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사순절 119 온라인 기도회 - 출애굽기(10 /20 / 2022 -) (02-14-2024 / 03-30-2024)



2024 사순절 119 온라인 기도회(02-14-2024) / (03-3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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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40일 / 03- 30-2024(토)
출애굽기 40:1-
언약궤(1절)
찬송 /  장(  )


40장


1-15 성박의 건설과 각 기구의 위치와 그 성별 및 제사장의 성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16-33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세우고, 여러 기구를 각각 그 위치에 두다.
34-38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성막 안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9일 / 03- 29-2024(금)
출애굽기 39:1-
언약궤(1절)
찬송 /  장(  )



39장


1-31 제사장의 성의의 제조.
32-43 성막의 완성과 모세의 검열 및 축복.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8일 / 03- 28-2024(목)
출애굽기 37:1-29
번제단(1절)
찬송 /  209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38장
     1-7. 제단과 그 부속품의 제작
        8. 세수통(물두멍)의 제작
  9-20. 뜰의 포장과 기둥 및 문장의 제작
21-31. 금·은·동의 헌물의 분량과 그 용도


창세기 45: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요한복음 4:18
내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번제단(燔祭壇)의 필수품(必需品)

1. 불(火) - 보혜사 성령

레위기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성령은 어떻게 불과 같은가요?

성경은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 (히브리서 12:29).
불이 자주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불에 붙은 떨기나무(출애굽기 3:2), 쉐키나의 영광(출애굽기 14:19; 민수기 9:14-15), 에스겔의 환상 (에스겔 1:4)이 그 예입니다.
많은 경우, 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의 수단이었고(민수기 11:1, 3; 열왕기하 1:10, 12), 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사사기 13:20; 열왕기상 18:38).

불은 구약성경 제사에서 중요했습니다.
번제 제단 위의 불은 하나님께서 직접 피우신(레위기 9:24) 신성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제단 위에 피워진 당신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킬 임무를 맡기셨고 (레위기 6:13), 다른 근원에서 피워진 불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레위기 10:1-2).

신약성경에서 제단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은사로 단장한 “산 제물” (로마서 12:1)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맨 처음 부분에서, 성령은 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 (마태복음 3장)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성령이 초대 교회에 내주하시는 사역을 시작했을 때,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임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했습니다(사도행전 2:3-4).

불은 성령이 하시는 일의 경이로운 묘사입니다. 성령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열정, 그리고 하나님의 순결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로마서 8:9). 구약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성막 위를 불로 덮으심으로 (민수기 9:14-15) 당신의 존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불 같은 존재는 그들에게 빛과 길을 제공하였습니다 (민수기 9:17-23). 신약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서 “장막 집”, “하나님의 성전”인 (고린도후서 5:1; 6:16) 우리들의 몸에 거하심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열정을 부어주십니다.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난 뒤, 서로에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32)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4:31).

성령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순결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고 (디도서 2:14),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십니다 (고린도전서 6:11; 데살로니가 후서 2:13; 베드로전서 1:2). 은세공인이 불을 사용해 찌꺼기를 제거하여 고가의 은을 추출하듯이, 하나님은 성령을 사용해 우리의 죄를 제거하십니다 (시편 66:10; 잠언 17:3). 하나님의 불은 우리를 씻어주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2. 피(血) - 용서(죄 사함)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3. 뿔(角)
- 구원(생명 보호)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성경에서 뿔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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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뿔이 나 있는 '모세 조각상'(미켈란젤로 작, 1515년).

일반적으로 뿔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힘을 가진 자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부터 황소 뿔에 기름을 담아 그 기름을 왕이나 예언자, 사제에게 붓는 의식이 있었다.
이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힘을 실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네 모서리 장식으로 뿔이 달려 있었다.


성경에서도 뿔에 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구약성경에서 들소의 뿔은 하느님의 힘, 우리를 지켜주는 표징으로 왕이 백성을 보호하거나 원수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됐다.

"그는 맏이로 난 소, 그에게 영예가 있어라. 그의 뿔은 들소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 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 에프라임의 수만 명이 그러하고 므나쎄의 수천 명이 그러하리라"(신명 33:17).


뿔을 든다는 것은 힘과 기쁨과 건강과 우월함을 나타낸다.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천둥으로 호령하신다"(사무엘상 2:10).

뿔은 힘의 상징, 특히 왕적인 힘의 상징이 된다.
따라서 뿔을 베는 것은 그 사람의 힘이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압의 뿔이 잘리고 그의 팔이 부러졌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미야 48:25).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을 보면 모세에게 뿔이 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모세에 대한 그림을 보면, 머리에 뿔이 난 모세를 그리거나 조각한 것이 많다.
모세 머리에 뿔이 나도록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그 원인이 라틴어 성경의 번역 오류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어 흥미롭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증언판 두 개를 들고 내려왔다.
그런데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니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워서 모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출애굽기 34:9-35).
이때 모세의 빛나는 얼굴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얼굴 살결이 빛나다'와 '뿔이 나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예로니모 성인은 구약성경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에서 이 대목을 그의 얼굴에 뿔이 돋은 것이라고 번역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성경 구절에 근거해 모세상을 조각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은 이 번역이 본래 의미와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모세 얼굴이 빛이 났는데 그 형태가 뿔 모양이었다'라고 해석하게 됐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고 하느님 영광이 모세 위에 머물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을 상징하는 일곱 뿔을 갖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요한계시록 5:6).
성경에서 뿔은 하느님의 능력과 도움, 승리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다.

사무엘하 3:4
네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열왕기상 1: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열왕기상 1:50-51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7일 / 03- 27-2024(수)
출애굽기 37:1-29
언약궤(1절)
찬송 /  장(  )


언약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역대하 5:7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 개 아래라.

성경에서 언약궤의 이동과 그 위치에 대한 마지막 말씀이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언약궤가 솔로몬 왕이 만든 성전에 자리 잡는 이야기를 끝으로 언약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성경에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현재 그 언약궤는 어디에 있을까?'하는 질문을 갖게 된다.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을 때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을까?
언약궤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답은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질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를 어디엔가에 잘 감춰 놓았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장소는 현 예루살렘 황금돔 밑이다.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스람교도들이 황금 돔을 세워 놓았는데 그 밑에 언약궤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에 거슬려도 황금 돔을 깨부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언약궤가 상할까 해서.

두 번째 장소는 로마 베드로 성당 밑이다.

자기들의 정통성을 강조하 기 위한 가톨릭의 주장이다.

세 번째 장소는 에디오피아의 어느 성당이다.

몇 년 전에 에디오피아에 있는 한 성당 신부가 보관 중인 언약궤를 공개하겠다고 신문 기자 인터뷰를 요청해서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결국 인터뷰는 무산되고 말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가 에디오피아로 갖고 갔을 것이라는 전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언약궤가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엮어 있는 것은 아마도 예레미야 3장 16절에 "...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숨겼다고 본다.

외경 마카비 2서 2:7-8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와 분향단을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에 대비하여 감추어 놓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장소는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져 있을 것이다.

지팡이와 만나는 증거판 앞에 두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언약궤 속에 두 돌 판과 같이 넣었다(히 9:4).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두 돌 판만 남아 있었다(대하 5:10).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지 않으신다는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진정한 언약궤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 11:19)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시편 110:10)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특징    

1. 지혜로운 사람(1, 8절) - 솔로몬

2. 총명한 사람(1절) - 아비가일
3. 자원하는 사람(3절) - 다윗

지혜를 구한 솔로몬(열왕기상 3:1-15)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야보고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지혜로운 사람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솔로몬 왕을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이가 많아야 20세였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처럼 잘 할 수 있을까?’ ‘이 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
먼저 2장 13절~25절에 보면 왕위에 오르려 했던 아도니야를 제거하였습니다.
아도니야가 살려고 밧세바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밧세바는 이 이야기를 솔로몬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왕상 2:23-24)
결국 25절에 말씀을 보면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반역에 동참하였던 아비야달과 요압을 제거하였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 다윗에게 모멸감을 주었던 시므이도 제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장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 3:4)

여러분 일천번제가 쉽습니까?
2년을 하고도 270일 동안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매일 매일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도전을 받고 일천번제헌금을 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헌금을 합니다. 그 액수를 다 다르지만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천원을 봉투에 넣어 헌금하고 어떤 분들은 매일매일 5,000원을 헌금하고,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헌금을 합니다. 그래서 혹시 빼먹을 수 있으니까 아예 번호를 1,000번까지 써서 놓고 헌금을 하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30일 작정하고 매일 기도회를 가졌지만 30일 동안 기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 아플 때도 있고,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기기도 하고, 하다보면 체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천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 헌금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은 쉽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매일 송아지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의 각을 뜨고, 율법대로 버릴 것은 버리고 태울 것은 태워야 합니다.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제사장들이 준비했겠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이 모든 것에 주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겠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작정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저는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작정하고 사는데 무슨 날을 정해서 작정을 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정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기가 쉽습니다. 한없이 뒤로 미루면서 열심을 품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해 놓고/ 시간을 정해 놓고/ 날짜를 정해 놓고/ 그 목표를 향하여 힘을 쏟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오. 정말 될 수 있으면 시간을 작정하고/ 날짜를 정하고 작정하여 기도해 보십시오. 가능하다면 기도하면서 여러분도 일천번제를 드리십시오.
분명히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는 근거도 여호와를 사랑하고 부친의 법도대로 행하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왕상 3:3)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천일이 하루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루가 천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과 연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라헬을 얻기 위해서 삼촌 라반과 계약을 하였습니다. “7년 동안 일하면 라헬을 주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라헬과 연애함으로 인하여 그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도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를 위해서 늘 봉사하고 헌신하여도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요.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일주일을 작정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정기도 시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을 때 너무나 즐거운 시간, 기쁜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매 말랐다면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헌신이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보시고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6절부터 대답합니다.
(왕상 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 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결론적으로 무엇을 구했습니까? 지혜를 구했습니다.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10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 3:10)
솔로몬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도하여도 주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왕상 3:11)

그렇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았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만을 위한 정욕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그렇습니다. 주님의 맞는 기도는 자기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맞는 기도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고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힘쓰는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로 주님의 일에 있는 것이 바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도들의 마음에는 좀 더 주의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안일을 해도 먼저 예배시간을 피해서 하고
약속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정하고
재정이 생겨도 하나님께 먼저 받칠 것을 생각하고
정말 복 받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남는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먼저 내가 쓸 것부터 챙기고 다음에 하나님 것을 생각합니다.
먼저 내 볼일 이 우선순위로 되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 순서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넘버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넘버 투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보너스를 주셨습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3-14)

그렇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되고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뿐 아니라 보너스로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솔로몬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뿐 아니라 그 외에 것도 보너스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작정하십시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기를 작정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 우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이 주는 교훈(사무엘상 25:23~38)

사무엘상 25:2~3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마온에서 5리정도 떨어진 갈멜이라는 곳에 다윗이 육백 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고 훗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멸하고 거역하여 불순종했고 오히려 자기를 추켜세워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아말렉과의 전쟁을 자기 전술과 전략으로 이긴 것처럼 자기 이름으로 공덕비를 세우기도 하고 하나님이 철저히 금하셨음에도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들을 골짜기에 자기 몫으로 숨기기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세움 받고 쓰임 받는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교만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공덕을 치하하고 자기이름으로 행세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부득이 그를 버리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사울을 이미 버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이스라엘 왕의 후계자로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늘 성령충만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맡겨진 양떼를 돌봄에 있어서도 맹수들과 싸우면서까지 목자의 사명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목숨보다 귀한 것으로 여겨 신앙인격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맘에 들어 하셨습니다.

이런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망명생활의 훈련을 시키시는 과정입니다.

무용(武勇)에 뛰어난 600명의 용사들이 다윗왕조를 세우기 위하여 훈련하고 있었던 곳이 갈멜이었습니다.

다윗은 근처에서 양과 염소를 돌보고 있던 나발의 목자들을 당시 강도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로 하여금 해치지 못하게 지시하고 더불어 목동과 양떼까지 보호하여 지키게끔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발의 양털 깎는 날이 되어 갈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는 양털 깎는 날이 수입이 생기는 소망적인 날이라 큰 잔치를 베풀고 지나가는 나그네까지도 넉넉히 대접함으로 그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하여 인심을 후히 쓰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 25:5~8)”고 그의 부하 열 명을 나발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0~11)”고 합니다. 그는 빈정대며 주인에게서 떠나 반란을 시도하여 갈라져나가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 있다고 다윗을 빗대어 욕을 한 것입니다.

나발의 미련함은, 첫째로 하나님이 성령을 충만케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사람인 다윗을 몰라본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가축들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나발의 세 번째 미련함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발의 이런 미련함에 빈손으로 돌아온 다윗의 부하들을 보고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사백 명 가량은 칼을 차게 하고 그들을 죽이러 올라가고 이백 명은 그 소유물 곁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도 실수였습니다. 자신이 그들의 목동과 가축을 돌보아준 것에 대한 응당한 댓가로 생각한 다윗은 나발이 자기를 모욕하고 무시했다고 생각하여 감정적으로 대처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9~20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하셨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의 종으로부터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삼상25:14~17)”고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서둘러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나발을 향해 가고 있는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본문의 내용과 같이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자신의 남편 나발이 너무나 서운하게 대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계획을 압니다. 곧 왕이 되실텐데 왕좌에 오르시게 되면 이런 미련한 사람 때문에 피 흘리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왕의 허물이 될까봐 이처럼 사정하고 비오니 미련한 자들을 죽일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런 피흘림을 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을 인식시키는 말을 합니다.

이에 다윗은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삼상25:32~34)”합니다. 그리고는 그 음식을 받고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청을 허락했다고 말을 합니다.

아비가일이 그 남편 나발에게로 가보니 왕의 잔치같은 잔치를 하며 술에 크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바로 말하지 않고 다음날까지 기다려 술이 깬 후에 말을 해줍니다.

신앙적인 지혜는 반드시 해야 할 말도 상황과 때를 분별하고 상대를 잘 알아 상대가 영적인 유익함으로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신앙인격으로 슬기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남편 나발이 다음날 아침, 술이 깨어 일어났을 때 전날에 있었던 일을 설명합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다 들은 그는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어 열흘 후에 죽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나발의 어리석음을 통한 아비가일의 신앙지혜를 본받으라고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교훈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아비가일은 그 남편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거역하다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회개할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나발과 같이 없애버리십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은 예수님과 영원한 영적신부가 되도록 예수님의 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목자인 목사들은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 그 교회에 속한 양 떼가 모두 하늘나라 가도록 하기 위하여 진액을 다하여 애쓰고 있다면 이런 목자의 뜻을 따라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윗(사무엘하 5:1-25)


●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예수님 빼고 다윗만큼 많은 분량에 걸쳐 일생이 자세하게 소개된 인물도 없다.
그만큼 성경에서, 또 기독교 신앙에서 다윗은 중요한 인물이다.
다윗은 어떤 인물인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어느정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윗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 여러분도

다윗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던 극적인 인물이요, 예수님의 조상이요, 성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위대한 시인이요 음악가요 골리앗을 넘어뜨린 최고의 용맹스런 장수요,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실수도 저질렀던, 참으로 다양한 재능과 인간미와 신앙을

겸비했던 인물!

이 한시간에 다윗에 대해 말하기란 사실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다윗의 일생을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서, 평소 여러분들이 성경 이야기를

통해 잘 알고 있는 부분 몇가지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도록 하겠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14대 손이며, 유다지파 이새의 여덟째 막내아들로,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 ‘사랑받는 자,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대로

다윗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유대땅 베들

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일개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로 장식되어 있다.

● 다윗이 등장할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워 왕정을 수립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여망하는 바 외적의 압제로부터 막 벗어나는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왕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긴 하였지만, 정치적.군사적 입장

에서 볼 때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그는 이전의 사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주변의 국가들이 강력한 왕정국가를 형성하고, 막강한 군대와 병기들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국력을 신장시킬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 신본주의적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다윗은 앞선 다른 신앙의 위인들과 달리 조금 일찍 7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평생 전쟁터에서 많은 고생을 해서인지 수명이 짧았다. 다윗의 70 생애는, 20세 이전의 초기와, 약 20세 경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장수로 등장하여, 30세에 왕위에 즉위하고 주변의 모든 이방민족을 정복했던 30년간의 중기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면서부터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70에 죽기까지 20년간의 말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초기

다윗은 베들레헴이라는 시골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들판에서 양떼들과 생활하면서 자랐고, 그래서인지 몸집은 크지 않았지만 기운도 세고 침착하며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윗은 양을 치다가 사자와 곰을 만났지만 그들을 쳐죽이고 양과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용맹스러운 청년이었다. 나이에 비해 다윗은 책임감이 투철했고 생각이나 마음가짐은 어른스러웠다.

다윗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사울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사울왕이 알게되면 이것은 반역으로서 사무엘은 물론 이새의 집안까지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우연히 베들레헴에 방문한 것처럼 하여 화목제사를 드리면서 이새의 가족, 즉 아들들도 초청하였다. 이때 이새는 여덟명의 아들 가운데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에 세웠다. 다윗은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어린 목동에게로 향해 있었다. 사무엘의 예상을 뒤엎고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이 미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때부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어른들의 제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던 어린 다윗이었지만, 이미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다윗의 모친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부정확하고 미흡하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다윗왕의 위치로 볼 때 이것은 예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다윗의 어머니는 이방 암몬 사람과 관계가 있는 여인 같다. 즉 다윗은 이방 여자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하고 다윗은 외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눌려 살면서 들판에서 양을 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때, 다윗은 결코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들어 쓰시기 전에 반드시 준비시키시고 연단을 하신다. 쇠를 강하게 하기 위해 불로 달구고 물로 식히듯이. 다윗은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눌려 집안에서 귀여움받고 지내지를 못하고 베들레헴 들판을 뛰어다녀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도 목자는 가장 비천한 직업이었다. 집에서 잠자지 못하고 들판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켜야 하는 일은, 요즘으로 치면 3D 업종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고난의 목장이 어린 다윗에게는 그대로 교실이요 도장이요 또 예배당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의 배움터에서 그를 가르치고 그와 교제하면서 은혜를 베푸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목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 다윗이 집안에서 고이 자랐다면 어찌 이런 시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 밤을 새며 양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겠는가?

다윗은 힘들고 지친 고난의 현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맛보았고,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고달프고 힘이 드는가?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게 마련이다. 다윗처럼 여러분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때, 오늘의 힘든 처지가 오히려 여러분을 더욱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주실줄로 믿는다.

● 중기

여호와의 신에 감동한 다윗은 더욱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드디어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기 전, 이미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수금을 잘타고 용기와 구변이 준수한 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든 사울을 치료하기 위해 다윗이 추천된다. 이에 다윗은 사울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되어, 사울왕이 악신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수금을 타서 사울을 상쾌하게 하였고, 사울의 총애를 받게 되어 왕의 병기드는 자가 되었다. 즉 사울왕의 최측근 비서가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블레셋 사람들이 골리앗을 앞세워 침범해 왔다. 당시 다윗은 베들레헴 집과 사울왕을 오가면서 그 아비의 양을 쳤는데, 한번은 아비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음식을 전하기 위해 전장으로 오게 되었다. 이때도 다윗이 징집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면, 아직 20세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전장에 당도한 다윗은 적장 골리앗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는 것을 듣게 되었고,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다윗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골리앗을 넘어뜨린다.

이날의 승리 후 다윗은 사울의 장수가 되어 가는곳마다 승리를 거두게 된다. 다윗의 명성은 금새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사울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노래한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신하가 군주를 능가하여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윗의 극심한 고난은 시작되었다.

사울은 여러번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산속으로 들판으로 도망쳐 다녀야만 했다. 당시의 자기 신세를 다윗은, ‘죽은 개나 벼룩’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사울왕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다윗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은 결코 그를 적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여’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은 환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떨 땐 더 큰 환난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연단을 받아 믿음이 깊어지는 사람이다.

다윗은 30세에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미친사람처럼 침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해야할 때도 있었다. 그 동안의 싸움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수많은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소서.’ 이러한 극심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그릇은 완성되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선을 행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성도의 앞길에도 때로는 고난과 역경의 장벽들이 계속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고 의지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자. 절대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자. 하나님이 세우시는 때를 기다리라.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며, 복되고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하실 것이다.

● 말기

다윗은 먼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 기간은 7년 반이었다. 그리고 사울왕의 사촌 아브넬의 반역 사건으로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 전국의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전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통치 하에서 날로 융성해 갔다.

이런 다윗에게 실패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성공하여 이름을 널리 떨친 후의 일이었다. 사울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고난을 받을 때 그의 영혼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방이 평정되어 왕위가 견고해지자, 그는 방심하기 시작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암몬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승리는 이미 다윗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나이든 다윗은 요압을 보내어 이스라엘 전군을 지휘하게 하고 자기는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왕궁에서 평안히 낮잠을 자고 저녁 때가 다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안일한 장소 - 그곳이야말로 성도에게 위태로운 곳이다. 다윗은 여기서 실패하고 말았다.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가 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 있을 때 그 아내를 범한다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행위인가? 게다가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전사하게 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한꺼번에 간음죄와 모살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이 일로 다윗이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일로 다윗의 가정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에 빠지고 만다. 왕자들간의 싸움, 가장 아꼈던 아들 압살롬의 반란, 다윗은 환갑을 넘은 나이에 맨발로 예루살렘성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다윗의 두 번째 실수는 인구조사의 실시였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지시대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인구 조사를 하여 군대를 뽑고 세금도 거두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었으나, 높고 영화로운 권세가 다윗으로 하여금 교만으로 눈이 가려진 모양이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갔다. 지도자들이 정말 정신 차리고 잘해야 한다.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 하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의 최대 강점은, 금방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사람은 실수하거나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영적 성향이 더 중요하다. 다윗도 엄청난 죄를 범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사람이었다. 시편에는 측은할 만큼 뜨겁고 간절한 다윗의 회개기도가 나타나 있다. 다윗은 회개를 통해 바로 자신을 회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수할 때마다 자신을 바로 일으키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 다윗은 시인으로서, 가인(歌人)으로서, 군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신앙인으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또한 그 모형으로서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되고 이스라엘의 국위가 높아진 원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임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감사드리며 살았던 겸손한 사람이었다. 

실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하지만 그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는 자는 심히 적다. 믿음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삶의 걸음걸음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늘 실감하며,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5일 / 03- 25-2024(월)
출애굽기 35:1-35
행하게 하신 말씀(1절)
찬송 / 279장(주의 말씀 듣고서)

디럭스 바이블 출애굽기 35장

거룩한 장소(공간)
거룩한 시간(안식일)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20장, 35장)
* 성

1-3 안식일에 관한 모세의 교훈
4-19 성막을 위해 헌물 할 것과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제조할 것을 명하다.
20-29 백성들이 즐겨 여러가지의 헌물을 하다.
30-35 공인에 대한 모세의 훈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십계명을 주셨을 때 명령하신 것


출애굽기 31:13-16

- 성막을 완성한 후에 말씀하신 것으로 장차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를 원한다면 반드시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이 됨이니라 그 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4일 / 03- 23-2024(토)
출애굽기 34:1-35
모세의 얼굴(30절)
찬송 / 495장(내 영혼이 은총 입어)

    1-4. 모세가 다시 등산하다.
    5-9.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다.
10-17. 하나님의 약속과 경계
18-27. 안식일과 삼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 및 첫 새끼의 대속
28-35. 모세의 하산과 변모

광채(7160) 카란(qâran)  קָרַן   

1. 빛나다.  2. 히필형 : 뿔이 나다
발음 [ qâran ]
구약 성경  /  4회 사용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광채가 나나
- 이것은 성물과 접촉하는 것이 거룩해진다(29:37; 30:29)는 원리와 일맥 상통한다.
즉 모세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집중했는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 혹은 거룩함이 자연스레 모세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모세가 성화(聖化)되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얼굴에 나는 광채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몇 군데 있다(마 13:43; 17:2; 행 6:15; 7:20).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 원문에 가깝도록 직역하면, '보라! 빛나는 얼굴의 피부가 되었도다'란 뜻으로 모세의 빛나는 얼굴의 광채를 보고 놀라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었다.

두려워하더니
- 앞절의 '광채가 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란'은 '뿔이나다'는 뜻도 있다.
아마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는 뿔과 같은 모양으로 빛났던 것같고 이때문에 사람들은 더 두려워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라틴어 벌겟역(Vulgate)은 이를 '뿔이 났다'로 번역했고, 이에 따로 모세를 묘사한 얼굴에 뿔이 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적용이다.
한편 후일 사도 바울은 이 모세 얼굴의 광채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새언약의 영광스러운 광채로 승화시켰다(고후 3:7-18).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3일 / 03- 22-2024(금)
출애굽기 33:1-23
그 반석 위에 서라(21절)
찬송 / 539장(이 몸의 소망 무엔가)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Then the LORD said, "There is a place near me where you may stand on a rock.

    1-6. 동행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슬픈 고시와 이스라엘 자손의 근심 및 겸기(회개).
  7-11. 회막에 들어간 모세.
12-17.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겠다는 언약의 갱신.
18-23.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한 모세의 기도와 그 응답.

반석
- 본래 의미는 '절벽'이며 일반적 의미는 '바위'인데 상징적으로 '피난처'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를 '반석'에 두겠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는 피난처에 숨기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성경에서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는데(신 32:15;삼상 2:2시 89:26),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는 피난처이자 구원하는 능력이심을 나타낸다.

서다(나찹. 5324)
נָצַב 스트롱번호5324

1.

두다

2.

니팔형 נִצַּב

3.

놓다

발음 [ nâtsab ]
구약 성경
19회 사용
반석(6697. 추르)

צוּר 스트롱번호6697
1.

2.

바위

3.

가장자리

발음 [ tsûwr ]
어원
6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74회 사용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모세가 죽은 줄 알고 성급하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시내 산에서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내려오다가 첫 번째 돌 판을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돌 판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금송아지 우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같은 동족이 죽게 됩니다.
이때에 모세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레위지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상을 섬겼던 자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이 죽인 사람이 삼천 명 정도가 됩니다.
이때에 레위 자손들이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우뚝 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출애굽기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같이 올라가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도 안다는 것입니다.

‘너를 앎이니라’ (י דע야다 3045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남성, 2인칭, 단수)
동침하다, 알다, 익숙하다, 기억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아는데 이름으로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개념에 서로 동침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결혼하여 익숙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항상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게 되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이런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에 즉시로 대답하셔서 너의 이름도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너의 이름을 잊지 않고 내 마음에 새겼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미리 정하셨으니’ (προοριζω 프로오리조 4309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단수, 3인칭) 예정하다, 미리 정하다, 예정을 입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προ 프로 4253) ~전에, 앞에, 라는 뜻과 (οριζω 호리조 3724) 결정하다, 정하다, 선포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공로가 필요 없이 믿음도 필요 없이 예정하셔서 구원시키기로 결정을 내리시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선택받은 것은 나의 공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 믿을 것을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나의 이름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설법과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창세전에 나의 이름을 아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땅에 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고 믿게 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출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베푸느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모든 선한 것을’ (טוב투브 2898 명사, 남성, 단수. 공성, 1인칭, 단수)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טוב토브 2895) 좋았다, 선히 여기다, 기뻐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과 기뻐하는 것을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1:17-18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선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선한 것에서 단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줄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출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내 얼굴을’ (פנים파님 6440 명사, 남성, 복수. 공성, 1인칭, 단수) 얼굴, 진설병, 용모, 라는 뜻이며 어근은 (פנה파나 6437) 권고하다, 돌아보다, 살피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복수형을 쓴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많아서 복수형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영광의 광채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진설병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출39:36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성막에서 떡상 위에 놓여진 진설병이 (לחם הפנים레헴 하파님)입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그 얼굴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떡을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이 떡을 먹어야 만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원죄가 사라지고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셔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33: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반석 위에’ (צור추르 6697) 바위, 반석, 이라는 뜻이며 (צור추르 6696) 함께 묶다, 압박하다, 괴롭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반석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반석입니다. 바로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십자가에서 고통의 압박을 받으시게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고통과 괴로움의 압박을 받으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셔야 만이 선택받은 죄인들과 하나님을 함께 묶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0: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반석은 신령한 음료가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입니다. 생수가 나와서 뜨거운 광야에서 마실 수가 있습니다. 이 반석도 (צור추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반석을 준비하여 주시고 그 위에 서라고 한 것입니다.

‘서라’ (נצב나차브 5324 동사, 닢알, 완료, 남성, 2인칭, 단수) 두다, 자리 잡다, 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리에 올려주셔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닢알 단순 수동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죄인인 인간 스스로 올라갈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려주셔야 가능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세워지면 하나님이 내려오게 하지 않는 한 절대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받은 백성들은 절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반석 위에 서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33: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위에 세워주시니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하나님이 지나갈 때에 주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반석 틈에’ (נקרה네카라 5366) 갈라진 틈, 구멍,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נקר나카르 5365) 구멍을 뚫다, 찌르다, 파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 틈에 두시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옆구리에 창을 맞으시고 피를 쏟아주셨습니다. 주님은 몸에 채찍 자국으로 구멍이 뚫리듯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온몸이 찢기시면서 살 조각이 파내어지는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이 반석 틈에 죄인들을 숨겨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요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와 물을 쏟아내어 주셨습니다. 죄인을 위한 대속의 피를 운명하신 후에도 쏟아주신 것입니다.

‘옆구리’ (צד차드 6654) 옆, 측면,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צדד차다드) 외면하다, ~의 쪽으로 돌리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택받은 자들이 원죄에 빠져 하나님을 몰라보고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쪽으로 눈을 돌리고 우상을 섬겼던 죄 때문에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을 찔리셔서 내가 우상을 섬겼던 죄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원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모세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세워주시고 손으로 덮어주신 것입니다.

출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틈에 세워주시고 지나가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손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거두어 주시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등을’ (אחור아호르 268 명사, 남성, 복수. 공성, 1인칭, 단수) 뒤쪽으로, 뒤에, 라는 뜻이며 어근은 (אחר아하르 309) 뒤에 남다, 머물러 있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등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에 나오는 영광은 볼 수가 없지만 뒤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하심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등에서 나오는 후광의 보호하심도 얼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강력합니다.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요14:8-9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 있어야 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반석 위에 세우지 않으시고 창세전에 선택한 백성들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세워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등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얼굴을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으로 들어와서 은혜가 충만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섬기면서 독생자의 은혜와 진리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2일 / 03- 21-2024(목)
출애굽기 32:1-35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32절)
찬송 / 514장(누가 주를 따라)

1-6.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상 아래서는 민중이 금송아지를 만들다(백성의 배신).
7-14. 산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첫째 중보기도)
15-20. 모세의 하산과 분노
21-24. 모세의 힐문과 아론의 변명
25-29. 죄에 대한 모세의 조처
30-35. 모세의 두번째 기도(둘째 중보기도)


주의 기록하신 책
-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생명책'으로도 표현되었다(시 56:8; 69:28; 139:16; 단 12:1; 빌 4:3; 계 3:5; 13:8; 17:8; 20:12).
이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 준다.
시민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등재된 자들만이 그 지방의 주민 또는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되며 아울러 시민권이 보장되었던 당시의 풍습에서 따온 이 '생명책'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나타난다(빌 4:3; 계 3:5).
곧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 모세의 이 기도는 신약 시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던 바울의 기도와 유사하다(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책임을 회피했던 아론과 달리 모세는 이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투철한 책임 의식과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Bengel).
실로 모세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고통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인 생명까지 걸고서 그토록 간절히 중보 기도 드리는 이유는 죄중에 죽어갈 저 무지하고 불쌍한 뭇 영혼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즉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지옥의 그 고통스런 불꽃(눅 16:24)까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그 치욕스런 십자가를 흔쾌히 지신 것도 '오직 사랑'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저 죽어가는 뭇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도 이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고전 4:1, 2).

내 이름을 지우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지 3개월쯤 지나 시내 광야에 도착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간 있었습니다.
시내산은 한라산(1,947.06m)보다는 높습니다.(대략 343.94m)
해발 2291m입니다.
그 기간 동안 산 아래의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백성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며 거기에 절하고, 화목제까지 바쳤습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 사태를 산상에서 다 지켜보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걸 섬길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바친 금붙이로 아론이 만든 형상은 송아지 모양의 애굽의 아피스입니다.
황소의 신 '아피스(Apis)'
사람의 생산을 돕고 곡물의 생산을 도와 잘 살게 해준다는 아피스 신상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한 달 이상 자리를 비웠다 해도 이것은 너무한 처신입니다.
백성들은 애굽 땅에 임한 10가지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이고, 홍해를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고,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먹었고, 어제만 해도 메추라기를 먹었고, 당일 아침에는 만나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한자성어 '배은망덕(背恩忘德)'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 속에서 은혜를 입고도 마음이 변하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남의 도움이나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단어가 바로 배은망덕입니다.
한자로 살펴보면, 背는 등을 뜻하며 배반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고, 恩은 은혜를 의미합니다. 忘은 잊다라는 뜻이고, 德은 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 한자가 조합되어 '배은망덕'이라는 성어가 완성되는데요, 이는 남에게 입은 은덕을 잊고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은망덕이란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와,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 이란?

유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나 전래동화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은망덕이라는 행동이 인간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간결하게 표현한 성어로 전해져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 사회에서 배은망덕이란 행위는 종종 목격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배은망덕이라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행위로 여겨지고 있으며,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인간관계에서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배은망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남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인간관계의 소중함과 신뢰를 쌓아가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은망덕을 피하고자 한다면, 남에게 받은 도움이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야 하며, 인간관계에서의 도덕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자풀이

  • 背 : 등 배, 배반할 배 
  • 恩 : 은혜 은 
  • 忘 : 잊을 망 
  • 德 : 클 덕, 덕 덕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단어는 남에게 받은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가치인 은덕을 인정하고 갚아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잊어버리고 배신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1. 그의 배은망덕한 행동에 사람들은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2. 한 번의 배은망덕으로 오랜 친구와의 관계가 망가졌다.
  3. 그녀는 어머니의 큰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했습니다.
  4. 정부의 배은망덕한 정책에 시민들의 분노가 치솟았다.
  5.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용서할 수 없어요.
  6. 그는 기업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여 경쟁사로 넘어갔다.
  7. 군주의 배은망덕한 행동으로 세력이 무너졌다. (옛날 사례)
  8. 소설 《춘향전》에서 병렬차관의 배은망덕한 행동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가져왔다. (소설 출처: 춘향전, 작자 미상)
  9. 시인 정지용의 시 《무진기》에서 "허무하게 배은망덕한 세월아"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시 출처: 무진기, 정지용)
  10. 고려시대 문헌 《경기록》에는 배은망덕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헌 출처: 경기록, 고려시대)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을 황당해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입니다.
우리는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습니까?
이 시대 최고의 신은 금송아지, 맘몬입니다.
물신숭배주의가 여전히 이 시대의 최고의 우상입니다.
우리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겨도 나가서는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광신도가 우리입니다.
신자나 비신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니면 아피스에게 절하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본문 25절을 보면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 절하며 방자했다고 합니다.
원어의 의미는 벌거벗었다는 뜻입니다.
물신숭배는 벌거벗는 문화와 함께 갑니다.
우리는 쾌락주의 문화의 홍수 속에 삽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황금만능주의, 물신숭배주의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40일 만에 내려온 모세가 백성들의 진풍경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양손에 든 십계명을 내던집니다.

19절입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써주신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립니다.
민수기를 보면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이토록 흥분해서 십계명 돌판을 내던졌을 정도였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이것은 우상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자 아피스가 무력하고 거짓된 신이라는 사실을 백성 스스로 확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의 금송아지 사건 처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1절 이하입니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여기서 왜 모세가 아론을 심문하고 추궁합니까?
시내산에 올라가기 전에 아론에게 백성들의 치리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아론이 대답합니다.
22절 하반절입니다.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지도력의 한계를 시인한 게 아니라 백성들의 악함을 탓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이러면 안 됩니다. 자기 책임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론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과장하고 거짓말도 합니다. 24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불에 금을 던졌더니 거기서 송아지가 나옵니까? 32장 4절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렇게 엄청난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인 아론의 책임이라고 하고, 아론은 백성들이 협박했기에 그들 책임이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회는 반드시 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책임적 주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반드시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결단과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주님이 어느 날 회당에서 한 손이 불구가 된 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의료행위를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안식일 법을 범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무슨 생각으로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셨을까요? 마가복음은 그 사건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최초의 동기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 책임을 홀로 지겠다는 듯이 숨어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백일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장애인 한 사람을 고쳐주시면서도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각오를 하신 겁니다. 이 일로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과 백성들은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현 시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립니다.
31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백성들의 물신숭배, 아론 같은 공직자들의 무책임까지 모두 자기가 짊어지고 비상한 각오로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3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남의 허물과 죄악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모세처럼 화해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사회, 내 나라, 내 민족의 허물을 대신 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사죄를 빌고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비장함을 보십시오.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지금은 나라와 사회,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모세처럼, 심판에 직면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과 밀당하며 끝까지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자신이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내 민족은 구원받기를 원한 바울처럼 우리도 맘모니즘이 창궐하는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사 이 시대와 나라를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쓴 뿌리"란 무엇인가?

쓰다는 표현은 보통 분노 및 원한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2:15에서 과연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쓴 뿌리"는 (나무 토막처럼) 뿌리가 쓰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뿌리가 식물로 자라난 후 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까요?

둘째, 히브리서 12:15의 쓰다는 것은 곪아 터진 분노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독이 있고 더러운 것을 의미할까요?

셋째, "쓴 뿌리"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는 신명기 29:18에서 유래하는 표현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역자주: 영어성경을 번역하면 "독 있고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이 말씀의 배경은 앞선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도움이 됩니다.

뿌리 자체가 쓰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쓴 열매는 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쓴 열매는 어쩌면 곪아 터진 분노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치명적인 쓴 열매가 나오도록 하는 뿌리가 무엇인가?
신명기 29장의 그 다음 절은 놀랍지만 히브리서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답변을 줍니다.
18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독초와 쑥(쓴 열매)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그 후 19절은 이 뿌리를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그렇다면 쓴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평안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전함을 느낍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내게는 평안[=구원]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 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건너짚는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의 몇몇 영적 체험 때문에 혹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서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신앙고백자들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이렇게 자신의 안전을 추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치료하여,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의 성실한 견인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분깃이 없는 자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의 싸움에 열심을 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2:3, 3:12,14, 6:4-7, 10:23-29).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라는 용어의 문맥을 보아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2:14-15).
이는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더 많은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는 믿음의 싸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깨어 경계하는 삶 없이도 구원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도록 교회 안에서 권장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더럽히며, 자신의 유업을 아무렇게나 대하여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했던 에서처럼 되게 이끕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1일 / 03- 20-2024(수)
출애굽기 31:1-18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13절)
찬송 / 383장(환난과 핍박 중에도)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날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안식일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기 때문이다.
“안식일”(Sabbath)이라 하면 한 주의 맨 끝 날인 토요일을 말한다.
(소위 “주일” 즉 일요일은 신약에서 “주(week)의 첫날”로 불린다.)
많은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십계명”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십계명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인, 간음, 도둑질, 탐심 등에 대한 계명들은 우리들이 지키기에 무방할 뿐 아니라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십계명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이요 그리스도인인 우리와는 무관한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성경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단지 교회에 나가고 일을 하지 않으며 방탕하게 보내지 않는 것이 이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을 해서는 안됐고 불도 지필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에게 거룩함이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그 혼이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께 거룩히 쉬는 안식일이니, 안식일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4-15)

"육 일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니, 주께 쉬는 안식일이라. 이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죽일지니라. 너희는 안식일 날에 너희의 온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2-3)

이를 어겼던 어떤 사람은 실제로 돌에 맞아 죽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을 어겼다고 해서 사람을 돌로 치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살인죄로 감옥에 갈 것이다.
그러나 신정통치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어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유대인도 아니면서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안식교인들이다.
그러나 왜 유독 안식일만을 지키는가?
안식일을 지키려는 사람은 구약의 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수염을 기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양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리는 등... 자기 마음대로 편한 것만 골라서 지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안식일을 지킨다며 토요일에 교회에 모인다.
(이들은 처음에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요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나 지금은 그 교리를 바꾸었다.)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지킬 필요도 없는 안식일을 그나마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적”(sign)으로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들을 참으로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 대대에 걸쳐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임이라. 이로써 내가 너희를 거룩케 하는 주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출 31:13, 겔 20:20을 볼 것).

출애굽기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에스겔 20:20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안식일을 포함해서)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없애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셨으며"(골 2:14).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러나 구약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었다.

한편 한국 교회들은 안식일의 개념을 “주일”로 바꾸어 “주일성수”라는 것을 교리로 만들어 가르친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는 부활의 주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도 하지 말고 매매 행위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소위 “주일”(사실 일요일은 성경에서 한 번도 “주일” 또는 “주의 날”이라는 말로 불리지 않았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쏟아 부어지는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이 아무리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둘을 동일선상에 놓으려 하면 혼동만 야기될 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빵을 떼며 교제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지켜야 한다는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으며,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인 것이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지 말고 흥청망청 보내도 된다거나, 일주일 내내 하나님은 거의 잊어버리고 생업에만 매달려 살았는데 일요일에도 똑같이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돈을 쓰지 않으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주일성수” 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구약의 율법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해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동에 빠지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이단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복의 길4-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 출 20:8-11, 눅 13:14-16

**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3:14-16,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복의 길 네 번째는 주일성수(主日成遂), 즉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은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듣고 보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20년 이상 목회를 해 온 지금까지도 주일이면 긴장이 되고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일은 단어의 뜻 그대로 ‘주인의 날’이며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되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매 주일마다 나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주일에 대하여 마음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13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고 하시고, 에스겔 20:12절에서는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고 하십니다.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표징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에서 주일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성경에서 정확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새 언약을 주신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22:20절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원한 하나님 자녀의 소망을 주시기 위한 부활로서 새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예배와 성만찬을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7절입니다. “그 주간의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주간의 첫 날은 지금의 일요일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없어지고 주일이 새롭게 생긴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 속에 그 의미를 다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인 사랑의 법이 모든 율법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옛 언약인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역시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길을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본문 말씀은 십계명 중에서 네 번째 계명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기본법입니다.
십계명은 권면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며 규범입니다.
이 말씀에서 안식일의 의미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고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너희도 쉬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성경에는 안식일에 일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실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5:32-36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행하신 기적 사건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예배 때였습니다.
그곳에는 귀신들려서 허리가 꼬부라져서 18년 동안이나 고생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보신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다가 그 여인을 불러서 안수하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께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의 법을 어겼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도리어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화를 내시며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드러내시면서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은 소나 나귀 등 자신들이 기르는 가축들을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물을 먹이려고 끌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짐승들을 죽지 않게 하려고 안식일에도 끌고 다녀 불법을 행하면서, 사람이 사탄에게 놓임을 받는 치유를 불법이라 한다고 호통을 치신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안식을 정하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법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어떻게 주일을 주일답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주일(主日)은 ‘주님의 날’이며, 성일(聖日)이라고 합니다. 즉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거룩하게 구별된 날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진 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날 중에서 여섯 날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하루를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구별하시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날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섯 날도 모자라서 마지막 하루까지도 ‘자신의 날’로 만들어버립니다. 성경에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이는 사람들이 안식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에도 많은 교인들이 주일 낮 예배 혹은 저녁만 참석하면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만 참석 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갈 곳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영업하고 사업하고 즐기는 일에 나머지 시간들을 다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시간을 한 시간으로 엄숙하게 지켜달라고 요구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 시간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일성수(主日成遂)라는 말은 일요일 하루를 주님의 날로 온전히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온 종일 제의식과 화목제의 음식을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주일은 말씀을 듣고 찬양하는 기쁨의 예배와 성만찬의 친교의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을 바르게 지켜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58:13-14절을 봅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날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물며 죄악으로 죽은 나를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주신 주님을 어떻게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일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주님의 날입니다. 마태복음 12: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여왕(女王)’이라고 표현하며, 여왕을 맞이할 때와 같이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달력에는 금요일 해가 지는 시간을 기록해 두는데, 해가 지는 시간에서 18분을 앞 당겨서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시계가 늦어져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이 시작 되는 사이렌을 울려서 모든 안식일 준비를 다 끝내고 시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여왕을 맞이하기 위해서 주부들은 집안 청소를 합니다. 즉 주일 맞이 대청소를 하고, 미리 시장을 보고,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다 준비해 둡니다. 식탁에는 꽃도 꽂아서 여왕을 맞이하듯이 준비를 하고 아름다운 초 두 개를 준비해서 켭니다. 두 초는 본문 8절의 “기억하라”는 말과 “지키라”는 이 두 가지를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기 전에 구제함에 구제헌금을 넣습니다. 남자는 흰 셔츠를 입고 여자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합니다.

여러분의 주일을 이런 마음으로 지켜보십시오. 주일은 거룩한 날, 즐거운 날, 존귀한 날이라고 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예배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날에 가족이 잘 준비된 식탁을 마주하고 음식을 나누며 기뻐하십시오. 느헤미야 8:10절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교회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성도들이 함께 즐겁게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며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혹 시간이 있으면 삶에 지친 사람들을 격려하며, 병든 자를 위로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십시오. 로마서 12:6-9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섬기고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묵혀두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받은 책망을 받게 됩니다. 마 25: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특히 하나님께서 주일에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58:13-14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안식일을 나의 거룩한 날로 지켜라! 안식일에도 너희의 용건에 따라서 여행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함으로써 나의 거룩한 날을 너희의 날로 쓰지 말아라. 안식일에는 너희가 다니고 싶은 곳으로 다니지도 말고 너희가 원하는 일도 하지 말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도 말아라! 오직 그날을 기쁜 날로 여기며 나 여호와의 거룩한 날로만 지켜라! 그러면 내가 직접 너희에게 참된 기쁨을 주겠다. 그리고 너희의 모든 장애물을 내가 세상에서 제거하여 주겠다. 그래서 내가 너희 조상 야곱에게 준 땅의 열매를 너희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겠다.\' 여호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주일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행을 할 경우, 특별한 사정에 의한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십니다. 여기서 금하는 것은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으로 행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무엇을 사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일에는 말도 쓸데없는 잡담이나 험담 등 함부로 말하는 것까지도 금합니다. 서로 세워주는 말,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 간증과 감사의 말 등. 하나님 앞에서 덕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내리십니다.

미국의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테일러(Zachary Taylor)는 헌법에 따라서 1949년 3월 4일 주일에 대통령 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는 그 날에 취임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못되었으면 못되었지 주일까지 범해가면서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테일러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하루 동안의 임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당시 상원의원장이었던 ‘데이빗 라임스 엘치슨’을 1일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치슨은 토요일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서 24시간 동안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는 주일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며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면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릴 것이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땅에서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세상의 어느 민족보다 높이리라.”고 하십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법

주일이면 습관을 따라 교회에 다녀오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한 일로 여기고 의무에 사로 잡혀 발걸음만 예배당에 뜰을 밟을 때가 많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교회에 다녀왔지만 진정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찬송 몇 곡과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기도를 드리고 적은 헌금을 드리며 설교를 듣고 돌아와서는 주일을 지키는 성도의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이것이 주일 지키는 자의 모습인가도 생각을 해보지만 역시 동의하가 어려운 부분이 나에게 있다.
성도라면 누구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교회의 각종 봉사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다른 사람을 도우며 주일을 보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잘 지켰느냐고 한다면 이 역시 만족함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나로서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일까?
주일 성수란 말은 세상의 일을 접어두고 하나님께 나가 주님과 온전히 하루를 보내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찬송하며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잘 들고 주신 말씀이 내 삶에 적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충분한 사랑의 교제가 필요하다.
한 주간 동안 어려움을 겪은 이, 혹은 소외된 이가 없는가, 등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가족들을 매주 돌보기 위한 정보의 창고가 교회여야 한다.
내게 주께서 명하신 사랑해야 할 이가 누구이며 어떻게 그를 섬겨야 할지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기본이 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일이야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예배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실천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이사야 58:13~14)

신자와 불신자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일날 성경찬송가를 들고 예배당에 가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성숙한 성도와 미성숙한 성도를 분멸하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주일날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잘 드린다면 그 사람은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임을 깨닫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 곧 신약시대에 지키는 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주전 165년경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잠깐 동안 독립국가의 모습을 보이다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후 1948년에 다시 이스라엘나라를 세우기까지 약 2000년 동안 세계를 방황하며 나라 없는 온갖 서러움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동안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많은 연구가들은 안식일 준수가 그 비결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몇 가정이 있든지 반드시 회당을 세웁니다. 
그 회당에서 안식일을 구별하여 그 날은 지킵니다. 
이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칩니다. 
회당, 안식일, 율법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그 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20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날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인생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축복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의 지혜입니다. 

이 복된 안식일에 대해 시편 84:10~12에 말씀하기를“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1.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출애굽기 20:9~10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육일은 사람의 날이지만 제 칠일 즉 주일은 날을 만드신 하나님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2.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쉬신 날, 일곱째 날을 말합니다. 
창세기 2:1~3에“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10계명에 기록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인 오늘날의 주일입니다. 
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말합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여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인간 재창조를 완성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이나 신약의 주일은 의미가 같습니다. 

3. 안식일은 십계명중 제 4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8에“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가운데 4계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4.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하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라는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이날을 소홀히 여기거나 다른 날과 똑같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 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정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서 20:12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시고자 주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에 행해지는 엄숙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날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이며 표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닫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깨달아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가난하게 혼자 살던 허만이라는 여든 아홉 살 된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청직원이 그 노인의 유품을 정리하고자 노인이 살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거지의 집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온통 넝마와 부서진 가구들로 가득했습니다. 
시청직원이 짐을 하나하나 챙기는 중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넝마 속에 파묻혀 있던 다섯 개의 바이올린을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바이올린 제작의 대가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들고 그가 직접 사인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값은 당시의 돈으로 수십만 달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노인은 그것을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알고 그렇게 쓰레기 속에 던져놓고 가난하게만 살았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가치를 아는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생명의 근원,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잘 섬기는 사람의 축복에 대해 요한삼서 1:2에“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2. 하늘나라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골로새서 2:16~17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장래에 있을 일 즉 하늘나라의 그림자로 주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 즉 주일을 정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며,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 즉 주일을 정하신 것입니다.

3. 사람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가복음 2:27에“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니...)”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쉬지 않고는 일할 수 없기에 적절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검증을 걸쳐 일과 휴식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효율적인 생산성을 유지하는 기간이 7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한 예를 통해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무신론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로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늘려 일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생산량이 30%로 감소해서 일주일을 다시 6일로 줄였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생산량이 30%로 감소되었습니다. 레닌도 어쩔 수 없이 일주일을 7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일주일의 7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소중한 삶의 리듬이 무너진다면 개인의 건강이나 땅의 축복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로 정하신 것은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위한 방법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발을 금해 오락을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인 이사야 58:13에“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빼앗는 사사로운 언행을 삼가하면서 이날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2.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20:9~11에“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느헤미야 10:31에는“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하셨습니다. 

미술가이며 시인인 제임스 스메탄이라는 사람은 몹시 가난 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나갑니까? 하고 묻자 “축복을 받으려고 나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축복입니까?”하고 묻자 “분노와 경멸, 그리고 냉대를 갖게 하는 유혹이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만족하게 되 는 것이지요. 
어둡고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차서 교회에 가면 평안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지요.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신 주님 앞에 나오는 날이 곧 주일 예배 시간입니다. 
주일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이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신령한 은혜가 임합니다.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내리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낙심한 사람에게는 소망을 주십니다. 염려와 금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넘치는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삶의 지혜도 주십니다. 그리하여 험한 세상을 이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십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더 알기 쉽게 이렇게 번역 한다면“너는 당당히 올라갈 것이며, 눈에 띄게 나타날 것이며, 너의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눈여겨 볼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는 에릭 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제8회 올림픽 경기가 파리에서 열렸을 때, 100m선수 중 가장 좋은 기록을 가진 금메달 유망주이자 믿음 좋은 스코틀랜드 청년 “에력 리들”이 경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일정이 주일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이 신실한 청년은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조국을 배반한 자, 위선자, 옹졸한 신앙인 등으로 말하면서 분노하고, 있는 대로 폭언을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에릭 리들은 주일을 범하면서 까지 금메달을 향하여 뛸 마음은 없다며 거절하고는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온종일 경건하게 하나남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목요일에 400m 경기가 있었는데 그 경기에 나갈 선수에게 문제가 생겨서 에릭 리들이 대신 나가게 되었습니다. 
100m 선수가 400m에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에서 에릭 리들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100m 경주자로서 400m를 뛸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100m 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m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100m 경주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겼더니, 나머지 길은 주님께서 인도해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예배에 성공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주일은“하나님의 날”입니다. 주일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높은 곳에 올리셔서 존귀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3.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하셨습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하셨습니다.“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는 것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성취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20년 후 거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업이란, 풍성한 물질과 자녀의 축복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세상의 모든 축복과 자녀의 축복과 내세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축복이 안식일 즉 주일을 잘 지키며,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五. 안식일을 어겼을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얻는 것이 없습니다(헛수고가 됨).
출애굽기 16:25~30에 말씀하시기를“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 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육신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에스겔 22:26에“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3. 패망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17:27에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더 중하게 여기는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4. 돌로 쳐 죽이라 하셨습니다.
민수기 15:32~36에 기록하시기를“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축복의 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종교적 엘리트들이 바쁘다는 것 때문에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진흙탕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주일예배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예배를 더 없이 소중히 여긴다. 영국의 명재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내 영혼이 잘되는 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입니다. 
주일예배의 승리자가 신앙생활의 승리자이며,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곧 인생의 승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성경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로 물리적,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로 의미와 내용이 있는 질적 시간을 의미한다"

인생이란 것은 모두에게 크로노스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어김없이 지나가는 이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시간이지만 허비하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썩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시간이 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강령"이라며 "즉, 세상의 크로노스 시대를 살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카이로스의 영원한 삶을 살아가고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세 가지 의미를 전달한다"고 했다.

그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의 첫 번째는 예배하는 삶, 삶의 안식,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며 "시대가 변하여 주일에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직장 관계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하나님 앞에 지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는 하나님이 내 삶에 가장 최우선이라는 중요한 고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주일은 세상의 모든 시끄러웠던 삶의 소리를 뒤로하고 하나님께 시야를 고정시키는 시간이며, 나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며,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시간이며, 무엇보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라며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무엇을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수동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다. 즉, 습관적인 억지로의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지키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때로 우리는 전쟁터와 같은 치열한 삶이 계속 끝나지 않고 지속될 때가 많다. 우리에게는 영과 육의 쉼, 특별히 우리의 심령 한복판에 있는 영의 쉼이 필요한 것"이라며 "기계처럼 일을 하다가는 우리가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 쉼을 일부러 보여 주신 것이다. 여기서 쉼은 단순히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어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안식을 하는 목적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기쁨과 상급을 보장한다"며 "많은 것을 가졌지만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참된 목적은 어떤 일을 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섬기는데 있다"고 했다.

주일을 시간적으로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느헤미야 공동체 행동 강령 두 번째는 이웃을 돕는 삶으로, 땅의 안식, 칠년마다 안식하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희년'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가 되는 것을 뜻한다"며 "구속(redemption)은 '되 무른다, 다시 찾는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던 우리를 마귀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7년에 한 번씩 쉬는 안식년이나 50년째의 희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나도 이웃에게 베푸는 시간을 의미한다"며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시간 속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도 마찬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린 만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안식일과 안식년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삶

영혼의 안식,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은 상황 가운데 느헤미야 10장 31절에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모든 허물의 빚을 탕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별히 "학생들을 격려하기 원한다. 청소년들이 하는 공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들이 때로 어른들의 압력과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의미 없이 느껴져도 하나님이 현지 나에게 직분과 시간을 맡겨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해 스쳐 지나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거룩한 주일처럼 거룩한 매일을 위하여!


안식일 준수 명령

1. 안식일을 지키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계시 가운데 마지막으로 안식일에 관한 명령을 부연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 명령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창세기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나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출애굽기 16:23부터 입니다.
안식일 규례는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내용이 되었는데, 이것은 안식일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언약의 증표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안식일을 언약으로 지켜야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율례를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문제였습니다.

a. 안식일 준수 명령(이사야  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b. 안식일의 목적(신명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2. 엿새와 제칠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시면서 그날 일하는 자는 생명이 끊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엿새 동안의 수고를 통해서 제칠일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십계명에 언급한 바대로 6일 간의 창조 사역 후의 하나님의 휴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사역, 즉 하나님은 온 인류와 만유의 창조주시라는 사실과 그들은 단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엿새 동안 수고한 그들에게 육체적 휴식을 주시려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표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에게 구별된 백성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 됩니다.

a. 엿새의 사역(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이니라.

b. 칠일에 쉼(히브리서 4: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2절. 훌. '존귀한, 고위함'이란 뜻의 이름.
유다 지파 갈렙의 후손으로 아말렉 전투 시 모세의 팔을 들어 올린 자.

브사렐.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는자'란 뜻의 이름. 성전 장식들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다른 기능인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6절. 오홀리압. 원어로 '아버지가 내 장막이다'라는 뜻.
성막 건축의 사명을 지녔다. 세워. 문자적 의미는 '그에게 주어서'로 브사렐을 돕는 자로서 오홀리압이 세워졌음을 가리킨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 잘 숙련된 기술공을 의미한다. 특별한 기술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13절. 나의 안식일.
이스라엘 장인들에 대한 안식일의 엄수 명령은 하나님 스스로가 안식일의 제정자이심을 나타낸다.
표징. '표시, 증거'란 뜻의 <twOa:오트>는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를 지칭.

14절. 더럽히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
원어 <ll'j;:할랄>은 '어기다, 모독하다'라는 뜻. 죽일지며. 문자적으로 정확한 뜻은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형은 이스라엘의 위기 의식에 따른 안식일 준수의 철저한 시행을 나타낸다. 생명이 끊쳐지리라. 이는 육체적인 죽음 뿐 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15절. 큰 안식일.
문자적으로 '안식의 안식 일'을 뜻하는 <@/tB;v' tB'v':솨바트 솨바톤>은 철저히 쉬어야 함을 의미한다.

17절. 창조하고. '일하다'라는 뜻의 <hc;[;:아사>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일' 그 자체를 의미. 제칠일에 쉬어. 하나님 자신의 안식은 인간은 안식일 준수의 근거가 된다.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표현으로, 창조 사역 후 휴식하시면서 창조물을 보고 흡족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원어<vp'n::나파쉬>는 '숨을 쉬었다'는 문자적 의미.

18절. 증거판 둘.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 귄능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말씀은 성막 설계에 관한 말씀이 끝나고 그 설계대로 일을 진행할 사역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 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 20:8~11절에서 안식일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한, 23:10~13절에서도 안식일과 안식년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만나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간접적으로 안식일 준수를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안식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막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안식일은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가 표면적으로 드러납니다.

브살렐(1~5절)

항상 새로운 말씀이 시작될 때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출처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규례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사람을 지명하십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그럽니다. '훌'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들어 올려 이스라엘이 승리케 하는데 기여한 사람입니다(17:10). 그리고 그는 모세가 시내 산에 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아론과 함께 백성들을 다스렸던 사람이기도 합니다(24:14). '우리'는 3인의 동명이인(왕상 4:19; 슥 10:24)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성막 건축자 브살렐의 부친입니다. '브살렐'은 성막 건축을 지휘 감독한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브살렐을 소개하면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브살렐이 하는 일이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까지 브살렐의 이름이 여러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히 출 37:1절에는 법궤를 만든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브살렐의 족보는 브살렐에 관한 말씀이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명하다'(nominate)란 말은 여럿 가운데서 가려 뽑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지명받는 자의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이보다도 그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이 더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즉 누구를 택하여 쓰시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콕 찝어서 지명하여 부르시고 성막 건축의 거룩한 사역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봉사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은 곧 성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2. 6절). 그다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에 매임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혜와 총명과 여러 가지 재주는 하나님의 은사이면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 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선물인 갖가지 재능들을 사모하는 마음과 아울러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쉬운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설계를 잘하고 또 금과 은과 놋으로 그 설계대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그에게 주리니”

그러니까 브살렐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브살렐 자신의 개인적인 인격과 능력을 무시하고 단지 그를 기계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브살렐의 개인적 인격과 능력을 존중하셔서 그의 능력이 극대화되도록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제사장직뿐만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직업의 귀천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이 부르심은 브살렐이 가진 재능과 모든 것을 고려하신 부르심입니다. 성막의 모든 기물들을 만드는 공교한 일꾼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렇게 부르신 후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즉 감당할 힘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그의 재능은 꽃피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의 모든 물건들 증거궤 속죄소, 회막의 모든 지구, 떡상, 등잔대,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 제사장 의복을 하나님의 설계대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성막을 만드는 사람도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 삶의 자리는 모두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오홀리압(6절)

6절에서는 브살렐을 돕는 동역자로 오홀리압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단'은 야곱과 그의 아내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 사이에서 태어난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습니다(창 30:1~6). 그리고 단의 후손들은 '길의 뱀'과 같이 교활하며, '첩경의 독사'같이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창 49:17). 또한, 이들은 '사자의 새끼'(신 33:22)로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성격은 전투적이요 공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파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흘리압을 부르셔서 성막 건축에 쓰일 휘장을 비롯한 각종 직물 제작을 담당케 하신 것은(38:23),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인간과는 달리 오직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를 택하시지 않고(고전 1:26) 당신의 사역에 꼭 필요한 자들을 적재적소에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세워라는 말은 본래 '주다'(give)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그에게'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이토'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두 단어를 직역하면 '그에게 주어서'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브살렐에게 오흘리압을 조력자로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그와 함께 일하게 하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라고 할 때 지혜로운에 해당하는 '하캄'은 '숙련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란 '특별한 재능이 있는 모든 자' 혹은 '숙련된 기술이 있는 모든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막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지혜로운 사람들, 재능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감당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의 일를 아론은 아론의 일을 그리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각양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각자 삶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12~17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안식일에 관해서는 만나를 주시면서(16:21~30) 또 십계명(20:8~11)에서 이미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언급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단 저는 안식일 준수가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침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예배도 등한히 되게 되고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 준수는 탐욕을 그치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성막 제작이라는 막중한 사역을 진행한다고 할지라도 안식일 만큼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안식일 계명을 어기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날을 도적질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일은 동시에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데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막 3:27).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하여 인간에게 육체의 노동으로부터 귀중한 휴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휴식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나그네 등 인간뿐 아니라 소나 나귀 등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휴식의 적용 범위가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에 공히 적용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그럽니다. 여기서 표징은 '오트'라는 말입니다. '신호'(sign)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몇 가지 표징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무지개와 할례와 안식일이 있습니다. 이 세 표징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① 무지개는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구원에 대한 표징입니다(창 9:13). ② 할례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임을 나타내는 언약의 표징입니다(창 17:10, 11). 그러나 이 언약의 표징은 예수의 오심으로 폐하여 졌으며,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중요시 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롬 2:28, 29). 그리고 마지막 안식일은 거룩함과 복 주심의 표징입니다. 창 2:2, 3절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2:23; 3:7, 9) 이들을 이끌어 내어(신 4:20)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이유는(3:8; 15:17)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명하여 부르신' 선민(選民)이요(사 43:1), 성민(堅民)으로 불린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신 4:39, 40)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만나를 통한 40년의 훈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안식일 준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중요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14절에서 안식일 계명이 강화되는 과정을 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그럽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은 더럽힌다는 말입니다. '더럽히다'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상처를 입히다'. '욕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약속을 어기다'(break promise)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RSV는 이 단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신성을 더럽히는'(profane)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란 곧 세속적인 생활과 관련된 일체의 일들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신성을 더럽히는 자를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고 더럽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이 말은 같은 의미 동사를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한 강조형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직역하면 '반드시 죽여라'가 됩니다. 이러한 안식일을 어긴 자의 처벌 규정은 안식일을 더럽힌 죄가 우상 숭배의 죄만큼 중죄(重罪)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죽이라는 말씀은 신 8:19. 20; 17:2~5절에서 반복됩니다. 더 나아가 생명이 끊쳐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육체적인 생명의 끊어짐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단절,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강력한 표징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원리를 강조하십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지만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께 거룩한 날, 즉 구별된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안식일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안식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솨바트 솨바톤'은 '안식의 안식일'(the stabbath of rest, KJV)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다시 창조 안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너희도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쉴줄 알아야 합니다.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그만큼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언약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신약에서도 이 정신은 주일로 계승되어 계속해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17절에 ‘왜냐하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기 때문에 인간들도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엿새 동안의 창조에 대한 기념의 성격과, ⓶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의 성격이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주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대한 감사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안식일의 참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쉬었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쉬었다는 말 히브리어 '나파쉬'는 원래 '숨', '호흡'이라는 말입니다. 동사형으로 '숨을 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재충전의 의미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RSV는 이를 '기운을 회복하셨다'(refreshed)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처럼 쉼을 필요로 하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 제동을 걸어줄 안전장치가 안식일 준수이며 그치고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새로운 충전을 통해 건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온전히 그치고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안식일에 담아놓은 귀하고 소중한 진리입니다.

십계명 두 돌판을 주심

마지막 18절은 십계명이 기록된(20:3~7절) 두 개의 들판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장면입니다. 즉 하나님은 약속대로(24:12) 이미 선포하신 계명(신 5:1~21)을 두 개의 돌판에 친히 써서 모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 중심의 시대가 그 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증거판 위에 기록된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자 본질로서. 단순한 율법의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율법이지만,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십계명의 돌판을 주신다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가 임박했음을 말해줍니다. 즉 40일이 지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는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애굽의 음란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묵상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감당해야 하는 성막의 모든 것들을 만드는 일도 소중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과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표징이라고 도전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할 일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1일 / 03- 20-2024(수)
출애굽기 31:1-18
브살렐(유다 지파)과 오홀리압(단지파)(1, 6절)
찬송 / 383장(환난과 핍박 중에도)


내가 유다 지파 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See, I have chosen Bezalel son of Uri, the son of Hur, of the tribe of Judah,

내가 또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Moreover, I have appointed Oholiab son of Ahisamach, of the tribe of Dan, to help him. Also I have given skill to all the craftsmen to make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뜻 : 아비의 장막
오홀리압(Oholiab)



가장 큰 은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새 6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가슴에 새겨진 아픈 기억으로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동족끼리 벌인 전쟁, 그리고 계속되고 있는 분단 상황이 빚어낸 아픔과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6월 10일은 민주화 항쟁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날입니다. 온 국민의 힘으로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꾼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내내 제 마음이 머문 곳은 시리아의 북부 도시 훌라(Houla)입니다. 지난 25일에 벌어진 학살극으로 인해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격이 아니라 의도적인 살해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이슬람 시아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의 폭력단체인 ‘샤비하Shabiha’에 속한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유령’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샤비하는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 여린 생명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것입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의 보복이 예고되고 있기에 그 땅에서는 더 큰 학살의 악순환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무저갱이 열린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그 잔학한 시대에 대한 증언자로 살았던 프리모 레비의 말대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지식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사람다운 삶에 대한 의식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휩쓸고 있는 탐욕과 광기에 맞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정신에 맞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상의 권세자들은 우리 속에 끊임없는 불만족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속에서 사고하는 이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세상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일찍이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엡6:12)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의 전략이 뭔지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에게서 공동체를 빼앗아갑니다. 함께 나누고 돌보고 섬기는 이들은 악한 영의 주술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기꺼이 누군가를 돌보려고 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든든함이 찾아듭니다.

• 교회의 근본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이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 제2이사야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소식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사40:9c)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사52:7c).

아름다운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바벨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제 아무리 막강하게 보여도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일견 든든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십니까? 오늘의 교회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바벨론에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결국 하나님의 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만 저는 오승윤 화백의 전시회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오방색(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을 뜻하는 청백적흑황색)을 가장 잘 활용한 화가로 알려진 그는 한국 인상주의 회화의 대가인 오지호 화백의 아들입니다.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은 모두 ‘산 그림’이었는데, 화가가 100개의 산에 오르며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제가 좀 놀란 것이 있습니다. 초기의 그림은 봄․여름․가을․겨울에 따라 변화하는 산 빛과 형태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화가는 산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골격을 그렸습니다. 어쩌면 그는 계절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핵심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그림에 빗대 말하자면 교회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월이 가도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붙들고 있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교회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살려는 결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려는 열린 태도야말로 교회가 한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교회는 중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 하나에 모이되 바로 거기가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 있다(11장)고 했습니다. 서른 개가 하나의 중심에 모인다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이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각각 자기로 가득 차 있다면 교회라는 수레는 구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름 아닌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빈 데 없이 내 이익, 내 견해, 내 계획으로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고, 이웃과의 평화도 불가능한 법입니다.

• 성막 짓기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저는 출애굽 공동체가 함께 지었던 성막이야말로 아름다운 교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압제의 땅인 애굽에서 이끌어내셨고, 시내산에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당신의 법을 일방적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백성의 정체성은 핏줄이나 지역에 뿌리를 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가야 할 미래의 비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비전은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지향해야 할 비전이 없다면 삶은 무기력하거나 권태로울 것입니다. 문제는 비전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 아주 조금 진보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기득권을 조금도 내놓지 않습니다. 비전은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퇴색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자꾸만 새롭게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비전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지속적으로 만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억압과 착취와 비인간화의 땅인 애굽을 떠나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백성임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성막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헌납했습니다.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창조적인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봉헌한 헌물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그만 가져오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자기 것을 내주면서도 기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자유인의 긍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건만 봉헌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시간과 재능까지도 바쳤습니다.

몇 해 전 여수에 신앙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교회를 둘러보며 참 놀랐습니다.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그 교회를 짓는데 온 교인들이 몸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나면 아내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교회에 와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한 남성 교우들이 찾아와 늦도록 함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이런 교회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 땀 흘림의 과정을 통해 교인들은 하나가 되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기술, 하나님의 선물
성막을 짓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그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주 솜씨 좋은 장인匠人들입니다. 어쩌면 출애굽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 기자는 그들의 그 숙련된 솜씨를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셨습니다.”(31) 그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 생각을 작품으로 만드는 일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오홀리압에게도 동일한 은사를 주셨는데, 특히 그에게는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막과 기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전수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적인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그들은 이전의 노동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기쁨과 감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재능이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아레테aretē입니다. 주로 인간의 탁월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따라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적용됩니다. 건강의 아레테, 아름다움의 아레테, 운동 능력의 아레테, 기술의 아레테를 성취하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기술 혹은 예술을 뜻하는 테크네technē라는 단어도 매우 중요한 데, 이 단어는 신의 활동에 대비되는 인간의 활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테크네를 가진 사람은 인간적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는 빼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아레테 혹은 테크네가 인간의 탁월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입장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서 유래한 탁월함이라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우월감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쓰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2:7). 그는 은사를 자랑하는 성도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전10:24)라고 단호하게 요구합니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재능 기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교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우리 신앙공동체는 물론이고 사회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브살렐 오홀리압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오늘 우리가 다소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누고 섬기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돈’의 지배력은 약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중독되었던 이들이 깨어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기쁘게 헌신하는 이들이 나오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 때 삶의 외로움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자기를 바치며 살 때 외로움과 두려움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아름다운 사귐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 일상의 모든 순간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기쁘게 수행하십시오. 세상 도처에서 평화의 일꾼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땀 흘려 씨를 뿌리고,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더디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성령에 충만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출 31:1-11)

르호봇
9~11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출애굽기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성령에 충만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시고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짓는 일꾼의 지도자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성막을 짓게 됩니다.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통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 봉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광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시내 산에 오르게 됩니다.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십계명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이 죄인들을 만나서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성막의 식양을 받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율법만 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죄지은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용서가 없지만 복음은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짓는데 중요한 인물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오늘 그 사람이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성막을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성막을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완전한 성전을 지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죄인들은 한 명도 죄 사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서 성막을 짓게 되고 이 사람들을 통해 성막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첫째, 유다지파 출신의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2절 레에 카라티 베솀 베찰엘 벤 우리 벤 후르 레마테 예후다

출 31: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메시아가 유다지파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라’라는 단어는 (라아 7200 VQMMYS 동사 칼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보다, 감찰하다, 결정하다, 즐겁다, 준비하다, 라는 뜻입니다. 번역본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지파의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면서 먼저 보라고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감찰하여 보았고 이 사람을 보면 기쁘고 즐거우며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한 사람으로 성막을 지을 수 있는 자로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결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주목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막을 지을 자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브살렐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선택한 이유를 주목하여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우리 221) 우리,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ור(오르 215) 빛나다, 영화롭다, 광채 나다, 불사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브살렐은 우리의 아들입니다. 우리의 아들로서 선택받은 브살렐은 성막을 지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이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아버지의 뜻을 이룰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브살렐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흑암을 빛으로 물러가게 하는 자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브살렐이 유다지파의 우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브살렐의 이름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해 보겠습니다.

‘브살렐’이라는 단어는 (베찰엘 1212) 브살렐,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ל(엘 410) 하나님, 이라는 뜻과 צל(첼 6738) 보호자, 그늘,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가 צלל(찰랄 6751) 그늘지다, 어두워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가 브살렐의 이름을 종합하여 보면 ‘하나님의 보호자’라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어둠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빛을 전파하여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사람이 성막을 짓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되어 부름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이 어둠에 있을 때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4절 엔 아우토 조에 엔 카이 헤 조에 엔 토 포스 톤 안드로폰 

5절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카이 헤 스코티아 아우토 우 카텔라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임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어둠에 있었고 죽음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살렐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빛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육신은 유다 지파의 뿌리를 통하여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의 혈통을 통하여 오신 육신을 부인한다면 이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감정이 있었습니다. 아프면 아파하셨고 괴로우면 괴로움을 표출하셨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을 브살렐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3절 바아말레 오토 루아흐 엘로힘 베호크마 우비트부나 우베다아트 우베콜 멜라카

출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주셨습니다.

‘충만하게’라는 단어는 (말레 4390 CW.VPICXS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가득하게 하다, 충만하다, 헌신하다, 만족하게 하다, 거룩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있습니다. 이 충만은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브살렐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니 성막을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을 브살렐이 사니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고 만족스럽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에 즉시로 성령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성령님이 브살렐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 충만은 받기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임하게 된 충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절대 받을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브살렐이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성령님의 충만함이 임할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막을 짓는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브살렐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 카이 유데오스 아나바이논 아포 투 휘다토스 에이덴 스키조메누스 투스 우라누스 카이 토 프뉴마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타바이논 에프 아우톤

11절 카이 포네 에게네토 에크 톤 우라논 쉬 에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막 1:10-11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생애의 기간은 끝나고 공생애의 기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브살렐도 자신의 사생애 기간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지명을 받아 성막을 짓게 되고 하나님의 성령의 영이 임하게 됨으로 공생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은 사생애에서 공생애로 들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 지파의 요셉의 아들로 살다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것은 브살렐은 성막의 기초를 놓는 작업을 했던 인물입니다.

4절 라헤쇼브 마하솨보트 라아쇼트 바자하브 우바케세프 우바네호쎄트

5절 우바하로쎄트 에벤 레말로트 우바하로쎄트 에츠 라아쇼트 베콜 멜라카

출 31:4-5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라

브살렐은 성막을 짓는 전반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였고 보석을 깎았으며 나무를 새기는 기술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금과 은과 놋은 성막의 기본 재료들입니다. 이것을 다루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금과 은과 놋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인성으로 구원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 호스테 아델포이 무 카이 휘메이스 에다나토데테 토 노모 디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에이스 토 게네스다이 휘마스 헤테로 토 에크 네크론 에게르덴티 히나 카르포포레소멘 토 데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른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에서 살아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몸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기초한 자가 바로 브살렐입니다.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선택받은 죄인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셋째, 단 지파 오홀리압을 선택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6절 바아니 힌네 나타티 이토 에트 오홀리아브 벤 아히사마크 레마테 단 우베레브 콜 하캄 레브 나타티 호크마 베아슈 에트 콜 아쎄르 치비티카

출 31:6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하나님께서는 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웠는지를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홀리압을 세운 것은 브살렐을 도와주라고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을 수 있도록 협력자로 세운 것입니다.

‘단’이라는 단어는 (단 1835) 단,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דין(딘 1777) 심판하다, 억울함을 풀다, 심판을 내리다, 공정하게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 단 지파는 심판하는 지파였습니다. 이 지파에서 오홀리압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을 풀어주고 공정하게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데리러 오시고 심판받을 자들은 공정하게 심문하여 재판하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오홀리압의 이름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달아 보겠습니다.

‘오홀리압’이라는 단어는 (오홀리아브 171) 오홀리압,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ב(아브 1) 아버지, 라는 뜻과 אהל(오헬 168) 장막, 성막, 성전,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는 אהל(아할 166) 장막을 세우다, 밝다, 빛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홀리압은 ‘아버지의 장막’이라는 의미를 가진 인물입니다. 무너진 아버지의 장막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장막에서 밝게 빛이 비추어져 구원받은 백성들이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우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0일 / 03- 19-2024(화)
출애굽기 30:1-38
분향단(1절)
찬송 / 467장(내게로 와서 쉬어라)

분향단,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의 제단,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1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2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3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를지며
4금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쪽에 만들지니 이는 제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5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6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8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9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10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분향단(焚香壇, the altar of incense)은 향을 사르는 제단으로 지성소로 향하는 휘장 앞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길이와 넓이가 각각 1규빗(약 50cm)이며 높이는 2규빗(100cm)의 크기로 싯딤나무로 만들었고 금을 입혔습니다.
번제단처럼 네 귀퉁이에 뿔을 만들었고 운반을 위해 금고리와 멜 수 있도록 채를 만들어 모두 금을 입혔습니다.
향단에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제조된 거룩한 향들만 피울 수 있었고 이른 아침과 저녁때 등잔대의 불을 정리할 때 향을 살랐습니다.
명칭이 ‘분향하는 제단’이라고는 하나 번제나 소제, 전제 등 제사는 드리지 못하며 오직 향만 사르도록 규정되었습니다.

1.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고 해석하여야 합니다.
상징적이나 영적인 부분들을 해석하는 원칙도 마찬가집니다.
앞선 글에도 언급했듯이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에는 성막이나 성전의 각종 기구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그 기구들이 가진 영적 의미들을 더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구약에 있었던 그림자와 요한이 본 환상들의 전체적인 부분들을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지만 최소한 ‘향’이 의미하는 바가 ‘기도’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향을 태울 때 발생하는 향연(香煙)은 우리의 기도가 이 향연처럼 위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분향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분향단의 위치를 규정하실 때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이라고 지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금등대에 대해서는 ‘떡상의 맞은 편’이라고 하셨듯이 분향단을 ‘속죄소 맞은 편’이라고 하신 것은 분향단이 속죄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번제단처럼 분향단에도 사방으로 네 뿔을 만들었는데 여기는 일 년에 한번 속죄제의 피로 속죄합니다.
아마도 이날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大贖罪日, Yom Kippur, 7월 10일)일 것입니다.
레위기 16:13에는 그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분향단에 있는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정리하자면 분향단은 언약궤의 속죄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이라는 것도 이 향단의 위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복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이며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헌신이기도 합니다. 기도처럼 하나님께 실제적으로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은 없습니다.

분향에 사용되는 향에 대한 규정

출애굽기 37:29에서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향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조법을 따라 만들어야 했으며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관련 명령은 이것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동일한 제조법으로 자신을 위해서나 사람을 위해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4-38)

1) 향의 원료

향의 원료는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 등 네 가지입니다.

먼저 소합향(蘇合香, stacte)은 ‘스며 나오다, 방울되어 떨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나타프(נָטָף)’에서 나온 말인데 단풍나무와 비슷한 소합향나무가 햇빛을 받으면 송진처럼 진액이 흘러나와 방울처럼 맺하는데 그것을 채취한 것이 소합향입니다.

대부분의 향 재료가 식물에서 얻어지는데 특별히 나감향(onycha)은 홍해나 지중해에서 서식하는 향조개(aromatic shell)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를 내어 만든 향입니다. 이 가루는 특히 불로 태울 때 진한 향을 발합니다.

풍자향(galbanum)은 인도나 페르시아 등지에서 자라는 페룰라 갈바니플루아(Ferula galbaniflua)라는 다년생 식물에서 추출한 진액으로 만들어졌는데 향이 자극적라서 불쾌하기도 하나 다른 향과 배합되면 향기를 오래 지속시켜 준다는 특성이 있고 해충을 막고 방부제 역할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향료를 유향(乳香, frankincense)에 섞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서식하는 유향나무에 상처를 입혀서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이 나지만 대단히 상쾌한 꽃향기를 발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재료들은 진정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잘 말해 줍니다.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진액이 스며 나와 방울이 맺히는 소합향처럼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 아래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개의 껍질을 잘게 부수듯 우리의 육신의 자아가 깨어지고 그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향연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단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삶의 필요만을 구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지극히 자아적인 것입니다. 나의 자아와 육체의 욕망은 죽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구하는 것이 바로 껍질의 부서짐입니다.

풍자향은 칼로 베임을 당한 곳에서 나오는 진액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더욱 향기를 발하는 향료가 되게 합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시 50:15). 고난 속에 부르짖는 기도는 방부제처럼 우리 영혼을 타락의 죄악에서 지켜 줍니다. 고난은 쓰지만 향의 효과는 큽니다. 이 세 가지 향 재료는 유향과 섞여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향기 나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교제의 삶은 하나님 앞과 세상 속에서 향기를 발합니다.

향 제조에 첨가되는 또 하나의 재료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언약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2:13에서는 소제를 드릴 때 ‘언약의 소금’을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18:19에서 레위인에게와 역대하 13:5에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소금언약’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2) 금지사항과 의미

향과 관련된 금지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향단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만든 향 외에 다른 향을 절대 사르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앞서도 보았듯이 이러한 제조과정으로 만들어진 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향재료들은 인반적인 것들이라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임의로 삶에 필요한 향품을 만들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겠으나 다만 거룩한 향을 만드는 동일한 방식으로 제조하여 사람이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거룩한 것’이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향 재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제조의 방식이 거룩한 것입니다. 상징이나 그림자란 영적이거나 앞으로 다가올 어떤 실체를 보여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해야만 합니다. 분향단의 향은 성도들의 기도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령하신 방식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일한 제조법으로 사람을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이 만든 우상도 역시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이 분향과 기도가 드려져야 합니다.

3. 분향단은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자를 고치시거나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과 함께 가장 많이 하신 일은 기도였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지존자이고 전능자이며 주권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존재는 기도하는 분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입장으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범이 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삶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가를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가 사역을 하지 않는 시간은 거의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기도는 구원받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육신을 입으셨을 때부터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으로 중보하시는 시점까지, 그리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중보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사도들을 세울 때 밤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요한복음 17장 전체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으심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능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마치 진액이 나무에서 방울처럼 스며 나오는 소합향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나감향처럼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풍자향처럼 채찍맞고 가시관 쓰이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생명을 내어놓으신 그의 기도는 향기로운 향연이 되어 보좌로 올라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중보자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예수님은 부활 후 살려주시는 영(성령)으로, 다른 형태의 보혜사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4. 분향단의 뿔

앞서 번제단에 대해 나눌 때 네 뿔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구원의 뿔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분향단에 있는 네 뿔도 역시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능을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게 하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막 9:29).

분향단은 속죄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중보는 구원과 절대적으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중보의 힘으로 연약함 가운데서 우리가 굳게 설 수 있고 또 성도들이 하는 진정한 기도는 믿음 안에 든든히 서 있게 하고 죄악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분향단의 불에 대한 중요한 명령

레위기 10장에는 대단히 당황스러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

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불이란 무엇일까요? 레위기 1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이는 대속죄일에 대한 규정으로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언급되지만 이미 성막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모세가 세부적인 사항들을 자세히 가르쳤던 내용일 것입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레 16:12)

분향단에 사용되는 불은 번제단에서 가져오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향을 사른 것으로 보입니다.

성막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있어서도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사용했습니다.

민수기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매우 진노하셔서 반역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심판하시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민 16:41).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온 백성에게까지 진노하셔서 전염병으로 그들을 치십니다, 이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에서 불을 담아 향을 피우고 회중들에게 가서 속죄하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민 16:46)

아론이 모세의 말대로 하자 염병이 그칩니다.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반드시 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야 합니다. 속죄 사역과 기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영적 실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번제단은 우리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속죄 사역을 이루신 복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간구의 바탕에는 복음의 진리와 영혼 구원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다른 복음이고 다른 불입니다. 그 복음이의 진리가 바탕되지 않는 기도의 제단은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움이 되는 복음 진리를 바탕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모든 중보의 사역은 복음과 영혼 구원이 중심이 되고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안위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 바탕에는 복음과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소위 성령 사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원칙을 망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역의 성격상 특히 기도하는 일에 많은 비중을 두지만 그 기도와 사역이 복음이나 영혼 구원과는 거리가 먼 ‘능력의 나타남’ 자체를 추구하거나 ‘성공과 축복과 번영’이라는 기복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이 아닌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와 추구하는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에서 가져온 것이라야 합니다.

분향단은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도 생활의 모범입니다.

6. 분향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출 30:7-8)

번제단에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떡상에 떡이 항상 진설되어야 하고 등잔대에 불이 항상 켜 있어야 하며 분향단에도 아침 저녁으로 끊이지 않고 향을 살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다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9일 / 03- 18-2024(월)
출애굽기 29:1-46
제사장 직분(1절)
찬송 / 341장(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제사장의 성별식

1. 물로 씻고 제사장 옷을 입음

준비물 / 젊은 수소 1, 수양 2, 무교병, 과자, 무교 전병
과정 / 물로 씻김, 제사장 의복, 머리에 기름 부음

하나님은 모세에게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 무교병과 과자와 무교 전병을 가져오고 성막 뜰로 들어와 거기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먼저 물로 씻겨야 했고 대제사장의 옷을 아론에게 입혀야 하는 것입니다.
아론은 그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특별한 임무를 받으면서 기름부음 받는 직분은 제사장 이외에 선지자, 왕을 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론의 아들들은 기름부음을 받진 않았지만 속옷과 때를 포함하는 제사장의 복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a. 무교병(레 2:4)
b. 물로 씻음(히 10:22)

2. 속죄제

아론은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직분을 맡은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죄에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때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것은 동일시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들 대신해서 죽은 짐승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인 됨과 피로 씻음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매년 대속죄일을 통해서 제사장들은 씻음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표하는 자들의 허물을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셨습니다.
피의 일부는 번제단 뿔에 발랐고, 나머지는 단 밑에 쏟았습니다.

a. 안수(레 8:14)
b. 속죄제(출 30:10)

3. 번제와 화제

숫양 둘 중 하나로 드리는 두 번째 제사는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자와 제사장들이 먹는 제사와는 달리 번제는 제단 위에서 전부를 태워야 했습니다.
번제는 또한 제사장으로 위임받는 사람이 자기 전체를 다 드려 그 직무에 임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숫양으로는 세 번째 희생을 드려야 합니다.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정결하고 성별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귀뿌리의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의 성별을 상징하며, 엄지 손가락의 피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의 거룩성을 묘사하고 엄지 발가락의 피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숫양의 피는 단 주위에 그리고 관유와 함께 제사장들과 그들의 옷에 뿌려야 했습니다.

a. 숫양(창 22:13)
b. 번제(민 29:13)

4. 요제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의 범주에 속했으며, 위임제에 맞게 조금 수정되었습니다.
화목제의 본질은 제물의 일부를 경배자가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되고 따라서 하나님께 가납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제사의 일부는 '요제'로서 그 제물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강조하는 의식 행위였습니다.
요제를 드린 다음에는 대개 하나님의 대표자들인 제사장들이 그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린 첫번째 제물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숫양의 가슴은 요제로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먹어야 할 몫입니다.
누군가가 화목제를 드릴 때 그 짐승의 가슴과 넓적다리는 항상 제사장들의 몫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칠 일 동안의 성별식에서 아론의 대제사장의 성의는 그를 계승한 아들에게 주어지고 다음 세대까지 계속 전달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회막 문에서 먹어야 할 위임식 숫양의 먹는 부분에 대해서 지시하고 이 경우 숫양과 떡은 매우 거룩한 성질의 식사로서 남은 것은 모두 태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은 칠 일 동안 행하며 매일 속죄제로 수송아지 하나를 드렸습니다.
칠 일 동안 단은 거룩한 섬김을 위해 제사를 통하여 속죄되고 성별되어야 했습니다.

a. 위임식(레 8:28)
b. 요제(민 5:25)

매일 드려야 하는 번제

1.  소제와 전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소제(밀가루와 기름)와 전제(포도주)와 함께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매일의 제물에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식사의 요소들, 즉 고기와 밀가루와 기름과 포도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매일의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였습니다.

a. 어린 양(겔 46:13)
b. 소제(레 2:7)

2. 매일 번제의 중요성

이 마지막 구절은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의 번제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거기서 만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죄를 위해 흘린 피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두 차례의 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은 자신의 궁핍과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a. 속죄의 피(히 9:22)
b. 하나님과의 교제(시 16:8)

결론 /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기름부으셔서 성막에서의 섬기는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제사장들은 성별 예배를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성별되어 여호와를 섬길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며 그들은 그분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8일 / 03- 16-2024(토)
출애굽기 28:1-43
거룩한 옷(2절)
찬송 / 92장(어둠의 권세)




제단 뿔

레위기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4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열왕기상 1:50-51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시편 118: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찌어다.



What Does Brass Represent in the Bible?


Introduction

Brass is mentioned numerous times throughout the Bible, both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But what exactly does this metal represent symbolically and spiritually?
In this comprehensive blog post, we will explore the significance and meaning of brass in the Scriptures.

Key Takeaways:

  • Brass is associated with strength, durability, and judgment in the Bible
    성경에서 황동은 힘, 내구성, 심판(판단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It was commonly used for altars, lavers, pillars, and musical instruments in the Tabernacle and Temple
  • Brass often represented the judgment of God against sin
  • The brazen serpent foreshadowed Christ’s crucifixion
  • Brass also symbolized the feet of Jesus and his triumph over evil
What does brass represent in the bible

Table of Contents

Properties of Brass in the Ancient World

In ancient times, brass was an alloy of copper and zinc that was known for its strength and brightness. The Hebrew word translated as “brass” or “bronze” is nechosheth, which comes from a root word meaning “to glisten” or “shining.” This reflects how brass would gleam in the sun’s rays.

Brass was harder and more durable than pure copper. It maintained a sharp edge and was resistant to corrosion. For these reasons, brass was used to make weapons, armor, coins, mirrors, hinges, and works of art in biblical times.

The Thera Sea in Solomon’s Temple measured 10 cubits across and 30 cubits around, with a depth of 5 cubits. It rested on 12 oxen made of brass (1 Kings 7:23-26 NKJV). This huge laver could hold thousands of gallons of water for the priests to wash themselves. The brass gave it strength to remain intact.

The Bible first mentions brass when Cain’s descendant Tubal-Cain became “an instructor of every craftsman in brass and iron” (Genesis 4:22 NKJV). The Canaanites and Philistines were also skilled metal workers in brass and iron when the Israelites entered the Promised Land (Joshua 22:8, 1 Samuel 13:19-20 NKJV).

These pagan groups probably produced brass idols and false gods. But God intended for the Israelites to use brass to construct holy things for His Tabernacle and Temple.

Brass Representing Strength and Judgment

The symbolism of brass in Scripture seems connected to its characteristics of hardness, firmness, and brightness. Brass often represents strength, durability, and the judgment of God against sin.

When King Nebuchadnezzar saw a mysterious figure in the fiery furnace, its feet were like “burnished bronze” (Daniel 10:6 NKJV). Here, brass conveys supernatural strength and a divine nature.

Similarly, when the Apostle John saw the risen Christ in Revelation, his feet “were like fine brass, as if refined in a furnace” (Revelation 1:15 NKJV). The brightness and burnished nature of Christ’s feet depict his holy judgment against the wicked.

His feet of brass will trample all evil underfoot. As a strong metal, brass was appropriately used in scales, chains, and shackles to convey military conquest, imprisonment, and judgment (2 Kings 25:7, Psalm 149:8 NKJV).

The Bible says God judges sin with “justice like the great deep” and righteousness like “the strong mountains” (Psalm 36:6 NKJV). So it is fitting that when God commanded Moses to build the Tabernacle, he was to construct the altar of burnt offering from acacia wood overlaid with brass (Exodus 27:1-2 NKJV).

The acacia wood speaks of Jesus’ humanity, while the brass conveys the strength and fiery judgment of God against sin at the cross.

Brass Objects in the Tabernacle and Temple

In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and later the Temple, brass was heavily utilized for altars, lavers, pillars, and musical instruments. God provided Bezalel and Oholiab with the skills to craft beautiful objects from brass and other metals (Exodus 31:2-6 NKJV). Let’s survey some of the key furnishings made of brass.

The Brazen Altar – This outer altar of burnt offering was 7.5 feet square and 4.5 feet high, overlaid with brass. It was the first object encountered when entering the Tabernacle, pointing to Christ’s sacrifice (Exodus 38:1-2 NKJV).

The Brazen Laver – The priests washed their hands and feet at this brass basin before proceeding further, picturing purification from sin through Christ’s blood (Exodus 30:17-21 NKJV).

The Pillars of Brass – Two towering 27-foot brass pillars named Jachin and Boaz stood on the porch of Solomon’s Temple (1 Kings 7:15-22 NKJV). These majestic columns represented the strength of God.

Brass Musical Instruments – Many instruments like cymbals, harps, and trumpets were made of gleaming polished brass (1 Chronicles 15:19, Daniel 3:7 NKJV). They were used to praise God.

The Brazen Sea – This colossal brass basin held water for priestly cleansing in the Temple (1 Kings 7:23-26 NKJV). It foreshadowed the living water of Christ.

The Brass Serpent – When venomous serpents bit the Israelites, God told Moses to make a brass snake and lift it up on a pole. All who gazed upon it lived (Numbers 21:4-9 NKJV).

Brass objects in God’s Tabernacle and Temple symbolized His glory, strength, purity, and salvation. They ultimately pointed to Jesus Christ.

The Brazen Serpent as a Foreshadow of Christ

One of the most significant brass objects was the brazen serpent that God instructed Moses to lift up on a pole to deliver the people from snakebites (Numbers 21:4-9 NKJV). Anyone who looked to the brass serpent lived, even though serpents represent sin and judgment. Jesus told Nicodemus:

“And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wilderness, even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4-15 NKJV)

Here, Jesus indicated the brass serpent pointed to Himself being lifted up on the cross for our salvation. Just as those who looked to the brass snake were healed, so too, those who look to Christ on the cross are saved from the “venom” of sin and its judgment.

The serpent represented the sin Christ took upon Himself, while the brass depicted the judgment He bore in our place. What an amazing foreshadow!

The Bible says “Christ has redeemed us from the curse of the law, having become a curse for us (for it is written, ‘Cursed is everyone who hangs on a tree’)” (Galatians 3:13 NKJV).

The brass serpent hanging on a wooden pole was a vivid object lesson of Jesus taking our curse on the “tree” of Calvary to redeem us. The serpent and brass together beautifully illustrate God’s plan of salvation.

Jesus’ Feet of Burnished Brass

We previously saw how the risen Christ’s blazing feet of brass in Revelation point to His divine judgment (Revelation 1:15 NKJV). But this brass imagery also occurs in another prophetic vision.

The prophet Daniel saw a glorious man with “his legs like the gleam of burnished bronze” (Daniel 10:6 NKJV). Here, the brilliant bronze likely depicts Jesus’ triumph over all evil powers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Daniel’s vision occurred while the Jews were in Babylonian captivity due to the sins of their nation. But God showed Daniel the future victory of the Messiah, with feet and legs of judgment to tread down all His enemies.

The Apostle Paul possibly had this image in mind when he wrote of Christ’s triumph over demonic rulers and authorities at the cross, “having disarmed principalities and powers, He made a public spectacle of them, triumphing over them” (Colossians 2:15 NKJV).

So the gleaming bronze legs and feet seen by Daniel and John point to Christ victoriously crushing satanic foes underfoot by His sacrificial death and glorious resurrection. What amazing brass symbolism showing Jesus’ definitive defeat of evil!

Brass Pictures Spiritual Lessons for Believers

For the early Christians under Roman rule, the imagery of brass in the Bible provided encouragement and instruction.

Since the emperors ruled with an iron fist, casting Christians to lions in the brass-barred Colosseum, the believers found hope in Revelation’s vision of Jesus’ brass feet judging this cruel empire while standing on the golden sands of heaven (Revelation 1:15). His flaming feet assured them of Rome’s eventual collapse.

Paul told the Corinthian church that he and the apostles endured many dangers so that “the life of Jesus also may be manifested in our body” (2 Corinthians 4:8-11 NKJV).

Their physical afflictions refined and “polished” their character like burnished brass to reveal the resurrection life of Christ. Suffering allowed God’s strength and glory to shine through their weakness.

For modern believers, the durability of brass in the Tabernacle’s laver and altar can picture how standing firm on Christ enables us to persevere through trials.

Like Job who endured loss and pain, we “shall come forth as gold” and shine brighter for Jesus (Job 23:10 NKJV). The spiritual lessons mediated through brass point us to the risen Savior.

Conclusion

In summary, brass in Scripture clearly signifies Jesus’ strength to redeem us, judge evil, and defeat satanic powers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He is the fulfillment of the brass furnishings, altar, serpent, and symbolic feet.

May this metal remind us of the durability, purity, and triumph of our Lord. Let’s trust in His proven strength to uphold us by faith in all troubles and persecution until He returns. Our Savior with “feet like fine brass” can trample every foe. We will walk in victory with our God.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7일 / 03- 15-2024(금)
출애굽기 27:1-21
단을 만들라(1절)
찬송 / 361장(주의 주실 화평)

단(4196)

מִזְבֵּחַ 스트롱번호4196

1.

제단

2.

출30:27

3.

28

발음 [ mizbêach ]
어원
20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400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제단, 출30:27,28, 39:39, 레1:9,13,15,왕상7:48, 대하29:22.

번제(

עֹלָה 스트롱번호5930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ʽôlâh ]
구약 성경
9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제단 위에 드려진 것, 번제, 창22:3,6,레1:4
  • 2.
    명사, 여성 상승, 계단, 겔40:26




성막의 뜰에 들어서서 성막을 만나기 전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놋으로 만든 번제단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성막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가장 큰 성구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번제단으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희생제물을 가지고 나아갔고 매일 아침마다 바쳐진 희생제물은 이 번제단에서 태워져 그 연기는 하늘을 향하여 올랐고 하나님은 그 희생제물의 연기를 흠향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번제단이었습니다.

그러면 번제단의 재료는 무엇으로 되어졌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1절).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약 2미터 50센티미터의 정사각형 모양에다 높이는 1미터 50미터의 큰 박스와 같은 모양을 하도록 만들되 그 재료는 아카시아나무인 조각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겉은 놋으로 싸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놋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금은 영광은은 속전구속을 그렇다면 놋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주로 오시는 재림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계 1:15절입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발을 보니 단련한 빛난 주석 즉 놋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장막 안에 이스라엘백성들을 물어 독이 퍼진 백성들로 죽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백성들의 완악함을 회개하였고 이 불뱀으로부터 구원하여 달라고 울부짖어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의 모양처럼 구리뱀을 만들어서 높은 장대에 매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나와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는 순간 낫게 하셨습니다.
놋뱀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백성들은 놋뱀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낫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들이 거하는 천막에서 억지로라도 나와서 놋뱀을 바라본 자는 정말 말씀대로 죽어가던 데서 나음을 얻고 온전해 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구리 뱀은 무엇의 그림자입니까?
사단에 물려 영원히 죄 가운데서 사망을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 구리 뱀은 십자가에 사단의 저주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구리 뱀은 누구 대신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까?
죄인인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백성들을 대신 하여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놋은 바로 심판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심판에서 생명을 얻는 은혜를 받았듯이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저주와 심판을 동시에 받으심으로 이를 믿는 우리가 심판에서 생명으로 바뀌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놋의 시작은 창세기 4:22절에서 나타납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의 출발이 바로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16:21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무엇입니까? 삼손이 무엇에 묶였습니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줄에 묶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득죄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넘기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하25:7절입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삼상 17:5절에 “골리앗은 머리에 놋투구를 썼고 놋갑옷을 입었고 다리에는 놋각반을 쳤고 어깨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은 무엇으로 몸을 감쌌다는 것입니까? 저주와 심판으로 반면에 사울임금은 삼상17:38절에 다윗에게 무엇을 씌워줍니까?
놋 투구
그랬을 때 다윗은 놋 투구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려고 물매만 준비하고 나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심판과 저주의 상징인 놋으로 둘러싼 골리앗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을 의미합니다.
여기다 무엇을 입혔습니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으로 입혔습니다.
놋은 붉습니다.
저주와 심판을 당하시고 한없이 흘리신 보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제단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말할 것도 없다 예수께서 택하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갈보리 언덕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당하셨다.

하나님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무리 하나님의 독생자라 할지라도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백성의 죄를 짊어지셨다면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에서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그룹들인 천사들이 모셔 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왕을 뵈었음이로다.”

왜요? 하나님 계신 것은 너무나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천사들이 서로 노래하기를 이사야 6:3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그러니 어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대신 저주와 심판을 받게 하시고 우리로 의롭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깨끗게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조순하고 얌전한 생활입니까?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14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하나님은 여기서 만나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예수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6일 / 03- 14-2024(목)
출애굽기 26:1-37
성막을 만들라(1절)
찬송 / 65장(생명의 빛 주 예수여)

26장    
      1-6. 성막을 위한 앙장 열폭
    7-13. 성막을 덮는 막(염소 털)
       14. 성막을 덮는 막(수양 가죽, 해달 가죽)
 15-25. 조각목 널판, 은받침
  26-30. 조각목 띠
  31-33. 구별하기 위한 장
  34-35. 지성소의 기구의 위치
  36-37. 문장과 기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막을 만들라(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찌니.
"Make the tabernacle with ten curtains of finely twisted linen and blue, purple and scarlet yarn, with cherubim worked into them by a skilled craftsman.

성막(4908) 미쉬칸(mishkan) מִשְׁכָּן    

1. 거주  2. 욥 18:21. 3. 굴
발음 [ mishkan ]

어원 / 79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거주, 주택, 거처, 거주지.
 a. 명사, 남성 [사람] 욥18:21, 시87:2.
 b. 명사, 남성 [동물] 굴, 동굴, 욥39:6.
 c. 명사, 남성 [하나님] 성전, 시46:5(4), 84:2(1),132:5
2. 명사, 남성 천막, 장막, 성막, 성소, 아1:8.
 a. 명사, 남성 이스라엘의 성막, 출25:9, 26:1이하, 40:9이하.
 b. 명사, 남성 증거막, 출38:21, 민1:50,53, 10:11.
 c. 명사, 남성 성막의 휘장, 출39:32, 40:2,6,29.

출애굽기 25장은 성소를 만들되 그 안에서 사용하는 세 가지 기구 즉 궤(언약궤)와 떡상과 등대(메노라)에 대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성소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이제까지는 족장 중심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으나 성소를 세운 후부터는 민족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을 만나야 하므로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볼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6장에서는 성막을 만들라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중에 함께 계시며 그들을 만나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임을 증거해 주는 증거 장막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속죄와 정결함과 거룩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은총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막은 새 언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과 영원한 영광에 관한 청사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성막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요 5:39).
따라서 성막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또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고증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성막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더 확실하게 찾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완벽하게 다 찾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징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이 100% 성경적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현재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무려 3천 년 전의 구조물을 오로지 성경 기록과 문헌들만으로 추적해 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정확도에서 있어서 당연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해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놓으신 전체 내용의 10분의 1이라도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성막을 통해 얻는 은혜는 너무도 깊고 크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성막의 상징성에 대해 큰 틀에서 종합적인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성막의 공간들이나 재료들, 그리고 색상, 모양, 크기, 수량 등이 모두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중요한 영적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작 과정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성막은 만유 위에 계시는 창조자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어떻게 세상에 내려오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첫째로 정리한 소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시며 사역하시다가 최종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영광스런 보좌에 다시 오르셨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대표자인 대제사장이 되어 앞서 가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로 정리했습니다. 그다음은 그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우리가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갈 새롭고 산 길, 영생의 길’이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The Four Mysteries hidden in the Coverings of The Tabernacle)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1
- 첫번째 덮개로 만든 가늘게 꼰 베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1)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지니, 매 폭의 장은 이십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지며,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2)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각 폭의 장은 삼십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앙장을 연락할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합하여 한막이 되게 하고, 그 막 곧 앙장의 나머지 그 반폭은 성막 뒤에 드리우고, 막 곧 앙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편에 한 규빗, 저편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편에 덮어 드리우고, (3)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4)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 (출 26:1-14)

성막의 덮개들(The Coverings of the Tabernacle)

성막의 덮개를 살펴봅시다.
성막의 덮개는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세부적인 사항을 지시하셨습니다.

첫 번째 덮개는 성막의 보드판과 안쪽에 있는 기구를 덮고 있어서 “성막 안쪽에서만” 첫 번째 덮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덮개는 땅 바닥까지 성막의 판, 곧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청색, 자색, 그리고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실로 짜여있고, 아름다운 천사들의 형상이 그 덮개에 수놓아져 있습니다.

 

첫 번째 덮개는 서로에게 붙어있는 두 개의 중요한 커튼 세트(sets)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은 서로에게 다섯 개의 더 작은 커튼형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중요한 커튼을 각각 연결하기 위해, 청색실로 된 50개의 고리가 커튼의 끝부분에 각각 연결되는데 사용됩니다.
금 걸쇠(잠금쇠)는 두 개의 커튼 세트를 하나의 큰 덮개로 만드는데 청색실의 고리에 사용됩니다.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두 개의 더 넓은 커튼으로 연결된 열 개의 커튼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길이는 28큐빗(1큐빗-45cm)이고, 그러니까 오늘날 환산법에 의하면 길이가 12.6m이고, 각 커튼의 너비는 4큐빗, 즉 1.8m입니다.

다섯 개의 더 작은 커튼은 우선 두 개의 커튼 세트를 만드는데 연결이 되고, 이 세트는 각각 50개의 고리로 된 청색실과 50개의 금 걸쇠로 붙입니다. 이것은 성막의 첫 번째 덮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우리에게 세세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성소와 지성소를 덮는 덮개가 세 개 더 있습니다.
즉, “염소 털로 된 덮개”와 “숫양에 붉은색으로 물든 가죽 덮개”와 “해달로 된 덮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청색, 자주색,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실”로 사람 손으로 만든 인공적 천사들의 모양으로 된 커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성막의 첫 번째 덮개에 사용된 “청색실”은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기 위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받았던 세례를 의미하고 뜻합니다.

곧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의의 세계를 당신의 십자가로 활짝 연 것입니다(마 3:15).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만이 당신의 세례를 통해 해결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이제 우리에게 영광스런 구원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1-22)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영생으로 부활하심으로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주님의 의와 사랑으로 하나 된 연합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 된 거룩한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영광의 연합을 십자가의 세례를 통해 이룬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5-17)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짚고 가겠습니다.
가늘게 짠 베실 커튼에 수놓아진 천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입니다.
둘째는 하늘세계를 수호하는 보호의 상징입니다.
즉 “죄인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셋째는 하나님의 처소를 보호하는 거룩의 상징입니다.
넷째는 천국의 모형을 나타내며 그곳에 천사들로 충만하고, 그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천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에워싸고 천국 보좌의 영광과 거룩을 그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천사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1-3)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막은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나라의 모형이라고 신약시대 예수의 사도들이 성경곳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덮개, 즉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는 수놓아진 천사들과 네 가지 색깔의 아름다움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죄를 지신 십자가의 영광과 은혜와 주님의 나라와 그 아름다움과 영광과 찬란한 거룩한 광채로 다가오는지요?

거룩과 의로움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당신에게도 거룩과 의로움으로 성령 안에서 충만하길 원합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당신의 심령과 영혼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십자가에 내가 죽고(세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경험되는 복된 하루이길 원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4-15)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2
- 염소털로 만든 두번째 덮개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염소털로 만듭니다(출26:7). 그 길이는 첫 번째 덮개보다 90cm나 차이가 나고 더 깁니다. 두 번째 덮개는 길이가 13.5m, 너비가 1.8m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덮개는 11개의 커튼으로 되어 있는데, 두 개의 커튼 세트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중 하나의 세트는 다섯 개로 또 다른 하나의 세트는 여섯 개의 커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세트는 놋걸쇠(잠금쇠)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 26:7)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염소털로 만들어진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오셔서 30세가 되었을 때, 주님은 스스로 자원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주님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자기 십자가에 가져가서, 우리의 손에 못 박혀 처형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단 번의 영원한 죄를 자기 피로 용서하시고, 자기백성에게 영원한 주님과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위에 덮여 있는 염소털의 흰 덮개, 곧 두 번째 덮개는 속죄염소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세례와 피로써 우리를 죄 없는 깨끗한 자로 만드심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지니라. (레 16:5)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레 16:7-10)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한 하나님께 번제물이요 우리에게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영원한 영광이 되셨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평강과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셔서, 하나님께 영광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당신과 저는 주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되심을 믿고 신뢰하며 소망하는지요? 주님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영원토록 사랑하며 살고픈 마음의 소원이 일어나는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영원한 구원의 반석과 영생의 소망과 영광의 주님으로 온 맘과 몸을 다해 섬기며 진리의 성령 안에서 이 땅을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 축복하며 사랑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3
- 붉은 색으로 물든 숫양가죽의 세번째 덮개


성막의 세 번째 덮개를 위해 사용된 재료는 붉은 색으로 물들인 숫양가죽입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적 제물이 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죽음의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구속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서 구원과 새창조질서의 회복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자였습니다.
이 아들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아들입니다.
즉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속한 아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늘세계에서만 창조할 수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별안간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라(잡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엄청난 살인행각을 벌이려 할까요?
하나님이 할 일이 없으셔서, 너무 심심하셔서 이런 무모한 행동을 아브라함에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장차 온 인류의 메시야로 오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먼저 우리를 대표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선물로 허락하신 이삭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신 생명의 주님을 보여주고자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모리산까지 독자 이삭을 데려가 번제물로 하나님께 받치려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향해 칼을 빼어 내리치려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에 교차된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교차된 것이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그 마음을...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향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명하십니다.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향해 빼든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됐다!”
“이제 네 독자 이삭을 통해 네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
“이제 됐다!”
그런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본즉 한 숫양이 덤불에 자신의 뿔이 걸려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숫양을 독자 이삭을 대신할 희생제물로 예비해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위해 친히 모든 것을 예비하시리니!

(The LORD will provide. 여호와이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친히 한 독생자를 영원전에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 독생자는 하나님께는 하나 밖에 없는 당신의 꿈이요 소망이요 영광이요 사랑이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독생자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이 분이 저와 당신이 믿고 신뢰하고 있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살이 갈기갈기 찢기시고 창에 찔려 피를 쏟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그 소망과 기대가 주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입니까?

성막 세 번째 덮개 천이 숫양의 피로 물든 것을 기억하시며 오늘을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만이 죄인에게 복음이십니다. 주 예수 안에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4
-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네번째 덮개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어집니다.
해달은 구약성경 히브리어로 “타카쉬”로 포유류의 번역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몇 가지 다른 포유류로 번역되는데, 가령 “바다소(해우)”(NIV), “물개”(ASV), “고운염소”(NLT), 그리고 “알락돌고래”(NASB) 등입니다.

우리는 이 포유류가 무엇인지 정확히 입증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언어학자들은 “타카쉬” 란 단어의 기원이 아마도 외래어 어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경우는, “타카쉬” 란 포유류는 그 가죽이 성막의 네 번째 덮개를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아름답거나 매혹적이지 못한 재질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해달 가죽의 네 번째 덮개는 예수께서 사람의 죄로 인한 추하고 더러운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을 암시합니다.
게다가 주님은 자신의 얼굴이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해달의 가죽 덮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래 전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인 사람의 비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가 죽음의 날까지 죄로 인한 수치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영생으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추하고 흉측한 모습의 예수를 십자가에 죽임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 보십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해달의 가죽 덮개처럼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 죄의 흉측한 모습을 메시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반면교사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습을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타인을 해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죄를 짓기를 좋아합니다.
더럽고 추한 해달가죽의 모습처럼, 우리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자신의 배만 채우는데 관심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에 고통을 대신 당해야만 하는 실질적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죄의 본질과 본성의 심각성을 실제적으로 아는 자만 메시야를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자는 자신의 죄에 무지하고,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죄로부터 용서와 사면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향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합니다(시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의 죄 안에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영접지 못합니다.
오직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를 통한 죄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멸망할 짐승처럼 파멸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한 가지 계획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모든 사람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감찰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한 개인에게만 국한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둠과 죄의 미혹 아래 그리고 마귀의 권세아래 속박당하여 살기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자신이 이 땅을 살면서 죄를 지은 적이 없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낫고 더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인간이 얼마나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교만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우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실제적으로 발견하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비교를 통해 얼마나 실제적으로 타인보다 더 낫고 더 못한 것입니까?
우리는 늘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과 탐심을 먼저 앞세우며 이웃과 타인을 괴롭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과 죄로 타락한 마음입니까?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하나님을 얼마나 수많은 죄로 대적하며 사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영광스럽게 소중히 창조하셨음에도, 인간은 아담 안에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아름다운 형상이 파괴되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죄로 타락한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죄로 인한 제한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을 위한 미래도 완벽하게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특별히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영이 죄로 인해 죽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원한 파멸과 죽음을 피할 다른 길과 선택이 없음에도 생명의 주님께 나아올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본능으로 행하는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1:10)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신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즉 메시야가 인간의 더러운 죄의 몸을 그대로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친히 자원하여 스스로 지시고, 죄의 형벌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함과 영생으로 부활하심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의 은혜와 십자가의 용서는 메시야를 자신의 주님으로 믿는 자에게만 이루어지고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선택한 자녀에게 이 구원의 소식과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중 누가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믿어지기 전까지 누구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막을 덮는 네 가지 종류의 덮개의 사용된 재료를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희미하게 성령으로 발견하고  드러낸 것을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스런 성도요,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세례 받으심과 십자가를 지심과 단 번에 영원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친백성입니다. 그러나 해달의 가죽 덮개와 같이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주님의 모습과 형상을 모르고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혈과 육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 곧 그리스도의 복음인 십자가와 은혜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령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그리스도로 오시기 전,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의 말씀으로 기록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하나님의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시며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메시야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싫어했고, 그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당하는 현장에서 욕을 하며 증오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 때문에 십자가에 고통과 채찍에 맞았음에도, 우리는 오히려 그를 향해 침 뱉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과 주님으로 여기지 않았던 우리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님에 의해서 만물이 움직이는데도 우리는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조롱과 조소와 침 뱉음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저주의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택한 한 영혼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의 피로 영원히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가 저주하고 멸시한 그 십자가로 스스로 자원하여 자신의 하늘 영광과 권세를 모두 포기하시고 그 죽음의 길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2)

세상에서는 가장 추하고 가장 아름답지 못하고 가장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도, 예수는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은혜로우시고 가장 기쁨이 되시고 가장 큰 소망이 되시고 가장 큰 사랑이시고 영생이신 그리스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저 자신과 당신에게 질문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많이 버림받고 가장 싫어버린 바 된 그 예수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주님으로, 영광의 왕으로,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모시고 있습니까?” 주 예수가 없는 인생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추하고 가장 악하고 가장 더러운 것임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나의 죄 때문에 죽임 당하심으로 나에게 천국을 영원한 상속의 기업으로 선물하신 예수를 당신의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의 찬송과 감사의 제목이 되며, 또한 주님과 늘 사모하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동행하는 것이 당신에게 가장 복되고 영광스럽고 축복된 삶임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이 진리의 성령으로 믿어지고 경험되길 원합니다!

당신의 죄로 타락한 지혜와 이성과 지식과 경험으로 예수를 바라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기까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부활과 영광의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요 12:16-17)


묵상 가이드 /  ABC 묵상법

1. A : A Title(제목을 정하라)
2. B :Best Sentence(요절을 찾으라)
3. C :Challenge(도전을 주는 말씀)
4. 적용을 찾으라


첫 번째 앙장(26:1~6)
본문은 지성소와 성소를 덮을 수 있는 ‘성막 덮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성막 덮개는 두 개의 앙장과 그 앙장을 덮을 두 개의 덮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첫 번째 앙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앙장’이란 성막의 천장에 치는 휘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앙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앙장은 모두 열 폭으로 다섯 폭씩 서로 이어서 만들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앙장에는 ‘그룹’을 새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그룹들을 만들 때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교히 만들라는 말은 열심히 고안하고 연구하여 정성껏 수를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담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의 한 부분에서조차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앙장과 덮개(26:7~14)
두 번째 앙장은 첫 번째 앙장과는 달리 염소털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염소털은 방습과 보온 효과가 뛰어나 고대 근동에서 천막을 만들 때 많이 사용하던 재료입니다. 이것으로 첫 번째 앙장을 덮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염소털로 만든 앙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든 앙장보다 한 폭이 더 많았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앙장을 완전히 덮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 앙장을 덮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결국 성막 덮개는 그룹을 수놓아 만든 앙장, 염소털로 만든 앙장,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등 이렇게 네 겹으로 이루어져 성소와 지성소를 덮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성막 내부의 모든 성물들을 보호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나는 나의 삶을 가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준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님, 주님의 일에 드리는 마음과 정성이 직장 일에 쏟는 마음 같지 못했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소서.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겸손히 쓰임받기 원하오니 ‘공교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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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5일 / 03- 13-2024(수)
출애굽기 25:1-40
식양을 따라(9절)

찬송 / 65장(생명의 빛 주 예수여)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25:10-22 / 법궤 : 
재료 : 조각목(싯딤나무) -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
          정금 - 신성을 상징
크기 :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
구조 : 속죄소(법궤의 뚜껑), 두그룹 천사, 증거판(공의), 만나(신령한 양식),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인도, 보호)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25:23-30 / 떡상 :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25:31-40 / 등대

재료 : 정금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향단

재료 : 조각목, 싯딤나무
크기 :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식양을 따라(출애굽기 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Make this tabernacle and all its furnishings exactly like the pattern I will show you.

식양(8403) 타브니트() תַּבְנִית 스트롱번호8403

1. 건물.   2. 견본. 3. 사물의 모양
발음 [ tabnîyth ]
어원  /  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건물, 건축양식, 시144:12
  • 2.
    명사, 여성 견본, 모범, 출25:9,40, 왕하16:10.
  • 3.

    명사, 여성 사물의 모양, 형상, 신4:16-18, 겔8:3, 8:10, 10:8.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 성막과 그에 관계된 모든 기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지 결코 인간이 계획하거나 고안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히 8:2).
즉 성막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히브리서 8:1-2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식양(타브니트)
- '견본' 또는 '모형' 으로 번역 될 수 있는 말로서 어떠한 실체의 그림자와 같은 청사진이나 모델 하우스 등을 가리킨다.
사실 구약 시대의 성막 제도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히 8:5).
따라서 모형과 그림자인 구약 시대의 성막 제도는 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었다(요 2:21; 히 8:13 ; 계 21 :22).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13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성소(4720) 미크다쉬

מִקְדָּשׁ 스트롱번호4720

1.

거룩한 것

2.

성지

3.

이스라엘의 성막

발음 [ miqdâsh ]
어원
어미활용 מִקְדְּשׁוֹ ,מִקְדָּשׁוֹ 민18:29,6942에서 유래
구약 성경
7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거룩한 것, 봉헌된 것, 성스러운 것, 성물, 민18:29
  • 2.
    명사, 남성 성지, 성소.
    • a.
      명사, 남성 이스라엘의 성막, 출25:8, 레12:4,21:12, 민10:21, 18:1.
    • b.
      명사, 남성 성전, 대상22:19, 대하29:21.
  • 3.
    명사, 남성 수용소, 보호소, 피난처, 도피처, 은신처, 사8:14, 겔11:16.


󰃨 내가... 거할 성소 - '거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쇠칸'(*)은 '숙박'이라는 개념을 가지며 동시에 '휴식한다'는 뜻의 '쇠카브'(*)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소에 머무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돌봐 주겠다는 의미이다. 그 속성상 무소 부재(無所 不在)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떠한 특정 장소에만 머물러 계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은 성경이 재차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왕상 8:27;대하2:6;사66:1;렘23:24;행7:48;17:24). 한편 성소란 말은 '성막'(26:36), '회막'(29:42), '증거의 장막'(17:7) 등으로도 표현되는데, 한 곳에 고정된 집이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텐트였다. 따라서 이처럼 이동하는 성소에 하나님이 거하시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을 앞서 인도하시겠다는 표현임을 분명알 수 있다(민9:17-23;신1:33). 그러나 솔로몬은 성전 건축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은 제한하고, 성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나중에는 성전 숭배 사상까지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음을 선포했고(사 66:1, 2), 스데반도 이를 강조했으며(행 7:48-50), 예수께서도 예배의 참된 요소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닌 예배드리는 자의 '신령과 진정' 임을 분명히 가르치셨다(요 4:21-24). 이처럼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성전된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6:19;고후 6:16;엡 2:21).

󰃨 그들을 시켜 ... 짖되 - 예물을 바친 사람들이 또한 건축의 당사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마음과 물질과 육체적 노력이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당신을 위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신다.

성소

유일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막에 들어가면, 먼저 번제단을 만난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되며, 다음으로 우리는 물두멍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을 씻고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성소에는 세 개의 성물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예배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성소에는 떡상과 등대와 분향단이 있다.

1. 떡상

떡(진설병)상은 이것은 법궤와 마찬가지로 금으로 도금되었으며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상의 규격은 길이 91.2cm, 넓이 45.6cm, 높이 68.4cm였다.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하나님께 진설해 바치는 기구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를 예표하므로 진설병을 바치고 있는 상은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떠받드는 중보자적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롬 8:34)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떡상의 사면 테두리는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둘렀다(출 25:25). RSV는 '턱'을 '틀'(frame)로, 공동 번역은 '가름장'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는데 곧 떡상의 사면 테두리에 붙은 보강재(補强材)를 가리킨다. 이것은 상위의 떡이 지면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보조 장치로서 그 크기는'손바닥 넓이 곧 7.6cm 가량이었다.

“상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찌니라”(출 25:30).

• 진설병 : 직역하면 '얼굴의 떡', '면전에 놓인 떡'이란 뜻으로 곧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떡을 가리킨다.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이러한 진설병을 두 줄로 6개씩 12개를 늘어놓아야 했는데(레 24:8), 이는 이스라엘 12지파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거두게 될 노동의 결과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이 떡이 당신 앞에 항상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잎에서 나오는 말씀(레마의 말씀)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떡이 이스라엘의 수고로 얻어진 노동의 결과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들여 말씀을 먹는 일을 해야함을 가리킨다(성경읽기, 듣기, 공부, 암송, 묵상, 나눔 등). 만나는 하늘로서 내려왔기에 그냥 새벽에 나가서 줍기만하면 되지만 떡은 차원이 달랐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2. 등대

“그가 또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으니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그것과 한 덩이로 되었고”(출 37:17).

"등대"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이 되어야 할 성도를 상징한다. 등대는 떡상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인데, 밤낮 계속적으로 불을 켜 놓도록 되어 있었다(27:21; 레 24:3). 성도들도 세상에서 빛의 생활을 함에 있어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마5:14-16 ; 엡 5:8-9). 성소 안은 낮에는 출입구를 통하여 빛이 들어와 밝았지만 밤에는 어두웠다. 따라서 제사장은 매일 밤에 불을켜고 아침에는 불을 껐다. 잔'(bowl)은 등잔(37절)과는 다른 것으로 일종의 악세서리인데 살구꽃 형상을 하고 있다(33절).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는 꽃받침이 있게 하였으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였으니”(출 37:21).

여섯 가지가 그 곁에서 나왔으니 - 기본 축을 이루는 중앙의 줄기에서부터 좌우로 각 3개씩 뻗은 6개의 가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줄기까지 합하면 7개의 가지가 되는데, 여기서 '7'이란 수는 등대가 완전한 빛을 발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수로 볼 수 있다.

“줄기와 연하여” - 예수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요 15:5,6)를 연상시켜 주는 대목이다. 즉 이것은 가지가 줄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합 관계를 보여 주는데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들도 생명의 근원과 모든 능력의 중심되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성도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살구꽃 형상" - 살구꽃의 문자적인 기본의미는 ‘(잠자지 않고) 밤을 새우다’, ‘경성하다’라는 의미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꽃은 부활과 희망, 각성과 보호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우리의 신앙을 경계하고 그 영혼을 각성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둥대에서 발하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된 사역을 상징한다. 따라서 살구꽃으로 등대를 장식한 점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참 희망이 될 뿐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등대를....쳐서 만들었으니" - 속죄소를 만들듯이 금덩어리를 망치로 쳐서 늘여 등대의 기본 형태를 다듬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7절). 그런데 왜 어렵게 망치로 쳐서 만들게 하였는가? 불속에 들어가 불순물이 걸러지고 망치로 두들겨 맞아 더욱 단단해지면서 등대의 모양으로 다듬어진다. 성도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연단과 시험)을 거쳐야 참된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3.
분향단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출 30:1-2).

• 분향단: 직역하면 '향(케토레트)을 태우는 곳(미크타르)인 단(미즈 베아호)'이다. 분향단은 향을 사르기 때문에 일명 '향단'으로 불리우기도 하고(10절:대상6:49), 금으로 만들어졌다고해서 '금단'으로 불리우기도 했다(39:38;민4:11). 크기는 가로, 세로 각 45.6cm에 높이 912cm정도였으며 위치는 성소의 중앙, 지성소 맞은 편에 놓여졌다.

번제단 뿔(27:2)이 실제적인 용도와 더불어(시118:27) 상징적으로 사용 (29:12;레8:15;9:9;16:18;왕상1:50;2:28;시18:112:9)된 것처럼, 분향단 뿔 역시 번제단과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설치된 것 같다.

"단...정금으로 싸고", 분향단은 땅바닥에 닿는 아래 바닥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으로 싸야 했다. 이처럼 분향단뿐 아니라 성막의 주요 기구를 모두 정금으로 도금한 이유는 금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 때문인 것 같다(25:11,24,31,38; 26:29), 즉 금은 그 아름다움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며, 그 변하지 않는 속성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나타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분향단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26: 33) 바로 앞쪽 성소 부분에 분향단에 두었다. 따라서 분향단은 성소의 여러 기구 중 속죄소에 가장 가까이 놓여지게 된다. 여기서 속죄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이고(25: 22), 분향단 위에서 타오르는 향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기도를 상징한다(계5:8).그러므로 분향단이 속죄소에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가장 가까이에 계셔 항상 그 기도를 들어 주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기도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해준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 3-4).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출 30: 7).

한편 분향은 매 아침마다 해야만 했다. 이 시간은 등불을 끄는 시간과 일치한다. 따라서 해가 돋을때 제사장은 등불을 끄는 일(27:20,21)과 향을 피우는 일. 이 두 가지 일을 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 "향기로운 향을...사르되",
성막에서는 늘 희생 제사가 이어졌기 때문에 고기태우는 냄새와 피 냄새 등으로 가득찼을 것이다(레1-6장). 따라서 이런 냄새를 제거하거나 중화시키기 위해서도 향가로운 향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축된다. 특히 제단 주변에는 피를 뿌리기 때문에(29: 12,16,20) 더욱 이러한 향이 필요했을 것이다. 등불을 정리할 때 - 어기서 '정리하다'로 번역된 '야타브'는'좋게 만들다', '잘되게 하다', '단장하다'는 뜻이 있으며 '기쁘게 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성소의 등불은 아침에 끄도록 되어 있는데(27:21; 레24:3; 삼상3:3)등불을 끄는 행위를 이처럼 '단장하는' 행위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심지를 다듬고 기름을 보충하는 간검(看檢) 행위이기 때문이다(27:21).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 8).


하나님이 보인 식양대로(출애굽기 25:8-9, 골로새서 1:15-17)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세전에 작정하신 것을 미리 알리시고(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그가 보여주신 식양대로 지은 집에 거하시는 분이다(히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신앙은 그를 믿음이요,  신앙생활은 그의 지시하신 대로 준행하는 생활이니(창 12:1-10)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라(갈 4:9).

마치 건축이 당국이 허가한 설계도대로 치수, 모양, 자재, 색깔, 배선, 배관, 조경 등  수많은 검사를 통과하며 진행되고 준공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에 식양(pattern)이 있는바(창 1:3-31)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 그대로 되어지고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심이요(창 1:27),
생령(아담)을 지으시되 오실 자의 표상(pattern)으로라(롬 5:14).
세상 모든 문화, 문명에도 창작이란 없고 있던 것의 재생뿐이다.

하나님의 명대로 행하여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에게(출 12:28)
광야에 이르러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으니(출 25:8-9)
호렙산에서 보여주신 식양대로라(출 26:30).
모세는 그 같이 역사를 필했고(출 36:8-40:33),
다윗은 성신이 그려주신 식양을 솔로몬에게 주었고(대상 28:11-19),
솔로몬은 7년에 걸쳐 그 설계, 식양대로 전을 필하였다(왕상 6:38).

이스라엘이 받은 계명은 아무 형상도 만들어 절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으나(출 20:4-5)
지성소와 성소에는 그룹(천사)의 형상을 새기게 하였다(출 6:29).

예슈아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심은 성전 된 자기 육체의 죽음과 부활로(요 2:19-10)
여호와 이름이 아닌 예슈아 이름으로(요 5:43)
유일하게 허락한 천사의 형상을 헐고 창조자의 형상을 보여주려 하심이었으니(골 3:6)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계신 말씀(요 1:1-3),
곧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골 3:15)
육신으로 오신 바 된(요 1:14)
하나님의 본체, 본체의 형상이심이다(빌 2:6, 히 1:5).

그가 죽으실 때
천사 문양이 있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며(마 27:51)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요 19:30)
① 아버지 계명대로 이루시고(요 10:18)
그 피로 모형이 아닌 참성소를 정결케 하심(히 9:23).
② 하늘성소를 더럽힌 마귀를 심판하심(겔 28:12-18, 요일 3:8).
③ 첫 아담의 죄 대신 마지막 아담이 죽으심이다(고전 15:22).

그는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부활승천하시고(고전 15:49)
영생을 믿는 자의 마음에(딤전1:4)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으니(고후 1:22)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재연하게 하심이라.

예슈아 이름으로 침례 받은 자는(마 28:19)
선한 일에 본이 되려(롬 8:29)
예슈아 그리스도의 말씀에 절대복종하고,
무소유를 고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도 고립도 고난도 죽음도 피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식양 =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패턴 = 죽음과 부활’
‘침례 = 죄와 함께 죽고 의로 부활함’이요(롬 6:3-7),
하늘에 가서 주를 모시고 살 그의 집이 되려 함이다(히 3:6).

오! 주여,
나, 과연 몇 % 그리스도인인지?
짝퉁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분, 악의, 훼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을 버리고
아들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게 하옵소서.
죽어 하늘문이 열리는 진품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아멘.





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
성막의 구조와 성전 변천사

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재료와 그 구조물, 기구 그리고 거기서 행해지는 의식에 대해서 놀랄 만큼 상세한 사항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셨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고 지상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시는 데에 성경의 2장 분량을 소비한 것에 비해 성막에 10장이 소요된 것은 이 말씀 속에 내포된 영적 교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성막의 구조와 모형을 한낱 지난날의 의식, 곧 사라진 지 오래 된, 이제는 무가치한 유대인의 관습과 풍속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 속에 숨어 있는 구속의, 복음의 원초적 의미를 연구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구들을 순서별로 연구하며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성막의 어의

성막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성막을 뜻하는 어의를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성막을 뜻하는 용어들이 적지 않게 쓰였는데 구약의 어법과 신약의 어법은 약간 차이점이 있기에 하나하나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오헬>

성막에 대해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인데 이것은 ‘천막’을 뜻하는 말로서 140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다.
이 말이 출 26:9에서는 성막의 전면에 있는 휘장을 의미하였고
27:21에서는 회중에 모이는 성막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정관사와 함께 쓰여서 성막을 나타내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덮는 것'(Covering)을 뜻한다.

<미쉬칸>

이 말은 ‘거주지’나 ‘거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는 장소로서,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장로로서 성막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어근은 ‘거하다'(to dwell)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이 <미쉬칸>은 출 25:9을 비롯하여 약 100회 정도 사용되는데 장막을 표현하는 말로서는 <오헬>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 대해서는 출 26:7에서 볼 수 있는데 원문은 <레오헬 알 하미쉬칸>으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서는 ‘Covering upon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 (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 성막을 덮는 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미쉬칸은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막 전체를 의미 할 때가 많고 오헬은 성막의 지붕 덮개를 나타내는 말로서 성막 자체를 의미하는데 쓰여졌다.

기타 용어들

<쏙>은 시 76:2에 <쇽>은 암 2:6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데 덮여 있는 밀실을 뜻한다.
또한 <씰쿠트>와 <셐카>도 암 5:26에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덮여 있는 은밀한 처소로서의 장막을 의미한다.

신약의 용어들

신약에서 성막은 처소(dwelling place)란 의미의 <스케네>, <스케오스>, <스케노마>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의 <미쉬칸>과 <오헬>을 번역한 것들이다. 즉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 사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두 단어에 대한 구분 없이 <스케네> 또는 <스케노마>를 사용했는데 이는 신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성막의 구조와 형식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 의미 또는 실체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곧 성막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하고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성막의 건립상, 구조상으로 그 적용어를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성막의 대표적 용어를 택하여 성막의 구조와 단어의 의미에 구애 됨이 없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성막의 구조

성막은 그 구조가 사람의 고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재료에서부터 건조 방법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되어졌기 때문에 성막 그 자체로 이미 중요하고 교훈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를 두신 하늘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는 실례
둘째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셋째로 신자들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장소로 교회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셨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기구들과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성막을 건조한 사람들

성막의 구조 자체를 다루기 전에 그 구조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막의 모든 구조와 재료에 대해서 뿐 아니라 만들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출 36장에 보면 성막을 건조할 사람들을 지정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한다.

①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

출 35장에 성막을 건조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하나는 ‘브살렐’로 그 이름의 뜻은 ‘주의 그늘에서’이다. 이 사람은 유다 지파의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이다. 또 다른 사람은 ‘오홀리압'(나의 하나님 아버지의 장막)으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이다(참조 출 35:34). 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로서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셔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으며 이들은 여호와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여 일을 했다.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고 재능과 기술을 겸비했으며,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 그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얻게 된 능력들인데 성령께서는 지혜와 재능과 모략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귀한 성품과 자격을 구비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참된 일꾼과 도구로서 그의 뜻을 좇아 거룩한 성막의 건조 사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②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출 36:2을 보면 위의 두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막 건조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외의 많은 기능공들로서 출 35:35, 36:4, 8 등에서 그들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보게 된다. 그들은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수 놓는 일과 짜는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한 사람들이다. 비록 이들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나 성막 건조에 참여하여 크게 협조하고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이들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과 모세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나 그들은 자원하여 협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감독하며 지도한 자들이나 그들은 그 감독과 지도를 받아서 일한 자들로서 각 분야에서 자기의 재능대로 헌신 봉사한 기능공들이었다(참조 출 36:8-39:43).

성막의 모형

오늘날 성막의 영적인 중요성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모형론(Typology)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성막은 이미 신약의 모든 복음의 진수를 간직한 신약에 대한 주석과도 같다. 이 점에서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에 대한 설명과 그 영적 의미까지도 다루고자 한다.


① 바깥마당

성막 전체의 모형에 대한 기록은 출 26:1-27:2에 나오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성막의 크기는 길이가 45m, 너비 22.5m, 높이가 2.25m의 직사각형인데 이동할 수 있는 조립식 구조로 되어 있다. 성막의 울타리 동쪽 끝에는 성막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문에 들어가기 전 외부의 마당을 바깥 마당이라 한다.

이 넓은 마당은 ‘이방인의 뜰’로도 부르는데 매우 넓은 공간이다. 즉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전 지역이 이 이방인의 뜰이 된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곳까지는 이방인들이 성막에 접근할 수 있으나 성막 안으로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죄인들을 지칭하는데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적질 등 여러 가지 불의와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나타내며 그들이 있는 이 바깥 마당은 죄악의 장소를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을 나타내는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 된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이 세상에는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에 죽을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부르셨다. 곧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요,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부르심을 입은 이 무리들은 이 바깥 마당에서 성막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있게 되었다.

② 문

성막에는 출입문이 있는데 이 문에는 기둥과 그 기둥의 밑받침이 있으며 4색실로 곧 청색, 자색, 홍색, 금색과 가는 베실로 아름답게 수놓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이 문의 폭은 약 10m가량 되는데 이는 너무 넓은 문이다. 이 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는 친히 자신을 양이 우리로 들어가는 문으로 말씀하셨다. 이 문으로만이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다른 데로 들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인 것이다(참조, 요 10:1) 그러므로 이 문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이 문의 휘장이 4색으로 된 것은 우리 구조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4복음이 표현하는 왕과 종, 인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은 항상 열려 있지는 않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 곧 닫히게 되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의 문이 닫혔듯이, 이 문도 닫히게 된다. 이때 문 밖에 있느냐 문 안에 있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심판으로 분류된다.

③ 담과 안마당

성막은 네 개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과 북편의 담이 45m이면, 각각 20개의 조각목을 세우고 그 밑에 놋받침을 받치고 그 기둥에 머리를 씌운 후 은으로 만든 갈고리와 가름대로 이어서 세마포로 드리워서 만들었다. 그 바깥 휘장의 높이는 2.5m인데 세마포는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는 베실로 수를 놓아 짠 휘장으로 높이가 2.5m가량 되었다. 서편 담은 길이가 25m이며 기둥이 10개 있었는데 서편과 동편의 길이는 같으나 동편 담에는 출입문이 있었다. 이 담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구별하고,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을 구별하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였다.

또한 이 담은 성도의 육신을 가리키는데(참조, 고후 5:1; 벧전 1:13-14) 성도의 육신인 이 장막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된다. 이 담 안의 마당은 ‘안마당’으로 불리는데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즉 이 안마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들어와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교회를 뜻한다. 성도들은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영적 교제를 하게 되었다(참조, 엡 2:20-22).

④ 성소와 지성소의 덮는 막

이 덮는 막은 안마당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같이 덮어 주는 막으로서 4중으로 되어 있다. 첫 번 덮막은 가는 베실로 짠 고운 막으로 성막 내부에서 보이게 되는데 금색, 자색, 청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아름답게 수가 놓아져 있다. 또한 이 천에는 성막으로 들어와 예배하는 자들을 내려다보는 천사의 모습과 함께 수놓아져 있다. 두 번째 막은 염소 털로 만든 것으로 그 크기는 44X30 규빗의 크기로 첫 번째 덮막보다 조금 더 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성막 위의 천막’으로 불리는데 아래 있는 앙장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주위에 있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로 붉게 염색된 수양의 가죽이 덮여 있는데 이 가죽은 제사의 제물로 쓰인 양의 가죽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붉게 염색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를 뜻한다. 맨 윗덮개는 수달의 가죽으로 외부 표면에서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가죽은 햇빛의 자극에 강하고 잘 썩지 않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아름답거나 매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외적으로는 초라하시고 볼품이 없으셨으나 그 내면적으로는 완전하고 고귀한 성품을 지니시고 이 세상 풍조나 죄악에 물들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⑤ 성소

이상에서 말한 4중 덮개 밑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게 되는데 성소에는 3개의 성막 기구가 있다. 곧 떡상과 향단과 등대이다. 제사장들은 이 성소에서 매일 등대의 불을 점검하고, 향단에 향불을 피우며, 떡상의 떡을 1주일에 한 번씩, 특별히 안식일에 12덩어리의 새로운 떡으로 갈아놓고 6가지 제사를 드렸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⑥ 지성소

성소를 지나서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다. 이 지성소에는 법궤가 속죄소 또는 시은소가 있고 그 위에는 두 그룹이 있다. 이 곳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짐승의 피를 가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다(참조, 출 30:10; 레 16:18; 23:27). 이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 있는데 이는 함부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 즉 천국을 뜻하며 이 곳은 아무도 나갈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임을 나타낸다. 일 년에 한 번 이곳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자신과 회중의 죄를 위해 매년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하나님께 단번에 나아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참조, 히 9:25).

⑦ 안 휘장

이 안 휘장은 앞에서 말한 성막의 첫 덮개와 같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그룹의 모습을 수놓아 만들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어서 두 곳을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이 휘장은 막힌 담으로 인류가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한 이후로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다. 에덴동산 이후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으셨고, 노아의 홍수 때도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하나님이 친히 방주의 문을 닫으심으로 세상 사람들과 노아의 식구 사이를 구분하셨다. 이제 이 지성소와 성소도 휘장으로 막으셔서 죄인들의 접근을 막으신 것이다.

휘장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는 위에서 말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며 둘째는 둘 사이의 교제의 단절을 뜻한다. 휘장 자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휘장이 수놓아진 천사가 이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가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참조, 마 27:5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사업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 놓였던 죄악의 담이 무너짐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 제물로서 중보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잃었던 화목, 즉 교제의 상실을 회복하셨다. 제2의 아담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 것이다.

3) 성막의 기구들

성막에는 8개의 기구들이 있게 되는데 이것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곧 외향적인 면과 내향적인 면인데 외향적인 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며 내향적인 면은 그 기구들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통한 인간의 구속적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두 면에 근거하여 성막의 기구들과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겠다.

① 놋제단(번제단)

놋단을 히브리어로 <미즈베하>라 하는데 ‘제물’ 또는 ‘희생’의 뜻이 있으며 ‘죽인다, 희생한다’는 뜻을 가진다. 이 단은 조각목(아카시아나무)으로 만들어져 그 위에 놋으로 싼 것으로 그 길이와 너비는 모두 5규빗(2.5m)이다. 단 위 네 모퉁이에는 각각 뿔이 나와 있으며 단 네 면 가운데는 제물을 받치는 그물망이 있다. 그리고 단 높이 중앙에 고리 넷을 이편과 저편에 둘씩 달아서 금을 입힌 막대기로 꿸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단을 이동할 때 어깨에 메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단은 번제단이라고도 하는데 ‘번제’라는 말은 ‘올라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열납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같은 희생 제단은 인간의 범죄 이후로 생겼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의 수치를 가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던 사실에서 시작되어 아벨의 제사에서 짐승이 드려졌고, 홍수 이후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짐승을 죽여 드리는 희생 제사의 단을 쌓았었다. 또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다가 수풀 사이에 걸려 있는 수양을 드렸고 그 외에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려왔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희생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드릴 때까지 이스라엘은 이 희생 제사를 짐승으로 드려왔다. 이 번제단은 죄의 결과로 당하는 형벌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물이 죄를 대신 쓰고서 그 형벌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놋제단에 제물을 가져 첫째는 먼저 죄를 자각하고 둘째는 양을 제단으로 끌고 가서, 셋째는 그 위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고 넷째는 죽여서 단위에 얹고 다섯째는 피를 제사장이 단 사면에 바르고 여섯째는 그 제물을 태우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단의 네 뿔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의 머리, 양손, 다리에서 흘리신 피로 십자가의 네 귀퉁이에 뿌리셨으며 친히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 지성소로 나아가심을 뜻한다.

② 물두멍

물두멍은 번제단 다음에 위치한 것으로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두 번째로 놓여 있다. 이것은 전체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물을 가득 담아서 성소에 출입하는 제사장이나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제사 전후에 손과 발을 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 수족을 씻지 않고 출입하는 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자신의 허물과 범죄, 실수를 살피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물두멍의 물은 거울로도 사용되었는데 제사장은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서 더러운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이는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 양심으로 어긋난 허물과 범죄를 비추어 보고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함을 뜻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이 찌른 창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은 그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신 후에 그 물로서 정결케 씻어 주심을 뜻하는 것으로 곧 성막의 물두멍의 본래 의미이다. 출애굽 시 유월절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피를 바른 것이 번제단의 의미를 가진다면 홍해 바다를 지나는 것은 곧 물두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순서적으로 먼저는 대속의 피, 그리고 정결케 하는 물의 순서가 된다. 성경에서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에베소서 1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다.

③ 떡상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④ 등대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⑤ 향단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⑥ 법궤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⑦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⑧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3. 대제사장과 그 의상

이제까지는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에 대해서 다루었었다. 즉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이 그리스도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가를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그 성막에서 봉사하는 대제사장과 그의 의상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대제사장

광야에서의 대제사장은 아론이었는데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론이 가지고 있던 대제사장의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수행하셨던 것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들은 단번에 완전하게 제사장의 임무를 마치신 것이다(참조, 히 7:11).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제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옷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짜여졌다(참조, 출 28:5, 6, 15, 33).

이때의 푸른색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나타내며 자색은 존귀함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존귀와 영광을 나타낸다. 진홍색은 피의 색깔로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희생하심을 상징한다.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제사장들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의 옷은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는데 그 옷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서는 대제사장의 의상에서 다루고자 한다.

2) 대제사장의 의상

① 속옷

속옷은 가는 베실로 짜서 만든 옷이다. 이 속옷에는 띠가 있어서 한 번 입으면 벗겨지거나 자리가 움직이는 일이 없게 되어 있는데, 이 띠는 속옷을 입게 되면 꼭 매어야 했다. 이 옷의 특징은 통으로 짠 것이며 반드시 속옷을 입은 후에야 겉옷을 입어야 했다. 이 겉옷은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제사장까지도 입게 되어 있었다. 이 속옷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으로 우리의 죄를 가리고 칭의를 얻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참조, 렘 23:6, 16). 여기에 매는 띠는 진리의 띠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나타낸다.

구속사 맥 1189 출애굽기

② 겉옷

에봇 받침은 겉옷이다. 이 겉옷은 푸른색의 옷인데 두 어깨 사이에 머리가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고 옷 가장자리를 따라서 석류 무늬 다음에 금방울을 계속 돌아가며 달게 되어 있다. 이 겉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표현하며 존귀와 영화를 나타낸다. 옷단의 방울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석류는 그 말씀대로 충실한 결실을 보여 준다. 이 겉옷이 성도에게 적용될 때는 의와 영광의 옷으로(참조, 사 61:10),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며, 세상을 심판하며 영광을 누릴 것을 의미한다(참조, 계 5:10; 20:4, 6).

③ 에봇

에봇은 겉옷 위에 입는 것으로 모양이 긴 앞치마처럼 생겼는데 대제사장의 어깨에 걸치게 되어있다. 또한 에봇에는 매는 띠가 있어서 대제사장의 허리에 단단히 맬 수가 있었다. 그 띠는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잘 조화 있게 짠 아름다운 띠이다. 이 에봇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세운 지상의 교회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을 나타낸다. 어깨는 힘, 능력을 상징하는데 곧 우리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교회가 지탱되고 유지됨을 나타낸다. 주님은 선한 목자와 같이 친히 그 어깨에 잃은 양과 같은 죄인들을 메고 오시는 것이다(눅 15:5).

④ 흉패

에봇 위에는 12보석으로 장식된 흉패가 있는데 대제사장의 가슴 부분에 위치함으로 흉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에봇이 교회를 의미한다면 흉패는 그 교회의 구성원을 나타낸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슴에 붙어 있는 지체이며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을 기꺼이 대속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셨다. 이 흉패는 각 줄에 3개씩 도합 12개의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보석들은 그림에서와 같다. 이 흉패는 금사슬에 매여 대제사장의 어깨에 있는 호마노로 만든 두 견대에 고정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대제사장의 허리띠에 매게 된다. 어깨의 두 호마노의 두 견대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참조, 출애굽기 도표7). 이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예고된 약속을 따라 나시고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 12사도를 택하여 믿음으로 접 붙게 하심을 나타낸다. 즉 12보석은 예수님의 12사도를 나타내며 견대에 12지파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이 견대의 고리에 12보석이 매달려 있듯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12사도가 계승함을 나타낸다.

⑤ 우림과 둠밈

대제사장의 가슴속에 있는 흉패는 주머니처럼 위에서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마치 지갑처럼 생긴 것이다. 이 속에 우림과 둠밈을 집어넣는데 <우림>은 ‘빛들’이라는 뜻이며 <둠밈>은 ‘완전함’이란 뜻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선악과 길흉의 원인과 결과를 알기 원할 때 이 두 패를 내어 봄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그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면 주님이 응답해 주심을 나타낸다. 또 이것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우림과 둠밈 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⑥ 성관

성관은 대제사장의 머리에 쓰는 모자로서 대제사장의 직분과 그 직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며(참조, 슥 3:1), 영광과 존귀를 입은 자로서 그 관을 쓰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히브리서 2장 9절에 의하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 수치와 고난의 가시관을 쓰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다.

⑦ 금패

금패는 대제사장의 성관에 붙이는 패로서 여기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이 쓰여 있으며 청색 끈에 매어 성관 앞에 달게 되었다. 이것은 첫째로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경고이며 둘째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별된 자임을 명심하여야 함을 주지시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와 선지자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참조, 대상 16:22). 왜냐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하나님이 쓰는 자이며 하나님이 친히 처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여 성령의 기름을 부어 세운 유일하고 영원한 하나님께 성결 된 대제사장이시며 만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분이셨다.

4. 성막의 역사적 변천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마디로 성막의 역사 곧 성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정치적 멸망이 있었고 성전의 재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부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구조와 그 의미 못지않게 성막의 변천 과정을 다루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성막의 변천 과정을 연대순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시내산에서의 성막

이는 최초의 성막으로 출 40:2, 17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후 제2년 1월 1일에 시내 산 밑에서 성막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얼마나 오랜 시일을 성막 건조에 보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초기 장막은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을 보내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과 함께 수 차례 이동되었다. 성막 위에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곧 성막을 분해해서 성막과 그것에 속한 부속품들과 기구들을 정리하여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고 진행케 했다. 레위인들은 각각 그들이 맡을 부분이 정해져 있어서 각자가 그들이 책임지는 성막의 부품들을 메고 출발했다(참조, 민 3:31-32; 4:15). 이때까지의 성막의 구조나 모형은 앞서 다른 성막의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가나안 정착 전까지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2) 가나안 정착 이후의 성막

40년의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진입했다. 그들도 그곳에서 먼저 성막을 안치할 장소를 찾게 되었는데 그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고, 묘지로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 근처 길갈이라는 곳을 임시 장소로서 선정하였다가 마침내 에브라임 영지에 있는 실로로 정하여 이곳에 성막을 두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성막의 기구와 구조는 변동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그 후로 성막이 분해되고 여러 곳에 제단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참조, 삿 17:12). 벧엘에는 언약궤가 이동하게 되었고 실로에는 성막이 있었다(참조, 삿 20:27).

3) 실로의 멸망

언제 어떻게 실로에 성막이 서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곳에 성막과 언약궤와 제사장직과 제사와 분향이 있었다. 사무엘상은 실로의 성막과 당시의 제사장 엘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블레셋의 침략으로 법궤를 빼앗긴 것을 말해 준다. 이 일로 인해서 실로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의 장중에 들어갔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참조, 렘 7:12). 그런데 성막 자체까지 다 약탈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에 ‘놉’에서 다시 언약궤와 성막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4) 비지역적 예배

실로의 패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신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가견적인 유형 신앙에서 불가견적인 정신과 영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인위적인 신본주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 증거로서 대제사장직의 성격 상실을 들 수 있다. 사무엘은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대제사장과 사사로서의 역할을 겸하여 행하였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져서 벧세메스에 잠깐 머물렀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서 약 20년간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벧엘, 미스바, 라마, 길갈 등을 순회하며 예배의식과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는 성막이 비지역화된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서 다윗 왕 때에는 완연한 현상이 되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역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다.

5) 놉과 기브온의 성막

놉은 여부스에서 북쪽으로 6km 떨어진 곳으로서 시온보다 90m나 높은 산시였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는 대제사장과 85명의 제사장이 거할 수 있었고, 에봇과 진설병을 놓는 상이 있었다. 이곳에서 사울 왕이 모든 제사장을 죽일 때 아비아달 하나만이 다윗에게 피하여 있었다. 그 후에 사울 왕은 성막을 기브온으로 옮긴 것 같다. 이 기브온은 여부스에서 10km, 벧엘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6) 기브온과 예루살렘의 성막

다윗은 왕이 된 후에 군사 삼만여 명과 함께 바알레 유다 즉 기럇여아림에 가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와서 다윗 성에 친 장막에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데 기브온에는 제단이 있는 성막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법궤가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법궤와 제단이 성전의 수축으로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기브온의 성막이 주로 제사에 이용되었으나 성전 건축과 함께 흩어져 있던 성막의 기구들이 모아져 한곳에 두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막은 가나안 입주 후 200년 뒤부터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성전이 대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모세의 성막 기구들은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역대하 4장 19절에 보면 솔로몬이 기구를 만들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원 성막의 기구들이 분실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재난과 환난으로 많은 부분이 분실되었다. 처음에 법궤에는 두 돌비와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으나 후에 성전에 법궤를 안치할 때는 두 돌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참조, 왕상 8:9; 대하 5:2-10).

7) 성전의 수난과 변천

성막이 성전의 건축과 함께 사라지고 성전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성전 역시도 수차례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을 통해서 유지되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A.D. 70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헤롯 성전이 파괴됨으로서 성전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① 솔로몬 성전

다윗의 뜻을 이어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의 통치 제4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B.C. 967). 이 성전의 전장은 60규빗(30m), 너비는 20규빗(10m), 높이가 30규빗(15m)으로 성전의 기구들은 성막에서 옮겨온 법궤와 함께 새로이 만들어 두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 시대로부터 시드기야 때까지 존속하다가 B.C. 586년에 갈대아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성전도 함께 소화되고 그 기물들은 바벨론으로 이전되었다. 그 후 380년 동안 성전은 복구되지 못했는데 이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참조, 렘 25:3).

② 스룹바벨 성전

B.C. 539년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그는 일찍이 바벨론에 잡혀온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회유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온 지 2년째 되던 해에 세스바살의 지휘 아래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참조, 스 5:16). 이것이 스룹바벨과 그의 건축자들에 의하여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왕 제6년 B.C. 515년에 끝내게 되었다. 이 성전에서 일한 제사장의 반열이 정해지고 유월절이 지켜지게 됨으로서 구약성경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된다. 그 후 이 성전은 구약 중간사의 기간을 걸치면서 수 차례의 파괴와 복구의 수난을 걸치다가 B.C. 20년에 헤롯의 재건 공사로 이 성전의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③ 헤롯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은 요새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헤롯에게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성전의 크기가 포로시대 이전의 성전 즉 솔로몬 성전보다 높이가 60규빗이나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서(참조, 대하 3:4)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는데 실제적 이유는 그 재건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기념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성전은 46년에 걸쳐 완공되었으나(참조, 요 2:20)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대로 A.D. 70년 로마의 티토(Titus)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때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주님의 말씀(참조, 눅 21:20-21)을 기억한 사람들은 성밖으로 도피하여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로서 시내산에서 시작한 성막은 여러 과정을 거쳐서 결국 성막의 완전한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과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제 성막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 성막에서 행해지던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도, 대제사장도 사라졌다. 다만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복귀시키려하나 이 일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들 속에도 의견이 구구하다. 그렇다면 성막의 존재와 그 의미는 이제 시대의 변천과 함께 소멸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도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이 주는 의미는 살아 움직인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단 한 번으로 그 모든 성막에서의 의식들이 마지막 심판날까지 지속되게 하심으로 더 이상의 동일한 의식이 필요 없을 뿐이다. 이제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이 성막이 각자의 몸에 해당되어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다(참조, 고전 3:16).

돌에 새겨 있던 돌비가 이제는 우리 맘에 새겨진 언약으로 바뀌었고(참조, 렘 31:31-33)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서 뿌리던 속죄의 피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뿌려졌으며 이제는 모든 성도가 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게 되는 것이다(참조, 벧전 2:9). 이제 제물은 우리 자신의 몸으로서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고 있는 것이다(참조, 롬 12:1). 그러므로 성막이 가졌던 모든 영적 의미는 지금도 적용되나 그 실제적인 것들은 완전한 수행으로 재차 재현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이제는 사라진 구약의 성전과 현대의 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의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주님이 명하신 성례전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성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구약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닌 우리 주님을 머리로 해서 한 몸 된 지체가 서로 교제하는 표식으로서 공동체의 개념을 강조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4일 / 03- 12-2024(화)
출애굽기 24:1-18
찬송 / 171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언약의 피(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니라.


첫째, 언약의 피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부족들은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이 그들의 팔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잔에 담아 함께 마셨습니다.
이 피의 언약을 통해 두 부족은 형제 부족이 되어 서로 의리를 지키면서 상부상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인간을 대표하여 피를 흘리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 그리고 마귀에게 공격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죄 사함의 피(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들이 스스로 죄값을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우리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와 절망과 저주와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칭의의 피(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 5:9)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이요,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때문에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우리들은 이제 마귀의 공격이나 참소를 받을지라도 담대히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성화의 피(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모두 죄로 가득한 것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욕을 없애고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피(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죄짓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구만리장천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를 찬송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나오기만 하면 그 피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여섯째, 화평의 피(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화목제가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룩케 하였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피를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일곱째,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에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사로잡아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덟째, 생명의 피(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식물이 생명의 근원인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면 말라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도 겉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세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면 넘치는 생명감과 소망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홉째, 승리의 피(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결함이 있는 성품도 좋은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셨고,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그의 피로 사셔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피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의 값으로 산 우리들은 절대로 값싼 인생이 아닙니다.

리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피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피를 말하면서도 피가 중심이 아니며 관심 또한 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9:18-22절을 다시 보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사세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말한 후에 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 이 의미를 깨닫는 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4:7절을 보면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준행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모세는 어떻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말씀을 들을 교인들이 말씀에 감동이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열심히 지켜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교인들의 반응에 감동하면서 무척 고무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 말씀에 은혜를 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진정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피를 뿌린 것입니다. 언약서에 피를 뿌린 것은 없지만 본문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모세가 행한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모세처럼 피를 뿌리는 것이 될까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피를 뿌린 것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이유가 없이 피만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말씀을 낭독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피로써 죄사함을 얻었으니 죄사함을 받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은 자답게 살게 하기 위해 내려진 하나의 생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피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에서 자기 구원만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피는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단순히 ‘너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는 죽은 자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책에도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죽은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은 이스라엘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취하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언약을 기어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약의 피 앞에서 우리의 실천 의지를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실천 의지까지 몽땅 무너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살았을 때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 채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는 그 효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왕성한 활동과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러한 우리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선포하게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외치는 것이 목사입니다.







절기(하그)

חָג 스트롱번호2282

1.

축제

2.

희생 제물

발음 [ châg ]
어원
2287에서 유래
구약 성경
62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축제, 절기, 출10:9, 12:14, 신16:10, 대하5:3
  • 2.
    명사, 남성 희생 제물, 출23:18, 시118:27, 말2:3.

מוֹעֵד 스트롱번호4150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

시간의 공간

발음 [ môwʽêd ]
어원
325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정한 때.
    • a.
      명사, 남성 시간의 한 점, 창17:21, 레23:2,4,37,44, 삼상13:8,11, 삼하20:5,24:15, 시75:3(2), 1:4, 2:6, 렘8:7, 단8:19, 11 :27,35, 호9:5, 12:10.합2:3.
    • b.
      명사, 남성 시간의 공간, 창1:14, 단12:7
  • 2.
    명사, 남성 회중, 민16:2, 욥30:23, 사14:13, 33:20.
  • 3.
    명사, 남성 집회 장소, 수8:14, 시74:8, 애2:6.
  • 4.
    명사, 남성 신호, 삿20:38.

חָגַג 스트롱번호2287

1.

선회하다

2.

춤을 추다

3.

절기를 지키다.

발음 [ châgag ]
구약 성경
16회 사용

뜻풀이부

I.
원형 선회하다, 돌다
  • 1.
    원형 춤을 추다, 삼상30:16
  • 2.
    원형 절기를 지키다.
    • a.
      원형 [어지럽게 뛰논다는 뜻], 출5:1, 레23:41.
    • b.
      원형 [공적인 모임으로서] 시42:5(4).
  • 3.
    원형 비틀거리다, 현기증이 나다[술 취한 자에 대해 사용], 시107:27.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3일 / 03- 11-2024(월)
출애굽기 23:1-33
찬송 / 337장(인애하신 구세주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절기를 지키라(출애굽기 23: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구약의 3대 절기와 ‘수장절(收藏節)’의 참 의미

3대 절기

성경의 절기(출 5:1)는 여호와가 그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로 ‘제사(예배, 롬 12:1)드리기 위해 정해진 날’을 말한다.

성경에 나타난 절기로는
▲매주 드려진 절기로 안식일(출 20:8)
▲매달 지켜진 절기로 월삭(민 28:14)
▲매년 드려진 절기로 유월절(혹은 무교절), 초막절(혹은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 수장절(혹은 장막절, 초막절), 나팔절(레 23:23~26), 속죄일(레 16:29~34), 부림절, 수전절이 있다.

그 가운데 ‘3대 절기’라고 하면 ‘유월절, 초막절, 수장절’이 이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7회의 절기를 드렸지만 여호와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 1년 3차에 걸쳐 절기를 지키도록 명했기 때문이다(출 23:14~19).
이 3대 절기만큼은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반드시 연 3차씩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드려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 외형적으로 절기만 지키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사 1:12~15).

7 20190325-28  30







3대 절기의 의미

이제 구체적으로 3대 절기 속에 감추어진 참 의미를 되새겨 보자.

먼저 날짜를 보면 유월절은 1월 14일(출 12:2,6),
초막절은 7월 15일(레 23:34),
수장절은 9월 24일(학 2:18, 20)이다.
이스라엘의 추수는 일 년에 크게 나누어 봄에는 보리와 밀, 가을에는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열매 등을 수확한다고 한다.
여기서 가을의 수장절을 초막절(신 16:16, 대하 8:13)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초막절’의 의미에 추수, 곧 수장(收藏)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여름의 초막절을 ‘처음 거둔다’는 의미의 초실절(初實節), ‘보리를 추수한다’는 의미의 맥추절(麥秋節, 출 34:22)이라고도 한다.
초막절의 다른 이름인 ‘칠칠절’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던 오순절(레 23:16)의 바로 전날을 가리킨다.

칠칠은 ‘7×7=49일’을 말하며 오순(五旬)은 ‘다섯 오, 열흘 순(旬)’이니 숫자 오십을 뜻하는 것이다.
다음에서 설명할 초막(성전)의 영적 의미와 관련해 볼 때 말씀으로 지어져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성전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을 때 거룩한 영, 성령이 임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초막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 육체를 풀이나 꽃(사 40:7, 벧전 1:24)으로 비유하신 것으로 볼 때 우리 몸 된 성전이 풀로 된 장막, 즉 초막(草幕)이 된다. 초림 때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실 초막의 실체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요 2:21, 요 1:32). 그리고 변화산 상에서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그 당시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하나 되어 진리의 말씀으로 지어진 제자들이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초막이요 성전이었다(마 17:4).

3대 절기의 개혁된 의미

진정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곳은 육적인 초막이 아니라(행 17:24) 거룩한 말씀으로 지어진 우리 육체인 성전(고전 3:9, 16, 6:19)인 것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400년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절기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 심판이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으로 흠 없는 어린 양(출 12:1~12)을 잡아 고기는 구워먹고 피는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재앙에서 건짐을 받은 것에서 유래된 절기다.

구약 율법의 유월절 어린 양은 모형과 그림자(히 10:1)로 참 실체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고전 5:7)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육적인 어린 양을 잡았던 모세 때의 유월절을 기념하지 않고 이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빠진 인류를 위해 희생 양으로 오신 예수님(요 1:29)의 피와 살 같은 말씀(요 6:51-55) 안에서 성만찬식의 떡과 포도주로 2천년 동안 기념해오고 있다.

또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또 다른 유월절 양식을 먹게 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다(눅 22:14~20). 

수장절(收藏節)에서 ‘수장(收藏)’의 사전적 의미는 ‘열매를 거두어 곳간에 저장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열매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의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성도’, 즉 첫 열매, 장자들(히 12:23), 시온산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14만 4천(계 7장, 계 14:1, 3)을 의미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계 5:9~10)이 될 자들이며 이들이 12지파에 각 지파 일만 이천씩 모여 14만 4000명을 이루게 된다. 12지파가 완성된 후 흰 옷 입은 큰 무리들이 몰려오게 되는데 이들이 예수님의 피로 씻어 그 옷이 희게 된,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계 7:14)이다.

‘피로 씻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죄를 사함 받았다는 뜻이며 이로써 예수님의 피의 효력이 마지막 계시록 때가 되어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곳간에 저장한다’고 할 때 곳간은 천국을 의미한다. 그 곳간은 육이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마 6:10) 하나님의 나라(계 21:1~2)이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씨(눅 8:11로) 거듭난 천국(마 13:24)의 아들들(마 13:38),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름 받는 시온산(계 14:1)이다.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해 시온으로 데려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로부터 지식과 명철로 양육(렘 3:14~15)받는다는 그 시온이다. 그 곳에서 이들은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요 14:29)을 그 예언의 말씀을 통해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산 제사 즉, 영적 예배

예레미야는 세 가지 중요한 예언을 했는데 그 중에 첫째가 새 일, 둘째 두 가지 씨 뿌릴 것, 셋째 새 언약 세울 것을 예언했다.
여기서 두 가지 씨마태복음 13장 24~25절의 예수님이 제 밭(자기 밭)에 뿌리시는 좋은 씨와 원수, 즉 마귀가 뿌리는 가라지이다.

예수님의 제 밭, 즉 예수교 세상(마 13:38)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각각 하나님의 말씀과 사단의 말에 의해 자라게 되고 그 가운데 가라지는 단에 묶여 버림을 받게 되고 알곡은 곳간에 데려가게 되는 것(마 24:40~41)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 ‘도적같이 추수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재림 때 영으로 오셔서 초림 때 씨 뿌리셨던 그 밭(교회)에서 추수를 하시는데 주인이면서도 도적과 같은 입장이 되시는 이유는 사단의 방해 가운데 참 신앙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초림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오늘날도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마 23:13)”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마 24:42, 살전 5:6)’고 하셨는데 참 신앙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게 되고 그 말씀의 길(요 14:6)을 따라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계 15:5)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22:14~20, 마 26:26~29)’이라고 하시면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 나라가 임할 때까지 먹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포도나무(요15:1)이시니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재림, 계시록 때 먹는다는 것이다.

즉, 마지막 때 약속의 목자를 통해 열리는 계시의 말씀을 먹고 마음에 새겨서 새 언약을 지켜야만 죄 사함(히 8:10~13)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수장절 감사 예배’는 수장절을 맞아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첫 열매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은하는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뜻한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듯이 추수한 곡물이나 과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람의 몸과 마음과 뜻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4:35~36)”라고 말씀과 같이 복음을 전하여 말씀으로 맺어진 열매를 천국 창고인 성전으로 인도하는 전도 즉, 영적 추수를 실천하는 것이 수장절의 진정한 의미이다.

성경 속의 절기는 사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절기이며 히브리서 4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분명히 “그의 안식에 들어갈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직 남아있다”고 기록했다.

성경 속의 절기가 단지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어 지키라는 절기가 아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할 절기로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약 절기의 이면 속에 감춰진 온전한 의미를 모른 채 구습에 젖어 지켜 왔던 유대인들의 절기는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초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신앙의 목적인 구원과 영생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를 거울삼고 ‘성경적 절기의 참 의미’를 깨달아 그에 합당하게 드리는 절기(감사 예배)가 거룩한 산 제사인 영적 예배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참 절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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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8545) 테무라(emûwrâh) תְּמוּרָה    

1. 교환하다.  2. 교환.  3. 교환된 물건 : 레 27:10
발음 [ temûwrâh ]
어원 / 417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회 사용
뜻풀이부

I. 명사, 여성 교환하다.
 1. 명사, 여성 교환, 매매, 물물 교환, 룻 4:7, 욥 15:31.
   a. 명사, 여성 [주]교환된 물건 : 레 27:10, 33, 욥 28:17
 2. 명사, 여성 배상, 보상, 보수 징벌, 보응, 욥 15:31, 20:18.

1-15절은 배상에 관한 법
16-31절은 도덕에 관한 법에 대하여 말씀

1. 도둑질에 따른 배상 (1~4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손해 배상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해서 도살하거나 팔면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1)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끼친 만큼만 배상하도록 하는데, 도둑질 한 경우에는 다섯 배나 네 배로 갚아야 하고, 만약에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3)고 엄격하게 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둑질한 짐승이 살아서 그의 손에 아직 있으면 ‘같은 종류의 짐승으로 갑절을 배상하도록’(4)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생계형 도둑이 아니라 이스라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소와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한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소는 힘든 농사일과 각종 짐 부리는 일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면서, 소의 각종 부산물은 주요 식량자원이자 원자재로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양도 많은 문화권에서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경제적 동물의 이용 외에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에서 양은 중요한 희생동물임과 동시에 소유한 양의 수가 재산을 뜻했고, 털과 가죽과 고기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짐승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경제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나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서 무거운 배상을 하게 한 것은 이웃의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최근 청소년 범죄 연령이 낮아지고 잔혹성이 커지다보니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거나 폐지하자는 의견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있습니다. 찬성 측에서는 청소년들이 촉법소년이라는 법을 악용하고, 낮은 처벌 수위로 재범률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의 청소년에게 교화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고, 꼭 처벌만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법은 힘 있는 사람에게는 거미줄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오랏줄입니다.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도 ‘바늘을 훔친 자는 주륙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는 말로 고무줄 같은 법집행을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배상제도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큰 재산을 도둑질한 자는 작은 재산을 도둑질한 사람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는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둑과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주인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2-3a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이 한밤중에 남의 집에 침입했다가 죽게 되더라도 그 도둑을 죽인 집 주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전기가 없기에 침입자를 알아보려고 불을 켜다가 주인이 먼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인이 그를 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식별이 가능한 해가 뜬 후라면 도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고, 그를 벌하도록 재판장에게 데려가게 하셨습니다. 이 규정은 한밤중에 도둑이 들어 놀란 사람과 대낮에 들어온 도둑 모두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2. 타인의 밭이나 곡식 등에 대한 배상 (5~6절)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가축을 풀어놓아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 먹게 하면, 즉 남의 밭이나 포도원을 훼손하면 가축의 소유자는 자기 밭의 제일 좋은 산출물과 포도원에서 최상품의 포도나 포도나무로 배상해야 합니다. 타인의 재물을 그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길을 다니다보면 길바닥이나 심지어는 도로에 내동댕이쳐있는 전동킥보드를 심심치 않게 목격합니다. 무슨 심보일까요? 자기 것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전에 교외에 있는 조그마한 찜질방을 갔는데, 월요일 낮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무리가 들어왔는데 그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목회자들이 월례회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하려고 샤워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샤워실 곳곳에 수건과 대야가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분명 제 앞에서 들어간 일행은 목회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나중에 주인이라도 보면 어쩔까 싶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건을 다 수거해서 수거함에 넣고, 대야도 정돈하고 나왔습니다.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농사철이 시작되면 땅 속에서 월동하는 해충의 방제를 위해 논.밭두렁이 태우기나 잡풀 소각 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한 화재가 빈번해지자, 산림인접지역에서는 논두렁 태우기를 금지하고 있고, 부득이하게 논.밭두렁 소각이 필요할 때는 시군 산림담당부서의 허가를 받아 공동 소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은 불에 타기 쉽습니다. 따라서 자칫하면 이웃의 재산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하한 목적으로 들판에 불을 놓는 경우 주의할 것을 당부함과 동시에 남의 곡식이나 밭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 위탁 물품이나 짐승에 대한 배상과 소유권 분쟁 시의 배상 (7~13절)

7절과 8절은 위탁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그 이웃집에서 도둑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그 도둑질한 자는 갑절로 배상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탁받은 사람은 위탁물을 잘 보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탁물을 잃어버리거나 도둑을 맞았다면 손실을 갚든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자신이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판장으로부터 잘못이 없다고 인정받으면 물품을 위탁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9절은 어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하여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유권 분쟁이 생길 경우,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쌍방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10-11절에서는 나귀, 소 그리고 양과 같은 짐승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맡긴 짐승이 죽거나 다치거나 아무도 안 볼 때 끌려갔다면, 맡은 자는 그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여호와께 맹세하면, 맡긴 자는 그대로 믿어야 하고, 맡은 자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0~11절). 그러나 도둑맞았다면 맡은 자는 맡긴 자에게 배상해야 합니다(12절). 그리고 만일 맡은 짐승들이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거로 내놓으면 그 찢긴 것에 대해서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3절).

4. 빌려온 짐승에 대한 배상 (14~15절)

이웃에게서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빌려온 짐승의 주인이 없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합니다(14). 그런데 그 짐승의 주인이 함께 있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사용료를 내기로 하고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5).

이상에서 배상에 대한 규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중요한 점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반드시 배상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배상하되 경우에 따라서 두 배, 네 배, 다섯 배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도둑과 같이 나쁜 의도를 갖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는데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었다 할지라도 타인의 것은 자신의 것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배상하되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위탁받았으면 마치 자기 것처럼 책임감을 갖고 지켜야 하며, 만약 위탁한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맡은 사람은 배상하거나, 책임이 없음을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 받아야 하며, 맡은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맡긴 사람을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과 함께 언약서를 주신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즉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나 한 사람만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상에 대한 법이 의도하는 바는 공동체 전체의 화합과 평화입니다.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선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자 공동체 전체를 위한 온전한 내려놓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한 것도 대단한데,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은 남을 속여서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자기 관할 구역의 세금을 미리 로마 제국에 선납하고 자기 마음대로 더 거두어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즉 그는 부당하게 부를 축적했습니다. 따라서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남은 절반으로 네 배의 배상을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를 위해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재물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율법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 삭개오가 아니라, 존경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삭개오와 같이 율법 안에서 자유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웃의 것을 소중히 여기며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배상에 대한 법에 대해 살펴보면서 내 것만 소중히 여겼던 완악한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본 삭개오는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의하게 모은 재산 모두를 공동체를 위해 내려놓았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삭개오와 같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봄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는 말씀을 오늘 날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3.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4. 하나님께서 배상에 대한 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하는 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부터 17절은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법에 대해, 18절부터 20절은 이방 풍습에 대한 법에 대해,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대한 법입니다.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16-17절)

(16-17)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만약 공동체 내에서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꾀어 동침하였을 경우에는 납폐금을 주고 아내를 삼아야 합니다. 납폐금이란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예물이나 돈을 의미하고, 성적인 결합은 상대방과 하나가 됨을 뜻하기에 약혼하지 않은 여자의 삶을 책임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가 결혼을 거절하게 되면 납폐금은 지급해야 했습니다. 납폐금을 얼마 지급했는지 정확히 언급이 되어 있지 않지만 신명기 22장 29절에 근거하여 은 오셉 세겔을 주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방 풍습에 관한 법(18-20절)

이어 이방 풍습에 대한 세 가지 명령이 나타납니다.

(18-20)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이 세 가지 명령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에 관한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무당’은 마법사, 요술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여성형이므로 ‘신접한 여인’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무당에 대해서는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점술은 고대근동 사회에서 흔히 행해졌던 종교 행위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무당들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배필로 하와를 보내 주셨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부부로 맺어진 남녀의 성적인 결합과 이로 인한 자손의 번성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 섭리를 벗어나는 부끄러운 행위 즉, 짐승과 교합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멸하게 된다는 것은 단지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멸이라는 개념은 생명을 포함해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까지도 함께 파괴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스며들어 있던 이방 풍습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강하게 하십니다.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공동체 중 약자에 관한 법(21-27절)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12장 37-38절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수많은 잡족’도 함께 출애굽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지만 그들도 함께 광야생활을 했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도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기에 그들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그네들을 학대하지 않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는 동시에 나그네였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과부나 고아에 대해서도 해롭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천대를 받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오히려 섬겨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이들의 인권을 지속적으로 짓밟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벌하시고,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경고를 더하십니다. 이어서 공동체의 채무관계에 대한 법이 이어집니다.

(25-27)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공동체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을 경우 채권자처럼 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이자는 곡식에 대해서 33.3퍼센트에 달했고, 은을 빌릴 경우에 20~25퍼센트인 것을 감안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애와 사랑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심지어 담보로 가지고 있던 물건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줄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따라 가는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고아, 과부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으며 지금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있는 우리들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겠습니까?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소외된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서 세상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교회 내에서만 사랑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이 전해지도록 주님의 통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법(28-31절)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관한 법에 대하여 열거합니다.

(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8절에 재판장의 원어는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하기에 본문에서 나오는 ‘재판장’으로 해석하기 보다 ‘하나님’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백성의 지도자들에 대한 저주를 금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다른 성경 번역본에서는 ‘재판장’이 아니라 대부분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또한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하는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제물 드림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29-30)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예물을 드릴 때는 먼저 지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지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고린도후서 9장 7절과 같이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곡물에 대해서는 처음 추수한 것을 드리고, 짐승에 대해서는 칠일 동안에는 어미의 젖을 먹게 하고, 여덟째 날에 하나님께 바치게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주어야 한다는 말은 이방 종교에서처럼 사람을 제단에 바치는 인신공양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13장 13절 대속의 개념으로 모든 탄생을 대표하는 장자를 받으시는 대신 레위인을 대속물로 받아 하나님의 소유로 삼고, 성소를 관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에 대해 언급하며 마무리 됩니다.

(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앞서 말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에 대한 결과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의 모습으로는 그 사람의 거룩함을 볼 수 없습니다. 매일같이 먹는 음식이야 말로 거룩한 삶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기에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 즉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먹는 행위조차 거룩해야 한다면 우리의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거룩한 성도의 삶을 보이시겠습니까? 그것은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될 때에 비로소 삶에서도 거룩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때 우리가 하는 언행과 먹고 마시는 그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함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는 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우리가 주님이 주신 법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목적이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삶 속에서 주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세상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을 금하셨습니다. 혹시 나의 삶에 신앙과 별개로 이방인들의 풍습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아야 하는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고 무엇으로 섬겨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지체없이 드려야 합니다. 나의 삶에 주님께 드려야 하는데, 지체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 거룩의 삶은 일상입니다. 오늘 하루 일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실천합시다.


속죄론(속죄론)

Ⅰ. Anselm(11세기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이전의 속죄론

1. 이레네우스(Irenaeus of Lyon. 115- )의 속죄론

총괄갱신설 (Racapitulation Theology)을 주장하였다.

아담이 범죄 하므로 온 인류가 초대된 저주에 임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순종하므로 온 인류가 총괄적으로 갱신되게 되었다. 아담 이전에 에덴동산이 있었듯이 둘째 아담이 총괄되고 난 후에는 지상 천년왕국이 있다. Irenaeus는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다 속죄하셨다는 이야기인지, 애매한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사람을 해방시켰다고도 하였다.

총괄갱신설은 이론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가리켜 Esoteric(무언가 비밀스러운, 비교(秘敎)적인, 비밀 종교적인)한 속죄설이라 한다.

2. 오리게네스(Origen of Alexandria 185-.)와 그레고리(Gergory of Nyssa,320-.)의 속죄론

이 두 사람은 속전신학(Ransom Theology)을 주장했는데, 이것을 속전설 또는 속상설이라고 한다

▶ Origen의 이론

그리스도의 속죄는 사단에게 지불한 속전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미끼를 삼키고 신성의 낚시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영혼까지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  만인구원설을 주장한 것이 되고.  나중에는 사단, 귀신까지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공개적인 Exoteric 이론이다.

▶ Gergory of Nyssa의 주장

   사단이 기만 당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속상설은 사단 기만설이다.

   ⑴ 기만자가 기만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⑵ 사단도 기만당하므로 유익을 얻었다. 사단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아우구스틴과 그레고리(Gregory 540-)Ⅰ세의 속죄론

   이 두 사람은 형벌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스스로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떨어졌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으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는 속죄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형벌 대속설을 주장한 것이다.

▶ GregoryⅠ세는 칼빈과 비슷한 형벌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인간이 죄 없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진노를 면하고 죄의 부채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의 칼빈이 주장한 형벌 대속설과 같은 맥락인 것을 보게 된다.

Ⅱ. 안셂(Anselm)에서 종교개혁까지의 속죄론

1. Anselm(1033~1109)의 속죄론

그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나”(Cur Deus Homer?)란 저서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속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속죄론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 이의 속죄론을 만족설(Satisfaction Theology)=상거래설 이라고 한다.

   ⑴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계약아래 있었으나,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 영광을 도둑질 또는 더럽혔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속죄는 절대 필요한 것이라 하여  속죄 절대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⑵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형법적으로 형벌을 부과하던지 아니면 민법적으로 손해배상을 해야만 한다.

   ⑶ 인간은 배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무죄하신 분이 자원해서

       수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리셨다.

       그리스도는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손해배상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민법적 속죄 배상으로 본 것이다.

  ⑷ 이 업적은 성례전을 통해 죄인들에게 이전된다.  성례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손해배상의 업적이 이전된다.  

       Satisfaction Theology란 하나님이 손해배상을 다 받으시고 만족하신 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 거래설 이라고도 한다

           ◉ Anselm의 이론에 대한 평가

① 속죄의 객관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공헌이다.

②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대리적 죽음이라는 개념이 약하다.

    대리적(Vicarious) 개념이 약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부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받쳐진 성물로 보았다.  

    입다가 자기 딸을 받친 것같이 그렇게 보았다.

③ 그리스도의 공로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신앙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성례전적인 요소만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믿음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적으로 전달된다고 본 것이다.

④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했고, 삶에도 구속적인 측면이 있는 것을 부인했다.

    종교 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을 굉장히 중요시 했던 것이다.

⑤ 공법과 사법 가운데 양자 택일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가들은 둘 다 보았으며, 주로 공법 쪽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아벨라드(Peter Abelard, 프,1079-1142)의 속죄론

도덕감화설(Moral unifluence theology)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죄인의 고난을 체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영향을 주어서 회개로 이끈다는 도덕 감화설이다

◉ 아벨라드 속죄론의 문제점.

   ① 속죄의 동기로 사랑만 강조되었지 공의는 무시되었다.

   ② 속죄의 객관성이 무시되고 주관적인 화해만 강조되었다.

   ③ 예수님을 감화주시는 도덕 교사로 전락시켰다.

3. 롬발드(Peter Lombard)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7-1274)의 속죄론

 안셀름과 아벨라드의 주장을 혼합한 혼합적 속죄관이다.

  (1) 속죄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였다, 하나님은 배상없이도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배상을 요구하는 길을 택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위대한 사랑의 표시였다.

       삶과 죽으심으로 충분한   배상이 되었고 인간은 성례전을 통해 이 업적을 전가 받았다.

  (3)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네 가지 측면에서 죄인의 구원을 가져왔다고 한다.

     ① 죄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받게 하는 공로    
     ②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히 만족한 대속     
     ③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원적 희생     
     ④ 죄인들을 노예와 형벌에서 구속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4. 던스 스코터스(Duns Scotus, 1255-1308)의 속죄론

  던스는 인정론(Acceptilation Theory)이라는 속죄론을 주장하였다.

(1) 프란체스코 소속으로 실제론과 유명론의 다리를 놓은 사람으로서 속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전횡적 의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죄에 대한 배상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 배상자가 꼭 그리스도일 필요는 없다.  천사일 수도 있다.

(2) 그리스도의 공로는 유한한 인성의 공로이므로 죄의 부채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

Ⅲ. 종교개혁기의 속죄론

1. Anselm과 개혁가들의 속죄론 비교

⑴ 속죄의 필요성 :

    Anselm ― 절대 필요성을 주장. 하나님 것 훔치고 배상해야 한다는 개념.

   개혁가 ― 필요하기는 한데 상대적 필요성을 주장.

⑵ 죄의 개념∶

    Anselm ― 하나님의 영광 침해요, 손해의 배상을 동반한다.

    개혁가 ― 하나님의 율법 위반으로, 형벌을 동반한다.

⑶ 속죄의 개념

    Anselm ― 속죄란 민법적으로 파악하여 하나님의 영광 회복을 위한 손해배상으로 보았다.

    개혁가 ― 공의를 만족시키는 형법적으로 파악하여,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적 형벌이었다.

                  형벌대속설(Penal Substitution)

⑷ 그리스도의 사역

     Anselm ―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하였다.

     개혁가 ― 그리스도의 속죄는  능동적으로 죄 없는 삶을 사셨다.수동적으로 죄 있는 자처럼 죽으셨다.

⑸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가되는 방법

     Anselm ― 성례전적 이전을 강조 ― 성례전을 통하여 이전된다는 주장.

     개혁가 ― 믿음에 의해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義는 죄인에게 전가된다.

2. 소키너스파(Sociniem)의 속죄론

모범설 (Example Theory)을 주장하였다, 대속적인 속죄 개념을 전면 부인했고 속죄 필요성을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삶과 죽음을 통해 믿음과 순종의 모범   을 보이셨을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과 화  목의 기초로 결합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3.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속죄론

Hugo Grotius는 항론파의 알미니안 주의자로서 화란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621년 파리로 도망갔다.

1617년 「the Satisfaction of Christ」(그리스도의 관점) 라는 책에서 율법 위반에 대한 형벌은 엄격히 집행되지 않는다고 했고, 고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거룩한 불쾌감을 표현하신 것이다. 꼭 안 죽어도 되는데  율법이 꼭 그렇게 실행되지 않는데,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거룩한 불쾌감을 나타내신 것이다. 따라서 우주적 통치 방법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즉 율법 위반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적 통치의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사용하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일벌백계(一罰百戒)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치설(Goverment Theory=정치적 속죄설)이라 한다.

   ◉ 이 주장의 문제점

①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인했다는 점이다.

② 속죄는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 대속이 아니라,

    미래 죄 방지를 위한 모범일 뿐이라 하여  속죄의 가치를 떨어뜨린 점이다.

4. 아르미니안(Arminian)주의 속죄론

(1)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한 공의의 완전한 대속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형벌을 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한 대속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 형벌이 아니라 자선의 대속이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의 속죄 대상은 모든 사람이나(일반 속죄설), 그 효과적인 적용은 궁극적으로 죄인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알미니안 주의자는 속죄의 범위를 확대했고 속죄의 효력은 엄청나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도르트 대회에서는 이들의 보편적 속죄설의 잘못을 지적하고, 제한 속죄설을 채택하였다.

5. 사우머르(Saumur)파의 속죄론

이들은 도르트회의 엄격한 칼빈주의를 부드럽게 하고 동시에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잘못을 피하려 절충설(Amyraldus, Placaeus)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가설적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제 1작정과 제 2작정이 있다고 말하였다..

▶제 1 작정 ―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모든 사람 위해 죽게 하셨다.(일반속    죄설)

▶제 2 작정 ― 추가적 작정으로서 그대로 두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은    혜를 베푸실 대상을 선택하셨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 것을 보나 부자연스러운 것을 면할 수 없다.

Ⅳ. 종교개혁 이후의 속죄론

1. 스코틀랜드(Scotland)의 Marrow(정수,알맹이)논쟁(1717~1722)

Marrow 논쟁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일어난 논쟁이다.

▶ Scotland 역사∶

1560년 John Knox가 장로교를 국교로 하였다.

1603년 James Ⅰ세와 Charles Ⅰ세가 Willam Load라는 대주교를 통하여 James Ⅰ세 때부터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한 왕이 통치를 한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한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한 나라가 된 것은 1703년의 일이다. Charles Ⅰ세가 스코틀랜드에 감독정치를 강요하였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제까지 장로 정치를 해왔는데 감독정치를 강요하니까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국의 의회 청교도들과 연합하여, ‘거룩한 연맹’을 맺는다. 이 사람들을 언약주의자(Covenanters)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1689년 William Mary가 공동으로 장로정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7세기 한 세기동안 너무 심한 율법 주의적 장로교였다.

18세기 초 Moderate파(Calvin주의도 완화하고, 신앙생활도 완화하는 파)가 스코틀랜드에서 득세하게 되었다. 득세를 하게 되자 이들은 자꾸 신학적인 변질을 하게 된다. 자꾸 변질을 하게 되자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Free Church를 만들게 되었다. 1843년 Thomas Chalmers를 중심으로 Free Church로 분리하게 된 것이다.

▶ Marrow 논쟁 :

18세기초에 Moderate파와 Moderate파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의 문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18세기 초에 두 가지 파가 나타났다.

⑴ 신 율법주의(Neo-Nomianism = Moderates)의 속죄론

 18세기 초 Scotland 국가교회가 주도하던 파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케 했고, 인간에게 먼저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셨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이 아니고,  회개와 믿음(신앙과 회개=회심 ― 이것을 신율법이라 하였다)으로 되는 것이라 하였다.  신 율법에 순종한 의가 칭의의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름만 바꾼 Arminianism 이었다.

⑵ 머로우(Marrow Men)파 의 속죄론

 1647년 Edward Fish가 「Marrow of Modern Pivinity」(현대 신학의 정수)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신 율법주의를 비판하자, 이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Marrow Men이라고 불렀다. 18세기에 이를 따르는Marrow Men 중에는 James Hog , Thomas Boston등이 있었다.Marrow Men의 주장은 칼빈주의와 비슷하면서 Saumur주의와 비슷했다.

①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며 선택적 사랑 (Electing love)을 강조하였다.

② Giving love를 강조하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죽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 신뢰를 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합일이 되고 그리스도와 합일이 오면, 그 다음에 선행을 행할 능력이

   오고, 죄를 버릴 능력이 온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와 비슷한데, Saumur가 섞인 완화된 칼빈주의다.

   Marrow Men은 Moderates를 율법주의자라고 부르고, Moderates는 Marrow Men을 율법 폐기론자라고 불렀다.

   1720년 Scotland의 Neo-Nomianism(=Moderates)들은 Marrow Men을 율법폐기론 자라 하여 정죄 하였다.

2. 실라이마허(Schleiermacher)의 속죄론

    실라이마허는 신비설(Mystical Theory)을 주장했다

▶ Schleiermacher의 주장

대속 교리를 완전 부인하고 그리스도는 죄성을 소유한 인간이나 성령의 감화로 죄성이 범죄로 나타나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활동은 창조적인 것이어서 심령을 감화시키며, 생명을 주는 영의 위대한 힘이며, 그는 자발적인 순종과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심오한 주관적 변화를 일으켜서 인간의 “신 의식성”을 높인다고 하였다.

                              예수    보통인간

인간---신 망각성      0%       100%

           신 의식성      100%     0%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은 보통 인간에게 “신 의식성”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비설이라 한다.

▶ 신비설은 도덕 감화설과 공통점 및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가지고 있다.

      공통점 ― 영향을 미쳐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

      차이점 ― 도덕 감화설은 도덕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인데, 신비설은 잠재 의식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 Schleiermacher는 현대 신학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 그는 현대 조직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 조직신학은 Schleiermacher 이후로 객관성을 상실하고 주관화되었다. 그래서 학자마다 제각기 주장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보게된다.  Schleiermacher가 영향은 크게 미쳤으나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엄청나게 악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3. 리츨 (Ritschl)의 속죄론

리츨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실과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화목은 완전히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태도의 변화에서 생겨진다고 하였다.

▶ Ritschl의 개념은 타원에 두 개의 중심이 있듯이,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윤리적인 나라이면서, 현세적인 나라이다. 영적인 나라가 아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서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죄란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속죄라는 것은 이 공동체 안에서 승리하는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속죄라고 주장하였다.

▶ 속죄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관련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창설하셨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공동체 안에서 순종, 신뢰, 세상 향한 승리 의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Ritschl을 따르는 사람은 공동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Ritschl의 속죄론은 개인의 형벌 대속과는 무관한 것을 보게된다.

4. 미국 후기 뉴잉글랜드파(New England Theology)의 속죄론

Joseph Bellamy, Samuel Hopking은 Timothy Dwight의 제자들인데 Yale 大에서 1820년에 큰 부흥(제 2차 대각성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Timothy Dwight의 외할아버지 Jonathan Edward 때에는 철저한 칼빈주의 였다. 그러나 Timothy Dwight 때에 와서는 약간 수정 칼빈주의(Modifier Calvinism)로 수정 되었다.  이후 Joseph Bellamy 때에 와서는 완전히 알미니안주의로 빠졌다. 조금 지나서 Yale 大에서 Horace Bushnell이 나오게 됐는데. 그는 완전히 자유주의자(Liberalism)가 되었다. 이것을 가리켜 New England Theology라고 한다.

Joseph Bellamy,와 Samuel Hopking의 속죄론은 통치설과 간접 전가설을 따랐으나  Horace Bushnell은 “인간이 왜 죄인이냐?”며 인간의 죄성을 점점 부인하고 인간은 착한 존재라 하고, 그러므로 인간은 양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착한 인간을 잘 길러주면 착한 인간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속죄론은 도덕 감화설이었다. 그의 저서 ‘대리적 희생「Christian Nerture Vicarious Sacrifice」'에서 도덕 감화설을 취하였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셔야 한다는 관념을 거절하고,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 되어 사랑과 순종의 새 정신을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요구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의 모든 거룩과 고난받으신 사랑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니 이것이 속죄라고 하였다.

▶ 유화(宥和 Propitiatiation)설

신의 진노를 달랜다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달래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속죄의 한 단면 가운데에는 Propitiatiation이라는 단면이 있다. (레온 모리스가 Propitiatiation 개념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는데 그는 성경의 속죄 가운데에는 Propitiatiation 개념이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하였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2일 / 03- 09-2024(토)
출애굽기 22:1-3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배상하라(출애굽기 22:1)

갚을찌니라.
배상

3절.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7919) 배상할 것이(369)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 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4376)

7919. 사칼(
sâkal)  שָׂכַל  

1. 바라보다
2. 신중하다
3. 피엘형 : 창48:14.
발음 [ sâkal ]
구약 성경  / 61회 사용

369. 아인( ’ayin)  אַיִן     

1. 무.  2. ~아니다.  3. ~ 없는
발음 [ ’ayin ]
어원  /  연계형 אֵין, ‘존재하지 않다’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무, 공허, 진공, 사 40:23] :
구약 성경  /  787회 사용
4376.  마카르(mâkar) מָכַר   
1. 팔다.   2. 약혼시키다.  3. 민족을 팔다
발음 [ mâkar ]
구약 성경  / 80회 사용


해 돋은 후
- 가택 침입자를 죽였을 경우, 야간과 달리 주간에 살인죄가 성립되는 이유는 밝을 때에는 이웃의 도움이나 기타 방법으로 그를 사로잡거나 내쫓음으로써 살인만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당 방어의 차원을 넘어 과잉 방어의 경우에는 주인이 그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는 본 규례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이 부정되어지는 것을 금하고 있는 모세 율법의 탁월성을 잘 보여준다<레 25장 강해, 모세의 율법과 고대의 법전들>.

몸을 팔아... 배상할 것이요
- 이처럼 모세 율법이 도둑질에 대하여 엄격한 형벌을 가하고 있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큰 경고를 주어 도둑질을 금하게 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명령은 땀흘려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을 가지고 생활하라는 것이었다(창 3:19).
그런데 도둑질은 이에 역행하여 자신은 땀흘림이 없이 타인이 수고한 대가를 가로채려는 패역 행위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도둑질에 대하여 수차 엄격한 금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신 23:24; 엡 4:28; 벧전 4:15).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1일 / 03- 08-2024(금)
출애굽기 21:1-36
찬송 / 349장(나 주의 도움 받고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귀를 뚫을 것이라(출애굽기 21:6)

재판장(*, 엘로힘)
- 이는 본래 지존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다(창 24:3;수 2:11. 그러므로 70인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귀를 뚫을 것이라
-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이었던 것같다(Knobel). 왜냐하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이었으니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일 칼타고인들은 종의 표식으로 종의 귀에 귀걸이를 매달았다고 한다(J. P. Lange). 한편 키케르(Cicero, B. C. 106-43)는 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리비아 노예에게 '네 귀를 충분히 뚫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다.

십계명과 613가지 규례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인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녀를 낳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법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종에 대한 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남종을 향한 5조이고, 7~11절은 여종을 향한 5조입니다.
종들은 6년간은 의무적으로 종살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7년 째 되는 해에는 무조건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살다보니 주인이 너무나 좋고, 나가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주인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결심이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처리하는 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송곳으로 귀를 뚫은 종은 어떤 종입니까?
이 시대 스스로 자진하여 귀를 뚫은 종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첫째,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기로 자원함(영원한 하나님의 종) 6절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종이 되는 경우를 몇 가지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1. 빚을 갚지 못해서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레 25:39).
2.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하라고 하십니다(출 22:3).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종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6년만 참고 종살이 하면 7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종의 노동 연한을 ‘6년’으로 정한 기준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6일간 일하시고 제 7일에 쉬셨다는 데 있습니다.

제7년에 자유함을 얻은 종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획득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것은 우리가 지금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젠가는 자유함을 주실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6년을 종으로 살고도 “나는 내 주인이 너무 좋고 내 처자가 좋아서 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결단하면 주인은 그를 재판장에게 데리고 갑니다.

재판장은 그 종의 의사를 확인하고 문설주에 종의 귀를 대게 합니다.
그리고 송곳으로 귀를 뚫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종이 되었다’ 라는 표시입니다.

자원하여 귀를 뚫은 종은 어떤 종입니까?
그는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기로 자원한 종인데, 이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를 자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한번 구멍 뚫은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헌금을 하는데 한 아이만 헌금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교사가 아이를 따로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헌금할 돈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화

선생님은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몸과 생명과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기도드려요.”
그 말에 감동한 선생님은 아이를 격려하고 나서 약간의 돈을 주면서, ‘잔돈으로 바꿔 매주일 1달러씩 헌금하라’고 말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매주 꼬박 꼬박 헌금을 하던 소년이 더 이상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잔돈으로 바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헌금을 했는데, 사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어요.
사먹으면 죄를 지을 것 같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 몽땅 바치고 이제는 다시 기도만 하기로 했어요."

어려서부터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하던 소년이 바로 1884년 부활절에 당시 미국인들에게 불모지나 다름 없던 조선 땅에 건너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님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먼 오지인 한국에 와서 평생을 귀에 구멍 뚫은 종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여러분은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까?
여러분은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자유까지 포기하고 자원하여 영원한 주님의 종이 되기로 헌신하셨습니까?

프랑스 군대의 최고의 명사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 봉급을 절약하여 조그마하고 아담한 집을 샀습니다.
그 집은 담쟁이 덩굴이 우거지고 각종 꽃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하여 평화롭게 이 집에서 살 수 있을 때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무렵 보불전쟁이 발발했고, 독일군이 이 조그만 마을을 점령하여 그의 집을 병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명사수인 병사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대포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그를 지휘하는 장군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저기 저 시골집이 보이나?”
병사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 집을 장군이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집에 독일군이 들어가 있네. 잘 겨냥하여 일격에 날려버리기를 바라네,” 장군이 말했습니다.
명령에 복종한 이 병사는 그가 가진 기량을 다하여 장군이 지적한 집을 겨냥했습니다.
무서운 굉음이 터지면서 그 아름다운 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잘 했군,” 하며 장군이 병사를 돌아다 보았을 때, 병사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자네 왜 그러나? 무슨 일이야?”
그러자 충성스러운 병사는 대답했습니다. “장군님, 제 집입니다.”
이 병사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어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엄숙한 결단의 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상전을 사랑하니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자유를 포기한 종) 5절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 

누구든지 잠시라도 종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득이 종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6년만 참고 주인을 섬기면 이제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원하여 귀 뚫은 종은 6년 만에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거절하고 영원한 종이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6년 종은 임시 종이요 귀 뚫은 종은 영원한 종입니다.
이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 것을 가리킵니다.

귀를 뚫은 것은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자유를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포기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실 7년째의 종의 해방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은 주인의 신앙적인 행위에 기인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6년간의 종 생활을 마친 자에게 신분상의 자유만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자립의 기틀까지 마련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해방되는 종들이 빈손으로 출발하게 되면 분명히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또다시 빚을 지고 종이 되는 생활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6년 간 부렸던 주인으로 하여금 얼마의 물질을 주어 보내도록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15:12-14
“···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영원히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고 자원하는 종의 마음을 보십시오.
귀에 구멍 뚫은 종, 상전을 사랑하여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한 종 --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맡기십니다. 

링컨이 어느날 시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노예시장이었습니다. 한 가족을 진열하여 놓고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뿔뿔이 헤어져 따로따로 팔려가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종이 필요하다고 그 가정의 예쁜 딸을 사가려고 하니까 딸이 안 떨어지겠다고 부등켜 안고 몸부림치면서 막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링컨은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가가서, 그 종의 가정 식구를 모두 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몸값은 내가 다 지불하였네. 그대들은 이제 자유네.” 그때 그들은 말했습니다.
“주인님, 우리는 주인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영원한 종이 되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거절하고 자원하여 종이 되기로 선택한 종이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자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시간을 쓰는 사람, 내가 가진 물질을 다 쓸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자원하여 주님께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 내 몸의 편함을 누리기를 거부하고 주님의 일을 위해 몸을 불사르기를 자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수석을 달리는 우수한 학생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그는 크리켓으로 영국 전체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캠퍼스 집회에 참여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가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 때문에 그는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선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치고 중국 땅으로 갔습니다.

중국에서 10여 년을 섬긴 후에 그의 육신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투병 생활을 하던 중 그는 다시 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결정이라며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스터드가 남긴 말은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날 위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로 만족해서도 안 되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주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셨습니까?

3. 귀를 뚫은 귀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종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는 종) 5절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 

아무리 종이라도 귀에 구멍을 뚫지 않으면 종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에 구멍을 뚫으면 평생 종이라는 표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종은 자원하여 귀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 이 흔적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종이라고 깔보는지 모르지만 본인은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귀에 구멍 뚫은 종은 종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성경 인물 중 종의 직분을 그리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서신서의 초두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빌립보서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디도서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

바울 사도는 자신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하며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매를 맞았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받은 많은 상처와 고통의 자국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그의 자랑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이 흔적을 ‘예수님의 흔적’이라 하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몸에는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신학, 철학, 음악, 의학 등 4개의 박사학위 소지자인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사명으로 아프리카 오지에서 흑인들을 위해 일평생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에 온 방문객이 그의 헌신을 보며 “당신 같은 사람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 프랜시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프란시스는 아무에게도 이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그에게 난 못자국, 창자국, 채찍자국을 그의 옷을 빨래하던 여인만이 알았습니다.
빨아도 빨아도 자꾸만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프란시스는 온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던 주님의 참 종이었습니다.

귀에 구멍 뚫은 종은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표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살아간 종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탈북자인 <이순옥> 여사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호주를 비롯한 곳곳에서 북한의 참상을 증언했습니다.
그 분은 북한의 감옥과 교화소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 증언이 책으로 엮어져 나왔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교화소 안에는 용광로 시설이 있는 작업장이 있는데, 그 곳에서는 무기 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옷도 거의 입지 않고 고무로 된 치마만 걸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는데, 멀리서 보니 그들은 머리가 둘 달린 괴물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까이 가 보니 고문을 당해 머리에 혹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척추가 내려앉아 꼽추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곳의 간수들은 그들을 <하늘을 믿는 미친놈들>이라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믿는 이 사람들은 누굴까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간수들은 징을 박아 만든 구두로 그들을 밟고 짓이기곤 했습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부러져 나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주여, 주여>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고통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얻어맞다가 죽으면 시뻘건 쇳물을 갖다 부어 숯처럼 만들었는데, 공장 안에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북녘 땅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지하교회 성도들이 계십니다.
남한의 교회는 북한 인권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북한 성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연합하여 움직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은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나요?
천국에 가 봤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천국에 가 보지 않았지만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을 오히려 천국 가는 보증수표로 생각하고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의 종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피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 흔적이 복음이 되어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나는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사람들로 부름받아 나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주님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하는 종이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가 가기 원하는 곳으로 마음껏 달려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로 기도하며 걸어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여러분의 육체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며, 여러분의 시간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여러분의 물질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참된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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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싱(Piercing)

요사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피어싱(piercing)이 상당히 유행을 합니다.
피어싱이란 몸의 각 부위에 구멍을 뚫어 고리들을 끼우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자면 귀, 입술, 눈꺼풀, 코, 혀, 배꼽 등등 어느 부위든지 뚫어서 고리를 끼우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피어싱이란 게 마시면 마실수록 계속 더 마시고 싶은 콜라처럼 살을 뚫으면 뚫을수록 계속 뚫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대개 피어싱을 하는 사람들은 뚫는 순간은 만족을 느끼나 다 채워지지 못한 다음 욕구를 위해 뚫을만한 또 다른 부위를 찾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잘 하지 않지만 귀걸이는 대개 하는 편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도 귀걸이는 웬만하면 한 번쯤은 해 보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귀걸이의 유래를 바로 알고 하는 사람은 별로 드문 것 같습니다.
귀걸이가 어떻게 유행되었느냐고요?

오늘의 말씀이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즉 한 가정의 종(노예)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 위한 종의 표시로서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따라 종에게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시적인 종과 귀를 뚫은 영원한 종입니다.
귀를 안 뚫은 종은 평생 종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 6년 동안만 주인에게 속하여 있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본래의 자유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안식년이 되면 주인도 그 종을 놓아주어야 하고 그 종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으나 대신 혼자 주인의 집에 들어왔으면 혼자 나가면 됩니다.

가령 장가를 들어서 왔으면 아내와 함께 나가게 되나 만일 그 아내가 주인이 돈을 주고 사와서 그 종에게 아내로 준 상태라면 아내는 물론 그 낳은 자식도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종(노예)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를 원한다면 그 종이 자원하여 영원한 종이 되는 표시로서 귀를 뚫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06절).
그러면 이때부터 그 종은 종이지만 행복하고 즐거움이 있는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저는 바로 귀를 뚫은 행복한 종에 대하여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되었습니까?


1. 전쟁에서 붙잡힌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경우입니다(민 31:09; 왕하 05:02).
이것은 전쟁에서 가능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오기 위해서와 적군이라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긴 법입니다.

2. 너무 가난해서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주인의 보살핌 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는 피치 못할 사정인 것이지요.

3. 자녀를 양육할 수 없어서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출 12:02, 07; 레 25:39).
물론 이것도 주로 가난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종이란 얼마나 불행한 신분입니까?
자유는 고사하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 인간성을 부인 당해야만 하는 불행한 존재입니다.

옛날 종의 비참 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종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오직 주인이 짝지어 주는 대로만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결혼하여 잘 사는데도 주인이 이혼하라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혼도 해야 했는데 그만큼 주인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주인은 마음대로 종들을 희롱할 수 있었고, 종들은 주인의 갖은 학대와 힘든 노역에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했으니 주인의 권세는 대단했고 동시에 종이 된다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었습니다.

노예제도가 가장 성황하던 로마 제국 당시에는 종들이 무려 육천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최대의 행운은 종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최고의 행복은 종의 생활을 하던 자가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전해지는 유대인 남자들의 기도문 중에 의하면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다음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했다고 하죠.

1.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2.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3.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 부정과도 다름없는 노예제도를 언약 백성 가운데 율법으로서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2절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히브리인의 종의 제도가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그 기간이 6년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요.

히브리 종은 육년간 고용된 계약 노동자로서 종이 그 기간이 지나 자유함을 얻을 때는 더 이상의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조건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주변 상황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것으로서 노예제도의 근본 정신이 사랑과 자비에 있음을 신명기 15:12~1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15:12-14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이렇게 보면 종이 실제로 고난의 종살이를 하는 것은 계산적으로 하자면 얼마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년은 자신의 몸값이나 부채의 반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그리고 한 이년간은 그 동안 먹고 산 것에 대한 값으로 여기고, 한 일년은 나아갈 때 얻는 물품 값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이처럼 당시 히브리인들의 종에 대한 규례는 다른 여러 종에 비해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규례는 종의 규례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어렵게 된 사람을 돕는 규례라는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물질이 없어 부채를 지거나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살만큼 준비시켜 내 보내는 제도가 바로 히브리 종의 제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50년째가 되는 희년이오면 그때는 노예가 된 그 사람을 놓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빚으로 잡혔던 농토까지도 전부 되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자원하는 영원한 종 

같은 유대인들끼리 종을 삼았을지라도 칠년 째 되는 안식년에는 반드시 자유인으로 신분 환원을 시켜 주어야 함이 법입니다.
그러나 종 된 사람이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주인을 위해 평생 종이 되겠다고 하면 재판장의 허락을 받아 송곳으로 그 귀를 뚫어 영원한 종이 되는 의식을 가집니다. (5-6절)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재판장(엘로힘) : 이는 본래 지존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인데(창 24:3; 수 02:11) 70인 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귀를 뚫을 것이라 :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Knobel).
왜냐하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으로서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아내나 자식들 때문에 주인을 떠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자원하는 종으로서 이 사람은 평생토록 그 주인을 섬깁니다.
해방될 날이 없지요. 해방이라면 그 종이 죽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혹 이 종이 마음이 바뀌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려고 할 때 주인이 재판장에게 이 사람은 귀를 뚫은 종입니다 라고 말 한 마디만 하면 재판장은 그를 떠나지 못하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데 귀를 뚫었던 흔적이 그를 평생 종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빚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고마움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자로서 그에게는 안식년을 맞아 서 귀를 뚫기 전 주인을 계속 섬기거나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상전과 자신의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자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니 이제부터 그는 비천한 노예가 아니라 진정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유를 허락한 그 주인이 너무 고맙고 좋아서 자유를 포기하는 종이 주인님! 제가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것보다 주인의 집에서 영원히 종으로 사는 것을 원한다면 그 종을 어떤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 종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의 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인은 그날부터 그 종을 예전처럼 부리지 않고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하게 됩니다

자원해서 된 종, 사랑의 종, 자유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이 종이 짊어지고 다니는 종의 멍에는 결코 무거운 멍에가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그리고 충성한다면 얼마나 그 신앙이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가령 아내가 여보,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내가 평생 당신을 섬기겠어요 라고 자진해서 고백한다면 이것은 진짜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긴다면 그 멍에는 결코 무겁지 않을 것이며 그 대상이 주인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수직적 명령계통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며 성도간에는 모든 일을 섬기는 자세로 살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나는 어떠한 종이며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절에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던 바울이 13절에서는 왜 또 다시 종노릇을 하라고 명하고 있는지를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먼저 무엇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까? 죄에서 자유, 사단의 지배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유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 타락과 방종의 기회, 다시 사단에게 지배를 받는 자리에 떨어지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13절의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경고의 말 속에는 그 자유로 주님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라는 적극적인 추진력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스스로 종노릇을 하는 사람 아닙니까? 자원하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주님을 향하여, 성도를 향하여 귀를 뚫은 종이 되어야지요. 기쁨으로 종노릇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참 자유를 주신 분, 우리에게 참된 죄사함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불행한 처지의 노예처럼 부리려고 종이 되라, 종노릇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주님의 종만이 아니라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13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수직적인 관계의 종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의 종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섬겨야 하고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피차에 서로 복종할 수 있고, 피차에 종노릇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인간 관계는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풍요롭고,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목사가 성도들을 섬기고, 성도들이 목사를 섬기는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겨 피차에 복종한다면 그 부부의 삶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까?
아우가 형을 섬기고 형이 아우를 섬기는 가정, 경영주가 노동자를 섬기고 노동자가 경영인을 섬기는 직장은 얼마나 생산성이 높겠습니까?

인간 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잡아먹으려고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자연히 서로를 섬길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종노릇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주님의 종노릇을 해야 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사랑하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이웃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자원하여서 귀에 구멍을 뚫었던 종들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종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 서로 종노릇을 하지 못하는 이 세대는 서로 잡아먹으려고 하며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 시기 질투하여 이용하고 착취하려 하는 비극의 세대입니다.

분명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사랑의 종노릇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종이라는 단어 얼마나 비천한 단어입니까? 인간이면서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한 체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이란 단어를 가장 영광스러운 단어로 바꾸어 놓았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6- 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D. L. 무디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했느냐 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 입니다.

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이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로부터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셨다면 우리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종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종이 세상으로 나갈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의 종이 되고자 귀를 뚫겠다는 것은 상전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 상전을 잘 섬기고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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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히브리 노예에 대한 율법 규정 중 일부분입니다.
노예에는 전쟁 노예 히브리 노예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전쟁 노예는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 출신으로 노예가 된 이방인들입니다.
반면 히브리 노예는 동족 중에서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히브리인이 노예가 된 이유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타인에게 손해를 끼쳤는데 이를 배상할 돈이 없는 경우, 몸으로 때우기 위해서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예가 육년 동안을 섬긴 후 제 칠년에는 자유를 주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본문과 같은 규정이 있는데 약간 다릅니다.

"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신명기 15:13,14)

보낼 때 공수로 보내지 말고 후히 주어 보내라는 부분이 신명기에는 추가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자유한 종이 이후에 먹고 살 밑천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빈 손으로 나가게 되면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또 다시 다른 집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6년을 섬기고 제 칠년에 자유를 주었을까요?
이는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규례는 7년을 일곱번 보낸 49년을 지낸 후 50년마다 돌아 오는 희년 규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희년에는 노예 해방 뿐 아니라 노예가 되기 전에 저당 잡혔던 농토까지 돌려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자비의 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제도는 경제적으로 파산난 사람을 일거리를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보낼 때는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시켜 보내 주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이스라엘 버전의 빈민 구제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는 일시적인 노예 신분은 있었지만, 사실상 노예 제도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을 가진 민족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게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였습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처자식까지 노예 신분은 세습되었습니다.
어떤 주인이 노예를 딱 육 년만 부려 먹고 퇴직금까지 두둑이 챙겨서 자유를 주겠습니까?
육년을 일하면 기업체로 치면 과장 직급으로서 가장 일을 잘 하고 열심히 할 때입니다.
종을 풀어 주려고 할 때 주인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이 규례를 잘 지키지 않는 주인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심한 책망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인들이 종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지 않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대신 자유를 주어 그 주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규례를 이처럼 중요시 여기실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보통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서로에게 남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 아래 있는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종 삼는 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례에서 정말 특별한 것은 스스로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에 보면 첫째는 주인을 너무 사랑해서 둘째는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계속 종이 되길 소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살이 도중 결혼한 처자는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어 함께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에 속했습니다. 처자를 사랑해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그럭저럭 쉽게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사랑해서 자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종이 되기를 원한다니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택을 받은 그 주인은 어떤 주인일까요? 그 주인은 분명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공의롭고 만사를 공평하게 다루는 주인일 것입니다. 그 주인은 노예를 노예를 여기지 않고 친 자식처럼 친 형제처럼 아끼는 주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본래 자유하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아무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이 되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신 이유도 역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 성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종이 이렇게 영원히 종이 되길 원하는 경우 재판장에게 가서 문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은 누가 귀를 뚫습니까? 주로 자매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귀를 뚫습니다. 또 피어싱이라는 이상야릇한 취미가 있어서 귀 뿐만 아니라 코, 배꼽, 심지어 혓바닥까지 뚫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귀를 뚫는다는 것은 치장이나 취미가 아니라 영원한 예속을 상징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군대에서 "말뚝 박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말뚝을 박는다는 것은 군대에 장기 복무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군에서 다른 건 강요하지만, 장기 복무 선택만큼은 본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다들 말뚝 박기를 극도로 싫어 합니다. 군에서 가장 심한 저주가 ‘너 말뚝 박아라’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그 중에 군대가 좋다고 장기 복무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기 복무를 지원하기 전과 후는 군인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원 전에는 의무 복무 군인이었지만, 지원 후에는 자원하여 복무하는 군인 즉 직업 군인이 됩니다. 귀를 뚫기 전이나 후나 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귀를 뚫은 후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이 됩니다. 의무에 의한 종이 아니라 자원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 가운데 스스로 속박되기를 결정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원하는 종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래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유와 퇴직금도 다 버리고 스스로 종이 됩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사랑은 그 소중한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종이 되기를 기뻐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의무에 의한 종은 6년이라는 의무 복무 기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종은 종신토록 그 상전을 즐거이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이 생각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 장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이란 분도 항상 싸인을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 남준’이라고 서명을 하십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빚을 진 자였습니다.
이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인생이 파산했습니다.
빚을 갚기는 커녕 날마다 그 채무가 점점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내 대신 댓가를 지불하시고 빚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그 댓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어린 양의 보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의 종 노릇하던데서, 사단의 종 노릇 하던데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또한 우리는 율법과 양심의 의무 아래서 짓눌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율법의 의무 아래서 신음하며 짓눌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를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도 율법 앞에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율법로부터 자유케 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늘 자신을 종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귀 뚫은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귀 뚫은 종이 된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때문에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자원하여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귀를 뚫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송곳으로 귀를 뚫듯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죄악된 성품 곧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 다음으로 종신토록,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헌신하는 종이 됩니다.

여러분 귀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코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분은 어디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까? 귀 뚫은 종도 있지만 코 뚫은 종도 있습니다. 코 뚫은 종은 코에 코뚜레가 끼여서 주인에게 질질 끌려가는 종입니다. 코 뚫은 종은 가기는 가되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끌려 갑니다. 코 뚫은 종은 주인이 고삐를 당기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이런 코 뚫은 종이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는 첫째 종은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이 종은 말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너무 많은 부담과 의무를 지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 종을 악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가 악한 종일까요? 이는 그가 주인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굳은 사람도 아니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그런 가혹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 주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달란트를 묻어 두는 바람에 결국 주인을 악랄하고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 셈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인상을 박박 쓰면서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저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가혹한 존재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질질 끌려가며 신앙 생활하는 본인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얼마 전에 러시아 김 에스더 선교사님이 오셨을 때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니 아직도 기타 들고 찬양을 인도하세요? 나이가 몇인데..."
그런데 찬양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찬양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즐겁고, 찬양 중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에 기쁘게 찬송합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준비해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꾸만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고 자꾸만 더 하나님께 기대고 싶습니다.
이제 보니 코에 뚫려 있던 구멍이 어느새 귀 쪽으로 옮겨져 버린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던 것일까요?
원인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저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제 영혼에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은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이 좋다는 말 속에 온갖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면서 능력이 크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귀를 뚫어서라도 영원히 그 곁에 함께 있고 싶은 분이십니다.
사람을 돕다 보면 과거 저와 같이 코 뚫은 종처럼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너무 안타까워서 속으로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참 좋으신 하나님인데 ..."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우리 속에 새 영을 창조하시어 좋으신 하나님을 알게 도와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심령을 우리 모두 속에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코를 뚫어 질질 끌고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 가운데 사랑으로 스스로 속박되어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주를 섬기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이미 우리 속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새 본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고 즐거이 주님을 따르는 귀 뚫은 종들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0일 / 03- 07-2024(목)
출애굽기 20:1-26
찬송 /266장(왕의 명령 전달할 사자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십계명(출애굽기 20:2)


십계명(十誡命, .עֲשֶׂרֶת הַדִּבְּרוֹת‬,  Decalogus)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계명이자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모세 율법은 출애굽기 20:1-23:33의 ‘계약서’
신명기 1장-29장의 ‘신명기 법전’
핵심은 출애굽기 20:1-17, 신명기 5:6-21에 해당하는 열 가지 계명이라고 하겠다.

십계명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아쉐레트 하드바리임"(열 가지 말씀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출애굽기 34:28, 신명기 4:13, 10: 4에서 언급된다.

출애굽기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Moses was there with the LORD forty days and forty nights without eating bread or drinking water. And he wrote on the tablets the words of the covenant--the Ten Commandments.

십계(the Ten Commandments)

신명기 4:13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He declared to you his covenant, the Ten Commandments, which he commanded you to follow and then wrote them on two stone tablets.

신명기 10:4
여호와께서 그 총회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The LORD wrote on these tablets what he had written before, the Ten Commandments he had proclaimed to you on the mountain, out of the fire, on the day of the assembly. And the LORD gave them to me.

십계명을 소개하는 출애굽기/탈출기 20장 1절에는 “이 모든 말씀”으로 나오고, 신명기 5장 5절에는 “주님(야훼)의 말씀”으로 나온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히브리 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70인역(Septuagint, LXX), 타르굼, 불가타(Vulgata, 새 라틴말 성경) 등에 근거하여 이를 말씀들, 즉 복수로 수정할 것을 BHS 비형 각주는 제안하고 있다.

십계명은 70인역에서 모두 목적격으로 나타나는데, 출애굽기/탈출기 34장 28절과 신명기 10장 4절은 '투스 데카 로구스'로, 신명기 4장 13절은 '타데카 레마타'로 번역되고 있다.
모두 "열 가지 말씀들"로 번역이 된다.
이 계명들은 출애굽기/탈출기 20장 3-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지만, 그 순서와 일반적인 내용은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십계명이 주어진 방법

십계명은 두가지 방법으로 주어졌는 데, 하나는 하나님의 선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둥소리와 번개와 트럼펫의 소리가 널리 펴졌으며, 사람들에게 경외와 존경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였다.

예레미야 31:33에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은 언약이며 이것은 사람의 마음도 돌판처럼 딱딱하여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새길 수 있으며, 이것은 율법의 영원함을 드러내는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뒤 50일만에 주어졌으며, 그들의 행동규범으로 주어졌다.


개신교 및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주(야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해서는 안 된다.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하지 말라.)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쉽게 외우는 십계명

1.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일. 일절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지니라.
이. 이상한 우상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3.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지니라.
삼. 삼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사. 사적인 일 핑계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
사. 사업일 하루 쉬고 안식일을 지키라.
죽을 사. 죽어도 안식일은 지키고 죽어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오. 오늘도 내일도 부모님을 공경하라.
오. 오마이 파파 마마

6. 살인하지 말지니라.

육. 육신을 살인하지 말라

육. 육혈포로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칠. 칠칠치 못하게 간음하지 말라.

칠. 칠배로 저주받을라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팔. 팔로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구. 구차한 말로 거짓증거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십. 십 원이라도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9일 / 03- 06(수)
출애굽기 19:1-25
찬송 / 357장(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사장 나라(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 pontiff.  (라틴어) pontificem.

언약(言約) : 신뢰가 중심이다 / covenant
- 말씀 언, 맺을 약

(예) 노아의 언약 - 무지개
       모세의 언약 - 계명(이스라엘 공동체)
      다윗의 언약 - 나단 선지자(다윗의 가문)

계약(契約) : 이익이 중심이다 / contract
- 맺을 계, 맺을 약


제사장 나라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집트)에서 고역과 학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그 아래 장막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했습니다.

4절에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는 새끼를 옮길 때 입으로 물어 옮깁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어서 옮깁니다.
새끼를 등에 없어서 높이 올랐다가 새끼를 떨어뜨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등에 업어서 올라가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새끼에게 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 훈련이 반복될 때 새끼들은 두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새끼를 안전하게 다루어 추락하지 않게 하며 스스로 날 수 있도록 성장시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했다는 것은 두려운 상황이 연속되는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8-14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역과 학대를 당할 때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고 애굽 추병들을 수장시켰습니다.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으나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풍성이 먹게 했습니다.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어 아우성이었으나 반석에서 물을 내어 풍족히 마시게 했습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과 싸워 이기게 해 주시고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게 해 주었습니다.
심히 두렵고 무서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안전하게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거치면서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군대가 홍해 바다에 몰사한 사건까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신 그 놀라운 사건들을 생생히 두 눈으로 목도하였다.
이제 하나님은 율법을 베풀기 전, 그 구원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시키고 있는 것이다(사 43:3-7).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 사랑의 팔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 인도하시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Keil).
이러한 표현은 신명기 32:10, 11, 12에 보다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 곳을 참조하라.

마치 독수리가...새끼를 받으며
-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려 날게 한다.
그런 후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다가 새끼들이 힘에 부쳐 떨어질 때는 재빨리 그 강한 날개로 받쳐 결코 새끼들이 해(害)를 당하지 않게 한다.
이런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독수리답게 강하고 튼튼하게 키운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랑과 공의로 훈련시키셨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출 19:4).

그 보금자리를...너풀거리며
-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졸고 있을 때 깨워 날게 하려고 어미 독수리가 그 둥우리를 어지럽게 휘젖는 것을 가리킨다(Knobel, MatthewHenry).

새번역 성경
출애굽기 19: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초하룻날, 바로 그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폰티펙스(pontifex)는 교량을 의미하는 '폰스'(pons), '폰트'(pont-)와 '무언가를 만들다, 이루다를 뜻하는 '파케레'(facere)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인도하신 언약적 목적을 제시했습니다.
5-6절에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소유'는 일반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매우 값진 아주 귀중한 보석을 의미합니다.
모든 족속 가운데 가장 귀히 여기는 족속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과 모든 나라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을 때 그들 대신 제사를 드려 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의 은혜를 입게 하는 직책으로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는 중보역할을 하게 하는 위치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를 70인역에서는 'βασιλειον ιερατευμα' (왕같은 제사장직)로 번역했는데, 이는 왕처럼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서 중보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번영하여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나라에 계시되고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 우위에 있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적으로 구별된 생활을 하므로 모든 백성이 흠모할만한 영성이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열방 백성이 사모할 만한 독특한 영적 가치(καρισμα)가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귀한 존재로 삼는다는 것, 열방 백성이 존중할만한 영적 가치가 있게 하는 동시에 군사와 경제에 있어서도 부강하게 한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중보 위치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구원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신다는 언약적 목적을 제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에 따른 언약적 요구를 하셨습니다.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주관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왕같은 제사장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그리해 주실 만한 인격적인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고... 조건이기도 하지만 마땅한 반응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구원하여 인도했으니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할 언약적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목적으로 가지셨습니다.
그 목적 때문에 반드시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외부의 대상이나 환경이나 상황이 그 목적을 헛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할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19:21. 신칙(申飭)하라
- 거듭 신, 신칙할 칙
-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

새번역. 공동번역  / 단단히 일러두어라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나 주를 보려고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어라.

현대인 / 경고하여라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들에게 나를 보려고 경계선을 뚫고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여라. 그러다가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4-5)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인 우리들에게 주신 정체성과 동일하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보물 ‘세굴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다. 사명과 이어지지 않은 은혜와 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라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들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런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곧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모든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아론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특별한 제사장 제도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성전제사 업무를 전적으로 책임 맡은 특수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적문직으로서의 제사장 직능이기보다는 존재적 의미 곧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살아야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을 이해하려면 제사장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제사장을 히브리어로는 ‘코헨’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세우다’ ‘정착시키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쿤’에서 파생된 것으로, ‘서있는 사람’ 곧 ‘봉사하거나 돕는 사람’을 가리킨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서 있다’는 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제사장을 ‘봉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사 61:6)

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의 사역은 두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1) 하나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재물과 중보기도를 드리는 일이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백성 대표로 제사장을 가까이 나오게 하셨다. 제사장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과 기도를 바치게 하신 것이다.

(2)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과 축복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과 기도를 드릴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민수기 6:24-26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일이다.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은 아브라함의 부름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주신 약속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아브라함의 받은 복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들도 함께 복을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로 확대가 되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들이 해야 할 기본적이면서도 우선해야 할 일은 중보기도이다. 중보기도는 자신을 넘어서서 남을 위한 관심과 배려의 기도이다. 중보기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응답이 보장되어 있다(약 4:3). 그러면서 중보기도는 자신을 넘어서는 기도이기에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지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한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성숙한 만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고, 많이 본 만큼 더욱 기도하게 되는 거룩한 순환이 이루어진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하나님의 뜻은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들이 정체성을 회복한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8일 / 03- 05(화)
출애굽기 18:1-27
찬송 / 279장(주 하나님의 사랑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 내가 알았도다(출애굽기 18: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Now I know that the LORD is greater than all other gods, for he did this to those who had treated Israel arrogantly.

이제 내가 알았도다
-
'이제'란 말의 히브리어는 '아타'로서 '지금에야', '방금에야'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를 시점으로해서 과거와 미래의 인생관이 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내가 알았도다'란 말은 히브리어의 '야다에티'로서 '내가 깨달았다. ' 또는 '내가 알아차렸다'라는 의미의 현재형 동사이다.
이것은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을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닫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 이드로는 여기서 다른 모든 이방신, 즉 자기가 섬기던 신을 포함하여 애굽의 모든 여러 신들이나 다른 부족들의 신들보다 여호와의 능력이 더 위대함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이 표현을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즉 다신교(多神敎) 사상의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다른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과 비교하여 수사학적으로 강조한 것 뿐이다.
즉 이것은 홍해 바다에서 구원받은 후 이스라엘이 올렸던 찬양이나(15:11), 시편의 노래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시 136:2, 3) 표현과 같은 것이다.


남아공 올리버 판사의 고백

그는 직장을 잃었지만 그 순간 그의 영혼을 찾았다

엘런 페이튼(Alan Paton)이 “당신의 땅은 아름답다(Ah, But your Land is beautiful)”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올리버 판사의 그 섬김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흑백 차별이 심한 나라였습니다.
흑백 차별이 한참 심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에 흑인 교회인 성시온 교회에서 고난주간에 목요일 날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세족식에 참여할 3명의 신자를 선정하였습니다.
그런데 2명의 발을 씻겨줄 사람은 정하였는데 한 명을 결정하지 못했고 결국 저명한 백인 판사를 초청했습니다.

'쟌 크리스티안 올리버(Jan Christiaan Oliver)' 라고 하는 판사입니다.
이분은 대법원장 서리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차기의 유력한 대법원장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순서 가운데 세족식이 있었어요.
누구나 자기가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사입니다.
예수님이 성만찬 하시고 세족식 하신 것처럼,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그날 예배 순서에 세족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올리버 판사는 그 순서가 있는지 모르고 참석을 했어요.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백인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나와서 발을 씻기 시작하는데 올리버 판사 순서가 되었을 때 슬그머니 뒤로 일어나 나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앞으로 나와서 한 흑인 여인 앞에 대야를 놓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흑인 여인은 그 판사님 집에서 30년 동안 종으로 일하고 있는 마르다 포투인(Martha Fortuin) 이라고 하는 여종이었습니다.
마르다 포투인은 30년 동안 올리버 판사의 집에서 그의 아들과 딸들을 돌보았고, 그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그 흑인 여종 앞에 판사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종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의 양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던 그 여종도 울고, 판사도 울고 갑자기 온 예배당 안이 숙연해졌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백인 사회에서 크게 이를 문제 삼았고, 결국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장 직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담임목사님이 너무나 죄송했어요.
자기 교회 초청했다가 판사직을 잃게 되니까 사과하려고 그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때 올리버 판사가 말합니다.

“성 목요일에 당신의 교회에서 행한 예식에 참여한 일은 나에게 판사로서 한 어떤 중요한 일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것에 대하여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판사 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이 이야기를 기록한 저자 엘런 페이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의 직장을 잃었지만, 그 순간 그는 그의 영혼을 찾았다.”
올리버 판사는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하는사회에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차기 대법관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의 윤리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





병행구조(parallel structure)
출애굽기 18장과 창세기 14-15장의 경우

모세를 방문한 이드로

내용개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서서히 민족 공동체로 형성되어 갔다.
본장에서는 이드로의 방문을 계기로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운영해 나갈 최초의 행정 조직을 세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출애굽 한 모세를 찾아왔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받아 공식 생애를 살고 있던 모세에게 뒤늦게 그 처자들이 나타난 것이다(1-12절).
이튿날 백성들의 송사를 혼자 처리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고, 백성 중에 재덕이 겸비한 자를 뽑아 모세를 대신해 행정 업무를 담당시키도록 권고하였다. 이에 모세는 이드로의 말대로 각 지위대로 행정을 담당할 자를 세웠다(13-27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호밥, 사사기 4:11. 르우엘, 출애굽기 2:18)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 근방에 머물렀을 때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동반해서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이드로는 모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애굽인에게 하신 일들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튿날 모세의 재판 광경을 본 이드로는 겸손한 자세로 모세에게 재덕이 겸전한 자를 세워 업무를 분담할 것을 조언하자 모세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영적교훈

모세는 백성들의 송사를 처리하기 위하여 혼자서 하루 종일 수고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개인적으로 모세의 기력을 쇠하게 하고 백성들로서는 송사가 지연되는 불편을 겪게 하였다.
마침내 행정관을 세움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전체 공동체가 더 원만히 움직여 나가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도 혼자의 힘이 아니라, 성도들이 서로 힘을 합쳐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모든 일을 혼자 행하려는 것은 오히려 지치고 낙심케 하기 쉽고, 성도들의 공통된 영적 발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섬김으로 주 안에서 성숙된 성도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고린도전서 13:9~12)

신학의 한 분야 가운데 ‘변증학’이라는 유신론증의 과목이 있습니다.
이 과목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과목의 내용 가운데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어떤 섬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섬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섬에서 새의 발자국을 하나만 발견하면 됩니다.
그러나 새가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섬을 샅샅이 뒤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이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섬에서 발자국 하나만 발견하면 “야, 정말 새가 살았구나”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하나만 발견하면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숲 속에서 동물 발자국을 찾고, 섬에서 새 발자국을 찾아 뒤쫓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집중과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고, 일상의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손자국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한히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자국, 손자국을 발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극적인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과 감동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조각가 로댕은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시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발견하는 동기가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요즘에는 재창조, 제2의 건국, 재 창립 등의 용어를 많이 씁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있던 것들을 새로운 자세, 새로운 비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이런 새로운 의지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왕이 죽은 후에 이사야 6:5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잘 알고 있던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탕자는 집을 나간 다음에 있던 돈을 다 허비하고 돌아와서 비로소 아버지를 새롭게 만납니다.
같은 집이었고, 같은 가족이었고, 같은 아버지였지만 새롭게 느끼며 맞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닭이 울 때까지 자신의 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경험한 다음에 비로소 “이제야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이방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종교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모세
를 권하여 사법제도를 창설할만큼 통솔력이 비범한 미디안의 추장이었습니다.
사위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보았습니다.
그 때 이드로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릅니다.

여러분, 이드로가 이 말을 할 때의 감격을 느끼십니까?
흥분과, 감동과, 기쁨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드로의 모습을 보십니까?
우리도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행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한 고백입니다(11절)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이드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합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재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힘’, ‘제일 원인’, ‘부동의 동자’ 등의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어떤 말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왜 창세기를 기록했을까요? 창세기는 그들의 역사인데 왜 창조 기사를 역사에 썼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란 말입니다.

일본의 어느 목사님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폭포를 보고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함께 구경하고 있던 캐나다 목사님이 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키가 자그마한 일본인이 너무 좋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우리 아버지가 만든 건데 너무 좋지 않습니까?” 캐나다목사님은 놀라서 당신이 누구 길래 아버지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일본인은 자신을 일본의 목사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일본인 목사님께 다음 주일에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주일 예배 시간에 일본인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이 일본에서 오신 목사님은 제가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잘 모르지만 이분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주인의 아들입니다”.

자연 만물과 우주의 신비,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우리의 낮음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태양계가 있는 이 은하계 안에는 별이 일천억 개나 있습니다. 또 이런 은하계가 일천억 개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별의 수는 10의 25승이나 됩니다. 별들과 별들의 거리는 수백, 수천광년씩 됩니다.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 크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려면 말이 적절치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공해가 심하여 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밤에도 하늘이 흐립니다. 이런 흐린 하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잊고 삽니다. 별이 보이는 맑은 하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기 쉽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작업장입니다. 하늘은 그분의 이력서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싶습니까? 그 분의 집을 방문해 보세요. 주소는 하늘시 별마을 10억번지입니다.

자연뿐만 아니라 인생에게도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머리의 좋은 점들이 많이 있답니다. 우선 죄가 적답니다.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라고 하는데 머리털이 많은 사람이 죄가 많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힘을 덜어드린답니다. 머리카락도 헤아리시는데 셀 게 별로 없으니까 하나님이 편하시답니다.

시편 95:3에는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라고 합니다. 시편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모아놓으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크신 주께 영광 돌리세”,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등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찬양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찬송가에도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찬송이 많이 있습니다.

1900년대 초 하이네라는 러시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바디아 산골 마을에서 엄청난 뇌우를 만나 하룻밤을 피신합니다. 이 때 뇌성을 들으면서 노랫말을 만듭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온 우주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어디에나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의 손을 벗어나 도망하다가 벧엘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창세기 28:16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자기 혼자 도망하고, 자기 혼자 고통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는 경험입니다.

칼빈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코넬리우스 플랜팅거 2세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선하신 분이며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고 낯선 분임을 강조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영적인 건강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교자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강조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다시 발견한 자는 하나님께 제사합니다(12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희생을 드리고 예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새롭게 발견하고 “이제야 알았도다”라고 한 그들은 즉각적으로 번제물과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입니다.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는 참 제사의 대상은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방종교의 제사장이 아니라 야훼 종교의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라고 합니다. 찬송과 위대하심을 선포합니다. 찬송과 영광, 이 모든 것이 제사입니다. 예배입니다. 아름다운 산천을 볼 때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찬송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의 명수였습니다. 어디 가든지 먼저 제사를 드립니다. 이사하여 짐을 풀기 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장사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저녁 해가 질 때에 아브라함이 들판에 나왔는데 지는 해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태양을 보고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는 해는 금방 산너머로 사라지지 않습니까? 일어나 보니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털고 일어나면서 “내가 섬기는 신은 영원히 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태양을 숭배하지 않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본의 스스끼라는 학자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00만의 신에서 유일한 한분의 신으로 돌아왔다”. 많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인 것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니콜라스 헤르만이라고 하는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
“첫째,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본래의 마땅한 자세로 예배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셋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완전히 반대란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의 약함과 낮음을 인정하는 예배가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인종차별의 악명이 높던 남아공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에는 흑인과 백인은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 시온교회(Holy Church of Zion)’라는 흑인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성만찬에 앞서 세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일에 흑인교회에 올리버라는 백인 대법원장이 혼자 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세족식 때에 마르다라는 흑인 여성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교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라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백인 대법원장이 흑인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사실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올리버는 “여러분, 이 사람은 내 집의 노예입니다.
한평생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더 씻겼습니다.
그 때마다 내 마음이 늘 괴로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발을 씻어준 이 사람의 발을 내가 씻겨 주어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 것뿐입니다”.

올리버 대법원장은 이 일로 대법원장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하며 기뻐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되었다”,
“이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는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 온전히 알 때가 옵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감격과 탄성이 우러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감격 속에 날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사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7일 / 03- 04(월)
출애굽기 17:1-16
찬송 / 390장(십자가 군병들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반석을 치라(출애굽기 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I will stand there before you by the rock at Horeb.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out of it for the people to drink." So Moses did this in the sight of the elders of Israel.

반석(6697) 추르(tsûwr) צוּר   

1. 돌.  2. 바위.  3. 가장자리
발음 [ tsûwr ]

어원 / 6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돌, 둥근 돌, 욥 22:24, 사 8:14
2. 명사, 남성  바위, 욥 18:4, 24:8, [은유적으로 하나님께 사용되어] 이스라엘의 피난처, 신 32:37, 시 18:3(2), 32(31), 47(46), 사 30:29, [한 나라의 설립자에 적용되어] 사 51:1, [복수로] 욥 28:10.
3. 명사, 남성 가장자리, 시 89:44(43), 칼날, 수 5:2, 3.
4. 명사, 남성  형태, 시 49:15(14).

치라(5221) 나카(nâkâh)  נָכָה   

1. 치다.  2. 니팔형 : 매맞은.  3. 피엘형 : 피엘형 부정사로 언급된 말 נַכֶּה
발음 [ nâkâh ]
구약 성경 / 504회 사용

호렙 산
- 시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 2, 291m의 '예벨 무사'(Jebel Musa, 모세의 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에서는 흔히 '시내산'으로도 불리운다(19:11, 18; 24:16; 레 26:46).
한편, 호렙 산과 시내 산과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3:1 주석을 참조하라.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 이 기적 사건은 만나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역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즉 후일 바울은 물을 '신령한 음료'로, 반석을 '신령한 반석'으로 해석함으로써(고전 10:4) 당시 사막의 갈증으로 인해 목말라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렙 산 반석의 물이 생수가 되었듯이, 오늘날 사막과 같은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숱한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교훈했던 것이다(요 4:14; 7:37; 계 22:7; 사 55:1).
특히 반석이 모세에 의해 때림을 당함으로 물을 낸 것은 예수께서 친히 저주를 받아 사람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 구원 사역을 이루신 것을 예표한다(사 53:4, 5; 요 19:1-3, 17-9).
같은 견지에서, 레온 우드(Leon Wood) 박사도 본 사건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했는데, 곧 그는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을 낸 이 사건은 장차 갈보리 산에서 그리스도께서 매를 맞아 피를 흘림으로써 그 보혈로써 만 백성을 영적 갈증에서 구원하신 사건을 상징한다고 보았다(A Survey of Israel's History).
특히 반석을 통해 흘러 나온 물의 양을 가리켜 시편 기자는 '강'(나하르)이라고 표현했는데(시 105:41), 이때 이 '강'과 같은 단어이다(창 2:10).
한편 '반석을 쳐서'는 더 있는데, 곧 민수기 20:2-13에 나오는 사건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6일 / 03- 02(토)
출애굽기 16:1-31
찬송 / 73장(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나와 메추라기(출애굽기 16:13, 31)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질문)
1. 메추라기를 얼마동안 먹었는가?
- 한 달(1개월) 민수기 11:20

2. 만나는 얼마동안 먹었는가?
- 40년 동안. 여호수아 5:12
- 만나를 담은 항아리 출애굽기 16:33, 여호와 앞에 두어 대대로 간수하라

메추라기(7958) 셀라우(selâv)  שְׂלַו    

1. 메뚜기.  2. 복수 ׃ שַׂלִוִים 민 11:32.
발음 [ selâv ]
어원  / 795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메뚜기, 민 11:32, 시 105:40.
  a. 명사 [주]복수 ׃שַׂלִוִים 민 11:32.

메추라기
-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 그리고 통통한 몸집을 가진 꿩 아과(亞科)의 철새이다(민 11:31).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틴을 중심하여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떼를 지어 북쪽으로 나아왔다가 가을쯤 되면 아라비아와 시리아 쪽으로 옮겨가 겨울에는 다시금 아프리카로 돌아간다(Schubert, Knobel)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러한 계절풍을 타고 이동하는 메추라기 떼들을 마치 비 같이 이스라엘 진에 떨어지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35절)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 졌다(민 11:21).

만나(4478) 만( mân)  מָן     

1.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2. 만나.  3. 민 11:7
발음 [ mân ]
어원  / 410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만나, 민 11:7, 9, 출 16:31이하, 민 11:6.

* 만나는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15절)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양식(3899)  레헴(lechem)  לֶחֶם 스트롱번호3899

1. 음식.   2. 레 3:11. 3. 레 21:8
발음 [ lechem ]
어원 / [여] 38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7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음식, 양식.
 a. 명사, 남성 [사람과 짐승의] 레 3:11, 욥 20:14, 시 41:10(9), 102:5(4).
 b. 명사, 남성 [하나님의 희생 제물에 대해 사용] 레 21:8,17, 렘 11:19

2. 명사, 남성 빵, 떡, 진설병, 출 25:30, 35:13, 39:36.
3. 명사, 남성 밀, 곡물, 곡식, 사 28:28.

이것이 무엇이냐
- 이 말의 히브리어는 '만 후'(*)로서 '만나'(Manna)라는 명칭은 바로 이 단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무엇이냐'(What)라는 뜻의 히브리어 '만'을 70인역이 헬라어로 '만나'라고 번역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Wycliffe).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성경에서 말하는 만나에 대하여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의 유목민들은 '만'이라 불리우는 연지벌레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바로 이 '만나'인 것으로 주장한다.
반면에 일부 아랍인들은 위성류(tamarisk)에서 나오는 진액이 굳어 흰색을 띤 것이 '만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 역시 이 만나를 시내 반도 부근에서 자생하는 식물액(液)으로 이해하여 기적적 만나의 공급을 의심한다(Seetzen, Burckhardt, Ritter).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달리 분명 만나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하신 하늘의 양식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만나가
1. 40년동안 백성들이 행진하는 곳마다 사철 구분없이 주어졌으며
2. 일정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200만 명의 인구에 부족함 없이 충족하게 주어지고 안식일 전날은 평일의 2배가 내려졌다는 점 등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깟씨
- 미나리과에 속하는 '고수풀'(coriander)의 씨를 가리킨다.
이 씨는 회백색에 직경 3mm 정도 되는데 소화제나 향료 또는 조미료로 쓰인다(민 11:7).

이스라엘은 메추라기와 만나로 생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단지 생존문제의 해결을 위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것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한 사람이 거둘 분량을 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분량을 정하지 않고 마음껏 거두어서 먹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6절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시면서 한 사람에 한 오멜이라는 분량을 정하십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와는 맞지 않습니다.
많이 거두면 그만큼 더 남아야 하고 적게 거두면 그만큼 부족한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남보다 더 많이 거두고 많이 남기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또한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거두어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다면 많이 거두었다 적게 거두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많이 거둔 것이 부와 자랑이 되지 못하고 적게 거두었다 해도 비천과 불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았던 기존의 세상, 애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생존을 위해 한 일이 또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19, 20절)는 말씀처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더러는 아침까지 둔 것입니다.

날마다 아침이면 지면에 만나가 있을 것인데 왜 남겨두었을까요?
그것은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있게 됩니다.
만나가 없으면 당장 생존에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생존을 위해 아침까지 남겨둔 것이라면 결국 이스라엘은 만나를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만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성향의 인간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나안 땅은 기존에 존재하던 가나안 민족의 삶의 방식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많이 거두기 위해 경쟁할 것이고, 많이 거둔 것이 힘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적게 거둔 사람은 힘없는 약자가 되는 세상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삶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균등입니다.
이러한 균등으로 나타나는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거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은 그 은혜조차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을 들으시고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는 이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는 이스라엘의 열심과는 무관합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거두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오멜씩 거두면서 자신들의 노력과는 무관한 은혜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양식을 주신 이유입니다.

고린도후서 8:14-15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헌금의 문제로 연결하여 말합니다.
헌금을 단순히 교회에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두었든 적게 거두었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세계입니다.

세상은 많이 거둔 자를 적게 거둔 자보다 더 가치 있게 대우합니다.
실력이 있기에 많이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이 거둔 자는 많이 헌금할 수 있습니다.
적게 거둔 자는 상대적으로 적게 헌금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헌금을 많고 적음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서 균등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두었다는 것 또한 무시되면서 많이 헌금한 사람이 대접받는 지옥의 현장이 될 뿐입니다.
많이 거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고 적게 거둔 것이 불만이 될 수 없는 균등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균등의 세계는 소유가 균등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소유가 균등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균등은 십자가로 가능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안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가장 존귀한 생명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자라면 세상에서 거두는 것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균등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의 차등이 없고 따라서 헌금 액수의 많고 적음에 따른 차등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로 인한 균등이며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것이야 말로 참된 부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땅의 것의 많고 적음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것으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을 불안 해 하면서 거둔 것을 아침까지 둡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믿지 못하고 내가 거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 내일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많이 거둘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신자는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한 것을 가진 부요한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이 거두어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귀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균등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한 첫 언급은 출애굽기 16장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 회중은 광야에서 굶어 죽겠다며 그들을 인도해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사실 이 원망은 모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줄 것이다.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줄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인정할 것이다.”(16:4, 8, 12)

뒤이어 출16:13절에 처음으로 ‘메추라기’(Quail)가 먼저 등장한다.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메추라기가 내려왔다.
그런데 백성이 그 메추라기를 잡았는지, 먹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만나’(Manna)가 처음 등장한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여기에서 ‘이게 무엇이냐?’라는 단어가 ‘만 후’이고 여기에서 ‘만나’라는 말이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본문은 16장이 14절부터 36절로 끝낱때까지 ‘만나’를 어떻게 먹는지에 대한 규칙을 설명한다.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자주 만나를 먹을 것인가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메추라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메추라기를 어떻게 먹을지, 언제 먹을지에 대한 설명도 없으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배고픈 백성이 갑자기 내려온 메추라기를 당연히 먹었는데 다만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좀 더 관련 근거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출애굽사건은 유대교와 기독교 배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신구약 저자들은 그때의 사건을 자주 인용했다.

메추라기

1. [출애굽기 16: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2. [민수기 11: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 [민수기 11: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4. [사무엘상 26:20]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5. [시편 105: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다음은 성경에서 ‘만나’에 대한 언급을 찾아서 모아보았다.

출애굽기16:31, 35
이스라엘 사람은 그것을 만나라고 하였다. 그것은 고수 씨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다. 이스라엘 자손은 정착지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를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

민수기11:9
밤이 되어 진에 이슬이 내릴 때면, 만나도 그 위에 내리곤 하였다.

신명기 8:3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5: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느헤미야 9:15, 20
굶주릴까봐 하늘에서 먹거리를 내려 주시고, (생략) 그들의 입에 만나가 끊이지 않게 하시며, 목말라 할 때에 물을 주셨습니다.

시편 78:24, 25
만나를 비처럼 내리시어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으니, 사람이 천사의 음식을 먹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풍족할 만큼 내려 주셨다.

요한복음 6: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히브리서 9:4
거기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제단과 온통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생략)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위와 같이, 단순히 키워드 검색만 해봐도 신구약을 통틀어 ‘만나’는 약 20회 정도 인용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어떤 저자도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다.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만나’라고만 표현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딱 3번뿐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위에서 설명한 출애굽기 16장의 첫 등장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번을 찾아보자.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두 번째 본문은 민수기 11장이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가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11:4-6)]

이 본문을 보면 위의 출애굽기 16장에서 그들은 메추라기를 먹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만나만 먹는 것이 지겨우니' 제발 고기를 달라고 원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백성의 불평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20절)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왜냐하면, 그 백성의 불평에 대단히 노하셨기 때문이다.(10절)
그리고 실제로 메추라기 기적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이 일어나 바로 그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민 11:31-32)]

그토록 고기를 원하던 그들은 드디어 메추라기를 먹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이 긴 글을 적었는가?
그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절에 나온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바로 그곳을,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라 불렀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거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민 11:33-34)]

그렇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은, 행복하고 맛있게 냠냠 쩝쩝한 게 아니라, 먹고 죽었다. 심지어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에 대한 대가였던 것이다.
그들은 극심한 재앙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들이 메추라기를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재앙을 받은 이후에 다시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여호수아서에서 출애굽이 끝난 후 가나안에 도착하자 이제는 '만나'가 멈추었다고만 말한다.(수 5:12)

성경에서 메추라기를 언급한 마지막 세 번째 본문은 시편 78편 27-29절이다.
사실 이 본문은 민수기 11장의 내용으로 지은 시편이다.
"고기를 먼지처럼 내려 주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처럼 쏟아 주셨다. 새들은 진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그들이 사는 곳에 두루 떨어지니, 그들이 마음껏 먹고 배불렀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주셨다."

비록 '메추라기'라는 단어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만나와 함께 '하늘의 새'를 내려주셔서 먹었다는 점에서 민수기 본문의 메추라기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메추라기를 먹긴 먹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30-31절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먹을 것이 아직도 입 속에 있는데도, 그들은 더 먹으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살진 사람들을 죽게 하시며,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거꾸러뜨리셨다.]

결국 이 시편은 민수기 11장에서의 사건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며, 결말은 동일하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욕망에 진노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추라기를 먹었던 사건은 결코 ‘긍정적인 예화’로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이고, 신구약 모든 저자들도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표현할 때 ‘메추라기’를 언급하지 않고, ‘만나’만 언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나’와 ‘메추라기’는 함께 사용하기 상당히 민망한 단어의 조합이며,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해서는 더더욱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보여준 신 광야

신 광야는 엘림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가기 전에 지나간 지역이다.

출애굽기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신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 씬’으로, 가데스 바네야가 있는 미드바르 친 광야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경에서는 둘 다 똑같이 ‘신 광야’로 표현되어 혼동을 주고 있다.

친 광야는 에돔 옆에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 지역의 남쪽에 있는 광야를 말하며, 신 광야는 시내 산에 가기 전에 통과한 광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 때 지나간 광야는 에담 광야, 수르 광야, 씬 광야, 시내 광야, 바란 광야, 친 광야가 있다.
신 광야는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르비딤에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곳이다(출 17:1).
신 광야는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신 광야의 정확한 위치는 추정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와디 타이베에서 동쪽으로 이르는 산악 도로를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황량한 구릉 지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에 도착하는 데 꼭 1개월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양식을 가지고 나왔다 할지라도 이 때쯤 거의 떨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양식이 떨어지자 그들은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면하게 하신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항상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만 집착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신 광야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정말 인내를 요구하는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만드는 좋은 약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렛대의 구실을 한다.

고난에 능숙한 사람은 그만큼 자기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 의지가 강해진다.
그러나 때로 고난은 우리들을 좌절의 함정으로 이끄는 모티브가 된다.
신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인간들의 나약하고 간교한 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난 중에 있는 자가 고난을 인내하지 못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에 동조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 광야에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해결해주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가 있었던 곳이 바로 신 광야이다.

메추라기는 히브리어로 셀라우라고 하는데 꿩과에 속하는 새로서, 몸 길이는 약 18cm 정도이며 털은 다갈색이고 흑색의 반점이 있다.
이 메추라기는 작은 철새로서 3-4월경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데, 시내 반도와 팔레스틴은 그 통로가 된다.
이 새는 날개가 짧으므로 계절풍을 이용하여 대군의 떼를 이루어 날아 이동한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메추라기는 살이 쪄 둔중하므로, 시내 반도 및 애굽에서는 손으로 메추라기를 잡을 수가 있다.
그리고 9월에는 반대로 대군을 이루어 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한다.
특히 가을 메추라기는 별미로 알려져 있다.
이 새는 둥지를 지면에 만들고 평균 16개의 알을 낳아 키우는데, 알은 식용으로 쓰인다.
다윗왕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자신을 메추라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삼상 26:20).

그리고 히브리어 셀라우는 비만을 뜻한다.
신 광야에서 음식물이 부족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 원망하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린 양식이 만나라고 한다(출 16:4).
그런데 실제로 시나이 반도의 건조 지대에서는 만나와 비슷한 음식이 존재하고 있다.
위성류 나무에 기생하는 깍지벌레가 있는데 ‘만’은 이 곤충의 분비물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한다.
6월이 되면 깍지벌레는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위성류 나무의 수액을 빨아, 일부는 애벌레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 위에 방울 모양으로 뱉어 놓는다.
이 분비물은 건조한 기후 탓에 물기가 빠져 금방 결정체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데, 매우 달고 쫀득쫀득하여 먹을 수가 있다. 성경에서는 만나가 고수풀씨 같이 희었고 맛은 벌꿀과자 같았다고 하였다(출 16:31). 고수풀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일년생 식물로 1-3mm 크기의 씨는 옅은 회색이다. 실제 만나는 흰색, 갈색, 노르스름한 색(민 11:8) 등 다양하다. 그리고 만나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펙틴을 지닌 세 가지 기본 당으로 짜여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인 만나를 서로 많이 거두겠다고 욕심 부리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한 개인에게 축적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는 곳이 신 광야이며, 적게 거둔 자나 많이 거둔 자나 자신이 만족할 만큼의 일용한 양식이 되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자의 만나를 썩게 하심으로, 내일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단호하게 배척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 사회에서 풍족한 물질문명을 향유하고 있지만,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할 양식을 독식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사회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내일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함께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보여준 신 광야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비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오랜 기간 동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만나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하얀 서리 같은 것을 보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다.
만나는 아랍말로 “이것이 무엇이냐?”를 뜻한다.
그것은 고수(미나리과의 1년생 초본)씨앗 같이 하얗고 맛은 벌꿀과자 같았다. 

만나는 사막에서 자라는 관목 잎사귀에 연지벌레가 붙어서 만들어내는 이슬 모양의 형성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지곤지 할 때 연지가 연지벌레 말린 것이다.
입술과 뺨에 바르는 빨간색 연지를 이마에 바르면 곤지가 된다.
딸기맛 우유나 빨간 립스틱에 들어가는 코치닐추출색소가 바로 연지벌레에서 채취한 것이다.

만나는 연지벌레의 침을 통해 나오는 분비물에서부터 생성되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바닥에 떨어지는데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딱딱하게 굳는다.
그래서 아침에 나가면 그걸 수확해서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녹는 온도가 낮기 때문에 햇빛이 나면 다 녹아버려서 햇빛이 나기 전에 거둬들여야 했다. 

만나는 맛이 달콤해서 지금도 먹을거리가 부족한 토착 유목민들은 그것을 인스턴트 먹을거리로 이용한다.
모세는 원래 미디안 광야에서 이미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살았기 때문에 만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배고파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이거 어떻게 해결하지?” 고민하다가 불현 듯 만나를 기억해냈을 것이다.
그걸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해주고 그들은 그렇게 믿고 먹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하나님이 만나 외에 다른 것을 주지 않고 40일이 지나자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기로 하였다.
실제로 메추라기는 이 지역을 지나 아프리카로의 긴 여정을 하였고, 긴 여정 끝에 지친 메추라기들이 땅에 떨어졌을 거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철새의 통로이고, 겨울철에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이집트로 이동한다.
즉 일 년에 두 차례 보통 메추라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에 지났던 지역을 통과한다.
이런 철새의 이동은 고대인들에게는 분명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는 철새의 대량포획이 일어났으며 20세기에 들어서도 수년 동안 메추라기는 이집트의 주요 수출품의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1920년경에 이르러서는 그 번식률이 극히 떨어져 메추라기의 이동이 중단되었다. 

민수기 11: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불평하는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는데, 이를 오염된 메추라기를 먹고 식중독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메추라기는 크리스마스로즈와 사리풀 등을 먹는데, 이 풀에는 독성이 있다.
결국 이 독성이 농축되어 있는 새를 먹을 경우 사람에게도 해가 될 수 있다.
바로 만나에 대해 불평을 했던 사람들은 이런 메추라기를 먹고 죽었을 것으로 본다.

메추라기는 꿩과의 철새로, 유럽 전 지역과 아시아 서쪽에서 주로 번식한다.
원래 야생조였으나 일본에서 최초로 식용 및 채란용으로 가금화되었다.
알과 고기는 모두 식용 혹은 약용으로 이용되는데, 동물성 식품이면서도 알칼리성 식품이고, 비타민 A와 단백질이 풍부하고 기름기가 적어 다른 동물성 식품에 비해 저칼로리 식품으로 특히 다이어트와 강장효과가 탁월하다.

우리는 고기보다는 알에 익숙하다.
메추리알은 일반 계란처럼 그냥 쪄서 먹거나 생으로 먹는데, 달걀보다 비타민 B1, B12가 훨씬 많이 들어있으며, 인과 철 등이 더욱 풍부하다.
단백질도 계란에 비해 많이 들어있고, 아미노산 조성은 계란과 비슷하나 글루탐산이 메추리알에 더 많다.
메추리알은 산후에 먹으면 회복이 빠르며, 허약체질 혹은 소모성 질환을 앓고 난 뒤에 보양으로도 좋은 음식이다. 

메추라기 고기는 맛도 좋고, 스태미나 식품으로 유명하다.
메추라기 고기가 비타민 B군이 많아 에너지 대사와 성호르몬 기능을 조절하여 성적욕구증대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메추라기는 체내 모든 장기의 기능을 보강하고 근골을 굳건히 하며 상식하면 겨울에는 추위를 이기게 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이기게 한다.
동의보감을 보면 메추라기 고기는 ‘순육’이라고 하는데 “순육은 오장을 보강하고 힘줄과 뼈를 튼튼히 한다”라고 하였다.

한 오멜(16절) : 한 오멜은 약 2.3리터입니다.

● 묵상 :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들을 먹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내리십니다.

날마다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2) 만나는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16~18절)

  하나님께서는 1인당 한 오멜씩 식구수대로 가져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대로 하였더니 어떤 사람은 많이 가져가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가져갔습니다. 그것을 식구수대로 나누었더니 많이 가져간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가져간 자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배불리 먹는데 충분한 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충족감을 느낄 만큼 충분히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40년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 묵상 :

이렇게 40년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십니다.

3) 만나는 나눔을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만나를 식구수대로 가져가게 하신 후에 식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간 것을 식구수대로 나누었더니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나를 나 혼자만의 것으로 따로 챙겨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40년간 반복하심으로 하나님의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누는 것을 ‘체데카(의)’라고 말합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삶을 실천하십시오.

말씀을 배운 이들은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가진 이들은 물질을 나누고,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기술을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풍성한 것을 채우십니다.

4) 만나는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5절)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리셨으나, 제 7일에는 만나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제 6일에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다른 날에는 만나를 남기고 보관하면 다음 날 아침에 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지만, 안식일에는 전날의 싱싱함이 그대로 보전되어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40년 동안 매 안식일마다 만나를 내리시지 않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5) 만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만나를 진영의 지면에 내리셨으니 그들은 그저 그릇을 들고 장막을 나가서 만나를 퍼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먹는데 있어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리시는 이 규칙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규칙은

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

② 거둔 것을 식구수대로 골고루 나누어주라는 것,

③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

④ 제 6일에는 이틀 치를 거두어 안식일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훈련하게 하기 위함이고, 식구들끼리 골고루 나누어 먹으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또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누지 않고 쌓아두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 6일째에는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셔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훈련하셨습니다.

● 묵상 : 이스라엘은 40년 동안이나 이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매일, 또는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들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있음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매주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는 봉사와 섬김에 충성합니다.


● 묵상 :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걱정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걱정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께 맡겨 믿음 있는 자가 되십시오.

* 기도제목

1. 우리 입에서 불평이 사라지게 하시고, 늘 감사가 가득한 입이 되게 하옵소서.
2. 끝없이 채우려는 저주받은 욕심과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3. 날마다 육의 양식을 먹듯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여 영의 양식을 섭취하게 하옵소서.
4.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항상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게 하셔서 육신의 것을 얻으려는 일로 영의 자리를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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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5일 / 03- 01(금)
출애굽기 15:1-27
찬송 / 229장(주 예수 다스리시니 )

신유(神癒)  하나님 신, 병 나을 유
- 신의 힘으로 병이 낫는 일
- 신앙 요법의 하나

치유(治癒) 다스릴 치, 병나을 유
-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하는 일

신유(信癒) 믿을 신, 병나을 유
- 믿음으로 병을 고치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치료하는 여호와(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He said, "If you listen carefully to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and do what is right in his eyes, if you pay attention to his commands and keep all his decrees, I will not bring on you any of the diseases I brought on the Egyptians, for I am the LORD, who heals you."

치료하는 여호와(I am the LORd who heals you.)
여호와 로파(יְהוָה רֹפְאֶךָ)

치료하다(7495) 라파 [ râphâʼ ]  רָפָא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너희가... 규례를 지키면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며 순종에의 촉구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의 언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법도와 율례'는 그의 백성에게 '계명과 규례'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 의(義)의 행위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육신적 편안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법을 따라 사는 의로운 사람을 요구하신 것이다. 질병으로부터의 보호 약속에 앞서 요구하신 이 요구는 곧 오늘 우리의 신앙의 표준이기도 하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 문자적으로 '여호와', 와 '너희의 치료자'란 동격의 단어가 합성을 이뤄 만들어진 것으로, 직역하면 '나 여호와는 너희의 치료자'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친근한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치료하는'의 히브리어 '라파'는 '의사' 또는 '의원'을 가리킨다.
곧 우리의 의원되시는 여호와는 실로 모든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과 죄 등 인생의 모든 문제점까지도 깨끗이 해결해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치료자이시다(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청종하고(8085) 솨마 [ shâmaʽ ]  שָׁמַע  
 

1. 듣다.   2. 창 3:10.  3. 창 37:17
발음 [ shâmaʽ ]
구약 성경  / 1159회 사용


행하며(6213) 아사[ ʽâsâh ] עָשָׂה
스트롱번호6213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기울이며(238) 아잔 [ ’âzan ]   אָזַן  스트롱번호 238

1. 날카롭다.  2.  명확하다.  3. 히필형 : הֶאֱזִין
발음 / [ ’âzan ]
구약 성경 / 2회 사용


지키면(8104) 발음 [ shâmar ]  שָׁמַר   


1. 지키다.  2. 동산을 지키다.  3. 창 30:31.
발음 [ shâmar ]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엘림
- '상수리 나무' 또는 '참나무'란 뜻으로 수에즈 동남쪽 약 100Km, 마라 남쪽 10여Km 지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와디 구룬델'(Wadi Ghurundel)인 듯하다(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ble).
당시 '엘림'은 비가 자주 왔고 개울과 샘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이곳은 물샘 12개와 종려 70주가 있었는데, 이는 완전수인 12와 70(7x10)이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했다(Keil).
그리고 몇몇 학자는 물샘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70장로를 각각 위한 것이고, 또한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Kurtz, Baumgarten).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이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인도된 곳이라 본다.
한편 출애굽 후 이곳까지의 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애굽 고센 땅 라암셋(12:37)->숙곳(12:37)->에담(13:20)->바알스본(14:2)->홍해(14:22)->수르 광야(15:22)->말(15:23)->엘림(15:27)이다.


찬송하리니(5115) 나바 [ nâvâh ]  נָוָה

1. 앉다.  2. 단정하다. 3.  히필형 : 돋보이게 하다
발음 [ nâvâh ]

구약 성경  / 2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앉다, 쉬다, 합 2:5
2. 원형 단정하다, 어울리다.
 a. 원형 히필형 : 돋보이게 하다[찬양으로], 축하하다, 출 15:2.


노래하리니(2176) 지마라트 [ zimrâth ]   זִמְרָת

1. 노래.   2. 찬양의 대상.  3. 노래 제목
발음 [ zimrâth ]
어원  / 216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뜻풀이부
1.명사, 여성 노래, 찬양의 대상, 노래 제목, 시  118:14, 사 12:2.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신유(神癒)"라고 합니다.
'신유'라는 한자어는 "귀신 신(神), 병나을 유(癒)"
"Faith Healing" 이란 신앙요법 또는 신앙으로 치유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한 나무(6086) 에츠[ ʽêts ] עֵץ

1. 나무.  2. 숲. 3. 나무로 만든 우상
발음 [ ʽêts ]
어원 / 복수 עֵצִים, 연계형 עֲצֵי, 60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29회 사용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열왕기하 2:19-22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요한계시록 22:2).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신유는 성경적 근거와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유는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신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종말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들이 이미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유의 은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 지으심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사명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타락한 후에 임하게 된 육신의 질병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중대한 이유가 되었으며, 구원을 얻은 후에는 더욱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성화의 방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넌 직후의 상황입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광야는 물이 없는 곳이요 양식을 얻을 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메마른 황무지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된 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광야 40년의 여정 동안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목이 말라 죽은 자들은 없었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은 자들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물과 양식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하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온전히 믿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광야 4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연합하기 위한, 생명을 담보로 한 훈련의 기간이었고 시험의 기간이었습니다.

그 훈련과 시험의 첫 과정이 마라에서 있었습니다.
마라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얻기 위해 도착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라의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낙심과 절망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쓴 물만 있었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입에서는 모세를 향한 거친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실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으며 그 나무를 물에 던졌을 때 마실 수 없었던 쓴물이 마실 수 있는 물로 변화되었습니ㅏㄷ.
이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애굽 사람에게 임한 모든 질병은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니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처럼 불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연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여정 동안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불신앙을 치료하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연합하는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신유의 은혜를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유의 은혜는 언제나 영혼의 잘됨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나의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병 고침의 은사들"이라면서 복수를 사용한 것은 여러 가지 병들을 고치는 은사들을 말함을 알 수 있다.
먼저 병 고침의 은사들의 정의를 보면 다음 과 같다.

병 고침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인데,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하여 질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한다(C. Peter Wagner).

이 은사들은 질병이나 연약함을 초자연적으로 치유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David Pytches).

이 은사들은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안수, 기도, 명령 또는 이것들을 종합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초자연적으로 고치는 능력을 말한다(Bobby Clinton).

1. 병 고침의 은사자들만 병을 고치는가?

- 병 고침의 은사들을 등한시하는 많은 보수교회에서도 야보고서 5장을 근거로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 5:14).
이렇게 하는 기도는 병 고치는 은사로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장로들(목사들)이 가진 영적 권세로 하는 기도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의 장로나 목사들만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병 고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신자들, 곧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기도하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그리고 병 고침의 은사들을 통해서(고전 12:9) 행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종류의 병을, 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잘 고침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극단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아직도 신유만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은혜의 산물인 의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심해야할 일이다.

어느 병원의 실험에 의하면, 한쪽 병자들은 약만 투입하고 다른 쪽 병자들은 약과 기도를 병행한 결과,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한 쪽의 병자들이 통증도 훨씬 적고 훨씬 빨리 회복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와 의학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또한 기도를 통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더라도 의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다.
(미국 신유 사역자는 의사들을 대동한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이 낫는다고 하니 병원에 가지말까요?"라고 질문도 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지만 은사자는 가급적 대상자에게 의사에게 가서 확인해보라는 것이 좋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으므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성경이 말하는 치유들

-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성경에서 치유와 관련된 단어들을 찾아보면*세라퓨오: 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육체적인 병을 치유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마 4:23; 8:7, 16 등).

* 이아오마이 : 육신적인 병은 물론(마 15:28), 마음이나 영적인 병은 물론 축사로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마 13:15; 눅 4:18; 요 12:40; 행 10:38; 히 12:3; 벧전 2:24; 약 5:16 등).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은사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병 고침은 물론 귀신 쫓는 은사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마 15:28; 행 10:38).

ἰάομαι 스트롱번호2390

1.

고치다

2.

눅5:17

3.

회복하다

발음 [ iaŏmai ]




1.
고치다, 치료하다.
  • a.
    [문자적으로] 눅5:17, 6:19, 요4:47, 행9:34, 10:38등, [수동] 마8:8, 15:28, 눅7:7, 8:47, 요5:13, 약5:16등.
  • b.

    [상징적으로] [여러 종류의 병으로부터 온전하게 됨] 회복하다, 마13:15, 요12:40, 행28:27.


* 소조 : 구원하다(마 1:21; 18:11), 위험에서 건져내다(마 8:25; 14:30), 치유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막 5:23; 6:56), 귀신 들린 자가 깨끗함을 받다(눅 8:36)에서 사용되었다.

σώζώ 스트롱번호4982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sōzō ]
어원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전하다, 구출하다.
  • 2.
    [자연적인 위험이나 피해에서 구출하거나 그것을 당하지 않는 것]
    • a.
      [죽음에서] 구하다, 마14:30, 막15:30, 눅23:35.
    • b.
      [위험에서] 구출하다, 요12:27, 히5:7.
    • c.
      [병에서] 구하다, 놓아주다, 마9:21, 22, 막5:23,28,34, 6:56, 눅8:48, 17:19, 18:42, 행4:9, 14:9, 약5:15.
    • d.
      지키다, 보존하다.
    • e.
      [수동] 번창하다, 낫다, 건강해지다.
  • 3.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다.
    • a.
      구원하시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요12:47, 고전1:21, 딤후1:9, 히7:25.
    • b.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눅7:50, 약1:21, 2:14, 벧전3:21.
    • c.
      [수동] 구원을 얻다, 마10:22, 막10: 26, 요5:34, 행2:21.
  • 4.
    [어떤 구절은 1,2에 다 속한다] 막8:35, 눅9:24, 롬9:27, 고전3:15.





* 라파 : 구약에서 사용된 것으로 원상태로 회복하다(창 20:17; 시 6:2; 렘 17:14).
사람의 병(출 15:26; 왕하 2:22), 나라의 죄악이 치유 받다(대하 7:14; 호 6:1; 렘 3:17).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에서 사용된다.

רָפָא 스트롱번호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67회 사용

뜻풀이부

  • 1.
    원형 수선하다
  • 2.
    원형 고치다, 치료하다, 욥5:18, 사19:22,전3:3, [분사로] 의사, 창50:2, 대하16:12.
    • a.
      원형 치료하다 [하나님께 사용되어], 신32:39, 대하7:14, 시30:3(2), 호7:1, 11:3.
    • b.
      원형 용서하다, 대하30:20, 렘3:22, 호14:5(4).
    • c.
      원형 위로하다, 욥13:4.
    • d.
      원형 니팔형
    • e.
      원형 수선되다, 고쳐지다, 렘19:11
    • f.
      원형 치료되다, 레13:37, 신28:27, 왕하2:22, 사53:5.
    • g.
      원형 피엘형
    • h.
      원형 고치다, 수리하다, 왕상18:30
    • i.
      원형 치료하다, 왕하2:21, 렘6:14, 겔34:4,[은유적으로] 위로하다, 렘8:11.
    • j.
      원형 치료되게 하다, 출21:19.







- 이상 단어를 통해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치유는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적 치유(spiritual healing)

죄인이 구원 받아 영혼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1:21; 13:15;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서 하였나이다."(시 41:4).


둘째, 육신 치유(physical healing)

몸의 질병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4:23; 고전 12:9;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셋째, 심령 치유 또는 내적 치유(emotional healing, inner healing)

사람의 마음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사 61:1-3; 눅 4:18-19; 마 12:20).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3), 육체의 질병의 70%가 마음의 질병에서 기인하는 심인성 질병임을 감안할 때 내적 치유는 육체의 치유 못지않게 중요하다.


넷째, 축사 또는 축귀(deliverance)

귀신을 쫓는 것을 말한다.(막 16:17; 눅 10:19; 행 10:38) 축사도 치유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유의 은사라고 할 때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국한해서 이해하기도 한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것(구원), 마음을 병을 고치는 것(내적 치유), 귀신 쫓는 것은 다른 단어나 개념으로도 소개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죽은 자를 살림

성경에는 죽은 자를 살린 기록이 가끔 나온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22), 직원의 죽은

을 살리시고(마 9:18-2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요 11:43-44), 죽은 도르가를 살린 베드로(행 9:36-40),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게를 살린 바울의 경우(행 20:9-10)를 들 수 있다. 현대의 경우, 영국의 능력 사역자인 스미스 위글워쓰는 그의 집회에 오랫동안 참석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죽은 자를 최소 10명 이상은 살렸다고 하며, 인도네시아에 임한 부흥기간 중, 죽은 사람의 시신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드렸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났다고 증언한다.


3. 질병의 원인들

사람들이 병들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원죄로 인한 연약함

죄를 지은 인간은 영, 혼, 육이 타락하여 기능이 약화되고 부실해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질병이나 연약함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거의 없다.

둘째, 본인의 죄와 허물들

본인의 죄와 허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징계를 받을 경우이다.
구스 여인과 결혼한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은 7일 동안 문둥병에 걸렸다(민 12:1-16).
40년 광야생활을 보면 불뱀 사건 등 심판과 징계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하여 왕의 위세를 뽐낸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내려 7만 명이나 죽었다.
세상의 온갖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면 자신도 모르게 질병이 낫는다.

셋째, 마귀의 공격

마귀가 모든 질병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귀가 질병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스라엘의 어떤 여인은 사단에게 매여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안수로 치유받았다(눅 11:13).

넷째, 마음의 상처

오늘날 질병의 70%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러므로 치유사역자는 육체적인 치유는 물론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내적 치유에도 통달해 있어야 한다.
허리병, 관절염 등은 스트레스와 관계있고, 마음속에 증오심을 회개한 사람의 경우 관절염등이 나은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다섯째, 자신의 부주의

생활 습관이 체계적이고 규칙적이지 못한 경우, 운동을 게을리 하는 경우, 음식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 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자신의 식생활, 일정 및 운동량을 조절하여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여섯째, 조상의 죄

조상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죄악을 저질렀을 때 그 자손은 그 죄악의 열매를 먹어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이 모든 저주가(각종 질병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재앙들)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신 28:46).
유전병도 이런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가계 치유를 통해 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

일곱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날 때부터 병약자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

세계적 교회성장 학자인 피터 와그너는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교단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주요 요인은 신유의 은사 덕분이라고 분석한다.(오랄 로버트, 케네스 헤긴, 조용기, 라인하르트 본케, 베니힌 목사 등은 오순절 교단 소속이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도 할 수 있다면 성경을 철저하게 믿는 보수주의자들이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런 저런 신학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마음 문을 열고 행하면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무수한 약속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풍성하게 역사한다.
승리와 패배의 차이는 항상 그 믿음에 달려 있다.
믿음으로 은사를 간구할 때 성령께서 병 고침의 은사들을 주신다.
많은 사람들은 혹시 내가 기도하여 병이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아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님을 반드시 자각해야 한다.
존 윔버 목사는 신유 기도를 일년 내내했으나 한 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믿음을 사용하여 말씀에 따라서 기도한 결과 일년 후부터 고침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유의 종이 되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탁스 위버라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웨론이라는 요정을 만납니다.
요정은 그 여인에 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가기 전에 리틀스 계곡의 샘물을 마시고 가겠는가?" 여인은 물었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요정은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을 모두 망각하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 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허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다시 말하기를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는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을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인생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 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 헬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비커스 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 는 이렇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 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 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는가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4일 / 02- 29(목)
출애굽기 14:1-3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Moses answered the people, "Do not be afraid. Stand firm and you will see the deliverance the LORD will bring you today. The Egyptians you see today you will never see again.

크리스천 작가였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 1835. 11. 30 ~ 1910. 4. 21)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주요 작품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인 톰 소여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동화 "톰소여의 모험"이 있다.

“나는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돼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약간의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 감리교인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함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과 이웃을 이어 주는 나무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왕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가 없고 공주만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왕은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첫번째  시험은 말타기와 활쏘기였다.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다.
두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다.
왕은 문제를 냈다.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너라. 기간은 100일을 주겠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우선 키가커야 하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려면 나뭇가지 또한  길어야 할텐데....'라고 생각하며 제작기 길을 떠났다.
그 20명 중에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나무를 구하려다가 찾지 못하고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던페로는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나무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무십자가다!" 
그 후 페로는 핀란드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 막다른 길에 선 이스라엘 (1-12)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발길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길이 아닌 네비게이션에 조차 나와 있지 않은 생소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즉 고센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려면 북동쪽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하나님은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남동쪽으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출 13:17)” 우려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장소가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입니다(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바다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이스라엘의 장막을 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게 하셨다가(13:20), 그들의 발길을 “돌이켜”(2)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의 민 33:7은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막다른 장소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배수진을 치게 해서, 죽기 살기로 애굽과 전투를 하라는 뜻인가요?
이스라엘은 아직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바로와 그가 이끄는 애굽 군대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10b-12)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자유냐? 빵이냐? 빵은 인간의 육체적 굶주림 뿐 아니라 물질적 욕망의 상징입니다.
빵과 자유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대로 자유인이 된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공포가 밀려오자,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노예로 사는 편이 좋다면서 빵을 추구합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께 마귀가 도발한 첫 번째 시험은 돌로 하여금 빵이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며(마 4:4),
사람의 욕망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빵을 택했습니다.
빵을 택한 그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출애굽한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물도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광야로 간다는 것은 마치 자살행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갔고,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막다른 홍해로 인도하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4, 18)

본문에서의 애굽 사람은 문자 그대로 애굽 백성 만을 한정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되고, 출애굽 여정 중에 거치는 모든 나라와 가나안은 물론 온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쫓아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한 상태로 두신다’는 의미라고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얼마든지 돌이키실 수 있음에도 그를 완악한 상태로 두신다는 것처럼 무서운 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도달했다는 소식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 즉 장자와 첫 번째 태생의 죽음이라는 재앙 앞에서 망연자실해있던 그들은 복수심에 전 병력을 소집합니다.

5-7.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본문에서 병거는 말이 이끄는 전차로 오늘 날의 탱크와도 같습니다.
평지에서 탱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선발된 병거만 600대였고, 그밖에도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했고 모든 지휘관들도 참여했으니, 애굽 군대의 규모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600대 이상의 전차와 마병과 보병대가 뒤따르는 소리는 아마 지축이 흔들릴 정도 였을 것입니다. 점점 더 가까이 들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애굽 군대의 위용 앞에서 막다른 홍해 해변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비백산할 만 합니다.

모세의 믿음 (13-14)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앞으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완악해진 바로가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아올 것이다’,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겠다‘ 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와 그 군대를 어떻게 물리쳐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백성들에게 뭐라 말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 애굽 군사를 앞으로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잠자코 구경만 하면 된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모세는 애굽이라는 구렁텅이 속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믿음의 순도는 99%가 아니라 100% 여야 합니다.
99.9% 믿음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해주실 것인지 몰랐음에도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바로의 군대를 물리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 같은 순도 100%의 믿음을 통해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15-20)

15-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앞으로 가게해라’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라’
‘그러면 바다가 갈라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애굽 병사가 너희 뒤를 따라 갈라진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혹시 자연 현상 앞에서 경외심을 갖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스위스의 라우터브루넨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은 트뤼멜바흐 폭포로 유명합니다.
트뤼멜바흐는 ‘드럼같은 소리를 내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10단으로 이루어진 계단형 폭포로 높이가 140m에 달합니다.
동굴을 들어가면서부터 들리는 물소리가 폭포에 가까워지면서는 그야말로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커집니다.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면서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넘실대는 바다가 갈라져서 양쪽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있는 물 절벽이 펼쳐있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경외심에 감히 갈라진 바다에 쉽사리 발을 디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뒤를 따라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수심에 눈이 먼 바로와 그 병사들은 초자연적인 엄청난 현상 앞에서도 신에 대한 경외심은 없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뒤를 쫒아갔습니다.

모세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목전까지 다가온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경계를 치셨습니다.
앞서 가던 구름 기둥을 애굽 진 쪽으로 뒤로 물러서게 하셔서(19) 애굽 진영 쪽을 구름과 흑암으로 가두어서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20a).
반면 이스라엘 진영은 밤을 환히 밝히셔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20b).

이스라엘을 막다른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애굽은 물론 온 세상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홍해 사건을 통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할 제일 우선의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됩니다(31). 코로나 팬데믹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하셨을까?를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제일 먼저는 신앙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당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주일예배를, 구역모임을, 성경공부를 현장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하면서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서로 마주보며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또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로 홀로 서게 되는 유익도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제 교육관을 방문해서 보니 그동안 휑했던 예배 현장에 어린 아이들로 가득함에 참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을 어제 주일 설교 말씀으로 해석하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애굽과 같이 완악한 세상은 하나님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일수록 우리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이 땅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황이 다가옵니다.
어려운 상황을 애굽과 같이 완악한 세상의 시선이 아닌 모세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완악한 세상을 향하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도 100%의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오니, 주님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전쟁이라는 막다른 길에 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완악한 러시아 위정자들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을 막다른 바닷가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3. 4절 하나님의 말씀과 13-14절 모세의 말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4. 내 인생에서 막다른 길에 처했던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앞으로 막다른 길에 처한다면 어떻게 극복하시겠습니까?


성경 안에서 출애굽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할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후의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출애굽 사건이 종종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이 사건이 예수님에 대한 예표임을 밝히기도 했고 출애굽 자체가 영적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좋은 모형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출애굽기 14장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고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성령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의 배경과 상황을 통해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안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

 

여기까지의 상황

이 사건의 배경은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던 창세기 12장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가 믿음으로 화답하기를 기다리셨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화답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시며 공식적인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리고 그 때 그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400년을 객으로, 노예로 고통 중에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해 낼 것을 약속하셨다.

결국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때에 엄청난 가뭄으로 인해서 야곱은 애굽(이집트)로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 그와 모든 가족들이 정착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그곳에 보내셔서 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두셨다. 그리고 창세기의 끝에서 요셉은 죽으면서 아브라함께 하나님께서 하셨던 약속을 그 형제들에게 상기시켰다.

창 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단순히 약속의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 요셉의 바람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경우는 그렇게 해달라고 유언을 했고 그의 아들들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장사하였다. 요셉도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의 형들, 그리고 모든 자손들이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방의 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노예가 되어 이방 왕을 섬기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번성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애굽이라는 당시의 강대국 안에 거주하면서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강하게 성장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출 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 그리고 요셉이 말했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실 때”가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출 3장).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리시면서 그 자손들을 “애굽에 있는 내 백성”(출 3:7)이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계획을 밝히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이 계획에 애굽의 대항과 그로 인한 심판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애굽을 치실 것으로 그 모든 일을 통해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참 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지고 계신 계획이었고 출애굽기에 와서 하나님은 그것을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며 약속하시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허무맹랑할 것이다. 사실 애굽 왕 바로가 이 말을 듣고 처음에 보인 반응도 그랬다.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당대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왕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보내달라는 모세의 말은 기가 찼을 것이다. 니가 뭔데, 니가 말하는 여호와라는 신이 뭔데 내가 그렇게 해야되느냐라고 바로는 반응했다. 그 여호와를 나는 모르니 그가 하는 말도 난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의 이 말은 틀린게 없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이 후에 이어지는 모든 출애굽 사건의 목적은 사람들도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출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이스라엘]가 알지라

출 7: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출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바로]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8:10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바로]가 알게 될 것이라

출 9:14-16 [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바로]가 알게 하리라 [15]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10: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모세, 이스라엘, 그 자손]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결국 이 모든 재앙과 사건을 통하여 바로와 당시의 애굽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는 결국 이스라엘에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 12:31)고 말하게 된다. 여호와를 모르니 보낼 수 없다고 말하던 그가 이제는 여호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제 요셉의 유언에 따라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상징하는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낮에는 구름 기둥을 따라 이동하고 밤에는 불 기둥 아래 쉬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조금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든 일들때문에 약간 얼떨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도 정말 하나님을 알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뒤에서 살펴보자.

상황은 다 끝난 것 같았다. 바로는 백기를 들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많은 물품(금, 은, 패물, 옷 등)을 취하여 나왔다. 이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다. 바로가 마음을 바꾼 것이다.

출 14: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시간이 좀 지났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다. 재앙은 끝났고 지금 자신들이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잘 부려먹던 노예들을 다 그냥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그래도 상식적으로 그 동안의 일들을 생각하면 사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들의 굳은 마음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길을 돌이킨 것(14:2)을 보면서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신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여호와는 광야에서는 힘을 못쓰는 그런 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로는 그들이 내보낸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잡아오기 위해 추격대를 보낸다.

출 14:6-7, 9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가장 빠르고 강력한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이스라엘을 추격해 왔다. 바로 전만 해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영화로 치면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에필로그로 잔잔한 음악이 이어지면서 평온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이어질 그런 상황이었다. 소설로 치면 발단, 전개, 절정을 지나 이제는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이 눈 앞에 현실로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때, 그들의 눈 앞에 그들이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바로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

끝인 줄 알았는데 끝나게 생긴 것이다. 결말인 줄 알았는데 절망이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숫자가 많았지만 그냥 숫자만 많았다. 그들은 군대가 아니었다. 바로의 군대가 끌고온 병거는 지금으로 치면 탱크다.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보병과 민간인 앞에 탱크 부대가 나타난 상황이다.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 싸울 수 없다. 이길 수 없다. 그럼 도망할 수는 있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바닷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두려움과 원망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반응을 보라.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상황을 보면 이 정도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이 상황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어지는 이들의 말을 보면 이들은 단순히 두려운 마음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이 이들을 삼켜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이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죽음의 두려움, 공포를 느끼고 있다. 지금 여기서 절대로 살아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을거면 그냥 애굽에서 살던대로 살다가 나이 들어 죽으면 되는데, 이렇게 광야까지 나와서 비참하게 죽어야할 이유가 어디있냐고 모세에게 따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전에 그들이 모세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우리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누가 종살이에서 구해달라고 했느냐. 5장에 보면 모세가 처음 바로를 만나고 나서 그들은 오히려 더 학대를 당했고 그로 인해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판단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마 그때 이들은 이런 식을 말을 했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이후에도 힘든 일을 만날 때 마다 종종 이런 식의 과거미화를 하며 왜 애굽에서 우리를 구해냈느냐는 식의 불평과 원망을 한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에서는 자신들이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16:3). 물이 없을 때에도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원망한다(17:3). 가나안의 정탐꾼들이 돌아왔을 때도 이들은 애굽에서 죽는게 나았다고 말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폭동을 일으켰다(민 14장).

결국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평안, 안전, 만족,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고 모세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깨뜨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적이고 내가 벗어나야할 상황이었다. 나에게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어려움보다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지금의 이 상황, 애굽의 군대가 그들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난 이 상황은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었을까? 조금 있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뜻밖의 상황, 예상 못한 상황, 내가 원하지 않았던 상황, 흔히 고난, 시련, 어려움이라고 부르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난은 나에게 좋지 않다고 단정짓고 따라서 단순히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그 순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원인을 찾아 책임을 묻는다. 어떤 경우는 끊임없는 자책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환경, 다른 사람을 그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다. 때로는 그 대상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하다.

바다를 뒤로 하고 애굽의 군대를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애굽의 군대를 마주하자 심히 두려워했다. 8절 끝에 보면 그들이 나올 때는 담대하게 나왔다. 그때는 그들이 승리를 경험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부르짖은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믿음의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찾듯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아마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섞여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게 했던 말을 보면, 그들은 모세에게 지금 고난의 모든 책임을 물으며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13장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단지 두려워하고 원망할 뿐이었다. 이 사건 전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그 놀라운 일들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믿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있었던 모세는 달랐다.

 

모세의 믿음의 확신

자신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답한다.

출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모세는 정말 연약해 보였다. 뭐 저렇게까지 못하겠다고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세는 전혀 다르다.

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어쩔줄 몰라하는 자들에게 가만히 서라고 한다. 애굽의 강력한 군대를 보고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도전한다. 다시 보지 않을 줄 알았지만 다시 너희 눈 앞에 나타난 이 애굽 사람들을 이제는 정말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너희가 경험할 것은 너희의 죽음이 아니라 너희를 두렵게 하는 이 군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고 너희가 해야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그저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힘을 내서 싸울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모세는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신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그가 경험한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후로 하나님은 그 뜻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모세는 그 모든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확신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말씀이다.

출 1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어떤 일이 어떤 목적으로 벌어질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길을 돌이켜 바닷가에 진을 치면 바로는 그들이 광야에 갇혔다고 생각하고 쫓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그의 군대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실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목적은 출애굽 과정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이고 이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래서 온 무리는 “그대로” 행하여 바닷가에 진을 쳤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바로는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하게 했고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그 군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처음에 우리가 살펴봤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바로의 군대가 보이는 순간 이들이 보였어야 할 반응은 두려움과 원망이 아닌 확신과 기쁨이어야 했다. 오히려 반대로 바로의 군대가 보이지 않았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지 의심했어야 했다. 바로의 군대가 보였기 때문에 이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좀 전에 했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었는가? 괜한 고난이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고통만 가져오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하는 일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같이 반응하는 것이 맞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속해서 행하실지를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옳다는 것을 다시 확신시켜 주신다.

출 14:15-18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1-4절에서 하셨던 말씀과 같지만 더욱 구체화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어떻게 바로의 군대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실 것인지도 밝히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할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들어가 그곳에서 멸망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이 증명될 것이다.

특히 성경이 반복해서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1번, 4, 6, 7, 9, 17, 18, 23, 24, 25, 26, 28절).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더욱 큰 영광을 얻으시게, 사람들이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이다. 그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더욱 강하신 능력의 하나님으로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보았을 때, 그 강력함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하고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에 사로잡혀 어쩔줄 몰라하고 원망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이 자신의 안위와 평안, 만족, 기쁨을 최우선에 두지 않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시련 가운데 안심하며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

성경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 결론은 참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으로 바다를 건넜고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 들어 갔다가 멸망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완악한 마음이다. 그동안 그렇게 당했었고 지금도 바다가 그렇게 갈라지는 것을 보면 정말 안되겠구나하고 도망할 법도 한데 그들은 바다 가운데까지 뛰어들었다. 결국 그들은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망하려 했지만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병거로 무장한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워했지만 결국 그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그들의 죽음이었다(30절).

이 사건의 결론으로 모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큰 능력을 보고 경험하자 그분을 믿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으로 15장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노래의 주제는 11절부터 기록되어 있다.

출 15:11-15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 15: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결론이다. 사람들은 많은 신을 섬기지만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 모든 신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참 신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신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애굽의 왕이든, 그의 군대든, 바다든 마찬가지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믿음이 없는 사람이든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도전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애굽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모세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험해도 애굽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능력을 보여주셨고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다. 그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받았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환경을 통해 계속해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편에 서라고 하시는데 거절한다. 만약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면, 성령께서 출애굽기 14장을 통하여 하는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바란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지만 언젠가 끝난다. 그 때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한다. 늦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한다.








가나안 7족속의 의미

적을 알고 우리 자신의 권세를 알면 적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영적 대적들인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 일곱 족속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그들을 물리치는 능력을 가져야 하겠다.


1. 헷 족속(Hittites) - 공포, 두려움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악몽, 우울증, 거짓, 속이는 것 등으로 영적 두려움 가운데 고통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헷 족속은 B.C. 1600-1700년 사이 족장 시대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가지 그곳에 거주한 종족 중에서도 매우 큰 민족이었다. 광야와 레바논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온 땅이 헷 족속의 영토로 불리웠을 정도다.
또 헷 족속은 히타이트족속들을 말하는데 BC10세기에 일어난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지역의 두려움이 대상이 된 족속이다.

2.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 진흙탕, 혼돈 무질서

진흙탕을 의미하며 혼돈과 무질서로 해석할 수 있다.
기르가스 족속은 우리의 삶에 진흙탕 같이 앞길을 볼 수 없도록 혼돈하고 공허함을 주고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게 얽히게 한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중에 우선순위를 놓치게 만든다.
성경은 에서를 가르켜 ‘망령된 자’라고 지칭했다.
에서는 장자권의 진가를 모르고 야곱에게 팔았다. 이러한 기르가스의 영을 물리치고 지혜와 분별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아모리 족속(Amorites) - 산중 사람, 교만, 교육(지식, 학문)

산중 사람이라는 뜻으로 교만 또는 교육(지식,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Amorite라는 단어는 ‘자랑하다’, ‘불룩 내밀다’, ‘산을 오르는 자’, ‘교만하게 행동하다’, ‘마음에 교만을 품다’ 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모든 정의들은 다 함께 인본주의적인 자세를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다.
아모리 족속은 교육의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우주적인 인간의 가치와 지식을 최우선시 하는 윤리 철학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에 의해서 강화된다.

4. 가나안 족속(Canaanites) - 낮은 땅, 저주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낮은 자존감, 경제, 저주(가난과 실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그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했기에 고대 세계에서 가나안이라고 하면 곧 ‘상인’을 의미하는 말과도 같았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 이후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흡수됐다.
가나안 족속은 ‘저주’라는 뜻도 있다(창 9:25).

5. 브리스 족속(Perizzites) - 시골 사람, 신경질, 미움, 광활한 평야, 전쟁터

시골사람이라는 뜻으로 신경질, 미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난 무식하다고 하면서 비신앙적인 사람이 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부르심을 받은 무리가 되지 못하게 하고 게으르게 하고 멀리 볼 수 없게 해서 약한 자립심과 존재감을 갖고 있다. 또 브리스는 ‘광할한 평야, 전쟁터’라는 의미도 있는데 혈기와 짜증, 신경질이 미움을 일으킨다.

6. 히위 족속(Hivites)

마음에 속한 축제(예술, 음악, 스포츠, 패션, 오락) 등으로 신념과 이념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면서 기만하고 땅의 것을 즐기게 하는 향략과 쾌락주의로 빠지게 한다.
구체적으로 예술, 음악, 스포츠, 오락 등 사람들이 세상에서 즐기며 깊게 빠지게 되는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

7. 여브스 족속(Jebusites) - 짓밟다, 억압(증오, 원망, 불평)

짓밟다는 뜻으로 억압(증오, 원망, 불평) 그리고 의료계로 해석할 수 있다.
밟히다 혹은 타작마당 등의 뜻을 가진 여부스는 다윗 왕 때 엄청난 전염병 재앙이 임했던 곳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자리가 바로 여부스 족속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죄사함을 받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은혜와 긍휼을 느꼈지만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부정하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면서 말슴과 기도로 장성함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올바른 마음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상 가나안 7족 같은 우리 안의 구습과 욕망을 우리는 타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가나안 7족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죄성을 가르킨다. 7족은 요단을 건너간 이들의 영적 쟁투라는 점에서 우리 기존 신앙인들이 해결해야할 인간 죄성의 쓴 뿌리다. 가나안 7족은 수십년간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성도의 고질적인 죄성으로 이것을 내쫓는 일에 잇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팔레스타인 지도

 

왕의 대로

'왕의 대로'라고 부르는 길 역시 고대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왕의 대로'란 말은 (민 20:17)과 (민 21:22)에 기록된 표현입니다.

(민 20:1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좌편으로나 우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이름은 왕이 다니는 특별한 길이라기 보다는 '주된 길'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길이 다른 길에 비해 빈번하게 사용된 주도로라는 말입니다.
왕의 대로는 지리적으로 다메섹을 기점으로 해서 아라비아 사막의 경계선에 가까운 트랜스 요르단 고원의 동쪽 가장자리의 길하레셋과 페트라를 지나고, 남북으로 달려 아카바 만의 에일랏에 이르는 국제 간선도로 입니다.
이 길은 사막의 경계 부근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들이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국제 교역에 있어서 남 아라비아 국가들의 값진 향료를 수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 이 길은 이스라엘 왕국시대에 남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교역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현대에 대한 정의들
   철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를테면  획스터는 현대를 '혼란의 시대'라고,
   소로킨은 '위기의 시대'로,
   오든은 '불안의 시대'로,
   알렉산더는 '불합리의 시대'로,
   괴슬러는 '갈망의 시대'로,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로,
   갤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표현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3일 / 02- 28(수)
출애굽기 13:1-22
찬송 / 221장(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 13:5)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에 이 예식을 지켜.
When the LORD brings you into the land of the Canaanites, Hittites, Amorites, Hivites and Jebusites--the land he swore to your forefathers to give you,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you are to observe this ceremony in this month:

13:1-2. 초태생은 여호와께 바치라
(애굽에서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에 대한 재앙을 잊지 말라는 교훈)

13:3-10. 무교병을 먹으라

13:11-16. 초태생을 바치라
(수컷은 여호와의 몫,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를 삼으라)
13:17-20. 애급에서 탈출(숙곳에서 에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심)
13:21-22.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한글개역성경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 구약에서만 19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4, 레위기 1, 신명기 6, 여호수아 1, 예레미야 2, 에스겔 2

《 출3:8,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3, 16:14, 신 6:3, 11:9, 26:9, 26:15, 27:3, 31:20, 수 5:6, 렘 11:5, 32:22, 겔 20:6, 20:15》

성경을 읽으면 ‘좋은 땅’을 설명하는 것임은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땅이고 간에 길바닥에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는 땅은 현실적으로 없고 이스라엘 역사에도 나오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곱의 때에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센’ 이라는 땅에서 목축을 주로 하며 살았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애굽은 비옥한 나일 강 주변으로 해서 농업이 발달 했습니다. 따라서 애굽에 이주하러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100% 목축만 하지는 않고 농사도 지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일’을 엄하게 시킨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출1:1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도 하고 농사의 여러 일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축과 농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목축을 할 수 있는 드넓은 푸른 목초지와 농사지을 수 있는 자기 소유의 땅을 갖는 것이 환상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소명을 주실 때 바로 이러한 땅을 주시겠다고 설명을 하십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지방의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땅을 준다고 하니까 또, 바로왕의 박해도 있고 하니까 그들이 모세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할 때, 문자 그대로 그 땅에는 젖과 꿀이 땅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땅일까요?

  '젖'은 우유를 생산할 수 있는 양과 염소를 먹일 수 있는 풍성한 초장을 의미하고 또한 성경에서 꿀은 벌꿀 자체를 의미하는 곳은 몇 군데 안 되고(삼손의 이야기 삿 14:8, 요나단 이야기 삼상 14:27, 잠언의 경고 잠 25:16 등에서는 문자 그대로 꿀을 의미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꿀’은 “대추야자 꿀과 같이 단 여름 과실을 생산하는 과실 수” 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쓰입니다.<同旨, 그 말씀, 2008.8. p169>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젖으로 대표되는 목축업과 꿀로 대표되는 농업 - 종 되었던 집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싶고 소망하고 꿈꾸었던 - 을 모두 할 수 있는 풍성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서 20장 6절은 이를 부연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들을 위하여 찾아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겔 20:6)

 따라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감추어 두었다가 찾아주신 땅이요, 모든 땅 중의 가장 아름다운 땅(겔 20:6)입니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민 35:34)이요, 시내와 분천과 샘이 있는 땅(신 8:7)이요, 광대한 땅(출 3:8)이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신 11:11-12)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적용할 가나안 땅은 어디일까요? 평강과 감사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예수 안에서의 삶이 곧 현재 우리의 가나안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신자만이 찾아 누리는 땅이요, 모든 만족 중에서 가장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아름다운 삶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부족을 쫒아 내야 했듯이 우리들도 끊임없이 내 속에서 올라오는 육신의 일들을 쫒아내며 살아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이 천국의 상징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의 상징이라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싸움을 할리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문화와 싸워야 했고 가나안 종교와 싸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나와야 했으며, '하나님'을 배우고 알기 위해 '광야'를 지나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가나안 족속'과는 싸워서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던 세력은 블레셋 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얻고 누리려면 필연적으로 블레셋과 싸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었다고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세상' 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 되는 가치관, 문화, 종교,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 문화, 종교하고 싸워 자신을 주 안에서 지켜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올라오는 육신의 정욕과도 싸워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 가치관, 종교와 육신의 본성은 가나안의 여섯 족속처럼 끊임없이 신자를 공격해 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을 받아 거듭났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 위한 싸움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고 불신자들은 이 싸움이 아예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컨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만사형통, 승승장구하는 땅이 아니며 고통과 질고가 없는 땅이 아닙니다. '산과 골짜기가 있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신11:11)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요구되는 땅이며, 그래서 날마다 하늘(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땅이며, 유혹하는 세상과 자신에게 있는 정욕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야 하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물리적으로 그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아니고, 토양이 매우 기름져서 농사짓기 아주 좋은 땅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고, 간섭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세상 복을 받고 고통도 없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誤算)이며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들은 오직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닮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기도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며,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김으로 승리의 기쁨이 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의미(신명기 11:8-12)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대부분의 신자들, 아니 많은 목회자들마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란 당시로선 일용하는 필수 식품이 아니라 기호 식품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스런 식품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아주 풍요로운 땅으로 쉽게 단정짓고는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전보다 생활 형편이 훨씬 나아지는 축복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해석이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많이 생산된다는 의미로 "흐른다"라고 표현했듯이 가나안 땅의 주산물은 물론 젖과 꿀입니다만 땅 자체가 풍요롭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젖과 꿀이 주산품이라는 것은 목축과 양봉이 주산업이라는 의미인데 곡물을 심을 수없는 아주 척박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아리조나 사막 지역에 가보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보호 구역이 곳곳에 있는데 너무 덥고 메마른 모래 땅이라 염소와 꿀벌을 치고 토산품을 만들어 파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바로 그런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 흐르다(2100) 주브(zûwb)  זוּב    

1. 흐르다.   2. 시 78:20.  레 15:25.
발음 [ zûwb ]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젖과 꿀, 풍부함을 뜻함] 출 3:8, 13:5,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4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땅이 풍요롭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젖을 생산할 수 있고 양봉만 할 수 있는 척박한 땅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흐른다(주브.
zûwb.  זוּב)'라는 동사는 "생산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습니까?
"파종한 후에 채소 밭에 발로 물대기"를 할 수 있는 애굽 땅과 비교했습니다.
수차(水車)를 발로 저어 물을 댈 수 있는 비옥한 평지라 채소나 곡물을 심기만 하면 풍족하게 수확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우선 채소와 곡물을 심을만한 평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간혹 내리는 비가 대지를 적실 정도가 안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일용할 주 식품인 곡물과 채소를 경작할만한 여건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을 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기호 식품은 양으로 따지면 조금만 생산해도 사실은 아주 많은 양이 됩니다.
기호식품이란 주 식품에 첨가해서 아주 적은 양을 섭취하는 것이고 또 매일 젖과 꿀만 먹고 살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쌀 수십만 톤과  꿀 1 톤이 먹일 수있는 사람 수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당시의 경제적 형편과 식생활 습관을 감안하면 젖과 꿀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최고급 식품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흐르는"이란 표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도저히 사람이 살 데가 못되는 땅이 가나안입니다.

