠 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요나는 그의 행동에 의하여 무엇을 잃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행복한 하나님의 사랑의 즐거움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신자(믿는 자)의 도리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비록 온 세상이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한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즉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키잡이(pilot) 없는 바다에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몹시 신음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어디에 가셨습니까? 제가 어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피할 만큼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이 대가는 너무 큽니다. 제가 주님의 임재 안에서 기뻐하기 위하여 주님께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또한 요나는 마음의 모든 평안을 잃었습니다. 죄는 곧 신자의 위로를 파괴합니다. 요나는 그가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위로를 잃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언약)을 요구(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 나는 나의 사명 수행의 과정에서 이 고난을 만났습니다. 이 고난의 시간 내내 나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는 그 자신의 결실을 거두고 있었습니다.[즉 자기 행동에 대한 보수(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자신의 의지(뜻)로 충만했습니다.(즉 하나님의 뜻을 전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가 모든 파도와 그대의 머리 위에 구르며 소용돌이치는 큰 물결들(파도들)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요나 같이 행동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그대 자신을 하나님의 일과 뜻에 즉시 맡기는 것보다 그것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마침내, 요나는 그의 때를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시 요나는 다시스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겨루는 것(싸우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주인과 객의 위치가 바뀐다.'는 말로서 사전에는 '사물의 경중이나 선후관계나 완급 따위가 서로 뒤바뀐다는 의미'

주인은 주인의 자리나 입장을 지켜야 하고 객은 객의 자리와 입장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 생활에서는 그 '당연한 순서가 뒤바뀌는' 부조리하고 몰상식한 일들이 흔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인과 객의 위치가 바뀌는' 일은 비단 사회생활뿐 아니라 종교생활에서도 발생합니다.

종교란 '신과 인간과의 관계 정립'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신이 '주인'이 되고 인간이 '객'이 되어야 마땅한 '선후관계'를 뒤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곧 '인본주의(人本主義) 종교'입니다.

사실상 철두철미하게 '신본주의(神本主義) 종교'인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교들은 다 '인간이 주인이 되어 있는 인본주의 종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신을 찾는 종교'는 예외가 없이 '주객전도의 인본주의 종교'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인본주의는 단지 우상 종교에서뿐 아니라 놀랍게도 바로 기독교 안에까지 만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아니라 오로지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하여'에 머물러 있는 교회나 목사나 교인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옳은 생각이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신앙생활이란 철두철미하게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되어야 한다고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소명하시어 선지자로 사용하실 때에 시종일관 당신께서 홀로 모든 주도권을 행사하고 계셨음을 속속들이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왜 참된 신앙생활은 반드시 '신본주의 종교'가 되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교는 '인간의 구도(求道)'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주도하는 종교입니다.

1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1a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고 했습니다.

요나서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당연히 '요나'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 1절의 말씀은 '요나'가 '주어'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여호와의 말씀"이 주체로, "요나"는 그 말씀이 "임하게" 된 객체로 나옵니다.

즉 이 요나서는 그 첫머리에서부터 누가 '주인'이며 누가 '객'인지 그 '선후관계'를 이처럼 뚜렷하게 명시해 놓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가 "여로보암" 왕과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가드헤벨'이란 지명을 통해서 요나가 스블론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북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당시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동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그저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고만 했습니다. 당시에 '누구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오늘날 어떤 사람 이름의 '성(姓)'에 해당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는 말은 그냥 '이름 석 자'로만 되어 있는 소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기 전'까지 요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별 의미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그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놀고 있던 백수건달이었든지 아니면 무슨 다른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던 성실한 사회인이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일단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요나를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이 요나에게 임한 바로 그때부터 이전에는 그저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 불과했던 그가 '하나님께서 파송하시는 선지자'로 순식간에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말 번역에는 없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1절의 첫 시작이 '또'라는 접속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발동됨으로써 '선지자를 소명'하시는 일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예외가 없이 반복되고 있는 패턴인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 쪽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선지자가 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항상 하나님 쪽에서 당신께서 사용하실 자를 말씀을 통하여 '부르셔서 명령을 내리시고 보내심'으로써 선지자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요나 역시 '스스로 도를 닦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선지자'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서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종교인들은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구도(求道)'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이 소위 득도라는 것을 하기 위하여 명상을 하고 사람이 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 곧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이 아니라 사람이 '주체'가 되고 '시작'이 되고 있으니 갈 데 없는 '주객전도의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신본주의 신앙'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가 됩니다.

'말씀이 임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신자'가 되고 '직분자'가 되고 '전도자'가 됩니다.

아니 태초에서부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창조했으며, 오늘날 역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닫게 하고 '생의 목적'을 바로 찾아서 출발하게 만들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기 전의 '나'라는 존재는 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저 '이름 석 자'밖에 없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 인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기 전의 나'는 입시지옥, 취업경쟁, 생활전선에 찌들던 고달픈 인생에 불과했지만, '복음의 음성이 내게 임함'으로써 이제는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기쁨만 충만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오기 전의 나'는 무력한 술꾼 남편, 바가지나 긁는 아낙네, 욕심쟁이, 놈팡이, '제 잘난 멋으로 살던 놈'에 불과했지만, '소명의 명령이 내게 임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거룩한 도구와 의의 병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 당신의 택자를 부르시는 말씀으로 먼저 찾아와 주신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비로소 '하나님과 사귀는 그의 자녀', '하나님을 따르는 그의 백성'이 되었음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교는 '인간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최고의 사랑을 구현하는 종교입니다.

1절 하반절부터 2절에 "1b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요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전도의 사명을 그에게 부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씀은 '앉아 있는 상태에서 일어서라'는 뜻이 아니라 '즉시 행동하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하신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요나가 선지자로 활동했던 '여로보암 2세' 시대는 주전 8세기 상반기였는데, 이때 니느웨는 이미 성곽으로 둘러싸여 요새처럼 강력하게 방어되어 있는 도시 즉 "큰 성읍"으로 티그리스 강의 동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그 니느웨를 중심으로 하여 북조 이스라엘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고 정복하면서 그 판도를 확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쳐서 외치라'는 말을 그 니느웨 성을 '파괴하듯이 외치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대항하여 외치라'(preach against it)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가리켜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니느웨 성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으로만 가득 차 있는 성읍이었고 그런 까닭에 요나는 그 성의 악독함을 '대항하여, 반대하며, 정죄하면서' 외쳐야 마땅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요나뿐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라면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선지자는 당연히 '악을 쳐서' 외쳐야 합니다.

악을 달래거나 악과 화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자신은 악과 대적관계에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그 악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공격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곧 이어지는 3절에 나오듯이 그런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앗수르 제국이 당시 북조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던 원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니느웨가 요나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적국의 수도라면 그 '원수를 쳐서 외치는' 일은 오히려 발 벗고 나설 일 같은데 왜 요나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요나는 그처럼 '하나님께서 쳐서 외치는 말씀'을 듣고 니느웨의 왕과 온 백성들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게 될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미운 니느웨 사람들을 '그냥 한방에 싹쓸이해 버릴 저주'를 내려 주지는 않으시고 그 대신에 오히려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말씀'을 전해 주라고 하시니 요나로서는 어이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놀라운 사랑은 아낌없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죄를 미워하고 악을 책망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식의 진정한 사랑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을 얻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다 악인이라면 혐오할 뿐이며 원수라면 미워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아주 당연하고도 정당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니느웨의 12만여 명의 죄인'들을 지극히 "아껴"(욘 4:11) 주시는 놀라운 성품의 소유자이십니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조차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 죄인들을 당신과 '화목케' 해 주시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사랑을 발휘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 전체의 주제는 사랑이다.'라는 말을 즐겨 쓰는 목사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왜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이 무슨 '사람 사이의 사랑', '나눔과 이해와 용서와 화목 따위를 통해서 성취되는 인간적인 사랑', '기독교뿐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들도 똑같이 말하고 공감하는 흔한 사랑'이라는 말입니까?

오직 성경만이 증거해 주는 최고의 사랑은 바로 '죄인을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일 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양심적인 사람'이 행하는 사랑도, 이 인간사회의 그 어떤 '마음 착한 사람'이 베푸는 사랑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해 주려 하시는' 이 지고한 사랑에는 감히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한 양심을 따라 베풀고 서로 나누는 가운데 인간사회에서 완전한 사랑을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저 인본주의 종교에 불과하며,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만이 진정한 최고의 사랑임을 뜨겁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교는 '인간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종교입니다.

3절에 기록하기를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했습니다.

'즉시' 행동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요나는 즉각 "일어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종의 반응이 아니라 반항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행동을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면전을 피하려고'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여호와의 존재하심으로부터 피하려고'(to flee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라는 뜻입니다.

즉 그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요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거부 의사'를 명백히 반영해 줍니다.

그는 적국의 나라에 가서 전도를 하여 그 왕과 백성들을 회개시켜 구원받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즉 '그런 일을 시키시는 것은 너무 심하다.'라고 반발하면서 자기로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없이 아예 하나님께로부터 "도망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욥바"는 요나가 살고 있던 곳에서 남서쪽으로 약 80k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던 항구도시였는데, 지중해 연안이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상선들이 오가고 있던 무역항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시스"의 정확한 위치는 사실 아직 미확인 상태이지만, 예레미야 10장 9절의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 에스겔 27장 12절의 "다시스는... 은과 철과 상납과 납을 가지고 네 물품을 무역하였도다"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것들을 미루어 추정해 볼 때에 다시스는 그 당시 세계 무역의 주역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이 스페인 남부 연안에 만들어 놓았던 식민지 항구였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갈" 때부터 지중해 반대편 서쪽 끝에 있는 그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는" 의도가 이미 확고부동하게 세워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렇게 작정을 하고 욥바에 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여기 '마침'이라는 말은 어떤 영어 성경에 'about to'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요나는 '마침 지금 막 다시스로 떠나려 하는 배'를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려는 요나에게 문자 그대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만 보였던 그 '다시스로의 줄행랑'이 '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니느웨 성'으로 가는 해변의 육지에 '토해' 놓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요나의 고집'이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무슨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고 자시고 할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시 교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 딴에는 하나님과 온갖 '밀당'(밀고 당기기)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야말로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는' 즉 예배당만 떠나면 마치 하나님께서 못 보실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만 깊이 숨어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찾으실 수 없다는 듯이, 즉 자기가 집안에서는 무슨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든지, 멀리 휴가를 가 있는 피서지에서는 그 어떤 불경한 행동을 저지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도 알 재주가 없을 것이라고 아주 태연자약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같은 날은 가족들과 함께 좀 좋은 시간도 가져야지.'하고 순전히 '자기 기분'대로 따라갑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말 3:10)는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데도, '이런 어려운 형편에 도대체 어떻게 십일조를 내고 살라는 말이냐?'라고 오로지 '자기변명'만 내세우면서 정말 간도 크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화목해지고 가계가 넉넉해지는 것을 두고 마치 '마침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만난 것'처럼 매사가 순조롭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교인들은 요나와 똑같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 양심에 거리낌 없이 그저 '하나님이 너무 심한 요구를 하신다.'라고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고집'에 질 분이시라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죄인인 우리들 가운데 구원받게 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이미 택해 놓으신 자'를 결코 그렇게 내버려두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감히 '중지(衆智)'니 '신앙양심'이니 하면서 내세우는 '자기주장'에 1밀리미터도 밀리지 않으시고 '오로지 그 작정하신 뜻'대로만 당신의 구속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아무리 자기를 전도하는 며느리를 핍박하던 시어머니라도 하나님의 택자인 한에는 휠체어에 태워서라도 반드시 교회로 나오게 하고야 마십니다.

아무리 건축헌금하기가 싫어서 '아예 배를 타고 최대한 멀리 다시스까지 도망하려' 해도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이미 작정해 놓으신 일꾼이면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서라도 오직 당신의 계획하신 그대로 사용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투정'에 꺾이고 '인간의 고집'에 지장이나 타격을 입는 신은 오직 '인본주의 종교의 우상'일 뿐 결코 우리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십니다.

참 하나님은 구속사를 비롯한 모든 세상만사를 100퍼센트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섭리하심으로써 필연적으로 성취하고야 마시는,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절대주권자이심을 철저하게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인본주의적인 주장과 고집을 가지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시도했던 요나는 이처럼 '여호와의 말씀, 하늘 아버지의 사랑, 절대주권자의 의지' 앞에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가 '진실한 신앙인'이 되고 '충성스러운 사명인'이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펼치실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라, 시종일관 '하나님께서 모든 이니셔티브를 꽉 잡고 계시는 가운데'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이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되는 '주객전도의 신앙생활'이 현대사회에, 현대교회 안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창조주'가 주인이시고 '피조물'이 객이지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심부름꾼이나 서비스맨이나 종'이 될 수 있다는 소리입니까?

정말이지 어처구니 짝이 없는 '객주도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인본주의적인 신앙'이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슨 나무 밑에 앉았다.'로 시작되는 불교나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기 위해 무슨 산으로 올라갔다.'로 시작되는 이슬람교와 사실상 오십보백보인 것입니다.

진짜 종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로만 시작되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에서만 출발합니다.

'사람의 신심(信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매사를 전적으로 주도하며, '사람의 선한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압도적으로 작동되며,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신 의지'대로만 모든 것이 관철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체험하는 것만이 바로 '신본주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성경 그 어디에도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단 한 군데도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씀들만 충만한 것입니다.

'주인과 객'의 순서도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이 '하나님과 사람'의 선후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종교심이나 선행이나 요구를 앞세우는 것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본주의적 발상임을 깨닫고, 그 시작과 근본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현재 영위하고 있는 은혜와 축복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그런 까닭에 모든 영광을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리는' 진정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루아흐,숨, 바람, 영, 개역성경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파님, 얼굴 face)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바람이 불 때(루아흐,숨, 바람, 영)

루아흐는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한다.

(a)  숨, 호흡 breath.

① 입의 숨: 욥 15:30 하나님의 입'김'; 참조: 욥 19:17 내 '숨'; 코의 숨 애 4:20 우리의 콧'김'(왕을 가리킴); 우상에 대하여 렘 10:14 "그곳에 생기가 없다"는 것은 '호흡'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시 135:7, 렘 51:17, 합 2:19.

② 명령적인 말, 루아흐는 입의 호흡 곧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1) 하나님의 명령, 시 33:6, 참조: 사 34:16. (2) 메시야 왕의 명령, 사 11:4.

③ 단순한 숨(인 말), 욥 6:26, 욥 16:3, 렘 5:13.

④ 분노의 거친 콧 숨: (1) 하나님에 대하여, 출 15:8, 삼하 22:16, 욥 4:9, 시 18:16, 사 30:28, 사 59:19. (2) 사람에 대하여, 사 25:4.

⑤ 생명의 표시와 상징, 창 6:17, 창 7:15, 창 7:22, "기식": 겔 37:5, 겔 37:6, 겔 37:8, 겔 37:9, 겔 37:10, 겔 37:14(숨 또는 영).

(b)  바람 wind.

① (하늘의) 바람 창 8:1, 출 15:10, 민 11:31, 왕상 18:45, 렘 10:13, 렘 51:16, 시 135:7, 호 13:15, 사 40:7, 참조: 욥 26:13. 동풍 출 10:13, 출 14:21, 시 48:8, 렘 18:17, 겔 17:10, 겔 19:12, 겔 27:26, 욘 4:8. 북풍 잠 25:23. 해풍(서풍), 출 10:19. 낮의 바람, 창 3:8. 사방 바람, 렘 49:36, 겔 37:9, 단 8:8, 단 11:4, 슥 2:10, 슥 6:5. 광풍, 시 107:25. 광풍 시 148:8, 겔 1:4, 겔 13:11, 겔 13:13, 시 55:9. 뜨거운 바람, 사 11:15. 바람의 인격화, 삼하 22:11, 시 18:11, 시 104:3, 참조: 호 4:19, 시 104:4.

② (바람의) 방향 quarter, 편 side. 겔 42:16 (동)편; 겔 42:17 (북)편; 겔 42:18 (남)편; 겔 42:19 (서)편; 대상 9:24 (동서남북) 사방; 렘 52:23 사면.

③ 공기 air, 가스 gas, 사 26:18, 사 33:11.

④ 무익, 공허한 것. 욥 7:7("호흡"), 나의 생명은 바람이다. 욥 15:2("헛된 지식"). 바람의 지식은 헛된 지식이다. 사 41:29. "우상은 바람이요" 우상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다. 전 1:14, 전 2:11, 전 2:17, 전 2:26, 전 4:4, 전 4:6, 전 6:9. 바람을 잡은 것은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을 잡은 것이다. 참조: 전 1:7, 전 4:16, 전 5:15.

(c)  마음의 자세, 기질, 성질, 생기(활기, 기운), 기분, 감정, 정신.

① 정신, 생기, 왕상 10:5, 대하 9:4 숨을 더 쉴 수 없는 정신 상태, 곧 넋을 잃는 것을 뜻한다. 창 45:27, 삿 15:19, 삼상 30:12 기운을 회복하는 것, 왕상 21:5 마음의 근심.

② 용기 courage. 수 5:1, 시 76:12(표준-군왕들의 "호흡"), 개역-방백들의 "심령". 사 19:3, 시 77:4, 시 142:4, 시 143:4, 수 2:11, 잠 18:14.

③ 기(성)질, 기분, 특히 분노, 수 9:23, 수 8:3, 잠 16:32, 참조: 잠 25:28, 잠 29:11, 욥 15:13, 슥 6:8, 전 7:9, 전 10:4.

④ 성마름(조급함)이나 참을성, 출 6:9. 참조: 미 2:7, 잠 14:29, 욥 32:18, 욥 21:4, 전 7:8.

⑤ (번민하거나 근심하는, 불만하는) 마음, 기질. 창 41:8, 창 26:35, 사 54:6, 참조: 겔 3:14, 욥 6:4, 욥 7:11, 삼상 1:15.

⑥ (압도당한, 꺾인) 마음, 기질. 겔 21:7, 참조: 사 61:3, 잠 15:4, 잠 15:13, 잠 17:22, 잠 18:14, 시 143:7.

⑦ 기타 성질 및 성향, 충동적인 성질. 대상 5:26, 대하 21:16, 대하 36:22, 스 1:1, 스 1:5, 렘 51:11, 학 1:14, 왕하 19:7 = 사 37:7, 민 14:24, 말 2:15, 말 2:16, 신 2:30, 민 5:14, 민 5:30(시기), 호 4:12, 호 5:4, 사 19:14, 사 28:6, 창 41:38, 잠 17:27.

(d)  예언의 영. 민 27:18, 왕하 2:15, 왕하 2:9, 사 29:10(참조: 창 2:21, 창 15:12, 사 19:14). 깊이 잠들게 하는 영. 미 2:11, 슥 13:2, 참조: 겔 13:3.

(e)  생물의 영, 숨쉬는 존재.

① 하나님의 선물과 창조. 슥 12:1, 욥 27:3, 참조: 사 42:5.

② 하나님은 영을 보존하신다. 욥 10:12, 욥 12:10, 민 16:22. 민 27:16, 잠 16:2.

③ 그러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창 6:3,

④ 영은 죽을 때에 떠난다. 시 78:39, 사 38:16(생명의 원리), 시 146:4, 시 104:29, 시 104:30, 욥 17:1, 욥 34:14(참조: 15절), 사 57:16, 전 8:8, 전 11:5, 전 3:21, 전 12:7, 시 31:6.

⑤ 육체를 떠난 영혼. 욥 4:15.

(f)  하나님의 영, 곧 삼위일체의 제 3위인 성령.

① 대부분의 표현에서 여호와의 신(영)은 가장 완전한 기독교적 의미에서 성령이라는 것을 문맥이 명백히 입증하며, 신약성경에서 강력한 유비(analagy)로 쓰여진다. (A. F. Kirkpacrich cambridge Bible. Psalms 11. P 293).

② 최초로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으로서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는 성령께서 한 인격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음을 시사한다. 창 1:2. 참조: 민 11:17, 민 11:25.

③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시 51:11, 참조: 사 63:10-11).

④ 이사야는 그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자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료 화자로 생각하든지 간에 메시야,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를 인용하면서 그가 말할 때 그의 분명한 인격체를 말한다.

⑤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나(욥 26:13)나 섭리에서(욥 33:4, 시 104:30), 우주적이며, 중생에 있어서 구속적이다(겔 11:9, 겔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 하시며(느 9:20, 시 143:10, 학 2:5), 지도권(민 11:25,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미 3:8, 슥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사 11:2, 사 42:1, 사 61:1)와 그의 백성들(욜 2:28, 사 32:15)에게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하신다.

(g)  초자연적 존재, 천사 같은 존재.

① 악한 영. 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② 참소하는 큰 영. 왕상 22:21.

③ 바람이나 불을 천사로 삼음. 시 104:4(참조: 왕상 19:11-12).

(참조: BDB; TWOT).

'루아흐'(헬라어 프뉴마)의 기본적인 개념은 '움직이는 공기' air in motion이다. 여기서 공기란 악어의 비늘 사이로 나올 수 없는 공기(욥 41:16 )로부터 한 바탕의 폭풍(사 25:4, 합 1:11 ASV, RSV)에 이르기까지의 공기를 가리킨다.  '네 바람', 루호트는 세상의 네 방위를 기술한다(렘49:36, 겔 37:9).  동물이든(창 7:15, 시 104:25, 29), 사람이든(사 42:5, 겔 37:5) 혹은 양자 모두이든지(창 7:22-23) 생물에게 있어서 루아흐는 호흡을 가리킨다.  여기서 호흡은 흡입한 것일 수도 있고(렘 2:24) 입술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사 11:4, 욥 9:18, 죽은 우상들과 대조, 렘 10:14, 렘 51:17).  하나님은 '루아흐'를 창조하신다. '하나님의(하나님으로부터 온) '루아흐'(영 spirit, 한글개역 "기운")가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 27:3).

호흡은 능력(왕상 10:5, 여기서 시바의 여왕은 '더 이상 '루아흐'가 없었다', 즉 그녀는 '숨을 쉬지 못했다', 압도당했다), 담력(수 2:11, 수 5:1, 이스라엘의 적들의 '영' spirit이 낙담했다), 가치(애 4:20, 여기에서 다윗 왕은 '우리 콧구멍의 호흡'[한글개역, "우리의 콧김"] ) 등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루아흐'(바람)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렘 5:13). 여기에서 '루아흐'는 '단순한 호흡'의 헛됨, 무익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욥 7:7, 사 41:29). 

공기의 돌진, 어떤 사람의 코를 통해 나오는 거센 콧바람처럼 '루아흐'는 호전적인 감정(사 25:4)이나 분노의 감정(삿 8:3, 잠 29:11, ASV, RSV)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호흡은 활동과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이 병들거나 쇠약할 때 그 '영'이 쇠한다(욥 17:1). 그러나 그 영은 '두번째 바람'으로 되돌아 오며 그는 '소생한다'(삿 15:19, 삼상 30:12, 참조, 창 45:27). 전 인류의 호흡(루아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욥 12:10, 사 42:5). 

그러나 인생의 독특한 성질은 물질적(육체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 즉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것에 있다. 인간의 '호흡', '숨'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 활동에 의해 주어졌다(창 2:7, 창 1:2에 나오는 짐승들과 대조하라).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우리, 창 1:26)의 형상을 반영하며, 다른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다(창 2:20)-이다.   

'루아흐'는 마음의 성향 혹은 태도를 묘사한다. 갈렘의 마음은 그의 불신실한 동료들의 마음과 달랐다(민 14:24, 참조, 산헤립의 영, 즉 왕하 19:7에 나오는 결심). 사람의 '루아흐'는 슬플 수도 있고(왕상 21:5), 압도당할 수도 있으며(시 77:3), 회개할 수도 있다(사 57:12). 사람의 '루아흐'는 '차가울'(억제될) 수 있고(잠 17:27), 질투할 수도 있으며(민 5:14), 인내하거나 교만할 수도 있다(전 7:8). 사람의 지혜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고(신 34:9) 매춘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다(호 4:12).

끝으로, '루아흐'는 인간의 완전한 영적인 의식을 나타낸다. '내가 내 안에 있는 내 영으로(한글개역,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마음을 다시리며'(잠 16:32, 참조, 단 5:20). '마음에 간사가 없다'(시 32:2).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다루긴 하지만(참조, 네페쉬 '영혼', 종종 단순히 '자아' self라고 번역된다)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이원론을 인정한다(A.B. Davidson, The Theology of the OT, p.202). 

영과 육이 결합하여 '자아' self를 이루며, 따라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루아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또한 인간은 '네페쉬'이다(그러나 때때로 인간은 네페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 '네페쉬'는 죽을 때 인간의 몸에서 떠난다고 한다). '루아흐'는 그 몸 속에 담겨 있다(단 7:15, 아람어, 슥 12:1). 몸은 죽을 때 티끌로 되돌아 가지만 불멸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창 3:19, 전 12:7). 이와 관련하여 '루아흐'와 '네페쉬'는 여기서 분명히 '영혼' soul을 의미하며, 중복되는 경향이 있다(욥 7:11, 사 26:9, 참조, 출 6:9, 민 21:4). 

'네페쉬'와 '루아흐' 양자 모두 죽을 때 몸을 떠날 것이며 몸에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창 35:18, 시 86:13, 영혼이 그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는 드문 실례에 대해 왕상 17:22을 참조하라).

보다 더 높은 영역에서 '루아흐'는 초자연적인 존재, 천사같은 존재,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가리키기도 한다(삼상 16:23, NASB).  적당히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루호트'(바람 winds, 시 104:4, 히 1:7) 로 이용하기도 하셨다. 사탄은 '참소하는 큰 영'이다(왕상 22:21). 다른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임할 수 있다(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영적인 인격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하나님이시다(사 31:3).  하나님의 '호흡'(한글개역, "기운")은 강한 바람일 수도 있다(사 40:7, 사 59:19, 참조, 민 11:31).  주의 '영'은 단순히 활동적인 능력이나 분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사 40: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느냐", 혹은 '누가 여호와의 마음[의도]을 알았느냐', 70인역본과 고전 2:16도 마찬가지임). 하지만 대부분의 면에서 '루아흐 야훼'(YHWH, 여호와의 신)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성령이다.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시 51:11, 참조, 사 63:10-11). 

태초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처럼'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창 1:2).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욥 26:13)나 섭리를 계속하심에 있어서(욥 33:4, 시 104:30) 우주적이며, 중생(regeneration)에 있어서 구속적이다(겔 11:19, 겔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하시며(느 9:20, 시 143:10, 학 2:5), 지도력(민 11:25,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미 3:8, 슥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사 11:2, 사 42:1, 사 61:1)와 그의 백성들(욜 2:18, 사 32:15)에게 장차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한다. 

['루아흐'와 '네페쉬'의 차이점, '루아흐'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원리이며, 이성, 의지,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전해주며 고무적인 활력을 만들어낸다. 이 활력은 결국 개인적인 삶의 주체로서 인간의 '네페쉬'가 된다. 개개인에 독특한 인격은 인간의 정서와 욕구의 자리인 '네페쉬'에 원래부터 있다. '루아흐'는 그 자체내에 그 활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다. '네페쉬'는 보다 주관적이고 조건부적인 생명을 갖는다. 신약성경은 '프뉴마'(루아흐)와 '프쉬케'(네페쉬)를 분명하고 실질적으로 구별하는 것 같다. - G. L. Archer.]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파님, 얼굴 face) 피하여

(a)  이 독특한 단어 파님은 항상 복수형으로 등장하는데 아마 얼굴이 수많은 부분들의 결합체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듯하다.

파님은?
① 사람의 얼굴(창 31:2), "그의 외모"(창 4:5), 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대용어(신 7:10)로 사용되었다.
② 관찰자에게로 향해진 면, 예를 들어 '지면'(창 2:6),
③ 이 단어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전치사들과 함께 사용된다. 예를 들면, ~의 면전에서 before the face of, ~앞에서 before, ~속으로 into, ~의 정면에서 in front of, ~의 반대편에 opposite 등이다.(참조: E. Tiedtke)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식별하게 해주고 그 사람의 마음 가짐과 감정을 반영해 준다.
따라서 파님은 자아 또는 자아 감정의 대용어가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얼굴은(신체의 여타 부분들과 함께) 사람의 생리 기능을 담당하는 외적 기관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동 방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격성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 얼굴이 상대방의 감정, 기분, 성격을 묘하게도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하다.

"굳은" 얼굴은 반항(렘 5:3), 뻔뻔스러움(잠 7:13), 무자비함(신 28:50)의 표시이다.  "빛나는" 얼굴은 기쁨의 증거이다(욥 29:24).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패배, 좌절, 굴욕을 가리킨다(삼하 19:5). "불꽃같은"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사 13:8). "나쁜" 얼굴은 근심 걱정으로 찌든 얼굴이다(창 40:7). "낙담한" 얼굴은 매우 강렬한 분노와 불쾌감에서 연유한다(창 4:5). 누군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를 달래거나 또는 그의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하나님께 대해, 왕상 13:6, 왕하 13:4). KJV는 이 마지막 문구를 "~가 여호와께 구했다/탄원했다" X sought/entreated the Lord라고 의역하였다(한글개역: "여호와께 간구하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문자적으로 "~가 여호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로 된다. 마찬가지로 이 관용구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잠 19:6).

"얼굴을 숨기다"라는 문구는 혐오감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며(사 53:3) "얼굴을 돌리다"라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시 132:10).
역으로 타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는 호의, 존중, 수락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거나(삼상 25:35, 한글개역, "청을 허락하노라") 또는 편파성 편애를 드러낸다는 뜻이다(레 19:15, 한글개역, "편을 들지", "두호하지").
얼굴을 숙인다는 빈번한 표현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님은 동물의 얼굴들에 해당하는 말로 역시 때때로 사용되었다(겔 1:10).(V. P. Hamilton)

(b)  파님은 특히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①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얼굴에 관한 관용구들과 문구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도 적용되었다.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신의의 표시로서 "환히 빛난다"(시 4:6). 그의 얼굴이 분노로 "침울해진다"(렘 3:12).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숨기기도" 하신다(시 13:1).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평강(즉,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감추거나 돌리실 때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시사한다(참조: 시 13:2, 시 104:29).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예외적 가능성으로 언급되어 있다(창 32:30,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창 16:13, 출 24:9 이하, 신 4:12, 삿 6:22 이하도 역시 참조하라).( E. Tiedtke)

"하나님의 얼굴을 뵙다"라는 구절이 5회 발견되는데 아마 종교 예배를 위해 성소를 찾아간다는 뜻의 전문 용어이다.
다섯 구절은 출 23:15, 출 34:20, 신 31:11, 시 42:2, 사 1:12이다.
이 보기들의 각 경우에서 동사 라아('보다' to see)는 니팔형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나타나다" to appear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개념을 "앞에 나타나다" appearing before라는 개념으로 유화시킨 것이다. 한 용례에서(삼상 1:22) 니팔형이 자음 본문에 의해 명시되어 있다. 여기를 니팔 부정사형 레라오트 파나이(하나님 "앞에 나타나다" to appear before God)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칼 부정사형인 리로트 파나이의 가능성은 출 33:20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몇몇 예외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야곱(창 32:30)과 모세(출 33:11)의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face to face 보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또는 그 음성을 듣기만해도 그는 죽게 된다(출 19:21).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항상 강조하고 있다. 죄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출 33:20, 참조: 사 6:5).

이러한 이유로 모세(출 3:6)와 엘리야(왕상 19:13) 그리고 스랍조차도(사 6:2) 하나님 면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놀람과 감사(창 32:30, 신 5:24), 두려움(삿 6:22, 삿 6:23, 삿 13:22, 사 6:5)으로 압도당하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출현하셨으며 그만이 아버지를 보았다(요 1:18, 요 6:46, 요일 4:1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통로가 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다.(참조: V. P. Hamilton)

출 33장에서 여호와의 얼굴(파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신다(출 33:14 이하). 이는 여호와의 인격적 임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다.

② 하나님의 얼굴이 성전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질 때, 이 용어는 제사와 관련된다. 성경의 범위를 넘어선 이 단어의 용법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은 신의 얼굴을 성전 우상의 얼굴로 만들어 이를 보고 예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사용되어진 우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예배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고 했을 때 비유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시 24:6, 시 42:2[마소라 42:3], 슥 8:21[마소라와 70인역본], 말 1:9[마소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의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특히 그것을 추구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사를 아주 떠나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편 기자는 시 105:4에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하고 있다. 진설병(출 25:30)의 문자적 의미는 "얼굴의 떡"("임재의 떡" RSV)이다. 이런 떡덩이들이 이교도 제사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제사에서는 이 떡들이 신의 음식 역할을 했다(참조: 렘 7:18). 이스라엘이 이 관습을 이어받았을 때 떡 Bread(아토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음식으로가 아닌 예물로 유향과 함께 특별히 마련된 식탁 위에 놓여졌다. 

③ 랍비 유대주의에서 사람의 최고의 소망은, 죽음에 임한 시각이나 메시야의 날 후에 다가올 세상에서,  셰키나의 얼굴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의 반사를 받아 의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지만(단 12:3) 불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주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포악하고 강포했습니다. 살인과 저주와 거짓과 늑탈이 그들 속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의 잔인한 죄악은 하늘의 하나님 앞에까지 상달되었습니다(욘 1:2). 죄악이 극에 달한 시대나 사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창 6:5~7:24, 18:20~19:29).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 얻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히 10:38~39).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의 말씀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왜 하필 요나가 니느웨로 가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요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셔도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엡 2:4~5). 죄는 인생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주었습니다. 영생하는 하늘나라의 한 시민이 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말씀을 거역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너희 죄가 진홍 같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심으로(사 1:18) 우리가 그에게 돌아와 용서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중대한 사명이 요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받은 사명은 외면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욘 1:3). 도망하는 요나를 보십시오.

첫째,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하였습니다.

본문 3절에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또 10절에는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반복하여 나오는 말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라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낯'(히: 페니 여호와 יהוה פבי)은 '여호와의 얼굴'(the face of Jehovah), '여호와의 앞'(before of Jehovah). '여호와의 현존'(presence of Jehovah)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성도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민 6:25, 시 17:15, 89:15~16). 여호와의 얼굴이 축복임을 아는 성도는 절대로 그 앞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의 기도 중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 17:15).

여호와의 얼굴이 축복임을 아는 성도는 항상 그의 얼굴 뵙기를 소원합니다. 그 얼굴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삽니다(창 39:8).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렸다고 생각하였을 때는 괴로워하며 그 얼굴 뵙기를 갈망하였습니다(욥 13:24, 34:29). 요나의 도망,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얼굴을 피하자고 하는 목적성을 띈 의도적인 도망이었습니다.

요나가 왜 이런 생각을 하였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수단을 쓰든지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보자', '더 이상 하나님의 간섭이나 보호, 지도는 받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니느웨로 간다 하여도 나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나에게는 괴로움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고 있지 않는가', '지금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또 그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할 인생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여 벗어날 수 있는 장소나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시 139:1~10).

둘째, 도망하는 목적지는 '다시스'였습니다.

본문 3절에 "…요나가…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다시스로 가려고…"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자 하였던 최종 목적지는 '다시스'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시스는 어디입니까? 학자들의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스페인의 '타르테수스'일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구약성경 시대에 광물 자원이 풍부하여 정교하게 세공된 은, 철, 상납 등이 생산·수출되는 곳이었습니다(렘 10:9, 겔 27:12).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반대 방향의 옛 두로인이 살고 있었던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하는 것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성품이 유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이 두려워 도망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다시스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로 도망하든지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배 밑층 깊숙한 곳에 내려가 깊이 잠든 요나까지 하나님은 찾아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로 가든지 그곳도 하나님의 앞이요, 하나님의 영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본문 3절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욥바' 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유명한 항구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니느웨'와 그가 내려간 '욥바'는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그가 이처럼 다시스를 목적하고 욥바로 내려간 것은 혈과 육을 따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민족의 특권을 잃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싫었습니다(욘 4:2). 내려가는 길은 책망과 저주와 고통과 멸망의 길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은 수치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창 12:10,13).

블레셋으로 내려갔던 이삭은 불신자 이방 임금 아비멜렉으로부터 책망과 미움을 받았습니다(창 26:1~26). 블레셋 땅 딤나로, 가사로, 소렉 골짜기로 내려갔던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리고 힘 잃고 눈까지 뽑히고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삿 14:1, 16:1~4). 모압으로 내려갔던 나오미는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재물 잃는 마라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룻 1:1~6, 20~21).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던 사람은 강도 만나,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기고 죽음의 지경까지 놓였습니다(눅 10:30).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방인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물고기 뱃속에까지 내려갔습니다(욘 1:1~17). 내려가면 망합니다. 신앙은 계속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배하려고 올라가고(삼상 1:7,24),
기도하려고 올라가고(행 3:1),
찬양하려고 올라가며(행 3:8),
감사하기 위하여 올라가며(신 12:5~7, 눅 17:15~19),
천국까지 올라가고 올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시 40:31).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나 목적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나의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면류관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러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벨 과학수상자들 대부분 왜 창조주하나님을 믿는가?


왜 과학자들이 신을 믿게 되는가?
뉴톤, 페러웨이, 맥스웰  등 무수한 과거의 과학자들이 신을 믿었다.
그리고 현재 살아 있는 많은 수의 유명한 과학자들이 신을 믿는다.
일반인 보다 더 많은 비율의 과학자가 신을 믿는다.
왜 이렇게 신을 믿게 되는가?
그것은 과학 자체가 신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보통 세상에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은 세상의 진리를 찾기 위해 과학을 시작한다.

하지만 연구의 연구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결국 신이 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신을 부정하기 위해 시작한 연구가 그 정점에 이르러서는 신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정점에 맞다뜨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유신론자가 생각하는 세상은 하나의 신적인 존재가 원자에서 우주까지 세밀하게 설계했고 운행중임을 믿는 것이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그 가능성의 수를 봤을 때 신을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여기에 있다.
과학은 인과율에서 시작되었고 과학자는 인과율을 믿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세상은 너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로 유명한 <기하학원론>의 저자 유클리드는 “자연의 법칙이란 신의 수학적인 방법일 뿐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만유인력의 법칙’과 ‘미적분학’의 확립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은 “과학자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찰하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장쩌민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대통령 클린턴에게
“미국은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으면서 왜 또 이렇게 많은 종교와 신앙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이 발전하던 시기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데카르트(René Descartes),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뉴턴(Isaac Newton)을 포함하여 모두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신을 신앙한다고 인정했으며 이 세계는 신의 걸작이기에 법칙이 있으며 단지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실증하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 리처드 파인만 (1965 노벨 물리학상)-

역사에 이름을 남긴 상당수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종교를 신앙하는 ‘유신론(有神論)’자였다.
가령 현대 과학의 초석을 다진 케플러(Johannes Kepler), 근대화학을 창립한 보일(Robert Boyle), 전기분해의 원리를 발견한 패러데이(Michael Faraday), 전보를 발견한 모오스(Morse), 열당량을 발견한 줄(James Prescort Joule), 전자기학 이론을 집대성한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원자 이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돌턴(John Dalton), 현대 유전학의 기초를 다진 멘델(Gregor Johann Mendel),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Alexander Fleming), 미생물학을 창시한 파스퇴르(Louis Pasteur) 등은 모두 독실한 종교 신자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인 해리어트 주커만(Harriet Zuckerman) 교수가 1977년 저술한 『과학엘리트 :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들(Scientific Elite; Nobel Laureates in the United States)』 이란 책의 통계를 보면 1901년 노벨재단이 설립된 이후 미국에서 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수상한 286명 중에서 73%가 기독교 신자였으며 19%는 유태교 신자였다.

저명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파인만은 일찍이 “수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을 믿지만 또 하나님도 믿는다. 양자 사이는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 항공우주과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우주의 끝없는 신기는 조물주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앙을 실증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우주의 존재 배후에 초월적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는, 과학의 진보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다.” 

-美 로켓의 아버지 폰 브라운박사 -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텍사스大의 스티븐 와인버그는 77년 자신의 저서에서 우주론을 통해 우주를 이해하면 할수록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나 신을 ‘살해했던’ 바로 그 과학이 오늘날 신앙을 원상회복시키고 있는 것으로 신앙인들은 생각한다.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본래 예정에 따라 생명과 의식(意識)을 탄생시켰다는 징표들과 부닥치게 됐다.
중력과 전자의 전하(電荷), 양자의 질량 등과 같은 자연의 상수(常數)들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원자들은 현재와 같은 결합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며, 별들은 연소하지 않았을 것이고 생명체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82년 영국 성공회 사제가 되기 전까지 케임브리지大에서 저명한 물리학자로 활동했던 존 폴킹혼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의 법칙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조화를 이뤄 우리 눈 앞에 있는 우주를 탄생시켰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됐다는 확신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레이저 광선의 원리를 발견해 64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찰스 타운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법칙에 지적인 측면이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지적설계의 증거가 무신론자에게 설계자를 확신시키다
(Intelligent Design Evidence Convinces Atheist of Designer)
 
ABC News에서의 AP 보고에 따르면, 한 유명한 무신론자가 과학적인 증거에 근거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81세의 나이에, 수십년간 고집하던 믿음은 실수였다고 말하면서,

안토니 플루(Antony Flew)는 "우주는 어떤 종류의 지적 능력과 첫 번째 원인에 의해서 창조되어졌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플루는 영국으로부터의 전화 인터뷰에서 초월적 지성(super-intelligence)은 생명체의 기원과 복잡한 자연에 대한 유일한 좋은 설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생물체의 최초의 번식이 자연주의적 진화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라고 쓰고 있다. 

 거의 50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노골적인 무신론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안토니 플루는, "설계자가 있음을 가리키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와 경우들을 항상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DNA에 대한 연구는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도로 복잡한 정렬이 있어야함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어떤 지성이 개입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요나와 큰 물고기 (Jonah and the great fish)​  Russell Grigg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이야기는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true history) 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비유(allegory) 인가?
아니면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nonsense) 인가?

성경은 요나의 이야기를 진실된 역사로서 간주하고 있다.
요나서는 실제의 역사로서 기록되었다.
요나(Jonah)는 실제 있었던 선지자였고, 열왕기하 14장 25절에도 언급되었으며, 예수님 자신도 요나의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

예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요나의 경우에 비유하셨다. (마태복음 12:39–41, 누가복음 11:29–30).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그러므로 요나 이야기의 사실성은 예수님이 무지하셨던지, 아니면 잘못 알고 계셨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함 없이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다.”1 라고 하였다.

요나를 삼킨 바다 생물은 무엇이었을까?

요나서에서 바다 생물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인 ‘dag’ 는 ‘물고기(fish)‘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마태에 의해 사용된 그리스어는 ’ketos‘ 로서, 바다 괴물(sea monster)을 의미하며, 개정된 번역판에서도 그렇게 표기되었다.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에서 번역가들은 이 단어를 고래(whale) 로서 번역했는데, 고래는 그들이 알고 있던 가장 큰 바다 생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a great fish)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욘 1:17)”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은 요나를 안전하게 수용하기 위해서 하나의 특별한 창조 행위를 하셨거나, 기존에 있던 바다 생물을 조절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out of the fish's belly)” 하나님께 기도했다 (요나 2:1). 배(belly)는 고대 히브리어에서도 그렇지만 영어에서도 꽤 모호한 용어이다.

그래서 만일 요나가 향유고래(sperm whale)와 같은 생물에 의해 삼켜졌다면, 그는 굉장히 큰 후두 주머니(laryngeal pouch)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 생물이 상어(shark)였다면, 요나가 상어의 위액(gastric juices)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준비된 위에 있었을 것이다.

한 남자를 통째로 삼킬 수 있는 큰 턱을 가지고 있는 바다생물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호주 퀸즈랜드의 무루라바(Mooloolaba)에 있는 수상공원(Underwater World)에 있는 사진을 보라.
그리고 죠스 영화에서도, 고기잡이 배의 선주인 퀸트(Quint)는 상어에 의해서 통째로 삼켜지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른 설명?

1891년 포크랜드 섬(Falkland Islands) 근처에서 캡틴 킬람(Captain Killam)이 지휘하던 포경선인 ‘동방의 별(Star of the East)’ 호에서 작살을 던지던 제임스 바틀리(James Bartley) 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인용되고 있다.

고래 사냥 도중에 바틀리는 바다에 빠졌고 사라졌다.
한 고래가 잡혔고 다음 날 선원들이 배를 갈랐을 때, 놀랍게도 바틀리가 그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아직도 고래의 위에서 살아있었다.
그는 깨어났고, 시간이 흐른 후 회복되었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고래의 뱃속에서 체류된 동안, 위액에 노출된 바틀리의 피부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그의 얼굴, 목, 손들은 창백하도록 흰색으로 탈색되어 있었고, 양피지 종이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바틀리는 굶주릴 때까지 아마도 뱃속 안쪽에서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공포로 감각을 잃어버렸고 그곳은 공기가 부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2

이 이야기는 1892년 10월, 영자 신문인 ‘Great Yarmouth Mercury’에 처음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른 글들에서 재보도 되었는데, 1924년에 출판된 프란시스 폭스(Francis Fox) 경이 지은 책 'Sixty-three Years of Engineering, Scientific and Social Work” 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경비판자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박 주장을 하고 있다.
1906년에 캐논 윌리암스(Canon Williams)라고 불리는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이 이야기의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캡틴 킬람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1906년 11월 24일 캡틴의 아내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전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고, ”나는 남편이 ‘동방의 별’ 호에 있었던 해에 남편과 함께 있었는데, 남편과 함께 있는 동안 한 사람의 선원도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선원 이야기는 바다 사람들의 허풍이다”3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의 상반된 보고서로부터, 누군가는 이 사건에 대해 경제적 문제로 얽혀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명백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헤리 림머(Harry Rimmer) 박사는 영국 해협에서 트롤어선으로부터 바다로 떨어졌다가 거대한 Rhincodon 고래상어에 의해서 삼켜졌던 한 선원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전체 트롤어선 선단은 상어를 잡기 위해 출항했다.
사고가 나고 48 시간이 지난 후, 그 상어가 목격되었고, 갑판에 있던 1파운드의 작살 총으로 살해되었다.
사체는 너무 무거워서 배의 갑판에 있던 윈치로 다루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선원들은 그의 동료를 기독교 식으로 장례해주기 위해 그 상어 사체를 해안으로 끌고 왔다.
상어의 배가 열려졌을 때, 그 사람은 의식은 없었지만 살아 있었다.
그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고, 충격으로 한 동안 고통을 당하였지만, 후에 퇴원하였다.
그의 사진과 이야기는 1 실링의 입장료를 내야하는 한 런던의 박물관(London museum)에 전시되어졌었고, ‘20세기의 요나(The Jonah of the Twentieth Century)' 로서 광고되어 졌었다.4

사흘 밤낮은 무엇인가?

고대 히브리인들은 관용적으로 하루의 한 부분도 하루로서 간주했다.5
그래서 사흘 밤낮(three days and three nights)은 38시간 정도의 짧은 기간도 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기간(금요일 늦은 오후에서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을 요나의 경우를 비유로 들며 밤낮 사흘이라고 말씀하셨던(마 12:40)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마가복음 8:31절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따라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시간 척도를 교대로(interchangeably) 사용하셨다.
성경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시간과 비교되어진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시간은 아무런 오류나 모순이 없는 것이다.6 

요나의 이야기의 많은 놀라운 부분 중의 하나는 그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욘 2:1)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던 이유이다.
아마도 그는 기절을 했었고, 하나님이 마치 요나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시기 위한 의도인 것처럼, 그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하고, 믿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건이 기적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6 가지 기적적인 사건들도 이루어져 있다.
그 사건들의 일부는 자연 현상까지도 하나님에 의해서 조절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욘 4:6)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욘 4:7)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욘 4:8)

이러한 기적들은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대홍수 사건, 바벨에서의 언어의 혼란, 출애굽 시에 애굽 땅에 내려진 재앙들, 홍해의 갈라짐, 엘리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기적적인 치유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 예수님의 부활 등과 같은 기적보다 더 믿을 수 없어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경을 믿지 못한다면 무너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는 것을 결코 잊어버리거나 변명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토록 긴 시간 동안을 물고기 뱃속에 있도록 하셨어야만 했을까?
그에 대한 정당하고 충분한 이유가 되는 대답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필요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말로,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하신(벧전 1:18-19)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FOOTNOTES

1. Henry Morris and Martin Clark, The Bible Has the Answer, Creation-Life Publishers, El Cajon (California), 1976, p. 74.

2.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Zondervan, Grand Rapids, 1966, Vol. 4, p. 153.

3. Leslie Rumble, Questions People Ask, Cheval‍‍ier Books, Kensington (New South Wales), 1972, p. 25.

4. Harry Rimmer, The Harmony of Science and Scripture, Eerdman's, Grand Rapids (Michigan), 1952, pp. 188–189.

5. Unger's Bible Dictionary, Moody Press, Chicago, 1957, p. 1099.

6. Cf. in Matthew 27:63–64 the Pharisees tell Pilate that Jesus had said He would rise 'after three days'. They then ask Pilate for a guard for the tomb 'until the third day'. If 'after three days' was not interchangeable with 'the third day', they would have asked for a guard 'until the fourth day'—Adapted from Josh McDowell and Don Stewart, Answers to Tough Questions Skeptics Ask About the Christian Faith, Here's Life Publishers, San Bernardino (California), 1980, pp. 50­51.


요나의 이야기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이야기는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true history) 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비유(allegory) 인가?
아니면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nonsense) 인가?


어떻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성경의 내용 중에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이야기는, 자신이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많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 물고기가 어떻게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가?
또 뱃속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어떻게 3일간이나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느냐? 라고 반문하면서 사실일 가능성을 전혀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부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크리스찬들은 이와 같은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는 결코 역사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솝의 우화와 같이 교훈을 주기 위해 풍유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풍유나 비유, 혹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할 경우에는 항상 그렇다고 명시하거나 전체 문맥을 통해서 그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요나는 가공인물이 아니라 열왕기하 14장 25절에도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로서, 기원전 8세기 경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prophet)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나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9-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41절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셨고, 40절에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요나의 기적처럼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거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큰 물고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는"물에 사는 큰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큰 물고기”는 고래나 상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만드신 물고기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큰 바다의 동물이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까요?

향유고래, 백상어, 고래상어와 같은 동물은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습니다.
잡아 올린 향유고래의 위 속에서 길이가 16피트나 되는 상어의 뼈가 실제로 발견된 일이 있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가능합니다.
고래의 위 속에는 항상 공기가 어느 정도 있을 뿐만 아니라, 공기로 호흡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머리 부분에 공기를 저장하는 큰 장소가 있습니다.
고래가 어떤 물체를 입에 넣었다가 삼키기에 너무 크면 이 공기 저장소로 보내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내뱉는다고 합니다.
어떤 큰고래의 공기 저장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4, 7, 7피트나 되는데, 이것은 사흘 동안 살아남기에 충분한 양의 공기입니다.

고래잡이 역사에는 고래에 사람이 통째로 삼켜진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 중에서 최소한 두 사람은 구출되어 생존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요나의 이야기는 자연적인 현상만으로도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요나의 생명을 구하신 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요나를,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셔서(욘 1:4) 바다에 던져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삼키게 하셨고(2;17), 요나가 회개하자 그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육지에 토하게 하심으로써(2:10) 요나의 생명을 건지시고, 그를 통하여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는다면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요나를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월 25일(화) 요나서 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올의 뱃속(2절)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He said: "In my distress I called to the LORD, and he answered me. From the depths of the grave I called for help, and you listened to my cry.

스올의 뱃속
밉베텐 쉐올(מִבֶּטֶן שְׁאֹול)
the depths of the grave

* 스올(7585)
שְׁאוֹל 스트롱번호7585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발음 / 스올[ sheʼôwl ]
어원 / 75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구약 성경 / 65회 사용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스올의 뱃속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베텐 쉐올'(*)은 '무덤의 깊은 곳에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요나가 죽었었다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는다(C. L. Feinberg).
다만 요나는 자신이 죽은거나 다름없다거나, 죽은 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벳느고, 사드락, 메삭은 평소보다 일곱배가 더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서 기도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굴에서 기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형 가운데서 기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교 현장에서 기도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이 배를 쪼개고 승선 인원 276명을 위하여 기도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유배되어 기도
사도 베드로는 깊은 감옥에 갇혀서 기도
부활하신 주님을 지켜본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
나는 지금 어디에서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기도하는가?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물고기 뱃속’이란 그의 인생의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진 자리였습니다.
2장 2절에 나타나는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올’이란 때때로 지옥으로도 표현되지만,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또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큰 물고기의 뱃속은 두 가지의 가능성, 두 가지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무덤이 되지만, 그곳을 탈출하면 그곳은 생명을 낳는 자궁이 됩니다.
마치 고난 속에서 무르익어 열매가 되는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바로 스올의 뱃속인 것입니다.

첫째, 말씀을 인용한 기도(2절)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시편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요나는 구약 시편을 인용하여 기도합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그 말씀이 요나를 지배하지 않았지만 스올의 뱃속에서는 그 말씀이 되살아났습니다.
평소에 내 마음에 새겼던 말씀이 기억에서 희미해질지라도 스올의 뱃속과 같은 환경이 나에게 닥쳐올 때 내 안에 있던 그 말씀이 순식간에 솟아나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니라 생명을 품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으로 바뀔 것입니다.