신자가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왜 그런 척박한 땅을 하나님은 오히려 축복의 땅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그 크고도 수많은 희생들을 거쳐서야 인도하셨는가?" 입니다.

애굽의 종살이 사백년과 가데스 바네야와 광야에서의 온갖 반역으로 인해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지 않습니까?
그 중에 모세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해답을 본문이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歲初-신년초)부터 세말(歲末-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척박하여 산물이 희귀한 땅이라 오히려 하나님이 일년 365일 한 시도 떠나지 않고 항상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땅을 당신의 백성에게 권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여건이 풍족한 곳이 아니라 정반대의 땅으로 당신의 자녀들이 들어가 살기를 하나님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에 세상 수단에 절대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계명대로만 살아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백성으로 선정한 이유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주는 백성들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한 마디로 신자가 되었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는 주위 여건이 어떠하든 삶의 세밀한 구석부터 전 인생을 걸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의존하여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람들의 칭찬이나 멸시와, 환경의 풍족함이나 궁핍함에 굴복하지 않고 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신 8:3).

또 그렇게 살면 젖과 꿀은 커녕 마실  물마저 없는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방황해도 주리거나 갈하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으며 발이 부릍지 않게 해줄 하나님이 세초부터 세말까지 항상 우리를 지켜봐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참 정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선 젖과 꿀을 싫컷 맛보았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젖과 꿀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40년간 방황하던 광야가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발로 물 대는 애굽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탐심을 좇아 살고 있습니까?(골 3:5)
진정한 젖과 꿀을 사모하기에 땅이 물을 흡수하는 험한 산과 골짜기에서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을 잡고 따라 가고 있습니까?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광야에서 본 가나안

신명기가 기록된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나안 동편이 광야이기에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과 골란보다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까?
그동안 걸었던 광야보다 가나안이 상대적으로 더 기름지다는 뜻일 수 있다.
요단 동편에서 볼 때 가나안은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풍으로 이슬을 공급받는다.
이슬은 밤마다 땅을 촉촉이 적시며, 겨울에는 농사가, 여름에는 목축이 가능한 땅으로 만든다.
겨울, 우기에 지중해 구름이 가나안산지에 부딪혀 내리는 비는 서쪽으로 흐르며 숲을 만들어 계단식 농법을 사용한 풍요로운 농사를 짓게 한다. 동쪽으로 흩뿌리고 지나가는 비는 유다광야에 초지를 형성해, 겨울에는 푸른 풀을 공급하고, 여름에는 건초로 목축을 하게 한다.

목축과 과일 농사에 적합한 땅
‘젖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은 가나안이 목축에 적합한 땅이라는 의미다.
가나안은 건조한 날씨에 적당한 수의 양 떼를 키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젖을 얻기 적절하다.

또한 ‘꿀이 흐르는 땅’이란 골짜기에 숨은 샘 곁에서 자라는 과실수의 열매를 말한다.
가나안의 여름은 가혹할 만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겨울에 내린 물을 품는 석회암층은 여름에 샘물을 꾸준히 공급해, 골짜기든 산지에 시내와 샘이 흐르게 하며(신 8:7), 과실수에 수분을 공급해 따가운 햇볕에 과일의 당도를 최고로 높인다.

신명기 8장에 나오는 7대 식물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이 과일이며, 대추야자 열매다말(Tamar)을 의미한다(신 8:8).
이스라엘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는 세계 최고의 당도를 자랑한다.
즉, 농업적으로 봤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은 적당한 목축에 적합한 땅이요, 당도 높은 과일 농사에도 적합한 땅이다.
그래서인지 현대 이스라엘의 주력 산업도 농업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기후나 주변 상황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살 수 있는 땅이다.
왜냐하면 항시 흐르는 요단강이 있지만 낮은 곳에 있어 사용할 수가 없고,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내려야 한다.
서쪽으로는 베니게와 블레셋, 동쪽으로는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심지어 광야의 미디안과 아말렉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추수기만 되면 침략해 왔다.

또한 거대 문명이 위치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가 이집트로 가려고 쳐들어왔고, 이집트도 북진 정책을 쓸 때는 가나안을 교두보로 삼았다.
전쟁이 많고, 사망의 그늘진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말씀에 순종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기근과 강대국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은 곡물을 심을 수 없는 척박한 땅,
그러나 건조한 날씨에 양떼를 키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젖을 얻기 적절했다.
또 골짜기에 숨은 샘 곁에서 자라는 과실수는 단맛이 강하다.
지금도 이 지역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는 당도가 높다.
비록 농사는 못짓지만 하나님이 일년 365일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고도 해석된다.

가나안은 시나이 반도와 아나폴리아 사이에 있는 해안 지역을 가리키는 옛지명으로 오늘날 레반트 지역에 속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북부, 시리아 일부 지역이다.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 요즘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이 되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이 시작이다.
이 전쟁으로 서안지구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1993년 오슬로협정으로 반환, 팔레스타인 자치구), 시나이반도(1982년 평화협정으로 이집트 반환), 골란고원 등을 전리품으로 챙긴 후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했다.

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연합군(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모두 이스라엘에 패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국경선은 더욱 견고해졌다.
강한 지도자가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 신세로 떨어졌다.

1987년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으나 2006년 총선이후 가자는 강경파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West Bank)지구는 온건파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권력 상태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방(미국, 유럽, 이스라엘)대 이슬람문화권(아랍 및 페르시아계, 파키스탄)의 군사적 대립의 근원이자 테러 분쟁 핵심지라 할 수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본토를 기습폭격,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질을 납치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전면봉쇄하고 대규모 보복공습을 했다.
이스라엘측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은 갓난아기와 여성들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테러리스트이고 팔레스타인측에서 보면 땅과 종교적 상징을 빼앗아가는 점령자이다.

중동의 전쟁은 전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각국마다 이스라엘 지지와 팔레스타인 지지로 분열되고 있다.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사는 뉴욕도 긴장하고 있다.
8일 타임스 스퀘어에서 이스라엘 지지시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지시위가 맞서며 경찰이 출동했었다.
지난 10일부터 유대교 회랑과 이슬람교 사원 인근에 대한 순찰도 강화되었다.

기원전 1,800년 경에 헤브론에 살았다고 알려진 아브라함(아랍어로 이브라힘)은 아랍과 유대 민족의 시조이다.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첫째 부인 사라의 아들 이삭의 후손, 아랍민족은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샬롬(shanlom)’은 안녕하세요, 잘가세요라는 일반적 인사로 평화, 평강, 평안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 인사말로 ‘샬람, 알레이 쿰’은 ‘당신의 평화를 빈다’이다.
샬롬과 샬람은 비슷한 발음으로 모두 ‘평화’ 라는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한 형제의 후손들이 죽으라고 싸우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우도 아니고 극좌도 아니고 중도의 목소리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목소리는 권력욕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더 이상은 ‘피가 피를 부르는’ 확전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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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 12 일 / 02- 27(화)
출애굽기 12:1-5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유월절(출애굽기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This is how you are to eat it: with your cloak tucked into your belt, your sandals on your feet and your staff in your hand. Eat it in haste; it is the LORD's Passover.

유월절(逾越節)이란 한자는 "넘을 유(逾), 넘을 월(越), 마디 절(節)"
영어로는 "Pass Over" 라고 합니다.
유월절은 히브리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시작을 말합니다.

유월절(페사흐) [ peçach ]  פֶּסַח 스트롱번호 6453

1. 형벌과 재난으로부터의 면제.  2. 유월절의 어린 양. 3. 유월절
발음 [ peçach ]
어원 / 645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뜻풀이부
1. 고유명사, 남성 형벌과 재난으로부터의 면제
 a. 고유명사, 남성 유월절의 어린 양[백성들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쳐지는 희생 제물], 출 12:48, 12:21, 27, 대하 30:15, 17, 35:1,6,  민9:4, 대하 30:18
 b. 고유명사, 남성 유월절[니산월의 제14일 : 무교절의 7일 이후에 곧바로 이어지는 날], 레 23:5.

12:1-13, 유월절 지침
12:14-20, 무교절 지침
 누룩이 없는 빵(누룩은 부정한 것, 죄악을 상징)
12:21-28, 유월절 지침(현관문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12:29-30, 멸하는 자(죽음의 천사)
12:31-36, 은금의복을 준비
12:37-51, 이집트를 떠나는 이스라엘
  42절 이하 이방인, 일군들이 유월절 지키는 규례, 양고기의 뼈를 꺾지 말라





허리에 띠를 띠고... 급히 먹으라
-
마치 출정하는 군인들의 그것처럼 긴장이 감도는 지시이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출애굽하라는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만반의 여행 준비를 갖추고 모든 행동을 재빨리 시행해야 했다. 실로 이 지시는 430년간 기다렸던 출애굽이 이제 목전에 다가왔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서 '급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파존'은 '도망하다'는 뜻의 '히파드'에서 온 말로서 도망치듯 서두르는 것을 뜻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이렇게 급히 먹도록 하신 이유는 그들이 당시 그토록 급하게 구출된 것이 오직 주의 은총 때문이었음을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지금까지 지시한 모든 내용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특별히 제정하신 유월절이었다.
따라서 너희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식사에 임하라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유월절'(페사흐)이란 문자적으로 '넘어간다'(Passover)는 뜻으로서, 즉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시던 날 밤, 죽음의 천사가 피 묻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지나쳐 넘어간 사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면서 부터 준행해야 할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인과 애굽인(이방인) 사이를 구별하여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의 대조적인 일을 행하신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기념하는 절기인 동시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또한 이는 오순절, 장막절과 함께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民族)이 이집트에서 탈출(脫出)한 일을 기념(紀念ㆍ記念)하는 유대교(Judea敎)의 축제일(祝祭日).
하늘의 천사(天使)가 밤중에 이집트의 각 집의 맏아들을 죽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어린양(羊)의 피를 문설주(門楔柱)에 발랐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서 재앙(災殃)을 받지 않은 일을 기념(紀念ㆍ記念)한 데서 유래(由來)한다."고 합니다.

유월절의 교훈은 어린 양의 피를 히브리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 바르고 초태생의 죽음이란 재앙을 넘어간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섭리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새해는 한해의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유월절은 히브리 민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넘어가는 그날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왜면하고 살아오셨나요?

아직도 보혈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시고 계시다면 주의 성령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보혈에 의해서 바뀐 인생은 더이상 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은 모두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여호와의 유월절과 같은 새로운 출발을 경험하는 은혜가 넘쳐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의 보혈은














The Lords Passover (여호와의 유월절)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갈 때
하늘로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이곳을 덮으소서
이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내 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The Lords Passover (여호와의 유월절)

In to the highest place of all
In to the most holy place I come
Taking off my worldly shoes
I fall before throne just as I am
When all of my love for me and all of my for you are dying
Down to this very plave Oh Lord, Comes heaven's Ta ber na cle
Cover me with Your blood Changer me with Your blood
All of my broken hopes in me will be restored in my God
Pass by me Oh my Lord Lay your hands Oh my Lord
All of my dying worship for
You will be revived in my God


여호와의 유월절


이 재앙은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중에 마지막 재앙이자 가장 큰 재앙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생명을 누가 손에 쥐고 있는가 심판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혼은 구원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보여주기도 합니다.
Exodus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왕의 장자부터 - 가축의 처음 난 것 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유추해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눈에는 그 강대한 바로의 장자도 귀족들의 장자도 서민들의 장자도 가축의 처음 난 것도 높낮이가 없습니다. 그사람이 착하든지 나쁘든지 천하든지 귀하든지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재앙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통해 여호와의 사자는 집을 넘어갔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두어서 하나님의 재앙에서 넘어갈 수 있었어요.
유월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할때 보는 단 한가지는 그 사람의 성품도 아니였고요 그사람의 생김세도 그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도 아니었어요.
단 한가지를 봤습니다.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러져 있었는가 아닌가
이게 중요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가 아닌가
그럼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나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성품 때문에 우리의 행동 때문에 우리의 지위 때문에 우리의 힘 때문에 우리의 돈 때문에 우리에게 닥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단 한가지 어린양의 피로 우리가 살아가는지 그것 하나만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런 여러분들께 이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나요?
그럼 우리에게 어린양의 피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누구의 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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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유월절의 어린양되시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피를 통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몇주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이런 배움은 결국 우리가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 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선제적으로 배워야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말이죠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면 우리를 구원할 분이 왜 필요하겠나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왜 복음인가 왜 복된 소식인가 이 이 이해의 바탕은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가르침 만으로 우리의 죄가 고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이 여러분의 귀를 여시고 여러분의 눈을 여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듣고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깨닫는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이 사랑은 간단한게 아닙니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모두에게 당연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라고 고백되어 나오는 그 탄식과 부르짖음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요
그 회개를 들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 일들은 단순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복음이 되는 이유는 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이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심판을 확정짓는 마지막 한방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 마저 죽였다’는 사건으로 들어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지만 인간은 그 마저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게 된 겁니다.
이제 그 어떤 사람도 이 죄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변명거리가 있었어요 율법을 잘 지켰다고 변명하였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갔다고 변명하였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이 딱 세워지고 나서부터는 더이상 변명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앞장 섰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힘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에 자손이라고 부르던 민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자고 동의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죄에서 더이상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적인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제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을 통해 믿게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 살아납니다.
그 차이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걸 가르는 거에요.
유월절의 교훈은 여기 있습니다. 새해는 한해의 새로운 시작이듯이 유월절은 민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넘어가는 그날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시기를 원하고 바라시나요? 아니면 십자가를 왜면한체 살고 계신가요.
여러분 아직도 보혈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시고 계시다면 주의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계시다면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바꾸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보혈에 의해서 바뀐 인생은 더이상 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나오지 못한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행동이 일들이 이제 모두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월절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백성들을 넘어간 날이라고 배웠습니다. 또 그 백성들을 구분하는 방법이 행위도 신분도 성품도 아닌 오직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의 피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한번 배웠습니다.
여러분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의 그 희생을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주간도 믿음의 눈을 들어 그 십자가를 붙잡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시작되는 한주간을 오직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 11 일 / 02- 26(월)
출애굽기 11:1-10
찬송 / 192장(양원히 죽게 될 내 영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지 재앙(출애굽기 1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가지 재앙을 바로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 내리니.
Now the LORD had said to Moses, "I will bring one more plague on Pharaoh and on Egypt. After that, he will let you go from here, and when he does, he will drive you out completely.

이제까지 애급 땅에 내려진 재앙은 아홉 가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여 재앙을 한 번 더 내려야 애굽의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히브리 백성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까요?
이러한 과정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애굽에 대한 마지막 재앙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 대한 재앙은, 애굽의 왕궁에서부터 일반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의 기초를 흔드는 재앙입니다. 장자는 그 집안의 기둥이며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찬송 : 새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성경 : 출애굽기 11장 1절-10절
설교 : 세상이 위대하게 보는 성도
우리 마음 속에는 두려워 하는 존재가 하나씩 이상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지금은 괜찮지만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사 바늘을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네 병원에서 주사 바늘 쇼크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가느다란 주사 바늘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두려워하는 것 혹은 두려운 존재가 있습니까?
지금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들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들은 애굽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았고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운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집안의 힘의 근원이 되는 "장자" 즉 "상속자"가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장자로부터 집에서 키우는 가축의 첫째까지 하나도 예외 없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애굽 사람들은 공포를 넘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백성은 은혜를



חֵן 스트롱번호2580

1. 자비.   2. 품위. 3. 탄원
발음 [ chê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자비, 호의, 선의, 창6:8, 19:19,32:6(5), 33:8, 30:27, 47:29, 50:4, 출3:21, 11:3, 12:36, 전9:11
2. 명사, 남성 품위, 아름다움, 우아함, 잠22:11, 31:30, 전10:12.
3. 명사, 남성 탄원, 기원, 기도, 슥12:10.​

모세가 위대하게 보이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 모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더 이상 애굽의 왕 바로가 두려운 존재나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모세가 두려운 존재요 위대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출애굽기 11: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위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돌"(גדל)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크기나 숫자, 효과 등에 있어서 "매우 큰" 것을 의미합니다. 혹은 명성이 있거나 많은 물질을 가진 것처럼 부유해 보이거나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미디안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애굽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높은 지위도 많은 재산도 대단한 명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모세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위대하게 보였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왜 모세가 애굽 사람들의 눈에 두려운 존재, 모든 것을 다 가진 위대한 존재로 보였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겨졌던 바로는 무능력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는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되었습니다. 지금껏 아홉 개의 재앙 모두 모세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두려운 열 번째 재앙에 대해 경고하였으니, 곧 모세의 말대로 될 것이라고 애굽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모세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기에, 애굽 사람들은 모세를 두려워하고 위대하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베드로와 함께 하실 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 있었던 놀라운 일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의 요셉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형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사람이며, 흘러 흘러 애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어린데 노예가 된 요셉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였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간수장이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3절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음을 보디발이 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창세기 39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예의 신분, 죄수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는 상황이 역전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5장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억해 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거짓말을 하였지만, 베드로는 성령께서 말씀하심을 듣고서, 책망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믿지 않는 자들까지 베드로와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 하였다라고 사도행전 5장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능력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위대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11:7. 구별하는

פָּלָה 스트롱번호 6395

1. 분리하다.  2. 니팔형 : 분리되다.  3. 히필형
발음 [ pâl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지만 다시 주님의 이름으로 각자의 처소에서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게 하시고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시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내 힘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주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오늘 우리의 하루는 형통할 것이며, 위대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모든 것을 다 가진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강한 용사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오늘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오늘도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연약한 나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세상의 유혹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무서운 재앙으로 단번에 바로를 굴복시키지 않고 10번째의 재앙까지 힘들게 끌고 오셨을까요?
살면서 계속되는 수많은 문제를 이겨낼 수 있도록 참고 인내하는 능력과 권세를 키워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상 참고 인내하는 능력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왜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도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약할 때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으면 하나님께 더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람이 더 감사를 안 합니다.
사람은 감사할 것이 많으면 더 감사를 모릅니다.
대개 보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헌금도 부자들은 잘 하지 않습니다.
봉사도 시간이 많은 사람이 봉사하지 않고 대개 바쁜 사람들이 봉사합니다.
믿음생활도 고난과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잘 믿고 결국 큰일을 합니다.

때로 고난도 겪어보아야 건강에 대한 고마움, 축복에 대한 고마움, 부모와 교회와 이웃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성도도 고난 중에 참고 인내하는 훈련을 이겨내야 진짜 훌륭한 성도가 됩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잘 활용하면 좋은 것이 남지만 물질과 명예와 인기가 찾아오면 대개 믿음을 비롯해서 더 좋은 것을 뺏깁니다.

사람들은 잘 입고, 잘 먹고,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돈이 많을수록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고, 해도 많고, 나쁜 것도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문제를 오히려 감사하며 인내하십시오. 자녀들이 고생 없이 자라야 큰일을 할 것 같지만 사실상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녀가 고생할 때 너무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되고, 인물이 되고, 좋은 교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기를 때 강하게 기르려고 어려운 난관도 계속 지나게 하십니다.
이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주는 사람에게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보면 고난을 주는 사람은 오히려 천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은 사람 만들려고 그를 보낸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마귀가 아닌 천사로 보시고 그 천사와도 잘 지내십시오. 참된 능력은 잘살고, 힘 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잘 참아내는 것입니다.





1. 애굽왕 바로가 아홉 가지의 재앙을 당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한 가지 재앙만 더 애굽에 내리게 되면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1절).

이 말씀은 지금까지 애굽에 내린 아홉 가지의 재앙들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졌음과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내려지면 바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임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미리 정하시고, 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세상 역사는 어느 뛰어난 영웅적 인물이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 속에서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이루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온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의 힘들고 지루한 싸움에서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2. 그리고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절).

물론,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순순히 내어줄 것을 전제한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애굽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은금 패물을 다 내어줍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준 이유는 재앙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속히 내보내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세기 15:16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서 은금 패물을 취함으로 그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며 착취당한 것에 대하여 일순간에 보상받게 된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착취당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수고를 다 기억하고 계셨다가 그들이 출애굽 할 때에 애굽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고를 다 보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수고를 다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조금도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다 기억하시고 언젠가는 다 갚아 주심으로 그 모든 수고와 고통을 잊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창 41:51).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친히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하늘 영광으로 덧입혀 주심으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흘린 눈물과 수고를 완전히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계 21:4).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고를 하고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을 믿으며 끝까지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애굽왕 바로의 장자로부터 천한 일을 하는 여종의 장자까지, 그리고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이것은 생명이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피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애굽인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권력이 없는 자나, 지식이 있는 자나 지식이 없는 자나 누구나, 그들에게 속한 모든 가축들까지도 다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피할 수 없었습니다(12:29.30).

고대 세계에서 장자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애굽에 임한 장자 재앙은 모든 애굽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애굽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7절).

여기서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말은 ‘개도 짖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개는 주변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짖어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가 짖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는 곳에는 이전과 다름없이 지극히 평안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애굽인들의 거주지에는 모든 가정의 장자가 죽어감으로 대 혼란과 통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진영에서는 개도 짖지 않았으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얼마나 완벽한 것이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요한계시록에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 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완벽하게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계 9:4, 13:8, 16:15).

사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임할 각종 재앙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심판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3:18).

여러분, 마지막 심판 때의 심판 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벽하게 보호받은 것과 같이 장차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 그날에도 완벽하게 보호를 받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애굽 왕 바로는 아홉 가지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장자 재앙이라는 무서운 심판의 경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자 재앙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끝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마침내는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심판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심판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하여 분명한 최후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구원하시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심판하여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애굽 왕 바로는 그 마음이 강퍅해서 아홉 번이나 되는 경고를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사람들도 이와 같음을 알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패물을 주신 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 잃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시내산 언약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머무르는 동안,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여러 율례를 주시면서 맺은 언약입니다(출 24:1-8).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서 단을 쌓고, 희생의 피 반(半)을 뿌린 후, 시내산에서 받은 말씀을 기록한 ‘언약서’(the book of the covenant)를 백성 앞에서 낭독하여 들려주었습니다(출 24:4-7).
이에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백성에게 피를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포함으로, 마침내 시내산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출 24:7-8).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 초기에 광야 1세대와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 말기에 41번째로 진을 친 모압 평지에서(신 29장) 광야 2세대에게 다시 확증되었습니다(일명 ‘모압 평지 언약’).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을 맺은 이후 계속되어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갱신하여,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언약입니다.

1. ‘나라’를 대상으로 한 언약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지 45일째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진 친 다음(출 19:1-2),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시내산에서 부르실 때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출 1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한 사람에서 시작되어 한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이제는 한 국가(백성 전체)를 중심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특히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때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운 것은, 언약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보여 줍니다(출 24:4).

1) 이스라엘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시내산 언약의 핵심을 담고 있는 십계명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이스라엘의 과거가 비참한 노예에 불과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해 주실 때, 이스라엘은 그에 합당한 수고도 없었고 의로움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참고-신 7:7, 9:4-6).
출애굽은 참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참고-겔 16:1-14).

우리도 죄와 사망의 권에 아래 영원한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였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허락받고(요일 2:25), 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자격을 부여 받았습니다(롬 8:15, 갈 4:6).
이는 자격을 따지지 않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엡 2:4-8).

2)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성취되어 세워진 큰 나라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 2:24을 볼 때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맺어진 언약입니다(출 6:5).
출애굽 역사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언약의 성취였던 것입니다(신 9:5).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말씀대로 “큰 민족”(창 12:2)이 되었습니다(출 1:7, 9).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대로 “강대한 나라”(창 18:18)가 되었습니다(출 1:9).
더 이상 나약한 노예 민족이 아니라 ‘항오를 이루며 행진하는 여호와의 군대’ 곧 당당한 정복자로 성장한 것입니다(출 12:41, 13:18, 민 33:1).

2. 하나님께서 직접 전 백성에게 음성으로 들려 주신 언약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전 백성에게 직접 선포하신 언약입니다(출 20:1-19, 신 5:4, 23-24).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백성이 없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생존한 국민은 없었습니다(참고-출 20:19, 신 5:25, 18:16, 히 12:18-20).
이러한 언약은 인류의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최초의 언약이었습니다(신 4:8, 32-33, 시 147:19-20).

3. 기록으로 구체화된 최초의 언약

시내산 언약의 뚜렷한 특징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기록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새겨졌습니다(출 31:18). 하나님께서 친수로 기록하셨다고 한 것은(신 9:10) 그만큼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증거의 두 돌판을 하나님께 받아 내려올 때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였습니다(출 32:1-6). 이에 모세는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고(출 32:19), 방자한 백성 가운데 삼천 명 가량을 도륙한 후에(출 32:25-28), 모세는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 40일 중보기도를 올렸고, 산 밑으로 내려와 회막에서 또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후 모세가 깎아서 시내산으로 가지고 올라간 돌판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다시 친수로 기록해 주셨습니다(출 34:1, 28).


하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율례를 주셨습니다(출 20:22-23:33). 이는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는데(출 24:4, 7),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서에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그 분량이 많은 것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큰 은혜입니다(참고-호 8:12). 하나님의 언약이 돌판에 새겨지고 언약서에 기록되었다 함은, 그 언약이 만대까지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참고-사 30:1-8).

4. 언약의 땅에서 지킬 실천적 언약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화되는 것은, 이제 가나안 입성이 임박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언약을 체결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3:20, 30).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언약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1) 약속의 땅
가나안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서 약속된 땅입니다(창 12:7, 13:14-17, 15:7, 18-21, 17:8). 가나안 땅이 ‘열조에게 언약을 주신 땅’이라는 사실은, 신구약 성경에서 각 시대마다 거듭거듭 기록되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이 임박한 상왕에서 받은 시내산 언약은 실제 가나안 땅에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 가운데 출애굽기 23:10-33에서는 그 땅에서 지킬 안식년과 안식일(10-13절), 3대 절기(14-19절),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규례(20-33절)를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한편,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통해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반드시 지키고 행해야 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신 4:1, 5, 13-14, 5:31, 6:1). 그 복된 언약의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모든 일에 풍요롭고 형통하도록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신 6:18-19, 7:12-14, 8:1, 9:1, 11:9 등).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약속의 땅에서 풍요로운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하고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방 사람과 결혼하거나 우상 숭배에 빠지면 그들을 토해 버리는 땅이기 때문입니다(레 18:24-28, 20:22).

2) 왕벌을 통한 땅의 정복(하나님의 주권 역사)
약속의 땅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입니다(출 29:45-46). 특히 광야와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이었던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함께하신다’는 외적인 표였습니다(출 25:22, 29:42-4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키면 그 땅의 정복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출 34:11, 레 25:18, 신 7:1, 8:1). 가나안 땅 정복은 결코 칼이나 활로 한 것이 아니라, 시내산 언약에서 약속해 주신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왕벌을 통해 이루어 주셨습니다(참고-신 7:20, 수 24:12). 특히 가나안 7족속 중에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 족속(히위, 가나안, 헷)을 멸할 때, 왕벌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출 23:28). 왕벌은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침을 쏘아 한 방에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공포의 벌입니다. 그 왕벌을 보내셔서 적들 가운데 문을 잠그고 숨어서 남아 있는 자까지 쫓아 들어가서 기어이 다 죽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신 7:20-24). 신명기에는 왕벌의 역사로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을 패배시킨 일이 자주 언급되었습니다(신 1:4, 2:26-35, 4:46-47, 29:7, 31:4).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약속의 하나님은 언제든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미쁘신 분입니다(고후 1:18, 20, 히 10:23, 11:11). ‘미쁘시다’ 함은, 믿음직하고 결코 꾸밈이나 거짓이 없다는 의미이며(신 7:9, 사 49:7), 이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살전 5:24, 살후 3:3, 딤후 2:13, 요일 1:9). 하나님의 미쁘심은 영원히 폐할 수 없습니다(롬 3:3). 하나님의 미쁘심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출애굽 열가지 재앙에 담긴 신학적 의미

출애굽기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이야기로, 열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나오는데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에 이 열가지 재앙이 없었다면, 애굽의 바로가 바로 국가 노동력의 원천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열 재앙은 출애굽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가지 재앙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열가지 재앙에 담긴 신학적 의미]

1. 열가지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을 벌하신 사건이다.

열가지 재앙에 등장하는 생물들은 하나같이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었습니다. 

민수기 33:4,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 벌을 주셨더라.

  애굽의 신들에 대한 심판을 위해 재앙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지만, 열가지 재앙을 겪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보다 우월한 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2.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었다. 

  열가지 재앙은 마술도 아니고, 자연재해도 아니고,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이다. 이 일을 보면서 애굽 사라들도 하나님을 알아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알아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열가지 재앙은 하나님 스스로가 나타내 보이신 신존재 증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열가지 재앙이다. 출애굽기 7장 5절은 열가지 재앙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애굽을 향하여 내린 재앙이기 때문에, 열가지 재앙이 애굽을 향하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학습하게 되었을 것이다. 열가지 재앙은 분명 애굽의 바로와 애굽을 향한 재앙이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신 사건이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으로 여겨야 그들을 놓아 줄 수 있듯이 이스라엘도 비록 노예였지만 생활의 기반을 모두 버려두고 광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모세 만 믿고 따라 나서기에는 무리수로 여겼을 것이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광야로 나가라' 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의미에서 어쩌면 지금 애굽 사람들보다 하나님께서 참 신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지금의 열가지 재앙의 중요한 효과는 애굽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조상으로부터 들은 하나님이 전부였겠지만,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이스라엘은 확신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출애굽 여정을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재앙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을 보여주시면서 한결같이 하신 말씀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것이니라." 이다. 열가지 재앙 내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은 내 백성임을 선포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열가지 재앙은 구별이라는 의미 또한 있다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바로야 이 백성은 네것이 아니다. 내 백성이다. 보내라~" 그러므로,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볼 수 있다. 

5. 열가지 재앙은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복음 자체는 모두가 믿거나, 모두 믿지 않고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심판적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열가지 재앙이 일어나는 애굽에서도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기에 열가지 재앙에는 구원의 의미가 있다할 수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로 지킨다.

  첫번째 재앙은 나일강물을 피로 바꾸신 이적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재앙인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한 재앙에서도 피가 등장한다. 장자들을 살해하실 때,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한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이 넘어가고 피가 발라지지 않은 집에서는 재앙이 임하게 된다. 그러기에 열가지 재앙은 구원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애굽에서 탈출한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으로, 이 예표는 신약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열가지 재앙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열가지 재앙이 끔찍한 사건이고, 없어야 할 사건을오만 받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단히 심오한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 담겨 있는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볼 것이다. 

  출애굽기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이 재앙의 목적은 분명하다.
애굽의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나일강을 숭배하듯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이것이 첫번째 재앙의 목적이다.
단순히 이 재앙은 애굽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백성으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하는 것에 있다.

10가지 재앙이 미래에 닥칠 대환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야곱의 대환란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전에 파라오에게 겪었던 것처럼 혹독한 압박과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사 60:14,렘 30:5-8).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음성을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렘 31:18-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에게 ‘그들을 가게 하라’ 명하실 것입니다(사 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할 것이요, 남쪽에게 이르기를, 붙잡아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하리니](사 43:6).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주셨듯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두 증인을 주실 것입니다(계 11:3-6).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하여 이적을 일으켰듯이 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들은 이적을 일으켜서 온 세상을 미혹할 것입니다(계 13:13-15).

1. 하나님은 세상에 전무후무한 강한 재앙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렘 25:15-16).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게 이같이 이르시되, / 너는 /  내 손에서 이 격노의 포도즙 잔을 가져다가 내가 너를 보내어 / 경고한/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움직이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가운데 칼을 보내었음이니라, 하시기에](렘 25:15-16).

2.  하나님은 이 재앙의 심판 가운데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계7:4, 12:6, 14-16).

3. 물은 다시 피로 변할 것입니다(계 8:8, 16:4, 5).

4.사탄의 개구리들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계 16:13).

5. 메뚜기의 역병이 다시 보내질 것입니다(계 9:2-11).

6. 하나님은 다시 종기를 보내십니다(계 16:2).

7. 끔찍한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입니다(계 8:7).
   흑암이 세상을 덮칠 것입니다(계 16:10).

8.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듯이 악인들 역시 회개하지 않고 더욱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입니다(계 9:20-21).

9.이집트의 장자들이 모두 죽었듯이 대환란 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계 9:15).

10.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듯이 대환란을 통과해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슥 14:3, 4; 롬 11:26).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종말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훈계하기 위하여 본보기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또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함이니라.](고전10:11)

애굽 10대 재앙의 분석적 연구

애굽 10대 재앙(The Ten Plagues on Egypt)은 그 각각의 하나씩도 참으로 놀라운 초자연적 이적(異蹟)들이었다. 하물며 이런 놀라운 이적들이 한 주체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여 10회나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애굽 10대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적(敵)들이 명확히 구분된 상태에서 그 적들을 향해 이적적 재앙이 폭발적으로 연속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와 해방을 가져온 일대 사건으로서 구약에 기록된 가장 역동적 기사의 하나이다. 

또한 애굽 10대 재앙은 애굽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감격적 해방과 구출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 애굽인에게는 죽음과 몰락이 닥쳐왔으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승리와 자유의 쟁취 및 새 역사의 출발이 비롯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 선민으로서 시내 산에서 선민 언약을 체결하고 선민으로서의 역사를 본격 태동시킨 것도 이 애굽 10대 재앙으로 이루어진 영광의 탈출인 출애굽(Exodus)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실로 애굽 10대 재앙은 선민 역사의 본격적 태동을 위한 대전주곡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태동된 선민의 역사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 만민 중에 세워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애굽 10대 재앙은 단순히 과거의 놀라운 이적 시리즈(Miracle Series)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악의 무리를 멸하시고 택한 백성을 초월적 능력을 가지고 강한 팔로 구출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의지를 실증하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애굽 10대 재앙은 그 세부 내용을 다음과 같은 몇몇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해 볼 때 더욱 오묘한 그 실체와 거기에 담긴 깊은 의미가 새삼스럽게 드러난다. 이에 애굽 10대 재앙의 실체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다음 세 가지 주요 관점별로 시도해 보기로 한다. 

1. 애굽 10대 재앙의 구조 분석 

가. 10대 재앙의 기본 구조 설명 

아래에서 보듯이 애굽 10대 재앙은 먼저 크게는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행하신 첫번째부터 아홉번째까지의 재앙과 하나님이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행하신 마지막 열번째 장자 재앙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매우 흥미있는 사실로서 첫번째에서 아홉번째까지의 간접 재앙들은 다음과 같은 내적 규칙성 내지 통일성에 의하여 다시금 순서대로 각각 세 개씩을 한 그룹(Group)내지 하나의 사이클(Cycle)로 하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먼저 각 그룹의 첫번째 재앙들 그러니까 제 1 피 재앙, 제 4 파리 재앙, 제 7 우박 재앙들은 모두 다 아침에(In the Morning) 그 재앙이 예고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음으로 각 그룹의 두 번째 재앙들 그러니까 제 2 개구리 재앙, 제 5 악질 재앙, 제 8 메뚜기 재앙들은 모두가 모세가 바로의 왕궁(To the Palace)으로 들어가서 경고한 다음에 일어났다. 각 그룹의 첫번째 재앙들에 대한 경고가 인간의 모든 활동이 시작되는 시점인 아침에 주어졌고 그리고 각 그룹의 두번째 재앙들의 경고는 인간 권력의 중심 공간인 바로의 왕궁에서 주어진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시간과 공간의 모든 요소를 망라하여 그 주요 포인트마다 거듭 주어졌 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각 그룹의 세번째 재앙들 즉 제 3 이 재앙, 제 6 독종 재앙, 제 9 흑암 재앙 등은 각 그룹의 첫째 둘째 재앙들이 일단 먼저 예고된 후에 일어난 것과 달리 모두 다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Without Warning) 일어났다. 이것은 때로 인간에게는 사전 경고없이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이 임할 수 있는 두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나. 10대 재앙의 3X3+1 구조의 의미 

이렇게 분석해 볼 때 우리는 애굽 10대 재앙이 단순히 열 번이라는 많은 회수에 걸쳐 일어났거나 또는 어찌해서 계속 진행하다 보니까 열 번에 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과 의도 아래 매우 섬세한 의미를 가진 완벽한 구조로 진행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일면 각각 정확한 규칙성 내지 통일성에 의하여 세 재앙씩을 한 그룹 내지 한 사이클로 하는 재앙이 세 번 반복되는 구조의 간접적 재앙이 있은 후 단 한 번의 직접적 재앙으로 10대 재앙 전체가 최종 종결되는 체제 내지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보다 세부적으로는 3x3의 간접적 재앙과 단 1회의 직접적 재앙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10’ 이라는 숫자는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필요한 모든 구성 요소를 완비(完備)한 숫자를 의미했다. 따라서 애굽에 내려진 재앙의 총수가 ‘10’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학대하는 원수들에게 모든 재앙을 다 내리셨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분석하였듯이 애굽 10대 재앙은 그 총수가 ‘10’이라는 전반적 사실보다 그 총 10개의 재앙을 이루는 세부 구조에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3’은 충만(充滿)올 상징하는 숫자였다. 따라서 애굽에 내린 간접적 재앙은 이처럼 충만을 의미하는 3개씩의 재앙을 묶은 한 그룹의 재앙이 그 역시 충만을 의미하는 3회에 걸쳐서 반복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직접적 재앙은 단 1회였으며 이것으로 모든 재앙 전체가 종결되었다. 이같은 애굽 10대 재앙의 구조는 한마디로 애굽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에게 참으로 완전히 충만한 사전 경고성 재앙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복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단 1회에 모든 것을 종결하셨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즉 하나님은 단 1회에 그들을 완전 굴복시킬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자발적 순종의 기회를 참으로 충만히 주시고자 먼저 3x3의 간접적 재앙을 진행시키셨다. 그러나 끝내 그들이 거부하자 하나님은 단 1회의 직접적 재앙을 통하여 마침내 애굽인들을 굴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실현시키셨다. 하나님은 절대 초월자이심으로 그가 직접 시행하시는 일은 이처럼 그의 뜻한 바대로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애굽인들을 향한 심판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기본 패턴(Pattern)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종들과 우주 만물을 통하여 모든 죄인들에게 거듭하여 경고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신다. 특히 세상 끝날에는 그 역시 일련의 재앙들을 통하여 최종적 경고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끝내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마침내 단 1회의 대종말(大終末)을 통하여 역사 전체나 각 개인을 최종 심판하실 것이다. 

다. 기타 관련 사항과 그 의의 

한편 다시 한번 애굽 10대 재앙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도 추가로 발견된다. 먼저 세번째 이 재앙에서부터는 앞서의 첫째, 둘째의 피 재앙이나 개구리 재앙들과 달리 애굽의 술객(Magicians)들은 도저히 모방할 수 없었다. 이것은 사단과 그를 따르는 자들도 비록 보통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잠시 인간을 현혹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할 때에는 그 한계가 너무나 분명함을 보여 준다. 

또한 네번째 파리 재앙부터는 그 재앙이 이스라엘인들을 제외하고 오직 애굽인들에게만 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어느 정도까지는 동일한 원리로 다스리시나 근본적으로는 구원 얻을 자와 저주 받을 자로 엄격히 구분하여 다스리심을 보여 준다. 

끝으로 셋째 그룹에 속하는 일곱번째에서 아홉번째까지의 재앙에서는 하나님이 매 경우마다 왜 바로와 그 백성을 즉각 멸망시켜서 단번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거듭하여 많은 재앙을 내리시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는 분명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행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요청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더욱 억누름으로써 결국 사단(Satan)의 화신(化身)으로 등장한 바로에게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똑똑히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 당대는 물론이고 훗날 애굽 10대 재앙에 대한 역사를 전해 들은 오고 오는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듣고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본문에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보다 궁극적인 전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점진적 정벌과 이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성취의 과정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매우 긴 장구한 역사적 과정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오묘한 예표이기도 하다. 

2. 애굽 10대 재앙과 애굽 우상들과의 관계 

애굽 10대 재앙은 표면적으로는 자연의 각종 이상 현상을 통한 재앙의 반복 내지 열거로 보인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10대 재앙 각각은 수다한 자연 현상의 배후에 그 각각의 현상을 주도하는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섬겼던 애굽인들이 신으로 간주한 각종 우상(偶像)들을 역으로 애굽인들을 향한 심판의 도구 내지 애굽인들과 함께 심판을 받을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일차적으로는 이적적 자연 현상을 통한 재앙들이었다. 동시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애굽인들이 섬기던 우상 전반에 대한 징벌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으로서 하나님께서 거짓 우상들을 이기심은 물론 그 거짓 신들을 믿는 백성은 벌하시고 당신의 백성은 구출해 주실 능력과 사랑이 있으심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많은 이들의 일반적 생각과 달리 비록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마침내 인간의 죽음을 초래한 것으로 가장 엄중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애굽 10대 재앙은 엄밀하게는 뒤로 갈수록 그 양상이 혹독해지는 소위 점층적 양상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처음 피 재앙과 아홉 번째의 흑암 및 열 번째의 장자 재앙이 대략 수미 쌍관식의 소위 양괄식 구조를 보이는 가운데 두 번째에서 여덟 번째 재앙까지는 거의 동일 수준의 재앙이 계속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첫번째 피 재앙은 애굽인들의 농경과 식수 둥 실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나일강(the River Nile)과 나일강의 신 하피(Hapi)를 치신 것이었다. 그리고 아홉번째 흑암 재앙은 최후의 재앙을 예고하는 동시에 애굽인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주요시하였던 태양신 라(Ra)를 무력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열번째 장자 재앙은 이집트인 전반은 물론 바로의 가장 직접적 수 호신으로 여겨진 생명의 신이요 이집트 최고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를 치신 것이었다. 반면에 두 번째에서 여덟 번째까지는 상호 신적 위계(位階)에 있어서나 이집트인들의 선호도에 있어서 그 다지 차이가 없는 여러 신들과 그들이 각각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여러 자연 현상을 통한 동일 수준의 재앙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그 관련 우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애굽 10대 재앙의 전개는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멸하시되 그들 모두를 남김없이 다 멸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3. 애굽 10대 재앙 과정에 대한 바로의 자세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애굽 왕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은 단 한번으로 종결되지 않고 10번에 걸쳐서 반복되었다. 이것은 역으로는 그만큼 바로에게 자발적 순복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비록 바로가 처음에는 몰랐다 해도 10번의 재앙이 전개 되어 가는 과정에서 지금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요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 the God)이 절대 초월자로서 유일한 신적 존재이시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애굽의 왕으로서의 자신의 정권 안정과 애굽의 국익 수호라는 세속적 이해 타산에만 집착하여 계속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각 재앙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모세에게 빌거나 타협안을 제시하다가도 그 재앙이 사라지면 곧바로 말을 바꾸거나 식언(食言)하는 등 일국의 왕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간교와 추태까지 부리고 있다. 한마디로 애굽 10대 재앙에 임하는 바로의 자세는 아집과 기만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로는 끝내 하나님으로부터 장자 재앙의 징벌까지 당하였으며 최후의 장자 재앙을 당한 후에는 참담한 패배자로서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출애굽할 것을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 40년과 가나안 정복까지의 전체적 과정에서 볼 때에는 대략 각 성도가 사단과 이 세상의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일단 성도(聖徒)의 지위(地位)를 얻는 것에 비교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과 바로의 투쟁이란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도를 억누르고 있는 사단과 그의 무리들로부터 성도를 구출하여 성도의 구원을 마침내 실현시키시는 사건의 예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出埈及)을 그토록 집요하고도 악착같이 거부한 바로의 행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거부하는 사단과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의 영원한 행태를 예표한다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같은 바로의 실로 끈질기고도 파렴치한 행태를 요약해 보면서 이를 우리 시대에 적용시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엡 2:2)의 사주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거부와 멸시의 실체를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끝내 바로가 단 1회의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 실현되었었듯이, 사단의 세력은 필히 몰락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최후 승리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天國)이 영구히 실현될 것도 분명히 깨달아 현실의 일시적 현상에 연연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말세(末世)에는 극심한 환난과 사단과 그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의 만행이 극성할 것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사단의 만행이 극에 달할수록 오히려 출애굽 당시의 이 바로의 행태가 주는 교훈을 깨닫고 더욱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바로 나 자신이 이 바로와 같이 사단에 속한 자의 하나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다가 멸망 당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애굽 10대 재앙에 임하는 바로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 앞에 뚜렷이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상징(Symbol)인 것이다.






바로가 재앙만 풀어 주면 보내 주겠다고 하다가 재앙이 끝나면 약속을 어기고 보내 주지 않는 식으로 속인 경우에는 제 2,4,7,8 재앙 때이먀, 바로가 부분적 타협안을 제시한 경우는 제 4,8,9 재앙 때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http://atsnu.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5_1&wr_id=243929&page=24



2024 사순절(02 / 14 - 03 / 30)  119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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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재앙의 내용

첫 번째 재앙 : 피(7:14-25)

여호와는 바로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재앙들을 내리기로 결정하였고, 그 첫째 재앙이 바로 애굽의 젖이며, 신으로 숭배되는 나일 강이었던 것이다.

첫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능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첫째 재앙은 눈에 보이는 모든 물을 피로 바뀌게 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인 물이 죽음의 상징인 피로 바뀌었음을 애굽 사람들이 보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에게 ‘생명(물) ’을 ‘죽음(피) ’로 만드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을 좌우하시는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재앙은 무려 일주일동안 애굽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나일 강을 죽음과 고통의 장소로 바뀌게 했다.[3]

두 번째 재앙 : 개구리(8:1-15)

나일 강에 살고 있던 개구리는 ‘문나 모지리카’(학명 Moonna Mozirica) 라는 학명을 가진 개구리이다.
애굽인들은 나일 강이 범람했다 감해지는 때에 보이는 개구리가 애굽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여겨서 신성시했다.
인간의 몸에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여신 헤케트를 풍요와 다산의 신이며, 나일 강에 장마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개구리들의 이른 침투로 인해서 왕은 오염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이것은 곧 건강에 해를 입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마찬가지고, 애굽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즉 애굽 사람들 전체가 오염된 음식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걸 보면 개구리들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된 것은 애굽의 ‘땅’이 오염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애굽 땅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황폐하게 변한다는 ‘총체인 오염’을 의미한다.[3]

세 번째 재앙 : 이(8:16-19)

세 번째 재앙에서부터는 애굽 주술사들이 그들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이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며 바로를 설득한다.
세 번째 재앙은 아무런 경고가 없었던 재앙 중 하나이다.
이 재앙은 땅으로부터 시작된 재앙으로 땅의 신 ‘게브’와 연관된다.
애굽인들은 밭을 갈 때마다 대지의 신 게브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이들에게 흙은 생명과 풍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생명으로 여기는 흙을 통해 애굽인들에게 괴로움과 죽음을 내린다.
또한 애굽의 ‘땅’을 황폐화 시키시고, 동시에 땅의 신 게브와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애굽인들에게 알게 하였다.[3]

네 번째 재앙 : 파리(8:20-32)

이전의 첫째 재앙부터 셋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함되었는데 넷째 재앙부터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인과 애굽인들 사이를 구분지으셨다.
이를 통해 여호와가 애굽땅을 관장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네 번째 재앙과 관련된 애굽의 신은 ‘케프리’이며, 풍뎅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루 일정을 관리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네 번째 재앙은 두 번째, 세 번째 재앙과 한 세트를 이루는데, 네 번째 재앙인 파리는 물과 땅에 연관된 것이고 이 세 재앙은 여호와가 물과 땅과 공기를 지배하는 분이심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애굽의 물과 땅과 공기가 파괴되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3]

다섯 번째 재앙 : 가축 돌림병(9:1-7)

다섯 번째 재앙도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하신다.
애굽의 가축들만 심한 돌림병에 걸리게 된다.
또한 가축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는 창조된 것들을 통해서 애굽을 심판하였지만 이번 재앙은 창조된 것을 ‘죽이는 일’로 심판을 진행하여 ‘죽음 모티브’가 시작된다.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능력을 말할 때 쓰이는 특별한 단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돌림병이 여호와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섯 번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들 하토르, 아피스 등이 있다.[3]

생축 (미크네)
- 이는 각종의 가축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미크네'란 '소유', '재산'이란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가축들이 곧 고대인들의 재산 명세서에서 가장 큰비중을 차지했음을 암시한다.
한편 '생축'이란 말과 더불어 제시된 '말'은 주로 전쟁용으로 사용된 듯하며, '나귀'는 단거리 수송용 또는 경작에, '약대'는 장거리 수송용에 각각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생축들에의 피해는 애굽인의 군사, 경제, 교통에 치명타를 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한 악질(데베르 카베드 메오드)

- '악질'(데베르)은 일종의 무서운 전염병을 뜻하는데, 여기에 '매우'(메오드), '심한'(카베드)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이 악질의 정도가 대단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악질이 얼마나심했는지는 애굽의 모든 생축이 죽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6절). 따라서 이전까지의 재앙은 단순히 사람 또는 짐승을 일시적으로 괴롭히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 다섯번째 재앙부터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로서 훨씬 재앙의 정도가 심화되었다. 동시에 이 악질 재앙은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첫번째 재앙(7:17-25)과 더불어 애굽의 각종 우상 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생축들은 각종 형태로 형상화되어 애굽인들의 경배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우상 종교의 희생 제물용으로도 쓰여졌기 때문이다<32:1-6 강해, 애굽의 종교>. 동시에 이 재앙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생사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섯 번째 재앙 : 악성 종기(9:8-12)

여섯 번째 재앙은 세 번째 재앙처럼 아무런 경고 없이 애굽을 강타하여 어떤 경고에도 반응하지 않는 바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바로왕 앞에 날려진 재는 벽돌을 굽던 풀무에서 끄집어낸 재일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이 당한 고난의 증거로 볼 수 있다.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은 주술사들도 바로와 그의 신하들도 악성 종기로 고통을 받아 여호와 앞에서 점점 애굽의 통치권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은 임호테프이다.[3]


일곱 번째 재앙 : 우박(9:13-35)

대기와 공중에 관련된 재앙.
우박 재앙은 인간 생명을 대규모로 위협하는 첫번째 재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박으로 인한 보리와 삼의 파손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짚을 구해다 벽돌을 만들라고 했던 바로의 요구에 대한 보복, 대기의 신 와 농업의 신 이시스, 습기의 신 테프누트를 겨냥한 것이다.
여호와의 ‘구별’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고센 땅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생명과 관련된 재앙으로 ‘경고’를 통해서 피할 방법을 알려주였다.[3]

중한

- 원 의미는 '무거운', '격렬한', '고통스런'이란 뜻으로서 우박의 엄청난 무게와 크기 및 그것이 미치는 극심한 피해를 예감케 한다.

우박(바라드)

- 동사 '춥다'에서 유래된 말로, 돌처럼 단단한 얼음알갱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종종 천둥과 함께 가축 떼가 들에 방목되는 시기인 겨울과 이른 봄(12-4월)사이에 내리곤 하여 곡물들에 큰 피해를 주어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우박이 단순히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재앙의 도구가 되어 사람과 짐승의 생명까지 해치는 애굽 역사이래 전무 후무한 무서운 심판이 되었다.
이때로부터 우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벌의 표와 심판의 도구로 자주 쓰이게 되었다(수 10:11; 학 2:17; 계 8:7; 16:21).

여덟 번째 재앙 : 메뚜기(10:1-20)

농경 지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재해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곡식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심각한 기근을 초래했다.
땅의 신에 대한 영적 전쟁으로 내려진 재앙이다.
메뚜기로부터 땅의 소산을 지켜주는 땅의 신에 대한 무능함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애굽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았을 때, 애굽의 신앙은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3]

아홉 번째 재앙 : 흑암(10:21-29) 

이 재앙은 여호와가 ‘세상에서 가장 해가 잘 드는 나라’ 위에 내린 것이다.
‘태양의 집’ 을 의미하는 헬리오폴리스라 불리는 도시는 태양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흑암 재앙은 애굽인들의 최고의 신인 태양신 를 그들로부터 빼앗고 여호와만이 신 중의 신임을 증명하는 재앙이었다.
3일동안 재앙이 일어났다.[3]

열 번째 재앙 : 장자의 죽음(12:29-30)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장자와 처음 난 짐승들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땅에서 처음 난 것과 가축의 처음 난 것처럼 여인의 몸에서의 맏아들도 여호와가 준 첫 선물로 여겨졌고, 이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애굽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신성시 되고 귀하게 여겨졌던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 그리고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다산의 신인 오시리스 와 생명의 신인 이시스에 대한 재앙이다.
바로는 태양신의 현신이며, 바로의 장자는 청년의 육체를 입은 호루스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신의 현신에 한 열 번째 재앙은 바로의 왕위 계승자를 없애는 재앙이었다.
그런 장자의 죽음을 통해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재앙 이후에 바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인정하게 된다.[3]

신학적 의의

여호와는 애굽에서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드러내심으로 애굽인들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을 지켜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그들의 조상들이 말하던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영적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분명한 목적 아래 벌어진 여호와와 애굽 신들의 전쟁 가운데, 여호와는 애굽의 모든 신들에 대해서 승리를 나타내였지만 성경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재앙의 원인은 바로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출 5:2).
바로는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애굽 백성들과 함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는 애굽의 신들과의 전쟁을 통한 승리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세 번째 재앙에서는 애굽의 주술사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고백했고,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을 통해 바로의 신하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두려워해 종들과 가축들을 집으로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를 통해 바로는 여호와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을 통해 모든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10가지 재앙에 대해서 그 재앙이 어떤 ‘애굽 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애굽을 향한 단순한 재앙이 아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목적 아래에서 수 많은 애굽 신들을 대면하여 누가 참된 신이며, 참된 신이라 말하는 여호와 자신이 누구인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신 ‘영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3]

각주

  1. Greifenhagen, F.V. (2000). 〈Plagues of Egypt〉. Freedman, David Noel; Myers, Allen C.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Amsterdam University Press. 1062쪽. ISBN 9789053565032.
  2. Tigay, Jeffrey H. (2004). 〈Exodus〉. Berlin, Adele; Brettler, Marc Zvi. 《The Jewish Study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3. 이동: 가나경열 (2015).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통해 바라보는 여호와와 신들의 전쟁”.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제10일 / 02-24-2024(토)
출애굽기 10장(10:1-29)
메뚜기, 흑암 재앙(4절, 21절)


1862년 2월 링컨 대통령의 아들 윌리가 죽은 지 얼마 못되어 다른 아들 데드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
병원을 찾은 링컨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내 생애에 가장 큰 어려움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간호사가 자신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미망인이라고 밝히며, 그러한 시련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링컨은 간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러자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가능합니다.”
링컨은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 불행이 닥쳤을 때도 완전히 복종했나요?”
간호사는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불행이 닥칠수록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완전히 복종할 수 있었어요.”
며칠 후 그녀를 다시 찾아온 링컨은 간호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으로 빨리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깨닫는 것이 느립니다.






출애굽기 10장 - 메뚜기와 흑암 재앙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심을 애굽 온 땅에 보이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이러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절).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모든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놀라운 일들은 훗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게 되는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자녀들에게 전할 때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되며, 혹 떠날지라도 그 말씀을 기억하는 날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은 부모된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 재산을 남겨 준다면 그들은 게으름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혹 지식을 더하여 준다면 교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혹 기술을 가르친다면 일평생 먹고 사는 데는 유익하겠지만 그것 역시도 그의 삶을 완전히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를 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전하여 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가 된다면 그는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갈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할 만큼”(빌 3:8)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역사를 가르치기를 더욱 귀하게 여기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삶의 열쇠를 남겨주는 부모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한 번 전달합니다(3절)

그런데 이 명령은 이미 7차례에 걸쳐서 반복되었으나 바로에 의하여 계속 거절되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거절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 한번쯤 ‘이 말씀을 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든가 아니면 ‘다른 명령을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몇 번이든 간에, 그것이 바로에게 거부되든 수용되든 간에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세에게 맡겨진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명을 맡은 자는 그 결과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까지 가고, 행하라고 하는 것을 행하고, 멈추라고 하는 순간 멈추면 되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를 예측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 3장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경고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경고하시기를 만약 악인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는데도 그가 범죄하여 죽는다면 에스겔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겠지만 만약 에스겔이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지 않아서 그가 범죄하여 죽는다면 그 책임을 에스겔에게 묻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자가 행한 일의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그를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았기에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을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전하기도 전에 미리 포기부터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거라고’, ‘괜히 창피만 당할 거라고’ 스스로 결과를 예측하면서 이웃을 향하여 한 마디의 말씀도 전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 모세와 아론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해 새 생명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애굽 왕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자신이 여호와 앞에 득죄하였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여 재앙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16-17절).

이는 10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비난하던 바로가 도리어 자신의 악함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고백은 9장의 본문에서 보신 것과 같이 마음 중심에서 나온 진실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현실의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을 면할 속셈으로 자기 잘못을 거짓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이르면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지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그러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다가 고난만 찾아오면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단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만 하나님을 찾는다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은 바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바로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임하였다(22절).

이 흑암은 당시 애굽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받던 태양신 ‘라’에 대한 심판으로 이 태양신 역시 한낱 우상에 불과함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그들의 그릇된 신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만일 바로가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이 재앙을 대했더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 땅에서 내보냄으로써 마지막 재앙, 곧 장자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감지할 만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모세에게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장자 재앙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바로왕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와 별 반 다름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겸손으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적을 허락하시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돌이키시려는 것과 우리들의 간증을 통해 우리 자손들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희들도 모세처럼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시되, 자녀들에게 썩어질 재물이 아니라 영원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는 지혜로운 부모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9일 / 02-23-2024(금)
출애굽기 9장(9:1-35)
악질, 독종, 우박 재앙(3절, 9절, 18절)

5재앙 - 악질
6재앙 - 독종
7재앙 - 우박


계속되는 재앙으로 인하여 바로는 깨닫는 것처럼 반응하였으나 재앙이 멈추면 다시 완악해지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완악(完惡) : 완전할 완, 악할 악
 -
성질(性質)이 모지락스럽고 악독(惡毒)함.


완강(頑強) : 완고할 완, 강할 강
 - 태도(態度)가 완고(頑固)하고 의지(意志)가 굳셈.

강퍅(剛愎) : 굳셀 강, 강퍅할 퍅
 - 성미(性味)가 깐깐하고 고집(固執)이 셈.

내 백성을 보내라


출애굽기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10: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멸시하는 사람(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는 말은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말씀을 순종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28장축복의 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의 장이지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의 장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좋은 분이시지만 그 반면에 조금도 자비가 없으신 저주도 내리시는 엄위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축복을 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경에서 어느 곳을 찾아보거나 동일하며 변개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생활에서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진단에서 나온 정확한 원인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 두 가지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15-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더 자세하고 두려운 내용이 신명기 28:58-6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명기 28:58-67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 60절 → 67절’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언제나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생애에 잡아끌어 드리지만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스스로 자기 가정과 사업에 이끌어 들여 패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렸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패망하는 경우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기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그 순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순종했을 때 축복을 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멸하시기를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바울이 증거 하는 이 한 사람으로 인한 불순종은 아담의 경우를 의미하며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온 인류의 비극을 가져 왔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가져왔으며 의를 가져 왔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사망을 유업으로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의인이 되었고 생명을 유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의 불순종한 죄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서운 해독을 끼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거든 그곳에서 탈취한 물건 중,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성안에 있는 은금과 강철로 만든 기구들은 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솔 아래 여리고성을 정복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정복할 목표는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라고 하는 적은 성이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어 살펴보았더니 보고하기를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주 적은 성이라 많은 군대를 올려 보낼 필요가 없고 약 2,3천 명 정도의 병력만 보내면 문제없이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약 3천명의 군사들을 그 성에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군병들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왔습니다.
이 때 여호수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찢고 티끌을 무릅쓰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들이 이 전쟁에서 참패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성물을 도적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참패한 원인이 이 한 사람의 죄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아간이란 자가 여리고성에서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 세겔과 50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몰래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아간을 어떻게 처치했습니까?
아간을 잡고 그가 훔친 물건들과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아이성을 다시 공격케 하시어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그 집의 한 사람의 불순종은 때로는 온 가정의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사람의 순종으로 온 가정이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죄악 중에도 가장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용서를 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불순종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3:36절 말씀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나 국가는 결국에는 망합니다. 지금 일본이란 나라가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 경제를 주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우상 숭배의 길에서 돌이키고 지난날 한국 교회를 핍박하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린 일을 회개치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멸망 할 것이며 이 땅에 임할 인류의 무서운 환난 중에서 후회하고 땅을 치며 통곡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며 돈을 축재하려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며 오늘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사실을 철저히 회개치 않으면 얼마 안가 정말로 패가망신하고 영영히 구제 받을 길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볼 때도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존중히 여김으로 그를 위대하게 하고 그 나라를 번창케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을 때 그가 누구이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순종하므로 복을 받는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

한편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계명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말씀을 두려워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1) 자기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욥이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욥23:11-1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영적 음식입니다. 음식을 멀리하는 자는 굶어 죽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자는 영의 주림으로 그의 생명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의 맛이 그의 입에 꿀보다 더 하다고 했습니다. 시119:103절 말씀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순종의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축복의 열매가 따르고 언약한 말씀대로 이루어짐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따르게 됨으로 그 말씀의 맛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맛인즉 무엇보다 더 달아요? ( ).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이 달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이 따르지 않으니 그의 생활에 말씀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신앙생활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말씀을 따라 그의 생활을 삼가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길의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라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며 삼가지 않으면 그는 결국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그의 인생길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그 말씀에 의지하는 생애를 말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지식을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자기 지혜나 자기 지식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 상식이나 경험이나 사람들의 권고를 따라 말씀에서 떠나거나 벗어나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곳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나 이적을 믿고 결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어제 밤에 그곳에도 여러 번 그물을 던졌지만 잡지 못했습니다’고 말하면서 의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고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지는 많은 고기가 그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이치적으로는 합리성이 없지만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니 내가 오직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습니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자세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약속한 상은 영생으로 갚으시는 생명의 상입니다.
하늘에서 받는 면류관의 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상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그 마음의 소원대로 성취되는 축복의 상입니다. 이 모든 상을 준비하시고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가 찾으시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상을 얻는 길로 다니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련스럽게도 패망을 이루는 길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생의 성공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이 그 길입니다. 이 생활은 곧 순종을 말합니다. 이 생활에는 상이 따릅니다. 이 세상의 상으로서의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놀라운 상이 높이 쌓인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더욱더욱 순종의 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애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요한계시록 11:8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유다서 1:8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숫자 0과 10의 의미는무엇일까?

조동욱(충북도립대학 교수)

통상 수(數)는 총 세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가 많고 적음과 같은 양(量)을 나타내며 이를 기수라 한다.
영어로는 one, two 등으로 표기한다.

둘째는 1층, 2층처럼 순서를 나타내며 이를 서수라 한다.
영어로는 first, second 등으로 표기한다.

셋째는 주민등록증 번호처럼 기호의 역할을 한다.

사실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원래 인도에서 만든 것이다.
이것이 아라비아 상인에 의해 아라비아 숫자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니 인도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가슴 칠 일이 아닌가 싶다.

또 아라비아 숫자가 1, 2, 3 등과 같이 표기 된 것은 메사포타미아 등은 점토판에 숫자를 그은 것이어서 작성한 숫자가 변형이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인도는 모래에 수를 표기했고 그 결과 만일 바람이라도 불면 작성한 수에 대한 구분이 어려워져 수를 1, 2, 3 등과 같이 표기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무(無)의 개념으로 '0' 이란 숫자를 만들어 냈다.
'0'이란 없다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0'을 다른 숫자의 뒤나 중간에 붙임으로 인류는 엄청나게 큰 수를 만들어 내게 된다.
1뒤에 0을 3개를 붙이면 천(千)이 되고, 4개를 붙이면 만(萬)이 된다.
1과 2 사이에 0을 2개를 넣으면 1002가 된다.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0'이 사실은 엄청나게 큰 수를 표기하는 도구가 되어 수의 혁명을 가져 오게 된다.

또 숫자 10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을까?
10은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수이고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하는 수라고도 하고 또 창조와 완성을 나타내는 수로 쓰인다.
또한 10은 귀신을 쫓는 수이기도 하다.
그 결과 로마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최대 악귀를 쫓아냈다고 생각한 것이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구원의 완성이란 의미로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다.

또한 10은 창조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욕이라고 생각하는 십새끼란 원래 창조란 뜻인 것이다.
새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도 10달간 어머니 뱃속에 있어야 하고 또 어머니의 십XX을 통해 새 생명이 창조되어 나온다.
우리가 욕이라고 생각하는 단어가 얼마나 소중한가.


1~10까지 숫자의 의미

1

1은 원초의 통일, 태초의 시작, 창조자, 주동자, 모든 가능성의 총합, 본질, 중심,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것, 배아(胚牙), 고립을 나타낸다. 또한 융기, 상승을 나타낸다.


중국 양(陽), 남성, 하늘, 길(吉)을 뜻한다.

기독교 하나님 아버지, 신성을 뜻한다.

유태교 1은 아도나이를 나타낸다. 또한 숨겨진 지식(카발라에서는 세피로스의 케텔)을 뜻한다.

이슬람교 통일로서의 신, 절대자, 모든 것을 자족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영(靈), 만물의 기원으로서의 신, 본질, 모나드를 의미한다.

도교 도(道)는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고, 3은 만물을 낳는다.

2

2는 이원성, 둘의 교체, 차이, 갈등, 의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정적인 상태, 뿌리박음, 변하여 균형을 유지함, 안정, 반영, 대극, 인간의 이원성과 욕망을 나타낸다. 이원성으로서 현현되는 것은 모두 서로 대립되는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는 점(点)을, 2는 길이를 나탄내다. 2는 1에서 출발한 최초의 숫자며 따라서 최초의 선(善)에서 일탈이라는 의미의 죄를 상징한다. 또한 순간적으로 타락하기 위숨을 나타낸다.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두마리의 동물은 배가된 힘을 나타낸다.


연금술 2는 태양과 달, 왕과 왕비, 유황과 수은 등 대립물을 나타낸다. 따라서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융합되는 남녀추니로서의 통일이다.
불교 2는 윤회의 이원성, 남과 여, 이론과 실천, 지혜와 방법을 나타낸다. 또한 서로 도와 길을 찾고 걷는 맹인과 절름발이를 뜻한다.
중국 2는 음(陰), 여성, 뭍(지상), 흉(凶)을 뜻한다.
기독교 신성과 인간성을 겸비한 예수를 뜻한다.
유태교 생명력을 의미하고, 카발라에서는 지혜와 자기 인식을 뜻한다.
힌두교 이원성, 샥타와 샥티를 뜻한다.
이슬람교 영(靈)을 뜻한다.
플라톤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2는 뜻이 없는 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3의 요소를 도입하는 관계를 함의(含意)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2는 한 쌍, 즉 2분된 지상적 존재를 나타낸다.
도교 괘(卦)는 음과 양 두 가지 결정요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2는 중심이 없기 때문에 음에 속하는 약한 숫자다.


3

 

3은 다수, 창조력, 성장, 이원성을 극복한 전진운동, 표현, 통합을 뜻한다. 3은 모든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최초의 숫자이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다. 3의 힘은 보편적이며 하늘, 땅, 바다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3중성을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육체·혼·영, 탄생·삶·죽음, 처음·중간·끝, 과거·현재·미래, 달의 세 가지 상(초승달, 반달, 보름달)을 나타낸다. 3은 천계의 숫자이며, 4가 육체를 나타내는 데 비해 3은 영혼을 상징한다. 3은 4와 합쳐져 7이라는 성스러운 숫자가 된다. 또 3과 4를 곱하면 12가 되는데, 그것은 황도십이궁, 일년 열두 달을 의미한다. 3은 1과 2를 더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2와 1로 나누어질 수 있다. 도교에서 3은 평형을 성립시키는 중심점을 가지기 때문에 강한 숫자다. 3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성(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족에게도 반영된다. 또한 3에는 중첩효과라는 권위가 있다. 즉 한 번이나 두 번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이 되면 확실성과 강한 힘을 지닌다. 예를 들면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3배 위대한 주(主), 3배 행복한 섬 등이 그것이다. 민화에서는 3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한다. 3번의 소원, 3번의 시련, 3인의 왕자, 왕비, 마녀, 또는 운명의 세 여신, 3인의 요정을 뜻한다. 이중 둘은 착한 요정, 나머지 하나는 악한 요정인 경우가 많다. 3은 다수를 의미하는데 많은 숫자, 군집, 만세삼창을 나타낸다. 또한 성취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들과 영적 존재의 삼위일체의 예는 무수히 많다. 삼위일체의 달의 여신이나 삼면의 여신은 특시 셈족, 그리스, 켈트, 게르만 등의 종교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하나의 신격을 가진 세 개의 상(相), 힘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제일 먼저 삼각형이 있다. 3개의 원 또는 삼각형이 일부 중첩되어 있는 도형은 삼위일체로서의 3개의 인격의 불가분의 통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각형 외에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삼지창, 붓꽃, 세개의 잎, 3중 벼락, 괘상 등이 있다. 달에 속하는 동물들은 다리가 세 개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달의 세 가지 모양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달에 3마리의 토끼 또는 세 사람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프리카 아샨티 족 달의 여신은 셋인데 그중 둘은 흑인, 하나는 백인이다.
연금술 황, 수은, 소금의 세 성분으로 이것들은 각기 영, 혼, 육체를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삼위일체의 신이 많다. 카르타고에서는 달을 뜻하는 '태모신'이 3개의 상징적인 기둥으로 묘사되었다.
아라비아   이슬람교 이전에 마나트는 3인의 성처녀(알-이타브, 알-우자, 알-마나트)로 나타내지는 삼위일체의 여신이다.1) 이 여신의 상징은 돌기둥, 돌, 기둥 또는 꼭대기에 비둘기를 장식한 기둥이다.
1) 이타브는 타이프 근교의 계곡에 있는 흰 돌에 사는 처녀신, 우자는 메카 근교의 계곡 아카시아 나무에 살고, 마나트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쿠다이드에서 제사지내는 검은 돌에 산다.
불교 3은 삼보(三寶) 즉 불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인 부처, 부처의 가르침, 승려를 나타낸다.
켈트 브리지트 여신은 세 가지 모습을 가진다. 켈트에는 지복의 세 여인 외에 무수한 3인조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같은 신의 세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3은 특히 중요한 숫자다.
중국 3은 성스러움, 길(吉)한 숫자, 가장 작은 홀수이다. 달에 사는 두꺼비 혹은 태양에 사는 새는 다리가 세 개다.
기독교 3은 삼위일체, 혼, 인간과 교회의 영육간의 결합, 삼인의 동방박사가 신, 왕, 희생으로서의 예수에게 바치는 세 가지 선물(유향, 황금, 몰약), 변용된 예수의 세 가지 모습, 예수가 받은 세 차례의 유혹, 베드로의 세 차례에 걸친 부인, 골고다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기까지의 날 수, 부활한 예수가 세 번 출현함, 엠마오의 순례자, 사도들에게 출현, 3인의 마리아, 신앙·희망·은총으로 이야기되는 신을 향한 세 가지 덕목을 뜻한다.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에 토트 신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로 불렸다.
그리스, 로마 3은 숙명, 운명으로서 세 가지 모습을 가진 하나의 신 모이라이(라케시스, 클로토, 아트로포스)를 나타낸다. 헤카테(Hecate) 여신도 삼위일체다. 복수의 여신으로 나타나는 에리니에스(Erinyes, 알렉토, 타시포네, 메가이라)들과 메두사로 알려진 괴물 고르곤의 세 자매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도 하나이자 셋인 모습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세 여신 카리테스들(Caritas,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시네, 탈레이아), 미의 세 여신들(graces), 3인의 세이렌(Seiren), 식물의 성장을 주관하고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상징하는 세 명의 여신 호라이들(Horae, 에우노미아, 디케, 에이레네 또는 탈로, 아우크소, 카르포),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지키는 세 명의 여신들(아이글레, 아리티아. 헤스펠라레투사 또는 아이글레, 아레투사, 헤스페리아), 태어날 때부터 백발을 하고 나온 그라이아이(Graeae, 팜프레도, 에니오, 데이노)도 있다.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Cerberos)는 머리가 셋이고 스킬라(Scylla)에게는 거대한 꼬리가 세 개, 키마이라(Chimaera)는 머리와 몸, 꼬리가 세 가지 다른 동물(사자, 산양, 뱀)의 모습이었다. 3,4 그리고 두 숫자의 합인 7은 3가지의 세계와 4대 원소를 주관하는 여왕으로서의 여신 아프로디테/베누스(Aphrodite/Venus)의 성스러운 숫자다. 오르페우스(Orpheus) 교의 상징체계는 존재, 생명, 지성이라는 3대 요소를 가진다.
유태교 3은 무한의 빛, 성화(聖化)된 지성, 카발라에서 3은 세피로스의 비나(지성)을 나타내며 남·녀, 통합적 지성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헤르메스 사상 지고의 힘힘으로서의 신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의미한다.
힌두교 트리무르티(trimurti,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의미한다. 이는 창조·지속·파괴와 시작·유지·종결의 세 가지 힘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삼신일체의 신은 많다. 달의 전차는 바퀴가 세 개 달려 있다.
잉카 태양신에는 아버지 태양(아포인테이), 자식 태양(첼리인테이), 형제 태양(인테이카오키)의 세 가지 모습이 있었고 이들은 삼신일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세 가지 신기(神器)에는 거울(八咫鏡), 검(天叢雲劍), 옥(八坂瓊曲玉)이 포함되며 각기 진리·용기·연민의 뜻을 가진다.
마오리 족 창조신인 큰영은 태양, 달, 대지의 삼위일체 신이다. 또한 자연의 신 즉 과거·현재·미래의 신이기도 하다. 3은 세워진 세 개의 손가락으로 상징되는 정신·인격·체격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완성을 나타낸다.
북유럽, 게르만 숙명은 세 명의 노른(마니, 니, 니시), 즉 운명의 세 여신을 통해서 나타난다. 세 자매는 순서대로 보름달, 초승달, 반달을 상징한다. 게르만 신화에서는 달이 숙명을 나타내며, 달의 여신 홀다는 두 자매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룬다. 달에 사는 토끼는 다리가 셋이다. 천둥신 토르(Thor)는 때로 머리가 셋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각 소용돌이 무늬 또는 삼각 호 장식은 오딘/보탄(Odin/Wotan)의 상징이다. 또한 3은 행운의 숫자다. 뭐든 좋은 것은 3이다.
슬라브 달의 신은 머리가 세 개다.
도교 삼재는 천, 지, 인을 가리킨다. 3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면 중심이 남는 최초의 강한 숫자다.
3은 양. 길함을 뜻하며 다수를 상징한다.

4
 
최초의 입체는 4에서 비롯된다. 4는 현현의 공간적 구조 또는 질서, 동적인 원에 대립하는 정적인 상태를 상징한다. 4는 완전성, 전체성, 완성, 연대, 대지, 질서, 합리성, 측정, 상대성, 정의를 상징한다. 4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는 4가지 기본 방위, 사계절, 4개의 바람, 정사각형의 4변, 십자가의 4개의 팔, 낙원에 있는 4개의 강, 지옥에 있는 4개의 강, 네 개의 성산(聖山), 낮과 밤의 네 구분, 달의 4현(弦), 4복음서 기록자 등이 있다. 서구에서는 세계가 4대 원소(동양에서는 5행)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성스러운 사위일체는 삼위일체와 대조적이다. 구약성서에서는 4가 상징적인 숫자였고 낙원의 중심에서 네 방향을 향해서 십자형으로 흘러나가는 4개의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지상 세계의 4개 지방 등 보편적인 상징이었다. 사위일체는 정사각형이나 십자가 뿐 아니라 4개의 잎 형상으로도 묘사된다.

아메리카 인디언 4는 네 개의 기본방위, 4가지 바람 등 가장 자주 사용되는 숫자이며 십자, 만(卍) 등의 형태로 묘사된다. 의식이나 의례에서는 같은 동작이 네 번 반복된다.
고대 서아시아 바람의 네 신은 동사남북의 네 방위와 동일시되었다.
불교 생명의 나무 담바에는 큰 가지가 4개 있고, 뿌리에서는 낙원의 4개의 성스러운 강이 흘러나온다. 이것들은 자무량심(慈無量心), 비무량심(悲無量心), 희무량심(喜無量心), 사무량심(捨無量心)의 4무량심1)을 나타낸다. 중국 불교에서는 4가지 기본 방위에 사천왕(四天王)2), 즉 동에는 옥반지와 창을 들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에는 비파를 지닌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에는 혼돈과 지진, 암흑의 우산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에는 채찍, 표범가죽으로 만든 자루, 용, 진주를 가지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자리잡고 있다.
1) 자무량심은 안락을 베풀려는 마음, 비무량심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마음, 희무량심은 중생이 기쁨을 얻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사무량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을 버리고 모두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다.
2) 한국에서는 동쪽에 옥반지와 검을 지닌 지국천왕, 남쪽에 용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 서쪽에 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 북쪽에 비파를 지닌 다문천왕이 있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목조 사천왕 참조.
중국 4는 정사각형으로 상징되는 대지의 숫자다. 불사의 강은 모두 네 개다.1) 4는 짝수이며 음(陰)의 숫자다.
1) 사독(四瀆): 신앙의 대상이 된 4대강. 양쯔(揚子), 지수이(濟水), 황허(黃河), 화이허(淮水).
기독교 4는 육체의 숫자, 3은 영혼의 숫자다. 낙원에서 흘러나오는 4개의 강, 4복음서, 4복음서 기록자, 4명의 대천사(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우리엘), 4악마(사탄, 바알제붑, 벨리아르, 몰록), 4대 교부(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뭇,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그레고리우스), 4대 에언자(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4덕(신중, 용기, 절제, 정의), 하나인 영기에서 불어오는 4개의 바람, 계시록의 4기사, 4복음서 기록자의 형상을 뜻한다.
이집트 4는 시간과 태양의 운행을 이해하는 성스러운 숫자다. 4개의 기둥이 하늘의 궁륭을 떠받치고 있다. 사체(死體)의 네 부분(간장, 폐, 내장, 위)이 담겨 있는 4개의 카노푸스의 단지를 지키는 수호자는 4가지 기본 방위와 연관되는 호루스(Horus)의 네 자식들이다.
그노시스 주의 바벨로(태모신)의 4를 뜻한다.
그리스 4는 헤르메스 신의 숫자다.
유태교 4는 측정, 은혜,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리즘에서 4는 세피로스의 헤세트(은총)를 나타내며, 카발라의 4세계(유출 세계, 창조 세계, 형성 세계, 활동 세계), 공간의 4방위, 토라의 4가지 위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헤르메스 사상 헤르메스 사상에서 4는 사위일체의 신(누스, 로고스, 누스 데미우르고스, 안트로포스)을 나타낸다.
힌두교 전체성, 충실, 완성을 의미하며, 창조주인 브라흐마는 4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힌둑 사원은 정사각형의 4변을 기초로 건축되며 질서와 완결성을 상징한다. 4개의 물질전개원리, 인간의 사지, 4자연계(동물, 식물, 광물, 정신), 4유가를 뜻한다. 4는 주사위에서 가장 이길 승산이 많은 숫자(서양에서는 7)이다. 4개의 카스트, 둘씩 대립하는 4개의 쌍이 있다.
이슬람교 원질을 나타내는 4가지 요소는 원리(창조주), 보편적 지성, 보편 영혼, 제1질료다. 이것은 카발리즘의 4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다. 또한 4인의 천사, 4개의 죽음의 집이다.
마야 천둥번개를 타고 지상계의 기본방위로 나타나는 챠크스 신이 있다. 또한 바카브 신과 4인이 교대로 1년의 1/4씩 지상계를 통치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완성, 조화로운 균형, 정의, 대지를 뜻한다. 4는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서약의 숫자다. 4와 10는 신을 뜻하며 테트라크티스(tetraktys, 1+2+3+4=10)의 성수(聖數)다.
북유럽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트(Asgard)에는 젖이 흐르는 4개의 강이 있다.
게르만 4인의 난장이가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도교 하늘을 지키는 네 사람의 수호신은 옥으로 만든 탑을 들고 있는 이(李), 검(劍)을 들고 있는 마(馬),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조(趙), 못이 박혀 있는 곤봉을 들고 있는 온(溫)이다. 4종류의 영적인 짐승으로 된 4신과 4령이 있다. 4신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이며, 순서대로 4가지 기본방위(동서남북)를 나타낸다. 4령은 기린, 봉황, 거북, 용이다.


5

 

5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사지를 뻗어 오각형의 별 모양을 한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다. 오각형 별에는 끝나는 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별과 마찬가지로 완전성과 힘의 상징이다. 5는 n제곱을 했을 때 마지막 숫자가 항상 5로 끝나기 때문에 순환수라고 불린다. 오각형 별은 원처럼 전체를 상징한다. 5는 중심과 기본방위를 나타내는 4점을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각형 별 모양은 4대 원소라는 힘을 만들어낸 중심적 창조주인 신성을 나타낸다. 5는 여성, 짝수인인 2와 남성, 홀수인 3의 결합으로서 성혼의 숫자다. 또한 5는 명상, 종교, 섭리, 다재, 오감을 나타낸다. 다섯잎 꽃, 다섯 개의 끝을 가진 잎은 소우주를 나타낸다. 별포는 펜타그램과 마찬가지로 통합된 인격을 나타내며 별표의 곡지점이 위쪽을 향하고 있을 때에는 요술과 검은 마법을 뜻한다. 사람의 다섯 손가락은 최초의 계산기 구실을 했다.

연금술 다섯잎 꽃과 오각형 모양의 별은 제5원소를 나타낸다.
불교 심장에는 네 가지 방향이 있고, 중심과 합해서 5라는 숫자가 되어 보편성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네 개의 섬에 둘러싸인 성산(聖山)도 보편성의 상징이다.1) 다섯의 선정불(禪定佛)2)이 있다.
1) 수미산(須彌山)은 동의 승신주(勝身洲), 서의 섬부주(贍部洲), 남의 우화주(牛貨洲), 북의 구로주(俱盧洲)의 네 대륙에 둘러싸여 있다.
2) 1. 대일여래(大日如來, 광휘의 뜻)는 법륜(法輪)과 중심과 흰색으로 상징된다. 2. 아축여래(阿축如來, 부동의 뜻)는 금강, 동쪽, 청색으로 상징된다. 3. 보생여래(寶生如來, 보탄(寶誕)의 뜻)는 보석과 남쪽, 황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4.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무량광(無量光)의 뜻)는 연(蓮)과 서쪽, 적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5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 아주 확실한 성공의 뜻)는 검(劍)과 북쪽, 녹색으로 상징된다.
중국 오행(五行)1), 오기(五氣)2), 오운(五運)3), 오성(五星)4), 오악(五嶽)5), 오곡(五穀)6), 오색(五色), 오미(五味)7), 오독(五毒)8), 오진(五塵)9), 오덕(五德)10), 오복(五福)11), 오상(五常)12), 오륜(五倫)13)을 뜻한다.
1)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2) 추위(寒), 더위(暑), 가뭄(燥), 습함(濕), 바람(風)
3) 오행의 운행
4) 목성(歲星), 화성(熒惑星), 금성(太白星), 수성(辰星), 토성(鎭星)
5)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숭산(嵩山)
6) 중국에서는 참깨, 보리, 피, 쌀, 콩(또는 참깨, 보리, 피, 수수, 콩)을 오곡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오곡이라 한다.
7)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단맛
8) 뱀, 두꺼비, 지네, 전갈, 도마뱀의 독
9)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다섯 가지 욕망.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의 오욕
10)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
11) 장수, 부유, 무병식재, 도덕을 즐기는 것, 천수를 누리는 것(또는 자손이 많은 것)
12) 어짐(仁), 의리(義), 예절(禮), 지혜(智), 신뢰(信)의 다섯 가지 덕
13) 부자유친(父子有親), 장유유서(長幼有序),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붕우유신(朋友有信)
기독교 5는 타락 후의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오감(五感), 십자가의 다섯 개의 점, 십자가 형을 받은 예수의 몸에 난 다섯 개의 상처(두 손, 두 발, 허리), 5천 사람을 먹인 물고기, 모세 오경1)의 숫자다.
1)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집트 나일강에 있는 다섯 마리 악어의 숫자다.

그리스, 로마 사랑과 화합을 나타내는 혼례의 숫자다. 5는 비너스(금성)의 숫자며, 비너스는 5년을 주기로 완성된다. 빛의 신으로서의 아폴론/아폴로는 전능, 전지, 편재, 영원, 통일의 5가지 상징물을 가지고 잇다.

유태교 5는 강함과 엄격, 근원지의 상징이다. 카발에서 5는 세피로스의 게브라(엄격함)를 의미한다.

힌두교 세계는 다섯 가지 요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오대(五大, 조악하고 큰 다섯 원소), 오유(五唯, 미세 원소), 다섯 가지 원색, 오감, 시바 신의 다섯 가지 얼굴이다. 비슈누(Vishnu)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10가지(5의 2배) 권화1)가 있다.

1) 마즈야(물고기), 쿠르마(거북), 바라하(멧돼지), 누리싱하(사람사자), 바마나(난쟁이), 파라슈라마(도끼를 가진 라마), 라마, 크리슈나, 석가세존, 칼키
이슬람교 실행해야 할 다섯 가지 의무인 오주(五柱)1), 신의 다섯 가지 재림2), 다섯 가지 기본 교리3), 다섯 가지 활동, 하루 다섯 차례4)의 예배를 나타낸다.

1) 신앙 고백, 예배, 단식, 희사, 순례
2) 물질세계, 이미지와 상징의 세계, 영의 세계, 신의 이름과 속성의 차원, 신의 본질의 차원
3) 무아타지라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 내세에 대한 약속과 위협, 4. 중간적인 위치, 5. 윤리적 명령이고, 시아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예언자직, 4. 사도직, 5. 이맘직
4) 새벽, 정오, 오후, 일몰, 밤
파르시 교 파르시 교와 만다 교의 의식에서 5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그것은 성스러운 빛의 윤일이 5일이라는 사실과 결부된다.

피타고라스 학파 5는 성혼, 즉 하늘(3)과 대지(2)의 결혼을 나타낸다. 빛, 빛의 신 아폴론과 그의 다섯 가지 특성을 가리킨다.


6

6은 평형, 조화를 상징한다. 6은 1에서 10까지의 범위 안에서 완전수(1+2=3=6)다. 필론에 따르면 모든 수의 중심으로서 가장 생산적이다. 6은 서로 반대되는 대극(對極)의 통일을 상징하는데, 자웅 두 개의 삼각형이 합쳐져 남녀추니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때 꼭지점이 위를 향하고 있는 삼각형은 남자와 불, 하늘을 나타내고, 역삼각형은 여자, 물, 대지를 나타낸다. 또한 6은 사랑, 건강, 아름다움, 기회, 행운을 의미한다. 서양에서는 주사위에서 6이 다른 숫자를 누르는 가장 강한 숫자다. 태양의 바퀴에는 6개의 빛줄기가 있다. 교차하는 두 개의 삼각형 즉 솔로몬의 봉인이라고 불리는 6개의 꼭지점을 가진 별은 완전한 균형을 상징한다.


고대 서아시아 창조에 소요되는 6일간을 뜻한다.

중국 우주는 6이라는 숫자에 의거한다. 4가지 기본 방위와 하늘(위)과 땅(아래)이 6가지 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 감각1)이 있다. 밤낮의 깊이는 각기 여섯으로 구분된다.

1)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육감으로서의 마음
기독교 6은 완전, 완성, 우주 창조에 필요한 6일간을 나타낸다.

유태교 창조에 필요한 6일간, 명상,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라에서 6은 창조, 세피로스의 디후엘레트(아름다움)의 상징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기회, 행운을 뜻한다.


7

7은 대우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완전, 전체성의 뜻이다. 3은 하늘과 혼을, 4는 대지와 육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7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덧없음을 모두 포함하는 제일 작은 숫자다. 7은 완성, 보증, 무사, 안식, 풍부, 재통합, 종합 등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처녀성과 '태모'를 나타내는 숫자다. 7과 연관되는 것으로는 우주의 7단계, 일곱 개의 하늘, 일곱층의 지옥, 7개의 행성과 그 행성이 나타내는 금속들(달은 은, 수성은 수은, 금성은 동, 태양은 금, 화성은 철, 목성은 주석, 토성은 납)이 있다. 우주의 일곱 개의 원, 태양의 일곱가지 광선, 인간의 일곱시기, 지혜의 일곱기둥, 일곱가지 무지개색, 1주일의 일곱 요일, 7음계, 세계의 7대 불가사의1) 등이다. 태양의 제7의 광선은 인간이 현세에서 내세로 가는 길이다. 단식과 회개는 7일간 행한다. 고대 유태인 철학자 필론에 따르면 어떤 수도 7제곱을 하면 제곱과 세제곱 모두를 포함하므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은 인도, 페르시아, 동아시아, 켈트, 지중해의 신화에 등장한다.


1) 이집트의 피라밋,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터키 에베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인청동상, 이라크 바빌론의 공중정원, 허티 할리카르나소스의 무덤,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연금술 작업에서 7개의 금속이 관계된다.

고대 서아시아 월령의 일곱 가지 구분과 1주일의 일곱 요일이다. 달이여! 그대는 뿔 모양의 빛으로 6일을 정하고 7일째에는 반쪽의 관으로 빛난다. 이런 의미에서 음력 일곱째 날은 태양에 대립하는 어둠과 불길을 상징하며 일곱째 날에 어떤일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그 날이 안식일이 되었다. 대지에는 일곱 개의 지역이 있다. 지구라트의 일곱 행성들로 상징되는 일곱 개의 하늘이다. 생명의 나무의 일곱가지에는 각기 일곱 개의 잎이 달려 있다. 지옥의 일곱 개의 문, 티아마트 여신의 일곱 악령과 그 여신을 죽인 일곱 개의 바람, 7가지 색, 일곱개의 인장, 일곱 기둥의 운명의 신을 나타낸다.

점성술 큰곰자리의 일곱 개의 별은 1년 중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불멸이다. 플레이아데스, 일곱 개의 큰 행성, 태양의 일곱 가지 광선을 뜻한다.

불교 7은 상승의 숫자, 지고천(至高天)으로 올라가 중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숫자다. 부처의 칠각(七覺, 일반적으로 팔상)은 시공을 초월하는 칠천(七天)1)을 넘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자바 섬에 있는 보루부두르 불교사원의 7층 건축물은 성산이자 우주축을 상징한다. 정상은 초월적인 북쪽을, 정상에 오르는 것은 부처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상징한다.

1) 야마천(夜摩天), 도사다천(覩史多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범중천(梵衆天), 대범천(大梵天)
기독교 신은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6개의 광선의 한가운데 있는 일곱번째 광선으로 상징된다. 7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7가지 성사1), 성령의 일곱가지 선물2), 7덕3), 일곱가지 큰 죄4), 연옥에 있는 일곱 층으로 된 산5), 중세의 자유 7과6), 행성을 포함하고 있는 일곱 개의 투명구체, 7대 예언자7), 지상에 관계하는 일곱 대천사8), 예수에 의해서 추방된 일곱 악마, 7일간의 단식과 회개,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9)과 슬픔10), 기독교 국가의 7대 영웅11), 초대 교회의 일곱가지 충고다. 또한 천지창조의 6일이 지난 후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다. '구약성서'에서 7이라는 숫자는 바알람의 일곱 개의 제단, 제물로 바친 일곱 마리 수소와 숫양, 일곱 개의 양각 나팔,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돎, 나아만이 요단 강에서 목욕한 횟수, 또한 삼손은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이라고 말했다. 엘리사에 의해 깨어난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했다. 노아의 방주는 7개월 만에 육지에 도달했다.

1) 성세, 견진, 성체, 고백, 병자, 신품, 혼인
2) 지혜, 총명, 지식, 의지, 영리, 효애, 경외
3) 3가지는 신에 대한 덕이고, 4가지는 기본 도덕
4) 교만, 탐욕, 색욕, 질시, 폭식, 분노, 나태
5) 일곱 가지 큰 죄를 하나씩 씻어내는 곳
6) 문법, 논리학, 수사학,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
7) 4대 예언자에 요나, 요엘, 자카리아 포함
8) 4대 천사에 카무엘, 요피엘, 쟈디엘 포함
9) 수태고지, 엘리사벳의 내방, 예수의 강탄, 동방박사 3인의 내방, 잃었던 예수의 발견, 부활, 승천
10) 시누온의 예언, 이집트로의 피난, 예수를 잃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뭇사람에게 전시된 예수의 시신,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매장
11) 영국의 성 게오르기우스/조지, 스코틀랜드의 성 안델레, 웨일즈의 성 다비드,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키우스, 스페인의 콤포스테라의 성 야곱, 프랑스의 성 도니, 이탈리아와 파트와의 성 안토니우스
이집트 운명의 여신으로서의 일곱 명의 하토르(Hathor)와 마아트(Maat)가 있었으며, 이 여신의 여사제들은 7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Ra) 신의 일곱 딸은 7벌의 내의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들었다. 라 신의 일곱 마리 매들은 칠현인을 나타낸다. 라의 호아소와 함께 있는 일곱 마리의 암소는 풍요를 나타낸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집트 신화 해석에서는 명계에 일곱 가족이 있고 21개의 문이 있다. 7은 오시리스(Osiris) 신의 성수(聖數)다.

그리스, 로마 7은 7현의 리라를 가진 아폴론/아폴로 신의 수이며 아테나/미네르바 여신, 군신 아레스/마르스의 수이기도 하다. 목신 판(Pan)은 일곱 개의 갈대로 만든 갈대 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는 일곱 명의 현인1)이 있다.

1) 로도스 섬의 클레오불롯, 코린토의 정치가 페리안드로스, 레스보스의 정치가 피타코스, 그리스의 격언가 비아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스파르타의 정치가 케일론,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
유태교 신비의 지혜를 뜻한다. 유태의 1년에는 일곱 번의 큰 제삿일1)이 있다. 메노라(Menorah)라는 가지가 일곱인 촛대가 있다. 솔로몬의 신전을 건축하는 데 7년이 걸렸다. 지혜의 일곱 기둥2)의 뜻이다.

1) 신년제(로슈 하샤나), 속죄의 날(욤 피르르), 초막절 축제(수코프), 궁결제(하누카), 프림 제, 과월제(페사하), 칠주제(샤보트)
2) 카발리즘에서 세피로스의 네시아하(영원)의 뜻이다.
힌두교 브라흐마의 칠보, 대홍수 이전의 일곱 신과 홍수에서 구원된 일곱 현자를 나타낸다.

이슬람교 7은 가장 작은 완전수, 일곱 개의 하늘, 일곱 가지 기후, 일곱 대륙과 바다, 일곱 색, 7인의 예언자1), 일곱 가지 활동력, 혼의 일곱 가지 상태2)를 뜻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을 상징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3)을 상징한다.

1) 아담, 누흐(노아), 이브라힘(아브라힘), 무사(모세), 다우드(다윗), 이사(예수), 무하마드
2) 명령을 내려 악으로 유도하는 혼, 비난하고 비판하는 혼, 영감을 받는 혼, 평온한 혼, 만족하는 혼, 기뻐하는 혼, 완전한 혼
3) 생명, 지식, 의지, 능력, 청력, 시력, 언어
일본 칠복신(七福神)1)을 상징한다.

1) 대흑(大黑), 혜비수(惠比須), 비사문(毘沙門), 변천(辯天), 포대(布袋), 복록수(福祿壽), 수로인(壽老人)
마법 주문으로 옭아매기 위해서 끈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든다. 주문은 일곱 번 반복한다.

미트라교 미트라스 신전에는 일곱 개의 가로대를 가진 사다리가 있는데, 그것들은 밀의의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계단을 상징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하늘, 4는 대지를 뜻하며 7은 이승의 신, 완성을 나타낸다.


8

영적인 의미에서 8은 신참자가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단계 칠천계(七天界)를 통과해서 도달하는 최종지점을 상징한다. 따라서 8은 낙원의 회복, 재생, 부활, 지복, 완전한 리듬의 상징이다.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인간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제8일째다. 단식과 참회의 7일간이 끝난 8일째는 풍요와 신생의 날이다. 7+1이라는 의미에서 8은 옥타브를 나타내는 숫자, 재출발을 상징한다. 8은 8개의 꼭지점을 가진 정육면체와 결부되기 때문에 입체성을 상징한다. 동서남북의 4가지 기본 방위에 각각의 중간 방위를 다하면 8개의 방위가 되며, 바람에도 8가지 종류가 있다. 8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쌍을 나타낸다. 정팔각형은 정육면체에서 원으로서의 변형의 시작을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일설에 의하면 네보 신의 마법의 숫자다.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중국 8은 전체, 모든 가능성의 현현, 행운의 상징이다. 팔괘(八卦)는 양(陽)을 나타내는 효(爻)가 세 개씩 다양하게 결합해서 8개의 조합으로 나타난 도형이다. 이들 8개의 조합은 대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때 원주는 시간과 공간(및 그 속에서의 생성 유전)을 상징한다.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 기쁨이 있다.

기독교 신생, 재생의 듯이다. 성수반은 대개 다시 태어남의 상징으로 8각형이다. 여덟가지 행복을 뜻한다.

이집트 신 토트의 성수(聖數)다.

유태교 8은 완벽한 지혜, 광휘, 세피로스의 호드(권위), 요드 헤 바브 헤(YHVH, 야훼)의 숫자, 주(主)의 숫자다. 솔로몬 신전은 8일째 되는 날 깨끗이 청소되었다.

헤르메스 사상 8은 헤르메스 신학에는 수와 기하학의 발명자인 주신 토트/헤르메스와 그 밑의 여덟 명의 신1)이 있다.

1) 눈, 네네트(심연), 후후, 후후트(무한), 쿠쿠, 쿠쿠트(암흑), 아멘, 아메네트(불가시성, 공기)
힌두교 8*8는 지상에 현현된 천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사원과 '만다라'의 형태는 8*8의 상징을 토대로 건축되었다. 세계 8대 지역, 8개의 태양, 하루의 시간을 8등분함, 8개의 '차크라'가 있다.

이슬람교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왕관은 8명의 천사가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공간의 8구분에 대응하는 것이다. 아라비아 어의 철자의 여덟 가지 구분1)에도 대응한다.

1) 순(脣) 문자, 치경(齒莖) 문자, 치찰(齒擦) 문자, 설단(舌端) 문자, 구각(口角) 문자, 경구개(硬口蓋) 문자, 구개수(口蓋垂) 문자, 연구개(軟口蓋) 문자
일본 8은 수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 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빛나는 하늘의 기둥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으로 색색가지 여덟 개의 천구가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8은 연대, 안정을 나타낸다.

도교 8은 현현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낸다. 현상계의 여러 가지 힘은 팔괘로 상징된다. 팔선 또는 불멸을 뜻한다.


9

9는 강력한 숫자인 3의 거듭제곱(3x3)이고 3조의 3배다. 9는 완성, 성취, 달성, 처음과 끝, 전체를 의미하며 천계와 천사의 숫자다. (9천계, 9천사의 위계) 또한 지상낙원을 나타낸다. 9는 불후의 숫자다. 또한 9는 원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원주는 90도 단위로 4등분되며 원주 전체는 360도이기 때문이다. 9는 2개의 삼각형이 조합된 모양으로 상징되며, 남과 여, 물과 불, 산과 동굴과 같은 대립원리를 상징한다.


불교 9는 지고의 영적인 힘을 상징하며 구천(九天)1)의 의미가 있다.

1)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된 아홉 개의 천체. 일천(日天), 월천(月天), 수성천(水星天), 화성천(火星天), 목성천(木星天), 금성천(金星天), 토성천(土星天), 항성천(恒星天), 종동천(宗動天)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켈트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9는 매우 중요한 의미르르 가진다. 8가지 방위와 중심점을 더한 숫자로 9는 중심을 상징한다. 삼중의 여신에서 삼중이란 3의 세제곱을 의미한다. 9인의 켈트 처녀, 9개의 흰 돌로 브리지트 여신의 시중을 드는 아홉처녀를 나타낸다. 9는 벨테인 불의 축제와 연관된다. 의식에서 9명씩 9번 총 81명이 참가한다.

중국 모든 숫자 중에서 3x3은 가장 길(吉)한 숫자이며, 9는 하늘의 힘을 나타낸다. 9는 명당에서처럼 8가지 방위와 아홉번째 점으로서의 중심을 나타낸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구법(九法)1), 구관(九官)2)을 뜻한다. 정전법(井田法)에서는 토지를 우물 정자 모양으로 아홉 구획으로 분할했다. 이때 중심에 있는 토지는 아홉번째 토지로서 최고 지배자인 상제에게 바쳤고 신의 토지라고 했다. 이 토지는 공전(公田)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은 천자가 천제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풍수에서도 지관이 용혈(龍穴)을 찾으면 그 구멍 앞에 있는 공간(명당)을 9분할한다.

1) 주나라 무왕에게 기자가 답했던 아홉가지 큰 법. 오행,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懲), 오복(五福)
2) 고대의 관제에 따른 아홉 명의 대신. 사공(司空), 황직(皇稷, 농경), 사도(司徒, 교육), 사(士, 형벌), 공공(共工, 공업), 우(虞, 산림), 질종(秩宗, 제사), 전악(典樂, 음악), 납언(納言)을 뜻한다.
기독교 기독교의 상징체계에서 9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천사에는 3계급씩 3조, 즉 아홉 위계가 있다. 하늘에는 아홉 천구, 지옥에는 아홉 환도(還道)가 있다.

이집트 이집트에는 아홉 신1)이 있다.

1)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신에는 아톤(Aton, Ra), 슈, 테프누트, 게브, 누트,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가 있다.
그리스, 로마 아홉 신, 후에는 9명의 뮤즈를 나타내는 숫자다.

유태교 9는 순수지성을 나타낸다. 9는 그 배수로 다시 9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진리를 뜻한다. 카발라에서 9는 10단계의 세피로스에서 아홉번째인 '이에소드(토대)'를 상징한다.

힌두교 불의 신 아그니의 성수다. 9의 제곱은 81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지는 만다라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우주를 형성하고, 우주를 포함한다.

마야 명계는 9층으로 나뉘어 있고 각 층을 다스리는 명계의 주인이 배치되어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9는 다른 모든 숫자가 그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순환하는 것으로 숫자의 한계를 나타낸다.

북유럽 오딘 신은 인간을 위해서 지혜의 비밀을 손에 넣으려고 아홉 낮, 아홉 밤 동안 '이그드라질'에 매달려 있었다. 북유럽의 페르세포네라고 불리는 눈(雪)의 여신 스켈디는 1년 중 3개월은 산 속에서, 9개월은 니오르드(항해, 교역의 신)의 바다에서 산다. 북유럽과 게르만의 상징체계에서 9는 성수(聖數)다.

10

10은 우주를 타나태는 수, 창조의 패러다임이자, 모든 수를 포함한다.
따라서 모든 사물과 모든 가능성을 상징한다.
10는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숫자, 10진법의 전환점이 되는 숫자다.
10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한다.

테트라크티스(tetraktys) 형(1+2+3+4=10)은 신성(神性)을 상징한다.
이 경우 1은 점, 2는 선, 3은 면, 4는 공간을 나타낸다.
10은 완전수로 1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10은 양 손의 열 손가락을 기초로 나온 숫자이며, 완성, 모든 계산의 기본을 나타낸다.
또한 보다 높은 범주의 완전성으로서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토대가 되는 숫자다.
또한 중국에서 만(萬)은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고, 현현 세계 전체를 뜻한다.
10은 여행의 완성을 나타내며 기원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는 9년간 방랑을 하고 10년째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트로이는 9년간 포위를 견디다가 10년째에 함락되었다.
10은 원주를 둘러싸는 9와 중심을 나타내는 1의 합으로 나오는 숫자로 완전성의 상징이다.
우주축으로서의 1과 그 주위를 돌며, 춤추는 9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서아시아 봄 축제에서 10일째에는 신상들을 모두 등장시켜 행렬을 지어 축하한다.
중국 10은 한자로는 종횡의 길이가 모두 같은 '십(十)'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음과 양이라고 불리는 두 방향을 향하고 있는 자신을 상징한다.
통설로는 동서를 뜻하는 ㅡ와 남북을 뜻하는 |이 모두 갖추어져 완전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십간(十干)에 12지를 배합해 모두 60가지 조합으로 연월일을 표시한다.

기독교 10은 모세의 십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10개의 등불, 10인의 처녀, 10탈란트 등의 비유에 나오는 숫자다.
신에게 바치는 1/10세(십일조)다.

그노시스 주의 충일의 세계, 이이온의 로고스(말씀)와 조에(命)에서 다시 10개의 아이온이 나왔다.

유태교 카발리즘에서 10은 '영원세계'인 요드(히브리어 알파벳의 열번째 문자), 신(神)(요드 헤 바브 헤, YHVH)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문자에 대응하는 숫자이며, 눈부신 지성, 신의 지원, 십계, 세피로스의 말후트(국왕), 신의 10개의 이름을 뜻한다.

또한 카발라에서 10은 절대무에서 흘러나오는 세피로스의 수다.
세피로스는 대개 생명의 나무에 의해서 상징되는데, 열 개 중의 첫번째 것이 모나드, 즉 다른 압홉 개의 '제1원인'이다.
또한 나머지 아홉 개의 세피로스는 각기 남, 녀, 그리고 둘을 통일시키는 지성의 삼위일체의 3가지로 구성된다.

열번째의 아도니(adoni)는 통일성으로서의 신비적 회귀를 상징한다.
솔로몬 신전에는 10개의 커다란 사제 목욕용 대야, 10개의 식탁, 10개의 촛대가 있다.
계약의 궤 앞에는 10명의 레위 인 사제가 있다.

힌두교 10보다 큰 범주들, 즉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기반을 이룬다.

이슬람교 이슬람법에서 10분의 1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타고라스 학파 10은 모나드를 나타낸다.
10은 완전의 상징이다.

로마 로마 숫자에서 10은 X(완전한 숫자)로 완성의 상징이다.

 




제7일 / 02-21-2024(수)
출애굽기 7장(7:1-25)
강퍅한 바로의 마음(3절)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제6일 / 02-20-2024(화)
출애굽기 6장(6:1-30)
강한 손(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 내리라.
Then the LORD said to Moses, "Now you will see what I will do to Pharaoh: Because of my mighty hand he will let them go; because of my mighty hand he will drive them out of his country."

강한 손(베야드 하자카)  בְיָד חֲזָקָה

손(야드) 3027  יָד 

1. 사람의 손. 2. 전치사와 함께 쓰이는 경우.
발음 [ yâd ]
구약 성경 / 1617회 사용
강한(하자크) 2389  חָזָק  

1. 완고한.  2. 강한
발음 [ châzâq ]
어원 / 23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6회 사용

이제 - 히브리어 '아타'(*)는 곧 '장'이란 뜻도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이 말 속에는 큰 격려의 뜻이 들어 있다. 즉 모세의 불평은 하나님께서 약속 이행을 지체하신다는 점을 골자로 하였거니와, 이에 대해 하나님 즉시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시겠다는 결의를 표하신 것이다.

강한 손을 더하므로 - 여기서 '강한 손'이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신인 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크게 나타내시겠다는 뜻이다. 한편 이처럼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대상과 연결시켜 간결하고 평이하게 표현하는 것은 히브리 문학의 주요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동일한 말('강한 손을 더하므로')을 중첩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명확성과 불변함을 나타내는 강조법적 기교이다. 󰃨 보내리라(*, 솰라흐) - '포기하다', '내던지다'는 의미로서 여기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못해 가게 내버려둔다는 뜻이다.

쫓아내리라(*, 가라쉬) - '축출하다', '추방하다' 로서 전술(前述)한 '솰라흐'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 말은 자의로 추방한다는 의미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어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즉 이는 여호와의 이적적 징벌로 말미암아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도리어 쫓아내듯 황급하게 내어보내는 상황에 처하게 될것임을 예시한 말이다(12:33).






제5일 / 02-19-2024(월)
출애굽기 5장(5:1-23)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절)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Moses returned to the LORD and said, "O Lord, why have you brought trouble upon this people? Is this why you sent me?

광야(미드바르) מִדְבָּר 스트롱번호 4057

1. 목초지.  2. 불모지. 3. 아라비아 사막
발음 [ mid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1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목초지[사막이 아니라 가축을 먹이기에 적당한], 시65:13(12), 사42:11, 렘23: 10, 욜1:19, 2:22
2. 명사, 남성
 a. 명사, 남성 불모지, 사막, 사32:15, 35:1, 50:2, 렘4:11, 욜2:3, 4:19(3:19).
 b. 명사, 남성 [관사와 함께 쓰이면] 아라비아 사막, 창14:6, 16:7, 출3:1, 13:18, 신11:24.
 c. 명사, 남성 [은유로] 사막, 사14:17, 렘2:31, 호2:5(3).
3. 명사, 남성 시적으로, דִּבֶּר ‘말하다’에서 유래: 입, 아4:3.

말씀(다바르) דָּבָר 스트롱번호 1697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출애굽기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 백성(출애굽기 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 백성(출애굽기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내 백성(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사람이 한 번 낙심하기 시작하면, 심각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 것도 하기가 싫고 의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우리 인생에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모세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으로 온 모세는,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괴로워하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곤란함과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게 되는 곤란함이나 어려움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불신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세

벽돌 굽는 일이 더욱 힘들어지고 지금까지 해 왔던 일상 생활이 무너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는 낙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5: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소리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어찌하여"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억지로 보내시고는 이제 이토록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셨다며 하나님께 절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세에게는 이같은 상황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약속을 확인시키시는 하나님

원망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을 다시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즉흥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이미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지켜 나가는 과정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어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6: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약속은 결코 변함이 없으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마음이 괴롭고 무거우며 원망을 쏟아 내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약속하신 땅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고 재확인시켜 주십니다.

더욱 낙심하는 모세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모세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모세는 또다시 낙심하고 원망합니다.

출애굽기 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데, 애굽 왕 바로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술은 무능하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한 입술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낙담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틀렸거나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모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과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낙담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5장 23절에서 "주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말씀을 전했다고 말하지만, 바로가 보인 행동으로 낙심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전했다면, 주께서 그 다음에 행하실 일들을 조용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낙심과 원망은, 자신의 말을 바로가 거부했다고 생각했기에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6장 12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말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자만심이 문제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판단하고 해석하고 내가 한 일인 것처럼 쉽게 교만해 하거나 혹은 쉽게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의 말과 같이 착각하는 교만은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보다 성령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부터 구원 받았으며 약속의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이 함부로 판단하고 쉽게 절망해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도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시며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내안에는 여전히 자만심과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하며,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착각합니다.
연약한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시험과 절망 속에서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게 도와 주옵소서. ​

기도제목

1. 겸손히 하나님만을 붙들고 의지하게 하소서.
2. 우리 가정이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3. 우리 가족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각자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 주소서.

사람이 말하는 것은 2∼3년이면 배우지만
듣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8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청은 평생의 학습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듣는 방식에는 네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판단하며 듣는 것,
질문하며 듣는 것,
조언하며 듣는 것,
감정 이입하며 듣는 것.

한자 '들을 청(聽)'은
여러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풀이해 보면
'듣는 것이 왕처럼 중요하고
열 개의 눈으로 보듯
상대방에게 집중해
상대와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에서 경청이 어려운 이유는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의견을
잘 경청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들어 달라고 떼쓰는 삶'보다
'들어주기를 힘쓰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존중해 준다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자연의 섭리이긴 하나 사람에게
입이 하나고 귀가 둘인 것은
말하기보다 듣는 것에 더 노력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
– 카네기

내 백성을 보내라(출애굽기 5:1) Let my people go!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이니라 하셨나이다.
Afterward Moses and Aaron went to Pharaoh and said,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Let my people go, so that they may hold a festival to me in the desert.'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이주한지 430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호칭하시면서 그들을 보내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의 요청으로 애굽으로 이주할 때 애굽은 그들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새롭게 즉위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고 고는 압제로 말미암아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잃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잃어버렸으며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배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요청하신 이유(1)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1)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시려는 목적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9:1)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즉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사역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출3:18, 참고. 출5:3,8,17, 8:8,25,26,27,28,29, 10:25) 즉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여부는 바로에게 달린 것입니다.

예배의 삶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기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성도들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예배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목적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슬렘신자들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하루 다섯 번 드리는 예배시간이 되면 모든 것을 덮어두고 먼저 예배를 드립니다. 모슬렘 국가에서는 기도시간이 되면 심지어 백화점까지도 영업을 중단하고 문을 닫으며, 관공서도 업무를 중단합니다.
리비아 반군들은 가다피 군과 싸우면서도 예배시간이 되면 전쟁터에서도, 사막에서 엎드려 예배를 드립니다. 폼페이(Pompey)가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안식일을 이용하여 공격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전쟁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유대전쟁사 1권 146). 또한 그리스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안식일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그들의 병영까지 쳐들어오는 적군을 방어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고스란히 붙잡혀 화형을 당하였습니다(유대교대사 12권 17).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켰으며, 예배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21, 사43:25) 또한 시편기자도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4:3)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으려는 이유(2-9)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습니다(2,3).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2)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계는 민족이나 지역마다 각기 그들을 지키는 신이 있다고 생각한 범신론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혹 여호와라는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애굽의 강력한 신과 비교할 때 노예 민족의 신이 얼마나 강하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바로나 빌라도의 대답은 자신의 무지와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수치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는 단호하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2)라고 하였습니다.
바로가 말한 대로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주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신 분은 누구인가?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3).
1. 모세는 바로에게 말하기를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하였습니다(3). 히브리인은 이스라엘 백성을 총칭하는 호칭입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생존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고통을 보았으며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 날마다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출3:7-9)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세상에서의 고통을 아십니다. 성도들의 세상에서의 수고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부르짖음을 듣고 알고 계십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요청하기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3.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는 것을 거절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활용한 노동력 때문이었습니다(4-9). 당시 이스라엘은 장정만 60만 이상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막강한 노동력을 활용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였습니다. 국고성(國庫城, Store cities)은 나라의 변방에 설치하여 유사시에 병기나 군량미를 신속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비축해 두는 창고를 말합니다.
바로는 이런 노동력을 빼앗길 수 없었다. 순수하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바로는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느냐 가서 너희의 노역이나”라고 다그쳤습니다. 즉 “일이나 하라. 왜 잔재주를 부리느냐”라고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바로는 그 날에 백성의 간역자들(看役者, 감독들)과 패장들(牌張, 기록원들)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더욱 힘들게 밀어붙였습니다(6). 벽돌은 전에 만들던 숫자대로 만들되 벽돌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짚은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었습니다(7). 짚이나 왕겨를 넣어 벽돌을 만들어야 내구성이 강한 벽돌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벽돌 만들기도 힘에 부치는데 이제는 벽돌에 들어가는 짚을 주워 다가 벽돌을 만든다면 더더욱 힘들게 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만들어진 비돔성을 발굴했는데, 제일 아래에는 짚이 섞여 건축되었으며, 중간부분은 곡초의 뿌리나 풀뿌리가 섞여 있었고, 제일 윗부분은 아무 것도 섞지 않는 벽돌로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애굽 왕 바로가 강압정책을 사용한 이유
1. 애굽 왕 바로가 이런 조취를 취해 더욱 가중된 압제정책을 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8). 이스라엘 백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생각과 요구를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르므로”는 “느슨하게 하다, 맥이 빠지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가서 더구나 사흘 길이나 나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요구한 것은 한가하기 때문에 즉 군기가 빠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 그러므로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을 더욱 무겁게 하므로 그런 요구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무겁게”는 “더 많이 지우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선 초과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 가중한 노동을 시켜 그들이 모세와 아론의 거짓말을 듣고 요동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3. 세상은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내세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세상일에 푹 빠져 하나님 일에 마음을 쓰지 못하게 하십니다. 피곤하고 지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못하게 만듭니다.
4.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할당량을 더욱 가중시키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불화를 일으키도록 조장하였습니다(17-21).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21)라고 불평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더욱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책임을 모세와 아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간혹 기도했는데도, 헌신했는데도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세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를 애굽 왕 바로는 깨닫지 못하므로 결국 바로는 많은 것을 잃고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하고 작은 고난 때문에 불평합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할 때 낙심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많은 기회를 일어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으로 매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얽은 줄이나 구속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받으실 예배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1970년대 한국에서 간 연구로 가장 이름을 날렸던 김정룡 박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별명이 간정룡 박사였습니다. 특히 간염 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드디어 간염 백신을 개발하였습니다. 상품화시키려고 보건사회부에 모든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보사부에서는 된다 안된다 연락이 계속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에 프랑스와 미국에서 간염 백신이 개발되어서 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김정룡 박사님은 그 때 다시 보사부를 찾아 가서 왜 당신이 개발한 백신을 아직 승인을 안 해줘서 프랑스와 미국에게 빼앗기게 했냐고 문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대답하는 말이,

“기준이 없어서 허가를 내 줄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FDA(식품의 약국)에서 승인이 되어서 이번에 코로나 백신이 출시되었는데, FDA가 승인할수 있었던 것은 기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어느 인문학 강의에서 듣게 되었는데 강사인 서강대 최진석 교수님이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선진국과 중진국의 차이는 바로 기준을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곧 중진국의 특징은 기준을 생산하는 나라가 아니고 만들어진 기준을 수용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기준을 생산하는 나라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생산하는 나라가 될 때 선진국이 된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저도 깊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어서 속히 우리 조국 한국도 백신을 만들뿐만 아니라 백신 승인을 위한 기준까지 만드는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한편 조국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는 우리들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요? 포스트 팬데믹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출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민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바로에게 떨면서 하고 있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떨면서 말하고 있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 당시는 지금 보다 훨씬 전 세계가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지역의 신이 있다고 모두가 믿고 있었던 때입니다. 애굽이 강한 것은 애굽의 신이 강해서 였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신이 온 세상의 기준을 생산해 내는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를 모르고 있을리가 없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들은 것을 그냥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바로가 답합니다. 2절,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예상대로입니다. 바로는 여호와를 경멸하듯 대꾸합니다. 한편 모세는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말하는 것을 들으며 좀 찔끔했을지 모릅니다. 이에 모세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3절,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히브리인의 하나님’으로 말을 조금 바꿉니다. 여기서 ‘히브리’의 뜻을 살펴 보면, ‘히브리’는 ‘건너 온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가나안으로 왔을 때 아브라함을 히브리인으로 이미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온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곧 건너 온 나그네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건너 온 자들이니 건너 가서 자기들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함을 바로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은 전염병에 다 죽을 거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명을 좀 연장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팬데믹 기간 우리들의 모습을 좀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난 1년 넘게 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많은 바램 가운데 지나지 않았습니까?

어떤 때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꼼짝 못하고 사람을 만나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이처럼 모세는 비록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로 앞에 왔지만 간이 콩알만 해져서 바로에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1년 넘게 늘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경험을 했듯이 말입니다.

이에 바로의 반응은, 그 다음 귀절들을 보면, 전처럼 같은 숫자의 벽돌을 만들게 하지만 물자도 알아서 구하면서 전처럼 똑 같은 숫자의 벽돌을 만들라고 합니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의 원망이 누구에게 오겠습니까?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그 원망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22절,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는 자기는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가 잘 안 되니 ‘히브리인의 하나님’ 곧 ‘건너 온 자들의 하나님’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비굴하게 할 것은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바로의 진노요 이스라엘의 원망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하늘은 이스라엘인들의 원망으로 가득채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지난 기간 온 세계가 팬데믹으로 인한 인간들의 두려움으로 가득채워졌듯이…. 제 생각에는 지금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숫자 보다 인간들이 뿜어낸 두려움의 바이러스 숫자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6:1,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모세는 분통이 터져 있는데 하나님은 아주 calm하십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원망도 들으셨는지 안 들으셨는지 몰라 볼 정도입니다.

도리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가 어쩔수 없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쫓아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쫓아내겠습니까? 자기들 보다 더 강함을 체험하게 될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자기들이 기준의 생산자였는데, 진짜 기준의 생산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보낼수 밖에 없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바로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을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겠노라.”

이로서 알수 있는 것은 400년전에 야곱과 그 자녀들을 강대국 애굽으로 보내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애굽 보다 강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종살이를 거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팬데믹을 허락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도 작년 1년여간 얼마나 안절부절하였습니까?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calm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팬데믹의 공포 가운데 있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을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겠노라.”

곧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출애굽하라” 말씀하시지만 오늘 저희들에게는 “출팬데믹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그러면 이러한 진정한 출팬데믹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통해 해답을 찾을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왜 하나님께서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절기를 지키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지키는 절기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시간상 다시 설명해 드리지 못합니다. 공통점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특히 유월절이 그렇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게 10번째 재앙을 내리는 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지킵니다. 이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민족의 집은 죽음의 천사가 뛰어 넘었기에 유월 곧 pass over했다고 해서 유월절 Passover가 절기가 된 것이 아닙니까?

곧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은 바로 Passover를 경험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애굽은 힘과 지식으로 기준의 생산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 내지 나라가 필요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민족과 나라는 400년의 애굽 종살이의 훈련기간을 마친 후 유월절을 경험한 민족과 나라임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팬데믹 가운데 있는 우리를 세우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오늘날 유월절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작년도 팬데믹 기간 중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꽃소리 핫라인이 개설되어서 많은 분들에게 큰 위로와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었습니다. 그 중 부자지간의 재미있는 대화 코너가 있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라면은 무슨 라면일까요?

유준이가 좋아하는 치즈라면? 치즈두개 넣은 것? 아니요..

그럼, 아빠가 좋아하는 랍스터 다리 넣은 해물라면? 그건 엄마가 오늘 먹었는데..

그럼 무엇일까요?

정답은.. 주님과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월절을 경험한 가정에서 나뉘어지는 대화입니다. 팬데믹 가운데서도 ‘주님과 함께 라면’ 때로는 삶속에 갈팡질팡할 때 ‘주님이시라면.’

사실 그동안 코로나 백신으로 많이 안정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출팬데믹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백신이 필요합니다. 이 백신은 ‘라면’백신입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주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는 “주님과 함께 라면” 노래를 부르며 담대히 절기를 지키는 참된 기준의 생산자들로 하여금 새 역사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이 위대한 시간에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출팬데믹 하라.”

사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기준의 생산자가 되게 하시려고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향하여 하늘로부터 돌진하여 내려 오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래도 백신을 개발한 카리코 박사처럼 뭔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우리처럼 준비가 안 된 자들을 부르실까요?’

1900년경 평안도 정주 땅에 백사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일하러 가는데 보니까 선교사님이 교회를 짓는데 흙으로 벽돌을 구워가지고 교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렇게 짓다가는 금방이라도 비가 오면 다 무너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감동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땅을 팔아서 교회를 짓도록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선교사님이 볼 때 감사하면서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바치고 나면 나중에 무얼 먹고 살겠는지…? 그래서 선교사님은 백사겸을 데려다가 교회 사찰집사를 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찰집사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주 총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바로 연희 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병원이 합해서 연세대학교가 될 때 초대 총장이 된 백낙준 박사입니다.

사실 백낙준 박사님은 연세대 초대총장뿐 아니라 문교부 장관, 참의원, 국무총리 서리 등 여러 분야에서 크게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백낙준 박사님처럼 기준의 생산자가 되자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기준의 생산자는 바로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님이셨습니다. 유월절을 경험한 분은 바로 백사겸 아버님인 것입니다.

물론 백낙준 박사님은 후에 얼마 동안 한국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기준의 생산자는 그의 아버님 백사겸 집사님이셨습니다.

누구나 백낙준 박사처럼 될수는 없습니다. 연세대 총장은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기준의 생산자가 될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유월절을 경험하는 자는 기준의 생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환경에도 주님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코로나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팬데믹 끝자락에서 “주님과 함께 라면,” “주님이시라면” 노래를 부르며 출팬데믹하십시다.

말씀을 거둡니다.

오늘 기준의 생산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고 보니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하가 생각이 나네요. 음악의 기준을 만들어내셨기에 그렇게 불려지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바하가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지나서 포르켈이라는 저자가 바하의 전기를 저술했습니다. 이런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조국이여, 그를 자랑스러워 해라. 그에 어울리는 나라가 되라.”

바하가 독일의 국격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하는 독일의 국격의 기준만 된 것이 아닙니다. NASA에서 1977년도에 Voyager I이라는 우주선을 우주에 띄웠는데 2025년까지 우주를 탐험한다고 합니다. 이 우주선에 7개의 classical music을 보냈는데 그 중 바하의 음악이 3개 들어 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바하의 3가지 음악을 보낸 이유는 ‘바로 이것이 이 땅에 사는 자들의 기준이다’ 보여주기 위해서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서 팬데믹을 보내신 것이 아닐까요? 팬데믹 끝자락에서 유월절 어린 양을 바라보는 자들로 인해 온인류를 위한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들을 세우시기 위함이 아니셨을까요?

그러므로 팬데믹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새로운 기준의 생산자들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기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 축복은 누구에게나 다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자랑스러워 하십시다. 그리고 기쁨으로 유월절 어린 양을 바라 보십시다. 유월절 절기를 삶의 광야에서 지키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내 백성을 내보내라’의 이중적 의미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출애굽기 전반부의 핵심 주제이며 엑소더스의 출발이다.
이 명령은 대상에 따라 단계 별로 몇 차례 반복된다.

야웨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면서 그에게 맡길 임무를 고지한다(출 3:10; 8:1, 20).
나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방면(discharge)을 직접 요구하는 대목에서 언급되었다(출 5:1; 9:1; 10:3).
본문에서 ‘샬라흐’는 피엘 동사로 활용된 점을 기억해야한다.
피엘은 타동사로서 목적어를 취하며 그 본래적인 의미를 강조하게 된다.
더구나 하나님이 주어다.
그러므로 샬라흐는 ‘이집트에서 내보내는’ 공간의 이동만을 명령한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여기에 특정한 사명을 읽어야한다.
단순히 ‘보내다’라기보다 ‘파송하다’는 뜻이 더 적절하다.

명사형 쉘라흐는 미사일이나 치명적 상처를 주는 무기를 가리킨다.
물론 성경에 미사일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칼’이나 ‘병기’로 번역되어(욥 33:18; 대하 23:10; 욜 2:8; 느 4:11,17)
‘방패’와 함께 쓰인다(대하 32:5).
주로 후대에 쓰인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뿌리, 싹, 가지 등을 ‘내다, 자라다, 뻗다’ 등으로 표현할 때도 있고(렘 17:8), 비유적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도 쓰인다(아 4:13). 샬라흐의 용법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밖으로) ‘빼내다’는 행위에 앞서 우선시되는 목적이 감지된다.
즉 아브라함을 염려하여 롯을 ‘내보내거나’(창 19:29), 완악한 백성의 ‘내버려두거나’(시 81:12), 충격을 주는 행위를 통하여 얻고자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경우는 각각 다르다.
이집트가 그 명령을 어긴다면 병기가 되어 돌아갈 것이며, 이스라엘이 순종한다면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곧바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는 구문이 뒤따르고 있다.
샬라흐 동사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광야로 내보낸다는 것과 아울러 하나님 예배라는 두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한 출애굽의 목적이 겉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과 해방이지만 안으로는 하나님 예배와 경외에 있다고 봐야한다.

출애굽기는 전체가 이야기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 법, 그리고 예배 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출애굽기의 구성을 위와 같이 설명하면 다소 의아해한다.
지금까지 출애굽기가 이집트 탈출을 중심으로 기적적인 사건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출애굽기 1-19장까지 서사의 핵심이 출애굽 사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40장까지 계속해서 출애굽 사건이라는 한 주제와 사건으로 단순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알다시피 출애굽기에는 계약을 통한 율법의 수여(출 19:1-24:14)와 성막의 건설이라는 굵직한 사건이 뒤따르기 때문이다(출 24:15ff).

출애굽기에서 본문의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이야기와 예배를 묶어주는 연결 구문이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 담판하는 출애굽 서사의 절정에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칫 조상들이 겪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지점에서 하나님 예배에 대한 강조를 장치해둔 것이다.
하긴 바로를 처음 설득할 때부터 야웨 제사를 위해 사흘 길을 허락하라고 요청한 바 있고 그 뒤로도 두 차례 더 언급되었다(출 3:18; 5:3; 8:27).
그러나 완악한 바로는 장자의 희생을 겪은 후에 자신의 입으로 야웨를 섬기라며 이스라엘을 내보낸다(출 10:7,11,24 등을 보라).

내 백성을 내보내라!
이스라엘의 해방과 하나님 예배는 모세가 홀로 감내하기에 힘든 중대한 사명이다.
그러니 모세는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거듭 거절한 것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조력자를 보내거나 이적을 통하여 모세를 설득하며 독려한다.
맥락이 다르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이 누구를 보낼까 하는 질문에 ‘나를 보내소서’라고 화답한다.
여기에 소명을 받은 이의 결연한 의지와 끝까지 완수하려는 책임감이 묻어난다.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막중한 두 가지 사명을 수행한다(출 12:31).

내 백성을 보내라




드디어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장면입니다.
이는 바로에게는 폭탄적인 선언이었을 입니다.
달리 말하면 선전포고(宣戰布告)인 셈입니다.
이에 대해 바로가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 폭탄적인 선언은 어떤 결과를 몰고 올 것인가?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에게 어떻게 나올 것이며,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 무엇이라 불평하게 되는가?
이것이 6장에서 관찰하게 될 과제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5) 여호와가 누구관대 보내겠느냐
둘째 단원(6-21)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셋째 단원(22-23)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첫째 단원(1-5) 여호와가 누구관대 보내겠느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2).

모세가 바로 앞에 들어가서 대언(代言)한 말은 일관되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기리라”(7:16, 8:1, 20, 9:1, 13, 10:3)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 바로가 노예로 부리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과,
2. 그러므로 그들을 보내라는 것과,
3.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가 아니라 나를 섬기리라 하십니다.

이에 대한 바로의 반응은,

1. 여호와가 누구관대,
2.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3.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의 반응입니다.
바로의 입장에서야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5) 한 대로 많은 노동력을 잃고싶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싸움은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7:5, 17, 8:10, 22)데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들은 다름 아닌 여호와가 누구인가를 알리기 위한 자기 계시였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재차 말합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3). 이는 3:18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출애굽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해방만 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나라건설에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흘 길쯤 광야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시려는 것인데 이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의 1차 목적지는 가나안이 아니라 시내산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첫 언약”(히 9:18)을 체결해야만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워주신 언약에 의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어음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약속이 시내산에서 언약으로 체결(24:7-8)이 된 것입니다.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3:12) 하셨는데 그들은 출애굽 한 후에 시내산에 1년을 머물면서 정성을 다하여 성막을 만들므로 실제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란 말속에는 이런 의도가 함의되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육적 출애굽 때에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시내산”에 가서 짐승의 피로 뿌림(24:8)을 받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적 출애굽 때는 시내산이 아니라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하신 갈보리 산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벧전 1:2)을 받아야함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단원(6-21)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9).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결과는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평안을 준 것이 아니라 더욱 무거운 고역과 수고를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합니다.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말고 그들로 스스로 줍게 하라 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6-9)고 명합니다. 그러므로 고역이 배나 가중되게 된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할당된 벽돌 수효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바로의 간역자들이 자기들의 세운바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을 때리는”(14)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이점은 복음전도자들도 경험하게 되는 바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줌으로 인하여 그가 시련과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사람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복음>을 듣지 않게” 하려는 사탄의 궤계인 것입니다.

이는 의외(意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입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3:19-20)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패장들은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21)고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리려하시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손 대대로 대물림을 하고 있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결의도 몸부림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롬 5:6) 한 연약함입니다. 그들은 자력으로는 물론 하나님께서 구출해 내시려는 데도 일어설 힘조차 없을 만큼 연약한 상태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할 불신자들의 영적인 상태이기도 합니다.

셋째 단원(22-23)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23)고 불평합니다.
모세의 불평이나 백성들의 원망하는 그 마음은 이해할 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나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오해가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을 만사형통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쯤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오해입니다.

그리하여 시내산 기슭에서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기도 하고, 내려주시는 만나를 매일 같이 먹으면서도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 11:5-6) 하고 어처구니없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광야생활이 고생스러워지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5) 하고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애굽에서 구출해 낸 것을 도리어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아닙니다.
영혼구원운동은 “피 흘리기까지”(히 12:4)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인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바울 사도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이라”(행 14:22)고 미리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7-58)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형제에게는 이 각오가 되어있습니까?


모세의 소명과 사명(출애굽기 3:1-12)

열정으로는 부족하다(민족적 감정)

모세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족을 위해 뭔가 해보려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자가 되고, 무조건 도망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 멀리 도망치다 보니, 미디안 땅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예비해 주신 여자 십보라를 만나 결혼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아들을 낳자, 광야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신 것에 감사해서 “게르솜”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언 세월이 약 40년 흘렀으며, 모세의 나이도 80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낮아질 대로 낮아졌고, 이집트의 화려한 추억도 다 잊혀져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즉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는 자기 민족을 향해 주신 마음(비전)으로 인해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꺼지지 않고 타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일찍 아침밥을 먹고 미디안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몰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따라 모세는 양떼를 좀 멀리 몰고  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서쪽으로 즉 이집트 방향으로 몰아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서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먼저 보시고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계속해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는 하나님을 뵈옵기 두려워 하여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중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본문 출3:7-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 말씀은 모세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명과 사명은 비슷한 말 같이 보이지만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명은 부르심입니다. 영어로 하면 calling입니다. 사명은 mission입니다. 소명이 먼저고, 사명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불러서 그 다음에 사명을 주십니다.  출3:4-5절이 소명에 해당하고, 출3:7-10절이 사명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부르실 때에, 두 가지 목적으로 부르십니다.

(1)    첫째 목적은 구원과 성화를 위해 부르십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을 부르실 때는 먼저 구원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자녀 삼으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관계로 부르십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 구원으로의 부르심에 대해 잘 설명하였습니다.

엡1:3-5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3-5)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사 때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불러주셨는데, 무엇이 되게 하시려고 불렀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즉 구원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즉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성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롬8:28-30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살아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의 첫 번째 목적입니다.

(2)    하나님의 소명의 두번째 목적은 특별한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시는 것입니다. 즉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마치 대통령이 대사를 불러서 사명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이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도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실 때, 분명하게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라고 두 번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중차대한 사명을 맡기시려고 그를 두 번 부르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발에서 신을 벗는 일이었습니다. 사명은 그 다음에 받았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더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을 벗으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모세가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기 전에 모세가 벗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모세가 결단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을 결단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          모세는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 하나님의 뜻에 따를 것에 대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권리(주권)를 포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겠다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겠습니다’라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신발을 벗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았다면 그런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입니다. 이전에 내가 주인으로서 살았다면, 내 맘대로 다녔다면,  이제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눅9:23) 이전의 익숙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방식, 이전의 가치관, 이전의 전통 같은 옷들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처절한 싸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히12:4)

모세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는 반드시 사명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부르셔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주님은 이제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mission)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 사명은 결코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한 사명을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모세의 사명은 본문 출3:7-10절 사이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집트에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사명)을 주시기 전에, 이집트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고통받는 백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개의 동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계십니다.

출3:7절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며 세 개의 동사를 통해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          보고

-          듣고

-          알고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을 겪을 때, 그 광경을 다 보시는 분이십니다. 신음 소리를 다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상황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가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 무엇인가요? ‘고난 자체보다 하나님께서 과연 내 사정을 아실까?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실까? ‘와 같은 생각과 느낌이 들 때 가장 힘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의 고통을 보시며,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든 상황을 이미 다 알고 계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며칠 전 큐티 책 <오늘의 양식>에 보면,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할머니가 교회 현관에서 두 개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부룬디에서 찍은 딸의 사진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린 손자의 사진입니다.  딸이 없고 아기만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 사진을 설명하면서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 딸이 손자를 낳다가 그만 생명을 잃었습니다.”(오늘의 양식, 3월3일)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가 그 할머니의 얼굴을 감싸 주면서, 역시 눈물을 흘리며 “그 마음을 제가 압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얼굴을 감싸주며 “그 마음을 압니다”라고 하였던 분도 몇 달 전에 아들을 세상에서 떠나보냈던 분이었던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같은 고통을 겪어본 분이나,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의 위로가 큰 힘이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가장 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을 다 겪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3:16,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는 십자가에서 가장 처절한 고통을 겪으시며 죽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아들이 십자가에 죽는 고통을 지켜보아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하신 구세주, 유일하신 중보자가 되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을 보세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알고만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곤경에서 구원해 주시길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건져내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불러서 이집트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민족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합니다.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요즘에 얼마나 답답합니까? 과연 언제까지 우리 민족이 둘로 분단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야 하는가?

저는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통일을 허락하실 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 민족의 사정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잘 알고 계시며,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북한 동포들의 고통, 신음 소리, 학대받는 것을 주님은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그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며,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출애굽의 이야기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정치적 압제, 경제적 가난, 질병과 같은 문제들로터 해방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죄로 인해 바로의 압제처럼 죄와 사탄의 노예로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표현하지 못해도 이 죄로 인한 고통, 부르짖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며, 인간을 영원한 불행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요,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 은혜를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출애굽기를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이야기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이야기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나이나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이 80이면 벌써 은퇴할 나이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충분히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아브라함을 보세요.(75세) 갈렙을 보세요.(85세)

하나님의 종에게 무슨 일을 맡길 것인가, 언제 그 일을 하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종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 하라는 일을 맡아서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누가 모세를 불렀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무슨 일을 맡기셨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는 일에 부름받았습니다.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누구십니까? 모세의 힘과 지혜로 가능한 일이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모세를 동참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때에 당신의 종을 불러서 그 일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여 지도자로 쓰임받은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게 될 때 결코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리더)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부름받은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오랫동안 양떼를 돌보면서 지도자로 부름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배웠을 것입니다.

여러분, 리더와 리더가 아닌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리더는 자리나 직책 그 이상입니다. 자리나 직책이 있어도 리더가 아닌 경우가 있고, 자리나 직책과 상관없이 리더로 쓰임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리더는 멀리 보고 큰 그림을 보고, 리더가 아닌 사람은 근시안적입니다.

리더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잡고 살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은 사리사욕을 챙깁니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 순위가 되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은 늘 분주합니다.

리더는 사람(영혼)을 중시하고 관계적이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은 관계를 소홀히 여기고 사람을 이용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리더는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이 솔선수범하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은 거짓과 위선을 일삼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누구를 불러 쓰실까요??

하나님은 시대적 요청이 있을 때, 준비된 사람, 열정이 있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불러 쓰십니다. 열정이 곧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대한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동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해서든 돕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젊은 모세가 한 번 실패하였지만, 그 열정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때가 되어 준비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서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 흑백 갈등이 한참일 때에, 하나님은 흑인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불러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통받는 흑인들에 대한 뜨거운 가슴이 있었으며,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기도와 비폭력 운동을 통해 흑인들의 인권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을 그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꿈을 주셨고, 그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불러서 함께 일하시길 기뻐하십니다. 각 시대마다 필요한 종들을 불러쓰셨습니다. 마음에 비전도 주시고, 열정도 주시고, 지혜와 능력을 주시면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겐 어떤 비전을 주셨나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계신가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젊은 모세는 스스로 리더가 되고 싶었지만 아직 준비가 안되었었습니다. 인간적인 야망, 수단을 사용하여 뜻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광야에서 많은 세월 동안 양떼를 돌보면서 리더가 된다는 것이 의욕만 앞선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철저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출3:11절을 보세요. 젊었을 때의 모세와 얼마나 다른 반응을 보였나요?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자신감이나 자만심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야에 묻혀 40년이상 양떼를 돌보면서 낮아질대로 낮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모세를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출3:12절에서,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라, 내가 할 것이다, 네가 아니라 내가 이루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셨으며, 그 사명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보다 더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각자에게 주시고 싶으신 말씀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너를 도와주리라” 하는 말씀인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깨닫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붙잡고 나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모세를 불러 쓰신 주님께서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불러서 쓰실 것을 믿습니다. 아직까지 자신의 사명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하나님께 물으셔서 자신의 사명을 꼭 발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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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일 / 02-17-2024(토)
출애굽기 4장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Then the LORD said to him, "What is that in your hand?" "A staff," he replied.

4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을 내밀어 잡으니 그 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17절. 너는 이 지팡이를 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

20절.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에 잡았더라.

지팡이(4294) 마테(maṭṭeh)  מַטֶּה   

1. 나뭇가지.  2. 회초리.  3. 규(圭. 홀 규)
발음 [ maṭṭeh ]
어원 / 518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51회 사용

1. 명사, 남성 나뭇가지, 가지, 잔가지, 가는 가지,분파, 지류, 겔 19:11이하

그 가지들은 견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홀이 될만한데 그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서 뛰어나서 보이다가

2. 명사, 남성 회초리, 막대, 지팡이, 장대, 출 4:2, 4, 17, 레 26:26, 민 20:9, 시 105:16, 겔 4:16, 5:16, 14:13.

 a. 명사, 남성 [주]
 b. 명사, 남성 규[왕의], 시 110:2.
 c. 명사, 남성 창[군인의], 삼상 14:27, 합 3:9, 14.
 d. 명사, 남성  회초리, 사 9:4, 10:5, 24, 겔 7:10.
3. 명사, 남성 종족, 지파, 분파[이스라엘 지파에 대해서만 사용], 민 1:49, 수 13:29, 왕상 8:1.

민수기 1:49
레위 지파만은 너는 계수치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여호수아 13:29
모세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으되 므낫세 자손의 반 지파에게 그 가족대로 주었으니.

열왕기상 8:1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출애굽기에서 "지팡이" 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는 "21구절"
출애굽기 40장, 1213구절


4:2, 4, 17, 20. / 7:9, 10, 12, 15, 17, 19, 20  /  8:5, 16, 17  / 9:23  / 10:13  /  12:11  /  14:16  /  17:5, 9  / 21:19


4: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가 되리라.

하수(2975) 예오르(yeʽôr) יְאֹר

1. 강.  2. 창 41:4 이하.  3. 단 12:5
발음 [ yeʽôr ]
어원 / 애굽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5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피(담) - '잘라내다', '멸망하다'란 의미의 동사 '다맘'에서 온 말로 피를 흘리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특히 본절에서 피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닥칠 파멸을 예고하는 것이다.

דָּמָם 스트롱번호1826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 15:16.
발음 [ dâmam ]
구약 성경 / 30회 사용

모세에게 주신 세 가지 표징

1. 하나님을 향한 불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모세는 두려워하고 염려합니다.
바알 앞에 서기를 두려워 했고, 장로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까봐 염려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백성들이 듣지 않으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는 것이지요.

두려움과 염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두려움과 염려는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또한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실 능력이 있으시고, 그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해주실만한 사랑이 있으신 분임을 인정하면 두려움과 염려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도 능력도 하찮게 보기에 두려움과 염려에 휩싸이고 마는 것입니다.

2. 무시하는 자를 향한 존중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모세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해줍니다.
모세에게 일일히 설득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세를 위해 세 가지의 표징을 주십니다.

첫째 표징은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는 표징이고,
둘째 표징은 손에 나병이 생겼다가 다시 온전해지는 표징이며,
셋째 표징은 물이 피가 되는 표징입니다.

앞의 두 가지 표징은 모세에게 직접 보여주셨고, 마지막 한 가지 표징은 애굽으로 가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세 가지의 표징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모세의 믿음을 위한 것이며, 또한 장로들과 백성들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기적은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사건을 말합니다.
기적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기적을 표징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기적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고작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불러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애굽 사람과 가나안 사람 전체를 지팡이로 만들어 버린 후, 가나안에서 살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게 하시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면서까지 그 백성을 설득하고, 만져주며, 확신시키는 작업을 공들여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지팡이와 뱀의 표징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 명하십니다.
지팡이를 던지자 지팡이는 곧 뱀이 되었습니다.
뱀은 애굽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바로가 쓰는 관에는 늘 뱀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세는 뱀을 보고 놀라서 피합니다.
이는 모세가 바로를 두려워하여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그대로 형상화 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 명하십니다.
뱀에게서 피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뱀을 잡습니다.
그러자 뱀은 즉시 지팡이로 변합니다.
뱀을 잡을 때에는 꼬리가 아닌 머리를 잡아야 합니다.
꼬리를 잡으면 즉각 물릴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게 하라 말하는 것은 마치 뱀의 꼬리를 잡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물릴 것이 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명령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뱀과 같은 바로는 지팡이와 같이 되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물 수 있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맨 처음 바로를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모세는 결국 순종하여 바로를 대적하게 될 것이며,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가나안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뱀 앞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뱀은 성도를 향해 그 어떠한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마른 막대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절대 불가능하다 생각되는 일, 두려워서 도무지 발걸음을 뗄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가라시면 발을 떼야 합니다.
그래야 뱀은 지팡이가 됩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뱀은 우리를 물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여 발을 내딛기만 하면 뱀의 꼬리를 잡을지라도 뱀은 우리를 물지 못하고 그저 막대기처럼 될 것입니다.

4. 나병에 걸린 손의 표징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손을 품에 넣으라 명하십니다.
손을 품에 넣었다 빼자 손은 곧장 나병에 걸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병에 걸린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말씀하십니다.
손을 품에 넣었다 빼자 이번에는 나병에 걸렸던 손이 말끔히 회복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병은 불치병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비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병의 특징 중 하나는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간 애굽에서 사는 동안 애굽의 죄악된 풍습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살이의 고통에는 고통스러워 부르짖었지만, 그들이 영적인 처지에는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백성들의 모습을 그려내기에 나병만한 비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고통과 이스라엘의 죄악을 끝내시겠다는 의지를 이 표징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나병 환자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마귀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고통 가운데 살았어야 했고, 죄를 지으면서도 죄가 죄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인간은 나병에 걸린 것과도 같은 처지를 벗어나 온전한 회복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5. 물이 피로 바뀌는 표징

사람들은 참 완악합니다.
첫째 표징만 보여줘도 믿어야 하지만, 둘째 표징을 필요로 합니다.
둘째 표징까지 보여주면 다 믿을 것 같지만, 그래도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셋째 표징이 필요합니다.
당장 모세만 해도 둘째 표징을 보여주고 셋째 표징을 말씀해주시는데도 여전히 못 가겠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이 다음 절에 등장을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셋째 표징까지 보여 주십니다.
셋째 표징은 나일 강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면 피가 될 것이라는 표징이었습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젖줄로서 나일강 자체가 애굽을 상징합니다.
사실 나일강이라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나일이라 되어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로는 그저 강물을 뜻하는 단어인 ‘예오르’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애굽에서는 ‘하피’라고 불렀습니다.
나일이라는 이름은 후에 헬라인들이 Neilos라고 부른데에서 유래했습니다.
헬라어 역본인 70인역 성경에서는 이 강물의 이름이 당연히 나일강으로 되어 있겠지요.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 역본을 따른 것입니다.
출애굽기가 기록될 당시에는 이 강물은 나일이 아닌 하피로 불렸습니다.
하피는 또한 강물을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나일강을 신성시 여겼습니다.
신이 내려와 거니는 강물로 여겨졌으며, 하늘 바다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도 나일강을 주관하는 신도 결코 신성하지 않습니다.
신성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이 피가 되는 것을 강의 신이 막을 수 있을까요?
막을 수 없다면 그 신은 존재하지 않는 가짜 신입니다.
물이 피가 되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참신이 함께 해주는 길이므로 담대히 가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표징은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의 영아들을 하수에 던졌습니다.
나일강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가 흐릅니다.
그 피로 애굽왕은 자신의 풍요를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피값을 애굽에게 물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풍요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애굽에는 풍요 대신 피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물을 애굽땅에 쏟을 때에 피가 되는 모습을 그러한 메시지를 형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표징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였던 애굽에게는 심판의 메시지가 되고, 압제하에서 억울한 피를 흘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원통함을 신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그 피의 능력으로 사단의 권세를 끝장내셨고, 우리의 고통과 죄를 씻어내셨으며, 우리의 모든 원통함을 신원하실 길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힘입니다.

모세의 지팡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지팡이)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 4:3-4)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뱀'으로 만드셨을까?
하나님의 권능을 더 강력하게 보일 다른 이적도 있을 텐데 말이다.
성경이 그 이유를 딱 집어서 말하지는 않는다.
이어지는 구절은 이에 대한 약간의 힌트를 제공한다.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출 4:5)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신 뒤, 꼬리를 잡아 다시 지팡이로 만드셨다.
그 다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나타난 줄 믿게 하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문맥을 고려하면, 이 기적은 '창세기', 그중에서도 족장들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창세기와 '지팡이', '뱀'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족장들을 상징하는 지팡이

모세가 홧김에 애굽인을 죽였고, 이로 인해 광야에 숨어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에서 모세의 삶을 믿음의 행위로 간주한다(히 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는 공주 아들이라는 왕족의 신분을 포기했고, 광야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유목 생활을 했다.
유목 생활은 그 신분이 '정착민'이 아닌 '나그네'임을 잘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실 그때를 광야에서 기다리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국고성 건축으로 농업과 벽돌 제조에 수십 년간 종사했다(cf. 출 1장).
그들은 조상의 직업인 목축업과 무관한 후손이 되어버린 상태이다.
이런 백성들 앞에 모세가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나타난다.
이는 상당히 유의미하다.
모세는 족장들을 떠올리는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백성들이 애굽의 '정착민'이 아니라 (족장들이 기다렸던) 약속의 땅으로 떠나야 할 '나그네'임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뱀에 대한 권능을 나타내는 지팡이

모세의 지팡이가 '목자'만을 상징했다면, 창세기 족장들을 상기시키는 추억의 물건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팡이는 이를 넘어 ‘지팡이-뱀-지팡이’의 기적, 곧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냈다.
뱀은 창세기에서 에덴동산의 사탄을 연상시키는 동물이다.
하와를 속여서 아담과 함께 동산에 쫓겨나도록 만든 근원적 대적(악)이었다.
따라서 지팡이에서 변한 뱀이 동산의 그 뱀을 상징한다면, ‘지팡이-뱀-지팡이’의 변화는 대적(사탄)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막강한 권능을 나타낸다.

애굽인들은 뱀을 지혜와 치유의 원천으로 숭배했기 때문에, 뱀은 애굽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팡이를 뱀으로 바꾸고 다시 뱀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신들과 사탄에 대한 그 권위를 보여주셨다.
이 상징은 모세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 Ryken and Hughes, Exodus: Saved for God’s Glory, (Wheaton, IL: Crossway Books, 2005), 109.

이것(뱀의 꼬리를 잡는 것)은 모세의 지팡이가 여호와의 권능을 상징했다는 개념의 시작이며, 이는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지팡이를 하나님의 왕좌의 상징으로 이를 지탱하는 것으로 끝나는 개념이다.
- Stuart, Exodus,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6), 129

'지팡이'와 '재앙'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바로 왕을 찾아갔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말했지만 바로 왕은 듣지 않았다.
심지어 지팡이가 뱀이 되고, 모세의 뱀이 마술사의 뱀들까지 모조리 삼켰어도 고집은 여전했다(출 7:13).
그래서 이후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 곧 재앙을 일으키는 도구로 계속해서 사용된다.
사르나(Nahum M. Sarna)는 이 재앙들에 세 쌍씩 세 주기가 있음을 제안한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재앙 “백성을 보내라!” 시간(Time) 모세(아론)의 행동
첫째 주기 O “아침에” 지팡이-물
(출 7:19; 8:5)
개구리 O x
X x 지팡이-땅
(8:17)
둘째 주기 파리 O “아침에” 여호와-구별
(8:23; 9:4)
전염병 O x
악성 종기 X x 손-하늘
(9;10)
셋째 주기 우박 O “아침에” 지팡이(손)-하늘
(9:23; 10:13; 22)
메뚜기 O x
어둠 X x

레이하르트(Peter J. Leithart)는 세 주기(series)가 각각 '물-땅-하늘'의 구조를 띤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경에서 이 구분이 뚜렷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상 그의(혹은 아론의) 지팡이는 '물-땅-하늘' 순으로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지팡이'와 '광야'

모세의 지팡이는 유월절 이후로 광야에서도 같은 용도로 계속 사용된다. 광야 생활에서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사건 광야에서 지팡이의 용례
홍해 사건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14:16,)
므리바 사건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그 반석을 치라(17:5-6,)
아멜렉과의 전투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17:9, 12, 하늘)

광야의 사건들과 애굽 재앙들을 지팡이 중심으로 추적해보면, 항상 ‘물-땅-하늘’에 사용된다.
이런 지팡이의 용례는 구약의 삼층 구조 세계관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 삼층 구조의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계명에서 잘 나타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세계에 대한 삼층 구조로서의 이해는 '노아의 방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노아에게 방주를 삼층으로 짓도록 하셨으며, 이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반영이다.
따라서 모세의 지팡이가 애굽에서 “물-땅-하늘”에 휘둘려졌고, 각 영역(층)에 재앙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애굽이라는 '바로의 집', 곧 “바로의 세계' 전체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
광야에서 지팡이가 '물-땅-하늘'에 휘둘려졌음도 역시 같은 의미를 갖는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 전체를 심판하셨고, 광야에서도 자기 백성을 위해 “물-땅-하늘”, 곧 세상 전체에서 권능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팡이가 물, 땅, 하늘에 휘둘려지며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남을 볼 때, 반드시 깨달아야 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만유의 주권자이심을 말이다!

예배를 위한 지팡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예배할) 것이니라” (출 7:16; 8:1; 8:20; 9:1; 9:13; 10:3)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의 지팡이로 이러한 (물-땅-하늘에 임하는) 우주적 재앙을 내리셨을까?
출애굽기에서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시내 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무엇을 목표로 삼는가?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할 것이니라.”
한글성경(개역개정)은 “섬기다”로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예배하다”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분 자신을 예배할 수 있도록 보내라고 재앙을 내릴 때마다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사실 출애굽의 목적을 무조건 가나안 땅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일차적 목적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섬기는) 것이다.

지팡이 사용의 목적도 마찬가지이다.
지팡이를 통해 나타난 권능들은 단순히 애굽을 심판하고 광야에 물을 내거나 아말렉을 멸망시키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 지팡이는 궁극적으로하나님의 백성을 여호와의 산, 곧 시내 산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예배자로 구별하여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모세의 지팡이로 물리치셨다.
설령 그것이 “물-땅-하늘”, 곧 세계 전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예배자를 반드시 불러모으신다.


오늘도 하나님의 지팡이(마테. מטה)를 들고 계십니까?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출 4:17)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 20:11)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출 17:9)

<지팡이>를 히브리어로 <마테 - מטה>라고 합니다.
“내뻗다, 늘어나다”의 뜻으로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지팡이>에 담긴 의미가 <기도>를 뜻합니다.
“내뻗다”를 뜻하는 지팡이는 <내 >손으로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 지팡이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엘로힘 אלהים 맛테 -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지팡이>를 헬라어로 <랍도스-ῥάβδος>라고 합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능력, 권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 지팡이를 손에 쥘 때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지팡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릴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지팡이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권능의 이름을 높여 올려 드릴 때, 하늘 보좌의 능력이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모든 영화를 던지시고 이 땅에 하늘 보좌를 연결하는 지팡이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높이 들리셨습니다.
그 이름의 지팡이를 오늘도 부활의 능력으로 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짖는 곳마다 <엘로힘 אלהים 맛테 -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셔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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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재의 수요일) 02-14-2024 pm 9:00
성경 / 출애굽기 1장

주제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출 1:17)
- 십브라와 부아처럼 살아보자(출 1: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Shipbrah. 아름다움)라 하는 자와 부아(Puah. 화려함. 입)라 하는 자에게 일러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출애굽기 기자는 출애굽기를 쓰면서 출애굽기 1:1에서 두 단어를 사용하므로 출애굽기의 성격을 말할려고 합니다.
그 첫 단어가 "이름"이라는 단어이며, 두번째 단어가 "애굽에 들어온(came to Egypt)"이라는 단어 입니다.
들어왔으니까 언젠가는 나가야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탈출기(Exdus)"라고 하고, 또 다른 이름은 "이름의 책( the Book of Names)"라고도 말합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문장으로 “이것들이 이름들이다”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1: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Now these are the names of the children of Israel who came to Egypt; each man and his household came with Jacob:"

​이름의 책 출애굽기에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말하기 위함 입니다.

그것은 창세기와 연결되는 이야기 입니다.
창세기가 인류의 탄생의 역사를 말한다고 하면,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나라의 탄생을 말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이름이 나옵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이름 외에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11절에 나오는 "바로" 왕이고, 그 다음이 15절에 나오는 "십브라"와 "부아" 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를 영적으로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창세기의 환란을 피해서 애굽으로 들어왔지만, 그곳에는 바로라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가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런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그 마귀에게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삽브라"와 "부아"라는 사람이 있어, 이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2:10에 가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탄생하게 됩니다.

​성경기자는 모세가 출생하는 장면에서 모세의 부모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구해준 애굽 공주 이름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나옵니다.
그만큼 그들의 이름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이름의 책인 출애굽기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에 신중합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역사이며 인격이며 얼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위선 세 가지를 떠올립니다.
그 사람의 얼굴, 그 사람의 연세, 그 사람의 직책입니다.

​첫째,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던 사람들

​1:15-16 /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이 구절은 1절에 말하고자 하는 "이름(Name)”이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왜 이들 이름을 맨 먼저 언급했을까요?
출애굽기라는 이름의 책에서 이 두 사람을 제일 먼저 언급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이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탄생시킨 산파들 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들을 얼마나 존경했을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모세도 없었고 이스라엘도 없어졌을 것입니다.

​십브라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이고, 부아는 "화려함"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사람들은 히브리 산파들입니다.
생명의 탄생을 돕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소위 말하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들(powerless poeple) 이었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비굴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힘 있는 사람 앞에서 기가 꽉 죽어 할 말도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더 힘 있는 분 more powerful person"을 두려워 했습니다.
우리도 그렀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자보다 더 힘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But the midwives feared God, and did not do as the king of Egypt commanded them, but saved the male children alive."

​이 구절을 보면, 십브라와 부아는 가치관이 분명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들이 바로의 지엄한 명령을 거역하면 처형당할 수 있니다.
바로는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떠받드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바로가 명령을 내린 후에 태어나는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죽은 목숨들이라는 점에서 “호모 사케르(Homo Sacer)”입니다.

'호모 사케르'라는 말은 "희생제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상관없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들이 태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사형수 입장”(Dead Man Walking)을 안고 태어나는 것 입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호모 사케르(Homo sacer)' 라는 말이 있다.
* 사케르(sacer) : 신성한

고대 그리스에서 쓰던 말인데,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이 다시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이렇게 정의한다.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vita uccidibile e insacrificabile)
-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새물결, 45쪽


희생물로 바칠 수 없다는 건 제사에 쓰일 수 없다는 것, 즉 신성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죽일 수는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살해한 자에 대한 사면'이 가능하다.
호모 사케르 살해에 대해 면책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신성한 권리를 받았거나 스스로 신성하다고 여기는 소수의 기득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에게 호모 사케르에 대한 살해를 허락하거나 부추기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장애인이나 나환자들은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된 호모 사케르였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이 소유한 노예의 팔다리를 자르고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이는 현대가 되어서도 형태가 바뀌었을 뿐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이나 약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현된다.
앞서 말한 피렌체의 노부부는 물론이고 한국에도 많은 어르신들이 급속히 발달하는 기술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그냥 문명에 대한 부적응자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원하는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현대 문명의 호모 사케르가 되어 버렸다.

기득권의 무기 - 호모 사케르화(化)

과거 무고한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대중들에게 던져졌다.
이는 종교 권력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마녀'라는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대중들이 마녀 사냥에 열을 올리는 만큼 종교 권력은 강화되었고 견제는 약화되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대중들의 자각과 연대에 의해 발전해 왔다.
그래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고 대중이 연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보도연맹, 빨갱이로 낙인찍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국민이되 국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성소수자, 장애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대중이 호모 사케르 사냥에 열중할수록 어떤 이들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최근 한국에서 본 대표적인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면 전직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이 떠오른다. 
백번 양보해서 공직자 당사자는 그렇다고 쳐도 공직과 관련 없는 한 젊은 여성의 사생활을 낱낱이 드러내는 방식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잔인했다.
언론들은 늦은 밤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민감한 개인정보인 학생생활기록부까지 공개했다.
당시 온 국민이 그 여성의 내신 등급과 영어 성적을 알게 되었다.

공격하는 자들은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공직자와 가족을 호모 사케르화(化)하여 대중 앞에 내던진 것이다.
호모 사케르, 즉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짓밟고 죽여도 괜찮으니 마음껏 돌을 던지라고 대중들을 부추기는 것이다.
기득권이 그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요인을 제거하는 오래된 방법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신문사 사장의 자녀 특혜 채용이 드러났다.
이는 앞서 말한 전직 장관과 유사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분노에 차 공정과 정의를 외치며 대중들에게 조리돌림을 부추기던 이들은 모두 침묵한다.
음식 배달원을 둘러싸고 메뉴가 뭐였냐고 폭포수같이 질문을 던지던 이들이 지금은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
누구를 호모 사케르로 만들 건지 정하고, 또 만들 수 있는 이들이 이 사회의 진짜 권력자들이다.

르네상스, 인간, 그리고 우리...

호모 사케르는 정치 사회뿐 아니라 기술과 자본의 발전 어느 곳에나 스며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의 삶을 발전시킨다고 하지만 정작 노인들이 햄버거 조차 마음대로 주문하지 못하게 하는 기술의 발전 방향이 정말 옳은지 생각해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와 스크린 도어에 끼여 스러져간 젊은 죽음에 대해 과연 자본과 사회구조는 책임이 없는지 물어봐야 한다.
사회 진출의 기회조차 제대로 잡기 어려운 젊은이들이 정말 아픈 만큼 어른이 되는 게 맞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올라가 삼복더위를 버티며 농성하는 사람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우리의 무관심이 계속된다면 호모 사케르가 되어 대중 앞에 내던져지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내 가족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보다 연대가 필요하다.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얘기하다가 너무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든다.
피렌체는 인간 본성의 재발견이라는 르네상스의 발현지이다.
그리고 코로나 시국이 지나가면 수많은 이들이 그 아름다움을 다시 찾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르네상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건축물과 예술품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라고 믿는다.
그래서 햄버거 주문을 위해 헤매던 피렌체의 노부부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둘째, 자기 사명을 목숨 걸고 실천한 사람

​1:18-19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18.  So the king of Egypt called for the midwives and said to them, “Why have you done this thing, and saved the male children alive?”
19. And the midwives said to Pharaoh, “Because the Hebrew women are not like the Egyptian women; for they are lively and give birth before the midwives come to them.”

​그러나 그들은 바로가 내리는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들은 지혜로운 변명으로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고 위기를 넘기고 목숨을 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살렸던 것입니다.

​바로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사람들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압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해보면 바로가 진정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린 것 입니다.
진정 강한 것은 산파들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고(20절), 산파들은 흥왕했습니다(21절).

​바로가 두려워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지 않았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번성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좋은 일이지만, 바로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삭이 농사를 지어서 백배 결실을 얻었을 때, 이것은 이삭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이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내칩니다.
그런데 바로는 동일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기 위해서 애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번성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는 것, 둘 다 바로에게는 감당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 중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본연의 임무인 살리는 일을 선택합니다.
그들이 아이들을 죽인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산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은 그들에게 큰 축복으로 주어집니다.

​1:20-21.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0. Therefore God dealt well with the midwives, and the people multiplied and grew very mighty.
21. And so it was, because the midwives feared God, that He provided households for them.

셋째, 십브라와 부아를 통해서 모세가 태어났다

​바른 생각과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고,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태어나게 됩니다.
놀라운 일 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사람을 요구하고 찾습니다.
오늘 우리는 십브라와 부아와 같은 사람으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바른 생각과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생명을 살립니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생각, 바른 믿음을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그것을 지킨다면, 우리가 나라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립니다. 우리를 통해 내일의 지도자 모세가 태어납니다.

​1: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So Pharaoh commanded all his people, saying, “Every son who is born you shall cast into the river, and every daughter you shall save alive.”

​"나일 강"과 관련이 있는 모세가 탄생하게 됩니다.
출 2:10에 가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탄생하게 됩니다.
"모세" 라는 이름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지다"라는 말입니다.

​십브라와 부아, 진정 위대한 여인들입니다.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그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살고,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가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 백성들은 번성하고 강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은 흥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기도

1. 이다니엘 뇌 수술을 받고 싶다
2. 역사의 흐름을 진단하라(자유민주주의 : 조선인민민주주의)


모세의 가족


모세의 가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모세의 생애를 조명해본다.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

<모세의 부모>, 러시아의 화가 이삭 아스크나지(Isaak Asknaziy) 作.

모세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레위의 후손들로, 아버지는 아므람(Amram), 어머니는 요게벳(Jochebed)이다(출애굽기 2:1). 아므람과 요게벳은 아론과 미리암, 모세를 낳았다. 성경은 아므람이 아버지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전하면서 아므람은 고핫(그핫)의 아들이며 요게벳은 레위의 딸이라고 설명한다(출애굽기 6:18~20, 민수기 26:58~59).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이 실제 고핫의 아들이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레위의 딸이라면 연대적인 측면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고핫은 야곱의 손자이자 레위의 아들이고 레위는 야곱의 아들로, 고핫과 레위는 야곱과 함께 요셉이 이집트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에 이집트로 이주했고,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때는 그로부터 약 400년이 흐른 후다(창세기 46:8~11, 출애굽기 12:40~41). 400년 동안 야곱–레위–고핫–아므람–모세 5대만 이어졌을 리 만무하다.

영어성경에서 Son으로, 한글성경에서 아들로 번역되기도 한 히브리어 בֵּן(ben)은 아들뿐 아니라 자손, 후손, 후예, 족속 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개역한글 성경의 민수기 26장 58절 “고핫은 아므람을 낳았으며”라는 부분을 NIV 영어성경에는 “Kohath was the forefather of Amram”, 고핫은 아므람의 조상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다시 말해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은 고핫의 아들이 아닌 후손인 것이다. 59절에는 요게벳에 대해 소개하며 ‘a descendant of Levi’, 즉 레위의 후손으로 기술하고 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도 실제 레위의 딸이 아니라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의 양모, 이집트 공주

<모세의 발견>, 영국의 화가 로렌스 알마타데마(Sir Lawrence Alma-Tadema) 作.

모세는 어릴 적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파라오의 딸이자 공주에게 입양되었다. 모세가 태어날 당시 이집트 파라오는 점점 강성해지는 이스라엘 민족(히브리인)을 두려워하여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히브리인의 사내아이는 다 죽이라고 명했다. 그로 인해 모세는 죽을 운명이었으나 어머니 요게벳이 아이를 숨겨 석 달 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아이를 숨길 수 없게 되자 요게벳은 갈대 상자를 구해 역청과 송진을 칠한 후 아이를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때마침 목욕하러 나온 파라오의 딸이 아이를 발견하였고, 요게벳의 딸 미리암의 기지로 요게벳이 유모로서 친아들 모세를 키우게 된다.

모세가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이집트 공주에게 인도되었고, 공주는 그를 양아들로 삼고 ‘모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집트 통치자 파라오의 딸이자 공주가 모세의 양어머니가 된 것인데, 그녀에 대해서는 성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집트 공주를 통해 모세는 이집트 왕실에서 왕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모세의 형, 아론

<파라오 앞에 나아간 모세와 아론>, 프랑스의 화가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作.

모세의 형 아론(Aaron)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불렀을 때 혀가 둔했던 모세의 대변인이 되어주었다(출애굽기 4:10~16). 아론은 모세가 파라오를 찾아갔을 때도 동행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 광야 생활하는 40년간 모세를 도와 그들을 지도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치를 때는 훌과 함께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세의 팔을 지지하여 붙들어주어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아론은 백성들로부터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는 금송아지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백성들을 보고 대노하여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렸다.

성막이 완성된 후 아론은 레위 지파로서 최초의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직분을 수행했다.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그들을 비방했을 때 아론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아 가나안에 들어갈 특권을 잃었다. 이후 호르산에서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준 후 죽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

미리암(Miriam)은 모세의 누이로서,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살리기 위해 갈대 상자에 담아 강가에 놓아두었을 때 함께했다. 미리암은 아기 모세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다가 파라오의 딸이 갈대 상자 속 아기를 발견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유모로 자신의 어머니 요게벳을 소개해주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구약성경 미가서는 미리암에 대해 모세,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한 지도자로 설명하고 있다(미가 6:4). 미리암은 이집트를 나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여인들을 지휘하며 뛰어난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선지자 미리암의 노래>, 이탈리아의 화가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作.

광야 생활 동안 모세가 구스 출신의 이방인을 아내로 얻은 일로 미리암은 아론과 함께 모세를 비난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지자를 비난한 죄로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
미리암의 이러한 행위는 모세의 권위에 대항하는 질투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민수기 12:1).
모세가 하나님께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간곡하게 원하여 칠일 동안 진 밖으로 격리되었다. 미리암은 광야 생활이 끝나는 정월에 가데스에서 죽었다(민수기 20:1).

모세의 장인, 이드로(르우엘)

이드로(Jethro)는 모세의 장인이다.
르우엘(Reuel)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 시절에 이집트 감독관을 죽인 일로 파라오의 눈을 피해 미디안으로 도피했을 때, 그곳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딸들을 우연히 도와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이드로는 모세와 자신의 딸 십보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선했다.

모세가 이드로를 도와 양들을 돌보던 중 시내산(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장인 이드로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형제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오겠다는 요청을 했을 때, 이드로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이드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출애굽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부근에 머물고 있을 때, 딸 십보라와 손자들을 데리고 그곳을 방문했다.

<모세에게 조언하는 이드로>, 네덜란드의 화가 얀 헤르츠 판 브론코르스트(Jan Gerritsz van Bronckhorst) 作.

이드로는 당시 모세가 혼자서 하루 종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재판을 맡아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모세에게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들고 벅찬 일이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위주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대신 송사를 재판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모세는 이드로의 말을 받아들여 유능한 사람을 뽑아 어려운 사건은 직접 재판하고 작은 사건들은 그들이 재판하게 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

모세의 아내 십보라(Zipporah)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이다.
십보라는 아버지 이드로의 주선으로 모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을 때, 십보라는 모세를 따라 두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다.

성경은 당시 여행길에서 발생했던 불가사의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집트로 향하던 중 숙소에 머물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
그러자 십보라가 부싯돌 칼을 가지고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제야 비로소 모세를 살려주셨다.

십보라가 모세를 가리켜 ‘피(Blood) 남편’이라고 한 이유는 할례 때문이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져온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의 표징으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남자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반드시 행해야 할 중요한 율례였다(창세기 17:10~14).

<모세의 아들의 할례>, 네덜란드의 화가 코르넬리스 호스테인(Cornelis Holsteyn) 作.

모세의 아들들, 게르솜과 엘리에셀

모세는 아내 십보라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 게르솜(Gershom)과 엘리에셀(Eliezer)을 낳았다.
게르솜은 모세의 장자로 ‘나그네 됨’, ‘객’이라는 뜻이다.
모세가 ”낯선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며 지은 것이고, 엘레에셀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도우셔서 파라오의 칼에서 나를 구원하였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모세의 가족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사단은 파라오를 통해 모세를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어머니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을 통해 모세를 파라오의 궁전으로 피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택하셨으나 모세가 언변의 부족함을 핑계하자 그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세우시고 함께 이스라엘을 통솔하게 하셨다.
그리고 누이 미리암을 통해 선지자를 비난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한편, 모세가 백성들의 사사로운 재판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고 장인 이드로를 통해 모세의 일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를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언약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레위 지파 출신인 모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은 훗날 다윗 시대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레위 자손들의 선조가 되었다(역대상 23:14~24).
모세의 큰아들 게르솜의 자손은 다윗성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일 때 언약궤를 메는 일을 담당했다(역대상 15:1~15).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에 대하여(출애굽기 6:14-20)

14 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15 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니 이들은 시므온의 가족이요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 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쓰실 때 중요한 연대표를 알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셨다.
바로 위 내용 역시 엄청난 배려이다.

출애굽기 12:40- 41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도라


이 사건은 야곱과 함께 70명의 가족이 애굽으로 건너와서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는 때까지의 기간을 정하여 준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시간적인 기둥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연대를 계속 확인해 나갈 수 있다.
위 출애굽기 6장 본문은 레위 지파가 어떻게 모세와 아론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를 소개하기 위해 12지파 중에 첫째 둘째 셋째를 소개한 후에 셋째에서 아론과 모세를 끄집어낸다.
문장 구조는 르우벤의 가족, 시므온의 가족, 그리고 레위의 가족이 소개된다.
레위의 가족으로는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가 있다. 레위는 137세에 죽는다.
게르손의 아들들은 립니와 시므이요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다. 고핫은 130세에 죽는다.
그리고 므라리의 아들들로 마흘리와 무시가 있고, 그들은 족보대로 레위의 가족이다.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 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이렇게 세 족장의 가족에 대한 소개가 끝난 후에 모세와 아론으로 건너 뛴다.
그 사이에는 얼마나 긴 기간이 있는지 우리가 계산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모세의 아버지 이름은 아므람이요, 어머니는 요게벳이다.
그러나 요게벳은 아므람의 고모이다. 따라서 근친 상간이라 할 수 있다.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은 137세까지 살았다.
이때 아므람은 고핫의 아들 아므람과 다른 아므람이다. 동명이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고핫의 아들 아므람은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이어진다. 이 동명이인의 아므람 사이에는 구속사에 기록할 만한 특이한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문제는 민수기 26장 59절인데,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애굽에서 레위에게서 난 자라 그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을 낳았고”
이 내용은 레위의 친딸이 요게벳이라는 뜻이 아니라 레위의 후손으로서의 요게벳이고, 애굽에서 태어난 여인으로서 레위 지파에 속한 자임을 의미한다.
New Living Translation 은 이러한 의미로 제대로 번역하였다.
NLT Numbers 26:59 and Amram's wife was named Jochebed. She also was a descendant of Levi, born among the Levites in the land of Egypt. Amram and Jochebed became the parents of Aaron, Moses, and their sister, Miriam.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해석은 동명 이인의 두 아므람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출애굽기 1장 1절에서 모세의 출생에 대한 묘사이다.
[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더라,
](출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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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일 / 02-15-2024
출애굽기 2장



​출애굽기 2:24-25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그 고통 소리(5009)
네아크(neʼâqâh)  נְאָקָה 스트롱번호 5009

1. 부르짖음.  2. 복수 연계형. 
발음 [ neʼâqâh )
어원 / 500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권념(眷念)(3045)  야다(yâdaʽיָדַע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부르짖다(2199) 자아크(zâʽaq)  זָעַק

1. 소리 지르다.  2. 니팔형 : 소집하다. 3. 히필형
발음 [ zâʽaq ]
구약 성경 / 71회 사용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23-25, 3:7-10

계 7:13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이 있는데 바로 여러분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로마니아 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고난과 환난은 버림과 저주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의 표시이며 훈련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쓸모없는 진흙 덩이를 가지고 쓸모 있는 질그릇을 만드시는데 하나님께서 질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긴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한국교회가 범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도 따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고통 소리도 들으셨고 야곱의 아내 레아의 괴로움도 권념하셨고 엘가나의 아내 한나의 고통 소리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이렇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시 118:5).
하나님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권념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 소리를 들으시고 내려와서 그들을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도록 섭리하셨다.

고통은 어떤 때는 우리의 죄 값으로 주어지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방편으로 주어집니다. 고통이 죄 값으로 주어지는 때에도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창22: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되었고 그리고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일어나서 크게 번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1:8-11).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학대에 못 이겨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 소리를 내며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2:23).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까운 원인으로는 바로의 악함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궁극적인 원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현실적인 원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정착하는 동안 애굽의 문화와 문명을 좋아하고 그들의 우상을 따른 죄 값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 값일 수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은 개인이나 민족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룬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수르와 애굽에 노예로 잡혀가서 70여년 동안 고통을 당하게 하셨는데 바로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게 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은 저주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축복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강변의 새벽 성도들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지난 일년 동안 저희 가족들을 슬픔과 아픔 중에 위로하시고 힘 주시면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금요일 새벽에 드린 감사입니다. “고통의 순간들에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끝없는 사랑으로 사랑의 나무가 자라게 하여주신 하나님 감사 드립니다.” 토요일 새벽에 드린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사역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통 중에 부르짖게 하셨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출 2:23).
부르짖으며 고통 소리를 내는 것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은혜와 사랑입니다.
어린 아기가 울지 못하면 큰 일입니다.
병든 자가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면 큰 일입니다.
부르짖음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지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부르짖으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들을 향해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부르짖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고 자기를 향한 진정한 겸손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 중에서 부르짖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모하면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리에서 부르짖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 집회 때마다 읽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박윤선 목사님이 자주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김치선 목사님이 항상 읽으시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고통 중에서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도 들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5).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출 22:23).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 22:27).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시 81:7).
하나님은 하나님의 분부를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의 부르짖음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1,2).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의 부르짖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반드시 하여야 할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는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는 일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부르짖을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듣고 내려와서 저들을 구원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출 3:7,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가장 뚜렷한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구름으로 바람으로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내려오셨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직접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육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4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 39).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하나님은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육의 사건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계속되면서 발전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모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의 역사도 반복되고 그들의 부르짖음도 반복되고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도 반복됩니다.
그러면서 인류의 역사는 천국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들이나 우리 민족이나 세계에 고난과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들이 모두 이 세상이 낙관적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큰 환난이 더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마 25:21).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고통하는 때가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딤후 3:1).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큰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보다 순수하게 만들고 우리들을 보다 겸손하게 만들고 우리들로 하여금 보다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하게 만들고 그리고 우리들을 구원의 도구들로 만드는 훈련의 방편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고통 소리를 내면서 부르짖을 것 뿐입니다. 소경이 고통 중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들도 부르짖으면 됩니다.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9:27).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고통 중에서 예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들도 부르짖으면 됩니다.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나이다”(눅9:38).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로 내려와서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가 고통 중에 있던 저의 아들 철원이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 보였던 것과 비슷하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은 이스라엘 나라의 땅도 아니고 북미 대륙의 미국 땅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땅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자인 벧엘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고통 중에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신음 중에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를 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의 고통 중에서 주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천국을 소유하시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뜰과 주의 집에 거하는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고통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노하심, 하나님의 기뻐하심 등이 이런 유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어떤 몸을 생각해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권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행위가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모세를 죽이려던 왕이 죽었습니다.
왕이 죽은 후에 애굽에 거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고통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 왕이 죽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끝나기는커녕 고역이 더 심해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첩첩산중입니다.
원래 악은 절대 쇠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해집니다.

바울은 말세에 대한 증언 가운데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합니다(딤후 3:13).
이런 모든 정황의 변화에서 우리는 모세의 소명의 배경을 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끝까지 연단하십니다.
불로 쇠를 연단할 때 조금 뜨겁다고 끄집어내면 아무 것도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연단이 될 때까지 두고 보십니다.
못들은 척 하십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힘 아래서 고역을 당합니다.
때가 찰 때까지는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시기만 합니다.

첫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 

'부르짖다'는 말은 히브리말의 자아크라는 말입니다.
막다른 상황에서 부딪쳐 외치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하나님은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을 인하여 부르짖었다는 것은 이 전에는 부르짖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비로소 우상적 외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는데 40년이 걸렸다.
왜 이전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습니까?
조금 힘들 때는 자기 힘으로 극복하고 참아보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전할 때에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렘 33: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출 22:23)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들어주심에 대해 간증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민 20:16).

사사기는 온통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습니다. 그들은 이방 왕에게 고통을 당합니다. 그들의 회개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과 백성들의 숨바꼭질이 계속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고통의 대상이었습니다.
블레셋이 그들을 괴롭힐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사무엘상 7:8에도 이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시편에는 "저희가 주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라는 말씀이 수없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은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 들립니다(약 5:4).

   지금도 억울한 울음소리, 고통 당하는 신음을 하나님은 다 들으십니다. 우리의 고통 당하는 자의 소리, 억울한 울음소리, 눌린 자의 신음소리에 대하여 민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리에 유난히 귀가 밝으십니다.

둘째,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들으시고'란 말은 솨마입니다. 이 말은 '주의 깊게 경청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계십니다.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상달되지 않는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다가 마는 소리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테레사 수녀의 '아름다운 선물'이란 책에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다른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침묵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들으십니다. 침묵 안에서 그분은 우리 영혼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침묵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특혜를 지닙니다"라고 합니다.

   경주(race)라는 말은 헬라어 아곤(agon)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에서 고통(agony)이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달리기는 가벼운 조깅이 아니라 녹초가 되도록 힘들며 때로는 심한 고통이 따르는 경주입니다.

   고난은 힘들어 보이지만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71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만큼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한센병환자는 신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 병의 특수한 비극입니다. 사실상 한센병환자의 신체적 기형은 그들이 고통 느끼지 못하기 때문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내(patience)라는 말은 '고통 당하다'는 뜻인 'patior'라는 고어에서 나왔다. 인내를 배운다는 것은 어떤 고생에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긍휼이란 헬라어의 스프랭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에서 나온 말입니다. 의학에서 내장학(splanchnology)이란 이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고통을 창자로부터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계십니다.

   옛날 진나라의 환공이 삼협을 배타고 갔습니다. 그의 하인 한 사람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배를 탔습니다. 이 원숭이 새끼의 어미는 이를 알고 뱃길을 따라 백리길을 울부짖으며 뒤쫓아 왔다고 합니다. 그 어미 원숭이는 끝내 뱃전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배를 갈라보았더니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고통을 아버지 하나님은 단장의 아픔으로 보고 듣고 동참하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백성을 권념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언약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고, 그 언약을 충실히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이삭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 26:24).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십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언약은 베리트란 단어입니다.
'자르다' 또는 '먹는다'는 뜻입니다.
언약을 세울 때 희생동물을 잘라 두 줄로 두고 그 사이를 언약자가 지나가는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언약을 어기면 짐승처럼 자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언약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더불어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은 파기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은 새 언약에서 완성됩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만찬 때에 "너희를 위한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만 사람들은 잊어버립니다.
노아시대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5).
하나님은 애굽에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5).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십니다(시 106:45).
그리고 사람들은 언약을 잊기 쉽기 때문에 잊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열왕기하 17:38에는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잊고 사는 백성을 싫어하십니다.
언약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고 권념하셨습니다.
권념이란 야다라는 말로서 '알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이미 깊이 알고 계신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이 그들을 용납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 시대입니다(God for us).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시대입니다(God with us).
그리고 성령시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시대입니다(God in us).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음을 아시고 고통하는 백성들을 위하십니다. 

폴 브랜드 박사(Dr. Paul Brand)는 한센병에 대한 권위자로 상당히 이름난 사람입니다.
그는 루이지애나 주의 카빌(Carvill)에 있는 한센병환자 재활원의 원장으로, 다음과 같은 체험으로 놀란 일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출장 차 미국을 떠나 브랜드 박사는 영국에 갔습니다.
그는 영국의 몇 군데에서 일을 본 후에 여러 시간의 기차여행 끝에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그 날 밤 그는 호텔에서 잠자리에 들려고 신발을 벗고 양말 한 짝을 벗었는데, 발뒤꿈치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별것 아니겠으나, 인도에서 수많은 한센병환자를 수술한 경험이 있는 세계적인 권위의 한센병전문가에게는 순간적으로 심각한 의심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기계적으로 일어나서 핀을 찾았습니다.
자리에 앉은 브랜드 박사는 핀으로 발의 복숭아 뼈 밑부분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핀을 더 깊이 찔렀습니다.
이제 찔린 부분에서는 피가 솟아났지만 그래도 감각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한센병에 감염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밤이 새도록 브랜드 박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센병환자로 살아가야 할 자기의 두려운 인생을 머리에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버림받은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의료진으로부터 백안시되는 입장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고통의 밤이 지나고 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아침과 같은 희망이 이제 자기 인생에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핀으로 어제 찔렀던 복숭아 뼈 밑 부분을 꼭 눌러서 쑤셨습니다.
순간 그는 기절할 듯이 아파서 고함을 쳤습니다.
그 아픔, 그 고통은 정말로 축복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가 깨달은 것은, 어제 장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앉아 있는 동안에, 신경의 한 부분이 눌려서 발이 마비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로 브랜드 박사는 실수로 손가락을 칼에 베었을 때도 그 고통에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발을 잘못 디뎌서 발목이 아파 펄쩍펄쩍 뛰면서도 그 아픔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버섯을 잘못 먹고 온 몸을 뒤틀면서 토하는 심한 고통을 당할 때도, 그는 "하나님, 나의 고통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지금 어떤 고통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듣지 않으시는 듯 보입니까?
하나님은 듣고 계십니다.
내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권념하시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고통들이 하나님이 들으시고 만나는 교량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통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고통은 감사의 조건입니다.
고통은 축복의 가면입니다.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יָדַע 스트롱번호 3045

1. 보다.  2. 지각하다. 3. 사사기 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고통이 올 때 대처하는 세 가지 반응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인생에 대하여 말하기를

“인생 자체가 고통이다.
많이 먹어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먹지 말아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결혼을 하여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요.
결혼을 하지 말아라.
그래도 불행할 것이다.
오래 산 사람보다 짧게 산 사람이 행복하고,
짧게 산 사람보다 낳아서 금방 죽은 사람이 행복하고,
금방 죽은 사람보다는 낳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영국에 유명한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앞의 비석에는 “최대의 행복 자” 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어느 순례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최대의 행복자였는가 궁금하여 파보았더니 빈무덤이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최대의 행복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에는 고통과 한숨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고대광실 높고 넓은 집에 사는 사람에게도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사글세 방에서 가난과 싸우며 사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2층집 창문에서 젊은 여인이 밖을 내려다보며 리어카에 검은 연탄을 싣고 가는 젊은 부부를 보면서. “우리 부부도 저들처럼 건강하고 화목했으면 좋겠다.”라고 부러워 하고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배달하던 가난한 젊은 여인은 “나는 어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이렇게 고된 일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는가.” 하고 부러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시련과 고통의 역경을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역경이 닥치고 고통이 오면 대개는 세가지 반응을 나타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고 합니다.

1. 냉소적인 태도
인간은 별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회의적인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체념하는 태도
인간은 그저 그런 존재이니 먹고 마시고 되는대로 살아가자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자포자기 하고 허무주의 속에 빠져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태도
고통과 역경을 당해도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세로 대처해 나가서 끝내는 승리하게 되는 위대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꼭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위대한 믿음을 소유했으며 승리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의 책상 위에 여러개의 누에고치가 놓여있었다.
그 누에고치 가운데 이미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고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누에고치들를 보고 있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에는 신기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여인은 그 작은 고치의 구멍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저런 큰 누에나방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화두가 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 작은 구멍으로는 도저히 누에나방이 나올 수가 없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한 마리의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만들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이 너무 작아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데 누에나방은 긴 시간을 통해 갖은 몸부림을 치며 용케도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지켜보다가 왠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누에나방이 세상에 편하게 나오도록 도와주기 위해 가위로 누에고치의 구멍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다른 누에나방은 날개가 찢기는 등 갖은 고통을 당하며 누에고치에서 겨우 빠져나오는데 반해, 가위로 크게 구멍을 내준 고치에서 나온 나방은 아무런 상처 없이 쉽게 나와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였다.

이를 보고 여인은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잠시 뒤에 벌어진 상황은 전혀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작은 구멍을 통해 힘들게 비집고 겨우 세상으로 나온 나방은 한 마리 한 마리씩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데, 가위로 구멍을 뚫어준 고치에서 쉽게 나온 나방은 날개를 푸드득거리다가 날지 못하고 그만 비실비실 책상위를 돌더니 지쳐서 잠잠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은 누에나방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며 애쓰는 동안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골라 마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날게 되지만, 그 과정을 겪지 않고 나온 나방은 순간적으로 편하게 나오긴 했지만 나를수가 없다는 이치를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내용은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

어느 부자집의 가정부로 살아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항상 웃으며 걱정이 없는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독실한 가정부는 늘 경제적인 어려움, 자녀들의 건강, 사건과 사고가 그 주위에서 끊이지 않았지요.
하루는 주인 부자의 부인이 가정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고 좋은데
왜 너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렇게 근심 걱정 사건 사고가 떠나지 않느냐?
그러자 가정부가 이렇게 되묻습니다.
만일 사냥군이 사냥을 하는데 산토끼 두 마리를 쫓고 있는데 한 마리를 총에 맞아 죽었고
또 다른 한마리는 다리에 총을 맞고 도망을 치고 있다면 어느 토끼를 쫓아갈까요?
그러자 부인은 그야 당연히 다리를 다친 토끼를 쫓아가야지.....
바로 그겁니다.
죽은 영은 마귀가 시험하려고 달려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영은 마귀가 잡아 먹으려고 늘 쫓아다닙니다.

죽은 자는 건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는 계속 쫓아다닙니다.


첫째, 죄로 인한 고난 - 회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의 해결 방법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의 유혹에 의한 고난 - 말씀과 기도 

마귀는 때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들을 억압하고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두어서 믿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고로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귀가 주는 고통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연단에 의한 고난 - 인내 

이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더 큰 믿음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더욱 큰 일군을 삼으려는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어서 연단의 과정으로 임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넷째, 어리석은 판단과 실수로 인한 고난 - 반성과 회개 

이 모든 고난의 해결 방법은 모두가 한 가지 즉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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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일 / 02-17-2024(토)
출애굽기 3장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셨을까?

성경에는 두 명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출애굽의 영웅 모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나안 정복 장군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4-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고자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로 부르셨으면 무협지 소설처럼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절세의 비법을 전수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이러시지 않고 도리어 모세에게 있는 신발부터 벗으라고 합니다.

또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있는 중차대한 시점인데 그에게 군사전략이라든가 무기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에게도 신부터 벗으라고 하십니다. 

신(shoes, 靴) - 이중적 의미

역사적으로 중근동에서는 종(노예)들은 신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발의 유무는 신분의 표식이기도 하였습니다.
신발을 신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신발은 또한 신분의 등급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신발에 대하여 일견,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듯한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제자들 보고 신을 가지지 말라고 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신만 가지라고 하십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 이니라”(마 10:7-10)

반면, 마가복음 6장에는 신을 신으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막 6:7-9)

즉, 마태복음에서는 ‘신을 가지지 말라’ 라고 하고 있고, 마가복음에서는 ‘신만 신고’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서로 다른 원어를 같은 단어로 번역해 놓은데 서 생기는 어려움입니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신’(靴)은 ‘휘포데아’ 로서 고급신발을 의미하고,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신’(靴)은 ‘오늘날의 ‘샌들’의 유래가 된 ‘산달리온’ 즉, 샌들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신발종류가 당시도 다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원래는 ‘은혜의 아버지’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지만)에서도 둘째 아들이 돌아오지 종처럼 신발 없이 살아온 아들에게 신발을 먼저 신겨주고 있습니다.
즉, 자기 아들은 종이 아니며 자유자라 이겁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1-24)

이와 같이 신발은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일정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이후 땅을 지파별로 분배했고, 땅은 사거나 팔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 없이 부모가 죽으면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방법이 신명기 25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신 25:5-10)

그리고 이 신명기서 말씀에 대한 실증적인 예가 룻기에 나옵니다.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을 긍휼히 여겨서 그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룻과 결혼하는 사람은 나오미의 밭을 사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유산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결국 내 돈을 들여 밭을 사지만 내 것이 되지 않는 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안 보아스가 성읍장로들을 초청하고 이것을 논의에 붙이자 제 1순위로 기업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이 처음에는 무르려 하다가 자신에게 물질적으로 손해만 되니까 결국 포기하고 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1순위로 기업무를 책임이 있는 사람이 신을 벗는 장면이 나옵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룻 4:1-8)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신을 벗는 다는 것
첫째, 종의 표시
둘째, 책임을 전가
자유자가 아니요 종이라는 표시인 동시에 신을 벗는다는 것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표시이었습니다.
신명기에는 ‘신 벗기운자의 집’이라고 불려지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침 뱉음’을 당하기도 한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제에서 끌어내어 가나안 땅으로 끌고 가야 하는 사명을 받고 있고, 여호수아는 철옹의 성 여리고를 함락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쉽지 않은 사역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들 보고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무협소설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쳐 주듯, 두 사람에게 무한한 능력을 부어 주고, 탁월한 참모들을 붙여주고, 기가 막힌 작전을 주셔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발바닥을 보호해 주는 신부터 벗으라고 하니 이상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같은 경우에는 여리고성 함락작전을 구상하느라고 머리가 복잡하고 잠도 잘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한 천사가 칼을 들고 나타나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자란 후에 사십이 되었을 때(행 7:23), 애굽사람 하나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 한명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일이 발각되어 졸지에 살인자로 지명수배 되는 바람에 미디안 광야까지 국제적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처가살이와 양떼 치는 일을 장장 사십년을 하였습니다. 
한 인생에 있어서 사십년은 결코 적은 세월이 아닙니다.
모세로서는 참 이해가 안 가는 시련이고 참기 힘든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가 80살이 되었을 때, 이제는 늙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여길 나이에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끄집어내라" 하신 것입니다.

이때, 모세는 할 말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40년 전에 제가 민족을 돌아보려고 할 때는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다 늙은 나이인데, 더구나 국제적 지명수배자요, 처가살이 하는, 배경도 군사도 없는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십니까?”
“일을 맡기시려면 힘 좋은 젊을 때 하시지 왜 지금 하십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 4장에는 모세가 하지 못하겠다고 변명하는 모습이 구절구절 나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보낸 모세의 40년은 한(恨)많은 세월이고, 자신에게 분통터지는 나날이었으며, 자신의 덧없는 인생을 바라보며 ‘내 인생이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를 수도 없이 자조(自嘲)하며 속절없이 보낸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인가? 를 수도 없이 되뇐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다 소진할 때 까지 기다리고 계셨으며 ‘모세의 열심과 열정’을 다 태워 없애버리도록 40년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긍휼과 애통은 꺼지지 않는 불이 되어 사라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이 되어 계속 타오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네 능력과 네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나의 종이 되어 순종하기만 하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은 네 책임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내가 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신을 벗으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합니다.
소위 ‘일’을 하려 합니다.
그것이 본분이고 충성인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일과 업적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100% 신뢰하고 그 분에게 항복하며 그분을 따를 수 있는" 본질적인 내면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환경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변하는 것은 원하지 않고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다보니 많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신앙의 영웅을 동경합니다.
스스로 신앙의 영웅이 되고 싶어 합니다.
성경을 볼 때에도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인물을 봅니다.

​기독신앙의 핵심은 우리로 말미암아서는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한 영역들이 눈곱만큼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세의 힘으로는 이스라엘을 돌 볼(행 7:23)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데 40년이 걸렸던 것입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이리하여 신을 벗은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꺼내는 귀한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모세의 경건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었고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소명을 받을 때 여러차례 못하겠다고 발을 빼려 했고(출 3:11, 출 4:1, 출 4:10, 출 4:13), 애굽 땅으로 갈 때도 장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려 간다고 하지 못하고 "애굽에 있는 형제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가겠다"(출 4:18) 고 둘러댈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적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하여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퍼 붓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그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에, 앞에는 홍해이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그러자 열가지 재앙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열심을 이해하지 못한(믿음이 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모세에게 원망하며 대듭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0-12)

그러자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 모세는 이렇게 담대히 말을 합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없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100% 신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모세는 그 신앙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환경은 동일한데 반응은 다릅니다. 이것이 믿음의 차이입니다.

오늘날도 한 가족 중에서, 또는 한 교회 구성원 중에서 똑 같은 문제와 고난 앞에서 반응이 서로 다른 것은 이러한 믿음의 차이에서 비롯 됩니다. 한 부류는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한 부류는 하나님을 신뢰 합니다. 귀하는 어느 쪽입니까?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출 24:13, 출 33:11, 민 11:28)이 되어 모세의 사역을 옆에서 쭉 - 지켜 본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고 난 뒤 가나안 정복이라는 바톤을 이어받았을 때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이때의 여호수아의 심경을 여호수아 1장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몇 차례 담대하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목도하면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가까이 오기는 했지만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을 것입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 들고 여호수아 앞에 나타나서 신을 벗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온 천사의 말의 뜻은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키는 일은 네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그 성을 함락시키겠다는 책임을 내려놓아라!”,
“이 싸움은 네 힘으로 되는 싸움도, 네가 노력해서 되는 싸움이 아니라 내 싸움이다” 하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여기서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오신 분은 단순히 여호수아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신 정도가 아니라 직접 군대 사령관이 되어서 친히 싸우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중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입 다물고 성을 돈 것 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아주 위험한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래도 얼마만큼은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항상 신앙의 실패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결과, 어떤 생각들을 하는가 하면, 우리 교회에 좀 더 사회적으로 이름이 있고 돈도 많고, 사회 경제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 오면 교회가 더 좋고, 더 유명해지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치고 시끄럽지 않고 다툼이 없는 교회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면 시끄럽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인생의 많은 경우에 홍해 같은 문제 앞에서, 혹은 여리고성과 같은 캄캄한 일 앞에서 넋을 잃고 있기도 하고 코가 석자나 빠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내 인생을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 하나도 책임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다시는 거짓말 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돌아서면 금방 거짓말하는 존재들이고, 오늘 무엇을 결심했다가 내일 하루도 지키지 못하는 인생들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해 주심을 믿는 것, 이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나를 신뢰하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열심과 열정은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불태우는 거짓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창수(漲水)가 나면 무너짐이 심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감사가 없는 것은 주어진 환경이 자기 수준에 못 미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념과 갈등과 내려놓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형편 없는 나락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리하여 자기가 누구인지를 발견한 사람들은, 지위와 학벌과 재물로 인해서 대단한 존재로 여겼던 자신이 깊은 수렁으로 인하여 형편없는 존재임을 안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보다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감사가 더 많은 이유입니다.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종으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은 하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충만한 것으로 채우고, 내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입니다.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는 전적인 사랑과 믿음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롬8:32)이시며, 자식은 그 아버지를 신뢰 하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이 본질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를 신뢰하는 어린아이는 적어도 끼니때가 되면 육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굶기지 않을 것을 압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와 같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홍해 같은 문제 앞에서, 여리고 성과 같은 큰 일 앞에서 모세와 같고 여호수아와 같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 수많은 어려움이 닥쳐도 놀랄 일이 없으며(롬5:8), 잘 되는 일 앞에서 자랑하거나 교만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신발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안 사람은 벗을 것이고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은 못 벗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를 소진하는 세월, 용쓰는 세월을 - 4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세월을 -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이에 따른 호칭
- 해제,지학,약관,이립,불혹,지천명,이순,고희,팔순,졸수,백수

♠ 해제(孩提) : (2∼3세) 어린 아이(兒提)
♠ 지학(志學) (15세) : 15세가 되어야 학문에 뜻을 둔다는 뜻
♠ 약관(弱冠) (20세) : 남자는 스무살에 관례(冠禮)를 치루어 성인이 된다는 뜻
♠ 이립(而立) (30세) : 서른살쯤에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뜻
♠ 불혹(不惑) (40세) : 공자가40세가 되어서야 세상일에 미혹함이 없었다고 한데서 나온 말
♠ 지천명(知天命) (50세) : 쉰살에 드디어 천명을 알게 된다는 뜻
♠ 이순, 육순(耳順, 六旬) 60세) : 이순은 논어에서 나온 말로 나이 예순에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원만하여 무슨 일이든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는 뜻이다. 60세 때의 생신인 육순(六旬)이란 열(旬)이 여섯(六)이란 말이고, 육십갑자(干支六甲)를 모두 누리는 마지막 나이
♠ 환갑, 회갑(還甲, 回甲) (61세) : 61세 때의 생신으로 60갑자를 다 지내고 다시 낳은 해의 간지가 돌아왔다는 의미
♠ 진갑(陳·進甲) 62세) : 62세 때의 생신으로 다시 60갑자가 펼쳐져 진행한다는 의미
♠ 미수(美壽) : (66세) : 66세 때의 생신이다. 현대 직장의 거개가 만 65세를 정년으로 하기 때문에 66세는 모든 사회활동이 성취되어 은퇴하는 나이이면서도 아직은 여력이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나이이므로 `美壽'라 하고, `美'자는 六十六을 뒤집어 쓰고 바로 쓴 자이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 고희·칠순·종심(古稀·七旬·從心)(70세) : 70세 때의 생신이다. 두보(杜甫)의 곡강(曲江) 시에?「술 빚은 보통 가는 곳마다 있으니 결국 인생은 기껏 살아 본들 70세는 옛날로부터 드물다.(酒債尋常行處有하니 人生七十古來稀라.) 란 승구 중 고(古)자와 희(稀) 자만을 써서 ‘고희(古稀)’란 단어를 만들어 70세로 대신 쓴 것이다.?또한 뜻대로 행하 여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데서 종심이라 하였다.
♠ 희수(喜壽) (77세) : 77세 때의 생신이다. 오래 살아 기쁘다는 뜻. 희(喜)자를 약자로 쓰면 七十七이 되는 데서 유래
♠ 팔순·산수(八旬·傘壽) (80세) : 80세 때의 생신이다. 산(傘)자의 약자가 팔(八)을 위에 쓰고 십(十)을 밑에 쓰는 것에서 유래
♠ 미수(米壽) (88세) : 88세 때의 생신이다. 미(米)자를 풀면 팔십팔(八十八)이 되는 것에서 유래
♠ 졸수(卒壽) (90세) : 90세 때의 생신이다. 졸(卒)의 속자(俗字)가 아홉구(九)자 밑에 열십(十)자를 사용하는데서 유래
♠ 백수(白壽) (99세) : 99세 때의 생신이다. 백(百, 100)에서 일(一)을 빼면(99세) 즉, 백자(白字)가 됨 
♠ 천수(天壽) : 병없이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면 하늘이 내려 준 나이를 다 살았다는 뜻으로 천수라 한다.

공자(孔子)는 일찍이<논어(論語)>“위정(爲政)”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이 글은 공자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학문의 심화된 과정을 술회한 것이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
(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적어도 공자가 살던 시대에 있어, 나이 마흔은 미혹됨이 없어 부동(不動)의 위상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20세를 약관(弱冠), 60세를 환갑(還甲), 70세를 고희(古稀),
77세를 희수(希壽), 88세를 미수(未壽)라고 한다.

15세는 지우학 공부할 시기를 정립한다하여
20세는 약관 뜻읏세운다
30세는 이립 뜻을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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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을 세우니라(출애굽기 40:17)

출애굽기 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성막이란?

4908. 성막(聖幕)(미쉬칸. mishkan) <מִשְׁכָּן>

1.  거주,  2. 굴,  3. 욥기 18:21(집)

발음 / 미쉬칸(mishkan)

어원 / 79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휘장(출 26:35), 회막(출 39:32, 민 3:7, 대상 6:32),
집(욥 18:21), 거처(시 49:11, 78:28, 사 32:18, 렘 9:19), 처소(시 132:5, 사 22:16, 겔 37:27).
[동] 계시다(시 26:8), 살다(욥 21:28).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으로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무르실 수 있는 거룩한 장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성소의 각 구조의 모양과 규격, 재료와 만드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주시며 친히 임재의 공간을 계획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성막입니다.

출애굽기 25-31장 : 성막 설계도
출애굽기 35-40장 : 성막 제작


성막은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직접 임재하시는 공간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곳입니다.

성막은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성막 주변에 지파별로 자리를 잡고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를 때 구름의 인도를 따라 이동했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떠오르는 날까지 머물렀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 : 출애굽기 40:34-38

히브리서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성막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신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에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형이자 그림자였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였습니다.

성막의 구조와 명칭

성막은 동쪽 성막문-뜰 : 번제단, 물두멍-성소-휘장-지성소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가늘게 꼰 베실 즉  흰색의 높은 세마포 휘장이 성막의 사면을 감쌌습니다.

1. 성막문

성막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10m 길이의 큰 문(막)입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여서 누구나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 했습니다.
성막의 문이 하나인 이유는 성막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10m의 길이나 되는 큰 성막문의 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면 누구라도 하나님께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막문의 구조 / 출애굽기 27:16-17

2. 번제단

성막의 문을 지나면 성막 앞쪽으로 넓은 뜰이 나옵니다.
뜰의 앞쪽에는 번제단이 있었는데, 번제단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동물을 악한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제물로 태우는 곳이었습니다. 번제단에 바칠 수 있는 동물은 수송아지, 염소, 양, 비둘기였고, 번제단의 불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셔서 제사장은 이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단을 통해 희생 제물을 받으신 이유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양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번제단의 구조 / 출애굽기 27:1-8
 

물두멍

번제단 뒤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 물두멍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가기 전과 번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 반드시 물두멍의 물로 손과 발을 씻어야 죽음을 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는 행위는 인간에게 남아있는 죄를 거룩한 물로 씻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정결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나타내며, 인간의 죄를 씻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을 상징합니다.

물두멍의 구조 / 출애굽기 30:18-20

성소

번제단과 물두멍이 놓인 뜰을 지나면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막의 천장에는 베 실과 색실로 만든 휘장 위에 염소 털로 만든 휘장을 얹고, 그 위에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막을 얹고, 그 위에 다시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막을 얹었습니다.

성소에서는 지성소로 들어가기 전 정결한 예식을 치렀습니다.
성소의 오른편에는 떡상을 놓아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진설병을 항상 놓아두도록 했고, 왼쪽에는 등잔대를 두어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성소 앞쪽에는 분향단이 놓였는데 제사장은 아침, 저녁으로 향을 피웠고 향 역시 꺼지지 않도록 관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성소 안의 기명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자 하셨는데, 떡상 위의 떡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등잔불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향단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소의 구조 / 출애굽기 25:23-40

휘장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가림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와 성소를 휘장으로 나누게 하시고, 지성소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셨습니다.
인간은 죄 많은 속성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목격할 경우에는 즉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시기 위해 지성소를 가리는 휘장을 두게 하셨습니다.

휘장의 구조 / 출애굽기 26:31-33

지성소

지성소는 히브리말로 ‘거룩함 중의 거룩함, 최고의 거룩한 곳’이라는 뜻으로 언약궤만이 놓여있는 길이, 너비, 높이가 똑같은 여섯 평 정도의 작은 방으로,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계명이 적힌 돌판을 담은 금궤입니다.
이 언약궤 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속죄소가 덮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는 곳이라는 뜻의 속죄소(贖罪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리라는 뜻에서 시은좌(施恩座)라고도 부르는데, 이 속죄소에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성소, 속죄소에 임재하실 때 성막 위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정결하게 씻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죄를 대속할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속죄소에 대속 제물의 피를 덧발랐는데 이는 대속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진 대속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지성소의 구조 / 출애굽기 25:10-22
대속의 보혈 / 히브리서 9:22

구약시대에 만들어진 성막은 놀랍게도 성막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하셨던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시작으로,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리라는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시키시려고 계획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3511


출애굽기를 마치면서 성막의 평면도를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동쪽 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앞에 번제단을 볼 것입니다.
번제단은 조각나무(싯딤나무)로 만든 후에 그 안과 밖을 놋으로 덮어 씌웁니다.
놋이 금보다 열에 강하기 때문에 놋으로 씌웠다고 합니다.

번제단은 장이 5규빗, 광이 5규빗, 고가 3규빗

번제단을 지나면 물두멍을 볼 것입니다.
물두멍은 놋으로 만듭니다.
성막의 기구들은 크기가 소개되었지만 물두멍은 그 크기가 소개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두멍은 제사장의 손과 발을 씻는 것으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것에는 무한하다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물두멍을 지나면 바로 앞에 성소의 휘장을 만납니다.
성소의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생, 가를게 꼰 베실로 짠 휘장으로 다른 무늬가 없습니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는 같은 재료로 휘장을 짜고 그 위헤 그룹들의 형상을 수놓아야 합니다.

성소의 휘장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 왼편에 금등대와 바로 앞에 분향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의 뿔에는 족장을 위한 속죄의 피를 발랐지만 분향단의 뿔에는 제사장과 온 회장을 위한 속죄의 피를 발랐습니다.
분향단은 족각목으로 만든 후에 그 안과 밖을 금으로 씌웠습니다.
떡상은 조각나무로 만든 후에 정금으로 씌웠습니다.

금등대는 금 1달란트로 만들었습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을 지나면 언약궤를 만날 것입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그 안과 밖을 금으로 씌웠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하여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모든 회중들의 피를 뿌려 용서를 받았습니다.

영광() :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진 후에 그 모든 것을 덮으면 작은 불이 일어나며 그 불이 빛이 되려고 작은 것일지라도 움직이지 않고 온전하게 감당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불 화(火) + 불 화(火) + 덮을 멱(冖) + 나무 목(木) / 열  십(十) + 사람 인(人)
 작을 소(小) + 우뚝할 올(兀) 

  • 1. 우뚝하다, (높고 위가)평평하다(平平--)
  • 2. 발뒤꿈치를 베다
  • 3. 움직이지 않다
  • 4. 민둥민둥하다
  • 5. 머리가 벗어지다, 민둥산이 되다
  • 6. 위태롭다(危殆--)
  • 7. 무지하다(無知--)
  • 8. 움직이지 않는 모양
  • 9. 무지(無知)한 모양
  • 10. 위태(危殆)로운 모양, 안정(安定)되지 않은 모양
    위태(危殆)로운 모양, 안정(安定)되지 않은 모양

영광(카보드. 3519) <כָּבוֹד>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 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단(壇) - 성막(聖幕) - 성전(聖殿) - 교회(敎會) - 사람의 몸(肉體) 


성막(聖幕)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동식 성전(聖殿)


성막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출애굽 시키실 때에,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모든 식양(式樣)을 보여 주시고 그대로 만들게 한 이동식 성전(聖殿)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몇 대를 걸쳐, 430년 동안 기나긴 세월을 살아 왔기 때문에, 애굽의 종교와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한 예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을 때, 모세가 오래 동안 내려오지 않자 자신들을 인도한 신을 만들라고 아론에게 졸라대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번제(燔祭)와 화목제(和睦祭)를 드리고 즐거워했던 신앙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聖幕)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시고 만들게 한 것이다.

출애굽기 25장 8절 이하에 말씀에서“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서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帳幕)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막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계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짓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聖幕)의 재료와 기구 또 구조와 모양 그리고 제사법(祭祀法) 하나 하나에는 신비한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성막에 대하여 배우고 연구하므로 영적 성장을 가져 올 수 있다.

성막론(聖幕論)을 배우다 보면, 신론(神論), 교회론(敎會論), 내세론(來世論), 인간론(人間論) 등과 신앙생활의 참된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말씀 위에 굳건히 선 신앙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 혼탁한 이 시대에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바른 신앙을 제시해 줄 것이다.





성령의 변화된 사람들의 특징(요한복음 14:16-17)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후 오십일이 지난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재하심에 하늘로부터 바람같은 소리가 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것이 각 사람의 머리위에 임하더니 그곳에 함께 하였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 후로 주님의 복음은 불같이 전세계를향하여 퍼지기 시작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증이 되셨고 대리자가 되셧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해주셨습니다.
인간의 학문이나 명상이나 수양이나 혹은 교양이나 극기나 수도를 통해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영접할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잘려 온전히 죽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때 바로 그 죽음에서부터 생명은 비롯되어 부활이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2천년전에 오신 역사적인 예수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아니라 성령과 함께 이 부활의 생을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우리의 죄를 청산하여 사망과 죄의 노예의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하여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거하사 주님과 더불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오늘날 같이 문명이 발달하여 최첨단의 시대에 그 어느때보다 물질의풍요로움속에서 정신적 빈곤을 겪고 있으며 도덕과 윤리는 황폐해져서로가 서로를 찢고 죽이고 미워하는 절망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가난한자에게 복된 소식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하며 눌린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눅 4:18).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충만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나면 우리의 인생전체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고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놀라울 정도로변화됩니다.

요 5:2-9에 나오는 베데스다못은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고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베데스다못은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물이 동할때만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도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가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사회도 개인도 성령이 함께 할때, 성령에 사로잡힐 때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사로 잡힐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끊임없이 이어지고있습니다.
이제 성령에 사로잡혀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를 바로 알고 증거하는 삶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고난을 보고 주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에 주님을 떠날려고했으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과 장래 일을 바로 알게 되자 (요 16:13) 그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퍄할 수 있었음이니라 성령을 모시면 우리는 주님을 바로 알게 되어 담대해집니다.

둘째,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인간관계를 유지

초대교회 성령의 충만함 속에 성도들끼지 유무상통할 수 있었고 서로서로위해 기도해 주고 사랑하며 축복을 빌수가 있었습니다.
미움대신사랑을, 자기중심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나를 자랑하는 교만대신 주님을 내세우는 겸손을(에 36:26) 가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십니다.

셋째, 천국 소망을 위한 삶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강한 소망을 가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로잡혀 쓰임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아주 강력한 소망을갖고 환경의 어려움이나 고난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전진했습니다. 소망은 인생에게 강력한 힘을 공급해 줍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도 모세도 강력한 소망을 가졌기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삶의 보람도 성공도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이원하시는 목표가 있습니다.
강력한 소망으로 전진하십시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넷째, 거룩한 고집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거룩한고집이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진행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무리속에서 더 강력한 긍정적인사람을 쓰십니다.

이사야 26:3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으로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사람은 거룩한 고집으로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로써 하나님의 도구로 택함을 입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여 모여들여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을 힙입어 변화의 삶을 살아 빛의 자녀로써 사명을 감당하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이름을 축원합니다.



천년왕국이란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서 특별히 언급된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대개 구약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왕국과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천년왕국에 관한 주요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전천년설(前千年說)이란,
천년왕국을 주의 재림 후에 있을 문자적 천년왕국으로 보는 견해인데,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이란 천년왕국을 유대인들의 천년왕국, 즉 구약적 성격의 천년왕국으로 본다.
이 견해는 이사야(사 65:20, 25)와 에스겔(겔 40-48장; 45:17; 46:3, 13) 등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들이 천년왕국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며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짐승 제사들과 절기들이 회복된다고 본다.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innialism)

역사적 전천년설은, 주의 재림 후 천년왕국이 있다고 보는 점에서는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같으나, 천년왕국을 신약적 성격의 나라로 보는 점에서 세대주의적 견해와 다르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등의 교부들이 가졌던 견해이었으므로 ‘역사적 전천년설‘이라고 부른다.
근대에 벵겔, 고데, 랑게, 알포드, 엘리콧, 잔 등 성경주석가들이 이 견해를 취하였다.

후천년설(後千年說, Postmillennialism)

후천년설이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이 신약 교회 시대 후기(後期)에 있을 기독교 황금시대를 가리키며 그 후에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것은 촬스 핫지, 윌리암 쉐드, 로버트 댑니, 벤자민 워필드 등 유력한 장로교 신학자들이 가졌던 견해이었다.

무천년설(無千年說, Amillennialism)

무천년설이란,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천년’ 동안의 지상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신약 교회 시대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에 어거스틴, 종교개혁시대에 루터와 칼빈, 그리고 근대에 와서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코프 등이 가졌던 견해이다.

믿음 안에 있는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똑바로 알려면,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을 똑바로 압니다.

하나님을 100%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본문 골로새서 1장 10절에 보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공부한다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에게 계시를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로 택하신 사람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두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모두 대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 받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요한일서 2장 2~4절에 보면,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기 멋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1.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지(無所不知)하십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을 꿰뚫어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해야 합니다.

창세기 4장 9~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래에 일어날 일을 선지자들에게 말씀해주셔서 선지자들로 하여금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틀린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신실하십니다. 완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40장 6~8절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은 풀과 같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全知)하실 뿐 아니라, 전능하십니다.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십니다. 사람이 보기에 100% 불가능해 보이고 소망이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가능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였을 때, 이삭을 낳았습니다. 90세의 할머니가 어떻게 아이를 낳습니까. 사라의 몸은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100%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께는 100%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흥망성쇠를 주장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와서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 8:6)”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8~9)”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것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3. 사랑이 많으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까워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서로서로 사랑하며 삽니다. 요한일서 4장 7~1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18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22~24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며 살면, 무엇을 구하든 다 받으며 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0~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범하니 망하여 포로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런데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잘못하여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으신 분이십니다. 은혜를 받을수록 이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행실이 나빴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때, 대제사장과 장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과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들이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을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행 9:5)”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는 순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습니다.

로마서 4장 17~22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아와 하나님께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가 반드시 해결됩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도합니다. 계속 기도합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기만 해도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딱 한 번 기도했는데도 응답해주십니다.
하루 종일 몸부림치며 기도한 적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습니다. 이틀 동안 기도해서 응답 받은 적도 있고, 1주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여 응답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10년 만에 응답 받은 적도 있습니다.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10년 동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늦게 응답하셔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계속 기도하면 보너스로 주어지는 축복이 많습니다. 계속 기도하는 동안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손해가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을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하나님의 뜻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에 보면,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응답 받은 대로 행하면 간증거리가 많습니다.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하게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을 가지기만 해도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생각만 해도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삽니다.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살면서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4~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에 보면,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저절로 전도됩니다.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8절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고 썼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자신이 믿음 안에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알고 체험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평생의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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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레브. lêb) 3820. לֵב

출애굽기 35:5, 10, 21, 22, 25, 29

관련 성경 / 마음(창 6:5, 삼상 4:13, 시 61:2), 심중(신 29:19, 에 7:5), 숨(출 8:15), 콧김(출 15:8), 가슴(출 28:29), 감동(출 35:34), 간담(수14:8), 결심,생각(삿 5:15, 시 33:11), 진심(삿 16:17), 기력(삿 19:5), 관념(삼상 4:20), 인심(삼하 15:13), 심장(삼하 18:14, 시 38:10), 염통(왕하 9: 24, 시 45:5), 한마음(대상 12:38, 시 83:5), 성심(대상 29:9), 전심(대하 17:6, 시 119:10, 겔 44:5), 뜻(대하 24:4), 충심(시 34:18), 총명(욥12:24), 지혜(욥36:5, 잠10:8, 전1:17), 지식(잠10:21), 의사(잠18:2), 생각(잠24:32), 명철(전7:7), 지각(렘5:21), 굳센 자(암2:16). [동] 말하다(창 42:28), 간곡하다(창 50:21), 낙심하다(민 32:7),염려하다(삼상 9:20), 개의하다(삼상 25:25),낙담하다(삼상 17:32, 겔21:15), 근심하다(삼하 7:27, 애 3:33), 상심하다(삼하 13:33), 깨닫다(왕상 8:47), 감동시키다(대하 30:12), 위로하다(대하 30:22), 주의하다(욥 1:8, 전 7:2), 담대하다(시 27:14), 살피다(시 48:13), 무지하다(잠 6:32), 간교하다(잠 7:10), 착심하다(잠 23:12), 진술하다(사 41:22), 기억하다(사 46:8), 낙심하다(렘 4:9).
[부] 다정하게(삿 19:3), 뜻대로(삼하 7:21, 대상 17:19), 담대히(렘 30:21).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마음은 국어사전적 정의로는 “생각, 의식 또는 정신”, “감정이나 기분”, “의지나 결심” 등으로 표현한다(우리말 큰사전).
헬라어로는 καρδια(카르디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정신, 사고, 감각, 중심부, 또는 지성, 감정이나 충동이나 애정이나 욕망의 자리로서 마음”을 정의한다.

마음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는 대략 10종류가 된다.
대표적으로 헬라어의 Ψυχη(프쉬케)가 마음을 뜻하는 용어라 할 수 있는데 그 뜻은 “정신, 영혼, 혼, 마음, 내적 생명, 마음 속 깊은 존재”를 의미한다.

마음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에서 다루기도 하지만, 분명히 신학적 주제이다.
심리학(心理學)이라는 용어는 마음(心)의 이치(理)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영어로 “psychology”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의 “Ψυχνη”를 영어로 음역한 psyche에서 온 말이다.
물론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 혼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나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혼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마음의 장소

마음이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머리인가? 가슴 어디인가? 심장이 마음인가?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때 항상 가슴에 두 손을 얹어 표현한다.
머리를 가리켜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교사들이 학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심장 뛰는 것 외에는 느낌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마음이라고 생각해 왔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양심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 골치 아픈 일을 만난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요즘 마음이 아파서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왠지 어색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인가?
의사들이 방사선 사진(X-Ray)을 촬영하고, 인간을 해부해 보아도 마음은 발견할 수 없다.
심장은 마음을 상징하는 장기일 뿐, 마음 자체는 아니다.
이는 심장 속에 생각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 불안, 공포 등을 느끼게 되면 뇌가 지각하여 호흡이 가빠지고 혈류량이 많아지거나 빨라지고, 혈압이 상승하고, 심박 항진이 감지될 뿐이다.
그러므로 의학적으로 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뇌일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병은 뇌 그리고 뇌의 활동인 정신의 병이다.
마음이 우리 몸의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로마시대의 의사 갤런(Galen 130~200 A.D.)은 플라톤(Platon)이 주장한 가슴이라는 설을 뒤엎고 그야말로 해부학적으로 뇌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마음의 영역

신학에서 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이 있다.
즉,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이분론과 영, 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삼분론이 서로 대립되어 있으며 양자는 모두 견고한 성경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영혼이든, 혼이든 이 안에 역시 지(지성), 정(감정), 의(의지)의 기능이 있다고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즉 이것들을 일컬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

어른은 공경해야 할 대상으로 학습하여 공격하지 않고 공경하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 성령에 대한 것도 우선은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지식을 통과해서 영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것과 복음이 오직 지식에만 머무르게 될 때는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성을 수립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은 지성이 새롭게 됨을 포함한다.
그렇다고 하여 있지도 않은 새로운 지식의 마술적 형성이 아니라 사상과 지성이 성경적으로 건전하게 되려는 성향을 의미한다.
지성은 지혜와 지식 그리고 추리와 사고의 영역으로서 이것이 부족할 때 인간은 어리석게 되고 둔하게 된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다(렘 17:9).
그 이유는 죄로 인해 인간의 모든 부분에 타락을 초래하여 지성도 함께 손상을 입게 되었고 오류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지 능력도 흐려지고 자기 왜곡(self-distortion)이 나타나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분명하게 인지하거나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알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고 분석했다. 그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게 되며 또한 지성의 타락은 선악을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며 지성과 창의성은 잘못된 상상력으로 발전하게 되어 그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의 의도와는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하여 마음이 깨끗하게 되면 지성의 변화가 초래되는데 이로 인하여 행복을 인식하게 된다. 즉 재산, 명예, 연령, 학식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어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새로운 인생관의 형성, 그리고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 같은 인지의 변화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그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감정

감정은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기능으로서 이것의 타락은 감정의 왜곡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의심뿐만 아니라 부정적 감정을 초래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정적인 요소가 강해서 슬픈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오고, 감동을 받고, 아울러 감정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다른 영역에서보다 감정의 변화로부터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병이라고 하며 정서 장애라고 할 수 있는 우울, 불안, 공포, 강박, 망상 등을 신경정신증(psycho-neurosis)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감정의 장애이다. 감정의 병리적 현상은 자기애, 자기비하 및 학대, 열등, 불만, 죄책, 의심, 억압, 반항, 거부, 충동, 변덕, 과민, 고집 또는 냉소 등의 상태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마음의 내적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하여 심리적으로 암울한 생활을 하도록 한다.

성경에 따르면 감정과 관련하여 마음은 근심(시 13, 잠 12:25)하기도 하며, 두려움을 느끼고(요 14:27), 아프기도 하며(욥 7:11), 상처를 입기도 한다(잠 25:20)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음이 약한 자들도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살전5:14). 또한 마음이 둔하게 되고(사 6:10), 경화증과 같이 감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기도 한다(출 4:21). 뿐만 아니라 마음에는 기쁨을 느끼게도 된다고 했다(시 4:7). 잠언 4장 23절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다. 내 마음속에 아무 생각이나 들어오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창녀촌으로,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것과 같다. 우리는 아무 생각이나 해서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되고, 신앙적인 순결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의지

이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면을 말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해서는 안될 것을 알고 자제하는 것이 이 영역이다. 신앙은 감정과 지식의 동의를 거쳐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본다면 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원죄와 자범죄(또는 고범죄)가 있는데 자범죄는 자신이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술에 취해보고자 하는 의지, 성폭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허락 없이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함으로써 내게 이익이 돌아오도록 하는 의지 이런 것들은 항상 자신의 의지로 범하는 것인데 의지가 타락되면 감정과 지식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불일치적 행동이 나타나는 문제가 된다.

의지는 행동 이전에 갖게 되는 마음의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의지는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실체(free entity)가 아니라 지식과 감정에 종속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의지가 지성과 감성에 따르지 않게 되면 그것은 일종의 분열 현상으로서 질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적 변화는 지성과 감성의 동의와 변화 다음에 오는 2차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성결된 신자는 지성과 감성의 성결을 통해 결국 혼의 의지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어 죄의 유혹에 대해서 강한 의지적 거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의지의 나약 및 박약은 자제력 상실과 맥을 함께 하는 개념으로서 이것은 곧 죄의 노출을 의미한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에 자신의 의지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게 되면서부터 죄가 발생된다.

사람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어떤 영적인 힘을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과 세상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고전 2:12). 성령으로 인해서 인간의 나약한 의지가 강해지며 악한 영의 점령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장차 의지의 나약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의지의 성결이 요청된다. 결국 죄라는 것은 지성의 왜곡, 감정의 불안정, 의지의 박약 등의 혼적 작용을 통해 영의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심리에 역사하셔서 인간의 마음 상태가 깨끗해지도록 하신다. 결국 마음이 성결하게 됨으로써 지성, 감성, 의지의 변화를 겪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느끼고, 올바르게 사고하며, 올바르게 행동하게 된다.

마음의 변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변화를 받는다는 용어는 헬라어의 μεταμορφουσθε(메타모르푸스데)
이 말은 μεταμορφομαι(메타모르포마이)에서 비롯된 말로서 “형태의 변화를 받는 것(be changed in form)”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외형적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구조적 변화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변화( μεταμορφομαι)는 마태복음 17장 2절, 마가복음 9장 2절에서도 사용되는데 “예수께서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누가는 이 말을 “용모가 변화되고”(눅 9:29)라고 표현했다.

즉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얼굴이면서 인식하기에 똑같은 것이 아닌 상태를 뜻한다.
이처럼 성령에 의해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데 이는 “사고 방식”의 변화로서 이는 동일한 사람이지만 충동과 유혹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더 이상 과거의 그 마음이 아닌 상태로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지식, 감정, 의지, 상상, 동기, 야망 등에 대해서 거룩한 생각과 관련을 맺는 것을 진정한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심리구조의 변화는 그리스도와 성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담스(Jay E. Adams)는 에베소서 4장 24절의 변화를 성경적 사고로의 변화에 두었는데 그것은 25절 이하의 내용과 연관을 맺고 있다고 전제하고 도적질하는 사람이 도적질하지 않는 변화가 아니라 도적질이 변하여 선을 행할 때 진정한 마음의 변화로 이해했다. 욕하던 사람은 다시는 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욕하던 입이 변하여 선한 것을 말할 때 비로소 마음의 변화로 보았다. 이와 같이 잘못된 행동의 변화는 성경적 사고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며 목회상담의 목표도 여기에 두어야 한다.

빌립보서 4장 7절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마음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분은 우리의 육신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시 33:15).

성경은 마음을 거의 1,000번 정도 언급합니다.
본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감정과 욕구가 거하는 영적인 부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펴 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계시므로, 또한 “마음”도 갖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음을 가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13:22).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따르는 지도자들과 함께,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십니다(사무엘상 2:35, 예레미야 3:15).

사람의 마음은 천성적으로 악하고, 신뢰할 수 없고, 부정직합니다.

예레미야 17:9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타락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욕구는 죄에 의해 부패되었습니다 – 게다가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깨닫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비밀을 아[십니다]” (시편 44:21, 고린도전서 14:25).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셨고],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24-25).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아시므로 정당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10).

마가복음 7:21-23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타락 상태를 지적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직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릅니다]” (로마서 10:10).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51:10, 에스겔 36:26).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겠다고]” (이사야 57:15)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시는 역사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고(시편 17:3, 신명기 8:2)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개념, 새로운 지혜, 그리고 새로운 욕구를 채우시는 일을 수반합니다(느헤미야 7:5, 열왕기상 10:24, 고린도후서 8:16).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부이며,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심리학(psychology)의 어원인 ‘psyche’는 마음·정신, ‘logos’는 지식·연구를 뜻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에서 인간을 영-혼-육의 삼중 구조로 나누었다. 여기서 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푸쉬케(ψυχὴ)가 영어로 마음(Psyche)이다. 심리학에서는 혼이란 용어 대신 '마음(Mind)' 혹은 '정신'(Soul)이라고 한다.
  
의식 (The Conscious)
 
우리가 알거나 느낄 수 있는 모든 경험과 감각은 의식이다. 마음은 극히 일부분만이 의식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빙산으로 비유한다. 수면 위에 있는 부분은 의식, 수면 밑의 있는 부분을 무의식이라고 한다.
 
융은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의식은 그 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섬과 같다"고 했다. 의식의 중심부에는 ‘자아’(Ego)가 있다. 나의 생각, 나의 지각, 나의 느낌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 또는 자아의식이라 한다. 자아의식은 '유전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발생된다.
 
융은 자아(Ego)와 자기(Self)를 구분하였다. "자아(Ego)는 의식의 중심이고,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의 중심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성숙하면 할수록 Ego가 아닌 Self가 마음을 지배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하지 못하고 충돌하면 '분열된 인간'이 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이.
 
개인 무의식 (The Personal Unconscious)
 
‘무의식’이란 글자 그대로 ‘의식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의식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마음의 세계는 모두 무의식이다. 자기가 하고도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는 것'은 모두 무의식의 결과이다.
 
융은 프로이트와는 다르게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하였다. 개인 무의식은 자아(Ego)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 경험들은 소멸되지 않고 무의식에 저장된다. 개인 무의식은 의식적인 개성화나 기능과 조화되지 않은 모든 정신적 활동과 내용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다.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의식에 도달할 수 없거나 또는 의식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경험은 모두 개인 무의식에 저장된다. 개인 무의식의 여러 내용은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쉽게 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
 
집단 무의식 (The Collective Unconscious)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은 융이 제창한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의 중심개념이며, 인간의 무의식의 심층에 존재하는 개인의 경험을 넘은 선천적 구조 영역이다. 이를 '보편적 무의식'이라고도 부른다. 개인 무의식보다 더 아래에 위치한 하부구조이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과 달리 개인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일류에게 공통적으로 유전되어온 '집단 무의식'이 마음의 심층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융은 집단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원형'(Archetype)이라고 하였다. 이 단어는 '시작·원리' 등의 의미를 가진 'arche'와 '각인'이란 뜻의 'type'의 합성어이다. 고고학이란 단어인 ‘Archaeology’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개인 무의식이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반면, 집단 무의식 초개인적이며 객관적이다. 집단 무의식은 유전되지만 개인 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뱀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왜 그럴까? 한 번도 뱀을 본 적 없는 아이들까지도 말이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집단 무의식' 때문에 그렇다. 물론 예외도 있다.
 
땅꾼은 뱀을 보면 ‘심봤다’
‘유레카’, ‘할렐루야!’


성령으로 성도되자


성령은 인격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시다. 성령은 헬라어로 '프뉴마'(Pneuma)이다.구약성경의 '루아흐'(Ruach)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프뉴마'의 단어 자체를 직역하면 ‘영'이다. ‘영'이란 ‘숨 혹은 기운'(breath)이나 ‘바람'(wind)이라는 뜻으로 성령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영어로 번역할 때는 다른 영과 구분하기 위하여 Spirit이란 첫 자를 대문자로 표기하거나, The를 앞에 붙인다.
 
신약성경에 성령은 140번은 다른 단어와의 연결 없이 독립적으로 '프뉴마'만 사용되고 있고, '거룩한 영'(pneuma hagion)이란 표현은 92회, '하나님의 영'이란 표현은 18회이다. 이외에도 여호와의 영, 그리스도의 영(롬8:9), 보혜사(요14:26), 예수의 영(행16:7), 성결의 영(롬1:4)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성령으로 성도(Saints in and with Holy Spirit)
 
인간은 죄인이기에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고, 스스로 성결해 질 수도 없다.  오직 예수를 믿어 '성령세례'로 구원받고, '성결의 영'(롬 1:4)인 '성령충만'으로 성결해 질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한다.
 
로마서 8:9절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가 나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교회 잘 다니고, 헌금 많이 하고, 봉사 열심히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영'이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우리를 성전이라고 했다.(고전 3:16, 6:19절)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자가 없다"고 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결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삶의 증거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갈 5:22-23)

성령으로 예배(Worship in and with Holy Spirit)
 
예배란? 거듭난 영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의 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했으나, 개역개정 성경에는 '영과 진리'로 고쳤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 드리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릴지니라' 이곳에 두 번의 ‘프뉴마'가 나온다.
 
첫째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이고, 둘째 프뉴마는 거듭난 '인간의 영'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죽은 영이 아닌 산영 즉 거듭난 영으로만 가능하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식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것이고, 예식은 혼과 육으로 지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신앙생활하고, 예식을 지키는 사람은 종교생활을 한다.



성령으로 기도(Prayer in and with Holy Spirit)
 
기도란? 하나님 아버지에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켜 내 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6-27절은 기도와 관련된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셔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돕는다고 했다.
 
요한복음에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다. 보혜사란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로 'Helper, Counselor, Advocator, Comforter' 등으로 번역된다. 특별히 Advocator는 법정용어로 피고인을 대신하여 말해주는 '변호사'를 뜻한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아버지 앞에 계신 그리스도는 '파라클레토스'로서 하늘의 법정에서 죄를 범한 성도를 대변해 주는 변호인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기도에 응답 받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구하지 않았기에 때문이고, 둘째 자신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2:2b-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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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물(禮物)(거제, 요제) 7311. 테루마(terûwmâh) תְּרוּמָה

출애굽기 35:20-29

1. 헌납,  2. 요제

발음 / 테루마(terûwmâh)
어원 / 73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물(출 25:2, 삼하 1:21), 요제물(출 29:27), 성물(레 22:12, 민 5:9), 예물(출 36:3, 신 12:17, 겔 20:40), 거제(민 15:19, 신 12:6, 느 10:39), 거제물(민 18:8, 느 12:44), 뇌물(잠 29:4), 봉헌물(말 3:8).
구약 성경 / 76회 사용

* 7311. רוּם 
1. 높다,  2. 거만한,  3. 과시하다

발음 / 룸(rûwm)
관련 성경 / 교만하다(신8:14, 17:20, 호13:6), 높아지다(삼상2:1, 시89:16, 단11:12), 높다(신12:2, 시99:2, 겔17:22), 올라가다(겔10:16,17), 오르다(창7:17, 겔10:4), 높이다(출15:2, 삼하22:27,시99:9), 자랑하다(시13:2), 드리다(레22:26, 민31:52, 시27:6), 들리다(시112:9, 미5:9), 진흥하다(잠11:11), 돋우다(사49:11, 57:14), 장대하다(신1:28, 9:2), 크다(민33:3, 신2:10), 일어나다(시113:4, 107:25, 느9:5), 양육하다(사1:2, 23:4), 들다(왕상11:27, 시37:34), 일으키다(시9:13), 소리지르다(욥38:34), 이르다(민18:26), 주다(대상25:5, 대하30:24), 부르다(창39:18, 스3:12), 내밀다(출14:16, 왕하6:7), 가지다(수4:5), 날리다(사58:1), 행하다(겔45:9), 세우다(창31:45), 놀리다(창41:44), 놓다(삼상9:24), 줍다(왕하2:13), 교만하다(시66:7), 영달하다(잠3:35), 나타내다(잠14:29), 이끌다(호11:4). [명] 높음(신32:27, 욥22:12, 시78:69), 높임(시21:13, 46:10),교만자(사2:12), 위(삼하22:49, 시18:48, 호11:7). [부] 높이(시27:5, 잠30:13, 사26:11).
구약 성경 / 166회 사용
제물(祭物)

제물(祭物)


בַח 2077 [zebach]
  • 1. 남성형 명사 희생, 제사, 제물.
  • 2. 남성형 명사 살륙, 도살된 동물의 육체, 제사, 창31:54, 겔39:17, 잠17:1
  • 3.  남성형 명사 [속죄나 성체의 의도를 지님] 출10:25, 레3:1, 4:10, 17:8, 민15:5.
מִנְחָה 4503 [minchâh]
  • 1. 여성형 명사 제물, 희생물, 희생 제물, 소제물, 창4:3,4,5, 레2:1,4,5,6, 6:7(14)이하, 7:9.
  • 2. 여성형 명사 선물, 예물, 기증품, 창32:14(13), 19(18),21, 43 : 11,15,25,26
  • 3. 여성형 명사 헌물, 공물, 조공, 세금, 삼하8:2,6, 왕하17:4, 시72:10.
תְּרוּמָה 8641 [terûwmâh]
  • 1. 여성형 명사 헌납, 제물, 선물, 출25:2,3, 30:13,14,레7:32, 22:12, 신12:11,17, 삼하1:21,잠29:4
  • 2. 여성형 명사 요제[비교 תְּנוּפָה], 출29:27, 레7:34.
אַזְכָּרָה 234 [’azkârâh]
  • 1. 여성형 명사 제물.
  • 2. 여성형 명사 기념물[추억이 담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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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과 주일

주일성수,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는 제4계명은 우리가 계속 준수해야 할 창조 규례(creation ordinance)이며, 도덕법(moral law)에 기초한 하나님의 제도입니다.
안식일 성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법령이며, 친히 세우신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계명은 폐기(종료, 무효화,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토요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 안식일로 날짜가 변경되었습니다.
구약의 토요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된 안식의 실체에 대한 그림자요 예표인 여러 가지 의식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6:26-30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니 제 칠일에 백성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은 이후 시내산에서 율법으로 제도화 되었다(출 20:8~11).
그 정신과 내용은 창시기 2장 2절 3절에 “여호와께서 안식하시니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인간에게도 안식하게 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이 부분은 신자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에 대하여 가리킨다.
그 지키는 방법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다.

“거룩히 지킴”(8절)
이것은 그날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 일함”(9절)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자가 다른 날에 곧 육일 동안 성실히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 성수에도 지장이 없게 된다.
또한 노동의 성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잠 5:6~11).

“그날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여기 ‘일’은 히브리 원어로 ‘멜라카니’인데, 육체의 생활을 위하는 영업과 같은 것들을 말한다.

מְלָאכָה  439.9

1. 봉사,  2.  부여된 일,  3. 장인의 일

발음 / 멜라카(melâʼkâh)

어원 / 4397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일(창 2:2, 출 12:16, 레 23:31), 짐승(창 33:14), 물품(출 22:7), 재주(출 31:3), 예물(출 36:6), 재료(출 36:7), 건축(출 38:24), 역사(출40:33, 왕상5:16, 느4:11), 무엇(레11:32), 노동(레23: 7, 민28:18), 공사(왕상7:14,22, 대상28:21), 목수(대상22:15), 사무(대상29:6, 에9:3), 감독자(대하24:12), 직무(느13:10), 행사(시73:28),제조(겔15:4,5), 생업(욘1:8), 지음(출35:21),씀(레7:24), 일꾼(대하34:10). [동] 만들다(레13:48), 수종들다(대하13:10).
구약 성경 / 166회 사용
* 4397. מַלְאָךְ 

1. 보내진 자,  2. 하나님의 사자,  3. 천사

발음 / 말라크(malʼâk)
어원 / ‘대리로 파견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창16:7, 삿2:1, 시34:7), 천사(창19:1, 삼하24:16, 대하32:21), 왕(삼하11:1), 사신(사14:32, 33:7), 파견자(나2:13).
구약 성경 / 212회 사용

그날은 육체를 위하지 않고 영적 생활을 위하는 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위주 해야 된다.
이 부분(8~11절)은 인생으로서 안식할 이유를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일을 엿새 동안에 마치시고 제 칠 일에 안식하사 그 날을 복 되게 하신 까닭이다(11절).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주님의 날(主日, The Lord's Day)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날짜를 변경시킨 것이 아닙니다.
신약 교회가 마음대로 제정한 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사도들과 초대 교회를 인도하셔서 구약 안식일이 가리키는 실체인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주일 안식일을 통해 발견하며 누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제안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탈무드에는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이 1,500여 가지나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율법주의적 안식일 준수는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신약 시대 주일 성수는 이런 정신과 태도로 지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주일에 해서는 안될 일들과, 주일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알고 있어야 주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8항은 주일 성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위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나니,
(1)그들은 마음을 준비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데 지장이 없도록 일반적 사업을 미리 정돈해 놓고,
(2)세상 사업과 오락에 관한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일체 중단하고 안식할 것이며,
(3)그 날의 모든 시간은 공 예배와 사적 예배를 위하여, 또는 부득이한 일과 자비 시행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주일 성수의 정신과 방법에 관해 성경과 신조(교리)와 교회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는 지키는 방법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무거운 짐으로 느낀다면 주일 성수의 정신과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주일은 참으로 즐겁고 복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성수의 방법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성도의 경건(영성)과 덕성이 함양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로 모든 염려와 무거운 짐에서 놓여나는 평안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일들을 하고 싶고 놀러가고 싶은 데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참으로 즐겁고 복된 날로 알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날이 되어야 주일을 점점 더 특별한 날로 복된 날로 잘 지킬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 즉 주일 성수를 왜,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해서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쉬신 날이며 복을 주셔서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신 것은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일로 피곤하셨기 때문에 쉬셨다는 말은 아닙니다(사 40:28-29).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도 엿새 동안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신 후에 창조하신 만물을 보시고 만족해 하셨으며 좋아하셨다는 뜻입니다.
일곱째 날을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인해 즐거워하는 복된 날로 구별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일을 하신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6일이 다 귀한 날이요 좋은 날이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의 결과를 보시고 심히 좋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고 쉬신 일곱째 날은 특별히 즐겁고 복된 날로 구별하시고 친히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복되고 즐거운 날로 지키게 한 것은 창조 직후에 정하신 규례입니다.
이것을 창조 안식 또는 창조 규례라고 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십계명을 내려 주실 때에 제4계명으로 주셨지마는 이 계명은 창조시에 주어진 창조 규례인 것입니다(출 20:8-11).

사람이 범죄한 후,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이 땅위에서 수고로이 일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수고로운 삶을 사는 인생에게 쉼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 제도가 수고로이 일하는 인간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안식일이 제정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휴식은 참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단순히 휴식만을 위해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게 하신 것은 엿새 동안 하던 일을 그치고 안식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와 교제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와 보존의 은혜와 영원한 복락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을 구별해 주셨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을 얻어 누리려면, 누구든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를 주(主)와 구주(救主)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의(義)와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참된 평안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려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참된 안식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일하지 않고 하루 종일 쉬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없는 안식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성취하시고 약속하신 구속의 은혜를 알고 믿는 자들만이 안식일을 즐겁고 복된 날로 지킬 수 있습니다.

제4계명에서 거룩히 지키라고 요구하는 안식일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까지는 제 칠일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매주 첫 날이 되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며,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주일)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대요리문답 제116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를 인해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과 영광을 삼위일체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날에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늘의 영원무궁한 안식을 앞당겨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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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과 꿀이 흐르는 땅(the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구약 성경에서 19회 사용(한글 개역 성경 인터넷 검색 결과 / 다국어 성경  사이트 참조)
출애굽기 4회(3:8, 17, 13:5, 33:3)
신명기 6회, 레위기 1회, 민수기 1회, 여호수아 1회, 예레미야 2회, 에스겔 2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문자적 의미는 우유를 많이 얻을 수 있는 소와 양을 키울 수 있는 푸른 초장과 샘물이 풍성한 곳과 꿀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꽃이 사철 피어있는 자연적 조건이 충족된 곳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땅을 말합니다.
자연적인 조건을 충분히 갖추지 않았지만 광야에서도 물을 마시게 하시고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는 땅을 말합니다.

적용 / 미국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의식주 문제를 한국보다 더 잘 해결하기 위한 축복받은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인가?)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약속의 땅이며 가나안 땅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인교회 구성원들은 기회의 땅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인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의식주 문제를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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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聖幕)과 회막(會幕)

성막이란 용어가 구약에서 82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출애굽기에서만 52회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40:34-35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회막이란 용어가 구약에서 146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출애굽기에서만 37회 사용됩니다.

성막이 완성된 후에 모세는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회막이 언제 세워졌을까요?

출애굽기 33:7-11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
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
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처으으로 회막이란 용어가 사용된 곳은
출애굽기 27:21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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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백성(암, עַם), 모세의 백성(암메카,  ) 목이 곧은 백성(암키세,   ) 

주의 백성(5971) עַם 

1. 백성,  2. 민족,  3. 복수형    עַמִּים 신명기 28:10

  • 1.  백성, 출 15:13, 신 4:20, 7:6, 32:36.
  • 2.  [주]복수형עַמִּים : 신 28:10, 시 33:10, 사 8:9.
  • 3. 민족, 족속, 지파, 창 19:4, 49:10, 레 19:16, 21:1,4, 신 32:8, 33:3,19, 삿 5:18, 시 18:28(27), 47:2(1),10(9), 사 3:13, 호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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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2022(월) (출애굽기 40:17, 성막을 세우니라) 

출애굽기 40장  / 성막의 완성과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막 

출애굽기 40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이 세워지고 여호와의 영광(하나님의 임재)이 성막에 충만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출애굽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1-15 성막의 건설과 각 기구의 위치와 그 성별 및 제사장의 성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16-33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세우고, 여러 기구를 각각 그 위치에 두다.
34-38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성막 안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다.


출애굽기 39:32-43절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어서 모세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성막을 세우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의 삶.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인 40장은 성막의 봉헌과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가득하게 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대미를 장식합니다. 때는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루이니, 애굽에서 나온지 1년이 되는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막을 세울 것을 명하십니다(2).

1~16절은 성막을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
17~33절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성막을 세우는 내용

하나님은 순서를 지시하시는데,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순서로 성막을 세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지성소의 증거궤, 휘장(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성소의 기구들, 다시 휘장(성소 문으로서의 휘장), 성막 뜰의 번제단과 물두멍, 끝으로 뜰 주위 포장과 문의 순서입니다.

모든 기구는 관유를 발라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아론과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 모세가 물로 씻기고 거룩한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거룩히 구별합니다.
모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언약 백성의 삶은 철저하게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막이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완공되자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쉐키나 구름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 영광을 흘깃 볼 수 있었으며, 하나님과 친구처럼 이야기했던 모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하자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결코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근접할 수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시대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모세마저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성막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이로부터 1400년 후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계시되고 나타나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삶이며, 그 영광과 은혜를 알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훗날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하게 보게 될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 옛날엔 성막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림자인 성막이 아니라 성막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영광을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 날마다 거룩하게 구별된 인생을 살게 하시며,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애굽기 40:1-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고, 성막 기구들을 제자리에 들여놓고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 성막 기구들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워라. 거기에 증거궤를 들여놓고, 휘장(지성소휘장)을 쳐서, 그 궤를 가려라. 또 너는 떡상을 가져다가 격식대로 차려 놓고, 등잔대를 가져다가 그 위에 등잔불을 올려놓아라. 또 금 분향단을 증거궤 앞에 놓고, 성막 어귀에 휘장(성소 희장)을 달아라.

번제단은 성막, 곧 회막 어귀 앞에 가져다 놓아라. 회막과 제단 사이에는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물을 채워라. 회막 주위로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에 휘장을 치고, 동쪽 울타리에다 낸 정문에는 막을 드리워라.

너는 관유(예식용 기름)를 가져다가,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것에 발라서,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제단이 가장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물두멍과 그 밑받침에 기름을 발라,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여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려다가, 목욕을 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으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은 것과 같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대대로 영원히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출애굽기 40:16-33a,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모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들여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만인 제 2년 1월 1일에 성막(전체)을 세웠습니다.
모세는 받침들을 놓고, 널판들을 맞추어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기둥을 세워, 성막(성소와 지성소 부분)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4중으로)를 덮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증거판을 가져다가 증거궤 안에 넣고, 그 궤에 채를 꿰고, 궤 위에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궤를 성막(지성소) 안에 들여놓고, 휘장을 쳐서 증거궤를 막았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 안, 성막의 북쪽 면, 휘장(지성소 휘장) 바깥에 떡(진설병)상을 들여놓았습니다.
상 위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빵(진설병)을 차려 놓았습니다.
회막 안의 떡상 맞은쪽, 성막의 남쪽 면에 등잔대를 놓고, 주 앞에 등잔을 올려놓았습니다.
금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안(지성소 휘장 앞)에 들여놓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피웠습니다.

또 동쪽의 성막 문에 막(휘장)을 달고, 성막, 곧 회막 문 앞에 번제단을 놓고, 그 위에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쳤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씻을 물을 채웠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물로 손과 발을 씻었는데,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그렇게 씻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번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성막 세우기 끝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세운 이야기 안에 반복해서 계속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19, 21, 23, 25, 27, 29, 32절에 7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일을 다 마쳤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세계역사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수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0:33b-38, 
성막이 완성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습니다.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히면, 진을 거두어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주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온 자손의 눈 앞을 밝혀 주었습니다.


성막 완성 후 하나님의 영광 충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것을 늘 보고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으면서 밤에는 불이 함께 하고, 낮에는 구름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매일 경험했다는 것으로 출애굽기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약 성경에서 종종 구름과 불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 구름과 불로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임재)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 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애굽기 24:15-18)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과 불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거기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마무리는 이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밤에도 행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불이 구름 가운데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고 움직였습니다.

구름과 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임재 -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 는 구름과 불이었습니다. 구름과 불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잖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끔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게 믿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격언들이 몇 개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 일견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To see is to believe!”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는 대화 중에 ‘보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전혀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를 들겠다고 해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예를 들어보겠다고 말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먹어 봅시다! – 먹읍시다’ 하면 되는데...
입어 봐도 되나요? – 입어도 되나요?’ 하면 되는데...
만나 보고 싶다! – 만나고 싶다! 하면 되는데...
만져 보자, 가 보자, 물어보자, 해 보자. 걸어 보자, 뛰어 보자, 살아 보자 등등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제를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구름이 눈에 보이고, 불이 내 눈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안심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전체 40장 중에서 10장 이상이 성막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성막 이야기를 출애굽기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그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만들기 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어디서 모세를 만났습니까?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위에서 모세를 불러 따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이면 어디나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감사한 일인데요,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게 하신 성막이 중요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꼭 그것에 눈에 보여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습니다. 그건 보고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성막이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나요? 거룩하게 장식된 교회 건물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나요? 잘 갖춰진 예배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건물)에 와서, 정해진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더 귀한 예배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생활예배)입니다.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이 찬양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 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 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라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곳에 섰으니 이 땅을 치유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를 높이리다
열방들아 주님을 송축할지어다 그 발아래 입 맞추라
영원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위대하신 왕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성전/교회)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다음에 바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 나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루한 제사와 율법 이야기 - 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매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놀라운 기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리타분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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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2022(토) (출애굽기 39:1)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출애굽기 39장  /


1-31 제사장의 성의의 제조.
32-43 성막의 완성과 모세의 검열 및 축복.

제사장 의복과 성막 준공[출 39장]

 

[내용개요]

 출25장부터 나타나는 성막 건축이 이제 마무리되고 있다. 본장에서는 성막과 모든 기구의 완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기술자들은 성막과 그 기구를 완성한 후에 마지막으로 제사장의 옷을 하나님의 명하신 방법에 따라 제작하였다(1-31절). 이들의 아름답고 화려한 의복은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모든 성막 건축을 완성한 그들은 모세 앞으로 제작물을 가져 왔다. 그것을 본 모세는 그 동안 성막 건축에 힘쓴 사람들에게 축복하였다(32-43절).



[강  해]

 본장에서는 28장을 근거로 하여 제사장의 의복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이 반복되어 기록된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러한 내용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일이 차지하는 신성하고 엄숙한 성격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철저히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제사장의 복장


1) 에봇

제사장의 옷에는 에봇과 흉패와 에봇 받침 긴 옷과 잡다한 옷들과 새긴 관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또한 본장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림과 둠밈이 있습니다. 에봇은 조끼 모양의 옷으로 대제사장의 복장 중 앞가슴 쪽을 가리는 것과 등을 가리는 두 조각의 천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견대를 만들었는데 견대는 에봇 두 조각을 연결하는 양쪽 어깨 끈을 일컫는 것입니다. 에봇 위에는 에봇을 매는 띠를 에봇과 같은 모양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붙여 짰습니다. 그들은 또한 호마노를 깎아 금테에 물려 인을 새김같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그것에 새겨 에봇 견대에 달아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 보석을 삼았습니다.

a. 제사장의 의복(레8:7)

b. 에봇(삼상30:7)


2) 흉패

흉패의 모형은 가로 세로가 한 뼘씩 되는 정방형으로 열두 개의 보석이 세 개씩 네 줄로 박혀 있습니다. 흉패는 공교히 짜여졌고, 에봇과 같은 모양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흉패에 물린 보석에도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 곧 그들의 이름대로 열두 이름을 인을 새김같이,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보석을 박은 흉패에는 금 사슬 두 개, 금테 둘, 금 고리 여섯을 부착했습니다. 그리고는 청색 끈으로 흉패를 에봇에 단단히 잡아맸습니다.

a. 흉패의 상징(엡6:14)

b. 열두 지파(창49:28)


3) 에봇 받침 긴 옷

에봇 받침 긴 옷은 출28:4에서 겉옷으로 표현되는 두루마기처럼 생긴 긴 청색 옷 입니다. 이 에봇 받침 긴 옷은 모두 청색으로 짰습니다. 옷의 두 어깨 사이에는 구멍을 내고 그 구멍 주위에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로 그 옷 가장자리에 석류를 수놓았습니다. 또한 정금으로 방울을 만들어 옷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석류 사이 사이에 달았습니다. 이 또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 대로 하였습니다.

a. 석류(학2:19)

b. 방울(슥14:20)


4) 납다한 옷들과 새긴 관

그들은 또한 가는 베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속옷을 짓고 세마포로 두건을 짓고 세마포로 빛난 판을 짓고 가는 베실로 짜서 세마포 고의들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띠를 만들었습니다. 제사장의 예복 중에 두건은 보자기 같은 것으로 싸여진 것을 뜻합니다. 관은 제사당의 의복을 가리키는 특수한 용어였습니다. 대제사장의 복장과 구별되는 것은 대제사장은 에봇, 흥패, 금 패를 더 착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같이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인을 새기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전면에 달았습니다.

a. 속옷(겔44:18)

b. 관의 상징(슥3:5)



2. 성막의 완성


1) 모든 역사를 마침

이스라엘 자손은 성막의 모든 역사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 대로 다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모든 성막의 기물들을 모세에게로 가져 왔습니다. 곧 막과 그 모든 기구와 갈고리들과 널판들과 그 띠들과 기둥들과 받침들이었습니다. 또한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 덮개와 해달의 가죽 덮개와 가리우는 장과 증거궤와 그 채들과 속죄소와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정금 등대와 그 잔과 벌여 놓은 등잔과 그 모든 기구와 등유들이었습니다. 이어서 금 단과 관유와 향기로운 향과 장막문장과 놋 단과 놋 그물과 그 채들과 그 모든 기구, 그리고 물두멍과 그 받침과 뜰의 포장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뜰문의 장과 그 줄들과 그 말뚝들과 회막의 소용 곧 성막의 모든 기구와 마지막으로 성소에서 섬기기 위한 정교한 옷, 곧 제사 직분을 행할 때에 입는 제사장 아론의 옷과 그 아들들의 옷이었습니다.

a. 거룩한 것들(사35:8)

b. 완성된 사역(요17:4)


2) 모세의 축복

이 모든 것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여 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를 보고 매우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수고한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막 건축에 관한 기사(참조, 출36-출39)와 모세에게 전에 내려졌던 지시(참조, 출25-출30) 사이에 정확한 일치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진 모형에 일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장인들은 이 모형에 따라 성막의 모든 부분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a.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식양(민8:4)

b. 사람의 축복(수22:6)



결론

본장에서는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것을 다루는 부분에서 무려 일곱 번이나 모세의 순종을 말합니다. 출40장에서도 같은 수의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완전수가 두 번이나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즉 철저한 순종을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름다울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감격과 만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단어해설]

2절. 에봇. 조끼 모앙의 옷. 대제사장이 제일 겉에 입는 옷이다.

3절. 금을 얇게 쳐서 오려서. 옷감을 짜는 데 탄력성이 있는 금실은 얇게 두들겨 실처럼 가늘게 만든 것이다.

4절. 견대. 양 어깨에 두르는 띠로서 에봇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멜빵.

5절. 에봇을 매는 띠. 에봇을 몸에 밀착시키는 데 필요한 허리 둘레에 매는 띠.

8절. 흉패. 우림과 둠밈을 넣어 두는 주머니로 에봇 앞가슴에 달렸으며, '판결 흉패'로도 불린다.

22절. 에봇 받침 긴 옷. 두루마기와 같은 것으로 흉패와 에봇 밑에 받쳐 입는 긴 겉옷.

25절. 금 방울. 방울 소리는 대제사장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키는 표식이다.

27절. 속옷. 고의 위에 입는 옷으로 발목에 올 정도로 긴 옷.

28절. 두건. '싸여진 것'을 뜻하는 <tp,n<x]mi:미츠네페트>는 일종의 터어번과 비슷함.

37절. 벌여 놓은. 문자적으로 '정돈해 놓은'.

38절. 금단. 금향단으로 분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


 

[신학주제]

 제사장 복장을 강조함. 출애굽기는 그 분량과 세밀함에 의해 몇 가지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즉 출애굽 사건과 시내 산 언약, 그리고 성막이다. 그중 에서도 분량이나 세밀함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성막이다. 성막에 관한 기록은 거의 출애굽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사장의 의복에 관한 기록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제사장의 의복이 강조되는 것은 제사장이 갖는 임무가 성막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성막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기초로 한다. 즉 그들이 과거의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임무를 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회복 하고 유지하는 결정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제사장이 제사 때 입는 의복이 매우 강조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적교훈]

 마침내 성막이 완성되었고 그 동안 성막 건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모세는 축복을 하였다. 그들이 성막 건축을 하는 동안에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모든 고난을 감수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이루어 내어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본장은 이처럼 끝까지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자가 축복받을 것임을 교훈해 주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현재의 고난이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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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2-2022(금) (출애굽기 38:1) 번제단을 만들었으니  

출애굽기 38장  / 번제단, 물두멍, 성막의 뜰(울타리)


1-7 제단과 그 부속품의 제작
8 세수통(물두멍)의 제작
9-20 뜰의 포장과 기둥 및 문장의 제작
21-31 금·은·동의 헌물의 분량과 그 용도

출애굽기 38장은 성막 기구 제작(3) - 번제단, 물두멍, 성막의 뜰(울타리)을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8:1-7절은 이미 출애굽기 27:1-8절에서 설명한 번제단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서 죄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물을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로, ‘올라간다’는 뜻이고, 단은 ‘미즈베아’로 ‘죽이다’는 뜻입니다.

번제단도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으로 만듭니다. 다른 기구와 차이점은 금으로 싸지 않고 놋으로 감싼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금보다 놋이 불에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금은 1,065도에 녹고, 놋은 1,085도에 녹는다고 합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2.5미터), 세로 5규빗(2.5미터), 높이가 1규빗반(75센티) 정도의 정사각형이며 4개의 뿔이 있고 가운데는 그물망이 있습니다. 놋 고리 한쪽에 2개씩 네 개가 붙어 있고, 멜 채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쌉니다. 번제단에는 몇 가지 보조기구들이 있는데, 재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이며 다 놋으로 만듭니다.



번제단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곳입니다. 번제단은 죄를 용서받는 자리,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일반인들이 못 들어갑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두멍도 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따라서 번제단이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나 나아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피였습니다(히 9:22). 구약제사는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 제사였습니다. 신약의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제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된 것처럼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 인생을 보혈로 덮어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8:8절은 출애굽기 30:17-21절에서 설명한 물두멍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이름이 이상하지만, 물두멍은 우리 말로 하면 큰 대야입니다.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데,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둡니다. 안 씻으면 죽습니다.


물두멍


중요한 사실은 물두멍의 재료입니다.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듭니다. 왜 하필이면 놋 거울일까요? 물두멍은 다른 성막 기구와 다르게 크기와 무게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두멍을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든 이유는 거울의 용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모습을 살피고 단정하게 하려고 거울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들도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 반드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두멍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사장은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물두멍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막 기구들과 달리 물두멍의 크기와 무게, 모양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와 크기, 그 깊이를 우리는 감히 잴 수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떤 말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두멍(a bronze basin)은 특별한 규격과 사이즈가 없습니다.
물두멍의 재료는 동(놋)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두멍 곧 놋대야는 손과 발을 씻는 것을 목적으로 물을 담아 놓는 성막의 기구입니다.
제사장 아론을 비롯한 유대 제사장들은 성막을 봉사하는 동안 자신들의 손과 발을 지속적으로 씻어야 함을 하나님께 지시 받습니다.

​물두멍의 위치는 거룩한 성소의 출입문과 희생제물을 드리는 번제단 사이에 둡니다.
물두멍이 사용되는 기능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물두멍은 번제단에 희생제물을 드린 후에 손과 발을 씻습니다.

​그 날 모세의 지시에 따라 임명된 제사장은 바깥 성막 뜰의 문으로 들어갈 때, 번제단을 마주보게 되는데, 그곳에서 다른 이스라엘 백성처럼 자신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그런 후 번제단 건너편에 있는 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한 더 많은 섬김을 위해 자신을 물두멍(놋대야)에서 손과 발을 씻음으로 제사장으로서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물두멍에서 자신을 정결케 함으로 번제단과 거룩한 성소에서 섬김과 봉사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번제단은 항상 제사장을 위한 첫 번째 섬김으로 요구되어 집니다.
그러니까 희생제물을 통해 죄사함 받고 구원에 동참한 자녀만이 하나님의 성막의 일을 섬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물과 피의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가까이할 수 있었습니다.       

​2. 물두멍은 거룩한 성소로 출입하기 전에 문 앞에 둡니다.

​거룩한 성소의 문 안에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기구들이 있습니다.
어느 제사장도 정결치 못한 자취와 흔적으로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3. 물두멍은 거룩한 성소를 떠나기 전에 제사장의 손과 발을 씻어야 하는 곳입니다.

성소 바깥뜰은 모두 청동(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성소 안은 모두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거룩한 성소와 성소 바깥뜰을 구분짓는 재료의 상징입니다.
이에 제사장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룩한 성소에서 나와 다시 일상적인 제사장의 업무를 할 때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 받았기에 제사장이 접촉하는 모든 것은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음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려주심으로 그 저주가 영생의 복이 된 것입니다.      

번제단은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고, 물두멍은 예수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피는 생명을 취하는 것이고 물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물두멍의 물은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의 능력 때문에 깨끗하다고 말하며, 당신의 진리의 사랑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영원한 생명을 죄인에게 가져다 준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 때, 제사장이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한 성소 안으로 들어와 맡겨진 사역이 끝난 후 다시 바깥뜰로 나갈 때마다 그의 손과 발을 물두멍에서 씻어야 하듯, 우리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의 더러움과 우리 자신의 우상과 죄로부터 씻겨져야 합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주님에게 질문할 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히브리어의 뜻은 - 위로부터 태어나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우리가 보는 물리적 보이는 세상에 목숨을 지탱할 생명을 가져다 주는 반면에, 영적 생수(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한 여자, 곧 사마리아 여자를 만날 때, 주님은 그녀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서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영혼이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성전 바닥에 실로암의 우물(히브리어 - 보냄을 받음)로부터 물을 붓는 장막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장차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약속하신바, 장차 당신의 백성에게 하늘나라의 보좌로부터 실제적인 영원한 생명수의 물을 부으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 

(겔 36:25-27)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구약 에스겔서 말씀 외에도 성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 5:27) 자기(그리스도 예수, 성도의 영원한 남편과 신랑)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15:3-4)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딛 3:5-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영적출생)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딛 3:7) 우리로 저(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히 10:21-22)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그리스도)이 계시매 (히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요 7:38-39) 나(예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성막기구 중 물두멍에 담긴 내용을 정리합니다. 당신에게 물두멍에서 살펴본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까? 제사장이 성막의 일을 하면서 발과 손을 정결하게 씻어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 아셨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마음에 되새겨 보셨습니까?

 

번제단에서 자신의 죄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렸던 제사장이 자신의 손과 발을 물두멍에 씻어야만 하는 이유를 이제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공로로 거룩한 제사장들이 된 여러분은 번제단에서부터 시작하여 물두멍을 통과하면서 성소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모두 주님의 공로와 용서와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을 당신의 영원한 아버지로 섬길 수 있음을 아셨습니까?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어제와 오늘만의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님이시요 영광의 왕이시요 천국과 지옥을 통제하고 통치하시는 당신의 예수이십니다. 그 분 안에 당신이 있고, 그분이 당신 안에 주님과 왕으로 계십니다. 오늘 그 주님에게 당신의 신분과 정체성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성령으로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도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실 것입니다.

 

(요 8: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출애굽기 38:9-20
출애굽기 27:9-19절에서 설명한 성막의 뜰(울타리)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성막의 울타리를 세마포로 만드는데, 가로가 100규빗(45m), 세로가 50규빗(22.5m) 울타리의 높이가 5규빗(2.25m)입니다.


성막 뜰


울타리를 만드는데, 60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모두 놋으로 만듭니다. 동쪽과 서쪽에 10개씩 남쪽과 북쪽에 20개씩 놋 기둥을 세웁니다. 그 기둥들을 잘 고정시키기 위해 갈고리와 가름대를 은으로 만듭니다. 성막 울타리는 성막 뜰과 성소, 지성소를 보호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칠 때, 동쪽에 문을 만드는 10m만 제외하고 모두 하얀 세마포로 두릅니다.

동쪽에만 있는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진 휘장입니다. 거기도 기둥이 넷 필요하고 받침대도 네 개 필요합니다. 누구나 성막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넓고 큰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집, 성막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 울타리 동쪽에 있는 문은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요한복음 14:6).

번제단을 만들 때도 놋을 사용했고, 물두멍도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를 만들 때 역시 놋으로 기둥을 만들고 받침대도 만듭니다. 성막을 만들 때 금이 사용되는 것만큼이나 놋도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느보산 모세 기념교회 놋뱀


놋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3:14,15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은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서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놋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막의 뜰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놋 기둥 역시 우리 인생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출애굽기 38:21-23절은 성막 건축 책임자 세 명의 업무 분담 내용입니다.

책임자
업무
이다말
아론의 아들
성막 곧 증거막을 위하여 레위 사람이 쓴
재료의 항목을 모세의 명령대로 계산함
브살렐
유다 지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듦
오홀리압
단 지파
브살렐을 도와서 함께 일함, 고안하고, 조각하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 실로 수를 놓음


출애굽기 38:24-31
성소 건축 비용과 어디에 얼마를 지출했는지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1. 성소 건축비로 든 금, 곧 흔들어 바친 금 - 성소 세겔로 29달란트 730세겔

2. 인구 조사 대상이 된 회중이 바친 은 - 성소의 세겔로 100달란트 1,775세겔

스무 살이 넘어서,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두 603,550명이므로,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가씩 낸 것입니다. 성소 건축을 위해 회중이 낸 은은 ‘생명의 속전’입니다. 출애굽기 30:11-16절에서 생명의 속전에 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세어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한 번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반 세겔을 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낸 생명의 속전은 회막을 수리하고 유지하는 비용으로 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 값을 대신하여 그들을 기억하여서 지켜 주십니다.  

은 100달란트로 성소 받침과 휘장 문의 기둥 받침을 100개를 부어 만들었습니다. 받침 한 개에 한 달란트가 들었습니다. 1,775세겔을 들여서, 기둥의 갈고리와 기둥 머리의 덮개와 기둥의 고리를 만들었습니다.


3. 성소 건축을 위해 드린 놋 - 70달란트 2,400세겔

회막 문 기둥받침과 놋 제단과 놋 그물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고, 뜰 주위의 기둥받침과 그 휘장 문의 기둥받침과 성막의 모든 말뚝과 뜰 사면의 모든 말뚝을 만들었습니다.

@ 성전 건축 비용 한 눈에 보기
성소 세겔로 29달란트 730세겔
성소의 세겔로 100달란트 1,775세겔
70달란트 2,400세겔


묵상을 위한 질문

번제단과 물두멍을 놋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막 기구를 만드는데 놋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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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2022(목) (출애굽기 37:1) 궤를 만들었으니 

출애굽기 37장  / 언약궤, 떡상, 등잔대, 분향단



출애굽기 36-38장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중심으로 성막의 기구들을 만드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6-38장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성막 기구들이 또 한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30장까지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 기구들이고, 출애굽기 36-38장에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성막 건축 책임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셔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 기구들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1-5 언약궤(법궤)의 제작
6-9 속죄소와 그룹의 제작
10-16 상과 그 부속품의 제작
17-24 등대와 그 부속품의 제작
25-28 향단과 그 부속품의 제작
29 거룩한 관유와 거룩한 향 제조법




출애굽기 37:1-9절은 출애굽기 25:10-22절에서 설명한 증거궤와 증거궤의 뚜껑인 속죄소(贖罪所를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증거궤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안과 밖을 쌉니다.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1규빗 45-50cm).


증거궤(언약궤 또는 법궤)


금고리 4개를 정금으로 만들고 양쪽에 둘씩 답니다. 멜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쌓고, 고리에 항상 꿰어 둡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두릅니다. 증거궤 윗부분(뚜껑)은 속죄소입니다. 증거궤 안에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증거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증거궤는 지성소에 있는 유일한 성물(거룩한 물건)입니다.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 만나 항아리(출 16:34)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민수기 17장)가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증거궤보다 길이가 길면 증거궤 앞에 보관했을 지도 모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막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것을 놋으로 쌉니다. 물두멍은 놋 거울로 만듭니다. 조각목은 조각 난 나무토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카시아 나무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과 감람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자였기 때문에 가장 좋은 나무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왕상 6:14-36). 성막을 세울 때, 대부분의 기구들을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을 사용한 이유는 광야에 제일 흔한 나무가 조각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성막 기구를 만드는데 아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는 증거궤의 덮개(뚜껑)가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모세를 만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천사)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5:22)


증거궤(법궤)와 속죄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증거궤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예수님도 진리요(요 14:6),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 1:1). 속죄소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뜻하고, 예수님 역시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7:10-16절은 출애굽기 25:23-30절에서 설명한 떡 상(진설병을 얹는 상)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길이가 2규빗, 광 1규빗, 높이가 1규빗 반(100*50*75).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가 꿰여 있습니다. 정금으로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잔을 만들어 떡과 함께 놓습니다.

떡상 위에는 떡 열 두 덩이가 두 줄로 올려져 있습니다. 이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파님’인데, 얼굴의 떡’, ‘면전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매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꿔 놓습니다.



떡상(진설병상)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떡 상 역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조각목(아카시아나무)은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고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아시고 우리를 감싸주시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떡 상에 올려진 떡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떡이 12개니까 하나님 앞에 드려진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할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임하신다는 뜻일까요?
제사 상에 떡을 올려놓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일까요? 

떡 상에 올려진 12개의 떡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신 떡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1).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떡상은 아카시아 나무(조각목)로 만든 작은 테이블이며 정금으로 그 위에 입혔습니다.
떡상의 크기는 가로가 3피트(90cm) * 세로가 1.5피트(45cm), 그리고 높이가 2피트 3인치(67.5cm) 정도입니다.
떡상은 금등대(금촛대) 맞은 편, 성소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나타내는 12 덩어리의 빵을 그 상 위에 두었습니다.

제사장은 고운가루로 빵을 굽고 일주일(7일) 동안 주님 앞에 항상 떡상을 두었습니다.
매 안식일마다 제사장은 떡을 치우고 그것을 거룩한 성소에서 먹었고, 새롭게 구운 12 덩어리의 떡을 테이블 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아무나 떡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떡을 먹을 수 있었고, 떡이 거룩하기에 거룩한 성소에서만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먹는 떡을 주님 앞에 항상 거룩하기에 "진설병(bread of the presence)"으로 불렀습니다.
상과 떡은 사람과 함께 교제하고 교통하고 나누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가 담겨있는 그림을 먼저 구약시대에 성막에서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출 25: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그것은 마치 식사 때 친구의 우정을 나누고 교제하는 초대와 같습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친구와 더불어 식사하는 것은 친근한 교제의 한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자기백성과 더불어 떡상을 사이에 두고 즐거운 식사와 대화, 그리고 사랑과 생명의 교제를 하고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원함을 날마다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이 당신과 더불어 영광스럽고 거룩한 사랑의 교제를 위해 당신의 임재가운데로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중개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우리가 살펴보는 떡상 곧 "진설병"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설병의 의미와 가치를 세리들과 창기들과 유대 사회의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 그 한 예로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서 관계맺는 친구사이의 우정의 모습을 초월하고 뛰어 넘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당신 자신에게로 초청하여,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교제권 안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인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교제와 사랑과 생명의 관계를 맺어 주기 위해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모두 버리시고 독생자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와 생명의 교제를 영원히 갖기 원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그 떡에 참여하는 모두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갖도록 "생명의 떡"으로 자원하여 약속을 좇아 죄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제자와 함께 한 주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 주님은 자신을 다시 한번 떡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내십니다. 


(마 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정리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 예수님의 찢겨진 몸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의 교제를 영원히 가능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유월절에 제자들과 맺은 새 언약(예수의 살과 피)의 은혜의 진리(복음)를 성령으로 믿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늘나라의 모형인 성막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영광과 거룩과 생명으로 교제하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와 같은 예배를 갖고자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약속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런 "생명의 떡"을 나누어 가진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교제와 사랑의 나눔과 교통을 위해서 말입니다. 당신은 혹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런 예배자입니까?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출애굽기 37:17-24
출애굽기 25:31-40절에서 설명한 순금 등잔대를 만든 이야기입니다.

등잔대는 정금 1달란트(34kg)를 쳐서 만듭니다. 살구꽃 형상의 꽃과 잔과 받침을 만듭니다. 양쪽에 세 개의 가지가 있고 가운데 한줄기로 그 가지들이 연합되어 있습니다. 등잔대에 일곱 개의 등잔이 있습니다. 불 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듭니다.


등잔대


등잔은 성소를 밝히는 유일한 빛입니다. 등잔이 없다면 성소는 칠흑 같은 어둠뿐입니다. 성소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금으로 싸는데, 등잔대만 정금을 쳐서 만듭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금 덩어리를 쳐서 성소를 밝히는 등잔대를 만드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죽음)을 통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등잔대의 7개 등잔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지혜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을 상징합니다(요 1:9; 8:12). 등잔에서 사용하는 기름은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람열매가 찧어지고 깨짐으로 순전한 기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참 빛이 세상에 비치게 되었습니다.

등잔대를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언급하는 꽃이 ‘살구꽃’입니다. 등잔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등잔대 가지와 줄기에 살구꽃 형상의 잔에 대해 반복합니다. 살구꽃’은 팔레스타인에서 봄이 올 때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살구꽃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가드’“파수꾼, 망보다, 깨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위 후손인 고라와 다단, 온이 모세를 거역하여 들고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 앞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권위(리더십)에 대해 뭔가 말씀하실 게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민수기 17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7장에 보면, 놀랍게도 아론의 지팡이에 살구꽃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고 나옵니다. 살구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살구꽃은 하나님 앞에 늘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등잔대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참 빛,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요 1:4-9).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리의 빛, 지혜와 계시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출애굽기 37:25-29,
출애굽기 30:1-10절에서 설명한 분향단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가로세로가 1규빗이고, 높이가 2규빗 정사각형이며, 네 모퉁이에 뿔이 있습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만들고,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를 꿰어 놓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1년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분향단의 뿔을 위하여 속죄하고 피를 바릅니다.


분향단


분향단은 성소의 중앙에 위치하고, 지성소 바로 앞에 있습니다. 분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위치합니다.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기를 사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입니다. 저녁에 등불을 켤 때에도 향을 사릅니다.

분향단도 조각목을 정금으로 쌉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모두 뒤틀리고 가시가 많이 나 있는 조각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덮어주시고 감싸 안아주셔야만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분향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 2:14-15). 성경은 기도의 분향단에서 피우는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합니다(계 5:7,8; 8:3,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린도후서 2:14-15)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요한계시록 5:7,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요한계시록 8:3,4)



묵상을 위한 질문


등잔대 가지와 줄기에 살구꽃 형상의 잔이 있다는 내용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등잔대를 만들면서 살구꽃 형상의 잔을 만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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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2022(수) (출애굽기 36:2)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  

출애굽기 36장  /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성막 제작

출애굽기 36-38장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중심으로 성막의 기구들을 만드는 내용입니다.

1-2 공인들의 피택
3-7 헌물이 많이 모이다.
8-19 성막의 앙장, 그 위에 덮는 막, 그 위에 덮는 두개의 덮개
20-30 널판과 그 은 받침의 제작
31-34 띠(항목)의 제작
35-38 간막이 휘장과 출입 문장 및 그 기둥의 제작


출애굽기 36-38장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성막 기구들이 또 한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30장까지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 기구들이고, 출애굽기 36-38장에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성막 건축 책임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셔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 기구들을 만든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6장은 성막 기구 제작(1) - 성막 덮개와 널판과 널판을 연결하는 띠,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성막 휘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6:1-7절은 먼저 성막을 건축하는데 헌신한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성막 건축 책임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성막을 짓겠다고 자원하여 모였습니다.

모세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주께서 그 마음에 지혜를 더하여 주신, 기술 있는 모든 사람, 곧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쓰라고 가져온 모든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침마다 계속,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성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세에게 가서 백성들에 예물을 그만 가져오게 해달라고, 너무 많이 가지고 와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부탁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 온 백성들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모습 참 감동입니다.


출애굽기 36:8-19절은 출애굽기 26:1-14절에서 이미 설명했던 ‘성막 덮개’를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성막 덮개는 성막(성소와 지성소)을 보호하는 천막 또는 천인데, 성막을 잘 보호하기 위해 네 겹(4중)으로 덮습니다.

@ 성막 덮개
첫 번째 덮개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천사를 수놓아 만든 휘장
(5폭+5폭=10폭, 청색고리 50X2=100개, 금 갈고리 50개로 연결
20mX14m)
두 번째 덮개
염소 털로 만듦(22mX5m)/ 성막을 덮는 막
(5폭+6폭=11폭, 전면과 후면 1/2 더 내림,
청색고리 50X2=100, 놋 고리 50개로 연결)
세 번째 덮개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듦, 두 번째 덮개 보다 더 큼
막의 덮개
네 번째 덮개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고 제 3 덮개 보다 더 큼/ 윗 덮개


성막 덮개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그룹(천사)을 공교히 수놓아서 만든 휘장입니다(출 26:1). 첫 번째 덮개는 길이가 28규빗(14m)이며 너비는 4규빗(2m)으로 5폭씩을(10m) 연결한 두 폭의(20m) 휘장을 50개의 금 갈고리로 연결시켜서 만듭니다.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염소 털로 짠 덮개입니다. 길이가 30규빗(15m)이며 너비가 4규빗(2m)의 5폭과 6폭으로 연결된 두 휘장을 청색고리 50개씩을 양쪽같이 달고 놋 갈고리 50개로 연결시켜 만든 11폭의 덮개입니다. 두 번째 덮개는 첫 번째 덮개보다 전면과 후면에 1m씩이 더 내려 덮습니다(출 26:7-13).

성막의 세 번째 덮개는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듭니다(출 26:14). 숫양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쳐집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해달의 가죽(물개 가죽)으로 만듭니다(출 26:14).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성막은 물개가죽(해달의 가죽)으로 덮인 모습밖에 안 보입니다. 초라한 모습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있습니다. 눈에 부시게 환하고 아름다운 집이 성막,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막의 덮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이나 근사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의 똥이 나뒹구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명함 한 장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초라한 사람입니다. 유명한 대학졸업장도 없고 아무런 학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우습게 보았고 멸시천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6:20-34절은 성소와 지성소의 벽이 되는 널판과 널판을 연결하는 띠를 만든 내용입니다. 
이미 출애굽기26:15-25절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기억이 안 나실 것 같아 한 번 더 설명 드립니다.

널판도 모두 조각목(싯딤나무 또는 아카시아 나무)으로 만듭니다. 남쪽에 20개 북쪽에 20개 서쪽에는 벽에 6개 모퉁이에 2개로 8개이며 성막에는 모두 48개의 널판이 필요합니다. 한 널판마다 은 받침이 2개씩 들어갔으니까 은 받침은 총 96개가 필요합니다.

널판에도 보이는 띠가 4줄이 있고 속으로 보이지 않은 1줄의 띠가 있어 모두 5띠의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널판 마다 띠를 꿸 금고리 4개씩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널판의 높이는 10규빗(5m)이며 넓이는 1규빗 반(75cm)으로 만들어집니다.



널판과 띠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널판 역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은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고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조각목은 너무 단단해서 건축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임하는 거룩한 장소인 성소와 지성소의 벽이 널판입니다. 우리 역시 널판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니까요. 조각목처럼 거룩한 성전을 만들 재목이 아닌데,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향해 고백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출애굽기 36:35-38절은 출애굽기 26:31-37절에서 이미 설명한 휘장을 만든 내용입니다.

휘장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지성소 휘장(26:31-35)이고 다른 하나는 성소에 들어오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성소 휘장(26:36,37)입니다.



지성소 휘장과 성소 휘장


휘장은 모두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듭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그 위에 천사를 공교히 수 놓아 만듭니다. 색깔도 눈에 띄지만 아름답게 수를 놓은 천사가 있어 더욱 거룩하게 보이는 천입니다.

지성소 휘장은 네 개의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드리워집니다. 네 기둥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네 기둥은 은 받침 위에 세워집니다. 휘장을 갈고리 아래로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35)

성소 휘장은 다섯 개의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드리워집니다. 다섯 기둥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소 휘장과 지성소 휘장을 설치하는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지성소 휘장과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다섯 기둥은 놋 받침 위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성소보다 지성소가 더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휘장은 모두 예수님을 뜻합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하는 휘장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요한복음 14:6).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받혀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태복음 27:50,5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묵상을 위한 질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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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2022(화) (출애굽기 35:1) 행하게 하신 말씀 

출애굽기 35장  / 성막 건축을 위한 자원하는 예물  

출애굽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2개를 선택한다면 "성막"과 "안식일" 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성막"은 광야에 머물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애급에서 급하게 나왔던 히브리 민족에게 광야(미드바르)는 애급보다 더 불편한 거주지라고 느꼈습니다.
마실 물도 없었고 심지어 먹을 것조차 없는 사막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히브리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성막"이었고, "안식일"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확인할 수 있는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33-34장은 모세의 중보로 언약을 갱신합니다.
34장은 모세의 얼굴의 광채(카란)에 의해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습니다.
35장은 비로서 성막 제작이 시작됩니다. 

* 죄는 순식간에 짓지만 회개는 어렵다!

성막 제작 과정

1. 안식일 명령(35:1-3) / 창조 질서 회복
2. 성막 재료 준비(35:4-36:7) /
3. 성막 건설(36:8-38, 26:1-37)
4. 언약궤(37:1-8, 25:10-25) / 언약 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2:4,
 사도행전 2:2, 앉아 있다는 말씀을 듣는 자세, 유대인은 기도할 때와 말씀을 읽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복음 4:20, 랍비가 강의하는 것은 앉아 있는 것
 * 앉은 자리는 말씀을 경청하는 자리 - 오순절 성령 강림은 곧 통성 기도가 아니라 말씀을 경청하던 자리라고 하겠다.
 사도행전 10:44,
 * 성령 강림과 말씀의 일치되는 현상을 앉아 있을 때에서 찾는다.
 
요한복음 14:26,

5. 떡상(37:10-16, 25:23-30)
6. 등잔대(27:17-24, 25:31-40)
7. 분향단(37:25-29, 30:1-5, 30:22-38)
 
요한계시록 8:3,
 창세기 22:2,
 창세기 18:2,

8. 번제단(38:1-7, 27:1-8)
9. 놋 물두멍(38:8, 30:18)
10. 성막울타리(38:9-20, 27:9-19)

* 성막의 제작 과정은 안에서부터(언약궤) 시작하여 성막 밖으로(성막울타리) 진행되었다.
로마서 15:15. 대략

회막과 성막의 차이는?
성막은 출애굽기 40장에서 완성되었다
회막은 모세가 들어갈 수 있었으나(33:7-11) 성막은들어갈 수 없다(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 회막은 모세의 기도로 백성들에게 임할 진노를 제하시고 가나안 땅에 하나님은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므로
이때에 주어진 것이 회막이었다.
모세가 회막에 나갈 때에만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다.
회막은 이스라엘 진영 밖에 쳤다.
성막은 이스라엘 진영 안에 쳤다. 이스라엘의 왕국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


회막(會幕)과 성막(聖幕)

성막(מִשְׁכָּן ) 4908

1.  거주,  2. 굴,  3. 욥기 18:21 

발음 / 미쉬칸(mishkan)

어원 / 79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휘장(출 26:35), 회막(출 39:32, 민 3:7, 대상 6:32),
집(욥 18:21), 거처(시 49:11, 78:28, 사 32:18, 렘 9:19), 처소(시 132:5, 사 22:16, 겔 37:27).
[동] 계시다(시 26:8), 살다(욥 21:28).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 7931. 솨칸(shâkan)   שָׁכַן
1. 아래 앉다,  2. 눕다,  3. 거주하다

발음 / 솨칸(shâkan) 

관련 성경 / 거하다(창 9:27), 들어가다(출 40:35), 엎드리다(신 33:20), 깃들이다(사 13:21, 겔 17:23), 머물다(출 24:16, 민 9:22, 잠 7:11), 계시다(왕상 8:12, 사 8:18), 살다(욥 30:6, 렘 46:26), 덮이다(욥 3:5), 쉬다(나 3:18), 두다(신 12:11, 느 1:9, 렘 7:12), 세우다(수 18 : 1),
떨어뜨리다(시 7:5)
[명] 소유지(수 22:19), 주소(잠 8:12), 있는 곳(욥 38:19).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회막( סֻכָּה) 5521

1. 오두막,  2. 회막의 축제  הַג הַסֻּכּוֹת

레위기 23:43

관련 성경 / 우릿간(창 33:17), 초막(레 23:42, 느 8:14, 욘 4:5), 야영(삼하 11:11), 장막(삼하 22:12, 왕상 20:12, 시 18:11), 굴(욥 38:40),
원두막(사 1:8), 천막(사 4:6, 암 9:11).

구약 성경 / 31회 사용




드디어 성막을 짓는 일이 시작됩니다.
먼저 모든 회중들에게 성막을 짓는 일에 필요한 재료들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함께 나누려는 신앙의 모습을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 자원하는 신앙(5절, 21절, 22절)
둘째, 동역하는 신앙(10절, 26절)
셋째, 숙고하는 신앙(32절)


시내 산에서 두번째 십계명 돌판을 받아 온 모세가 성막 건축을 위한 각종 기구와 장비를 설명하고 백성들은 그것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즐거이 바친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성막 건축에 앞서 안식일에 관한 규례를 한 번 더 강조하였다(1-3절).
그리고 성막 건축에 필요한 각종 재료와 만들어야 할 기구와 장식들에 관해 설명하였다(4-19절).
그러자 백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각종 장신구를 비롯한 재물들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쳤다(20-29절).
이를 본 모세는 브사렐과 오홀리압을 뽑아 성막 건축의 모든 것을 감독하고 제작하게 하였다(30-35절).


1-3. 안식일에 관한 모세의 교훈
4-19. 성막을 위해 헌물 할 것과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제조할 것을 명하다.
20-29. 백성들이 즐겨 여러가지의 헌물을 하다.
30-35. 공인에 대한 모세의 훈시

출애굽기 35장은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 백성들이 자원하여 예물을 드린 내용과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 책임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우신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5장은 성막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재료(예물)와 사람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5: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말씀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아 놓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엿새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렛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 곧 주께 바친 완전히 쉬는 안식일이므로,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해야 한다.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

성막을 건축하라고 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 것은 안식일에 대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막을 건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는 않는 성막을 건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성막보다 먼저 지어야 할 눈에 보이지 않는 성막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공간의 성소 - 성막 -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간(장소)
시간의 성소 - 안식일 -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

출애굽기 35:4-9.
성막 건축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 

너희 소유 중에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바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주께 예물을 바칠 수 있는데, 성막 건축을 위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예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 은, 동, 청색, 자색, 홍색, 가늘 게 꼰 베 실, 염소 털,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 해달 가죽, 조각목
(아카시아 나무), 등잔용 기름, 관유(예식용 기름)에 넣는 향품, 분향할 향에 넣는 향품,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들

출애굽기 35:10-19.
하나님께서 만들라고 명령하신 성막 기구들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어야 합니다.

성막과 그 덮개, 그 윗덮개, 갈고리와 널판, 그 띠, 기둥, 받침, 증거궤와 그것에 딸린 채와 속죄판과 그것을 가릴 휘장, 상과 상을 옮기는 데 쓸 채, 그 밖의 모든 기구와 상에 차려 놓을 빵, 불을 켤 등잔대와 그 기구, 등잔과 등잔용 기름과, 분향단과 단을 옮기는 데 쓸 채와 예식용 기름과 분향할 향, 성막 어귀의 휘장, 번제단, 거기에 딸린 놋그물과 번제단을 옮기는 데 쓸 채와 모든 기구, 물두멍과 그 받침, 뜰의 휘장, 그 기둥과 밑받침과 뜰의 정문 휘장, 성막의 말뚝과 줄, 울타리의 말뚝과 줄, 성소에서 예식을 올릴 때에 입는 잘 짠 옷, 곧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 일을 할 때에 입는 옷

출애굽기 35:20-29.
성막 건축에 필요한 재료들과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
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남녀 구별 없이 스스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장식 핀과 귀고리와 반지와 목걸이 등 온갖 금붙이를 가져 왔으며, 그 모든 사람이 금붙이를 흔들어서 주께 바쳤다.
2.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 실과 염소 털과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 물건들을 가져 왔다.
3. 은과 동을 예물로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주께 그 물건들을 예물로 가져 왔다.
4. 제사 기구를 만드는 데 쓰는 아카시아 나무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가져 왔다.
5. 재주 있는 여자들은 모두 손수 실을 빼서, 그 뺀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 실을 가져 왔다.
6. 타고난 재주가 있는 여자들은 모두 염소 털로 실을 자았다.
7. 모든 족장은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다.
8. 모든 족장은 향품과 등잔용 기름과 예식용 기름과 분향할 향에 필요한 기름을 가져 왔다.
9. 스스로 바치고 싶어 하는 모든 남녀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서 모세를 시켜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려고, 기쁜 마음으로 물품을 가져다가 주께 바쳤다.

출애굽기 35:30-35.
성막 건축 책임자 브살렐과 오홀리압

출애굽기 31:1-11에도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두 번 나온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3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 건축 책임자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임명한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35장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막 건축을 위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우셔서 그 일을 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유다 지파 사람,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내어, 그 생각해 낸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물리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사 그에게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책임자로 세우실 때, 그들을 선택하신 기준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를 움직이게 하는 말씀은 무엇일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를 향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질문하셨던 말씀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라고 거듭 강조하여 질문한다면 주저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의 사랑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나의 사랑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사랑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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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2022(월) (출애굽기 34:30, 모세의 얼굴)

출애굽기 34장  / 언약의 갱신  


출애굽기 34장 내용 구조

     1-4. 모세가 다시 산에 오르다(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5-9.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다(여호와로라)    
   10-17. 하나님의 약속과 경계(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맺지말라)

     17-27. 안식일과 삼대 절기를 지키라(무교절, 칠칠절, 수장절)

     28-35. 모세의 하산과 변모(얼굴의 광채)

출애굽기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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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채(카란. qâran) קָרַן  

(29, 30, 35절)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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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번역)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공동번역) 야훼와 대화하는 동안에
(현대인) 여호와와 말하였으므로



첫번째 언약
출애굽기 32:15-16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두번째 언약
출애굽기 3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마태복음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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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되사(메타모르포오, mĕtamŏrphŏō) μεταμορφόω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처럼
다른 차원으로의 변화

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로마서 5:19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야고보서 2:2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로마서 3:28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도행전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5절 /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8절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히브리서 6:1- 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요한삼서 1: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오늘의 기도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
오직 선을 행하는 믿음으로  

왜 처음 것과 같은 두 개의 돌판을 깎아서 준비하라고 하셨을까?
처음 돌판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의 것을 던져서 깨트린 것이 모세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순종하려 할 때는 반드시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요나가 타고 있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나를 니느웨로 보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바다로 던져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큰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요나는 그 큰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얼굴의 ‘얼’은 영혼(靈魂)을 뜻하며 ‘굴’은 구멍(窟)을뜻합니다. 
얼굴은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의 ‘얼’은 모두 ‘혼’이라는 뜻입니다.
‘얼빠지다’라는 말을 ‘혼이 빠지다’로 쓰이기도 합니다.
‘얼씨구’란 말은 혼이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얼싸안다’는 반가워두 팔을 벌리며 혼을 싸 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영적존재입니다. 
그래서 저쪽에 누가 숨어서 나를 몰래 보면 누가 있는 것 같아 쳐다봐집니다.

‘얼핏’이란 말은 그런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영혼의 상태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 직전 공회 앞에 섰을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환하게 빛났습니다(행 6:15).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 
성경은 스테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보였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우선 성령 충만했습니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술 취하는 것과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말수가 늘고, 노래를 하고, 권하고, 감정적이 되고, 용감해지고, 지배당하고, 중독되고, 냄새를 풍깁니다. 
아마 바울도 둘 사이의 공통점을 생각하며 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상적인 공통점은 있어도 그 내용과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술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술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스데반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의 순교를 앞두고 그를 격려하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보면 일반적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마26:64, 눅 22:69, 엡 1:20, 골 3:1, 히 1:3).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본 환상에서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서 계셨을까요? 많은 주석가들이 이에 대해 ‘순교자를 격려하고 환영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을 환영하는 주님을 바라본 스데반에게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도 감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십니다. 암 환자들을 돌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렸지만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으로 충만하니 세상을 떠날 때 얼굴이 맑고 밝고 깨끗하고 평안했습니다.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모두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으로는 일시적으로 기뻐할 수 있지만, 항상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변함없는 하늘의 것이 있어야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하고 돌아와 성과를 보고하며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기쁨의 근원이고 본질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우리가 갈 곳을 예비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보장을 해주셨는데도 걱정하며 얼굴이 어둡고 침침하다면 과연 나에게 믿음이 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도록 하늘을 소망해야하고, 성령 충만으로 마음의 근심을 몰아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중요한 언약을 체결하는 신성한 기간 동안에 오히려 황금 송아지를 만들면서 추태를 부려온 자들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목이 뻣뻣한 백성(32:9)이라 하시면서 그들을 진멸해버리겠다고 서두르셨습니다.

이를 막아선 사람이 바로 언약의 중개자 모세였으며 하나님과 다시금 대화의 물꼬를 터 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오래 전 알아오던 친구처럼 하나님과 깊은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였고 이로 인해 두 번째 돌판을 받으러 다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은혜의 자리가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돌판 두 개를 처음 것과 똑같이 다듬고 깎아서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세가 직접 돌판을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밤새도록 돌판을 깎아 만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모세는 급히 제작된 두 돌판을 들고서 아침 일찍 시내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판에다 모세가 깨뜨렸던 첫 돌판에 새겼던 동일한 언약 말씀을 똑같이 새겨주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는 관계였던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중대 범죄를 저질러 진멸할 뻔한 최대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 정상에까지 올라선 모세가 구름 가운데 휩싸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들은 하나님의 첫 메시지 또한 이것을 잘 뒷받침해줍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6-7절).

하나님께서 인자와 자비가 넘치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손 삼사 대까지 죄를 묻겠다 하신 것은 다름 아니라 황금 송아지 사건에 대해 가족의 살아있는 구성원 모두에게 공동체 개념으로 그 죄를 묻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죄에 대해 보응하실 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가기 위해서는 때로 징계도 서슴지 않으시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첫 언약이 맺어진 순간부터 가장 패역한 죄악으로 그 언약을 서슴없이 위반했건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와 더불어 새로운 언약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언약의 중개자요 기도의 중보자인 모세는 이번에 또 다시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목이 뻣뻣한 백성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산 정상에 올라가서 처음 성막 제작과 관련해 하나님의 세밀한 지침을 듣느라 40일간 체류하고 있는 와중에 하나님을 통해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는 진노하심을 눈으로 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비서 여호수아와 터벅터벅 산 아래로 내려오다가 금 송아지 우상숭배 현장을 목격하고서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버렸습니다(32:19). 그러자 그 돌판이 산으로 내려가면서 돌과 돌끼리 부딪히며 깨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마음이 깨어진 것이 아니라 돌비가 깨어졌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하고 완악한지 죄를 지을 때 잘 압니다. 사람끼리 부딪히면 잘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심지어는 얼토당토 않는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속한 이스라엘이 목이 뻣뻣한 공동체임을 고백합니다.
모세가 ‘목이 곧은 백성’이라 말하고 납작 엎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입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교만한 자는 한없이 낮추게 하시지만,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자에게는 또한 한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다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맺으시면서 신신당부한 것은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나안 족속들과의 평화 협정은 나중에 가서 올무로 걸려 넘어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중 언약을 맺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유혹거리들에 노출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쉽사리 마음속에 도사린 죄된 속성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못 이기는 척 악하고 추잡한 것을 허용하고 눈감으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건강한 상식을 넘어서서 과감히 세상의 가치를 쫓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 작은 머리와 가슴 속에, 생각 속에서 매일 치열한 전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 때문에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고방식과의 싸움이요, 돈 때문에 사람의 인격을 파는 사업적인 마인드와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가나안 종교는 또한 성적인 즐거움을 주는 종교였습니다. ‘아세라’ 신상은 가슴을 내놓은 음란한 여신상이었고 성적인 타락을 오히려 정당하고 부추기는 문화생활로 꼬드기는 집단입니다. 오늘날 성의 남용으로 점점 더 음란해지고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경계선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중 언약을 경계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그것을 명심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하기에 늘 우리들 삶의 기쁨의 근원이 하늘에 둔 또 다른 질료들임을 깨닫고 누리며 사는 자이길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교회와 세상에서 늘 회색지대 근처에 주변 경계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극적인 해답이 되기에, 로마서에서의 권면처럼 의의 병기로 우리 자신을 드리려고 애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황금 송아지 사건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되면서 35장부터는 성막을 실제로 제작하는 데 놀라운 열성을 보여줄 정도로 바뀌어졌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하늘 양식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 우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40일 동안 모세는 물과 음식을 전폐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습니다.
이 광채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함으로 인하여 생긴 광채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뒤덮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 자신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론과 온 백성은 모세의 광채를 보고 그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르신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전한 후에 수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에만 수건을 벗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모세에게 집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얼굴에 수건을 가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모세가 하나님과 40일을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지만,
두 번째 모세가 40일을 하나님과 있었을 때에는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주심으로, 결코 이스라엘이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에 대한 분명한 각인이 되고, 모세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십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첫째, 예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면 알수록, 예배하지 않을 수 없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과의 언약을 배제합니다.
세상과 벗됨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우리가 성도로서 추구하고 살아야 할 가장 큰 가치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아는 은혜와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메랑(Boomerang)

영어로는 "부머랭"이라고 발음한다.
호주 원주민의 단어를 음차한 것인데다 원주민들도 부족마다 이를 달리 발음하였기에 (워머랑, 워머레잉, 보머랑 등등) "진짜" 발음은 달리 없는 셈이다.

세간에서는 하술할 리터닝이 유명하여 부메랑이면 '반드시 돌아오는 나무토막'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부메랑은 '그냥 물건을 던졌을 때보다 멀리 날아간다는 점'에 착안하여 무기・수렵 도구로 발전한 투척 소모용 도구이며, 오히려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특수한 사례이다.

사냥용 부메랑은 투척무기의 일종으로 30~80 cm가량 되는 휘어진 나무조각이다.
나무로 제작된 이 무기는 ㄴ 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모양인데, 던지면 빙글빙글 돌아가며 날아가지만 직선으로 날아가며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때 회전력에 의해 부메랑의 어느 부분이 상대에게 맞든 대미지는 충분하다.

던지는 방법은 ㄱ 자 상태에서 한쪽 날개가 앞을 향하게, 마치 낫을 잡듯이 쥐고 던지는 것이다.
전투용 부메랑은 일반적인 ㄴ자 모양과는 다르며, 두껍고 길고 거대하다. 이것을 던져서 공격하기가 원주민의 주된 전법이었으나, 후대에 창이 발명되며 사장되었다.
원래 이 사람들이 호주에 처음 이주할 때는 원시적이나마 활도 있었으나, 호주에 활의 재료가 될 만한 나무가 고갈되면서 활 대신 부메랑을 만들었다.

부메랑이 유럽인들에게 처음 소개된 것은 1804년인데, 당시 부메랑을 목격했던 이들이 부메랑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지 아주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터키인의 시미터처럼 굽고 날이 선 나무 막대를 붕가리족 전사가 던졌는데, 투척 솜씨는 매우 정교했으며 투척력 또한 엄청났기에 우리 백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기는 20~30 야드(18~27미터)를 날아간 뒤 공중에서 놀라운 속도로 방향을 전환해 적의 오른팔을 가격한 후 튕겨져 적어도 70~80야드(64~73미터)를 더 날아갔다. 적의 팔은 끔찍한 타박상을 입었으며 구경하던 이들 모두 그 솜씨에 감탄하였다.


부메랑이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아보리진(Aborigine)이 동물 뼈 등으로 만들어 새를 잡을 때 사용한 것으로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도구입니다.