가장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은 유대인들입니다.
고난을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주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지켜주는 은혜를 경험하는 생명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풍성한 말씀, 풍성한 생명

둘째,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기도(4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 선지자는 평소에는 성전에 대한 마음이 형식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올의 뱃속에서 성전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향한 요나의 기도는 열왕기상 8:38의 말씀을 근거한 기도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봉헌한 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 9:3)

그리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왕상 8:38)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약속에 근거한 기도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그러나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사랑을 담아 기도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마음을 만지는 기도(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멀어진 관계를 가회복하려고 감사제와 서원제를 드립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감사를 드리며 서원을 갚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살펴주시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만 숨어 있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요나와 같이 감사와 서원의 제사와 기도로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요나가 이렇게 기도할 때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로 토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가 기도하지 않은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육지에 토하니라.

문제를 부르짖으라
문제를 넘을 수 있도록 회개하라
문제를 해결하는 감사와 서원의 제사를 드리라

자유대한민국의 역사는 스올의 뱃속과 같은 과정을 지나왔습니다.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또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 간코쿠 헤이고니 간스루 조야쿠[*])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에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

군사정전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
(韓半島 平和協定, Peace Treaty on Korean Peninsula, PTKP)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유엔의 중재하에 1953년 7월 27일 

스올의 뱃속에서 배운 교훈을 절대 잊지 않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3일을 보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은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간이었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죽음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 것이냐? 네 인생의 종착역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네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새롭게 도전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요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셔도 마지막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네가 결단해야 한다. 네가 그곳을 이겨 나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저할는지….”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셔도 마지막은 나,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닌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꾸기 위해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 2: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까?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용기가 있을 때,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있을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할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끝입니다. 제 인생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봐야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이 위기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제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인생의 종착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요나는 가장 깊은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입니다.

 2절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와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의 ‘주께서’가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3인칭 하나님이셨다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2인칭으로 요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에 머물게 하는 기도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내 아내의 하나님, 내 남편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2인칭이신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늘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내 영혼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고난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겁쟁이가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싫습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며 포기합니다. 때로는 숨어 버리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다가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3인칭의 하나님에서 2인칭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나갈 때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오만불손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이 내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과감히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스올의 뱃속을 새 생명의 자리로 만듭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어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압니다. 또한 시시각각 내 곁에 다가오는 춥고 시린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던 사람이 건강검진 결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며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곁을 떠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곳곳에 자리 잡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스올의 뱃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스올의 뱃속처럼 무덤과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자궁과도 같은 축복의 역사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의 암흑시대, 6·25 전쟁의 아픔,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북녘에 있는 백성들은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처럼 어둠과 외로움이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래서 생명의 자리로 오게 해 주소서”라고 개인의 삶과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삶의 자리는 개인에게도 있고, 가족에게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이 사회와 대한민국, 또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스올의 뱃속에서부터 토해 내게 하시어 우리가 생명의 사람으로, 부활의 존재로 일어설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기도하면서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나서 2장은 선지자 요나(Jonah, 비둘기)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요나의 기도는 개인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나서 2장의 내용 구분
2:1-4. 요나의 고난과 구원
2:5-10. 구원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다시스로 방향을 바꾸었을 때 심각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극한 반항으로 죽음을 선택한 요나였지만 물고기 뱃속 즉 스올의 뱃속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스올의 뱃속은 가장 낮은 곳에서 돌아오는 회개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사적인 의미로 볼 때 물고기 뱃속에서의 요나는 예수의 죽으심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구원을 얻은 사건은 예수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었던 것도 예수께서 죽으셔서 부활하시기까지의 기간과도 일치합니다.
물고기 뱃속은 사실상 지옥이나 무덤 속같이 절박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장사지낸 후 부활하시기까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하셨습니다(벧전 3:18-19).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했듯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때에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은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고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처럼 구워 받은 은총에 대하여 날마다 매 순간마다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 물고기(1710)
דָּגָה 스트롱번호1710

1. 물고기. 2. 보통 집합적인 뜻을 지님
발음 / 다가[ dâgâh ]
관련 성경 / 물고기(창 1:26, 출 7:18, 겔 47:9), 생선(민 11:5), 어족(신 4:18, 사 50:2).
구약 성경 / 15회 사용

요나는 하나님의 기회를 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돌이키기 위해서 요나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 “네가 내 메신저가 되어라. 니느웨에 가서 내 말을 증거하고 저들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해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했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싫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자비롭고 너무 착하십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 폭풍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방 뱃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요나에게도 기도하며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선장이 요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요나 1:6)

선장은 요나에게 기도를 요청했지만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풍 속에서 배가 깨지게 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세 번째, 요나는 이 재앙이 자신 때문에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배를 돌리는 등의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뱃사람들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습도, 용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대로 두면 요나는 끝장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자기 마음대로 도망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계속 요나를 추적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요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시면서 결국 요나가 다시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나가 당한 모든 일들의 주체와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며 요나서를 읽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요나를 움직이려고 하셨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 (요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 (요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요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 (요나 4:6)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 (요나 4: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 (요나 4:8)

요나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요나야, 내가 너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사랑한단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계속 도망가기만 했습니다.

결정은 요나가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물고기 뱃속’이란 그의 인생의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진 자리였습니다.

2장 2절에 나타나는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올’이란 때때로 지옥으로도 표현되지만,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또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큰 물고기의 뱃속은 두 가지의 가능성, 두 가지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무덤이 되지만, 그곳을 탈출하면 그곳은 생명을 낳는 자궁이 됩니다. 마치 고난 속에서 무르익어 열매가 되는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바로 스올의 뱃속인 것입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3일을 보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은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간이었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죽음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 것이냐? 네 인생의 종착역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네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새롭게 도전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요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셔도 마지막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네가 결단해야 한다. 네가 그곳을 이겨 나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저할는지….”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셔도 마지막은 나,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닌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꾸기 위해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 2: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까?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용기가 있을 때,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있을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할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끝입니다. 제 인생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봐야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이 위기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제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인생의 종착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요나는 가장 깊은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입니다.

 2절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와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의 ‘주께서’가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3인칭 하나님이셨다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2인칭으로 요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에 머물게 하는 기도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내 아내의 하나님, 내 남편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2인칭이신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늘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내 영혼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고난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겁쟁이가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싫습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며 포기합니다. 때로는 숨어 버리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다가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3인칭의 하나님에서 2인칭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나갈 때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오만불손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이 내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과감히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스올의 뱃속을 새 생명의 자리로 만듭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어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압니다. 또한 시시각각 내 곁에 다가오는 춥고 시린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던 사람이 건강검진 결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며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곁을 떠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곳곳에 자리 잡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스올의 뱃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스올의 뱃속처럼 무덤과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자궁과도 같은 축복의 역사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의 암흑시대, 6·25 전쟁의 아픔,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북녘에 있는 백성들은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처럼 어둠과 외로움이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래서 생명의 자리로 오게 해 주소서”라고 개인의 삶과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삶의 자리는 개인에게도 있고, 가족에게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이 사회와 대한민국, 또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스올의 뱃속에서부터 토해 내게 하시어 우리가 생명의 사람으로, 부활의 존재로 일어설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기도하면서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스올의 뱃속 - 요나 제 2장

​일부 신학자들은 이 책이 이방 나라를 상징하는 바닷속에 빠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탄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싫어하는 책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현신을 설명하는 창세기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요나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설명하는 다니엘서일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 - 불가항력(不可抗力) / 아닐 부, 옳을 가, 겨룰 향,  힘 력

"인간(人間)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저항(抵抗)해 볼 수도 없는 힘" 이라는 뜻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פָּלַל 스트롱번호6419

1. 심판하다,  2. 심판하다
발음 / 파랄[ pâlal ]
관련 성경 / 뜻하다(창48:11), 판결하다(삼상2:25), 유리하게 판단하다(겔16:52), 처벌하다(시106:30), 기도하다(민21:7, 신11:2, 삼상1:27),간구하다(왕상8:33, 대하6:24, 사45:14), 빌다(왕상8:35, 대하6:26, 욥42:10), 묵도하다(느2:4).
[명] 기도(삼하7:27, 왕상8:29, 대상17:25), 간구(왕상8:54, 대하33:13).
구약 성경 / 84회 사용


세 종류의 사람들

1. 신을 발견하여 섬기는 사람들 - 도리에 합당하고 행복한 사람
2. 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애써 구하는 사람들 -  도리에 합당하지만 불행한 사람 
3. 신을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 -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

기도하며 기도의 응답을 즐기는 사람(불가항력) 不可抗力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기도의 응답을 전혀 모르는 사람(운칠기삼) 運七技三
기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의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자포자기) 自暴自棄


공자(孔子)
생이지지(生而知之) - 배우지 않아도 아는 사람
학이지지(學而知之) - 배워서 아는 사람
곤이지지(困而知之) - 어려움을 겪어야 아는 사람

중간의 사람들은 도리에 합당하지만 불행하다.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위 구절에서 "스올(שְׁאוֹל. H7585)" (땅 깊은 곳, 스올)”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단어를 비롯해 하데스, 게헤나, 아부소, 타타루스  다섯 개의 단어들이 단 한 개의 단어 “Hell(지옥)”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한글 성경은 그나마 구분이 되어있습니다만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돈스럽기는 매일반입니다.

* 스올(7585) שְׁאוֹל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발음 / 스올[ sheʼôwl ]
어원 / 75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구약 성경 / 65회 사용

위에 스올이 언급되었기에 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겠습니다.
필자는 인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또 죽은 다음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 그동안 견딜 수 없는 궁금증을 갖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우선 영어의 지옥을 의미하는 Hell은 헬란(Helan)이라는 단어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덮어 놓은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의미합니다.
영국에서는 감자를 보관하는 구덩이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나쁘던 좋던 모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37:35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무덤을 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무덤은 "카바르(קָבַר H6912. 묻다, 무덤)”를 사용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땅속이 아니라 지상의 동굴이나 매장소에 시체를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언제나 땅 밑 깊은 곳을 의미했습니다(시편 63:9; 시편 14:9; 44:23; 에스겔 26:20; 31:14, 16, 18; 32:18, 24).

​묻는다는 의미의 “카바르”는 스올의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카바르”가 명사로 쓰일 때는 복수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단 한 번도 복수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무덤은 분명한 장소가 지정되어 있어 언제나 방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스올은 장소가 지정되어 있지 않아 방문이 불가합니다.
무덤은 사고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사고팔 수 없습니다(창세기 23:4-20).

​무덤에 있는 몸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부 구절들에서는 스올에 있는 영혼이 인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사야 14:4-7; 44:23; 에스겔 31:16; 32:21). 이 부분이 과연 모든 일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지 또는 상징적인 말인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의 회중입니다(잠언 21:16).
스올은 죄인들의 영역입니다(민수기 16:33; 욥기 24:19; 시편 9:17; 31:17 등).
선인들의 영역이기도 합니다(시편 16:10; 30:3; 49:15; 86:13 등).
스올은 깊은 곳 (욥기 11:8),
어두운 곳(욥기 10:21, 22);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민수기 16:30, 33; 에스겔 31:15, 16, 17).

​"하데스(Aδης G86. 음부)”는 스올의 헬라어 버전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데스는 크고 흰 보좌의 심판 때까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계시록 20:11-15).
그 외에도 감옥으로(베드로전서 3:19),
문과 철장, 잠금장치가 있는 곳으로(마태복음 16:18; 계시록 1:18),
지구 밑에 있는 곳으로(마태복음 11:23; 누가복음 10:15) 표현되어 있습니다.

​"게헨나(Γέεννα G1067. 지옥불)”은 원래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계곡을 의미했습니다.
이곳은 짐승의 사체와 쓰레기 하치장이었습니다. 이곳은 소독을 위해 늘 유황 불길이 유지되었습니다. 이곳은 죄인들을 심판하는 “영원한 불의 못”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타타루(Ταρταρόω. G5020. 지옥)”는 한글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베드로후서 2:4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이곳은 하데스 또는 스올의 영역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창세기 6장에서 등장하는 타락한 천사들을 가둔 곳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부소스(ἄβυσσος. G12.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계시록에서 짐승이 나오는 곳입니다 (계시록 11:7; 17:8). 이곳은 사탄이 천년 간 구속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20:1, 3). 계시록 9장에 등장하는 황충의 무리가 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타타루와 같은 곳으로 생각되나 굳이 다른 단어로 표현 한 것으로 봐서는 그리 간단히 결론을 내릴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곳에서 이 단어들의 의미와 그것이 시사하는 인간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릴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실 때 여러분도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가 경험하고 있는 이 폭풍이 하나님의 의한 것임을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 이는 자신이 겪는 모든 시련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아는 욥과 (욥기 1:21; 2:10) 다윗의 (사무엘하 16:5-11) 기도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본 2장은 아래와 같이 시편의 구절들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요나 2:2 - 시편 120:1 /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요나 2:3 - 시편 42:7 /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요나 2:4 - 시편 31:22 /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요나 2:5 - 시편 69:1 /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요나 2:7 - 시편 142:3; 18:6 / 내 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요나 2:8 - 시편 31:6 /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요나 2:9 - 시편 116:17, 18, 3:8 /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산의 뿌리란 해저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인간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깊은 죽음의 골짜기까지 갔다 온 것입니다.
요나의 이 기도는 히스기아의 기도에서 인용되었습니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용하시기 위해 배에서 분리 시키셨고 물고기를 보내 그의 신변의 안전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위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이 왜 그토록 어려운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우리 성도들의 단골 메뉴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다니엘 3:16-18, 24-25)

내 죄에 대한 징계 또는 훈육: 히브리서 12:5; 야고보서 4:17; 로마서 14:23; 요한일서 1:9

죄에 빠지는 것을 예방: 베드로일서 4:1-2

우리의 자만을 없애기 위해: 고린도후서 12:7-10

믿음을 키우기 위해: 베드로전서 1:6-7

성장을 위해: 로마서 5:3-5

복종과 단련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행전 9:15; 빌립보서 4:11

타인을 위로할 능력을 얻기 위해: 고린도후서 1:3-4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고린도후서 4:7-11

천사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욥기 1:8; 에베소서 3:8-11; 베드로전서 1:12

인간은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그 어려움은 어느 누가 겪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뒤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은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고난을 어려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견디면 자원입니다.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는 기차이기도 합니다.

이옥 선교사 그는 북한에서 인민군 하사로 근무했던 사람인데 탈북하여 우리나라에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에 온 사람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에 국가 배급이 끊어지자 먹을 것이 없어 다 죽게 될 위경에 빠졌습니다.
너무 굶으면 헛 것이 보이고 모래도 곡식으로 착각하고 먹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는 강냉이라도 원없이 먹어보는 것을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탈북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다가 물에 빠져 정신을 잃고 물에 떠내려가게 되었는데 강 하류에서 조선족에 의해 건짐을 받아 중국에 있는 우리 나라 목사님을 만나 복음을 받아 들이고 우리 나라에 온 사람입니다.

사업하면서 겪는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역자가 겪는 고통이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오늘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사역을 했던 요나 선지자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합니다(왕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1. 요나는 사명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로서 티그리스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지방으로부터 동쪽으로 700km 떨어진 곳입니다. 
3:3에 보면 성읍 둘레는 걸어서 3일 이상 걸리는 큰 도시입니다.
카알 델리취에 의하면 15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4:11에 보면 어린아이만 해서 12만 명이었으므로 총 인구는 100만을 육박하는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우상숭배가 성행했고 포로를 다루는데 잔인했습니다.
당시에 니느웨는 역병이 2번이나 돌고 있었고(B.C. 765, 753년) 일식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B.C. 763년)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에 대한 암시를 느끼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멸망을 선포하므로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욥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1:1-3).
 '욥바'는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변 항구입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에서 서쪽으로 3,000km나 떨어진 스페인 지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했으나 요나는 정 반대 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자신이 죽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원수들이 멸망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만 한 것입니다.

 2. 요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명을 거절하고 도망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을 잊어버리기 위해 배 밑창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풍(大風)을 만나 폭풍이 대작(大作)하므로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이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의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神)을 부르며 배 밑창에 들어가 깊이 잠들어 있던 요나에게도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바다는 점점 흉용해져 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온 것인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그 원인자로 뽑혔습니다.
그들은 요나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온 것인지 묻자 요나는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연고인 줄 알고 그들에게 자기를 바다에 던지면 폭풍이 잔잔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다가 점점 더 흉용해짐에 따라 하나님께 요나 한 생명 때문에 자기들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으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요나가 던져지자 하나님께서 준비한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흑암의 고난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1:4-17).

3. 요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흑암 가운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스올 뱃속이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죽음, 무덤, 음부, 지옥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호소하며 죄를 회개하며 서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회개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떠났던 것,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버리고 거짓되고 헛된 것을 따랐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한 서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고통 중에 회개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명한 바를 선포하게 했습니다.
요나는 3일 길을 걸어 니느웨로 갔습니다.
하룻동안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치고 다녔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금식을 했으며 심지어는 어린 아이와 짐승들까지 금식을 시켰습니다.
니느웨의 모든 사람이 무론대소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 금식을 하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전에 지은 죄를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진노를 거두시고 멸망치 않게 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보고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리라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3:1-10).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나 우리 하나님이 시킨 일이 마음에 부담이 되어 거절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서 서원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고통을 주는 환경이 우릴 토해내게 할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진입금지’를 의미하는 표지판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표지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 초보 운전이었을 때, 나는 경황없이 들어선 길에서 마주 오던 차들이 유난히 나를 노려보며 경적을 울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얼마간 진행을 하다가 마침내 주차단속을 하던 경찰이 나를 세웠다.

‘일방통행로입니다. 
면허증을 좀 보여주시지요.’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했었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범칙금 고지서를 발부 받았으나 나는 오히려 미안해하고 또 감사하면서 즉시 유턴을 하여 제 길로 바로 가게 되었다.

선지자 중에서 하나님의 순리와 명령을 거역하고 나의 경우처럼 역주행 하던 선지자가 있으니 아시다시피 바로 ‘요나’이다. 
니느웨로 가라시던 명을 거스려 다시스로 향하던 요나는 경찰의 제지(대풍’ 大風’)를 받아 ‘스올(음부, 무덤)의 뱃속’으로 불리는 물 고기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물고기를 생각하면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한 선생님께서 보여주시던 그림 속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 그림은 고기 뱃속을 자그마한 다락방의 이미지로 형상화 한 다음, 호롱불 아래에서 성경책을 펴 놓고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이었다.
어두운 고기 뱃속에서도 성경책을 볼 수 있도록 해 준 선생님의 배려가 참 세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내가 다 시 한 번 요나의 상황을 재현해 볼라치면 그 그림은 동화 수준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고기의 뱃속 상황은 그리 호락하지는 않 았으리라 생각한다. 
위(胃)의 연동운동으로 인한 물리적인 압력, 지속적으로 내뿜는 강산성 위액, 뜨거운 내부 온도, 밀려오는 온 갖 해조류며 작은 고깃덩이까지… 그가 느꼈을 고통의 깊이란 것은 당해보지 않은 내가 상상하기에 너무 가혹하고, 어쩌면 죽음의 위기 감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직접 체험한 심각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요나의 처신이다. 
그 와중에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기도한 요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절망적 고통 앞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곳을 택하시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세상 사람들이 만날 때 즐겨 찾는 화려하고 아늑한 곳이 아닌, ‘스올’과 같은 절망적인 곳, 상처와 고통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는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길 원하신다.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고통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고통 속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체험 해 보라. 
그리고 그 길에서 돌아서라. 
시인하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 여러분 앞에 기 다리고 있다. 

기도할 수 있는 한 절대로 완전히 절망에 빠진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는 차라리 자신의 고통의 깊이를 먼저 느껴보라.”고 역설한 유진 피터슨의 말이 오늘따라 귀에 쟁쟁하게 들린다.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는 요나(요나 2:1-10)

요나는 광풍이 불어오는 바다 한가운데서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선지자로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성경도 쉬지 않고 읽었고 남들보다 기도도 많이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환란가운데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멋대로 살았던 못된 죄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아 내가 바로 그렇게 증오하며 비판했던 외식주의자였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찾아가는 환자는 한결같이 자신의 몸에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거센파도와 광풍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절)

그도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에서 비로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죄때문에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큰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각오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광풍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자기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광풍앞에서 자기의 욕심도, 자기의 자존심도, 자기의 생명조차 내려놓고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겉 사람이 강합니다.
끈질깁니다.
그래서 그냥 말로 해서는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경의 풍랑을 통해서 우리를 겉사람을 깨트리고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하나님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듭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비로소 하나님앞에 엎드려 진정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역경이 바로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경이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도 지금까지 기도한다고 했지만 매우 형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마음을 터놓고 기도한 적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깊은 기도를 드린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눈물로 기도했던 기억이 아득합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기도합니다.

1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의 얼굴이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회복입니다.
비록 물고기 뱃속이지만 요나의 영이 깨어난 것입니다.
비로소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삶이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을 위해서도 물고기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물고기는 내 가정의 풍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내가 당하는 육체적인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내 자식들이 당하는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내가 마땅히 배워야 할 교훈을 알게 하십니다.

 

2절,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영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과 교통의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고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요나의 죽음을 선택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의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이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요나, 여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요나에게 엄청난 고난이 왔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고난이 모두다 징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또한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징계하십니다.
징계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나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징계는 모든 성도에게 찾아옵니다.

징계가 없으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나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을 드십니다.
내게 하나님의 채찍이 가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의 질책이 나를 향해서 찾아올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영혼이 깨어난 것입니다.

2. 징계는 나자신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징계 그 자체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나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죄덩어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 징계를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3. 징계의 목적은 나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는 나의 믿음을 자극시켜서 믿음의 연단을 만들어 냅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를 통해서 무너지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앞에 엎드리고 요나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징계가 은혜입니다.

징계가 내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다 제거하고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나의 교만이 깨어지고 나를 거룩하게 하는 데 절대 필요한 과정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그가 받는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스올'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말합니다.
죽은 바와 다름없는 곳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비로소 찾았습니다.
요나는 죽음의 골짜기에 갇힌 것입니다.
탈출할래야 할 수 없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밀폐된 어둠 속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더러운 냄새로 숨이 막히고 어둠이 가득한 고통의 장소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반드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기서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잃어버렸던 신앙을 찾은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자기를 찾은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기도를 찾은 것입니다.
평소에 요나는 선지자라고 하면서도 진실한 기도를 하지 못했고, 신앙은 형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것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도하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전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과 내 삶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선지자이니까 겉으로는 좋은 신앙인처럼 보였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이론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내 생각과 같았을 때는 순종하는 것 같았지만 내 생각과 다를 때는 여지없이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마음의 꺼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메마르고 그의 심령이 메말라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고,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캄캄한 환난의 밤을 만나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기도를 배울 수 없는 "요나"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는, 큰 풍랑을 당하지 않고는, 파도를 만나지 않고는 기도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캄캄한 뱃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이렇게 외쳤을지 모릅니다.
"내가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저 평안한 땅에서, 저 아름다운 땅에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 때,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을 때 나는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요나가 이제라도 기도를 배우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일 때, 한계상황에 부딪쳐 앞에 캄캄할 때에도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서 내 음성을 듣고 계시다는 사실은 은혜가 아닙니까?

이때 요나는 기도하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1.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3-4절).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이 모든 역경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위에 넘쳤나이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앙망하며 간구합니다.
요나의 기도 속에서 중요한 낱말은 "다시"라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얼마동안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다시 성경을 펼치겠습니다. 다시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은혜를 사모하기 시작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앙망합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거기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다시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여러분이 앉아 있어 교제가 단절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잃어버렸던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가 회복되었습니다(7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요나는 여호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편안할 때 자주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곳이 물고기의 뱃속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이 절박한 상황에 던져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구세군의 창설자이신 월리엄 부드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는 여러분이 지금 드리는 그 기도에 생사가 달린 것처럼 생각하십시오"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멈추지 하십시오.
기도하실 때 지금 드리는 이 기도에 여러분의 생사가 달린 것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절박해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에 필요없는 수식어는 얼마나 많이 떨어지겠습니까?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높고높은 보좌 위에서‥" 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했을까요? 오히려 그는 원색적인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정신 똑똑히 차리고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한번만 더 내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요나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나의 의식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있는 신앙은 그 생각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생각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갖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당연히 먼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 생각대로 고집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감사가 회복되었습니다(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그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편안한 삶을 살 때 일찌기 그의 입술에는 감사의 언어가 없었습니다.
그가 마음대로 자기의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 그는 감사의 언어를 잊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의 캄캄한 뱃속에서 그는 감사의 언어를, 감사의 노래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역경 속에서 자기의 삶이 끝날 듯한 고통의 한밤중에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나면 그저 기도는 감사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배부른 기도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합니다.
그는 비로소 '감사'라는 단어를 깨닫습니다.
더이상 요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그저 감사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서원을 갚겠다고 결심합니다.
그의 서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신 사명,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이 명하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순종하겠다는 다짐과 맹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회개에 이르렀다면 외면했던 사명의 길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생을 살면서 한 번도 서원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도 어딘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고 감사의 고백이 흘러나올 때 "하나님, 제가 나머지 생은 다르게 살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가 이렇게 살아 보겠습니다" 하는 결심도 없이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구원받은 성도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앤드류 러코크라는 구약 신학자는 물고기 속에 들어가 있던 요나의 모습을 이와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물고기야말로 요나의 인생을 다시 빚어 만드는 새로운 삶의 모태였다.
마치 어린아이의 생명이 어머니의 태내 어둠 속에서 빚어지며 그 속에서 인생이라는 놀라운 날을 예비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기 물고기의 뱃속이라는 고난의 한 심연에서 요나에게 새로운 삶을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고난만 예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의 빛나는 내일의 새벽까지도 예비하셨음을 깨닫고 주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시편기자의 고백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감사를 배우고 하나님을 향한 결단으로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요나, 그를 위해서 하나님은 마지막에 어떻게 하십니까?

10절,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그 물고기가 요나를 다시 빚기 위해서 주께서 예비하신 교육의 현장이었다면, 이제 요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감사를 배웠고 새로운 미래를 결심했기에 그곳에서 배울 것은 다 배운 셈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물고기로 요나를 토하게 하심으로 고난을 끝내십니다. 스올의 뱃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아버지앞에서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잃어버린 영적인 은혜를 회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드려 보았습니까?
심정을 통하는 깊은 기도를 드려 보았습니까?
지금은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할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서원을 갚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감사함으로 주 앞에 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월 26일(수) 요나서 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말씀대로(3절)



요나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Jonah obeyed the word of the LORD and went to Nineveh. Now Nineveh was a very important city--a visit required three days.

"여호와의 말씀대로(the word of the LORD)"
키데발 아도나이(כִּדְבַר יְהוָה)

* 말씀(1697) 다바르(dâbâr) דָּבָר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다바르[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언어(창 11:1, 시 19:3, 잠 29:20), 말씀(창 15:1, 민 11:24), 일(창 18:14, 출 18:18), 말(창 24:52, 출 35:1, 신 4:2), 명령(창 44:2, 삼상 15:11,13), 물건(출 22:9), 대답(잠 27:11), 사건(민 25:18, 신 19:15), 계명(신 4:13), 규례(신 15:2), 판결(신 17:11), 뜻(신 17:10), 직무(신 24:5), 까닭(수 5:4, 왕상 9:15), 의견(삿 20:7), 염려(삼상 10:2),구변(삼상 16:18), 이유(삼상 17:29), 소식(삼하 15:28), 식양(왕상 6:38), 소문(왕상 10:6),행위(왕상 10:6, 16:20), 사적(事蹟)(왕상 11:41,14:29), 행적(왕상 14:19, 대하 12:15), 지략(志略)(왕상 14:29, 16:14), 독(왕하 4:41), 불의(왕하 17:9), 양(왕하 25:30), 유언(대상 23:27), 반(대상 27:1), 글(대상 29:29), 소행(느 5:9), 생각(겔 38:10), 한 마디(렘38:14), 조서(에1:19), 일기(에2:23), 소리(욥26:14, 시22:1), 용맹(욥41:12), 병(病)(시41:8), 목적(시64:5), 영광(시79:9), 표적(시105:27), 노래(시137:3),사물의 이치(전8:1), 불행(전8:5), 예언(렘28:6), 편지(렘29:1), 영(단9:25), 말미암다(창20:11, 신4:21), 조금(렘38:5), [동] 응하다 (겔12:23), 말씀하다(말1:1), 대하다(출8:12), 대답하다(민20:8, 삼하24:13), 이르다(창41:28, 왕상18:31), 상종하다(삿18:28), 상심하다(삼하13:33), 청하다(삼하14:15), 구하다(삼하14:22), 모의하다(왕상1:7), 허락하다(대하1:9), 무엇이든지(삿19:19), 구별하다(느12:47), 자세히(삼상3:18), 어찌(삼상11:12).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요나 3:1-10 여호와의 말씀대로(according to the word of God) לפי דבר אלוהים

요나서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 요나에게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요나 1:1-2)

첫번째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올의 뱃속에서 삼일 동안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듬은 후에 다시 두번째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두번째 말씀을 듣고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 40일 후면 니느웨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니느웨는 사일 동안 걸어다녀야 할만큼 매우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룻동안 니느웨 성에서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성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요나 3:5-6)

타락했던 니느웨 성 사람들과 심지어 왕까지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금식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곤 신을 숭상하는 악한 이방 족속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민족은 여전히 우리만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요나 한 사람이 순종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날도 순종해야 할 사람이 순종하지 않아 불행한 일은 계속하여 산불 번지듯 퍼져나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불러주신 목적은 바로 이 때를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순종의 자리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을 때 그 말씀은 곧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동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동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예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말만 잘 하는 사람들" 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받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겠습니다.

내 입의 말과 묵상과 행실이 먼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이 되어 구원의 증거가 열매되는 일에 성공하는 믿음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과 행위가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말은 해 놓고 행동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때의 상황에서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계속해서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씀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선포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되어야 합니다.
아니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신 하나님이 또한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또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제 요나에게 다시 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요나에게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게 되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요나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 한 개인을 중심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요나가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본문의 기록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요나에게 사명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나를 훈련시키신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훈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자가 잘 듣도록 바뀔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훈련으로 인간의 죄성을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요나 한 개인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나라고 하는 인물이 대표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요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 고정관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이렇게 이끄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어떻게 언약을 성취하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고 계신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죽이고 언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사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서 과거의 이스라엘을 죽이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창조하여 언약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요나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게 됩니다.
요나가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선포되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의도대로 드러나고 성취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처음 의도는 니느웨에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고, 니느웨에서 말씀이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심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선포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이 의논하여 절충된 다른 의견이 제시되어 실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요나가 말씀에 굴복된 자로 바뀌어져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거부한 선지자가 죽고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선지자로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제 말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 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말씀은 니느웨에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니느웨에 선포되게 됩니다.
 
3,4절의 말씀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선포한 말씀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큰 성읍이라 삼 일 길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서 삼 일이 아니라 하루를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상황을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5-8절).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삼일 동안 다니면서 선포한 것도 아니고 하루 선포하니까 온 성읍에 소문이 퍼지고 그 소식이 왕에게까지 상정되어 왕도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금식을 선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고 강포를 행하는 일을 그치도록 합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니느웨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니느웨의 회개가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회개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싶다고 해서 회개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입장에서 니느웨 백성들이 마음대로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회개하게 만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하였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에게서 회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유보시키신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했다가 심판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훔서 1:1 이하에 보면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나 1:1-3a)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가 외치던 이 상황은 요나 선지자가 외쳤던 시대에서 약 100년 후의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니느웨을 철저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심판을 유보하신 것은 결코 니느웨를 구원코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훔서를 통해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니느웨를 회개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요나 선지자를 보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니느웨를 회개하는 것을 보도록 요나를 참여시키신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나는 배에서 다시스로 도망하면서도 배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은 히브리 민족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라고 앞의 강론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 시대는 여로보암 2세 때로 다윗 이래로 가장 부유함을 누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누리는 부유함이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기고 있기 때문에 누리는 복이라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니느웨에 선포하라고 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요나에게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그러한 긍휼이 베풀어진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나의 모습 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만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은 멸망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그 고정관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회개시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죄가 많거나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의해 구원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는 방식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언약의 방식대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짐에 있어서 요나 같은 자를 보내시는 것은 고통과 희생의 과정이 포함되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안다고 하고 그 말씀대로 산다고 알고 있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이고 또한 모든 인간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은 모든 죄인들의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게 하심에 있어서 요나를 고통과 희생의 자리로 끌고 가셔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은혜와 긍휼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부유함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이지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자격이 이스라엘에게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니느웨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전례없는 강성함을 누리는 것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이 긍휼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도 벌써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느웨에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에 요나라는 존재가 고통을 당하고 희생되었듯이 이스라엘에게 계속적으로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은 언약의 실체가 오셔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39-41)라고 말씀하신 것은 요나의 고통과 희생 그것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거부하고 도망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그렇다거나 내가 잘 믿을 것 같아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 모든 순종의 삶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니느웨를 회개시킴으로 이스라엘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고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우습게 압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나무 십자가 자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대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홀로 십자가에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셨기 때문임을 믿는 자가 성도요 또한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 쪽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구원에 대한 어떤 근거도 날마다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이라는 근거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도, 목사나 장로, 집사, 권사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어떤 당위성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임을 고백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7-31)


1. [민수기 3:51]
이 속전을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

2. [신명기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 [여호수아 8:8]
너희가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였느니라 하고

4. [사무엘상 16: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5. [열왕기하 1:17]
왕이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저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 이년이었더라

6. [열왕기하 9: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7. [열왕기하 23: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8. [역대상 12:23]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러하였더라

9. [역대하 29:15]
저희가 그 형제를 모아 성결케 하고 들어가서 왕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명한것을 좇아 여호와의 전을 깨끗케 할쌔

10. [역대하 30:12]
하나님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저희로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일심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11. [예레미야 13: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요나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 (고전 2:14-3:3, 마태 13:3-2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4)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덕경(德經)」제 41장) :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上士聞道, 勤而行之)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간수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듯하기도 하며(中士聞道, 若存若亡)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으니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When the be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practices it assiduously;        
     When the average student hears about the way, it seems to him one moment there and gone the next;      
     When the wor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laughs out. If he did not laugh, it would be unworthy of being the way. 

 
사람들을 3가지로 분류합니다.
난사람, 든 사람, 된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인정받을만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난사람은 보통 평범한 사람보다 뛰어나 유명하여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을 말합니다.
든 사람은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세 사람가운데 인간으로서 필요한 모습은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유명해지는 것보다, 머리에 많은 지식을 쌓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사람됨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거미와 같은 사람, 개미와 같은 사람, 그리고 꿀벌과 같은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세상에는 거미와 같이 남을 이용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개미와 같이 일은 열심히 하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꿀벌과 같이 끊임없이 날라서 자기도 살고 남도 살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우월 의식과 특권의식이 강하게 내포된 구분입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옛날에는 더욱 그것이 심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면 모두 이방인이었고, 이방인은 사람이 아닌 동물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주님을 믿기가 매우 어려웠고, 그들의 우월의식과 고정관념이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이것을 깨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러 관점에서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사람을 어떻게 분류할까요? 본문은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유의하여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나의 모습을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구분은 크게 3가지로 나타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14절에서 이것을 잘 알려줍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한마디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요, 중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연인을 말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지금 세계 76억 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의 숫자가 약 20억 정도 됩니다.
전체 인구의 30%가 넘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카톨릭과 다른 종파를 모두 포함한 숫자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독교가 어떤 종교보다도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3분의 2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믿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하고, 전도할 대상들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늘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것을 한마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깨닫는 존재입니다.
결국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 자기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이가 점점 깨달아야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점점 깨달아야 철이 드는 것입니다.
인간 됨의 회복은 깨달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은 모두 깨달음의 사람입니다.
깨달음이 신앙과 삶에 너무도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중요한 깨달음은 하나님이 역사 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풍성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안됩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성령이 도우시면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고, 맹목적이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모습이 나오고, 인간임을 포기하는 행동들이 나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많이 발견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3장 1절과 2절에서 이것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요, 이미 거듭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도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징을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긴 했지만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막 태어난 생명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보다 조금 성장해서 이제 돌을 지나고, 걸음마를 하는 단계의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보다 조금 더 자라서 이제 말도 하고, 재롱도 피우고, 자기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단계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어린아이라 하고, 또한 이것이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입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이들을 젖을 먹는 자라고 강조합니다.
이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어린아이기에 젖을 먹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만큼 아직까지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물론 아이가 순수하고 깨끗하지만, 가만히 보면 어린아이의 약점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깊이 생각하거나 올바르게 판단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웁니다.
그런데 그 우는 것을 가만히 보면 모두 자기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배고프다는 것이고, 불편하다는 것이고, 놀아달라는 것이고, 딴 생각하지 말고 나만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을 때, 여지없이 웁니다.
물론 이렇게 자기의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행동에서 오는 모습입니다.
아이가 엄마 생각하고 우는 것 보았습니까?
지금 엄마가 몹시 피곤해서 잠을 자야 하는데 아이가 그런 엄마를 생각하고 울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이가 밤에 울면 대책이 없습니다.
다 일어나야 합니다.
한 두 번은 봐주는데 자꾸 그러면 나중에는 때려주고 싶을 때가 생길 정도입니다.
이게 어린아이입니다.
갓난아이는 자기밖에 모릅니다.

아이는 사색이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나 목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커서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것 보았습니까?
“아!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달픈가, 어떻게 해야 돈을 벌어 성공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상한 아이일 것입니다.
아이는 그저 아이입니다.
아이처럼 살면 됩니다.
요즘 아이들의 정신연령이 높아서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자기가 결혼할 친구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 나이에 질투도 하고 좋아하는 친구의 이야기만 나오면 어른처럼 얼굴이 빨게 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입니다.
생각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미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야 인생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방향을 정하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계시지만,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분쟁과 시기가 있었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편협한 삶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고, 폭넓게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교회를 세운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 이것을 알려줍니다.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야말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깊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우선, 15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16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주를 가르치겠느냐” 라고 반문하는데,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서 ‘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신령한 자는 뭔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마음을, 그의 사랑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잘 깨달아 인생을 후회 없이 살도록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 마음은 한마디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온유와 겸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깨달음이 있고, 남을 배려하고, 깊이 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의 약점을 모두 보안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운데 육에 속한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자라면 이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우리 모두 영에 속한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서 커다란 깨달음을 갖고, 이기심을 버리고, 깊은 사람으로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월 27일(목) 요나서 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박 넝쿨(6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Then the LORD God provided a vine and made it grow up over Jonah to give shade for his head to ease his discomfort, and Jonah was very happy about the vine.

7021. 박넝쿨(a vine) 키카욘  קִיקָיוֹן  
1. 조롱박.  2. 박 넝쿨. 3. 요나 4:6-10.
발음 / 키카욘[ qîyqâyôwn ]
어원 / 700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박 넝쿨(욘 4:6-10).
구약 성경 / 5회 사용

* 7006. 토하다(카야. qâyâhקָיָה  
1. 토하다
2. 예레미야 25:27.
발음 / 카야[ qâyâh ]
관련 성경 /  토하다(렘 25:27).
구약 성경 / 9회 사용

요나서 4장은 그릇된 선민 의식을 가진 요나와 공평하게 이방인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크게 대조되는 말씀으로 내용을 두 부분으로 소개합니다.

4:1-4. 니느웨의 회개에 불평하는 요나
4:5-11. 그릇된 요나의 생각을 바꾸려는 하나님

요나는 삼일 길의 큰 성읍 니느웨에서 단 하룻동안만 니느웨가 40일이 지나면 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그렇게 악독한 도성이 즉시 회개하는 놀라운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무너져야 할 이방인의 도성인 니느웨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어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적대국인 앗수르의 발전은 이스라엘에게 위험이 된다는 생각이 요나를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큰 도성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보고 오히려 불평하고 분을 내는 것은 편협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깨닫게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저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며 은근히 무시하고 저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요나를 깨우치려고 뜨거운 햇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는 박 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얼마 후 그 박넝쿨이 시들어서 그늘이 없어질 때 요나는 박 넝쿨 때문에 불평합니다.
이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네가 심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독한 도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단면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인간들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그의 자녀로 사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내 안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통하여 외부로 전달되고 증거되기를 위하여 결단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요나는 큰 성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 아니하자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을 하겠습니까.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요나가 얼마나 앗수르를 싫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가 망해야 이스라엘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갔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경고를 선포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중심적으로 판단을 하고 있으며, 자기가 원한대로 되지 않자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가 세상의 첫 번째 살인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찾는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는 하나님께 분노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요나와 가인처럼 자기중심적 분노를 표출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분노를 이 땅에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죄를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모든 저주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자가 된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요나는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기 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인 줄 알았지만 자기의 생각대로 그 은혜가 베풀어지길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자 그는 불평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평하고 분노한 이유는 자신이 받은 은혜의 깊이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나는 여기서 이 같은 왜곡된 인간 심성을 표출한다.
그는 국가적인 회개를 통해 심판이 연기된 니느웨 성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이스라엘의 대적국인 니느웨에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아직도 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편협한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은 박 넝쿨을 통해서 요나의 오해를 지적하셨다.

<요나 4장 개역한글>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4장 성경주석>

4:1 싫어하고.

 첫 번째 구절은 문자적으로 “그것은 요나에게 악, 곧 커다란 악이었다”이다. 제4장은 인간의 마음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현저하게 대비하여 나타내 준다. 요나는 싫어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뜻을 돌이키”신 것에 대해 몹시 분개했다(3:10).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음을 기뻐하는 대신, 그는 자기의 이기적이고 죄된 자존심 때문에 분개함을 나타냈다. 자기가 예언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간주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에게는 앗수르 수도에 사는 모든 영혼들보다도 자기의 명성이 더욱 소중했다. 그는 성취되지 않은 그 예언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미래를 아시는 여호와의 능력이 불신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추론했을지도 모른다.

4:1 노하여.

 . 니느웨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3:10) 요나를 격분하게 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가 불순종했을 때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건만, 하나님께서 동일한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베푸셨을 때 그는 그것을 질투했다.

4:2 기도하여.

 2장의 기도와 비교할 때 이 기도를 드릴 때의 상황은 얼마나 다르며, 이 기도를 하게 만든 그 정신은 얼마나 다른가! 그때 그는 생명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때 그는 겸손했지만 지금은 화를 낸다.

4:3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나님께 드리는 요나의 간청은 모세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모세는 죄를 범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진정한 자기희생 정신으로 기꺼이 자기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호소했다(참조 출 32:31, 32). 요나는 완전히 낙담에 빠졌다.

4:4 성냄.

 요나의 성냄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내실 때에 나타내신 것과 같은 고결한 분노(참조 요 2:13~17)가 아니라 전적으로 이기심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선지자는 자기의 성급한 정신으로 인해 스스로 큰 축복을 빼앗겼다(참조 잠 14:29; 16:32).

4:5 보려 하니라.

 어떤 이들은 요나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절)라는 질문을 자기가 하나님의 의도를 성급하게 오판했으며 니느웨가 아직도 멸망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제시했으나, 다른 이들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진지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오히려 요나의 반응은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경고하셨던 것처럼 실행하셔야 한다는 요나의 완고한 태도와 주장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4:6 박 넝쿨.

 히브리어 키카욘(qiqayon). 알려지지 않은 식물. 아주까리, 일종의 오이 등 여러 가지가 그 정체로 제시되었다. 그 식물은 기적적으로 성장했으며, 비록 이것이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악갓어로 쿡카니투(kukka-ni-tu)라고 하는 미확인된 종류의 식물일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구태여 그 정체를 빠르게 성장하는 어떤 알려진 식물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4:6 준비하사.

 . 히브리어 마나(manah), “지정하다.”

4:6 괴로움.

 .히브리어 라아(ra‘ah). 악, 불운, 고생, 불행 등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 요나의 불편함은 육체적인 것이었기보다는 그가 당하고 있다고 느낀 속상함과 모욕과 실망으로 인한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이었다.

4:7 준비하사.

 참조 6절 주석.

4:7 시드니라.

 . 인생의 경험에서 얼마나 자주 기쁨과 즐거움의 새 날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일 때, 어떤 불행이나 슬픔의 벌레가 와서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 버리는가!

4:8 뜨거운.

 히브리어 하리쉬트(h.aris∨it). 단지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 “태우는 듯한”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개정표준역」은 “찌는 듯이 더운”이라는 의미를 제시한다.

4:8 준비하셨고.

 .참조 6절 주석.

4:9 내가…합당하니이다.

 선지자는 성급하고 완고하게 자기가 성내고 죽고자 결심한 것이 옳다고 항변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에 사리에 맞는 태도를 일깨우려고 애쓰고 계셨다.

4:10 네가 아꼈거든.

 히브리어에서 “네가”는 강조형이다. 화가 난, 동정심이 없는 선지자 요나는 자기가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를 들이지 않은 별 가치 없고 하찮은 박 넝쿨에는 기꺼이 동정심을 나타내고 아까워했으나, 큰 도성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배려를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다. 「70인역」은 이 절의 처음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것을 위해 고생하지도 않고 네가 그것을 기르지도 않은 박 넝쿨에 동정심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화를 냈고(1, 4절),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시들도록 허락하셨을 때도 화를 냈다(9절).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인가!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보다도 박 넝쿨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4:11 분변치 못하는.

 어떤 이들은 이 표현을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느 쪽 손이 더 강하고 유용한지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적용시켰다. 만약 그런 어린이들이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구성한다고 가정할 경우 니느웨는 약 600,000명의 인구를 가진 도성이었을 것이다. 그런 수치는 그 고대 도성의 알려진 크기와 조화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숫자이다. “분변치 못하는”이라는 표현은 선과 악에 대해 불완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을 지칭하는 은유적인 내용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더 좋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면 니느웨와 함께 그 주변 성읍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참조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4:11 십이만여 명이요.

 . 니느웨의 인구에 대하여는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4:11 아끼는 것이.

 . 히브리어 후스(h.us), “유감스럽게 여기다”, “~에 동정심을 나타내다.” 후스는 10절에서 “아꼈거든”으로 번역되었다.

요나서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4장은 요나에게 은혜를 가르쳐주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특별히 더 돋보이는 장입니다.
요나는 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운 것 같습니다.
요나가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배우는지 “요나, 은혜를 배우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3장에서 요나의 선포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을 본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고, 그는 평생에 가장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요나는 지금 그 현장에 있습니다.
정말 어메이징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 오산에 나가셔서 복음을 전하는데 듣는 사람마다 꼬꾸라지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한다면, 그래서 오산시 전체가 다 하나님 말씀으로 뒤집어 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요나는 그러한 일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가 감격합니다.
기뻐 날뛰면서 춤을 춥니다.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요나서 4장의 시작입니다.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싫어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못마땅한 겁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라는 그 감격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화를 냅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 수가 있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런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용서해주신단 말인가?” 요나는 그들이 심판받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겁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다니!” 이게 요나를 분노하게 한 겁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제사를 드린다며 난리를 쳤는데, 다른 사람이 그 은혜를 받으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정의롭지 않다며 하나님 앞에서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그럽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그냥 좀 넘어갔으면 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냥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랬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내게 상처 준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처벌당하기를 바라고 어떻게든 그 잘못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 화가 나는 겁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인가요? 요나인가요? 문제는 “요나”에요. 문제는요 “나”에요. 내가 문제입니다. 요나는 어쩜 이렇게 우리와 닮았을까요? 화가 난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쏟아 붓습니다. 2절에서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이 기도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합니다. 먼저 자기가 했던 잘못을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줄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는 이 같은 대형 사고가 일어날 줄을 예상하고, 자신은 이것을 막기 위해 도망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요나는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잘못이라도 되듯이 하나님을 몰아붙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요나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거는 좋게 말해 기도지, 보면 기도가 아니라 협박입니다. 요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거리며 하나님께 악을 쓰는 겁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들이밀면서 덤비는 겁니다. “하나님 그냥 나를 죽이세요!”

이거는 진짜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까부는 겁니다. 이런 요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래? 그렇게 네가 죽기를 원한다면 뜻대로 해주마!” 라고 말씀하시면서 커다란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를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철없는 아이를 설득하는 부모처럼, 슬픔과 실망과 분노의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반항하는 십대 아이를 설득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요나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러면서 질문하십니다. “요나야 한번 생각해보아라. 네가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거냐? 이 일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런데 이 질문에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는 대답도 안하고 성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완전히 막가자는 겁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훈계를 하는데 화가 난다고 확 나가면서 방문을 쾅 닫는 것과 같은 겁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는 니느웨 성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40일 후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 위해 앉아있습니다. “하나님! 저 니느웨 백성들을 벌하시든지, 나를 죽이시든지 알아서 하세요.”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빨리 자라는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나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표정이 풀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돕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갑자기 행복해졌습니다. 6절에 보면.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요나서에서 요나가 기뻐했다는 표현이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를 봤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나무 그늘 하나에 엄청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요나입니다.
문제는요 “나”입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았을 때도,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할 때도, 누군가 구원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트에서 1+1 상품을 제대로 하나 건지면 엄청 기뻐하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크게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다시마가 들어있는 라면 아시죠? 포장을 뜯었는데 다시마가 3개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 일은 잘 없잖아요. 2개도 아니고 3개라니! 저는 사진을 찍으며 아내에게 자랑을 합니다. 이거보라고 3개나 들어있다고 그러면서 엄청 기뻐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책임이 주어져도 기뻐하지 않는 제가 손가락만한 다시마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저도 요나와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화를 내던 요나가 박넝쿨이 주는 그늘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게 다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음 날 새벽에 벌레를 예비하십니다. 그래서 요나의 초막을 덮은 박넝쿨에 보내시고, 그것을 갉아먹게 하십니다. 박넝쿨은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그늘은 사라졌고 요나의 미소도 사라집니다. 이제 불타는 햇빛이 요나의 머리에 바로 꽂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온갖 거를 다 준비하십니다. 큰 바람을 보내서 바다에 빠뜨렸다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건지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셨다가 이제는 벌레와 뜨거운 동풍까지 준비하셨던 겁니다. 철없는 요나를 돌이키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겁니다.

뜨거운 동풍을 맞으며 뙤약볕 아래에 있는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요즘말로 멘붕 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또 화를 냅니다. 8절에 요나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서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감사하다가, 니느웨가 회개하니까 화를 내며 덤비다가, 박넝쿨 때문에 좋다고 기뻐하다가, 이제 그게 없어졌다고 또 화를 내면서 죽겠다고 소리 치고 있는 겁니다.

죽는다는 게 무슨 비장의 무기에요. 뭐가 그렇게 대단한 목숨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걸핏하면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요나가 원하는 대로 동풍의 온도를 300도로 올려가지고 요나를 바비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 아내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렇게 요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여러분, 이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인내심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4절에서 하셨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요나야, 이 일이 지금 네가 화를 낼 일이냐? 나의 말을 전하는 선지자인 네가 큰 성읍 니느웨의 회개를 직접 보면서도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화를 내며 죽기를 구하는 것이 어떠냐? 그런 일이 너에게 가당한 것이냐? 네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느냐?”

그런데 요나의 대답은 정말 가관입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가 대답합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정말 독이 제대로 올랐습니다. 못 말리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에게 마침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씀을 하십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게 요나서의 끝입니다. 혹시 찝찝하게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분명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뭔가 쓰다가 그만둔 거처럼 요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셨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요나야 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요나는 집착할 가치도 없고 권리도 없는 것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같은, 그것도 자신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박넝쿨을 아끼며 그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아끼는 것은 어떻습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것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요나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니느웨까지, 자기가 원수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아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박넝쿨을 통해서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시는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화를 냈던 요나가 어떻게 했을까요? 궁금하지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라는 질문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요나서의 요나가요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나도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삶으로 실천하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신지 알았습니다. 그가 2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알고 있는 것이 자신의 삶과는 잘 안 맞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데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넓고, 그렇게 파격적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는 영적 축제의 현장에서 오히려 화를 냈던 겁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되는데 저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은 안 돼,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화가 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요나처럼,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화를 냅니다. 기뻐하지 못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나는 받아도 되지만, 저런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파격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좀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바람을 일으키시고, 배, 물고기, 박넝쿨, 벌레 온갖 것을 다 동원하셨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빠뜨렸다가 건져내셨다가 다시 니느웨에 보내셨다가 훈계하셨다가 온갖 일을 다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것인지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니느웨 같은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니느웨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마음에 니느웨와 같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아무리 내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내 도덕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생활 방식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고, 두 번째 기회를 주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르쳐주길 원하셨던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 파격적인, 크고도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은혜로운 자가 되어 은혜를 베풀며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언제, 어디에서 맹수가 뛰어 나올지 모르는 밀림 속 같습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경쟁하고 밟고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이라도 흠 잡을 것이 있으면 찍어 내리고 비난합니다. 나에게 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 인상을 쓰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그렇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는 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운데는 뭔가 관대함이 있고 너그러움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한 대로 갚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 주고 안아 주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힘이고 우리의 경쟁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삶에 함께하셔서 앞서 준비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가 아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누군가의 삶을 도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 4:1-2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2587)
* 하눈(channûwn) חַנּוּן 

1. 은혜로운,  2. 자비로운,  3. 온화한
발음 / 하눈[ channûw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비한(출 22:27), 은혜로운(출 34:6, 대하 30:9, 시 103:8).
구약 성경 / 13회 사용

용서할 자를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

자비로우시며(7349)  

* 라훔(
rachûwm) רַחוּם 

1. 인정 많은.  2. 동정심이 많은. 3. 신명기 4:31
발음 / 라훔[ rachûw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비로운(출 34:6, 시 103:8, 욘 4:2), 자비한(신4:31, 시78:38, 145:8), 긍휼히 여기는(느9:17). [부] 긍휼히(느9:31). [명] 자비(대하30:9), 진실(시86:15).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7356. 자궁(라함.  racham)  רַחַם
1. 자궁.  2. 처녀
발음 / 라함[ racha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창43:14), 사랑하는 마음(창43:30),위하는 마음(왕상3:26), 긍휼(신13:17, 느9:27,28, 시51:1), 불쌍히 여김(왕상8:50, 슥1:16), 자비(대하30:9), 긍휼하심(시25:6), 은혜(느1:11), 태(창49:25, 잠30:16, 사46:3), 처녀(삿5:30).
구약 성경
6회 사용


639. 노하기를(아프.
’aph) אַף  

1. 호흡하는 곳.  2. 코. 3. 민수기 11:20.
발음 / 아프[ ’aph ]
어원 / 5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코(창 2:7, 삼하 22:9, 시 115:6), 얼굴(창3: 19, 삼상25:41), 분노(창27:45, 신29:20, 렘12:13), 노(창30:2, 삼상11:6, 겔22:20), 분기(창49:7), 콧김(출15:8), 진노(민11:10, 스8:22, 사3:8), 머리(민22:31), 노염(시30:5), 분(욥37:11). [동] 노여워하다(합3:8), 노하다(창39:19, 출 11:8, 욥27:3), 분노하다(신9:19, 단9:16, 호 13:11), 울분을 터뜨리다(욥18:4).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더디하시며(750)

750. 긴, 느린(아레크. ’ârêk)  אָרֵךְ 

1. 긴,  2. 느린
발음 / 아레크[ ’ârêk ]
어원 / 74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는(전 7:8), 더딘(출 34:6, 민14:18, 잠14:29), 긴(겔17:3). [부] 더디(느9:17), 오래(렘15:15).
구약 성경 / 7회 사용


인애가 크시사(2617)(7227)

2617. 인자함(헤세드. chêçêd)  חֵסֵד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7227. 풍성한(라브. rab) רַב 

1. 풍성한,  2. 복수형 : 출 19:21, 3. 큰
발음 / 라브[ rab ]
어원 / 여성형 יַבָּה, 복수 רַבִּים, 7231에서 유래한 압축형
관련 성경 / 가득한(창6:5), 큰(창7:11, 수11:8, 삼하24:14), 많은(창13:6, 신28:38, 대하14:14), 무거운(창18:20, 전6:1), 족한(창24:25, 신3:26, 삼하24:16), 높이는(민16:3), 풍부한(창30:43), 수많은(출12:38, 겔33:24), 번성하는(출23:29, 신26:5, 대상4:27), 오랜(민9:19, 신1:6), 강대한(신9:14), 허다한(신31:17), 풍족한(삼상2:5),먼(삼상26:13), 많아지는(삼하15:12, 욥5:25),용맹스런(삼하23:20, 대상11:22), 넉넉한(왕상19:4, 잠28:27), 광대한(에1:20, 시147:5), 풍성한(시4:6), 넓은(사51:10), 범람하는(시32:6), 후한(시86:5), 심한(전8:6). [명] 여러날(창21:34, 신2:1, 에11:4), 다수(출23:2), 무리(왕상12:28, 느7:2, 시31:14), (시위)대장(왕하25:10), 장수(대하1:11), 여러(번)(시106:43), 장관(렘41:1), (시위대) 사령관(렘52:14,30), 선장(욘1:6). [부] 오래(창37:34), 많이(출19:21, 민35:8), 후히(대하21:3), 흡족히(시78:15), 온갖(잠26:10), 만족히(사53:11), 가득히(욜3:13).
구약 성경 / 413회 사용















































오바댜(Obadiah) - 여호와의 종 / 07-22-2023(토)


오바댜(Obadiah) -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

저자 : 1절은 선지자 오바댜가 오바댜서의 저자라고 알려줍니다.

본서의 기록자는 남 유다 출신 선지자 오바댜이다.
오바댜는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라는 뜻이다.
에돔의 멸망을 선포했으며 고향이나 가족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성경에는 오바댜 선지자를 비롯해 아합의 궁내 대신 오바댜 등 총 13명의 오바댜가 등장한다.

저작 연대 : 오바댜서는 주전 848-84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바댜서의 기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본서의 포로 귀환 내용이 바벨론 포로 귀환을 연상케 하며, 또한 열왕기서나 역대기의 기록에서 에돔의 배반을 언급하긴 했으나 에돔이 유다를 침공했다는 내용은 없어 열왕 시대 이후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기록 목적 :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인 오바댜서는 단지 21절 밖에 없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범죄한 에돔을 정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선지자입니다.
에돔 사람들은 에서의 후손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서의 쌍둥이 형제 야곱의 후손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의 형제 싸움은 천년 동안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분열 때문에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중에 그들의 땅을 건너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이제 주의 심판의 말씀은 에돔의 교만에 대해 선포될 것입니다.

핵심 구절 : 오바댜 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바댜 1: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오바댜 1: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요약 : 오바댜의 메시지는 최종적이며 확실합니다.
에돔 왕국은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에돔은 오만하고 이스라엘이 불행을 당할 때 기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적군의 공격을 에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들은 그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이러한 교만한 죄악은 더 이상 간과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마지막 때에 시온의 완성과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끝나며, 그 때에 그 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되어 주께서 그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예표: 오바댜서 21절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개역한글).
이 “구원자들”(다른 역본은 “구원받은 자들")은 말씀 사역자들인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특히 마지막 때의 복음 설교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구원자들’로 불리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구원을 얻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선포하고 우리에게 그 구원을 얻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그들에 의해 선포되는 말씀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수단입니다.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값 주고 사신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구원의 창시자이십니다.
반면, 복음의 구원자들과 전달자들은 시대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말세의 증거로서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적용 :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승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에돔과 달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은 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외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31번째 책으로 선지자 오바댜가 기록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가장 짧다.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연합해서 유다를 공격한 에돔은 멸망하고, 유다는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에돔

오바댜가 심판을 예고한 에돔 민족은 이삭의 아들 에서의 후손으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과는 형제지간이다. 사해 남단의 세일산에 정착해 큰 민족을 이루었다.[17]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향할 때 에돔은 자신들의 영토를 지나지 못하게 하고,[18]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을 배신하거나 괴롭혔다.[19][20][16][21][22][23][24]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할 때는 앞장서서 침공하기까지 했다. 결국 자신들도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유다에 복속되었다가 끝내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

오바댜의 내용 구성

내용
1장 1-16 에돔의 죄와 심판
17-21 이스라엘의 회복과 복된 미래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 믿고 교만하게 행한 에돔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셨다. 형제 나라인 유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돕기는커녕 오히려 침략자를 도와 약탈에 앞장선 죄로 인해 그 행위대로 멸망당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한편 유다는 이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오바서는 구약에서 유일하게 단 한 장으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한 장으로 구성된 말씀은 신약에서는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빌레몬서 4권이며 구약에서는 오바댜서 1권으로 모두 5권입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섬기다는 아바드와 여호와라는 야가 결합된 것으로 "여호와의 종"이란 뜻입니다.
오바댜서는 에돔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말씀으로 묵상의 주제는 '중심의 교만(the pride of your heart)'입니다.
중심의 교만이란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신의 힘을 믿는 에돔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오바댜 1: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에 끌어내리겠느냐The pride of your heart has deceived you, you who live in the clefts of the rocks and make your home on the heights, you who say to yourself, 'Who can bring me down to the ground?'

에돔 족속들이 거주한 곳은 사해 남동쪽 바위가 많은 산악 지대로 난공 불락의 요새였다.
그 주민들은 자연적인 동굴이나 인공적으로 바위를 깨어 만든 집에서 거주하였다.
이런 조건들은 외부로부터 보호해 줄 뿐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더욱이 수도인 베트라는 약 3Km에 걸쳐 펼쳐지는 좁은 암반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리 많은 적이라도 적은 수의 군사력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에돔 족속은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리어 이로 인해 교만을 불러일으켰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돈'(2087)은 '끓는다'(boil)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지드'(*)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으로는 끓고 있는 음식이나 물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사람의 심성을 나타낼 때는 자만하여 스스로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마치 물이 끓어넘치는 듯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자들은 그 어떤 것에도 복종하려 하지 않고,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


2087. 자돈(zâdôwn) זָדוֹן 

1. 허풍,  2. 교만,  3. 거만
발음 / 자돈[ zâdôwn ]
어원 / 210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교만(잠언 11:2, 잠 13:10, 겔 7:10), 교만한 자(렘 50:31, 32).
                  [부] 무법하게(신 17:12), 마음대로(신 18:22).
구약 성경 / 11회 사용


2102. 주드(zûwd)  זוּד 

1. 끓이다,  2. 거만하게 굴다,  3. 니팔형 분사 נָזִיד : 요리되다
발음 / 주드[ zûwd ]
관련 성경  / 교만하다(렘 50:29), (죽을) 쑤다(창 25:29).
                   [부] 거리낌 없이(신 1:43, 17:13), 교만하게(출 18:11, 느 9:10), 마음대로(신 18:20).
구약 성경 / 10회 사용


오바댜 1: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 '시온 산'은 하나님의 통치가 강력하게 구현되고 시행되는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표상적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를 심판할 수 있는 근거나(사 31:9; 욜 3:16), 심판의 장소를 의미하기도 한다(11-14,16절; 사 10:12; 미 3:12).

한편, '피할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펠레이타'(*)로서 '구출'', '모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 봐서 '그 산에 피할 자'란 심판을 모면하여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학개와 스가랴 때에 고국의 종교를 재건한 사람을 가리킨다(학 1:12,14).








하나님은 본서를 통해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에돔은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는 형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일 산을 거점으로 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자신들의 강력한 군사적, 경제적인 힘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1:1-9.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심판을 선언
1:10-16. 이스라엘과는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들보다 이스라엘을 더욱 핍박하고 심지어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의해 침략 당할 때는 그것을 기뻐하고 같이 노략질을 일삼았으므로 하나님은 이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1:17-21.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선민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선지자는 에돔의 심판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오바다 선지자는 유다에 행한 에돔의 잔악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에돔에게 징벌을 내리실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유다를 대적한 에돔의 심판 예언은 곧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유다가 대적 에돔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에돔의 죄악을 징벌하신다는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로우심을 증거하여 주며 핍박받는 의인에게 승리의 소망이 됩니다.

에돔은 근원상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본장에서는 바로 에돔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이다. 선지자는 에돔의 죄를 지적하면서 먼저 그들의 교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당시 에돔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을 믿고 하나님을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형제인 이스라엘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환난을 기뻐하고 같이 핍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며 공의에 벗어나는 불의한 행동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본 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두 가지 측면의 삶의 기준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수직적 관계와 공동체 구성원간에 실현해야 할 사랑과 공존의 수평적 관계이다. 이 두 가지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성도들의 삶의 기준인 것이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남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힘들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서로 무관심한 관계가 되어 버렸고 익명의 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이런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 않게 사람들끼리의 사랑과 공존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바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는지를 살피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도움을, 소외된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에돔에 대한 심판 예언(1-9절)
오바댜는 구약성경 39권 중에서 유일하게 1장으로 구성된 성경입니다. 신약성경에는 1장짜리가 4권, 빌레몬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가 있습니다.
오바댜 선지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바댜’라는 인물이 성경에 몇 명 등장합니다. 아합왕 시대에 기근이 극심할 때에, 왕궁을 맡은 사람 중에 오바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선지자 100명을 굴에 몰래 숨겨 두고, 빵과 물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오바댜는 선지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시야 왕 때 성전 수리에 동참했던 인물 중에 오바댜가 있었고,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도 오바댜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오바댜’의 뜻이 ‘여호와의 종’입니다. 또한 이 이름은 ‘에베드_예배하다, 경배하다’라는 동사에서 왔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어떤 신분에 있었든지, 또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1-9절은 에돔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묵시(하존)’라는 말은 ‘계시’, ‘말씀’,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바댜를 통해서 에돔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라는 의미입니다. 한 국가의 대사가 대통령의 명을 받고서 다른 나라에 가서 그것을 전하면, 그 말을 대사가 자기 입으로 말할지라도, 그 말은 대사의 말이 아니라 대통령의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도 동일합니다. 선지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선지자가 목이 터져라 외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터지는 것입니다. 또 선지자가 눈물로 호소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눈물의 호소가 됩니다.

(1-2)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에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에돔을 쳐부수러 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로 에돔은 아주 작게(보잘 것 없게) 될 것이고, 굉장히 경멸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돔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입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역사,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당시의 초강대국이 좌지우지하는 것 같고, 역량이 굉장히 뛰어난 최고 통치권자가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개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고, 내 계획과 내 의지가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돔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들의 문제를 이렇게 밝힙니다.
(3-4)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이었습니다. 에돔은 해발 1,500m 이상 되는 험준한 바위산에 요새를 건설하고 살았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이 북한산인데, 가장 높은 곳인 ‘백운대’가 해발 836m입니다. 평소 등산하지 않던 사람이 올라가려고 하면, 쉬운 높이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산은 높을수록 올라가기는 더 힘듭니다. 에돔 사람들은 북한산 위에 또 북한산을 하나 더 올려놓은 정도 지점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는 난공불락의 성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에돔 사람들을 ‘독수리’에 비유합니다. 독수리는 새 중에서 가장 높은 곳,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삽니다. 게다가 조류 중에서 가장 강합니다. 또한 시력도 좋아서 2,000m 상공에서 들판을 지나는 쥐를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독수리 둥지와 같은 곳에 요새를 만든 것과 같은 곳에 살았던 에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자신들을 함락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끌어내릴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남의 집 담을 넘어가 물건을 훔칠지라도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지 않습니다. 아니 가져갈 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져가려고 했던 것만 가져가든지,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정도만 가져갑니다. 또 남의 포도밭에 들어가 서리를 할 때도 밭에 있는 포도를 전부 가져갈 수 없습니다. 가져갈 수 있을 정도만 갖고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돔에게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남긴 것이 없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깊이 감추어 둔 것까지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8-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말미암아 에서의 산에 있는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여 멸절되리라

혹 나라가 망하게 되더라도 ‘지혜로운 사람’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좀 더 빠른 시간에 재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그런 사람들을 남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만’은 에돔의 대표적인 도시를 뜻하거나, ‘에브라임’이 북이스라엘을 전제를 대표하듯이, 에돔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드만이 에돔을 대표하는 도시이든, 에돔 전체를 뜻하든, 군인들이 모두 멸절을 당한다는 것은 에돔이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돔의 죄(10-14절)
10-14절은 에돔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저질렀던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네 형제 야곱(이스라엘)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십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가 들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몹시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붉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그 죽을 좀 달라고 했더니, 야곱이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에서는 말로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 장자의 명분이 넘어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팔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붉은 팥죽으로 인해서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고, 그 뜻이 ‘붉다’입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은 모두 이삭과 리브가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임이니라(신 2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할 때에 에돔 지역을 통과만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밭이 있는 지역이나, 포도원이 있는 지역은 결코 통과하지 않을 것이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큰 길로만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돔의 대답은 “NO!”였습니다. 그럼에도 지나가겠다고 하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 두 민족은 오랜 기간 적대적이었습니다.

(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멀리 섰던 날’의 문자적인 뜻은 ‘반대편에 섰던 날’입니다. 즉 에돔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에 바빌로니아의 편에서 서서 함께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바빌로니아 군대와 서로 지역을 나누어서 약탈했습니다.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표현이 ‘현재, 부정형’으로 되어 있는데, ‘과거, 긍정형’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했으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했으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렸으며’입니다. 과거 긍정형의 일을 현재 부정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더욱더 생생하며 묘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입을 크게 벌렸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그만큼 통쾌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즉 손가락질하며 “쌤통이다!”, “고소한 참기름이다” 등등을 큰 소리로 말하며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13-14)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이 말씀도 ‘현재, 부정형’으로 된 것을 ‘과거, 긍정형’으로 읽어야 합니다. 에돔은 예루살렘이 침략을 당할 때 들어가지 말아야 할 성문으로 들어갔고, 고난을 덜어 주지 않고 방관했으며, 손대지 말아야 할 재물에 손을 댔고, 심지어 도망가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막아 도망가지 못하게 했고, 더 나아가 원수(바빌로니아)에게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에돔의 이런 만행을 하나님께서 결코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며 불순종할 때에, 바빌로니아를 통해서 징계하셨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 백성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에돔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15-21절)
15-21절은 세상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에돔도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돔은 B.C. 32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함락당하여, 수천 명의 지도자가 죽임을 당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A.D. 66-73년에 있었던 ‘제1차 유다-로마전쟁(First Jewish–Roman War)’ 또는 ‘유대독립전쟁’ 이후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7-18)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에돔이 보기에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짓밟을 때는 유다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침략자의 편에서 함께 짓밟고 약탈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타 재가 된 것은 에서 족속(에돔)이고, 반면에 야곱 족속(남유다)과 요셉 족속(북이스라엘)은 불꽃처럼 되살아나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21)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이것이 ‘오바댜’의 결론입니다. 스스로 난공불락이라 여기며 교만했던 에서의 산(에돔)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에 대한 박해였습니다. 에돔의 조상인 에서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은 형제였습니다. 그것도 쌍둥이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가까운 사람(가족, 친척, 교우 등)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치면, 그것이 징계의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짓누르는 것인지, 반대로 대가를 지불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짓누르는 삶은 당장은 이익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기 삶을 무너지게 만드는 첩경입니다. 그러나 대가를 지불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은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대가를 지불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하지만 에서가 하나님의 향한 삶을 살지 않게 될 때에 그 후손들은 서로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1,500m나 되는 곳, 바위틈에 요새와 같이 세워졌기 때문에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함락당할 때에 침략군의 편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을 자행했습니다.
바라옵나니 우리가 가족과 친척, 교우 등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바르게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불해야 할 대가를 감당하게 하시고,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1. 에돔은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에 지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난공불락이라 여겨 교만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높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낭패를 당한 일은 없습니까?

2. 에돔은 같은 피를 이어받은 이스라엘에게 행한 포악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데 바꾸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만, 다시 회복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된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4. 가까운 사람들에게부터 대가를 지불하는 삶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며, 또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오바댜의 묵시(默示)다.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산다 하여 누구도 감히 우리를 땅에 끌어내리지 못할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끌어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에서가 어찌 수탐(搜探) 되었는가 놀랄 것이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악으로 말미암아 멸절(滅絶)되리라. 
너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너도 그들 중에 끼어 함께 제비를 뽑았다. 
네가 형제의 날 곧 재앙의 날에 방관해서는 안 되었다. 
너는 오히려 그들의 환난을 기뻐했고 도망하는 자를 막았고 원수에게 넘겼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 왔다.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으리라. 
하지만 시온 산에는 피할 자가 있다. 
야곱 족속은 그곳에서 기업을 얻을 것이다. 
야곱 족속이 불이 되어 에서 족속이 지푸라기가 되어 불탈 것이다. 
야곱의 족속은 주변의 땅들을 얻을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 에서의 산을 심판할 것이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했다.

오바댜 1:14 / 그 남은 자(8300)

8300. 생존자,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자,  민수기 21:35

사리드(sârîyd) שָׂרִיד

1. 생존자,   2.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자,  3. 민수기 21:35(이에 그와 그 아들들과 그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 땅을 점령하였더라.)
발음 / 사리드[ sârîyd ]
어원 / 827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남김(민 21:35, 신 2:34), 남기는 것(욥 20:21), 남은[을] 자[사람](민 24:19, 수 10:20, 렘 42:17), 남아 있는 바(렘 47:4), 남은 자(욥 18:19, 렘 44:14, 옵 1:14).
구약 성경 / 28회 사용




성경을 볼 때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단어가 있다.
다름 아닌 ‘셀라’이다.
셀라에 대한 궁금증은 대부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셀라의 의미,
둘째 셀라의 기능,
셋째 셀라를 읽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이다.

셀라는 주로 시편에 기록되어 있고 하박국에도 기록되어 있다.
시편 3편 2절에 처음 등장하는 셀라는 총 39편의 시편에서 68회 사용됐고, 하박국에서 3회(합 3:3, 9, 12)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인 셀라는 신약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총 71회 등장한다.
문자적 의미의 셀라는 올리라는 뜻이다.
기능적으로 음악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셀라가 음악 악상기호라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셀라가 악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셀라가 ‘들어 올리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음을 높이라는 부호로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음 자체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악기나 사람의 목소리를 크게 하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는 지휘자가 단조로운 음악의 흐름에 변화를 주려고 붙인 부호라는 것이다.

사실 시편의 기자들이 처음부터 셀라를 넣어 시를 지은 것은 아니다.
하박국 3장과 서른아홉 편의 시편을 후대 혹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곡조를 붙여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로 연주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한글 성경은 괄호 안에 넣어 (셀라)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괄호가 없다.
한글 성경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괄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셀라가 시편과 하박국의 기자가 지은 원문에는 없었지만, 필사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셀라가 처음 등장하는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지은 시이다.
시편 51편 또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다윗에게 이 사건들은 평생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시편들에 곡조를 붙여 찬양대가 부르게 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며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짓지 않으려는 다윗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에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돔 사람들은 이삭의 맏아들이자 야곱의 쌍동이 형인 에서의 후손입니다.
리브가의 뱃속에서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엄마인 리브가에게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25:23).
성인이 된 에서는 경솔하게도 팥죽을 먹기 위해 야곱에게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 버립니다(창세기 25:30-34).
그리고는 그 후부터 그의 동생 야곱을 증오합니다.
에서는 에돔 사람의 아버지가 되고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끝없이 싸웁니다.

성경에서 “세일”(여호수아 24:4), “보스라”(이사야63:1)와 “셀라” (열왕기하14:7)는 에돔 땅과 수도를 말합니다.
셀라는 오늘날 페트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돔”이라는 이름은 “붉은”을 뜻하는 셈 족 언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또한 사해의 남쪽을 에돔이라 부른 이유는 지형학적으로 붉은 사암이 너무나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을 팥죽과 맞바꾼 바람에 에서는 에돔이라고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가족을 데리고 같은 이름의 구릉지대로 이사를 갑니다.
창세기 36장은 에돔 사람들의 초기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아직 없을 때에 왕들이 차례로 에돔 땅을 다스렸습니다(창세기 36:31).
에돔 사람들의 종교는 풍요의 신을 섬긴 다른 이방 족속들과 비슷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결국 남쪽 땅을 점령하고 농사와 무역으로 생계를 꾸립니다.
고대 무역로 중 하나인 임금님의 땅(민수기 20:17)은 에돔을 통과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당시 그 통로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강제로 거부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에돔 족속과 가까운 친척이었으므로 에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되었습니다(신명기23:7).
그러나 에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그로 인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사울 왕이 에돔과 전쟁을 치를 때 다윗이 그들을 물리치고 에돔에 군사기지를 세웁니다.
에돔 영토를 통치하면서 솔로몬 때 이스라엘은 홍해에 에시온 게벨 항구를 건설하여 많은 원정을 보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 이후 에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잠시 자유를 누리다가 티글라스-필레세르 3 세가 이끄는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진압당했습니다.

마카베오 전쟁 동안 에돔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토벌 당하여 유대교로 강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에돔인은 유대인에 대한 오래된 미움을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헬라어가 공용어가 되었을 때 에돔 사람들은 이두메 사람으로 불리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탄생과 함께 유대교로 개종한 한 이두메 사람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이두메 사람이 바로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에 학살을 명령한 폭군 헤롯 대왕입니다(마태복음2:16-18).

헤롯이 사망한 이후 이두메 사람들은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35장에서 이미 에돔 사람들의 파멸을 예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35:15).
이스라엘이 에돔보다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유대인들을 지배하려는 지속적인 에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성경의 에돔 땅은 사해 남쪽 지역으로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국가의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압과는 세렛 시내를 경계로 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경계는 홍해에 맞닿아 있는 에시온게벨(현재 에일랏)까지였다. 에돔의 수도는 보스라(사 34:6, 64:1; 렘 48:24)로 이곳에는 에돔의 궁궐이 있었다(암 1:12). 히브리어로 에돔의 의미는 ‘붉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와디 알-아르바 동쪽의 세일 산의 색깔이 붉은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성경에 의하면 에돔 땅의 조상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서로 그의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붉었다(창 25:25). 또한 그는 야곱이 내어 준 붉은 것을 먹어 그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다(창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 25:30)

'에돔'(Edom)은 ‘붉다’라는 뜻이다. 원문에는 이 말이 두 번 반복되어 '그 붉고 붉은 것(???? ???)'으로 나온다. 에서가 팥죽의 붉은 색깔에 자극받은 식욕 때문에 지극히 흥분한 상태에 있음을 묘사한다. 본래의 붉은 피부에다 이 붉은 팥죽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이후 사람들은 그를 '붉다'는 뜻을 지닌 '에돔'이라 불렀다.

장자권을 팔고 대신하여 받은 '붉은'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얻게 된 에서의 별명으로(창 25:30), 에돔 족속은 바로 이 에서의 후손이다. 유다 지파는 에돔 경계에 닿는 영토를 분배받았지만 에돔 영토를 결코 침범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에돔 지역은 모압, 암몬 등과 더불어 정복 대상에서 제외된 곳이었기 때문이다(신 2:4-23). 따라서 가나안 정복과 분배시기에 이스라엘과 에돔이 서로 접촉하거나 충돌한 기록은 없다. 약 2세기 후에 사울이 에돔인들과 싸운 적이 있고(삼상 21:7),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에돔은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게 된다.

한편, 장자는 짐승의 '초태생'과 추상적으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처음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외적 특권으로 아비의 뒤를 승계하여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27:1-45; 대하 21:3)과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을 가진다.

둘째는 내적 특권으로 장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함과 동시에,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된다.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이다.

야곱이 이런 장자권의 소유를 위한 형 에서와 흥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평소에 장막에 머물 때 장자권의 영적 축복을 부모로 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반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에 관해 무지하므로 가능했고, 과거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언행을 자주 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 왔었고, 사전에 이 문제를 놓고 농담조의 대화가 빈번하여 에서의 경계심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굶주림에 처한 형의 처지를 이용해 장자권을 흥정한 처사는 정당시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향후 그의 고달픈 인생의 여정이 잘 반증해 준다.

구약 당시 장자권의 상실은 본 절처럼 본인의 의사로 맹세를 통하여 직접 양도할 때, 서자가 장자일 경우 합법적인 아내가 그 후 아들을 낳아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때(창 21:10), 아비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창 48:22; 대상 26:10), 중죄에 대한 징벌로 박탈당할 때(창 49:3,4; 대상 5:1)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성경 기록과 유사한 풍습이 기록된 아카드어 토판인 누지서판(Nuzi Tablets)에는 형제가 상속받은 숲을 다른 형제에게 세 마리의 양을 받고 팔고 있는 상속권 거래에 관한 실례가 소개되어 있다.

그러므로 에서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후회하는 에서를 답습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면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6).

결국 그가 살았던 지역은 에돔이라 불렸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세일 산 에돔 들에 거주했다(창 32:3; 36:8∼9). 창세기 36장은 세일 산에서 살았던 에돔 족속의 족보를 상당히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창 36:9∼43). 이는 아마도 에서가 이삭의 아들이요 야곱의 형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관계는 에돔 족속이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에 조금 더 우호적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데스에서부터 에돔 땅을 건너가고자 할 때 에돔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민 20:14∼21). 그러나 에돔은 모압과 암몬이 그랬던 것처럼 연맹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하지는 않았다. 성경에는 에돔 사람이 이스라엘의 형제이기에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신 23: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

민수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하던 시대에 에돔은 이미 왕정을 이루고 있었다(민 20:14). 그러나 역사고고학적으로 볼 때 당시 에돔은 국가 개념의 왕정이 아닌 유목민의 부족장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시대보다 100년 정도 빠른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 256번에 기록된 우루-두-무(URUU-du-mu·두무 도시라는 뜻)가 에돔 도시국가를 말한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었던 우두무라 불리던 유적지라고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시대와 동시대에 기록된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주전 1213∼1203년에 재위한 메르넵타 왕 시대에 기록됨)는 ‘에돔으로부터 온 샤수 유목민’을 언급하고 있다. 샤수는 주전 15세기경부터 이집트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무리들을 일컫는 말로 ‘발로 걸어 움직이는 자’라는 뜻이다.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민 20:14)

대부분 학자들은 샤수를 사막 유목민으로 보고 있다. 샤수는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사해 남쪽 지역을 넘어 시나이 반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이들로, 당시 국가보다는 족속(부족)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왕보다는 족장의 개념이 더 어울린다. 때로 이들은 이집트의 북서쪽 지역을 넘어 약탈을 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아멘호테프 3세 같은 경우 그의 적들의 목록에 샤수를 넣기도 했고,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벽 부조에는 샤수와의 전투 현장 모습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했던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 외에 샤수를 에돔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에돔 땅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고고학적 흔적이 주전 9세기 이후인 것으로 보아 당시 에돔을 사막 유목민의 단계에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일 산지

세일 산의 원주민은 "호리 족속"이다. '호리'란 '구멍'을 의미한다. 이는 '호리족속'이 혈거인(穴居人)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세일산 주변의 석회암 동굴을 거처로 삼았던 것 같다. 세일의 원주민이었던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 의해 1차 정복당하였고(창 14:5,6), 훗날 에서의 자손에 의해 추방당하거나 남은 자들은 에돔 족속에게 예속되어 동화되고 말았다(신 2:12,22). 한편 에서의 아내가 된 ‘오홀리바마’ 역시 이 호리 족속이었다.

세일 산은 사해와 아카바 만(gulf) 사이의 아라바 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다.

에서는 일찍 부터 이삭을 떠나 세일에서 생활했었다(창 32:3; 33:16). 야곱과 완전히 분리하여 세일에 거주하고 됨으로써 언약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인 가나안 땅(창 12:7)에 대한 주권은 별다른 저항을 일으키지 않고 야곱의 후손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에서가 야곱과 갈리게 된 표면적 이유는 소유의 풍부로 인한 목초지의 부족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이삭을 통해 이미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창 27:39,40). 즉 이미 하나님은 영원 전 부터 야곱에게는 가나안 땅(창 28:13)을, 에서에게는 세일 산지를 기업으로 주시려고 작정 하셨었다(신 2:5; 수 24:4; 32:3).

한편 가나안의 시온산이 언약의 땅을 상징한다면(시 87:1-5), 세일 산은 에돔을 대표하는 산으로서 이방인의 요새를 의미한다(겔 35:2,15).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무함을 인하여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로 황무케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무하리니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5:15).

에서의 자손

에서의 아내는 ‘아다’, ‘바스맛’, ‘오홀리바마’ 이렇게 셋이다. 에서는 3명의 아내와 5명의 아들 및 11명의 손자가 있다. 그 중 중요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데만 : 문자적인 뜻은 '오른 쪽에 있는 자'로서 이 이름은 훗날 에돔의 한 부족이자 북동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렘 49:20;겔 25:13).

* 아말렉(에서가 아다에게서 낳은 엘리바스의 첩 딤나가 낳았다) : 아내들을 제쳐두고 이례적으로 엘리바스의 첩 딤나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괴롭힌 ‘아말렉 족속(출 17:8;민 14:45)’이 바로 그녀의 소생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힘과 동시에, 그들이 에돔 족으로부터 이탈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된 동기가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에서의 후손 중에는 사울 왕 때에 도엑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사악한 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무엘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삼상 21:7)

'도엑'(Doeg)은 '불안'이란 뜻이다. 그리고 '에돔 사람'은 야곱의 쌍동이 형 에서의 후손들로서 팔레스틴 지방과 인접한 남부에 살고 있었다(창 36장). 바로 이같은 혈연적, 지역적 사정으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에돔 사람들 중에는 개종(改宗)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사울 왕의 목자장(牧者長)이란 요직을 맡을 정도가 된 '도엑'은 이미 개종하여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엑의 과거 국적을 굳이 밝힌 까닭은, 그로 인하여 머지않아서 결코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려고 의도한 때문인 듯하다(창 25:25, 30; 민 20:14-21; 삼하 8:13, 14; 왕상 11:14-22).

"사울의 목자장"- 당시 가축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는 점에서, '도엑'이 사울 왕의 목자장이라는 요직(要職)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울 왕으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과는 달리 70인역(LXX)은 이 말을 '사울의 노새를 관리하는 자'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근거는 희박하다. 또한 최근 들어서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여기 '목자'를 '로임'이 아닌 '라침' , 즉 '달리는 자'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여기의 '달리는 자'는 왕의 병거보다 앞서 나가는 왕의 시위대를 가리키는데(8:11), 따라서 도엑을 '달리는 자의 우두머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견해는 ‘도엑’이라는 인물이 왕의 시위대 가운데 끼어 있었으며(22:17, 18), 많은 사람들과 가축을 쳐 죽일 만한 무예 및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 된다고 한다.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도엑'(Doeg)은 다윗과 아히멜렉 간에 되어진 일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발함으로써 무고한 제사장 85인과 놉 땅의 거민과 가축을 몰살케 만들었다(삼상 22:9-22 / 아히멜렉은 놉 땅의 제사장으로 허기진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성막의 떡을 주었고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주었다). 이처럼 도엑은 간악하고 아부 근성이 농후한 인물로서, 후일 다윗은 그의 시편 52편을 통해 도엑의 잔인성을 질타하였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진입 루트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에돔 땅을 지나가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한다. 에돔에 속한 것은 풀 한포기도 건들지 않고 혹 피해를 입히면 배상하겠다고 모세가 간곡히 부탁하지만 그들은 거절한다(민 20.14-21).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에돔의 세일산( 페트라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페트라 외곽 와디 무사(모세의 계곡)의 샘은 모세가 바위를 치자 물이 터져 나온 곳(민수기 20:10-11)이라고 한다. 모세의 형이자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은 현재 아랍어로 ‘자발 하룬’이라 불리는 페트라의 ‘호르산(아론산)’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솔로몬은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아한다(왕상 11:1). 그로인해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 만연하게 된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무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겔 25:12-13).

사울은 왕이 되자 우선 그의 주변에 있던 이스라엘의 적을 정복해야만 했다. 이 중에는 에돔도 포함되었고, 성경에 의하면 에돔을 비롯한 모든 적은 사울에게 정복되었다. 사울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다윗시대에도 여전히 적군이었다. 다윗은 소금 골짜기 즉 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만8000명을 물리쳤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어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게 하였다(삼하 8:13∼14). 심지어 그는 요압을 시켜 6개월 동안 남아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이도록 하였다(왕상 11:15∼16). 덕분에 솔로몬은 평화롭게 얻은 에돔 땅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어(왕상 9:26) 오빌에서 금을 가져올 수 있었고,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비록 요압의 칼에서 살아남아 이집트에서 돌아온 하닷에 의해 에돔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잠시 벗어난 듯하나(왕상 11:14∼25), 여호사밧 때에 에돔에는 왕 대신 섭정 왕이 있었고,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고자했던 모습은 에돔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의 구리 광산

성경은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기 즉 주전 11세기 후반부터 에돔과의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에돔이 주전 8∼6세기께 존재했던 나라였고 이스라엘의 속국이기보다는 독립국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시행된 캘리포니아 대학과 요르단 유물청의 ‘키르벳 엔-나하스’에서의 발굴은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키르벳 엔-나하스는 사해 남쪽에 위치한 유적지로 공중에서 찍은 사진에도 확연히 보이는 것처럼 사각형 모양의 요새화된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대부분이 주전 10∼9세기께 유물로 측정되고 있으며, 주전 11세기경 이집트 인장들도 발견된 바 있다. 유적지 공중사진에서도 검은 흔적들이 목격되는데, 이는 구리를 녹일 때 생기는 물질들이 굳어서 발견되는 구리 용재(鎔滓)의 흔적들로 이곳이 구리 광산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이스라엘의 주전 10∼9세기 유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벳 엔-나하스는 솔로몬의 이스라엘 경계에 세운 요새들 선상에는 속해 있지 않은 즉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유적지가 아니다.

결국 유적지를 발굴한 토머스 레비(Thomas Levy) 교수는 이 유적지는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에돔을 정복하고 세운 구리 광산을 위한 요새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이곳을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 네게브지역에 있는 팀나 유적지를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불러왔다.

에돔의 키르벳 엔-나하스

그러나 사실 이 유적지는 이집트의 구리 광산으로 주전 1400∼1250년께 활발한 활동이 있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오히려 미미한 흔적이 있을 뿐이며 구리광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요새화되어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성경에는 솔로몬이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요새화했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역대상 22장 3절에 예루살렘의 다윗 성을 짓기 위해 철과 놋이 준비되었던 것을 보아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5만∼6만t의 구리 보유량을 가진 1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이 발견된 키르벳 엔-나하스가 아마도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에돔의 도시, 페트라

에돔 땅은 나무가 없고 붉은 바위로 이뤄진 산악지역이며, 농업과 목축업에 부적합한 광야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성경시대 에돔 사람들의 경제는 사해에서 추출해 내는 소금과 바위에서 얻어낸 향신료 수출에 의존했다. 이렇듯 열악한 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에돔 땅에 욕심을 냈던 것은 언급했던 구리광산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로(king’s way) 때문이었다. 더불어 지중해변에 적당한 항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유다가 에돔 땅의 바닷가 ‘에시온게벨’과 ‘엘롯(대하 8:17; 왕상 9:26)’을 항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윗이 차지했던 에돔 땅 덕분에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을 통해 오빌의 금을 들여올 수 있었다. 솔로몬 시대 이후 부국강병의 시대를 누렸던 유다의 임금 여호사밧 역시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어 오빌로 보내고자 하였다(왕상 22:48-50)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 22:48, 49)

결국 에돔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모압과 전쟁을 치를 때 그들의 동맹이 될 수밖에 없었다(왕하3장). 그러나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때에 에돔은 유다를 배반했고 섭정 왕이 아닌 자신들의 왕을 세웠다(왕하 8:20) 물론 여호람의 반격도 있었지만 에돔은 더 이상 유다의 속국이 아니었다(왕하 8:22). 후에 유다 왕 ‘아마샤’는 다시 한번 에돔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에돔 사람 1만 명을 죽이고 에돔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4:7; 대하 25장).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이와 같이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왕하 8:20-22)

에돔의 여신 '코스'

앞에서 언급한 전쟁 과정 속에서 유다 왕 ‘아마샤’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고 이 범죄는 그를 망하게 만들었다. 아마샤는 에돔에서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지고 돌아왔고, 자신의 신으로 세우고 백성들에게 경배하며 분향하도록 하였다(대하 25:14) 성경은 이 에돔의 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신의 이름을 ‘코스(Qaws / Qos)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에 관한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에돔 역시 성경 외의 다른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에돔의 신화나 종교적 자료 역시 밝히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단지 앗수르의 왕들이 에돔을 파괴하고 조공을 받는 기록에 의하면 디글랏 빌레셀(주전 745-727)과 산헤립(주전 705-681) 시대에 에돔 왕의 이름은 ’코스 신은 임금)’ 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주전 680-669년)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다.

또한 에돔의 요새가 있었던 호르밧 키트밋(Horvat Qitmit)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 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가나안 지역에서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들이 섬기는 주요 신의 이름을 넣어 짓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들에 들어가는 ‘코스’가 어떤 신이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에돔 땅에서 신약 시대 전후에 거주했던 나바테안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섬겼던 ‘두슈라(Dushura)’라 불리는 신이 산을 다스리는 신이었던 것으로 보아 ‘코스’도 유사한 역할의 신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코스 신과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는 없지만 에돔의 요새가 발견된 호르밧 키트밋 유적지에서는 뿔 단린 진흙으로 만든 여인의 두상이 발견되어 여신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이 여신상의 모습은 가나안 땅에서 발견된 어떤 신상과도 다름 모습을 하고 있다. 두상의 양쪽에 뿔이 달렸고 다시 이마 한 가운데 뿔이 하나 더 달려 있다. 두상의 정수리에 돋아 있는 기둥은 마치 전쟁용 투구를 연상케 해 전쟁의 여신의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유적지에서 보다 남쪽에 위치한 ‘엔 하체바’ 유적지에서는 작은 성소구역이 발견되었는데, 제단과 함께 모두 750여개의 점토 형상들과 향을 피우는 제대 그리고 제사용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토기의 형태를 볼 때 에돔의 것들이었으며 특별히 제대 중 세 개는 받침대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호르밧 키트밋의 북쪽에 위치한 호르바 우자에도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다의 요새가 발견되었다.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앗수르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오히려 영토는 확장되었고 유다를 위협할 만큼 강력해 졌다. 호르밧 우자에서는 주전 7-6세기경 기록된 37개의 히브리어 오스트라콘들과 판독하기 힘든 에돔어로 기록된 오스트라콘 하나가 발견됐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 중 하나는 호르밧 우자보다 북쪽에 있는 아랏 요새로 보내지는 문헌으로 에돔이 쳐들어 오고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에돔의 위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돔 사람들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주전 586년 예루살렘을 파괴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유다 사람들을 학살했다. 선지자들은 에돔이 이 전쟁에 가담하였기에 저주가 있으리라 예언했다(시 137:7; 사 34:9; 겔 25:12-1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에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폐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진노와 분노를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25:12-14)

저주는 실현되었다. 바벨론의 나보니두스는 주전 553년 에돔을 멸망시켰다. 그 이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자 에돔 땅은 아라비아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됐고, 그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유다의 영역 안으로 이동하였다.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년)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주전 539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에돔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지역(진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곳은 한때 유다의 땅이었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버려져 있던 곳이었다. 에돔 사람들은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고 마레사와 벧술 같은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주전 332년경 알렉산더의 헬라 세력 이후 네게브 북쪽 지역에 정착한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을 경멸했고 그들과 혼인도 하지 않았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남긴 대표적인 유적지는 ‘마레사’가 있다.

마레사는 ‘갈렙’에게 주어진 성이었으며(수 15:44) 르호보암의 요새이기도 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 이스라엘의 46개 도시를 파괴했다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목록에 등장하기도 한다.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하면서 도시는 산산이 부서졌고 오랫동안 버려진 도시였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마레사에 정착하고 이두메아의 주요 도시가 되면서 도시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마레사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은퇴한 그리스 군사들의 주요 거주지가 되면서 헬라문명과 이두메아, 시돈 그리고 나바테아 같은 가나안 문명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적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마레사의 비들기 집

마레사의 고고학적 흔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이 살았던 동굴과 지하구조이다. 마레사의 많은 구조물들은 부드러운 바위를 깎아 만든 석회동굴들이다. 일반적인 가옥과 가축우리, 작업실(workplace) 그리고 비둘기 집(Columbarium Cave) 등 동굴을 뚫어 만든 이 구조물들은 때로는 지하에 길을 만들어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이 구조물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비둘기 집이다. 85개의 비둘기 집들이 발견된 바 있는데 지하 구조물 벽에 구멍을 뚫어 마련된 곳도 있으며 길이가 30m에 달하는 터널형 비둘기 집도 있다. 후자의 경우 벽에는 3000마리 이상의 비둘기들이 서식할 수 있는 1900개 벽감(niche)이 마련되어 있다. 이 비둘기 집에서 길러진 비둘기는 식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비둘기의 변은 연료로 사용되었다.

마레사 - 올리브 압축실

마레사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지하 구조물 중에는 올리브 압축실이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큰 방의 한쪽 면을 깎아 만든 올리브 압축기가 보인다. 방 안에는 올리브가 담긴 주머니를 압축하기 위한 거대한 돌추들이 널려 있다. 돌추들은 벽면 반원형 아래 길게 깎여 있는 틈 사이에 걸려 있던 긴 통나무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방 한쪽에 마치 삼손의 연자 맷돌을 연상케 하는 맷돌들이 있다. 이 맷돌에서 먼저 올리브를 으깬 후 으깨진 올리브들을 바구니에 담아 벽면에 있는 올리브 압축기로 기름을 짜내었을 것이다.

마레사 - 시도 사람의 무덤

마레사에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주전 3∼1세기 사이 이두메아 지역에 거주했던 시돈 사람들과 이두메아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중 무덤 내부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덤이 가장 유명한데 이는 시돈의 아폴로파네스 가족 무덤이었다. 무덤의 양면에는 시체를 눕힐 수 있는 벽감이 마련되어 있고 가장 안에는 침대처럼 생긴 벤치가 깎여져 있어 아마도 이 무덤을 사용했던 가족들의 가장 우두머리 조상이 안치되었을 것이다. 무덤 내부는 거대한 항아리(그리스의 암포라 형태)와 다양한 신화적 동물들의 벽화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까마귀들과 지하수의 입구를 지킨다는 세르베루스,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붉은 불새 등이 그려져 있다. 또 다른 무덤에는 플루트를 부는 남자와 하프를 켜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전 63년 이스라엘을 정복한 로마의 폼페이는 마레사와 에돔 지역을 유대와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마레사는 주전 40년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마레사에는 더 이상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 주후 2세기경 로마 도시 에루테로포리스(Eleutheropolis)가 마레사 근처 언덕에 건설되었다.

헤롯의 관할 영지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두메아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Ptoelemaic Dynasty)’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주전 202∼195년 사이 있었던 시리아 전쟁에서 ‘셀루시드 왕조(Seleucid Dynasty)’ 에게 통치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셀루시드 왕조의 이두메아 통치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셀루시드의 통치를 저지한 사람은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존 히르카누스’와 유대인들이었다(마카베오 1서 5:3). 마카베오서는 외경의 하나로 구약과 신약의 유대 중간사 중 망치라는 뜻을 유대 독립군 마카비가 어떻게 셀루시드 왕조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유대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는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주전 167∼164, 마카베오 1서 4:36∼61).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약 백년간(주전 164∼63년) 과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고, 유대교를 팽창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었던 이들은 유대 국가에 종속되었고, 모두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이두메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유대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두메아 사람들 중 누구보다 유명한 사람은 ‘헤롯’이다. 헤롯은 이두메아 아버지인 ‘안티파테르’와 나바테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사실 유대인들은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헤롯의 형제들과 그의 아들들 또한 이스라엘을 통치했지만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 땅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로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는 이두메아를 유대 통치지역으로 함께 보았고,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 되어갔다.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2만 명의 이두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싸웠다. 그들의 전쟁은 참혹한 파괴의 현장만을 남겼고 이 전쟁과 함께 이두메아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만 그들이 거주했던 장소를 이두메아라 부를 뿐이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의 땅을 차지했던 이들로 신약시대 유대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바테아의 수도인 페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랍계통 사람들로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이 즉 유프라테스 강부터 홍해까지 지역에 거주했다. 주전 586년 바빌론이 유다를 파괴하자 황폐한 유다 땅에 에돔 사람들이 목초를 찾아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남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올라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히려 에돔 사람들을 서쪽 유다 땅으로 몰아내고 자신들이 에돔 땅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주전 312년께 셀루시드 장군 ‘히에로니무스’의 나바테아와의 전쟁 기록 이후 헬라 문헌들에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나바테아 사람들이 남긴 그들만의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단지 사해 주변을 비롯한 요르단 남쪽의 주요 거주지 내에 남겨져 있는 벽화들과 비문들이 있을 뿐이다. 비문에 따르면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람어에서 발전된 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 12세기부터 오랫동안 근동의 언어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는 주전 330년경 헬라 문명의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사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헬라어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나바테아 알파벳은 아람어에서 발전한 것이었고, 주후 4세기경 이 지역에서 사용된 아랍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동전과 비문은 주로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도 아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후대에 아랍 사람들은 아람 사람을 ‘나바테아 사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나바테아의 언어와 문화가 아람에 기초하고 있지만 에돔이 차지하고 있었던 항구 엘롯과 아카바만을 지나는 무역상들 때문에 이 지역은 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는 사해에서 나오는 역청을 판매했고, 항구를 통해 들여오는 향료들을 동쪽 지역과 거래했다. 또한 사막의 기후이기는 하지만 관개시설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고 이를 통한 수입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나바테아 사람들의 관개시설은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현재 나바테아 사람들의 거주지는 매우 건조하여 거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으로 이 조건은 과거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에 비는 우기에 겨우 1∼2번 크게 내릴 뿐 자주 내리지도 않고 물이 고이지도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물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독특한 기술을 개발해냈다. 우선 땅을 깔때기 모양으로 파 들어간 후 가운데에 과일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 나무 주변 지역의 흙을 무너뜨려 부드럽게 만들어 물이 잘 스며들게 했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빗물은 깔때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들어가 나무 아래 고이게 되고 이 물을 덮어 물이 고여 있도록 하였다. 고대부터 역사학자들은 이 시설을 ‘사막의 오아시스’라 불렀다. 이러한 발전된 기술을 가진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바테아 사람들은 바다에서는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한때 해적으로 불린 적도 있다.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

유대 하스모니아 왕조가 셀루시드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바테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동맹 관계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아 왕조의 알렉산더 야네우스는 이두메아인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나바테아 사람들 역시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하스모니아 왕조와 나바테아 사이는 나빠졌고, 주전 90년 나바테아 왕 오보다스 I세는 알렉산더 야네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주전 62년 로마의 침략에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 당시 무적이었던 로마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버텼던 장소가 페트라이다.

주전 32년 유다 왕 헤롯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손을 잡고 나바테아 왕 말리쿠스 Ⅱ세를 공격했다. 헤롯의 군사와 병거는 몇 번의 접전 끝에 나바테아를 함락할 수 있었다. 주후 1세기 로마시대에 아라비아와 홍해를 잇는 무역으로 인해 나바테아는 국제 무역시장으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며 주후 4세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페트라는 주전 312년경부터 나바테아의 수도로 대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사해에서부터 시작돼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인 와디 아라바의 동쪽 호르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계곡 덕분에 주변이 온통 높게 탑처럼 솟은 바위산들로 둘려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는 자연적 요새를 갖춘 곳이다. 로마가 왜 이곳을 함락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는지 이해할 수 있다.

페트라 유적지에서는 이미 주전 16∼13세기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학자들 중에는 페트라가 에돔 땅 중 ‘셀라(왕하 14:7)’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셀라의 뜻은 단순히 ‘바위’일 뿐 같은 장소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페트라는 바위 계곡 틈새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바위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었던 도시다. 이 계곡의 이름은 ‘와디 무사’ 즉, 와디 모세라 불리는데 아랍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바위에 지팡이를 꽂아 물이 나오게 한 장소가 페트라이다. 또한 이곳은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있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페트라에서 발견된 로마식 건축 구조물, 무덤

페트라에서 발견되는 로마 극장 등 도시의 모습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장관을 이룬 것은 무덤 군이다. 페트라의 무덤은 바위산의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무덤 입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주전 6세기께 사용된 초기 무덤은 단순한 기둥들이 있는 형태로 아취 형태의 입구가 연결되어 집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이 무덤의 형태는 점차 화려한 양식을 더하게 되는데 이집트의 장식들과 그리스의 기둥들이 혼합되어 웅장한 입구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무덤은 주전 2세기께 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에는 로마 신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로 발전했다.

현재 페트라의 무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Ⅲ편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던 성배를 찾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지명 및 국가

에서의 후손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옵 1:1~16, 신 23:7)





내게 가시 같은 존재조차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신명기 23:7)

‘오바댜’서는 구약에서 가장 적은 분량의 책이며, 신약에도 인용이 거의 없는 성경책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뚜렷이 계시되어 있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들이 어떻게 멸망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 잘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지자 오바댜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을 밝힐 때는 히브리인의 관례에 따라, “…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지만, 오바댜서에는 단순히 “오바댜의 묵시라”고 소개합니다.
선지자 오바댜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흔하게 보이는 이름입니다.(대상 3:21, 7:3, 8:38, 9:16, 44, 12:9, 27:19, 대하 17:7, 34:12, 스 8:9, 느 10:5 등)

오바댜 시대도 확실하게 특정할 수 없습니다.
오바댜 1장 10~14절에 보면, 에돔의 죄를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을 때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은 것이 이때 뿐은 아닙니다.
르호보암 때 애굽 시삭의 침략, 여호람 때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의 침입,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때 바벨론의 공격 등이 있었습니다.

오바댜서의 내용은 에돔에 대한 심판(1:1~14)과 이스라엘의 구원(1:15~21)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형제인 야곱의 후손, 유다의 환란 때 행한 에돔의 포학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에 에돔을 비롯한 만국은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받을 것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에돔’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혹은 유다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대상자로, 신약교회의 모체입니다.

오바댜서는 교회의 승리를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며, ‘시온산’은 교회, 혹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유다에게 에돔처럼 눈에 거슬리는 사람, 부담되는 존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 중에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부담스런 상대가 존재합니다.
대한민국에게 일본은 부담스러운 나라입니다.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왜곡합니다.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을 견제하며 우리의 미래를 방해합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는 야욕을 보입니다.
첨단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군사력은 이미 대한민국 국군을 능가합니다.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괴롭게 하는 우리 주변의 가시 같은 존재들을 어떻게 대할 지, 신명기 23장 7절 말씀을 제목으로 삼아 오바댜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오바댜서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봅니다.
오바댜서를 성경의 ‘예루살렘이 침략당한 것’을 기록한 내용 중 유다의 여호람 왕이 통치할 때 유다에 반역하고 배반한 에돔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침략함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보면, 오바댜서의 연대는 B.C. 849~842년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8장 20~24절에 보면, 여호람 왕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20절을 보면,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여호람 때 유다가 에돔과 전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유다 왕 여호람이 에돔에 패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람에 대해 기록한 역대하 21장 16~17절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유다를 배반한 에돔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침략하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약탈한 전리품을 에돔과 연합군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오바댜 1장 10~14절에서 에돔 사람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를 기록했는데, 에돔은 동맹군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사람과 재산을 늑탈했으며, 유다 민족의 고통을 위로는커녕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주전 605년, 597년,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당해 약탈당할 때, 에돔은 바벨론을 도와서 바벨론의 침략과 약탈에 동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 도망자들이 있었는데, 그 도망자들을 붙잡아 바벨론에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에돔 족속과 유다 족속의 관계를 보면, 에돔 족속이 유다 족속에게 행한 일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입니다.
비록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일이 있었지만, 에서와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이미 화해했습니다.
이렇게 에돔과 유다가 한 핏줄, 형제관계의 족속인데도 에돔은 형제를 버리고, 침략자와 한 패가 되어 형제간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다 민족 곁에 왜 가시와 같은 에돔 민족을 두셔서 선민이 이토록 어려움을 겪게 하십니까?”라며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으로 하여금 유다 족속을 괴롭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이 하나님만 섬기는 민족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유다 곁에 에돔을 두셨습니다.
에돔 족속은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선민답게 세우기 위해 준비하신 회초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했을 때마다, 바른 길로 돌이키도록 드셨던 채찍이 에돔이었습니다.