이후에는 새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냥이나 다른 부족과 전투를 벌일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메랑이 목표물에 맞지 않고 되돌아오면, 이는 자신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위험 신호였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같이, 의도를 벗어나 오히려 위협적인 결과로 다가오는 상황을 '부메랑 효과'라 합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은 부메랑 효과와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악의를 가지고 대할 때 때로는 그 악의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나쁜 일을 곰곰이 살펴보면 스스로 저지른 나쁜 일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행한 좋은 일은 당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의 밑거름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네게서 나간 것은 네게로 돌아온다.
(戒之戒之, 出乎爾者, 反乎爾者也)   - 증자(曾子)

얼굴(파님, 6440)  פָּנִים

1. 얼굴,  2. 활용 예 : 대면  / 파님 엘 파님(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파님(pânîym)  

어원 / 643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얼굴(로부터 피하다)(창 16:8), 대항(창 16:12),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다)(창 17:3, 민 16:4), (소돔) 쪽(으로 향하다) (창18:16), 소원(창 19:21), 앞(창 23:12), 섬김(창 24:40), 말미암음(창 27:46, 출 8:24, 레 26:10),  (기근)까닭(창 47:13), 인도(출 32:1, 민23:28), 얼굴(레 17:10),  (세력 있는) 자(레 19:15), 거느림(신 3:28), 낯(창 3:8, 출 2:15), 위(창 6:1), 얼굴(창 9:23, 출 10:28, 민 12:15), 나그네(창 23:4), 후일(창 30:33), 맞은편(출 14:9, 신 32:49), 목전(출 17:6, 수 10:12), 진설병(출 39:36), 들(레 14:7, 민 19:16), 선봉(신 3:18), 용모(신 28:50), 본래(수 11:10), 손(삿 2:14), 전례(룻 4:7), 선견자(삼상 9:19), 건너편(삼하 10:16), 아귀(삼하 17:19), 부하(삼하 18: 9), 내소(왕상 6:20), 옛적(대상 4:40), 몸(대하 35:22), 가죽(욥 41:13), 앞잡이(잠 16:18), 생명(잠 16:15), 시작(잠 17:14), 형편(잠 27:23), 안색(사 3:9), 까닭(사 10:27), 얼굴가리개(사 25:7), 사람(사 36:9), 이전(사 41:26), 얼굴빛(렘 30:6), 내시(렘 52:25), 대적(애 1:5), 모양(겔 1:28), 징조(겔4:3), 빈들(겔 39:5), 현관(겔 40:22, 26), 출입구(겔 42:11),어귀(겔 42:12).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 6437(파나, pânâh)  פָּנָה

1. 돌다,  2. 향하게 하다,  3. 창세기 18:22

관련 성경 / 권고하다(레 16:9, 왕하 13:23), 돌아가다(신 16:7, 수 22:4, 렘 50:16), 돌이키다(신 31:18,왕하 2:24, 겔 10:11), 돌아보다(왕상8:28, 대하 6:19, 렘 47:3), 떠나다(신 29:18, 왕상 17:3), 지나가다(시 90:9), 보다(대하 26:20, 욥 6:28, 전 2:11), 쳐다보다(사 8:21), 가다(사 53:6), 올라가다(렘 6:4), 들다(창 25:63), 거스르다(출 14:27), 들어오다(신 23:11), 엎드러지다(삿 19:26), 향하다(창 18:22, 겔 17:6), 돌리다(신 1:7), 들어가다(신 1:40,  2:1), 돌이키다(사 45:22), 살피다(출 2:12), 바라보다(출 16:10, 민 16:42), 만들다(레 19:4), 추종하다(레 19:31, 20:6), 정탐하다(신 1:24), 돌아서다(수 7:12), 보이다(수 8:20), 나오다(삼상 13:17), 행하다(왕상 2:3), 이르다(수 15:2), 돌아오다(렘 46:5, 겔 44:1), 섬기다(호 3 :1), 예비하다(사 40:3), 준비하다(시 80:9), 쫓아내다(습 3:15), 수축하다(사 57:14), 매다(삿 15:4).
[부] 도리어(학 1:9).
[명] 새벽(시 46:5), 모퉁이(대하 25:23).
구약 성경 / 135회 사용

얼굴 : 한글
한글사전에서 얼굴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1. 사람의 눈·코·입·이마·턱 및 두 뺨과 두 귀 등이 있는 머리의 앞면. 또는, 그 전체적 윤곽이나 생김새. 안면(顔面). 용안(容顔).
"귀여운 얼굴"

2. 사람의 감정이나 체면 등을 드러내는 부분으로서의 머리 앞면. 낯. 체면. 면목.

얼이란 "영혼"을 의미하고, 굴이란 "동굴(통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얼굴이란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 즉 마음의 창 또는 생각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얼굴을 깎다"

얼긴이는 얼이 간 사람
어른은 얼이 큰 사람
어린이는 얼이 이른 사람
어리석은 이는 얼이 썩은 사람
얼이 빠진 사람은 멍한 사람을 말합니다. 

광채(카란. qâran) 7160.  קָרַן

광채(카란. qâran) 7160.  קָרַן 

1. 빛나다,  2. 히필형, 뿔나다

발음 / 카란(qâran)
관련 성경 / 광채가 나다(출 34:29, 30, 35).  [명] 뿔(시 69:31).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 빛나다, 출 34:29, 30, 35.
  a. 히필형 : 뿔이 나다, 시 69:32(1).

뿔(케렌. qeren) 7106. קֶרֶן

1. 뿔,  2. 뿔로 만들어진 용기,  3. 나팔

발음 / 케렌(qeren)
어원 / 71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뿔(창22:13, 삼상2:1, 시148:14), 양각나팔(수6:5), 양각(왕상1:39), 나팔(대상25:5), 뿔(시75:4), 산(사5:1), 광선(합3:4).
구약 성경 / 76회 사용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은 단순히 사물을 보는 기능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눈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눈을 보면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코나 입이나 귀는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마음을 알 수 없지만, 눈을 보면 어느 정도 그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사나운 사람은 눈빛도 사납고, 마음이 불안한 사람은 눈빛도 불안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은 눈빛도 맑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눈의 기능 중 가장 나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크게 보고,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흐리게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눈빛이 우리의 시선에도 가득한 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에서 사람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스웨덴 오레브로 대학의 마트 라르손 박사는 과학전문지 '생물심리학(Biological Psychology)'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눈의 홍채(虹彩)에 있는 구멍(음와)과 선(수축구)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홍채의 구멍과 선들은 동공이 확대될 때 형성된다.

라르손 박사는 428명의 홍채를 근접촬영한 사진을 분석하고 각자 성격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구멍이 많은 사람들은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며 사람을 쉽게 신뢰하는 성격인 반면 선이 많은 사람은 신경질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라르손 박사는 홍채의 이러한 차이는 태아 때 홍채의 발달을 조절하는 유전자로 알려진 PAX6 신경발달유전자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홍채의 이러한 개인적 특징은 개인차를 나타내는 생물표지(biomarker)로 이용될 수도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유전자가 변이되면 충동적 성격을 갖게 되고 사회성이 저하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라르손 박사는 지적했다.

이에 대해 영국 버킹엄셔 칠턴스 대학 심리학교수인 조지 필드먼 박사는 유전자에 의해 형성되는 성격적 특징을 눈의 홍채를 통해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금언은 유전적 근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행복의 얼굴
김현승(1913-1975)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

오늘의 얼굴
박목월(1916-1978)

세수를 하고
마른 타올로
얼굴을 문지른다
오늘의 얼굴
누구에게나
오늘은 새롭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날마다
새로 창조된
아침을 맞이한다.
세수를 하고
누구나
오늘의 얼굴과
대면한다
거울에 비치는
늙고 주름진 얼굴
그것은
오늘의 나의 얼굴
그러나 뉘우칠 것이 없다
마른 타올로 얼굴을 문지르는
신선한 시간 속에서
천하의 모든
꽃가지에는
오늘의 꽃송이가 벌어지고
오늘의 태양이 빛난다
어떻게 살아도
충만할 수 없는
이 신선한 시간 속에서
얼굴을 씻고
눈보다 흰 타올로
문지른다.
 

출애굽기 34장 / 언약의 갱신

1-4. 모세가 다시 등산하다.
5-9.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다.
10-17. 하나님의 약속과 경계
18-27. 안식일과 삼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 및 첫 새끼의 대속
28-35. 모세의 하산과 변모

모세는 금 송아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이 깨졌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명 두 돌 판을 깨뜨려버렸습니다(출 32장). 

모세는 다시 십계명 두 돌판(증거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34장에 나옵니다.

언약 갱신의 첫 단계로, 모세가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그 돌 판을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34:6-7)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주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34:10-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시 언약을 맺는다 

“내가 이제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 모든 백성 앞에서, 이 세상 어느 민족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을 하여 보일 것이다. 너희 주변에 사는 모든 백성이, 나 주가 너희에게 하여 주는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도록 하여라. 내가 이제 너희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34:10-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1)

1. 너희는 삼가, .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2.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3.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4. 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5.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면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신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12, 15)”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신 이유

1.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될까 봐
2. 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따를까 봐
3.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드릴까 봐
4. 그들이 너를 청하면 그 제물을 먹을까 봐
5. 너희가 너희 아들들을 그들의 딸들과 결혼시키면, 그들의 딸들은 저희 신들을 음란하게 따르면서, 너희의 아들들을 꾀어, 자기들처럼 음란하게 그 신들을 따르게 만들 까 봐


출애굽기 34:18-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2)
1. 무교절을 지키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2. 처음 태어난 짐승들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3. 너희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도 모두 대속해야 한다.
4. 아무도 내 앞에 빈 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5.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어야 한다.
6. 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에는 칠칠절을, 한 해가 끝날 때에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7. 모든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주 앞에 나와야 한다.

      위에 나오는 7번 명령에 순종하면 – 언약을 맺으면 - 받는 복이 여기 있습니다.
       1. 내가 뭇 민족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너희의 영토를 넓혀 주겠다.
       2. 너희가 한 해에 세 번, 주 너희의 하나님을 뵈려고 올라올 때에, 아무도 너희의 땅을 점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8.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치지 말아라.
9.유월절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10. 너희는 너희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너라.
11.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신 명령들


12.
너희는 삼가,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13.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14.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17.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마라.
18.
무교절을 지키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19.
처음 태어난 짐승들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20.
너희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도 모두 대속해야 한다.
20.
아무도 내 앞에 빈 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21.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어야 한다.
22.
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엔 칠칠절을, 한 해가 끝날 때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23.
모든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주 앞에 나와야 한다.
24.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치지 말아라.
25.
유월절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26.
너희는 너희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너라.
26.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 34:27-35,
하나님께 십계명 두 돌판(증거판)을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에 기록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주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모세는, 주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주 앞으로 들어가서 주와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습니다.
나와서, 주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와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거로 얼굴에 광채가 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수건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AD 5세기 경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합니다.
이 성경을 벌게이트 성서라고 부릅니다.
이때 광채라는 "카란"이란 단어를 "케렌"으로 이해하고 번역하여 마치 모세의 얼굴에 뿔이 났다고 이해하였다.

카란(광채)
케렌(뿔)

*  자료 참조 사이트 / https://m.blog.naver.com/yanghwajin/222181883290


모세에게 뿔이 있었을까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성경 오역이 낳은 치명적인 결과물입니다.
돌판을 손에 쥔 채 머리에 뿔을 달고 있는 모세상으로 인해, 수세기 동안 전세계인들은 모세를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이 머리에 뿔을 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 있는 머리의 뿔은 출애굽기 34장 29절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서 발생한 실수였습니다.
본래 히브리어 성경구절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어근 קרן은 두가지 의미로 해석되는데 바로 “뿔”이라는 뜻을 가진 קֶרֶן (케렌)과 “빛을 뿜다/광채가 나다”라는 뜻을 가진 קָרַן (카란)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전자의 뜻으로 해석하여 결국 뿔 난 모세의 모습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 증거의 두 판 – 참조 : (32:15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 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 이것은 성물과 접촉하는 것이 거룩해진다는 원리와 일맥상통한다.

출애굽기 29:37 
네가 칠 일 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리니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출애굽기 30:29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즉 모세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집중했는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 혹은 거룩함이 자연스레 모세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모세가 성화(聖化)되어진 것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 
- 가까울 근(근), 먹 묵(묵), 놈 자(자), 검을 흑(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는 뜻으로,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그 버릇에 물들기 쉽다는 말.

성경에서 얼굴에 나는 광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의인의 얼굴(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둘째, 예수님의 얼굴(마태복음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셋째, 스데반의 얼굴(사도행전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넷째, 모세의 얼굴(출애굽기 7: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출애굽기 34: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 원문에 가깝도록 직역하면, '보라! 빛나는 얼굴의 피부가 되었도다'란 뜻으로 모세의 빛나는 얼굴의 광채를 보고 놀라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었다.

▶ 두려워하더니 
- 앞절의 '광채가 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란'은 '뿔이나다'는 뜻도 있다.

아마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는 뿔과 같은 모양으로 빛났던 것 같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더 두려워했던 것 같다.

따라서 라틴어 벌겟역(Vulgate)은 이를 '뿔이 났다'로 번역했고, 이에 따로 모세를 묘사한 얼굴에 뿔이 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적용이다.

한편 후일 사도 바울은 이 모세 얼굴의 광채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새언약의 영광스러운 광채로 승화시켰다.

고린도후서 3:7-18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출 34: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 회중의 모든 어른 -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가리킨다.

(12: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율법에만 집착하여 그 율법이 가리키는 바,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어두운 심령 상태를 나타내는 비유로 인용하였다.

(고후 3:7-18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출 34:34-35]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 하나님의 영광(33:18)을 대하기 위해서이다.

(33: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런데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기만 하면 이 율법의 수건이 저절로 벗겨져, 율법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에 대하여 깨닫게 되어 날마다 변화 받아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고린도후서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마태복음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변형되사(3339. 메타모르포오, mĕtamŏrphŏō) μεταμορφόω

1. 변화하다,  2. 외형적 변화,  3.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

발음 / 메타모르포오오(mĕtamŏrphŏō)

어원 / 완료수동분사 μεταμεμορφω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μετεμορφώθην, 3326과 34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변형되다(마 17:2, 막 9:2), 변화받다(롬 12: 2), 변화하다(고후 3:18).
신약 성경 / 4회 사용

* 3326. 메타(μετά)

1. ~와 함께,  2. ~가운데,  3. ἧνμετά τῶν θηρίων : 그는 들짐승들과 같은 상황 속에 있었다
관련 성경 / 후에(요 2:12), ~와 함께(마 4:21, 살전 3:13), 동행하고(마 5:41), 으로(엡 4:2), 더불어(갈 4:25), 데리고(마 20:20), 지나면(마26:2), 가지고(마 26:47), 다음(마 27:62), 만에(막 8:31), 겸하여(막 10:30), 타고(계 1:7), 동류로(눅 22: 37), 가운데서(눅 24:5), 뒤에(히9:3), 겸한 (엡 6:23), 취하여(히 9:19), 후로는(히 10:16),에게(계 1:12).
신약 성경 / 473회 사용


* 3445. 모르포오(μορφόω)

1. 형성하다,  2. 꼴을 이루다,  3. 형을 이루다

어원 /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μορφώθην, 3449와 동일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상을 이루다(갈4:19).
신약 성경 / 1회 사용

- 얼굴에 대한 예화 

1. 빛나는 얼굴

오래 전, 몬타나 주의 배노크에 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금광을 찾아나섰다.
험한 산과 들을 지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몇몇 사람은 도중에 쓰러져 죽었다.
또한 인디언들이 공격하여 좋은 물건과 말들을 모두 빼앗아가면서 다시 한번 자기들의 영토에 들어오면 그때는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할 수없이 그들은 다시 배노크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한 사람이 돌이 이상해서 주워들고 함께 깨뜨려보니 금이었다!
기진맥진했던 사람들에게 힘이 솟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그 곳에는 엄청난 사금이 묻혀 있었다.
며칠 동안 금을 채취했으나 음식이 떨어지고 장비가 없어서 도저히 더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노크의 집으로 돌아가 음식과 장비를 새롭게 챙겨서 정한 날에 만나 함께 그 곳으로 오기로 했다.
물론, 모두 목숨을 걸고 약속하기를, 금을 발견한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며칠에 걸쳐서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이제 떠나는 날이 되어서 약속된 장소에 모였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들 주변에 백여 명의 사람들이 따라나선 것이었다.
누가 비밀을 누설했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계획을 알고 따라나섰던 것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의 얼굴에 솟아나는 기쁨과 생기와 희망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비밀이 탄로 나고 말았던 것이다.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황금 노다지를 발견한 것보다 못한 것일까?
크리스천들의 가슴과 얼굴에는 환희가 넘쳐야 한다. 또한 생활과 언행에도 이러한 기쁨이 있어야 한다.


2. 저드슨 얼굴의 광채

저드슨은 미국교회에서 해외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다.
이 위대한 선교사가 휴가를 받아 귀향하는 도중 코네티컷 주 스트니튼을 지나가게 되었다.
다시는 스트니튼이 뉴잉글랜드와 뉴욕을 연결하는 철도 분기점이었으므로 이곳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스트니튼의 소년들은 유명한 사람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철길 옆 폐차장에서 저녁 늦게까지 떠나지 않았다.
드디어 저녁 무렵 육중한 몸을 이끌며 열차가 구내로 들어 왔다.
그러자 소년들은 우루루 달려가 소문으로 듣던 인물이 내리는가를 살폈다.
이 때 무리 중 한 소년은 열차에서 막 내리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끌렸다.
소년은 지금까지 그처럼 얼굴에 환한 광채가 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순간 그 승객이 옛날에 그림에서 본 유명한 선교사라는 직감이 들었다.
소년들이 보고자 한 얼굴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소년 트럼블은 유명한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추억>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그 저서 중에 "소년이 저드슨의 얼굴을 보고서"라는 장이 있다.
이 저서로 말미암아 저드슨 선교사의 얼굴에 빛나던 광채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해 얼굴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광채가 난다.
그래서 오랜 전 이 사실을 안 시편 기자는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라고 말한 것이다.


3. 얼굴을 빛나게 하는 약

어떤 힌두 원주민이 선교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얼굴을 빛나게 만드는 약을 내게 좀 주십시오'라고 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고 선교사가 묻자, 그 원주민이 말하기를 '당신들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빛나는 얼굴들을 하고 있다는 걸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 좀 달란 말입니다'.
모세도 이약을 얼굴에 바른 사람이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약이 필요한것 같다

4.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링컨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을 때 한 지도자가 내각의 인물을 추천했다.
링컨은 거절했다.
그가 이유를 묻자 링컨은 『그의 얼굴이 마음에 안듭니다』라고 말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는 겁니까? 얼굴은 자기 책임이 아닙니다』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자 링컨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40 대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겪은지 40 년이 훨씬 넘었다.
그런데 지금 책임지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

5. 형사와 목사

누가 그랬던가?
서른 살 때에는 서둘러 살고, 마흔 살 때에는 마음대로 살고, 쉰 살 때에는 쉬엄쉬엄 살고, 예순살 때에는 여유있게 사는 거라고.
그 말이 사실이라서, 서둘러 살 수 밖에 없는 나의 서른 살 때를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마음대로 살 수있는 마흔 살로 싹 넘어갈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좋으랴!

혼자서 이런 궁리를 하며 좋아하는데, '마흔이 넘으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온다.
오늘 우리 공동체 나눔의 집을 모교단의 목사님 두 분과, 서울시경에 근무하는 정보과 P형사가 다녀가셨다.
K형사는 우리 공동체 자원봉사자이고, P형사는 도시빈민선교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막무가내로 나를 찾아오는 분이다.
그런데 그 분들을 잘 모르는 자원봉사자들은 형사들을 가리키며
"이 분들은 어느 교회 목사님이신가요?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하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는 목사님 두 분을 향해서는 "이 분들이 경찰서에서 오신 분들인가요?" 하고 묻는 게 아닌가.
목사같은 형사님 얼굴에 비해 형사같은 목사님 얼굴이라니....
아 아, 이제 책임져야 할 내 얼굴!
난 과연 뭐 같은 목사 얼굴인가?


6. 얼굴 만들기

홀리 브러바흐는 성형수술의 역사에 관한 그녀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50살이 되었을 때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자신 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50년 동안 반복된 우울, 웃음, 걱정,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의 얼굴에 새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많이 보여주는 그 얼굴을 우리가 매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이 성형수술에 대해 언급한 것은 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그것이 우리의 외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놀라운 관념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후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이 너무나 밝게 빛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출애굽기 34:29-30.  고린도후서 3:7).
바울은 그 영광을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훨씬 놀라운 영광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가 점점 더 주 예수님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8).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일은 우리에게 완벽한 얼굴을 만들어 주지는 못하지만, 찌푸리고 눈썹을 찡그리는 원인들을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내적인 평화로 바꾸어 줍니다.
얼굴을 위한 어떤 미용술도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7. 신앙인의 얼굴표정

미국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여행자가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통순경에게 교회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경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여행자가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경에게 "왜 가까운 교회도 있는데,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 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순경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도 저 교회에서 예배들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습니다.
나는 불신자이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고 참된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신앙인들의 얼굴 표정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8. 얼굴로 말한 전도사

매콜은 신앙심이 두터운 그리스도인이었다. 매콜이 파리에서 죽었을 때 전에 무정부주의자였던 한 노동자가 매콜관 옆에서 몹시 슬프게 울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사람의 친척입니까?"
그러자 그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슬퍼하십니까?"
"이 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당신에게 특별한 말을 하셨습니까?"
그는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얼굴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매콜의 얼굴이 예수의 구원을 말했다는 뜻이다.

9. 사랑하면 얼굴도 바뀝니다

1896년, 영국의 맥스 비어봄(Max Beerbohm)이 발표한 ‘행복한 위선자(The Happy Hypocrite)’란 장편 우화가 있습니다.
우화의 주인공 로드 조지 헬(Lord George Hell)은 무례한 사람이었고, 수많은 악을 행하면서 얼굴까지 흉하게 변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처녀를 보고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결혼을 원했지만 그는 그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가 자기처럼 흉측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알고 죄로 찌든 자신의 얼굴을 감추려고 성자의 가면을 썼습니다.
가면 덕분에 마침내 그는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결혼 후, 헬은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몇 년 후, 과거에 헬과 사귀었던 여자가 나타나 그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헬의 가면을 벗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헬이 아내와 함께 있을 때 그 여자는 헬 앞에 나타나 “이제 위선의 가면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가면이 벗겨졌을 때, 성자의 가면 뒤에 있던 그의 얼굴은 더 이상 흉측한 죄인의 얼굴이 아니었고 진짜 성자의 얼굴로 변해있었습니다.

10. 링컨이 수염을 기른 까닭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전 어느 시골의 여학생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은 적이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링컨 아저씨, 저는 아저씨가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요. 그런데 아저씨는 얼굴이 너무 못 생겼어요. 턱은 주걱턱이고 눈은 움푹 들어갔고요, 광대뼈는 왜 그렇게 뾰족 튀어나왔나요. 그래서 우리 동네 어른들은 아저씨가 너무 못 생겨서 싫대요. 어쩌면 좋아요. 그래서 여기 저의 소원을 보냅니다”는 사연이었다. 그의 소원은 링컨에게 지금부터 양볼과 턱에 수염을 길러서 흉한 얼굴 모습을 바꿔달라는 것이었다.이에 링컨은 ‘그렇지, 옳은 충고야’ 하고 빙긋 웃고는 그때부터 수염을 길러 대통령에 출마했다는 일화다.한 어린 학생의 의견도 소홀히 여기지 않은 탓에 그는 큰 인물이 됐고 불의와 부정에 생명을 걸고 과감히 싸워 이길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말중 “소수의 사람을 잠시는 속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 없다”는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11. ‘추남’ 소크라테스의 여유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못생겼다.
어느 극작가는 ‘구름’이라는 글에서 보기 싫은 그의 얼굴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 글이 연극으로 꾸며져 공연중일 때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자리에 직접 참석,관중을 향해 절을 하며 “내 실물을 보고 연극을 즐기라” 해서 웃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멋에 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을 모방하는 데만 신경쓴다.
자신만의 매력이 있고 미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음을 알 때 우리에게는 삶의 보람이 생긴다.
흉내만 내다가는 만족감을 잃는다.
뱁새는 뱁새대로 매력이 있고 황새는 역시 황새로 사는 게 바람직하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는 속담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흉내를 금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남이 한다고 무조건 나도 하겠다는 식의 모방보다는 ‘자기식’을 독창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철학자 코도르세의 “네 자신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그것과 비교함이 없이 즐기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12. 코끼리 죽이는 법

코끼리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앗! 세상에 내 모습이 이렇게 못생겼었나?" 하면서 너무 놀라 죽어버린다고 하지요.
정말인지 진짜인지 사실인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 그래서 늙은 코끼리는 연못에서 물을 마실 때 얼른 앞서가서 다른 가족들이 연못에 비치는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연못물을 흙탕물로 만들어 놓는다고 합니다.
어제는 길을 가다가 정말 그 얼굴이 도깨비 같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무슨 장애인이나 사고로 다쳐서 얼굴이 상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인데 얼굴의 표정이 너무나 기묘하여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12귀신의 하나처럼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하였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저분의 집에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얼굴이 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거울의 도움 없이는 비춰보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도 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타인의 입의 도움 없이는 내 마음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어때요?
내 마음을 다른 사람들의 입은 어떻게 비추어 줍니까?


13. 기쁨이 있는 얼굴

잠언 15:13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

어떤 분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처음으로 미국인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는 연방 웃음을 자아내고 교인들은 함께 웃으며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어가 짧은 이 사람은 왜 웃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옆에 앉은 한국사람에게 지금 무엇 때문에 웃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자기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가 잘 모르면서 웃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같이 웃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짧은 영어는 할 수 있지만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민 초기의 에피소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웃든 저렇게 웃든 웃음은 인간에게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입니다.
한번 웃으면 심장박동을 촉진하고 근육이완에 도움이 되기에 에어로빅과 같은 효과가 있으며, 또 20초만 깔깔대고 웃으면 5분동안 노를 저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웃음은 치료제로서도 유익합니다.
노먼 커슨이라는 미국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의사는 그에게 단 한가지 유일한 처방을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즐겁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재산을 정리해 세계를 일주하면서 코미디와 희극 영화를 보고 항상 웃으며 생활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병은 말끔히 나아 있었다고 합니다.
노먼 커슨은 그 뒤로 웃음학 박사가 되었고, 웃음은 체내의 조깅과 같으며 내면 세계의 깊숙한 마사지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습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의 얼굴 표정은 어떠해야 할까요?
웃음과 기쁨이 있는 표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교회를 처음 방문한 불신자의 눈에 비친 교인들의 모습이 무표정하고 무뚝뚝하다면 다시는 그런 딱딱한 분위기에 오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반겨주는 성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흐르고 있다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뿐 아니라 또 오고 싶은 마음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은혜 받은 성도의 얼굴은 어떠해야 할까요?
기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소개하면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억지로 기뻐하고 미소 지으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먼저 우리의 심령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넘치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과 염려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심령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성령의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늘 우리 안에 구원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14. 웃는 얼굴

어떤 흑인 관광객이 조선호텔에 투숙했다.
그런데 호텔에 투숙해 있는 동안 호텔 보이가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그 흑인에게 시중을 잘 들었는지 아주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자기 나라로 가는 날, 웃는 얼굴의 보이를 부르더니 참 수고했다면서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 내놓고 호텔 보이에게 주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 돈의 액수를 우리 나라 돈으로 계산해 보았더니 이천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이었다.
그 보이는 웃는 얼굴과 친절 때문에 큰 돈을 벌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아 봤더니 흑인 관광객은 아프리카 어느 나라 황제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그러므로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갈라디아서 6:10)"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전서 5:16-18)

15. 화장은 지워진다

화장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었다고 한다.
자기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중세에는 마마 자국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했다.
서커스단의 도화사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피에로 화장을 한다.
아프리카나 뉴기니 원주민들은 전쟁을 할 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한다.
마치 카멜레온이 상대방과 싸울 때 붉은 색을 진하게 내는 것처럼 말이다.
화장을 하는 경우들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다져보면 남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집약된다.
화장을 잘 하면 얼굴의 결점도 감춰지고 더 아름답게 보인다.
화장은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남자 여자 가리 것 없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화장을 한다.
학벌, 가문, 지역, 돈 명예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화장 도구들을 사용한다.
그것으로 자기의 본성을 가리고 남 앞에서 멋진 사람으로 내보이고자 한다.
그러나 얼굴에서 화장이 지워질 때 추한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지워진 자국에서 차츰 드러나는 본래의 얼굴이 곱기는 어렵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화장을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화장은 언젠가 지워지게 마련이고 이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해도 하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지워질 것이다.
위조 화폐가 통용되지 않듯 하늘 나라에서는 거짓이나 위선이 통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나마 참 모습으로 살 수 없을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게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때때로 세상의 부귀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두고 부러워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시고, 제가 가진 작은 물질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할 용기와 지혜를 주옵소서.

16. 눈썹이 없는 여인

어디를 보나 나무랄 데가 없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한가지 숨겨진 큰 컴플렉스가 있다면 그것은 눈썹이 정말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이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어요.
남자도 여자에게 다정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었고 둘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놈의 눈썹 때문에 항상 불안했습니다.
일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여자는 자기만의 비밀을 지키면서 행여나 들키면 어쩌나... 그래서 남편이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따뜻하기만 한 남편의 눈길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는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년이란 세월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에게 예상치 않던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상승일로를 달리던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된거지요.
둘은 길거리고 내몰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오후였습니다.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리어카의 연탄재가 날아와 여자의 얼굴은 온통 검뎅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고 답답했지만 여자는 얼굴을 닦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자기의 비밀이 들켜버릴까봐요.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썹부분만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의 다른 부분을 모두 닦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눈물까지 다 닦아준 후 다정하게 웃으며 남편은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17. 얼굴의 연탄자국

어느 무더운 여름철에 연탄 장사가 교회 사택에 연탄을 싣고 와서 창고에 쌓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는 그것이 미안해서 남방셔츠를 벗어 놓고 같이 연탄을 날랐다. 그런데 이 날은 목회자들의 회의가 있는 날이었는데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그래서 급히 손을 씻고 남방셔츠를 다시 입고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시내를 활보하며 가는데, 행인들마다 힐끔힐끔 목사를 쳐다보았다. 회의장에 도착하니 친구 목사가 몇 명이 와 있었는데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이봐, 부업 차렸나?"
"부업이라니? 목사가 무슨 부업이야?"
그의 질문이 별로 듣기 좋은 말이 아니어서 퉁명스럽게 반문했다.
"아무래도 부업을 차린 듯한 증거가 보여서 하는 말이야."
"이봐, 농담이 지나치군. 무슨 증거가 보인 단 말이야?"
친구 목사는 거울을 가리키려 말했다.
"가서 거울 좀 보고 오게나"
그래서 거울을 보니 얼굴과 목 등에 검은 자국이 여기저기 나있었다.
연탄 만진 손으로 땀 을 씻었던 모양이었다.
목사는 그것을 보고 "거울을 미리 보고 왔더라면 이런 실수가 없었을 텐데..."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18. 당신의 얼굴이 바뀝니다  
출애굽기 34:29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얼굴이 정말 못 생긴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고상한 성품을 지녔지만 못생긴 자기 얼굴이 늘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티에 참석한 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첫눈에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녀 앞에 자신있게 나갈 수 없는 외모 때문에 여러 날을 망설였습니다.
고민 끝에 이 여인을 결코 놓칠 수 없음을 확신한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멋진 가면을 쓰고 청혼하였고 그녀는 남자의 고상한 분위기와 멋진 그 가면에 반해 청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는 결혼한 후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정성을 다해 아낌없이 바치며 사랑했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세심하게 모든 것을 배려하며 위로하는 멋진 남편이 되었습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내는 우연히 남편의 곤히 잠자는 모습을 보았고 남편의 얼굴이 이상함을 발견하고는 그 가면을 벗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못 생기고 추했던 남자의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놀랍게도 가면의 모습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 안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신비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에게도 창조의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그분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 안에 두신 그 신비한 능력이 내 삶을 창조합니다. 물론 죄악으로 인해 파괴되고 훼손된 것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 가능성은 내 안에 존재합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말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사십주야를 함께 했던 모세의 얼굴이 바뀌었습니다.감히 범접할 수 없는 광채가 모세의 얼굴을 휘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얼굴도 광채가 날 수 있습니다. 아니 완전히 얼굴이 바뀔 수 있습니다.삶도 말입니다. 퀴퀴한 냄새가 나고 어둡고 그늘진 내 인생에 하나님의 밝은 평강의 빛, 은혜의 빛, 축복의 빛이 내리쬐기를 기대합시다. 우리가 주 안에서 지향하는 것에 따라 주님은 분명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성실과 충성으로 최선을 다해 기도하는 대로 이끄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주여, 내 얼굴을 바꿔주소서. 그늘진 내 삶에 어둠을 몰아내주소서. 내 안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학중 목사(새안산교회)

19. 예수님의 얼굴

2차대전 말기 눈에 덮힌 중국의 오지를 의심에 잠긴 한 사나이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는 말 등에 실려, ‘오오 주여, 주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했으면 저는 믿겠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즉각 그의 마음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하여 이곳 저곳에 검은 땅이 나타나 보기에 흉한 들판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을 따라 그는 말에서 내려 그 장면을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하였을 때 거기에는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20. 어머니의 얼굴

선생님은 한동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엄마의 얼굴을 그리라고 했더니 왜 옆모습만 그렸니?"
"저... 사랑은 어떤 허물도 덮는다고 하셨죠?"
"그래서?"
"저의 엄마는 제가 실수로 쏟은 뜨거운 물에 얼굴 반쪽이 흉하게 일그러졌어요.
하지만 저를 원망하지 않아요.
제 눈엔 우리 엄마 얼굴이 이 그림처럼 아름다워요."

21.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예수 믿는 사람의 얼굴은 어떻게 생겨야할까?
만약 시험관으로 우리를 면접하신다면 합격할 수 있는 얼굴을 가져야하는데 어떤 얼굴이어야 하나?
불만과 불평, 찌그러진 얼굴이나 교만과 독선, 절망과 낙심, 위선과 거짓의 얼굴은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독한 얼굴이나 절망과 낙심으로 힘이 없는 얼굴이나 위선과 조그마한 유혹을 당해도 그곳으로 치우치고, 조그마한 고통을 당해도 예수님을 멀리하고, 낙심과 원망이 서려있는 얼굴을 좋아 하실리 없습니다.
신앙으로 무장한 유연하고 꿋꿋한 기상이 풍기는 얼굴을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합격시켜 주시지 않을까?
사람의 얼굴은 묘한 데가 있습니다.
거의 눈, 코, 귀가 같은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어딘가 조금씩은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얼굴이 그 사람을 대표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을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히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얼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언 15: 13)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산의 한 쪽에 강하고 위엄 있고도 친절하며 존경스럽게 보이는 그 얼굴을 매일 바라보며 기뻐하는 어네스트라는 소년이 그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마을에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년은 그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그 전설에 대하여 담소하고 있을 때 드디어 어떤 사람이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입니다."
우리가 진정 누굴 닮기 원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며 바라볼 때 우리도 그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닮아가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조금이라도 닮아 가는 일이 아닐까요,

23. 믿음의 얼굴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비둘기처럼 더불어 사는 게 아니라 공작새처럼 과시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외모를 과시하고 돈의 권력을 과시하며 명예에 굶주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얼굴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과거의 이력서요, 현재의 현황판이요, 오늘을 알리는 게시판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에 신앙이 나타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공작새의 깃털이든, 비둘기의 눈이든 무엇인가를 닮게 마련이겠죠.
비오는 날도 아름답게, 바람 부는 날도 감사하게 항상 주를 찬양할 수 있는 힘은 참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입니다.

24. 얼굴은 마음의 거울

영국의 과학잡지 뉴 사이언티스 최근호는 밝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잿빛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건강하다는 보고서를 게재,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조사된 건강실태의 경우, 북부 칼레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남부 피레네에 사는 주민들보다 소화계통의 암이나 간경변에 걸릴 확률이 3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자살 건수도 햇살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메이요 클리닉의 공동 설립자인 찰스 H. 메이요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심은 순환기관과 심장, 임파선 및 모든 신경계통에 영향을 주어 건강을 크게 해칩니다.
나는 지금까지 과로로 인하여 죽은 사람은 거의 못 보았지만 근심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은 많이 보았습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마음의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빛납니다. 멀리서 봐도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근심이 있는 사람은 얼굴이 어두워 보입니다.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있으면 심령이 상하며, 얼굴에도 어두운 그늘이 생기는 것입니다.

25. 얼굴은 마음의 창

링컨은 “사람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자신의 삶의 내용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된 링컨에게 하루는 한 친구가 어떤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링컨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거절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 진실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부모가 준 얼굴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지만 그 후 40년동안 자신이 살아간 삶의 내용에 따라 얼굴이 새로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얼굴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악의 얼굴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선하고 천사같고 천진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그 얼굴이 추해지고 일그러지고 욕심이 가득한 얼굴이 됩니다. 얼굴은 마음의 창입니다.

26. 얼굴이 빛나는 사람은

1.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2. 기분 좋은 일이 있는 사람이다.
3.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 약속이 있는 사람이다.
4. 남몰래 선한 일을 한 사람이다.
5.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다.
6.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7. 하나님의 사람이다.
8. 세상을 환하게 하는 사람이다.
9. 교회에 가고 있는 사람이다.
10.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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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2022(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 33:3) 

출애굽기 33장  / 모세의 중보 기도

33장 내용 구조

33:1-6. 동행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슬픈 고시와 이스라엘 자손의 근심 및 겸기(회개).
33:7-11. 회막에 들어간 모세.
33:12-17.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겠다는 언약의 갱신.
33:18-23.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한 모세의 기도와 그 응답.

흐르다(2100) 주브(zûwb) זוּב  

1. 흐르다,  2. 시편 78:20,  3. 레위기 15:25

발음 / 주브(zûwb)
관련 성경 / (물을) 내다(시 78:20), 흘러나다(시 105:41,사 48:21), 쇠약하다(애 4:9), 흐르다(출 3:8, 레 20:24, 겔 20:6), 유출하다(레15:19).
[명] 백탁병자(삼하 3:29), 유출(레 15:25),  유출병(레 15:2, 민 5:2).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이사야 64:8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하나님과 사람을 비유할 때 하나님은 토기장이, 사람은 진흙이라고 합니다.
질문을 하겠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려고 할 때 그 진흙을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진흙에 수분이 있을 동안만 그 진흙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신앙생활에 적용해보면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사람에게 영적 수분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애급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는데 약속의 땅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지라도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33장 내용 구조

      33:1-6. 하나님의 부정적 고지

      33:7-11. 회막으로 나가는 모세(장막 - 회막)


      33:12-17. 모세의 간구(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33:18-23. 모세의 기도(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the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출애굽기 33: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아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가나안 땅의 대명사

문자적 의미 /
목초지와 꽃과 화초가 무성한 땅

영적 의미 / 
일차적인 자연조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이 임하는 땅


창세기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시편 77:20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출애굽기 33:3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죄  때문에  함께 하지 않는다 

여호수아 7:12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33:4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죄를 슬퍼할 수 있는가?

출애굽기 3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출애굽기 33: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 


출애굽기 33:7b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오늘의 기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

주와 동행 365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새롭게





출애굽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중보 기도한 말씀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을 인터넷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란 말씀을 검색하였더니 모두 구약에서 19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4회), 레위기(1회), 민수기(1회), 신명기(6회), 여호수아(1회), 예레미야(2회), 에스겔(2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언약을 새롭게 맺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 가서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출애굽기 33:1-6,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 백성을 이끌고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고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거라.
내가 한 천사를 보낼 터이니, 그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나는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
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없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땅이 약속의 땅이 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데 무슨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참담한 말씀을 듣고 통곡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장식품을 몸에 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라.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다.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와 함께 올라가다 가는, 내가 너희를 아주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너희 몸에서 장식품을 떼어 버려라.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제 결정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호렙 산을 떠난 뒤로는 장식품을 달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3:7-11,
성막이 세워지지 전,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지 그 비결, 곧 모세의 회막 생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 바깥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는 그 장막을,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이라고 하였습니다.
‘회막’은 ‘임시 성막’이라고 보면 됩니다.
출애굽기 39, 40장에 이르러 성막이 완성됩니다.
성막이 있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던 곳입니다.

여호와를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 밖에 있는 이 회막으로 갔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갈 때마다 백성은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장막에서, 모세가 장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습니다.

모세가 장막에 들어서면, 구름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어귀에 서고, 주께서 모세와 말씀하십니다.
그 때, 백성은 구름기둥을 보면,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장막 어귀에서 엎드려 주를 경배하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눈의 아들이며 모세의 젊은 부관인 여호수아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왜 장막을 떠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가 모세의 후계자로 조금씩 부각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33:12-16,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다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뜻을 꺾으시고 친히 함께 가겠다고 응답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한 번 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 땅에 함께 가지 않으시면 가나안 땅에 가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이 행복입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길은 불행입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계셔서 축복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중에 16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본인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애굽기 33:17-23,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서 요청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인도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요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

우리가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새벽마다 일어나 오늘의 묵상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에 따라 하루의 삶을 시작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것입니다.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를 사모하라 

성도에게 가장 위험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신자를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스스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절하고 자기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 죽음과 파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로 반역한 백성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고(동행하시면 하나님의 공의는 그들을 진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천사를 보내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는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신이라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주면 되고, 성공하도록 이끌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성공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그러한 마음이라면, 너희가 원하는 대로 가나안 땅에는 들여보내주겠지만,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합니다(4).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습관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진 밖에 설치한 회막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본래 성막은 진중에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죄악 이후로 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을 덮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곳을 회막(會幕)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의 행동은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어,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들어간 것을 본 자들 중,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밖 회막으로 모세와 함께 나아갔고(7), 그를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8).

하나님의 역사는 거창한 캠페인이나 운동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을 앙모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모세는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나님을 만나던 사람입니다(11).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고 그 축복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 없는 성공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저주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구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모세를 수종들던 여호수아 역시 이 하나님 임재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회막을 떠나도 그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11).

모세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 성공을 위해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모세는 함께 하시는 은혜를 구했고(12~13), 이어서 백성들과 함께 가시는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15~16).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모두 승낙하셨습니다(14, 17).
특히 13절에 모세의 기도를 보십시오.
신자라면 누구라도 해야 할 기도의 내용입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이라는 것뿐입니다.
하다못해 성공으로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동행만이, 하나님 백성의 증거요, 표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응답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합니다(18).
이것은 인간이 지상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그는 이미 40일 40야를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과 율법과 계시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더 풍성하고 충만한 계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미 보았고 이미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이라도 맛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갈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 더 큰 은혜를 구합니다.
이런 은혜를 구하십시오.
더 큰 은혜를 구하십시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없는 성공과 축복을 미워하게 하시며, 비록 덜 성공하고 상황은 덜 만족스럽더라도,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인생되게 하옵소서.
돈 없어도,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 때문에 웃을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더 강력한 임재를 기다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금송아지 사건으로 비롯된 비극은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동행거부(同行拒否)’ 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3절).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미래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함께하시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경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마 자신들의 몸을 단장할 수 없었습니다(4절).
당시 장신구는 각종 형태의 신상들이 새겨져 있는 우상숭배의 상징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장신구들이 어떠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을 우상숭배의 범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의 장신구를 가지고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우상숭배 문화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금송아지 숭배로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또다시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몸에서 장신구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5절).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도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죄와 우상숭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경각심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언제든지 죄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요소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죄를 범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들은 각종 우상숭배와 더불어 세상의 음란하고 불건전한 문화에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눈에 띄지 않게 우리에게 슬며시 다가와 우리를 유혹해 죄악으로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했던 우상의 장신구는 없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7절에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회막’이란 ‘만남의 장소’ 라는 뜻으로 모세가 하나님께 경배하고 기도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곳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설치한 회막은 이스라엘 진중에 설치된 성막(민 2장)과 달리 이스라엘 진 밖에 설치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당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 막아서 회막이 이스라엘 진중이 아닌 진 밖에 설치되게 된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회막은 분명 이스라엘 진중에 설치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가 있는 곳에는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와 함께 거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기를 원한다면 우리 안에서 죄의 모습이 발견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만일 우리 안에 죄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교회 가운데 임재하시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교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교회는 여느 사회단체와 마찬가지로 단지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들의 모임이 교회로 불리는 것은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 스스로 성결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로서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의 사명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세와 하나님이 얼마나 친밀한 사이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모세와 하나님은 마치 친구가 만나 이야기하듯 서로 마주 보고 마음을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했습니다.
물론 이 만남은 직접 얼굴을 보고 만난 만남이 아니라 기도로서의 만남을 뜻합니다.

특히 우리는 모세의 기도가 자신의 말만 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장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회막을 지키며 관리하던 여호수아가 후에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자격이나 자질보다는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하나님과 가까이 거하기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장막의 일을 기꺼이 맡아 감당하는 신앙적 열정이 있는 사람이 교회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세상적인 능력을 많이 소유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넘치게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 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를 인격적으로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한 영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시 17:8, 9).

하나님과 이러한 만남을 갖는 사람은 어떤 일에 부딪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며,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습니까?
염려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결코 두려워하지도 염려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아시되 인격적으로 세세하게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하게 맡겨진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결단하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환경을 열어 주셔서 반드시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우리를 인격적으로 세세하게 아시는 그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생의 참된 승리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과 그들과의 사이를 갈랐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범죄한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킨 모세와 여호수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혹, 저희들에게도 이스라엘과 같은 죄악이 없는지 스스로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성령충만으로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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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2022(금) 목이 곧은 백성(출애굽기 32:9)  

출애굽기 32장  / 금송아지 사건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시내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아래에서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2장 내용 구조

    32:1-6. 백성의 배신(금송아지를 만들다)
    32:7-14.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첫번째 중보기도
    32:15-20. 모세의 하산과 분노
    32:21-24. 모세의 힐문과 아론의 변명
    32:25-29. 죄에 대한 모세의 조처
    32:30-35. 모세의 두번째 중보기도

목이 곧은 백성
They are a stiff-necked people
출애굽기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아멘

목이 곧은 백성
농부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소, 말을 일컫는 말
(성경) 고집 세고 악한 상태를 의미하는 관용어

이사야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신앙
출애굽기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주인이 누구인 줄 아는 신앙

출애굽기 3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출애굽기 32:11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언약을 확신하는 신앙

출애굽기 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주의 보혈을 믿는 신앙
출애굽기 32:20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출애굽기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오늘의 기도
오직 주만 믿고 따라가자! 

말씀과 기도로 새롭게
주와 동행 365

출애굽기 32:1-6,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 산에 갔는데 40일이 지났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불안했는지 아론에게 찾아가서 모세가 없으므로 이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상숭배에 길들여진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모세가 없을 때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요 초대 대제사장이 될 사람인데, 백성들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우상을 숭배하는데 앞장을 섭니다.
아론이 백성들에게 금 고리들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들을 다 모아서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아론이 금 고리를 녹여서 만든 금 송아지 상을 본 백성들이 뭐하고 소리를 쳤는지 아세요?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에 질세라 아론은 한술 더 뜹니다. 금 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아론이 백성들을 부추겨서 금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선언합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


출애굽기 32:7-14,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와 깊은 교제를 하시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7-10)


출애굽기 32:11-14,
하나님의 진노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그 결과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십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32:11-14)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설명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을 언급하면서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고 지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32:15-20,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모세가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받은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진 사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판 둘(십계명)을 손에 들고서 산에서 내려옵니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시고 제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던 모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홧김에 모세가 증거판(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산 아래로 집어 던진 게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고 생각하고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졌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다시 받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약 갱신’이라고 합니다.  

20절 말씀은 상당히 무서운 느낌이 드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금 송아지 우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우상숭배가 얼마나 큰 죄인지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대 근동의 자료들에 따르면 신들의 전쟁에서 상대방 신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의미로 신의 우상을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한 것도 우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출애굽기 32:21-24,
모세와 아론이 나눈 대화인데, 아론의 변명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형님은, 그들이 이렇게 큰 죄를 짓도록 그냥 놓아 두셨습니까?”

모세의 질문에 아론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합니다.

“아우님은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하게 된 까닭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나에게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인도하여 줄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모세라는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아론의 변명(출애굽기 32:4)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32:25-29,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편에 선 것

도륙하라(2026) 하라그 הָרַג

도륙하라(2026) 하라그  הָרַג     

1. 죽이다,  2. 창세기 4:8,  출애굽기 2:14, 시편 27:1

발음 / 하라그(hârag)

관련 성경 / 죽이다(창 4:23, 출 2:14, 시 10:8), 죽다(삿 9:54, 욥 20:16), 죽임을 당하다(왕상 18:12, 대상 7:21, 민 31:19), 살륙하다(느 4:11, 애 3:43, 합 1:17), 도륙하다(에 9:16, 출 32:27), 멸하다(창 20:4), 쳐죽이다(대하 24:25), 살인하다(호 9:13), 살륙을 당하다(겔 26:15, 애 2:20, 사 27:7), 죽음을 당하다(렘 18:21, 겔 37: 9), 살해당하다(사 26:21).
[명] 죽임(에 7:4), 주검(사 14:19).
구약 성경 / 167회 사용

모세는, 백성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론이 그들을 제멋대로 날뛰게 하여, 적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모세가 진 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였고,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편에 서겠다고 앞으로 나온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적들의 조롱거리가 된 자들을 심판했습니다. 그 날,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죽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에게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명령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에게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심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레위 지파 중에서 우상 숭배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2:29절에, 모세가 저마다 자녀와 형제자매를 희생시켜 자신을 여호와께 드린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가 죽인 3,000명 안에 레위 지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제사를 드려야 할 지파입니다. 그런데 아론과 더불어 레위 지파 사람들 일부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 스스로 악을 제거해야 하고,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지파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출애굽기 32:30-35,
모세가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속할까 하노라(3722) 카파르 כָּפַר

속할까 하노라(3722) 카파르  כָּפַר

1. 덮다,  2. 전면에 퍼지다, 3. 머리로 덮히다

발음 / 카파르(kâphar)

관련 성경 / 칠하다(창 6:14), 속죄하다(출 30:10, 신 32:49, 겔 45:17), 알다(사 47:11), 용서하다(겔 16:63), 마치다(단 9:24), 속량하다(신21:8), 풀다(창 32:20), 속죄하게 하다(레 17:11), 사하다(대하 30:18, 시 78:38), 폐하다(사 28:18).
[명] 속죄제(느 10:33, 겔 43:26), 속죄물(출 29:33).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이튿날 모세는 백성들이 지은 크나큰 죄를 지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께 가서 백성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기도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질 각오하고 드린 기도입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여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아론이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금송아지 사건에서 여호와의 편에 선 레위 자손이 자기 형제와 친구와 자기의 이웃을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는 철저하게 멸해야만 용서의 자리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멀리하려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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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2022(목) 공교한 일(출애굽기 31:4) 

출애굽기 31장  / 브살렐과 오홀리압 

공교한 일(4284) /  מַחֲשָׁבָה

1. 명상,  2. 공교한 일

발음 / 마하솨바(machăshâbâh) 

어원 / 28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창 6:5, 욥 21:27, 사 55:8), 방책(삼하 14:14), 의도(대상 28:9), 사상(시 33:10), 심중(대상 29:18), 양식(대하 2:14), 꾀(에8:3, 렘 18:18), 계교(욥 5:12, 잠 6:18), 경영(잠 15:22), 계책(렘 18:11, 49:30), 계획(렘 49:20, 잠 19:21),모략(단 11:24,25), 뜻(미 4:12), 정교한 일(출 31:4, 35:33, 35), 기술(출 35:32), 고안(대하 26:15), 경영하는 것(잠 16:3), 모해함[하는 것](애 3:60, 61).
[동] 꾀하다(에 8:5, 렘 11:19).
구약 성경 / 50회 사용

* 연구하다는 "하솨브"는 "생각해내다, 고안하다, 계산하다"는 뜻이다.
공교한 일이란 "마하솨바"는 "고안" "계획" 이란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안에서 지혜롭게 생각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아름답게 나타내야 한다
* 2803. חָשַׁב

1. 생각하다,  2. 생각해내다,  3. 악을 꾀하다

발음 / 하솨브(châshab) 

관련 성경 / 여기다(창 38:15), 생각하다(삼상 1:13, 시 73:16), 계수(計數)하다(레 25:27)

브살렐(Bezalel) :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
유다의 6대 손
유다 - 베레스 ㅡ 헤스론 - 갈렙 - 훌 - 우리 - 브살렐

오홀리압(Oholiab) : 아버지는 나의 장막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 = 숙련된 기술이 있는 자




출애굽기 31장부터 35장은 지혜로운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워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신 성막과 성막의 기구들을 제작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31:12-17, 안식일에 대한 말씀
31:18, 증거판 둘(십계명 두 돌판) 

출애굽기 31장 내용 분해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
31:12-17, 안식일(영원한 언약)
31:18, 하나님이 친히 쓰신 증거판 둘

출애굽기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브살렐과 오홀리압

보아라, 내가, 유다 지파 사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불러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겠다. 그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그 생각한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겠다.”(31:2-5)

분명히 나는,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브살렐과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리고 기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더하여,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겠다.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에 덮을 속죄소와 회막에 딸린 모든 기구와 상과 거기에 딸린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제사장 일을 할 때에 입는 잘 짠 옷, 곧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 아들들의 옷과 성별하는 기름과 성소에서 쓸 향기로운 향을,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대로 만들 것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한 눈에 보기

브살렐 /
유다 지파,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춤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깎아 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함

오홀리압 /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재능이 있음(출 38:23)
브살렐과 함께 일함
조각하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음

출애굽기 31:12-17,
안식일에 대한 말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제거될 것이다.

6일 동안은 일을 하고, 7일 째는 주께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6일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7일째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31:18,
증거판 둘에 관한 말씀

6일 동안은 일을 하고, 7일 째는 주께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6일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7일째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31:18,
증거판 둘에 관한 설명입니다.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하나님이 손수 돌 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증거판 두 개에 적힌 내용은 출애굽기 20장에서 살펴본 십계명이었습니다.
참고로, 출애굽기 32:15,16절에 보면, 두 증거판 앞뒤로 글자가 적혀 있다고 나옵니다.
돌 판 앞뒤로 동일한 계명을 기록했는지, 십계명을 돌 판 앞뒤에 나누어서 기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 기술자의 자격 조건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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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2022(수) 분향단(焚香壇)(출애굽기 30:1) 

출애굽기 30장  / 분향단, 속전, 물두멍, 관유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가로세로가 1규빗이고, 높이가 2규빗 정사각형이며, 네 모퉁이에 뿔이 있습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만들고,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를 꿰어 놓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1년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분향단의 뿔을 위하여 속죄하고 피를 바릅니다.


분향단(焚香壇)  / ‘미즈바흐 하케토레트’

출애굽기 30장분향단물두명, 관유향의 제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소에서 하나님께 드릴 향을 올려놓을 분향단에 대해서 소개합니다(1-10절).

분향단은 성소에서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향을 피우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의 진행과 제사 드리는 자들의 정성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 하는 의식인데, 그들은 향의 연기가 하늘에 상달될 때 자신들의 기도도 함께 상달된다고 믿었습니다.

‘분향단’은 히브리어 ‘미즈바흐 하케토레트’이며, ‘제단’을 뜻하는 ‘미즈베아흐’와 ‘분향, 제물의 향기로운 향기’를 뜻하는 ‘케토레트’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케토레트’는 히브리어 동사 ‘카타르’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동사는 ‘향기롭게 하다’(아 3:6), ‘불사르다’(레 6:22), ‘기름을 태우다’(삼상 2:16), ‘분향하다’(대하 26:18, 28:3)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분향단의 크기와 위치

1. 분향단은 장이 1규빗, 광이 1규빗, 고가 2규빗

출애굽기 30:1-2에서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 37:25).

2. 분향단은 네모 반듯합니다.

출애굽기 37:25에서 “네모 반듯하고”는 히브리어 ‘라바’로, ‘정방형(정사각형)으로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장 1규빗, 광 1규빗의 비교적 작은 정방형 제단입니다.
이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자세가 대신(對神), 대인(對人) 관계에서 반듯해야 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고(욥 22:21), 또 이웃과 화목한 후에 드리라는 의미입니다(마 5:24). 

3. 분향단은 “속죄소 맞은편”에 두었습니다.

출애굽기 40:5에 “또 금향단을 증거궤 앞에 두고 성막 문에 장을 달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소 안의 떡상과 등대가 마주하도록 한 것과 달리, 분향단은 독립적으로 지성소와 성소 사이 휘장 앞에 두었습니다.
출애굽기 30:6에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향단을 둘 자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도록 한 것은, 분향단과 속죄소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인구 조사를 통해 생명의 속전을 내게 하시고 그것으로 성막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11-16절).
놋으로 만든 물두멍은 회막과 단 사이에 있습니다(17-21절)
향유 제조법을 말씀하시며 일반인들은 만들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지하셨습니다(22-38절).


분향단은 성소의 중앙에 위치하고, 지성소 바로 앞에 있습니다.
분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위치합니다.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기를 사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입니다.
저녁에 등불을 켤 때에도 향을 사릅니다.

분향단도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정금으로 쌉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모두 뒤틀리고 가시가 많이 나 있는 조각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덮어주시고 감싸 안아주셔야만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분향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 2:14-15).
성경은 기도의 분향단에서 피우는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합니다(계 5:7,8; 8:3,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린도후서 2:14-15)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요한계시록 5:7,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요한계시록 8:3,4)


출애굽기 30:11-16절은 생명의 속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세어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합니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인데, 하나님께 올리는 예물입니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한 번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반 세겔을 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낸 생명의 속전은 회막을 수리하고 유지하는 비용으로 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 값을 대신하여 그들을 기억하여서 지켜 주십니다.


출애굽기 30:17-21, 물두멍

물두멍은 큰 대야와 같은 모양입니다.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데,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둡니다.
안 씻으면 죽습니다.




물두멍


물두멍의 재료는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듭니다.
왜 하필이면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 거울로 물두멍을 만들었을까요?
물두멍은 다른 성막 기구와 다르게 크기와 무게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두멍을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든 이유는 거울의 용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모습을 살피고 단정하게 하려고 거울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들도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 반드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두멍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사장은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물두멍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막 기구들과 달리 물두멍의 크기와 무게, 모양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와 크기, 그 깊이를 우리는 감히 잴 수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떤 말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0:22-38,
관유와 향을 만드는 법과 사용하는 방법

출애굽기 30:22-33. 관유에 대한 설명
출애굽기 30:34-38. 향에 대한 설명  
 


출애굽기 30:22-33
관유에 대한 말씀

성막에 사용하는 관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일 좋은 향품을 사용해야 합니다.

1. 순수한 몰약 500 세겔
2. 향기로운 육계 250 세겔
3. 향기로운 창포 250 세겔
4. 계피 500 세겔
5. 올리브 기름 한 힌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관유)을 만들어야 합니다.

관유를 어디에 사용할까요?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와 등잔대와 그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서, 이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가장 거룩한 것이 되며,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 기름을 발라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성별하는 데만 써야 하는 기름이다.
너희는 이것을 아무의 몸에나 부어서는 안 되며, 또 그것을 만드는 방법으로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가 거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게 섞어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거나, 그것을 다른 아무에게나 발라 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출애굽기 30:34-38,
향을 어떻게 만드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에 대한 말씀

먼저, 분향단에 사용할 향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과 섞되 저마다 같은 분량으로 섞습니다.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서 잘 섞은 다음에,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향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설명합니다.
향 중에서 그 가운데서 일부를 곱게 빻아서, 제사장이 하나님과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놓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십니다.
제사장들이 만들 유향은 주의 것이며, 거룩한 것입니다.
사사로이 쓰려고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나 백성 중에서 그 냄새를 즐기려고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치수가 나옵니다.
그런데 왜 물두멍은 치수가 나오지 않을까요?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를 말합니다.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누구도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물두멍에 대한 크기와 규모는 소개하지 않습니다.

분향단의 구속사적 교훈

1.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 분향단의 위치가 “속죄소 맞은편”인 것은 지속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30:6a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대제사장은 성소를 지나 휘장을 통과하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장소로 1년에 하루(7월 10일 대속죄일, 욤 키퍼) 대제사장이 들어가 백성의 모든 죄를 위하여 속죄하는 곳입니다(레 16:34, 히 9:7).
이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오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를 나타냅니다(히 5:6, 10, 6:20, 9:12, 10:11-12).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만나는 곳,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말씀하시는 곳’입니다(출 25:22, 29:42).
이는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대한 놀라운 교훈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분향단이 놓인 속죄소 맞은편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처소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은 하나님 보좌 우편, 곧 “위엄의 우편”입니다(히 1:3, 8:1).
그곳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중보기도의 자리입니다. 

둘째, 분향단을 속죄소 맞은편에 두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과 영광스러움을 알려 줍니다.

이 땅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흠모할 만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이 없고, 심지어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나(사 53:2-3), 본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요(빌 2:6), 보좌 가운데 계신 분이셨습니다(계 7:17).

성막 뜰의 “회막문 앞 번제단”(레 1:5, 4:18, 17:6)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해 주신 일을 상징하며,
회막 안 ‘속죄소 앞의 분향단’(출 30:6)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나타냅니다(행 2:33-36, 엡 1:20).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므로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셨습니다(엡 1:20-21). 

2. 성도의 거룩한 기도
- 지극히 거룩한 분향단에 지극히 거룩한 향이 있어야 함은 성도의 기도가 거룩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기도를 천사가 금향로에 담아 보좌 앞으로 가지고 올라갑니다(계 5:8, 8:3-5, 시 141:2).
지극히 거룩한 분향단에서 지극히 거룩한 향연을 올린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기도 습관에 큰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가 올리는 기도가 지극히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 그러한 기도가 얼마나 귀중하고 보배로우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암시합니다(히 9:4).
금 같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라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상달됩니다.
막연히 허공을 향해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결코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앞에 올라가지 못합니다(마 6:7).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올려야 합니다. 

3. 네 가지 향은 네 가지 유형의 기도 모범

①. 소합향의 기도

소합향은 햇빛을 받으면 분출되는 향입니다.
실로,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분출하는 소합향의 기도였습니다.
소합향을 얻는 나무에서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히 5:7).
우리 성도들도 소합향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소합향(stacte)

‘소합향’은 ‘스며 나오다, 새어 나오다, 방울방울 떨어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타프’에서 유래하여, ‘물방울, 향기로운 나무의 진’을 의미합니다(욥 36:27). 나무에서 진액이 떨어질 때 눈물 모양으로 나오며(잠 5:3, 아 5:13), 그 맛은 쓰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많이 자랍니다.

②. 나감향의 기도

나감향은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진 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 26:39, 42, 44).
소라나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 만든 나감향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완전히 부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신령한 나감향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우리 성도 역시 나감향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감향(onycha)

‘나감향’은 히브리어 ‘쉐헬레트’로, ‘껍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지중해나 홍해에서 사는 소라 혹은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로 만든 향입니다.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향 조개’입니다. 이 가루는 태울 때 진한 향을 내며, 다른 향품과 섞으면 그 향기를 더욱 진하게 하여 오래가도록 도와주며, 철저히 부수어질수록 향기를 더 발합니다(참고-출 30:34).

③. 풍자향의 기도

풍자향은 강한 향의 진액입니다.
풍자향처럼 진액을 짜듯 마음을 다 쏟는 기도가 될 때, 모든 죄와 질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한 통곡이었고 강물같이 쏟아지는 눈물이었습니다(히 5:7).
예수님께서 온 힘과 진액을 쏟아 기도하시는 순간,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도왔습니다(눅 22:43-44).
분명히 기도는 보통의 힘으로는 안 되는 영적 중노동이요, 피나는 투쟁입니다.
자신을 진액처럼 쏟아 재물이 되는 순간입니다(눅 22:44, 히 5:7).

풍자향(galbanum)

‘풍자향’은 히브리어 ‘헬베나’로, ‘풍성함, 기름짐, 비옥함’을 가리킵니다. 페룰라(ferula)식물의 줄기 밑부분에서 얻는 강한 향의 진액이며,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풍자향은 방부제 역할을 하며, 해충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④. 유향의 기도

유향은 ‘희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향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유향과 같이 깨끗한 기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도에는 단 1퍼센트도 인간의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기도도 예수님처럼 깨끗한 유향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유향(frankincense)

‘유향’은 히브리어로 ‘레보나’이며, ‘희다’(white)라는 뜻을 가진 ‘라반’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유향은 매우 귀한 향료로 알려졌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자생하는 유향나무(Boswellia trees)에 상처를 입혀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4. 분향단의 네 뿔은 기도의 힘과 권세를 상징

뿔은 힘과 능력과 권세의 상징입니다(신 33:17, 삼상 2:1, 10, 시 75:10, 89:17, 24, 92:10, 112:9, 148:14, 애 2:3, 겔 29:21, 암 6:13, 눅 1:69).
뿔 달린 짐승들을 보면 기(氣)가 살아 당당하며, 뿔을 높이 치켜들고 그 뿔을 흔들며 자랑합니다.
하지만 힘이 없으면 뿔을 들지 못하고 구석으로 도망칩니다.
적(敵)이 침범할 때 뿔로 들이받아서 자기 영역에서 몰아냅니다.
우리도 나의 생명을 해하거나 교회를 해롭게 하는 어둠의 세력이 공격해 올 때, 기도와 말씀의 권능의 뿔을 들고 싸워 이겨서 자신과 교회를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다니엘 7:7에서 넷째 짐승이 열 뿔을 가졌습니다.
붉은 용의 세력도 열 뿔을 가졌습니다(단 7:24, 계 12:3, 13:1, 17:3, 7, 12, 16).
사단의 뿔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이 죽기까지 마구 찌릅니다.
그것은 교만, 시기, 질투, 정욕, 허무, 두려움, 이기심 등입니다(마 15:19, 막 7:21-23, 엡 4:30-32).
이러한 사단 마귀의 뿔을 꺾고, 행악자들의 교만의 뿔을 잘라 버리고, 의인들이 뿔을 높이 들고 승리하는 비결은 믿음의 기도입니다(시 75:10).
바로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자기의 뿔을 높이 드는 것이 기도입니다(시 92:10).
금향로에 성도의 기도를 받아 올라간 천사가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을 때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났습니다(계 8:3-5).
이처럼 우리의 기도는 악한 세상을 심판하며 징계하는 권세와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앞에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자의 억울한 호소를 들으시고, 의인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고 악한 자를 징계하십니다(시 109:4, 마 5:44, 롬 12:19-20).
항상 깨어 기도하는 자만이 장차 올 모든 환난을 능히 피하고, 다시 오시는 인자 앞에 설 수 있습니다(눅 21:36).



분향단(altar of incense)은 지성소 입구의 휘장 앞, 즉 떡 상과 등대 중간 전면에 놓았다(출 30:6).
분향단은 금으로 입힌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고 이것은 휘장 앞에 놓여졌는데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막이다.
분향단은 정방형이었고 크기는 가로 1규빗(0.5m) 넓이 1규빗(0.5m) 높이 2규빗(1m)로 되어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향으로 아침과 밤마다 이 제단에서 분향을 해야 했다(출 30:7-8).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분향단의 뿔에 속죄제의 피를 뿌리며 속죄하는 시간을 가졌다(출 30:10).

분향은 기도를 상징하며(시 141:2, 계5:8) 우리에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가리키고 있다(요 17장, 막 14:32-42).

진설병과 유사하게도 분향단은 그 꼭대기 주위에 금관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히 2:9).
그러나 분향단은 기도의 장소이기 때문에 관과 기도는 왕적 제사장의 모습을 의미하고있다(히 9:4).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순서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었다(시 110:1, 히 7장).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와 함께 공감하실 수 있으시고 (히 4:15) 의와 평강의 왕으로써 그의 자비와 은혜를 공급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히 7:25, 4:16, 창 14:18).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자의 일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단 6:10,마 6:5-13).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고(살전 5:17) 감사함으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드리며,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깨어 구해야 한다(엡 6:18).
기도는 전투가 심하고 복음의 선교가 어려울수록 특히 더 중요해진다(엡 6:19).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분향단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더 풍부한 향을 부어 주실 것이다.
그 향은 우리가 그 분의 뜻대로 구할 때에 그 분에게 올라가고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다(계 8:3-4).

언약궤는 하나님의 집이고, 그 분의 거처이자(출 25:8-9),
그리스도와 교회 모두의 모형이다(골 2:9, 딤전 3:15,  엡 2:21-22).
그것은 그 분의 집이 "모든 열방을 위한 기도의 집"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열망이다(사 56:7).

분향단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피가 먼저 충당되어야 한다는 것이고(레 4:7).
그 피는 속죄의 피다.
그러므로 그 향은 그 아들의 이름에 대한 참 지식과 경험으로 예비되어져야 한다.
- 그의 순결, 거룩, 순종,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존이다.
그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그가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분향단에서 사용되어지는 향(출 30:34-38)

분향단에서 사용되는 향은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을 섞고 소금을 넣어서 향으로 피워졌다.
소금은 언약의 상징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약속한다(레 2:13).
소햡향은 향나무의 향이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의미한다.
나감향은 조개를 빻고 찧어서 얻어지는 향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한다.
풍자향은 고무나무에서 나오는 소독약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한다.
유향은 죽은 시체에 바르는 향유로 고약한 냄새를 없애주는 향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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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2022(화) 직분 위임(출애굽기 29:1) 

출애굽기 29장  / 대제사장의 위임식

제사장 위임식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릴 제사장들이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입니다.
실제로 레위기 8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한 제사장 직분 위임식을 행합니다. 본문에서는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모세가 무엇을 준비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위임식(밀루) / 구약 11회 - 출애굽기 6회(29:22, 26, 27, 31, 34, 35)
                                          레위기 5회(8:22, 28, 29, 31, 33)

위임식(4394) מִלֻּא

1. 완성,  2. 박음,  3. 봉헌

발음 / 밀루(millûʼ)
어원 / 43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동] 물리다(출 25:7, 35:9), 가공하다(대상 29:2).
                  [명] 위임식(출 29:22, 레 8:22, 33, 레 7:37).
구약 성경 / 5회 사용
* 4390. מָלֵא 

1. 타동사 채우다,  2. 창세기 1:22,  3. 출애굽기 16:32

발음 / 마래(mâlêʼ)
관련 성경 / 가득하다(창 6:13, 삿 16:27, 사 1:15), 차다(창 29:21, 레 12:4, 사 30:27), 충만하다(출 40:34, 시 33:5, 사 11:9), 넘치다(수3:15, 겔 23: 33),품다(에 7:5), 강장하다(욥 20:11), 담대하다(전 8:11), 채우다(출 15:9, 사 27:6, 렘 19:4), 끝나다(사 40:2), 다하다(왕하9:24, 에 1:5, 애 4:18), 마치다(레 8:33, 에 2:12, 렘 25:12), 풍족하다(욥 20:22), 헌신하다(출 32:29), 걸리다(창 50:3), 지나다(출 7:25), 가지다(삼하 23:7),구비하다(왕상 7:14), 풍부하다(겔 27:25), 물리다(출 28:17, 31:5), 거룩하게 하다(출 28:41), 위임되다(레 21:10), 담다(수9:13), 확증하다(왕상 1:14), 이루다(왕상 8:15, 대하 6:4), 드리다(대하 29:31, 삼상 18:27), 부요하다(사 23:2), 만족하게 하다(렘 31:25), 먹이다(슥 9:13), 위임받다(출 29:29), 위임하다(출 29:33), 응하게 하다(왕상 2:27), 받다(대하 13:9), 지내다(대하 36:21), 모이다(렘 4:5), 움키다(겔 10:2), 메우다(창 26:15), 채우다(레 9:17), 자원하다(왕상 13:33), 찌르다(욥 41:7), 가득하다(시 80:9), 거룩하게 구별하다(민3:3, 삿 17:12), 가득하게 하다(렘 51:14), 위임식을행하다(출  29:35, 레 8:33).
[부] 매우(에 3:5), 온전히(민 32: 12, 신 1:36, 수 14:14).
구약 성경 / 250회 사용

출애굽기 29:1-3,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기본적으로 준비할 것들

1. 수송아지 한 마리
2. 숫양 두 마리(흠 없는 것)
3. 누룩을 넣지 않은 빵
4.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
5.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모두 고운 밀가루로 만들기)

이 모든 것들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출애굽기 29:4-9, 제사장 위임식 순서

1.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리고 와서 목욕을 하게 하라
2. 제사장 옷을 가져다가,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과 흉패를 달고, 정교하게 짠 에봇 띠를 띠게 하여라
3.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에 ‘여호와께 성결’ 금패를 붙여라
4. 거룩하게 구별하는 데 쓰는 기름을 가져다가, 그의 머리 위에 부어,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라
5.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속옷을 입게 하고, 띠를 띠게 하고, 머리에 두건을 감게 하라.

이런 절차를 통해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라. 이것이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여라

출애굽기 29:10-14,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 속죄제에 대한 설명 

준비한 흠 없는 수송아지를 하나님께 속죄제물로 드립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모세가 할 일입니다.

모세가 수소를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수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게 한 다음에, 회막 어귀 주 앞에서 그 수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소의 피를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제단 밑에 부어야 합니다.

내장을 덮은 모든 기름기와 간에 붙은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과 거기에 붙은 기름기를 떼어 내서 제단 위에서 살라 바쳐야 합니다.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바깥에서 불에 태워야 합니다. 모세가 할 일이 엄청납니다.

출애굽기 29:15-18,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번제에 대한 설명

준비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는데, 역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뿐이고, 모든 일은 모세의 몫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주고, 그 숫양의 머리 위에 그들의 손을 얹게 한 다음에, 그 숫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합니다. 그 숫양의 각을 뜬 다음에, 내장과 다리는 씻어서 각을 뜬 고기와 머리 위에 얹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숫양 전체를 제단 위에서 통째로 살라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 드리는 번제이며, 이것이 바로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살라 바치는 제물입니다.


출애굽기 29:19-21, 피와 관유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예식

한 마리 남아 있는 숫양의 피과 관유를 가지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른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놓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게 합니다.
2. 그 숫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아론의 오른쪽 귓불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불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도 발라야 합니다.
3. 남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합니다.
4. 제단 위에 있는 피와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을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 위에 뿌리고, 아론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 위에 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이 거룩하게 됩니다.


이 절차를 통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피로 붉게 물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덮어 주심으로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브리서 9:13,14)


출애굽기 29:22-25,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화제와 요제에 대한 설명

숫양에서 기름기와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기와 간에 붙은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과 그것을 덮은 기름기를 떼어 내고, 오른쪽 넓적다리를 잘라 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사장을 위임하는 의식에서 쓸 것인데, 요제를 드린 후에 불태워 드릴 번제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둔 광주리에서, 빵 한 덩이와 기름을 섞어서 만든 과자 한 개와 속 빈 과자 한 개를 가져다가,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얹어 주어, 그것으로 주 앞에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드리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흔들어 드리는 제사가 바로 요제입니다.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다가, 제단의 번제물 위에 놓고 불살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주께 살라 바치는 제물, 화제입니다.

출애굽기 29:26-28,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과 거제물에 대한 설명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에 쓸 숫양에서 가슴을 떼어, 주께 흔들어 바치는 예식을 하고 나서, 그것은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본문에서는 모세의 몫이 되는 거구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에 쓴 숫양 고기 가운데서 흔들어 바친 것(요제)과 들어올려 바친 것(거제), 곧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올려 바친 넓적다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들어올려 바친 제물(거제물)이므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분깃입니다.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 제물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화목제물로 주께 들어올려 바친 제물입니다.


출애굽기 29:29-30, 아론의 성의(대제사장의 옷)에 대한 설명 

아론의 거룩한 옷은 그의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서, 그들이 제사장 위임식 때에 그것을 입고 기름부음을 받게 하여야 합니다. 아론의 아들 가운데서, 그의 제사장직을 이어받고 회막에 들어가서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사람은, 일주일 동안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대제사장 옷


출애굽기 29:31-34절은 제사장 위임식 식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제사장 위임식 때에 드린 숫양의 살코기를 가져다가, 거룩한 곳에서 삶아야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 어귀에서 바로 이 숫양의 살코기와 광주리에 든 빵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우고 속죄의 제물로 바친 것이므로, 그들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먹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의 살코기나 빵이 이튿날 아침까지 남아 있거든, 너는 그 남은 것을 불에 태워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므로, 남은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29:35-37,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속죄제에 대한 설명

일주일 동안 제사장 위임식이 진행되는데, 매일 속죄제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날마다 수송아지 한 마리씩을 바쳐서, 죄를 속하는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제단 위에 속죄제물을 드려서, 그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서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제단 위에 속죄제물을 드려서,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제단은 가장 거룩하게 되고, 그 제단에 닿는 것도 모두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9:38-42,  제사장이 매일 하나님께 드릴 번제에 대한 설명

매일 1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는데, 아침에 한 마리, 저녁에 한 마리 드립니다.
한 어린 양에 고운 가루 10분의 1에바(약 2.2리터)와 찧은 기름 4분의 1힌(약 900그램)을 같이 드립니다.
번제를 드릴 때, 소제와 전제를 함께 드립니다.


출애굽기 29:43-46,  제사장 위임식 결론 

왜 매일 번제를 드려야 하는지, 왜 제사장이 필요한 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날 것이다. 거기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어 그 곳이 거룩한 곳이 되게 하겠다. 내가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겠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이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20장).
출애굽기 2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 언약을 맺습니다.
25장부터 27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지시한 성막 제작에 관한 규례가 나오고 28장에는 제사장에 관한 규례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할 제사장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지명하고 있습니다.
29장은 제사장 위임식에 관한 규례가 나오는데 이는 제사장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는 의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제사장 위임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제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5대 제사가 있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데 그 종류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제사장 위임에 필요한 제사로 속죄제, 번제, 그리고 화목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제사 이외에도 화제, 거제, 요제, 그리고 전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화제, 거제, 그리고 요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니라 제사 방법에 해당됩니다.
화제는 불로 태우는 제사이고,
거제는 제사장이 두 손으로 제물을 들어서 제사하는 방법이고,
요제는 제사장이 제물을 흔들어 제사하는 방법이고,
전제는 포도주와 같은 액체를 부어서 제사하는 방법입니다.

29장에는 제사장 위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사의 종류와 제사의 방법이 언급되어 있는데 중요한 점은 상세한 제사 규례가 아니라 이런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다음으로 제사장의 옷을 만들게 하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사장을 위임하고 성결케 하는 의식을 하셨는데 이 위임식을 통해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29장 마지막 45절 46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을 맺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수 있도록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심과 홍해의 기적을 베푸신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이 참 신이며 여호와임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10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평하는 습성을 아시고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제의 기적도 오래 가지 않아서 오늘에 직면하는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불평했습니다.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함에 대한 불평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마름에 대한 불평과 고기를 먹지 못함에 대한 불평에도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해결만으로 하나님을 찾고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속성을 고려하면 오래가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과 같은 특별한 장소에서 모세와 같은 중재자를 불러 현현하여 자신의 살아계심과 여호와이심을 알리시기보다 인간의 입장을 고려하여 좀 더 쉽고 편안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어 먼저 찾아오시며 은혜를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제사 역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광야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회막에서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말씀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인 만남과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알게 되고, 구원자임을 잊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을 잊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석 자를 잊게 된다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기적보다 하나님을 만날 장소에서 만나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남의 장소로 가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만남의 장소에 있다고 하더라고 인간이 거룩해지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만나지 못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위임에 필요한 3종류의 제사를 언급하면서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9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위임의 목적은 ‘거룩’입니다.
이러한 제사들은 나중에 레위기에서도 언급되는데 일반인인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적용됩니다.

먼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거룩해야 합니다.

첫째, 안수하라

거룩해지는 절차로 안수가 있습니다.

29장에 언급된 3가지 제사인 속죄제, 번제, 화목제는 수송아지와 숫양을 제물로 바치는데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수송아지나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특이한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안수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안수는 주로 사람에게 합니다.

이를테면 직분을 위임할 때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의 특징을 보면, 안수를 함으로써 안수받는 자가 안수자로부터 권위와 직분과 능력을 받게 됩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에서 볼 수 있듯이 안수받는 자의 병이 치유되거나 성령을 받게 됩니다(막 6:5, 행 8:18, 행 28:8). 이처럼 안수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구약의 제사법을 보면 사람이 아니라 제물인 동물에 안수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과 달리 권위와 직분과 능력의 전가가 아니라 죄의 전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제물로 전가되도록 하는 의식입니다.
이것 역시 거룩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피를 뿌리라

제물의 피를 사람과 사람의 옷에다 뿌리는 것입니다.
동물의 피가 사람의 몸과 제사장의 옷에 뿌려지게 되면 상식적으로는 그 몸과 그 의복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피비린내와 피로 얼룩지게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21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과 그들의 옷이 거룩하리라고 하셨겠습니까?

거기에는 의식의 중요성보다 의식을 통해서 그 의식이 의미하는 바를 알도록 하는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드리는 자가 그 의도를 알기 원하십니다.
죄의 전가와 속죄의 피의 의미를 아는 것이 제사하는 자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거룩해야 할 대상이 제사드리는 사람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제물이 거룩해야 하고 제단이 거룩해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숫양의 가슴과 넓적다리를 요제를 통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6, 37절에서는 제단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단과 제물과 제사드리는 자,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피비린내 나는 제사를 제단에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단 번에 화목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가지고 나아가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거룩해 질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오늘도 여호와의 이름을 잊지 않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단 번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저희들을 속죄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피로 거룩해짐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어떤 기적보다도 기도를 통하여 은밀하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제사장 위임을 위한 예식(1-37)

하나님은 제사장 직분을 위하여 모세에게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 무교병과 과자와 무교 전병을 가져오고 성막 뜰로 들어와 거기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만나 물로 씻고 대제사장의 옷을 입게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그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아론의 아들들은 기름부음을 받진 않았지만 속옷과 때를 포함하는 제사장의 복장을 갖추어 입었습니다(1-9).

아론은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릴 때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제단에 드려졌습니다. 이 의식을 통해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인 됨과 피로 씻음의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매년 대속죄일에 제사장들은 씻음을 받았으며 피의 일부는 번제단 뿔에 발랐고, 나머지는 단 밑에 쏟았습니다(10-14). 

두번 째로 숫양 둘 중 하나를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 번제는 제단 위에서 전부를 태워드림으로 제사장으로 위임받는 사람이 자기 전체를 다 드려 그 직무에 임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15-18).

다른 숫양으로는 세 번째 희생을 드리되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정결하고 성별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귀뿌리의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의 성별을 상징하며, 엄지 손가락의 피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의 거룩성을 묘사하고 엄지 발가락의 피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숫양의 피는 단 주위에 그리고 관유와 함께 제사장들과 그들의 옷에 뿌려야 했습니다(19-21).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로 화목제의 본질은 제물의 일부를 경배자가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되고, 이 제사의 일부를 '요제'로 드려졌는데 그 제물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강조하는 의식 행위였습니다. 숫양의 가슴은 요제로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먹어야 할 몫입니다. 그리고 칠 일 동안의 성별식에서 아론의 대제사장의 성의는 그를 계승한 아들에게 주어지고 다음 세대까지 계속 전달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회막 문에서 먹어야 할 위임식 숫양의 먹는 부분에 대해서 지시하고 이 경우 숫양과 떡은 매우 거룩한 성질의 식사로서 남은 것은 모두 태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은 칠 일 동안 행해졌는데 매일 속죄제로 수송아지 하나를 드렸습니다(22-37).

2) 매일 드려야 하는 번제(38-46)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소제(밀가루와 기름)와 전제(포도주)와 함께 어린 양은 아침과 저녁에 한 마리씩 드려야 했습니다(38-41).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의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거기서 만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2-46).

주께서 주신 오늘! 자신을 성별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에 흠 없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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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2022(월) 제사장 직분(출애굽기 28:3)

출애굽기 28장  /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 것

28:1-43.

1절,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 것
2-5절, 제사장의 예복이 될 거룩한 옷을 지을 것
6-14절, 에봇과 띠 및 견대
15-30절, 흉패
31-35절, 에봇 받침 겉옷
36-38절, 패
39절,  속옷, 관, 띠
40-43절,  아론의 아들들의 복장과 그들의 성별

3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마음에 지혜있는 자(하크메 레브)

- '지혜'를 의미하는 '하크모트' '마음'을 가리키는 '레브'가 합하여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하크모트' 혹은 '호크마' '지혜'라는 뜻 이전에 '솜씨좋음', '능숙함'이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데 참여한 '지혜있는 자'란 곧 뛰어난 재단 기술과 바느질 솜씨를 지닌 기술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NEB는 이를 '기술자'(craftsman)로 번역했는데, 가정이나 조직을 통해 기술을 전수받던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특별한 기술은 곧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졌다(사 28:24-29).
그러나 그러한 기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재능과 학문등도 모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

- 여기서 '지혜의 영'(루아흐 호크마)이란 곧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했는데 왕이나(삼상 16:13), 선지자(삼상 19:20), 사사(삿 3:9; 6:34), 제사장(레 4:3, 5, 16; 6:22) 등이 바로 그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들은 모두가 특별한 일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약 시대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며 또한 내재하신다(요 14:16, 17; 롬 8:9; 고전 3:16).



출애굽기 25장부터 27장은 성막 제작에 관한 특별 규례를 소개합니다.
28장에서는 제사장에 관한 규례를 소개하며 하나님께서는 아론 가문을 제사장으로 직접 선택하시고(1-5절) 그들에게 입힐 에봇과 띠, 판결 흉패, 겉옷 등에 관한 규례를 자세히 알려 주셨습니다(6-43절).

백성들의 죄에 대한 중보적 역할을 담당하는 제사장들에 대해 이처럼 세심하게 명령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준다.

성막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본장에서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직분과 제사장이 갖추어야 할 복장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특별했고 거룩한 옷이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성막에서 섬김으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아론과 그의 네 아들들이었습니다.
후에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으므로 아론계 제사직이 그의 두 어린 아들 즉,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다양한 직무를 담당했습니다.
매일 두 번씩 금 제단에 향을 피우는 일, 등대와 임재의 떡 상을 유지하는 일, 번제 단 위에서 희생을 드리는 일과 백성에게 축복을 비는 일 등의 직무를 해야 했습니다.
덧붙여 그들은 민사 판결을 주관하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전쟁시에는 용기를 북돋웠습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생활은 성막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었고 제사장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 하나님의 심판(예레미야 10:1-2)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b. 제사장(레위기 l: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 / 카한(3547)  כָּהַן 

1. 예시하다,  2. 사제가 되다,  3.  피엘형 כִּהֵןהֵן
발음 / 카한(kâhan)

관련 성경 /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출 28:41, 겔 44:13), 제사장이 되다(호 4:6), 제사장 직을 행하다(출 31:10, 39:41)
구약 성경 / 23회 사용

제사장 코헨(3548) כֹּהֵן

1. 제사장,  2. 대제사장,  3. 왕 

발음 / 코헨(kôhên)
관련 성경 / 제사장(창 14:18, 레 14:18, 대하 31:19, 스 6:9, 7:12, 24)
구약 성경 / 752회 사용
대제사장의 예복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직의 영광과 거룩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구속 사역을 나타내시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특별한 옷을 입도록 명령하셨다.
대제사장이 입는 예복은 ‘흉패, 에봇, 겉옷, 반포 속옷, 관, 띠’와(출 28:4), ‘고의’(출 28:42)가 있다.
‘반포 속옷, 띠, 관, 고의’는 일반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공통으로 입는 옷이지만, 특별 제작된 ‘에봇, 에봇 띠, 겉옷, 흉패’는 오직 대제사장만 입을 수 있다.

제사장 및 대제사장의 예복의 특징을 그림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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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의

linen breeches, 미크나스

출 28:42, 39:28, 레 6:10, 16:4

제사장의 예복 중에 살에 가장 가까운 데 입는 옷으로, 대제사장의 하체를 가리기 위해 입는다. 가는 베실로 짠 세마포로 된 속바지로, 길이는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고쟁이’에 가깝다.

2. 속옷

tunic, 케토네트

출 28:39-40, 29:5, 8, 39:27, 레 6:10, 8:7, 13

겉옷 안에 살에 닿게 입는 통으로 된 옷으로,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오며 길이는 발뒷꿈치까지 내려온다. 가는 베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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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속옷) 띠

sash, 아브네트

출 28:39, 39:29, 레 8:7, 13

위에서 아래까지 통으로 짜인 속옷은 매우 헐렁하기 때문에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띠를 띤다.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 만들었으며, 가슴에서 한 바퀴 돌려서 묶고 발목까지 길게 늘어지게 했다.

4. 에봇 받침 겉옷

the robe of the ephod, 메일 하에포드 

출 28:31-35, 29:5, 39:22-26, 레 8:7

하얀 속옷 위에 입는 에봇 받침 겉옷은 청색 실로 짜인 통옷으로 옷 전체가 청색이다.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목테두리로 돌아가면서 깃을 짜서 입고 벗을 때 해지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했다. 겉옷의 가장자리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놓아 만들고 정금으로 방울을 만들어, 석류 사이사이에 금방울을 일정한 간격으로 달도록 했다.


5. 관

일반 제사장이 쓰는 관과 대제사장의 관은 모두 가는 베실로 만들지만 형태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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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일반 제사장의 관

미그바아

출 28:40, 29:9, 39:28, 레 8:13 

산처럼 위쪽이 불룩하게 솟아 있는 모양의 관이다.

② 대제사장의 관

미츠네페트

출 28:39-40, 29:6, 39:28,

레 8:9, 슥 3:5 

터번 형태로 빙빙 돌려가며 짜서 꿰맨 두건(turban) 모양이었다.

또한 금으로 만들고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쓴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앞에 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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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에봇
ephod, 에봇
출 28:6-14, 29:5, 39:2-7, 레 8:7

대제사장이 그 직분을 행할 때 입는 거룩한 옷 중의 하나로, 에봇 받침 겉옷 위에 입는다.
소매가 없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앞치마 같은 모양의 옷이다.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 및 가늘게 꼰 베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었다.
앞판과 뒷판이 견대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깨 견대에는 호마노 두 개가 각각 붙어 있다.

7. 에봇 띠
skillfully woven bandof ephod, 헤쉐브 아푸다 
출 28:8, 29:5, 39:5, 레 8:7

에봇 위에 매는 띠로, 허리에 감아 앞에서 묶게 되어 있다. 가는 베실,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로 짠다.

8. 판결 흉패
breastpiece of judgement, 호쉔 미쉬파트
출 28:15-30, 29:5, 39:8-21,레 8:8

에봇 위의 가슴 부분에 붙이는 큰 패를 가리킨다.
흉패는 가로 세로가 한 뼘 길이(반 규빗, 약 22.5cm)이의 네모 반듯한 형태로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었고, 두 겹이었다.
한 겹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을 달고, 다른 한 겹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었다.
흉패 위쪽은 금사슬에 매어 대제사장의 어깨의 두 견대에 붙어있는 호마노 금테에 고정시키고, 아래쪽은 청색 끈으로 대제사장의 에봇 허리띠에 매어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제사장의 에봇 ( 28:6-14 )

대제사장이 제일 겉에 입었던 에봇에 관한 지시가 주어지고 있다.
하급 제사장들은 세마포로 만들어진 에봇을 입었다(삼상 22:8).
사무엘은 어렸을 때(삼상 2:18), 또한 다윗은 법궤 앞에서 춤을 출 때 이 세마포 에봇을 입었다(삼하 6:14).
그러나 대제사장이 입었던 에봇만은 '금 에봇'으로 불렸다.
왜냐하면 많은 금실을 섞어 그것을 짰기 때문이었다.
이 에봇은 소매없는 짧은 상의로서 단추로 옷을 채우게 되어 있었으며 동일한 재료로 공교하게 만들어진 띠가 달려 있었다(6-7절).
또한 두 개의 견대가 있어 한 어깨에 하나씩 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두 개의 보석이 각 견대에 하나씩 금테에 물리워 부착되어 있었다(9-12절).


겉옷 אַדֶּרֶת (아데레트)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났을 때 “겉옷”을 던졌다(왕상19:19, 새번역 외투). 이 때 “겉옷”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אַדֶּרֶת (아데레트)이다. 헬라어로는 μηλωτή (멜로테)이다.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멜로테’는 수도원의 수사들이 입는 옷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이 단어는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매우 교묘한 용어이기 때문에 좀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작은 미세한 소리 속에 계시는 야훼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운 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왕상19:13). 엘리야는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것은 예언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별한 옷이었다.

스가랴는 거짓예언자를 꾸짖었는데 “그 날이 오면, 어느 예언자라도 자기가 예언자 행세를 하거나 계시를 본 것을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예언자처럼 보이려고 걸치는 그 거친 털옷(아데레트)도 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슥13:4). 아데레트는 예언자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깨로부터 걸치는 망토와 같이 생긴 겉옷이었을 것이다. 이것을 한글 역본들은 “털옷”, “외투”, “겉옷”, “왕복/어의/임금의 옷”, 따위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아데레트는 염소나 양의 털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털옷”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에서가 태어났을 때 “전신이 털옷 같았다”고 묘사할 때 이 단어 ‘아데레트’를 사용했다(창25:25).

본디 אַדֶּרֶת (아데레트)는 “영광/광휘/존귀”를 의미하였다. אַדֶּרֶת (아데레트)는 여성명사 연계형인데 남성명사로는 אֶדֶר (에데르)가 있다. 이 단어의 동사 אָדַר (아다르)는 ‘넓다/위대하다/존귀하다’란 뜻으로 쓰이는데 성경에서 니팔형으로 두 번, 히필형으로 한 번, 도합 세 차례만 언급된다. 출애굽기 15장에 ‘바다의 노래’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이 동사는 니팔형으로 야훼의 위대함을 가리켜 두 차례 사용되고 있다(출15:6, 11). 이 동사는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는 상태동사이다. 이 동사에서 남성명사 ‘에데르’와 여성명사 ‘아데레트’가 파생한 듯하다.

대부분 ‘겉옷’이라고 번역된 여성명사 ‘아데레트’는 야훼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슥11:3). 이 단어는 본디 하나님의 영광이나 왕이나 귀족과 같은 존귀한 신분을 묘사한 것이었을 것이다(욘3:6). 여호수아가 여리고 도성을 함락했을 때 아간이 금과 은과 시날 산 “외투”(아데레트)를 숨겼는데 이 ‘아데레트’는 바벨론에서 수입한 최고급 옷으로서 여리고 도성의 왕이 입고 있던 왕복이었을 수도 있다(수7:21, 24).

‘영광’이나 ‘존귀’란 말뜻이 어떻게 ‘겉옷’이란 뜻으로도 발전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중요한 단서는 스가랴 13장 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슥13:4). 예언자들이 자신의 존귀한 신분을 나타내려고 염소털로 망토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존귀함과 영광을 나타냈던 것 같다. 엘리야는 본디 디셉(티스베)에서 농사짓는 농부였는데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염소털로 망토를 지어서 어깨에 걸치고 다녔던 것 같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신현현의 체험을 하였을 때 야훼로부터 세 가지 분부를 받는다. 이 중 하나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이다. “아벨므홀라 출신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왕상19:16 새번역). 이 명령에 의하면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났을 때 겉옷을 툭 던진다. 왜 기름을 붓지 않고 겉옷을 던졌을까? 제자로 삼으려면 기름을 붓지 않았어도 좀더 예식을 갖추어 엘리사에게 겉옷을 입혀주는 정중함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엘리야가 승천하는 장면에서도 이상한 모습이 보인다. 그토록 열심히 따라 다니던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승천하면서 하늘에서 겉옷을 떨어뜨려 준다. 엄숙하게 망또를 입혀주면서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장면은 찾아 볼 수 없다. 예언자가 걸치던 겉옷을 제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고대의 일반적인 관례였음을 이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주께서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제자로 삼되, 그 제자 엘리사로 하여금 우상숭배자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예후의 칼날을 피한 자들을 모조리 다 죽이는 사명이 엘리사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어라는 명령을 받았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왕상19:19), 기름을 붓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예언자의 “겉옷”(아데레트)를 툭 던졌다. 엘리야는 승천하면서 끝까지 따라온 엘리사에게 “겉옷”(아데레트)을 마지막으로 툭 던져 주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석 전통과는 매우 다르다. 스승 엘리야의 능력을 갑절로 구한 엘리사에게 성령의 능력이 갑절로 임하였다는 이해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엘리야의 겉옷에 관한 묵상을 바르게 하려면 열왕기상 16장부터 열왕기하 1장에 걸쳐있는 매우 장황한 엘리야-엘리사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더욱 깊이 세밀하게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엘리야는 야훼로부터 세가지 분부를 받았으나(왕상19장), 이 중 한 가지도 이행하지 않았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붓지도 않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붓지도 않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지도 않았다. 호렙산 동굴에서 변화를 받은 엘리야의 사상과 마음을 이 겉옷이란 모티프를 통해서 신명기사가는 지극히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반포 속옷

반포(班布)는 반물(검은 빛을 띠는 남색) 빛의 실과 흰 실을 섞어 짠 띠나 수건 감의 폭이 좁은 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속옷’이란 표현과 같이 사용 되는데, 수 놓은 옷, 체크 무늬 옷, 섞어 짠 옷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28장 요약

제사장의 옷은 흉패, 에봇, 겉옷, 반포 속옷, 관, 띠, 그리고 성패로 구성되어 있다.

제사장의 의복은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낸다.

첫째,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제사장 직분의 거룩성과 위엄
둘째, 권위를 부여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

28장 서두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가까이 오게 하셨다(1절).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제사장에게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 위임식을 행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였다(41절).
이 두 곳 사이에는 신성한 제사장의 옷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2-39절).
에봇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늘 기억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긴 호마노가 부착되어 있었다(6-14절).
판결 흉패에는 각 보석에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빛날 것임을 상징해 준다(15-28절).
우림과 둠밈은 흉패 안에 두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길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29-30절).
에봇을 받쳐 주는 겉옷과 기타의 기구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연한 구분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곧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긴 패에 의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성물을 받으신다(311-39절).
따라서 제사장의 옷은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에서 중보 역할을 감당한다(38절).

하나님은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혀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시고,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게 하셨다.

제사장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 입히는 이유가 무엇인가?(2-3절)

성막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라면, 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구별하셨다(2절).
하나님은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방법과 재료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다.

첫 번째 소재는 금이다.
옷에 금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값지고 귀한 옷이라는 의미이다.

두 번째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이다.
고대사회에서 이것은 다 왕권을 상징하는 재료들이다.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재료와 성막을 만드는 재료가 동일하다는 것은 성막과 제사장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제사장의 에봇 위의 어깨에 붙인 보석은 무엇이며, 그 위에 무엇을 새겼는가?(9-12절)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해서 그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다.
제사장의 에봇은 그것을 말해 준다.
에봇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금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것으로, 제사장의 제일 밖에 덧입는 일종의 앞치마이다.

그 어깨에는 호마노 보석 두 개를 달고 한 호마노당 이스라엘 지파 이름 6개씩, 합해서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보석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선다는 상징이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만이 영광과 존귀로 옷 입고 하나님 앞에 섰지만, 신약에서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롬 13:14 ; 갈 3:27), 세상을 섬기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9).

우리가 택함 받은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짊어지고 섬기는 존귀한 사명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날마다 잊지 않아야 한다.




36절. 너는 또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패(치츠)

본래의 의미는 '반짝임'인데, '꽃'이나 '꽃 모양의 무늬'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종종 '장식패'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70인역에서는 '잎'을 뜻하는 '프페탈론'으로 번역했다.
고대종교에서는 꽃이 주술적 효과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는데, 그것은 꽃 자체가 생명의 요소로 화(禍)를 방지하는 효과를 지닌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만약 신에게 제사를 드리다가 그 제사가 신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어떤 '죄과'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 '꽃'이 이 '죄과'를 막아 준다는 것이다(Keil).
또한 꽃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형상으로도 종종 쓰였는데, 여기서 제사장이 꽂 모양의 패를 쓴 것은 이방종교의 주술적 효과를 따른 것이 아니라 왕과 같은 위엄과 권위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성도들을 가리켜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 했고, 또한 이와 비슷한 표현을 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다(계 1:6; 5:10; 사 61:6; 66:21).

인을 새기는 법으로
- 11절 주석 참조.

여호와께 성결(코데시 라예호와)

- 우리말로 '성결'이라고 번역된 '코데쉬''거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여호와께 거룩' 혹은 '여호와를 향한 거룩'이 된다.

대제사장의 의복은 여러 가지 장식과 보석 등으로 꾸며져 일반 의복과 완전히 구별되었는데, 그 목적이 사람들 앞에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일깨우기 위해 이같은 글을 새겼을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은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는 자이니 그가 그 제물의 죄건(罪愆)을 담당해야 함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래 만물은 인류와 함께 죄로 오염되었는바 그대로는 하나님께 바칠 수 없으니 여호와 앞에서 성결함을 보장받은 대제사장이 이를 책임지고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38절).

따라서 여기 대제사장은 장차 온 인류가 만물의 죄건을 담당하실 이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나 한편 당시 이방 종교의 사제들은 주술적(呪術的) 효과를 위해 주문을 새긴 띠나 두건을 머리에 두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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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판을 만들어 세우라(출애굽기 26:15)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Make upright frames of acacia wood for the tabernacle.

16. 각 판의 장은 십 규빗, 광은 일 규빗 반으로 하고 

널판의 길이는 10규빗, 넓이(폭)은 1규빗 반(1 1/2 규빗) 

17. 판에 두 촉씩 내어 서로 연하게 하되 너는 성막 널판을 다 그와 같이 하라.
18. 너는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되 편을 위하여 널판 스물을 만들고
19. 스무 널판 아래 은받침 마흔을 만들찌니 이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고 저 널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찌며
20. 성막 다른 편 곧 그 북편을 위하여도 널판 스물로 하고

* 다른 편(젤라, 첼라) - 널판과 동의어. 창세기에서 갈비뼈를 젤라라고 한다. 
  남자의 갈비 뼈 24개. 여자의 갈비뼈 24개 도합 48개
  성막의 구조에서 널판이 48개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깨닫게 한다.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가 되는 교회를 보호하신다.
  은받침은 성경에서
  1.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은 400세겔을 지불한다.  
  2. 요셉이 애급으로 팔려갈 때 은 30에 팔렸다/
  3. 예수께서 은 30에 팔렸다.
  - 조각목과 같은 인생을 널판지로 만들어 금으로 씌워서 보혈의 댓가를 지불한 은으로 받침을 만들어 세운다.




26-27절. 띠를 만들라 

너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찌니 성막 이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뒤 곧 서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며.


골로새서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은 : 댓가, 금 : 믿음, 성령 : 하나되게하는 은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


에베소서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1.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2.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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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2022(토) 단(壇) 출애굽기 27:1 

출애굽기 27장  / 번제단(燔祭壇), 성막 뜰(세마포 휘장)

27:1-8, 번제단에 대한 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서 죄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물을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로, ‘올라간다’는 뜻이고, 단은 ‘미즈베아’로 ‘죽이다’는 뜻입니다.

번제 / עֹלָה   5930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올라(ʽôlâh)

관련 성경 / 번제(창 8:20, 레 10:19), 번제물(출 10:25, 레 3:5, 민 6:11)
[동] 올라가다(겔 40:26), 번제하다(창 22:7, 8) 
구약 성경 / 9회 사용

단(번제단) / מִזְבֵּחַ    4196

1. 제단,  2. 출애굽기 30:27-28

발음 / 미즈베하(mizbêach)
어원 / 20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향단(출 40:5, 26, 레 4:7), 번제단(레 4:7), 제단(민 16:39, 왕상 1:53, 시 84:3)
구약 성경 / 400회 사용

번제단도 조각목으로 만듭니다.
다른 기구와 차이점은 금으로 싸지 않고 놋으로 감싼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금보다 놋이 불에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금은 1,065도에 녹고, 놋은 1,085도에 녹는다고 합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2.5미터), 세로 5규빗(2.5미터), 높이가 1규빗반(75센티) 정도의 정사각형이며 4개의 뿔이 있고 가운데는 그물망이 있습니다.
놋 고리 한쪽에 2개씩 네 개가 붙어 있고, 멜 채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쌉니다.
번제단에는 몇 가지 보조기구들이 있는데, 재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이며 다 놋으로 만듭니다.


번제단(燔祭壇)

번제단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곳입니다.
번제단은 죄를 용서받는 자리,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일반인들이 못 들어갑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두멍도 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따라서 번제단이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나 나아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피였습니다(히 9:22).
구약제사는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 제사였습니다.
신약의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제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된 것처럼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 인생을 보혈로 덮어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번제단(燔祭壇)


1. 번제단의 제작

번제단은 하나님께 제물을 불태워 드릴 때 사용하였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번제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향단과 구별하여 부르기 위한 것이었고 번제단은 또한 놋 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번제단은 성막과 동편 문 사이에 놓여졌습니다.
번제단의 크기는 대략 가로 2m, 세로 2m, 높이 1.25m로서 속이 비어 있고 나무 틀에 놋을 입혀 만들어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네 모퉁이 위에는 뿔이 있었으며 이 뿔 또한 놋으로 입혀야 했습니다.
그릇들 역시 놋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의 성별 시와 속죄일에는 피를 그 뿔에 발라야 했습니다.
놋 그물은 무슨 용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번제단 아랫부분을 바깥으로 둘러서 제사에 쓸 불이 바깥으로 퍼지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채 역시 놋을 입히고 제단 가장자리의 놋 고리에 꿰어 단을 이동시키는 데 사용케 했습니다.
물두멍은 단과 성막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a. 번제단(겔 43:13)
제단의 크기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가락에 이르고 한 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척이요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척이며 그 가로 둘린 턱의 너비는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b. 놋(민 16:39)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이 드렸던 향로를 가져다가 쳐서 제단을 싸서.

놋은 강력한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레위기 26:19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과 같게 하리니.

신명기 28:23
네 머리 위의 하늘이 되고 네 아래의 은 철이 될 것이며.

요한계시록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 주석(bronze, 놋)
- 주님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놋과 같다.

놋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은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서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놋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막의 뜰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놋 기둥 역시 우리 인생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2.  번제단이 주는 의미

이 번제단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회막의 성막 문 앞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은 누구든지 희생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희생 제사를 통해서만 죄가 사해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단 위에서는 장막 뜰에서 예배자가 볼 수 있듯이 죄를 위한 희생 제사가 계속 드려졌습니다.
우리는 이 희생의 궁극적인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히 10:1-18).
번제단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제단의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뿔은 원래 제사로 드릴 가축들을 상징했으나 후로는 짐승들을 단단히 잡아매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뿔은 또한 다른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 성전으로 도망 온 사람은 제단의 뿔을 잡음으로써 상징적으로 자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고, 그로써 보호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a. 그리스도의 희생(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b. 뿔(레 4:7)
제사장은 또 그 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27:9-19, 성막의 뜰에 대한 설명

성막의 울타리를 세마포로 만드는데, 가로가 100규빗(45m), 세로가 50규빗(22.5m) 울타리의 높이가 5규빗(2.25m)입니다.

   성막 뜰


울타리를 만드는데, 60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모두 놋으로 만듭니다.
동쪽과 서쪽에 10개씩 남쪽과 북쪽에 20개씩 놋 기둥을 세웁니다.
그 기둥들을 잘 고정시키기 위해 갈고리와 가름대를 은으로 만듭니다.
성막 울타리는 성막 뜰과 성소, 지성소를 보호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칠 때, 동쪽에 문을 만드는 10m만 제외하고 모두 하얀 세마포로 두릅니다.

동쪽에만 있는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진 휘장입니다.
거기도 기둥이 넷 필요하고 받침대도 네 개 필요합니다.
누구나 성막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넓고 큰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집, 성막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 울타리 동쪽에 있는 문은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요한복음 14:6).

번제단을 만들 때도 놋을 사용했고, 물두멍도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를 만들 때 역시 놋으로 기둥을 만들고 받침대도 만듭니다. 성막을 만들 때 금이 사용되는 것만큼이나 놋도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놋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은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서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놋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막의 뜰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놋 기둥 역시 우리 인생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27:20,21, 감람으로 짠 기름으로 성소 안에 등불을 켜라는 내용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은 늘 켜 두어라.
아론과 그 아들들은 등불을 회막 안의 증거궤 앞에 쳐놓은 휘장 밖에 켜 두어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서 꺼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성막 기구를 만드는 주 재료가 조각목과 놋인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7장. 번제단과 성막의 뜰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암 머무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계명과 함께 성막에 대한 설계도를 받았습니다.
27장은 번제단과 성막 뜰의 세마포 휘장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말씀합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번제단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번제단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5규빗이고 높이가 3규빗으로 성막에서 가장 큰 기구인 만큼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번제단(燔祭壇)조각목으로 만들어서 놋으로 쌌습니다.

성경에서는 금은 영광, 은은 구속을,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놋으로 싼 번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놋제단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29:42, 43).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곳입니다.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29:37) 그리스도를 붙드는 모든 죄인들은 깨끗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

번제단의 위 사방 모서리에는 뿔을 이어서 만들게 하였는데, 희생제물을 묶는 용도였습니다.
그러나 뿔은 또한 능력과 힘을 상징하는데, 구세주의 단호한 목적과 그의 사랑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붙들어 맨 것은 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 힘이었습니다(요 10:19,  빌 2:9).
번제단에서 태우고 있는 제물은 예배하러 회막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선포하기에 충분합니다.

이어서 성막 뜰에 대한 지시가 나옵니다(9~19).
바깥뜰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세마포 휘장입니다.
성막의 세마포 휘장은 흰 세마포로 만들어서 모든 주변의 이스라엘 진영의 텐트나 또는 가나안 사람들의 어두운 것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죄 없으신 순결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드러냅니다.
이 세마포 휘장은 뜰 내부로 세워진 60개의 기둥에 5규빗 간격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기둥의 받침은 불의 작용을 견뎌내는 놋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이것은 죄인들의 대속물 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에 소멸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입니다.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시는데(11), 가름대는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주는 막대기였고, 갈고리는 세마포장을 가름대에 연결하게 했습니다. 이 은은 구속의 상징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거룩한 의와 거룩한 은혜가 결합된 것을 보여줍니다.

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것은 문에 수를 놓으라고 했는데, 회막 안의 휘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회막 안의 휘장과 덮개에는 그룹을 수놓으라고 지시하셨지만, 여기 성막의 문에는 그런 지시가 없고 단지 삼 색 실로 수를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성막으로는 모든 죄인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룹을 수놓으라고 하셨다면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이 성막 문으로조차 들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은 모든 죄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되어야 했기에 그룹을 수놓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은 성막 안으로 연결됩니다(20~21).
제사장들은 증거궤(지성소) 앞 휘장 밖에서(성소)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등불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를 드리지 않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는 강조의 말씀으로, 24시간 불이 켜져 있도록 하라는 명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했습니다.
이 등불은 창문 하나 없는 성막 안을 언제나 환하게 밝혀주는 유일한 빛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언제나 밝히 비추시고 보고 계시며 생명과 빛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불을 위해서는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만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성도 안에 언제나 내주하시는 빛 되신 주님에 대한 상징이며, 그 빛은 언제나 오직 성령의 기름으로만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타오르는 희생제물은, 그 제물을 가지고 온 예배자와 동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 제물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마치 그 희생제물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번제단에서처럼 타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진노를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때 그 안에서 함께 죽은 것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놋으로 싼 번제단이 상징하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것만이 우리의 심령에 평안을 주는 복음인 것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불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꺼지지 않도록 순결한 기름, 성령의 은혜에 완전히 붙들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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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聖幕) (히) 미시칸(mishkan) 4908 מִשְׁכָּן

1. 거주,  2. 엽기 18:21,  3. 굴

발음 / 미시칸(mishkan)

어원 / 79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휘장(출 26:35), 회막( 출 39:32, 민 3:7, 대상 6:32), 집(욥 18:21), 거처(시 49:11, 78:28, 사 32:18, 렘 9:19), 처소(시 132:5, 사 22:16, 겔 37:27).
[동] 계시다(시 26:8), 살다(욥 21:28).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 7931. שָׁכַן    
1. 아래 앉다,  2. 눕다,  3. 거주하다

발음 / 사칸(shâkan)

관련 성경 / 거하다(창 9:27), 들어가다(출 40:35), 엎드리다(신 33:20), 깃들이다(사 13:21, 겔 17:23),머물다(출 24:16, 민 9:22, 잠 7:11), 계시다(왕상 8:12, 사 8:18), 살다(욥 30:6, 렘 46:26), 덮이다(욥 3:5), 쉬다(나 3:18), 두다(신 12:11, 느 1:9, 렘 7:12), 세우다(수 18 : 1), 떨어뜨리다(시 7:5).
[명] 소유지(수 22:19), 주소(잠 8:12), 있는 곳(욥 38:19).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성막(聖幕) (헬) 스케네(σκηνή) /  4633 σκηνή, ῆς, ἡ  

1. 초막,  2. 오두막집

발음 / 스케네( skēnē)

4632와 4639와 유사어로 보임 : 천막

관련 성경 / 초막(마 17:4, 막 9:5, 눅 9:33), 처소(눅 16: 9), 장막(행 7:43, 히 8:2, 계 13:6) 
신약 성경 / 20회 사용

성전(聖殿) (히) 바이트(bayith)  בַּיִת 1004  / 바이트(bayith) בַּיִת

1. 집,  2. 장막

열왕기하 23:7, 여호와의 전 가운데...

어원 /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 7:1, 레 14:35, 삼상 1:7), 권속(창 18:19,레 16:6, 삼하 2:3), 궁(창 12:15, 삼하 7:2), 처소(창 24:31, 대 하5:7), 집 안(창 27:15, 시 55:14), 전(출 34:26, 신 23:18), 옥(창 39:20, 삿 16:21,왕하 25:27), 간수장(창 39:21), 궁중(창 45:2, 왕하 21:33, 에 7:8), 가족(창 5:22, 신 11:6, 시 68:6), 족속(출 2:1, 레 22;18, 수 17:17), 식구( 출 12:3), 안쪽(출 28:26), 가옥(레 14:55, 신 19:1,사 5:8), 친정(레22:13), 종족(민 1:2, 대상 7:4), 지도자(민 25:14), 지파(수 22:14), 신전(삿 9:4,왕하 19:37, 대상 10:10), 신당(삿 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 16:18, 대상 29:3), 창고(왕하 20:13), 궁궐(왕하 21:18, 대상 14:1), 성막(대상 9:23), 궁전(대상 17:1), 곳간(대상26:15, 사 22:8), 반열(대상 28:13), 내전(內殿)(대하 3:13), 무더기(욥 8:17), 가산(욥 20:28), 국고(사 22:15), 딸(사 10:32), 부엌(겔46:24),  집(미 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교회(敎會) (헬) 에클레시아(ĕkklēsia) ἐκκλησία / 1577 ἐκκλησία

1. 회,  2. 모임

사도행전 7:38
관련 성경 / 교회(마 16:18, 행 2:47, 롬 16:4), 모인 무리 (행 19:32), 민회(행 19:39), 모임(행 19:41).
신약 성경 / 114회 사용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거하시매 / 
σκηνόω   4637

1. 살다,  2. 거주하다,  3. 요한계시록 13:6

발음 / 스케노(skēnŏō)
어원 / 미래 σκηνώσω, 제1부정과거 ἐσκή- νωσα, 463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하다(요 1:14, 계 13:6, 21:3), 장막을 치다(계 7:15).
신약 성경 / 5회 사용
성막 /
σκηνή, ῆς, ἡ  4633

1. 초막,  2. 오두막집

4632와 4639와 유사어로 보임 : 천막

발음 / 스케네(skēnē)

관련 성경 / 초막(마 17:4, 막 9:5, 눅 9:33), 처소(눅 16: 9), 장막(행 7:43, 히 8:2, 계 13:6) 
신약 성경 / 20회 사용
영광
δόξα, ης, ἡ  1391

1. 광명,  2. 위엄,  3. 누가복음 2:9

발음 / 독사(dŏxa)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신약 성경 / 166회 사용
카보드(영광)
כָּבוֹד  3519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광야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 성막을 만들게 하신 이유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이었다.
왜냐하면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백성들은 문제에 부딪치면 애급으로 돌아가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애급에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다양한 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다가올 때마다 다양한 신들에 의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광야생활은 수시로 이동하는 생활이었으므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천막과 같은 주거지를 사용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처소도 천막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게 하셨다.
이렇게 천막으로 만들었던 성막은 솔로몬 왕 때에 반영구적인 건물로 건축되었다.
이것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성전 중심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많은 유능한 젊은이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 결과 성전에서 더 이상 모일 수 없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하여 새로 건축한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도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도 증축하는 중이었는데 이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한다.
헤롯 성전도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은 서쪽의 통곡의 벽만 남아 있다.
마지막 때를 예언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제4의 성전이 건축되면 마지막이 된다고 하지만 성경은 성전은 이 땅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솔로몬 성전(기원전 968-961년)

솔로몬이 최초의 성전을 아브라함이 제사를 지냈다는 예루살렘 동쪽 모리아산에 세웠다.
성전 건축을 위해 다윗이 준비해둔 자재 외에도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를 구입했고, 히람 왕이 보낸 건축기술자와 이스라엘 인부들을 동원하였다.
이 성전은 완성된 후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파괴됨.

스룹바벨 성전(기원전 520-516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명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은 옛 예루살렘 성전에 비해 규모가 매우 축소된 것이긴 했지만, 옛 성전 자리라고 짐작되는 곳에 성전을 재건하였다.
그렇지만 성전 안에 계약의 궤를 안치하지는 못했다(2마가 2장)

기원전 169년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에 의해 파손됨.

마카베오의 성전(기원전 164년)

마따디아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는 파손된 성전을 보수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다시 파손됨.

헤롯 성전(기원전 20년 경 시작)

헤롯 왕은 파손된 성전을 모두 헐고 새로운 양식으로 엄청나게 확장하여 다시 짓기 시작했다.
또한 성전 둘레에 거대한 장벽을 둘러쌓았다.
오늘날 이중 일부가 보존되어 '통곡의 벽'이라 불린다.
그러나 이 재건 작업은 예수 시대에도 완성되지 않았다(마가 13:2).
역사가들에 의하면, 서기 64년경 헤롯 아그립바 2세 때에 완성되었는데 매우 화려하고 웅장했다고 한다.

유다 전쟁이 있었던 서기 66-70년경에 폐허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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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가는 베실 - 쉐시(8336) 흰색 /

שֵׁשׁ  8336

1. 흰 대리석,  2. 에스더 1:6,  3. 아가 5:16

발음 / 쉐시(shêsh)
관련 성경 / 세마포 옷(창 41:42), 가는 베실(출 25:4, 39:29), 가는 베(출 39:27, 겔 16:10, 13), 가는 베줄(에 1:6), 세마포(출 38:16, 잠31:22), 화반석(아 5:15), 세마포 휘장(출 27:9, 18).
구약 성경 / 38회 사용
청색(7504)  רָפֶה

1. 늘어진,  2. 연약한

발음 / 라페(râpheh)
어원 / 75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약한(민 13:18. 삼하 17:2, 사 35:2), 늘어진(욥 4:3).
구약 성경 / 4회 사용
하늘색 - 하나님의 마음
푸른색 -ㅡ 아들
자색 - 왕의
홍색 - 피

자색(713)



홍색(8438)


휘장(앙장)(3407)(에리아) - יְרִיעָה

1. 장막,  2. 이사애 54:2,  3. 출애굽기 26:1

발음 / 에리아(yerîyʽâh)

어원 / 341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휘장(출 26:1, 36:9,16, 26:6, 36:14, 민 4:25,삼하 7:2, 시 104:2, 사 54:2, 렘 4:20, 10:20, 49:29)
구약 성경 / 3회 사용
* 3415. יָרַע

1. 떨다,  2. 약하다,  3. 해롭다

발음 / 야라(yâraʽ)  
관련 성경 / 떨다(사 15:4), 근심하다(창 21:12, 느 2:10,13:8), 악하다(창 38:10, 삼하 11:27), 기뻐 아니하다(창 48:17, 삼상 8:6, 사 59:15), 아끼다(신 15:10), 미운 눈으로 바라보다(신 28:54,56),슬프다(삼상 1:8), 불쾌하다(삼상 18:8), 걱정하다(삼하 11:25), 해하다(삼하 20:6), 악하게 여기다(대상 21:7), 멸하다(욥 20:26), 미치다(시 106:32), 싫어하다(욘 4:1).
[명] 근심(창 21:11), 수심(느 2:3).
구약 성경 / 2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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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금) 출애굽기 26장 성막(聖幕)

성막의 네 가지 기구 - 성막 덮개, 널판, 띠, 휘장


출애굽기 25-30 : 성막의 식양(설계도)

출애굽기 35-40 : 성막의 제작(브살렐, 오홀리압)

* 성막(聖幕, Tabernacle)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


26:1-14, 성막 덮개

성막(성소와 지성소)을 보호하는 천막 또는 천으로 네 겹으로 덮는다.

성막 덮개 :

첫 번째 덮개 /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천사를 수놓아 만든 휘장
                      (5폭 + 5폭 = 10폭, 청색고리 50 x 2 = 100개,  금 갈고기 50개로 연결 20m x 14m)

두 번째 덮개 / 염소 털로 만듦(22mX5m)/ 성막을 덮는 막
                     
(5폭+6폭=11폭, 전면과 후면 1/2 더 내림, 청색고리 50X2=100, 놋 고리 50개로 연결)

염소털(5795) - 7절.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עֵז  5795

1. 암염소,  2. 염소털

발음 / 에즈(ʽêz) 
어원 / 58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염소(창27:9, 출12:5, 아4:1), 염소털(출35:23, 민31:20, 삼상19:13).
구약 성경 /  75회 사용
  염소털은 희생을 상징
 
26:14

세 번째 덮개 /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듦, 두 번째 덮개 보다 더 큼
                       ☞ 막의 덮개

네 번째 덮개 /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고 제 3 덮개 보다 더 큼/ 윗 덮개  

14절. 14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붉다(아담) - 수양의 가죽에 아담의 색으로 염색하라 즉 죄를 뒤집어 쓰신 예수 그리스도

해달의 가죽(돌고래) - 방수의 기능 및 멸시를 받으신 메시아(이사야 53장 고난 받으신 예수)
* 해달의 가죽으로 질겨서 신발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의 모습은 나이 오십도 안 되어서....(요한복음 8:57)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3- 수양 가죽의 붉은 색
2- 염소의 머리털로 짠 덮개
1-하나님의 마음이 설명된 네 가지 색갈
지성소
속죄소(시은좌)

신앙은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져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저 점점 더 좁아지고 굳어지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다.






성막의 덮개







성막 덮개


성막의 첫 번째 덮개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그룹(천사)을 공교히 수놓아서 만든 휘장입니다(출 26:1).


첫 번째 덮개는 길이가 28규빗(14m)이며 너비는 4규빗(2m)으로 5폭씩을(10m) 연결한 두 폭의(20m) 휘장을 50개의 금 갈고리로 연결시켜서 만듭니다.


성막의 두 번째 덮개
염소 털로 짠 덮개입니다.

길이가 30규빗(15m)이며 너비가 4규빗(2m)의 5폭과 6폭으로 연결된 두 휘장을 청색고리 50개씩을 양쪽같이 달고 놋 갈고리 50개로 연결시켜 만든 11폭의 덮개입니다.
두 번째 덮개는 첫 번째 덮개보다 전면과 후면에 1m씩이 더 내려 덮습니다(출 26:7-13).

성막의 세 번째 덮개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듭니다(출 26:14).


숫양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쳐집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성막의 네 번째 덮개
해달의 가죽(물개 가죽)으로 만듭니다(출 26:14).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성막은 물개가죽(해달의 가죽)으로 덮인 모습밖에 안 보입니다.
초라한 모습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있습니다.
눈에 부시게 환하고 아름다운 집이 성막,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막의 덮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이나 근사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의 똥이 나뒹구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명함 한 장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초라한 사람입니다. 유명한 대학졸업장도 없고 아무런 학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우습게 보았고 멸시천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6:15-30, 성소와 지성소의 벽(뼈대)이 되는 널판과 띠 

널판도 모두 조각목(싯딤나무 또는 아카시아 나무)으로 만듭니다.
남쪽에 20개 북쪽에 20개 서쪽에는 벽에 6개 모퉁이에 2개로 8개이며 성막에는 모두 48개의 널판이 필요합니다.
한 널판마다 은 받침이 2개씩 들어갔으니까 은 받침은 총 96개가 필요합니다.

널판에도 보이는 띠가 4줄이 있고 속으로 보이지 않은 1줄의 띠가 있어 모두 5띠의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널판 마다 띠를 꿸 금고리 4개씩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널판의 높이는 10규빗(5m)이며 넓이는 1규빗 반(75cm)으로 만들어집니다.

널판과 띠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널판 역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은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고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조각목은 너무 단단해서 건축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임하는 거룩한 장소인 성소와 지성소의 벽이 널판입니다.
우리 역시 널판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니까요.
조각목처럼 거룩한 성전을 만들 재목이 아닌데,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향해 고백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출애굽기 26:31-37, 휘장 

휘장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지성소 휘장(26:31-35)
다른 하나는 성소에 들어오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성소 휘장(26:36-37)

지성소 휘장과 성소 휘장


휘장은 모두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듭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그 위에 천사를 공교히 수 놓아 만듭니다.
색깔도 눈에 띄지만 아름답게 수를 놓은 천사가 있어 더욱 거룩하게 보이는 천입니다.

지성소 휘장은 네 개의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드리워집니다.
네 기둥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네 기둥은 은 받침 위에 세워집니다.
휘장을 갈고리 아래로 늘어뜨린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놓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리라”(35)

성소 휘장은 다섯 개의 기둥 위에 금 갈고리로 드리워집니다.
다섯 기둥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소 휘장과 지성소 휘장을 설치하는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지성소 휘장과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다섯 기둥은 놋 받침 위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성소보다 지성소가 더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휘장은 모두 예수님을 뜻합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하는 휘장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요한복음 14:6).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받혀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태복음 27:50-5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브리서 10:19-20)


적용을 위한 질문

1. 성막의 덮개는 왜 하나가 아니라 네 개였을까?

2. 성막 덮개를 4중 구조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널판을 만들어 세우라(Make upright frames of acacia 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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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0장 / 성막의 완성과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막 


출애굽기 40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이 세워지고 여호와의 영광(하나님의 임재)이 성막에 충만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출애굽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9:32-43절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어서 모세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성막을 세우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출애굽기 40:1-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고, 성막 기구들을 제자리에 들여놓고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 성막 기구들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워라. 거기에 증거궤를 들여놓고, 휘장(지성소휘장)을 쳐서, 그 궤를 가려라. 또 너는 떡상을 가져다가 격식대로 차려 놓고, 등잔대를 가져다가 그 위에 등잔불을 올려놓아라. 또 금 분향단을 증거궤 앞에 놓고, 성막 어귀에 휘장(성소 희장)을 달아라.

번제단은 성막, 곧 회막 어귀 앞에 가져다 놓아라. 회막과 제단 사이에는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물을 채워라. 회막 주위로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에 휘장을 치고, 동쪽 울타리에다 낸 정문에는 막을 드리워라.

너는 관유(예식용 기름)를 가져다가,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것에 발라서,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제단이 가장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물두멍과 그 밑받침에 기름을 발라,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여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려다가, 목욕을 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으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은 것과 같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대대로 영원히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출애굽기 40:16-33a,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모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들여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만인 제 2년 1월 1일에 성막(전체)을 세웠습니다.
모세는 받침들을 놓고, 널판들을 맞추어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기둥을 세워, 성막(성소와 지성소 부분)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4중으로)를 덮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증거판을 가져다가 증거궤 안에 넣고, 그 궤에 채를 꿰고, 궤 위에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궤를 성막(지성소) 안에 들여놓고, 휘장을 쳐서 증거궤를 막았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 안, 성막의 북쪽 면, 휘장(지성소 휘장) 바깥에 떡(진설병)상을 들여놓았습니다.
상 위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빵(진설병)을 차려 놓았습니다.
회막 안의 떡상 맞은쪽, 성막의 남쪽 면에 등잔대를 놓고, 주 앞에 등잔을 올려놓았습니다.
금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안(지성소 휘장 앞)에 들여놓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피웠습니다.

또 동쪽의 성막 문에 막(휘장)을 달고, 성막, 곧 회막 문 앞에 번제단을 놓고, 그 위에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쳤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씻을 물을 채웠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물로 손과 발을 씻었는데,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그렇게 씻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번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성막 세우기 끝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세운 이야기 안에 반복해서 계속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19, 21, 23, 25, 27, 29, 32절에 7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일을 다 마쳤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세계역사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수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0:33b-38, 
성막이 완성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습니다.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히면, 진을 거두어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주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온 자손의 눈 앞을 밝혀 주었습니다.


성막 완성 후 하나님의 영광 충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것을 늘 보고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으면서 밤에는 불이 함께 하고, 낮에는 구름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매일 경험했다는 것으로 출애굽기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약 성경에서 종종 구름과 불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 구름과 불로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임재)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 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애굽기 24:15-18)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과 불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거기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마무리는 이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밤에도 행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불이 구름 가운데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고 움직였습니다.

구름과 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임재 -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 는 구름과 불이었습니다. 구름과 불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잖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끔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게 믿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격언들이 몇 개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 일견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To see is to believe!”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는 대화 중에 ‘보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전혀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를 들겠다고 해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예를 들어보겠다고 말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먹어 봅시다!먹읍시다’ 하면 되는데...
입어 봐도 되나요?입어도 되나요?’ 하면 되는데...
만나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하면 되는데...
만져 보자, 가 보자, 물어보자, 해 보자. 걸어 보자, 뛰어 보자, 살아 보자 등등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제를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구름이 눈에 보이고, 불이 내 눈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안심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전체 40장 중에서 10장 이상이 성막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성막 이야기를 출애굽기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그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만들기 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어디서 모세를 만났습니까?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위에서 모세를 불러 따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이면 어디나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감사한 일인데요,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게 하신 성막이 중요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꼭 그것에 눈에 보여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습니다. 그건 보고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성막이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나요? 거룩하게 장식된 교회 건물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나요? 잘 갖춰진 예배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건물)에 와서, 정해진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더 귀한 예배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생활예배)입니다.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이 찬양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 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 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라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곳에 섰으니 이 땅을 치유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를 높이리다
열방들아 주님을 송축할지어다 그 발아래 입 맞추라
영원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위대하신 왕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성전/교회)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다음에 바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 나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루한 제사와 율법 이야기 - 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매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놀라운 기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리타분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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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0장 / 성막의 완성과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막 


출애굽기 40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이 세워지고 여호와의 영광(하나님의 임재)이 성막에 충만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출애굽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9:32-43절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어서 모세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성막을 세우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출애굽기 40:1-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고, 성막 기구들을 제자리에 들여놓고 모든 기구에 관유를 발라 성막 기구들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 곧 회막을 세워라. 거기에 증거궤를 들여놓고, 휘장(지성소휘장)을 쳐서, 그 궤를 가려라. 또 너는 떡상을 가져다가 격식대로 차려 놓고, 등잔대를 가져다가 그 위에 등잔불을 올려놓아라. 또 금 분향단을 증거궤 앞에 놓고, 성막 어귀에 휘장(성소 희장)을 달아라.

번제단은 성막, 곧 회막 어귀 앞에 가져다 놓아라. 회막과 제단 사이에는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물을 채워라. 회막 주위로 울타리를 만들고, 거기에 휘장을 치고, 동쪽 울타리에다 낸 정문에는 막을 드리워라.

너는 관유(예식용 기름)를 가져다가,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것에 발라서,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라. 그러면 제단이 가장 거룩하게 될 것이다. 너는 물두멍과 그 밑받침에 기름을 발라,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여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려다가, 목욕을 하게 하여라. 그리고 너는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게 하고,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으로서 나를 섬기게 하여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라. 그리고 네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은 것과 같이,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기는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대대로 영원히 제사장직을 맡게 된다.”


출애굽기 40:16-33a,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성막을 세우고 모든 기구들을 제 자리에 들여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만인 제 2년 1월 1일에 성막(전체)을 세웠습니다.
모세는 받침들을 놓고, 널판들을 맞추어 세우고, 그 띠를 띠우고, 기둥을 세워, 성막(성소와 지성소 부분)을 완성하였습니다.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4중으로)를 덮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증거판을 가져다가 증거궤 안에 넣고, 그 궤에 채를 꿰고, 궤 위에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궤를 성막(지성소) 안에 들여놓고, 휘장을 쳐서 증거궤를 막았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 안, 성막의 북쪽 면, 휘장(지성소 휘장) 바깥에 떡(진설병)상을 들여놓았습니다.
상 위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빵(진설병)을 차려 놓았습니다.
회막 안의 떡상 맞은쪽, 성막의 남쪽 면에 등잔대를 놓고, 주 앞에 등잔을 올려놓았습니다.
금향단을 회막 안, 휘장 안(지성소 휘장 앞)에 들여놓고,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피웠습니다.

또 동쪽의 성막 문에 막(휘장)을 달고, 성막, 곧 회막 문 앞에 번제단을 놓고, 그 위에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쳤습니다.
회막(성소와 지성소 부분)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놓고, 거기에 씻을 물을 채웠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그 물로 손과 발을 씻었는데,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그렇게 씻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어서 성막과 번제단을 둘러싸고, 동쪽 울타리에다가 낸 정문에는 막을 달아 가렸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
 



성막 세우기 끝


모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세운 이야기 안에 반복해서 계속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0:19, 21, 23, 25, 27, 29, 32절에 7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일을 다 마쳤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세계역사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수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탈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0:33b-38, 
성막이 완성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모든 일을 다 마쳤습니다.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습니다. 모세는, 회막에 구름이 머물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으므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구름이 성막에서 걷히면, 진을 거두어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걷힐 때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주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구름 가운데 불이 있어서, 이스라엘 온 자손의 눈 앞을 밝혀 주었습니다.


성막 완성 후 하나님의 영광 충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할 때,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것을 늘 보고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으면서 밤에는 불이 함께 하고, 낮에는 구름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매일 경험했다는 것으로 출애굽기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약 성경에서 종종 구름과 불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때, 구름과 불로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임재)이 구름과 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 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애굽기 24:15-18)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과 불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거기서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마무리는 이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머물러 있으면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밤에도 행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불이 구름 가운데 있어서 그것을 바라보고 움직였습니다.

구름과 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실제, 하나님의 임재 -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 는 구름과 불이었습니다. 구름과 불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잖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끔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게 믿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격언들이 몇 개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 일견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To see is to believe!”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우리는 대화 중에 ‘보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전혀 못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를 들겠다고 해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예를 들어보겠다고 말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먹어 봅시다! – 먹읍시다’ 하면 되는데...
입어 봐도 되나요? – 입어도 되나요?’ 하면 되는데...
만나 보고 싶다! – 만나고 싶다! 하면 되는데...
만져 보자, 가 보자, 물어보자, 해 보자. 걸어 보자, 뛰어 보자, 살아 보자 등등


구름과 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제를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구름이 눈에 보이고, 불이 내 눈 앞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안심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전체 40장 중에서 10장 이상이 성막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성막 이야기를 출애굽기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 한 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그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만들기 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어디서 모세를 만났습니까?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위에서 모세를 불러 따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이면 어디나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감사한 일인데요,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게 하신 성막이 중요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꼭 그것에 눈에 보여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습니다. 그건 보고 믿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성막이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나요? 거룩하게 장식된 교회 건물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나요? 잘 갖춰진 예배시간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살아서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교회(건물)에 와서, 정해진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더 귀한 예배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생활예배)입니다.

출애굽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이 찬양 가사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 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 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라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곳에 섰으니 이 땅을 치유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를 높이리다
열방들아 주님을 송축할지어다 그 발아래 입 맞추라
영원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위대하신 왕



묵상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성전/교회)입니까? 구름과 불입니까? 무지개입니까? 천둥과 번개입니까?


출애굽기 다음에 바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 - 나와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루한 제사와 율법 이야기 - 가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매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놀라운 기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리타분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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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4장 / 언약의 갱신 



모세는 금 송아지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이 깨졌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명 두 돌 판을 깨뜨려버렸습니다(출 32장). 모세는 다시 십계명 두 돌판(증거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34장에 나옵니다.

언약 갱신의 첫 단계로, 모세가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모세는 두 돌 판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그 돌 판을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산으로 올라갑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34:6,7)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서 경배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주께서 저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 사실이면,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인 것은 사실이나, 주께서 우리의 악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34:10-17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시 언약을 맺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 모든 백성 앞에서, 이 세상 어느 민족들 가운데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을 하여 보일 것이다. 너희 주변에 사는 모든 백성이, 나 주가 너희에게 하여 주는 그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도록 하여라. 내가 이제 너희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34:10,11)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1)
1)너희는 삼가,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2)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3)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4)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5)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히 언약을 맺으시면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신 명령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12,15)”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뭘까요?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하신 이유
1)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가 될까 봐
2)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따를까 봐
3)그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을 드릴까 봐
4)그들이 너를 청하면 그 제물을 먹을까 봐
5)너희가 너희 아들들을 그들의 딸들과 결혼시키면, 그들의 딸들은 저희 신들을 음란하게 따르면서, 너희의 아들들을 꾀어, 자기들처럼 음란하게 그 신들을 따르게 만들 까 봐


출애굽기 34:18-26절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2)
1)무교절을 지키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2)처음 태어난 짐승들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3)너희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도 모두 대속해야 한다.
4)아무도 내 앞에 빈 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5)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어야 한다.
6)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에는 칠칠절을, 한 해가 끝날 때에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7)모든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주 앞에 나와야 한다.

위에 나오는 7)번 명령에 순종하면 – 언약을 맺으면 - 받는 복이 여기 있습니다.
1)내가 뭇 민족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너희의 영토를 넓혀 주겠다.
2)너희가 한 해에 세 번, 주 너희의 하나님을 뵈려고 올라올 때에,
아무도 너희의 땅을 점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8)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치지 말아라.
9)유월절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10)너희는 너희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너라.
11)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신 명령들
구절
언약 또는 명령
12
너희는 삼가,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13
너희는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그들의 석상을 부수고, 그들의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려라.
14
너희는 다른 신에게 절을 하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지 말아라.
17
너희는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마라.
18
무교절을 지키고 일주일 동안 무교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라.
19
처음 태어난 짐승들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20
너희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도 모두 대속해야 한다.
20
아무도 내 앞에 빈 손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21
6일 동안 일하고, 제 7일에 쉬어야 한다.
22
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엔 칠칠절을, 한 해가 끝날 때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23
모든 남자들은 모두 한 해에 세 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주 앞에 나와야 한다.
25
너희는 나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의 피를, 누룩을 넣은 빵과 함께 바치지 말아라.
25
유월절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26
너희는 너희 땅에서 난 첫 열매 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주 너희의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오너라.
26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아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 34:27-35절은 하나님께 십계명 두 돌판(증거판)을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우신 언약들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에 기록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주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모세는, 주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하던 말을 다 마치자,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주 앞으로 들어가서 주와 함께 말할 때에는 수건을 벗고, 나올 때까지는 쓰지 않았습니다. 나와서, 주께서 명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와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 적용 질문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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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3장 / 모세의 중보 기도


출애굽기 3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언약을 새롭게 맺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 가서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출애굽기 33:1-6절은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 백성을 이끌고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고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거라. 내가 한 천사를 보낼 터이니, 그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나는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겠다. 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없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땅이 약속의 땅이 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데 무슨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참담한 말씀을 듣고 통곡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장식품을 몸에 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라.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다.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와 함께 올라가다 가는, 내가 너희를 아주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너희 몸에서 장식품을 떼어 버려라.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제 결정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호렙 산을 떠난 뒤로는 장식품을 달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33:7-11절은 성막이 세워지지 전,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지 그 비결, 곧 모세의 회막 생활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 바깥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는 그 장막을,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이라고 하였습니다. ‘회막’은 ‘임시 성막’이라고 보면 됩니다. 출애굽기 39,40장에 이르러 성막이 완성됩니다. 성막이 있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던 곳입니다.

여호와를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 밖에 있는 이 회막으로 갔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갈 때마다 백성은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장막에서, 모세가 장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습니다.

모세가 장막에 들어서면, 구름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어귀에 서고, 주께서 모세와 말씀하십니다. 그 때, 백성은 구름기둥을 보면, 모두 일어나서 자기 장막 어귀에서 엎드려 주를 경배하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눈의 아들이며 모세의 젊은 부관인 여호수아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왜 장막을 떠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가 모세의 후계자로 조금씩 부각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33:12-16절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가 다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뜻을 꺾으시고 친히 함께 가겠다고 응답하신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한 번 더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 땅에 함께 가지 않으시면 가나안 땅에 가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이 행복입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 길은 불행입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그 땅에 계셔서 축복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중에 16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본인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출애굽기 33:17-23절은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룁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서 요청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인도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요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렇게 하시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적용 질문

우리가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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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2장 / 금송아지 사건 

출애굽기 32장은 모세가 시내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아래에서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2:1-6절은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는 게 늦어지자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그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자 아론이 모든 백성의 금 귀고리를 모아서 금송아지 형상을 만든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 산에 갔는데 깜깜 무소식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다 되어 갑니다. 백성들이 불안했는지 아론에게 찾아가서 모세가 없으니까 이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불안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게 참 놀랍습니다. 우상숭배에 길들여진 증거입니다.

모세가 없을 때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요 초대 대제사장이 될 사람인데, 백성들을 진정시키기는 커녕 우상을 숭배하는데 앞장을 섭니다. 아론이 백성들에게 금 고리들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들을 다 모아서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듭니다.

아론이 금 고리를 녹여서 만든 금 송아지 상을 본 백성들이 뭐하고 소리를 쳤는지 아세요?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에 질세라 아론은 한술 더 뜹니다. 금 송아지 앞에 제단을 쌓고 아론이 백성들을 부추겨서 
금 송아지를 '여호와'라고 선언합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


출애굽기 32:7-1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내용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와 깊은 교제를 하시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7-10)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출애굽기 32:11-14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 내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그 결과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십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32:11-14)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설명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을 언급하면서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고 지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노를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32:15-20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모세가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받은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진 내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판 둘(십계명)을 손에 들고서 산에서 내려옵니다. 모세가 진에 가까이 와서 보니,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돌 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시고 제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던 모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홧김에 모세가 증거판(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을 산 아래로 집어 던진 게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고 생각하고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졌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다시 받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약 갱신’이라고 합니다.  

20절 말씀은 상당히 무서운 느낌이 드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금 송아지 우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우상숭배가 얼마나 큰 죄인지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대 근동의 자료들에 따르면 신들의 전쟁에서 상대방 신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의미로 신의 우상을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모세가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것을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한 것도 우상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입니다. 


출애굽기 32:21-24절은 모세와 아론이 나눈 대화인데, 아론의 변명이 걸작입니다.

이 백성이 형님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형님은, 그들이 이렇게 큰 죄를 짓도록 그냥 놓아 두셨습니까?”

모세의 질문에 아론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합니다.

“아우님은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이 백성이 악하게 된 까닭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나에게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인도하여 줄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모세라는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 아론의 변명
출애굽기 32:4
출애굽기 32:24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내가 그들에게, 금붙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금을 빼서 나에게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32:25-29절은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편에 선 내용입니다.

모세는, 백성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론이 그들을 제멋대로 날뛰게 하여, 적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모세가 진 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였고,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편에 서겠다고 앞으로 나온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적들의 조롱거리가 된 자들을 심판했습니다. 그 날, 백성 가운데서 어림잡아 삼천 명쯤 죽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에게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명령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에게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심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레위 지파 중에서 우상 숭배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2:29절에, 모세가 저마다 자녀와 형제자매를 희생시켜 자신을 여호와께 드린 레위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가 죽인 3,000명 안에 레위 지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제사를 드려야 할 지파입니다. 그런데 아론과 더불어 레위 지파 사람들 일부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 스스로 악을 제거해야 하고,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지파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출애굽기 32:30-35절은 모세가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이튿날 모세는 백성들이 지은 크나큰 죄를 지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께 가서 백성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 기도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질 각오하고 드린 기도입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여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아론이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 적용 질문

금송아지 사건에서 여호와의 편에 선 레위 자손이 자기 형제와 친구와 자기의 이웃을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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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장 / 브살렐과 오홀리압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31:12-17, 안식일에 대한 말씀
31:18, 증거판 둘(십계명 두 돌판) 

출애굽기 31장 한 눈에 보기
출애굽기 31:1-11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
출애굽기 31:12-17
안식일(영원한 언약)
출애굽기 31:18
하나님이 친히 쓰신 증거판 둘


출애굽기 31:1-11절은 성막 건축 책임자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입니다.

보아라, 내가, 유다 지파 사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불러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겠다. 그가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그 생각한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겠다.”(31:2-5)

분명히 나는, 단 지파 사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브살렐과 함께 일하게 하겠다. 그리고 기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혜를 더하여,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겠다.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에 덮을 속죄소와 회막에 딸린 모든 기구와 상과 거기에 딸린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제사장 일을 할 때에 입는 잘 짠 옷, 곧 제사장 아론의 거룩한 옷과 그 아들들의 옷과 성별하는 기름과 성소에서 쓸 향기로운 향을, 그들이, 내가 너에게 명한 대로 만들 것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한 눈에 보기

브살렐
오홀리압
지파
유다 지파
단 지파
가족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아히사막의 아들
재능
하나님의 영을 채워 주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춤
재능이 있음(출 38:23)

업무
여러 가지를 생각하여, 그 생각한 것을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고,
온갖 기술을 발휘하여, 보석을
깎아 내는 일과 나무를 조각하는 일을 함
브살렐과 함께 일함
조각하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음
(출 38:23 참고)


출애굽기 31:12-17절은 안식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제거될 것이다.

6일 동안은 일을 하고, 7일 째는 주께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6일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7일째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1:18절은 증거판 둘에 관한 설명입니다.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하나님이 손수 돌 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그에게 주셨습니다. 증거판 두 개에 적힌 내용은 출애굽기 20장에서 살펴본 십계명이었습니다. 참고로, 출애굽기 32:15,16절에 보면, 두 증거판 앞뒤로 글자가 적혀 있다고 나옵니다. 돌 판 앞뒤로 동일한 계명을 기록했는지, 십계명을 돌 판 앞뒤에 나누어서 기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적용 질문

하나님의 성막을 만드는 기술자의 자격 조건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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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0장 / 분향단과 물두멍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가로세로가 1규빗이고, 높이가 2규빗 정사각형이며, 네 모퉁이에 뿔이 있습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만들고,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를 꿰어 놓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1년 단 한 번 대속죄일에 분향단의 뿔을 위하여 속죄하고 피를 바릅니다.


   분향단


분향단은 성소의 중앙에 위치하고, 지성소 바로 앞에 있습니다. 분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위치합니다. 아침마다 향기로운 향기를 사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향기입니다. 저녁에 등불을 켤 때에도 향을 사릅니다.

분향단도 조각목을 정금으로 쌉니다. 우리 힘으로는 결코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모두 뒤틀리고 가시가 많이 나 있는 조각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덮어주시고 감싸 안아주셔야만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분향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후 2:14-15). 성경은 기도의 분향단에서 피우는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합니다(계 5:7,8; 8:3,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린도후서 2:14-15)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요한계시록 5:7,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요한계시록 8:3,4)


출애굽기 30:11-16절은 생명의 속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세어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합니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인데, 하나님께 올리는 예물입니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한 번 반 세겔의 생명의 속전을 내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반 세겔을 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낸 생명의 속전은 회막을 수리하고 유지하는 비용으로 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 값을 대신하여 그들을 기억하여서 지켜 주십니다.


출애굽기 30:17-21절은 물두멍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름이 이상하지만, 물두멍은 우리 말로 하면 큰 대야입니다. 성소와 번제단 사이에 있는데,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둡니다. 안 씻으면 죽습니다. 누가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요.

물두멍


중요한 사실은 물두멍의 재료입니다. 회막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듭니다. 왜 하필이면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 거울로 물두멍을 만들었을까요? 물두멍은 다른 성막 기구와 다르게 크기와 무게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두멍을 여인들의 놋 거울로 만든 이유는 거울의 용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인들은 자기의 모습을 살피고 단정하게 하려고 거울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들도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 반드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두멍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사장은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물두멍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막 기구들과 달리 물두멍의 크기와 무게, 모양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와 크기, 그 깊이를 우리는 감히 잴 수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떤 말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0:22-38절은 관유와 향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것들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30:22-33절은 관유에 대한 설명이고, 30:34-38절은 향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애굽기 30:22-33절은 관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막에 사용하는 관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일 좋은 향품을 사용해야 합니다. 순수한 몰약500 세겔, 향기로운 육계 250 세겔, 향기로운 창포 250 세겔, 계피 500 세겔, 이렇게 성소 세겔로 취하고, 올리브 기름 한 힌과 함께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관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관유를 어디에 사용할까요?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와 등잔대와 그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서, 이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가장 거룩한 것이 되며,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 기름을 발라서,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성별하는 데만 써야 하는 기름이다. 너희는 이것을 아무의 몸에나 부어서는 안 되며, 또 그것을 만드는 방법으로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가 거룩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게 섞어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거나, 그것을 다른 아무에게나 발라 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출애굽기 30:34-38절은 향을 어떻게 만드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 설명합니다.

먼저, 분향단에 사용할 향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과 섞되 저마다 같은 분량으로 섞습니다. 향을 제조하는 법을 따라서 잘 섞은 다음에,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다음은 향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설명합니다. 위에서 만든 향 중에서 그 가운데서 일부를 곱게 빻아서, 제사장이 하나님과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놓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십니다. 제사장들이 만들 유향은 주의 것이며, 거룩한 것입니다. 사사로이 쓰려고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나 백성 중에서 그 냄새를 즐기려고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입니다.            


@ 작용 질문

모든 성막 기구들은 치수가 나오는데, 왜 물두멍은 치수가 나오지 않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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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9장 / 대제사장의 위임식 


제사장 위임식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릴 제사장들이 거룩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절차입니다. 실제로 레위기 8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한 제사장 직분 위임식을 행합니다. 본문에서는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모세가 무엇을 준비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29:1-3절은 모세가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기본적으로 준비할 것들입니다.

모세가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친히 준비할 것들
수송아지 한 마리, 숫양 두 마리(흠 없는 것), 누룩을 넣지 않은 빵, 누룩 없이 기름만
섞어 만든 과자, 누룩 없이 기름만 바른 속 빈 과자(모두 고운 밀가루로 만들기)
이 모든 것들을 모두 한 광주리에 넣어서, 수송아지와 두 마리의 숫양과 함께


출애굽기 29:4-9절은 모세가 진행할 제사장 위임식 순서입니다.

1)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어귀로 데리고 와서 목욕을 하게 하라
2)제사장 옷을 가져다가,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과 흉패를 달고, 
정교하게 짠 에봇 띠를 띠게 하여라
3)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에 ‘여호와께 성결금패를 붙여라
4)거룩하게 구별하는 데 쓰는 기름을 가져다가, 그의 머리 위에 부어, 그를 거룩하게 구별하여라
5)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속옷을 입게 하고, 띠를 띠게 하고, 머리에 두건을 감게 하라
이런 절차를 통해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라. 이것이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여라


출애굽기 29:10-14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 속죄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준비한 흠 없는 수송아지를 하나님께 속죄제물로 드립니다. 여기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모세가 할 일입니다.

모세가 수소를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수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게 한 다음에, 회막 어귀 주 앞에서 그 수소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소의 피를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제단 밑에 부어야 합니다.

내장을 덮은 모든 기름기와 간에 붙은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과 거기에 붙은 기름기를 떼어 내서 제단 위에서 살라 바쳐야 합니다.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바깥에서 불에 태워야 합니다. 모세가 할 일이 엄청납니다.


출애굽기 29:15-18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번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준비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는데, 역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는 일은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뿐이고, 모든 일은 모세의 몫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주고, 그 숫양의 머리 위에 그들의 손을 얹게 한 다음에, 그 숫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합니다. 그 숫양의 각을 뜬 다음에, 내장과 다리는 씻어서 각을 뜬 고기와 머리 위에 얹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 숫양 전체를 제단 위에서 통째로 살라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 드리는 번제이며, 이것이 바로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살라 바치는 제물입니다.


출애굽기 29:19-21절은 피와 관유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예식입니다.

한 마리 남아 있는 숫양의 피과 관유를 가지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다른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 놓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게 합니다.
2)그 숫양을 잡고, 피를 받아서, 아론의 오른쪽 귓불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불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도 발라야 합니다.
3)남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려야 합니다.
4)제단 위에 있는 피와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을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 위에 뿌리고, 
아론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 위에 뿌려야 합니다.
☞ 그렇게 하면,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이 거룩하게 됩니다.


이 절차를 통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피로 붉게 물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를 덮어 주심으로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브리서 9:13,14)


출애굽기 29:22-25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화제와 요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숫양에서 기름기와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기와 간에 붙은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과 그것을 덮은 기름기를 떼어 내고, 오른쪽 넓적다리를 잘라 내어야 합니다. 이것은 제사장을 위임하는 의식에서 쓸 것인데, 요제를 드린 후에 불태워 드릴 번제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둔 광주리에서, 빵 한 덩이와 기름을 섞어서 만든 과자 한 개와 속 빈 과자 한 개를 가져다가,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얹어 주어, 그것으로 주 앞에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드리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흔들어 드리는 제사가 바로 요제입니다.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다가, 제단의 번제물 위에 놓고 불살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향기로 주를 기쁘게 해 드리는, 주께 살라 바치는 제물, 화제입니다.


출애굽기 29:26-28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과 거제물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에 쓸 숫양에서 가슴을 떼어, 주께 흔들어 바치는 예식을 하고 나서, 그것은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의 몫이 됩니다. 본문에서는 모세의 몫이 되는 거구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 위임식에 쓴 숫양 고기 가운데서 흔들어 바친 것(요제)과 들어올려 바친 것(거제), 곧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올려 바친 넓적다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들어올려 바친 제물(거제물)이므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분깃입니다.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 제물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화목제물로 주께 들어올려 바친 제물입니다.


출애굽기 29:29,30절은 아론의 성의(대제사장의 옷)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론의 거룩한 옷은 그의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서, 그들이 제사장 위임식 때에 그것을 입고 기름부음을 받게 하여야 합니다. 아론의 아들 가운데서, 그의 제사장직을 이어받고 회막에 들어가서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사람은, 일주일 동안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대제사장 옷


출애굽기 29:31-34절은 제사장 위임식 식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제사장 위임식 때에 드린 숫양의 살코기를 가져다가, 거룩한 곳에서 삶아야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 어귀에서 바로 이 숫양의 살코기와 광주리에 든 빵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으로 세우고 속죄의 제물로 바친 것이므로, 그들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먹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의 살코기나 빵이 이튿날 아침까지 남아 있거든, 너는 그 남은 것을 불에 태워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므로, 남은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 29:35-37절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 중에서 속죄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주일 동안 제사장 위임식이 진행되는데, 매일 속죄제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날마다 수송아지 한 마리씩을 바쳐서, 죄를 속하는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제단 위에 속죄제물을 드려서, 그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서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제단 위에 속죄제물을 드려서, 제단을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제단은 가장 거룩하게 되고, 그 제단에 닿는 것도 모두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9:38-42절은 제사장이 매일 하나님께 드릴 번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매일 1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는데, 아침에 한 마리, 저녁에 한 마리 드립니다. 한 어린 양에 고운 가루 10분의 1에바(약 2.2리터)와 찧은 기름 4분의 1힌(약 900그램)을 같이 드립니다. 번제를 드릴 때, 소제와 전제를 함께 드립니다.


출애굽기 29:43-46절은 제사장 위임식 결론입니다.

왜 매일 번제를 드려야 하는지, 왜 제사장이 필요한 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날 것이다. 거기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어 그 곳이 거룩한 곳이 되게 하겠다. 내가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겠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머물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그들의 주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주 하나님이다.”(43-46)



@ 적용 질문


대제사장 위임식 순서와 절차가 왜 이렇게 복잡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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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8장 / 대제사장의 옷과 판결 흉패




대제사장의 옷은 오직 대제사장 직분을 위해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옷입니다. 세상에 단 한 벌 밖에 없는 아주 귀한 옷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입는 옷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을 섬길 때 입는 옷입니다.

출애굽기 28:1-5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을 위하여 옷을 만들라고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불러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겨라. 너는 너의 형 아론이 입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라.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 준 모든 재주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나를 섬길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서 입을 예복을 만들라고 하여라.

그들이 만들어야 할 예복은 이러하니, 곧 가슴받이와 에봇과 겉옷과 줄무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이렇게 그들은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 주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게 하여야 한다. 에봇을 만드는 이들은, 금 실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모시 실을 써서 에봇을 만들어야 한다.


   대제사장의 옷


출애굽기 28:6-14절은 대제사장이 입는 겉옷 에봇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제사장의 겉옷인 에봇은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짜서 만듭니다. 에봇에 어깨받이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이어지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을 짜는 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에 정교하게 붙여 짭니다. 호마노 두 개를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하나씩 견대처럼 부착합니다. 호마노 위에는 야곱의 12아들 이름을 한 호마노에 6명씩 새깁니다.




주의할 점은 르우벤부터 베냐민까지 이스라엘의 아들이 태어난 순서대로 이름을 보석에 새겨야 합니다.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보석에 새기고 금테에 물려야 합니다. 소중한 이름이니까요.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합니다.


출애굽기 28:15-29절은 판결 흉패에 대한 설명입니다.

판결 흉패는 에봇을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듭니다.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네모 반듯하게 두 겹으로 만들었고 네 줄로 열 두 보석을 답니다. 흉패의 보석들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 둘입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이 되게 합니다. 그의 가슴에 있는 보석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판결 흉패
  

출애굽기 28:30절은 판결 흉패에 넣는 우림과 둠밈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나아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해야 합니다. 우림과 둠밈의 뜻이 있는데요, 우림은 ‘빛’이고, 둠밈은 ‘온전함’입니다. 우림과 둠밈은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결정할 수 없을 때에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왜 우림과 둠밈 두 가지가 필요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모양이 어떠한 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는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림과 둠밈(추정)


출애굽기 28:31-35절은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 받침 겉옷에 대한 설명입니다.

에봇에 딸린 겉옷을 만들되, 청색으로 만듭니다. 그 겉옷 한가운데 머리를 넣을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의 둘레를 갑옷의 깃처럼 단단히 홀쳐서 찢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겉옷자락 둘레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 모양의 술을 만들어 달고, 석류 술 사이사이에 금방울을 만들어 답니다.

겉옷자락을 돌아가며,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 또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를 답니다. 그리하여 아론이 제사를 드릴 때에, 이것을 입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 성소를 드나들 때에, 방울 소리가 나면, 그가 죽지 않을 것이고, 방울 소리가 안 들린다면 죽었다는 것입니다.   


에봇 받침 겉옷


출애굽기 28:36-38절은 대제사장이 쓰는 순금패가 달린 관에 대한 설명입니다.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서, 그 위에, 인장 반지를 새기듯이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깁니다. 이것을 청색 실로 꼰 끈에 매어서 제사장이 쓰는 관에 달되, 그것이 관 앞쪽으로 오게 합니다. 이것을 아론의 이마에 달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한 예물을 드릴 때에, 그 거룩한 봉헌물을 잘못 드려서 지은 죄를 그가 담당하도록 합니다. 그는 그것을 늘 이마에 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바치는 예물을, 주께서 기꺼이 받아 주십니다.


대제사장 쓰는 관과 순금패


출애굽기 28:39절은 대제사장의 반포 속옷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는 베 실로 반포 속옷을 만듭니다. 가는 모시 실로 제사장이 쓰는 관을 만들고, 수를 놓아 예복의 허리띠를 만듭니다. 여기까지가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길 때 복장입니다. 


대제사장의 의복 일체


출애굽기 28:40-43절은 아론의 아들들이 입을 속옷에 관한 설명입니다.

아론의 아들들에게 입힐 속옷과 그들이 띨 허리띠도 만들고, 그들이 쓸 관도 만들어서, 그들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서 제사장으로 세우고,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그들에게 허리에서 넓적다리까지 덮이는 속바지를 모시 실로 만들어 입히고, 그들의 몸 아래를 가리게 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제단으로 나아갈 때에, 그것을 입어서 몸 아래를 가려야 합니다. 몸 아래를 노출하는 죄를 지으면 죽습니다. 이것은 그와 그의 자손이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입니다.


@ 적용 나눔과 질문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다른 지파보다 레위 지파가 특별히 하나님 앞에 거룩하기 때문일까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다른 가족들보다 거룩하고 신실하기 때문일까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한 사건과 레위기 10장에 나오는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은 사건을 봐도 아론이나 그의 아들이 특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이들이 제사장으로 임직을 받게 된 걸까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이 특별해서 제사장 직분을 받은 게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사실을 잘 알면 겸손하게 직분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 사실을 잊으면 자신의 지위나 명예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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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7장  / 번제단, 성막 뜰(세마포 휘장)


27:1-8, 번제단에 대한 설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려서 죄 용서를 받아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물을 잡아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로, ‘올라간다’는 뜻이고, 단은 ‘미즈베아’로 ‘죽이다’는 뜻입니다.

번제단도 조각목으로 만듭니다.
다른 기구와 차이점은 금으로 싸지 않고 놋으로 감싼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금보다 놋이 불에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금은 1,065도에 녹고, 놋은 1,085도에 녹는다고 합니다.

번제단은 가로 5규빗(2.5미터), 세로 5규빗(2.5미터), 높이가 1규빗반(75센티) 정도의 정사각형이며 4개의 뿔이 있고 가운데는 그물망이 있습니다.
놋 고리 한쪽에 2개씩 네 개가 붙어 있고, 멜 채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쌉니다.
번제단에는 몇 가지 보조기구들이 있는데, 재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이며 다 놋으로 만듭니다.


번제단


번제단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곳입니다.
번제단은 죄를 용서받는 자리,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장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일반인들이 못 들어갑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두멍도 성소에 들어가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따라서 번제단이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나 나아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피였습니다(히 9:22).
구약제사는 동물의 피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 제사였습니다.
신약의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제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단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된 것처럼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 인생을 보혈로 덮어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삶(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7:9-19, 성막의 뜰에 대한 설명

성막의 울타리를 세마포로 만드는데, 가로가 100규빗(45m), 세로가 50규빗(22.5m) 울타리의 높이가 5규빗(2.25m)입니다.

   성막 뜰


울타리를 만드는데, 60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모두 놋으로 만듭니다.
동쪽과 서쪽에 10개씩 남쪽과 북쪽에 20개씩 놋 기둥을 세웁니다.
그 기둥들을 잘 고정시키기 위해 갈고리와 가름대를 은으로 만듭니다.
성막 울타리는 성막 뜰과 성소, 지성소를 보호해야 합니다.
울타리를 칠 때, 동쪽에 문을 만드는 10m만 제외하고 모두 하얀 세마포로 두릅니다.

동쪽에만 있는 문은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진 휘장입니다.
거기도 기둥이 넷 필요하고 받침대도 네 개 필요합니다.
누구나 성막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넓고 큰 문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집, 성막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막 울타리 동쪽에 있는 문은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요한복음 14:6).

번제단을 만들 때도 놋을 사용했고, 물두멍도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이 사용하던 놋거울로 만들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를 만들 때 역시 놋으로 기둥을 만들고 받침대도 만듭니다. 성막을 만들 때 금이 사용되는 것만큼이나 놋도 많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놋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은 이야기가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어서 불순종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놋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뒤틀린 조각목을 놋이 감싸주어 용서와 은혜의 번제단이 되지 않았습니까? 성막의 뜰을 든든히 지탱해주는 놋 기둥 역시 우리 인생을 든든히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할렐루야!

27:20,21, 감람으로 짠 기름으로 성소 안에 등불을 켜라는 내용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올리브를 찧어서 짜낸 깨끗한 기름을 가져다가 등불을 켜게 하되, 그 등불은 늘 켜 두어라.
아론과 그 아들들은 등불을 회막 안의 증거궤 앞에 쳐놓은 휘장 밖에 켜 두어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서 꺼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적용을 위한 질문 / 
성막 기구를 만드는 주 재료가 조각목과 놋인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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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6:1 성막(聖幕) 미시칸(mishkan) 4908 מִשְׁכָּן

1. 거주,  2. 엽기 18:21,  3. 굴

발음 / 미시칸(mishkan)

어원 / 79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휘장(출 26:35), 회막( 출 39:32, 민 3:7, 대상 6:32), 집(욥 18:21), 거처(시 49:11, 78:28, 사 32:18, 렘 9:19), 처소(시 132:5, 사 22:16, 겔 37:27).
[동] 계시다(시 26:8), 살다(욥 21:28).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 7931. שָׁכַן    
1. 아래 앉다,  2. 눕다,  3. 거주하다

발음 / 사칸(shâkan)

관련 성경 / 거하다(창 9:27), 들어가다(출 40:35), 엎드리다(신 33:20), 깃들이다(사 13:21, 겔 17:23),머물다(출 24:16, 민 9:22, 잠 7:11), 계시다(왕상 8:12, 사 8:18), 살다(욥 30:6, 렘 46:26), 덮이다(욥 3:5), 쉬다(나 3:18), 두다(신 12:11, 느 1:9, 렘 7:12), 세우다(수 18 : 1), 떨어뜨리다(시 7:5).
[명] 소유지(수 22:19), 주소(잠 8:12), 있는 곳(욥 38:19).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성막(聖幕) 4633 스케네 σκηνή, ῆς, ἡ 

1. 초막,  2. 오두막집

발음 / 스케네( skēnē)

4632와 4639와 유사어로 보임 : 천막

관련 성경 / 초막(마 17:4, 막 9:5, 눅 9:33), 처소(눅 16: 9), 장막(행 7:43, 히 8:2, 계 13:6) 
신약 성경 / 20회 사용

성전(聖殿) 1004 바이트(bayith) בַּיִת

1. 집,  2. 장막

열왕기하 23:7, 여호와의 전 가운데...

어원 /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 7:1, 레 14:35, 삼상 1:7), 권속(창 18:19,레 16:6, 삼하 2:3), 궁(창 12:15, 삼하 7:2), 처소(창 24:31, 대 하5:7), 집 안(창 27:15, 시 55:14), 전(출 34:26, 신 23:18), 옥(창 39:20, 삿 16:21,왕하 25:27), 간수장(창 39:21), 궁중(창 45:2, 왕하 21:33, 에 7:8), 가족(창 5:22, 신 11:6, 시 68:6), 족속(출 2:1, 레 22;18, 수 17:17), 식구( 출 12:3), 안쪽(출 28:26), 가옥(레 14:55, 신 19:1,사 5:8), 친정(레22:13), 종족(민 1:2, 대상 7:4), 지도자(민 25:14), 지파(수 22:14), 신전(삿 9:4,왕하 19:37, 대상 10:10), 신당(삿 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 16:18, 대상 29:3), 창고(왕하 20:13), 궁궐(왕하 21:18, 대상 14:1), 성막(대상 9:23), 궁전(대상 17:1), 곳간(대상26:15, 사 22:8), 반열(대상 28:13), 내전(內殿)(대하 3:13), 무더기(욥 8:17), 가산(욥 20:28), 국고(사 22:15), 딸(사 10:32), 부엌(겔46:24),  집(미 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교회(敎會) 1577 에클레시아(ĕkklēsia) ἐκκλησία

1. 회,  2. 모임

사도행전 7:38
관련 성경 / 교회(마 16:18, 행 2:47, 롬 16:4), 모인 무리 (행 19:32), 민회(행 19:39), 모임(행 19:41).
신약 성경 / 114회 사용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ήν


거하시매 / 
σκηνόω   4637

1. 살다,  2. 거주하다,  3. 요한계시록 13:6

발음 / 스케노(skēnŏō)

어원 / 미래 σκηνώσω, 제1부정과거 ἐσκή- νωσα, 463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하다(요 1:14, 계 13:6, 21:3), 장막을 치다(계 7:15).
신약 성경 / 5회 사용
성막 /
σκηνή, ῆς, ἡ  4633

1. 초막,  2. 오두막집

4632와 4639와 유사어로 보임 : 천막

발음 / 스케네(skēnē) 


관련 성경 / 초막(마 17:4, 막 9:5, 눅 9:33), 처소(눅 16: 9), 장막(행 7:43, 히 8:2, 계 13:6) 
신약 성경 / 20회 사용
영광
δόξα, ης, ἡ  1391

1. 광명,  2. 위엄,  3. 누가복음 2:9

발음 / 독사(dŏxa)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신약 성경 / 166회 사용
카보드(영광)
כָּבוֹד  3519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개역개정,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성막(미쉬칸)
- '거주하다'는 뜻의 '솨칸'에서 유래할 말로 거처 '거주지'라는 의미이다.
즉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하심을 나타내는 장소를 가리킨다.
자세한 설명은 25:8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거할 성소
- '거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쇠칸'은 '숙박'이라는 개념을 가지며 동시에 '휴식한다'는 뜻의 '쇠카브'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소에 머무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돌봐 주겠다는 의미이다.
그 속성상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떠한 특정 장소에만 머물러 계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은 성경이 재차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왕상 8:27; 대하 2:6; 사 66:1; 렘 23:24; 행 7:48; 17:24).

한편 성소란 말은 '성막'(26:36), '회막'(29:42), '증거의 장막'(17:7) 이라고도 한다.
한 곳에 고정된 집이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텐트였다.
따라서 이처럼 이동하는 성소에 하나님이 거하시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을 앞서 인도하시겠다는 표현임을 분명알 수 있다(민 9:17-23; 신 1:33).

그러나 솔로몬은 성전 건축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은 제한하고, 성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나중에는 성전 숭배 사상까지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음을 선포했고(사 66:1, 2),
스데반도 이를 강조했으며(행 7:48-50),
예수께서도 예배의 참된 요소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닌 예배드리는 자의 '신령과 진정' 임을 분명히 가르치셨다(요 4:21-24).
이처럼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성전된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엡 2:21).

앙장
- 텐트나 상여 등의 위에 치는 휘장(covering)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성을 덮는 막을 의미한다.

열 폭을... 만들지니
- 성막의 제일 안쪽을 덮는 소위 제1앙장에 대한 제조법이(제1앙장의 모양은 36:8 주석의 그림을 참조하라>.
이것은 길이 약 12. 8m, 너비 약 18m 만들어진 앙장을 길이 부분이 앞뒤 방향으로 양옆 방향으로, 너비 부분이 앞뒤 방향으로 오게끔 해서 성소와 지성소 위에 덮었다.
성막 본채는 좌우 그리고 서쪽 벽은 있었지만 동쪽 입구는 휘장으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이 앙장을 포함해서 4겹의 피륙으로 덮혀졌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제1앙장은 성막 안쪽에서만 볼 수 있었고 바깥에서는 볼 수 없었다.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
- 26:1-14강해, '앙장을 수 놓은 네가지 색실'을 참조하라.

그룹
- 25:18, 19 주석 참조.
그리고 수 놓인 그룹의 모양에 대해서는 36:37, 38 그림을 참조하라.

공교히(마아쉐 호쉐브)
- '마아쉐'는 '만들다'는 뜻의 '아솨'에서 온 말로 '활동', '일', '만든 것' 등의 뜻이고,
'호쉐브'는 '생각하다', '계산하다', '고안하다'는 뜻으로서 여기에는 '공교한' '숙련된'의 뜻도 있다.
따라서 '공교한 일로', '숙련된 일로'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은 최고의 기술로 만들 것이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 놓아 만들지니
- 원어에는 수를 놓는다는 말이 없으나 실을 사용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놓아'가 첨가되어 있다.
이때 앙장과 수는 따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앙장을 짜면서 각각 다른 4색의 실을 사용, 그룹의 모양이 함께 짜지도록 했다.
즉 앙장도 카페트나 담요를 만드는 기법으로 '공교히'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막 안쪽에서 볼 수 있는 제 1앙장에 이처럼 그룹(25:18)을 수놓은 것은 친사들이 성막 내부의 성결을 유지하며 또한 보호하고 있음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출애굽기 26:1 성막(聖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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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에서 성막의 기구들 언약궤, 떡상, 등잔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6장에서는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는 성막의 덮개(1~14)

성막의 천장 덮개는 4중으로 되어있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흰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정교하게 그룹을 수놓아 만든 휘장이 씌워졌고, 그 위에는 염소털로 만든 막이 덮여졌습니다.
이 질긴 천은 지금도 중동의 유목민들이 천막을 만들 때 사용하는 천입니다.
그 위에는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이 덮여졌고 맨 위에는 해달의 가죽이 덮여졌습니다.
염소털로 만든 덮개는 그 아래의 천을 보호하고 다른 것들과 분리하는 거룩한 성별을 의미합니다.
붉게 칠해진 수양의 가죽은 희생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빌 2:8).
수양 가죽에 들여진 붉은 색은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상징합니다.
해달의 가죽은 외양상 조금도 아름답지 않고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인성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매력적이지 않았으나, 알면 알수록 그분의 영광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둘째는 성막 둘레의 널판(15~30)

성막의 둘레에 세워지는 기능으로서, 48개의 널판은 조각목(아카시아나무)으로 만들어졌고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각 널판은 10규빗 x 1.5규빗이었습니다.
널판은 가로세워져서 서로 연결하여 성막의 둘레를 형성하였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어깨를 연결하여 교회를 형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은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싼 각각 다섯 개의 띠로 엮어져 있었는데(26~28),
성령께서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을 상징합니다(엡 4:3).
널판의 아래에는 은으로 받침을 만들어 끼워지게 하였습니다.
은받침은 하나에 40kg이 나가는 무게로 만들어졌습니다.
은은 이스라엘의 장정(20~50세 남성)을 계수하여 각각 속전으로 은 반 세겔씩 내게 하였는데 바로 그것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은은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는 속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널판 하나에 은받침 2개씩 있었는데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속함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셋째는 휘장(31~33)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존하는 기능이요, 구별하는 기능입니다.
휘장은 역시 흰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어졌고 아래로는 금갈고리를 붙여서 언제나 아래로 늘여뜨리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휘장 외에 널판과 같은 네 개의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서 은받침 위에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휘장은 아무도 지성소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장차 이 휘장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예수님의 휘장이 성소의 휘장을 찢는 죽음, 곧 하나님께로 죄인들이 나아올 수 있도록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여는 죽음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넷째는 성막의 문(36~37)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과 마찬가지로, 흰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아 짜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지성소의 입구와는 달리 5개의 기둥을 세우라고 하셨고, 역시 금갈고리도 달게 되어있었습니다.
기둥 다섯에 놋받침 다섯이 있습니다.
놋은 십자가를 견디신 구세주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문 마다, 입구 마다 그룹이 수놓아진 세마포를 휘장으로 두었다는 것은 아무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성막의 덮개는 성도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안,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모든 죄인된 인간에게 금지된 사항입니다.
휘장 그리고 거기 수놓아진 그룹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그 보혈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널판과 그 받침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교회의 기둥처럼 교회를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구속함을 입은 백성들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굳게 서서 교회의 기둥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교회에는 분명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들이 서로 연합하여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까?

성막을 통해서 교회를 봅니다.
성막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봅니다.
성막을 통해서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우리가 오늘 어디를 보아야 하며, 무엇을 꿈꾸어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다시 새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구원받은 천국백성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도 충만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막(聖幕)의 재료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성막을 짓기 위하여 드려진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방법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능력과 역사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인 순종과 헌신에 의하여 드린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 난 하나님의 아들의 도성인신으로 참 이스라엘로써 신앙적인 순종과 헌신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됨을 말해준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하나님과 참 잇라엘의 결연자에게 말씀하심과 같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34) 고 했다.
그 여자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내가 그로라"(요 4:25-26).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상징이었다(출 25:8, 왕상 8:27)

말씀의 도성인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매

헬라어의 성막은 육신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요 1:14, 고후 5:1)



그러므로 성막은 도성인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만나게 되고 영적으로 교제하게 되며 그 안에서, 즉 그를 중계로하여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만나거나, 참 예배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참 성막이다.
우리는 이하에서 성막의 기구들을 생각하기 전에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에 법궤로부터 시작하여 속죄소, 그룹, 떡상, 향단, 촛대,놋단, 세수대야와 안마당, 바깥마당의 순으로 논한 것이다.
위의 순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심을 의미하며, 죄인을 위한 희생을 나타낸다. 그 희생은 십자가의 희생이다. 죄인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요, 그 역사이다. 또 성막에 들어가는 과정을 생각하여 보면 깊은 진리가 있다. 이방인의 죄인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의 문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여 잡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생명과 거룩함과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된다. 즉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하향적 사랑과 인간의 상향적 신앙을 보여 준다.

2.법궤

[하나님께서는 조각목으로 법궤를 만들 것을 명령하셨다(출25:10). 그 조각목은 광야에서 자라는 무척 굳은 나무이다.]그 궤는 조각목,즉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다.]38)그 [아카시아 나무는 선택되었다. 그 나무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성장하는 나무이다. 그 나무를 선택하여 재료로 사용하였다.]39) 이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설명하여 준다. 우리는 각각 성품이 다르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대하여 그 개성도 완고하면서도 마귀에게는 유순하여 패하는 자가 많다. 즉 보잘것 없는 고난, 시험과 시련 속에서 그 성품이 움직여 신앙을 잃어 버리는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품은 외유내강 하셨다. 예수님은 세번이나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뿐 아니라 공생애에 수없는 고난과 위험을 당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을 쓰신 인간이었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셨다. ..... 조각목이 견고하여 벌레가 먹을 수 없을 같이 주님의 의지는 움직여지지 않으셨다.]40) 그 나무는 결이 아름답고 귀한 나무이다. 그와같이 우리 주님의 성품은 아름답고 고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조각목은 순금으로 입혔다. 이에 대하여 엉거(Unger)박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나타낸 것이라]41) 고 했다. 그러나 성경에 순금은 순수한 참 신앙을 의미하는 때가 많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또 신성이 신앙의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카일(keil)씨도 "내외에 금으로 포장한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있는 여호와의 성성(聖性)이라"42)고 했다. 그러므로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말하며 정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한다. 주님은 신성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인성도 가지고 계신다(사7:14). 고로 조각목을 정금으로 싼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神人양성의 소유를 나타낸다43). 그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 두 돌비와 아론의 싹난지팡이를 넣어 두었다(히9:4). 그와같이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 심판과 의에 근거한 은헤의 왕국, 하나님 자신의 증거로써 언약 돌비들이 있었다44).
이는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입에서는 그것이 늘 차고 넘쳐 흘렀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놀랄 뿐 아니라 충만함을 받았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부활을 하신 생명의 주님을(민17:10)의미하는데 그가 죄인들을 원수에게서 구원하고, 천국길로 인도하심을 의히만다. 만나 항아리는 생명의 소유자로써(요6:) 택한 양들에게 영생의 양식과 생명을 주심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보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세가지의 유대를 가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요14:6).여기에 대해 차남진 박사는 "십계명은 성부의 대표요, 만나는 희생 제물된 성자의 대표요, 아론의 싹난지팡이는 성신의 대표라"했다. 또 그리스도의 삼중직도 의미한다고 했다(기독신보,196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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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궤(언약궤, 법궤) 출애굽기 26:1 성막(聖幕)

궤에 대한 다양한 명칭
히브리어 : 아론

1. 언약궤,   2. 증거궤,   3. 법궤,  4. 나무궤,   5. 만군의 여호와의 궤,   6. 여호와의 궤,   7. 하나님의 궤,   8. 이스라엘 신의 궤,
9. 주의 능력의 궤,  10. 거룩한 궤,  11.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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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삼으시려고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출애굽기 1-6장 / 모세의 사명
출애굽기 7-13장 / 열 재앙과 유월절
출애굽기 14-18장 / 출애굽과 신광야
출애굽기 19-24장 / 시내산 언약

 19장 : 시내산 언약
 20장 : 십계명
 21장 : 종과 폭행, 소의 잘못에 관한 배상
 22장 : 손해배상, 소외된 자에 관한 법
 23장 : 정의, 안식, 절기, 순종과 축복
 24장 : 시내산 언약식, 모세사 산에 오름 40일

출애굽기 25-40장 / 성막

 25-31장 : 성막 설계
 32-34장 : 범죄와 중보기도
 35-40장 : 성막 건축과 완성

출애굽기 25장-40장은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5-30장 :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성막 설계도입니다.
성막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의 재료와 모양, 치수 등등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5-40장 :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성막 설계도대로 성막건축 책임자 브살렐오홀리압이 성막을 짓는 내용입니다.

성막에 대해서는 ‘성막(Tabernacle)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사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막에 관한 사진들을 보면서 성막을 이해하시면 한결 쉽습니다.

특별히 기억해두실 것은 성막에 나오는 모든 기구들 – 번제단, 물두멍, 떡상, 분향단, 금촛대, 증거궤(법궤, 언약궤) – 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은 성막 기구  증거궤, 떡상, 등잔대를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25:1-7 /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말씀하신 모든 예물들은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공짜로 받아서 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 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애굽기 12:35, 36)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위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곧 금과 은과 동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 실과 염소 털과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과 아카시아 나무와 등잔용 기름과 예식용 기름에 넣는 향품과 분향할 향에 넣는 향품과 에봇과 가슴받이에 박을 홍옥수와 그 밖의 보석들이다.”(25:3-7)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위해 하나님께 드릴 예물
   금, 은, 동, 청색 실, 자주색 실, 홍색 실, 가는 모시 실, 염소 털,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 돌고래 가죽, 아카시아 나무, 등잔용 기름, 
   예식용 기름에 넣는 향품, 분향할 향에 넣는 향품, 에봇, 가슴 받이에 
   박을 홍옥수, 그 밖의 보석들


출애굽기 25:8-9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이 왜 필요한 지 말씀하시는 내용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할 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지으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모세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모세가 디자인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막은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곳입니다.

성전은 고정되어 있는 예배 장소라면, 성막은 이동식 예배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백성들이 지파 별로 텐트를 치고 머무는 곳마다 성막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증거궤(언약궤, 법궤) 


출애굽기 25:10-22 / 증거궤와 증거궤의 뚜껑인 속죄소(贖罪所)

증거궤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안과 밖을 쌉니다.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1규빗 45-50cm).

금고리 4개를 정금으로 만들고 양쪽에 둘씩 답니다.
멜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쌓고, 고리에 항상 꿰어 둡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두릅니다.
증거궤 윗부분(뚜껑)은 속죄소입니다.
증거궤 안에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증거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증거궤는 지성소에 있는 유일한 성물(거룩한 물건)입니다.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 만나 항아리(출 16:34)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민 17장)가 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증거궤보다 길이가 길면 증거궤 앞에 보관했을 지도 모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막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것을 놋으로 쌉니다.
물두멍은 놋 거울로 만듭니다.
조각목은 조각 난 나무토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카시아 나무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과 감람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자였기 때문에 가장 좋은 나무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왕상 6:14-36).
성막을 세울 때, 대부분의 기구들을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을 사용한 이유는 광야에 제일 흔한 나무가 조각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성막 기구를 만드는데 아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는 증거궤의 덮개(뚜껑)가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모세를 만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천사)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2)          


증거궤(법궤)와 속죄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증거궤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예수님도 진리요(요 14:6),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 1:1).
속죄소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뜻하고, 예수님 역시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5:23-30  / 떡상(진설병을 얹는 상)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길이가 2규빗, 광 1규빗, 높이가 1규빗 반(100*50*75).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가 꿰여 있습니다.
정금으로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잔을 만들어 떡과 함께 놓습니다.

떡상 위에는 떡 열 두 덩이가 두 줄로 올려져 있습니다.
이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파님’인데, 얼굴의 떡’, ‘면전의 떡



출애굽기 25장 성막 기구 설계(1) 언약궤, 떡상, 등잔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삼으시려고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19:5,6)
출애굽(1-18장)
모세의 사명
(1-6장)
열 재앙과 유월절
(7-13장)
출애굽과 신 광야
(14-18장)
시내산 언약(19-24장)


시내산 언약
(19-24장)
시내 산 언약(19장)
십계명(20장)
종과 폭행, 소의 잘못에 관한 법(21장)
손해 배상, 소외된 자에 관한 법(22장)
정의, 안식, 절기, 순종과 축복(23장)
시내 산 언약 + 모세가 산에 오름(24장)




성막(25-40장)

성막 설계
(25-31장)
성막 기구 설계(1) 25-27장
대제사장의 옷과 판결 흉패(28장)
제사장 위임식 준비(29장)
성막 기구의 설계(2) 30장
브살렐과 오홀리압(31장)
범죄와 중보기도
(32-34장)
금 송아지 사건(32장)
모세의 중보기도와 언약 갱신(33,34장)

성막 건축과 완성
(35-40장)
성막 건축을 위한 준비(35장)
성막 기구 제작(36-38장)
대제사장의 옷 완성 & 성막 기구 완성(39장)
성막 세우기 &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40장)


출애굽기 25장-40장은 성막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막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는 분들 외에는 출애굽기 25장부터 거의 읽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0장 십계명까지는 읽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 특히 성막 이야기는 사실 관심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5-40장 중에서 그나마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은 32장에 나오는 금 송아지 사건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마음 어렵게 여기는 부분이 성막입니다(출애굽기 25-30장, 35-40장). 출애굽기 전체 40장 중에서 성막에 대한 이야기가 분량이 가장 많습니다. 분량이 많은 만큼 중요한데 사실 읽어도 잘 모르겠습니다. 성막에 대한 설명이 두 번씩이나 나와서 더 부담이 되고 짜증이 납니다.

하지만 왜 출애굽기에 성막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되어 나오는지 그 이유를 알면 너무 쉽습니다. 출애굽기 25-30장에 나오는 성막 이야기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성막 설계도입니다. 성막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의 재료와 모양, 치수 등등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5-40장에 나오는 성막 이야기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성막 설계도대로 성막건축 책임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짓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성막에 대해서 똑같은 내용이 두 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자세히 공부하면 됩니다.

성막에 대해서는 ‘성막’, ‘Tabernacle’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사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막에 관한 사진들을 보면서 성막을 이해하시면 한결 쉽습니다. 특별히 기억해두실 것은 성막에 나오는 모든 기구들 – 번제단, 물두멍, 떡상, 분향단, 금촛대, 증거궤(법궤, 언약궤) – 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장은 성막 기구 설계  세 가지 성막 기구들(증거궤, 떡상, 등잔대)을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25:1-7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성막 건축에 필요한 예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말씀하신 모든 예물들은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공짜로 받아서 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 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애굽기 12:35,36)



출애굽기 25:8, 9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이 왜 필요한 지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할 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지으라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막은 모세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모세가 디자인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막은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던 곳입니다.
성전은 고정되어 있는 예배 장소라면, 성막은 이동식 예배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 백성들이 지파 별로 텐트를 치고 머무는 곳마다 성막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증거궤(언약궤, 법궤)


출애굽기 25:10-22 / 증거궤와 증거궤의 뚜껑인 속죄소(贖罪所)

증거궤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안과 밖을 쌉니다.
길이가 2규빗 반, 너비가 1규빗 반, 높이가 1규빗 반입니다(1규빗 45-50cm).

금고리 4개를 정금으로 만들고 양쪽에 둘씩 답니다.
멜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싸고, 고리에 항상 꿰어 둡니다.
단 상단 부분에 금테를 두릅니다.
증거궤 윗부분(뚜껑)은 속죄소입니다.
증거궤 안에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습니다.

증거궤는 어디에 있을까요?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증거궤는 지성소에 있는 유일한 성물(거룩한 물건)입니다.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부릅니다. 증거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 판, 만나 항아리(출 16:34)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다(민 17장).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증거궤보다 길이가 길면 증거궤 앞에 보관했을 지도 모릅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성막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쌉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든 것을 놋으로 쌉니다.
물두멍은 놋 거울로 만듭니다.
조각목은 조각 난 나무토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카시아 나무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과 감람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자였기 때문에 가장 좋은 나무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왕상 6:14-36).
성막을 세울 때, 대부분의 기구들을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을 사용한 이유는 광야에 제일 흔한 나무가 조각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 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성막 기구를 만드는데 아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십계명 돌 판이 들어있는 증거궤의 덮개(뚜껑)가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모세를 만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천사)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2)          

증거궤(법궤)와 속죄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증거궤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고, 예수님도 진리요(요 14:6),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 1:1).
속죄소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뜻하고, 예수님 역시 용서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5장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긴 내용입니다.

역대하 5:1절은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지었다는 요약적 진술입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은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모든 일을 완성하였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거룩하게 구별해서 바친 성물, 곧 은과 금과 모든 기구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창고에 넣었습니다.

역대하 5:2-10절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긴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시온, 곧 ‘다윗 성’에서 성전으로 옮기려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이스라엘 자손의 각 가문의 대표인 온 지파의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모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일곱째 달 절기에 왕 앞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이니, 레위 사람들이 궤를 메어 옮겼습니다.
궤와 회막과 장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구를 모두 옮겨 왔는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것을 날랐습니다.
솔로몬 왕과 왕 앞에 모인 온 이스라엘 회중이 궤 앞에서, 양과 소를,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잡아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제자리, 곧 성전 내실 지성소 안,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 가져다가 놓았습니다.
그룹들은 궤가 놓인 자리 위에 날개를 펼쳐서, 궤와 채의 위를 덮었습니다.
궤에서 삐죽 나온 두 개의 채는 길어서 그 끝이 지성소의 정면에 있는 성소에서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소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채는 오늘날까지 그 곳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궤 속에는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두 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두 판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온 다음에 여호와께서 호렙에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거기에 넣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요?

왕상 8:9절과 대하 5:10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어디 있을까요?

히브리서 
9:4에는 여호와의 언약궤 안에 십계명을 기록한 언약의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렇게 세 가지가 들어있다고 나오거든요.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출애굽기 25:23-30 / 떡상(진설병을 얹는 상) 


조각목으로 만들고 정금으로 쌉니다.
길이가 2규빗, 광 1규빗, 높이가 1규빗 반(100x50x75).
금고리 4개가 양쪽에 둘씩 있고, 멜 채가 꿰여 있습니다.
정금으로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잔을 만들어 떡과 함께 놓습니다.

떡상 위에는 떡 열 두 덩이가 두 줄로 올려져 있습니다.
이 떡은 히브리어로 ‘레헴파님’인데, 얼굴의 떡’, ‘면전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매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꿔 놓습니다.



떡상(진설병상)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싼 떡 상
역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조각목(아카시아나무)은 연약한 인간(성)을 뜻하고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조각목은 보통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가시가 나 있고, 뒤틀려 있습니다.
너무 단단해서 건축재료로 사용하기가 힘든 나무입니다.
조각목은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조각목이 모퉁이의 머리 돌처럼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아시고 우리를 감싸주시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떡 상에 올려진 떡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떡이 12개니까 하나님 앞에 드려진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할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떡으로 임하신다는 뜻일까요?
제사 상에 떡을 올려놓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일까요? 

떡 상에 올려진 12개의 떡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신 떡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51).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25:31-40 / 등잔대


정금 1달란트(34kg)를 쳐서 만듭니다.
살구꽃 형상의 꽃과 잔과 받침을 만듭니다.
양쪽에 세 개의 가지가 있고 가운데 한줄기로 그 가지들이 연합되어 있습니다.
등잔대에 일곱 개의 등잔이 있습니다.
불 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듭니다.




등잔대

등잔은 성소를 밝히는 유일한 빛입니다.
등잔이 없다면 성소는 칠흑 같은 어둠뿐입니다.
성소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조각목으로 만든 후에 금으로 싸는데, 등잔대만 정금을 쳐서 만듭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금 덩어리를 쳐서 성소를 밝히는 등잔대를 만드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죽음)을 통해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등잔대의 7개 등잔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지혜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을 상징합니다(요 1:9; 8:12).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이 있었나니.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을 얻으리라.


등잔에서 사용하는 기름은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감람열매가 찧어지고 깨짐으로 순전한 기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참 빛이 세상에 비치게 되었습니다.

등잔대를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언급하는 꽃이 ‘살구꽃’입니다.
등잔의 모양을 설명하면서 등잔대 가지와 줄기에 살구꽃 형상의 잔에 대해 반복합니다.
살구꽃’은 팔레스타인에서 봄이 올 때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살구꽃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가드’“파수꾼, 망보다, 깨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שָׁקֵד 스트롱번호 8247

1. 살구나무,  2. 살구나무 열매
발음 / 샤케드(shâqêd)
어원 / 82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감복숭아(창 43:11), 살구 열매(민 17:8), 살구나무(전 12:5, 렘 1:11)
구약 성경 / 4회 사용

* 8245. שָׁקַד 

1. 밤을 새우다,  2. 경계하다,  3. 주목하다

발음 / 샤카드(shâqad)
관련 성경 / 새우다(시 102:7), 깨어있다(시 127:1, 렘 31:28, 44:27), 기다리다(잠 8:34), 지키다(스 8:29), 엿보다(사 29:20, 렘 5:6),
보다(렘 1:21)
구약 성경 / 18회 사용

레위 후손인 고라와 다단, 온이 모세를 거역하여 들고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 앞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권위(리더십)에 대해 뭔가 말씀하실 게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민수기 17장에 나옵니다.

민수기 17장에 보면, 놀랍게도 아론의 지팡이에 살구꽃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고 나옵니다.
살구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살구꽃은 하나님 앞에 늘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등잔대 :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

어두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참 빛,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4-9)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5. 빛
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이 아니요 이 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이 있었나니.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진리의 빛, 지혜와 계시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사진 : 벤구리온 공항에 비치된 메노라입니다.

메노라와 관련된 성서 구절들을 찾아 읽다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막안의 기물들 중 하나인 메노라와 훗날 솔로몬의 성전에 만들어진 메노라는 각각 제작법이 다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한 성막의 메노라 제작법(출 25:31-40, 37:17-24, 민8: 4)과 솔로몬 시대의 메노라 제작법 (왕상 7:48)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1) 메노라의 재료는 순전한 금 (히브리어로 메노라 자하브 타호르)한 달란트를 쳐서 만들도록 하였다. 한편 솔로몬 성전의 메노라 (왕상 7:49)는 좌우에 다섯개씩의 정금 등잔대 (히브리어로 메노로트 자하브 사구르)를 만들어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자하브 사구르”(solid gold- zahav sagur)라는 단어는 아카드에서 기원한 것이다. 반면 “자하브 타호르” (pure gold – zahav tahor)는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전문 용어와 가깝다.  

 2)같은 모양, 혹은 다른 모양:  성막에 설치되는 메노라는 한 달란트의 금을 쳐서 만든 것이다.즉 여러개의 조각을 붙여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성막에는 단 하나의 메노라만을 제작하여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의 메노라는 하나가 아닌 열개이다.

3). 성막에 설치하는 메노라는 자세한 제작법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민 8:4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메노라의 제작 양식을 보여주셔야 할 정도로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성전의 메노라는 그 제작 방법에 대한 기술이 간단하게 등잔대와 금꽃과 등잔을 만들라고 언급한다.

4) 성막의 메노라에는 아몬드 꽃을 장식한다. 그러나, 성전의 메노라는 꽃을 장식하지만 어떤 꽃인지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왜 솔로몬은 또 다른 메노라를 만들었을까? 모세 시대의 만든 메노라 외에 또 다른 메노라들을 만들어서 성전에 비치하였을까? 아니면 성막에 있던 메노라를 잃어버렸을까? 성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성서의 메노라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히브리대 레아 마조르 교수의 글에 의하면 (http://mikrarevivim.blogspot.com/search?q=מנורה - 성막의 금촛대(메노라) - 빛의 나무)
메노라는 생명과 능력을 상징한다.
이유는, 메노라에 장식되는 꽃인 아몬드 꽃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 되었음을 알리는 꽃이다.
즉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힘을 상징한다.
또한 아몬드 나무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다.

예를 들면, 민 17장에 나오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아몬드 꽃이 핀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야곱과 라반 이야기에서도 메노라의 아몬드 꽃이 나온다.
창 30:37에 나오는 “루즈” 라는 단어는 아몬드 나무(다른 말로는 샤케드)를 뜻한다.
이 “루즈”역시 생명의 탄생과 직접 관련이 있다.
성막의 불을 밝히는 제사장은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 역시 생명을 뜻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상징 메노라(Menorah)

히브리어 메노라는 מְּנֹרָ֖ה 입니다.
멤, 눈, 레쉬, 헤이 이 4글자의 조합인데,
각 글자마다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단어들을 조합해보니
가장 높은 진리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삶이 바로 메노라의 의미라는 걸 알게 하셨습니다.
가장 높은 진리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삶.
(Life of overpowering to reveal the highest things)


메노라는 가지가 일곱인 등대로 성막시대부터 유대인의 상징이었고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의 상징이다.
메노라는 유대교 회당의 제대에 놓여지는 등대로 성막과 성전의 일곱 등대의 모습이다.

출애굽기 25장 31~40
출애굽기 37장 17~24
성막에서 사용하는 등대(등잔)의 제작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1. 성막의 메노라(등대)

(1). 등대의 재료
등대는 정금 1 달란트로 만들었다(정금 1달란트 = 34kg)(출 25:31, 출 37:17)
금은 믿음을 상징한다.
빛된 생활을 하려면 믿음 생활을 하여야 함을 뜻한다.

(2). 만든 방법
금을 녹여 틀에 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쳐서 만들었다.(출 25:31, 출 37:17)
이는 고난을 통하여 정금과도 같은 빛된 생활을 하게 됨을 상징한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빛나는 메노라(등대)이다.

(3).등대의 모양
가운데 한줄기가 있고 양편에 각각 3가지씩 6개의 가지가 있다.(출 37:18)
등잔은 모두 7개로 살구꽃 형상이다.(출 25:33)

(4).살구나무의 신학적 의미
살구나무는 정확하게 아몬드를 말한다.
살구꽃은 2월 초에 꽃이 피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다.
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마치 땅 위의 흰구름 처럼 보인다.
꽃이 핀지 10주가 지나면 열매를 딸수 있는데 이 아몬드가 그 해의 첫 열매이다.
히브리인들은 살구나무를 [깨어 있는 나무]라는 뜻인 [솨케드]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예레미야 1장 11~12절에 하나님이 [예레미아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네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막과 성전 지성소 등잔의 형상적 소재가 된 살구나무는 그 해의 첫 열매를 맺는 나무인 동시에 깨어 있는 나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전 15:20)
살구나무 등잔(메노라)은 시종일관 깨어 계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적 파수꾼인 예언자들과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이다.
고대 히브리 전통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깨어 계시는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신성한 나무는 깨어 있는 나무인 살구나무이며 이 나무는 신내림의 성소였다.
창세기 3장 3절에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창세기의 저자 모세는 살구나무를 엔덴 동산의 생명나무로 발전 시킨 것이다.

(5).성막의 등대 위치
출27:21절에 의하면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 두었으며 출27:20절에 의하면 순결한 감람유를 사용하였고(출27:20)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게 켜 놓았다고 하였다.
성막에는 창문이 없다.
오직 하나의 빛 등대가 있을 뿐이다.

성막의 등대가 주는 성경적 의미는
①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의 빛이요 등경위에 놓인 등불과 같이 온 집안을 비추는 빛이니 사람 앞에서 비추어야 한다(요5:14~16)는 의미가 있다.
②등잔은 감람유를 공급받아야 빛을 낼수 있다.
감람유는 성령을 의미한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낼수는 없는 것이며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빛을 낼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빌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③빛을 내지 못하는 등잔은 등대가 아니다.
계2:5절에서 하나님은 빛된 생활을 하지 않으며, 회개치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긴다고 하였다.

(6).등대의 역사
성막에는 등대가 하나 밖에 없었으나 솔로몬 성전에는 10개의 등대가 있었다.
성전에는 10개의 등대에서 70개의 등잔이 빛을 발하게 된다.
70 개의 빛은 완전한 빛을 의미하고 있다.
70 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뜻하며 성경 여러곳에서 70 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①야곱이 애굽에 데리고 간 식구가 70명(창46:27)
②엘림에 있는 종려 나무수가 70주(출15:27)
③바벨론 포로기간이 70년(렘25:11)
④유대인 산해드린 공회에 장로가 70인(겔8:11)
⑤예수님이 파송하신 70문도(눅10:1)

2. 국회 의사당의 메노라

이 거대한 메노라는 1956년 영국의 통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국 의회가 이스라엘 국가에 기증한 작품이다.
이 메노라는 브론즈 제품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애기하는 29개의 장면이 조각되어 있고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매노라는 신앙의 빛의 상징인 동시에 4천년에 걸친 제국의 방랑 동안에 바른 신앙을 일관하여 사명에 순종하는 의지를 지탱한 희망의
상징]



3. 하누카 메노라
유대인의 절기 중에 빛의 절기라고 하는 하누카 절기가 있다.
하누카 절기(수전절 또는 봉헌절)에 불을 켜는 등대를 하누카 메노라 라고 부른다.
하누카 등대는 성전의 7개의 등잔으로 이루어진 등대와 달리 9개의 등잔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등잔은 약간 길고 나머지 여덟 개는 짧다.
유다 마카비가 핼라의 분활국 셀류쿠스로 부터 성전을 탈환하고 메노라에 가보니 대제사장의 확인이 있는 순결한 기름(감람유=올리브유)은 단 하루치 밖에 없었다.
레위기법에 따라 성전 기름은 순결한 기름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적은 양의 기름임에도 성전의 메노라는 8일 동안 꺼지지 않고 성전을 밝혔다.
8일 동안 대제사장은 성전을 청결케 할수 있었으며 거룩한 기름도 준비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하누카 절기는 8일동안 빛을 밝히면서 지키는 절기가 되었고 하누카 등대도 8개의 가지를 가진 9개의 등잔으로 된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후 기름 대신에 초를 사용하는 촛대로 변했다.
하누카 절기가 되면 유대인들은 대문밖에 메노라를 내 놓고 하루에 한개씩 촛불을 더해가면서 8일동안 불을 밝힌다. 처음 불은 중앙에 있는 촛대와 다른 하나를 밝히고 다음날 다른 하나를 추가하여 불을 밝힌다.
이 날을 빛의 축제라고 부르며 이는 AD 1세기경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여 처음 붙여진 이름이다.
유대인의 하누카 축제일은 서방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로 지키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메노라(금촛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한 덩어리의 순금을 쳐서 만드는 기술을 요구하는 엄청 어려운 작업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메노라는 일곱 촛대입니다. 이 각각의 촛대를 만들어 연결하여 붙이는게 아니라 한 덩어리의 순금을 다듬고 쳐서 가운데 한 줄기에서 양 옆으로 각각 3줄기씩 총 6줄기가 나고, 가운데 줄기로 기름을 부으면 양쪽으로 퍼저가는 형태입니다. 100% 순금으로 메노라를 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표현하는 일곱 촛대 역시 메노라의 모습인데, 이 것은 일곱영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각 줄기의 생김을 보면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고 저쪽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출 37: 19)’가 있다고 합니다. 각 줄기마다 3개의 잔에 꽃받침과 꽃이 각각 있어 총 9개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9개 구분으로 만들어진 줄기가 좌우로 각각 3줄기씩 있고 가운데 등잔대만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출 37: 20)’이 있습니다. 즉 가운데 등잔대만 12부분입니다. 다시 살펴보면, 좌측에 9,9,9개 부분 가운데 12부분, 우측에 9,9,9개 부분으로 각각 만들어진 메노라 입니다. 이 숫자들에 대해서도 어떤 유대인 교수가 좌측 줄기와 가운데 등잔대, 9+9+9+12= 39, 그리고 우측 줄기 9x9x9=27 이렇게 보고 성경 구약과 신약이 각각 39장과 27장으로 이뤄진 것과도 일치한다고 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약간은 끼워맞춘 것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딱 숫자가 맞게 떨어지는 것 또한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할 것은 가운대 등잔대만 12개의 부분인데, 이 것에 대해 12제자를 의미하며, 가운데 12제자로 부터 하나님의 복음이 세계에 전파 된 것 같이 나머지 6개의 줄기가 그 12부분이 있는 등잔대로 부터 기름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메노라는 각 줄기에 직접 기름을 채워 넣지 않습니다. 가운데 등잔대를 통해 기름이 채워질 때 가장 먼 곳 줄기부터 채워져 옵니다. 동방으로 부터 시온의 대로가 회복이 되어 일본, 한국, 북한을 거쳐 실크로드를 지나 예루살렘까지 충만해 지는 과정과 정말 흡사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메노라의 꽃의 모양은 살구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원어 성경에서 말하는 꽃은 바로 아몬드 꽃입니다. 번역상 오류인데, 당시 아몬드 꽃이 없었던 우리 나라에서 아마 가장 흡사한 모양을 했던 꽃으로 살구꽃이라고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가장 유력한 듯 합니다.
실제로 아몬드 꽃은 시리고 매서운 겨울이 지나 1월이 되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저 꽃 피우는 나무라고 합니다. 어떤 자매가 얘기 해 준 바로는 예슈아를 믿었던 반 고흐가 이 살구꽃의 비밀을 알고 그림의 소재로 이 살구꽃을 그렸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 한가지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바로 이 아몬드 나무 가지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 생명이 없는 나무에 싹이 났습니다. 이 것은 아론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 일 뿐 아니라 완전히 죄로 부터 죽어 마땅한, 말라 비틀어진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신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양을 칠 때 자기의 몫을 늘리기 위해 아롱진 양들을 낳게 하려고 시내에 꽂아 놓은 나무 중에 하나가 또 아몬드 나무 입니다.
다시 출애굽기 메노라로 돌아가서, 이렇게 만들어진 메노라의 역할은 성막 안을 환하게 비춥니다. 특히 마주보게 놓여진 떡상을 비추는데, 그 떡상에 놓인 빵의 이름은 진열빵입니다. 물론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진설병이라고 나옵니다. 이를 영어로 보면 Showbread 입니다. Show 즉 보이는, 보여주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전 묵상 가운데 성막을 하나님의 얼굴과 비교했을 때 메노라와 마주보는 떡상은 하나님의 두 눈과 비교했던 적이 있습니다.
메노라의 형태 또한 나무가지와 아주 흡사한데 그래서 인지 생명나무라고 많이 말합니다. 실제로 성소를 비추고 그 앞에 놓여진 빵, 이스라엘 지파를 상징하는 두 줄의 빵을 비추는 메노라는 실제로 에덴 동산에 심겨져 있던 생명나무, 우리의 유일한 생명나무 되시는 예슈아 입니다.
이 메노라는 항상 꺼지지 않습니다. 레 24:2에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두라고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여호와의 일곱 영이 항상 이스라엘을 24시간 돌보시고 지키십니다. 그리고 메노라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기름을 채우는 일은 바로 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제사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 부분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는 메노라가 있어서 매일 목사님 혹은 전도사님 혹은 어떤 모습이든 사역자들이 메노라에 기름을 채우거나 불을 붙이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특별히 일반인과 구분되어 풀타임 사역을 하는 자라면 사역의 기본은 내 양, 내 교회, 내 명성을 떨치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과 영혼들 사이에 항상 그 빛이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이는 여담이지만, 새벽에 겨우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로, 눈도 다 제대로 못 뜨고 식탁(방이 좁아서 책상을 못 놓고 결국 식탁 한 켠이 제 공부방이 되었습니다, 하하)에 앉아 성경을 열고 눈은 읽고 있어도 뇌는 여전히 깨지 못하는 찰나를 지나 어느새 이렇게 눈에 불을 켜고 타이핑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이 신기합니다.
제가 ‘하나님, 오늘은 어떤 걸 묵상하길 원하세요? 뭘 가르쳐 주실꺼에요?’라고 물었을 때 스스로에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야, 내가 지금 이렇게 묵상하려는 이유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올리기 위한 이유라면 접자. 차라리 잠을 더 자라. 본질이 흐려진다면, 동기와 태도에 문제가 있다면 접자.’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봤던 메노라를 보여주셨고, 오늘은 메노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처음 말씀드린 가장 높은 진리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제 영이 기뻐 뛰고 오른쪽에 앉으셔서 늘 상냥하게 가르쳐 주시는 예슈아를 오늘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글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다는 기쁨은 정말 감겼던 눈이 똥그랗게 떠지는, 정말 흥분된 일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메노라, 영원한 생명 나무 되신 예슈아를 몸 된 성전에 늘 밝혀 두십시오. 그 빛을 통해 가장 높은 진리를 드러내는 압도적인 삶을 살아낼 것 입니다.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매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오늘은 특별히 갑절의 축복이 임하기를 더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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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8일 / 03- 16-2024(토)
출애굽기 28:1-43
거룩한 옷(2절)
찬송 / 92장(어둠의 권세)




제단 뿔

레위기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4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열왕기상 1:50-51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시편 118: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찌어다.



What Does Brass Represent in the Bible?


Introduction

Brass is mentioned numerous times throughout the Bible, both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But what exactly does this metal represent symbolically and spiritually?
In this comprehensive blog post, we will explore the significance and meaning of brass in the Scriptures.

Key Takeaways:

  • Brass is associated with strength, durability, and judgment in the Bible
    성경에서 황동은 힘, 내구성, 심판(판단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 It was commonly used for altars, lavers, pillars, and musical instruments in the Tabernacle and Temple
  • Brass often represented the judgment of God against sin
  • The brazen serpent foreshadowed Christ’s crucifixion
  • Brass also symbolized the feet of Jesus and his triumph over evil
What does brass represent in the bible

Table of Contents

Properties of Brass in the Ancient World

In ancient times, brass was an alloy of copper and zinc that was known for its strength and brightness. The Hebrew word translated as “brass” or “bronze” is nechosheth, which comes from a root word meaning “to glisten” or “shining.” This reflects how brass would gleam in the sun’s rays.

Brass was harder and more durable than pure copper. It maintained a sharp edge and was resistant to corrosion. For these reasons, brass was used to make weapons, armor, coins, mirrors, hinges, and works of art in biblical times.

The Thera Sea in Solomon’s Temple measured 10 cubits across and 30 cubits around, with a depth of 5 cubits. It rested on 12 oxen made of brass (1 Kings 7:23-26 NKJV). This huge laver could hold thousands of gallons of water for the priests to wash themselves. The brass gave it strength to remain intact.

The Bible first mentions brass when Cain’s descendant Tubal-Cain became “an instructor of every craftsman in brass and iron” (Genesis 4:22 NKJV). The Canaanites and Philistines were also skilled metal workers in brass and iron when the Israelites entered the Promised Land (Joshua 22:8, 1 Samuel 13:19-20 NKJV).

These pagan groups probably produced brass idols and false gods. But God intended for the Israelites to use brass to construct holy things for His Tabernacle and Temple.

Brass Representing Strength and Judgment

The symbolism of brass in Scripture seems connected to its characteristics of hardness, firmness, and brightness. Brass often represents strength, durability, and the judgment of God against sin.

When King Nebuchadnezzar saw a mysterious figure in the fiery furnace, its feet were like “burnished bronze” (Daniel 10:6 NKJV). Here, brass conveys supernatural strength and a divine nature.

Similarly, when the Apostle John saw the risen Christ in Revelation, his feet “were like fine brass, as if refined in a furnace” (Revelation 1:15 NKJV). The brightness and burnished nature of Christ’s feet depict his holy judgment against the wicked.

His feet of brass will trample all evil underfoot. As a strong metal, brass was appropriately used in scales, chains, and shackles to convey military conquest, imprisonment, and judgment (2 Kings 25:7, Psalm 149:8 NKJV).

The Bible says God judges sin with “justice like the great deep” and righteousness like “the strong mountains” (Psalm 36:6 NKJV). So it is fitting that when God commanded Moses to build the Tabernacle, he was to construct the altar of burnt offering from acacia wood overlaid with brass (Exodus 27:1-2 NKJV).

The acacia wood speaks of Jesus’ humanity, while the brass conveys the strength and fiery judgment of God against sin at the cross.

Brass Objects in the Tabernacle and Temple

In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and later the Temple, brass was heavily utilized for altars, lavers, pillars, and musical instruments. God provided Bezalel and Oholiab with the skills to craft beautiful objects from brass and other metals (Exodus 31:2-6 NKJV). Let’s survey some of the key furnishings made of brass.

The Brazen Altar – This outer altar of burnt offering was 7.5 feet square and 4.5 feet high, overlaid with brass. It was the first object encountered when entering the Tabernacle, pointing to Christ’s sacrifice (Exodus 38:1-2 NKJV).

The Brazen Laver – The priests washed their hands and feet at this brass basin before proceeding further, picturing purification from sin through Christ’s blood (Exodus 30:17-21 NKJV).

The Pillars of Brass – Two towering 27-foot brass pillars named Jachin and Boaz stood on the porch of Solomon’s Temple (1 Kings 7:15-22 NKJV). These majestic columns represented the strength of God.

Brass Musical Instruments – Many instruments like cymbals, harps, and trumpets were made of gleaming polished brass (1 Chronicles 15:19, Daniel 3:7 NKJV). They were used to praise God.

The Brazen Sea – This colossal brass basin held water for priestly cleansing in the Temple (1 Kings 7:23-26 NKJV). It foreshadowed the living water of Christ.

The Brass Serpent – When venomous serpents bit the Israelites, God told Moses to make a brass snake and lift it up on a pole. All who gazed upon it lived (Numbers 21:4-9 NKJV).

Brass objects in God’s Tabernacle and Temple symbolized His glory, strength, purity, and salvation. They ultimately pointed to Jesus Christ.

The Brazen Serpent as a Foreshadow of Christ

One of the most significant brass objects was the brazen serpent that God instructed Moses to lift up on a pole to deliver the people from snakebites (Numbers 21:4-9 NKJV). Anyone who looked to the brass serpent lived, even though serpents represent sin and judgment. Jesus told Nicodemus:

“And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wilderness, even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4-15 NKJV)

Here, Jesus indicated the brass serpent pointed to Himself being lifted up on the cross for our salvation. Just as those who looked to the brass snake were healed, so too, those who look to Christ on the cross are saved from the “venom” of sin and its judgment.

The serpent represented the sin Christ took upon Himself, while the brass depicted the judgment He bore in our place. What an amazing foreshadow!

The Bible says “Christ has redeemed us from the curse of the law, having become a curse for us (for it is written, ‘Cursed is everyone who hangs on a tree’)” (Galatians 3:13 NKJV).

The brass serpent hanging on a wooden pole was a vivid object lesson of Jesus taking our curse on the “tree” of Calvary to redeem us. The serpent and brass together beautifully illustrate God’s plan of salvation.

Jesus’ Feet of Burnished Brass

We previously saw how the risen Christ’s blazing feet of brass in Revelation point to His divine judgment (Revelation 1:15 NKJV). But this brass imagery also occurs in another prophetic vision.

The prophet Daniel saw a glorious man with “his legs like the gleam of burnished bronze” (Daniel 10:6 NKJV). Here, the brilliant bronze likely depicts Jesus’ triumph over all evil powers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Daniel’s vision occurred while the Jews were in Babylonian captivity due to the sins of their nation. But God showed Daniel the future victory of the Messiah, with feet and legs of judgment to tread down all His enemies.

The Apostle Paul possibly had this image in mind when he wrote of Christ’s triumph over demonic rulers and authorities at the cross, “having disarmed principalities and powers, He made a public spectacle of them, triumphing over them” (Colossians 2:15 NKJV).

So the gleaming bronze legs and feet seen by Daniel and John point to Christ victoriously crushing satanic foes underfoot by His sacrificial death and glorious resurrection. What amazing brass symbolism showing Jesus’ definitive defeat of evil!

Brass Pictures Spiritual Lessons for Believers

For the early Christians under Roman rule, the imagery of brass in the Bible provided encouragement and instruction.

Since the emperors ruled with an iron fist, casting Christians to lions in the brass-barred Colosseum, the believers found hope in Revelation’s vision of Jesus’ brass feet judging this cruel empire while standing on the golden sands of heaven (Revelation 1:15). His flaming feet assured them of Rome’s eventual collapse.

Paul told the Corinthian church that he and the apostles endured many dangers so that “the life of Jesus also may be manifested in our body” (2 Corinthians 4:8-11 NKJV).

Their physical afflictions refined and “polished” their character like burnished brass to reveal the resurrection life of Christ. Suffering allowed God’s strength and glory to shine through their weakness.

For modern believers, the durability of brass in the Tabernacle’s laver and altar can picture how standing firm on Christ enables us to persevere through trials.

Like Job who endured loss and pain, we “shall come forth as gold” and shine brighter for Jesus (Job 23:10 NKJV). The spiritual lessons mediated through brass point us to the risen Savior.

Conclusion

In summary, brass in Scripture clearly signifies Jesus’ strength to redeem us, judge evil, and defeat satanic powers through His death and resurrection. He is the fulfillment of the brass furnishings, altar, serpent, and symbolic feet.

May this metal remind us of the durability, purity, and triumph of our Lord. Let’s trust in His proven strength to uphold us by faith in all troubles and persecution until He returns. Our Savior with “feet like fine brass” can trample every foe. We will walk in victory with our God.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7일 / 03- 15-2024(금)
출애굽기 27:1-21
단을 만들라(1절)
찬송 / 361장(주의 주실 화평)

단(4196)

מִזְבֵּחַ 스트롱번호4196

1.

제단

2.

출30:27

3.

28

발음 [ mizbêach ]
어원
20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400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제단, 출30:27,28, 39:39, 레1:9,13,15,왕상7:48, 대하29:22.

번제(

עֹלָה 스트롱번호5930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ʽôlâh ]
구약 성경
9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제단 위에 드려진 것, 번제, 창22:3,6,레1:4
  • 2.
    명사, 여성 상승, 계단, 겔40:26




성막의 뜰에 들어서서 성막을 만나기 전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놋으로 만든 번제단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성막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가장 큰 성구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번제단으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희생제물을 가지고 나아갔고 매일 아침마다 바쳐진 희생제물은 이 번제단에서 태워져 그 연기는 하늘을 향하여 올랐고 하나님은 그 희생제물의 연기를 흠향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번제단이었습니다.

그러면 번제단의 재료는 무엇으로 되어졌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1절).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약 2미터 50센티미터의 정사각형 모양에다 높이는 1미터 50미터의 큰 박스와 같은 모양을 하도록 만들되 그 재료는 아카시아나무인 조각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겉은 놋으로 싸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놋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금은 영광은은 속전구속을 그렇다면 놋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주로 오시는 재림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계 1:15절입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재림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발을 보니 단련한 빛난 주석 즉 놋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장막 안에 이스라엘백성들을 물어 독이 퍼진 백성들로 죽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백성들의 완악함을 회개하였고 이 불뱀으로부터 구원하여 달라고 울부짖어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의 모양처럼 구리뱀을 만들어서 높은 장대에 매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누구든지 나와서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는 순간 낫게 하셨습니다.
놋뱀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백성들은 놋뱀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낫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들이 거하는 천막에서 억지로라도 나와서 놋뱀을 바라본 자는 정말 말씀대로 죽어가던 데서 나음을 얻고 온전해 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구리 뱀은 무엇의 그림자입니까?
사단에 물려 영원히 죄 가운데서 사망을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 구리 뱀은 십자가에 사단의 저주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구리 뱀은 누구 대신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까?
죄인인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백성들을 대신 하여 심판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놋은 바로 심판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은 심판에서 생명을 얻는 은혜를 받았듯이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저주와 심판을 동시에 받으심으로 이를 믿는 우리가 심판에서 생명으로 바뀌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놋의 시작은 창세기 4:22절에서 나타납니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의 출발이 바로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16:21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무엇입니까? 삼손이 무엇에 묶였습니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줄에 묶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께 득죄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넘기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하25:7절입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삼상 17:5절에 “골리앗은 머리에 놋투구를 썼고 놋갑옷을 입었고 다리에는 놋각반을 쳤고 어깨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은 무엇으로 몸을 감쌌다는 것입니까? 저주와 심판으로 반면에 사울임금은 삼상17:38절에 다윗에게 무엇을 씌워줍니까?
놋 투구
그랬을 때 다윗은 놋 투구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려고 물매만 준비하고 나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심판과 저주의 상징인 놋으로 둘러싼 골리앗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을 의미합니다.
여기다 무엇을 입혔습니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놋으로 입혔습니다.
놋은 붉습니다.
저주와 심판을 당하시고 한없이 흘리신 보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제단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말할 것도 없다 예수께서 택하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갈보리 언덕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당하셨다.

하나님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무리 하나님의 독생자라 할지라도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백성의 죄를 짊어지셨다면 심판을 받으셔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에서 무엇을 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그룹들인 천사들이 모셔 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6:5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왕을 뵈었음이로다.”

왜요? 하나님 계신 것은 너무나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천사들이 서로 노래하기를 이사야 6:3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그러니 어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대신 저주와 심판을 받게 하시고 우리로 의롭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깨끗게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조순하고 얌전한 생활입니까?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14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하나님은 여기서 만나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예수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6일 / 03- 14-2024(목)
출애굽기 26:1-37
성막을 만들라(1절)
찬송 / 65장(생명의 빛 주 예수여)

26장    
      1-6. 성막을 위한 앙장 열폭
    7-13. 성막을 덮는 막(염소 털)
       14. 성막을 덮는 막(수양 가죽, 해달 가죽)
 15-25. 조각목 널판, 은받침
  26-30. 조각목 띠
  31-33. 구별하기 위한 장
  34-35. 지성소의 기구의 위치
  36-37. 문장과 기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막을 만들라(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찌니.
"Make the tabernacle with ten curtains of finely twisted linen and blue, purple and scarlet yarn, with cherubim worked into them by a skilled craftsman.

성막(4908) 미쉬칸(mishkan) מִשְׁכָּן    

1. 거주  2. 욥 18:21. 3. 굴
발음 [ mishkan ]

어원 / 79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거주, 주택, 거처, 거주지.
 a. 명사, 남성 [사람] 욥18:21, 시87:2.
 b. 명사, 남성 [동물] 굴, 동굴, 욥39:6.
 c. 명사, 남성 [하나님] 성전, 시46:5(4), 84:2(1),132:5
2. 명사, 남성 천막, 장막, 성막, 성소, 아1:8.
 a. 명사, 남성 이스라엘의 성막, 출25:9, 26:1이하, 40:9이하.
 b. 명사, 남성 증거막, 출38:21, 민1:50,53, 10:11.
 c. 명사, 남성 성막의 휘장, 출39:32, 40:2,6,29.

출애굽기 25장은 성소를 만들되 그 안에서 사용하는 세 가지 기구 즉 궤(언약궤)와 떡상과 등대(메노라)에 대하여 계시하셨습니다.
성소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이제까지는 족장 중심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으나 성소를 세운 후부터는 민족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을 만나야 하므로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볼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6장에서는 성막을 만들라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중에 함께 계시며 그들을 만나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임을 증거해 주는 증거 장막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속죄와 정결함과 거룩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은총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막은 새 언약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과 영원한 영광에 관한 청사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성막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요 5:39).
따라서 성막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모든 내용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또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고증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성막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더 확실하게 찾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완벽하게 다 찾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징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이 100% 성경적이라고 감히 주장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현재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무려 3천 년 전의 구조물을 오로지 성경 기록과 문헌들만으로 추적해 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정확도에서 있어서 당연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해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해 놓으신 전체 내용의 10분의 1이라도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정도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성막을 통해 얻는 은혜는 너무도 깊고 크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성막의 상징성에 대해 큰 틀에서 종합적인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성막의 공간들이나 재료들, 그리고 색상, 모양, 크기, 수량 등이 모두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중요한 영적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작 과정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대로, 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성막은 만유 위에 계시는 창조자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어떻게 세상에 내려오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첫째로 정리한 소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시며 사역하시다가 최종적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영광스런 보좌에 다시 오르셨습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대표자인 대제사장이 되어 앞서 가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로 정리했습니다. 그다음은 그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우리가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갈 새롭고 산 길, 영생의 길’이라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The Four Mysteries hidden in the Coverings of The Tabernacle)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1
- 첫번째 덮개로 만든 가늘게 꼰 베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1)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지니, 매 폭의 장은 이십팔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하고, 그 앙장의 연락할 말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앙장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앙장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대하게 하고, 금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앙장을 연합하여 한 성막을 이룰지며,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2)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각 폭의 장은 삼십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앙장을 연락할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합하여 한막이 되게 하고, 그 막 곧 앙장의 나머지 그 반폭은 성막 뒤에 드리우고, 막 곧 앙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편에 한 규빗, 저편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편에 덮어 드리우고, (3)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4)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 (출 26:1-14)

성막의 덮개들(The Coverings of the Tabernacle)

성막의 덮개를 살펴봅시다.
성막의 덮개는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세부적인 사항을 지시하셨습니다.

첫 번째 덮개는 성막의 보드판과 안쪽에 있는 기구를 덮고 있어서 “성막 안쪽에서만” 첫 번째 덮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덮개는 땅 바닥까지 성막의 판, 곧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청색, 자색, 그리고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실로 짜여있고, 아름다운 천사들의 형상이 그 덮개에 수놓아져 있습니다.

 

첫 번째 덮개는 서로에게 붙어있는 두 개의 중요한 커튼 세트(sets)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은 서로에게 다섯 개의 더 작은 커튼형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중요한 커튼을 각각 연결하기 위해, 청색실로 된 50개의 고리가 커튼의 끝부분에 각각 연결되는데 사용됩니다.
금 걸쇠(잠금쇠)는 두 개의 커튼 세트를 하나의 큰 덮개로 만드는데 청색실의 고리에 사용됩니다.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두 개의 더 넓은 커튼으로 연결된 열 개의 커튼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길이는 28큐빗(1큐빗-45cm)이고, 그러니까 오늘날 환산법에 의하면 길이가 12.6m이고, 각 커튼의 너비는 4큐빗, 즉 1.8m입니다.

다섯 개의 더 작은 커튼은 우선 두 개의 커튼 세트를 만드는데 연결이 되고, 이 세트는 각각 50개의 고리로 된 청색실과 50개의 금 걸쇠로 붙입니다. 이것은 성막의 첫 번째 덮개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우리에게 세세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성소와 지성소를 덮는 덮개가 세 개 더 있습니다.
즉, “염소 털로 된 덮개”와 “숫양에 붉은색으로 물든 가죽 덮개”와 “해달로 된 덮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청색, 자주색,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실”로 사람 손으로 만든 인공적 천사들의 모양으로 된 커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성막의 첫 번째 덮개에 사용된 “청색실”은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기 위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받았던 세례를 의미하고 뜻합니다.

곧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의의 세계를 당신의 십자가로 활짝 연 것입니다(마 3:15).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만이 당신의 세례를 통해 해결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이제 우리에게 영광스런 구원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1-22)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영생으로 부활하심으로 세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주님의 의와 사랑으로 하나 된 연합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 된 거룩한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영광의 연합을 십자가의 세례를 통해 이룬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5-17)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짚고 가겠습니다.
가늘게 짠 베실 커튼에 수놓아진 천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는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입니다.
둘째는 하늘세계를 수호하는 보호의 상징입니다.
즉 “죄인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셋째는 하나님의 처소를 보호하는 거룩의 상징입니다.
넷째는 천국의 모형을 나타내며 그곳에 천사들로 충만하고, 그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천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에워싸고 천국 보좌의 영광과 거룩을 그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천사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1-3)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막은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나라의 모형이라고 신약시대 예수의 사도들이 성경곳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덮개, 즉 성소와 지성소를 덮고 있는 수놓아진 천사들과 네 가지 색깔의 아름다움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죄를 지신 십자가의 영광과 은혜와 주님의 나라와 그 아름다움과 영광과 찬란한 거룩한 광채로 다가오는지요?

거룩과 의로움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당신에게도 거룩과 의로움으로 성령 안에서 충만하길 원합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당신의 심령과 영혼에 충만하길 원합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십자가에 내가 죽고(세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경험되는 복된 하루이길 원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4-15)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2
- 염소털로 만든 두번째 덮개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염소털로 만듭니다(출26:7). 그 길이는 첫 번째 덮개보다 90cm나 차이가 나고 더 깁니다. 두 번째 덮개는 길이가 13.5m, 너비가 1.8m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덮개는 11개의 커튼으로 되어 있는데, 두 개의 커튼 세트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중 하나의 세트는 다섯 개로 또 다른 하나의 세트는 여섯 개의 커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세트는 놋걸쇠(잠금쇠)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 26:7)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염소털로 만들어진 성막의 두 번째 덮개는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오셔서 30세가 되었을 때, 주님은 스스로 자원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주님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자기 십자가에 가져가서, 우리의 손에 못 박혀 처형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단 번의 영원한 죄를 자기 피로 용서하시고, 자기백성에게 영원한 주님과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위에 덮여 있는 염소털의 흰 덮개, 곧 두 번째 덮개는 속죄염소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세례와 피로써 우리를 죄 없는 깨끗한 자로 만드심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지니라. (레 16:5)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레 16:7-10)

 

 

말씀을 정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한 하나님께 번제물이요 우리에게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영원한 영광이 되셨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평강과 화평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셔서, 하나님께 영광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당신과 저는 주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되심을 믿고 신뢰하며 소망하는지요? 주님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영원토록 사랑하며 살고픈 마음의 소원이 일어나는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영원한 구원의 반석과 영생의 소망과 영광의 주님으로 온 맘과 몸을 다해 섬기며 진리의 성령 안에서 이 땅을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 축복하며 사랑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3
- 붉은 색으로 물든 숫양가죽의 세번째 덮개


성막의 세 번째 덮개를 위해 사용된 재료는 붉은 색으로 물들인 숫양가죽입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의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적 제물이 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죽음의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구속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서 구원과 새창조질서의 회복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자였습니다.
이 아들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아들입니다.
즉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속한 아들이란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늘세계에서만 창조할 수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별안간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라(잡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엄청난 살인행각을 벌이려 할까요?
하나님이 할 일이 없으셔서, 너무 심심하셔서 이런 무모한 행동을 아브라함에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장차 온 인류의 메시야로 오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먼저 우리를 대표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선물로 허락하신 이삭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신 생명의 주님을 보여주고자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모리산까지 독자 이삭을 데려가 번제물로 하나님께 받치려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향해 칼을 빼어 내리치려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에 교차된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교차된 것이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그 마음을...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향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명하십니다. 하나 뿐인 아들 이삭을 향해 빼든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으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됐다!”
“이제 네 독자 이삭을 통해 네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
“이제 됐다!”
그런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본즉 한 숫양이 덤불에 자신의 뿔이 걸려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숫양을 독자 이삭을 대신할 희생제물로 예비해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위해 친히 모든 것을 예비하시리니!

(The LORD will provide. 여호와이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친히 한 독생자를 영원전에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 독생자는 하나님께는 하나 밖에 없는 당신의 꿈이요 소망이요 영광이요 사랑이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독생자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이 분이 저와 당신이 믿고 신뢰하고 있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살이 갈기갈기 찢기시고 창에 찔려 피를 쏟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시고 준비하신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그 소망과 기대가 주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입니까?

성막 세 번째 덮개 천이 숫양의 피로 물든 것을 기억하시며 오늘을 십자가에 나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만이 죄인에게 복음이십니다. 주 예수 안에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



성막의 덮개에 숨겨진 네 가지 비밀들과 의미 #. 4
-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네번째 덮개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어집니다.
해달은 구약성경 히브리어로 “타카쉬”로 포유류의 번역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몇 가지 다른 포유류로 번역되는데, 가령 “바다소(해우)”(NIV), “물개”(ASV), “고운염소”(NLT), 그리고 “알락돌고래”(NASB) 등입니다.

우리는 이 포유류가 무엇인지 정확히 입증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언어학자들은 “타카쉬” 란 단어의 기원이 아마도 외래어 어원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경우는, “타카쉬” 란 포유류는 그 가죽이 성막의 네 번째 덮개를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덮개는 아름답거나 매혹적이지 못한 재질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해달 가죽의 네 번째 덮개는 예수께서 사람의 죄로 인한 추하고 더러운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을 암시합니다.
게다가 주님은 자신의 얼굴이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해달의 가죽 덮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래 전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인 사람의 비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가 죽음의 날까지 죄로 인한 수치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영생으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추하고 흉측한 모습의 예수를 십자가에 죽임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 보십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해달의 가죽 덮개처럼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 죄의 흉측한 모습을 메시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반면교사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습을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타인을 해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죄를 짓기를 좋아합니다.
더럽고 추한 해달가죽의 모습처럼, 우리는 출생부터 죽음까지 자신의 배만 채우는데 관심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에 고통을 대신 당해야만 하는 실질적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죄의 본질과 본성의 심각성을 실제적으로 아는 자만 메시야를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한 자는 자신의 죄에 무지하고,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죄로부터 용서와 사면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향하여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합니다(시 49: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 49:20)

창세기 1장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의 죄 안에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영접지 못합니다.
오직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를 통한 죄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멸망할 짐승처럼 파멸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한 가지 계획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모든 사람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감찰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한 개인에게만 국한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둠과 죄의 미혹 아래 그리고 마귀의 권세아래 속박당하여 살기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자신이 이 땅을 살면서 죄를 지은 적이 없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낫고 더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삽니다.
인간이 얼마나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교만과 자기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2)

우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실제적으로 발견하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비교를 통해 얼마나 실제적으로 타인보다 더 낫고 더 못한 것입니까?
우리는 늘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과 탐심을 먼저 앞세우며 이웃과 타인을 괴롭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과 죄로 타락한 마음입니까?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우리가 일평생 살면서 하나님을 얼마나 수많은 죄로 대적하며 사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영광스럽게 소중히 창조하셨음에도, 인간은 아담 안에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아름다운 형상이 파괴되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죄로 타락한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죄로 인한 제한적인 존재이기에 자신을 위한 미래도 완벽하게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특별히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고 영이 죄로 인해 죽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원한 파멸과 죽음을 피할 다른 길과 선택이 없음에도 생명의 주님께 나아올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본능으로 행하는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1:10)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성막의 네 번째 덮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신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즉 메시야가 인간의 더러운 죄의 몸을 그대로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의 죄를 친히 자원하여 스스로 지시고, 죄의 형벌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함과 영생으로 부활하심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의 은혜와 십자가의 용서는 메시야를 자신의 주님으로 믿는 자에게만 이루어지고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선택한 자녀에게 이 구원의 소식과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중 누가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믿어지기 전까지 누구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막을 덮는 네 가지 종류의 덮개의 사용된 재료를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희미하게 성령으로 발견하고  드러낸 것을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스런 성도요,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세례 받으심과 십자가를 지심과 단 번에 영원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친백성입니다. 그러나 해달의 가죽 덮개와 같이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주님의 모습과 형상을 모르고 또한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혈과 육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 곧 그리스도의 복음인 십자가와 은혜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령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그리스도로 오시기 전,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의 말씀으로 기록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하나님의 메시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시며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메시야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싫어했고, 그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당하는 현장에서 욕을 하며 증오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 때문에 십자가에 고통과 채찍에 맞았음에도, 우리는 오히려 그를 향해 침 뱉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과 주님으로 여기지 않았던 우리였습니다. 모든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님에 의해서 만물이 움직이는데도 우리는 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조롱과 조소와 침 뱉음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저주의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택한 한 영혼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의 피로 영원히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우리가 저주하고 멸시한 그 십자가로 스스로 자원하여 자신의 하늘 영광과 권세를 모두 포기하시고 그 죽음의 길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2)

세상에서는 가장 추하고 가장 아름답지 못하고 가장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도, 예수는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은혜로우시고 가장 기쁨이 되시고 가장 큰 소망이 되시고 가장 큰 사랑이시고 영생이신 그리스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저 자신과 당신에게 질문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많이 버림받고 가장 싫어버린 바 된 그 예수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주님으로, 영광의 왕으로,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모시고 있습니까?” 주 예수가 없는 인생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장 추하고 가장 악하고 가장 더러운 것임을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십자가에 나의 죄 때문에 죽임 당하심으로 나에게 천국을 영원한 상속의 기업으로 선물하신 예수를 당신의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의 찬송과 감사의 제목이 되며, 또한 주님과 늘 사모하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동행하는 것이 당신에게 가장 복되고 영광스럽고 축복된 삶임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이 진리의 성령으로 믿어지고 경험되길 원합니다!

당신의 죄로 타락한 지혜와 이성과 지식과 경험으로 예수를 바라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기까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부활과 영광의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요 12:16-17)


묵상 가이드 /  ABC 묵상법

1. A : A Title(제목을 정하라)
2. B :Best Sentence(요절을 찾으라)
3. C :Challenge(도전을 주는 말씀)
4. 적용을 찾으라


첫 번째 앙장(26:1~6)
본문은 지성소와 성소를 덮을 수 있는 ‘성막 덮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성막 덮개는 두 개의 앙장과 그 앙장을 덮을 두 개의 덮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문은 첫 번째 앙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앙장’이란 성막의 천장에 치는 휘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앙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앙장은 모두 열 폭으로 다섯 폭씩 서로 이어서 만들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앙장에는 ‘그룹’을 새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 그룹들을 만들 때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교히 만들라는 말은 열심히 고안하고 연구하여 정성껏 수를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담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의 한 부분에서조차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 앙장과 덮개(26:7~14)
두 번째 앙장은 첫 번째 앙장과는 달리 염소털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염소털은 방습과 보온 효과가 뛰어나 고대 근동에서 천막을 만들 때 많이 사용하던 재료입니다. 이것으로 첫 번째 앙장을 덮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염소털로 만든 앙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든 앙장보다 한 폭이 더 많았습니다. 이것은 첫 번째 앙장을 완전히 덮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붉은 물을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 앙장을 덮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결국 성막 덮개는 그룹을 수놓아 만든 앙장, 염소털로 만든 앙장,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등 이렇게 네 겹으로 이루어져 성소와 지성소를 덮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성막 내부의 모든 성물들을 보호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나는 나의 삶을 가꾸어 가시는 하나님의 준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님, 주님의 일에 드리는 마음과 정성이 직장 일에 쏟는 마음 같지 못했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소서.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겸손히 쓰임받기 원하오니 ‘공교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도록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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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5일 / 03- 13-2024(수)
출애굽기 25:1-40
식양을 따라(9절)

찬송 / 65장(생명의 빛 주 예수여)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25:10-22 / 법궤 : 
재료 : 조각목(싯딤나무) -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
          정금 - 신성을 상징
크기 :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
구조 : 속죄소(법궤의 뚜껑), 두그룹 천사, 증거판(공의), 만나(신령한 양식),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인도, 보호)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25:23-30 / 떡상 :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25:31-40 / 등대

재료 : 정금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향단

재료 : 조각목, 싯딤나무
크기 :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식양을 따라(출애굽기 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Make this tabernacle and all its furnishings exactly like the pattern I will show you.

식양(8403) 타브니트() תַּבְנִית 스트롱번호8403

1. 건물.   2. 견본. 3. 사물의 모양
발음 [ tabnîyth ]
어원  /  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여성 건물, 건축양식, 시144:12
  • 2.
    명사, 여성 견본, 모범, 출25:9,40, 왕하16:10.
  • 3.

    명사, 여성 사물의 모양, 형상, 신4:16-18, 겔8:3, 8:10, 10:8.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 성막과 그에 관계된 모든 기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지 결코 인간이 계획하거나 고안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히 8:2).
즉 성막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히브리서 8:1-2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식양(타브니트)
- '견본' 또는 '모형' 으로 번역 될 수 있는 말로서 어떠한 실체의 그림자와 같은 청사진이나 모델 하우스 등을 가리킨다.
사실 구약 시대의 성막 제도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히 8:5).
따라서 모형과 그림자인 구약 시대의 성막 제도는 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었다(요 2:21; 히 8:13 ; 계 21 :22).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13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성소(4720) 미크다쉬

מִקְדָּשׁ 스트롱번호4720

1.

거룩한 것

2.

성지

3.

이스라엘의 성막

발음 [ miqdâsh ]
어원
어미활용 מִקְדְּשׁוֹ ,מִקְדָּשׁוֹ 민18:29,6942에서 유래
구약 성경
7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거룩한 것, 봉헌된 것, 성스러운 것, 성물, 민18:29
  • 2.
    명사, 남성 성지, 성소.
    • a.
      명사, 남성 이스라엘의 성막, 출25:8, 레12:4,21:12, 민10:21, 18:1.
    • b.
      명사, 남성 성전, 대상22:19, 대하29:21.
  • 3.
    명사, 남성 수용소, 보호소, 피난처, 도피처, 은신처, 사8:14, 겔11:16.


󰃨 내가... 거할 성소 - '거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쇠칸'(*)은 '숙박'이라는 개념을 가지며 동시에 '휴식한다'는 뜻의 '쇠카브'(*)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성소에 머무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돌봐 주겠다는 의미이다. 그 속성상 무소 부재(無所 不在)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떠한 특정 장소에만 머물러 계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은 성경이 재차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왕상 8:27;대하2:6;사66:1;렘23:24;행7:48;17:24). 한편 성소란 말은 '성막'(26:36), '회막'(29:42), '증거의 장막'(17:7) 등으로도 표현되는데, 한 곳에 고정된 집이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텐트였다. 따라서 이처럼 이동하는 성소에 하나님이 거하시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을 앞서 인도하시겠다는 표현임을 분명알 수 있다(민9:17-23;신1:33). 그러나 솔로몬은 성전 건축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하나님은 제한하고, 성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나중에는 성전 숭배 사상까지 생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음을 선포했고(사 66:1, 2), 스데반도 이를 강조했으며(행 7:48-50), 예수께서도 예배의 참된 요소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닌 예배드리는 자의 '신령과 진정' 임을 분명히 가르치셨다(요 4:21-24). 이처럼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성전된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전 3:16;6:19;고후 6:16;엡 2:21).

󰃨 그들을 시켜 ... 짖되 - 예물을 바친 사람들이 또한 건축의 당사자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마음과 물질과 육체적 노력이 분리되지 않고 온전히 '당신을 위해' 하나가 되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신다.

성소

유일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막에 들어가면, 먼저 번제단을 만난다.
이곳에서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되며, 다음으로 우리는 물두멍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을 씻고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성소에는 세 개의 성물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예배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들이다.
성소에는 떡상과 등대와 분향단이 있다.

1. 떡상

떡(진설병)상은 이것은 법궤와 마찬가지로 금으로 도금되었으며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상의 규격은 길이 91.2cm, 넓이 45.6cm, 높이 68.4cm였다.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하나님께 진설해 바치는 기구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를 예표하므로 진설병을 바치고 있는 상은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떠받드는 중보자적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롬 8:34)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떡상의 사면 테두리는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둘렀다(출 25:25). RSV는 '턱'을 '틀'(frame)로, 공동 번역은 '가름장'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는데 곧 떡상의 사면 테두리에 붙은 보강재(補强材)를 가리킨다. 이것은 상위의 떡이 지면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보조 장치로서 그 크기는'손바닥 넓이 곧 7.6cm 가량이었다.

“상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찌니라”(출 25:30).

• 진설병 : 직역하면 '얼굴의 떡', '면전에 놓인 떡'이란 뜻으로 곧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떡을 가리킨다.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이러한 진설병을 두 줄로 6개씩 12개를 늘어놓아야 했는데(레 24:8), 이는 이스라엘 12지파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거두게 될 노동의 결과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이 떡이 당신 앞에 항상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잎에서 나오는 말씀(레마의 말씀)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떡이 이스라엘의 수고로 얻어진 노동의 결과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들여 말씀을 먹는 일을 해야함을 가리킨다(성경읽기, 듣기, 공부, 암송, 묵상, 나눔 등). 만나는 하늘로서 내려왔기에 그냥 새벽에 나가서 줍기만하면 되지만 떡은 차원이 달랐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2. 등대

“그가 또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으니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그것과 한 덩이로 되었고”(출 37:17).

"등대"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빛이 되어야 할 성도를 상징한다. 등대는 떡상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인데, 밤낮 계속적으로 불을 켜 놓도록 되어 있었다(27:21; 레 24:3). 성도들도 세상에서 빛의 생활을 함에 있어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마5:14-16 ; 엡 5:8-9). 성소 안은 낮에는 출입구를 통하여 빛이 들어와 밝았지만 밤에는 어두웠다. 따라서 제사장은 매일 밤에 불을켜고 아침에는 불을 껐다. 잔'(bowl)은 등잔(37절)과는 다른 것으로 일종의 악세서리인데 살구꽃 형상을 하고 있다(33절).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는 꽃받침이 있게 하였으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였고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였으니”(출 37:21).

여섯 가지가 그 곁에서 나왔으니 - 기본 축을 이루는 중앙의 줄기에서부터 좌우로 각 3개씩 뻗은 6개의 가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줄기까지 합하면 7개의 가지가 되는데, 여기서 '7'이란 수는 등대가 완전한 빛을 발하는 것을 뜻하는 상징수로 볼 수 있다.

“줄기와 연하여” - 예수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요 15:5,6)를 연상시켜 주는 대목이다. 즉 이것은 가지가 줄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연합 관계를 보여 주는데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들도 생명의 근원과 모든 능력의 중심되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성도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살구꽃 형상" - 살구꽃의 문자적인 기본의미는 ‘(잠자지 않고) 밤을 새우다’, ‘경성하다’라는 의미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꽃은 부활과 희망, 각성과 보호를 상징하는 꽃으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우리의 신앙을 경계하고 그 영혼을 각성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둥대에서 발하는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된 사역을 상징한다. 따라서 살구꽃으로 등대를 장식한 점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참 희망이 될 뿐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등대를....쳐서 만들었으니" - 속죄소를 만들듯이 금덩어리를 망치로 쳐서 늘여 등대의 기본 형태를 다듬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7절). 그런데 왜 어렵게 망치로 쳐서 만들게 하였는가? 불속에 들어가 불순물이 걸러지고 망치로 두들겨 맞아 더욱 단단해지면서 등대의 모양으로 다듬어진다. 성도가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연단과 시험)을 거쳐야 참된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3.
분향단

“너는 분향할 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출 30:1-2).

• 분향단: 직역하면 '향(케토레트)을 태우는 곳(미크타르)인 단(미즈 베아호)'이다. 분향단은 향을 사르기 때문에 일명 '향단'으로 불리우기도 하고(10절:대상6:49), 금으로 만들어졌다고해서 '금단'으로 불리우기도 했다(39:38;민4:11). 크기는 가로, 세로 각 45.6cm에 높이 912cm정도였으며 위치는 성소의 중앙, 지성소 맞은 편에 놓여졌다.

번제단 뿔(27:2)이 실제적인 용도와 더불어(시118:27) 상징적으로 사용 (29:12;레8:15;9:9;16:18;왕상1:50;2:28;시18:112:9)된 것처럼, 분향단 뿔 역시 번제단과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설치된 것 같다.

"단...정금으로 싸고", 분향단은 땅바닥에 닿는 아래 바닥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으로 싸야 했다. 이처럼 분향단뿐 아니라 성막의 주요 기구를 모두 정금으로 도금한 이유는 금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 때문인 것 같다(25:11,24,31,38; 26:29), 즉 금은 그 아름다움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나타내며, 그 변하지 않는 속성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나타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분향단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26: 33) 바로 앞쪽 성소 부분에 분향단에 두었다. 따라서 분향단은 성소의 여러 기구 중 속죄소에 가장 가까이 놓여지게 된다. 여기서 속죄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이고(25: 22), 분향단 위에서 타오르는 향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기도를 상징한다(계5:8).그러므로 분향단이 속죄소에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가장 가까이에 계셔 항상 그 기도를 들어 주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기도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해준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 3-4).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출 30: 7).

한편 분향은 매 아침마다 해야만 했다. 이 시간은 등불을 끄는 시간과 일치한다. 따라서 해가 돋을때 제사장은 등불을 끄는 일(27:20,21)과 향을 피우는 일. 이 두 가지 일을 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 "향기로운 향을...사르되",
성막에서는 늘 희생 제사가 이어졌기 때문에 고기태우는 냄새와 피 냄새 등으로 가득찼을 것이다(레1-6장). 따라서 이런 냄새를 제거하거나 중화시키기 위해서도 향가로운 향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축된다. 특히 제단 주변에는 피를 뿌리기 때문에(29: 12,16,20) 더욱 이러한 향이 필요했을 것이다. 등불을 정리할 때 - 어기서 '정리하다'로 번역된 '야타브'는'좋게 만들다', '잘되게 하다', '단장하다'는 뜻이 있으며 '기쁘게 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성소의 등불은 아침에 끄도록 되어 있는데(27:21; 레24:3; 삼상3:3)등불을 끄는 행위를 이처럼 '단장하는' 행위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심지를 다듬고 기름을 보충하는 간검(看檢) 행위이기 때문이다(27:21).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 8).



하나님이 보인 식양대로(출애굽기 25:8-9, 골로새서 1:15-17)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세전에 작정하신 것을 미리 알리시고(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그가 보여주신 식양대로 지은 집에 거하시는 분이다(히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신앙은 그를 믿음이요,  신앙생활은 그의 지시하신 대로 준행하는 생활이니(창 12:1-10)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라(갈 4:9).

마치 건축이 당국이 허가한 설계도대로 치수, 모양, 자재, 색깔, 배선, 배관, 조경 등  수많은 검사를 통과하며 진행되고 준공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에 식양(pattern)이 있는바(창 1:3-31)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 그대로 되어지고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심이요(창 1:27),
생령(아담)을 지으시되 오실 자의 표상(pattern)으로라(롬 5:14).
세상 모든 문화, 문명에도 창작이란 없고 있던 것의 재생뿐이다.

하나님의 명대로 행하여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에게(출 12:28)
광야에 이르러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으니(출 25:8-9)
호렙산에서 보여주신 식양대로라(출 26:30).
모세는 그 같이 역사를 필했고(출 36:8-40:33),
다윗은 성신이 그려주신 식양을 솔로몬에게 주었고(대상 28:11-19),
솔로몬은 7년에 걸쳐 그 설계, 식양대로 전을 필하였다(왕상 6:38).

이스라엘이 받은 계명은 아무 형상도 만들어 절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으나(출 20:4-5)
지성소와 성소에는 그룹(천사)의 형상을 새기게 하였다(출 6:29).

예슈아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심은 성전 된 자기 육체의 죽음과 부활로(요 2:19-10)
여호와 이름이 아닌 예슈아 이름으로(요 5:43)
유일하게 허락한 천사의 형상을 헐고 창조자의 형상을 보여주려 하심이었으니(골 3:6)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 안에 계신 말씀(요 1:1-3),
곧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골 3:15)
육신으로 오신 바 된(요 1:14)
하나님의 본체, 본체의 형상이심이다(빌 2:6, 히 1:5).

그가 죽으실 때
천사 문양이 있는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며(마 27:51)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요 19:30)
① 아버지 계명대로 이루시고(요 10:18)
그 피로 모형이 아닌 참성소를 정결케 하심(히 9:23).
② 하늘성소를 더럽힌 마귀를 심판하심(겔 28:12-18, 요일 3:8).
③ 첫 아담의 죄 대신 마지막 아담이 죽으심이다(고전 15:22).

그는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부활승천하시고(고전 15:49)
영생을 믿는 자의 마음에(딤전1:4)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으니(고후 1:22)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재연하게 하심이라.

예슈아 이름으로 침례 받은 자는(마 28:19)
선한 일에 본이 되려(롬 8:29)
예슈아 그리스도의 말씀에 절대복종하고,
무소유를 고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도 고립도 고난도 죽음도 피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식양 =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패턴 = 죽음과 부활’
‘침례 = 죄와 함께 죽고 의로 부활함’이요(롬 6:3-7),
하늘에 가서 주를 모시고 살 그의 집이 되려 함이다(히 3:6).

오! 주여,
나, 과연 몇 % 그리스도인인지?
짝퉁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분, 악의, 훼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을 버리고
아들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게 하옵소서.
죽어 하늘문이 열리는 진품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아멘.





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
성막의 구조와 성전 변천사

출애굽기 성막 성경공부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막의 모든 구조물을 보면서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한 부분은 가장 길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곳이다.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 끝까지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재료와 그 구조물, 기구 그리고 거기서 행해지는 의식에 대해서 놀랄 만큼 상세한 사항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셨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고 지상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시는 데에 성경의 2장 분량을 소비한 것에 비해 성막에 10장이 소요된 것은 이 말씀 속에 내포된 영적 교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성막의 구조와 모형을 한낱 지난날의 의식, 곧 사라진 지 오래 된, 이제는 무가치한 유대인의 관습과 풍속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 속에 숨어 있는 구속의, 복음의 원초적 의미를 연구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구조와 기구들을 순서별로 연구하며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성막의 어의

성막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성막을 뜻하는 어의를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성막을 뜻하는 용어들이 적지 않게 쓰였는데 구약의 어법과 신약의 어법은 약간 차이점이 있기에 하나하나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오헬>

성막에 대해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인데 이것은 ‘천막’을 뜻하는 말로서 140회 이상이나 사용되었다.
이 말이 출 26:9에서는 성막의 전면에 있는 휘장을 의미하였고
27:21에서는 회중에 모이는 성막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정관사와 함께 쓰여서 성막을 나타내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덮는 것'(Covering)을 뜻한다.

<미쉬칸>

이 말은 ‘거주지’나 ‘거처’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는 장소로서, 또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장로로서 성막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어근은 ‘거하다'(to dwell)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이 <미쉬칸>은 출 25:9을 비롯하여 약 100회 정도 사용되는데 장막을 표현하는 말로서는 <오헬>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 대해서는 출 26:7에서 볼 수 있는데 원문은 <레오헬 알 하미쉬칸>으로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서는 ‘Covering upon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 (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개역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은 ‘a tent over the tabernacle’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그 성막을 덮는 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미쉬칸은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막 전체를 의미 할 때가 많고 오헬은 성막의 지붕 덮개를 나타내는 말로서 성막 자체를 의미하는데 쓰여졌다.

기타 용어들

<쏙>은 시 76:2에 <쇽>은 암 2:6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데 덮여 있는 밀실을 뜻한다.
또한 <씰쿠트>와 <셐카>도 암 5:26에 기록되어 있는데 역시 덮여 있는 은밀한 처소로서의 장막을 의미한다.

신약의 용어들

신약에서 성막은 처소(dwelling place)란 의미의 <스케네>, <스케오스>, <스케노마>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의 <미쉬칸>과 <오헬>을 번역한 것들이다. 즉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서 사용한 것들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두 단어에 대한 구분 없이 <스케네> 또는 <스케노마>를 사용했는데 이는 신약에서는 구약에서와 같이 성막의 구조와 형식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 의미 또는 실체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곧 성막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하고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성막의 건립상, 구조상으로 그 적용어를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성막의 대표적 용어를 택하여 성막의 구조와 단어의 의미에 구애 됨이 없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성막의 구조

성막은 그 구조가 사람의 고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재료에서부터 건조 방법까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 되어졌기 때문에 성막 그 자체로 이미 중요하고 교훈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로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를 두신 하늘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는 실례
둘째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 주고 있으며,
셋째로 신자들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장소로 교회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셨다.
그러므로 성막의 모든 기구들과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성막을 건조한 사람들

성막의 구조 자체를 다루기 전에 그 구조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막의 모든 구조와 재료에 대해서 뿐 아니라 만들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출 36장에 보면 성막을 건조할 사람들을 지정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한다.

① 이름이 지정된 사람들

출 35장에 성막을 건조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하나는 ‘브살렐’로 그 이름의 뜻은 ‘주의 그늘에서’이다. 이 사람은 유다 지파의 ‘훌’의 손자이며 ‘우리’의 아들이다. 또 다른 사람은 ‘오홀리압'(나의 하나님 아버지의 장막)으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이다(참조 출 35:34). 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들로서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셔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셨으며 이들은 여호와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여 일을 했다.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고 재능과 기술을 겸비했으며,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다 그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입어 얻게 된 능력들인데 성령께서는 지혜와 재능과 모략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귀한 성품과 자격을 구비한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참된 일꾼과 도구로서 그의 뜻을 좇아 거룩한 성막의 건조 사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②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출 36:2을 보면 위의 두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막 건조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외의 많은 기능공들로서 출 35:35, 36:4, 8 등에서 그들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보게 된다. 그들은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수 놓는 일과 짜는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한 사람들이다. 비록 이들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으나 성막 건조에 참여하여 크게 협조하고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이들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하나님과 모세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나 그들은 자원하여 협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감독하며 지도한 자들이나 그들은 그 감독과 지도를 받아서 일한 자들로서 각 분야에서 자기의 재능대로 헌신 봉사한 기능공들이었다(참조 출 36:8-39:43).

성막의 모형

오늘날 성막의 영적인 중요성에 대한 무지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모형론(Typology)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성막은 이미 신약의 모든 복음의 진수를 간직한 신약에 대한 주석과도 같다. 이 점에서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에 대한 설명과 그 영적 의미까지도 다루고자 한다.


① 바깥마당

성막 전체의 모형에 대한 기록은 출 26:1-27:2에 나오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성막의 크기는 길이가 45m, 너비 22.5m, 높이가 2.25m의 직사각형인데 이동할 수 있는 조립식 구조로 되어 있다. 성막의 울타리 동쪽 끝에는 성막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문에 들어가기 전 외부의 마당을 바깥 마당이라 한다.

이 넓은 마당은 ‘이방인의 뜰’로도 부르는데 매우 넓은 공간이다. 즉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전 지역이 이 이방인의 뜰이 된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곳까지는 이방인들이 성막에 접근할 수 있으나 성막 안으로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란 하나님의 선민이 아닌 죄인들을 지칭하는데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적질 등 여러 가지 불의와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나타내며 그들이 있는 이 바깥 마당은 죄악의 장소를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을 나타내는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대상이 된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이 세상에는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에 죽을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부르셨다. 곧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요,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부르심을 입은 이 무리들은 이 바깥 마당에서 성막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있게 되었다.

② 문

성막에는 출입문이 있는데 이 문에는 기둥과 그 기둥의 밑받침이 있으며 4색실로 곧 청색, 자색, 홍색, 금색과 가는 베실로 아름답게 수놓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이 문의 폭은 약 10m가량 되는데 이는 너무 넓은 문이다. 이 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는 친히 자신을 양이 우리로 들어가는 문으로 말씀하셨다. 이 문으로만이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다른 데로 들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인 것이다(참조, 요 10:1) 그러므로 이 문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이 문의 휘장이 4색으로 된 것은 우리 구조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4복음이 표현하는 왕과 종, 인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은 항상 열려 있지는 않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 곧 닫히게 되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의 문이 닫혔듯이, 이 문도 닫히게 된다. 이때 문 밖에 있느냐 문 안에 있느냐에 따라 영원한 생명과 심판으로 분류된다.

③ 담과 안마당

성막은 네 개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남쪽과 북편의 담이 45m이면, 각각 20개의 조각목을 세우고 그 밑에 놋받침을 받치고 그 기둥에 머리를 씌운 후 은으로 만든 갈고리와 가름대로 이어서 세마포로 드리워서 만들었다. 그 바깥 휘장의 높이는 2.5m인데 세마포는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는 베실로 수를 놓아 짠 휘장으로 높이가 2.5m가량 되었다. 서편 담은 길이가 25m이며 기둥이 10개 있었는데 서편과 동편의 길이는 같으나 동편 담에는 출입문이 있었다. 이 담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구별하고,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을 구별하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였다.

또한 이 담은 성도의 육신을 가리키는데(참조, 고후 5:1; 벧전 1:13-14) 성도의 육신인 이 장막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된다. 이 담 안의 마당은 ‘안마당’으로 불리는데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즉 이 안마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들어와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 교제를 나누는 교회를 뜻한다. 성도들은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영적 교제를 하게 되었다(참조, 엡 2:20-22).

④ 성소와 지성소의 덮는 막

이 덮는 막은 안마당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같이 덮어 주는 막으로서 4중으로 되어 있다. 첫 번 덮막은 가는 베실로 짠 고운 막으로 성막 내부에서 보이게 되는데 금색, 자색, 청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아름답게 수가 놓아져 있다. 또한 이 천에는 성막으로 들어와 예배하는 자들을 내려다보는 천사의 모습과 함께 수놓아져 있다. 두 번째 막은 염소 털로 만든 것으로 그 크기는 44X30 규빗의 크기로 첫 번째 덮막보다 조금 더 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성막 위의 천막’으로 불리는데 아래 있는 앙장들을 보호하고 동시에 주위에 있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다.

세 번째로 붉게 염색된 수양의 가죽이 덮여 있는데 이 가죽은 제사의 제물로 쓰인 양의 가죽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헌신을 의미한다. 붉게 염색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를 뜻한다. 맨 윗덮개는 수달의 가죽으로 외부 표면에서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가죽은 햇빛의 자극에 강하고 잘 썩지 않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도 아름답거나 매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외적으로는 초라하시고 볼품이 없으셨으나 그 내면적으로는 완전하고 고귀한 성품을 지니시고 이 세상 풍조나 죄악에 물들지 않으심을 보여 준다.

⑤ 성소

이상에서 말한 4중 덮개 밑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게 되는데 성소에는 3개의 성막 기구가 있다. 곧 떡상과 향단과 등대이다. 제사장들은 이 성소에서 매일 등대의 불을 점검하고, 향단에 향불을 피우며, 떡상의 떡을 1주일에 한 번씩, 특별히 안식일에 12덩어리의 새로운 떡으로 갈아놓고 6가지 제사를 드렸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곳이다. 이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⑥ 지성소

성소를 지나서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다. 이 지성소에는 법궤가 속죄소 또는 시은소가 있고 그 위에는 두 그룹이 있다. 이 곳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짐승의 피를 가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다(참조, 출 30:10; 레 16:18; 23:27). 이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 있는데 이는 함부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 즉 천국을 뜻하며 이 곳은 아무도 나갈 수 없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임을 나타낸다. 일 년에 한 번 이곳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자신과 회중의 죄를 위해 매년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하나님께 단번에 나아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참조, 히 9:25).

⑦ 안 휘장

이 안 휘장은 앞에서 말한 성막의 첫 덮개와 같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그룹의 모습을 수놓아 만들었다.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어서 두 곳을 구별하는 역할을 했다. 이 휘장은 막힌 담으로 인류가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한 이후로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다. 에덴동산 이후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으로 막으셨고, 노아의 홍수 때도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하나님이 친히 방주의 문을 닫으심으로 세상 사람들과 노아의 식구 사이를 구분하셨다. 이제 이 지성소와 성소도 휘장으로 막으셔서 죄인들의 접근을 막으신 것이다.

휘장이 의미하는 것은 첫째로는 위에서 말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며 둘째는 둘 사이의 교제의 단절을 뜻한다. 휘장 자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휘장이 수놓아진 천사가 이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가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참조, 마 27:5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사업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 놓였던 죄악의 담이 무너짐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 제물로서 중보자가 되어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잃었던 화목, 즉 교제의 상실을 회복하셨다. 제2의 아담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 것이다.

3) 성막의 기구들

성막에는 8개의 기구들이 있게 되는데 이것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곧 외향적인 면과 내향적인 면인데 외향적인 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며 내향적인 면은 그 기구들이 가지는 영적 의미를 통한 인간의 구속적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두 면에 근거하여 성막의 기구들과 그 영적 의미를 알아보겠다.

① 놋제단(번제단)

놋단을 히브리어로 <미즈베하>라 하는데 ‘제물’ 또는 ‘희생’의 뜻이 있으며 ‘죽인다, 희생한다’는 뜻을 가진다. 이 단은 조각목(아카시아나무)으로 만들어져 그 위에 놋으로 싼 것으로 그 길이와 너비는 모두 5규빗(2.5m)이다. 단 위 네 모퉁이에는 각각 뿔이 나와 있으며 단 네 면 가운데는 제물을 받치는 그물망이 있다. 그리고 단 높이 중앙에 고리 넷을 이편과 저편에 둘씩 달아서 금을 입힌 막대기로 꿸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단을 이동할 때 어깨에 메고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단은 번제단이라고도 하는데 ‘번제’라는 말은 ‘올라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열납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같은 희생 제단은 인간의 범죄 이후로 생겼는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였을 때 그들의 수치를 가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던 사실에서 시작되어 아벨의 제사에서 짐승이 드려졌고, 홍수 이후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짐승을 죽여 드리는 희생 제사의 단을 쌓았었다. 또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다가 수풀 사이에 걸려 있는 수양을 드렸고 그 외에 이스라엘의 족장들도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려왔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희생 제사를 자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드릴 때까지 이스라엘은 이 희생 제사를 짐승으로 드려왔다. 이 번제단은 죄의 결과로 당하는 형벌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물이 죄를 대신 쓰고서 그 형벌을 받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놋제단에 제물을 가져 첫째는 먼저 죄를 자각하고 둘째는 양을 제단으로 끌고 가서, 셋째는 그 위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고 넷째는 죽여서 단위에 얹고 다섯째는 피를 제사장이 단 사면에 바르고 여섯째는 그 제물을 태우는 순서를 거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단의 네 뿔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의 머리, 양손, 다리에서 흘리신 피로 십자가의 네 귀퉁이에 뿌리셨으며 친히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 지성소로 나아가심을 뜻한다.

② 물두멍

물두멍은 번제단 다음에 위치한 것으로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두 번째로 놓여 있다. 이것은 전체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물을 가득 담아서 성소에 출입하는 제사장이나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제사 전후에 손과 발을 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 수족을 씻지 않고 출입하는 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자신의 허물과 범죄, 실수를 살피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물두멍의 물은 거울로도 사용되었는데 제사장은 그곳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서 더러운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이는 성령의 감화에 따라서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 양심으로 어긋난 허물과 범죄를 비추어 보고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함을 뜻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로마 병정이 찌른 창으로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은 그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신 후에 그 물로서 정결케 씻어 주심을 뜻하는 것으로 곧 성막의 물두멍의 본래 의미이다. 출애굽 시 유월절 양을 잡아서 문설주에 피를 바른 것이 번제단의 의미를 가진다면 홍해 바다를 지나는 것은 곧 물두멍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순서적으로 먼저는 대속의 피, 그리고 정결케 하는 물의 순서가 된다. 성경에서 이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에베소서 15장 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다.

③ 떡상

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편에 떡상이 있는데 이 떡상은 일명 진설병 상이라고도 한다.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졌는데 길이가 2규빗(약 1m), 높이가 1규빗 반(약 75cm), 너비가 1규빗(50cm)정도이며 안과 밖을 순금으로 쌌다. 그 위에 차려지는 떡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갈아 놓았다. 이 떡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누룩과 꿀을 넣지 않고 소금과 기름을 넣어서 만들었다.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따라서 12개를 놓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양무리들의 영혼의 양식임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제사장 된 성도들의 영혼의 양육자로서 매 성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양식을 공급해 주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 주님을 떠나가고 말았다. 이때 베드로에게 ‘너도 가려느냐?’고 주님이 물으시자 ‘영생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뉘께 가오리까?’라고 함으로써 주님 자신이 그 생명의 떡이심을 베드로는 고백했다. 이 떡은 누룩 없는 신령하고 순수한 생명의 참 떡이시며 진리의 떡이시다. 이 떡에 기름과 소금이 첨가되었는데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상징한다(참조 히 13:8).

④ 등대

등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세워져 있고 그 줄기에는 여섯 개의 가지가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잔과 꽃,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꽃의 형상은 살구꽃이었다. 가운데 1개 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가지가 있었다. 이 등대의 빛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꺼지지 않게 켜 놓아야 하는데 이는 어두울 동안은 계속 빛을 발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등불 켜는 일을 맡은 것으로 추측되며, 사무엘 3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일을 맡았던 것 같다(참조, 삼상 3:1-9). 등대의 꽃받침 위에 올려놓는 등잔도 역시 순금으로 만들었으며 일곱 개의 등불이 모두 동시에 켜지게 되면 매우 밝은 빛을 내게 된다.

이 등대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며(참조, 요 1:4-5) 등잔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감람유(올리브유)로 가득 채우게 되는데 스가랴 4장 2절에 의하면 순금 등대 좌우에 두 감람나무가 서서 그 등에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불이 힘 있게 타게 했다. 이것은 주의 몸 된 교회가 성도들에게 은혜의 기름을 공급하여 주어서 성도들로 세상에 및을 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참조, 마 5:14; 엡 5:8).

⑤ 향단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 모두 1규빗(약 50cm)으로 네모가 반듯하며, 높이는 2규빗(약 1m)이었다. 이것도 역시 금으로 안팎을 쌌으며 그 향단 위와 전후좌우에 금테 무늬를 놓았고, 그 위에 네 뿔을 금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고리 네 개를 만들어 향단 양편에 붙여서 채를 꿰게 하였다. 또한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품을 제조하는 법은 출 30장 22절, 25절에 의하면 유질 몰약 50세겔, 그 반수의 향기로운 창포 250세겔, 계피 500세겔과 감람기름 한 힌(hin: 3.67ℓ)을 취하여 섞여서 만들었다. 아론의 자손은 그 향품을 아침마다 그 향단위에 사르되 등불을 점검할 때와 저녁에 등불을 켤 때 향품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이 향단은 다른 향이나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 이외는 사용치 못했다. 이 향단은 기도의 제단으로 요한계시록 8장 3절 이하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 항상 드려져야 하는 향불인 것이다. 진실과 성심으로 제단에서 드리는 기도는 향단에서 향을 분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향단의 불을 꺼뜨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였다.

⑥ 법궤

이제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를 들어가게 되는데 휘장을 지나면 법궤를 보게 된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이 지성소에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게 된다.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법궤 위 시은소(속죄소)에 피를 쏟게 된다. 법궤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 간단히 그 세 부분을 언급하면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고 그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다. 법궤는 네모지게 만든 상자와 같은 것으로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와 높이는 각각 1규빗 반(약 75cm)이다. 이 궤 역시 각목으로 만들어서 안팎에 순금으로 입혔다.

위의 모서리는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에 달아서 양편에 두 고리를 두고 채를 만들어 끼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는데, 그 두 돌비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으로 ‘언약의 말씀’, ‘언약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넣어 두었다.

이 법궤의 순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데 카일(Keil)은 법궤의 내외를 순금으로 씌운 것은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의 신성(神性)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법궤의 조각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순금은 그의 신성을 의미한다. 법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비는 하나님의 지존하신 공의를, 만나는 신령한 양식을,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의미한다. 즉 십계명은 공의의 성부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성자 하나님을 아론의 지팡이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⑦ 속죄소(시은소)

법궤의 두 번째 부분인 속죄소는 <카포레트>인데 이는 동사 <카파르>에서 온 것으로 근본 뜻은 ‘덮는다’이다. 즉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용서와 자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며 길이가 2규빗 반(약 1.25m), 너비가 1규빗 반(약 75cm)으로 순금으로 된 덮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좌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심판의 보좌로서 그 밑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에 의해서 죄인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시게 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1년이 한번 희생 제사의 피를 가지고 이 하나님의 보좌 위에 뿌림으로서 이 심판의 은혜의 보좌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한 대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로서 만족되어짐을 나타낸다.

⑧ 두 그룹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두 그룹을 세웠는데 한 그룹은 이 쪽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연하여 있으며 이 두 그룹은 두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고 얼굴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그룹의 형상은 사람의 얼굴, 사자, 송아지 그리고 독수리 형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참조, 겔 1:6; 계 4:7-8). 여기서의 그룹은 사람의 형상이며 그들은 천사의 한 부류로서(참조, 창 3:24), 하나님의 보내신 대사로서 하나님을 대리한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이 천사를 보았을 때 하나님처럼 경배하고 우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참조, 삼하 22:11; 시 18:10). 그러므로 그들이 속죄소 위에 있는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내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그곳에 뿌려지는 속죄의 피를 경탄한 듯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3. 대제사장과 그 의상

이제까지는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에 대해서 다루었었다. 즉 성막의 모형과 기구들이 그리스도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가를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그 성막에서 봉사하는 대제사장과 그의 의상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대제사장

광야에서의 대제사장은 아론이었는데 그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론이 가지고 있던 대제사장의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수행하셨던 것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들은 단번에 완전하게 제사장의 임무를 마치신 것이다(참조, 히 7:11).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제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옷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짜여졌다(참조, 출 28:5, 6, 15, 33).

이때의 푸른색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자의 신분을 나타내며 자색은 존귀함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존귀와 영광을 나타낸다. 진홍색은 피의 색깔로 사랑과 희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희생하심을 상징한다. 아론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제사장들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의 옷은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는데 그 옷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서는 대제사장의 의상에서 다루고자 한다.

2) 대제사장의 의상

① 속옷

속옷은 가는 베실로 짜서 만든 옷이다. 이 속옷에는 띠가 있어서 한 번 입으면 벗겨지거나 자리가 움직이는 일이 없게 되어 있는데, 이 띠는 속옷을 입게 되면 꼭 매어야 했다. 이 옷의 특징은 통으로 짠 것이며 반드시 속옷을 입은 후에야 겉옷을 입어야 했다. 이 겉옷은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제사장까지도 입게 되어 있었다. 이 속옷은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으로 우리의 죄를 가리고 칭의를 얻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참조, 렘 23:6, 16). 여기에 매는 띠는 진리의 띠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나타낸다.

구속사 맥 1189 출애굽기

② 겉옷

에봇 받침은 겉옷이다. 이 겉옷은 푸른색의 옷인데 두 어깨 사이에 머리가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고 옷 가장자리를 따라서 석류 무늬 다음에 금방울을 계속 돌아가며 달게 되어 있다. 이 겉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직을 표현하며 존귀와 영화를 나타낸다. 옷단의 방울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석류는 그 말씀대로 충실한 결실을 보여 준다. 이 겉옷이 성도에게 적용될 때는 의와 영광의 옷으로(참조, 사 61:10),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며, 세상을 심판하며 영광을 누릴 것을 의미한다(참조, 계 5:10; 20:4, 6).

③ 에봇

에봇은 겉옷 위에 입는 것으로 모양이 긴 앞치마처럼 생겼는데 대제사장의 어깨에 걸치게 되어있다. 또한 에봇에는 매는 띠가 있어서 대제사장의 허리에 단단히 맬 수가 있었다. 그 띠는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잘 조화 있게 짠 아름다운 띠이다. 이 에봇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세운 지상의 교회가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달려 있는 것을 나타낸다. 어깨는 힘, 능력을 상징하는데 곧 우리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교회가 지탱되고 유지됨을 나타낸다. 주님은 선한 목자와 같이 친히 그 어깨에 잃은 양과 같은 죄인들을 메고 오시는 것이다(눅 15:5).

④ 흉패

에봇 위에는 12보석으로 장식된 흉패가 있는데 대제사장의 가슴 부분에 위치함으로 흉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에봇이 교회를 의미한다면 흉패는 그 교회의 구성원을 나타낸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슴에 붙어 있는 지체이며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의 몸을 기꺼이 대속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셨다. 이 흉패는 각 줄에 3개씩 도합 12개의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보석들은 그림에서와 같다. 이 흉패는 금사슬에 매여 대제사장의 어깨에 있는 호마노로 만든 두 견대에 고정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대제사장의 허리띠에 매게 된다. 어깨의 두 호마노의 두 견대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참조, 출애굽기 도표7). 이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예고된 약속을 따라 나시고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 12사도를 택하여 믿음으로 접 붙게 하심을 나타낸다. 즉 12보석은 예수님의 12사도를 나타내며 견대에 12지파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이 견대의 고리에 12보석이 매달려 있듯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12사도가 계승함을 나타낸다.

⑤ 우림과 둠밈

대제사장의 가슴속에 있는 흉패는 주머니처럼 위에서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마치 지갑처럼 생긴 것이다. 이 속에 우림과 둠밈을 집어넣는데 <우림>은 ‘빛들’이라는 뜻이며 <둠밈>은 ‘완전함’이란 뜻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선악과 길흉의 원인과 결과를 알기 원할 때 이 두 패를 내어 봄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그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면 주님이 응답해 주심을 나타낸다. 또 이것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우림과 둠밈 같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심을 의미한다.

⑥ 성관

성관은 대제사장의 머리에 쓰는 모자로서 대제사장의 직분과 그 직분의 영광과 존귀를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며(참조, 슥 3:1), 영광과 존귀를 입은 자로서 그 관을 쓰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히브리서 2장 9절에 의하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 수치와 고난의 가시관을 쓰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다.

⑦ 금패

금패는 대제사장의 성관에 붙이는 패로서 여기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이 쓰여 있으며 청색 끈에 매어 성관 앞에 달게 되었다. 이것은 첫째로 ‘모든 일에 조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경고이며 둘째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별된 자임을 명심하여야 함을 주지시키는 표시이다. 그러므로 기름부음 받은 자와 선지자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참조, 대상 16:22). 왜냐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와 하나님이 쓰는 자이며 하나님이 친히 처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성별하여 성령의 기름을 부어 세운 유일하고 영원한 하나님께 성결 된 대제사장이시며 만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분이셨다.

4. 성막의 역사적 변천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마디로 성막의 역사 곧 성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 이스라엘의 정치적 멸망이 있었고 성전의 재건과 함께 이스라엘의 부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막의 구조와 그 의미 못지않게 성막의 변천 과정을 다루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 성막의 변천 과정을 연대순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시내산에서의 성막

이는 최초의 성막으로 출 40:2, 17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후 제2년 1월 1일에 시내 산 밑에서 성막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얼마나 오랜 시일을 성막 건조에 보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초기 장막은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을 보내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과 함께 수 차례 이동되었다. 성막 위에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곧 성막을 분해해서 성막과 그것에 속한 부속품들과 기구들을 정리하여 레위인들의 어깨에 메고 진행케 했다. 레위인들은 각각 그들이 맡을 부분이 정해져 있어서 각자가 그들이 책임지는 성막의 부품들을 메고 출발했다(참조, 민 3:31-32; 4:15). 이때까지의 성막의 구조나 모형은 앞서 다른 성막의 구조와 동일한 것으로 가나안 정착 전까지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2) 가나안 정착 이후의 성막

40년의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진입했다. 그들도 그곳에서 먼저 성막을 안치할 장소를 찾게 되었는데 그 장소는 사람이 살지 않고, 묘지로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리고 근처 길갈이라는 곳을 임시 장소로서 선정하였다가 마침내 에브라임 영지에 있는 실로로 정하여 이곳에 성막을 두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성막의 기구와 구조는 변동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그 후로 성막이 분해되고 여러 곳에 제단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레위 자손들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참조, 삿 17:12). 벧엘에는 언약궤가 이동하게 되었고 실로에는 성막이 있었다(참조, 삿 20:27).

3) 실로의 멸망

언제 어떻게 실로에 성막이 서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곳에 성막과 언약궤와 제사장직과 제사와 분향이 있었다. 사무엘상은 실로의 성막과 당시의 제사장 엘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블레셋의 침략으로 법궤를 빼앗긴 것을 말해 준다. 이 일로 인해서 실로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의 장중에 들어갔음을 성경 여러 곳에서 암시하고 있다(참조, 렘 7:12). 그런데 성막 자체까지 다 약탈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에 ‘놉’에서 다시 언약궤와 성막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4) 비지역적 예배

실로의 패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신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가견적인 유형 신앙에서 불가견적인 정신과 영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인위적인 신본주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 증거로서 대제사장직의 성격 상실을 들 수 있다. 사무엘은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대제사장과 사사로서의 역할을 겸하여 행하였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져서 벧세메스에 잠깐 머물렀다가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서 약 20년간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벧엘, 미스바, 라마, 길갈 등을 순회하며 예배의식과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했는데 이는 성막이 비지역화된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서 다윗 왕 때에는 완연한 현상이 되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역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셨다.

5) 놉과 기브온의 성막

놉은 여부스에서 북쪽으로 6km 떨어진 곳으로서 시온보다 90m나 높은 산시였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는 대제사장과 85명의 제사장이 거할 수 있었고, 에봇과 진설병을 놓는 상이 있었다. 이곳에서 사울 왕이 모든 제사장을 죽일 때 아비아달 하나만이 다윗에게 피하여 있었다. 그 후에 사울 왕은 성막을 기브온으로 옮긴 것 같다. 이 기브온은 여부스에서 10km, 벧엘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6) 기브온과 예루살렘의 성막

다윗은 왕이 된 후에 군사 삼만여 명과 함께 바알레 유다 즉 기럇여아림에 가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와서 다윗 성에 친 장막에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데 기브온에는 제단이 있는 성막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법궤가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법궤와 제단이 성전의 수축으로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기브온의 성막이 주로 제사에 이용되었으나 성전 건축과 함께 흩어져 있던 성막의 기구들이 모아져 한곳에 두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막은 가나안 입주 후 200년 뒤부터 그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성전이 대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모세의 성막 기구들은 사라지거나 변형되었다. 역대하 4장 19절에 보면 솔로몬이 기구를 만들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원 성막의 기구들이 분실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재난과 환난으로 많은 부분이 분실되었다. 처음에 법궤에는 두 돌비와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으나 후에 성전에 법궤를 안치할 때는 두 돌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참조, 왕상 8:9; 대하 5:2-10).

7) 성전의 수난과 변천

성막이 성전의 건축과 함께 사라지고 성전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 성전 역시도 수차례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을 통해서 유지되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A.D. 70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헤롯 성전이 파괴됨으로서 성전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① 솔로몬 성전

다윗의 뜻을 이어서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의 통치 제4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B.C. 967). 이 성전의 전장은 60규빗(30m), 너비는 20규빗(10m), 높이가 30규빗(15m)으로 성전의 기구들은 성막에서 옮겨온 법궤와 함께 새로이 만들어 두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 시대로부터 시드기야 때까지 존속하다가 B.C. 586년에 갈대아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성전도 함께 소화되고 그 기물들은 바벨론으로 이전되었다. 그 후 380년 동안 성전은 복구되지 못했는데 이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참조, 렘 25:3).

② 스룹바벨 성전

B.C. 539년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그는 일찍이 바벨론에 잡혀온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회유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온 지 2년째 되던 해에 세스바살의 지휘 아래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참조, 스 5:16). 이것이 스룹바벨과 그의 건축자들에 의하여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왕 제6년 B.C. 515년에 끝내게 되었다. 이 성전에서 일한 제사장의 반열이 정해지고 유월절이 지켜지게 됨으로서 구약성경의 역사는 끝을 맺게 된다. 그 후 이 성전은 구약 중간사의 기간을 걸치면서 수 차례의 파괴와 복구의 수난을 걸치다가 B.C. 20년에 헤롯의 재건 공사로 이 성전의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③ 헤롯 성전

스룹바벨의 성전은 요새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헤롯에게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성전의 크기가 포로시대 이전의 성전 즉 솔로몬 성전보다 높이가 60규빗이나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서(참조, 대하 3:4)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는데 실제적 이유는 그 재건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기념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성전은 46년에 걸쳐 완공되었으나(참조, 요 2:20)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대로 A.D. 70년 로마의 티토(Titus)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때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주님의 말씀(참조, 눅 21:20-21)을 기억한 사람들은 성밖으로 도피하여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로서 시내산에서 시작한 성막은 여러 과정을 거쳐서 결국 성막의 완전한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과 함께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제 성막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 성막에서 행해지던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 제사도, 대제사장도 사라졌다. 다만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원 상태로 복귀시키려하나 이 일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들 속에도 의견이 구구하다. 그렇다면 성막의 존재와 그 의미는 이제 시대의 변천과 함께 소멸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도 성막의 모든 구조와 모형이 주는 의미는 살아 움직인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단 한 번으로 그 모든 성막에서의 의식들이 마지막 심판날까지 지속되게 하심으로 더 이상의 동일한 의식이 필요 없을 뿐이다. 이제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이 성막이 각자의 몸에 해당되어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다(참조, 고전 3:16).

돌에 새겨 있던 돌비가 이제는 우리 맘에 새겨진 언약으로 바뀌었고(참조, 렘 31:31-33)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서 뿌리던 속죄의 피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뿌려졌으며 이제는 모든 성도가 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게 되는 것이다(참조, 벧전 2:9). 이제 제물은 우리 자신의 몸으로서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지고 있는 것이다(참조, 롬 12:1). 그러므로 성막이 가졌던 모든 영적 의미는 지금도 적용되나 그 실제적인 것들은 완전한 수행으로 재차 재현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이제는 사라진 구약의 성전과 현대의 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오늘날의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주님이 명하신 성례전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성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구약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닌 우리 주님을 머리로 해서 한 몸 된 지체가 서로 교제하는 표식으로서 공동체의 개념을 강조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4일 / 03- 12-2024(화)
출애굽기 24:1-18
찬송 / 171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언약의 피(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니라.


첫째, 언약의 피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옛날 부족들은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이 그들의 팔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잔에 담아 함께 마셨습니다.
이 피의 언약을 통해 두 부족은 형제 부족이 되어 서로 의리를 지키면서 상부상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인간을 대표하여 피를 흘리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 그리고 마귀에게 공격을 당할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죄 사함의 피(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In fact, the law requires that nearly everything b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the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만일 우리들이 스스로 죄값을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우리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와 절망과 저주와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칭의의 피(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 5:9)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이요, 마귀의 참소를 받지 않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하고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때문에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우리들은 이제 마귀의 공격이나 참소를 받을지라도 담대히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성화의 피(히브리서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 모두 죄로 가득한 것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욕을 없애고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피(에베소서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죄짓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구만리장천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를 찬송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고 나오기만 하면 그 피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여섯째, 화평의 피(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화목제가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거룩케 하였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만물 가운데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피를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일곱째,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에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의 입술을 사로잡아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여덟째, 생명의 피(요한복음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식물이 생명의 근원인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면 말라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도 겉으로는 돈과 명예와 권세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시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면 넘치는 생명감과 소망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홉째, 승리의 피(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결함이 있는 성품도 좋은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셨고,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그의 피로 사셔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비싼 피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의 값으로 산 우리들은 절대로 값싼 인생이 아닙니다.

리는 예수님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피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피를 말하면서도 피가 중심이 아니며 관심 또한 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9:18-22절을 다시 보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사세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말한 후에 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 이 의미를 깨닫는 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4:7절을 보면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준행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모세는 어떻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말씀을 들을 교인들이 말씀에 감동이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열심히 지켜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교인들의 반응에 감동하면서 무척 고무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 말씀에 은혜를 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진정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피를 뿌린 것입니다. 언약서에 피를 뿌린 것은 없지만 본문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모세가 행한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모세처럼 피를 뿌리는 것이 될까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피를 뿌린 것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이유가 없이 피만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말씀을 낭독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피로써 죄사함을 얻었으니 죄사함을 받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은 자답게 살게 하기 위해 내려진 하나의 생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피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에서 자기 구원만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피는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단순히 ‘너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는 죽은 자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책에도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죽은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언약의 피’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언약은 이스라엘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취하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언약을 기어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약의 피 앞에서 우리의 실천 의지를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실천 의지까지 몽땅 무너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살았을 때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 채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는 그 효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왕성한 활동과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러한 우리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선포하게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외치는 것이 목사입니다.







절기(하그)

חָג 스트롱번호2282

1.

축제

2.

희생 제물

발음 [ châg ]
어원
2287에서 유래
구약 성경
62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축제, 절기, 출10:9, 12:14, 신16:10, 대하5:3
  • 2.
    명사, 남성 희생 제물, 출23:18, 시118:27, 말2:3.

מוֹעֵד 스트롱번호4150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

시간의 공간

발음 [ môwʽêd ]
어원
325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정한 때.
    • a.
      명사, 남성 시간의 한 점, 창17:21, 레23:2,4,37,44, 삼상13:8,11, 삼하20:5,24:15, 시75:3(2), 1:4, 2:6, 렘8:7, 단8:19, 11 :27,35, 호9:5, 12:10.합2:3.
    • b.
      명사, 남성 시간의 공간, 창1:14, 단12:7
  • 2.
    명사, 남성 회중, 민16:2, 욥30:23, 사14:13, 33:20.
  • 3.
    명사, 남성 집회 장소, 수8:14, 시74:8, 애2:6.
  • 4.
    명사, 남성 신호, 삿20:38.

חָגַג 스트롱번호2287

1.

선회하다

2.

춤을 추다

3.

절기를 지키다.

발음 [ châgag ]
구약 성경
16회 사용

뜻풀이부

I.
원형 선회하다, 돌다
  • 1.
    원형 춤을 추다, 삼상30:16
  • 2.
    원형 절기를 지키다.
    • a.
      원형 [어지럽게 뛰논다는 뜻], 출5:1, 레23:41.
    • b.
      원형 [공적인 모임으로서] 시42:5(4).
  • 3.
    원형 비틀거리다, 현기증이 나다[술 취한 자에 대해 사용], 시107:27.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3일 / 03- 11-2024(월)
출애굽기 23:1-33
찬송 / 337장(인애하신 구세주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절기를 지키라(출애굽기 23: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구약의 3대 절기와 ‘수장절(收藏節)’의 참 의미

3대 절기

성경의 절기(출 5:1)는 여호와가 그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날로 ‘제사(예배, 롬 12:1)드리기 위해 정해진 날’을 말한다.

성경에 나타난 절기로는
▲매주 드려진 절기로 안식일(출 20:8)
▲매달 지켜진 절기로 월삭(민 28:14)
▲매년 드려진 절기로 유월절(혹은 무교절), 초막절(혹은 맥추절, 칠칠절), 초실절, 수장절(혹은 장막절, 초막절), 나팔절(레 23:23~26), 속죄일(레 16:29~34), 부림절, 수전절이 있다.

그 가운데 ‘3대 절기’라고 하면 ‘유월절, 초막절, 수장절’이 이에 해당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7회의 절기를 드렸지만 여호와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남자들에게 1년 3차에 걸쳐 절기를 지키도록 명했기 때문이다(출 23:14~19).
이 3대 절기만큼은 유대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반드시 연 3차씩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드려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 외형적으로 절기만 지키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사 1:12~15).

7 20190325-28  30







3대 절기의 의미

이제 구체적으로 3대 절기 속에 감추어진 참 의미를 되새겨 보자.

먼저 날짜를 보면 유월절은 1월 14일(출 12:2,6),
초막절은 7월 15일(레 23:34),
수장절은 9월 24일(학 2:18, 20)이다.
이스라엘의 추수는 일 년에 크게 나누어 봄에는 보리와 밀, 가을에는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 열매 등을 수확한다고 한다.
여기서 가을의 수장절을 초막절(신 16:16, 대하 8:13)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초막절’의 의미에 추수, 곧 수장(收藏)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여름의 초막절을 ‘처음 거둔다’는 의미의 초실절(初實節), ‘보리를 추수한다’는 의미의 맥추절(麥秋節, 출 34:22)이라고도 한다.
초막절의 다른 이름인 ‘칠칠절’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던 오순절(레 23:16)의 바로 전날을 가리킨다.

칠칠은 ‘7×7=49일’을 말하며 오순(五旬)은 ‘다섯 오, 열흘 순(旬)’이니 숫자 오십을 뜻하는 것이다.
다음에서 설명할 초막(성전)의 영적 의미와 관련해 볼 때 말씀으로 지어져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성전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을 때 거룩한 영, 성령이 임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초막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 육체를 풀이나 꽃(사 40:7, 벧전 1:24)으로 비유하신 것으로 볼 때 우리 몸 된 성전이 풀로 된 장막, 즉 초막(草幕)이 된다. 초림 때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실 초막의 실체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요 2:21, 요 1:32). 그리고 변화산 상에서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그 당시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하나 되어 진리의 말씀으로 지어진 제자들이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초막이요 성전이었다(마 17:4).

3대 절기의 개혁된 의미

진정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곳은 육적인 초막이 아니라(행 17:24) 거룩한 말씀으로 지어진 우리 육체인 성전(고전 3:9, 16, 6:19)인 것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400년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절기이다. 애굽 전역에 장자 심판이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으로 흠 없는 어린 양(출 12:1~12)을 잡아 고기는 구워먹고 피는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재앙에서 건짐을 받은 것에서 유래된 절기다.

구약 율법의 유월절 어린 양은 모형과 그림자(히 10:1)로 참 실체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고전 5:7)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육적인 어린 양을 잡았던 모세 때의 유월절을 기념하지 않고 이제는 죄와 사망 가운데 빠진 인류를 위해 희생 양으로 오신 예수님(요 1:29)의 피와 살 같은 말씀(요 6:51-55) 안에서 성만찬식의 떡과 포도주로 2천년 동안 기념해오고 있다.

또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또 다른 유월절 양식을 먹게 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다(눅 22:14~20). 

수장절(收藏節)에서 ‘수장(收藏)’의 사전적 의미는 ‘열매를 거두어 곳간에 저장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열매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의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성도’, 즉 첫 열매, 장자들(히 12:23), 시온산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14만 4천(계 7장, 계 14:1, 3)을 의미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피로 사서 나라와 제사장(계 5:9~10)이 될 자들이며 이들이 12지파에 각 지파 일만 이천씩 모여 14만 4000명을 이루게 된다. 12지파가 완성된 후 흰 옷 입은 큰 무리들이 몰려오게 되는데 이들이 예수님의 피로 씻어 그 옷이 희게 된,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계 7:14)이다.

‘피로 씻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죄를 사함 받았다는 뜻이며 이로써 예수님의 피의 효력이 마지막 계시록 때가 되어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곳간에 저장한다’고 할 때 곳간은 천국을 의미한다. 그 곳간은 육이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마 6:10) 하나님의 나라(계 21:1~2)이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씨(눅 8:11로) 거듭난 천국(마 13:24)의 아들들(마 13:38),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름 받는 시온산(계 14:1)이다.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해 시온으로 데려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로부터 지식과 명철로 양육(렘 3:14~15)받는다는 그 시온이다. 그 곳에서 이들은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요 14:29)을 그 예언의 말씀을 통해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산 제사 즉, 영적 예배

예레미야는 세 가지 중요한 예언을 했는데 그 중에 첫째가 새 일, 둘째 두 가지 씨 뿌릴 것, 셋째 새 언약 세울 것을 예언했다.
여기서 두 가지 씨마태복음 13장 24~25절의 예수님이 제 밭(자기 밭)에 뿌리시는 좋은 씨와 원수, 즉 마귀가 뿌리는 가라지이다.

예수님의 제 밭, 즉 예수교 세상(마 13:38)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각각 하나님의 말씀과 사단의 말에 의해 자라게 되고 그 가운데 가라지는 단에 묶여 버림을 받게 되고 알곡은 곳간에 데려가게 되는 것(마 24:40~41)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 ‘도적같이 추수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재림 때 영으로 오셔서 초림 때 씨 뿌리셨던 그 밭(교회)에서 추수를 하시는데 주인이면서도 도적과 같은 입장이 되시는 이유는 사단의 방해 가운데 참 신앙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초림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오늘날도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마 23:13)”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으라(마 24:42, 살전 5:6)’고 하셨는데 참 신앙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게 되고 그 말씀의 길(요 14:6)을 따라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계 15:5)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22:14~20, 마 26:26~29)’이라고 하시면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 나라가 임할 때까지 먹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포도나무(요15:1)이시니 예수님의 피와 살, 즉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재림, 계시록 때 먹는다는 것이다.

즉, 마지막 때 약속의 목자를 통해 열리는 계시의 말씀을 먹고 마음에 새겨서 새 언약을 지켜야만 죄 사함(히 8:10~13)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수장절 감사 예배’는 수장절을 맞아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첫 열매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은하는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산 제사, 즉 영적 예배를 뜻한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듯이 추수한 곡물이나 과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람의 몸과 마음과 뜻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4:35~36)”라고 말씀과 같이 복음을 전하여 말씀으로 맺어진 열매를 천국 창고인 성전으로 인도하는 전도 즉, 영적 추수를 실천하는 것이 수장절의 진정한 의미이다.

성경 속의 절기는 사람으로 비롯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절기이며 히브리서 4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분명히 “그의 안식에 들어갈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직 남아있다”고 기록했다.

성경 속의 절기가 단지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어 지키라는 절기가 아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할 절기로 남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약 절기의 이면 속에 감춰진 온전한 의미를 모른 채 구습에 젖어 지켜 왔던 유대인들의 절기는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초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신앙의 목적인 구원과 영생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대를 거울삼고 ‘성경적 절기의 참 의미’를 깨달아 그에 합당하게 드리는 절기(감사 예배)가 거룩한 산 제사인 영적 예배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참 절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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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8545) 테무라(emûwrâh) תְּמוּרָה    

1. 교환하다.  2. 교환.  3. 교환된 물건 : 레 27:10
발음 [ temûwrâh ]
어원 / 417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회 사용
뜻풀이부

I. 명사, 여성 교환하다.
 1. 명사, 여성 교환, 매매, 물물 교환, 룻 4:7, 욥 15:31.
   a. 명사, 여성 [주]교환된 물건 : 레 27:10, 33, 욥 28:17
 2. 명사, 여성 배상, 보상, 보수 징벌, 보응, 욥 15:31, 20:18.

1-15절은 배상에 관한 법
16-31절은 도덕에 관한 법에 대하여 말씀

1. 도둑질에 따른 배상 (1~4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손해 배상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해서 도살하거나 팔면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1)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끼친 만큼만 배상하도록 하는데, 도둑질 한 경우에는 다섯 배나 네 배로 갚아야 하고, 만약에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3)고 엄격하게 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둑질한 짐승이 살아서 그의 손에 아직 있으면 ‘같은 종류의 짐승으로 갑절을 배상하도록’(4)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생계형 도둑이 아니라 이스라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소와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한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소는 힘든 농사일과 각종 짐 부리는 일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면서, 소의 각종 부산물은 주요 식량자원이자 원자재로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양도 많은 문화권에서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경제적 동물의 이용 외에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에서 양은 중요한 희생동물임과 동시에 소유한 양의 수가 재산을 뜻했고, 털과 가죽과 고기는 이스라엘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짐승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경제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나 양 그리고 나귀와 같은 짐승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서 무거운 배상을 하게 한 것은 이웃의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최근 청소년 범죄 연령이 낮아지고 잔혹성이 커지다보니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거나 폐지하자는 의견을 둘러싸고 찬반 논쟁이 있습니다. 찬성 측에서는 청소년들이 촉법소년이라는 법을 악용하고, 낮은 처벌 수위로 재범률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의 청소년에게 교화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고, 꼭 처벌만이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법은 힘 있는 사람에게는 거미줄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오랏줄입니다.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도 ‘바늘을 훔친 자는 주륙을 당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는 말로 고무줄 같은 법집행을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배상제도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큰 재산을 도둑질한 자는 작은 재산을 도둑질한 사람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는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둑과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주인 사이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2-3a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이 한밤중에 남의 집에 침입했다가 죽게 되더라도 그 도둑을 죽인 집 주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전기가 없기에 침입자를 알아보려고 불을 켜다가 주인이 먼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인이 그를 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식별이 가능한 해가 뜬 후라면 도둑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고, 그를 벌하도록 재판장에게 데려가게 하셨습니다. 이 규정은 한밤중에 도둑이 들어 놀란 사람과 대낮에 들어온 도둑 모두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2. 타인의 밭이나 곡식 등에 대한 배상 (5~6절)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가축을 풀어놓아 남의 밭이나 포도원에 들어가 먹게 하면, 즉 남의 밭이나 포도원을 훼손하면 가축의 소유자는 자기 밭의 제일 좋은 산출물과 포도원에서 최상품의 포도나 포도나무로 배상해야 합니다. 타인의 재물을 그만큼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요즘 길을 다니다보면 길바닥이나 심지어는 도로에 내동댕이쳐있는 전동킥보드를 심심치 않게 목격합니다. 무슨 심보일까요? 자기 것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전에 교외에 있는 조그마한 찜질방을 갔는데, 월요일 낮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 무리가 들어왔는데 그분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목회자들이 월례회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샤워를 하려고 샤워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샤워실 곳곳에 수건과 대야가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분명 제 앞에서 들어간 일행은 목회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나중에 주인이라도 보면 어쩔까 싶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건을 다 수거해서 수거함에 넣고, 대야도 정돈하고 나왔습니다.

(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농사철이 시작되면 땅 속에서 월동하는 해충의 방제를 위해 논.밭두렁이 태우기나 잡풀 소각 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한 화재가 빈번해지자, 산림인접지역에서는 논두렁 태우기를 금지하고 있고, 부득이하게 논.밭두렁 소각이 필요할 때는 시군 산림담당부서의 허가를 받아 공동 소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은 불에 타기 쉽습니다. 따라서 자칫하면 이웃의 재산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하한 목적으로 들판에 불을 놓는 경우 주의할 것을 당부함과 동시에 남의 곡식이나 밭을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 위탁 물품이나 짐승에 대한 배상과 소유권 분쟁 시의 배상 (7~13절)

7절과 8절은 위탁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그 이웃집에서 도둑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히면 그 도둑질한 자는 갑절로 배상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탁받은 사람은 위탁물을 잘 보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탁물을 잃어버리거나 도둑을 맞았다면 손실을 갚든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자신이 잘못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판장으로부터 잘못이 없다고 인정받으면 물품을 위탁한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9절은 어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하여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유권 분쟁이 생길 경우,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쌍방은 재판장(또는 하나님)에게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10-11절에서는 나귀, 소 그리고 양과 같은 짐승을 이웃에게 맡겼는데 맡긴 짐승이 죽거나 다치거나 아무도 안 볼 때 끌려갔다면, 맡은 자는 그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여호와께 맹세하면, 맡긴 자는 그대로 믿어야 하고, 맡은 자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0~11절). 그러나 도둑맞았다면 맡은 자는 맡긴 자에게 배상해야 합니다(12절). 그리고 만일 맡은 짐승들이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거로 내놓으면 그 찢긴 것에 대해서는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3절).

4. 빌려온 짐승에 대한 배상 (14~15절)

이웃에게서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빌려온 짐승의 주인이 없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반드시 배상해야 합니다(14). 그런데 그 짐승의 주인이 함께 있을 때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사용료를 내기로 하고 빌려온 짐승이 다치거나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됩니다(15).

이상에서 배상에 대한 규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중요한 점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반드시 배상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배상하되 경우에 따라서 두 배, 네 배, 다섯 배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도둑과 같이 나쁜 의도를 갖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는데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의도치 않게 피해를 주었다 할지라도 타인의 것은 자신의 것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배상하되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위탁받았으면 마치 자기 것처럼 책임감을 갖고 지켜야 하며, 만약 위탁한 것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맡은 사람은 배상하거나, 책임이 없음을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 받아야 하며, 맡은 사람이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맡긴 사람을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과 함께 언약서를 주신 이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즉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는 나 한 사람만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상에 대한 법이 의도하는 바는 공동체 전체의 화합과 평화입니다.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선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자 공동체 전체를 위한 온전한 내려놓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한 것도 대단한데,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은 남을 속여서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자기 관할 구역의 세금을 미리 로마 제국에 선납하고 자기 마음대로 더 거두어서 부를 축적했습니다. 즉 그는 부당하게 부를 축적했습니다. 따라서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남은 절반으로 네 배의 배상을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를 위해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재물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율법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 삭개오가 아니라, 존경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삭개오와 같이 율법 안에서 자유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웃의 것을 소중히 여기며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배상에 대한 법에 대해 살펴보면서 내 것만 소중히 여겼던 완악한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본 삭개오는 내 것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것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의하게 모은 재산 모두를 공동체를 위해 내려놓았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게 도와주시고 삭개오와 같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봄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라는 말씀을 오늘 날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3.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4. 하나님께서 배상에 대한 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는?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하는 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부터 17절은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법에 대해, 18절부터 20절은 이방 풍습에 대한 법에 대해,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대한 법입니다.

성도덕과 올바른 신앙(16-17절)

(16-17) 사람이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납폐금을 주고 아내로 삼을 것이요 만일 처녀의 아버지가 딸을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납폐금으로 돈을 낼지니라

만약 공동체 내에서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꾀어 동침하였을 경우에는 납폐금을 주고 아내를 삼아야 합니다. 납폐금이란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예물이나 돈을 의미하고, 성적인 결합은 상대방과 하나가 됨을 뜻하기에 약혼하지 않은 여자의 삶을 책임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가 결혼을 거절하게 되면 납폐금은 지급해야 했습니다. 납폐금을 얼마 지급했는지 정확히 언급이 되어 있지 않지만 신명기 22장 29절에 근거하여 은 오셉 세겔을 주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방 풍습에 관한 법(18-20절)

이어 이방 풍습에 대한 세 가지 명령이 나타납니다.