이런 가시와 같은 에돔을 곁에 둔 상황에서 유다 족속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 능력을 힘입어 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 내게 부담되는 사람, 보기만 해도 괴롭고 가시와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사람들을 내 주변에 있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살펴볼 때, 아직도 변화되어야 할 성품과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때로는 나를 변화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괴롭게 하는 가시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던 교만을 꺾게 합니다. 가시 때문에 잘못된 성격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시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 때로 내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도 받아들이는 것은 참 힘듭니다.
에돔처럼 내게 가시 같은 존재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허락하신 가시와 같은 존재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으로 감싸 안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사람이나 세상의 방법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방법대로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느끼며 누리는 것입니다.

유다 족속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었는데, 에돔 족속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면에서 에돔 족속은 유다 족속보다 유력했습니다.
에돔 족속은 해상 무역에서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구리 광석 등 풍부한 천연자원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에돔의 동쪽과 서쪽은 높고, 북쪽은 절벽으로 차단되어 있어서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했습니다.
또한 에돔 사람들은 뛰어난 지혜와 학문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빈틈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에돔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 6~9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에돔은 다른 이방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유다 족속을 공격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동맹들에 의해 에돔은 배신을 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멸망하였습니다.
멸망하지 않을 것 같은 에돔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회복되지 못할 유다 족속이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멸망당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도 멸망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회복되지 못할 것 같은 나라도 회복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됩니다.
에돔이 아무리 완벽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니까 망했습니다.
교만하던 에돔이 망했습니다.
가시 같은 에돔이 망했습니다.

가시 같은 존재들 때문에 마음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아니 인생을 살다보면 주위에 가시 같은 존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시 같은 존재일지라도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시 같은 존재를 두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변화되어야 할 기질과 교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시 같은 존재는 미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감사할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37장 28절에 보면, 가시 같은 존재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고 합니다.
괴롭히는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며 기도해 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간섭(干涉) : 방패 간, 건널 섭
-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영향(影響)을 주려고 하는 것. 참견(參見).

유기(遺棄) : 남길 유, 버릴 기
- 내버리고 돌보지 않음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라(로마서 1:28-32)


죄의 목록을 열거한 후 사도 바울은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하나님이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남까지 죄를 짓게 만든다.”고 했다(32절).
왜 사도 바울은 죄의 목록을 열거했는가?
사람은 원래부터 죄인이고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서 열거된 21개의 죄를 거의 다 지을 것이다.
결국 그 죄들은 사람에게 복음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소리 없이 웅변한다. 

그 모든 죄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내어버려 두셨기 때문이다.
잘못된 길로 갈 때 실패하고 매를 맞고 병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잘못된 길로 가도 아무 일이 없다면 오히려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심으로 성공하고 형통한 것보다 하나님이 간섭하심으로 실패하고 시험 당하는 것이 오히려 복이다.

가끔 보면 너무 책임감이 없고 잘못을 계속 저질러서 친구까지 포기한 사람이 있다.
불행한 사람이다.
목사까지 포기한 사람을 블랙유머로 ‘목포댁’이라고 한다.
더 불행한 사람이다.
가끔 보면 부모마저 포기한 사람이 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포기하면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
만약 하나님까지 포기한다면 오직 절망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다.

본문에 열거된 21가지 죄는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생기는 죄들이다. 결국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어떤 죄를 안 지으려는 노력보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는 노력이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해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이 목표로 한 어떤 한 가지 죄는 안 지을 수 있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죄를 짓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죄 구멍을 막으면 다른 죄 구멍이 터지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죄를 한꺼번에 막는 길을 찾아 그 길로 가는 것이다. 어떤 길이 죄를 한꺼번에 막는 길인가?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길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포기가 없으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포기하고 목사가 포기하고 부모가 포기해도 하나님만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나 구원의 길은 있고 넘치는 희망도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가? 복음의 정표를 내미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주신 최상의 정표다. 그 복음의 정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은 죄 공장들로서 가만히 두면 망하고 죽는 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복음 안에는 언제나 사는 길이 있다.




간섭(간섭)과 유기(遺棄) 그리고 사랑과 미움(로마서 1:24-32)

- 방패 간, 건널 섭
- 남길 유, 버릴 기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 하셨는가 하면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곧 피조물을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은 곧 피조물과 창조주를 연결해 주고 있는 생명줄이기도 합니다.
이러면 피조물은 하나님 말씀과 떨어지면 죽음이 됩니다.
생명줄로부터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떠난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피조물 입장에선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고 “최악의 저주”는 하나님 말씀과 끊어진 것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과 끊어져 있다 함은 독자적(獨自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죄(罪)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 로부터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 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 외에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피조물인 만물은 “그 말씀” 이신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을 때만 산 자가 됩니다.
이렇게 말씀이신 예수님과 연결이 된 상태를 의(義)라고 합니다.

의(義)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義)를 순종”이라고 하고, “불의(不義) 곧 죄를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이라 함은 하나님 말씀에 매여 있다는 뜻이며, 불순종이라 함은 말씀과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아말렉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을 하자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한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서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라고 자증(自證)을 하고 만 것입니다.

왜? 불순종을 합니까?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이 죄”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에 토를 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피조물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불순종을 불러 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자기 생각으로 아말렉을 다 진멸치 않고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 하나님이 기뻐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은 가상하지만 이 가상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말렉을 마귀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을 하실 때 내가 광야 길에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추억하노니 라고 언급을 하셨던 것입니다.
저 놈들은 내 백성을 괴롭힌 저주 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인정사정을 보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육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놈들은 살려두고 잔챙이들만 죽였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떠난 저주 받은 자들의 안목입니다.
이걸 악(惡)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서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가인이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아벨에게 쏟아 부은 것입니다.
가인은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제사를 거부한 하나님의 처사를 용납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정성껏 제사를 지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의 정성을 보아서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한 것은 가인의 제사에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 신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정성에 문제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성으로 판단치 않고 “어떤 제물이냐”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지목한 제물이냐”를 보십니다.
이를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십니다.
이걸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우린 그 제물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보다 제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제사보다 앎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만 앞세우고 나가면 그 제물을 보시고 흠향하십니다.
제물을 드린 사람을 보고 흠향하는 것이 아니고 제물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한 대로 내가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이레의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받으시는 제물이 따로 있습니다.
“그 제물의 제사”를 원하십니다.
그 제물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속에서 양으로 나타납니다.
양은 장차 오신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를 두고 아벨은 믿음으로 더 좋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으로 제사를 지낸 아벨의 제사를 흠향하신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피가 있습니다.
그 피가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를 예표 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에는 피가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에는 인간의 정성만 있었지 의인의 희생으로 죄인이 구속을 받는 대속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이걸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고 화를 발한 것입니다.
가인의 생각은 자신의 제사를 거부하고 아벨의 제사를 받아준 하나님의 결정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생각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하나님이 제사를 받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굴복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가인이나 사울은 자기 생각 때문에 하나님 생각을 거부하는 불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울이나 가인의 모습을 일컬어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불순종을 한 것이지 불순종을 하였기 때문에 악(惡)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세요.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불순종의 영”이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것도 사단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두고 자기 길로 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는 항상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죄는 항상 자신을 낳아 준 부모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의 부모는 하나님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부모란?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입니다.
부모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같은 동일한 중수의 죄로 물어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론적으로도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다 죄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이 부모에요.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하니까 가장 존경하고 감사하고 두려워하여야 할 분이 부모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 모든 자식들은 부모를 가장 우습게 여겨요.
만만하게 보고 말을 안 들어요.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가장 어리석음이 생명을 주신 분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뱀(살모사) 새끼들이라서 죄가 그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죄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안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곧 하나님 앞에서 아이들처럼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곧 참 부모이신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 자식과 같아요.
죄인은 자기를 낳아준 하나님을 죽인 패륜아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것으로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꼭 너희 자식들처럼 내 말을 안 듣는 자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단절이 된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단절(斷絶)이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님으로부터 단절이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보게 되면 피조물은 늘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그대로 되었다는 것은 곧 피조물이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순종의 끝엔 생명이 있고, 불순종의 끝엔 죽음이 있습니다.
생명(生命)이란? 어원적으로 보면 “살으라는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살어! 그러면 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생명의 능력(能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의 기운(氣運)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말씀이 의도하는 대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나무에게 꽃을 피워! 그러면 나무는 꽃을 피워내고!
바람아 불어! 그러면 바람이 불어요.
신앙적으로 말하면 너 예수 믿어! 그러면 예수가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걸 그대로 보여주셨어요.
제자들이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에 물이 들어와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잠에서 깬 예수님이 바람을 보고 꾸짖습니다.
바람아! 이제 그만 잠잠해라!
그러자 순식간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 집니다.
바람이 예수님 말씀에 잔잔해 진다는 것은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고 즉시로 잠잠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는다는 것은 바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고 즉시로 조용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이나 병도 말씀으로 고칩니다.
귀신도 예수님 말씀에 즉시로 나가고!
병도 예수님 말씀에 즉시로 고쳐집니다.
이는 귀신이나 병도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귀신이나 병도 만물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만물 안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그대로 순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주 만물이 수천 년 동안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해가 바뀌고 계절이 돌고 돌아도 어김없이 그 자리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또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어김없이 철을 따라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피고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달래” 보고 너~ “봄”에 꽃을 피워! 그러니 “진달래”는 봄이 되면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국화”에게 너~ “가을”에 꽃을 피워! 그러니 “국화”는 어김없이 가을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백”을 보고 야! 너는 “겨울”에 꽃을 피워! 그러니 “동백”은 그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새에게 살라고 하니 참새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 너 살어! 그러니 제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생명이고 창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말씀대로 되시니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무엇이 보시기에 봏은 것이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뭐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깨어졌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었어요.
죄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게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피조물이 하나님과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러자 생명의 공급이 끊겨버렸습니다.
그럼 피조물은 자기 안에 있는 수한(壽限)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수한(壽限)이 다 하였다는 것은 정한 기간 동안만 살다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10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7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3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1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 수한(壽限)이 다하면 죽습니다.
마치 핸드폰 밧데리가 정한 시간이 되면 방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밧데리는 충전을 하여야 살아 있어요.
밧데리에게는 충전기가 곧 생명의 끈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삽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 자기 수한(壽限)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산 영(靈)”이라고 합니다.
산 영(靈)은 밧데리처럼 자기 수한(壽限) 만큼만 살아요.
계속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충전(充電) 받지 않으면 죽어요.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靈)”으로 오셨습니다.
살려주는 영(靈)이란? 글자 그대로 살려주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주세요.
마치 방전된 밧데리에 전기를 공급하여서 충전으로 살려내듯이 예수님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살려내고 생명을 계속하여 공급을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생명의 말씀에서 떨어진 것을 다시 생명의 말씀에 붙잡아 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순종이란? 완전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붙좇게 되는 경향성(傾向性)을 말합니다.
이는 성령이 그 안에서 “순종하는 영(靈)”으로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버려주셨다는 것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니들 맘대로 살으라”는 말입니다.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살아가는 피조물이 생명줄에서 끊어져서 홀로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저주(詛呪)가 뭐냐?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유기(遺棄)시켜 버린 것입니다.
왜?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당함이 그렇게 큰 저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니까”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왜?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무당을 찾고 귀신을 섬기느냐 하면 하나님이 방치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죽을 짓을 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니까” 이성(理性)을 사랑하여 생명을 낳는 사랑을 하지 않고 생명도 낳지 못하는 동성(同姓)을 사랑하는 역리(逆理) 현상이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이건 단순하게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떠나 생명과 상관없는 일을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으면 생명을 낳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하나님과 떨어지면 생명을 낳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되어요.
하나님은 이성을 통하여서 생명을 낳게 하셨습니다.
동성(同性)이란? 같은 종이란 말입니다.
이성(理性)이란? 다른 종이란 말입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났습니다.
흙이 흙을 사랑하는 것은 동성(同性)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흙에게 있어 이성(理性)이란? 하늘입니다.
하늘에 것을 사랑하여야 생명이 잉태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후 흙에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이 세상에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마귀가 준 것입니다.
세상엔 생명이 없습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면 생명이 잉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할 자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어요.
흙이 흙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게 영적 동성애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낳지 못하는 동성애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죄는 생명을 낳지 못하는 사랑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을 흙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시니까” 이웃을 헤치는 살인과 미움과 강포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죄는 항상 생명을 죽이고 파멸케 하는 것으로 역사를 합니다.
이는 죄가 생명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반(反)하는 모습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한 각각의 말씀 속에서 특히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께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버려두셨다”는 말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즉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죄는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니 죄인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죽음이 넘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셨다 함은 죽게 내 버려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냥 그렇게 흙에서 나서 흙을 퍼 먹고 살다가 죽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냥 죄 아래서 태어나서 죄의 종노릇하다가 그 죄값으로 죽습니다.
이걸 신약의 유다에서는 흑암으로 돌아가는 유리하는 별이라고 했어요.
죄인은 끈 떨어진 연처럼 죄 아래서 출생하여서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자기 맘대로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은 죄에 대한 보응으로 그럼 “니 맘대로 살라”고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포기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니들 맘대로 살으라는 말은 죄인 입장에선 야~ 이제부터 자유다! 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건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간섭을 당하는 자와 간섭을 당하지 않는 자의 결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니 내용이 동화와 다르더라도 의미만 참고하세요.
헤클베리 핀은 자유 합니다.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 합니다.
반면에 톰 소여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사건건 간섭을 받습니다.
톰 소여는 간섭하는 사람이 있고 헤클베리 핀은 간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섭 당하는 톰 소여의 눈에는 헤클베리 핀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나도 내 맘대로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경도 잠시입니다.
장성하고 난 후 두 사람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달라집니다.
허클베리 핀은 망나니로 살고 톰 소여는 예의범절을 갖춘 자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신자와 불신자의 이야기로 적용해 봅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사건건 간섭 당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신자는 간섭 당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상이라는 삶에서는 불신자들이 훨씬 편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지옥입니다.
신자는 지독하게 간섭 당합니다.
간섭 당할 때마다 아픕니다.
그러나 그 끝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은 자일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지독하게 간섭을 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얼마나 간섭을 당하였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욕을 먹고, 얻어맞고, 헐 벗고, 굶주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간섭 당할수록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곤핍해지고 아픕니다.

반면에 간섭 당하지 않으면 편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간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허클베리 핀처럼 자기 맘대로 살아가겠지요.
죄인이 자기 맘대로 하면 어찌 될까요?그야 당연히 죄 짓다가 죽겠지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죄인은 죽을 짓만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이니 죽을 짓만 하다가 영원한 죽음인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 버려주셨다는 것은 저주가 됩니다.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복(福)이란?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죄인을 하나님이 마음을 간섭하지 않으면 죄인들 맘대로 살게 됩니다.
죄인 맘대로 살면 죽을 짓만 골라서 하게 됩니다.
저주란? 내가 내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본능(本能)이 이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죄인이 본능대로 살면 파멸이에요.
죄인이 자기 맘대로 살아가면 어떤 식으로서 살게 될까요?
나만 살고 남을 다 죽이게 되어요.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고 남도 있어요.
내가 있고 부모형제도 있어요.
자식도 나 보다 앞설 순 없어요.
아내나 남편도 나 보다 앞 설 순 없어요.
그 누구라도 날 힘들게 하면 싫어요.

내가 신(神)이에요.
내가 곧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나는 나 이외 다른 신(神)이 없어요.
하나님도 나 보단 우선하지 못해요.
내가 있고 하나님도 있어요.
이게 죄인이에요.
죄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얼마든지 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살아가는 세상에선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살인으로 나타나고, 도적질로 나타나고, 사기로 나타나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으로 이를 말해주셨어요.
십계명(十誡命)은 죄의 근원을 말해주고 있어요.
죄의 모습이 십계명에서 이웃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나,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사기나, 간음이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기 유익을 위하여 남을 헤치는 것들입니다.

십계명(十誡命)은 인간의 어그러진 면(面)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가 십계명(十誡命)이 말하는 악함 들을 생산해 내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근본(根本)은 자기 유익을 챙기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진 죄인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요.

자기중심으로 살게 되면 세상에 모든 것들이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럼 모든 피조물이 전부 자기 유익으로 산다고 하면 어찌 될까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형국이 되겠지요.

인간들 세계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살아가고 있어요.
내게 유익이 된다고 하면 남이야 죽든 말든 개의치 않습니다.
서로가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을 헤친다고 하면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됩니다.

이게 죄인들의 삶에 모습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유기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된 것이 어째서 그렇게 큰 저주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제부터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遺棄) 당함이 왜? 무서운지 중요한 말을 하니 깊이 생각을 하시면서 들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묵시 속에 있는 천국의 모형(模型)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낙원이라고 합니다.
낙원(樂園)이란? 즐겁고 기쁜 동산이란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평화” 라고 합니다.
평화(平和)란? 구분이 없고 하나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차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차별이나 차등이 없으니 만족함이 되는 것입니다.
만족할 때 마음에 쉼을 얻고 안식이 되어요.
그러므로 천국을 일컬어 안식(安息)하는 세계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언제 안식을 합니까?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지요.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내시고 쉬신 날입니다.
더 이상 일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창조 사건으로 보면 창조를 마치고 일곱째 날 안식하는 날입니다.
안식이란? 더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할 일이 남아 있으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안식이 되려면 미완료(未完了)가 되면 안 되어요.
완료(完了) 상태가 되어야 다 이루심의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완료(完了)란? 변화나 자람이 필요치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온전한 자로서의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더 장성 할 것이 없는 자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온전한 자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고 영생으로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미완료에요.
영생이라는 더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로 창조가 된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어른으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자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정도로서의 어른이라는 입장에서 온전하다고 하는 말이니 참고하세요.
아담은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천국에서의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장성한 자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장성하였다 함은 더 이상의 자람이 필요치 않는 생명의 완전(完全)함 또는 완성(完成)된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담은 구원받은 천국백성의 모형인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곳입니다.
“완전(完全)의 세계이고!”
“완성(完成)의 세계이고”
“완료(完了)의 세계!” 입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이니 천국은 완전하고 완성되고 완료되어서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아담과 하와처럼 더 자람이 필요가 없는 온전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자람이나 변화됨이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아이를 낳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어떤 사람들이 계대결혼 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잖아요.
어떤 집에 형이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율법에 의하면 동생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하는데 그 동생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어버렸어요.
이러한 식으로 일곱 형제가 계대혼인 법에 의하여 형수와 관계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럼 천국에 가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아주 난감한 질문을 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 세상 관점에서의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천국에서의 모습으로 대답을 합니다.
천국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누구의 아내라는 것이 없지요.
오로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존재하는 겁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으니 아이를 낳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곳이 아니에요.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자람이 필요치 않다는 뜻입니다.

자람이란? 미완료(未完了)입니다.
미완료(未完了)가 되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미완료가 되면 완료를 위하여 나아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어요.
그럼 안식이 되지 않잖아요.
만약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면 자라가야 하는 미완료의 상태가 되어요.
그럼 에덴동산은 안식의 세계가 될 수가 없어요.
에덴동산에서 미완료로서의 상태가 되면 안 되잖아요.
갓난아이는 성장을 전제로 하는 미완료 상태에요.
키워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 키울 때까지 안식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완전(完全)”하고, “완성(完成)”이 된 “완료(完了)”의 세계인 것입니다.
“완(完)” 자가 들어가는 것은 더 이상 변화나 자람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모두가 어린 양의 신부로서 충만한 자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천국에서의 삶은 창조 사건으로 보면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미숙아(未熟兒)로 낳지 않고 아담을 창조하듯이 장성한 아이로 낳으면 자람이 필요치 않겠지요.아이의 출생을 성도의 구원으로 이해하여 봅시다. 

예를 들어서 성도가 거듭나자 말자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하는 즉시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역사 속에 둘 필요가 없어요.
더 가르치고 배울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역사라는 고난 속에 던져둡니까?
얼른 데리고 가야지요.
하지만 역사 속에 남겨 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자라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자람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온 세계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어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영광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알아가기를 기도했어요.
그러니 성도는 이 역사라는 곳에서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미하여야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천국에서 세세토록 찬미 할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생애를 마치고 공생애를 시작하잖아요.
사생애란? 나를 위하여 살던 때를 말하고!
공생애란?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30세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것은 역사 속에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이 장성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제 장성한 자로서 아버지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되었단 말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것은 장성하였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에선 30세가 되면 장성한 자로 간주해요.
그래서 회막에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어요.
30세란? 완전한 자를 상징해요.
요셉이 30세 때 총리가 되어서 나라의 일을 맡아서 하게 됩니다.
또한 다윗도 30세에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예수님도 30세가 되어서 제사장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 창조 된 아담처럼 자람이 필요치 않는 장성한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 아이를 낳아도 30살짜리를 낳아야 합니다.
미숙아(未熟兒)를 낳으면 안 되어요.
30살짜리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키우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낳아 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살아 갈 테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낳아지는 모든 생명은 장성한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없어요.
전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부모님이 보살핌이 필요한 자로 태어납니다.
미숙아(未熟兒)는 부모의 보살핌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미숙아(未熟兒)란? “아닐 미(未)”에, “익을 숙(熟)”에, “아이 아(兒)” 자를 써요.
어원적으로 말하면 “아직 익지 않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덜 익은 인간”이란 말입니다.
“사람이지만 아직 온전하게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는 자”란 뜻입니다.
온전한 자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질수 있는 자란 말입니다.
미숙아(未熟兒)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 질수가 없어요.

과실로 말하면 땡감처럼 텁텁하단 말입니다.
홍시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하려면 변화와 자람이 있어야 합니다.
미숙아(未熟兒)는 아직 홍시처럼 익어야 함이 남아 있는 미완료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 세상은 완전(完全)하고 완성(完成)되고 완료(完了)된 세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모의 보호함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낳아지는 모든 생명은 미완료(未完了)로서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완료(完了)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존재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생명줄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은 저주인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이를 낳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어째서 에덴동산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이를 낳았을까요?

이는 에덴동산 바깥은 역사로서 미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절대로 필요한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미완료인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였다는 것은 곧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죄인을 버려두셨다고 하는 말씀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겠지요.
간섭하지 않고 버려두셨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간섭하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 알겠습니까? 

성경은 “완료의 세계를 묵시”라고 하고, “미완료의 세계를 역사”라고 해요.
에덴동산은 묵시(黙示)이고, 에덴동산 밖은 역사(歷史)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완료(完了)”의 세계이고, “에덴동산 밖은 미완료(未完了)”인 세계인 것입니다.
미완료(未完了)란? 아직 다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완료를 향하여서 뭔가 변화하고 장성하여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부모의 간섭이 필요해요.
마치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과 같이 아직 장성하도록 이르러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에서는 계속하여 장성한 것으로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안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자람이 있으면 안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람이란? 미완료(未完了)이고! 미완성(未完成)이고! 미완전(未完全)입니다.

안식(安息)이 되려면 “미(未)” 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未)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뭔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안식을 하려면 미(未) 라는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부족함이 있으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야 안식이 됩니다.
천국(天國)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의 상태로서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어진 상태가 천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덴동산에서는 자람이 필요치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는 자람이 필요한 아이의 출생이 없는 것입니다.
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혼인(婚姻)을 하였어도 아이를 낳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천국에 모습을 보아도 어린양과 혼인하는 것은 있어도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하는 것은 역사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는 묵시의 반대입니다.
묵시가 완료(完了)라고 한다면, 역사는 미완료(未完了)입니다.
묵시가 쉼이라고 하면, 역사는 수고로움입니다.
“묵시는 부족함이 없는 완(完)이고!”
“역사는 아직 이르러야 하고 모자라는 미(未)”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묵시와 다른 세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묵시는 일곱째 날로서 안식일이지만 역사는 수고하는 여섯째 날에 속하여 있습니다.
성경에 일곱째 날 이후에 다른 날이 없는 것은 모든 것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순환하는 주기(週期)를 일주일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게 하신 것도 모두가 창조의 사건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하루에서 엿새까지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해 놓은 것은 묵시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을 잠깐 살펴보고 갑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지요.
이는 엿새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은 묵시에 속한 날을 상징해요.
그래서 엿새 동안은 수고하는 날로 살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날로 삼은 것입니다.
이건 안식일을 통해서 장차 역사를 떠나 묵시인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가르치기 위함이에요.
엿새는 일곱째 날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을 겨냥하고 있어요.
모든 수고가 일곱째 날 안에서 완료가 되어요.
이게 창조 사건이 주는 교훈이에요.
우리가 일곱째 날인 주일날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과 다른 천국에서의 안식을 하는 모습으로서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가르치려고 엿새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안식을 한다고 하니 각자의 집에서 쉬게 한 것이 아니고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 간에 교제케 하였어요.
안식일에는 축제를 벌였어요.
이건 천국에서의 기쁘고 즐거운 삶에 모습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장차 가야 할 천국이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일곱째 날 안식일에 성회(聖會)로 모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에선 안식일 날 일을 해서도 안 되지만, 성회에 참석치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아도 돌로 쳐 죽였어요.
그건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에는 모두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함께 떡을 떼고 나누면서 축제를 벌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이 의미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일은 일곱째 날을 상징하는 묵시에 속한 날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라는 말은 이러한 일곱째 날의 의미 안에서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모인다면 그냥 엿새에 속한 날에 모임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요.
그건 주일로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일요일로 쉬는 것이에요.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듯이 주일을 기다려야 해요.
교회가 그리워져야 해요.
그래서 주일을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식으로서의 날이 아니고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의 날”이란 말이에요.

 

“주의 날”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로서 묵시에 속한 날이에요.

주의 날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과 달라요.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 월요일도 주의 날이고, 화요일도 주의 날이고, 수요일도 주의 날이고, 목요일도 주의 날이고, 금요일도 주의 날이고, 토요일도 주의 날이고, 일요일도 주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 받은 성도는 묵시에 속한 자로서 항상 주의 날로 사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역사와 묵시를 구분하는 의미에서 열심히 모이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일요일이라 생각지 말고 천국백성으로서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모이세요.

그럼 교회에서 성도들과의 모임이 곧 천국에서의 모임과 같은 의미가 되잖아요.

그러니 주일날 놀러 가지 말고 교회에 모이세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으로 주셨으니까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천국에 모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열심히 교회에 모여야지요.

성경에서 열심히 모이라고 하였지 교회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했지!

교회 안가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교회에 가면 곡식도 있고 가리지도 있어요.

흔히 복음 아는 성도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내가 구분하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로 섬기면 되어요.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따지지 말고 주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섬기세요.

 

어떤 분들은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라고 해요.

그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인간의 게으름을 복음으로 합리화시켜 주려고 공교하게 지은 말이에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자기 몸 편함으로 이용하는 것이에요.

이건 악한 것이에요.

 

설교를 듣는 것은 예배의 전부가 아니에요.

위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아래로는 형제간에 사귐이에요.

그래서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교회(敎會)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란? 모임을 말합니다.

 

예배란?
말씀을 듣는 것도 있지만 성도의 교제가 있어요.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이면 성전에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제사도 드리고 만남을 통하여서 교제하고 축제를 벌이라고 하셨어요.
이건 새 언약 안에서도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이 되어 있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날마다 교회로 모인 것도 다 이러한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완성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모이는 것보다 더 잘 모여야 하는 것이어야 해요.
옛 언약에선 이레 중에 하루가 안식일이었지만 새 언약에선 날마다 안식일이에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에요.
그러니 천국에 모형인 교회에 날마다 모여서 말씀도 듣고 교제도 하였던 것입니다.
옛 언약 안에서는 억지로 모였지만 새 언약 안에선 자발적으로 모여요.
구약은 법적으로 모였지만 신약엔 은혜로 모이는 것이에요.
그러니 모인다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름이 없어요.
장차 예수 안에서 모두가 모일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차압을 합니다.
그러니 주변에 교회가 버젓이 있는데도 이런 저런 핑계로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악한 것이에요.
여러분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그 속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 따지지 말고 복음을 받은 우리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란? 말 자체가 모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에요.
왜? 모임을 전제로 하는 교회라고 하는가 하면 교회는 이 땅에 천국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는 반드시 교회라는 모임을 갖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성도와 성도를 연결하여서 교회로 모이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경은 열심히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온 몸과 맘으로 믿는 거에요.
복음을 머릿속으로 알고 마음으로 믿어지면 이제는 손과 발로 움직여서 복음으로 사세요.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하지요.
마음으로 믿는 것은 “내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외적인 믿음”이에요. 이 둘은 하나에요.

마음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행함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고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부인한다고 하잖아요.

제자들이 누구 앞에서 예수를 시인합니까?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 시인했어요.
이건 내가 믿는 예수를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 있어요.

빛을 말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드러내 밝히란 말입니다.
나 예수 믿는다!
교회 가서 복음 모르는 분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나는 이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교회에 더 열심히 가야지요.
성경을 보세요.
성령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그러면서 집에서 놀았는가요.
아니잖아요.
날마다 모여서 주를 찬미하고 했잖아요.
직장 때문에 날마다 못 모이면 모두가 모이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반가운 얼굴들을 대하고 교제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그 영광을 찬미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날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였어요.
성령이 임하자 역사에 속한 자들이 묵시로 편입이 되었어요.
땅에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이 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역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 묵시에 속한 사람이에요.
묵시에 속하였으니 이 세상에 비록 살아도 묵시적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표시로 일곱째 날에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묵시에 속한 곳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만대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주의 날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묵시의 날이에요.
교회도 묵시의 세계에요.
성도도 묵시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묵시에 속한 자들이 묵시의 날에 묵시적인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묵시는 완료된 세계이므로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날마다가 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그럼 이 시대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이는 사회의 구조가 일요일에는 쉬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선 매일 모여서 천국 생활을 맛보면 좋겠지만 먹고 살아야하니까 그럴 순 없잖아요.
직장도 다니고, 학교도 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먹고 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사회가 정한 6일 동안은 열심히 직장 생활 하다가 일요일은 출 애굽한 것과 같은 맘으로 역사에서 묵시로 탈출한 것과 같이 주의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을 간과하지 마세요.
귀하게 여기셔야 해요.
교회가 타락했다 아니다 말하지 말고!
내 자신이 교회의 가치를 주님의 몸이라 생각하고 모이면 비록 그 교회가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나는 타락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서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 모이는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정하다고 여기면 부정한 것이 되고 내가 정하다고 하면 정한 것이 되어요.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보자기를 내려 주잖아요.
그 속에 각양 더러운 곤충들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이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율법에 금하는 것들이므로 싫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네가 왜? 부정하여서 못 먹겠다고 하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보자기 속에 담겨진 곤충은 이방인인 고넬료를 상징해요.
고넬료는 이방인이에요.
그러니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은 더러운 짐승과 같아요.
이런 짐승과 같은 사람이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어요.
고넬료는 구제도 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고넬료는 아직 예수를 몰라요.
기껏 안다고 하여도 옛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만 있는 것입니다.
그 섬김으론 구원 못 받아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의(義)가 있어야 해요.
고넬료는 율법 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는 것은 있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가서 네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율법에 의(義)는 다 헛 것이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알려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서 예수라는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자 성령이 임하고 고넬료가 세례를 받잖아요.
아! 내가 지금까지 쌓은 의(義)는 의(義)가 아니었군요!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 안에 있군요!
고넬료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택한 백성이니까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서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요.
옛 언약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도 그들 중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잖아요.
베드로도 그들 중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어요.
하나님은 빼내시곤 다시 그 곳으로 보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베드로처럼 가야지요.
가서 그게 아니고 예수라고 복음을 전해야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그 의(義)를 전해야지요.
그런데 어떻게 저 교회는 복음 없으니 나 안 가!
그럽니까?
어디서 듣고 배운 복음입니까?
어떻게 목사라는 인간이 교회 가지 말라고 합니까?
이건 복음을 빙자한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아주 사악한 자에요.
그건 복음도 아니고 공교하게 만든 인본주의 사상으로 전하는 말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자기 챙기기를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을 긍정해주고 달래주는 죽은 뱀의 말이에요.
이런 사람을 따르는 자들도 유유상종이라서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켜서 달콤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 말이 복음인줄 알고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고 뱀의 말이에요.
그러니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복음 복음 하면서도 그 복음으로 말장난하면서 자기 이익의 재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삶을 합리화하여 결국 자기 육신의 쾌락을 쫓아간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뱀의 독(毒)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고 해요.
복음 속엔 내 가치 챙기기가 없어요.
복음 안에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채워주는 것이 없어요.
육신이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복음은 항상 우리 육신의 소욕이 죄라고 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니 복음 알았으니 이제부터 네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고!
성령이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네 맘대로 살지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살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이러한 간섭하심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오늘 본문 식으로 하나님이 버려두신 겁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이 네 맘대로 살지 말라고 하여도 우린 내 맘대로 살고자 합니다.
죄가 나를 내 몸 편한대로 끌고 가니까요.
그러니 성도는 상한 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한계를 알 때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오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우리 육신을 고발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억지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에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으로서의 자기 부인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반드시 인도하세요.
이런 삶이 안 나타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신 사생아에요.
그가 믿는 예수는 관념이고!
그가 아는 복음은 지식이고!
그에 신앙은 추상이고!
그에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
교회에 가라는 말은 강요가 아니고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말하는 것은 다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안 간다고 하는 그 사상이 뱀의 사상으로서 악하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이건 제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저는 다만 예수님의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신앙은 누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그 예수님이 반드시 예수님이 사셨던 그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예수님의 증거자로 사용하세요.
복음 주고서 빈둥거리고 놀게 하지 않아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지옥 생활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복음은 내 생각을 긍정해 주고 우리 육신의 편안한 삶을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천사가 깨우지요.
왜? 깨웁니까?
아직도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그 성(城)이 어디인가요?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은 예수를 죽인 원수들이 있는 곳이에요.
지금 베드로가 거기서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또 가래요.
가서 또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으래요!
이게 성령을 받은 성도의 운명이에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운명 안에 있어요.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 복음 들고 오셨어요.
빛이 어둠에 오셨다구요.
오셔서 죽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주시곤 어둠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교회로 보내는 거에요.
죽은 곳에 생명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게 두 증인들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주세요.
그리곤 그 복음으로 율법이 전해지는 곳으로 보냅니다.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고 율법 교회로 가라고 궁둥이를 확 차버립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자들은 거기서 죽어요.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뿌려진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교회에요.
복음을 받은 성도가 묻힐 무덤이 바로 교회에요.
제발 하나님의 일하심을 좀 아세요.
다시 완료와 미완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에덴동산은 완료이고 에덴동산 바깥은 미완료에요.
에덴동산 바깥을 역사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역사에 와서 아이를 낳지요.
미완료에서 아이를 생산하지요.
그러니 역사에서 낳아지는 아이는 전부가 다 미숙아(未熟兒)인 겁니다.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역사에 속한 모든 생명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미숙아(未熟兒)란? 자람을 전제로 하고 있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장성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아요.다 보살핌으로 자라서 장성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천국과 달라요.
요한계시록에서의 천국을 보면 생명수 강가에 달마다 과실이 맺힌다고 하지요.
달마다 실과가 맺힌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다 자란 완성이란 말이에요.
왜냐하면! 천국은 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역사와 다르다는 의미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유기시킨 것이 그렇게 큰 저주인지를 조금만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자람을 전제로 하는 미숙아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아야 합니다.

갓난아이는 미숙아(未熟兒)입니다.
미숙아(未熟兒)란? 아직 덜 익은 아이라고 했습니다.
덜 자라서 영글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글다” 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르지 못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讚美)케 하고자 함입니다.
이건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베소서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
“우리” 라는 어떤 무리들을 선택 하셨습니다.
어떤 집단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그 집단을 누구 안에서 선택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은 그 “우리” 라는 무리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 “우리” 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이 “우리” 속에 속한 “나” 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이 세상에서 흠 있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여기서 흠이란? 죄와 사망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죽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흠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서 살려 준다는 뜻입니다.

왜? 죽은 자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려 냅니까?
그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날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걸 찬미(讚美)라고 합니다.
찬미(讚美)란? 아름다움을 기리는 것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에 가면 난 죽은 자였는데!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라고 찬미해요.
이 찬미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어집니다.
내가 어떤 자이었는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친미하게 되어집니다.

이 땅에서 이 은혜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기도하지요.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더 길게 알아가기를 기도하잖아요.
예수님도 그랬어요.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아는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이건 양적(量的)인 것이 아니라 질적(質的)인 이야기에요.
이 깨달음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자람이에요.
우린 모두가 초등학문 아래서 태어났어요.
초등학문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우린 법 아래서 태어났고! 법 아래서 자랐고! 법 아래서 살았어요. 그래서 우린 법이 편해요.

법이란? 타율이에요. 강제에요.
지키면 상(賞)을 받고 안 지키면 벌(罰)을 받아요.
그래서 우린 하나님도 상(賞)은 받고 벌(罰)을 안 받고자 섬겼어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섬기지 않았어요.
이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가 내가 누구인지 감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원래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가 이 사실을 감추어 버렸어요.
죄가 내가 찬양 받도록 살게 하였어요.
그러므로 우린 무슨 일을 하여도 내 가치 챙기기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날 알아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처럼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영광 챙기기입니다.
그러니 법을 지켜도 자기 영광을 챙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자기 영광을 챙겨요.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고 깨달아야 하는데 우린 그걸 모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부모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모르는 것과 같아요.
자식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우린 우리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쥐뿔도 없는 것이 뭘 쬐끔하고 나면 그걸 힘을 삼고 꼴값을 떠는 것입니다.
이 꼴값을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일엔 미숙아(未熟兒)에요.
아직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인 것입니다.

우린 영적으로 미숙아(未熟兒)에요.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야할 자들입니다.
미숙아(未熟兒)란? 완전(完全)과 완성(完成)과 완료(完了)로 나아가야 하는 자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 자람이 필요로 한단 말입니다.
은혜 가운데 강건한 자로 자라가야 한단 말입니다.
한번 은혜 받는 것이 끝이 아니고 그 깊이를 끊임없이 알아가고 자라가야 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영적 미숙아(未熟兒)에겐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 뭐냐?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은혜를 알아야 하잖아요.
알아야 감사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는 일에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이 간섭 당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고난이 많을수록 신앙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생각과 달라요.
그래서 사도들이 그토록 아픈 고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얼마나 고난이 심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겠어요.
이건 자살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놈에 이런 사랑이 다 있나요?
하지만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독한 간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많이 부대낄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의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얼마나 잠기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져요.
아주 푹 잠기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물에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이 발목에 잠기면 내 힘으로 살아가요!
물이 무릎에 잠기면 조금 불편해도 자기 힘으로 살아가요!
허리에 잠기면 힘이 부치지만 그래도 자기 힘과 물의 힘 반반으로 살아가요!
그러나 온 몸이 푹 잠기면 그 땐 내 힘으로 살수가 없어요.
물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요.
이건 우리의 신앙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알면 조금 감사하고 조금 찬미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알면 알수록 많이 감사하고 많이 찬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고난을 통해서 알아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빛을 알게 하려고 어둠을 두신 것과 같습니다.
영생을 알게 하려고 죽음을 경험케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곧 배가 많이 고플수록 음식의 귀중함과 고마움을 많이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아파본 사람일수록 건강의 귀함을 아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천국이 귀함은 이 땅에서 지옥을 많이 경험한 사람에게 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 받았음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깊이 알수록 감사가 됩니다.
그럼 여기서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고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어렵거나 육신이 고통스러우면 지옥 같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능적으로 육신이 편한 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인생의 목적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데 두고 쫓아갑니다.

이러한 안락한 삶을 재물이 준다고 믿어요.
그래서 재물을 쫓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입니다.
어떤 동네에 재물이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두고 “내 영혼아 즐거워하자” 라고 했어요.
이 사람은 재물이 영혼에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서 야~! 이 놈아!
오늘 밤 내가 너의 영혼을 거두어 가면 이 쌓아둔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재물이 너의 죽음을 막아 줄 수가 있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부자에게 알려주는 말은 사람이 사는 것은 보이는 이 땅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재물만 모았지 하나님은 잊고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부자는 어리석지 않아요.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우리가 다 꿈꾸는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우린 이 부자처럼 살고자 합니다.
교회에서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 가치를 가지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늠을 합니다.
너 하나님을 아느냐! 라고 묻습니다.
너 예수를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가 없는 일에 다다라야 신(神)을 찾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神)을 찾지 않아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돈이면 다 해결이 됩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란?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진시황이 그렇게 찾고 찾았던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의 화려함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화려함도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돈도 잃고! 명예도 잃고! 권세도 잃어버립니다.
결국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일평생 잃어버릴 것들을 붙잡고 산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럼 어리석지 않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건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책망하신 말을 알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어리석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말은 지혜로움입니다.
그럼 어리석은 부자에게 책망한 것을 내 것으로 살면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이 됩니까?
그건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답이 나옵니다.
누가 예수를 믿느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이 병든 자라는 것을 알아야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그건 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떨 때 밉습니까?
우리 뜻대로 살게 하지 않을 때 밉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을 하시면 우리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반대로 간섭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적개심이 발동을 해요.
그럼 우린 죄인으로 드러나요.
날 힘들게 하는데 감사가 나올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본능적으로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우리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토설케 만들어요.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살도록 가만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두면 우린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간섭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적개심이 생깁니다.
그 적개심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미움입니다.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아야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내가 하나님을 많이 미워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비례하여서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산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깊어갈수록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더욱 더 자각(自覺)하게 되어요.
이러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自覺)이 급기야는 내 자신이 미워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 난 진짜 지독한 악당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내가 악당임을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깨달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일수록 지독하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세요.

이 간섭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로부터 간섭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는 스스로 왕처럼 살고 싶어하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간섭 당함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간섭 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을 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입장에선 하나님의 간섭을 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가만 둘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입니다.

사랑 속에는 예뻐함도 있지만 미워함도 있습니다.

예쁨과 미움은 모두가 사랑입니다.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도 많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보세요.

나만 그를 독점하고 싶어해요.

그러니 사랑이 자연히 당신은 나만 바라보라는 식으로서의 간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이기주의에요.

간섭한다는 것은 간섭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엄청난 고통입니다.

만약에 자신을 간섭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간섭이라는 사랑을 미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깊이에 따라서 간섭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간섭하고 적게 사랑하면 적게 간섭해요.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 보세요.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하잖아요.

어디에서 무얼 할까?

누구랑 있을까?

그러니 수시로 전화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이 간섭이 싫어지면 사랑도 깨어집니다.

다시 말합니다.

사랑과 미움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뒷면이 미움이고, 미움의 뒷면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기를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질투는 사랑의 다른 면이에요.

질투가 강할수록 많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백성들에게 알려 주라고 합니다.

사랑해서 그런다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그 누구도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에 종살이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미워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사랑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말대로 자신들이 포로가 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그 사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포로로 보내놓고선 잠시도 잊지 않았어요.

나중에 자기백성을 학대 하였다는 죄목으로 바벨론은 멸망시켜 버립니다.

 

간섭함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타인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타인으로 보이면 간섭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좋아 할 뿐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챙길 뿐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는 하나 라는 한 몸으로 보지만 좋아하는 것은 너는 너 나는 나 둘로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깊을수록 간섭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 할수록 많이 간섭합니다.

미움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내 버려두셨다고 합니다.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건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저주란?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이에요.

이걸 유기라고 합니다.

무관심이야 말로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신 형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면 멸망입니다.

죄인의 길은 멸망의 길이에요.

 

야곱과 에서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의 일생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았어요.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을 하는가 하면 야곱이 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식으로 간섭을 하십니다.

그러니 미칠 지경인 겁니다.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을 간섭하심으로 나타났고!하나님의 미워하심이 에서를 유기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럼 언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간섭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언약 백성은 새 언약의 길로 간섭을 하십니다.

이게 또 보통 아픈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율법이 편합니다.

또한 자연적으로 율법적 신앙을 선호합니다.

 

율법적 신앙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신앙은 좋을수록 자아가 확장됩니다.

율법 신앙이 좋을수록 내 자랑이 많아지고 내 자랑이 많아지면 내 영광으로 채워집니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 반(反)하는 악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에요.

그런데 영광을 돌려야 할 자가 영광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게 율법 신앙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런 신앙 안에 있지 못하게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율법 신앙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거치는 반석이란? 넘어뜨리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킨 것을 의(義)로 붙잡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義)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는 식으로 간섭해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옳음이 아니라 틀림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도록 간섭을 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려 버리십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대역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걸려들었어요.

자기 딴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어요.

추호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을 시켜서 죄인을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십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은혜를 입고 보니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넘어져도 감사하고 일어나도 감사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우리를 간섭하실 것입니다.

이 간섭이 끝나는 날엔 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하는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깨닫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잘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되어 가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우린 모두가 “주여 나의 나됨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그러므로 물에도 집어넣었다가 불에도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담금질을 하신답니다.
그러니 불같은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모두가 널 사랑해서 라고 합니다.

그토록 간섭을 당한 바울이 외칩니다.
누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위험이냐 칼이냐! 곤고나 적신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하늘에 있는 천사라 할지라도 이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한 사랑을 뉘라서 알까요?
이 사랑을 깊이 알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무엇인가요?(요한계시록 1:4, 3:1, 4:5, 5:6)



“하나님의 일곱 영”은 요한계시록 1:4, 3:1, 4:5, 5:6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4은 일곱 영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 3:1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4:5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켜진 일곱 개의 등불과 연결시킵니다.
요한계시록 5:6은 일곱 영을 어린 양의 “일곱 눈”과 동일시하고, 이들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진술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에는 최소 세 가지 가능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성령의 상징이라는 것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은 완벽성과 완전함을 언급하는 데 숫자 7을 사용합니다.
만일 “일곱 영”의 “일곱”이 그와 같은 의미라면,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각기 다른 영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완벽하심과 완전하심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의 천사들, 스랍 (seraphim)이나 그룹 (cherubim) 등을 언급하는 것

이는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천사들의 묘사와도 일치합니다 (요한계시록 4:6-9; 5:6-14; 19:4-5).

셋째는 이사야 11:2을 근거하는 것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일곱 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주님의 영
2. 지혜의 영
3. 총명의 영
4. 모략의 영
5. 재능의 영
6. 지식의 영
7. 주님을 경외하는 영

성경은 일곱 영들이 구체적으로 누구 혹은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지만, 첫번째 해석, 즉 일곱 영이 성령이라는 견해가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7 일곱 영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요한계시록 1:4)

하나님의 일곱 영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요한계시록 4:5)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요한계시록 5:6)



하나님의 일곱 영 / 키이스 밀러

하나님의 일곱 영에 대한 말씀들

1) 계시록 1: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2) 계시록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 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4) 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하나님의 일곱 영은 일곱 가지 성품을 가진 성령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영 (the Spirit of the Lord upon)

그리스도 예수님께 부어진 한량없는 성령의 임재 그 자체를 말한다.
마치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는 바로 이 성령으로 옷 입어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일곱 영 중에서 중심의 자리에 있는.

지혜의 영 (wisdom)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광대한 지혜,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이 바로 지혜의 근원이다.

총명의 영 (understanding)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
성경 속에 보물처럼 감취어진 영적 진리를 캐내게 하는 것이 바로 총명의 영의 사역임.

이 영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늘에서 하나님이 부으시는 비전의 삶을 창조적으로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계시의 중요성 이해 / 얻기 위해 기도한 이 : 바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모략의 영 (counsel)

모략이란 모든 일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 주님의 모략은 영원토록 이 땅 위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분의 계획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당신의 생각과 마음의 뜻을

계시할 것이다.

이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성령의 성품인 권능의 영이다.

권능의 영(might)

권능의 영을 받는 사람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권능, 강건함의 기름부음이 나타나게 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권능이란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일들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이란 고작해야 하나님 손가락 한두 개 만으로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권능의 광대함을 보고 이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사 9:6)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일은 결코 사람의 상상으로 품을 수 없는 놀라운 것.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영 (Spirit of knowledge of the Lord)

이전의 것들은 성령에 속하거나 성령에 관한 성품이었으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영은 여호와 하나님을 친히 아는 것.
하나님과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 같이 그분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속사정을 아는 것.
하나님에 대한 어떤 속성과 성품을 배우고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알게 되는 이 경험 때문에 성령의 나머지 모든 성품들이 가능.
하나님의 속사정까지 아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바로 하나님의 가슴 소게 있는 많은 하늘의 일들을 깨닫는 사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9)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장성함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지극히 크심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the Spirit of the fear of the Lord)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성도로 하여금 놀라운 영광의 하나님을 알고 온 마음으로 존경을 표하며 두려워하게 하는 것.

성령의 일곱 영이 없이는 그 어떤 환경적, 자연적 제약들을 극복할 수 없다.
세상과 사단과 인간육신의 정욕이라는 방해물들을 극복하고 초자연적 권능으로 하늘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임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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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

문명의 바벨탑

헨리 나우웬이 쓴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나라에 왕자 네 명이 있었다. 네 명의 왕자가 모여 이런 결정을 내렸다. “우리 형제가 전 세계에 흩어져서 최첨단 과학 기술을 배워오자.” 오랜 세월이 흘러 네 명의 왕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첫째 왕자가 말했다.“나는 한 조각의 생물의 뼈만 있으면 근육을 붙이는 기술이 있다.”둘째 왕자도 말했다. “나는 뼈와 근육만 있으면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는 기술을 배워왔다.” 셋째 왕자는 “나는 뼈와 근육 그리고 털이 있으면 사지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라고 했다. 막내 왕자도 질세라 말했다.“나는 사지가 있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을 배워왔다.” 네 왕자는 숲 속에 들어가 뼈를 하나 주웠는데, 그것은 사자의 뼈였다. 네 명의 왕자는 그 뼈에 근육을 붙이고,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고, 사지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사나운 사자가 일어나 그 네 명의 왕자를 물어뜯어 죽였다. 이 이야기는 인간들이 쌓아놓은 현대 문명의 바벨탑에 인간 스스로 깔려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문명에 의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비참하게 죽어가는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어리석은 벌레

하루는 하늘을 찌를 듯이 커다란 나무에서 살고 있던 벌레들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대장 벌레가 다른 벌레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나무가 어찌나 큰지 우리 벌레들이 이곳에 살고 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 몇 마리 정도로는 이 나무의 위용에 가려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끼를 많이 나아서 이 나무를 먹어치우면 세상은 이 나무보다 위대한 우리 벌레들을 알아줄 것입니다.” 대장 벌레의 말을 들은 붙임성 좋은 부하가 재빨리 나서며 말했습니다. “대장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다 짜내어 이 나무를 빨리 갉아먹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립시다.” 이 말을 들은 대장 벌레는 흐뭇해서 말했습니다. “좋다. 이 나무를 총공격하자. 한쪽은 부지런히 자식을 낳고 나머지는 나무를 공격하여 우리 이름을 만천하에 드러내자.”대장의 말에 신이 난 벌레들은 나무를 공격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벌레들은 열심히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을 구경하던 이웃 벌레들은 그들의 능력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벌레들의 공격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벌레들이 살고 있던 나무가 힘을 잃고 하나둘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그 큰 나무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나무를 쓰러뜨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벌레들이 먹을 양식 또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오자 벌레들은 모두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당나귀의 교만

어떤 마부가 당나귀 등에 돌부처를 싣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돌부처를 보고 합장 배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는 자기를 우러러보고 경배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쭐대며 교만한 마음으로 마부가 가라는 방향으로 가지를 않습니다.
이에 화가 난 마부는 채찍으로 내려칩니다.
갑자기 내려치는 채찍에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당나귀의 등에 있던 돌부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당나귀는 다리를 다쳐 그만 쓸모없는 나귀가 되었고 결국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부모 처자와 물과 대지와 공기와 햇볕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 하나, 세포 하나도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시간도, 삶의 기간도, 죽는 시간도 내가 정하지 못합니다.
절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시한부로 빌려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실 하나님만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은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은 실로 큰 죄이며, 하나님 나라의 거침돌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언 18:12)

교만과 독선의 머리를 치켜 세운 뱀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농부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길위에 꽁꽁 얼어붙은 뱀 한 마리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가져와 화롯가에 놓아두었다.
얼마 후 생기를 되찾은 뱀이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더니 농부의 아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농부는 홰초리를 들어 뱀을 후려쳤다.
그리고 길게 뻗은 뱀을 막대기에 감아 밖에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배은망덕한 놈, 은혜를 모르면 벌을 받지. 저를 살려준 사람의 아들을 물려 하다니…”
농부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앞으로는 절대로 뱀을 구해주지 마세요”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구해준 분이 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구해준 그분을 향해 인간은 가끔 교만과 독선의 머리를 치켜세운다.
불순종의 결과는 항상 사망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하늘의 노여움을 받는다.

옷걸이의 신분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하였습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체(本體)를 정확히 알고 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진짜 능력, 자기가 선 자리를 모르거나 망각하면, 설탕물을 먹고 가짜 꿀을 내놓는 벌처럼, 초라한 인격자의 모습이 되고 맙니다.