(18-20)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이 세 가지 명령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에 관한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무당’은 마법사, 요술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여성형이므로 ‘신접한 여인’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무당에 대해서는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점술은 고대근동 사회에서 흔히 행해졌던 종교 행위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무당들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간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배필로 하와를 보내 주셨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부부로 맺어진 남녀의 성적인 결합과 이로 인한 자손의 번성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창조 섭리를 벗어나는 부끄러운 행위 즉, 짐승과 교합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멸하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멸하게 된다는 것은 단지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멸이라는 개념은 생명을 포함해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까지도 함께 파괴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스며들어 있던 이방 풍습과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강하게 하십니다.

21절부터 27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 약자에 대한 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공동체 중 약자에 관한 법(21-27절)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12장 37-38절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수많은 잡족’도 함께 출애굽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지만 그들도 함께 광야생활을 했고,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도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기에 그들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그네들을 학대하지 않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는 동시에 나그네였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약자인 과부나 고아에 대해서도 해롭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가장 천대를 받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오히려 섬겨야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 중 이들의 인권을 지속적으로 짓밟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벌하시고,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경고를 더하십니다. 이어서 공동체의 채무관계에 대한 법이 이어집니다.

(25-27)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공동체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을 경우 채권자처럼 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의 이자는 곡식에 대해서 33.3퍼센트에 달했고, 은을 빌릴 경우에 20~25퍼센트인 것을 감안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인애와 사랑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심지어 담보로 가지고 있던 물건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줄 정도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흘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따라 가는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고아, 과부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으며 지금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있는 우리들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겠습니까?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소외된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서 세상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교회 내에서만 사랑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이 전해지도록 주님의 통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법(28-31절)

28절부터 31절은 하나님에 관한 법에 대하여 열거합니다.

(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8절에 재판장의 원어는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을 지칭하기에 본문에서 나오는 ‘재판장’으로 해석하기 보다 ‘하나님’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백성의 지도자들에 대한 저주를 금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을 다른 성경 번역본에서는 ‘재판장’이 아니라 대부분 ‘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또한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하는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제물 드림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29-30)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해 예물을 드릴 때는 먼저 지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지체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질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고린도후서 9장 7절과 같이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곡물에 대해서는 처음 추수한 것을 드리고, 짐승에 대해서는 칠일 동안에는 어미의 젖을 먹게 하고, 여덟째 날에 하나님께 바치게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주어야 한다는 말은 이방 종교에서처럼 사람을 제단에 바치는 인신공양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 13장 13절 대속의 개념으로 모든 탄생을 대표하는 장자를 받으시는 대신 레위인을 대속물로 받아 하나님의 소유로 삼고, 성소를 관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에 대해 언급하며 마무리 됩니다.

(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앞서 말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법에 대한 결과는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의 모습으로는 그 사람의 거룩함을 볼 수 없습니다. 매일같이 먹는 음식이야 말로 거룩한 삶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기에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 즉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먹는 행위조차 거룩해야 한다면 우리의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거룩한 성도의 삶을 보이시겠습니까? 그것은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될 때에 비로소 삶에서도 거룩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때 우리가 하는 언행과 먹고 마시는 그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어야 함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는 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우리가 주님이 주신 법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목적이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삶 속에서 주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세상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의 풍습을 금하셨습니다. 혹시 나의 삶에 신앙과 별개로 이방인들의 풍습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하나님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바라보아야 하는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고 무엇으로 섬겨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지체없이 드려야 합니다. 나의 삶에 주님께 드려야 하는데, 지체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 거룩의 삶은 일상입니다. 오늘 하루 일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실천합시다.


속죄론(속죄론)

Ⅰ. Anselm(11세기 스콜라 신학의 아버지)이전의 속죄론

1. 이레네우스(Irenaeus of Lyon. 115- )의 속죄론

총괄갱신설 (Racapitulation Theology)을 주장하였다.

아담이 범죄 하므로 온 인류가 초대된 저주에 임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순종하므로 온 인류가 총괄적으로 갱신되게 되었다. 아담 이전에 에덴동산이 있었듯이 둘째 아담이 총괄되고 난 후에는 지상 천년왕국이 있다. Irenaeus는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다 속죄하셨다는 이야기인지, 애매한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고, 사람을 해방시켰다고도 하였다.

총괄갱신설은 이론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가리켜 Esoteric(무언가 비밀스러운, 비교(秘敎)적인, 비밀 종교적인)한 속죄설이라 한다.

2. 오리게네스(Origen of Alexandria 185-.)와 그레고리(Gergory of Nyssa,320-.)의 속죄론

이 두 사람은 속전신학(Ransom Theology)을 주장했는데, 이것을 속전설 또는 속상설이라고 한다

▶ Origen의 이론

그리스도의 속죄는 사단에게 지불한 속전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미끼를 삼키고 신성의 낚시에 걸려들었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영혼까지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 함을 받았다.  만인구원설을 주장한 것이 되고.  나중에는 사단, 귀신까지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공개적인 Exoteric 이론이다.

▶ Gergory of Nyssa의 주장

   사단이 기만 당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속상설은 사단 기만설이다.

   ⑴ 기만자가 기만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⑵ 사단도 기만당하므로 유익을 얻었다. 사단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아우구스틴과 그레고리(Gregory 540-)Ⅰ세의 속죄론

   이 두 사람은 형벌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스스로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떨어졌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으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는 속죄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형벌 대속설을 주장한 것이다.

▶ GregoryⅠ세는 칼빈과 비슷한 형벌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인간이 죄 없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진노를 면하고 죄의 부채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의 칼빈이 주장한 형벌 대속설과 같은 맥락인 것을 보게 된다.

Ⅱ. 안셂(Anselm)에서 종교개혁까지의 속죄론

1. Anselm(1033~1109)의 속죄론

그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나”(Cur Deus Homer?)란 저서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속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속죄론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 이의 속죄론을 만족설(Satisfaction Theology)=상거래설 이라고 한다.

   ⑴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계약아래 있었으나,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 영광을 도둑질 또는 더럽혔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속죄는 절대 필요한 것이라 하여  속죄 절대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⑵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길은 형법적으로 형벌을 부과하던지 아니면 민법적으로 손해배상을 해야만 한다.

   ⑶ 인간은 배상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무죄하신 분이 자원해서

       수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을 돌리셨다.

       그리스도는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손해배상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민법적 속죄 배상으로 본 것이다.

  ⑷ 이 업적은 성례전을 통해 죄인들에게 이전된다.  성례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손해배상의 업적이 이전된다.  

       Satisfaction Theology란 하나님이 손해배상을 다 받으시고 만족하신 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 거래설 이라고도 한다

           ◉ Anselm의 이론에 대한 평가

① 속죄의 객관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공헌이다.

②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대리적 죽음이라는 개념이 약하다.

    대리적(Vicarious) 개념이 약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부의 영광을 위해 자발적으로 받쳐진 성물로 보았다.  

    입다가 자기 딸을 받친 것같이 그렇게 보았다.

③ 그리스도의 공로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신앙에 대한 설명이 없다. 성례전적인 요소만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믿음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적으로 전달된다고 본 것이다.

④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했고, 삶에도 구속적인 측면이 있는 것을 부인했다.

    종교 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을 굉장히 중요시 했던 것이다.

⑤ 공법과 사법 가운데 양자 택일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가들은 둘 다 보았으며, 주로 공법 쪽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아벨라드(Peter Abelard, 프,1079-1142)의 속죄론

도덕감화설(Moral unifluence theology)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죄인의 고난을 체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영향을 주어서 회개로 이끈다는 도덕 감화설이다

◉ 아벨라드 속죄론의 문제점.

   ① 속죄의 동기로 사랑만 강조되었지 공의는 무시되었다.

   ② 속죄의 객관성이 무시되고 주관적인 화해만 강조되었다.

   ③ 예수님을 감화주시는 도덕 교사로 전락시켰다.

3. 롬발드(Peter Lombard)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7-1274)의 속죄론

 안셀름과 아벨라드의 주장을 혼합한 혼합적 속죄관이다.

  (1) 속죄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였다, 하나님은 배상없이도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

  (2) 그러나 하나님은 배상을 요구하는 길을 택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위대한 사랑의 표시였다.

       삶과 죽으심으로 충분한   배상이 되었고 인간은 성례전을 통해 이 업적을 전가 받았다.

  (3)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네 가지 측면에서 죄인의 구원을 가져왔다고 한다.

     ① 죄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받게 하는 공로    
     ②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히 만족한 대속     
     ③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원적 희생     
     ④ 죄인들을 노예와 형벌에서 구속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4. 던스 스코터스(Duns Scotus, 1255-1308)의 속죄론

  던스는 인정론(Acceptilation Theory)이라는 속죄론을 주장하였다.

(1) 프란체스코 소속으로 실제론과 유명론의 다리를 놓은 사람으로서 속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전횡적 의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죄에 대한 배상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 배상자가 꼭 그리스도일 필요는 없다.  천사일 수도 있다.

(2) 그리스도의 공로는 유한한 인성의 공로이므로 죄의 부채에 미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

Ⅲ. 종교개혁기의 속죄론

1. Anselm과 개혁가들의 속죄론 비교

⑴ 속죄의 필요성 :

    Anselm ― 절대 필요성을 주장. 하나님 것 훔치고 배상해야 한다는 개념.

   개혁가 ― 필요하기는 한데 상대적 필요성을 주장.

⑵ 죄의 개념∶

    Anselm ― 하나님의 영광 침해요, 손해의 배상을 동반한다.

    개혁가 ― 하나님의 율법 위반으로, 형벌을 동반한다.

⑶ 속죄의 개념

    Anselm ― 속죄란 민법적으로 파악하여 하나님의 영광 회복을 위한 손해배상으로 보았다.

    개혁가 ― 공의를 만족시키는 형법적으로 파악하여,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희생적 형벌이었다.

                  형벌대속설(Penal Substitution)

⑷ 그리스도의 사역

     Anselm ―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하였다.

     개혁가 ― 그리스도의 속죄는  능동적으로 죄 없는 삶을 사셨다.수동적으로 죄 있는 자처럼 죽으셨다.

⑸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가되는 방법

     Anselm ― 성례전적 이전을 강조 ― 성례전을 통하여 이전된다는 주장.

     개혁가 ― 믿음에 의해 죄는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義는 죄인에게 전가된다.

2. 소키너스파(Sociniem)의 속죄론

모범설 (Example Theory)을 주장하였다, 대속적인 속죄 개념을 전면 부인했고 속죄 필요성을 부인했다. 그리스도는 삶과 죽음을 통해 믿음과 순종의 모범   을 보이셨을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 사함과 화  목의 기초로 결합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3.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속죄론

Hugo Grotius는 항론파의 알미니안 주의자로서 화란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1621년 파리로 도망갔다.

1617년 「the Satisfaction of Christ」(그리스도의 관점) 라는 책에서 율법 위반에 대한 형벌은 엄격히 집행되지 않는다고 했고, 고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거룩한 불쾌감을 표현하신 것이다. 꼭 안 죽어도 되는데  율법이 꼭 그렇게 실행되지 않는데,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죄에 대한 거룩한 불쾌감을 나타내신 것이다. 따라서 우주적 통치 방법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즉 율법 위반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적 통치의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사용하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일벌백계(一罰百戒)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치설(Goverment Theory=정치적 속죄설)이라 한다.

   ◉ 이 주장의 문제점

① 속죄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인했다는 점이다.

② 속죄는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 대속이 아니라,

    미래 죄 방지를 위한 모범일 뿐이라 하여  속죄의 가치를 떨어뜨린 점이다.

4. 아르미니안(Arminian)주의 속죄론

(1)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한 공의의 완전한 대속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형벌을 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한 대속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 형벌이 아니라 자선의 대속이라고 하였다.

(2) 그리스도의 속죄 대상은 모든 사람이나(일반 속죄설), 그 효과적인 적용은 궁극적으로 죄인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알미니안 주의자는 속죄의 범위를 확대했고 속죄의 효력은 엄청나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도르트 대회에서는 이들의 보편적 속죄설의 잘못을 지적하고, 제한 속죄설을 채택하였다.

5. 사우머르(Saumur)파의 속죄론

이들은 도르트회의 엄격한 칼빈주의를 부드럽게 하고 동시에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잘못을 피하려 절충설(Amyraldus, Placaeus)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가설적 만인 구원설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제 1작정과 제 2작정이 있다고 말하였다..

▶제 1 작정 ―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모든 사람 위해 죽게 하셨다.(일반속    죄설)

▶제 2 작정 ― 추가적 작정으로서 그대로 두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므로 은    혜를 베푸실 대상을 선택하셨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 것을 보나 부자연스러운 것을 면할 수 없다.

Ⅳ. 종교개혁 이후의 속죄론

1. 스코틀랜드(Scotland)의 Marrow(정수,알맹이)논쟁(1717~1722)

Marrow 논쟁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일어난 논쟁이다.

▶ Scotland 역사∶

1560년 John Knox가 장로교를 국교로 하였다.

1603년 James Ⅰ세와 Charles Ⅰ세가 Willam Load라는 대주교를 통하여 James Ⅰ세 때부터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한 왕이 통치를 한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한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한 나라가 된 것은 1703년의 일이다. Charles Ⅰ세가 스코틀랜드에 감독정치를 강요하였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제까지 장로 정치를 해왔는데 감독정치를 강요하니까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국의 의회 청교도들과 연합하여, ‘거룩한 연맹’을 맺는다. 이 사람들을 언약주의자(Covenanters)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1689년 William Mary가 공동으로 장로정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17세기 한 세기동안 너무 심한 율법 주의적 장로교였다.

18세기 초 Moderate파(Calvin주의도 완화하고, 신앙생활도 완화하는 파)가 스코틀랜드에서 득세하게 되었다. 득세를 하게 되자 이들은 자꾸 신학적인 변질을 하게 된다. 자꾸 변질을 하게 되자 정통적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Free Church를 만들게 되었다. 1843년 Thomas Chalmers를 중심으로 Free Church로 분리하게 된 것이다.

▶ Marrow 논쟁 :

18세기초에 Moderate파와 Moderate파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의 문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18세기 초에 두 가지 파가 나타났다.

⑴ 신 율법주의(Neo-Nomianism = Moderates)의 속죄론

 18세기 초 Scotland 국가교회가 주도하던 파로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케 했고, 인간에게 먼저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셨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이 아니고,  회개와 믿음(신앙과 회개=회심 ― 이것을 신율법이라 하였다)으로 되는 것이라 하였다.  신 율법에 순종한 의가 칭의의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름만 바꾼 Arminianism 이었다.

⑵ 머로우(Marrow Men)파 의 속죄론

 1647년 Edward Fish가 「Marrow of Modern Pivinity」(현대 신학의 정수)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신 율법주의를 비판하자, 이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Marrow Men이라고 불렀다. 18세기에 이를 따르는Marrow Men 중에는 James Hog , Thomas Boston등이 있었다.Marrow Men의 주장은 칼빈주의와 비슷하면서 Saumur주의와 비슷했다.

①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며 선택적 사랑 (Electing love)을 강조하였다.

② Giving love를 강조하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죽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 신뢰를 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합일이 되고 그리스도와 합일이 오면, 그 다음에 선행을 행할 능력이

   오고, 죄를 버릴 능력이 온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와 비슷한데, Saumur가 섞인 완화된 칼빈주의다.

   Marrow Men은 Moderates를 율법주의자라고 부르고, Moderates는 Marrow Men을 율법 폐기론자라고 불렀다.

   1720년 Scotland의 Neo-Nomianism(=Moderates)들은 Marrow Men을 율법폐기론 자라 하여 정죄 하였다.

2. 실라이마허(Schleiermacher)의 속죄론

    실라이마허는 신비설(Mystical Theory)을 주장했다

▶ Schleiermacher의 주장

대속 교리를 완전 부인하고 그리스도는 죄성을 소유한 인간이나 성령의 감화로 죄성이 범죄로 나타나지 않도록 보호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활동은 창조적인 것이어서 심령을 감화시키며, 생명을 주는 영의 위대한 힘이며, 그는 자발적인 순종과 죽음을 통해 인간에게 심오한 주관적 변화를 일으켜서 인간의 “신 의식성”을 높인다고 하였다.

                              예수    보통인간

인간---신 망각성      0%       100%

           신 의식성      100%     0%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은 보통 인간에게 “신 의식성”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비설이라 한다.

▶ 신비설은 도덕 감화설과 공통점 및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가지고 있다.

      공통점 ― 영향을 미쳐서 변화를 초래한다는 것.

      차이점 ― 도덕 감화설은 도덕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인데, 신비설은 잠재 의식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 Schleiermacher는 현대 신학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 그는 현대 조직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 조직신학은 Schleiermacher 이후로 객관성을 상실하고 주관화되었다. 그래서 학자마다 제각기 주장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보게된다.  Schleiermacher가 영향은 크게 미쳤으나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엄청나게 악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3. 리츨 (Ritschl)의 속죄론

리츨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실과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화목은 완전히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태도의 변화에서 생겨진다고 하였다.

▶ Ritschl의 개념은 타원에 두 개의 중심이 있듯이,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윤리적인 나라이면서, 현세적인 나라이다. 영적인 나라가 아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서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죄란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속죄라는 것은 이 공동체 안에서 승리하는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속죄라고 주장하였다.

▶ 속죄는 일차적으로 공동체에 관련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창설하셨고, 그리스도의 속죄는 공동체 안에서 순종, 신뢰, 세상 향한 승리 의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Ritschl을 따르는 사람은 공동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Ritschl의 속죄론은 개인의 형벌 대속과는 무관한 것을 보게된다.

4. 미국 후기 뉴잉글랜드파(New England Theology)의 속죄론

Joseph Bellamy, Samuel Hopking은 Timothy Dwight의 제자들인데 Yale 大에서 1820년에 큰 부흥(제 2차 대각성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Timothy Dwight의 외할아버지 Jonathan Edward 때에는 철저한 칼빈주의 였다. 그러나 Timothy Dwight 때에 와서는 약간 수정 칼빈주의(Modifier Calvinism)로 수정 되었다.  이후 Joseph Bellamy 때에 와서는 완전히 알미니안주의로 빠졌다. 조금 지나서 Yale 大에서 Horace Bushnell이 나오게 됐는데. 그는 완전히 자유주의자(Liberalism)가 되었다. 이것을 가리켜 New England Theology라고 한다.

Joseph Bellamy,와 Samuel Hopking의 속죄론은 통치설과 간접 전가설을 따랐으나  Horace Bushnell은 “인간이 왜 죄인이냐?”며 인간의 죄성을 점점 부인하고 인간은 착한 존재라 하고, 그러므로 인간은 양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착한 인간을 잘 길러주면 착한 인간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속죄론은 도덕 감화설이었다. 그의 저서 ‘대리적 희생「Christian Nerture Vicarious Sacrifice」'에서 도덕 감화설을 취하였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셔야 한다는 관념을 거절하고,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 되어 사랑과 순종의 새 정신을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요구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의 모든 거룩과 고난받으신 사랑으로서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니 이것이 속죄라고 하였다.

▶ 유화(宥和 Propitiatiation)설

신의 진노를 달랜다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달래진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속죄의 한 단면 가운데에는 Propitiatiation이라는 단면이 있다. (레온 모리스가 Propitiatiation 개념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는데 그는 성경의 속죄 가운데에는 Propitiatiation 개념이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하였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2일 / 03- 09-2024(토)
출애굽기 22:1-3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배상하라(출애굽기 22:1)

갚을찌니라.
배상

3절.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7919) 배상할 것이(369)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 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4376)

7919. 사칼(
sâkal)  שָׂכַל  

1. 바라보다
2. 신중하다
3. 피엘형 : 창48:14.
발음 [ sâkal ]
구약 성경  / 61회 사용

369. 아인( ’ayin)  אַיִן     

1. 무.  2. ~아니다.  3. ~ 없는
발음 [ ’ayin ]
어원  /  연계형 אֵין, ‘존재하지 않다’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무, 공허, 진공, 사 40:23] :
구약 성경  /  787회 사용
4376.  마카르(mâkar) מָכַר   
1. 팔다.   2. 약혼시키다.  3. 민족을 팔다
발음 [ mâkar ]
구약 성경  / 80회 사용


해 돋은 후
- 가택 침입자를 죽였을 경우, 야간과 달리 주간에 살인죄가 성립되는 이유는 밝을 때에는 이웃의 도움이나 기타 방법으로 그를 사로잡거나 내쫓음으로써 살인만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당 방어의 차원을 넘어 과잉 방어의 경우에는 주인이 그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는 본 규례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이 부정되어지는 것을 금하고 있는 모세 율법의 탁월성을 잘 보여준다<레 25장 강해, 모세의 율법과 고대의 법전들>.

몸을 팔아... 배상할 것이요
- 이처럼 모세 율법이 도둑질에 대하여 엄격한 형벌을 가하고 있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큰 경고를 주어 도둑질을 금하게 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명령은 땀흘려 일한 대가로 얻은 소득을 가지고 생활하라는 것이었다(창 3:19).
그런데 도둑질은 이에 역행하여 자신은 땀흘림이 없이 타인이 수고한 대가를 가로채려는 패역 행위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도둑질에 대하여 수차 엄격한 금지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신 23:24; 엡 4:28; 벧전 4:15).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1일 / 03- 08-2024(금)
출애굽기 21:1-36
찬송 / 349장(나 주의 도움 받고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귀를 뚫을 것이라(출애굽기 21:6)

재판장(*, 엘로힘)
- 이는 본래 지존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다(창 24:3;수 2:11. 그러므로 70인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귀를 뚫을 것이라
-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이었던 것같다(Knobel). 왜냐하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이었으니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일 칼타고인들은 종의 표식으로 종의 귀에 귀걸이를 매달았다고 한다(J. P. Lange). 한편 키케르(Cicero, B. C. 106-43)는 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리비아 노예에게 '네 귀를 충분히 뚫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다.

십계명과 613가지 규례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인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녀를 낳습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법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종에 대한 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남종을 향한 5조이고, 7~11절은 여종을 향한 5조입니다.
종들은 6년간은 의무적으로 종살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7년 째 되는 해에는 무조건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살다보니 주인이 너무나 좋고, 나가서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주인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결심이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처리하는 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송곳으로 귀를 뚫은 종은 어떤 종입니까?
이 시대 스스로 자진하여 귀를 뚫은 종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첫째,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기로 자원함(영원한 하나님의 종) 6절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종이 되는 경우를 몇 가지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1. 빚을 갚지 못해서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레 25:39).
2.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능력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하라고 하십니다(출 22:3).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종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6년만 참고 종살이 하면 7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종의 노동 연한을 ‘6년’으로 정한 기준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6일간 일하시고 제 7일에 쉬셨다는 데 있습니다.

제7년에 자유함을 얻은 종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획득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것은 우리가 지금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젠가는 자유함을 주실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6년을 종으로 살고도 “나는 내 주인이 너무 좋고 내 처자가 좋아서 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 라고 결단하면 주인은 그를 재판장에게 데리고 갑니다.

재판장은 그 종의 의사를 확인하고 문설주에 종의 귀를 대게 합니다.
그리고 송곳으로 귀를 뚫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종이 되었다’ 라는 표시입니다.

자원하여 귀를 뚫은 종은 어떤 종입니까?
그는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기로 자원한 종인데, 이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를 자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한번 구멍 뚫은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헌금을 하는데 한 아이만 헌금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담임 교사가 아이를 따로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아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헌금할 돈이 없어 대신 그 시간에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화

선생님은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몸과 생명과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기도드려요.”
그 말에 감동한 선생님은 아이를 격려하고 나서 약간의 돈을 주면서, ‘잔돈으로 바꿔 매주일 1달러씩 헌금하라’고 말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매주 꼬박 꼬박 헌금을 하던 소년이 더 이상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잔돈으로 바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헌금을 했는데, 사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어요.
사먹으면 죄를 지을 것 같고... 그래서 지난 주일에 몽땅 바치고 이제는 다시 기도만 하기로 했어요."

어려서부터 이렇게 성실하게 기도하던 소년이 바로 1884년 부활절에 당시 미국인들에게 불모지나 다름 없던 조선 땅에 건너온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님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먼 오지인 한국에 와서 평생을 귀에 구멍 뚫은 종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여러분은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까?
여러분은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자유까지 포기하고 자원하여 영원한 주님의 종이 되기로 헌신하셨습니까?

프랑스 군대의 최고의 명사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 봉급을 절약하여 조그마하고 아담한 집을 샀습니다.
그 집은 담쟁이 덩굴이 우거지고 각종 꽃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하여 평화롭게 이 집에서 살 수 있을 때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무렵 보불전쟁이 발발했고, 독일군이 이 조그만 마을을 점령하여 그의 집을 병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명사수인 병사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대포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그를 지휘하는 장군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저기 저 시골집이 보이나?”
병사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 집을 장군이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집에 독일군이 들어가 있네. 잘 겨냥하여 일격에 날려버리기를 바라네,” 장군이 말했습니다.
명령에 복종한 이 병사는 그가 가진 기량을 다하여 장군이 지적한 집을 겨냥했습니다.
무서운 굉음이 터지면서 그 아름다운 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잘 했군,” 하며 장군이 병사를 돌아다 보았을 때, 병사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자네 왜 그러나? 무슨 일이야?”
그러자 충성스러운 병사는 대답했습니다. “장군님, 제 집입니다.”
이 병사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어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엄숙한 결단의 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상전을 사랑하니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자유를 포기한 종) 5절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 

누구든지 잠시라도 종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득이 종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6년만 참고 주인을 섬기면 이제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원하여 귀 뚫은 종은 6년 만에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거절하고 영원한 종이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6년 종은 임시 종이요 귀 뚫은 종은 영원한 종입니다.
이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 것을 가리킵니다.

귀를 뚫은 것은 자신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자유를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포기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실 7년째의 종의 해방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은 주인의 신앙적인 행위에 기인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6년간의 종 생활을 마친 자에게 신분상의 자유만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자립의 기틀까지 마련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해방되는 종들이 빈손으로 출발하게 되면 분명히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또다시 빚을 지고 종이 되는 생활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6년 간 부렸던 주인으로 하여금 얼마의 물질을 주어 보내도록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15:12-14
“···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영원히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고 자원하는 종의 마음을 보십시오.
귀에 구멍 뚫은 종, 상전을 사랑하여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한 종 --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을 맡기십니다. 

링컨이 어느날 시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노예시장이었습니다. 한 가족을 진열하여 놓고 흥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뿔뿔이 헤어져 따로따로 팔려가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종이 필요하다고 그 가정의 예쁜 딸을 사가려고 하니까 딸이 안 떨어지겠다고 부등켜 안고 몸부림치면서 막 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링컨은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가가서, 그 종의 가정 식구를 모두 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몸값은 내가 다 지불하였네. 그대들은 이제 자유네.” 그때 그들은 말했습니다.
“주인님, 우리는 주인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영원한 종이 되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거절하고 자원하여 종이 되기로 선택한 종이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자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시간을 쓰는 사람, 내가 가진 물질을 다 쓸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자원하여 주님께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 내 몸의 편함을 누리기를 거부하고 주님의 일을 위해 몸을 불사르기를 자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C. T.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수석을 달리는 우수한 학생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탁월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그는 크리켓으로 영국 전체 시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장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캠퍼스 집회에 참여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가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 때문에 그는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선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치고 중국 땅으로 갔습니다.

중국에서 10여 년을 섬긴 후에 그의 육신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투병 생활을 하던 중 그는 다시 아프리카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결정이라며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스터드가 남긴 말은 모든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날 위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은 그 이하로 만족해서도 안 되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종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주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셨습니까?

3. 귀를 뚫은 귀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종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는 종) 5절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 

아무리 종이라도 귀에 구멍을 뚫지 않으면 종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귀에 구멍을 뚫으면 평생 종이라는 표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종은 자원하여 귀에 구멍을 뚫은 것이라 이 흔적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종이라고 깔보는지 모르지만 본인은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귀에 구멍 뚫은 종은 종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성경 인물 중 종의 직분을 그리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서신서의 초두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빌립보서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디도서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

바울 사도는 자신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하며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전도하다가 매를 맞았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받은 많은 상처와 고통의 자국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그의 자랑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이 흔적을 ‘예수님의 흔적’이라 하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몸에는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신학, 철학, 음악, 의학 등 4개의 박사학위 소지자인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사명으로 아프리카 오지에서 흑인들을 위해 일평생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아프리카에 온 방문객이 그의 헌신을 보며 “당신 같은 사람이 꼭 이렇게 고생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슈바이처는 “나를 동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십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 프랜시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흔적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몸에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프란시스는 아무에게도 이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그에게 난 못자국, 창자국, 채찍자국을 그의 옷을 빨래하던 여인만이 알았습니다.
빨아도 빨아도 자꾸만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프란시스는 온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던 주님의 참 종이었습니다.

귀에 구멍 뚫은 종은 사람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표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살아간 종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탈북자인 <이순옥> 여사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호주를 비롯한 곳곳에서 북한의 참상을 증언했습니다.
그 분은 북한의 감옥과 교화소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 증언이 책으로 엮어져 나왔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교화소 안에는 용광로 시설이 있는 작업장이 있는데, 그 곳에서는 무기 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옷도 거의 입지 않고 고무로 된 치마만 걸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는데, 멀리서 보니 그들은 머리가 둘 달린 괴물 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가까이 가 보니 고문을 당해 머리에 혹이 하나씩 달려 있었고, 척추가 내려앉아 꼽추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곳의 간수들은 그들을 <하늘을 믿는 미친놈들>이라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믿는 이 사람들은 누굴까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간수들은 징을 박아 만든 구두로 그들을 밟고 짓이기곤 했습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부러져 나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주여, 주여>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고통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얻어맞다가 죽으면 시뻘건 쇳물을 갖다 부어 숯처럼 만들었는데, 공장 안에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북녘 땅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종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지하교회 성도들이 계십니다.
남한의 교회는 북한 인권의 개선을 위해, 그리고 북한 성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연합하여 움직여야 하는 절체절명의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은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나요?
천국에 가 봤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버티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천국에 가 보지 않았지만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천국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을 오히려 천국 가는 보증수표로 생각하고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의 종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피 값을 지불하고 사셨다는 말입니다.
그 흔적이 복음이 되어 여러분의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 나는 자원하여 귀에 구멍 뚫은 사람들로 부름받아 나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주님의 종 됨을 자랑스러워하는 종이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가 가기 원하는 곳으로 마음껏 달려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힘들고 어렵지만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로 기도하며 걸어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여러분의 육체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며, 여러분의 시간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 여러분의 물질에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참된 헌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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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싱(Piercing)

요사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피어싱(piercing)이 상당히 유행을 합니다.
피어싱이란 몸의 각 부위에 구멍을 뚫어 고리들을 끼우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자면 귀, 입술, 눈꺼풀, 코, 혀, 배꼽 등등 어느 부위든지 뚫어서 고리를 끼우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피어싱이란 게 마시면 마실수록 계속 더 마시고 싶은 콜라처럼 살을 뚫으면 뚫을수록 계속 뚫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대개 피어싱을 하는 사람들은 뚫는 순간은 만족을 느끼나 다 채워지지 못한 다음 욕구를 위해 뚫을만한 또 다른 부위를 찾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잘 하지 않지만 귀걸이는 대개 하는 편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도 귀걸이는 웬만하면 한 번쯤은 해 보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귀걸이의 유래를 바로 알고 하는 사람은 별로 드문 것 같습니다.
귀걸이가 어떻게 유행되었느냐고요?

오늘의 말씀이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즉 한 가정의 종(노예)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 위한 종의 표시로서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따라 종에게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시적인 종과 귀를 뚫은 영원한 종입니다.
귀를 안 뚫은 종은 평생 종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 6년 동안만 주인에게 속하여 있다가 그 기간이 지나면 본래의 자유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안식년이 되면 주인도 그 종을 놓아주어야 하고 그 종도 자유롭게 나갈 수 있으나 대신 혼자 주인의 집에 들어왔으면 혼자 나가면 됩니다.

가령 장가를 들어서 왔으면 아내와 함께 나가게 되나 만일 그 아내가 주인이 돈을 주고 사와서 그 종에게 아내로 준 상태라면 아내는 물론 그 낳은 자식도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정의 종(노예)이 그 주인이 좋아서 그 주인을 영원히 섬기기를 원한다면 그 종이 자원하여 영원한 종이 되는 표시로서 귀를 뚫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06절).
그러면 이때부터 그 종은 종이지만 행복하고 즐거움이 있는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저는 바로 귀를 뚫은 행복한 종에 대하여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되었습니까?


1. 전쟁에서 붙잡힌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경우입니다(민 31:09; 왕하 05:02).
이것은 전쟁에서 가능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오기 위해서와 적군이라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긴 법입니다.

2. 너무 가난해서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주인의 보살핌 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는 피치 못할 사정인 것이지요.

3. 자녀를 양육할 수 없어서 노예로 파는 경우입니다(출 12:02, 07; 레 25:39).
물론 이것도 주로 가난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종이란 얼마나 불행한 신분입니까?
자유는 고사하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 인간성을 부인 당해야만 하는 불행한 존재입니다.

옛날 종의 비참 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종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오직 주인이 짝지어 주는 대로만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결혼하여 잘 사는데도 주인이 이혼하라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혼도 해야 했는데 그만큼 주인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주인은 마음대로 종들을 희롱할 수 있었고, 종들은 주인의 갖은 학대와 힘든 노역에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했으니 주인의 권세는 대단했고 동시에 종이 된다는 것은 비극 중에 비극이었습니다.

노예제도가 가장 성황하던 로마 제국 당시에는 종들이 무려 육천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최대의 행운은 종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최고의 행복은 종의 생활을 하던 자가 종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전해지는 유대인 남자들의 기도문 중에 의하면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다음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했다고 하죠.

1.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2.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3.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 부정과도 다름없는 노예제도를 언약 백성 가운데 율법으로서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2절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히브리인의 종의 제도가 한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그 기간이 6년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요.

히브리 종은 육년간 고용된 계약 노동자로서 종이 그 기간이 지나 자유함을 얻을 때는 더 이상의 값을 지불하지 않고 무조건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주변 상황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것으로서 노예제도의 근본 정신이 사랑과 자비에 있음을 신명기 15:12~1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15:12-14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이렇게 보면 종이 실제로 고난의 종살이를 하는 것은 계산적으로 하자면 얼마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삼년은 자신의 몸값이나 부채의 반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그리고 한 이년간은 그 동안 먹고 산 것에 대한 값으로 여기고, 한 일년은 나아갈 때 얻는 물품 값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이처럼 당시 히브리인들의 종에 대한 규례는 다른 여러 종에 비해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규례는 종의 규례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어렵게 된 사람을 돕는 규례라는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물질이 없어 부채를 지거나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살만큼 준비시켜 내 보내는 제도가 바로 히브리 종의 제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50년째가 되는 희년이오면 그때는 노예가 된 그 사람을 놓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빚으로 잡혔던 농토까지도 전부 되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자원하는 영원한 종 

같은 유대인들끼리 종을 삼았을지라도 칠년 째 되는 안식년에는 반드시 자유인으로 신분 환원을 시켜 주어야 함이 법입니다.
그러나 종 된 사람이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주인을 위해 평생 종이 되겠다고 하면 재판장의 허락을 받아 송곳으로 그 귀를 뚫어 영원한 종이 되는 의식을 가집니다. (5-6절)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재판장(엘로힘) : 이는 본래 지존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인데(창 24:3; 수 02:11) 70인 역은 이를 하나님의 판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추측컨대 이는 공개된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엄숙히 판단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귀를 뚫을 것이라 : 고대 근동의 관습으로 이것은 완전한 예속(隸屬)과 순종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Knobel).
왜냐하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있어서 귀는 예속의 기관으로서 귀를 뚫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상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아내나 자식들 때문에 주인을 떠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자원하는 종으로서 이 사람은 평생토록 그 주인을 섬깁니다.
해방될 날이 없지요. 해방이라면 그 종이 죽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혹 이 종이 마음이 바뀌어 주인의 집에서 나가려고 할 때 주인이 재판장에게 이 사람은 귀를 뚫은 종입니다 라고 말 한 마디만 하면 재판장은 그를 떠나지 못하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하는데 귀를 뚫었던 흔적이 그를 평생 종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귀를 뚫은 종은 빚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고마움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자로서 그에게는 안식년을 맞아 서 귀를 뚫기 전 주인을 계속 섬기거나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상전과 자신의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자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니 이제부터 그는 비천한 노예가 아니라 진정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유를 허락한 그 주인이 너무 고맙고 좋아서 자유를 포기하는 종이 주인님! 제가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것보다 주인의 집에서 영원히 종으로 사는 것을 원한다면 그 종을 어떤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 종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의 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주인은 그날부터 그 종을 예전처럼 부리지 않고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하게 됩니다

자원해서 된 종, 사랑의 종, 자유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이 종이 짊어지고 다니는 종의 멍에는 결코 무거운 멍에가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면, 그리고 충성한다면 얼마나 그 신앙이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가령 아내가 여보,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내가 평생 당신을 섬기겠어요 라고 자진해서 고백한다면 이것은 진짜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섬긴다면 그 멍에는 결코 무겁지 않을 것이며 그 대상이 주인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종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수직적 명령계통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며 성도간에는 모든 일을 섬기는 자세로 살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나는 어떠한 종이며 어떠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절에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던 바울이 13절에서는 왜 또 다시 종노릇을 하라고 명하고 있는지를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먼저 무엇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까? 죄에서 자유, 사단의 지배에서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유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 타락과 방종의 기회, 다시 사단에게 지배를 받는 자리에 떨어지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13절의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경고의 말 속에는 그 자유로 주님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라는 적극적인 추진력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를 뚫은 종은 스스로 종노릇을 하는 사람 아닙니까? 자원하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주님을 향하여, 성도를 향하여 귀를 뚫은 종이 되어야지요. 기쁨으로 종노릇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참 자유를 주신 분, 우리에게 참된 죄사함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불행한 처지의 노예처럼 부리려고 종이 되라, 종노릇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주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주님의 종만이 아니라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13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수직적인 관계의 종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의 종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섬겨야 하고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피차에 서로 복종할 수 있고, 피차에 종노릇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인간 관계는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풍요롭고,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목사가 성도들을 섬기고, 성도들이 목사를 섬기는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겨 피차에 복종한다면 그 부부의 삶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까?
아우가 형을 섬기고 형이 아우를 섬기는 가정, 경영주가 노동자를 섬기고 노동자가 경영인을 섬기는 직장은 얼마나 생산성이 높겠습니까?

인간 관계가 파괴되는 이유는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심지어 서로 잡아먹으려고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자연히 서로를 섬길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종노릇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주님의 종노릇을 해야 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사랑하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이웃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자원하여서 귀에 구멍을 뚫었던 종들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종으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 서로 종노릇을 하지 못하는 이 세대는 서로 잡아먹으려고 하며 다르게 표현하면 서로 시기 질투하여 이용하고 착취하려 하는 비극의 세대입니다.

분명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사랑의 종노릇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종이라는 단어 얼마나 비천한 단어입니까? 인간이면서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한 체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이란 단어를 가장 영광스러운 단어로 바꾸어 놓았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6- 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D. L. 무디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했느냐 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 입니다.

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이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로부터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셨다면 우리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종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종이 세상으로 나갈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의 종이 되고자 귀를 뚫겠다는 것은 상전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 상전을 잘 섬기고 가정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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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히브리 노예에 대한 율법 규정 중 일부분입니다.
노예에는 전쟁 노예 히브리 노예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전쟁 노예는 전쟁 중에 사로잡힌 포로 출신으로 노예가 된 이방인들입니다.
반면 히브리 노예는 동족 중에서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히브리인이 노예가 된 이유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타인에게 손해를 끼쳤는데 이를 배상할 돈이 없는 경우, 몸으로 때우기 위해서 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예가 육년 동안을 섬긴 후 제 칠년에는 자유를 주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도 본문과 같은 규정이 있는데 약간 다릅니다.

"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신명기 15:13,14)

보낼 때 공수로 보내지 말고 후히 주어 보내라는 부분이 신명기에는 추가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자유한 종이 이후에 먹고 살 밑천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 빈 손으로 나가게 되면 경제적 기반이 없어서 또 다시 다른 집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6년을 섬기고 제 칠년에 자유를 주었을까요?
이는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규례는 7년을 일곱번 보낸 49년을 지낸 후 50년마다 돌아 오는 희년 규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희년에는 노예 해방 뿐 아니라 노예가 되기 전에 저당 잡혔던 농토까지 돌려 주는 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자비의 법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제도는 경제적으로 파산난 사람을 일거리를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보낼 때는 자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준비시켜 보내 주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이스라엘 버전의 빈민 구제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는 일시적인 노예 신분은 있었지만, 사실상 노예 제도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을 가진 민족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게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였습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처자식까지 노예 신분은 세습되었습니다.
어떤 주인이 노예를 딱 육 년만 부려 먹고 퇴직금까지 두둑이 챙겨서 자유를 주겠습니까?
육년을 일하면 기업체로 치면 과장 직급으로서 가장 일을 잘 하고 열심히 할 때입니다.
종을 풀어 주려고 할 때 주인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이 규례를 잘 지키지 않는 주인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심한 책망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인들이 종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지 않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대신 자유를 주어 그 주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규례를 이처럼 중요시 여기실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보통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서로에게 남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아버지 아래 있는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종 삼는 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례에서 정말 특별한 것은 스스로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에 보면 첫째는 주인을 너무 사랑해서 둘째는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 계속 종이 되길 소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살이 도중 결혼한 처자는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어 함께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에 속했습니다. 처자를 사랑해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은 그럭저럭 쉽게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사랑해서 자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종이 되기를 원한다니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택을 받은 그 주인은 어떤 주인일까요? 그 주인은 분명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공의롭고 만사를 공평하게 다루는 주인일 것입니다. 그 주인은 노예를 노예를 여기지 않고 친 자식처럼 친 형제처럼 아끼는 주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본래 자유하지만 스스로 종이 된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아무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이 되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신 이유도 역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 성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종이 이렇게 영원히 종이 되길 원하는 경우 재판장에게 가서 문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은 누가 귀를 뚫습니까? 주로 자매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귀를 뚫습니다. 또 피어싱이라는 이상야릇한 취미가 있어서 귀 뿐만 아니라 코, 배꼽, 심지어 혓바닥까지 뚫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귀를 뚫는다는 것은 치장이나 취미가 아니라 영원한 예속을 상징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군대에서 "말뚝 박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말뚝을 박는다는 것은 군대에 장기 복무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군에서 다른 건 강요하지만, 장기 복무 선택만큼은 본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다들 말뚝 박기를 극도로 싫어 합니다. 군에서 가장 심한 저주가 ‘너 말뚝 박아라’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은 그 중에 군대가 좋다고 장기 복무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기 복무를 지원하기 전과 후는 군인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원 전에는 의무 복무 군인이었지만, 지원 후에는 자원하여 복무하는 군인 즉 직업 군인이 됩니다. 귀를 뚫기 전이나 후나 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귀를 뚫은 후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이 됩니다. 의무에 의한 종이 아니라 자원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 가운데 스스로 속박되기를 결정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원하는 종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래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유와 퇴직금도 다 버리고 스스로 종이 됩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사랑은 그 소중한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종이 되기를 기뻐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의무에 의한 종은 6년이라는 의무 복무 기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종은 종신토록 그 상전을 즐거이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이 생각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 장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김남준 목사님이란 분도 항상 싸인을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 남준’이라고 서명을 하십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빚을 진 자였습니다.
이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인생이 파산했습니다.
빚을 갚기는 커녕 날마다 그 채무가 점점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내 대신 댓가를 지불하시고 빚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그 댓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어린 양의 보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피로 우리를 죄의 종 노릇하던데서, 사단의 종 노릇 하던데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또한 우리는 율법과 양심의 의무 아래서 짓눌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율법의 의무 아래서 신음하며 짓눌려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의 의를 우리를 대신해서 모두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도 율법 앞에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와 율법로부터 자유케 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늘 자신을 종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귀 뚫은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고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귀 뚫은 종이 된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 때문에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자원하여 종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귀를 뚫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송곳으로 귀를 뚫듯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죄악된 성품 곧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 다음으로 종신토록, 영원히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헌신하는 종이 됩니다.

여러분 귀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코를 한 번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분은 어디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까? 귀 뚫은 종도 있지만 코 뚫은 종도 있습니다. 코 뚫은 종은 코에 코뚜레가 끼여서 주인에게 질질 끌려가는 종입니다. 코 뚫은 종은 가기는 가되 오만가지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끌려 갑니다. 코 뚫은 종은 주인이 고삐를 당기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이런 코 뚫은 종이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는 첫째 종은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이 종은 말합니다. "주님은 나에게 너무 많은 부담과 의무를 지우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 종을 악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가 악한 종일까요? 이는 그가 주인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굳은 사람도 아니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그런 가혹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 주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달란트를 묻어 두는 바람에 결국 주인을 악랄하고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 셈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인상을 박박 쓰면서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저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가혹한 존재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렇게 질질 끌려가며 신앙 생활하는 본인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얼마 전에 러시아 김 에스더 선교사님이 오셨을 때 저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니 아직도 기타 들고 찬양을 인도하세요? 나이가 몇인데..."
그런데 찬양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찬양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 즐겁고, 찬양 중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에 기쁘게 찬송합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준비해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꾸만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고 자꾸만 더 하나님께 기대고 싶습니다.
이제 보니 코에 뚫려 있던 구멍이 어느새 귀 쪽으로 옮겨져 버린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던 것일까요?
원인은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저는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제 영혼에 빛을 비추어서 하나님은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이 좋다는 말 속에 온갖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면서 능력이 크시고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귀를 뚫어서라도 영원히 그 곁에 함께 있고 싶은 분이십니다.
사람을 돕다 보면 과거 저와 같이 코 뚫은 종처럼 질질 끌려가는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너무 안타까워서 속으로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신데... 참 좋으신 하나님인데 ..."
그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우리 속에 새 영을 창조하시어 좋으신 하나님을 알게 도와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심령을 우리 모두 속에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코를 뚫어 질질 끌고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 가운데 사랑으로 스스로 속박되어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주를 섬기길 원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이미 우리 속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새 본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받고 즐거이 주님을 따르는 귀 뚫은 종들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0일 / 03- 07-2024(목)
출애굽기 20:1-26
찬송 /266장(왕의 명령 전달할 사자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십계명(출애굽기 20:2)


십계명(十誡命, .עֲשֶׂרֶת הַדִּבְּרוֹת‬,  Decalogus)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계명이자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모세 율법은 출애굽기 20:1-23:33의 ‘계약서’
신명기 1장-29장의 ‘신명기 법전’
핵심은 출애굽기 20:1-17, 신명기 5:6-21에 해당하는 열 가지 계명이라고 하겠다.

십계명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아쉐레트 하드바리임"(열 가지 말씀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출애굽기 34:28, 신명기 4:13, 10: 4에서 언급된다.

출애굽기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Moses was there with the LORD forty days and forty nights without eating bread or drinking water. And he wrote on the tablets the words of the covenant--the Ten Commandments.

십계(the Ten Commandments)

신명기 4:13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He declared to you his covenant, the Ten Commandments, which he commanded you to follow and then wrote them on two stone tablets.

신명기 10:4
여호와께서 그 총회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The LORD wrote on these tablets what he had written before, the Ten Commandments he had proclaimed to you on the mountain, out of the fire, on the day of the assembly. And the LORD gave them to me.

십계명을 소개하는 출애굽기/탈출기 20장 1절에는 “이 모든 말씀”으로 나오고, 신명기 5장 5절에는 “주님(야훼)의 말씀”으로 나온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히브리 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70인역(Septuagint, LXX), 타르굼, 불가타(Vulgata, 새 라틴말 성경) 등에 근거하여 이를 말씀들, 즉 복수로 수정할 것을 BHS 비형 각주는 제안하고 있다.

십계명은 70인역에서 모두 목적격으로 나타나는데, 출애굽기/탈출기 34장 28절과 신명기 10장 4절은 '투스 데카 로구스'로, 신명기 4장 13절은 '타데카 레마타'로 번역되고 있다.
모두 "열 가지 말씀들"로 번역이 된다.
이 계명들은 출애굽기/탈출기 20장 3-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지만, 그 순서와 일반적인 내용은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십계명이 주어진 방법

십계명은 두가지 방법으로 주어졌는 데, 하나는 하나님의 선언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돌판에 새겨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둥소리와 번개와 트럼펫의 소리가 널리 펴졌으며, 사람들에게 경외와 존경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였다.

예레미야 31:33에는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은 언약이며 이것은 사람의 마음도 돌판처럼 딱딱하여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새길 수 있으며, 이것은 율법의 영원함을 드러내는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뒤 50일만에 주어졌으며, 그들의 행동규범으로 주어졌다.


개신교 및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주(야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해서는 안 된다.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하지 말라.)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쉽게 외우는 십계명

1.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일. 일절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지니라.
이. 이상한 우상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3.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지니라.
삼. 삼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사. 사적인 일 핑계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
사. 사업일 하루 쉬고 안식일을 지키라.
죽을 사. 죽어도 안식일은 지키고 죽어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오. 오늘도 내일도 부모님을 공경하라.
오. 오마이 파파 마마

6. 살인하지 말지니라.

육. 육신을 살인하지 말라

육. 육혈포로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칠. 칠칠치 못하게 간음하지 말라.

칠. 칠배로 저주받을라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팔. 팔로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구. 구차한 말로 거짓증거 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십. 십 원이라도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9일 / 03- 06(수)
출애굽기 19:1-25
찬송 / 357장(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사장 나라(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 pontiff.  (라틴어) pontificem.

언약(言約) : 신뢰가 중심이다 / covenant
- 말씀 언, 맺을 약

(예) 노아의 언약 - 무지개
       모세의 언약 - 계명(이스라엘 공동체)
      다윗의 언약 - 나단 선지자(다윗의 가문)

계약(契約) : 이익이 중심이다 / contract
- 맺을 계, 맺을 약


제사장 나라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이집트)에서 고역과 학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그 아래 장막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했습니다.

4절에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새는 새끼를 옮길 때 입으로 물어 옮깁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어서 옮깁니다.
새끼를 등에 없어서 높이 올랐다가 새끼를 떨어뜨리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등에 업어서 올라가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새끼에게 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 훈련이 반복될 때 새끼들은 두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새끼를 안전하게 다루어 추락하지 않게 하며 스스로 날 수 있도록 성장시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했다는 것은 두려운 상황이 연속되는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8-14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역과 학대를 당할 때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고 애굽 추병들을 수장시켰습니다.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아우성이었으나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풍성이 먹게 했습니다.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어 아우성이었으나 반석에서 물을 내어 풍족히 마시게 했습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과 싸워 이기게 해 주시고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게 해 주었습니다.
심히 두렵고 무서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안전하게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거치면서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군대가 홍해 바다에 몰사한 사건까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신 그 놀라운 사건들을 생생히 두 눈으로 목도하였다.
이제 하나님은 율법을 베풀기 전, 그 구원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시키고 있는 것이다(사 43:3-7).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 사랑의 팔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 인도하시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Keil).
이러한 표현은 신명기 32:10, 11, 12에 보다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 곳을 참조하라.

마치 독수리가...새끼를 받으며
-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려 날게 한다.
그런 후 주위에서 조심스럽게 지켜보다가 새끼들이 힘에 부쳐 떨어질 때는 재빨리 그 강한 날개로 받쳐 결코 새끼들이 해(害)를 당하지 않게 한다.
이런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독수리답게 강하고 튼튼하게 키운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답게 양육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사랑과 공의로 훈련시키셨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출 19:4).

그 보금자리를...너풀거리며
- 새끼들이 보금자리에서 졸고 있을 때 깨워 날게 하려고 어미 독수리가 그 둥우리를 어지럽게 휘젖는 것을 가리킨다(Knobel, MatthewHenry).

새번역 성경
출애굽기 19: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초하룻날, 바로 그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폰티펙스(pontifex)는 교량을 의미하는 '폰스'(pons), '폰트'(pont-)와 '무언가를 만들다, 이루다를 뜻하는 '파케레'(facere)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인도하신 언약적 목적을 제시했습니다.
5-6절에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소유'는 일반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매우 값진 아주 귀중한 보석을 의미합니다.
모든 족속 가운데 가장 귀히 여기는 족속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과 모든 나라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했을 때 그들 대신 제사를 드려 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의 은혜를 입게 하는 직책으로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는 중보역할을 하게 하는 위치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를 70인역에서는 'βασιλειον ιερατευμα' (왕같은 제사장직)로 번역했는데, 이는 왕처럼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서 중보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번영하여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나라에 계시되고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경제적 군사적 우위에 있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적으로 구별된 생활을 하므로 모든 백성이 흠모할만한 영성이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열방 백성이 사모할 만한 독특한 영적 가치(καρισμα)가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귀한 존재로 삼는다는 것, 열방 백성이 존중할만한 영적 가치가 있게 하는 동시에 군사와 경제에 있어서도 부강하게 한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중보 위치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구원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주신다는 언약적 목적을 제시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에 따른 언약적 요구를 하셨습니다.
5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주관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왕같은 제사장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그리해 주실 만한 인격적인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고... 조건이기도 하지만 마땅한 반응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구원하여 인도했으니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할 언약적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목적으로 가지셨습니다.
그 목적 때문에 반드시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어떤 외부의 대상이나 환경이나 상황이 그 목적을 헛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할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19:21. 신칙(申飭)하라
- 거듭 신, 신칙할 칙
-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

새번역. 공동번역  / 단단히 일러두어라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에게, 나 주를 보려고 경계선을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러 두어라.

현대인 / 경고하여라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가서 백성들에게 나를 보려고 경계선을 뚫고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하여라. 그러다가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4-5)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인 우리들에게 주신 정체성과 동일하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보물 ‘세굴라’로 삼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다. 사명과 이어지지 않은 은혜와 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라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들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런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곧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모든 백성이 제사장으로서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아론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특별한 제사장 제도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성전제사 업무를 전적으로 책임 맡은 특수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적문직으로서의 제사장 직능이기보다는 존재적 의미 곧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명감을 갖고 살아야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을 이해하려면 제사장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제사장을 히브리어로는 ‘코헨’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세우다’ ‘정착시키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 ‘쿤’에서 파생된 것으로, ‘서있는 사람’ 곧 ‘봉사하거나 돕는 사람’을 가리킨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서 있다’는 것은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제사장을 ‘봉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사 61:6)

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제사장의 사역은 두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1) 하나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속죄의 재물과 중보기도를 드리는 일이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백성 대표로 제사장을 가까이 나오게 하셨다. 제사장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과 기도를 바치게 하신 것이다.

(2)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과 축복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과 기도를 드릴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민수기 6:24-26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는 일이다.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나라 사명은 아브라함의 부름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주신 약속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아브라함의 받은 복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들도 함께 복을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로 확대가 되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들이 해야 할 기본적이면서도 우선해야 할 일은 중보기도이다. 중보기도는 자신을 넘어서서 남을 위한 관심과 배려의 기도이다. 중보기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응답이 보장되어 있다(약 4:3). 그러면서 중보기도는 자신을 넘어서는 기도이기에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지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한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성숙한 만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고, 많이 본 만큼 더욱 기도하게 되는 거룩한 순환이 이루어진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하나님의 뜻은 제사장 나라로서 우리들이 정체성을 회복한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8일 / 03- 05(화)
출애굽기 18:1-27
찬송 / 279장(주 하나님의 사랑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 내가 알았도다(출애굽기 18: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Now I know that the LORD is greater than all other gods, for he did this to those who had treated Israel arrogantly.

이제 내가 알았도다
-
'이제'란 말의 히브리어는 '아타'로서 '지금에야', '방금에야'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를 시점으로해서 과거와 미래의 인생관이 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내가 알았도다'란 말은 히브리어의 '야다에티'로서 '내가 깨달았다. ' 또는 '내가 알아차렸다'라는 의미의 현재형 동사이다.
이것은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을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닫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 이드로는 여기서 다른 모든 이방신, 즉 자기가 섬기던 신을 포함하여 애굽의 모든 여러 신들이나 다른 부족들의 신들보다 여호와의 능력이 더 위대함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이 표현을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즉 다신교(多神敎) 사상의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다른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과 비교하여 수사학적으로 강조한 것 뿐이다.
즉 이것은 홍해 바다에서 구원받은 후 이스라엘이 올렸던 찬양이나(15:11), 시편의 노래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시 136:2, 3) 표현과 같은 것이다.


남아공 올리버 판사의 고백

그는 직장을 잃었지만 그 순간 그의 영혼을 찾았다

엘런 페이튼(Alan Paton)이 “당신의 땅은 아름답다(Ah, But your Land is beautiful)”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속에서 올리버 판사의 그 섬김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흑백 차별이 심한 나라였습니다.
흑백 차별이 한참 심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대 도시 요하네스버그에 흑인 교회인 성시온 교회에서 고난주간에 목요일 날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세족식에 참여할 3명의 신자를 선정하였습니다.
그런데 2명의 발을 씻겨줄 사람은 정하였는데 한 명을 결정하지 못했고 결국 저명한 백인 판사를 초청했습니다.

'쟌 크리스티안 올리버(Jan Christiaan Oliver)' 라고 하는 판사입니다.
이분은 대법원장 서리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차기의 유력한 대법원장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순서 가운데 세족식이 있었어요.
누구나 자기가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사입니다.
예수님이 성만찬 하시고 세족식 하신 것처럼,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그날 예배 순서에 세족식이 있었습니다.
사실 올리버 판사는 그 순서가 있는지 모르고 참석을 했어요.
그 예배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백인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나와서 발을 씻기 시작하는데 올리버 판사 순서가 되었을 때 슬그머니 뒤로 일어나 나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앞으로 나와서 한 흑인 여인 앞에 대야를 놓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흑인 여인은 그 판사님 집에서 30년 동안 종으로 일하고 있는 마르다 포투인(Martha Fortuin) 이라고 하는 여종이었습니다.
마르다 포투인은 30년 동안 올리버 판사의 집에서 그의 아들과 딸들을 돌보았고, 그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그 흑인 여종 앞에 판사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종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의 양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던 그 여종도 울고, 판사도 울고 갑자기 온 예배당 안이 숙연해졌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백인 사회에서 크게 이를 문제 삼았고, 결국 판사직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장 직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담임목사님이 너무나 죄송했어요.
자기 교회 초청했다가 판사직을 잃게 되니까 사과하려고 그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그때 올리버 판사가 말합니다.

“성 목요일에 당신의 교회에서 행한 예식에 참여한 일은 나에게 판사로서 한 어떤 중요한 일들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것에 대하여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판사 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이 이야기를 기록한 저자 엘런 페이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의 직장을 잃었지만, 그 순간 그는 그의 영혼을 찾았다.”
올리버 판사는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하는사회에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차기 대법관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회의 윤리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





병행구조(parallel structure)
출애굽기 18장과 창세기 14-15장의 경우

모세를 방문한 이드로

내용개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서서히 민족 공동체로 형성되어 갔다.
본장에서는 이드로의 방문을 계기로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운영해 나갈 최초의 행정 조직을 세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출애굽 한 모세를 찾아왔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받아 공식 생애를 살고 있던 모세에게 뒤늦게 그 처자들이 나타난 것이다(1-12절).
이튿날 백성들의 송사를 혼자 처리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고, 백성 중에 재덕이 겸비한 자를 뽑아 모세를 대신해 행정 업무를 담당시키도록 권고하였다. 이에 모세는 이드로의 말대로 각 지위대로 행정을 담당할 자를 세웠다(13-27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호밥, 사사기 4:11. 르우엘, 출애굽기 2:18)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 근방에 머물렀을 때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동반해서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이드로는 모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애굽인에게 하신 일들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튿날 모세의 재판 광경을 본 이드로는 겸손한 자세로 모세에게 재덕이 겸전한 자를 세워 업무를 분담할 것을 조언하자 모세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영적교훈

모세는 백성들의 송사를 처리하기 위하여 혼자서 하루 종일 수고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개인적으로 모세의 기력을 쇠하게 하고 백성들로서는 송사가 지연되는 불편을 겪게 하였다.
마침내 행정관을 세움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전체 공동체가 더 원만히 움직여 나가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도 혼자의 힘이 아니라, 성도들이 서로 힘을 합쳐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모든 일을 혼자 행하려는 것은 오히려 지치고 낙심케 하기 쉽고, 성도들의 공통된 영적 발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일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섬김으로 주 안에서 성숙된 성도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고린도전서 13:9~12)

신학의 한 분야 가운데 ‘변증학’이라는 유신론증의 과목이 있습니다.
이 과목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과목의 내용 가운데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어떤 섬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섬에 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섬에서 새의 발자국을 하나만 발견하면 됩니다.
그러나 새가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섬을 샅샅이 뒤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이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섬에서 발자국 하나만 발견하면 “야, 정말 새가 살았구나”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하나만 발견하면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숲 속에서 동물 발자국을 찾고, 섬에서 새 발자국을 찾아 뒤쫓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집중과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고, 일상의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의 손자국을 발견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한히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자국, 손자국을 발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극적인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과 감동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조각가 로댕은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시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있던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재발견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발견하는 동기가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요즘에는 재창조, 제2의 건국, 재 창립 등의 용어를 많이 씁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있던 것들을 새로운 자세, 새로운 비전,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의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이런 새로운 의지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왕이 죽은 후에 이사야 6:5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잘 알고 있던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탕자는 집을 나간 다음에 있던 돈을 다 허비하고 돌아와서 비로소 아버지를 새롭게 만납니다.
같은 집이었고, 같은 가족이었고, 같은 아버지였지만 새롭게 느끼며 맞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닭이 울 때까지 자신의 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이제야 알았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경험한 다음에 비로소 “이제야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이방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 종교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모세
를 권하여 사법제도를 창설할만큼 통솔력이 비범한 미디안의 추장이었습니다.
사위인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행적을 보았습니다.
그 때 이드로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탄성을 지릅니다.

여러분, 이드로가 이 말을 할 때의 감격을 느끼십니까?
흥분과, 감동과, 기쁨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드로의 모습을 보십니까?
우리도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행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한 고백입니다(11절)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이드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듣고 하나님의 크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합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재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힘’, ‘제일 원인’, ‘부동의 동자’ 등의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어떤 말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왜 창세기를 기록했을까요? 창세기는 그들의 역사인데 왜 창조 기사를 역사에 썼을까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다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위대하시고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란 말입니다.

일본의 어느 목사님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러 갔습니다. 폭포를 보고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함께 구경하고 있던 캐나다 목사님이 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키가 자그마한 일본인이 너무 좋아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우리 아버지가 만든 건데 너무 좋지 않습니까?” 캐나다목사님은 놀라서 당신이 누구 길래 아버지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일본인은 자신을 일본의 목사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고 일본인 목사님께 다음 주일에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캐나다 목사님은 주일 예배 시간에 일본인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이 일본에서 오신 목사님은 제가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잘 모르지만 이분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주인의 아들입니다”.

자연 만물과 우주의 신비,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우리의 낮음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태양계가 있는 이 은하계 안에는 별이 일천억 개나 있습니다. 또 이런 은하계가 일천억 개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별의 수는 10의 25승이나 됩니다. 별들과 별들의 거리는 수백, 수천광년씩 됩니다.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 크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하려면 말이 적절치 않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공해가 심하여 하늘의 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밤에도 하늘이 흐립니다. 이런 흐린 하늘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잊고 삽니다. 별이 보이는 맑은 하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기 쉽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작업장입니다. 하늘은 그분의 이력서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싶습니까? 그 분의 집을 방문해 보세요. 주소는 하늘시 별마을 10억번지입니다.

자연뿐만 아니라 인생에게도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대머리의 좋은 점들이 많이 있답니다. 우선 죄가 적답니다.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라고 하는데 머리털이 많은 사람이 죄가 많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힘을 덜어드린답니다. 머리카락도 헤아리시는데 셀 게 별로 없으니까 하나님이 편하시답니다.

시편 95:3에는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라고 합니다. 시편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 모아놓으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크신 주께 영광 돌리세”,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등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찬양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찬송가에도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찬송이 많이 있습니다.

1900년대 초 하이네라는 러시아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바디아 산골 마을에서 엄청난 뇌우를 만나 하룻밤을 피신합니다. 이 때 뇌성을 들으면서 노랫말을 만듭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온 우주 가운데 녹아 있습니다. 어디에나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님의 손을 벗어나 도망하다가 벧엘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창세기 28:16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자기 혼자 도망하고, 자기 혼자 고통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제야 내가 알았도다”는 경험입니다.

칼빈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코넬리우스 플랜팅거 2세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선하신 분이며 동시에 이해하기 어렵고 낯선 분임을 강조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영적인 건강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설교자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강조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다시 발견한 자는 하나님께 제사합니다(12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희생을 드리고 예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새롭게 발견하고 “이제야 알았도다”라고 한 그들은 즉각적으로 번제물과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높이는 행위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입니다.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는 참 제사의 대상은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감동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방종교의 제사장이 아니라 야훼 종교의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라고 합니다. 찬송과 위대하심을 선포합니다. 찬송과 영광, 이 모든 것이 제사입니다. 예배입니다. 아름다운 산천을 볼 때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찬송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의 명수였습니다. 어디 가든지 먼저 제사를 드립니다. 이사하여 짐을 풀기 전에 제사를 드립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장사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저녁 해가 질 때에 아브라함이 들판에 나왔는데 지는 해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태양을 보고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는 해는 금방 산너머로 사라지지 않습니까? 일어나 보니 태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털고 일어나면서 “내가 섬기는 신은 영원히 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태양을 숭배하지 않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본의 스스끼라는 학자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00만의 신에서 유일한 한분의 신으로 돌아왔다”. 많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인 것을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니콜라스 헤르만이라고 하는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
“첫째,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본래의 마땅한 자세로 예배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 분을 그분으로, 우리를 우리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셋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완전히 반대란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의 약함과 낮음을 인정하는 예배가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인종차별의 악명이 높던 남아공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에는 흑인과 백인은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 시온교회(Holy Church of Zion)’라는 흑인교회가 있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성만찬에 앞서 세족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일에 흑인교회에 올리버라는 백인 대법원장이 혼자 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세족식 때에 마르다라는 흑인 여성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교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놀라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백인 대법원장이 흑인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사실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올리버는 “여러분, 이 사람은 내 집의 노예입니다.
한평생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더 씻겼습니다.
그 때마다 내 마음이 늘 괴로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발을 씻어준 이 사람의 발을 내가 씻겨 주어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 것뿐입니다”.

올리버 대법원장은 이 일로 대법원장직에서 파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하며 기뻐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되었다”,
“이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12에는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 온전히 알 때가 옵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감격과 탄성이 우러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감격 속에 날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사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7일 / 03- 04(월)
출애굽기 17:1-16
찬송 / 390장(십자가 군병들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반석을 치라(출애굽기 17: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I will stand there before you by the rock at Horeb. Strike the rock, and water will come out of it for the people to drink." So Moses did this in the sight of the elders of Israel.

반석(6697) 추르(tsûwr) צוּר   

1. 돌.  2. 바위.  3. 가장자리
발음 [ tsûwr ]

어원 / 6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돌, 둥근 돌, 욥 22:24, 사 8:14
2. 명사, 남성  바위, 욥 18:4, 24:8, [은유적으로 하나님께 사용되어] 이스라엘의 피난처, 신 32:37, 시 18:3(2), 32(31), 47(46), 사 30:29, [한 나라의 설립자에 적용되어] 사 51:1, [복수로] 욥 28:10.
3. 명사, 남성 가장자리, 시 89:44(43), 칼날, 수 5:2, 3.
4. 명사, 남성  형태, 시 49:15(14).

치라(5221) 나카(nâkâh)  נָכָה   

1. 치다.  2. 니팔형 : 매맞은.  3. 피엘형 : 피엘형 부정사로 언급된 말 נַכֶּה
발음 [ nâkâh ]
구약 성경 / 504회 사용

호렙 산
- 시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 2, 291m의 '예벨 무사'(Jebel Musa, 모세의 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에서는 흔히 '시내산'으로도 불리운다(19:11, 18; 24:16; 레 26:46).
한편, 호렙 산과 시내 산과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3:1 주석을 참조하라.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 이 기적 사건은 만나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역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즉 후일 바울은 물을 '신령한 음료'로, 반석을 '신령한 반석'으로 해석함으로써(고전 10:4) 당시 사막의 갈증으로 인해 목말라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렙 산 반석의 물이 생수가 되었듯이, 오늘날 사막과 같은 삶의 터전에서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숱한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교훈했던 것이다(요 4:14; 7:37; 계 22:7; 사 55:1).
특히 반석이 모세에 의해 때림을 당함으로 물을 낸 것은 예수께서 친히 저주를 받아 사람들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 구원 사역을 이루신 것을 예표한다(사 53:4, 5; 요 19:1-3, 17-9).
같은 견지에서, 레온 우드(Leon Wood) 박사도 본 사건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했는데, 곧 그는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을 낸 이 사건은 장차 갈보리 산에서 그리스도께서 매를 맞아 피를 흘림으로써 그 보혈로써 만 백성을 영적 갈증에서 구원하신 사건을 상징한다고 보았다(A Survey of Israel's History).
특히 반석을 통해 흘러 나온 물의 양을 가리켜 시편 기자는 '강'(나하르)이라고 표현했는데(시 105:41), 이때 이 '강'과 같은 단어이다(창 2:10).
한편 '반석을 쳐서'는 더 있는데, 곧 민수기 20:2-13에 나오는 사건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6일 / 03- 02(토)
출애굽기 16:1-31
찬송 / 73장(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나와 메추라기(출애굽기 16:13, 31)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질문)
1. 메추라기를 얼마동안 먹었는가?
- 한 달(1개월) 민수기 11:20

2. 만나는 얼마동안 먹었는가?
- 40년 동안. 여호수아 5:12
- 만나를 담은 항아리 출애굽기 16:33, 여호와 앞에 두어 대대로 간수하라

메추라기(7958) 셀라우(selâv)  שְׂלַו    

1. 메뚜기.  2. 복수 ׃ שַׂלִוִים 민 11:32.
발음 [ selâv ]
어원  / 795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메뚜기, 민 11:32, 시 105:40.
  a. 명사 [주]복수 ׃שַׂלִוִים 민 11:32.

메추라기
-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 그리고 통통한 몸집을 가진 꿩 아과(亞科)의 철새이다(민 11:31).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틴을 중심하여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떼를 지어 북쪽으로 나아왔다가 가을쯤 되면 아라비아와 시리아 쪽으로 옮겨가 겨울에는 다시금 아프리카로 돌아간다(Schubert, Knobel)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이러한 계절풍을 타고 이동하는 메추라기 떼들을 마치 비 같이 이스라엘 진에 떨어지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한편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35절)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 졌다(민 11:21).

만나(4478) 만( mân)  מָן     

1.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2. 만나.  3. 민 11:7
발음 [ mân ]
어원  / 410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 만나, 민 11:7, 9, 출 16:31이하, 민 11:6.

* 만나는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15절)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양식(3899)  레헴(lechem)  לֶחֶם 스트롱번호3899

1. 음식.   2. 레 3:11. 3. 레 21:8
발음 [ lechem ]
어원 / [여] 38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7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음식, 양식.
 a. 명사, 남성 [사람과 짐승의] 레 3:11, 욥 20:14, 시 41:10(9), 102:5(4).
 b. 명사, 남성 [하나님의 희생 제물에 대해 사용] 레 21:8,17, 렘 11:19

2. 명사, 남성 빵, 떡, 진설병, 출 25:30, 35:13, 39:36.
3. 명사, 남성 밀, 곡물, 곡식, 사 28:28.

이것이 무엇이냐
- 이 말의 히브리어는 '만 후'(*)로서 '만나'(Manna)라는 명칭은 바로 이 단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무엇이냐'(What)라는 뜻의 히브리어 '만'을 70인역이 헬라어로 '만나'라고 번역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Wycliffe).

여호와께서...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성경에서 말하는 만나에 대하여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의 유목민들은 '만'이라 불리우는 연지벌레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바로 이 '만나'인 것으로 주장한다.
반면에 일부 아랍인들은 위성류(tamarisk)에서 나오는 진액이 굳어 흰색을 띤 것이 '만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 역시 이 만나를 시내 반도 부근에서 자생하는 식물액(液)으로 이해하여 기적적 만나의 공급을 의심한다(Seetzen, Burckhardt, Ritter).
하지만 이러한 주장과 달리 분명 만나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하신 하늘의 양식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만나가
1. 40년동안 백성들이 행진하는 곳마다 사철 구분없이 주어졌으며
2. 일정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200만 명의 인구에 부족함 없이 충족하게 주어지고 안식일 전날은 평일의 2배가 내려졌다는 점 등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깟씨
- 미나리과에 속하는 '고수풀'(coriander)의 씨를 가리킨다.
이 씨는 회백색에 직경 3mm 정도 되는데 소화제나 향료 또는 조미료로 쓰인다(민 11:7).

이스라엘은 메추라기와 만나로 생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단지 생존문제의 해결을 위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것일까요?
그런 것이라면 한 사람이 거둘 분량을 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분량을 정하지 않고 마음껏 거두어서 먹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6절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시면서 한 사람에 한 오멜이라는 분량을 정하십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말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이치와는 맞지 않습니다.
많이 거두면 그만큼 더 남아야 하고 적게 거두면 그만큼 부족한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남보다 더 많이 거두고 많이 남기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또한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거두어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다면 많이 거두었다 적게 거두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많이 거둔 것이 부와 자랑이 되지 못하고 적게 거두었다 해도 비천과 불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았던 기존의 세상, 애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생존을 위해 한 일이 또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19, 20절)는 말씀처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더러는 아침까지 둔 것입니다.

날마다 아침이면 지면에 만나가 있을 것인데 왜 남겨두었을까요?
그것은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있는 만나가 내일은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있게 됩니다.
만나가 없으면 당장 생존에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생존을 위해 아침까지 남겨둔 것이라면 결국 이스라엘은 만나를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만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성향의 인간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나안 땅은 기존에 존재하던 가나안 민족의 삶의 방식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많이 거두기 위해 경쟁할 것이고, 많이 거둔 것이 힘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적게 거둔 사람은 힘없는 약자가 되는 세상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삶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는 균등입니다.
이러한 균등으로 나타나는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 거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은 그 은혜조차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을 들으시고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는 이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는 이스라엘의 열심과는 무관합니다.
이스라엘이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거두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오멜씩 거두면서 자신들의 노력과는 무관한 은혜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양식을 주신 이유입니다.

고린도후서 8:14-15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헌금의 문제로 연결하여 말합니다.
헌금을 단순히 교회에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거두었든 적게 거두었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세상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세계입니다.

세상은 많이 거둔 자를 적게 거둔 자보다 더 가치 있게 대우합니다.
실력이 있기에 많이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이 거둔 자는 많이 헌금할 수 있습니다.
적게 거둔 자는 상대적으로 적게 헌금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헌금을 많고 적음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서 균등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두었다는 것 또한 무시되면서 많이 헌금한 사람이 대접받는 지옥의 현장이 될 뿐입니다.
많이 거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고 적게 거둔 것이 불만이 될 수 없는 균등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균등의 세계는 소유가 균등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소유가 균등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균등은 십자가로 가능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안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가장 존귀한 생명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자라면 세상에서 거두는 것의 많고 적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균등입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의 차등이 없고 따라서 헌금 액수의 많고 적음에 따른 차등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로 인한 균등이며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의 세계인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것이야 말로 참된 부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땅의 것의 많고 적음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것으로 추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을 불안 해 하면서 거둔 것을 아침까지 둡니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믿지 못하고 내가 거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 내일을 살게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많이 거둘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신자는 천하를 얻은 것보다 귀한 것을 가진 부요한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이 거두어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두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만 귀할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균등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한 첫 언급은 출애굽기 16장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 회중은 광야에서 굶어 죽겠다며 그들을 인도해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사실 이 원망은 모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줄 것이다. 저녁에는 먹을 고기를 주고, 아침에는 배불리 먹을 빵을 줄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나를 인정할 것이다.”(16:4, 8, 12)

뒤이어 출16:13절에 처음으로 ‘메추라기’(Quail)가 먼저 등장한다.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진 친 곳을 뒤덮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진 친 곳 둘레에 안개가 자욱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메추라기가 내려왔다.
그런데 백성이 그 메추라기를 잡았는지, 먹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만나’(Manna)가 처음 등장한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이럴 수가, 광야 지면에, 마치 땅 위의 서리처럼 보이는,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 하고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입니다.”]

여기에서 ‘이게 무엇이냐?’라는 단어가 ‘만 후’이고 여기에서 ‘만나’라는 말이 파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본문은 16장이 14절부터 36절로 끝낱때까지 ‘만나’를 어떻게 먹는지에 대한 규칙을 설명한다.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자주 만나를 먹을 것인가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메추라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메추라기를 어떻게 먹을지, 언제 먹을지에 대한 설명도 없으며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배고픈 백성이 갑자기 내려온 메추라기를 당연히 먹었는데 다만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좀 더 관련 근거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출애굽사건은 유대교와 기독교 배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신구약 저자들은 그때의 사건을 자주 인용했다.

메추라기

1. [출애굽기 16: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2. [민수기 11: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 [민수기 11: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4. [사무엘상 26:20]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5. [시편 105: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다음은 성경에서 ‘만나’에 대한 언급을 찾아서 모아보았다.

출애굽기16:31, 35
이스라엘 사람은 그것을 만나라고 하였다. 그것은 고수 씨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와 같다. 이스라엘 자손은 정착지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를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

민수기11:9
밤이 되어 진에 이슬이 내릴 때면, 만나도 그 위에 내리곤 하였다.

신명기 8:3
주님께서 당신들을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당신들도 알지 못하고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5: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느헤미야 9:15, 20
굶주릴까봐 하늘에서 먹거리를 내려 주시고, (생략) 그들의 입에 만나가 끊이지 않게 하시며, 목말라 할 때에 물을 주셨습니다.

시편 78:24, 25
만나를 비처럼 내리시어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으니, 사람이 천사의 음식을 먹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풍족할 만큼 내려 주셨다.

요한복음 6: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 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히브리서 9:4
거기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제단과 온통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생략) 돌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위와 같이, 단순히 키워드 검색만 해봐도 신구약을 통틀어 ‘만나’는 약 20회 정도 인용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어떤 저자도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표현을 쓴 적은 없다.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만나’라고만 표현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딱 3번뿐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위에서 설명한 출애굽기 16장의 첫 등장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번을 찾아보자.

메추라기가 등장하는 두 번째 본문은 민수기 11장이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가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11:4-6)]

이 본문을 보면 위의 출애굽기 16장에서 그들은 메추라기를 먹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만나만 먹는 것이 지겨우니' 제발 고기를 달라고 원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백성의 불평을 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한 달 내내, 냄새만 맡아도 먹기 싫을 때까지, 줄곧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20절)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왜냐하면, 그 백성의 불평에 대단히 노하셨기 때문이다.(10절)
그리고 실제로 메추라기 기적이 일어난다.
[주님께서 바람을 일으키셨다. 주님께서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를 몰아, 진을 빙 둘러 이쪽으로 하룻길 될 만한 지역에 떨어뜨리시어, 땅 위로 두 자쯤 쌓이게 하셨다. 백성이 일어나 바로 그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 이튿날도 온종일 메추라기를 모았는데, 적게 모은 사람도 열 호멜은 모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진 주변에 널어 놓았다. (민 11:31-32)]

그토록 고기를 원하던 그들은 드디어 메추라기를 먹게 되었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이 긴 글을 적었는가?
그 이유는 이어지는 다음 절에 나온다.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주님께서 백성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극심한 재앙으로 치셨다. 바로 그곳을, 사람들은 기브롯 핫다아와(탐욕의 무덤)라 불렀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을 거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민 11:33-34)]

그렇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은, 행복하고 맛있게 냠냠 쩝쩝한 게 아니라, 먹고 죽었다. 심지어 ‘고기가 아직 그들의 이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에 대한 대가였던 것이다.
그들은 극심한 재앙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들이 메추라기를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재앙을 받은 이후에 다시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여호수아서에서 출애굽이 끝난 후 가나안에 도착하자 이제는 '만나'가 멈추었다고만 말한다.(수 5:12)

성경에서 메추라기를 언급한 마지막 세 번째 본문은 시편 78편 27-29절이다.
사실 이 본문은 민수기 11장의 내용으로 지은 시편이다.
"고기를 먼지처럼 내려 주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처럼 쏟아 주셨다. 새들은 진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그들이 사는 곳에 두루 떨어지니, 그들이 마음껏 먹고 배불렀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주셨다."

비록 '메추라기'라는 단어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만나와 함께 '하늘의 새'를 내려주셔서 먹었다는 점에서 민수기 본문의 메추라기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메추라기를 먹긴 먹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30-31절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먹을 것이 아직도 입 속에 있는데도, 그들은 더 먹으려는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살진 사람들을 죽게 하시며,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거꾸러뜨리셨다.]

결국 이 시편은 민수기 11장에서의 사건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며, 결말은 동일하다.

메추라기를 먹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욕망에 진노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메추라기를 먹었던 사건은 결코 ‘긍정적인 예화’로 사용될 수 없었던 것이고, 신구약 모든 저자들도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표현할 때 ‘메추라기’를 언급하지 않고, ‘만나’만 언급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나’와 ‘메추라기’는 함께 사용하기 상당히 민망한 단어의 조합이며,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해서는 더더욱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보여준 신 광야

신 광야는 엘림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가기 전에 지나간 지역이다.

출애굽기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신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 씬’으로, 가데스 바네야가 있는 미드바르 친 광야와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경에서는 둘 다 똑같이 ‘신 광야’로 표현되어 혼동을 주고 있다.

친 광야는 에돔 옆에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 지역의 남쪽에 있는 광야를 말하며, 신 광야는 시내 산에 가기 전에 통과한 광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 때 지나간 광야는 에담 광야, 수르 광야, 씬 광야, 시내 광야, 바란 광야, 친 광야가 있다.
신 광야는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르비딤에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곳이다(출 17:1).
신 광야는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신 광야의 정확한 위치는 추정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와디 타이베에서 동쪽으로 이르는 산악 도로를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황량한 구릉 지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에 도착하는 데 꼭 1개월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양식을 가지고 나왔다 할지라도 이 때쯤 거의 떨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양식이 떨어지자 그들은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면하게 하신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항상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에만 집착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곳이 바로 신 광야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정말 인내를 요구하는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만드는 좋은 약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렛대의 구실을 한다.

고난에 능숙한 사람은 그만큼 자기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되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 의지가 강해진다.
그러나 때로 고난은 우리들을 좌절의 함정으로 이끄는 모티브가 된다.
신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은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인간들의 나약하고 간교한 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난 중에 있는 자가 고난을 인내하지 못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악한 사단의 세력에 동조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 광야에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해결해주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가 있었던 곳이 바로 신 광야이다.

메추라기는 히브리어로 셀라우라고 하는데 꿩과에 속하는 새로서, 몸 길이는 약 18cm 정도이며 털은 다갈색이고 흑색의 반점이 있다.
이 메추라기는 작은 철새로서 3-4월경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데, 시내 반도와 팔레스틴은 그 통로가 된다.
이 새는 날개가 짧으므로 계절풍을 이용하여 대군의 떼를 이루어 날아 이동한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메추라기는 살이 쪄 둔중하므로, 시내 반도 및 애굽에서는 손으로 메추라기를 잡을 수가 있다.
그리고 9월에는 반대로 대군을 이루어 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한다.
특히 가을 메추라기는 별미로 알려져 있다.
이 새는 둥지를 지면에 만들고 평균 16개의 알을 낳아 키우는데, 알은 식용으로 쓰인다.
다윗왕은 사울 왕에게 쫓기는 자신을 메추라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삼상 26:20).

그리고 히브리어 셀라우는 비만을 뜻한다.
신 광야에서 음식물이 부족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 원망하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린 양식이 만나라고 한다(출 16:4).
그런데 실제로 시나이 반도의 건조 지대에서는 만나와 비슷한 음식이 존재하고 있다.
위성류 나무에 기생하는 깍지벌레가 있는데 ‘만’은 이 곤충의 분비물을 가르키는 말이라고 한다.
6월이 되면 깍지벌레는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위성류 나무의 수액을 빨아, 일부는 애벌레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 위에 방울 모양으로 뱉어 놓는다.
이 분비물은 건조한 기후 탓에 물기가 빠져 금방 결정체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데, 매우 달고 쫀득쫀득하여 먹을 수가 있다. 성경에서는 만나가 고수풀씨 같이 희었고 맛은 벌꿀과자 같았다고 하였다(출 16:31). 고수풀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일년생 식물로 1-3mm 크기의 씨는 옅은 회색이다. 실제 만나는 흰색, 갈색, 노르스름한 색(민 11:8) 등 다양하다. 그리고 만나 성분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펙틴을 지닌 세 가지 기본 당으로 짜여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인 만나를 서로 많이 거두겠다고 욕심 부리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한 개인에게 축적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는 곳이 신 광야이며, 적게 거둔 자나 많이 거둔 자나 자신이 만족할 만큼의 일용한 양식이 되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남겨 놓은 자의 만나를 썩게 하심으로, 내일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은 단호하게 배척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 사회에서 풍족한 물질문명을 향유하고 있지만,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할 양식을 독식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 사회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내일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함께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의 역사를 보여준 신 광야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비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오랜 기간 동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만나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하얀 서리 같은 것을 보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다.
만나는 아랍말로 “이것이 무엇이냐?”를 뜻한다.
그것은 고수(미나리과의 1년생 초본)씨앗 같이 하얗고 맛은 벌꿀과자 같았다. 

만나는 사막에서 자라는 관목 잎사귀에 연지벌레가 붙어서 만들어내는 이슬 모양의 형성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지곤지 할 때 연지가 연지벌레 말린 것이다.
입술과 뺨에 바르는 빨간색 연지를 이마에 바르면 곤지가 된다.
딸기맛 우유나 빨간 립스틱에 들어가는 코치닐추출색소가 바로 연지벌레에서 채취한 것이다.

만나는 연지벌레의 침을 통해 나오는 분비물에서부터 생성되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바닥에 떨어지는데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딱딱하게 굳는다.
그래서 아침에 나가면 그걸 수확해서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녹는 온도가 낮기 때문에 햇빛이 나면 다 녹아버려서 햇빛이 나기 전에 거둬들여야 했다. 

만나는 맛이 달콤해서 지금도 먹을거리가 부족한 토착 유목민들은 그것을 인스턴트 먹을거리로 이용한다.
모세는 원래 미디안 광야에서 이미 40년 동안 양을 치면서 살았기 때문에 만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배고파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이거 어떻게 해결하지?” 고민하다가 불현 듯 만나를 기억해냈을 것이다.
그걸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해주고 그들은 그렇게 믿고 먹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하나님이 만나 외에 다른 것을 주지 않고 40일이 지나자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기로 하였다.
실제로 메추라기는 이 지역을 지나 아프리카로의 긴 여정을 하였고, 긴 여정 끝에 지친 메추라기들이 땅에 떨어졌을 거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는 철새의 통로이고, 겨울철에 팔레스타인을 통해서 이집트로 이동한다.
즉 일 년에 두 차례 보통 메추라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에 지났던 지역을 통과한다.
이런 철새의 이동은 고대인들에게는 분명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는 철새의 대량포획이 일어났으며 20세기에 들어서도 수년 동안 메추라기는 이집트의 주요 수출품의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1920년경에 이르러서는 그 번식률이 극히 떨어져 메추라기의 이동이 중단되었다. 

민수기 11: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불평하는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는데, 이를 오염된 메추라기를 먹고 식중독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메추라기는 크리스마스로즈와 사리풀 등을 먹는데, 이 풀에는 독성이 있다.
결국 이 독성이 농축되어 있는 새를 먹을 경우 사람에게도 해가 될 수 있다.
바로 만나에 대해 불평을 했던 사람들은 이런 메추라기를 먹고 죽었을 것으로 본다.

메추라기는 꿩과의 철새로, 유럽 전 지역과 아시아 서쪽에서 주로 번식한다.
원래 야생조였으나 일본에서 최초로 식용 및 채란용으로 가금화되었다.
알과 고기는 모두 식용 혹은 약용으로 이용되는데, 동물성 식품이면서도 알칼리성 식품이고, 비타민 A와 단백질이 풍부하고 기름기가 적어 다른 동물성 식품에 비해 저칼로리 식품으로 특히 다이어트와 강장효과가 탁월하다.

우리는 고기보다는 알에 익숙하다.
메추리알은 일반 계란처럼 그냥 쪄서 먹거나 생으로 먹는데, 달걀보다 비타민 B1, B12가 훨씬 많이 들어있으며, 인과 철 등이 더욱 풍부하다.
단백질도 계란에 비해 많이 들어있고, 아미노산 조성은 계란과 비슷하나 글루탐산이 메추리알에 더 많다.
메추리알은 산후에 먹으면 회복이 빠르며, 허약체질 혹은 소모성 질환을 앓고 난 뒤에 보양으로도 좋은 음식이다. 

메추라기 고기는 맛도 좋고, 스태미나 식품으로 유명하다.
메추라기 고기가 비타민 B군이 많아 에너지 대사와 성호르몬 기능을 조절하여 성적욕구증대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메추라기는 체내 모든 장기의 기능을 보강하고 근골을 굳건히 하며 상식하면 겨울에는 추위를 이기게 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이기게 한다.
동의보감을 보면 메추라기 고기는 ‘순육’이라고 하는데 “순육은 오장을 보강하고 힘줄과 뼈를 튼튼히 한다”라고 하였다.

한 오멜(16절) : 한 오멜은 약 2.3리터입니다.

● 묵상 :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들을 먹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내리십니다.

날마다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2) 만나는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16~18절)

  하나님께서는 1인당 한 오멜씩 식구수대로 가져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대로 하였더니 어떤 사람은 많이 가져가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가져갔습니다. 그것을 식구수대로 나누었더니 많이 가져간 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가져간 자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배불리 먹는데 충분한 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충족감을 느낄 만큼 충분히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40년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 묵상 :

이렇게 40년간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십니다.

3) 만나는 나눔을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만나를 식구수대로 가져가게 하신 후에 식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간 것을 식구수대로 나누었더니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나를 나 혼자만의 것으로 따로 챙겨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40년간 반복하심으로 하나님의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누는 것을 ‘체데카(의)’라고 말합니다.

● 묵상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삶을 실천하십시오.

말씀을 배운 이들은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가진 이들은 물질을 나누고,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기술을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풍성한 것을 채우십니다.

4) 만나는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5절)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내리셨으나, 제 7일에는 만나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제 6일에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다른 날에는 만나를 남기고 보관하면 다음 날 아침에 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지만, 안식일에는 전날의 싱싱함이 그대로 보전되어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40년 동안 매 안식일마다 만나를 내리시지 않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5) 만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만나를 진영의 지면에 내리셨으니 그들은 그저 그릇을 들고 장막을 나가서 만나를 퍼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먹는데 있어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리시는 이 규칙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규칙은

①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

② 거둔 것을 식구수대로 골고루 나누어주라는 것,

③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

④ 제 6일에는 이틀 치를 거두어 안식일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필요한 만큼만 거두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훈련하게 하기 위함이고, 식구들끼리 골고루 나누어 먹으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또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누지 않고 쌓아두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 6일째에는 이틀 치를 거두게 하셔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을 훈련하셨습니다.

● 묵상 : 이스라엘은 40년 동안이나 이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매일, 또는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들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 있음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매주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매주 반복적으로 행하는 봉사와 섬김에 충성합니다.


● 묵상 :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걱정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걱정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일을 주께 맡겨 믿음 있는 자가 되십시오.

* 기도제목

1. 우리 입에서 불평이 사라지게 하시고, 늘 감사가 가득한 입이 되게 하옵소서.
2. 끝없이 채우려는 저주받은 욕심과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3. 날마다 육의 양식을 먹듯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여 영의 양식을 섭취하게 하옵소서.
4.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항상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게 하셔서 육신의 것을 얻으려는 일로 영의 자리를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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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5일 / 03- 01(금)
출애굽기 15:1-27
찬송 / 229장(주 예수 다스리시니 )

신유(神癒)  하나님 신, 병 나을 유
- 신의 힘으로 병이 낫는 일
- 신앙 요법의 하나

치유(治癒) 다스릴 치, 병나을 유
-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하는 일

신유(信癒) 믿을 신, 병나을 유
- 믿음으로 병을 고치는 것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치료하는 여호와(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He said, "If you listen carefully to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and do what is right in his eyes, if you pay attention to his commands and keep all his decrees, I will not bring on you any of the diseases I brought on the Egyptians, for I am the LORD, who heals you."

치료하는 여호와(I am the LORd who heals you.)
여호와 로파(יְהוָה רֹפְאֶךָ)

치료하다(7495) 라파 [ râphâʼ ]  רָפָא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너희가... 규례를 지키면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며 순종에의 촉구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의 언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법도와 율례'는 그의 백성에게 '계명과 규례'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 의(義)의 행위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육신적 편안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법을 따라 사는 의로운 사람을 요구하신 것이다. 질병으로부터의 보호 약속에 앞서 요구하신 이 요구는 곧 오늘 우리의 신앙의 표준이기도 하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 문자적으로 '여호와', 와 '너희의 치료자'란 동격의 단어가 합성을 이뤄 만들어진 것으로, 직역하면 '나 여호와는 너희의 치료자'가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친근한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치료하는'의 히브리어 '라파'는 '의사' 또는 '의원'을 가리킨다.
곧 우리의 의원되시는 여호와는 실로 모든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과 죄 등 인생의 모든 문제점까지도 깨끗이 해결해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치료자이시다(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청종하고(8085) 솨마 [ shâmaʽ ]  שָׁמַע  
 

1. 듣다.   2. 창 3:10.  3. 창 37:17
발음 [ shâmaʽ ]
구약 성경  / 1159회 사용


행하며(6213) 아사[ ʽâsâh ] עָשָׂה
스트롱번호6213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기울이며(238) 아잔 [ ’âzan ]   אָזַן  스트롱번호 238

1. 날카롭다.  2.  명확하다.  3. 히필형 : הֶאֱזִין
발음 / [ ’âzan ]
구약 성경 / 2회 사용


지키면(8104) 발음 [ shâmar ]  שָׁמַר   


1. 지키다.  2. 동산을 지키다.  3. 창 30:31.
발음 [ shâmar ]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엘림
- '상수리 나무' 또는 '참나무'란 뜻으로 수에즈 동남쪽 약 100Km, 마라 남쪽 10여Km 지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와디 구룬델'(Wadi Ghurundel)인 듯하다(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ble).
당시 '엘림'은 비가 자주 왔고 개울과 샘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이곳은 물샘 12개와 종려 70주가 있었는데, 이는 완전수인 12와 70(7x10)이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했다(Keil).
그리고 몇몇 학자는 물샘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70장로를 각각 위한 것이고, 또한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Kurtz, Baumgarten).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이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인도된 곳이라 본다.
한편 출애굽 후 이곳까지의 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애굽 고센 땅 라암셋(12:37)->숙곳(12:37)->에담(13:20)->바알스본(14:2)->홍해(14:22)->수르 광야(15:22)->말(15:23)->엘림(15:27)이다.


찬송하리니(5115) 나바 [ nâvâh ]  נָוָה

1. 앉다.  2. 단정하다. 3.  히필형 : 돋보이게 하다
발음 [ nâvâh ]

구약 성경  / 2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앉다, 쉬다, 합 2:5
2. 원형 단정하다, 어울리다.
 a. 원형 히필형 : 돋보이게 하다[찬양으로], 축하하다, 출 15:2.


노래하리니(2176) 지마라트 [ zimrâth ]   זִמְרָת

1. 노래.   2. 찬양의 대상.  3. 노래 제목
발음 [ zimrâth ]
어원  / 216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뜻풀이부
1.명사, 여성 노래, 찬양의 대상, 노래 제목, 시  118:14, 사 12:2.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신유(神癒)"라고 합니다.
'신유'라는 한자어는 "귀신 신(神), 병나을 유(癒)"
"Faith Healing" 이란 신앙요법 또는 신앙으로 치유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계 22:2).

한 나무(6086) 에츠[ ʽêts ] עֵץ

1. 나무.  2. 숲. 3. 나무로 만든 우상
발음 [ ʽêts ]
어원 / 복수 עֵצִים, 연계형 עֲצֵי, 60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29회 사용

한 나무를... 던지매 물이 달아 졌더라
-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이다.

열왕기하 2:19-22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한다(요한계시록 22:2).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신유는 성경적 근거와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유는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신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종말의 메시아이심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들이 이미 이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유의 은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 지으심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후에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사명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타락한 후에 임하게 된 육신의 질병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중대한 이유가 되었으며, 구원을 얻은 후에는 더욱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성화의 방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넌 직후의 상황입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광야는 물이 없는 곳이요 양식을 얻을 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메마른 황무지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된 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광야 40년의 여정 동안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목이 말라 죽은 자들은 없었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은 자들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물과 양식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하시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온전히 믿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광야 4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연합하기 위한, 생명을 담보로 한 훈련의 기간이었고 시험의 기간이었습니다.

그 훈련과 시험의 첫 과정이 마라에서 있었습니다.
마라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얻기 위해 도착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라의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낙심과 절망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쓴 물만 있었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입에서는 모세를 향한 거친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실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으며 그 나무를 물에 던졌을 때 마실 수 없었던 쓴물이 마실 수 있는 물로 변화되었습니ㅏㄷ.
이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애굽 사람에게 임한 모든 질병은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니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사람처럼 불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연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여정 동안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불신앙을 치료하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연합하는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신유의 은혜를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유의 은혜는 언제나 영혼의 잘됨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나의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병 고침의 은사들"이라면서 복수를 사용한 것은 여러 가지 병들을 고치는 은사들을 말함을 알 수 있다.
먼저 병 고침의 은사들의 정의를 보면 다음 과 같다.

병 고침의 은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인데,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하여 질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한다(C. Peter Wagner).

이 은사들은 질병이나 연약함을 초자연적으로 치유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David Pytches).

이 은사들은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안수, 기도, 명령 또는 이것들을 종합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초자연적으로 고치는 능력을 말한다(Bobby Clinton).

1. 병 고침의 은사자들만 병을 고치는가?

- 병 고침의 은사들을 등한시하는 많은 보수교회에서도 야보고서 5장을 근거로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 5:14).
이렇게 하는 기도는 병 고치는 은사로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장로들(목사들)이 가진 영적 권세로 하는 기도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의 장로나 목사들만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병 고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신자들, 곧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기도하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그리고 병 고침의 은사들을 통해서(고전 12:9) 행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많은 종류의 병을, 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잘 고침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극단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아직도 신유만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은혜의 산물인 의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심해야할 일이다.

어느 병원의 실험에 의하면, 한쪽 병자들은 약만 투입하고 다른 쪽 병자들은 약과 기도를 병행한 결과,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한 쪽의 병자들이 통증도 훨씬 적고 훨씬 빨리 회복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기도와 의학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
또한 기도를 통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더라도 의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좋다.
(미국 신유 사역자는 의사들을 대동한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이 낫는다고 하니 병원에 가지말까요?"라고 질문도 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지만 은사자는 가급적 대상자에게 의사에게 가서 확인해보라는 것이 좋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으므로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성경이 말하는 치유들

-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성경에서 치유와 관련된 단어들을 찾아보면*세라퓨오: 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육체적인 병을 치유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마 4:23; 8:7, 16 등).

* 이아오마이 : 육신적인 병은 물론(마 15:28), 마음이나 영적인 병은 물론 축사로 치유하는 것을 말한다(마 13:15; 눅 4:18; 요 12:40; 행 10:38; 히 12:3; 벧전 2:24; 약 5:16 등).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은사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병 고침은 물론 귀신 쫓는 은사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마 15:28; 행 10:38).

ἰάομαι 스트롱번호2390

1.

고치다

2.

눅5:17

3.

회복하다

발음 [ iaŏmai ]




1.
고치다, 치료하다.
  • a.
    [문자적으로] 눅5:17, 6:19, 요4:47, 행9:34, 10:38등, [수동] 마8:8, 15:28, 눅7:7, 8:47, 요5:13, 약5:16등.
  • b.

    [상징적으로] [여러 종류의 병으로부터 온전하게 됨] 회복하다, 마13:15, 요12:40, 행28:27.


* 소조 : 구원하다(마 1:21; 18:11), 위험에서 건져내다(마 8:25; 14:30), 치유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막 5:23; 6:56), 귀신 들린 자가 깨끗함을 받다(눅 8:36)에서 사용되었다.

σώζώ 스트롱번호4982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sōzō ]
어원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전하다, 구출하다.
  • 2.
    [자연적인 위험이나 피해에서 구출하거나 그것을 당하지 않는 것]
    • a.
      [죽음에서] 구하다, 마14:30, 막15:30, 눅23:35.
    • b.
      [위험에서] 구출하다, 요12:27, 히5:7.
    • c.
      [병에서] 구하다, 놓아주다, 마9:21, 22, 막5:23,28,34, 6:56, 눅8:48, 17:19, 18:42, 행4:9, 14:9, 약5:15.
    • d.
      지키다, 보존하다.
    • e.
      [수동] 번창하다, 낫다, 건강해지다.
  • 3.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다.
    • a.
      구원하시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요12:47, 고전1:21, 딤후1:9, 히7:25.
    • b.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눅7:50, 약1:21, 2:14, 벧전3:21.
    • c.
      [수동] 구원을 얻다, 마10:22, 막10: 26, 요5:34, 행2:21.
  • 4.
    [어떤 구절은 1,2에 다 속한다] 막8:35, 눅9:24, 롬9:27, 고전3:15.





* 라파 : 구약에서 사용된 것으로 원상태로 회복하다(창 20:17; 시 6:2; 렘 17:14).
사람의 병(출 15:26; 왕하 2:22), 나라의 죄악이 치유 받다(대하 7:14; 호 6:1; 렘 3:17).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에서 사용된다.

רָפָא 스트롱번호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67회 사용

뜻풀이부

  • 1.
    원형 수선하다
  • 2.
    원형 고치다, 치료하다, 욥5:18, 사19:22,전3:3, [분사로] 의사, 창50:2, 대하16:12.
    • a.
      원형 치료하다 [하나님께 사용되어], 신32:39, 대하7:14, 시30:3(2), 호7:1, 11:3.
    • b.
      원형 용서하다, 대하30:20, 렘3:22, 호14:5(4).
    • c.
      원형 위로하다, 욥13:4.
    • d.
      원형 니팔형
    • e.
      원형 수선되다, 고쳐지다, 렘19:11
    • f.
      원형 치료되다, 레13:37, 신28:27, 왕하2:22, 사53:5.
    • g.
      원형 피엘형
    • h.
      원형 고치다, 수리하다, 왕상18:30
    • i.
      원형 치료하다, 왕하2:21, 렘6:14, 겔34:4,[은유적으로] 위로하다, 렘8:11.
    • j.
      원형 치료되게 하다, 출21:19.







- 이상 단어를 통해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치유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치유는 5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적 치유(spiritual healing)

죄인이 구원 받아 영혼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1:21; 13:15;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서 하였나이다."(시 41:4).


둘째, 육신 치유(physical healing)

몸의 질병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마 4:23; 고전 12:9;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셋째, 심령 치유 또는 내적 치유(emotional healing, inner healing)

사람의 마음이 치유 받는 것을 말한다.(사 61:1-3; 눅 4:18-19; 마 12:20).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3), 육체의 질병의 70%가 마음의 질병에서 기인하는 심인성 질병임을 감안할 때 내적 치유는 육체의 치유 못지않게 중요하다.


넷째, 축사 또는 축귀(deliverance)

귀신을 쫓는 것을 말한다.(막 16:17; 눅 10:19; 행 10:38) 축사도 치유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유의 은사라고 할 때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국한해서 이해하기도 한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영혼의 질병을 고치는 것(구원), 마음을 병을 고치는 것(내적 치유), 귀신 쫓는 것은 다른 단어나 개념으로도 소개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죽은 자를 살림

성경에는 죽은 자를 살린 기록이 가끔 나온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왕상 17:22), 직원의 죽은

을 살리시고(마 9:18-24),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요 11:43-44), 죽은 도르가를 살린 베드로(행 9:36-40),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게를 살린 바울의 경우(행 20:9-10)를 들 수 있다. 현대의 경우, 영국의 능력 사역자인 스미스 위글워쓰는 그의 집회에 오랫동안 참석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죽은 자를 최소 10명 이상은 살렸다고 하며, 인도네시아에 임한 부흥기간 중, 죽은 사람의 시신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드렸을 때 그 사람이 살아났다고 증언한다.


3. 질병의 원인들

사람들이 병들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원죄로 인한 연약함

죄를 지은 인간은 영, 혼, 육이 타락하여 기능이 약화되고 부실해졌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질병이나 연약함에 걸리지 않는 사람을 거의 없다.

둘째, 본인의 죄와 허물들

본인의 죄와 허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징계를 받을 경우이다.
구스 여인과 결혼한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은 7일 동안 문둥병에 걸렸다(민 12:1-16).
40년 광야생활을 보면 불뱀 사건 등 심판과 징계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하여 왕의 위세를 뽐낸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이 내려 7만 명이나 죽었다.
세상의 온갖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면 자신도 모르게 질병이 낫는다.

셋째, 마귀의 공격

마귀가 모든 질병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귀가 질병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스라엘의 어떤 여인은 사단에게 매여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안수로 치유받았다(눅 11:13).

넷째, 마음의 상처

오늘날 질병의 70%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러므로 치유사역자는 육체적인 치유는 물론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내적 치유에도 통달해 있어야 한다.
허리병, 관절염 등은 스트레스와 관계있고, 마음속에 증오심을 회개한 사람의 경우 관절염등이 나은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다섯째, 자신의 부주의

생활 습관이 체계적이고 규칙적이지 못한 경우, 운동을 게을리 하는 경우, 음식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 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자신의 식생활, 일정 및 운동량을 조절하여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여섯째, 조상의 죄

조상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죄악을 저질렀을 때 그 자손은 그 죄악의 열매를 먹어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이 모든 저주가(각종 질병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재앙들)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신 28:46).
유전병도 이런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가계 치유를 통해 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

일곱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날 때부터 병약자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

세계적 교회성장 학자인 피터 와그너는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교단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주요 요인은 신유의 은사 덕분이라고 분석한다.(오랄 로버트, 케네스 헤긴, 조용기, 라인하르트 본케, 베니힌 목사 등은 오순절 교단 소속이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도 할 수 있다면 성경을 철저하게 믿는 보수주의자들이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런 저런 신학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마음 문을 열고 행하면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무수한 약속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풍성하게 역사한다.
승리와 패배의 차이는 항상 그 믿음에 달려 있다.
믿음으로 은사를 간구할 때 성령께서 병 고침의 은사들을 주신다.
많은 사람들은 혹시 내가 기도하여 병이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아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님을 반드시 자각해야 한다.
존 윔버 목사는 신유 기도를 일년 내내했으나 한 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믿음을 사용하여 말씀에 따라서 기도한 결과 일년 후부터 고침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유의 종이 되었다.














어떤 여자가 자기의 삶을 마치고 사후 세계로 가기 위해서 스탁스 위버라는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여자는 웨론이라는 요정을 만납니다.
요정은 그 여인에 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대는 이 강을 건너가기 전에 리틀스 계곡의 샘물을 마시고 가겠는가?" 여인은 물었습니다.
"내가 그 샘물을 마셔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자 요정은 "만약 그대가 리틀스의 샘물을 마시면 세상을 모두 망각하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 다.
그러자 여인은 "나에게 그 샘물을 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다 잊고 싶습니다"
"허나 여인이여, 그대는 동시에 모든 기쁨도 잊을 것이요"
"허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실패를 망각하고 싶습니다."
요정이 다시 말하기를 "여인이여 하지만 동시에 그대는 성공도 잊을 것이요"
여인이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잊고 싶습니다"
"여인이여, 하지만 그대는 동시에 사랑도 잊을 것이요"
한참을 생각하던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샘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인생 순례의 정점에서 기쁨은 고통을 동반하고, 성공은 실패를 수반하며, 사랑은 상처를 동반한 다는 진리를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 헬라 때부터 내려오는 이비커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비커스 는 주전 5세기경에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 당시 유명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비커스가 고린도에서 가까운 시골로 여행을 갔다가 어느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긴 것은 말할 것 없고 매를 수없이 맞아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비커스는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강도를 만나 억울하게 매맞아 죽으면서 그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학을 보고 "너 학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보지 않느냐. 나 는 이렇게 죽지만 이 다음에 네가 내 원수를 좀 갚아 다오"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비커스가 죽으면서 하는 말을 강도는 다 들었습니다.
그처럼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가 행방불명이 되니까 사람들은 그의 행방을 확인하려 애썼지 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도 모르다가 나중에 어느 산골짜기에서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보고 그가 강도에게 맞아 죽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강도를 잡을 길이 없었습니다.
완전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고린도시의 노천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여 연극 관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 연히 학 몇 마리가 공중에서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은 구경하는 사람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아, 이비커스의 학이 나한테 원수 갚으러 오는구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붙잡아서 알아보았더니,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시인 이비커스를 몇 달 전에 산골짜기에서 죽인 강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왜 그런 소리를 질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연극 구경하는데 학이 머리 위로 날아가면 어떻습니까?
그저 '학이 날아가는가보다'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강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죄가 그 사람의 양심 속에 서 그 사람의 죄를 찾아내서 그 사람의 양심 속에서 그 사람이 범한 무서운 죄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4일 / 02- 29(목)
출애굽기 14:1-3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원을 보라(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Moses answered the people, "Do not be afraid. Stand firm and you will see the deliverance the LORD will bring you today. The Egyptians you see today you will never see again.

크리스천 작가였던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 1835. 11. 30 ~ 1910. 4. 21)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주요 작품으로는 미시시피 강 유역을 배경으로 개구쟁이 소년인 톰 소여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그린 동화 "톰소여의 모험"이 있다.

“나는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번에는 돼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약간의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장로교인 감리교인침례교인을 한 우리 안에 함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하늘과 땅과 이웃을 이어 주는 나무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다. 
왕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왕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뒤를 이을 왕자가 없고 공주만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왕은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첫번째  시험은 말타기와 활쏘기였다.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다.
두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이었다.
왕은 문제를 냈다.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너라. 기간은 100일을 주겠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려면 우선 키가커야 하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려면 나뭇가지 또한  길어야 할텐데....'라고 생각하며 제작기 길을 떠났다.
그 20명 중에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나무를 구하려다가 찾지 못하고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수 있게 해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던페로는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나무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나무십자가다!" 
그 후 페로는 핀란드를 잘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 막다른 길에 선 이스라엘 (1-12)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발길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길이 아닌 네비게이션에 조차 나와 있지 않은 생소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즉 고센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려면 북동쪽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하나님은 정반대로 이스라엘을 남동쪽으로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출 13:17)” 우려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장소가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입니다(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바다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이스라엘의 장막을 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게 하셨다가(13:20), 그들의 발길을 “돌이켜”(2)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의 민 33:7은 “에담에서 발행하여 바알스본 앞 비하히롯으로 돌아가서 믹돌 앞에 진쳤고” 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막다른 장소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배수진을 치게 해서, 죽기 살기로 애굽과 전투를 하라는 뜻인가요?
이스라엘은 아직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바로와 그가 이끄는 애굽 군대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10b-12)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자유냐? 빵이냐? 빵은 인간의 육체적 굶주림 뿐 아니라 물질적 욕망의 상징입니다.
빵과 자유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대로 자유인이 된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공포가 밀려오자,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노예로 사는 편이 좋다면서 빵을 추구합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께 마귀가 도발한 첫 번째 시험은 돌로 하여금 빵이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며(마 4:4),
사람의 욕망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빵을 택했습니다.
빵을 택한 그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출애굽한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물도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광야로 간다는 것은 마치 자살행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갔고,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막다른 홍해로 인도하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4, 18)

본문에서의 애굽 사람은 문자 그대로 애굽 백성 만을 한정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은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되고, 출애굽 여정 중에 거치는 모든 나라와 가나안은 물론 온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쫓아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한 상태로 두신다’는 의미라고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얼마든지 돌이키실 수 있음에도 그를 완악한 상태로 두신다는 것처럼 무서운 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막다른 홍해 바닷가에 도달했다는 소식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 즉 장자와 첫 번째 태생의 죽음이라는 재앙 앞에서 망연자실해있던 그들은 복수심에 전 병력을 소집합니다.

5-7.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본문에서 병거는 말이 이끄는 전차로 오늘 날의 탱크와도 같습니다.
평지에서 탱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선발된 병거만 600대였고, 그밖에도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했고 모든 지휘관들도 참여했으니, 애굽 군대의 규모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600대 이상의 전차와 마병과 보병대가 뒤따르는 소리는 아마 지축이 흔들릴 정도 였을 것입니다. 점점 더 가까이 들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애굽 군대의 위용 앞에서 막다른 홍해 해변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비백산할 만 합니다.

모세의 믿음 (13-14)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앞으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다’, ‘완악해진 바로가 온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쫓아올 것이다’,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겠다‘ 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와 그 군대를 어떻게 물리쳐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백성들에게 뭐라 말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 애굽 군사를 앞으로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잠자코 구경만 하면 된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모세는 애굽이라는 구렁텅이 속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믿음의 순도는 99%가 아니라 100% 여야 합니다.
99.9% 믿음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해주실 것인지 몰랐음에도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바로의 군대를 물리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 같은 순도 100%의 믿음을 통해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15-20)

15-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해주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앞으로 가게해라’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라’
‘그러면 바다가 갈라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해서, 애굽 병사가 너희 뒤를 따라 갈라진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혹시 자연 현상 앞에서 경외심을 갖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스위스의 라우터브루넨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은 트뤼멜바흐 폭포로 유명합니다.
트뤼멜바흐는 ‘드럼같은 소리를 내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10단으로 이루어진 계단형 폭포로 높이가 140m에 달합니다.
동굴을 들어가면서부터 들리는 물소리가 폭포에 가까워지면서는 그야말로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커집니다.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면서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넘실대는 바다가 갈라져서 양쪽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있는 물 절벽이 펼쳐있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경외심에 감히 갈라진 바다에 쉽사리 발을 디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뒤를 따라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수심에 눈이 먼 바로와 그 병사들은 초자연적인 엄청난 현상 앞에서도 신에 대한 경외심은 없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뒤를 쫒아갔습니다.

모세에게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목전까지 다가온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경계를 치셨습니다.
앞서 가던 구름 기둥을 애굽 진 쪽으로 뒤로 물러서게 하셔서(19) 애굽 진영 쪽을 구름과 흑암으로 가두어서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쪽으로 오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20a).
반면 이스라엘 진영은 밤을 환히 밝히셔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20b).

이스라엘을 막다른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애굽은 물론 온 세상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실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홍해 사건을 통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할 제일 우선의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내일 살펴보겠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됩니다(31). 코로나 팬데믹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하셨을까?를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제일 먼저는 신앙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당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주일예배를, 구역모임을, 성경공부를 현장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하면서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서로 마주보며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또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서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로 홀로 서게 되는 유익도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제 교육관을 방문해서 보니 그동안 휑했던 예배 현장에 어린 아이들로 가득함에 참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을 어제 주일 설교 말씀으로 해석하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애굽과 같이 완악한 세상은 하나님을 절대 믿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일수록 우리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이 땅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황이 다가옵니다.
어려운 상황을 애굽과 같이 완악한 세상의 시선이 아닌 모세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완악한 세상을 향하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도 100%의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오니, 주님 연약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전쟁이라는 막다른 길에 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완악한 러시아 위정자들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을 막다른 바닷가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3. 4절 하나님의 말씀과 13-14절 모세의 말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4. 내 인생에서 막다른 길에 처했던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앞으로 막다른 길에 처한다면 어떻게 극복하시겠습니까?


성경 안에서 출애굽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할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후의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출애굽 사건이 종종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이 사건이 예수님에 대한 예표임을 밝히기도 했고 출애굽 자체가 영적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좋은 모형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출애굽기 14장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고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성령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의 배경과 상황을 통해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안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교훈을 얻기를 원한다.

 

여기까지의 상황

이 사건의 배경은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던 창세기 12장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을 주셨고 그가 믿음으로 화답하기를 기다리셨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화답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시며 공식적인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리고 그 때 그의 자손들이 이방에서 400년을 객으로, 노예로 고통 중에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해 낼 것을 약속하셨다.

결국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때에 엄청난 가뭄으로 인해서 야곱은 애굽(이집트)로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 그와 모든 가족들이 정착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그곳에 보내셔서 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두셨다. 그리고 창세기의 끝에서 요셉은 죽으면서 아브라함께 하나님께서 하셨던 약속을 그 형제들에게 상기시켰다.

창 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단순히 약속의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이 요셉의 바람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경우는 그렇게 해달라고 유언을 했고 그의 아들들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장사하였다. 요셉도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의 형들, 그리고 모든 자손들이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굳이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많은 시간이 지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방의 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노예가 되어 이방 왕을 섬기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번성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애굽이라는 당시의 강대국 안에 거주하면서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강하게 성장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출 2:23-25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 그리고 요셉이 말했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실 때”가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출 3장).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리시면서 그 자손들을 “애굽에 있는 내 백성”(출 3:7)이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실 계획을 밝히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이 계획에 애굽의 대항과 그로 인한 심판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애굽을 치실 것으로 그 모든 일을 통해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참 신, 참 하나님이심을 알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지고 계신 계획이었고 출애굽기에 와서 하나님은 그것을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며 약속하시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허무맹랑할 것이다. 사실 애굽 왕 바로가 이 말을 듣고 처음에 보인 반응도 그랬다.

출 5:2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당대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왕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보내달라는 모세의 말은 기가 찼을 것이다. 니가 뭔데, 니가 말하는 여호와라는 신이 뭔데 내가 그렇게 해야되느냐라고 바로는 반응했다. 그 여호와를 나는 모르니 그가 하는 말도 난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의 이 말은 틀린게 없다.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이 후에 이어지는 모든 출애굽 사건의 목적은 사람들도 하여금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출 6: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이스라엘]가 알지라

출 7: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출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바로]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 8:10 그가 이르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바로]가 알게 될 것이라

출 9:14-16 [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바로]가 알게 하리라 [15]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10: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모세, 이스라엘, 그 자손]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결국 이 모든 재앙과 사건을 통하여 바로와 당시의 애굽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는 결국 이스라엘에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 12:31)고 말하게 된다. 여호와를 모르니 보낼 수 없다고 말하던 그가 이제는 여호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제 요셉의 유언에 따라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상징하는 그의 유골을 가지고 낮에는 구름 기둥을 따라 이동하고 밤에는 불 기둥 아래 쉬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조금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든 일들때문에 약간 얼떨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도 정말 하나님을 알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뒤에서 살펴보자.

상황은 다 끝난 것 같았다. 바로는 백기를 들었고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에게서 많은 물품(금, 은, 패물, 옷 등)을 취하여 나왔다. 이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다. 바로가 마음을 바꾼 것이다.

출 14: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시간이 좀 지났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었다. 재앙은 끝났고 지금 자신들이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잘 부려먹던 노예들을 다 그냥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던거지! 그래도 상식적으로 그 동안의 일들을 생각하면 사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들의 굳은 마음은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길을 돌이킨 것(14:2)을 보면서 그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신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여호와는 광야에서는 힘을 못쓰는 그런 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로는 그들이 내보낸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잡아오기 위해 추격대를 보낸다.

출 14:6-7, 9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가장 빠르고 강력한 애굽의 최정예 부대가 이스라엘을 추격해 왔다. 바로 전만 해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영화로 치면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에필로그로 잔잔한 음악이 이어지면서 평온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이어질 그런 상황이었다. 소설로 치면 발단, 전개, 절정을 지나 이제는 결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이 눈 앞에 현실로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때, 그들의 눈 앞에 그들이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바로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다.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

끝인 줄 알았는데 끝나게 생긴 것이다. 결말인 줄 알았는데 절망이었다.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숫자가 많았지만 그냥 숫자만 많았다. 그들은 군대가 아니었다. 바로의 군대가 끌고온 병거는 지금으로 치면 탱크다.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은 보병과 민간인 앞에 탱크 부대가 나타난 상황이다.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 싸울 수 없다. 이길 수 없다. 그럼 도망할 수는 있을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바닷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두려움과 원망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반응을 보라.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상황을 보면 이 정도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이 상황에서 두렵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어지는 이들의 말을 보면 이들은 단순히 두려운 마음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두려움이 이들을 삼켜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이들은 지금의 상황에서 죽음의 두려움, 공포를 느끼고 있다. 지금 여기서 절대로 살아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을거면 그냥 애굽에서 살던대로 살다가 나이 들어 죽으면 되는데, 이렇게 광야까지 나와서 비참하게 죽어야할 이유가 어디있냐고 모세에게 따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전에 그들이 모세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우리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누가 종살이에서 구해달라고 했느냐. 5장에 보면 모세가 처음 바로를 만나고 나서 그들은 오히려 더 학대를 당했고 그로 인해 모세와 아론에게 그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판단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마 그때 이들은 이런 식을 말을 했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은 이후에도 힘든 일을 만날 때 마다 종종 이런 식의 과거미화를 하며 왜 애굽에서 우리를 구해냈느냐는 식의 불평과 원망을 한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에서는 자신들이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떡을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16:3). 물이 없을 때에도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원망한다(17:3). 가나안의 정탐꾼들이 돌아왔을 때도 이들은 애굽에서 죽는게 나았다고 말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폭동을 일으켰다(민 14장).

결국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평안, 안전, 만족,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고 모세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깨뜨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적이고 내가 벗어나야할 상황이었다. 나에게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어려움보다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지금의 이 상황, 애굽의 군대가 그들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난 이 상황은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었을까? 조금 있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뜻밖의 상황, 예상 못한 상황, 내가 원하지 않았던 상황, 흔히 고난, 시련, 어려움이라고 부르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난은 나에게 좋지 않다고 단정짓고 따라서 단순히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그 순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그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원인을 찾아 책임을 묻는다. 어떤 경우는 끊임없는 자책에 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어떤 환경, 다른 사람을 그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다. 때로는 그 대상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하다.

바다를 뒤로 하고 애굽의 군대를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애굽의 군대를 마주하자 심히 두려워했다. 8절 끝에 보면 그들이 나올 때는 담대하게 나왔다. 그때는 그들이 승리를 경험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부르짖은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믿음의 고백은 아니었을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찾듯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아마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섞여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에게 했던 말을 보면, 그들은 모세에게 지금 고난의 모든 책임을 물으며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다.

13장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단지 두려워하고 원망할 뿐이었다. 이 사건 전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그 놀라운 일들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믿는 것이었다. 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있었던 모세는 달랐다.

 

모세의 믿음의 확신

자신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답한다.

출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모세는 정말 연약해 보였다. 뭐 저렇게까지 못하겠다고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세는 전혀 다르다.

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어쩔줄 몰라하는 자들에게 가만히 서라고 한다. 애굽의 강력한 군대를 보고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도전한다. 다시 보지 않을 줄 알았지만 다시 너희 눈 앞에 나타난 이 애굽 사람들을 이제는 정말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확신한다. 너희가 경험할 것은 너희의 죽음이 아니라 너희를 두렵게 하는 이 군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고 너희가 해야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그저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힘을 내서 싸울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모세는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신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그가 경험한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후로 하나님은 그 뜻을 빠짐없이 이루셨고 모세는 그 모든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확신의 근거가 있다.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말씀이다.

출 14: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어떤 일이 어떤 목적으로 벌어질 것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길을 돌이켜 바닷가에 진을 치면 바로는 그들이 광야에 갇혔다고 생각하고 쫓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그의 군대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실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목적은 출애굽 과정에서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것이고 이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래서 온 무리는 “그대로” 행하여 바닷가에 진을 쳤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바로는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자손을 추격하게 했고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그 군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처음에 우리가 살펴봤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바로의 군대가 보이는 순간 이들이 보였어야 할 반응은 두려움과 원망이 아닌 확신과 기쁨이어야 했다. 오히려 반대로 바로의 군대가 보이지 않았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인지 의심했어야 했다. 바로의 군대가 보였기 때문에 이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좀 전에 했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었는가? 괜한 고난이었을까? 이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고통만 가져오는 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하는 일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목적을 가지고 계획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같이 반응하는 것이 맞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속해서 행하실지를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옳다는 것을 다시 확신시켜 주신다.

출 14:15-18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17]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18]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1-4절에서 하셨던 말씀과 같지만 더욱 구체화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어떻게 바로의 군대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실 것인지도 밝히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할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들어가 그곳에서 멸망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이 증명될 것이다.

특히 성경이 반복해서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1번, 4, 6, 7, 9, 17, 18, 23, 24, 25, 26, 28절).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더욱 큰 영광을 얻으시게, 사람들이 살아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이다. 그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더욱 강하신 능력의 하나님으로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보았을 때, 그 강력함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하고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순간 두려움을 느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에 사로잡혀 어쩔줄 몰라하고 원망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이 자신의 안위와 평안, 만족, 기쁨을 최우선에 두지 않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시련 가운데 안심하며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

성경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 결론은 참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되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으로 바다를 건넜고 애굽 군대는 그들을 따라 들어 갔다가 멸망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완악한 마음이다. 그동안 그렇게 당했었고 지금도 바다가 그렇게 갈라지는 것을 보면 정말 안되겠구나하고 도망할 법도 한데 그들은 바다 가운데까지 뛰어들었다. 결국 그들은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도망하려 했지만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병거로 무장한 애굽 군대를 보고 두려워했지만 결국 그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그들의 죽음이었다(30절).

이 사건의 결론으로 모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큰 능력을 보고 경험하자 그분을 믿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으로 15장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 노래의 주제는 11절부터 기록되어 있다.

출 15:11-15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2]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 15: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결론이다. 사람들은 많은 신을 섬기지만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 모든 신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참 신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신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애굽의 왕이든, 그의 군대든, 바다든 마찬가지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믿음이 없는 사람이든 하나님의 주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도전 /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게 되었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애굽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모세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험해도 애굽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능력을 보여주셨고 살아계심을 나타내셨다. 그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고 따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받았다.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통해, 환경을 통해 계속해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편에 서라고 하시는데 거절한다. 만약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면, 성령께서 출애굽기 14장을 통하여 하는 말씀에 귀기울이기를 바란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지만 언젠가 끝난다. 그 때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한다. 늦기 전에 그렇게 해야 한다.








가나안 7족속의 의미

적을 알고 우리 자신의 권세를 알면 적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영적 대적들인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 일곱 족속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그들을 물리치는 능력을 가져야 하겠다.


1. 헷 족속(Hittites) - 공포, 두려움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악몽, 우울증, 거짓, 속이는 것 등으로 영적 두려움 가운데 고통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헷 족속은 B.C. 1600-1700년 사이 족장 시대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가지 그곳에 거주한 종족 중에서도 매우 큰 민족이었다. 광야와 레바논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온 땅이 헷 족속의 영토로 불리웠을 정도다.
또 헷 족속은 히타이트족속들을 말하는데 BC10세기에 일어난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지역의 두려움이 대상이 된 족속이다.

2.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 진흙탕, 혼돈 무질서

진흙탕을 의미하며 혼돈과 무질서로 해석할 수 있다.
기르가스 족속은 우리의 삶에 진흙탕 같이 앞길을 볼 수 없도록 혼돈하고 공허함을 주고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게 얽히게 한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 중에 우선순위를 놓치게 만든다.
성경은 에서를 가르켜 ‘망령된 자’라고 지칭했다.
에서는 장자권의 진가를 모르고 야곱에게 팔았다. 이러한 기르가스의 영을 물리치고 지혜와 분별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아모리 족속(Amorites) - 산중 사람, 교만, 교육(지식, 학문)

산중 사람이라는 뜻으로 교만 또는 교육(지식,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Amorite라는 단어는 ‘자랑하다’, ‘불룩 내밀다’, ‘산을 오르는 자’, ‘교만하게 행동하다’, ‘마음에 교만을 품다’ 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모든 정의들은 다 함께 인본주의적인 자세를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다.
아모리 족속은 교육의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우주적인 인간의 가치와 지식을 최우선시 하는 윤리 철학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에 의해서 강화된다.

4. 가나안 족속(Canaanites) - 낮은 땅, 저주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낮은 자존감, 경제, 저주(가난과 실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그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했기에 고대 세계에서 가나안이라고 하면 곧 ‘상인’을 의미하는 말과도 같았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 이후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흡수됐다.
가나안 족속은 ‘저주’라는 뜻도 있다(창 9:25).

5. 브리스 족속(Perizzites) - 시골 사람, 신경질, 미움, 광활한 평야, 전쟁터

시골사람이라는 뜻으로 신경질, 미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난 무식하다고 하면서 비신앙적인 사람이 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부르심을 받은 무리가 되지 못하게 하고 게으르게 하고 멀리 볼 수 없게 해서 약한 자립심과 존재감을 갖고 있다. 또 브리스는 ‘광할한 평야, 전쟁터’라는 의미도 있는데 혈기와 짜증, 신경질이 미움을 일으킨다.

6. 히위 족속(Hivites)

마음에 속한 축제(예술, 음악, 스포츠, 패션, 오락) 등으로 신념과 이념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면서 기만하고 땅의 것을 즐기게 하는 향략과 쾌락주의로 빠지게 한다.
구체적으로 예술, 음악, 스포츠, 오락 등 사람들이 세상에서 즐기며 깊게 빠지게 되는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

7. 여브스 족속(Jebusites) - 짓밟다, 억압(증오, 원망, 불평)

짓밟다는 뜻으로 억압(증오, 원망, 불평) 그리고 의료계로 해석할 수 있다.
밟히다 혹은 타작마당 등의 뜻을 가진 여부스는 다윗 왕 때 엄청난 전염병 재앙이 임했던 곳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자리가 바로 여부스 족속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죄사함을 받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은혜와 긍휼을 느꼈지만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부정하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면서 말슴과 기도로 장성함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올바른 마음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상 가나안 7족 같은 우리 안의 구습과 욕망을 우리는 타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가나안 7족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죄성을 가르킨다. 7족은 요단을 건너간 이들의 영적 쟁투라는 점에서 우리 기존 신앙인들이 해결해야할 인간 죄성의 쓴 뿌리다. 가나안 7족은 수십년간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성도의 고질적인 죄성으로 이것을 내쫓는 일에 잇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팔레스타인 지도

 

왕의 대로

'왕의 대로'라고 부르는 길 역시 고대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왕의 대로'란 말은 (민 20:17)과 (민 21:22)에 기록된 표현입니다.

(민 20:17)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우리로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나 통과하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공히 마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좌편으로나 우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이름은 왕이 다니는 특별한 길이라기 보다는 '주된 길'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길이 다른 길에 비해 빈번하게 사용된 주도로라는 말입니다.
왕의 대로는 지리적으로 다메섹을 기점으로 해서 아라비아 사막의 경계선에 가까운 트랜스 요르단 고원의 동쪽 가장자리의 길하레셋과 페트라를 지나고, 남북으로 달려 아카바 만의 에일랏에 이르는 국제 간선도로 입니다.
이 길은 사막의 경계 부근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들이 많이 이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국제 교역에 있어서 남 아라비아 국가들의 값진 향료를 수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 이 길은 이스라엘 왕국시대에 남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의 교역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현대에 대한 정의들
   철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를테면  획스터는 현대를 '혼란의 시대'라고,
   소로킨은 '위기의 시대'로,
   오든은 '불안의 시대'로,
   알렉산더는 '불합리의 시대'로,
   괴슬러는 '갈망의 시대'로,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로,
   갤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표현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13일 / 02- 28(수)
출애굽기 13:1-22
찬송 / 221장(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 13:5)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에 이 예식을 지켜.
When the LORD brings you into the land of the Canaanites, Hittites, Amorites, Hivites and Jebusites--the land he swore to your forefathers to give you,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you are to observe this ceremony in this month:

13:1-2. 초태생은 여호와께 바치라
(애굽에서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에 대한 재앙을 잊지 말라는 교훈)

13:3-10. 무교병을 먹으라

13:11-16. 초태생을 바치라
(수컷은 여호와의 몫,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를 삼으라)
13:17-20. 애급에서 탈출(숙곳에서 에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심)
13:21-22.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한글개역성경 인터넷에서 검색한 결과 구약에서만 19회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4, 레위기 1, 신명기 6, 여호수아 1, 예레미야 2, 에스겔 2

《 출3:8,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3, 16:14, 신 6:3, 11:9, 26:9, 26:15, 27:3, 31:20, 수 5:6, 렘 11:5, 32:22, 겔 20:6, 20:15》

성경을 읽으면 ‘좋은 땅’을 설명하는 것임은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땅이고 간에 길바닥에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는 땅은 현실적으로 없고 이스라엘 역사에도 나오지 않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곱의 때에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센’ 이라는 땅에서 목축을 주로 하며 살았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애굽은 비옥한 나일 강 주변으로 해서 농업이 발달 했습니다. 따라서 애굽에 이주하러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100% 목축만 하지는 않고 농사도 지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농사의 여러 일’을 엄하게 시킨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출1:1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도 하고 농사의 여러 일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축과 농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목축을 할 수 있는 드넓은 푸른 목초지와 농사지을 수 있는 자기 소유의 땅을 갖는 것이 환상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소명을 주실 때 바로 이러한 땅을 주시겠다고 설명을 하십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지방의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땅을 준다고 하니까 또, 바로왕의 박해도 있고 하니까 그들이 모세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할 때, 문자 그대로 그 땅에는 젖과 꿀이 땅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땅일까요?

  '젖'은 우유를 생산할 수 있는 양과 염소를 먹일 수 있는 풍성한 초장을 의미하고 또한 성경에서 꿀은 벌꿀 자체를 의미하는 곳은 몇 군데 안 되고(삼손의 이야기 삿 14:8, 요나단 이야기 삼상 14:27, 잠언의 경고 잠 25:16 등에서는 문자 그대로 꿀을 의미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꿀’은 “대추야자 꿀과 같이 단 여름 과실을 생산하는 과실 수” 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많이 쓰입니다.<同旨, 그 말씀, 2008.8. p169>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젖으로 대표되는 목축업과 꿀로 대표되는 농업 - 종 되었던 집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싶고 소망하고 꿈꾸었던 - 을 모두 할 수 있는 풍성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에스겔서 20장 6절은 이를 부연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들을 위하여 찾아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겔 20:6)

 따라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감추어 두었다가 찾아주신 땅이요, 모든 땅 중의 가장 아름다운 땅(겔 20:6)입니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민 35:34)이요, 시내와 분천과 샘이 있는 땅(신 8:7)이요, 광대한 땅(출 3:8)이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신 11:11-12)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적용할 가나안 땅은 어디일까요? 평강과 감사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예수 안에서의 삶이 곧 현재 우리의 가나안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신자만이 찾아 누리는 땅이요, 모든 만족 중에서 가장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아름다운 삶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부족을 쫒아 내야 했듯이 우리들도 끊임없이 내 속에서 올라오는 육신의 일들을 쫒아내며 살아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이 천국의 상징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의 상징이라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싸움을 할리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문화와 싸워야 했고 가나안 종교와 싸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나와야 했으며, '하나님'을 배우고 알기 위해 '광야'를 지나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가나안 족속'과는 싸워서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가나안 땅을 지배하고 있던 세력은 블레셋 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얻고 누리려면 필연적으로 블레셋과 싸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었다고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세상' 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 되는 가치관, 문화, 종교,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 문화, 종교하고 싸워 자신을 주 안에서 지켜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올라오는 육신의 정욕과도 싸워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 가치관, 종교와 육신의 본성은 가나안의 여섯 족속처럼 끊임없이 신자를 공격해 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을 받아 거듭났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 위한 싸움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고 불신자들은 이 싸움이 아예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컨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만사형통, 승승장구하는 땅이 아니며 고통과 질고가 없는 땅이 아닙니다. '산과 골짜기가 있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신11:11)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이 요구되는 땅이며, 그래서 날마다 하늘(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땅이며, 유혹하는 세상과 자신에게 있는 정욕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야 하는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물리적으로 그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아니고, 토양이 매우 기름져서 농사짓기 아주 좋은 땅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고, 간섭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세상 복을 받고 고통도 없고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誤算)이며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들은 오직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닮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기도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며,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김으로 승리의 기쁨이 늘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의미(신명기 11:8-12)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대부분의 신자들, 아니 많은 목회자들마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란 당시로선 일용하는 필수 식품이 아니라 기호 식품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스런 식품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아주 풍요로운 땅으로 쉽게 단정짓고는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전보다 생활 형편이 훨씬 나아지는 축복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해석이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멉니다.

많이 생산된다는 의미로 "흐른다"라고 표현했듯이 가나안 땅의 주산물은 물론 젖과 꿀입니다만 땅 자체가 풍요롭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젖과 꿀이 주산품이라는 것은 목축과 양봉이 주산업이라는 의미인데 곡물을 심을 수없는 아주 척박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아리조나 사막 지역에 가보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보호 구역이 곳곳에 있는데 너무 덥고 메마른 모래 땅이라 염소와 꿀벌을 치고 토산품을 만들어 파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바로 그런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 흐르다(2100) 주브(zûwb)  זוּב    

1. 흐르다.   2. 시 78:20.  레 15:25.
발음 [ zûwb ]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젖과 꿀, 풍부함을 뜻함] 출 3:8, 13:5,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4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땅이 풍요롭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젖을 생산할 수 있고 양봉만 할 수 있는 척박한 땅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흐른다(주브.
zûwb.  זוּב)'라는 동사는 "생산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습니까?
"파종한 후에 채소 밭에 발로 물대기"를 할 수 있는 애굽 땅과 비교했습니다.
수차(水車)를 발로 저어 물을 댈 수 있는 비옥한 평지라 채소나 곡물을 심기만 하면 풍족하게 수확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합니다.
우선 채소와 곡물을 심을만한 평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간혹 내리는 비가 대지를 적실 정도가 안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일용할 주 식품인 곡물과 채소를 경작할만한 여건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젖과 꿀을 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기호 식품은 양으로 따지면 조금만 생산해도 사실은 아주 많은 양이 됩니다.
기호식품이란 주 식품에 첨가해서 아주 적은 양을 섭취하는 것이고 또 매일 젖과 꿀만 먹고 살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쌀 수십만 톤과  꿀 1 톤이 먹일 수있는 사람 수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당시의 경제적 형편과 식생활 습관을 감안하면 젖과 꿀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최고급 식품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흐르는"이란 표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도저히 사람이 살 데가 못되는 땅이 가나안입니다.

신자가 관심을 쏟아야 할 부분은 "왜 그런 척박한 땅을 하나님은 오히려 축복의 땅이라고 약속하셨고 또 그 크고도 수많은 희생들을 거쳐서야 인도하셨는가?" 입니다.

애굽의 종살이 사백년과 가데스 바네야와 광야에서의 온갖 반역으로 인해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지 않습니까?
그 중에 모세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 해답을 본문이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歲初-신년초)부터 세말(歲末-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척박하여 산물이 희귀한 땅이라 오히려 하나님이 일년 365일 한 시도 떠나지 않고 항상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땅을 당신의 백성에게 권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여건이 풍족한 곳이 아니라 정반대의 땅으로 당신의 자녀들이 들어가 살기를 하나님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에 세상 수단에 절대 의지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계명대로만 살아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선정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백성으로 선정한 이유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해주는 백성들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한 마디로 신자가 되었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는 주위 여건이 어떠하든 삶의 세밀한 구석부터 전 인생을 걸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의존하여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 돈의 많고 적음이나, 사람들의 칭찬이나 멸시와, 환경의 풍족함이나 궁핍함에 굴복하지 않고 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신 8:3).

또 그렇게 살면 젖과 꿀은 커녕 마실  물마저 없는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방황해도 주리거나 갈하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으며 발이 부릍지 않게 해줄 하나님이 세초부터 세말까지 항상 우리를 지켜봐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참 정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선 젖과 꿀을 싫컷 맛보았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젖과 꿀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40년간 방황하던 광야가 오히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발로 물 대는 애굽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탐심을 좇아 살고 있습니까?(골 3:5)
진정한 젖과 꿀을 사모하기에 땅이 물을 흡수하는 험한 산과 골짜기에서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을 잡고 따라 가고 있습니까?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광야에서 본 가나안

신명기가 기록된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나안 동편이 광야이기에 이스라엘이 차지한 길르앗과 골란보다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할까?
그동안 걸었던 광야보다 가나안이 상대적으로 더 기름지다는 뜻일 수 있다.
요단 동편에서 볼 때 가나안은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풍으로 이슬을 공급받는다.
이슬은 밤마다 땅을 촉촉이 적시며, 겨울에는 농사가, 여름에는 목축이 가능한 땅으로 만든다.
겨울, 우기에 지중해 구름이 가나안산지에 부딪혀 내리는 비는 서쪽으로 흐르며 숲을 만들어 계단식 농법을 사용한 풍요로운 농사를 짓게 한다. 동쪽으로 흩뿌리고 지나가는 비는 유다광야에 초지를 형성해, 겨울에는 푸른 풀을 공급하고, 여름에는 건초로 목축을 하게 한다.

목축과 과일 농사에 적합한 땅
‘젖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은 가나안이 목축에 적합한 땅이라는 의미다.
가나안은 건조한 날씨에 적당한 수의 양 떼를 키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젖을 얻기 적절하다.

또한 ‘꿀이 흐르는 땅’이란 골짜기에 숨은 샘 곁에서 자라는 과실수의 열매를 말한다.
가나안의 여름은 가혹할 만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겨울에 내린 물을 품는 석회암층은 여름에 샘물을 꾸준히 공급해, 골짜기든 산지에 시내와 샘이 흐르게 하며(신 8:7), 과실수에 수분을 공급해 따가운 햇볕에 과일의 당도를 최고로 높인다.

신명기 8장에 나오는 7대 식물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이 과일이며, 대추야자 열매다말(Tamar)을 의미한다(신 8:8).
이스라엘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는 세계 최고의 당도를 자랑한다.
즉, 농업적으로 봤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은 적당한 목축에 적합한 땅이요, 당도 높은 과일 농사에도 적합한 땅이다.
그래서인지 현대 이스라엘의 주력 산업도 농업이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기후나 주변 상황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살 수 있는 땅이다.
왜냐하면 항시 흐르는 요단강이 있지만 낮은 곳에 있어 사용할 수가 없고, 농사를 지으려면 비가 내려야 한다.
서쪽으로는 베니게와 블레셋, 동쪽으로는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심지어 광야의 미디안과 아말렉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추수기만 되면 침략해 왔다.

또한 거대 문명이 위치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가 이집트로 가려고 쳐들어왔고, 이집트도 북진 정책을 쓸 때는 가나안을 교두보로 삼았다.
전쟁이 많고, 사망의 그늘진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말씀에 순종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기근과 강대국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은 곡물을 심을 수 없는 척박한 땅,
그러나 건조한 날씨에 양떼를 키울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젖을 얻기 적절했다.
또 골짜기에 숨은 샘 곁에서 자라는 과실수는 단맛이 강하다.
지금도 이 지역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는 당도가 높다.
비록 농사는 못짓지만 하나님이 일년 365일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켜 보호해 주시는 땅이라고도 해석된다.

가나안은 시나이 반도와 아나폴리아 사이에 있는 해안 지역을 가리키는 옛지명으로 오늘날 레반트 지역에 속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북부, 시리아 일부 지역이다.

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 요즘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이 되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이 시작이다.
이 전쟁으로 서안지구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1993년 오슬로협정으로 반환, 팔레스타인 자치구), 시나이반도(1982년 평화협정으로 이집트 반환), 골란고원 등을 전리품으로 챙긴 후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했다.

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연합군(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모두 이스라엘에 패한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국경선은 더욱 견고해졌다.
강한 지도자가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 신세로 떨어졌다.

1987년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으나 2006년 총선이후 가자는 강경파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West Bank)지구는 온건파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권력 상태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방(미국, 유럽, 이스라엘)대 이슬람문화권(아랍 및 페르시아계, 파키스탄)의 군사적 대립의 근원이자 테러 분쟁 핵심지라 할 수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본토를 기습폭격,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질을 납치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전면봉쇄하고 대규모 보복공습을 했다.
이스라엘측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은 갓난아기와 여성들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테러리스트이고 팔레스타인측에서 보면 땅과 종교적 상징을 빼앗아가는 점령자이다.

중동의 전쟁은 전세계에도 영향을 미쳐 각국마다 이스라엘 지지와 팔레스타인 지지로 분열되고 있다.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사는 뉴욕도 긴장하고 있다.
8일 타임스 스퀘어에서 이스라엘 지지시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지시위가 맞서며 경찰이 출동했었다.
지난 10일부터 유대교 회랑과 이슬람교 사원 인근에 대한 순찰도 강화되었다.

기원전 1,800년 경에 헤브론에 살았다고 알려진 아브라함(아랍어로 이브라힘)은 아랍과 유대 민족의 시조이다.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첫째 부인 사라의 아들 이삭의 후손, 아랍민족은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샬롬(shanlom)’은 안녕하세요, 잘가세요라는 일반적 인사로 평화, 평강, 평안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 인사말로 ‘샬람, 알레이 쿰’은 ‘당신의 평화를 빈다’이다.
샬롬과 샬람은 비슷한 발음으로 모두 ‘평화’ 라는 뜻이다.
그런데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한 형제의 후손들이 죽으라고 싸우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우도 아니고 극좌도 아니고 중도의 목소리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목소리는 권력욕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더 이상은 ‘피가 피를 부르는’ 확전은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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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 12 일 / 02- 27(화)
출애굽기 12:1-51
찬송 / 장(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유월절(출애굽기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This is how you are to eat it: with your cloak tucked into your belt, your sandals on your feet and your staff in your hand. Eat it in haste; it is the LORD's Passover.

유월절(逾越節)이란 한자는 "넘을 유(逾), 넘을 월(越), 마디 절(節)"
영어로는 "Pass Over" 라고 합니다.
유월절은 히브리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시작을 말합니다.

유월절(페사흐) [ peçach ]  פֶּסַח 스트롱번호 6453

1. 형벌과 재난으로부터의 면제.  2. 유월절의 어린 양. 3. 유월절
발음 [ peçach ]
어원 / 645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뜻풀이부
1. 고유명사, 남성 형벌과 재난으로부터의 면제
 a. 고유명사, 남성 유월절의 어린 양[백성들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쳐지는 희생 제물], 출 12:48, 12:21, 27, 대하 30:15, 17, 35:1,6,  민9:4, 대하 30:18
 b. 고유명사, 남성 유월절[니산월의 제14일 : 무교절의 7일 이후에 곧바로 이어지는 날], 레 23:5.

12:1-13, 유월절 지침
12:14-20, 무교절 지침
 누룩이 없는 빵(누룩은 부정한 것, 죄악을 상징)
12:21-28, 유월절 지침(현관문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12:29-30, 멸하는 자(죽음의 천사)
12:31-36, 은금의복을 준비
12:37-51, 이집트를 떠나는 이스라엘
  42절 이하 이방인, 일군들이 유월절 지키는 규례, 양고기의 뼈를 꺾지 말라





허리에 띠를 띠고... 급히 먹으라
-
마치 출정하는 군인들의 그것처럼 긴장이 감도는 지시이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 출애굽하라는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만반의 여행 준비를 갖추고 모든 행동을 재빨리 시행해야 했다. 실로 이 지시는 430년간 기다렸던 출애굽이 이제 목전에 다가왔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여기서 '급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파존'은 '도망하다'는 뜻의 '히파드'에서 온 말로서 도망치듯 서두르는 것을 뜻한다.
한편 하나님께서 이렇게 급히 먹도록 하신 이유는 그들이 당시 그토록 급하게 구출된 것이 오직 주의 은총 때문이었음을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지금까지 지시한 모든 내용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특별히 제정하신 유월절이었다.
따라서 너희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 식사에 임하라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유월절'(페사흐)이란 문자적으로 '넘어간다'(Passover)는 뜻으로서, 즉 여호와께서 애굽을 심판하시던 날 밤, 죽음의 천사가 피 묻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지나쳐 넘어간 사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면서 부터 준행해야 할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인과 애굽인(이방인) 사이를 구별하여 축복과 저주, 생명과 죽음의 대조적인 일을 행하신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기념하는 절기인 동시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레위기 서론, 히브리 절기와 축제>. 또한 이는 오순절, 장막절과 함께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民族)이 이집트에서 탈출(脫出)한 일을 기념(紀念ㆍ記念)하는 유대교(Judea敎)의 축제일(祝祭日).
하늘의 천사(天使)가 밤중에 이집트의 각 집의 맏아들을 죽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어린양(羊)의 피를 문설주(門楔柱)에 발랐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서 재앙(災殃)을 받지 않은 일을 기념(紀念ㆍ記念)한 데서 유래(由來)한다."고 합니다.

유월절의 교훈은 어린 양의 피를 히브리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 바르고 초태생의 죽음이란 재앙을 넘어간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섭리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새해는 한해의 새로운 시작인 것처럼 유월절은 히브리 민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넘어가는 그날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왜면하고 살아오셨나요?

아직도 보혈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시고 계시다면 주의 성령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보혈에 의해서 바뀐 인생은 더이상 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은 모두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여호와의 유월절과 같은 새로운 출발을 경험하는 은혜가 넘쳐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의 보혈은














The Lords Passover (여호와의 유월절)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갈 때
하늘로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이곳을 덮으소서
이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내 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The Lords Passover (여호와의 유월절)

In to the highest place of all
In to the most holy place I come
Taking off my worldly shoes
I fall before throne just as I am
When all of my love for me and all of my for you are dying
Down to this very plave Oh Lord, Comes heaven's Ta ber na cle
Cover me with Your blood Changer me with Your blood
All of my broken hopes in me will be restored in my God
Pass by me Oh my Lord Lay your hands Oh my Lord
All of my dying worship for
You will be revived in my God


여호와의 유월절


이 재앙은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중에 마지막 재앙이자 가장 큰 재앙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생명을 누가 손에 쥐고 있는가 심판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혼은 구원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보여주기도 합니다.
Exodus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왕의 장자부터 - 가축의 처음 난 것 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유추해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눈에는 그 강대한 바로의 장자도 귀족들의 장자도 서민들의 장자도 가축의 처음 난 것도 높낮이가 없습니다. 그사람이 착하든지 나쁘든지 천하든지 귀하든지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재앙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통해 여호와의 사자는 집을 넘어갔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두어서 하나님의 재앙에서 넘어갈 수 있었어요.
유월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할때 보는 단 한가지는 그 사람의 성품도 아니였고요 그사람의 생김세도 그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도 아니었어요.
단 한가지를 봤습니다.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러져 있었는가 아닌가
이게 중요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가 아닌가
그럼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나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성품 때문에 우리의 행동 때문에 우리의 지위 때문에 우리의 힘 때문에 우리의 돈 때문에 우리에게 닥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단 한가지 어린양의 피로 우리가 살아가는지 그것 하나만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그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그런 여러분들께 이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나요?
그럼 우리에게 어린양의 피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누구의 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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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유월절의 어린양되시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피를 통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몇주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이런 배움은 결국 우리가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 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선제적으로 배워야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말이죠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면 우리를 구원할 분이 왜 필요하겠나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왜 복음인가 왜 복된 소식인가 이 이 이해의 바탕은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가르침 만으로 우리의 죄가 고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이 여러분의 귀를 여시고 여러분의 눈을 여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듣고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 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깨닫는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이 사랑은 간단한게 아닙니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모두에게 당연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라고 고백되어 나오는 그 탄식과 부르짖음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요
그 회개를 들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 일들은 단순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는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복음이 되는 이유는 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이 백성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심판을 확정짓는 마지막 한방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 마저 죽였다’는 사건으로 들어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여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지만 인간은 그 마저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이게 된 겁니다.
이제 그 어떤 사람도 이 죄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변명거리가 있었어요 율법을 잘 지켰다고 변명하였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갔다고 변명하였고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이 딱 세워지고 나서부터는 더이상 변명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앞장 섰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힘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에 자손이라고 부르던 민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자고 동의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죄에서 더이상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적인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반대로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제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이 남아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을 통해 믿게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 살아납니다.
그 차이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걸 가르는 거에요.
유월절의 교훈은 여기 있습니다. 새해는 한해의 새로운 시작이듯이 유월절은 민족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고 넘어가는 그날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시기를 원하고 바라시나요? 아니면 십자가를 왜면한체 살고 계신가요.
여러분 아직도 보혈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시고 계시다면 주의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십자가의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계시다면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바꾸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보혈에 의해서 바뀐 인생은 더이상 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죄가 나오지 못한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시선이 행동이 일들이 이제 모두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월절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백성들을 넘어간 날이라고 배웠습니다. 또 그 백성들을 구분하는 방법이 행위도 신분도 성품도 아닌 오직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의 피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라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한번 배웠습니다.
여러분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의 그 희생을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주간도 믿음의 눈을 들어 그 십자가를 붙잡고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시작되는 한주간을 오직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 11 일 / 02- 26(월)
출애굽기 11:1-10
찬송 / 192장(양원히 죽게 될 내 영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지 재앙(출애굽기 1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가지 재앙을 바로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찌라 그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 내리니.
Now the LORD had said to Moses, "I will bring one more plague on Pharaoh and on Egypt. After that, he will let you go from here, and when he does, he will drive you out completely.

이제까지 애급 땅에 내려진 재앙은 아홉 가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여 재앙을 한 번 더 내려야 애굽의 왕과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히브리 백성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까요?
이러한 과정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애굽에 대한 마지막 재앙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 대한 재앙은, 애굽의 왕궁에서부터 일반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의 기초를 흔드는 재앙입니다. 장자는 그 집안의 기둥이며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찬송 : 새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성경 : 출애굽기 11장 1절-10절
설교 : 세상이 위대하게 보는 성도
우리 마음 속에는 두려워 하는 존재가 하나씩 이상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지금은 괜찮지만 결혼하기 전까지는 주사 바늘을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네 병원에서 주사 바늘 쇼크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가느다란 주사 바늘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두려워하는 것 혹은 두려운 존재가 있습니까?
지금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들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들은 애굽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았고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운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집안의 힘의 근원이 되는 "장자" 즉 "상속자"가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장자로부터 집에서 키우는 가축의 첫째까지 하나도 예외 없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애굽 사람들은 공포를 넘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백성은 은혜를



חֵן 스트롱번호2580

1. 자비.   2. 품위. 3. 탄원
발음 [ chê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자비, 호의, 선의, 창6:8, 19:19,32:6(5), 33:8, 30:27, 47:29, 50:4, 출3:21, 11:3, 12:36, 전9:11
2. 명사, 남성 품위, 아름다움, 우아함, 잠22:11, 31:30, 전10:12.
3. 명사, 남성 탄원, 기원, 기도, 슥12:10.​

모세가 위대하게 보이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인 모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더 이상 애굽의 왕 바로가 두려운 존재나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모세가 두려운 존재요 위대한 존재로 보였습니다.
출애굽기 11: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위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돌"(גדל)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크기나 숫자, 효과 등에 있어서 "매우 큰" 것을 의미합니다. 혹은 명성이 있거나 많은 물질을 가진 것처럼 부유해 보이거나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미디안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애굽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높은 지위도 많은 재산도 대단한 명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는 모세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위대하게 보였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왜 모세가 애굽 사람들의 눈에 두려운 존재, 모든 것을 다 가진 위대한 존재로 보였을까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겨졌던 바로는 무능력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는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되었습니다. 지금껏 아홉 개의 재앙 모두 모세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장 두려운 열 번째 재앙에 대해 경고하였으니, 곧 모세의 말대로 될 것이라고 애굽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모세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기에, 애굽 사람들은 모세를 두려워하고 위대하게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베드로와 함께 하실 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 있었던 놀라운 일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의 요셉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형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사람이며, 흘러 흘러 애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나이도 어린데 노예가 된 요셉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였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인정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간수장이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3절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음을 보디발이 보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창세기 39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예의 신분, 죄수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는 상황이 역전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5장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억해 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거짓말을 하였지만, 베드로는 성령께서 말씀하심을 듣고서, 책망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믿지 않는 자들까지 베드로와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 하였다라고 사도행전 5장 1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능력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위대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11:7. 구별하는

פָּלָה 스트롱번호 6395

1. 분리하다.  2. 니팔형 : 분리되다.  3. 히필형
발음 [ pâl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지만 다시 주님의 이름으로 각자의 처소에서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게 하시고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시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내 힘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주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오늘 우리의 하루는 형통할 것이며, 위대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모든 것을 다 가진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강한 용사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오늘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오늘도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연약한 나와 함께 하시며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세상의 유혹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은 처음부터 무서운 재앙으로 단번에 바로를 굴복시키지 않고 10번째의 재앙까지 힘들게 끌고 오셨을까요?
살면서 계속되는 수많은 문제를 이겨낼 수 있도록 참고 인내하는 능력과 권세를 키워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상 참고 인내하는 능력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왜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도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약할 때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으면 하나님께 더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사람이 더 감사를 안 합니다.
사람은 감사할 것이 많으면 더 감사를 모릅니다.
대개 보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헌금도 부자들은 잘 하지 않습니다.
봉사도 시간이 많은 사람이 봉사하지 않고 대개 바쁜 사람들이 봉사합니다.
믿음생활도 고난과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잘 믿고 결국 큰일을 합니다.

때로 고난도 겪어보아야 건강에 대한 고마움, 축복에 대한 고마움, 부모와 교회와 이웃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성도도 고난 중에 참고 인내하는 훈련을 이겨내야 진짜 훌륭한 성도가 됩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잘 활용하면 좋은 것이 남지만 물질과 명예와 인기가 찾아오면 대개 믿음을 비롯해서 더 좋은 것을 뺏깁니다.

사람들은 잘 입고, 잘 먹고,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돈이 많을수록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고, 해도 많고, 나쁜 것도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문제를 오히려 감사하며 인내하십시오. 자녀들이 고생 없이 자라야 큰일을 할 것 같지만 사실상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녀가 고생할 때 너무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되고, 인물이 되고, 좋은 교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기를 때 강하게 기르려고 어려운 난관도 계속 지나게 하십니다.
이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주는 사람에게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보면 고난을 주는 사람은 오히려 천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은 사람 만들려고 그를 보낸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마귀가 아닌 천사로 보시고 그 천사와도 잘 지내십시오. 참된 능력은 잘살고, 힘 있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잘 참아내는 것입니다.





1. 애굽왕 바로가 아홉 가지의 재앙을 당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한 가지 재앙만 더 애굽에 내리게 되면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1절).

이 말씀은 지금까지 애굽에 내린 아홉 가지의 재앙들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졌음과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내려지면 바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임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미리 정하시고, 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세상 역사는 어느 뛰어난 영웅적 인물이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 속에서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이루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러한 역사의 주체자로서의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온다 할지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와의 힘들고 지루한 싸움에서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2. 그리고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2절).

물론,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 패물을 순순히 내어줄 것을 전제한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애굽 사람들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은금 패물을 다 내어줍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준 이유는 재앙의 원인이 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속히 내보내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세기 15:16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서 은금 패물을 취함으로 그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며 착취당한 것에 대하여 일순간에 보상받게 된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착취당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수고를 다 기억하고 계셨다가 그들이 출애굽 할 때에 애굽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고를 다 보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수고를 다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조금도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다 기억하시고 언젠가는 다 갚아 주심으로 그 모든 수고와 고통을 잊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창 41:51).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친히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하늘 영광으로 덧입혀 주심으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흘린 눈물과 수고를 완전히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계 21:4).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고를 하고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을 믿으며 끝까지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애굽왕 바로의 장자로부터 천한 일을 하는 여종의 장자까지, 그리고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이것은 생명이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피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애굽인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권력이 없는 자나, 지식이 있는 자나 지식이 없는 자나 누구나, 그들에게 속한 모든 가축들까지도 다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피할 수 없었습니다(12:29.30).

고대 세계에서 장자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애굽에 임한 장자 재앙은 모든 애굽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애굽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7절).

여기서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말은 ‘개도 짖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개는 주변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민감하게 반응하며 짖어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가 짖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주하는 곳에는 이전과 다름없이 지극히 평안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애굽인들의 거주지에는 모든 가정의 장자가 죽어감으로 대 혼란과 통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진영에서는 개도 짖지 않았으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얼마나 완벽한 것이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요한계시록에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 때에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완벽하게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계 9:4, 13:8, 16:15).

사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임할 각종 재앙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과연 우리가 그러한 심판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3:18).

여러분, 마지막 심판 때의 심판 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벽하게 보호받은 것과 같이 장차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 그날에도 완벽하게 보호를 받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애굽 왕 바로는 아홉 가지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장자 재앙이라는 무서운 심판의 경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자 재앙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끝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마침내는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심판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심판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하여 분명한 최후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마음을 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구원하시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심판하여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애굽 왕 바로는 그 마음이 강퍅해서 아홉 번이나 되는 경고를 받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할 사람들도 이와 같음을 알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금패물을 주신 것을 통해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 잃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시내산 언약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머무르는 동안,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여러 율례를 주시면서 맺은 언약입니다(출 24:1-8).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서 단을 쌓고, 희생의 피 반(半)을 뿌린 후, 시내산에서 받은 말씀을 기록한 ‘언약서’(the book of the covenant)를 백성 앞에서 낭독하여 들려주었습니다(출 24:4-7).
이에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백성에게 피를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라고 선포함으로, 마침내 시내산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출 24:7-8).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 초기에 광야 1세대와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 말기에 41번째로 진을 친 모압 평지에서(신 29장) 광야 2세대에게 다시 확증되었습니다(일명 ‘모압 평지 언약’).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과 횃불 언약을 맺은 이후 계속되어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갱신하여,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언약입니다.

1. ‘나라’를 대상으로 한 언약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지 45일째 되던 날에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진 친 다음(출 19:1-2),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시내산에서 부르실 때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출 19: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한 사람에서 시작되어 한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이제는 한 국가(백성 전체)를 중심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특히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때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운 것은, 언약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임을 보여 줍니다(출 24:4).

1) 이스라엘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시내산 언약의 핵심을 담고 있는 십계명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이스라엘의 과거가 비참한 노예에 불과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해 주실 때, 이스라엘은 그에 합당한 수고도 없었고 의로움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참고-신 7:7, 9:4-6).
출애굽은 참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참고-겔 16:1-14).

우리도 죄와 사망의 권에 아래 영원한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였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허락받고(요일 2:25), 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자격을 부여 받았습니다(롬 8:15, 갈 4:6).
이는 자격을 따지지 않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엡 2:4-8).

2)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성취되어 세워진 큰 나라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 2:24을 볼 때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맺어진 언약입니다(출 6:5).
출애굽 역사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언약의 성취였던 것입니다(신 9:5).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말씀대로 “큰 민족”(창 12:2)이 되었습니다(출 1:7, 9).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대로 “강대한 나라”(창 18:18)가 되었습니다(출 1:9).
더 이상 나약한 노예 민족이 아니라 ‘항오를 이루며 행진하는 여호와의 군대’ 곧 당당한 정복자로 성장한 것입니다(출 12:41, 13:18, 민 33:1).

2. 하나님께서 직접 전 백성에게 음성으로 들려 주신 언약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전 백성에게 직접 선포하신 언약입니다(출 20:1-19, 신 5:4, 23-24).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백성이 없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생존한 국민은 없었습니다(참고-출 20:19, 신 5:25, 18:16, 히 12:18-20).
이러한 언약은 인류의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최초의 언약이었습니다(신 4:8, 32-33, 시 147:19-20).

3. 기록으로 구체화된 최초의 언약

시내산 언약의 뚜렷한 특징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기록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새겨졌습니다(출 31:18). 하나님께서 친수로 기록하셨다고 한 것은(신 9:10) 그만큼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증거의 두 돌판을 하나님께 받아 내려올 때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였습니다(출 32:1-6). 이에 모세는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고(출 32:19), 방자한 백성 가운데 삼천 명 가량을 도륙한 후에(출 32:25-28), 모세는 다시 시내산으로 올라가 40일 중보기도를 올렸고, 산 밑으로 내려와 회막에서 또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후 모세가 깎아서 시내산으로 가지고 올라간 돌판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다시 친수로 기록해 주셨습니다(출 34:1, 28).


하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율례를 주셨습니다(출 20:22-23:33). 이는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는데(출 24:4, 7),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서에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그 분량이 많은 것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큰 은혜입니다(참고-호 8:12). 하나님의 언약이 돌판에 새겨지고 언약서에 기록되었다 함은, 그 언약이 만대까지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참고-사 30:1-8).

4. 언약의 땅에서 지킬 실천적 언약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화되는 것은, 이제 가나안 입성이 임박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언약을 체결하기 전 하나님께서는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3:20, 30).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언약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1) 약속의 땅
가나안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서 약속된 땅입니다(창 12:7, 13:14-17, 15:7, 18-21, 17:8). 가나안 땅이 ‘열조에게 언약을 주신 땅’이라는 사실은, 신구약 성경에서 각 시대마다 거듭거듭 기록되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이 임박한 상왕에서 받은 시내산 언약은 실제 가나안 땅에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 가운데 출애굽기 23:10-33에서는 그 땅에서 지킬 안식년과 안식일(10-13절), 3대 절기(14-19절),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규례(20-33절)를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한편,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을 통해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반드시 지키고 행해야 되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신 4:1, 5, 13-14, 5:31, 6:1). 그 복된 언약의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모든 일에 풍요롭고 형통하도록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신 6:18-19, 7:12-14, 8:1, 9:1, 11:9 등).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는 약속의 땅에서 풍요로운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하고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방 사람과 결혼하거나 우상 숭배에 빠지면 그들을 토해 버리는 땅이기 때문입니다(레 18:24-28, 20:22).

2) 왕벌을 통한 땅의 정복(하나님의 주권 역사)
약속의 땅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입니다(출 29:45-46). 특히 광야와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이었던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함께하신다’는 외적인 표였습니다(출 25:22, 29:42-4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키면 그 땅의 정복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출 34:11, 레 25:18, 신 7:1, 8:1). 가나안 땅 정복은 결코 칼이나 활로 한 것이 아니라, 시내산 언약에서 약속해 주신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왕벌을 통해 이루어 주셨습니다(참고-신 7:20, 수 24:12). 특히 가나안 7족속 중에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 족속(히위, 가나안, 헷)을 멸할 때, 왕벌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출 23:28). 왕벌은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침을 쏘아 한 방에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공포의 벌입니다. 그 왕벌을 보내셔서 적들 가운데 문을 잠그고 숨어서 남아 있는 자까지 쫓아 들어가서 기어이 다 죽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신 7:20-24). 신명기에는 왕벌의 역사로 아모리 왕 시혼, 바산 왕 옥을 패배시킨 일이 자주 언급되었습니다(신 1:4, 2:26-35, 4:46-47, 29:7, 31:4).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하여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약속의 하나님은 언제든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미쁘신 분입니다(고후 1:18, 20, 히 10:23, 11:11). ‘미쁘시다’ 함은, 믿음직하고 결코 꾸밈이나 거짓이 없다는 의미이며(신 7:9, 사 49:7), 이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살전 5:24, 살후 3:3, 딤후 2:13, 요일 1:9). 하나님의 미쁘심은 영원히 폐할 수 없습니다(롬 3:3). 하나님의 미쁘심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소망입니다.




출애굽 열가지 재앙에 담긴 신학적 의미

출애굽기는 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이야기로, 열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나오는데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에 이 열가지 재앙이 없었다면, 애굽의 바로가 바로 국가 노동력의 원천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열 재앙은 출애굽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열가지 재앙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열가지 재앙에 담긴 신학적 의미]

1. 열가지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을 벌하신 사건이다.

열가지 재앙에 등장하는 생물들은 하나같이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었습니다. 

민수기 33:4,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 벌을 주셨더라.

  애굽의 신들에 대한 심판을 위해 재앙 내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전까지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몰랐지만, 열가지 재앙을 겪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보다 우월한 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2.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었다. 

  열가지 재앙은 마술도 아니고, 자연재해도 아니고,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이적이다. 이 일을 보면서 애굽 사라들도 하나님을 알아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알아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열가지 재앙은 하나님 스스로가 나타내 보이신 신존재 증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열가지 재앙이다. 출애굽기 7장 5절은 열가지 재앙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애굽을 향하여 내린 재앙이기 때문에, 열가지 재앙이 애굽을 향하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학습하게 되었을 것이다. 열가지 재앙은 분명 애굽의 바로와 애굽을 향한 재앙이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신 사건이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으로 여겨야 그들을 놓아 줄 수 있듯이 이스라엘도 비록 노예였지만 생활의 기반을 모두 버려두고 광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모세 만 믿고 따라 나서기에는 무리수로 여겼을 것이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광야로 나가라' 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의미에서 어쩌면 지금 애굽 사람들보다 하나님께서 참 신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지금의 열가지 재앙의 중요한 효과는 애굽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면서 조상으로부터 들은 하나님이 전부였겠지만, 열 가지 재앙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이스라엘은 확신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에 출애굽 여정을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재앙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열가지 재앙을 보여주시면서 한결같이 하신 말씀은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것이니라." 이다. 열가지 재앙 내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은 내 백성임을 선포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열가지 재앙은 구별이라는 의미 또한 있다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바로야 이 백성은 네것이 아니다. 내 백성이다. 보내라~" 그러므로,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볼 수 있다. 

5. 열가지 재앙은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복음 자체는 모두가 믿거나, 모두 믿지 않고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심판적  의미가 있다. 마찬가지로 열가지 재앙이 일어나는 애굽에서도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러기에 열가지 재앙에는 구원의 의미가 있다할 수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로 지킨다.

  첫번째 재앙은 나일강물을 피로 바꾸신 이적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재앙인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한 재앙에서도 피가 등장한다. 장자들을 살해하실 때,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한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이 넘어가고 피가 발라지지 않은 집에서는 재앙이 임하게 된다. 그러기에 열가지 재앙은 구원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애굽에서 탈출한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으로, 이 예표는 신약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열가지 재앙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열가지 재앙이 끔찍한 사건이고, 없어야 할 사건을오만 받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단히 심오한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 담겨 있는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볼 것이다. 

  출애굽기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이 재앙의 목적은 분명하다.
애굽의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나일강을 숭배하듯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이것이 첫번째 재앙의 목적이다.
단순히 이 재앙은 애굽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백성으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하는 것에 있다.

10가지 재앙이 미래에 닥칠 대환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야곱의 대환란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전에 파라오에게 겪었던 것처럼 혹독한 압박과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사 60:14,렘 30:5-8).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음성을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렘 31:18-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에게 ‘그들을 가게 하라’ 명하실 것입니다(사 43: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할 것이요, 남쪽에게 이르기를, 붙잡아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하리니](사 43:6).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주셨듯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두 증인을 주실 것입니다(계 11:3-6).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하여 이적을 일으켰듯이 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들은 이적을 일으켜서 온 세상을 미혹할 것입니다(계 13:13-15).

1. 하나님은 세상에 전무후무한 강한 재앙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렘 25:15-16).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내게 이같이 이르시되, / 너는 /  내 손에서 이 격노의 포도즙 잔을 가져다가 내가 너를 보내어 / 경고한/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움직이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가운데 칼을 보내었음이니라, 하시기에](렘 25:15-16).

2.  하나님은 이 재앙의 심판 가운데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계7:4, 12:6, 14-16).

3. 물은 다시 피로 변할 것입니다(계 8:8, 16:4, 5).

4.사탄의 개구리들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계 16:13).

5. 메뚜기의 역병이 다시 보내질 것입니다(계 9:2-11).

6. 하나님은 다시 종기를 보내십니다(계 16:2).

7. 끔찍한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입니다(계 8:7).
   흑암이 세상을 덮칠 것입니다(계 16:10).

8. 파라오가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듯이 악인들 역시 회개하지 않고 더욱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입니다(계 9:20-21).

9.이집트의 장자들이 모두 죽었듯이 대환란 때 역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계 9:15).

10.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듯이 대환란을 통과해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슥 14:3, 4; 롬 11:26).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종말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훈계하기 위하여 본보기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또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함이니라.](고전10:11)

애굽 10대 재앙의 분석적 연구

애굽 10대 재앙(The Ten Plagues on Egypt)은 그 각각의 하나씩도 참으로 놀라운 초자연적 이적(異蹟)들이었다. 하물며 이런 놀라운 이적들이 한 주체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여 10회나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애굽 10대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적(敵)들이 명확히 구분된 상태에서 그 적들을 향해 이적적 재앙이 폭발적으로 연속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와 해방을 가져온 일대 사건으로서 구약에 기록된 가장 역동적 기사의 하나이다. 

또한 애굽 10대 재앙은 애굽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감격적 해방과 구출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 애굽인에게는 죽음과 몰락이 닥쳐왔으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승리와 자유의 쟁취 및 새 역사의 출발이 비롯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 선민으로서 시내 산에서 선민 언약을 체결하고 선민으로서의 역사를 본격 태동시킨 것도 이 애굽 10대 재앙으로 이루어진 영광의 탈출인 출애굽(Exodus)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실로 애굽 10대 재앙은 선민 역사의 본격적 태동을 위한 대전주곡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태동된 선민의 역사는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 만민 중에 세워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로 확장되었다. 

그 결과 애굽 10대 재앙은 단순히 과거의 놀라운 이적 시리즈(Miracle Series)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악의 무리를 멸하시고 택한 백성을 초월적 능력을 가지고 강한 팔로 구출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의지를 실증하는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애굽 10대 재앙은 그 세부 내용을 다음과 같은 몇몇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해 볼 때 더욱 오묘한 그 실체와 거기에 담긴 깊은 의미가 새삼스럽게 드러난다. 이에 애굽 10대 재앙의 실체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다음 세 가지 주요 관점별로 시도해 보기로 한다. 

1. 애굽 10대 재앙의 구조 분석 

가. 10대 재앙의 기본 구조 설명 

아래에서 보듯이 애굽 10대 재앙은 먼저 크게는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행하신 첫번째부터 아홉번째까지의 재앙과 하나님이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행하신 마지막 열번째 장자 재앙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매우 흥미있는 사실로서 첫번째에서 아홉번째까지의 간접 재앙들은 다음과 같은 내적 규칙성 내지 통일성에 의하여 다시금 순서대로 각각 세 개씩을 한 그룹(Group)내지 하나의 사이클(Cycle)로 하는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먼저 각 그룹의 첫번째 재앙들 그러니까 제 1 피 재앙, 제 4 파리 재앙, 제 7 우박 재앙들은 모두 다 아침에(In the Morning) 그 재앙이 예고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음으로 각 그룹의 두 번째 재앙들 그러니까 제 2 개구리 재앙, 제 5 악질 재앙, 제 8 메뚜기 재앙들은 모두가 모세가 바로의 왕궁(To the Palace)으로 들어가서 경고한 다음에 일어났다. 각 그룹의 첫번째 재앙들에 대한 경고가 인간의 모든 활동이 시작되는 시점인 아침에 주어졌고 그리고 각 그룹의 두번째 재앙들의 경고는 인간 권력의 중심 공간인 바로의 왕궁에서 주어진 것은 결국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시간과 공간의 모든 요소를 망라하여 그 주요 포인트마다 거듭 주어졌 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각 그룹의 세번째 재앙들 즉 제 3 이 재앙, 제 6 독종 재앙, 제 9 흑암 재앙 등은 각 그룹의 첫째 둘째 재앙들이 일단 먼저 예고된 후에 일어난 것과 달리 모두 다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Without Warning) 일어났다. 이것은 때로 인간에게는 사전 경고없이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이 임할 수 있는 두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나. 10대 재앙의 3X3+1 구조의 의미 

이렇게 분석해 볼 때 우리는 애굽 10대 재앙이 단순히 열 번이라는 많은 회수에 걸쳐 일어났거나 또는 어찌해서 계속 진행하다 보니까 열 번에 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과 의도 아래 매우 섬세한 의미를 가진 완벽한 구조로 진행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일면 각각 정확한 규칙성 내지 통일성에 의하여 세 재앙씩을 한 그룹 내지 한 사이클로 하는 재앙이 세 번 반복되는 구조의 간접적 재앙이 있은 후 단 한 번의 직접적 재앙으로 10대 재앙 전체가 최종 종결되는 체제 내지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보다 세부적으로는 3x3의 간접적 재앙과 단 1회의 직접적 재앙으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10’ 이라는 숫자는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필요한 모든 구성 요소를 완비(完備)한 숫자를 의미했다. 따라서 애굽에 내려진 재앙의 총수가 ‘10’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학대하는 원수들에게 모든 재앙을 다 내리셨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분석하였듯이 애굽 10대 재앙은 그 총수가 ‘10’이라는 전반적 사실보다 그 총 10개의 재앙을 이루는 세부 구조에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3’은 충만(充滿)올 상징하는 숫자였다. 따라서 애굽에 내린 간접적 재앙은 이처럼 충만을 의미하는 3개씩의 재앙을 묶은 한 그룹의 재앙이 그 역시 충만을 의미하는 3회에 걸쳐서 반복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직접적 재앙은 단 1회였으며 이것으로 모든 재앙 전체가 종결되었다. 이같은 애굽 10대 재앙의 구조는 한마디로 애굽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에게 참으로 완전히 충만한 사전 경고성 재앙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복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단 1회에 모든 것을 종결하셨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즉 하나님은 단 1회에 그들을 완전 굴복시킬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자발적 순종의 기회를 참으로 충만히 주시고자 먼저 3x3의 간접적 재앙을 진행시키셨다. 그러나 끝내 그들이 거부하자 하나님은 단 1회의 직접적 재앙을 통하여 마침내 애굽인들을 굴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실현시키셨다. 하나님은 절대 초월자이심으로 그가 직접 시행하시는 일은 이처럼 그의 뜻한 바대로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애굽인들을 향한 심판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기본 패턴(Pattern)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종들과 우주 만물을 통하여 모든 죄인들에게 거듭하여 경고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신다. 특히 세상 끝날에는 그 역시 일련의 재앙들을 통하여 최종적 경고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끝내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마침내 단 1회의 대종말(大終末)을 통하여 역사 전체나 각 개인을 최종 심판하실 것이다. 

다. 기타 관련 사항과 그 의의 

한편 다시 한번 애굽 10대 재앙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도 추가로 발견된다. 먼저 세번째 이 재앙에서부터는 앞서의 첫째, 둘째의 피 재앙이나 개구리 재앙들과 달리 애굽의 술객(Magicians)들은 도저히 모방할 수 없었다. 이것은 사단과 그를 따르는 자들도 비록 보통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잠시 인간을 현혹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할 때에는 그 한계가 너무나 분명함을 보여 준다. 

또한 네번째 파리 재앙부터는 그 재앙이 이스라엘인들을 제외하고 오직 애굽인들에게만 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어느 정도까지는 동일한 원리로 다스리시나 근본적으로는 구원 얻을 자와 저주 받을 자로 엄격히 구분하여 다스리심을 보여 준다. 

끝으로 셋째 그룹에 속하는 일곱번째에서 아홉번째까지의 재앙에서는 하나님이 매 경우마다 왜 바로와 그 백성을 즉각 멸망시켜서 단번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거듭하여 많은 재앙을 내리시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는 분명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으로 행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요청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더욱 억누름으로써 결국 사단(Satan)의 화신(化身)으로 등장한 바로에게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똑똑히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 당대는 물론이고 훗날 애굽 10대 재앙에 대한 역사를 전해 들은 오고 오는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듣고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본문에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보다 궁극적인 전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점진적 정벌과 이를 통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성취의 과정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매우 긴 장구한 역사적 과정에 걸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오묘한 예표이기도 하다. 

2. 애굽 10대 재앙과 애굽 우상들과의 관계 

애굽 10대 재앙은 표면적으로는 자연의 각종 이상 현상을 통한 재앙의 반복 내지 열거로 보인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10대 재앙 각각은 수다한 자연 현상의 배후에 그 각각의 현상을 주도하는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섬겼던 애굽인들이 신으로 간주한 각종 우상(偶像)들을 역으로 애굽인들을 향한 심판의 도구 내지 애굽인들과 함께 심판을 받을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이었다. 즉 애굽 10대 재앙은 일차적으로는 이적적 자연 현상을 통한 재앙들이었다. 동시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애굽인들이 섬기던 우상 전반에 대한 징벌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으로서 하나님께서 거짓 우상들을 이기심은 물론 그 거짓 신들을 믿는 백성은 벌하시고 당신의 백성은 구출해 주실 능력과 사랑이 있으심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많은 이들의 일반적 생각과 달리 비록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마침내 인간의 죽음을 초래한 것으로 가장 엄중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애굽 10대 재앙은 엄밀하게는 뒤로 갈수록 그 양상이 혹독해지는 소위 점층적 양상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처음 피 재앙과 아홉 번째의 흑암 및 열 번째의 장자 재앙이 대략 수미 쌍관식의 소위 양괄식 구조를 보이는 가운데 두 번째에서 여덟 번째 재앙까지는 거의 동일 수준의 재앙이 계속 열거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첫번째 피 재앙은 애굽인들의 농경과 식수 둥 실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나일강(the River Nile)과 나일강의 신 하피(Hapi)를 치신 것이었다. 그리고 아홉번째 흑암 재앙은 최후의 재앙을 예고하는 동시에 애굽인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주요시하였던 태양신 라(Ra)를 무력하게 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열번째 장자 재앙은 이집트인 전반은 물론 바로의 가장 직접적 수 호신으로 여겨진 생명의 신이요 이집트 최고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를 치신 것이었다. 반면에 두 번째에서 여덟 번째까지는 상호 신적 위계(位階)에 있어서나 이집트인들의 선호도에 있어서 그 다지 차이가 없는 여러 신들과 그들이 각각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여러 자연 현상을 통한 동일 수준의 재앙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그 관련 우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애굽 10대 재앙의 전개는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멸하시되 그들 모두를 남김없이 다 멸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겠다. 

 

3. 애굽 10대 재앙 과정에 대한 바로의 자세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애굽 왕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징벌은 단 한번으로 종결되지 않고 10번에 걸쳐서 반복되었다. 이것은 역으로는 그만큼 바로에게 자발적 순복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비록 바로가 처음에는 몰랐다 해도 10번의 재앙이 전개 되어 가는 과정에서 지금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요구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 the God)이 절대 초월자로서 유일한 신적 존재이시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애굽의 왕으로서의 자신의 정권 안정과 애굽의 국익 수호라는 세속적 이해 타산에만 집착하여 계속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각 재앙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모세에게 빌거나 타협안을 제시하다가도 그 재앙이 사라지면 곧바로 말을 바꾸거나 식언(食言)하는 등 일국의 왕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간교와 추태까지 부리고 있다. 한마디로 애굽 10대 재앙에 임하는 바로의 자세는 아집과 기만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로는 끝내 하나님으로부터 장자 재앙의 징벌까지 당하였으며 최후의 장자 재앙을 당한 후에는 참담한 패배자로서 도리어 이스라엘에게 출애굽할 것을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 40년과 가나안 정복까지의 전체적 과정에서 볼 때에는 대략 각 성도가 사단과 이 세상의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일단 성도(聖徒)의 지위(地位)를 얻는 것에 비교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과 바로의 투쟁이란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도를 억누르고 있는 사단과 그의 무리들로부터 성도를 구출하여 성도의 구원을 마침내 실현시키시는 사건의 예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出埈及)을 그토록 집요하고도 악착같이 거부한 바로의 행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거부하는 사단과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의 영원한 행태를 예표한다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같은 바로의 실로 끈질기고도 파렴치한 행태를 요약해 보면서 이를 우리 시대에 적용시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엡 2:2)의 사주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거부와 멸시의 실체를 직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끝내 바로가 단 1회의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 실현되었었듯이, 사단의 세력은 필히 몰락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최후 승리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天國)이 영구히 실현될 것도 분명히 깨달아 현실의 일시적 현상에 연연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말세(末世)에는 극심한 환난과 사단과 그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의 만행이 극성할 것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사단의 만행이 극에 달할수록 오히려 출애굽 당시의 이 바로의 행태가 주는 교훈을 깨닫고 더욱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바로 나 자신이 이 바로와 같이 사단에 속한 자의 하나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다가 멸망 당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애굽 10대 재앙에 임하는 바로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 앞에 뚜렷이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상징(Symbol)인 것이다.






바로가 재앙만 풀어 주면 보내 주겠다고 하다가 재앙이 끝나면 약속을 어기고 보내 주지 않는 식으로 속인 경우에는 제 2,4,7,8 재앙 때이먀, 바로가 부분적 타협안을 제시한 경우는 제 4,8,9 재앙 때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http://atsnu.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5_1&wr_id=243929&page=24



2024 사순절(02 / 14 - 03 / 30)  119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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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재앙의 내용

첫 번째 재앙 : 피(7:14-25)

여호와는 바로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재앙들을 내리기로 결정하였고, 그 첫째 재앙이 바로 애굽의 젖이며, 신으로 숭배되는 나일 강이었던 것이다.

첫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능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첫째 재앙은 눈에 보이는 모든 물을 피로 바뀌게 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인 물이 죽음의 상징인 피로 바뀌었음을 애굽 사람들이 보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에게 ‘생명(물) ’을 ‘죽음(피) ’로 만드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을 좌우하시는 유일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재앙은 무려 일주일동안 애굽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나일 강을 죽음과 고통의 장소로 바뀌게 했다.[3]

두 번째 재앙 : 개구리(8:1-15)

나일 강에 살고 있던 개구리는 ‘문나 모지리카’(학명 Moonna Mozirica) 라는 학명을 가진 개구리이다.
애굽인들은 나일 강이 범람했다 감해지는 때에 보이는 개구리가 애굽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여겨서 신성시했다.
인간의 몸에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여신 헤케트를 풍요와 다산의 신이며, 나일 강에 장마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개구리들의 이른 침투로 인해서 왕은 오염된 음식을 먹게 되었고, 이것은 곧 건강에 해를 입게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도 마찬가지고, 애굽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즉 애굽 사람들 전체가 오염된 음식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걸 보면 개구리들이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된 것은 애굽의 ‘땅’이 오염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애굽 땅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황폐하게 변한다는 ‘총체인 오염’을 의미한다.[3]

세 번째 재앙 : 이(8:16-19)

세 번째 재앙에서부터는 애굽 주술사들이 그들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이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고백하며 바로를 설득한다.
세 번째 재앙은 아무런 경고가 없었던 재앙 중 하나이다.
이 재앙은 땅으로부터 시작된 재앙으로 땅의 신 ‘게브’와 연관된다.
애굽인들은 밭을 갈 때마다 대지의 신 게브에게 감사를 드렸는데, 이들에게 흙은 생명과 풍요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생명으로 여기는 흙을 통해 애굽인들에게 괴로움과 죽음을 내린다.
또한 애굽의 ‘땅’을 황폐화 시키시고, 동시에 땅의 신 게브와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애굽인들에게 알게 하였다.[3]

네 번째 재앙 : 파리(8:20-32)

이전의 첫째 재앙부터 셋째 재앙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포함되었는데 넷째 재앙부터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인과 애굽인들 사이를 구분지으셨다.
이를 통해 여호와가 애굽땅을 관장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네 번째 재앙과 관련된 애굽의 신은 ‘케프리’이며, 풍뎅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하루 일정을 관리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네 번째 재앙은 두 번째, 세 번째 재앙과 한 세트를 이루는데, 네 번째 재앙인 파리는 물과 땅에 연관된 것이고 이 세 재앙은 여호와가 물과 땅과 공기를 지배하는 분이심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애굽의 물과 땅과 공기가 파괴되고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3]

다섯 번째 재앙 : 가축 돌림병(9:1-7)

다섯 번째 재앙도 애굽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구분하신다.
애굽의 가축들만 심한 돌림병에 걸리게 된다.
또한 가축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는 창조된 것들을 통해서 애굽을 심판하였지만 이번 재앙은 창조된 것을 ‘죽이는 일’로 심판을 진행하여 ‘죽음 모티브’가 시작된다.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능력을 말할 때 쓰이는 특별한 단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돌림병이 여호와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섯 번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들 하토르, 아피스 등이 있다.[3]

생축 (미크네)
- 이는 각종의 가축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미크네'란 '소유', '재산'이란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가축들이 곧 고대인들의 재산 명세서에서 가장 큰비중을 차지했음을 암시한다.
한편 '생축'이란 말과 더불어 제시된 '말'은 주로 전쟁용으로 사용된 듯하며, '나귀'는 단거리 수송용 또는 경작에, '약대'는 장거리 수송용에 각각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러한 생축들에의 피해는 애굽인의 군사, 경제, 교통에 치명타를 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한 악질(데베르 카베드 메오드)

- '악질'(데베르)은 일종의 무서운 전염병을 뜻하는데, 여기에 '매우'(메오드), '심한'(카베드)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이 악질의 정도가 대단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악질이 얼마나심했는지는 애굽의 모든 생축이 죽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6절). 따라서 이전까지의 재앙은 단순히 사람 또는 짐승을 일시적으로 괴롭히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 다섯번째 재앙부터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로서 훨씬 재앙의 정도가 심화되었다. 동시에 이 악질 재앙은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첫번째 재앙(7:17-25)과 더불어 애굽의 각종 우상 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생축들은 각종 형태로 형상화되어 애굽인들의 경배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우상 종교의 희생 제물용으로도 쓰여졌기 때문이다<32:1-6 강해, 애굽의 종교>. 동시에 이 재앙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생사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섯 번째 재앙 : 악성 종기(9:8-12)

여섯 번째 재앙은 세 번째 재앙처럼 아무런 경고 없이 애굽을 강타하여 어떤 경고에도 반응하지 않는 바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처음으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바로왕 앞에 날려진 재는 벽돌을 굽던 풀무에서 끄집어낸 재일 것이며 이것은 여호와의 백성이 당한 고난의 증거로 볼 수 있다.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은 주술사들도 바로와 그의 신하들도 악성 종기로 고통을 받아 여호와 앞에서 점점 애굽의 통치권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재앙을 통해 심판한 애굽의 신은 임호테프이다.[3]


일곱 번째 재앙 : 우박(9:13-35)

대기와 공중에 관련된 재앙.
우박 재앙은 인간 생명을 대규모로 위협하는 첫번째 재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박으로 인한 보리와 삼의 파손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짚을 구해다 벽돌을 만들라고 했던 바로의 요구에 대한 보복, 대기의 신 와 농업의 신 이시스, 습기의 신 테프누트를 겨냥한 것이다.
여호와의 ‘구별’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던 고센 땅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생명과 관련된 재앙으로 ‘경고’를 통해서 피할 방법을 알려주였다.[3]

중한

- 원 의미는 '무거운', '격렬한', '고통스런'이란 뜻으로서 우박의 엄청난 무게와 크기 및 그것이 미치는 극심한 피해를 예감케 한다.

우박(바라드)

- 동사 '춥다'에서 유래된 말로, 돌처럼 단단한 얼음알갱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종종 천둥과 함께 가축 떼가 들에 방목되는 시기인 겨울과 이른 봄(12-4월)사이에 내리곤 하여 곡물들에 큰 피해를 주어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우박이 단순히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재앙의 도구가 되어 사람과 짐승의 생명까지 해치는 애굽 역사이래 전무 후무한 무서운 심판이 되었다.
이때로부터 우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벌의 표와 심판의 도구로 자주 쓰이게 되었다(수 10:11; 학 2:17; 계 8:7; 16:21).

여덟 번째 재앙 : 메뚜기(10:1-20)

농경 지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재해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곡식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로 심각한 기근을 초래했다.
땅의 신에 대한 영적 전쟁으로 내려진 재앙이다.
메뚜기로부터 땅의 소산을 지켜주는 땅의 신에 대한 무능함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애굽의 신들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았을 때, 애굽의 신앙은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3]

아홉 번째 재앙 : 흑암(10:21-29) 

이 재앙은 여호와가 ‘세상에서 가장 해가 잘 드는 나라’ 위에 내린 것이다.
‘태양의 집’ 을 의미하는 헬리오폴리스라 불리는 도시는 태양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흑암 재앙은 애굽인들의 최고의 신인 태양신 를 그들로부터 빼앗고 여호와만이 신 중의 신임을 증명하는 재앙이었다.
3일동안 재앙이 일어났다.[3]

열 번째 재앙 : 장자의 죽음(12:29-30)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장자와 처음 난 짐승들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땅에서 처음 난 것과 가축의 처음 난 것처럼 여인의 몸에서의 맏아들도 여호와가 준 첫 선물로 여겨졌고, 이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애굽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신성시 되고 귀하게 여겨졌던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 그리고 처음 난 것들을 죽이는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 재앙이었다.
이 재앙은 다산의 신인 오시리스 와 생명의 신인 이시스에 대한 재앙이다.
바로는 태양신의 현신이며, 바로의 장자는 청년의 육체를 입은 호루스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신의 현신에 한 열 번째 재앙은 바로의 왕위 계승자를 없애는 재앙이었다.
그런 장자의 죽음을 통해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재앙 이후에 바로는 패배를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인정하게 된다.[3]

신학적 의의

여호와는 애굽에서의 영적인 전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드러내심으로 애굽인들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을 지켜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그들의 조상들이 말하던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심으로써 ‘영적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분명한 목적 아래 벌어진 여호와와 애굽 신들의 전쟁 가운데, 여호와는 애굽의 모든 신들에 대해서 승리를 나타내였지만 성경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재앙의 원인은 바로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출 5:2).
바로는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애굽 백성들과 함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불신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는 애굽의 신들과의 전쟁을 통한 승리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세 번째 재앙에서는 애굽의 주술사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고백했고,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을 통해 바로의 신하들은 여호와의 재앙을 두려워해 종들과 가축들을 집으로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를 통해 바로는 여호와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을 통해 모든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10가지 재앙에 대해서 그 재앙이 어떤 ‘애굽 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여호와의 완전한 승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나는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애굽을 향한 단순한 재앙이 아닌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는 목적 아래에서 수 많은 애굽 신들을 대면하여 누가 참된 신이며, 참된 신이라 말하는 여호와 자신이 누구인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신 ‘영적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3]

각주

  1. Greifenhagen, F.V. (2000). 〈Plagues of Egypt〉. Freedman, David Noel; Myers, Allen C.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Amsterdam University Press. 1062쪽. ISBN 9789053565032.
  2. Tigay, Jeffrey H. (2004). 〈Exodus〉. Berlin, Adele; Brettler, Marc Zvi. 《The Jewish Study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3. 이동: 가나경열 (2015). “출애굽의 10가지 재앙을 통해 바라보는 여호와와 신들의 전쟁”.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제10일 / 02-24-2024(토)
출애굽기 10장(10:1-29)
메뚜기, 흑암 재앙(4절, 21절)


1862년 2월 링컨 대통령의 아들 윌리가 죽은 지 얼마 못되어 다른 아들 데드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
병원을 찾은 링컨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내 생애에 가장 큰 어려움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간호사가 자신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미망인이라고 밝히며, 그러한 시련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링컨은 간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러자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가능합니다.”
링컨은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 불행이 닥쳤을 때도 완전히 복종했나요?”
간호사는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불행이 닥칠수록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완전히 복종할 수 있었어요.”
며칠 후 그녀를 다시 찾아온 링컨은 간호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재앙으로 빨리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깨닫는 것이 느립니다.






출애굽기 10장 - 메뚜기와 흑암 재앙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이유는

첫째는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심을 애굽 온 땅에 보이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이러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절).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모든 역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놀라운 일들은 훗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게 되는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자녀들에게 전할 때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되며, 혹 떠날지라도 그 말씀을 기억하는 날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그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은 부모된 성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 재산을 남겨 준다면 그들은 게으름에 빠질 수 있습니다.
혹 지식을 더하여 준다면 교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혹 기술을 가르친다면 일평생 먹고 사는 데는 유익하겠지만 그것 역시도 그의 삶을 완전히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를 전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전하여 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자가 된다면 그는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갈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할 만큼”(빌 3:8)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역사를 가르치기를 더욱 귀하게 여기므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삶의 열쇠를 남겨주는 부모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한 번 전달합니다(3절)

그런데 이 명령은 이미 7차례에 걸쳐서 반복되었으나 바로에 의하여 계속 거절되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거절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께 한번쯤 ‘이 말씀을 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라든가 아니면 ‘다른 명령을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몇 번이든 간에, 그것이 바로에게 거부되든 수용되든 간에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세에게 맡겨진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명을 맡은 자는 그 결과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까지 가고, 행하라고 하는 것을 행하고, 멈추라고 하는 순간 멈추면 되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를 예측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 3장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경고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경고하시기를 만약 악인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는데도 그가 범죄하여 죽는다면 에스겔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겠지만 만약 에스겔이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지 않아서 그가 범죄하여 죽는다면 그 책임을 에스겔에게 묻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명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자가 행한 일의 결과가 나쁘기 때문에 그를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았기에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을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전하기도 전에 미리 포기부터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거라고’, ‘괜히 창피만 당할 거라고’ 스스로 결과를 예측하면서 이웃을 향하여 한 마디의 말씀도 전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이 모세와 아론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해 새 생명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애굽 왕 바로는 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자신이 여호와 앞에 득죄하였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여 재앙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16-17절).

이는 10절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가려고 하는 것을 악하다고 비난하던 바로가 도리어 자신의 악함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고백은 9장의 본문에서 보신 것과 같이 마음 중심에서 나온 진실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현실의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을 면할 속셈으로 자기 잘못을 거짓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이르면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이지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도 그러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다가 고난만 찾아오면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단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만 하나님을 찾는다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은 바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바로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임하였다(22절).

이 흑암은 당시 애굽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받던 태양신 ‘라’에 대한 심판으로 이 태양신 역시 한낱 우상에 불과함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그들의 그릇된 신앙에 대한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만일 바로가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이 재앙을 대했더라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 땅에서 내보냄으로써 마지막 재앙, 곧 장자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감지할 만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모세에게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엄포를 놓음으로써 장자 재앙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바로왕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로와 별 반 다름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겸손으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기적을 허락하시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돌이키시려는 것과 우리들의 간증을 통해 우리 자손들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희들도 모세처럼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시되, 자녀들에게 썩어질 재물이 아니라 영원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는 지혜로운 부모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9일 / 02-23-2024(금)
출애굽기 9장(9:1-35)
악질, 독종, 우박 재앙(3절, 9절, 18절)

5재앙 - 악질
6재앙 - 독종
7재앙 - 우박


계속되는 재앙으로 인하여 바로는 깨닫는 것처럼 반응하였으나 재앙이 멈추면 다시 완악해지는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완악(完惡) : 완전할 완, 악할 악
 -
성질(性質)이 모지락스럽고 악독(惡毒)함.


완강(頑強) : 완고할 완, 강할 강
 - 태도(態度)가 완고(頑固)하고 의지(意志)가 굳셈.

강퍅(剛愎) : 굳셀 강, 강퍅할 퍅
 - 성미(性味)가 깐깐하고 고집(固執)이 셈.

내 백성을 보내라


출애굽기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10:3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치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멸시하는 사람(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는 말은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는 말은 말씀을 순종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신명기 28장축복의 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의 장이지만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의 장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좋은 분이시지만 그 반면에 조금도 자비가 없으신 저주도 내리시는 엄위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축복을 주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경에서 어느 곳을 찾아보거나 동일하며 변개할 수 없는 하나의 법칙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생활에서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진단에서 나온 정확한 원인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 두 가지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15-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더 자세하고 두려운 내용이 신명기 28:58-6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명기 28:58-67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 60절 → 67절’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언제나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생애에 잡아끌어 드리지만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스스로 자기 가정과 사업에 이끌어 들여 패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렸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패망하는 경우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기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이 그 순종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순종했을 때 축복을 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멸하시기를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재앙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바울이 증거 하는 이 한 사람으로 인한 불순종은 아담의 경우를 의미하며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온 인류의 비극을 가져 왔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가져왔으며 의를 가져 왔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사망을 유업으로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의인이 되었고 생명을 유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의 불순종한 죄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서운 해독을 끼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거든 그곳에서 탈취한 물건 중,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성안에 있는 은금과 강철로 만든 기구들은 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솔 아래 여리고성을 정복하여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정복할 목표는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라고 하는 적은 성이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어 살펴보았더니 보고하기를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주 적은 성이라 많은 군대를 올려 보낼 필요가 없고 약 2,3천 명 정도의 병력만 보내면 문제없이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약 3천명의 군사들을 그 성에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군병들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 왔습니다.
이 때 여호수와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을 찢고 티끌을 무릅쓰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들이 이 전쟁에서 참패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성물을 도적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에게 참패한 원인이 이 한 사람의 죄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아간이란 자가 여리고성에서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 세겔과 50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몰래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아간을 어떻게 처치했습니까?
아간을 잡고 그가 훔친 물건들과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아골 골짜기란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아이성을 다시 공격케 하시어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그 집의 한 사람의 불순종은 때로는 온 가정의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사람의 순종으로 온 가정이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죄악 중에도 가장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용서를 받지 못할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불순종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3:36절 말씀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18절 말씀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나 국가는 결국에는 망합니다. 지금 일본이란 나라가 번창하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 경제를 주름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우상 숭배의 길에서 돌이키고 지난날 한국 교회를 핍박하고 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흘린 일을 회개치 않으면 그들은 반드시 멸망 할 것이며 이 땅에 임할 인류의 무서운 환난 중에서 후회하고 땅을 치며 통곡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하며 돈을 축재하려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며 오늘의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사실을 철저히 회개치 않으면 얼마 안가 정말로 패가망신하고 영영히 구제 받을 길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볼 때도 어느 나라건 어느 민족이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존중히 여김으로 그를 위대하게 하고 그 나라를 번창케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을 때 그가 누구이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순종하므로 복을 받는 나라와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

한편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계명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말씀을 두려워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1) 자기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생활을 말합니다.

욥이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일정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욥23:11-1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영적 음식입니다. 음식을 멀리하는 자는 굶어 죽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자는 영의 주림으로 그의 생명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의 맛이 그의 입에 꿀보다 더 하다고 했습니다. 시119:103절 말씀을 보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순종의 생활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에는 축복의 열매가 따르고 언약한 말씀대로 이루어짐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따르게 됨으로 그 말씀의 맛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맛인즉 무엇보다 더 달아요? ( ). 그러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이 달기는 고사하고 그렇게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이 따르지 않으니 그의 생활에 말씀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신앙생활이란 즐거운 것이 아니라 괴로운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말씀을 따라 그의 생활을 삼가는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스승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길의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라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며 삼가지 않으면 그는 결국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그의 인생길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그 말씀에 의지하는 생애를 말합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지식을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자기 지혜나 자기 지식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 상식이나 경험이나 사람들의 권고를 따라 말씀에서 떠나거나 벗어나는 일을 결코 하지 아니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곳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사나 이적을 믿고 결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어제 밤에 그곳에도 여러 번 그물을 던졌지만 잡지 못했습니다’고 말하면서 의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고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지는 많은 고기가 그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이치적으로는 합리성이 없지만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니 내가 오직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겠습니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자세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약속한 상은 영생으로 갚으시는 생명의 상입니다.
하늘에서 받는 면류관의 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상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에도 그 마음의 소원대로 성취되는 축복의 상입니다. 이 모든 상을 준비하시고 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가 찾으시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상을 얻는 길로 다니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미련스럽게도 패망을 이루는 길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생의 성공은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생활이 그 길입니다. 이 생활은 곧 순종을 말합니다. 이 생활에는 상이 따릅니다. 이 세상의 상으로서의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놀라운 상이 높이 쌓인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더욱더욱 순종의 생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명기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애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요한계시록 11:8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유다서 1:8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숫자 0과 10의 의미는무엇일까?

조동욱(충북도립대학 교수)

통상 수(數)는 총 세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가 많고 적음과 같은 양(量)을 나타내며 이를 기수라 한다.
영어로는 one, two 등으로 표기한다.

둘째는 1층, 2층처럼 순서를 나타내며 이를 서수라 한다.
영어로는 first, second 등으로 표기한다.

셋째는 주민등록증 번호처럼 기호의 역할을 한다.

사실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원래 인도에서 만든 것이다.
이것이 아라비아 상인에 의해 아라비아 숫자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니 인도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가슴 칠 일이 아닌가 싶다.

또 아라비아 숫자가 1, 2, 3 등과 같이 표기 된 것은 메사포타미아 등은 점토판에 숫자를 그은 것이어서 작성한 숫자가 변형이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인도는 모래에 수를 표기했고 그 결과 만일 바람이라도 불면 작성한 수에 대한 구분이 어려워져 수를 1, 2, 3 등과 같이 표기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무(無)의 개념으로 '0' 이란 숫자를 만들어 냈다.
'0'이란 없다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0'을 다른 숫자의 뒤나 중간에 붙임으로 인류는 엄청나게 큰 수를 만들어 내게 된다.
1뒤에 0을 3개를 붙이면 천(千)이 되고, 4개를 붙이면 만(萬)이 된다.
1과 2 사이에 0을 2개를 넣으면 1002가 된다.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0'이 사실은 엄청나게 큰 수를 표기하는 도구가 되어 수의 혁명을 가져 오게 된다.

또 숫자 10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을까?
10은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수이고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하는 수라고도 하고 또 창조와 완성을 나타내는 수로 쓰인다.
또한 10은 귀신을 쫓는 수이기도 하다.
그 결과 로마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최대 악귀를 쫓아냈다고 생각한 것이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구원의 완성이란 의미로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다.

또한 10은 창조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욕이라고 생각하는 십새끼란 원래 창조란 뜻인 것이다.
새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도 10달간 어머니 뱃속에 있어야 하고 또 어머니의 십XX을 통해 새 생명이 창조되어 나온다.
우리가 욕이라고 생각하는 단어가 얼마나 소중한가.


1~10까지 숫자의 의미

1

1은 원초의 통일, 태초의 시작, 창조자, 주동자, 모든 가능성의 총합, 본질, 중심,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것, 배아(胚牙), 고립을 나타낸다. 또한 융기, 상승을 나타낸다.


중국 양(陽), 남성, 하늘, 길(吉)을 뜻한다.

기독교 하나님 아버지, 신성을 뜻한다.

유태교 1은 아도나이를 나타낸다. 또한 숨겨진 지식(카발라에서는 세피로스의 케텔)을 뜻한다.

이슬람교 통일로서의 신, 절대자, 모든 것을 자족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영(靈), 만물의 기원으로서의 신, 본질, 모나드를 의미한다.

도교 도(道)는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고, 3은 만물을 낳는다.

2

2는 이원성, 둘의 교체, 차이, 갈등, 의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정적인 상태, 뿌리박음, 변하여 균형을 유지함, 안정, 반영, 대극, 인간의 이원성과 욕망을 나타낸다. 이원성으로서 현현되는 것은 모두 서로 대립되는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는 점(点)을, 2는 길이를 나탄내다. 2는 1에서 출발한 최초의 숫자며 따라서 최초의 선(善)에서 일탈이라는 의미의 죄를 상징한다. 또한 순간적으로 타락하기 위숨을 나타낸다.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두마리의 동물은 배가된 힘을 나타낸다.


연금술 2는 태양과 달, 왕과 왕비, 유황과 수은 등 대립물을 나타낸다. 따라서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융합되는 남녀추니로서의 통일이다.
불교 2는 윤회의 이원성, 남과 여, 이론과 실천, 지혜와 방법을 나타낸다. 또한 서로 도와 길을 찾고 걷는 맹인과 절름발이를 뜻한다.
중국 2는 음(陰), 여성, 뭍(지상), 흉(凶)을 뜻한다.
기독교 신성과 인간성을 겸비한 예수를 뜻한다.
유태교 생명력을 의미하고, 카발라에서는 지혜와 자기 인식을 뜻한다.
힌두교 이원성, 샥타와 샥티를 뜻한다.
이슬람교 영(靈)을 뜻한다.
플라톤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2는 뜻이 없는 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3의 요소를 도입하는 관계를 함의(含意)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2는 한 쌍, 즉 2분된 지상적 존재를 나타낸다.
도교 괘(卦)는 음과 양 두 가지 결정요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2는 중심이 없기 때문에 음에 속하는 약한 숫자다.


3

 

3은 다수, 창조력, 성장, 이원성을 극복한 전진운동, 표현, 통합을 뜻한다. 3은 모든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최초의 숫자이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다. 3의 힘은 보편적이며 하늘, 땅, 바다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3중성을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육체·혼·영, 탄생·삶·죽음, 처음·중간·끝, 과거·현재·미래, 달의 세 가지 상(초승달, 반달, 보름달)을 나타낸다. 3은 천계의 숫자이며, 4가 육체를 나타내는 데 비해 3은 영혼을 상징한다. 3은 4와 합쳐져 7이라는 성스러운 숫자가 된다. 또 3과 4를 곱하면 12가 되는데, 그것은 황도십이궁, 일년 열두 달을 의미한다. 3은 1과 2를 더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2와 1로 나누어질 수 있다. 도교에서 3은 평형을 성립시키는 중심점을 가지기 때문에 강한 숫자다. 3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성(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족에게도 반영된다. 또한 3에는 중첩효과라는 권위가 있다. 즉 한 번이나 두 번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이 되면 확실성과 강한 힘을 지닌다. 예를 들면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3배 위대한 주(主), 3배 행복한 섬 등이 그것이다. 민화에서는 3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한다. 3번의 소원, 3번의 시련, 3인의 왕자, 왕비, 마녀, 또는 운명의 세 여신, 3인의 요정을 뜻한다. 이중 둘은 착한 요정, 나머지 하나는 악한 요정인 경우가 많다. 3은 다수를 의미하는데 많은 숫자, 군집, 만세삼창을 나타낸다. 또한 성취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들과 영적 존재의 삼위일체의 예는 무수히 많다. 삼위일체의 달의 여신이나 삼면의 여신은 특시 셈족, 그리스, 켈트, 게르만 등의 종교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하나의 신격을 가진 세 개의 상(相), 힘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제일 먼저 삼각형이 있다. 3개의 원 또는 삼각형이 일부 중첩되어 있는 도형은 삼위일체로서의 3개의 인격의 불가분의 통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각형 외에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삼지창, 붓꽃, 세개의 잎, 3중 벼락, 괘상 등이 있다. 달에 속하는 동물들은 다리가 세 개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달의 세 가지 모양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달에 3마리의 토끼 또는 세 사람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프리카 아샨티 족 달의 여신은 셋인데 그중 둘은 흑인, 하나는 백인이다.
연금술 황, 수은, 소금의 세 성분으로 이것들은 각기 영, 혼, 육체를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삼위일체의 신이 많다. 카르타고에서는 달을 뜻하는 '태모신'이 3개의 상징적인 기둥으로 묘사되었다.
아라비아   이슬람교 이전에 마나트는 3인의 성처녀(알-이타브, 알-우자, 알-마나트)로 나타내지는 삼위일체의 여신이다.1) 이 여신의 상징은 돌기둥, 돌, 기둥 또는 꼭대기에 비둘기를 장식한 기둥이다.
1) 이타브는 타이프 근교의 계곡에 있는 흰 돌에 사는 처녀신, 우자는 메카 근교의 계곡 아카시아 나무에 살고, 마나트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쿠다이드에서 제사지내는 검은 돌에 산다.
불교 3은 삼보(三寶) 즉 불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인 부처, 부처의 가르침, 승려를 나타낸다.
켈트 브리지트 여신은 세 가지 모습을 가진다. 켈트에는 지복의 세 여인 외에 무수한 3인조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같은 신의 세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3은 특히 중요한 숫자다.
중국 3은 성스러움, 길(吉)한 숫자, 가장 작은 홀수이다. 달에 사는 두꺼비 혹은 태양에 사는 새는 다리가 세 개다.
기독교 3은 삼위일체, 혼, 인간과 교회의 영육간의 결합, 삼인의 동방박사가 신, 왕, 희생으로서의 예수에게 바치는 세 가지 선물(유향, 황금, 몰약), 변용된 예수의 세 가지 모습, 예수가 받은 세 차례의 유혹, 베드로의 세 차례에 걸친 부인, 골고다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기까지의 날 수, 부활한 예수가 세 번 출현함, 엠마오의 순례자, 사도들에게 출현, 3인의 마리아, 신앙·희망·은총으로 이야기되는 신을 향한 세 가지 덕목을 뜻한다.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에 토트 신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로 불렸다.
그리스, 로마 3은 숙명, 운명으로서 세 가지 모습을 가진 하나의 신 모이라이(라케시스, 클로토, 아트로포스)를 나타낸다. 헤카테(Hecate) 여신도 삼위일체다. 복수의 여신으로 나타나는 에리니에스(Erinyes, 알렉토, 타시포네, 메가이라)들과 메두사로 알려진 괴물 고르곤의 세 자매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도 하나이자 셋인 모습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세 여신 카리테스들(Caritas,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시네, 탈레이아), 미의 세 여신들(graces), 3인의 세이렌(Seiren), 식물의 성장을 주관하고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상징하는 세 명의 여신 호라이들(Horae, 에우노미아, 디케, 에이레네 또는 탈로, 아우크소, 카르포),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지키는 세 명의 여신들(아이글레, 아리티아. 헤스펠라레투사 또는 아이글레, 아레투사, 헤스페리아), 태어날 때부터 백발을 하고 나온 그라이아이(Graeae, 팜프레도, 에니오, 데이노)도 있다.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Cerberos)는 머리가 셋이고 스킬라(Scylla)에게는 거대한 꼬리가 세 개, 키마이라(Chimaera)는 머리와 몸, 꼬리가 세 가지 다른 동물(사자, 산양, 뱀)의 모습이었다. 3,4 그리고 두 숫자의 합인 7은 3가지의 세계와 4대 원소를 주관하는 여왕으로서의 여신 아프로디테/베누스(Aphrodite/Venus)의 성스러운 숫자다. 오르페우스(Orpheus) 교의 상징체계는 존재, 생명, 지성이라는 3대 요소를 가진다.
유태교 3은 무한의 빛, 성화(聖化)된 지성, 카발라에서 3은 세피로스의 비나(지성)을 나타내며 남·녀, 통합적 지성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헤르메스 사상 지고의 힘힘으로서의 신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의미한다.
힌두교 트리무르티(trimurti,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의미한다. 이는 창조·지속·파괴와 시작·유지·종결의 세 가지 힘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삼신일체의 신은 많다. 달의 전차는 바퀴가 세 개 달려 있다.
잉카 태양신에는 아버지 태양(아포인테이), 자식 태양(첼리인테이), 형제 태양(인테이카오키)의 세 가지 모습이 있었고 이들은 삼신일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세 가지 신기(神器)에는 거울(八咫鏡), 검(天叢雲劍), 옥(八坂瓊曲玉)이 포함되며 각기 진리·용기·연민의 뜻을 가진다.
마오리 족 창조신인 큰영은 태양, 달, 대지의 삼위일체 신이다. 또한 자연의 신 즉 과거·현재·미래의 신이기도 하다. 3은 세워진 세 개의 손가락으로 상징되는 정신·인격·체격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완성을 나타낸다.
북유럽, 게르만 숙명은 세 명의 노른(마니, 니, 니시), 즉 운명의 세 여신을 통해서 나타난다. 세 자매는 순서대로 보름달, 초승달, 반달을 상징한다. 게르만 신화에서는 달이 숙명을 나타내며, 달의 여신 홀다는 두 자매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룬다. 달에 사는 토끼는 다리가 셋이다. 천둥신 토르(Thor)는 때로 머리가 셋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각 소용돌이 무늬 또는 삼각 호 장식은 오딘/보탄(Odin/Wotan)의 상징이다. 또한 3은 행운의 숫자다. 뭐든 좋은 것은 3이다.
슬라브 달의 신은 머리가 세 개다.
도교 삼재는 천, 지, 인을 가리킨다. 3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면 중심이 남는 최초의 강한 숫자다.
3은 양. 길함을 뜻하며 다수를 상징한다.

4
 
최초의 입체는 4에서 비롯된다. 4는 현현의 공간적 구조 또는 질서, 동적인 원에 대립하는 정적인 상태를 상징한다. 4는 완전성, 전체성, 완성, 연대, 대지, 질서, 합리성, 측정, 상대성, 정의를 상징한다. 4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는 4가지 기본 방위, 사계절, 4개의 바람, 정사각형의 4변, 십자가의 4개의 팔, 낙원에 있는 4개의 강, 지옥에 있는 4개의 강, 네 개의 성산(聖山), 낮과 밤의 네 구분, 달의 4현(弦), 4복음서 기록자 등이 있다. 서구에서는 세계가 4대 원소(동양에서는 5행)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성스러운 사위일체는 삼위일체와 대조적이다. 구약성서에서는 4가 상징적인 숫자였고 낙원의 중심에서 네 방향을 향해서 십자형으로 흘러나가는 4개의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지상 세계의 4개 지방 등 보편적인 상징이었다. 사위일체는 정사각형이나 십자가 뿐 아니라 4개의 잎 형상으로도 묘사된다.

아메리카 인디언 4는 네 개의 기본방위, 4가지 바람 등 가장 자주 사용되는 숫자이며 십자, 만(卍) 등의 형태로 묘사된다. 의식이나 의례에서는 같은 동작이 네 번 반복된다.
고대 서아시아 바람의 네 신은 동사남북의 네 방위와 동일시되었다.
불교 생명의 나무 담바에는 큰 가지가 4개 있고, 뿌리에서는 낙원의 4개의 성스러운 강이 흘러나온다. 이것들은 자무량심(慈無量心), 비무량심(悲無量心), 희무량심(喜無量心), 사무량심(捨無量心)의 4무량심1)을 나타낸다. 중국 불교에서는 4가지 기본 방위에 사천왕(四天王)2), 즉 동에는 옥반지와 창을 들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에는 비파를 지닌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에는 혼돈과 지진, 암흑의 우산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에는 채찍, 표범가죽으로 만든 자루, 용, 진주를 가지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자리잡고 있다.
1) 자무량심은 안락을 베풀려는 마음, 비무량심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마음, 희무량심은 중생이 기쁨을 얻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사무량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을 버리고 모두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다.
2) 한국에서는 동쪽에 옥반지와 검을 지닌 지국천왕, 남쪽에 용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 서쪽에 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 북쪽에 비파를 지닌 다문천왕이 있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목조 사천왕 참조.
중국 4는 정사각형으로 상징되는 대지의 숫자다. 불사의 강은 모두 네 개다.1) 4는 짝수이며 음(陰)의 숫자다.
1) 사독(四瀆): 신앙의 대상이 된 4대강. 양쯔(揚子), 지수이(濟水), 황허(黃河), 화이허(淮水).
기독교 4는 육체의 숫자, 3은 영혼의 숫자다. 낙원에서 흘러나오는 4개의 강, 4복음서, 4복음서 기록자, 4명의 대천사(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우리엘), 4악마(사탄, 바알제붑, 벨리아르, 몰록), 4대 교부(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뭇,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그레고리우스), 4대 에언자(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4덕(신중, 용기, 절제, 정의), 하나인 영기에서 불어오는 4개의 바람, 계시록의 4기사, 4복음서 기록자의 형상을 뜻한다.
이집트 4는 시간과 태양의 운행을 이해하는 성스러운 숫자다. 4개의 기둥이 하늘의 궁륭을 떠받치고 있다. 사체(死體)의 네 부분(간장, 폐, 내장, 위)이 담겨 있는 4개의 카노푸스의 단지를 지키는 수호자는 4가지 기본 방위와 연관되는 호루스(Horus)의 네 자식들이다.
그노시스 주의 바벨로(태모신)의 4를 뜻한다.
그리스 4는 헤르메스 신의 숫자다.
유태교 4는 측정, 은혜,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리즘에서 4는 세피로스의 헤세트(은총)를 나타내며, 카발라의 4세계(유출 세계, 창조 세계, 형성 세계, 활동 세계), 공간의 4방위, 토라의 4가지 위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헤르메스 사상 헤르메스 사상에서 4는 사위일체의 신(누스, 로고스, 누스 데미우르고스, 안트로포스)을 나타낸다.
힌두교 전체성, 충실, 완성을 의미하며, 창조주인 브라흐마는 4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힌둑 사원은 정사각형의 4변을 기초로 건축되며 질서와 완결성을 상징한다. 4개의 물질전개원리, 인간의 사지, 4자연계(동물, 식물, 광물, 정신), 4유가를 뜻한다. 4는 주사위에서 가장 이길 승산이 많은 숫자(서양에서는 7)이다. 4개의 카스트, 둘씩 대립하는 4개의 쌍이 있다.
이슬람교 원질을 나타내는 4가지 요소는 원리(창조주), 보편적 지성, 보편 영혼, 제1질료다. 이것은 카발리즘의 4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다. 또한 4인의 천사, 4개의 죽음의 집이다.
마야 천둥번개를 타고 지상계의 기본방위로 나타나는 챠크스 신이 있다. 또한 바카브 신과 4인이 교대로 1년의 1/4씩 지상계를 통치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완성, 조화로운 균형, 정의, 대지를 뜻한다. 4는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서약의 숫자다. 4와 10는 신을 뜻하며 테트라크티스(tetraktys, 1+2+3+4=10)의 성수(聖數)다.
북유럽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트(Asgard)에는 젖이 흐르는 4개의 강이 있다.
게르만 4인의 난장이가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도교 하늘을 지키는 네 사람의 수호신은 옥으로 만든 탑을 들고 있는 이(李), 검(劍)을 들고 있는 마(馬),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조(趙), 못이 박혀 있는 곤봉을 들고 있는 온(溫)이다. 4종류의 영적인 짐승으로 된 4신과 4령이 있다. 4신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이며, 순서대로 4가지 기본방위(동서남북)를 나타낸다. 4령은 기린, 봉황, 거북, 용이다.


5

 

5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사지를 뻗어 오각형의 별 모양을 한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다. 오각형 별에는 끝나는 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별과 마찬가지로 완전성과 힘의 상징이다. 5는 n제곱을 했을 때 마지막 숫자가 항상 5로 끝나기 때문에 순환수라고 불린다. 오각형 별은 원처럼 전체를 상징한다. 5는 중심과 기본방위를 나타내는 4점을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각형 별 모양은 4대 원소라는 힘을 만들어낸 중심적 창조주인 신성을 나타낸다. 5는 여성, 짝수인인 2와 남성, 홀수인 3의 결합으로서 성혼의 숫자다. 또한 5는 명상, 종교, 섭리, 다재, 오감을 나타낸다. 다섯잎 꽃, 다섯 개의 끝을 가진 잎은 소우주를 나타낸다. 별포는 펜타그램과 마찬가지로 통합된 인격을 나타내며 별표의 곡지점이 위쪽을 향하고 있을 때에는 요술과 검은 마법을 뜻한다. 사람의 다섯 손가락은 최초의 계산기 구실을 했다.

연금술 다섯잎 꽃과 오각형 모양의 별은 제5원소를 나타낸다.
불교 심장에는 네 가지 방향이 있고, 중심과 합해서 5라는 숫자가 되어 보편성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네 개의 섬에 둘러싸인 성산(聖山)도 보편성의 상징이다.1) 다섯의 선정불(禪定佛)2)이 있다.
1) 수미산(須彌山)은 동의 승신주(勝身洲), 서의 섬부주(贍部洲), 남의 우화주(牛貨洲), 북의 구로주(俱盧洲)의 네 대륙에 둘러싸여 있다.
2) 1. 대일여래(大日如來, 광휘의 뜻)는 법륜(法輪)과 중심과 흰색으로 상징된다. 2. 아축여래(阿축如來, 부동의 뜻)는 금강, 동쪽, 청색으로 상징된다. 3. 보생여래(寶生如來, 보탄(寶誕)의 뜻)는 보석과 남쪽, 황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4.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무량광(無量光)의 뜻)는 연(蓮)과 서쪽, 적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5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 아주 확실한 성공의 뜻)는 검(劍)과 북쪽, 녹색으로 상징된다.
중국 오행(五行)1), 오기(五氣)2), 오운(五運)3), 오성(五星)4), 오악(五嶽)5), 오곡(五穀)6), 오색(五色), 오미(五味)7), 오독(五毒)8), 오진(五塵)9), 오덕(五德)10), 오복(五福)11), 오상(五常)12), 오륜(五倫)13)을 뜻한다.
1)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2) 추위(寒), 더위(暑), 가뭄(燥), 습함(濕), 바람(風)
3) 오행의 운행
4) 목성(歲星), 화성(熒惑星), 금성(太白星), 수성(辰星), 토성(鎭星)
5)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숭산(嵩山)
6) 중국에서는 참깨, 보리, 피, 쌀, 콩(또는 참깨, 보리, 피, 수수, 콩)을 오곡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오곡이라 한다.
7)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단맛
8) 뱀, 두꺼비, 지네, 전갈, 도마뱀의 독
9)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다섯 가지 욕망.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의 오욕
10)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
11) 장수, 부유, 무병식재, 도덕을 즐기는 것, 천수를 누리는 것(또는 자손이 많은 것)
12) 어짐(仁), 의리(義), 예절(禮), 지혜(智), 신뢰(信)의 다섯 가지 덕
13) 부자유친(父子有親), 장유유서(長幼有序),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붕우유신(朋友有信)
기독교 5는 타락 후의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오감(五感), 십자가의 다섯 개의 점, 십자가 형을 받은 예수의 몸에 난 다섯 개의 상처(두 손, 두 발, 허리), 5천 사람을 먹인 물고기, 모세 오경1)의 숫자다.
1)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집트 나일강에 있는 다섯 마리 악어의 숫자다.

그리스, 로마 사랑과 화합을 나타내는 혼례의 숫자다. 5는 비너스(금성)의 숫자며, 비너스는 5년을 주기로 완성된다. 빛의 신으로서의 아폴론/아폴로는 전능, 전지, 편재, 영원, 통일의 5가지 상징물을 가지고 잇다.

유태교 5는 강함과 엄격, 근원지의 상징이다. 카발에서 5는 세피로스의 게브라(엄격함)를 의미한다.

힌두교 세계는 다섯 가지 요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오대(五大, 조악하고 큰 다섯 원소), 오유(五唯, 미세 원소), 다섯 가지 원색, 오감, 시바 신의 다섯 가지 얼굴이다. 비슈누(Vishnu)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10가지(5의 2배) 권화1)가 있다.

1) 마즈야(물고기), 쿠르마(거북), 바라하(멧돼지), 누리싱하(사람사자), 바마나(난쟁이), 파라슈라마(도끼를 가진 라마), 라마, 크리슈나, 석가세존, 칼키
이슬람교 실행해야 할 다섯 가지 의무인 오주(五柱)1), 신의 다섯 가지 재림2), 다섯 가지 기본 교리3), 다섯 가지 활동, 하루 다섯 차례4)의 예배를 나타낸다.

1) 신앙 고백, 예배, 단식, 희사, 순례
2) 물질세계, 이미지와 상징의 세계, 영의 세계, 신의 이름과 속성의 차원, 신의 본질의 차원
3) 무아타지라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 내세에 대한 약속과 위협, 4. 중간적인 위치, 5. 윤리적 명령이고, 시아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예언자직, 4. 사도직, 5. 이맘직
4) 새벽, 정오, 오후, 일몰, 밤
파르시 교 파르시 교와 만다 교의 의식에서 5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그것은 성스러운 빛의 윤일이 5일이라는 사실과 결부된다.

피타고라스 학파 5는 성혼, 즉 하늘(3)과 대지(2)의 결혼을 나타낸다. 빛, 빛의 신 아폴론과 그의 다섯 가지 특성을 가리킨다.


6

6은 평형, 조화를 상징한다. 6은 1에서 10까지의 범위 안에서 완전수(1+2=3=6)다. 필론에 따르면 모든 수의 중심으로서 가장 생산적이다. 6은 서로 반대되는 대극(對極)의 통일을 상징하는데, 자웅 두 개의 삼각형이 합쳐져 남녀추니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때 꼭지점이 위를 향하고 있는 삼각형은 남자와 불, 하늘을 나타내고, 역삼각형은 여자, 물, 대지를 나타낸다. 또한 6은 사랑, 건강, 아름다움, 기회, 행운을 의미한다. 서양에서는 주사위에서 6이 다른 숫자를 누르는 가장 강한 숫자다. 태양의 바퀴에는 6개의 빛줄기가 있다. 교차하는 두 개의 삼각형 즉 솔로몬의 봉인이라고 불리는 6개의 꼭지점을 가진 별은 완전한 균형을 상징한다.


고대 서아시아 창조에 소요되는 6일간을 뜻한다.

중국 우주는 6이라는 숫자에 의거한다. 4가지 기본 방위와 하늘(위)과 땅(아래)이 6가지 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 감각1)이 있다. 밤낮의 깊이는 각기 여섯으로 구분된다.

1)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육감으로서의 마음
기독교 6은 완전, 완성, 우주 창조에 필요한 6일간을 나타낸다.

유태교 창조에 필요한 6일간, 명상,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라에서 6은 창조, 세피로스의 디후엘레트(아름다움)의 상징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기회, 행운을 뜻한다.


7

7은 대우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완전, 전체성의 뜻이다. 3은 하늘과 혼을, 4는 대지와 육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7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덧없음을 모두 포함하는 제일 작은 숫자다. 7은 완성, 보증, 무사, 안식, 풍부, 재통합, 종합 등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처녀성과 '태모'를 나타내는 숫자다. 7과 연관되는 것으로는 우주의 7단계, 일곱 개의 하늘, 일곱층의 지옥, 7개의 행성과 그 행성이 나타내는 금속들(달은 은, 수성은 수은, 금성은 동, 태양은 금, 화성은 철, 목성은 주석, 토성은 납)이 있다. 우주의 일곱 개의 원, 태양의 일곱가지 광선, 인간의 일곱시기, 지혜의 일곱기둥, 일곱가지 무지개색, 1주일의 일곱 요일, 7음계, 세계의 7대 불가사의1) 등이다. 태양의 제7의 광선은 인간이 현세에서 내세로 가는 길이다. 단식과 회개는 7일간 행한다. 고대 유태인 철학자 필론에 따르면 어떤 수도 7제곱을 하면 제곱과 세제곱 모두를 포함하므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은 인도, 페르시아, 동아시아, 켈트, 지중해의 신화에 등장한다.


1) 이집트의 피라밋,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터키 에베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인청동상, 이라크 바빌론의 공중정원, 허티 할리카르나소스의 무덤,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연금술 작업에서 7개의 금속이 관계된다.

고대 서아시아 월령의 일곱 가지 구분과 1주일의 일곱 요일이다. 달이여! 그대는 뿔 모양의 빛으로 6일을 정하고 7일째에는 반쪽의 관으로 빛난다. 이런 의미에서 음력 일곱째 날은 태양에 대립하는 어둠과 불길을 상징하며 일곱째 날에 어떤일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그 날이 안식일이 되었다. 대지에는 일곱 개의 지역이 있다. 지구라트의 일곱 행성들로 상징되는 일곱 개의 하늘이다. 생명의 나무의 일곱가지에는 각기 일곱 개의 잎이 달려 있다. 지옥의 일곱 개의 문, 티아마트 여신의 일곱 악령과 그 여신을 죽인 일곱 개의 바람, 7가지 색, 일곱개의 인장, 일곱 기둥의 운명의 신을 나타낸다.

점성술 큰곰자리의 일곱 개의 별은 1년 중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불멸이다. 플레이아데스, 일곱 개의 큰 행성, 태양의 일곱 가지 광선을 뜻한다.

불교 7은 상승의 숫자, 지고천(至高天)으로 올라가 중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숫자다. 부처의 칠각(七覺, 일반적으로 팔상)은 시공을 초월하는 칠천(七天)1)을 넘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자바 섬에 있는 보루부두르 불교사원의 7층 건축물은 성산이자 우주축을 상징한다. 정상은 초월적인 북쪽을, 정상에 오르는 것은 부처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상징한다.

1) 야마천(夜摩天), 도사다천(覩史多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범중천(梵衆天), 대범천(大梵天)
기독교 신은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6개의 광선의 한가운데 있는 일곱번째 광선으로 상징된다. 7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7가지 성사1), 성령의 일곱가지 선물2), 7덕3), 일곱가지 큰 죄4), 연옥에 있는 일곱 층으로 된 산5), 중세의 자유 7과6), 행성을 포함하고 있는 일곱 개의 투명구체, 7대 예언자7), 지상에 관계하는 일곱 대천사8), 예수에 의해서 추방된 일곱 악마, 7일간의 단식과 회개,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9)과 슬픔10), 기독교 국가의 7대 영웅11), 초대 교회의 일곱가지 충고다. 또한 천지창조의 6일이 지난 후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다. '구약성서'에서 7이라는 숫자는 바알람의 일곱 개의 제단, 제물로 바친 일곱 마리 수소와 숫양, 일곱 개의 양각 나팔,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돎, 나아만이 요단 강에서 목욕한 횟수, 또한 삼손은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이라고 말했다. 엘리사에 의해 깨어난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했다. 노아의 방주는 7개월 만에 육지에 도달했다.

1) 성세, 견진, 성체, 고백, 병자, 신품, 혼인
2) 지혜, 총명, 지식, 의지, 영리, 효애, 경외
3) 3가지는 신에 대한 덕이고, 4가지는 기본 도덕
4) 교만, 탐욕, 색욕, 질시, 폭식, 분노, 나태
5) 일곱 가지 큰 죄를 하나씩 씻어내는 곳
6) 문법, 논리학, 수사학,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
7) 4대 예언자에 요나, 요엘, 자카리아 포함
8) 4대 천사에 카무엘, 요피엘, 쟈디엘 포함
9) 수태고지, 엘리사벳의 내방, 예수의 강탄, 동방박사 3인의 내방, 잃었던 예수의 발견, 부활, 승천
10) 시누온의 예언, 이집트로의 피난, 예수를 잃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뭇사람에게 전시된 예수의 시신,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매장
11) 영국의 성 게오르기우스/조지, 스코틀랜드의 성 안델레, 웨일즈의 성 다비드,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키우스, 스페인의 콤포스테라의 성 야곱, 프랑스의 성 도니, 이탈리아와 파트와의 성 안토니우스
이집트 운명의 여신으로서의 일곱 명의 하토르(Hathor)와 마아트(Maat)가 있었으며, 이 여신의 여사제들은 7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Ra) 신의 일곱 딸은 7벌의 내의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들었다. 라 신의 일곱 마리 매들은 칠현인을 나타낸다. 라의 호아소와 함께 있는 일곱 마리의 암소는 풍요를 나타낸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집트 신화 해석에서는 명계에 일곱 가족이 있고 21개의 문이 있다. 7은 오시리스(Osiris) 신의 성수(聖數)다.

그리스, 로마 7은 7현의 리라를 가진 아폴론/아폴로 신의 수이며 아테나/미네르바 여신, 군신 아레스/마르스의 수이기도 하다. 목신 판(Pan)은 일곱 개의 갈대로 만든 갈대 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는 일곱 명의 현인1)이 있다.

1) 로도스 섬의 클레오불롯, 코린토의 정치가 페리안드로스, 레스보스의 정치가 피타코스, 그리스의 격언가 비아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스파르타의 정치가 케일론,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
유태교 신비의 지혜를 뜻한다. 유태의 1년에는 일곱 번의 큰 제삿일1)이 있다. 메노라(Menorah)라는 가지가 일곱인 촛대가 있다. 솔로몬의 신전을 건축하는 데 7년이 걸렸다. 지혜의 일곱 기둥2)의 뜻이다.

1) 신년제(로슈 하샤나), 속죄의 날(욤 피르르), 초막절 축제(수코프), 궁결제(하누카), 프림 제, 과월제(페사하), 칠주제(샤보트)
2) 카발리즘에서 세피로스의 네시아하(영원)의 뜻이다.
힌두교 브라흐마의 칠보, 대홍수 이전의 일곱 신과 홍수에서 구원된 일곱 현자를 나타낸다.

이슬람교 7은 가장 작은 완전수, 일곱 개의 하늘, 일곱 가지 기후, 일곱 대륙과 바다, 일곱 색, 7인의 예언자1), 일곱 가지 활동력, 혼의 일곱 가지 상태2)를 뜻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을 상징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3)을 상징한다.

1) 아담, 누흐(노아), 이브라힘(아브라힘), 무사(모세), 다우드(다윗), 이사(예수), 무하마드
2) 명령을 내려 악으로 유도하는 혼, 비난하고 비판하는 혼, 영감을 받는 혼, 평온한 혼, 만족하는 혼, 기뻐하는 혼, 완전한 혼
3) 생명, 지식, 의지, 능력, 청력, 시력, 언어
일본 칠복신(七福神)1)을 상징한다.

1) 대흑(大黑), 혜비수(惠比須), 비사문(毘沙門), 변천(辯天), 포대(布袋), 복록수(福祿壽), 수로인(壽老人)
마법 주문으로 옭아매기 위해서 끈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든다. 주문은 일곱 번 반복한다.

미트라교 미트라스 신전에는 일곱 개의 가로대를 가진 사다리가 있는데, 그것들은 밀의의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계단을 상징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하늘, 4는 대지를 뜻하며 7은 이승의 신, 완성을 나타낸다.


8

영적인 의미에서 8은 신참자가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단계 칠천계(七天界)를 통과해서 도달하는 최종지점을 상징한다. 따라서 8은 낙원의 회복, 재생, 부활, 지복, 완전한 리듬의 상징이다.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인간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제8일째다. 단식과 참회의 7일간이 끝난 8일째는 풍요와 신생의 날이다. 7+1이라는 의미에서 8은 옥타브를 나타내는 숫자, 재출발을 상징한다. 8은 8개의 꼭지점을 가진 정육면체와 결부되기 때문에 입체성을 상징한다. 동서남북의 4가지 기본 방위에 각각의 중간 방위를 다하면 8개의 방위가 되며, 바람에도 8가지 종류가 있다. 8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쌍을 나타낸다. 정팔각형은 정육면체에서 원으로서의 변형의 시작을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일설에 의하면 네보 신의 마법의 숫자다.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중국 8은 전체, 모든 가능성의 현현, 행운의 상징이다. 팔괘(八卦)는 양(陽)을 나타내는 효(爻)가 세 개씩 다양하게 결합해서 8개의 조합으로 나타난 도형이다. 이들 8개의 조합은 대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때 원주는 시간과 공간(및 그 속에서의 생성 유전)을 상징한다.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 기쁨이 있다.

기독교 신생, 재생의 듯이다. 성수반은 대개 다시 태어남의 상징으로 8각형이다. 여덟가지 행복을 뜻한다.

이집트 신 토트의 성수(聖數)다.

유태교 8은 완벽한 지혜, 광휘, 세피로스의 호드(권위), 요드 헤 바브 헤(YHVH, 야훼)의 숫자, 주(主)의 숫자다. 솔로몬 신전은 8일째 되는 날 깨끗이 청소되었다.

헤르메스 사상 8은 헤르메스 신학에는 수와 기하학의 발명자인 주신 토트/헤르메스와 그 밑의 여덟 명의 신1)이 있다.

1) 눈, 네네트(심연), 후후, 후후트(무한), 쿠쿠, 쿠쿠트(암흑), 아멘, 아메네트(불가시성, 공기)
힌두교 8*8는 지상에 현현된 천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사원과 '만다라'의 형태는 8*8의 상징을 토대로 건축되었다. 세계 8대 지역, 8개의 태양, 하루의 시간을 8등분함, 8개의 '차크라'가 있다.

이슬람교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왕관은 8명의 천사가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공간의 8구분에 대응하는 것이다. 아라비아 어의 철자의 여덟 가지 구분1)에도 대응한다.

1) 순(脣) 문자, 치경(齒莖) 문자, 치찰(齒擦) 문자, 설단(舌端) 문자, 구각(口角) 문자, 경구개(硬口蓋) 문자, 구개수(口蓋垂) 문자, 연구개(軟口蓋) 문자
일본 8은 수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 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빛나는 하늘의 기둥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으로 색색가지 여덟 개의 천구가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8은 연대, 안정을 나타낸다.

도교 8은 현현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낸다. 현상계의 여러 가지 힘은 팔괘로 상징된다. 팔선 또는 불멸을 뜻한다.


9

9는 강력한 숫자인 3의 거듭제곱(3x3)이고 3조의 3배다. 9는 완성, 성취, 달성, 처음과 끝, 전체를 의미하며 천계와 천사의 숫자다. (9천계, 9천사의 위계) 또한 지상낙원을 나타낸다. 9는 불후의 숫자다. 또한 9는 원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원주는 90도 단위로 4등분되며 원주 전체는 360도이기 때문이다. 9는 2개의 삼각형이 조합된 모양으로 상징되며, 남과 여, 물과 불, 산과 동굴과 같은 대립원리를 상징한다.


불교 9는 지고의 영적인 힘을 상징하며 구천(九天)1)의 의미가 있다.

1)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된 아홉 개의 천체. 일천(日天), 월천(月天), 수성천(水星天), 화성천(火星天), 목성천(木星天), 금성천(金星天), 토성천(土星天), 항성천(恒星天), 종동천(宗動天)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켈트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9는 매우 중요한 의미르르 가진다. 8가지 방위와 중심점을 더한 숫자로 9는 중심을 상징한다. 삼중의 여신에서 삼중이란 3의 세제곱을 의미한다. 9인의 켈트 처녀, 9개의 흰 돌로 브리지트 여신의 시중을 드는 아홉처녀를 나타낸다. 9는 벨테인 불의 축제와 연관된다. 의식에서 9명씩 9번 총 81명이 참가한다.

중국 모든 숫자 중에서 3x3은 가장 길(吉)한 숫자이며, 9는 하늘의 힘을 나타낸다. 9는 명당에서처럼 8가지 방위와 아홉번째 점으로서의 중심을 나타낸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구법(九法)1), 구관(九官)2)을 뜻한다. 정전법(井田法)에서는 토지를 우물 정자 모양으로 아홉 구획으로 분할했다. 이때 중심에 있는 토지는 아홉번째 토지로서 최고 지배자인 상제에게 바쳤고 신의 토지라고 했다. 이 토지는 공전(公田)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은 천자가 천제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풍수에서도 지관이 용혈(龍穴)을 찾으면 그 구멍 앞에 있는 공간(명당)을 9분할한다.

1) 주나라 무왕에게 기자가 답했던 아홉가지 큰 법. 오행,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懲), 오복(五福)
2) 고대의 관제에 따른 아홉 명의 대신. 사공(司空), 황직(皇稷, 농경), 사도(司徒, 교육), 사(士, 형벌), 공공(共工, 공업), 우(虞, 산림), 질종(秩宗, 제사), 전악(典樂, 음악), 납언(納言)을 뜻한다.
기독교 기독교의 상징체계에서 9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천사에는 3계급씩 3조, 즉 아홉 위계가 있다. 하늘에는 아홉 천구, 지옥에는 아홉 환도(還道)가 있다.

이집트 이집트에는 아홉 신1)이 있다.

1)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신에는 아톤(Aton, Ra), 슈, 테프누트, 게브, 누트,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가 있다.
그리스, 로마 아홉 신, 후에는 9명의 뮤즈를 나타내는 숫자다.

유태교 9는 순수지성을 나타낸다. 9는 그 배수로 다시 9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진리를 뜻한다. 카발라에서 9는 10단계의 세피로스에서 아홉번째인 '이에소드(토대)'를 상징한다.

힌두교 불의 신 아그니의 성수다. 9의 제곱은 81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지는 만다라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우주를 형성하고, 우주를 포함한다.

마야 명계는 9층으로 나뉘어 있고 각 층을 다스리는 명계의 주인이 배치되어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9는 다른 모든 숫자가 그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순환하는 것으로 숫자의 한계를 나타낸다.

북유럽 오딘 신은 인간을 위해서 지혜의 비밀을 손에 넣으려고 아홉 낮, 아홉 밤 동안 '이그드라질'에 매달려 있었다. 북유럽의 페르세포네라고 불리는 눈(雪)의 여신 스켈디는 1년 중 3개월은 산 속에서, 9개월은 니오르드(항해, 교역의 신)의 바다에서 산다. 북유럽과 게르만의 상징체계에서 9는 성수(聖數)다.

10

10은 우주를 타나태는 수, 창조의 패러다임이자, 모든 수를 포함한다.
따라서 모든 사물과 모든 가능성을 상징한다.
10는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숫자, 10진법의 전환점이 되는 숫자다.
10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한다.

테트라크티스(tetraktys) 형(1+2+3+4=10)은 신성(神性)을 상징한다.
이 경우 1은 점, 2는 선, 3은 면, 4는 공간을 나타낸다.
10은 완전수로 1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10은 양 손의 열 손가락을 기초로 나온 숫자이며, 완성, 모든 계산의 기본을 나타낸다.
또한 보다 높은 범주의 완전성으로서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토대가 되는 숫자다.
또한 중국에서 만(萬)은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고, 현현 세계 전체를 뜻한다.
10은 여행의 완성을 나타내며 기원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는 9년간 방랑을 하고 10년째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트로이는 9년간 포위를 견디다가 10년째에 함락되었다.
10은 원주를 둘러싸는 9와 중심을 나타내는 1의 합으로 나오는 숫자로 완전성의 상징이다.
우주축으로서의 1과 그 주위를 돌며, 춤추는 9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서아시아 봄 축제에서 10일째에는 신상들을 모두 등장시켜 행렬을 지어 축하한다.
중국 10은 한자로는 종횡의 길이가 모두 같은 '십(十)'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음과 양이라고 불리는 두 방향을 향하고 있는 자신을 상징한다.
통설로는 동서를 뜻하는 ㅡ와 남북을 뜻하는 |이 모두 갖추어져 완전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십간(十干)에 12지를 배합해 모두 60가지 조합으로 연월일을 표시한다.

기독교 10은 모세의 십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10개의 등불, 10인의 처녀, 10탈란트 등의 비유에 나오는 숫자다.
신에게 바치는 1/10세(십일조)다.

그노시스 주의 충일의 세계, 이이온의 로고스(말씀)와 조에(命)에서 다시 10개의 아이온이 나왔다.

유태교 카발리즘에서 10은 '영원세계'인 요드(히브리어 알파벳의 열번째 문자), 신(神)(요드 헤 바브 헤, YHVH)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문자에 대응하는 숫자이며, 눈부신 지성, 신의 지원, 십계, 세피로스의 말후트(국왕), 신의 10개의 이름을 뜻한다.

또한 카발라에서 10은 절대무에서 흘러나오는 세피로스의 수다.
세피로스는 대개 생명의 나무에 의해서 상징되는데, 열 개 중의 첫번째 것이 모나드, 즉 다른 압홉 개의 '제1원인'이다.
또한 나머지 아홉 개의 세피로스는 각기 남, 녀, 그리고 둘을 통일시키는 지성의 삼위일체의 3가지로 구성된다.

열번째의 아도니(adoni)는 통일성으로서의 신비적 회귀를 상징한다.
솔로몬 신전에는 10개의 커다란 사제 목욕용 대야, 10개의 식탁, 10개의 촛대가 있다.
계약의 궤 앞에는 10명의 레위 인 사제가 있다.

힌두교 10보다 큰 범주들, 즉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기반을 이룬다.

이슬람교 이슬람법에서 10분의 1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타고라스 학파 10은 모나드를 나타낸다.
10은 완전의 상징이다.

로마 로마 숫자에서 10은 X(완전한 숫자)로 완성의 상징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40일 / 03- 30-2024(토)
출애굽기 40:1-
언약궤(1절)
찬송 /  장(  )


40장


1-15 성박의 건설과 각 기구의 위치와 그 성별 및 제사장의 성별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
16-33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세우고, 여러 기구를 각각 그 위치에 두다.
34-38 성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성막 안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9일 / 03- 29-2024(금)
출애굽기 39:1-
언약궤(1절)
찬송 /  장(  )



39장


1-31 제사장의 성의의 제조.
32-43 성막의 완성과 모세의 검열 및 축복.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8일 / 03- 28-2024(목)
출애굽기 37:1-29
번제단(1절)
찬송 /  209장(주의 말씀 받은 그날)

38장
     1-7. 제단과 그 부속품의 제작
        8. 세수통(물두멍)의 제작
  9-20. 뜰의 포장과 기둥 및 문장의 제작
21-31. 금·은·동의 헌물의 분량과 그 용도


창세기 45: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요한복음 4:18
내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번제단(燔祭壇)의 필수품(必需品)

1. 불(火) - 보혜사 성령

레위기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성령은 어떻게 불과 같은가요?

성경은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 (히브리서 12:29).
불이 자주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불에 붙은 떨기나무(출애굽기 3:2), 쉐키나의 영광(출애굽기 14:19; 민수기 9:14-15), 에스겔의 환상 (에스겔 1:4)이 그 예입니다.
많은 경우, 불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의 수단이었고(민수기 11:1, 3; 열왕기하 1:10, 12), 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사사기 13:20; 열왕기상 18:38).

불은 구약성경 제사에서 중요했습니다.
번제 제단 위의 불은 하나님께서 직접 피우신(레위기 9:24) 신성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제단 위에 피워진 당신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킬 임무를 맡기셨고 (레위기 6:13), 다른 근원에서 피워진 불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레위기 10:1-2).

신약성경에서 제단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은사로 단장한 “산 제물” (로마서 12:1)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맨 처음 부분에서, 성령은 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 (마태복음 3장)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성령이 초대 교회에 내주하시는 사역을 시작했을 때,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임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했습니다(사도행전 2:3-4).

불은 성령이 하시는 일의 경이로운 묘사입니다. 성령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열정, 그리고 하나님의 순결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의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로마서 8:9). 구약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성막 위를 불로 덮으심으로 (민수기 9:14-15) 당신의 존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불 같은 존재는 그들에게 빛과 길을 제공하였습니다 (민수기 9:17-23). 신약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서 “장막 집”, “하나님의 성전”인 (고린도후서 5:1; 6:16) 우리들의 몸에 거하심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열정을 부어주십니다. 길을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난 뒤, 서로에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32)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4:31).

성령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순결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고 (디도서 2:14),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이십니다 (고린도전서 6:11; 데살로니가 후서 2:13; 베드로전서 1:2). 은세공인이 불을 사용해 찌꺼기를 제거하여 고가의 은을 추출하듯이, 하나님은 성령을 사용해 우리의 죄를 제거하십니다 (시편 66:10; 잠언 17:3). 하나님의 불은 우리를 씻어주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2. 피(血) - 용서(죄 사함)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3. 뿔(角)
- 구원(생명 보호)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성경에서 뿔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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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뿔이 나 있는 '모세 조각상'(미켈란젤로 작, 1515년).

일반적으로 뿔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힘을 가진 자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부터 황소 뿔에 기름을 담아 그 기름을 왕이나 예언자, 사제에게 붓는 의식이 있었다.
이것은 기름 부음을 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힘을 실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네 모서리 장식으로 뿔이 달려 있었다.


성경에서도 뿔에 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구약성경에서 들소의 뿔은 하느님의 힘, 우리를 지켜주는 표징으로 왕이 백성을 보호하거나 원수를 물리치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됐다.

"그는 맏이로 난 소, 그에게 영예가 있어라. 그의 뿔은 들소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 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 에프라임의 수만 명이 그러하고 므나쎄의 수천 명이 그러하리라"(신명 33:17).


뿔을 든다는 것은 힘과 기쁨과 건강과 우월함을 나타낸다.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천둥으로 호령하신다"(사무엘상 2:10).

뿔은 힘의 상징, 특히 왕적인 힘의 상징이 된다.
따라서 뿔을 베는 것은 그 사람의 힘이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압의 뿔이 잘리고 그의 팔이 부러졌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미야 48:25).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을 보면 모세에게 뿔이 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모세에 대한 그림을 보면, 머리에 뿔이 난 모세를 그리거나 조각한 것이 많다.
모세 머리에 뿔이 나도록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그 원인이 라틴어 성경의 번역 오류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어 흥미롭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증언판 두 개를 들고 내려왔다.
그런데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니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워서 모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출애굽기 34:9-35).
이때 모세의 빛나는 얼굴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얼굴 살결이 빛나다'와 '뿔이 나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예로니모 성인은 구약성경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에서 이 대목을 그의 얼굴에 뿔이 돋은 것이라고 번역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성경 구절에 근거해 모세상을 조각했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후대 주석가들은 이 번역이 본래 의미와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 '모세 얼굴이 빛이 났는데 그 형태가 뿔 모양이었다'라고 해석하게 됐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고 하느님 영광이 모세 위에 머물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하느님의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을 상징하는 일곱 뿔을 갖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요한계시록 5:6).
성경에서 뿔은 하느님의 능력과 도움, 승리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다.

사무엘하 3:4
네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열왕기상 1: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열왕기상 1:50-51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7일 / 03- 27-2024(수)
출애굽기 37:1-29
언약궤(1절)
찬송 /  장(  )


언약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역대하 5:7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 개 아래라.

성경에서 언약궤의 이동과 그 위치에 대한 마지막 말씀이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언약궤가 솔로몬 왕이 만든 성전에 자리 잡는 이야기를 끝으로 언약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성경에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현재 그 언약궤는 어디에 있을까?'하는 질문을 갖게 된다.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을 때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을까?
언약궤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답은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질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를 어디엔가에 잘 감춰 놓았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장소는 현 예루살렘 황금돔 밑이다.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스람교도들이 황금 돔을 세워 놓았는데 그 밑에 언약궤가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눈에 거슬려도 황금 돔을 깨부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언약궤가 상할까 해서.

두 번째 장소는 로마 베드로 성당 밑이다.

자기들의 정통성을 강조하 기 위한 가톨릭의 주장이다.

세 번째 장소는 에디오피아의 어느 성당이다.

몇 년 전에 에디오피아에 있는 한 성당 신부가 보관 중인 언약궤를 공개하겠다고 신문 기자 인터뷰를 요청해서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결국 인터뷰는 무산되고 말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가 에디오피아로 갖고 갔을 것이라는 전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와 같이 언약궤가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엮어 있는 것은 아마도 예레미야 3장 16절에 "...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말씀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숨겼다고 본다.

외경 마카비 2서 2:7-8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와 분향단을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에 대비하여 감추어 놓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장소는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져 있을 것이다.

지팡이와 만나는 증거판 앞에 두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언약궤 속에 두 돌 판과 같이 넣었다(히 9:4).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두 돌 판만 남아 있었다(대하 5:10).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지 않으신다는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진정한 언약궤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 11:19)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시편 110:10)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특징    

1. 지혜로운 사람(1, 8절) - 솔로몬

2. 총명한 사람(1절) - 아비가일
3. 자원하는 사람(3절) - 다윗

지혜를 구한 솔로몬(열왕기상 3:1-15)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야보고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지혜로운 사람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솔로몬 왕을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이가 많아야 20세였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처럼 잘 할 수 있을까?’ ‘이 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
먼저 2장 13절~25절에 보면 왕위에 오르려 했던 아도니야를 제거하였습니다.
아도니야가 살려고 밧세바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밧세바는 이 이야기를 솔로몬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왕상 2:23-24)
결국 25절에 말씀을 보면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반역에 동참하였던 아비야달과 요압을 제거하였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 다윗에게 모멸감을 주었던 시므이도 제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장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립니다.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 3:4)

여러분 일천번제가 쉽습니까?
2년을 하고도 270일 동안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매일 매일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도전을 받고 일천번제헌금을 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헌금을 합니다. 그 액수를 다 다르지만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천원을 봉투에 넣어 헌금하고 어떤 분들은 매일매일 5,000원을 헌금하고,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헌금을 합니다. 그래서 혹시 빼먹을 수 있으니까 아예 번호를 1,000번까지 써서 놓고 헌금을 하는 모습을 저는 보았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30일 작정하고 매일 기도회를 가졌지만 30일 동안 기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 아플 때도 있고,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기기도 하고, 하다보면 체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천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 헌금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은 쉽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매일 송아지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의 각을 뜨고, 율법대로 버릴 것은 버리고 태울 것은 태워야 합니다. 정말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제사장들이 준비했겠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이 모든 것에 주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겠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작정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저는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작정하고 사는데 무슨 날을 정해서 작정을 하고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정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기가 쉽습니다. 한없이 뒤로 미루면서 열심을 품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표를 정해 놓고/ 시간을 정해 놓고/ 날짜를 정해 놓고/ 그 목표를 향하여 힘을 쏟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오. 정말 될 수 있으면 시간을 작정하고/ 날짜를 정하고 작정하여 기도해 보십시오. 가능하다면 기도하면서 여러분도 일천번제를 드리십시오.
분명히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릴 수 있는 근거도 여호와를 사랑하고 부친의 법도대로 행하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왕상 3:3)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천일이 하루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하루가 천년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과 연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라헬을 얻기 위해서 삼촌 라반과 계약을 하였습니다. “7년 동안 일하면 라헬을 주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라헬과 연애함으로 인하여 그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도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를 위해서 늘 봉사하고 헌신하여도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요.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일주일을 작정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정기도 시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을 때 너무나 즐거운 시간, 기쁜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매 말랐다면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헌신이 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보시고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6절부터 대답합니다.
(왕상 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 3: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결론적으로 무엇을 구했습니까? 지혜를 구했습니다.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10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 3:10)
솔로몬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기도하여도 주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기도를 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왕상 3:11)

그렇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았습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만을 위한 정욕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그렇습니다. 주님의 맞는 기도는 자기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의 맞는 기도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고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며 힘쓰는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로 주님의 일에 있는 것이 바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성도들의 마음에는 좀 더 주의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안일을 해도 먼저 예배시간을 피해서 하고
약속을 해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할 수 있도록 약속을 정하고
재정이 생겨도 하나님께 먼저 받칠 것을 생각하고
정말 복 받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남는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먼저 내가 쓸 것부터 챙기고 다음에 하나님 것을 생각합니다.
먼저 내 볼일 이 우선순위로 되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 순서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넘버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넘버 투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보너스를 주셨습니다.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3-14)

그렇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되고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뿐 아니라 보너스로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솔로몬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여러분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 것뿐 아니라 그 외에 것도 보너스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작정하십시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기를 작정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 우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이 주는 교훈(사무엘상 25:23~38)

사무엘상 25:2~3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마온에서 5리정도 떨어진 갈멜이라는 곳에 다윗이 육백 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고 훗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멸하고 거역하여 불순종했고 오히려 자기를 추켜세워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아말렉과의 전쟁을 자기 전술과 전략으로 이긴 것처럼 자기 이름으로 공덕비를 세우기도 하고 하나님이 철저히 금하셨음에도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들을 골짜기에 자기 몫으로 숨기기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세움 받고 쓰임 받는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교만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공덕을 치하하고 자기이름으로 행세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부득이 그를 버리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사울을 이미 버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이스라엘 왕의 후계자로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늘 성령충만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맡겨진 양떼를 돌봄에 있어서도 맹수들과 싸우면서까지 목자의 사명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목숨보다 귀한 것으로 여겨 신앙인격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맘에 들어 하셨습니다.

이런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망명생활의 훈련을 시키시는 과정입니다.

무용(武勇)에 뛰어난 600명의 용사들이 다윗왕조를 세우기 위하여 훈련하고 있었던 곳이 갈멜이었습니다.

다윗은 근처에서 양과 염소를 돌보고 있던 나발의 목자들을 당시 강도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로 하여금 해치지 못하게 지시하고 더불어 목동과 양떼까지 보호하여 지키게끔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발의 양털 깎는 날이 되어 갈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는 양털 깎는 날이 수입이 생기는 소망적인 날이라 큰 잔치를 베풀고 지나가는 나그네까지도 넉넉히 대접함으로 그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하여 인심을 후히 쓰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 25:5~8)”고 그의 부하 열 명을 나발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0~11)”고 합니다. 그는 빈정대며 주인에게서 떠나 반란을 시도하여 갈라져나가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 있다고 다윗을 빗대어 욕을 한 것입니다.

나발의 미련함은, 첫째로 하나님이 성령을 충만케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사람인 다윗을 몰라본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가축들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나발의 세 번째 미련함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발의 이런 미련함에 빈손으로 돌아온 다윗의 부하들을 보고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사백 명 가량은 칼을 차게 하고 그들을 죽이러 올라가고 이백 명은 그 소유물 곁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도 실수였습니다. 자신이 그들의 목동과 가축을 돌보아준 것에 대한 응당한 댓가로 생각한 다윗은 나발이 자기를 모욕하고 무시했다고 생각하여 감정적으로 대처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9~20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하셨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의 종으로부터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삼상25:14~17)”고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서둘러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나발을 향해 가고 있는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본문의 내용과 같이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자신의 남편 나발이 너무나 서운하게 대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계획을 압니다. 곧 왕이 되실텐데 왕좌에 오르시게 되면 이런 미련한 사람 때문에 피 흘리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왕의 허물이 될까봐 이처럼 사정하고 비오니 미련한 자들을 죽일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런 피흘림을 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을 인식시키는 말을 합니다.

이에 다윗은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삼상25:32~34)”합니다. 그리고는 그 음식을 받고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청을 허락했다고 말을 합니다.

아비가일이 그 남편 나발에게로 가보니 왕의 잔치같은 잔치를 하며 술에 크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바로 말하지 않고 다음날까지 기다려 술이 깬 후에 말을 해줍니다.

신앙적인 지혜는 반드시 해야 할 말도 상황과 때를 분별하고 상대를 잘 알아 상대가 영적인 유익함으로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신앙인격으로 슬기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남편 나발이 다음날 아침, 술이 깨어 일어났을 때 전날에 있었던 일을 설명합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다 들은 그는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어 열흘 후에 죽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나발의 어리석음을 통한 아비가일의 신앙지혜를 본받으라고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교훈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아비가일은 그 남편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거역하다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회개할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나발과 같이 없애버리십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은 예수님과 영원한 영적신부가 되도록 예수님의 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목자인 목사들은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 그 교회에 속한 양 떼가 모두 하늘나라 가도록 하기 위하여 진액을 다하여 애쓰고 있다면 이런 목자의 뜻을 따라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윗(사무엘하 5:1-25)


●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예수님 빼고 다윗만큼 많은 분량에 걸쳐 일생이 자세하게 소개된 인물도 없다.
그만큼 성경에서, 또 기독교 신앙에서 다윗은 중요한 인물이다.
다윗은 어떤 인물인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어느정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윗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 여러분도

다윗에 대해서는 한마디씩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던 극적인 인물이요, 예수님의 조상이요, 성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위대한 시인이요 음악가요 골리앗을 넘어뜨린 최고의 용맹스런 장수요,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실수도 저질렀던, 참으로 다양한 재능과 인간미와 신앙을

겸비했던 인물!

이 한시간에 다윗에 대해 말하기란 사실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다윗의 일생을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서, 평소 여러분들이 성경 이야기를

통해 잘 알고 있는 부분 몇가지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도록 하겠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14대 손이며, 유다지파 이새의 여덟째 막내아들로, 그

이름은 히브리 말로 ‘사랑받는 자,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대로

다윗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유대땅 베들

레헴에서 태어났으며, 일개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은혜로 장식되어 있다.

● 다윗이 등장할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워 왕정을 수립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여망하는 바 외적의 압제로부터 막 벗어나는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왕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긴 하였지만, 정치적.군사적 입장

에서 볼 때 여전히 불안정하였다. 그는 이전의 사사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주변의 국가들이 강력한 왕정국가를 형성하고, 막강한 군대와 병기들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국력을 신장시킬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세워 신본주의적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다윗은 앞선 다른 신앙의 위인들과 달리 조금 일찍 7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평생 전쟁터에서 많은 고생을 해서인지 수명이 짧았다. 다윗의 70 생애는, 20세 이전의 초기와, 약 20세 경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장수로 등장하여, 30세에 왕위에 즉위하고 주변의 모든 이방민족을 정복했던 30년간의 중기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면서부터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70에 죽기까지 20년간의 말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초기

다윗은 베들레헴이라는 시골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들판에서 양떼들과 생활하면서 자랐고, 그래서인지 몸집은 크지 않았지만 기운도 세고 침착하며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다윗은 양을 치다가 사자와 곰을 만났지만 그들을 쳐죽이고 양과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용맹스러운 청년이었다. 나이에 비해 다윗은 책임감이 투철했고 생각이나 마음가짐은 어른스러웠다.

다윗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사울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사울왕이 알게되면 이것은 반역으로서 사무엘은 물론 이새의 집안까지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우연히 베들레헴에 방문한 것처럼 하여 화목제사를 드리면서 이새의 가족, 즉 아들들도 초청하였다. 이때 이새는 여덟명의 아들 가운데 일곱 아들을 사무엘 앞에 세웠다. 다윗은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어린 목동에게로 향해 있었다. 사무엘의 예상을 뒤엎고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이 미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때부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어른들의 제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던 어린 다윗이었지만, 이미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다윗의 모친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부정확하고 미흡하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다윗왕의 위치로 볼 때 이것은 예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다윗의 어머니는 이방 암몬 사람과 관계가 있는 여인 같다. 즉 다윗은 이방 여자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하고 다윗은 외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눌려 살면서 들판에서 양을 쳤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때, 다윗은 결코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들어 쓰시기 전에 반드시 준비시키시고 연단을 하신다. 쇠를 강하게 하기 위해 불로 달구고 물로 식히듯이. 다윗은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눌려 집안에서 귀여움받고 지내지를 못하고 베들레헴 들판을 뛰어다녀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도 목자는 가장 비천한 직업이었다. 집에서 잠자지 못하고 들판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켜야 하는 일은, 요즘으로 치면 3D 업종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고난의 목장이 어린 다윗에게는 그대로 교실이요 도장이요 또 예배당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연의 배움터에서 그를 가르치고 그와 교제하면서 은혜를 베푸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목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 다윗이 집안에서 고이 자랐다면 어찌 이런 시가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8).” 밤을 새며 양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겠는가?

다윗은 힘들고 지친 고난의 현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맛보았고,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고달프고 힘이 드는가?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게 마련이다. 다윗처럼 여러분도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때, 오늘의 힘든 처지가 오히려 여러분을 더욱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주실줄로 믿는다.

● 중기

여호와의 신에 감동한 다윗은 더욱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드디어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기 전, 이미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수금을 잘타고 용기와 구변이 준수한 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고 악신이 든 사울을 치료하기 위해 다윗이 추천된다. 이에 다윗은 사울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되어, 사울왕이 악신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 수금을 타서 사울을 상쾌하게 하였고, 사울의 총애를 받게 되어 왕의 병기드는 자가 되었다. 즉 사울왕의 최측근 비서가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블레셋 사람들이 골리앗을 앞세워 침범해 왔다. 당시 다윗은 베들레헴 집과 사울왕을 오가면서 그 아비의 양을 쳤는데, 한번은 아비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음식을 전하기 위해 전장으로 오게 되었다. 이때도 다윗이 징집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면, 아직 20세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전장에 당도한 다윗은 적장 골리앗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는 것을 듣게 되었고,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다윗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골리앗을 넘어뜨린다.

이날의 승리 후 다윗은 사울의 장수가 되어 가는곳마다 승리를 거두게 된다. 다윗의 명성은 금새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런데, 사울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노래한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신하가 군주를 능가하여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윗의 극심한 고난은 시작되었다.

사울은 여러번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산속으로 들판으로 도망쳐 다녀야만 했다. 당시의 자기 신세를 다윗은, ‘죽은 개나 벼룩’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사울왕을 미워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다윗은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은 결코 그를 적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여’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은 환난을 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떨 땐 더 큰 환난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연단을 받아 믿음이 깊어지는 사람이다.

다윗은 30세에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미친사람처럼 침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해야할 때도 있었다. 그 동안의 싸움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수많은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소서.’ 이러한 극심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그릇은 완성되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선을 행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성도의 앞길에도 때로는 고난과 역경의 장벽들이 계속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예비되어 있음을 믿고 의지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자. 절대 서두르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자. 하나님이 세우시는 때를 기다리라.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며, 복되고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하실 것이다.

● 말기

다윗은 먼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 기간은 7년 반이었다. 그리고 사울왕의 사촌 아브넬의 반역 사건으로 다윗이 유다와 이스라엘 전국의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전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통치 하에서 날로 융성해 갔다.

이런 다윗에게 실패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성공하여 이름을 널리 떨친 후의 일이었다. 사울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고난을 받을 때 그의 영혼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방이 평정되어 왕위가 견고해지자, 그는 방심하기 시작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암몬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승리는 이미 다윗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나이든 다윗은 요압을 보내어 이스라엘 전군을 지휘하게 하고 자기는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왕궁에서 평안히 낮잠을 자고 저녁 때가 다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안일한 장소 - 그곳이야말로 성도에게 위태로운 곳이다. 다윗은 여기서 실패하고 말았다.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가 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 있을 때 그 아내를 범한다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행위인가? 게다가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전사하게 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한꺼번에 간음죄와 모살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이 일로 다윗이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일로 다윗의 가정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에 빠지고 만다. 왕자들간의 싸움, 가장 아꼈던 아들 압살롬의 반란, 다윗은 환갑을 넘은 나이에 맨발로 예루살렘성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다윗의 두 번째 실수는 인구조사의 실시였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 지시대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인구 조사를 하여 군대를 뽑고 세금도 거두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었으나, 높고 영화로운 권세가 다윗으로 하여금 교만으로 눈이 가려진 모양이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전염병에 걸려 죽어갔다. 지도자들이 정말 정신 차리고 잘해야 한다.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 하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의 최대 강점은, 금방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사람은 실수하거나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영적 성향이 더 중요하다. 다윗도 엄청난 죄를 범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사람이었다. 시편에는 측은할 만큼 뜨겁고 간절한 다윗의 회개기도가 나타나 있다. 다윗은 회개를 통해 바로 자신을 회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실수할 때마다 자신을 바로 일으키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 다윗은 시인으로서, 가인(歌人)으로서, 군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신앙인으로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또한 그 모형으로서 참으로 아름답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되고 이스라엘의 국위가 높아진 원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임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감사드리며 살았던 겸손한 사람이었다. 

실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하지만 그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는 자는 심히 적다. 믿음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삶의 걸음걸음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늘 실감하며, 감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5일 / 03- 25-2024(월)
출애굽기 35:1-35
행하게 하신 말씀(1절)
찬송 / 279장(주의 말씀 듣고서)

디럭스 바이블 출애굽기 35장

거룩한 장소(공간)
거룩한 시간(안식일)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20장, 35장)
* 성

1-3 안식일에 관한 모세의 교훈
4-19 성막을 위해 헌물 할 것과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제조할 것을 명하다.
20-29 백성들이 즐겨 여러가지의 헌물을 하다.
30-35 공인에 대한 모세의 훈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십계명을 주셨을 때 명령하신 것


출애굽기 31:13-16

- 성막을 완성한 후에 말씀하신 것으로 장차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를 원한다면 반드시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이 됨이니라 그 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4일 / 03- 23-2024(토)
출애굽기 34:1-35
모세의 얼굴(30절)
찬송 / 495장(내 영혼이 은총 입어)

    1-4. 모세가 다시 등산하다.
    5-9.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선포하시다.
10-17. 하나님의 약속과 경계
18-27. 안식일과 삼대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 및 첫 새끼의 대속
28-35. 모세의 하산과 변모

광채(7160) 카란(qâran)  קָרַן   

1. 빛나다.  2. 히필형 : 뿔이 나다
발음 [ qâran ]
구약 성경  /  4회 사용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광채가 나나
- 이것은 성물과 접촉하는 것이 거룩해진다(29:37; 30:29)는 원리와 일맥 상통한다.
즉 모세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집중했는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 혹은 거룩함이 자연스레 모세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모세가 성화(聖化)되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얼굴에 나는 광채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몇 군데 있다(마 13:43; 17:2; 행 6:15; 7:20).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 원문에 가깝도록 직역하면, '보라! 빛나는 얼굴의 피부가 되었도다'란 뜻으로 모세의 빛나는 얼굴의 광채를 보고 놀라워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었다.

두려워하더니
- 앞절의 '광채가 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란'은 '뿔이나다'는 뜻도 있다.
아마 모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는 뿔과 같은 모양으로 빛났던 것같고 이때문에 사람들은 더 두려워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라틴어 벌겟역(Vulgate)은 이를 '뿔이 났다'로 번역했고, 이에 따로 모세를 묘사한 얼굴에 뿔이 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적용이다.
한편 후일 사도 바울은 이 모세 얼굴의 광채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새언약의 영광스러운 광채로 승화시켰다(고후 3:7-18).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3일 / 03- 22-2024(금)
출애굽기 33:1-23
그 반석 위에 서라(21절)
찬송 / 539장(이 몸의 소망 무엔가)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Then the LORD said, "There is a place near me where you may stand on a rock.

    1-6. 동행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슬픈 고시와 이스라엘 자손의 근심 및 겸기(회개).
  7-11. 회막에 들어간 모세.
12-17. 모세의 간구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겠다는 언약의 갱신.
18-23.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한 모세의 기도와 그 응답.

반석
- 본래 의미는 '절벽'이며 일반적 의미는 '바위'인데 상징적으로 '피난처'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를 '반석'에 두겠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는 피난처에 숨기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성경에서 '반석'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는데(신 32:15;삼상 2:2시 89:26),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는 피난처이자 구원하는 능력이심을 나타낸다.

서다(나찹. 5324)
נָצַב 스트롱번호5324

1.

두다

2.

니팔형 נִצַּב

3.

놓다

발음 [ nâtsab ]
구약 성경
19회 사용
반석(6697. 추르)

צוּר 스트롱번호6697
1.

2.

바위

3.

가장자리

발음 [ tsûwr ]
어원
6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74회 사용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모세가 죽은 줄 알고 성급하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시내 산에서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화가 나서 내려오다가 첫 번째 돌 판을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돌 판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금송아지 우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같은 동족이 죽게 됩니다.
이때에 모세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레위지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상을 섬겼던 자들을 죽였습니다.
이들이 죽인 사람이 삼천 명 정도가 됩니다.
이때에 레위 자손들이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같이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우뚝 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출애굽기 33: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의 응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는 이 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같이 올라가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도 안다는 것입니다.

‘너를 앎이니라’ (י דע야다 3045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남성, 2인칭, 단수)
동침하다, 알다, 익숙하다, 기억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아는데 이름으로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개념에 서로 동침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결혼하여 익숙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항상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게 되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가 이런 관계입니다.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에 즉시로 대답하셔서 너의 이름도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내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너의 이름을 잊지 않고 내 마음에 새겼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미리 정하셨으니’ (προοριζω 프로오리조 4309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단수, 3인칭) 예정하다, 미리 정하다, 예정을 입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προ 프로 4253) ~전에, 앞에, 라는 뜻과 (οριζω 호리조 3724) 결정하다, 정하다, 선포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공로가 필요 없이 믿음도 필요 없이 예정하셔서 구원시키기로 결정을 내리시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선택받은 것은 나의 공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 믿을 것을 아시고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나의 이름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설법과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창세전에 나의 이름을 아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땅에 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고 믿게 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출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베푸느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모든 선한 것을’ (טוב투브 2898 명사, 남성, 단수. 공성, 1인칭, 단수)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טוב토브 2895) 좋았다, 선히 여기다, 기뻐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과 기뻐하는 것을 지나가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1:17-18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선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와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선한 것에서 단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줄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출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내 얼굴을’ (פנים파님 6440 명사, 남성, 복수. 공성, 1인칭, 단수) 얼굴, 진설병, 용모, 라는 뜻이며 어근은 (פנה파나 6437) 권고하다, 돌아보다, 살피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복수형을 쓴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많아서 복수형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영광의 광채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은 진설병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출39:36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진설병과

성막에서 떡상 위에 놓여진 진설병이 (לחם הפנים레헴 하파님)입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그 얼굴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떡을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이 떡을 먹어야 만이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원죄가 사라지고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셔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33: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반석 위에’ (צור추르 6697) 바위, 반석, 이라는 뜻이며 (צור추르 6696) 함께 묶다, 압박하다, 괴롭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반석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반석입니다. 바로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십자가에서 고통의 압박을 받으시게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고통과 괴로움의 압박을 받으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셔야 만이 선택받은 죄인들과 하나님을 함께 묶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0:4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반석은 신령한 음료가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입니다. 생수가 나와서 뜨거운 광야에서 마실 수가 있습니다. 이 반석도 (צור추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반석을 준비하여 주시고 그 위에 서라고 한 것입니다.

‘서라’ (נצב나차브 5324 동사, 닢알, 완료, 남성, 2인칭, 단수) 두다, 자리 잡다, 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리에 올려주셔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닢알 단순 수동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죄인인 인간 스스로 올라갈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려주셔야 가능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세워지면 하나님이 내려오게 하지 않는 한 절대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받은 백성들은 절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반석 위에 서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33: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위에 세워주시니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하나님이 지나갈 때에 주님의 손으로 모세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반석 틈에’ (נקרה네카라 5366) 갈라진 틈, 구멍,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נקר나카르 5365) 구멍을 뚫다, 찌르다, 파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 틈에 두시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옆구리에 창을 맞으시고 피를 쏟아주셨습니다. 주님은 몸에 채찍 자국으로 구멍이 뚫리듯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온몸이 찢기시면서 살 조각이 파내어지는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이 반석 틈에 죄인들을 숨겨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요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와 물을 쏟아내어 주셨습니다. 죄인을 위한 대속의 피를 운명하신 후에도 쏟아주신 것입니다.

‘옆구리’ (צד차드 6654) 옆, 측면,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צדד차다드) 외면하다, ~의 쪽으로 돌리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택받은 자들이 원죄에 빠져 하나님을 몰라보고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쪽으로 눈을 돌리고 우상을 섬겼던 죄 때문에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을 찔리셔서 내가 우상을 섬겼던 죄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던 원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모세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세워주시고 손으로 덮어주신 것입니다.

출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반석 틈에 세워주시고 지나가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손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거두어 주시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등을’ (אחור아호르 268 명사, 남성, 복수. 공성, 1인칭, 단수) 뒤쪽으로, 뒤에, 라는 뜻이며 어근은 (אחר아하르 309) 뒤에 남다, 머물러 있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등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에 나오는 영광은 볼 수가 없지만 뒤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하심을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등에서 나오는 후광의 보호하심도 얼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강력합니다.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요14:8-9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서 있어야 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반석 위에 세우지 않으시고 창세전에 선택한 백성들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세워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등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얼굴을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안으로 들어와서 은혜가 충만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섬기면서 독생자의 은혜와 진리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2일 / 03- 21-2024(목)
출애굽기 32:1-35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32절)
찬송 / 514장(누가 주를 따라)

1-6.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상 아래서는 민중이 금송아지를 만들다(백성의 배신).
7-14. 산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첫째 중보기도)
15-20. 모세의 하산과 분노
21-24. 모세의 힐문과 아론의 변명
25-29. 죄에 대한 모세의 조처
30-35. 모세의 두번째 기도(둘째 중보기도)


주의 기록하신 책
-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생명책'으로도 표현되었다(시 56:8; 69:28; 139:16; 단 12:1; 빌 4:3; 계 3:5; 13:8; 17:8; 20:12).
이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 준다.
시민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등재된 자들만이 그 지방의 주민 또는 그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되며 아울러 시민권이 보장되었던 당시의 풍습에서 따온 이 '생명책'이라는 말은 신약에서는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나타난다(빌 4:3; 계 3:5).
곧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 모세의 이 기도는 신약 시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던 바울의 기도와 유사하다(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책임을 회피했던 아론과 달리 모세는 이처럼 자기 민족을 위해 생명까지 내놓을 만큼 투철한 책임 의식과 동포를 사랑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Bengel).
실로 모세나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천국의 기쁨과 지옥의 고통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적인 생명까지 걸고서 그토록 간절히 중보 기도 드리는 이유는 죄중에 죽어갈 저 무지하고 불쌍한 뭇 영혼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즉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지옥의 그 고통스런 불꽃(눅 16:24)까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랑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그 치욕스런 십자가를 흔쾌히 지신 것도 '오직 사랑'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저 죽어가는 뭇 영혼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도 이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고전 4:1, 2).

내 이름을 지우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지 3개월쯤 지나 시내 광야에 도착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간 있었습니다.
시내산은 한라산(1,947.06m)보다는 높습니다.(대략 343.94m)
해발 2291m입니다.
그 기간 동안 산 아래의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백성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며 거기에 절하고, 화목제까지 바쳤습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 사태를 산상에서 다 지켜보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여러분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걸 섬길 수 있습니까? 

백성들이 바친 금붙이로 아론이 만든 형상은 송아지 모양의 애굽의 아피스입니다.
황소의 신 '아피스(Apis)'
사람의 생산을 돕고 곡물의 생산을 도와 잘 살게 해준다는 아피스 신상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한 달 이상 자리를 비웠다 해도 이것은 너무한 처신입니다.
백성들은 애굽 땅에 임한 10가지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이고, 홍해를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고,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먹었고, 어제만 해도 메추라기를 먹었고, 당일 아침에는 만나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한자성어 '배은망덕(背恩忘德)'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 속에서 은혜를 입고도 마음이 변하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이처럼 남의 도움이나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단어가 바로 배은망덕입니다.
한자로 살펴보면, 背는 등을 뜻하며 배반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고, 恩은 은혜를 의미합니다. 忘은 잊다라는 뜻이고, 德은 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 한자가 조합되어 '배은망덕'이라는 성어가 완성되는데요, 이는 남에게 입은 은덕을 잊고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은망덕이란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와, 이를 피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려 합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 이란?

유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나 전래동화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은망덕이라는 행동이 인간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간결하게 표현한 성어로 전해져 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 사회에서 배은망덕이란 행위는 종종 목격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배은망덕이라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행위로 여겨지고 있으며,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인간관계에서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배은망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남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인간관계의 소중함과 신뢰를 쌓아가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은망덕을 피하고자 한다면, 남에게 받은 도움이나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아야 하며, 인간관계에서의 도덕적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자풀이

  • 背 : 등 배, 배반할 배 
  • 恩 : 은혜 은 
  • 忘 : 잊을 망 
  • 德 : 클 덕, 덕 덕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단어는 남에게 받은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가치인 은덕을 인정하고 갚아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잊어버리고 배신하는 것은 큰 죄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1. 그의 배은망덕한 행동에 사람들은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2. 한 번의 배은망덕으로 오랜 친구와의 관계가 망가졌다.
  3. 그녀는 어머니의 큰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했습니다.
  4. 정부의 배은망덕한 정책에 시민들의 분노가 치솟았다.
  5.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용서할 수 없어요.
  6. 그는 기업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여 경쟁사로 넘어갔다.
  7. 군주의 배은망덕한 행동으로 세력이 무너졌다. (옛날 사례)
  8. 소설 《춘향전》에서 병렬차관의 배은망덕한 행동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가져왔다. (소설 출처: 춘향전, 작자 미상)
  9. 시인 정지용의 시 《무진기》에서 "허무하게 배은망덕한 세월아"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시 출처: 무진기, 정지용)
  10. 고려시대 문헌 《경기록》에는 배은망덕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헌 출처: 경기록, 고려시대)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을 황당해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입니다.
우리는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습니까?
이 시대 최고의 신은 금송아지, 맘몬입니다.
물신숭배주의가 여전히 이 시대의 최고의 우상입니다.
우리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섬겨도 나가서는 금송아지 앞에 절하는 광신도가 우리입니다.
신자나 비신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니면 아피스에게 절하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본문 25절을 보면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 절하며 방자했다고 합니다.
원어의 의미는 벌거벗었다는 뜻입니다.
물신숭배는 벌거벗는 문화와 함께 갑니다.
우리는 쾌락주의 문화의 홍수 속에 삽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황금만능주의, 물신숭배주의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40일 만에 내려온 모세가 백성들의 진풍경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양손에 든 십계명을 내던집니다.

19절입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써주신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립니다.
민수기를 보면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모세가 이토록 흥분해서 십계명 돌판을 내던졌을 정도였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이것은 우상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자 아피스가 무력하고 거짓된 신이라는 사실을 백성 스스로 확인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의 금송아지 사건 처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1절 이하입니다.
“[21]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당신에게 어떻게 하였기에 당신이 그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여기서 왜 모세가 아론을 심문하고 추궁합니까?
시내산에 올라가기 전에 아론에게 백성들의 치리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아론이 대답합니다.
22절 하반절입니다.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자신의 잘못이나 지도력의 한계를 시인한 게 아니라 백성들의 악함을 탓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이러면 안 됩니다. 자기 책임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론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고 과장하고 거짓말도 합니다. 24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불에 금을 던졌더니 거기서 송아지가 나옵니까? 32장 4절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렇게 엄청난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인 아론의 책임이라고 하고, 아론은 백성들이 협박했기에 그들 책임이라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사회는 반드시 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책임적 주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반드시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결단과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주님이 어느 날 회당에서 한 손이 불구가 된 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의료행위를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안식일 법을 범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무슨 생각으로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셨을까요? 마가복음은 그 사건이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최초의 동기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 책임을 홀로 지겠다는 듯이 숨어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백일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장애인 한 사람을 고쳐주시면서도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각오를 하신 겁니다. 이 일로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과 백성들은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현 시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가 엎드립니다.
31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백성들의 물신숭배, 아론 같은 공직자들의 무책임까지 모두 자기가 짊어지고 비상한 각오로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32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남의 허물과 죄악을 내가 대신 짊어지고 모세처럼 화해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사회, 내 나라, 내 민족의 허물을 대신 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사죄를 빌고 구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비장함을 보십시오.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지금은 나라와 사회,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모세처럼, 심판에 직면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과 밀당하며 끝까지 기도한 아브라함처럼, 자신이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내 민족은 구원받기를 원한 바울처럼 우리도 맘모니즘이 창궐하는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사 이 시대와 나라를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쓴 뿌리"란 무엇인가?

쓰다는 표현은 보통 분노 및 원한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2:15에서 과연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첫째, "쓴 뿌리"는 (나무 토막처럼) 뿌리가 쓰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뿌리가 식물로 자라난 후 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까요?

둘째, 히브리서 12:15의 쓰다는 것은 곪아 터진 분노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독이 있고 더러운 것을 의미할까요?

셋째, "쓴 뿌리"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마지막 질문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는 신명기 29:18에서 유래하는 표현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역자주: 영어성경을 번역하면 "독 있고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이 말씀의 배경은 앞선 두 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도움이 됩니다.

뿌리 자체가 쓰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 쓴 열매는 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쓴 열매는 어쩌면 곪아 터진 분노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치명적인 쓴 열매가 나오도록 하는 뿌리가 무엇인가?
신명기 29장의 그 다음 절은 놀랍지만 히브리서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답변을 줍니다.
18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독초와 쑥(쓴 열매)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지 않게 하라).” 그 후 19절은 이 뿌리를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그렇다면 쓴 열매를 맺게 하는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원한 평안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안전하지 않은데 안전함을 느낍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내게는 평안[=구원]이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언약의 백성 중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건너짚는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과거의 몇몇 영적 체험 때문에 혹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안에서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신앙고백자들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이렇게 자신의 안전을 추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치료하여,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의 성실한 견인을 일구어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적어도 네 번에 걸쳐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분깃이 없는 자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도록 날마다 믿음의 싸움에 열심을 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2:3, 3:12,14, 6:4-7, 10:23-29).

히브리서 12:15의 쓴 뿌리라는 용어의 문맥을 보아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2:14-15).
이는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더 많은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쓴 뿌리는 믿음의 싸움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깨어 경계하는 삶 없이도 구원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도록 교회 안에서 권장하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더럽히며, 자신의 유업을 아무렇게나 대하여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했던 에서처럼 되게 이끕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1일 / 03- 20-2024(수)
출애굽기 31:1-18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13절)
찬송 / 383장(환난과 핍박 중에도)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날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
안식일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기 때문이다.
“안식일”(Sabbath)이라 하면 한 주의 맨 끝 날인 토요일을 말한다.
(소위 “주일” 즉 일요일은 신약에서 “주(week)의 첫날”로 불린다.)
많은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십계명”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십계명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인, 간음, 도둑질, 탐심 등에 대한 계명들은 우리들이 지키기에 무방할 뿐 아니라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십계명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이요 그리스도인인 우리와는 무관한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성경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단지 교회에 나가고 일을 하지 않으며 방탕하게 보내지 않는 것이 이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을 해서는 안됐고 불도 지필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에게 거룩함이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그 혼이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께 거룩히 쉬는 안식일이니, 안식일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31:14-15)

"육 일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니, 주께 쉬는 안식일이라. 이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죽일지니라. 너희는 안식일 날에 너희의 온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2-3)

이를 어겼던 어떤 사람은 실제로 돌에 맞아 죽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을 어겼다고 해서 사람을 돌로 치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살인죄로 감옥에 갈 것이다.
그러나 신정통치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어긴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유대인도 아니면서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안식교인들이다.
그러나 왜 유독 안식일만을 지키는가?
안식일을 지키려는 사람은 구약의 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수염을 기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양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리는 등... 자기 마음대로 편한 것만 골라서 지켜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안식일을 지킨다며 토요일에 교회에 모인다.
(이들은 처음에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요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나 지금은 그 교리를 바꾸었다.)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이들은 자기들이 지킬 필요도 없는 안식일을 그나마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표적”(sign)으로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들을 참으로 지킬지니 이는 그것이 너희 대대에 걸쳐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임이라. 이로써 내가 너희를 거룩케 하는 주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출 31:13, 겔 20:20을 볼 것).

출애굽기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에스겔 20:20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안식일을 포함해서)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없애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셨으며"(골 2:14).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러나 구약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었다.

한편 한국 교회들은 안식일의 개념을 “주일”로 바꾸어 “주일성수”라는 것을 교리로 만들어 가르친다.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는 부활의 주일로 바뀌었기 때문에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도 하지 말고 매매 행위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소위 “주일”(사실 일요일은 성경에서 한 번도 “주일” 또는 “주의 날”이라는 말로 불리지 않았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쏟아 부어지는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이 아무리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둘을 동일선상에 놓으려 하면 혼동만 야기될 뿐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 날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빵을 떼며 교제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지켜야 한다는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으며,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날이 거룩한 날인 것이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지 말고 흥청망청 보내도 된다거나, 일주일 내내 하나님은 거의 잊어버리고 생업에만 매달려 살았는데 일요일에도 똑같이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돈을 쓰지 않으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주일성수” 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구약의 율법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해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혼동에 빠지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이단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복의 길4-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 출 20:8-11, 눅 13:14-16

**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20:8-11,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3:14-16,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복의 길 네 번째는 주일성수(主日成遂), 즉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은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듣고 보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20년 이상 목회를 해 온 지금까지도 주일이면 긴장이 되고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일은 단어의 뜻 그대로 ‘주인의 날’이며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어떻게 지내야 되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매 주일마다 나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주일에 대하여 마음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됨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13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고 하시고, 에스겔 20:12절에서는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고 하십니다.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표징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에서 주일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성경에서 정확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새 언약을 주신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로마서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시며, 누가복음 22:20절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원한 하나님 자녀의 소망을 주시기 위한 부활로서 새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 예배와 성만찬을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7절입니다. “그 주간의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nbsp;&nbsp;주간의 첫 날은 지금의 일요일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없어지고 주일이 새롭게 생긴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 속에 그 의미를 다 포함시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인 사랑의 법이 모든 율법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옛 언약인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역시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는 길을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본문 말씀은 십계명 중에서 네 번째 계명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기본법입니다.
십계명은 권면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며 규범입니다.
이 말씀에서 안식일의 의미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고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너희도 쉬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성경에는 안식일에 일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실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5:32-36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누가복음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행하신 기적 사건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예배 때였습니다.
그곳에는 귀신들려서 허리가 꼬부라져서 18년 동안이나 고생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을 보신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다가 그 여인을 불러서 안수하셔서 고쳐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께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의 법을 어겼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도리어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화를 내시며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드러내시면서 나무라셨습니다.
그들은 소나 나귀 등 자신들이 기르는 가축들을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물을 먹이려고 끌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짐승들을 죽지 않게 하려고 안식일에도 끌고 다녀 불법을 행하면서, 사람이 사탄에게 놓임을 받는 치유를 불법이라 한다고 호통을 치신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안식을 정하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법만을 고집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어떻게 주일을 주일답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주일(主日)은 ‘주님의 날’이며, 성일(聖日)이라고 합니다. 즉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거룩하게 구별된 날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진 날’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날 중에서 여섯 날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하루를 ‘하나님의 날’로 거룩하게 구별하시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날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섯 날도 모자라서 마지막 하루까지도 ‘자신의 날’로 만들어버립니다. 성경에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이는 사람들이 안식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에도 많은 교인들이 주일 낮 예배 혹은 저녁만 참석하면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만 참석 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갈 곳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영업하고 사업하고 즐기는 일에 나머지 시간들을 다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배시간을 한 시간으로 엄숙하게 지켜달라고 요구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 시간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일성수(主日成遂)라는 말은 일요일 하루를 주님의 날로 온전히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온 종일 제의식과 화목제의 음식을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주일은 말씀을 듣고 찬양하는 기쁨의 예배와 성만찬의 친교의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을 바르게 지켜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58:13-14절을 봅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날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물며 죄악으로 죽은 나를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주신 주님을 어떻게 경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일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주님의 날입니다. 마태복음 12: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여왕(女王)’이라고 표현하며, 여왕을 맞이할 때와 같이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안식일을 맞이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가 지는 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달력에는 금요일 해가 지는 시간을 기록해 두는데, 해가 지는 시간에서 18분을 앞 당겨서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시계가 늦어져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이 시작 되는 사이렌을 울려서 모든 안식일 준비를 다 끝내고 시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여왕을 맞이하기 위해서 주부들은 집안 청소를 합니다. 즉 주일 맞이 대청소를 하고, 미리 시장을 보고, 안식일에 먹을 음식을 다 준비해 둡니다. 식탁에는 꽃도 꽂아서 여왕을 맞이하듯이 준비를 하고 아름다운 초 두 개를 준비해서 켭니다. 두 초는 본문 8절의 “기억하라”는 말과 “지키라”는 이 두 가지를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기 전에 구제함에 구제헌금을 넣습니다. 남자는 흰 셔츠를 입고 여자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안식일을 맞이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합니다.

여러분의 주일을 이런 마음으로 지켜보십시오. 주일은 거룩한 날, 즐거운 날, 존귀한 날이라고 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예배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날에 가족이 잘 준비된 식탁을 마주하고 음식을 나누며 기뻐하십시오. 느헤미야 8:10절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교회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성도들이 함께 즐겁게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며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혹 시간이 있으면 삶에 지친 사람들을 격려하며, 병든 자를 위로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십시오. 로마서 12:6-9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섬기고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묵혀두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받은 책망을 받게 됩니다. 마 25: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특히 하나님께서 주일에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사야 58:13-14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안식일을 나의 거룩한 날로 지켜라! 안식일에도 너희의 용건에 따라서 여행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함으로써 나의 거룩한 날을 너희의 날로 쓰지 말아라. 안식일에는 너희가 다니고 싶은 곳으로 다니지도 말고 너희가 원하는 일도 하지 말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도 말아라! 오직 그날을 기쁜 날로 여기며 나 여호와의 거룩한 날로만 지켜라! 그러면 내가 직접 너희에게 참된 기쁨을 주겠다. 그리고 너희의 모든 장애물을 내가 세상에서 제거하여 주겠다. 그래서 내가 너희 조상 야곱에게 준 땅의 열매를 너희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겠다.\' 여호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주일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행을 할 경우, 특별한 사정에 의한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십니다. 여기서 금하는 것은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으로 행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무엇을 사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일에는 말도 쓸데없는 잡담이나 험담 등 함부로 말하는 것까지도 금합니다. 서로 세워주는 말,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 간증과 감사의 말 등. 하나님 앞에서 덕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내리십니다.

미국의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테일러(Zachary Taylor)는 헌법에 따라서 1949년 3월 4일 주일에 대통령 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는 그 날에 취임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못되었으면 못되었지 주일까지 범해가면서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테일러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하루 동안의 임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당시 상원의원장이었던 ‘데이빗 라임스 엘치슨’을 1일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치슨은 토요일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서 24시간 동안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는 주일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며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면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릴 것이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땅에서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세상의 어느 민족보다 높이리라.”고 하십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법

주일이면 습관을 따라 교회에 다녀오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한 일로 여기고 의무에 사로 잡혀 발걸음만 예배당에 뜰을 밟을 때가 많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교회에 다녀왔지만 진정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찬송 몇 곡과 얼마 안 되는 시간에 기도를 드리고 적은 헌금을 드리며 설교를 듣고 돌아와서는 주일을 지키는 성도의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이것이 주일 지키는 자의 모습인가도 생각을 해보지만 역시 동의하가 어려운 부분이 나에게 있다.
성도라면 누구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교회의 각종 봉사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다른 사람을 도우며 주일을 보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일을 잘 지켰느냐고 한다면 이 역시 만족함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나로서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일까?
주일 성수란 말은 세상의 일을 접어두고 하나님께 나가 주님과 온전히 하루를 보내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찬송하며 교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잘 들고 주신 말씀이 내 삶에 적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충분한 사랑의 교제가 필요하다.
한 주간 동안 어려움을 겪은 이, 혹은 소외된 이가 없는가, 등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가족들을 매주 돌보기 위한 정보의 창고가 교회여야 한다.
내게 주께서 명하신 사랑해야 할 이가 누구이며 어떻게 그를 섬겨야 할지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기본이 된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경험하는 일이야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예배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 실천하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이사야 58:13~14)

신자와 불신자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일날 성경찬송가를 들고 예배당에 가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성숙한 성도와 미성숙한 성도를 분멸하는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주일날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잘 드린다면 그 사람은 성숙한 성도의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고 하나님의 날임을 깨닫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 곧 신약시대에 지키는 주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주전 165년경 마카비 형제들에 의해 잠깐 동안 독립국가의 모습을 보이다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후 1948년에 다시 이스라엘나라를 세우기까지 약 2000년 동안 세계를 방황하며 나라 없는 온갖 서러움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동안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많은 연구가들은 안식일 준수가 그 비결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몇 가정이 있든지 반드시 회당을 세웁니다. 
그 회당에서 안식일을 구별하여 그 날은 지킵니다. 
이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칩니다. 
회당, 안식일, 율법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그 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20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날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가 우리의 인생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축복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의 지혜입니다. 

이 복된 안식일에 대해 시편 84:10~12에 말씀하기를“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1.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출애굽기 20:9~10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육일은 사람의 날이지만 제 칠일 즉 주일은 날을 만드신 하나님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2.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이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쉬신 날, 일곱째 날을 말합니다. 
창세기 2:1~3에“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10계명에 기록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안식일이 신약시대인 오늘날의 주일입니다. 
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날을 말합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여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인간 재창조를 완성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안식일이나 신약의 주일은 의미가 같습니다. 

3. 안식일은 십계명중 제 4계명입니다.

출애굽기 20:8에“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가운데 4계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4.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20:11에“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하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라는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이날을 소홀히 여기거나 다른 날과 똑같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 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정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서 20:12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시고자 주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에 행해지는 엄숙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날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특권이며 표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닫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깨달아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가난하게 혼자 살던 허만이라는 여든 아홉 살 된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청직원이 그 노인의 유품을 정리하고자 노인이 살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거지의 집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온통 넝마와 부서진 가구들로 가득했습니다. 
시청직원이 짐을 하나하나 챙기는 중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넝마 속에 파묻혀 있던 다섯 개의 바이올린을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바이올린 제작의 대가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들고 그가 직접 사인한 것들이었습니다. 
그 값은 당시의 돈으로 수십만 달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노인은 그것을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알고 그렇게 쓰레기 속에 던져놓고 가난하게만 살았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가치를 아는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생명의 근원,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잘 섬기는 사람의 축복에 대해 요한삼서 1:2에“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2. 하늘나라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골로새서 2:16~17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장래에 있을 일 즉 하늘나라의 그림자로 주일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 즉 주일을 정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며,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 즉 주일을 정하신 것입니다.

3. 사람을 위해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가복음 2:27에“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니...)”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기계와 달리 쉬지 않고는 일할 수 없기에 적절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 검증을 걸쳐 일과 휴식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효율적인 생산성을 유지하는 기간이 7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한 예를 통해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를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무신론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로 감소했습니다.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늘려 일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생산량이 30%로 감소해서 일주일을 다시 6일로 줄였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생산량이 30%로 감소되었습니다. 레닌도 어쩔 수 없이 일주일을 7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일주일의 7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소중한 삶의 리듬이 무너진다면 개인의 건강이나 땅의 축복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로 정하신 것은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위한 방법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발을 금해 오락을 행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인 이사야 58:13에“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빼앗는 사사로운 언행을 삼가하면서 이날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2.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20:9~11에“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하셨습니다. 

느헤미야 10:31에는“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약속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하셨습니다. 

미술가이며 시인인 제임스 스메탄이라는 사람은 몹시 가난 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나갑니까? 하고 묻자 “축복을 받으려고 나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축복입니까?”하고 묻자 “분노와 경멸, 그리고 냉대를 갖게 하는 유혹이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만족하게 되 는 것이지요. 
어둡고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차서 교회에 가면 평안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지요.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신 주님 앞에 나오는 날이 곧 주일 예배 시간입니다. 
주일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이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신령한 은혜가 임합니다.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내리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낙심한 사람에게는 소망을 주십니다. 염려와 금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넘치는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삶의 지혜도 주십니다. 그리하여 험한 세상을 이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십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더 알기 쉽게 이렇게 번역 한다면“너는 당당히 올라갈 것이며, 눈에 띄게 나타날 것이며, 너의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눈여겨 볼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는 에릭 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제8회 올림픽 경기가 파리에서 열렸을 때, 100m선수 중 가장 좋은 기록을 가진 금메달 유망주이자 믿음 좋은 스코틀랜드 청년 “에력 리들”이 경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일정이 주일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 이 신실한 청년은 경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조국을 배반한 자, 위선자, 옹졸한 신앙인 등으로 말하면서 분노하고, 있는 대로 폭언을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에릭 리들은 주일을 범하면서 까지 금메달을 향하여 뛸 마음은 없다며 거절하고는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온종일 경건하게 하나남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목요일에 400m 경기가 있었는데 그 경기에 나갈 선수에게 문제가 생겨서 에릭 리들이 대신 나가게 되었습니다. 
100m 선수가 400m에 나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에서 에릭 리들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100m 경주자로서 400m를 뛸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100m 는 내 힘으로 뛰었고, 나머지 300m는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100m 경주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섬겼더니, 나머지 길은 주님께서 인도해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예배를 소중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예배에 성공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주일은“하나님의 날”입니다. 주일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높은 곳에 올리셔서 존귀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3.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하셨습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58:14에“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하셨습니다.“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는 것은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성취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20년 후 거부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업이란, 풍성한 물질과 자녀의 축복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정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세상의 모든 축복과 자녀의 축복과 내세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축복이 안식일 즉 주일을 잘 지키며,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五. 안식일을 어겼을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얻는 것이 없습니다(헛수고가 됨).
출애굽기 16:25~30에 말씀하시기를“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 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육신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이 됩니다.
에스겔 22:26에“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3. 패망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17:27에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더 중하게 여기는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4. 돌로 쳐 죽이라 하셨습니다.
민수기 15:32~36에 기록하시기를“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축복의 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종교적 엘리트들이 바쁘다는 것 때문에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진흙탕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주일예배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예배를 더 없이 소중히 여긴다. 영국의 명재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나에게는 예배석이 대영제국의 수상석보다 더 존귀하다.”고 말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내 영혼이 잘되는 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입니다. 
주일예배의 승리자가 신앙생활의 승리자이며,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곧 인생의 승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성경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하나는 크로노스로 물리적,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로 의미와 내용이 있는 질적 시간을 의미한다"

인생이란 것은 모두에게 크로노스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어김없이 지나가는 이 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시간이지만 허비하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썩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시간이 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강령"이라며 "즉, 세상의 크로노스 시대를 살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카이로스의 영원한 삶을 살아가고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세 가지 의미를 전달한다"고 했다.

그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삶의 첫 번째는 예배하는 삶, 삶의 안식,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며 "시대가 변하여 주일에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직장 관계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하나님 앞에 지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는 하나님이 내 삶에 가장 최우선이라는 중요한 고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주일은 세상의 모든 시끄러웠던 삶의 소리를 뒤로하고 하나님께 시야를 고정시키는 시간이며, 나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며,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시간이며, 무엇보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라며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무엇을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수동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다. 즉, 습관적인 억지로의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지키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때로 우리는 전쟁터와 같은 치열한 삶이 계속 끝나지 않고 지속될 때가 많다. 우리에게는 영과 육의 쉼, 특별히 우리의 심령 한복판에 있는 영의 쉼이 필요한 것"이라며 "기계처럼 일을 하다가는 우리가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 쉼을 일부러 보여 주신 것이다. 여기서 쉼은 단순히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어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안식을 하는 목적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기쁨과 상급을 보장한다"며 "많은 것을 가졌지만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참된 목적은 어떤 일을 금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섬기는데 있다"고 했다.

주일을 시간적으로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느헤미야 공동체 행동 강령 두 번째는 이웃을 돕는 삶으로, 땅의 안식, 칠년마다 안식하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희년'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가 되는 것을 뜻한다"며 "구속(redemption)은 '되 무른다, 다시 찾는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던 우리를 마귀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7년에 한 번씩 쉬는 안식년이나 50년째의 희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그 은혜를 나도 이웃에게 베푸는 시간을 의미한다"며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시간 속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도 마찬가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린 만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안식일과 안식년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사는 삶

영혼의 안식,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회복되지 않은 상황 가운데 느헤미야 10장 31절에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모든 허물의 빚을 탕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별히 "학생들을 격려하기 원한다. 청소년들이 하는 공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들이 때로 어른들의 압력과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의미 없이 느껴져도 하나님이 현지 나에게 직분과 시간을 맡겨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해 스쳐 지나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거룩한 주일처럼 거룩한 매일을 위하여!


안식일 준수 명령

1. 안식일을 지키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계시 가운데 마지막으로 안식일에 관한 명령을 부연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 명령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계속해서 섬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창세기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나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출애굽기 16:23부터 입니다.
안식일 규례는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의 내용이 되었는데, 이것은 안식일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언약의 증표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안식일을 언약으로 지켜야 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율례를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문제였습니다.

a. 안식일 준수 명령(이사야  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b. 안식일의 목적(신명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2. 엿새와 제칠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시면서 그날 일하는 자는 생명이 끊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엿새 동안의 수고를 통해서 제칠일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십계명에 언급한 바대로 6일 간의 창조 사역 후의 하나님의 휴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사역, 즉 하나님은 온 인류와 만유의 창조주시라는 사실과 그들은 단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엿새 동안 수고한 그들에게 육체적 휴식을 주시려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표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에게 구별된 백성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 됩니다.

a. 엿새의 사역(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이니라.

b. 칠일에 쉼(히브리서 4: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2절. 훌. '존귀한, 고위함'이란 뜻의 이름.
유다 지파 갈렙의 후손으로 아말렉 전투 시 모세의 팔을 들어 올린 자.

브사렐.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는자'란 뜻의 이름. 성전 장식들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다른 기능인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6절. 오홀리압. 원어로 '아버지가 내 장막이다'라는 뜻.
성막 건축의 사명을 지녔다. 세워. 문자적 의미는 '그에게 주어서'로 브사렐을 돕는 자로서 오홀리압이 세워졌음을 가리킨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 잘 숙련된 기술공을 의미한다. 특별한 기술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13절. 나의 안식일.
이스라엘 장인들에 대한 안식일의 엄수 명령은 하나님 스스로가 안식일의 제정자이심을 나타낸다.
표징. '표시, 증거'란 뜻의 <twOa:오트>는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를 지칭.

14절. 더럽히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다.
원어 <ll'j;:할랄>은 '어기다, 모독하다'라는 뜻. 죽일지며. 문자적으로 정확한 뜻은 '반드시 죽일지니라'. 사형은 이스라엘의 위기 의식에 따른 안식일 준수의 철저한 시행을 나타낸다. 생명이 끊쳐지리라. 이는 육체적인 죽음 뿐 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15절. 큰 안식일.
문자적으로 '안식의 안식 일'을 뜻하는 <@/tB;v' tB'v':솨바트 솨바톤>은 철저히 쉬어야 함을 의미한다.

17절. 창조하고. '일하다'라는 뜻의 <hc;[;:아사>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일' 그 자체를 의미. 제칠일에 쉬어. 하나님 자신의 안식은 인간은 안식일 준수의 근거가 된다.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표현으로, 창조 사역 후 휴식하시면서 창조물을 보고 흡족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원어<vp'n::나파쉬>는 '숨을 쉬었다'는 문자적 의미.

18절. 증거판 둘.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친히 쓰신 것이더라. 하나님 귄능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말씀은 성막 설계에 관한 말씀이 끝나고 그 설계대로 일을 진행할 사역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 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 20:8~11절에서 안식일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한, 23:10~13절에서도 안식일과 안식년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만나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간접적으로 안식일 준수를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안식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막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안식일은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가 표면적으로 드러납니다.

브살렐(1~5절)

항상 새로운 말씀이 시작될 때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출처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규례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사람을 지명하십니다.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그럽니다. '훌'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들어 올려 이스라엘이 승리케 하는데 기여한 사람입니다(17:10). 그리고 그는 모세가 시내 산에 계명을 받으러 올라갔을 때 아론과 함께 백성들을 다스렸던 사람이기도 합니다(24:14). '우리'는 3인의 동명이인(왕상 4:19; 슥 10:24)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성막 건축자 브살렐의 부친입니다. '브살렐'은 성막 건축을 지휘 감독한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브살렐을 소개하면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브살렐이 하는 일이 큰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 장까지 브살렐의 이름이 여러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히 출 37:1절에는 법궤를 만든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브살렐의 족보는 브살렐에 관한 말씀이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명하다'(nominate)란 말은 여럿 가운데서 가려 뽑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지명받는 자의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이보다도 그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이 더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즉 누구를 택하여 쓰시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콕 찝어서 지명하여 부르시고 성막 건축의 거룩한 사역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봉사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은 곧 성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2. 6절). 그다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에 매임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혜와 총명과 여러 가지 재주는 하나님의 은사이면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 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선물인 갖가지 재능들을 사모하는 마음과 아울러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쉬운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설계를 잘하고 또 금과 은과 놋으로 그 설계대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그에게 주리니”

그러니까 브살렐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브살렐 자신의 개인적인 인격과 능력을 무시하고 단지 그를 기계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브살렐의 개인적 인격과 능력을 존중하셔서 그의 능력이 극대화되도록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제사장직뿐만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직업의 귀천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입니다. 이 부르심은 브살렐이 가진 재능과 모든 것을 고려하신 부르심입니다. 성막의 모든 기물들을 만드는 공교한 일꾼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렇게 부르신 후에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즉 감당할 힘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그의 재능은 꽃피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의 모든 물건들 증거궤 속죄소, 회막의 모든 지구, 떡상, 등잔대, 분향단, 번제단, 물두멍 제사장 의복을 하나님의 설계대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성막을 만드는 사람도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 삶의 자리는 모두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오홀리압(6절)

6절에서는 브살렐을 돕는 동역자로 오홀리압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단'은 야곱과 그의 아내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 사이에서 태어난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습니다(창 30:1~6). 그리고 단의 후손들은 '길의 뱀'과 같이 교활하며, '첩경의 독사'같이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창 49:17). 또한, 이들은 '사자의 새끼'(신 33:22)로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들의 성격은 전투적이요 공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파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흘리압을 부르셔서 성막 건축에 쓰일 휘장을 비롯한 각종 직물 제작을 담당케 하신 것은(38:23),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인간과는 달리 오직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를 택하시지 않고(고전 1:26) 당신의 사역에 꼭 필요한 자들을 적재적소에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세워라는 말은 본래 '주다'(give)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그에게'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이토'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두 단어를 직역하면 '그에게 주어서'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브살렐에게 오흘리압을 조력자로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살려 '그와 함께 일하게 하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라고 할 때 지혜로운에 해당하는 '하캄'은 '숙련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란 '특별한 재능이 있는 모든 자' 혹은 '숙련된 기술이 있는 모든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막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지혜로운 사람들, 재능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감당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세의 일를 아론은 아론의 일을 그리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각양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각자 삶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 맡겨주신 일들을 감당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12~17절)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안식일에 관해서는 만나를 주시면서(16:21~30) 또 십계명(20:8~11)에서 이미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언급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단 저는 안식일 준수가 모든 신앙생활의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침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예배도 등한히 되게 되고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안식일 준수는 탐욕을 그치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성막 제작이라는 막중한 사역을 진행한다고 할지라도 안식일 만큼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안식일 계명을 어기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날을 도적질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일은 동시에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데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막 3:27).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하여 인간에게 육체의 노동으로부터 귀중한 휴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휴식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나그네 등 인간뿐 아니라 소나 나귀 등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휴식의 적용 범위가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에 공히 적용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그럽니다. 여기서 표징은 '오트'라는 말입니다. '신호'(sign)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몇 가지 표징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무지개와 할례와 안식일이 있습니다. 이 세 표징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① 무지개는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구원에 대한 표징입니다(창 9:13). ② 할례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임을 나타내는 언약의 표징입니다(창 17:10, 11). 그러나 이 언약의 표징은 예수의 오심으로 폐하여 졌으며,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중요시 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롬 2:28, 29). 그리고 마지막 안식일은 거룩함과 복 주심의 표징입니다. 창 2:2, 3절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2:23; 3:7, 9) 이들을 이끌어 내어(신 4:20)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이유는(3:8; 15:17)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친히 '지명하여 부르신' 선민(選民)이요(사 43:1), 성민(堅民)으로 불린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신 4:39, 40)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여기는 만나를 통한 40년의 훈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안식일 준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중요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14절에서 안식일 계명이 강화되는 과정을 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그럽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은 더럽힌다는 말입니다. '더럽히다'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상처를 입히다'. '욕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약속을 어기다'(break promise)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RSV는 이 단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신성을 더럽히는'(profane)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란 곧 세속적인 생활과 관련된 일체의 일들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신성을 더럽히는 자를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고 더럽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이 말은 같은 의미 동사를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한 강조형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직역하면 '반드시 죽여라'가 됩니다. 이러한 안식일을 어긴 자의 처벌 규정은 안식일을 더럽힌 죄가 우상 숭배의 죄만큼 중죄(重罪)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죽이라는 말씀은 신 8:19. 20; 17:2~5절에서 반복됩니다. 더 나아가 생명이 끊쳐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육체적인 생명의 끊어짐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의 단절,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장 강력한 표징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원리를 강조하십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지만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께 거룩한 날, 즉 구별된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안식일이라는 말은 철저하게 안식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솨바트 솨바톤'은 '안식의 안식일'(the stabbath of rest, KJV)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다시 창조 안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너희도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쉴줄 알아야 합니다.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그만큼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언약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신약에서도 이 정신은 주일로 계승되어 계속해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17절에 ‘왜냐하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기 때문에 인간들도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엿새 동안의 창조에 대한 기념의 성격과, ⓶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의 성격이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주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에 대한 감사의 성격을 가지는 것은 이러한 안식일의 참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쉬었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쉬었다는 말 히브리어 '나파쉬'는 원래 '숨', '호흡'이라는 말입니다. 동사형으로 '숨을 쉬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재충전의 의미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RSV는 이를 '기운을 회복하셨다'(refreshed)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처럼 쉼을 필요로 하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 제동을 걸어줄 안전장치가 안식일 준수이며 그치고 주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새로운 충전을 통해 건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온전히 그치고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안식일에 담아놓은 귀하고 소중한 진리입니다.

십계명 두 돌판을 주심

마지막 18절은 십계명이 기록된(20:3~7절) 두 개의 들판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장면입니다. 즉 하나님은 약속대로(24:12) 이미 선포하신 계명(신 5:1~21)을 두 개의 돌판에 친히 써서 모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 중심의 시대가 그 막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증거판 위에 기록된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자 본질로서. 단순한 율법의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율법이지만, 그 내면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십계명의 돌판을 주신다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가 임박했음을 말해줍니다. 즉 40일이 지나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는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애굽의 음란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묵상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감당해야 하는 성막의 모든 것들을 만드는 일도 소중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과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표징이라고 도전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할 일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1일 / 03- 20-2024(수)
출애굽기 31:1-18
브살렐(유다 지파)과 오홀리압(단지파)(1, 6절)
찬송 / 383장(환난과 핍박 중에도)


내가 유다 지파 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See, I have chosen Bezalel son of Uri, the son of Hur, of the tribe of Judah,

내가 또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Moreover, I have appointed Oholiab son of Ahisamach, of the tribe of Dan, to help him. Also I have given skill to all the craftsmen to make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뜻 : 아비의 장막
오홀리압(Oholiab)



가장 큰 은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새 6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가슴에 새겨진 아픈 기억으로 속앓이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동족끼리 벌인 전쟁, 그리고 계속되고 있는 분단 상황이 빚어낸 아픔과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 않습니다. 6월 10일은 민주화 항쟁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날입니다. 온 국민의 힘으로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꾼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내내 제 마음이 머문 곳은 시리아의 북부 도시 훌라(Houla)입니다. 지난 25일에 벌어진 학살극으로 인해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격이 아니라 의도적인 살해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학살을 저지른 이들은 이슬람 시아파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의 폭력단체인 ‘샤비하Shabiha’에 속한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유령’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샤비하는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 여린 생명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것입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의 보복이 예고되고 있기에 그 땅에서는 더 큰 학살의 악순환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무저갱이 열린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그 잔학한 시대에 대한 증언자로 살았던 프리모 레비의 말대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지식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사람다운 삶에 대한 의식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휩쓸고 있는 탐욕과 광기에 맞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정신에 맞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상의 권세자들은 우리 속에 끊임없는 불만족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속에서 사고하는 이들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세상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일찍이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엡6:12)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의 전략이 뭔지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에게서 공동체를 빼앗아갑니다. 함께 나누고 돌보고 섬기는 이들은 악한 영의 주술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기꺼이 누군가를 돌보려고 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든든함이 찾아듭니다.

• 교회의 근본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이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 제2이사야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소식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사40:9c)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사52:7c).

아름다운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바벨론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제 아무리 막강하게 보여도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일견 든든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너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십니까? 오늘의 교회가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바벨론에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결국 하나님의 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만 저는 오승윤 화백의 전시회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오방색(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을 뜻하는 청백적흑황색)을 가장 잘 활용한 화가로 알려진 그는 한국 인상주의 회화의 대가인 오지호 화백의 아들입니다.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은 모두 ‘산 그림’이었는데, 화가가 100개의 산에 오르며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제가 좀 놀란 것이 있습니다. 초기의 그림은 봄․여름․가을․겨울에 따라 변화하는 산 빛과 형태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후기로 갈수록 화가는 산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골격을 그렸습니다. 어쩌면 그는 계절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핵심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그림에 빗대 말하자면 교회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월이 가도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붙들고 있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죽어가는 것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교회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살려는 결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려는 열린 태도야말로 교회가 한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교회는 중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 하나에 모이되 바로 거기가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 있다(11장)고 했습니다. 서른 개가 하나의 중심에 모인다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이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각각 자기로 가득 차 있다면 교회라는 수레는 구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름 아닌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빈 데 없이 내 이익, 내 견해, 내 계획으로 꽉 차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고, 이웃과의 평화도 불가능한 법입니다.

• 성막 짓기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저는 출애굽 공동체가 함께 지었던 성막이야말로 아름다운 교회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압제의 땅인 애굽에서 이끌어내셨고, 시내산에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당신의 법을 일방적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면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백성의 정체성은 핏줄이나 지역에 뿌리를 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함께 이루어가야 할 미래의 비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비전은 미래의 청사진입니다. 지향해야 할 비전이 없다면 삶은 무기력하거나 권태로울 것입니다. 문제는 비전은 아름답지만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는 사실입니다. 역사가 아주 조금 진보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끈질기게 요구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기득권을 조금도 내놓지 않습니다. 비전은 현실의 장벽에 가로막혀 퇴색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자꾸만 새롭게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비전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지속적으로 만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억압과 착취와 비인간화의 땅인 애굽을 떠나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백성임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성막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헌납했습니다.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창조적인 일에 동참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봉헌한 헌물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그만 가져오라’고 부탁해야 할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자기 것을 내주면서도 기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자유인의 긍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물건만 봉헌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시간과 재능까지도 바쳤습니다.

몇 해 전 여수에 신앙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 교회를 둘러보며 참 놀랐습니다.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그 교회를 짓는데 온 교인들이 몸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남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나면 아내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교회에 와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한 남성 교우들이 찾아와 늦도록 함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이런 교회가 있나 싶었습니다. 그 땀 흘림의 과정을 통해 교인들은 하나가 되었고,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기술, 하나님의 선물
성막을 짓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그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아주 솜씨 좋은 장인匠人들입니다. 어쩌면 출애굽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 기자는 그들의 그 숙련된 솜씨를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가득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셨습니다.”(31) 그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 생각을 작품으로 만드는 일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오홀리압에게도 동일한 은사를 주셨는데, 특히 그에게는 ‘남을 가르치는 능력도 주셨다’고 합니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성막과 기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전수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적인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면서 그들은 이전의 노동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기쁨과 감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재능이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고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아레테aretē입니다. 주로 인간의 탁월함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따라서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적용됩니다. 건강의 아레테, 아름다움의 아레테, 운동 능력의 아레테, 기술의 아레테를 성취하는 것이 그리스인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기술 혹은 예술을 뜻하는 테크네technē라는 단어도 매우 중요한 데, 이 단어는 신의 활동에 대비되는 인간의 활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테크네를 가진 사람은 인간적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는 빼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아레테 혹은 테크네가 인간의 탁월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입장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서 유래한 탁월함이라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우월감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쓰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12:7). 그는 은사를 자랑하는 성도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전10:24)라고 단호하게 요구합니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들이 재능 기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교인들이 자신의 재능을 우리 신앙공동체는 물론이고 사회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브살렐 오홀리압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오늘 우리가 다소라도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누고 섬기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돈’의 지배력은 약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중독되었던 이들이 깨어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기쁘게 헌신하는 이들이 나오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 때 삶의 외로움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자기를 바치며 살 때 외로움과 두려움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아름다운 사귐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살아가면서 일상의 모든 순간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기쁘게 수행하십시오. 세상 도처에서 평화의 일꾼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땀 흘려 씨를 뿌리고,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길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더디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성령에 충만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출 31:1-11)

르호봇
9~11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출애굽기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성령에 충만한 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시고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짓는 일꾼의 지도자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성막을 짓게 됩니다.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통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 봉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광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시내 산에 오르게 됩니다.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십계명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이 죄인들을 만나서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성막의 식양을 받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율법만 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막은 죄지은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용서가 없지만 복음은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짓는데 중요한 인물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오늘 그 사람이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성막을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성막을 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완전한 성전을 지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이 세상의 죄인들은 한 명도 죄 사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서 성막을 짓게 되고 이 사람들을 통해 성막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첫째, 유다지파 출신의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2절 레에 카라티 베솀 베찰엘 벤 우리 벤 후르 레마테 예후다

출 31: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유다 지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메시아가 유다지파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라’라는 단어는 (라아 7200 VQMMYS 동사 칼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보다, 감찰하다, 결정하다, 즐겁다, 준비하다, 라는 뜻입니다. 번역본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지파의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면서 먼저 보라고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감찰하여 보았고 이 사람을 보면 기쁘고 즐거우며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한 사람으로 성막을 지을 수 있는 자로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결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명령하시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주목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막을 지을 자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브살렐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브살렐을 선택한 이유를 주목하여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우리 221) 우리,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ור(오르 215) 빛나다, 영화롭다, 광채 나다, 불사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브살렐은 우리의 아들입니다. 우리의 아들로서 선택받은 브살렐은 성막을 지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이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아버지의 뜻을 이룰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브살렐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흑암을 빛으로 물러가게 하는 자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브살렐이 유다지파의 우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브살렐의 이름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해 보겠습니다.

‘브살렐’이라는 단어는 (베찰엘 1212) 브살렐,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ל(엘 410) 하나님, 이라는 뜻과 צל(첼 6738) 보호자, 그늘,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가 צלל(찰랄 6751) 그늘지다, 어두워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우리가 브살렐의 이름을 종합하여 보면 ‘하나님의 보호자’라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어둠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빛을 전파하여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사람이 성막을 짓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되어 부름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이 어둠에 있을 때에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4절 엔 아우토 조에 엔 카이 헤 조에 엔 토 포스 톤 안드로폰 

5절 카이 토 포스 엔 테 스코티아 파이네이 카이 헤 스코티아 아우토 우 카텔라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임했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어둠에 있었고 죽음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살렐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빛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육신은 유다 지파의 뿌리를 통하여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의 혈통을 통하여 오신 육신을 부인한다면 이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감정이 있었습니다. 아프면 아파하셨고 괴로우면 괴로움을 표출하셨습니다. 이것이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을 브살렐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3절 바아말레 오토 루아흐 엘로힘 베호크마 우비트부나 우베다아트 우베콜 멜라카

출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하나님은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주셨습니다.

‘충만하게’라는 단어는 (말레 4390 CW.VPICXS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가득하게 하다, 충만하다, 헌신하다, 만족하게 하다, 거룩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있습니다. 이 충만은 부족함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브살렐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니 성막을 짓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을 브살렐이 사니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고 만족스럽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신 후에 즉시로 성령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성령님이 브살렐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 충만은 받기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임하게 된 충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절대 받을 수 없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브살렐이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성령님의 충만함이 임할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막을 짓는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브살렐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 카이 유데오스 아나바이논 아포 투 휘다토스 에이덴 스키조메누스 투스 우라누스 카이 토 프뉴마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타바이논 에프 아우톤

11절 카이 포네 에게네토 에크 톤 우라논 쉬 에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막 1:10-11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생애의 기간은 끝나고 공생애의 기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브살렐도 자신의 사생애 기간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지명을 받아 성막을 짓게 되고 하나님의 성령의 영이 임하게 됨으로 공생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브살렐은 사생애에서 공생애로 들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 지파의 요셉의 아들로 살다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것은 브살렐은 성막의 기초를 놓는 작업을 했던 인물입니다.

4절 라헤쇼브 마하솨보트 라아쇼트 바자하브 우바케세프 우바네호쎄트

5절 우바하로쎄트 에벤 레말로트 우바하로쎄트 에츠 라아쇼트 베콜 멜라카

출 31:4-5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라

브살렐은 성막을 짓는 전반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기초를 놓게 됩니다.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였고 보석을 깎았으며 나무를 새기는 기술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금과 은과 놋은 성막의 기본 재료들입니다. 이것을 다루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금과 은과 놋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막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인성으로 구원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절 호스테 아델포이 무 카이 휘메이스 에다나토데테 토 노모 디아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에이스 토 게네스다이 휘마스 헤테로 토 에크 네크론 에게르덴티 히나 카르포포레소멘 토 데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른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에서 살아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몸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악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기초한 자가 바로 브살렐입니다.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선택받은 죄인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셋째, 단 지파 오홀리압을 선택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6절 바아니 힌네 나타티 이토 에트 오홀리아브 벤 아히사마크 레마테 단 우베레브 콜 하캄 레브 나타티 호크마 베아슈 에트 콜 아쎄르 치비티카

출 31:6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하나님께서는 왜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웠는지를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홀리압을 세운 것은 브살렐을 도와주라고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을 수 있도록 협력자로 세운 것입니다.

‘단’이라는 단어는 (단 1835) 단,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דין(딘 1777) 심판하다, 억울함을 풀다, 심판을 내리다, 공정하게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 단 지파는 심판하는 지파였습니다. 이 지파에서 오홀리압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을 풀어주고 공정하게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셔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데리러 오시고 심판받을 자들은 공정하게 심문하여 재판하시는 분이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오홀리압의 이름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달아 보겠습니다.

‘오홀리압’이라는 단어는 (오홀리아브 171) 오홀리압,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ב(아브 1) 아버지, 라는 뜻과 אהל(오헬 168) 장막, 성막, 성전,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는 אהל(아할 166) 장막을 세우다, 밝다, 빛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홀리압은 ‘아버지의 장막’이라는 의미를 가진 인물입니다. 무너진 아버지의 장막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장막에서 밝게 빛이 비추어져 구원받은 백성들이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우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30일 / 03- 19-2024(화)
출애굽기 30:1-38
분향단(1절)
찬송 / 467장(내게로 와서 쉬어라)

분향단,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의 제단,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1 너는 분향할 제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2길이가 한 규빗, 너비가 한 규빗으로 네모가 반듯하게 하고 높이는 두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이어지게 하고
3제단 상면과 전후 좌우 면과 뿔을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를지며
4금 테 아래 양쪽에 금 고리 둘을 만들되 곧 그 양쪽에 만들지니 이는 제단을 메는 채를 꿸 곳이며
5그 채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고
6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7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8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9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10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분향단(焚香壇, the altar of incense)은 향을 사르는 제단으로 지성소로 향하는 휘장 앞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길이와 넓이가 각각 1규빗(약 50cm)이며 높이는 2규빗(100cm)의 크기로 싯딤나무로 만들었고 금을 입혔습니다.
번제단처럼 네 귀퉁이에 뿔을 만들었고 운반을 위해 금고리와 멜 수 있도록 채를 만들어 모두 금을 입혔습니다.
향단에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제조된 거룩한 향들만 피울 수 있었고 이른 아침과 저녁때 등잔대의 불을 정리할 때 향을 살랐습니다.
명칭이 ‘분향하는 제단’이라고는 하나 번제나 소제, 전제 등 제사는 드리지 못하며 오직 향만 사르도록 규정되었습니다.

1.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고 해석하여야 합니다.
상징적이나 영적인 부분들을 해석하는 원칙도 마찬가집니다.
앞선 글에도 언급했듯이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에는 성막이나 성전의 각종 기구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그 기구들이 가진 영적 의미들을 더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구약에 있었던 그림자와 요한이 본 환상들의 전체적인 부분들을 일치시키는 것은 무리지만 최소한 ‘향’이 의미하는 바가 ‘기도’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향을 태울 때 발생하는 향연(香煙)은 우리의 기도가 이 향연처럼 위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가 분향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시편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분향단의 위치를 규정하실 때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이라고 지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금등대에 대해서는 ‘떡상의 맞은 편’이라고 하셨듯이 분향단을 ‘속죄소 맞은 편’이라고 하신 것은 분향단이 속죄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번제단처럼 분향단에도 사방으로 네 뿔을 만들었는데 여기는 일 년에 한번 속죄제의 피로 속죄합니다.
아마도 이날이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大贖罪日, Yom Kippur, 7월 10일)일 것입니다.
레위기 16:13에는 그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분향단에 있는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레위기 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정리하자면 분향단은 언약궤의 속죄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이라는 것도 이 향단의 위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란 자신이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복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이며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헌신이기도 합니다. 기도처럼 하나님께 실제적으로 가장 가까이 나가는 길은 없습니다.

분향에 사용되는 향에 대한 규정

출애굽기 37:29에서 “거룩한 관유와 향품으로 정결한 향을 만들었으되 향을 만드는 법대로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향품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조법을 따라 만들어야 했으며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관련 명령은 이것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동일한 제조법으로 자신을 위해서나 사람을 위해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여호와를 위하여 만들 향은 거룩한 것이니 너희를 위하여는 그 방법대로 만들지 말라. 냄새를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모든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출 30:34-38)

1) 향의 원료

향의 원료는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 등 네 가지입니다.

먼저 소합향(蘇合香, stacte)은 ‘스며 나오다, 방울되어 떨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나타프(נָטָף)’에서 나온 말인데 단풍나무와 비슷한 소합향나무가 햇빛을 받으면 송진처럼 진액이 흘러나와 방울처럼 맺하는데 그것을 채취한 것이 소합향입니다.

대부분의 향 재료가 식물에서 얻어지는데 특별히 나감향(onycha)은 홍해나 지중해에서 서식하는 향조개(aromatic shell)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를 내어 만든 향입니다. 이 가루는 특히 불로 태울 때 진한 향을 발합니다.

풍자향(galbanum)은 인도나 페르시아 등지에서 자라는 페룰라 갈바니플루아(Ferula galbaniflua)라는 다년생 식물에서 추출한 진액으로 만들어졌는데 향이 자극적라서 불쾌하기도 하나 다른 향과 배합되면 향기를 오래 지속시켜 준다는 특성이 있고 해충을 막고 방부제 역할도 했습니다.

이 세 가지 향료를 유향(乳香, frankincense)에 섞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서식하는 유향나무에 상처를 입혀서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이 나지만 대단히 상쾌한 꽃향기를 발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재료들은 진정한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잘 말해 줍니다.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진액이 스며 나와 방울이 맺히는 소합향처럼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 아래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개의 껍질을 잘게 부수듯 우리의 육신의 자아가 깨어지고 그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향연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단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삶의 필요만을 구하는 기도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지극히 자아적인 것입니다. 나의 자아와 육체의 욕망은 죽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구하는 것이 바로 껍질의 부서짐입니다.

풍자향은 칼로 베임을 당한 곳에서 나오는 진액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더욱 향기를 발하는 향료가 되게 합니다.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시 50:15). 고난 속에 부르짖는 기도는 방부제처럼 우리 영혼을 타락의 죄악에서 지켜 줍니다. 고난은 쓰지만 향의 효과는 큽니다. 이 세 가지 향 재료는 유향과 섞여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향기 나게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교제의 삶은 하나님 앞과 세상 속에서 향기를 발합니다.

향 제조에 첨가되는 또 하나의 재료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언약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2:13에서는 소제를 드릴 때 ‘언약의 소금’을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18:19에서 레위인에게와 역대하 13:5에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소금언약’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2) 금지사항과 의미

향과 관련된 금지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분향단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만든 향 외에 다른 향을 절대 사르지 말라는 것과 또 하나는 앞서도 보았듯이 이러한 제조과정으로 만들어진 향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향재료들은 인반적인 것들이라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임의로 삶에 필요한 향품을 만들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겠으나 다만 거룩한 향을 만드는 동일한 방식으로 제조하여 사람이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

‘거룩한 것’이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해야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향 재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제조의 방식이 거룩한 것입니다. 상징이나 그림자란 영적이거나 앞으로 다가올 어떤 실체를 보여 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해야만 합니다. 분향단의 향은 성도들의 기도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령하신 방식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일한 제조법으로 사람을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기도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이 만든 우상도 역시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이 분향과 기도가 드려져야 합니다.

3. 분향단은 기도의 사람이신 예수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병자를 고치시거나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과 함께 가장 많이 하신 일은 기도였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지존자이고 전능자이며 주권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존재는 기도하는 분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입장으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범이 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삶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가를 본보기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가 사역을 하지 않는 시간은 거의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기도는 구원받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육신을 입으셨을 때부터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으로 중보하시는 시점까지, 그리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넘어지지 않도록 중보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사도들을 세울 때 밤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요한복음 17장 전체에는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으심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능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나왔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마치 진액이 나무에서 방울처럼 스며 나오는 소합향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나감향처럼 깨어지고 부서졌습니다. 풍자향처럼 채찍맞고 가시관 쓰이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생명을 내어놓으신 그의 기도는 향기로운 향연이 되어 보좌로 올라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중보자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예수님은 부활 후 살려주시는 영(성령)으로, 다른 형태의 보혜사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4. 분향단의 뿔

앞서 번제단에 대해 나눌 때 네 뿔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구원의 뿔이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분향단에 있는 네 뿔도 역시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능을 우리 삶의 현장에 나타나게 하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막 9:29).

분향단은 속죄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중보는 구원과 절대적으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중보의 힘으로 연약함 가운데서 우리가 굳게 설 수 있고 또 성도들이 하는 진정한 기도는 믿음 안에 든든히 서 있게 하고 죄악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분향단의 불에 대한 중요한 명령

레위기 10장에는 대단히 당황스러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

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불이란 무엇일까요? 레위기 16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이는 대속죄일에 대한 규정으로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언급되지만 이미 성막을 만드는 모든 과정에 모세가 세부적인 사항들을 자세히 가르쳤던 내용일 것입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레 16:12)

분향단에 사용되는 불은 번제단에서 가져오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향을 사른 것으로 보입니다.

성막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있어서도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을 사용했습니다.

민수기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고라의 반역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매우 진노하셔서 반역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심판하시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민 16:41).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온 백성에게까지 진노하셔서 전염병으로 그들을 치십니다, 이때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에서 불을 담아 향을 피우고 회중들에게 가서 속죄하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피워 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민 16:46)

아론이 모세의 말대로 하자 염병이 그칩니다. 향로에 향을 사를 때는 반드시 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야 합니다. 속죄 사역과 기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영적 실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번제단은 우리 죄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그림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속죄 사역을 이루신 복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간구의 바탕에는 복음의 진리와 영혼 구원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다른 복음이고 다른 불입니다. 그 복음이의 진리가 바탕되지 않는 기도의 제단은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움이 되는 복음 진리를 바탕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한 모든 중보의 사역은 복음과 영혼 구원이 중심이 되고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안위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그 바탕에는 복음과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소위 성령 사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원칙을 망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역의 성격상 특히 기도하는 일에 많은 비중을 두지만 그 기도와 사역이 복음이나 영혼 구원과는 거리가 먼 ‘능력의 나타남’ 자체를 추구하거나 ‘성공과 축복과 번영’이라는 기복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이 아닌 다른 불로 향을 사르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가져온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간구와 추구하는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복음에서 가져온 것이라야 합니다.

분향단은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기도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도 생활의 모범입니다.

6. 분향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출 30:7-8)

번제단에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떡상에 떡이 항상 진설되어야 하고 등잔대에 불이 항상 켜 있어야 하며 분향단에도 아침 저녁으로 끊이지 않고 향을 살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다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17)













2024 사순절 온라인 119 기도회
제29일 / 03- 18-2024(월)
출애굽기 29:1-46
제사장 직분(1절)
찬송 / 341장(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제사장의 성별식

1. 물로 씻고 제사장 옷을 입음

준비물 / 젊은 수소 1, 수양 2, 무교병, 과자, 무교 전병
과정 / 물로 씻김, 제사장 의복, 머리에 기름 부음

하나님은 모세에게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 무교병과 과자와 무교 전병을 가져오고 성막 뜰로 들어와 거기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먼저 물로 씻겨야 했고 대제사장의 옷을 아론에게 입혀야 하는 것입니다.
아론은 그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특별한 임무를 받으면서 기름부음 받는 직분은 제사장 이외에 선지자, 왕을 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론의 아들들은 기름부음을 받진 않았지만 속옷과 때를 포함하는 제사장의 복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a. 무교병(레 2:4)
b. 물로 씻음(히 10:22)

2. 속죄제

아론은 먼저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직분을 맡은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죄에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때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는 것은 동일시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들 대신해서 죽은 짐승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죄인 됨과 피로 씻음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매년 대속죄일을 통해서 제사장들은 씻음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표하는 자들의 허물을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주셨습니다.
피의 일부는 번제단 뿔에 발랐고, 나머지는 단 밑에 쏟았습니다.

a. 안수(레 8:14)
b. 속죄제(출 30:10)

3. 번제와 화제

숫양 둘 중 하나로 드리는 두 번째 제사는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예배자와 제사장들이 먹는 제사와는 달리 번제는 제단 위에서 전부를 태워야 했습니다.
번제는 또한 제사장으로 위임받는 사람이 자기 전체를 다 드려 그 직무에 임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른 숫양으로는 세 번째 희생을 드려야 합니다.
그 피를 아론과 그 아들들의 오른쪽 귀뿌리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정결하고 성별되었다는 표시가 됩니다.
귀뿌리의 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의 성별을 상징하며, 엄지 손가락의 피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의 거룩성을 묘사하고 엄지 발가락의 피는 하나님을 섬길 때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숫양의 피는 단 주위에 그리고 관유와 함께 제사장들과 그들의 옷에 뿌려야 했습니다.

a. 숫양(창 22:13)
b. 번제(민 29:13)

4. 요제

세 번째 제사는 화목제의 범주에 속했으며, 위임제에 맞게 조금 수정되었습니다.
화목제의 본질은 제물의 일부를 경배자가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화목되고 따라서 하나님께 가납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 제사의 일부는 '요제'로서 그 제물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강조하는 의식 행위였습니다.
요제를 드린 다음에는 대개 하나님의 대표자들인 제사장들이 그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린 첫번째 제물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숫양의 가슴은 요제로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먹어야 할 몫입니다.
누군가가 화목제를 드릴 때 그 짐승의 가슴과 넓적다리는 항상 제사장들의 몫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칠 일 동안의 성별식에서 아론의 대제사장의 성의는 그를 계승한 아들에게 주어지고 다음 세대까지 계속 전달 계승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회막 문에서 먹어야 할 위임식 숫양의 먹는 부분에 대해서 지시하고 이 경우 숫양과 떡은 매우 거룩한 성질의 식사로서 남은 것은 모두 태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은 칠 일 동안 행하며 매일 속죄제로 수송아지 하나를 드렸습니다.
칠 일 동안 단은 거룩한 섬김을 위해 제사를 통하여 속죄되고 성별되어야 했습니다.

a. 위임식(레 8:28)
b. 요제(민 5:25)

매일 드려야 하는 번제

1.  소제와 전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번 소제(밀가루와 기름)와 전제(포도주)와 함께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매일의 제물에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식사의 요소들, 즉 고기와 밀가루와 기름과 포도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매일의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였습니다.

a. 어린 양(겔 46:13)
b. 소제(레 2:7)

2. 매일 번제의 중요성

이 마지막 구절은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의 번제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거기서 만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교제는 죄를 위해 흘린 피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두 차례의 이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은 자신의 궁핍과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a. 속죄의 피(히 9:22)
b. 하나님과의 교제(시 16:8)

결론 /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기름부으셔서 성막에서의 섬기는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제사장들은 성별 예배를 통해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자신의 삶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성별되어 여호와를 섬길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며 그들은 그분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선영목사(소천 2019년 1월



김선영 목사님이 유방암과 신장결석등의 병으로 1월경 소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검색어가 많이 유입이 되어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소천하셨고 예전 8개 간증 중 하나와 비슷한게 마지막 간증으로 올라왔습니다.
내용은 8개짜리 간증을 들으신분들은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https://blog.naver.com/470123/220870136907


안녕하십니까?
저는 3개월간 교회를 안나가다가 다시 마음 다잡고 경기 시흥 월곶에 있는 살구선교회 새마음교회 김선영 목사님께서 사역하시는 곳에서 예배 드리는 성도입니다.

저희 교회는 교인의 90%가 다 외지에서 오시는 분들입니다.
저도 평택에서 시흥으로 다니구요.
가장 멀리서 오시는 분은 충북 충주에서 오십니다.

​작년 3월에 캐나다 영생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국내로 집회차 계시던중 하나님의 명령으로 짐도 제대로 챙겨오시지 못한 상황에서 시흥 월곶에 개척을 하게 됐습니다.

​참고로 성도수가 30여분 정도로 미미한 수라 월 사례비도 없이 목회를 하십니다.
교회 이사장님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께서 운영해주신다는 믿음만으로 오직 복음 전하시는데만 매진하고 계십니다.

​김선영 목사님은 외부에서 특히 해외에서도 초빙을 많이 받으십니다.
근데 모든걸 자비로 가시고 현지에서는 사례비도 안 받으세요.
하나님이 다 하신거니까 본인은 한것이 없다라는 목사님만의 고집 때문에요.

​저희 김선영 목사님이 지금 많이 아프세요 결석으로 허리가 끊어질듯한 고통과 유방암까지 지금 말도 아니게 고생이세요.
목사님 말로는 예수님 믿고 이렇게 아파보긴 첨이래요.
기도 좀 부탁드릴께요.

​참고로 저희 교회에서는 오늘부터 저녁 8시에 모여서 합심기도 하기로 했어요 당분간 계속요.
저희 목사님 너무 불쌍해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볼려는 방편으로 여기에 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김선영목사님은 20살때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고 예수님 믿고 영접하신후 지금까지 40여년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쭈욱 가고 계셨던 분이에요.

故김선영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께 영광!]

youtu.be/nhk8mTcpryk


김선영 목사님의 놀라운 회심 간증









누가복음 12장- 14장 02/03/2024(토)

2-21-2024(수) 누가복음 14:7-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석에 앉으라(누가복음 14: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But when you are invited, take the lowest place, so that when your host comes, he will say to you, 'Friend, move up to a better place.' Then you will be honored in the presence of all your fellow guests.

상석(上席. the highest place)과 말석(末席. the lowest place)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다면 어느 자리에 앉기를 원할까요?
아마 모두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대한 비유의 핵심은 혼인 만찬에서 먼저 높은 자리에 앉으면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 자리를 내주면서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면 초청한 주인이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고 할 때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왕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잠언 25:6-7).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안식일에 고창병에 고생하던 사람을 고쳐주신 것에 대해서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은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관심을 갖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망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손님들이 앞을 다투어 높은 자리를 잡는 것을 보셨습니다.
저들은 누가 더 높고 중요한가를 자리를 통해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보려는 사람들의 가식적이고 과시적인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그들의 허위의식을 깨우치셨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손님으로 초대 받았을 때 안내자가 인도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판단하여 높은 자리에 먼저 앉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지체가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어주고 끝자리에 앉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먼저 끝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주인이 그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부르면서 다가와 더 높은 자리로 안내를 해 주어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높은 자리와 끝자리를 대조하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비유라고 하겠습니다(눅 13:30).

신앙이란 항상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들도 나를 낮추고 또 낮추므로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겸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11절에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지만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 질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잠언 29:23, 겔 21:26, 눅 18:14, 마 23:12, 약 4:6,10,벧전 5:5-6).
이 교훈은 신랑 메시아의 결혼 만찬에 초대받은 자들과 신자들 모두를 위한 말씀이다.
제자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자신이 가장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나를 드러내고자 상좌에 앉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늘 낮은 자세, 겸손한 자세로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는 다는 사실을 늘 헤아려서 낮은 자리 말석에 앉는 낮은 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2-20-2024(화) 누가복음 1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창병 든 사람(누가복음 14: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There in front of him was a man suffering from dropsy.

고창병(蠱脹病)

고창병(5203) 휘드로피코스( hüdrōpikŏs)  ὑδρωπ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5203

1. 수종 걸린.  2. 수종으로 앓는. 3. 눅 14:2.
발음 [ hüdrōpikŏs ]
어원 / 5204와 3700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수종(水腫) 걸린, 수종으로 앓는, 눅 14:2.

* 5204

ὕδωρ,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5204
1. 물.  2. 마 3:16. 3. 막 1:10
발음 [ hüdōr ]
어원  /  5205의 어간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물, 마 3:16, 막 1:10, 눅 7:44, 요 4:7.



* 3700.  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행 1:3.
발음 [ ŏptanŏmai ]

뜻풀이부

1. 나타나다, 보여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 1:3.

* 수종(水腫) : 물 수, 종기 종 
1. (신장성(腎臟性)ㆍ심장성(心臟性)ㆍ영양(營養) 장해성(障害性) 등(等)에 의(依)하여)몸이 조직(組織) 간격(間隔)이나 체강(體腔) 안에 임파약ㆍ장액(漿液)이 많이 괴어 몸이 붓는 병(病). 물종기.
2. 부증(浮症).


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 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도르'(*)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 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 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미쉬나, shabbat 7:2).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일.

이러한 금지 사항들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으며, 반대로 우상숭배자라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그 죄를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탈무드, shabbat 118b).
이밖에 더 자세한규정들에 대해서는 미쉬나의\"안식일\"(shabbat)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엣세네파들은 안식일을 바리새인이나 보통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다. \"다마스커스계약\"(Covenant of Damascus) 은 자세하게 안식일에 지켜야 할규정들에 대해서 기록하고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다(당시의 랍비들은1Km까지는 허용하고 있었다. 참조.행 1: 12).
엣세네파들은 마실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았고, 그들 가까이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엣세네 종파는 다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겨도 되도록 허락하였다.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겼을 때에는 7년동안 가두도록 규정하였다.
위에서 언급 한대로,안식일을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금지사항들은 범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용납되었다(미쉬나, Yoma 8: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던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마 12:9-14, 막 3:1-6, 눅 6:6-8).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었다. 다만 그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아니면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는그를 치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예수의 경우에는 환자(손 마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날까지기다렸다 치료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심으로 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랍비 유다(Judah the Prince) 와 메이어(Meir)는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양을 꺼내 주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하물며\"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하셨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려 구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다든지 아니면 그 동물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매트레스 같은 것을 그 구덩이에 넣어 주도록 했다.
예수께서는 또한 안식일에 18년동안 귀신에 잡혀 있던 여자를 고쳐 주셨다(눅13: 10-17).
이에 대해 회당장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꼭 고쳐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비난하였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된 것은 안식일에 응급 환자가 아닌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데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끌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박하셨다(15-16 절).
이러한 예수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되기도 한다).
"소는 매일마다 물을 주어야 하며, 이는 안식일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일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아니하면, 그 소는 큰고통을 당할 것이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랍비들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년동안 류머티스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전형적인 성서 해석 방법인 kal va-homer ("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을 사용하셨다).
즉 동물도안식일에 풀어 주는데 \"하물며\"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기초해서
예수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셨던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셨을 때에도 예수는 똑같은논리를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한편, 예수께서도 말씀하신것처럼 미쉬나와 탈무드는 안식일에 어떻게 동물들을 돌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요 5:12).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금지 사항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을 어겼다고 그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편,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까서 먹은 것때문에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기도 했다(마 12:1-8; 막 2:24-28, 눅 6:1-5).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임과 동시에 그것을 까부는 일로 비쳤다. 이러한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범하지않았다. 다만 제자들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을 내버려 둔 것에 대하여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금지된 거룩한 떡을 먹은 것(삼상 21:1-6)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떡을 먹었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율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토라(율법서)에서는 그러한 명백한 규정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예수의 이 말씀을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선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랍비들도 이렇게 가르쳤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Mekilta Exodus 31:13, 14; 탈무드, Yoma 85b).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시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나에게 분개하느냐?\"(요 7:23).
이러한 규정도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전통)가운데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잘 알려진 랍비들의 결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법을 따라서 아이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할례 받는 날이 안식일이 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주도록 랍비들은 결정을 했다.
안식일에 할례받는 것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할례를 주기 위해 할례에 사용될 도구를 운반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위에서 본대로 금지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 사항으로 허락을 했던 것이다(미쉬나, Shabbat 19:1).
그러나 아이의 건강 때문에 8일째에 할례를 받을 수 없을 경우는 아이가 회복된 다음에 받도록 했다(미쉬나, shabbat 19:5).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할례도 베풀거늘“하물며”사람의 전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고 반박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보편적인 해석 방법이었던 kal va-homer(\"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를사용하셔서 토라와 구전법을 해석하셨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규정을 부정하거나 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한번도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신 적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구전법)에 근거해서 자신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이 그들의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주셨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고창병(蠱脹病. dropsy)"이라고 하지만 새번역 성경에서는 "수종병(水腫病. dropsy)" 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휘드로피코스(hüdrōpikŏs. ὑδρωπικός)" 라고 합니다.
'고창병'이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질병이라고 하여 새번역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수종병'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병은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혈액 속으로 흘러야 할 물이 혈액 밖으로 나와서 몸이 붓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죄인들을 가리켜 영적 병자로 비유합니다.
따라서 '고창병'은 영적으로 어떤 병적인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창병'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왜 생명의 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병을 윱ㄹ하고 그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거나 더 악화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물인 말씀을 율법으로 읽고 적용하여 얻게 되는 병을 말합니다.
그 좋은 예가 "안식일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인들이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은 후에 거듭난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토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법으로 이해하고 행하므로 생명이 되어야 할 말씀이 오히려 죄인들을 고창병 또는 수종병에 걸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문제로 자주 부딪혔던 것입니다.
그만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문제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경 안에서 이렇게 생명과 같이 여기는 법이 왜 없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처럼 간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마치 율법적으로 인식하고 지킨다면 그것은 곧 고창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킨다면 율법의 범위를 벗어나 더 큰 긍휼과 자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한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더 높고 깊고 넓게 이해하고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명령대로, 그 율법대로 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단지 법을 지키는 행위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곧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말씀(물)에 의하여 고창병이 든 것이 아닐까요?

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며 고창병에서 자유롭게 되어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는 은혜로운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우리의 고창병, 참 예수를 만나서 안식일에 고침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치유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먼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떤 질병으로, 어떤  정도로 아픈 환자이든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마침내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셨기 때문에 병자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 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수종병(Dropsy)은 다른 말로 고창병이라고도 합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그러니 수종병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의 마음은 어떠했겠는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류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문제가 생기고, 그 증상이 만연하며, 복수가 차면서 몸이 퉁퉁 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심하십니다.

치유를 받아 생명의 연장을 보장받고, 건강하고 힘차게 사시며, 마음속에 기쁨과 희망과 행복이 넘쳐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서 치료와 회복과 쉼의 은총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항상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고창병든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이지만 실은 이 환자와의 관계성 보다는 예 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관계성에 더 집중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고창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셨기도 하시겠지만 주님은 이 환자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이 환자를 이용해서 바리새인들을 교육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에 들어가셨다.

1. 예수님과 바리새인?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 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눅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눅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 는가 엿보니”

눅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는 눈?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23:13 “화 있을진저 !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 이 먹는다' 하더라”

2.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시고 주님은 오늘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들어가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때에도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다)

①언제? 안식일에

②무엇을 하시려? 잡수시려

③어디에? 두령의 집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고, 안식일에 일하는 자라고 비판하는 그 잘 에 주님은 바리새인의 집에들어 가신다.

주님을 죽일려고 하는 그 바리새인들의 두목의 집에 들어 가신다.

왜 주님이 그 집에 들어 가시는가?

진정으로 배가 고파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이 좋아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의 꼬임에 바졌는가?
주님은 배고픔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좋아서도 아니고, 꼬임에 빠진 것도 아니다.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가?
생명이(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상좌의 어리석음이 어떤 것인가?
가난한 자들을 돌아 보아야 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

3.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이들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도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초청을 하고 초청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환대와 인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엿보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심성과 괴략을 엿보고 계셨다.

주님은 엿보아야 될 분이 아니다.
고백하고 그 분앞에 엎드려야 한다.
교회는 엿보는 데가 아니다.
목사는 엿보아서 될 사람이 아니다.
설교는 엿보아 들어서는 안된다.
평생가도 은혜 한번 받지를 못할 것이다.

4. 고창병 든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 ⇨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 가는 병.
당시에는 이 병이 하나님의 저주로 생기는 불치병으로 인식했다.

5. 예수님의 질문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①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의 엿봄을 지적하는 것이다.
② 이 질문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잠히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지를 않는 다는 것 을 그들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의 치유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이 환자의 치유는 이 환자의 믿음이나 고백이나, 간구가 없었고 주님의 필요에 의해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

Ⅱ. 예수님의 가르치심

1. 율법과 생명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 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에 우선을 두고 계신다.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생명 사랑, 생명 구원

2. 상좌에 앉은 사람들

「청함 받은 사람들의 상좌택함을 보시고...」
진정으로 상좌에 앉아야 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주님이 상좌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들은 주님을 모르기에 주님 앞에서도 자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자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3.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자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14절)


인트로(Intro, 소개)

어느 안식일날에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인 지도자들 중에 어떤 한 바리새인 집을 방문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 앞에는 수종병이라는 병을 앓으며 고생하고 있는 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등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켜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라도 귀신들려 18년 동안 중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 주신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번에도 예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면 그것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흠내고자 해서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진 생각을 아시고는 수종병을 앓는 자를 바라보시며 바리새인과 율법선생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대답해 보아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이 물으심에 그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수종병을 앓고 있는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는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묵묵부답으로 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너희 아들이나 집에서 키우는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고 해서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안식일이라도 당장에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 말씀에 그 누구도 이러쿵 저러쿵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고창병(Dropsy. 드랍시)

본문에 수종병이 나옵니다.
수종병(水腫病, dropsy) 옛날 성경에는 고창병이라 기억하는데, 헬라어는 "휘드로피코스" (물이라는 '휘도르'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고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수종병이 고창병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개역개정이나 한글성경에 수정이 되어서 지금은 수종병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사실 옛날에 쓰여진 고창병은 잘못된 표현이어서 지금은 수정한 것입니다.
사실 고창병이라는 말은 동물들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에 생기는 병이기에 동물에게 나타나는 병입니다.
그리고 고창병이 생기는 원인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삼킨 거친 풀· 나뭇잎· 열매들이 첫째위에서 다시 입으로 뱉어져 되새김을 하지 않고 막바로 4째위까지 통과하여 장으로 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전혀 되새김으로 씹히지 않은 음식물이 장에 오면 소화 장애로 부패되었기에 수분도 흡수가 안되어서 배만 맹꽁이배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게 되고 소가 한 번 이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라 합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위험한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자에 물이차서 북처럼 부풀어 생기는 병이라 해서 고창(鼓脹)병이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휘드로피코스 즉 물과 관련된 그리고 물이 차서 생긴 병이기에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창병으로 쓰였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물의 병과는 좀 다르기에 현재 수종병이라고 수정한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Dropsy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물이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는 대략 70%정도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의 60%가 물이라고 합니다.
물이 없으면 죽고맙니다.
날마다 물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수액을 통해서 온몸에 영양분들이 전달이 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이란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유지해 주는 아주 소중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물도 과하면 수종병처럼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뭐든지 과하면 안좋은것 같습니다.
적당함이 참 좋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물(事物)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도리어 안한 것만 못함이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분명히 물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3일만 물의 공급이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 전체에 문제가 생기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심지어 생명에도 지장을 초래 한다고 합니다.
부족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또 많이 넘치면 그것 역시 우리의 몸을 위험한 상태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은 우리에게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나치면 도리어 해가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에서 오는 것도 문제이지만 넘쳐서 오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물과 말씀

말씀 또한 물과 같은 것은 아닐까?
말씀 또한 언제나 필요한 물처럼 영적으로 생각을 해 볼때 날마다 반드시 필요한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매일같이 말씀이 없다면, 물이 부족하면 목마름이 오는 갈증처럼 우리의 심령의 갈급함이 생기고 급기야는 몸에 심각한 일이 벌어지듯이 말씀도 부족하면 우리의 영혼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바로 넘치면 오히려 안좋다는 그 말!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물이 우리를 해할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수종병…물과 관계된 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하필 물에 의해 피패된 몸을 치유하셨을까요?
그리고 그것도 안식일에 바리새인들 앞에서 말이죠?

물과 말씀을 같이 생각해 봤습니다.
물은 우리의 육신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말씀은 우리의 영이 숨쉬고 살아가는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수종병…딱 맞는 비유인것 같아요. 그것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장 많이 알고 말씀을 넘치게 알고 있는 그 바라새인들 앞에서 물이 넘쳐나서 수종병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는 치유의 목적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대로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생명 살리는 일이 가장 큰 일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높은 뜻을 가진 율법이라고 해도 안식일이라 하여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인 것입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은 하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수종병이 걸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독이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의 말씀은 정말 소중하고 귀한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오히려 생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씀이 아닌것입니다.
생명인 말씀을 그저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것만을 따르게 된다면 수종병에 걸리듯이 우리의 영혼도 수종병에 걸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런 영적 수종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이고 깨우치기를 원하셔서 수종병에 걸린자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귀한 말씀을 생명력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의 말씀을 알지만 온전한 이해가 되지 않고 그저 아는것만으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을 먹는것일까요?
혹시 이런 일들을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날 처음으로 성경의 내적인(영적) 비밀들을 접하면 너무도 기뻐서 놀라움에 젖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게 됩니다.
날마다 숨겨진 비밀들을 알아내느라고 다른 일은 뒷전이 되고 심지어는 집에 있는 아이들 밥 챙겨주는 일도 마다하고 이런 저런 모임에 열심을 냅니다. 일주일 내내 듣고 듣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유튜브라든 수많은 각종 SNS을 통해 많은 말씀들을 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여기서 알아진 지식을 남에게 전달하느라고 또 여념이 없습니다. 이모임 저모임에서 자랑하듯이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보면 참 은혜가 넘치는 일인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하기도 합니다. 소위 하나님과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여, 주구장창 말씀은 추구하나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 실제가 없는 공허한 이론일 뿐인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머리로만 알고 나의 영은 점점 수종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육신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친히 낮고 천한 피조물로 내려와서 인생을 체휼한 수난의 과정이 있어야 실제가 되었듯이, 영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역동되어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가 있어야 그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자신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며 부활의 삶으로 사는 것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지식은 그저 이론일 뿐이고 그저 떠있는 관념뿐인 것입니다. 역동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처럼 자신은 지식의 허영 속에서 높은 구원을 성취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비춰지는 실재의 모습은 생명이 없는 그저 곧 썩어 죽을 그런 뿌리없는 생명을 잃은 나무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에 제가 고창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종병의 옛날 말입니다. 같은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들에게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서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이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은 곧 묵상이라도 해도 될것 같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영적인 고창병 즉 수종병이 걸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되새김질하는 동물들처럼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내서 그 말씀을 곰곰이 되씹어야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가 풀만 먹어도 골수가 가득 찬 단단하고 굵은 뼈를 만들어내고, 영양이 풍부한 젖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되새김질에 비밀이 있습니다.
되새김질은 소화 흡수를 완벽하게 돕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억새풀이라 할지라도 다 분해시켜 버려 몸에 풍부한 영양을 공급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되새김질의 말씀묵상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뼈와 같은 견고한 믿음으로 형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게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는것을 봅니다.
이곳 저곳에서 온갖 미디어를 통해 마구잡이로 말씀을 먹습니다.
토할때 까지 먹고 또 먹습니다.
탈이 납니다.
바로 고창병 수종병이 생기고 맙니다.
묵상이 없이 마구 먹어대서 배에 복수가 차는 무서운 병인 복수 수종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계속되면 온갖 성인병 증세로 시달릴 것입니다. 암은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이라던가요? 그래서 암(癌)이라는 한자에 보면 입구자가 세 개나 들어 있습니다. 영적인 암은 많이 안다는 교만의 도도함과, 다른 이를 정죄하는 증세로 나타납니다. 쉽게 치료되지 않기에 아주 치명적입니다.
많이 듣고서 소화만 잘 시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완전 금상첨화 이겠죠. 그러나 들은 만큼 실제가 안 된다면, 이것들이 쌓여 영적인 수종병인 교만을 초래하고 곧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때에 조심할 것은, 듣는 것이 모두 구원이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말 위험합니다. 들은 만큼 살아내지 못하면 모든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습관적 신앙생활을 없애시기를 바랍니다. 혹여 우리가 그런 습관적 신앙생활을 한다면 단번에 일소하고, 말씀 앞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이제 탈바꿈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야만 더이상 고창병에 걸려 생사를 오고가는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무조건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씹고 또 되씹고 묵상이라는 말씀의 되새김을 통해 살아서 생명력을 갖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신앙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실제가 있는 살아 숨쉬는 건강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길은 오직 말씀의 되새김인 묵상뿐입니다.

요한계시록 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작은 능력(지식적으로 작은)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결단코 배반치 아니함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승리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능력이 많아 보인다고 해서 건강하고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비록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새김하는 묵상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삶가운데 지켜내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충만한 삶이 되어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이제 더이상 고창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생하지 마시고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작은 능력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뇌이면서 되새기면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생명력 넘치는 말씀의 능력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이 실제의 능력이 넘치고 살아 숨쉬는 그럼 신앙인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며 기도해 봅니다.



2-19-2024(월) 누가복음 13:31-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삼일에는(누가복음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He replied, "Go tell that fox, 'I will drive out demons and heal people today and tomorrow, and on the third day I will reach my goal.'

예수님 당시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인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희생물이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됨으로 속죄의 제물로 드려졌다.

헤롯(헤롯 안티파스, 분봉 왕. 영주)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 추종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헤롯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다(32절).


유대 사회에서(1세기 시대) 여우는

아가 2:15 / 여우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귀찮은 존재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3-4월).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오는 이유는 들쥐를 잡으려고 들어오는데 들쥐가 포도향을 좋아하여 포도원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때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와 포도나무의 꽃을 떨어트려 열매를 얻지 못하게 한다.

헤롯의 야심은 유대인의 왕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추종하는 세력은 미리 제거하려고 하였다.

마태복음 8:20 / 여우는 하찮은 존재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느헤미야 4:15 / 여우는 성벽을 쌓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여우가 지나가도 무너지겠다.
너희들이 쌓는 성은.........
깃털처럼 가벼운 하찮은 존재

열매를 맺히기 전에 꽃을 떨어트리는 여우
성곽을 쌓기도 전에 허무는 여우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본문의 내용은 어떤 바리새인 사람들 예수님께 와서 '이 곳을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다가 사흘이 되면 일을 모두 마칠 것" 이라고 일러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계속 갈 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적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 집이 버림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다.' 할 때까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랍비 문헌에서는 '여우'를 간교함의 대명사라고 합니다.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예수님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한 교활함과 간사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삼일에는 완전하여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삼일은 상징적 의미로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하겠으며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씩 주저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주님의 분부하심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따라가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내가 지고

저 여우
- 여우는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서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온다.
예수께서 여기서 헤롯을 여우로 부르는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당신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 한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여우는 사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승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또 다른 의미는 그의 교활함과 간교함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며 예수께서는 결코 그의 협박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과 내일...제 삼 일
- 헤롯의 협박은,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임을 언명(言明)하고 있다.
난해 구절인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1. 문자적인 의미에서 삼일을 가리킨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은 일을 더하고 제3일에 헤롯의 관할 지역을 떠나가겠다는 의미로 본다(Bleek,Meyer).
2. 출 19:10-11에 배경을 둔다고 보아 준비와 정결 기간인 이틀이 지나고 사홀째 되는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3. 제 삼 일이 절정에 이르는 결정적인 시간을 뜻한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즉 '이틀'은 그 시간에 이르기 까지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Marshall).
4. 상징적 의미로 보아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Bengel, Farrar).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4의 견해가 유력하다.

완전하여지리라
-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 문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헤롯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완료하신다(Bleek,Bruce).
2.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완료하신다(Manson).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m, Farrar, Marshall, Gilmour).
이중 3의 견해가 유력하다.

완성하다, 완전하다. 텔레이오오(tĕlĕiŏō) τελειόω 스트롱번호 5048

1. 완성하다.  2. 완수하다. 3. 히 2:10
발음 [ tĕlĕiŏ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τελείωσα, 완료 τε- τελείωκα, 완료수동태 τετελείω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τελειώθην, 미래 수동태 τελειωθήσομαι, 5046에서 유래


성경에서 숫자 3의 의미는?

모든 종교에서 3이란 숫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에서 쓰는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심오한 관념을 보더라도 3이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체적 효과가 무엇이든지 삼중 반복 형식은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민속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대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은 대체로 세 명이 한조로 나온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거나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점술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을 때도 세 번 연속으로 같은 수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문화권에서 3이란 숫자는 행운의 숫자이자,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하는 수로 사용했다.

3은 일련의 사건들의 형태가 이뤄지는 데 필요한 최소 숫자이다.
어떤 사건이 한 번이나 두 번 발생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으로 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신호가 된다.

성경에서도 3이란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3이란 숫자는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그래서 숫자 3은 '하느님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하느님이 사제의 축복에 관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에서도 축복을 세 번에 걸쳐서 하라고 당부하신다(민수 6:22-27).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신다(마태 4:1-11).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도 3일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는 최종적 목적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또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발생한다면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완전히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관해 물어본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복은 그들의 거절이 매우 단호한 것임을 의미한다(누가 23:13-25).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예사로 돼 있다.
미사 때 참회예식에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세 번 반복하는데, 이는 잘못을 완전하게 참회한다는 뜻이다.
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노래하는데, 이 역시 하느님이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순 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49

2

18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50

2

19

월 

누가 13:31∼35

제 삼일에는(32절)

51

2

20

누가 14:1∼6

고창병 든 사람(2절)

52

2

21

누가 14:7∼14

말석에 앉으라(10절)

53

2

22

누가 14:15∼24

큰 잔치(16절)

54

2

23

누가 14:25∼35

제자가 되려면(27절)

55

2

24

누가 15:1∼10

하나를 잃으면(25절)


2-17-2024(토) 누가복음 13:22-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열어주소서(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Once the owner of the house gets up and closes the door, you will stand outside knocking and pleading, 'Sir, open the door for us.' "But he will answer, 'I don't know you or where you come from.'

주여 열어주소서(Sir, open the door for us) / Lord please open it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세상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로 가야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좁은 길을 가기를 힘쓰라”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좁은 길로 가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그 좁은 길, 고난을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그 길은 생명의 길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육체적 ‘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생명’…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그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황에서 ‘좁은 문’은 어떤 문이었을까? 
예루살렘에는 문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문들에는 작은 문이 달려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큰 문을 닫히면 그 좁은 문으로는 짐을 실은 나귀나 수레 같은 것들은 들어올 수 없었고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씀에 대하여 ‘버클레이’ 신학자는 여기서 ‘바늘 귀’는 ‘바늘 문’, 즉 ‘좁은 문’인 이 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가는 문은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우리의 모든 세상의 짐들, 소유를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좁은 문이라는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냐 하면 어떤 사람의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마지막 때에 집 주인이 문을 닫을 때 사람들이 와서 문들 두드리며 ‘나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집 주인이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라고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악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믿음 있는 자와 행하는 자는 전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자는 비록 자신이 실패할지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기를 기뻐합니다. 그 길을 가며 항상 성공하지 않을 지라도 믿음으로 그 길을 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기뻐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오늘 나의 삶에서 어느 길로 가시며,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 길에 함께 동행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의 욕심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오늘 나의 삶에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주님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설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시며, 그 좁은 문 안으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적은지 물었다면,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많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하여도’로 번역된 기본형 ‘ζητέω제테오’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개인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장로들의 유전이나 율법에 열심을 내어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좁은 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구하여도 / 구하다. 제태오(zētĕō)  ζητέω 스트롱번호 2212

1. 발견하려고 찾다.  2. 마 28:5. 3. 요 18;4
발음 [ zētĕō ]

어원  / 미완료 ἐζήτουν, 미완료 단수3인칭수동 ἐζητεῖτο, 미래 ζητήσω, 제1부정과거 ἐζήτησα, 미래수동태 ζητη- θήσομαι,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발견하려고 찾다, 구하다.
 1. [문자적으로]
  a.  [잃는 것을] 마28:5, 막1:37, 눅2: 48, 19:10, 요6:24,26, 7:34, 36등.
  b.  [자기와 관계를 맺기 원하고 또 어디서 찾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얻기를 원하고 존재를 찾을 때] 요18;4, 행10:19,21, 딤후1:17, ζητεῖν τ. θε- όν, εἰ ἄραγε αὐτὸν εὕροιεν: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하여 하나님을 찾는다. 마2:13, 12:43, 눅11: 9,24등, 행17:27, 롬10:20등. 
 2.  찾아다니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 막3:32, 행9:11.
 3.  조사하다, 검사하다, 생각하다, 궁리하다, 막11:18, 14:1,11, 요16:19, [법적 용어로] 요8:50, 11:56.
II.  [찾는다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
 1.  얻으려고 노력하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다, 마6:33, 26:16, 막14: 55, 눅12:31, 22:6, 요5:44, 7:18, 롬2:7, 고전7:27, 고후12:14, 골3:1, 벧전3:11등.
 2.  애쓰다, 목표를 삼다, 원하다.
  a.  [무엇을] 요5:30, 빌2:21등, 고전7: 27, 계9:6.
  b.  [의문문과 함께] τί ζητεῖτε: 무엇을 원하는가, 요1:38, 4:27.
  c.  [부정사와 함께] 마12:46, 막12:12, 눅5:18, 9:9, 17:33, 요5:18, 7:1, 롬10:3, 갈2:17등.
  d.  ζ. τὴν ψυχήν τινος: 누군가의 생명을 찾는다, 마2:20, 롬11:3.
  3. 요구하다, 막8:12, 고전1:22, 고후13:3등, ζητεῖται ἐν τ. οἰκονόμοιςἵνα: 관리자에게 ~을 요구하다, 고전4:2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25-2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문이 닫힌 후에서 문 밖에 서 있는 이들은 문을 두드리며, 과거 집주인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문을 열어 줄 것을 애원합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외면한 채 호통합니다.
과거 주인과의 교제와 가르침에 진심으로 따르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그마저도 이용하려는 모습은 혹 우리의 모습일까 싶어 씁쓸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대조를 통해, 이야기를 매듭짓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야 6: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역설적 사명을 받았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 6:9-10).
주님도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라고 했다. 이사야처럼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열어주소서(κυριε ανοιξον)

눈을 열어주소서!(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성령이 눈을 열어주면, 위기를 극복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데스와 베렛 사이 샘 곁에서 하갈의 눈을 열어줬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을 만난 그녀는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라 불렀다(창 16:14).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자, “눈이 가리어져서”(눅 24:16) 주님을 몰라보던 엠마오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다”(눅 24:31).
성경을 풀어주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눅 24:32).
아람 군대가 밤에 사마리아를 에워싸자, 엘리사가 사환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엘리사가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사환은 불말과 불병거가 사마리아 산에 가득함을 보았다(왕하 6:17).
또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아람군대의 눈이 어두워졌다(왕하 6:18).

귀를 열어주소서!(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성령이 귀를 열어주면, 말씀을 깨닫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 11:15)고 가르쳤다.
“길가 밭”은 사탄의 방해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마 13:19).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과 박해로 곧 넘어진다(마 13:20-21).
“가시떨기”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결실치 못한다(마 13:22).
“좋은 땅”만 말씀을 듣고 깨달아 100배, 60배, 30배로 결실한다(마 13:23).
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의 후렴은 이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 29; 3:6,13, 22)

마음을 열어주소서!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He came to that which was his own, but his own did not receive him.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성령이 마음을 열어주면, 주님을 영접한다(요 1:12-13).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바울이 말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고(행 16:14), 베뢰아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것처럼(행 17:11),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자!(계 3:20)

말씀을 열어주소서(요한복음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All this I have spoken while still with you.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가르쳐 생각나게 하소서!(요 14:25-2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오직 성령께서 말씀을 가르쳐줘야 영적 분별력이 생긴다(고전 2:13-14).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19-21)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귀국길에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다. 성령의 인도로 그 수레에 올라탄 빌립과 내시의 대화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행 8:30)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행 8:31).
그러자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고(행 8:34-35), 물을 만나자 빌립은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8:36-38).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을 앞두고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따라가자!(막 10:46-52)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자!(히 3:1; 12:2)



하나님의 법칙이나 예수님의 법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느 누가 교회를 30년 40년 다녔다고 하면 우선 그의 인격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오래 다녔다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문제는 연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이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시간 이후로는 내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다고 그 년 수를 자랑하지 말고 몇 십 년 다녔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믿음이 뒤떨어졌거나 신앙생활 하는 것이 남만 못하다면 가슴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느냐 하는 년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의 믿음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설교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구원의 문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쫓겨 날 수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처럼 자기는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은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다시 한 번 자신의 믿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 “주여! 열어주소서” 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날에 은혜 받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 모두가 들림 받아 천국 문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16-2024(금) 누가복음 13:18-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겨자씨 한 알(누가복음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garden. It grew and became a tree, and the birds of the air perched in its branches."

겨자씨 한 알(a mustard seed) /

성경에 나오는 새는 실제 육적인 새와 영적인 새가 있으며 영적인 새는 영(靈)[1]을 의미한다.

육적 이치와 영적 의미

새가 하늘을 날며 나무에 깃들듯이, 성경에서는 나무목자와 성도로(사 5:7, 요 15:1), 그들에게 임한 나무에 깃드는 새로 비유한다(마 3:16).

두 가지 소속의 새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새

  •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계 18:2)
  • 공중에 나는 모든 새(계 19:17)
  • 하나님의 보좌네 생물 중 넷째 생물을 독수리 같다고 함(계 4:6~7).
  •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화를 외침(계 8:13).
  •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양육 받음(계 12:14).

역사

예언 성취

구약 예언

신약 예언

관련 인물

마태복음 13:31-32
겨자씨 비유

겨자씨와 누룩 비유인데 겨자씨 비유는 두 절이고 누룩 비유는 단 한 절이다.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리 쉽고 간단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두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 겨자씨, 밭, 겨자가 나무가 된다는 것, 공중의 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여자, 가루 서 말, 누룩, 부푼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풀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유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근거로 보았을 때 비유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며, 적어도 본 장에서 기록된 모든 비유가 각각 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같은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31-32절)라고 천국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흔히 “겨자씨 비유”라고 일컫는데 이 비유에 대한 해석들을 보면 대부분이 천국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미미하지만 나중에는 엄청나게 확장되어 놀라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혹은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욥기 8:7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천국을 크기로 말씀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의 왕국은 시작과 나중의 개념이 없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하고 주님의 일을 열심히하며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상태로 이 땅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수님은 그 나라의 본질을 보여 주셨고 그 본질은 십자가를 통해 극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겨자씨 비유는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에 연결하여 보충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알리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런 점에서 밀과 독보리 비유와 문맥상 연결되어 있고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하셔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밀과 독보리 비유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과 일맥상통한 관점에서 그 다음 비유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았을 것이다.
즉 누구든지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겨자가 자라서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겨자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좀 의아한 것이었다.
겨자는 2-3월이면 노란 십자화로 피는데 온 산과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다.
이스라엘 전역에 널리 자라지만 특히 갈릴리 지역에 많이 퍼져 있는 1년초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밭에 겨자를 심을 필요가 없었다.
지천에 널려 있는 겨자를 굳이 자기 밭에 뿌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농부도 없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어느 땅에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개정 성경에서는 “풀”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개역한글판에서는 “나물”이라고 번역하였었다.
사실 풀이라는 의미보다 나물 혹은 채소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보통은 1m정도로 자라지만 더 큰 것은 2-3m까지 자라기도 하는데 포기로 군락을 이루어 자라기 때문에 여름 건조기가 시작되면 씨를 맺은 후 말라 서로 엉켜서 딱딱한 나무같이 되어 새가 집을 짓기도 한다.
씨는 지름이 1-2mm 크기로 작은데 겨자씨가 씨앗 중의 가장 작은 씨앗은 아니지만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의 대명사로 쓰였다. 이것을 기름을 짜거나 향신료로 이용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는 구약적 배경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을 하고 있는 다니엘서 말씀을 통해 본문을 이해하도록 하자.

다니엘 4:10-12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본문은 느부갓네살의 꿈인데 다니엘이 설명하기를 느부갓네살이 이룩한 거대한 바벨론 제국은 땅의 모든 족속들이 깃들일 만한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넓은 문맥에서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살펴보면 이 꿈을 꾸기 전에 거대한 신상이 세워진 꿈이었는데 사람이 손대지 않은 뜨인 돌이 신상을 치니 산산이 파괴되어 작은 돌은 큰 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한 꿈이었다(단 2:31-45).
다시 말하면 바벨론 나라가 거대하여 모든 족속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지만 언젠가 뜨인 돌에 의해 망하는 나라가 될 것을 계시해 주신 것이었다(에스겔 17:22-24, 31:3-14에 보면 애굽 역시 이런 나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중의 나는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겉으로 풍성하게 보일지 모르나 언젠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실 나라라는 것이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의 씨를 먹는 존재가 13:4에서는 새라고 하였는데 그 새는 9절에서 악한 자라고 하셨고 그 악한 자는 38-39절에서 곧 원수요 마귀라고 밝히셨다.

성경에서 새는 일단 영적인 존재로 상징되는데 비둘기나 독수리는 성령님이나 하나님을 나타낼 때에 쓰여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중의 새는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악한 영으로 상징된다(참고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새는 공중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새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가만히 보금자리를 틀고 그 나무를 장악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들이 깃든 그 나라를 심판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8:2-4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언약의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뿌려 열매를 맺는 땅으로 만드셨고 천국의 아들들을 심으셨으나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추수 때까지는 그대로 두신다.
그것이 천국의 아들들을 보존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밀과 독보리 비유에 이어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고 경계를 삼도록 하시기 위하여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같이 되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물이 나무가 되는 비정상적인 현상, 예수님은 그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이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정상적인 확장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가 되어 악한 영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결과가 되는 복을 주신 것이라고 속이는 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하시기 위해 이 비유로 미리 알려 주셨다

이사야 6:9-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전통적인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고 하며, 누룩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내적 성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해석과 설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성장으로 인하여 부패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자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으로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가 깃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고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로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에 좋다고 합니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겨자씨는 마치 무씨 크기의 씨앗을 맺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마치 교회의 외적 성장을 강조한 결과 거대한 대형 교회로 성장한 후에는 대내외적으로 부패한 양상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생각할 때 무조건 좋게만 해석하는 것보다는 경고성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며(겨자씨 비유처럼) 또한 내적 성장(누룩의 비유처럼)을 겸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작금에 대형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기현상에 의한 것일뿐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철저하게 안으로는 욕망에 붙잡히려는 자아를 죽이고 겉으로는 날마다 후패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반듯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리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가 4:32.  누가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스겔은(17:3. 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

그리스도 왕국 이룰 ‘복음의 씨앗’으로 비유. 예수님 시대 ‘가장 작은 씨’로 속담에 자주 등장. 옆으로 자라며 순식간 번식하는 특성 때문 만민 향해 ‘말씀’ 퍼뜨려 온 세상 채우는 의미


아니, 이스라엘에도 유채 꽃이 자라요?

겨자 꽃이 보일 때마다 터지는 감탄사다. 특히 갈릴래아 호수는 봄마다 겨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현무암도 많아서, 제주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유채 같은 노란 꽃이 겨자라고 알게 되면, 겨자나무가 어쩜 저렇게 작냐고 또 한 번 감탄사가 터진다. 성경에서 겨자씨 비유를 읽을 때, 올리브나 소나무처럼 키 큰 나무들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다.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 좋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무씨 크기의 씨앗을 송알송알 맺는다.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성지에서 누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서 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그뿐인가?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르 4,32 루카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제키엘은(17,3.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도 실제로는 가장 작은 씨앗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의 대명사처럼 속담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고대 유다 법전 미쉬나는 정원에 겨자씨를 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순식간에 자라 공간을 잠식해 버리므로, 다른 식물들이 맥을 못 추는 까닭이다. 곧, 씨앗 크기에 비해 번식력이 대단해서, 작은 씨의 대명사가 된 듯하다. 또한 이런 특성 때문에 겨자는 큰 나무에 비유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겨자는 옆으로 제 존재를 퍼뜨린다. 예수님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도 만민을 향해 수평으로 번성하여, 온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간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천국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주변에 널린 겨자처럼 매일매일은 평범하다. 하지만, 그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면 내게는 천국이 된다. 겨자가 큰 들판을 메워가듯 내 인생에 천국들이 쌓이면, 마침내 하늘나라처럼 풍성해질 것이다. 게다가 새들까지 보듬는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은, 다른 이들과 천국을 나눌 수 있는 이타적 아름다움도 비유해 주는 듯하다. 이런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볼 때, 겨자 꽃은 정말 하늘나라를 닮지 않았나?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겨자씨(4615)

σίναπι, εως, τό 스트롱번호4615

1.

겨자

2.

겨자 씨

3.

마13:31

발음 [ sinapi ]
어원
σίνομαι ‘쏘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겨자, 겨자 씨, 마13:31, 막4:31, 눅13:19.

κόκκος, ου, ὁ 스트롱번호2848
1.

2.

낱알

3.

각종 식물의 씨

발음 [ kŏkk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씨, 낱알, 각종 식물의 씨, 겨 자씨, 마13:31, 17:20, 막4:31, 눅13:19, 17:6, 고전15:37.


겨자씨 한 알
- 유대인들에게는 "겨자씨 만큼이나 작다" 속담이 있는데(Robertson) 이는 '겨자씨'가 아주 작은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씨앗은 그렇게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무려 5m나 되는 큰 나무가 된다.
어떤 사본들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커다란'(*, 메가)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도 있다.
본문에서도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나 그 마지막 사람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 '그러므로'(*, 운)는 시간의 계속을 표시하는 접속사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말씀이 앞부분과 연속성을 가진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앞에서의 치유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관련되어져 이해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1) 예수께서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장과 같이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가....무엇으로 비할꼬 - 이 이중(二重)의 도입구는 사 40:18과 유형상 비슷하며 막 4:30 에 더 온전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NIV)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여러번 언급이 있었고, 여러 교훈 및 치유 사건을 통해 그 나라의 성격이 부분적으로 암시되기는 했지만(6:20;7:28;8:10;9:2,27,60;10:9,11;11:20), 여기서는 비유를 통해 그 성격이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이용해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을 설명하셨다. 

겨자씨는 놀랄 만큼 작은 것이다. 우리가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주님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를 설명하시기 위해 겨자씨를 사용하셨다. 이에 대해 말해보자.

겨자씨는 정말 정말 작다. 겨자 식물의 종류에 따라 연노란색에서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겨자씨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잘 심길 경우, 10일 아내 싹을 틔운다. 다 자란 겨자 줄기는 말을 탄 기수의 키 만큼 자란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3가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

누가복음 13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족한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몇 사람으로 시작된 교회가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방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원을 받자마자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 모두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성장해나갈 것이다.

믿음은 산도 움직일 수 있다

누가복음 17장 5~6절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하셨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 12:4)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ㅇ르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믿음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해도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찌라도 산과 나무를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믿음은 작게 시작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닿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 정도로 성장한다.

우리의 믿음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어둔 하늘에 빛과 같이 비추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마태 13:31-33과 누가 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

“12명의 제자들, 머지않아 그들은 70명의 제자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500명이 되었습니다.
500명은 어느 날 30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곧 이어 5000명이 됩니다. 
곧 이어 그들은 2만 명, 3만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지는 역사의 고동 소리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p. 66)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40년이 채 못 되어서 복음은 모든 로마제국의 대도시의 심장부까지 전파되었고, 이들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통상로를 따라서 수많은 마을들과 작은 촌락들에까지도 전파되었으며, 2세기 말쯤에는 알려진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Charles Swindoll, “New Testament Insights, LUCK”, pp. 444-445)

위의 예들은 다 역사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역사 속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눅 17:20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겨자씨 비유”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설령 가시적이라 할지라도(그러나 결코 가시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 나라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 13:31-32과 눅 13:18-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막 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와는 전후문맥 안에서만 보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룩 비유” 없이 “겨자씨 비유”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처음 깨닫고 지적한 자는, 필자가 알기에는, Arno C. Gaebelein(1861-1945)이다. 그는 마 13장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교회의 비정상적이며 유해한 관료주의적 팽창과 누룩으로 표현된 죄의 주입을 통해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사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비유들은 악의 성장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에 걸쳐 적용되는 예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에 눌려 이내 묻혀 버렸고, 나중에 James M. Boice(1938-2000)에 의해 또 다시 주장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 Arno C. Gaebelein은 무슨 근거로 이 비유에 나오는 거대한 겨자 나무와 누룩이 퍼진 반죽 덩이를 긍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커진, 그러나 내부는 전체가 죄로 오염된 타락한 교회로 보았는가?
Arno C. Gaebelein의 주장을 받아들인 James M. Boice가 그의 책 “The Parables of Jesus”에서 말한 것들 중에 우선 “겨자씨의 비유”에 관한 것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 13:31-32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James M. Boice의 견해

James M. Boice가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 비유”가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타락한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로 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겨자씨가 나무로까지 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예수께서 성장하는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셨으면,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자라는 비유나 백향목 씨가 레바논의 크나큰 나무 중 하나로 자라는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다.

둘째, 마 13장의 전후문맥에서 보면, 겨자나무에 깃들이는 새(32절)는 이미 첫 번째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어버린 새를 악한 자(마귀)로 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마귀로 비유된 새가 조금 뒤 겨자씨 비유에서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또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36-43절) 사이에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이 비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끼어있다는 것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동일한 성격의 비유라는 것을 말해준다.

“겨자씨 비유”에 대한 Arno C. Gaebelein과 James M. Boice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가 비정상적인 화려함과 거대함에 매몰된 참담한 상태를 고발하는 예수님의 슬픈 비유임에 틀림없다.
 

눅 13:18-19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견해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

누가복음의 “겨자씨 비유”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처럼 먼저 전후문맥 속에서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전후문맥 속에서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이 비유 앞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 13:6-9)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겨자씨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동일하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겉만 그럴 듯한 타락한 하나님 나라를 책망하시는 비유라는 말이다.
이는 “전후문맥에서”와 “겨자씨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 전후문맥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눅13:2-5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향해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눅13: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3:6)를 시작으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눅13:6-9).

그 후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셨다.(눅13:10-13). 이때 회당장은 분을 내어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어겼다고 비난한다(눅13;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이에 대해 예수님은 회당장을 비롯한 무리에게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신 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나귀에 대한 행위와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신다(눅13:15-16).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13:18)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회당장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태를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겉만 크고 화려한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그러나 그 속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반죽처럼 죄로 만연된 이스라엘을 “겨자씨와 누룩 비유”(눅13:18-22)로 폭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눅13: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에서, 또 눅13:34-35(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계속 발하신다.

이렇게 눅13장 전체의 전후문맥에서 볼 때(그 이전과 그 이후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정적인 그 무엇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엄중한 심판의 경고들을 쏟아내시면서, 그 사이에 전후문맥과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생뚱맞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2. 비유 속에서

“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타락한 하나님 나라, 즉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라는 증거는 눅13장의 전후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겨자씨 비유” 속에서도 차고 넘친다. 예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시작하신다.

여기서 “채소밭”(κῆπος. 케포스)은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자신의 집 부근에 정원을 만들어 놓고 틈틈이 채소 등을 재배해서 자급자족하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왜 저 사람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지 바보같이? 이 사람, 미친 거 아냐?’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 당시 겨자는 향신료(양념)와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겨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써야하는 필수 소비재가 아니어서 겨자를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들판에 널려 있는 것이 겨자 풀이었기 때문이다. 1년생 잡풀인 겨자는 번식력이 대단히 강해서 농부들은 오히려 자기 밭이나 채소밭에 겨자 풀이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쓴다. 만약 어쩌다가 겨자풀이 자기 채소밭을 침범해 자라기 시작하면, 그 채소밭은 못쓰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겨자 풀의 왕성한 생장으로 인해, 그 채소밭에서는 채소가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일부러 심는 바보는 절대로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등장하는 이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누가복음과 의미가 다른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는 단순히 “땅에 심길 때에는”이라고만 되어 있다).

또 유대인이 대단히 무겁게 여기는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유대인은 결코 없을 것이다(레19: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율법에 의하면 채소밭에는 채소만 심어서 재배해야 한다. 채소가 자라는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어 겨자 풀을 키우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 왜 그랬을까? 이 사람이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자신의 채소밭이 망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 율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겨자 풀은 번식력과 아울러 생장 속도도 대단히 빠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금방 크게 자란다. 보통은 3-5m, 대단히 크게 자라는 것은 8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뿌린 까닭은,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빠른 시간 내에 예루살렘의 겉모습과 이로 인한 자기 자신의 지위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내기 위해 부당하게 수많은 돈을 착복했다. 예루살렘 성전 당국은 절기 때 제사 제물에 쓸 짐승을 성전에서 팔면서 턱없는 폭리를 취했으며(예수님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마리를 염소 한 마리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비둘기를 준비해 오면, 제사장들이 고의적으로 흠 없는 제물로서의 부적격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전 뜰에서 파는 값비싼 비둘기를 사야 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악행은 수두룩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신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제 헌금을 내기도 하고, 또 제사를 잘 드리는 척,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의로운 척 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겨자 나무처럼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 위선으로 일관하면서도(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 속에서 몰래 누룩이 퍼지듯 속으로는 율법을 밥 먹듯이 어기면서(누룩 비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채소밭을 쓸모없게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에 “누룩 비유”를 더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따라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누룩 비유”가 없는“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와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겉만 화려하고 웅장한 위선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이 1년생 겨자 풀을 굳이 겨자 나무로 묘사하신 것은 단4:11-12(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에서 나무로 묘사된 바벨론 제국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은 거대한 나무이지만 이스라엘은 겉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년생 잡풀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1년생 겨자 풀을 겨자 나무라고 묘사하신 것은 바벨론 제국의 나무처럼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있는, 그러나 1년생 잡풀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진실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단4:11-12에서 하늘에 닿은 엄청난 크기의 나무는 바벨론 제국을 가리키며, 그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바벨론 제국에 빌붙어 살고 있는 주변국의 열왕들, 부자들, 권세자들을 가리킨다. 새들이 깃들이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불의한 무력으로 만들어낸 거짓 평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바벨론 제국을 흉내 내며 엄청난 크기의 겨자 나무를 가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그 가지들에 온갖 잡새들(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깃들이며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참 하나님 나라였다면 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과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겨자 나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누룩 비유”에서처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이에 누룩 같은 죄가 구석구석 완전히 퍼져버린 타락한 하나님 나라에 불과했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설명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잡새 같은 불법적인 권세자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께 끊임없이 비수를 들이댔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을 보라. 비정상적으로 커진 겨자 나무처럼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이런 교회에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반드시 온갖 잡새를 모여들고 깃들인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겨자 나무가 크면 클수록 더욱 많은 잡새들이 날아온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날아든 잡새들을 위해 둘러서서 정성껏 안수기도도 해주고, 이런 잡새들이 교회에 많이 깃들이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기까지 한다. “우리 교회는 대통령이 출석해요. 우리 교회에 국회의원들이 몇 명이나 출석하시는 줄 아세요? 우리 교회에는 판검사, 변호사만 200명이 넘어요”라고 하면서 말이다(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대통령들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자들 중에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커다란 겨자 나무 같은 교회를 골라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있는 잡새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겨자 나무는 1년생이므로 아무리 크게 자란다 할지라도 1년 동안 자라다가 사라지는 잡풀에 불과하며, 결코 진짜 나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무가 아닌 겨자 풀의 가지가 아무리 크고 굵게 자랐다할지라도 그 속이 비어있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는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설령 정신 나간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 깃들였다할지라도 겨자 풀은 1년생 잡풀이므로 깃들인 둥지의 수명은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다.

또 겨자 나무가 있는 채소밭은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 있고,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설령 겨자 풀의 가지가 나무처럼 튼튼하더라도 사람 가까이에 있는 채소밭에는 새들이 결코 깃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 나무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만큼이나 정상적인 새들이 아님에 틀림없다.
물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겨자 나무는 오래지 않아 로마 제국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겨자 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을 리는 결코 없다(다시 말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전진과 성장을 계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만연을 상징하는 “누룩 비유”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비유의 내용이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와 누룩 비유”와는 그 목적과 초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다면, 1년생 잡풀인 겨자 풀이 아니라 오래 동안 생존하며, 또 외관이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백향목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향목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시 92:12-13 /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104:16 /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정말로 의도하셨다면, 아마도 “마치 사람이 자기 뒷산에 갖다 심은 작은 백향목 가지 같으니 자라서 거대한 백향목이 되어, 공중의 비둘기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관한 비유는 결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웅장함과 거대함은 말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가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겨자씨 비유”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라 나무가 되어”에서 “자라”로 번역된 “ηὔξησεν”(에윅세센)은 “자라다, 늘어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αὐξάνω”(아욱사노)의 ‘단순 과거’이며, “되어”로 번역된 “ἐγένετο”(에게네토)는 “존재하게 되다, 있게 되다, 생기다, ~이 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γίνομαι”(기노마이)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가 이미 다 자라서 이제는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에서 “깃들였느니라”로 번역된 “κατεσκήνωσεν”(카테스케노센)도 “살다, 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κατασκηνόω”(카타스케노오)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나무가 된 겨자 풀의 가지에 새들이 이미 깃들였다는 말이다(참고로 “누룩 비유”가 없는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자라서”(ἀναβαίνει/아나바이네이), “커지며”(γίνεται μεῖζον/기네타이 메이존), “내니”(ποιεῖ/포이에이) 등의 모든 동사는 ‘현재형’ 동사로 되어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계속 전진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약 “겨자씨 비유”가 처음에는 겨자씨 한 알 크기의 보잘 것 없는 하나님 나라가 나중에 자라서 엄청나게 커지는 겨자 나무처럼 부흥하는 지상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였다면, 예수님은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미래형’(또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셔서 “자라 나무가 될 것이며(되고 있으며)”,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다(깃들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있을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이후의 교회의 외적 성장과 또 화려하고 엄청나게 성장(?)할 중세 교회와 중세 교회보다 더 화려하고 더 커질 현대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 하나님 나라임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현재형’이나 ‘미래형’은 고사하고, ‘미완료 과거’도 아닌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신 까닭은 당시에 타락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 화려하게 커져버린 고착화된 껍데기를 지적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헌금을 면죄부 등으로 사기치면서, 크고 화려하게 키운 교회의 외적인 껍데기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로 합리화시키기를 좋아했다. 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세교회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물들, 거대한 교회의 조직과 재물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등을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대하게 자란 겨자 나무 같은 성장이며 부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00%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외식적인 이스라엘을 거대한 겨자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와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성장(?)을 웅장한 겨자 나무에 적용시키며 기뻐하는 것은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가, 중세 교회처럼 황제마저도 굴복시키는 대단한 교세와 위용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외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사적인 교훈은 교회가 외적으로 커질 때 필연적으로 교회는 타락했다.
아니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외적으로 교회가 커졌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커지는데 집착하게 되며, 그러므로 필연적인 외적 성장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 이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셨듯이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타락한 중세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가?

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겨자씨 한 알처럼 외적으로는 오히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 나라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나라,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다(계 11:7-8 /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증인된 삶으로 인하여 세상의 핍박을 받으며 그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계 7:17 /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럼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므로(계 13:10 /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순교했으나 주의 재림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계 11:11 /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끝내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겨자씨 비유”에서의 겨자 나무처럼 거대해지고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외적으로 웅장하게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 없이 눈으로 판단하고 주판을 튕기거나 계산기를 두들기며, “교회가 이렇게 크고 화려하니까 불교보다는 낫겠지?”하면서, 겨자 나무 가지에 잡새들이 깃들이듯이, 누구나 들어와 깃들일 수 있는 다른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크고 힘이 강한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이 될수록 더욱 커지고 힘이 강해질 것이므로 세상 나라의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 나라가 친구가 되자고 거대한 겨자 나무 같은 교회에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들은 세상 나라의 핍박으로 인한 인내도 눈물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신 것처럼, 크고 힘은 강하나 타락한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모든 지상 교회들은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와 누룩 비유”에서 주님의 엄한 경고를 귀기우려 듣고, 피 눈물 나는 회개를 통해 “남은 자”의 교회로 다시 새롭게 서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교회가 아닌 겨자 나무 같은 교회들은 오히려 필자의 피토하는 권면을 비웃을 테지만 말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2-15-2024(목) 누가복음 13:10-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누가복음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forward and said to her, "Woman, 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 you are free from your illness

infirmity - 허약

ἀπολύω 스트롱번호 630

1. 놓아주다.  2. 가게 하다. 3. 이혼하다
발음 [ apŏlŏuō ]
어원 / 미완료 ἀπέλυον, 미래 ἀπολύσω, 제1부정과거 ἀπέλυσα, 제1부정과거부정사 ἀπολῦσαι, 현재완료수동태 ἀ- πολέλυ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πε- λύθην, 미래수동태 ἀπολυθήσομαι, 575와 3089에서 유래

* 575. 아포(apŏ)  ἀπό  

1. ~으로부터.  2. aπάγεσθαι.  3. 마 27:24
발음 [ apŏ ]

뜻풀이부

1.  놓아주다, 풀어주다, 용서하다, 마18: 27, 27:15-26, 눅6:37, 요18:39, 행3:13, 5:40. [수동태] 놓이다, 풀리다, 눅13:12.
2.  가게 하다, 보내버리다, 해산시키다.
  a. 이혼하다, 보내버리다, 마1:19, 5:31, 19:3, 막10:2,4,11, 눅16:18.
  b.  해산시키다, 돌려보내다, 마14:15, 22, 15:32,39, 막6:36, 8:3,9, 행19:41. [수동태] 해산 당하다, 출발하다, 떠나다, 행4:23, 15:30, 히13:2
 c.  [중간태] 가다, 떠나다, 행28:25, 히13:23

* 3089. 루오(lüō)  λύω 

1. 풀다.  2. 깨다. 3. 열다
발음 [ lüō ]

뜻풀이부

I. 풀다[결박, 족쇄 등을].
 1. [문자적] 깨다, 열다.
 2.  [비유적] 열다, 펴다, 막7:35.

II. 놓아 주다, 풀어주다.
 1. [문자적]
  a.  [죄수를] 행 22:30.
  b.  [천사를] 계9:14.
  c.  [사탄] 계20:3.
  d.  [나사로] 요11:44.
  e.  [동물] 마21:2, 막11:2,4, 눅19:30.
 2.  [비유적] 해방시키다, 자유하게 하다, 풀어주다.
 3.  파괴하다, 부수다, 헐다, 행27:41, 벧후3:10-12.
 4.  절멸시키다, 끝내다, 폐지하다, 없애다, 마5:19, 요5:18, 행2:24, 요일 3:8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마리아와 요셉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 레위기 12장 말씀에 따른다면, 예수님의 가족이 성전을 방문한 때는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을 넘긴 때였을 것입니다.
번제물로 ‘1년 된 어린 양’이 아니라 비둘기로 제사하려 했던 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품에 안겨있는 예수님이야말로, 온 인류를 위한 가장 크고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이것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 곧 성령님과 깊은 교류 속에 있었던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이자 온 인류를 구원할 대속제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생 동안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감격에 겨워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찬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누가 2:29).
‘놓임을 받다’(아폴루오)는 말은 속박되어있던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아포) 비로소 풀어지는(루오)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무엇에 묶여 있다가 풀려났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 것일까요?

1차적으로는 그를 붙들고 있는 세상과 육신입니다.
그는 이제 드디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히 육신의 속박을 벗어나는 ‘죽음’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시므온이 안고 있는 그 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육신을 벗어나는 죽음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자유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그에게 선사한 것은 잠깐 동안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짧은 분리’가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놓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 메시야로 인하여 임할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위로’는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이루시게 될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읽으신 성경 말씀이 이사야 61장입니다.
거기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읽으신 후에, 이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시므온은 30년 후에 예수님을 통해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의 품에 안기신 메시야를 만남으로 마음에 족한 위로가 넘쳤습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평안과 놓임과 위로를 얻었다면, 우리는 이에 비할 수 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14:16-17).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완전한 평안입니다(요 14:2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나를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부자유함
둘째는 정신적인 부자유함
셋째는 영적인 부자유함

사람을 부자유 하게 하는 것들 중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 부자유함은 이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영적인 부자유함은 심판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부자유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부자유함은 세상에서 해결 받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해결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차라리 그 손을 찍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가 다시 죽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을 두 번씩이나 경험했던 인물이 나사로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3절)

오늘날도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런 치유와 기적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치유와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내 죄 사함받고서

https://www.youtube.com/watch?v=CC_PApJ1oOw



동사 아폴루오(Homer 이래)는 아포($575)와 루오($3068: 목욕하다, 씻다)에서 유래했으며, 루오의 강의형으로 역시 '씻다, 씻어내다'를 의미한다. 의식적인 정화를 ...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요. C.S. 루이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노래하네요.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곧, C.S. 루이스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지 하나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의 진리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사주나 팔자 혹은 타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우상 앞에게 예물을 드리며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주팔자 등 운명을 점치며 부적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모든 우상숭배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지요.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세를 성취하고, 더 많은 재물을 성취하고, 세상의 더 큰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때로는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또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나누며 섬기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성경의 이러한 가치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사람이 이제는 양보하고 배려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결국 그의 행동과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치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0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안식일을 맞이하면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장소, 곧 정해진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면 다음주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 곧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는 그 이전까지 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다른 랍비들이 가르치다가 혹은 이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가르치다가,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회당을 찾아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의 능력과 그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날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른 랍비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권위와 권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절) “아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 회당에는 오랜 세월 안식일마다 회당예배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많은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겠지요. 당시 회당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안식일이나 바로 그날의 안식일이나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가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회당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 회당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더라도, 예배 준비가 완벽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라 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예배 준비가 조금 부족하고 예배를 위한 시설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은 치유를 받은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관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드디어 그 회당은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지는 극심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이 깨끗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은혜의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 회당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모든 책임을 가진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14a절) 

지금 회당장은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회당장이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회당장이 화가 난 대상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던 그는 회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그가 지적하는 사항은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겨있는 회당장의 마음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있는 행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회당장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고 있는데 왜 굳이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그의 또 다른 의도를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회당장이 크게 화를 내는 핵심 이유가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회당장의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외식하는 자들아”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하잖아요.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하지요. 

자, 회당장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숨겨진 원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세요.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네, 여기까지는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지요? 어떠한 전제입니까?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회당을 찾아와도 언제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여인은 18년 동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지 않았기에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잖아요. 지금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 회당장이나 여러 랍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방문하시기 이전까지 그들은 참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유독 회당장만큼은 애써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회당을 방문하면 언제라도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애써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회당장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 선포와 예수님의 치유 역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가 보아도 회당에서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당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회당장, 곧 그 회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날 하루만 예수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회당장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신 뒤에 18년 동안 근육이 수축되어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어요. ‘아니, 내가 이 회당의 회당장인데, 이 회당에서는 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 회당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쏠리니 회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본성은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질병인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여기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생각은 심지어 회당장조차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써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새로운 관점

회당장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거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이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기르는 가축에게는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고 안식일에도 풀을 뜯겼던 것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6절) 

회당장은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화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안식일의 규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대답 역시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해 답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본문 16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관점은 18년 동안 큰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이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브라함의 딸을” 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네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딸’ 정도가 되겠네요. 

이 여인이 겪었던 질병은 몸의 근육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다 꼬부라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육이 수축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이 힘을 잃고 탄력을 잃어버리기만 해도 몸의 자태가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관절이 꼬부라져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겉모습에는 만물의 영장,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자기 중심적 관점으로 가득했던 회당장을 비롯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여인을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겼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날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주십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여인은 그 외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딸’이라고 선언하여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바꾸어주시자,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라파(Yahwe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출 15:26) godsname
☆ Yahweh-Rapha

The Lord our healer. “By His stripes were are healed” declares the Bible. Jesus Christ died to give you life. Not only was God the healer in the Old Testament, but Jesus Christ revealed the healing heart of God for all of us, more than ever. (Exodus 15:26, 2 Chronicles 7:14, Psalm 6:2, 41:4, 103:3, 147:3, Isaiah 19:22, 30:26, 57:18-19Jeremiah 3:22; 17:14, 30:17)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시00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0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사19: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사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57:18-19 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렘0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당장처럼, 우리 역시 지독한 자기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반드시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여 주셔서, 철저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그들의 겉모습과 상관 없이 아브라함의 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무척이나 인형을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분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이 소녀는 손님 앞에서 여러 인형을 꺼내서 자기의 인형을 설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밝은 얼굴을 보다가 그 아저씨는 이렇게 묻게 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느냐? 가장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소녀는 깊은 침묵에 잠기었다가 한참 후에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저씨에게 다짐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절대로 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아, 그러지” 아저씨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저 뒤에 있는,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지고 옷은 다 헤진 가장 못난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와서 “제가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랬습니다. “어째서냐?”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대답합니다. “이 인형이 저와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제가 사랑한 그런 인형이고요, 둘째는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는 못난 인형이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꼭 같은 이 이야기가 있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데리고 하숙을 치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하숙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네 아이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이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맏아들, 우리 첫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더니 곧 부인합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우리집 4남매 중에 하나뿐인 고명딸이거든요. 그 딸이 예뻐서, 재롱을 떨고 그래서 제가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아니고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복자로서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아니오,” 다시 부인하고 한참을 생각한 후 이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합니다.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에 걸렸거든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아십니까? 병든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요. 오히려 약한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문제의 자식을 부모는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인물이 잘났느니 못났느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고 사랑의 이유는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왜 사랑하느냐고는 묻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성경에서 보십시다.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꼬부라진 사람입니다. 18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장기 병자입니다. 어쩌면 누구도 이 장애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어서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온 가족들도 다 버렸고 그 누구도 이것을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과 식구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그런 버려진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다른 말로 정신적 지체요, 이것은 의식의 부자유라는 것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말을 들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사랑을 압니까? 준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찌 생각하면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할 정도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몸도 병들었고 정신도 병들었고 인격도 병들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우리 인간의 흔히 보는 보편적 가치로 볼 때에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버려진, 완전히 소외당한 불쌍한 청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치론의 대표자인 R. B. 페리(Ralph Barton Perry)라고 하는 분의 그 가치론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
그래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돈이 많으면 대접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받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소비하느냐?
가졌더라도 구두쇠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돈을 쓰면서 사느냐?
이것이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가치가 오르고 내리기도 합니다.

둘째는 신체적 가치입니다.
건강하고 잘먹고 튼튼하고 그리고 늠름하게 보일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 말하는대로 키도 한 180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축구선수들이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확실히 신체적 가치가 높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평가가 됩니다.

셋째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혹은 심리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예술성이 있느냐?
아름다움을 갖추었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줄 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런 것입니다.

넷째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그것이 그 사람이 가치입니다.
목적이 가치를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높은 것 그것을,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살 때에 그만큼 인생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자, 이런 가치론에 한 번 준해서 여기에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자,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이 원리의 기준에 의해서 생각해 볼 때에 완전히 제로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잘 보십시오, 이 여자를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의 사람됨을 보았느냐?
분명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유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의 건강과 젊음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내면적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 통하든 안통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대해야 되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적인 인간을 보시면서 아브라함의 딸, 선민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렇게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에서 보아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 그러면서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지금 건강을 잃어버리고 특별히 마귀에게 붙들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부자유한 그러한 억압된 생명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를 볼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유가 없습니다. 무엇에 붙들려 있다는 말입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세 오르테가(Jose Ortega Y Gasset)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집단의 반란(The Revolt of the Masses)”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독특한 학술용어가 쓰여있습니다.
그것은 “전문화의 야만주의”라고 했습니다.
The Barbarism of Specialization,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단순 지식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단순 무식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합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둘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식하게 무식한 것입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아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Learned Ignorance 라고 했습니다. 공부 많이 한 무식한 사람,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전문화 때문입니다. 너무 한쪽으로만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어느 잡지를 보니까 의학도 이제는 부득불 일반의학을 많이 해야하겠다는 논문을 본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너무 전문적으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서 환자가 하나 왔을 때에 그 사람 진찰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공부하지 않은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환자가 와야 알지 내가 공부하지 않은 환자는 아무리 보아도 진찰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병도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은 딱 하나만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지식이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한쪽으로만 공부를 했지 너무 많이 하는 동안에 다른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니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 공부를 많이 못했더라도 절대 ‘나는 무식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무식한 사람들 밖에 살지 않으니까. 다 무식하니까. 왜? 전체적인 것을 모릅니다. 또 하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을 모르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만 했지 왜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연구에 연구를 하면서 건강까지 해치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번다고. 아니 병들어서 돈을 벌면 무엇합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 실상은 모르고 무엇을 가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없고. 여러분, 혹시 은행 빛이 없습니까? 당신은 재벌입니다. 요즘 빚이 없는 사람은 재벌입니다. 요즘 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 다 빚입니다. 자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있다고 하나 아무 것도 없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불쌍하고 무식한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알긴 무엇을 압니까?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모를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웃는 이런 학설이 나와있습니다. 유식한 무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기 우상화의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안다고 하는 감옥 속에 갇힌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들리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만의 감옥에 있고 욕심의 감옥에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열등의식의 감옥에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고집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을 볼까요?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늘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어려운 사회가 이 체제를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아, 거기는 뭐 분명합니다. 강한 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언제 이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북한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6.25때, 전쟁에 그 무자비하게 폭격할 때 부모가 다 죽고 고아로 살아남은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커서 지금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본인들이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본 일이 없습니다. 미 제국주의자 놈들이 폭격을 해서 다 죽었대요. 수령님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셔서 탁아소, 고아원을 거쳐서 지금 이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수령이요 진짜 어버이입니다. 어버이 수령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아, 무섭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죽인 그 놈들, 제가 복수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원한, 이 복수심에 꽉 막힌 것입니다. 여기에 붙들렸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그 복수할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북한이 못사는 것입니다. 무기 준비하고 전쟁 준비하느라고 거기다가 온 정력을 다 쏟다보니까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 변증법적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속 사람은 다 우리와 같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마음, 잘못된 생각, 증오심, 원한, 섭섭한 마음, 분한 마음에 꽉 붙들리면은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납니다.

자, 오늘 예수님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여자,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명만 유지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 들을 수 잇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지금 메어있습니다. 속박되어있습니다. 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이 완전히 속박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 거기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 공항에 나가면서 보면은 한쪽 구석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 모여 앉아서 이러고 빨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지나가면서 한 번씩 웃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아,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안 그렇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서 무엇엔가 노예가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그 욕심, 그 명예심, 그 벌컥벌컥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잘못된 습관에 매인 것, 다 매인 것입니다. 다 씌운 것입니다. 확실하게 씌운 것입니다. 제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매였다, 매였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의 시각에서 보셨습니다. 은혜를 +로 부여하시고 은혜 속에서 이 여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보여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미래가 보입니다. 애들이 장난을 칩니다. 심한 장난을 칠 때에 부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아이가 발명가가 되려고 하나보다’ 안 그렇습니까? 고집을 부리고 뒹굴고 할 때에도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은 “쟤가 의지가 있어. 개성이 있다고 쟤가.” 그렇지 않습니까? 왜요? 미래를 보잖아요 미래를. 사랑의 시각으로 보니까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봅니다. 이 매여있는 불쌍한 여자를 보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나면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한평생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하며 살 것을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자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미래와 소망을 환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노예가 된 것이요, 혈기의 노예가 되고, 욕심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여러분, 온전한 자유인이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여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 그 불쌍한 곳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입니다. 


2-14-2024(수) 누가복음 13:6-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누가복음 13: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Sir,' the man replied, '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and I'll dig around it and fertilize it.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Please leave it as it is this year too.

유예(猶豫) : 오히려 유, 미리 예
 1. 시일을 늦춤
 2. 망설여 결행하지 않음
 3. 집행(執行) 유예(猶豫)

중보(3316)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중보(3316) 메시테스(mĕsitēs) μεσίτης, ου, ὁ 스트롱번호 3316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발음 [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3319.  μέσος, η, ον 스트롱번호 3319

1. 중간의.  2. 마 25:6.  3. 중앙
발음 [ mĕsŏs ]
어원 / 332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간의, 가운데 있는.
 a. [형용사] 마 25:6, 눅 22:55, 요 1:26, 19:18, 행 26:13.
 b. [중성명사로] 중앙, 가운데, 마 13:25, 14:6, 막 3:3, 7:31, 눅 4:30,35, 17:11, 요 8:3,59, 20:19, 행 4:7, 계 7:17.
 c. [중성 μέσον이 부사로 사용됨] 빌 2:15.



이사야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라는 법률용어에서 '사면(赦免)’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후 2-3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맺는 열매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 그대로 두고 다시 한 번 더 열매를 맺도록 관리하겠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과원지기는 예수님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로서 예수님은 주인에게 간청하여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어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한다면 당장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왜 그토록 오래동안 참고 기다리실까요?
그 까닭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에스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들을 아직도 이 세상에 머물도록 지켜주시는 것은 구원해야 할 생명을 찾아내어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은혜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024년 내가 구원해야 할 생명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날마다 그 생명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열매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https://www.youtube.com/watch?v=i1UbpDjlDtU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겔 18: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누가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유대인 농부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쉽게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번식력이 아주 강해서 아무 데에나 심어 놓아도 열매를 잘 맺습니다.
그런데 이 가치 없고 흔한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할 농부는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를 위해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돌보는 주인도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농사 규례를 살펴보면, 과목을 심고 3년 동안 맺힌 열매는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않고, 제 4년에는 첫 열매이니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부터 열매를 거둡니다(레 19:23~25).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24.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삼 년을 와서 열매를 구했다면 이 주인은 나무를 심어놓고 7년 이상을 기다린 셈입니다.
7년이 지나도 무화과나무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포도원에 있다면 정말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해서 7년 넘게 기다렸다는 것도 유대인 농부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마침내 주인은 화가 났고, 이제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무화과나무가 찍힘을 당하는구나’ 생각할 즈음에, 이번에는 주인이 아닌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주인에게 무화과나무를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주인이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이제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는데, 과원지기가 나서서 마땅히 찍어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변호합니다.
자신이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과원지기가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 간구는 과원지기가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하시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하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다림과 긍휼이라고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도대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왜 주님은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이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사야 27장 말씀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포도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오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무화과나무처럼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데, 열매를 맺도록 때를 따라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하거나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돌봐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찍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은 집행유예가 아닌 사면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외친 누가복음 13장 8절 말씀,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여기에서 ‘그대로 두소서’는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압히에미는 ‘용서하소서, 사면하소서’ 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하신 말씀인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즉 “압히에미(사면하소서)!”라고 외치십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완전히 끝이 난 것이고,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이나 벌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외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대적하는 무리, 인간들을 향하여 완전한 사면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지 못하여 무화과나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집행유예를 받은 것처럼 늘 행위를 보고 자신을 정죄하며 불안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예수님은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다

찍힘을 당해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압히에미” 즉 “사면하소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우리 행위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아야 할 심판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지만 믿지 못한 악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포도원지기 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 수 없는 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또한, 주인의 오래 참음과 과원지기의 간청 때문에 우리가 놀라운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때때로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도 우리를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진리를 믿지 못하는 악함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사탄에게 속아 자신에게 빠져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긍휼을 베푸시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임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포도원 안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자신에 대하여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원래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했습니다.
보통 무화과나무는 2~3년 정도가 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3년이 되었음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존재에는 분명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존재 가치를 결정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무화과나무의 존재 가치는 없습니다.
목적이 불분명하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땅을 아깝게 방치시켜놓을 바에 무화과나무를 어서 잘라버리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그 자리에 다른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금년까지만 유예기간을 준다면, 정성껏 가꿔보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망설임 없이 찍어버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과 가치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의 마땅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올 한해 동안 내 삶 속에서 어떠한 열매가 맺혔는가, 혹은 열매를 맺었는가 맺지 못했는가를 돌아봅시다. 

첫째, 기다림에도 때가 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주인은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참고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치시는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 등. 하지만 또 다른 성품이 있다면, 인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행동이 있습니다.

8절의 말씀에 포도원지기가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기다림 중에도 행동하십니다.
가만히 방관하며 기다리지 않고 열매가 맺어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시면서 깨닫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또 다른 특징은 한계, 곧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죄악에서 떠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인내하신 후에도 열매가 없을 때 마땅히 그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더 이상 은혜를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려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떠나가고 심판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기다림 끝에 “찍어버려라. 어찌 땅만 버리고 있느냐”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 포도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며 간절히 만류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인이 포도원지기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의 인정을 받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무화과나무를 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주인에게 한 번 더 수고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만약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무화과나무는 가차없이 찍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가 한 해만 더 거름과 물을 주며 수고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멸망 사이에 두신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주인의 생각에는 소망이 없는 나무이지만, 포도원지기는 소망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런 중보자이심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인 우리를 중보하시어 새로운 인생으로 치유하시고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조금만 더 고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면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중보자이신 예수님도 우리 안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며, 열매 맺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끝까지 책임지시는 예수님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유예기간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 무화과나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스스로 자신이 관리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무가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종자가 좋지 않아 노력을 기울여도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3년의 시간 동안 기르며 지켜봤던 포도원지기만큼 그 사실을 잘 아는 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자신이 더 노력해보겠다, 내가 끝까지 책임져보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더럽고 추하고 비틀어졌다고 해서 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곧고 바르게, 깨끗하게 만들어가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그 안에 품어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세워가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형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깨끗하고 병들지 않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깨끗하냐에 따라 그에 맞는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한 심령으로 빚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중보하시고 책임지시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

법률 용어에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가 있습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유예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사형이라는 형벌이 집행됩니다.
유예 기간 동안 잘 살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이라는 형의 집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聖徒)는 이 땅에 사는 유예 기간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면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사형 판결을 받고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던 우리가 대(大) 사면을 받아 하늘의 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뤄진 완전한 사면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된 사실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사탄이 주는 생각을 따라 살면서 십자가에서 이뤄진 역사를 집행유예 정도로 삶에 적용시켜서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항상 잘하려는 조바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쁨을 주는 소식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사면된 성도의 거룩함은 이 세상의 어떤 더러운 것과도 섞이지 않고,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는 온전한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렇기에 성화(聖化)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온전케 하셨다는 이 말씀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론으로 이 말씀에 교묘하게 흠집을 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에 짐을 질 뿐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았습니다. 설령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노력해서 벗어야 할 저주가 더 이상 없고, 십자가의 효력이 무효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이미 다 받아버리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하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주인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과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고 말하는데, 그것은 ‘열매를 잘 맺으면 살리고 못 맺으면 버릴 테니 금년에도 두고 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 속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게 참혹한 형의 집행을 일 년 동안 미루어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로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대로 두소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압히에미’로, 그 뜻은 ‘용서하다, 사면하다, 버리지 않고 놔두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형을 당하기 위해 집행 장소로 끌려가는 사형수에게 “당신은 사면이요!”라고 외치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대로 두소서(압히에미),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압히에미’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셔서 외치신 말씀 중에도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외치실 때, ‘사하여 주옵소서’란 말이 바로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사면해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 무화과나무에게 똑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형의 집행을 1년간 미루어 주시면 잘 해보겠습니다’ 하고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년이란 시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참혹히 찍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처럼 성도가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성화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과원지기에 의해 찍힘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과 죄가 온전히 씻어져서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 죄를 기억함이 없는 완전한 사면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름이 되셨다

물질이 죽어서 썩음으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에너지를 가진 것이 ‘거름’입니다.
거름은 죽음이 함의된 단어로,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거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거름이 되었고, 우리가 그 거름을 양분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혀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때를 따라 물을 주며 항상 보호하여 찍히지 않게 하며, 주인이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오직 과원지기에 의해서

신앙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한 나를 발견하고 과원지기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인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일에도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2-13-2024(화) 누가복음 13: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누가복음 13:3,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If you don't repent, you will perish)

* 회개하다(3340) 메타노에오(mĕtanŏĕō)  μετανοέω 스트롱번호 3340

1. 마음을 고치다.  2. 바꾸다.  3. 뉘우치다
발음 [ mĕtanŏĕō ]
어원  /  미래 μετανοήσω, 제1부정과거 με- τε νόησα, 3326과 353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 마 3:2, 막 1:15, 눅 10:13, 행 2:38, 8:22, 고후 12:21, 계 2:21, 22, 16:11.


그때 마침
- 이 표현은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을 말해주는 동시에 어떤 예기치 않은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빌라도가...섞은 일
-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예수께 보고되고 있다.
여러명의 갈릴리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그 보고 내용인데 이러한 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극은 당시에 흔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느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고 다만 여러가지 추축이 있을 뿐이다.
1. 사도행전 5:37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2.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처럼 되게 한 사건이라고 본다(23:12).
12. 헤롯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3.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이들 견해는 확실한 증거로써 뒷받침되지 않는 하나의 추축에 불과하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이 말씀은 앞에서 보고한 사람들의 관심(關心)이 빌라도의 악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살자들의 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바,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욥 4:7;-8. 20. 22:4-5. 요 9:1-2).

회개치 아니하면...망하리라
-
'아니라'(*, 우키)고 하는 단정적인 부정의 표연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固定觀念) 즉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편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
여기서 '회개'(*, 메타노에오)는 지난 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깃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마 7:1-5; 롬 3:10-12). 한편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Farrar,Godet), 그보다는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arshall,Lenski).

실로암에서...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
-
예수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는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어상으로는 2절과 4절의 '죄'가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즉 2절(*, 하마르톨로이)에서 와는 달리 4절의 '오페일레타이(*)는 '빚진 자'라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서 '빚진 자'를 '죄인'에 대한 단순한 동의어라고 보는 견해(Marshall)와 열 여덟 명의 희생자들이 성전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Ewald)가 있다.
즉 이들은 빌라도의 수로공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고, 빌라도는 그 공사비를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사용한 것이므로 이 돈을 노임으로 받은 이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부분은 1-5절로 빌라도에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둘째 부분은 6-9절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입니다.
 
첫째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1-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두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극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죽음을 목격한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허겁지겁 달려와서 고했습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 의도는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객사한 이유는 바로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합니다. 
정말 갈릴리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갈릴리 사람들처럼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판단하지 말고 오리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요즘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삼풍백화점 , 성수대교, 무역센터, 비행기사고 , 열차사고, 자동차사고, 화재사고 이런 일들이 죄가 많아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회개라는 말은 히랍어로 “메타노에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 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입니다. 
망하지 않는 지름길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2월 13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13:1∼5
묵상을 위한 주제 : 회개치 않으면 망한다(3절)
성구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으로빌라도에 의해서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죄악이 크고 무겁기 때문에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3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같은 의미의 말씀으로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그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사고와 자연 재해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메타노에오) 라는 단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이며 망하지 않는 지름길이라고 하겠습니다.

♪ 찬양 / 어서 돌아오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시인 필립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는다면 회개를 설교하다가 죽기를 원하며, 만일 내가 강단 밖에서 죽는다면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
당신의 비밀스런 의무를  확실히 실행하라.
무엇을 하든 멈추지 말라.
그것을 소홀히 하면 영혼은 절대 강건하지 못한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골방 문을 먼저 떠난다.

주님과의 비밀스런 교제를 풍성히 하라.
그것은 성도를 풍요롭게 하는 비밀스런 업무이다.

기도가 당신의 아침을 여는 열쇠와 하루를 마감하는 빗장이 되게 하라.

죄를 대적하여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릎을 꿇고 싸우는 것이다. - 필립 헨리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착각이다.
사람들은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나라가 언제 부터인가 커피공화국이 되었다.
커피집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커피집을 오픈하는 사람들은 커피집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 대박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별화 되지 않으면 대박이 아니라 쪽박 찬다.
차별화하지 않으면 쪽박 찬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커피집을 오픈하면서부터 차별화를 위해서 몸부림 칠 것이다.
고객을 만족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시 회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예외 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일침이 놓고 계신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발생했던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을 좀 살펴보자.

첫 번째 사건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복음서에는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이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예수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로 건설을 제안했다.
수로를 건설하려면 재정이 많이 드는데 빌라도는 이 재정을 성전 헌금에서 충당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 바쳐지는 엄청난 수의 가축 희생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전체에서 성전의 물소비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빌라도의 제안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가운데 일부 갈릴리 사람들은 성전의 거룩한 돈을 이방인과 함께 썼다고 흥분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빌라도는 군사들을 풀어 이를 진압했다.
또한 경고의 의미에서 진압하는 과정가운데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성전제물에 섞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이방 민족에 의해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정치적 사건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전 모독과 관련되어 있어서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 분명했다.

​두 번째 사건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이다.

여기서 실로암 망대란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빌라도가 성전 헌금을 이용해서 예루살렘 성 밖에 건설했던 수로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던 망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망대가 무너짐으로 인해 18명의 사망자 발생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말씀처럼 어떤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디선가 재난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건이 자신과 관계되었을 경우에는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닥치는가?’ 라고 말하며 흥분한다. 타인에게 일어나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옛말에 ‘강 건너 불구경 하듯한다’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당장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들은 더욱 심했다. 그들은 누군가 불행한 사건을 당하면 인과 응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을 당했다는 것이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에 저가 시각장애인이 되었냐고 물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각장애인을 죄의 소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건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각은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다. 즉 유대인들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러한 사건을 당한 자들의 죄를 지적하기 바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초점을 바로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두셨다. 다시 말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정치적 살육이나 실로암 망대가 붕괴된 자연적 사건 모두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하셨다. 곧 그 모든 사건들은 ‘그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을 향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5절 말씀을 보라. 두 사건 이야기를 하시고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살육을 당했던 사람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도 너희도 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그들처럼 똑같이 망하게 된다고 말씀한다. 오늘 이 시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코로나 19에 걸린 사람이 우리 보다 죄가 많아서 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살육 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실로암 망대에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다르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말씀하신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망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정신차리라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았다면 너희는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 결과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예수님은 죄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은 죄 값에 따라 형량이 다르다. 형량이 큰 사람은 그 만큼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고 형량이 적은 사람은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다. 살인죄를 지은 사람과 좀도둑이 같은 형량을 받을 수는 없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는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실 때는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다. 큰 죄를 지었던 작은 죄를 지었던 모두가 죄인이다. 덜 죄인은 없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야고보기자는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그 죄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다고 말씀한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향하여 칼을 가신다고 말씀한다.
활을 이미 당기어서 쏠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말씀한다.
얼마나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인지 모른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하신 교회에 대해서는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큰 환난가운데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셨다.
토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이런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이것이 죄인의 끝이다.
죄를 지은 인간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그 끝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과하고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쉬운 것이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쉽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일까?
하나님을 의식하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회개는 쉽다.
인간인지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말은 하지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죄인 줄을 알고 빨리 회개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하기 어렵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니 죄에 대해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니까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회개는 형식적인 회개로 그치면 안 됩니다.
입으로만 하는 회개로 그치면 안 된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유다광야에 있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로 몰려왔다.
세례요한이 몰려오는 그들에게 가장 먼저 외쳤던 말씀이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쳤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라.
여전히 예루살렘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다.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가지고 와서 그 짐승에게 안수하여 자의 죄를 전가하고 직접 잡았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제물을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다 치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좋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세례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다. 왜 이미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을 그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인가? 이는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가운데 진정한 회개는 사라지고 없고 형식적인 회개, 말뿐만 회개만이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대해 말라기 3: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거짓된 모습으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성전 문을 차라리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는 너희가 손으로 어떤 것을 드리든지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사1:13절에서 더 강하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은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회로, 예배를 드린다고 모여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호소하고 계신다.

​짐승 한 마리 잡아서 바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고해성사 한 번 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 시대이다. 죄를 지어도 그것에 대한 대가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니 죄를 쉽게 짓는다. 바울은 죄와 싸우데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다.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죄다.
죄는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 된다.
죄는 사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회개하는 것이다.

이사야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보다 희게 씻어주시겠다고 하셨다. 회개하면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는 부패하고 만다.
회개가 없는 신앙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
회개가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 말뿐인 회개가 하니라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를 할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을 때 진정한 회개를 통해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늘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난을 보는 시각(누가복음 13:1~5)







지진은 말세의 징조 중에 대표적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1에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참고 마 24:7, 막 13:8).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큰’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말세에는 곳곳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8에도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이런 큰 지진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보아서 아는 사람이 있고, 또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다.
보지 않아도 됩니다.
듣기만하면 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삼고, 교훈을 받는 사람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 하찮은 남의 언행일지라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집 일본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지진을 앞에 두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오늘 읽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십시다.

재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총독 빌라도가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저들의 제물에 섞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세상이 이런 흉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수 더 떠서, 실로암에서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비참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2,4절에서 “이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남의 허물은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 나라 일본의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의 참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이 엄청난 일을 통해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화하고자 하는가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재난을 만나면 남의 죄를 생각하거나 원망부터 합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나라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핍니다. 이제 이 재난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1)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의 역사다. 왜 이런 비극이 인류에게 있는 것인가요? 성경은 이 세 가지가 인류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재난과 불행을 피해갈 길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경고와 심판으로 재난을 이 땅에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있는 곳에 재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2)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재난 속에는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재난 속에서 우리의 죄악을 털어내는 심판의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도 믿습니다.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는 사람이 죄를 버립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모든 인생을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은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곳이요, 홍수를 만난 노아의 때와 같았을 것입니다. 남아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래도 남겨두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자비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78:38에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3)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셋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치어죽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사건 뒤에 여러 가지로 사건 자체가 분석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실공사입니다. 돈을 떼어 먹고 엉터리공사를 했다느니, 관리를 잘못했다느니 정부정책이 잘못됐다느니 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망대가 낡았으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든지 보수 공사를 제 때 해야지, 이것은 인재(人災)라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본지진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지진에 대해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첨단장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어째서 지진 징후를 알지 못했으며 경보를 발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가하면 지진의 과학적 규명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경제손실과 득실을 따지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깨닫고 이 재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글자 한자 안 틀리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난 속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재난을 보는 주님의 시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남의 불행이나 재난을 보면 “무슨 죄가 얼마나 커서 저렇게 당할까?”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인과응보론 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어떤 사람들도 그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요한복음 9:2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욥이 당한 고난의 소문을 듣고 위로하려 왔다가 그 고난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는 결국, 욥이 죄 없이 이런 일을 당하겠느냐며 정죄자로 돌아선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재난을 보는 예수님의 시각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재난과 비극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요?

1) 우리도 저들과 같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나, 지진과 쓰나미로 죽거나 손해와 비극을 당한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고, 4절에도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비극을 보면서, 세상의 재난과 비극의 원인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렇듯 비참하게 죽었으나 우리도 저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원래 다혈질이라 자주 반정부, 반 정치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들이 다스리기가 어려워 ‘유대의 화약고’라고 불렀다. 그러니 까불다가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에 치어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공연히 죽었겠는가? 다 죗값이제!”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저 지진을 만난 것이 우상숭배, 배금주의, 성적 타락 때문이라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쉽게 비판하지 말라. 저 사람이 죄 때문에 망했다고 비판하지 말라. 너희도 저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도 저와 같다는 것이다. 남의 죄는 보면서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남이 당하는 고난을 보면서 자신이 당할 고난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3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눅 6:41).

2) 저들이 당하는 재난은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만 죄가 더 많아서 그 모든 재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는 분들은 종종 그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안전벨트 안 했다고 교통순경이 잡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가 걸린 순간에도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 차들이 무수히 지나갑니다. 그러면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왜 나만 잡아요. 저 사람들도 안하고 그냥 가는 데요!” 그러면, 순경이 하는 말이 “선생님, 죄 지었다고 다 감옥 갑니까? 대표로 가는 거지요. 대표로” 그럽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위반한 적이 많지만 그럭저럭 다 넘어가고 가끔씩 걸립니다. 죄지었다고 다 감옥가면 감옥이 세상보다 커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당할 일을 저들이 먼저 당한 것뿐입니다.

여기 갈릴리 사람들이 죽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도처에서 사고로, 질병으로, 전쟁으로, 지진으로 애매하게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만 죄인인가요? 아닙니다.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마치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당한 것처럼 아파하는 애통을 가져야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역사상 폼페이 지진이 유명합니다. 그러면 왜 폼페일까요? 로마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폼페이를 치시고, 그래도 로마가 회개치 않으니 다음에 로마를 치신 것입니다. 모두들 죄악이 관영한 중에 폼페이가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때는 부모 대신 자녀가 당하기도 하고, 내 대신 이웃이 당하기도 합니다. 결코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위태롭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좌파들이 너무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를 짓밟습니다. 안티크리스천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안티들은 세상에 대통령이 기독교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꿇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번은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이 많이 조심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은 메시지입니다. 재난은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지나가는 사건도 아니요 미래적인 사건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귀로 듣도록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눈으로 보게 하시고, 눈으로 봐도 못 알아들으면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재난을 보는 우리의 반응.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재앙을 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요?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3, 5절에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반복은 자비입니다.
먼저 죽은 몇 사람은 우리 모두가 당해야 할 일을 부분적으로 당한 것뿐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 사람이 당한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1. 회개하라.

주님은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일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사고를 보고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가족이 한 번 앰뷸런스로 병원에 실려 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추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저 차에 실려 가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재난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은혜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당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먼저 당함으로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거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6,11을 개역 성경은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다. 거울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개정 개역은 ‘본보기’로 썼다고 합니다.

유다서 1:7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8:23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했고, 디모데전서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십시다.

2. 깨어 있으라.

깨어 있지 않으면 들어도 못 듣고, 보아도 못 봅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결국 회개할 수 없게 됩니다.

누가복음 21:34-36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깨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의식하며 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영적각성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가요?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가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열매를 맺으라.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이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과 일에 열매를 남겨야 할 때이다. 열매를 생각합시다.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는 그 곳에 있지 않았으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일본 지진의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지금 내가 그 일을 보고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금이 복음이요, 지금이 은총입니다.
아직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주 앞에 나와서 이 음성을 듣고 있지 않은가요! 이것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일본의 엄청난 재난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TV가 하나님의 심판을 촉구하는 매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일본이다. 먼 나라가 아닙니다. 강 건너 이웃집입니다. 가까이 일본을 통해 종말이 가까웠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의로운가요? 아니다. 대표로 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말할 시간도 아니요, 비판할 시간도 아니요, 다만 들어야 할 시간이요, 무릎을 꿇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듣고 보았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총입니다. 이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요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다. 우리 오늘 이 시간 한 번 의자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읍시다. 대통령과 마음이 하나 되십시다. 주의 자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마음의 손을 들고 겸손의 무릎을 꿇읍시다.

김익두 목사님이 노방전도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천당’하고 외쳤더니, 그 중에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 여기서는 전도 안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고 은근히 협박을 합니다.
그래서 김목사님 ‘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큰 비가 있고, 뇌성벽력이 있었는데, 벼락이 정자나무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을 웅덩이처럼 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없으니 애꿎은 나무나 논을 때렸겠지요.
만약 하나님이 있어도 눈이 멀었을 겁니다.”
그럽니다. 그래 목사님이 잠시 묵상을 하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김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서당 나왔나? 학교에 다녔나?” 
“학교 다녔지요!” 
“그러면 선생님 손에 뭐가 있더냐?” 
“매가 있지요1” 
“그러면 그 매로 어딜 치더냐?” 
“그야, 칠판을 치거나 책상을 때리지요!” 
“왜 애매한 칠판이나 책상을 치는가?” 
“그야, 아이들이 떠들거나 안 듣고 장난치기 때문이지요!”
그때 김목사님이 냅다 고함을 질렀습니다.
“네 이놈, 다음에는 하나님이 네게 벼락을 때리실 게다!” 
그랬더니, 이 청년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그 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2-12-2024(월) 누가복음 12:54-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대를 분별하라(누가복음 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How is it that you don't know how to interpret this present time?

예수님께서는 천지의 기상을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는 불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이 불어오면 더위가 올 것을 알았습니다.
이와같이 기상은 잘 알면서도 시대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고 있습니까?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특징하는 사상을 "다원주의"라고 합니다.
'다원주의'의 대한 세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둘째는 뉴에이지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을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뉴에이지의 문자적 의미는 "새 시대"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합니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셋째는 동성애와 동성혼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하여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 섭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흐름에 한국에서도 "차별금지법"을 제안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을 교회가 막아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도 결국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생명력이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분별하다는 헬라어는 "도키마조(dŏkimazō. δοκιμάζω)"라고 합니다.
'도키마조'는 "시험하다, 시험하여 증거하다,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라(interpret this present time) Discern the times

분별하다(1381) 도키마조(dŏkimazō) δοκιμάζω 스트롱번호 1381

1. 시험하다.  2. 시험하여 증거하다. 3.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
발음 [ dŏkimazō ]
어원 / 미래 δοκιμάσω, 제1부정과거 ἐδο- κίμασα, 완료수동 δεδοκίμασμαι, 1384에서 유래


천지의 기상은...분변치 못하느냐

- '천지의 기상'에 대비되는 '이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선교 활동과 관련된 사건들,
(2) 인간들의 결단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행위(Marshall).
(3)예루살렘의 멸망 또는 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말(Jeremias).
본문은 이러한 제견해들을 종합하여 이해되어야 옳을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시대적 징후를 분별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시대를 분별하여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 태도 때문이었던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의 사람들은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을 불면, 어김없이 더위가 올 것을 알았다. 이렇게 기상은 잘 알아맞히면서도, 시대는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이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이 지금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 쯤 가고 있는지 왜 무관심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이 시대를 분별하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할 때, 우리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한 마디로 ‘다원주의’다.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교회는 다원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싸워야 한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를 살펴보자.

 1.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다원주의가 종교의 형태를 띠고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다.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한 마디로,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우리 시대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책들이 시중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학생들은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해서 학문을 배우기 때문에, 무엇을 전공했든지 간에 대학교를 나올 때는 종교다원주의의 맹신자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가 유일한 구주다”라고 말하면, 콧방귀를 끼고 만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영적인 면에서 심각한 도전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교회는 더욱 말씀으로 무장하고, 진리로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싸워 승리해야한다.

 2. 뉴에이지 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이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뉴에이지를 문화의 한 흐름 정도로만 이해하고 지나가는데, 그것은 피상적인 면만을 본 것이고, 그 본질에 들어가면 문화의 형태가 아니라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문화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영적인 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로운 영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에이지가 무슨 의미인가? ‘새 시대’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가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뉴에이지의 해로운 영적 영향력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3. 동성애와 동성혼(same-sex marriage, gay marriage)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섭리요 성경적인 모델인데,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기까지 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소위 ‘성 평등’이란 용어를 들고 나와서 법으로 명문화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성 평등이 무엇인가?
성을 구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성을 자신이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태어날 때 갖게 되는 생물학적인 성의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정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양성평등’은 인정하지만, 성 평등은 인정할 수 없다! 양성평등이 무엇인가? 남녀를 차별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하자는 것이다. 이는 이미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다(헌법 36조 1항). 동성애를 관철하기 위해서 양성평등을 성 평등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녀의 평등은 마땅하나, 모든 성이 평등할 수는 없다!

또 한 가지, 동성애,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의 개정을 주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기존의 차별금지법(헌법 11조 1항)에다가 ‘개인의 성적 지향’ 차별금지 등의 조항을 슬쩍 포함시켜놓고 있다. 이는 동성애, 동성혼을 비롯해서 온갖 변태적인 성적 태도들에 대해서도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성 평등과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되면, 학교에서는 성교육시간에 동성 간의 성관계에 대해서도 가르쳐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군대에서는 동성애자를 제재할 방법이 없게 되고 군사기와 전력은 크게 저하될 것이다.

영국의 기독교변호사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동성애 관련 법제화를 못 막으면, 교회가 세상에 짓밝히고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2만 명 넘게 나가 있는 해외선교사들도 다 철수해야합니다. 앞서 영국은 성 평등법 통과 후 출석교인이 2%가 안 될 정도로 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했는데, 더 이상 선교사를 내보낼 능력이 안 되어 빠른 속도로 철수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유능한 일꾼들을 선교사로 내보낼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남아서 차별금지법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최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통한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시대를 분별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이 시대를 변화시켜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노년 삶의 질을 향상하는 방법으로 ‘섹서사이즈’(sexercise)를 적극 권한다.
섹스(sex)와 운동(exercise)을 조합한 신조어다.
그 주제는 ‘침대에서 잠자는 것 이상을 얻으라’는 거다.
“섹스는 모든 근육 집단을 사용하며 심장과 폐를 활발히 움직이게 하고 시간당 약 300㎈를 소모한다”고 설명한다.
한술 더 떠 “올겨울의 정기적인 섹스가 다가오는 봄에 더 훌륭한 몸매와 더 젊어 보이는 용모로 이어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다 늙어서 무슨…’ ‘아휴 남사스럽게…’ ‘거 참. 주책맞네…’ 하며 외면할 일이 아니다.
친구도 아닌 며느리를 민망스럽게 한 주인공은 사실 내 아버지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전립선암을 앓고 계시다.
20년도 넘게 약을 잡수신다.
나는 아버지가 성생활은 졸업한 줄 알았다.
그런 내게 아버지의 고백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신비로웠다.
내 친구들 몇은 비아그라를 복용한 지 오래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아그라를 처방받은 흔적도 없다.

도쿄 노인의학연구소가 2007년 87세 노인의 건강과 체력을 조사했더니 1977년 70세에 해당했다.
30년 사이 17세가 젊어졌다.
요즘엔 자기 나이에 0.7을 곱하면 아버지 세대의 신체· 정신· 사회적인 나이와 맞먹는다고 한다.
지금 내 아버지 나이 93세에 0.7을 곱하면 겨우 65.1세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부친은 ‘장청년(長靑年)’이 맞다.
그동안 나 자신의 젊음에만 관심이 있었지 아버지 나이를 놓치고 있었다.
불효가 딴 게 불효가 아니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은 신석기시대 29세에서 17세기 유럽인은 51세였다.
이 기준으로 할 것 같으면 마르틴 루터의 63세는 오늘날 호모 헌드레드에 해당한다.
그는 죽음을 앞둔 며칠 전까지도 아내 폰 보라와 섹스를 주제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루터는 “일주일에 두 번 아내에 대한 의무로 섹스를 하면 남편은 물론 아내에게도 이롭다”는 부부섹스 규칙까지 제안했을까.
루터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침실에까지 확대한다.

“아담의 타락에서 잉태되어 인간의 불순한 본능으로 귀착돼 버린 성욕의 허물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것을 눈감아 준다.
결혼생활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섹스는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악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고(故) 안병무 교수는 어느 날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에 부부가 성교하는 중인데 하나님이 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면 손을 저으며 하나님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들과 며느리가 가정사역자로 살아가는 일을 삶으로 응원해준 아버지가 고맙기 그지없다.
부모님은 가정사역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성질’만 빼고 내 아버지를 살아내야 한다. 맞다.
침대는 잠자는 것 이상의 ‘스위트 홈’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 보자기다.




2-10-2024(토) 누가복음 12:3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을 던지러 왔노라(누가복음 12:49)

내가 불을 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I have come to bring fire on the earth, and how I wish it were already kindled!

성경에서 불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신명기 4:24)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 열 명이 없으므로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사도행전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예수님께서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한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셋째는 불은 하나님입니다(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our "God is a consuming fire."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했을까요?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는다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싸움을 "영적 싸움"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 종교 사회이었습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신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는 유일신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참람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번에 칼로 무를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놔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 하고 비난합니다.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합니다. 
결국 그 결과는 다툼과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을 소유한 영의 사람과 육체를 기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기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이 불과 같다고 할 때 불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용광로와 불타는 벌판의 불처럼, 성령의 불은 하나님의 강력한 영광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불같이 강력하게 임재하실 때에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구원입니다.
성령의 불은 쭉정이에게는 심판의 불이고, 알곡에게는 구원의 불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동일한 불이심판의 불도 되고, 구원의 불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불이 구원의 불로는 어떻게 임합니까?

* 흠향의 불 :

흠향의 불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영광으로 강력하게 임재 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엘리야의 제물을 흠향하셨습니다(왕상 18:33).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임재 하셔서 참 하나님 되심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이 됨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력한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공식 예배와 삶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강력한 임재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제련의 불 :

성령의 불은 흠향의 불이기도 하지만 제련의 불이기도 합니다.
말라기 3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의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용광로 불 속에 넣으셔서 불순물을 제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속에 교만과 음란과 미움의 불순물을 태워 없애버리십니다.
불평과 불만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감사와 경배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 파급의 불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경우 성령의 불이 불타는 벌판의 불길처럼 번지는 파급의 불이 됩니다.
성령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담력과 열정을 줍니다(행 4:31).
성령의 불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함으로 복음이 번져나가게 합니다.
성령의 불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겁게 해서 복음 열정의 불이 번지게도 합니다(눅 24:32).
성령의 불이 이 경우 열정의 불로 번집니다.
성령의 불은 마음에 감동을 주어 인도함으로 그 불이 번지게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감동을 주어 이것저것을 하게 하는 인도의 불로 번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불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번졌습니다.
성령의 불은 3세기 이내에 당시 로마제국 전체를 복음 앞에 무릎 꿇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게 번졌습니다.
성령의 불을 흠향의 불, 제련의 불, 파급의 불로 확실하게 체험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확실하고 강력한 증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행 1:8).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시면서 이 세상에 불이 붙는 것을 예수님은 그토록 원하고 계신다.
49절의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는 불이 붙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 뿐 불은 아직 붙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불이길래 예수님은 불이 붙기를 그토록 열망하고 계시는가?
50절에 주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다.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무엇이기에 그 세례를 받기까지 답답해하시는가?
그러면서 51절부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을 하시기 시작하는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시면서 “이후로는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이,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와 며느리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37)
도대체 불은 무엇이고 세례는 무엇이며 왜 집안 가족들이 이렇게 싸우고 다툰다는 말씀인가?

엡 2:14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골 1:20)
그리고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주님은 스스로 분쟁을 조장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 믿으면 가정이 화목해야지 이렇게 아비와 자식이 어미와 딸이 시어미와 며느리가 분쟁한다면 누가 예수 믿겠는가?

목사들이 설교할 때 예수 믿으면 가정에 싸움난다고 하는 말씀을 들어 보았는가?
본문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가를 확정해야 할 것이다.
49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불을 던지러 왔다고 했을 때 불은 어떤 불인가 하면 5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쟁이다.
주님은 지금 분쟁의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분쟁의 불이 붙지 않고 있다.

왜 주님은 집안을 분쟁시키지 못해서 애가 타시는가? 남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주님을 생각해 보셨는가? 남의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그렇게 원하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평화롭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왜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50절의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고 했다. 그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의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받으실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남의 가정 파탄 내는 불세례이다. 이 불세례는 다름 아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는 세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는 것이다. 불이 붙어 아비가 자식을 어미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미가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버리면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대 사회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사회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파버린다.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인다. 그들의 사고에서 유일신 사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참람죄를 걸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다. 단번에 칼로 무우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고 하고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하니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본문의 말씀을 정리하면 예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시면서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셨는데, 그 불이 다름 아닌 성령의 불을 의미했다. 그 성령의 불은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십자가에 죽지 않은 상태이고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게 될 때 하나님과 성령이 임한 성도는 화평을 이루는데, 하나님과 화평 된 자는 이제 사단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들 즉 사단의 종들과는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10: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했다. 마10:36절에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 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천륜을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령은 천륜을 거스린다. 둘 사이는 건너지 못할 강이 가로 막고 있듯이 한족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마귀가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집안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예수는 믿는데 엉터리로 믿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지 않은 영적 싸움을 하게 된다.

여기서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은 눈뜬 소경이고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저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먼저 본 자가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예수 믿는 것을 취미생활 수준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니까 능력은 절대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제대로 믿어버린다면 사단은 역사할 것이고 믿지 않는 불신 가족들은 적지 않게 괴롭힐 것이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에서 부터 '호적을 판다', '이혼을 한다' 까지 갈 것이다.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면 친지들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고 친지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이웃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등천하는 이 땅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불을 던지러 오신 주님의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지상 교회는 마귀와 싸우는 전투적 하나님 나라이다. 주님의 승리를 내 승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부득이하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고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 입고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불세례를 받기 전의 답답함을 우리가 느끼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의 승리가 나의 것이 되기까지 우리는 그 답답함과 싸우며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은 이상 영적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승리하기 위한 모든 영적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예수님의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습니다(49-50)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는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나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천국에서 영생으로 곧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주어지기에 불은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붙이기 위해 죽음의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말씀의 불을 지폈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을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그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믿는 자의 심령마다 오시고 구하는 자마다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해야 하고, 최선과 차선을 분별해야 하고, 선과 악을 계속 분별하여 가까이할 것과 멀리할 것을 계속해야 하고, 예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한 가운데 주님 편을 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깨달아 감사한 마음과 기쁜 마음,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잘 감당하도록 합시다.

2. 진리 위에 바로 섭시다(51-53)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고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이 분열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와 불신자 간에 바른 관계가 지속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과 육체적인 자는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 평화는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선행 요건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 간의 갈등과 분열을 필연적으로 동반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쟁입니다. 복음의 계획과 그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 주고 거룩한 사랑 안에 함께 묶어주는 것으로, 만일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연 그렇게 되어질 것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어 복음이 분쟁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쟁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이 이성과 감정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의 가장 근거 있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계속 조명하며 우리의 생각을 이성이 아니라 말씀으로 바꾸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둠과 빛은 상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취면 어둠은 도망가야 합니다. 동시에 빛이 빛을 발하지 않거나 못하면 어두움 속에 묻혀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 위에 서서 말씀을 통하여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3.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합시다(54-57)

팔레스틴에서의 비는 지중해의 습도 높은 바람에서 기인하는바 서쪽 지중해 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곧 비가 올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바람은 남쪽의 사막 지역에서 불어왔는데, 팔레스틴 지역을 가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위와 가뭄이 시작되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하시면서 질책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종교 윤리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상을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상황을 통하여 사회 속의 사회인들은 사회인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 지도자들대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영적 분별력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기상 변화에나 민감하고 자신의 안일함을 위해 로마의 정치적 상황에만 재빠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구약에 직간접으로 450번이나 예언된 메시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교회와 우리의 모습을 분별하여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때는 악한 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악한 시대이기에 세월을 아끼도록 말씀합니다. 하지만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기에 신랑 되신 예수님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머뭇머뭇하지 말고 옳은 것에 대하여 선택하였어야 합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수많은 유혹의 손길에서 결단하여 뿌리쳐야 합니다. 시대를 바르게 분변하여 죄악 된 길에서 단호히 돌아서야 합니다.

결단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4. 회개만이 살길입니다(58-59)

예수님은 58절에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하십니다. 이는 채무자가 법정에 서기전에 어떻게 해서든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정에 서기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늦기 전에 시대의 징후를 분별하여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법정 밖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쌍방이 서로 합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는 예수님의 댓속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 5장에서는 하나님과 화목케 됨을 말씀합니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요, 긍휼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우리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불에서 건짐을 받아 영원한 생명 된 길을 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영혼은 밝게 되어 세상을 밝게, 소망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 만이 살길이요 이 길을 가는 방법입니다. 죽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못하면 하나님의 법정에 서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의 뜻은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긍휼하심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회개만이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성령세례와 불세례

주님은 물과 성령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던지신다 하였다.

물과 불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물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로는 마임이라 한다. 물은 땅에도 하늘에도 있으며 처음 땅에는 깊은 샘(테홈, 깊음)이 있었고 그곳에 물이 있었으니 물의 얼굴에는 엘로힘의 영이 품고 있었다고 한다(창 1:2). 물과 성령의 관계는 태초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었으며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물과 영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으며(요 3:5) 제자들에게 너희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으나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하셨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 하셨으니(요 3:6) 물에서 난 것이 육이요 또한 물이다. 이 육은 물에서 났으나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하였다(벧후 3:5). 이와 같이 태초부터 물은 육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땅의 물은 아래 사상이요 하늘엔 윗물, 높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이 하늘의 높은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뜻을 거슬리어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어 땅과 모든 생물을 물에 수장시키신다. 노아 때에 홍수로 지면에 기식하는 모든 것을 멸하셨으나 노아를 비롯하여 여덟 목숨을 건지셨다. 그리고 노아와 그 후손과 방주에서 나오는 모든 생물과 언약을 정하셨다. 그것은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으며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어 땅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언약의 표적이라 하셨으니 앞으로는 물이 아닌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창 9:8~17).

인자는 밤에 도적같이 오시는데 그날에는 하늘과 초등 학문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태워지리니 의로운 삶을 산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된다고 한다(벧후 3:10~13). 이로 보건대 물과 성령의 관계와 물과 불의 관계에 물이 항상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은 위에 높은 사상이 깨우쳐 주고 품어 주어 일정한 기간을 훈육하여 그 물(사상)에서 나오게 하시는데 이를 세례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물과 세례를 이렇게 설명한다.

"물은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부도덕함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선한 양심이 하나님에 이르고자 질문하는 것이라(벧전 3:21)."

구원은 목숨이 받게 되는데 물에 잠겼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것을 세례라 한다. 둘째 날에 노아 때 홍수로 잠겼다가 나오며 셋째 날엔 소돔 고모라의 불세례에서 살아남은 믿음의 사람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넷째 날엔 요단강을 건너면서 세례를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고 다섯째 날엔 또 다시 요단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게 된다. 주님도 다섯째 날에 요단강 물로부터 올라오시게 된다.

다섯째 날까지의 물에서 나온다는 것은 물로써 거듭남이라 하는데 다섯째 날까지의 물, 곧 사상이란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법이다. 둘째 날에 홍수를 내려 지면의 죄악을 쓸어버리시고 무지개 언약을 주시고 셋째 날 아브라함의 믿음에 언약하셨으며 넷째 날 죄 있는 인생들에게 율법을 주시어 사망을 이루시는 사상이 다섯째 날까지의 사상이며 물이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다.

이제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에서 거듭남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이를 바울의 주석을 빌리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오도록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했으니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인데 불세례와 병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불 심판의 법인가? 성령세례란 죄와 사망의 법(사상)에서 해방되어 성령으로 사는 자를 말하는데 이 자를 연결된 소식을 가진 자라 말하고 있다.

주님이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연결된 소식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고 하셨다. 이로써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임하시어 성령세례를 주신다.

"오순절 날을 함께 채우려고 저희가 모두 하나 되어 그곳에 있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의 몰아치는 것 같은 울림이 나서 저희 앉아 있던 집 전부를 가득 채웠으니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져 저희에게 보이더니 각 사람 위에 앉았으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케 되어 성령이 발표하도록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혀)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온 자들, 즉 요한의 세례로 나온 자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는 동시에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지는 역사와 함께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게 된 것이다. 혀(방언)가 불이니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자신의 혀가 자신을 태운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상이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며 지옥에 속하여 불살라진다(약 3:6)."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불이 있는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을 불 못 또는 둘째 사망이라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불지옥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인데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사도 요한도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불속에 태우신다 하였으니 불세례는 쭉정이를 태우는 심판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쭉정이를 태우는 불 있는 지옥이 어느 장소에 있느냐다.

몸 밖에 있다면 주님께서 던지는 불세례는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몸 안에 있다면 반드시 불세례를 받아서 내 몸 안에 이롭지 못한 쭉정이와 더러운 사망의 사상들을 깨끗이 쓸어서 불지옥에 던져 태워야 한다. 그럼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도 얻는 일거양득의 효과적인 증인의 삶을 살도록 계획하신 것이니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동시에 받기를 권면한다.

주의 날(인자의 날)은 밤에 임하시므로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 날에 주님을 만난 자들은 모두 깨어서 옥을 지키던 자들이었다. 도적이 어느 옥에 올지 모르기에 항상 깨어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 성령세례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니 그날 하늘과 땅이 불타고 초등 학문이 불에 녹아질 때에 의로운 삶을 사는 자는 소식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 안에 도적같이 도착하리니 그날 안에서 하늘 삶이 굉음으로 지나갈 것이며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풀어질 것이며 땅과 그 안에 행위가 불 태워질 것이다. 그런즉 이 모든 삶이 풀어지나니 어떻든 너의 삶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안에서 시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날의 출현을 기다리고 서두르면 그날을 인하여 하늘 삶이 불붙어져 풀어지고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녹아지게 된다. 나의 삶도 그의 연결된 소식을 좇아 새 하늘 삶과 새 땅을 기다리나니 의는 하늘 삶 안에서 안주한다(벧후 3:10~13)."

주님께서는 나와 동행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뽑아서 짊어지고 나와 동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형 틀이니 사형장에 있어야 하지만 아예 사형 틀을 뽑아서 짊어지고 다니면서 죽을 일이 생각나거든 바로 죽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고 불붙은 지옥을 소유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시며 이 자에게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 연결된 소식을 주시어 의로운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시어 둘째 사망에 온전히 들어가지 않고 사망에 관한 부분만 태워서 불 못에 던지므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https://nykcn.org/serye-xi-li-mataebogeum-3-11






불(4442) 푸르()


던지다(906) 발로




- 본문에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것은 '불'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Grundmann, Ellis).
2. 영적 활동(Bengel,Vincent).
3. 심판 (Schlatter,Grasser).
4. 로마의 침략(Clark).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정확한 것인지를 판별하기란 어렵지만 앞의 비유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건대 (3)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이 불이...무엇을 원하리요

- 이 문구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하다.

1.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오(Bleek,Wette).
2. 내가 무엇을 하리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Alford,Meyer,Stier).
3. 이 불이 붙었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Plummer).
4. 이 불이 이제 붙어지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가?(Marshall).

이 가운데 "이 불이 이제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에 따라 (3)과 (4)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심판을 내리러 오셨는데 그 불이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어떤 화가가 복음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복음에 대한 그림은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침몰한 배에서 선원 한사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두 손으로 바위를 움켜잡고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참으로 생동감이 있고 세상 풍파 속에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를 때 산 소망이 주어진다는 뜻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는 그 그림을 보다가 다시 한번 더 붓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으로는 복음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완전하게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는 붓을 들고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냥 얼핏 보기에는 똑 같은 그림이었는데 앞에 그린 그림과 한군데 틀린 곳이 있었습니다.
앞에 그린 그림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바위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지만 뒤에 그린 그림은 한 손은 바위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자기만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다른 영혼들을 전도해서 함께 천국 가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 것입니다.


옛날에 석가님과 공자님과 예수님 세 분이 산보를 하는데 한 청년이 못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공자님이 말하기를 "허어, 군자는 대로 행인데 어찌하다 물에 빠져 고생을 하는고?" 하더랍니다.
그 다음에 석가님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물에 빠져 고생하는고?" 했답니다.
그 뒤를 따라가던 젊은 예수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그 청년을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한낱 우스운 얘기 같지만은 우리 기독교는 도덕적인 책망 이전에, 철학적인 윤회설 이전에 물에 빠진 사람을 나가서 건져 주는 사랑과 자비의 종교요 우리의 잘못을 책하지 않고 용서해 주고 믿음을 주고 돌보아주는 은총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요단강 계곡 경사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화창한 날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각기 자기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꿈이 있었어. 나는 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거기서 하 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쓰여졌으면 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큰 봉사를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알게 될 꺼야."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내 꿈이야.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해변으로 끌려나가서 큰 범선이 되어서 지중해 를 내왕하는 사람들을 도와 날라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모험을 하게 하고 저 로마의 풍요함을 이 땅에 심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 때 세 번째 나무도 늘어진 가지를 쳐들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이 너희들하고는 좀 달라. 나는 여기 그대 로 혼자 남아 있고 싶어. 여기서 내 가지를 하늘로 향하여 치켜들고 산을 오르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눈을 들어 하 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여름에 햇빛이 쪼일 때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이 내 그늘 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나무 그루에 도끼가 와 닿았습니다.
그 나무는 높은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언덕 에서 끌려 내려 왔습니다.
목수는 그 나무를 받아서 조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의 재목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이 나무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나무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어느 집의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들이 핥으며 비를 맞아 시들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그 나무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낡아빠진 구유가 되다니"하며 한탄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도 잘렸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 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큰 범선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를 싣고 다니는 작은 어선이 되었습니다.
매일 바닥에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싣고 다니는 조각배가 된 그 나무는 절망에 가득 차 자 기의 신세를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도 역시 베어져서 그 언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목수들의 손에 의해서 그 당시 중한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인 십자가로 만 들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나?"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하늘에 별 하나가 나타나서 그 말구유 위를 비추고 구유 위에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이 한 아기를 낳아 눕혔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건축물도 그 구유와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 습니다.
고깃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작은 바다에서 고기나 싣고 다니던 이 배는 자신의 삶이 시간 낭비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작은 배에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를 제단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이 작은 배는 세상의 어느 큰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십자가 된 나무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딴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땅의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나무는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 나무는 언덕 기슭에 있던 평범한 나무였지만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에게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쓰일 곳이 어딘지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삶의 성공이란 이것을 찾아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거기에 바쳐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의 자세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2-9-2024(금) 누가복음 12:3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다리는 사람(누가복음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to return from a wedding banquet, so that when he comes and knocks they can immediately open the door for him.

영국 리버풀대학의 로인 심리학자 브롬리(D. B. Bromley)는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며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며 보낸다"라고 했다.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볼때 60년을 늙어가며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의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며 지내는 것일가?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에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보았을 때 일생동안 어떤 일에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며 지내는지 활동별로 비교한 기사가 게재된바 있다. 이는 영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로 문화가 많이 다른 우리 일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수 있고 세대에 따라 소비하는 시간의 형식도 크게 다를수 있지만 그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평균수명 80년은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701,280시간이 된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 = 700,800시간에 윤달인 해 20년의 24시간 X 20년 = 480시간을 더하면 된다.

"표"에 따르면 일로 지내는 시간이 26년(227,760시간)으로 가장 길게 나타났고 아침에 깨여날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잠자는 시간은 평균 25년(239,000시간)으로 2위였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합쳐보면 평생 시간의 64% 가까이 된다. 이는 하루 24시간에서 15시간 반이 넘는 시간으로서 우리가 하루 쓸수 있는 나머지 시간은 8시간 반 정도라는 것을 알려준다.

TV를 보는 시간이 10년으로 하루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이상으로 3위로 나타났고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양분의 공급을 위한 식사나 간식을 하는 시간이 52,560시간(6년)으로 4위에 있다.

전화통화시간이 4년으로 그 뒤를 잇고 이는 하루중 1.2시간을 전화통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여준다. 스마트폰사용이 확산되고있는 현실에서 그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3년으로 6위로 나타났고 특별한 생각 없이 지내는 시간과 화를 내며 지내는 시간이 2년으로 같게 나타난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남성과 녀성에서 차이를 보이는것은 우선 주방에서 일하는 시간으로 녀성이 2년 5개월, 남성은 1년 3개월로 차이를 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외모를 가꾸는 몸단장 시간(거울을 보는 시간)이 녀성의 경우 평생 136일로 남성의 46일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것으로 나타난것이다. 그에 비해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는데 평생 들이는 시간은 남성이 1년인데 비해 녀성은 0.5년으로 2배의 차이를 보이는것도 흥미로왔다.

아쉽게도 조사항목중 미소짓는 시간은 88일로 꼴찌로 나타났다. 미소짓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씩 더 가진다면 1년에 3,650분, 약 60시간으로 2.5일 정도가 된다. 이는 40세인 사람이라면 80세까지 약 100일로 조사에서 나타난 평생의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된다.

이렇듯 우리 삶은 평소의 시간관리에 대한 마음가짐에 따라 크게 변할수 있다. "행복하기때문에 웃는것이 아니라 웃기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도 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기다리다(4327) 프로스데코마이(prŏsdĕchŏmai) προσδέχομαι

1. 집어 올리다.  2. 기다리다
발음 [ prŏsdĕ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εδε- χόμην, 제1부정과거 προσεδεξάμην, 제1부정과거수동태 προσεδέχθην, 4314와 120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집어 올리다, 받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눅 15:2, 행 24:15, 롬 16:2, 빌 2:29, 히 10:34.
2.  기다리다, 기대하다, 눅 12:36, 행 23: 21, 딛 2:13.


거룩한 성도(벧전 2:9)
거룩한 성전(고전 3:16)
하나님의 자녀(요 1:12)





깨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역사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이 깨어나야 한다
셋째는 교회가 깨어나야 한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의 수가 부족하여 멸망의 불에 의해서 무너졌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찾는 교회와 지도자들의 수가 부족하여 시련과 고통을 겪은 후에 다시 일어서야 한다면 불행한 역사가 될 것이다.

- 깨어 있으라 / 깨어 있다는 말씀의 원문 뜻은 = 주의를 기울이다. 준비하고 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시리란 구약의 예언 횟수는 456회
주님의 재림 횟수는 신구약 도합 1,518회(신약에만 300회)

1189장, 31073구절
초림에 대한 예언 109구절
재림에 대한 예언 224구절
모두 333구절




깨어 있음의 본질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정, 경주, 싸움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순례자로서, 멸망의 성으로부터 천성을 향하여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갑니다. 이 여정은 온갖 위험과 시련, 유혹의 덫이 도사리고 있는 낯선 땅을 지나는 나그네 길과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경주자로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마치기 위해 모든 방해 요인을 극복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군인으로서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의 대장이요 왕이신 예수님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여 우리를 대적하는 죄와 세상,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순례자요, 경주자요, 군인인 신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의 습관을 묵상과 기도처럼 잘 알려진 영적 훈련과 나란히 강조하면서도, 특별히 깨어 있음은 다른 습관들을 예리하게 유지해주는 습관으로 보았습니다. 즉 깨어 있음을 게을리할 때 다른 영적 습관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집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에 관해 가르칠 때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존 플라벨은 이 구절을 주제로 쓴 책의 서론에서 “회심할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고, 회심 이후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깨어 경계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이 용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말 그대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경성’(警醒)이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시 127:1; 히 13:17). 운전자에게 졸음은 선택 사항이 아닌 것처럼, 신자의 삶에도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물리적으로 깨어서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음은 정신적, 영적 의미일 때가 더 많습니다. 즉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 있어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어 있음은 일시적인 의무가 아니라 긴급하고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시기를 분별하는 신자들에게 ‘잠에서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롬 13:11). 어두운 밤과 같은 이 세상이 끝나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밝아올 새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깨어 있음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밤에 적의 후방을 노리기 위해 고공 침투 훈련을 받는 공수부대처럼 행동해야 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여객기에 탑승한 승객처럼 행동합니다. 위험을 긴급하거나 실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시 주의 사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고 금새 잊어버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교훈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눅 8:18)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2:1은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우리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있음에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살피는 일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눅 2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함께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끝으로, 깨어 있음은 특히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려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히 12:2). 우리 자신만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유혹에서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깨어 있음의 세 번째 요소는 ‘경계’입니다. 파수꾼은 깨어서 주의할 뿐만 아니라 적군이 침투하지 않는지 유심히 살피며 지킵니다. 신자가 파수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대적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 육신, 마귀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원수는 세상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말씀하고, 세상의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약 4:4)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치, 문화 체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두 번째 원수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울이 종종 “육신”으로 언급하는 “내주하는 죄”입니다(롬 7:18-20; 갈 5:16-17,24). 우리 내면에서 솟구치는 육신의 욕망에 미혹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는 스파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은밀히 숨어서 우리를 배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세 번째 원수, 가장 큰 원수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와 그의 명령을 받는 악한 영들입니다(엡 6:12).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4) 깨어 있음의 마지막 요소는 ‘기대’입니다. 경계가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면 기대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대를 시편 130:5-8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시편 저자는 자신을 날이 새기를 고대하며 한밤중에 불침번을 서는 파수꾼에 비유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5-8).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말씀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영혼의 태도입니다. 그런 영혼은 주제넘게 서두르거나 나태함에 빠져 죄를 짓거나 불신앙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이 올 것을 확신하며 자신의 위치를 굳게 지킨 채 어둡고 긴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자는 희망에 찬 기대를 품고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깨어 있음을 종말론적인 기대와 연결지어, 재림하실 그리스도께 생각을 집중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곧 깨어 있음이란 항상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줄곧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저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 모든 것을 과거에 이루어진 그분의 승리와 미래에 있을 그분의 재림이라는 영광스러운 빛에 비추어 생각하는 태도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랑이신 주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활기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깨어 있음은 네 가지 요소(경성, 주의, 경계, 기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도덕적인 원수들(세상, 육신, 마귀)을 경계해야 하고, 주님(그분의 약속과 재림)을 기대해야 합니다.

점검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정이자 경주요,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이자 경주자요, 군인입니다. 이런 비유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비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깨어 있음에 관하여 청교도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이 정의를 꼼꼼하게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깨어 있음이란 … 낱낱이 조심하면서 부지런하게 하나님이 지정하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 우리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사탄의 전략과 전술을 살펴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기회에 얽혀들지 않는 것이다.”

3.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4. 여러분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경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가장 필요한지 깨닫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5.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더욱 기쁘고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인....기다리는 사람

- 13:25와 마 25:11 에서는 주인이 문을 관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상황이 설정(設定)되고 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으므로 본문의 비유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실감나게 들렸을 것이다.
여기서 '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앙의 주(主)로서의 예수를 부를 때 많이 사용되는 말이나(마 26:22),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되었다(막 13:35).
그리고 '돌아와'의 헬라어 '아날뤼오(*) 문자적 의미는 '떠나다'이다(빌 :23; 딤후 4:16).
그러나 본문의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가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할 때는 집으로 떠나가는 것이 되고 그 주인의 집을 중심으로 할 때는 돌아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언제 오실지 알수는 없어도 반드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늘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재차 강조한 내용이다(마 25:1-13).



신앙생활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막연하게 시간만 흘러가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간을 성경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비록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기다리는 사람(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이라고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로마의 기독교 탄압이 심각하던 시대에 지하 땅굴 속으로 들어가(카타콤) 생활을 하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 북한 땅에서 지하교회 성도들은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언제 붙잡혀서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을지 알 수 없는 환경에서 더욱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탈북자들을 돕던 중국 연변의 어느 선교사의 놀라운 이야기가 새롭게 뇌리를 스쳐갑니다.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 탈북자들을 돕는 선교사를 만나 먹을 양식과 성경을 요구합니다.
이때 그 노인의 처참한 모습이 마음이 뭉클해진 선교사가 노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어르신 원하시면 제가 남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잠깐 하나님께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왔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남한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할 일은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네 믿음을 지키는 것이란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이제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마지막까지 내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북한 땅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 노인의 모습에서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구나!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난는 그 노인처럼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을까?
두렵고 떨리는 몸과 마음을 다시 내 믿음을 추스려야 하겠습니다.

주여,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찾아 오셨네









2-8-2024(목) 누가복음 12:22-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누가복음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
For the pagan world runs after all such things, and your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세상 사람들은 염려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맡겨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에피립토(ĕpirrhiptō)  ἐπιῤῥίπτω 스트롱번호 1977

1. ~위에 던지다.  2. 눅 19:35.
발음 [ ĕpirrhipt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έριψα, 제2부정과거수동태 ἐπερρίφην, 1909와 449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에 던지다.
  a.  [문자적으로 : 옷에 대하여] 눅 19:35.
  b.  [상징적으로] τ. μέριμναν ἐ. ἐπὶ θεόν: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다, 벧전 5:7.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솰라크(shâlak) שָׁלַךְ 스트롱번호 7993

1. 히필형.  2. 던지다. 3. 물리치다
발음 [ shâlak ]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뜻풀이부

I. 동사 히필형
 1. 동사 던지다, 창 21:15, 민 35:20, 22
 2. 동사 물리치다, 버리다, 왕하 7:15, 겔 20:8, 전 3:6.
  a. 동사 [אֶל을 수반하여] 창 37:22, 민 19:6, 신 9:21, 렘 26:23.
  b. 동사 [בְּ를 수반하여] 창 37:20, 출 32:24, 미 7:19.
  c. 동사 [עַל을 수반하여] 삿 9:53, 욥 27:22.
3.동사 굴복시키다, 뒤엎다, 렘 9:18.
  a. 동사 [주][비유적 표현] 욥 18:7.
  b. 동사 호팔형 הָשְׁלַךְ: 내쫓기다, 사 14:19. [בְּ와 אֶל을 수반하여] 삼하20:21, 렘14:16, 겔16:5. [לְ을 수반하여] 버림을 당하다, 렘36:30
  c. 동사 [주][비유적 표현] 시 22:11(10)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ἐπί 스트롱번호 1909

1. ㉠ ~을 다스리는
발음 [ ĕpi ]


ῥίπτω 스트롱번호 4496

1. 던지다.  2. 맡기다. 3. 놓다
발음 [ rhiptō ]

뜻풀이부

1. 던지다, 맡기다, 놓다, 뉘우다[사나움이나 강렬함을 내포하지 않고], 마 9:36, 15:30.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 자기의 염려를 떠맡길 수 있다.

베드로전서 5:7의 원문은 "잊어버리는 것은 생각에서 지우라는 의미가 아니다. 행동에서 없이 하라는 말이다."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도
초대 교회 때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름은 티테디오스 아메림노스(Titedios Amerimnos)이다.
이 이름의 앞부분은 고유명사이며, 뒷 부 분은 “걱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 단어의 뜻이 반대가 되게 하는 부정 접두어인 헬라어의 문자 알파가 앞에 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이방신을 믿고 있었던 사람인데 그가 구원받고 예수의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코 걱정하지 않는 사람 티테디오스(Titedios)”라고 불리어졌던 것 같다.
ejpirivptw는  ejpi(위에) + rivptw(던지다)이다.
그럼 무엇 위에 던져야하는 가?
말씀 위로 던져야 한다(믿음이다.)
예수 위로 던져야 한다(기도이다.)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결의 key가 되시기 때문이다.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What the people of the world seek)

'세상 백성들'(타 에드네 투 코스무. τα εθνη του κοσμο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1934) 에피제테오(ĕpizētĕō) ἐπιζητέω

1. 탐색하다.  2. 누가 4:42.  3. 묻다
발음 [ ĕpizētĕō ]
어원 / 미완료 ἐπεζήτουν, 제1부정과거 ἐπεζήτησα, 1909와 221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탐색하다, 찾다.
  a. [문자적으로] 눅 4:42, 행 12:19.
  b. 묻다, 알기 원하다, 행 19:39.
  c. 토론하다, 논쟁하다, 논란하다.

2. 애써 노력하다.
 a. 바라다, 원하다, 마 6:32, 눅 12:30, 행 13:7, 롬 11:7, 빌 4:17, 히 11:14, 13:14.
 b. 요구하다, 갈망하다, 마 12:39, 16:4.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너 투 코스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의당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호멧이 군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이야기입니다.
"내일 여러분이 다시 모여 주시면 저 앞의 산이 내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도록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마호멧은 외칩니다.
"산아 내 앞으로 오라"고 외쳐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 다.
군중들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웅성거릴 때 마호멧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 산이 여기로 오지 않음은 만약 산이 이리로 오면 여러분이 다 산에 깔려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저 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산으로 숨어 버렸을 때 군중들은 깨닫고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야기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기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마호멧이 외친 "내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적이 내 앞으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기적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늘을 맞이하게 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맞이하지 못한 수 많은 사람들이 지구촌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서 호흡하며 생명의 길을 걷는 은혜의 기적을 믿음으로 누리며 더 큰 은총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작고 가난하여 교역자도 모시지 못하고 교인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러한 교회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휴가차 그곳에 왔다가 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 니다.
교인들끼리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단순한 예배인데 그 예배에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감동을 받은 목사님이 예배가 끝난 후 어느 집사님 한 분에게 어떻게 이렇게 은혜가 충만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깜짝 놀라며 그 목사님에게 그럼 은혜가 없는 예배도 있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라고 합니다.
그 시골 교회 교인들은 은혜 없는 예배가 있는 줄을 모르고 사는데 우리는 혹시 은혜가 충만한 예배가 있는  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은 흔히 예배와 설교를 놓고 은혜가 있었다 없었다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예배와 설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예배는 세상에 본시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은혜 받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동 받는 삶을 욕심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과 기도를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되기를 욕심 내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 보물...마음도

- '마음'은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며 '보물'은 궁국적인 관심을가리킨다.
결국 하늘과 땅 또는 물질과 하나님 나라 이 중 어느 것에 궁국적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미적지근하고 이중적인 자세는 용납되지 않으며 성도는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마 6:24).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재물을 덤으로 얻게 되지만 재물을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다.



2-7-2024(수) 누가복음 12:13-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탐심을 물리치라(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동남아에서 애완용 원숭이를 잡아 파는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아주 특이하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주둥이 긴 항아리 또는 병 속에 달콤한 사탕을 집어 넣고 그 항아리 또는 병을 땅에 깊숙히 박아 놓은 박대기에 묶어두면 원숭이가 그 병속에 들어있는 사탕을 꺼내려고 손에 사탕을 가득 잡고 손을 뺄 수 없어 결국은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팔려간다고 합니다.
이때 원숭이가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한개만 잡고 손을 빼면 될텐데 욕심 때문에 사탕을 쥐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붙잡으로 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멈추고 있다고 합니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다 보면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원숭이를 쉽게 만나게 됩니다.
이때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원주민이 조롱박과 바나나 몇 개 그리고 창이 넓은 밀짚모자를 준비해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나나 하나를 조롱박 속으로 집어넣고는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내서 맛있게 먹어 보였습니다.
물론 나무 위 원숭이들이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롱박 속에다 남아 있는 바나나를 집어넣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한숨 자는 척합니다.
원숭이들은 조롱박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중 대장 격인 원숭이 하나가 나무 밑에서 잠자는 사람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조롱박 속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습니다.
원숭이는 손에 힘을 주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이때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면 놀란 원숭이가 펄쩍 뛰어 나무를 잡고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한 손이 조롱박 속에 있기에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어서 결국 잡히고 맙니다.
조롱박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자기 손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고 불쌍해 보입니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도망갈 나무숲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왜 원숭이가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까?
바나나를 쥔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나나를 쥔 손을 풀고 밖에서 손을 빼었다면 원숭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끼 식사도 되지 않는 눈앞 욕심 때문에 자유를 잃고 인간의 포로가 된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람에게 실제 일어났습니다.

한 신앙 좋은 노인이 있었는데 그분은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연말이 되어 미국에 있던 자녀들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난 손자 녀석이 주둥이가 좁은 이조백자에 손을 집어넣고 빠지지 않는다고 울며 난리를 쳤습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백자가 깨지지 않도록 온 가족이 동원되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 사이 아이는 마치 죽어 넘어가는 아이처럼 울자 노인은 황급히 손자를 위해 망치로 백자를 깨뜨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가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던 손을 벌려보니 기가 막히게도 5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이 사건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노인의 결단과 아이의 행동을 통해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노인의 결단에 있어 아무리 고가 품의 백자라도 손자만큼 귀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백자의 가치보다 손자의 가치가 더 소중했기에 과감하게 깨트려 손자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있어 모범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이의 행동에 있어 마치 원숭이가 바나나를 쥔 것과 같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에게 이유를 말했더라면 백자를 깨지 않고 돈을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백자보다 5백 원짜리 동전의 가치가 더 있었고, 그것을 꺼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어른들보다는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고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욕심의 결과와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교훈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꼭 쥐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거나 그것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본다면 이제는 쥐고 있었던 손을 펴야 할 때 인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이란 분수에 넘거나 도에 지나친 욕망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까지 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그만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 가운데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제일 큰 욕심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정욕, 혹은 음욕

이것 때문에 고금을 통해 범죄하고 쓰러진 이들이 많습니다. 각종 성범죄와 치정 살인사건이 우리 사회에서도 매일 같이 일어납니다. 삼손은 이 정욕에 끌려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끝내 패망하였습니다.

둘째, 탐욕, 혹은 물욕

광부들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미시시피강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켰습니다. 배가 강 복판에서 휘청거리자 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승객들은 구명정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건장한 남성들은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뭍을 향해 헤엄을 쳤습니다. 승객들이 대부분 탈출한 후 한 남성이 갑판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있었고 몸에는 각종 보석들이 휘감겨 있었습니다. 그는 강물에 뛰어들었으나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구조대원들이 물 속에 잠긴 그의 시체를 건져 올렸는데 그 사람의 주머니는 승객들로부터 훔친 금덩이와 귀중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귀중품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익사한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한번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은 체면과 사랑과 우정도 모두 내팽개칩니다.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재물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을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욕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를 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 욕심 때문에 결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아간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탐내어 땅 속에 감추었다가 온 가족이 돌로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수7: 18- 26)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됩니다. 마음속에 이 욕심을 버려야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셋째, 권력욕, 혹은 지위욕

이 욕심 때문에 어떤 단체나, 조직이나 회사나 관청을 불문하고 온갖 시기와 쟁투와 분열과 뇌물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조 오백년사를 보면, 이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추태와 골육상쟁과 유혈의 비극이 있었습니까? 성경에도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의 위를 빼앗으려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에서는 먹는 데 약하여 그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고, 노아는 술에 약하여 큰 수치를 당하였고, 솔로몬은 정욕에 약하여 큰 실수를 했고, 롯 같은 이는 물욕에 약하여 소돔 성에 살다가 큰 재난을 당합니다. "누구나 지옥에 가는 사다리가 있다"는 속담처럼 항상 깨어 있어 내 자신의 약점을 미리 알아두고 이 방면에 침입하는 모든 유혹과 시험을 막아야 합니다.(마15:18- 20, 벧후2:10)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지라"(딛1:15)
특히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교만과 음행과 거짓과 탐심과 나태 등을 멀리하고 버려야 하겠습니다.(잠6: 16- 19)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심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하지만
때로는 더 좋은 것, 더 맛 있는 것, 더 멋진 것에 마음을 쏟기도 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이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에 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 만큼의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아침이 되자 곧장 출발하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름진 토지를 더 차지하려고 조금씩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한 채로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농부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그가 묻힌 3아르신(2미터) 크기만큼이었다.


탐심(4124) 플레오넥시아(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24

1. 탐심.  2. 탐욕. 3. 눅 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 412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탐심, 탐욕, 눅 12:15, 롬 1:29, 고후 9:5.

* 4123. πλεονέκτης, ου, ὁ   

1. 욕심꾸러기.  2. 탐심 많은 사람. 3. 고전5:10
발음 [ plĕŏnĕktēs ]
어원  / 4119와 219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욕심꾸러기, 탐심 많은 사람, 고전 5:10, 6:10, 엡 5:5.

* 4119.  πλείων    
1. 4183의 비교급 : 더 큰.  2. 마 12:41.
발음 [ plĕiōn ]


* 2192. ἔχω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
발음 [ ĕchō ]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예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거부하신 것은 그 사람이 당면한 문제 배후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은 한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즉 '저희에게'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탐심'(플레오녀시아. 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은 '더 많은'의 뜻을 가진 '플레온'(πλείων) 과 '소유하다'의 뜻을 가진 '혀시아'(*)의 합성어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가리킨다.
여기서 지적되는 것은 단지 '물질'에 대한 탐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는 모든 종류의 죄악된 성향(性向)을 총칭한다고 보아야 한다(시 39:6; 합 2:9; 골 3:5; 딤전6:9-11).



평생 베풀면서 살다간 방경삼 목사 소천이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방 목사님은 1935년 평안 남도에서 출생하여 월남하여 목회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영적 심적 물적으로 저들에게 베풀 수 있을 때까지만 목회하겠다" 일념으로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강원도 원주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습니다.
음성 나환자 뿐 만 아니라 양성 나환자 등 3백명이 전국에서 모여 사는 경천원에 들어 갔을 때 그들은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계란을 건네주었습니다.
방목사는 그것을 덥석 받아 먹고 그들의 환영 가운데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후 신안 농원에 가서 목회를 하였고 중부교회에서 교도소 출소자 뒷바라지를 하며 대전 신학교와 청주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이 어려울 때 생활비와 자녀학비를 내주느라 정작 자신의 딸과 아들의 등록금은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한이 되어 마지막 조의금으로 아들 등록금 한 번 내 주고 나머지는 섬선교회 후원과 목회자 미망인 자녀 장학금에 전달하고 돌아 가셨습니다.
마지막 그는 5월 15일 향년 62세로 아내에게 "살아 생전 내가 못다 베푼 어려운 이들을 당신이 대신 돌봐 달라.
내가 죽거든 시신을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고 장례식 대신 노회장으로 감사 예배를 드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소천 하였습니다.
입관식도 발인식도, 장례식도 없는 감사 예배로 이 땅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생활 경전이라 일컫는 <탈무드>에 사람의 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주먹을 꽉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 때는 손바닥을 보이고 숨을 거둔다.
태어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죽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빈손에 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도 흥미롭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신이 너무 일찍 그를 데리러 왔다.
32세의 나이에 정복지에서 중병에 걸렸다.
모기에 몰렸다고도 하고, 그를 시기한 어느 장군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신하들을 불러모아 "내가 죽거든 시체를 넣은 관 밖으로 내 손 하나를 내밀어 달라"라고 유언했다. 참으로 황당한 유언이었다. 신하들이 놀라자 알렉산더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호령했던 그 사람 역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부귀영화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물거품이라는 것을 자신의 관 밖으로 내민 빈손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유언이 이루어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 버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저승 갈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제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저승길에는 한 푼도 챙겨갈 수 없다. 그런데도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이것저것을 움켜쥐려고 악착을 떨다가 비루하고 던적스런 인간으로 몰락한다. 기어이 뭇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서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한다. 끝없는 욕심 때문에 파멸한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이사야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새번역) 사람의 탐욕스러운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로 가버렸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새번역)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로마서 7:7-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새번역)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새번역) 그러므로 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현대인)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욕심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하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또 그들은 탐욕에 빠져 그럴 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파멸이 반드시 그들에게 닥치고 말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개역개정,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과 과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온(whole) 3648. 홀로크레로스(hŏlŏklērŏs) ὁλόκληρος, ον 

1. 완전한.  2. 전체적인. 3. 건전한
발음 [ hŏlŏklērŏs ]
어원  / 3650과 28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완전한, 전체적인, 건전한, 건강한, 살전 5:23.

영혼육

몸, 육체(소마. sōma)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몸.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 14:12, 27:52, 58, 59, 막15:43, 45, 눅 17:37, 23:52, 55, 24:3, 23, 요 19:31, 38, 행 9:40, 히 13:11, 유 1:9.
  b. 산 몸, 마 5:29, 6:22, 26:12, 막 5: 29, 14:8, 눅 11:34, 요 2:21, 롬 1:24, 고전 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 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 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3, 2:16, 4: 4,12,16, 5:23, 30, 골 1:18, 24, 2:19, 3:15.


혼, 영혼(푸쉬케.  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혼, 목숨, 생명:
 1. [문자적으로]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영(프뉴마.  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 415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불기, 숨.
  a. 바람, 요 3:8, 히 1:7.
  b. 숨 내쉬기, 숨, 살후 2:8.
2.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 27:50, 눅 8:55, 행 7:59, 히 12:23.
3. [인간의 인격의 일부분으로서의] 영.
  a. 고후 7:1, 골 2:5.
  b. [통찰력, 감정, 의지의 원천 또는 좌 소, 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 막2:8, 눅1:47, 행17:16, 롬8:16, 고전16:18.
  c.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 성질, 기질, 의향, 고전4:21, 갈6:1, 엡4:23, 벧전3:4.
4. [독립적 존재로서의] 영.
  a.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요 4:24.
  b. 영, 영물, 행23:8,9, 히1:14, 12:9, 계1:4, 3:1.
  c. 유령, 눅24:37,39.
  d.  악한 영, 귀신, 마12:43, 막1:23, 눅8:29, 행5:16.
5.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를 구별짓는] 참된 영.
  a.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고전2:11, 롬8:11, 살전4:8.
  b. 그리스도의 영, 주님의 영, 행16:7, 고후3:17, 갈4:6, 빌1:19.
  c. 성령, 마12:32, 눅2:26, 행2:4, 히2:4.

영혼아...마시고 즐거워하자 -
그의 총체적 실존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물질에 의존하여 물질로 말미암아 쾌락을 즐기는 것일뿐 진리를 추구하는 의미의 문제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그에게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피땀흘려 부를 축적한 자에게 있어 그 부를 이용하여 안락하고 풍족한 세월을 구가해 보고자 하는 보상 심리는 본능적 욕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흘러가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했어야 옳았다(사 51:6).

어리석은 자여 -
자신의 삶에 대해 용의 주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18,19절)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 아프론)는 '정신없는 자','무분별한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의 근본이심을 거부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시 14:1).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뿌리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인하다시피 하는 유물론(唯物論)에 박혀 있음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시되는 소위 개인의 자유 역시 오직 자본 곧 물질을 확보하는 일에 집착되어가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물질이냐 영혼이냐 세속주의냐 하나님 중심주의냐 하는 이 근본적인 가치 선택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논제임에 분명하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부자는 '여러 해'를 계획했으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그의 영혼을 가져갈 것이다.
'오늘 밤'은 그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감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재물은 그의 생명을 단 하루 밤도 지속시키는 힘을 갖지 못한다.
여기서 '영혼'은 생명을 뜻하고 '도로 찾으리니'는 인간의 생명이란 하나님께 대여 받은 것으로 언젠가는 되돌려져야함을 말해주며 생명에 관한한 하나님이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기를 위하여...부요치 못한 자 -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부유함과 하나님께 대한 빈곤을 대비시킴으로써 부자의 삶의 목표가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33절; 마 6:20),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다(마 25:31-46).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생명과 재물이 하나님께 근거한 것임을 알고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벧전 4:10).

2-6-2024(화) 누가복음 12:8-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할 말(누가복음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for the Holy Spirit will teach you at that time what you should say.

신앙생활의 내용을 분석하면 언어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시자하기 전에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회중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때로는 어느 설교자의 외침에 동의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멘"하고 말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1:3)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인한다는 헬라어는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는 "같은(호모)"이란 단어와 "말을 한다(레고)"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인데 그 의미는 "같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인한다는 헬라어는 "아르네오마이(arnĕōmai. ἀρνέομαι)"라고 합니다.
'아르네오마이'는 "거절하다" "부정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심판주가 나는 너를 부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한 성당에서 한 사제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그 신부를 도와서 성찬을 준비합니다. 
그러다 그만 이 어린아이가 실수를 해서 포도주가 든 그릇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신부는 버럭 화를 내면서 저리 나가라고, 너 같은 녀석 필요 없다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무신론자가 되고 그리고 철저한 공산 국가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유고의 ‘티토(Josip Broz Tito. 1892. 5. 7~1980. 5. 4)' 대통령입니다. 
한편 동시대에 또 다른 한 성당에서 신부가 성찬을 준비하는데 어린이가 보좌를 합니다. 
어린이가 그만 실수해서 포도주잔을 땅에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너도 앞으로 큰 신부가 되겠어, 나도 너만 한때는 그런 실수를 많이 했거든,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훌륭한 신부가 됐잖아.” 
그리고 오히려 아이를 격려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유명한 ‘플턴 신(Fulton Sheen. 1895. 5. 8~1979. 12. 9)’ 대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만 어떻게 반응하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들의 인생이 전혀 다른 운명으로 갈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합니다.
말이란 이처럼 권세가 있습니다.

다 찬양하여라


6.25때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한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불행하게도 폐결핵이 걸렸습니다. 치료할 돈도 없습니다. 여동생이 어쩔 수 없이 술집에 가서 술을 따르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오빠에게는 절대적으로 비밀 이였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오빠를 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 후에 전쟁도 끝나고 오빠도 건강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신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바로 이 여동생이 술집에 있었던 사실을 아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교인은 다니면서 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덕스러운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온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오누이는 충격을 받고 그만 스스로 생명을 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 더 덮어줄 수 있었더라면, 지나간 과거의 일인데, 이제 새사람이 되었는데 그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걸 꼭 끄집어내서 소문을 내고 결국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유익한 말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말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말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말이 있으면 불안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말이 있는가하면 공동체를 허무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을 나쁜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얼마든지 선한 일에 쓰면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나라의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가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귀한 것을 가지고와라!” 또 다른 신하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와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 년 후에 신하들이 통에 무언가를 담아서 가져왔는데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인가 가져온 것을 뚜껑을 열어보니까 사람의 혀라는 것입니다. 혀는 죽을 사람도 살리고,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에 혀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신하들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담고 온 상자를 보니까 거기에도 역시 사람의 혀가 있었습니다. 혀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증오하게 만들기도 하고, 사기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우리가 말이라는 걸 참 조심해야합니다. 특히 목사라는 직분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십년 넘게 목회하면서 늘 말을 해놓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목사님은 그냥 내뱉고 끝나겠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얼마나 반성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내가 말을 또 조심해야지.’ 이러한 반성을 많이 하고 후회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괴로워하지만, 또 동시에 저에게 상처를 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에 맘이 괴롭고, 잠을 못 이루고, 갑자기 건강하던 위가 소화가 안 되고, 건강하던 허리가 아프고, 사람이 신경을 쓰니까 허리도 아프고 소화도 안 됩니다. 이게 문제가 참 많습니다. ‘사람의 모든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 신경성이다.’ 라는 걸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하던 곳이 문제가 생깁니다. 목사도 철갑을 두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하고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말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이 정말 저 사람에게 유익이 되겠는가? 저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저 사람에게 소망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늘 물어봐야 합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니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잘못된 말에 대해서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남을 헐뜯는 말 모두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니까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쓸데없는 말 자꾸 하면 문제만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1장에 보면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은 좀 두 번, 세 번 생각한 다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더러운 말, 덕이 되지 않는 말, 은혜가 안 되는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왜 잘 나가다 싸웁니까? 꼭 말 때문에 싸우고, 말 때문에 말꼬리 잡아서 그 말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좋은 말에 관한 격려도 있습니다. 잠언 16장에 보면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좋은 말은 보약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병이 떠나갑니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엔돌핀이 막 솟구칩니다. 

잠언 25장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정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데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하라.” 덕을 세우는 말만 합시다.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 헐뜯는 말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으면 묻어두는 것입니다.

잠언 18장에 보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데로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에고치 알고 계시지요?  이 누에고치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을 가지고 자기 집을 만듭니다. 누에고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누에의 나오는 실을 가지고 누에고치를 만들어서 자기가 그 속에 있는 거예요. 어찌 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근사한 빌딩을 지어가고, 어떤 사람은 초라한 초가집을 지어가고, 어떤 분은 개집 같은 것을 지어갑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에 이 은혜가 안 되는 말, 덕이 떠나는 말,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축복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 믿음의 말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붕어빵이 있고 잉어빵이 있습니다. 겨울에 화로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붕어모양의 틀에 넣으면 붕어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붕어빵을 잉어빵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붕어빵 틀을 버리고 잉어빵 틀을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틀을 놓느냐에 따라 빵이 결정 됩니다. 우리 인생을 바꾸려면 말을 바꿔야 합니다. 언어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이 언어를 잘 배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에 하숙하던 형님이 있었는데 이 형님이 남을 좀 비웃는 말을 자주합니다. 본인은 굉장히 유머스럽게 한다고 하는데 자꾸 남의 약점을 캐냅니다. 저도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게 재밌는 줄 알고, 잘하는 줄 알고 남의 약점만 있으면 자꾸 얘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받기는커녕 미움만 받았습니다. 저의 친형도 아닌데 그 형한테 잘못 배워서 남을 놀리는 것을 배우곤 했습니다.

제가 어느 집에 갔더니 그 집은 자기부인을 부르는데 보통 ‘여편네’라고 부릅니다. 저도 모르게 또 그것을 배워가지고 저희 집사람에게 “여편네! 여편네!” 라고 불렀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싫어합니다. “부인이라고 하지 여편네가 뭐냐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습관이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들이 한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위해서 말을 참 조심해야 해요. 여러분도 부인에게 ‘여편네’라고 하지 마십시오. 아들들이 장가가서 부인에게 ‘여편네! 여편네!’ 그러면 사랑도 못 받고, 참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말로 인해 운명이 갈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는데 10명의 정탐꾼은 그 가나안 땅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그 땅은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키는 장대 같아서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고 그 성은 견고합니다.” 이렇게 악평을 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온 백성이 술렁거립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에, 그런 들어가지도 못하는 땅에 들어가려고 여기까지 왔나?’ 하면서 백성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고, 돌을 들어서 지도자들을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능히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긍정적인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동요된 백성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매우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죽는다.”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경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해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보응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할 때에는 ‘하나님의 녹음기에 또 녹음이 됐겠구나!’ 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언어생활에 대한 어떤 말씀을 주고 계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망의 소리, 불평의 소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이래도 원망의 소리, 이래도 불평의 소리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임금이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 “임금이 안보이면 나랏님도 욕하는데 왜 욕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나랏님을 욕하면 하나님께서 다 듣고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망조차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데 그 전화 내용이 다 녹음되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 말조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도 못 듣는 거야, 비밀이야’ 이래서 마구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 녹음되어진다면, 만약에 제가 지금까지 핸드폰에서 한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져서 공개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불평과 원망을 다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말을 통해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교인들이 너무 불평이 너무 많아서 목사님께 와서 자꾸 누구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교인 불평록’이라는 공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뭐 불평을 하면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다 적겠습니다.” 하면서 다 적었습니다. “집사님께서 말씀하는 것, 어느 권사님이 어떤 일은 덕이 안 된다는데 지금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싸인하라고,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싸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싸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평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와 흑암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찬양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흑암의 나라, 사탄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불평과 원망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탄의 자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거 꼭 마음에 새기십시오.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8절부터 30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말씀입니다. 말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결국 다 죽었습니다. 정탐꾼이 정탐하고 돌아온 그 40일에 1년을 곱해가지고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고 유리하다가 20세 이상 된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어서 시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20세 이하의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 “우리는 그 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한 대로 된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정말 실수를 해도 “아이고 죽겠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죽겠다.” 물론 여러분은 그 말대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말한 것은 그 말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메랑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던지면 돌아서 자신의 손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존경받고 싶으냐? 남을 먼저 존경하라. 축복받고 싶으냐? 너희가 먼저 남을 축복해라. 이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말한 대로 응답하십니다.

‘사또 도미오’라는 일본사람이 쓴 책 중에는 <인생은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트 버드’라는 미국사람이 쓴 책 중에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책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젠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너는 그렇게 하다가 먹고나 살겠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이제는 축복을 선포해 주십시오. 비록 공부를 못하고 장난꾸러기일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아빠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넌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빌리그레이엄’목사님이 어렸을 때는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빌리가 커서 뭐가 되겠냐? 저거 깡패나 되겠지.”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믿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빌리! 너는 말도 잘하고 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귀하게 쓰실 거야.” 이렇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빌리그레이엄’ 같은 훌륭한 부흥강사가 나온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장군은 어릴 때 완전히 싸움꾼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맥아더만 보면 학을 땝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맥아더를 꼭 껴안고 “맥아더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그랬더니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훌륭한 대장군이 됩니다. 그 부모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인격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그의 인생이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소망의 말을 하면 소망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사랑의 말을 하면 사랑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정적인 말, 비판적인 말을 하면 다 부서져가는 비판적인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소망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거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도 힘듭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불신앙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신앙적인 삶을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비방을 일삼는 사람이 남에게 칭찬 받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타인을 무시하는 말을 뱉은 사람이 존경받고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은 그 입술의 열매대로 먹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혀는 영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말에는 기술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선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악해지는 것입니다. 음란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벌써 음란해지는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생각 없다가도 누가 자꾸 옆에서 음란한 말을 하면 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방하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도 거기 전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 줄로 믿습니다. 잠언 6장 2절에 보니까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입의 말로 내 인생의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내게 축복이 되는지, 남에게 유익이 되는지. 이 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세 번째로는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마가복음 11장 20절 이하를 살펴보았습니다.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러한 말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플러 신학교 ‘찰스 크래프트’ 교수가 <신자가 소유한 놀라운 권세>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참으로 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권세를 사탄이 빼앗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고 마귀에게 시험당할 때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내게 절하라. 내가 너에게 권세를 주겠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감히 예수님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잃어버린 권세를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찾아주신 그 놀라운 권세가 소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풍랑을 향해 명령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 자녀의 입에도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오십니까? 여러분! 두려움을 향해서 명령하십시오. “두려움은 떠나갈지어다.”, “풍랑은 잔잔해질지어다.”, “질병은 치료받을지어다.”, “장애물은 해결되어질지어다.” 여러분! 선포하시고 명령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앉은뱅이를 향해서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했을 때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믿음의 말만 하십시오. 믿음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불신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소망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남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말만 하십시오. 그것이 격려를 되고, 칭찬해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의 성공하는 비결은 바로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인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말합니다. “성공하는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 돈을 내면 그 지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몰려들었습니다. 돈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공하는 지혜가 무언가 들으려 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말 조심해.” 그리고 떠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말만 잘해도 천 냥 빚을 갚고, 말만 잘해도 죽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여러분의 인생이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아주 말이 거칠고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외아들이 하나 있는데 며느리를 봤습니다. 참 참한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혀를 찼습니다. “저 뭘 모르고 들어왔지, 저 집에 오면 죽어나가지, 살지 못할 텐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말이 거칠고 독살스러운데.” 그런데 이 며느리가 너무 지혜롭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초전박살 내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초반에 기를 잡으려고 무슨 일만 있으면 “너는 친정에서 그런 것도 못 배워가지고 왔느냐고, 무식한 년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저는 친정에서 별로 배운 게 없어요. 시집에 와서 훨씬 많이 배우네요. 어머니, 많이 지도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또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니 “야 너는 대학까지 나온 년이 그것도 모르냐?” 이 며느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아이고, 어머니! 지금은 대학 나와 봤자 옛날의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돼요. 어머니가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손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며느리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이제 내가졌다. 너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지혜로운 말로 시어머니에게 대응할 때 시어머니 마음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의 지혜입니다.

말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술에 이제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복음을 증거하며 실망한 자들을 일으키고 낙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하다(3670)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  

1. 약속하다.  2. 동의하다. 3. 고백하다.
발음 [ hŏmŏlŏgĕō ]
어원  / 미완료 ὡμολόγουν, 미래 ὁμολο- γήσω, 제1부정과거 ὡμολόγησα, 3674의 어간과 3056에서 유래

사람 앞에서...시인할 것이요

-
'앞에서'(*, 엠프로스덴)는 공개적인 고백을 강조하는 말로 판사 앞에서 증언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나를 시인하면'(*, 호몰로 게세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고백하면'의 뜻이 된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고백이 단지 하나의 당위성 때문에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안에 사는 삶의 결과로서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뜻한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와 아울러 구체적인 결실을 맺어 보이는 생명력있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자태(姿態)이다.
마태의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대신 내 아버지 앞에서"로 서술되어 있는데, 누가는 법정에서의 증언을 염두에 두고 있고 마태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인자'에 대해서는 5:24 절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부인하다(720)  아르네오마이(arnĕōmai)  ἀρνέομαι  

1. 거절하다.  2. 부정하다.ὁμο- λογεῖν. 3. 부정하다
발음 [ arnĕōmai ]
어원 / 미래 ἀρ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ρ- νησάμην, 완료 ἤρνημαι, 아마도 1[부정불 변사]과 4483의 중간태에서 유래

사람 앞에서...부인함을 받으리라

- 앞절에서의 긍정적인 약속이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심판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말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행위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한편 8, 9절 전체의 의미는 바른 신앙적 삶에 대한 격려와 비신앙적 삶에 대한 심판 경고 등 양자를 모두 포함하지만, 문맥상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분노에 의한 핍박이 예상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11:53, 54) 후자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이...가르치시리라

- '곧 그때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때 성령의 도우심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준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위기 상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해 준다거나 방해 세력을 분쇄한다고 말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을 가르치신다고 하신 점에 유의하자.

이것은 성령께서 결코 기적이나 무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제자들을 무력한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며 위기의 상황 조차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정공법(正攻法)을 채택하신다는 것을 암시 한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베드로(행 4:8-12), 스데반(행 6:10), 바울(딤후 4:17) 등에게서 실제로 성취되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에 가게 되면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하게 되면 세 번 기도하라."
러시아에서 전해오는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크리스찬 작가 엔로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
그 작품은 1587년 이래 일본의 태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도꾸가와(德川) 장군으로 이어 오면서,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여 많은 사제와 신도들이 화형으로 처형되고 고문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진 소설 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로드리꼬라는 신부인데 그는 박해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고뇌와 신앙적 회의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스켓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톨릭 신도들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도록 강요받았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화를 밟지 않고 참혹한 죽음의 길을 걷는 순교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내세워 주저 없이 성화를 밟고, 그리고 괴로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로드리꼬 신부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깊이 고뇌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도들이 바닷물 속으로 무참히 가라 앉아가지만,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잠잠하고 새는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하나님은 계속 침 묵을 지킬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며 깊은 고뇌 가운데 있던 로드리꼬 신부는 드디어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희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니라."

여기서 신부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마을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첫날을 지낸 다음에 아침 담임 목사가 강사 숙소에 들러서 집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어젯밤 강사 목사의 설교 중 "젖꼭지를 생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양반 마을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런 집회를 계속할 수 없다고 야단 났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어젯밤 설교 원고를 검토하다가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날 밤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오늘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젖꼭지를 생각하라 하더라"고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고 아들은 곧바로 동네 이 집 저 집에 전화를 걸어서 온 동리가 발칵 뒤집혀졌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담임 목사님에게 "내가 어제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까?"하면서 설교 원고를 내 보이시는데 거기에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의사소통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2-5-2024(월) 누가복음 12: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두려워 할 자(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But I will show you whom you should fear: Fear him who, after the killing of the body, has power to throw you into hell. Yes, I tell you, fear him.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이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주할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동물들의 몸값을 검색하였더니 흰곰은 1-2억, 돌고개는 1억 5천, 아프리카 코끼리는 2-3억, 오랑우탄은 3억, 기린은 2억, 브라자 원숭이는 1만 달러- 1만 6천달러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값은 얼마일까요?

죽은 동물의 가치는 상아 1kg 2천 달러, 러시아 웅담은 1천만원, 뉴질랜드 녹용은 2박시 분말가루 84,900원, 중국 호랑이 가죽 350만원 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는 오히려 장례비가 필요합니다.
뉴욕에서 장례를 치루려면 가장 싼 관 1개 3000불, 묘지 3천불, 장례식장 비 최소한 1만 5천불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몸 값으로는 동물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동물은 죽은 후에 세속적 가치만 갖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텐데 영생이란 복된 삶과 영벌이란 저주의 삶으로 구분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삶을 누가 결정하느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 결정합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을 재림의 날,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비싼 몸값 자랑하는, 세계의 동물 ‘톱7’은? - 비마이펫 크리에이터즈

모든 존재는 귀하다.
그래서 그 존재에 감히 값을 매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을 얻기 위해 들인 비용 또는 시장에서 거래됐던 가격은 기록으로 남는다.

미국 <인디아타임즈>는 8일(현지시간), 이런 기록들을 활용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동물’들을 소개했다. 여기엔 독특한 컬러를 지닌 원숭이부터 세계 기록 경주마, 흰색 사자 새끼, 과학의 힘을 빌린 복제견, 희소성 가득한 대형견, 우유 생산량이 대단한 젖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만 달러부터 1천600만 달러까지 그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7위. 브라자원숭이(De Brazza’s monkey)

7위는 브라자원숭이다. 영장목 긴꼬리원숭이과의 포유류다.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피에트로 사보르난 디 브라자’가 처음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따왔다. ‘네글렉투스원숭이’라고도 불린다.

브라자원숭이는 사진에서 보듯 흰 수염, 주황색 왕관 털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도 볼 수 있다. 한 마리당 가격은 1만 달러에 이른다.  

6위. 아라비아말(Arabian horse)

아라비아말이 6위를 기록했다. 아라비아 및 그 주변 지역을 원산지로 하는 품종의 말이다. 독특한 머리 모양과 높은 꼬리 마차가 특징이다. 

가장 오래된 말 품종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라비아말은 4천500년 전 역사 속 동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고고학적 기록도 있다. 

때문에 다른 품종을 향상시키는데 많이 기여했다. 오늘날 거의 모든 현대 승마 종에서 아라비아말의 혈통이 발견되는 것은 그래서다.  

5위. 흰 사자 새끼(White Lion Cubs)

흰 사자는 지난 1938년 남아프리카의 팀바바티(Timbavati)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그들은 사자 중 가장 희귀한 종들 중 하나다. 

흰 사자는 야생에서도 소수만이 살아남은 만큼, 매우 희귀하다. 최대 14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위. 랜슬롯(Sir Lancelot)

‘랜슬롯’은 최초의 복제견 레트리버다. 원래 최초의 개 ‘랜슬롯’을 기리기 위해 동명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 

복제의 시작은 이러했다. 랜슬롯을 키우던 에드가와 니나 오토 부부는 자신이 키우던 랜슬롯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슬픔에 잠겨 있던 이들은 랜슬롯을 복제하기로 결심한 것. 

그들이 랜슬롯에게 투자한 비용은 무려 15만5천달러가 넘는 금액. 랜슬롯은 현재 슬하 8마리 새끼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다.



3위. ‘티베트 마스티프’(Tibetan Mastiffs)

3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티베트 원산의 대형견 ‘티베탄 마스티프’가 차지했다. 네팔에서는 ‘티베트의 개’라는 뜻을 가졌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개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은 가축, 궁전, 수도원 등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된 경비견으로 쓰였다. 죽을 때까지 한 명의 주인만 섬기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비싸게 판매된 티베트 마스티프는 지난 2011년 거래된 아이(150만 달러)다. 당시 국제애견협회 켄넬클럽에서 ‘지구상 가장 비싼 개’로 선정됐다. 

2위. ‘미스 미시’(Miss Missy)

‘미스 미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소다.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 지방 원산인 대표적 젖소 홀스타인(Holestein) 종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소보다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무려 50%나 더 많이 우유를 만들어낸다. 

값어치는 무려 120만 달러다. ‘미스 미시’는 지난 2009년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온타리오 주에서 열린 경매에서 해당 가격에 판매됐다. 

1위. 그린 몽키(Green Monkey)

1위의 주인공은 미국의 서러브레드(thoroughbred) ‘그린 몽키’다. 서러브레드는 말 품종의 하나로, 영국에서 영국 재래종과 아랍 말을 교배해 개량한 경주 말을 뜻한다. 

‘그린 몽키’는 2004년생이다. 2006년 2살이 되던 해, 한 경매에서 지금까지도 최고가 기록을 빼앗기지 않은, 무려 1천600만 달러에 팔렸다. 

그는 첫 경기에서 8분의 1마일을 무려 9.8초 속도로 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1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한자에서 두 개의 단어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공포(恐怖. 두려울 공, 두려워할 포)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말합니다.
둘째는 경외(敬畏. 공경 경, 두려워할 외)는 공경하고 두려워함을 말합니다.

공포는 나보다 더 크고 강한 것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라면 경외는 나보다 더크고 강한 것 앞에서 오히려 그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3. 타인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을 뿐이며 죽음 이후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우치셨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몸에 대한 것과 영혼에 대한 것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모두 몸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몸에 대한 것보다 더 소중한 영혼에 대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과 혼과 영을 갖춘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심판 후에는 영생과 영벌의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5:46)

영벌(eternal punishment. everlasting punishment)은 생전에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영혼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라면 영생(eternal life. the righteous into life eternal)은 이 세상에서 부요함으로 또는 가난함으로 살았을지라도 세속의 가치에 따른 삶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적인 삶을 확신했던 영혼들이 누려야 할 새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은 나의 구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과 은혜로 늘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야기 예화) 펄벅 여사의 간증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이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중국 동네 마을에는 백인이었던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했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몽둥이, 곡괭이, 도끼, 쇠스랑 등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가지고 펄 벅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마치 오늘을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들었다.
잠시 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단숨에 거실로 몰려왔다.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펄 벅의 어머니는  "정말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하며 정중히 차를 권했다.
그들은 멈칫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고 말했는데, 그것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두려움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첫번째 유형은 유익하며 장려되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번째 유형은 해가 되며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첫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반드시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분의 진노와 분노에 대하여 마땅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정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면 많은 축복과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지혜의 시작이며 명철로 인도합니다(시편 111:10).
오직 어리석은 자만 지혜와 훈계를 경멸합니다(잠언 1:7).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과 안식과 평강과 만족으로 인도합니다(잠언 19:23).
그것은 샘과 생명이며(잠언 14:27), 우리에게 보장과 안전한 장소를 제공합니다(잠언 14:26).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언급된 두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디모데후서 1:7에 언급된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두려움과 겁내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풍성하게 뿌려 놓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1:10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와 우리에게 발생할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얼마나 그분의 자녀를 위해 공급하실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31). 이 몇 구절들은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의 두려움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홀로 있게 되는 것과, 너무 연약하게 되는 것과, 무시 당하는 것과, 육체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권고는 성경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56:11에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에 대한 놀라운 증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주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옵니다. 욥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어려운 몇몇 연단을 경험하면서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라” (욥기 13:15)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두려워하다(5399) 포베오(phŏbĕō) φοβέω  

1. 무서워하다.  2. 놀라다. 3. 두려워하다
발음 [ phŏbĕō ]
어원 / 수동태 φοβέομαι, 미완료 수동태 ἐφοβούμην,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 φοβήθην, 미래수동태 φοβηθήσομαι, 540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
 a. [자동사] 놀라다, 무서워하다, 마17: 6, 막5:33, 행16:38.
 b. [타동사]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마10:26, 요9:22, 갈2:12, 히 11:23.

히브리서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5399 

2. 공경하다, 존경하다, 경외하다, 눅 1:50, 행 10:35(하나님을 경외하며), 벧전 2:17.

사도행전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포베오) 의를 행하는(에르가조마이)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5399                            2038

베드로전서 2:17
뭇라람을 공경하며(티마오) 형제를 사랑하며(아가파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포베오) 왕을 공경하라.
                               5091                                   25                                              5399



내 친구
- 요 15:14에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천구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내 친구'라 표현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이다. 이는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의 친밀한 관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며(Grundmann), 이 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므로 명심해서 들어야 함을 뜻한다.

몸을 죽이고...두려워하지 말라


-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교훈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며,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며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세상 권력이나 악인의 위세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인간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믿는 확신이 요청될 뿐이다(21:18).

지옥

- 여기 사용된 헬라어 '게엔나'((gĕĕnnaγέεννα)는 히브리어 '게엔놈'을 음역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아하스왕 이후 어린 아이를 몰록의 신에게 제물로 불태워 바친 곳이며(레 18 :21. 왕하 23:10),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으로 이 우상 숭배가 근절된 후에도(왕하 23:16) 이 곳은 저주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19:6; 렘 7:31-34). 신약 시대에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 곳에서는 항상 불이 타고 연기가 피어 올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상징하기도 하였다(Tyndale).
이러한 어두운 역사적 버경을 가지고 있는'게엔나'는 종말론적인 심판 뒤에 악인들이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같은 '지옥'으로 번역되지만 몸을 떠난 영혼들이 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 '하데스'(*)와 구분된다.
'게엔나'에 던져넣을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막 9:45,47. 약 4:12).이 권세는 세상을 불의로 통치하는 어둠의 권세(22:53)곧 죽음의 세력을 (히 2:14) 능가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권세이다.

지옥(1067) 게엔나(gĕĕnnaγέεννα, ης, ἡ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발음 [ gĕĕnna ]
어원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 5:29, 30, 10:28, 18:9, 23:15,33, 막 9:43, 47, 눅 12:5, 불의 지옥, 마 5:22, 18:9.
[상징적으로] 약 3:6.

하데스(86) 하데스(hadēs)  ᾅδης, ου, ὁ   

1. ‘눈에 보이지 않는다’.  2.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3. 죽은 자들의 거처
발음 [ hadēs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149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눈에 보이지 않는다’.
 a.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b. 죽은 자들의 거처, 지하세계, 행 2:27, 31.
 c. [하늘과 대비된] 깊음, 음부, 마 11: 23, 눅 10:15.
2. [인격화된] 죽음, 고전 15:15, 계 6:8, 20:13.


스올, 음부, 지옥,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스올, 음부, 게헨나,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 등의 다양한 용어들은 많은 논쟁과 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12:4, 요한계시록 2:7).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도둑들 중 한 명이 그 분께 자비를 구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 분이 곧 천국에서 그 분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낙원을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하셨고, 이후 “낙원”이라는 단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기쁨의 장소들을 표현할 때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성경에서 단 한번,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누가복음 16:19-31).
아브라함의 품은 탈무드에서 “천국”의 동의어로서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요한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기대었던 것처럼, 나사로가 천국의 만찬에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기대어 식탁에 누워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천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낙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은 행복을 누리는 반면 그들 자신들은 고통을 받는 것과, 사악한 자와 의로운 자들 사이에 절대 이어지지 않을 “큰 구렁텅이”(누가복음 16:26)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의 핵심과 사건의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는 스올입니다.
스올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장소” 혹은 “세상을 떠난 영혼/정신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지옥”을 의미하는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하데스로, 역시 “죽은 자들의 장소”를 나타냅니다.
게헨나라는 헬라어 또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며, 힌놈이라는 히브리어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스올과 하데스는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마지막 부활과 크고 흰 보좌에서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있게 되는 일시적인 장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사망 시 곧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즉 천국, 낙원,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게 가게 됩니다(누가복음 23:43,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요한계시록 19:20, 20:10, 14-15에서만 언급되어있는 불못은 최후의 지옥으로 천상의 존재와인간 모두를 포함하여, 회개하지 않은 반역자들을 영원히 처벌하는 장소입니다(마태복음 25:41).

불못은 유황으로 타는 곳으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4, 마가복음 9:45-46). 그리스도를 부정하여 하데스 및스올 안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죽은 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불못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자들은 이렇게 끔찍한 운명을 마주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뿌려진 그 분의 피에 의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거할 운명을 지음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음부”로 번역된 “스올”

구약성경에 65번 나오는 “sheol(스올)”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한글 성경에는 주로 “음부”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저승”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처럼 느껴진다.

17세기에 번역된 흠정역 영어 성경을 보면,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연구를 거치는 동안, “지옥”으로 번역된 “스올”이 문맥과 전체적인 의미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새국제역(NIV)은 “지옥” 대신에 “무덤”으로 번역함으로써 잘못된 번역을 수정하였다. “음부”로 번역된 “스올”이란 말은 “무덤”이란 뜻으로 이해해야만 된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스올”을 지옥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야곱, 욥, 다윗과 같은 의인들이 죽어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엉뚱한 결론이 생기기 때문이다.
1) 신실하게 산 야곱도 자신이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창 37:35 ; 42:38,44
2) 의로운 욥도 죽으면 스올로 내려간다고 하였다 : 욥 14:13 ; 17:13~16
3) 다윗도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시편 18:4,5 ; 30:3

신약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3가지

신약성경에는 지옥(hell)으로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hades), 12번은 “게헨나”(gehenna), 그리고 나머지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라는 헬라어가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의 “음부”인 “하데스” 
 “하데스”는 구약성경의 “스올”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아시아의 무덤에 있는 묘비를 보면, 지금도 묘비 위에 기록된 “ooo의 무덤”이라는 글에서 “하데스”라는 단어가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종종 “지옥”이라고 번역된 “하데스”는 죽은 악인들의 영혼이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우리 모두가 가게 되는 “무덤”이나 “죽음” 자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의 본문만 주의깊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번역된 성경들은 “하데스”를 “무덤” 또는 원어 그대로 “하데스”로 표현함으로써, “하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할 때에 생기는 문맥상, 그리고 신학상의 혼란을 피하고 있다.

B. 어두운 구덩이 -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또 다른 헬라어인 “타르타루스”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루스)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매.” 베드로후서 2:4. 베드로 후서 2장에서는 “지옥에 던져”로 번역된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타르타루스, a dark 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셨으며.” 유다서 6절. 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지옥으로 번역되었던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어두운 구덩이)로 번역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은 이 흑암의 구렁텅이는 어디일까? 요한계시록에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범죄하여 지구로 쫓겨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는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지구)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 요한계시록 12:7~9.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던져져서 심판의 날까지 흑암 가운데 가두워진 곳은 바로 지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기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천년기가 시작되면서, 한 천사가 사단과 그의 천사들을 천년 동안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결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도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배웠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2:4에 “지옥”으로 번역되었고, 유다서 6절에 “흑암”(abyss)으로 번역된 “타르타루스”는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C. 신약성경의 지옥 - “게헨나” 
신약성경에서 게헨나(gehenna)는 모두 12번 “지옥”이란 말로 번역됨으로써,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다. 게헨나는 12번 중에서 단 한번(약 3:6)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특이한 표현이다. 그 중에서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은, 지옥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성경절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그런데 여기 나오는 게헨나는 지옥이 아니라 지명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증거 1: 게헨나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인명인 “힌놈”(Hinnom)이 합성되어 생긴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지명인데, 구약성경에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여러번 등장한다(여호수아 18:16).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게헨나는 실제적인 지옥이 아니라,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힌놈의 골짜기”(gehenna)는 저주와 살륙을 의미하는 장소였다. 구약시대에는 그곳에서 자식들을 몰렉신에게 불살라 제사하였다. “아하스가 ...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 그 자녀를 불사르고.” 역대하 28:1~3.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골짜기가 장차 살륙의 골짜기로 불려지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예레미야 7:31~33.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게헨나 곧, 힌놈의 골짜기라고 불리웠던 예루살렘 성 밖의 남쪽 골짜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차 메시야를 거절하는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게 될 장소로 상징되었다. 예루살렘 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하였다. 그 골짜기에는 항상 처형당한 죄인의 시체와 죽은 동물의 시체와 쓰레기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뿌연 연기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파괴적인 화염 속으로 어떤 것이 떨어지게 되면, 순식간에 구더기에 덮혀서 없어져 버렸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아신 예수께서는 악인들이 최후의 심판날에 “게헨나” 즉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성벽 아래서 전개되는 완전한 파멸의 장면을 가리키면서, 예수께서는 지옥불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예증을 들었던 것이다. 구더기와 쥐들이 계속해서 각종 동물의 시체들을 뜯어먹는 장면을 지적하시면서, 지옥의 완전한 멸망의 모습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 힌놈의 골짜기)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증거 2: 만일 이 성경절에서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헨나”가 유황불이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진짜 지옥이라면, 어떻게 구더기가 그곳에서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 있겠는가? “거기(지옥)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구더기들을 사람의 혼(soul)으로 해석하는데,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가? 결코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구더기를 사람의 혼으로 표현하거나 상징한 곳이 있는가? 단 한군데도 없다. 구더기와 지옥의 유황불은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단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쓰레기와 죽은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밤낮 타오르던 게헨나(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시면서, 마지막 심판 날에 악인들을 태울 불길을 “영영한 불”로 표현하셨던 것이다(마 25:41). “영영한 불” 이란 영원토록 중단되지 않고 타는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인한 결과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게헨나”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 지옥이란 말로 번역되었지만(마 5:22, 29, 30 ; 10:28 ; 23;33), 사람이 죽은 뒤 몸을 떠난 혼백이 영원토록 불 가운데서 고통받는 곳을 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그 대신, 장차 있을 재림과 연관된 심판의 때에 육신이 유황불에 소멸되는 곳으로 묘사되었다(마 5:22 ; 25:41 ; 마 10:28 ; 5:29, 30).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게헨나) 불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5:22. “...온 몸이 지옥(게헨나)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30.





인간의 여섯 가지 기본적인 두려움

모든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유전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육체적 유전이고, 하나는 사회적 유전이 그것이다.
인간이 육체적 유전은 갖가지 습성과 육체적 형태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 이루어진 육체적 유전을 통해 인류 공통의 여섯 가지 두려움도 유전되어 왔다.
이러한 두려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 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유전'이란 개인이 지식을 얻게 되는 모든 수단과 출처를 의미한다.
즉, 독서와 상호간의 대화, 일반적으로 '개인적 경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의 영감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동료를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성향으로 부터 - 이러한 성향은 유전된다.- 유래한다.
동물들은 서로 육체를 먹이로 삼는 포식을 행하지만, 고등의 감각, 즉 직관과 사고, 이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은 그 동족을 유체적으로 포식하진 않지만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데서 더욱 커다란 만족을 느낀다.

작금의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는 물질 숭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두둑한 은행잔고가 없으면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간주되는 시대인 것이다.

가난처럼 인간에게 고통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 없다.
인간이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부에 대한 소유욕은 너무나 강렬하여 때로는 이를 손에 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합법적인 수단을 통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기도 한다.

가난에대한 두려움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다!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강간, 그리고 기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고도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위치에 계속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가난은 범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그러니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자신의 동료를 신뢰한다고 하면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첫 번째는 늙음이 가난과 결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종교인들의 무자비하고 그릇된 세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은 '유황과 불' , '연옥' 그리고 악령에 대한 설법으로 대변된다.
이에 따라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힘든 상황이나 악조건의 끔찍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관련한 두 가지 원인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하나는 자신의 재물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유전법칙을 통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사후 세계에대한 끔찍한 그림 때문이다.
이에 비쳐볼 때 인간이 나이 먹어가는 것을 두려워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3. 타인의 비판 대한 두려움

인간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에겐 이러한 종류의 두려움이 잘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류 제작업자는 모든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 이를 충분히 상업화에 이용하고 있다. 분기마다 의상의 컨셉과 소위 '트렌드' '스타일'이라는 것이 달라진다.
도대체 누가 트렌드를 창출하는 것인가? 이는 의류 구매자의 몫이 아니고 의류 제조업자의 상술이다.
그러면 그는 왜 분기마다 스타일을 바꾸는 것일까? 의심할 바 없이 더 많은 옷을 팔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자동차 생산업체의 경우에도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선보인다.
의류 제조업자들은 인간이란 동물이 '지금 보두가 입고 다니는 옷'보다 한두 시즌 뒤처진 옷을 입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해도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는 동료의 파트너를 빼앗으려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의 대상이어야 할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그녀를 뻇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본래 남성은 천성적으로 일부다처의 속성을 지닌다.
모든 남성은 '일부다처의 속성이 본능속에 잠재해 있다'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적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거나, 혹 다른 연유로 성적인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경우일 것이다.
'제정신의 미치광이'가운데에서도 여자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자와 반대로 남자 때문에 질투의 화신이 된 여자만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형태의 정신장애를 개인적으로 몇번 경험하였을 뿐인데 이 경험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령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6가지 두려움 가운데서는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은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마음을 파괴시키고 황폐화시켜 때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이상의 현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기원을 파헤쳐보면 가난과 나이 먹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빈곤과 노력에 대한 두려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건강 상실도 - 자신이 실제 경험해 본 적이 없어도 -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끔찍한 세계'로 이끌기 때문이다.
때로 건강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정도 이상으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인간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건강요법과 치료물질들이 존재해왔다.
자신의 생계를 타인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모든 수단을 다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설득을 할 것이다.
이래서 결국 사람들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물려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6가지 두려움 가운데 최악의 것으로 꼽을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두려움의 끔찍한 고통은 종교적인 광신주의에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죽음에 관한 이러한 종교상의 책임은 다른 이유들을 다 보탠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사실 '교화된' 사람들, 특히 신학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답이 없는 질문들을 해왔다.
'어디서?' '어디로?' 인데 이것은 결국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영(靈), 혼(魂), 육(肉)에 대한 성경적 이해

사람의 본질 / 사람은 흙으로 만든 몸(육)에 하나님이 숨(영)을 불어넣은 살아있는 혼이다.

창세기 2: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히브리어로 영은 “루아흐”, 혼은 “네페쉬”
히브리어 성경에는 "혼" 이라는 단어인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살전서 5: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혼이란 사람 그 자체를 말한다.

출애굽기 12:15
-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먹는 자는"에서 "자"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라고 한다.

For seven days you are to eat bread made without yeast. On the first day remove the yeast from your houses, for whoever eats anything with yeast in it from the first day through the seventh must be cut off from Israel.

에스겔 18:20
-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The soul that sinneth, it shall die. The son shall not bear the iniquity of the father, neither shall the father bear the iniquity of the son: the righteousness of the righteous shall be upon him, and the wickedness of the wicked shall be upon him.

혼이란 생명체를 말한다.

민수기 31:28 -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네페쉬”가 포함되어 있음.

From the soldiers who fought in the battle, set apart as tribute for the LORD one out of every five hundred, whether persons, cattle, donkeys, sheep or goats.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12:7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원어 성경에는 신이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되어 있음.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 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 개역의 "신"은 개역개정판에서 "영"으로 개정되었음

누가복음 23:46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낙원이나 지옥에 간다.

누가복음 16:22~23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특별한 경우 (예수님과 요나)

마태복음 12:40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 2:6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 the earth beneath barred me in forever. But you brought my life up from the pit, O LORD my God.

*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에,
요나의 혼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 예수님의 몸은 돌무덤에 있고,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19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영은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 혼, 몸이 다 있는 모습니다.

 

영, 혼 , 몸의 관계

예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태를 닫으셨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영이 슬퍼하였고, 그녀의 혼이 괴로워하고, 자기 혼을 주 앞에 쏟아놓았으며, 그의 몸은 음식을 거부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며 기도하였다.

사무엘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In bitterness of soul Hannah wept much and prayed to the LORD. ”

사무엘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영, 루아흐)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혼, 네페쉬) 통한 것뿐이오니”

* 원어 성경에는 마음은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번역되어 있고 심정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번역되어 있음.

"Not so, my lord," Hannah replied,  "I am a woman who is deeply troubled. I have not been drinking wine or beer;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영, 혼, 몸의 기능

: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
: 인격을 갖추고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인격체인 사람을 대표함
: 생명체로서의 기능 유지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혼은 자기를 의식하고, 몸은 세상을 의식한다.”

* 개역성경에서 "영(spirit)" 은 생기, 영, 신, 혼, 마음, 유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고,
" 혼(soul)"은 생령, 산 영, 심정, 마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이단적 사상과 오류들, 동양사상과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 NIV 성경은 "영"은 spirit, ghost 으로 "혼"은 soul, living being 으로 번역 되었다.

* 하나님의 이름은 KJV, NIV 성경은 "the LORD" 로 표기 했고 개역성경은 "여호와" 로 표기했다.




2-3-2024(토) 누가복음 12: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외식을 주의하라(1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Meanwhile, when a crowd of many thousands had gathered, so that they were trampling on one another, Jesus began to speak first to his disciples, saying: "Be on your guard against the yeast of the Pharisees, which is hypocrisy.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성경에서 누룩은 두 가지 의미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좋은 의미의 누룩(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선한 능력을 드러낸다면 그 믿음은 모두에게 유익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나쁜 의미의 누룩((마 16:6. 막 8: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만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범법자로 드러나거나 잘못된 일의 주인공이 될 때는 그 사람 때문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은 발효하는 힘이 있습니다.
음식에 누룩이 들어가면 그 음식을 발효시켜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적당한 발효는 음식을 더 좋은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효과를 얻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전통 음식 김치가 발효 음식입니다.
요구르트와 같은 음료도 발효 음료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믿음은 먼저 사람에게 들어간 후에 그 사람이 변화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이란 "위선, 가장, 겉표정"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과 친절한 언어로 마치 다정다감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마구잡이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겉과 속이 항상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언제나 일치한 삶과 신앙을 유지했던 인물이 "욥(Job. 인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고의 부자로 소문이 났을 때에도 갑작스런 변화로 온 몸에 악창이 솟아나 개가 그 헌데를 핥아주는 것으로도 만족하며 감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부인이 "차라리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라"고 욱박지를 때에도 입술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까?
내 어려움이 욥보다 더 심한가요?
그렇다면 욥도 참고 인내한 것처럼 나도 참고 인내하는 훈련장에서 멋진 훈련병으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이 하루가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내게 주어진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외식하는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 구제, 기도, 금식

외식이란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것,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것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복음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복음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기도  

     복음에 합당한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갖추라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

1. 복음을 방해하는 외식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 가득한 삶을 산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을 것이 빤하다. 복음은 ‘진리’이다. 그에 반해 위선은 ‘거짓’이다.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거짓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거짓된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도 거짓으로 매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책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바리새인의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 더욱 돋보였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보다 더욱 감동하여 마음을 열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녀들을 교육할 때도 나타난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 취급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한 행동을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으로, 직접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오히려 그런 사랑을 전하는 우리를 위선자로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진리로 생각하고 사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누룩, 즉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숨길 수 없는 외식

외식은 반드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서 겉모습을 위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리 숨기려고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일시적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 앞에서 모두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죄지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에게 긍휼을 베푼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지만 그 죄를 계속 숨기게 되면, 다시 말해서 나는 죄가 없다고 계속 발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위선은 거짓이다. 그리고 그 거짓은 숨길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숨길 경우, 즉 계속해서 위선으로 도배할 경우,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막 3;29).

3. 심판에 이르는 외식

신앙의 결과는 심판대 앞에서 결정될 것이다.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를 더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끝에서 이번에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를 ‘외식하는 자’로 규정하시면서, 그 외식 때문에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고 경고하셨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7-59).

무리를 고발하는 주체는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 등이다(요 5:45;롬 11:2-3). 모세와 엘리야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도 고발의 주체가 되신다. 고발하는 자가 죄를 범한 사람들을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끌어가면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가장 사소한 죄 하나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그곳에서 영원토록 나오지 못한다. 여기에서 ‘감옥’은 심판 장소인 ‘지옥’을 의미한다. 마가는 지옥의 참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네 눈이 너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지옥에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위선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지옥을 자초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외식이 주는 매력, 즉 죄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죄는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다리가 하나 잘려나가도, 암에 걸려 내일 죽게 되는데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죄가 주는 쾌락을 지옥과 맞바꾸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 한가운데로 몰려드는 나방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무교병을 먹는 절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누룩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을 상징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 세상의 힘으로 절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는 유일한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누룩이 되어 떡 속에 들어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누룩은 천국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측에서의 공로나 노력, 죄와 자기 의 등을 상징하는 이중적 상징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는 반면에, ‘천국은 누룩과 같다’라고 모순되는 듯한 인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후자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의 배를 위해 내놓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까지 포함한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외식이 무엇이지요?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가족들을 위해 나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외식이라고 하지 않고 ‘성실’이라고 합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타주며 “평안하시죠?”라고 인사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인내와 순종이라고 합니다.
외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기와 자랑과 배를 위한 모든 종교 행위와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식은 반드시 사람들의 눈을 세상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6:6~12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논의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논의라는 헬라 단어는 ‘디알로기조마이’라고 합니다.
디알로기조마이는 ‘논쟁하다,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떡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으십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미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으로 오게 될 구원과 영생에 대해 거기 모인 무리에게 표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만나가 바로 하늘의 떡인 당신을 상징함을 말씀해 주셨고, “이 세상의 떡은 사람들의 배를 잠시 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곧 다시 배가 고프게 되느니만큼 너희들은 하늘의 떡인 나를 먹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니느웨라는 야만인들의 구원을 위해 삼 일간 물고기 배 속에서 갇혀 있다 나와서 니느웨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물고기의 먹이로 내주셨다가 회개하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풀어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벌이라 하지 않고 ‘고난’이라고 한 것이며, 마치 예수님께서 사흘 간 지옥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사흘간의 물고기 배 속의 경험을 ‘스올, 음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요나 2:2~3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꾸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님의 표적이 담고 있던 구원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기적으로 자기들을 만족시켜 달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깨달은 사람은 절대 눈에 보이는 기적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무관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깨닫게 된 복음처럼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부복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신부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보태어 자기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우물물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야망에만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피해 도망가시는데, 제자들이 떡 하나를 갖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제자 중에서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성경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자기가 먹을 떡 한 개만 달랑 들고 배에 탄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무려 떡이 일곱 광주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한 개만 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떡 한 개가 뭐냐? 이걸로 어떻게 이 많은 숫자가 여행 중에 요기하겠느냐?”라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떡 한 개 챙겨온 사람이 다른 모든 제자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정당함을 피력하고 있었겠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떡을 두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이 말은 “외식하지 말라.”라고 했지요? 외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힘으로 삼아 그것의 유무로 일희일비하며 사는 것, 이 세상에서 자기 배만을 위해 사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즘 말로 쉽게 의역하면 “너희들의 육신의 배를 위해 이 세상의 떡이 마치 너희들 인생의 목적인 양 소란 떨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인생의 목적이 자신들의 입신양명과 자신들의 인기와 자기들의 자랑이기 때문에 하늘의 떡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떡을 또 만들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피해 도망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역시 영생의 떡으로 오신 당신 앞에서 세상의 떡을 하나 들고서 온통 그 떡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누룩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누룩,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 손에 들린 세상의 떡에 눈을 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기껏 하늘의 떡이신 당신의 공로로 거저 주어지게 될 구원에 관해 설명해 주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게다가 제자들까지 누룩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경건한 종교 행위까지도 자신들 이익의 재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떡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경건한 종교 행위는 전부 외식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 독사의 새끼들이라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건의 열심은 반드시 다툼과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나를 자랑하는 데 몰두하게 되면 우리는 경건까지도 나 자신의 이익에 사용하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겉으로 드러난 경건한 모습과 도덕적, 윤리적 삶의 양으로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기나 자랑을 위해 경건한 행위를 일삼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교만과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과 다툼이 쏟아지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9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세계적인 여성잡지 ‘엘르(Elle)’의 편집장이며 준수한 외모와 화술로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하던 43세의 한 젊은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3주 후 그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고,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깜박이는 신호로 알파벳을 지정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한 문장을 쓰는데 꼬박 하룻밤을 지새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필자인 클로드 망디빌(Claude Mendibil)에게 20만 번 이상의 눈을 깜박여 15개월 만에 책을 한권 쓰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잠수종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이고, 그 책의 저자는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1952-1997)입니다.

잠수종이라는 것은 세월호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다이빙벨(diving bell)입니다.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다이빙벨 안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갇혀있는 몸이지만 그의 마음만은 하늘을 훨훨나는 나비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잠수복을 입고 다이빙벨에 갇힌 것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마음은 훨훨 나는 나비를 상상하며 삶을 긍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잠수종과 나비』라는 자신의 책이 출간된 지 8일 후에 자신을 옥죄이는 잠수종을 벗어던지고 나비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그가 쓴 책 제목과 같은 ‘잠수종과 나비’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전신마비라는 처참한 상황에서 ‘우리가 자연스런 들숨과 날숨을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불평과 원망은 행복에 겨운 자의 사치스런 신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그는 50센티미터 앞에 있는 아들을 보고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어서 눈물을 쏟아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는 위기 덕분이고, 일류는 이류 덕분이고, 고귀함은 고생함 덕분입니다.
상처는 상급을 기약합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넘어진 곳이 일어서는 곳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희망적인 때이고, 어두움에 질식할 것 같을 때가 샛별이 나타날 때입니다.
희망이 늦을 수는 있지만 없을 수는 없습니다.
별은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축복은 조금 멀리 있어 보일 때 오히려 인생의 보약이 됩니다.
늦게 주어지는 축복이 더욱 풍성한 축복입니다.
꿈과 희망은 영혼의 날개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절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꿈과 희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자 하는 꿈과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은 축복의 씨앗이고, 행복의 설계도입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삶을 바라보십시오.
힘들다고 느낄 때 진짜 힘든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절망 중에서도 마음속에 태양을 품고 온기를 느끼십시오.
바른 길로 이끄는 ‘상처의 표지판’을 긍정하며 내일의 희망을 향해 훨훨 나는 나비가 되십시오.’

43살의 젊은 나이에 전신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눈꺼풀 밖에 없었지만, 그는 훨훨 하늘을 나는 나비를 꿈꾸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출간한 지 불과 8일 만에 45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잠수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비처럼 이 세상을 훌훌 털고 날아갔지만,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가 가장 희망적일 때’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에 수없이 만나는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중에 하나인 ‘희망’의 능력입니다.

장 도미니크 보비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욥입니다.
43살의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어느 날 뇌졸중이 찾아와 그의 삶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처럼, 욥에게도 그런 시련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욥기 1:1절에 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짧은 말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께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정도로 바른 삶, 정직한 삶,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아들 7명과 딸 3명 등 모두 10명의 자녀를 주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에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재산도 많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의 재산목록을 공개합니다.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욥기 1:3)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말 성경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인격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부러운 사람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 인격의 탁월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 성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욥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젊은이들은 그 앞에서 숨었고, 노인들도 다 일어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읍의 유지들은 말을 삼갔고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성읍의 지도자들조차 욥 앞에서는 말소리를 낮췄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앞에서 조심했습니다.(욥기 29:7-10)
성읍 사람들이 욥을 그렇게 존경하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욥이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다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욥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그가 가진 재산 때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욥에게 도움을 받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욥을 좋아했고 존경했던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멈췄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훌륭한 인품과 칭찬받는 신앙,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욥이 10명의 자식들과 함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평생을 살았다는 것으로 결말이 났으면, 많은 사람들이 ‘욥처럼 살면 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욥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어느 날 스바 사람들이 욥의 소유인 소떼를 다 빼앗아가버렸고, 가축을 지키던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남아 있던 양떼와 종들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침공해 들어와 낙타도 다 빼앗아갔고, 칼로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 소식에 낙심되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10명의 자녀들이 큰 아들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거친 들에서 폭풍우가 몰아쳐 건물 모퉁이 기둥을 치자 건물이 무너져 10명의 자녀들이 한 순간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욥기 1:20) 욥은 그런 큰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합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자신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표현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욥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항변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내게 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둬가신다면 내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당신이 가져다신다는데 내가 뭐 할 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온 몸에 종기가 생겼습니다. 건강을 잃은 것입니다. 그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8절) 성서학자들은 욥이 겪었던 병으로 추정되는 ‘종기’가 ‘궤양성 피부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악성 질병은 고대 사회에서 악인들만 감염되는 두렵고 수치스러운 질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욥은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재에 앉았다는 말은 비탄과 굴욕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신이 겪는 그 질병으로 인해 욥은 깊은 슬픔과 아울러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몸서리를 치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온 몸은 악성 종기로 가려워 질그릇으로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보십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한 순간에 잃었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욥의 열 명의 자들이 결혼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자녀들은 아직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욥의 나이는 많아야 50대, 그렇지 않으면 40대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부자라고 표현될 정도로 부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금수저로 태어난 어떤 갑부집의 자식이 아니라, 그는 그 재산을 그만큼 갖추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생의 시간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수고하고 땀 흘리며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가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열 명의 자녀는 그에게 미래의 행복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도 그만큼 부러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많은 자식들을 낳아도 가진 것이 없어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면 불쌍한 가정이겠지만, 욥에게는 그런 걱정이 필요없습니다. 욥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이 생일잔치를 하다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지 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일잔치가 끝나면 아이들을 데려다가 정결예식을 행하고 하나님께 아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풍족한 생활로 인해 죄를 짓지 않을까 하는 걱정 외에 욥이 자식들로 인해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욥의 미래입니다. 욥이 자녀들을 위해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것은 자녀들이 미래가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식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고 삽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좀 힘들어도 자식들이 잘 되면 기쁩니다. 부모님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욥은 건강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자신의 현재입니다. 과거가 사라지고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려도 오늘의 내가 굳건하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다시 일어설 용기도, 희망도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 현재가 무너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한 것처럼, 욥의 아내가 그에게 “당신은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이라.”(9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욥의 아내가 욥에게 신앙을 격려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겠느냐? 그냥 죽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보다 뜻을 명확하게 하여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진 재산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버렸을 때에도, 그리고 애지중지 키우던 열 명의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었을 때에도 욥의 아내는 욥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건강을 잃고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고 맙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 많던 재산이 날아가버린 것이 더 아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장사지내야 했던 어머니로서 아마도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때 욥의 아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일을 겪었을 때에도 욥의 신앙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던 아내가 욥이 건강을 잃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저주의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과거를 잃은 것도 마음 아프고, 미래를 잃은 것도 희망이 사라졌기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나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현재를 잃는 것입니다. 현재를 잃으면 과거도 필요 없고, 내일의 희망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도 잃었고, 미래도 잃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현재까지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었음에도 왜 욥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욥의 아내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는 악성종기로 인해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겠느냐?’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말한 ‘온전함’은 욥의 온전한 신앙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욥이 가진 온전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었을 때 욥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비난하는 아내를 향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 어려움을 겪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은 철저하게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찌 화를 당하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도 모두 잃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저주로밖에 읽혀지지 않을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뭔가를 조금만 잃어도 마음에 분노와 불평이 가득해집니다. 욥처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든 것을 잃은 상황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내기 바쁩니다. 가진 재산을 조금 잃었다고 불평하고, 나의 자존심이 조금 짓밟혔다고 분노하고,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원망합니다. 자식의 문제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 때문에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보다 승진이 더디다고 화가 납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너무나도 큰 존재인데 어느 순간에 내 곁을 떠나거나 내 품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많은 것을 잃었다 한들 욥만큼 잃어보았습니까? 우리는 과거 하나만 잃어도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 다 잃고도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되면 생을 자포하자기 하고 신앙이 흔들리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을 모두 잃고도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전부가 아니라 현재의 일부만 잃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데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니 어쩌면 온전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던 욥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욥기 42장에서 기록한 것처럼 고난의 때를 온전한 신앙으로 버티어냈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풍성한 것들로 채워주셨습니다. 재산이라는 과거를 모두 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욥에게 지난날 가졌던 것보다 배나 많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미래인 자녀 열 명을 모두 잃었었는데, 그 미래를 그대로 보상해 주셔서 열 명의 자녀를 다시 낳게 하셨습니다. 물론 건강이라는 현재의 삶도 온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서 온전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신앙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온전한 신앙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도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비비어(John Bevere)가 쓴 『광야에서』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우리네 인생길을 걸어 살아감에 있어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팁’을 제시하면서 그 열 번째 생존팁으로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는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기가 너무도 쉽다.
그래서 당신에게 작은 비밀 하나를 알려 주고 싶다.
정말이지 내가 광야에서 살아남고 번영하는데 큰 도움이 된 비밀이다.
나는 이것을 ‘비밀의 기쁨 약’이라고 부른다.
외적으로는 즐거운 일이 없을 때,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때,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이 해 주신 일을 다시 떠올린다.
예수님이 불이 꺼지지 않고 유황냄새가 그치지 않는 지옥에서 나를 구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고문, 그 지옥은 내가 아닌 마귀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마귀는 인류를 속여 수많은 사람을 그곳으로 함께 데려 간다.
하지만 창조주 예수님이 나를 그곳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생명을 내어 주셨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며 감사의 태도로 돌아서서 영원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때, 갑자기 눈앞의 상황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감사해야 할 모든 것을 돌아보며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 이것이 내 비밀의 기쁨 약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내게서 사라질 때, 심지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인도하신 구원의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만 바라보십시다. 그것이 온전한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온전한 신앙을 갖고 살면 욥을 회복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유대 지도자들이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16:6. 막 8:15)
이러한 경우 '누룩'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 반면 마태복음 13:33에서는 좋은 의미로 표현됩니다.

이와같이 누룩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누룩'이 '파급적 효과'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의 본래적 의미는 '배우', '각색'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위선'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위선은 11-37이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위선의 파급 효과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고(11:44)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52).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5272

1. 위선.  2. 가장. 3. 겉 표정
발음 [ hüpŏkrisis ]
어원 / 527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선, 가장, 겉 표정, 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약 5:12, 벧전 2:1.

오래 전에 일본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도시에 매우 진실하고 경건한 부인이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외출을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자동차들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역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집 가까이 다가갔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 부인의 집에 화재가 나서 집이 몽땅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후에 탄식하며 "아이구, 이제 망했구나!" 하고 슬퍼하더랍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말을 하였는데 막상 내 집이 불에 타서 시커먼 재로 변했을 때는 감사가 아니라 망했구나 하고 외치는 것이 과연 신앙의 본 모습일까요?


어떤 독일인이 혀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결국 혀를 잘라야 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의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수술이 끝나면 그는 입으로는 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눈과 손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그로서는 마지막 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그가 최후로 할 말은 무엇일까?
의사나 가족이나 간호원 모두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 조용히 감은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그의 입술을 통하여 흘러나온 말은 "주님, 감사합 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친구나 친척들 그리고 아끼던 것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른 최후의 이름은 "주님"이었고 남긴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멘으로 감사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에는 이유도 항변도 조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 눈을 감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라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사 신앙의 소유자가 됩시다.

누가복음 12:1-3 /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학자/율법선생]들의 외식을 책망하며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1:37-52).
1. 바리새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씻지만, 그들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2.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3.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4. 서기관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면서도, 너희는 스스로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5. 서기관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민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그들 조상들의 증인이 되며, 그들이 저지른 소행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여 그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는데, 이제 그 뒤를 좇아 서기관들이 의로운 자의 피 흘림에 있다. 이러한 그들은 아벨의 피에서부터 시작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6. 서기관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예수께서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책망하시자,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은 앙심을 품고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구실을 찾고자 악의적인 마음으로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지며 기회를 노렸습니다(눅 11:53-54).

그러한 동안에 사람들은 수없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어서 예수님 주변은 서로 짓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주의하라며 경계하게 하는 말씀을 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까닭 없이 괜히 그들을 미워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행하는 모습에서 선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은 외식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인 외식은 그들에게 있는 외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는 외식은 곧 온 유대인에게서 행해지고 있는 외식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선함이 없다는, 그래서 그들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겅건한 모양으로 치장한 몸과 그 행하는 일로 비록 선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는 선을 가장한, 그러니까 위선이라는 포장이요 가면일 뿐입니다.
포장 속에는 담겨 있는 내용물이 있으며 가면 속에는 실제의 얼굴이 있듯이, 위선은 영원히 그들의 본 모습의 얼굴을 숨겨 두지 못합니다.
그들의 위선은 떡덩이 속에 든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에 의해서 떡덩이는 크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떡덩이 속에는 누룩이 든 것을 압니다.
그러니 위선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본 모습인 악함이 드러납니다.
감추어 놓은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 숨겨 놓은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 있을 수 있었으며, 숨겨져 왔습니다만 언제까지나 그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그 실체는 감추어지지 못하며 숨겨지지 않고,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일지라도 밝은 대낮에 들리는 말이 되어서 위선자들의 위선을 환하게 드러낼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한 말이지만 지붕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만한 외치는 소리가 될 것이므로 위선자들의 위선은 감춰지지 못하고 누구나 알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이 있는 곳에서는 위선이 자리 잡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성에 의한 악독과 탐욕에 있는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나갑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 모두를 몰아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악독과 탐욕에 의한 위선이 자리할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없이 행하는 것에는 그것이 정결의 규례를 지키고 십일조 규례를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세밀히 가져나가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모두는 악독과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 것에서 가져나가는 외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그러한 행함이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에 의하여 하는 것이므로 아주 작고 적은 소소한 것일지라도 무시되지 않으며 선하며 존귀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외식이 결코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무릇 할 마음만 있으면 힘써 할 것이요,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를 힘입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죄 사함과 의를 힘입음에 있으므로 우리가 행하는 믿음 생활에서 선을 가장한 위선이 제거되고 외식의 포장이요 가면이 벗겨져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되며 받으심에 있습니다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온 유대인들에게서 드러내 주신 것에서 보는 외식을 주의할 것의 권면을 가볍게 여기고 한 귀로 흘려보내듯이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몸에 있는 한에는 육은 영을 거역하며 대적하는 유혹인 육의 욕망이 언제든지 꿈틀대며 그 기회의 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분을 아는 지식의 견고함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자신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 주시고 있는 권면, 주의에 주목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3-16)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있는 우리를 단 하루도 어둠에 갇혀 있게 하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진리가 비춰주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 아래에 있는 어둠이 물러가게 하므로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에, 단 한 시도 어둠의 지배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에 있을 틈이 없는 것은 어둠을 지배하는 빛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빛에 의하여 확연히 드러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있는 믿음은 외식에 있는 위선이 아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에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는 것을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5272

1. 위선.  2. 가장. 3. 겉 표정
발음 [ hüpŏkrisis ]
어원 / 527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선, 가장, 겉 표정, 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약 5:12, 벧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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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 24장 (11-13-2023 / 월 - 02-02-2024 )





영국의ㅡ설교자 "스펄젼목사" (Charles Haddon Spurgeon, 1834년 6월 19일 ~ 1892년 1월 31일 )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불란서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blɛz paskal], 1623년 6월 19일 ~ 1662년 8월 19일 )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도 아니고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의 하나님이다.
신앙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절대적 믿음

1. 성경에 기초를 두라

2. 감각에 의존하지 말라(감각을 극복하라)
요 11장 나사로의 죽음

3. 경험에 의존하지 말라
- 깊은 곳에 가서 고기를 잡으라(베드로의 경험)
누가 5:6

4. 눈으로 보고 믿지 말라
- 우상을 만드는 이유가

하박국 2:18
예레미야 2:16
요한복음 20:29



(예) 데칼트의 의심


 






04-27-2024(토) 누가복음 24:36-5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평강이 있을찌어다(36절)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While they were still talking about this, Jesus himself stood among them and said to them,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Peace be with you)"
에이레네 휘민(ειρηνη ὑμῖ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아직까지도 제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기준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오직 예수님이 그 기준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람의 육체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 Natural Body)  사르크스( sarx ) σάρξ
둘째는 시체(屍體. Dead Body) 소마( sōma ) σῶμα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Spiritual Body) 소마 프뉴마티코스( sōma pnĕumati-kŏs ) 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ς   


육체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말합니다.
육체에서 호흡이 멈추면 사람의 몸은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된 사람의 몸이지만 부활 후에는 전혀 새로운 몸 즉 부활체가 됩니다.
부활체에 대한 근거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와 같은 말씀에서
부활체의 특징은 영이 아니라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9절).
부활체의 특징은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41-43절).
부활체의 특징은 어느 공간이든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36절)

부활의 기준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 행하신 삶의 모습에서 장차 우리들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음식도 먹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몸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대로 믿습니다.
새롭게 변화된 영광스런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그 날을 소망 중에 기다립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첫째는 육체(肉體) Natural Body 고린도전서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All flesh is not the same: Men have one kind of flesh, animals have another, birds another and fish another.


둘째는 시체(屍體) Dead Body 누가복음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but didn't find his body. They came and told us that they ha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he was alive.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Spiritual Body

고린도전서 15:44.  46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it is sown a natur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If there is a natural body, there is also a spiritual body.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 부활한 예수의 출현이 세번째 언급된다.
이 이야기는 부활 예수에 대한 체험의 체험적이고 종합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구성상으로 베드로와 글로바 일행이 각각 경험한 부활 예수의 체험은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증인으로 선 가운데서 종합되고 확인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려는 누가의 치밀한 의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글로바가 경험한 부활한 예수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적 만남을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서의 부활한 예수는 육체적 부활을 증명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고있다.
그러나 요 20:19에 따르면 문을 닫아 두었는데도 들어왔다고 표현함으로써 영육(靈肉)에 구애를 받지 않는 신비한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영과 육을 종합하여 영과 육의 부활을 균형있게 언급하려고 하는 듯하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인사는 요 20:19, 20에서 두 번 거듭되고 있는데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하는 인사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 인사는 단순한 인사말이라기 보다는 부활한 예수의 시대에 평화(平和)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하였듯이(2:14) 부활한 예수가 머무는 곳 그리고 예수를 만나는 모두에게 '평화'(에이레네)가 있으라는 축복의 말씀이다.

어떤 대학교수가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종이를 한 장 주면서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꼭 가지고 싶은 것을 적어보라고 하였다.
이 제자는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그 종이에 열심히 적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러한 것들을 적어 교수님에게 보여드렸다.
교수는 그가 적은 내용들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그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온 것들은 매우 훌륭한 것들일세.
그리고 일리 있는 내용일세.
그러나 자네는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가졌다 해도 오히려 그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거리가 될 지도 모르네.”

이 청년은 깜짝 놀라면서 “교수님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그 교수는 연필로 그 청년이 적어온 목록에 Ⅹ로 그어버리고 그 밑에다 ‘마음의 평화’라고 크게 써 주었다.

이 청년은 크게 깨달았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명예보다, 사랑보다, 권력보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 이 청년은 평생 동안 그 어떤 것보다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살았고, 나중에는 ‘마음의 평화’라는 책을 썼는데 수백만 부가 팔렸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죠수아 리브만(Joshua Liebman, 1907-1948)’이라는 사람이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건강도 챙겨야 하고, 돈도 남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명예와 권력도 얻어야 하고... 어쩌면 이런 것들이 우리를 더욱 초조하고, 불안하게 하는 건 아닐까요?
얻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반칙에도 무감각하고, 타인의 희생은 무시하고...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두려움입니다.
반대로 가장 큰 행복은 평강, 즉 샬롬(shalom)인데요, 샬롬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돈, 명예, 권력보다는 마음이 평화로와야 행복하고, 진정한 부자가 된다는 뜻이겠죠. 모두 마음만은 '부자' 되세요~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청년은 후에 “마음의 평화”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그 책은 1946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데요, 그 청년은 죠수아 리브만 (Joshua Liebman, 1907-1948)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9,  21, 26)

「평강」이라는 말은 평화, 평안, 화평이라는 말이다.

수 천년동안 강대국들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온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서로 만날 때마다「Shalom」이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즉,「평화」「평안」이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평화, 평안이다. 돈 가지고, 권력가지고, 지식과 명예로 평화와 평안을 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처럼 찾고 있는 진정한 평화와 평안을 찾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세상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험악해져 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 명예, 지식, 결혼 그 자체에 평화가 없다는 증거이다.

한 쌍의 젊은이의 결혼을 주례하던 주례자가 서약을 하게 되었다. “신랑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신부를 사랑하며 백년가약을 맹세 하겠습니까?” 그러자 신랑이 “2-3년은 살아봐야 알겠는데요. 그리고 저 이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대머리여서 가발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찬송을 불렀다. 평화를 주려고 주님은 오셨으나, 인간은 불안과 갈등, 초조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존 가드너」라는 사람은 「자아의 재생」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만일 행복이 물질적인 것을 갖는 데서 온다고 생각하면 미국에 사는 사람은 다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우리의 비극이 있다.」

지난 2007년 9월 20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2002년 미국의 사업가인 잭 휘태커(59세)씨는 무려 3억1490만 달러에 달하는 파워 볼 복권에 당첨되었다. 이것은 복권 역사상 가장 최고의 금액이었다. 우리 돈으로 3 천억 원이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복권이 당첨된 이후로 5년 만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460건의 소송에 연루되었으며, 음주와 도박, 연애행각, 음주운전 등으로 잇따라 불행이 겹쳤다. 그는 “복권 당첨 후 나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 그 놈의 복권이 나를 망하게 했다.” 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였다.

C 폴록=행복이란 과잉과 부족의 중간에 있는 조그마한 역이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며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평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평화는 아무 데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이 세상에는 참 평안이 없는가?

그토록 사람들이 갈망하고, 평화와 평안을 위하여 많은 조약이 체결되고, 유엔이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은 날이 갈수록 불안하고, 전쟁의 위험은 더욱 높아져 가고,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는가?

어떤 사람의 입에서도 ‘평안하다, 라는 말을 들어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①우리 마음에 있는 죄 때문이다.

죄는 평안을 파괴한다. 죄가 자리 잡고 있는 한, 우리의 마음에 또는 인간세계에 평안이 있을 수 없다. 죄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모든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마음속에 죄가 자리 잡고 있는 한, 돈 방석, 권력의 의자, 지식의 최고봉에 앉아 있어도, 그 심령이 평안할 수 없다.
죄인은 개 짖는 소리에도 놀라고,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하기 마련이다.
영국의 속담에「죄인은 생쥐 발자국 소리에도 놀란다.」라는 말이 있다.
시38:3=「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죄악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평안을 방해한다. 죄라고 하는 것은 범하기 전에는 좋아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행복해 보여도, 일단 죄를 범하고 나면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알게 되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 같았고,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보여 먹고 싶은 생각과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것을 따먹었다.

그런 다음 그가 행복하고, 평안했는가? 마음에 평화가 있었는가? 평안은 모두 사라졌다. 두렵고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고, 숨었다. 그렇다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감추어지고 숨어지는가?

「미국의 유명한 뉴스 해설가인 폴 하비(Paul Harvey)는 추운 지방에 사는 Eskimo인들이 늑대를 어떻게 잡는가? 에 대한 특별한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Eskimo인들은 늑대를 잡기 위하여, 날카로운 칼날에 짐승의 피를 묻힌 후, 그것을 얼린다. 칼날에 피가 얼어붙으면 그 위에 다시 피를 묻히고 다시 얼린다.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을 하면 나중에는 칼날이 얼어붙은 피 속에 숨겨지게 된다. 이 칼을 늑대들이 잘 다니는 곳에 칼날이 위로 오게 묻어둔다. 늑대는 피 냄새를 맡고 곧 다가와서 얼어있는 피를 혀로 핥기 시작한다. 계속 핥으면 마침내 날카로운 칼날이 나타나지만 늑대의 혀는 이미 차가운 얼음을 핥는 중에 감각이 없어져 자기의 혀가 갈라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열심히 핥는다. 늑대는 마침내 피를 많이 흘려 쓰러져 죽는다는 것이다.」

죄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지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이라는 생각도, 감각도 없이, 죄짓는 재미에 빠져, 열심히 죄를 지으나, 결국은 자기를 망하게 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죄악을 품고 있는 한, 참 평화가 없는 것이다.

②문제를 자기가 지고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절대자가 아니며, 초능력자가 아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처럼 한 없이 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다보면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이런 문제를 자기가 짊어지고 가지 않는다. 하나님께 모든 삶 전체를 맡기는 것이다.

빌4:6-7=「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짐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느 무더운 여름 청년 한 사람이 예배당 앞을 지나다가 호기심에 끌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강단 뒤로 까만 휘장이 쳐져 있고, 그 위에 하얀 글씨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마11:28의 성경말씀이 쓰여 있었다.
청년은 그 글씨를 보고 ‘이곳은 예배당이 아니라 휴게소로군’하면서 코웃음을 치고 예배당을 나와 자기의 갈 곳으로 가버렸다.

그로부터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청년의 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산다는 것이 너무너무 힘이 들었다. 모든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죽고만 싶었다. 청년은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죽을 곳을 찾아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가고 있는 길은 자신이 바로 1년 전에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한참 가다보니 십자가 종탑이 보였다. 그는 문득 1년 전에 자신이 그곳에 들렸던 일과 성경구절이 생각나게 되었다.
청년은 교회로 들어가 목사님을 만나고, 그 성경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였다. 청년은 새 사람이 되었다. 죽으러 가던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후에 크게 성공하였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내 짐을 내가 지고 가려고 할 때, 평안도 평화도 없다. 주님께 맡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 참된 평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평화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 평화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평화이다.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변함없는 평화이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평강을 주시는가?

①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이 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19-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자신이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또한 다시 사셨음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그의 부활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지만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는 반신반의의 상태에 있었다.

이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못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시면서「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가 그 믿음의 결과로 받는 주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의 샘이 솟을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살렸다. 나의 모든 죄를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깨끗케 하였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살 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원망과 불평, 불안한 마음은 사라질 것이며, 구원의 기쁨과, 감격,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두 기둥이다. 이것이 없이 기독교는 존립할 수 없다.

「인도의 Nallamalam 이라는 곳에서 선교하던 한 선교사가 이런 간증을 했다. 인도 여인 한 사람이 매우 남루한 옷을 입고 늘 예배에 참석하였다. 예배의 분위기에 적절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지장을 주어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 부인에게 물었다. “왜 항상 그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합니까? 다른 옷이 없습니까?” 여인이 대답하기를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이 내게는 제일 좋은 옷입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다시 묻기를 “당신은 그렇게 가난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가난하다면 자비로라도 옷을 한 벌 사주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선교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전에는 보석도, 돈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친척 한 사람이 재산을 모두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만 버리면 빼앗아간 돈과 보석들을 모두 다시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다시 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이 때 그 여인은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많은 돈을 가지고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러한 확신과 감격 속에 살았기 때문에 매우 남루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여하고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마음에 평화가 충만했던 것이다.

여러분이 진정한 평안과 평화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확신하기 바란다.

②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 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21)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도 너희를 보낸다.” 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 보내신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릴 것이다.

제자들은 선교사명을 부여 받았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역은 이제 다 끝나고, 이제 제자들에게 그 사역을 위임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해야 할 사명이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다. 결국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래서 엡6:15에 「평안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복음이 평안의 소식이라면, 이것을 전하는 사람도 역시 평안을 마음껏 누릴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열심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을 살리는 운동에 힘을 써야 한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의 평화가 넘칠 것이다.

눅10:에는 예수님께서 70인의 전도 특공대를 파송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눅10:17에 보면 이 70인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하는데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하였다. 전도하는 자의 기쁨이다.
여러분 모두도 이러한 기쁨과 평화를 소유하시기 바란다.

③신앙을 회복하는 사람이 이러한 평강을 누릴 수 있다.(26-27)

주님께서 이 자리에 다시 오신 것은 도마의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도마는 여러 다른 제자들의 중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였다.

성경은 믿음이 귀하다고 말씀한다. 계2:9에 믿음이 있는 자를「부요한 자」라고 말한다. 벧후1:1에서는 믿음을「보배」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이는 믿음이나 만져지는 믿음이 아니다. 사실 가장 좋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공기, 사랑, 천국, 하나님, 성령 등은 귀한 보배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느낌이나 눈에 보이는 것은 수시로 변한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무엇을 보고 믿으려 한다면 그러한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으며, 결국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고후4:18=「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벧전1: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런데도 도마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내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돈을 잃어버렸을 때 마음 아파한다.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는 더욱 마음 아파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는 더욱 비통해 한다.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자 애쓴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리고 나서는 무감각하게 지낼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한다. 피조물이며 죄인 된 인생의 진정한 평안과 행복은 믿어야 할 것을 믿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심 많은 도마가 신앙을 회복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에게「예수님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영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세상에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늘의 평안과 평화로 가득 찰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평안하게 해줄 수 없다.
돈, 권력, 명예가 우리를 평안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평안하게 하실 수 있다.

요한복음 14:27
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면서 온갖 인간의 고통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안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실 수 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밤에 런던시를 배회하다가 야경에게 붙잡혔다.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경범죄로 투옥되어 하룻밤을 감옥에서 지내고, 이튿날 석방되어 궁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궁전에서는 왕이 갑자기 없어져 큰 소동이 일어났다. 헨리 8세는 자기가 냉방에서 하루 저녁 고생을 하고나니 감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되어 그 다음날부터 감옥마다 석탄을 넉넉하게 보내주고 죄수들에게 빵을 푸짐하게 주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이 경험해보니 그 고통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런 분이시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양적으로 다르다.
세상에 시달려 피곤에 지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따뜻한 평안과 평화가 넘치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평안과 평화는

1.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2.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증거에 열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임한다.
3.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04-26-2024(금) 누가복음 24:25-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을 풀어 주실 때(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They asked each other, "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opened the Scriptures to us?"

* 말씀하시고(라래오. lalĕō)  λαλέω 스트롱번호  2980

1. 소리를 내다.  2. 말하다. 3. 주장하다
발음 [ lalĕō ]
말씀하다(마 9:18, 눅 1:70), 말하다(마 10:19, 막 14:9, 딛 2:15, 계 10:3,4), 이르다(마 14:27, 눅 2:20), 이야기하다(눅 9:11), 전하다(요14:25), 가르치다(막 4:33), 화답하다(엡 5:19), 말을 하다(유 16).

* 성경(그라패. graphĕ) γραφ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124

1.기록된 것.  2. ἡ γ      3. 성경전체.
발음 [ graphĕ ]
어원 / 1125에서 유래
성경(마 21:42, 요 2:22, 고전 15:3, 약 2:8, 벧전 2:6, 벧후 1:20), 글(마 26:56, 행 8:35, 롬 16:26), 말씀(약 4:5).


* 뜨겁지(카이오. kaiō) καίω 스트롱번호 2545

1. 불붙이다.  2. 등불을 켜다. 3. 마음이 타다
발음 [ kaiō ]
켜다(마 5:15, 요 5:35, 계 4:5), 뜨겁다(눅 24: 32), 사르다(요 15:6), 불사르다(고전 13:3), 불붙다(히 12:18), 타다(계 8:10, 21:8), 붙다 (계19:20).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행위었다.
한편 이와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성경을 해석해 줄 때 - 한국교회 초기 성경을 글자로만 이해하던 시대

(예) 가이사랴 빌립보 : 개(가이), 상해(상하이) 개를 사러 빌립보에 가셨다
(예) 본디오 빌라도 : 빌라도의 성이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가며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두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뜨거움이 느껴질 때가 언제일까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감사할 때

감사(感謝)는 마음이 열렸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늘 건강하기 때문에 건강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건강해 질 수 있는 치료법을 찾았다든지 아니면 완쾌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감사할 것입니다.

둘째는 찬송할 때

찬송(讚頌)은 내 마음을 감동하는 자극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울 때에 노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환경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은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깊은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감동을 기도하며 말씀에서 쏟아지는 깨달음이 날마다 새롭게 각인되는 은혜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기도할 때

기도(祈禱)는 내게 필요한 것을 청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필요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이 땅에 머물게 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바르게 깨닫고 그 일에 정성을 쏟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르게 하소서

오 하나님,
이제 나는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만을 섬기고자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참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지배하에 거하고자 합니다.

기도하오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소서.
그러나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치료하여 열어주소서.
주님의 손짓을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치료하여 뜨게 하소서.

주님이 누구이신지 바로 식별할 수 있도록
나에게서 망상을 쫓아내주소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말씀해주소서.
주님이 명하시는 모든 것을 나는 따르기 원합니다. 아멘.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행위었다. 한편 이와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영적인 눈이 열리는 비결

결국 두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고 엠마오 근처에서 여관을 잡으면서 주님께 자기들과 함께 계셔달라고 부탁을 했고 주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관에서 식사하실 때 주님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그 떡을 먹자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고 그들은 그때서야 주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는 몇 가지 비결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감사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30절에서 축사한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말인데 감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축사하다(2127) 유로게오

εὐλογέω 스트롱번호2127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3.

눅24:50

발음 [ ĕulŏgĕō ]
어원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좋게 말하다, 찬양하다, 격찬하다, 마14:19, 26:26, 막6:41, 14:22, 눅1:64, 2:28, 24:30,53, 고전14:16, 약3:9.
  • 2.
    [하나님의 은혜로운 능력을 불러내는 것으로서의] 축복하다.
    • a.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눅24:50, 히7:1,6, εὐ. τοὺς καταρωμένους: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하다, 눅6: 28, 롬12:14, λοιδορούμενοι εὐλο γοῦμεν: 모욕을 당할 때 축복하다, 롬12:14, 고전4:12, 벧전3:9.
    • b.
      사물에게 축복하다, [신에게] 바치다, 마8:7, 막6:41, 14:22, 눅9:16.
    • c.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주어로 가질 때] 복을 내리다, 복을 주시다, 행3:26, 엡1:3, 히6:14, [수동으로] 마25:34, 눅1:42, 갈3:9.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축복하다(막10:16, 고전10:16), 축사하다 (마14:19, 막6:41, 눅24:30), 찬송하다(마23: 39, 막11:9, 눅2:28), 복을 받다(갈3:9), 복이 있다(눅1:42), 복을 주다(행3:26, 히6:14), 복을 빌다(히7:6, 벧전3:9).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으면 눈이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신비하게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또한 서로 감사의 말을 할 때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신앙인의 최고 인격이고,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감사하는 삶이 없이는 행복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 공동체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욕구불만과 시기와 질투를 가지면 절대 창조적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진정 아름다운 것이 많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떡을 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을 모르고 있었고 그저 낯선 좋은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낯선 분과 사랑의 떡을 떼는 순간 그들은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낯선 분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떡을 함께 뗄 때 우리의 눈은 밝아지고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정 나눔 속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것이며 그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떡을 떼어야 하고 이웃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성도임을 내세우고 주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공동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겁고 영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이웃의 형편과 신앙과 사정을 살펴주는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 삶에 있어서 큰 의미의 행복과 축복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부자란 누구일까요? 돈이 있고, 차가 있고, 집이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남과 나눌 것이 있고, 나눌 마음이 있는 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누구일까요? 판자집에 살고, 돈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남과 나눌 것이 있어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사실상 가난한 자일 것입니다.

물은 계속 퍼내야 샘 근원이 튼튼해지고 맑은 물이 더욱 생겨나듯이 우리도 소중한 일을 위해서 우리의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정으로 삶과 사물을 보는 변화된 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떠질 때 우리의 눈이 변화되면 이웃도 달리 보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우리에게 시야의 변화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말씀을 듣고 뜨거워질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떡을 뗀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 그 순간에 주님은 신비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제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들은 순식간에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변화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주님은 말씀 속에서 현존하신 주님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말씀을 진지하게 붙들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뜨거워졌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지하게 성경 말씀 앞에 서서 말씀을 받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생각으로 재단하지 말고, 자기 취향에 따라 변질시키지도 말고, 말씀 앞에 정직해지시고, 말씀으로 수술 받을 각오를 해 보십시오. 어떤 다른 희한한 신앙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신앙은 선전이 아닙니다. 다만 진솔하고 겸허하게, 들으려는 심정을 가지고 말씀 앞에 서 보십시오. 그러면 진정으로 말씀 안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뜨거워 졌다는 것은 진리에 접촉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 졌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32) 뒤늦게나마 깨달은 두 사람의 고백은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을 상상할 때 인간의 마음은 싸늘해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식어진 인간의 마음은 다시 뜨거워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식어졌다면 말씀의 깊은 세계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쉬임  없이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아드릴 때 가을볕에 잘 익은 열매처럼 속사람이 영글어 갈 것입니다. 마음도 가슴도 뜨거운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의 뜨거워지자 예수님을 노상(路上)에서 숙소로 모시는 아름다운 인간미가 되살아났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면 사람이 사람다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지 않을 때 매사가 억지가 되고 억지로 하는 모든 일은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기도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봉사하면 오히려 기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성경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교회 오면 기뻐서 날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전도하면 욕먹어도 기쁩니다.

뜨거워진 마음은 사랑의 동력이 된다

찬바람 부는 인간의 싸늘한 마음에서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눈 속에서 할미꽃을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음이 뜨거운 자만이 우정과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자, 친절하자"고 아무리 결의 대회를 열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고 마음에 열이 오르면 친절하지 말라고 해도 친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지자 예수님을 길가에 혼자 남겨두지 않고 숙소로 모셨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사람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으로 감화 받은 사람은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합니다. 성령에 감동된 뜨거운 마음은 남의 처지를 그대로 보고만 넘기지 않습니다. 뜨거워진 인간의 마음은 밤길을 홀로 가는 외로운 나그네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동행하는 복된 신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만나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영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는 마침내 영에 눈이 열려서 부활의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영의 눈이 열립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비젼이 생깁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용기가 생깁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십자가에 죽어 장사되어버린 절망의 예수가 아니라 무덤을 헤쳐 버리고 다시 사신 부활의 예수님을 그들은 발견했던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부활의 확신과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하여 도망가던 제자들이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뜨거워진 마음은 그들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비극은 그들의 발걸음을 석양에 지는 낙조를 향하게 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들은 더 이상해지는 서산을 향해 내려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해 뜨는 동쪽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기독교의 행진은 해 지는 쪽을 향한 석양의 행진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벽의 여명을 찾아가는 새 아침의 행진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떠나왔던 예루살렘은 더 이상 공포의 도시가 아니라 영광의 새 아침이 밝아오는 희망의 동산이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까? 이제 해 뜨는 동쪽으로 여명의 아침을 향하여 힘차게 행군합시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전진형의 인간이 된다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태웠고 그들이 외쳤던 부활의 소식을 싸늘한 대지에 훈훈한 열기를 일으켰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증거하는 그들의 행진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뜨거워진 마음이 주님의 부활을 외치고 전진할 때 인류는 소생의 길을 되찾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말씀의 진리로 뜨거워진 기독신자의 발전과 전진을 가로 막을 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그 무엇도 우리의 행진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진은 언제나 해 뜨는 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하나님의 백성은 밤을 향하여 돌아가지 않습니다. 일이 좀 힘들고 고달프다고 해서 낙조를 향하여 엠마오로 가는 사람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식어버린 사람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이제 새벽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어둠을 뚫고 나가는 사람만이 새벽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 된다

결국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뜨거운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곧 엠마오를 거의 다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극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돌아가니까 정말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이 두 제자도 자기들에게 있었던 일을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됩니다. 신앙이란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끼면 하나님은 커지고 문제는 작아져 보입니다. 사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동안 잠들었던 마음이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분발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롭게 깨우쳐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떨칠 수 있는 존재로 부활하시길 바랍니다.


슬픔의 터널을 잘 통과하고 나면, 이제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욕망으로 슬퍼하며 살던 존재에서 사랑으로 기뻐하며 사는 존재로 말입니다. 그렇게 거듭남, 그렇게 다시 태어남,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제 잠들었던 마음을 깨웁시다. 슬픔과 절망, 불확실한 자기의 미래와 불신앙의 터널을 통과하여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서 당당하게 기쁨으로 살아가는 부활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경건의 삶을 사신 여러분, 이제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로 연합된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절 기도(최효섭 목사)

그리스도여 당신은 오늘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은 오늘 나의 관을 깨뜨리고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 속에 가득 찬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나의 영혼에 차는 소망의 기쁨입니다.

주여, 이 새봄에 나의 마음 밭에 오소서.
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 당신이 오시면 어제의 슬픔이 가고
당신이 오시면 저 밝은 하늘 열리고
당신이 오시면 미움도 사라지고
당신이 오시면 마음과 마음 다시 만나고
당신이 오셔야 사람다운 사람,
남편다운 남편, 아내다운 아내, 자식다운 자식이 되겠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여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게 하시고
먼지가 묻어도 빨리 털어 내게 하시고
미움을 품고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하소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말랐던 뿌리에서 백합의 미소가 피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어두운 태에서 생명의 울음이 터지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며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않게 하소서.

갈 길이 멀다고 걱정만 하지 말게 하시며
지나온 길 되돌아보지 않게 하시고
어둠이 와도 외로워하지 않게 하소서.

몽치가 다가올 때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배반하는 제자에게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십자가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오 주님!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내 생각이 넓은 하늘 되게 하시며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나의 무덤을 헤치고 새롭게 태어날 힘을 주소서.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시고
미래를 설레는 흥분으로 기다리게 하시며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꿈꾸게 하시며
알지 못해도 소망으로 전진하게 하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이 봄, 이 부활절에 나도 새 출발하게 하소서.
'두려워 말라’(마 14:27) ‘염려하지 말라'(마 6:34)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오늘 새 출발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선장이시오 진정한 후원자,
주님은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자 시오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품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최후까지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나도 오늘 부활하게 하소서. 아멘.



감사하다

εὐχαριστέω 스트롱번호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ĕucharistĕō ]
어원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감사하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다, 눅18:11, 롬16:4.
  • 2.
    감사하다, 감사를 돌리다, 눅17:16, 행28:15, 고전14:18, 빌1:3, 골1:3,12, 3:17, 살전5:18등.
    • a.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고전14:17.
    • b.
      εὐχαριστῶ τῷ θεῷ: 하나님께 대한 감사.
  • 3.
    기도한다.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축사하다(마15:36, 막8:6, 행27:35), 감사 기도하다(마26:27, 눅22:19), 감사하다(눅 18:11, 요11:41, 고전10:30).

찬송하다

ψάλλω 스트롱번호5567
1.

노래하다

2.

찬송하다

3.

롬15:9

발음 [ psallō ]
어원
미래 ψαλῶ, ψάω ‘문지르다’에서 유래 [강조형]

뜻풀이부

  • 1.
    노래하다, 찬송하다, 롬15:9, 고전14:15, 엡5:19, 약5:1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찬송하다(롬15:9, 고전14:15, 약5:13).




ψάλλω 5567 [psallō]
  • 노래하다, 찬송하다, 롬15:9, 고전14:15, 엡5:19, 약5:13.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ὑμνέω 5214 [hümnĕō]
  • 1.

    [타동사] 찬송하다, 찬미가를 부르다, 행16:25, 히2:12.

  • 2.

    [자동사] 노래하다, 마26:30, 막14:26.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ὕμνος, ου, ὁ 5215 [hümnŏs]
  • 찬송, 노래, 엡5:19, 골3:16.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 찬양. ἀναφέρειν θυσίαν αἰνέσεως: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 히13:1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찬양하다

δοξάζω 1392 [dŏxazō]

  • 1.

    찬양하다, 존경하다, 영예를 주다, 찬미하다, 영광돌리다.

  • 2.

    [하나님께] 막2:12. ㉠ ἔν τινι, 갈1:24, 벧전4:16. ㉡ ἐπίτινι, ~때문에 찬양하다, 행4:21. ㉢ διά τινος와 ἐπίτινι, 롬1:21, 11:13, 고전12:26, 고후9:13.

  • 3.

    [아버지께] 마5:16.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εὐλογέω 2127 [ĕulŏgĕō]
  • 1.

    좋게 말하다, 찬양하다, 격찬하다, 마14:19, 26:26, 막6:41, 14:22, 눅1:64, 2:28, 24:30,53, 고전14:16, 약3:9.

  • 2.

    [하나님의 은혜로운 능력을 불러내는 것으로서의] 축복하다.

  • 3.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눅24:50, 히7:1,6, εὐ. τοὺς καταρωμένους: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하다, 눅6: 28, 롬12:14, λοιδορούμενοι εὐλο γοῦμεν: 모욕을 당할 때 축복하다, 롬12:14, 고전4:12, 벧전3:9.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αἰνέω 134 [ainĕō]
  • 찬양하다[하나님에게만 사용], 눅2:13, 행2:47, 롬15:11, 계19:5.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θαυμάζω 2296 [thaumazō]
  • 1.

    [타동사] 찬양하다, 이상히 여기다.

  • 2.

    [능동태]

  • 3.

    [자동사]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ἀνθομολογέομαι 437 [anthŏmŏlŏgĕŏ- mai]
  • 찬양하다, [하나님에게] 감사하다, 눅2:38.

O.N.O 스트롱코드 헬라어사전


언제 우리 마음이 뜨거운가?(누가복음 24:13-35)

1. 말씀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본문 :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는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25절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사람이 죄를 깨달을 때 가슴이 뜨끔해진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不信仰)은 가장 큰 죄인데(요 16:9) 사람들이 이 죄에 대한 의식(儀式)을 갖기만 하면 큰 죄감(罪感)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큰 것을 느끼지 못한다.
공이 굴러가는 것은 잘 느끼면서도 지구의 도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불신앙을 꾸짖으시니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마음들이 마치 불을 품은 것 같았다.(눅 24:25,32)    

2. 말씀을 통해 새 소망을 갖게 될 때

두 제자는 주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새 소망으로 그 마음이 불타올랐다.
26절에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다. 여기 ‘할 것이 아니냐!’란 말은 헬라어로 ‘욱키 에데이’(οὐχὶ ἔδει)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게 하는 필연성’(必然性, divine necessity)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을 제자들에게 뜨겁게 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이 본래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이 있었더라면 새삼스레 마음이 뜨거워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때까지 슬픔에 잠겼다가(눅 24:17, 21) 
주님의 풀어주시는 말씀을 듣고 이 소망의 위로를 받으니 이는 마치 밤중에 어둠 속을 헤매던 자에게 햇빛처럼 반가웠고 잃었던 보배를 되찾게 된 자의 가슴처럼 뜨거워졌다.

이스라엘의 구속자(救贖者)로 바라던 사랑의 대상(눅 24:21)이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망을 가지는 그들의 가슴이 어찌 뜨겁지 않았으랴!
약혼자는 그 신랑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뜨거움을 느낀다.
그 신랑이 죽은 줄 알았다가 어디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지랴!

3. 주님이 해석해 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자세한 성경 해석으로 인해 ‘부활 진리’의 확신(確信)을 갖게되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사람이 확신이 생기면 마음이 움직여지며 뜨거워지는 법이다.
사도행전 18:5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렸다는 것이 그와 같은 것이며, 예레미야 20:7-9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할 때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았다는 것도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 말씀의 창작자(創作者)이시므로 힘이 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山上寶訓)을 주신 다음에도 사람들이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다.”고 했다.(마 7:29)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듣는 때마다 마음에 뜨거움을 일으켰다. 말씀에 의한 주님의 현림(現臨. 말씀을 통해 임하심)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32절은 “주님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하였으니 마음 뜨거워진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부활하신 메시아 로 알아본 증표(證票)이다.

4.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두 제자가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새로운 성경관(聖經觀)으로 인해 그들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27절의 ‘모든 선지자’라는 말씀과 ‘모든 성경’이란 말씀을 보니 예수께서 부활에 대한 예언(豫言)을 성경의 한두 구절만 인용(引用)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성경의 전부가 부활에 대한 예언이었다. “나는 (중략)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는 구약의 말씀을 주님이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마 22:32)하실 때 듣던 무리가 다 주님의 이 같은 성경 해석에 대단히 놀랐다고 했다.(마 22:33)

5.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인류 구원의 대사건’인 고로 이 진리를 듣는 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진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천지(天地)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온 천하에 변혁(變革)을 일으킨다. 이것은 불과 같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무엇이나 다 이런 중대성(重大性)을 띤 것이다. 누가복음 12:49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의 전하실 복음의 말씀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중대성을 띤 것임을 가리킨다.

6.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볼 때

두 제자의 심령이 생명 세계를 사모하여 갈망했던 고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그들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들은 부활의 진리를 깨달은 후에 사망 세계에서 생명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제부터 ‘영광에 들어감’(눅 24:26)에 대하여 바라보며 갈망(渴望)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주님께서 그들을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신 것이다.  

부활 후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뗘나려 하시고 다시 나타나셨다가 그 자취를 감추신 이 모두가 다 그들의 마음을 간절하게 만들어주시려는 것이었다. 28절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하셨다는 그것이 그렇고 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서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한 것도 그의 제자들을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로 이끌어 가시려는 운동이었다.

왜냐면 그들은 이제부터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어야 하며 보이지 않는 예수를 사랑하며 사모(思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장에 갇힌 새가 바깥세상 공중(空中)을 내다보고 얼마나 사모하며 안타까워하는가? 그와 같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그 영원한 생명 세계를 향하여 간절히 사모할 때에 그들 마음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고 이 소망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절망의 발걸음을 되돌려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갔다.(*) 글쓴 이 / (고) 정암 박윤선 목사, 출처 / 박윤선 목사 저, ‘설교집 영생의 원천’(서울, 영음사) 1977년 pp.113-115. 원제 : 엠마오로가는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짐 




1. 13-24절/ [부활하신 예수를 못 알아봄] …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 13-16절/ 주님이 부활하신 날,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엠마오로 가고 있음. 이들은 메시아 왕국을 소망하던 자들이었음. 그런데 예수의 갑작스런 죽음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음.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남.

- 17-24절/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지금 무엇 때문에 그리 슬퍼하고 있느냐고 물음. 그러자 그들이 입을 열어 자신들이 경험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줌. 예수가 행한 일들과 갑작스런 그의 죽음, 그리고 그의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이 천사를 만나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사도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두 사도(베드로, 요한, 요20:3)가 무덤을 가 보았지만 부활했다는 예수는 보지 못했다고 말함.

- 이때까지 이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 그 이유? (영의) 눈이 가리어져 있기 때문(16절). 이같이 부활하신 예수는 육신의 눈으로 인식될 수 없는 분임. 육신의 예수를 만나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음(cf. 벧전1:8).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지 않는 한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볼 수 없음(고전15:4-8). 신자는 부활하신 예수를 영으로 만난 자들임.

-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 단 한번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으심. 그럼에도 우리는 왜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지 탄식하며 살아감. 주를 아는 지식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임.

2. 25-26절/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는 제자들]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 그들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라고 말함. 이는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던 것 아니었냐는 것임(시22:6-8,18절, 시41:9, 사50:6, 사53장, 슥11:12-13).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음. 예수께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 인간은 성경을 자신들이 능히 다룰 수 있는 책,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정복 가능한 책이라고 생각함. 그러나 정작 성경 안의 세계에 들어가 @의 말씀 앞에 서면 자연의 광대함 앞에 숙연해 지듯 그 광대함 앞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음. 예수의 십자가는 이미 창세 전에 작정되어 있었던 일이었음. @이 정하신 때에 그 일이 인간 역사 가운데 벌어진 것에 불과함. 인간은 이러한 @의 지혜를 감당하지 못함(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주님은 지금 우리들의 삶에 벌어지는 지극히 작은 일도 @의 뜻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말씀하심(마10:29-30). 이를 수긍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우연으로 가득한 무의미한 삶을 매일 살아감. 필연이라 할 수 있는 날이 과연 몇 일이나 있을까? 그러나 주님에게 이 세상 일에 우연은 없었음. 이런 주님을 우리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주님과의 동행은 @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함.

3. 27-35절/ [성경 해석의 중요성]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 주님이 두 제자에게 모든 성경에 쓴 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심(27절). 엠마오에 도착하자 그들이 예수를 강권하여 집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함. 예수가 떡을 갖고 축사하심. 이때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그가 예수임을 비로소 알아봄. 그러나 그 순간 예수가 그들의 눈에서 사라짐. 그들이 서로에게 “”라고 말함. 부활하신 예수를 본 이상 고향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에 즉시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했던 일을 증거함.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이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했던 동력은 무엇이었나? 두 가지를 주목해 볼 수 있음. ①눈이 열려 주를 알아봄(31절), ②성경이 풀어질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짐(32절). 누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었을까? 누가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었나? 31절의 눈이 “밝아졌다”, 32절의 성경을 “풀어 주다”라는 두 단어는 같은 단어임. “디나오니고”라는 헬라어는 “열다(to open)”라는 뜻임. 성경은 닫혀 있는 책임. 이것을 주님이 열어주심. 이때 영의 눈이 열려 주를 보게 되고, 마음이 뜨거워져 주의 일에 헌신하게 되는 일이 벌어짐.

-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시는 일이 바로 이 일임. 자신의 택한 그릇을 찾아가 성경을 풀어주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자로 세우는 일임(행20:24). 이것이 교회에게 맡겨진 일임. 성경의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주를 위해 사는 자들로 세우는 일임(행17:2-3).

- 오늘날 필요한 것은 교회성장도 아니고 교회의 하나됨도 아니라 바로 성경의 뜻을 풀어주는 일임. 목사에게 맡겨진 사명은 신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는 일 하나임. 이 일을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되고 주님의 양들이 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됨. 이것이 종말이고(마24:14), @이 계획하신 영원한 나라가 실현될 때임.

- 두 제자가 주를 만났을 때의 그 뜨거운 마음은 지금 차갑게 식어 있음. 그 결과 옛 고향(엠마오)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음. 주님은 이들을 찾아와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그들이 서 있어야 할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심. 그곳에 돌아가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됨. 주님은 지금 우리를 그 자리로 인도하심. 그 자리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증인으로 세워짐. 이것이 @의 택한 자녀의 운명임. 하와를 아담에게 인도하셨듯, @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심(빌1:20-21).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임(계21:2). 천국은 그리스도의 신부들된 자들의 나라임.

 







04-25-2024(목) 누가복음 24:1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사렛 예수의 일(19절)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What things?" he asked. "About Jesus of Nazareth," they replied. "He was a prophet, powerful in word and dee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16절. 눈이 가리워져(2902)

κρατέω 스트롱번호 2902

1. 손에 넣다.  2. 체포하다.  3. 쥐다
발음 [ kratĕō ]
어원 / 미완료 ἐκράτουν, 미래 κρατήσω, 제1부정과거 ἐκράτησα, 완료 부정사 κεκρατηκέναι, 미완료수동태 ἐκρατο- ύμην, 완료수동태 κεκράτημαι, 29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손에 넣다, 수감하다, 체포하다.
 a. 체포하다, 붙잡다, 마 14:3, 21:46, 막3:21, 행24:6, 계20:2.
 b. 붙잡다, 쥐다, 붙들다, 마26:48, 18: 28, 막1:31, 눅8:54.
 c. [목적을] 달하다, 이루다, 행27:13.

2. 쥐다.
 a. 잡다, 행3:11.
 b. 쥐다, 계2:1.
 c. 제지하다, 억제하다, 눅24:16, 계7:1.
 d. 꽉 잡다, 꽉 붙들다, 행2:24.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잡다(마14:3, 계2:13), 붙잡다(행3:11, 계2:1), 붙들다(막3:21, 골2:19), 지키다(막7:3,8), 두다(막9:10, 요20:23), 뜻을 이루다(행27:13), 매이다(행2:24).

31절. 눈이 밝아져(1272)

διανοίγω 스트롱번호 1272

1. 열다.
2. 눅 2:23
3. 열다
발음 [ dianŏigō ]
어원 / 제1부정과거 διήνοιξ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διηνοίχθην,, 1223과 353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열다.
 a.  [문자적으로] 눅2:23, 행7:56.
 b.  [상징적으로] [귀를] 열다, 막7:34, 35. [눈을] 뜨다, 눅24:31. [마음을] 열다, 눅24:45, 행16:14.

2.  설명하다, 해석하다, [성경을] 눅24:32. 독립적인, 행17:3.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열리다(막 7:34, 35), 나다(눅 2:23), 풀다(눅 24:32, 행 17:3), 열다(눅 24:45, 행 16:14), 밝아지다(눅 24:31)


글로바(Cleopas)

우리말 신약성경에 글로바라는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그리스어로는 클레오파스(눅 24:18) 또는 클로파스(요 19:25)입니다.
둘은 같은 인물이며 요셉의 형제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클레오파스클레오스(영광 찬양 명성)파테르(아버지 조상 어른)가 합쳐진 클레오파트로스(아버지의 영광)를 줄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성 이름은 클레오파트라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곁에 있던 여인들 가운데 하나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였음을 증언합니다.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여인들로부터 예수의 부활을 전해 듣고도 믿지 못한 채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글로바였다고 적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께서 다가가 같이 걸어도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눅 24:18~19, 새번역)
글로바 일행은 부활한 나사렛 예수를 나중에야 알아보았습니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글로바가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눅 24:13-35)

‘엠마오 도상’(On the Road to Emmaus)이란 그림을 네델란드의 화가인 렘브란트가 그렸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는데 그 행복이 하루아침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는 실의에 빠져 붓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어도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엠마오 도상’을 그리려고 무려 18종류의 번역 성경을 읽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위대한 생명의 비밀을 깨닫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남으로 인한 인생의 허무함과 좌절감의 길목에서 렘브란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엠마오 도상의 예수님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듣고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 그 곁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글로바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최근이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묻습니다.
"무슨 일이냐?"
"나사렛 예수의 일입니다.
그는 능하신 선지자이었는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ㅇ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난지 벌써 사흘째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우리 중에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확인했더니 정말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무덤은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계시의 종교의 특징은 "말씀(로고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며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눈을 뜨고도 바로 곁에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처럼 나도 또한 성경을 읽고 설교를 자주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한 엠마오 도상의 제자와 같은 어리석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는지 나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헬라 단어는 "크라테오(kratĕō. κρατέω)" 라고 합니다.
'크라테오'는 "손에 넣다. 체포하다. 쥐다"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합니다.

사탄의 손에 사로잡히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나의 귀를 닫고 눈을 덮는 어두움의 세력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오직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험한 세상을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은혜의 사람으로 우뚝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예수 따라 가는 십자가의 군병








두 번째 그림은 엠마오에 도착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가장 꾸밈없는 생생함을 전하는 화가이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현란한 기량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진실성만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경은 변치 않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1648년에 그린 <엠마오의 저녁식사>는 루카복음 24장 13-35절이 그 배경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개의 장면으로 나뉜다.

첫째 장면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와 예수님이 동행하는 장면이고,

둘째 장면은 엠마오에서 저녁식사를 나누는 장면이며,

셋째 장면은 제자들이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장면이다.

그 중 렘브란트는 둘째 장면인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주제로 삼았다.

 

이 그림의 무대는 어떤 숙소이다.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가구도 없다.

그는 불필요한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구를 없애버렸다.

대신 네 사람만이 화면에 등장한다.

황금분할의 중앙에 예수님께서 계신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제자들이 앉아 있고,

한 아이가 시중을 들고 있다.

 

그분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고,

그분의 손은 빵을 떼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평범하다.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위인의 수려함을 찾아볼 수 없다.

짧은 수염, 수척한 얼굴, 크고 슬픈 눈, 갈색의 머리카락, 야윈 몸,

아무 장식이 없는 허름한 옷이 전부다.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님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종전의 예수님과는 다르다.

종전의 화가들은 예수님을 곱고 아름답고 위엄 있게 그렸다.

화가들은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을 영웅적으로 미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성경에 나타난 말씀대로만 그렸다.

예수님을 지친 인간으로 그렸던 것은

예수님을 사실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적인 삶을 사셨으나 동시에 하느님이셨다.

그렇다면 렘브란트는 그분의 신성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예수님의 신성은 후광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뒤쪽에 드리운 부드러운 빛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표시다.

그분은 사람들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1)

오른쪽의 제자는 깜짝 놀라 자기 수건을 거머쥔 채 몸을 뒤로 움찔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집고 일어서려 한다.

예수님에게로 달려가려는 듯이 말이다.

왼쪽의 제자는 뒷모습만 보이지만 수건을 든 손으로 입을 막고 있다.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고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식사를 날라주는 시종의 시선은 빵을 떼는 예수님의 손에 머물러있다.

또 가장 밝고 강한 빛이 하얀 식탁보와 빵을 떼는 예수님의 손에 머물러있다.

그리고 식탁위의 물건들도 미사 때 쓰는 성반과 물 잔과 술잔만 있다.

그래서일까?

뒷벽의 윗부분도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원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래서 건물의 실내는 마치 성당의 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것 아닌가?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땅을 떼어 주는 순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듯이,

우리들도 미사 때에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순간

그분을 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림이 왜 왼쪽으로 치우쳤을까?

그것은 식사를 날라주는 시종의 뒤쪽에 열린 문을 자리하게 하기 위함이다.

오른쪽은 미래를 상징한다.

현재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는 순간 그분을 알아본 사실을

미래에 예루살렘에 있는 동료들에게 알려야 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리고 동료들을 만나 그들이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3.35)

 

그렇다면 성체성사로 그분을 만나는 우리들도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일어나 삶의 현장으로 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동료들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슬픈 얼굴로 땅을 떼어주시는 그분의 모습만 자꾸만 떠오른다.

우리가 그 일을 증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다. 








세 번째 그림은 낯이 익을 것입니다. Robert Zϋnd 가 그린 그림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본문을 보면 제자 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장소로 볼 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다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눈이 가리어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눈이 밝아져 알아봅니다. 감정적으로 볼 때 슬픔에 잠겨 가다가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사역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다가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나 렘브란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좌절의 길목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귀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실의나 좌절에 빠진 분은 안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엠마오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곁에 서서 우리와 함께 걷기 원하십니다.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만나 회복을 경험하며 삶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합니다(13-24절)

앞에 있는 누가복음 24:1-12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빈 무덤’사건을 다룹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에 갔지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옮겨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곁에 섰던 두 천사가 근심하던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고 말합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여인들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베드로도 무덤이 빈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천사들의 알림과 여인들의 증거와 베드로의 확인으로 구성된 빈 무덤 이야기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져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글로바와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낙심이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 이십오 리 즉 7마일 쯤 떨어진 엠마오라 하는 동네로 가고 있었습니다. 7마일이면 우리 교회에서 동쪽으로는 에스콘디도 city hall 정도이고 서쪽으로는 78번상에 있는 Costco 정도입니다. 

길을 가면서 제자들의 화제는 온통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것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니 기뻐하고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안타까워합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함께 걸어갑니다. 

그렇지만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다시 사신 주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셨기에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들어가실 때 문이 닫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문을 통과하여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예수님이신지라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왜 어두워졌습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믿지 않기에 그들의 영안은 어두웠습니다. 

길을 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요? 예수님이 말을 걸자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면서 가던 발걸음을 멈춥니다. 가장 기뻐해야 할 시간에 그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글로바라 하는 자가 말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 하면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정말로 답답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셔서 지금 그들 앞에 있는데 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죽은 예수를 붙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글로바는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그분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서기관들이 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분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심지어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남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시기해서 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빌라도에게 고소했더니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야망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허!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요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아 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그가 죽은 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어요. 이제 모든 게 끝났어요. 끝났어. 예수님을 향한 기대가 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말이요.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어요.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오더니만 예수의 시신은 간 곳 없고 대신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나요. 기가 막혀서.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베드로도 무덤에 달려갔는데 그도 예수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돌아왔대요. ‘예수님이 다시 사시다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돼요.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봐. 두 제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고 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믿음의 한계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 우리의 신앙은 항상 말씀에 점검받고 조율되어야 합니다. 말씀보다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을 더 의지할 때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뜨거워집니다(25-27절)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이나 부활은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영광의 메시아, 승리의 메시아만 생각했지 고난 받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구약을 인용해가며 당신에 관하여 말씀한 부분들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어떤 영적 진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어떤 부분을 다루셨을까요? 

모세의 율법: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이 바로 메시아를 가리킨다.

출 12장에 보면 해질 때에 이스라엘 자손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양을 잡아 그 피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는데 그 어린 양이 바로 메시아를 상징한다.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나사렛 예수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

예언서: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나사렛 예수님은 동정녀 탄생을 하셨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메시아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시편: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친 말이다.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이 예언에 따라 예수는 부활하셨다.

예수님에 관한 어떤 사건도 우연하게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연결시킬 때만 예수님에 일어난 사건들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인 것이 깨달아집니다.

“자세히 풀어” 강해. 예수님은 강해설교의 원조입니다. 입에 침을 튀기며 ‘믿습니까?’‘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면서 불과 같이 토해내는 말씀이라야 은혜를 받는 것 같지 강해 설교는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안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풀어줄 때에 목소리를 높이며 열변을 토했겠습니까? 잔잔하게 말씀하셔도 성령에 충만한 메시지인지라 제자들은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지경을 넓혀주기 원하십니다. 

단 위에서 내려다보면 설교 중에 눈을 지그시 감은 분들이 보입니다. 대개 매주 조는 분들이 주로 졸아요. 주님의 날에 아버지의 집에 왔으니 얼마나 편안하겠어요. 눈을 감고 묵상하며 한 주일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있습니다. 어느 부흥회에 가서 목사님이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데 앞에 있는 분이 계속 조는 것이 너무 눈에 거슬려서 곁에 있는 권사님에게 좀 깨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권사님이 자기가 재워 놓고 왜 나보고 깨우래 하며 툴툴 대더랍니다. 

효율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하여 목소리는 어떤 톤으로 하고 어떤 제스처를 쓰고 음향 장치는 어떻게 조정해야 하고 등등 기술적인 면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회개를 통하여 깨끗해지고 성령에 기름 부음을 받아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은혜를 사모하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가슴에 더 진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서로 화답할 때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 은혜가 더 은혜 됩니다. 그런 면에서 목사가 교인들을 만들고 교인들이 목사를 만듭니다. 은혜로운 설교가 되도록 목사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기도에 눈이 떠집니다(28-31절)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엠마오에 거의 다 왔습니다. 두 제자는 이미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푹 빠졌습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여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며 그들을 눌러온 슬픔과 염려는 사라집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여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엠마오를 그냥 지나쳐 가시려는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그분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날도 이미 저물었는데 오늘 밤에는 우리와 같이 이곳에 머무십시다. 간절하게 권하니 예수님은 그 청을 받아

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를 나누자고 먼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게 더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토대로 그린 성화를 보면 예수님은 문밖에 서계신데 문 바깥쪽으로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 문은 오직 안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마음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실 때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십니다. 함께 음식을 드실 때에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난 후 떡을 떼어 저희에게 주시자 그들의 영안이 밝아집니다. 지금까지 함께 오시면서 성경을 풀어주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예수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족합니다. 이미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32-35절)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가자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예수님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믿게 되었으니 더 이상 엠마오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즉시 일어나 그 밤에 열 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시간에도 제자들은 모여서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을 인하여 낙심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이미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도 엠마오 도상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길을 가던 것과 구약에서 메시아에 관련된 말씀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엠마오에 있는 집에 들어가 식사를 나누면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자기들에게 주었을 때 갑자기 눈이 열리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을 흥분된 목소리로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어느 새 두 사람은 갈릴리 여인들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인하여 낙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믿음을 회복한 후에는 그들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엠마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낙심과 좌절과 포기의 길, 슬픔으로 가득 찬 길, 소망을 잃은 길, 도피의 길, 문제에 압도되다 보니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고 영의 눈이 어두운 채로 가는 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길: 믿음으로 채워진 길, 기쁨으로 충만한 길, 소망으로 가득 찬 길, 사명을 가지고 가는 길.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길을 가다보면 오르막길을 갈 때도 있지만 내리막길을 갈 때도 있습니다.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찬송을 부르면서도 막상 현실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를 택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더 나아가면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근심과 염려가 깊어지면 몸이 탈진이 되고 마음에 기쁨이 없고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의 여부에 상관없이 사실은 이런 침체는 누구나 경험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거장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지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민 11:5,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왕상 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문제에만 사로잡히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 속에 아직 남아있는 세상적인 잔뿌리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의심하고, 염려하고, 좌절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 보시기에 찾아오십니다. 아들이 없다고 낙심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졸지에 도망자가 되어 40년이란 긴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낮아지는 훈련을 하던 모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인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영적 침체에 빠져 로뎀 나무 밑에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한숨짓던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과거와 현재의 수치를 인하여 사람들의 낯을 피하던 수가 성 여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어떤 절망이나 근심거리에 싸여 있든지, 어떤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든지, 어떤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를 받고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처를 싸매주시기 원하십니다. 무엇으로?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을 통하여 회복을 경험합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디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은 단지 문자에 불과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요 신약은 예수님의 전기로 여겨집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지경을 넓혀주기 원하십니다. 