아모스(Amos) 짐, 짐을 지는 사람 07-12-2023(수) / 07-21-2023(금)



 선지자들의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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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에서 아모스서의 위치

1. 최초의 문서 예언자

구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예언서 가운데 아모스서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건 아모스서가 ‘예언자의 이름이 곧 예언서의 이름으로 등장한 최초의 예언서’라는 점입니다. 이와 같이 아모스처럼 예언자의 이름이 곧 책의 이름이 된 예언서를 ‘문서 예언’(Writing Prophets)이라고 하고, 이들을 ‘문서 예언자’(Writing Prophets)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경에서는 총 17권이 예언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것은 문서 예언자들이 직접 예언서를 기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사역과 예언이 예언자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수집되고 보존되었다는 의미입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55).

2. 양을 치며 농사를 지었던 아모스

예언자로 부름 받기 전, 아모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참고로 바벨론에서 예언사역을 했던 에스겔의 직업은 제사장이었고(겔 1:3), 예레미야도 제사장이었습니다(렘 1:1). 반면, 아모스는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 7:14-15). 아모스는 분명하게 자신을 ‘선지자도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은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라는 정확한 의미입니다. ‘선지자의 아들’이란 말은 혈연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가끔 ‘선지자 무리’ 혹은 ‘선지자 생도’란 표현이 나오는데(삼상 10:5, 20:18-24, 왕하 2:3, 4:1, 38) 이들은 한 사람을 지도적인 예언자를 모시고 활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선지자 무리에 속한 생도와 지도적인 예언자는 흔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라고 불렀던 것이 좋은 실례입니다(왕하 2:13)(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66-67). 그런 점에서 아모스가 ‘선지자의 아들’이란 말은 그가 전문적인 예언자 무리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대신, 아모스는 자신을 ‘양을 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사꾼’으로 소개합니다. 주목할 것은 아모스가 자신을 ‘목자’라고 사용한 용어는 열왕기하 3장 4절에만 단 한번 나온다는 점입니다.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히브리어 ‘노케드’는 아모스가 남에게 고용된 일반 목동을 뜻하는 ‘로에’(히브리어)와는 달리, 자기의 목장을 소유하며 양을 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62). 아마도 그는 본래 생활에 별로 어려움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한 재산을 가진 중산층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아마샤’는 당시 북이스라엘에 위치한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제사장이었습니다(아모스 7:10-11). 특히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왕실성전’이 있는 곳으로 북이스라엘의 ‘중앙성전’(Central Sanctuary)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북이스라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평범한 제사장이 아니라 힘과 권력이 있는 제사장이었으리라 판단됩니다.

반면,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출신’이 아닌 ‘남유다’에 위치한 ‘드고아’(Tekoa) 출신의 농부였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산악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산간벽지가 아닙니다. 참고로, 드고아는 남유다의 르호보암(주전 922-915)이 이곳에다 각종 무기와 군비를 비축하고 군대 사령관을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대하 11:6-12), 남유다가 멸망하기 이전까지 계속해서 중요한 군사 도시로 남아 있었던 곳이었습니다(렘 6:1).(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60.)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남유다 출신’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남유다 출신의 아모스를 북이스라엘로 보내셔서 예언하도록 하셨을까요? “이것은 당시 북쪽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에 평신도를 들어다가 북쪽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차준희, 『예언서 바로보기』,212-213.).

당시 이스라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된 ‘남유다’와 이를 제외한 열지파로 이루어진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 이후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열왕기상 11-12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르호보암 2세가 통치하였고, 남유다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3. ‘심판 예언자’인 아모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지배계층, 일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마다 무섭게 책망했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국내의 대표적인 구약학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강성렬은 예언자에 대해 이렇게 규정합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어떠한가? 말씀의 종으로 부름 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토라에 불순종하는 지배 계층과 일반 대중의 잘못된 신앙생활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그들의 왜곡된 삶의 양식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고발한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비판과 저항 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강성열, 『구약성서로 읽는 지혜 예언 묵시』, 119).

예언자 아모스 역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매섭게 예언했습니다(암 8:2). “아모스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종말에 대하여 선포한 예언자입니다.”(차준희, 『예언서 바로보기』, 214).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고(accusation) 그에 상응한 하나님의 징벌을 선언했기에(announcement of judgement) 그를 흔히 전형적인 심판의 예언자라고 합니다(prophets of doom)(박준서, 『구약세계의 이해』, 123). 아모스의 예언대로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아모스가 활동한지, 약 30년 만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도 아모스는 명석한 여로보암 2세의 통치로 북이스라엘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가장 융성할 때,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실, 아모스만이 ‘심판 예언’을 한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진실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발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바른 이야기만 했기에 부패한 사회와 왕궁을 향해 거침없이 쓴 소리를 했고, 담대히 멸망을 선포해야 했기에 학자들은 이들을 ‘멸망 예언자’(doom prophets)라고 부릅니다. “소위 멸망 선지자로 불리는 참 예언자들은, 대부분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을 선포하던 이들입니다.”(기민석, 『한국성도를 위한 예언서 강의』, 54). 반대로 왕과 백성들에게 근거없는 평화를 외치며 왕의 비위만을 맞추기에 급급했던 예언자들은 ‘구원 예언자’ 혹은 ‘평화 예언자’(salvific prophets)라고도 합니다.(기민석, 『한국 성도를 위한 예언서 강의』, 43). 이런 부류에 속한 예언자로는 예레미야 시대의 하나냐(렘 28:1-4), 북이스라엘의 아합에게 속해있던 400명의 궁정 예언자들(왕상 22:1-6)입니다. 400명의 궁정 예언자들은 참 예언자였던 미가야와는 달리 ‘아합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거짓예언을 했습니다.

특히, 아모스는 주변 국가들을 향해서도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아모스 1-2장은 북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인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심판 선언 이전에 이방 나라를 향해서도 심판 선언을 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을 때에 긍휼을 베풀지 않고 약한 이웃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가혹하게 탄압했기 때문”(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85)입니다. 에돔은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무참히 유린당할 때 돕기는 커녕 바벨론에 동조하여 그들과 같이 남유다의 재물을 노략했습니다. 심지어 바벨론을 피해 도망치는 유다 백성들을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심지어 그들을 붙잡아 바벨론에 넘기기까지 했습니다(옵 1:11-14). 이웃 나라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체, 살인하고 노략질한 에돔에 대해 하나님께서 멸망을 선언하셨듯,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도 무고히 이웃국가를 침략하여 노략질한 이방 나라들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근거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인 ‘휴머니즘’(Humanism)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이방 나라들(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지적은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범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에게는 보편적 정의의 잣대를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이사야, “미가 6장 6-8절에 담긴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의 예배 비판과 사회윤리”, 115-116.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세상 모든 나라들을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분임을 널리 알리는 것’(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85)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모스의 심판 예언은 주로 북이스라엘을 향해 집중됩니다. 아모스 2장 6절부터 9장 6절까지는 모두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들로 가득합니다. 


아모스(AMOS) / 짐을 진 자

기록자 : 아모스
기록 시기 : 주전 760년경
성격 : 대언
이름 : 아모스는 ‘짐을 진 자’를 뜻한다.

대언자 아모스의 직업은 농부였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그는 처음에 대언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남 왕국 유다의 시민이었으나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되기 전에 북 왕국을 향해 대언했다.

수신자 : 북 왕국 이스라엘의 통치자와 백성들
주제 :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 회복의 약속
목적 : 하나님과 우리를 나누는 죄들을 제거해야 그분과의 교제가 회복됨을 보여 주는 것
내용 :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시리아를 정복하면서 백성들이 번영과 형통을 누리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방탕함과 사치와 불법이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송아지 숭배와 바알 숭배가 혼합되어 이스라엘 국가의 종교가 되었다.
제사장들은 수치스런 일을 행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송아지 숭배의 근원인 벧엘로 가서 왕과 백성들에게 부정과 탐욕과 술 취함과 간음과 학대를 버리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그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포로로 잡혀가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강하게 선포했다.
강하게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그는 메시아 왕국과 메시아의 약속을 주면서 경건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아모스서는 9장, 146절, 4,217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 9장(이스라엘의 분산과 회복),
핵심 절 :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므로 내가 이르되, 다림줄이니이다, 하매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두고 다시는 그들 곁을 그대로 지나가지 아니하리라.”(7:8),
핵심 단어 : 다림줄,
핵심 구 :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함께 걷겠느냐?”(3:3)
아모스서의 그리스도 : 만군의 하나님(4:13),
영적 교훈 :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4:12)



아모스서의 시대적 배경

예언서는 서두에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를 명시적으로 밝혀둡니다.
그래서 예언서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와 장소를 숙지해야 합니다.
아모스 1장 1절에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남유다를 웃시야 왕이 통치할 때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역사서와 예언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을 동시에 병기해 놓았습니다.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왕상 16:28) 남유다의 아사왕 재위 18년에 북이스라엘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1. ‘예후 왕조’의 네 번째 왕, 여로보암 2세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13번째 왕으로 무려 41년간을 다스렸습니다(왕하 14장 23절, 주전 786-746).
그 이름의 뜻은 “백성이 번성하게 되기를 원한다”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19명의 왕 가운데 가장 오랜기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참고로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아모스의 뒤를 이어 호세아도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참고로 “호세아는 문서 예언자 가운데 유일하게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출생하고 활동한 예언자”(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11)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2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여로보암 2세는 예후 왕조(Jehu Dynasty, 주전 842-815)의 네 번째 왕이었습니다.
예후 왕조에는 예후로 시작하여 ‘여호아하스’ -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리야’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후 왕조 이후에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 6명의 왕인, 살룸(745, 1개월) - 므나헴(745-737) - 브가히야(738-737) - 베가(737-732) - 호세아(732-724)가 등장하지만 통치기간은 약 24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대단히 불안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에는 예후 왕조뿐만 아니라 전체 북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경제적·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여로보암의 2세의 영토 확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 14:25).
그렇다면 하맛(Hamath)은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요?
여기에서 ‘아라바 바다’는 사해(死海, Dead sea)를 가리킵니다.

2. 정치· 경제적 상황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융성은 ‘내부적 요인’보다 ‘외부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북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혔던 아람은 신흥 세력이었던 앗수르의 아닷-니라리 3세(Adad-Ninari, 주전 810-782)의 침공을 받아 그들의 수도였던 다메섹이 점령당하여 조공을 앗수르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람(시리아)은 그 힘이 약화되어 더 이상 북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이희학, “북왕국 멸망의 사회적 원인들과 예언자 아모스의 심판”, 『구약논단』, 22).

더하여 아닷-니라리 3세와 그의 아들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 pileser)는 더 이상 시리아-팔레스틴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이안 프로반 외 2인,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547). 참고로 디글랏빌레셀 3세는 성경에서 ‘불’(Pull, 왕하 15:9, 대상 5:2)을 말합니다. 므나헴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디글랏-빌레셀 3세가 침략하려하자 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줌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습니다(왕하 15:17-22).

또한 여로보암 2세 치세 하에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넓게 확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군사력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군사력이 강력했다는 것은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군사력의 바탕은 경제력에 기반합니다. 외세의 침략이 사그라들자, 대내외적인 경제적인 여건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육로와 해상을 통해 국제무역이 활발했으며, 농산물(포도주와 곡식)을 팔아 부자들이 출현했습니다’(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49).

열왕기하 15장 20-21절 “앗수르 왕 불(Pull, 디글랏빌레셀 3세)이 와서 그 땅을 치려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에서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당시, 화폐단위로 은 한 달란트는 3,000세겔이었기에 므나헴 당시, 북이스라엘에서는 적어도 60,000여명의 부자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큰 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깁보레 하일’은 본래 전쟁의 용사를 의미했지만, 본문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 즉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희학, “북왕국 멸망의 사회적 원인들과 예언자 아모스의 심판”, 『구약논단』, 32.

대지주들이 많다는 것은 그에 비해 소작농도 비례하여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모스 3장 15절에 의하면, 이들은 ‘사치스러운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을 소유했고 별장 안에는 값비싼 수입품이었던 상아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암 6:4). 이런 당시 부자들의 호화로운 사치 행각은 20세기 초반에 고고학을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1930년대, 영국과 미국 합동 발굴팀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궁전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궁전의 한 방에서 수많은 상아 장식품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기에 이를 ‘상아 방’(ivory room)이라 명명하였습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59. 각주 3번을 보라).

당시 소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파생하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전체 문제’로 비화되기 일쑤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사법체계의 붕괴, 없는 자에 대한 가진 자의 갑질과 착취, 사회 안전망의 붕괴 등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은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상태는 어떠했을까요?

3. 북이스라엘의 신앙 상태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이스라엘은 대외적인 정치적 안정과 활발한 국제무역으로 인해 경제가 호황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상태는 매우 어두웠다고 아모스는 지적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의 고발은 아모스 3-6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십니다.
아모스서 2장 4-8절은 북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심판을 돌이키지 않을 거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암 2:6).
바로 이어, 죄의 항목을 나열합니다.
첫째,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고,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파는 것입니다.
둘째,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자의 길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넷째,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시는 내용 중에서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죄’의 언급은 없습니다.
성전제사를 드리지 못했다거나, 십일조를 안했다거나, 안식을 어겼다는 지적은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네 가지 사회 윤리적 죄를 고발”(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죄의 고발은 아모스서 8장 4-6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4-6).

이 두 본문을 잘 읽어보시면, 2장 6-7절에서는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연약한 자”가 언급되고, 8장 4-6절에서는 “가난한 자”, “힘없는 자”(4절), “힘없는 자”, “가난한 자”(6절)가 언급됩니다. 즉, 아모스서 2장 6-7절과 8장 4-6절은 동일한 세 집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420. 참고로, 아모스서 2장 7절의 ‘겸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는 ‘빈곤한 자’ 혹은 ‘빈궁한 자’를 말합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88.

이 두 본문(암 2:6-7, 8:4-6)이 보여주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사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기대하셨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삶의 모습은 ‘재판을 공정하게 집행함으로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것’(신 24:17; 27:19, 출 23:6-8, 잠 17:23, 사 10:2, 암 5:12)이었으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객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공동체였습니다(출 22:22, 신 10:18; 16:16, 욥 29:12-16, 시 41:1; 146:9, 잠 14:21; 22:22, 사 1:17, 렘 22:3). 하지만 아모스가 본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권력있는 자들이 재판을 굽게 하고 있으며, 돈이 있는 자들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그들이 가진 최소한의 물질을 착취하는 세상이었습니다(암 4:1; 5:11-12).

아모스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정의를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암 5:7)로 규정합니다. 더욱이, 당시 종교지도들 역시 이러한 흐름에 합세하여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암 8:5). 이 말씀에 따르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제사와 절기가 빨리 지나가기를 고대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만 백성들이 바친 헌물들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기 때문이지요”(기민석, 『한국 성도들을 위한 예언서 강의』, 99). 이런 일을 누가 했을까요? 바로 당시 종교 지도자, 즉 성전에서 제사일을 관장하는 제사장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바친 헌물을 그냥 팔지 않고 저울을 속여 팔아 큰 이득을 남기려고 했다니, 참 가관입니다.”(기민석, 『한국 성도들을 위한 예언서 강의』, 99)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외형적 종교적 행위는 매우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습니다.
아모스서 4장 4-5절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4-5).

본문에서 등장한 벧엘과 길갈은 북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렸던 제의의 중심지였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구약의 절기들과 제사인 월삭, 안식일, 십일조, 수은제, 낙헌제가 상시적으로 드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마다” 제사를 드리며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서 언급된 여러 제사의 종류 등은 이들이 참으로 정성스럽게 제사했음”(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457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에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행위가 어떤 불법적이거나 규례를 어긴 제사에 대한 책망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참고로, 수은제는 ‘감사제’(레 7:13)이고, 낙헌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레 7:16, 민 15:3)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신앙행위를 한 마디로 이렇게 규정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암 4:5). 아모스서 5장 21-23절에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체의 신앙행위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기뻐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특별히, 아모스서 5장 1절에 ‘내가 미워하고’, ‘내가 멸시하다’라는 거절을 표시하는 심한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로, 이는 하나님의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줍니다(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55).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본문에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신앙행위 일체를 거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절기와 성회의 거부입니다.
둘째는 일체의 제사에 대한 거부입니다.
셋째,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를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서 드려지는 일체의 신앙행위 자체를 거부하시고 어떤 제사와 헌물도 열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아모스는 8세기 전반기 이스라엘의 여로보아 2세와 유다의 웃시야의 치세에 살았던 사람이다.

표제는 그가 대지진 직전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선지자로 활동했던 것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아모스서는 북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때는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였다. 이 때에 요나가 예언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 시절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으며, 거대한 부가 왕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마리아에는 강력하면서도 흥청망청할 정도로 부유한 계층이 성장하였다. 아모스의 설교의 초점이 된 것은 이러한 부유한 자들이 부와 권력과 특권을 남용한 점이다. 그러나 부와 군사적인 성공의 시기는 이스라엘 왕국의 짧고도 찬란한 일몰의 시기였다.

아모스 자신은 유다의 베들레헴 남쪽 오 마일 지점에 있는 드고아 지방 출신 목자였다.

이 선지자의 사회적 지위 - 얼핏 보기에 아모스는 천한 신분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사용된 목자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rsh)가 아니라 다른 용어(nqd)가 사용되었다. 이 칭호는 대규모 목축업자였거나 가축 중개인으로 볼 수도 있다. 적어도 아모스는 단순한 농부나 소작인이 아니라 보다 부유한 사회계층의 사람으로서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했던 것이 된다.

어느 드고아? - 유일하게 알려진 곳은 유다 베들레헴 남쪽의 마을이다.

아모스와 기타 선지자들 - 7:14절은 아주 논란이 많은 부분중의 하나이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I not porphet; I not son of prophet)" 라는 구절을 과거로 해석하거나 현재로 해석할 경우 많은 해석상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적 아마샤는 아모스를 선지자로 생각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샤와 아모스 모두 그의 행동을 예언이라는 동사를 가지고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지자와 이 책간의 관계 - 오경의 문서 비평 방법론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아모스 자신의 말들을 후대의 것들로부터 분리하려는 노력들을 기울였다. 여기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새로운 종교적 전통을 고안한 사람이 된다. 양식비평에 이르러서는 아모스서의 관심을 원래의 뼈대와 함께 원래의 설교들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조사하고, 일단 성문화된 문헌의 편집 단계를 찾는데 시간을 들였다. 이로써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단계를 고안해낸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들에 깊이 젖어 있던 자가 된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아모스서의 수많은 부분들이 후대의 증수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현대의 학자들이 비평학계의 방법론들이 과연 성경의 책들, 특히 아모스서와 가은 작은 책들을 잘게 쪼개는 것을 허용해 주는 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점점 더 의심을 품고 있다. 아모스서에 대한 연구의 세 번째 단계는 문학적인 구조와 수사학적인 발전 과정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책에 접근하는데 있다. 이들은 아모스의 저자 문제와는 별도로 아모스서가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편집자이든 아모스이든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문학적인 구조

열방들에 대한 신탁(1-2장)

아모스는 일곱 나라에 대한 예언적인 심판의 말씀을 전한다.심판의 신탁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일종의 지리적인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심판들은 지혜문학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X와 X+1의 숫자 패턴을 사용하고 있다(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그러나 이것들을 주로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위해 채택된 수사학적인 기법들이다. 그의 말을 듣는 청중들은 이웃 나라들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들에 대한 비판들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은 사회적인 불의에 대한 비난이 자신들의 발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을 것이다. 주변 적국들에 대한 신탁은 이스라엘에게 갑자기 튀어 오르는 덫이 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들(3-6장)

여기서 아모스는 다양한 문학 양식들을 사용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선지자적인 소송의 연설양식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니므이 고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법정 대리인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배경은 재판정이다. 이런 선지자적인 소송 외에도 아모스는 또한 심판의 연설들과 저주의 신탁들을 사용한다.

이상들에 대한 기록들(7-9장)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다섯 개의 이상들에 대한 자서전적인 기록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중 네 개는 서로간에 비슷하고, 마지막은 뚜렷한 차이가 난다. 처음 네 개는 분명한 연결점이 있으며, 하나의 집단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의 신탁들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문학적인 기교들을 사용하고 있다.

신학적인 주제들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북왕국의 종교적, 사회적 관행들을 거부하시고,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그들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허버드는 주권적인 통치와 심판을 네 가지 상이한 차원에서 바라본다. 첫째는 개인적,신적 차원에서이다. 심판에서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둘째는 창조적 차원이다. 세상 자체가 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형국이다. 셋째는 도덕적인 인과관계의 차원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저질러진 악은 본인에게 악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넷째는 정치적인 역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하나니므이 주권적인 통치는 세상의 열방들을 다 포괄한다.

우상숭배와 사회적인 불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아모스의 메시지는 우상수애와 사회적인 불의라는 두 가지 영역에 대한 것이다. 여호와 숭배가 부패했으며, 외형적이고 허식적인 종교적인 사항들은 율법의 중요한 요소들을 상실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물질적인 번영은 부유한 상류계층을 만들어 냈고, 여유 시간과 잉여 재산은 죄악에 사용되었다. 이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백성들 가운데 공의를 명하시며, 순종을 요구하신다.

언약과 남은 자

아모스는 급진적인 종교개혁가가 아니었다. 언약에 근거한 법정 소송의 대리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언약의 존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오경의 내용을 많이 언급하고 있으며, 언약적인 이념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선민, 즉 야웨와의 언약 관계 속에서 구속을 받은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이 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성 때문에 이 백성의 죄를 심판으로 대응하시는 수밖에 없으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헌신 때문에 거기에는 항상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백성의 핵이 되는 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여호와의 날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그 나라가 변호를 받는 날, 용사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날로 보았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 개념은 완전히 뒤집었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의미했으며, 용사이신 하나님은 이 백성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원수들의 군대들을 자기 백성에게로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도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효력에 대해서 다른 선지자들과 같이 신념을 갖고 있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사회 정의 및 가난한 자들의 학대에 대한 아모스서의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아모스서는 특히 신약의 몇몇 구절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로마서 12:9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는 권면
스데반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국가적인 우상숭배에 대한 회상 등이 그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15:16-17에 인용된 아모스 9:11-12를 들 수 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는 이방인들을 교회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이스라엘의 재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잉라고 주장한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다시 일으키며, 그 틈을 수리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실제적인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열방들을 모으는 것도 또한 포함하는 것이었다.


주전 8세기의 역사적 배경(히스기야)


히스기야(주전 715-685년)

이제 주전 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아모스서, 호세아서, 이사야서, 미가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 연구는 히스기야로 마감을 합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남유다 왕이었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입니다.

대체로, 히스기야는 구약성경을 조금 아는 분들이라면 익히 들어본 이름입니다. 그만큼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성군 가운데 한명으로 인정받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29장부터 32장까지 무려 4장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을 정도로 히스기야는 남유다 왕들 가운데 성군으로 평가됩니다.

먼저, 히스기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열왕기하 18장부터 20장까지이고, 역대기는 역대기하 29장부터 32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하여 3장을 할애했고, 역대기 저자는 4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먼저, 히스기야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 18:3-7)

히스기야에 대해서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일말의 부정적인 평가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떠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역대기 저자 역시 히스기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대하 29:2). 이렇게 히스기야는 열왕기 저자와 역대기 저자에게 모두 후한 점수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왜 두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알아 봅시다. 첫째, 히스기야는 그의 부친, 아하스로 인해 16년간 방치되었던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제사를 회복합니다(대하 29:1-36). 둘째, 그 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 절기를 7일간 준행합니다(대하 30:1-27). 셋째, 남유다 성읍에 세워진 모든 우상들과 우상숭배의 진원지였던 산당과 단을 파괴함으로, 우상숭배의 뿌리를 제거합니다(대하 31:1). 이러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대해 역대기 저자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대하 31:21).

이렇게 히스기야가 남유다의 종교개혁을 시도하는 사이,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재차 침략합니다. 우리가 위에서 다루었듯이,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북이스라엘의 므나헴 왕 때에도(왕하 15:17-20), 베가 왕 때에도(왕하 15:27-31) 침략을 했습니다. 히스기야 재위 4년, 이때 북이스라엘은 마지막 왕, 호세아가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참고로, 이 호세아는 예언자 호세아와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가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에게 바쳤던 조공을 중단하고 대신 이집트의 도움을 청합니다. 이는 “당시 중동에서 유일하게 앗수르를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 중 하나였던 애굽의 소(So)왕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운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한 것”(한홍, 『왕들의 이야기 1』, 281)입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했기에 북이스라엘을 도울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앗수르를 배반하고 이집트의 원조를 청한 사실을 알게 된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은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합니다(왕하 17:1-5). 이러는 동안,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인 사르곤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아 사마리아를 공격합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게 멸망합니다. 이때가 주전 722년입니다.

3만 명에 이르는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앗수르로 끌려갔으며, 앗수르의 도시들인 할라, 고산 하볼 하숫가, 메대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앗수르가 취한 식민통-치방식은 ‘쌍방향 강제이주정책’(two way-deportation policy)(차준희, 『역사서 바로읽기』, 229)이었습니다. 즉, 앗수르의 백성들을 식민지 국가에 이주시키고, 식민지 백성을 자기 영토에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앗수르 제국은 이렇게 쌍방향 강제이주정책을 시행했을까요? 이는 혼혈정책을 통해 신민지 국가가 앗수르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탄생한 것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앗수르와 북이스라엘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종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마리아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점을 가지고 불결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까지 내려갑니다(차준희, 『역사서 바로읽기』, 230) .

이후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약 400년간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셨고, 그로 인해 사마리아 지역에도 복음이 심겨집니다. 더 나아가,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소위 이를 ‘사마리아인의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한편, 약 3만여 명의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통해 앗수르 지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특히 앗수르는 피정복민의 반란을 방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반역할 가능성이 높은 지방의 주민들을 모아서 멀리 딴 곳으로 이주시켜 버리는 강제이주정책”입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킬 때, 매우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앗수르는 포로들을 앗수르로 끌어갈 때 말할 수없이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포로들의 발목을 줄이나 사슬로 묶어 보폭으로 걷게 했을 뿐 아니라, 가죽 끈에 묶여진 갈고리를 혀나 턱에 꽂았다. 묶인 손이나 발에 구멍을 내어 밧줄을 엮는 경우도 있었다. 포로들이 잘 따라오지 못할 때는 이 갈고리 끈을 사정없이 잡아 당겨서 포로들에게 형언키 힘든 고통을 주었다. 앗수르의 이 잔혹한 포로 다루기는 바벨론에게도 그대로 답습된다(한홍, 『왕들의 이야기 2』, 50).

앗수르로 끌려간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버렸고, 종교 역시 혼합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은 당시 고대근동의 맹주였던 앗수르에게 주전 722년에 멸망합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 제국은 이제는 남유다를 식민지화 하려고 침략합니다. 이때가 히스기야 재위 14년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왕하 18:13). 한편, 역대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취하고자 한지라”(대하 32:1).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반-앗수르 정책을 펼쳤습니다.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왕하 18:7). 이러한 히스기야를 앗수르의 산헤립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초토화시키려고 침략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의 대군은 노도와 같이 몰려와서 주변 여러 나라들을 복종시키고 블레셋의 성읍들도 휩쓸어 버렸다. 여로보암 때부터 요새화된 요충지 라기스도 점령하고 에그론 왕을 해방시키더니, 아프리카의 강국 애굽과 에티오피아 연합군까지 격퇴시켰다. 이 싸움에서 산헤립은 유다의 46개 성읍을 점령하고 20만이 넘는 포로들을 잡아갔다. 무시무시한 공성 장비를 가진 앗수르 대군의 침략 앞에 유다는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했다(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09).

이때, 히스기야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왕하 8:14).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엄청난 비용을 요구합니다. 즉,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더하여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줍니다(왕하 18:13-16). 하지만 앗수르의 산헤립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완전히 지배하려고 합니다(왕하 18:17-37). 이 사건은 이사야 36-38장까지 길게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앞에, 히스기야는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합니다. “히스기야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궁내 대신 엘림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옷을 입혀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매”(왕하 19:1-2). 비록 이전에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두려워서 성전에 있는 금을 다 긁어모아 바쳤지만, 이제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은 큰 국가적 재난 앞에서 리더가 스스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겠다는 의미”(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18)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당시, 궁중 예언자였던 이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앗수르의 침략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묻자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보낸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을 전달해 줍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 37:6-7).

이와 같이 히스기야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희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왕하 19:5-7)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역사서와 예언서가 서로 병행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사야서라는 예언서에 역사적 사건들이 종종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예언은 ‘무시간적·무공간적인 말씀’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특정한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37장 6-7절과 열왕기하 19장 5-7절은 약간의 기록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남유다를 구원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은 일치합니다. 실제로, 그 다음날 앗수르의 정예부대 18만 5천명의 군사들이 몰살당합니다. 산헤립 역시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의 아들들에게 살해당합니다(왕하 19:35-37). 그러면서 고대근동 지역을 호령했던 앗수르의 세력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대신 바벨론이라는 또 다른 제국이 흥기하게 됩니다.

국가적 대재난을 잘 넘겼던 히스기야에게 갑자기 죽을 병이 찾아옵니다(왕하 20:1, 사 38:1).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눈물로 통회하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연장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왕하 20:4-6). 이렇게 히스기야는 국가적 재난으로부터 남유다를 구원했고, 개인적인 환난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이로 인해 마음이 높아지고 맙니다. 마치, 자기의 힘과 능으로 된 것처럼 착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차에 고대근동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바벨론왕, 발라단의 아들인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냅니다(왕하 20:12). “고대사회에서는 병으로 회복된 군주에게 이웃 나라 왕들이 축하 사신과 선물을 보내는 것이 외교적 관례”(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33)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남유다의 주요한 시설을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다 공개해 버립니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왕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이사야가 가로되 저희가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왕하 20:12-15).

이사야는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 심판적 예언을 전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 20:17-18).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두 가지의 심판적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남유다의 모든 재물이 바벨론으로 이거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왕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가운데 바벨론의 환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남유다가 바벨론의 식민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약 100년 후에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모스와 호세아가 활동하던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시대적 배경, 이사야와 아모스가 활동하던 남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예언서 본문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예배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탐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모스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아모스’라 불렸어요.
아모스서는 유다 문학 사상 가장 먼저 쓰여진 예언서로 중요하지요.
비록 분량이 적어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12개의 소예언서에 속하지만, 다른 예언서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답니다.

아모스는 어떤 성경인가?

누가 썼나요?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성서의 주된 내용이지요.
아모스란 이름의 뜻은 ‘주님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남 유다 사람으로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아모 7,14)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는 아니고 상당한 자기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주변의 국제정세나 유다와 이스라엘의 국내 사정에 밝은 걸 보면, 그는 꽤 많이 배운 사람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모스는 본래 예언자 가문에 속하지도, 왕실 예언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와 베델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전한 뒤, 그는 남 유다로 추방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위경들이 전하는 전설에는 아모스가 베델의 사제 아마니야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 또는 남 유다의 왕 우찌야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모스는 하느님의 현존과 정의를 크게 강조하였기에 ‘정의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6-746) 시절로서 대략 기원전 76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아모스의 예언활동이 그친 얼마 뒤에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아모스가 선포한 신탁들을 모우고, 또 자신이 직접 밝힌 자서전적인 내용(7,1-9; 8,1-3; 9,1-4)을 덧붙여 아모스서의 골격이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남 유다에서도 계속 살아 움직여서 유다에 관한 내용이 뒷부분에 덧붙여졌지요.
아마 최종적인 아모스서의 형태는 다른 예언서들처럼 유배기나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합니다.

왜 쓰여졌나요?

아모스가 예언자로 등장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저물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이 위축된 탓에 기를 펴고 살면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북 이스라엘의 부유층은 가난한 동족을 괴롭히는 불의를 자행하며, 자만과 향락 속에 빠져 안일하게 살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았으므로 그분의 보호를 받아 아무 일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의 환상을 지니고, 자기식의 예배행위에만 열중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태평스레 있는 백성들에게 아모스는 무서울 정도로 엄하고 가혹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 심판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넘어,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실제로 계시며 그분은 정의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주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것을 강하게 일러준 것이죠.

 <새김과 나눔>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될 때, 우리는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며 현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불과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실현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야훼를 찾아라

(아모 1-9장)

아모스서는 9장인데,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아모 1,1-2,16)

하느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신 나라는 모두 몇 나라입니까?(2,21-24)

 하느님께서 외치시면 가르멜 산마루의 푸른 초원이 말라버릴 정도로, 말씀의 힘은 살아 있고 대단합니다. 이제 그 하느님께서 다마스커스, 불레셋 등 여러 민족의 죄상을 드러내며 그들에게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의 죄는 다른 민족 사람들을 마구 다루고 죽인 잘못입니다. 그 누구라도 형제를 괴롭히고 생명을 짓밝는 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욕보이는 짓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역시 죄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우상을 섬겨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힌 잘못을 범했다고 고발되죠. 그들은 자신들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맡겨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규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된 것이에요.

 네 하느님과 만날 채비를 하여라(아모 3,1-6,12)

아모스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두 가지 송가를 크게 읽어 보십시오(4,13; 5,9-8)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아모스의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아모스는 자신이 원하거나 자의 적인 판단에 따라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왕실과 부유한 세도가와 그들의 귀부인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규탄하며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다른 형제들을 자기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아 무시하고 괴롭히며, 오직 자기 중심적으로 허영심과 자만심에 빠져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도 성소에서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봉헌하며 감사예물을 끊임없이 바치지만, 아모스는 이

것 역시 살아 계신 하느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과 순종함이 없는 자기 기만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하느님과 떨어져 죽음의 길을 가는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아와 살 길을 찾으라고 부르짖습니다.

 다시는 뿌리뽑히지 않으리라(아모 7,1-9,15)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시의 내용과 뜻은 무엇입니까?(7,1-9; 8,1-3; 9,1-4)

아모스가 본 환시들은 심판의 말씀을 한층 더 생생하게보완해 줍니다.
그러나 베델의 사제 아마지야는 그를 추방하여 그 말씀을 무시하려고 하죠.
하지만 먹을 양식은 넘쳐도 참된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리는 처지는 외적인 불행보다 더 심한 내적인 고통이요 심판입니다.

결국 아모스가 선포하는 요점은 하느님을 무슨 안전장치 쯤으로 여기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되고 결정적인 힘이신 하느님의 실재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가(회개하여) 하느님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섬기고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 때,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오리라는 선포랍니다.
누구든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습니다.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모스 5: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아모스서는 저자의 이름을 따라 정했으며, '아모스'는 '짐을 지는 사람'이란 뜻으로, 이는 여호와를 거부하거나 아예 망각하고 있던, 당시의 남.북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어려운 사역을 수행해야 했던 아모스의 소명과 잘 어울다고 할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남유다 예루살렘 남방 약 20km지점에 위치한 드고아의 목자 출신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당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였으나,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타락이 극심했던 북이스라엘을 일차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당시 일시적 부강과 번영에 도취되어 여호와 신앙을 떠나 인본주의적. 세속적 타락에 함몰된 선민의 사회 정의의 상실을 중심으로 한 적나라한 지적과 그에 대한 철저한 심판 및 공의의 징계 이후의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에 의한 회복 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먼저 다메섹(1:3~5), 가사(1:6~8), 두로(1:9~10), 에돔(1:11~12), 암몬(1:13~15), 모압(2:1~3), 유다(2:4~5)에 이어, 그 정점으로서 이스라엘(2:6~16)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1~2장).

그리고 이어 심판 예언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을 향해 온갖 불의와 불법을 행하고 형식적으로만 예배하는 사회 지도층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지, 그 당위성을 설교(3~6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모스서는 마지막으로 다섯개의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굳은 결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7~9장). 

처음 메뚜기 환상(7:1~3)과 불 환상(7:4~6)에서는 아모스의 간구로 하나님의 심판이 유예됩니다.

그리고 다림줄 환상(7:7~9)과 여름 과일 환상(8:1~3)에서는 선지자의 간구가 더이상 소용없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소 붕괴 환상(9:1~4)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음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서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파괴에 따른 사회 정의의 실종에 관한 내용

아모스서는 사회 정의가 붕괴된 선민 사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부패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본서에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무자비한 횡포(3:9.10; 4:1)와 수탈과 폭리(2:1; 5:11)및 상류 계층의 사치와 방종(2:8; 6:4-6) 등의 다양한 사회 악이 거듭하여 예리하게 지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불가피함이 예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본서에는 불의와 사회 정의의 실종에 대한 질타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파괴에 대한 지적이 더 많은것을 볼수 있습니다(2:12; 3:4. 5;  5:18-27).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 정의의 붕괴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파괴된 데서 찾으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5:4).

그런 점에서 본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인 인간 상호간의 사랑과 정의의 회복을,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와의 바른 관계 회복과 긴밀하게 연결시킨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서는 수평적 인간 관계의 파괴와 사회 정의 붕괴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나타난 가시적 현상임을 밝힘으로써 사회 정의의 회복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여호와 신앙의 회복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모스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파괴에 사회 정의 붕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수평적 차원의 인간 사랑과 사회 정의 구현이 가능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집중적으로 설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외적 번영에 초래된 영적 피폐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의 무대였던 북이스라엘을 보면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등, 다윗과 솔로몬 이래 최대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외적 번영과 반비례하여 영적으로는 매우 피폐했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순수한 신앙의 열정은 식어지고, 형식적 신앙으로 주변 나라의 우상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사회에는 사치와 방탕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부패와 압제가 횡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외적 번영에 심취되어 신앙과 도덕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외적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임은 분명하나 여기에만 관심을 두게 될 때, 보다 가치 있는 영적 축복의 중요함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을 알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내면적인 것보다 외면적인 것, 영적인 것보다 세속적인 것에 빠진 사회는 피폐해지고 개인은 강팍하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외적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이로 인하여 영적 문제에 소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외적 번영이 영적 피폐를 가져온다면, 외적 번영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만들어버린 아모스 당시 선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본서는, 외적 번영에 내재된 위험에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큰 축복으로 키워나가는 영적 성숙함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회 정의 구현에 힘쓸 책무를 지닌 지도층을 향한 말씀

모든 예언서가 종교적 타락과 더불어 사회적 범죄와 도덕의 붕괴를 지적합니다.  따라서 아모스서 역시 마찬가지이나, 다른 예언서에 비하여 사회적 범죄와 도덕의 붕괴를 더욱 많이, 그리고 더욱 강력하게 질타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아모스는 사회 지배 계층의 부패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예를 들어 4:1-5 에서는 사회 지도층이 약자를 압제하는 악행을 자행하며, 자기 만족적 종교 행위에 심취하여 있음을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6:1-14에서도 안일에 빠진 지도층 사람들이, 주제 넘고 포악하며 향락적이고 불경건하다는 사실을 질타하며,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처럼 아모스가 지도층의 타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들의 범죄가 일반 사람들의 범죄보다 더 심각 하다는 점과 더불어, 그들의 타락이 미치는 파급 효과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더욱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하며, 사회적으로 더 큰 기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월한 위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약자들을 수탈하는 등 범죄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 지도층들의 범죄는 다른 사람들을 본받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그들의 행동은 자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민 사회의 타락에 대하여 그들의 책임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특히 사회 지도층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바른 자각을 가지도록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넷째,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종교 행위에 대한 질타

아모스서에는 다른 예언서에 비하여 사회 정의의 실종에 대한 질타와 이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모스서에는 종교적 타락과 범죄에 대한 지적 역시 적지 않습니다. 선민 사회에서 사회적 타락과 종교적 타락은 동전의 앞뒤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범죄 중 더욱 근원적이며 고질적인 범죄는 종교적 범죄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범죄의 뿌리에서 자라나는 가지가 사회적 타락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가 본서에서 주로 초점을 맞추는 종교적 범죄는 형식적인 여호와 신앙과 기복적인 종교 행위였습니다. 아모스 당시 선민들은 조상들의 관행에 따라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며, 각종 절기를 지키는 등 그들 나름대로 종교 행위를 했습니다(4:4.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절기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성회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드리는 각종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5:21.22). 이는 그들의 종교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복적인 목적에 바탕을 둔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삶에 바른 신앙의 열매가 없었다는 점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숭배하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다는 점에서 잘 드러납니다(5:26).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가증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과 더불어 동반 멸망할 것을 경고하셨고(5: 26. 27), 또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은 벧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 활동을 악의적으로 호도하고 예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7:10-13). 제사장으로서 참된 선지자의 사역을 방해한 아마샤에게는 그의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는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7:17).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바르게 섬기지 않는 행위를 매우 가증하게 여기시며 엄격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본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종교 행위는 과거 구약 선민 이스라엘이 행하였던 악행만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신앙인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을 때 범하기 쉬운 죄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아모스서는 오늘날 성도에게도 형식적이거나 기복적인 신앙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깨닫게 하며 자신이 이와 같은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를 점검해 보도록 경각심을 일깨워야 할것입니다.


다섯째, 절대 공의에 업각한 하나님 심판의 공정성

본서의 주된 내용은 정치, 경제, 군사 등 외적번영에 도취되어 여호와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의 길을 가는 북이스라엘의 신앙적 범죄와 사회적 타락을 지적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서에는 북이스라엘의 범죄 지적과 심판 선언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람, 블레셋, 베니게, 에돔, 암몬, 모압 및 남유다에 대한 범죄 지적과 심판 선언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나라에 대해서만 심판하시거나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만 특별한 기준을 적용시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는 예외없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본서 예언의 주된 대상이 되는 북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유다에 대한 심판도 선언하셨고, 더 나아가 주변 6개국 등 도합 8개국에 대한 심판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대 공의에 입각한 심판은 공간적 한계를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적 한계도 가지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모스 시대의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자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온세상에 대한 심판자이시며 오늘날 우리들의 심판자도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과거 아모스 시대에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심판하셨듯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2700여년 전에 기록된 아모스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가치를 지니는 것도 이와 같은 불변의 진리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여호와 신앙의 회복

본서는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범죄의 지적과 범죄한 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 사이에 여호와를 찾으라는 권고가 발견되어지며(5:4-9), 또한 이와 더불어 악에서 돌이키라는 회개 촉구도 나옵니다(5:10-15). 이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여호와를 찾는 데 있음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에서 돌이키라는 회개의 촉구가 나아오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찾아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대한 외적 증거를 보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 촉구 역시 여호와를 향한 바른 신앙을 회복하라는 권면과 별개가 아닌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범죄와 불행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범죄와 불행의 근본적 치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에서 출발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것도,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어그러진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관계를 바로 회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범죄한 인간 스스로 바로 잡을 수 없는 양자간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아모스서를 통하여 이러한 구속의 진리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것만이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곱째, 변경되지 않는 선민 회복의 약속

본서에는 범죄에 대한 여호와의 준엄한 책망과 범죄한 자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여호와의 심판 집행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 거듭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서의 마지막 단락인 9:11-15에는 비록 짧으나마, 선민의 회복 약속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본서는 선민의 구원이란 밝고 고무적인 내용으로 마감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분이실 뿐만 아니라 택한 자는 반드시 구원하시는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알게 합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선포되는 약속은 선민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선민으로서 누렸던 축복들보다 더욱 큰 축복들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부분의 약속은 구약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데서 벗어나, 본토에 귀환하여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의 구속사가 완성되는 날, 신약 선민인 성도 모두가 새하늘과 새땅에서 누릴 종말론적 축복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본서는 일차적으로 B.C.8세기의 범죄로 얼룩진 암울한 영적 상황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따라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영적으로 각성된 구약 선민에게 주어진 소망의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본서는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된 어두운 현실 속에서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에게도 종말론적 소망을 갖게 하며 큰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한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데 평일에는 열심히 도박장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여기실까요? 십일조와 헌금은 꼬박꼬박 하면서도 여전히 탈세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모, 자식, 형제와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바로 아모스서는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모스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끝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모스는 여호와를 사자로 보는 은유법을 사용하며, 남은 자를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파멸의 상징으로 제시하는 충격 요법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모스의 선포의 원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의 상류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원인을 보여 주는 아모스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예배는 윤리로, 사랑은 공의로 나타나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론

사마리아인들은 침대상에 누워 헛된 구원의 신학을 지절거리며 아모스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 목자는 이제 그들의 죽음의 증거만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이들의 어리석음이, 바로 오늘 우리의 어리석음은 아닐까요? 
번영과 축복의 신학 위에서 성공 신드롬에 걸린 우리의 모습이, 사마리아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단지 염세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만은 아닐것입니다. 
울부짖는 사자로서의 여호와의 은유를 통해 아모스 기자가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했던것이 바로 이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기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갱신하느냐, 아니면 끝이 없는 역사 자체의 심판을 받느냐하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선택은 여러분 각자의 몫 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여러분의 영원한 삶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간과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의 언약 관계를 갱신하길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7월 12일(수) 아모스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묵시 받은 말씀(1절)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The words of Amos, one of the shepherds of Tekoa--what he saw concerning Israel two years before the earthquake, when Uzziah was king of Judah and Jeroboam son of Jehoash was king of Israel.

묵시 받은 말씀(The words of Amos)

* 묵시(2372) 하자(châzâh) חָזָה

1. 보다.  2. 하나님을 보다.  3. 민수기 24:4
발음 / 하자[ châzâh ]
관련 성경 / 보다(욥15:17, 시58:10, 겔12:27), 우러러보다(욥36:25), 바라보다(시63:2, 미4:11), 받다(사2:1), 이상(異像)으로 받다(암1:1, 합1:1), 보이다(사30:10), 들어가다(욥8:17), 뵙다(욥23:9, 시11:7), 깨닫다(욥34:32), 보게 하다(아6:13).
구약 성경 / 55회 사용

* 묵시(2378) 하조투(châzôwth) חָזוֹת 

1. 이상.  2. 계시.  3. 묵시
발음 / 하조트[ châzôwth ]
어원 / 23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묵시(역대하 9:29).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잇도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구약 성경 / 1회 사용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

- 아모스는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인물로 보인다(호 1:1).
당시에는 여로보암 2세가 남방 유다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시기로(왕하 14:25) 대단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지진이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스가랴에 의해 다시 언급된것을 보면(슥 14:4, 5), 상당히 큰 지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가랴 14:4-5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요세푸스는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 했을 때 문둥병이 발하게 되었던 시기(대하 26:16-20)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어쩌면 이 지진은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을지도 모른다(Feinberg).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 '드고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넓은 들판이 있었고(대하 20:20; 렘 6:1), 목양에 좋은 곳이었다(Jerome, S.R.Driver).

한편 '목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케드'(5349)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 '로에'(7443. 로이)와는 달리 털이 많은 양을 키우는 목자이거나(BDB), 비교적 좋은 양을 키우는 목자로 여겨진다. 이 단어가 모압 왕 메사에게 적용되기도 했는데(왕하 3:4), 그는 양을 기르고 공급하는 사람이었다(T.E.McComiskey).

7473. 목자(로이. rôʽîy) רֹעִי 

1. 목자의.  2. 목자
발음 / fhdl[ rôʽîy ]
어원 / 형 7462의 능동태 분사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목자(사 38:12, 슥 11:17).
구약 성경 / 3회 사용

5349. 목자(노케드. nôqêd) נֹקֵד

1. 양의 일종을 지키는 목자. 2. 목자
발음 [ nôqêd ]
어원 / 5348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분사형
관련 성경 / 목자(암 1:1), 양치는 자(왕하 3:4).
구약 성경 / 2회 사용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

- '...가 받은 말씀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베레이'(1697)는 어록집과 같은 형태의 책들에서 자주 사용되었고(잠 30:1; 31:1; 전 1:1; 렘 1:1), 고대 히타이트의 봉신 계약 문서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전문적인 선지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모스는 당시 부패했던 선지자들과는 달리 대중들에게 참신한 인상을 줄수 있었을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할 때 최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당시 주변 강대국의 약세를 이용하여 여로보암 2세는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번영은 종교적인 타락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에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하나님은 죄를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든 여호와 심판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주변 국가들의 죄에 대해서도 심판을 선포합니다.

아모스 1장은 서론에 해당하며 이스라엘과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범죄를 고발하고 그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합니다.

특히 다메섹을 비롯한 가나안 국가들의 멸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아울러 회개를 제시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의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종말론적인 희망을 제시합니다.

아모스는 먼저 이방 민족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여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이방 민족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라고 하겠습니다.

아모스 1장의 내용 구분
1:1-2. 심판 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심판의 주체가 누구인가
1:3-5. 다메섹에 대한 심판
1:6-8. 가사에 대한 심판
1:9-12. 두로와 에돔에 대한 심판
1:13-15. 암몬 족속에 대한 심판

하나님은 교만과 우상 숭배로 얼룩진 이방 나라의 심판을 먼저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외쳤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벌써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진노의 존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으면서도 자신에게 조그만 잘못을 범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도들은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가르치는 본을 보여주는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의 화신이 되어 이 세상을 사랑으로 메꾸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모스는 누구인가?(아모스 1:1)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드고아에서 양 치던 목자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해 받은 메시지다.
웃시야가 유다를 다스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의 왕이던 시기, 곧 대지진이 있기 이 년 전에, 이 메시지가 환상 가운데 그에게 임했다.

아모스서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전반적인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웃시야가 유다를 다스리고 여로보암2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시기라고 합니다.
웃시야의 시대 B.C 792-740년, 여로보암 2세의 시대가 B.C 793-753
학자들은 아모스가 B.C 750년 즈음에 활동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철기시대, 우리 나라는 고조선 시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즈음입니다.

지진이 있기 이 년전'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지진이 정확하게 언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때는 남북 모두 커다란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군사적, 정치적으로 위상도 높았구요.
그런데 그래서일까요.. 우상 숭배, 사치, 방종, 사법적 부패,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 등이 만연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계속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경고하셨지만그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B.C 722년, 먼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나라에게 멸망합니다.
아모스가 외친지 약 30년이 흐른 뒤의 일이지요.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드고아라는 지명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마을입니다.
남유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북쪽으로 올라와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궁정 출신이나 제사장 가문의 사람도 아닙니다.
목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겸손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 같네요.
그가 아모스서에서 보여준 언어구사능력과 역사에 대한 통찰은그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거든요.

아모스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북이스라엘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번영이 오히려 영적 타락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으니까요.
그 번영은 상류계층에게 집중된 것이었고, 일반 국민들은 소외감과 박탈감까지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상류층은 더욱 탐욕을 부려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면서 부정을 자행하고 있었구요.
북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아모스는 그 상황을 보면서 피끓는 마음으로 달려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외침은 오늘 우리들이 다시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포효(咆哮)하는 사자(아모스 1:2)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 포효(咆哮) : 고함지를 포, 성낼 효 / 사납게 외침. 사나운 짐승의 울부짖음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포효하시고예루살렘에서 고함치신다.
청천벽력같은 그 소리에 양 치는 목자의 초장이 시들고 갈멜 산 꼭대기가 벌벌 떤다.

성경연구를 할 때나 묵상을 할 때 제일 먼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 등
하나님의 모습을 찾고 나면 전체 본문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결정되지요.

아모스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부르짖고, 고함을 치시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포효한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듯합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을 '사자(lion)'로 묘사합니다.
아마, 목자 출신인 아모스의 경험이 반영된 표현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자가 지금 이스라엘의 적을 향하여 포효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해 포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두 곳은 같은 곳을 나타냅니다. 시적 반복이지요.) 사자가 부르짖을 때,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도 말라버립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에 놓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항상 선한 목자로만 생각했고, 그들의 적을 향해서만 포효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아모스는 지금  "하나님은 더 이상 너희들의 목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너희 앞에서 부르짖는다.
너희가 주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희를 삼키실 것이다!" 

다메섹에 대한 심판 예고(아모스 1:3-5)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4.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5.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다마스쿠스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길르앗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
쇠망치, 나무망치로 무자비하게 두들겨팼다.
나는 하사엘의 왕궁에 불을 놓고, 벤하닷의 요새들을 태워버릴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성문들을 박살낼 것이며,죄의 골짜기에 사는 범죄자 왕,낙원 왕궁에서 호령하는 그 악독한 우두머리를 쫓아낼 것이다.
그 땅의 백성들은그들이 본래 살던 곳, 기르로 돌려보낼 것이다."

하나님의 포효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부르짖는다는 하나님의 외침이 당시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모스가 일단 주변에 대한 심판을 먼저 선고하면서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첫번째 대상은 다메섹입니다.
다메섹시리아의 수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리아를 대표합니다.

성경에서 시리아아람이라고 하며,  다윗 왕 때부터 이스라엘과는 숙적이었습니다.
특히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했을 때 여러번 싸웠지요.
요단강에서 몸을 씻어서 피부병이 나은 나아만 장군도 아람 사람입니다.

아모스는 아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이유를
그들이 길르앗을 가혹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철타작기라는 표현은 아주 가혹하고 철저하게 침략했다는 표현이겠지요.
정확하게 어느 때 그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열왕기하에 있는 사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4절에는 하사엘과 벤하닷이 등장합니다.
둘 다 열왕기상하에 이름이 나타납니다.

벤하닷은 열왕기하 6장에서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병이 들었을 때 엘리사에게 하사엘을 사자로 보내어 자신의 병이 나을지를 물어봅니다.
그만큼 엘리사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 때 엘리사는 하사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립니다.
놀란 하사엘이 왜 그러시느냐고 묻자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이다"(열왕기하 8:12)

엘리사의 예언은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날 저녁 하사엘이 벤하닷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열왕기하 10장에서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공격하지요.
그 때 길르앗을 특히 잔인하게 침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길르앗이 그냥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표현일수도 있구요.