오늘도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낙심과 불신의 길로 들어설 때 저의 발 앞에 말씀의 빛을 비추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말씀을 통해 주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믿음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의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말씀은 사람의 영과 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 4:12). 말씀이 우리 심령을 수술하고 우리의 아픈 부분을 어루만져 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그럴 때 영적인 신령한 눈과 분별력을 가지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열정과 생명력을 얻습니다. 하늘 문이 열립니다.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회복된 후 증인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회복은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더구나 그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했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복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가르쳐 주셨을 때 제자들은 자기들을 둘러싼 의심과 염려의 구름이 걷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회복하였습니다. 회복은 사명과 연결이 됩니다. 주님을 경험한 벅찬 감격을 자기들만 간직할 수 없어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잠시 방황하였지만 다시 자신들의 사명을 발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책 없이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이제는 주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열정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부인할 수 없는 체험이 있었기에 의심과 좌절의 상황에서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은 우리 삶의 목적을 변화시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시 만난 사도들의 기쁨과 놀라움의 환호성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의 진리를 알고 느끼고 감격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삶의 변화와 헌신으로, 사명을 감당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인하여 낙심하거나 포기하며 엠마오로 가려는 마음을 가진 분들은 없습니까? 주님과 교제를 통하여 시련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엠마오 길을 걸으며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의 마음이 얼마나 뜨겁게 불타올랐습니까?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두 제자들처럼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세요. 성령께서 나의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세요. 신실하신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로 만들어 사용하시고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도 부활하여 영생을 갖게 됩니다. 성도들은 이 땅 가운데 살면서 부활의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베푸신 은혜, 즉 말씀과 기도를 인하여 영육 간에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주가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며 신실한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4-24-2024(수) 누가복음 24: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삼일에(7절)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The Son of Man must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sinful men, be crucifi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again.'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머물고 있을 때에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향품을 예비하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놀랍게도 그 무덤의 돌문이 열려있고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으며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 여인들은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된 일을 기이하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확실한 부활과 불확실한 믿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늘 듣던 제자들이었지만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못했기 때문에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한 부활과 불확실한 믿음

빈 무덤(1-3절)
천사의 증언(4-7절)
증인(8-10절)
믿지 않음(11-12절)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누가복음 24:1-12)


여러분, 혹시 길을 걷다가 갑자기 폭풍우를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바람이 몰아치고, 번개가 치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전한 곳을 찾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며, "이 폭풍우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나는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의 삶 속에서도 갑작스러운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마치 갑작스런 폭풍우처럼,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갑자기 어둡고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기 위해 무덤을 방문했으나, 대신 빈 무덤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습니다.
이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삶의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 특히 어려움과 시련이 닥쳤을 때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줄 수 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아닌 빈 무덤이었습니다.
이 순간 여인들의 마음은 아주 복잡했습니다.
또한 매우 실망했습니다.
여인들이 았찾던 것은 사랑하는 스승의 마지막 안식처였으나 예상치 못한 빈 공간이었습니다.

‌이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실수하는 관점에 대한 깨달음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기대와 이해를 기반으로 사물을 찾고, 때로는 실제로 중요한 것을 놓치곤 합니다.

‌또한, 천사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위로나 가르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언과 약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중심임을 강조합니다.

‌여인들은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기억하는 행위는 단순한 정신적 활동이 아니라, 신앙의 깊이와 성숙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러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가 어떻게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사실, 이 여인들은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자들 중 일부는 이 이야기를 '헛된 소리'로 여겼지만, 베드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무덤을 확인하러 갑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믿음이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와 확인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무덤에서 본 것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한 소문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건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신앙의 다양한 단계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무덤 앞에서의 혼란과 불안, 천사의 말씀에 대한 놀라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순간의 깨달음, 그리고 베드로의 적극적인 탐구와 확인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순간들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억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지적 활동이 아니라 믿고 따른다는  실천적 의미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면 이미 이 세상을 이기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곧 예수의 보혈입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보혈의 찬송을 부르며 오늘도 내가 맡은 자리에서 믿음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의 보혈은







ㅇ 세상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믿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정보의 수동적 수용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탐구와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마음에 담고,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에서 이를 실천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단순히 과거의 대화나 교훈을 떠올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과 행동에 깊은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문자의 나열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어떻게 깊은 변화를 일으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했을 때, 먼저는 혼란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자, 그들의 심정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머리 속의 지식으로 남지 않고, 그들의 마음과 행동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있었던 핵심 요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단순한 목격자를 넘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신앙은 단순한 믿음에서 확신으로, 불안에서 평화로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가? 우리는 그 말씀을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게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임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행동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활기를 불어넣고, 방향을 제시하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묵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행동에 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내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기도합시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깊이 있게 묵상하며,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 그들의 마음은 슬픔과 혼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감정을 뛰어넘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분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

이 여인들의 행동에서 저는 큰 교훈을 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 믿음이 그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엄청난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믿음은 이러한 진정한 믿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여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나 당시의 문화적 제약을 넘어섰습니다. 당시 여성의 증언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이러한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이 경험한 진실을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선포하는 용기를 가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여러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용기를 주며,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모범을 따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앞장설 때,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여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슬픔을 넘어서는 믿음의 힘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 각자에게도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용기를 가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나눈 여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에 깊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결정과 행동, 심지어 우리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종종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우리 자신의 지혜와 힘에만 의존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진리를 기억하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가 직면한 모든 상황 속에서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결단과 적용은 무엇이 될까요? 첫째,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시간, 에너지, 그리고 자원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가르치는 삶에 투자함으로써 실천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러한 결단과 적용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힘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매일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두고, 그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빛을 반영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이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사랑과 은혜로우신 주님,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나눈 귀한 말씀을 통해 주님의 약속과 말씀이 얼마나 확고하고 신실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상황과 어려움 속에서도 변함없이 함께 계시며,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등대와 같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도전과 시험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주소서.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이끌고, 우리의 결정과 행동에 지혜와 방향을 주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부활의 희망을 잃지 않고,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하소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누가복음 24:1-12)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 곧 예비일인 금요일 삼시 곧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막15:25) 그리고 육시(정오)에서 구시(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어버립니다. 이 어두움이 육시에서 구시까지 세 시간 동안 이어집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버지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니이다" 큰 소리로 부르시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시게 됩니다. 공회 의원이며 선하고 의로운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세마포로 싸고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돌무덤)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이날은 금요일 곧 안식일 예비일이었기 때문에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 곧 장사를 위한 물품을 준비하고 안식일에는 쉽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곧 주일 새벽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 무덤에 옵니다. 그런데 무덤을 가로 막아 두었던 바위가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체는 없습니다. 무덤에 시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과 그 여인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 오늘 부활절을 맞아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핵심적인 신앙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신앙, 십자가신앙, 부활신앙, 재림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진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특별히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부활신앙에 대해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1. 부활신앙으로 현재를 살라

5절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안식 후 첫날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무덤에 안치되었음을 보았던 여자들은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을 찾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문을 막아 두었던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는 없습니다.시체가 없음을 안 여인들은 근심합니다. 그 때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 천사들이 곁에 서 있었습니다.여인들이 무서워 엎드리자, 천사들이 말합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천사들이 예수님의 살아나심,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분을 어찌 죽은 자들의 무덤에서 찾느냐" 무덤이나 죽음은 인간을 가두는 족쇄일 뿐, 예수님을 결코 가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신 분으로 결코 무덤이, 죽음이 가둘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무덤을 찾았을 때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없습니다. 때마침 옆에 있던 천사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점진적이고 치밀한 구성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명확히 증거하고 있습니다.천사들이 여인들에게 한 질문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질문은 오늘 부활절을 맞아 예배하는 우리들 가운데 주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를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아무리 믿음이 예수님을 향해 있고 그 사랑이 남다르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사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헛된 믿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산다 할지라도 만일 부활에 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면 결코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음으로 해서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은 기독교의 핵심 신앙입니다. 볼링 핀이 가지런히 서 있습니다. 볼을 굴려서 핀을 쳐서 모두 넘어뜨리는 것을 '스트라이크' 라고 합니다.스트라이크를 치려면 핵심 핀인 5번 핀을 중심으로 쳐야 합니다. 그래서 5번 핀을 'kingpin' 이라고 한다 합니다. 이 핀만 제대로 공략하면 다른 핀은 자동으로 넘어갑니다. 핵심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있어도 부활신앙을 갖지 못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또한 우리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서는 이것을 명확히 설명합니다. 또한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설교, 바울의 전도여행 가운데 전했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저 선한 일을 하고, 모여서 사랑으로 교제하며, 열심히 나와 예배하는 일이 전부다 라고 여기면 안됩니다. 핵심을 붙들고 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 그 다음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이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들을 버리고 부차적인 것들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곧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있은 지 나흘입니다. 뒤늦게 이곳 베다니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십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나가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는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때 부활의 때에 살아날 것은 믿지만 지금 죽어서 나흘이 지난 내 오라비가 지금 다시 살아나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주님이시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인 것이죠.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니 이것에 네가 믿느냐?"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까지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부활의 신앙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입니다. 부활신앙이 마지막 날 부활의 때, 그 때만의 신앙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now and here ... 즉, 부활신앙의 현재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 삶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신앙입니다.

베다니에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마르다의 연락을 받고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린 마리아가 그 언니 마르다와 동일하게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우는 모습을 보고 같이 함께 울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눈물이었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의 권세 앞에 사망의 권세 앞에서 어찌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지금 그 자리에 계신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비통한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가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지가 벌써 나흘입니다 냄새가 납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을 향해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주님께서 계신 곳에 사망권세가 떠나가고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일어나 나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활신앙은 장차 마지막 때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이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시는 그 주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3년반을 주님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을 보고 모두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단언을 합니다. 모두가 주를 떠날지라도 자신만은 떠나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 역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신앙에 있어서 자기 주장이나 가치가 얼마나 허무하기 그지 없는 것인지,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나 무력하기 그지 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 실패하여 모두 떠나 각기 제 길로 갔던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좌절하고 절망한 그들에게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오셨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그 어떤 권세 앞에서도 꺽이지 않는 신앙으로 세우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 부활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하였듯이, 자기주장이나 자기 가치를 위한 헌신에서 벗어나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신앙으로 변화는 것은 바로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될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자기 열심과 자기 공로를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우던 그 뜨거웠던 열정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던 것은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입니다.

Ex) 예수는 역사다

얼마 전 나온 영화 <예수는 역사다> 라는 영화는 실화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리 스트로벨이란 사람이 쓴 책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리 스트로벨은 미국의 LA 타임즈, 시카고 트리뷴 이라는 신문사를 운영하는 트리뷴이란 미디어 기업에 최연소로 입사해서 승승장구하던 기자였습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서는 철저한 회의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뿐인 딸과 식사를 하다 딸이 응급상황에 빠지게 되는데, 한 신실한 크리스쳔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고 이 일로 아내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됩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는 아내의 신앙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는 기자였기 때문에 <사실, fact>를 통해서만 진실로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허구, 특히 예수 부활의 허구를 증명하기 위해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기자답게 전문가를 만나 취재합니다. 의사, 고고학자, 그 밖에 수많은 전문가를 취재하면서 예수의 부활이 허구이며 거짓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그는 사실과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점점 예수의 부활과 영생의 진실에 접근해 가기 시작한다는 내용입니다. 2년후에 그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 부활의 허구를 증명하려던 그가 반대로 예수는 부활하신 구세주임을 증거하고 변명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수집하던 증거들을 모아 책으로 엮는 것이 바로 <예수는 역사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이며 실제이며 또한 현재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은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 삶, 우리의 현재 가운데 함께 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장차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을 갖는 것 중요합니다. 이 신앙이 세상에 속해, 이 땅의 것만을 추구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살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장차 부활할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현재입니다. 부활신앙을 갖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주님의 살아계시고 함께 하심을 믿고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부활신앙으로 반드시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으라​

6절<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절<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절<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절<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천사들이 자신들 앞에서 무서워 엎드려 있는 여인들에게 계속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인자가(내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을 따라, 그 약속을 따라, 그 말씀을 따라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곧 생명이요 빛이요 권세와 영광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심', 또 '예수님이 곧 말씀이심' 라고 증거하는 요한복음 1:1-3절의 말씀의 입증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입으로 하신 말씀대로 죽으셨다 말씀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첫 새벽에 하늘로서 내려온 천사는 “그(=예수님)의 말씀하시던 그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6)고 말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할 것을 권위 있게 선포하였고, 이 말을 듣고 믿은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그대로 고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이렇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17: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마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마27: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눅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18: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이렇게 약속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 곧 부활의 신앙은 말씀의 성취를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말씀의 증거대로 믿으며, 또한 말씀을 근거로 하여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 단락인 13절부터의 내용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 한 제자의 이름은 글로바인데, 이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그들의 얼굴과 말에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르던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심을 목도하고 실망을 가득 안고 내려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에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합니다. 그들은 이미 여자들을 통해 죽으시고 무덤에 안치되신 예수님의 시체가 거기 없고, 천사들만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시면서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님 자신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십니다. 아마도 이들은 여전히 설명하고 있는 이가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잘 아는 랍비 정도로 알았을지 모릅니다. 날이 저물어 마을에 들어가 머물게 되고 식사할 때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에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 천명을 먹이시던 때, 떡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을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육신적인 눈으로, 육신적인 이성으로, 논리로는 도저히 부활신앙을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을 주시고 눈을 열어 주실 때 보이게 됩니다. 믿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았느냐? 자신들과 동행하시고 함께 식사하시면서 떡을 떼어 주시던 그 분이 예수님임을 알고 난 후에 그들은 깨닫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이 뜨거웠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기대와 소망이 무너지고 좌절과 절망이 가득할 때 무엇으로 그 마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신앙을 통해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냉냉하고 무기력한 신앙에서 그 마음이 뜨겁게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3년의 세월은 뜬 구름이었다, 봄날의 꿈 같은 일이었다 생각하고 더 이상 아무런 기대와 소망없이 슬픈 기색을 하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은 부활하셔서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성경을 풀어주심으로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들과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외칩니다. "주께서 살아나셨다"

부활의 신앙과 말씀은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부활은 말씀대로 이루어졌으며, 말씀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말씀이 성취됨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곧 말씀대로 성취됨을 믿는 신앙입니다.

Ex) 장기려 박사의 부활신앙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는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유를 세가지로 설명했다고 합니다.
첫째,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 졌기 때문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의 진실성에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셋째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장기려 박사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또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 이 말씀을 현실에서 증명하는 것이 부활신앙과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라 여기고 자신의 전 인생을 아프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말씀대로 우리는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부활신앙의 사람들은 부활신앙을 삶을 통해 실천합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전 생애를 주를 위해 바쳤던 것처럼….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전 생애를 주를 위해 바쳤던 것처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부활의 주님을 믿고 자신의 부활의 부활을 믿으며 순교신앙으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복음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부활신앙으로 현재를 사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부활하시고 말씀대로 또한 우리를 부활케 하실 주님을 위해 내가 할 헌신이 무엇인지 찾고 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진짜 성도인가?

  누가 진짜 성도인가? (눅 23:50-56)   캄캄한 어둠입니다. 절망입니다. 더 이상 무엇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꿈도 희망도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때로 부딪치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는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도무지 어떤 길도 방법도 보이지를 않을 때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고통스럽게만 느껴집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럴 때 죽음을 생각합니다. 차라리 죽는다면 더 이상 그 어떤 고통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오히려 죽음이 눈앞에 보이기에 더 두렵습니다. 더 절망스런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십자가 앞의 상황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빚어지는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절망 속에 보이는 참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난 직후에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를 장사 지낼 수 있도록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낼 수 있도록 내어달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했다고 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유대 관원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장 큰 죄악이라고 여기는 신성 모독죄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구를 했던 것이요 결국 그들의 아우성에 빌라도가 두 손을 다 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명령하지를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역죄인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신성 모독죄로 처형을 당하는 사람은 그 자신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도 제대로 머리를 들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온 가족이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장사지내도록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니 이 사람이 도대체 제 정신이 있는 사람입니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청한 사람의 신분입니다. 이 사람은 공의회 회원이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공의회 회원이 누굽니까? 우리네로 말하면 국회의원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보통 산헤드린 공의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층입니다.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 온 가족이 다 망할 수도 있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평소의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인 것을 그가 공의회 의원일 뿐 아니라 그에게 대해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의회 의원도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가지 쌓아온 명성은 어떻게 하고 자기 집안을 또 어떻게 하고 그렇게 무모할 정도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할 수가 있었느냔 말입니다.

그가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예수입니다. 그의 말씀이 비록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요셉의 마음에 어떤 감동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은 그가 앞으로 나서야 할 상황이 아닙니다. 자칫 예수와 한 패거리로 몰려 같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명성과 부귀가 하루아침에 다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를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를 따르며 그 앞에서 배웠던 제자들조차도 다 도망쳐 버리고 몸을 숨긴 상황입니다. 그만큼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도록 내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있다면 그래도 무언가 예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기대라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다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이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믿고 있지만 그 당시는 전혀 그렇지를 않지 않습니까? 그 누구라도 예수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사람들이 슬퍼하고 절망했던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제자들처럼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따랐다고 해도 몸을 숨기는 것이 당연할 텐데 거꾸로 누구도 예수를 따르고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나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요 하고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오히려 당당하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 달라고 하여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에다가 예수를 정성껏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진짜 믿음입니까? 모든 것이 좋을 때는 참 믿음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에도 앞장서고 하여간 모든 일에 본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기라도 하면 그 좋던 믿음의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헤매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담담히 믿음을 지켜나가는 그런 사람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는 죽음에 이를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던 제자들이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그들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준비가다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막상 어려운 상황이 되니까 그들은 다 도망쳐 숨어 버렸습니다. 한데 거꾸로 전혀 예수와는 상관도 없는 것 같았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그의 평소의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던 그 사람이 이런 어려운 때에 오히려 나는 예수의 제자요 하며 자기를 선전하는 것처럼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인 신앙인이 참 신앙인이 아니라 내면적인 신앙인이 참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여기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믿음도 좋고 많은 은사와 은혜도 넘치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어려운 때를 만나 형편없이 망가지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평소에는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하다가 목사에게 어떤 허물이라도 보이고 목사가 어떤 어려운 지경에라도 빠지게 되면 오히려 나 몰라라 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앞장서서 죽이려 덤벼드는 것이 우리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평소에는 전혀 교회 일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고 전혀 믿음의 사람 같이 보이지도 안았는데 교회가 어려운 때에 목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오히려 앞장서서 교회를 지키고 목사를 지켜주는 그런 사람들도 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까?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 세워주는 자입니까 아니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참 더러운 꼴을 다 봤다고 하며 그럴 수가 있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소위 코드정치라고 해서 내편 네편 편 가름을 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좀 잘못되었어도 감싸주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면 내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난도질을 해대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아니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게 손해가 닥칠 것 같으면 모른 척하고 돌아서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던 지요? 아니 그냥 모른 척 하고 돌아서는 것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서 죽이려고 대글지는 않는지요? 그래요 그게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보게 되더란 말입니다.

성도들은 끝까지 서로를 감싸주고 보다듬어주고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을 때 서로 도와주려고 하고 약한 분들이 있을 때 서로 붙들어주려고 하고 부족한 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물심양면으로 돕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어려우면서도 앞장서서 주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와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주님도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바로 참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까리만 나누고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주위로 두루 펼쳐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볼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연약한 내 자신을 보면서 참으로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시험에 들고 마음 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아니 실제로 나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나 아니면 저들이 저런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텐데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어도 내가 조금만 더 생각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조심했어도 내가 조금만 더 바로 섰어도 저들이 저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면서 가슴을 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무언가 내게 기회가 주어져도 자신이 없습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못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끝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는 어두움 속에 있습니까? 어둡다고 하는 것은 곧 밝아진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더 깜깜합니다. 하지만 눈 깜짝 할 사이에 밝은 아침이 됩니다.

지금 상황이 절망입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지를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앞에는 이제부터는 좋아질 일밖에는 없다고 믿으십시오. 지금 모든 상황이 좋습니까? 그렇다면 계속해서 모든 것이 좋을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죽었기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이 됩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그런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믿으십시오. 나는 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요? 그렇다면 주님이 나를 강하게 해 주신다고 믿으십시오. 아니 주님이 나의 능력이 되심을 고백하십시오.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주님께서는 나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려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는 당당히 설 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나처럼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을 위해 주님이 죽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공의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는 그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결정과 처사가 잘못되었노라고 항변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비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내가 그때 용기 있게 입을 열어 그들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항변만 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고 있었을 텐데 아니 결정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해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하면서 후회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라도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고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후회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지금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나섰던 것이요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중하게 장사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래서 믿음은 결단이요 용기입니다. 마음만 간절했지 입에서 맴맴 돌기만 하고 그저 집어 삼켰던 사랑한다는 말을 입을 열어 고백하는 것 역시 용기입니다. 사랑하는데 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베풀어야 한다면 주저 하지 말고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단하지 못하고 입을 열어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차마 그것을 결단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더 이상 지나 놓고 나서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얼 할 수 있겠느냐고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 자녀를 삼으셨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주셨으며 우리를 아름다운 보배로 삼으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짙은 구름을 거두듯이 없애버리셨고 우리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우리를 죄에게 풀어주시기 위해서 내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하신대로 영광의 자녀가 되었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가 되었으며 이제 나의 모든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내게 모든 필요한 능력을 주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의 약함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주저하며 나는 못한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위해 간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으며 연약하기에 더 기쁨으로 주님을 섬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연약하기에 십자가입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상처로 가득한 나의 모습을 안고 그대로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는 나를 씻겨주시고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며 친히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나의 부족하고 연약함을 인해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고백하던 이사야의 고백처럼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고백하며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섬겨나가는 하나남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은 죽은 예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주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주님만 바라보시고 주님의 약속을 따라 간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더욱 감사함으로 주시는 사명을 따라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연약해 보여도 비록 부족해보여도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충성하는 그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며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주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순종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4-23-2024(화) 누가복음 23:50-5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의로운 요셉(50절)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Now there was a man named Joseph, a member of the Council, a good and upright man,

요셉(Joseph)이란 이름의 뜻은 "그는 이김" 또는 "여호가 더하시기를 바란다" 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동일한 이름을 갖는 여러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문에 소개된 요셉은 아리마대 출신입니다.

아리마대(Arimathea. 높이 있음)라는 지역은 예루살렘 서북 32km 지점 현재의 벨라(Shephelah) 지방 구릉지대에 있는 렌티스(Rentis)라고 합니다.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후 빌라도를 찾아가 시체를 줄것을 요구하여 자기 집안의 새무덤에 장사하였던 인물입니다(막 15:42-43, 마 27:57-60, 눅 23:50-53, 요 19:38).

본문에서는 그를 가리켜 "선하고 의로운 요셉(a good and upright man)"이라고 합니다.
왜 요셉을 선하며 의롭다고 하셨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만족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에서 만족이 아니라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과 기쁨의 삶을 위하여 자기를 절제하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장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된 죄수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여 자기 가족의 무덤에 안장했습니다.
당시 분위기에서 예수님을 시신을 거두어 안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기대했던 수 많은 무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고소하여 끔찍한 십자가 처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시신을 안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자기를 희생하며 주위의 날카로운 시선을 온 몸에 느끼며 선하고 의로운 삶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가는 일을 나 혼자서 그 길을 선택하지 않고 멈춘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번화한 거리의 건널목에서 보행자 신호가 바뀌기 전에 사람들이 그 길을 건너갈 때 나 혼자서 그 자리에 서 있는다는 것은 마치 시대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을 실천하려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소금이 완전히 분해되어 녹아지고 빛이 어둠을 뜷고 들어가 어둠을 몰아낸 후 그 빛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있으면서도 내가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쉬운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성자의 귀한 몸




















04-22-2024(월) 누가복음 23:44-4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백부장의 고백(47절)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The centurion, seeing what had happened, praised God and said, "Surely this was a righteous man."

44. 때가 제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 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실 때의 시간적 상황을 마가는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3시(현재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마가 15:25)
유대 시간으로 제6시(현재 정오)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9시(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낮 12시는 가장 밝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밤중같은 어둠이 몰려와서 세상을 어둠에 감싸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갈라졌습니다.
성경은 이 휘장을 예수님의 육체라고 합니다(히 10:20).
유대 시간으로 제9시(현재 오후3시)에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마가 15:34. 누가 23:46)
준비일 즉 안식일 전날이 되었습니다(마가 15:42).

안식일에는 십자가에 사람을 놔둘 수 없으므로 로마의 군병들은 두 강도들이 아직 숨이 멎지 않았으므로 다리를 꺾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에 로마 군병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으며 그때 피와 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속죄의 제물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로마의 백부장은 드이어 그의 입을 열어 고백합니다.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당시에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로마 황제가 곧 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때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위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마치 예식을 치루는 형식과 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백부장의 고백을 생각하며 온 몸과 마음을 모아 올바른 신앙고백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정오가 되었을 때, 해가 더 이상 빛을 잃고 온 땅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오후 3시경이 되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고 예수님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형 집행을 주관하던 백부장은 이날의 모든 일을 목격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사롭지 않은 예수님에 모습에 주목하여 그가 어떤 사람인가 바라보았습니다.
로마군의 장교로서 죽음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지켜본 그는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을 인정하였고, 그분께 영광을 돌렸으며, 자신들이 십자가 형에 처한 예수님은 의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한 것입니다.

백부장이 이렇게 고백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새벽부터 하루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의 행동과 말을 듣고 보고 느끼며 판단했을 때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은 깨달음에서 시작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한문자는 "각(覺)"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깨달을 줄 아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을 스스로 돌아볼 때, ‘이렇기 때문에 난 믿음이 생겼어’, 혹은 ‘저런 일 때문에 믿음이 확실해졌어’ 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돌아보면 진정한 믿음은 외적인 변화나 증거 때문에 생겼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시작점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믿음의 본질은 경험과 사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각(自覺) 즉 자기 스스로 깨닫게 될 때부터 시작합니다.

표적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의 접근은 믿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기사와 이적을 보여줄지라도 그 사건으로 인하여 갑자기 확실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은 백부장과 같이 전인적인 통찰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과 논리적 근거가 믿음의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전인적인 통찰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서 비롯됩니다.
은혜가 임할 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로 믿음을 갖고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나 증거가 되지 못할지라도, 똑같은 일을 겪은 우리에게는 이를 통찰하여 신앙으로 깨우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인지를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씩 주님을 쫓아 믿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며 우리 믿음은 성장하고 완성되어 갑니다.
흔들리지 않으며 견고해집니다.
복음의 일꾼으로 자처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합니다.

이 사건 이후에 백부장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의 고백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는 제자가 되어 초대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주님은 부족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전인적인 믿음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몸 된 백성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일방적인 은혜였고 부르심이었습니다.
내가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자가 다만 예수님을 극명하게 바라보면서 나의 모든 감각과 인지와 지혜와 명철로 당신을 느끼고 깨닫고 믿는 역사를 항시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은혜를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오! 주여.
제 안에 오셔서 역사하소서
주의 은혜의 복음을 힘써 따라가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 서서
날마다 백부장과 같이
주님을 진정한 의인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그리스도인의 성공학(누가복음 23:44~49)


요한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소위 ‘삼박자축복’입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하고⋯ 삼박자축복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부흥시켰고 대형교회의 출발점이 됩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목회관을 번영신학이라 비판하는데 특히 장로교가 더합니다. 
복음을 변질시켜 기복주의신앙을 한국교회에 들여왔다는 것이지요! 
비판받을 내용도 충분하지만, 사실 기독교인들이 잘 되는 것! 형통하는 것! 성공하는 것! 잘못이 아닙니다. 
잘 믿고 잘되고 잘 살고…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것이 아닌가요? 

1. 잘못된 성공관

물질성공론.

“무엇을 갖고 있다”는 소유의 성공론입니다. 갈수록 돈의 위력, 영향력이 강합니다. 얼짱 몸짱도 자본입니다. 그래서 성형수술이 대세를 이룹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있고 얼짱과 몸짱으로 살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성공이라는 성공론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나보다 더 돈이 많고 아름답고 사람을 만나면 실패자가 됩니다.

신분성공론.

“무엇이 되었다!”는 출세 성공론입니다. 성공하려고 너도나도 일류대학, 일류직장을 꿈꿉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월급이 많은 신분을 성공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과장이 되면 성공자로 자처하지만 입사동료가 부장이 되었다면 순간에 실패자가 됩니다.

성공비하론.

“성공은 고상한 삶이 아니다!”는 관점입니다. 경건한 신자일수록 출세나 성공 쪽은 바라보지도 말라 합니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세속적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 하면 경건신앙생활과는 반대로 가는 길이며 믿음 포기로 압니다. 성공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는 주님도 한 몫 합니다. 부자들에 대해 별로 좋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 19:24,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성경말씀은 한쪽만 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조건 부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행위구원의 불가성을 말하는 것이지 물질문제가 아닙니다.

성공포기론. 

나에게는 성공이라는 단어는 남의 이야기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무슨 성공이냐, 성공은 이름이 있고 남들에게서 성공자로 인정을 받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축복이지, 나에게 성공은 무슨... 이런 생각이 결국은 나로 하여금 실패의 생애를 살게 하거나 풍성한 삶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공과 번영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약은 부(富)와 번영으로 가득 찹니다. 
믿음의 조상 계보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족장들이 모두 부자였고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하나님의 본심은 자녀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이 고생하며 사는 것을 바라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주변의 아리마대 요셉,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눅8:3), 유럽교회 선교의 문을 열었던 자주장사 루디아(행 16:14). 이들 성공한 부자신자들이 없었다면 누구의 무덤에 묻히며 예수님과 12명 제자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으며, 바울이 마게도냐교회-유럽복음화 개척선교를 어떻게 감당했겠어요?

물론 예수님 자신은 세속적인 성공자는 아닙니다. 머리 둘 곳도 없었으니 물질 성공자도 아니요, 33년 살았으니 수명으로도 성공자는 아닙니다. 외국에 자주 드나들어야 성공자인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경내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독신으로 살다 떠난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실패자라는 사람은 대적자들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공자입니다. 어떤 면에서 성공자인가요?

성공자 예수님

㈀ 지근거리, 먼거리, 원수에게 인정받아 성공자입니다.

41절,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없다” 십자가에 세 시간을 같이 달려있던 강도에게서 인정을 받습니다. 가까운 아내와 자식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성공이지요!

49절, 멀리서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갈릴리 여인들에게서 인정을 받습니다.

47절,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백부장이 말합니다.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은 로마 군인, 공무원이고 예수님은 신성모독, 황제 빙자 죄명으로 처형당한 죄수입니다. 특히 십자가 강도는 악랄한 범죄인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수님을 감시하고 처형을 주도했던 백부장은, 예수님의 용서, 의탁⋯ 이 모든 것들을 보고 고백합니다.

“그는 무죄한 자다! 우리가 무죄한 자를 죽였다!”

원수의 입에서 “의인이다”, 고백이 나왔다면 죄수로 처형되었지만 예수님은 성공자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살다간 이가 링컨입니다. 경쟁자 스탠턴은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수염과 털이 많은 고릴라 대통령을 세울 바에야 아프리카에 가서 한 마리를 데려오면 될 것이 아닌가? 
아프리카로 고릴라를 사러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가보면 좋은 고릴라가 한 마리 있으니 말이다.”

얼마나 모욕적 언사입니까? 
그러나 스탠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링컨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으로 임명합니다.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시신을 안고 울부짖은 사람은 상대당(黨) 대통령 후보 스탠턴입니다. 
스탠턴은 이렇게 흐느꼈습니다.

“여기에 누워있는 이 분은 인류가 소유할 수 있었던 최고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링컨은 미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위입니다. 
노예제도 지지자들이었던 남부는 링컨을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도 링컨을 1위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링컨의 성공은 업적 때문이 아니라 인격 때문입니다. 원수에게서조차 인정받는 삶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성공에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원수에게서조차 인정받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성공자가 됩니다.

그보다 더한 성공은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존경 받는 것입니다. 작가 포스터는 <인도 가는 길>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라고 씁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자들이 가장 행복하듯이 내가 존경하는 그 사람에게서 내가 존경을 받을 때 그는 진정 성공한 사람입니다.

㈁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서 성공자입니다.

성공(成功)은한문으로 이룰 ‘성’(成) 공 ‘공’(功), 목적을 이룸, 뜻을 이룸입니다. 내가 품은 뜻을 이루고 목적을 이루면 그게 성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부자가 되는 성공만을 생각합니다. 그건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가, 마지막 말을 보면 성공자입니다

성공자는 소유물이나 신분이 결정짓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자꾸 이런 식으로 성공의 척도를 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성공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죽을 때는 기쁨 없이 쓸쓸하게 죽어갑니다.

영국 여왕이자 유럽 패선계의 지도자 엘리자벳은 임종 시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다 끝났습니다. 나는 끝장에 이르렀습니다. 끝장, 끝장,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인생, 끝났습니다. 인생을 누리고 승리하고 사랑하였으나 이제는 그 끝이 이른 것을 압니다!”

이것이 세계의 절반이 부러워했던, 영국 여왕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문호(文豪) 톨스토이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하고 당황해 했습니다. 훌륭한 작품을 남긴 사람답지 않은 마지막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여섯 시간을 달려 있었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 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진정 성공자엿습니다.

우리 성공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느냐, 그걸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먹고 쓰고 입고 이름을 내고⋯ 나를 치장하는 내 길만 달려왔다면 성공의 길을 달려온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관에 뚜껑이 덮이기 전에는 성공 유무(有無)를 함부로 결정지으면 안 됩니다.

㈂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성공시켜 성공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성공시킨 사람입니다. 한 강도의 생애를 변화시킵니다. 백부장의 입술에서 진정한 고백을 하게 합니다. 12제자를 비롯해서, 바울, 삭개오… 많은 사람들을 성공시켰고 그들 성공은 예수님 성공입니다. 예수님은 책 한 권, 학교 하나 세워보지 못한 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에 관한 책으로 온 세상이 넘칩니다. 남을 성공시키니까 예수님 자신이 성공한 것입니다. 월드컵 선수들이 성공하니 히딩크가 성공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마술가 톨스톤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습니다. 학식도 없고 어릴 때 가출한 사람. 걸식하며 철도변에 있는 간판에서 글자를 배우던 그가 어떻게 미국 제일의 마술가가 되었냐? 는 물음입니다. 톨스톤은, 다른 마술가들은 청중을 보며 “여기에 바보들이 많이 와 있구나, 이들을 속여 돈과 명예를 얻어야지!” 하지만 자신은 다르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를 보러 온 이 사람들이 참 고맙다, 나는 나를 만나러 온 청중을 사랑한다, 나도 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웃음과 행복을 주겠다!’

그런 생각으로 무대에 섰기에 성공적인 마술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니 내가 행복하더라는 것입니다. 남을 웃게 해주려고 했더니 내가 웃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공은 더욱 돋보입니다. 성공의 개인화, 사유화는 진짜 성공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공이 인간 사회에 유익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될 때 비로소 그 성공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진정한 성공이란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소박한 견해를 보입니다.

3. 성공의 비결

<성공학>은 인간의 무한한 성공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학문입니다. 성공학을 최초로 체계화한 사람은 오리손 스위트 마든입니다. 7세에 고아가 된 마든은 고생하다 사무엘 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읽고 당시 성공 대명사였던 에디슨, 록펠러, 카네기, 전화기 발명자 알렉산더 벨… 등을 인터뷰합니다. 그들 성공자들에게서 공통점들을 찾아냅니다.

-자신감.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창조력)를 인정하는 것!

-적극적 사고. “노(No)할 때가 온(On) 할 때이다”라는 적극적 사고를 활용하는 것!

-창조적 사고. 정주영씨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갖고 나가라!”.

-심혈을 기울임. 최선을 다했습니다.

-집중적 노력, 집념. 갈렙과 같은 일편단심입니다.

-성결한 목표. 외국 사업가. “요한복음을 이해한다면 서른 살을 넘어서면 스스로 서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안에서의 죄사함과 성결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두뇌를 갈고 닦아 기술을 연마한 사람의 성공 비율은 15%, 인간관계를 잘 해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85%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일시적 성공입니다. 진정한 성공을 원한다면 나를 창조하신 분과의 바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출생시킨 부모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안 되면 성공과 행복이 허전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의 목표에 맞춰 살아갈 때 진정한 성공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평생을 G채널에 맞추어야 합니다.

G는 God입니다.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내가 흔드는 부채는 나를 조금 시원하게 하지만 전기에 연결된 선풍기는 여러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전기 코트에 연결하면 엄청난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힘에 코드를 꼽는 순간 내 속에 있던 성공인자는 폭발적인 힘을 내게 됩니다. 링컨은 거의 무학 출신이지만 성경책 한권으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대정치가 글래드스턴은, “나는 일생동안 유명한 명사 95명을 알고 지냈는데 그 중에서 87명은 성경을 신봉하며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하나님이라는 엄청난 전기를 기도 파이프를 통해 얻어냈습니다. 그는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루터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하나님만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는 기도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자가 되고 성공자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에게, 환경에게 맞추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예수가 단순한 유대인 남자로 보이고 오히려 그의 성공을 앗아간 남자로 보였습니다. 환경을 보니 물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다는 말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당신은 구세주다!” 채널을 맞추었을 때 그는 성공한 여인이 됩니다.

성경은 결코 성공학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번영과 부흥을 말합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베드로를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하자, 박해도 받겠지만 축복도 100배로 받을 것(막10:28-30)이라고 하셨습니다. 100배의 성공적 삶을 보장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온유함에도 농사 지어 백배 결실을 맺는 성공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공적인 삶을 기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존감과 자족! 이게 성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삼아 영혼이 구원을 얻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 바른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공자 예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성공시키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04-20-2024(토) 누가복음 23:39-4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One of the criminals who hung there hurled insults at him: "Aren't you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교회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좌우에 두 강도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의 이름을 "디스마"와 "게스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야이시거든 우리들을 구원하고 당신도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요구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강도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다른 강도에게 우리는 십자가 형을 받을만한 죄를 지었지만 이 사람은 십자가 형을 받아야 죄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하고 간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몇 가지 은혜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다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세상은 "낙원(파라다이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에 간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둘째는 일생동안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라도 주님을 인정하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마지막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한 강도와 같은 은혜를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깨닫고 주님 앞으로 나가는 것이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구원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두 강도가 비록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한 강도는 회개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다른 강도는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회를 믿음으로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에서는 어느 강도가 회개한 강도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오른편 강도가 회개하였다는 생각하는 것은 오른 편은 구원을 받는 백성들이 머물러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이 받으신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품은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히 12:2).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의 기쁨을 바라보셨다는 것과 공의로운 아버지께 모든 심판을 맡기시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예수님이 품으신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22편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더 생생하게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어야 하고 믿음으로 깨닫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모두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많을지라도 오직 단 한가지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후에 따라오는 온갖 은혜를 누릴 수 있는 회개한 강도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게스타스는 이에수스(Ἰησοῦς)와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두 도둑들 중 한 명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그는 디스마스(Δυσμας)가 이에수스에게 자비를 간청한 것과 달리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이에수스를 비웃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루카스 복음서(Εὐαγγέλιον κατὰ Λουκάν)' 23장 32절~43절에서 언급된다.

본래 루카스에선 두 도둑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4세기 중반의 외경인 '니코데무스 복음서(EVANGELIVM NICODEMI)'에선 처음으로 회개한 도둑과 그렇지 않은 도둑을 각각 디스마스와 게스타스 - "게스타(GESTA)" - 라고 기록했다. 제노바 대주교 자코모 다 바라체(Giacomo da Varazze)가 쓴 '황금전설(LEGENDA AVREA)'에선 회개하지 하지 않은 도둑을 '게스마스'라 칭한다.

게스타스는 때때로 "선한 도둑"과 대비되는 "악한 도둑"이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게스타스와 똑같이 도둑과 살인, 폭행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회개로 구원받은 디스마스와 대조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후일 경건한 민간 신앙에선 게스타스와 디스마스가 각각 이에수스의 왼쪽과 오른쪽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각색되었다. 한편, 도둑은 강도를 막아달라는 의미를 지닌 라티움어 부적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문헌에서의 언급

6세기에 쓰인 외경 '아랍 유년기 복음서(إنجيل الطفولة العربي, 수리야 유년기 복음서)'에선 게스타스와 디스마스를 각각 두마쿠스와 티투스(TITVS)라 적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두마쿠스는 티투스와 함께 사막을 지나던 성 가족을 공격하려 했다고 하는데, 이때 티투스는 성 가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두마쿠스를 설득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미스르로의 도피 당시 디스마스가 성모와 아기 이에수스를 보호하는 동안 게스마스가 성자 요세프(Ἰωσήφ)로부터 물건을 강탈했다는 내용 - 이는 후일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황금전설(The Golden Legend)'에도 등장한다. - 이나, 도피길에서 성모가 모유가 떨어진 어미를 대신해 디스마스에게 젖을 물린 반면 게스마스는 그의 어미로부터만 수유를 받았다는 내용의 전승들도 존재한다.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쓰인 루스어 비경 '십자가 나무의 말씀(Слово о Крестном Древе)'에선 게스타스를 한 십자가를 훔친 미친 도둑으로 묘사하는데, 훔친 십자가는 대홍수 당시 모셰(משֶׁה)가 신으로부터 받아 마라(Marah)에 심은 씨앗이 자란 나무의 가지 세 개를 엮어 만든 것이었다. - 나무에 관해선 탈출기(שמות) 15장에서도 언급된다. - 추측컨대 십자가는 로마 황후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아우구스타(FLAVIA IVLIA HELENA AVGVSTA)에 의해 발견되었음을 인정받았음에도 성물로 취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십자가는 종적을 감추었다.

대중 문화에서의 모습

미니시리즈 '나츠라트의 이에수스(Jesus of Nazareth)'에서 도둑은 아람(Aram)이라 불린다.

필리피나스에서 관용구로서의 사용

필리피나스의 카톨릭교도들은 실망이나 응징의 감탄사로서 예후다 이시카리오트(יהודה איש־קריות)를 뜻하는 후다스(Hudas), 바르 압바(בר אבא, 바라바스)를 뜻하는 바라바스(Barabas)와 함께 게스타스를 말하는 헤스타스(Hestas)를 사용한다.
단어는 1980년 필리피나스 TV 시리즈인 '존과 마르샤(John En Marsha)'를 통해 특히 유명해졌다.











04-19-2024(금) 누가복음 23:32-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너를 구원하라(37절)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에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을 때 눈 앞애서는 모욕과 조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관리들과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했는데, 관리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예수님을 비웃으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라고 모욕했습니다(35절).

군인들은 그들이 마시는 싸구려 신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며(시 69:21)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고 비웃었습니다(37절).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옷, 신발, 터번, 속옷 등을 각각 제비뽑아 나누어가졌습니다(시 22:18).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는데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중 몇몇은 예수님 앞을 지나가면서 그 앞에서 머리를 흔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막 15:29~30).

유대 종교 지도자들, 군인들, 백성들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님을 비웃고 모욕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 4:3, 6).

많은 사람을 구원한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모욕적인 말을 들으시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려오지 않으심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기 백성을 살리신 것입니다.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5, 18).

주님이 받으신 고통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사 53:5-6).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려고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 모습을 닮고 실천하기 위하여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2. 주님의 심정(시 22:1~21)

빌라도 관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이 받으신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품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이에 대해 별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이 이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는 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
베드로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의 기쁨을 바라보셨다는 것, 그리고 공의로운 아버지께 모든 심판을 맡기시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기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예수님이 품으신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22편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더 생생하게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호소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조상)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받으신 고난에 대한 토로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자신)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받으신 고난에 대한 토로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시 22:1~21) 구원의 요청 그리고 신뢰

22~31절 – 구원의 확신, 고난 너머의 기쁨을 바라봄 

우리는 예수님이 고통 중에 어떤 심정이었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 중 하나가 시편 22편이었고(마 27:46), 이 시편이 확실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표 하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예수님은 이 시편이 노래하는 것처럼 1) 자기의 고통을 아버지께 토로하고, 2) 아버지의 구원을 요청하며, 3) 거룩하신 아버지의 공의와 구원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고난을 감당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수치스러운 모욕 앞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 8)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이 마음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3. 주님의 말씀(반응)(28-31; 34)

주님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육체적 고통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모든 고통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와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 중에 또 한 가지 가장 놀라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이상하리만치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하게 맞아 고통스러울 때 또는 수많은 희롱과 욕설을 받는 순간에 참으로 놀랍게도 거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욕으로 되갚지도 않으시고, 고통 중에 짜증 섞인 호통을 치거나, 경고하지도 않으시고, 원망이나 두려움에 터져 나온 외마디 말도 없으셨습니다. 

흔히 우리 몸이 심히 아프거나 많은 정신적 상처를 입었을 때 가까운 사람들이나 원수들을 향해 우리 입에서 아주 쉽게 나올만한 말들을 예수님의 입술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하지만 주님은 입을 열어 몇 마디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의 기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주님의 반응 즉 주님이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두 가지 말씀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입을 닫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고통 중에 주님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준 반응입니다.

1. 나 말고 너희를 걱정하거라(28~31절)

첫 번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28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통과하여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자기를 따라오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많은 여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슬퍼했다기보다 로마 군병에 의해 죽임당하는 유대인 죄수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고 슬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딱하고 안됐다고 느껴서 슬피 울며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 흘리고 모욕받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보다 앞으로 징벌의 날을 맞이할 예루살렘 백성을 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더욱 구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29절부터 30절까지 하신 말씀은 예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며 경고하신 임박한 심판에 대한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21장). 

곧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된 징벌의 날이 닥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록된 말씀대로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29절; 사 54:1). 한마디로 심판을 피해 목숨을 겨우 부지하려면 애가 없는 상태가 훨씬 유리한 심각한 상황이 예루살렘에 닥칠 것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심각한지 사람들은 산들을 보며 차라리 지금 우리를 덮어 우리 목숨이 단번에 끊어져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30절; 호 10:8; 사 2:19,20).

예수님은 “푸른 나무에게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물으셨습니다(31절). 생명력 있고 열매 맺는 푸른 나무 같은 예수님께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셨다면, 죽어서 말라버린 그래서 열매가 없는 마른 나무 같은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더 극심한 심판을 내리겠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약 40년 후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포위되어 식량이 없어 자기 아기를 잡아먹고 굶어 죽고 군대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등 약 110만 명이 죽임을 당하고 그중 약 만 명의 백성이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10만에 가까운 백성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딸린 식구(특별히 아기)가 있는 사람은 그날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극심한 고통 중에 빨리 죽기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성안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그 무서운 징벌의 날을 생각하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며 통곡하시기도 했습니다(눅 13:3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극심한 고통 중에 죽음으로 가는 길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아닌 자기 백성의 안위를 돌아보셨습니다. 너희가 당할 고난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돌이키라. 나를 위해 울지 말아라. 너희를 위해,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 

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34절)

주님의 이타적인 사랑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해서만 표현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두 번째 말씀이자 십자가 위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가상칠언) 바로 이것입니다(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모욕하는 군병들과 관리들, 서서 구경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죽인 원수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손에 대못을 박은 군병, 자기 속옷을 벗기고 겉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경비들, 욕하고 비웃은 백성들, 자기를 이 죽음까지 오게 한 교만하고 완악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아무런 분노의 말도 쏟지 않으셨습니다.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너희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하신 말씀,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대신 아뢴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죄를 범하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반역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가 사해진 것은 죄가 그만큼 덜 심각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우리 대신 그 죄의 징벌을 다 지시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44). 예수님은 친히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서로 용서하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골 3:13)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기 힘든 원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하기 힘든지, 용서하기 어려운지 계산하고 따지지 마십시오. 다만 주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주님이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셨는지 깊이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도리어 백성의 안위를 돌보신 이타적인 사랑,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고 조롱하는 원수를 위해 도리어 용서를 빌어주는 한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우리가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깊이 묵상해볼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아무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옮겨간 시몬을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며 이 시몬의 아들 루포를 가리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라고 부릅니다(롬 16:13). 이로 봤을 때, 시몬은 아마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들 루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까지 숨차게 십자가를 들어 나르고 그 무거운 통나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시몬은 어쩌면 두손을 털고 유유히 내려가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휴~ 다행이다. 내가 이 십자가를 옮기기만 했지, 실제로 여기 못 박혀 죽을 저주받은 사람은 아니라서…”

하지만 시몬은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뒤에 피 흘리며 온갖 조롱을 받고 따라오던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이것이 우리가 주를 영원히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아버지의 뜻을 붙잡고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어떤 원망이나 불평, 염려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굳건한 신뢰 그리고 철저한 순종의 마음입니다. 어떤 힘든 환경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품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고통의 행렬 가운데 철저한 침묵을 유지하셨지만, 그중에 입을 열어서 하신 말씀을 통해 백성과 원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베풀어야 할 형제 사랑이며 원수 사랑입니다.
주가 사랑한 것처럼 사랑합시다.
주가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합시다.








04-18-2024(목) 누가복음 23:26-3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레네 시몬(26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As they led him away, they seized Simon from Cyrene, who was on his way in from the country, and put the cross on him and made him carry it behind Jesus.

마태복음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마가복음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억지로(29) 앙가류오(anggarĕuō)  ἀγγαρεύω 스트롱번호29

1.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2. 강제하다. 3. 억지로 가게 하다
발음 [ anggarĕuō ]
어원  /  외래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강제하다, 억지로 가게 하다, 마 5:41, 27:32.

참고 정보 / 문법설명  미래 ἀγγαρεύ- σω, 제1부정과거 ἠγγάρευσα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미래 ἀγγαρεύ- σω, 제1부정과거 ἠγγάρευσα

관련 성경  / 
억지로 가게 하다(마 5:41, 막 15:21).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형 될 것이란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누가봐도 촌뜨기 형색이 분명합니다.
마침 예수님꼐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시던 중에 지치고 진하여서 그 자리에 쓸어지셨습니다.
그러자 로마 군병은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촌뜨기와 같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 대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면 요즈음 말로 쪽 팔리는 신세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의 재수없었던 사건으로 인하여 구레네 시몬에게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서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사람 시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앙가류오. anggarĕuō. ἀγγαρεύω)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되었지만 그 결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 한번의 재수없었던 사건이 일생동안 기념할만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그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루포 즉 구네레 시몬은 사도 바울과도 밀접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억지로 행한 것도 놀랍도록 큰 은총으로 이끌어주신 것처럼 오늘날도 억지로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억지로 불렀던 찬송과 억지로 드렸던 헌금과 억지로 하던 기도가 장차 나에게 크나큰 은총으로 덮어질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자는 애국가의 가사처럼 오늘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을 부르며 찬송하는 일에 성공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04-17-2024(수) 누가복음 23:13-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1절)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But they kept shouting, "Crucify him! Crucify him!"

σταυρόω 스트롱번호4717
1. 십자가에 못박다.  2. 마 20:19. 3. 갈 5:24
발음 [ staurŏō ]
어원  /  미래 σταυρώσω, 제1부정과거 ἐσ- ταύρωσα, 완료수동태 ἐσταύρωμαι, 제1부정 과거수동태 ἐσταυρώθην, 471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십자가에 못박다, 십자가에 처형하다.
 a. [문자적으로] 마 20:19, 23:34, 26:2, 27:22, 26, 31, 35, 38, 28:5, 막 15:13, 눅 23:33, 요 19:6, 행 2:36, 고전 1:13.
 b. [상징적으로] 갈 5:24, 6:14.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십자가에 못박다(마 20:19, 눅 23:23, 갈 5:24), 십자가에 못 박히다(마 26:2, 요 19:16, 고후 13:4), 못 박히다(요 19:


소리
φωνή, ῆς, ἡ 스트롱번호5456
1.

소리

2.

음성.

3.

말소리

발음 [ phōnē ]
어원
5316과 유사한 어원에서 유래

소리(마3:3, 눅23:23, 계9:9), 음성(눅22:17, 요10:27, 계16:17), 말(행13:27).
이긴지라(2729) 카티스퀴오(katischüō)  κατισχύω 스트롱번호2729

1. 강하다.   2. 지배하다. 3. 승리를 거두다
발음 [ katischüō ]
어원  / 미완료 κατίσχυον, 미래 κατισχύ- σω, 제1부정과거 κατίσχυσα, 2596과 2480에서 유래
이기다(마 16:18, 눅 23:23).

소리(5456) 포네(phōnē)  φωνή, ῆς, ἡ  
1. 소리.   2. 음성.  3. 말소리
발음 [ phōnē ]
어원  / 5316과 유사한 어원에서 유래

승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경구절 10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 (요한1서 5장 4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21장 31절)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출애굽기 15장 6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장 1절)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여호수아 10장 8절)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에베소서 6장 13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 4장 7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장 33절)  


세상을 이기는 믿음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 있어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 아닙니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상도 있고,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1874∼1965)은 “경쟁의 세계는 두 가지 단어밖에 없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합을 하거나 싸우면 승리를 해야 됩니다. 

이번에 시드니 올림픽 경기에서 양궁으로 한국의 첫 금메달 소식을 안겨 준 고등학교 2학년의 윤미진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윤양의 어머니는 마흔 네 살로 군포에 있는 유리 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아버지는 쉰 네 살로 트럭 운전수이며 건설 공장 현장에서 일합니다.
한 달 월급이 150만원밖에 되지 않는 맞벌이 부부이며, 1남 4녀의 가정에서 태어난 윤양은 어려운 가정형편이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특히 ‘윤미진 학생은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태릉선수촌에서 교회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경기 나갈 때에도 목사님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 말고 나가라.”고 기도도 해 주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기도를 열심히 하던 윤미진 학생이 ‘금메달 땄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땄을 때 올림픽 상금을 보면, 개인 상금 금메달이 6천만원, 단체 상금이 4천만 원으로 윤미진 학생의 경우에 금메달이 둘이 됩니다. 

연금이 매달 60만 원씩 나옵니다.
협회 포상금과 격려금이 약 3천만원, 정몽구 대한양궁협회 명예회장이 천만 원 상금을 주고, 더 나가서 승용차 한 대도 배당이 됩니다. 

각계 상금과 격려금을 합하면 포상금의 총합계가 약 3억 원 이상이 됩니다.
경기에서 승리하면 영광과 포상금이 주어집니다.
수년동안 땀흘리고 훈련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러나 실제 금메달 가격은 12만 원 밖에 안됩니다.
은에다가 금으로 코팅을 해서 만든 메달이지만, 그 이상의 큰 영광과 상과 보람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 354∼430)는 “기독교인의 승리의 원천은 바로 믿음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승리하는 사람들은 다 그 마음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반석 같은 믿음, 불굴의 믿음’이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시작해서 승리의 상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A.D. 90∼95년경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에 보낸 편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이단의 미혹을 받고, 타락하고,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와 불법에 포기하지 말고 싸워서 이겨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박해와 시련과 싸워서 이기고 승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사탄 마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만 갖기만 하면 세상도 이기고, 질병, 가난, 저주도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 ‘born of God’ 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잉태되었다가 믿음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불행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이 되고, 거짓된 진리와 거짓된 삶에서 진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죄를 지었으나 용서함 받고, 세상에서 자유함을 얻으며, 공포가 떠나고, 평강이 있습니다.
죽었다 할지라도 부활의 생명을 갖고 소망적인 삶을 살아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첫째, 고난에서 승리합니다.
둘째, 죄와 사망에서 승리합니다.
셋째, 마귀로부터 승리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1. 고난에서 승리 -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 37) 

첫째, 우리는 고난에서 승리합니다.
이겨도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풍족하게 넉넉히 이깁니다. 아무리 환난, 곤고, 핍박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A.D 57년경 로마 교회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핍박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 ‘교회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박해하고, 핍박하고, 추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탄압과 박해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끝까지 그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시편 34편 19절 말씀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려면 고난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올바로 살려면 고난이 닥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이 지나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있습니다. 부정 부패하는 사람 또는 정경 유착하는 사람, 돈을 모으는 사람, 속이는 사람,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당장 그 사람이 잘되는 것 같지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치가와 사업가로서 불법, 탈법, 비리를 행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하나님께 멸망과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통해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患難)을 당하나 담대(膽大)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겨놓고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행복은 고난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 역경과 고난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에게 고난과 시험은 같은 의미입니다. 

여러분, 시험을 잘 치루어서 통과하면 합격의 영광과 포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시험을 봐야 됩니다. 시험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증 시험을 봅니다. 시험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한 단계 더 진급하게 되고, 시험을 통해서 더 연단 받게 되고, 시험을 통해서 더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 철학자 시인 세네카(Lucius Annacus Seneka ; B.C. 4 ∼ A.D. 65)는 “불은 철을 단련시키고, 역경은 강자를 단련시킨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철이 더 강해지려면 불 속에 들어가고, 불 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또 두들겨 맞고,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불 속의 단련함을 통해서 철은 비로소 강철이 됩니다. 이처럼 사람도 연단을 많이 받으면,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가난과 역경 속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이긴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한 정신력을 갖고, 큰 포부와 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가지면 삶을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여름에 ‘태풍과 싸워 이긴 노인’의 이야기가 신문에 났습니다. 

지난 8월말에 태풍 제12호 ‘프라피룬’이 서해 남쪽을 통과하였습니다. 이날 새벽에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에 사는 63세 고흥산씨는 ‘태풍이 온다’는 기상 예보를 듣고 태풍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26척의 배를 다 육지로 옮겨 놓고, 8척의 배는 방파제 뒤로 배를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고씨는 “이 배 한 척이 내 재산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굶어 죽으나 바다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나는 배를 건져야 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살면 배도 산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배를 육지에 옮겨 놓고, 방파제에 옮겨 놨는데 고씨는 오히려 폭풍을 향해서 배를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도가 칠 때 정면으로 배를 몰고 들어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라고 생각한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그 속을 향해서 배를 몰고 전진하였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뱃머리에 부딪히자, 배는 90도 각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가 다시 수직으로 떨어졌습니다. 무려 10시간 동안을 목숨을 걸고 파도와 싸웠습니다. 그러는 동안 태풍을 피했던 다른 배들은 다 산산조각이 나고, 방파제도 파도에 밀려갔습니다. 

26척 배, 8척 배가 다 파선(破船) 되었지만 고씨의 배는 폭풍이 끝나자 유유히 바다에서 다시 그의 고향 섬으로 돌아왔습니다. 배가 들어올 때 마을 사람들이 환호하며 격려하고 그에게 감탄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폭풍과 싸운 사람의 배가 살아 남았습니다. 폭풍을 피하고, 폭풍에 대해서 옮겨 놓은 사람들의 배는 다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는 정면돌파 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야구 선수가 공을 때릴 때 스트라이크로 들어오는 공을 때려야 홈런이 됩니다. 잘못된 공은 홈런이 나오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는 비겁하게 살아선 안됩니다. 도망가거나 회피해서도 안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정면 돌파할 때, 그 사람에게 승리가 나타납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때로는 몸이 아프고, 고통 중에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면, 반드시 거기에는 생각 이상의 기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모두 고난 속에서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죄와 사망에서 승리 - 죄, 사망, 구원, 영생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는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둘째로 죄와 사망에서 승리합니다. 사망과 죄는 우리를 괴롭힙니다. 마치 뱀이나 전갈이 독침을 쏘듯이 사망과 죄는 우리를 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고 나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처럼 사망은 죽음의 공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이 쏠 때, 그 공격을 물리 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두렵지 않고, 담대하게 승리하면서 인생을 살아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죄를 졌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죄에 대한 용서가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용서하여 주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만이 우리에게 구원과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 말씀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갔을 때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陰部)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고 음부(陰部)의 세력이 이기지 못하는 것은 바로 교회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의 구원의 방주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용서와 구원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축복이 나타납니다. 교회를 통해서 치료와 건강이 나타납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 결코 교회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교회만이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사도 바울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누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누가 나에게 구원을 베풀 것인가?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함께 하시면 죄와 사망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 녹스(John Knox ; 1514∼1572)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라. 그리하면 육체의 죽음에도 두려움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을 놓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배신과 배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질병과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담대하게 용기 있게 사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아무리 죄가 있어도 죄가 무겁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무거운 돌을 올려 놓아도 그 무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죄가 무겁습니다. 죄를 져서 고통을 당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누가 죄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이 되어도 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장관, 국회의원, 재벌, 학식이 높은 사람들, 존경받는 인물들도 죄와 싸워서 이기지 못합니다. 인간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죄와 시험과 유혹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죄의 노예가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워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교회 다니는 남자 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퇴근길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곧바로 병원에 갔으나 병원에서는 병명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두 달 지내다가 또 쓰러졌습니다. 이번에는 더 큰 종합병원에 갔습니다. 종합병원에 가서 ‘뇌혈관 조형술’을 통해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비로소 병명이 나왔는데 ‘자각성 수막성 동맥류’ 이었습니다. 뇌혈관 대동맥이 부어서 대동맥이 터지는 병이었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해야만 합니다. 수술을 해야지 만약 다시 재발하면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된다. 수술하지 않고 재발하면 죽는다.”라고 생각하니 그는 이상하게 수술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뇌혈관 동맥이 부어서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죽고 사는 건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하나님께 맡깁니다’하고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수술 날짜를 잡았지만 그는 연기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침 교회에 기도 성회가 있어서 일주일동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수술하지 않게 살려주십시오. 기도 응답을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십시오.”하고 기도 했습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나오다가 그만 또 쓰러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병원입니다.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병원에서는 검사를 다 하고 수술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의사가 눈이 휘둥그래져 깜짝 놀랬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부풀어 있던 실핏줄은 온데간데 없고 뇌혈관이 제대로 잘 통하는 정상적인 치료와 회복이 됐습니다. 

수술을 해도 50% 성공률인데 하나님께 일주일동안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나타나서 수술하지 않고 깨끗이 고침 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줬으니 이제 남은 인생 나도 하나님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간절히 기도합니다. 목숨걸고 열심히 주님 앞에 철야기도, 새벽기도, 금식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응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기 때문에 응답 받지 못합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마귀에게 승리 - 마귀, 사단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셋째로 마귀로부터 승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죄악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시험, 유혹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이단, 사설(邪說)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시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권능을 주시면, 세상 그 무엇과도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긴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말씀으로, 성령으로 싸우기 때문에 세상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일단 싸움을 하고 경기를 하면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경기가 끝납니다. 사람과 사람이 경기하고, 싸우고, 사람과 맹수가 싸우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승리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마귀와 싸움에서도 우리는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결코 져서는 안됩니다. 

골로새서 2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하여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함을 통해서 승리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우리에게 보장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질병을 일으키고(욥 2:7), 믿음을 떨어지게 하고(눅 22:31~32), 불순종하게 하고(요일 3:8), 미치게 합니다(요 10:20). 또 죄를 짓게 하고 망하게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승리를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이기게 만들어 주시고, 행복하게 하시고, 축복을 주시고,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17세기에 영국의 유명한 작가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 1564∼1616)는 “성도들이여 사탄과 싸워라 사탄은 인류의 적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에게 이 사탄이 사람 속에 들어가면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살인하며, 악한 죄를 일으킵니다. 마귀의 정체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 현상들은 나타납니다. 

왜 사람이 악하고 사납고 잔인해집니까? 그 속에 마귀가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정치가 속에 들어갑니다. 사업하는 사람 속에 들어갑니다. 부정 부패하는 사람 속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죄를 일으키고, 국가 경제성장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공산주의를 일으키는 이 모든 악한 역사가 다 사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이 나라를 괴롭히는 모든 사탄 마귀는 물러갈지어다.”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도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얼마 전 금융 연수원에서 ‘기업을 망하게 하는 요소 10가지’를 발표했습니다. 한 교수가 나와서 “왜 기업이 망하냐? 회사가 망하는 이유가 있다.”라고 몇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그가 지적한 10가지 중에서 특이한 것은 “전문가의 충고보다도 점쟁이 말을 더 믿으면 망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치가들이 점쟁이한테 찾아가고, 재벌가들이 점쟁이한테 갔다가 부도나고 망합니다. 

요즘 보면 점쟁이 찾아가고, 무당한테 찾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연예인이나 체육가들, 사업가들, 정치가들, 점쟁이 집 문 앞에 줄 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말세에는 미신과 우상숭배, 미혹하는 영들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혼란을 시킵니다. 

얼마전 신문에 “테헤란 밸리에 처녀도사 떴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강남 테헤란 밸리에 있는 오피스텔에 자리잡은 한 철학가, 처녀도사 김민정(29살)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처녀도사에게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가서 점을 칩니다.
점치는 내용을 보면 “내가 세우는 벤처 기업이 흥합니까? 망합니까? 투자자금은 얼마큼 해야됩니까? 동업자와 궁합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이력서를 가져와서 어느 직원을 채용해야 됩니까? 또 동업자가 와서 누굴 회사 대표로 세워야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또 건설업 회사들, 유흥업 관계자들, 더 나가서 자녀 진학 문제 등, 하여튼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와서 “점을 쳐달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씨가 하는 말이 “첨단 과학 기술로 무장한 벤처 기업인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찾아오더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도사 수입이 한 달에 몇천 만원입니다.
점쟁이, 무당은 알아 맞출 확률이 50% 가 있습니다.
맞아도 그만, 틀려도 그만인데 그래도 사람들은 점쟁이한테 찾아갑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불안해합니까?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기 때문에 마지막 찾아가는 곳은 점쟁이들입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의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도 이 점쟁이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 사람들, 중국 사람들은 80% 이상이 다 회사 경영을 놓고 점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한번 복채(卜債) 주는데 200불씩 돈을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마귀의 점치는 영에 사로잡혀서 오늘날 미신과 불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겠다고 마귀 사탄에게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믿음”이지 결코 “점”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중학 입시를 놓고 친구들이 점치러 갔습니다. 그래서 몇 명이 함께 가서 점을 치며 “중학교는 어느 학교 갑니까?”라고 하며 친구들과 호기심에 찬 눈으로 점쟁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교회를 다니는 한 학생이 따라갔습니다. 그 학생이 점치는 차례가 되었는데, 점쟁이가 험상궂게 앉아 있어서 그만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점치면 안 되는데 친구 따라 왔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이 무당이 이름을 부르더니 생년월일을 따지고 그 다음에 점을 치는데 점괘(占卦)가 안나왔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점을 치지 못하다가 학생을 똑바로 쳐다보고 “너 예수 믿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예, 나 예수 믿어요. 우리 엄마 매일 새벽기도 해요.” 그랬더니 점쟁이가 소리지르면서 “누굴 망하게 하려고 찾아 왔느냐?”라고 하며 “나 죽는 꼴을 봐야 되겠느냐, 당장 나가라.”고 하며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이 초등학교 때 점쟁이 찾아갔다 쫓겨남 당하고 나중에 커서 이 학생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믿음 가진 사람,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은 점쟁이한테 가도 점괘(占卦)가 안 나옵니다. 점쟁이한테 가서 점괘가 나왔다하면 그 사람은 가짜 신앙 가진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점괘가 나오지 않습니다. 점쟁이 집에 찾아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승리하는 성도가 되자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자는 고난을 당해도 승리하고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죄와 사망에서 승리합니다. 마귀와 싸워서 승리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비록 험하고 또 환난, 풍파, 고난, 고통이 많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올바른 믿음만 가지면 반드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대대로 우상을 섬긴 집안에서 자란 한 처녀가 시집을 가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이 가내공업을 운영하는데 잘 됐다 안됐다 해서 항상 걱정이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시간나는대로 공장 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틈만 나면 점쟁이한테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점쟁이한테 자주 찾아갔는데 한번은 점쟁이가 똑바로 쳐다보고 “당신, 무당 신 받았어. 무당이 돼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점치러 가서 남편 잘 되기 위해서 점쟁이한테 갔지 무당 되러 간 게 아닌데 무당 신 내렸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 나니까 걱정이 났습니다. 무당이 되면 가족에게 떠나서 버림받고, 무당으로 한평생 살 것을 생각하니까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잠을 못 자고 엎치락뒤치락 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가면 괜찮다.”라고 어디에서 들어서, 누가 전도하는 사람이 없는지 찾고 있는데 마침 어느 교회 집사 한 분이 전도를 하였습니다. 

“교회 나가자고.”하며 집사님이 전도했습니다. ‘그렇지 내가 집사님 따라 교회 나가면 무당이 안 돼도 될텐데.’라고 생각하며 무당을 다시 찾아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나 이제 교회 다니려고 그러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당 되기 싫다.”라고 말했더니 무당이 화를 내면서 “너 교회 나가면 급살(急煞) 맞아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죽더라도 한 평생 무당으로 사는 것 보다 낫다.’라고 생각해서 ‘하나님 믿겠다.’고 결심하고 그 집사님 따라서 교회 나갔습니다. 

교회 나가자마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불신앙 우상 숭배한 것, 지금까지 잘못한 것,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 했습니다.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 급살은커녕 마음이 기쁘고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그전에 점쟁이한테 한 번 갔다오면 찜찜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공포 속에서 살았는데 교회 갔다오니까 그저 기쁘고 편안해서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급살(急煞)을 맞아 죽는다.”는 소리가 진짜 나타나는데 보니까 남편이 교회 나간 걸 알고나서 부터는 한번도 결혼하고 나서 화를 낸 적이 없는 남편이 ‘교회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막 두들겨 패는데, 남편한테 급살을 맞아 죽을 것 같았습니다. 

“큰일났다. 내가 어떡하던지 이걸 견뎌내야지. 남편 마음속에 이 마귀가 들어가서 그렇구나.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구나.” 

“하나님, 이제 내가 죽던지 살던지 결판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금식기도하고, 새벽기도를 1년 했습니다. 

“우리 가정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우리 직장, 공장도 잘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살아 계신 표적을 나타나게 하시고, 마귀와 싸워 이기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1년 기도하니 그렇게 강퍅하던 남편이 점점 착해지더니 1년 만에 부인 따라서 교회도 나오게 되고, 남편도 구원받고 온 가족이 다 교회 나오고, 하나님이 사업장에 축복을 주었습니다.
교회 나오기 전에는 한 달 수입이 2백만 원이었는데 1년 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까 축복 받고 잘돼서 천만 원씩 수입이 되고, 십일조 20만 원 내는 사람이 1백만 원씩 내고, 전도도 백 명이나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는 승리했습니다.
점쟁이는 나에게 급살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승리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기시기 바랍니다. 

가난과 죄악과 저주와 싸워 승리할 때 하나님께서 영적인 건강과 축복과 자손이 번창하고, 사업이 잘되고 형통하고, 행복한 축복까지 보장하여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믿음이 있어야 싸움에서 승리하지, 믿음 없이 의심으로 꽉 들어차고 불안과 두려움 공포 속에 빠지면 아무것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달라’고 간구 하십시오.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우리와 함께 타고 가는 차 안에서 오스말 목사가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통화 내용은 오늘 저녁에 있을 예배에 특별히 초청한 자기 부인의 이모가, 만나기로한 버스 정류장에 시간에 마추어 도착하겠다고 했다. 우리 부부를 태운 차는 숙소에서 얼마 안가서 뻐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뻐스가 한 대 지나가고 두 번째 도착한 뻐스에서 부부인듯 싶은 커플이 우리가 탄 차를 향해 웃으면서 다가온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오스말 목사 사모의 작은 이모인 마릴레니와 그의 남편 안토니라 했다.
인디안 혈통의 건장한 중년의 남자로 우리가 서로 만난 순간부터 차에서 내릴때까지 거의 30분 이상을 말하기를 쉬지 않는 열정이 넘치는 입담 좋은 사람이였다.
입담이 좋아서 사람을 금방 사귀는 타입이라 동네 아저씨 같아 보였고 우리는 주로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어야 했다.
그 가정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면서 악이 담긴 큰 소리가 이기는 세상을 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말을 들어주고 마음을 읽어주는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병들어가고 있는 인생들이 얼마나 주위에 많은가?

유한한 인생을 의지하다 올무에 걸리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안전지대에 거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때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싶은 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눅 23:23절 말씀이 생각이 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빌라도가 예수를 놓고자 하여 “때려서 놓으리라”하니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성경에는 “그들의 큰 소리가 이간지라”라고 기록되어있다.
큰소리! 사람의 소리가 이기는 장면! 가슴이 아파온다.
오늘날 큰소리, 불의와 악의 소리, 사람의 소리가 이기는 세상을 대하며 하나님은 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신다.

이 세상의 공의는 어느 무덤에 사장되었는가?
악이 정의로 착각되고, 죄인이 의인으로 행세하며, 그들의 희생양들의 아픔은 쓰레기로 매몰되어도 사람의 소리 악의 큰소리가 이겨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처럼 죽어가는 이들을 향해 눈 하나 깜짝할줄 모르고.... 악인도 악한 날에 쓰시기 위해 때가 될 때까지 악의 잔이 찰 때까지 알곡이 상할까봐 가라지도 그냥 두시는 줄도 모르고 오히려 회개의 기회를 범죄의 기회로 삼으면서배째라며 배채우는 세상! 
그러나 그들은 하나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부활하실 것은 모르고 승리한 줄 알고 쾌재를 부르지 않았는가? 










십자가형은 가장 잔혹한 형벌로서 중한 범죄자를 처형하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군중들의 고함 소리가 빌라도의 귀에는 더 크게 들렸습니다.
마음에서는 죄가 없는데 라고 양심의 소리가 울리고 귀에서는 군중들의 외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옵니다.
이때 빌라도는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라바를 석방할까?
아니면 이 예수를 석방할까?
성경에서 바라바를 강도라고 하지만 사실은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버지가 있습니다.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민중 보기를 일으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군중들이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외침으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올바른 판결이 아니라 부당한 판결에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복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소개되는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18세기 러시아에 가르시아라고 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전쟁 중에 부대원들과 가족들이 함께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관이 찾아와서 장군에게 누군가 식량을 훔쳐가서 조금씩 없어진다는 보고를 합니다.
장군은 부대원들과 가족들 모두를 소집하여 누구든지 식량을 훔치다가 적발되면 엄한 채찍 형에 가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며칠 후 부관이 다시 찾아와서 “장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식량을 훔친 범인이 잡혔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그 범인이 장군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근심과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를 풀어주자니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해 신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어머니에게 채찍 형을 가하자니 연약하신 어머니가 채찍을 맞고 돌아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다 드디어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채찍 맞는 곳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채찍을 막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에 장군이 소리쳤습니다.
“형을 중지하라!” 그리고 그 단에 올라가서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쳐라!”

장군은 자신이 한 말대로 실행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었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벌을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대신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리고,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헤롯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유대 군중에게, 대제사장과 관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우리와 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오늘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은혜를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누고 증거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셨도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세상을 이기는 믿음


야곱은 백 삼십 년간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출 47:9)고 했고, 모세는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시 90:10)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라면 이겨야 합니다.
세계대전 중 영국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은 취임연설에서 외쳤습니다.
“목표는 오직 승리가 있을 뿐, 승리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지식, 권세, 돈 같은 것이 인생의 승리를 약속하는 강한 무기 같지만 성경은 믿음이 가장 확실한 무기라고 강조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무기는 물맷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무기도 창과 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시타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일생 연구할 때 많은 난관에 부딪쳐도 실망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호 톨스토이의 명언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 마디에 있다.”

백화점 왕 J.C. 페니의 호소입니다. “오늘날 미국인이 복잡한 현실과 암담한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믿음, 즉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를 도우신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그러나 믿음에는 반드시 도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광야의 시험과 십자가의 도전에 시달리셨습니다. 원수들은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3).

최근 유난히 천재지변이 많이 일어납니다. 일본 대지진으로 엄청난 희생과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어린 생명들이 무너지는 교실에서 몰사하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이런 참사와 비극은 믿음에 대한 심각한 시험과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선언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은 누구보다 장수하며 인생의 풍상과 믿음의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악한 세력의 공격과 시험에 수없이 시달렸습니다.
요한은 무섭고 악한 세상을 몸소 경험하고도 세상을 이기는 무기는 믿음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요한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악한 세상의 도전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직접 체험하면서 십자가가 죄악 세상의 도전을 이기는 영원한 승리의 표상임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죄와 고난과 죽음이 그의 영혼을 깨뜨리려고 다가오는 것을 아시고 고민하셨습니다. 인간의 무력도, 하늘의 천군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믿음을 유일한 무기로 고르셨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이 깨달은 것은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침내 악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결박당하고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요한은 십자가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참고 기다리면 다 잘 된다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인간 본성이 선하므로 결국 해피엔딩이라는 성선설도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누가 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인생의 모든 막다른 골목에 돌파구를 제공합니다. 홍해는 죽음의 길이었지만 믿음으로 돌진할 때 생명길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산더미 같은 문제를 돌파하는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기 때문에 너희들의 뜻을 따르는 것 뿐이다.
ㅈ만 지 못한다.ㅏㅈ귄에사형제도에게





예수와 바라바 (눅 23:13-25)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분을 죄인으로 다루었습니다.
죄인처럼 붙잡혀서 유대인들에 의해 재판을 받았고, 나중에는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뒤집어씌운 죄목은 이렇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칭하여 하나님을 모독한 죄',
'민중을 선동하고 다님으로 사회를 혼란시킨 죄',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교를 전파함으로 국가전복을 꾀한 죄'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한 가지 죄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을 말한 죄'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진실을 말한 죄,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진실을 말한 죄, 로마정부에 대한 진실을 말한 죄, 이렇게 진실을 말한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만든 죄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체포하여 십자가에 처형하는 과정에서 그 분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몇 사람의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분 옆에 달려있던 두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가리켜서 강도라, 또는 행악자라고 말씀합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은 흉악한 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이 두 사람은 보통 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인, 살인강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강도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세상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강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사람은 결국 자기의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같은 강도이었고 같은 죄를 지었지만, 한 사람은 이 세상만 바라보다가 멸망하였고, 또 한 사람은 죽음 너머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에는 이 두 사람의 죄수 외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라바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라바의 눈을 통해서 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바라바는 폭동과 살인사건의 주범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바라바는 십자가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로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까지 십자가에 매달려서 온 몸의 물과 피가 다 빠져나가 죽는 무서운 형벌입니다.
바라바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자꾸만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이 손에 그 커다란 못이 박힌다면 얼마나 아플까?'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에 싸여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옆방에 갇혀있는 죄수가 끌려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그는 무서운 공포에 떨면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라바가 갇혀있는 감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간수들이 들어와 두 팔을 거칠게 잡아 당겼습니다.
바라바는 '이제 드디어 때가 왔구나' 생각하고는 고개를 떨군 채로 끌려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밖으로 끌려나온 바라바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는 자유다. 이제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바라바는 마치 꿈을 꾸듯 감옥 문을 벗어나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인파 속에 묻혀서 정신없이 걷고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따라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계셨습니다.
바라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그 분이 대신 지고 계셨습니다.

바라바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했습니다.
'쾅·쾅·' 못박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바라바의 심장도 따라 뛰었습니다.
'저 못은 바로 내 이 손에 박혀야 할 못인데' 예수님의 손에 못박는 망치소리에 바라바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얼마 후 바라바는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시에 찔린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그 분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손에는 커다란 못이 부드러운 살을 찢고 뼈를 뚫고 나무에 박혀있었습니다.
그 손에서는 보배로운 그 분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발도 역시 무서운 못에 박힌 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무지한 군인들은 날카로운 창끝으로 그 분의 가슴을 찔러 뜨거운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시간이 지났습니다.
온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예수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 지셨습니다.
고통 때문에 거칠어졌던 숨소리도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바라바는 쓰러져 땅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저 분은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였고,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바라바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이요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죽음과 멸망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 대신 죄인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 대신 십자가를 지셨고, 나 대신 고통을 당하셨고, 나 대신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나를 죄가운데서 구원해 내시고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이것을 고백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 분은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내 이 손에 박혀야 할 못이 대신 그 분 손에 박혔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그 고통을 그 분께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내가 가야 할 죽음의 길을 그 분이 대신 가셨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이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 순간까지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실 것입니다.



바랍바스는 아람어 바르와 압바의 합성어입니다. ‘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압바’는 아버지입니다.
즉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류는 누군가의 아들과 딸 곧,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이런 중의적인 의미가 그 이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모든 인류, 곧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 풀려나게 될 바라바에 대해 설명합니다.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을 저질러 로마제국에 피해를 입힌 자로 그 형벌이 최고형인 사형에 해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를 “유명한 죄수”라고 부르며,
마가복음에서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강도” 또는 “약탈자”라고 부릅니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라바는 열심당원의 지도자로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로마 군대에 피해를 입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반면 사독 계열의 친 로마 성격을 가진 제사장들이 정치적인 죄수를 풀어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를 일반적인 살인과 약탈을 한 범죄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의 행적을 성경은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분노한 무리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을 죄 없으신 예수님 대신 풀어주라고 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1)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이 예수님께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리게 하여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로 낙인찍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분노와 잘못된 욕망이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빌라도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제시한 타협안을 거듭 주장합니다.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한 내용, 즉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곧 구약 제사 때 흠 없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해야 백성의 죄가 사함을 얻었듯이 죄 없는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죄를 대신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희로애락을 느끼신 인간 예수님이시지만, 죄가 없으셨기에 십자가 대속 사건을 완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백성들의 끝없는 분노의 요구는 나약한 재판장을 무너뜨립니다.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런 악한 모습을 보였던 무리는 이후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전한 부활의 복음 앞에서 스스로 직면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라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직접적인 가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와 함께 백성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죄 있는 모든 인류의 축소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어서 빌라도가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24-25)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요한복음에서는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향해 가이사에게 고소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빌라도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가 유대지역에서 두 가지 실수를 저질러서 백성들에게 책잡힌 것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한 번 더 실정하게 되면 그 지역의 백성들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탄원을 하게 되고 빌라도는 자리를 잃게 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비겁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저버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 속에서 진리의 편에 서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만족과 이익을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씀 앞에서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입니다. 진리 편에 서지 못하면 어느새 우리는 비 진리에 편승하고 이 세상 가치관에 휩쓸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크고 작은 심판과 징계를 경험한 후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빌라도의 공의롭지 못한 재판으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우리는 모두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우신 방법으로 해결하셨습니다.

복음을 나눌 때에 사용하는 한 예화가 있습니다. 18세기 러시아에 가르시아라고 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전쟁 중에 부대원들과 가족들이 함께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관이 찾아와서 장군에게 보고합니다. 누군가 식량을 훔쳐가서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장군은 부대원들과 가족들 모두를 소집하여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식량을 훔치다가 적발되면 엄한 채찍 형에 가할 것이라고.

며칠 후 부관이 다시 찾아와서 보고합니다. “장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식량을 훔친 범인이 잡혔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그 범인이 장군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근심과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를 풀어주자니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해 신의를 잃어버리게 되고, 어머니에게 채찍 형을 가하자니 연약하신 어머니가 채찍을 맞고 돌아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다 드디어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채찍 맞는 곳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채찍을 막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에 장군이 소리쳤습니다. “형을 중지하라!” 그리고 그 단에 올라가서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쳐라!”

장군은 자신이 한 말대로 실행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었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벌을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대신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리고,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헤롯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유대 군중에게, 대제사장과 관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우리와 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오늘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은혜를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누고 증거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셨도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빌라도와 같이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협하는 모습이 아닌 거룩한 희생으로 진리를 지켜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대제사장도, 백성의 무리도, 로마 군인들도, 빌라도도 아닌, 바로 내가,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의 고백과 찬양을 끝 날까지 올려드릴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인 십자가를 날마다 묵상하며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며 또한 그 은혜를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백성의 무리는 분노와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때로 분노와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는 없었는지 돌아보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십시다.
2. 빌라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의 편에 서지 않고 타협과 불의를 선택했습니다. 나의 삶에 진리 편에 서지 못하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3.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직면한 적이 있으며, 주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여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하나님을 나의 힘과 목적으로 삼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며 살기 위해 오늘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 중 하나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속담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양쪽에 관련되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속담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며, 언론에서도 종종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어떤 정책을 추진하다가 이현령비현령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속담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국 절대군주인 만만황제의 첫째 아들인 묵황(穆皇)이 임금의 위치를 먼저 물어봤다가, 버릇없는 몸짓을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버려 실패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위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이현령비현령은 상황에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하나의 문제나 상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모든 선택이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자어 속담의 경우 유래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이현령비현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이 무척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이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이현령비현령이 됩니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적인 문헌인 '밍자(明子)'에는 "귀는 귀걸이로 장식을 하며, 코는 코걸이로 장식을 한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여성의 장신구로서의 귀걸이와 코걸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인 배경에서 파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현령비현령은 고대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황제(黃帝)의 십 신(十神) 중 하나인 이神(耳神)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생각을 형성하고 판단할 때, 손가락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귀와 코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神은 인간의 판단능력이나 직관력과 관련된 신이었으며, 이현령비현령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 속담에서는 단어의 의미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의 경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은 어떤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취해야 하는 행동이 대부분의 경우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속담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한자풀이

이현령비현령의 각 한자를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耳(이): 귀, 청각 기관의 일부를 나타내며, 소리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 懸(현): 매달리다, 달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떠올리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 鈴(령): 종, 방울, 소리와 관련된 물체를 나타내며, 소리의 발생을 의미합니다. 
  • 鼻(비): 코, 인체의 기관 중 하나를 나타내며, 냄새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懸(현): 매달리다, 달다
  • 鈴(령): 종, 방울

이처럼 이현령비현령의 각 한자는 모두 소리나 냄새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한자어 속담의 특징 중 하나인 상황에 맞는 의미를 가지려는 성격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1. "이현령비현령처럼 이 질문에 대한 답안도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 "우리가 선택을 할 때마다, 이현령비현령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일을 처리할 때마다, 이현령비현령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를 참고한다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4. "오늘 같은 날씨에는 이현령비현령처럼 즐길 만한 여러 가지 활동이 있어요."
  5. "여행을 갈 때, 이현령비현령처럼 계획을 세울 때 여러 가지 옵션을 고려해봐야 겠어요."
  6. "이현령비현령을 적용하여, 여러분이 선택한 폰트나 색상이 제품 전체적인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민해보세요."
  7. "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이현령비현령처럼 다양한 공부법을 시도해보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8. "이현령비현령처럼 여러 가지 선택지를 고려하여, 내일 할 일을 계획해보는 것이 좋겠어요."
  9. "이현령비현령을 생각하며, 어떤 고민이 있을 때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10. "이불을 쓸지, 뜨거운 차를 마실지 고민할 때, 이현령비현령을 생각하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B.C 47년에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안티파테르 2세라는 에돔 출신 이방인에게 넘겨집니다.
그의 가문이 곧 ‘헤롯 가문’입니다.
안티파테르 2세차남헤롯은 ‘헤롯대왕’으로 불리며 처음에는 갈릴리 지방의 총독으로 시작하였지만 당시 벌어진 난들을 진압하면서 유대인과 로마의 지지를 얻어 B.C. 40년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의 영아학살을 지시한 것이 바로 이 ‘헤롯대왕’이며 예루살렘 성전 건축사업을 벌인 것 역시 이 ‘헤롯대왕’입니다.
헤롯대왕의 사후 그의 세 아들이 이스라엘을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는데(이때는 로마로부터 ‘왕’으로 제대로 임명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분봉왕이라는 명칭이 사용됩니다.)
이 중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에돔)를 다스리던 아켈라오는 여러 학정과 학살로 로마로부터 통치권을 빼앗기고 유배되고 그 지역을 다스릴 관리를 로마에서 직접 파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디바’이며 헤롯대왕의 세 아들 중 갈릴리의 분봉왕이 된 자입니다.
그는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한 세례 요한을 살해한 자로 유명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헤롯 [Herod]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유대(예루살렘)지역은 아켈라오가 쫓겨난 이후 로마의 속주가 되어 직접 통치를 받게 된 시기이고 그 통치자가 바로 빌라도였습니다.
로마 속주가 된 이상 로마의 법에 의한 통치를 받게 되었고, 지역 특성을 고려하여 사소한 문제들에 있어서 지역의 권위를 가졌던 자치 기구들의 활동을 허용하기는 했어도 ‘사형’ 만큼은 로마 법정의 판결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아무리 이리떼처럼 몰려들어 으르렁거려도 그들은 더 무서운 호랑이 때문에 죽이지도 건들지도 못하는 겁쟁이들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마음속으로 그 호랑이를 싫어하고 미워함에도 말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그 호랑이에게 갑니다.

“백성을 미혹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자칭 왕이라 합니다”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한 말들입니다(2절). 대부분은 모함이지만 그 모함마저도 호랑이에게는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고, 관심 밖인 것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비웃는 듯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절)라고 묻고 그닥 큰 위협이나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파악된 이후엔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회피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도다”(4절) 고작 그의 말 한마디인 것 같지만 이것은 ‘로마의 판결’입니다.
이 판결대로라면 예수님을 죽일 길이 없는 무리들은 더욱 강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가장 두려워 하고 관심 있어 할 말을 합니다.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5절) 전임이라 할 수 있는 아켈라오가 쫓겨난 것은 바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민을 학살하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통치자의 자질을 의심받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저 죄 없는 자의 재판에 얽히기 싫어서 였는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6절), 그는 그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것은 헤롯(헤롯 안디바)의 관할”이라며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냅니다. (7절)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8절) 8절의 설명만 보면 이 기쁨은 말하자면 말로만 듣던 연예인을 직접 보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헤롯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마음속 구석의 찜찜한 부분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14장 1-2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에게 결혼에 대한 비난을 받음에도 사실 죽일 마음까지는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잔칫상에서의 여흥이 부른 섣부른 약속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죽이게 된 사건은 늘 그를 찜찜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들렸을 때에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은 아닌가 늘 찜찜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곧 이런 찜찜함이 어떻게든 해결되리라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헤롯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여러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9절) 그저 곁에 자신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만이 시끄럽게 저 자를 죽여야 한다고 떠들어 댈 뿐입니다.(10절) 곧 흥미를 잃은 헤롯은 그저 업신여기고 희롱하여 빛난 옷을 입히고(이것은 주변에서 떠드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함께 골탕먹이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고 저는 이분이 유대의 왕이라고 인정합니다요” 이런 의미라고 할까요?)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매우 의미 심장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12절)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 원수와 같이 여기던 자였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통치되던 땅이 3분열되고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눈엣가시 같은 로마, 빌라도가 달가웠을 리 없습니다. 서로는 언제든 로마에 나의 통치를 음해하고 모함하여 나를 끌어내릴 수 있는 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는데 죽이 척척 맞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당시대의 정치였고 통치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싫은 일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좌우의 갈등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어느 때에는 이쪽이, 어느 때에는 저쪽이 권력을 얻고 상대방을 치고 때려눕히기에 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정치에 있어서 어느 입장에 서야 할지 매우 난감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또는 너무나 쉽게도 어느 한 쪽에 올라타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자신의 정치성향에 맞춰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도 보게 됩니다. 정치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악이라 규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의 짧은 생각에 분명히 좌든, 우든 원수처럼 으르렁 대던 그들도 예수를 업신여기고 희롱하는데 죽이 척척 맞는, 친구가 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을 송사하는 많은 무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판결을 내려 달라 자신의 통치자들, 자신의 정치에 호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예수님의 뜻, 말씀이 아닌 좌나 우 이념을 붙들고 의지하며 믿고 살아가던 자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믿었던 그가(그가 빌라도이든 헤롯이든)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는데 하나가 되어 친구가 되는 모습을 말입니다.

3절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네 말이 옳도다”라는 말은 사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해석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애매한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무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겁하게 피하신 것이 아니라 빌라도가 묻는 그 의미의 왕은 아니시지만 예수님은 사실 참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여러 물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성도에 대해 물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느 편이 우리를 좋게 대해줄까? 어느 편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더 가만 놔둘까? 어느 편이 더 욕을 덜할까.. 비겁하게 눈치 보며 더 나은 편을 찾아 다니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봅니다.

결국 정치에서 승리한 그리스도인에 의해 전복(? 황제를 개종시켰다면 전복이나 다름 없습니다)되어 그리스도인의 나라, 교회가 다스린 나라였던 로마는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기독교당, 기독교 친화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렵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잘 지켜가고 있다면 우리는 잘나가는 당, 정치세력과 짝짜꿍이 잘 되고 있는 모습이 아닌, 서로 싸우던 정치 세력들이 친구가 되어 우리를 핍박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기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교만한 말을 하고 있다면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04-16-2024(화) 누가복음 23:8-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로 친구가 되니라(12절)


헤롯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That day Herod and Pilate became friends--before this they had been enemies.

유대의 분봉왕 헤롯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원수지간 이었으나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위해서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한문자 사자 성어의 훈은 "가까울 근(近), 먹 묵(墨), 놈 자(者), 검을 흑(黑)"이라고 합니다.
근묵자흑이란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가까이 하며 나 또한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나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나쁜 버릇에 물들기 쉬움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평소에 빌라도와 헤롯(헤롯 안티파스)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고소에 의해서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고소의 함성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때에 헤롯과 빌라도가 이 군중들의 고소 소리를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군중들은 로마의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는 두려움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는 분봉 왕의 자리를 위하여 빌라도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총독의 자리를 지키려고 불법 판결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법적인 재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침묵입니다.
둘째는 네 말이 옳다는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대답과 침묵에 대한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메시아이냐?
네가 말하였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이외의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말하였도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종교적인 문제는 유대인들의 관심사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관심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바꾸고 예수님을 고소한 것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렴 귀걸이" 라는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懸鈴鼻懸鈴)"식의 삶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거룩의 정도를 바르게 걷는 은혜의 발자취를 세상에 흔적으로 남기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시다.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헤롯의 판결 : 무죄(8~12절)

예수님은 헤롯이 머물던 궁전으로 끌려갔습니다.
빌라도 관정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였고, 고발하던 무리가 함께 따라갔습니다.

헤롯은 집안 대대로 예수님과 악연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만날 헤롯 안디바의 아버지는 헤롯 대왕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왕이었습니다(마 2).
혹시라도 자기 권력에 해가 될 것 같으면 모조리 죽였던 미친 왕이었습니다.
나중에 베들레헴 근방에 두 살 아래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그 아들들이 아버지가 다스리던 이스라엘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들을 가리켜 “분봉왕”이라고 부릅니다(왕보다는 낮은 지역 통치자).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던 갈릴리는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던 지역이었고, 그래서 빌라도는 헤롯에게 이 문제를 떠넘긴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 역시 예수님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강제로 이혼했고, 이것이 죄라고 지적한 선지자의 목을 잘라 쟁반위에 얹어 아내에게 바쳤는데,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을 백성에게 소개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막 6:22~28; 눅 3:19~20).

세례 요한만 죽이면 끝인 줄 알았던 헤롯은 그 이후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기적과 가르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매우 놀랍니다.
‘내가 요한을 죽였는데,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눅 9:7~9).
그 후 예루살렘에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이 이를 예수님께 알렸을 때, 예수님은 헤롯을 “저 여우”라고 부르셨습니다(눅 13:31~32).
예수님에게 헤롯의 위협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자처럼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여우처럼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그 예수를 눈 앞에서 보게 된 것이니 헤롯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한 번 보자!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8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아마도 여러 말로 예수님을 시험했을 것입니다. 천천히 교묘한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떤 일을 행했는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모든 불합리한 질문에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정반대로 예수님을 좇아 헤롯 궁전까지 찾아 들어온 무리는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습니다.

9절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죄인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침묵은 그분의 죄 없으심을 똑똑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셨습니다(벧전 2:15). 예수님께 죄가 있어 이런 수모를 당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칭찬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선을 행하신 것입니다(벧전 2:18-20). 시끄러운 그들의 악독한 목소리보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침묵이 훨씬 더 큰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심문한 장면은 오직 누가만 기록하고 있어 우리는 더 자세한 장면을 알 수 없습니다. 방탕하고 경박했던 안디바는 이제 예수에 대해 흥미를 잃었습니다. 아무런 이적도 반항도 변명도 없는 이 죄수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보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일을 행했습니다.

11절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님을 업신여겼을 것입니다. 

“네가 우리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른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요한이 살아돌아온 줄 알고 내가 크게 놀랐던 바로 그 선지자냐? 내가 죽이려 했던 그 사람이냐? 근데 이 꼴이 뭐냐? 네 능력은 어디로 간거냐? 빌라도가 그러기를 네가 왕이라지? 그럼 어디 한 번 왕처럼 입어봐라”

만왕의 왕께서 백성에게 손가락질당했던 방탕하고 몹쓸 죄인의 희롱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왕께서 로마의 작은 변두리를 다스리는 지역 통치자의 업신여김을 당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시늉을 하며 놀려댔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왕이 입을법한 빛나는 옷을 입힌 채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가는 길 걸어서 10분,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예수님은 수치와 모욕을 입고 한 걸음 한 걸음 끌려가셨습니다.

빌라도는 헤롯이 보낸 선물, 빛나는 옷을 입고 돌아온 예수님을 보면서 헤롯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도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고, 헤롯도 그래서 도로 보내었다”(23:15)고 말합니다. 헤롯의 판결 역시 무죄였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12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 친구 /  φίλος, η, ον 스트롱번호5384

1. 사랑 받는.   2. 사랑하는. 3. ὁ φίλος : 남자 친구
발음 [ philŏs ]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 스트롱번호26

1. 사랑.   2. 인간의 사랑. 3.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발음 [ agapē ]
어원  /  25에서 유래

* 25. ἀγαπάω 스트롱번호25
1.

사랑하다

2.

인격에 대한 호감.

3.

마5:44

발음 [ agapaō ]
어원
미완료 ἠγάπων, 미래 ἀγαπήσω, 제1부정과거 ἠγάπησα, 완료 ἠγάπη- κα, 완료분사 ἠγαπηκώς, 완료수동분사 ἠγαπημένος, 미래수동태 ἀγαπη- θήσομαι, ἄγαν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헬라어 (Ancient Greek)에서 사랑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로 분류 됩니다.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 (ἐρως)', 가족 간의 사랑인 '스트로게 (스톨게, στρογή)', 친구간의 사랑인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 (φιλία)' 1,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곧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 (ἀγάπη)' 입니다.

헬라어의 사랑

2016. 2. 14.

사랑이란 말이 너무 흔하게, 그리고 무의미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건적인 사랑,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지요(요일 3:18).

헬라어(Ancient Greek)에서 사랑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로 분류 됩니다.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ἐρως)', 가족 간의 사랑인 '스트로게(스톨게, στρογή)', 친구간의 사랑인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φιλία)'1,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곧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ἀγάπη)' 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 보면 두 가지의 사랑이 나옵니다.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 :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 : 내 양들을 치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 : 내 양들을 먹이라.

이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아가페'2로, 베드로는 '필리아'3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와 필리아 두 낱말에 대해서 별 차이 없이 사용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4 이를 구별해서 사용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후자의 입장에서 이 대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대화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베드로 :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필리아)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가페'적인 사랑, 곧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었던 것인데,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 곧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로 대답을 했습니다.

두 번째 대화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베드로 :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필리아)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두 번째 대화는 첫 번째 대화와 거의 같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 질문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아닌 예수님과 베드로 자신 사이의 관계를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대화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필리아)하느냐?"
베드로 :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필리아)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째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아가페'로 묻지 않으시고 '필리아'로 묻고 계십니다. 즉 "네게 필리아의 사랑이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질문을 LB(Living Bible)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 ". 이 질문에 베드로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필리아의 사랑이라도 있는지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대개 남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니, 어떻게 보면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마 5:46)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지요. 그런데, 이 사랑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가페의 사랑, 그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헬라어 ‘사랑’에 관한 용어 정리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사랑과 관련된 4가지 용어

    <성경에 사용된 용어>

1) ἀγαπάω(아가파오) - 명사형 ; 아가페 ἀγάπη

∙ love, wish well to, take pleasure in, long for ; 사랑하다, 잘 되기를 바라다. 즐거워하다, 열망하다 -> 요3:16

  -겔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렘48:31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무리가 길헤레스 사람을 위하여 슬퍼하리로다”

   * 모압 ; 롯의 맏딸이 아버지와 근친상간하여 낳은 아들 / 작은 딸 ; 암몬

∙ Agape’s deeper meaning is more fully realized by illustrating God’s relationship with man and man’s relationship with each other. 아가페의 깊은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 Agapao elicits little of the heartiness and warmth of phileo 아가페 사랑은 필레오 사랑과 같은 따뜻함, 정감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예) 고린도전서 13장

∙ Agapao depends largely on the context in which it is used 아가페 사랑은 그것이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서 의미가 결정된다. ⇒ 아가페 사랑을 그동안 교회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의 개념으로 한정한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개념 정의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아가파오)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아가파오)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2) φιλέω(필레오) - 명사형 φῐλία 필리아 ; friendship, love, affection, fondness 우정, 사랑, 애정, 다정함 = 아가페 사랑과 달리 필레오 사랑은 情적인 요소가 있다.

∙ to treat affectionately or kindly 애정과 친근함으로 대하다

∙ 사랑을 나타내는 일반적 의미로서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 사이에 존재하는 관심과 우정에 기초하고 있다.

∙ 종교적 의미가 거의 없다.

∙ 하나님의 사랑도 정적인 면에서는 ‘필레오 사랑’으로 표현된다.

  -요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필레오)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요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필레오)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성경에 사용되지 않은 용어>

3) ἐράω 에라오 – 명사형 ; Έρως(에로스)

∙ 남녀 간에 존재하는 정념적이며 감각적인 사랑

4) στέργω 스테르고 – 명사형 ; στοργή 스토르게

∙ to love (mostly of non-sexual affection) ; 사랑하다(거의 非 性的인 사랑)

∙ to show affection ; especially of parents and children ; 애정을 나타내다.(특별히 부모와 자녀 간)

이 두 가지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 사랑이다. 스토르게 사랑은 생명의 면에서 자녀의 생명은 부모의 연장이기 때문에 자기 사랑이다. 그러나 아가페와 필레오는 他者에 대한 사랑이다.(It can indicate satisfaction towards some person or thing)

☐ 아가페 사랑은 상호관계성이다.

요한이 ‘아가파오’를 사용한 용례를 보면 ‘아가페 사랑’은 상호적이다.(요13-17) 즉 언제나 관계적 사랑이지 일방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앞서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며,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심지어 자연도 그것을 보여준다. 텅 빈 하늘에서 땅을 살리고 공급하는 모든 것이 내려온다. 바람, 비, 햇빛 등등)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지 않고는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위에서 오는 사랑으로 아구까지 채워지지 않은 채 남을 사랑하려 하는 것은 물론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불가능하다.


    ⁜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다. ; 요3:19, 5:42, 8:42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a. 아버지 → 아들 ; 요3:35, 10:17, 15:9-10, 17:23-24, 26

-요17:23,24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b. 아들 → 아버지 ; 요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

c. 아들(예수) → 제자 ; 요13:1,33,34, 14:21, 15:9-10,12, 21:7,20

d. 제자 → 아들(예수) ; 요14:15,21,23,28, 21:15-26

e. 아버지 → 제자 ; 요14:21,23, 17:23

f. 제자 → 제자 ; 요13:34-35, 15:12-13,17, 17:26

  -요13:34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아가파오’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아하브 אָהַב’의 의미

0 구약에서 ‘하나 One’를 의미하는 ‘에하드’는 하나님의 本性的인 면을 나타내며, ‘사랑 Love’을 의미하는 ‘아하브’는 하나님의 實行的인 면을 나타내준다.

사랑 곧 ‘아하브’의 본질적 의미는 ‘주는 것’이다. 줄 수 있다는 것은 주는 사람 그 자신이며, 그의 능력이다. 능력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주는 것’의 정점은 그 자신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실체로서 우리에게 준 것이 ‘그리스도’이다. 이의 예표로 보여준 것이 창세기 15장 1절이다.

-창15:1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0 ‘아하브’의 글자 의미 ;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이요 성전인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주시는 것이 사랑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א ; 알레프 => 하나님

ה ; 헤 => 나타내다, 주다

ב ; 베이트 => 집, 성전

☐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아가페’ 사랑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0 보통 ‘사랑章’으로 불리는 이 본문에 ‘아가페 사랑’의 본질이 잘 나타내 있는데 이 구절들을 보면 ‘아가페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말하는 사랑의 느낌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감정적이고 정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0 또 굉장히 중요한 요점은 이 구절들의 주어가 ‘그 사랑’(헤 아가페 Ἡ ἀγάπη)이지 ‘나 I’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것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하늘의 아가페 사랑은 ‘그 사랑’이 그렇게 행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다만 통로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다. 이를 놓치면 안 된다. 내가 하는 것은 내 사랑이고 결국은 나를 높이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6:3) 할 수 없다.

a. 그래서 이 구절들의 주어가 전부 ‘그 사랑’(헤 아가페 Ἡ ἀγάπη)이다.

b. 4절에서만 ‘그 사랑’이라는 단어가 3번 나오는데,

  첫째, ‘그 사랑’은 오래 참음과 온유가 한 묶음이며,

  둘째, ‘그 사랑’은 투기(시기)하지 아니하며,

  셋째, ‘그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5-7절은 전부 이 셋째 사랑에 연결되어 나온다.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3가지 비슷한 번역의 단어 본래 의미

1) 오래 참음(4절) ⇒ 마크로뒤메오 μακροθυμέω /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마음을 잃지 않고 오래 견딤

2) 모든 것을 참으며(7절) ⇒ 스테고 στέγω / to protect or keep by covering, to cover over with silence / 무엇을 덮어주고 오랜 동안 침묵하며 지켜내는 것

3)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절) ⇒ ὑπομένω 휘포메노 / to remain, not recede or flee /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때그때 유익을 따라 옮겨 다니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냄

c. 동사로 표현된 이 사랑의 내용들은 모두 15가지인데 그중에 긍정이 7개, 부정이 8개이다.

 - 긍정(7) ;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부정(8) ; 투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d. 이 15개의 동사는 주어인 ‘그 사랑’이 他者에게 능동으로 행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2개의 수동태와 3개의 중간태가 있다. ‘중간태’란 그 행위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그 결과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 수동태로 사용된 것 ;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부풀려지지 아니하다’이다. 곧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아첨에 의해 자신이 부풀림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내지 아니하며’인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쉽게 자극받지 아니하며, 날카롭게 되지 아니하며’이다. 곧 어떤 환경이나 외적 요인에 의해 예민하게 되어 성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중간태로 사용된 것 ;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이다. 이 3가지는 그 행위가 상대에게도 영향이 미칠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생명과 안식으로 자신에게 이 시대에서 보상됨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e. 모두 시제가 현재라는 것 ; 그러므로 사랑은 지나간 과거도 아니고 앞으로 올 미래도 아니고 지금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해야 한다.





로마에서 세운 통치자 빌라도와 직급상 그 밑에서 다스리고 있는 지역통치자 헤롯 안디바,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기 힘든 관계였습니다. 특히 빌라도는 황제가 부여한 권력을 남용하여 헤롯이 다스리는 지역을 종종 간섭하고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서로 좋아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훗날 사도들이 말한 것처럼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렀습니다(행 4:27). 그 일에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예수님은 무죄였습니다. 그분을 판 유다가 그분을 무죄라고 말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역시 그분이 죄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말했고, 헤롯의 판결 역시 무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의 죄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팔렸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 때문에 빌라도에게 넘겨졌으며, 빌라도와 헤롯의 죄 때문에 심문당하며 희롱과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8)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형벌 받을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은 다름이 아닌 그 나라 백성이 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이토록 낮아지게, 수치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실에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시는지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며 살고 계시는지요. 빛난 옷을 입고 결박당한 채로 온갖 조롱과 수치를 당하며 걸어갔던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수많은 백성의 거짓 고소를 묵묵히 들으셨던 그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그분이 당하신 고통의 깊이 만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그분이 받으신 모욕의 크기만큼, 우리 삶에서 나오는 주님을 향한 찬양 소리가 더욱 커지기 원합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닌 분들께, 예수님은 이 자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에게 그 나라 백성이 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을 그 나라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묻기만 하지 마시고, 정말 그 진리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새벽 6시가 되기 전,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빌라도 앞에 다시 서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또다시 충격적인 사건과 그 사건을 겪어내신 예수님의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

모든 사람들이 좋은 친구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친구는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1.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2. 진실하라

솔직한 대화와 나눔


1. 관심을 갖고 듣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을 진심으로 듣고, 그에 대해 관심을 표현해 주는 것은 친구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친구가 되면, 상대방도 우리를 더욱 좋게 생각할 것입니다.

2. 솔직하게 대화하기

좋은 친구 관계에서는 솔직한 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에게 거짓말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친구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때로는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대화를 피하지 말고, 직접 대면하여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을 존중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힘들 때는 위로의 말이나 도움을 주고, 상대방의 성공을 축하하고 응원하는 태도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존중과 배려는 우리의 친구 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4.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더 잘 알아가기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함께 여행을 가거나, 취미를 공유하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어려운 시기에 서로에게 도움을 주거나, 즐거운 순간을 함께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서로를 더욱 더 알아가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신뢰와 충실을 보여주기

좋은 친구 관계에서는 신뢰와 충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었을 때, 우리는 그 신뢰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소한 약속도 지키고, 상대방이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도와주는 것이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입니다. 또한 우리의 비밀을 지키고, 상대방의 비밀을 존중하는 태도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신뢰와 충실은 우리의 친구 관계를 튼튼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듣고, 솔직하게 대화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신뢰와 충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더욱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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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과 건축가 피디아스(Phidias, BC 491~430)



아테네의 아클로폴리스 언덕 위 파르테논 신전 야간의  밤모습이다.
아크로폴리스 최대의 신전.

파르테논. B.C.432년 페리클레스 시대 때 천재조각가로 불렸던 피디아스의 감독하에 15년에 걸쳐 당대의 조각가, 석공 등을 총동원해 만들었다. 도리스 양식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이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를 모시던 곳이다.

건축가 피디아스가 아무리 천재였던들, 2천 5백년 후, 그의 후손들이 그의 건축물 구경으로 밥을 먹고 살게 될 것과, 밤새 내내 조명등이 켜질 것에 대해서는, 예측하지 못했을 터이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 위에 서 있는 조각품이 있는 데 이는 2500여 년 전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가 페이디아스(Phidias)의 작품이다.  페이디아스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서구 미술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고 보는 사람마다 칭송을 했지만, 정작 그 당시 그 작품을 발주했던 아테네의 재무관은 페이디아스의 작품료 지불을 거절했다.

"조각품은 신전의 지붕 위에 있고, 신전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조각의 전면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신은 우리에게 조각 전체 값을, 다시 말해 아무도 볼 수 없는 조각의 뒷면 작업에 들어간 비용까지 청구했는데, 적절치 않다"는 게 이유다. 이에 대해 페이스디아스는 "아무도 볼 수 없다고? 하지만 하늘의 신(神)들은 볼 수 있지"라고 대꾸했다.

 
피디아스가 만든 올림피아의 제우스 주화 코인

페이디아스 / Phidias
조각가 피디아스(Phidias, BC 491~430)


건축 역사상 건축가가 밝혀진 몇 안되는 건축물인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상.
이 두 작품의 총지휘를 맡은 이가 바로 피디아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벼락을 만드는 신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올림피아에 안치된 제우스 신상이었다. 제우스 신상은 신전이 건설된 후 40년이 지났을 때 피디아스에게 주문되었는데, 8년 여의 작업 끝에 높이 90cm, 길이 10m, 폭 6.65m 크기의 신상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신상임에도 불구하고 피디아스는 제우스의 신성한 위엄과 너그러움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은 18세기 경부터 일어났지만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또한 피디아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로 8m나 되는 대형 아테나 신상을 만들었고,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을 조각하기도 했다. 덕분에 피디아스는 건축가에서 최고의 조각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천재 조각가 피디아스가 만든 제우스의 동상을
1952년 필립 갈레에 의해 목판본으로 복원한 그림이다.

마치 사진처럼 절묘한 극세화.

피디아스가 파르테논신전을 건축하는 것을 그의 친구와 바라보고있는 그림을
로렌스 알마 타데마가 1868년에 그린 그림이다.

파르테논 신전 모습


파르테논신전

아크로폴리스 최대의 신전.

고대 그리스의 신전.

아테네 아클로폴리스에 세운 고전 초기의 뛰어난 건축이다.

B.C 432년 페리클레스 시대 때 천재 조각가로 불렸던 피디 아스의 감독 하에 15년에 걸쳐 당대의 조각가, 석공 등을 총 동원해 만들었다. 도리스 양식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이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를 모시던 곳으로 가로 30.88m, 세로 69.5m, 기둥의 높이 10.43m, 기둥의 직경은 아래부터 1.90.m, 머리부 분은 1.45m다. 눈의 착각을 수정하기 위해 안쪽으로 기운 듯이 건축되었다.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감사의 뜻으로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네에게 바친 신전이다.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감독을 맡았고, 설계는 이크티노스, 시공은 칼리크라테스가 담당하여 BC 447년∼BC 438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평면은 동서로 8기둥, 남북으로 17기둥, 바닥 30.8m×69.5m. 도리스식의 주주식(周柱式) 건물이며, 내부는 동쪽에 전당(前堂)과 아테네상을 안치한 내진(內陣), 서쪽에 후실과 처녀궁 등 4실로 되어 있다. 내부 기둥이나 들보는 바깥의 장중한 도리스양식과는 대조적으로 우아한 이오니아양식을 채용하고 있다.

신전을 빛내는 조각으로 페이디아스가 만든 황금과 상아의 거상 아테나 파르테노스, 즉 처녀 아테네상이 내진에 안치되어 있으며, 박공은 동쪽에 <여신 아테네의 탄생>, 서쪽에 <아테네와 포세이돈의 아티카 지배권 싸움>의 대군상 조각을 배치하였고, 지붕 밑의 사방을 빛내는 92면의 메토프에는 신화에 있는 4가지 이야기, 그리고 내진 상부 프리즈에는 범(汎)아테나이아축제 대행렬이 전체 길이 약 160m에 걸쳐 돋을새김[陽刻(양각)]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고전 초기의 걸작이다.

이 건물은 비잔틴시대인 426년에 하기아 소피아성당으로 내부가 개수되었는데 그 때 아테네상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한다. 투르크점령시대(1458∼1833)에는 모스크로 바뀌었고, 1687년 9월 베네치아군 포격으로 투르크군이 그곳에 두었던 화약이 폭발하여 프리즈의 3/4, 28기(基)의 기둥 등이 붕괴되었다. 지금 군상조각이나 메토프, 프리즈의 돋을새김 대부분은 <엘긴 마블스>라 하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일부는 아크로폴리스미술관과 파리의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04-15-2024(월) 누가복음 23: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절)


빌라도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So Pilate asked Jesus,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Yes, it is as you say," Jesus replied.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의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내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주님의 몸이며, 잔은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실 힘을 얻었습니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정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으시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가 붙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반역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이었지만 이것은 예수님은 ‘구원의 주, 메시야요 세상에 왕으로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유대에 왔을 때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인생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구세주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기에,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 되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오,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생들을 죄와 죽음,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로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세상의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라틴어(INRI)(IESVS· NAZARENVS· REX· IVDÆORVM)
유대인의 왕. 영어(King of the Jews)
유대인의 왕. 헬라어(βασιλιάς των Εβραίων)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죄패에 기록된 '유대인의 왕 예수'

진리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가 하늘에서 범죄한 우리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한 대속의 희생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어떠한 죄를 지었을까?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짓고 추방당했는지 예수님께서 대속 제물이 되신 행적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그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마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유대 지역은 로마 제국에서 세운 헤롯왕이 통치했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당시에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 유대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가이사(황제) 외에 왕이 존재할 수 없었다. 만일 가이사 외의 다른 사람이 왕이라고 칭한다면 이는 로마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였다.

사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 했을 때 종교적인 이유로는 처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반역죄를 씌우기 위해서 “예수가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고 자신이 왕으로 자처한다”며 고소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일찍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을 때도 일부러 헤롯 당원들을 입회시켰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마 22장 15~17절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한 의도는 만약 예수님이 로마 황제에게 세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는 로마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고, 황제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시면 헤롯 당원들이 증인이 되어서 로마에 반항하는 ‘반역자’라고 고소할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 22장 18~22절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물었던 것도 “유대인의 왕”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장 33절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할 만한 죄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을 때 겪게 될 정치적인 위험도 있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요 19장 12~13절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을 때 유대인들은 분명히 로마 본국에 유언비어를 퍼뜨릴 수도 있었다. ‘총독이 반역자를 감싸고 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질 경우 자신이 겪게 될 정치적인 위험을 총독 빌라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하였던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의 참소에 의해 예수님은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된 후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능력이 부족하셔서 로마 군병들에게 처형을 당하신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을 이루려고 고난을 참으셨던 것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마 26장 53~54절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중형인 십자가형을 받고 운명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당하신 것은 우리가 하늘에서 어떠한 범죄로 이 땅에 쫓겨 내려왔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대목이다.

우리가 하늘에서 반역의 죄를 짓고 이 땅에 내려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반역의 죄명으로 처형당하시고 불의한 우리를 살리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가리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죄를 사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장 4~6절


유대인의 왕 예수

예수님은 유대 산헤드린에서 불법철야재판을 통해 신성모독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시킬 권한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데려갔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가서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총독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반역죄로 고발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의 죄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빌라도에게 사형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란 반역죄로 고소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소 사실을 인정하는 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를 부인할 경우 유대인들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죄인들은 기소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네 말이 옳도다’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단하셨기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기소 사실에 대해 다투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백했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고발하는 내용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시대는 관료제가 발달하지 않아 고소하는 자는 주장과 입증해야 했으므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반역죄를 모두 주장하고 입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반박하고 필요한 증인이나 증거를 요청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범죄사실에 대해 아무 변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기에 총독은 크게 놀랐습니다.
그가 놀란 이유는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고소당한 예수가 보통 죄인과 달리 한마디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가 붙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반역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이었지만 이것은 예수님은 ‘구원의 주, 메시야요 세상에 왕으로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유대에 왔을 때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인생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구세주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기에,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 되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오,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생들을 죄와 죽음,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로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세상의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자살한 유다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넘겼습니다. 유다가 예수를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넘겨준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은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께 부은 한 여인이 등장했을 때 유다는 그 여인을 호되게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차고 넘치도록 칭찬을 한 후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분노를 갖게 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모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밤에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주겠다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의 예수를 은 30에 판 것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가 정신을 차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겼을 때 상황은 유다가 예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 함께 의논하고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유다는 이것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죽게 됐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유다는 그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도 예수님이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형판결을 받게 된 사실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유다에게 싸늘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뭔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유다는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유다의 죄는 예수님을 체포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지만 유다가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책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자신이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단 자책감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은을 성소의 헌금함에 던져 넣고 물러가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유다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유다는 흔히 ‘신자가 되지 못한 제자’라 불립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변화받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의 돈궤를 맡았고, 물질문제에서 예수님고 충돌했습니다. 유다는 향유옥합을 부음받은 후 자신을 책망하고 여인을 옹호하는 예수님에 대해 깊은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분노함으로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것은 그에게는 은 30냥을 얻으며 동시에 예수도 정신차라게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얼마나 물질주의적인 자인가를 드러내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위한 것임을 말해주며, 그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은 그가 얼마나 물질주의자인가를 드러냈습니다.

사람들 중에 누구도 노골적으로 물질을 숭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물질을 숭배합니다.’ ‘나는 물질이 노예입니다.’선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결정적인 순간 우리는 물질과 하나님 중 선택하게 됩니다. 그 날은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엄중한 시험의 날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그런 날을 만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날은 롯의 처가 소돔성을 탈출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된 날입니다. 그 날은 롯에게 있어서는 에덴 동산같은 소돔 들판을 선택한 날입니다. 그날은 게하시가 엘리사를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옷과 은을 취하였다가 문둥이가 된 날입니다. 그 날은 발람이 신탁을 전하기 위해서 출발하고 말못하는 나귀에게 책망을 받은 날입니다. 그 날은 재산을 팔아서 다 헌금하지 않아도 되는데 다 헌금을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을 당한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날입니다.

물질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은 ‘맘몬’으로 칭했고 하나님의 경쟁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해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유다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팔아, 예수님을 이용해 물질을 얻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고 영적인 어떤 것들을 통해서 물질적인 이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의 힘은 교묘하고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 사는 삶을 살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소한 죄목인 ‘유대인의 왕’임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범죄사살에 대해 아무 변호를 하지 않았으므로 빌라도는 놀랐습니다.

이 일 후 빌라도는 즉시 ‘유월절 특사’를 제안했습니다. 빌라도가 유월절 특사를 제안한 이유는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임을 알았고 종교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를 고소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7,18절을 보십시오.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기소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직접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기소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혜성처럼 등장한 라이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들의 위선과 무능을 지적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선함 목자로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를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눈먼자를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걸어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예수님의 왕이 된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처음부터 예수를 죽일 것을 모의했으며 예수를 죽이고자 그를 기소하였습니다.

시기심이 무서운 것은 그 끝은 언제나 살인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건들이 시기심으로 사람을 죽인 일들을 기록합니다. 가까이 성경에서는 가인은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하시자 시기심으로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섹스피어의 비극에는 오델로가 있습니다. 오델로 역시 시기심으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창을 다윗에게 던졌던 이유는 ‘사울의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다’ 하는 노래를 수많은 여인들의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천재는 되지 못했지만 천재를 알아보는 눈은 가졌던 비극적이 인물입니다. 그는 천재인 모차르트를 시기합니다. 결국 그는 천재인 모차르트를 독살했습니다. 살리에르가 시기심을 해결하는 방법은 모차르트는 독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시기심은 살인으로 나갑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기소한 이유를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예수를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자 함을 알았습니다.

시기심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강한 감정입니다. 시기심을 인간을 이끌어 가는 감정 중 가장 강력한 감정입니다. 시기심은 그 시기의 대상을 죽여야 끝이 나는 감정입니다. 인류 역사에 많은 위대한 일들이 시기심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역사상 많은 위대한 일들이 ‘시기심’과 ‘경쟁심’의 결과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기 위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이들은 사도 바울을 괴롭히려고 시기와 경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심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심을 잘 다루어야 하며, 시기심과 경쟁심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예수가 총독 앞에 섰을 때 총독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를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서 반역죄로 고소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 그 죄목에 대해서 자백했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반역죄를 뒷받침하는 사실들로 여러 가지 고소했지만 이에 대해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아 빌라도를 놀라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고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태도를 보신 후 예수님이 죄가 없으며 종교지도자들이 시기로 예수를 고소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주기 위해 유월절 특사를 제안했습니다. 당시 유대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무리가 원하는 죄수를 특사로 풀어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명한 죄수로는 바라바가 있었는데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를 대비시키면 무리들이 당연히 예수를 풀어달라고 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이미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를 풀어달라”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또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내가 어떻게 하랴?” 그러자 무리들이 대답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의 입장에선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다시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악한 일도 하지 않았음을 무죄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자신의 말이 먹혀들지 않음을 보았고,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러자 백성들은 빌라도에게 대답했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빌라도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 주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형판결을 내리도록 위력을 행사한 이들, 민란을 일으킬 정도의 위력을 행사한 이들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를 위력으로 압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며 지옥에서 올라온 자들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들은 불과 1주일전 예수님의 영광의 입성을 하실 때 열렬이 환호하며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외치던 그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종교지도자들의 들려준 돈 몇푼에 팔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군중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의 문제는 군중심리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문제 중에 하나는 왜 개인은 도덕적인데 사회는 부도적한가 하는 점입니다. 개개인을 보면 도덕적으로 우수한데 집단이 되면 오히려 매우 부도덕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군중심리 때문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한 무리들은 개개인은 선량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군중이 되었을 때 그들은 군중심리에 따르며 돈 몇푼에 매수되는 우매한 군중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라고 할 때 노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모든 사람이 노라고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광고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물결을 타고 있을 때 대세를 거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으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하지만 그런 군중심리에 빠진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숨을 걸만한 개인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거나, 우리가 주변의 대세와 흐름에 맞추어 산다면, 우리는 예수님 당시 살았더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외친 군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던지 군중심리로 살아선 안되며 시대의 물결을 거스리는 개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형 판결을 내린 빌라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종교지도자들의 고소사실을 들은 후 예수님의 무죄임을 알았고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으로 고소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즉시 유월절 특사를 무리들에게 제안했습니다.

이 때 마태복음은 특별히 빌라도가 그의 아내로부터 꿈 이야기를 들었다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을 보십시오. “19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었을 때 빌라도는 아내에게서 온 사람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말은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이미 빌라도는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 놀란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유월절 특사를 제안했지만 종교지도자들이 무리를 매수하였기에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특사로 석방하란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는 어떻게 하랴?’ 물었습니다. 무리들은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 물었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냐?’ 그러자 무리들은 악귀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더욱 크게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오게 하여 씻으며 ‘이 죄를 너희와 네 자손이 당하라’고 하며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빌라도의 죄는 무엇일까요? 빌라도의 죄는 예수님을 죽인 죄입니다.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죄는 빌라도의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구하려 노력했지만, 위력에 굴복한 불의한 재판관이었습니다. 재판관의 양심으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지만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정치생명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예수님에게 사형을 건고한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빌라도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로서 기록했으며, 빌라도는 이 정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책임을 지는 자의 죄입니다.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릴 유일한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결정권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결정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자기 위치에 있었더라도 그런 결정을 했을 것이다는 말로 책임을 면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빌라도의 위치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집니다. 결정과 책임을 지는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들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결정권자의 지위에 오르는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자신의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빌라도와 다름없는 불의한 결정권자가 될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양심은 실제적인 위협 앞에 무기력합니다. 진리가 있는 양심만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으며 진리가 없는 양심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진리를 저버릴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선지자의 때에 살았다면 우리는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선지자들의 무덤에 헌화하고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몄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함으로서 그들은 이미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의 후손임을 증명했다 했습니다. 그런 말들을 하는 자들은 과거에 살았더라면 선지자들을 죽였을 자란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았다면 우리는 확실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는 무리들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기심으로 예수를 기소한 종교지도자들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였을 것이며,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빌라도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류로서 공동체적으로 메시야를 죽이는 죄에 동참했습니다. 우리는 인류로 묶여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미국의 백인들은 그들의 흑인노예를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느낍니다. 오늘날 수많은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과 과거 대륙침략의 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한국과 일본에 사과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에 잘못을 한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란 것을 양심이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의 피가 우리에게 흐르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상징 - 물고기 '익투스'(ΙΧθΥ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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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살펴 보면 수첩이나 다이어리, 자동차 유리에 붙어있는 물고기 모양 그림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아~ 그리스도교 신자구나..." 라고 짐작한다.
어떤 사람은 습관처럼 자신의 이름을 쓸때 그 앞에 물고기를 그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연인 이름 앞에 하트를 그리듯이 말이다.

그리고 낚시업체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익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업체들이 많은 걸 알 수 있다.

 

 이렇듯 물고기 그림은 1세기 로마 카타콤바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징이 되었다.

물고기 그림은 1세기 로마 카타콤바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징이 되었다.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큰 박해를 받았다.


이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람들을 피신하여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바 등지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물고기를 그리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다른 신자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암호였던 것이다.

 

물고기란 뜻의 헬라어 '익투스'(ΙΧθΥΣ)"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 라는 글의 첫 글자들을 모아놓은 것과 같다.
예수(Ιησoυs), 그리스도(Χριστοs), /하나님(θεοs), 아들(Υιοs), 구세주(Σωτηρ)의 첫 머리 글자만을 따서 모아보면  물고기라는 헬라어 '익투스'(ΙΧθΥΣ)라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고기 표시는 단순한 기호에서 더 나아가 영속적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물고기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으로써 유물이나 교회에 그 흔적이 남겨져 있다.
아래 사진은 화려하게 장식된 물고기 모양의 등잔.
한쪽 면에는 크리스토그램이 찍혀있다.
그리고 이 사진은 갈릴리/갈릴래아 호수가에 위치한 타브가 교회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념하는 모자이크가 제단 앞을 장식하고 있다.

더욱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마태 14:17-21),
그물을 드리워 물고기를 잡으신 일(루카 5:1-11; 요한 21:1-14)과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루카 5:10)"라고 말씀하신 것들도 물고기와 관계가 있다.

물고기란 단어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다.
박해가 한창일 때 초대교회 신자들은 의사소통과 신분확인을 위한 암호의 한 형태로서 땅이나 카타콤바 벽에 물고기 그림을 그렸다.
한 사람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절반을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가 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카타콤바는 공동묘지 역할과 함께 일종의 지하도시로서 내부로 들어오면 출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아주 복잡했다.
따라서 카타콤바는 현지 지리에 익숙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자들은 또 카타콤바의 미로에서 물고기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자신들의 집회장소를 찾아왔다.
물고기 모양은 오늘날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것처럼 초대교회에서 믿음의 상징이 되었다.
카타콤바에서 발견된 물고기 형상 그림은 이전 로마 헬레니즘 미술에서 유래하였으나 이러한 신자들의 생각으로 의미가 새롭게 변화되었다.

고대 바빌론에는 지혜의 신이 천지창조 일년 후에 물고기 모습으로 육지에 와서 인간에게 밭을 가는 지식을 가르치고 학문의 기초를 가르쳤다는 전설이 있다.
인도 신화에서도 신이 물고기로 변신하여 인류의 시조를 홍수에서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물고기는 다른 나라의 신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물고기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징이 된 것은 성경의 사건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구약성경은 인간을 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비유하고 있다.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기적의 물에 의해 다시 소생하는 물고기는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
제자들은 주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다시 쳐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낚았으며(요한 6,1-13 참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에게 생선을 구워 주셨다(요한 21,1-13 참조).
또 세금을 바칠 때 예수님 일행이 돈이 없어 곤궁에 빠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은전를 찾아낸 이야기가 나온다(마태 17, 24-27 참조). 

이러한 성경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또한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사람을 물고기에 비유하기도 했다(마태 4,19 참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로 만드신 숯불로 구운 물고기를 '수난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 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에서 물고기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익투스 [Ichthys]

익투스(그리스어: ἰχθύς 이크티스[*], 대문자 표기로 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초기 기독교도들이 비밀스런 상징으로 썼던 두 개의 곡선을 겹쳐 만든 물고기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Ιησουσ Χριστοσ Θεου Υιοσ Σωτηρ"('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主)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라는 뜻)의 약자라는 설도 있다.

 (ΙΧΘΥΣ 익투스ιχθυs.물고기)



Ιησoυs(예수스, 예수)

Χχριστοs(크리스토스, 그리스도)

Θεοs(데오스, 하나님)

Υιοs(휘오스, 아들)

Σωτηριαs(소테리아스, 구세주)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물고기 그림 ΙΧΘΥΣ(익투스.ιχθυs) 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1. 문양및 단어의 의미

익투스는 본래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랍니다.

위에서 보시는 그림 같이 이 그림안에는 글씨가 써 있습니다.  읽는 방법은 익투스(익쑤스) 소리내는 방법은 익쑤스에 가깝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원래 아래 단어들의 머리 글자 들의 조합입니다

  1)그리스어   대문자 : 익투스(ΙΧΘΥΣ)는  ΙΗΣΟΥΣ(Iesus: 예수) ΧΡΙΣΤΟΣ(Christos: 그리스도) ΘΕΟΥ(Theou: 하나님의) ΥΙΟΣ(Uios: 아들) ΣΩΤΗΡ(Soter: 구세주)

소문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Ιησομs Χριστοs Θεομ Υιοs Σωτηρ)의 희랍어 첫 알파벳을 모은 것입니다 (ΙΧΘΥΣ : ιχθμs)

 

  2)영어 표기  I : Iesus (예수스 : 예수) X : Christus (크리스투스 : 그리스도) θ : Theos (떼오스 : 하나님) U : Huios (휘오스 : 아들) Σ : Sojomete (소조메테 : 구원자) , 소테르, 로 표기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라는 단어와 문양 속에는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Ιησομs Χριστοs Θεομ Υιοs Σωτηρ예수스 크리스투스 떼오스 휘오스 소테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2. 물고기 문양이 기독교의 상징이된 유래.

물고기는 1세기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고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었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볼로서의 이 물고기에 대한 언급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 150-)의 저술인 파이도고구스(Paedogogus; 교사, 3:11)에 등장합니다. (이덕형 지음  생각의 나무사 발행 "이콘과 아방가르드"  P194 각주참조)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보면 아시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시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공동체에 속하는 일이었답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는 이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박해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서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참석자들은 입구에서 안내자를 만나 예배처로 인도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 때 입구의 인도자는 방문객이 예배를 드리러 찾아온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기독교인을 박해하기 위해 위장하고 들어와 기독교인의 근거지를 고발하려 찾아온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로 바닥에 물고기 그림(신앙고백)을 그림으로써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했다고 합니다.

 

3. 물고기 문양이 그리스도인을 상징하게 된 것은 성경의 사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으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은 일(요 6:1-13)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은 일(요 21:1-13)

먹을 것이 없어 예수님의 일행이 곤궁에 빠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의 입에서 금화를 찾아낸 이야기(마 17:24-27)등과

오병이어나 칠병이어등의 기적 그리고 바리새인 들이 하늘의 표적을 구할 때 예수님께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있다가 나온 기적 밖에 보여줄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 한 것(마 12:38-40) 등 성경의 여러사건 들이 물고기와 관련되어있습니다.



기독교의 상징 물고기 (익투스.ιχθυs.)에 대하여


ΙΧΘΥΣ(익투스.ιχθυs.물고기)

물고기의 뜻을 가진 헬라어 ΙΧΘΥΣ
상당히 깊은 뜻과 의미를 지니고 있답니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라는 고백입니다.
각 단어의 첫 머리 글자만 모으면

바로
 "물고기(익투스)"라는 단어가 됩니다.
자세한 뜻과 의미와 시대 배경은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먼저
 물고기(익투스)의 상징 단어를 알아 보겠습니다.


  (ΙΧΘΥΣ 익투스ιχθυs.물고기)


Ιησoυs(예수스, 예수)

Χχριστοs(크리스토스, 그리스도)

Θεοs(데오스, 하나님)

Υιοs(휘오스, 아들)

Σωτηριαs(소테리아스, 구세주)


ΙΧΘΥΣ(익투스.물고기)
물고기는 1세기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고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볼로서의 이 물고기에 대한 언급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 150-)의 저술인
파이도고구스(Paedogogus;교사, III,xi)에 등장합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주후64년부터 250년간)로마는 교회를 향하여
큰 박해를 가하게 됩니다.
이 때에 사람들은 피신하여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 등에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서로의 신분을 은밀하게 밝히기 위하여
물고기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 보이거나 물고기 모형의 조각품을
소지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때에 땅에 물고기를 그렸습니다.
물고기 그림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익투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십니다.
"라는 헬라어 문장의 각각 첫 머리 글자를 딴 글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물고기 그림이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박해가 한창일 때 초대 교인들은 그들을 박해하는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는 의미로서
그리고 의사 소통과 신분확인을 위한 암호의 한 형태로서 땅이나
카타콤의 벽에 물고기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절반을
거기에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가 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카타콤은 공동묘지의 역할과 함께 일종의 지하 도시로서 외부의
침략에서 은신할 수 있는 미로였습니다.
외부인들이 익숙하지 못한 장소로서 비록 그들이 카타콤 내부에
들어온다 할지라도 출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진 곳으로서 현지의 지리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이 숨기에는 안성마춤이었습니다.

그들이 미로에서 길을 찾는 표식이 바로 물고기 모양이었습니다.
물고기의 몸통에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헬라어의
약자인 "ΙΧΘΥΣ" 라는 글이 쓰여졌는데 이 물고기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장소를 찾아 왔습니다.

물고기 모양은 오늘날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듯 초대 교회에서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근래에 와서도 역시 이 심볼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심볼이 된 것은 성서의
사건들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으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은
일(요한 6:1-13)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은 일(요한 21:1-13)
돈이 없어 예수님의 일행이 곤궁에 빠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의 입에서 금화를 찾아낸 이야기(마17:24-27)등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값 없는 은총을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나 집 문앞에 그리고 여러 곳에서 자주 보아온
물고기 모양의 그림에는 이렇듯 깊은 뜻과 의미가 담겨 있는것입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105

4

14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106

4

15

월 

누가 23:1∼7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절)

107

4

16

누가 23:8∼12

서로 친구가 되니라(12절)

108

4

17

누가 22:13∼25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1절)

109

4

18

누가 23:26∼31

구레네 시몬(26절)

110

4

19

누가 23:32∼38

네가 너를 구원하라(37절)

111

4

20

누가 23:39∼43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39절)









04-13-2024(토) 누가복음 22:63-7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선지자 노릇하라(64절)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They blindfolded him and demanded, "Prophesy! Who hit you?"

선지자 노릇하라(4395)  προφῆτεύω

1. 예언하다.  2.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3. 알아 맞추다
발음 [ prŏphētĕuō ]
어원 / 미완료 ἐπροφήτευον, 미래 προφη- τ εύσω, 제1부정 과거 ἐπροφήτευσα, 439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예언하다.
 a.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마 7:22, 행 2:17, 고전 11:4.
 b. 알아 맞추다, 마 26:68, 막 14:65, 눅 22:64.
 c. 예고하다, 미리 일을 예언하다, 마 15:7, 막 7:6, 벧전 1: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선지자 노릇하다(마 7:22, 막 14:65, 눅 22: 64), 예언하다(마 11:13, 행 2:17, 벧전 1:10), 미리 말하다(요 11:51).

욕하더라

마태복음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Those who passed by hurled insults at him, shaking their heads.

하나님의 권능

마가복음 16:19-20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After the Lord Jesus had spoken to them, he was taken up into heaven and he sat at the right hand of God.
Then the disciples went out and preached everywhere, and the Lord worked with them and confirmed his word by the signs that accompanied it.

사도행전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Look," he said, "I see heaven open and the Son of Man standing at the right hand of God."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누가복음 22:63~71)

우리는 오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심문당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목요일 밤에 시작하여 금요일 새벽까지 이어진 재판이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심리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로 퇴위 됐지만 실세였던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요 18:12~14; 19~23)
두 번째로 안나스의 사위이자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마 26:59~66; 막 14:55~64; 눅 22:63~65)
세 번째는 새벽에 71명의 유대인 대표로 이뤄진 산헤드린 앞에서였습니다(눅 22:66~71; 마 27:1; 막 15:1).

누가는 63~65절까지 가야바의 집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핍박을 기록했고, 66절부터 71절까지는 새벽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두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대제사장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하룻밤에 두 번이나 먼저 심문하고, 새벽에 또 다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재판을 벌였을까요?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상식적이고 심지어 불법적이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첫째, 죄인에 대한 심리는 공개된 장소인 성전에서 해야 했는데, 예수님은 대제사장 집 안에서 비밀리에 심리를 받으셨습니다.
물론 마지막엔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했지만, 그 앞에 두 번은 몰래 이루어진 사전 심리였습니다.
왜 두 번의 비밀 재판이 필요했을까요? 조금 후에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자기변호의 기회가 주어져야 했지만, 예수님은 답이 이미 정해진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야 하는데, 형이 무엇이냐를 결정하는 심리였습니다.
그들이 정해놓은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마 26:66).

셋째, 중대한 재판 특히 사형에 관련된 재판은 판결을 내리기 전 최소 이틀의 시간을 두어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했는데, 예수님은 단번에 결정이 났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안식일이라 산헤드린 회의를 열 수 없고 그러면 예상보다 예수님을 오래 가둬야 하는데, 민심을 생각하면 이는 그리 안전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날치기 통과를 시킨 것입니다.

넷째, 절기 중에 심문이나 재판을 받지 않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심문당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그들이 세운 재판에 관한 규칙을 다 어겨 가면서까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예수님의 심리를 해치우려 한 것일까요?

유대 종교 지도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눈엣가시 같은 예수를 운 좋게 그 측근 제자의 배신을 통해 잡아들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예수를 빨리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마 26:4).

그냥 죽인다? 안 됩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요 18:31). 로마에서 세운 총독이 허락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예수가 로마를 위협하는 인물이라 제거하는 것이 좋다고 설득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은 흥미롭게도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 

백성을 미혹하니 반란자가 아닙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막으니 반역자가 아닙니까? 황제를 대항하여 일어난 자칭 왕, 죽이는 것이 로마 제국을 위해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총독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로마 총독은 이런 식으로 속인다 쳐도, 같은 산헤드린 71명의 유대인 대표들을 어떻게 속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수많은 백성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먼저, 한 가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으니, 이스라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몰래 찾아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아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요 3:2).
또한 관리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요 12:42).

그래서 비밀 사전 모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뜻을 함께하는 유대인 대표들을 모아서 미리 모의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새벽에 급히 호출한 산헤드린 구성원이 다 모였을 때, 이미 정해진 각본대로 재판을 이끌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지만, 마태와 마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6:59~68; 막 14:55~65).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비밀리에 모인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습니다(마 26:59).
유대인이 가장 증오하는 죄,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 신성 모독의 증거를 찾는 것입니다.
신성 모독이 확실하면 산헤드린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모인 무리는 많은 증인을 세워 열심히 신성 모독의 증거를 찾습니다. 하지만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난항을 겪습니다(막 14:56). 가장 그럴듯한 증언이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마 26:61).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모독한 것이 곧 신성 모독이라고 몰아세울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두명이 말한 이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아 불발되었습니다(막 14:59).

보다 못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 이 증거들에 대해 할 말이 있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안 하셨고, 답답한 대제사장은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신성 모독과 직결된 질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마 26:63).

아주 의미 심장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이 주님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면 밝히 말씀해주십시오,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시렵니까?”(요 10:24). 그때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모르겠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거기서 그쳤으면 됐는데, 예수님은 더 나아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0:36). 그러자 사람들이 돌로 치려 했고 그 이유를 “신성 모독”이라 했습니다(요 10:33). 사람이면서 자칭 하나님이라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입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나오면,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도 분명 단번에 돌아설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대답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마 26:63). 예수님을 계속 압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을 평정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인간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심각한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는 사람이 영웅일 리 없습니다. 죽여 마땅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최소한 “그렇다”는 의미가 담긴 대답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하지만 분명히 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4).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대제사장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됐다! 예수님이 드디어 그들이 듣기에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앉을 수 없습니다. 그 권능의 우편에 자기가 앉아 있을 거라는 말은 신성 모독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분노의 표현으로 옷을 찢으며 말합니다(아마도 속으로 웃으며)

“이 자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했으니 더 이상의 증인은 필요 없다,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마 26:65)

대제사장 집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며 비밀 모임이 끝이 났습니다(막 14:64).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분노에 찬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을 뿐 아니라 심한 욕설과 조롱 심지어 폭력까지 퍼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인들(막 14:65), 곧 예수님을 지키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때리고 욕하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63절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절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절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직위나 직급에 상관없이 그들은 예수님을 치고 때리고 희롱하는 일에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눈을 가리고 때린 후에, “네가 선지자라며? 어디 한 번 너를 친 사람이 누군지 맞춰보시지”라고 조롱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욕설을 예수님께 퍼부었습니다. 찬양과 감사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께 그날 밤 내내 더럽고 추악한 말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마음껏 예수님을 조롱하고 때리고 욕한 후에 대제사장 집 지하에 있는 감옥에 예수님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심하게 맞아 붓고 상처 난 얼굴에 더러운 침이 묻은 채로 결박된 예수님은 그렇게 차가운 감옥 돌바닥에서 고통을 참아내며 새벽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뭘 잘못한 걸까요? 얼마나 잘못했길래 이런 처벌을 당한단 말입니까? 왜 이렇게 예수님을 미워하는 걸까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날이 샜습니다. 이제 준비된 쇼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그 공회로 끌어들였습니다(66절). 몇 시간 전에 모의 법정에서처럼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하고, 대중이 실제로 등을 돌려야 합니다. 어젯밤에 했던 것처럼만 예수님이 잘 따라준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공회는 예루살렘 성전 뜰 절단석에 있는 공회당에서만 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회의 의장이고, 배심원이 서로를 볼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앉았습니다. 배심원은 70인으로 구성된 서기관, 랍비,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 장로들의 대표자로 구성되었습니다.

죄수는 법정을 정면으로 하고 상복을 입고 서 있도록 하였고, 죄수 뒤에는 보통 그를 변호할 랍비나 그 제자들이 앉았지만, 아마 예수님께는 전혀 제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과반수가 지지하면 무죄판결을, 2/3이 표결하면 유죄 판결을 낼 수 있었습니다. 2/3이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공회에서는 더 많은 말이 오갔을 것이지만, 누가는 핵심적인 질문 두 개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요약하여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67절에 나옵니다.

67절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예,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에 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영웅 아닙니까? 그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그렇게 환호하며 춤을 춘 것 아닙니까? 로마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제국을 위협할 반란군 두목입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빌라도 앞에서 사형당할 죄인으로 판결받을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백성의 기대가 하나님의 계획과 다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기름 부음을 받은 자, 하나님이 기뻐하신 종 그리스도가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67절…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절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다, 아니다’로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너희 생각은 정해진 것이 아니냐. 내가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 아니냐. 내가 묻는다고 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견고하고 딱딱한 불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이 예수님이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보여주었지만, 그 모든 증거에 귀를 막고 눈을 가릴 정도로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구약 성경 말씀을 사용하여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69절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계시하신 말씀으로 네 짐승의 환상을 통해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왕국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중 마지막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곧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하나님께서 그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단 7:13-14).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기대하는 대로 로마 정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정부를 세우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요 18:36). 하지만 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맞다. 지금은 너희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소멸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를 주실 것이요, 나는 멸망하지 않을 영광스러운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이제부터 영원히(단 7:14). 그때 내 앞에 설 준비가 되었느냐?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 앞에 앉아있는 대제사장 가야바나 주위를 둘러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죄수 취급하고, 자신들이 재판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죽기까지 순종한 아들을 높여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지금 완강하게 거부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기쁨으로 순종하든지,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 속에 굴복하든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권능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셨습니까? 언젠가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대로 로마에 반역할 그리스도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빌미를 남기지 않으면서도, 구약의 예언을 통해 자신이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권능의 우편에 선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서게 될 날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말입니다.

큰 소득 없는 대답을 들은 무리는 이제 기다렸다는 듯이 약속된 회심의 질문을 던집니다. 70절입니다.

70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신성 모독 판결로 가는 다이렉트 질문입니다. 공회를 보고 있는 여러 유대인들이 듣고 예수님에게서 단번에 등을 돌리게 만들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70절…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네가 의도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나는 네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라고 신성 모독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으로 공회의 결정은 쉽게 원하는 대로, 짜여진 각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최후 판결을 내렸습니다. 71절입니다.

71절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사실 아무런 증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친히 그 입에서 들은 이야기,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으로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대답, 이는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대답이 사형에 합당한 증거라고 판결했습니다. 선고는 내려졌고, 민심도 어느 정도 돌아섰습니다. 이제 로마 총독만 잘 설득하면 예수는 죽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그리스도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합니다(23:1).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음번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했을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안달했을까요?
예수님의 답변을 기반으로 세 단계로 접근하여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냥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그분을 죽어야 할 만큼 죄가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가난한 자를 먹이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도대체 왜 죽이려 한단 말입니까? 대답은 단순합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속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습니다(마 23:25). 종교 시스템을 이용하여 돈을 불렸습니다. 권력과 손을 잡고 특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로의 유전과 전통을 지켜 남보다 더 의로운 척, 외식적인 종교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칭찬을 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자 그들은 회개하기 보다는 그분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들이 사랑하는 탐욕과 방탕과 온갖 더러운 죄를 즐길 수 있도록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약속한 그리스도였다. 선지자였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예수님을 죽여야 할이유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영접해야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었을까요? 자기 땅에 온 하나님을 자기 백성이 어떻게 영접하지 않고 거절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맹인처럼 눈앞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드러내는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분의 입술과 손과 발을 통해, 삶을 통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계시는데 그걸 못 볼 수 있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진리에 눈 감게 만듭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셋째,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예수를 죽이려고 할까요?

예수님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19).
그들은 죄 때문에 성령이 밝히 드러내 보이신 진리를 강팍한 마음으로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경향과 행위를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며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한 그날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만물과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마음에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열심을 냅니다. 그 죄의 끝은 어디까지 미칠까요?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제거하기까지 죄는 끝없이 나아갑니다. 이렇게 죄는 크든 작든 파괴적입니다.

결국 죄 때문입니다. 그 악독한 죄에 노예가 된 이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욕하고, 침 뱉고 조롱한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에 앉히고 재판한 것입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분,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에게 가장 죄 많은 사람에게 내리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죽이고 싶어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창조주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귀를 막으며 죄가 드러날 때 회개하기보다 끝까지 추구하려는 강렬한 죄의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권세있는 말씀으로 윽박지르지도 않았습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지도 않으셨고, 이성을 잃고 분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실 때도 있었지만 묵언으로 골을 낸 것도 아니고, 뺨을 맞으셨지만 반격하지 않으셨습니다. 침을 뱉었지만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선지자라면 한 번 맞춰보라”며 눈을 가리고 때리고 조롱했지만, 억한 심정으로 권능을 남용하여 맞추거나 저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빗발치는 악에 대하여 조금도 악으로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모든 고통을 끝까지 선하게 참아 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침묵하지 않으셨을까요?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을까요? 그들이 원하는 대답 아닙니까? 그 대답으로 인해 사형이 확정될 것을 아셨을텐데 말입니다.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그 악독한 죄의 노예가 된 이들을 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0~25)

여러분, 우리는 처음 죄에서 놓임 받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계속해서 죄와 싸우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우리가 악과 싸울 때 힘이 되시고 본이 되시며 승리가 되십니다.
악한 사람과 맞설 때, 악한 세상과 싸울 때, 악한 내 자아와 씨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보여주신 싸움의 정석, 씨름의 기술을 배우십시오.
그가 승리하셨기에 우리의 승리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그것이 담대하게 십자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 진정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 자취를 따라오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라 사시겠습니까?





선지자란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지자를 헬라어로 "프로페테스(prophetes. προφήτης)"라고 하며 "예언자"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예언"이란 단어를 한자어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의미로 사용하는 예언(豫言)
이때 예언이란 한자어는 "미리 예(豫)" "말씀 언(言)"'이란 뜻을 말합니다.

둘째는 말씀을 맡아 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예언(預言)
이때 예언이란 "맡을 예(預)" "말씀 언(言)"이란 뜻입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는 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예언"을 좋아합니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알려주는 역할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로 강조하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받은 말씀을 회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며 욕하면서 누가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하였는지 알아맞추라는 식의 선지자 노릇이나 하라는 것은 완전히 인격을 무시하는 저질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는 침묵(沈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이 됩니다.
이러한 자세를 성경에서는 "시가오( sigaō. σιγάω)" 라고 합니다.
'시가오'란 "침묵을 지키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을 멈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죽은 자의 침묵"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의 침묵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의 침묵
둘째는 먼동이 크기 전의 고요한 침묵
셋째는 죽은 자의 침묵

조롱하며 비웃고 모욕하는 무리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조롱하는 무리들과 언쟁을 통하여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를 통한 부활과 세상 죄를 짊어져야 할 어린 양으로서 희생 제물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었기에 더 큰 목적을 위하여 사소한 말장난에 대해서는 침묵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예견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마음판에 새기며 말을 아끼고 진실한 행동으로 삶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어느 속에 있든지









침묵 예화 모음 28편

1. 29년 침묵 끝의 말

울드 부부는 1967년에 그들의 다섯 살 난 아더가 정박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드 부부는 아이가 가족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 사랑에 보답하지도 못할테지만 아이를 정박아 수용소가 아닌 집에서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보답을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울드 부부는 가급적이면 아이를 정상인처럼 대하려고 노력했다. 일요일에는 교회도 데려가고 평일에는 특수학교를 보냈으며 일부러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바보처럼 웃기만 했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느새 열여덟 살이 된 아더, 울드 부부는 그동안 아들을 장애아 학교에 보내고 장애아들이 모여서 일하는 작업장에도 보냈다. 그러나 아더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91년 아더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아더는 장애인 작업장에서 단순한 전자장비를 조립하는 일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캐럴이라는 새로운 책임자가 이곳에 발령되었는데 그녀는 아더에게서 어떤 숨은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곧 그녀는 아더에게 컴퓨터로 의사 소통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캐럴은 아더가 매우 똑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울드 부부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들을 작업장으로 불렀다. 그리고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주변환경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캐럴이 먼저 아더에게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컴퓨터 자판으로 물었다. 그러자 아더의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힘들게 움직였다. 컴퓨터 화상에 알파벳 한 글자 한 글자가 떠올랐다. 아더가 한 문장을 만드는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29년간의 침묵 끝에 아더의 마음이 완성되었다.
"이제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울드 부부는 울고 있었다.

2. 30년 간의 침묵

사업가인 짐이 빌리 그레이엄에게 말했다.
"저와 30년 동안 동업하는 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 부끄러운 일이군요. 함께 무릎 꿇고 하나님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한 후 빌리 그레이엄이 이렇게 권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즉시 폴에게 가서 당신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십시오. 새롭게 살아야 하며, 삶을 새롭게 영위하기 위해 구주를 받아들이도록 간청하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짐은 폴의 사무실에서 아무 말 없이 서성거렸다. 이상히 여긴 폴이 물었다.
"짐, 매우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응,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
"그게 뭐지?"
"자네 영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네. 난 자네가 예수를 믿으면 좋겠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폴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몇 년 동안 나는 자네가 내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해주길 바랐네. 예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새롭게 해주시길 그리스도께 기도하겠네. 자네와 함께 이번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그 분께 정식으로 믿음을 고백하겠네."

3. 톱밥 속에서 들린 시계 소리

얼음공장에서 일하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톱밥이 쌓여 있는 곳에서 값비싼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동료 와 함께 2시간 이상이나 시계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어떤 어린 소년이 그의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꼬마야, 그 시계 어디서 찾았니?"
"예, 제가 톱밥 위에 앉아 있는데 시계 소리가 `째깍 째깍'하 고 들렸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정신없이 요란하게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서 하 나님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조용한 가운데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4. 침묵하는 강자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움을 벌였다.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를 정하는 수컷끼리의 싸움이다.
여기에서 이기면 모든 암컷 호랑이들을 거느리며 좋은 먹이와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마침내 결전이 벌어졌다.
한 마리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덤벼들었다.
그런데 또 한 마리는 침묵하며 이에 맞섰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렁차게 포효하던 호랑이가 용맹스럽게 싸울 것 같더니 도중에 그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고 말았다.
크게 소리 지르는 호랑이일수록 약한 놈이고 싸움에 진다고 한다.
진정 강한 호랑이는 오로지 침묵과 위엄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고 한다.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이 세상, 호랑이가 보고 웃을 것이다.

5. 침묵하지 못하는 사람

스파르타의 정치가 데마라투스가 공회 석상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이를 본 그의 친구가 '여보게, 못나서 말을 않나?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 안하나?'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대는 모르는 말일세!
못난 사람은 절대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라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을 통제할수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절대로 말을 통제하지 못한다.

6. 침묵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작품에 「침묵」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극심한 박해로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해서 쓴 책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니까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다음과 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즉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다 십자가를 세워 놓고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잠시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푹 잠겨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지켜 보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애처롭게 고난당하며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사랑의 주님, 영적으로 무지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깨닫게 하시고, 징계 뒤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의 손길을 기뻐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존귀와 영광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7.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

신앙인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저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저의 다급한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으면서 왜 그렇게 침묵하십니까?
얼마 전 일이었습니다.
저녁 6시 20분경에 아내와 저는 교회 앞에서 유치원 차를 타고 오는 딸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행복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좋아하는 맛있는 어묵을 요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슈퍼마켓에 들르자고 졸라댔습니다.
웬만하면 은혜의 요청을 들어주겠지만 그 순간만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은혜가 좋아하는 어묵을 준비해 놓았는데, 영양가도 없는 과자를 사주어서 입맛을 버리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은혜는 엄마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막 떼를 쓰며 울었습니다.
껌 사줘요! 과자 사줘요! 엉엉엉! 은혜야! 집에 가면 맛있는 어묵이 있어! 조금만 참으면 돼! 그래도 은혜는 그 잠깐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울어댔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아내 울고 있는 은혜에게 재빨리 냄비에서 어묵 꼬치 하나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은혜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양가 없는 껌과 과자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의 종합적인 영양을 고려하여 잠시 침묵으로 대응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 속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음성이 들어 있습니다.

8. 침묵을 창조하라

하루는 어떤 부인이 성 빈첸시오 신부를 찾아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더 이상 남편과 살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의 신경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를 넘어섰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다시 화목해질 수 있을까요?"
빈첸시오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부인, 울 수도원 앞뜰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답니다. 수위에게 가서 그 우물물을 좀 얻어 가십시오. 그리고 남편이 집에 돌아오시면 그 물을 얼른 한 모금 입에 머금으십시오. 삼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겨예요."
착한 부인은 신부의 말대로 수도원의 물을 얻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늦게서야 귀가한 남편은 또 어느 날처럼 부인에게 불평과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같았으면 부인도 마구 달려들었겠지만, 그녀는 빈첸시오 신부의 가르침대로 성수를 얼른 입안 가득 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물이 새지 않도록 입술을 꼭 깨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떠드는 소리가 점차 잠잠해졌습니다. 그날 밤 이들 부부는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부인은 남편이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그 성수를 입 안 가득히 머금곤 했습니다. 그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남편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변했습니다. 신경질도 줄어들었고, 오히려 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의 달라진 태도에 무척이나 기뻐하며 신부를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빈첸시오 신부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기적을 일으킨 것은 수도원 앞뜰의 우물물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침묵이죠. 당신의 침묵이 남편을 부드럽게 한 것뿐입니다."

9. 그리운 말 한마디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사람을 얼마나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느낌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도록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라도 해명도 변명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10. 말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굴에 들어가면 절대적인 침묵을 요구하는데 만약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것이다.
하루는 바보 삼 형제가 그 굴을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그 중 제일 큰 형이 말했다.
"너희들 이곳에서 말하면 죽는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둘째 형이 " 것 봐, 말하면 죽지," 그러면서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셋째가 자신있게 말합니다.
"나는 절대 말 안할 거야"
결국 셋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11. 침묵도 사랑이다

사람은 침묵이 필요합니다. 혼자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행동과 작은 임무와 신상에 일어나는 혹독한 곤경에 소비되는 내면적 힘을 축적하는 것은 바로 침묵 속에서입니다. 침묵은 천지창조보다 먼저 와서 온 하늘을 말없이 덮었습니다.
- 도로시 헌트의 《마더 데레사 일일묵상집》 중에서 -

* 침묵에 대한 명언은 많다. 침묵이 그만큼 값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침묵이 왜 필요한지를 압축한 완전한 말은 그리 많지 않다. 데레사 수녀의 말에서 침묵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된다. 침묵도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자기와 모든 사물에 대한 그윽한 사랑이다.

12. 침묵 속의 가르침

젊은 철학자 에머슨이 대사상가인 칼라일을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호수 주변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해질 무렵에는 둘 다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두 사람은 단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에머슨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칼라일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칼라일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머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나도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자네는 매우 훌륭한 철학자가 될 걸세.”

두 석학은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말보다 침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번 한 주간, 침묵 가운데 전해지는 가르침을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13. 침묵의 지혜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창조는 침묵과 함께 시작되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생각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상상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계획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할 피조물을 품으셨다. 침묵은 하나님의 언어이다. 침묵은 말이 없다. 침묵은 말이 없는 언어이다. 소리가 없는 언어이다.
침묵 속에 담긴 언어는 무게가 있다. 깊이가 있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생명이 있고 넘치는 에너지가 있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린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새 역사를 창조한다. 침묵 중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다. 참된 말은 침묵 속에서 나온 말이다. 침묵으로 품은 말속에 참된 의미가 있다. 생명이 있다. 능력이 있다. 그런 까닭에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의 언어는 깊이가 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우주에서 침묵만큼 하나님의 모습과 닮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맛보게 된다. 침묵은 고요함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고요히 자란다. 어린이들은 고요히 자란다. 서서히 자란다. 고요함중에 꽃이 피고 고요함중에 꽃이 진다. 고요함중에 태양이 뜨고 고요함중에 태양이 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라. 소리없이 움직인다. 식물은 소리없이 자란다. 곡식은 소리없이 영근다. 침묵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최상의 지혜이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과실은 기다림을 통해 맛을 더해 간다. 풋사과는 신선하지만 깊은 맛이 없다. 사과의 깊은 맛은 기다림을 통해 더해 간다. 기다림은 맛을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 은총의 선물이다. 침묵할 때 우리는 듣게 된다. 침묵할 때 우리는 드러난 언어 속에 담긴 감춰져 있는 언어를 듣게 된다. 언어 속에 담긴 세계를 알게 된다. 누군가 침묵 중에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랑이란 언어 속에는 엄청난 세계가 담겨 있다. 침묵은 지혜다. 침묵할 때 마음은 고요해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맑아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깊어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부드러워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따뜻해진다. 그러므로 더 많이 침묵하라.
/강준민 목사(LA동양선교교회)

14. 침묵이 좋은 몇 가지 이유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침묵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을 예방합니다.
침묵은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침묵은 세상과 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둘 수 있도록 해줍니다.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들어줄 수 있게 합니다.
침묵은 무한한 인내심을 길러줍니다.
침묵은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기도하게 합니다.
침묵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 핑계였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그리고 침묵하면 당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합니다.

15. 침묵의 힘

어떤 의미에서 침묵은 현재, 과거, 미래를 하나로 만든다. 예를 들면, 사랑은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에 의해서 흔히 드러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베풀어지는 예감과 통찰력은 이러한 침묵의 초시간적인 성격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 막스 피카르트의《침묵의 세계》 중에서 -

* 입을 열어 다툼이 되느니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말 때문에 싸움의 불길을 키우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침묵은 때로 끊길 뻔 했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주기도 하고, 그 사람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시 연결해 줍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며, 성숙된 인격의 한 표현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16. 비난과 침묵

말에 어폐가 좀 있지만,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은 무척 쉽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걱정해 주는 것처럼, 또 진심으로 위하여 충고해 주는 척하면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을 끼쳐주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간간이 우리 주변에 불미스러운 추문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기대감과 비례해서 충격의 파장은 크고 소문은 확산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무책임하게 침소봉대하여 말들이 말을 낳고 또 말을 만들어 겉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 사이버 상에서의 소문은 진위 확인은 고사하고 유통기한도 없이 가히 언어 폭력 수준입니다. 이럴 땐 말을 옮기지 말고 그저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해 주는 것이 어려우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도 좋습니다. 사실 추문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걱정한답시고 이리저리 글을 펴다 나를 정도로 우리는 걱정하지도 않으며, 또 실제로 당사자와 친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조금 더 혹평하면 그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기심에 따라 소문내는 참새 입방아 노릇만 하게 되고 결국 상처를 재생산하며 마귀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남의 말은 좋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차라리 침묵이 나을지 모릅니다. 격려할 수 없다면 오히려 비난보다는 침묵이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7. 가만히 들어주세요

누군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교훈이나 어떤 말을 해주기보다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위로가 될때가 있습니다. 깊이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는 이 앞에서 말은 그야말로 말일 뿐입니다. 어깨를 다독거려 준다든지 눈을 바라본다든지 하면서 침착하고도 평화롭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세요. 그의 이야기와 이야기 너머의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오히려 더 든든한 위안과 설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슬픔이나 아픔에서 벗어나는 기간 동안 당신도 그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해두세요. 예를 들면 그의 아픔을 함께하며 목도리를 짜서 준다든지 그를 위하여 하루하루 정성을 모은 저금통을 준다든지 그렇게 만드는 과정이나 시간이 들어간 것들을 선물해보세요 진정으로 귀 기울여준다는 것은 말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처럼 바위처럼 떠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오래 지켜주는 것입니다.
/권대웅, <당신이 별입니다> 중에서

18. 조용한 물이 깊은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말 중에 대부분은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아픈곳을 말하면서 그 말에서 기쁨을 찾으려고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할 뿐 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말을 하지않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생각없이 합니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확실한 이야기도 아닌 추측을 가지고 말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의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삶의 힘을 돋구어 주는 그런 말을 나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까...
사람들은 드러내는 말 보다는 밝은 미소로 침묵으로 조용한 물이 깊은 것 처럼 깊이 있는 말로 사랑과 감동을 전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요?

19. 3·2·1 법칙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천’이 성공 비법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그 내용 중 하나가 “속내를 털어놓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것이었다. 대인 관계의 3·2·1 법칙이 있다. 그것은 3분간 경청하고, 2분간 맞장구쳐주고, 1분간 말을 하라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정신과 의사들의 주된 일은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아무리 흥분한 사람도 한 시간만 말을 하면 화가 진정된다. 황하는 작은 시냇물이 흘러들어 오는 것을 막지 않았기에 그만큼 커질 수 있었다. 오늘날 엄청난 과학기술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통신망은 눈부실 정도로 발전했다. 휴대전화는 신체의 일부처럼 밀접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점점 고독을 느낀다. 아이들은 컴퓨터 속으로, 어른들은 텔레비전 속으로 빠져든다. 성경은 말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진정 필요한 시대다.
/설동욱 목사(예정교회)

20. 하나님의 침묵

본문: 시편 83 장 1 절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기도를 하여도 응답이 없을 때 답답한 마음에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은 아닐까?’라는 섣부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도하며 기다려도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행동 하나하나까지 알고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짧은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쫓아가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한정된 머릿속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시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때가 무르익었을 때 과일을 수확해야 그 과일이 맛이 있듯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에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를 고르십니다. 침묵의 시기가 지나면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 기도: 침묵 후에 이어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도하게 하소서.

21. 말을 아껴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교수에게 한 학생이 "교수님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교수는 "입을 적게 움직이고 머리를 많이 움직이게"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일에 골몰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일에 골몰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타인들의 흠만보인다. 그리고 타인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린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하기 전에 반드시 두 번 생각한다.

22. 침묵 게임

부모님은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침묵 게임’을 시키셨다. 가장 오랫동안 침묵하는 사람이 이기는, 많은 부모가 좋아하는 게임이다. 어느 날 몇 시간 동안 그 게임을 하고 있을 때(우리는 그 게임을 잘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침묵 게임을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나는 요즘도 전혀 다른 이유로 침묵 게임을 하고 있다. 진정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움 때문에 말하길 억제한다. 갈등이 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통이 두렵고, 인간관계의 혼란을 정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것이 두렵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 무엇에 대해 괴롭지 않은 척할 때, 본심과 달리 타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척할 때 침묵 게임을 하는 것이다. 나는 수년 동안 서로 침묵 게임을 하는 부부들을 안다. 그들은 말싸움을 피하기 위해 그 게임을 하지만, 실은 친밀감을 회피하고 있다. 나는 직장에서 침묵 게임을 하는 직원들을 안다. 그들은 파문
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 게임을 하지만, 실은 원망과 좌절 속에서 수년을 보낸다. 나는 믿지 않는 이웃이나 친구와 침묵 게임을 하는 교인들을 안다. 그들은 거절이나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겠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제공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지금 당신은 누구와 침묵 게임을 하고 있는가? 침묵 게임 뒤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
「단순하게 믿으라」/ 존 오트버그

23. 침 묵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마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때,
침묵은 양선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용서해 줄 때,
침묵은 자비입니다.
불평없이 고통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더라도 타인에게 영광이 돌려지도록 내버려둘 때,
침묵은 겸손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시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침묵은 신앙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순종입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할 때
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믿을 때
침묵은 사랑입니다.




24. 침묵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잠 13:3)

캐나다의 의학박사 윌리엄 오슬러는 침묵에 대한 귀한 말을 남겼습니다. “침묵은 가장 훌륭한 예술에 속한다. 생활의 분위기는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사소한 일, 즉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투덜거리거나 실랑이함으로써 어두워진다. 항상 모든 일이 우리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거든 침묵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라. 또한 항상 온화한 마음을 가지도록 애쓰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이 내는 불평으로 인하여 짜증을 내거나 힘들어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나중에 말한 것을 후회해도 일단 입으로 쏟아놓은 말은 도로 주워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함부로 했던 말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굉장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입을 지켜 꼭 필요한 말, 유익한 말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지 않으면, 나중에 고통을 겪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조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25. 침묵

타우라스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은 독수리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다. 독수리의 가장 좋은 먹이는 두루미이다. 두루미들이 타우라스 산을 넘을 때면 독수리들은 포식을 하는 날이다. 산을 오르는 두루미들을 독수리가 여지없이 공격하는 것이다. 독수리의 먹이가 되는 두루미는 소음을 내는 두루미이다. 타우라스 산을 수없이 넘지만 노련한 두루미는 거의 희생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행을 떠나기 전 입에 돌을 물고 가기 때문이다. 돌을 문 두루미는 돌 때문에 무사히 산을 넘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침묵은 사탄의 먹이가 되지 않게 막아준다.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어는 침묵이며 그리스도인의 침묵은 성화의 본질에 속한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침묵은 더 좋은 일이다.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26. 침묵

[냅시]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세 가지의 침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하얗게 떨어지는 눈송이의 침묵이요,
둘째, 먼동이 트기 직전 한 시간의 침묵이며,
셋째, 죽은 자의 침묵이라고 했습니다.

27. 침묵의 언어

제가 아는 어떤 분들이 수양을 하는 방법으로서 한 시간 이상 나무와 대화하는 훈련을 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나무 앞에서 침묵하며 동산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표현되지 않은 언어, 즉 인간이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원색의 언어를 날마다 새롭게 들을 수가 있고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상이고 이것이 영감이고 이것이 진짜 시인입니다. 그 말은 구태여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시로 표현할 수조차도 없는 줄로 압니다. 그 말은 일종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 종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는 엄청난 침묵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신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28. 한 마디를 안했던 사람

영국의 사상가이자 역사와 문필에 능통했던 토마스 카알라일은 아주 신경질이 많아서 자기 부인을 학대하여 부인이 거의 자살하려고까지 했다.
그의 부인은 한번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부인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고 좋은 남편이 아닌 것 같았고 살아도 희망이 없을것 같았다.
그래서 그 부인은 죽었다.
누가 보아도 부인은 억울하고 토마스 카알라일은 자기 부인에게 좋지 않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카알라일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내 속을 모른다. 단 5분만이라도 좋다. 아니 2분만이라도 좋다. 내 아내가 한 번만 다시 살아난다면 꼭 한마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죽었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누가 이 사정을 알아주랴?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랴? 사실은 나는 내 아내를 사랑했다." 이 사람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항상 주님과 가족과 친구와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고백해야 한다.


침묵하자(4601) 시가오( sigaō)
σιγάω 스트롱번호4601
1.

침묵을 지키다

2.

아무 말도 안하다

3.

말을 멈추다

발음 [ sigaō ]
어원
제1부정과 ἐσ ίγησα, 완료수동 분사 σε σιγημένος, 4602에서 유래

마태복음 27:12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우덴 아페크리나토(ουδεν απεκρινατο)


대답하다(611) ἀποκρίνομαι 스트롱번호611

1. 마 11:4.  2. 마 4:4
발음 [ apŏkrinŏmai ]
어원  /  제1부정과거중간태 ἀπεκρινάμην,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ἀπεκρίθην, 미래수동태 ἀποκριθήσομαι, 575와 κρι- νω에서 유래

연관 단어

대답하다(마 3:15, 막 8:4, 요 21:5), 고하다(막 9:5), 말씀하다(막 14:48), 대답(막 14:60, 눅 23:3),
이르다(눅 23:40), 응답하다(계 7:13).

3762

οὐδείς, οὐδεμία, οὐδέν 스트롱번호3762

1. 아닌.  2. 누구도~아닌.  3. 어떤 것도…아닌
발음 [ ŏudĕis ]
어원  /  3761과 152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아무~없이(마 5:13), 자가 없느니라(막 10:29), 이가 없다(눅 1:61), 없나니(롬 8:1), 어떤 사람도(고후 5:16), 것이 없나니(딤전4:4), 자가 하나도 없나니(딤후2:4), 아무~ 아니하고(빌1:20), 누구든지~않고(엡5:29), 아무 것도(몬14), 하나도 없어야(히2:8), 아무도 아니하시느니라(약1:13),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자~없느니라(계2:17).




떼:것으로구 두 가지 의미로
때로는 “선포하는 자” 또는 “옹호자”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영적 통찰력과 미래를 “보는” 능력으로 인해 “예견자”라고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라는 식의 조롱하는 말투로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합니다.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을 때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이중부정 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혤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단 한마디의 고소에 대해서도 (답변)하지 않으셨다'가 된다.
실로 예수의 침묵은 무언(無言) 중에 자신의 무죄성욜 강조하신 동시에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서(20:28) 기꺼이 고난을 당하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심히 기이히 여기더니
- 이 말은 가끔 초자연적인 사실 앞에서 경이감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9:33)실로 죽음 앞에서 조금도 혼들림 없이 자신을 구재(救災)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채 '한 마디' 대답 없이 침묵할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 다변(多辯)의 수사학으로 길들여진 빌라도가 그런 일을 일찍이 본 일이 있었겠는가?
그는 사실상 초자연적 존재와 사건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기이히 여기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로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정 예수께 있어서는 말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인류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성경에서 선지자들은 현재의 사안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거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하는 등 가르치는 역할과 계시하는 역할 모두 갖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때에 만연했던 부패에 대해 대담하게 설교하였으며(이사야1:4)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는 등(이사야 25:8)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다뤘습니다.

선지자들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하나님의 집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33명 이상의 선지자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고 그 중 16명이 여자입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의 장로 70명(민수기11:25)과 오바댜가 구한 100명의 선지자를 포함해 수많은 자들이 예언했습니다(열왕기상18:4).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선지자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20:7에서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을 통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수 차례 아브라함 앞에 그분을 드러내십니다.

야곱과 요셉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둘 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보는데, 이 또한 예언의 범주에 속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었고 대선지자로 여겨졌습니다(신명기 34:10).
여호수아와 많은 사사들도 선지자로 섬겼습니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은 어린 시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사무엘상 3:4).
이후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가 된 다윗에게 기름부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에는 특히나 예언 사역이 활발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선지자의 무리가 왕성히 활동했습니다(열왕기상 20:35).
엘리야와 엘리사 모두 수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 또한 메시아를 예언했습니다(마태복음 3:1).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이자, 제사장, 왕,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의 수많은 예언들을 이루셨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경우 바울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사도행전 9:10-18).
사도행전 21:9는 빌립의 딸 넷이 예언했다고 말합니다.
예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 영적 은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두 명의 “증인”이 예루살렘에서 예언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1장)

보통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선지자들은 멸시당하고 그들의 메시지는 무시당하게 마련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민족에게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했습니다(이사야 30:9-10).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해 애통해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34).

물론, “예언”을 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선지자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면서 거짓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400명의 거짓 선지자를 두어 그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습니다(역대하 18:4-7. 디모데후서 4:3).
신약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수많은 경고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7:15).
예수님께서는 또한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24).

요한계시록에서도 대환난의 때에 일어나 전 세계 사람들을 미혹할 거짓 선지자에 대해 말합니다(요한계시록 16:13. 19:20. 20:10).
미혹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항상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요한일서 4:1).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열심일 것입니다.
결코 이미 드러내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선지자는 아합 왕과의 운명적 대결 직전의 미가야처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말할 것입니다(역대하 18:13).




04-12-2024(금) 누가복음 22:54-6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히 통곡하니라(62절)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And he went outside and wept bitterly.

심히(4090) 피크로스[ pikrōs ] πικρῶς   

1. 아프게.   2.  쓰라리게.  3. 심하게
발음 [ pikrōs ]
어원  / 408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아프게, 쓰라리게, 심하게, 마 26:75, 눅 22:62.


통곡하니라(2799) 클라이오[ klaiō ]   κλαίω      

1. 울다  2.  슬퍼하다
발음 [ klaiō ]
어원 / 미완료 ἔκλαιον, 미래 κλαύσω, 제1부정과거 ἔκλαυσα,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울다, 막 14:72, 눅 7:38, 요 11:31.
2. 슬퍼하다, 비탄하다, 마 2:18, 계 18:9.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슬퍼하다(마 2:18), 울다(마  26:75, 막16:10, 계 18:19), 통곡하다(눅 22:62), 곡하다(요  11: 31, 16:20), 눈물 흘리다(빌3:18).

멀찍이(3113) 마크로덴(makrŏthĕn)  μακρόθεν  

1. 멀리서부터.  2. 먼 곳으로부터.  3. 멀리
발음 [ makrŏthĕn ]
어원  /  3117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멀리서부터, 먼 곳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서, 마 27:55, 막 8:3, 15:40, 눅 16:23, 18:13, 22:54, 계 18: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멀찍이(마 26:58, 막 14:54, 눅 22:54), 멀리 [멀리서](마 27:55, 막 11:13, 계 18:10).

신앙의 거리

왜 가장 앞장서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까?
가장 열심내던 제자가 이젠 예수를 부인하는 자가 되었을까?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Peter followed him at a safe distance.
베드로가 안전거리를 두고 예수를 따라갔더라.

이 장면을 요한복음에서는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8:15-18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예수와 함께 데제사장의 뜰 안에 Vs 문 밖

문 지키는 여종 (아무 능력도 없는 종) - 그런데 베드로에게 -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 마치 검사/ 재판장의 따끔한 질문처럼 큰 소리로 베드로를 겁박하는 소리

요한과 함께 예수의 곁에 있을 기회를 놓치고 Vs 아랫사람과 함께 불을 쬐며 (그 결과 누구와 함께 거하게 되는가?) 

요한은 뜰 안까지 가서 예수와 함께 거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처음에 문밖에 서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한이 블러서 그를 데리고 오는데도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찍이 예수를 바라보다가 이제 아랫사람들과 함께 둘러 서서 불을 쬡니다. 

자기의 믿음으로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랫사람들의 여론이 어떠한지, 아무 능력과 권위가 없는 문지키는 여종의 질문에 기겁하여 자리를 피하고 언제나 예수의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서서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고, 문밖에서, 바깥뜰에서, 사람들 옆에서 예수와 점점 멀어지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다가 "너도 예수편이지" 하니까 결국 부인하고 저주하며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세번씩 부인하는 사건의 발단은 이렇게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것 - 안전거리를 두고 신앙생활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안전거리 Safe Distance) 
제일 많이 쓰이는 곳 - 

o   운전할 때 - 앞차와의 안전거리 왜? 가까이 가면 앞차에 위협이 되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o   최근 몇년 간 safe distance - 사람 사이의 거리 - 6 feets

사람 사이의 안전거리가 필요한가?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 

여호수아 3:3-4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홍해을 건널 때는 모세로 하여금 물을 갈라 마른땅이 되게 하여 그 길을 걷는데 요단강을 건널 때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앞서가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가는데 그 사이 거리를 이천 규빗 되게 하고 더 가까이 가지 말라 그러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라 

홍해를 건너는 것이 우리가 중생하게 되는 세례의 의미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결, 성화의 의미 -> 성화에 있어서 필요한 것 - 안전거리 

말씀과 나 사이의 거리 - 설교자와 나 사이의 거리를 통해 내가 행할 길을 알게 된다는 것 

해석학에서 거리가 의미하는 것 - 저자와 독자의 거리, 글자와 생각과의 거리를 통해 의미/ 해석이 발생한다는 것 

말씀에 적용하면 말씀을 달달달 외운다고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과 나 사이의 거리를 두고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되새길 때 그 말씀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 

·        인간 관계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관계를 지향하는 것 - 부부관계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노라 - 한 몸된 관계 

그 부부관계의 신비를 가장 잘 묘사한 성경 - 아가서 

하나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또 사라지고 쫓아가고, 만났다가 헤어지고....그러면서 진정한 부부가 되는 관계 

순간에 하나된 감정을 느낄 순 있지만 그것이 지속되기는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어렵다. 불가능하다. 

내가 이 사람이랑 하나가 된다는 것 - 이 사람을 속속들이 다 안다? 

다 알다, 다 소유하다, 다 경험했다고 인정되는 순간 그 관계의 가치는 상실된다. 

오히려 오래 살았지만 여전히 모르겠어. 날마다 새로와 하는 관계가 더 생명력있고 깊어지는 관계이다. 

저랑 아내랑과 가끔 다툴 떄가 있다. 

내가 아내에게 제일 많이 들어왔던 말 -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나한테도 그렇게 친절하게, 해봐 

내가 아내에게 제일 많이 투정부리는 말 - 애들한테 하듯이 나한테좀 해봐 

-> 실재로 부부치료사가 강연하는 내용 - 부부끼리 다투는 이유 - 

     상대방을 남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자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함부로 대할 때가 많다. 가까우면서도 서로 예의를 유지하고 적당한 긴장관계가 필요하다.   

(2) 신앙의 안전거리 

하나님과 나 사이- 예수와 나 사이의 안전거리는? 

구약의 사람들 - 하나님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가까이 가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출애굽기 19:21-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이 외에도 여러 구절을 통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안전거리를 표현한다. 

구약에는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은 특정한 인물 외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금하셨고 백성들은 그것을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든 벽을 허무신 이후에 그 분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모든 거리를 사라지게 하셨다.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하나님은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면 그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십니다.

오히려 가까이 하지 못하는 자는 베드로와 같이 멀찍이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 예수가 아닌 종들과 함께 거하며 결국 예수를 부인합니다. 

장로교 신학은 예수를 주로 영접하여 주의 자녀가 되는 중생과 자녀됨으로부터 시작되는 성화의 삶을 하나로 바라보지만 성결교 신학은 중생과 성화를 나누어 설명합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기는 했지만 예수를 더 가까이 하지 못하며 언제나 거리를 두는 신앙도 있습니다. 

저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행하시는 일방적인 은혜의 사건이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는 철저히 말씀에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홍해를 건넌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애굽땅- 세상만을 바라보고 삽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더 이상 애굽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왜 무리가 아닌 제자가 되야 합니까? 제자가 되야 더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나요? 제자가 되어야 더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잘 못하는 사람은 안 빠지는 게 목적입니다. 안빠지려고 허우적거리다 더 물 속에서 나오질 못합니다. 

안전거리를 두고 멀찍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언제나 두 마음, 양다리를 걸치며 세상에서도 신앙에서도 안빠지려 허우적러리다 더 깊은 고통과 침체로 빠져 버립니다. 

그런데 깊은 물에서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몸에 힘을 빼고 물결에 몸을 싣고 적은 힘과 몸짓으로도 물 위르 해쳐 나갑니다. 

주님은 얕은 물가가 아니라 깊은 물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합니다.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라 합니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와서 하나님을 만나라 합니다.
오래 믿었어도 가까이 오지 못한 사람은 베데스다 연못의 오래된 병자일 뿐입니다.
정말 신앙의 깊은 세계, 주님과 가까이 교제하며, 자신이 설정해 놓은 주님과의 안전거리를 해제하시고 주님과 연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래서 무슨 일을 하던 주의 마음으로, 주가 기뻐하시며, 주가 함께 하며 주관하시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지금 ‘코로나’라는 폭풍의 중심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이전에는 교회를 욕하고 혐오하더니 이제는 증오합니다.
직장에서는 사람들이 교회를 마치 코로나의 온상인 것처럼  욕합니다.

우리는 어찌하던지 코로나가 종식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평일의 모든 예배와 모임까지도 포기하며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데...
세상을 바르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힘썼을 뿐인데....
열두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듯이, 초대교회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듯이 몇몇 악한 자들이 교회 가운데 들어와 마치 가라지처럼 교회를 망침으로 교회에 문제들이 있는 것인데...
세상사람들은 교회를 ‘악의 온상’인 것처럼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십자가 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교회를 욕하는 세상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진실을 모르고 선동되어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심히 통곡하니라(wept bitterly)"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제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셨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58절).
베드로는 사나이의 의를 지키려고 그나마 체포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도망가버린 다른 제자들보다는 나은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불과 두어 시간 전만 해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했었습니다(35절).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위기에 직면하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숨어서 따라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숨어서라도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신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말은 유창했지만 믿음은 연약했습니다.
그래서 큰소리 친 것과는 달리 예수님과 함께 떳떳하게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 또항 아직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일 마다 예배에 참여합니다.
물질도 바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는 결단력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선을 긋고 그 안에서 믿음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베드로가 언제부터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듣고 난 이후부터 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의 삶에서 두 가지 고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고백이며 둘째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두 가지 고백이 필요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믿음과 사랑의 수레바퀴를 굴려가며 오늘도 통곡했던 자리에서 일어나 헌신과 희생의 자리로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주을 앙모하는 자




우리가 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멀찍이 따라간다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예수님과의 거리를 가까이 한다면 그 사랑은 점점 뜨거워지고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거리는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하면 거리가 가까워지고, 사랑이 식으면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의 척도는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게 동행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일에서만 ‘주님, 주님’하면서 동행하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의 길에서는 머뭇거린다면 나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부족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알아 볼까봐 숨어서 뒤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떠합니까?
베드로처럼 멀찍이 숨어서 뒤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고보사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이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언제 어느 곳에서도 늘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69-74절 말씀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장면입니다.
그는 한 여종으로부터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지적을 받자 즉각 부인하며 알지 못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은 마치 답변을 미리 준비하고 연습한 것 처럼 신속했습니다.
본문에 ‘부인하여’라는 말은 ‘본능적으로 즉시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을 즉시 부인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72절에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74절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면서 두 번씩이나 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점점 강하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두 번째에는 ‘맹세하고’ 부인했고,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불과 서너 시간 전만 해도 두 번이나 거듭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며 큰소리쳤습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잃을 위기 앞에 서자 정신없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해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구약 잠언 28:26에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고, 신약 고린도전서 10:12에서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너무 믿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자신의 마음을 과신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베드로와 같이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정신없이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성과 연약성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심한 죄책감에 통곡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숙한 성도는 결코 자신을 믿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쳐서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킵니다.

코로나의 위기 앞에 선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베드로처럼 '나는 교회와 상관이 없다'며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는 않은지?

알곡과 가라지를 가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고, 자신을 의뢰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 자랑하시는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4-11-2024(목) 누가복음 22:47-5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것까지 참으라(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But Jesus answered, "No more of this!" And he touched the man's ear and healed him.

"이것까지 참으라(No more of this)"
bear with me until this.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모든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로 돌렸습니다.
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속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죄인이 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는 끊임없는 배신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배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한 이래로 배신은 인간의 부패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난 첫 배신은 아담이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b)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에서 시작합니다(창 3:12).

배신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관계를 끊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신은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나라를 배신하고, 회사를 배신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배신은 남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배신한 적은 없습니까?
로마의 장군 줄리어스 시저가 친구들과 부하들에 의해 암살을 당할 때 암살자 중에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터스가 있는 것을 보고 “모두 한 편인가? 브루터스, 너마저? 그럼 시저는 끝이로구나!”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러한 배신 행위를 예수님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행위를 아셨으면서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장소인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여러 무리들을 데리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옵니다.
이것이 예수를 넘겨주기로 한 사람들과 약속한 신호였습니다.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 예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제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립니다.
이 제자는 왜 하필 대제사장의 종을 향해 칼을 썼을까요?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같은 기득권 세력입니다.
종은 주인의 지시를 따라 함께 했던 것뿐일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쓴 것이라면 그 칼은 종이 아닌 대제사장과 같은 사람을 향했어야 합니다.
종 보다는 대제사장을 향해 칼을 들어야 더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기엔 주어진 상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 중에는 성전의 경비대장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힘으로 상대하여 예수를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고 제자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순순히 내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리들 중 가장 약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을 상대하여 칼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의 행동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의 문제 해결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제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칼을 든 것은 힘없이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종의 귀를 자른 것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당방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일을 겪고 계십니다.
제자의 배신과 함께 붙들려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아야 하는 것입니까?
부당함에 대해 참는 것은 우리의 속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대항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상황은 있겠지만 예수님은 힘없는 제자들이 대항하다 다칠 것을 염려해서 참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상황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붙들리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에 자신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부당한 상황이라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기에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부당하게 대우 받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상이었고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참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도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한다 해도 이 말씀대로 무조건 참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저로서도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일률적으로 적용해서 어떤 경우에도 참아야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내심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일에서 제자들이 벗어나야 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으라는 말씀에는 단지 폭력을 쓰지 말라거나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순순히 잡혀가시는 예수님에게서 장차 그들이 가야 할 삶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칼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지켜야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을 겪게 되면 그러한 상황이 있게 된 배후에 누가 계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불만으로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말한 대로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신자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비록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참는다고 해서 삶의 모든 내막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부당한 일을 겪게 하시는지 생각한다고 해서 금방 답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삶을 생각한다면 분명한 답 하나는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도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삶은 ‘형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자신을 위한 칼 ◎

제자가 칼을 든 것은 외적으로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서 자신들 곁에 함께 해야 그동안 예수님을 추종했던 인생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신 뒤에도 칼을 들어 종의 귀를 치면서까지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충성과 의리로 귀결되면서 칭찬들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행동을 거부하십니다. 제자의 행동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아셨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예수님을 위해서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한다는 일들을 보면 결국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고 목사가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그 속마음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또한 참아야 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칼을 든 제자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해를 끼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제자처럼 칼을 들어 공격함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선동할 것입니다. 이 또한 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가 진심으로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길이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다면 교인들을 향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열심을 참고, 소위 좋은 신앙을 저울질하는 추로 작용하는 기도와 봉사와 십일조를 참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는지 네 자신부터 먼저 보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부당함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것도 나라는 존재가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분노하고, 나를 위해 칼을 들고자 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만 있는 것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보게 되는 기회가 ‘참으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했을 때 예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유다의 행동은 겉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에 대한 친근함과 신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자기를 위해 예수께 입 맞춘 것일 뿐입니다.

유다를 앞세운 무리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또한 자기들의 삶의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 훼방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은 달랐지만 저마다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 어둠의 권세 ◎

53절에 보면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눅 19:47절에 보면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 주변에 백성들이 없습니다. 눈치 보고 두려워 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을 때는 백성들 때문에 자신들의 계획대로 행동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구의 눈치 볼 필요가 없이 자기들 뜻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의 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워 할 대상이 없이 오직 자기를 위해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에 붙들렸을 때 관심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이 진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인가?’라는 선택에서 선악과를 먹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권세 아래 있게 된 인간의 형편입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필요한 신을 찾습니다. 교회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하나님,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위해 적당히 지켜줘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어둠이 권세로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내가 원한 내 인생을 칼을 들고 대항해서라도 빼앗기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참으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종의 귀를 치는 제자의 그 속성이 우리 안에도 박혀 있음을 평소 우리의 삶을 보면서 실감해야 합니다. ‘참으라’는 말씀이 칼을 든 그 제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아닌 듯,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 자신을 향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기 희망이 무너졌을 때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오직 자신의 인생에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십자가는 옵션처럼 취급됩니다. 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순종되는 것이 곧 생명으로 향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환상일 뿐이며, 함께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길에 참여되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제대로 보게 된다면 예수님만이 희망이심을 절감할 것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04-10-2024(수) 누가복음 22:39-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어나 기도하라(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Why are you sleeping?" he asked them. "Get up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습관(1485) 에도스(ĕthŏs)  ἔθος   

  1. 버릇.   2. 관습.  3. 유대인의 풍속
발음 [ ĕthŏs ]
어원 / 1486에서 유래
전례(눅 1:9, 2:42), 습관(눅 22:39, 히 10:25), 규례(행 6:14), 법(행 15:1, 25:16), 풍속(행 16: 21, 26:3), 관습(행 21:21, 28:17).


예수님께서는 습관(에도스, ἔθος)을 좇아 다락방을 떠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할터이니"(눅 22:31) 이제부터는 전대와 주머니와 신발을 준비하고 심지어 겉옷을 팔아 검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날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계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과도 흡사합니다.

누가는 마지막 십자가의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기도하러 가셨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평소에 늘 하시던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기도 생활을 해야 하는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까지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문제가 생겼을 때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만, 그 때만 잠시 반짝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해야 합니다.
습관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매일 정기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하셨습니다(44절).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믿음이란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도할 수 없을 때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죽으나 사나 기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 다가도록 기도에 전념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소망하며 일어납시다.

주여,
나를 기도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깊은 속에서


προσεύχομαι 스트롱번호4336

1.  기도하다.  2.  막 1:35.  3. 눅 1:10
발음 [ prŏsĕuchŏmai ]
어원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υχόμην, 미래 προσεύξομαι, 제1부정과거 προ- σηυξάμην, 4314와 217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기도하다, 막 1:35, 눅 1:10, 행 1:24.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는 말씀으로 은혜나누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목적과 계획을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서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닌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합니다.



거룩한 산제물로 드린다는것은 거룩한 삶으로 예배하는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삶으로 예배를 들이려면 반드시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타락해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잘아시기때문에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성령님이 오셨음으로

내가 아닌 내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변화하라”가 아닌 “변화를 받으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 성령님이 우리안에 오셨음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악한

생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땅에 살아가면서 많은 업적과 공로를 많이 남겨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는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는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주권적인 뜻 : 불레, 허용적인 뜻 : 델레마

1. 주권적(절대적)인 뜻 : 하나님이 정해놓으시면 누구도 거스를(저항)수가 없다는 것. 
구원과 관련된 인류의 사건과 구원의 사건(역사) 을 뜻함.

다니엘 4:32.
네가 사람에게서 쫒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 이와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2. 허용적인 뜻 :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아드릴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    

데살로니가전서 4:3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 항상 기뻐하라,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도후서6: 14. 너희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결혼에 관한 내용)

만일 우리 인생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 있고, 허용적인 뜻이 없다면, 또  허용적인 뜻만 있고, 주권적인 뜻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에겐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주권적인 뜻만 있고 허용적인 뜻이 없다면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는것이 없다면 혼란과 무질서로 아수라장이 될것이며, 구원의 확신도 없을것이며 로봇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은 사는게 사는것이 아닐 것 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운것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아는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신앙생활 하는데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과 “목표”를 알려주는

“나침판” 역활을 해주는것이지 “약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속에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적인 도덕과 윤리로 구분할 수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크게 두 가지로 생각 할 수 있는데요...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과, 순종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때도 있고,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중요한건 하나님의 뜻을 묻기전에 순종하는 믿음(기도)이 더 중요하고, 입맛따라 믿음이 아닌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일까요?



빌립보서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위 말씀처럼 하나님은 선하시며, 기쁨이시며, 온전(완벽)하시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선하시다는겁니다.

선의 기준은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때 선한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때 아니다 싶을때는 내려놔야 한다는 겁니다.



또 한 하나님은 기쁨이십니다. 하나님이 보실때 기쁨이 아니면 싫어하신다면 또 한

내려놔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과 나의 마음”, “하나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 되었을때

영적 희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한 하나님은 온전(완벽)하십니다. 실수가 없으시다는 겁니다. 어떠한 고난과 반대

어려움, 공격에도 하나님의 뜻은 실수가 없으시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내가 선택하려면

하나님이 미워하는것을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것을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시는것

기뻐하시는것을 내가 기뻐하면 됩니다.



매순간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던지다보면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고, 나의 품은 뜻이 주의 뜻과 같이 되는 것 입니다.



“분별하도록 하라” 는 말씀은 “입증하다”, “시험하다”, “인정하다” 등의 뜻 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는 아닌것같아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면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입증해

보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입증하며 증명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해하고 깨닳아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입증해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모습과 대조되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장면, 저 위의 그림과 같은 장면, 이 순간,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 이 순간, 제자들은 피곤하여 그만 졸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요한 순간, 구지 기록하지 않아도 될 장면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많을텐데, 구지 이 장면을 공관복음 모두에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 장면이, 참으로 한심하고 어이가 없는 이 장면이, 오늘날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시고, 우리는 육신이 약하고 피곤하여 그 옆에서 졸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지금도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육신이 연약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여도 잠시 뿐입니다. 힘쓰고 애써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많이 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0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6절)

유혹에 빠지지 않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어떤 유혹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셔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2절)

무슨 유혹입니까? 무슨 시험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되기를 바라는 유혹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시험에, 내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피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마시라고 주시는 잔을 마시지 않게 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서 살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평소에 매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6절)

"어찌하여 자느냐.... 일어나 기도하라"

어찌하여 그렇게 기도하지 않느냐?

어찌하여 그러고 있느냐?

이제 그만... 일어나 기도하라!

......

주님의 음성에 순종합시다. 

일어나 기도합시다. 

그만 자고 일어나 기도합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습관을 따라 기도합시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일어나 기도합시다!!






는 아버지의 뜻대로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들을 위하여 찢기셔야 했습니다(마 26:28; 고전 11:24).

감람산은 감람나무(올리브 나무)가 많은 산이었고, 마태는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를 감람산 안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이었다고 말하는데(마 26:36),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그 부근에 올리브를 짜서 기름을 만드는 틀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일주일간 예수님은 베다니 숙소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지만, 이날 밤은 달랐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도시 남서쪽 에세네 구역의 개인 주택이었던 다락방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성전 맞은 편 동쪽에 있던 감람산을 향해 30여 분 컴컴한 밤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좁고 불편한 골짜기와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마침내 제자들과 자주 모였던 겟세마네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해 야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 후면 유다가 무리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고, 유대인의 심문을 받고, 로마인의 판결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이 이제 코앞에 닥쳤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잡히실 그 장소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열 한 제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내가 말한 것과 같이 사탄이 너희를 뒤흔들고 기름을 짜내듯이 너희를 짜내어 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넘어져 완전히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리니, 기도하라. 그 유혹에 빠져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라’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고 그분의 뜻대로 허락되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기도의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시험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내가 저기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마 26:36), 세 명의 제자, 특별히 더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여주신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나머지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41절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누가는 돌 던질 만큼 가셨다고 말하는데, 돌을 던져 닿을 거리를 말합니다. 아무리 멀어도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만큼(6-7미터, 대럴 벅)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이동하셨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심정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실 곳까지 나아가시면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고뇌에 빠졌습니다(마 26:37). 그리고 동행하던 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

예수님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큰 고뇌에 빠졌습니다. 심하게 놀랄 뿐만 아니라 극도로 슬퍼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시험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문 앞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고통스러운 죽음, 사형 앞에서 커다란 덩치에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마도 덜덜 떨며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실 육체적 고통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밤중에 유대인에게 끌려가 심한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가 등이 파이도록 채찍질을 당하는 것, 십자가에 달려 숨이 턱턱 막히는 질식에 이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면 그때야 죽음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 결코 쉬운 일도, 만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으니까요(히 4:15).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임박한 시험에 이토록 놀라고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는 육체적 고통이 전부가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시고,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셔서 홀로 아버지 앞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누가의 말처럼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41절).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토록 무서워하고 슬퍼하고 고민하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잔을 마시는 것을 고민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잔은 분노의 잔이었습니다(사 51:17; 렘 25:15, “여호와의 진노의 잔”). 하나님의 백성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대신 마셔야 했습니다. 영원 전부터 겟세마네 동산에 이른 그날 밤까지 처음으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진노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버지와 영원한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사랑이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받고, 아들은 아버지를 인하여 영광을 받는 관계였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자족하시는 분,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만족할 거리를 찾지 않는 분으로 묘사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영원히 만족하고 영원히 기뻐하며, 아들은 아버지를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이 관계는 지속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고(마 3:17; 17:5),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만 말하고 보여주신 대로만 행하였다”고 고백하며 순종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요 5:19). 그런데 이제 그 아버지께서 분노의 잔을 아들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대신 지게 될 많은 사람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고후 5:21; 벧전 2:22).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날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시 7:11). 그런 거룩하고 정결한 분께서 많은 사람의 오물을 뒤집어쓰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잔이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하는 자기 아버지의 손에서 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만큼 마시기 힘들고 두렵고 슬픈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만큼 마시는 것이 심히 고민이 되어 죽게 될 만큼 힘겨운 잔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압니다. 하지만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친밀하게, 의심 하나 없이 아버지를 온전히 믿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아빠”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아버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아버진 뭐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와 함께, 아버지가 내미시는 잔 앞에서 극도로 고민하고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확실한 신뢰.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강한 인정.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저는 신뢰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무섭고, 슬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심히 고민이 되어 죽을 것 같아도, 아버지의 뜻이 거기에 있사오니, 아버지의 뜻을 믿사오니 저는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자기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오래전 선지자의 글을 통해서도 그랬고, 아들 예수님께도 계속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나중에 무리에게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꺼내 휘두르자,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책망하시며,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3-54).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 베다니에 계실 때, 아버지의 뜻대로 임하게 될 일을 생각하며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7).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의 마무리처럼 이때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 그때, 하늘에서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아버지는 자기의 뜻을 아들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시험이 극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옮겨달라고 구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항상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그 뜻에 따르겠다는 기도로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뜻을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죽음의 고통으로 부르짖는 아들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하셨습니다.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셨을 때, 그 모든 시험을 아버지의 뜻을 신뢰함으로, 말씀으로 승리하시고 나서, 예수님께 나타나 수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마귀가 가장 극단적인 고통과 두려움, 슬픔으로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고,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시험을 이기고 아버지의 뜻을 신뢰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압도적인 시험의 무게와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동시에 기도하는 중에 받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적 전쟁과 같았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된 이 영적 전쟁을 감당하고 계신 예수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거세진 영적 전쟁에 맞서 힘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단순하고 명료한 표현이지만, 그날 밤 겟세마네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면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다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시다가, 일어나 동산을 거닐다가 또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시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몸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굵게 흘러나왔고, 전쟁에서 칼에 맞으면 피를 철철 흘리는 것처럼,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이천 년 전 어두운 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심한 통곡을 하며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엎드렸다가, 일어났다가, 동산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시 얼굴을 땅에 대고 흐느끼며 기도하기를 반복하셨던 예수님.

여러분, 우리의 죄의 깊이가 이 정도란 걸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싸우고 때론 넘어지는 죄가 이 정도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지 알고 싶으십니까? 겟세마네로 가보십시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예수님도 모르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거기에 떨어진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받은 축복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요일 3:1).

마지막으로 극심한 시험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순종할 수 있을지 잘 모르시겠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도 마실 수 없는 무섭고 고통스러운 진노의 잔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시험 대상자를 만나볼 시간입니다. 예수님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에 올라온 이상, 이제 예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였습니다. 사탄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함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하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45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가끔은 제자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아무리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기도를 부탁하셨는데도, 어떻게 잠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둘째치고, 그들에게 닥칠 시험에 대해 예수님이 경고하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천하 태평하게 대비를 안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어찌하여 자느냐?” 어떤 주석가는 이 말의 뉘앙스가 “아니! 어떻게 자고 있느냐?”라고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줄 모르느냐? 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이들이 잠든 것은 이번 한 번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총 세 번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고, 세 번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올 때마다 어김없이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마 26:40, 43, 45; 막 14:37, 40, 41-42). 

왜 잠이 들었을까요? 누가는 45절에 “슬픔으로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다”고 말합니다(마 26:43; 막 14:40).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신 죽음에 대한 말씀과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며 슬픔에 압도되어 육신이 지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일주일 주님과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심신이 지쳤을 것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정말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그 때에, 어쩌면 그들은 기도를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육신은 연약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41; 막 14:38).

여러분, 우리도 연약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시험, 특별히 영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죄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탄은 울부짖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고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얼마나 자주 진지하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인데(엡 6:12), 혈과 육에만 매여 수많은 시험에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제자들처럼 시험이 닥쳤을 때, 주를 버리고, 주를 부인하고, 죄에 넘어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왜 이리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리고 직접 보여주십니다. 극심한 시험 앞에서 어떻게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며 그것에 순종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이 어떻게 더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모두 쉬지 말고 기도하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우리의 믿음의 주, 믿음의 본이 되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하시는 길 중에 예수님이 하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을 앞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하신 기도입니다.

다락방을 떠나기 전에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2).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그 기도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십시오(176-8pp). 18장 1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는 길에 하신 기도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시고, 그 뜻대로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6절부터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즉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그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구하시고 나서(11절) 15절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시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제자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셨습니다. 악에서 그들을 건져주시고, 17절을 보면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구하셨습니다. 죄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시고, 죄를 벗고 거룩에 이르도록 진리로 그들을 지켜주시고 보전해달라고 구하신 것입니다(11절).

그래서, 연약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심지어 부인하고, 믿음도 흔들렸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온전함을 입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믿음의 본, 믿음의 주뿐만 아니라 또한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를 향하여 가시는 길에 열한 사도의 연약함만 중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열한 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 열한 사도로에게서 흘러나온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해서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입니다(요일 5:4).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인정하고 시험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간절히, 힘써,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다는 사실에 위로와 힘을 얻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데 실패하고 수많은 시험에 넘어지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이천 년 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는 그날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주요 곧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히 12:2).










04-09-2024(화) 누가복음 22:35-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는(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He said to them, "But now if you have a purse, take it, and also a bag; and if you don't have a sword, sell your cloak and buy one.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할 때(눅 9:1-5)와 칠십 인 전도대를 파송할 때(눅 10:1-5)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며 배낭도 준비하고 검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왜 서로 다른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제자들과 전도대를 파송할 시대와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혀야 할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평화로운 시대와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가 다른 것처럼 머지않아 심각한 신앙의 핍박과 더불어 어려움을 겪어야 할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갖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검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검이란 공격용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용으로 사용할 목적을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검이란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검을 사라고 하셨기에 능력의 말씀을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접근이라고 하겠습니다.

패역한 세대를 향하여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검과 같은 예리한 판단력과 급소를 찔러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합니다.
이러한 힘은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만 얻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치 장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와 비슷합니다.
짧은 시간에 완주하는 기록 경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 달려야 하는 지구력과 끝까지 달려야만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쾌감을 위하여 많은 노력과 수고와 인내가 없이는 결실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이 하루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루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신앙의 몫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읾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 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즉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제 전대(purse, NIV)와 주머니(bag, NIV)를 가지라고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심도 달라지고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 무대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 같은 시대의 구분은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의 박해 시대를 대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Conzelmann). 21장까지 예수의 활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실과 22, 23장에 언급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P.S. Minear).

󰃨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본 구절의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고조된 긴장감을 나타낸다. 먼저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한 까닭은 반드시 겉옷을 팔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대를 가져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은 칼이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칼은 무엇에 쓸려고 준비하라고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겉옷을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점은 그 검을 준비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반증한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제자들 중에 칼 두 자루가 있음을 예수에게 밝힌다. 따라서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이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검 또는 성령의 검을 준비하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고(Olshausen, Godet).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 칼을 준비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으며(Bengel), 무력적 힘을 통해 선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들은 예수의 전체적인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해석들이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전과는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면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나아가 희생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Meyer, Farrar, Plummer, Gilmour).



󰃨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 사 53:12을 상기시키며 34절에서처럼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강조 어투를 사용하여 예수 자신의 고난을 예언의 성취로 언급한다. 즉 메시야가 도리어 범죄자 또는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예수의 체포와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시사해 준다.

󰃨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 '내게 관한 일'이란 앞서 언급한 이사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 간다'는 말의 헬라어 '텔로스 에케이'(*)를 직역하면 '끝', '결말', 또는 '목표를 가진다'라는 뜻이며 이는 예언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로써 예수 자신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있는 자는 가질 것이고 내도지팡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고ㅓ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나누신 마지막 대화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어 39절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 마가, 요한은 이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고, 오직 누가만 예수님의 다락방 마지막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무슨 교훈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낭, 전대, 검 잘 챙겨라”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네, 여기 검이 두 개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시며 네 구절로 이루어진 누가의 기록이 끝이 납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제자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왜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의 손끝을 통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같은 교훈을 남기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남기기 원하셨던 그 교훈을 확실히 받으시기 원합니다.

1. 예수에 대한 세상의 반응(35절)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겪었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3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이 말은 과거 어떤 시점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셨던 일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 일은 일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로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9:1-6).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고 전도하러 갈릴리 각 마을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셨는데,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기억나게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이들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영접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그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만일 영접하면 그 집에서 머물면서 환대와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그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며 제자들을 받아준 이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환대하고 영접할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지팡이나 배낭, 양식, 돈, 여분의 옷을 준비해 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을 기쁨으로 영접할 이들을 기대하며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쳤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일을 상기시키며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때 부족한 게 있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배낭도, 전대도, 지팡이도, 여분의 옷도 챙겨가지 않았지만 하나도 부족함 없이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을 영접했던 이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비슷한 훈련이 칠십 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 또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보내져,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전대나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열두 제자처럼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그 집에서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눅 10:1-16).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영접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는 동네에서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하셨고,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곧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전하라고 보내신 제자들 역시 같은 배척을 맛봤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때는 제자들을 영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낭도, 전대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이 공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일을 떠올리게 하신 것일까요? 바로 다음 말씀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맞설 세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에 대한 달라진 반응(36-37절)

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예수님은 “이제는”이라고 때를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뭔가 과거와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에 지시하신 말씀이 이제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전대(지갑)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전대를 가지라고 하셨고, 과거엔 배낭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검에 대한 명령이 나오는데, 이제는 검이 꼭 필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검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겉옷은 단지 몸을 보호하거나 따뜻하게 하는 많은 의복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패션 아이템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유대인에게 겉옷은 하나의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여러 겉옷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고, 대부분 한 벌의 겉옷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고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는 등 겉옷은 그들의 생필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을 저당잡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겉옷을 빼앗는 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이 유대인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눅 6:29). 그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며 이제는 그 귀중한 생필품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입니다. 전대, 배낭, 칼 이제 모두 직접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칼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대, 배낭과 함께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제 그들에게 닥칠 위협과 공격에서 그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일까요?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예수님의 손에 왜 못을 박으려 할까요? 다른 이를 부요케 하려고 가난한 삶을 택하여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희생적인 섬김을 보이신 그분의 머리에 왜 가시관을 씌우려 할까요? 왜 겸손과 온유를 옷 입으신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때리며 침 뱉고 조롱하려는 것일까요? 왜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예수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런 반응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획하신 뜻에 따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인용한 부분입니다.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 “그가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서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택하신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희생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사야 53장 말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백성의 허물을 대신하여 찔리고, 백성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징계를 받고, 백성이 낫게 하려고 채찍에 맞고, 백성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는 하나님의 택한 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 예수님은 지금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가 유대인의 손에 잡혀 심문당하고 로마 법정의 불합리한 판정에 의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불법을 했거나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 이사야의 손을 통해 700년 전에 그리스도에게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잔을 함께 마시며 분명하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께 이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뜻대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이 핍박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범죄자 취급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 나가는 또 한 사람의 죄인, 강도나 살인자 같은 범죄자에 불과했습니다.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사 53:3). 그가 당하는 고난과 징벌은 예수 본인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맞는 마땅한 형벌이었습니다(사 53:4).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심문과 곤욕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에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죄인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하고 핍박하고 비웃었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여기고 거칠고 혹독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같은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거칠고 혹독한 핍박과 거절이 제자들을 향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대와 배낭 그리고 검을 준비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엔 예수님의 분명한 경고와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그는 주님이 먼저 당하신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그렇게 거절을 당하셨다면, 그 제자들 역시 거부를 당하고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오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18-20)

여러분, 이로써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편에 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들이 곱게 바라볼 리 없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반드시 환난을 당합니다(요 16:33).

직장 회식 자리에서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술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부할 때 핍박이 있습니다. 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절제하며 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의 비웃음을 당합니다. 힘듭니까? 괴롭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각오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전대와 배낭과 칼을 가지고 미리 대비하고 맞설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말세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 살기가 정말 힘듭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살다가는 욕먹고 업신여김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외롭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나를 따르는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대비하라. 각오하라.

여러분,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를 따르는 삶이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해서 아무런 그늘도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사형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7).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10:28). 

실제로 예수님 당시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합니다.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모욕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기도 하고, 본인이 잔인무도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열 한 제자 역시 모두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순교 당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기독교의 참모습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말하는 기독교가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좋은 일만 가득 일어날 것이라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뭐든 긍정의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약속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만사형통하고 다 잘된다고 축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해 핍박받을 각오를 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한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그분과 함께 왕으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내 안전과 평안, 안락과 쾌락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값진 분이신가? 내 가족보다 친척보다 더 그리스도가 귀한 분이신가? 정말 내 목숨보다 그리스도가 더 존귀한 분인가? 예수님은 망대를 세울 때 비용을 계산하는 것처럼, 적국과 싸울 때 일만 명으로 이만 명을 대적할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처럼, 계산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6-3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보배로운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 세상 무엇과, 이 세상 누구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과연 다락방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3. 예수에 대한 제자의 반응(38절)

38절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38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예수님이 지금 사람들을 찌르고 죽일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당당하게 입성하신 것, 성전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것, 그리고 성전을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메시아, 왕으로서 지금의 권세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새로운 부흥기로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 좌편과 우편에 앉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는데(요 11:16), 예수님이 진짜 죽으러 가는지 생각도 못 하고 한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싸우실 때 같은 편으로 끝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을 준비하라고 하니, 곧 메시아의 왕국 탈환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두 개의 칼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 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의 오른편 귀를 잘랐으나, 곧바로 예수님의 꾸중을 듣습니다(요 18:10-11).

기대했던 왕이 순순히 잡히는 걸 본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렸습니다. 

수년을 가르쳤지만, 메시아의 사명이 무엇인지, 그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제자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칼 두 개면 충분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귀한 일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 따라오는 고난과 박해를 각오하고 감수할 만큼 충분히 가치 있고 남는 것이라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사하시고 내게 영생이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 하나로 만족하며 영원히 감사할 수 있었던 우리가 점점 그분이 주시는 것, 주시지 않은 것에 집착하고, 그분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계산하며 마지못해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움과 박해에 놀라며 그리스도에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교훈이 필요합니다. 전대와 배낭과 검을 준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삶에 박해가 있을 것을 각오하며 살아야 합니다.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3:17). 그가 따르던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벧전 4:12).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벧전 4:13). 주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가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여러분, 우리에게도 영원한 가치를 계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현재 받는 고난보다 장차 받을 영광이 지극히 큼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즐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알 때 그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들었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고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아직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 채찍질을 당하고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합니다”(행 5:41). 드디어 그들이 예수님이 마지막 교훈을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고, 핍박받을 때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당하는 모든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좁은 문을 통과하여 주가 계시는 그곳에 이르는 좁고 험한 길을 기쁨으로 가시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04-08-2024(월) 누가복음 22:31-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형제를 굳게하라(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And when you have turned back, strengthen your brothers.

네 형제를 굳게 하라(Strengthen your brothers)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가룟 유다는 돌이키는 과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돌이키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돌이킨다는 헬라어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 라고 합니다.
'에피스트레포'는 "돌아오다, 돌아오게하다, 회개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있고 직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은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죄를 깨닫고 뉘우칠 때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까?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려고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어두운 장막에 가리워져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같고 소망이 없는 것같을지라도 반드시 그 사람이 돌아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배후에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 나의 기도가 그 누군가를 돌이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의 자리를 든든히 세워야 하겠습니다.
어둠의 길에서 방황하는 생명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소망의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어서 돌아오오



오베르랑목사
Jean Frederic Oberlin. 1740-1826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눈 덮인 알프스에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을 회복해보니 어느 집 방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계곡에서 떨어진 자기를 구해준 그 집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곳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한가지 묻겠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제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이를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누가복음 22:24~38절)

오늘도 역시 주님이 가시려는 길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저는 이렇게 주님과 소통이 되지 않는 제자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은 이렇게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소망이 28~30절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32절에 베드로를 향해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말씀대로 돌이켜 사도행전에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못한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지옥 백성이 되었습니다.
돌이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그러나 악심을 품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돌이키시는 은혜 앞에 돌이킬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 가득 채워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고(7~23절) 이제 곧 겟세마네의 아픔의 시간을 가진 뒤에 붙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심각한 소통장애가 제자들을 삼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주님과 다른 곳을 보고 있고 다른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위대한 사도로 양육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예수님의 수난 직전까지 서로 누가 크냐 하는 어리석은 다툼을 계속하였습니다(마 20:20~28; 막 10:35~45; 눅 9:46~48절).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이제는 깨어 준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칼이 두 개 있다고 대답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제자들이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가 될 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공적인 이름 대신 '시몬'이라고 본명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예수를 부인할 것을 곡식이 체에 흔들리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역사에 흔들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은혜가 너무 큽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슴 가득 느끼는 복된 말씀입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할 때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 ἐπιστρέφω)라는 말은 '회개하다', '돌아서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한 실수에서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그와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핍박으로부터 형제들과 교회를 믿음으로 사수케 하는 특별한 사명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만만 호언장담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충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6:33; 막 14:29).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고백처럼 주를 위해 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mr 새벽 1시 30분경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예언은 54~62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베드로를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돌이켜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는 섬기는 자로(24~30절)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에 의해 배반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누가 크냐'라는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이 논쟁의 발단은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께 자신들의 충성심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은 결코 배신자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데서 시작된 듯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25절은 일단 세상 나라는 이렇다는 의미입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귿ㄹ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을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임금들'은 세상 권력을 잡은 자들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세상 권력자들이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을 종처럼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 속에서 심한 억압을 받고 있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방 권력자들의 횡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권력자들은 스스로 신이 되어 백성들로부터 '주'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지만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억압, 착취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교만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은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은인'은 '유에르게테스‘로 '좋은'을 의미하는 '유'와 '일'을 의미하는 에르곤'이 합성된 단어로 '좋은 일을 하는 자', '공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은인'이란 단어를 이방 권력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즐겨 사용했습니다. 심지어는 폭군들까지도 이러한 칭호로 불리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세상 권세 자들의 거짓됨과 가증된 행위들을 예로 들어 제자들에게 세상 권력의 헛됨과 거짓됨을 깨닫게 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권력자들이 군림하는 것같이 큰 자가 작은 자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원리가 적용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 20:26, 27절에서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지배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지배 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섬기는 자보다 큰 것이 세상 원리지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자가 높아지고 섬기는 자가 대접받는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요 13:1~11절) 하늘 보좌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선서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빌 2:5~11).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즉 예수께서는 말씀과 삶의 모범을 통해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큰 자인 천국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높아지려 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마음을 사로잡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소망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럽니다. 연약하고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둔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시려고 합니다. 여기서 '함께 한 자들'(호이 디아메 메네코테스)은 '통하여'를 의미하는 '디아'와 '머물다'를 의미하는 '메노'의 합성어로 모든 삶을 통하여 희노애락을 같이한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은 사탄의 시험의 연속이었던 예수님의 삶에 동참했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자 또한 앞으로도 계속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것에 대한 요구요 격려였습니다. 그렇게 지난 3년을 주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목회자로서 느끼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그저 겸손히 섬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맡겨'(디아티데마이)라는 말은 위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제자들에게 앞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나라'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섬김의 권세를 맡기시고, 그 보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특히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영적 이스라엘인 구원 받을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권세를 주셨듯이(빌 2:9~10),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섬김의 권세를 주셔서 주님의 사역에 동참케 하시고 그들을 높이시어 주님의 권세에 동참케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게 이 연약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소망이며 기대입니다.

2. 돌이킨 후에(31~34절)

그리고 이 소망은 베드로에게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체화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그럽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공적인 이름 대신 '시몬'이라고 본명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예수를 부인할 것을 밀이 체에 흔들이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역사에 흔들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은혜가 너무 큽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슴 가득 느끼는 복된 말씀입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할 때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라는 말은 '회개하다', '돌아서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한 실수에서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그와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핍박으로부터 형제들과 교회를 믿음으로 사수케 하는 특별한 사명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만만 호언장담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충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6:33; 막 14:29).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고백처럼 주를 위해 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mr 새벽 1시 30분경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예언은 54~62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베드로를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돌이켜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제는(35~38절)

이제 주님은 3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셔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은 고난의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하셨을 때(눅 9:2:눅 10:1)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엇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녀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적대하게 될 것이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의 죽음 후로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하여 제자들이 복음 전하러 다니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은 검을 사는 것이 매우 시급한 상황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검은 물리적인 의미의 검을 으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조건인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께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검 두 개를 예수께 보입니다. 이 검은 여행자들이 갖고 다녔던 호신용 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지금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 시키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키시고자 하는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족하다는 말씀은 답답함의 표현입니다. 그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일관되게 소통이 되지 않는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우리는 여기 제자들보다 더 낫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생각을 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다가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진리의 말씀을 만나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돌이키는 은혜가 오늘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 아침에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가 섬기는 자의 나라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일에 더 겸손히 주님을 섬기고 지체들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네 형제를 가슴에 품고 그를 살려내라’는 것으로 그 형제가 주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복음 안에서 하나(oneness)가 되어질 때 가능합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복음 체질이 되어 서로를 살리며 복음으로 하나(oneness)를 이룬 복음 공동체의 축복을 누리는 가운데 현장정복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면서 제자 중에 자신을 팔 자가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각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 자이냐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눅 22:25~26).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큰 자는 대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한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봐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영적으로 큰 자는 바로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이 땅에 군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세기 3장 문제 속에 빠져 고생하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대속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인생 중대 문제 세 가지인 하나님 떠난 문제, 죄 문제, 사단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섬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대속물이 되심으로 가장 큰 섬김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만나는 길을 전하하는 선지자의 역할, 죄 문제를 완벽히 해결받는 길을 제시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흑암 문화와 흑암 세력의 공격을 물리치고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왕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가슴을 가지고 현장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성경적 섬김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가장 큰 섬김-대속은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어 다른 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놓치고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문제와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나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실망으로 끝이 납니다. 여러분은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자가 행복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섬기는 것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을 가지고 성경적 섬김의 삶을 살 때 그것이 풍성한 영혼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교회 직분이 바로 섬김의 축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먼저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이러한 영적인 큰 자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적 동기 부여자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28~30) 예수님께서 서로 다투던 제자들을 향해 더 이상 세상적인 가치관 속에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놀라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긴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또 이와 함께 ‘현장에서 영적 싸움을 하며 복음을 확산시킨 자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드린 자들에게 가장 큰 영광을 부여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닥칠 시험과 회복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참 제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는 말은 사단이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을 실족케 하기 위해 강하게 역사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배신행위로 믿음과 구원을 잃게 하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실수를 다시 돌이켜 그것을 교훈 삼아 형제들에게 믿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이 참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실수가 평생의 교훈이 되어 다른 이의 실수를 이해하며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항공모함의 활주로는 일반 공항의 활주로보다 길이가 훨씬 짧은데도 전투기의 이륙이 가능합니다. 이에는 수증기의 힘을 이용하여 전투기 출력을 최대화시키는 캐터펄트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항공모함이 전투기가 이륙하는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항해하기 때문에 짧은 길이의 활주로에서도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캐터펄트와 항공모함 같은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영적인 동기 부여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항공모함이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듯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여러분 주위의 사람이 힘차게 비상할 수 있도록 영적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을 율법의 눈으로 바라보면 서로를 죽이는 꼴이 될 뿐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완전 복음 체질이 될 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연약한 자, 실족한 자를 살리는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세상의 흑암 문화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굳게 하며 항상 복음의 oneness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5년 10월에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주부가 1kg이 채 되지 않는 미숙아 쌍둥이 자매를 출산했습니다.
그래서 자매가 각각의 인큐베이터에 넣어졌는데 언니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갖은 조치를 취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예전에 읽었던 책의 치료사례가 떠올라 건강을 회복한 언니를 동생의 인큐베이터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언니가 동생의 어깨에 작은 손을 얹었는데 몇 분 뒤 기적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언니의 손길이 닿고 얼마 뒤 동생의 맥박이 고르게 되고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등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동생은 기적처럼 살아나 건강하게 퇴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 사랑으로 품는다면 여러분의 수준과 형편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이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oneness가 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복음공동체인 교회는 어떻게 해서든 oneness가 되어 서로를 복음의 눈으로 이해하며 힘을 주어 함께 세워나가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된 지체의식을 가지고 주변의 성도들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서로를 통해 더욱 든든히 세워지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98

4

7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99

4

8

월 

누가 22:31∼34

네 형제를 굳게하라(32절)

100

4

9

누가 21:35∼38

이제는(36절)

101

4

10

누가 22:39∼46

일어나 기도하라(46절)

102

4

11

누가 22:47∼53

이것까지 참으러(51절)

103

4

12

누가 22:54∼62

심히 통곡하니라(62절)

104

4

13

누가 22:63∼71

선지자 노릇하라(64절)













04-06-2024(토) 누가복음 22:24-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섬기는 자로(27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For who is greater, the one who i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Is it not the one who is at the table? But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섬김의 종류(Kinds of Service)

lip service / 앵무새 봉사
spiritual service / 기도,
material service / 구제비, 선교비, 재난구호
mental service / 동정
formal service / 형식적 봉사


호모 하빌리스

인간을 정의할 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 지혜인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사람) 도구인
호모 에렉투스(서서 걷는 사람) 직립인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  놀이인
호모 하빌리스(손을 쓰는 사람)



호모 하빌리스는 '손재주 좋은 사람', '손을 쓸 줄 아는 사람',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북한에서는 문화어로 "손쓴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랑, 미루지 말라

레프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여행길에 올랐다.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렀는데, 예닐곱 살짜리 딸아이가 있었다.
몸이 아파 가냘픈 모습을 한 소녀는 톨스토이가 가진 빨간 가방이 예쁘다며 달라고 졸랐다.

가방은 얼마 전 친지가 유품으로 전해준 소중한 물건이지만, 소녀가 진심으로 원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주기로 약속을 했다.
“아가야, 이 가방엔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어 지금은 줄 수가 없단다.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너한테 줄게.”

일주일쯤 뒤 톨스토이는 약속을 지키려고 주막에 들렀다.
그러나 소녀는 병이 악화돼 며칠 전 죽었다고 어머니가 전했다.
톨스토이는 마음이 아파 어머니를 앞세워 소녀의 무덤을 찾아갔다.
원할 때 가방을 곧장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소녀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비석을 세워 자책하는 문구를 하나 새겼다. ‘사랑을 미루지 말라.’

이 우화는 톨스토이가 일생 동안 찾고자 했던 ‘사랑’을 아주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누가 뭐래도 ‘바로 지금’(Here & now)이란 얘기다.
이를 조금 풀어쓴 것이 단편 ‘세 가지 질문’ 아닐까 싶다.

톨스토이는 75세 노년기에 이 단편을 썼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황제가 각각의 일에 합당한 시간이 언제이며,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에 큰 상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세 가지 질문에 온갖 사람들이 앞다퉈 의견을 내놨다.
첫 번째 질문에는 연월일 시간표를 만들어라, 합당한 시간을 마법사에게 물어보라 같은 의견이 나왔으며
두 번째 질문에는 성직자, 의사, 군인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 번째 질문에는 학문, 군사기술, 신에 대한 경배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답했다.

대답이 크게 엇갈리는데 실망한 황제는 평민으로 변장을 한 채 숲 속 현자를 찾아가 세 가지 질문에 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몸이 연약한 현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밭고랑 파기만 계속했다.
보다 못한 황제가 삽을 넘겨받아 해질 무렵까지 땅 파기를 도와준 뒤, 지금 답해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다쳐서 피투성이가 된 배를 움켜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황제는 붕대와 수건으로 깨끗이 그를 치료해 주었다.
다음 날 그 남자는 황제에게 다가와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 형제를 처형하고 내 재산을 몰수했기에 당신에게 복수를 맹세한 원수요. 나는 당신이 현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죽이기로 결심하고 숲 속에 숨어 있었소.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아 이곳으로 향했는데 당신 호위병이 나를 발견하고 부상을 입혔소. 그러나 당신은 고맙게도 나를 정성껏 치료해 생명을 구해주었소. 당신 때문에 내가 살았으니 이제 당신의 충실한 종이 되겠소.”

황제가 다시 현자에게 답을 달라고 했다.
현자는 말했다.
“벌써 답이 나오지 않았는가. 만일 자네가 연약한 나를 위해 밭고랑을 파주지 않고 돌아갔다면 저 남자가 자네를 공격했을 것이니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네가 밭고랑을 팠던 때이고,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위해 선한 일을 해준 것이라네. 자네가 치료해준 저 남자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

톨스토이는 16세 아래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고, 온갖 여성 편력을 남겼지만 사랑에 관한 한 대체로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는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 살 때 어머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카잔 대학교 동양어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불성실하고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진급시험에 떨어졌다.
법학부로 옮겼으나 그마저 중퇴하고 고향 농장에서 농민생활 개선에 힘썼지만 건달로 취급받았다.
톨스토이는 그러나 20대 초반부터 단편, 중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37세에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해 명성을 얻은 뒤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안나카레니나(49세) 부활(71세) 등으로 최고의 작가로 등극했다. 톨스토이는 평생 사랑을 갈구했다. 어린 시절이 외롭고 불행했기 때문일까. 40대 중반 한때 자신이 쓴 작품이 하나같이 무의미하다며 소설 쓰기를 거부했던 그는 노년기 단편에선 사랑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부를 아낌없이 버렸으며,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치고자 노력했다. 그가 ‘예수 이후 최고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다. 82세로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잠언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가 그 결정판이다. 인생을 회고하며 명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탐구한 책이다. 톨스토이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틈틈이 읽어주며 각자 삶의 지침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짤막한 글귀들을 모아 엮은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한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역시 사랑이다. 100년을 훨씬 넘긴 글이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몸이 불편한 이, 영혼이 가난한 이, 부유하고 비뚤어진 이, 버림받은 이, 오만한 이까지도 모두 사랑하라. (중략) 사랑은 우리 영혼 속에 산다. 타인 또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은 오직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핵심은 주위 모두에게 무조건 축복을 베푸는 데 있다. (중략) 이유를 가진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만이 영원하다. 이런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진다.”

톨스토이는 역시 현재의 사랑을 최고로 여긴다.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에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성스러운 발현이다. 성스러움에는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평생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을 강조했지만 자신이 모범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하녀, 농노의 아내, 집시 여인, 친척 아주머니 등 수많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평생의 반려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를 힘들게 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15년 정도 순탄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지독히 불행했다.

노년엔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을 사회에 기부키로 하면서 부인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그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참된 사랑을 실천하고자 집을 나섰다가 허름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을 고찰해 보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자매, 친구, 직장동료, 이웃 사람 등이 대표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사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거창한 기부나 자선이 다가 아니다. 밝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 안부 묻는 전화 한 통화, 정성 담긴 식사 한 끼, 자그마하지만 예쁜 꽃 한 송이라도 괜찮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했다.
사랑은 받는 사람만큼 주는 사람도 행복하다는 뜻 아닐까 싶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톨스토이, 홍대화 옮김, 현대지성, 2021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이상원 옮김, 조화로운삶, 2014

<안나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2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즉 손을 쓰는 사람.
사람이 손을 쓰는 능력이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조류 가운데 그 무엇도 손가락을 5개 이상 활용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손이 발달한 민족입니다.
젓가락을 쓰는 것도 손이 발달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인은 손에 대한 은유가 많습니다.
‘손 좀 빌려다오’
‘손이 모자란다’
‘손 끊었다’
‘저 사람 손 좀 봐야겠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그리스도인도 손이 발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손은 섬기는 손입니다.
기도로 섬겨야 합니다.
봉사로 섬겨야 합니다.
교제로 섬겨야 합니다.
얼싸 안는 거소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손이 발달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코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때에만 주님을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축복을 받을 때에만 찬양한다.
자기의 위로와 만족을 구하니 아니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것이다.
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삼"을 심는 사람들

성 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산삼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산삼의 붉은 꽃씨를 까먹은 까치의 똥이 산 속 어디엔가 뒹굴다가 햇볕이 많은 양지도 아니고 햇볕이 너무 없는 음지도 아닌 곳에서 산삼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삼이 신묘한 약효를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을 "심마니"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삼을 캐는 심마니와 다른 심마니들도 있습니다.
농사를 뜻하는 "농"자를 앞에 붙인 "농심마니"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삼을 캐러 다니는 게 아니라 삼을 뿌리러 다닙니다.
심마니가 수백 년 묵은 산삼을 캐러 다니는데 반해, 농심마니들은 수백 년 뒤의 후손들을 위해 삼의 씨앗을 심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귀한 분을 통해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이 오기까지 산삼의 씨를 뿌리는 농심마니처럼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석구석 후세들의 가슴속에 흐를 생명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섬김의 종류, 규범

섬김의 종류

1.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 섬김이다

예배를 뜻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요 섬김이다 ( 계4:8-11 요4:24 삼상7:3 )

2. 수평적 차원 

사람과 공동체를 섬기는 섬김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 노예해방운동, 감옥 개량, 금주운동 빈민구제 운동 고앙원 양로원건립 평화봉사단등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봉사정신을 실천해 왔다 .

(1) (2)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구약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으나 신약에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신이며 성경중심 사상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섬김의 삶이다.
섬김의 삶을 위해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있을수 없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김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배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대한 사랑은 이웃을 진정 섬김으로 완성된다 이웃 섬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연결점을 발견한다 (롬12:1) 이웃을 잔정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는 것이다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 : 섬김의 규범

1. 숨은 봉사 : 남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2. 작은일의 봉사 :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며 작은일부터 먼저 봉사한다
3. 구설수를 막아주는 봉사 : 험담, 훼방하며 뒤에서 흉을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공통체를 튼튼하게 하는 봉사이다
4. 봉사를 받아주는 봉사 :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만 때문에 d런 봉사들을 물리칠 때가 많다
5.  예의로서의 봉사 :  예의를 지키는 일도 봉사이다 남엗한 감사의 표현 , 적절한 시기에 인사하는 것 윗분들에게 인사카들 보내는 일등 모두 봉사이다 . 무례한 행위는 섬김을 방해한다
6. 대접하는 봉사 : 나그네를 대접하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친구 초대 식사대접 등은 기독교의 미덕중 하나이다 대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7. 경청의 봉사 :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섬김이다 듣기를 먼저하라 남이 먼저 말하게 하라 자신의 말을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때 말이 많아진다
8. 서로 짐을 져주는 봉사 : 남의 아픔 힘든 것 고통을 져주는 것을 져준다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위해 십자가의 큰 짐을 지심으로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다 남의 작은 짐부터 져주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수 있다
9.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 :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다르다 그같은 하나님 뜻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봉사이다
10. 희생적 봉사 :  자신의 영예, 이기심을 따라 봉사하느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희생의 봉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 규범이다


섬김은 예배로 시작합니다.

예배의 개념을 만찬 예배로 제한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물론 주께서 직접 부탁하신 성찬을 통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고전 11:17-34). 하지만 그것만이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넓게는 우리의 삶 전체가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2). 회중이 함께 모일 때 드리는 예배의 방편에는 성찬 외에도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이 있었습니다(고전 14:26). 같은 맥락에서 성도가 각자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기는 것 역시 예배입니다(고전 12-14장).

“예배”(worship)라고 번역된 원어를 살펴봐도 “섬김”이 예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예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라트레오(λατρεύω)는 “섬기다”(serve)라는 뜻을 가졌습니다(빌 3:3; 히 9:9; 10:2).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worship”)…(빌 3:3)

구약성경 역시 아바드(עבד)라는 단어가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었는데 이 단어의 본래 뜻 중 하나가 “섬기다”입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로는 신명기 6장 13절이 있습니다(참고. 출 3:12; 12:31; 시 2:11; 사 19:21; 렘 35:15).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worship”)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둘째, 섬김이 예배라면 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배의 범주가 우리의 모든 삶까지 확장 된다면, 우리의 일차적인 섬김의 대상은 참으로 다양해집니다. 불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정치 지도자들(롬 13:1-7), 육신의 주인들 혹은 직장 상사들(벧전 2:18-25),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벧전 3:1-7)가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고전 12-14; 벧전 3:8-12). 이처럼 우리가 섬기는 일차적인 대상은 다양합니다. 하지만우리의 모든 예배는 한 대상인 하나님에게 향합니다.

우리는 각각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그들을 섬겨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것이 바로 예배의 최종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해 서로를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어떤 사람은 봉사의 일로, 어떤 사람은 권면하고 세워주는 일로 섬깁니다. 섬기는 모양은 다양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셋째, 섬기는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라면 섬기는 자는 서로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아니면 애찬 준비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이는 마치 밭일 하는 노예가 상이 많은지 아니면 집안일 하는 종이 상이 많은지에 대한 질문처럼 어리석게 들립니다. 모두가 주인의 종이며 주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둘 다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면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눅 17:10).

맡겨진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고전 4:2).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주가 주신 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성도를 섬기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주인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사람 역시 그 일을 통해 성도를 섬깁니다. 그들의 땀과 수고로 성도가 따뜻한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시설관리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분이 계시고, 교회 자동차 운행으로 수고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노인사역에 힘쓰는 분이 계시고, 구제와 선교에 힘을 모으고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누가 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충성스럽게 일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로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기준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우리가 피해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먼저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교만이고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괄시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나는 저 초라한 화장실 청소따윈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무시이며 자기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교만입니다. 반대로 화장실을 청소하는 성도가 ‘저 설교자는 맨날 설교만 하려고 하고 화장실은 청소하려고 하지 않아’라고 비방한다면 그 역시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 일에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진실로 그는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찮다고 여긴 것이며,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성도가 설교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 일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고 간주하고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가운데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섬김의 대상이 가장 고귀하고 존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섬긴 일에 대해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마 25:21). 우리는 선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하고,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야 합니다.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달란트를 보고 비교하며 분노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받은 은사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로 그들은 서로를 섬겼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섬김”이라고 할 때 손과 발로 하는 봉사만을 생각합니다. 쓸고 닦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만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2-14장 말씀은 수많은 섬김의 방편들이 나옵니다. 가르치는 말씀과 지혜의 말씀도 포함됩니다. 봉사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서로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고전 12:28).

그러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것도 섬기는 것이요, 차를 운행하는 것도,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것도 섬기는 것이며, 누가 보지 않아도 교회 여기 저기를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또 성도의 연약함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일에 어떤 성도가 괴로워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해준다면 그것 역시 섬김입니다. 상을 닦는 것도 섬김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섬김입니다. 모이기에 힘쓰는 것 역시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섬김입니다. 도서관 책을 정리하는 것도 섬김이고, 읽은 책의 내용으로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도 섬김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것도 섬김이고 설거지 하는 것도 섬김이며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함께 유익한 교제를 나누는 것도 섬김입니다. 식사를 준비하신 분들을 격려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서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도 섬김이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징계하고 훈계하는 것도 섬김이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섬김이고, 떡과 잔을 만들고, 떡과 잔을 돌리는 것도 섬김입니다. 예배시간 아이를 조용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섬김이고, 그 과정을 참고 인내해주는 사람들도 섬기는 중입니다. 설교하는 것도 섬기는 것이고 설교자를 위해 물을 떠 놓는 것도 섬김입니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섬김입니다.

더하려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섬김의 영역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누가 이 섬김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규정지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섬김입니다. 예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유평교회에 섬김이 풍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더 많은 영역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고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던 이유가 있습니다(행 6: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곧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였기 때문이었고, 결국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지키는 것과 동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에임스는 신학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말씀이 가르치시는 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마땅한 바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예배이며,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모양이 다양하다면, 우리는 이제 한 가지 분명한 원리 안에서 그 다양한 섬김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기관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로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조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 중에서도 사회봉사와 단체 내의 섬김이 특출난 곳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적 이타적 섬김과 참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주 소중한 것까지 아낌 없이 줄 정도인데, 아들은 그 사랑을 대충 깨닫고 그 아버지께 헌신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이것 저것 열심히 뭔가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참 사랑은 그 안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그분이 요구한 몇가지 일에만 열심히 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에베소 교회처럼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견딤과 열심이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처럼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섬기더라도 바른 자세와 태도로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대상이 어떤 분인지 알고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이유와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경외심, 감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제대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섬김은 예배입니다. 모든 예배는 진리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더 알기 위해, 더 바른 마음과 태도로 드리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기 위해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는 섬김은 방향을 잃어버린 섬김이고, 섬기지 않는 배움은 유익이 없는 배움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몸을 내어주는 헌신도 필요하지만 진리와 함께하는 참 사랑의 특징도 들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섬기는 대상인 하나님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배웁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로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긴 시를 가지고 하나님을 노래했던 것입니다(시 119).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과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최종 목적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모양을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교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며,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그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예배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요 17:1-5). 예수님은 무엇으로 섬기는지에 대해 불평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인데 너희가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맨날 나만 봉사하고 너희는 나에게 배우기만 하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섬기는 자로 가장 낮은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돌보시고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진리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넘쳐 주야로 아버지와 기도로 교제하며 말씀 안에서 풍성한 지혜로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섬김을 본 받고 있습니까? 죽기까지 충성하신 그리스도의 섬김의 본을 당신은 따르기 원하십니까?


섬김에 대하여

교회 역할(기능들)을 살펴보면 케리그마(말씀선포), 레이트루기아(예배), 코이노니아(교제), 디다케(가르침과 훈련), 그리고 디아코니아(봉사 섬김)이다 섬김의 기능은 다른 기능 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각 기능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섬김은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사에서 확인되는 교회의 본질이고 신앙의 참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주의 종을 세우신 목적도 봉사의 일을 하게하려는 것이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믿음이 성장과 봉사를 통해 건강한 교회가 된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교회를 섬기고 사회를 섬기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최근 2007년 겨울 태안반도 기름 제거 작업에 100만명 자원 봉사중 70%가 기도교인들 이었다(비공식집계) 이는 별안간 된 것이 아니고 10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 선교 초기부터 국민과 더불어 아파하며 그들 위해 봉사하는 전통(학원설립, 의료기관 설립 사회봉사) 의 계속이며 2000년 기독교 사회적 섬김의 연속이다 (한국사회봉사단, 김삼환 목사) 한국교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얀마 사태, 중국 스촨성 지진 땅에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 희망 연대(10개교단 참여)도 한국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미얀마등지에서도 예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공동체, 교회는 먼저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요12:26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른 것을 말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가 진정 섬기는 자가된다 또한 하나님 명령 그대로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이웃섬김에 절실히 요청되는 태도는 (갈5:13) 말씀대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참된 경건, 경거한 신앙은 무엇인가 ? 세속에 물들지 않고 힘없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II. 섬김이란 무엇인가
1. 성경에서 말하는 섬김
A. 구약
db'[;(5647, 아바드)
일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후기 히브리어 : 예배하다 하나님께 순종하다

아바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일하다 work, 봉사하다, 섬기다, 시중들다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90회 나온다. 이러한 봉사는 사물,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향한 것일 수 있다. 이 단어가 사물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그 노동이 미치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격을 수반한다. 예: 밭을 '경작하다' to till(창 2:5과 그 밖의 곳에서 종종) 포도원을 '정돈하다' to dress, 세마포를 만드는 자(사 19:9) 혹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겔 48:18). 때때로 이 단어는 신 15:19의 (땅을) '갈다' to till (한글개역, "부리지")에서처럼 대격 없이 사용된다. 두번째로 이 단어는 예를 들어 야곱이 라반을 섬기는 경우와 같이(창 29:15, 창 30:26, 창 30:29) 사람 대격을 수반한다. 사람 대격을 수반하는 경우에 이 단어는 사람과 함께 전치사 '베'를 수반한다. 즉 사람은 "타인에 의해 일한다" 혹은 타인을 노예로 사용한다(출 1:14, 렘 22:13, 이 동사의 히필 어간은 '아무개를 (노예로 삼아) 강제로 일하게 하다'(출 1:13)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때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자유케 하는 경험이다(출 3:12, 출 4:23, 출 7:16, 출 7:26, 출 10:26, 시 22:31, 욥 21:15, 렘 2:20, 말 3:14). 동일한 개념이 레위 자손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민 3:7-8, 민 4:23, 민 4:30, 민 4:47, 민 8:11, 민 8:19 이하, 등). 흥미롭게도 70인역본은 제사장들만의 공적인 직무를 가리키는데 헬라어 라트류오를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롬 15:16을 제외하고는 신약의 사역(ministry)이나 그 기능들을 가리키는데 라트류오 어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롬 15:16에서 이 어군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바울의 수고를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적인 문맥, 특히 구약의 의식(ritual)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라트류오 어군이 사용되었다(히 9:21, 히 10:11, 눅 1:23).( 참조: W. L. KAISER; BDB).

tr'v;(8334, 샤라트)
섬기다, 봉사하다 샤라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섬기다, 봉사하다 minister,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7회 나오며,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용례 중 20회는 분사 메샤레트로 나오는데 '사역자 minister'라는 뜻의 명사로 사용된다. 샤라트의 용법은 자연적으로 ① 중요한 인물, 보통 통치자에게 드려지는 개인적 섬김. ②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이 있는 자들 편에서 행하는 예배의 사역이라는 두 범주로 분류된다. 샤라트가 시사해 주는 종의 높은 지위 및 그가 주인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창 39:4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요셉은 보디발의 재산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이양받고 있다. 엘리사의 사환은 메샤레트(섬기는 자 minister)로 지칭되었다(왕하 4:43, 왕하 6:15). 둘째 범주는 주로, 성막에서 그리고 나중에 성전에서 봉사하였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포괄하고 있다(한 구절, 시 103:21에서는 천군들이 그와 같이 지칭된다). 수많은 구절에서 그들의 봉사가 특히 성소와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출 28:35은 성소에서의 아론의 사역을 말하며 출 28:43은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에서 섬긴다고 언급하였다(참조: 욜 1:13). 레위인들도 그와 같이 지칭되었다. (대상 6:17과 대상 16:4, 대상 16:37) 삼상 2:11, 삼상 2:18과 삼상 3:1에서 사무엘은 엘리의 조수로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장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들이 또한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공적 대리자라는 위치에 있었다. 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겸손하게 자신들을 비천한 종으로 인지하는 한편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를 섬길 것이라는 사실이다.(H. J. Austel)

B. 신 약
diakonevw(1247, 디아코네오)
종으로서 섬기다, 봉사하다. 식탁에서 수종들다 (눅17:8) (요12:2) (눅12:37)
우리가 봉사나 섬기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자발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행한 일과 그런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생길 이익을 의미한다. 봉사라고 해서 보수(Reward)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섬기는 행위는 지배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성실한 봉사는 교만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자가 되어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종속적 위치에 있으며, 그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죄의 지배와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므로서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봉사(섬김)하다"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들의 개념은 때때로 구별하기 어렵지만 각각 그 기본 강조점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 둘류오(douleuvw, )는 복종,예속을 강조하는 것으로,'노예로 섬기다'를 의미한다.
* 데라퓨오(qerapeuvw, )는 기꺼이 섬기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에 의해 존경과 관심을 표현한다(특별히 신을 향하여).
* 라트류오(latreuvw, )는 '삯을 위해 봉사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신앙적, 제의적 의무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 롬9:4 히9:1 요16:20 )
* 레이투르레오(leitourgevw, )는 '공무에 봉사하다'를 뜻하며, 70인역본에서는 성전에서 봉사를, 기독교회에서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 휘페레테오(uJphretevw, )는 '노나 키를 잡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며, 특히 봉사가 주인과 관계된다. 그 명사 휘페레테스는 때때로 '노잡이, 조수'를 의미한다.

이런 단어들과는 달리, 디아코네오는 매우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봉사라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다. 휘페레테오와 가장 가깝지만, 디아코네오에는 사랑의 봉사라는 개념이 더욱 강하다(Beyer, TDNT). 디아코네오는 일반적으로 '섬기다, 봉사하다, 지원하다, 집사로 섬기다'를 의미하며, 개역 한글판에는 '수종들다, 섬기다, 일하다, 돕다, 맡다, 집사의 직분을 하다, 공양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디아코니아의 종류와 내용
신약성경에서 디아코니아는 크게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식탁에서 수종드는 것이다. 당시 사회관습에 의하면 식사 때에 식탁에 기대앉아 식사를 하는 상전과 허리를 동이고 수종드는 하인이 있었다. 디아코니아는 이렇게 수종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은 눅 10:40; 12:37; 17:8; 22:27; 요12:2 등에 나타난다.
둘째, 좀더 넓은 의미로서 물질적(재정적)인 도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6:2에서는 구제사역을 디아코니아라고 한다. 여기서 디아코니아가 말씀사역과 대조되므로 물질적 도움 일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본문은 마25:42-44; 27:55; 막15:41; 눅8:3; 행11:29; 12:25; 롬15:25; 고후8:19; 히6:10 등이 있다.
셋째, 아주 넓은 의미로서 일반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런 예로는 마 4:11; 8:15; 20:28; 눅4:39; 22:26; 요12:26; 행19:22 딤전3:10; 벧전1:12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공동체 특히 신앙공동체인 교회 내에서의 섬김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통한 섬김이 있다. 벧전 4:10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런 디아코니아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고전12:8-10에 나오는 은사와 롬12:6-8에 나오는 봉시직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역도 포함된다.

C. 성경에서 섬김의 예
(1) 구 약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탹한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레19:18)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요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들은 .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그들의 인권 존중하며 가난한자를 구제하며 그뿐 아니라
생태계를 돌보며 섬기는 공동체이다 안식년 소산물은 짐승에게 주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호해야한다 (신22:6-7)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 이스라엘은 하나님 명령에 다라 도피성 제도를 만들어 과실로 살인자의 생명을 보호한다 , 기업이 없이 성막 봉사만을 하는 레위지파에도 필요한 땅을 분배하는 등 약자 보호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히고저 하였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인 사르밧 과부를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보살피시게 하신다 느헤미야는 사회지도층 부자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학대 (고리 이자)를 금지시키다 (느5:10-11) 사랑과 섬김을 촉구하다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인생이 헛됨을 고백한다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비법은 (1) 이 세상일이 우리가 원하느대로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7:13 하나님이 굽게하신 것을 누가 펼수 있는가? (2) 세상에는 때가 있다 3; 범사에 기한이 있다 이 때와 기한은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하신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행복해질수 있다 전도자는 후배들에게 자기처럼 늦게 깨닫지 말고 행복한 길을 미리 찾아가도록 권면한다 자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실토하면서 ..헛된 이생을 살았음을 고백하면서 후배들에게 행복의 길로 초대한다 이것이 또하나의 섬기는 모습이다
룻기서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이방여인 룻을 험담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왕따시키지도 않고 따듯한 마음으로 돌보아 준다 보아스는 신분이 높은 자로 이방여인(당시 이방인과 접촉 시 죄가 전염된다고 생각하였음) 롯에게 자비를 베풀어 한 여인을 살려낸다

(2) 신약
섬김의 가장 위대한 모범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비천한 인감의 몸을 입으시고 겸손하게 섬기셨다 (빌2:1-11)
헬라인들은 섬김을 비천한 것으로 생각하다 신분이 낮고 비천한 사람이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섬기기 위해 태어나지 않고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섬김을 하나님 사랑과 연결시키며 스승으로 주님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헬라인들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견해를 보여주시고 모범을 보이셨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에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필요한 물질을 유무사옹하고 가난한자를 돕는 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실천하여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창찬을 받아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었다 (행2:44-47) : 여러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 (롬15:25-27) 섬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까지 확장되었다 다

III. 섬김의 본질

1. 섬김에 대한 성경 가르침의 독특성
헬라문화에서 디아코니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를 시중드는 것’ 이다. 보다 확장된 의미는 ‘음식을 공급하는 것’ 이고,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모든 종류의 ‘섬김’ 이다. 그런데 이렇게 섬기고 시중드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섬기는 일 중에 유일하게 명예로운 것은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섬기는 것은 명예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비우는 자세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섬긴 것이다 질적으로도 섬긴 개념의 혁명이 일어나게 하셨다 종래에 섬김은 종들이 하급자가 마지못해 생계를 우해 섬기었으나 주님은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사랑으로 섬기셨다
유대교에서는 섬김이 헬라문화에서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섬김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이며, 특히 훌륭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더욱 그렇다. 유대문헌에 나오는 디아코니아도 ‘식탁을 시중드는 것’ 과 ‘
순종한다는 의미의 섬김‘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섬김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정의, 자유, 존엄성과 희망 없는빵만을 주는 것은 현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인간적 사랑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봉사는 예배와 삶의 일치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십일조와 안식일을 통해 이것을 제도화하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봉사, 섬김은 아코니아 는 샬롬, 메시야 왕국을 지향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화해를 지향한다 하나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자를 섬긴다 첫째가 꼴지가 되는 파라독스와 가치전도의 역설적 통치체계이다 바울은 화해를 위한 섬김을 강조한다 디아코니아는 복음을 통해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이웃과 세계와 피조물을 치유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이루려는 구원 행위이다 ( 황홍렬 교수)

2. 섬김의 본질
(1) 사랑 받은 자는 사랑을 실천한다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요 교회 기능이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려는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려는 섬김이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는 섬김이다 섬김, 봉사는 교회의 주요기능이다

(2)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원래 봉사를 가르키는 말 service에는 예배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초대교회가 시작한 봉사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예배의 차원을 제거하고는 생각할수 없는 나눔과 섬김의 실천이었다 봉사는 가난한 이웃과 내가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이에 늘 현존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러나 국가 북지제도가 발달하며서 봉사는 하나님과 종교적 차원이 배제된 사회봉사로 그 개념이 축소되었다

(3) 섬김은 희생이요 십자가 신학에 근거한다
섬김 봉사란 말은 (디아코니아)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한다 시중들므로 먹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섬김은 섬김 받는자의 즐거움을 창출하기 위해 나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리스도의 참 뜻을 구현하는 것이다 즉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활동이다 섬김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류 타락 이후 관계 아닌 소유에 얽매어, 끊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던 인간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 충만을 받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돌보기 시작했다 (행5: ) 이웃 섬김에는 항상 희생이 수반된다 디아코니아는 십자가 신학에 기초한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바탕으로 섬김의 행동이 시작된다 교회 디아코니아 사역의 근거는 예수님이다 주님은 섬기러 이땅에 오셨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마귀와 죄의 노예 상태 있는 우리의 존재 속에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삶을 우리와 함께 나누면서 우리를 그리스와 연합되게 하셨다 이 연합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우리 믿는자들은 그 안에서 그의 섬김에 참여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참 섬김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사랑의 섬김이다 섬김은 사랑의 표현이요 (아가페사랑) 그구체적인 행동이다 행동 없는 사랑이 공허한 것처럼 사랑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섬김은 무의미하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섬김만이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사랑에 감전되게 한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였다 섬김은 낮아짐이다 사랑의 섬김은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다 인간은 타인을 위한 존재이어야 한다( 본훼퍼) 칼빈은 말하기를 신자들이 돈을 버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약한자를 돕고 그들과 재물을 나누어 갖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사랑은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말하기를 사랑은 정의를 요구하고 정의는 사랑을 구현한다고 하였다 사랑의 섬김은 나눔이다 나눔에서 섬김이 시작된다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5) 섬기는 자는 자기 부정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없이 섬김은 나눔이 아니라 베풂이 된다 병든자 소외된자는 구제 봉사 대상이 아니라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 구성원이다(몰트만)
주는 자나 받는자는 상호 수평적 관계임을 알아야 한다 사랑의 섬김은 동정아닌 우애가 우선되어야 한다 사랑의 나눔의 섬김은 자기 중심적 사고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사랑의 섬김은 철저히 상대방이 주체요 주인이라는 의식 아래서만 가능하다

(6) 교회는 주님의 섬김을 실천하는 곳이다
섬김은 교회의 사명이다 섬김, 봉사는 교회의 정체성을 증거해 주는 본질적 요소이다
섬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에게 부여한 의무이다 예수님의 영은 섬김의 영이다 세상은 출세지향적 성공지향적인 상향성 영이다 교회는 섬기러 온신 예수님의 몸이다 섬김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 존재 의미를 부인하는 교회이다 예수정신을 떠난 교회이다 예수의 영, 성령이 떠난 교회이다 교회는 섬김의 운동을 통해서만 참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된다 성령은 낮은 곳에서(섬기는 것에서) 역사하신다 먼저 손해보려는 자세 없으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을 수밖에 없다

(7) 디아코니아(섬김)의 한계
디아코니아는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디아코니아에도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 .특히 물질적 섬김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시고 시장하실 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다. 그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이것은 물질만으로 사람을 충분히 도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디아코니아에서 물질적 섬김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사역을 소홀히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균형 잡힌 디아코니아를 통해 물질적 섬김이 복음전파에 가여하고 복음이 물질적 섬김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유대교의 디아코니아에는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불의하거나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는 경향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의 섬김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가치한 사람을 시중드는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섬김이 하나님 앞에 공덕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덕목을 위해 섬기게 된다. 디아코니아가 공로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신자들도 자기의 다이코니아 행위를 공로로 생각하게 될 위험이 크다. 디아코니아에서의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공로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거기 빠지면 남과 경쟁하며 자신을 자랑하거나 남을 시기하며 비난하게 된다. 디아코니아를 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스스로 높이거나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빌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IV. 섬김의 종류, 규범

1. 섬김의 종류
(1)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 섬김이다 = 예배를 뜻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요 섬김이다 ( 계4:8-11 요4:24 삼상7:3 )
(2) 수평적 차원 :사람과 공동체를 섬기는 섬김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 노예해방운동, 감옥 개량, 금주운동 빈민구제 운동 고앙원 양로원건립 평화봉사단등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봉사정신을 실천해 왔다
(1) (2)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구약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으나 신약에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 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신이며 성경중심 사상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섬김의 삶이다 섬김의 삶을 위해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있을수 없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김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배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대한 사랑은 이웃을 진정 섬김으로 완성된다 이웃 섬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연결점을 발견한다 (롬12:1) 이웃을 잔정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는 것이다

2.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 섬김의 규범들 (리처드 포스터 , 노영상 교수 )
(1), 숨은 봉사 :남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2). 작은일의 봉사 :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며 작은일부터 먼저 봉사한다
(3). 구설수를 막아주는 봉사 :
험담, 훼방하며 뒤에서 흉을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공통체를 튼튼하게 하는 봉사이다
(4). 봉사를 받아주는 봉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만 때문에 d런 봉사들을 물리칠 때가 많다
(5). 예의로서의 봉사
예의를 지키는 일도 봉사이다 남엗한 감사의 표현 , 적절한 시기에 인사하는 것 윗분들에게 인사카들 보내는 일등 모두 봉사이다 . 무례한 행위는 섬김을 방해한다
(6). 대접하는 봉사
나그네를 대접하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친구 초대 식사대접 등은 기독교의 미덕중 하나이다 대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7). 경청의 봉사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섬김이다 듣기를 먼저하라 남이 먼저 말하게 하라 자신의 말을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때 말이 많아진다
(8). 서로 짐을 져주는 봉사
남의 아픔 힘든 것 고통을 져주는 것을 져준다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위해 십자가의 큰 짐을 지심으로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다 남의 작은 짐부터 져주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수 있다
(9)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다르다 그같은 하나님 뜻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봉사이다
(10). 희생적 봉사 (노영상 교수)
자신의 영예, 이기심을 따라 봉사하느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희생의 봉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 규범이다

V. 섬겨야 할 이유와 목적

1. 디아코니아(섬김)의 목적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전 1-:31; 마6:9-10참조) 그러므로 디아코니아의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디아코니아는 사람의 명예를 높이거나 사람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의 방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디아코니아의 이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 외에서 말하는 디아코니아와 상반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높아지거나 혹은 특별한 대상을 섬김으로써 섬기는 자가 높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쳐주는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또한 디아코니아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므로 대상의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두 모습과 통한다.

2. 섬겨야 할 이유

(1)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고 또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 빌2:6-8 요13:2-15)
성경교훈은 인간 본성을 거스려 타인을 섬기게 한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의 섬김의 가르침을 외면하면 인간 사회에 소망을 찾기 어렵다 섬김의 실천은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요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교회 섬김은 세상 속에 병든자 약한자 굶주린자 고통 속에 있는자 들을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위대한 자가 되기 위해 섬겨야 한다 하늘나라 법칙 역설적이다 ( 마20:20-28)
(마20: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3) 받는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기에 섬겨야 한다 ( 행20:35 )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4) 예수 안에 있는 피조물로서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기위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섬겨야 한다 ( 고후5:17, 창1:28)
오늘날 우리 사회의 특징은 상상을 초월한 소비문화 , 다원성을 추구하고 권위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하늘에 있는 천국을 사모하기 보다는 지상의의 풍요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기에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책임있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 지속적이고 힘든 섬김의 노력을 해야 한다-임성빈 교수

(5)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섬김이 필요하다
인간 능력 차이는 필연적이다 사회 발전할수록 개인 능력 차이에 따른 소유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정보사회로의 이전은 이런 격차를 더욱 심화시켜 인구 80%를 저소득층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한다 나눔과 섬김은 좋은 사회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섬김은 인간 능력 차이로 인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마5:42)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신15:9-11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6) 세대간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오느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의사소통이 어렵고 큰 이질감을 느끼며 산다 갈등이 많다 세상을 본받지 아니하는 기성세대의 지혜와 미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데 익숙한 신세대의 용기를 사랑안에서 조화 시킬수 있는 섬김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야 만 한다 그러므로 권력으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세대간 지역간 통합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토대를 둔 섬김의 사역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임성빈 교수)

(7)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무지한 자들의 비난을 막기위해 필요하다
우리들은 세상 속에 소금과 빛으로 우리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과을 돌려야 할 책이이 있다 이 사명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섬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섬기는 삶 선한 행실을 통해 무지한 자들의 비방( 안티기독교)을 막아야 한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VI.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
예수님은 모든 신앙인의 절대 기준이고 신앙이란 곧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라면 그분이 오신 목적 곧 섬김의 삶은 분명 모든 교회의 절대적인 신앙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섬기시고 섬김받는 예수그리스도
주님은 섬기러 이세상에 오셨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9막10:45, 요13:2-15)
사탄이 요구하는 지배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거절하고 자기를 비우며 섬기는 길을 가셨다(마4;1-11) 섬기는 길이야말로 뭇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그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시켰으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의 생애이었다
주님은 낮아지셨다 비천한 지위에 테어나시고 왕이신 그가 종이되심 (빌2:6-7) 율법아래 복종하셨으며(갈4:4-5) 이 세상 비참함에 처하셨다( 사53L:3)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2. 예수그리스도는 겸손과 온유하심으로 섬김을 수행하셨다
사랑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의 자기비하 , 포기는(빌2;5-11)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보게 하며(죄의 자각)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게 하는 결단을 촉구한다
천상의 신적 사랑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섬김의 동기가 된다

3. 예수님의 가르치신 섬김: 개념의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1). 원래 섬김은 하급자가 상급자를 섬기는 것인데 상급자가 하급자를 섬겼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 요13:13-14 주인의 권리가 종의 의무로 변화되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주인이시며 종이되셔서 종의 의무를 감당하셨다
(2), 섬김의 질의 변화가 나타났다
-섬긴은 하급자가 어쩔수 없어서 의무적으로 수행되던 것이었는데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섬기셨다 자발적인 사랑의 섬김이다 주인은 종의 눈물에는 자유하나 주님은 주인으로서 종의 눈물에 속박되셨다 그들과 함께 우셨다

4. 주님은 섬김의 대상을 긍휼히 여기셨다 막9:35-36 요11:35 눅19:41
주님의 섬김 속에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주님의 눈물이 있다

5. 예수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특성 ( Torrance )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특성은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인간을 향한 섬김으로 나누는 것이다
(1) 하나님을 향한 섬김 :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섬김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
(2) 인간을 향한 섬김 : 교회 교회 구성원들과 인류 사회에 대한 섬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 차원의 섬김이다 이것 역시 인간의 비참함으로 옷입고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고통 당하느 모든 사람들을 섬기신다

VII. 잘못된 섬김

1. 말씀(하나님) 증언이 없는 섬김
말씀 증언 없는 섬김의 봉사는 세속화된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회복지에 머물 뿐이다 교회 섬김은 예전이 집행되는 제단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세속적이고 관료적인 사회복지에 머무르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섬김 없는 말씀 증언은 열매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과 같으며 하나의 기계적인 예배의식 행위이거나 빈껍데기의 경건성을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할수 있다 섬김의 실천이 없는 예전은 진정한 예배를 파괘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 반쯤 죽은자 곁을 그냥지나가다, 자비심 없는 ..)

2. 보상을 기대하는 섬김
섬김에서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사라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고 사람으로부터 보상과 영광을 받으려고 의를 행한다 외식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를 행하고 사람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하며 의를 행한다 섬김의 보상도 이세상이 아닌 저 하늘나라에서 받게된다

3. 동정심은 없고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섬김
욥의 친구 엘리바스 , 빌닷 소발, 3명은 욥의 재앙을 듣고 와서 욥을 위로하고 섬기려했으나 잘못된 섬김으로 오히려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았다 욥 치구들 (3명)은 욥의 고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그들 지식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 고난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침묵했다 욥의 고난의 호소를 이해하고 그와 함께 아파하며 그 문제를 하나님에게로 갖고 가지 않았다 그들의 섬김은 오히려 욥에게 상처만 되었다 신학지식이나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과 슬픔 가운데 있는 당사자에 대한 공감이며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묻는 자세이다

4.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하는 섬김
봉사가 자기일이 되어버리면 자기 이름이 나타나면 그것은 참된 봉사가 아니다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자아성취와 등치시키고 있다면 진정한 섬김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봉사는 자기를 잊고 희생하는 것이다 교회 명예, 홍보를 하기 위해 무질서하게 하는 봉사는 효과가 없다
교회가 서울역 노숙자들을 봉사할 때 초기에는 어떤 노숙자들은 점심을 세 번이나 먹었다 손님(=노숙자)모시기 경쟁이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봉사를 연출하였다 고아원 방문을 해도, 수해현장을 방문하여도 돌봄 섬김보다 사진 많은 사진을 찍다가 주민들 고아원 생들 분노를 사기도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저기 중심적 성취욕에 사로잡히면 진정한 섬김은 불가능하다 섬길대상자들의 간절한 소원과 바램을 겸손히 경청해야 한다

더욱 선 한 것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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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는 부와 명예를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들이 비록 나의 육적 감각을 즐겁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주님 나는 비록 부가 없어 결핍되고 어려움을 당해도
나를 비겁하게 방어하거나
나는 그 증오의 이름을 견디기 위해 몸서리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영원한 진리와 정의를 보는 눈을 내게 주소서
애정으로 가득찬 가슴을 주소서
가장 친절한 연민을 가슴에 담아 주소서
또한 모든 어두움을 밝게하는 믿음을 주소서

주님, 인류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남에게 대해서는 벙어리가 되고
타인의 허물에는 눈이 멀게 하소서
바닥까지 떨어진 약한 자에게 손발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더 좋은 선으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나라가 추구하는 그런 선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Clergyman Theodore Parker (1810-1860)

5, 베풀기만 하는 주는자, 우월감을 가진 봉사
교회 봉사에는 대상이 없다 다만 이웃이 있을 뿐이다 교회 봉사는 이웃이 되는 것이다 봉사자가 우월한 위치나 지위에 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웃을 종속적 위지에 두거나 봉사하는 자가 문제해결자로 나타나서는 아니된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수 없게 되고 하나님 말씀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한다 만남을 통한 복음화의 체험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봉사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걸어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화의 길이며 봉사없느 복음화란 불구이며 기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교회는 베푸는 일을 경쟁적으로 계속해 왔다 교회는 힘이 너무 강해졌다 너무 높아졌다
베풀지만 세상은 교회가 섬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배워야한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섬기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막10:43-4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교회가 많이 가졌고 높아졌고 살만해졌기에 이제 없는 자에게 주는 것은 베푸는 자선 사업이지 섬기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많은 것을 갖고 사시지 않았으나 그 삶 은 섬김 그 자체였다 오늘날 교회는 베풂은 있으나 섬김이 없다 (공성철 교수 )
교회는 부와 권력으로 높은 자가 되어기에 진정한 섬김이 없다 세상은 그것을 알고 있다 주님은 세상을 통해 교회에게 멧세지를 주고 계신 것이다

VIII. 섬김의 교회사적 고찰

교회가 이땅에 세워질 때부터 섬김의 사역은 교회와 함께 있어 왔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훌륭한 섬김의 역사를 갖고 있다 초대교회 이래 교회는 봉사의 주체로서 그 기능을 활발하게 수행하여 왔다 초기에 개인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봉사활동이 사도시대에 이르러 구제 사업을 전담하는 교회의 직분으로써 집사가 탄생하고 집사제도를 통해서
점차 제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나그네와 가난한 자를 위해 교회나 수도원에 속한 숙박소가 주요 교통로로 설립되었다

1.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교회가 크게 급성장하면서 소외계층이 생기게 되었고 교회는 주님의 섬김 정신을 본받아 즉각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섬겼다 시도들은 시탁 봉사르 그반두고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염하고 봉사할 집사를 선택하여 봉사일을 전념하게 하엿다 속사도시대에는 집사들이 구제 사역외에 감독을 보좌하고 돕는 부사제의 역할도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개종이후 기독교가 국교화돠면서 집사들의 사역은 국가 공무원 같은 성격을 가졌다 여기서 섬김의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가 타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 중세 시대
중세의 교구는 구역내에 빈곤자를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교구는 신자의 헌금 영지수입물 및 생산물의 10/1세등을 재원으로 하여 이 가운데 1/4을 빈민 구제비로 사용하였다 도다른 봉사활동의 주체는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그 입구에 오는 누구든지 차별없이 구제하였다 때로는 빈민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음식물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수도원 숙박소는 구빈원의 기원으로 처음에는 순레지를 대접하는 장소이었으나 나중에는
노쇠자 병자, 과부 고아 나 구호를 필요로하는 자들이 주거로 사용되었다 빈민 가종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농사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별히 가난한자 나그네 고나 과부들 불치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구빈원 ( Hospital)이 생겨났으며 여기서 질병의 치료와먹고사는 모든 일상생활을 돌보는 수용시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종교적 우호단체인 길드(동업조합)도 길드 조직원들뿐만 아니라 조기성원 밖의 사람들에게도 디아코니아를 수행하였다 중세시대에는 교회 대신 수도원을 중심으로 디아코니아 사역이 이루어졌다

3. 종교개혁 시대 와 그후
루터, 칼빈을 통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 섬김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학적 작업을 통해 사랑(삼김)은 믿음의 열매로서 이해되고 강조되었다 종교개혁 사상은 사회봉사면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하게 했다 섬김은 공로가 아니다 하늘나라에서 업적을 얻기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집사라는 직분이 생겨났다 집사는 교회 안에 어려운 자 가난한자를 살피고 도와야 한다 칼빈은 집사를 특별한 사명자로 가르쳤다 루터는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사역은 특별히 교회법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개별적인 구걸행위를 금지시키고 모금하여 돌보고 섬기는 것을 제도화하였다이런 교회법 제정이 여러 서유럽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 이후 경건주의자들은 디아코니아 에 대한 특별한 사역을 통해 영성주의적인 경건운동과 함께 어려운 자들을 섬기는 디아코니아가 함께 발전할수 있었다 특히 19세기 독일 교회가 그러하였다 요한 하인리히 뷔헤름은 도덕적 위기 현상에서 방치되어진 거리 아동들을 수용하여 신앙교육 , 직업 교육을 시켜 그 시대 중요한 봉사자들로 활용하여 독일 교회 사회선교와 디아코니아 사역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가 세운 라우에하우스는 이른바 공부방, 혹은 지역아동 센타의 원조격이다
그후 개신교는 전쟁 고아와 미망인 보호시설 , 학교 기숙사 건립 무료진료사업 감옥 개량, 인보사업운동( 상류층이 빈민지역에 이사해서 직접구제하는것)을 전개하였고 최근에는 아동 여성 인종차별 환경문제등에 그 섬김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IX. 섬김 주체와 대상들, 영역

1. 디아코니아의 주체와 대상
(1) 누가 섬겨야 하나
누구나 해야 한다 특별한 사람만 섬기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은 은사받은 대로 섬겨야 합니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성도들은 누구나 은사를 받았습니다 누구나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섬겨야 합니다 디아코니아의 주체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다. 물론 특별한 직분을 감당하는 디아코니아는 그 직분을 맡은 사람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이웃을 돕는 디아코니아는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마25:31-46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잘 보여준다. 그 비유는 이웃을 돕지 않으면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이웃 섬김의 디아코니아는 모든 신자들의 의무임을 알려준다. 심지어 가난한 신자도 이 의무를 면재받지 못한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눅3:11; 21:1-4; 고후8:2,19 참조)

(2) 누구를 섬기나 ?
(가) 우리가 먼저 우선적으로 섬길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마4:10 삼상7:3)목사가 아니고 이웃이 아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틀린말은 아니나 섬김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섬긴다 복종함으로 섬긴다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나) 교회를 섬겨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섬김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주신 은사대로 직분을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한다(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다)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섬길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마22:34-40) 이웃은 가까운 부모로부터 형제 자매로 시작해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둔 족속 , 원수까지도 섬김의 대상이 된다
디아코니아의 대상은 어려운 사람이다. 특히 물질로 섬기는 디아코니아는 물질이 결핍된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른편에 선 자들이 구원을 받는 이유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눅14:12-14도 어려운 사람을 도운 사람만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디아코니아가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필수적인 사명이다. 아울러 그 대상도 신자로 국한해서는 안된다(마25:31-46). 누구든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교회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한다. 불신자도 대상이 된다는 것은 디아코니아가 복음전파에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예배와 세상에 대한 봉사를 분리해서는 않된다 (암4:4-5)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먼저 화해하는 것이 예배의 전제이다 하나님과 하나됨은 이웃과의 하나됨을 배제하고서는 불가능하다

2.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영역 (스위스에서 있었던 세계교회 협의회 보고서)

(1). 말씀에 대한 섬김 (본질적 섬김, 하나님 섬김 ; 임창복 교수 추가)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주신다 교회는 말씀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2). 이웃 섬김
-교회의 생명과 존재를 위해 필수적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이웃을 섬겨야 한다 나눔, 섬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3). 지역사회의 섬김 :
-지역 사회 주민의 필요에 눈을 돌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4). 세계를 섬긴다 :
-국가적 상황에만 섬김을 제한하지 말고 세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섬김을 실천한다
(5). 예방적 섬김 :
교회 안과 밖에서 수행도고 있는 섬김 사역을 본질적으로 분석하여 이것 들이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섬김 사역인지 분석하고 교육하여 효과적인 섬김 사역이 되게 한다
(6). 구조적 또는 정치적 섬김 :
이웃의 고통과 비참의 원인에 대해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원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7). 인도주의적 섬김
그리스도인들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생태계 보전, 자연재해 복구, 전쟁 폭력으로 고통 당하느 이들을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인도적인 방법으로 섬긴다
(8). 상호적 섬김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우월감을 배제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 고통 받는자와 함께 동등한 입장에서 고통을 함께 나눈다. 실제적 섬김은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9). 자유하게 하는 섬김
그리스도인은 섬김 사역을 수행 할 때 섬기는 대상을 그들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며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는 마음의 공간을 열도록 해야한다

X. 섬김의 과제와 방법

1. 디아코니아의 방법
(1) 물질로, 시간바쳐, 몸으로 섬긴다
디아코니아의 방법은 디아코니아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는 물질로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도록 한다. 물질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는 물질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물질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엡4:28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이싿.
부당한 방법을 피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성실히 일하여 재물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를 위해서는 먼저 정당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물질을 얻어야 한다. 눅16:9가 말하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는 말씀은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이웃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다. 거기서 불의한 재물은 단순히 세상 재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디아코니아를 하지 않는 자이다. 디아코니아는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자들이 물질 외에 시간이나 여러 가지
능력으로 헌신하는 것도 필요하다. 올바른 디아코니아는 자기가 가난해질 정도로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돕는 것이다.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면서 디아코니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물질의 생산을 위해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 이런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다. 예수님께 있어서 말씀 사역과 물질적 도움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준 것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은 사람들이 어려운 자를 돕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디아코니아도 말씀사역이 물질적 섬김을 일으키고 물질적 도움이 말씀전파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2) 물질이 없으면 입술로 섬기고 무릎으로 섬긴다
나이팅게일은 1907년 영국 국왕이 수여한 여성 최초 매리트 훈장을 하사받았는데 그 상패에 쓰인 문구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물질로 남을 도울 수가 있다 물질이 없으면 말로 도울수 있다 물질도 말도 없을 때는 눈물로 도울수 있다 “

가까운데서 쉬운 것부터 한다 친구에게 ,부모님에게 전화한통, 기거리 휴지 한번 줍는 것
자기방을 청소하고, 집앞 길거리 청소하는 것 , 노인들에게 잠간이라도 말벗이 되어 드리는 것 이 모두가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3)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 오병이어 기적 가렙다 과부 공궤 막다라 마리아의 봉헌 많이 모아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햇다 봉사란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나누는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받은 것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책임이 주어져있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선한 사업을 힘써야 한다
주부교실 경로잔치 노인대학 탁아소 유치원 신용협동조합 도서실 장학회 독서실 환경보호운동 ..노숙자 돌보기 탈북자 지원 .등등 찾아보면 얼마든지 봉사할 것이 많다..

2. 온전한 섬김을 위한 과제와 전망 손인웅 목사
(1). 섬김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위해 성경에 근거한 섬김의 정신과 형태를 바로 해석하고 사람의 방향성을 고무하는 “말씀에 대한 섬김”을 강화해 나아가야 한다
(2). 기존 개인 영혼 구언에만 역점을 두는 좁은 의미의 전도 전략을 확장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선포와 함께 하나님 나라 구현에 참여하는 사회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야 한다
(3). 교인들로 하여금 지역사회, 교회 내에 섬김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와 기회를 부여한다
(4). 교회중심 목회에서 지역사회 중심의 교회로 구조를 전환한다
(5). 담임 목사중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보리고 동역자들이 협력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식 리더쉽이 필요하다
(6) 교회가 디아코니아 사역을 우선적으로 강화해 나아갈 것
(7).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할 것
(8). 교회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지역관청과 연결하여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토록한다

3. 섬김 사역에서 한국교회의 과제 ( 한국교회 봉사단 사무처장 김종생 목사 )
(1). 섬김 사역의 실태 파악
(2). 신학 정립과 복지 선교 메누얼 개발과 보급
(3), 가족 기능의 강화
(4). 소외계층을 위한 체계적인 사회복지 사업
(5). 북한 동포를 위한 지원 확대
(6). 지구촌 재해 현장에 대한 구호
(7). 연대와 연합 : 교리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봉사는 교회를 하나되게 한다

4. 사회봉사를 위한 제언 손인웅 목사
(1) 당회원 지도층에게 사회봉사에 대한 지지를 얻고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
(2) 먼저 지역사회 주민들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사할 것 그리고 우성순위를 정한다 단계별로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3) 자원봉사자를 잘 선발하고 이들의 체계적인 교육과 관리가 필요하다
(4) 지속적인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의 개인 신앙 영성을 철저히 훈련히도록 해야 한다 경쟁의식 비교의식이 발동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교회는 겸손히 사회를 섬겨야 한다

XI. 섬김의 자세

1. 예수님의 마음 곧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빌2:1-5)
진정한 섬김은 겸손에서 나온다 이 겸손은 오직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데서 나온다
-리처드 포스터 =인간의 능력 자연적 힘에 열중하다면 그것은 육신의 일이며 겸손에 치명적인 것이다

2.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섬길 것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3 억지로 하지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한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4 이웃을 섬김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한다
조지 뮐러 목사의 고백 :
“내가 봉사의 일을 할수 있었던 것은 내 자아가 죽는 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내 생각 내 의지는 다 죽어버리고 내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죽고 내 의견과 선택과 취미와 내뜻에 죽었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 죽었고 내 형제나 내친구의 칭찬과 비난에도 죽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만 받도록 배워왔습니다 “.

5. 눈가림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한다
일본 사무라이 정신 : 나라를 위해서는 피를 흘린다 친구위해서는 눈물을 흘린다 가족을 위해서는 땀을 흘린다

6. 섬김 받는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를 세워준다
도움을 청한 사람이 도움을 받으면 그는 도와준 사람에게 감사할뿐 아니라 무의식적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 인간 의 특징이다 외부조직가가 어떤 제안을 백성들에게 할 때 백성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바보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제안이 틀려서 받아들이 않는 것이 아니다 받는 자는 항상 신세지는 사람으로 취급되기에 그들을 내적 장애자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한편 주는 자는 항상 주는 자 돕는자 강자 최고자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인간적 우월성을 자신도 모르게 자부하여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그 어떤 인간도 남을 도울수 없는 사람은 없다. 다른 지체에 기여못하는 지체도 없다 각자가 주면서 동시에 받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주는 디아코니아는 받아들이는 디아코니아 경험을 전제로 한다 주는 행위만 강조하다보면 저기 의, 자기 공로만 나타나게 된다 행동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 알린스키

7. 성도들의 섬긴 생활의 자세
(1) 봉사는 하나님 나라 확장과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한다
(2) 자기의 시간, 물질 등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3)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 단발성 행사가 되면 않된다

** 섬기는 자의 갖추어야 할 조건들 ( 김형태 총장 한남대학교 )
1. 자신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 섬기기 전에 먼저 자기 심령에 감사가 있어야 한다 자기 내면에 궁핍함을 느끼는 자는 남을 생각하거나 배려할 여유가 없다 욕망을 줄이면 감사를 많이 하게된다. 살아있는 자체가 감사하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아진다 )

2.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섬김의 도리는 상대방 입장과 눈높이에서 이해하고 용납할 대 가능하다 내 생각과 주장대로 가분달 섬기는 섬김이 아니라 시혜처럼 되기 쉽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았다

3. 요구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한다
베드로 요한은 앉으뱅이가 돈을 구했으나 그에게 정작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요, 일어나 걷는 것이다 근본적 해결책이었다 물질보다 영적 치유 회복이 중요하다
오병이어 : 안드레의 신앙회복, 어린이 헌신 의 회복 이런것들이 회복된 후에 경제적 회복 이루어졌다 (요6:5-13)
마르다 마리아 : 여수님이 필요한 섬김은 물질적 공궤가 아니라 신앙적 동행이었다 ( 눅10:38-42) (미6:6-8)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행하는 것이아니냐

4.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섬김이 방해가 되는 일이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목적지까지 잘 가도록
조력해 준다 돌무화과 나무는 삭개오에게 디딤돌 역할을 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다
섬기는 자는 자기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모세 연기처럼 사라지다 세례요한 존경 대접 받은 일 없다 목소리만 남기고 퇴장하다

5. 은밀한 중에 섬겨야 한다 받으려고 섬기지 말라
섬기고 나서 그 비밀을 지키기 어렵다 광고하고 싶다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려면 사람의 칭찬을 거절해야 한다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2-4) (마6:16-18)

6. 실제적으로 섬겨야 한다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 말로만 하면 않된다
등잔만 준비하지 말고 기름도 준비하라 천국 지옥 가르는 기준 : 시레적인 봉사이다
마25:34-36

7. 자신이 먼저 정결해야 한다
청렴결백한 인품을 가져야 잘 섬긴다 수원지가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수도관이 녹슬어 있으면 녹물이 나온다 양심을 지키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

8. 철저한 자기 연찬을 계속해야 한다
자신을 항상 살피고 섬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필요한 지식과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8. 다른 사람의 섬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존경의 수용도 종요하다 제자에게도 진실한 감사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위한 일은 자기중심보다 상대방중심으로 전환ㄴ되어야 한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봉사를 했으나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

XII. 섬김과 선교

선교와 봉사는 동반자의 관계인가? 아니면 대립적인 관계인가 ? 어덯게 보느냐에 따라 봉사가 선교적 가치를 갖기도 하고 도리어 선교에 역효과를 갖기도 한다

1. 선교와 섬김 3대 이론
< 선교와 관련하여 봉사에 대한 교회의 시각들 >
(1) 전통적인 선교관에서 본 봉사관
전통적 선교관은 선교우선권을 강조한다 교회와 사회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여 교회는 선교에만 전념해야하고 선교사역에서 봉사사업을 배제하려고 한다
이주장에는 성장 성공같은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2) 통전적인 선교관
선교와 봉사는 상호 불가분리적인 관계로 본다 마차의 두바퀴와 같다 봉사는 선교의 주요한 수단이다 전도와 사회봉사는 동반자의 관계로 새의 두 날개와 같다
(3) 선 선교 -후봉사
먼저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을 한다음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교회가 봉사를 한다
사회봉사는 전도의 결과이다 전도를 통해 복음을 믿고 거듭나게되면 그들 삶속에서 자연히 사회봉사를 하게 된다는 것

한국교회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통전적인 선교관을 갖고 사역하였다 선교사들은 전도의 수단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수많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6. 25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민족 복음화를 위한 부흥화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전통적인 선교관을 갖게 되었다 선교에 집중하여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지만 사회와 교회가 이분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세상과 천국 등 이원론에 입각한 신앙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등한히 하였다 사회적 봉사의 사명은 국가나 사회단체에 맡기는 경향이 강했다

2, 올바른 관계 (견해)
교회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과제를 갖고 있으며 이 두과제는 수레의 두바퀴와 같이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이과제를 동시에 충실하게 수행할 대 교회는 성장 하고 성숙하게 된다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때 사회와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요즘 교회가 정체되고 사회로부터 신뢰를 일허가는 이유중 하나가 이웃에 대한 섬김 사역이 부족한 때문으로 판단된다

선교와 섬김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타자를 선교 동역자로 만나는 것이라면 디아코니아는 하나님 사랑안에서 타자에게 이웃이 되고 상호의존 관계를 이루며 대안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둘다 타자를 만나는 것이다 성령하나님이 매개자이시다 만남으로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선교우선인가 사회봉사가 우선인가 하는 것은 선교개념 자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선교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타자에게 이웃이 되어 만날 것인가 한님의 선교동역자로 만난 것인가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어야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이 대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다 한편으로는 정치세력의 희생자이며 한편으로 자신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란 지식을 빼앗겼기에 비극이 있다 교회는 이런 현실을 고려하여 섬김을 통한 선교를 ,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XIII. 섬김의 기능과 유익

1. 교회의 사회봉사기능과 그 내용들
그러면 교회가 디아코니아 전통을 계승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봉사활동을 실천할 때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교회의 사회봉사기능은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완화적 기능(alleviative function)이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교회의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결연사업, 불우청소년 장학사업, 경로잔치, 재가노인봉사, 노인무료급식사업, 장애인보장구지급사업 등이 교회의 완화적 기능의 예라 할 수 있다.

둘째, 치유적 기능(curative function)이다.
교회의 사회봉사를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빈곤의 원인이 되는 개개인의 능력 부족을 보충하거나 빈곤에 이르게 하는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로써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든지 빈곤의 악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다.
빈곤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사업으로는 보육사업이나 공부방이나 독서실사업 등이 있고 그리고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업으로는 무료진료, 직업훈련, 취업알선, 재활사업, 공동작업장 등이 있다.

셋째, 예방적 기능(preventive function)이다.
이는 앞으로 닥칠 사고나 고통들을 예측하여 미리 예방하는 기능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노령, 질병, 장애, 이혼, 실업 등에 대비해서 이를 예방할 수 있다. 신용협동조합을 통한 저축사업, 가족상담이나 청소년 상담사업을 통해 빈곤이나 가족해채 또는 비행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교회는 매우 드물 것이다. 하지만 각 지역에 맞는 프로그램을 선변하고 각 교회의 여건과 실정에 맞는 수준에서는 얼마든지 봉사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봉사들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해 소기의 성과를 보기 위해서는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과 인적자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를 위해 교회내 인적자원을 조직화하고, 봉사관을 짓는데 재력을 투자하고, 외부의 봉사기관들과 연대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2. 섬김의 유익
(1) 위대하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된다
섬김으로 보람을 얻는다 보람은 행복의 요소이다 진정 소외된 이웃 불행을 당한 이웃을 이해 봉사하고 섬기면 인생의 참된 보람을 알게되고 느끼게 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버리게 된다 남을 위한 봉사 이것이 인생의 가장 값진 행복을 누라는 길이다 남을 위한 섬김의 추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장 멋진 인생을 산 사람이다 오늘의 이 역사의 위대함이란 남을 섬기고 간 사란들이 발자취이다
이 세상에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들은 남을 섬기고 간 사람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지위는 섬기는 자가 얻는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희생이 크거나 봉사의 범위가 넓을수록 그는 더욱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섬기는 자의 지위는 뺏을 자가 없습니다

한사람의 아픈 가슴을 지정시킬 수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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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의 아픈 가슴을
진정시킬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살지 않았다
하나의 고통받는 삶에
안락함이 되어줄 수 있다면,
아니, 하나의 아픔을 가라앉히고
한 마리의 추락하는 울새를 도와
다시 그의 둥지에 놓아줄 수 있다면,
나는 헛되이 살지 않았다

에밀리 디킨스 (1830-1886)

(2) 섬기는 자 자신이 변화된다
봉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세상과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들과 관계맺는 자리에서 우리는 기쁨 슬픔 평화 정의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바라본다 섬기다 보면 가난한 이웃보다 섬기는 자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웃에대한 편견, 장애인에대한 편견 그리고 넘을 섬기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 봉사활동을 통해 말씀을 체험하고 자기 존재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쳐 실천할 때 우리 사람은 달라진다

(3) 교회가 신망을 얻게되고 복음 전도에 유익을 가져온다
봉사를 통해 지역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덕수 교회 손잉웅 목사) 교회의 문턱이 낮아지고 담이 허물어졌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은 교회로 하여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중장기적으로 교회는 지역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에 자기 자녀들이 나가 배우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생길 것이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을 보면서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발적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X IV.섬김 교육, 훈련

학생들을 지식으로만 가르치면 변화가 없다 섬겨야 한다 그들이 섬김을 받을 때 마음으로부터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게되고 존경심을 갖게되며 가르침을 머리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이 변해야 삶이 변화된다 소기의 기독교 교육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섬김은 교회 교육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섬김이 없으면 복음은 복음으로 인식될 수 없다 교회교육은 섬김을 그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섬김의 방식을 통해 가르침으로 학생들로하여금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섬기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말로 되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과 혀로만 교육할수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섬기는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능력을 갖춘 교사가 필요하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1. 섬김 교육의 필요성
섬김의 실천적 수준까지 가려면 :첫째 섬김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섬김이 선언적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섬김의 본질을 모르기에........예수님의 섬김을 주목해야 한다)
둘째. 섬김을 훈련 받아야 한다 훈련통해 체득되어야 지속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섬김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행함이다 인간은 배우지 않고 행할 수 없다 섬김활동엑도 배움이 필요하다 섬김이 구조화되지 않고 교육되지 않으면 적실성이 떨어진다 사회구적인 측면에서 장치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교육적 장이 마련될 때 섬김의 효율은 높아진다
봉사는 실천하기도 힌들고 그것을 계속 짓고해 나아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모델로 하여 훈련한다.