아모스가 예언하고 있는 지금은 그로부터 약 100년정도 흐른 때입니다.
그렇다고 100년전 잘못을 가지고 지금 심판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그동안 계속 보여준 그들의 잔인함을 심판하는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하나님의 정의는 이처럼 비인간적인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갚으시는 응보적 정의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악행에 대해서 참지 않으시지요.
심판의 불을 보내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사엘의 집, 벤하닷의 궁궐, 다메섹의 빗장 이런 표현은 모두 아람을 의미합니다.
아람이 파괴되고, 아람 사람들, 특히 아람 왕이 죽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B.C 732년, 즉 이 예언이 있은 후 약 20년이 흐른 뒤에 다메섹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합니다.

더구나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서 기르에 이른다고 했는데요,  기르지방은 아람백성이 시작되었던 지역입니다.
즉, 아람백성을 기르로 잡아간다는 의미는 그들의 역사를 처음으로 돌려놓겠다는 하나님의 무서운 의지가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와 두로에 대한 심판경고(아모스 1:6-10)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7.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8.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10.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하나님의 메시지

"가사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민 전부를 몰아내서는, 그들을 에돔에 팔아 버렸다. 나는 가사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모조리 태워 버릴 것이다. 내가 범죄자 왕을 아스돗에서, 그 악독한 우두머리를 아스글론에서 쫓아낼 것이다. 내가 손을 들어 에그론을 칠 것이며, 블레셋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두로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민 전부를 에돔에 넘기고, 자기 친족들과 맺은 조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는 두로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모조리 태워 버릴 것이다."

아모스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총 8개의 경고를 합니다. 
나라들은 달라지지만 심판의 내용은 비슷비슷합니다.

두 번째 경고는 가사성으로 대표되는 블레셋 민족들에 대한 것입니다.
블레셋에 대해서는 그래도 많이 들으셨죠?  골리앗으로 대표되는 그 민족이지요.

8절에 있는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드, 가사까지 합쳐서 5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사시대부터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다윗 왕 시대에 거의 정복되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했습니다. 

블레셋 민족들에게 심판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포로들을 노예로 삼거나 팔아버리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그 사실 자체를 지적하기 보다는 포로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유대 사람들일 가능성도 높구요. 그들에 대한 심판은 역시 불을 보내어 궁궐을 사르고 남은 자까지 멸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심판은 두로를 향한 것입니다.
두로는 이스라엘의 북서쪽 해변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원래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에서 기술자를 보내기도 했고, 아합왕의 아내였던 이세벨도 두로 출신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두로에게 심판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 역시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았다'라는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지요.
이 또한 이스라엘과의 조약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또다시 불로 궁궐을 태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국에 대한 심판경고는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의 배후에 계시며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인류의 역사가 겉으로는 국가간의 조약이나 전쟁들에 이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것이지요. 그냥 종교적인 부분만 이끌어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의 드라마 속에 있다.'고 표현했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의의 법칙에 따라 세계를 움직이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나 내 가정, 내 교회의 복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치하시며 이끌어가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너무 개인적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관심은 오직 '열방 복음화'에만 맞추어져 있을 때가 많지요.
물론 그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집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국의 하나님이시며 만유의 주이십니다. 


에돔과 암몬에 대한 심판 경고(아모스 1:11-15)

1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12.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14.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15.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에돔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형제를 사냥감 쫓듯 쫓아서 살해한다.
무자비하고 무정하다.
분을 품고서 밤낮으로 미쳐 날뛰며,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그의 수도 데만을 불태워 허물고, 보스라의 요새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

"암몬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땅을 더 차지하겠다고, 그는 임신한 길르앗의 여인들의 배를 갈랐다. 나는 그의 수도 랍바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 전쟁이 고함친다! 으르렁댄다!  회오리바람과 함께 닥치는 대로 쓸어간다! 왕이 포로로 붙잡혀 갔고,  그의 제후들도 그 뒤를 따른다"

하나님의 포고

하나님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심판 경고가 떨어집니다. 
세 번째 까지는 이스라엘과 혈통적 관계가 없는 시리아(아람), 블레셋, 두로였는데  이제부터는 이스라엘과 혈통적 관계가 있는 나라들이지요.

네 번째 대상은 에돔입니다.
에돔의 기원은 이삭의 아들이며 야곱의 쌍둥이 형이었던 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선 동생이었던 야곱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셨고,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지요.

창세기에서는 에서와 야곱이 어느 정도 화해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후 이스라엘과 에돔은 계속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에돔은 매우 호전적인 민족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무자비하다, 항상 화를 낸다, 끝없이 분을 품는다라는 구절들이 반복됩니다.
실제로 약 170년이 지난 후 결국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에돔은 유다의 영토였던 곳을 침략합니다.

다섯 번째 심판의 대상인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후손들입니다.
소돔에서 탈출한 뒤 산에 머물고 있던 롯의 두 딸이  롯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해서 아들들을 낳았고 큰 딸의 아들이 모압, 작은 딸의 아들이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암몬 또한 매우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침략하곤 했습니다.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니, 암몬 자손에 대한 묘사가 제일 잔인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호전적인 에돔과 암몬이 하나님의 불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현대에도 이러한 잔인한 일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이나, 르완다나 보스니아의 인종청소(이 얼마나 끔찍한 단어란 말입니까!), 일본의 난징 대학살 등등 인류의 잔인한 모습은 에돔과 모압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7월 13일(목) 아모스 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짓 것(4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This is what the LORD says: "For three sins of Judah, even for four, I will not turn back {my wrath}. Because they have rejected the law of the LORD and have not kept his decrees, because they have been led astray by false gods, the gods their ancestors followed,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astray by false)"

* 3577. 거짓 것( 카자브.  kâzâb) כָּזָב    

1. 거짓말.  2. 속이는 행위.  3. 시편 40:5
발음 / 카자브[ kâzâb ]
어원 / 35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짓말(삿 16:10, 잠 14:5, 단 11:27), 거짓(시 4:2), 거짓말하는 자(시 5:6, 잠 19:22), 거짓(시 40:4, 잠 21:28, 겔 22:28).
[형] 거짓되다(시 62:9, 겔 13:6,7), 간사하다(잠 23:3).
구약 성경 / 31회 사용

아모스 2장에서는 모압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종교적 의무를 다 이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실 때 물질이나 형식적인 헌신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즉 그의 중심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바울의 교훈과 같이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모든 인간에 대한 동일한 근거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 기준이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롬 1:17).
그런데 이런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의 이행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서 1장에서 이방 나라들의 심판을 예언한 선지자는 2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은 것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장에서 선지자는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구원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므로 절대적인 구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속에 존재하는 구원의 언약이 사실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교적 율법의 준수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말씀에 따른 삶에는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인 율법의 의무 이행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전삶의 형태까지도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의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사람이 자신의 행함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압에 대한 심판경고(아모스 2:1-3)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
2.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3.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죽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모압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에돔 왕의 시신을 불에 태워 모독했다. 나는 모압을 불태워 허물고, 그리욧의 요새들도 태워 버릴 것이다.
모압은 고함소리 중에, 전쟁나팔소리와 함께 망할 것이다.
내가 그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제후들도 다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여섯 번째로 모압에 대한 심판 경고.
모압 암몬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서 시작한 민족입니다.
큰 딸이 롯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낳은 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압도 암몬처럼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압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조금 이상합니다.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다는 것이 심판의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일단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옛 형벌이었던 부관참시(무덤을 파서 시체를 다시 죽이는 상징적이고 모욕적인 형벌이지요)와 비슷한 것은 알겠는데, 그 대상이 에돔 왕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돔은 어제 우리가 보았던대로 아모스의 심판 경고를 받은 이스라엘의 오랜 적국이자 잔인한 민족입니다.
어떻게 보면 심판 받아 마땅한 민족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그 나라의 왕의 시체를 모독한 것이 심판의 이유라니요?
이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은 민족적 배타주의를 뛰어 넘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힌다는 이유가 아니라 비인간적 야만 행위 그 자체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민족, 혹은 어떤 사람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해도 그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범죄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현대 사상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이로써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라들에 대한 심판 경고는 끝이 났습니다.
여섯 번의 심판 경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은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범죄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악에 대한 우리의 시각 또한 넓어져야 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이나 테러,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인종차별주의,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는 경제 만능주의,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양극화..
이런 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은 종교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만 모두 환원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깨어진 세상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 온전한 샬롬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 서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괴로워하며 슬퍼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원한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우리들은 약자들의 신음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의 하나님이시니까요.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아모스 2:4-5)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5.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하나님의 메시지 

"유다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했고, 내 명령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오래된 거짓말, 그들의 조상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거짓말은 잘도 집어삼킨다. 나는 유다를 불태워 허물고, 예루살렘의 요새들을 다 태워 버릴 것이다."

아모스의 심판 경고는 일곱 번째에 접어들었습니다.
7이란 완전수가 아닙니까?
아마도 이 무시무시한 심판 설교를 듣고 있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다.
북이스라엘과 같은 핏줄이면서 가깝고도 먼 나라.
성경에 보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전쟁도 하고 교류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B.C 930년 경 나누어졌고, 지금 아모스가 설교하고 있는 때가 B.C 750년쯤 되니까 남북이 나뉜 지 180년.

유다의 죄목은 무엇입니까?

다른 이방나라들과 마찬가지의 기준이 적용될까요?
오늘 아모스의 경고에는 남유다의 구체적인 행위들은 나타나지 않고 포괄적인 죄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죄목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짓 것에 미혹되었다."입니다.
유다는 (북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백성 입니다.
오래 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시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영원히 지켜야 할 율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율법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때 지켜야 할 것들이었지요.
각종 의식법과 더불어 시민법, 도덕법들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그 후 이스라엘의 행위를 재는 기준이 되어 왔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며 살았습니다.
일단 처음에 율법을 받았던 조상들조차 광야에서 계속해서 불순종했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도래했던 사사시대는 '각각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정의되었으며,  그 지혜롭던 솔로몬왕도 말년에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남북으로 나뉜 후에도 대부분의 왕이 악한 길로 갔습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면에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마땅히 하나님을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 안에도 그 율법을 따르지 않는 모습들이 만연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주인이 아니라 도구로 삼아서 복을 비는 대상으로 축소시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대신 스러져 없어지고 말 거짓 것들을 따라갑니다.
배금주의, 성공주의 이런 것들이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거짓 것들이지요.
심지어는 점을 치거나 궁합을 보거나 하는 일까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도 스러져 갑니다.
내 몸을 너무나 사랑해서 열심히 다이어트와 헬스를 하고 보양식도 먹지만 이웃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에는 인색하며 내 가족은 사랑하지만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지요. 이런 모습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쩌면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들에 대해 심판의 경고가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7이라는 완성의 숫자로 보아 심판 경고가 끝날 것 같으니, 하나님께서 결국 북이스라엘을 높이시겠다는 선언으로 들리지 않았을까요?


아, 이스라엘이여! (아모스 2:6-8)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이스라엘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사고판다. 그들에게 사람은 그저 물건일 뿐이다. 돈벌이 수단이다. 신발 한 켤레를 갖겠다고 가난한 사람을 팔아 버린다. 그들은 자기 할머니도 팔아 치우는 자들이다. 돈 없는 자들을 바닥에 메치고, 불운한 자들을 수렁으로 떠민다. 형이고 아우고 할 것 없이 다들 '신성한 매춘부'와 동침하며,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그들이 가난한 이들로부터 강탈한 물건이 이방 신의 산당에 수북이 쌓여 있다. 그들은 그곳에 둘러앉아 사기 쳐 빼앗은 포도주를 들이킨다."

열국에 대한 심판은 '서너 가지 죄'라고 시작했지만 사실 한두 가지만 선포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정말로 여러 가지 죄가 지적됩니다.
더구나 열국의 범죄들은 전쟁범죄가 많았던 것에 비해, 이스라엘의 범죄는 일상에서 자행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시 북이스라엘의 죄는 어떤 것이었길래 이렇게 아모스가 피를 토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회는 먼저 돈이 우선인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의인 (여기서 의인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혹은 그냥 가난한 이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을 팔았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팔았습니다.
당시에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채권자의 종이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은 학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었고, 7년 째가 되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그들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신발 한 켤레라는 얼마 안되는 돈을 위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짓밟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했으며,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았으며, 그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면 그 길을 굽게 하여 막았지요.
또한 이스라엘 사회는 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동침한 '젊은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려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성전의 창기였다고 말합니다.
가나안 종교의 영향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 의식의 일환으로 그런 매춘이 횡행했다는 것이지요.
어떤 학자들은 그냥 집에서 일하는 하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일어나는 성적 학대를 묘사한 셈이 됩니다.
어떤 의견이 맞는지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쨌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죄악이었지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대가로 종교 행위를 벌였습니다.
원래 율법에 따르면 담보로 취했다가다도 저녁이면 돌려 주어야 하는 겉옷을 깔고 집회에서 누웠으며, 강탈한 포도주로 친교의 시간을 가졌지요.

아모스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도 이런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과는 경우가 다르니 종교적 타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모든 것을 생명과 인격의 관점이 아니라 경제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측정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약한 자들의 복지와 권리를 인정하기 보다는 그들을 계속 억누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해서 가정이 깨어지고 밤의 문화가 성행합니다.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일부 타락한 특권층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만 정도와 범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겠습니까?

열국에 비해서 훨씬 더 심하게 까발려지고 있는 그들의 상태에 대해 들으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타락했던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모스의 말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지적받아야 할 범죄가 남아 있으며 그에 따른 심판 경고가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기억하라! (아모스 2:9-11)

9.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10.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11.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나는, 나는 언제나 너희 편이었다. 나는 너희와 맞서던 아모리 사람들을 멸했다. 큰 백향목처럼 키가 크고, 굵은 상수리나무처럼 억센 그들을 멸했다. 내가 그들을 꼭대기에서부터 뿌리 끝까지 멸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건져내고, 너희의 사십 년 광야 길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식은 죽 먹듯 차지하게 했다. 나는 너희 젊은이들 중에서 예언자들을 길러 냈고, 으뜸가는 젊은이들을 구별하여 거룩을 훈련시켰다. 그렇지 않은가, 이스라엘이여!"

다른 이방 나라들보다 오히려 더욱 무거운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 그들에 대한 심판 경고에는 다른 나라들에게는 없었던 독특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들이 기술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먼저 아모리 족속을 멸하셨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강한 족속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키가 큰 백향목과 강한 상수리나무에 비유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이 정탐하러 갔다가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비하하며 좌절하게 만들었던 그 민족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후에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열매부터 뿌리까지' 멸하셨지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랬듯이, 이스라엘이 칼과 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이 출애굽사건은 예언서 전반에 걸쳐서 계속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당대 최강의 제국이었던 이집트와 그 신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가장 잘 나타난 사건이었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강대함에 두려움을 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지요. 징계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나실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해서 병든 그들을 고치셨고, 불순종하는 그들을 꾸짖으셨으며, 방황하는 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셨으며, 나실인들을 통해서는 (나실인은 특정 기간동안 하나님께 특별한 서약을 하고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는 등의 거룩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삼손이 대표적이지요.)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지를 보여주셨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아모스가 열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각종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영적 타락은 기억상실증에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범죄하여 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모스 2:6-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12절에는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범죄 :

돈 때문에 의인을 팔았습니다. 적은 금액의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 금액을 주는 자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적은 것을 탐내어 빼앗았습니다. 바로 살겠다는 사람까지 꿰어 잘못 살게 했습니다. 믿는 자들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도무지 긍휼을 베풀지 않고 욕심만 채웁니다.

도적적으로 범죄 :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에게 드나들었습니다. 믿는 자들도 성적으로 타락합니다. 아버지가 퇴폐업소에서 여자를 불렀는데 딸이고, 어린 여학생들이 아버지 또래와 원조교제를 하고, 어린 아이들이 포르노 영상들을 보고 모든 사람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식입니다.

종교적으로 범죄 :

성전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눕고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불의하게 얻은 것들로 성전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범죄하여 얻은 것으로 교회에 헌금하여 존경받는 것과 같습니다. 도박해서 딴 돈으로 십일조 하고 훔친 돈으로 감사헌금 하는 격입니다. 또한 나시르인으로 술을 마시게 하고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말씀대로 전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드러내는 말씀은 전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말씀만 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와 권세를 이용하여 사역자들을 조종하고 자기 변호에 이용하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종교의식을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하나님 말씀까지 자기들의 의도대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2:13-16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을 할 때는 여로보암 2세 때로서 BC790~750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 멸망한 때는 BC721년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뿐입니다. 5:6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1:2에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6:33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리처드 코치가 쓴 「80/20법칙」이 있습니다.
'80/20의 법칙'이란 집중하는 20%에서 80%가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20%에 집중하면 나머지 80%가 해결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주력상품이 회사 전체를 살립니다.
오리온 제과는 '초코파이'가 동아제약에서는 '박카스에프'가 전체 매출의 80%를 넘는다고 합니다.
전략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우선수위를 두고 우선순위에 집중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하면 나머지가 다 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사고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심지어는 덜 중요한 80%에 목숨을 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가 결혼 전에 여러 남성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나름대로 가치 기준을 가지고 어느 한 남자를 선택하면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치 기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누구를 택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A도 좋은 것이 있고 B도 좋은 것이 있고 C도 좋은 것이 있고 하는 식이라면 결국 결정을 미루다가 혼기를 놓칩니다. 뒤에 D와 결혼을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그 D는 A,B,C보다 못한 사람하고 하게 됩니다. 음식점을 하려고 한다면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값, 써비스, 인테리어, 주차장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맛입니다. 다 갖추어도 음식맛이 없으면 안 됩니다. 병원을 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병을 잘 고쳐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다른 사역을 모두 하려고 한다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다른 사역은 저절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주를 이룹니다. 그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예배에 실패하고 예배에 실패하면 부흥이 안 되는데 교육, 구제, 선교가 잘 되겠습니까?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을 잘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선택했으면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 버렸습니다(창 25:33, 히 12:16).
반대로 중요하지 않는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손해를 보는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면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자와 조카 롯의 목자가 싸울 때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삭도 아비멜렉왕이 우물을 빼앗을 때마다 싸우지 않고 양보했습니다.

누가복음10:42에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회복하는 길이고 모든 것이 잘되는 길입니다.


'경건한'(godly)과 '경건'(godliness)의 반대말은
'세속적인'(worldly)과 '속된 마음'(worldliness)입니다.
흔히 영문법에서 명사에 접미사 '-ly'가 붙으면 '~같은' 혹은 '~다운'이란 뜻의 형용사가 됩니다


지도자들을 위해서 (아모스 2:12)


12.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너희는 훈련받는 젊은이들이 탈선하게 만들고, 젊은 예언자들에게는 '예언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어제 영적 타락의 시작이 '기억상실증'일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도자들의 타락입니다.
거룩을 지켜야 할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바른 말씀을 선포해야 할 선지자들이 대중에 영합하는 설교를 하게 되지요.
지금도 그런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잊을만하면 터져나오는 목회자들의 이런저런 비리들도 문제려니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또한 축복, 성공, 비전, 부흥, 평강, 긍정의 힘 등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물론 그런 것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으며 목회자들은 그것을 선포해야 하지만 문제는 역시 균형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성공의 척도는 부나 명예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으며,  부를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이며, 우리의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일 수 있으며, 보통 고난이 있어야 우리가 성장할 수 있으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는 말씀이 같은 무게로 선포되어야 하지요.

지도자들의 타락 또한 이스라엘의 탓이라는 것이지요.
이 또한 지금도 곰곰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일부러 목회자들이 범죄하게 만드는 경우야 없겠지만, 세속적 가치에 휩쓸리지 않으며 지내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하려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듣기에 좋은 말씀을 선포해 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또는 내가 듣기에 좋은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를 찾아 떠나는 것은 목회자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예언하지 않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거든요.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합니다.


다른 나라를 비난하기 전에(아모스 2:13-16)

13.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14.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15.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16.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도저히 너희를 두고 볼 수 없다. 참을 만큼 참아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용량을 초과하여 짐을 실은 마차처럼, 나는 지금 삐꺽거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행동에 들어가면, 너희는 어찌할 작정이냐? 제아무리 빨리 달아나도 너희는 내게서 도망치지 못한다. 힘센 자들의 힘도 소용없다. 전사들도 소용없다. 활 잘 쏘는 자들도 소용없다. 잘 달리는 자들도 소용없다. 전차를 모는 자들도 소용없다. 너희 가운데 최고로 용감한 전사라 해도 아무 소용없다. 그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옷도 챙겨 입지 못한 채 내뺄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지도자들이 타락하며,  결국 이런저런 죄악들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이제 하나님은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경고에 첫머리에 하나님을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비유를 사용한 것이겠지요.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는 어떻습니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요. 메시지는 이 소리를 하나님의 신음소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의 길을 떠나 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내뱉는 탄식소리이기도 하겠지요.  또한 무거운 수레는 땅을 누릅니다.  바퀴로 부드러운 땅을 움푹 패이게 하지요.

어떤 학자들은 이 묘사가 지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1에서 아모스의 이 경고가 지진이 일어나기 2년 전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어쩌면 2년 후, 이스라엘은 끔찍한 지진을 겪으면서 아모스의 이 경고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닥칠 때에는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이시기 때문이지요.

본문에서 활을 가진 자, 발이 빠른 자, 용사, 힘센 자...들이 모두 아무 소용없다고 짧게 짧게 언급하는 아모스의 말투는 매우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 그날은 이렇게 두려운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무서운 경고를 보면서 우리들 또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열국에 대한 심판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쾌재를 불렀을 이스라엘에게 떨어진 무서운 경고를 보십시오. 그 경고를 들으며 새파랗게 변했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익숙합니다. 크게 보면 북한, 일본, 또는 미국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는지금 우리들에게 '다른 나라들을 비난하기 전에 대한민국이 먼저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2)

시편 119:116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Sustain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and I will live; do not let my hopes be dashed.

* 살게하시고(소성케 하시고)  2421 하야(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하야[ châyâh ]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 4:11), 살게 하다(겔 37:14, 시119:17), 낫다(수 5:8, 왕하 8:8), 살리다(창 20:7, 겔 37:5), 지내다(창 5:7), 보존되다(창 19:20), 생활하다(창 27:40, 왕하 4:7), 소생하다(창45:27, 삿 15:19), 거주하다(창 47:28), 살려주다(왕상 20: 32), 살아나다(왕상 17:22), 희생하다(왕하 13:21), 살려두다(민 31:15, 삿21:14), 구원하다(겔 3:18), 유전하다(창 7:3), 부흥하게 하다(합 3:2), 전하다(창 19:32), 기르다(삼하 12:3, 사 7:21), 중수하다(대상 11:8), 일으키다(느 4:2), 소생하게 하다(시 80:18, 7:12), 보전하다(겔 18:27), 풍성하다(호 14:7), 생존하게 하다(수 14:10),구원하다(창 19:19), 보존하게 하다(창 6:20), 살려주다(사 38:16),
[명] 만세(삼상 10:24, 왕하 11:12), 생명(전 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시편 119: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9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7월 14일(금) 아모스 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기의 비밀(7절)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Surely the Sovereign LORD does nothing without revealing his plan to his servants the prophets.

"자기의 비밀(revealing his plan)"
소드(סֹודֹו)

* 5475. 소드(çôwd)  סוֹד 

1. 침상.  2. 동석. 3. 예레비먀 6:11
발음 / 소드[ çôwd ]
어원 / 32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모의(창 49:6, 욥15:8), 꾀(시64:2), 간계(시83:3), 모임(시89:7, 렘15:17), 회중(시111 : 1),의논(시55:14, 잠15:22), 비밀(잠20:19, 암3:7), 회의(렘23:18, 22), 공회(겔13:9), 친밀함(시25:14), 교통함(잠3:32), 은밀한 일(잠25:9). [형] 가까운(욥19:19).
구약 성경 / 21회 사용

3:5 /
창애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에서 뛰겠느냐.

* 창애 - 미끼, 덫, trap

6341. 파흐(pach)  פַּח 

1. 그물. 2. 멸망
발음 / 파흐[ pach ]
어원/ 63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철판(민16:38), 올무(수23:13, 시119:110,사8:14), 그물(시11:6, 잠7:23, 호9:8), 덫(암3:5).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4170. 모케쉬(môwqêsh)  מֹקֵשׁ 

1. 올가미.  2. 상처의 원인.  3. 복수 ־ים
발음 / 모케쉬[ môwqêsh ]
어원 / 33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함정(출 10:7), 올무(출 23:33, 삼상 18:21, 사 8:14), 갈고리(욥 40:24), 그물(잠 12:13, 18:7, 30:25), 덫(암 3:5).
[동] 옭아매다(욥 34:30).
구약 성경 / 27회 사용

인간이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 앞에 일어날 일을 하나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다면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실패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일을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계획을 성도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비밀을 선지자들에게 알려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어려운 세상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한다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며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인간을 향한 구원 계획이며 이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 계획은 영원한 신적 계획으로서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해 나가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한 예정 속에서 완벽하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계획들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일 때에도 먼저 자기의 선지자들에게 밝히 드러내신 후에 집행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집행하시려 할 때에도 선지자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며 임박한 심판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집행자이심과 동시에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죄악을 행하는 인간들에게 진노를 행하시기에 앞서 죄인들인 인간들이 속히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돌아와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할 수 있도록 방편을 마련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정점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나타내셨습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직접 인간의 눈과 경험으로 알 수 있게 하신 은혜의 현신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계획을 선지자에게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시대에 온 인류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3:10 /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른(6213) 일(5228)(עֲשֹׂות־נְכֹחָה) 이소트 니코하흐  

* 6213. 일(아사. 
ʽâsâh)  עָשָׂה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아사[ ʽâsâh ]



* 5228. 바른(나코아흐. 
nâkôach) נָכֹחַ 

1. 바른.  2. 정직한
발음 / 나코아흐[ nâkôach ]
어원 / 522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른(삼하 15:3), 적당한(잠 24:26), 정직한(사 26:10). [명] 바른길(사 57:2).
구약 성경 / 4회 사용



말씀묵상

하루는 공자가 노나라 임금 애공에게 군주와 백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공자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군주민수(君舟民水)’라고 말했습니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는 뜻입니다.
백성은 임금을 띄우는 물이 되기도 하지만 성난 민심은 임금을 뒤집는 물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맞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겸손한 임금을 세워서 그를 받들어 주는 물이 되기도 하지만 임금이 백성의 뜻에 합하게 정치하지 못했을 때 민란이 일어나고 임금을 뒤집는 성난 물결이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세상의 군주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대로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현장, 공동체, 가정, 일터, 교회, 세속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성취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렇게 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지극한 짝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들은 강력한 제국도 아니었습니다.
잘난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의리가 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배반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잘난 민족과 힘센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그 제국들을 제쳐놓고 히브리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극히 아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만을 알았나니’ 하나님은 그들만을 아는 사랑에 굶주린 바보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택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이 나를 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잘난 것도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사악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배신당하셨습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실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서운 진노를 보여주심으로 또 다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이 말씀은 그 당시 집권자들에게 주시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자기 궁궐에 있는 자들은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궁궐에서 행하는 일들은 세심해야 합니다.
그들이 판단하는 것들이 백성들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작정하고 백성들을 강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판단 한 가지가 잘못되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임금이 지금 궁궐이 좁은 것 같으니 크고 넒은 궁궐을 짓자고 할 때 옆에 있는 간신들이 손뼉을 치며 그렇게 하자고 말합니다.
그 말이 결정되는 순간 백성들은 피눈물이 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임금이 자존심 상한다고 해서 이웃나라와 전쟁을 하자고 하면 백성들은 전쟁터에 끌려 나가야 됩니다.
한 두 사람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잃은 가정에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납니다.
백성들의 시체가 온 산천을 뒤덮을 것입니다.
궁궐에서 그들이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백성들은 한숨 쉬고 고통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옛날 북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백성들을 괴롭게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보십시오. 15절입니다.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겨울 궁과 여름 궁이 있었습니다. 큰 궁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궁궐을 크게 지은 만큼 백성들의 삶은 그에 비례해서 힘겨워집니다. 상아로 만든 궁궐이 있었습니다. 상아는 이스라엘에서 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상아를 수입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들였습니다. 그 돈으로 궁궐을 지었습니다. 그 만큼 백성들은 수탈당했습니다. 백성들 몫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 임금 한 사람을 위한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은 힘겨워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과 큰 궁들을 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행동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큰 궁궐들을 짓고 백성들의 피를 뽑아 먹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집권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악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권자들의 죄악 이면에 있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지도자들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 1세는 벧엘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 제단은 가짜였습니다.
금송아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제단의 뿔도 만들어 두었습니다.
원래 제단의 뿔은 어떤 죄인이라도 잡으면 죽이지 못하도록 명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짜였습니다.
벧엘에 있는 제단 자체가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북이스라엘은 가짜를 섬기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짜를 섬긴 백성들과 영적 지도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랜 기간 동안 기회와 시간을 주었지만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니 이제는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은 영적 지도자들이 만든 벧엘의 제단과 제단 뿔도 함께 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짜를 섬긴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하나님의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 영적 지도자들과 세상 지도자들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사와 교회의 중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설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중직들과 직분 받은 자들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가짜를 섬기면 안 됩니다.
돈을 비롯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짜입니다.
오늘 이 시대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가짜를 섬기라고 충동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짜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깨달음을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벧엘의 금송아지 같은 가짜 위에 서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의 말씀이 진짜입니다.
겨울 궁과 여름 궁도 상아 궁궐도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불면 사라지고 없어질 가짜에 목숨 걸지 마시고 진짜이신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는 복된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1. 지도자들이 믿음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 가짜에 속지 않고 진짜이신 하나님과 말씀을 의지하겠습니다.
3. 사랑의 하나님, 가짜를 섬기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고 진짜이신 말씀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본절이 앞절과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 부분과 논리적인 연결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T.E.McComiskey).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절의 첫머리에 나오는 히브리어 '키'(*)를 '그러나'(but)로 번역하고(Harper), 어떤 역본들은 '확실히'(surely)로 번역하였다(KJV, JB).
그렇지만 8절에 나오는 '사자'와 '두려움'의 개념이 4절의 '사자'와 6절의 '두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보면, 7절만을 따로 생각할 수도 없다.

한편 '비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는 '은밀한 협의'(SECRET COUNSEL)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밀접한 관계에 기초한 적극적인 의논(잠 15:22)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관계성을 통해 미리 알려주는 계획(plan)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으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렘 23:18, 22).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는 그에 앞서 항상 경고가 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도 그러했고(창 6:13-21),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미리 경고되었다(창 18:17-21; 19:12,13).




내가 너희를 '알았다' (아모스 3:1-2)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아, 귀 기울여 들어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문하신다. 너희 모두와, 그분이 이집트에서 건져 주신 모든 족속에게 말씀하신다. 모두, 귀 기울여 들어라!

"지상의 모든 족속 중에서 내가 특별히 너희를 골라내었다.  지금 내가 너희 모든 죄에 대해 심문하는 것은 너희가 받은 이 특별한 부름 때문이다."

이제 아모스서의 본론 부분인 3장으로 들어왔네요.
서론격이었던 1-2장에서 열국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던 아모스는 3-6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 더욱 자세하게 심문합니다.
그렇게 심문하기 이전에 아모스는 다시 이스라엘의 지위에 대해서 상기시킵니다.
아니, '이집트에서 올리신 모든 족속'이라고 대상을 알리는 것으로 보아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유다에 대해서도 외치는 것 같습니다.
원래 남유다 사람이었던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 와서 이 예언을 선포하고 다시 유다로 돌아와서 책으로 쓰거든요.
지금 무시무시한 심판경고를 받을 정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은 원래 어떤 민족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 자유민으로 해방되었던 민족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았던 민족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고프지 않았던 민족입니다.
끊임 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된 민족입니다.

그것을 아모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을 알았다"

이제는 많이 알려졌듯이 여기서 '알았다'는 단어는 그냥 '머리로 인식했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입니다.
남녀간의 성적인 관계를 묘사할 때도 쓰이고, 친숙하다, 인정하다, 선택하다, 사랑하다는 말로 번역되고 있지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원래 이런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족속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특별한 소유물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 중에서 특별히 아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자 하나님은 더욱 분노하셨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컸기에 아픔과 분노가 더욱 컸던 것이지요. 로마의 황제였던 시저가 아들같이 아꼈던 심복 부르투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부르투스, 너마저..'라고 신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에 대해 오해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은혜의 선언을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 아모스의 이런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은혜로 사랑받았기 때문에 이제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값없는 은총은 우리에게 책임있는 반응을 요구합니다.

어찌 일어나겠느냐?(아모스 3:3-6)

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6.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걷고 있으면, 둘이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아니냐?
사자가 숲 속에서 표효하고 있으면, 먹이를 움켜쥐었다는 말이 아니냐?

젊은 사자가 만족하여 으르렁거리고 있으면, 저녁거리를 잡았다는 말이 아니냐?
새가 바닥에 떨어졌으면, 돌에 맞았다는 말이 아니냐?
덫이 탁 하고 닫혔으면, 무언가 덫에 걸렸다는 말이 아니냐?
마을에 경보가 울리면, 주민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재앙이 도성을 휩쓸고 있으면,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느냐?

'어찌'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지요?
아모스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맞습니다!'라는 답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이지요.
아모스는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 아니 우리들까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 있는 질문들을 5개 열거합니다.
그 질문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진술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두 사람이 동행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뜻이 맞기 때문이다!
사자가 수풀에서 부르짖는다면 뭔가를 움켜 잡은 것이다!
젊은 사자가 으르렁대고 있다면 뭔가를 잡은 것이다!
새가 덫에 치였다면 누군가 덫을 놓았기 때문이다!
덫이 튀어 올랐다면 새가 잡힌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야 당연하지'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들이니까요.
그런데 아모스는 이어서 핵심진술로 들어갑니다.
성읍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인데, 그렇게 재앙이 임한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셨기 때문이다!
아..결국 아모스가 이런 수사학적 질문들을 통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겪을 재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구보니, 앞에서 아모스가 무심한 듯 열거했던 5개의 질문도 남다르게 들립니다.

두 사람의 동행은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동행으로 보이고,
부르짖는 사자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아, 이스라엘은 덫에 걸려 있으면서도 다가오는 심판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자처럼 부르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은 지금도 포효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혹시 우리의 귀가 어두워지지는 않았을까 두려운 마음이 드네요. 오 주여, 우리의 귀를 열어주소서!


예언자의 역할 (아모스 3:7-8)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주께서 무슨 일을 하실 때 당신의 예언자들에게 미리 그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시지 않고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 법이 없다.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겁먹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떤 예언자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느냐?

아마도 아모스가 이런 심판경고를 계속 토해내자,  듣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의했나 봅니다.  "너는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남유다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라고 말이지요.  그러므로 아모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예언의 기원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기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예언은 어떤 명석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며, 예언자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우신 사람입니다.  예언자가 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지요. 예언자의 권위는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또한 예언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일을 행했습니다.  사실 예언자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왕과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기본 통로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주 임무가 심판 경고였구요. 그러므로 방자하게 그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심판을 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시대에 따라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열정이나 기도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은데  요즈음에는 경영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냥 저만의 생각일까요?  목표를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이런 것들은 사실 경영자의 역할이 아닐까요?  물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만큼 그런 것들이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왠지 점점 교회가 유기체보다는 조직에 더 가까워지고 있으며, 목회자가 영적 지도자보다는 CEO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완결된 지금,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기록된 말씀을 잘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전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직접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니만큼  저의 생각과 저의 해석이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혹시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건조한 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증인 부르세요 (아모스 3:9-12)

9.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앗시리아의 요새들에게 알려라. 이집트의 요새들에게 알려라. 그들에게 전하여라. "사마리아의 산 위에 모여, 유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아라. 잔인과 공포가 얼마나 들끓고 있는지를! 그들은 올바른 일을 하나도 할 줄 모른다. 그럴 마음도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폭력과 어둠을 쌓아 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적이 그 나라를 포위할 것이며, 너를 무력화시키고 너의 요새를 약탈할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다.  "사자에게서 어린양을 구하려던 목자가  겨우 두 다리와 귀 조각 정도나 건져 내듯이,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소수만 건짐을 받을 것이다.  겨우 낡은 의자 몇 개,  부러진 탁자다리 정도만 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초대장을 받는 사람들은 아스돗(어떤 사본은 앗시리아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과 애굽의 궁궐들. 초대장소는 사마리아의 산. 그리고 그들이 관객으로 모여서 관람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란과 학대와 포학과 겁탈. 아..

아,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랑했던 궁궐들이 이제 폐허가 될 것입니다. 호화스러웠던 침실이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아모스는 그 모습을 생생한 비유로 묘사합니다. 사자에게 물려간 어린 양을 목자가 구하려고 해봤자 다리 조각이나 귀 조각 정도나 간신히 건질 수 있듯이, 침상이나 걸상 조각 정도만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건짐을 받는다'고 표현되었다고 해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소수만 건짐을 받을 정도로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물론 진리의 편에 서 있지 않은 자들은 언제나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정과 부패로 인해 비난받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둡고 부패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며,  그들에게 대안사회를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그들 못지 않은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그들을 증인으로 부르실 수도 있으니까요!


심판의 타겟 (아모스 3:13-15)

13.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곱 가문에 대한 고발이다. 귀 기울여 듣고 증언하여라. 이는 하나님, 곧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목하여라! 그날 나는 이스라엘이 자기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베델에 악한 제단들을 세운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뿔 달린 제단들은 뿔이 전부 잘려 나가고 산산조각 날 것이다.
내가 겨울 궁궐을 허물고, 여름 궁궐을 - 화려한 건물들을 모조리 다 - 박살낼 것이다.

증인으로 불려나온 아스돗과 애굽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증거하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벧엘은 북이스라엘을 설립한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을 대신하기 위해서 제단을 만든 곳입니다.
아마도 그 이후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벧엘로 와서 제사를 드렸던 것 같네요.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 타겟이 되는 곳은 겨울 궁궐, 여름 궁궐입니다.
그 궁궐들은 부유층들이 가지고 있던 별장을 의미합니다.
계절에 따라 피서 또는 피한을 즐겼던 곳들이겠지요.
더구나 그 궁궐들이 상아로 지어졌다는 것을 보아 매우 호화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아.. 이스라엘의 심판의 시작이 벧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은 성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사회적 타락이 영적 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과 지금 우리 나라의 위치는 매우 다르지만, 우리 또한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귀에 듣기 좋은 설교들만 선포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악을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긍정적 사고방식과 평안과 위로만 난무하지는 않습니까?
좋은 프로그램을 찾아 철새처럼 교회를 떠돌지는 않습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작은 교회들보다는 내게 필요한 대형교회로만 몰리지는 않습니까?
재정이 투명하게 집행되지 않고 함부로 낭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구제하기 보다는 자체 건물과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자의 편에 서기 보다는 강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한 구조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보다는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심지어는 그 구조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조차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회자들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영적 타락은 사회 지도층의 부패로 이어졌습니다.
이것 또한 지금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도 동일합니다.
약자를 돌아보고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서 구조를 개혁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골몰하고 부와 사회적 위치를 세습하는 정치인들, 각종 부정과 불의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그들끼리의 동맹을 맺고 있는 재벌들, 비판을 잠재우고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언론들과 학자들, 소위 사회적 지도층의 부패 또한 북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다음 타겟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겠습니다.
쉬운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가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주여,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우리를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7월 15일(토) 아모스 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나기를 예비하라(12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Therefore this is what I will do to you, Israel, and because I will do this to you, prepare to meet your God, O Israel."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
prepare to meet your God, O Israel)
히콘 리게라트 엘로이카(הִכֹּון לִקְרַאת־אֱלֹהֶיךָ)

* 3559. 예비하라(쿤. kûwn) כּוּן

1. 똑바로서다. 2. 필렐형.  כּוֹנֵן
3. 세우다
발음 / 쿤[ kûwn ]
관련 성경 / 견고하다(왕상2:46, 대상17:14, 잠29:14), 예비되다(잠19:29), 준비하다(대하35:4, 시9:7, 사51:13), 든든히 서다(삼상20:31), 굳게서다(대상16:30, 시102:28, 잠12:3), 완비하다(대하8:16), 갖추다(대하29:35) 구비되다(대하35:10), 준비되다(대하35:16), 견고히 하다(시89:21), 서다(시101:7), 보존되다(잠12:19), 이루다(잠16:3), 성취하다(잠20:18),정하다(창41:32, 시108:1), 분향하다(시141:2),성취하다(잠20:18), 버티다(삿16:26,29), 기다리다(욥12:5, 18:12), 옳다(욥42:7), 신실하다(시5:9), 정직하다(시51:10), 확정되다(시57:7), 세우다(출15:17, 시119:90, 신32:6), 당기다(시11:2), 건축하다(합2:12), 배우다(욥8:8), 짓다(욥31:15, 잠8:27), 건설하다(시24:2), 삼다(대상14:2), 저축하다(대상29:16),행하다(대하27:6), 정돈하다(대하35:20), 결심하다(대하30:19), 지도하다(렘10:23), 성취하다(렘33:2), 항오를 벌이다(나2:3), 향하다(삼상7:3), 살피다(삼상23:22), 방비하다(렘51:12), 닦다(신19:3), 베풀다(욥29:7), 주다(시65:9), 인도하다(잠16:9), 삼가다(잠21:29), 박히다(겔40:43).
[명] 참(신 13:14), 실상(삼상 23:23).
[부] 견고히(시 93:1, 잠 25:5, 왕상 2:45), 든든히(잠 4:26), 자세히(신 17:4), 과연(삼상 26:4).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 7125. 만남(키리아. qîrʼâh) קִרְאָה 

1. 만남. 2. 마주침.
발음 / 키리아[ qîrʼâh ]
관련 성경 / 미치다(창 42:38), 이르다(욥4:14), 당하다(신31:29), 닥치다(렘13:22), 일어나다(렘44:23), 영접하다(창14:17, 삼하19:20, 사21:14), 마주 대하다(창15:10), 마주 오다(창24:65),만나다(창32:6, 삼상15:12, 암4:12), 맞다(창33:4, 출4:27, 삿14:5), 엎다(출14:27), 막다(민20:20, 22:34, 시35:3), 치다(민21:23, 삿7:24), 쓰지 않다(민24 : 1), 마주 나오다(신1:44,삼상9:14), 대적하다(신2:32, 수11:20), 싸우다(신29:7, 수8:14), 마주 나가다(삿15:14),환영하다(삼상18:6), 대하다(삼상17:2, 삼하10:10), 만나보다(왕하23:29), 향하다(대상19:17), 방비하다(대하35:20), 달려오다(시59:4), 일어나다(출1:10), 나타나다(출5:3),내리다(렘32:23).
[부] 우연히(삼하1:6).
구약 성경 / 23회 사용


바산은 요단강 동쪽 북단에 위치한 기름진 목초지로  그곳에서 사육되는 소들은 매우 살지고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인들을 바로 이 바산의 살진 암소에 비유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근동 지방에서는 모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동에서는 기름진 몸매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지도층의 부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유복한 생활을 했고, 남편들을 뒤에서 움직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 나갔습니다.
하지만 장차 이 부유한 여인들은 밧줄에 묶여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앗수르 유적지에서 발견된 한 비석에 보면  앗수르 군사들이 사로잡은 포로의 코나 아랫 입술을 뚫고  거기에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가는 아주 비참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경책하며 심판을 예언하던 아모스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종교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벧엘은 일찍이 야곱이 살기등등한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천국 사닥다리와 여호와를 꿈속에서 보고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 드보라와 사무엘은 이곳을 중심으로 선지자 사역을 행하는 등  벧엘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중심지이었습니다.
그런데 왕국이 분열된 이후 북이스라엘을 창건한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유다에 종교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싫어하여 이곳에 자체적으로 단을 만들어 금송아지 숭배를 획책함으로써 벧엘은 북이스라엘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길갈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으로 유서 깊은 장소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 기념물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곳이며, 이곳은 벧엘과 함께 사무엘의 중심 사역지로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기 전까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었습니다.  그러나 길갈 역시 벧엘과 마찬가지로 왕국 분열 이후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배교의 중심지가 되어 심각하게 타락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희생’이란 아침마다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4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소에 올라와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는 평소 드리는 십일조 외에 삼년에 한 번씩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삼년에 한번 드리는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리고,  일 년에 한번 드리는 희생을 아침마다 드린다 할지라도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들은 오히려 그것 자체가 죄를 더하는 행위라고 꾸짖습니다.

형식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만 형식에 치우친 제사와 예배는 결코 바람직한 제사와 예배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배는 예배자의 삶에서 드려지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예배하는 시간을 위하여 예배하는 자의 거룩하고 진실된 삶을 굳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시대가 예배자는 많이 있지만 예배자의 삶을 실천하는 예배자가 너무 적어 다양한 문제에 휘말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북녘 땅에는 예배자의 삶을 생각도 할 수 없는 얼어붙은 땅으로 닫혀 있습니다.
남녘의 땅에는 예배자의 삶을 훼방하지 않는 자유가 풍성하지만 그 자유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는 거센 거짓된 문화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예배자의 삶을 사랑하고 자랑할 줄 아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징계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경고이다(T. E. McComiskey).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 (아모스 4:1-3)

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마리아 언덕에서 풀을 뜯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귀 기울여 들어라. 가난한 이들에게 비열하고 밑바닥 사람들에게 잔인한 여자들!
게을러빠지고 제멋대로인 너희는 남편에게 요구한다.
'시원한 술 한 잔 갖다 주세요!'
잘 들어라. 나 하나님이 나의 거룩을 두고 맹세한다!
조심하여라,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너희를 밧줄로 묶어 끌고 가면서, 뒤처지는 자들은 몽둥이로 다스릴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한 줄로 꿰어 훼파된 성벽들 밖으로 끌고 가서, 저승으로 던져 넣을 것이다."

오늘 선포되는 아모스의 심판 경고는 특별히 귀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산의 암소'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바산은 풍부한 목초지로 목축이 성행했던 지역의 이름입니다.
즉, 바산의 암소라는 표현은 양질의 살찐 암소라는 의미이지요.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녀들의 죄악은 세가지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1. 그녀들은 힘 없는 자들을 학대했고
2. 가난한 자들을 압제했으며
3. 남편들에게 술을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아마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부정하게 부를 축적하면서 향락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요즈음에도 가끔씩 언론에 드러나는 '싸모님'들과 비슷한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다시 '때'가 이를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바로 하나님의 날, 즉 심판의 날이지요.
하나님이 맹세하신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으니,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녀들은 물고기가 낚시에 걸리듯이, 송아지가 코뚜레에 코가 꿰어지듯이 묶여 끌려갈 것입니다.
처음에 그녀들을 '사마리아의 산에서 풀을 뜯는 바산의 암소'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머리를 풀어헤치고 더럽혀지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슬피 울며 끌려갈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신세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의지하고 있던 성벽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적들이 사방에서 뜷린 성벽을 통해 들어와 그녀들을 사로잡아 하르몬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성벽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나의 건강, 예금, 보험, 가문, 권력등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영혼을 데려가실 것도 모르고 곳간에 소출을 쌓아놓으며 미래를 계획했던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정말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수많은 간증들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고 사업에 실패한 후에야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것들이 우리를 보호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시편 기자처럼 고백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산성 나의 방패이십니다.'

공무를 집행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죄를 지어서 검찰 포토라인에 설 때가 있습니다. 혹은 그들이 청문회 자리에 나와서 사실관계를 설명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잘 몰랐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제 가족들이 한 일입니다.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알고도 발뺌한다면 뻔뻔하고 사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을 몰랐다면 고위 공직자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는 무능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몰랐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따져 물으시는 것도 몰랐다고 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몰랐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사마리아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고위 공직자 남편을 둔 여인들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잘나가는 남편을 둔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에게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압제한 죄를 묻고 계십니다. 정말 이 여인들이 힘없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압제했을까요? 그들을 세워놓고 채찍질을 했겠습니까? 발길질을 했겠습니까? 그들의 돈을 빼앗았겠습니까? 여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들이고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인들의 죄를 왜 힘없고 가난한 자와 연관시켜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인들은 벧엘과 길갈을 자주 순례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과 길갈은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그들은 자주 벧엘에 가서 예배드리고 길갈에 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야곱의 영적 고향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나중에 큰 부자가 되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도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벧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순례하고 예배드릴 영적 고향이 되었습니다. 당시 여로보암 1세부터 내려오던 금송아지 제단도 역시 벧엘에 있었습니다. 

길갈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요단강을 건너서 처음 만났던 곳이 길갈이었습니다. 길갈에서 그들은 할례를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 뜻으로 길갈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넌 기념으로 각 지파마다 큰 돌을 하나씩 가져다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과 길갈을 영적 고향으로 삼았고 성지순례 명소가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 고위 공직자들의 아내들은 몰려 다니면서 벧엘과 길갈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삼일에 한 번씩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화목제를 드립니다. 수은제와 낙헌제라 불리는 그것은 감사의 화목제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이 그 자리에서 어떤 감사 제목으로 예배드렸을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을 이번에도 승진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오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가족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이 혜택을 자손만대에 누리게 해 주십시오. 더 많은 물질을 벌게 해 주시고 명예가 쌓이도록 도와주시며 남편 뿐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남편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잘 먹고 잘 살도록 해 주십시오” 그들은 시마다 때마다 많은 물질을 드리며 하나님께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완벽했습니다. 헌금도 많이 가지고 나왔고 예배드리면서 자기들끼리 친목도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죄가 될까요? 이것이 왜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압제하는 죄가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교 생활은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힘없고 가난한 자를 살피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의 잔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것은 위로 하나님과 아래로 백성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격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올바른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불리는 사마리아의 귀족의 여인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있어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눌 제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죄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이 나라에 그렇게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하는 것만큼 큰 죄가 없습니다. 돌아봐야 됩니다. 살펴야 됩니다. 주변 이웃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야 합니다. 몰랐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해야 됩니다. 기도하면서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종교 생활하는 여인들의 종교생활을 중독이라고 표현하십니다.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술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마치 술에 중독된 것처럼 벧엘과 길갈에 가서 사흘에 한 번씩 십일조를 드리고 수은제와 낙헌제로 감사의 화목제를 드리는 것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생활이고 돈 잔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를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이들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갈고리로 끌어가고 낚시로 낚아서 끌고 가며 하르몬에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이들이 하나님께 애원할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야 되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몰랐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에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자를 살피고 돌아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중독처럼 종교 생활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서 거룩한 옷을 입고 아름답게 예배드리는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종교 생활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배부른 바산의 암소가 되지 않고 이웃들을 살피고 돌아보는 부지런함과 열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실천다짐

1) 배부른 바산의 암소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습니다.

2) 이웃을 돌아보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겠습니다.

3. 한줄기도

바산의 암소와 같이 육적인 것에만 풍성하고 영적인 것에 메마른 신앙생활에 중독된 저희들에게 영적인 깨달음으로 날마다 천국생활을 즐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종교(宗敎) : religion
라틴어 - relegare / 다시(re) + 연결하다(legare)

자연종교 : 수행(修行) - 불교
계시종교 : 은혜(恩惠) - 기독교



7월 17일(월) 아모스 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호와를 찾으라6절)

* 찾으라(1875) 다라쉬(dârash) דָּרַשׁ
너희는 찾으라

דָּרַשׁ 스트롱번호1875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발음 / 다라쉬[ dârash ]
관련 성경 / 찾다(레 10:16, 시 77:2, 신 22:2), 묻다(신 13:14, 왕상 14:5, 겔 14:3), 조사하다(신 19:18), 구하다(대하 16:12, 미 6:8, 대상26:31), 거두다(대하 24:6), 구걸하다(시 109:10), 청하다(대상 10:13), 간구하다(대하 20:3, 렘21:2), 연구하다(스 7:10, 시 111:2, 전 1:13), 조사하다(스 10:16), 용납하다(겔 14:3), 힘쓰다(렘 29:7), 탐구하다(신 12:30), 받다(신 18:19), 요구하다(신 23:21, 겔 20:40), 알아보다(삼하 11:3), 나아가다(대하 1:5), 신원하다(대하 24:22), 감찰하다(시 10:4,13), 도모하다(에 10:3), 심문하다(시 9:12), 돌보다(시 142:4),
[부] 자세히(사 34:16), 청하건대(왕상 22:5).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 살리라(2421) 하야(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하야[ châyâh ]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 4:11), 살게 하다(겔 37:14, 시119:17), 낫다(수 5:8, 왕하 8:8), 살리다(창 20:7, 겔 37:5), 지내다(창 5:7), 보존되다(창 19:20), 생활하다(창 27:40, 왕하 4:7), 소생하다(창45:27, 삿 15:19), 거주하다(창 47:28), 살려주다(왕상 20: 32), 살아나다(왕상 17:22), 희생하다(왕하 13:21), 살려두다(민 31:15, 삿21:14), 구원하다(겔 3:18), 유전하다(창 7:3), 부흥하게 하다(합 3:2), 전하다(창 19:32), 기르다(삼하 12:3, 사 7:21), 중수하다(대상 11:8), 일으키다(느 4:2), 소생하게 하다(시 80:18, 7:12), 보전하다(겔 18:27), 풍성하다(호 14:7), 생존하게 하다(수 14:10), 구원하다(창 19:19), 보존하게 하다(창 6:20), 살려주다(사 38:16),
[명] 만세(삼상 10:24, 왕하 11:12), 생명(전 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여호와를 찾으라

1. 찾다(시편 77:2)
나의 환난 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2. 묻다(신명기 13: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3. 조사하다(신명기 19: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4. 구하다(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앞에서(4절)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주체였고, 이번에는 아모스가 그와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청중에게 던진다.
이로써 아모스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하게 한다.

염려컨대...없을까 하노라
- '염려컨대...없을까 하노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펜'(*)은 백성들로 하여금 분명한 선택을 하도록 요청한다.
그 선택은 바로 여호와를 찾아서 그로 말미암는 모든 은혜를 누리든지 아니면 심판을 당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요청이다(T.E.McComiskey).
한편, '내리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첼라흐'(*)의 기본적인 의미는 '돌진하다'(rush)는 의미와 가까운 것으로(BDB) 전후 문맥에 따라 독특한 뉘앙스를 준다.
이 단어는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시는 모습을 그리는 데 사용되기도 했고(삿 14:6,19;15:14;삼상 10:6;11:6;16:13), 반면에 악령이 강하게 임하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였다(삼상 18:10).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항하시는 여호와의 강력한 행위를 묘사한다(J.Niehaus).

5:4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 '이스라엘 족속에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베이트 이스라엘'(*)은 앞 구절의 '이스라엘 중에서'와 같은 용어로 본 구절은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앞 문장과 대구를 이룬다.
이스라엘이 장차 쇠퇴하겠지만, 소수나마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복합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를 권고하신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구절이 단지 두 단어의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나를 찾으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르슈니'()는 여호와께 사용될 때, '그분께로 돌아와 다시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라'는 의미이다(시 9:10; 24:6; 77:2; 사 65:10; 호 10:12; 습 1:6).

그리고 '살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위흐유'(*)는 때때로 영적인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T.E.McComiskey).
또한 이 두 명령형 동사가 접속사 '와우'(*, 그리고, 그리하면)로 연결되어 있어서 앞의 명령은 전제로 제시되었고, 뒤의 명령은 그에 따라 주어지는 결과를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화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제시한다(Calvin).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경제 정책과 방향에 따라서 나라의 경제동향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어떤 정부는 친기업적인 경제정책을 펼치고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풀고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이유는 기업에 모인 돈을 가계에 흘려보내 원활한 경제흐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낙수론을 펼쳤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돈도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야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경제정책입니다.

하지만 이 정책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기업의 투명함과 높은 윤리의식입니다.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풀어서 돈이 모였으나 기업이 가지고 돈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업이 이윤을 연구 개발에 재투자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나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직원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낙수효과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의 고위 공직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에게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절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돈이 모였습니다.
무역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투명함과 윤리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들어온 돈을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백성들과 나누지 않았습니다. 부는 몇몇 사람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를 언급하십니다. 벧엘과 길갈은 4장에서 나왔던 지명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필수적으로 순례해야 할 성지였습니다. 벧엘은 야곱과 관련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던 길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때부터 벧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고향이 되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요단강을 건너서 만났던 첫 번째 장소가 길갈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기념으로 열두 돌을 세웠던 곳이 길갈이었고 할례언약을 시행하여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한 곳이었습니다. 벧엘과 길갈은 북이스라엘 지경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 지경 가장 남쪽 끝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을 먹어도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고위직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남유다 영토를 지나 멀리까지 갈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누구와 관련이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말년에 이삭을 낳고 그곳에 정책해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이삭도 아버지가 떠난 후 브엘세바에서 머물렀습니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습니다. ‘브엘세바’라는 이름의 뜻은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벧엘과 길갈을 자주 드나들었고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 남유다 브엘세바까지 순례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낙헌제와 수은제를 드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절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그들은 성지는 열심히 찾아다니는데 하나님을 찾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찾으나 하나님은 찾을 생각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기도 많이 하고 예배 열심히 드리고 헌금도 열심히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모스 본문의 맥락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정의와 공의를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정의와 공의는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덕목이었습니다. 정의는 미슈파트, 공의는 체다카입니다. 미슈파트는 자기중심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정의를 말합니다. 체다카는 관계에 바탕을 둔 공의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들을 섬기며 사랑해야 함을 체다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권세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의는 없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율법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고 베풀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정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과 같은 것이고 공의도 역시 흘러내려 마르지 않는 강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로부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서 이웃들에게 넘치는 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길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졌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랐던 곳, 십자가 고난 받으신 곳을 오르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 했던 곳을 답사하며 다닙니다. 배를 타고 지중해 바다를 건너 밧모 섬에도 들어가 봅니다. 종교 개혁지를 갈 수 있습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지는 열심히 찾아다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는 행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웃들에게 물 같이,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흘러내리기를 바랍니다. 도움의 손길, 사랑의 손길이 머물러야 하는 그곳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나눔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언약을 기억하시면서 살아가시는 복된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천다짐

1.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합니다.
2. 정의와 공의를 마음에 두고 살겠습니다.
3. 기도 /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진실한 마음으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모스 5:14-15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세우다(3322) 야차그(yâtsag)
יָצַג 스트롱번호3322

1. 히필형 הִצִּיג : 서게 하다.
2. 놓다
3. 창 43:9
발음 / 야차그[ yâtsag ]
관련 성경 / 두다(창 43:9, 삿 8:27), 세우다(창 30:38, 암 5:15), 머물다(창 33:15), 밟다(신 28:56), 보이다(창 47:2), 머물러 두다(출 10:24).구약 성경 / 16회 사용

미워하다(8130) 사네(sânêʼ)  שָׂנֵא 

1. 미완료형   יִשְׂנָא
2. 분사형 שׂוֹנֵא 증오자
3. 니팔형 : 잠14:17.
발음  사네[ sânêʼ ]
관련 성경 / 미워하다(창 26:27, 삿 11:7, 시 50:17), 가증히 여기다(신 12:31), 싫어하다( 잠5:12, 사 1:14, 암 6:8).
[명] 미움(삼하 13:15, 잠 19:7), 원수(창 24:60, 잠 25:21), 대적(출 1:10), 원한(신 4:42, 19:4,6).
구약 성경 / 113회 사용

굴리다 / 가랄(1556)(gâla) גָּלַל

1.구르다.  2.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파생어로 사용된다. 3. 바퀴
발음 / 가랄[ gâlal ]
관련 성경  / 옮기다(창 29:3,8), 떠나가다(수 5:9), 의탁하다(시 22:8), 굴리다(수 10:18, 삼상 14:33, 렘 51:25), 맡기다(시 37:5, 잠 16:3), 떠나게 하다(시 119:22), 말리다(사 34:4), 흘리다(암 5:24), 묻다(사 9:5), 끌려들다(창 43:18), 달려들다(욥 30:14).
구약 성경 / 16회 사용



7월 18일(화) 아모스 6장 - 지도자들이 받을 심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셉의 환난(6절)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You drink wine by the bowlful and use the finest lotions, but you do not grieve over the ruin of Joseph.

* 환난(7667) 쉐베르(sheber) שֶׁבֶר 

1. 깨뜨림.  2. 해몽. 3. 파멸
발음 / 쉐베르[ sheber ]
어원 / 76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 [형] 부러짐(레 21:19), 틈(시 60:2), 패망(사 1:28, 애 2:11), 무너짐(사 30:13), 무너지는 소리(습 1:10), 깨뜨림(사 30:14), 상함(렘 8:21), 파괴됨(애 2:13), 상처(레 24:20), 파괴(잠 17:19), 멸망(잠18:12, 렘 4:6), 파멸(렘 50:22), 상함(사 65:14), 상처(렘 6:14, 나3:19), 환난(암 6:6).
구약 성경 / 44회 사용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 '대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즈레케이'(*)는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사용하는 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출 38:3; 민 4:14; 대하4:8) 제물그릇(sacrificial bowls)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NASB). 이는 그들이 매우 무분별하게 방탕한 태도로 술을 마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 귀한 기름은 향품을 섞은 기름(왕상 10:10; 겔 27:22)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지도자들이 누리던 방탕한 풍요를 묘사한다.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 '요셉의 환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 요세프'라는 구문이 여기에만 등장하지만, '쉐베르'는 민족적인 파멸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자주 사용된다(사 30:12, 15; 애 2:13; 나 3:19).
아모스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의 지도자들이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근심없이 지낸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은 어김없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사야 30:12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애가 2:13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나훔 3: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아모스 6:1.
1945. 화 있을찐저 - 호이(hôwy) הוֹי 

1. 화 있을진저.  2. 사 5:8.  3. 렘 48:1.
발음 / 호이[ hôwy ]
관련 성경 / 오호라(왕상 13:30), 슬프다(사 1:4, 렘 22:18, 48:1), 화 있을진저(사 5:8, 렘 22:13, 합 2:6), 화 있도다(렘 50:27).
구약 성경 / 51회 사용

슬픔과 탄식을 나타내는 감탄사로(사 1:4, 24; 29:1) 일반적으로 심판이 선포될 때 사용된다(5:18).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이 아니라.




아모스 6장에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원에서 그들의 종교적 삶과 일상적인 삶 사이의 깊은 괴리를 꾸짖는 말씀이라면 6장은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육적으로는 많은 쾌락과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6:1-7, 향락에 빠져버린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에 대한 경고
6:8-14, 하나님의 심판 통해 멸망당할 것을 예언

아모스 선지자는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매우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지역의 주도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풍요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형식에 있어서는 거의 솔로몬 시대와 같이 많은 절기 제사와 각종 종교 행사들을 거행하였고 각종 제물과 십일조, 찬양  등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자신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종교적 영역에서의 신으로만 제한시켜 버린 것입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적나라하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외친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원론적인 삶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열심이 강했으나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의무를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핍박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행사나 제사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상실한 채 형식적인 태도에만 집착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참된 제사는 자신들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죄하심에 참여치 못하고 형식에만 치우쳐 버린 제사는 그 드리는 횟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며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리고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성도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면 그가 드리는 예배와 예물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른 것인지를 언제나 돌아보며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예배가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 4. 21 ~ 1932. 11. 17)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 가운데 한 사람인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이었습니다.
그분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로 부터 국권을 침탈당하고 국권을 넘기게 된 경술국치를 당하고 난 후에 가족들을 모아 회의를 합니다. 회의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이때까지 우리 가문은 나라의 녹을 받으며 편안하게 잘 살았는데 이제 나라가 일제에 넘어갔으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과 전답과 이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회의 끝에 이회영 선생의 가문은 집과 땅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그 가문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현재 서울 명동 땅 대부분이 이회영 선생 일가가 가지고 있었던 땅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헐값으로 처분하고 만주로 떠납니다.
만주에 가서 학교를 세웠습니다.
신흥무관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을 길러서 일제에 대항하는 항일운동을 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거기서 길러낸 군사들을 기반으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더구나 이회영 선생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금까지 누린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결단하는데 하나님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슨 뜻이냐고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뜻

노블레스 오블리주(프랑스어. noblesse oblige, 영어.  nobility obliges)란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의 칼레 사람들은 시민군을 조직해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식량이 고갈되어, 끝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파격적인 항복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하겠다.”

칼레의 갑부인 ‘외수타슈 생피에르’ 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했습니다. 이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자루 옷을 입고 영국 왕의 앞으로 나왔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임신 중이던 영국 왕의 아내가 처형을 만류했습니다. 이들을 죽이면 태아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습니다. 왕은 고심 끝에 이들을 풀어 주었고, 6명의 시민은 칼레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진 자의 의무를 상징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 탄생된 배경입니다. 단 6명의 지도자가 칼레를 구한 것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은 아주 작은 불빛에서 시작됩니다. 희생과 나눔을 의무로 여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 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 라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를 바로잡자 :  6명의 시민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일단 여기까지가 실제로 일어난 역사 속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칼레의 시민 이야기. 어딘가 불편하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좋지만 사실상 감성팔이 수준이다.

그렇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좋은 예라 손꼽히는 칼레의 시민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일단 칼레의 6명의 용감한 시민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문건은 영국과 플랑드르, 프랑스, 부르고뉴,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교황청의 기록까지 합하여 약 20개 정도가 존재하는데, 당시 기록에는 6명의 용감한 시민의 이야기나 영국 여왕의 간청 따위는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
그저 “1년 정도 공성전을 벌인 후 결국 필리프 6세가 먼저 철수하고, 영국이 칼레를 점령한 후, 시민들을 소거했다”라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당시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플랑드르 지방의 문헌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좀 더 관대하게(칼레를 떠나는 시민들에게 노잣돈을 나눠줬다라고 나옴) 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의 공식 기록들은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을 살려달라는 간청을 에드워드 3세가 무시해서 약 500명 정도가 굶어죽었다라는 식으로 악랄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 후로, 사실 칼레 공성전이나 시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다가, 프랑스 혁명을 거쳐 민족주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

백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후 프랑스 본토에서도 “마녀” 혹은 “어리석은 자의 상징”으로 통하던 잔 다르크를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하고(볼테르나 루소의 시대까지만 해도 잔 다르크는 “얼빠진 광신도”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로 통했다), 칼레의 시민들을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은 애국자”들로 둔갑시킨 건 당대의 정치인들과 그 정치인들을 빨아대던 작가들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갑부로 둔갑한 외수타슈 생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는 갑부가 아니라 당시 필리프 6세에게 칼레 방어의 명을 받은 칼레의 시장이었다. 그리고 시장이나 마을의 치안을 담당한 자가 자기 목에 밧줄을 메고 항복하는 건 에드워드 3세의 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14세기의 유럽 도시들이 적에게 항복할 때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혹은 관례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관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칼레의 시민 동상을 제작한 오귀스트 로뎅은 이 이야기의 모순을 간파하고 그들을 영웅적으로 보이지 않게끔 조각하였다가 당시 언론에 “뭐 이리 불쌍한 표정들로 만들었음?” 하며 대차게 까이기도 한다.

이렇게 불쌍하게 표현하는 것도 재능이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어원: 닭벼슬도, 노른자도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진 자가 먼저 베풀고 먼저 행동하고 먼저 희생하고. 사회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희생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칼레의 시민 이야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회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의무지워진 것이기도 하다.

멀리 가자면 호메로스의 일리야드에서 참된 왕가의 인물이라면 병사들 앞에 나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트로이의 왕자가 등장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집정관을 선출할 시에는 군단 경험은 물론, 호민관이나 법무관 등의 중간 관리직도 풍부하게 경험한 사람들을 선호한 로마 공화정과 제정의 역사가 있고, 우리에게는 의병대를 조직해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거나 혹은 독립운동에 가세했던 양반들과 지식인들이 있다. 지붕이 시퍼런색으로 도색되어 있는 저택에서 수첩이나 뒤적거리시는 어떤 분과 참 대조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Noblesse가 닭의 벼슬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하는 시점에서 이미 오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Noblesse는 중세 프랑스어 단어인 Noblece가 근대를 거치면서 변화한 것이고, 그 어원은 라틴어에서 “고귀함”, 혹은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있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가문”을 뜻하는 Nobilis(복수: Nobiles.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자는 Nobilitas)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Oblige는 중세 영어인 obligen(혹은 중세 프랑스어 단어 obligier)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시 그 어원은 라틴어에서 “속박”, 혹은 “의무”를 나타내는 Obligare에서 비롯되었다. 닭벼슬은 도대체 어디서 갑툭튀한 건지.

  Noblesse Oblige라는 표현 자체가 등장하게 된 건 19세기 중엽, 프랑스 사실주의를 상징하는 극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희곡,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ée)”에서 처음 등장한다. 미안하지만 그 이전에는 이런 표현 자체가 없었다.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 해야 한다는 점에는 3,800% 정도 찬성하지만, 출처도 불분명하고 자기 감정에 앞서 배경 설명을 얼렁뚱땅 한다거나, 혹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강조하는 것은 그닥 좋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꼰대라서 이런 걸 따지는 건지도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런 이야기.

참고 : 실제 칼레 공성전의 전말

백년 전쟁 초기에 벌어진 전투 중에 하나인 제 1차 칼레 공성전(1346)은 크레시 전투에서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 필리프 6세(Philippe VI de Valois)는 노르망디 지방에서 프랑스 본토로 진군하는 에드워드 3세와 영국군을 저지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영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 역시 필리프 6세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칼레를 확보하여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완벽 차단하고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로를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1346년 9월 4일부터 공성전이 시작된다. 칼레 공성전은 1347년 8월 3일까지 이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수 차례에 걸쳐 필리프 6세에 의한 파상적인 공격이 계속 이루어진다.

단, 필리프 6세는 크레 시에서 약 3만여 명의 병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군에 대한 공격은 주로 영국의 보급 저지를 위주로 이루어졌다. 물론 단 한 번도 성공을 하지 못하지만(반대로 영국군 역시 필리프 6세의 군대를 괴멸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칼레 공성전에 임해야 했다).

당시 칼레에는 약 7,000-8,000명 정도의 시민이 있었는데, 필리프 6세에 의한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시민들에 의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칼레는 당시 요새화되었기에 쉽사리 점령할 수 없었고, 에드워드 3세는 주변을 약탈하고 프랑스 군의 보급을 막는 작전으로 칼레를 고립시키는 전술을 택하였다. 실질적으론 공성전이 펼쳐진지 6개월 만인 1347년 2월에 이르러 칼레를 완전 포위한다.

1347년 8월 1일, 1년 남짓한 저항에 지친 칼레시민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의사를 타전한다. 8월 3일에 에드워드 3세와 그의 군대가 칼레에 입성하게 되고, 머지 않아 칼레 시민들은 모두 영국-플랑드르 연합군 병사들에 의하여 강제 소거 당한다. 이후 1558년 프랑스군에 의하여 탈환되기까지, 칼레는 약 200여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기득권 세력들을 책망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많이 누리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데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아모스 선지자 시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부를 백성들에게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책망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상아는 북이스라엘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량 수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입한 상아로 상을 만들어서 누워있습니다.
상아로 침대를 만들었습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납니다.
그들이 상아 상을 만들어서 술 마시고 즐기는 동안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상아 상이 늘어나는 만큼 백성들은 굶주리고 고통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먹는 고기는 최상급 고기였습니다.
어린 양과 송아지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그들은 노래도 열심히 불렀습니다. 시를 짓고 곡을 붙여서 다윗 흉내를 냅니다. 그들은 다윗과 닮지 않았습니다. 행실과 내면은 다윗과 반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를 짓고 노래 부르던 다윗의 모습이 좋아보였습니다. 겉모습은 흉내 내지만 내면은 엉망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신다는 표현은 술에 중독된 그들의 모습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술에 중독되어 있고 기름진 삶을 자랑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으로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시절에 부를 많이 축적했습니다. 그들의 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이 백성들에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기득권 세력들이 그 돈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치장하기 바빴습니다. 백성들은 그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심판하실까요?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하나님은 그들이 사로잡히는 자 중에서 앞서 사로잡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려고 호세아, 아모스, 요나 선지자를 집중적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부를 백성들에게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준비하셨습니다. 북방에서 한 민족이 내려올 것인데 그들이 내려오면 사로잡힐 백성들을 먼저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기득권 세력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은 사로 잡히는 자 중에서 앞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치에 합당한 일입니다. 기득권 세력들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앞서 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과 명예를 백성들에게 나누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조차 하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 앞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 아닙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은 대부분 시대적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는 서민들입니다. 하지만 앞서 사로잡히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는 타인보다 앞서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앞서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돈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은혜는 먼저 받은 백성들입니다. 먼저 은혜 받은 백성으로 받은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들, 아직까지 믿지 않는 자녀들에게 그 은혜를 흘려보내야 하는 그 의무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 우리가 먼저 믿었다면 먼저 믿은 값을 그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말씀을 전하고 선포해야 됩니다.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 근심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부여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근심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환난 날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앗시리아 군대가 일어나서 북이스라엘 전역을 칠 것입니다.
먼저 된 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우리에게 주어진 짐이 큽니다.
우리도 나라의 어려움과 고통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은혜 받은 자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2. 우리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3. 은혜 받은 자들이 앞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오니 드리는 기도를 받아 주시옵소서.


7월 19일(수) 아모스 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림줄(7절)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This is what he showed me: The Lord was standing by a wall that had been built true to plumb, with a plumb line in his hand.

* 다림줄 :  '납, 측연 추'를 뜻하는데 다림줄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건물을 허물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 594. 아나크(’ănâk) אֲנָךְ 

1. 납.  2. 다림줄
발음 / 아나크[ ’ănâk ]
어원 / ‘좁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사용되지 않음]
관련 성경 /  다림줄(암 7:7, 8).
구약 성경 / 4회 사용

아모스가 본 환상들

아모스가 본 세 가지 환상을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아모스는 이제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피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서 본장부터는 죄악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 즉 앗수르의 침략에 대해 환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본장부터는 아모스의 예언 사역이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였던 전장까지와는 달리 백성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역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아모스 개인 사역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7:1-9. 황충과 불과 다림줄 환상을 통한 경고
7:10-17. 제사장이었던 아마샤와의 논쟁

아모스는 3장에서 6장까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9장까지 다섯 개의 환상을 언급하게 되는데, 본장에서는 세 개의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환상들은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들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앗수르의 공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한 편 이 같은 아모스의 환상을 듣고서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방해하고자 하는 제사장 아마샤의 공격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모스의 사역은 선지자의 사역이 하나님의 예언의 대변자임과 동시에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는 중보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구약 성경을 보면 여러 형태의 중보사역이 등장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놓고 조카 롯을 위해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중보사역(참조, 창18:22-23), 우상 앞에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중보 기도(참조, 출32:30-32),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슬퍼하며 기도하는 사무엘의 중보 사역(참조, 삼상12:23) 등에서 중보 사역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중보 사역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중보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고 죽으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대속이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 사함에 관한 중보가 가능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행하고 계 신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여전히 사단의 세력이 성도들을 위협하는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능력인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이런 중보 기도의 필요성이 매우 크게 대두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성도들의 중보 사역이 무엇보다 크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부패한 상황 속에서도 영적으로 깨어 의의 길로 돌아오도록 권고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 이처럼 시대 속에 깨어 있는 선지자야말로 시대를 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대 속의 선지자인 성도들도 영적으로 깨어 갈수록 타락되어 가는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영꺽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날마다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유익과 축복만을 위해 간구하는 자가 아니라 시대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의 기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도자가 분명한 원칙과 지도력, 타협하지 않는 소신을 가지고 공동체를 인도하면 질서는 확실하게 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적인 불만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지도자 때문에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원칙 없이 행동한다면 혜택을 입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아우성 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지도자는 본질에 있어서는 타협하지 않는 분명한 소신과 지도력을 가져야 하고 비본질에 있어서는 넓은 아량과 마음을 가지고 통큰 결단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바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에게 통하는 것이 있고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절대로 양보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통하는 것도 있습니다. 끝없이 용서하시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임계점에 도달하고 나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을 봅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여로보암 2세 시절 그들은 부유했지만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에게 세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 가지 환상을 통해서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마지막 환상은 돌이키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예고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메뚜기가 풀을 다 먹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의 풀은 곡식을 말합니다. 메뚜기 떼가 곡식을 먹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 시절 물질의 부를 누렸다 할지라도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메뚜기 떼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곡식을 다 먹어버리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환상을 본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미약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이들이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심판을 되돌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선지자의 간구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메뚜기 심판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심판에 대한 환상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의 불이 바다와 육지를 삼키고 태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바다와 땅에 임하면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여로보암 2세 시절은 해상 무역이 성행했습니다. 배를 띄워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이 먼 바다까지 오가는 배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북이스라엘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불이 육지를 삼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 아무리 금자탑을 높이 쌓아 올린들 소용없습니다. 제 아무리 경제적 평화와 부를 누리면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일으켜서 전쟁이 일어나게 하시면 쌓아둔 재산은 불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이 또한 무서운 재앙입니다. 선지자는 이 환상을 보고 하나님께 울며 엎드립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선지자는 야곱이 미약하다는 말로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도 철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이신 세 번째 환상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다림줄 환상을 보이셨습니다. 다림줄이 무엇입니까? 건축현장에서 수직을 맞추는데 필요한 도구입니다. 땅 바닥으로부터 시작해서 높다랗게 벽을 쌓아올립니다. 벽돌을 하나하나 쌓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제 아무리 좋은 눈썰미를 가지고 벽돌을 쌓아 올린다 하더라도 삐뚤삐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은 다림줄을 위에서 아래로 늘어뜨립니다. 다림줄에 맞추어서 벽돌을 쌓아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반듯한 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메뚜기 재앙도 철회하셨고 불 재앙도 철회하시는데 다림줄은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림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두고 말씀대로 사는지 그렇지 않는지 지켜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들이 인생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재앙을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세상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을 위에서 늘어뜨려 보면 인생의 벽돌이 삐죽삐죽 튀어 나와서 보기 흉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씀의 다림줄을 너희들 인생에 보내노니 튀어나온 벽돌이 있다면 다시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쌓아 올려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원점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점부터 시작하기 싫어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준은 말씀이 아니라 다른 나라이며 믿지 않는 백성들의 세상 풍조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림줄로 삼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내가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인생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닥칠 것입니다. 선지자는 메뚜기 심판이나 불 심판을 예고하신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다림줄 심판 예고에는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습니다. 매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의 기준에서는 타협이 없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이 오늘 우리 인생에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사태를 겪고 있습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바이러스 하나가 교회를 텅 비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가운데에도 교회는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도 비교 대상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말씀의 다림줄 앞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리 인생도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아까워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 말씀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은혜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1. 인생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절대 기준인 말씀을 기억하고 살겠습니다.
3. 말씀의 다림줄이 우리 인생에 있음을 기억하고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하나님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암 7:7~8)

‘다림줄’이란 건축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다. 쌓아 올린 구조물이 수직으로 바로 서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것일까? 아모스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함2세의 부국강병책으로 부강하고 경제적 호황을 누렸지만, 사회 윤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곳곳에 사회적 약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는 주변사회의 풍요를 상징하는 우상숭배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고 명하였다. 아모스는 ‘정의를 하수 같이, 공법을 물 같이’ 흐르는 사회를 위해 하나님의 시각으로 외쳤다. 하나님이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에 베풀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의 첫 번째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의 손에 이 다림줄을 들게 하셨다(슥4:10). 이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백성의 지도자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기뻐하신다. 이는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고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기준 감각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작건 크건 관계없이 위험에 처한다. 리더의 위기는 공동체의 위기이다.

오늘날 나의 손에는 다림줄이 들려 있는가? 하나님의 판단력을 닮고 시행하고 있는가? 이 다림줄이 올바로 서지 못하면 나의 공동체는 흔들린다. 잘못된 건물을 세우게 된다. 진리의 잣대가 흔들리면 공동체는 진리에 벗어난 집을 짓게 된다. 죽은 전통과 잘못된 관습, 상황의 잣대로 공동체를 세우면, 하나님의 다림줄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자신과 내가 섬기는 공동체, 그리고 이 땅의 교회들을 향해 다림줄을 베푸신다면 어떻게 될까? 올바로 쌓아올리지 못한 나의 모습이 전체 구조물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겠는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준엄하신 심판을 내리시겠는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나와 내가 세운 집들을 다시 재어보자.

영어로 다림줄은 plumb line입니다.
라틴어 ‘플룸붐’(납)에서 온 plumb은 다림줄 끝에 매다는 다림추(plumb bob, plummet)를 뜻하기도 합니다.
로마 시대에 납으로 수도관을 만든 것이 plumbing(수도 시설, 배관 공사), plumber(배관공) 같은 단어에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 경고를 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셨다. 다림줄을 드리우고 쌓은 성벽 곁에 주님께서 서 계시는데 손에 다림줄이 들려 있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다림줄입니다’ 하니, 주님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이삭의 산당들은 황폐해지고 이스라엘의 성소는 파괴될 것이다. 내가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겠다.’”(암 7:7~9, 새번역) 그리고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춰 중심을 잘 잡고 바르게 서 있는지 돌아봅니다.

다림줄



인류 역사의 끝은 사상전쟁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인류 종말을 가르친 다림줄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그어놓은 어떤 국경선이나 민족적 분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교파를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지되 먼저, 하나님을 대적하는

666의 무리가 반드시 파멸당할 것이 작정되어 있습니다(사 7:15, 사 2:4, 미 4:3, 사 32:16~19). 그러므로 누구든지 붉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는 몽땅 없애버린다는 것이 6000년 선악 싸움의 최후의 결전을 짓는 아마겟돈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경기와 게임이 그렇듯이, 어짜피 이 땅의 영적 전쟁도 이긴 자가 차지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인간 자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한 자들이 바로 최후의 승리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중심과 사상을 보십니다(삼상 16:7).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상과 하나된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약속한 것이 사 66:18절 이하의 예언이 됩니다. 

암 7:7절에 "다림줄"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이 다림줄을 베풀고는 다시는 용서치 않는다고 하신 것을 볼 때 다림줄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공법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원래 '다림줄'이라는 것은 성전을 곧게 쌓을 때 필요한 기구로서 실에 추를 달아 늘어뜨려 중력방향의 수직을 맞추는 도구입니다. '척량줄'이라고도 합니다. 육적 세계의 건물도 보이지 않는 수직(중력)방향을 잡아주는 다림줄과 어긋날 때에는 어김없이 무너지고야 말듯이, 보이지 않는 신령한 영적 성전도 다림줄 역할을 하는 심판의 잣대(계 11:1), 척량줄(슥 2:1~), 먹줄(겔 9:3), 다림보던 추(왕하 21:13)에 맞지 않을 때에는 여지 없이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최고의 목수'이십니다. 고로 예수님이 들고 계신 다림줄은 부패한 성전을 심판하는 진리의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아려주는 율법시대에 누구든지 율법을 범하면 저주를 받았고(신 27:26), 영혼을 구원하는 은혜시기에도 역시 누구든지 '천국복음'을 떠나면 영적인 저주를 입고 지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갈 1:7~8). 종말에도 '영원한 복음'이라는 다림줄(계 14:16)이 등장하여 심팜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 한 번도 인용됨이 없으니, 종말론의 예언 안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바로 종말의 영적 성전 건축 사명자인 스룹바벨에 의해서 고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슥 4:10)과, 머릿돌(슥 4:7)과, 하나님의 印(계 7:3, 학 2:23)을 맡겨 당신의 종으로 쓰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고로 모든 혼란한 것을 뒤집어엎는 심판기에는 '다림줄'을 외치고 나오는 '스룹바벨'의 사명자가 혼란한 종말 교회에 성경대로 재등장합니다. 이 다림줄의 사명은 영적 성전(기독교)에 부패가 있으리라는 계시록의 말씀 곧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좌에 앉으신 성부께로 받은(계 5장) 작은 책과 함께 시작되며, 인봉된 심판의 책이 열려져 그 해석을 알게 하는 일 없이는 절대로 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슥 4:9~10 스룹바벨의 손으로 성전건축(144,000명 인 치는 역사)이 마쳐지는 데는 "그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하셨습니다.

전술한 바, 주께서는 쌓은 담을 재어보는 줄을 다림줄이라 칭하셨고(암 7:7~), 예루살렘을 척량하는 것을 척량줄이라 명하셨으며(슥 2:1~5), 성전을 척량할 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사용하는 모습을 묵시로 주셨습니다(계 11:1~2). 이 모든 단어는 같은 내용을 지칭하니 곧 진리의 기준이 어떤 대표자에게 위탁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은 그 외에는 다 가짜라는 뜻이 아니고, 전 세계의 흩어져 있는 알곡 곧 진리의 용사들을 불러모으는 사명은 '영원한 복음'을 들고 나오는 동방 해 돋는 곳은 '다른 천사'의 사명 곧 '우리'라고 지칭된(계 7:3) 말세 선구자적인 무리들이 리드할 것을 뜻합니다. 이들은 다림추가 중력방향으로만 작용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향한 자들이며, 그 이외의 사상에는 결코 타협치 아니하는 신앙의 용사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사명은 수직이 아닌 모든 것들의 정체르 다림줄 앞에서 만천하에 공개되도록 하는 명료성과 독일무이성에 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아니하시고는 부족한 인간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사명입니다(슥 4:6).

사단의 왜곡된 진리가 난립하는 이 시대, 곧 성전건축의 대역사인 기독교의 大공사판에, 다림줄을 모르고서도 공사에 동참해보겠다고 날뛰는 거짓무리들이 다시 등장할 것입니다(에스라 4:2). 그들은 세상 명예를 바라는 자들이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사단의 권위를 빌어서 주님의 일을 기꺼이 훼방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에스라 4:4~6).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성전재건'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나쁜 무화과입니다(렘 24장).

구약 성민의 모든 역사가 종말의 기독교 안에서 재연될 때에, 이스라엘 성소(종말의 기독교)에 다림줄을 베풀고(설교하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여지 없이 실행될 것입니다. 이를 외쳐 고하는 사명이 '다림줄'을 위탁받은 스룹바벨의 사명이며, 이 사명을 깨달아 한마음 된 자들이 계시록 7:3절의 '우리'라는 단체를 이루어 계 10:11절처럼 '다시 예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림줄, 다림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혼란의 줄" "공허의 추"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 34:11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12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이들은 환란 날의 불택자들로서 에돔 사상(시기, 질투, 미움, 무신론, 황금만능, 종교협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사 34:5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그를 심판할 것이라 34:6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초장=교회)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륙을 행하심이라"에돔은 정치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7머리 10뿔 국가들이요, 종교적으로는 환란시대의 불택자들 곧 성전 밖마당 교파(협상교회)들입니다.

계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아모스 7:7~8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왕하 21: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다림줄을 깨닫게 되면 성전 밖마당과 안 마당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전 밖마당에 있는 자들은 이방인(잔인한 군주=사 19:4 / 한 왕=단 8:23~, 9:26~)의 손에 붙여져 짓밟힐 때까지 결코 다림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태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각 집을 짓는 자들인데, 집을 지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자와 사단의 꾀임을 받은 자가 섞여 있다가 다림줄 말씀(암 7:7~9)이 등장될 때(다시 예언될 때 - 계 10:11) 확연히 갈라지게 됩니다. 마치 곡식 밭에 알곡과 쭉정이가 공존하다가 타작마당에서는 확연히 갈라지는 이치와 같습니다(고로 다림줄은 사 41:15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와 같은 뜻이 됩니다). 같은 교회 내에서 똑같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었으나, 다림줄 말씀이 외쳐질 때는 제 본 모습(영적 현주소)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홍수에 빠져 죽고, 핵에 타 죽는 것이 일반인들이 말하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더 무섭고도 근원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바로 다림줄 말씀이 지나갈 때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불에 해를 당하는 심판보다도 더 원천적인 심판인 것입니다. 홍수나 불은 다림줄 밖에 있는 사람을 훑고 지나가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그날에는 재앙이 됨을 미리 깨닫고 각성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15절 말씀에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이란, 중생받은 자가 헛된 삶을 살다가 공력이 불탈 때 육체는 소멸되고, 영혼만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노아 때 죽은 자들이 육체는 죽었으나 예수님이 옥에 내려가셔서 전파하실 때 그 영혼이 살리움 받은 이치와 꼭 같습니다(벧전 3:18~). 영혼구원은 예수 피 권세에 있으나, 환란날에 재앙을 면하고 새 시대의 백성이 되는 육체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산 말씀 권세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피로 산 말씀 권세! 이것이 바로 다림줄의 권세, 머릿돌의 권세, 하나님의 인(印)의 권세입니다.

고로 다림줄이란

계시록과 계시록을 통하여서만 들어갈 수 있는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뜻합니다. 이것을 말할 줄 아는 교회가 종말의 촛대교회요, '해를 입은 한 여자'가 되는 것이니 ① 광야교회(율법), ② 피로 산 교회(은혜), ③ 촛대교회(심판과 새 시대)로 이어지는 구원노정의 순서를 알고 때를 따라 양식을 먹는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보배롭고 귀한 일이 될 것입니다(마 24:45).

그러므로 진정 예수님의 피로 산 백성이라면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의 다림줄에 절대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혼란의 줄(기독교 협상주의, 무신론, 과학만능, 황금만능)로부터 벗어나 다림줄만을 꼭 붙들어 주님이 용서 없는 심판을 행하실 때 심판을 이기고 새 시대의 거룩한 백성 또는 왕권자가 되어 주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데 이 한 몸 다 바칩시다.


다림줄이 필요하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빌드-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터를 잘 닦아야 한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폭삭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목수답게 튼튼한 반석이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무엇인가? 교회이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말씀)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건축자가 수직으로 벽돌을 쌓는 과정은 마치 말씀을 아는 지식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기초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군데군데 벽돌을 빼먹고 쌓으면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기본기, 기초가 올바르지 않을 때에 우리 앞에 놓인 삶에서도 하나님보다 자신이 갖고 있고 보이는 것에 얽매여 넘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상은 상대적으로, 수치적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다.(삼상16:7)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중심’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기준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다림줄’은 무엇을 제시하였을까? 하나님의 다림줄은 그분의 말씀이었다.

성경에서의 다림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영과 육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때 기준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의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리웠다. 바르지 않은 건물은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야 하듯이 바르지 않은 나라는 허물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당신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다림줄, 말씀은 삶의 기초요 바른 길을 제시하는 절대적 규범이다. 이제 우리 스스로 다림줄을 드리워야 한다. 나의 삶이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중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온전하고 올바르게 빌드-업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수평을 붙들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40년, 180년을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은 곧 은혜이다. 우리 주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고, 중심을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7월 20일(목) 아모스 8장 - 여름 실과의 환상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무엇을 보느냐?(2절)


예레미야 24:1-8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예언

  1. 바벨론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2.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그들로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로 내가 쫓아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미가 7: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What do you see, Amos?" he asked. "A basket of ripe fruit," I answered. Then the LORD said to me, "The time is ripe for my people Israel; I will spare them no longer.

아모스서 전체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환상 중 네 번째 환상을 소개합니다.
7장에서는 세 가지 환상 중에서 다림줄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다면, 8장에서는 '여름 실과 광주리 환상'을 통한 이스라엘 종교의 멸망을 예고한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과 종교적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8:1-13. 여름 실과 광주리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
8:4-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삶의 이익만 추구했다는 아모스의 마지막 설교

아모스는 네번째의 환상, 곧 여름 실과의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은 곧 멸망하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표하는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여름 실과(카이츠)'란 단어와 '끝(케츠)'이란 히브리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지자 아모스가 본 네 번째 환상은 북 이스라엘 왕국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또다시 이스라엘을 향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사회적인 불의와 신앙적인 타락상을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의 파국적인 멸망이 필연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영적으로 기근 상태에 빠진 처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서 8장을 통하여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울려 퍼질 때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더 나아가 말씀의 기갈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해 인정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실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끝(7093) 겟츠(qêts) קֵץ

1. 극단.  2. 끝없이 אֵין קִץ.  
3. 파멸
발음 / 겟츠[ qêts ]
어원 / 7112에서 유래한 압축형
관련 성경 / 지남, 끝(창 8:6, 전 12:12), 끝남(출 12:41, 민 13:25, 대하 8:1, 겔 7:2, 단 11:27), 끝(창 6:13, 신 31:10, 왕하 19:23), 마지막(욥6:11, 애 4:18, 단 11:40), 종말(시 39:4, 합 2:3), 끝날(단 12:13).
구약 성경 / 67회 사용

* 여름실과(7019) 카이츠(qayits) קַיִץ 

1. 추수. 2. 여름
발음 / 카이츠[ qayits ]
어원 / 69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름(창 8:22, 시 32:4, 렘 8:20), 여름과일(삼하 16:1, 렘 40:10, 미 7:1), 과일(삼하 16:2).
구약 성경 / 22회 사용


음펨바 효과란 같은 냉각 조건에서 높은 온도의 물이 낮은 온도의 물보다 빨리 어는 현상을 지칭한다.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는 같은 냉각 조건에서 고온의 이 저온의 보다 더 빨리 어는 현상 또는 그 효과를 말한다.[1][2] 이는 35℃ 물과 5℃ 물로 실험하였을 때 비교효과가 극대화된다.[3] 1963년 탄자니아의 에라스토 음펨바(Erasto B. Mpemba)가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3]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이 50년간 풀리지 않다가 2013년 11월 싱가포르 연구진에 의해 물의 수소결합과 공유결합의 에너지 상관관계에 의한 현상임이 밝혀졌다.[4]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인간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양식을 섭취해야 한다. 모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말씀과 선지자를 공급하셨다. 이 말씀도 곧 율법으로 가시화 되었고 인간 세상의 삶의 영적 기준이 되었다. 아울러 선지자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계속 유지시키셨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선민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죽음에 처한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구원 계획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와 아울러 끊임없이 죄를 범하여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까지 초래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우선 영적 양식인 말씀을 끊어 버리는 영적 기갈부터 초래했으며 더 나아가 최종적 심판을 통한 육체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는 특권은 절대적인 구원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공된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율법을 어길 때 오히려 율법은 심판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심판의 형태는 비단 선택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임한다. 여호와의 날인 최후의 심판 날에는 인간들의 모든 공동체 영역 속에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이 포괄적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본장을 통하여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울려 퍼질 때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더 나아가 말씀의 기갈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는 무관심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해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다운 삶을 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아직까지 희망이 있고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면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가장 무서운 심판, 임박한 진노의 심판이 하나님이 입을 닫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들과 말 할 일이 없다. 지금까지 말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고 행실이 그 모양이라면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침묵은 임박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여러 말씀들이 있습니다. 호세아, 아모스를 통해서 하신 말씀들 끝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에게 계속해서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7장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메뚜기 환상과 바다와 육지에 불이 임하는 환상, 다림줄 환상이었습니다. 이제 네 번째 환상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보아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뜻을 여러 번 돌이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를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 주십니다. 때가 무르익어서 여름 과일을 사람들의 식탁에 올릴 때가 되었다는 말씀은 임박한 심판이 이르렀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름의 끝이 와서 과일을 따야 하는 것처럼, 과일이 사람들의 식탁에 놓일 때가 된 것처럼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특히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전했는데 오늘본문 다르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의 죄가 심각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돌보지 않는 힘 있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월삭과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일을 멈추는 날입니다. 쉬는 날입니다. 단순히 육체를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쉬는 날입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 있는 자들은 월삭과 안식일에 쉬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문을 열기만 하면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직하게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속이는 저울로 장사했습니다. 에바를 속이고 저울을 속였습니다. 세겔을 속여서 팔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을 압제하고 착취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이 행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달아주는 밀도 좋은 밀이 아니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사람들을 인신매매로 팔아넘기는 자들, 좋지 않은 밀을 팔아서 폭리를 취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여름 과일 광주리처럼 해치워 버리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눈에 띄는 것은 독자의 죽음이라는 대목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자가 죽으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희망이 사라집니다. 독자는 그 가정의 희망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다음 세대가 끊어지게 할 것이라는 선언은 예사로운 심판이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 바로를 심판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북이스라엘의 희망의 싹을 끊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11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화 되어 명확히 드러납니다. 양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물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곧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모두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입맛이 없다는 것은 몸에 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곡기를 끊는다는 것은 생명이 다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먹어야 됩니다.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징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자연환경으로, 주변 상황으로, 때로는 백성들의 양심을 찔러가며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듣지 않자 하나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름과일이 광주리에 담겨 식탁에 올라가는 것처럼 임박한 심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시고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갖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생명수 같은 말씀으로,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환경으로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듣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고 설교를 들어도 졸리기만 하고 징조를 보아도 마음에 가책이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임할 것이고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북이스라엘 북단 단에서부터 남유다 남단 브엘세바까지 하나님께서는 영적 기갈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듣고 깨닫고 돌이키는 자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크게 말씀하시고 때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작게 말씀하십니다. 때마다 시마다 아버지의 말씀에 영혼을 열고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 말씀을 듣는 지혜로운 백성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힘써 지키겠습니다.
2.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말씀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3. 말씀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들려 주시니 그 말씀으로 힘을 얻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옵소서.

7144. 대머리(코르아흐. qorchâh) קָרְחָה 

1. 벗겨짐.  2. 머리의 정수리.  3. 머리의 앞부분
발음 [ qorchâh ]
어원 / 713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머리(레 21:5, 겔 7:18, 미 1:16). [동] 대머리가 되다(렘 47:5, 48:37), 털을 밀다(신 14:1), 머리털을 밀다(겔 27:31)
구약 성경 / 11회 사용

7월 21일(금) 아모스 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범죄한 나라(8절)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Surely the eyes of the Sovereign LORD are on the sinful kingdom. I will destroy it from the face of the earth-- yet I will not totally destroy the house of Jacob," declares the LORD.

범죄한 나라(밤마믈라카 하핱타아.  בַּמַּמְלָכָה הַחַטָּאָה

2403. 범죄한(하타트. chaṭṭâʼth)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 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 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4467. 나라(맘라카. mamlâkâh) מַמְלָכָה 

1. 왕국.   2. 지배권. 3. 통치권
발음 / [ mamlâkâh ]
어원 / 44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라(창 10:10, 민 32:33, 삼상 10:18, 암 6:2), 왕위(신 17:20, 대하 20:29), 만국(왕하 19:15, 스 1:2), 왕(왕하 11:1, 대하 22:10, 암 7:13), 왕국(시 46:6), 열방(사 23:11), 국왕(시 135:11), 국가(렘 18:7, 51:20).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아모스 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 319. 남은 자( 아하리트.  ’achărîyth) אַחֲרִית 

1. 마지막 부분.  2. 종말.  3. 장래
발음 / 아하리트[ ’achărîyth ]
어원/ 3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후일(창 49:1, 민 24:14), 종말(민 23:10, 신 32:20, 사 46:10), 끝날(신 4:30, 겔 38:16), 마침내(신 8:16, 잠 23:32), 나중(욥 8:7, 잠 29:21), 자손(시 109:13), 마지막(잠 5:11, 단 8:23), 필경(잠 14:12, 19:20), 장래(잠 23:18, 24:20, 렘 29:11), 말일(사 2:2, 렘 23:20), 남은 자(겔 23:25, 암 4:2, 9:1), 자손(단 11:4). [동] 마치다 (단 8:19).
구약 성경 / 61회 사용

아모스 9:12
저희로 에돔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7611. 쉐에리트(sheʼêrîyth)  שְׁאֵרִית 

1. 나머지.  2. 남은 자.  3. 후손
발음 / 쉐에리트[ sheʼêrîyth ]
어원 / 76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남겨둔 것(렘40:11), 남은 자(렘44:7, 50:26,왕하21:14, 사15:9, 암5:15), 나머지(느7:72, 사44:17), 기타(렘39:3). [형] 남아 있는(삼하14:7, 렘8:3, 겔36:5), 남은(스9:14, 겔36:3, 습2:9).
구약 성경 / 66회 사용


'에돔의 남은 자'란 1:11,12에서 심판을 받은 자들과는 달리 그 심판에서 구원받고 보존된 자들을 가리킨다.
아마 이들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이란 말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 즉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F. Keil).
그리고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도 역시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품에 돌아온 자들, 곧 구원받은 무리들을 지칭하는 듯함.


'남은 자'(שאר, λειμμα, λοιπος, remnant) 사상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 실현과 사탄의 방해라는 줄거리 로 되어 있는데 그 줄거리에는 항상 ‘남은 자’가 있습니다.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아르’(שאר)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레임마’(λειμμα) 혹은 ‘로이포스’(λοιπος)라고 하고, 영어로는 ‘렘넌트’(remnant)라고 합니다.
‘남은 것’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노아 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여 물로 심판 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노아와 그 식구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 6:6-8, 눅 17:26-27, 벧전 3:20).

롯 때에도 소돔성이 사람들이 타락하여 불로 심판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롯과 그 식구들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창 19:29, 눅 17:28-29).

아합왕 때에도 북이스라엘이 아합왕과 이세벨의 학정으로 모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엘리야와 7,000명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왕상 19:18, 롬 11:2-5).

포로기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한 가운데 사로잡혀간 자들 중에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앙을 가진 자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사 6:13, 10:20, 11:10-12, 렘 23:1-4, 31:7-8, 단 1:8-9).

하나님은 음란과 우상숭배로 타락했을 때 심판을 하면서도 언제나 신앙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신실한 신앙을 가진 ‘남은 자’를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엘 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욜 2:28-32, 행 2:1-21).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롬 9:27, 29).
사도 요한은 종말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고 했습니다(계 6:6).

구약시대에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여 사로잡혀 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부흥시켰습니다.

신약시대에 모두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로마의 박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성령의 충만하여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켰습니다.

그처럼 종말에도 사탄의 온갖 핍박과 유혹에도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참 생명력을 가진 ‘여자의 남은 후손들’ 곧 ‘남은 자’와 더불어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선 것입니다. ‘바다 모래 위’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는 장소라기보다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기 위해 여자의 남은 자손을 공격하게 할 짐승을 부르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13장에 보면 두 짐승이 나옵니다. 1-10절에는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짐승이 나오고 11-18절에는 땅에서 두 뿔을 가진 짐승이 올라옵니다. 용이 그 두 짐승을 이용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합니다. ‘용’은 사탄을 상징하고, ‘바다에서 나온 열 뿔 달린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땅에서 올라온 두 뿔 가진 짐승은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상징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을 의미하고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는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울 자들을 남겨 놓습니다. 사탄은 그들이 구원역사에 생명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을 앞세워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남은 자‘들은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거나 미혹당하지 않고 신앙을 지킵니다.

   남은 자들은 증거를 가지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이른바 ‘남은 자손’은 어떤 성격을 가진 자들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분인 것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양보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며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증언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주되심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양보하지 않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이 이용하는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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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에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 쓰임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11:3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했습니다 (11:5-6).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영광을 누립니다. 요한계시록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고 했습니다 (14:12).

   지금 신약 복음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로마서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남은 자는 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해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환난 가운데서도 보호하고 원하시는 때에 영적 권세를 주어 사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양보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모두 힘든 가운데 있지만 남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신실한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목적 하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목적 때문에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 있는 남은 자들<쉐아르- שְׁאָר‎>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사 10:21)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롬 11:4)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왕하19:31)

“남은 자”를 히브리어로 <쉐아르- שְׁאָר‎>라고 합니다.
영어로 <렘넌트- Remnant> 라고 합니다.
“남다, 남겨지다”의 <샤아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죄악을 심판하실 때, 보호 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믿음이 있는 자를 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실 때, 롯과 두 딸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시대 때, 홍수로 심판 하실 때,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실 때, 고센 땅에 머물며 하나님을 경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 바알과 아세라 신상에 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칠천명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영혼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구별 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영혼이 남은 자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영혼들입니다. 그 “남은 자”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영혼들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보호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손이 함께 하는 영혼들입니다. <남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은 자' 사상에 대하여

[라이프성경사전]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 심판받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죄악 된 세상과 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역경을 견디며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소수의 의로운 자들을 남겨 두시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이들의 구원에 목적이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의로운 자들을 통해 당신의 구속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대표적 실례를 살펴보면,

1. 대홍수 가운데서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창 6:5-8).
2. 바로의 남아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모세(출 2장).
3. 출애굽 1세대로서 광야에서 살아남은 여호수아와 갈렙(민 14:29-30).
4. 아합의 여호와 신앙 말살 정책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의 성도(왕상 19:18).
5.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사 10:20; 미 2:12-13) 등이다.

사도 바울은 환난과 역경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가리켜 ‘남은 자’로 정의했다(로마서 9: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교회용어사전]

고통과 재난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레 26:36; 민 24:19). 특히,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에 멸망치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사 10:20; 렘 31:7).

이사야 10:20-21 / 남은 자야곱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이런 자들은 고난 중에도 죄악과 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남겨 두신 일차적인 목적은 이들의 구원에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창 6:5-8; 출 2장; 민 14:29-30; 왕상 19:18; 사 10:20-22; 미 2:12-13).
참고로, 사도바울은 환난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남은 자'로 정의했다.(로마서 9:27)

[두산백과사전]

남은 자 사상 요약 :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는데, 그 중에서도 소수자를 남겨 구원과 축복의 담당자로 함을 자각하고 있는 자.
헤브라이어로는 아하리스, 예세르, 펠레타(피한 자) 등이다.
하나님이 자유로운 은혜로서 심판을 면케 하고 심판에 제한을 가하는 일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정치적, 군사적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을 일컫는다.

《여호수아서》 13장 12절에 “곧 르바의 남은 족속으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도읍하였던 바산 왕

옥의 온 나라라 모세가 이 땅의 사람들을 쳐서 쫓아내었어도”로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남은 족속을 이야기한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싹이 되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허락한 것이다.
《이사야》 1장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고 하여 하나님이 남은 자를 허락하였음을 나타낸다.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구약성서 《이사야》 10장에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여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은 자를 모으고, 남은 자는 회개하게 된다.
《예레미야》 31장 9절에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향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남은 자는 여호와를 의탁하여 보호받게 된다.

남은 자는 순결한 자들이 되고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남은 자가 받는 축복은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예레미야 32:38~39)”로 나타나 있다. 스바냐에 따르면 남은 자는 겸비하여 주를 찾는 자이고 남은 자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신약성서의 이 개념은 바울로의 구원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Holynet]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어리트’(tyrav)입니다.
‘남다’, ‘뒤에 남겨지다’라는 뜻의 ‘솨아르’(rav)에서 파생된 ‘쉐어리트’는 ‘잔류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솨아르’는 벌목 후에 남아 있는 나무나 그 나무의 그루터기(사 6:13; 10:19)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에 의해 심판을 받고 남은 자, 혹은 남은 민족, 남은 땅을 비유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사 15:9; 렘 47:4,5; 겔 25:16).