봉사(사랑의 실천)은 기도(예배와 관상)와 성경말씀(거룩한 탐구)과 더불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 모든 영성훈련은 이길에 포함된다
이 세길은 세길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길이다 서로 분리될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어느 한가지라도 비껴간다면 두길도 잃게 된다 영적 성장의 세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비껴 갈수 없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봉사를 하찮게 가르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2. 섬김을 위한 기독교 교육적 원리 (총회 김치성 목사)

섬김은 종이나 하인같은 마음 자세 없으면 진정한 섬김 불가하다
SERVANT
Searching : 주변을 둘러보고 섬길대상 자를 찾아본다 ( 이런 교육을 시킨다)
Empathy : 상대방을 공감하고 긍휼히 여긴다 (긍휼히 여기는 감성교육 필요)
Responsibility : 섬길대상 자에 대한 최고한의 책임감을 가진다
Vicinity : 섬길대상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Attendance : 섬길대상자를 시중들어라 ( 이웃돕는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시킴)
Neighbour : 어려움을 당하는 섬길대상자들은 우리 이웃이다 (눅210: 선한 사리아 사람 롬15:2 참조)
Theophany : 주님은 연약한 인간 모습으로 현현(나타남)하시기도 한다 . 이웃섬김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눅9: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3. 섬김의 훈련 박봉수 목사
(1). 순종 훈련 ; 하나님 듯을 알고 섬김에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알 것 기도 말슴으로 훈련 깨닫고 실천한다
(2). 낮아짐의 훈련 : 사람은 낮아질 때 진정 섬길수가 있다 종의 의무르 수행할 대만 섬길수 있다 주의의 권리행사로는 불가하다 바울은 스스로 종이되다 고전9:19 조우이 의식을 갖도록 훈련하라
(3). 긍휼 훈련 : 긍휼: 연민의 정이 아니다 긍휼이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동일시하는 능력이다 함께 고통을 받는 것 깊은 밀착과 가정이입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감정이다 섬김은 긍훌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심화된다
(4). 봉사훈련
섬김 훈련은 구체적인 봉사로 실천된다 봉사는 훈련이 필요하다 봉사는 머리로 가슴으로 하는 것 아니고손발로 한다 손과 발이 철저히 훈련되지 않으면 봉사가 오히려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 봉사훈련은 행동과 성찰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4. 자기 부정과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은 하나님 사랑안에서 먼저 저기를 바르게 사랑하고 우리가 타자에게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일방적인 관계를 극복하고 연대나 섬김을 빙자하여 타자를 지배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을 수용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와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기도와 명상(말씀)에서 이루어진다 디아코니아에서는 중요한 문제는 행함보다 먼저 디아코니아를 행하는 사람 ,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말씀, 기도 ,예배, 성만찬 코이노니아 공동체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하나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자신의 허물 , 죄절 ,실패 아 상처를 용납하는 자기 사랑으로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고난을 자기것으로 받아들이며 디나코니아에서 오는 유혹과 어려움을 십자가를 통해서 극복하고 자기부정의 길로 나아간다 타자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타자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하나님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아픔과 좌절 고통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 자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새롭게 들을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섬길 때 타자를 당장 하나님 자녀로 만들려는 조급성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하나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경과 기도, 디아코니아를 통해 즉 이웃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XV 결 론

1995년 서울 한 지역에 주민들이 장애아 특수 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농성을 40일 째 하고 있다 자녀교육 과 지역 이미지가 나빠져 집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성을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 자녀들을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말하며 자기자녀와 함께 어울리기를 꺼려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장애아들에게 병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잘 어울린다

1. 오늘의 시대는 섬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요청하고 있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기업이나 회사도 사장이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던 시대는 갔다 군림하는 시대가 아니라 아랫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시대이다
Robert K. Greenleaf 이 <-섬김의 리더십, .1970 펴냄> 책을 펴냈다 위 리더십의 특징 들은 주의깊게 들어줌, 감정이입(공감), 치유, 청지기 정신, 성장을 위한 헌신 , 공동체 형성, 이다 한마디로 Servant 리더십이다 서번트 리더십은 그후 피터 드레거, 스티븐 코비, 피터 센지 와렌 배니스등 리더십 대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드래커 Drucker <미래경영 > 의 말을 들어보자
“지식 경제시대에는 기업 비롯한 여러 직에서 상사와 부하의 구분이 없어진다 지시와 감독은 통하지 않는다 21세기에는 리더가 부하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조직원을 이끄는 기존의 리더십 패러다임 대신에 리더가 부하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그들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
세계화 시대, 지구화 시대에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빈부 격차가 더욱 커질 것이다
영극화 현상이 가속되어 소수만 부자가 되는 현상 초래.할것이라고 한다 90%가 10%를 위해 사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것이 교회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이것은 새시대의 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다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본받아야 해결될 수 있다
먼저 우리 마음을 가다듬고 섬김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눈으로 볼수 없다 (어린 왕자 )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다으과 같이 호소한다
“현대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봉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현장의 정보가 아니라
현장에 대해 놀날줄 아는 마음이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사회 비참함과 , 부조리에 대해 놀라야 한다 “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가난한 자들 도와야 한다
한국도 이제 국력에 걸맞게 세계 가난한 나라를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대외 무상 원조 : 1996년 GNI의 0.05% (2억달러) OECD권고는 0.7%이었다
2005년에는 0.09%이었다 OECD중 23개국 꼴지, 1일당 15.2 달러이다

2. 예수님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야 한다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신 예수님. 섬기는 것만큼 권위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영적 권위가 생기게 된다 섬김을 받는자는 결국에 짐심으로 섬기는 지도자에게 자발적인 순종과 충성을 하게 된다 세속적인 권위는 권세에 기초하여 군림하는 것이다
서번트 리더는 먼저 써번트가 되어야 한다 먼저 섬기다보면 나중 끌고 가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생긴다 주님은 스스로 낮아지시고 써번트 리더가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 위해 생명을 희생하셨다 섬김은 희생을 동반한다 섬김은 고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희생의 섬김을 본받을 때 바른 섬김의 사역을 감당한다

3. 한국 교회는 섬김의 사명을 잘 감당해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적 교회로 바뀌어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회 봉사를 위해 섬김 사역을 지속해 왔다 한국사회 사회 복지 재단 중 60-70%가 개신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복음 전도 문은 잘 열리지 않고 있다 저들 눈에는 교회가 너무 강해져서 경계 대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더 그러나 우리는 교회 주요사명인 섬김 사역을 멈추어서 않된다 끊임없이 후련하며 봉사를 실천해 나갈 대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교회기능 예배 전도 교육 교제 봉사 모두 동일하다 사회봉사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한 노력이다 교회 안 사람끼리만 교제는 사회로부터 외면 당한다 섬김사역은 위급한 상황으로 보고 당장 할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내 가족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위급한 상태에 있는데 시간이 없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성숙한 교회는 한마디로 섬기는 교회이다
교회가 예수의 섬김의 종의 길을 포기하고 영광과 부귀 지배하는 길을 갈 때 언제나 영적 부패와 타락이 있었다 ( 성종현 교수)
교회 섬김 활동도 교회 내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붊을 받았으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섬김은 단순히 사후 치료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전 예방적인 것까지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와 섬기는 공동체의 상호 형평성을 유지하는 구조와 내용을 가져야 한다 모이는 것과 보내는 것이 동등한 비중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 사회봉사비 : 전 예산의 2-6% 사회봉사프로그램 가진 교회는 19% 에 불과하다
오늘날 한국교회 사회봉사의 문제점 : 일시적 이벤트 . 영속성이 없다 단순한 구호성격 프로그램 부족 . 내부대상자 중심 전문성이 부족함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섬김사역에 뿌리를 둔 진정한 섬김(디아코니아) 의 회복을 위해 3개 영역의 철저한 개혁과 수정을 해야한다 (아래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요, 그가 명령하시는 섬김의 특징이다)
(1) 기도 : 하나님섬김과 이웃섬김의 실천을 위한 기도 . 기도로 한님과 이웃을 섬긴다
(2) 증언 :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섬김으로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다
(3) 화해 : 먼저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코이노니아 유대를 강화하려 화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화해를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섬긴다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파송하사 예수님 자신의 섬김 사역을 공유하도록 명령하셨다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복음 선포, 치유사역, 용서사역, 도와주는 사역을 통해서 질병과 가난 죄된 행실, 죽음과 심판 아래 서있는 인간과 하나님 ,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중재하는 일을 본질적, 지역적 , 세계적, 예방적 ,미래적, 또는 정치적, 인도적 , 상호작, 자유하게하는 섬김을 중보적 기도, 담대한 증언, 그리고 화해를 통하여 온유와 겸손으로 실천해야 한다

4.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겨야 한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디아코니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여 그의 유익을 위해 해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행할때에는 공로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공동체의 삶은 섬김의 삶이다 청지기 삶을 통해 온갖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행동의 은사=디아코네인 (행19:22 몬1:13 딤후1;18) 섬김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수행되고 그의 영광을 위해서만 이행되어야 한다

5. 자기 사랑과 자기 희생이 요청된다
인간 뛰어난 자질은 결코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한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남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나눔 섬김은 인간 본성과는 반대된다 인간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추구한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실현은 자기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많이 소유하여 향락하고 지배하며 자기뿐 아니라 자기 후손들에게도 그 소유와 향락을 물려주려고 한다 도움이 필요한 타자르 마음에 주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나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을 받아들일 때만 타자를 받아 들인다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자기사랑은 이웃사랑의 척도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타인도 사랑할수 없다 자신이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이웃의 고통을 감당할수 없다 자기를 증오하는 자는 이웃도 증오한다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사랑은 자기 증오일 뿐이다 참딘 자기 사랑은 타인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천국의 능력이다 참된 자기 사랑에서 디아코니아 적 사랑이 나온다 참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엡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6, 타자를 위한 섬김사역이 상생하는 길이요 주님 기뻐하시는 일이다
산업 사회-약자 무능한자 도태되는 세상이다 ,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여 약자를 섬길 때 사회 계층 갈등을 해결할수 있을 것이다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망을 얻으며 복음은 더 힘있게 전파된다 상처는 상처에 의해 치유된다
고난과 상처를 감당할 힘은 기도와 말씀 명상에서 온다 고난과 십자가를 준비함이 없이
디어코니아에 투신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 디어코니아는 내적 공허함을 성공을 통해 보상하는 수단도 아니고 자기성취의 도구가 되어서도 않된다
자기를 죽이고 복음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에서 자유한 자가 타인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것이다 이기심 공허함을 넘어서 타자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物神, 행동주의 우상을 파괘한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디아코니아는 개인과 교회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줌(giving)을 요구한다 (데이비드 길) 주는 일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받는 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나누는 일이다 주는 것은 물질이나 나누는 것은 나자신이다
디아코니아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주는자와 받는자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지배와 의존 관계로 변질되는 것이다 상호의존적 상호대등한 관계에서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면 그 자체가 치유가 된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나아가서 자신이 지닌 어떤 것을 통해 상대방에게 , 사회에 무엇인가를 기여하게 된다 다아코니아적 사랑에서 나온 지혜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타자가 스스로 일어서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자에게 무엇인가를 줄수있기까지 책임을 지면서 동시에 타자를 , 타자의 삶을 존경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마지막 설교문
“내 장례식은 길게 하지 마시고 간단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노벨상을 탔다는 말은 아예 입밖에도 내지 마시오 나는 남에게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 들으면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록 . 성경 본문 명상 자료
1. 마20:28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 그자신의 푸쉬켄 : 조에=영원한 생명, 비오스=단지생물학적 생명 이 아니고 혼, 마음, 지성을 포함한 혼의 생명이다 ) 을 많은 (모든이 아니다 ; 만인구원설은 잘못) 사람의 대속물(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내는 몸값)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수난 예고, 제자들은 영광 추구 시기 분쟁하였다
-두형제 그 어머니는 예수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야 , 왕으로 오해했다
세상 욕심에 기초하여, 교만이 있기에(높아지려는) 영적 소경이 되어 올바른 가치판단이 불가했기에 엉뚱한 것을 요구했다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이며 성모 마이라와자매 간? (마27:56 막16:1) 그러므로 두형제는 예수와 이종사촌간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 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교만하면 망한다 자신만 높아지려는 자
(잠11:2) "교만(驕慢)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만은 낮추는 것. 자세 태도를 낮추는 것이다 실력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내게 유익만 되면 오케이다 ) 이기주의자는 고독하다 -이기주의자는 타인의 질투를 유발시킨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구하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
-제자들은 십자자가 고난 이전에 영광부터 구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으로 착각하다
우리의 세속적인 소원이 천국 일에 방해되는 수가 많다
-제자들의 반응 : 분히 여기다 동일한 시기심 명예욕이 있었기에. 교회 분열 원인이다
시기. 교만은 가장 무서운 죄이다 가장 나중까지 남는다 교만은 인격의 최선의 것을 파괘시킨다 교만은 다른 요소가 첨가될 때 점점 커진다 겸손은 자기 부족을 아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께 대드는 죄이다 다른 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죄이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 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최고의 섬김은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상대방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내가 죄인이 되고 상대방을 지혜롭게 만들기 위해 내가 미련한 자가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그리스도는 권능을 남을 섬기는데 사용하셨다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높이신다 하나님이 높이시기까지 아무말도 아무짓도 하지 말라

2. 빌2:6-8
(빌2:6-8) 그는 근본(본래부터)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외형만이 아닌 본질적 형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낮아지신 하나님 아들 구주 예수그리스도, 겸손의 극치이시다
-우리도 순종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순종함으로 낮아진다
-하나님이 높힐 때까지 높아지지 말라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모든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스펄젼)

3. 마22:37-40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의식의 중심 )을 다하고 목숨(푸쉬켄)을 다하고 뜻(의지 ,지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핵심, 요약)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
(1) 마음을 다한다=충성을 다한다
(2) 목숨을 다해서=가장 귀한 거슬 바쳐서
(3) 뜻을 다해서 :내 의지를 꺽고 하나님뜻을 깨달아 순종하야
① (4) 힘을 다해=건강한 마음과 육체로 최선을 다해 (1) + (2) + (3) + (4) =온 인격을 다해서 사랑한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 아가페 사랑이다 (신6:4-9 11:13-21 민15:37이하 쉐마 한구절)
-사랑의 종류 : 아가페(희생적 사랑) 필로스(형제 친구사랑) 에로스(남녀간 사랑) 스토르게(동족 부모자식사랑) -사랑은 인간 영혼을 지배한다
-세상은 너무 변하기에 사랑할수 없다 문제해결도 불가하다 계속문제 이어진다
-사랑할 대상이 생길 때 힘이 생기고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큰 힘이 생기고 기쁨이 있어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님 계명의 요약이다
* 하나님을 사랑함의 단계 :
-내 유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함--- 하나님이 최고 선이시므로 사랑함 -- 하나님위해 하나님을 사랑함(헌신) --하나님위해 하나님 싫어하는 것을 미워하고 나자신을 사랑함 (몸도 아낀다) --하나님과 일치됨 (무아지경)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다 거듭나야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 : 자기 부인, 세상을 경시함 은혜를 깨달음 죄를 버림 순종 감사생활을 함 기도 말씀 묵상

-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 (레19:18)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출발하고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결실이다 십자가의 도이다 두 개 조화될 때 복음의 영광이 나타난다 -사랑에서 나오는 의무는 쉽다
-사람은 하나님 형상을 닮아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 사랑의 대상 : 하나님 + 이웃+ 자기자신 (네몸같이)
* 자기사랑: 죄악된 자아는 부인하고 성령에 의해 거듭난 참 자아는 사랑해야 한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산것이기에 글고 하나님 형상이 새롭게 되었기에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최고봉에 이르면 다른 것이 다 보인다
“하나님을 살아하라 그리고난 후에 네맘대로 하라” -어거스틴

4. (요13:3-17)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질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인격자는 큰 괴로움 중에도 먼저 남을 생각한다(크리소스톰)
-유대인들은 식사전에 먼저 발을 씻는 습관이 있다 아랫사람이 먼저 윗사람 발을 씻겨준다 =하나님 세계<-> 이 땅의 세계
-수건을 허리에 두르심=겸손을 의미: 베드로 나중에 그것을 깨닫다
그리스도의 겸손 완전 봉사, 사랑의 실천이다
-몸을 굽혀야 발을 씻길수 있다 교만한 자세로는 남을 사랑함이 불가하다 겸손없는 사랑은 피차 피곤케 한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한다
-제일먼저 가롯 유다 발을 씻기셨다(크리소스톰)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부터 사랑하라 제일 미운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누구든지 사랑 가능케된다
-말틴 루터 :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지않고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신다”
지금은 형편 없느 자라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발을 씻기신다
-발을 씻는 물은 너무 뜨거원도도 않되고 너무 차거워도 않된다

* 베드로의 무지 : 예수님 답변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영적 무지가 하나님 자비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 예수그리스도에게 의존되었다는 것을 망각하엿다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주님은 미래지향적으로 대답하시다 조급하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른다 인간은 지나간 후에야 알게된다(모세도 하나님 뒷부분만 보았다) 하나님이 키를 갖고 관리하신다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게 분깃을 갖지 않는다)
-매일 매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씻지 않으면 예수님에 의해 씻음받지 못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다 매일 매일 씻지 않을 정도로 깨긋한 자가 없다
-사랑받고 용서를 받았다는 체험있을 때 예수그리스도와 상관있게 된다
-이생동안 감당할수 없는 사랑 받은 것을 깨듣고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라
교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받은 것을 생각하라 내가 준것만 생각하면 교만해 진다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목욕=루오= 전신을 씻는 것 거듭난 것 중생한 것을 의미한다
발을 씻다=비프토=부분적으로 씻는 것을 말함 매일 죄를 싯는 것
-매일 죄 씻어버려야 영혼이 성화가 된다
-너희(교회)가 깨끗하지만 다는 아니다 어느단체나 가롯 유다는 있다 하나님 섭리이다
양떼 속에 염소 두지 아니하면 양들은 추우면 모여들어 가운데 있는 양은 압사하게 된다 (기롯유다 없으면 좋을 것 같으나 사실그렇지 않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 행동 말슴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선물도 의미를 알아야 한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서로 섬겨라)
-다른 사람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 내가 먼저 사랑주어야 받게 된다 보복 원망은 악순환된다
-예수님 용서했으니, 사랑했으니, 먼저 섬기셨으니 우리도 용사ㅓ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휘파데이그마=본, 모형)(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당시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고만 다투었다 뒤 따라가는 것은 쉽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 이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되도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행복=아는 것 + 행하는 것 참된 행복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
-진리 모르고 순종할 대 갈등하게 된다 혼란이 우려된다. 알고 행할 때 실망하지 않는다
-진리를 알지만 불순종하는 것은 무익하다
-제자가 스승 발을 싯기는 것은 당연하다(율법) 그러나 스승이 제자 발을 씻기는 것은 봉사요 헌신이다
-예수그리스도=주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 예수님 판단은 우리보다 훨씬 낫다
-예수님 순종하셨기에 그 제자도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전문적 권위보다 희생적 권위가 더 높은 권위이다 가슴이 열려진다
-스스로를 영적 중심으로 삼지 말라 지구중심설은 오류이다

5. 눅10:25-37
(눅10:25-3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알고있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아는 것만으로는 않된다 너는 알지만 행하지 않았다)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이웃이 아니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부기빠지라고)과 포도주(소독제)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비용)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도움이 필요한 모든 타인
-강도같은 인생, 타산적인 인생 (제사장,레위인) ,
선한 인생( 남을 섬기고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
-예루살렘(하나님 , 말씀, 교회 ) 떠나면 강도 만나나. 여리고로 가면 불행당한다 . 인류역사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는 과정이다
-예루살렘 떠나 강도마나지 말라 -가난, 질병, 실패 , 죽음 . 의 강도
-신앙이 학문화되고 형식이 되면 생명력을 상실한다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백해무익하다
-제사장, 레위인은 율법주의 에 얽매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모르다. 사랑의 실천 훈련이 없었다
-선한 사마리안인 =예수님을 상징 한다 준미은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신다
-사랑하는 자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랑만이 인간 존재의 비밀을 이해한다 사랑만이 방법을 정당하한다 사랑은 숨겨진 능력을 개발한다 사랑은 생명의 법칙이다 사랑은 이웃을 얻는다
-좋은 일은 즉시 실천해야 한다 나중하려면 행하려는 마음이 식어져서 못한다
-선한 일에는 뜨거운 가슴, 민첩한 손과 발 , 용기, 사랑이 있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행이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6. 마25:31-46 양과 염소의 비유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 리니(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 는 것같이 하여(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 서 보았느니라(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供饋 먹을 것을 드림)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 나이까(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악인들 사단의 종노릇하는 불신자들 )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지옥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 지 아니하였고(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 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늘 시중하다)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 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供養)치 아니하더이까 (자원하는 마음으로)(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실천 여부이다 사랑은 믿음에서 당연하게 나온 사랑이다
미래 심판과 현세의 사랑의 봉사는 연결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만, 인간을 사랑하는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 몰이할 때나 밤에 우리에 둘 때 각기 다른 우리에 둔다
산헤드린 심판 때 무죄자는 오른편에 유죄가 확정된 자는 왼편에 둔다 오른편 + 더 귀한 자리( 한국 고대 상과 반대)
-많은 사람은 혀끝으로 사랑하고 경건한 자는 손끝으로 사랑한다
-의인=택함 받은 자 양과 염소 비슷하다 나중에 가려진다
-의인들(이미 믿음으로 칭의 된 자) 대답: 그런일 없다 ; 그들은 선행조차 잊고 있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였기에.... 자기 공로 잊고 살다
-무념 무이념 무상의 헌신이라야 가치있고 힘을 생기게 한다
-선택 받았기에 무조건 보상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를 선행했기에.... 받은 성령과 연합했기에.... 하나님 능력을 힘입고 순종했기에 보상을 받은 것이다 聖杯찾아나셨던 Camelot 문에 쓰러져 신음하는 거지 물을 달라하기에 물을 던다주니 물을 더다준 컵이 빛나는 성배이다“ ( 거지= 주님) -그리스도 재림대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게된다 양과 염소로 구분된다
-사랑으로 봉사, 헌신하라 (잠31:20)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롬15:1) "(히13:3) " (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 형제에게 한 것 =주님에게 한 것 (마10:40) (마18:5) ""(눅10:16)
-최존자와 최저자를 연결시키는 기독교 윤리는 심오하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결과보다는 동기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다 이웃을 돕는 것은 그리스도를 돕는 것.
최후 상급을 결정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다 충성이다
* 저주받은 자들아 “ ”내아버지께“ 란 말이 없다 저주는 하나님 아버지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다 (지혜서1:1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하셨는데 악한 자는 행실과 말로써 죽음을 자초한다
-사람 아닌 행위에서 저주를 내리심 : 사람은 처음부터 멸망 받도록 예비된 것이 아니다
-저주: 대적한다 타인에게 나쁜일이 일어나도록 바라거나 기원한다
신11:20 우상 좇으면 저주받음 , 갈1:9 다른 복음을 전하면, 고전16:22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자( 친구만치도 사랑하지 않으면)
-의인과 악인은 모드 자기 한 행위를 모르고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
충성된 자는 자기의 善을 계산하지 아니하였고 악인은 그 악을 계산하지 않았다-벵겔
의무 수행 아니하고 그 과오조차 몰랐다 왜냐하면 너무 악했기 때문이다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심판을 받았다 - Carr

-운명은 쓸모에 의해 결정된다 운명은 익숙한 데로 만들어진다 (에서는 사냥에 익숙함)
-선과 악은 우리의 작은 의지에서 시작된다 가장 기초적인 것도 하지않고 산다
-신앙이란 투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행동적이다
시11:6 눅3:17 계20:15 말4:1 악인은 불과 유황불에 던져진다
-무정한 이기주의가 되지 말라 -왼편 있는 자는 계속 자기 공로를 주장하였다
-누구나 모두 심판 받을 때가 온다 -영생, 영벌 (46절) : 조엔 아니오니온
구원의 의무 :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누리는 가장 높은 좋은 생명
벌이던 生이던 미래의 생, 벌은 영원히 계속된다
(마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 으라"
-최후의 심판 : 신앙-성령충만 (10처녀) 사명수행(달란트) 사랑행위( 양 염소) 로 수행된다
-기독신자: 내 형제를 지극히 귀히 여긴다 의인: 기독자에게 사랑행위를 하는 자이다
악인은 사랑의 행위가 없는 이기주의자이다 악한자이다

7. 행2:44-47
(행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공산주익 아니다 공동목적에 쓰려고 헌금 자발적 일시적이었다
(미국 초기 청교도도 일시적으로 공산사회)

초대기독교 공산사회 : 공산주의
내것은 당심의 거이다 네것은 내것이다
네 고통이 나의 고통이다 내 고통은 당신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주다 가져가세요 강제로 뺏어온다 폭력으로 뺏는다
주는자가 주도하다 받는자가 주도한다
신본주의 인본주의 유물사상

-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다
예수 섬기는 것 이웃을 섬기는 것 자기 소유를 팔아 구제한다 눅12:31-34
가정 버린 것이 아니다 한집에 산 것 아니다
자본주의 약점은 능력에 따라 먹고산다 불구자등은 곤경
구제시 태도: 고전13:13 사랑으로 행11:29 힘대로 롬12:8 성실함으로 마6:3-4 은밀하게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 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열심히 모이다 하나님을 찬미했다47절 사랑했다45절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 다 더
하게 하시니라"
평화롭고 기쁘고 바른 생활을 했기에 주님만이 부흥을 시킨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칭찬 받는 이유: 기적, 구제 상부상조 사랑의 교제
박스터 : “신앙 좋은 여자보다 마음이 좋고 온유하고 착한 여자와 사는 것이 낫다
-평등은 자발성 봉사심 친교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한다 공산주의는 피로 이루려한다
가난의 평등만 이루다가 망했다

8. 요13:34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 카이네 = 늘 새로운 , 갱신된 빛나는
-사랑은 수고하는 것 희생하는 것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 이햐하는 것 관심 갖는 것 책임지는 것 존경하는 것 , 주는 것
시각장애자 15만명중 2만명은 시력회복 가능 : 안구 기증자-3000명 일본은 60만명이다
사랑과 미움은 모두 동화성이 있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게 되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면 예수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오직 그 제자들 가운데서만 발견하게 되니까 제자들 사랑 아주 중요하다
-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참사랑= 사랑을 모르는 자도 사랑한다 원수도 사랑한다 의롭게 하는 사랑 (스스로 죄인되어서) 대속적 사랑, 영광된 사랑
** 왜 새계명인가
1) 사랑의 대상이 새롭다 : 이방인까지 사랑한다
2) 새로운 척도(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하기에, (예수님 사랑으로)
3) 새로운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에..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야 가능하기에
4) 동기가 새롭기에 (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5) 레19:18과 대조, 이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6) “ 서로” = 형제애를 명하셨기에
-진실한 사랑 받지 못하면 살아야 할 으지가 없어진다
- 미국 산디애고 에 한 한국전쟁 부상병이 불구자 되어 고향에 와서 어머니에게 전화 “ 어머니 불구된 내친구 평생 데리고 살려고 하는데요? ” 어머니 “ 그건 곤란하다 평생 고생만 하게된다” 이말을 듣고 그 아들은 12층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9. 요15:12-14
(요15:12-14)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제자의 사명 : 서로 사랑하는 것 우리는 기쁨과 사랑을 위해 선택 받았다
-가장 큰 사랑=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 주님은 제자들을 종이라하지 않고 친구라 불러주심 : 너무 황송한 말씀이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 모른다 제자들은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듣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친구가 도어 주신다 내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와주신다 친구관계 아주 중요하다
-친구는 숨기는 것이 없다 친구는 닮는다 어려서부터 사위어야 좋다 닮는다
-교회 나오는 것 친구되신 그리스도 만나고 사귀려고 나온다 도움 청하려 나온다
-그리도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친구이다
-미천한 우리를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같은 인격으로 올려 놓으신다
-예수님의 친구사랑은 희생의 사랑이다 완전의인이신 그리스도는 나 때문에 죄인이 되고
-나는 그리스도때문에 의인이 되게하여 살리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값을 치룬 사랑이다
-사랑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13절 나누는 것=15절 서로 위해 기도하는 것=16절
-친구가 되는 조건 : 순종 , 사랑 , 신뢰
-친구되신 예수님과 매일 사랑하라
(잠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종은 비천하다 주인의 소유믈이다 빌1:1 롬1;1 약1;1 사도들은 끝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다

10. 요일3:11-18
(요일3:11-18)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예수님 새계명) 이는 너희(신자들)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멧세지)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아가페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예수믿어 영생을 누리느 줄 : 사랑함은 영생 조건이 아니라 영생 누리는 자의 증거이다)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영적으로 여전히 죽어있다, 거하지않다=갖지 않다=영생을 누릴 지속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사랑의 본질)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푸쉰켄: 여원한 생명 조에도 아니고 단순한 생물학족 생명 비오스도 아니다 정신적 의지, 정서가 항상 움직이는 생명, 혼의 생명이다)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과 같은 그런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말할수 없다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시시한 무가치한 말)과 혀(겉치례의 말, 빈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사랑의 역동적 측면)과 진실함(사랑의 질적 측면)으로 하자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참 생명을 주실 때 생명의 본질인, 하나님 성품인 사랑도 주신다 이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자녀가 아니다 그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지 못하느 것은 욕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이 영생의 조건은 아니지만 형제 사랑이 없느 자면 하나님 자녀가 아닌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영생이 없음이 분명하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가 도움을 청하든 아니하든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자기 의지로 그 동정심을 막기도하고 도욱 충분히 열기도 하여 돕고 섬기게된다
-허위는 항상 나쁘다 사랑의 허위는 더욱 가증스럽다
-사랑의 결핍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불명예스럽게 한다
-마귀 특성은 미움, 살인 , 성령하나님의 역사는 사랑, 살리는 것 이다

11. 빌2:3-5
(빌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분쟁,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교만은 마귀의 본성이고 가장 나쁜 것이다 교만은 악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유대인 격언)
-자기보다 남을 낫게( 낮게 하면 큰일이다) 여기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은 하나님앞에서 두려워섬기며 그분을 전적으ㅗ 의지하며 감사하며
이웃에게는 존경하며 섬기는 것 , 자신에게는 바른 평가를 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 부인을 통해서 가능하다 자기소유, 자기생각, 의지, 공로, 자랑, 계획 수단, 이익을 부인해야 한다 부인하지 않으면 부인하도록 하나님은 용광로에 집어 넣으신다
-겸손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 가치 , 재능, 능력을 하나님위해 , 이웃을 위해 사용하여 서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때까지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하지 말라
-제자는 예수님 처럼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가는 자이다 예수님 따라가야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다



“섬김”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둥병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열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유창한 설교를 하시지도 않았고 정통 진리를 선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야단을 치시지도 않았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 기도 소리를 들은 강도 한 사람은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한 강도가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예수님께서는 그 강도를 향해서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강도도 놀라고 로마 군인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런 예수님이 정말 의인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아마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은 평생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사실을 전하면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어루만져 주심으로 나타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심으로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몸과 영혼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와 같은 귀중한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중한 설교를 유창한 말로 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신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에서 우러나온 삶의 고백이었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권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그러면 이제부터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지적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또한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선지자 이사야가 지적했습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목회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성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그러면 이제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 얼마나 귀중한 삶과 사역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해서 묘사하는 성경말씀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센병자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섬기셨고,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각색 병자들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면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그리고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4-27).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고 섬김의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의인 의식을 지닌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권위를 버리시고 친히 낮아지셨고 착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착해지심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신데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착해지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 심지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착한 일을 행하려면 낮아져야 하고 죄인의 모양을 지니고 두루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한 여인에게 착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는데,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피곤하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을 취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7). 그리고 마지막에는 강도와 같은 죄인의 모습을 지니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섬김과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었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섬김의 삶과 사역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교만과 위선과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극치로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낮아짐과 착해짐과 섬김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 1:9). 사도 바울은 기근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 15:25). 착함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면서 주인이라고 부르는 대신 낮추면서 “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빌1:1). 사도 바울은 주님의 종이 된 이후 자기의 의지와 계획과 기질과 취미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고,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면 마게도냐로 갔고, 로마로 가라고 하면 로마로 갔습니다.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라고 하면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매를 맞으라고 하면 매를 맞았고 풍랑의 위험을 당하라고 하면 풍랑의 위험을 당했고 순교하라고 하면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이방인 교회를 섬기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섬기면 섬길수록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생기고 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진정한 기쁨이 소유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섬김과 성도들 섬김에서 오는 것을 발견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생명을 사랑과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섬김의 삶을 살다가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셋째로, 빌립보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착함과 섬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들이, 욥바에 살던 다비다 즉 도르가도, 가이사랴에 살던 백부장 고넬료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자였던 바나바는 누구보다도 가장,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도 착함과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착함과 섬김의 삶과 사역” 덕분에 예루살렘과 욥바와 가이사랴와 빌립보에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 9:4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2-4).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 16:40).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루디아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옷감 장사를 하던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본래 고향은 두아디라였는데 옷감 장사를 더 잘 하기 위해서 마게도냐의 한 도시인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 자주 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서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면서도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3절에 보면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과 함께 빌립보 강변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14절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또는 ‘경외’하는 사람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고,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루디아를 귀하게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와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섬세하고 오묘하고 아름답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행 16:13-14).

결국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강변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결국 섬김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도 바울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빌립보 사람들을 섬기고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섬김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첫 단계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인데,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청종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둘째 단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셋째 단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 일인데, 루디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바울과 실라와 누가를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넷째 단계는 자기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로 삼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의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를 삼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결국 루디아는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두드러진 아름다운 주제가 “교제”와 “섬김”과 “기쁨”인데, “교제”와 “섬김”과 “기쁨”은 루디아의 “교제”와 “섬김”과 “기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디아는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권사님들과 여집사님들에게 루디아와 같은 섬김의 사람들이 되라고 항상 권면하곤 했습니다. 사실 강변교회의 모델은 빌립보교회였습니다.

넷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인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이 매우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이나 화려한 프로그램보다는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사랑의 섬김과 봉사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떼들로 낮에는 한센병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한센병자들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윤함에 사모님은 섬김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가슴에 채워주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순수한 기쁨과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이기풍 목사님은 함께 제주도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정양순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그분의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들 섬김은 매우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와 섬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님은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 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정양순 사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긴 분이었고, 그 다음 남편을 섬긴 분이었고, 그리고 한센병자들을 섬긴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한센병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한센병자 교회였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 섬김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양순 사모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함께 여수와 순천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 섬김과 이웃 섬김으로 한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님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한국의 언론들은 그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 있는 작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이었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이나 감동적인 설교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인데, 장기려 박사님이야말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든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모니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 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장기려 박사님은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여명의 간질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무엇보다 예수님만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받고 섬기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분은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한평생 사모님과 자녀들을 평양에 남겨 두고 온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지만,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으로 어두워진 한국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또 하나의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섬김의 밝은 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것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성공이 아닙니다. 많은 물질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삶과 사역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주님과 교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착하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섬김의 삶을 살고 그런 섬김의 사역을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기적인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의 “섬김의 삶과 섬김의 사역”을 흠모하고 본받으면서 섬김의 삶을 살고 섬김의 사역을 하려고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1988년 여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라는 나라를 찾아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 15개를 파주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병원을 하나 지어주기도 했고, 노재인이라는 영양사 한 사람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부터 홍수와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1999년경부터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고아 어린이들 160여명을 돕는 일을 지난 14년 동안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지어 주고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대표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13대의 대형 트럭에 싣고 황해도 개성에 가서 그곳 민화협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2014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방문하고 테러로 130여명이 생명을 잃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한 역사적인 교회인 올 세인트 교회의 성도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음을 날마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착해져야 하고 따뜻해져야 하고 부드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고 자기 자신을 열어서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눈물을 지니고 함께 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셔서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복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14장(새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1절을 두 번 부르겠습니다.
















04-05-2024(금) 누가복음 22:14-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파는 자의 손(21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But the hand of him who is going to betray me is with mine on the table.










04-04-2024(목) 누가복음 22:7-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월절을 예비하니라(13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They left and found things just as Jesus had told them. So they prepared the Passover.

유월절은 애급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들을 구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의 유래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후 그 집안에 머물던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을로 들어가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그에게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큰 다락방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유월절을 예비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때가 되면 예루살렘을 떠났던 많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주로 나사렛이란 곳에서 활동하셨지만 뮤월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더구나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절기가 될 것입니다.

어린 양이 속죄의 제물로 바쳐진다면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월절 희생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무엇을 예비해야 할까요?
우리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예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예비해야 하겠습니까?

신랑이 되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정결한 세마포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마포 정결한 옷은 "거룩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구별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정의(正義)와 사랑(愛)과 분배(分配)라는 기준입니다.

정의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지킬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평등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분배는 높고 낮음이 없고 많고 적음이 없는 서로 돕는 힘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이런 기준이 흔들리고 붕괴되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라는 수치스러운 말이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모두가 한 형제 자매라는 진리에 따라 서로 돕고 나눔을 통한 새로운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초석(礎石)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율로 어온ㅁ  이이므로 더욱 되ㅣㄹ 으로 모여을 찾아ㅇ로

때는 유월절 그리고 무교절이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아빕월(출 13:4; 34:18; 신 16:1) 혹은 니산월(4월) 14일, 그리고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직후 일주일로 니산월 15일부터 21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무교절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합쳐서 유월절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고 있었다”고 말했고, 마가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말합니다(막 14:1).

유다의 배신은 무교절 이틀 전인 수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배신한 시점이 유월절 하루 전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밤이 유월절 밤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눅 22:52).
왜냐하면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년 애굽(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애굽 땅의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습니다(출 12:29).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는데,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출 12:30).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처음 난 생명을 죽이실 때, 죽임을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가족 대신 죽을 희생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대문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잡고 우슬초 묶음으로 그릇에 담은 피를 적셔 그 피를 문 인방(위, 아래)과 좌우 설주에 바르고 그 밤에 집 안에서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효모를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출 12:5~14).

죽은 양의 피를 보면 여호와께서 그 집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리라” 약속하셨고, “유월절”의 뜻이 바로 “넘어가다”였습니다(출 12:13). 이스라엘은 영원히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출 12:24).
나중에 자녀가 유월절의 의미를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27).

출 12:27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유월절은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모세의 때로부터 예수님의 때까지 약 1500여년간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통해 구원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이 특별한 날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러 오셨지만(요 1:29), 그렇다고 해서 배신자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하지만 유다만 배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던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2절). 

2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대제사장들은 정치적인 영향력과 힘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율법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함께 모여 심각하게 논의합니다(마 26:3). 예수님을 “무슨 방도로 죽일까”에 대한 궁리입니다. 이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참 대제사장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니(요 14:6)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죽이고 싶을만큼 말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으로 백성의 죄를 깨우치게 하고,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고, 구원의 약속을 이루러 왔다고 하자(마 5:17),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율법으로(요 5:39)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고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해서든 고소할 거리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모든 논쟁을 이기시고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약이 바짝 오르고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을 것입니다.

정말 할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백성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부터, 성전에서 가르치는 내내, 예수님을 기대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에 적어도 2백 70만명의 순례가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로마는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대비하여 많은 병사를 투입시켰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도 낮에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명절에 모인 수많은 백성이 민란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었습니다(막 14:2).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몰래 잡아 죽이고 싶어도, 소문 내지 않고 비밀리에 예수님이 묵고 있는 곳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의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해줄 해결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배신자 유다입니다. 유다라면 예수님이 있는 정확한 장소를 그들에게 몰래 알려줄 수 있습니다. 유다가 그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절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가룟인(유대사람) 유다, 그는 열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 중 한 이름 없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택하신 열두 제자, 사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눅 6:12). 

예수님이 몰라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70).

그러면 유다는 어차피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이라 아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았을까요?
그에겐 아무런 은혜도 비취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항상 옆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그분과 교제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잠잠케 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눅 9:1-6).

다른 제자들과 함께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했고(마 14:33),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떠났을 때 남아서 베드로와 함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요 6:68-69).

하지만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마 7:21).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

참된 주의 제자는 단지 주를 지식적으로 알고 부르는 것에 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제자는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가룟 유다는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항상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깊은 사랑과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풍성히 누렸지만, 그분의 말씀을 좇지 않고 따르지 않는 거짓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이라 불렀습니다(요 17:12).

사탄은 이 거짓 제자를 통해 악한 일을 이루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입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간 예수님을 직접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고(마 4), 그 이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막으려 했습니다(마 16:23). 그리고 이번에는 “멸망의 자식” 유다를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사탄의 뜻을 좇아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성전 경비대장들은 로마 군사가 아니라 성전의 경비를 맡은 유대인 경찰 장교들입니다.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논의하는데, 어떻게 예수를 넘겨줄 지 방법을 함께 찾습니다.

당연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어땠을까요? 막힌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겠지요? 그들은 아주 기뻤습니다. 드디어 예수를 잡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배신자 유다에게 예수를 판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 유다는 “내가 예수를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냐?”고 묻습니다(마 26:14). 그리고 당시 노예가 거래되는 가격인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마 26:15). 

그때부터 유다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예수님을 몰래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마 26:16).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2세기 무렵 영지주의 분파에서 쓰인 유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유다에게 ‘나를 팔아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으니 배신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레네오 주교(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의 제자)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말한 것처럼 성경을 통해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어떤 원한이 있었을까요?

후에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은 삼십을 대제사장에게 도로 가져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마 27:3), 그는 예수님에게 어떤 원한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배신한 것일까요?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유다가 돈궤를 맡은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돈궤 안에 있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요 12:6). 한 마디로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 정도로 그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눅 16:13). 한 손에 하나님을 또 다른 손에 돈을 쥘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 유다는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다 나를 사랑하고, 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사랑하고, 세상의 풍조와 내 욕심을 좇는 것, 그것이 죕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 곧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성공, 인기, 명예, 돈, 안정된 삶, 계획대로 이루어진 평탄한 삶, 그런 것을 잡으려 애씁니다. 그래서 언제든 손에 쥔 그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쥔 손을 놓아버리는, 배신자같은 삶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분노하고, 낙심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8).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음도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빌 1:21).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만 붙잡는 삶입니다. 한 손에 다른 것을 잡고 있지 않은 삶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삶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님만 사랑하는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그리스도가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빌 3: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선택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위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줄 준비, 죄인을 위해 희생양으로 대신 죽을 준비를 하셨습니다.

2. 구원을 준비하는 예수님(7~13절)

7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다음날이 되어 목요일,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날을 “무교절”, 마태와 마가는 “무교절의 첫날”(마 26:17; 막 14:12)이라고 부르는데, 유월절을 포함한 전체 절기의 첫 날을 가리킵니다. 니산월(4월) 14일 목요일 저녁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 준비를 위해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핵심적인 제자들입니다.

8절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절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냐?”는 질문을 모든 제자가 함께 합니다(마 26:17; 막 14:12). 그 안에 누가 있었을까요? 배신자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정확한 위치를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했다면 함께 듣고 있던 유다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대제사장들에게 그 장소를 밀고하여 예수님을 잡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주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던 유월절 만찬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눅 22:15).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언약이 맺어졌다는 의미를 설명할 아주 특별한 식사를 하지 못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년 어린양을 죽일 필요가 없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포할 특별한 식사입니다. 

또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임 당하는 그 날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일찍 잡히셨다면 그 정확한 시간보다 먼저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정확한 장소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예전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가서 나귀를 풀어 오고 주인이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함께 먹을 장소를 알려주실 때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정확히 예비하신 장소를 찾아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는데, 원어로 보면 그 사람은 남자입니다. 당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였기 때문에 그는 눈에 쉽게 띄였을 것입니다.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거든 그 주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11절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절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당시 유월절 순례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공간을 내어주었지만, 이 사람은 누가 선생인지, 누가 그 선생의 제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집 주인이 예수님과 이미 이야기를 마친 사람으로 예수님이 미리 유월절 식사하실 곳을 계획하셨다고 말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 집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집이었고, 집 주인은 마가의 아버지였으므로 말이 안 되는 설명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마가의 아버지는 제자들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그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8). 그래서 이것은 미리 계획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으로서 정확하게 장소를 예비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13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성 안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를 따라 집 주인을 만났고, 주인이 보여주는 큰 다락방을 보았습니다. 1층 주인집 위에 올려진 2층의 공간으로 계단을 타고 따로 출입할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큰 방이었습니다. 가운데 테이블이 놓여 있고 누워서 식사할 수 있도록 자리가 펴져 준비 되어 있는 방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당시 한 가족을 대표로 희생양을 제사장에게 가져올 수 있는 최대 인원이 2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내셨는데, 그들은 양 외에도 쓴 나물, 포도주, 무교병 등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먹을 충분한 양식을 준비하느라 바빴을 것이고(막 14:16), 날이 저물어 예수님과 나머지 제자들이 다락방에 합류할 때까지 계속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그 장소를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마 26:20).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죽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셨던 예수님, 베드로와 요한이 그 특별한 만찬을 준비하는 동안 예수님은 배신자 가룟 유다와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그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그분은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그분의 영광을 계속해서 비추셨을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다락방에 모든 제자가 모였을 때, 마귀는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지만, 예수님은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요 13:2-5). 

떡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유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말씀하시고, 그와 저녁을 함께 먹고 잔을 그와 함께 나누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14~20).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심령이 괴로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토로하셨습니다(요 13:21).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던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예수님은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까지 그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기를 팔아서 살인자의 손에 넘길 사람을 처음부터 알았으면서 다른 제자와 똑같이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고, 자기를 넘길 기회만 찾고 있는 제자의 발을 씻기고, 그에게 자기 살과 피의 의미를 설명하며 돌아올 기회를 주는 사랑,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영생을 얻기를 끝까지 오래 참고 온유하게 기다리는 사랑

유월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얼마나 오래 방황하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생을 받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외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더 이상 배신하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불신하지 말라고, 하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외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그 사랑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하라고, 형제 자매를 그 사랑으로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라고, 그 사랑 때문에 모이기에 힘쓰고, 그 사랑 때문에 봉사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나가 전파하라고 우리를 강권합니다. 여러분 그 사랑의 부르심을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오늘 돌이키십시오. 오늘 순종하십시오. 오늘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으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배신하는 연약한 우리를 일으키는 유일한 힘은 주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04-03-2024(수) 누가복음 2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Then Satan entered Judas, called Iscariot, one of the Twelve.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는 누구나 속죄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제물로 준비하셨습니다.
제물을 죽이려면 누군가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품게 하므로 희생 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생각을 통하여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의 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의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만드는 것은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도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반드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만일 잘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후에 그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은 30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고 합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집어 넣는 생각의 특징은 부정한 것이며 거짓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했던 12명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그 땅을 목격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대한 고백은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와 있다로 나뉘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차지할 수 없다는 정탐꾼들의 수가 월등하게 많습니다.
그만큼 사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대부분의 부정적인 것들이 세상을 차지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참된 것은 오히려 그 수가 적기 때문에 마치 거짓에 의해서 쫓겨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진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교훈을 잊지 마시고 언제나 진리편에 설 수 있는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부정한 생각을 거룩한 생각으로 다스리며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기도합시다.

십자가 군병들아



존 파이퍼 / 사탄의 열 가지 전략

존 파이퍼 목사
자신이 운영 중인 '하나님을향한갈망'(DesiringofGod.org) 블로그에
'여러분을 향한 사탄의 10가지 전략'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삶에 있어서 우리를 가장 각성시키는 사실은 모든 인류에게 초자연적인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의 목적은 고통과 기쁨을 이용하여 영원히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그를 '마귀 그리고 사탄, 전 세계를 속이는 자, 참소자(12:9~10), 세상의 주관자(요 12:31),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표현한다.

사탄의 공격 방법
그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우리의 대적(벧전 5:8).

그러나 가장 끔찍하고 원치않는 구속 가운데,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 2:2)을 따르고 있다.
사탄의 길은 분명히 파멸이며, 사탄은 가능한 많은 이들을 자신의 길로 끌고가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깨어 전쟁에 임하라'는 제목으로 기록한 '선한 싸움'(딤 1:18)에는 날마다 이 원수를 대적하고(벧전 5:9, 약 4:7), 날마다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엡 4:27), 날마다 그의 계략에 대항하는(엡 6:11) 것들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사탄의 열 가지 전략

1. 거짓말쟁, 거짓의 아비(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니니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거짓을 말한다. 그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의 입술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진리에 대한 의심이었다("하나님께서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두 번째 나온 말은 교묘한 거짓말이었다("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린다(고린도후서 4:4)

이 세상의 신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그는 거짓을 말할 뿐 아니라 참된 것을 숨긴다. 그는 복음의 귀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우리가 사실과 증거들을 보면서도, 그 귀한 가치는 알지 못하도록 가리운다.

3. 빛과 의로움의 옷으로 가장(고린도후서 11:13-15)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체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이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탄의 종들이 스스로를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즉, 겉으로는 교회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말하지만 안으로는 바울 사도가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사탄의 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마7:15)와 같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20장 30절 말씀은 이들이 무리들을 끌어내어 멸망으로 이끈다고 기록돼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별의 은사(빌1:9)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우둔함에 빠질 수 있다.

4. 사탄은 기적을 행한다.

데로니가후서 2장 9절은 마지막 날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마치 이러한 기적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사탄이 거짓된 기적들만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설령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사탄의 거짓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 충분히 진짜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해 죄짓게 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계실 때, 그분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고통과 순종의 길을 포기하길 바랬다(마4:1~11).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삶에서 유다를 유혹하는데는 성공했다(눅22:3~6).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전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6.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고, 신앙을 죽인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에 나타난 4가지 밭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땅에 뿌려지는데 일부 씨앗은 길 가에 뿌려져서 새들이 재빨리 먹어버린다. 주님은 15절에서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말씀을 빼앗아간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롬 10:17).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염려의 말씀을 전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신앙을 죽이려는 사탄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7. 아픔과 질병(누가복음 13: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허리가 굽어져서 스스로 펼 수 없는 한 여인을 치유해주셨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이같은 일을 행한다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은 "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같은 질병의 원인이 사탄에게 있음을 아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증거한다. 즉, 사탄이 병으로 사람들을 누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의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분명 '육체의 가시'가 우리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사탄의 사자가 될 수 있다(고후 12:7). 그러나 질병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인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운 계획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을 데려올 필요를 못 느끼셨다.

8. 살인자(요한복음 8:44)

너희는 마귀의 아비로부터 나왔고, 그 아비의 일을 행하려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요한 사도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라고 하였다(요일 3:12).

서머나 교회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하였다(계 2:10).

사탄은 피에 굶주려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충만케 하려고(요10:10)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사탄은 할 수 있는대로 생명을 빼앗고, 결국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고자 한다.

9. 사역자들의 계획을 대적(데살로니가전거 2:17-18)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은 전도와 제자도를 싫어한다.
그는 선교사들을 비롯해 전도에 열정이 있는 이들의 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해물들을 던져 놓는다.

10. 성도들을 고소한다(요한계시록 12:10)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나고.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러나 그의 고소는 그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 될 것이다.

사탄은 욥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한다.
사탄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해 "그들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이 주시는 이익만 바라본다"고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그들의 신앙은 진짜가 아니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분(히 7:25)'이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영광스럽다.

사탄은 결국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그리스도를 굳건히 붙드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골로새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마가복음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인 가롯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
예수님이 직접 선발하신 12제자중 하나이고,
하나님이신 예수님 가까이서 3년을 지냈어도 사단이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사단에 잡혀서
큰 죄를 지을 것을 알면서도 제자에게 들어가 있는 사단을 쫒아주지 않으셨다.

가롯 유다는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틈을 열어 두었고,
예수님은 유다의 선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셨다.
유다가 자신에게 사단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회개하였으면
주님은 그때 유다에게서 사단을 몰아내어 주셨을 것이다.

오늘 이른 새벽에 마귀에 이끌려서 갖고 있던 것들을 버렸다.
사단에게 마음과 시간을 뺏겨서는 안된다.
언제 떠나도 괜찮도록 부끄러움을 주는 흔적들은 정리해 나가자.
 

주님!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혹시 제게 사단이 들어오게 되면 성령의 도움으로 즉시 감지하게 하시고,
바로 회개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1. 사단에 대해 민감할 수 있도록 기도에 게으르지 말 것 
2. 불필요한 것들 가지고 있지 말 것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방책을 연구하고 있을 때, 때마침 가룟 유다가 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했습니다.
백성들이 무서워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는데 가룟 유다가 찾아 온 것입니다.
도대체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그들에게 돈을 받고 팔 생각을 했을까요?
유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단은 영적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사단은 증오와 적개심이 가득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단은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거래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은 유다에게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합니다.

​31. 사단은 성도를 감옥에 던져 환난을 당하게 합니다.

​계 2 :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32.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계 12 :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33.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믿는 자들을 참소합니다.

​계 12 :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34. 사단은 지상에 큰 재앙을 일으킵니라.

​계 12 :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35.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하는 이 세상 신입니다.

​고후 4 :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36. 사단은 이 세상 임금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입니다.

​엡 2 :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7. 사단은 흑암의 권세 자입니다.

​골 1 :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38. 사단은 귀신의 왕입니다.

​마 12 :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39. 사단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마 12 :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0. 사단은 악한 영입니다.

​마 13 :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1. 사단은 가인을 통해 아벨을 죽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또 다른 아들 셋을 주셨습니다.

​창  4 :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 사단은 세상사람들을 사악하게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창 6 :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43. 사단은 에서를 통해서 야곱을 죽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창 27 : 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4. 사단은 바로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처음난 남자를 다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원하셨습니다.

​출 2 :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45. 사단은 다윗의 아들들이 서로 죽이며 권력다툼을 하게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 명의 생명은 보존하셨습니다.

​삼하 13 :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46. 사단은 하만을 이용해서 유다민족을 멸절하려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통해서 민족을 살려주셨습니다.

​에 4 :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47. 사단은 헤롯 왕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현몽하여 예수님을 보호하셨습니다.

​마 2 :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48.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실패하게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마 4 :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9. 사단은 세상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요 19 :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마 28 :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사단은 지금도 사람을 속이고 불신하고 실족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대적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않으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정신은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마 28 :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는 분명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그에게 사단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고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노렸던 대상은 가룟 유다 뿐 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포함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어 사단의 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사단에게 패배하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3:2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이미 오래전부터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넣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4:7에서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마음에서 “악한 생각”을 다스려 제거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을 다스리지 못한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유다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마음을 잘 다스려 악한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들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사단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자희들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도와주옵소서.
마귀를 대적하게 하시고 악한 생각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언제나 말씀과 기도로 살게 하옵소서.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께서 인도해 주심을 믿고 언제나 믿음으로만 나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실수하지 않게 하시고 조금이라도 악의 모양을 흉내 내지 않게 히옵시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한 페친의 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게 됐다.
그의 아들 결혼식 때 친구가 보낸 축의금 얘기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아들 결혼식 축의금으로 백만 원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때 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그는 사정을 알고 거금을 보내준 친구가 너무도 고마워서 콧등이 시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 백만 원은 큰 힘이 되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데 그런 그에게 문제가 하나 생겨났다.
얼마 전 그 친구로부터 아들의 결혼 청첩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에게 백만 원 받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번엔 자기 차례가 된 것이다.
축하해줘야 하는 기쁜 마음보다도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그때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도 그만한 액수를 축의금으로 내야 한다.
하지만 살기에도 빠듯한 현재의 어려운 형편 탓에 똑같은 액수의 축의금을 어떻게 마련할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백만 원 축의금을 받아 힘든 살림에 보태 쓰면서 누렸던 행복과 고마움이 한순간 깊은 염려와 부담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마침내 아내와 상의를 한 결과 빚을 내서라도 그에게 백만 원의 축의금을 하기로 결정했다.

 

[4] 사실 축의금이란 축하의 의미로 선물하는 돈이기도 하지만 서로 상부상조한다는 뜻도 있다. 결국 빚을 내서 마련한 백만 원을 가지고서 결혼식장에 갔다. 친구는 와줘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손님들 때문에 바쁜 틈이지만 안부까지 물어주는 것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부부는 돈을 빌려서라도 빚을 갚게 된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일 같은 금액의 축의금을 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보다 큰 마음의 빚으로 남을 것 같았다고 한다.

 

[5] 그런데 며칠 후 집으로 등기 우편이 배달이 되었는데 발신인은 며칠 전에 혼례를 치룬 그의 친구였다. 결혼식에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카드를 등기로 보냈나 하고 뜯어 봤더니 낯익은 친구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 형편을 다 아는데 축의금이 다 뭐야?

그리고 어려운 자네 형편에 백만 원이 무슨 소리야?

 

[6] 만원이면 족하네.

여기 구십구만 원을 돌려보내니 그리 알게.

이 돈을 안 받는다면 자네를 친구로 생각지 않겠네.”

그 내용과 함께 구십구만 원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다음은 그 글의 내용과 함께 친구가 보낸 구십구만 원짜리 수표를 받아든 내 페친의 글이다.

 

[7]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런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요!

진정한 친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8] 날이 가면 갈수록 정서가 메마르고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엔 눈물겨운 일도 감동받는 일도 많았건만 지금은 그럴 일이 별로 없다.

이런 때에 오랜 만에 깊은 감동을 주는 스토리가 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페친의 친구가 보인 친구를 향한 배려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페친의 에피소드에 모처럼 크게 행복한 하루가 된 것 같다.

 

[9] 오늘 내게는 이런 친구가 몇 있는지? 아니 나는 다른 이에게 이런 친구가 되고 있는지? 우리에겐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친구’(요 15:13) 말이다. 누구일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신 친구는 없다.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주변 친구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오늘 페친의 친구처럼 언제나 감동과 감격을 주며 사는 참 친구가 되어야겠다.





사탄의 계교에 무너진 가룟 유다(누가복음 22:1-6)

22장은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의 제3일인 화요일에 발생한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1-6절)으로 시작하여 제6일인 금요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체포 사건과 공회에서의 심문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이 예언되고 성만찬이 제정되며,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의 예언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최후의 기도 및 예수의 체포와 심문이 이어지는 매우 급박한 사건 가운데서도 본서 저자 누가가 특별히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22장에서 강조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첫문단에서 시작된 가룟 유다의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음모(1-6절)가 마지막 부분에서 산헤드린에 의해서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 주며(63-71절), 그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일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24-30절)과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하며 겟세마네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잠을 자는 제자들의 모습과(39-46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54-62 절) 등을 보여 줌으로써 구속사가 성취되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전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한없이 무디고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장의 첫문단인 1-6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인 1, 2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산헤드린의 예수 살해 음모와 관련한 고민을 다루며, 후반부인 3-6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을 다룬다.
즉 1, 2절은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정했지만, 백성들 때문에 두려워하는 모습을 기록했으며, 3-6절은 가룟 유다가 산헤드린을 찾아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으나(마 26:1-16 ; 막 14:1-11) 그 구성이 조금 다르다.
마태와 마가는 산헤드린의 고민과 가룟 유다의 배반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록한 반면에(마 26:6-13 ; 막 14:3-9) 누가는 이 기록을 생략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향유를 부은 자를 책망한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은 정확히 그가 가룟 유다임을 밝혔다(요 12:4).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록에 근거해서 마태와 마가복음을 자세히 보면 돈을 사랑하는 가룟 유다의 심경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마태와 마가 및 요한은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하게 된 심경의 변화 단계를 보여 주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갑작스럽게 가룟 유다의 배신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누가는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독특한 표현을 통하여 가룟 유다의 배신의 근본 원인이 무엇임을 분명히 밝히지만(3절) 그의 본성의 단면과 심경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 향유 도유 사건은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전 토요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의 불신앙과 마리아의 헌신된 신앙을 비교하기 위해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기록한 것이다.

​반면 누가는 과감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강조할 것은 강조하면서 마태와 마가보다 더 정확한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22:1-6의 첫 문단은 고난 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예수를 살해하고자 혈안이 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이 배반자 가롯유다와 결탁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자 음모를 꾸민 사실을 보도한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유월절이라 불리는 무교절’이 된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로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출 12:8-11).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정월인 니산월 14일 저녁에 4일 전에 준비한 1년된 홈없는 양을 잡아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먹었다.
이것은 B.C. 1446년에 있었던 출애굽할 때 상황을 재현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늘 기억하며 감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의식이다.

​그리고 무교절은 그 다음 날 아침부터 1주일 간 무교병을 먹으면서 출애굽 당시 발효하지 않은 빵을 먹은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무교절은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누가가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연속성으로 인해 이 둘을 한 절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는 아예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표현하여 같은 날처럼 기록하였다(막 14:1).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런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 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본절은 당시 유대의 최고 입법 · 사법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 차원에서 예수를 제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일꼬’로 번역된 ‘아넬로신’의 원형 ‘아나이 레오'는 ‘위로’라는 뜻의 ‘아나’와 ‘취하다’는 뜻의 ‘하이레오마이’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땅에서부터 들어올리다’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물에 사용되면 ‘제거하다’, ‘폐지하다’는 뜻을 갖고(히 10:9), 사람에게 사용되면 ‘살해하다(slay)', ‘죽이다’는 뜻을 가진다(마 2:16).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 었으며 존재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연구하니’로 번역된 ‘에제툰’은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제테오’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어느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매우 집요하게 노력하였음을 의미한다.

누가는 본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는 데 반해 마태와 마가는 그들이 두려워한 구체적 내용, 즉 민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마 26:5 ; 막 14:2). 사실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할 때 예수를 메시야나 선지자로 알고 따르던 무리들의 소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음해하려 할 때 항상 발생하는 걸림돌이었다(눅 19:48).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사탄이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로 들어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반 사건이며 인간이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전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가룟 유다의 배반이 3-6절까지 기록되었다.

이 문단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죽일 방책을 찾으며 고민하는 산헤드린을 찾아가 함께 예수님을 죽일 방책을 의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와 마가는 2절과 3절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발생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을 기록했다(마 26:6-13 ; 막 14:3-9).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기록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자 돈을 좋아하는 가룟 유다의 성향을 잘 보여 주는 사건으로 향유 도유 사건을 제시했지만, 누가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이유조차 제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 즉 누가는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공관 복음은 모두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마치 유다가 인간적 동기로서 스스로 산헤드린에 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마 26:14 ; 막 14:10), 누가는 사단이 산헤드린으로 가도록 원인 제공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들어가니’로 번역된 ‘에이셀멘’의 원형 ‘에이세르코마이’는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나타내는 단어로서(눅 9:46), 본절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단의 영향력을 가리킨다(행 5:3). 누가는 유다의 배신의 궁극적인 원인은 사단에게 있다고 분명히 지적한다. 이러한 기록은 요한복음에 더 자세하게 나타난다.

요한은 사단이 마음속에 들어가는 과정을 2단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첫번째 단계는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고’(요 13:2)이며, 두 번째 단계는 ‘사단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요 13:27)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수난이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유다 배후에 있는 사단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단지 유다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사단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 광야에서의 유혹이 실패한 후(눅 4:13) 다시 본절에서 예수님을 향한 강력한 도전을 하고 있다. 광야에서 실패한 뒤 사단은 자신이 부리는 종 귀신들을 통해 역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은 날로 쇠약해져만 갔고(눅 13:16), 하나님의 나라는 날로 왕성해져 갔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바로 앞에 두고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된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부름 받은 자라 하더라도 전심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사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엄청난 반역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순수한 동기를 저버리고 탐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요 12:6) 사단은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들과 더불어,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였다.

아마도 마태의 기록처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는 식의 유다의 흥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마 26:15). 그리고 산헤드린의 주된 고민거리였던 민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수 주위에 무리가 없을 때를 포착해 잡기로 의논했을 것이고(6절), 잡을 때에는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을 신호로 삼기로 정했을 것이다(48절). 물론 이 모든 일은 사단에 사로잡힌 유다가 능동적으로 주도하여 나갔을 것이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은전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어 스승 예수를 원수의 손에 넘긴 탐욕에 눈이 먼 유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데에는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진 것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가 있었으며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유다에게 접근 했을 것이지만 탐욕도 주된 원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구약에서 발람이 그랬던 것처럼 가룟 유다 또한 동일하게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사단의 도구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값비싼 향유로 헌신하는 마리아의 향유를 아까워했던(요 12:6) 유다는 결국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재물에 대한 탐심을 가지는 것은 마음의 열쇠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유다는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테르 오클 루’는 ‘무리가 없을 때’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마태와 마가의 병행 구절에 나오는 바대로 ‘민란’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는 직접 ‘민란이나 소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시적 언어와 중의적 단어를 결합시켜 독자로 하여금 동일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문학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대제사장들이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이유는 많은 무리로 인하여 일어 날 수 있는 민요를 두려워했기 때문임이 본절의 묘사 가운데서도 잘 드러난다.

예수를 잡으려는 음모 ( 22:1-6 )

무교절이 가까운 때에 그리스도를 넘겨 주었다(1절)

1. 원수들의 음모(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음 먹기만 하면 곧 실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 했다.

2. 그들과 결탁한 배신자 가롯 유다(3,4)

가롯 유다는 열 둘 중에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열 둘 중의 하나가 비열하게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다. 즉 사단이 들어간 것이다(3절). 그것은 마귀의 소행이었다. 그리스도나 그의 진리나 그의 길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단이다.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를 유다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4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의논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3. 그들 사이에 맺은 협정(5,6)

1)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틀림없이 넘겨주기로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기뻐했다.

2) 그 대가로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했으며 유다는 이를 기뻐했다(5절). 저희가…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유다는 찾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일을 행할 시간과 장소 즉 무리가 없을 때 소동 없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가룟 사람 유다’란 뜻.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유다를 말한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양하다’는 뜻이다.
예수의 제자 중 ‘다대오’라 불리는 유다(야고보의 아들, 마 10:3)와 구별하기 위해(요 14:22) ‘가룟 유다’라 칭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았고(마 10:1-2; 막 3:19; 눅 6:13), 회계 관리자(요 12:6; 13:29)로 재정 일을 맡아보았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마 27:3).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그러나 진실된 회개는 하지 않았다)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은 30을 성소에 던진 뒤(마 27:3-5) 자살하였다(마 27:5; 행 1:18).
마태는 그가 목매어 죽었다고 하고(마 27:5), 누가는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전한다(행 1:18).












04-02-2024(화) 누가복음 21:34-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깨어 있으라(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Be always on the watch, and pray that you may be able to escape all that is about to happen, and 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3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모든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고”, 그것은 곧 아침 일찍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일부터 체포되신 날까지 “밤에는 감람원에 가서 쉬셨고,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37절). 매일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에 힘쓰셨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 또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가르침의 핵심 주제는 “종말”이었습니다(마 24-25(97구절) –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막 13 – 집주인, 종).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마다 말씀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행 1:3).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렇게 간절히 제자들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고 잘 준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설명하신 종말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장차 올 모든 일을 준비해야 할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J. C. 라일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여기에 나타난 본문보다도 더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362p)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주 오심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태도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1. 종말을 기다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오늘날 교회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이 다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35절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여기서 “이날”은 언제를 가리킬까요? “이날”은 휴거의 날이 아니라 유대인 속량의 날입니다(눅 21:28).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는 날입니다(21:31).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천사들이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택하신 유대인을 불러 구원하실 것이고(막 13:27), 반대로 온 사방에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죗값을 치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구원 혹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구원을, 믿지 않고 거절한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날 전에 구원받은 이방인들,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이방인의 때가 차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는 이날이 오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홀연히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주님의 호령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집니다. 휴거됩니다(살전 4:16-17).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 땅에 남겨져 환난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일이 다릅니다. 또 36절을 보십시오.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 제자들에게(“너희는”)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장차 올 이 모든 일”은 무엇입니까? 인자의 오심과 그 직전에 있을 온갖 무서운 재난과 일월성신의 징벌입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일을 능히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피한다는 말은 단지 목숨을 보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잘 대비한들 어떻게 그 무서운 진노를 다 피하겠습니까? 실제로 진노의 날에 많은 사람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계 6:17). 

하지만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능히 그들을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들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유 1:24).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살든지 혹은 죽든지 결국 인자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재난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항상,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이미 구원받은 이방인인 우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전에 끌어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환난을 피하고 잘 대비해야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앞에 서겠지만, 우리는 환난 전에 공중에 임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공중으로 끌어 올려져 모든 환난을 피하고 그리스도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 전에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과 일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또한 “항상 기도하라”와 “깨어 있으라”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날과 기다리는 일은 다르지만, 그 날과 그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휴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깨어 있으라”에 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교회가 기다리는 종말에 대한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통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4장에서 성도에게 임할 휴거에 대해 가르치고 나서 5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먼저 때와 시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살전 5:1~3).

살전 5장 1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절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교회가 기다리는 “주의 날” 곧 휴거의 때가 언제 어떻게 이른다고요? “밤에 도둑같이”(2), 예상하지 못한 그 때 “갑자기”(3) 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해산의 고통이 이르는 것처럼, 주가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휴거는 청천벽력같은 멸망의 선포입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주의 날” 역시 갑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1장 34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들에겐 징조가 있습니다. 창세 전후로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재난이 있고, 그 후로는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고 땅과 바다가 요동치는 무서운 징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 따위로 마음이 둔해져 그날을 갑자기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짐승이 방심하다가 덫에 갑자기 순식간에 걸려드는 것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대책 없이 그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아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합니다(마 24:37~39). 어떻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징조를 보고도 멸망할 때까지 깨닫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심각할 정도로 나약하고 나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진노를 앞둔 유대인들이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면 징조 없이 도둑같이 갑자기 나타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 오심을 잘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절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절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종말을 기다리는 자세: 깨어 있으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과 동일한 명령 “깨어 있으라”를 발견합니다. 6절에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그리고 8절에 “정신을 차리고…”입니다.

“정신 차리라”, “깨어 있으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지 않으면 각자 알아서 해석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깨어 있으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종말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도구)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오해: 재물사용/항상 생각하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들을 명확히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성도를 가리켜 “우리” 혹은 “너희”라고 말하고 성도가 아닌 자를 “다른 이들”(3) 혹은 “그들”(6)이라고 말합니다.

또 성도는 “낮에 속하였다”(8)고 말합니다. 특히 5절을 보시면 성도는 “빛의 아들들”, “낮의 아들들”로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반면에 성도가 아닌 이들은 “자는 자”, “취하는 자”라고 말하며 그들은 “밤에 자고, 밤에 취한다”고 말합니다(7절). 밤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는 빛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는 빛과 사귐이 있는 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요일 1:7).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밖에 있는 어둠 혹은 밤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들은 하나님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냥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 ‘자는 것’ 혹은 ‘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여 그분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죄), 그것이 밤에 속한 자, 어둠에 속한 자의 당연한 삶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세상 풍조 속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입니다(엡 2:21-3).

하지만 반대로 빛에 속한 자, 낮의 아들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들은 밤에 속한 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요일 1:6). 

밝은 대낮에 보통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과 항상 사귐을 갖는 성도는 낮의 아들로서 빛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롬 12:2).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 이것이 깨어있는 삶,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단순히 내일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으로 돈을 사용하는 삶이 아닙니다. 단지 항상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만 갖고 있는 삶도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입니다.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방해물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술취함, 방탕함같은 죄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생활의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수고와 슬픔). 이러한 것들은 우리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소속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땅이 내가 속한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령한 복보다는 보이는 이 땅의 재물을, 측량할 수 없는 하늘의 보상보다는 측량 가능한 이 땅에서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둔해진 마음으로 살게 되면 계속해서 하나님께 속한 기쁨이 아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닌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빠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나 오실 주님을 대놓고 부인하지 않지만, 현재의 삶에서 그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잠자는 삶입니다.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악을 멀리하는 일에도, 하나님을 위해 선을 행하는 일에도 지나치게 소극적입니다. 어떻게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

바울은 세 가지 깨어 있기 위한 도구 혹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본문에서는 호심경(갑옷의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붙이던 구리 조각, 방탄조끼)와 투구라는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둘 다 보호하는 방어용 도구입니다. 전쟁에서 팔 다리를 잃어도 죽지는 않지만 심장이나 머리가 상하면 죽습니다. 호심경과 투구는 전쟁 중에 그런 치명적인 부상에서 보호해주는 필수 무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게, 악에 빠지지 않게, 마음이 둔하여 져서 잠들지 않게 막아주는 필수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1. 믿음

첫째로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요일 5:4).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유익한 삶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해 불신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생생하고 피부에 와닿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우리가 이 땅에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고후 4:18). 우리에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약속하신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고, 뜻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믿음을 두십시오. 

생활의 염려가 여러분의 심장을 겨눌 때, 세상의 유혹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려고 할 때, 믿음의 방패로 막으십시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어떠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 내게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구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약 1:6).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굳건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롬 10:17). 그 말씀을 많이 읽고, 오래 묵상하고, 하루 종일 읊조리며 그 말씀으로 약속하신 이를 굳게 믿으십시오.

  1. 사랑

심장을 보호하는 호심경의 또 다른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이 이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주 오심을 그렇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간절히 바라지 못할까요? 왜 당장의 생활의 염려나 술취함, 방탕함 등에 쉽게 빠져 영원한 복, 영광스러운 주를 잊어버리며 살까요?

결국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먼 지역에 출장갔을 때, 빨리 집에 돌아와 쉬고 싶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는 가족들과 빨리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빨리 그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 아름답고 멋진 해외 여러 나라를 여행해도 집에 오면 항상 하는 말, “역시 집이 최고야” 아닙니까? 내가 진짜 쉴 수 있고, 나를 가장 잘 알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소속된 바로 그곳이 집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만큼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자기 나라를 사랑해서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지음 받은 사람이 지으신 이를 만나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빛과 사귐이 있는 자가 참 빛이신 하나님을 직접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생활의 염려따위에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 어떤 것을 가져다 주어도 그 유혹을 능히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주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의 마음이 확실히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직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주를 사랑하면 당연히 주를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칭찬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1:6-7). 그러면서 그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주를 사랑하면 주를 위한 고난도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우리를 깨어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이 깨어 있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라”(요 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더욱 주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소망

마지막으로 소망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만, 본문이 말하고 있는 소망은 구원에 둔 소망입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해 각자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죗값을 다 지불하셔서 더 이상 죄가 없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따라오는 말씀에서 이렇게 구원을 설명합니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먼저 구원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피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내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그분의 온전한 의로움을 내게 옷입히셨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죄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롬 8:1). 여기까지는 구원을 이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10절을 보시면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깨어 있든지(살아 있든지) 혹은 자든지(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와 영원히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우리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한 연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가 누리고, 그리스도의 상속을 내가 함께 누리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나도 참여하여 함께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친밀한 교제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히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사시는데 겨우 생활의 염려때문에, 세상이 주는 짧은 쾌락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나와 함께 살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서 탄식하는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부인하며 잠자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영광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나의 신랑, 나와 한 몸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성령이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 심장을 뛰게 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주 예수와 날마다 함께 살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주 예수와 동행하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깨어 기다리는 삶은 각자 혼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와 연합하셨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권면합시다. 잠자는 사람이 있나 서로 살펴보고 깨워 줍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사람들을 보거든 말씀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줍시다. 어리고 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말씀을 들려줌으로 믿음에서 자라나도록 도와줍시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믿으라”고 강하게 권면합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주가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서로 일깨워 줍시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보여줍시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그보다 얼마나 더 사랑스럽고 고귀한 분인지 말해줍시다.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내 삶을 통해 그들의 삶을 뜨겁게 세워줍시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만이 남는 삶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계속해서 알려 줍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잘 쓰고 있는지 서로 확인해 줍시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우리의 소망으로 두고 있는지, 아니면 불타버릴 이 세상의 것에 우리 소망을 두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교제합시다.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서로에게 말해주면서 그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깨어 있으라

헬라어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가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11구절로 나타납니다.

깨어 있으라는 헬라어단어는 "그레고래오(γρηγορεω)"라고 합니다.
"그레고레오"는 "방심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 있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어 있으라(그래고래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스트롱번호 1127

1. 깨어 있다.  2. 마태복음 24:43.  3. 정신차리고 있다
발음 [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깨어 있다, 경성하다.
 a.  [문자적으로] 마 24:43, 26:38, 40, 막 13:34, 14:34, 37, 눅 12:37,39.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 24:42, 25:13, 26:41, 막 13:35,37, 14:38, 행 20:31, 고전 16:13, 살전 5:6, 10,  벧전5:8, 골 4:2, 계 3:2,3, 16:15.


이 단어는 신약에서 중요한 여러 가지의 다른 사용법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의미와 차원들을 연구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이해하길 원합니다.

먼저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서 이 깨어 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논의 하겠습니다.

첫째,  신약에서의 사용법과 의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헬라어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깨어 있으라(watch)’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 주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므로 그 의미들을 알아야합니다.

1. 헬라 원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사용되었으며, 그분께서 밤에 도둑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24:42; 마태복음 25:13; 누가복음 12:37. 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 10절에서도 이 말씀이 사용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분의 오심이 밤에 도둑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즉, 이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혼이 그분께서 신랑으로서의 오심을 위해 준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당신의 오심이 홀연한 오심이라고 경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일어나 깨어서 지켜 보도록 합시다!

둘째, 주님과 함께 하는 고통의 교제로서 깨어 있는 것

그 단어는 겟세마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주님께서 당신의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하도록 초대하고 계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가 이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고난 가운데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고통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막힘 없이  그분의 고난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대로 그분과의 큰 친밀감과 뚜렷함/확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셋째, 원수로부터 오는 시험과 전쟁에서 구원 받기 위해 깨어 있음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가복음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지켜지거나 보호 받지 못하거나 사단의 함정에서 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요한계시록 12:10).

이것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소하는 자가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를 고발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 깨어 있음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넷째,  이 단어를 사용하여 강조된 또 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 삶에서 견고하고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와 감사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3-14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새번역 – 고린도전서 16: 13, 14)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많은 성인들이 그의 영적인 제자였던, 소경인 성 디디무스(4세기)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에 대해 훈련되고 준비된 군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우리를 주님을 위한 군인으로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그러므로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입대한 군인이 되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영으로 기도를 굳건히 계속하고, 인내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사역과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떠나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양떼를 깨어 보살피라고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2-3
사도 요한이 사데의 교회의 사자에게 그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인 영적으로 약한 양떼를 향해 깨어나라고 명령하는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7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섬김을 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지키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데 있어서 깨어 있고 굳건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이 단어가 발생한 여러 성경 구절을 살펴 본 후,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크고 위대한 은혜를, 즉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 나눔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지금까지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깨어 있음”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가기 전에, 구별되고 뚜렷한 영적 은사로써 “깨어 있음”에 대한 교부들의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 시나이의 성 헤시키오스 (7/8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생각을 지키면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은 마음의 입구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고치고 멈추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연습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를 욕망의 생각들과 정욕의 말들, 그리고 악한 행동들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킵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7/8 세기):

‘지성/이성에 대한 주의와 깨어 있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악마로부터 구조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 시나이의 성 필로테오스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우리의 주의함/깨어 있음과 기도가 매일 함께 합쳐지게 되면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열왕기하2:11) 되어 우리를 하늘로 올라가게 합니다!’

두 번째 : 어떻게 하면 영적 깨어 있음의 은사와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포인트를 나누겠습니다:

  1. 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짐
  2. 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것
  3. 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4. 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이 포인트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

우리가 앞서 성경과 교부들의 어록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축복과 특성들과 함께 영적으로 깨어 있음의 은사를 받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깨어 있음, 또는 경각심은, 우리의 영혼을 세우는 에 대해 주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세워진 속사람 안에는 깨어 있음의 은혜와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의 성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 복음 16:1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세우시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교회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음)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지은 자가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브리서 3: 3, 4).

바울은 또한 자신이 섬기는 교회들의 영적 건축과 덕을 세우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고린도전서 3:10) 부릅니다.

 이 영적인 세움/건축은 우리에게 다음을 요구합니다:

  • 매일 성령 안에서 걸음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서 살아있도록 하며, 또한 새롭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우리의 행동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말 가운데 합당하고 마땅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행동이 세상의 사람들의 행동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또한, 때로는 우리의 말이 부정적이거나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판단/정죄하거나, 거친 농담을 하거나, 수다와 험담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깨어 있음의 첫 번째 영역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일상의 행동들을 지키는 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도록 적합하고 적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 14)

우리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밖의 것들을 주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로 당신의 은혜와 덕을 허락하십니다.

기록 되기를: […] 믿음에 덕을 […]  더하라 (베드로후서 1:5)

2.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우리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분열되고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의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분열되고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8)

이 구절의 다른 번역들을 볼 때 우리가 이 분열과 나뉨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라는 문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오래된 번역 중 하나인 콥틱의 번역도 “두 마음의 사람/double-hearted man” 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Young Literal Translation (YLT)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개의 혼의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안정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정결함과 일관성을 가로 막으며 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NLT)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뉘었다.”

그러므로 시편 86: 11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86: 11)

마음과 양심의 영적 민감성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자신이 죄를 지으면 즉시 자신을 찔렀습니다.

사무엘상 24: 5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무엘상 24: 5)

또한 사무엘하 24:10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일을 행함으로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사울이 다윗의 뒤를 쫓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고난을 안겨줬는데 다윗이 겨우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고 해서 왜 다윗의 마음과 양심이 가책을 느겼는지 우리는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지도 않았는데요! 그의 겉옷 한 귀퉁이만 베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또한 왜 다윗의 마음이 단지 백성의 수를 세었다고 자신을 찌르고 가책을 느낄까 궁금해 할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위해 단순히 백성의 힘을 알기 위한 것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영적으로 민감한 다윗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정복하는 것이 백성을 강건케 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것이지, 백성의 능력과 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성 티콘, 모스코바의 총대주교(19세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은 마음에 있지 않다면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악이 마음 속에 없다면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은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발은 악을 향하여 걷지 않을 것이며, 혀와 입술은 악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눈은 악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나 마음은 악을 원하지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대해 깨어 있으며, 악함과 분열됨으로부터 지킬 때, 우리는 순전한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 민감한 양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발견한 책의 기록된 말씀을 읽고 백성의 상태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낸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곳과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곳과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역대하 34: 27, 28).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더 이상 부드럽지 않는 딱딱하고 굳어진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 또한 말라버린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의 말을 기억합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엘2: 12, 13).

여기서 선한/좋은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 디모데전서 1: 5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디모데전서 1: 5)

  • 또한, 사도 바울은 유대 공회 앞에서 자신의 변호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선한 양심/good conscience)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사도행전23: 1).

  • 사도는 다음 장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동일한 것을 다시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행전 24: 16).

  • 사도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디모데후서1: 3).

  • 사도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우리의 주의를 끌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 22).

악한 양심은 타인과의 부정적인 경험이, 사랑과 용서의 부족으로 축적되어 그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많은 막힘과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브리서 13: 18).

이 신성한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얻고, 모든 악함이 비워진,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얻으며, 선한 양심을 얻어야 할 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을 수 있고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이 위대한 덕을 얻을 준비가 되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또한  마지막 때에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는 악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제가 연합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많이 드렸지만, 여기서 몇 가지의 포인트를 추가하기 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리 시대 가운데 원수가 일하는 주요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연합을 파괴하거나 약화시켜서 영적인 권위와 여러 다양한 특권을 상실하게 하는 원수의 주요 분야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원수는 대부분 우리의 감각들, 즉, 눈과 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것을 보고 듣게 함으로써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의 정확성을 조사하거나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거리낌이 없는 청결한 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벽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참된 사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게 되는 것은 표면적이고 외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마음과 양심은 오염되고 닫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계략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고, 타인을 향해 우리의 양심을 투명하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구성원들 사이의 분열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의 이 분열의 결과로 우리는 많은 축복과 영적 권위와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흐름을 잃게 됩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 10:24, 25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것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 25)

4.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이 점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드렸지만 오늘 제가 몇가지의 강조할 점들과 질문들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마지막 때와 관련된 매우 특별한 일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요한 복음 14:26).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서 마지막 때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약되고, 마비되며, 연약함과 요동침 가운데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즉 늘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이 구절의 각 부분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동치는 상태, 미지근한 상태에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와 같은, “영적인 포로 됨, 유배”의 상태로 여기신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셨습니다.

요즘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밝히고 싶어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신비롭게 영감으로 오는 것이며, 영적으로 마음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받은 자들의 생각 가운데 드러나고 계시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포로의 상태로부터 나오게 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반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여기서 우리는 세가지로 연결된  두개의 세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말씀에 예치된 성령의 신비들을 깨닫도록 합시다:

첫째,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Not lagging in diligence)

이것은 멈추지 않는 영적인 부지런함의 상태로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는 영적 근면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영 안에서) 열심을 품고 (Fervent in spirit)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영 안에서 열심을 품는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함과 근면은 우리의 영을 지피고 우리로 하여금 영 안에서 열심을 품도록 만들어 줍니다.

  • 주를 섬기라 (Serving the Lord)

영 안에서 열심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를 즉시 하나님 임재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거나 섬기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Rejoicing in hope)

주님의 영적 예배자들은 끊임 없고 지속적인 산 소망의 원천인 부활의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고정된 소망으로써, 부활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끌어서, 하늘 자리/영역에서 마음과 영 가운데 있습니다.

  • 환난 중에 참으며(Patient in tribulation)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산 소망이 있는 한, 시련이 그 사람을 포위하거나 압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의 영의 열심과 열성으로 인해 부드럽고 유순해졌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빚어서 형성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 3), 또는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새번역) 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병약함과 시련과 곤란을 겪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 10 참조).

  • 기도에 항상 힘쓰며 (Continuing steadfastly in prayer)

이 세가지 연결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영생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도는 입과 입술에 오르는 말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마음과 그 사람의 존재 전체에 지속적인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연관된 영적 민감성에 대한 다른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음 가운데 죽음의 정복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유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혼 안에 그것이 심어지고 많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 26)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을 멸하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육 안에서 죽음을 대면하셨고 이기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 24).

사망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것은 깊이 있고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는 고통으로, 때로는 질병, 약점, 무력함, 또는 두려움, 불안, 슬픔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얻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죽음과의 싸움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 슬픔, 시험과 같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사람의 통찰력을 열어서 그것이 죽음의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에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행하고 걸으면서 이 전쟁에서 인내한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과 죽음을 이기는 것에 대한 분깃,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와 관련된 준비의 필수적이고 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깨어 나고 주의하기를 바라시며 신음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유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우리 세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이전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큰 차이가 있을까요?

순교자들은 고난 중에서도, 왜 그리고 어떻게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전도가 초기 세기 가운데, 왜 그리고 어떻게 확장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행전4: 33).

사도 바울이 고리도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 14).

순교자들은 이렇게 극복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와 같이 노력하였고, 그 은혜가 그들을 변모하게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대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어둠과 사단이 지배하는 곳들에서 구원을 위한 믿음의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 전파는 상황들과 개인들,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절대적 진정성과 기도의 영 가운데 지속적인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다가, 또 다시 평상시처럼 삶의 다른 일들에 몰두하며 방향을 돌린다면, 우리의 상황은 마지막 때의 대립과 대적에 있어서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 복음13: 37).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성령 안에서의 삶과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위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즉,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기록된 것에 순종합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 2)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2 – 새번역)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 계시록 3: 3).

동시에 우리의 삶은 이 세대 가운데 증인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공동체로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아야 합니다 (마태 복음 5:14).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고 위를 향해 올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되기를, 믿는 자들을 강건케 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 3, 4a)

이것이 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따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재림의 날을 알 수 없기 때문(마태복음 24:42, 25:13, 마가복음 13:33-35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가복음 13:33-35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마태복음 26:38, 마가복음 14:34)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심판의 주 앞에 서기 위하여(누가복음 21:36)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기도와 감사하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골로새서 4:2)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04-01-2024(월) 누가복음 21:29-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화과나무를 보라(29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He told them this parable: "Look at the fig tree and all the trees.

마태복음 24:32-35
마가복음 13:28-31

예수님께서는 자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사용하는 소재들은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것들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기 전에 먼저 열매가 될 "탁쉬"라는 작은 봉우리 같은 것들이 돋아납니다.
때로는 시장한 사람이 그 '탁쉬'를 따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성지의 나무들에 대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것에 관한 책을 읽은 후에 저주를 받은 이유는 '탁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우리 속담에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보여줄 수 있을까?

성서학자들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작되는 그 날이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잎을 피우는 시기가 이미 1948년 5월 14일에 성취되었으므로 마지막 때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하크라자트 하츠마우트. הכרזת העצמאות ) 또는 멜길라트 하츠마우트(מגילת העצמאות )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난 날인 1948년 5월 14일 (히브리력 5708년 이야르월)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 의 새로운 유태인의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계승한 국가로 선포한 문서를 말합니다.

이것이 근거가 되어 이미 무화과나무가 잎을 피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말세 즉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두려움을 갖고 매일의 일상을 반복되는 습관적인 삶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며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저 천성을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신령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 세대(게네아) γενεά, ᾶς, ἡ 스트롱번호1074
1. 가족.  2. 동일한 조상에서 퍼져 나온 가문. 3. 동시대의 사람들
발음 [ gĕnĕa ]
어원  /  1085의 추정된 파생어에서 유래

*말(로고스)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Solus Christus, 오직 예수 그리스도

1985년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Paul Knitter의 < No Other Name? >이란 책이다.
1987년 한국말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제목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물음표 때문이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과,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말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다.
오직 예수! 예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의미다.
오직 예수? 예수 외에도 구원을 주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없는 구원과 십자가 없는 복음이다.
예수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것을 종교다원주의라 한다.
종교다원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너도 옳다, 그러나 나도 옳다 주의다.
예수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구원이 있다는 말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양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다양하기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할까? 베드로가 사도행전 설교에서 외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밖에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해석이나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왜 꼭 예수라야만 하는가? 왜 굳이 다른 종교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가? 자기만 옳다는 배타적 자세라는 것이 21세기 과학시대에 나홀로 진리라는 주장이 맞지 않는 사고 아닌가?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탄의 최고 전략은 우리 눈에서 예수를 가리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은 모든 것이 좋아 보이지만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는 것이다.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부가 무너지는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아주 멋진 종교로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돕는 세상만 강조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 없는 구원 없다! 이 구호만 삭제해 버리면 기독교인이 받아야 할 비난,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전쟁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의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생명을 살리는 기독교의 복음은 고등한 윤리나 철학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이렇게 외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영광스런 면류관이 아니다. 핍박과 고난이다. 베드로도 주님의 제자들도 이 복음 때문에 피를 흘렸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피로써 써 내려간 역사다. 마르틴 루터의 삶을 기억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외친 루터. 이 외침 때문에 1521년 4월 17일 황제 앞에 불려갔다. 황제 앞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렸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었다.

루터보다 100년 일찍 종교개혁의 불씨를 일으킨 사람이 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요한 후스다. 프라하 구시가지 중심광장에 가면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동상, 후스의 동상이다. 프라하대학에서 공부해서 1398년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37세 되던 1409년에는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단순하다.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교회의 법은 가톨릭의 법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다! 타락한 교황을 질타하고 교황의 무오성을 거부했던 후스는 결국 1414년 10월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의회에 참석한 후에 감옥에 들어간다. 교황 비판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고 용서를 구하면 목숨을 보장받는다는 회유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진리를 외친 사람. 결국 1415년 7월 6일, 화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세상 눈에는 참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게까지 예수만이 구원이라고 외칠 필요가 있었는가?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묻기도 한다. 누가 진짜 바보인지 한번 물어보라. 잠시 살아갈 인생에 예수 때문에 생명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바보인가? 적당하게 몇 년, 몇 십년 더 살다가 언젠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올텐데, 불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바보 같은 인생인가?

오직 예수를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 시대.
너무나 간단한 이유 한 가지가 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든지, 아니면 예수만 구원이라고 외침으로 오는 핍박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지.
예수가 정말 유일한 주라 고백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죽어 있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가슴마다 선교지요,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마다 선교사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7가지 묻고자 한다.

1.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분이 누군가?
2.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분이 누군가?
3.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 누군가?
4. 겸손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하늘의 문을 여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 누군가?
5. 신자가 호흡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야 할 그 이름이 누군가?
6. 살아도 죽어도 우리가 그를 위해 살아야 할 유일한 주님이 누군가?
7. 연약하고 부족하게 살았지만 세상 떠나는 날, 우리를 품 안에 앉아줄 분이 누군가?







감람산 강화 - 종말

감람산 강화라고 부르는 이 말씀의 주제는 “종말”입니다.

감람산에 앉아 예루살렘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말론 강의는 거대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 이라는 경고로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은 무너졌으며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은 종말의 시작일 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환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내려오시기 전에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또한 앞으로도 없을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마 24:21).
그리고 그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마 24:29) 사람들이 무서워 기절할 것입니다(눅 21:26). 

이것이 바로 “인자의 징조”이고(마 24:30), 그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지식적으로 유익을 주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녀를 두고 외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한국에 일어날 엄청난 재난에 대한 소식을 미리 알았다면 자녀들에게 그 재난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무서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잘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해를 당하지 말고 잘 대처해서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무서운 환난을 잘 대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해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런 간절한 심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정리해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 배우기 원합니다.

1. 예루살렘 멸망(20~24절)

21:20절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먼저 예수님이 바라보신 가까운 미래의 환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성 밖을 수많은 군대들이 에워싸는 것을 볼 때, 곧 이 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비할까요?

21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다(21절). 환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뿐만 아니라 주변 유대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안전한 지역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심각한 지역은 예루살렘 성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피신하라고 하시고,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촌)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워싼 군대들이 곧 성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백성이 죽임을 당하며 끌려간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입니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며 포로로 끌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 무서운 재앙이 다시 한번 제자들이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예루살렘 성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일어날 모든 환난이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이라고 하셨습니다.

22절 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로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거역할 때 이와 같은 징벌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26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대항할 때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 2세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 광야에 모아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언약을 맺을 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신 28:53).

그 이후로도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 미가, 스가랴 등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하고 거절하는 백성을 징벌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사 34:8; 렘 5:29; 6:1~8; 26:1~9; 46:10; 50:27; 단 9:26; 호 9:7; 미 3:12; 슥 8:1~8). 

특별히 제자들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성전에 대한 징벌이 기록된 말씀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왕상 9:6~9).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실제로 586년(370여년 후) 하나님은 자기에게 돌아선 백성을 말씀하신 그대로 벌하셨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높은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이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이 복원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자기 하나님을 거절했을 때, 결정적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땅에 온 하나님을 그들이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요 1:11),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예루살렘과 그 성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며칠 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손에 의해 죽게 될 것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치며 자기 하나님을 십자가에 없애 죽이라고 외치는 백성들의 손에 의해 말입니다(마 27:25). 

가까운 미래에,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40년이 흐른 뒤, 징벌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날에 어떤 재앙이 있을까요?

23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절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 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학살과 살육이 계속되는 그 날에 아이 밴자들(임산부), 젖 먹이는 자들은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큰 환난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백성에게 임한 무서운 진노를 피해 빨리 도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수많은 사람이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이 이방에게 포로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예고하신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한 모습입니다.

40년 후 실제로 예루살렘에 이러한 무서운 환난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로마 티투스 장군의 군대들이 성을 에워싸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 굶주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삶아 먹었습니다. 약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습니다. 9만 7천여 명의 백성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자들은 애굽이나 제국 여러 영토 곧 이방 지역에 사로잡혀 갔고,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하거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졌습니다.

참 무서운 환난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된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죽거나 끌려가고, 성은 박살 났습니다. 완전히 끝이 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4절)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방인의 때”라는 기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이방인의 때”. 그때가 다 차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찰 때까지 하나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억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자기 골육 유대인을 간절히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여기에도 기한이 나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그리고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의 더러가 우둔하게 됩니다. 유대인이 멸망 받음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을 풍성히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롬 11:11~12). 그동안 유대인 중심으로 흘러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 중심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을 위한 미래는 이제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방인의 때가 차고 나면” 밟혔던 유대인들이 속량을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설명이 두 번째로 나오는 “인자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본 먼 미래에 어떤 징조와 함께 그날이 오는지 살펴봅시다.

2. 인자의 징조(25~28절)

25절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절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이방인의 때가 차고 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고 나서,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피와 같이 됨-계 6:12),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하늘의 권능들(천체)이 흔들립니다(마 24:29; 사 13:10; 34:4). 계시록에 보면 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낮 삼 분의 일에 비춤이 없다고 말합니다(계 8:12). 온 세상이 암흑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바다와 파도에도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계시록 말씀에 보면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 땅에 쏟아져 땅, 수목의 삼 분의 일이 타 버릴 것”을 말합니다(계 8:7).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 바다의 삼 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이 삼 분의 일이 죽습니다”(계 8:8~9).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면 무서운 파도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외에도 계시록에 기록된 이 날의 징조는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서워할 것입니다.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할 것입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느끼는 공포를 아십니까? 이 날엔 지구 전체가 그 비행기처럼 요동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마침내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27절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자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십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능 그리고 영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무서운 징조, 그리고 무한한 능력과 영광을 지니신 왕, 예수님의 재림. 이 일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절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일 즉 하늘에 무서운 징조가 일어나고, 땅과 바다가 흔들리고, 마침내 인자가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났지만 뭔가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전에는 일어나지 못했고 머리를 들지 못했던 것이죠. 2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밟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에 유대인들은 마침내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 “너희” 곧 유대인의 속량이 시작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에 따르면 인자가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는 또 다른 대상이 등장하는데, 바로 “땅의 모든 족속”입니다.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이죠. 그들은 인자가 오는 것을 보며 통곡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0). 

왜죠? 그들에게 주어진 기한이 이제 끝났고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일어나 머리를 들고 자기를 속량하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을 회복하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마 24:31) 천사들을 보내실 것이고, 그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대적으로 온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막 13:27).

이것이 장차 유대인에게 임할 속량의 날입니다. 인자가 오시는 그 날에 이런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사도 바울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나서 온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가 인용한 이사야 59장 20절 말씀처럼 시온 곧 예루살렘에 구원자가 임할 때,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구름을 타고 다시 임하실 그 때, 그분은 경건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돌이키시고 그들의 죄를 씻으실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자를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과 맺으신 아브라함, 다윗 언약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고 자기 백성의 땅을 찾아주시며, 자기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그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말입니다.

3. 대비하라(29~33절)

자,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보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잘 알고 그 위기를 피하라고, 대비하여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한 가지 비유를 더해주셨는데, 29절과 30절에 그 비유가 나옵니다.

29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절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예수님의 비유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였는데, 다른 모든 나무를 통해서도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감람산에 무화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 비유는 생동감이 넘치는 비유였을 것입니다. 

겨울에 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겨우내 딱닥 하고 생명력이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가지가 연하여지고(마 24:32), 싹이 나고 잎사귀를 내면 곧 여름이 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5~6월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예수님은 단지 계절이 돌아온다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싹이 나고 잎사귀가 나면 곧 열매를 맺을 것을 너희가 알지 않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무가 보여주는 신호를 읽을 줄 알았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 24:32; 막 13:28). 나무를 보면서 가지가 연해지는 징조, 싹이 나는 징조, 잎사귀가 나는 징조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날이 곧 올 것을 기대하고 대비하는 것처럼, 조금 전까지 말씀하신 징조들이 올 때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31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에게 속량이 찾아온 날부터 이 땅에 시작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아 영원한 나라를 통치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 전에 일어날 여러 징조들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강조하며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큰 환난이 일어나고 일월 성신에 징조가 생기고 바다와 파도가 요동하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이는 환난의 시기가 길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한 세대 안에 징조의 시작부터 인자의 임재까지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란 말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환난은 극심하겠지만 그 기간은 아주 길지 않을 것입니다. 한 세대 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징조가 일어날 때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속량의 날을 준비하는 그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3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한 말은 없어지지 않고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말 계획표가 말씀하신 그대로 조금의 오차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어떻게 말씀에 반응해야 했을까요? 흥미롭게도 그들의 세대 안에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징조의 시작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이것을 알려주시고 피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AD70년 11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은 정말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잘 대비했을까요?

유대인의 반란은 66년부터 열심당원을 통해 시작되었는데, 로마 정부는 그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여러 번 예루살렘을 위협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67년도에는 갈루스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갑자기 공격하고 에워쌌는데 쉽게 점령할 수 있었지만 뚜렷한 이유없이 갑자기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거민의 많은 숫자가 그 공격에 놀라서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 중 많은 사람이 요단 강 건너편 산지 마을 펠라로 숨었고, 일부는 리바누스 산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래서 70년 최후 대접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무너지는 성에서 완전히 피신했습니다. J. C. 라일은 제자들이 “주님의 충고에 따라 행동했고, 마지막 포위 때에 있었던 비참함을 피했다”고 말합니다(351p). 그들은 잘 대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래를 잘 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맞춰진 종말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점은 “이방인의 때”입니다. 아직 충만한 수가 채워지지 않았고 유대인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이 거절했기 때문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 앞에 일어날 일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우리에겐 일월 성신의 징조가 없습니다. 천체가 흔들리고 바다가 요동치는 환난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실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주님께서 큰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죽은 자들 그리고 그 때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순으로 그 음성을 듣고 공중으로 끌어 올려질 것입니다. 여기도 구름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공중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 영원히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인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의 공중 재림입니다. 휴거라고도 부르는 이 날은 아무런 징조가 없습니다. 

현상으로서 세상에 난리와 소요에 대한 소문이 일어나고 성도에 대한 핍박이 일어나겠지만, 유대인에게 있을 그런 대환난은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환난이 있기 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재난과 핍박을 경험할 때마다  주 오심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는 주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주가 모든 믿는 자를 공중으로 끌어 올리실 때 당신은 이 땅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대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대환난 끝에 주가 이 땅에 임하실 때 그것을 통곡하며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대비하십시오. 믿는 자를 불러 공중으로 끌어올리시기 전에 그 속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시기 바랍니다. 그 방주에 타는 방법은 돈도 명예도 열심도 아니고 오직 믿음입니다. 

둘째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어느날 주님의 호령에 따라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을 말하고 나서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8). 이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를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와 근심을 벗어버리는 날입니다. 슬픔과 눈물이 씻기는 날입니다. 낮고 천한 삶을 살았더라도 높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반전을 맞이할 수 있는 날입니다. 주를 위해 한 일에 대한 칭찬을 받는 날입니다. 핍박과 고난에 대한 풍성한 보상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는 그분이 약속한 모든 것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성취되는 날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고 살았던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 날이 진실로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 삶에 진정으로 큰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03-30-2024(토) 누가복음 21:20-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형벌의 날(22절)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For this is the time of punishment in fulfillment of all that has been written.

형벌의 날 보응의 날(호세아 9:7-9)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 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이스라엘 백성이 형벌을 받아야 되는 이유(7절)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  어리석은 선지자란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이 왔는데도 알지 못하고, 깨이지 못하고 멸망을 준비하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또한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유다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으로(아람) 가서 싸우려 할 때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400명 선지자를 불러 물었을 때, 그들은 다 같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미가야는 청상의 일을 말하며 거짓말하는 영을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어 왕에게 말하게 했다는 것을 말했으나, 왕도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물로 마시게 하라하고 전쟁에 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열왕기상 22:24 /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 하더냐.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 사람들은 거짓에는 잘 감동을 받고 받아들이지만 참은 받아들이지를 아니합니다.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문은 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의 길은 협착하고 좁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며 친속까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3:21 /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요한복음 10:20 /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바울에게도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사도행전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인생은 무엇인가에 미쳐서 사는 것입니다.
돈에 향락에 권세에 우리는 이왕이면 후회 없는 예수에 미쳐서 살아야합니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우리가 죄악을 쌓으면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을 쌓지 말고 속히 버려야합니다.

창세기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마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욥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2. 거짓 선지자

(8절)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 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1) 하나님의 파수군

파수군은 늘 깨어 경계하고 지키어 보호해야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마귀의 유혹으로 부터 보호해야 하고 파수군은 위험이 쳐하면 나팔을 불어 알려야합니다.

(사56: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2)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보호해야할 그들이 오히려 새를 그물을 쳐 잡듯이 멸망으로 끌고 가는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단들이 멸망의 길로 끌고 가려합니다. 그러므로 깨이고 분별하여야합니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3)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세상에서도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 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구별해야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성전인줄 알아 구별해야합니다.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3. 기브아의 시대

(9절)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심히 패괴한 시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기브아 시대는 사사기 19장 20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레위 사람 하나가 첩을 대리고 살았습니다. 이 첩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음행을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저를 다시 데리고 오고자 하여 장인의 집에가 첩과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저물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자 길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노인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들을 보고는 자신의 집으로 이들을 맞아들여 음식을 대접을 합니다.

바로 이 때 그 동네의 비류들이 이 집을 에워싸고는 성적인 관계를 맺고자 레위 사람과 그 여인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과 이 레위 사람의 첩을 내 놓겠으니 이 레위인과는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저들을 이를 거절을 합니다.

결국 실랑이 끝에 레위 사람은 자신의 첩을 저들에게 내 놓습니다. 이 동네 비류들이 이 여인을 밤새도록 욕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보냈습니다.

그 첩은 노인의 집 문에 이르러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여기에 흥분을 해서 이 여인의 시체를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열두 토막을 내어 자신이 당한 일을 온 지파에게 고합니다.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뺀 이스라엘 전 병력은 40만 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고작 26,700명에 불과했습니다. 처음 전쟁은 베냐민이 승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두번째의 싸움에서 결국 베냐민이 패배를 하고 맙니다. 이날 베냐민에 속한 모든 남자는 600명만 남고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을 가리켜 기브아 시대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바로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와 기브아 시대와 흡사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그들은 행한 죄로 인하여 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악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실 것이다.

욥기 4:8 /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시편 107:34 /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03-29-2024(금) 누가복음 21:5-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슨 징조(7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Teacher," they asked, "when will these things happen? And what will be the sign that they are about to take place?"


거룩한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을 즐기자!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이란 도덕성을 중시하며 가난한 상황에서도 그 미덕을 유지하고 행복을 찾아내는 고결한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

한자풀이

  • 淸 : 맑을 청 
  • 貧 : 가난할 빈 
  • 樂 : 노래 악, 즐길 락(낙), 좋아할 요 
  • 道 : 길 도 

'청빈낙도(淸貧樂道)'의 각 한자별 뜻을 살펴보면 淸(청)은 '맑을'이라는 뜻으로 청렴한 사상을 표현합니다.
貧(빈)은 '가난할'이라는 뜻 물질적 인 충분함이 없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樂(악, 락, 요)은 '노래', '즐길', '좋아할' 등의 뜻으로 인생에서의 행복과 만족을 가리킵. 道(도)는 '길'이라는 의미로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해하면, '청빈낙도(淸貧樂道)'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청렴하고 올바른 길을 따르는 사람이 즐거움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는 청렴결백하게 살면서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우며 옳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인정 받아 행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성어는 많은 재물을 가진 것이닌, 도리와 겸손한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며 우리에게 중요 인생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성어는 숭고한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동양 문화에서 그 존재 찾을 수 있습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라는 말은 고요한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이너 심신적의 풍요로움을 강조합니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바람이 서서히 분다.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자는 얘기다.
이는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high thinking)'와 궤를 같이한다.

예부터 한·중·일 지식인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바로 '청빈(淸貧)'이었다.
말 그대로 '맑은 가난'.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간소한 삶이며, 소유의 욕망을 최소화함으로써 내면의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동일한 의미랄까.

일본에서 청빈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거품 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이 시작되던 1992년, 작가이자 평론가인 나카노 고지(中野孝次·1925~2004)는 현대의 물질 만능 풍조 대안으로 옛 선인들의 소박한 삶을 재조명한 '청빈의 사상'을 출간해 선풍적인 관심을 모았다.

당대의 이 베스트셀러는 옛 시인 마쓰오 바쇼, 문인 가모노 조메이, 화가 요사 부손 등 문학사와 예술사 거장들의 일화와 글을 통해 청빈의 삶이 안기는 기쁨과 홀가분함을 일깨워줬다. 나아가 인도 철학, 성 프란치스코, 에리히 프롬 등의 이론으로 청빈 사상의 가치와 효용을 뒷받침했다.


저자에 따르면 자발적 가난인 청빈의 꽃은 소유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피어난다. 예컨대 에도시대 예술가 혼아미 고에쓰 가문의 경우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유를 만끽했다. 고에쓰의 어머니 묘슈는 집안의 큰어른으로 성공한 자손들이 수시로 옷이며 용돈을 드렸지만, 그때마다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다. 이는 단순히 자선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가난한데 혼자만 많이 소유하는 걸 죄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마침내 마음은 물건의 노예가 돼버린다. 자유롭고 한가하게 나날을 보내기를 원한다면 물욕 따위는 버려야 한다. 물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람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산다는 것은 숫자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며 "소유를 아무리 늘려도 삶의 충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삶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깨달음, 빼고빼고 또 빼어 마음 하나만 남기는 삶이 청빈이라는 것. 그러면서 옛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했고, 죽은 후에 남길 것은 맑고 아름다운 이 삶의 원칙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됐음에도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으로 맴돌고 있어서다. 좋은 집, 좋은 차 등 '소유'에 집착할수록 평안, 즐거움 같은 '존재'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도 이런 청빈의 전통이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사상이 바로 그렇다.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선비들은 명리와 빈천을 떠나 자연, 예술, 인생이 혼연일체가 된 풍류의 삼매경을 일상에서 즐겼다. 하지만 청빈의 전통, 선비적 가치관은 현대 사회가 성장과 소비 등 물질적 가치를 향해 질주하면서 폄하되고 잊혔다. 유형 가치에 매몰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 무형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옮긴이 김소영 씨는 "속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갔던 옛 문화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만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빛나는 예술혼이다"며 "'맑고 가난한 삶'은 그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자세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일본 출간 이듬해인 1993년 우리나라에도 소개돼 눈길을 끌었으나 절판됐다가 이번에 출판사와 번역자가 바뀐 가운데 새로운 번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바다출판사 펴냄. 302쪽. 1만5천원.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중국의 옛 격언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그 뜻과 의미는 '빈곤한 삶에 안주하며 도(道)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돈이나 재물이 부족해도 마음의 안정과 만족을 찾아가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안빈낙도는 선비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도를 배우고 연구하는 것을 중요시하던 시대 배경을 반영하고 있죠.

한자풀이

한자를 분석해보면 이러한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 安 : 편안할 안 
  • 貧 : 가난할 빈 
  • 樂 : 즐길 낙 
  • 道 : 길 도



마지막 때의 징조 / 성경 구절

마태복음 24:3~14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 때는 언제인가?
성경은 마지막 때를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다시 세울 때라고 합니다.
이 때를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마 24:32, 막 13:28, 눅 21:29).
따라서 마지막 때는 1948년 5월 14일 디아스포라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건국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합니다(마 24:3-14, 딤후 3:1-5)
본문에서는 두 가지 징조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
둘째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마지막의 징조이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합니다.

종말에 대한 신앙은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인식해야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죽음)
둘째는 역사의 종말(심판)

마지막 때를 올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 4:7-8).

오늘 이 하루가 주와 동행하는 거룩한 삶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마태복음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가복음 13: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누가복음 21: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디모데후서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베드로전서 4:7~8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지막 때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 식량학자들 환경공해를 부르짖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과 몇 십 년 후에 지구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이미 자연계는 오래 전부터 명백한 징조들을 수도 없이 보여 주었는데, 그때 과학자들이 인류는 지구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그렇게 소리 높여 경고해 주었는데.’라고 후회할 것이다.” 그 과학자로서는 점점 더 빈도수와 강도가 높아지는 태풍과 쓰나미, 역사상 유래 없이 빠른 속도로 녹고 있는 빙하와 빙붕들만 보아도 지구의 온난화는 더 없이 명백한데도, 정작 강대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모든 징조와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최소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와 역사의 종말이 되지는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은 오직 ‘주의 임하심’과 함께 올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그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면서” 그것이 아름다운 대리석과 값비싼 장식들로 꾸며진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그 화려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는” 멸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나중에 그들이 “감람산”에 도착했을 때 조용히 예수님께 다가와서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겠으며 또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의 날이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의 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하여는 아무 언급을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경고해 주는 명백한 ‘말세 징조’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4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예수님의 제일성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대하여 속임을 당하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즉 말세가 가까움을 보여 줄 ‘징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언제 말세가 되든지 간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부터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을 미혹하는 일들은 우선 ‘가짜 메시아’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즉 자칭 예수라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면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즉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단들은 특히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곳곳에서 연이어 터질 때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함으로써 더욱 활개를 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참된 신자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온갖 ‘난리와 난리’가 점점 더 많이, 더 크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런 ‘가짜 메시아’들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한 증거’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일”은 원래부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일 뿐이며 “아직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전쟁들이 세계 도처에서 끊일 새 없고, 지구촌 곳곳에 “기근과 지진” 등의 재해가 연이어 벌어지겠지만, 그것들은 그저 말세가 가까워질 때 필연적으로 벌어질 “재난의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감람나무’ 혹은 ‘동방의 계명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역시 그런 사이비 교주들은 곳곳에 등장하고 있으며 끝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까지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항상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이용하여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이 곧 망한다.’는 말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미혹하는 데에는 가장 효력이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가짜 재림 예수’일수록 특히 ‘민족 간의 내전, 나라 간의 전쟁’이나 ‘지진, 기근, 온역 등의 천재지변’ 따위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사건들을 자기네가 주장하는 ‘재림 일정 시간표’에 억지로 뜯어 맞추어 넣어 그럴싸하게 꾸미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내가 바로 재림한 그리스도다.’라고 소개해야 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예수님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동반하시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한눈에 재림주이심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우주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그처럼 구차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 날 아무 시에 세상 끝이 온다.’라는 따위의 예언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6절)고 천명하신 사실을 자기는 안다고 하는 것이니, 재림주는커녕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단임에 분명합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세상의 종말의 날짜와 직결시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분명히 일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또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끝이란 공포스러운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될 날이니 그런 가짜 메시아들의 미혹이나 온갖 천재지변을 당해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온갖 헛된 종말론을 유포할 때, 바로 그런 일이야말로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나타날 징조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사탄의 속임수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참된 신자에 대한 박해’도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반드시 벌어질 징조입니다.

  9절부터 14절에 기록하기를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말세에 대한 또 하나의 징조는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가리킵니다.
  사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이단의 미혹보다 먼저 찾아왔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부터 그들은 ‘회당’ 앞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채찍’을 맞기도 했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는 사형’을 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박해는 그처럼 육체적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인 동시에 또한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는” 정신적 고통의 극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박해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관원 등 세속권력으로부터 받기도 했지만, 최악의 경우는 같은 기독교인으로부터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된 결과 기독신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는” ‘배교자’가 되어 박해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배신자들의 “불법이 성하게” 되면서 자연히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는” 즉 기독신자들 내부에서 큰 갈등과 시험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세의 징조가 나타날 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박해는 ‘배교자’들이 드러나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된 신앙인’이 누구인지 분명해지는 기회도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실하고 충성된 신자는 스데반 집사가 그랬던 것처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만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삽니다.
  그런 ‘환난 시대의 순교자’들과 ‘평화 시대의 순교자’들에 의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는” 순간 ‘땅 끝까지 이르는 전도’가 완성되면서 “그제야 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얼마나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까?
  사탄은 세상 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기의 날이 다 되어 가는 줄 잘 아는 까닭에 더욱 발악을 하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해 올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이 참된 개혁주의 기독신앙은 천주교로부터는 계속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무식하다는 비판을 더욱 맹렬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혈육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들을 것이고, 회사의 술자리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신자들이 불신가족과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가 과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대신에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만 늘어가게 될 때에 결코 실망하거나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거짓 선지자’들이 강력한 혼합종교 세력을 형성하면서 참된 신앙을 사수하고자 하는 소수의 교회를 사방팔방으로 에워싸고 핍박해 올 것이며,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이 일어나 서로 잡아 주는’ 배교가 오히려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신자에게는 반드시 ‘한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신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가 안팎으로 박해를 당하고 불신사회의 절대다수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이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벌어질 징조라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그런 와중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가 당하는 박해를 오히려 참된 신앙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교적인 신앙자세를 지키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천국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언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그처럼 자신의 믿음을 인내로 지키는 성도에게 약속된 구원의 완성을 반드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어질 사탄의 박해는 참된 복음을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필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연합공세 앞에도 결코 굴하거나 변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면서 자신의 신앙을 온 세상 앞에서 증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각 시대에 일어나는 재앙’도 세상 끝날을 예비하라고 경고해 주는 징조입니다.

  15절 이하 22절에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거룩한 곳” 즉 예루살렘이 “멸망의 가증한 것” 즉 로마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게 될 날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일부가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로마 군대의 강력한 진압에 의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사망자가 백십만 명, 포로로 잡혀 간 자가 구만칠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남긴 숫자는 좀 과장되었을 가망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로 비극적인 종말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1:22).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부 유대인들은 그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적군이 닥칠 때 본능적인 반응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 안에 있다가는 다 멸망당할 것이니 성 밖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을 탈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그런 예루살렘의 멸망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 마치 세상 종말과 직결되는 “(대)환난” 정도로 보일만 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성전이 파괴당하고 선민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종말이 닥친 것처럼 여겨질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부분적인 심판의 날이었지 결코 온 세상 전체의 끝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대재앙의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최후의 대심판이 오기도 전에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하고”끝나 버리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즉 ‘택자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인류역사를 통해 그런 날의 숫자를 조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사람들은 바로 자기 시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세상 종말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그야말로 세상 종말이 임박한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처럼 착각했던 로마제국이 야만스러운 이민족의 침략에 어이없이 무너졌을 때, 서기 1000년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 삼분의 일이나 되는 생명을 빼앗아 갔을 때,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인류가 온 세상을 스스로 한꺼번에 자멸시킬 수도 있는 위기로 몰아갔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 세기 말에 지나갔던 ‘1999년 7월’ 중에 태양계 행성들의 특이한 직렬현상으로 인하여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소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그 달이 오기 직전까지 숱한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도 예수님 재림이 가까워졌음을 일깨워 주는 ‘징조’이지, 결코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는 ‘현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으로 온갖 재앙이나 천재지변이 생기게 하시는 것을 두고서 자기 시대에 반드시 종말이 온다는 증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지금 당장 종말이 닥쳐 온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각 시대마다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오직 ‘최후 심판의 날’을 예비하며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적인 심판과 재앙 중에도 ‘피할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것입니다.
  당장 그 어떤 환난이나 재앙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더라도 결코 속단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진짜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만 굳게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23절부터 3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짜 재림 때에 벌어질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재림이 가까워진 징조’가 아니라 실제로 ‘재림이 시작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온갖 소문들을 퍼뜨림으로써 차츰차츰 널리 알려질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나타나게 될 일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는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인데, 본문의 문맥에서는 죄악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천사들이 동원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등 창조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진짜 천재지변이 일어나면서 ‘옛 하늘과 옛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재림을 알리는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면서”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을 대동하시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시면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재림주의 위엄 앞에 “통곡”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들을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우리 눈으로 직접 목도하게 될 때까지 ‘세상 끝’은 여전히 ‘가까울’ 뿐이지 아직 ‘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그 말세지말의 진짜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이단에게 미혹을 당하지 말고’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온갖 재앙 중에도 그 날들을 감하면서 택자를 보전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이처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종말의 징조들은 ‘재림 직전’에만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예언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부터가 이런 징조들을 그들 생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겪었기 때문입니다.
  미혹하는 이단, 신자를 박해하는 대적,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당하는 재난들 - 이 모든 것들은 어느 시대, 어느 신자나 다 똑같이 당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짜 중요한 점은 세상 끝날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신자가 자기 믿음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꼭 지켜야 한다는 사실일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일 년 전, 혹은 한 달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한 가지 특별한 징조를 말씀해 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 한 가지만 예의주시하면서 그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고 방심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라면 모두가 겪게 될 일반적인 징조들을 특별히 더 강조해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번, 오직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뿐입니다.
  설사 예수님 재림이 앞으로 천 년 후로 확정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하는 데에는 그 천 년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생전에 재림주를 맞이할 준비를 확실히 못 해 놓으면 죽고 나서 무덤에 묻힌 상태에서는 그 날이 천 년 아니라 만 년이 남아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이 서기 몇 천 년에 되든지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각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다 ‘내일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오늘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많은 천재지변의 종말 징조들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종말 징조들을 당하게 될 때에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정말 제대로 준비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항상 변함없는 신앙으로 그 재림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만 더욱 철저히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는 것을 오도하고 미혹하는 이단들, 우리의 지키고 있는 것을 욕하고 미워하는 박해자들, 우리의 잡은 것을 흔드는 온갖 환난과 재난 중에서도 ‘세상 끝’이 오기 이전에 꼭 ‘이런 일들이 먼저 있어야 할 줄’로 알고, 오직 자신의 믿음만 끝까지 굳게 지킴으로써 그 ‘주의 임하심’을 기쁨으로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때에, 무슨 징조가

대통령이 기자 회견을 하거나 어느 유명한 학자를 초청하여 간담회를 할 때에, 그 질문할 것을 미리 서면으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질문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꼭 대답할 필요와 가치가 있는 질문들만 골라서 답변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그런 경우에 채택되지 못하고 답변을 받지 못한 질문들은 그 대통령이나 교수가 그것들을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 5절부터 7절의 기록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을 떠나려 할 무렵에 어떤 사람들이 그 성전이 아름다운 대리석과 특별한 장식들로 꾸며진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그 화려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는 멸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그 일 있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의 날이란 것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의 날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고 물었다고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하여는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으셨지만, 그 대신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몇 가지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징조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겪을 일들이기도 했으며, 또한 오고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종말이 오기 이전에 각자의 생애를 통하여 겪게 될 징조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해 주기로 선택하셨던 질문, 즉 세상 끝날이 이르기 전에 ‘무슨 징조’들이 나타날 것인지를 함께 상고하면서, 주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다시 한 번 일깨우고자 합니다.

  1. ‘미혹하는 이단의 등장’이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8절로 11절에 기록하기를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세가 가까움을 보여 줄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제일성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대하여 거짓 꾀임을 당하거나 파선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중요한 것은 종말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 그 자체보다도,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신자가 자기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신앙을 미혹하는 일들은 우선 ‘가짜 메시아’들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칭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이 “내가 그로라”라고, 즉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때가 가까왔다”고, 즉 ‘세상 종말이 곧 임박했다’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감람나무’ 혹은 ‘동방의 계명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역시 그런 사교 교주들은 우후죽순처럼 곳곳에 등장하고 있으며 끝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까지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항상 “때가 가까왔다”는 말로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곧 망한다.’는 말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미혹하는 데에는 가장 효력이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일수록 특히 ‘난리와 소란의 소문, 민족 간의 내전, 나라 간의 전쟁, 지진, 기근, 온역 등의 천재지변’ 따위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사건들을 자기네가 주장하는 재림 일정 시간표에 억지로 뜯어 맞추어 넣어 그럴싸하게 꾸미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내가 바로 재림 구주다.”라고 소개해야 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예수 그리스도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동반하시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한 눈에 재림주이심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우주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그처럼 구차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 날 아무 시에 세상 끝이 온다.”라는 따위의 예언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누차 강조하신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을 자기는 안다고 하는 것이니, 재림주이기는커녕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단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세상의 종말의 날자와 직결시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또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끝이란 공포의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되는 날이니 그런 가짜 메시아들의 위협이나 하늘과 땅의 무서운 일들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온갖 헛된 종말론을 유포할 때, 바로 그런 모습이야말로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나타날 징조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사단의 꾀임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신자에 대한 박해’도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12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또 일어날 징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인데,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이단의 미혹보다 먼저 찾아왔었습니다.
  “너희에게 손을 대어”라는 말씀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육체적인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 앞에서 재판을 당하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채찍과 돌에 맞는 형벌까지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박해는 육체적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이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정신적 고통의 극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박해를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받기도 했고, 또는 “임금들과 관장들” 즉 세속권력으로부터 당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으로부터 배반당하고 넘김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얼핏 비슷해 보이는 종교인로부터 시작하여 불신 세상 정권들까지 가세하는 가운데, 육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온갖 종류의 박해들을 참된 신자들이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징조가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박해당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예수신자 됨이 드러나는 기회이며 오히려 불신자 앞에서 참된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구재(말하는 재주)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신자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곧바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그 신자의 입술과 마음에 변명할 말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 믿는 믿음만을 확실히 지키고 있으면 그런 사람은 그 언제 어떤 자리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그 신앙을 고백하고 변증하고 전도할 말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교적인 신앙자세만 지키고 있으면 성도는 어떤 박해 속에서도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는”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되며, 그런 “인내로 영혼을 얻는” 완전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실로 얼마나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사단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면 할수록 더욱 발악을 하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이 참된 개혁주의 기독교신앙은 가톨릭으로부터는 계속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무식하다는 비판을 더욱 맹렬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추석 때에도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혈육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들을 것이고 회사의 술자리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신자들이 불신가족들과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가 불신 과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대신에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들만 늘어가게 될 때 결코 실망하거나 약해져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참된 신앙을 사수하고자 하는 교회는 반드시 절대다수의 종교인들로부터는 항상 ‘공회’ 앞에 세움을 당하고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속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기다리는 신자에게는 반드시 ‘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가 안팎으로 핍박당하고 미움받는 일은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항상 있을 대표적인 징조라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그런 와중에서도 오직 ‘너희의 인내로 너희의 영혼을 얻으라’고 뜨겁게 격려하고 계십니다.
  세상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어질 사단의 박해는 참된 예수 신앙, 참된 진리를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세상 사회의 비난 앞에서도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떳떳하게 신앙을 변호하며 주변 사람들의 미움 앞에서도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지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끝까지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각 시대에 일어나는 재앙’도 세상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20절로 24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후 66년경에 유대인들 중 일부가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로마의 강력한 진압에 의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사망자 즉 “칼날에 죽임을 당한” 자가 백십만 명, 포로된 자 즉 “이방에 사로잡혀 간” 자가 구만 칠천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남긴 숫자는 좀 과장되었을 가망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로 비극적인 종말이었음을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예루살렘의 멸망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큰 환난과 진노”로써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부 유대인들은 그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성으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적군이 닥칠 때 본능적인 반응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 안에 있다가는 다 멸망당할 것이니 성밖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을 탈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 멸망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세상 종말과 직결되는 사건 정도로 보일만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당하고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떼죽음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더 큰 종말의 징조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부분적인 심판의 날이었지, 결코 온 세상 전체의 끝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종말은 “이방인의 때가 차는 날” 즉 구원 받기로 작정된 모든 택자들의 수가 채워지는 먼 훗날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각 세대의 사람들은 바로 자기네 시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세상 종말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그야말로 세상 종말이 임박한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처럼 착각했던 로마 제국이 야만 이민족의 침입 앞에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게 되었을 때, 서기 1000년이 다가올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 삼분의 일을 죽였을 때, 일이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 세기 말에 지나갔던 ‘1999년 7월’ 중에 태양계 행성의 어떤 이상변동으로 인하여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소위 ‘노스트라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그 달이 오기 직전까지 숱한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 사람들은 바로 자기 시대에 꼭 종말이 올 것처럼 보이는 이와 비슷한 징조들을 계속 보고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으로 여러 가지 재앙이나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생기게 하시는 것을 두고 무조건 자기 시대에 반드시 종말이 올 것이라는 증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런 재앙을 만나게 될 때, 자신과 가족과 자기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이 없는지 돌이켜 보고 회개함으로써, 앞으로 진짜 최후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를 위하여 대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도 반드시 구원 얻을 것을 확실히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적인 심판과 재앙 중에서도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국난이나 재앙이 당장 내 눈 앞에서 일어나도 결코 속단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이르게 될 때까지 오직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만을 굳게 붙들고 결코 놓치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종말에 대하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과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먼저 나타나겠습니까?’라는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질문 즉 종말의 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두 번째 질문 즉 종말 이전에 반드시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대하여서 아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분명히 가치가 없는 질문이며 필요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종말의 징조들은 꼭 ‘재림 직전’에만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부터가 이런 징조들을 그들 생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혹하는 말들, 신앙을 억압하는 박해,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당하는 재난들 -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바로 어느 세대, 어느 신자나 겪을 수 있는 종말 징조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종말의 징조들이란 한 신자가 그 어느 시대에 살더라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시대에 사는 각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깨어서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일 년 전, 혹은 한 달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한 가지 특별한 징조를 말씀해 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 한 가지만 예의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자기 신앙생활에 해이해지고 방심하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라면 모두가 겪게 될 일반적인 징조들을 특별히 더 강조해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예수님 재림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단 한 번, 오직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뿐입니다.
  설사 예수님 재림이 앞으로 1000년 후로 확정되어 있다 손치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재림 준비하는 데에는 그 1000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전에 예수님 재림 준비 확실히 못 해 놓으면 죽고 나서 무덤에 묻힌 상태에서는 그 날이 천 년 아니라 만 년이 남아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이 서기 몇 천 년에 되든지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예수님 재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고, ‘오늘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예수님 재림이 아직 멀었구나.’라고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은 과거이든지 현재이든지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예 존재하지 않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들 중에서 ‘어느 때’에 대하여서는 전혀 대답해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대답해 주실 필요가 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만약 대답해 주신다면 그것은 재림 준비를 제대로 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대학교의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퀴즈’를 줍니다.
  이 퀴즈란 무슨 수수께끼가 아니라, 그 학기의 교과 내용이나 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의 내용 대하여 부분적으로 자주 치르는 짧은 시험을 말합니다.
  그 중에 어떤 교수는 그런 퀴즈를 매 시간마다 주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 교수의 수업이 있기 전날마다 항상 퀴즈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교수는 퀴즈 주는 날을 무작위로 골라서 자기 마음대로 불규칙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즉 어느 날에 퀴즈를 치르게 될지 학생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경우에 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교수님의 눈치를 살피고 그 어떤 암시와 행동거지를 보면서 다음 시간에는 퀴즈를 낼 것 같다 혹은 안 낼 것 같다 하고 온갖 추측을 다해 보는 것이 좋은 자세이겠습니까?
  아니면, 수업이 있을 때마다 그날 퀴즈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항상 퀴즈 시험 준비를 갖추고 수업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퀴즈 나오는 날을 예측하려고 하는 학생은 분명히 낙제할 것이고 언제든지 퀴즈 치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만 ‘A’학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준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오실까?’ - 여기에만 온갖 신경을 쓰는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 재림 준비 제대로 하지 않고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재림 징조가 지금 내 눈앞에, 지금 내가 사는 시대에도 이처럼 곳곳에서 뚜렷하구나.’ - 이렇게 긴장하고 깨어 있는 성도만이 ‘자기 등불에 기름을 채워 넣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신자로서, 천국의 혼인 잔치에 틀림없이 들어갈 수 있는 성도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많은 천재지변의 종말 징조들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종말 징조들을 당하게 될 때에도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라’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진짜 바로 믿고 잘 섬기는 성도는 예수님 언제 오시더라도 항상 변함없는 신앙으로 그 주님 맞을 준비만 더욱 철저히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는 것을 오도하고 미혹하는 이단들, 우리의 지키고 있는 것을 욕하고 미워하는 박해자들, 우리의 잡은 것을 흔드는 온갖 환난과 재난 중에서도, 세상 종말 이전에 꼭 ‘이런 것, 이런 징조들이 먼저 있어야 할 줄’로 알고 이 신앙 끝까지 잘 지킴으로써 예수님 재림을 영광 중에 함께 맞이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3-28-2024(목) 누가복음 2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부의 두 렙돈(2절)


2. 또 어떤 가난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He also saw a poor widow put in two very small copper coins.
"I tell you the truth," he said, "this poor widow has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s.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가난한(구차한) 5303 후스테레마(hüstĕrēma) ὑστέρημα, ατος, τό  

1. 결핍.  2. 결점
발음 [ hüstĕrēma ]
어원 / 530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결핍, 궁핍, 부족, 눅 21:4, 고전 16:17(부족한 것), 고후 8:14(부족한 것), 빌 2:30.
2.  부족, 결점, 살전 3:10.

가난한 4434 프토코스(ptōchŏs) πτωχός, ἡ, όν 

1. 구걸하는. 2. 불쌍한
발음 [ ptōchŏs ]

어원 / πτώσσω ‘웅크리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구걸하는, 의지하고 사는, 가난한, 마 5:3, 11:5, 눅 21:3, 계 3:17.
2. 불쌍한, 가련한, 하찮은, 빈약한, 무력한, 갈 4:9.



πτωχός, ἡ, όν  4434 [ptōchŏs]
  • 1. 구걸하는, 의지하고 사는, 가난한, 마 5:3, 11:5, 눅 21:3, 계 3:17.
  • 2. 불쌍한, 가련한, 하찮은, 빈약한, 무력한, 갈 4:9.
πένης, ητος 3993 [pĕnēs]
  • 가난한, 궁핍한, 고후 9:9.

ἐνδεής, ές 1729 [ĕndĕēs]
  • 가난한, 행 4:34.

πενιχρός, ά, όν 3998 [pĕnichrŏs]
  • 가난한, 궁핍한, 눅 21:2.

  • 가난한 

  • 부족함, 가난
  • 메뚜기[아라 비아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오늘 날까지도 늘 먹는 곤충], 세례 요한의 음식, 마3:4, 막1:6.


πτωχεύω 4433 [ptōchĕuō]
  • 가난하다, 빈곤하다, 고후8:9.

βάθος, ους, τό 899 [bathŏs]

1. 극심한 가난, 고후 8:2.
2. 깊음.
3. [문자적으로] 마 13:5, 막 4:5, 눅 5:4, 롬 8:39, 엡 3:18.






2 렙돈을 넣었다는 누가의 표현은 마가에 의해서 고드란트로 표현합니다(마가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렙돈 (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렙돈은 헬라의 주화로 무게는 1.7g이며, 재질은 구리이다.
1렙돈은 1/2 고드란트, 1/8 앗사리온, 1/128 데나리온 의 가치를 가졌다.







성경의 화폐 - 렙돈

 1-

구약 시대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일정한 가치의 기준이 되는 오늘날의 화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상거래나 어떤 상황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에는 주로, 금, 은, 청동, 철과 같은 금속들이나 양, 염소, 새, 곡물, 기름가 포도주 같은 가축이나 농산물이 화폐의 기능을 대신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세겔”이라는 단위가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세겔이라는 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게의 단위입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23장에는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사라를 매장할 땅을 헷 사람 에브론에게 구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에브론에게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주었다고 합니다(창 23:16).
이 표현은 사백 세겔 무게의 은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은의 모양은 덩어리 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장신구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발굴물 중에는 은을 철사와 같이 길게 뽑아 놓고 마치 실타래 처럼 뭉쳐 놓은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런 형태로 은을 달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교환 가치에 따라서 그것이 은 일수도 있고, 금일 수도, 청동이나, 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세겔이라는 무게 단위를 세겔이라는 화폐로 생각하시면 성경을 읽다가 혼동이 올 수도 있습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지불한 은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 수있는 단서가 위의 성경 구절에 있는데요.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상인들은 바벨론의 무게 단위를 국제 통용 무게 단위로 사용했습니다(고대 바벨론 제국 1894–1595 BCE).
바벨론 세겔은 그 무게가 약 8.3-8.5g 입니다.
따라서 400세겔은 은 3.4kg에 해당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세겔의 단위는 항상 일정했는가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또는 같은 시대라도 지역에 따라서 세겔의 무게가 제 각각이었습니다.
아래의 예는 매우 간단히 몇가지를 소개하는 시대와 지역별 세겔의 표준 무게입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건넌 세겔은 그 무게 단위가 수메르-바벨론 세겔이고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성전세를 내게 하시는데, 그 때의 세겔은 아마도 이집트 세겔을 사용했을 겁니다.

수메르 - 바벨론 세겔 (아브라함 가족들의 시대)  8.3-8.5g
이집트 세겔 (출애굽 시대)  11-13g
앗수르 세겔 (히스기야 시대)  10g
바벨론 세겔 (포로기 시대)  8.3-8.4g
요세푸스 (예수님 시대)  13.6g

이렇게 세겔 무게 단위의 금이나, 은, 청동이나 철들을 교환하다보면 반드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바로 저울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의 추도 가지고 다녀야합니다.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동전입니다.

오늘날의 동전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스에서 국가 또는 지역 통치자들이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조폐공사를 만들었습니다.
지역마다 세겔의 무게가 다르고,  저울 추를 믿을 수 없어서 고안해낸 제도입니다.
조폐공사에서 균일하게 무게를 맞춘 금과 은들을 휴대하기 쉽게 둥글 납작한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게가 일정한 공인된 화폐라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그 위에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오늘날의 동전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그리스식 동전이 지중해 주변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성과 편이성 때문에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라마다 동전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동식물이나,  글자,  또는 통치자의 형상들을 문양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당시의 동전들의 이름을 많이 소개합니다.
드라크마, 데나리온, 아사리온, 고드란트, 렙돈과 같은 동전의 이름들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동전의 단위는 “렙돈”(λεπτὸν)이라는 단위입니다.

아마도 성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헌금함을 지나가는 부자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는 그 누구보다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였다는 칭찬과 함께 말이지요.

두 렙돈을 지금 대한민국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의 가치일까요?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마 20:10).
돈의 단위 상으로 1 데나리온은 64고드란트입니다.
그런데, 렙돈은 그 고드란트의 절반(2 렙돈=1고드란트)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략 하루의 노동시간이 8시간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하루 노동으로 1데나리온(64 고드란트)을 받는다면, 한 시간에 8 고드란트를 받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한 시간 최저 시급이 2019년을 기준으로 8,350원이니, 1 고드란트(=2 렙돈)는 약 1,000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데나리온 = 64 고드란트 = 128 렙돈
1 렙돈 ≈ 500 원

금이나 은이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동전 렙돈을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가치로만 이해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드리는 여인의 믿음의 무게로 그 두 렙돈을 평가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믿음의 무게를 늘려나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화폐 단위 -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성경의 화폐 단위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등이 있다.
주조화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양모, 곡물, 목재, 가축 등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금속의 무게를 달아 값을 치렀다.

주조화폐는 B.C. 7세기경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금속 조각의 화폐였던 것이 차츰 금화나 은화로 발전했다.
화폐가 발전하면서 무게의 단위와 주화의 명칭이 상용되기도 했다.
무게 단위이자 화폐로 통용됐던 게라, 베가, 세겔에 대해서는 성경의 단위 – 무게편을 참고하면 된다.

구약성경의 화폐 단위

다릭(Daric)

다릭(Daric)은 바사(페르시아) 시대의 표준 금화다. 황제 다리오(다리우스 1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화폐 단위다. 원어인 히브리어성경에는 ‘דַּרְכְּמוֹן(darkemon)’으로 기록되어 있다. 1다릭의 무게는 약 8.4g이다. 금 1돈이 3.75g이니 2돈을 웃도는 가치인 셈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공사를 위하여 창고에 바친 것은, 금이 이만 다릭이요, 은이 이천이백 마네였다.(새번역 느헤미야 7:71)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치리할 때,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성경은 당시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금 20,000다릭을 성전 건축에 쓸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168kg의 엄청난 양이다. 2021년 금 시세가 순금 1g이 약 63,000원이다. 20,000다릭이면 100억 원 정도의 금액을 봉헌했던 것이다. 단, 금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 하에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 추정치는 90억원가량이다.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렙돈(Lepton)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헬라의 주화로 고드란트의 2분의 1 정도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1~4)

고드란트(Godrants)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앗사리온(Assarion)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은 로마에서 쓰던 소액 동전으로 청동 화폐 단위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1앗사리온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5천 원 정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
    라(마태복음 10:29)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보잘것없는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 계신다.

데나리온(Denarius)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다. 로마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었으며 로마 황제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은화(銀貨)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 나드 한 옥합을 ···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마가복음 14:3~5)

한 여자가 들고 온 나드(Nard)는 고급 향유다. 휘발성이 강한 나드는 반드시 병에 넣어서 보관한다. 사용할 때는 병을 깨서 향을 퍼지게 하는데, 신경안정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드향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천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향료인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크마(Drachma)

드라크마(δραχμή, Drachma)는 ‘움켜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은화의 명칭이다. 무게는 약 4.3g으로 1드라크마는 로마의 주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8~9)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작은 은화를 꿰어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해온 관습이 있다고 한다. 드라크마 10개를 끈에 꿰어 만든 이 머리 장식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리는데,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도 전해진다. 즉 세메디는 장식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드라크마는 바로 이 세메디로 추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화 한 닢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는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와 같음을 설명하셨다.

므나(Mina)

므나(μνᾶ, Mina)는 주로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으나 헬라와 로마에서는 화폐 단위로도 사용됐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

(새번역 누가복음 19:12~22)

비유 속 귀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 1므나씩, 총 10므나를 주었다(누가복음 19:16, 18, 20).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주고 간 10므나는 10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노동자 일일 급여를 7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7천만 원 정도다. 즉 종들은 개인당 7백만 원의 자본금을 받았던 것이다. 왕은 그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도 장사를 하지 않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을 엄히 문책했다.

달란트(Talent)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18:23~35)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다.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이 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땅에 묻혀 계셨던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찬반론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연구는 매우 흥미로워진다.
그 이유는 기존의 우세한 견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마태복음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사람들은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를 어떻게 사흘 밤낮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유로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은 얼마의 시간인가?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셨던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 낮과 하루 밤”이 하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루의 한 시간도 “하루 낮과 하루 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시간(금요일과 토요일)이 하루(토요일)와 다른 하루의 단 몇 시간(금요일의 한 두시간) 즉, 이틀 밤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요한복음 19:31 누가복음 23:50-54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책형을 당하셨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9:31누가복음 23:54-56, 두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누가복음 23:50, 52-5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우 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

여기에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구절이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추정해보면, 하루는 자정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었으며, 4월에는 그 시각이 대략 7시 경이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은 “제 9시경”에 돌아가셨고, 이는 현대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경이므로, 성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에 기록된 사건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묻히신 시간은 오후 3시경부터 7시경 사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그 주의 안식일, 즉 한 주의 7번째 날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의 다음 날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준비일로 사람들이 이를 혼돈했던 것 뿐이다.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별도로 다른 특별한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의 규정에 대해 언급한 레위기 2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4-8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새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히브리 달력의 첫번째 달은 아빕으로 후에 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요한복음 19:31누가복음 23:53에서 말하는 준비는 유월절과 무교병 절기에 대한 준비였다.
마태복음 27:46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규례에 따라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는 니산 제 14일, “9시 경”, 즉 오후 3시 경에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고, 무교절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다(누가복음 23:53)”는 것은, 레위기 23:7의 무교절 첫째날을 의미한다.

레위기 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는 구절로 인해 무교절 첫째날을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2이 아니라, 규례에서 모든 노동을 금하는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즉, 안식일은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준비일, 특별한 안식]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마가복음 15:42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과 해가 저문 후 시체를 받은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 15:42-43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니산 제 14일로, 아직 유월절을 준비하는 무교절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날은 항상 [“곧”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안식일 전날”로, 요한복음 19:31누가복은 23:52-54의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째 날이며, 그 다음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니산 제 15일로)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하는 구절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날이 아닌 특별한 안식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교절 첫째날만이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더 많은 날을 명확하게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레위기 23:23-32를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23-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3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안식일로 묘사된 일곱번째 달의 첫 날이나 열흘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미리 정해진 날짜나 기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안식일,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로, 주님의 죽음 다음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말그대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식일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인 레위기 23:33-36을 읽어보자.

레위기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성경 구절에 나와 있듯이, 초막절 첫 날과 여덟째 날 모두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다른 개념이다4.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의 준비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주일과 일치할 필요가 없이 사용되었다.
레위기 25:1-4
의 말씀을 읽어보자.

레위기 25:1-4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위에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일반적인 주일인 “한 주의 일곱째 날”과,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기일인 반면, 특별한 안식일은 미리 정해진 날짜로, 주중 어떤 날도 될 수가 있다.
특별한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표현하였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닌, 주중 어떤 날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부활하셨는가?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며 주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40시간에 끼워 맞추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믿으면 돌아가신 날짜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해가 질 때 땅 속에 묻히셨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정확하게 72시간 후, 땅 속에 묻히신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일요일 아침이 아닌 오후, 즉, 해가 질 무렵이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일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새벽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6:1-8).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신 시점이 일요일 아침이 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확히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보내시고,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 즉 땅에 묻히신 시각과 일치하는 그 시각에 부활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위 구절에서 안식일은 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인 주일이다. 주님께서 “땅 속에서” 계셨던 사흘 낮과 밤이 특별한 안식이었던 동시에 주일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16:1과 누가복음 23:5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23:56
"[마가복음 16:1과 동일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 참조)]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매 여인들이 향품을 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안식일 전에 (여인들이 미리 향품을 샀다는 의미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두 안식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1에 나오는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날, 즉 특별한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56에 나오는 안식일은 주일이다.
두 구절 모두 같은 날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한 날)을 의미하지만, 각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은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즉 특별한 안식일과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마태복음 28:1-2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은 “새벽에”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동사 "epifosko"를 번역한 것인데 “해가 지다”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23:53-54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땅에 묻힌 시간을 언급하실 때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누가복음 23:53-54
"[요셉]이 이[시체]를 내려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epifosko]."

신약에서 이 두 구절 외에 동사 "epifosko"를 써서 시간을 표현한 부분은 없다.

다시 마태복음 28:1로 돌아가보면,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전에 예수님께서 묻히신 시간과 일치하는 해질 무렵이다.
그 시간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을 보기만 하고 돌아갔으며, 마가복음 16:1-2와 같이 자신들이 떠난 후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른 채, 다른 날 향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4절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께서는 그 사흘 낮 사흘 밤 전 같은 시각에 묻히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일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무덤에서 계시기를 마치신 그 시간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는 몇 시에 묻히셨는가?
요한 복음 19:31의 준비일과 다른 구절의 특별한 안식일인, 무교절의 첫날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니산 제 14일 해질 무렵이다.

얼마나 땅 속에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서 언급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72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일요일]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무덤 안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낸 후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토요일 오후부터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토요일6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셋째 낮과 밤이고, 금요일이 둘째, 목요일이 첫째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고, 같은 날 오후에 묻히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목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특별한 안식일이 된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했던 금요일은 평일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계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없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날짜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 중 어떤 주제라도 정확성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검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통에는 분명히 부주의성과 잘못된 추정이 있고, 성경의 명확성을 왜곡하는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E.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Kregel Publications, Grand Rapids, MI 49501, 1990

Ralph Edward Woodrow: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Ralph Woodrow Evangelistic Association Inc., 1992



각주

1. 출애굽기 12:2, 13:4와 에스더 3:7 참조.

2. 이는 기일이 아닌 첫 달 제 14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였다.

3.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은 이 구절에서 시간 계산에 대해 논했던 바와 일치한다.

4. 이 특별한 안식일이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주일과 같을 때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구절은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이다. 그러나 고대 필사본에 구두점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쉼표를 찍은 위치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무덤 안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무시는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쉼표를 “부활하셨다”는 단어 다음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해당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성경 구절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6.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을 적용했다.




예수님은 왜 과부가 ‘두 렙돈’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을까?

기독일보
4~5분

1. 예수 시대의 헌금통

예수님 시대의 성전에는 헌금통이 13개가 비치되었다. 7개는 성전세, 6개는 성전 유지비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용.

당시 통화는 그리스 주화, 로마 주화였으나, 유대인은 은의 순도를 고려하여 두로화(Tyrian Shekel, 아래 그림 참조)를 고집하였다고 한다. 종교세 유통을 일원화하고자 한 실리적 이유였을 것이다.

▲이 주화는 두로화(Tyrian Shekel)이다.

성전세는 일년에 반 세겔로서, 모세의 율법과 계약을 맺은 20세 성인 남성은 반드시 내야 하는 헌금이다. 세겔은 알다시피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기에, '현대인의 헌금 규모보다 얼마 안 되네?' 싶겠지만,

당시 규정 성소는 한 곳이었다는 점, 그리고 성전 징세는 비록 느헤미야 시대부터였으나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통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현실적인 금액이다.

그런데 이 헌금자 중에 예수님의 눈에 띈 여성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 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본론의 시작이다.

▲비록 이단에서 만든 영상 캡춰이지만 가장 타당한 고증의 재연이다. 헌금통이 나팔관처럼 되어 있어 헌금 떨어지는 소리에 효과적이었음을 잘 고증하였다.

2. 헌금통 앞에 앉아 어떻게, 무엇을 보고 계셨나

실제로 예수께서는 헌금통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때 "보고 있었다"는 동사 '에테오레이(ἐθεώρει)'는 과거시제 중에서도 미완료로서 그 이전부터 죽 그렇게 해 온 행위를 반영한다. 즉 어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에서의 "(그냥 무심코) 올려보다가 눈에 띈(Ἀναβλέψας δὲ εἶδε)" 뉘앙스와는 대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설마 예수께서 저 위치에서 저렇게 보셨을까. 본문 어휘가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그림처럼 저런 자세로 보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예수님이더라도 시험들기 십상). 이에 관해서는 있다가 다루겠다.

그러면 이 남다른 관찰로 무엇을 봤을까?

금액을 봤을까, 의복/ 행색을 봤을까? 문자적으로는 '어떻게(πῶς)' 헌금하는지를 봤다 했으나, 단순치 않다(누가복음에는 이 πῶς가 없음).

우린 '어떻게' 헌금을 하나?

▲바로크 시대에는 바로크답게 과부 이야기조차 사치스럽게 꾸몄다. Baroque fresco at Ottobeuren.

과거에 공부하던 시절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채플이 열렸는데, 헌금 바구니가 돌았다. 헌금을 하는 목사님 학우들을 보면(보려고 본 건 아니고), 만원짜리를 넣는 분은 손이 바구니 밖에서 보이는 상태에서 헌금을 떨어뜨리고, 손이 헌금 바구니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분은 얼마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의 경우 5천, 3천원을 하더라도 손을 헌금 바구니 속으로 쑥 넣으면 더 쪽팔린 것 같아, 감추려는 유혹을 떨치고, 더욱 보란듯이 바구니 위 공중에서 천원짜리를 낙하시키곤 하였다.

예수께선 이런 탈외식을 가장한 인위적인 태도를 지켜보신 것일까?

헌금은 심리이다.

예수께서는 헌금의 액수까지 거론하였다.

▲이 주화가 바로 본문 속 렙타이다. 과부들의 동전.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본문상의 한 렙타(속격)는 한 세겔(일당)의 64분의 1 가치의 주화이다.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가장 최소 단위의 주화이다. 그래서 이를 과부의 동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통화의 절대가치가 아니라 두 렙타가 갖는 배수/분, 즉 남성들은 세겔(일당)의 절반으로 의무를 다하였으나, 과부는 두 배를 감당함으로써 생산능력을 갖춘 남성의 배분 가치를 압도하고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과부의 열악한 처지와의 이러한 대비를 누가복음에서는 '부자'와 '과부'의 대비로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현장이 보다 실제였을 것이다. 오클로스(하급의 무리)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보고 있었다"라는 동사 '에테오레이'는 단순한 주시가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동사를 순화시킨 이유는 이것이 수색/조사를 동반한 좀 센 관찰이었기 때문이다. 즉 헌금 액수를 거론한 것은 모든 관찰의 종합이지, 탐색의 주된 요소는 아니다. 이 관찰의 대상은 그 과부가 지닌 전체 아우라인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러 왔다니까, 거지 행색을 하고 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삶을 포기한 사람 중엔 자기 할당량의 두 배를 헌금통에 넣을 정도로 준비된 사람이 없다. 그 돈으로 술을 사거나, 아니면 마지막으로 가족과 먹고 죽을 빵을 사지.

그녀는 부자들 틈에 낀 가난한 자라서 눈에 띈 게 아니라, 화려할 것 없는 오클로스(ὄχλος)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띌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부의 원형으로서 고향으로 귀환한 나오미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은 드로잉은 좋으나 상기의 해석과 배치된다. 과부의 낯빛이 저리 잿빛이었을 리 없다.

3. 참 과부의 원형

생활형 종교인이 아닌 이상, 구도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길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자기가 걸어온, 혹은 걸어가고 있는 길은 맞는지, 자기가 축성해온 수고와 시간은 효력을 발하는 지.

만약 자기 수고와 시간이 남아 있다면 그는 부자이다.

그러나 만일 수고와 시간을 박탈당한 경험이 있다면 성별의 구분 없이 그는 과부이다. 과부의 영성인 것이다.

바로 이 때 나오미는 비록 자신은 연로하나 자기를 따라온 소녀 과부 룻에게 참된 태도를 가르친다. 너의 고엘이 될 보아스에게 갈 때, 거지 행색을 하고 가서 '의무를 다하라' 청구하는 게 아니라, 기름을 바르고 단정하게 하고 가서 직접 관계를 교섭하라는 지시이다.

이 태도, 곧 부끄러운 두 렙타(λεπτὰ)의 땡그렁 소리도 당당하게 임하는 기품이 바로 '거지'와 '신부'의 차이를 가르는 것이다. 이것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우리가 헌금을 낙하시킬 때, 우린 부자인가 거지인가.
본의 아니게 우리는 거지의 행색을 자처한다.

▲이것은 The Classic Bible Art Collection (Formerly Standard Publishing) 삽화인데 헌금통 입구가 저렇게 부착 되었을 수도 있다는 고증이다. 마치 수도가 같으나 헌금통 입구는 외벽 밖이지만 헌금통은 성전 내부였을 것이라는 고증.

4. 미문(美門), 여인의 뜰

공교롭게도 이곳은 거지짓 하던 못 걷는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운 성전 미문(美門)과 접해 있다.

예수께서 주시하고 계시던 이 장소는 성전 구조상 '여인의 뜰'로서, 당시 헤롯 성전은 '제사장의 뜰',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처럼 대중에게 종교 테마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방인의 뜰이라 하여 이방인만 들어갔던 것이 아니며, 여인의 뜰이라 하여 여인만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이스라엘인이 들어갈 수 있지만 이방인은 그 이상의 공간으로 넘어갈 수 없고, 남성들은 여인의 뜰에 들어갈 수 있지만 여성은 그 이상의 공간에 들어설 수 없는 그런 경계가 선명하였다.

헌금통을 두던 바로 이 '여인의 뜰'이 미문이라는 문을 접하고 있었는데, 이 미문은 '코린디안의 문'이라고도 불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문은 아름다운 문인데, 어찌하여 코린디안이라 불렸을까.

코린디안은 'Corinthian', 즉 고린도전/후서의 그 지역을 말한다. 고린도 지역은 거울 생산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는데, 당시 거울은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미문이 코린디안의 문이었다 함은 그것이 황금(사실은 동)의 문이었던 까닭이다.

이 상징의 교차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저 유명한 노래,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ㅡ에서,

소리 나는 구리(χαλκός)는 이 헌금함에 떨어뜨리는 주화(χαλκός)와 같은 어휘로서, 돈을 떨어뜨리는 태도의 은유이며, 이 과부의 두 렙타 이야기는 바울이 가르친 이 사랑의 노래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렙타가 굳이 한 코드란트라 밝힌 것은 이 코드란테스(κοδράντης)가 쿼터의 유래인 것과 연관 있다. 과부의 이런 결기가 성전의 쿼터를 지탱한다는 표지.







03-27-2024(수) 누가복음 20:45-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기관들을 삼가라(46절)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Beware of the teachers of the law. They like to walk around in flowing robes and love to be greeted in the marketplaces and ha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마가복음 12:38~40)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즐기며. 
39. 회당의 상좌(높은 자리)와 잔치의 상석(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서기관(율법학자)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과부의 재산을 가로채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 긴 옷(38절) :  긴 옷은 유대의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기도할 때나 예배 때에 입는 예복(禮服)입니다.    
그런데 이 예복을 밖에까지 걸치고 나타나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40절) : 과부나 부유한 부녀자들을 위하여 긴 축복의 기도를 해주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일을 의미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율법의 판결권을 남용하여 성전에서 일하는 과부의 재산을 교묘하게 착복하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사람인 척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가라”는 말은 “등을 돌리다, 길을 달리하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서기관들에게 등을 돌리며, 또 그들이 가는 길과 달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과 같이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종교에 세 개의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부활도 인정하지 않고, 내세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현실만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에쎄네파가 있었습니다.
에쎄네파는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현실을 부정하고 금욕주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두 파는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는 달리 부활도 인정하고 내세도 인정하고 오직 율법대로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에쎄네파와는 달리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가운데서 율법을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바리새파 중에서도 율법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제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는데, 그 중에 서기관들이 제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삼가라, 등을 돌리라, 그들과 길을 달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삼가라(4337) 프로세코  προσέχω 스트롱번호4337

1. 마음을 ~에게 돌리다.  2. 주목하다.  3. 관심을 가지다
발음 [ prŏsĕchō ]
어원  / 미완료 προσεῖχον, 제2부정과거 προσεσχον, 완료 προσέσχηκα, 4314와 2192에서 유래

- 월드 비전 전국 지도자 대회(대전 유성 호텔)
  새벽기도회 강사로 참석
  대전 지역에서 이름난 목사님의 경우.
  당시 가장 작은 경차 프라이드를 타고 오셨다.
  호텔에서 주자 안내를 하던 직원이 차를 호텔 앞에 주차하지 말고 호텔 뒤 주차장으로 가라고 하였단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직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보며 한 참석자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겸손한 지도자의 삶과 모습이 그립다.



누가복음에 보면(20:45-46)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얼마든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삼가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서기관들을 삼가고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누가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되기가 쉽겠습니까?
그것은 누구보다 말씀대로 예수님을 더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오래 믿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교회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22: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남들에게는 가르치기만 하고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 22: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제일 되기 쉬운 사람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입니다.
또 이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또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지도자도 아니기에 “절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다릅니다” 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이 제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기 쉽니다. 왜냐하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일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말씀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겸손한 사람입니까? 내가 항상 교만한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겸손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이 서기관과 같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를 채찍질하면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는 길과 반대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찬식을 하기 위해서 검은 가운을 입습니다. 이렇게 가운을 입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찬식을 더 경건하게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만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시장과 길거리를 걸어 다닙니다. 그들이 왜 긴 옷을 시장과 길거리에서 입고 다니겠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율법을 가리키는 서기관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가 위함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기 위함입니다. 어떤 목사님도 천주교 신부님과 같은 옷을 입고 카페에 가니까 어떤 사람이 신부인줄 알고 돈을 지불해주더라는 것입니다.

//또 그 긴 옷에는 율법의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율법의 구절이 적혀 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인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는 종교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율법이 적힌 긴 옷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그를 상석에 앉힙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회당에서만 아니라 길거리를 다닐 때도 유법이 적힌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또 40절에 보면 이 서기관들의 특징에 대해서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법률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의 주 수입은 법률을 해석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법률의 해석과 판결을 받기 위해서 서기관들을 찾을 때 어떤 기준으로 서기관들을 찾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는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을 잘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가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느냐를 가지고 서기관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이 더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경건하고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도였습니다. 특별히 기도를 오래하는 것을 경건하고 거룩한 기준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시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보는 길에서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 더 오래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이 서기관에 대해서 외식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함으로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몇 시간 기도할 정도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해 놓고 실제 부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해서 가난한 과부들의 돈을 착취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간혹 이런 사람을 봅니다. “나는 교회 집사다 장로다” 해 놓고 사람들의 돈을 떼어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도 “교회를 다니니까 우리보다 기도를 많이 하니까 또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믿을 수 있겠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건을 가장해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서기관들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시거나 돈 거래를 하실 때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만일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교회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이 서기관들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은 ---을 하라, 또 —을 하지 말라는 많은 율법을 기록하고 또 만들면서 정작 그 율법의 핵심인 사랑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많은 율법적 규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은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 등의 율법적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로 하여금 중독에 빠지게 하는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우리가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그 술과 담배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는 가족과 이웃 때문 술 담배를 끊을 수 있어야합니다. 이와 같이 술 담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또 왜 성도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합니까? 간음은 우리의 영혼에 심각한 해를 끼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주신 내 육체에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간음이란 상대방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주일성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우선을 두어야합니다. 또 성도를 사랑함으로 만나기 위해서 주일성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지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간음하지 않음으로 말씀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주일성수를 함으로 말씀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술 담배하지 않았지만 과연 교회의 형제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간음하지 않았을 뿐이지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얼마나 돌아보고 사랑하고 있습니까?(하나문제?)

주일에 예배를 잘 드리고 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사랑하고 교제하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셨다면 내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정말 내 이웃을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 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서기관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기도가 자신이 사람들에게 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보이는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 기도함으로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인 것을 보여 주려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순간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혹시 어떤 사람이 40일 금식기도를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40일 금식 기도를 할 정도로 의롭고 경건한 사람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입니다. 또 우리 주위에 있는 일반 종교인들의 생각입니다.

//내가 만일 40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하는 사람은 나는 40일씩이나 금식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나는 40일씩이나 금식기도 하지 않으면 내 자신을 죽이거나 절제하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요즘에 적어도 9시까지는 새벽기도실에 있습니다. 물론 저는 9시까지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고 또 걸으며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매일 새벽기도실에 9시까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저는 새벽시간에 그렇게 있지 않으면 하루도 못살아가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몇 시간 기도한다면 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완악하고 부수어지기 어려운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는 저 자신이 더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러분들도 누구보다 더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내가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기도를 오래하고 많이 한 사람은 절대 기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기도를 오래한 것 때문에 기도를 적게 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를 오래하고 많이 한 만큼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더 알기에 연약한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기도를 오래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의 본질은 형제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지체를 사랑함으로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밤을 새워 기도한다는 것은 밤을 새워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밤을 새워 기도한다는 것은 밤을 새워 형제를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보니까 기도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들 주위에 찬 바람이 생생 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저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기도도 율법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더 드러냅니다. 또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은 더 따뜻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참된 본질을 깨달아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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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서기관들의 제일 큰 문제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자신의 긴 옷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이 율법대로 살아가는 의인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에게 또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롬3장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러분 가운데서 만일 내가 이 교회를 다니고, 좀더 착한 일을 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분들이 바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해서, 조금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주일에 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갈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단 한 분도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나의는 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나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서기관들과는 달리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삼가라(마가복음 12:35~40)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그들을 경계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말씀을 함께 나누는 중에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길 소원합니다. 

첫째-그들의 해석과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치는데 인용하는 시110:1절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본문35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쌔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서기관들은 메사야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방으로부터 억압받는 유대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왕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처럼 메시야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다윗의 혈통을 빌려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였던 서기관들과 자주 논쟁을 하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경된 인도자라고 까지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는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시고 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말씀을 가르쳤고, 예수께서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막7:7에서 그들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서기관들은 사람의 교훈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교훈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반박하시기 전에 먼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본문 36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36절)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께 수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중에서도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었고,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다시 고기 잡으러 바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비로소 오순절 성령의 체험 후부터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모든 말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요14:2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가르칠 때나 들을 때도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도 없고, 바르게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없는 말씀의 선포와 말씀청취는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는 모든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벧후1:20-21절 말씀입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령의 감동이 없이 자신들의 전통적 해석방법에 따라 율법을 이해하고 가르쳤던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러 왔을 때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한 세례요한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1:31-33절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당시의 서기관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교훈을 받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면  결코 예수님과 논쟁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던 세례요한은 주님과 논쟁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동이 결핍된 가르침은 사람들의 영혼에 아무런 감동과 은혜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과 예수의 영광이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은 신앙인들의 영적생활에 커다란 장애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적인 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관한 학식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과 해석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학문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학자라도 그가 성령의 감동이 없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 어떤 성경적 해석이나 가르침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경해석은 자칫하면 사람의 교훈과 가르침으로 타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시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서기관들의 교훈과 가르침은 결국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의 못 받게 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증거 합니다.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나 듣는 성도나 모두가 성령으로 감동되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큰 역사를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하는 저와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둘째-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르치는 신분인 서기관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까칠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지독하게도 외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외식이라는 말은 마음속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을 위주로 사는 삶 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자주 외식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시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경계하신 서기관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보여 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오는 음부에서 고민에 빠져있는 부자는 이 땅에서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서기관들이 입기 원하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긴 옷과 자색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참으로 그는 성경의 말씀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일들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는 자신의 삶이 축복받은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그의 삶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멸망 받는 이 부자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무론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일을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이유는 남에게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타락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들을 평가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노숙자 패션을 하고 광야에서 야인처럼 사는 세례요한을 말씀하실 때 그는 왕궁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을 속히 버려야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품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높아지기를 원하는 삶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삶이라는 것을 크게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습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의 마음은 이미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으로 가득한 타락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소유자는 결코 축복 받은 영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연못에 오리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물이 말라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하고 이주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은 날 수 있는 오리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어「비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이들은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은 그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된 농부가『누가 저런 생각을 다 했을까?』라고 하면서 탄성을 지르며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자랑스럽게 대꾸했습니다.“내가 했지” 순간 그 개구리는 그 높은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교만의 결과는 반드시 패망을 불러옵니다.(잠언16:18).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이 공공연하게 성도들 사이에서도 용납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안 될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성령이 충만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그는 교회 내에 가난하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자신의 부동산을 모두 팔아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모든 이들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그에게 바나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면서 까지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 곳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이름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바나바처럼 좋은 일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밭 값의 일부만을 드리면서 모든 것을 드린 것처럼 사도들에게 거짓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적당히 하고 최고의 효과를 얻어내려는 계산된 지극히 타락한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적은 것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일은 사업에서는 몰라도 성도가 교회에서 신앙인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사단이 가득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행5:3) 
대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에게 영광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대접을 받기를 스스로 원하는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잔치나 회당에서의 상좌를 원했습니다. 

간혹 어떤 교회에는 상석이 따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원하는 자리입니다. 대접을 받으려는 마음의 산물입니다. 사단이 뿌려놓은 타락한 마음의 씨앗을 싹틔우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경계하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 대접받는 자리를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는 일은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아 높여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은 결국에는 반드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6:3-4에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를 외식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과부의 가산이라는 말은 작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서기관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사람들로 소개한 것은 그들이 작은 것들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에서 작은 일을 쉽게 생각하는 영적 교만은 우리 모두가 경계를 해야 할 교만한 마음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외식으로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실하고 참된 기도는 오래하는 것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외식으로 길게 하는 기도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12:40)

기도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처럼 기도가 다른 것들을 보조하거나 이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외식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문에 외식적인 신앙은 빨리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중하기 때문입니다.






콘텐츠(content)가 왕이라면 문맥(context)은 신이다

책을 읽을 때 문맥을 고려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작업이다.
문장의 전후 문맥을 전혀 알지 못하고 글을 읽으면 백이면 백 각기 다른 뜻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나는 ‘말’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하자.
이게 우리가 타는 ‘말’(horse)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입으로 하는 ‘말’(language)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초(初, 처음)가 아닌 ‘말’(末, ‘마지막’)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어학연수차 미국에 도착한 첫 날, 한국인 여학생에게 미국인 선생이 이렇게 물었다.
“Do you miss Korea?”
그러자 그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No, I am not Miss Korea.”(아녜요, 전 Miss Korea가 아닌 걸요).
그녀는 “한국이 그립지?”라는 영어문장을 “너 미스코리아니?”로 착각한 것이다.
문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Are’가 아닌 ‘Do’가 사용된 것도 그렇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스 코리아’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단어는 문장 속에서, 문장은 단락 속에서 의미가 결정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보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언 중 대부분이 잘못 알고 있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발명왕 에디슨이 한 말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란 말이다.
대부분은 에디슨이 영감보다는 노력에 더 강조점을 두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영감도 필요하겠지만 노력이 그 이상으로 중요함을 그가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뜻은 정반대이다.

한 잡지사 기자가 “지금까지 발명 중 가장 영감 있었던 발명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자, 에디슨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음.. 아마도 신생아의 두뇌에서 천재성을 발견했다는 것이지요.
갓 태어난 만큼 천재성이 머물기 좋은 자리는 없어요.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기 쉽지 않아요.
하지만 1% 영감과 99% 노력만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소!”

에디슨의 의미는 “99% 노력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노력해요.
하지만 난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1%의 영감이 있어요”란 것이다. 

곧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99퍼센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천재가 되려면 노력도 필요하지만 1%의 영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앞뒤 맥락을 파악하지 않은 채 한 문장 그 자체에만 고정되어 해석한다면 저자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성경 속에서 그런 대표적인 구절을 찾아보자. 수 1:7절의 말씀이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

여기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구절을 ‘정치적으로 우파나 좌파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참조해서 살펴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7절 다음에 나오는 8절까지 포함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이것을 문맥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그것으로부터 우측으로나 좌측으로나 돌아서지 말라’(do not turn from it to the right or to the left)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신 교수 수정역)

본문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책)으로부터 돌아서서 조금이라도 곁길로 가지 말고 언제나 그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7절만 보면 거기서 말하는 ‘우나 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으나, 바로 다음 절인 8절을 참조해보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율법책’을 기준으로 봤을 때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말고 정로를 추구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문맥을 고려한다는 것은 이만큼 중요한 일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지 않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잡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함이 필수적이다.

하나만 더 살펴보자.
행 19:3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극장이나 연극장에 가면 안 된다고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다고 들었다. 바울이 이 설교를 들었다면 얼마나 쓴 웃음을 지었을까?

이 본문은 영화나 연극을 금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당시 바울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해를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거기 들어가지 말 것을 권고하기 위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문맥 고려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를 취급하는 일에서 황금률, 하나의 절대적인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정직이다.
우리는 우리가 택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본문을 언제나 문맥 가운데서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본문에 정직하다는 것은 전후 문맥의 흐름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땐 문맥의 중요성을 꼭 기억하고 시작하자.






03-26-2024(화) 누가복음 20:41-4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윗의 자손(4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Then Jesus said to them, "How is it that they say the Christis the Son of David?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은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삼하 7장, 시 89:20-37, 사 9:2-7, 11:1-9. 렘 23:5-6, 33:14-18).

이와 같은 예언을 곡해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에 마치 다윗 왕과 같은 시대의 번영된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성육신하셨습니다(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성경의 예언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선언했습니다(롬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 되셨다는 것은 다윗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삼하 7장;시 89:20-37;사 9:2-7,11:1-9;렘 23:5-6;33:14-18).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점에서(빌 2:6), 그들의 메시야관은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이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언급한다(롬 1:3,4).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신약성경에서 17개의 구절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예수님보다 대략 1000년 정도 앞서 살았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메시아)가 다윗의 씨앗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말합니다(삼하 7:12-16).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따라서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였으며, 그것은 즉 예수님이 다윗의 씨앗임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법적 아버지인 요셉을 통해 다윗의 직계 후손이 된다는 계보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3장에 들어있는 계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따른 혈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요셉에게 입양되고 마리아에게 피를 물려받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언급될 때는 주로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예언한 대로 메시아적 칭호를 언급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긍휼 또는 치유를 구하는 자들에 의해 여러 번 “주여,…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불려지셨습니다.
귀신에 의해 고통 당하던 딸을 가진 여인(마태 15:22)
길 가에 있던 두 명의 맹인들(마태 20:30)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마가 10:47)

모두가 도움을 구하며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영예의 호칭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 권력, 능력을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공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외쳐 부르는 자들과 달리 바리새인들은 교만에 눈이 가리워지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므로 맹인 거지들이 볼 수 있었던 것조차 볼 수 엇었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지금 이곳에 오셨다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존경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존경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칭송할 때 격분했으며 (마태 21:15)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세웠습니다(누가 19:47).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그 호칭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라고 요구하심으로써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가 12:35-37)
물론 율법 교사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유대 지도자들이 교사로서 미숙한 점과 구약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아의 본성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내어 자신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고 세상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도리가 되신(사도 4:12)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적 의미에서도 영적 의미로도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가?

누가복음 1장 32절에서 가브리엘 천사장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라고 한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다. 아래에는 이에 관해 마태복음에 언급된 구절들이다.

마태복음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태복음 12: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태복음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태복음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 즉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물려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이다.
둘째,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물려받을 정통권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를 이을 법적 계승자이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켰음은 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에 나오는  얘수님의 두 갈래 계보에서 명확해진다.

첫번째 계보는 사회에서 예수님의 아버지로 인정한 요셉이 다윗왕의 왕족 계통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이어받을 정통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예수님은 다윗의 직계 자손일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충족된다.
누가복음 3:23-38에서 보이듯이 마리아는 진정 다윗의 직계 자손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법적, 물리적 모두 다윗의 왕좌에 정통권을 가진 다윗의 자손이다.

이런 일들은 물론 돌발적으로 생기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이들은 메시아에게 필요한 전제조건들이다.
구약성경 예언에 의하자면 약속한 메시아는 아브라함의 자손(창세기 21:12, 갈라디아서 3:16 참조)임과 동시에 다윗의 자손(시편 132:11, 사도행전 2:29-30 참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둘 다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이 진리를 직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단순한 역사적 일람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약속한 분이시며,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21;12, 시편 132:11)을 달성하셨을뿐 아니라 아담의 타락이후 타락이 가져다 준 상황을 바로잡아 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3:15)도 실행하신 것이다.


다윗의 자손, 다윗의 주 예수 그리스도(누가복음 20:41~44)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다

예수님이 고난 주간 첫날인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마 21:9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기도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의 후손인 요셉(마 1:20; 눅 1:69)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분명한 계보(족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마 1:1).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분이 길을 가실 때 두 맹인이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9:27).
심지어 이스라엘 밖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이방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보고서 한 말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습니다(마 15:22).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를 때는 다윗의 자손인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해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경우는 질병에서 놓임을 받기를 기대했던 것이고,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며 기대했던 것은 그들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즉 정치적 사회적 탄압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1:32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순히 족보상 다윗의 후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을 자로,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무궁한 나라를 통치할 자로 오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로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오셔서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반겼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그들을 억압하고 정복하고 있는 이방 민족을 몰아내기를 기대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아 자주국가를 예루살렘에서 실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바벨론, 그리스, 로마 수백 년간 계속해서 짓밟혀있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견고한 나라로 오랜 세월 다스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이 백성들 가운데 행한 기적과 가르침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기대할만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질병, 귀신, 만물(파도, 바람)을 통제하는 능력, 권위 있는 가르침,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자로 적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혹은 그와 동일한 성격의 표현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있었던 첫 번째 논쟁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의 권위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누가 준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반문하심으로 자기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눅 20:1-8). 그리고 이어진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으로 등장하는데, 그 하나님의 독생자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눅 20:9-18).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하나님)는 하나이니라”(요 10:30).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다는 것이죠(요 5:18).

그냥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하여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래서 백성이 가지고 있던 여러 질병, 정치적, 사회적, 영적 문제의 해결사, 구원자가 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왕이 되려 하셨다면 사람들은 충분히 예수님을 왕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정도 수준으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으시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신성모독자’를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훌륭한 성인,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 보는 것에 문제가 없습니다. 심지어 의지하고 기도할 대상, 나에게 복을 더해줄 대상으로 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이 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느냐?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서는 존경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따를 마음은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틀림없고, 그분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첫째는 정신이상자, 둘째는 사기꾼, 셋째는 하나님 중에서 하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①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데도 자기 자신이 그렇다고 믿고 주장한 것이라면 그분은 정신이상자입니다. 오늘날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미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미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온전하지 못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헛소리하거나, 허황된 것을 주장하거나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분은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②둘째로, 만일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한 것이라면 그분은 사기꾼입니다. 거짓임을 알고도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짓으로 남을 속이고 이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전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기가 만든 거짓말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형선고에 이르는 심문 가운데도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절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③그러면 나머지 옵션은 하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 이 탁월한 논증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입증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약 1,500년의 세월 동안 40여 명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이 성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읽고 사용하던 성경, 구약성경을 통해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임을 확증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자기의 뜻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해석하는지 배우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경해석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때 단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찾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의 질문1(41절)

먼저,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아마 성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바리새인들(마 22:41)과 방금까지 질문한 사두개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41절“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마 22:42). 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가르치던 서기관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막 12:35). 구약의 많은 예언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삼하 7:14~17; 23:1~7; 시 89:28~37; 사 9:6~7; 11:1~10; 렘 30:9; 33:14~18; 겔 34:23~24; 미 5:2). 그 대표적인 예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이런 구약성경의 말씀으로 서기관들에게 가르침 받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그리스가 자기 백성의 땅에 오신다면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와야 한다고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성경 기록 하나를 그들에게 읽어주십니다.

2. 예수님의 인용(42-43절)

42절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절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110:1인용)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 말씀입니다(1절). 다윗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람의 손에 의해 뽑힌 실패한 왕 사울을 이어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선택하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으로,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뜻대로 선하게 다스린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습니다(BC 1000년 정도).

제왕시라고도 불리는 이 시편은 다윗은 자기 이후에 세워질 왕,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자기의 왕권을 이어받고 그 나라를 다스릴 자를 위해 지은 노래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솔로몬이었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다윗이 기대했던 후손을 솔로몬이 아니라 많은 유대인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바로 그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메시아)로 보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도 그러한 접근을 이상하게 보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솔로몬과 그 후손들보다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그리스도에게 적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시편 강해를 하시는데, 우리는 몇 가지 예수님이 성경을 해석하는 태도와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은 구약성경의 일부인 다윗의 시편을 단지 인간의 책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주장하려는 것,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그 주장이 온전히 이 본문의 권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의 무오성, 권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자기의 주장을 이어나가고 계십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했다”고 하십니다(마 22:43; 막 12:36).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였습니다.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 맞춰 설정된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문학 장치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류가 가득한 단지 종교적인 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그 자체에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성경에 대한 태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조롱하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성경을 불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절대 권위의 아버지 말씀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권위는 상황에 따라 무시합니다. 최근에는 창조와 진화의 논쟁, 성 정체성에 대한 논쟁 등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 성경이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일부분만 옳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성경을 이리저리 재구성하여 자신들이 수용하고 싶어 하는 것과 조화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성경을 조작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 그 권위를 확실히 인정했습니다. 조금의 의심이나 의구심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성경해석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관찰하셨습니다.
42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되”.

여기에 “주”가 두 번 언급됩니다.
헬라어로는 큐리오스라는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인”이라는 뜻이고,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주께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누구에게 이르셨다고 말합니까?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나의 주”라고 표현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을 이어 왕이 될 다윗의 후손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적용하여 보면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주”라고 표현하고, 자기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받을 자를 가리켜 “내 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지요?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관찰하셨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이렇게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다윗의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를 또 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예수님의 질문은 44절입니다.

3. 예수님의 질문2(44절)

44절“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단지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왕이 될 사람에 불과했다면 왜 하나님 말씀에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하였느냐?

합리적인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는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라고 부르는 분, 다윗보다 먼저 계셨고 다윗보다 위에 계신 분, 곧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성령 하나님에게 감동되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특별히 43절의 말씀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여기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말한 첫 번째 ‘주’입니다. 그리고 “너”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이 말한 두 번째 ‘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는다’는 표현은 고대 동양 전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왕이 패배와 복종의 표시로 승리한 왕의 발아래 목을 밟혔습니다. 승리한 왕이 패배한 원수를 발판처럼 밟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 말씀을 찾아보면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예수님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저자들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사망까지 정복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5:2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노래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지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고 묻습니다(히 1:13).

하나님 보좌 우편, 왕을 대신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죄를 사하고, 사망을 멸하고, 원수를 밟으며 만물을 붙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저 그분을 섬기는 영일뿐입니다(히 1:14).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다윗의 주, 하나님이셔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통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보다 큰 권세를 가져야만 이 세상에 온전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무궁한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모든 악을 심판하고 모든 선을 보상하시는 권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의 최고 원수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왕이 죄와 사망을 멸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 죄때문에 사망을 맞이할 뿐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죄와 사망을 밟고 그를 믿는 자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죄 사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사망을 이겨내지 못한 분이 어떻게 우리 인류를 얽매고 있는 사망의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시고, 그 말씀을 자세히 관찰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 곧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구약에 다윗을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분명하게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감히 예수님께 묻는 자도 없었습니다”(마 22:46).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의 족보에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살았던 한 사람으로만 보십니까? 여러분 삶에 교훈이 되고 도전이 되고 모범이 되는 성인으로 보십니까? 좋은 일을 가져다주고 복을 줄 귀인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처럼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그 발아래 두고 통치하실 하나님, 죄와 사망을 이기고 생명과 부활을 허락하실 하나님, 공의와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하나님.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자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그 나라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성경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분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 지속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고 바르게 해석함으로 말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우리가 힘을 잃고 믿음이 연약해지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우리와 연합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신성과 능력을 보는 것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소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영생을 결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의심 없이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구태여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예배드릴 이유도 없고 기도하거나 전도하는 것은 헛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은 다 진실한 신앙인이냐 하면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약 2:19).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떱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되 그가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교의 삼대 당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유력한 제사장 가문들과 세속 귀족 대표자들로 된 당파로서 오직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으며 죽은 자의 부활이나 내세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사직을 독점했고, 최고 종교 재판소요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장악했습니다.

또 로마 당국과 타협하여 정치적으로도 큰 혜택을 누렸습니다.
유대교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중심으로 삼는 종교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사두개인들의 특권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 사두개파인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상인들에게 성전 마당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도록 허락해 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 챙겼습니다.
또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매년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내야 하는데, 이 때 세속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하는 세겔로 바꾸어서 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 마당에서 환전을 하게 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락시킬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하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모세가 이르기를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둘째와, 셋째와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옵니다. 팔순의 모세가 양떼를 인도하여 호렙산에 이르렀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모세는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며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때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기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말씀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 외에도 하나님께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심은 곧 하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뵈었을 때는 아브라함이 죽은 지 이미 40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록 아브라함이 육신으로는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육신의 죽음과 더불어 영영 존재가 소멸되고 말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보니 하나님을 일컬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지구를 비롯한 온 우주 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홀로 살아계시는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생(永生)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신은 죽었으나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그들의 육신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의 육신의 죽음을 일컬어 잔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 줍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 영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이미 죽은 자입니다.

아담의 후손은 태어날 때 이미 그 영이 죽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전혀 관심도 없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 주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은 영이 죽은 상태여서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하나의 직업적인 종교인으로서 정해진 종교 의식을 거행할 뿐 제사를 받으실 하나님께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종교적인 특권을 이용해서 대접받고 잘사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제사장들이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색이 신자라고 하면서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신학 박사라도, 수십 년 교회를 다녔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산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영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영을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은 갓난아이가 젖을 사모하듯이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설교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점점 진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됩니다. 이는 그 사람 속에 영생의 씨가 심겨져서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성경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였고 예언서와 역사서, 시가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오경 곧 율법서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비록 율법을 지켜 구원받을 사람이 없긴 하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로 인해 살리라, 곧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영혼의 존재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육신의 죽음으로 인간의 삶은 영영 끝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단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잘못된 주장을 합니다. 성경은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지 사사로이 풀면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단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자기들이 만든 틀에 맞추어서 억지로 해석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8장 14절에 이르기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십니까? 이는 성도님들이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더 깊이 알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은총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영적인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알아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영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고대 중근동의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알 수 있고, 문학적인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윤리 도덕에 관한 차원 높은 가르침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사람은 성경의 주제인 구원의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꾸준히 읽어나가십시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더라도 계속 읽다 보면 앞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 주셔서 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 번 째로,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라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일곱 형제를 차례로 남편으로 삼았던 여자가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닌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제사장으로서 성전 제단에 제물을 바친 것은 한갓 종교적인 의식이었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육신의 부활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가 죽어 흙으로 변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살려내지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으로서는 지극히 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부활 시에는 천사와 같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을 것인데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으므로 쉬운 진리조차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아들을 얻게 될 것을 바라고 믿었으며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이 번성하리라는 말씀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의 믿음은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살펴보십시오. 어디서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이 믿는 자들을 위하여 일어났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 바다에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호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레 동안 열을 지어 성을 돈 것밖에 없는데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열거하자면 밤을 새워도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에 기록된 이러한 기적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요 종교적인 진술일 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불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그대로 믿는 것을 보고 참 순진하다고 말합니다. 자기들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러나 자기들은 성경이 틀린 것을 너무나 많이 알기 때문에 순진하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로 성경을 판단하다 보니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이 사실임을 믿고 의심치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과거에 능력을 나타내셔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변함없는 능력으로 성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그 능력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영을 살려 내시며, 마귀의 종 된 자들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모든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또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시고, 세상 유혹을 물리치게 하시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때 예수님을 믿다가 그만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이끌려서 교회에 와 앉아있긴 하지만 설교가 졸음을 부르는 자장가로 들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재미가 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면 불쌍한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수박 겉핥기로 교회에 드나들었을 뿐이지 영생의 진리를 맛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자들입니다.

찬송가 85장을 작사한 성도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역시 그 능력을 체험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시며, 그 지혜와 능력이 한량없으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또 앞서간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지금 저와 성도님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산 자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서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일평생 동안 동행하시면서 날마다 능력의 손길로 붙들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3-25-2024(월) 누가복음 20:27-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산 자의 하나님(38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죽은 사람을 "네크로스(νεκρός)"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입니다(He is the God of the living).
살아있는 사람은 "자오ζάω)" 라고 합니다.
이때 살았다 죽었다는 의미는 물론 육체적인 생명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생명을 세 종류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생명(조에. ZOE. ζωή)
둘째는 혼의 생명(푸쉬케. PSYCHE. ψυχή)
셋째는 육의 생명(비오스. BIOS. βίος)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  8:38, 고전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 16:25, 행 8:33, 약 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 이생에, 고전 15:19.
  c. τέλος ζωῆς : 생의 마지막, 히 7:3.
  d. ζωὴ κ. πνοή : 생명과 숨, 행 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 생기, 계 11:11.
  f. ψυχὴ ζωῆς ; 살아있는 것, 계 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 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 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νεκ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3498
1.

죽은.

2.

마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nĕkrŏs ]
어원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뜻풀이부

  • I.
    [형용사] 죽은.
    • 1.
      [문자적]
      • a.
        [생물] 마28:4, 막9:26, 행28:6, 계1:18.
      • b.
        [무생물, 놋뱀, 우상에 대해 사용]
    • 2.
      [비유적]
      • a.
        [사람] ㉠ [방탕한 아들에 대해 사용] 죽은 것 같은, 타락한, 눅15:24,32. ㉡ [비활동적인 교회에 대해 사용] 계3:1. ㉢ [세례받기 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사용] 롬6:11, 엡2:1,5, 골2:13.
      • b.
        [사물] ν. ἔργα: 죽은 일, 히6:1, 9:14.
  • II.
    [명사] 죽은 자, 사자
    • 1.
      [문자적] 마17:9, 막6:14, 눅9:7, 요2:22, 12:1, 행3:15, 4:10, 13:30, 롬6:4, 7:4, 고전15:12, 갈1:1, 엡1:20, 골2:12, 벧전1:21.
    • 2.
      [비유적] ἄφες τοὺς ν. θάψαι τοὺς ἑαυτῶν: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마8:22, 눅9:60.

왜 예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고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고 어느 집안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유대 전통은 그 다음 형제가 형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아야 할텐데 둘째 형제도 죽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계대결혼법이라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계대결혼법에 따라 일곱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렇다면 부활 때에는 그 여자는 누구의 부인이 됩니까?
이런 엉뚱하고 난처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시집도 장가도 안 가고 새로운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조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조에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말합니다.
영생이란 죽은 후에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그 때부터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죽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영원히 살아간다고 합니까?
육체의 생명은 죽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죽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한 것으로 확신하고 매일 매일의 삶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진실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본문에서 깨우치는 자녀들은 두 종류라고 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자녀들(34절)

이 세상의 저녀들은 당시 풍속에 따라 계대 결혼제도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제도에 묶여 있었기에 일곱 형제들에 의해서 한 사람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제도가 과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신령한 가치 보다는 세속적 가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부활의 자녀(36절)

부활의 자녀는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활의 자녀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다시 죽을 일이 없고 천사와 동등하다고 합니다(35-36절).
 
따라서 산 자들은 세속의 가치를 성경적 가치와 비교하여 잘못된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쫓아가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부활에 대한 질문과 대답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활의 문제를 들고 나와 질문하셨습니다.
즉 한 여인이 형사취수의 제도로 일곱 명의 남편을 가졌는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들의 그릇된 내세관을 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현세와 내세를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부활하면 천사와 같은 형체를 입게 되어 다시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 부활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음(막 12:25)
b. 항상 주와 함께 있음(살전 4:17)

예수님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함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부활 문제로 시험한 사두개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명확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듣고는 그분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요, 약속에 참예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a.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임(고전 1:24)
b. 그리스도의 교훈은 하나님의 것이요(요 7:16-17)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36절)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요 11:25, 26).

νεκ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3498

1. 죽은.  2. 마 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nĕkrŏs ]
어원  /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ζάω 스트롱번호 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영생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생명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늘 가난하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

개울물이 빨리 흘러가 돌아오지 않듯이 인명(人命)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불경(佛經)

거름은 땅을 비옥하게 한다. 생명에는 어디나 배설물이 있다. -도교

과학이나 생물학은 인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한 기원의 궁극적인 해답이나 해답자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된 성경만이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사망의 기원을 죄에 두는 깊은 관찰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준다. -올더스 헉슬리

그대의 생명을 잘 돌보아라. 그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휫필드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가졌고, 따라서 존중하는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높이는 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 -슈바이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 즉 자신의 내부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즐거움, 흥미, 지식, 유머, 슬픔 등을 송두리째 주라.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살찌우고, 자신의 생명감도 증진시키는 일이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준다는 그 자체가 무한한 즐거움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에릭 프롬

대지가 숨을 내쉴 때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준다. 대지가 숨을 들이마실 때는 우리는 죽음을 맞아야 할 운명이다. -칼릴 지브란

만약 장수하고 번영하려면 거미가 살게 놔 둬라.

모든 것은 서로 살리고 섬기는 모습이다. -석가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피조물을 학대하지 말고 죽이지도 말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해하도록 노력해라. 나 이외의 모든 살아있는 생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며 자신의 목숨을 최고로 여긴다. -불교

모든 생물은 오직 한 분, 신에게서 왔으며 그러므로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우리 각자는 거대한 신의 구성원이다. -톨스토이

모든 생물은 천성적으로 전쟁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스위프트

목숨은 오직 하나, 생명의 가치를 따질 수는 없다.

부식(腐蝕)은 그 자체가 더 풍요한 생명을 낳는다. -로버트 브라우닝

사람의 목숨은 모든 재물 중에서 으뜸가는 재물이다. -일련(日蓮)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 층 높이의 불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한 일이다.

살고 있는 한,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 좋다. -존 밀턴

살아있는 풀 한 포기 이상의 신비는 없다. -김용옥

생명 이외의 부는 없다. -러스킨

생명은 시간이 아니라 활동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사람은 서른 살에 노인이 되어 죽을 수도 있고, 여든 살에 젊은이가 되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한 사람은 죽음 후에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죽기 전에 멸망한 사람이다. -토마스 풀러

생명은 운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기교이다. -괴테

생명은 존재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토마스 굿윈

생명은 지속(持續)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지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져도 졌다 하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살려니, 되려니 하는 것이 믿음이다. 없어도 믿는 것, 없으면 만들기라도 하자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이 생명이다. -함석헌(咸錫憲)

생명은 황금을 쌓지만 황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다. -호메로스

생명의 자랑은 늘 신선하고 기운찬 점에 있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완성했다는 순간은 없는 것이다. -알랭

생명의 특성은 리듬(Rhythm)에 있다. -김용옥

생명이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죽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 자연의 도리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엇인가 바랄 수 있다. -세네카

생을 죽이는 자는 죽지 않고 생을 살게 하는 자는 살지 않는다. -장자(莊子)

세 종류의 생명이 있다. 첫째, 자연적인 생명, 둘째, 영적인 생명, 셋째, 영원한 생명(영생) -토마스 맨톤

신은 절대로 반복은 하지 않는다. 생명의 법칙은 무한한 변화이다.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 있게 하기를 배웠다. -플루타르크

아침에 나는 버섯은 그믐날도 초하룻날도 모른다. 사람의 생명도 이 버섯처럼 덧없는 것이다. -장자(莊子)

어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이 짧은 것을 믿지 않는다. -존슨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바그너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것은 생명이며 결코 죽음이 아니다. -발레리

예술은 생명 이해의 그릇이다. -딜타이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수명은 비록 짧지만 잘 소비된 일생의 기억은 영원하다. -키케로

우리가 하나님과 자연으로부터 받는 최고의 것은 생명이다. 이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기르려는 본성은 각자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깨뜨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은 역시 신비임에 틀림없다. -괴테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시간은, 그 생명을 빼앗기 시작한다.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짧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것을 가리켜 죽어가는 생명인지 살아가는 죽음인지 잘 모르겠노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연기 같은 그림자이자 그림자 같은 꿈일 따름이다. -토마스 브룩스

인간의 생명은 마치 바람에 내맡겨 있는 등불과 같아서 언제 꺼질지 모른다. -법보(法寶)

인생의 참된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데 있다. -톨스토이

자기 자신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서 추방시켜야만 한다. -톨스토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해도 미워해도 안 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존 밀턴

자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자는 남의 생명 또한 귀한 줄 모른다. -도교

자신의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속에서의 삶은 더욱 큰 환희를 안겨준다. -괴테

잘 사는 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사무엘 워드

조금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샘으로 빈 항아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가득 찬 두 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돌아갈 것이다. -칼릴 지브란

죽은 자에게 신은 생명을 되붙여준다. -빅토르 위고

'쥐를 위하여 밥덩어리를 언제나 남겨 두고, 나방을 불쌍히 여겨 등불을 켜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옛 사람의 이런 생각은 곧 우리 인생의 태어나고 자라게 하는 한 가지 작용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른바 흙이나 나무와 같은 형체일 따름이다. -채근담(菜根譚)

추위에 떨었던 사람일수록 태양을 따뜻하게 느낀다. 인생의 험한 항해에서 빠져 나온 사람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된다. -휘트먼

평안하게 죽는 것보다 괴로움을 견디면서 사는 것이 낫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생명을 소유하시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가지고 그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실 것이다. -무디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명심보감(明心寶鑑)

현재 우리의 생명은 한쪽에 너무 많은 자아가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너무 많은 기계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아직 순수한 생명이 아니다. -게오르그 짐멜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

우리는 이제 생명의 인식에 있어서 아홉 째 중점-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성경에서 지극히 중요한 진리이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영적인 생명을 분명히 알고 죄 없이 승리하는 생활을 하려면 이 기본 진리에 대한-온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Ⅰ. 세 가지 생명

A. 세 가지 생명의 정의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생명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 안에 있는 세 생명 - 사람의 생명, 사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 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 안에 오직 한 생명, 즉 부모로부터 얻은 사람의 생명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 안에 사람의 생명 외에 사탄의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 18절, 20절은 사람 안에, 즉 사람의 육신 안에 죄가 거함을 말한다. 여기의 죄는 사탄의 생명을 가리킨다. 이 육신은 사탄의 생명을 담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 안에 머물며 자주 영을 거스려 정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안에 사탄의 생명을 소유한다.

더우기 요한복음 3장 36절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라고 말한다. 요한 일서 5장 12절은 또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이 있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의 고유한 사람의 생명과 타락을 통해 생긴 사탄의 생명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준다.


B. 세 가지 생명의 기원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생기를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셨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아담은 피조된 사람의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의 두 나무,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앞에 두셨다. 성경에서 나중에 주어진 계시들에 의하면, 생명나무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사탄을 의미하며, 아담은 인류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 당시 에덴 동산, 즉 우주 가운데에는 세 편, 즉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이 관련된 하나의 상황이 벌어졌다.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그가 하나님과 겨루는 그 초점은 사람이다. 사탄과 하나님은 다 사람을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의 성취를 위해 사람을 원하셨고, 반면에 사탄은 그의 사악한 욕망과 실현을 위해 사람을 원했다. 사람을 얻음에 있어서 사탄과 하나님의 방법은 다 생명을 통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 그분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고 그분과 연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을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유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타락한 생명을 얻어 그와 혼합되게 했다.

사탄에게 속임을 당한 그날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 후부터 사탄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와 그를 타락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고유한 원래의 창조된 생명 외에 사람은 또한 타락한 사탄의 생명을 얻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중에 나타나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 안에 그분의 생명을 두시고, 그분의 아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사람이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창조된 사람의 생명과 타락을 통해 생긴 사탄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의 세 생명은 각각 창조, 타락, 구원을 통하여 얻은 바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손으로부터 나올 때 우리는 피조된 인간의 생명을 얻었다. 아담을 통과할 때 우리는 타락되어 사탄의 타락된 생명을 얻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받아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C. 세 생명의 위치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세 가지 다른,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의 생명은 각각 우리 존재의 세 부분인 혼과 몸과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 그분은 생기를 사람 속으로 불어 넣으셨고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창 2:7). 이것은 창조를 통해 얻은 사람의 생명이 사람의 혼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탄에게 유혹되어 타락했을 때, 그는 사탄을 의미하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그의 몸 안으로 섭취하였다. 그러므로 타락을 통해 사람에게 생긴 사탄의 생명은 사람의 몸 안에 있다. 사람이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의 생명을 그분과 함께 가져오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구원을 통해 사람이 얻는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영 안에 있다.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혼 안에는 사람의 생명을 가지며, 몸 안에 사탄의 생명을 가진다.

세 가지 생명이 위치하는 세 부분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 부분들의 의식에 관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가장 밖에 있는, 물질적인 부분인 몸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물질 세계를 접촉하는 촉각과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의 오감을 가진다. 그러므로 몸의 의식은 세상적인 느낌 또는 물질적인 감각이라 불린다.

우리의 가장 안에 있고 가장 깊은 부분인 영은 양심과 직감과 교통을 포함한다. 양심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관이며 옳고 그름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고 인정되며 무엇이 그르고 거절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직감은 아무런 수단이 필요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교통 부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통하고 교통을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접촉하게 하는 것이 교통의 부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느끼게 하는, 즉 영적인 세계를 접촉하게 하는 것은 양심과 직감 둘다이다. 이 두 부분의 느낌은 영 안에서의 느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인 감각, 또는 하나님의 느낌이라 불린다.

영과 몸 사이에 위치한 혼은 우리 내부의 심리적인 부분이며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내포한다. 생각은 사고하고 고려하는 기관이고, 감정은 즐거움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의 기관이며, 의지는 의견을 세우고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다. 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부분-생각과 감정-만이 의식을 가진다. 생각의 느낌은 합리성(rationalization)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면에 감정의 느낌은 좋고 싫음에 기초를 둔다. 우리 혼의 두 느낌은 우리에게 사람의 심리적인 부분, 즉 사람 자신 또는 자아를 느낄 수 있게 하며 심리적인 세계를 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심리적인 느낌, 또는 자아 의식이라 부른다.*

(*보통 우리가 「사람의 의식」을 말할 때, 우리는 혼의 감정 안에서 좋아하고 싫어함의 느낌을 의미한다. 이 느낌은 혼의 생각, 몸의 오감, 영의 의식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영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영의 직감으로 인해 약간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주로 혼의 감정에 있어서의 좋아하고 싫어함의 느낌으로 구성된다.)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수치감을 갖게 하셨다. 이 느낌은 이중 기능을 가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을 막아 준다. 만일 사람에게 수치감이 없다면 마음대로 죄를 범하기 쉽다. 누구든 수치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더 많이 보호될 것이다. 여자는 수치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이 있다.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분명 가장 낮은 부류의 사람이다.


D. 세 가지 생명의 본성과 상태

우리가 우리 안에 얻은 세 가지 다른 생명은 각각 그 고유한 기원을 가지고 우리 존재의 세 가지 다른 부분에 따로따로 거한다. 그러므로 이 세 생명의 본성과 우리 안에서의 각각의 상태 역시 서로 다르고 다소 복잡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직후에, 하나님의 눈에 사람은 「심히 좋았고」(창 1:31) 「정직하였다」(전 7:29). 그러므로 창조된 사람의 생명은 원래 좋았고 정직했다. 그것은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에 대한 의식이나 부끄러움의 의식도 없었다. 그것은 순전하고 단순했다.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한 후, 사람은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 있는 상황을 빚어 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사탄에게 중독되어 생명이 오염되고 타락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집에 있는 나의 자녀들에게 칠판 지우개를 가지고 놀지 말라고 명했다 하자. 내가 집을 떠난 후 그들은 호기심 때문에 그 지우개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돌아왔을 때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잘못된 행위는 단순히 가족 규율의 위반일 뿐 아무 것도 그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번에 내가 독약병을 집에 두고 아이들에게 『절대로 이것을 마시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하자, 내가 집을 비운 후 그들은 그 병이 가지고 놀기에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는-아뿔사, 그 독약을 마신다. 이 순간 그들은 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가족 규율을 위반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독이 있는 어떤 것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금령에 불순종했을 뿐 아니라 사탄의 생명을 그 자신 안으로 취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적으로 복잡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의 정직하고 좋은 사람의 생명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사악하고 타락된 사탄의 생명도 소유한 것이다.

온갖 종류의 죄로 가득 차 있는 사탄의 생명은 모든 타락의 씨와 악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탄은 사람 안에 살면서 그에게 정욕을 품게 하며(요 8:44) 죄를 범하게 한다(요일 3:8).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살아내게 하는 악의 근원이다. 사람이 저지르는 다양한 죄들은 사탄의 생명, 또는 그 안에 거하는 마귀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이 마귀적인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비록 때때로 사람이 그의 생명을 좇아 사람의 선함을 약간 살아낼 수 있긴 하지만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 마귀적인 생명을 좇아 무서운 악들을 살아낸다.

때때로 사람은 매우 점잖을 수 있다. 그는 정말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참된 사람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때에, 화낼 때, 그는 정말 마귀와 같고 악취로 가득하다. 사람이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함, 도박과 여러가지 범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무서운 모습을 지니며 마귀의 냄새로 가득하다. 사람이 그 마귀적인 생명을 살아내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를 속이고 그로 하여금 마귀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사람과 마귀의 혼합된 생활을 하게 하는 속에 있는 마귀의 생명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실지적인 내적 상태이다. 사람에게 사람과 사탄의 두 생명이 있고, 본성에 있어서 좋은 면과 또 다른 악한 면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에게는 한편으로는 선하고 정직해지려는 소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과 악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여러 세대를 거쳐, 인간 본성의 연구에 종사하는 철학가들은 두 가지 다른 사상을 주창해 왔다. 즉,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생명과 악한 생명을 다 소유하고 있으므로 우리 안에 이 두 본성이 다 있다.

그러나 주께 감사하라! 오늘날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과 마귀의 생명을 소유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도 소유하고 있다. 타락을 통해 사탄이 그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주입하여 우리를 그와 연합되게 하고 그에게 얻은 바 되게 하며 그의 본성의 온갖 악을 소유하게 하듯이, 하나님 역시 그분의 구출을 통해 그분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두시고 우리가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에게 얻은 바 되게 하며, 우리로 그분의 본성의 모든 신성하고 선함을 소유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타락의 결정적인 요점이 생명이었듯이 구원의 결정적인 요점도 역시 생명이다. 주의 상(床)을 대할 때, 우리는 먼저 생명의 떡을 떼고 그 후에 죄 사함의 잔을 마신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체험할 때 먼저 피를 받고 나서 생명을 받기는 하지만 그분의 구원에 있어서 주된 상징은 생명을 뜻하는 떡임을 의미한다. 피를 뜻하는 잔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떡을 취한 후에 잔을 취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 안은 세상 사람들보다 좀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사람의 정직한 생명과 사탄의 사악한 생명과 신성하고 선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그 당시 에덴 동산에 존재했던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의 셋으로 구성된 그 상황이 오늘 우리 안에 똑같이 존재한다. 우리 내부 그곳에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셋 모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에서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겨루는 사탄의 다툼 역시 오늘날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다.

사탄은 우리를 소유하려는 그의 사악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와 협력하기를 바라면서 오늘날 우리 안에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 역시 그분의 선하신 기쁘심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가 그분과 협력하기를 바라시면서 우리 안에 운행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사탄의 생명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사탄의 사악함을 살아내어 우리에 대한 그의 악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산다면 하나님의 신성한 선함을 살아 내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성취하실 수 있게 한다. 때로 우리가 사탄의 생명을 좇지도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좇지도 않고 독립적으로 우리 사람의 생명만을 좇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 우리는 독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살지 않으면 사탄의 생명을 좇아 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아주 다른 세 종류의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생활을 할 수 있다. 매우 친절한 한 형제가 아침에는 정말 사람처럼 보이고, 정오에 그의 아내에게 화낼 때는 마귀를 방불케 하며, 밤에 기도 시간 중에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과 그의 아내 앞에 자백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하루 중에도 그는 아주 다른 세 사람처럼 행동하고 서로 다른 세 가지 상황을 살아 낸다. 아침에 그는 사람처럼 친절하고, 정오에는 마귀처럼 화를 내고, 밤에 죄를 처리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모양을 나타낸다. 하루 종일 그의 생활 가운데 사람, 마귀, 하나님이 모두 표현된다.

그가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세 가지 생명-사람과 마귀와 하나님-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의 생명을 좇아 살 때에는 사람과 같고, 그가 마귀의 생명을 좇아 행할 때에는 마귀와 같으며,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모양을 표현한다. 우리가 좇아 사는 그 생명이 우리가 살아내는 바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한 사람 안에 세 가지 다른 생명-사람의 창조된 생명, 사탄의 타락된 생명,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세 가지 생명을 모두 소유했지만 세 가지 다른 발생으로 인해 세 번의 다른 때에 그 생명들을 얻었다. 첫째로 우리는 창조의 때에 창조를 통해 사람의 창조된 생명을 얻었고, 둘째로 사탄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접함으로 말미암아 타락 중에 사탄의 타락된 생명을 얻었으며, 세째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었다. 이 세 가지 사건들-창조, 타락, 구원-이 우리 안에 발생한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각각 생명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사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의 세 생명을 얻었다.

이것을 보고 알 때, 우리는 생명의 길에 관해 분명해질 수 있다.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이 동시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데 우리는 어느 생명을 좇아 살아야 하는가? 사람의 생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인가, 사탄의 생명인가? 우리가 좇아 사는 그 생명이 우리가 살아내게 될 생명이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놓여져 있다.


Ⅱ. 네 가지 법

구원받은 우리 안의 세 가지 생명은 각각 하나의 법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세 가지 생명에 속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이외에도 우리 밖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안과 밖에 모두 네 가지 법이 있다. 이것은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바이다.


A. 네 가지 법의 정의

로마서 7장과 8장의 중심 주제는 법이다. 먼저 6장에서 사도는,『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함이라』고 말한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는」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도는 7장과 8장에서 법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한다.

7장은 『형제들아(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함으로 시작한다. 다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6절)라고 말하고, 뒤에서 그는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7절)고 말한다. 다시 『나는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노라』(22절)고 말한다.

이들 모두는 구약의 법과 율법을 가리킨다. 마침내 그는 『내 지체들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나의 생각의 법과 싸워 나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 안으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도다』(23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 자신이 노예로서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8장에서 그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사도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연관된 네 가지 다른 법에 관해 전부 말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7:22, 25), 즉 구약의 율법으로서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밖으로 말해낸다. 둘째, 「생각의 법」(7:23)은 우리 생각 안에 있으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세째,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7:23)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한다.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법의 기능이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서 표현됨으로 인하여 그것은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이라 불리운다. 네째, 「생명의 영의 법」(8:2)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살게 한다. 이 법이 나오는 그 영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 사람의 영으로 구성된 조화(mingle)된 영, 생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명의 영의 법」이라 불리운다. 더우기 이 영은 생명을 담고 있고, 생명에 속하며, 생명이기 때문에 이 영의 법은 「생명의 법」이라 불리운다. 네 가지 법 중에서 한 법-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밖에 있는 반면, 나머지 셋-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 몸 안에 있는 죄의 법,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안에 있다.


B. 네 가지 법의 기원

네 가지 법의 기원은 각각 다르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쓰여져 구약시대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셨다. 나머지 세 법은 먼저 우리가 언급한 세 가지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모든 생명에는 법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법이 항상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생명은 항상 하나의 법을 소유한다.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이 있으므로 그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에 상응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때가 아닌 태어날 때에 얻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한 자연적인 증여물이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선물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생각과 사고 안에는 타고난 기호나 선을 행하고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람들에게 호의적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자 하는 원함과 우리 스스로 개혁하려는 희망과 진보하려는 결심이 허다하게 있었다. 선을 행하려 하고 진보하려는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으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것들은 또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도 이 선의 법이 이미 우리 안에 있었음을 증거한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 18절(내가 내 속에...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에 기초하여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나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으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의 원래 창조된 생명으로부터 나올 리가 없으며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7장 18절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이 결론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할 때 우리 육신 안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 23, 24절의 문맥에 의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육신은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을 가리킨다.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 즉 육신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장의 뒷부분에서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우리의 생각 안에 선의 법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의지와 생각은 둘다 우리의 혼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혼의 생각과 의지 양자 안에는 타락 후에도 선함의 요소가 있다. 이 선함의 요소는 자연히 우리의 창조된 선한 생명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의 원래 창조된 생명에 속하고 우리가 구원받기 전 곧 우리의 출생시에 존재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창조된 선한 생명은 타락을 통하여 사탄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으므로 그 선함의 요소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부정확하다. 예를 들어, 신맛의 요소를 꿀물이 든 컵 속으로 가미하면 단맛을 손상시키지만 단 요소를 없애지는 않는다. 비록 사람이 사탄으로 인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의 선함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 안에 있는 창조된 선함의 요소가 사탄으로 인해 부패되어 고칠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무(全無)한 상태로까지 부패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유리 컵을 박살낸다면 그것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지만 유리의 요소는 여전히 남는다. 금 막대기 한 조각이 오물통에 던져질 수는 있지만 금의 요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부모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 형제애, 성실, 진실, 예의 바름, 도덕성, 수치감 등이 다소 불순하고 혼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소들은 진심에서 우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선한 요소들이 오염되기는 했지만 파괴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비록 그 요소들이 매우 약하기는 해도 여전히 남아 있다. 중국의 현인들과 철학가들이 사람 안에 몇몇 「뛰어난 미덕」과 「타고난 지각」 등이 있음을 발견하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결론 내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함의 요소와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법이 있으므로, 사람의 본성에 관한 이들 철학가들의 발견은 과연 옳다.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앞에서 범죄-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음-를 통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왔음을 말했다. 사탄의 이 생명 안에 악의 법, 즉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사탄의 생명은 악하므로 그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그 법은 자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과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영과 조화되어 생명의 영이 된다. 이 생명의 영의 생명 안에 생명의 영의 법 또는 생명의 법인 한 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의 법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을 두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이지 선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생명의 법을 두신다. 선의 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를 통해 주어진다. 우리 안에 있는 선을 행하는 요소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을 두신다. 이 생명 안에는 생명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은 우리의 구원의 때에 얻은 바 되고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법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 속하며,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람에 속하며,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탄에 속하며, 생명의 영의 법은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와 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C. 네 가지 법의 위치

네 가지 법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려면 우리는 그들 각각의 위치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밖에 있다. 선의 법은 우리의 생각, 즉 우리의 혼 안에 있다. 선을 행하는 법이 우리의 혼 안에 있으므로 이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그 법 역시 물론 우리의 혼 안에 있다. 이 법의 기능은 특히 혼의 생각 안에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법은 「생각의 법」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안에는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의 법, 선한 인간 본성이 있다.

죄의 법은 우리의 지체들, 즉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사람은 타락 중에 그의 몸 안으로 지식의 나무 열매를 받아들였다. 그런고로 사탄의 악한 생명이 우리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죄의 법 역시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이 법이 우리의 몸 안에 있고 그 몸이 지체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이 법은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 안에는 사탄과 사탄의 생명과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죄의 법과 사탄의 악한 본성이 있다. 사탄과 사탄의 그 악한 것들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 섞인 사실로 인해 몸은 변질되어 타락한 육신이 되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생명의 영이 우리의 영 안에 거하므로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 역시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이 법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의 기원이 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위치 역시 영이다. 그런고로 그것은 전적으로 영에 속하며 몸이나 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 안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 그분의 생명의 본성이 있다.


D. 네 가지 법의 본성과 기능

우리 안팎의 이 네 가지 법의 본성과 기능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규칙들로 구성되며, 그 본성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우리 밖에 있는 이 법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이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규칙들을 좇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을 행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왔으며, 사람의 선한 본성을 내포하고,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본성에 꼭 맞는다. 이 법이 우리 안에, 즉 우리의 생각 안에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일으킨다. 특히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선해질 것을 요구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선의 법은 선을 행하기를 지향하는 경향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은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기를 기뻐한다. 이것이 사도가 『나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고 말한 바이다.

우리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사탄의 악하고 타락한 생명으로부터 나왔으며 사탄의 악한 본성을 담고 있다. 사탄의 악한 생명은 우리의 육신 안에 현존하는 「악」이고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이다(롬 7:21,20). 그것은 「죄의 법」이므로 이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이 법은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그 천연적인 힘을 행사하여 악을 행하고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을 거스려 싸운다.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줄 때, 이 죄의 법은 그것을 거스려 일어나 싸워 우리를 사로잡아간다(롬 7:23).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려 하거나 하나님의 법의 선한 요구를 만족케 하려는 우리의 갈망을 실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로마서 7장 21절로 24절에 기록된 대로 우리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 복종하여 온갖 종류의 죄를 범하여 사망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우리 자신의 의지력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우리를 자극하는 죄의 법에 의해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두 가지 서로 모순되는 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법은 창조된 선(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우리 혼의 생각 안에 작용하여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을 일으킨다. 다른 한 법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와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작용하며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한다. 우리의 생각과 지체들 안에서 모순된 일들을 행하는 이 두 가지 정반대되는 법은 우리 안에서 서로 거스려 싸운다. 그 결과 대개 죄의 법이 선의 법을 이겨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우리가 행하기 원치 않는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한다.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이성과 정욕의 싸움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성은 우리 창조된 생명 안에 있는, 본래 타고난 선을 행하는 요소이다. 정욕은 우리 타락된 몸 안에 거하는 죄, 또는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악이다. 이성이 부분적으로 우리 사람의 양심으로부터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 안에 작용한다. 그런고로 「이성」의 완성으로 인한 선함은 지식으로부터 나오거나 지식을 통과한다. 정욕이 우리 타락된 사람의 본성에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정욕의 결과인 악은 정욕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식에 있어서 강한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좀더 있는 반면, 좀더 격정적인 사람은 쉽게 악을 행한다. 다른 말로 해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선은 생각 안에 있는 지식으로부터 비롯되거나 생각 안의 지식을 통과하는 데 반하여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악은 지체들 안에 있는 정욕의 결과이다.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이성이 유리한 위치를 얻을 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한다. 지체들 안에 있는 정욕이 더 나은 위치를 얻을 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싸움이 갈라디아서 5장에 언급된 싸움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갈라디아서 5장은 영을 거스려 싸우는 우리의 육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아 성령을 얻은 후에만 일어난다. 그러나 두 법의 싸움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과 창조된 선한 생명 사이의 싸움에 관계되어 있고 이 싸움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존재하는 내적 싸움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세상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싸움이다.

죄의 법으로부터 나오는 이 「죄(Sin)」는 사탄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다. 대문자로 표시된 「죄(Sin)」는 그것이 인격화되고 유일함을 의미한다.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님이 계시고 오직 한 죄(Sin)가 있을 뿐이다. 죄는 하나의 특별한 용어이고 유일한 대상이다. 죄는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부터 8장은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주관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대하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하며,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압도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악을 우리에게 행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밖의 많은 죄들(sins)은 단지 우리 안의 유일한 죄(Sin)의 작용으로 인한 행위들일 뿐이다. 이 유일한 죄는 죄들의 뿌리요 어미다.

죄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밖으로 죄를 짓게 하는가? 우리는 죄가 우리의 몸 안에 거함을 보아 왔다. 그러나 자극하는 기관은 의지이지 몸이 아니다. 사람의 혼에 속하는 의지는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지시에 복종하며 사람의 몸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우리 몸 안에 거하기는 하지만, 그 손상 작용은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몸에서 시작된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에 손상을 입게 하며 우리 전존재가 타락되기까지 죄의 독성을 발산해 낸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장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1장과 마가복음 7장은 또한 온갖 종류의 죄가 사람 안에 있다고 밝힌다. 이 성경 구절들은 사람이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타락되었고 죄들로 가득함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의 혼은, 생각은 악하고 감정은 오염되고 의지는 반역적이며, 심지어 그의 영도 어두워졌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 안에 있는 죄의 활동의 결과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 안에 사람의 법과 사탄의 법, 선의 법과 악의 법, 두 법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있음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법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온다.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생명들 중에서, 신성하고 영원한 본성에 관한 한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생명」이다(이것은 1장 「생명은 무엇인가?」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은 「생명」이다. 생명의 영의 법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생명」이듯이 그 본성도 「생명」이다. 이 법은 그 근거가 되는 생명으로 인해 「선」하거나 「악」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법과 같지 않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생명과 선은 서로 다르다. 여기 세 가지 중점이 있다. 첫째로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인 반면, 선은 사람의 생명의 본성이다. 둘째로 생명은 선하지만 선이 반드시 생명인 것은 아니다. 세째,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의 나무는 생명과 선이 서로 명백히 다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생명은 선도 악도 아니다. 생명, 선, 악은 서로 다른 세 가지 독립된 것들이다.

우리는 생명과 선이 같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선과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이 있고 또한 사람의 선이 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을 담고 있다. 사람의 선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단지 사람의 선한 본성만을 담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0절과 디모데 후서 2장 21절에 언급된 선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살아내는 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이고 하나님의 선이다.

마태복음 12장 35절, 로마서 7장 18, 19, 21절과 9장 11절에 언급된 선은 우리가 우리 고유의 생명을 좇아 살아내는 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이고 사람의 선이다.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은 「생명」의 본성이나 하나님의 요소가 없는, 단지 사람의 선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선만이 선일 뿐 아니라 「생명」의 본성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참된 요소를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선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생명 본성은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는 사람의 선은 자연히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생명 본성을 담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본성을 담고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내도록, 즉 하나님의 선을 살아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본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이들 법은 또한 그 힘의 정도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 우리는 법들이 그들 각각의 기원이 되는 대상의 힘의 정도에 따라 세기에 있어서도 다양함을 안다.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왔는데, 사람의 생명은 가장 연약하다. 그런고로 선의 법이 선을 행하는 힘 역시 가장 연약하다. 죄의 법은 더 강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런고로 죄를 짓는 이 법의 힘은 선의 법이 선을 행하는 힘보다 더 강하다. 그것은 우리를 선을 행함에 있어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가장 강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런고로 이 법의 힘 역시 가장 강하다. 그것은 우리를 죄의 법에 복종하여 죄를 범하는 것에서 지킬 뿐만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 자체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자연스럽게 살아 낼 수 있게 한다.

역대로 철학가들은 도덕성을 개발하거나 행위를 개선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을 주창해 왔다. 사실상 그들이 주창해 온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원래의 선을 되찾거나 재활동시키기 위한, 이미 타락된 몸과 혼에 근거한 사람의 지식과 자기 의지와 자기 노력을 통한 작용이다. 이 모든 것은 죄의 법의 본연의 힘을 이겨낼 수 없다. 사람의 힘은 제한되어 있는 반면 법의 힘은 지속적이다. 사람이 애쓰는 것은 자기 노력인 반면 법의 힘은 자동적이다. 언젠가 그의 힘은 고갈되고 법의 힘이 다시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출 방법은 우리를 에워싸는 죄를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외적 몸에 역사하는 것도 아니며, 선을 행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하여 우리의 몸과 우리 영 사이에 있는 혼에 역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요소를 우리 안으로 더하시어 생명의 강력한 힘을 가져 오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우리의 영 안이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죄의 법 안에 죄 짓는 능력을 이겨내기 위하여 죄의 법을 정복할 만한 법을 이용하여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들에 퍼지면서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진전해 나아가신다. 나아가 우리는 전에 선의 법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선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영의 법으로부터 나온 생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생명을 살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관계된 네 가지 법, 즉 우리 밖에 있는 한 법과 우리 안에 있는 세 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 밖에 있는 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세 법 중 한 법은 우리 혼 안에, 한 법은 우리의 몸 안에, 한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창조된 선한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혼 안에 있는 법은 선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을 우리에게 일으킨다. 타락되고 악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 몸 안에 있는 법은 악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법은 신성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 내게 한다.

우리의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거룩함, 의로움, 선함의 요구를 부여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를 만질 때 그 요구들을 실행하기 원하고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우리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 밖의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틀림없이 반대하고 저항하며 대개는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이겨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함에 무력해질 뿐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어긴다. 이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우리의 영을 좇아 산다면 우리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이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표준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한 예로,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탐하지 않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의 이 요구를 만질 때,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하며 더이상 탐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반대하여 일어나 내부에서 우리로 하여금 탐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많이 작정하고 결정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탐심은 더욱더 우리 안에 무성해진다. 밖에 하나님의 법의 요구로 인해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즉시 우리 안에 악을 작용케 하여 우리의 선한 생각을 거스려 싸우게 한다. 더우기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거의 모든 교전에서 선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 진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보다 더 강하고 우리를 죄의 법에서 구출하여 해방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통한 우리의 고투와 투쟁을 멈추고, 대신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자극하는 탐욕으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우리는 탐하지 말라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빼어난 거룩함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우리 위에 특정한 요구들을 두며,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즉시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법-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과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의 사이에서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원하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막고 방해한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혼을 에워싸듯이 몸 안에 있는 죄의 법도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에워싸며, 죄의 법은 선의 법보다 더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 그 에워쌈을 격파하고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모든 것보다 가장 강하다. 그러므로 그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내고 그 법의 삼킴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충분히 이행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우리에 대한 이 네 법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또다른 한 예를 사용할 수 있다.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마치 우리에게 구애하는 훌륭한 한 남자와 같다. 반면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의 구애에 응하려는 정숙한 한 숙녀와 같다. 그러나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은 항상 그 숙녀를 좇아다니며 그녀와 그 남자 사이에 말썽을 일으키고자 하는 한 악한과 같다. 그는 이 숙녀가 그 남자의 구애에 응하려는 것을 알 때마다 그녀를 납치하여 강제로 그녀가 그녀 자신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원함대로 행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늘로부터 온 한 천사에 비유될 수 있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악한으로부터 숙녀를 구하여 그녀로 하여금 그 남자의 구애를 실행할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원함은 실현된다. 결국 그녀는 하늘로부터 온 이 천사가 사실은 그 남자가 분장한 분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그녀로 하여금 그 남자의 구애를 이행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 자신의 갈망을 그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한다.

이 예에서 우리는 비록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위에 요구들을 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 요구들을 실행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낼 힘이 전혀 없다. 게다가 죄의 법은 항상 선의 법을 반대하고, 선의 법이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방해하고 그 원함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강력한 힘과 함께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출인,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모든 요구들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낼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구출되어 자동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결론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구출은 사람의 개혁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 근거가 다르다. 사람의 개혁은 원래의 사람의 선에 근거하는 반면 하나님의 구출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 즉 생명의 영에 근거한다. 또한 그 방법이 다르다. 사람의 개혁은 사람의 힘을 발휘하고 우리의 신체에 심한 처리를 하여 격정을 눌러 사람 안에 선을 초래하는 방법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의 구출은 그분의 영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영 안으로 주입하여 우리의 영을 소생케 하는 방법으로 말미암는다. 그 때 새롭게 하는 역사가 우리의 영에서 시작되어 먼저 우리의 영의 다양한 부분들을 새롭게 하고 그런 연후에 우리의 혼의 다른 부분들을 새롭게 하며, 마침내 물질적인 몸까지 새롭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도 다르다. 사람의 개혁의 결과는 단지 사람의 가장 높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 신성한 하나님의 본성의 신성한 표준을 살아내게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구출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어 「하나님-사람들(God-men)」이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를 선한 사람들(good-men)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사람들(life-men)로 만든다. 우주 가운데에는 「하나님-사람들」과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의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를 악한 사람들이나 선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사람들」로 만든다.

세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출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로 「생명-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막연한 교리이다. 하나님 안에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영의 법 안에 살아야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영 안에 있으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영 안에 살 것을 요구한다. 생명의 느낌은 생명의 영의 법의 느낌이므로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의 느낌 안에 살 것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영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영의 법 안에 사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생명이며 우리는 「생명-사람들」이 된다.

네째, 하나님의 구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우리가 생명의 영의 법을 복종하여 하나님 안에 살 때, 하나님 또한 우리 안에 사시며 그분과 우리는 둘이 하나로 완전히 연합될 때까지 실제적으로 조화(mingle)된다.

주관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요점이 더 있다. 첫째로, 우리는 내적 느낌을 접촉해야 하는데, 이것은 내적 느낌을 복종함을 뜻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통 안에 살아야 한다. 교통은 생명의 흐름이다. 교통 안에 사는 것은 생명의 흐름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점은 우리로 하여금 실지적으로 생명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에 관한 이 장의 목적은 우리에게 이 요점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실지로 내적 느낌을 접촉하고 교통 안에 산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1) 죄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2)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고 (3)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것이고 (4)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낼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하나님-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이며 생명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내포하는 것이다.




03-23-2024(토) 누가복음 20:19-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25절)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Caesar's," they replied. He said to them, "Then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명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권력이 해야 할 몫과 종교가 해야 할 몫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처럼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이스라엘을 강제 점령한 로마의 법으로 올무를 놓으려 합니다.
올무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런 논쟁을 하고 있는 시기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때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정치와 종교, 제도론적으로는 국가(정부)와 종교단체(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정교분리는 자유의 원리를 강조한 것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용어 개념은 미국 헌법 수정 1조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로 처음 사용됨으로써 일반화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서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보다 ‘정교분리’라고 사용됩니다.

정교분리란 추상적으로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수 있고 내면적, 신앙적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내지 비종교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개념이 지닌 추상성 때문에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에 대한 불간섭’이 아니라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종교는 권력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혹독한 질책을 가해야 합니다.
반면에 권력이 올바른 방향을 선택할 때는 손뼉을 치며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 없는 종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애족의 기초위에 든든히 세워지고 번성해야 합니다.
만일 종교가 국가의 방향에 무관심 할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 할 경우 나라가 무너진 후에 땅을 치며 후회한들 무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편 22:28)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신 나라가 복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민족이 복이 있다." (시편 33:12)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나라가 세워져서 나라를 신앙을 두려워하고 신앙은 나라를 바른 길 위에 세워가도록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과 논쟁도 하시고 또 제자들과 이전과는 다른 말씀들을 해가고 계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한 과정을 정리하시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혼인 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결박하여 쫓아내었다는 것은 사실 이전과 다르게 두드러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르게 비유한다면 그 이전까지는 마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은근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함께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말씀으로 전하신 것을 십자가로 직접 보여주시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이것은 좀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줄곧 행함을 책망하시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다가 어떤 면에서 보면 좀 갑자기 의복을 입지 않고 온 것을 책망하시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러니까 길에서 불러서 왔으면 된 것이지 왜 의복까지 입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과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니 묻겠다.>며 시비를 거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의 시비는 '예수, 이때까지 너는 우리가 형식에 치중한 것을 그렇게 나무랐는데 이제 와서 예복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어쩜이냐? 그렇다면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우리 삶의 외모는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면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들의 시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되느냐? 아니면 행함이 있어야 하느냐?">하는 그것이다.

흔히들 전도를 해 보면 사람들은 '예수 이름을 시인하기만 하면 천국 간다면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시인하면 되지 않느냐?'하는 반문을 하곤 한다. 그러면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는 순간을 알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임종을 난데없이 졸지에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그건 좀 궁색한 답변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믿음과 행함으로 대변되는 문제는 늘 어렵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가장 먼저 뭐가 하나님의 것이고 뭐가 가이사의 것인지 구분하는 것부터 난제다. 다른 무엇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가이사의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부터 정의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하나님의 것이냐는 논제가 있고 그것 또한 극복하기 힘들다.(하지만 그것은 신앙 안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므로 좀 다르긴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 밀양의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엄마인 전도현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인한 살인범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믿었다. 그 사이 아들을 잃은 엄마도 아들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큰 용기를 내서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감옥을 찾아갔다. 여기까지는 너무 좋은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교도소에서 만난 유괴살인범은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들의 엄마에게 용서 받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지금 많은 교인들이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즉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시므로 교회에서 용서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가이사와 하나님이 전혀 구분이 없는 것이다.

구분이라는 것은 거룩함이다. 거룩함의 뜻이 원래 그것이다. 즉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용서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겐 용서 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것을 영화에서 잘 표현한 것이 바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예배 중에 틀어 버린 장면이다.)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내용이고 무엇이 형식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사람이 할 일이냐며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것이다. 정말로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세상에 것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보이시면서 답변을 하신 것이다. 동전에 가이사의 상이 그려져 있었기에 그것을 확인시키고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정말로 어려운 문제가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나리온 자체의 문제나, 세금의 문제나, 세상 물건 중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이 세상의 것인지를 나누는 방법이나 비법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누가 바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쓰는 데나리온은 로마의 황제에게 드려져도 하나님의 것이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황소를 하나님께 드려도 세상에게 그러니까 세상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바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바치느냐의 문제라는 것

예수님께 책망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본질을 오판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한 신앙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규례를 잘 지키느냐 하는 것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본질이 형식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형식이라는 것이 안에 내용과 원인이 있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냥 형식만 지키면 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 안에는 어떤 부정한 것이 있어도 형식만 온전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그렇다 보니 그들은 세금을 내는 형식이라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세금을 내는 형식이 가이사에게 내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금을 내지 않고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들의 그 생각이나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살인범의 가치관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신앙의 오류로서 맥을 같이 하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모가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외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슬아슬한 논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아주 분명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가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온전하면 된다는 이야기 아닌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외모가 죄인인 사람들과 어울린 탓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눈에는 예수님의 논리라면 사람은 창녀와 같이 음란해도 무관하고, 세리와 같이 매국적 행동 양식을 가져도 무관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그게 바로 유괴살인범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모나 형식은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겉모양이 고양이라서 고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중심이자 본질이 DNA가 고양이면 외모는 자연스럽게 고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고,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니 그 중심과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은 데나리온을 어디에 사용해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강아지가 되지 않는 것이나, 독사와 양이 같은 물을 먹어도 독이 되고 우유가 되는 것도 같은 논리인 것이다. 그와 같이 반대로 중심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그가 아무리 행동으로 경건한 모양을 하고 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며 안식일 마다 황소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그것은 다 세상에 바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의 냄새가 싫어서 누가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까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 가치관의 원조는 선악과인 것은 누누이 이야기 해 온 것이다. 다시 영화 밀양을 이야기 해 본다면, 유괴살인범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런 사과를 기대하는 세상의 흐름과 사람들의 생각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같이 세상의 것을 어느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분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세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며 배척하게 된다. 그것은 지금도 만연한 신앙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어떤 일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그런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일부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말이다. 마귀라는 것도 그렇다.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이 마귀가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이기지 못해서 세상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이긴다는 식의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귀나, 신앙에서 보면 일면 터부시해야 할 것 같은 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욥의 때와 같이 마귀도 부리시고, 또 세상에서 사람들이 큰 죄라고 사람 죽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하시는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죽인 사람의 수를 세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치관이 하나님을 세상의 주로 믿는 제대로 된 가치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세상의 법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인들의 법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법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안 된다며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하신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법이 무너질 것 같은 죄악 된 세상의 법과 가치관이 집행되는 것도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 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엘리야나 엘리사의 기적과 같은 기적으로 다 해결하시고 그것보다 그냥 두는 것이 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되면 그냥 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도 껌 값도 안 되는 기적 하나 베푸시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면 잘못된 그 일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 속한 세상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폐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한 뜻이 당시 사람들이 가진 가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죄를 물을 때 끌려가셨는데,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사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가 의아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중심에 있는지 아닌지를 보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고, 그런 가치관과 심령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이 바치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 심령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도덕을 무시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모양을 갖추며 살려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애쓰면 자신을 가꾸는 외모요 형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람, 뭘 해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존경할만한 행함이 우러나는 원인인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기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신앙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두 문장이 극적으로 대립되어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러한 표현 때문에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정교 분리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참조, 로마서 13:1-7)

모든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 문화 종교의 영역에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 놓으라는 말이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으로 돌려 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 극을 피해가는 기회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 놓고 가이사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하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23:2).










03-22-2024(금) 누가복음 20:9-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머릿돌(17절)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Jesus looked directly at them and asked, "Then what is the meaning of that which is written: "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머릿돌(케파레. kĕphalē. κεφαλή)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왜 머릿돌을 예수님이라고 할까요?
이 말씀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시편의 인용구 입니다(시편 118:22).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즉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머릿돌은 주춧돌로서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중심이 되는 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유대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열어주신다는 속담처럼 유대 땅에서 막힌 길은 이방인들에게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날마다 나를 통하여 예수님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한 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막힌 길이 아니라 열린 길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구원의 하나님을 향하여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열린 길이 되어
구원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섬김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힌두교가 말하는 구원의 길



힌두이즘의 윤회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 즉 까르마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러한 결과가 이 세상에서 윤회할 때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영원히 거듭되는 윤회에서 벗어나서 신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까르마 마르그(행위의 길)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여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1500년부터 500년에 걸친 베디시대에는 복잡한 제사의식이 강조되었습니다.

둘째는 갼 마르그(지식의 길)

세상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얻어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베단따 철학에서는 구원의 방법론으로 복잡한 제사의식에 반하여 명상과 요가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대중이 따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낮은 카스트와 여성들이 제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추상적인 지식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박띠 마르그(헌신의 길)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박띠 마르그가 7세기 말에 남인도의 타밀나두에서 태동한 것은 5세기에 이르러 힌두교에서 인격신의 개념이 완성되고 발전하는 시기와도 맞물립니다.

박띠마르그의 토대가 된 박띠운동은 7세기 말부터 남인도의 타밀나두에서부터 시작된 사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카스트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글자를 모르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지역 언어로 이야기와 찬양을 들려주며 구원의 길을 제시한 개혁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박띠운동은 12세기 이후 북인도 지역으로 퍼져서 15~17세기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도 예수박따운동을 하는 그룹이 있어서 쌋쌍이라는 형태의 찬양과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박띠전통과 기독교의 전통이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복음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은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박띠운동이 태동하는 역사적인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몇 학자는 기독교가 박띠운동의 역사적인 기원이 된다는 주장을 하는데요.
주로 인도를 연구하는 서구학자들과 인도의 기독교 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도마가 타밀나두의 수도인 첸나이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2세기와 3세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인들이 첸나이에 있었는데요.
박띠운동이 태동하는 7세기에는 남인도에 이미 기독교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타밀나두에 있었던 기독교 공동체가 힌두이즘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힌두교의 사상가들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격렬한 감정과 사랑의 환희'를 경험케 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의 사상을 자신들의 신앙체계에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죠.
물론 다른 요소들도 있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박띠운동의 성격을 알아서 그 전통에 따라서 복음을 제시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와 예배의 전통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본질적인 요소를 충실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선교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동의 문화와 인도의 문화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예배의 요소인 찬양과 말씀과 기도는 박띠운동의 전통이기에 앞서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독교의 전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204.
ἀκρογωνιαῖος, α, ον 스트롱번호204
1.

맨 모퉁이에 놓인

2.

엡2:20

3.

벧전2:6.

발음 [ akrŏgōniai- ŏs ]
어원
206과 1137에서 유래
베드로전서 2:6-8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04.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머릿돌 2776.

κεφα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2776
1.

머리.

2.

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kĕphalē ]
어원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모퉁이 1137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1. For in Scripture it says: "See, I lay a stone in Zion, a chosen and precious cornerstone, and the 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2. Now to you who believe, this stone is precious. But to those who do not believe,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3. and,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They stumble because they disobey the message--which is also what they were destined for.


머릿돌(2776).  κεφαλή, ῆς, ἡ 
1. 머리.  2. 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kĕphalē ]
어원  /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시 118:22을 인용한 문구인데 16절에서 언급된 결론과 청중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 대답이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비유가 주는 교훈을 더욱 명료하게한다.
이 비유 역시 상징적 의미로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경고와 좋은 돌은 한때 버려졌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머릿돌로 쓰여지게 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비유에서 주인의 종과 아들을 배척하고 죽인 농부들을 상징하며 사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의미(행 2:36).


모퉁이의 머릿돌은 무엇인가?(베드로전서 2:7)

모퉁이의 머릿돌, 곧 주춧돌을 가리킨다.
이 돌은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초석이고 가장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찮게 여겨버렸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셨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모퉁이 돌, 머릿돌 되신 예수님' 의미 파헤치기 | 이스라엘 건축 및 주거문화

고온건조한 기후인 이스라엘은 건축에 주로 돌을 사용했다.
애굽, 바벨론, 이스라엘의 일부 해안 지역은 진흙이 풍부해 볏짚과 진흙을 혼합해서 만든 벽돌로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석회암으로 건물을 세웠다.
나무는 문이나 서까래 등 아주 적은 부분에만 사용되었다.
갈릴리에는 검은색 현무암이 많아 검은색 건축물이 많지만, 예루살렘 인근의 돌은 대부분 옅은 베이지색 석회암이었다.
때문에 석회암으로 건축되고 회반죽을 바른 예루살렘 성은 강렬한 태양을 받으면 온통 금빛처럼 빛났다.

성경은 메시아에 대한 표현으로 ‘기초돌’(사 28:16), ‘모퉁이 돌’(엡 2:20, 벧전 2:6)로 표현했다.
이것은 집을 건축하는 기준이 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도들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붙잡고 계신 분도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퉁이 돌은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기초돌을 말합니다.
건축물 전체의 안전과 보존은 기초돌이 얼마나 단단하고 크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기초돌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욥이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하나님께 따질 때,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한 창조 행위를 통해 하나님에게는 욥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신비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느냐?”(욥 38:6)고 물으셨습니다. 건축물에 사용된 모퉁이 돌, 즉 기초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초돌 덕분에 건축물 전체가 안전하게 보존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기초돌은 욥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초돌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권리와 자격이 피조물인 욥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Isa 28:16 Therefore,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Look, I am laying a stone in Zion, an approved stone, set in place as a precious cornerstone for the foundation. The one who maintains his faith will not panic.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자신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소개하신 적이 있다 (마 21:42).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은 그 건축물의 모퉁잇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인들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십자가에 내던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귀하게 세우실 것을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초라하게 죽으셨다. 그러나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심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가 되셨다.

머릿돌 신앙으로


예수님은 질문으로 이미 하늘이 주신 권세로 일한다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주는 권세, 사람들의 주는 안수, 단체가 주는 자격증, 졸업증, 증서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됐다’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징비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성경선생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학교를 나왔거나 어떤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거나 어떤 단체에서 자격증을 주었기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포도원 농부 비유는 종교지도자들이 한 권세에 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이 일을 한다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와 목적, 결과를 말해줍니다.

비유 전체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9-16절입니다.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이 비유는 당시에 많이 있었던 부재지주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부재지주들이 있었고 소작농이 그 포도원을 경작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세를 주고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때가 되어 포도원 주인은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여러 종들을 보냈지만 세를 주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면 그를 공경할 것이라 생각해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농장주의 아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진노하여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유대인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이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유대인들과 세상은 그 아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게 닥칠 일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누가복음 20장 17,18절을 보십시오.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 하십니다. 그 이유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폐석인데 건축을 마치고 보니 그 폐석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폐석처럼 버림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서십자가 형을 당할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과 사형집행이 결합된 것입니다. 십자가 형은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게 하는 형벌입니다. 십자가 형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며 ‘이곳은 로마의 세상이며 로마가 통치하는 세상’이란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참하게 버리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폐석처럼 버림받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고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느리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버림받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왕이요 주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왕이요 주로 삼으시는 방법은 그가 버림을 받는 것을 통해서, 곧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버림받는 것은 그리스도 주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가이사와 빌라도, 로마군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가이사와 빌라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1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이유는 세상권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기 위한 것이요, 자신의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듯이 버림받으심을 통해 주요,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셧고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이요, 참다운 왕으로 등극하셨으며, 세상의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참된 왕이 되셨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모퉁이의 머릿돌 되실 예수님은 심판주가 될 것을 힘주어 말합니다. 누가복음 20장 18절을 보십시오.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심판주가 되기에 이 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을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길은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주인이요, 왕으로 등극하셨고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성도들에게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산 돌이신 예수께 나가자’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길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얻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는 길 외에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왕이요, 심판주가 되셨듯 제자들도 십자가를 통해 왕이요, 심판주들이 될 것입니다.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삶을 살 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세상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자비량선교단체인 우리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들 축에 속합니다. 이사무엘 현정 리 목자님의 일년요절은 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런 말씀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젊어서 스탭목자님들은 자주 몸살에 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몸살이 나기까지 언제나 한계에까지 역사를 섬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대부분의 목자님들은 고난을 사랑하는 이런 요절을 잡고 역사를 섬깁니다. 우리 자비량선교사들이 당하는 고난은 혹독하고 가혹한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가 UBF man으로 산다는 것은 죽도록 고생을 한다는 뜻이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죽도록 고생하는 삶을 자청할까요? 왜 우리는 죽도록 고생하는 삶을 기꺼이 살고자 할까요? 그 대답은 바로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는 것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더욱 자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03-21-2024(목) 누가복음 20: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슨 권세로(2절)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they sai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무슨 권세로(By what authority)
1849. 에쿠시아(ĕxŏusia)  ἐξουσία, ας, ἡ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Korean Translation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spoke, saying to Him,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or who is the one who gave You this authority?"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하늘로서 라고 대답한다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로서라고 말한다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려고 덤벼드는 무리들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를 부정하는 어떤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느냐?
또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성경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삶이 가장 분명한 대답이며 확신을 갖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종교 특히 사람의 이성을 만족시키려는 종교다원화주의가 지성인들과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곧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인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생명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자유롭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오늘도 종교인의 도덕적인 삶을 자랑하지 말고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랑의 길을 증거하는 은총의 삶을 자랑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는지 자신들의 무신앙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권세로 자신이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이나 믿음의 근거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깨우쳐야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믿고 있었는지 내 믿음에 대하여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또한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우리의 겸손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세상의 권권을 행사하거나 권위를 주장할 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 진정한 권세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거나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버려진 이들을 돌보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권세 사용할 때 겸손과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세상의 권세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권세와 권리에 대해 질문할 때, 우리 삶의 절대적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와 권리가 하늘로부터 오고 그것을 옳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살아갈 때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결론적으로, 권세의 근원을 묻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위임과 부름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따라, 우리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 마태복음에 관하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 사역, 죽음, 부활을 기록하며, 그분이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왕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하여, 그분의 탄생, 산상수훈을 포함한 가르침, 기적 행위, 제자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정과 십자가에서의 희생,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이 땅에 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왕국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그리고 유익한 비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예수님의 권위와 진리가 드러나며, 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가 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성전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열매를 맺지 않는 믿음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권위와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미다스 왕(마이다스의 손) 이야기

미다스(그리스어: Μιδας, 영어로는 Midas 마이다스)는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임금이다.
역사적으로 미다스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소아시아 지역 프리기아 나라의 국왕이자 선대 왕인 고르디아스 왕의 아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매우 탐욕스러웠던 미다스 왕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더 많은 부귀를 원했다.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실레노스를 도와주고 잘 대접한 인연으로, 그는 술(酒)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미다스는 정원수, 조각물, 가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도대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심한 그는 무심코 자기 딸을 안았다가 기겁을 했다.
사랑하는 딸이 금 조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으며, 다오니소스의 선심으로 미다스는 팍톨로스 강물에 목욕함으로써 원래의 미다스로 회귀할 수 있었다.
금 조각상으로 변한 딸도 강물에 담갔다고도 한다.
그래서 딸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음악의 신 아폴론의 수금 연주와 목신 판(강의 신 마르쉬아스와 대결했다는 설도 있다)의 피리 연주 대결에서 판을 편드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아폴론의 응징을 받아 두 귀가 당나귀 귀로 변해버렸다.

오늘날 미다스는 '탐욕, 과욕'을, 미다스의 손(Midas touch)은 '돈 버는 재주'라는 뜻을 지닌다.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이한 이야기 5선

태조 이성계(1335~1408)부터 순종(1874~1926)까지. 조선왕조실록은 27대에 걸쳐 조선 왕실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년, 월에 따라 적는 방법)로 기술한 사서다. 엄밀히 말하면 고종과 순종은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 1, 2대 황제지만, 여기 포함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분량과 철저한 고증으로 국내 사서 가운데 최고의 가치를 자랑한다.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실록에는 가치관과 풍습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왕실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기이한 이야기 5개를 소개한다. 의역이 섞여있다.

1. 중종(1488~1544) - 궁궐에 나타난 '삽살개 + 망아지' 괴물

1511년 5월 9일(중종 6년), 태조의 비(妃) 한 씨를 모신 사당 '문소전'에서 개를 닮은 짐승이 나타나는 변고가 벌어졌다.
처음 목격한 사람은 궁궐의 종(머슴)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짐승은 서쪽 담을 넘어 재빨리 달아났다.
중종은 병사를 보내 짐승의 뒤를 쫓았지만, 잡는데 실패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짐승은 삽살개 같이 생기고, 크기는 망아지만 했다.
또 대단히 민첩했다고 한다.

16년이 지난 1527년 2월 26일(중종 22년). 소위 '작서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 이후 짐승은 다시 등장했다.
이날 궁중에는 사지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진 쥐를 누군가가 동궁(왕세자)의 거처 북쪽 은행나무에 걸어놓는 소동이 있었다.

소식을 접한 중종은 분노했다.
동궁을 저주하는 행위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중종은 경빈 박 씨와 그의 시녀, 사위 홍려(洪礪) 등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이들을 불러다가 문초했다.
이어 박 씨와 아들 복성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6월 17일. 신하 정원(鄭源·1495~1546)은 중종에게 이 같이 아뢨다.

"간밤에 소라(나각, 관악기)를 부는 갑사(군인)가 가위에 눌려 기절하는 일이 있었다.
깨어난 동료들이 그에게 응급처치를 하던 중, 모양은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짐승이 취라치(나팔수)의 방에서 나와 서명문으로 향하는 걸 봤다.
취라치의 방에서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고 한다"

두려움을 느낀 중종은 궁궐(경복궁)을 잠시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법까지 검토하지만, 신하들 만류로 포기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짐승은 1530년(중종 25년)과 1532(중종 27년)년에도 나타나 조정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짐승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건 1545년(인종 2년) 7월 2일이다.
실록은 당시 경성(한양)에서 "괴물이 나타나 밤에 돌아다닌다.
그것이 지나가는 곳은 검은 기운으로 물들어 완전히 캄캄해진다.
수레 무리가 지나가는 듯 큰소리가 났다"는 괴담이 돌아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전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공교롭게도 이 날은 중종이 붕어(사망)한 날이었다.

2. 영조(1694~1776) - 평안도에서 나타난 '곰 + 돼지' 괴물

1747년 11월 5일(영조 22년), 평안도(현재 평안남·북도) 감사가 보낸 정체불명의 동물 가죽이 궁궐에 도착했다.

"앞발은 호랑이 발톱이고, 뒷발은 곰 발바닥이다.
머리는 말 같고 코는 산돼지 같으며, 털은 산양 같은데 능히 사람을 물었다.
병사가 잡아서 가죽을 올려 보내왔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괴물의 정체가 뭔 것 같냐"고 물었다.
이에 누구는 '얼룩말'이라고 답했고, 누구는 '맥(貘)'이라고 대답했다.

맥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 분포하는 포유류 동물 '테이퍼(Tapir)'를 뜻한다.
기제목(奇蹄目) 테이퍼과에 속한다.

맥은 숲·초원·산림 등에 주로 거주한다.
태어날 때, 멧돼지처럼 흰 가로줄 무늬를 갖고 있다가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없어진다.
앞발에 4개, 뒷발에 3개의 발굽이 있으며 코와 윗입술이 길게 자라나는 게 특징이다.

평안도에서 내려온 동물 가죽의 정체는 정말 '맥'이었을까?

3. 선조(1552~1608) - 하늘에서 내려온 '정체불명 삼형제'

1604년 12월 1일(선조 37년), 평안도 관찰사 김신원(金信元)은 조정에 '기이한 삼형제'에 대한 소문을 보고했다.

"군내에 사는 계집종의 집에 '강가시(康加屎)'라는 남성과 그의 부인 '향태'가 머물렀는데, 강가시는 집을 떠나기 전 '기이한 형제 세 명이 하늘에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계
집종이 반신반의하며 청소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강가시가 언급한 삼형제가 온 자취도 없이 있었다"

김신원에 따르면 형제의 생김새는 꽤 독특했다.
장남은 수염이 한 자(약 30cm)에 큰 눈과 쟁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차남은 수염이 다섯 치(약 15cm)에 얼굴과 체격이 크고 미남이었다.
삼남은 수염이 네 치(약 12cm)에 얼굴과 체격이 컸다.

삼형제는 모두 검은 관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김신원에 따르면 그 모습이 두려워 좀처럼 쳐다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삼형제와 함께 내려온 이들의 엄마는 계집종에게 "장남은 음문(성기)으로 낳았고, 나머지는 옆구리로 낳았다"며 "이들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 생불(生佛)"이라고 설명했다.

엄마는 "출산한 지 하루도 안 돼 3형제가 모두 장성했다"며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름도 귀신같이 맞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신은 김신원을 허풍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신은 기록를 전하며 "하늘 아래 어찌 이치에 벗어난 물건이 있겠냐"며 "이 일을 보고한 김신원도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또 이를 전한 계집종도 사리에 밝지 못한 것 같다"는 주석을 달았다.
실록에는 이 같이 사신이 자신의 의견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4. 중종(1488~1544) - 용산에서 발견된 두 발 잘린 아이

1533년(중종 28년) 2월 16일,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은 중종에게 괴이한 사건을 보고했다.
용산강(노량진과 마포) 근처 무녀의 집 뒤에서 두 발이 잘린 여자 아이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중종은 이에 "신중히 간호해 죽지 않게 하고, 속히 포도 부장을 불러 범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 조치였다.

실록에 따르면 아이는 상당히 똑똑했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옥가이(玉加伊)'라고 했고, 발목을 자른 범인도 정확히 지목했다.
옥가이는 '"한덕'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고 했다.
한덕은 옥가이의 수양 엄마로, 옥가이의 생모 '중덕'과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의금부는 한덕과 중덕을 불러 대질 심문을 했다.
옥가이에게 "둘 중 누가 네 발을 잘랐느냐"고 물었다.
옥가이는 곧장 한덕을 가르켰다.
한덕은 "옥가이의 발은 동상으로 썩어 저절로 떨어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금부도사(의금부 심문 책임자) 이창무(李昌茂)는 "아이의 발이 칼로 잘린 게 명백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중종이 금부도사의 의견 쪽으로 기울자, 일부 신하는 "어린 옥가이가 범인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한덕의 처형을 만류했다.

증인으로 불려온 마을 사람들은 "한덕의 집에 살던 최근까지도 옥가이의 두 발은 멀쩡했다", "한덕 뿐만 아니라 중덕(생모), 귀덕 등 용산가 근처에 있던 집을 옥가이가 들락날락 했다"는 등의 증언을 해 사건을 더 미궁에 빠지게 했다.
한덕과 중덕, 또는 제3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중종은 장장 2주에 걸쳐 이 사건을 심문했다.
하지만 진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5. 세종(1397~1450) - 함길도에 등장한 뱀 모양 기생충

1431년 5월 13일(세종 13년), 함길도(함경남·북도)의 감사(관찰사)는 조정에 관내에서 벌어진 괴상한 일을 전했다.
당시 함길도에는 무녀(巫女) 한 명이 뱀 그림을 음식에 넣는 소동이 있었는데, 이 그림은 보통 그림이 아니었다.
무녀는 그림 안에 '죽은 것도 산 것'으로 만드는 주문을 걸었다.
무녀는 그림을 넣은 음식을 한 남성에게 먹였다.
남성은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며칠을 앓다가 죽었다.
가족들은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 남성의 배를 열었다.
놀랍게도, 뱃속에는 뱀 세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대경실색한 가족은 뱀 두 마리를 죽이고, 한 마리는 키우던 개에게 먹이로 줬다.
뱀을 먹은 개도 나흘 만에 죽자 가족들은 "무녀가 저주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뱀 그림을 그린 무녀와 '신기(神氣)'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여인들을 도매금으로 잡아다가 옥에 가뒀다.

감사는 "당시 갇힌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옥에 있다가 목을 메 자살하고 있다"며 "(이들의) 억울함이 적지 않다.
형벌을 삼가는 뜻에 위배되니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세종은 "물건의 그림이 변해 살아났다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03-20-2024(수) 누가복음 19:41-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의 눈물(41절)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3월 20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19:41∼48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님의 눈물(41절)
♦ 성구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피와 눈물과 땀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액체라고 합니다.

피는 생명이며 또한 용기의 상징입니다. 

눈물은 정성과 사랑의 상징입니다.

땀은 노력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다는 것은 그만큼 예루살렘 성을 사랑하셨다는 증거라고 하겠으며 인성을 소유하신 온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의 자긍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지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 이라고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랑이 되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머지않아 훼파되고 무너질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만큼 사랑하셨던 예루살렘과 성전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고 예언했습니다(사 56:7).

우리 모두 이사야의 예언처럼 먼저 내 안의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 세워진 거룩한 성전에서 복음의 물결이 다시 복음의 원산지 예루살렘으로 역류하여 흘러갈 수 있도록 온 땅을 복음의 열매로 채워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음의 열매를 맺는 일에 성공하여 그 열매가 예루살렘으로 흘러들어가서 빚진 복음을 갚아낼 수 있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송 / 온 세상 위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d-vayJOkgh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눈물의 강이 흘러가는 곳에 감동이 있고 사랑과 나눔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위대한 것들은 인간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들입니다. 
피땀, 피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절대로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자신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구원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서 나누고 우리가 흘릴 눈물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3년 생애에서 몇 번이나 울었을까? 
성경에 그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도 사람인 이상 성장 과정과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들처럼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과 관련된 성구가 3회 나옵니다. 
아마 공생애 기간 이전에는 차치하고라도 그 기간 동안에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누가복음에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히브리서에 간접적으로 한 번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째, 나사로의 무덤에서였습니다(요 11:35)

32. 마리아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고 슬퍼하는 나사로의 누이들을 보면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누가 19:41)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나사로의 무덤에서는 조용히 우셨지만, 여기서는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번째 운다는 단어는 단순히 주님이 눈물을 금치 못하시고 주님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숨을 쉬고 흐느끼며 고통에 차서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신 예루살렘은 인간들의 죄악이 한데 똘똘 뭉쳐 있는 중심지를 뜻할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본문의 주님 말씀대로 "알았으면 좋을 뻔 한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크게 우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답답하여 우신 것입니다.  

셋째, 심한 통곡과 눈물의 간구와 소원(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에게는 눈물의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볼 때 감동적인 사실들이 참 많습니다만 특히 "예수께서 우셨다" 라는 그 눈물에 감동의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울지 않는다고 강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성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요, 그토록 완고하게 자기 길을 고집하고 그의 사랑을 거부하며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뻔뻔스럽게 그의 은혜를 요구했던 그 거역의 백성들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눈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물을 아낍니다. 
나약하게 보이기 싫어서일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에게 눈물은 절제하거나 금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됩니다. 
그래서 눈물을 막습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웃으면 복이 온다'며 웃음은 적극 권하면서 눈물은 애써 말립니다. 그러나 체험해본 사람들은 눈물 뒤의 절묘한 카타르시스를 압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경직된 근육이 풀리고, 침침한 마음이 개운해지고, 탁한 영혼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눈물을 웃음만큼 강한 영육간의 치료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물 흘리기를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슬플 때, 위기에 닥쳤을 때, 가슴을 찢는 감동의 순간에, 자신을 압도한 그 감정을 분출하여 강같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 약속해주셨습니다. 

눈물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감격의 눈물, 감사의 눈물, 슬픔의 눈물, 기쁨의 눈물, 통분의 눈물, 참회의 눈물, 아픔의 눈물, 외로움의 눈물, 연민의 눈물, 감동의 눈물 등등...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통한의 슬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눈물 없는 사람, 눈물 없는 세대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성도는 눈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늘 있어야 합니다. 스펄젼은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에게 많은 눈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귀하고 복된것인데,특별히 어떤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까?   

첫째, 회개의 눈물(시편 6: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하나님은 성도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런 사람을 귀히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임받은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를 철저하게 눈물로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변명하기에 바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으면 변화도 없고 갱신도 없고 회복도 없습니다. 

죠지 뮬러는 고아를 돌보고 기도하는 분으로 유명한데, 그가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취미에 대하여 죽고 기호와 개성, 책망과 칭찬에 대하여 죽는 자신을 보았는데, 그때로부터 온전히 하나님께만 순종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지만 철저한 회개로 용서함을 받고,위대한 역사를 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구원을 얻은 감격의 눈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감격에 눈물흘리는 사람입니다. 
한번도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격적인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면 "신앙의 진수"를 아직 경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기 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결코 구원의 눈물 같은 것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은 이후로 이 감격의 눈물이 일생동안 그를 지배했던 사람입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안질에 걸렸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눈 때문에 서신을 대필시키기도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가장 큰 일들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동안 많은 순교자를 냈지만 그 많은 순교자들은 모두 구원 받은 감격의 눈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게 되며 부흥되어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에 대한 눈물이 항상 있는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놀랍고 신령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셋째, 긍휼히 여기는 눈물

현대인들은 절대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함께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눈물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눈물의 리더십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독해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교회에나 또 어느 때나 존재합니다.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고 아픈 사람들이요 눈물의 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눈물은 때로는 눈에 띄기도 하지만 보통 남몰래 흘립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그는 벌써 리더쉽을 가진자이며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만으로도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가 생기고 복음의 문이 열리기도 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장영희교수는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내것 내가 먹고 네것 네가 먹으면 되지 나눌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그런 식의 인생관은 옳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시위대 뜰에 가두기도하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도 가두고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진흑구덩이에도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위협을 가한 그 백성들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호소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벧론으로부터 70년만에 돌아오게 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이 기도가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칼빈은 "기도와 눈물이 우리의 무기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후버는 "원자탄을 가진 나라보다도 기도하는 성도가 많이 있는 나라가 가장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물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회개의 눈물,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 남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눈물의 기도는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교회위에 놀라운 역사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의 눈물의 기도는 응답과 축복으로 열매 맺을 줄 믿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해주는 얘기 들어주겠니 믿어주겠니
옛날 어느 나라에 함께 살았던 왕자와 왕의 이야기

언제부턴가 그 나라에는 몹쓸 병이 돌고 있었대
사랑과 용서보다 미움과 싸움이 커져만 가는

그 왕은 고민했었나봐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이는
하나뿐인 왕자뿐이었는데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왕자님을 해치게 될 줄을 알았던거야

그 때 왕자님이 말했대
사랑하는 저들을 위해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드려요
당신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전하러
그 어디든 맨발로 찾아갈게요
사랑을 나눠 줄게요

추운 곳에서 어둔 곳에서 매일 사랑을 가르쳤대
항상 기뻐하라고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라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만
왕자님을 해치고야 만거야
하늘도 울고 세상도 울었지만
왕자님은 기도했대 저들을 용서하라고

그제서야 모두 알았지
우릴 위해 이곳에 오신 걸 우릴 위해 눈물 흘리셨단 걸
그분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배우고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렸는데

또 시간은 점점 흐르고 그 기억은 멀어져가면서
우리들은 다시 잊어가나봐
그분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우리는 언제까지나 항상 기억해야해
가슴에 새겨둬야 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한 육체로 오셨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당시 유대인들은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는 사람들은 육체로 보이기만 할 뿐 영적인 존재로 오셨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주장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근거를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합니다(Gnosticism. γνωστικός. gnōstikós).
그러나 예수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 소개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비교적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정말 예수께서는 한 번도 웃으신 적이 없으셨을까?
저녁 해가 넘어가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시면서 제자들과 정답게 둘러앉아 웃음 섞인 환담을 나눌 기회조차도 전혀 없으셨을까?
당시의 상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기와 파탄에 빠져 있었던 시기임을 고려해 본다면, 정말로 웃을 수 있는 기분이나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예수께서 적어도 세 번 우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 우셨던 것이 모두 감람산을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제일 먼저 우신 것은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 앞에서였다(요 11:35).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한 그녀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병 앞에서 힘없이 쓰러진 나약한 한 친구 나사로를 향한 연민의 정과 더불어, 오빠를 잃은 두 자매의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휴머니즘 자체가 신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은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야보고서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5:13)고 하였다. 고난당하는 욥을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은 울며 각자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말도 없이 땅에 앉아 마주보고 지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그런 슬픔을 나누는 신앙의 휴머니즘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우신 두 번째 경우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우신 것이다. 이 눈물은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향한 눈물로서 자기 민족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이 담겨있는 눈물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릴리를 출발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고,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고국이요 사랑하는 동족이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흘리는 예수의 눈물 속에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심이 담겨 있다.

애국심 자체가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안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나라와 나라의 국경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다(행 17:26).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각자의 조국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도 모두가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분들이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김으로 무서운 죄를 범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용서를 기도하였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줄 것까지 요구하였다(출 32:32).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뜨거운 애국심의 기도였다. 바울 역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위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였다(롬 9:1-2). 바울은 자신의 골육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민족의 구원을 원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였다. 복음서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같은 상황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담겨 있었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가 보여준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담 이후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흘린 눈물, 곧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눈물이었다. 이 눈물 속에는 인류의 절망적 운명을 뒤바꾸어 놓게 될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그 눈물은 절망이기보다 오히려 인류 구원의 감격이 담겨 있는 눈물이다. 눈물의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 선택한 십자가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넓은 길을 열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지금 우리도 예수께서 흘린 눈물이 필요하다. 지금은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엄청난 피해에 원전사고의 재앙이 겹친 이웃나라 일본을 위하여 함께 눈물을 흘릴 때이다. 자연재해 앞에 힘없이 무너진 과학과 경제의 오만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어느 때보다 뜨겁게 기도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통일시대를 내다보며 북한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대통령의 심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조국을 위하여 기도할 수는 있다. 이런 눈물의 기도가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우리를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친히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특성, 행동 및 서식지

말의 사촌인 당나귀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존재한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거나 끄는데 사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이 동물은 엄청나게 지능적이고 유순하다.
당나귀의 특성, 행동 및 서식지 등 당나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계속해서 읽어보자.

당나귀의 신체적 특성

당나귀는 말과에 속하기 때문에 말, 코뿔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말과에서 가장 작은 종이기도 하다.
성인 당나귀는 대개 키가 90~140 cm이지만, 조금 더 큰 품종도 있다.

예를 들어 카탈루냐 당나귀의 키는 160 cm가 넘고 대략 250 kg 정도의 체중이 나간다.
최대 15~20세까지 살 수 있지만 40살까지 살았다고 기록된 일부 사례가 있다.

당나귀의 색깔은 회색, 흰색, 검은색, 갈색의 모든 색조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완전한 백색 또는 흑색을 띠는 일부 품종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당나귀의 경우에는 이들 중 한 색상이다.
이 동물은 몸에 비례하여 짧고 뾰족한 머리와 큰 귀를 갖고 있다.
귀를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열을 식히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당나귀의 행동학적 특성

현재 당나귀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야생 당나귀의 후손이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약 6000년 전부터 길들여졌다.
튼튼하고 견고한 동물로서 사막처럼 물이 거의 없고 매우 뜨거운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추운 기후에서는 살기가 어렵다.

당나귀는 초식 동물이며 다른 초식 동물보다 훨씬 더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
그렇지만 잔디, 건초 및 관목을 선호한다.
채소를 정말 좋아하고 비슷한 크기의 다른 동물에 비해 많이 먹지 않는다.
섭취하는 모든 식물의 수분을 잘 이용하기 때문에, 물을 잘 마시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물은 아예 마시지 않는다. 

당나귀의 행동

당나귀는 매우 유순하고 고분고분하다.
거의 모든 당나귀가 무거운 짐을 옮기고 끄는 데 익숙하다.
보통 힘든 상황이나 휴식 없이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을 잘 해낸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불가능한 노동 생활 방식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동물이다.

편견으로 인해 “donkey” 와 “ass(영어로 당나귀를 뜻함)”라는 단어는 많은 문화권에서 모욕적인 말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당나귀는 매우 예리하고 지능적인 동물이다.
느리게 움직이고 절대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매우 똑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
또한 기억력이 훌륭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장소와 경로를 기억할 수 있다.

당나귀가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자기방어에 따라 뒷다리로 아주 세게 차거나 이빨로 세게 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격적이거나 예민하지 않고 매우 유순하기 때문에,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센 고집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마음을 바꾸기란 매우 어렵다.
작업 수행하거나 명령을 따르는 동안 위험을 감지할 때 매우 조심성이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서식지

당나귀는 전 세계에 살고 있다.
가장 처음 길들여진 곳은 북아프리카이지만, 놀라운 성격과 힘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날씨가 따뜻한 국가에서는 더 많이 찾았다.

남부 및 서부 유럽이나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당나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전역으로도 퍼졌다. 전 세계에 있는 당나귀 중 절반은 현재 아시아, 특히 중국, 아프가니스탄, 인도에 서식하고 있다. 남미 대륙에서 당나귀가 가장 많은 나라는 멕시코와 콜롬비아이다. 스페인의 경우, 특히 안달루시아에 많이 있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더 이상 야생 당나귀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현재 야생에 서식하는 당나귀는 실제로 유기되었거나 탈출했거나 인간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길들여진 당나귀의 자손이다.

종을 구조하는 것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는 당나귀의 숫자가 멸종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스페인 출신의 4종이 위험에 처한 상태이다.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재 많은 숫자가 학대의 희생자이거나 몇 년간 지속적인 이동 끝에 유기된 동물이다. 이로 인해 당나귀를 구하기 위한 보호소가 생기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좋지 않은 삶을 살았던 당나귀를 구조하고, 회복시키고, 돌봐주고, 더 좋은 집을 찾아주려고 한다. 

당나귀는 견고하고 지능적이며 특출난 동물이다.
힘과 유순한 성격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이로 인해 많은 문화권에서는 이야기, 속담, 우화에 당나귀가 들어간다.


나귀의 착각

나귀 한 마리가 잠에서 깼다.
마음 한 구석에 뿌듯한 자부심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우물 곁으로 잔뜩 점잔을 빼며 다가섰으나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러분은 왜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입니까?"
화가 나서 막 소리쳤다.
사람들은 기막힌 표정으로 나귀를 쳐다봤다.
어떤 이는 막대기로 꼬리를 내리치면서 빨리 꺼져버리라고 버럭 고함까지 질렀다.
"세상에 이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다 있나? 내가 누군지를 모르다니!"

나귀는 방향을 틀어 시장쪽으로 갔다.
그러나 반응은 매한가지였다.
고개를 까딱대며 한껏 폼을 잡고 시장 한가운데를 걸어갔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 사람들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란 말이야! 어제 일을 잊었는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뿐 나귀를 외면했다.
자존심에 금이 간 나귀는 몹시 혼란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겪은 수치를 들은 엄마 나귀가 말했다.
"이 바보야,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너는 그냥 나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니."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들어간 나귀 이야기의 속편이다.
나귀가 세상 사람들이 질러대는 환호성을 자기에게 보낸 것으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나귀는 그냥 짐이나 부릴 뿐이다.
단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때로 분에 넘치는 존경과 대접을 받는다. 하물며 제왕적 목회자, 유명 부흥강사는 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예수님 때문이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올라타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헛된 자만심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누군데." 아,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숱한 칭찬과 환호, 박수소리, 모두 다 주님께 보내는 것인데, 내게 오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착각인가!

타락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나귀의 본분을 잊을 때 찾아온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멀어지는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주님보다 더 유명해지고 더 힘세지려고 할 때 시작된다. 중세 군주 부럽지 않은 절대적 권위, 수많은 교인, 웅장한 건물, 막대한 예산,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모신 나귀가 되기 어렵다. 그리스도를 깔고 앉은 나귀가 되기 십상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한 것은 가난과 병고"라고 말했다.

한국 교회가 정화되기 위해 가장 긴요한 것은 고난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온갖 성취를 뽐내며 주님 위에 걸터앉은 교회가 아닌, 땀을 뻘뻘 흘리며 힘에 겨워 주님을 태우는 교회, 대강절을 앞두고 곱씹어야 할 교회상이다.

03-19-2024(화) 누가복음 19:28-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귀 새끼(30절)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Go to the village ahead of you, and as you enter it, you will find a colt tied there, which no one has ever ridden. Untie it and bring it here.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걸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a colt)타셨다고 합니다.
나귀의 어원은 "작은 것"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당나귀는 짐을 나르며(창세 22:3)
쟁기로 밭을 가는(이사 30:24) 짐승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수레를 끄는 일이다.
나귀가 일반 백성들에게 친근한 동물이었지만 또한 나귀와 노새는 고대 근동 지방 왕의 의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솔로몬은 왕이 되기 위한 기름 부음을 받으러 기혼으로 갈때 다윗의 노새를 탔다.
다윗 임금이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그리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그대들은 그대들 주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시오"라고 명령했다(1열왕 1, 33).
열왕기에는 입성할 때 의전으로 나귀를 탔다고 기록돼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를 생각해볼 만하다.
사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겨주셨다.
자존심이 강한 말을 타지 않고 온순한 당나귀를 일부러 택하신 것이다.

당나귀 모습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르쳐준다.
성경에서 나귀는 겸손과 봉사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지만 겸손하게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왕의 대관식을 하셨다.

나귀는 미련함을 상징하기도 한다(잠언 26:3).
유다인들은 연자 맷돌을 돌려 곡식을 찧는 데 나귀 힘을 빌렸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는 유다인들 재산으로 취급한다.
성경은 특히 나귀의 재산적 가치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놓거나 파고 그것을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 그 구덩이 임자는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치러 배상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탈출 21, 33-34). 또한 정의 실현에 관한 법을 설명하면서 나귀 안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탈출23, 4-5).

나귀는 주로 가난한 이들과 가까운 동물로 묘사됐고 이런 특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오랜 전승에서 나귀는 겸손과 봉사뿐 아니라 게으름, 어리석음과 완고함의 정반대 상징도 드러냈다.
붉은 나귀는 사탄의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이 되기도 했다.



다른 때는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제자들과 더불어 걸어서 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첫째는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구약의 예언자 스가랴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 타는 것이라면 나귀는 일반인들 중에서 노약자들이 탈 것으로 사용합니다.

둘째는 군중들의 흥분을 가라 앉히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누가복음 19:30)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무리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기뻐하며 큰 소리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군가 군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추대하자!" 라고 외치면 모든 군중들이 환호하며 마치 로마 정부를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분위기에서 개선장군처럼 말을 타고 등장한다면 반역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새끼 나귀의 걸음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이동하기 때문에 흥분한 군중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예언된 메시아가 되심을 보여주시려고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누가복음 19:39-40)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고 칭송할 때 어떤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릴 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세워질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로마 정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만일 로마 정부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반역으로 판단하고 모인 군중들과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아간다면 바리새인들도 위태롭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만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상 나라를 무너트리려고 한다면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전혀 다른 나라가 이미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세운 그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그 나라의 주인공처럼 나귀 새끼 타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다면, 그래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멋지고 훌륭한 말을 타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줄 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일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오신 왕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원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 만드시기 위해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사 우리가 당할 형벌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세상적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으로 들어가는 첫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바닥에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가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소리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도예수님처럼 고난에 동참하자고 외칩니다. 
금식을 하고 일주일간 금욕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이천여 년 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무지한 백성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며 마음 아파 하실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세상의 욕심들을 내려놓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몫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복을 위한 왕이 아니심을 기억하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세상적 욕심을 내려놓고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십시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유일한 구원주가 되십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외치던 우리들의 진심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자 메시아이시지만,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에 대해 묵상하고 새벽 설교로 요약했습니다. [생명의 삶 묵상] 마가복음 11:1-10,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며 나귀 새끼틀 끌고 옵니다. 그 위에 제자들이 겉옷을 얹고 예수님이 타시자, 무리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라라고 외칩니다.

본문 해설

1. 예수님의 왕적 권위 (11:1-6)

사명을 이루실 때가 이르자 예수님은 그분의 왕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명하십니다(2절). 당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는 신성한 목적에 사용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라고 묻는 나귀 주인에게는 “주님이 쓰시려 하십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게 하십니다(3절). 예수님은 이 일을 왕적 권한으로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시기에 어떤 것이라도 그분이 필요로 하시는 때에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나귀 주인의 온전한 순종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기꺼이 그분 바칩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온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왕적 권위가 어떻게 드러났나요?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주님께 기꺼이 드릴 것은 무엇인가요?

2.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1:7-10)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슥 9:9). 고대에 왕은 즉위식 때 노새를 탔고(왕상 1:38), 승전 후 개선할 때는 말을 탔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그분의 나라가 로마 황제가 추구하는 ‘압제와 전쟁의 나라'가 아닌 겸손으로 세우는 ‘섬김과 평화의 나라'임을 나타냅니다. 많은 시람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길 위에 겉옷을 펴는 행동은 충성과 존경을 뜻하고, 손에 든 종려나뭇가지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외쳐 부르는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시 118:25~26).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류의 구원자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어떻게 표현하나요?

한절 묵상 : 마가복음 11장 7절

겸손하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셨습니다(마 21:5; 슥 9:9). 예수님의 입성은 자기 백성을 위한 왕의 행차라고 하기에는 볼품없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기까지 낮아지셨고, 죽음을 향해 순종의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이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왕의 행차를 거절하신 예수님 모습은 우리가 따를 신앙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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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다. 마가복음 11장 1-10절

나귀 새끼를 타신 평화의 왕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왕적 권위와 겸손,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찬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드러내셨지만, 그 방식은 기존의 왕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론

1. 예수님의 왕적 권위

마태복음 11장 1-6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어 어린 나귀 새끼를 데려오라고 명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가올 때 왕처럼 위엄 있게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당시 평범하고 겸손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자신이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섬김과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왕적 권위는 세상의 권력과는 달리,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권위입니다.

2. 겸손으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사람들이 펼친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영하고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되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의 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십자가에 오르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3. 나에게 주는 응답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겸손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 기도와 말씀 묵상: 예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배우기 위해 기도와 말씀 묵상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 섬김과 사랑: 예수님은 섬김의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평화 전파: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세상의 화해와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이 겸손하고 평화로운 구원자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요한복음 12:12-1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에서 '호산나!'란 '지금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붙여서 사용하는 바람에 '호산나'도 찬송한다는 뜻인 줄 알고 성가대 이름 중에서도 호산 나 성가대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찬송하는 뜻인 줄 알고 이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뜻이 아니고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하자면 도 움을 청하는 외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호산나라는 외침이 처절한 상황에서 외치기 보다는 자기를 도우고 해방시킬 메시야가 들어온다는 시점에서 외치는 것이 기 때문에 기쁨과 감격과 환영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이 대대적인 환영을 하던 날로부터 몇일이 못되어서 그렇게 찬송 하며 맞이했던 그 무리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쳐댓던 것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는 환호와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군중들은 다시 빌리도 법정에 모여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못박을 것을 요구했던 것 입니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급격한 변심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가 하는 것을 오늘 이 사건으로부터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도움과 큰 이적과 선한 일을 베푸셨던 그 분을 결국은 모두가 다 버리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복음서의 중요한 추적거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이렇게 쉽게 볼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들에게 좋은 일을 해줄 때는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이유야 어찌하였든지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제발 그러지 말자!' 이렇게 쉽게 비교해서 결론으로 가기에는 이른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같이 '도대체 사람 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졌으며, 또한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이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 어떻게 달라서 그렇게 떠나가고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리고 제자들은 무엇을 뛰어 넘었길래 나중에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그렇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되었는가'하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 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 을 때에 마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사람들은 들었습니 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문둥병자를 고쳤으며,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켰는 가 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다 더더욱 바로 몇일 전에 베다니에서 죽 은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에서는 친히 그같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고쳐주셔서 병이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 하였던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십시오! 당신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십니다!'하면서 그렇게 기쁘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가리켜 만일 '이 사람들이 소리치지 아니하면 이 돌들이 외치리라!'고 하신 것처럼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 였던 사건이 역사적으로 성취되는 사건임을 보여주실 뜻은 있었지만, 그러나 환호 하는 백성들의 그 기대와 요구를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건 자체에서 이 미 예수님은 상징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금지한 몇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기 를 먹을 때 짐승을 잡아서 먹게 되거든 그 짐승의 피는 먹지말라'라는 규약도 있고 '이방 민족과는 결혼하지 말라!'라는 규칙도 있습니다. 그런 많은 규칙 중에 중요 한 규칙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최소 한 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즉 농사용으로 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전투용으로는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명 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라 할지라도 마병을 거느릴 수 없게 되어 있고 전차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위용을 위해서는 전차를 가질 수 있었지만 전투용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가지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구 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솔로몬이 범한 가장 큰 잘못 중의 하나로 그가 말을 많이 둔 것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삼은 것을 큰 죄로 지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20:7절에 보면 이런 구체적인 설명도 나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 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신앙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말과 병거를 의지 하는 것은 중대한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과 병거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전 쟁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상징시키기 위하여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란 전쟁용으로는 부적격 합니다. 나귀가 힘 은 세지만 전쟁용으로는 못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하는 예는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예수님은 다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이 때에 그들은 겉옷을 깔아서 겉옷 위로 나귀를 타고 들어 오십니다.

종종 우리가 로마 제국이 배경이 된 영화들을 보면 로마 군대가 외국에 가서 전쟁 을 해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돌아오는 지를 묘사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 을 것입니다. 앞에서 나팔수들이 나팔을 불며, 연변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를 하고, 그리고 특별히 탈취한 전리품들을 앞세워 들어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쪽이 면 표범을 앞세우고, 사자도 함에 담아서 오고, 노예들도 앞세우고, 그리고 뿌리는 꽃송이와 오색 종이들, 환호하는 퍼레이드 속을 당당히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그 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추종을 받았을 때에 누가 제일 많이 긴장 했겠습니까 바로 로마 정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이고, 그 곳에 빌라도 총독 이 와서 관할하고 있습니다. 민중이 어떤 사람을 추종하고 거대한 힘으로 모였다 면 가장 긴장되는 것이 빌라도와 로마 정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이 예수님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혁명가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에게 무장한 모습이나 어떤 민첩함이나 교활함이나 그런 류의 어떤 것도 없음을 보 고 아마 피식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깐 겉옷 위를 지금 느릿느릿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드러내었 습니다. 그러한 모습에서는 로마 정부를 전복할 의도나 힘이 있어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상징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장면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겸손하셨다든가, 예언에 응해서 이 길을 걸으셨다든가 하는 것은 많이 상고하는데 이 사건 자체가 갖는 뜻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를 못하고, 바로 그 다음의 십자가 승리로 인한 능력과 감격으로 너무 쉽 게 뛰어갑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한 이 사건이 스가랴 9에 있는 말씀이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슥9:9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 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 귀의 작은 것 곧 새끼니라" 여기서 예언된 말씀 중에서 분명히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귀를 타고 오는데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 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면서 구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제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입니다마는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왜 그가 이스라 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신데 나귀 새끼를 탔느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이해를 못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한 번 더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실 그 때에 는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며,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러 오실 것입니다. 그 묘사는 요한 계시록 19장을 보시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19:11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무엇을 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백마를 타고 오시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분명히 정복하러 오시며, 심판하러 오시며, 권세 와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초림하시는 예 수님께서는 평화의 상징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셔야 했는지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을 오해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예 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다른 메사야룰 찾아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슥12:10절 의 말씀을 보면 또 하나의 예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 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잘못 알아 볼 것에 대한 예언이 이미 되어 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 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어느 날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자기네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 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대하여 회개하는 날이 온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예언이 응한 것같이 여기 이 예언도 응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놓고서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려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뜻밖에도 놀라운 결론에 부딪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때 예 수 그리스도를 환영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은 이것었습니다. 그 오해는 오 늘날 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로서, 자신들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 실을 생각지를 못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얻 은 자인데 다만 지금 악하고 나쁜 나라와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불편하게 핍박하고 있다고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생각에 이제 공의의 하나님께서 오 시기만 하시면 자기네들을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을 따름이 지, 그들 자신이 바로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러 오셨다고 설명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메사야는 지금 그 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공의로 심판하러 오시어서 자기네들의 어려 움과 억울한 핍박 가운데서 꺼내어 주실 자로 생각했지, 그들 자신이 고침을 받아 야 하고 죄값을 치러야 하고 거듭나야 될, 회개가 필요한 대상이라고는 전혀 상상 치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해하고 있는 신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향하여 갖고 있는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는 거의 대부분이 오해를 합니다. 나로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대한 특별한 뜻과 계획이 있어서 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 계획이 있고 내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필 요한 것을 요구해서 얻어 가지는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을 안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 다. 바로 이같은 생각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었다는 역 사적인 이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가 결국은 어떠한 불행을 불러 오게 되는가 하는 점을 눅19:4 1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며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 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 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사건을 놓고 우리가 이중적 인 메세지를 구분해 받아야 합니다. 그 첫번째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 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올바로 반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 고 또 한가지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상태에 모든 인생들이 빠져 있었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인 그 죄인됨을 고치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러 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이중성 때문에 기독교는 늘 오해를 받습니다. 기독교는 세 상사람들에게 이렇게 오해를 받습니다. '너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너희 들을 그 모양 그 꼴로 밖에는 인도하지 못하느냐'하는 오해를 듣습니다. 이건 세 상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 자체로 부터도 오해를 받습 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믿었을 때와 도대체 뭐가 다르고 차이가 납니까' 하는 오해를 제기 받기도 합니다.

왜 이런 오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 고 뛰쳐 나왔으되 자신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 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예수님 을 통하여 우리의 어려운 이 모든 형편이 피어지고 고쳐지리라는 기대와, 이 지긋 지긋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리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나왔는데 항 상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기대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 려운 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고 참된 신앙의 길이란 주님의 뒤를 쫓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인 것입니 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들어 오실 때에 말을 타고 들어 오셨다면 그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것 같습니까 놀랍 게도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 하 셨을 때에 심판 주와 왕의 모습으로 오셨더라면 모두 다 죄값으로 멸망을 받고 말 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이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된 현실은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대와 요구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작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에 대해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는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뿌리 깊은 문제입 다. 여러분의 기대와 요구사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의 모두가 '정말 예수 그리 스도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 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경제력입니까 집입니까 그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져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 가운데서 꺼집어 내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가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무엇을 쌓아 나가는 작업을 하는 그것이 시 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르켜 주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뭐 라고 고집을 피웁니까 ' 아닙니다! 이 경제의 문제, 건강의 문제, 집 문제, 이 출 세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 시는 것이 내게는 더 현실적인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다른 문제는 잘 모르겠고,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내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소원과 기대가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우리 입에서 무슨 말 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아!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는지 모르 겠습니다'하는 겁니다. 이와같은 혼동과 오해가 우리들의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하 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분은 놀라셔야 합니다.

왜 놀라야 합니까 우리는 백마타고 왕권과 철장의 권세로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 스도를 자꾸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 앞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 아 영락없이 자신조차 멸망 당하고 말 처지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심판의 주님을 자청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왜 심판의 대상이 됩니까 아직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을 상징하 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다음 번 재림 때에는 반드 시 백마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 평화의 주님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 이 땅의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시고 영광을 감추셨습니 다. 그래서 결국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에 대한 진 노와 형벌의 담을 제거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게해 주셨습니다 아직은 평화의 때입니다. 재림이 있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가지고 지속적인 교제를 이루는 것 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의 아들들답게 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 요한 우리 자신들의 지상 과제입니다. 결국 신자들의 지상의 삶이란 완성을 향해 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직은 우리가 누군지 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칼을 뽑아 보이도록 요구받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신자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방법으로 신자 됨을 증명해 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예 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환영을 받으셨지만 저들의 기대 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인생의 어떤 역경과 어려움 때문에 기독교에 입문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그 문제들을 푸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줄 아십니까 기독교는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에 전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 이란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며,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만들어준 분에게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배신한 자요, 상처받은 자요, 눈먼 자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지적을 기독교는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 고는 이제 거기서 돌이키고 돌아오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셨기에 그 분을 만나고 영접하므로써 돌아오라는 말씀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내가 이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중생한 자에게만 알게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 도 우리는 역시 2천년 전의 그 예루살렘의 군중들 처럼 그저 쉽게 호산나! 호산나! 외치면서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고 갈증이 난 군중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히 있 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환호하고 열열히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 이라는 이야기에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사랑하는 제자들마저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 런데 눅24:13-26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날에 저희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 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영광 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지적을 받아 마땅한 자들일 것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 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전 66권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약속들, 그리 고 그 행하신 능력에 관한 기록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성경 전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를 향하신 전체적인 뜻에 관심 이 있기 보다는 내 욕심에 더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내 욕심과 유사한 말씀을 찾 아 놓고서 '하나님! 이렇게 하셨으니까 제게도 이렇게 해 주십시오!'하면서 우리는 기독교를 너무도 쉽게 갈갈이 찢어서 마음대로 뜯어 맞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바를 더디 믿는 자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신자들의 참 승리와 감격의 생활로부터 단절시 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자랑이 물질이라고 누가 가르쳤습니까 인간의 힘이 자기의 육체요, 자기 손에 잡고 있는 권세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잠자리는 두평도 안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무덤도 그저 한 평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도 정력과 관 심과 마음을 쏟아붓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큰 사랑과 축복과 하늘의 행복을 왜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사는 것이야 뭐라 그러겠습니까마는 세상 사람들과 엄연히 그 신분과 차원이 달라야 할 신자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과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여간 불 행한 일이 아닙니다

<결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의 입성의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우리을 향하신 엄청난 진리를 우리 신앙의 대전제와 기초로 놓고서 그 위에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서 있 는 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문제 는 우리가 늘 미련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미를 더디 깨달음으로 연약한 신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걸어가야 할 신자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무엇인지에 온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내 마음의 욕심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참 행복과 축복과 감격이 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으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착취하시 려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이 다만 신자로서의 사명과 책임만을 요구하시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찬송과 감사를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느낄 수 없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까 아직까지 내게 미련함이 있고 더디 깨닫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미련한 마음을 제하시고 성경의 신령한 깨닫는 은혜로 속히 깨닫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세상이 주는 기쁨과 전혀 다른 새 기쁨을 차지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끼쳐주시는 평강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 보고 기뻐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바라고 독수리처럼 높이 높이 올라가는 믿음 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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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단위 -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 등 무게 단위


성경의 단위를 살피다 보면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한 도량형이 많이 등장한다.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 등의 단위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바사(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 조금씩 변해 왔다.

도량형은 무게나 길이, 부피, 화폐 등의 단위로 나눌 수 있는데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는 무게 단위로 쓰였다.
성경의 무게 단위들
이 각각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 살펴보자.

구약성경의 무게 단위

게라(Gerah)

게라(גֵּרָה, Gerah)는 성경의 무게 단위 중 가장 최소 단위로, 1게라는 약 0.5g, 0.15돈에 해당한다.
1원짜리 동전의 무게가 0.729g이라고 하니 게라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한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이 반 세겔은 주에게 올리는 예물이다.(새번역 출애굽기 30:13)

구약시대, 20세 이상의 남자는 성막의 기물을 제작하는 데 반 세겔, 즉 10게라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는 100원짜리 동전 정도의 무게다.

베가(Beka)

베가(בֶּקַע, Beka)는 5.7g으로, 1베가는 반 세겔, 10게라와 같은 무게다.

스무 살이 넘어서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두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므로,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가씩 낸 셈이다.(새번역 출애굽기 38:26)

구약•신약 성경의 무게 단위

세겔(Shekel)

세겔(שֶׁקֶל, Shekel)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기본 단위다. 1세겔은 게라의 20배 정도이며 약 11.5g, 3돈가량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무게 단위이기도 하다. 성소세겔, 일반세겔, 왕실세겔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무게를 잴 때는 먼저 어떤 세겔인지 정한 후에 무게를 쟀다.

그는 머리 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달아 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되었다.(새번역 사무엘하 14:26)

세겔은 후에 화폐로 통용됐는데 금으로 된 세겔과 은으로 된 세겔로 나뉘었다.

마네, 므나(Mina)

마네(מָנֶה, Mina)는 므나와 동일한 단위다. 개역한글 구약성경에는 원어인 히브리어 그대로 ‘마네’, 신약성경에는 누가복음 19장 예수님의 비유 속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따라 ‘므나(μνᾶ)’라고 번역되었다. 마네(므나)는 약 570g의 무게다. 이는 세겔의 50배, 1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한다.

그는 또, 금을 두드려 펴서 입힌 작은 방패를 삼백 개를 만들었는데, 그 방패 하나에 들어간 금은 삼 마네였다. 왕은 이 방패들을 ‘레바논 수풀 궁’에 두었다. (새번역 열왕기상 10:17)

솔로몬 왕이 3마네의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방패 하나의 무게는 1.7kg 정도 나갔다. 이는 1.5리터 음료수 병과 비슷한 무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네(므나) 역시 세겔처럼 화폐로도 통용됐다.

달란트(Talent)

달란트(Talent)는 성경의 무게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35kg이다. 이는 세겔의 3,000배, 마네의 60배다. 달란트는 헬라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헬라어 ‘탈란톤(τάλαντον)’은 ‘저울’, ‘계량된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글개역 구약성경의 달란트는 히브리어 ‘킥카르(כִּכָּר)’를 번역한 것이다. 킥카르는 ‘한 덩어리’라는 의미다. 달란트는 신약시대에는 세겔, 마네(므나)와 함께 주로 화폐 단위로 쓰였다. 한글개역 신약성경에서 달란트가 무게 단위로 쓰인 것은 요한계시록이 유일하다.

하나님께서는 큰 성 바빌론의 죄악을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들이키게 하셨습니다. 모든 섬들이 사라지고, 산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들이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우박 때문에 재난이 너무나 커서 ··· 너무나 끔찍한 재난이었습니다. (쉬운성경 요한계시록 16:19~2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진노의 일곱 대접 중에 마지막 일곱 번째 재앙 중에는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해 무게가 약 35kg의 우박이 9km 상공(우박이 형성되는 적란운의 위치)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우박이 고체라는 특성과 공기저항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있다.


성경의 화폐 단위 -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성경의 화폐 단위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등이 있다.
주조화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양모, 곡물, 목재, 가축 등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금속의 무게를 달아 값을 치렀다.

주조화폐는 B.C. 7세기경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금속 조각의 화폐였던 것이 차츰 금화나 은화로 발전했다.
화폐가 발전하면서 무게의 단위와 주화의 명칭이 상용되기도 했다.
무게 단위이자 화폐로 통용됐던 게라, 베가, 세겔에 대해서는 ‘성경의 단위 – 무게’ 편을 참고하면 된다.

구약성경의 화폐 단위

다릭(Daric)

다릭(Daric)은 바사(페르시아) 시대의 표준 금화다.
황제 다리오(다리우스 1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화폐 단위다.
원어인 히브리어 성경에는 ‘דַּרְכְּמוֹן(darkemon)’으로 기록되어 있다.
1다릭의 무게는 약 8.4g이다.
금 1돈이 3.75g이니 2돈을 웃도는 가치인 셈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공사를 위하여 창고에 바친 것은, 금이 이만 다릭이요, 은이 이천이백 마네였다.
(새번역 느헤미야 7:71)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치리할 때,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성경은 당시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금 20,000다릭을 성전 건축에 쓸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168kg의 엄청난 양이다.
2021년 금 시세가 순금 1g이 약 63,000원이다.
20,000다릭이면 100억 원 정도의 금액을 봉헌했던 것이다.
단, 금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 하에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 추정치는 90억원가량이다.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렙돈(Lepton)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헬라의 주화로 고드란트의 2분의 1 정도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1~4)

고드란트(Godrants)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앗사리온(Assarion)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은 로마에서 쓰던 소액 동전으로 청동 화폐 단위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1앗사리온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5천 원 정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29)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보잘것없는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 계신다.

데나리온(Denarius)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다.
로마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었으며 로마 황제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은화(銀貨)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 나드 한 옥합을 ···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마가복음 14:3~5)

한 여자가 들고 온 나드(Nard)는 고급 향유다.
휘발성이 강한 나드는 반드시 병에 넣어서 보관한다.
사용할 때는 병을 깨서 향을 퍼지게 하는데, 신경안정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드향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천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향료인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크마(Drachma)

드라크마(δραχμή, Drachma)는 ‘움켜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은화의 명칭이다.
무게는 약 4.3g으로 1드라크마는 로마의 주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누가복음 15:8~9)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작은 은화를 꿰어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해온 관습이 있다고 한다.
드라크마 10개를 끈에 꿰어 만든 이 머리 장식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리는데,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도 전해진다.
즉 세메디는 장식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드라크마는 바로 이 세메디로 추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화 한 닢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는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와 같음을 설명하셨다.

므나(Mina)

므나(μνᾶ, Mina)는 주로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으나 헬라와 로마에서는 화폐 단위로도 사용됐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새번역 누가복음 19:12~22)

비유 속 귀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 1므나씩, 총 10므나를 주었다(누가복음 19:16, 18, 20).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주고 간 10므나는 10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노동자 일일 급여를 7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7천만 원 정도다.
즉 종들은 개인당 7백만 원의 자본금을 받았던 것이다.
왕은 그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도 장사를 하지 않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을 엄히 문책했다.

달란트(Talent)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18:23~35)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다.


03-17-2024(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열 므나의 비유(13절)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So he called ten of his servants and gave them ten minas.'Put this money to work,' he said, 'until I come back.'

* 장사하라(4231) 프라그마튜오마이(pragmatĕuŏ- mai ) πραγματεύομαι

1. 사업을 하다.  2. 장사하다. 3. 눅 19:13.
발음 [ pragmatĕuŏ- mai ]
어원  /  디포넌트. 제1부정과거 ἐ- πραγματευσάμην, 4229에서 유래

* 4229
πρᾶ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4229
1. 되어진 일.  2. 되어질 일. 3. 사물
발음 [ pragma ]
어원 / 4238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되어진 일, 행위, 일, 사건, 눅1:1, 행5:4, 고후7:11,히6:18.
  • 2.
    되어질 일, 맡은 일, 업무, 과업, 직부, 롬16:2, 살전4:6.
  • 3.
    [일반적으로] 일, 사물, 마18:19, 히10:1, 11:1, 약3:16.
  • 4.
    소송, 논쟁, 고전6:1.
* 4238

πράσσω 스트롱번호4238
1. 행하다.  2. 모으다. 3. 행 3:17
발음 [ prassō ]

뜻풀이부
  • 1.
    [타동사]
    • a.
      행하다, 하다, 완수하다, 행5:35, 19:19, 롬7:19, 고후5:10, 12: 21, 살전4:11.
    • b.
      모으다, 징수하다, 눅19:23.
  • 2.
    [자동사]
    • a.
      하다, 행하다, 행3:17, 17:7.
    • b.
      있다, 살아가다, 지내다, 행15:29, 엡6:21.

󰃨 그 종 열을 불러
-
마태는 달란트 비유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한 반면 누가는 그 세 배가 넘는 열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귀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종을 언급함으로써 귀인을 상당한 재력을 갖춘 권위있는 인물로 묘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 은 열 므나를 주며
- 여기서도 달란트 비유와는 달리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화폐의 단위도 차이가 있는데 '므나'(*)는 헬라의 동전으로서 한 달란트의 1/60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 여기서 언급되는 화폐 단위는 엄청나게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본 비유에서는 적은 액수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그런 의미에서는 작은 일에 충성(마 25:21,23)을 촉구하는 달란트 비유의 주제와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 이와 같은 당부내지는 지시의 말이 달란트 비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화폐 단위 '므나'를 각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재능이라고 한다면 '장사하라'는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재능, 또는 일을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수행(遂行)하라는 지시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예수의 명령과 연관될 때 예수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는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장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튜오마이'는 이윤 추구와 관계되는 상업적 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상업적 이윤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 무리들의 귀를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비유였으리라 짐작된다.


열 므나의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므나는 은화이고 100드라크마에 해당합니다.
달란트는 금화인데 6000드라크마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1므나는 1달란트의 1/60에 해당합니다.

므나의 비유는 예수님의 메시아로서, 청중들을 향한 마지막 공식적인 교훈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시작된 예루살렘을 향한 모든 여정이 이 말씀을 끝으로 마치게 됩니다. 
19장 앞부분에서는 여리고에서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다음 주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시게 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굉장히 중요한 교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열 므나의 비유’를 하실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11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예수님께서는 귀인으로 가셨다가 왕이신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이 땅에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교훈이 바로 므나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2천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시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조로 볼 때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날과 그 시는 모르지만 그 때까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열 사람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맡기셨고 그것으로 장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장사의 목적은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득을 남기고 칭찬을 받지만 한 사람은 한 므나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책망을 듣습니다.

나는 심판의 주로부터 칭찬을 듣겠는가?
아니면 책망을 듣겠는가?

"주마가편(走馬加鞭)" 이란 한자숙어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는 뜻입니다.
칭찬을 들을 사람은 더욱 분발하여 칭찬을 듣도록 노룍하고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책망을 들을 사람은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목표를 정하고 다시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천성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둘러보는 재미에 심취하여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오늘도 신실한 일군으로 내게 맡겨진 삶을 바르게 감당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달란트의 비유

은 열 므나의 비유

본문

마태복음25:14~30

누가복음 19:11~27

배경

천국은 타국으로 가는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는 군중들에게

화폐 가치

금 1달란트 = 90,000드라크마

250년치 품삯

(일5만원x90,000=45억원)

은 1 므나 = 100 드라크마

3개월치 품삯

(일5만원x100 =500만원)

배분방식

3명에게 각각 금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씩 차등 지급

10명에게 각각 은 1 므나씩

균등지급

결산

5달란트 => +5 달란트 = 10달란트 남김

2달란트 => +2 달란트 = 4달란트 남김

각가 주어진 재능만큼 균등있는결실을 얻음

 

1달란트 => 0 달란트 = 1달란트 남김

1 므나 =>  +10 므나 = 11므나 남김

1 므나 =>  +5 므나 = 6므나 남김

각자 최선으로 차등있는 결실을 얻음

 

1 므나 =>  0 므나 =1므나 남김

변명

질책

주인이 두려워서 땅에 감추고 보관

취리하는 자에게 맡겨 이자라도 얻어야

주인이 무서워서 수건에 싸서 보관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얻어야

평가

5달란트 => 작은 것에 충성, 착함

2달란트 => 작은 것에 충성, 착함

1달란트 => 악하고 게으름

1 므나 =>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착함

1 므나 =>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착함

1 므나 =>  악함

보상

5달란트 => 즐거움에 참여+1 달란트

2달란트 => 즐거움에 참여

균등 보상

1 므나 =>  열고을 권세+ 1 므나

1 므나 =>  다섯고을 권세

차등 보상

심판

1달란트 받은이 = 어두운데로 내 쫒김

주인의 왕 됨을 원하지 않은 자들 =>

죽임

 

성경의 두 비유는 천국(하나님 나라)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유사한 평행구절에 해당된다.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에 언급하신 내용으로 보여지며, 주제(하나님나라)가 같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태와 누가가 각각 다르게 받아 적은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다른 상황에서 다른 형식으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각각의 특징(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화폐단위를 볼 때 신약에서 달란트는 마태복음에서만, 므나는 누가복음에서만 사용된 단어이다

마태복음에서 종에게 지급한  금 다섯달란트는 현재 가치로 하루 일당 5만원으로 볼때 45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인 반면 누가복음에서 지급한 은 한 므나는 500만원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금액이다.
현재 경제상황에 맞춰 말하면 마태복음에서는 중견기업을 운영하게 한 것이고 누가복음은 소호창업을 하게 한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맡겨진 인생에서 최선으로 응답해야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각자의 인생에 대한 출발점과 성장과정에 대해서 다른 시야로  해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각각 차등 지급한 달란트의 가치를 비추어볼 때 달란트는 각자에게 부여된 재능 혹은 선별적 환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누가복음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지급한 므나의 가치를 보게되면 므나는 차별적 재능보다 보편적 환경에서 얻게되는 기회라고 볼 수 있겠다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부유한 가정, 교육적 여건이 풍부한 도시등 선별적 환경에서부터 차등있게 성장하기도 하는 반면, 초등학교 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환경 속에서 공부하며 노력여하에 따라 최소한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3.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결실을 남긴 형태는 차이가 있다.

마태에서는 각각 차등있는 재능에 걸맞게 각각 많은 결실을 거두었고 누가에서는 동일한 환경에서도 각자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차등있는 결실을 거두었다. 우리의 인생을 비추어볼 때 이런 다른 상황은 낯설지가 않다. 영재로 태어나서 전문가로 성장하는 모습이나 학교에서 꼴찌를 할 망정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각각의 출발점은 다르고 지나치는 여정은 다르지만 최선을 이룬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와 누가 모두 서로 다른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마태와 누가에서 각각의 화폐가치가 큰 차이를 보이지만 결실에 있어서 주인의 평가는 동일하게 '적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화폐가치로 보자면 달란트의 결실은 놀라울 정도로 크고, 므나의 결실은 상대적으로 작아보인다.
주인은 최선으로 일구어낸 결실에 대해서 칭찬하며 흐뭇해하시면서도 그 성과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적다는 표현은 더 큰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더 크고 놀라운 달란트를 혹은 므나를 맡기시고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원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종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일구어낸 성과에 만족하고 자만에 빠질 수가 없게된다.

5. 마태와 누가 모두 한 달란트, 한 므나를 받고 그대로 갖고만 있다가 다시 내어놓는 종의 모습과 그에 대한 주인의 심판은 동일하다.

모두 주인에대한 무서움  두려움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관리하다가 실패해서 손실을 입게 될 때 주인의 질책과 책임추궁을염려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핑계에 불과한것은 주인의 평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태 누가 모두 동일한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나 대부업자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았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6. 마태 마가 두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전혀 상반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통점을 찾아가다보면 다양한 인생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서로 다른 환경 다른 재능 그래서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며 모두 성공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 성공의 크기나 가치보다 자신만의 환경을 바탕으로 혹은 자신만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내는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다른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얻어낸 성과에 자만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는 삶이 곧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이다. 

7. 반면 좋은 환경을 낭비하고 나쁜 환경을 불평하면서 재능을 썩히고 제자리 걸음만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심판은 엄격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삶을 사는 행태를 가리켜 주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청지기로서의 삶의 기준은 주인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8. 어떤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것인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또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주신 내 인생의 재능과 환경 가운데서 최선의 삶을 견지하여 걸맞는 성과를 이루어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필요가 있는 곳에 거하는 것,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남과 비교하지 않고 타인을 존중히 여기는 것,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결실을 얻어내는 것,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주여 이 종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도하여 주소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열 므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의 종 열 명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귀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그가 종들을 신뢰했으며 또 종들의 충성 여부를 시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자신의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일을 막론하고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지만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의합니다. 

므나 비유가 달란트 비유와 다른 것은 10명의 종들에게 10개의 므나 중 한 개씩 똑같이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더 많이 주고 어떤 이에게는 조금 덜 나눠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맡기고 간 경제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이며 므나 비유는 작은 단위의 화폐를 맡기고 갔다는 점이 다르다. 
중량으로 말하면 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된다. 

여기 므나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는 날,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셨는지를 알고자 하여 10명의 종을 불렀다. 10명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와 모두 보고를 한다.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그들은 저마다 남긴 므나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눅 19:20을 보면 또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한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주인은 잘했다고 칭찬하기 시작했고 또 한편 “악한 종아 내가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므나를 맡긴 이유를 바로 알아야 칭찬을 받는다(13절)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은화 므나를 맡긴 이유는 장사하는 밑천으로 준 것이다.
므나를 맡긴 이유는 간직하고 있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열심히 사업하라는 뜻으로 준 것이다.

그러나 칭찬을 듣지 못한 종은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절)

위의 두 구절의 말씀은 므나를 맡긴 이유에 대해 한 종은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오히려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땅을 살면서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향해 왜 구원했는지, 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는지, 왜 은혜를 주셨는지를 바로 알고 살 길을 원하신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는 그 분의 의의 종이다. 내게 주님이 구주가 되시고 주님이 내 삶에 맡겨 주신 이유를 바로 알도록 성경을 읽자. 바로 알지 못하면 항상 므나를 받아들고서 수건으로 싸두는 일을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성도라는 이름을 맡긴 이유, 교회의 직분을 맡긴 이유, 시간과 건강과 사회 생활을 맡긴 이유를 오해하고 책망 받는 종처럼 되고 만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바로 알아 주님의 의도대로 움직여 칭찬 듣는 성도가 되자.

므나를 남기는 결산을 해야 칭찬을 받는다(16절)

칭찬을 받는 종들은 므나를 받아서 열심히 장사하였다. 장사의 목적은 이문을 남기는 것이다. 하나를 원금으로 삼았으면 하나 이상을 만드는 것이 장사 잘하는 상인의 능력이다.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원금을 잃어버리든지 남기지 못하고 원금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면 장사 잘하는 상인이라 볼 수 없다. 무조건 남기는 결산이 있어야 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모든 것이 시작할 때는 미약했지만 다섯이 되고 열이 되면 그 사람은 주인의 칭찬을 받는 이가 된다. 

회사를 맡은 CEO의 책임과 능력은 무엇인가? 적자 재정 구조를 흑자 재정 구조로 바꾸어 놓는데 있다. 남기는 결산을 하면 계속 연봉이 올라가고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남기는 결산을 하지 못하면 책망 받고 쫓겨나게 된다. 요즈음 미국의 애플이라는 회사는 아이폰이라는 핸드폰으로 유명하다. 

이 애플 회사는 1996년도에 수 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던 회사였다. 이것을 흑자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CEO를 영입하였다. 그러나 그 새로운 CEO는 2~7월 사이에 8억 8천 4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하였다. 새로운 CEO는 해고되었으나 그에게 지급된 임금이 930만 달러였다고 한다. 

왜 이렇게 큰 돈을 지급했는가? 장사 밑천을 가지고 더 많이 남기게 하려고 더 많은 이익을 내게 하려고 10억 이상의 돈을 경비로 쓴 것이다. 이익 창출이 이만큼 중요한 것이다. 결국 애플은 아이폰으로 성공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장사꾼은 맡긴 것을 가지고 남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사업가이다.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고 세워서 또 다시 복음의 사업가가 되게 하는데 있다. 무조건 교회는 남겨야 한다. 남기는 결산을 해야 칭찬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된다. 어느 교회는 가정마다 만원을 맡기고 추수감사절에 가져오게 하였다. 잊어버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남겨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가 통장에 물질을 남겨두라는 뜻이 아니다. 사명을 바로 알고 사명을 쫓아 일하며 사명을 다한 결과를 하나님 앞에 보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라고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3. 므나의 가치보다 더 좋은 상을 받으며 칭찬을 받는다. (눅19:17)

눅19:17에서 주인이 말씀하신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눅19:19에서도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여기서 주인이 베푸시는 상은 내가 이루어놓은 삶의 열매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주신다. 므나 은화의 가치와 비교가 안되는 것으로, 므나의 가치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준비되어 칭찬을 받게 하신다. 주인이 주시는 상과 칭찬의 초점은 작은 것에 소홀이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본다.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인이 맡기고 부탁하신 말씀에 대해 작은 일일지라도 순종하고 책임을 다할 때 내가 이루어놓은 일보다 비교가 안되는 훨씬 더 좋은 상을 허락하신다. 열 므나 남겼다고 열 고을을 치리하는 이로 세우신다. 이 상급은 사람의 계산법과는 아주 다른 특별한 계산법인 것이다.

주님이 나를 칭찬하는 방법은 계산할 수 없는 상을 주시는 것으로 하신다. 주님은 구체적이시다. 감동적이시다. 풍성하시다. 내가 이루어놓은 결과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므나의 가치와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칭찬하신다. 훨씬 더 좋은 상으로 충성된 자를 칭찬하신다. 

우리 모든 주님의 종된 그리스도인들은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온다. 계산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맡긴 일이 무엇이 있었느냐고 핑계하지 말라. 책망 받은 한 종처럼 주님을 오해하지 말라. 가만히 있으면 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말하지 말라. 주인이 되신 주님은 보자기에 모든 것을 싸두는 인생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하는 소극주의, 두려움 때문에 시작도 하지 못하는 소심주의, 땀 흘리지 않고 거두어 들이려는 한탕주의를 주님은 책망하신다. 

주님은 가만히 있는 자들에게 야단치신다. 내가 열 므나를 가져다 은행에 맡기고 원금과 이자라도 더불어 찾아 조금이라도 남기는 일을 하라고 선언하신다. 심판이 가까이 오고 종말이 가까이 오고 주의 재림이 가까이 올 때 더욱 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책망을 받는다. 맡겨진 일, 맡겨진 사명을 바로 깨달아 최선을 다해 남기며 작은 일에 충성하여서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상 주시는 칭찬을 받아야 한다. 

므나는 작은 은전이다. 
달란트는 큰 중량의 금화다. 
므나 비유는 보잘 것 없는 것, 사소한 것,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맡은 자라면 그것이 소중한 줄 알고 일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이런 작고 작은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 내게 맡기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작고 작은 므나만한 일을 가지고 칭찬 받고 책망 받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a.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심(막4:34)
b.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고전4:2)

2) 귀인이 왕위를 가지고 돌아옴
귀인이 왕이 되려고 먼 나라로 갔을 때에 백성은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에 보내어 자신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이 도모하는 일들이란 언제나 악하고 합당하지 못한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그 마음의 모든 계획들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귀인을 미워한 것과는 달리 귀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a.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함(요7:7)
b. 충성된 자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함(잠25:13)

3) 상급과 형벌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 그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에게 귀인은 칭찬과 함께 열 고을과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종은 주인의 엄한 것을 무서워하여 맡겨 준 한 므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두었다가 주인에게로 도로 가져 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단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한 므나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 됨을 거절한 자들을 끌어다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a. 정직으로 판단하심(시9:8)
b. 열매 맺는 백성이 천국을 차지함(마21:43)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중년 미국 여성분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 형제가 동네 한구석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지역의 유력한 저명인사가 말을 타고 그곳을 산책하다가 하필이면 아들 형제의 죽창이 저명인사가 타고 있던 말의 눈을 찔러, 놀란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말과 저명인사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었다.

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 말의 가격도 자그마치 천만 불이 넘는, 세계에서 몇 마리밖에 없는 엄청나게 비싼 말이었다.

두 아들이 재판을 받게 된다.
판사가 형제 둘에게 누구의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느냐고 묻는다.
두 형제는 서로 자기가 휘두른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했다.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청했다 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판결을 내릴 수 없는 판사가 마음씨 아름답고 형제 우애가 남다른 그 형제의 어머니를 재판정에 불러 세우고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인, 한 아들만 사형에 처하면 되는데, 형제가 서로 자기 죽창에 말의 눈이 찔렸다고 주장하니 부인이 한 아들을 정하도록 하시오!”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기도가 끝난 부인이 하는 말, “작은 아들을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판사가 “왜 작은 아들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부인이 이렇게 말한다.

“판사님, 큰 아들은 전처의 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제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말한다.
“아니, 부인!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한 법인데, 그 아들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이 답한다.
“판사님, 옳을 말씀입니다.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자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제가 큰 아들을 죽게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숙연해지고 재판정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순간 방청객들은 물론, 부인의 말에 감동받은 판사는 힘을 주어 근엄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부인! 지금까지 30년 넘게 재판을 하면서 오늘과 같이 감동 받기는 처음입니다.”
두 아들도 또 그 어머니도 미국 사회를 아름답게 선도할 모범적 가족이라고 판단한 판사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힘주어 판결문을 낭독한다.

“내가 판사의 권한으로 두 아들을 무죄로 석방한다.”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위에 소개한 미국과 과거 이북에서 일어난 두 사건은 마치 쌍둥이 예화처럼 거의 흡사한 내용이다. 어쩜 이리도 거의 똑같은 스토리일 수가 있는지, 하필이면 그 예화들이 모두 내 눈에 띄게 될 수 있는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더러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실망도 말고 절망도 말고 끝까지 인내로 기다리면서 선을 행하고 겸손을 보이고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두 가정이 경험한 것과 흡사한 기적의 결과를 우리도 맛볼 수 있을 줄 믿는다.
우리 모두도 이런 주인공들로 널리 널리 회자되었으면 좋겠다.







03-16-2024(토) 누가복음 19:1-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보시옵소서(누가복음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But Zacchaeus stood up and said to the Lord, "Look, Lord! Here and now I give half of my possessions to the poor, and if I have cheated anybody out of anything, I will pay back four times the amount."

"삭개오(Zacchaeus)"라는 이름은 "순결" 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아주 사악한 인간으로 취급되어 유대인들이 증오하던 대상이었습니다.
사회 통념으로는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행동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통념으로는 여전히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 통념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증오하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다는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討索. 칠 토, 찾을 색. 금품을 억지로 달라고 함)한 것이 있다면 사배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삭개오가 사악(邪惡. 간사할 사, 악할 악. 도리에 어긋나고 악독함)한 사람이었다면 자기의 소유를 절반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나눠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해서는 사배로 갚겠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사회 통념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외면하며 비웃는 대상을 찾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할 수 있는 만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만남에 의해서 한 사람을 돌이킬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사역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덕과 윤리와 법에 의해서 저촉(抵觸. 막을 저, 닿을 촉. 서로 부딪치거나 모순 됨)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사회 통념상 사악한 존재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모신 후에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 흩어져야 할 작은 예수라고 합니다.
작은 예수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면 세상은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까닭은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삶을 보여주지 못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이 땅에 수많은 성도들이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대합니다.
기대가 없는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비록 그 기대가 무너질지라도 또 다시 기대를 갖고 새 날이 열려질 것을 확신하며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 주의 나라와







사회통념
이란 사회 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건전한 상식, 또는 견해를 뜻하는데 사회통념에 대한 인정범위는 일반적인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통념의 함정

아이들과의 대화는 늘 초심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얼마 전 어느 중학교 진로교육 강연회에서 판사라는 직업과 법원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늘 빠지지 않는 질문이 ‘판사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정도인데, 그날은 뜻밖에 아무도 이를 묻지 않아서 준비해 둔 대답을 못하고 머쓱해 있었던 순간, 어떤 아이가 손을 들고 “판사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인생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판결을 하는데, 판사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다 잘 알고 있나요?
공부를 많이 하면 다 알게 되나요?”라고 물었다.

필자는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독서에 관한 동기 부여도 해줄 겸 해서 좋은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한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판단을 할 때 그 사람의 처지나 환경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고, 판사들이 모든 사회 현상과 직업을 경험해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많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질문을 먼저 받고 보니 간접경험을 위한 독서만으로는 그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판결문을 포함해서 법조인들은 법률서면에 ‘사회통념’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사회통념에 비추어 볼 때…', '사회통념에 부합한다', '사회통념에 어긋난다'는 등으로 말이다.
사회통념이란 '사회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공통된 사고방식' 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관념' 정도로 정의된다.
이웃 간에 수인한도를 정할 때와 같이 사회통념 자체가 규범적인 기준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판결문 등 법률서면에서는 대부분 어떤 결론이나 주장의 합리성 내지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이 되는데, 그것이 왜 사회통념인지에 대한 논증은 많이들 생략한다.
서면상의 논증은 생략했더라도, 단순한 나의 직관을 사회통념으로 격상시킨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든 사회통념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면 다시 한 번 주변과 사람을 세심하게 살펴야겠다.

삭개오(Zacchaeus) : 순결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덕과 윤리와 법에 의해서 저촉(抵觸. 막을 저, 닿을 촉. 서로 부딪치거나 모순 됨)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사회 통념상 사악한 존재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내가 삭개오와 관계를 갖고 지내면서 삭개오를 알게 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모신 후에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이런 삭개오를 생각하면 삭개오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통념이었을 뿐입니다. 

호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나다니엘 레첸메이어(Nathaniel Lachenmeyer)가 지은 ‘부러진 부리’라는 꼬마 참새 이야기입니다.