‘쉐어리트’는 하나님 심판의 엄중함을 표현하며, 심판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두 가지 성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은 ‘오직 남은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을 절대로 멸하시지 않는다는 소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남은 자’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 하실 때에 그 중에서 몇명을 남겨 구원과 축복을 베푸시는 데, 그것을 아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지는 ‘남은 자’에는 광야 생활에서 살아 남아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들, 앗수르의 강제 이송에서 탈출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대하 30:6; 34:9),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유다로 되돌아 온 자들(학 1:12; 슥  8:6  참조; 느 1:2-3), 이방 여러 나라들로부터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아 오게 된 자들(사 11:11; 미 2:12)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을 면케 하시거나, 심판을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남은 자를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심판 중에서도 회복을 약속하시며,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서 9장은 다섯 번째 문설주 환상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씀의 기근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 심판이 임할 것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 회복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해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계속될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의 흐름 속에서도 '남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9:1-6. 성전 파괴에 대한 환상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
9:7-10.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 심판에 대한 예언
9:11-15. 다윗의 무너진 천막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제시 

아모스는 다섯번째의 환상인 부서지는 문설주를 보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멸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베풀어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는 그날에 무너진 이스라엘의 장막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는 곧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가 그러했듯이 아모스 선지자도 줄곧 심판을 예언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통하여 다시 회복하실 것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통하여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사상은 결국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은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남은 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그루터기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남은 자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민족적 의미에서 살아 남은 자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은 자들이란 이스라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자들입니다.
또한 이들조차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남은 자가 아니라 심판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더불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깨닫게 합니다.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나라와 백성 위에 뛰어나며 이 땅 위에 주의 백성과 함께 임재하심으로써 주의 백성들을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환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자는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가고 온갖 죄의 유혹이 밀려오는 세상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욱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풍요에서도 성도들은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때때로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멸망 가운데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닌 자들을 남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죄악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결을 지킨 성도들에게 마지막 심판을 통해 승리의 기쁨과 영원한 구원의 면류관을 주시기 때문이다. 바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소부재(omnipresent)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접두사 omni- 는 “모든”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많은 종교에서 신은 무소부재하다고 간주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세분화됩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의 모든 결마다 스며있지는(범신론) 않으시지만, 어디에서 항상 계십니다.

비록 어디에서든지 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지만, 모든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하십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 다른 환경에서는 당신의 존재하심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방법으로 한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고(시편 46:1; 이사야 57:15) 상황에 따라 어떤 주어진 시간에 모든 창조물들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시편 33:13-14).

하나님께서는 시공의 모든 영역에 무소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어떤 시간이나 공간에만 지협적으로 제한을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또 매순간의 현재마다 계십니다.
어떤 분자와 원자 입자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존재하시기에 너무 작다 할 수 없으며, 어떤 은하계도 하나님께서 제한하시기에는 너무 광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창조물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능성들까지도 알고 계시므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사물의 모든 자연적 질서 안에, 모든 방법, 모든 시간과 장소 안에 존재하십니다(이사야 40:12; 나훔 1:3).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건의 안내자로서 역사 속의 모든 사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존재하십니다(시편 48:7, 2; 역대하 20:37; 다니엘 5:5-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다른 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 간청하는 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히 세심한 방법으로 존재하십니다(시편 46:1).
더할 나위 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된 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시며(골로새서 2:19), 지상을 덮고 있으며 지옥 문이 이기지 못할 온 교회들 안에 신비롭게 존재하십니다.

인간 정신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역설적인 질문들에 시달리듯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설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즉 지옥에도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악인이 가는 곳으로, 악인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끝없는 분노 아래 고통 받는 장소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장소라고 주장합니다(마태복음 25:41).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과 분리된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4:10이 어린양 앞에서 고난 받는 악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지옥에 있는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견뎌야 합니다.
악인을 따로 떼어 놓은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니 좀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존재로 채우시며(골로새서 1:17) 당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기 때문에(히브리서 1:3), 위의 역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되 반드시 축복해야 할 곳에만 존재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당신의 자녀들과 떨어져 계신 것처럼(이사야 52:9), 악인을 멀리 하시고(잠언 15:29) 마지막 때에는 어둠에 매여 있는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가해지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고통 당하는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들이 자신들이 처한 영원한 상태로 인해 괴로워하고, 구원을 바라며 울부짖고,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 즉 죄가 없었다면 그들이 누렸을지도 모를 모든 축복으로부터 깊은 단절을 만든 그 죄를 끊임 없이 상기시켜 주시는 자로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항상 존재하시지만, 진노 외에 어떤 속성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국에도 존재하시며, 우리가 여기서는 감히 이해할 수 조차 없는 모든 축복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여러 가지 모양의 축복, 여러 가지 모양의 사랑, 여러 가지 모양의 친절, 그야말로 진노 외에 그 모든 것을 보이시며 천국에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만(시편 139:11-12),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이사야 57:16).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시 139:7-18)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안다면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 신앙의 컬러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리고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시조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무지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시를 의미하는 ‘revelation’은 ‘보여주다’ ‘드러내다’를 의미하는 ‘reveal’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계시를 기록해 놓은 게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 부르는 겁니다. 
반대로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지만 영적으로 무지한데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경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알 뿐이죠. 
하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최대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Communicable Attribute)과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Incommunicable Attribute)입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인간과 공유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도 부분적으로 나눠주신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지혜, 선, 사랑, 거룩, 의 등입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이런 속성들을 조금씩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인간이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이죠. 
비공유적 속성은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등입니다. 
무한성의 속성에 해당되는 게 여럿 있죠. 영원성이나 전지전능(全知全能 Omniscience and Omnipotence)도 무한성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런 속성을 가리켜 ‘편재’(遍在 Omnipresence/Ubiquity) 혹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부릅니다. 

전지전능한데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본문 시편 139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인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살지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 전지전능, 무소부재

본문을 보면, 다윗은 먼저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한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입니다. 
시편 139:2~4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내 생각조차, 심지어 입을 뻥끗도 하지 않았는데 말 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죠. 

13절~14절을 보면 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노래합니까? 
창조주 하나님!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오장육부를 만드셨는데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의학의 발달로 인공 심장, 인공 혈액, 시험관 아기, 복제 인간, ... 별의 별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편재! 무소부재! 
다윗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7절~8절에서 노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창세가 3장을 보면,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피로 속죄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최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승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손길과 시선이 부담스럽습니까? 피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반갑고 좋습니까? 당연히 반갑고 좋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 : 인도, 보호, 감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역사들을 행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3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1. 인도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9절~10절(상).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 

비유법인데, 새벽에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햇살이 얼마나 강렬합니까? 그 빛이 빠른 속도로 가는 것처럼, 아무리 빨라 바다 끝으로 가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며 그의 손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가도, 아무리 멀어진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절.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빛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다 찾아내십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 중 야간 투시경이 있습니다. 야간 사격이나 수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신기하게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간 투시경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해도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우리의 인생길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만큼 우리를 존중해 주시는데, 우리가 범죄하면 길을 막으십니다. 때로는 매를 드십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를 정금처럼 귀한 사람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한세대)의 간증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당 간부 자제로 8세에 뽑혀 평양 음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훈련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러시아 유학까지 갔습니다. 유학 시절 한 카페에서 음악을 들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재즈 피아노곡인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었는데, 청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북한에 돌아갔는데, 음악에 많은 제한을 받기 시작합니다. 

평양국립교향악단에서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한 게 문제가 되어 시말서를 쓰고 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20세기 이후 음악은 불순하다며 19세기 이전 음악만 연주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중국으로 탈북을 결행합니다. 탈북 후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을 때 극동방송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데,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인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 도움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공항에서 체포되어 공안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북한으로 압송됩니다. 도중에 탈출하고, 또 잡히고 ...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북한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런데 취조 도중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사관이 묻습니다. 너 아무개 아냐? 평양 음대 출신 맞지? 아버지가 아무개지? 그래서 이젠 모든 신원이 밝혀졌으니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수사관이 자기가 최근에 전근 왔다며, 아버지의 후배인데 과거에 은혜를 많이 입었다며 풀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으로 오개 됐습니다. 그 후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한세대 교수가 된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물론 이 간증은 특별한 사람의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상황에 맞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보호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시139: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나를 호위하듯이 보호해 주십니다. 강한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10절(하). “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your right hand will hold me fast)” 오른손은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능력으로 붙잡아주십니다.

여러분, 중력(重力 Gravity)의 법칙을 아시죠. 지구가 그 표면의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지구본을 놓고 생각해 보세요! 둥근 지구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거꾸로 서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고 걷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북위 37도쯤 되니까 비스듬히 서 있는 격입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그 속도가 엄청납니다. 자전 속도는 위치마다 다른데, 적도가 가장 빠른 1,674km/h입니다. 

한국은 1,337km/h입니다. KTX 시속의 5배쯤 됩니다. 얼마나 빠릅니까! 공전 속도는 107,532km/h입니다. 이렇게 쌩쌩 달리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정해 놓으신 중력의 법칙을 통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중력으로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십니다. 

또 18절 보십시오! “ ...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자나 깨나 보살펴주십니다. 잘 때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큰일이죠. 다윗은 다른 시편 23:4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보호해 주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사건과 사고가 많습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와중에 그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때문입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간증입니다.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했는데, 전투를 하던 중 네 군데 총탄을 맞고 신실했습니다. 군의관이 관통으로 판단하고 급히 상의를 벗겼습니다. 상의의 상태로 보면 분명히 관통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 보니 심장 부위에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총탄이 상의 주머니에 있던 포켓성경을 관통하다가 포켓 성경과 그 뒤에 있던 파월장병수첩 사이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이게 화제가 되어서 국내외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그 주인공은 수년전(기독교 잡지에 간증이 실린 때) KBS 제주방송총국 이영진 부장입니다. 포켓성경은 파병 직전 군 동료이며 교회 친구였던 이흥부 이병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붙잡아주심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고, 늘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감찰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시139: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you have searched me) 나를 아시나이다” 살핀다는 말이 바로 ‘감찰’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은 눈입니다.(계1:14 참조)

하나님은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피할까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실은 하나님이 뻔히 보고 계신데 죄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없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 회개치도 않고 습관적인 죄악으로 고질화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한꺼번에 얻어맞는 겁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미리미리 십자가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이 죄를 품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쫓깁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잘 풀릴 수가 없죠. 기도도 담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박 장수가 봉고 트럭에 수박을 싣고 이면도로와 골목길을 다니며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좁은 도로에 신호등이 있는데, 사람도 많지 않고 경찰차도 없으니까 위반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뒤에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봤나 걱정됐지만 시치미를 떼고 갔습니다. 뒤를 보니까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따라옵니다. 겁이 났습니다. 경찰차가 바짝 따라오더니 서라고 손짓합니다.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차에서 내리더니 소리칩니다. “아저씨! 왜 도망치는 것처럼 달려요? 수박 한 통 사기 되게 어렵네!”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겁니다.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영혼을 짓누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기도를 하며 무슨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 죄악을 숨기거나 방치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심지어 시편 130:3~4은 뭐라고 합니까?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되 아예 죄악의 기록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참고 기다려주실 뿐, 결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터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아주시지만, 공의로우신 분이라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이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그때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속죄의 은혜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성화의 노력을 기울었습니다. 
결국 ‘성군 다윗’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시편 139:19절,23절~24절을 보십시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Search me)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경직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는 너는? 그리고 한국교회 교인들은 어떻고?”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시 카메라만큼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일각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관련자들이 감시 카메라 앞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지저분한 짓들을 해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바르게 살고, 혹 잘못되면 얼른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닮은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담대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정말 믿습니까? 
그러면 그분을 늘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경외’의 신앙이 있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아무쪼록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 유대인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랍비에게 갔습니다. 랍비는 그 아이를 보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니? 어디에 계신지 대답하면 이 은전 하나를 주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 한 가지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제 질문에 답하신다면 제가 선생님께 은전 두 개를 드리겠습니다.” 아이의 당돌한 말에 랍비는 무슨 질문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랍비는 아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며 행복의 요인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특히 이 시는 모든 시 가운데 걸작에 속하는 시로 ‘시편 중 왕관’이라고 불리어질 뿐만 아니라 신앙적 감정의 깊이와 사상의 탁월성, 표현의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첫째, 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하고 있는가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셋째,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가?


  


본문 7절에 다윗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하며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피할 곳이 없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며 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축복이신데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하고 간섭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1)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에 나타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아갈 때에는 천진난만한 시대였기에 그들은 벗었으나 부끄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무화과 잎을 엮어 그들의 몸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만나시기 위해 저녁 무렵 에덴동산에 임하셔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환영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던 그들이 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달려 나오질 못하고 숨었습니까? 그들이 죄인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나타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죄성이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스며들어 본성이 되고, 그 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1-5)라고 하며 환상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 죄인인 자신을 깨닫게 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제단 숯불을 그 입에 가져다 대어 그 죄를 사함 받았으며 참으로 많은 세월 가운데에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아무 상관없는 고기 잡는 일과 죄를 통해 자신의 앞에 계신 거룩한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스스로가 한없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죄를 사함 받고자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죄를 감추고 숨기려고 하는 사람은 계속 어둠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21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자아 너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봇이나 기계처럼 입력한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 아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그 섭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인간은 도리어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치고 죄를 지으며 그것을 감추기까지 합니다. 즉,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일에 사용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말씀하신 대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부인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한 안정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을 때 참된 자유를 얻은 듯 했지만 그 자유로 인해 오히려 노예가 되었고, 빈곤하게 되었으며,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땅에 떨어져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아가 깨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지만 그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옴으로 참된 자유와 평안, 그리고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유 의지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꾸 떠나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지 우리 맘대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낫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옳은 것이며,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우리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옳고 나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생각보다 우리의 생각이 더 지혜롭습니까?


이사야서 55장 8-9절에 보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이 세상 그 어느 누가 따라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깨닫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어 결국 멸망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을 회개케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나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풍랑을 일으켜 그를 고래 뱃속에서 회개하도록 하셨고 결국 삼일 만에 고래 뱃속에서 나오게 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킴으로 그 성을 구한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 하려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을 내 생각에다가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닌 내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것으로 그런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 사람입니다.


  


2.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1) 한마디로 ‘없다.’가 답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이 세상에 편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곳은 없습니다. 시편 94편 9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을 지으시고,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고 보지 아니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숨을 곳이 없는 것입니다.


요사이 과학의 발달로 여러 가지 편리한 도구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 적외선을 이용한 망원경은 밤중에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어 아주 유용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적외선을 발견한 시점부터 그 빛을 사용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이 빛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만드신 하나님께서 보질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적외선이 없어도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 행동, 말까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앉고 서는 것도, 생각도, 행위도, 말도 모두 알고 계시며, 심지어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과 같이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의 모든 일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18절에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라고 하며 우리는 주의 편만한 속에 들어있음을 말하고 있고, 에베소서 1장 3-6절에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며 이것을 알고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 뜻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음을 말씀했습니다.


지난 21일 미 육군 브래들리 매닝 일병은 미국의 국방 비밀을 폭로한 죄로 군사 재판에서 35년형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국가 기밀문서를 전 세계에 공개한 죄로 CIA에 근무하던 에드워드 스노든을 잡으려 했지만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도망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도 비밀은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심에도 비밀을 절대 폭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삼국 유사에 기록된 이야기 중 신라 48대 경륜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륜왕은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이상하게도 귀가 조금씩 자라나더니 시간이 지나자 당나귀 귀처럼 커졌습니다. 그래서 새 관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불렀습니다. 관을 만들기 위해 왕을 찾아온 그 사람은 왕의 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하면 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에 말하지 못하고 답답함에 속앓이를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풀기 위해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뒤 죽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죽은 뒤 그 대나무 밭에 바람이 불 때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창피한 왕은 그 밭에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산수화를 심었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멈추질 않았다고 합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점이나 비밀을 모두 알고 계신다는 말에 기분 나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까지도 알고 계심에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프란시스 톰슨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이셨으며 신앙이 깊은 분으로 아들이 목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톰슨을 신학교를 보냈지만 그는 학업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교육 의지가 높았던 톰슨의 아버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의술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그를 다시 의과대학에 보내었지만 톰슨은 또 학업을 그만두고 집을 나왔습니다. 집을 나온 톰슨은 먹고 쓸 것이 없어 신문을 팔아 겨우 먹고 살게 되었고, 노숙자나 거지처럼 얻어먹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약까지 하게 되어 거의 폐인이 되었습니다. 톰슨은 그런 상황에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을 시로 적었는데, 우연히 그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게 된 출판사 사장인 월프래드 메이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기도 하고 돌보아주며 결국 그를 문학가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쓴 시집 중 아주 유명한 ‘천국의 추적’이라는 시집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사냥감인 우리는 사냥꾼인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지만 끝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적하고 잡아 변화시킴으로 새사람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사냥감인 자신이 잡히지 않기 위해 끝까지 도망쳤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붙잡아 새 사람이 되게 하셨음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간증하기를 “내가 변화되고, 이 시를 쓰게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끊임없이 나에게 임하셨기에 내가 이처럼 변화 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을 잊을 부모가 어디 있으며, 모른다고 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손바닥에 우리 이름을 새기시고 늘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돌보아 주시기에 하나님의 손에서 떠날 자 그 눈에서 숨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감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곳, 더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3-2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라고 했으며, 시편 33장 15절에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죄성에 가득 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시고 살피신다니 더욱 도망가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피고 지켜보시는 이유는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먹는 것, 자는 것, 생활하는 것을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잘못된 길로 가면 교훈하고 충고하고 권면하여 옳은 길로 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이 땅에서 승리하고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1)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 생명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죄의 길에 빠지고 멸망의 길에 들어선다고 한다면 우리의 부모되신 하나님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하면 권고하고 채찍질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길로 다시 되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1-4)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양인 우리를 불러 돌아오게 하시며, 만약 오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돌아오게 하십니다. 즉, 택함 받은 백성인 우리들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곁길에 서서 의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몰아주시기 위해 늘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4-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모든 고난과 슬픔 가운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늘 살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모른다고 하셨다면 그들은 이 땅에서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들으셔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슬픔, 환난 당함을 모른다고 하신다면 우리는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아람 왕 벤하닷이 쳐들어와 하나님을 모욕하였을 때 히스기야 왕은 그들을 징벌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일곱 길로 도망갈 것을 말씀하셨고, 결국 그들은 패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 보면 환난과 어려움을 당한 그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지 않았습니까?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게 된 하갈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샘을 얻었고(창21:14-19), 아들이 없는 슬픔을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부르짖은 한나는 아들을 얻게 되었으며(삼상1:10-11), 가난한 자는 부르짖어 양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시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열 명의 문둥병자를 모두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으며,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처럼 곤고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지 못하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생각을 해야 하며 자꾸 우리의 생각을 고쳐서 하나님의 생각에 접근하도록 해야 합니다.


2000년 4월 7일 고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동해안 지역을 8일간이나 태우고 진화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군부대와 전 도민이 동원되어 불을 끄려고 했지만 바람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피해는 점점 더 커져갔고, 불을 진압하던 군장병 몇몇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뉴스를 보던 우리 교회 집사님께서 갑자기 급하게 교회로 뛰어왔습니다. 바로 그 불길 속에 군 복무 중이던 집사님의 둘째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사님은 불길가운데서 아들을 구해달라고 땅을 치고 대성통곡 하며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는지 날이 새고 새벽녘이 되었는데 그 때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이 꺼지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곧 큰 아들이 달려와 비가 내려 불이 진압되어 아들이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 소식에 기뻐하며 정신 차리고 보니 얼마나 땅을 치며 기도했는지 집사님의 손바닥이 터져 손이며 바닥이며 피투성이가 되어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무소부재하시고 편만하시기에 우리가 기도하면 어디서든지 역사하셔서 우리를 고통가운데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선하심과 축복하심을 받아 누려야지 잘못한 것만 생각하고 도망치려고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3) 공의의 심판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의인이 악인이 되고 악인이 의인이 되는 이 세상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만약 이 세상을 그대로 놔둔다면 악인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평가하심으로 바른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하심으로 바른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그를 하늘나라에 가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하였기에 시편139편 23-24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하며 저자는 자신의 악한 생각을 사로잡아서 선한 생각을 하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을 하나님께서 모른 척하셨다면 가인은 아마도 같은 일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을 아시고 네 아우의 피가 나에게 소리친다고 말씀하셨으며, 요한계시록 6장 10-11절에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4) 우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시는 것은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닌 의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상 주시기 위함이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여 매일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굽어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잘 섬겨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되 그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은혜 베푸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십니다.  
그분이 궁극적 희망이 되시는 이유는 죽음의 권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두렵고 절망적이며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넉넉히 이겨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희망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긴 이후로 예수의 십자가 그늘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이기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진 자는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거나 넘어져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항상 희망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 그 대상은 주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영적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 때문에 이 땅에 소망이 끊어졌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북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아모스 9장 말씀에는 궁극적인 소망이 되시는 그 한 분을 계시하십니다. 궁극적인 소망은 북이스라엘에서 태어날 왕이 아닙니다. 남유다의 왕도 아닙니다. 그 분은 왕 중의 왕이며 궁극적이고 멸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인류의 소망이 되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온전한 소망,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제단이 무너져서 모든 사람이 다 죽을 것이다. 혹시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멸할 것이다.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제단이 어디입니까? 이 제단은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 제단입니다. 여로보암 1세부터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까지는 약 20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200년 동안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제단을 제거하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음란한 제사를 드려도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납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금송아지가 하나님인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용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제 기다림의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단을 완전히 무너지게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함께 망할 것입니다. 혹시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따라가서 죽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우상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상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사람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돈으로 쌓은 탑이 무너지고 권력이 무너져 내려 우리가 그 아래 함께 깔려 죽을 것입니다.
재난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완전한 심판을 말씀하셨지만 희망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범죄한 자를 주목하시고 멸할 것이지만 야곱의 집은 완전히 멸하지는 않을 것이며 남은 자를 둘 것이고 희망을 선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마지막에 희망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라는 대목에서 우리의 눈이 번쩍 뜨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다윗 왕조를 말하는 것일까요? 북이스라엘은 유다 백성들과 다른 길을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으로 갈라졌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로보암을 따라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다윗의 장막이라면 남유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도 아니고 남유다의 왕들 중 한 사람도 아닙니다. 다윗의 장막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회복될 것이니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나 정치지도자들에게 희망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는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760여년 이후에 그리스도를 보낼 것이니 그 분이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 무너진 장막을 일으켜 세우고 벌어진 틈을 메울 것이며 궁극적 소망이 되실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시면 일어날 일을 말씀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에돔에 남은 자들을 일으키고 만국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다 말씀하셨습니다.
에돔이 어떤 자들입니까?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집을 나가 갈라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면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진 것, 야곱과 에서가 갈라진 분열 상태로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만국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십자가 아래 함께 모여 찬양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망의 노래입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 한 분이 궁극적 희망입니다.
세상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세상이 바뀔 것 같고 지역 국회의원이 바뀌면 지역이 바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에 돈이 많아지면 행복해 질 것 같지만 그것도 허상입니다.
세상에 악은 여전히 관영하고 불평등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 아래에서야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죽음의 권세도 부활로 회복될 것입니다.
예수님 아래에 있으면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나눠지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뽑혀 나갑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뽑혀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다윗의 장막에 거하게 되면 영원히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 우리가 거하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마지막 교훈을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궁극적 소망은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되신다는 사실, 이 세상에 악이 관영하여도 예수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아래 거하면 우리는 영원히 다시 뽑히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1.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합니다.
2. 궁극적 희망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3. 사랑의 하나님, 소망 없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영원히 주님 따르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모스 9:2-4
2.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찌라도 내 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3.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4.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시편 139:7-10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남은 자(이사야 10:20, 22)(미가 5:3. 7-8)

7605. 쉐아르(
sheʼâr) שְׁאָר 

1. 나머지
2. 여분
3. 이사야 10:20
발음 / 쉐아르[ sheʼâr ]
어원 / 76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머지(대상 11:8, 느 10:28, 사 10:19), 충만(말 2:15), 기타(스 4:3), 남은 자(사 10:20, 14:22). [형] 다른(스 3:8, 에 9:12).
구약 성경 / 26회 사용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 이 일은 스알야숩(7:3)의 이름속에 포함된 예언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은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에게 적용된 이름 중 하나이다(9:6).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돌아오리니
-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성취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삼하 17:11) 되었으나,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은 자는 소수에 국한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 9:6-8,27)는 사상과 연결시켜 인용한다.


아모스 9:1 /  남은 자(319. 아하리탐)

- 이는 흔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에서 말해지는 바,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환난을 피하고 보존되어진 자들(사 10:20, 22; 미 5:3,7,8)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아직 환난을 받지 않은 자(곧 받게 될 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4:2).

319. 남은 자(아하리트.  ’achărîyth)  אַחֲרִית 

1. 마지막 부분. 2. 종말. 3. 장래
발음 / 아하리트[ ’achărîyth ]
어원 / 3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후일(창 49:1, 민 24:14), 종말(민 23:10, 신 32:20, 사 46:10), 끝날(신 4:30, 겔 38:16), 마침내(신 8:16, 잠 23:32), 나중(욥 8:7, 잠 29:21), 자손(시 109:13), 마지막(잠 5:11, 단 8:23), 필경(잠 14:12, 19:20), 장래(잠 23:18, 24:20, 렘 29:11), 말일(사 2:2, 렘 23:20), 남은 자(겔 23:25, 암 4:2, 9:1), 자손(단 11:4). [동] 마치다 (단 8:19).
구약 성경 / 6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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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남 유다 출신으로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아모스 7:14-15)

아모스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4. 별명 / 정의의 선지자

5. 주제 성구 /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정의(正義)


1.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2. 정의의 사도(使徒)
3. 사회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구성원의 기회나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하는 일.
4. 바른 의의

정의(체다카, 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공의(公義)


1. 공정한 도의(道義).
2.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3. 가톨릭 / 선악의 제재(制裁)를 공평하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 품성(積極稟性)의 하나.

공의(미쉬파트, mishpâṭ) מִשְׁפָּט               

1.  판결,  2. 율례, 3. 공의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에는 시리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 Χριστιανός)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 로마제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리스도인(Christianum)의 존재가 유대교인과 구별되었다.

기원후 2세기 초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비서로 활동했던 로마 역사가 Suetonius는 De vita Caesarum(황제들의 생애)에서, 글라우디오 황제 시대(주후 41-54년) 주후 49년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반포했음을 말하면서 그 이유를 잠깐 서술하였다.

“글라우디오는 그리스도(Chrestus)의 선동을 받은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난동을 일으켜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 유대인들의 추방사건이 그리스도라는 인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과의 갈등이 분쟁과 불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로마인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유대인들의 존재가 기독교인들 사이의 불화로 문제를 일으키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반유대적 시민들의 호소에 편승하여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도왔던 부부 아길라와 브리스길라는 이때 로마로부터 추방당하여 건너온 로마 교인이었다(행 18:2). 수에토니우스는 세속 역사가였지만, 기독교인이 믿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 불렀다. 이 명칭은 헬라어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의 라틴어 음역이었다. 그런데 라틴어로 제대로 음역한다면 Christus(크리스투스)라고 해야 하고, 실제로 라틴어 성경번역은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2세기 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그리스도(Χριστός)를 Christus가 아닌 Chrestus 라고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다른 단어로 음역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Χριστός)라는 말은 헬라어 χρίω (크리오)에서 왔다.
이 동사는 ‘기름 붓다’(anoint), 혹은 ‘기름 바르다’(smear)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레코 로만 세계의 사람들은 헤브라이즘의 메시아(그리스도),
즉 anointed one (기름부음 받은, 기름칠한 자)의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Christus의 철자보다는 비슷한 철자이지만, 뜻이 통하고 발음이 비슷한 Chrestus로 음역했을 것이다.
이 음역은 헬라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를 즉시 연상시킨다.
이 단어는 대체적으로 탁월한(excellent), 유용한(useful), 도움이 되는(helpful), 좋은(good), 친절한(kind), 온화한(mild) 등의 뜻을 가지며, 고전 헬라어뿐만 아니라, 셉투아진트, 신약성경에서 고루 사용되었다.

구약 헬라어 성경(LXX)에서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여러 히브리어 동사에서 번역한 단어이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선한’이라는 טוֹב(토브)를 번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렘 24:2; 단 2:32).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로서 주로 관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목적에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본질적 선함(essential goodness)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relational), 혹은 목적에 도움이 되는(serviceable) 선함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적 선함(moral goodness)을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헬라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가 7번 사용되었고,
명사 χρηστότης (크레스토테스)는 10번 사용되었고,
동사 χρηστεύομαι(크레스튜오마이)는 단 한 번 사용되었다(고전 13: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담화에서 예수는 “묵은 것이 좋다”(χρηστεύομαι)라는 격언을 소개한다(눅 5:39).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 엉뚱한 격언이 첨부되었기에, 고대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지만 묵은 포도주가 미각과 후각에 더 좋은 것이기에 포도주를 마시는 목적에 맞는다는 의미로서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를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고 다른 주장을 하는 가르침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친다”(새번역성경, 고전 15:33) 고 고전 희극작가 Menander의 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서 ‘좋은 습성'(에토스 크레스토스, ἦθος χρηστός)은 도덕적 선함을 뜻하는 말인데, 부활을 믿지  않는 거짓 교인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선한 삶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을 경계하는 바울의 염려를 담고 있다.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세상에 보여주는 핵심단어이다.
선하고 착하게 사는 모습, 관용과 인자, 친절을 베푸는 모습, 겸손과 온유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이다.
제자 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모습을 인자한(χρηστός)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삶으로 표현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어떤 인간이라도 인자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처럼,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인자하시다"( χρηστὸς ὁ κύριος) 라는 진리(벧전 2:3)를 맛보았기에, 이제 세상에서 사는 모습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해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χρηστοί),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로마의 역사가나 관리들,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친절함과 부드러움, 온유함, 사랑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종교적 오해와 선입관이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의 친절함(크레스토테스 χρηστότης)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믿는 그리스도(Christus)를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고 불렀다. 예수는 친절한 분(Chrestus)이다.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도덕적 선함을 말하고, 인간관계에서 선하고 친절한 삶을 사는 것이고, 세상을 향한 섬김의 목적에 유용한 덕목이다. 이 덕목을 실천하는 사는 사람들이 Χριστιανός(크리스티아노스)이다.


6월 19일(토) 드고아 목자 아모스


드고아(Tekoa, 나팔소리)는 유다 광야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남으로 약 15km  베들레헴의 남으로 약 10km의 위치에 있는 해발 1,000m 에 가까운 고지이다.
예언자 아모스의 출신지였으며 예루살렘 방어의 언덕이었던 이곳에는 오늘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계곡의 낮은 지대에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고, 또한 한때의 무성했던 산재한 식물의 부식토가 있다.
이곳에서 감람열매와 시카모어열매(암 7:14)라고 불리는 과일이 재배되었다.


아모스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호세아 1:1b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유다 왕 웃시야(10대) /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13대) /

아모스와 호세아는 동 시대에 예언 활동을 하였다.
다만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였으나
아모스는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으나 말씀을 갖고 왕래하며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과 북한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한 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의 분열은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목자(牧者) shepherds                                  

1. 로이(rôʽîy) רֹעִי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여호와 로이) 

2. 노케드(nôqêd) נֹקֵד (아모스 1:1)
   (털이 많은 양, 비교적 좋은 양)


서너 가지 죄(1:3, 6, 9, 11, 13, 2:1, 4, 6)

1. 수적인 격언
numerical proverb

2. 완전 수 3 + 1=4(아주 많은 죄)
Luther, Calvin, Keil, Drive

3. 3+4=7(죄로 가득한 상태) 
W. R. Harper


다메섹의 죄(3절) - 아람(수리아)의 수도
철타작기로 길르앗을 압박

가사의 죄(6절)
사로 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인신매매)


두로의 죄(9절)
형제의 계약을 무시하고
사로 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인신매매)

에돔의 죄(11절)
칼로 형제를 추격하며 긍휼을 버리고 항상 분을 품다 


암몬의 죄(13절)
자기 지경을 넓히려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
(비인도적인 만행)


아모스(Amos. ʽÂmôwç) עָמוֹס                         짐, 무거운 짐을 진자,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자                            

    묵시 / 하조트(châzôwth) חָזוֹת

평범한 가문의 아모스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을 선포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무거운 짐을 맡았다.

바닷물의 염분 농도(약 3%)

로마 정부 기독교를 국교 / 9%의 기독교인들

어느 임금의 세 딸 / 금, 보석, 소금


오늘의 기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자

희생, 헌신, 자기 포기, 자기 비하


6월 21일(월)

아모스(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

1. 남 유다 출신(웃시야 왕)

2. 북 이스라엘을 향한 활동(여로보암 2세)

3. 목자(노케드, 보케르)

4.  서너가지 죄(수적인 격언)
X + 1 =  점차 증가하는 죄악

잠언 6:6 /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5. 이웃 나라들의 죄를 심판
율법을 받은 백성들의 죄악이 더 심각
세상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호세아 2: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 거짓것 / (현대인, 공동, 새번역) 거짓 신
    (NIV) false gods
    카자브(kâzab) כָּזַב 헛것, 거짓말쟁이, 거짓말

유다의 죄(4절)

1.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

2.  율례를 지키지 않는 것

3. 거짓 것에 미혹된 것(우상 숭배)
* 난외의 주 1 참조(우상)

아모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이스라엘의 죄(6-8절)


1.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부당한 재판)

2.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불의한 뇌물)

3.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물질적 탐욕)

4.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부정과 부패)

5.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음란)

6.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무정함)

7.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신성모독)

정의(체다카, 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공의(미쉬파트, mishpâṭ) מִשְׁפָּט               

 1.  판결,  2. 율례, 3. 공의


역대하 19:6(여호사밧 왕)
너희의 재판 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아모스 5:24
오직 공법(מִשְׁפָּט)을 물 같이,정의(צְדָקָה)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7절.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12절b.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공의란?
판결의 의를 말하는 것으로 공평한 재판이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정의란?
사회적 의를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질서가 모두에게 바르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12절b.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오늘의 기도

믿음의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자

 임직자들을 세울 때
(믿음? 사회적 지위와 신분?)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신일교회는 창립76주년을 맞아 ‘신일교회 7무(無) 임직식’이라는 특별한 임직예식을 가졌다.
1. 임직자 직분에 따른 임직헌금 無
2. 축하를 위한 축의금 꽃다발 無
3. 임직증서를 수여하고 화려한 임직패 無
4. 가슴에 다는 꽃과 흰 장갑 無
5. 임직을 위한 의상(양복, 한복) 구매 착용 無
6. 임직자들이 돈을 모아 교회에 드리는 기념품 無
7. 교역자에게 선물 및 사례비 無 등

7무(無) 예식을 진행하며 코로나19 시대에 솔선하여 검소한 예식을 실천했다.



6월 22일(화) 자기의 비밀(아모스 3:7)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3. 4장과 5. 6장은 구약에서 공통적인 표현법으로서, 시의 효과를 위해 둘 혹은 그 이상의 행이 다른 낱말이 갖는 사상과 관련되어 표현되는 것을 병행구 또는 병행법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1. 동의적 병행법
가장 일반적인 것은 시편 1:1과 같이 시의 행이 그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2. 반의적 병행법
어떤 경우에는 잠언 3:5과 같이 두 행이 반대의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3. 종합적 병행법
어떤 경우에는 잠언 3:20과 같이 둘째 행이 첫째 행의 의미에다 무엇을 더하는 것이다.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아모스 3: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아모스 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아모스 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 너희만(레크, rêyq. רֵיק)

(공동번역) 너희만을 골라내었건만
(새번역)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
- 친밀한 관계

1.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출 19:5, 말 3:17)

2. 제사장 나라(출 19:6)

3. 여호와의 백성(삿 5:11, 삼하 14:13)

4. 거룩한 백성(신 7:6, 14:2, 21)

아모스 3: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을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의 기도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자!

어두운 죄악 가운데서 불러 내어 구원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아름다운 은혜를 전하는 사명


6월 23일(수) 예비하라(아모스 4:12)


아모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 4:1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 바산의 암소들(부유한 여인들)

아모스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 벧엘(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난 곳)
* 길갈(단을 쌓은 곳, 12지파의 기념비, 국가의 시작 선포)
*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상번제)

벧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이 시작된 곳

길갈은 가나안 땅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은 곳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12지파의 기념비를 세운 곳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선포한 곳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벧엘에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죄를 더했다’(4절)는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겠습니다.

아모스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수은제(thank offering) 토다(tôwdâh) תּוֹדָה
  은혜에 보답하는 제사(감사)
* 낙헌제(freewill offering) 네다바(nedâbâh)   נְדָבָה

  자원하는 제사 (아낌없이 주는 마음)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6-11절)
내가……
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6b, 8b, 9b, 10b, 11b)


7가지 재앙
1. 기근(6),
2. 가뭄(7-8), 
3. 곡물재해(9a), 
4. 황충(9b),
5. 전염병(10a), 
6. 칼(전쟁)(10b), 
7. 지진(11) 

아모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잠언 31:30-31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의 기도

예수님이 기뻐하는 예배와 삶을 회복하자!

내가 만족하는 예배와 예물
영적인 예민함

찰스 엠 셀돈(Charles M  Sheldon. 1857-1946)
In his Step(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yskekq&logNo=220799757881


하나님께서 재난을 내리시는 목적을 세 가지로 분명하게 증거 한다.

첫째,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고난에는 뜻이 있고 재앙에는 메시지가 있다.

빨리 지나가고 회복되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과 메시지를 깨달아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둘째,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도다’

인간의 오만을 꺾으신다.
재난은 오만불손한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들의 꽃과 같다.
한줌의 재로 돌아갈 존재다.
재난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자각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셋째,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왕 노릇하던 헛된 우상들을 무너뜨리신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우상은 이단 신천지의 교주만이 아니다. 물질과 건강, 명예와 권세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코로나19의 재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부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고, 오만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인정하는 기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6월 24일(목) 여호와를 찾으라(아모스 5:6)

아모스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돌아오라!
슈브(shûwb) שׁוּב                                                                                                    

5:2, 처녀 이스라엘  
5:4, 벧엘, 길갈, 브엘세바                                     

찾으라!
다라쉬(dârash)  דָּרַשׁ                                                                

* 인간의 어리석음 : 매를 맞아야 깨닫는 존재

아모스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7-8

공법(공의)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북두칠성)과 삼성(오리온좌)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아모스 5:14-15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오늘의 기도

시대적 본분과 사명을 깨닫자!

길을 보여주는 삶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가?)



6월 25일(금) 공법을 쓸개로(아모스 6:12)


아모스 6:12-13a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말이 바위 위를 달릴 수 없고 소가 바위를 개간할 수 없듯이(공동번역 / 바다를 개간 할 수 있느냐?)
사람이 해서는 알 될 정의와 공의를 무너뜨렸습니다.

금기로 간주되는 일,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이스라엘이 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자 순리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의를 쓸개와 쓴 쑥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쓸개와 쓴 쑥으로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는 의미입니다.
‘쓸개’와 ‘쓴 쑥’으로 번역한 단어는 성경 다른 구절에서는 ‘독’과 ‘독약’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허무한 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경제적 힘을 자랑하는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허무한 것(로다바르, 지명으로 뜻은 없는 것, nothing)
언어의 묘미를 살려 없는 것을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가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허무한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뿔(카르나임)이란 것도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명으로 여로보암 2세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얻은 땅으로 이런 것들도 모두 헛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정복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하는 교만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6: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한 나라를 일으켜 치겠다’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 국경 최북단이며
아라바 시내는 이스라엘 국경 최남단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외세에 의해 짓밟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나라는 앗수르를 의미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번영의 시기에 교만해졌습니다.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능력이 있고 지도자들이 지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도자들의 타락이 백성들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갇힌 자들은 안중에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신 발 한 짝에 팔아넘길 정도로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었고, 축적된 부로 사치와 향락의 일상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보면, 양과 염소의 무리 중에 염소 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주님이라고 여겼다면 과연 태도가 달랐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것이 주님께 대하는 것임을 성경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하루 사회적 약자를 주님을 대접하듯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주님을 대하듯이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모스의 경고의 화살은 아무래도 지도자들, 상류층을 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 유다의 수도인 시온산,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산에 거주하면서 으스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모스는 갈레, 하맛, 가드를 상기시켜주지요.
그곳들은 이전에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했었지만 아모스 당시에는 쇠락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더욱 심판받을 것인데, 그들의 죄목은 교만과 안일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아모스의 고발은 참 생생합니다.

상아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켜고, 양과 송아지를 잡아서 파티를 열고, 자기가 마치 다윗인 것처럼 악기를 만들어서 노래부르고, 술에 빠져 있으면서 열심히 외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흉한 날은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환난, 즉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힘들어 부르짖는 서민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이지 않았구요.

자신들이 쌓아놓은 자기들만의 성 안에서 흥청망청 지낼 뿐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사치와 부패는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로마 제국 말기의 귀족들이 그랬고,
유럽 봉건 시대의 왕과 영주들이 그랬고,
일제 치하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이 그랬고,
제정 러시아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그랬고,
미군정 아래에서 지주들이 그랬지요.
미국에서 2008년 금융위기로 600만 명이 집을 잃었을 때도 은행의 임원들은 수십억원의 연봉잔치를 누렸고,
북한에서는 수백 만의 인민들은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당 간부들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주사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부를 축적히는 일에 열중하는 것
그들은 나라의 운명이나 다른 사람의 아픔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이득에만 관심이 있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아모스는 그런 지도자들에게 그날이 오면 그들이 맨 앞에서 끌려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1절에서 그들을 가리켜 '백성들의 머리'라고 했는데 7절에서는 사로잡혀갈 때도 머리가 될 것이라고 빈정대고 있지요.
그리고 그들의 기지개 켜는 소리와 흥얼대던 노래소리도 그칠 것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을 우리 스스로에게도 돌려야겠지요.



6월 26일(토) 다림줄(아모스 7:7)

7:1.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7:1, 4. 8:1)  

아모스 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 보이신 것(라아. רָאָה)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

1. 듣는 것(경청)
2. 보는 것(환상)
3. 전하는 것(신탁)             
    * 하나님의 마음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아모스 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 다림줄(아나크, ’ănâk. אֲנָךְ ) / 주석(칼)
다림줄은 위에서부터 줄을 내려야 한다.
기준은 위에서 시작                   

* 쌓은 담(견고한 성, 사마리아 성,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아모스 7:2, 5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아모스 7:3, 6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7: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시간(시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을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
사회가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남 유다 출신의 선지자 아모스

아모스 7: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 7: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 BC 722년 앗수르에 의한 멸망

오늘의 기도

말씀을 분별하는 믿음을 주소서!

가정 제단의 거룩함을 회복하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일어나라.

진리 편에 가담하라. 

6월 28일(월) 기근과 기갈(아모스 8:11)


기근(飢饉· 饑饉)

1. 흉년이 들어 식량이 모자라는 것. 순화어는 `굶주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2. 필요한 물자가 몹시 부족한

기갈(飢渴)

1.배고픔과 목마름.

"기갈이 심하다"

* 기갈이 감식(甘食)
- 굶주리고 목마르면 무엇이나 맛있다는 말.

* 기갈든 놈은 돌담조차도 부순다
- 사람이 몹시 굶주리면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까지도 저지른다.

* 기갈이 들다
- 몹시 굶주려서 간절히 음식을 탐내다. 순화어는 `(굶)주리다'.

아모스가 본 환상

1. 황충(7:1-3)
2. 불(7:4-6)
3. 다림줄(7:7-9)
4. 여름과일 한 광주리(8:1-3)
5. 단 곁에 서신 주님(9:1-4)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기근과 기갈이란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없다" 라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대형교회는 있습니다.
대형 예수님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드러나야 합니다.
얼마전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하여 담당 의사를 만났습니다.
은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므로 "은혜는 주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 은혜가 주는 것인가?"
성경에도 "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사도행전 20:35)

그동안 신앙교육은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것을 받는 것이 은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은혜는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형교회는 주는 은혜가 다른 교회보다 더 크고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유한 것은 많지만 주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부흥과 성장을 자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예수님이 있을까요?
부흥과 성장하는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무르익어야 합니다.

아모스 8:12-13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교회마다 시집 가야 할 아가씨들은 넘쳐나는데 장가갈 청년들이 없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갈하여 피곤하다는 것은 물론 짝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아모스 8: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우상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탐욕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아모스 8:1-2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카이츠)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케츠)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첫째, 언어의 이중적 의미로 표현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살구나무(샤켓. Shaqed)
지킨다(쇼켓. Shoqed)

둘째, 무르익은 과일은 곧 썩을 수밖에 없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고 이곳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으라고 하였다.

예레미야 1:11

네가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샤켓. Shaqed) 가지를 보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쇼켓. Shoqed)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8247. 살구나무(샤켓. shâqêd) 솨케드  שָׁקֵד 

1. 살구나무
2. 살구나무 열매
발음 [ shâqêd ]
어원 / 82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감복숭아(창43:11), 살구 열매(민17:8), 살구나무(전12:5, 렘1:11).
구약 성경 / 4회 사용

* 8245. 지키다(솨카드. shâqad ) שָׁקַד 

1. 밤을 새우다.  2. 경계하다. 3. 주목하다
발음 [ shâqad ]
관련 성경 / 새우다(시102:7), 깨어있다(시127:1, 렘31:28, 44:27), 기다리다(잠8:34), 지키다(스8:29), 엿보다(사29:20, 렘5:6), 보다(렘1:21).
구약 성경 / 18회 사용





아모스 8: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 여호와의 말씀(예수) / 은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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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
2. 웃시아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지자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마태복음 9:13, 로마서 9:25, 베드로전서 3:10-12)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는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주전 8세기 북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 활동 : 아모스, 요나, 호세아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이다. (2) 웃시아 왕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 지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그의 저서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 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 (마 9:13,롬9:25, 벧전 3:10-12).


아모스의 소명(1-2절)
오늘부터 아모스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아모스’의 이름의 뜻은 ‘짐을 지는 사람’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끊임없이 죄를 짓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선언하라는 말씀의 짐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이 활동했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선지서가 12권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그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이 6권(요엘, 오바댜, 요나, 나훔, 하박국, 말라기)이 있고, 밝히는 것이 6권 있습니다. 밝히는 것 중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모두 무너지고 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리고 미가와 스바냐는 남유다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남유다의 왕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와 아모스에는 남유다의 왕과 북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이 모두 언급을 하고 있고, 아모스는 남유다 출신임에도 북이스라엘에서 선지자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1절에서 ‘말씀이라’가 맨 뒤에 나오지만, 히브리어성경에는 맨 앞에 나옵니다. 다른 선지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도 아모스 선지자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은, 10대 임금 ‘웃시야(791-739)’였습니다. 그는 무려 52년 동안이나 통치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 므낫세(55년 통치)를 이어 두 번째로 긴 기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중요 도시 중에 하나인 아스돗을 점령했고, 에돔의 ‘구르바알’도 차지했습니다. 구르바알을 에돔의 수도 ‘페트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은, 13대 임금 ‘여로보암2세(793-753)’였습니다. 그는 41년을 통치했는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서는 므낫세와 웃시야에 이어서 세 번째이었고, 북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긴 기간 통했습니다. 그는 신흥 제국 아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까지, 남쪽으로는 염해(사해)까지 확장하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즉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했던 때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과 북이 함께 강성해 있을 때는 이 때가 거의 유일합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사회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세금제도로 가난한 사람을 더욱 착취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핵심구절이 5:24절인데,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그 땅에는 정의(하나님의 바르게 행하심을 받아들여, 공평하고 공정한 원칙)도 없었고, 공의(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아무 데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을 돕는 긍휼)도 없는 불의와 우상숭배만이 팽배했던 것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의 출신지와 직업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드고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말씀은 남유다가 아니라 북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의 직업이 ‘목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목자들을 뜻하는 보편적인 말은 ‘로에’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노케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2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모압왕 메사’를 지칭하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가난한 목자일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지만, 굉장히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즉, 목자라기보다 목축업자에 가깝습니다. 또한 7장에서 아모스는 자신이 ‘뽕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제사장 집안의 아들도 아니었고, 선지자 학교(신학교)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삿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터,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터전이 됩니다. 삶의 자리를 떠난 부르심은 없습니다.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으시고,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신다고 선언합니다. ‘부르짖다’는 성경에서 주로 사자가 포효할 때에, 특히 먹잇감을 공격하거나, 싸울 상대 앞에서 으르렁거릴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소리를 내다’는 ‘천둥번개가 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짖으시고, 소리를 내신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때에 ‘목자의 초장에서 갈멜산 꼭대기까지’ 마른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우리말 ‘한라에서 백두까지’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에게 심각하게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주변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3-15절)
3-2:16까지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그리고 주변 6개국 등 8개의 나라에 대한 심판과 징계의 예언입니다. 그 중에서 3-15절은 5개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8개 나라를 심판하는 내용은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①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라며 심판의 주체가 누구신지를 밝힙니다.
②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라며 심판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③ “불을 보내리니... 사르리라”라며 심판의 형태를 밝힙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④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라며 심판을 선언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 네 가지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3-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다메섹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아람(시리아)의 수도입니다. 고대의 상업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서너 가지 죄만 지어도 한 도시나 한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분이신가?” 그러나 ‘서너 가지’는 ‘3이나 4’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아주 많음’을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3과 4를 더하면 7인데, 7은 완전수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을 심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이 길르앗을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특히 여호아하스왕 때에 아람(시리아)이 보병 일만 명과 마병과 병거(탱크)를 몰고 와 침략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서쪽, 지중해와 접한 곳에 위치한 블레셋은 도시들이 연합하며 만든 국가인데, 그 중에 대표적인 도시인,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에 대한 심판 선언입니다.
가사는 블레셋에서 가장 교통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편리한 교통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서 잡은 사람들을 인신매매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사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지 인신매매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파는 일은 고대에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에돔에 고의로 팔아넘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사에 불을 보내어서 궁궐을 사르겠다고 하십니다. 그 의미는 패전하여서 궁궐이 불에 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전쟁포로를 무자비하게 잡아 넘겼으니, 전쟁으로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와 접한 곳에 위치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두로는 발달한 해상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그래서 교만했습니다. 교만한 두로왕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참칭하기도 하고, 자신의 지혜가 가장 뛰어나다고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은 서로 혈맹관계, 형제의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두로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내 형제여”라고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로와 인접한 도시 시돈 출신의 여인 이세벨은 아합왕과 결혼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난하여 두로로 이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묵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1-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들이 만든 나라입니다.
사실 에돔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더 많이 당했습니다. 사울왕에 에돔에서 승리를 한 적이 있었고, 다윗왕도 소금골짜기(염곡)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물리친 적도 있었습니다. 후에 유다가 바빌로니아제국에 의해 무너질 때에 에돔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의 편에서 유다 백성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에돔에 대한 심판은 미래의 시점에 이루어질 것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둘째 딸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벤암미)의 후손이 세운 나라입니다. 암몬 사람들은 길르앗의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이런 만행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야 하고, 상상으로도 없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이유가 자기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였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악독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 만행을 저지른 암몬을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살핀 다섯 나라, 아람(다메섹), 블레셋(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베니게(두로), 에돔, 암몬이 심판을 받는 이유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만행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박해를 받는 상황을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가 이 말씀을 받은 것이 ‘지진 2년 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국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했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이런 심판을 예언하는 것은 당돌하고 미친 짓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물론 그 결과도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자신의 기도자리, 겟세마네를 갖는 것은 미래를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가장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속적 가치관이 난무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무릎을 꿇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모스 장별 요약 및 강해


1. 아모스 개요


아모스는 1:1에서 시기를 분명히 고지하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다.
시대적 배경은 유다 왕 웃시야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 때 선지자로 활동했다.

2. 아모스 장별 요약

아모스 1장 요약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가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다메섹을 벌하리라.
에돔과 두로와 암몬을 벌하리라.
그들이 이스라엘이 망할 때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모스 2장 요약

여호와께서 모압을 벌할 것이다.
유다를 벌할 것이다.
그들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벌할 것이다.
그들의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혔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멸하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너희는 나실인으로 포주를 마시게 하고 선지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모스 3장 요약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으로 예언한다. 
사마리아는 포학과 겁탈이 쌓였다. 
내가 이스라엘의 죄를 보응할 때 벧엘의 단들을 벌하고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버릴 것이다.

아모스 4장 요약

바산의 암소들아 너희는 힘없는 자들을 학대한다. 너희를 갈고리로 끌며, 낚시로 너희 남은 자들을 끌고 가리라.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죄를 더한다. 너희에게 재앙이 임하나 나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 이스라엘아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여호와는 산들을 짓고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다.

아모스 5장 요약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 졌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불 같이 임하리라. 너희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겁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여는 자여 그날은 어둠이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고 멸시한다. 너희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절)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라라.

아모스 6장 요약

교만하고 방탕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리라.
그들은 상아 상에 눕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 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한다.
환난에 대하여 근심하지 않는다.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궁궐들을 미워한다. 
말은 달리지 못하고 소는 밭갈지 못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길 한 나라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리라.

아모스 7장 요약

풀이 움돋기 시작할 때 메뚜기를 땅의 풀을 먹을 것이다. 
간구하자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신다. 
이번에 불로 징벌하지만 다시 돌이키신다. 
다림질로 측량하여 다시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여로보암에게 아모스가 왕을 배반했다고 고소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하신다.

아모스 8장 요약

여름 과일 광주리를 보라.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다. 
가난한 자를 삼키고 땅의 힘없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할 기갈이라.(11절)

아모스 9장 요약

이스라엘이 한 명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다. 
모든 자가 칼에 죽을 것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가 땅을 만져 녹게 하고 땅이 강의 넘침같이 솟아오를 것이다. 
이방 민족들을 불러오리라. 
화가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죄인들은 칼에 죽으리라.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울 것이다.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삼을 것이다. 내가 들을 다시 땅에 심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