공원 나무에서 살면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참새가 어느 날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불행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참새들 세계에서도 왕따를 당하여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지 못해 야위고 씻지도 못해 지저분한 그를 동료들은 더러운 새로 취급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빵을 먹이는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던 노숙자 아저씨였습니다.
“너와 난 같은 처지인 모양이지”하고 웃으면서 그가 내미는 빵을 먹으며 오랜만에 참새는 행복을 느낍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을 만듭니다.
아저씨는 공원의 벤치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립니다.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덥수룩한 머리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아저씨가 꼬마 참새의 깃털을 쓸어주며 “안녕, 잘 자야해, 내일을 위하여”하고 속삭입니다.
꼬마 참새도 부드럽지만 힘차게 ‘짹’하고 대답합니다.
그날 밤 아저씨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다시 반듯해지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간추려 볼까요?
참새가 부리가 부러져서 기형이 되었습니다.
참새들 사이에 왕따를 당합니다.
그런데 노숙자 아저씨의 눈에 이 참새가 띄었습니다.
아마도 참새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참새에게 빵을 건네줍니다.
참새는 오랜만에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받아먹은 셈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참새는 아저씨의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잠이 듭니다.
함께 꿈을 꾸었는데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나아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자마자 이 이야기에 혹 빠졌습니다.
무조건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에 그렇게 쉽게 빠졌나 차분히 생각하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러진 부리’가 제목인데 부러진 부리의 참새의 모습에 저는 쉽게 동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동화되었겠습니까?
부러진 부리의 아픔을 저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글을 한국의 이동원 목사님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라는 책에서 접해 보았는데 이 목사님은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 바로 공동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곧 참 공동체는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라고 밝히시고 계신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동안 삶을 사시면서 부러진 부리의 경험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번 이상 기형이 되는 경험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들의 부리는 멀쩡한데 나의 부리만 부러지는 경험을 한번이상 다 하셨을 줄 압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남들 사이에 낄수 없는 고통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톨스토이도 아주 꼭 맞는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가정을 개인으로 바꾸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 같이 같다.
하지만 불행한 개인들의 불행은 제각기 다르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하나 같이 같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 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만 부러진 부리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처럼 부리가 부러진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는 모두가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
모양은 다 다르지만 부러진 것은 같으니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도리어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다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많은 문제를 도리어 어떻게 축복으로 바꿀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고 계셨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보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삭개오는 자기 키로는 도저히 볼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부자이지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다고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군가가 삭개오가 앞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삭개오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 아주 신기하게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부자이며 키가 작은 세리장이 뛰어 가니 모두 재미있게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저 삭개오 세리장이 어디를 저렇게 열심히 뛰어 가지.” 그런데 뛰는 것보다 더 웃기는 장면이 벌어집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뽕나무는 아이들이 올라가는 데입니다. 삭개오는 아이들에게 그 자리마저 빼앗길까 봐 열심히 뛰어가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들 킥킥거리며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소리내어 킥킥 거릴 수가 없습니다. 잘못해서 걸리면 다음번에 세금을 왕창 내야할지 모르니깐, 조심조심하며 조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삭개오보다 더 중요한 분은 예수입니다. 잠시 킥킥거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아무리 키가 작아도 그렇지 뽕나무에 올라갈 정도라면 키 말고도 다른 문제가 섞여 있을 줄 압니다. 키가 작으면 제일 앞에 나가서면 됩니다. 제일 앞에 나가서면 뒤의 사람들에게 전혀 방해가 안 됩니다. 키가 큰 사람들에게는 삭개오가 있으나 마나 입니다. 키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세리 중에 세리입니다. 곧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죄인들과 옷만 스쳐도 죄가 옮겨 온다고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삭개오만 나타나면 이들은 자리를 피합니다. 줄행랑을 칩니다. 왜냐하면 죄가 옮을 가봐. 삭개오는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자기가 앞에 나가서면 사람들이 다 피할 것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자기를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아예 삭개오는 뽕나무로 올라 간 것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나타나길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또다시 비통해 여깁니다. 아마 삭개오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가 뽕나무로 뛰어 오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자기를 쉬쉬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뽕나무에 올라가 있습니다. 심한 외로움을 느낍니다.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실시한 사회학적 실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이 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학교에 초대하였습니다.
아주 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였습니다.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초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행사도 행해지지 않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은 온데 간데 사라졌습니다.
수백 명의 주민들만 남아 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광고도 없습니다.
방문객들은 막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슬 방문객들은 군중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점점 자기들을 위한 아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두 그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두 다른 의견의 그룹이 생깁니다.
잠시 후에는 두 그룹의 대변인이 생깁니다.
논쟁은 싸움으로 변해 갑니다.
드디어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발전할 즈음이 되었습니다.
이 때 교수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회학적 실험이었다고….

이 실험을 통하여 심리학 교수들은 다시금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재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의 이중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곧 자신의 문제는 다양한 관점에서 봅니다. 자신의 문제를 생각할 때는 모두 부러진 부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의 부리를 생각할 때는 달라집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중구조로 봅니다. 이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매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순인 것 같습니다. 나의 문제는 세상에서 유일한 문제입니다. 남의 문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흑 아니면 백.

교우 여러분,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모두 부리가 부러진 면에는 같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다릅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죠? 서로 다른 면을 인정하며 포용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우리는 이웃을 볼 때는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의 이중구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대하는 사람들도 이중적 판단 구조로 삭개오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삭개오는 검은 색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많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독특한 부러진 부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도 부리가 부러져 있으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삭개오를 나쁜 사람으로 손가락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러진 부리를 가진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보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 하나 자기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검은 색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눈총뿐입니다.
이 때 드디어 그렇게도 보고 싶던 예수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삭개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치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뽕나무 위에 있으니 자기에게까지 쫓아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소리치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점점 가까이 오시고 계십니다. 자기가 있는 뽕나무 근처까지 오셨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고 무의식중에 몸을 가다듬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회개하라” 소리치실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욱 몸을 숨깁니다. 순간 예수님이 뽕나무 밑에 까지 오셨습니다. 몸은 얼어붙는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도 검정색과 나쁜 것의 대명사로 살아오면서 많이 기가 죽어 있는데 이제는 예수라는 사람에게까지 검정색이니 나쁜 것이니 불리게 되는 시간이 닥아 옴을 느낍니다. 그런데 순간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가 들립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귀를 의심합니다. 아니 삭개오만 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귀를 의심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그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해왔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토록 가까이 하길 원하시는 예수라는 분이 자기를 찾아 오셨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주님을 모셨습니다. 삭개오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무리는 어쩔 수 없는 무리입니다. 무리는 검던가 희던가 둘 중에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부러진 부리의 모양은 다 다르면서도…. 삭개오를 왕따시켰던 무리는 이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 볼 줄 모르는 무리는 금방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굳어집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곧 예수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삭개오와 즐거운 시간을 나눕니다. 삭개오와 웃고 놀고 별 장난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밥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키가 작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삭개오에게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와 같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개의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부르던 자가 자기 집에 함께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이미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삭개오는 난생처음 자기 편을 만납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이것이 삶이로구나를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갑자기 일어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진정으로 회개하였고 진정으로 구원이 그 집에 임한 것을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부자가 재산 반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수입이 많아질수록 십일조가 어렵다는 말들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부자였습니다. 얼마큼 큰 부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 곧 부정한 방법으로 빼앗은 경우는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22:1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삭개오가 공연히 4배를 갚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하면 최소한 4배는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하고 있지 못하던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제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시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고백을 들으셨을 때 주님은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할 때 그것도 삭개오처럼 구체적으로 고백할 때 주님은 이처럼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를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한 시작은 무엇이었나요?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였나요? 한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 그것도 구체적으로 결단하게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자 삭개오가 그러한 결단을 하였습니다. 협박을 통해서 이루어졌나요?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III)’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시리즈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소개하는 장면과 두 주전 본문 말씀 곧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많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장면과 연관해서 잠시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삭개오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은 흔들린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는 싶었는데 살려고 할 때마다 왕따를 당하는 경험을 합니다. 왕따를 당하면 포기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이러기를 수십 년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거의 포기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순간 삭개오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살아 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꼼짝 못하도록 도장을 찍으신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워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무엇이었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이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삭개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유는 우리도 언젠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동생 아무개야…”

테오도르 댈림플(Theodore Dalrymple)이라는 영국의 정신과의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감옥소에서 죄수들을 상담하며 치료하는 의사인데, 놀라운 사실을 보고합니다.
죄수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 죄인 줄은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죄수들이 자기들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드는데, 한 죄수는 교회의 기물을 늘 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훔치느냐고 물으면 교회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왜 교회당 관리를 소홀히 해서 자기로 하여금 훔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관리를 잘하면 자기 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더 소개할까요?
이 사람은 비디오등 전기제품들을 잘 훔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자기가 훔치는 이유는 의사들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빨리 좋은 약을 개발하여 자신의 도벽을 없애지 못하기에 자신이 자꾸 훔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죄를 계속 짖고 있을까요?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흑과 백의 관점에서 선인과 악인의 이중적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삭개오도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따시킵니다.
그러니 토색하는 것은 자신을 왕따를 시키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자신의 토색을 합리화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신비입니다.
죄인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잘 압니다.
그러나 죄는 반복되어 짓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합리화합니다.
바로 우리도 죄의 신비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 죄의 신비, 죄인의 신비 -  나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불륜)
죄는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크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삭개오는 평소에 사람들이 외면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뒤집어 졌습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있구나!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4배로 갚아주어야 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사순절의 시기에 삭개오와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視覺. 볼 시, 깨달을 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04-13-2024(토) 누가복음 22:63-7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선지자 노릇하라(64절)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They blindfolded him and demanded, "Prophesy! Who hit you?"


일반적으로 선지자란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선지자(prophetes)는 “선포하는 자” 또는 “옹호자”를 뜻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영적 통찰력과 미래를 “보는” 능력으로 인해 “예견자”로도 불립니다.

성경에서 선지자들은 현재의 사안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거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하는 등 가르치는 역할과 계시하는 역할 모두 갖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때에 만연했던 부패에 대해 대담하게 설교하였으며(이사야1:4)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는 등(이사야 25:8)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다뤘습니다.

선지자들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하나님의 집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33명 이상의 선지자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고 그 중 16명이 여자입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의 장로 70명(민수기11:25)과 오바댜가 구한 100명의 선지자를 포함해 수많은 자들이 예언했습니다(열왕기상18:4).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선지자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20:7에서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을 통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수 차례 아브라함 앞에 그분을 드러내십니다.

야곱과 요셉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둘 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보는데, 이 또한 예언의 범주에 속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었고 대선지자로 여겨졌습니다(신명기34:10). 여호수아와 많은 사사들도 선지자로 섬겼습니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은 어린 시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사무엘상 3:4). 이후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가 된 다윗에게 기름부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에는 특히나 예언 사역이 활발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선지자의 무리가 왕성히 활동했습니다(열왕기상20:35). 엘리야와 엘리사 모두 수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 또한 메시아를 예언했습니다(마태복음 3:1).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이자, 제사장, 왕,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의 수많은 예언들을 이루셨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경우 바울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사도행전9:10-18). 사도행전 21:9는 빌립의 딸 넷이 예언했다고 말합니다. 예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 영적 은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두 명의 “증인”이 예루살렘에서 예언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1장)

보통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선지자들은 멸시당하고 그들의 메시지는 무시당하게 마련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민족에게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이사야30:9-10)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해 애통해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34).

물론, “예언”을 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선지자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면서 거짓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400명의 거짓 선지자를 두어 그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습니다(역대하 18:4-7; 디모데후서 4:3). 신약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수많은 경고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7:15). 예수님께서는 또한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태복음 24:24)고 경고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대환난의 때에 일어나 전 세계 사람들을 미혹할 거짓 선지자에 대해 말합니다(요한계시록 16:13; 19:20; 20:10). 미혹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항상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요한일서 4:1).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열심일 것입니다. 결코 이미 드러내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선지자는 아합 왕과의 운명적 대결 직전의 미가야처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말할 것입니다(역대하18:13).




04-12-2024(금) 누가복음 22:54-6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히 통곡하니라(62절)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And he went outside and wept bitterly.


지금 ‘코로나’라는 폭풍의 중심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이전에는 교회를 욕하고 혐오하더니 이제는 증오합니다.
직장에서는 사람들이 교회를 마치 코로나의 온상인 것처럼  욕합니다.

우리는 어찌하던지 코로나가 종식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평일의 모든 예배와 모임까지도 포기하며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데...
세상을 바르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힘썼을 뿐인데....
열두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듯이, 초대교회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듯이 몇몇 악한 자들이 교회 가운데 들어와 마치 가라지처럼 교회를 망침으로 교회에 문제들이 있는 것인데...
세상사람들은 교회를 ‘악의 온상’인 것처럼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십자가 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교회를 욕하는 세상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진실을 모르고 선동되어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 선, 예수님의 수난 앞에 선 수제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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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체포당하시자 도망가던 베드로는 다시 돌이켜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58절).
베드로는 예수님이 염려되어 끝까지 뒤따라 간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그래도 끝까지 도망가 버린 다른 제자들보다는 나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불과 두어 시간 전만 해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절)라고 호언장담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위기에 처해지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봐 몰래, 그것도 멀찍이 숨어서 따라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베드로의 태도는 예수께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해버리리라”고까지 말씀하시면서 강하게 지적하신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신앙 태도’입니다(계 3:15-16).
병든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숨어서라도 재판정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숨어서 따른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많은 권능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입니다(마 16:1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말은 유창했지만 믿음은 연약했습니다.
그래서 큰소리 친 것과는 달리 예수님과 당당하게 죽음의 길로 가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멀찍이 따라간다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예수님과의 거리를 가까이 한다면 그 사랑은 점점 뜨거워지고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거리는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하면 거리가 가까워지고, 사랑이 식으면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의 척도는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게 동행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일에서만 ‘주님, 주님’하면서 동행하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의 길에서는 머뭇거린다면 나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부족한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알아 볼까봐 숨어서 뒤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떠합니까?
베드로처럼 멀찍이 숨어서 뒤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고보사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이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언제 어느 곳에서도 늘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69-74절 말씀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장면입니다.
그는 한 여종으로부터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지적을 받자 즉각 부인하며 알지 못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은 마치 답변을 미리 준비하고 연습한 것 처럼 신속했습니다.
본문에 ‘부인하여’라는 말은 ‘본능적으로 즉시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을 즉시 부인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72절에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74절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면서 두 번씩이나 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점점 강하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두 번째에는 ‘맹세하고’ 부인했고,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불과 서너 시간 전만 해도 두 번이나 거듭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며 큰소리쳤습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잃을 위기 앞에 서자 정신없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해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구약 잠언 28:26에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고, 신약 고린도전서 10:12에서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너무 믿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자신의 마음을 과신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베드로와 같이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정신없이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성과 연약성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심한 죄책감에 통곡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숙한 성도는 결코 자신을 믿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쳐서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킵니다.

코로나의 위기 앞에 선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베드로처럼 '나는 교회와 상관이 없다'며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는 않은지?

알곡과 가라지를 가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고, 자신을 의뢰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 자랑하시는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4-11-2024(목) 누가복음 22:47-5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것까지 참으라(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But Jesus answered, "No more of this!" And he touched the man's ear and healed him.




◎ 유다의 배신 ◎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배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한 이래로 배신은 인간의 부패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난 첫 배신은 아담이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下)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답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자 모든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속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배신이 없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신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관계를 끊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신은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나라를 배신하고, 회사를 배신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배신은 남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배신한 적은 없습니까? 로마의 장군 줄리어스 시저가 친구들과 부하들에 의해 암살을 당할 때 암살자 중에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터스가 있는 것을 보고 “모두 한 편인가? 브루터스, 너마저? 그럼 시저는 끝이로구나!”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러한 배신 행위를 예수님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행위를 아셨으면서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장소인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여러 무리들을 데리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옵니다. 이것이 예수를 넘겨주기로 한 사람들과 약속한 신호였습니다.

◎ 참으라의 의미 ◎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 예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제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립니다. 이 제자는 왜 하필 대제사장의 종을 향해 칼을 썼을까요?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같은 기득권 세력입니다. 종은 주인의 지시를 따라 함께 했던 것뿐일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쓴 것이라면 그 칼은 종이 아닌 대제사장과 같은 사람을 향했어야 합니다. 종 보다는 대제사장을 향해 칼을 들어야 더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기엔 주어진 상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 중에는 성전의 경비대장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힘으로 상대하여 예수를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고 제자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순순히 내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리들 중 가장 약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을 상대하여 칼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의 행동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의 문제 해결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제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칼을 든 것은 힘없이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종의 귀를 자른 것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당방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일을 겪고 계십니다. 제자의 배신과 함께 붙들려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아야 하는 것입니까? 부당함에 대해 참는 것은 우리의 속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대항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상황은 있겠지만 예수님은 힘없는 제자들이 대항하다 다칠 것을 염려해서 참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상황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붙들리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에 자신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부당한 상황이라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기에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부당하게 대우 받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상이었고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참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도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한다 해도 이 말씀대로 무조건 참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저로서도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일률적으로 적용해서 어떤 경우에도 참아야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내심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일에서 제자들이 벗어나야 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으라는 말씀에는 단지 폭력을 쓰지 말라거나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순순히 잡혀가시는 예수님에게서 장차 그들이 가야 할 삶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칼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지켜야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을 겪게 되면 그러한 상황이 있게 된 배후에 누가 계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불만으로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말한 대로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신자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비록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참는다고 해서 삶의 모든 내막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부당한 일을 겪게 하시는지 생각한다고 해서 금방 답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삶을 생각한다면 분명한 답 하나는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도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삶은 ‘형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자신을 위한 칼 ◎

제자가 칼을 든 것은 외적으로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서 자신들 곁에 함께 해야 그동안 예수님을 추종했던 인생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신 뒤에도 칼을 들어 종의 귀를 치면서까지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충성과 의리로 귀결되면서 칭찬들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행동을 거부하십니다. 제자의 행동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아셨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예수님을 위해서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한다는 일들을 보면 결국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고 목사가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그 속마음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또한 참아야 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칼을 든 제자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해를 끼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제자처럼 칼을 들어 공격함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선동할 것입니다. 이 또한 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가 진심으로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길이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다면 교인들을 향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열심을 참고, 소위 좋은 신앙을 저울질하는 추로 작용하는 기도와 봉사와 십일조를 참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는지 네 자신부터 먼저 보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부당함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것도 나라는 존재가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분노하고, 나를 위해 칼을 들고자 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만 있는 것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보게 되는 기회가 ‘참으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했을 때 예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유다의 행동은 겉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에 대한 친근함과 신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자기를 위해 예수께 입 맞춘 것일 뿐입니다.

유다를 앞세운 무리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또한 자기들의 삶의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 훼방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은 달랐지만 저마다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 어둠의 권세 ◎

53절에 보면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눅 19:47절에 보면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 주변에 백성들이 없습니다. 눈치 보고 두려워 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을 때는 백성들 때문에 자신들의 계획대로 행동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구의 눈치 볼 필요가 없이 자기들 뜻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의 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워 할 대상이 없이 오직 자기를 위해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에 붙들렸을 때 관심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이 진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인가?’라는 선택에서 선악과를 먹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권세 아래 있게 된 인간의 형편입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필요한 신을 찾습니다. 교회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하나님,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위해 적당히 지켜줘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어둠이 권세로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내가 원한 내 인생을 칼을 들고 대항해서라도 빼앗기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참으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종의 귀를 치는 제자의 그 속성이 우리 안에도 박혀 있음을 평소 우리의 삶을 보면서 실감해야 합니다. ‘참으라’는 말씀이 칼을 든 그 제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아닌 듯,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 자신을 향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기 희망이 무너졌을 때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오직 자신의 인생에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십자가는 옵션처럼 취급됩니다. 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순종되는 것이 곧 생명으로 향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환상일 뿐이며, 함께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길에 참여되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제대로 보게 된다면 예수님만이 희망이심을 절감할 것입니다.












04-10-2024(수) 누가복음 22:39-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어나 기도하라(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Why are you sleeping?" he asked them. "Get up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습관(1485) 에도스(ĕthŏs)  ἔθος   

  1. 버릇.   2. 관습.  3. 유대인의 풍속
발음 [ ĕthŏs ]
어원 / 1486에서 유래
전례(눅 1:9, 2:42), 습관(눅 22:39, 히 10:25), 규례(행 6:14), 법(행 15:1, 25:16), 풍속(행 16: 21, 26:3), 관습(행 21:21, 28:17).


예수님께서는 습관(에도스, ἔθος)을 좇아 다락방을 떠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할터이니"(눅 22:31) 이제부터는 전대와 주머니와 신발을 준비하고 심지어 겉옷을 팔아 검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날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계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과도 흡사합니다.

누가는 마지막 십자가의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기도하러 가셨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평소에 늘 하시던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기도 생활을 해야 하는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까지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문제가 생겼을 때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만, 그 때만 잠시 반짝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해야 합니다.
습관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매일 정기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하셨습니다(44절).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믿음이란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도할 수 없을 때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죽으나 사나 기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 다가도록 기도에 전념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소망하며 일어납시다.

주여,
나를 기도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깊은 속에서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모습과 대조되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장면, 저 위의 그림과 같은 장면, 이 순간,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 이 순간, 제자들은 피곤하여 그만 졸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요한 순간, 구지 기록하지 않아도 될 장면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많을텐데, 구지 이 장면을 공관복음 모두에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 장면이, 참으로 한심하고 어이가 없는 이 장면이, 오늘날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시고, 우리는 육신이 약하고 피곤하여 그 옆에서 졸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지금도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육신이 연약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여도 잠시 뿐입니다. 힘쓰고 애써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많이 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0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6절)

유혹에 빠지지 않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어떤 유혹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셔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2절)

무슨 유혹입니까? 무슨 시험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되기를 바라는 유혹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시험에, 내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피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마시라고 주시는 잔을 마시지 않게 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서 살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평소에 매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6절)

"어찌하여 자느냐.... 일어나 기도하라"

어찌하여 그렇게 기도하지 않느냐?

어찌하여 그러고 있느냐?

이제 그만... 일어나 기도하라!

......

주님의 음성에 순종합시다. 

일어나 기도합시다. 

그만 자고 일어나 기도합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습관을 따라 기도합시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일어나 기도합시다!!






는 아버지의 뜻대로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들을 위하여 찢기셔야 했습니다(마 26:28; 고전 11:24).

감람산은 감람나무(올리브 나무)가 많은 산이었고, 마태는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를 감람산 안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이었다고 말하는데(마 26:36),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그 부근에 올리브를 짜서 기름을 만드는 틀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일주일간 예수님은 베다니 숙소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지만, 이날 밤은 달랐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도시 남서쪽 에세네 구역의 개인 주택이었던 다락방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성전 맞은 편 동쪽에 있던 감람산을 향해 30여 분 컴컴한 밤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좁고 불편한 골짜기와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마침내 제자들과 자주 모였던 겟세마네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해 야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 후면 유다가 무리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고, 유대인의 심문을 받고, 로마인의 판결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이 이제 코앞에 닥쳤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잡히실 그 장소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열 한 제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내가 말한 것과 같이 사탄이 너희를 뒤흔들고 기름을 짜내듯이 너희를 짜내어 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넘어져 완전히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리니, 기도하라. 그 유혹에 빠져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라’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고 그분의 뜻대로 허락되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기도의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시험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내가 저기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마 26:36), 세 명의 제자, 특별히 더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여주신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나머지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41절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누가는 돌 던질 만큼 가셨다고 말하는데, 돌을 던져 닿을 거리를 말합니다. 아무리 멀어도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만큼(6-7미터, 대럴 벅)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이동하셨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심정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실 곳까지 나아가시면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고뇌에 빠졌습니다(마 26:37). 그리고 동행하던 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

예수님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큰 고뇌에 빠졌습니다. 심하게 놀랄 뿐만 아니라 극도로 슬퍼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시험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문 앞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고통스러운 죽음, 사형 앞에서 커다란 덩치에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마도 덜덜 떨며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실 육체적 고통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밤중에 유대인에게 끌려가 심한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가 등이 파이도록 채찍질을 당하는 것, 십자가에 달려 숨이 턱턱 막히는 질식에 이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면 그때야 죽음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 결코 쉬운 일도, 만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으니까요(히 4:15).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임박한 시험에 이토록 놀라고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는 육체적 고통이 전부가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시고,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셔서 홀로 아버지 앞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누가의 말처럼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41절).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토록 무서워하고 슬퍼하고 고민하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잔을 마시는 것을 고민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잔은 분노의 잔이었습니다(사 51:17; 렘 25:15, “여호와의 진노의 잔”). 하나님의 백성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대신 마셔야 했습니다. 영원 전부터 겟세마네 동산에 이른 그날 밤까지 처음으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진노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버지와 영원한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사랑이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받고, 아들은 아버지를 인하여 영광을 받는 관계였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자족하시는 분,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만족할 거리를 찾지 않는 분으로 묘사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영원히 만족하고 영원히 기뻐하며, 아들은 아버지를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이 관계는 지속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고(마 3:17; 17:5),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만 말하고 보여주신 대로만 행하였다”고 고백하며 순종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요 5:19). 그런데 이제 그 아버지께서 분노의 잔을 아들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대신 지게 될 많은 사람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고후 5:21; 벧전 2:22).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날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시 7:11). 그런 거룩하고 정결한 분께서 많은 사람의 오물을 뒤집어쓰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잔이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하는 자기 아버지의 손에서 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만큼 마시기 힘들고 두렵고 슬픈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만큼 마시는 것이 심히 고민이 되어 죽게 될 만큼 힘겨운 잔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압니다. 하지만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친밀하게, 의심 하나 없이 아버지를 온전히 믿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아빠”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아버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아버진 뭐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와 함께, 아버지가 내미시는 잔 앞에서 극도로 고민하고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확실한 신뢰.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강한 인정.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저는 신뢰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무섭고, 슬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심히 고민이 되어 죽을 것 같아도, 아버지의 뜻이 거기에 있사오니, 아버지의 뜻을 믿사오니 저는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자기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오래전 선지자의 글을 통해서도 그랬고, 아들 예수님께도 계속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나중에 무리에게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꺼내 휘두르자,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책망하시며,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3-54).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 베다니에 계실 때, 아버지의 뜻대로 임하게 될 일을 생각하며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7).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의 마무리처럼 이때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 그때, 하늘에서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아버지는 자기의 뜻을 아들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시험이 극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옮겨달라고 구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항상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그 뜻에 따르겠다는 기도로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뜻을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죽음의 고통으로 부르짖는 아들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하셨습니다.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셨을 때, 그 모든 시험을 아버지의 뜻을 신뢰함으로, 말씀으로 승리하시고 나서, 예수님께 나타나 수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마귀가 가장 극단적인 고통과 두려움, 슬픔으로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고,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시험을 이기고 아버지의 뜻을 신뢰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압도적인 시험의 무게와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동시에 기도하는 중에 받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적 전쟁과 같았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된 이 영적 전쟁을 감당하고 계신 예수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거세진 영적 전쟁에 맞서 힘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단순하고 명료한 표현이지만, 그날 밤 겟세마네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면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다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시다가, 일어나 동산을 거닐다가 또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시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몸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굵게 흘러나왔고, 전쟁에서 칼에 맞으면 피를 철철 흘리는 것처럼,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이천 년 전 어두운 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심한 통곡을 하며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엎드렸다가, 일어났다가, 동산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시 얼굴을 땅에 대고 흐느끼며 기도하기를 반복하셨던 예수님.

여러분, 우리의 죄의 깊이가 이 정도란 걸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싸우고 때론 넘어지는 죄가 이 정도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지 알고 싶으십니까? 겟세마네로 가보십시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예수님도 모르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거기에 떨어진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받은 축복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요일 3:1).

마지막으로 극심한 시험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순종할 수 있을지 잘 모르시겠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도 마실 수 없는 무섭고 고통스러운 진노의 잔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시험 대상자를 만나볼 시간입니다. 예수님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에 올라온 이상, 이제 예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였습니다. 사탄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함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하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45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가끔은 제자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아무리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기도를 부탁하셨는데도, 어떻게 잠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둘째치고, 그들에게 닥칠 시험에 대해 예수님이 경고하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천하 태평하게 대비를 안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어찌하여 자느냐?” 어떤 주석가는 이 말의 뉘앙스가 “아니! 어떻게 자고 있느냐?”라고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줄 모르느냐? 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이들이 잠든 것은 이번 한 번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총 세 번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고, 세 번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올 때마다 어김없이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마 26:40, 43, 45; 막 14:37, 40, 41-42). 

왜 잠이 들었을까요? 누가는 45절에 “슬픔으로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다”고 말합니다(마 26:43; 막 14:40).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신 죽음에 대한 말씀과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며 슬픔에 압도되어 육신이 지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일주일 주님과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심신이 지쳤을 것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정말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그 때에, 어쩌면 그들은 기도를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육신은 연약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41; 막 14:38).

여러분, 우리도 연약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시험, 특별히 영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죄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탄은 울부짖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고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얼마나 자주 진지하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인데(엡 6:12), 혈과 육에만 매여 수많은 시험에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제자들처럼 시험이 닥쳤을 때, 주를 버리고, 주를 부인하고, 죄에 넘어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왜 이리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리고 직접 보여주십니다. 극심한 시험 앞에서 어떻게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며 그것에 순종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이 어떻게 더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모두 쉬지 말고 기도하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우리의 믿음의 주, 믿음의 본이 되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하시는 길 중에 예수님이 하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을 앞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하신 기도입니다.

다락방을 떠나기 전에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2).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그 기도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십시오(176-8pp). 18장 1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는 길에 하신 기도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시고, 그 뜻대로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6절부터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즉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그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구하시고 나서(11절) 15절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시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제자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셨습니다. 악에서 그들을 건져주시고, 17절을 보면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구하셨습니다. 죄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시고, 죄를 벗고 거룩에 이르도록 진리로 그들을 지켜주시고 보전해달라고 구하신 것입니다(11절).

그래서, 연약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심지어 부인하고, 믿음도 흔들렸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온전함을 입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믿음의 본, 믿음의 주뿐만 아니라 또한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를 향하여 가시는 길에 열한 사도의 연약함만 중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열한 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 열한 사도로에게서 흘러나온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해서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입니다(요일 5:4).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인정하고 시험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간절히, 힘써,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다는 사실에 위로와 힘을 얻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데 실패하고 수많은 시험에 넘어지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이천 년 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는 그날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주요 곧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히 12:2).










04-09-2024(화) 누가복음 22:35-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는(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He said to them, "But now if you have a purse, take it, and also a bag; and if you don't have a sword, sell your cloak and buy one.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할 때(눅 9:1-5)와 칠십 인 전도대를 파송할 때(눅 10:1-5)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며 배낭도 준비하고 검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왜 서로 다른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제자들과 전도대를 파송할 시대와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혀야 할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평화로운 시대와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가 다른 것처럼 머지않아 심각한 신앙의 핍박과 더불어 어려움을 겪어야 할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갖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검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검이란 공격용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용으로 사용할 목적을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검이란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검을 사라고 하셨기에 능력의 말씀을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접근이라고 하겠습니다.

패역한 세대를 향하여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검과 같은 예리한 판단력과 급소를 찔러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합니다.
이러한 힘은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만 얻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치 장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와 비슷합니다.
짧은 시간에 완주하는 기록 경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 달려야 하는 지구력과 끝까지 달려야만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쾌감을 위하여 많은 노력과 수고와 인내가 없이는 결실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이 하루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루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신앙의 몫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읾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 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즉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제 전대(purse, NIV)와 주머니(bag, NIV)를 가지라고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심도 달라지고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 무대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 같은 시대의 구분은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의 박해 시대를 대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Conzelmann). 21장까지 예수의 활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실과 22, 23장에 언급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P.S. Minear).

󰃨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본 구절의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고조된 긴장감을 나타낸다. 먼저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한 까닭은 반드시 겉옷을 팔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대를 가져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은 칼이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칼은 무엇에 쓸려고 준비하라고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겉옷을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점은 그 검을 준비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반증한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제자들 중에 칼 두 자루가 있음을 예수에게 밝힌다. 따라서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이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검 또는 성령의 검을 준비하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고(Olshausen, Godet).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 칼을 준비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으며(Bengel), 무력적 힘을 통해 선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들은 예수의 전체적인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해석들이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전과는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면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나아가 희생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Meyer, Farrar, Plummer, Gilmour).



󰃨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 사 53:12을 상기시키며 34절에서처럼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강조 어투를 사용하여 예수 자신의 고난을 예언의 성취로 언급한다. 즉 메시야가 도리어 범죄자 또는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예수의 체포와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시사해 준다.

󰃨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 '내게 관한 일'이란 앞서 언급한 이사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 간다'는 말의 헬라어 '텔로스 에케이'(*)를 직역하면 '끝', '결말', 또는 '목표를 가진다'라는 뜻이며 이는 예언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로써 예수 자신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있는 자는 가질 것이고 내도지팡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고ㅓ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나누신 마지막 대화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어 39절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 마가, 요한은 이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고, 오직 누가만 예수님의 다락방 마지막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무슨 교훈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낭, 전대, 검 잘 챙겨라”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네, 여기 검이 두 개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시며 네 구절로 이루어진 누가의 기록이 끝이 납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제자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왜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의 손끝을 통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같은 교훈을 남기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남기기 원하셨던 그 교훈을 확실히 받으시기 원합니다.

1. 예수에 대한 세상의 반응(35절)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겪었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3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이 말은 과거 어떤 시점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셨던 일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 일은 일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로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9:1-6).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고 전도하러 갈릴리 각 마을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셨는데,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기억나게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이들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영접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그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만일 영접하면 그 집에서 머물면서 환대와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그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며 제자들을 받아준 이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환대하고 영접할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지팡이나 배낭, 양식, 돈, 여분의 옷을 준비해 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을 기쁨으로 영접할 이들을 기대하며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쳤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일을 상기시키며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때 부족한 게 있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배낭도, 전대도, 지팡이도, 여분의 옷도 챙겨가지 않았지만 하나도 부족함 없이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을 영접했던 이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비슷한 훈련이 칠십 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 또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보내져,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전대나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열두 제자처럼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그 집에서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눅 10:1-16).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영접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는 동네에서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하셨고,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곧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전하라고 보내신 제자들 역시 같은 배척을 맛봤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때는 제자들을 영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낭도, 전대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이 공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일을 떠올리게 하신 것일까요? 바로 다음 말씀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맞설 세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에 대한 달라진 반응(36-37절)

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예수님은 “이제는”이라고 때를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뭔가 과거와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에 지시하신 말씀이 이제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전대(지갑)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전대를 가지라고 하셨고, 과거엔 배낭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검에 대한 명령이 나오는데, 이제는 검이 꼭 필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검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겉옷은 단지 몸을 보호하거나 따뜻하게 하는 많은 의복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패션 아이템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유대인에게 겉옷은 하나의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여러 겉옷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고, 대부분 한 벌의 겉옷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고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는 등 겉옷은 그들의 생필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을 저당잡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겉옷을 빼앗는 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이 유대인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눅 6:29). 그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며 이제는 그 귀중한 생필품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입니다. 전대, 배낭, 칼 이제 모두 직접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칼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대, 배낭과 함께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제 그들에게 닥칠 위협과 공격에서 그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일까요?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예수님의 손에 왜 못을 박으려 할까요? 다른 이를 부요케 하려고 가난한 삶을 택하여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희생적인 섬김을 보이신 그분의 머리에 왜 가시관을 씌우려 할까요? 왜 겸손과 온유를 옷 입으신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때리며 침 뱉고 조롱하려는 것일까요? 왜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예수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런 반응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획하신 뜻에 따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인용한 부분입니다.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 “그가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서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택하신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희생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사야 53장 말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백성의 허물을 대신하여 찔리고, 백성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징계를 받고, 백성이 낫게 하려고 채찍에 맞고, 백성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는 하나님의 택한 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 예수님은 지금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가 유대인의 손에 잡혀 심문당하고 로마 법정의 불합리한 판정에 의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불법을 했거나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 이사야의 손을 통해 700년 전에 그리스도에게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잔을 함께 마시며 분명하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께 이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뜻대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이 핍박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범죄자 취급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 나가는 또 한 사람의 죄인, 강도나 살인자 같은 범죄자에 불과했습니다.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사 53:3). 그가 당하는 고난과 징벌은 예수 본인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맞는 마땅한 형벌이었습니다(사 53:4).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심문과 곤욕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에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죄인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하고 핍박하고 비웃었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여기고 거칠고 혹독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같은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거칠고 혹독한 핍박과 거절이 제자들을 향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대와 배낭 그리고 검을 준비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엔 예수님의 분명한 경고와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그는 주님이 먼저 당하신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그렇게 거절을 당하셨다면, 그 제자들 역시 거부를 당하고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오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18-20)

여러분, 이로써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편에 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들이 곱게 바라볼 리 없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반드시 환난을 당합니다(요 16:33).

직장 회식 자리에서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술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부할 때 핍박이 있습니다. 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절제하며 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의 비웃음을 당합니다. 힘듭니까? 괴롭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각오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전대와 배낭과 칼을 가지고 미리 대비하고 맞설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말세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 살기가 정말 힘듭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살다가는 욕먹고 업신여김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외롭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나를 따르는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대비하라. 각오하라.

여러분,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를 따르는 삶이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해서 아무런 그늘도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사형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7).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10:28). 

실제로 예수님 당시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합니다.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모욕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기도 하고, 본인이 잔인무도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열 한 제자 역시 모두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순교 당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기독교의 참모습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말하는 기독교가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좋은 일만 가득 일어날 것이라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뭐든 긍정의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약속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만사형통하고 다 잘된다고 축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해 핍박받을 각오를 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한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그분과 함께 왕으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내 안전과 평안, 안락과 쾌락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값진 분이신가? 내 가족보다 친척보다 더 그리스도가 귀한 분이신가? 정말 내 목숨보다 그리스도가 더 존귀한 분인가? 예수님은 망대를 세울 때 비용을 계산하는 것처럼, 적국과 싸울 때 일만 명으로 이만 명을 대적할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처럼, 계산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6-3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보배로운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 세상 무엇과, 이 세상 누구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과연 다락방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3. 예수에 대한 제자의 반응(38절)

38절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38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예수님이 지금 사람들을 찌르고 죽일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당당하게 입성하신 것, 성전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것, 그리고 성전을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메시아, 왕으로서 지금의 권세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새로운 부흥기로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 좌편과 우편에 앉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는데(요 11:16), 예수님이 진짜 죽으러 가는지 생각도 못 하고 한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싸우실 때 같은 편으로 끝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을 준비하라고 하니, 곧 메시아의 왕국 탈환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두 개의 칼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 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의 오른편 귀를 잘랐으나, 곧바로 예수님의 꾸중을 듣습니다(요 18:10-11).

기대했던 왕이 순순히 잡히는 걸 본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렸습니다. 

수년을 가르쳤지만, 메시아의 사명이 무엇인지, 그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제자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칼 두 개면 충분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귀한 일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 따라오는 고난과 박해를 각오하고 감수할 만큼 충분히 가치 있고 남는 것이라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사하시고 내게 영생이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 하나로 만족하며 영원히 감사할 수 있었던 우리가 점점 그분이 주시는 것, 주시지 않은 것에 집착하고, 그분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계산하며 마지못해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움과 박해에 놀라며 그리스도에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교훈이 필요합니다. 전대와 배낭과 검을 준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삶에 박해가 있을 것을 각오하며 살아야 합니다.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3:17). 그가 따르던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벧전 4:12).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벧전 4:13). 주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가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여러분, 우리에게도 영원한 가치를 계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현재 받는 고난보다 장차 받을 영광이 지극히 큼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즐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알 때 그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들었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고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아직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 채찍질을 당하고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합니다”(행 5:41). 드디어 그들이 예수님이 마지막 교훈을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고, 핍박받을 때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당하는 모든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좁은 문을 통과하여 주가 계시는 그곳에 이르는 좁고 험한 길을 기쁨으로 가시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04-08-2024(월) 누가복음 22:31-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형제를 굳게하라(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And when you have turned back, strengthen your brothers.

네 형제를 굳게 하라(Strengthen your brothers)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가룟 유다는 돌이키는 과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돌이키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돌이킨다는 헬라어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 라고 합니다.
'에피스트레포'는 "돌아오다, 돌아오게하다, 회개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있고 직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은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죄를 깨닫고 뉘우칠 때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까?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려고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어두운 장막에 가리워져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같고 소망이 없는 것같을지라도 반드시 그 사람이 돌아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배후에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 나의 기도가 그 누군가를 돌이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의 자리를 든든히 세워야 하겠습니다.
어둠의 길에서 방황하는 생명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소망의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어서 돌아오오



오베르랑목사
Jean Frederic Oberlin. 1740-1826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눈 덮인 알프스에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을 회복해보니 어느 집 방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계곡에서 떨어진 자기를 구해준 그 집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곳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한가지 묻겠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제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이를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누가복음 22:24~38절)

오늘도 역시 주님이 가시려는 길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저는 이렇게 주님과 소통이 되지 않는 제자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은 이렇게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소망이 28~30절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32절에 베드로를 향해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말씀대로 돌이켜 사도행전에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못한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지옥 백성이 되었습니다.
돌이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그러나 악심을 품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돌이키시는 은혜 앞에 돌이킬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 가득 채워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고(7~23절) 이제 곧 겟세마네의 아픔의 시간을 가진 뒤에 붙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심각한 소통장애가 제자들을 삼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주님과 다른 곳을 보고 있고 다른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위대한 사도로 양육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예수님의 수난 직전까지 서로 누가 크냐 하는 어리석은 다툼을 계속하였습니다(마 20:20~28; 막 10:35~45; 눅 9:46~48절).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이제는 깨어 준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칼이 두 개 있다고 대답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제자들이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가 될 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공적인 이름 대신 '시몬'이라고 본명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예수를 부인할 것을 곡식이 체에 흔들리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역사에 흔들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은혜가 너무 큽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슴 가득 느끼는 복된 말씀입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할 때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 ἐπιστρέφω)라는 말은 '회개하다', '돌아서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한 실수에서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그와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핍박으로부터 형제들과 교회를 믿음으로 사수케 하는 특별한 사명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만만 호언장담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충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6:33; 막 14:29).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고백처럼 주를 위해 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mr 새벽 1시 30분경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예언은 54~62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베드로를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돌이켜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는 섬기는 자로(24~30절)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에 의해 배반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누가 크냐'라는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이 논쟁의 발단은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께 자신들의 충성심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은 결코 배신자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데서 시작된 듯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25절은 일단 세상 나라는 이렇다는 의미입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귿ㄹ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을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임금들'은 세상 권력을 잡은 자들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세상 권력자들이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을 종처럼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 속에서 심한 억압을 받고 있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방 권력자들의 횡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권력자들은 스스로 신이 되어 백성들로부터 '주'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지만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억압, 착취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교만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은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은인'은 '유에르게테스‘로 '좋은'을 의미하는 '유'와 '일'을 의미하는 에르곤'이 합성된 단어로 '좋은 일을 하는 자', '공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은인'이란 단어를 이방 권력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즐겨 사용했습니다. 심지어는 폭군들까지도 이러한 칭호로 불리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세상 권세 자들의 거짓됨과 가증된 행위들을 예로 들어 제자들에게 세상 권력의 헛됨과 거짓됨을 깨닫게 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권력자들이 군림하는 것같이 큰 자가 작은 자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원리가 적용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 20:26, 27절에서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지배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지배 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섬기는 자보다 큰 것이 세상 원리지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자가 높아지고 섬기는 자가 대접받는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요 13:1~11절) 하늘 보좌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선서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빌 2:5~11).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즉 예수께서는 말씀과 삶의 모범을 통해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큰 자인 천국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높아지려 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마음을 사로잡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소망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럽니다. 연약하고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둔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시려고 합니다. 여기서 '함께 한 자들'(호이 디아메 메네코테스)은 '통하여'를 의미하는 '디아'와 '머물다'를 의미하는 '메노'의 합성어로 모든 삶을 통하여 희노애락을 같이한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은 사탄의 시험의 연속이었던 예수님의 삶에 동참했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자 또한 앞으로도 계속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것에 대한 요구요 격려였습니다. 그렇게 지난 3년을 주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목회자로서 느끼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그저 겸손히 섬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맡겨'(디아티데마이)라는 말은 위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제자들에게 앞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나라'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섬김의 권세를 맡기시고, 그 보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특히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영적 이스라엘인 구원 받을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권세를 주셨듯이(빌 2:9~10),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섬김의 권세를 주셔서 주님의 사역에 동참케 하시고 그들을 높이시어 주님의 권세에 동참케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게 이 연약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소망이며 기대입니다.

2. 돌이킨 후에(31~34절)

그리고 이 소망은 베드로에게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체화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그럽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공적인 이름 대신 '시몬'이라고 본명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예수를 부인할 것을 밀이 체에 흔들이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역사에 흔들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은혜가 너무 큽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슴 가득 느끼는 복된 말씀입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할 때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라는 말은 '회개하다', '돌아서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한 실수에서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그와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핍박으로부터 형제들과 교회를 믿음으로 사수케 하는 특별한 사명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만만 호언장담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충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6:33; 막 14:29).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고백처럼 주를 위해 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mr 새벽 1시 30분경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예언은 54~62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베드로를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돌이켜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제는(35~38절)

이제 주님은 3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셔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은 고난의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하셨을 때(눅 9:2:눅 10:1)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엇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녀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적대하게 될 것이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의 죽음 후로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하여 제자들이 복음 전하러 다니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은 검을 사는 것이 매우 시급한 상황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검은 물리적인 의미의 검을 으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조건인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께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검 두 개를 예수께 보입니다. 이 검은 여행자들이 갖고 다녔던 호신용 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지금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 시키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키시고자 하는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족하다는 말씀은 답답함의 표현입니다. 그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일관되게 소통이 되지 않는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우리는 여기 제자들보다 더 낫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생각을 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다가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진리의 말씀을 만나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돌이키는 은혜가 오늘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 아침에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가 섬기는 자의 나라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일에 더 겸손히 주님을 섬기고 지체들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네 형제를 가슴에 품고 그를 살려내라’는 것으로 그 형제가 주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복음 안에서 하나(oneness)가 되어질 때 가능합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복음 체질이 되어 서로를 살리며 복음으로 하나(oneness)를 이룬 복음 공동체의 축복을 누리는 가운데 현장정복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면서 제자 중에 자신을 팔 자가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각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 자이냐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눅 22:25~26).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큰 자는 대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한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봐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영적으로 큰 자는 바로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이 땅에 군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세기 3장 문제 속에 빠져 고생하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대속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인생 중대 문제 세 가지인 하나님 떠난 문제, 죄 문제, 사단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섬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대속물이 되심으로 가장 큰 섬김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만나는 길을 전하하는 선지자의 역할, 죄 문제를 완벽히 해결받는 길을 제시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흑암 문화와 흑암 세력의 공격을 물리치고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왕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가슴을 가지고 현장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성경적 섬김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가장 큰 섬김-대속은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어 다른 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놓치고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문제와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나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실망으로 끝이 납니다. 여러분은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자가 행복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섬기는 것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을 가지고 성경적 섬김의 삶을 살 때 그것이 풍성한 영혼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교회 직분이 바로 섬김의 축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먼저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이러한 영적인 큰 자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적 동기 부여자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28~30) 예수님께서 서로 다투던 제자들을 향해 더 이상 세상적인 가치관 속에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놀라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긴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또 이와 함께 ‘현장에서 영적 싸움을 하며 복음을 확산시킨 자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드린 자들에게 가장 큰 영광을 부여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닥칠 시험과 회복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참 제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는 말은 사단이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을 실족케 하기 위해 강하게 역사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배신행위로 믿음과 구원을 잃게 하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실수를 다시 돌이켜 그것을 교훈 삼아 형제들에게 믿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이 참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실수가 평생의 교훈이 되어 다른 이의 실수를 이해하며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항공모함의 활주로는 일반 공항의 활주로보다 길이가 훨씬 짧은데도 전투기의 이륙이 가능합니다. 이에는 수증기의 힘을 이용하여 전투기 출력을 최대화시키는 캐터펄트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항공모함이 전투기가 이륙하는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항해하기 때문에 짧은 길이의 활주로에서도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캐터펄트와 항공모함 같은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영적인 동기 부여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항공모함이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듯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여러분 주위의 사람이 힘차게 비상할 수 있도록 영적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을 율법의 눈으로 바라보면 서로를 죽이는 꼴이 될 뿐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완전 복음 체질이 될 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연약한 자, 실족한 자를 살리는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세상의 흑암 문화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굳게 하며 항상 복음의 oneness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5년 10월에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주부가 1kg이 채 되지 않는 미숙아 쌍둥이 자매를 출산했습니다.
그래서 자매가 각각의 인큐베이터에 넣어졌는데 언니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갖은 조치를 취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예전에 읽었던 책의 치료사례가 떠올라 건강을 회복한 언니를 동생의 인큐베이터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언니가 동생의 어깨에 작은 손을 얹었는데 몇 분 뒤 기적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언니의 손길이 닿고 얼마 뒤 동생의 맥박이 고르게 되고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등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동생은 기적처럼 살아나 건강하게 퇴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 사랑으로 품는다면 여러분의 수준과 형편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이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oneness가 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복음공동체인 교회는 어떻게 해서든 oneness가 되어 서로를 복음의 눈으로 이해하며 힘을 주어 함께 세워나가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된 지체의식을 가지고 주변의 성도들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서로를 통해 더욱 든든히 세워지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98

4

7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99

4

8

월 

누가 22:31∼34

네 형제를 굳게하라(32절)

100

4

9

누가 21:35∼38

이제는(36절)

101

4

10

누가 22:39∼46

일어나 기도하라(46절)

102

4

11

누가 22:47∼53

이것까지 참으러(51절)

103

4

12

누가 22:54∼62

심히 통곡하니라(62절)

104

4

13

누가 22:63∼71

선지자 노릇하라(64절)













04-06-2024(토) 누가복음 22:24-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섬기는 자로(27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For who is greater, the one who i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Is it not the one who is at the table? But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섬김의 종류(Kinds of Service)

lip service / 앵무새 봉사
spiritual service / 기도,
material service / 구제비, 선교비, 재난구호
mental service / 동정
formal service / 형식적 봉사


호모 하빌리스

인간을 정의할 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 지혜인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사람) 도구인
호모 에렉투스(서서 걷는 사람) 직립인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  놀이인
호모 하빌리스(손을 쓰는 사람)



호모 하빌리스는 '손재주 좋은 사람', '손을 쓸 줄 아는 사람',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북한에서는 문화어로 "손쓴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랑, 미루지 말라

레프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여행길에 올랐다.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렀는데, 예닐곱 살짜리 딸아이가 있었다.
몸이 아파 가냘픈 모습을 한 소녀는 톨스토이가 가진 빨간 가방이 예쁘다며 달라고 졸랐다.

가방은 얼마 전 친지가 유품으로 전해준 소중한 물건이지만, 소녀가 진심으로 원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주기로 약속을 했다.
“아가야, 이 가방엔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어 지금은 줄 수가 없단다.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너한테 줄게.”

일주일쯤 뒤 톨스토이는 약속을 지키려고 주막에 들렀다.
그러나 소녀는 병이 악화돼 며칠 전 죽었다고 어머니가 전했다.
톨스토이는 마음이 아파 어머니를 앞세워 소녀의 무덤을 찾아갔다.
원할 때 가방을 곧장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소녀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비석을 세워 자책하는 문구를 하나 새겼다. ‘사랑을 미루지 말라.’

이 우화는 톨스토이가 일생 동안 찾고자 했던 ‘사랑’을 아주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누가 뭐래도 ‘바로 지금’(Here & now)이란 얘기다.
이를 조금 풀어쓴 것이 단편 ‘세 가지 질문’ 아닐까 싶다.

톨스토이는 75세 노년기에 이 단편을 썼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황제가 각각의 일에 합당한 시간이 언제이며,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에 큰 상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세 가지 질문에 온갖 사람들이 앞다퉈 의견을 내놨다.
첫 번째 질문에는 연월일 시간표를 만들어라, 합당한 시간을 마법사에게 물어보라 같은 의견이 나왔으며
두 번째 질문에는 성직자, 의사, 군인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 번째 질문에는 학문, 군사기술, 신에 대한 경배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답했다.

대답이 크게 엇갈리는데 실망한 황제는 평민으로 변장을 한 채 숲 속 현자를 찾아가 세 가지 질문에 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몸이 연약한 현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밭고랑 파기만 계속했다.
보다 못한 황제가 삽을 넘겨받아 해질 무렵까지 땅 파기를 도와준 뒤, 지금 답해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다쳐서 피투성이가 된 배를 움켜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황제는 붕대와 수건으로 깨끗이 그를 치료해 주었다.
다음 날 그 남자는 황제에게 다가와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 형제를 처형하고 내 재산을 몰수했기에 당신에게 복수를 맹세한 원수요. 나는 당신이 현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죽이기로 결심하고 숲 속에 숨어 있었소.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아 이곳으로 향했는데 당신 호위병이 나를 발견하고 부상을 입혔소. 그러나 당신은 고맙게도 나를 정성껏 치료해 생명을 구해주었소. 당신 때문에 내가 살았으니 이제 당신의 충실한 종이 되겠소.”

황제가 다시 현자에게 답을 달라고 했다.
현자는 말했다.
“벌써 답이 나오지 않았는가. 만일 자네가 연약한 나를 위해 밭고랑을 파주지 않고 돌아갔다면 저 남자가 자네를 공격했을 것이니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네가 밭고랑을 팠던 때이고,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위해 선한 일을 해준 것이라네. 자네가 치료해준 저 남자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

톨스토이는 16세 아래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고, 온갖 여성 편력을 남겼지만 사랑에 관한 한 대체로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는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 살 때 어머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카잔 대학교 동양어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불성실하고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진급시험에 떨어졌다.
법학부로 옮겼으나 그마저 중퇴하고 고향 농장에서 농민생활 개선에 힘썼지만 건달로 취급받았다.
톨스토이는 그러나 20대 초반부터 단편, 중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37세에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해 명성을 얻은 뒤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안나카레니나(49세) 부활(71세) 등으로 최고의 작가로 등극했다. 톨스토이는 평생 사랑을 갈구했다. 어린 시절이 외롭고 불행했기 때문일까. 40대 중반 한때 자신이 쓴 작품이 하나같이 무의미하다며 소설 쓰기를 거부했던 그는 노년기 단편에선 사랑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부를 아낌없이 버렸으며,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치고자 노력했다. 그가 ‘예수 이후 최고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다. 82세로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잠언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가 그 결정판이다. 인생을 회고하며 명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탐구한 책이다. 톨스토이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틈틈이 읽어주며 각자 삶의 지침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짤막한 글귀들을 모아 엮은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한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역시 사랑이다. 100년을 훨씬 넘긴 글이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몸이 불편한 이, 영혼이 가난한 이, 부유하고 비뚤어진 이, 버림받은 이, 오만한 이까지도 모두 사랑하라. (중략) 사랑은 우리 영혼 속에 산다. 타인 또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은 오직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핵심은 주위 모두에게 무조건 축복을 베푸는 데 있다. (중략) 이유를 가진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만이 영원하다. 이런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진다.”

톨스토이는 역시 현재의 사랑을 최고로 여긴다.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에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성스러운 발현이다. 성스러움에는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평생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을 강조했지만 자신이 모범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하녀, 농노의 아내, 집시 여인, 친척 아주머니 등 수많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평생의 반려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를 힘들게 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15년 정도 순탄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지독히 불행했다.

노년엔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을 사회에 기부키로 하면서 부인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그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참된 사랑을 실천하고자 집을 나섰다가 허름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을 고찰해 보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자매, 친구, 직장동료, 이웃 사람 등이 대표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사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거창한 기부나 자선이 다가 아니다. 밝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 안부 묻는 전화 한 통화, 정성 담긴 식사 한 끼, 자그마하지만 예쁜 꽃 한 송이라도 괜찮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했다.
사랑은 받는 사람만큼 주는 사람도 행복하다는 뜻 아닐까 싶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톨스토이, 홍대화 옮김, 현대지성, 2021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이상원 옮김, 조화로운삶, 2014

<안나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2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즉 손을 쓰는 사람.
사람이 손을 쓰는 능력이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조류 가운데 그 무엇도 손가락을 5개 이상 활용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손이 발달한 민족입니다.
젓가락을 쓰는 것도 손이 발달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인은 손에 대한 은유가 많습니다.
‘손 좀 빌려다오’
‘손이 모자란다’
‘손 끊었다’
‘저 사람 손 좀 봐야겠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그리스도인도 손이 발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손은 섬기는 손입니다.
기도로 섬겨야 합니다.
봉사로 섬겨야 합니다.
교제로 섬겨야 합니다.
얼싸 안는 거소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손이 발달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코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때에만 주님을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축복을 받을 때에만 찬양한다.
자기의 위로와 만족을 구하니 아니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것이다.
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삼"을 심는 사람들

성 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산삼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산삼의 붉은 꽃씨를 까먹은 까치의 똥이 산 속 어디엔가 뒹굴다가 햇볕이 많은 양지도 아니고 햇볕이 너무 없는 음지도 아닌 곳에서 산삼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삼이 신묘한 약효를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을 "심마니"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삼을 캐는 심마니와 다른 심마니들도 있습니다.
농사를 뜻하는 "농"자를 앞에 붙인 "농심마니"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삼을 캐러 다니는 게 아니라 삼을 뿌리러 다닙니다.
심마니가 수백 년 묵은 산삼을 캐러 다니는데 반해, 농심마니들은 수백 년 뒤의 후손들을 위해 삼의 씨앗을 심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귀한 분을 통해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이 오기까지 산삼의 씨를 뿌리는 농심마니처럼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석구석 후세들의 가슴속에 흐를 생명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섬김의 종류, 규범

섬김의 종류

1.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 섬김이다

예배를 뜻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요 섬김이다 ( 계4:8-11 요4:24 삼상7:3 )

2. 수평적 차원 

사람과 공동체를 섬기는 섬김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 노예해방운동, 감옥 개량, 금주운동 빈민구제 운동 고앙원 양로원건립 평화봉사단등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봉사정신을 실천해 왔다 .

(1) (2)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구약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으나 신약에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신이며 성경중심 사상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섬김의 삶이다.
섬김의 삶을 위해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있을수 없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김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배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대한 사랑은 이웃을 진정 섬김으로 완성된다 이웃 섬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연결점을 발견한다 (롬12:1) 이웃을 잔정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는 것이다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 : 섬김의 규범

1. 숨은 봉사 : 남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2. 작은일의 봉사 :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며 작은일부터 먼저 봉사한다
3. 구설수를 막아주는 봉사 : 험담, 훼방하며 뒤에서 흉을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공통체를 튼튼하게 하는 봉사이다
4. 봉사를 받아주는 봉사 :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만 때문에 d런 봉사들을 물리칠 때가 많다
5.  예의로서의 봉사 :  예의를 지키는 일도 봉사이다 남엗한 감사의 표현 , 적절한 시기에 인사하는 것 윗분들에게 인사카들 보내는 일등 모두 봉사이다 . 무례한 행위는 섬김을 방해한다
6. 대접하는 봉사 : 나그네를 대접하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친구 초대 식사대접 등은 기독교의 미덕중 하나이다 대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7. 경청의 봉사 :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섬김이다 듣기를 먼저하라 남이 먼저 말하게 하라 자신의 말을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때 말이 많아진다
8. 서로 짐을 져주는 봉사 : 남의 아픔 힘든 것 고통을 져주는 것을 져준다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위해 십자가의 큰 짐을 지심으로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다 남의 작은 짐부터 져주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수 있다
9.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 :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다르다 그같은 하나님 뜻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봉사이다
10. 희생적 봉사 :  자신의 영예, 이기심을 따라 봉사하느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희생의 봉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 규범이다


섬김은 예배로 시작합니다.

예배의 개념을 만찬 예배로 제한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물론 주께서 직접 부탁하신 성찬을 통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고전 11:17-34). 하지만 그것만이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넓게는 우리의 삶 전체가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2). 회중이 함께 모일 때 드리는 예배의 방편에는 성찬 외에도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이 있었습니다(고전 14:26). 같은 맥락에서 성도가 각자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기는 것 역시 예배입니다(고전 12-14장).

“예배”(worship)라고 번역된 원어를 살펴봐도 “섬김”이 예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예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라트레오(λατρεύω)는 “섬기다”(serve)라는 뜻을 가졌습니다(빌 3:3; 히 9:9; 10:2).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worship”)…(빌 3:3)

구약성경 역시 아바드(עבד)라는 단어가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었는데 이 단어의 본래 뜻 중 하나가 “섬기다”입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로는 신명기 6장 13절이 있습니다(참고. 출 3:12; 12:31; 시 2:11; 사 19:21; 렘 35:15).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worship”)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둘째, 섬김이 예배라면 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배의 범주가 우리의 모든 삶까지 확장 된다면, 우리의 일차적인 섬김의 대상은 참으로 다양해집니다. 불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정치 지도자들(롬 13:1-7), 육신의 주인들 혹은 직장 상사들(벧전 2:18-25),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벧전 3:1-7)가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고전 12-14; 벧전 3:8-12). 이처럼 우리가 섬기는 일차적인 대상은 다양합니다. 하지만우리의 모든 예배는 한 대상인 하나님에게 향합니다.

우리는 각각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그들을 섬겨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것이 바로 예배의 최종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해 서로를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어떤 사람은 봉사의 일로, 어떤 사람은 권면하고 세워주는 일로 섬깁니다. 섬기는 모양은 다양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셋째, 섬기는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라면 섬기는 자는 서로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아니면 애찬 준비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이는 마치 밭일 하는 노예가 상이 많은지 아니면 집안일 하는 종이 상이 많은지에 대한 질문처럼 어리석게 들립니다. 모두가 주인의 종이며 주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둘 다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면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눅 17:10).

맡겨진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고전 4:2).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주가 주신 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성도를 섬기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주인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사람 역시 그 일을 통해 성도를 섬깁니다. 그들의 땀과 수고로 성도가 따뜻한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시설관리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분이 계시고, 교회 자동차 운행으로 수고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노인사역에 힘쓰는 분이 계시고, 구제와 선교에 힘을 모으고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누가 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충성스럽게 일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로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기준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우리가 피해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먼저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교만이고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괄시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나는 저 초라한 화장실 청소따윈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무시이며 자기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교만입니다. 반대로 화장실을 청소하는 성도가 ‘저 설교자는 맨날 설교만 하려고 하고 화장실은 청소하려고 하지 않아’라고 비방한다면 그 역시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 일에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진실로 그는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찮다고 여긴 것이며,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성도가 설교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 일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고 간주하고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가운데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섬김의 대상이 가장 고귀하고 존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섬긴 일에 대해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마 25:21). 우리는 선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하고,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야 합니다.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달란트를 보고 비교하며 분노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받은 은사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로 그들은 서로를 섬겼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섬김”이라고 할 때 손과 발로 하는 봉사만을 생각합니다. 쓸고 닦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만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2-14장 말씀은 수많은 섬김의 방편들이 나옵니다. 가르치는 말씀과 지혜의 말씀도 포함됩니다. 봉사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서로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고전 12:28).

그러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것도 섬기는 것이요, 차를 운행하는 것도,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것도 섬기는 것이며, 누가 보지 않아도 교회 여기 저기를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또 성도의 연약함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일에 어떤 성도가 괴로워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해준다면 그것 역시 섬김입니다. 상을 닦는 것도 섬김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섬김입니다. 모이기에 힘쓰는 것 역시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섬김입니다. 도서관 책을 정리하는 것도 섬김이고, 읽은 책의 내용으로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도 섬김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것도 섬김이고 설거지 하는 것도 섬김이며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함께 유익한 교제를 나누는 것도 섬김입니다. 식사를 준비하신 분들을 격려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서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도 섬김이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징계하고 훈계하는 것도 섬김이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섬김이고, 떡과 잔을 만들고, 떡과 잔을 돌리는 것도 섬김입니다. 예배시간 아이를 조용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섬김이고, 그 과정을 참고 인내해주는 사람들도 섬기는 중입니다. 설교하는 것도 섬기는 것이고 설교자를 위해 물을 떠 놓는 것도 섬김입니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섬김입니다.

더하려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섬김의 영역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누가 이 섬김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규정지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섬김입니다. 예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유평교회에 섬김이 풍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더 많은 영역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고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던 이유가 있습니다(행 6: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곧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였기 때문이었고, 결국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지키는 것과 동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에임스는 신학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말씀이 가르치시는 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마땅한 바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예배이며,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모양이 다양하다면, 우리는 이제 한 가지 분명한 원리 안에서 그 다양한 섬김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기관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로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조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 중에서도 사회봉사와 단체 내의 섬김이 특출난 곳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적 이타적 섬김과 참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주 소중한 것까지 아낌 없이 줄 정도인데, 아들은 그 사랑을 대충 깨닫고 그 아버지께 헌신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이것 저것 열심히 뭔가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참 사랑은 그 안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그분이 요구한 몇가지 일에만 열심히 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에베소 교회처럼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견딤과 열심이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처럼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섬기더라도 바른 자세와 태도로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대상이 어떤 분인지 알고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이유와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경외심, 감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제대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섬김은 예배입니다. 모든 예배는 진리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더 알기 위해, 더 바른 마음과 태도로 드리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기 위해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는 섬김은 방향을 잃어버린 섬김이고, 섬기지 않는 배움은 유익이 없는 배움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몸을 내어주는 헌신도 필요하지만 진리와 함께하는 참 사랑의 특징도 들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섬기는 대상인 하나님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배웁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로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긴 시를 가지고 하나님을 노래했던 것입니다(시 119).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과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최종 목적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모양을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교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며,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그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예배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요 17:1-5). 예수님은 무엇으로 섬기는지에 대해 불평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인데 너희가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맨날 나만 봉사하고 너희는 나에게 배우기만 하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섬기는 자로 가장 낮은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돌보시고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진리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넘쳐 주야로 아버지와 기도로 교제하며 말씀 안에서 풍성한 지혜로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섬김을 본 받고 있습니까? 죽기까지 충성하신 그리스도의 섬김의 본을 당신은 따르기 원하십니까?


섬김에 대하여

교회 역할(기능들)을 살펴보면 케리그마(말씀선포), 레이트루기아(예배), 코이노니아(교제), 디다케(가르침과 훈련), 그리고 디아코니아(봉사 섬김)이다 섬김의 기능은 다른 기능 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각 기능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섬김은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사에서 확인되는 교회의 본질이고 신앙의 참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주의 종을 세우신 목적도 봉사의 일을 하게하려는 것이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믿음이 성장과 봉사를 통해 건강한 교회가 된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교회를 섬기고 사회를 섬기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최근 2007년 겨울 태안반도 기름 제거 작업에 100만명 자원 봉사중 70%가 기도교인들 이었다(비공식집계) 이는 별안간 된 것이 아니고 10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 선교 초기부터 국민과 더불어 아파하며 그들 위해 봉사하는 전통(학원설립, 의료기관 설립 사회봉사) 의 계속이며 2000년 기독교 사회적 섬김의 연속이다 (한국사회봉사단, 김삼환 목사) 한국교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얀마 사태, 중국 스촨성 지진 땅에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 희망 연대(10개교단 참여)도 한국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미얀마등지에서도 예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공동체, 교회는 먼저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요12:26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른 것을 말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가 진정 섬기는 자가된다 또한 하나님 명령 그대로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이웃섬김에 절실히 요청되는 태도는 (갈5:13) 말씀대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참된 경건, 경거한 신앙은 무엇인가 ? 세속에 물들지 않고 힘없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II. 섬김이란 무엇인가
1. 성경에서 말하는 섬김
A. 구약
db'[;(5647, 아바드)
일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후기 히브리어 : 예배하다 하나님께 순종하다

아바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일하다 work, 봉사하다, 섬기다, 시중들다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90회 나온다. 이러한 봉사는 사물,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향한 것일 수 있다. 이 단어가 사물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그 노동이 미치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격을 수반한다. 예: 밭을 '경작하다' to till(창 2:5과 그 밖의 곳에서 종종) 포도원을 '정돈하다' to dress, 세마포를 만드는 자(사 19:9) 혹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겔 48:18). 때때로 이 단어는 신 15:19의 (땅을) '갈다' to till (한글개역, "부리지")에서처럼 대격 없이 사용된다. 두번째로 이 단어는 예를 들어 야곱이 라반을 섬기는 경우와 같이(창 29:15, 창 30:26, 창 30:29) 사람 대격을 수반한다. 사람 대격을 수반하는 경우에 이 단어는 사람과 함께 전치사 '베'를 수반한다. 즉 사람은 "타인에 의해 일한다" 혹은 타인을 노예로 사용한다(출 1:14, 렘 22:13, 이 동사의 히필 어간은 '아무개를 (노예로 삼아) 강제로 일하게 하다'(출 1:13)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때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자유케 하는 경험이다(출 3:12, 출 4:23, 출 7:16, 출 7:26, 출 10:26, 시 22:31, 욥 21:15, 렘 2:20, 말 3:14). 동일한 개념이 레위 자손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민 3:7-8, 민 4:23, 민 4:30, 민 4:47, 민 8:11, 민 8:19 이하, 등). 흥미롭게도 70인역본은 제사장들만의 공적인 직무를 가리키는데 헬라어 라트류오를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롬 15:16을 제외하고는 신약의 사역(ministry)이나 그 기능들을 가리키는데 라트류오 어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롬 15:16에서 이 어군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바울의 수고를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적인 문맥, 특히 구약의 의식(ritual)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라트류오 어군이 사용되었다(히 9:21, 히 10:11, 눅 1:23).( 참조: W. L. KAISER; BDB).

tr'v;(8334, 샤라트)
섬기다, 봉사하다 샤라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섬기다, 봉사하다 minister,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7회 나오며,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용례 중 20회는 분사 메샤레트로 나오는데 '사역자 minister'라는 뜻의 명사로 사용된다. 샤라트의 용법은 자연적으로 ① 중요한 인물, 보통 통치자에게 드려지는 개인적 섬김. ②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이 있는 자들 편에서 행하는 예배의 사역이라는 두 범주로 분류된다. 샤라트가 시사해 주는 종의 높은 지위 및 그가 주인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창 39:4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요셉은 보디발의 재산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이양받고 있다. 엘리사의 사환은 메샤레트(섬기는 자 minister)로 지칭되었다(왕하 4:43, 왕하 6:15). 둘째 범주는 주로, 성막에서 그리고 나중에 성전에서 봉사하였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포괄하고 있다(한 구절, 시 103:21에서는 천군들이 그와 같이 지칭된다). 수많은 구절에서 그들의 봉사가 특히 성소와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출 28:35은 성소에서의 아론의 사역을 말하며 출 28:43은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에서 섬긴다고 언급하였다(참조: 욜 1:13). 레위인들도 그와 같이 지칭되었다. (대상 6:17과 대상 16:4, 대상 16:37) 삼상 2:11, 삼상 2:18과 삼상 3:1에서 사무엘은 엘리의 조수로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장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들이 또한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공적 대리자라는 위치에 있었다. 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겸손하게 자신들을 비천한 종으로 인지하는 한편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를 섬길 것이라는 사실이다.(H. J. Austel)

B. 신 약
diakonevw(1247, 디아코네오)
종으로서 섬기다, 봉사하다. 식탁에서 수종들다 (눅17:8) (요12:2) (눅12:37)
우리가 봉사나 섬기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자발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행한 일과 그런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생길 이익을 의미한다. 봉사라고 해서 보수(Reward)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섬기는 행위는 지배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성실한 봉사는 교만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자가 되어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종속적 위치에 있으며, 그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죄의 지배와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므로서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봉사(섬김)하다"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들의 개념은 때때로 구별하기 어렵지만 각각 그 기본 강조점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 둘류오(douleuvw, )는 복종,예속을 강조하는 것으로,'노예로 섬기다'를 의미한다.
* 데라퓨오(qerapeuvw, )는 기꺼이 섬기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에 의해 존경과 관심을 표현한다(특별히 신을 향하여).
* 라트류오(latreuvw, )는 '삯을 위해 봉사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신앙적, 제의적 의무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 롬9:4 히9:1 요16:20 )
* 레이투르레오(leitourgevw, )는 '공무에 봉사하다'를 뜻하며, 70인역본에서는 성전에서 봉사를, 기독교회에서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 휘페레테오(uJphretevw, )는 '노나 키를 잡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며, 특히 봉사가 주인과 관계된다. 그 명사 휘페레테스는 때때로 '노잡이, 조수'를 의미한다.

이런 단어들과는 달리, 디아코네오는 매우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봉사라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다. 휘페레테오와 가장 가깝지만, 디아코네오에는 사랑의 봉사라는 개념이 더욱 강하다(Beyer, TDNT). 디아코네오는 일반적으로 '섬기다, 봉사하다, 지원하다, 집사로 섬기다'를 의미하며, 개역 한글판에는 '수종들다, 섬기다, 일하다, 돕다, 맡다, 집사의 직분을 하다, 공양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디아코니아의 종류와 내용
신약성경에서 디아코니아는 크게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식탁에서 수종드는 것이다. 당시 사회관습에 의하면 식사 때에 식탁에 기대앉아 식사를 하는 상전과 허리를 동이고 수종드는 하인이 있었다. 디아코니아는 이렇게 수종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은 눅 10:40; 12:37; 17:8; 22:27; 요12:2 등에 나타난다.
둘째, 좀더 넓은 의미로서 물질적(재정적)인 도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6:2에서는 구제사역을 디아코니아라고 한다. 여기서 디아코니아가 말씀사역과 대조되므로 물질적 도움 일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본문은 마25:42-44; 27:55; 막15:41; 눅8:3; 행11:29; 12:25; 롬15:25; 고후8:19; 히6:10 등이 있다.
셋째, 아주 넓은 의미로서 일반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런 예로는 마 4:11; 8:15; 20:28; 눅4:39; 22:26; 요12:26; 행19:22 딤전3:10; 벧전1:12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공동체 특히 신앙공동체인 교회 내에서의 섬김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통한 섬김이 있다. 벧전 4:10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런 디아코니아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고전12:8-10에 나오는 은사와 롬12:6-8에 나오는 봉시직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역도 포함된다.

C. 성경에서 섬김의 예
(1) 구 약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탹한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레19:18)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요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들은 .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그들의 인권 존중하며 가난한자를 구제하며 그뿐 아니라
생태계를 돌보며 섬기는 공동체이다 안식년 소산물은 짐승에게 주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호해야한다 (신22:6-7)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 이스라엘은 하나님 명령에 다라 도피성 제도를 만들어 과실로 살인자의 생명을 보호한다 , 기업이 없이 성막 봉사만을 하는 레위지파에도 필요한 땅을 분배하는 등 약자 보호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히고저 하였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인 사르밧 과부를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보살피시게 하신다 느헤미야는 사회지도층 부자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학대 (고리 이자)를 금지시키다 (느5:10-11) 사랑과 섬김을 촉구하다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인생이 헛됨을 고백한다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비법은 (1) 이 세상일이 우리가 원하느대로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7:13 하나님이 굽게하신 것을 누가 펼수 있는가? (2) 세상에는 때가 있다 3; 범사에 기한이 있다 이 때와 기한은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하신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행복해질수 있다 전도자는 후배들에게 자기처럼 늦게 깨닫지 말고 행복한 길을 미리 찾아가도록 권면한다 자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실토하면서 ..헛된 이생을 살았음을 고백하면서 후배들에게 행복의 길로 초대한다 이것이 또하나의 섬기는 모습이다
룻기서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이방여인 룻을 험담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왕따시키지도 않고 따듯한 마음으로 돌보아 준다 보아스는 신분이 높은 자로 이방여인(당시 이방인과 접촉 시 죄가 전염된다고 생각하였음) 롯에게 자비를 베풀어 한 여인을 살려낸다

(2) 신약
섬김의 가장 위대한 모범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비천한 인감의 몸을 입으시고 겸손하게 섬기셨다 (빌2:1-11)
헬라인들은 섬김을 비천한 것으로 생각하다 신분이 낮고 비천한 사람이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섬기기 위해 태어나지 않고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섬김을 하나님 사랑과 연결시키며 스승으로 주님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헬라인들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견해를 보여주시고 모범을 보이셨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에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필요한 물질을 유무사옹하고 가난한자를 돕는 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실천하여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창찬을 받아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었다 (행2:44-47) : 여러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 (롬15:25-27) 섬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까지 확장되었다 다

III. 섬김의 본질

1. 섬김에 대한 성경 가르침의 독특성
헬라문화에서 디아코니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를 시중드는 것’ 이다. 보다 확장된 의미는 ‘음식을 공급하는 것’ 이고,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모든 종류의 ‘섬김’ 이다. 그런데 이렇게 섬기고 시중드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섬기는 일 중에 유일하게 명예로운 것은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섬기는 것은 명예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비우는 자세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섬긴 것이다 질적으로도 섬긴 개념의 혁명이 일어나게 하셨다 종래에 섬김은 종들이 하급자가 마지못해 생계를 우해 섬기었으나 주님은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사랑으로 섬기셨다
유대교에서는 섬김이 헬라문화에서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섬김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이며, 특히 훌륭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더욱 그렇다. 유대문헌에 나오는 디아코니아도 ‘식탁을 시중드는 것’ 과 ‘
순종한다는 의미의 섬김‘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섬김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정의, 자유, 존엄성과 희망 없는빵만을 주는 것은 현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인간적 사랑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봉사는 예배와 삶의 일치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십일조와 안식일을 통해 이것을 제도화하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봉사, 섬김은 아코니아 는 샬롬, 메시야 왕국을 지향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화해를 지향한다 하나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자를 섬긴다 첫째가 꼴지가 되는 파라독스와 가치전도의 역설적 통치체계이다 바울은 화해를 위한 섬김을 강조한다 디아코니아는 복음을 통해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이웃과 세계와 피조물을 치유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이루려는 구원 행위이다 ( 황홍렬 교수)

2. 섬김의 본질
(1) 사랑 받은 자는 사랑을 실천한다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요 교회 기능이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려는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려는 섬김이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는 섬김이다 섬김, 봉사는 교회의 주요기능이다

(2)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원래 봉사를 가르키는 말 service에는 예배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초대교회가 시작한 봉사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예배의 차원을 제거하고는 생각할수 없는 나눔과 섬김의 실천이었다 봉사는 가난한 이웃과 내가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이에 늘 현존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러나 국가 북지제도가 발달하며서 봉사는 하나님과 종교적 차원이 배제된 사회봉사로 그 개념이 축소되었다

(3) 섬김은 희생이요 십자가 신학에 근거한다
섬김 봉사란 말은 (디아코니아)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한다 시중들므로 먹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섬김은 섬김 받는자의 즐거움을 창출하기 위해 나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리스도의 참 뜻을 구현하는 것이다 즉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활동이다 섬김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류 타락 이후 관계 아닌 소유에 얽매어, 끊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던 인간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 충만을 받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돌보기 시작했다 (행5: ) 이웃 섬김에는 항상 희생이 수반된다 디아코니아는 십자가 신학에 기초한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바탕으로 섬김의 행동이 시작된다 교회 디아코니아 사역의 근거는 예수님이다 주님은 섬기러 이땅에 오셨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마귀와 죄의 노예 상태 있는 우리의 존재 속에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삶을 우리와 함께 나누면서 우리를 그리스와 연합되게 하셨다 이 연합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우리 믿는자들은 그 안에서 그의 섬김에 참여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참 섬김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사랑의 섬김이다 섬김은 사랑의 표현이요 (아가페사랑) 그구체적인 행동이다 행동 없는 사랑이 공허한 것처럼 사랑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섬김은 무의미하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섬김만이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사랑에 감전되게 한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였다 섬김은 낮아짐이다 사랑의 섬김은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다 인간은 타인을 위한 존재이어야 한다( 본훼퍼) 칼빈은 말하기를 신자들이 돈을 버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약한자를 돕고 그들과 재물을 나누어 갖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사랑은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말하기를 사랑은 정의를 요구하고 정의는 사랑을 구현한다고 하였다 사랑의 섬김은 나눔이다 나눔에서 섬김이 시작된다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5) 섬기는 자는 자기 부정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없이 섬김은 나눔이 아니라 베풂이 된다 병든자 소외된자는 구제 봉사 대상이 아니라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 구성원이다(몰트만)
주는 자나 받는자는 상호 수평적 관계임을 알아야 한다 사랑의 섬김은 동정아닌 우애가 우선되어야 한다 사랑의 나눔의 섬김은 자기 중심적 사고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사랑의 섬김은 철저히 상대방이 주체요 주인이라는 의식 아래서만 가능하다

(6) 교회는 주님의 섬김을 실천하는 곳이다
섬김은 교회의 사명이다 섬김, 봉사는 교회의 정체성을 증거해 주는 본질적 요소이다
섬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에게 부여한 의무이다 예수님의 영은 섬김의 영이다 세상은 출세지향적 성공지향적인 상향성 영이다 교회는 섬기러 온신 예수님의 몸이다 섬김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 존재 의미를 부인하는 교회이다 예수정신을 떠난 교회이다 예수의 영, 성령이 떠난 교회이다 교회는 섬김의 운동을 통해서만 참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된다 성령은 낮은 곳에서(섬기는 것에서) 역사하신다 먼저 손해보려는 자세 없으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을 수밖에 없다

(7) 디아코니아(섬김)의 한계
디아코니아는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디아코니아에도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 .특히 물질적 섬김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시고 시장하실 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다. 그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이것은 물질만으로 사람을 충분히 도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디아코니아에서 물질적 섬김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사역을 소홀히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균형 잡힌 디아코니아를 통해 물질적 섬김이 복음전파에 가여하고 복음이 물질적 섬김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유대교의 디아코니아에는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불의하거나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는 경향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의 섬김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가치한 사람을 시중드는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섬김이 하나님 앞에 공덕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덕목을 위해 섬기게 된다. 디아코니아가 공로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신자들도 자기의 다이코니아 행위를 공로로 생각하게 될 위험이 크다. 디아코니아에서의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공로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거기 빠지면 남과 경쟁하며 자신을 자랑하거나 남을 시기하며 비난하게 된다. 디아코니아를 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스스로 높이거나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빌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IV. 섬김의 종류, 규범

1. 섬김의 종류
(1)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 섬김이다 = 예배를 뜻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요 섬김이다 ( 계4:8-11 요4:24 삼상7:3 )
(2) 수평적 차원 :사람과 공동체를 섬기는 섬김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 노예해방운동, 감옥 개량, 금주운동 빈민구제 운동 고앙원 양로원건립 평화봉사단등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봉사정신을 실천해 왔다
(1) (2)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구약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으나 신약에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 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신이며 성경중심 사상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섬김의 삶이다 섬김의 삶을 위해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있을수 없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김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배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대한 사랑은 이웃을 진정 섬김으로 완성된다 이웃 섬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연결점을 발견한다 (롬12:1) 이웃을 잔정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는 것이다

2.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 섬김의 규범들 (리처드 포스터 , 노영상 교수 )
(1), 숨은 봉사 :남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2). 작은일의 봉사 :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며 작은일부터 먼저 봉사한다
(3). 구설수를 막아주는 봉사 :
험담, 훼방하며 뒤에서 흉을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공통체를 튼튼하게 하는 봉사이다
(4). 봉사를 받아주는 봉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만 때문에 d런 봉사들을 물리칠 때가 많다
(5). 예의로서의 봉사
예의를 지키는 일도 봉사이다 남엗한 감사의 표현 , 적절한 시기에 인사하는 것 윗분들에게 인사카들 보내는 일등 모두 봉사이다 . 무례한 행위는 섬김을 방해한다
(6). 대접하는 봉사
나그네를 대접하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친구 초대 식사대접 등은 기독교의 미덕중 하나이다 대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7). 경청의 봉사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섬김이다 듣기를 먼저하라 남이 먼저 말하게 하라 자신의 말을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때 말이 많아진다
(8). 서로 짐을 져주는 봉사
남의 아픔 힘든 것 고통을 져주는 것을 져준다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위해 십자가의 큰 짐을 지심으로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다 남의 작은 짐부터 져주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수 있다
(9)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다르다 그같은 하나님 뜻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봉사이다
(10). 희생적 봉사 (노영상 교수)
자신의 영예, 이기심을 따라 봉사하느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희생의 봉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 규범이다

V. 섬겨야 할 이유와 목적

1. 디아코니아(섬김)의 목적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전 1-:31; 마6:9-10참조) 그러므로 디아코니아의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디아코니아는 사람의 명예를 높이거나 사람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의 방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디아코니아의 이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 외에서 말하는 디아코니아와 상반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높아지거나 혹은 특별한 대상을 섬김으로써 섬기는 자가 높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쳐주는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또한 디아코니아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므로 대상의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두 모습과 통한다.

2. 섬겨야 할 이유

(1)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고 또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 빌2:6-8 요13:2-15)
성경교훈은 인간 본성을 거스려 타인을 섬기게 한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의 섬김의 가르침을 외면하면 인간 사회에 소망을 찾기 어렵다 섬김의 실천은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요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교회 섬김은 세상 속에 병든자 약한자 굶주린자 고통 속에 있는자 들을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위대한 자가 되기 위해 섬겨야 한다 하늘나라 법칙 역설적이다 ( 마20:20-28)
(마20: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3) 받는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기에 섬겨야 한다 ( 행20:35 )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4) 예수 안에 있는 피조물로서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기위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섬겨야 한다 ( 고후5:17, 창1:28)
오늘날 우리 사회의 특징은 상상을 초월한 소비문화 , 다원성을 추구하고 권위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하늘에 있는 천국을 사모하기 보다는 지상의의 풍요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기에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책임있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 지속적이고 힘든 섬김의 노력을 해야 한다-임성빈 교수

(5)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섬김이 필요하다
인간 능력 차이는 필연적이다 사회 발전할수록 개인 능력 차이에 따른 소유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정보사회로의 이전은 이런 격차를 더욱 심화시켜 인구 80%를 저소득층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한다 나눔과 섬김은 좋은 사회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섬김은 인간 능력 차이로 인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마5:42)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신15:9-11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6) 세대간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오느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의사소통이 어렵고 큰 이질감을 느끼며 산다 갈등이 많다 세상을 본받지 아니하는 기성세대의 지혜와 미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데 익숙한 신세대의 용기를 사랑안에서 조화 시킬수 있는 섬김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야 만 한다 그러므로 권력으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세대간 지역간 통합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토대를 둔 섬김의 사역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임성빈 교수)

(7)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무지한 자들의 비난을 막기위해 필요하다
우리들은 세상 속에 소금과 빛으로 우리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과을 돌려야 할 책이이 있다 이 사명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섬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섬기는 삶 선한 행실을 통해 무지한 자들의 비방( 안티기독교)을 막아야 한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VI.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
예수님은 모든 신앙인의 절대 기준이고 신앙이란 곧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라면 그분이 오신 목적 곧 섬김의 삶은 분명 모든 교회의 절대적인 신앙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섬기시고 섬김받는 예수그리스도
주님은 섬기러 이세상에 오셨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9막10:45, 요13:2-15)
사탄이 요구하는 지배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거절하고 자기를 비우며 섬기는 길을 가셨다(마4;1-11) 섬기는 길이야말로 뭇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그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시켰으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의 생애이었다
주님은 낮아지셨다 비천한 지위에 테어나시고 왕이신 그가 종이되심 (빌2:6-7) 율법아래 복종하셨으며(갈4:4-5) 이 세상 비참함에 처하셨다( 사53L:3)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2. 예수그리스도는 겸손과 온유하심으로 섬김을 수행하셨다
사랑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의 자기비하 , 포기는(빌2;5-11)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보게 하며(죄의 자각)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게 하는 결단을 촉구한다
천상의 신적 사랑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섬김의 동기가 된다

3. 예수님의 가르치신 섬김: 개념의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1). 원래 섬김은 하급자가 상급자를 섬기는 것인데 상급자가 하급자를 섬겼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 요13:13-14 주인의 권리가 종의 의무로 변화되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주인이시며 종이되셔서 종의 의무를 감당하셨다
(2), 섬김의 질의 변화가 나타났다
-섬긴은 하급자가 어쩔수 없어서 의무적으로 수행되던 것이었는데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섬기셨다 자발적인 사랑의 섬김이다 주인은 종의 눈물에는 자유하나 주님은 주인으로서 종의 눈물에 속박되셨다 그들과 함께 우셨다

4. 주님은 섬김의 대상을 긍휼히 여기셨다 막9:35-36 요11:35 눅19:41
주님의 섬김 속에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주님의 눈물이 있다

5. 예수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특성 ( Torrance )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특성은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인간을 향한 섬김으로 나누는 것이다
(1) 하나님을 향한 섬김 :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섬김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
(2) 인간을 향한 섬김 : 교회 교회 구성원들과 인류 사회에 대한 섬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 차원의 섬김이다 이것 역시 인간의 비참함으로 옷입고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고통 당하느 모든 사람들을 섬기신다

VII. 잘못된 섬김

1. 말씀(하나님) 증언이 없는 섬김
말씀 증언 없는 섬김의 봉사는 세속화된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회복지에 머물 뿐이다 교회 섬김은 예전이 집행되는 제단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세속적이고 관료적인 사회복지에 머무르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섬김 없는 말씀 증언은 열매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과 같으며 하나의 기계적인 예배의식 행위이거나 빈껍데기의 경건성을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할수 있다 섬김의 실천이 없는 예전은 진정한 예배를 파괘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 반쯤 죽은자 곁을 그냥지나가다, 자비심 없는 ..)

2. 보상을 기대하는 섬김
섬김에서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사라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고 사람으로부터 보상과 영광을 받으려고 의를 행한다 외식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를 행하고 사람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하며 의를 행한다 섬김의 보상도 이세상이 아닌 저 하늘나라에서 받게된다

3. 동정심은 없고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섬김
욥의 친구 엘리바스 , 빌닷 소발, 3명은 욥의 재앙을 듣고 와서 욥을 위로하고 섬기려했으나 잘못된 섬김으로 오히려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았다 욥 치구들 (3명)은 욥의 고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그들 지식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 고난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침묵했다 욥의 고난의 호소를 이해하고 그와 함께 아파하며 그 문제를 하나님에게로 갖고 가지 않았다 그들의 섬김은 오히려 욥에게 상처만 되었다 신학지식이나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과 슬픔 가운데 있는 당사자에 대한 공감이며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묻는 자세이다

4.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하는 섬김
봉사가 자기일이 되어버리면 자기 이름이 나타나면 그것은 참된 봉사가 아니다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자아성취와 등치시키고 있다면 진정한 섬김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봉사는 자기를 잊고 희생하는 것이다 교회 명예, 홍보를 하기 위해 무질서하게 하는 봉사는 효과가 없다
교회가 서울역 노숙자들을 봉사할 때 초기에는 어떤 노숙자들은 점심을 세 번이나 먹었다 손님(=노숙자)모시기 경쟁이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봉사를 연출하였다 고아원 방문을 해도, 수해현장을 방문하여도 돌봄 섬김보다 사진 많은 사진을 찍다가 주민들 고아원 생들 분노를 사기도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저기 중심적 성취욕에 사로잡히면 진정한 섬김은 불가능하다 섬길대상자들의 간절한 소원과 바램을 겸손히 경청해야 한다

더욱 선 한 것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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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저는 부와 명예를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들이 비록 나의 육적 감각을 즐겁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주님 나는 비록 부가 없어 결핍되고 어려움을 당해도
나를 비겁하게 방어하거나
나는 그 증오의 이름을 견디기 위해 몸서리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영원한 진리와 정의를 보는 눈을 내게 주소서
애정으로 가득찬 가슴을 주소서
가장 친절한 연민을 가슴에 담아 주소서
또한 모든 어두움을 밝게하는 믿음을 주소서

주님, 인류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남에게 대해서는 벙어리가 되고
타인의 허물에는 눈이 멀게 하소서
바닥까지 떨어진 약한 자에게 손발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더 좋은 선으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나라가 추구하는 그런 선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Clergyman Theodore Parker (1810-1860)

5, 베풀기만 하는 주는자, 우월감을 가진 봉사
교회 봉사에는 대상이 없다 다만 이웃이 있을 뿐이다 교회 봉사는 이웃이 되는 것이다 봉사자가 우월한 위치나 지위에 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웃을 종속적 위지에 두거나 봉사하는 자가 문제해결자로 나타나서는 아니된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수 없게 되고 하나님 말씀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한다 만남을 통한 복음화의 체험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봉사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걸어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화의 길이며 봉사없느 복음화란 불구이며 기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교회는 베푸는 일을 경쟁적으로 계속해 왔다 교회는 힘이 너무 강해졌다 너무 높아졌다
베풀지만 세상은 교회가 섬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배워야한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섬기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막10:43-4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교회가 많이 가졌고 높아졌고 살만해졌기에 이제 없는 자에게 주는 것은 베푸는 자선 사업이지 섬기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많은 것을 갖고 사시지 않았으나 그 삶 은 섬김 그 자체였다 오늘날 교회는 베풂은 있으나 섬김이 없다 (공성철 교수 )
교회는 부와 권력으로 높은 자가 되어기에 진정한 섬김이 없다 세상은 그것을 알고 있다 주님은 세상을 통해 교회에게 멧세지를 주고 계신 것이다

VIII. 섬김의 교회사적 고찰

교회가 이땅에 세워질 때부터 섬김의 사역은 교회와 함께 있어 왔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훌륭한 섬김의 역사를 갖고 있다 초대교회 이래 교회는 봉사의 주체로서 그 기능을 활발하게 수행하여 왔다 초기에 개인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봉사활동이 사도시대에 이르러 구제 사업을 전담하는 교회의 직분으로써 집사가 탄생하고 집사제도를 통해서
점차 제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나그네와 가난한 자를 위해 교회나 수도원에 속한 숙박소가 주요 교통로로 설립되었다

1.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교회가 크게 급성장하면서 소외계층이 생기게 되었고 교회는 주님의 섬김 정신을 본받아 즉각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섬겼다 시도들은 시탁 봉사르 그반두고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염하고 봉사할 집사를 선택하여 봉사일을 전념하게 하엿다 속사도시대에는 집사들이 구제 사역외에 감독을 보좌하고 돕는 부사제의 역할도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개종이후 기독교가 국교화돠면서 집사들의 사역은 국가 공무원 같은 성격을 가졌다 여기서 섬김의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가 타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 중세 시대
중세의 교구는 구역내에 빈곤자를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교구는 신자의 헌금 영지수입물 및 생산물의 10/1세등을 재원으로 하여 이 가운데 1/4을 빈민 구제비로 사용하였다 도다른 봉사활동의 주체는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그 입구에 오는 누구든지 차별없이 구제하였다 때로는 빈민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음식물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수도원 숙박소는 구빈원의 기원으로 처음에는 순레지를 대접하는 장소이었으나 나중에는
노쇠자 병자, 과부 고아 나 구호를 필요로하는 자들이 주거로 사용되었다 빈민 가종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농사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별히 가난한자 나그네 고나 과부들 불치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구빈원 ( Hospital)이 생겨났으며 여기서 질병의 치료와먹고사는 모든 일상생활을 돌보는 수용시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종교적 우호단체인 길드(동업조합)도 길드 조직원들뿐만 아니라 조기성원 밖의 사람들에게도 디아코니아를 수행하였다 중세시대에는 교회 대신 수도원을 중심으로 디아코니아 사역이 이루어졌다

3. 종교개혁 시대 와 그후
루터, 칼빈을 통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 섬김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학적 작업을 통해 사랑(삼김)은 믿음의 열매로서 이해되고 강조되었다 종교개혁 사상은 사회봉사면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하게 했다 섬김은 공로가 아니다 하늘나라에서 업적을 얻기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집사라는 직분이 생겨났다 집사는 교회 안에 어려운 자 가난한자를 살피고 도와야 한다 칼빈은 집사를 특별한 사명자로 가르쳤다 루터는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사역은 특별히 교회법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개별적인 구걸행위를 금지시키고 모금하여 돌보고 섬기는 것을 제도화하였다이런 교회법 제정이 여러 서유럽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 이후 경건주의자들은 디아코니아 에 대한 특별한 사역을 통해 영성주의적인 경건운동과 함께 어려운 자들을 섬기는 디아코니아가 함께 발전할수 있었다 특히 19세기 독일 교회가 그러하였다 요한 하인리히 뷔헤름은 도덕적 위기 현상에서 방치되어진 거리 아동들을 수용하여 신앙교육 , 직업 교육을 시켜 그 시대 중요한 봉사자들로 활용하여 독일 교회 사회선교와 디아코니아 사역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가 세운 라우에하우스는 이른바 공부방, 혹은 지역아동 센타의 원조격이다
그후 개신교는 전쟁 고아와 미망인 보호시설 , 학교 기숙사 건립 무료진료사업 감옥 개량, 인보사업운동( 상류층이 빈민지역에 이사해서 직접구제하는것)을 전개하였고 최근에는 아동 여성 인종차별 환경문제등에 그 섬김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IX. 섬김 주체와 대상들, 영역

1. 디아코니아의 주체와 대상
(1) 누가 섬겨야 하나
누구나 해야 한다 특별한 사람만 섬기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은 은사받은 대로 섬겨야 합니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성도들은 누구나 은사를 받았습니다 누구나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섬겨야 합니다 디아코니아의 주체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다. 물론 특별한 직분을 감당하는 디아코니아는 그 직분을 맡은 사람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이웃을 돕는 디아코니아는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마25:31-46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잘 보여준다. 그 비유는 이웃을 돕지 않으면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이웃 섬김의 디아코니아는 모든 신자들의 의무임을 알려준다. 심지어 가난한 신자도 이 의무를 면재받지 못한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눅3:11; 21:1-4; 고후8:2,19 참조)

(2) 누구를 섬기나 ?
(가) 우리가 먼저 우선적으로 섬길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마4:10 삼상7:3)목사가 아니고 이웃이 아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틀린말은 아니나 섬김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섬긴다 복종함으로 섬긴다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나) 교회를 섬겨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섬김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주신 은사대로 직분을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한다(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다)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섬길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마22:34-40) 이웃은 가까운 부모로부터 형제 자매로 시작해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둔 족속 , 원수까지도 섬김의 대상이 된다
디아코니아의 대상은 어려운 사람이다. 특히 물질로 섬기는 디아코니아는 물질이 결핍된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른편에 선 자들이 구원을 받는 이유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눅14:12-14도 어려운 사람을 도운 사람만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디아코니아가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필수적인 사명이다. 아울러 그 대상도 신자로 국한해서는 안된다(마25:31-46). 누구든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교회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한다. 불신자도 대상이 된다는 것은 디아코니아가 복음전파에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예배와 세상에 대한 봉사를 분리해서는 않된다 (암4:4-5)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먼저 화해하는 것이 예배의 전제이다 하나님과 하나됨은 이웃과의 하나됨을 배제하고서는 불가능하다

2.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영역 (스위스에서 있었던 세계교회 협의회 보고서)

(1). 말씀에 대한 섬김 (본질적 섬김, 하나님 섬김 ; 임창복 교수 추가)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주신다 교회는 말씀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2). 이웃 섬김
-교회의 생명과 존재를 위해 필수적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이웃을 섬겨야 한다 나눔, 섬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3). 지역사회의 섬김 :
-지역 사회 주민의 필요에 눈을 돌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4). 세계를 섬긴다 :
-국가적 상황에만 섬김을 제한하지 말고 세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섬김을 실천한다
(5). 예방적 섬김 :
교회 안과 밖에서 수행도고 있는 섬김 사역을 본질적으로 분석하여 이것 들이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섬김 사역인지 분석하고 교육하여 효과적인 섬김 사역이 되게 한다
(6). 구조적 또는 정치적 섬김 :
이웃의 고통과 비참의 원인에 대해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원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7). 인도주의적 섬김
그리스도인들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생태계 보전, 자연재해 복구, 전쟁 폭력으로 고통 당하느 이들을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인도적인 방법으로 섬긴다
(8). 상호적 섬김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우월감을 배제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 고통 받는자와 함께 동등한 입장에서 고통을 함께 나눈다. 실제적 섬김은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9). 자유하게 하는 섬김
그리스도인은 섬김 사역을 수행 할 때 섬기는 대상을 그들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며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는 마음의 공간을 열도록 해야한다

X. 섬김의 과제와 방법

1. 디아코니아의 방법
(1) 물질로, 시간바쳐, 몸으로 섬긴다
디아코니아의 방법은 디아코니아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는 물질로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도록 한다. 물질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는 물질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물질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엡4:28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이싿.
부당한 방법을 피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성실히 일하여 재물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를 위해서는 먼저 정당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물질을 얻어야 한다. 눅16:9가 말하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는 말씀은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이웃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다. 거기서 불의한 재물은 단순히 세상 재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디아코니아를 하지 않는 자이다. 디아코니아는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자들이 물질 외에 시간이나 여러 가지
능력으로 헌신하는 것도 필요하다. 올바른 디아코니아는 자기가 가난해질 정도로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돕는 것이다.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면서 디아코니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물질의 생산을 위해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 이런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다. 예수님께 있어서 말씀 사역과 물질적 도움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준 것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은 사람들이 어려운 자를 돕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디아코니아도 말씀사역이 물질적 섬김을 일으키고 물질적 도움이 말씀전파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2) 물질이 없으면 입술로 섬기고 무릎으로 섬긴다
나이팅게일은 1907년 영국 국왕이 수여한 여성 최초 매리트 훈장을 하사받았는데 그 상패에 쓰인 문구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물질로 남을 도울 수가 있다 물질이 없으면 말로 도울수 있다 물질도 말도 없을 때는 눈물로 도울수 있다 “

가까운데서 쉬운 것부터 한다 친구에게 ,부모님에게 전화한통, 기거리 휴지 한번 줍는 것
자기방을 청소하고, 집앞 길거리 청소하는 것 , 노인들에게 잠간이라도 말벗이 되어 드리는 것 이 모두가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3)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 오병이어 기적 가렙다 과부 공궤 막다라 마리아의 봉헌 많이 모아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햇다 봉사란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나누는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받은 것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책임이 주어져있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선한 사업을 힘써야 한다
주부교실 경로잔치 노인대학 탁아소 유치원 신용협동조합 도서실 장학회 독서실 환경보호운동 ..노숙자 돌보기 탈북자 지원 .등등 찾아보면 얼마든지 봉사할 것이 많다..

2. 온전한 섬김을 위한 과제와 전망 손인웅 목사
(1). 섬김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위해 성경에 근거한 섬김의 정신과 형태를 바로 해석하고 사람의 방향성을 고무하는 “말씀에 대한 섬김”을 강화해 나아가야 한다
(2). 기존 개인 영혼 구언에만 역점을 두는 좁은 의미의 전도 전략을 확장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선포와 함께 하나님 나라 구현에 참여하는 사회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야 한다
(3). 교인들로 하여금 지역사회, 교회 내에 섬김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와 기회를 부여한다
(4). 교회중심 목회에서 지역사회 중심의 교회로 구조를 전환한다
(5). 담임 목사중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보리고 동역자들이 협력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식 리더쉽이 필요하다
(6) 교회가 디아코니아 사역을 우선적으로 강화해 나아갈 것
(7).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할 것
(8). 교회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지역관청과 연결하여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토록한다

3. 섬김 사역에서 한국교회의 과제 ( 한국교회 봉사단 사무처장 김종생 목사 )
(1). 섬김 사역의 실태 파악
(2). 신학 정립과 복지 선교 메누얼 개발과 보급
(3), 가족 기능의 강화
(4). 소외계층을 위한 체계적인 사회복지 사업
(5). 북한 동포를 위한 지원 확대
(6). 지구촌 재해 현장에 대한 구호
(7). 연대와 연합 : 교리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봉사는 교회를 하나되게 한다

4. 사회봉사를 위한 제언 손인웅 목사
(1) 당회원 지도층에게 사회봉사에 대한 지지를 얻고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
(2) 먼저 지역사회 주민들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사할 것 그리고 우성순위를 정한다 단계별로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3) 자원봉사자를 잘 선발하고 이들의 체계적인 교육과 관리가 필요하다
(4) 지속적인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의 개인 신앙 영성을 철저히 훈련히도록 해야 한다 경쟁의식 비교의식이 발동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교회는 겸손히 사회를 섬겨야 한다

XI. 섬김의 자세

1. 예수님의 마음 곧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빌2:1-5)
진정한 섬김은 겸손에서 나온다 이 겸손은 오직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데서 나온다
-리처드 포스터 =인간의 능력 자연적 힘에 열중하다면 그것은 육신의 일이며 겸손에 치명적인 것이다

2.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섬길 것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3 억지로 하지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한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4 이웃을 섬김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한다
조지 뮐러 목사의 고백 :
“내가 봉사의 일을 할수 있었던 것은 내 자아가 죽는 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내 생각 내 의지는 다 죽어버리고 내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죽고 내 의견과 선택과 취미와 내뜻에 죽었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 죽었고 내 형제나 내친구의 칭찬과 비난에도 죽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만 받도록 배워왔습니다 “.

5. 눈가림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한다
일본 사무라이 정신 : 나라를 위해서는 피를 흘린다 친구위해서는 눈물을 흘린다 가족을 위해서는 땀을 흘린다

6. 섬김 받는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를 세워준다
도움을 청한 사람이 도움을 받으면 그는 도와준 사람에게 감사할뿐 아니라 무의식적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 인간 의 특징이다 외부조직가가 어떤 제안을 백성들에게 할 때 백성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바보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제안이 틀려서 받아들이 않는 것이 아니다 받는 자는 항상 신세지는 사람으로 취급되기에 그들을 내적 장애자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한편 주는 자는 항상 주는 자 돕는자 강자 최고자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인간적 우월성을 자신도 모르게 자부하여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그 어떤 인간도 남을 도울수 없는 사람은 없다. 다른 지체에 기여못하는 지체도 없다 각자가 주면서 동시에 받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주는 디아코니아는 받아들이는 디아코니아 경험을 전제로 한다 주는 행위만 강조하다보면 저기 의, 자기 공로만 나타나게 된다 행동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 알린스키

7. 성도들의 섬긴 생활의 자세
(1) 봉사는 하나님 나라 확장과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한다
(2) 자기의 시간, 물질 등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3)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 단발성 행사가 되면 않된다

** 섬기는 자의 갖추어야 할 조건들 ( 김형태 총장 한남대학교 )
1. 자신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 섬기기 전에 먼저 자기 심령에 감사가 있어야 한다 자기 내면에 궁핍함을 느끼는 자는 남을 생각하거나 배려할 여유가 없다 욕망을 줄이면 감사를 많이 하게된다. 살아있는 자체가 감사하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아진다 )

2.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섬김의 도리는 상대방 입장과 눈높이에서 이해하고 용납할 대 가능하다 내 생각과 주장대로 가분달 섬기는 섬김이 아니라 시혜처럼 되기 쉽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았다

3. 요구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한다
베드로 요한은 앉으뱅이가 돈을 구했으나 그에게 정작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요, 일어나 걷는 것이다 근본적 해결책이었다 물질보다 영적 치유 회복이 중요하다
오병이어 : 안드레의 신앙회복, 어린이 헌신 의 회복 이런것들이 회복된 후에 경제적 회복 이루어졌다 (요6:5-13)
마르다 마리아 : 여수님이 필요한 섬김은 물질적 공궤가 아니라 신앙적 동행이었다 ( 눅10:38-42) (미6:6-8)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행하는 것이아니냐

4.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섬김이 방해가 되는 일이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목적지까지 잘 가도록
조력해 준다 돌무화과 나무는 삭개오에게 디딤돌 역할을 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다
섬기는 자는 자기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모세 연기처럼 사라지다 세례요한 존경 대접 받은 일 없다 목소리만 남기고 퇴장하다

5. 은밀한 중에 섬겨야 한다 받으려고 섬기지 말라
섬기고 나서 그 비밀을 지키기 어렵다 광고하고 싶다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려면 사람의 칭찬을 거절해야 한다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2-4) (마6:16-18)

6. 실제적으로 섬겨야 한다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 말로만 하면 않된다
등잔만 준비하지 말고 기름도 준비하라 천국 지옥 가르는 기준 : 시레적인 봉사이다
마25:34-36

7. 자신이 먼저 정결해야 한다
청렴결백한 인품을 가져야 잘 섬긴다 수원지가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수도관이 녹슬어 있으면 녹물이 나온다 양심을 지키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

8. 철저한 자기 연찬을 계속해야 한다
자신을 항상 살피고 섬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필요한 지식과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8. 다른 사람의 섬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존경의 수용도 종요하다 제자에게도 진실한 감사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위한 일은 자기중심보다 상대방중심으로 전환ㄴ되어야 한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봉사를 했으나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

XII. 섬김과 선교

선교와 봉사는 동반자의 관계인가? 아니면 대립적인 관계인가 ? 어덯게 보느냐에 따라 봉사가 선교적 가치를 갖기도 하고 도리어 선교에 역효과를 갖기도 한다

1. 선교와 섬김 3대 이론
< 선교와 관련하여 봉사에 대한 교회의 시각들 >
(1) 전통적인 선교관에서 본 봉사관
전통적 선교관은 선교우선권을 강조한다 교회와 사회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여 교회는 선교에만 전념해야하고 선교사역에서 봉사사업을 배제하려고 한다
이주장에는 성장 성공같은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2) 통전적인 선교관
선교와 봉사는 상호 불가분리적인 관계로 본다 마차의 두바퀴와 같다 봉사는 선교의 주요한 수단이다 전도와 사회봉사는 동반자의 관계로 새의 두 날개와 같다
(3) 선 선교 -후봉사
먼저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을 한다음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교회가 봉사를 한다
사회봉사는 전도의 결과이다 전도를 통해 복음을 믿고 거듭나게되면 그들 삶속에서 자연히 사회봉사를 하게 된다는 것

한국교회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통전적인 선교관을 갖고 사역하였다 선교사들은 전도의 수단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수많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6. 25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민족 복음화를 위한 부흥화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전통적인 선교관을 갖게 되었다 선교에 집중하여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지만 사회와 교회가 이분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세상과 천국 등 이원론에 입각한 신앙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등한히 하였다 사회적 봉사의 사명은 국가나 사회단체에 맡기는 경향이 강했다

2, 올바른 관계 (견해)
교회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과제를 갖고 있으며 이 두과제는 수레의 두바퀴와 같이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이과제를 동시에 충실하게 수행할 대 교회는 성장 하고 성숙하게 된다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때 사회와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요즘 교회가 정체되고 사회로부터 신뢰를 일허가는 이유중 하나가 이웃에 대한 섬김 사역이 부족한 때문으로 판단된다

선교와 섬김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타자를 선교 동역자로 만나는 것이라면 디아코니아는 하나님 사랑안에서 타자에게 이웃이 되고 상호의존 관계를 이루며 대안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둘다 타자를 만나는 것이다 성령하나님이 매개자이시다 만남으로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선교우선인가 사회봉사가 우선인가 하는 것은 선교개념 자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선교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타자에게 이웃이 되어 만날 것인가 한님의 선교동역자로 만난 것인가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어야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이 대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다 한편으로는 정치세력의 희생자이며 한편으로 자신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란 지식을 빼앗겼기에 비극이 있다 교회는 이런 현실을 고려하여 섬김을 통한 선교를 ,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XIII. 섬김의 기능과 유익

1. 교회의 사회봉사기능과 그 내용들
그러면 교회가 디아코니아 전통을 계승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봉사활동을 실천할 때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교회의 사회봉사기능은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완화적 기능(alleviative function)이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교회의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결연사업, 불우청소년 장학사업, 경로잔치, 재가노인봉사, 노인무료급식사업, 장애인보장구지급사업 등이 교회의 완화적 기능의 예라 할 수 있다.

둘째, 치유적 기능(curative function)이다.
교회의 사회봉사를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빈곤의 원인이 되는 개개인의 능력 부족을 보충하거나 빈곤에 이르게 하는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로써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든지 빈곤의 악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다.
빈곤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사업으로는 보육사업이나 공부방이나 독서실사업 등이 있고 그리고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업으로는 무료진료, 직업훈련, 취업알선, 재활사업, 공동작업장 등이 있다.

셋째, 예방적 기능(preventive function)이다.
이는 앞으로 닥칠 사고나 고통들을 예측하여 미리 예방하는 기능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노령, 질병, 장애, 이혼, 실업 등에 대비해서 이를 예방할 수 있다. 신용협동조합을 통한 저축사업, 가족상담이나 청소년 상담사업을 통해 빈곤이나 가족해채 또는 비행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교회는 매우 드물 것이다. 하지만 각 지역에 맞는 프로그램을 선변하고 각 교회의 여건과 실정에 맞는 수준에서는 얼마든지 봉사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봉사들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해 소기의 성과를 보기 위해서는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과 인적자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를 위해 교회내 인적자원을 조직화하고, 봉사관을 짓는데 재력을 투자하고, 외부의 봉사기관들과 연대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2. 섬김의 유익
(1) 위대하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된다
섬김으로 보람을 얻는다 보람은 행복의 요소이다 진정 소외된 이웃 불행을 당한 이웃을 이해 봉사하고 섬기면 인생의 참된 보람을 알게되고 느끼게 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버리게 된다 남을 위한 봉사 이것이 인생의 가장 값진 행복을 누라는 길이다 남을 위한 섬김의 추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장 멋진 인생을 산 사람이다 오늘의 이 역사의 위대함이란 남을 섬기고 간 사란들이 발자취이다
이 세상에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들은 남을 섬기고 간 사람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지위는 섬기는 자가 얻는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희생이 크거나 봉사의 범위가 넓을수록 그는 더욱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섬기는 자의 지위는 뺏을 자가 없습니다

한사람의 아픈 가슴을 지정시킬 수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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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의 아픈 가슴을
진정시킬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살지 않았다
하나의 고통받는 삶에
안락함이 되어줄 수 있다면,
아니, 하나의 아픔을 가라앉히고
한 마리의 추락하는 울새를 도와
다시 그의 둥지에 놓아줄 수 있다면,
나는 헛되이 살지 않았다

에밀리 디킨스 (1830-1886)

(2) 섬기는 자 자신이 변화된다
봉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세상과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들과 관계맺는 자리에서 우리는 기쁨 슬픔 평화 정의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바라본다 섬기다 보면 가난한 이웃보다 섬기는 자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웃에대한 편견, 장애인에대한 편견 그리고 넘을 섬기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 봉사활동을 통해 말씀을 체험하고 자기 존재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쳐 실천할 때 우리 사람은 달라진다

(3) 교회가 신망을 얻게되고 복음 전도에 유익을 가져온다
봉사를 통해 지역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덕수 교회 손잉웅 목사) 교회의 문턱이 낮아지고 담이 허물어졌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은 교회로 하여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중장기적으로 교회는 지역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에 자기 자녀들이 나가 배우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생길 것이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을 보면서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발적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X IV.섬김 교육, 훈련

학생들을 지식으로만 가르치면 변화가 없다 섬겨야 한다 그들이 섬김을 받을 때 마음으로부터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게되고 존경심을 갖게되며 가르침을 머리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이 변해야 삶이 변화된다 소기의 기독교 교육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섬김은 교회 교육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섬김이 없으면 복음은 복음으로 인식될 수 없다 교회교육은 섬김을 그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섬김의 방식을 통해 가르침으로 학생들로하여금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섬기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말로 되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과 혀로만 교육할수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섬기는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능력을 갖춘 교사가 필요하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1. 섬김 교육의 필요성
섬김의 실천적 수준까지 가려면 :첫째 섬김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섬김이 선언적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섬김의 본질을 모르기에........예수님의 섬김을 주목해야 한다)
둘째. 섬김을 훈련 받아야 한다 훈련통해 체득되어야 지속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섬김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행함이다 인간은 배우지 않고 행할 수 없다 섬김활동엑도 배움이 필요하다 섬김이 구조화되지 않고 교육되지 않으면 적실성이 떨어진다 사회구적인 측면에서 장치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교육적 장이 마련될 때 섬김의 효율은 높아진다
봉사는 실천하기도 힌들고 그것을 계속 짓고해 나아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모델로 하여 훈련한다.

봉사(사랑의 실천)은 기도(예배와 관상)와 성경말씀(거룩한 탐구)과 더불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 모든 영성훈련은 이길에 포함된다
이 세길은 세길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길이다 서로 분리될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어느 한가지라도 비껴간다면 두길도 잃게 된다 영적 성장의 세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비껴 갈수 없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봉사를 하찮게 가르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2. 섬김을 위한 기독교 교육적 원리 (총회 김치성 목사)

섬김은 종이나 하인같은 마음 자세 없으면 진정한 섬김 불가하다
SERVANT
Searching : 주변을 둘러보고 섬길대상 자를 찾아본다 ( 이런 교육을 시킨다)
Empathy : 상대방을 공감하고 긍휼히 여긴다 (긍휼히 여기는 감성교육 필요)
Responsibility : 섬길대상 자에 대한 최고한의 책임감을 가진다
Vicinity : 섬길대상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Attendance : 섬길대상자를 시중들어라 ( 이웃돕는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시킴)
Neighbour : 어려움을 당하는 섬길대상자들은 우리 이웃이다 (눅210: 선한 사리아 사람 롬15:2 참조)
Theophany : 주님은 연약한 인간 모습으로 현현(나타남)하시기도 한다 . 이웃섬김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눅9: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3. 섬김의 훈련 박봉수 목사
(1). 순종 훈련 ; 하나님 듯을 알고 섬김에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알 것 기도 말슴으로 훈련 깨닫고 실천한다
(2). 낮아짐의 훈련 : 사람은 낮아질 때 진정 섬길수가 있다 종의 의무르 수행할 대만 섬길수 있다 주의의 권리행사로는 불가하다 바울은 스스로 종이되다 고전9:19 조우이 의식을 갖도록 훈련하라
(3). 긍휼 훈련 : 긍휼: 연민의 정이 아니다 긍휼이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동일시하는 능력이다 함께 고통을 받는 것 깊은 밀착과 가정이입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감정이다 섬김은 긍훌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심화된다
(4). 봉사훈련
섬김 훈련은 구체적인 봉사로 실천된다 봉사는 훈련이 필요하다 봉사는 머리로 가슴으로 하는 것 아니고손발로 한다 손과 발이 철저히 훈련되지 않으면 봉사가 오히려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 봉사훈련은 행동과 성찰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4. 자기 부정과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은 하나님 사랑안에서 먼저 저기를 바르게 사랑하고 우리가 타자에게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일방적인 관계를 극복하고 연대나 섬김을 빙자하여 타자를 지배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을 수용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와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기도와 명상(말씀)에서 이루어진다 디아코니아에서는 중요한 문제는 행함보다 먼저 디아코니아를 행하는 사람 ,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말씀, 기도 ,예배, 성만찬 코이노니아 공동체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하나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자신의 허물 , 죄절 ,실패 아 상처를 용납하는 자기 사랑으로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고난을 자기것으로 받아들이며 디나코니아에서 오는 유혹과 어려움을 십자가를 통해서 극복하고 자기부정의 길로 나아간다 타자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타자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하나님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아픔과 좌절 고통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 자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새롭게 들을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섬길 때 타자를 당장 하나님 자녀로 만들려는 조급성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하나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경과 기도, 디아코니아를 통해 즉 이웃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XV 결 론

1995년 서울 한 지역에 주민들이 장애아 특수 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농성을 40일 째 하고 있다 자녀교육 과 지역 이미지가 나빠져 집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성을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 자녀들을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말하며 자기자녀와 함께 어울리기를 꺼려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장애아들에게 병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잘 어울린다

1. 오늘의 시대는 섬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요청하고 있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기업이나 회사도 사장이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던 시대는 갔다 군림하는 시대가 아니라 아랫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시대이다
Robert K. Greenleaf 이 <-섬김의 리더십, .1970 펴냄> 책을 펴냈다 위 리더십의 특징 들은 주의깊게 들어줌, 감정이입(공감), 치유, 청지기 정신, 성장을 위한 헌신 , 공동체 형성, 이다 한마디로 Servant 리더십이다 서번트 리더십은 그후 피터 드레거, 스티븐 코비, 피터 센지 와렌 배니스등 리더십 대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드래커 Drucker <미래경영 > 의 말을 들어보자
“지식 경제시대에는 기업 비롯한 여러 직에서 상사와 부하의 구분이 없어진다 지시와 감독은 통하지 않는다 21세기에는 리더가 부하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조직원을 이끄는 기존의 리더십 패러다임 대신에 리더가 부하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그들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
세계화 시대, 지구화 시대에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빈부 격차가 더욱 커질 것이다
영극화 현상이 가속되어 소수만 부자가 되는 현상 초래.할것이라고 한다 90%가 10%를 위해 사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것이 교회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이것은 새시대의 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다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본받아야 해결될 수 있다
먼저 우리 마음을 가다듬고 섬김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눈으로 볼수 없다 (어린 왕자 )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다으과 같이 호소한다
“현대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봉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현장의 정보가 아니라
현장에 대해 놀날줄 아는 마음이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사회 비참함과 , 부조리에 대해 놀라야 한다 “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가난한 자들 도와야 한다
한국도 이제 국력에 걸맞게 세계 가난한 나라를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대외 무상 원조 : 1996년 GNI의 0.05% (2억달러) OECD권고는 0.7%이었다
2005년에는 0.09%이었다 OECD중 23개국 꼴지, 1일당 15.2 달러이다

2. 예수님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야 한다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신 예수님. 섬기는 것만큼 권위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영적 권위가 생기게 된다 섬김을 받는자는 결국에 짐심으로 섬기는 지도자에게 자발적인 순종과 충성을 하게 된다 세속적인 권위는 권세에 기초하여 군림하는 것이다
서번트 리더는 먼저 써번트가 되어야 한다 먼저 섬기다보면 나중 끌고 가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생긴다 주님은 스스로 낮아지시고 써번트 리더가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 위해 생명을 희생하셨다 섬김은 희생을 동반한다 섬김은 고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희생의 섬김을 본받을 때 바른 섬김의 사역을 감당한다

3. 한국 교회는 섬김의 사명을 잘 감당해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적 교회로 바뀌어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회 봉사를 위해 섬김 사역을 지속해 왔다 한국사회 사회 복지 재단 중 60-70%가 개신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복음 전도 문은 잘 열리지 않고 있다 저들 눈에는 교회가 너무 강해져서 경계 대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더 그러나 우리는 교회 주요사명인 섬김 사역을 멈추어서 않된다 끊임없이 후련하며 봉사를 실천해 나갈 대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교회기능 예배 전도 교육 교제 봉사 모두 동일하다 사회봉사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한 노력이다 교회 안 사람끼리만 교제는 사회로부터 외면 당한다 섬김사역은 위급한 상황으로 보고 당장 할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내 가족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위급한 상태에 있는데 시간이 없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성숙한 교회는 한마디로 섬기는 교회이다
교회가 예수의 섬김의 종의 길을 포기하고 영광과 부귀 지배하는 길을 갈 때 언제나 영적 부패와 타락이 있었다 ( 성종현 교수)
교회 섬김 활동도 교회 내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붊을 받았으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섬김은 단순히 사후 치료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전 예방적인 것까지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와 섬기는 공동체의 상호 형평성을 유지하는 구조와 내용을 가져야 한다 모이는 것과 보내는 것이 동등한 비중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 사회봉사비 : 전 예산의 2-6% 사회봉사프로그램 가진 교회는 19% 에 불과하다
오늘날 한국교회 사회봉사의 문제점 : 일시적 이벤트 . 영속성이 없다 단순한 구호성격 프로그램 부족 . 내부대상자 중심 전문성이 부족함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섬김사역에 뿌리를 둔 진정한 섬김(디아코니아) 의 회복을 위해 3개 영역의 철저한 개혁과 수정을 해야한다 (아래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요, 그가 명령하시는 섬김의 특징이다)
(1) 기도 : 하나님섬김과 이웃섬김의 실천을 위한 기도 . 기도로 한님과 이웃을 섬긴다
(2) 증언 :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섬김으로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다
(3) 화해 : 먼저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코이노니아 유대를 강화하려 화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화해를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섬긴다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파송하사 예수님 자신의 섬김 사역을 공유하도록 명령하셨다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복음 선포, 치유사역, 용서사역, 도와주는 사역을 통해서 질병과 가난 죄된 행실, 죽음과 심판 아래 서있는 인간과 하나님 ,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중재하는 일을 본질적, 지역적 , 세계적, 예방적 ,미래적, 또는 정치적, 인도적 , 상호작, 자유하게하는 섬김을 중보적 기도, 담대한 증언, 그리고 화해를 통하여 온유와 겸손으로 실천해야 한다

4.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겨야 한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디아코니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여 그의 유익을 위해 해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행할때에는 공로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공동체의 삶은 섬김의 삶이다 청지기 삶을 통해 온갖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행동의 은사=디아코네인 (행19:22 몬1:13 딤후1;18) 섬김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수행되고 그의 영광을 위해서만 이행되어야 한다

5. 자기 사랑과 자기 희생이 요청된다
인간 뛰어난 자질은 결코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한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남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나눔 섬김은 인간 본성과는 반대된다 인간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추구한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실현은 자기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많이 소유하여 향락하고 지배하며 자기뿐 아니라 자기 후손들에게도 그 소유와 향락을 물려주려고 한다 도움이 필요한 타자르 마음에 주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나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을 받아들일 때만 타자를 받아 들인다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자기사랑은 이웃사랑의 척도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타인도 사랑할수 없다 자신이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이웃의 고통을 감당할수 없다 자기를 증오하는 자는 이웃도 증오한다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사랑은 자기 증오일 뿐이다 참딘 자기 사랑은 타인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천국의 능력이다 참된 자기 사랑에서 디아코니아 적 사랑이 나온다 참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엡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6, 타자를 위한 섬김사역이 상생하는 길이요 주님 기뻐하시는 일이다
산업 사회-약자 무능한자 도태되는 세상이다 ,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여 약자를 섬길 때 사회 계층 갈등을 해결할수 있을 것이다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망을 얻으며 복음은 더 힘있게 전파된다 상처는 상처에 의해 치유된다
고난과 상처를 감당할 힘은 기도와 말씀 명상에서 온다 고난과 십자가를 준비함이 없이
디어코니아에 투신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 디어코니아는 내적 공허함을 성공을 통해 보상하는 수단도 아니고 자기성취의 도구가 되어서도 않된다
자기를 죽이고 복음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에서 자유한 자가 타인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것이다 이기심 공허함을 넘어서 타자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物神, 행동주의 우상을 파괘한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디아코니아는 개인과 교회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줌(giving)을 요구한다 (데이비드 길) 주는 일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받는 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나누는 일이다 주는 것은 물질이나 나누는 것은 나자신이다
디아코니아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주는자와 받는자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지배와 의존 관계로 변질되는 것이다 상호의존적 상호대등한 관계에서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면 그 자체가 치유가 된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나아가서 자신이 지닌 어떤 것을 통해 상대방에게 , 사회에 무엇인가를 기여하게 된다 다아코니아적 사랑에서 나온 지혜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타자가 스스로 일어서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자에게 무엇인가를 줄수있기까지 책임을 지면서 동시에 타자를 , 타자의 삶을 존경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마지막 설교문
“내 장례식은 길게 하지 마시고 간단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노벨상을 탔다는 말은 아예 입밖에도 내지 마시오 나는 남에게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 들으면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록 . 성경 본문 명상 자료
1. 마20:28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 그자신의 푸쉬켄 : 조에=영원한 생명, 비오스=단지생물학적 생명 이 아니고 혼, 마음, 지성을 포함한 혼의 생명이다 ) 을 많은 (모든이 아니다 ; 만인구원설은 잘못) 사람의 대속물(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내는 몸값)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수난 예고, 제자들은 영광 추구 시기 분쟁하였다
-두형제 그 어머니는 예수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야 , 왕으로 오해했다
세상 욕심에 기초하여, 교만이 있기에(높아지려는) 영적 소경이 되어 올바른 가치판단이 불가했기에 엉뚱한 것을 요구했다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이며 성모 마이라와자매 간? (마27:56 막16:1) 그러므로 두형제는 예수와 이종사촌간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 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교만하면 망한다 자신만 높아지려는 자
(잠11:2) "교만(驕慢)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만은 낮추는 것. 자세 태도를 낮추는 것이다 실력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내게 유익만 되면 오케이다 ) 이기주의자는 고독하다 -이기주의자는 타인의 질투를 유발시킨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구하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
-제자들은 십자자가 고난 이전에 영광부터 구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으로 착각하다
우리의 세속적인 소원이 천국 일에 방해되는 수가 많다
-제자들의 반응 : 분히 여기다 동일한 시기심 명예욕이 있었기에. 교회 분열 원인이다
시기. 교만은 가장 무서운 죄이다 가장 나중까지 남는다 교만은 인격의 최선의 것을 파괘시킨다 교만은 다른 요소가 첨가될 때 점점 커진다 겸손은 자기 부족을 아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께 대드는 죄이다 다른 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죄이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 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최고의 섬김은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상대방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내가 죄인이 되고 상대방을 지혜롭게 만들기 위해 내가 미련한 자가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그리스도는 권능을 남을 섬기는데 사용하셨다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높이신다 하나님이 높이시기까지 아무말도 아무짓도 하지 말라

2. 빌2:6-8
(빌2:6-8) 그는 근본(본래부터)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외형만이 아닌 본질적 형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낮아지신 하나님 아들 구주 예수그리스도, 겸손의 극치이시다
-우리도 순종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순종함으로 낮아진다
-하나님이 높힐 때까지 높아지지 말라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모든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스펄젼)

3. 마22:37-40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의식의 중심 )을 다하고 목숨(푸쉬켄)을 다하고 뜻(의지 ,지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핵심, 요약)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
(1) 마음을 다한다=충성을 다한다
(2) 목숨을 다해서=가장 귀한 거슬 바쳐서
(3) 뜻을 다해서 :내 의지를 꺽고 하나님뜻을 깨달아 순종하야
① (4) 힘을 다해=건강한 마음과 육체로 최선을 다해 (1) + (2) + (3) + (4) =온 인격을 다해서 사랑한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 아가페 사랑이다 (신6:4-9 11:13-21 민15:37이하 쉐마 한구절)
-사랑의 종류 : 아가페(희생적 사랑) 필로스(형제 친구사랑) 에로스(남녀간 사랑) 스토르게(동족 부모자식사랑) -사랑은 인간 영혼을 지배한다
-세상은 너무 변하기에 사랑할수 없다 문제해결도 불가하다 계속문제 이어진다
-사랑할 대상이 생길 때 힘이 생기고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큰 힘이 생기고 기쁨이 있어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님 계명의 요약이다
* 하나님을 사랑함의 단계 :
-내 유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함--- 하나님이 최고 선이시므로 사랑함 -- 하나님위해 하나님을 사랑함(헌신) --하나님위해 하나님 싫어하는 것을 미워하고 나자신을 사랑함 (몸도 아낀다) --하나님과 일치됨 (무아지경)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다 거듭나야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 : 자기 부인, 세상을 경시함 은혜를 깨달음 죄를 버림 순종 감사생활을 함 기도 말씀 묵상

-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 (레19:18)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출발하고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결실이다 십자가의 도이다 두 개 조화될 때 복음의 영광이 나타난다 -사랑에서 나오는 의무는 쉽다
-사람은 하나님 형상을 닮아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 사랑의 대상 : 하나님 + 이웃+ 자기자신 (네몸같이)
* 자기사랑: 죄악된 자아는 부인하고 성령에 의해 거듭난 참 자아는 사랑해야 한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산것이기에 글고 하나님 형상이 새롭게 되었기에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최고봉에 이르면 다른 것이 다 보인다
“하나님을 살아하라 그리고난 후에 네맘대로 하라” -어거스틴

4. (요13:3-17)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질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인격자는 큰 괴로움 중에도 먼저 남을 생각한다(크리소스톰)
-유대인들은 식사전에 먼저 발을 씻는 습관이 있다 아랫사람이 먼저 윗사람 발을 씻겨준다 =하나님 세계<-> 이 땅의 세계
-수건을 허리에 두르심=겸손을 의미: 베드로 나중에 그것을 깨닫다
그리스도의 겸손 완전 봉사, 사랑의 실천이다
-몸을 굽혀야 발을 씻길수 있다 교만한 자세로는 남을 사랑함이 불가하다 겸손없는 사랑은 피차 피곤케 한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한다
-제일먼저 가롯 유다 발을 씻기셨다(크리소스톰)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부터 사랑하라 제일 미운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누구든지 사랑 가능케된다
-말틴 루터 :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지않고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신다”
지금은 형편 없느 자라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발을 씻기신다
-발을 씻는 물은 너무 뜨거원도도 않되고 너무 차거워도 않된다

* 베드로의 무지 : 예수님 답변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영적 무지가 하나님 자비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 예수그리스도에게 의존되었다는 것을 망각하엿다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주님은 미래지향적으로 대답하시다 조급하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른다 인간은 지나간 후에야 알게된다(모세도 하나님 뒷부분만 보았다) 하나님이 키를 갖고 관리하신다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게 분깃을 갖지 않는다)
-매일 매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씻지 않으면 예수님에 의해 씻음받지 못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다 매일 매일 씻지 않을 정도로 깨긋한 자가 없다
-사랑받고 용서를 받았다는 체험있을 때 예수그리스도와 상관있게 된다
-이생동안 감당할수 없는 사랑 받은 것을 깨듣고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라
교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받은 것을 생각하라 내가 준것만 생각하면 교만해 진다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목욕=루오= 전신을 씻는 것 거듭난 것 중생한 것을 의미한다
발을 씻다=비프토=부분적으로 씻는 것을 말함 매일 죄를 싯는 것
-매일 죄 씻어버려야 영혼이 성화가 된다
-너희(교회)가 깨끗하지만 다는 아니다 어느단체나 가롯 유다는 있다 하나님 섭리이다
양떼 속에 염소 두지 아니하면 양들은 추우면 모여들어 가운데 있는 양은 압사하게 된다 (기롯유다 없으면 좋을 것 같으나 사실그렇지 않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 행동 말슴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선물도 의미를 알아야 한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서로 섬겨라)
-다른 사람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 내가 먼저 사랑주어야 받게 된다 보복 원망은 악순환된다
-예수님 용서했으니, 사랑했으니, 먼저 섬기셨으니 우리도 용사ㅓ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휘파데이그마=본, 모형)(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당시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고만 다투었다 뒤 따라가는 것은 쉽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 이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되도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행복=아는 것 + 행하는 것 참된 행복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
-진리 모르고 순종할 대 갈등하게 된다 혼란이 우려된다. 알고 행할 때 실망하지 않는다
-진리를 알지만 불순종하는 것은 무익하다
-제자가 스승 발을 싯기는 것은 당연하다(율법) 그러나 스승이 제자 발을 씻기는 것은 봉사요 헌신이다
-예수그리스도=주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 예수님 판단은 우리보다 훨씬 낫다
-예수님 순종하셨기에 그 제자도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전문적 권위보다 희생적 권위가 더 높은 권위이다 가슴이 열려진다
-스스로를 영적 중심으로 삼지 말라 지구중심설은 오류이다

5. 눅10:25-37
(눅10:25-3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알고있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아는 것만으로는 않된다 너는 알지만 행하지 않았다)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이웃이 아니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부기빠지라고)과 포도주(소독제)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비용)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도움이 필요한 모든 타인
-강도같은 인생, 타산적인 인생 (제사장,레위인) ,
선한 인생( 남을 섬기고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
-예루살렘(하나님 , 말씀, 교회 ) 떠나면 강도 만나나. 여리고로 가면 불행당한다 . 인류역사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는 과정이다
-예루살렘 떠나 강도마나지 말라 -가난, 질병, 실패 , 죽음 . 의 강도
-신앙이 학문화되고 형식이 되면 생명력을 상실한다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백해무익하다
-제사장, 레위인은 율법주의 에 얽매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모르다. 사랑의 실천 훈련이 없었다
-선한 사마리안인 =예수님을 상징 한다 준미은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신다
-사랑하는 자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랑만이 인간 존재의 비밀을 이해한다 사랑만이 방법을 정당하한다 사랑은 숨겨진 능력을 개발한다 사랑은 생명의 법칙이다 사랑은 이웃을 얻는다
-좋은 일은 즉시 실천해야 한다 나중하려면 행하려는 마음이 식어져서 못한다
-선한 일에는 뜨거운 가슴, 민첩한 손과 발 , 용기, 사랑이 있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행이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6. 마25:31-46 양과 염소의 비유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 리니(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 는 것같이 하여(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 서 보았느니라(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供饋 먹을 것을 드림)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 나이까(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악인들 사단의 종노릇하는 불신자들 )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지옥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 지 아니하였고(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 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늘 시중하다)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 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供養)치 아니하더이까 (자원하는 마음으로)(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실천 여부이다 사랑은 믿음에서 당연하게 나온 사랑이다
미래 심판과 현세의 사랑의 봉사는 연결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만, 인간을 사랑하는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 몰이할 때나 밤에 우리에 둘 때 각기 다른 우리에 둔다
산헤드린 심판 때 무죄자는 오른편에 유죄가 확정된 자는 왼편에 둔다 오른편 + 더 귀한 자리( 한국 고대 상과 반대)
-많은 사람은 혀끝으로 사랑하고 경건한 자는 손끝으로 사랑한다
-의인=택함 받은 자 양과 염소 비슷하다 나중에 가려진다
-의인들(이미 믿음으로 칭의 된 자) 대답: 그런일 없다 ; 그들은 선행조차 잊고 있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였기에.... 자기 공로 잊고 살다
-무념 무이념 무상의 헌신이라야 가치있고 힘을 생기게 한다
-선택 받았기에 무조건 보상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를 선행했기에.... 받은 성령과 연합했기에.... 하나님 능력을 힘입고 순종했기에 보상을 받은 것이다 聖杯찾아나셨던 Camelot 문에 쓰러져 신음하는 거지 물을 달라하기에 물을 던다주니 물을 더다준 컵이 빛나는 성배이다“ ( 거지= 주님) -그리스도 재림대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게된다 양과 염소로 구분된다
-사랑으로 봉사, 헌신하라 (잠31:20)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롬15:1) "(히13:3) " (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 형제에게 한 것 =주님에게 한 것 (마10:40) (마18:5) ""(눅10:16)
-최존자와 최저자를 연결시키는 기독교 윤리는 심오하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결과보다는 동기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다 이웃을 돕는 것은 그리스도를 돕는 것.
최후 상급을 결정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다 충성이다
* 저주받은 자들아 “ ”내아버지께“ 란 말이 없다 저주는 하나님 아버지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다 (지혜서1:1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하셨는데 악한 자는 행실과 말로써 죽음을 자초한다
-사람 아닌 행위에서 저주를 내리심 : 사람은 처음부터 멸망 받도록 예비된 것이 아니다
-저주: 대적한다 타인에게 나쁜일이 일어나도록 바라거나 기원한다
신11:20 우상 좇으면 저주받음 , 갈1:9 다른 복음을 전하면, 고전16:22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자( 친구만치도 사랑하지 않으면)
-의인과 악인은 모드 자기 한 행위를 모르고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
충성된 자는 자기의 善을 계산하지 아니하였고 악인은 그 악을 계산하지 않았다-벵겔
의무 수행 아니하고 그 과오조차 몰랐다 왜냐하면 너무 악했기 때문이다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심판을 받았다 - Carr

-운명은 쓸모에 의해 결정된다 운명은 익숙한 데로 만들어진다 (에서는 사냥에 익숙함)
-선과 악은 우리의 작은 의지에서 시작된다 가장 기초적인 것도 하지않고 산다
-신앙이란 투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행동적이다
시11:6 눅3:17 계20:15 말4:1 악인은 불과 유황불에 던져진다
-무정한 이기주의가 되지 말라 -왼편 있는 자는 계속 자기 공로를 주장하였다
-누구나 모두 심판 받을 때가 온다 -영생, 영벌 (46절) : 조엔 아니오니온
구원의 의무 :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누리는 가장 높은 좋은 생명
벌이던 生이던 미래의 생, 벌은 영원히 계속된다
(마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 으라"
-최후의 심판 : 신앙-성령충만 (10처녀) 사명수행(달란트) 사랑행위( 양 염소) 로 수행된다
-기독신자: 내 형제를 지극히 귀히 여긴다 의인: 기독자에게 사랑행위를 하는 자이다
악인은 사랑의 행위가 없는 이기주의자이다 악한자이다

7. 행2:44-47
(행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공산주익 아니다 공동목적에 쓰려고 헌금 자발적 일시적이었다
(미국 초기 청교도도 일시적으로 공산사회)

초대기독교 공산사회 : 공산주의
내것은 당심의 거이다 네것은 내것이다
네 고통이 나의 고통이다 내 고통은 당신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주다 가져가세요 강제로 뺏어온다 폭력으로 뺏는다
주는자가 주도하다 받는자가 주도한다
신본주의 인본주의 유물사상

-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다
예수 섬기는 것 이웃을 섬기는 것 자기 소유를 팔아 구제한다 눅12:31-34
가정 버린 것이 아니다 한집에 산 것 아니다
자본주의 약점은 능력에 따라 먹고산다 불구자등은 곤경
구제시 태도: 고전13:13 사랑으로 행11:29 힘대로 롬12:8 성실함으로 마6:3-4 은밀하게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 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열심히 모이다 하나님을 찬미했다47절 사랑했다45절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 다 더
하게 하시니라"
평화롭고 기쁘고 바른 생활을 했기에 주님만이 부흥을 시킨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칭찬 받는 이유: 기적, 구제 상부상조 사랑의 교제
박스터 : “신앙 좋은 여자보다 마음이 좋고 온유하고 착한 여자와 사는 것이 낫다
-평등은 자발성 봉사심 친교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한다 공산주의는 피로 이루려한다
가난의 평등만 이루다가 망했다

8. 요13:34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 카이네 = 늘 새로운 , 갱신된 빛나는
-사랑은 수고하는 것 희생하는 것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 이햐하는 것 관심 갖는 것 책임지는 것 존경하는 것 , 주는 것
시각장애자 15만명중 2만명은 시력회복 가능 : 안구 기증자-3000명 일본은 60만명이다
사랑과 미움은 모두 동화성이 있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게 되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면 예수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오직 그 제자들 가운데서만 발견하게 되니까 제자들 사랑 아주 중요하다
-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참사랑= 사랑을 모르는 자도 사랑한다 원수도 사랑한다 의롭게 하는 사랑 (스스로 죄인되어서) 대속적 사랑, 영광된 사랑
** 왜 새계명인가
1) 사랑의 대상이 새롭다 : 이방인까지 사랑한다
2) 새로운 척도(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하기에, (예수님 사랑으로)
3) 새로운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에..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야 가능하기에
4) 동기가 새롭기에 (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5) 레19:18과 대조, 이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6) “ 서로” = 형제애를 명하셨기에
-진실한 사랑 받지 못하면 살아야 할 으지가 없어진다
- 미국 산디애고 에 한 한국전쟁 부상병이 불구자 되어 고향에 와서 어머니에게 전화 “ 어머니 불구된 내친구 평생 데리고 살려고 하는데요? ” 어머니 “ 그건 곤란하다 평생 고생만 하게된다” 이말을 듣고 그 아들은 12층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9. 요15:12-14
(요15:12-14)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제자의 사명 : 서로 사랑하는 것 우리는 기쁨과 사랑을 위해 선택 받았다
-가장 큰 사랑=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 주님은 제자들을 종이라하지 않고 친구라 불러주심 : 너무 황송한 말씀이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 모른다 제자들은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듣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친구가 도어 주신다 내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와주신다 친구관계 아주 중요하다
-친구는 숨기는 것이 없다 친구는 닮는다 어려서부터 사위어야 좋다 닮는다
-교회 나오는 것 친구되신 그리스도 만나고 사귀려고 나온다 도움 청하려 나온다
-그리도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친구이다
-미천한 우리를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같은 인격으로 올려 놓으신다
-예수님의 친구사랑은 희생의 사랑이다 완전의인이신 그리스도는 나 때문에 죄인이 되고
-나는 그리스도때문에 의인이 되게하여 살리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값을 치룬 사랑이다
-사랑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13절 나누는 것=15절 서로 위해 기도하는 것=16절
-친구가 되는 조건 : 순종 , 사랑 , 신뢰
-친구되신 예수님과 매일 사랑하라
(잠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종은 비천하다 주인의 소유믈이다 빌1:1 롬1;1 약1;1 사도들은 끝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다

10. 요일3:11-18
(요일3:11-18)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예수님 새계명) 이는 너희(신자들)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멧세지)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아가페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예수믿어 영생을 누리느 줄 : 사랑함은 영생 조건이 아니라 영생 누리는 자의 증거이다)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영적으로 여전히 죽어있다, 거하지않다=갖지 않다=영생을 누릴 지속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사랑의 본질)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푸쉰켄: 여원한 생명 조에도 아니고 단순한 생물학족 생명 비오스도 아니다 정신적 의지, 정서가 항상 움직이는 생명, 혼의 생명이다)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과 같은 그런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말할수 없다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시시한 무가치한 말)과 혀(겉치례의 말, 빈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사랑의 역동적 측면)과 진실함(사랑의 질적 측면)으로 하자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참 생명을 주실 때 생명의 본질인, 하나님 성품인 사랑도 주신다 이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자녀가 아니다 그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지 못하느 것은 욕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이 영생의 조건은 아니지만 형제 사랑이 없느 자면 하나님 자녀가 아닌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영생이 없음이 분명하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가 도움을 청하든 아니하든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자기 의지로 그 동정심을 막기도하고 도욱 충분히 열기도 하여 돕고 섬기게된다
-허위는 항상 나쁘다 사랑의 허위는 더욱 가증스럽다
-사랑의 결핍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불명예스럽게 한다
-마귀 특성은 미움, 살인 , 성령하나님의 역사는 사랑, 살리는 것 이다

11. 빌2:3-5
(빌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분쟁,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교만은 마귀의 본성이고 가장 나쁜 것이다 교만은 악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유대인 격언)
-자기보다 남을 낫게( 낮게 하면 큰일이다) 여기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은 하나님앞에서 두려워섬기며 그분을 전적으ㅗ 의지하며 감사하며
이웃에게는 존경하며 섬기는 것 , 자신에게는 바른 평가를 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 부인을 통해서 가능하다 자기소유, 자기생각, 의지, 공로, 자랑, 계획 수단, 이익을 부인해야 한다 부인하지 않으면 부인하도록 하나님은 용광로에 집어 넣으신다
-겸손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 가치 , 재능, 능력을 하나님위해 , 이웃을 위해 사용하여 서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때까지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하지 말라
-제자는 예수님 처럼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가는 자이다 예수님 따라가야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다



“섬김”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둥병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열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유창한 설교를 하시지도 않았고 정통 진리를 선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야단을 치시지도 않았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 기도 소리를 들은 강도 한 사람은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한 강도가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예수님께서는 그 강도를 향해서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강도도 놀라고 로마 군인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런 예수님이 정말 의인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아마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은 평생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사실을 전하면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어루만져 주심으로 나타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심으로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몸과 영혼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와 같은 귀중한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중한 설교를 유창한 말로 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신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에서 우러나온 삶의 고백이었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권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그러면 이제부터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지적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또한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선지자 이사야가 지적했습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목회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성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그러면 이제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 얼마나 귀중한 삶과 사역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해서 묘사하는 성경말씀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센병자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섬기셨고,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각색 병자들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면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그리고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4-27).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고 섬김의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의인 의식을 지닌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권위를 버리시고 친히 낮아지셨고 착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착해지심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신데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착해지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 심지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착한 일을 행하려면 낮아져야 하고 죄인의 모양을 지니고 두루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한 여인에게 착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는데,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피곤하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을 취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7). 그리고 마지막에는 강도와 같은 죄인의 모습을 지니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섬김과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었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섬김의 삶과 사역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교만과 위선과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극치로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낮아짐과 착해짐과 섬김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 1:9). 사도 바울은 기근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 15:25). 착함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면서 주인이라고 부르는 대신 낮추면서 “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빌1:1). 사도 바울은 주님의 종이 된 이후 자기의 의지와 계획과 기질과 취미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고,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면 마게도냐로 갔고, 로마로 가라고 하면 로마로 갔습니다.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라고 하면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매를 맞으라고 하면 매를 맞았고 풍랑의 위험을 당하라고 하면 풍랑의 위험을 당했고 순교하라고 하면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이방인 교회를 섬기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섬기면 섬길수록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생기고 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진정한 기쁨이 소유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섬김과 성도들 섬김에서 오는 것을 발견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생명을 사랑과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섬김의 삶을 살다가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셋째로, 빌립보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착함과 섬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들이, 욥바에 살던 다비다 즉 도르가도, 가이사랴에 살던 백부장 고넬료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자였던 바나바는 누구보다도 가장,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도 착함과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착함과 섬김의 삶과 사역” 덕분에 예루살렘과 욥바와 가이사랴와 빌립보에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 9:4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2-4).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 16:40).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루디아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옷감 장사를 하던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본래 고향은 두아디라였는데 옷감 장사를 더 잘 하기 위해서 마게도냐의 한 도시인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 자주 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서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면서도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3절에 보면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과 함께 빌립보 강변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14절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또는 ‘경외’하는 사람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고,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루디아를 귀하게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와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섬세하고 오묘하고 아름답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행 16:13-14).

결국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강변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결국 섬김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도 바울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빌립보 사람들을 섬기고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섬김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첫 단계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인데,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청종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둘째 단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셋째 단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 일인데, 루디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바울과 실라와 누가를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넷째 단계는 자기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로 삼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의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를 삼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결국 루디아는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두드러진 아름다운 주제가 “교제”와 “섬김”과 “기쁨”인데, “교제”와 “섬김”과 “기쁨”은 루디아의 “교제”와 “섬김”과 “기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디아는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권사님들과 여집사님들에게 루디아와 같은 섬김의 사람들이 되라고 항상 권면하곤 했습니다. 사실 강변교회의 모델은 빌립보교회였습니다.

넷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인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이 매우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이나 화려한 프로그램보다는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사랑의 섬김과 봉사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떼들로 낮에는 한센병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한센병자들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윤함에 사모님은 섬김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가슴에 채워주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순수한 기쁨과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이기풍 목사님은 함께 제주도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정양순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그분의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들 섬김은 매우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와 섬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님은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 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정양순 사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긴 분이었고, 그 다음 남편을 섬긴 분이었고, 그리고 한센병자들을 섬긴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한센병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한센병자 교회였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 섬김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양순 사모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함께 여수와 순천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 섬김과 이웃 섬김으로 한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님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한국의 언론들은 그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 있는 작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이었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이나 감동적인 설교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인데, 장기려 박사님이야말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든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모니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 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장기려 박사님은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여명의 간질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무엇보다 예수님만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받고 섬기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분은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한평생 사모님과 자녀들을 평양에 남겨 두고 온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지만,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으로 어두워진 한국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또 하나의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섬김의 밝은 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것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성공이 아닙니다. 많은 물질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삶과 사역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주님과 교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착하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섬김의 삶을 살고 그런 섬김의 사역을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기적인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의 “섬김의 삶과 섬김의 사역”을 흠모하고 본받으면서 섬김의 삶을 살고 섬김의 사역을 하려고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1988년 여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라는 나라를 찾아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 15개를 파주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병원을 하나 지어주기도 했고, 노재인이라는 영양사 한 사람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부터 홍수와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1999년경부터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고아 어린이들 160여명을 돕는 일을 지난 14년 동안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지어 주고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대표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13대의 대형 트럭에 싣고 황해도 개성에 가서 그곳 민화협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2014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방문하고 테러로 130여명이 생명을 잃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한 역사적인 교회인 올 세인트 교회의 성도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음을 날마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착해져야 하고 따뜻해져야 하고 부드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고 자기 자신을 열어서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눈물을 지니고 함께 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셔서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복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14장(새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1절을 두 번 부르겠습니다.
















04-05-2024(금) 누가복음 22:14-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파는 자의 손(21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But the hand of him who is going to betray me is with mine on the table.










04-04-2024(목) 누가복음 22:7-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월절을 예비하니라(13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They left and found things just as Jesus had told them. So they prepared the Passover.

유월절은 애급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들을 구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의 유래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후 그 집안에 머물던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을로 들어가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그에게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큰 다락방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유월절을 예비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때가 되면 예루살렘을 떠났던 많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주로 나사렛이란 곳에서 활동하셨지만 뮤월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더구나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절기가 될 것입니다.

어린 양이 속죄의 제물로 바쳐진다면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월절 희생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무엇을 예비해야 할까요?
우리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예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예비해야 하겠습니까?

신랑이 되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정결한 세마포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마포 정결한 옷은 "거룩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구별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정의(正義)와 사랑(愛)과 분배(分配)라는 기준입니다.

정의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지킬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평등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분배는 높고 낮음이 없고 많고 적음이 없는 서로 돕는 힘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이런 기준이 흔들리고 붕괴되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라는 수치스러운 말이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모두가 한 형제 자매라는 진리에 따라 서로 돕고 나눔을 통한 새로운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초석(礎石)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율로 어온ㅁ  이이므로 더욱 되ㅣㄹ 으로 모여을 찾아ㅇ로

때는 유월절 그리고 무교절이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아빕월(출 13:4; 34:18; 신 16:1) 혹은 니산월(4월) 14일, 그리고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직후 일주일로 니산월 15일부터 21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무교절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합쳐서 유월절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고 있었다”고 말했고, 마가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말합니다(막 14:1).

유다의 배신은 무교절 이틀 전인 수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배신한 시점이 유월절 하루 전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밤이 유월절 밤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눅 22:52).
왜냐하면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년 애굽(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애굽 땅의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습니다(출 12:29).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는데,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출 12:30).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처음 난 생명을 죽이실 때, 죽임을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가족 대신 죽을 희생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대문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잡고 우슬초 묶음으로 그릇에 담은 피를 적셔 그 피를 문 인방(위, 아래)과 좌우 설주에 바르고 그 밤에 집 안에서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효모를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출 12:5~14).

죽은 양의 피를 보면 여호와께서 그 집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리라” 약속하셨고, “유월절”의 뜻이 바로 “넘어가다”였습니다(출 12:13). 이스라엘은 영원히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출 12:24).
나중에 자녀가 유월절의 의미를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27).

출 12:27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유월절은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모세의 때로부터 예수님의 때까지 약 1500여년간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통해 구원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이 특별한 날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러 오셨지만(요 1:29), 그렇다고 해서 배신자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하지만 유다만 배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던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2절). 

2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대제사장들은 정치적인 영향력과 힘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율법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함께 모여 심각하게 논의합니다(마 26:3). 예수님을 “무슨 방도로 죽일까”에 대한 궁리입니다. 이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참 대제사장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니(요 14:6)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죽이고 싶을만큼 말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으로 백성의 죄를 깨우치게 하고,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고, 구원의 약속을 이루러 왔다고 하자(마 5:17),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율법으로(요 5:39)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고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해서든 고소할 거리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모든 논쟁을 이기시고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약이 바짝 오르고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을 것입니다.

정말 할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백성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부터, 성전에서 가르치는 내내, 예수님을 기대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에 적어도 2백 70만명의 순례가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로마는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대비하여 많은 병사를 투입시켰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도 낮에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명절에 모인 수많은 백성이 민란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었습니다(막 14:2).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몰래 잡아 죽이고 싶어도, 소문 내지 않고 비밀리에 예수님이 묵고 있는 곳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의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해줄 해결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배신자 유다입니다. 유다라면 예수님이 있는 정확한 장소를 그들에게 몰래 알려줄 수 있습니다. 유다가 그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절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가룟인(유대사람) 유다, 그는 열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 중 한 이름 없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택하신 열두 제자, 사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눅 6:12). 

예수님이 몰라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70).

그러면 유다는 어차피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이라 아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았을까요?
그에겐 아무런 은혜도 비취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항상 옆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그분과 교제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잠잠케 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눅 9:1-6).

다른 제자들과 함께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했고(마 14:33),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떠났을 때 남아서 베드로와 함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요 6:68-69).

하지만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마 7:21).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

참된 주의 제자는 단지 주를 지식적으로 알고 부르는 것에 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제자는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가룟 유다는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항상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깊은 사랑과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풍성히 누렸지만, 그분의 말씀을 좇지 않고 따르지 않는 거짓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이라 불렀습니다(요 17:12).

사탄은 이 거짓 제자를 통해 악한 일을 이루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입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간 예수님을 직접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고(마 4), 그 이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막으려 했습니다(마 16:23). 그리고 이번에는 “멸망의 자식” 유다를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사탄의 뜻을 좇아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성전 경비대장들은 로마 군사가 아니라 성전의 경비를 맡은 유대인 경찰 장교들입니다.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논의하는데, 어떻게 예수를 넘겨줄 지 방법을 함께 찾습니다.

당연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어땠을까요? 막힌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겠지요? 그들은 아주 기뻤습니다. 드디어 예수를 잡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배신자 유다에게 예수를 판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 유다는 “내가 예수를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냐?”고 묻습니다(마 26:14). 그리고 당시 노예가 거래되는 가격인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마 26:15). 

그때부터 유다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예수님을 몰래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마 26:16).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2세기 무렵 영지주의 분파에서 쓰인 유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유다에게 ‘나를 팔아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으니 배신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레네오 주교(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의 제자)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말한 것처럼 성경을 통해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어떤 원한이 있었을까요?

후에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은 삼십을 대제사장에게 도로 가져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마 27:3), 그는 예수님에게 어떤 원한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배신한 것일까요?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유다가 돈궤를 맡은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돈궤 안에 있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요 12:6). 한 마디로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 정도로 그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눅 16:13). 한 손에 하나님을 또 다른 손에 돈을 쥘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 유다는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다 나를 사랑하고, 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사랑하고, 세상의 풍조와 내 욕심을 좇는 것, 그것이 죕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 곧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성공, 인기, 명예, 돈, 안정된 삶, 계획대로 이루어진 평탄한 삶, 그런 것을 잡으려 애씁니다. 그래서 언제든 손에 쥔 그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쥔 손을 놓아버리는, 배신자같은 삶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분노하고, 낙심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8).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음도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빌 1:21).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만 붙잡는 삶입니다. 한 손에 다른 것을 잡고 있지 않은 삶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삶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님만 사랑하는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그리스도가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빌 3: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선택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위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줄 준비, 죄인을 위해 희생양으로 대신 죽을 준비를 하셨습니다.

2. 구원을 준비하는 예수님(7~13절)

7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다음날이 되어 목요일,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날을 “무교절”, 마태와 마가는 “무교절의 첫날”(마 26:17; 막 14:12)이라고 부르는데, 유월절을 포함한 전체 절기의 첫 날을 가리킵니다. 니산월(4월) 14일 목요일 저녁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 준비를 위해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핵심적인 제자들입니다.

8절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절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냐?”는 질문을 모든 제자가 함께 합니다(마 26:17; 막 14:12). 그 안에 누가 있었을까요? 배신자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정확한 위치를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했다면 함께 듣고 있던 유다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대제사장들에게 그 장소를 밀고하여 예수님을 잡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주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던 유월절 만찬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눅 22:15).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언약이 맺어졌다는 의미를 설명할 아주 특별한 식사를 하지 못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년 어린양을 죽일 필요가 없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포할 특별한 식사입니다. 

또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임 당하는 그 날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일찍 잡히셨다면 그 정확한 시간보다 먼저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정확한 장소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예전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가서 나귀를 풀어 오고 주인이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함께 먹을 장소를 알려주실 때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정확히 예비하신 장소를 찾아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는데, 원어로 보면 그 사람은 남자입니다. 당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였기 때문에 그는 눈에 쉽게 띄였을 것입니다.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거든 그 주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11절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절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당시 유월절 순례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공간을 내어주었지만, 이 사람은 누가 선생인지, 누가 그 선생의 제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집 주인이 예수님과 이미 이야기를 마친 사람으로 예수님이 미리 유월절 식사하실 곳을 계획하셨다고 말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 집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집이었고, 집 주인은 마가의 아버지였으므로 말이 안 되는 설명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마가의 아버지는 제자들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그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8). 그래서 이것은 미리 계획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으로서 정확하게 장소를 예비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13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성 안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를 따라 집 주인을 만났고, 주인이 보여주는 큰 다락방을 보았습니다. 1층 주인집 위에 올려진 2층의 공간으로 계단을 타고 따로 출입할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큰 방이었습니다. 가운데 테이블이 놓여 있고 누워서 식사할 수 있도록 자리가 펴져 준비 되어 있는 방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당시 한 가족을 대표로 희생양을 제사장에게 가져올 수 있는 최대 인원이 2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내셨는데, 그들은 양 외에도 쓴 나물, 포도주, 무교병 등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먹을 충분한 양식을 준비하느라 바빴을 것이고(막 14:16), 날이 저물어 예수님과 나머지 제자들이 다락방에 합류할 때까지 계속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그 장소를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마 26:20).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죽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셨던 예수님, 베드로와 요한이 그 특별한 만찬을 준비하는 동안 예수님은 배신자 가룟 유다와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그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그분은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그분의 영광을 계속해서 비추셨을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다락방에 모든 제자가 모였을 때, 마귀는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지만, 예수님은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요 13:2-5). 

떡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유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말씀하시고, 그와 저녁을 함께 먹고 잔을 그와 함께 나누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14~20).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심령이 괴로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토로하셨습니다(요 13:21).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던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예수님은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까지 그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기를 팔아서 살인자의 손에 넘길 사람을 처음부터 알았으면서 다른 제자와 똑같이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고, 자기를 넘길 기회만 찾고 있는 제자의 발을 씻기고, 그에게 자기 살과 피의 의미를 설명하며 돌아올 기회를 주는 사랑,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영생을 얻기를 끝까지 오래 참고 온유하게 기다리는 사랑

유월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얼마나 오래 방황하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생을 받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외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더 이상 배신하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불신하지 말라고, 하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외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그 사랑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하라고, 형제 자매를 그 사랑으로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라고, 그 사랑 때문에 모이기에 힘쓰고, 그 사랑 때문에 봉사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나가 전파하라고 우리를 강권합니다. 여러분 그 사랑의 부르심을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오늘 돌이키십시오. 오늘 순종하십시오. 오늘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으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배신하는 연약한 우리를 일으키는 유일한 힘은 주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04-03-2024(수) 누가복음 2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Then Satan entered Judas, called Iscariot, one of the Twelve.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는 누구나 속죄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제물로 준비하셨습니다.
제물을 죽이려면 누군가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품게 하므로 희생 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생각을 통하여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의 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의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만드는 것은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도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반드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만일 잘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후에 그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은 30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고 합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집어 넣는 생각의 특징은 부정한 것이며 거짓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했던 12명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그 땅을 목격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대한 고백은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와 있다로 나뉘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차지할 수 없다는 정탐꾼들의 수가 월등하게 많습니다.
그만큼 사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대부분의 부정적인 것들이 세상을 차지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참된 것은 오히려 그 수가 적기 때문에 마치 거짓에 의해서 쫓겨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진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교훈을 잊지 마시고 언제나 진리편에 설 수 있는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부정한 생각을 거룩한 생각으로 다스리며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기도합시다.

십자가 군병들아



존 파이퍼 / 사탄의 열 가지 전략

존 파이퍼 목사
자신이 운영 중인 '하나님을향한갈망'(DesiringofGod.org) 블로그에
'여러분을 향한 사탄의 10가지 전략'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삶에 있어서 우리를 가장 각성시키는 사실은 모든 인류에게 초자연적인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의 목적은 고통과 기쁨을 이용하여 영원히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그를 '마귀 그리고 사탄, 전 세계를 속이는 자, 참소자(12:9~10), 세상의 주관자(요 12:31),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표현한다.

사탄의 공격 방법
그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우리의 대적(벧전 5:8).

그러나 가장 끔찍하고 원치않는 구속 가운데,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 2:2)을 따르고 있다.
사탄의 길은 분명히 파멸이며, 사탄은 가능한 많은 이들을 자신의 길로 끌고가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깨어 전쟁에 임하라'는 제목으로 기록한 '선한 싸움'(딤 1:18)에는 날마다 이 원수를 대적하고(벧전 5:9, 약 4:7), 날마다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엡 4:27), 날마다 그의 계략에 대항하는(엡 6:11) 것들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사탄의 열 가지 전략

1. 거짓말쟁, 거짓의 아비(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니니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거짓을 말한다. 그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의 입술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진리에 대한 의심이었다("하나님께서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두 번째 나온 말은 교묘한 거짓말이었다("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린다(고린도후서 4:4)

이 세상의 신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그는 거짓을 말할 뿐 아니라 참된 것을 숨긴다. 그는 복음의 귀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우리가 사실과 증거들을 보면서도, 그 귀한 가치는 알지 못하도록 가리운다.

3. 빛과 의로움의 옷으로 가장(고린도후서 11:13-15)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체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이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탄의 종들이 스스로를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즉, 겉으로는 교회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말하지만 안으로는 바울 사도가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사탄의 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마7:15)와 같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20장 30절 말씀은 이들이 무리들을 끌어내어 멸망으로 이끈다고 기록돼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별의 은사(빌1:9)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우둔함에 빠질 수 있다.

4. 사탄은 기적을 행한다.

데로니가후서 2장 9절은 마지막 날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마치 이러한 기적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사탄이 거짓된 기적들만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설령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사탄의 거짓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 충분히 진짜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해 죄짓게 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계실 때, 그분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고통과 순종의 길을 포기하길 바랬다(마4:1~11).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삶에서 유다를 유혹하는데는 성공했다(눅22:3~6).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전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6.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고, 신앙을 죽인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에 나타난 4가지 밭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땅에 뿌려지는데 일부 씨앗은 길 가에 뿌려져서 새들이 재빨리 먹어버린다. 주님은 15절에서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말씀을 빼앗아간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롬 10:17).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염려의 말씀을 전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신앙을 죽이려는 사탄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7. 아픔과 질병(누가복음 13: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허리가 굽어져서 스스로 펼 수 없는 한 여인을 치유해주셨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이같은 일을 행한다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은 "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같은 질병의 원인이 사탄에게 있음을 아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증거한다. 즉, 사탄이 병으로 사람들을 누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의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분명 '육체의 가시'가 우리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사탄의 사자가 될 수 있다(고후 12:7). 그러나 질병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인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운 계획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을 데려올 필요를 못 느끼셨다.

8. 살인자(요한복음 8:44)

너희는 마귀의 아비로부터 나왔고, 그 아비의 일을 행하려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요한 사도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라고 하였다(요일 3:12).

서머나 교회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하였다(계 2:10).

사탄은 피에 굶주려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충만케 하려고(요10:10)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사탄은 할 수 있는대로 생명을 빼앗고, 결국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고자 한다.

9. 사역자들의 계획을 대적(데살로니가전거 2:17-18)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은 전도와 제자도를 싫어한다.
그는 선교사들을 비롯해 전도에 열정이 있는 이들의 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해물들을 던져 놓는다.

10. 성도들을 고소한다(요한계시록 12:10)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나고.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러나 그의 고소는 그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 될 것이다.

사탄은 욥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한다.
사탄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해 "그들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이 주시는 이익만 바라본다"고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그들의 신앙은 진짜가 아니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분(히 7:25)'이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영광스럽다.

사탄은 결국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그리스도를 굳건히 붙드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골로새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마가복음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인 가롯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
예수님이 직접 선발하신 12제자중 하나이고,
하나님이신 예수님 가까이서 3년을 지냈어도 사단이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사단에 잡혀서
큰 죄를 지을 것을 알면서도 제자에게 들어가 있는 사단을 쫒아주지 않으셨다.

가롯 유다는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틈을 열어 두었고,
예수님은 유다의 선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셨다.
유다가 자신에게 사단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회개하였으면
주님은 그때 유다에게서 사단을 몰아내어 주셨을 것이다.

오늘 이른 새벽에 마귀에 이끌려서 갖고 있던 것들을 버렸다.
사단에게 마음과 시간을 뺏겨서는 안된다.
언제 떠나도 괜찮도록 부끄러움을 주는 흔적들은 정리해 나가자.
 

주님!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혹시 제게 사단이 들어오게 되면 성령의 도움으로 즉시 감지하게 하시고,
바로 회개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1. 사단에 대해 민감할 수 있도록 기도에 게으르지 말 것 
2. 불필요한 것들 가지고 있지 말 것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방책을 연구하고 있을 때, 때마침 가룟 유다가 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했습니다.
백성들이 무서워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는데 가룟 유다가 찾아 온 것입니다.
도대체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그들에게 돈을 받고 팔 생각을 했을까요?
유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단은 영적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사단은 증오와 적개심이 가득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단은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거래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은 유다에게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합니다.

​31. 사단은 성도를 감옥에 던져 환난을 당하게 합니다.

​계 2 :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32.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계 12 :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33.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믿는 자들을 참소합니다.

​계 12 :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34. 사단은 지상에 큰 재앙을 일으킵니라.

​계 12 :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35.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하는 이 세상 신입니다.

​고후 4 :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36. 사단은 이 세상 임금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입니다.

​엡 2 :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7. 사단은 흑암의 권세 자입니다.

​골 1 :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38. 사단은 귀신의 왕입니다.

​마 12 :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39. 사단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마 12 :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0. 사단은 악한 영입니다.

​마 13 :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1. 사단은 가인을 통해 아벨을 죽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또 다른 아들 셋을 주셨습니다.

​창  4 :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 사단은 세상사람들을 사악하게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창 6 :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43. 사단은 에서를 통해서 야곱을 죽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창 27 : 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4. 사단은 바로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처음난 남자를 다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원하셨습니다.

​출 2 :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45. 사단은 다윗의 아들들이 서로 죽이며 권력다툼을 하게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 명의 생명은 보존하셨습니다.

​삼하 13 :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46. 사단은 하만을 이용해서 유다민족을 멸절하려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통해서 민족을 살려주셨습니다.

​에 4 :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47. 사단은 헤롯 왕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현몽하여 예수님을 보호하셨습니다.

​마 2 :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48.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실패하게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마 4 :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9. 사단은 세상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요 19 :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마 28 :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사단은 지금도 사람을 속이고 불신하고 실족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대적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않으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정신은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마 28 :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는 분명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그에게 사단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고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노렸던 대상은 가룟 유다 뿐 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포함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어 사단의 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사단에게 패배하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3:2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이미 오래전부터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넣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4:7에서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마음에서 “악한 생각”을 다스려 제거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을 다스리지 못한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유다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마음을 잘 다스려 악한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들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사단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자희들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도와주옵소서.
마귀를 대적하게 하시고 악한 생각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언제나 말씀과 기도로 살게 하옵소서.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께서 인도해 주심을 믿고 언제나 믿음으로만 나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실수하지 않게 하시고 조금이라도 악의 모양을 흉내 내지 않게 히옵시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한 페친의 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게 됐다.
그의 아들 결혼식 때 친구가 보낸 축의금 얘기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아들 결혼식 축의금으로 백만 원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때 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그는 사정을 알고 거금을 보내준 친구가 너무도 고마워서 콧등이 시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 백만 원은 큰 힘이 되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데 그런 그에게 문제가 하나 생겨났다.
얼마 전 그 친구로부터 아들의 결혼 청첩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에게 백만 원 받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번엔 자기 차례가 된 것이다.
축하해줘야 하는 기쁜 마음보다도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그때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도 그만한 액수를 축의금으로 내야 한다.
하지만 살기에도 빠듯한 현재의 어려운 형편 탓에 똑같은 액수의 축의금을 어떻게 마련할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백만 원 축의금을 받아 힘든 살림에 보태 쓰면서 누렸던 행복과 고마움이 한순간 깊은 염려와 부담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마침내 아내와 상의를 한 결과 빚을 내서라도 그에게 백만 원의 축의금을 하기로 결정했다.

 

[4] 사실 축의금이란 축하의 의미로 선물하는 돈이기도 하지만 서로 상부상조한다는 뜻도 있다. 결국 빚을 내서 마련한 백만 원을 가지고서 결혼식장에 갔다. 친구는 와줘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손님들 때문에 바쁜 틈이지만 안부까지 물어주는 것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부부는 돈을 빌려서라도 빚을 갚게 된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일 같은 금액의 축의금을 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보다 큰 마음의 빚으로 남을 것 같았다고 한다.

 

[5] 그런데 며칠 후 집으로 등기 우편이 배달이 되었는데 발신인은 며칠 전에 혼례를 치룬 그의 친구였다. 결혼식에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카드를 등기로 보냈나 하고 뜯어 봤더니 낯익은 친구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 형편을 다 아는데 축의금이 다 뭐야?

그리고 어려운 자네 형편에 백만 원이 무슨 소리야?

 

[6] 만원이면 족하네.

여기 구십구만 원을 돌려보내니 그리 알게.

이 돈을 안 받는다면 자네를 친구로 생각지 않겠네.”

그 내용과 함께 구십구만 원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다음은 그 글의 내용과 함께 친구가 보낸 구십구만 원짜리 수표를 받아든 내 페친의 글이다.

 

[7]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런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요!

진정한 친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8] 날이 가면 갈수록 정서가 메마르고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엔 눈물겨운 일도 감동받는 일도 많았건만 지금은 그럴 일이 별로 없다.

이런 때에 오랜 만에 깊은 감동을 주는 스토리가 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페친의 친구가 보인 친구를 향한 배려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페친의 에피소드에 모처럼 크게 행복한 하루가 된 것 같다.

 

[9] 오늘 내게는 이런 친구가 몇 있는지? 아니 나는 다른 이에게 이런 친구가 되고 있는지? 우리에겐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친구’(요 15:13) 말이다. 누구일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신 친구는 없다.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주변 친구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오늘 페친의 친구처럼 언제나 감동과 감격을 주며 사는 참 친구가 되어야겠다.





사탄의 계교에 무너진 가룟 유다(누가복음 22:1-6)

22장은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의 제3일인 화요일에 발생한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1-6절)으로 시작하여 제6일인 금요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체포 사건과 공회에서의 심문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이 예언되고 성만찬이 제정되며,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의 예언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최후의 기도 및 예수의 체포와 심문이 이어지는 매우 급박한 사건 가운데서도 본서 저자 누가가 특별히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22장에서 강조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첫문단에서 시작된 가룟 유다의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음모(1-6절)가 마지막 부분에서 산헤드린에 의해서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 주며(63-71절), 그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일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24-30절)과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하며 겟세마네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잠을 자는 제자들의 모습과(39-46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54-62 절) 등을 보여 줌으로써 구속사가 성취되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전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한없이 무디고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장의 첫문단인 1-6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인 1, 2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산헤드린의 예수 살해 음모와 관련한 고민을 다루며, 후반부인 3-6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을 다룬다.
즉 1, 2절은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정했지만, 백성들 때문에 두려워하는 모습을 기록했으며, 3-6절은 가룟 유다가 산헤드린을 찾아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으나(마 26:1-16 ; 막 14:1-11) 그 구성이 조금 다르다.
마태와 마가는 산헤드린의 고민과 가룟 유다의 배반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록한 반면에(마 26:6-13 ; 막 14:3-9) 누가는 이 기록을 생략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향유를 부은 자를 책망한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은 정확히 그가 가룟 유다임을 밝혔다(요 12:4).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록에 근거해서 마태와 마가복음을 자세히 보면 돈을 사랑하는 가룟 유다의 심경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마태와 마가 및 요한은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하게 된 심경의 변화 단계를 보여 주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갑작스럽게 가룟 유다의 배신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누가는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독특한 표현을 통하여 가룟 유다의 배신의 근본 원인이 무엇임을 분명히 밝히지만(3절) 그의 본성의 단면과 심경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 향유 도유 사건은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전 토요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의 불신앙과 마리아의 헌신된 신앙을 비교하기 위해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기록한 것이다.

​반면 누가는 과감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강조할 것은 강조하면서 마태와 마가보다 더 정확한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22:1-6의 첫 문단은 고난 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예수를 살해하고자 혈안이 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이 배반자 가롯유다와 결탁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자 음모를 꾸민 사실을 보도한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유월절이라 불리는 무교절’이 된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로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출 12:8-11).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정월인 니산월 14일 저녁에 4일 전에 준비한 1년된 홈없는 양을 잡아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먹었다.
이것은 B.C. 1446년에 있었던 출애굽할 때 상황을 재현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늘 기억하며 감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의식이다.

​그리고 무교절은 그 다음 날 아침부터 1주일 간 무교병을 먹으면서 출애굽 당시 발효하지 않은 빵을 먹은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무교절은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누가가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연속성으로 인해 이 둘을 한 절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는 아예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표현하여 같은 날처럼 기록하였다(막 14:1).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런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 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본절은 당시 유대의 최고 입법 · 사법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 차원에서 예수를 제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일꼬’로 번역된 ‘아넬로신’의 원형 ‘아나이 레오'는 ‘위로’라는 뜻의 ‘아나’와 ‘취하다’는 뜻의 ‘하이레오마이’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땅에서부터 들어올리다’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물에 사용되면 ‘제거하다’, ‘폐지하다’는 뜻을 갖고(히 10:9), 사람에게 사용되면 ‘살해하다(slay)', ‘죽이다’는 뜻을 가진다(마 2:16).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 었으며 존재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연구하니’로 번역된 ‘에제툰’은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제테오’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어느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매우 집요하게 노력하였음을 의미한다.

누가는 본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는 데 반해 마태와 마가는 그들이 두려워한 구체적 내용, 즉 민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마 26:5 ; 막 14:2). 사실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할 때 예수를 메시야나 선지자로 알고 따르던 무리들의 소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음해하려 할 때 항상 발생하는 걸림돌이었다(눅 19:48).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사탄이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로 들어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반 사건이며 인간이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전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가룟 유다의 배반이 3-6절까지 기록되었다.

이 문단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죽일 방책을 찾으며 고민하는 산헤드린을 찾아가 함께 예수님을 죽일 방책을 의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와 마가는 2절과 3절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발생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을 기록했다(마 26:6-13 ; 막 14:3-9).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기록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자 돈을 좋아하는 가룟 유다의 성향을 잘 보여 주는 사건으로 향유 도유 사건을 제시했지만, 누가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이유조차 제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 즉 누가는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공관 복음은 모두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마치 유다가 인간적 동기로서 스스로 산헤드린에 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마 26:14 ; 막 14:10), 누가는 사단이 산헤드린으로 가도록 원인 제공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들어가니’로 번역된 ‘에이셀멘’의 원형 ‘에이세르코마이’는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나타내는 단어로서(눅 9:46), 본절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단의 영향력을 가리킨다(행 5:3). 누가는 유다의 배신의 궁극적인 원인은 사단에게 있다고 분명히 지적한다. 이러한 기록은 요한복음에 더 자세하게 나타난다.

요한은 사단이 마음속에 들어가는 과정을 2단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첫번째 단계는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고’(요 13:2)이며, 두 번째 단계는 ‘사단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요 13:27)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수난이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유다 배후에 있는 사단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단지 유다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사단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 광야에서의 유혹이 실패한 후(눅 4:13) 다시 본절에서 예수님을 향한 강력한 도전을 하고 있다. 광야에서 실패한 뒤 사단은 자신이 부리는 종 귀신들을 통해 역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은 날로 쇠약해져만 갔고(눅 13:16), 하나님의 나라는 날로 왕성해져 갔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바로 앞에 두고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된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부름 받은 자라 하더라도 전심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사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엄청난 반역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순수한 동기를 저버리고 탐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요 12:6) 사단은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들과 더불어,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였다.

아마도 마태의 기록처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는 식의 유다의 흥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마 26:15). 그리고 산헤드린의 주된 고민거리였던 민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수 주위에 무리가 없을 때를 포착해 잡기로 의논했을 것이고(6절), 잡을 때에는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을 신호로 삼기로 정했을 것이다(48절). 물론 이 모든 일은 사단에 사로잡힌 유다가 능동적으로 주도하여 나갔을 것이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은전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어 스승 예수를 원수의 손에 넘긴 탐욕에 눈이 먼 유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데에는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진 것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가 있었으며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유다에게 접근 했을 것이지만 탐욕도 주된 원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구약에서 발람이 그랬던 것처럼 가룟 유다 또한 동일하게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사단의 도구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값비싼 향유로 헌신하는 마리아의 향유를 아까워했던(요 12:6) 유다는 결국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재물에 대한 탐심을 가지는 것은 마음의 열쇠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유다는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테르 오클 루’는 ‘무리가 없을 때’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마태와 마가의 병행 구절에 나오는 바대로 ‘민란’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는 직접 ‘민란이나 소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시적 언어와 중의적 단어를 결합시켜 독자로 하여금 동일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문학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대제사장들이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이유는 많은 무리로 인하여 일어 날 수 있는 민요를 두려워했기 때문임이 본절의 묘사 가운데서도 잘 드러난다.

예수를 잡으려는 음모 ( 22:1-6 )

무교절이 가까운 때에 그리스도를 넘겨 주었다(1절)

1. 원수들의 음모(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음 먹기만 하면 곧 실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 했다.

2. 그들과 결탁한 배신자 가롯 유다(3,4)

가롯 유다는 열 둘 중에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열 둘 중의 하나가 비열하게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다. 즉 사단이 들어간 것이다(3절). 그것은 마귀의 소행이었다. 그리스도나 그의 진리나 그의 길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단이다.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를 유다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4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의논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3. 그들 사이에 맺은 협정(5,6)

1)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틀림없이 넘겨주기로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기뻐했다.

2) 그 대가로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했으며 유다는 이를 기뻐했다(5절). 저희가…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유다는 찾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일을 행할 시간과 장소 즉 무리가 없을 때 소동 없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가룟 사람 유다’란 뜻.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유다를 말한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양하다’는 뜻이다.
예수의 제자 중 ‘다대오’라 불리는 유다(야고보의 아들, 마 10:3)와 구별하기 위해(요 14:22) ‘가룟 유다’라 칭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았고(마 10:1-2; 막 3:19; 눅 6:13), 회계 관리자(요 12:6; 13:29)로 재정 일을 맡아보았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마 27:3).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그러나 진실된 회개는 하지 않았다)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은 30을 성소에 던진 뒤(마 27:3-5) 자살하였다(마 27:5; 행 1:18).
마태는 그가 목매어 죽었다고 하고(마 27:5), 누가는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전한다(행 1:18).












04-02-2024(화) 누가복음 21:34-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깨어 있으라(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Be always on the watch, and pray that you may be able to escape all that is about to happen, and 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3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모든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고”, 그것은 곧 아침 일찍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일부터 체포되신 날까지 “밤에는 감람원에 가서 쉬셨고,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37절). 매일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에 힘쓰셨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 또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가르침의 핵심 주제는 “종말”이었습니다(마 24-25(97구절) –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막 13 – 집주인, 종).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마다 말씀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행 1:3).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렇게 간절히 제자들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고 잘 준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설명하신 종말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장차 올 모든 일을 준비해야 할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J. C. 라일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여기에 나타난 본문보다도 더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362p)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주 오심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태도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1. 종말을 기다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오늘날 교회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이 다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35절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여기서 “이날”은 언제를 가리킬까요? “이날”은 휴거의 날이 아니라 유대인 속량의 날입니다(눅 21:28).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는 날입니다(21:31).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천사들이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택하신 유대인을 불러 구원하실 것이고(막 13:27), 반대로 온 사방에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죗값을 치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구원 혹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구원을, 믿지 않고 거절한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날 전에 구원받은 이방인들,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이방인의 때가 차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는 이날이 오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홀연히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주님의 호령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집니다. 휴거됩니다(살전 4:16-17).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 땅에 남겨져 환난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일이 다릅니다. 또 36절을 보십시오.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 제자들에게(“너희는”)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장차 올 이 모든 일”은 무엇입니까? 인자의 오심과 그 직전에 있을 온갖 무서운 재난과 일월성신의 징벌입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일을 능히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피한다는 말은 단지 목숨을 보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잘 대비한들 어떻게 그 무서운 진노를 다 피하겠습니까? 실제로 진노의 날에 많은 사람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계 6:17). 

하지만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능히 그들을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들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유 1:24).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살든지 혹은 죽든지 결국 인자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재난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항상,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이미 구원받은 이방인인 우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전에 끌어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환난을 피하고 잘 대비해야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앞에 서겠지만, 우리는 환난 전에 공중에 임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공중으로 끌어 올려져 모든 환난을 피하고 그리스도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 전에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과 일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또한 “항상 기도하라”와 “깨어 있으라”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날과 기다리는 일은 다르지만, 그 날과 그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휴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깨어 있으라”에 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교회가 기다리는 종말에 대한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통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4장에서 성도에게 임할 휴거에 대해 가르치고 나서 5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먼저 때와 시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살전 5:1~3).

살전 5장 1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절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교회가 기다리는 “주의 날” 곧 휴거의 때가 언제 어떻게 이른다고요? “밤에 도둑같이”(2), 예상하지 못한 그 때 “갑자기”(3) 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해산의 고통이 이르는 것처럼, 주가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휴거는 청천벽력같은 멸망의 선포입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주의 날” 역시 갑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1장 34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들에겐 징조가 있습니다. 창세 전후로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재난이 있고, 그 후로는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고 땅과 바다가 요동치는 무서운 징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 따위로 마음이 둔해져 그날을 갑자기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짐승이 방심하다가 덫에 갑자기 순식간에 걸려드는 것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대책 없이 그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아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합니다(마 24:37~39). 어떻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징조를 보고도 멸망할 때까지 깨닫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심각할 정도로 나약하고 나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진노를 앞둔 유대인들이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면 징조 없이 도둑같이 갑자기 나타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 오심을 잘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절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절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종말을 기다리는 자세: 깨어 있으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과 동일한 명령 “깨어 있으라”를 발견합니다. 6절에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그리고 8절에 “정신을 차리고…”입니다.

“정신 차리라”, “깨어 있으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지 않으면 각자 알아서 해석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깨어 있으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종말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도구)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오해: 재물사용/항상 생각하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들을 명확히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성도를 가리켜 “우리” 혹은 “너희”라고 말하고 성도가 아닌 자를 “다른 이들”(3) 혹은 “그들”(6)이라고 말합니다.

또 성도는 “낮에 속하였다”(8)고 말합니다. 특히 5절을 보시면 성도는 “빛의 아들들”, “낮의 아들들”로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반면에 성도가 아닌 이들은 “자는 자”, “취하는 자”라고 말하며 그들은 “밤에 자고, 밤에 취한다”고 말합니다(7절). 밤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는 빛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는 빛과 사귐이 있는 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요일 1:7).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밖에 있는 어둠 혹은 밤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들은 하나님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냥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 ‘자는 것’ 혹은 ‘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여 그분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죄), 그것이 밤에 속한 자, 어둠에 속한 자의 당연한 삶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세상 풍조 속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입니다(엡 2:21-3).

하지만 반대로 빛에 속한 자, 낮의 아들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들은 밤에 속한 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요일 1:6). 

밝은 대낮에 보통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과 항상 사귐을 갖는 성도는 낮의 아들로서 빛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롬 12:2).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 이것이 깨어있는 삶,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단순히 내일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으로 돈을 사용하는 삶이 아닙니다. 단지 항상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만 갖고 있는 삶도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입니다.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방해물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술취함, 방탕함같은 죄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생활의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수고와 슬픔). 이러한 것들은 우리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소속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땅이 내가 속한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령한 복보다는 보이는 이 땅의 재물을, 측량할 수 없는 하늘의 보상보다는 측량 가능한 이 땅에서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둔해진 마음으로 살게 되면 계속해서 하나님께 속한 기쁨이 아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닌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빠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나 오실 주님을 대놓고 부인하지 않지만, 현재의 삶에서 그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잠자는 삶입니다.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악을 멀리하는 일에도, 하나님을 위해 선을 행하는 일에도 지나치게 소극적입니다. 어떻게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

바울은 세 가지 깨어 있기 위한 도구 혹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본문에서는 호심경(갑옷의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붙이던 구리 조각, 방탄조끼)와 투구라는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둘 다 보호하는 방어용 도구입니다. 전쟁에서 팔 다리를 잃어도 죽지는 않지만 심장이나 머리가 상하면 죽습니다. 호심경과 투구는 전쟁 중에 그런 치명적인 부상에서 보호해주는 필수 무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게, 악에 빠지지 않게, 마음이 둔하여 져서 잠들지 않게 막아주는 필수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1. 믿음

첫째로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요일 5:4).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유익한 삶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해 불신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생생하고 피부에 와닿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우리가 이 땅에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고후 4:18). 우리에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약속하신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고, 뜻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믿음을 두십시오. 

생활의 염려가 여러분의 심장을 겨눌 때, 세상의 유혹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려고 할 때, 믿음의 방패로 막으십시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어떠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 내게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구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약 1:6).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굳건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롬 10:17). 그 말씀을 많이 읽고, 오래 묵상하고, 하루 종일 읊조리며 그 말씀으로 약속하신 이를 굳게 믿으십시오.

  1. 사랑

심장을 보호하는 호심경의 또 다른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이 이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주 오심을 그렇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간절히 바라지 못할까요? 왜 당장의 생활의 염려나 술취함, 방탕함 등에 쉽게 빠져 영원한 복, 영광스러운 주를 잊어버리며 살까요?

결국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먼 지역에 출장갔을 때, 빨리 집에 돌아와 쉬고 싶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는 가족들과 빨리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빨리 그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 아름답고 멋진 해외 여러 나라를 여행해도 집에 오면 항상 하는 말, “역시 집이 최고야” 아닙니까? 내가 진짜 쉴 수 있고, 나를 가장 잘 알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소속된 바로 그곳이 집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만큼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자기 나라를 사랑해서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지음 받은 사람이 지으신 이를 만나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빛과 사귐이 있는 자가 참 빛이신 하나님을 직접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생활의 염려따위에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 어떤 것을 가져다 주어도 그 유혹을 능히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주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의 마음이 확실히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직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주를 사랑하면 당연히 주를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칭찬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1:6-7). 그러면서 그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주를 사랑하면 주를 위한 고난도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우리를 깨어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이 깨어 있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라”(요 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더욱 주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소망

마지막으로 소망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만, 본문이 말하고 있는 소망은 구원에 둔 소망입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해 각자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죗값을 다 지불하셔서 더 이상 죄가 없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따라오는 말씀에서 이렇게 구원을 설명합니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먼저 구원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피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내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그분의 온전한 의로움을 내게 옷입히셨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죄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롬 8:1). 여기까지는 구원을 이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10절을 보시면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깨어 있든지(살아 있든지) 혹은 자든지(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와 영원히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우리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한 연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가 누리고, 그리스도의 상속을 내가 함께 누리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나도 참여하여 함께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친밀한 교제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히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사시는데 겨우 생활의 염려때문에, 세상이 주는 짧은 쾌락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나와 함께 살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서 탄식하는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부인하며 잠자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영광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나의 신랑, 나와 한 몸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성령이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 심장을 뛰게 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주 예수와 날마다 함께 살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주 예수와 동행하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깨어 기다리는 삶은 각자 혼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와 연합하셨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권면합시다. 잠자는 사람이 있나 서로 살펴보고 깨워 줍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사람들을 보거든 말씀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줍시다. 어리고 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말씀을 들려줌으로 믿음에서 자라나도록 도와줍시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믿으라”고 강하게 권면합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주가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서로 일깨워 줍시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보여줍시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그보다 얼마나 더 사랑스럽고 고귀한 분인지 말해줍시다.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내 삶을 통해 그들의 삶을 뜨겁게 세워줍시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만이 남는 삶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계속해서 알려 줍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잘 쓰고 있는지 서로 확인해 줍시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우리의 소망으로 두고 있는지, 아니면 불타버릴 이 세상의 것에 우리 소망을 두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교제합시다.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서로에게 말해주면서 그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깨어 있으라

헬라어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가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11구절로 나타납니다.

깨어 있으라는 헬라어단어는 "그레고래오(γρηγορεω)"라고 합니다.
"그레고레오"는 "방심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 있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어 있으라(그래고래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스트롱번호 1127

1. 깨어 있다.  2. 마태복음 24:43.  3. 정신차리고 있다
발음 [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깨어 있다, 경성하다.
 a.  [문자적으로] 마 24:43, 26:38, 40, 막 13:34, 14:34, 37, 눅 12:37,39.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 24:42, 25:13, 26:41, 막 13:35,37, 14:38, 행 20:31, 고전 16:13, 살전 5:6, 10,  벧전5:8, 골 4:2, 계 3:2,3, 16:15.


이 단어는 신약에서 중요한 여러 가지의 다른 사용법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의미와 차원들을 연구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이해하길 원합니다.

먼저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서 이 깨어 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논의 하겠습니다.

첫째,  신약에서의 사용법과 의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헬라어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깨어 있으라(watch)’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 주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므로 그 의미들을 알아야합니다.

1. 헬라 원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사용되었으며, 그분께서 밤에 도둑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24:42; 마태복음 25:13; 누가복음 12:37. 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 10절에서도 이 말씀이 사용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분의 오심이 밤에 도둑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즉, 이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혼이 그분께서 신랑으로서의 오심을 위해 준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당신의 오심이 홀연한 오심이라고 경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일어나 깨어서 지켜 보도록 합시다!

둘째, 주님과 함께 하는 고통의 교제로서 깨어 있는 것

그 단어는 겟세마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주님께서 당신의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하도록 초대하고 계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가 이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고난 가운데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고통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막힘 없이  그분의 고난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대로 그분과의 큰 친밀감과 뚜렷함/확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셋째, 원수로부터 오는 시험과 전쟁에서 구원 받기 위해 깨어 있음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가복음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지켜지거나 보호 받지 못하거나 사단의 함정에서 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요한계시록 12:10).

이것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소하는 자가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를 고발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 깨어 있음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넷째,  이 단어를 사용하여 강조된 또 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 삶에서 견고하고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와 감사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3-14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새번역 – 고린도전서 16: 13, 14)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많은 성인들이 그의 영적인 제자였던, 소경인 성 디디무스(4세기)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에 대해 훈련되고 준비된 군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우리를 주님을 위한 군인으로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그러므로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입대한 군인이 되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영으로 기도를 굳건히 계속하고, 인내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사역과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떠나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양떼를 깨어 보살피라고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2-3
사도 요한이 사데의 교회의 사자에게 그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인 영적으로 약한 양떼를 향해 깨어나라고 명령하는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7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섬김을 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지키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데 있어서 깨어 있고 굳건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이 단어가 발생한 여러 성경 구절을 살펴 본 후,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크고 위대한 은혜를, 즉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 나눔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지금까지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깨어 있음”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가기 전에, 구별되고 뚜렷한 영적 은사로써 “깨어 있음”에 대한 교부들의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 시나이의 성 헤시키오스 (7/8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생각을 지키면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은 마음의 입구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고치고 멈추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연습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를 욕망의 생각들과 정욕의 말들, 그리고 악한 행동들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킵니다.’

  •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7/8 세기):

‘지성/이성에 대한 주의와 깨어 있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악마로부터 구조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 시나이의 성 필로테오스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우리의 주의함/깨어 있음과 기도가 매일 함께 합쳐지게 되면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열왕기하2:11) 되어 우리를 하늘로 올라가게 합니다!’

두 번째 : 어떻게 하면 영적 깨어 있음의 은사와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포인트를 나누겠습니다:

  1. 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짐
  2. 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것
  3. 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4. 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이 포인트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

우리가 앞서 성경과 교부들의 어록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축복과 특성들과 함께 영적으로 깨어 있음의 은사를 받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깨어 있음, 또는 경각심은, 우리의 영혼을 세우는 에 대해 주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세워진 속사람 안에는 깨어 있음의 은혜와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의 성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 복음 16:1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세우시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교회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음)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지은 자가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브리서 3: 3, 4).

바울은 또한 자신이 섬기는 교회들의 영적 건축과 덕을 세우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혜로운 건축자라고 (고린도전서 3:10) 부릅니다.

 이 영적인 세움/건축은 우리에게 다음을 요구합니다:

  • 매일 성령 안에서 걸음으로써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서 살아있도록 하며, 또한 새롭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우리의 행동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말 가운데 합당하고 마땅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행동이 세상의 사람들의 행동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또한, 때로는 우리의 말이 부정적이거나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판단/정죄하거나, 거친 농담을 하거나, 수다와 험담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깨어 있음의 첫 번째 영역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일상의 행동들을 지키는 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볼 수 있도록 적합하고 적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 14)

우리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밖의 것들을 주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로 당신의 은혜와 덕을 허락하십니다.

기록 되기를: […] 믿음에 덕을 […]  더하라 (베드로후서 1:5)

2.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우리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분열되고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의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분열되고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1:8)

이 구절의 다른 번역들을 볼 때 우리가 이 분열과 나뉨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라는 문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오래된 번역 중 하나인 콥틱의 번역도 “두 마음의 사람/double-hearted man” 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Young Literal Translation (YLT)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개의 혼의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안정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정결함과 일관성을 가로 막으며 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NLT)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뉘었다.”

그러므로 시편 86: 11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86: 11)

마음과 양심의 영적 민감성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자신이 죄를 지으면 즉시 자신을 찔렀습니다.

사무엘상 24: 5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무엘상 24: 5)

또한 사무엘하 24:10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일을 행함으로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사울이 다윗의 뒤를 쫓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고난을 안겨줬는데 다윗이 겨우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고 해서 왜 다윗의 마음과 양심이 가책을 느겼는지 우리는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지도 않았는데요! 그의 겉옷 한 귀퉁이만 베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또한 왜 다윗의 마음이 단지 백성의 수를 세었다고 자신을 찌르고 가책을 느낄까 궁금해 할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위해 단순히 백성의 힘을 알기 위한 것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영적으로 민감한 다윗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정복하는 것이 백성을 강건케 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것이지, 백성의 능력과 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성 티콘, 모스코바의 총대주교(19세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은 마음에 있지 않다면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악이 마음 속에 없다면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은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발은 악을 향하여 걷지 않을 것이며, 혀와 입술은 악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눈은 악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나 마음은 악을 원하지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대해 깨어 있으며, 악함과 분열됨으로부터 지킬 때, 우리는 순전한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 민감한 양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발견한 책의 기록된 말씀을 읽고 백성의 상태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낸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곳과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곳과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역대하 34: 27, 28).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더 이상 부드럽지 않는 딱딱하고 굳어진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물 또한 말라버린 것입니다!

선지자 요엘의 말을 기억합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엘2: 12, 13).

여기서 선한/좋은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 디모데전서 1: 5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디모데전서 1: 5)

  • 또한, 사도 바울은 유대 공회 앞에서 자신의 변호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선한 양심/good conscience)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사도행전23: 1).

  • 사도는 다음 장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동일한 것을 다시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사도행전 24: 16).

  • 사도 바울은 제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디모데후서1: 3).

  • 사도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우리의 주의를 끌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 22).

악한 양심은 타인과의 부정적인 경험이, 사랑과 용서의 부족으로 축적되어 그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많은 막힘과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브리서 13: 18).

이 신성한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얻고, 모든 악함이 비워진,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얻으며, 선한 양심을 얻어야 할 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을 수 있고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이 위대한 덕을 얻을 준비가 되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또한  마지막 때에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는 악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제가 연합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많이 드렸지만, 여기서 몇 가지의 포인트를 추가하기 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리 시대 가운데 원수가 일하는 주요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연합을 파괴하거나 약화시켜서 영적인 권위와 여러 다양한 특권을 상실하게 하는 원수의 주요 분야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원수는 대부분 우리의 감각들, 즉, 눈과 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것을 보고 듣게 함으로써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의 정확성을 조사하거나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거리낌이 없는 청결한 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벽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참된 사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게 되는 것은 표면적이고 외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마음과 양심은 오염되고 닫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계략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고, 타인을 향해 우리의 양심을 투명하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구성원들 사이의 분열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의 이 분열의 결과로 우리는 많은 축복과 영적 권위와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흐름을 잃게 됩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 10:24, 25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것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 25)

4.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이 점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드렸지만 오늘 제가 몇가지의 강조할 점들과 질문들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마지막 때와 관련된 매우 특별한 일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요한 복음 14:26).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서 마지막 때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약되고, 마비되며, 연약함과 요동침 가운데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즉 늘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이 구절의 각 부분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동치는 상태, 미지근한 상태에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와 같은, “영적인 포로 됨, 유배”의 상태로 여기신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셨습니다.

요즘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밝히고 싶어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신비롭게 영감으로 오는 것이며, 영적으로 마음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받은 자들의 생각 가운데 드러나고 계시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포로의 상태로부터 나오게 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반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여기서 우리는 세가지로 연결된  두개의 세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말씀에 예치된 성령의 신비들을 깨닫도록 합시다:

첫째,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Not lagging in diligence)

이것은 멈추지 않는 영적인 부지런함의 상태로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는 영적 근면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영 안에서) 열심을 품고 (Fervent in spirit)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영 안에서 열심을 품는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함과 근면은 우리의 영을 지피고 우리로 하여금 영 안에서 열심을 품도록 만들어 줍니다.

  • 주를 섬기라 (Serving the Lord)

영 안에서 열심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를 즉시 하나님 임재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거나 섬기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Rejoicing in hope)

주님의 영적 예배자들은 끊임 없고 지속적인 산 소망의 원천인 부활의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고정된 소망으로써, 부활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끌어서, 하늘 자리/영역에서 마음과 영 가운데 있습니다.

  • 환난 중에 참으며(Patient in tribulation)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산 소망이 있는 한, 시련이 그 사람을 포위하거나 압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의 영의 열심과 열성으로 인해 부드럽고 유순해졌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빚어서 형성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 3), 또는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새번역) 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병약함과 시련과 곤란을 겪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 10 참조).

  • 기도에 항상 힘쓰며 (Continuing steadfastly in prayer)

이 세가지 연결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영생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도는 입과 입술에 오르는 말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마음과 그 사람의 존재 전체에 지속적인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연관된 영적 민감성에 대한 다른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음 가운데 죽음의 정복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유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혼 안에 그것이 심어지고 많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 26)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을 멸하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육 안에서 죽음을 대면하셨고 이기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 24).

사망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것은 깊이 있고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는 고통으로, 때로는 질병, 약점, 무력함, 또는 두려움, 불안, 슬픔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얻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죽음과의 싸움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 슬픔, 시험과 같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사람의 통찰력을 열어서 그것이 죽음의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에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행하고 걸으면서 이 전쟁에서 인내한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과 죽음을 이기는 것에 대한 분깃,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와 관련된 준비의 필수적이고 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깨어 나고 주의하기를 바라시며 신음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유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우리 세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이전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큰 차이가 있을까요?

순교자들은 고난 중에서도, 왜 그리고 어떻게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전도가 초기 세기 가운데, 왜 그리고 어떻게 확장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행전4: 33).

사도 바울이 고리도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 14).

순교자들은 이렇게 극복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와 같이 노력하였고, 그 은혜가 그들을 변모하게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대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어둠과 사단이 지배하는 곳들에서 구원을 위한 믿음의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 전파는 상황들과 개인들,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절대적 진정성과 기도의 영 가운데 지속적인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다가, 또 다시 평상시처럼 삶의 다른 일들에 몰두하며 방향을 돌린다면, 우리의 상황은 마지막 때의 대립과 대적에 있어서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 복음13: 37).

5.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성령 안에서의 삶과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위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즉,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기록된 것에 순종합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 2)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2 – 새번역)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 계시록 3: 3).

동시에 우리의 삶은 이 세대 가운데 증인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공동체로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아야 합니다 (마태 복음 5:14).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고 위를 향해 올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되기를, 믿는 자들을 강건케 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 3, 4a)

이것이 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따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재림의 날을 알 수 없기 때문(마태복음 24:42, 25:13, 마가복음 13:33-35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가복음 13:33-35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마태복음 26:38, 마가복음 14:34)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심판의 주 앞에 서기 위하여(누가복음 21:36)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기도와 감사하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골로새서 4:2)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04-01-2024(월) 누가복음 21:29-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화과나무를 보라(29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He told them this parable: "Look at the fig tree and all the trees.

마태복음 24:32-35
마가복음 13:28-31

예수님께서는 자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사용하는 소재들은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것들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기 전에 먼저 열매가 될 "탁쉬"라는 작은 봉우리 같은 것들이 돋아납니다.
때로는 시장한 사람이 그 '탁쉬'를 따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성지의 나무들에 대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것에 관한 책을 읽은 후에 저주를 받은 이유는 '탁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우리 속담에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보여줄 수 있을까?

성서학자들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작되는 그 날이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잎을 피우는 시기가 이미 1948년 5월 14일에 성취되었으므로 마지막 때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하크라자트 하츠마우트. הכרזת העצמאות ) 또는 멜길라트 하츠마우트(מגילת העצמאות )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난 날인 1948년 5월 14일 (히브리력 5708년 이야르월)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 의 새로운 유태인의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계승한 국가로 선포한 문서를 말합니다.

이것이 근거가 되어 이미 무화과나무가 잎을 피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말세 즉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두려움을 갖고 매일의 일상을 반복되는 습관적인 삶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며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저 천성을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신령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 세대(게네아) γενεά, ᾶς, ἡ 스트롱번호1074
1. 가족.  2. 동일한 조상에서 퍼져 나온 가문. 3. 동시대의 사람들
발음 [ gĕnĕa ]
어원  /  1085의 추정된 파생어에서 유래

*말(로고스)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Solus Christus, 오직 예수 그리스도

1985년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Paul Knitter의 < No Other Name? >이란 책이다.
1987년 한국말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제목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물음표 때문이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과,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말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다.
오직 예수! 예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의미다.
오직 예수? 예수 외에도 구원을 주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없는 구원과 십자가 없는 복음이다.
예수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것을 종교다원주의라 한다.
종교다원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너도 옳다, 그러나 나도 옳다 주의다.
예수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구원이 있다는 말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양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다양하기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할까? 베드로가 사도행전 설교에서 외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밖에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해석이나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왜 꼭 예수라야만 하는가? 왜 굳이 다른 종교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가? 자기만 옳다는 배타적 자세라는 것이 21세기 과학시대에 나홀로 진리라는 주장이 맞지 않는 사고 아닌가?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탄의 최고 전략은 우리 눈에서 예수를 가리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은 모든 것이 좋아 보이지만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는 것이다.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부가 무너지는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아주 멋진 종교로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돕는 세상만 강조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 없는 구원 없다! 이 구호만 삭제해 버리면 기독교인이 받아야 할 비난,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전쟁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의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생명을 살리는 기독교의 복음은 고등한 윤리나 철학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이렇게 외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영광스런 면류관이 아니다. 핍박과 고난이다. 베드로도 주님의 제자들도 이 복음 때문에 피를 흘렸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피로써 써 내려간 역사다. 마르틴 루터의 삶을 기억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외친 루터. 이 외침 때문에 1521년 4월 17일 황제 앞에 불려갔다. 황제 앞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렸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었다.

루터보다 100년 일찍 종교개혁의 불씨를 일으킨 사람이 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요한 후스다. 프라하 구시가지 중심광장에 가면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동상, 후스의 동상이다. 프라하대학에서 공부해서 1398년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37세 되던 1409년에는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단순하다.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교회의 법은 가톨릭의 법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다! 타락한 교황을 질타하고 교황의 무오성을 거부했던 후스는 결국 1414년 10월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의회에 참석한 후에 감옥에 들어간다. 교황 비판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고 용서를 구하면 목숨을 보장받는다는 회유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진리를 외친 사람. 결국 1415년 7월 6일, 화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세상 눈에는 참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게까지 예수만이 구원이라고 외칠 필요가 있었는가?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묻기도 한다. 누가 진짜 바보인지 한번 물어보라. 잠시 살아갈 인생에 예수 때문에 생명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바보인가? 적당하게 몇 년, 몇 십년 더 살다가 언젠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올텐데, 불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바보 같은 인생인가?

오직 예수를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 시대.
너무나 간단한 이유 한 가지가 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든지, 아니면 예수만 구원이라고 외침으로 오는 핍박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지.
예수가 정말 유일한 주라 고백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죽어 있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가슴마다 선교지요,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마다 선교사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7가지 묻고자 한다.

1.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분이 누군가?
2.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분이 누군가?
3.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 누군가?
4. 겸손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하늘의 문을 여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 누군가?
5. 신자가 호흡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야 할 그 이름이 누군가?
6. 살아도 죽어도 우리가 그를 위해 살아야 할 유일한 주님이 누군가?
7. 연약하고 부족하게 살았지만 세상 떠나는 날, 우리를 품 안에 앉아줄 분이 누군가?







감람산 강화 - 종말

감람산 강화라고 부르는 이 말씀의 주제는 “종말”입니다.

감람산에 앉아 예루살렘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말론 강의는 거대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 이라는 경고로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은 무너졌으며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은 종말의 시작일 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환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내려오시기 전에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또한 앞으로도 없을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마 24:21).
그리고 그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마 24:29) 사람들이 무서워 기절할 것입니다(눅 21:26). 

이것이 바로 “인자의 징조”이고(마 24:30), 그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지식적으로 유익을 주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녀를 두고 외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한국에 일어날 엄청난 재난에 대한 소식을 미리 알았다면 자녀들에게 그 재난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무서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잘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해를 당하지 말고 잘 대처해서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무서운 환난을 잘 대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해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런 간절한 심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정리해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 배우기 원합니다.

1. 예루살렘 멸망(20~24절)

21:20절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먼저 예수님이 바라보신 가까운 미래의 환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성 밖을 수많은 군대들이 에워싸는 것을 볼 때, 곧 이 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비할까요?

21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다(21절). 환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뿐만 아니라 주변 유대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안전한 지역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심각한 지역은 예루살렘 성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피신하라고 하시고,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촌)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워싼 군대들이 곧 성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백성이 죽임을 당하며 끌려간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입니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며 포로로 끌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 무서운 재앙이 다시 한번 제자들이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예루살렘 성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일어날 모든 환난이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이라고 하셨습니다.

22절 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로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거역할 때 이와 같은 징벌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26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대항할 때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 2세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 광야에 모아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언약을 맺을 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신 28:53).

그 이후로도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 미가, 스가랴 등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하고 거절하는 백성을 징벌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사 34:8; 렘 5:29; 6:1~8; 26:1~9; 46:10; 50:27; 단 9:26; 호 9:7; 미 3:12; 슥 8:1~8). 

특별히 제자들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성전에 대한 징벌이 기록된 말씀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왕상 9:6~9).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실제로 586년(370여년 후) 하나님은 자기에게 돌아선 백성을 말씀하신 그대로 벌하셨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높은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이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이 복원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자기 하나님을 거절했을 때, 결정적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땅에 온 하나님을 그들이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요 1:11),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예루살렘과 그 성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며칠 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손에 의해 죽게 될 것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치며 자기 하나님을 십자가에 없애 죽이라고 외치는 백성들의 손에 의해 말입니다(마 27:25). 

가까운 미래에,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40년이 흐른 뒤, 징벌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날에 어떤 재앙이 있을까요?

23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절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 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학살과 살육이 계속되는 그 날에 아이 밴자들(임산부), 젖 먹이는 자들은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큰 환난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백성에게 임한 무서운 진노를 피해 빨리 도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수많은 사람이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이 이방에게 포로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예고하신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한 모습입니다.

40년 후 실제로 예루살렘에 이러한 무서운 환난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로마 티투스 장군의 군대들이 성을 에워싸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 굶주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삶아 먹었습니다. 약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습니다. 9만 7천여 명의 백성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자들은 애굽이나 제국 여러 영토 곧 이방 지역에 사로잡혀 갔고,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하거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졌습니다.

참 무서운 환난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된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죽거나 끌려가고, 성은 박살 났습니다. 완전히 끝이 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4절)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방인의 때”라는 기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이방인의 때”. 그때가 다 차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찰 때까지 하나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억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자기 골육 유대인을 간절히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여기에도 기한이 나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그리고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의 더러가 우둔하게 됩니다. 유대인이 멸망 받음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을 풍성히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롬 11:11~12). 그동안 유대인 중심으로 흘러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 중심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을 위한 미래는 이제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방인의 때가 차고 나면” 밟혔던 유대인들이 속량을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설명이 두 번째로 나오는 “인자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본 먼 미래에 어떤 징조와 함께 그날이 오는지 살펴봅시다.

2. 인자의 징조(25~28절)

25절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절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이방인의 때가 차고 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고 나서,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피와 같이 됨-계 6:12),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하늘의 권능들(천체)이 흔들립니다(마 24:29; 사 13:10; 34:4). 계시록에 보면 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낮 삼 분의 일에 비춤이 없다고 말합니다(계 8:12). 온 세상이 암흑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바다와 파도에도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계시록 말씀에 보면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 땅에 쏟아져 땅, 수목의 삼 분의 일이 타 버릴 것”을 말합니다(계 8:7).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 바다의 삼 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이 삼 분의 일이 죽습니다”(계 8:8~9).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면 무서운 파도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외에도 계시록에 기록된 이 날의 징조는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서워할 것입니다.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할 것입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느끼는 공포를 아십니까? 이 날엔 지구 전체가 그 비행기처럼 요동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마침내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27절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자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십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능 그리고 영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무서운 징조, 그리고 무한한 능력과 영광을 지니신 왕, 예수님의 재림. 이 일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절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일 즉 하늘에 무서운 징조가 일어나고, 땅과 바다가 흔들리고, 마침내 인자가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났지만 뭔가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전에는 일어나지 못했고 머리를 들지 못했던 것이죠. 2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밟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에 유대인들은 마침내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 “너희” 곧 유대인의 속량이 시작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에 따르면 인자가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는 또 다른 대상이 등장하는데, 바로 “땅의 모든 족속”입니다.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이죠. 그들은 인자가 오는 것을 보며 통곡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0). 

왜죠? 그들에게 주어진 기한이 이제 끝났고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일어나 머리를 들고 자기를 속량하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을 회복하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마 24:31) 천사들을 보내실 것이고, 그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대적으로 온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막 13:27).

이것이 장차 유대인에게 임할 속량의 날입니다. 인자가 오시는 그 날에 이런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사도 바울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나서 온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가 인용한 이사야 59장 20절 말씀처럼 시온 곧 예루살렘에 구원자가 임할 때,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구름을 타고 다시 임하실 그 때, 그분은 경건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돌이키시고 그들의 죄를 씻으실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자를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과 맺으신 아브라함, 다윗 언약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고 자기 백성의 땅을 찾아주시며, 자기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그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말입니다.

3. 대비하라(29~33절)

자,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보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잘 알고 그 위기를 피하라고, 대비하여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한 가지 비유를 더해주셨는데, 29절과 30절에 그 비유가 나옵니다.

29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절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예수님의 비유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였는데, 다른 모든 나무를 통해서도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감람산에 무화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 비유는 생동감이 넘치는 비유였을 것입니다. 

겨울에 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겨우내 딱닥 하고 생명력이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가지가 연하여지고(마 24:32), 싹이 나고 잎사귀를 내면 곧 여름이 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5~6월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예수님은 단지 계절이 돌아온다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싹이 나고 잎사귀가 나면 곧 열매를 맺을 것을 너희가 알지 않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무가 보여주는 신호를 읽을 줄 알았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 24:32; 막 13:28). 나무를 보면서 가지가 연해지는 징조, 싹이 나는 징조, 잎사귀가 나는 징조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날이 곧 올 것을 기대하고 대비하는 것처럼, 조금 전까지 말씀하신 징조들이 올 때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31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에게 속량이 찾아온 날부터 이 땅에 시작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아 영원한 나라를 통치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 전에 일어날 여러 징조들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강조하며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큰 환난이 일어나고 일월 성신에 징조가 생기고 바다와 파도가 요동하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이는 환난의 시기가 길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한 세대 안에 징조의 시작부터 인자의 임재까지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란 말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환난은 극심하겠지만 그 기간은 아주 길지 않을 것입니다. 한 세대 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징조가 일어날 때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속량의 날을 준비하는 그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3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한 말은 없어지지 않고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말 계획표가 말씀하신 그대로 조금의 오차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어떻게 말씀에 반응해야 했을까요? 흥미롭게도 그들의 세대 안에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징조의 시작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이것을 알려주시고 피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AD70년 11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은 정말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잘 대비했을까요?

유대인의 반란은 66년부터 열심당원을 통해 시작되었는데, 로마 정부는 그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여러 번 예루살렘을 위협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67년도에는 갈루스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갑자기 공격하고 에워쌌는데 쉽게 점령할 수 있었지만 뚜렷한 이유없이 갑자기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거민의 많은 숫자가 그 공격에 놀라서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 중 많은 사람이 요단 강 건너편 산지 마을 펠라로 숨었고, 일부는 리바누스 산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래서 70년 최후 대접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무너지는 성에서 완전히 피신했습니다. J. C. 라일은 제자들이 “주님의 충고에 따라 행동했고, 마지막 포위 때에 있었던 비참함을 피했다”고 말합니다(351p). 그들은 잘 대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래를 잘 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맞춰진 종말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점은 “이방인의 때”입니다. 아직 충만한 수가 채워지지 않았고 유대인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이 거절했기 때문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 앞에 일어날 일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우리에겐 일월 성신의 징조가 없습니다. 천체가 흔들리고 바다가 요동치는 환난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실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주님께서 큰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죽은 자들 그리고 그 때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순으로 그 음성을 듣고 공중으로 끌어 올려질 것입니다. 여기도 구름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공중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 영원히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인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의 공중 재림입니다. 휴거라고도 부르는 이 날은 아무런 징조가 없습니다. 

현상으로서 세상에 난리와 소요에 대한 소문이 일어나고 성도에 대한 핍박이 일어나겠지만, 유대인에게 있을 그런 대환난은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환난이 있기 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재난과 핍박을 경험할 때마다  주 오심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는 주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주가 모든 믿는 자를 공중으로 끌어 올리실 때 당신은 이 땅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대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대환난 끝에 주가 이 땅에 임하실 때 그것을 통곡하며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대비하십시오. 믿는 자를 불러 공중으로 끌어올리시기 전에 그 속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시기 바랍니다. 그 방주에 타는 방법은 돈도 명예도 열심도 아니고 오직 믿음입니다. 

둘째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어느날 주님의 호령에 따라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을 말하고 나서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8). 이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를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와 근심을 벗어버리는 날입니다. 슬픔과 눈물이 씻기는 날입니다. 낮고 천한 삶을 살았더라도 높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반전을 맞이할 수 있는 날입니다. 주를 위해 한 일에 대한 칭찬을 받는 날입니다. 핍박과 고난에 대한 풍성한 보상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는 그분이 약속한 모든 것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성취되는 날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고 살았던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 날이 진실로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 삶에 진정으로 큰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03-30-2024(토) 누가복음 21:20-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형벌의 날(22절)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For this is the time of punishment in fulfillment of all that has been written.

형벌의 날 보응의 날(호세아 9:7-9)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 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이스라엘 백성이 형벌을 받아야 되는 이유(7절)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  어리석은 선지자란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이 왔는데도 알지 못하고, 깨이지 못하고 멸망을 준비하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또한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유다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으로(아람) 가서 싸우려 할 때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400명 선지자를 불러 물었을 때, 그들은 다 같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미가야는 청상의 일을 말하며 거짓말하는 영을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어 왕에게 말하게 했다는 것을 말했으나, 왕도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물로 마시게 하라하고 전쟁에 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열왕기상 22:24 /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 하더냐.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 사람들은 거짓에는 잘 감동을 받고 받아들이지만 참은 받아들이지를 아니합니다.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문은 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의 길은 협착하고 좁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며 친속까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3:21 /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요한복음 10:20 /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바울에게도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사도행전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인생은 무엇인가에 미쳐서 사는 것입니다.
돈에 향락에 권세에 우리는 이왕이면 후회 없는 예수에 미쳐서 살아야합니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우리가 죄악을 쌓으면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을 쌓지 말고 속히 버려야합니다.

창세기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마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욥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2. 거짓 선지자

(8절)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 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1) 하나님의 파수군

파수군은 늘 깨어 경계하고 지키어 보호해야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마귀의 유혹으로 부터 보호해야 하고 파수군은 위험이 쳐하면 나팔을 불어 알려야합니다.

(사56: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2)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보호해야할 그들이 오히려 새를 그물을 쳐 잡듯이 멸망으로 끌고 가는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단들이 멸망의 길로 끌고 가려합니다. 그러므로 깨이고 분별하여야합니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3)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세상에서도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 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구별해야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성전인줄 알아 구별해야합니다.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3. 기브아의 시대

(9절)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심히 패괴한 시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기브아 시대는 사사기 19장 20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레위 사람 하나가 첩을 대리고 살았습니다. 이 첩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음행을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저를 다시 데리고 오고자 하여 장인의 집에가 첩과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저물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자 길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노인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들을 보고는 자신의 집으로 이들을 맞아들여 음식을 대접을 합니다.

바로 이 때 그 동네의 비류들이 이 집을 에워싸고는 성적인 관계를 맺고자 레위 사람과 그 여인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과 이 레위 사람의 첩을 내 놓겠으니 이 레위인과는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저들을 이를 거절을 합니다.

결국 실랑이 끝에 레위 사람은 자신의 첩을 저들에게 내 놓습니다. 이 동네 비류들이 이 여인을 밤새도록 욕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보냈습니다.

그 첩은 노인의 집 문에 이르러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여기에 흥분을 해서 이 여인의 시체를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열두 토막을 내어 자신이 당한 일을 온 지파에게 고합니다.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뺀 이스라엘 전 병력은 40만 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고작 26,700명에 불과했습니다. 처음 전쟁은 베냐민이 승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두번째의 싸움에서 결국 베냐민이 패배를 하고 맙니다. 이날 베냐민에 속한 모든 남자는 600명만 남고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을 가리켜 기브아 시대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바로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와 기브아 시대와 흡사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그들은 행한 죄로 인하여 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악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실 것이다.

욥기 4:8 /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시편 107:34 /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03-29-2024(금) 누가복음 21:5-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슨 징조(7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Teacher," they asked, "when will these things happen? And what will be the sign that they are about to take place?"


거룩한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을 즐기자!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이란 도덕성을 중시하며 가난한 상황에서도 그 미덕을 유지하고 행복을 찾아내는 고결한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

한자풀이

  • 淸 : 맑을 청 
  • 貧 : 가난할 빈 
  • 樂 : 노래 악, 즐길 락(낙), 좋아할 요 
  • 道 : 길 도 

'청빈낙도(淸貧樂道)'의 각 한자별 뜻을 살펴보면 淸(청)은 '맑을'이라는 뜻으로 청렴한 사상을 표현합니다.
貧(빈)은 '가난할'이라는 뜻 물질적 인 충분함이 없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樂(악, 락, 요)은 '노래', '즐길', '좋아할' 등의 뜻으로 인생에서의 행복과 만족을 가리킵. 道(도)는 '길'이라는 의미로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해하면, '청빈낙도(淸貧樂道)'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청렴하고 올바른 길을 따르는 사람이 즐거움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는 청렴결백하게 살면서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우며 옳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인정 받아 행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성어는 많은 재물을 가진 것이닌, 도리와 겸손한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며 우리에게 중요 인생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성어는 숭고한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동양 문화에서 그 존재 찾을 수 있습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라는 말은 고요한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이너 심신적의 풍요로움을 강조합니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바람이 서서히 분다.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자는 얘기다.
이는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high thinking)'와 궤를 같이한다.

예부터 한·중·일 지식인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바로 '청빈(淸貧)'이었다.
말 그대로 '맑은 가난'.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간소한 삶이며, 소유의 욕망을 최소화함으로써 내면의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동일한 의미랄까.

일본에서 청빈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거품 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이 시작되던 1992년, 작가이자 평론가인 나카노 고지(中野孝次·1925~2004)는 현대의 물질 만능 풍조 대안으로 옛 선인들의 소박한 삶을 재조명한 '청빈의 사상'을 출간해 선풍적인 관심을 모았다.

당대의 이 베스트셀러는 옛 시인 마쓰오 바쇼, 문인 가모노 조메이, 화가 요사 부손 등 문학사와 예술사 거장들의 일화와 글을 통해 청빈의 삶이 안기는 기쁨과 홀가분함을 일깨워줬다. 나아가 인도 철학, 성 프란치스코, 에리히 프롬 등의 이론으로 청빈 사상의 가치와 효용을 뒷받침했다.


저자에 따르면 자발적 가난인 청빈의 꽃은 소유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피어난다. 예컨대 에도시대 예술가 혼아미 고에쓰 가문의 경우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유를 만끽했다. 고에쓰의 어머니 묘슈는 집안의 큰어른으로 성공한 자손들이 수시로 옷이며 용돈을 드렸지만, 그때마다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다. 이는 단순히 자선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가난한데 혼자만 많이 소유하는 걸 죄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마침내 마음은 물건의 노예가 돼버린다. 자유롭고 한가하게 나날을 보내기를 원한다면 물욕 따위는 버려야 한다. 물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람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산다는 것은 숫자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며 "소유를 아무리 늘려도 삶의 충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삶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깨달음, 빼고빼고 또 빼어 마음 하나만 남기는 삶이 청빈이라는 것. 그러면서 옛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했고, 죽은 후에 남길 것은 맑고 아름다운 이 삶의 원칙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됐음에도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으로 맴돌고 있어서다. 좋은 집, 좋은 차 등 '소유'에 집착할수록 평안, 즐거움 같은 '존재'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도 이런 청빈의 전통이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사상이 바로 그렇다.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선비들은 명리와 빈천을 떠나 자연, 예술, 인생이 혼연일체가 된 풍류의 삼매경을 일상에서 즐겼다. 하지만 청빈의 전통, 선비적 가치관은 현대 사회가 성장과 소비 등 물질적 가치를 향해 질주하면서 폄하되고 잊혔다. 유형 가치에 매몰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 무형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옮긴이 김소영 씨는 "속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갔던 옛 문화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만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빛나는 예술혼이다"며 "'맑고 가난한 삶'은 그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자세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일본 출간 이듬해인 1993년 우리나라에도 소개돼 눈길을 끌었으나 절판됐다가 이번에 출판사와 번역자가 바뀐 가운데 새로운 번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바다출판사 펴냄. 302쪽. 1만5천원.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중국의 옛 격언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그 뜻과 의미는 '빈곤한 삶에 안주하며 도(道)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돈이나 재물이 부족해도 마음의 안정과 만족을 찾아가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안빈낙도는 선비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도를 배우고 연구하는 것을 중요시하던 시대 배경을 반영하고 있죠.

한자풀이

한자를 분석해보면 이러한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 安 : 편안할 안 
  • 貧 : 가난할 빈 
  • 樂 : 즐길 낙 
  • 道 : 길 도



마지막 때의 징조 / 성경 구절

마태복음 24:3~14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 때는 언제인가?
성경은 마지막 때를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다시 세울 때라고 합니다.
이 때를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마 24:32, 막 13:28, 눅 21:29).
따라서 마지막 때는 1948년 5월 14일 디아스포라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건국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합니다(마 24:3-14, 딤후 3:1-5)
본문에서는 두 가지 징조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
둘째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마지막의 징조이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합니다.

종말에 대한 신앙은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인식해야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죽음)
둘째는 역사의 종말(심판)

마지막 때를 올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 4:7-8).

오늘 이 하루가 주와 동행하는 거룩한 삶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마태복음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가복음 13: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누가복음 21: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디모데후서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베드로전서 4:7~8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지막 때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 식량학자들 환경공해를 부르짖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과 몇 십 년 후에 지구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이미 자연계는 오래 전부터 명백한 징조들을 수도 없이 보여 주었는데, 그때 과학자들이 인류는 지구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그렇게 소리 높여 경고해 주었는데.’라고 후회할 것이다.” 그 과학자로서는 점점 더 빈도수와 강도가 높아지는 태풍과 쓰나미, 역사상 유래 없이 빠른 속도로 녹고 있는 빙하와 빙붕들만 보아도 지구의 온난화는 더 없이 명백한데도, 정작 강대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모든 징조와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최소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와 역사의 종말이 되지는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은 오직 ‘주의 임하심’과 함께 올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그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면서” 그것이 아름다운 대리석과 값비싼 장식들로 꾸며진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그 화려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는” 멸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나중에 그들이 “감람산”에 도착했을 때 조용히 예수님께 다가와서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겠으며 또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의 날이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의 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하여는 아무 언급을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경고해 주는 명백한 ‘말세 징조’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4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예수님의 제일성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대하여 속임을 당하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즉 말세가 가까움을 보여 줄 ‘징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언제 말세가 되든지 간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부터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을 미혹하는 일들은 우선 ‘가짜 메시아’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즉 자칭 예수라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면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즉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단들은 특히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곳곳에서 연이어 터질 때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함으로써 더욱 활개를 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참된 신자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온갖 ‘난리와 난리’가 점점 더 많이, 더 크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런 ‘가짜 메시아’들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한 증거’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일”은 원래부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일 뿐이며 “아직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전쟁들이 세계 도처에서 끊일 새 없고, 지구촌 곳곳에 “기근과 지진” 등의 재해가 연이어 벌어지겠지만, 그것들은 그저 말세가 가까워질 때 필연적으로 벌어질 “재난의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감람나무’ 혹은 ‘동방의 계명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역시 그런 사이비 교주들은 곳곳에 등장하고 있으며 끝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까지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항상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이용하여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이 곧 망한다.’는 말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미혹하는 데에는 가장 효력이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가짜 재림 예수’일수록 특히 ‘민족 간의 내전, 나라 간의 전쟁’이나 ‘지진, 기근, 온역 등의 천재지변’ 따위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사건들을 자기네가 주장하는 ‘재림 일정 시간표’에 억지로 뜯어 맞추어 넣어 그럴싸하게 꾸미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내가 바로 재림한 그리스도다.’라고 소개해야 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예수님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동반하시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한눈에 재림주이심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우주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그처럼 구차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 날 아무 시에 세상 끝이 온다.’라는 따위의 예언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6절)고 천명하신 사실을 자기는 안다고 하는 것이니, 재림주는커녕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단임에 분명합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세상의 종말의 날짜와 직결시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분명히 일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또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끝이란 공포스러운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될 날이니 그런 가짜 메시아들의 미혹이나 온갖 천재지변을 당해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온갖 헛된 종말론을 유포할 때, 바로 그런 일이야말로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나타날 징조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사탄의 속임수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참된 신자에 대한 박해’도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반드시 벌어질 징조입니다.

  9절부터 14절에 기록하기를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말세에 대한 또 하나의 징조는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가리킵니다.
  사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이단의 미혹보다 먼저 찾아왔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부터 그들은 ‘회당’ 앞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채찍’을 맞기도 했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는 사형’을 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박해는 그처럼 육체적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인 동시에 또한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는” 정신적 고통의 극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박해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관원 등 세속권력으로부터 받기도 했지만, 최악의 경우는 같은 기독교인으로부터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된 결과 기독신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는” ‘배교자’가 되어 박해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배신자들의 “불법이 성하게” 되면서 자연히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는” 즉 기독신자들 내부에서 큰 갈등과 시험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세의 징조가 나타날 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박해는 ‘배교자’들이 드러나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된 신앙인’이 누구인지 분명해지는 기회도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실하고 충성된 신자는 스데반 집사가 그랬던 것처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만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삽니다.
  그런 ‘환난 시대의 순교자’들과 ‘평화 시대의 순교자’들에 의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는” 순간 ‘땅 끝까지 이르는 전도’가 완성되면서 “그제야 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얼마나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까?
  사탄은 세상 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기의 날이 다 되어 가는 줄 잘 아는 까닭에 더욱 발악을 하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해 올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이 참된 개혁주의 기독신앙은 천주교로부터는 계속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무식하다는 비판을 더욱 맹렬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혈육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들을 것이고, 회사의 술자리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신자들이 불신가족과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가 과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대신에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만 늘어가게 될 때에 결코 실망하거나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거짓 선지자’들이 강력한 혼합종교 세력을 형성하면서 참된 신앙을 사수하고자 하는 소수의 교회를 사방팔방으로 에워싸고 핍박해 올 것이며,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이 일어나 서로 잡아 주는’ 배교가 오히려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신자에게는 반드시 ‘한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신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가 안팎으로 박해를 당하고 불신사회의 절대다수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이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벌어질 징조라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그런 와중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가 당하는 박해를 오히려 참된 신앙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교적인 신앙자세를 지키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천국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언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그처럼 자신의 믿음을 인내로 지키는 성도에게 약속된 구원의 완성을 반드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어질 사탄의 박해는 참된 복음을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필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연합공세 앞에도 결코 굴하거나 변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면서 자신의 신앙을 온 세상 앞에서 증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각 시대에 일어나는 재앙’도 세상 끝날을 예비하라고 경고해 주는 징조입니다.

  15절 이하 22절에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거룩한 곳” 즉 예루살렘이 “멸망의 가증한 것” 즉 로마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게 될 날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일부가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로마 군대의 강력한 진압에 의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사망자가 백십만 명, 포로로 잡혀 간 자가 구만칠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남긴 숫자는 좀 과장되었을 가망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로 비극적인 종말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1:22).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부 유대인들은 그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적군이 닥칠 때 본능적인 반응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 안에 있다가는 다 멸망당할 것이니 성 밖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을 탈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그런 예루살렘의 멸망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 마치 세상 종말과 직결되는 “(대)환난” 정도로 보일만 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성전이 파괴당하고 선민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종말이 닥친 것처럼 여겨질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부분적인 심판의 날이었지 결코 온 세상 전체의 끝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대재앙의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최후의 대심판이 오기도 전에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하고”끝나 버리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즉 ‘택자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인류역사를 통해 그런 날의 숫자를 조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사람들은 바로 자기 시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세상 종말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그야말로 세상 종말이 임박한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처럼 착각했던 로마제국이 야만스러운 이민족의 침략에 어이없이 무너졌을 때, 서기 1000년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 삼분의 일이나 되는 생명을 빼앗아 갔을 때,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인류가 온 세상을 스스로 한꺼번에 자멸시킬 수도 있는 위기로 몰아갔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 세기 말에 지나갔던 ‘1999년 7월’ 중에 태양계 행성들의 특이한 직렬현상으로 인하여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소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그 달이 오기 직전까지 숱한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도 예수님 재림이 가까워졌음을 일깨워 주는 ‘징조’이지, 결코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는 ‘현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으로 온갖 재앙이나 천재지변이 생기게 하시는 것을 두고서 자기 시대에 반드시 종말이 온다는 증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지금 당장 종말이 닥쳐 온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각 시대마다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오직 ‘최후 심판의 날’을 예비하며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적인 심판과 재앙 중에도 ‘피할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것입니다.
  당장 그 어떤 환난이나 재앙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더라도 결코 속단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진짜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만 굳게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23절부터 3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짜 재림 때에 벌어질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재림이 가까워진 징조’가 아니라 실제로 ‘재림이 시작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온갖 소문들을 퍼뜨림으로써 차츰차츰 널리 알려질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나타나게 될 일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는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인데, 본문의 문맥에서는 죄악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천사들이 동원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등 창조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진짜 천재지변이 일어나면서 ‘옛 하늘과 옛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재림을 알리는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면서”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을 대동하시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시면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재림주의 위엄 앞에 “통곡”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들을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우리 눈으로 직접 목도하게 될 때까지 ‘세상 끝’은 여전히 ‘가까울’ 뿐이지 아직 ‘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그 말세지말의 진짜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이단에게 미혹을 당하지 말고’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온갖 재앙 중에도 그 날들을 감하면서 택자를 보전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이처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종말의 징조들은 ‘재림 직전’에만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예언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부터가 이런 징조들을 그들 생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겪었기 때문입니다.
  미혹하는 이단, 신자를 박해하는 대적,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당하는 재난들 - 이 모든 것들은 어느 시대, 어느 신자나 다 똑같이 당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짜 중요한 점은 세상 끝날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신자가 자기 믿음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꼭 지켜야 한다는 사실일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일 년 전, 혹은 한 달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한 가지 특별한 징조를 말씀해 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 한 가지만 예의주시하면서 그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고 방심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라면 모두가 겪게 될 일반적인 징조들을 특별히 더 강조해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번, 오직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뿐입니다.
  설사 예수님 재림이 앞으로 천 년 후로 확정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하는 데에는 그 천 년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생전에 재림주를 맞이할 준비를 확실히 못 해 놓으면 죽고 나서 무덤에 묻힌 상태에서는 그 날이 천 년 아니라 만 년이 남아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이 서기 몇 천 년에 되든지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각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다 ‘내일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오늘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많은 천재지변의 종말 징조들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종말 징조들을 당하게 될 때에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정말 제대로 준비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항상 변함없는 신앙으로 그 재림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만 더욱 철저히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는 것을 오도하고 미혹하는 이단들, 우리의 지키고 있는 것을 욕하고 미워하는 박해자들, 우리의 잡은 것을 흔드는 온갖 환난과 재난 중에서도 ‘세상 끝’이 오기 이전에 꼭 ‘이런 일들이 먼저 있어야 할 줄’로 알고, 오직 자신의 믿음만 끝까지 굳게 지킴으로써 그 ‘주의 임하심’을 기쁨으로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때에, 무슨 징조가

대통령이 기자 회견을 하거나 어느 유명한 학자를 초청하여 간담회를 할 때에, 그 질문할 것을 미리 서면으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질문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꼭 대답할 필요와 가치가 있는 질문들만 골라서 답변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그런 경우에 채택되지 못하고 답변을 받지 못한 질문들은 그 대통령이나 교수가 그것들을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 5절부터 7절의 기록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을 떠나려 할 무렵에 어떤 사람들이 그 성전이 아름다운 대리석과 특별한 장식들로 꾸며진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그 화려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는 멸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그 일 있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의 날이란 것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의 날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고 물었다고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하여는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으셨지만, 그 대신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몇 가지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징조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겪을 일들이기도 했으며, 또한 오고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종말이 오기 이전에 각자의 생애를 통하여 겪게 될 징조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해 주기로 선택하셨던 질문, 즉 세상 끝날이 이르기 전에 ‘무슨 징조’들이 나타날 것인지를 함께 상고하면서, 주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다시 한 번 일깨우고자 합니다.

  1. ‘미혹하는 이단의 등장’이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8절로 11절에 기록하기를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세가 가까움을 보여 줄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제일성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대하여 거짓 꾀임을 당하거나 파선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중요한 것은 종말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 그 자체보다도,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신자가 자기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신앙을 미혹하는 일들은 우선 ‘가짜 메시아’들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칭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이 “내가 그로라”라고, 즉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때가 가까왔다”고, 즉 ‘세상 종말이 곧 임박했다’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감람나무’ 혹은 ‘동방의 계명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역시 그런 사교 교주들은 우후죽순처럼 곳곳에 등장하고 있으며 끝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까지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항상 “때가 가까왔다”는 말로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곧 망한다.’는 말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미혹하는 데에는 가장 효력이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일수록 특히 ‘난리와 소란의 소문, 민족 간의 내전, 나라 간의 전쟁, 지진, 기근, 온역 등의 천재지변’ 따위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사건들을 자기네가 주장하는 재림 일정 시간표에 억지로 뜯어 맞추어 넣어 그럴싸하게 꾸미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내가 바로 재림 구주다.”라고 소개해야 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예수 그리스도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동반하시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한 눈에 재림주이심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우주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그처럼 구차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 날 아무 시에 세상 끝이 온다.”라는 따위의 예언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누차 강조하신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을 자기는 안다고 하는 것이니, 재림주이기는커녕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단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세상의 종말의 날자와 직결시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또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끝이란 공포의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되는 날이니 그런 가짜 메시아들의 위협이나 하늘과 땅의 무서운 일들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온갖 헛된 종말론을 유포할 때, 바로 그런 모습이야말로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나타날 징조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사단의 꾀임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신자에 대한 박해’도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12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또 일어날 징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인데,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이단의 미혹보다 먼저 찾아왔었습니다.
  “너희에게 손을 대어”라는 말씀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육체적인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 앞에서 재판을 당하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채찍과 돌에 맞는 형벌까지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박해는 육체적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이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정신적 고통의 극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박해를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받기도 했고, 또는 “임금들과 관장들” 즉 세속권력으로부터 당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으로부터 배반당하고 넘김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얼핏 비슷해 보이는 종교인로부터 시작하여 불신 세상 정권들까지 가세하는 가운데, 육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온갖 종류의 박해들을 참된 신자들이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징조가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박해당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예수신자 됨이 드러나는 기회이며 오히려 불신자 앞에서 참된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구재(말하는 재주)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신자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곧바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그 신자의 입술과 마음에 변명할 말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 믿는 믿음만을 확실히 지키고 있으면 그런 사람은 그 언제 어떤 자리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그 신앙을 고백하고 변증하고 전도할 말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교적인 신앙자세만 지키고 있으면 성도는 어떤 박해 속에서도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는”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되며, 그런 “인내로 영혼을 얻는” 완전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실로 얼마나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사단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면 할수록 더욱 발악을 하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이 참된 개혁주의 기독교신앙은 가톨릭으로부터는 계속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무식하다는 비판을 더욱 맹렬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추석 때에도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혈육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들을 것이고 회사의 술자리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신자들이 불신가족들과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가 불신 과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대신에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들만 늘어가게 될 때 결코 실망하거나 약해져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참된 신앙을 사수하고자 하는 교회는 반드시 절대다수의 종교인들로부터는 항상 ‘공회’ 앞에 세움을 당하고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속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기다리는 신자에게는 반드시 ‘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가 안팎으로 핍박당하고 미움받는 일은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항상 있을 대표적인 징조라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그런 와중에서도 오직 ‘너희의 인내로 너희의 영혼을 얻으라’고 뜨겁게 격려하고 계십니다.
  세상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어질 사단의 박해는 참된 예수 신앙, 참된 진리를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세상 사회의 비난 앞에서도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떳떳하게 신앙을 변호하며 주변 사람들의 미움 앞에서도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지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끝까지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각 시대에 일어나는 재앙’도 세상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20절로 24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후 66년경에 유대인들 중 일부가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로마의 강력한 진압에 의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사망자 즉 “칼날에 죽임을 당한” 자가 백십만 명, 포로된 자 즉 “이방에 사로잡혀 간” 자가 구만 칠천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남긴 숫자는 좀 과장되었을 가망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로 비극적인 종말이었음을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예루살렘의 멸망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큰 환난과 진노”로써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부 유대인들은 그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성으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적군이 닥칠 때 본능적인 반응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 안에 있다가는 다 멸망당할 것이니 성밖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을 탈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 멸망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세상 종말과 직결되는 사건 정도로 보일만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당하고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떼죽음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더 큰 종말의 징조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부분적인 심판의 날이었지, 결코 온 세상 전체의 끝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종말은 “이방인의 때가 차는 날” 즉 구원 받기로 작정된 모든 택자들의 수가 채워지는 먼 훗날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각 세대의 사람들은 바로 자기네 시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세상 종말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그야말로 세상 종말이 임박한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처럼 착각했던 로마 제국이 야만 이민족의 침입 앞에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게 되었을 때, 서기 1000년이 다가올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 삼분의 일을 죽였을 때, 일이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 세기 말에 지나갔던 ‘1999년 7월’ 중에 태양계 행성의 어떤 이상변동으로 인하여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소위 ‘노스트라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그 달이 오기 직전까지 숱한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 사람들은 바로 자기 시대에 꼭 종말이 올 것처럼 보이는 이와 비슷한 징조들을 계속 보고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으로 여러 가지 재앙이나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생기게 하시는 것을 두고 무조건 자기 시대에 반드시 종말이 올 것이라는 증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런 재앙을 만나게 될 때, 자신과 가족과 자기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이 없는지 돌이켜 보고 회개함으로써, 앞으로 진짜 최후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를 위하여 대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도 반드시 구원 얻을 것을 확실히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적인 심판과 재앙 중에서도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국난이나 재앙이 당장 내 눈 앞에서 일어나도 결코 속단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이르게 될 때까지 오직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만을 굳게 붙들고 결코 놓치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종말에 대하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과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먼저 나타나겠습니까?’라는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질문 즉 종말의 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두 번째 질문 즉 종말 이전에 반드시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대하여서 아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분명히 가치가 없는 질문이며 필요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종말의 징조들은 꼭 ‘재림 직전’에만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부터가 이런 징조들을 그들 생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혹하는 말들, 신앙을 억압하는 박해,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당하는 재난들 -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바로 어느 세대, 어느 신자나 겪을 수 있는 종말 징조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종말의 징조들이란 한 신자가 그 어느 시대에 살더라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시대에 사는 각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깨어서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일 년 전, 혹은 한 달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한 가지 특별한 징조를 말씀해 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 한 가지만 예의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자기 신앙생활에 해이해지고 방심하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라면 모두가 겪게 될 일반적인 징조들을 특별히 더 강조해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예수님 재림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단 한 번, 오직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뿐입니다.
  설사 예수님 재림이 앞으로 1000년 후로 확정되어 있다 손치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재림 준비하는 데에는 그 1000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전에 예수님 재림 준비 확실히 못 해 놓으면 죽고 나서 무덤에 묻힌 상태에서는 그 날이 천 년 아니라 만 년이 남아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이 서기 몇 천 년에 되든지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예수님 재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고, ‘오늘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예수님 재림이 아직 멀었구나.’라고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은 과거이든지 현재이든지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예 존재하지 않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들 중에서 ‘어느 때’에 대하여서는 전혀 대답해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대답해 주실 필요가 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만약 대답해 주신다면 그것은 재림 준비를 제대로 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대학교의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퀴즈’를 줍니다.
  이 퀴즈란 무슨 수수께끼가 아니라, 그 학기의 교과 내용이나 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의 내용 대하여 부분적으로 자주 치르는 짧은 시험을 말합니다.
  그 중에 어떤 교수는 그런 퀴즈를 매 시간마다 주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 교수의 수업이 있기 전날마다 항상 퀴즈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교수는 퀴즈 주는 날을 무작위로 골라서 자기 마음대로 불규칙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즉 어느 날에 퀴즈를 치르게 될지 학생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경우에 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교수님의 눈치를 살피고 그 어떤 암시와 행동거지를 보면서 다음 시간에는 퀴즈를 낼 것 같다 혹은 안 낼 것 같다 하고 온갖 추측을 다해 보는 것이 좋은 자세이겠습니까?
  아니면, 수업이 있을 때마다 그날 퀴즈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항상 퀴즈 시험 준비를 갖추고 수업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퀴즈 나오는 날을 예측하려고 하는 학생은 분명히 낙제할 것이고 언제든지 퀴즈 치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만 ‘A’학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준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오실까?’ - 여기에만 온갖 신경을 쓰는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 재림 준비 제대로 하지 않고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재림 징조가 지금 내 눈앞에, 지금 내가 사는 시대에도 이처럼 곳곳에서 뚜렷하구나.’ - 이렇게 긴장하고 깨어 있는 성도만이 ‘자기 등불에 기름을 채워 넣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신자로서, 천국의 혼인 잔치에 틀림없이 들어갈 수 있는 성도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많은 천재지변의 종말 징조들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종말 징조들을 당하게 될 때에도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라’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진짜 바로 믿고 잘 섬기는 성도는 예수님 언제 오시더라도 항상 변함없는 신앙으로 그 주님 맞을 준비만 더욱 철저히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는 것을 오도하고 미혹하는 이단들, 우리의 지키고 있는 것을 욕하고 미워하는 박해자들, 우리의 잡은 것을 흔드는 온갖 환난과 재난 중에서도, 세상 종말 이전에 꼭 ‘이런 것, 이런 징조들이 먼저 있어야 할 줄’로 알고 이 신앙 끝까지 잘 지킴으로써 예수님 재림을 영광 중에 함께 맞이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3-28-2024(목) 누가복음 2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부의 두 렙돈(2절)


2. 또 어떤 가난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He also saw a poor widow put in two very small copper coins.
"I tell you the truth," he said, "this poor widow has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s.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가난한(구차한) 5303 후스테레마(hüstĕrēma) ὑστέρημα, ατος, τό  

1. 결핍.  2. 결점
발음 [ hüstĕrēma ]
어원 / 530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결핍, 궁핍, 부족, 눅 21:4, 고전 16:17(부족한 것), 고후 8:14(부족한 것), 빌 2:30.
2.  부족, 결점, 살전 3:10.

가난한 4434 프토코스(ptōchŏs) πτωχός, ἡ, όν 

1. 구걸하는. 2. 불쌍한
발음 [ ptōchŏs ]

어원 / πτώσσω ‘웅크리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구걸하는, 의지하고 사는, 가난한, 마 5:3, 11:5, 눅 21:3, 계 3:17.
2. 불쌍한, 가련한, 하찮은, 빈약한, 무력한, 갈 4:9.



πτωχός, ἡ, όν  4434 [ptōchŏs]
  • 1. 구걸하는, 의지하고 사는, 가난한, 마 5:3, 11:5, 눅 21:3, 계 3:17.
  • 2. 불쌍한, 가련한, 하찮은, 빈약한, 무력한, 갈 4:9.
πένης, ητος 3993 [pĕnēs]
  • 가난한, 궁핍한, 고후 9:9.

ἐνδεής, ές 1729 [ĕndĕēs]
  • 가난한, 행 4:34.

πενιχρός, ά, όν 3998 [pĕnichrŏs]
  • 가난한, 궁핍한, 눅 21:2.

  • 가난한 

  • 부족함, 가난
  • 메뚜기[아라 비아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오늘 날까지도 늘 먹는 곤충], 세례 요한의 음식, 마3:4, 막1:6.


πτωχεύω 4433 [ptōchĕuō]
  • 가난하다, 빈곤하다, 고후8:9.

βάθος, ους, τό 899 [bathŏs]

1. 극심한 가난, 고후 8:2.
2. 깊음.
3. [문자적으로] 마 13:5, 막 4:5, 눅 5:4, 롬 8:39, 엡 3:18.






2 렙돈을 넣었다는 누가의 표현은 마가에 의해서 고드란트로 표현합니다(마가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렙돈 (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렙돈은 헬라의 주화로 무게는 1.7g이며, 재질은 구리이다.
1렙돈은 1/2 고드란트, 1/8 앗사리온, 1/128 데나리온 의 가치를 가졌다.







성경의 화폐 - 렙돈

 1-

구약 시대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일정한 가치의 기준이 되는 오늘날의 화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상거래나 어떤 상황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에는 주로, 금, 은, 청동, 철과 같은 금속들이나 양, 염소, 새, 곡물, 기름가 포도주 같은 가축이나 농산물이 화폐의 기능을 대신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세겔”이라는 단위가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세겔이라는 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게의 단위입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23장에는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사라를 매장할 땅을 헷 사람 에브론에게 구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에브론에게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주었다고 합니다(창 23:16).
이 표현은 사백 세겔 무게의 은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은의 모양은 덩어리 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장신구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발굴물 중에는 은을 철사와 같이 길게 뽑아 놓고 마치 실타래 처럼 뭉쳐 놓은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런 형태로 은을 달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교환 가치에 따라서 그것이 은 일수도 있고, 금일 수도, 청동이나, 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세겔이라는 무게 단위를 세겔이라는 화폐로 생각하시면 성경을 읽다가 혼동이 올 수도 있습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지불한 은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 수있는 단서가 위의 성경 구절에 있는데요.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상인들은 바벨론의 무게 단위를 국제 통용 무게 단위로 사용했습니다(고대 바벨론 제국 1894–1595 BCE).
바벨론 세겔은 그 무게가 약 8.3-8.5g 입니다.
따라서 400세겔은 은 3.4kg에 해당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세겔의 단위는 항상 일정했는가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또는 같은 시대라도 지역에 따라서 세겔의 무게가 제 각각이었습니다.
아래의 예는 매우 간단히 몇가지를 소개하는 시대와 지역별 세겔의 표준 무게입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건넌 세겔은 그 무게 단위가 수메르-바벨론 세겔이고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성전세를 내게 하시는데, 그 때의 세겔은 아마도 이집트 세겔을 사용했을 겁니다.

수메르 - 바벨론 세겔 (아브라함 가족들의 시대)  8.3-8.5g
이집트 세겔 (출애굽 시대)  11-13g
앗수르 세겔 (히스기야 시대)  10g
바벨론 세겔 (포로기 시대)  8.3-8.4g
요세푸스 (예수님 시대)  13.6g

이렇게 세겔 무게 단위의 금이나, 은, 청동이나 철들을 교환하다보면 반드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바로 저울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의 추도 가지고 다녀야합니다.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동전입니다.

오늘날의 동전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스에서 국가 또는 지역 통치자들이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조폐공사를 만들었습니다.
지역마다 세겔의 무게가 다르고,  저울 추를 믿을 수 없어서 고안해낸 제도입니다.
조폐공사에서 균일하게 무게를 맞춘 금과 은들을 휴대하기 쉽게 둥글 납작한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게가 일정한 공인된 화폐라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그 위에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오늘날의 동전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그리스식 동전이 지중해 주변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성과 편이성 때문에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라마다 동전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동식물이나,  글자,  또는 통치자의 형상들을 문양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당시의 동전들의 이름을 많이 소개합니다.
드라크마, 데나리온, 아사리온, 고드란트, 렙돈과 같은 동전의 이름들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동전의 단위는 “렙돈”(λεπτὸν)이라는 단위입니다.

아마도 성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헌금함을 지나가는 부자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는 그 누구보다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였다는 칭찬과 함께 말이지요.

두 렙돈을 지금 대한민국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의 가치일까요?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마 20:10).
돈의 단위 상으로 1 데나리온은 64고드란트입니다.
그런데, 렙돈은 그 고드란트의 절반(2 렙돈=1고드란트)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략 하루의 노동시간이 8시간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하루 노동으로 1데나리온(64 고드란트)을 받는다면, 한 시간에 8 고드란트를 받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한 시간 최저 시급이 2019년을 기준으로 8,350원이니, 1 고드란트(=2 렙돈)는 약 1,000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데나리온 = 64 고드란트 = 128 렙돈
1 렙돈 ≈ 500 원

금이나 은이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동전 렙돈을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가치로만 이해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드리는 여인의 믿음의 무게로 그 두 렙돈을 평가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믿음의 무게를 늘려나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화폐 단위 -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성경의 화폐 단위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등이 있다.
주조화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양모, 곡물, 목재, 가축 등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금속의 무게를 달아 값을 치렀다.

주조화폐는 B.C. 7세기경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금속 조각의 화폐였던 것이 차츰 금화나 은화로 발전했다.
화폐가 발전하면서 무게의 단위와 주화의 명칭이 상용되기도 했다.
무게 단위이자 화폐로 통용됐던 게라, 베가, 세겔에 대해서는 성경의 단위 – 무게편을 참고하면 된다.

구약성경의 화폐 단위

다릭(Daric)

다릭(Daric)은 바사(페르시아) 시대의 표준 금화다. 황제 다리오(다리우스 1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화폐 단위다. 원어인 히브리어성경에는 ‘דַּרְכְּמוֹן(darkemon)’으로 기록되어 있다. 1다릭의 무게는 약 8.4g이다. 금 1돈이 3.75g이니 2돈을 웃도는 가치인 셈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공사를 위하여 창고에 바친 것은, 금이 이만 다릭이요, 은이 이천이백 마네였다.(새번역 느헤미야 7:71)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치리할 때,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성경은 당시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금 20,000다릭을 성전 건축에 쓸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168kg의 엄청난 양이다. 2021년 금 시세가 순금 1g이 약 63,000원이다. 20,000다릭이면 100억 원 정도의 금액을 봉헌했던 것이다. 단, 금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 하에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 추정치는 90억원가량이다.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렙돈(Lepton)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헬라의 주화로 고드란트의 2분의 1 정도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1~4)

고드란트(Godrants)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앗사리온(Assarion)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은 로마에서 쓰던 소액 동전으로 청동 화폐 단위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1앗사리온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5천 원 정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
    라(마태복음 10:29)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보잘것없는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 계신다.

데나리온(Denarius)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다. 로마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었으며 로마 황제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은화(銀貨)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 나드 한 옥합을 ···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마가복음 14:3~5)

한 여자가 들고 온 나드(Nard)는 고급 향유다. 휘발성이 강한 나드는 반드시 병에 넣어서 보관한다. 사용할 때는 병을 깨서 향을 퍼지게 하는데, 신경안정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드향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천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향료인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크마(Drachma)

드라크마(δραχμή, Drachma)는 ‘움켜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은화의 명칭이다. 무게는 약 4.3g으로 1드라크마는 로마의 주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8~9)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작은 은화를 꿰어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해온 관습이 있다고 한다. 드라크마 10개를 끈에 꿰어 만든 이 머리 장식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리는데,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도 전해진다. 즉 세메디는 장식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드라크마는 바로 이 세메디로 추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화 한 닢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는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와 같음을 설명하셨다.

므나(Mina)

므나(μνᾶ, Mina)는 주로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으나 헬라와 로마에서는 화폐 단위로도 사용됐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

(새번역 누가복음 19:12~22)

비유 속 귀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 1므나씩, 총 10므나를 주었다(누가복음 19:16, 18, 20).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주고 간 10므나는 10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노동자 일일 급여를 7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7천만 원 정도다. 즉 종들은 개인당 7백만 원의 자본금을 받았던 것이다. 왕은 그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도 장사를 하지 않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을 엄히 문책했다.

달란트(Talent)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18:23~35)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다.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이 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땅에 묻혀 계셨던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찬반론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연구는 매우 흥미로워진다.
그 이유는 기존의 우세한 견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마태복음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사람들은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를 어떻게 사흘 밤낮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유로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은 얼마의 시간인가?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셨던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 낮과 하루 밤”이 하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루의 한 시간도 “하루 낮과 하루 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시간(금요일과 토요일)이 하루(토요일)와 다른 하루의 단 몇 시간(금요일의 한 두시간) 즉, 이틀 밤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요한복음 19:31 누가복음 23:50-54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책형을 당하셨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9:31누가복음 23:54-56, 두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누가복음 23:50, 52-5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우 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

여기에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구절이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추정해보면, 하루는 자정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었으며, 4월에는 그 시각이 대략 7시 경이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은 “제 9시경”에 돌아가셨고, 이는 현대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경이므로, 성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에 기록된 사건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묻히신 시간은 오후 3시경부터 7시경 사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그 주의 안식일, 즉 한 주의 7번째 날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의 다음 날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준비일로 사람들이 이를 혼돈했던 것 뿐이다.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별도로 다른 특별한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의 규정에 대해 언급한 레위기 2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4-8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새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히브리 달력의 첫번째 달은 아빕으로 후에 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요한복음 19:31누가복음 23:53에서 말하는 준비는 유월절과 무교병 절기에 대한 준비였다.
마태복음 27:46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규례에 따라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는 니산 제 14일, “9시 경”, 즉 오후 3시 경에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고, 무교절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다(누가복음 23:53)”는 것은, 레위기 23:7의 무교절 첫째날을 의미한다.

레위기 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는 구절로 인해 무교절 첫째날을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2이 아니라, 규례에서 모든 노동을 금하는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즉, 안식일은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준비일, 특별한 안식]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마가복음 15:42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과 해가 저문 후 시체를 받은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 15:42-43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니산 제 14일로, 아직 유월절을 준비하는 무교절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날은 항상 [“곧”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안식일 전날”로, 요한복음 19:31누가복은 23:52-54의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째 날이며, 그 다음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니산 제 15일로)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하는 구절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날이 아닌 특별한 안식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교절 첫째날만이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더 많은 날을 명확하게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레위기 23:23-32를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23-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3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안식일로 묘사된 일곱번째 달의 첫 날이나 열흘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미리 정해진 날짜나 기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안식일,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로, 주님의 죽음 다음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말그대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식일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인 레위기 23:33-36을 읽어보자.

레위기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성경 구절에 나와 있듯이, 초막절 첫 날과 여덟째 날 모두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다른 개념이다4.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의 준비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주일과 일치할 필요가 없이 사용되었다.
레위기 25:1-4
의 말씀을 읽어보자.

레위기 25:1-4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위에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일반적인 주일인 “한 주의 일곱째 날”과,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기일인 반면, 특별한 안식일은 미리 정해진 날짜로, 주중 어떤 날도 될 수가 있다.
특별한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표현하였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닌, 주중 어떤 날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부활하셨는가?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며 주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40시간에 끼워 맞추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믿으면 돌아가신 날짜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해가 질 때 땅 속에 묻히셨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정확하게 72시간 후, 땅 속에 묻히신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일요일 아침이 아닌 오후, 즉, 해가 질 무렵이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일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새벽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6:1-8).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신 시점이 일요일 아침이 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확히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보내시고,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 즉 땅에 묻히신 시각과 일치하는 그 시각에 부활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위 구절에서 안식일은 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인 주일이다. 주님께서 “땅 속에서” 계셨던 사흘 낮과 밤이 특별한 안식이었던 동시에 주일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16:1과 누가복음 23:5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23:56
"[마가복음 16:1과 동일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 참조)]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매 여인들이 향품을 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안식일 전에 (여인들이 미리 향품을 샀다는 의미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두 안식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1에 나오는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날, 즉 특별한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56에 나오는 안식일은 주일이다.
두 구절 모두 같은 날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한 날)을 의미하지만, 각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은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즉 특별한 안식일과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마태복음 28:1-2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은 “새벽에”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동사 "epifosko"를 번역한 것인데 “해가 지다”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23:53-54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땅에 묻힌 시간을 언급하실 때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누가복음 23:53-54
"[요셉]이 이[시체]를 내려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epifosko]."

신약에서 이 두 구절 외에 동사 "epifosko"를 써서 시간을 표현한 부분은 없다.

다시 마태복음 28:1로 돌아가보면,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전에 예수님께서 묻히신 시간과 일치하는 해질 무렵이다.
그 시간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을 보기만 하고 돌아갔으며, 마가복음 16:1-2와 같이 자신들이 떠난 후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른 채, 다른 날 향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4절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께서는 그 사흘 낮 사흘 밤 전 같은 시각에 묻히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일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무덤에서 계시기를 마치신 그 시간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는 몇 시에 묻히셨는가?
요한 복음 19:31의 준비일과 다른 구절의 특별한 안식일인, 무교절의 첫날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니산 제 14일 해질 무렵이다.

얼마나 땅 속에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서 언급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72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일요일]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무덤 안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낸 후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토요일 오후부터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토요일6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셋째 낮과 밤이고, 금요일이 둘째, 목요일이 첫째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고, 같은 날 오후에 묻히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목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특별한 안식일이 된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했던 금요일은 평일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계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없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날짜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 중 어떤 주제라도 정확성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검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통에는 분명히 부주의성과 잘못된 추정이 있고, 성경의 명확성을 왜곡하는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E.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Kregel Publications, Grand Rapids, MI 49501, 1990

Ralph Edward Woodrow: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Ralph Woodrow Evangelistic Association Inc., 1992



각주

1. 출애굽기 12:2, 13:4와 에스더 3:7 참조.

2. 이는 기일이 아닌 첫 달 제 14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였다.

3.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은 이 구절에서 시간 계산에 대해 논했던 바와 일치한다.

4. 이 특별한 안식일이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주일과 같을 때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구절은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이다. 그러나 고대 필사본에 구두점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쉼표를 찍은 위치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무덤 안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무시는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쉼표를 “부활하셨다”는 단어 다음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해당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성경 구절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6.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을 적용했다.




예수님은 왜 과부가 ‘두 렙돈’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을까?

기독일보
4~5분

1. 예수 시대의 헌금통

예수님 시대의 성전에는 헌금통이 13개가 비치되었다. 7개는 성전세, 6개는 성전 유지비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용.

당시 통화는 그리스 주화, 로마 주화였으나, 유대인은 은의 순도를 고려하여 두로화(Tyrian Shekel, 아래 그림 참조)를 고집하였다고 한다. 종교세 유통을 일원화하고자 한 실리적 이유였을 것이다.

▲이 주화는 두로화(Tyrian Shekel)이다.

성전세는 일년에 반 세겔로서, 모세의 율법과 계약을 맺은 20세 성인 남성은 반드시 내야 하는 헌금이다. 세겔은 알다시피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기에, '현대인의 헌금 규모보다 얼마 안 되네?' 싶겠지만,

당시 규정 성소는 한 곳이었다는 점, 그리고 성전 징세는 비록 느헤미야 시대부터였으나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통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현실적인 금액이다.

그런데 이 헌금자 중에 예수님의 눈에 띈 여성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 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본론의 시작이다.

▲비록 이단에서 만든 영상 캡춰이지만 가장 타당한 고증의 재연이다. 헌금통이 나팔관처럼 되어 있어 헌금 떨어지는 소리에 효과적이었음을 잘 고증하였다.

2. 헌금통 앞에 앉아 어떻게, 무엇을 보고 계셨나

실제로 예수께서는 헌금통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때 "보고 있었다"는 동사 '에테오레이(ἐθεώρει)'는 과거시제 중에서도 미완료로서 그 이전부터 죽 그렇게 해 온 행위를 반영한다. 즉 어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에서의 "(그냥 무심코) 올려보다가 눈에 띈(Ἀναβλέψας δὲ εἶδε)" 뉘앙스와는 대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설마 예수께서 저 위치에서 저렇게 보셨을까. 본문 어휘가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그림처럼 저런 자세로 보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예수님이더라도 시험들기 십상). 이에 관해서는 있다가 다루겠다.

그러면 이 남다른 관찰로 무엇을 봤을까?

금액을 봤을까, 의복/ 행색을 봤을까? 문자적으로는 '어떻게(πῶς)' 헌금하는지를 봤다 했으나, 단순치 않다(누가복음에는 이 πῶς가 없음).

우린 '어떻게' 헌금을 하나?

▲바로크 시대에는 바로크답게 과부 이야기조차 사치스럽게 꾸몄다. Baroque fresco at Ottobeuren.

과거에 공부하던 시절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채플이 열렸는데, 헌금 바구니가 돌았다. 헌금을 하는 목사님 학우들을 보면(보려고 본 건 아니고), 만원짜리를 넣는 분은 손이 바구니 밖에서 보이는 상태에서 헌금을 떨어뜨리고, 손이 헌금 바구니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분은 얼마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의 경우 5천, 3천원을 하더라도 손을 헌금 바구니 속으로 쑥 넣으면 더 쪽팔린 것 같아, 감추려는 유혹을 떨치고, 더욱 보란듯이 바구니 위 공중에서 천원짜리를 낙하시키곤 하였다.

예수께선 이런 탈외식을 가장한 인위적인 태도를 지켜보신 것일까?

헌금은 심리이다.

예수께서는 헌금의 액수까지 거론하였다.

▲이 주화가 바로 본문 속 렙타이다. 과부들의 동전.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본문상의 한 렙타(속격)는 한 세겔(일당)의 64분의 1 가치의 주화이다.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가장 최소 단위의 주화이다. 그래서 이를 과부의 동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통화의 절대가치가 아니라 두 렙타가 갖는 배수/분, 즉 남성들은 세겔(일당)의 절반으로 의무를 다하였으나, 과부는 두 배를 감당함으로써 생산능력을 갖춘 남성의 배분 가치를 압도하고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과부의 열악한 처지와의 이러한 대비를 누가복음에서는 '부자'와 '과부'의 대비로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현장이 보다 실제였을 것이다. 오클로스(하급의 무리)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보고 있었다"라는 동사 '에테오레이'는 단순한 주시가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동사를 순화시킨 이유는 이것이 수색/조사를 동반한 좀 센 관찰이었기 때문이다. 즉 헌금 액수를 거론한 것은 모든 관찰의 종합이지, 탐색의 주된 요소는 아니다. 이 관찰의 대상은 그 과부가 지닌 전체 아우라인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러 왔다니까, 거지 행색을 하고 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삶을 포기한 사람 중엔 자기 할당량의 두 배를 헌금통에 넣을 정도로 준비된 사람이 없다. 그 돈으로 술을 사거나, 아니면 마지막으로 가족과 먹고 죽을 빵을 사지.

그녀는 부자들 틈에 낀 가난한 자라서 눈에 띈 게 아니라, 화려할 것 없는 오클로스(ὄχλος)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띌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부의 원형으로서 고향으로 귀환한 나오미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은 드로잉은 좋으나 상기의 해석과 배치된다. 과부의 낯빛이 저리 잿빛이었을 리 없다.

3. 참 과부의 원형

생활형 종교인이 아닌 이상, 구도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길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자기가 걸어온, 혹은 걸어가고 있는 길은 맞는지, 자기가 축성해온 수고와 시간은 효력을 발하는 지.

만약 자기 수고와 시간이 남아 있다면 그는 부자이다.

그러나 만일 수고와 시간을 박탈당한 경험이 있다면 성별의 구분 없이 그는 과부이다. 과부의 영성인 것이다.

바로 이 때 나오미는 비록 자신은 연로하나 자기를 따라온 소녀 과부 룻에게 참된 태도를 가르친다. 너의 고엘이 될 보아스에게 갈 때, 거지 행색을 하고 가서 '의무를 다하라' 청구하는 게 아니라, 기름을 바르고 단정하게 하고 가서 직접 관계를 교섭하라는 지시이다.

이 태도, 곧 부끄러운 두 렙타(λεπτὰ)의 땡그렁 소리도 당당하게 임하는 기품이 바로 '거지'와 '신부'의 차이를 가르는 것이다. 이것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우리가 헌금을 낙하시킬 때, 우린 부자인가 거지인가.
본의 아니게 우리는 거지의 행색을 자처한다.

▲이것은 The Classic Bible Art Collection (Formerly Standard Publishing) 삽화인데 헌금통 입구가 저렇게 부착 되었을 수도 있다는 고증이다. 마치 수도가 같으나 헌금통 입구는 외벽 밖이지만 헌금통은 성전 내부였을 것이라는 고증.

4. 미문(美門), 여인의 뜰

공교롭게도 이곳은 거지짓 하던 못 걷는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운 성전 미문(美門)과 접해 있다.

예수께서 주시하고 계시던 이 장소는 성전 구조상 '여인의 뜰'로서, 당시 헤롯 성전은 '제사장의 뜰',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처럼 대중에게 종교 테마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방인의 뜰이라 하여 이방인만 들어갔던 것이 아니며, 여인의 뜰이라 하여 여인만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이스라엘인이 들어갈 수 있지만 이방인은 그 이상의 공간으로 넘어갈 수 없고, 남성들은 여인의 뜰에 들어갈 수 있지만 여성은 그 이상의 공간에 들어설 수 없는 그런 경계가 선명하였다.

헌금통을 두던 바로 이 '여인의 뜰'이 미문이라는 문을 접하고 있었는데, 이 미문은 '코린디안의 문'이라고도 불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문은 아름다운 문인데, 어찌하여 코린디안이라 불렸을까.

코린디안은 'Corinthian', 즉 고린도전/후서의 그 지역을 말한다. 고린도 지역은 거울 생산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는데, 당시 거울은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미문이 코린디안의 문이었다 함은 그것이 황금(사실은 동)의 문이었던 까닭이다.

이 상징의 교차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저 유명한 노래,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ㅡ에서,

소리 나는 구리(χαλκός)는 이 헌금함에 떨어뜨리는 주화(χαλκός)와 같은 어휘로서, 돈을 떨어뜨리는 태도의 은유이며, 이 과부의 두 렙타 이야기는 바울이 가르친 이 사랑의 노래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렙타가 굳이 한 코드란트라 밝힌 것은 이 코드란테스(κοδράντης)가 쿼터의 유래인 것과 연관 있다. 과부의 이런 결기가 성전의 쿼터를 지탱한다는 표지.







03-27-2024(수) 누가복음 20:45-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기관들을 삼가라(46절)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Beware of the teachers of the law. They like to walk around in flowing robes and love to be greeted in the marketplaces and ha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마가복음 12:38~40)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즐기며. 
39. 회당의 상좌(높은 자리)와 잔치의 상석(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서기관(율법학자)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과부의 재산을 가로채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 긴 옷(38절) :  긴 옷은 유대의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기도할 때나 예배 때에 입는 예복(禮服)입니다.    
그런데 이 예복을 밖에까지 걸치고 나타나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40절) : 과부나 부유한 부녀자들을 위하여 긴 축복의 기도를 해주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일을 의미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율법의 판결권을 남용하여 성전에서 일하는 과부의 재산을 교묘하게 착복하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사람인 척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가라”는 말은 “등을 돌리다, 길을 달리하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서기관들에게 등을 돌리며, 또 그들이 가는 길과 달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과 같이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종교에 세 개의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부활도 인정하지 않고, 내세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현실만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에쎄네파가 있었습니다.
에쎄네파는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현실을 부정하고 금욕주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두 파는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는 달리 부활도 인정하고 내세도 인정하고 오직 율법대로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에쎄네파와는 달리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가운데서 율법을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바리새파 중에서도 율법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제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는데, 그 중에 서기관들이 제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삼가라, 등을 돌리라, 그들과 길을 달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삼가라(4337) 프로세코  προσέχω 스트롱번호4337

1. 마음을 ~에게 돌리다.  2. 주목하다.  3. 관심을 가지다
발음 [ prŏsĕchō ]
어원  / 미완료 προσεῖχον, 제2부정과거 προσεσχον, 완료 προσέσχηκα, 4314와 2192에서 유래

- 월드 비전 전국 지도자 대회(대전 유성 호텔)
  새벽기도회 강사로 참석
  대전 지역에서 이름난 목사님의 경우.
  당시 가장 작은 경차 프라이드를 타고 오셨다.
  호텔에서 주자 안내를 하던 직원이 차를 호텔 앞에 주차하지 말고 호텔 뒤 주차장으로 가라고 하였단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직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보며 한 참석자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겸손한 지도자의 삶과 모습이 그립다.



누가복음에 보면(20:45-46)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얼마든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삼가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서기관들을 삼가고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누가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되기가 쉽겠습니까?
그것은 누구보다 말씀대로 예수님을 더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오래 믿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교회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22: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남들에게는 가르치기만 하고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 22: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제일 되기 쉬운 사람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입니다.
또 이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또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지도자도 아니기에 “절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다릅니다” 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이 제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기 쉽니다. 왜냐하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일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말씀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겸손한 사람입니까? 내가 항상 교만한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겸손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이 서기관과 같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를 채찍질하면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는 길과 반대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찬식을 하기 위해서 검은 가운을 입습니다. 이렇게 가운을 입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찬식을 더 경건하게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만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시장과 길거리를 걸어 다닙니다. 그들이 왜 긴 옷을 시장과 길거리에서 입고 다니겠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율법을 가리키는 서기관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가 위함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기 위함입니다. 어떤 목사님도 천주교 신부님과 같은 옷을 입고 카페에 가니까 어떤 사람이 신부인줄 알고 돈을 지불해주더라는 것입니다.

//또 그 긴 옷에는 율법의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율법의 구절이 적혀 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인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는 종교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율법이 적힌 긴 옷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그를 상석에 앉힙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회당에서만 아니라 길거리를 다닐 때도 유법이 적힌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또 40절에 보면 이 서기관들의 특징에 대해서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법률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의 주 수입은 법률을 해석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법률의 해석과 판결을 받기 위해서 서기관들을 찾을 때 어떤 기준으로 서기관들을 찾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는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을 잘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가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느냐를 가지고 서기관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이 더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경건하고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도였습니다. 특별히 기도를 오래하는 것을 경건하고 거룩한 기준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시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보는 길에서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 더 오래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이 서기관에 대해서 외식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함으로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몇 시간 기도할 정도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해 놓고 실제 부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해서 가난한 과부들의 돈을 착취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간혹 이런 사람을 봅니다. “나는 교회 집사다 장로다” 해 놓고 사람들의 돈을 떼어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도 “교회를 다니니까 우리보다 기도를 많이 하니까 또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믿을 수 있겠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건을 가장해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서기관들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시거나 돈 거래를 하실 때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만일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교회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이 서기관들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은 ---을 하라, 또 —을 하지 말라는 많은 율법을 기록하고 또 만들면서 정작 그 율법의 핵심인 사랑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많은 율법적 규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은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 등의 율법적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로 하여금 중독에 빠지게 하는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우리가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그 술과 담배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는 가족과 이웃 때문 술 담배를 끊을 수 있어야합니다. 이와 같이 술 담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또 왜 성도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합니까? 간음은 우리의 영혼에 심각한 해를 끼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주신 내 육체에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간음이란 상대방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주일성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우선을 두어야합니다. 또 성도를 사랑함으로 만나기 위해서 주일성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지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간음하지 않음으로 말씀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주일성수를 함으로 말씀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술 담배하지 않았지만 과연 교회의 형제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간음하지 않았을 뿐이지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얼마나 돌아보고 사랑하고 있습니까?(하나문제?)

주일에 예배를 잘 드리고 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사랑하고 교제하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셨다면 내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정말 내 이웃을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 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서기관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기도가 자신이 사람들에게 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보이는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 기도함으로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인 것을 보여 주려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순간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혹시 어떤 사람이 40일 금식기도를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40일 금식 기도를 할 정도로 의롭고 경건한 사람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입니다. 또 우리 주위에 있는 일반 종교인들의 생각입니다.

//내가 만일 40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하는 사람은 나는 40일씩이나 금식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나는 40일씩이나 금식기도 하지 않으면 내 자신을 죽이거나 절제하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요즘에 적어도 9시까지는 새벽기도실에 있습니다. 물론 저는 9시까지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고 또 걸으며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매일 새벽기도실에 9시까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저는 새벽시간에 그렇게 있지 않으면 하루도 못살아가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몇 시간 기도한다면 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완악하고 부수어지기 어려운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는 저 자신이 더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러분들도 누구보다 더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내가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기도를 오래하고 많이 한 사람은 절대 기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기도를 오래한 것 때문에 기도를 적게 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를 오래하고 많이 한 만큼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더 알기에 연약한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기도를 오래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의 본질은 형제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지체를 사랑함으로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밤을 새워 기도한다는 것은 밤을 새워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밤을 새워 기도한다는 것은 밤을 새워 형제를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보니까 기도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들 주위에 찬 바람이 생생 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저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기도도 율법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더 드러냅니다. 또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은 더 따뜻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참된 본질을 깨달아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이 서기관들의 제일 큰 문제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자신의 긴 옷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이 율법대로 살아가는 의인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에게 또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롬3장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러분 가운데서 만일 내가 이 교회를 다니고, 좀더 착한 일을 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분들이 바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해서, 조금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주일에 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갈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단 한 분도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나의는 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나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서기관들과는 달리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삼가라(마가복음 12:35~40)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그들을 경계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말씀을 함께 나누는 중에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길 소원합니다. 

첫째-그들의 해석과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치는데 인용하는 시110:1절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본문35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쌔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서기관들은 메사야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방으로부터 억압받는 유대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왕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처럼 메시야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다윗의 혈통을 빌려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였던 서기관들과 자주 논쟁을 하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경된 인도자라고 까지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는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시고 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말씀을 가르쳤고, 예수께서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막7:7에서 그들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서기관들은 사람의 교훈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교훈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반박하시기 전에 먼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본문 36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36절)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께 수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중에서도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었고,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다시 고기 잡으러 바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비로소 오순절 성령의 체험 후부터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모든 말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요14:2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가르칠 때나 들을 때도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도 없고, 바르게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없는 말씀의 선포와 말씀청취는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는 모든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벧후1:20-21절 말씀입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령의 감동이 없이 자신들의 전통적 해석방법에 따라 율법을 이해하고 가르쳤던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러 왔을 때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한 세례요한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1:31-33절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당시의 서기관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교훈을 받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면  결코 예수님과 논쟁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던 세례요한은 주님과 논쟁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동이 결핍된 가르침은 사람들의 영혼에 아무런 감동과 은혜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과 예수의 영광이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은 신앙인들의 영적생활에 커다란 장애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적인 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관한 학식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과 해석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학문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학자라도 그가 성령의 감동이 없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 어떤 성경적 해석이나 가르침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경해석은 자칫하면 사람의 교훈과 가르침으로 타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시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서기관들의 교훈과 가르침은 결국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의 못 받게 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증거 합니다.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나 듣는 성도나 모두가 성령으로 감동되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큰 역사를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하는 저와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둘째-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르치는 신분인 서기관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까칠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지독하게도 외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외식이라는 말은 마음속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을 위주로 사는 삶 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자주 외식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시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경계하신 서기관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보여 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오는 음부에서 고민에 빠져있는 부자는 이 땅에서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서기관들이 입기 원하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긴 옷과 자색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참으로 그는 성경의 말씀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일들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는 자신의 삶이 축복받은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그의 삶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멸망 받는 이 부자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무론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일을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이유는 남에게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타락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들을 평가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노숙자 패션을 하고 광야에서 야인처럼 사는 세례요한을 말씀하실 때 그는 왕궁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을 속히 버려야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품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높아지기를 원하는 삶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삶이라는 것을 크게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습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의 마음은 이미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으로 가득한 타락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소유자는 결코 축복 받은 영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연못에 오리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물이 말라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하고 이주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은 날 수 있는 오리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어「비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이들은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은 그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된 농부가『누가 저런 생각을 다 했을까?』라고 하면서 탄성을 지르며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자랑스럽게 대꾸했습니다.“내가 했지” 순간 그 개구리는 그 높은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교만의 결과는 반드시 패망을 불러옵니다.(잠언16:18).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이 공공연하게 성도들 사이에서도 용납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안 될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성령이 충만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그는 교회 내에 가난하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자신의 부동산을 모두 팔아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모든 이들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그에게 바나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면서 까지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 곳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이름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바나바처럼 좋은 일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밭 값의 일부만을 드리면서 모든 것을 드린 것처럼 사도들에게 거짓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적당히 하고 최고의 효과를 얻어내려는 계산된 지극히 타락한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적은 것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일은 사업에서는 몰라도 성도가 교회에서 신앙인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사단이 가득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행5:3) 
대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에게 영광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대접을 받기를 스스로 원하는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잔치나 회당에서의 상좌를 원했습니다. 

간혹 어떤 교회에는 상석이 따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원하는 자리입니다. 대접을 받으려는 마음의 산물입니다. 사단이 뿌려놓은 타락한 마음의 씨앗을 싹틔우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경계하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 대접받는 자리를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는 일은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아 높여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은 결국에는 반드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6:3-4에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를 외식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과부의 가산이라는 말은 작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서기관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사람들로 소개한 것은 그들이 작은 것들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에서 작은 일을 쉽게 생각하는 영적 교만은 우리 모두가 경계를 해야 할 교만한 마음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외식으로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실하고 참된 기도는 오래하는 것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외식으로 길게 하는 기도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12:40)

기도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처럼 기도가 다른 것들을 보조하거나 이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외식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문에 외식적인 신앙은 빨리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중하기 때문입니다.






콘텐츠(content)가 왕이라면 문맥(context)은 신이다

책을 읽을 때 문맥을 고려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작업이다.
문장의 전후 문맥을 전혀 알지 못하고 글을 읽으면 백이면 백 각기 다른 뜻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나는 ‘말’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하자.
이게 우리가 타는 ‘말’(horse)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입으로 하는 ‘말’(language)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초(初, 처음)가 아닌 ‘말’(末, ‘마지막’)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어학연수차 미국에 도착한 첫 날, 한국인 여학생에게 미국인 선생이 이렇게 물었다.
“Do you miss Korea?”
그러자 그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No, I am not Miss Korea.”(아녜요, 전 Miss Korea가 아닌 걸요).
그녀는 “한국이 그립지?”라는 영어문장을 “너 미스코리아니?”로 착각한 것이다.
문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Are’가 아닌 ‘Do’가 사용된 것도 그렇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스 코리아’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단어는 문장 속에서, 문장은 단락 속에서 의미가 결정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보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언 중 대부분이 잘못 알고 있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발명왕 에디슨이 한 말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란 말이다.
대부분은 에디슨이 영감보다는 노력에 더 강조점을 두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영감도 필요하겠지만 노력이 그 이상으로 중요함을 그가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뜻은 정반대이다.

한 잡지사 기자가 “지금까지 발명 중 가장 영감 있었던 발명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자, 에디슨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음.. 아마도 신생아의 두뇌에서 천재성을 발견했다는 것이지요.
갓 태어난 만큼 천재성이 머물기 좋은 자리는 없어요.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기 쉽지 않아요.
하지만 1% 영감과 99% 노력만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소!”

에디슨의 의미는 “99% 노력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노력해요.
하지만 난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1%의 영감이 있어요”란 것이다. 

곧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99퍼센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천재가 되려면 노력도 필요하지만 1%의 영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앞뒤 맥락을 파악하지 않은 채 한 문장 그 자체에만 고정되어 해석한다면 저자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성경 속에서 그런 대표적인 구절을 찾아보자. 수 1:7절의 말씀이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

여기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구절을 ‘정치적으로 우파나 좌파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참조해서 살펴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7절 다음에 나오는 8절까지 포함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이것을 문맥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그것으로부터 우측으로나 좌측으로나 돌아서지 말라’(do not turn from it to the right or to the left)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신 교수 수정역)

본문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책)으로부터 돌아서서 조금이라도 곁길로 가지 말고 언제나 그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7절만 보면 거기서 말하는 ‘우나 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으나, 바로 다음 절인 8절을 참조해보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율법책’을 기준으로 봤을 때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말고 정로를 추구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문맥을 고려한다는 것은 이만큼 중요한 일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지 않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잡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함이 필수적이다.

하나만 더 살펴보자.
행 19:3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극장이나 연극장에 가면 안 된다고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다고 들었다. 바울이 이 설교를 들었다면 얼마나 쓴 웃음을 지었을까?

이 본문은 영화나 연극을 금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당시 바울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해를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거기 들어가지 말 것을 권고하기 위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문맥 고려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를 취급하는 일에서 황금률, 하나의 절대적인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정직이다.
우리는 우리가 택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본문을 언제나 문맥 가운데서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본문에 정직하다는 것은 전후 문맥의 흐름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땐 문맥의 중요성을 꼭 기억하고 시작하자.






03-26-2024(화) 누가복음 20:41-4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윗의 자손(4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Then Jesus said to them, "How is it that they say the Christis the Son of David?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은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삼하 7장, 시 89:20-37, 사 9:2-7, 11:1-9. 렘 23:5-6, 33:14-18).

이와 같은 예언을 곡해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에 마치 다윗 왕과 같은 시대의 번영된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성육신하셨습니다(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성경의 예언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선언했습니다(롬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 되셨다는 것은 다윗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삼하 7장;시 89:20-37;사 9:2-7,11:1-9;렘 23:5-6;33:14-18).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점에서(빌 2:6), 그들의 메시야관은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이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언급한다(롬 1:3,4).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신약성경에서 17개의 구절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예수님보다 대략 1000년 정도 앞서 살았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메시아)가 다윗의 씨앗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말합니다(삼하 7:12-16).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따라서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였으며, 그것은 즉 예수님이 다윗의 씨앗임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법적 아버지인 요셉을 통해 다윗의 직계 후손이 된다는 계보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3장에 들어있는 계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따른 혈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요셉에게 입양되고 마리아에게 피를 물려받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언급될 때는 주로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예언한 대로 메시아적 칭호를 언급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긍휼 또는 치유를 구하는 자들에 의해 여러 번 “주여,…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불려지셨습니다.
귀신에 의해 고통 당하던 딸을 가진 여인(마태 15:22)
길 가에 있던 두 명의 맹인들(마태 20:30)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마가 10:47)

모두가 도움을 구하며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영예의 호칭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 권력, 능력을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공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외쳐 부르는 자들과 달리 바리새인들은 교만에 눈이 가리워지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므로 맹인 거지들이 볼 수 있었던 것조차 볼 수 엇었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지금 이곳에 오셨다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존경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존경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칭송할 때 격분했으며 (마태 21:15)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세웠습니다(누가 19:47).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그 호칭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라고 요구하심으로써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가 12:35-37)
물론 율법 교사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유대 지도자들이 교사로서 미숙한 점과 구약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아의 본성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내어 자신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고 세상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도리가 되신(사도 4:12)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적 의미에서도 영적 의미로도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가?

누가복음 1장 32절에서 가브리엘 천사장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라고 한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다. 아래에는 이에 관해 마태복음에 언급된 구절들이다.

마태복음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태복음 12: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태복음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태복음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 즉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물려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이다.
둘째,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물려받을 정통권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를 이을 법적 계승자이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켰음은 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에 나오는  얘수님의 두 갈래 계보에서 명확해진다.

첫번째 계보는 사회에서 예수님의 아버지로 인정한 요셉이 다윗왕의 왕족 계통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이어받을 정통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예수님은 다윗의 직계 자손일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충족된다.
누가복음 3:23-38에서 보이듯이 마리아는 진정 다윗의 직계 자손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법적, 물리적 모두 다윗의 왕좌에 정통권을 가진 다윗의 자손이다.

이런 일들은 물론 돌발적으로 생기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이들은 메시아에게 필요한 전제조건들이다.
구약성경 예언에 의하자면 약속한 메시아는 아브라함의 자손(창세기 21:12, 갈라디아서 3:16 참조)임과 동시에 다윗의 자손(시편 132:11, 사도행전 2:29-30 참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둘 다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이 진리를 직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단순한 역사적 일람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약속한 분이시며,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21;12, 시편 132:11)을 달성하셨을뿐 아니라 아담의 타락이후 타락이 가져다 준 상황을 바로잡아 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3:15)도 실행하신 것이다.


다윗의 자손, 다윗의 주 예수 그리스도(누가복음 20:41~44)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다

예수님이 고난 주간 첫날인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마 21:9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기도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의 후손인 요셉(마 1:20; 눅 1:69)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분명한 계보(족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마 1:1).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분이 길을 가실 때 두 맹인이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9:27).
심지어 이스라엘 밖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이방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보고서 한 말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습니다(마 15:22).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를 때는 다윗의 자손인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해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경우는 질병에서 놓임을 받기를 기대했던 것이고,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며 기대했던 것은 그들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즉 정치적 사회적 탄압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1:32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순히 족보상 다윗의 후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을 자로,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무궁한 나라를 통치할 자로 오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로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오셔서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반겼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그들을 억압하고 정복하고 있는 이방 민족을 몰아내기를 기대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아 자주국가를 예루살렘에서 실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바벨론, 그리스, 로마 수백 년간 계속해서 짓밟혀있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견고한 나라로 오랜 세월 다스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이 백성들 가운데 행한 기적과 가르침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기대할만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질병, 귀신, 만물(파도, 바람)을 통제하는 능력, 권위 있는 가르침,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자로 적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혹은 그와 동일한 성격의 표현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있었던 첫 번째 논쟁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의 권위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누가 준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반문하심으로 자기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눅 20:1-8). 그리고 이어진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으로 등장하는데, 그 하나님의 독생자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눅 20:9-18).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하나님)는 하나이니라”(요 10:30).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다는 것이죠(요 5:18).

그냥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하여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래서 백성이 가지고 있던 여러 질병, 정치적, 사회적, 영적 문제의 해결사, 구원자가 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왕이 되려 하셨다면 사람들은 충분히 예수님을 왕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정도 수준으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으시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신성모독자’를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훌륭한 성인,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 보는 것에 문제가 없습니다. 심지어 의지하고 기도할 대상, 나에게 복을 더해줄 대상으로 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이 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느냐?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서는 존경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따를 마음은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틀림없고, 그분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첫째는 정신이상자, 둘째는 사기꾼, 셋째는 하나님 중에서 하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①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데도 자기 자신이 그렇다고 믿고 주장한 것이라면 그분은 정신이상자입니다. 오늘날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미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미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온전하지 못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헛소리하거나, 허황된 것을 주장하거나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분은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②둘째로, 만일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한 것이라면 그분은 사기꾼입니다. 거짓임을 알고도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짓으로 남을 속이고 이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전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기가 만든 거짓말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형선고에 이르는 심문 가운데도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절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③그러면 나머지 옵션은 하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 이 탁월한 논증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입증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약 1,500년의 세월 동안 40여 명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이 성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읽고 사용하던 성경, 구약성경을 통해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임을 확증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자기의 뜻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해석하는지 배우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경해석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때 단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찾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의 질문1(41절)

먼저,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아마 성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바리새인들(마 22:41)과 방금까지 질문한 사두개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41절“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마 22:42). 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가르치던 서기관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막 12:35). 구약의 많은 예언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삼하 7:14~17; 23:1~7; 시 89:28~37; 사 9:6~7; 11:1~10; 렘 30:9; 33:14~18; 겔 34:23~24; 미 5:2). 그 대표적인 예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이런 구약성경의 말씀으로 서기관들에게 가르침 받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그리스가 자기 백성의 땅에 오신다면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와야 한다고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성경 기록 하나를 그들에게 읽어주십니다.

2. 예수님의 인용(42-43절)

42절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절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110:1인용)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 말씀입니다(1절). 다윗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람의 손에 의해 뽑힌 실패한 왕 사울을 이어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선택하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으로,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뜻대로 선하게 다스린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습니다(BC 1000년 정도).

제왕시라고도 불리는 이 시편은 다윗은 자기 이후에 세워질 왕,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자기의 왕권을 이어받고 그 나라를 다스릴 자를 위해 지은 노래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솔로몬이었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다윗이 기대했던 후손을 솔로몬이 아니라 많은 유대인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바로 그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메시아)로 보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도 그러한 접근을 이상하게 보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솔로몬과 그 후손들보다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그리스도에게 적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시편 강해를 하시는데, 우리는 몇 가지 예수님이 성경을 해석하는 태도와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은 구약성경의 일부인 다윗의 시편을 단지 인간의 책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주장하려는 것,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그 주장이 온전히 이 본문의 권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의 무오성, 권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자기의 주장을 이어나가고 계십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했다”고 하십니다(마 22:43; 막 12:36).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였습니다.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 맞춰 설정된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문학 장치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류가 가득한 단지 종교적인 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그 자체에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성경에 대한 태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조롱하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성경을 불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절대 권위의 아버지 말씀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권위는 상황에 따라 무시합니다. 최근에는 창조와 진화의 논쟁, 성 정체성에 대한 논쟁 등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 성경이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일부분만 옳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성경을 이리저리 재구성하여 자신들이 수용하고 싶어 하는 것과 조화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성경을 조작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 그 권위를 확실히 인정했습니다. 조금의 의심이나 의구심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성경해석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관찰하셨습니다.
42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되”.

여기에 “주”가 두 번 언급됩니다.
헬라어로는 큐리오스라는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인”이라는 뜻이고,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주께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누구에게 이르셨다고 말합니까?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나의 주”라고 표현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을 이어 왕이 될 다윗의 후손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적용하여 보면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주”라고 표현하고, 자기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받을 자를 가리켜 “내 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지요?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관찰하셨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이렇게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다윗의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를 또 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예수님의 질문은 44절입니다.

3. 예수님의 질문2(44절)

44절“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단지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왕이 될 사람에 불과했다면 왜 하나님 말씀에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하였느냐?

합리적인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는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라고 부르는 분, 다윗보다 먼저 계셨고 다윗보다 위에 계신 분, 곧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성령 하나님에게 감동되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특별히 43절의 말씀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여기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말한 첫 번째 ‘주’입니다. 그리고 “너”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이 말한 두 번째 ‘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는다’는 표현은 고대 동양 전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왕이 패배와 복종의 표시로 승리한 왕의 발아래 목을 밟혔습니다. 승리한 왕이 패배한 원수를 발판처럼 밟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 말씀을 찾아보면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예수님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저자들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사망까지 정복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5:2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노래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지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고 묻습니다(히 1:13).

하나님 보좌 우편, 왕을 대신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죄를 사하고, 사망을 멸하고, 원수를 밟으며 만물을 붙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저 그분을 섬기는 영일뿐입니다(히 1:14).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다윗의 주, 하나님이셔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통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보다 큰 권세를 가져야만 이 세상에 온전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무궁한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모든 악을 심판하고 모든 선을 보상하시는 권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의 최고 원수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왕이 죄와 사망을 멸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 죄때문에 사망을 맞이할 뿐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죄와 사망을 밟고 그를 믿는 자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죄 사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사망을 이겨내지 못한 분이 어떻게 우리 인류를 얽매고 있는 사망의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시고, 그 말씀을 자세히 관찰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 곧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구약에 다윗을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분명하게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감히 예수님께 묻는 자도 없었습니다”(마 22:46).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의 족보에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살았던 한 사람으로만 보십니까? 여러분 삶에 교훈이 되고 도전이 되고 모범이 되는 성인으로 보십니까? 좋은 일을 가져다주고 복을 줄 귀인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처럼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그 발아래 두고 통치하실 하나님, 죄와 사망을 이기고 생명과 부활을 허락하실 하나님, 공의와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하나님.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자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그 나라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성경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분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 지속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고 바르게 해석함으로 말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우리가 힘을 잃고 믿음이 연약해지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우리와 연합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신성과 능력을 보는 것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소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영생을 결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의심 없이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구태여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예배드릴 이유도 없고 기도하거나 전도하는 것은 헛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은 다 진실한 신앙인이냐 하면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약 2:19).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떱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되 그가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교의 삼대 당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유력한 제사장 가문들과 세속 귀족 대표자들로 된 당파로서 오직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으며 죽은 자의 부활이나 내세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사직을 독점했고, 최고 종교 재판소요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장악했습니다.

또 로마 당국과 타협하여 정치적으로도 큰 혜택을 누렸습니다.
유대교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중심으로 삼는 종교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사두개인들의 특권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 사두개파인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상인들에게 성전 마당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도록 허락해 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 챙겼습니다.
또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매년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내야 하는데, 이 때 세속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하는 세겔로 바꾸어서 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 마당에서 환전을 하게 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락시킬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하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모세가 이르기를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둘째와, 셋째와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옵니다. 팔순의 모세가 양떼를 인도하여 호렙산에 이르렀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모세는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며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때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기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말씀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 외에도 하나님께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심은 곧 하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뵈었을 때는 아브라함이 죽은 지 이미 40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록 아브라함이 육신으로는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육신의 죽음과 더불어 영영 존재가 소멸되고 말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보니 하나님을 일컬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지구를 비롯한 온 우주 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홀로 살아계시는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생(永生)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신은 죽었으나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그들의 육신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의 육신의 죽음을 일컬어 잔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 줍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 영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이미 죽은 자입니다.

아담의 후손은 태어날 때 이미 그 영이 죽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전혀 관심도 없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 주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은 영이 죽은 상태여서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하나의 직업적인 종교인으로서 정해진 종교 의식을 거행할 뿐 제사를 받으실 하나님께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종교적인 특권을 이용해서 대접받고 잘사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제사장들이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색이 신자라고 하면서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신학 박사라도, 수십 년 교회를 다녔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산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영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영을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은 갓난아이가 젖을 사모하듯이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설교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점점 진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됩니다. 이는 그 사람 속에 영생의 씨가 심겨져서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성경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였고 예언서와 역사서, 시가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오경 곧 율법서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비록 율법을 지켜 구원받을 사람이 없긴 하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로 인해 살리라, 곧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영혼의 존재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육신의 죽음으로 인간의 삶은 영영 끝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단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잘못된 주장을 합니다. 성경은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지 사사로이 풀면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단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자기들이 만든 틀에 맞추어서 억지로 해석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8장 14절에 이르기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십니까? 이는 성도님들이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더 깊이 알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은총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영적인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알아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영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고대 중근동의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알 수 있고, 문학적인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윤리 도덕에 관한 차원 높은 가르침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사람은 성경의 주제인 구원의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꾸준히 읽어나가십시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더라도 계속 읽다 보면 앞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 주셔서 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 번 째로,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라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일곱 형제를 차례로 남편으로 삼았던 여자가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닌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제사장으로서 성전 제단에 제물을 바친 것은 한갓 종교적인 의식이었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육신의 부활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가 죽어 흙으로 변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살려내지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으로서는 지극히 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부활 시에는 천사와 같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을 것인데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으므로 쉬운 진리조차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아들을 얻게 될 것을 바라고 믿었으며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이 번성하리라는 말씀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의 믿음은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살펴보십시오. 어디서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이 믿는 자들을 위하여 일어났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 바다에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호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레 동안 열을 지어 성을 돈 것밖에 없는데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열거하자면 밤을 새워도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에 기록된 이러한 기적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요 종교적인 진술일 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불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그대로 믿는 것을 보고 참 순진하다고 말합니다. 자기들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러나 자기들은 성경이 틀린 것을 너무나 많이 알기 때문에 순진하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로 성경을 판단하다 보니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이 사실임을 믿고 의심치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과거에 능력을 나타내셔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변함없는 능력으로 성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그 능력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영을 살려 내시며, 마귀의 종 된 자들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모든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또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시고, 세상 유혹을 물리치게 하시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때 예수님을 믿다가 그만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이끌려서 교회에 와 앉아있긴 하지만 설교가 졸음을 부르는 자장가로 들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재미가 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면 불쌍한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수박 겉핥기로 교회에 드나들었을 뿐이지 영생의 진리를 맛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자들입니다.

찬송가 85장을 작사한 성도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역시 그 능력을 체험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시며, 그 지혜와 능력이 한량없으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또 앞서간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지금 저와 성도님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산 자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서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일평생 동안 동행하시면서 날마다 능력의 손길로 붙들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3-25-2024(월) 누가복음 20:27-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산 자의 하나님(38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죽은 사람을 "네크로스(νεκρός)"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입니다(He is the God of the living).
살아있는 사람은 "자오ζάω)" 라고 합니다.
이때 살았다 죽었다는 의미는 물론 육체적인 생명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생명을 세 종류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생명(조에. ZOE. ζωή)
둘째는 혼의 생명(푸쉬케. PSYCHE. ψυχή)
셋째는 육의 생명(비오스. BIOS. βίος)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  8:38, 고전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 16:25, 행 8:33, 약 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 이생에, 고전 15:19.
  c. τέλος ζωῆς : 생의 마지막, 히 7:3.
  d. ζωὴ κ. πνοή : 생명과 숨, 행 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 생기, 계 11:11.
  f. ψυχὴ ζωῆς ; 살아있는 것, 계 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 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 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νεκ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3498
1.

죽은.

2.

마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nĕkrŏs ]
어원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뜻풀이부

  • I.
    [형용사] 죽은.
    • 1.
      [문자적]
      • a.
        [생물] 마28:4, 막9:26, 행28:6, 계1:18.
      • b.
        [무생물, 놋뱀, 우상에 대해 사용]
    • 2.
      [비유적]
      • a.
        [사람] ㉠ [방탕한 아들에 대해 사용] 죽은 것 같은, 타락한, 눅15:24,32. ㉡ [비활동적인 교회에 대해 사용] 계3:1. ㉢ [세례받기 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사용] 롬6:11, 엡2:1,5, 골2:13.
      • b.
        [사물] ν. ἔργα: 죽은 일, 히6:1, 9:14.
  • II.
    [명사] 죽은 자, 사자
    • 1.
      [문자적] 마17:9, 막6:14, 눅9:7, 요2:22, 12:1, 행3:15, 4:10, 13:30, 롬6:4, 7:4, 고전15:12, 갈1:1, 엡1:20, 골2:12, 벧전1:21.
    • 2.
      [비유적] ἄφες τοὺς ν. θάψαι τοὺς ἑαυτῶν: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마8:22, 눅9:60.

왜 예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고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고 어느 집안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유대 전통은 그 다음 형제가 형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아야 할텐데 둘째 형제도 죽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계대결혼법이라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계대결혼법에 따라 일곱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렇다면 부활 때에는 그 여자는 누구의 부인이 됩니까?
이런 엉뚱하고 난처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시집도 장가도 안 가고 새로운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조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조에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말합니다.
영생이란 죽은 후에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그 때부터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죽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영원히 살아간다고 합니까?
육체의 생명은 죽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죽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한 것으로 확신하고 매일 매일의 삶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진실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본문에서 깨우치는 자녀들은 두 종류라고 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자녀들(34절)

이 세상의 저녀들은 당시 풍속에 따라 계대 결혼제도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제도에 묶여 있었기에 일곱 형제들에 의해서 한 사람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제도가 과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신령한 가치 보다는 세속적 가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부활의 자녀(36절)

부활의 자녀는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활의 자녀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다시 죽을 일이 없고 천사와 동등하다고 합니다(35-36절).
 
따라서 산 자들은 세속의 가치를 성경적 가치와 비교하여 잘못된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쫓아가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부활에 대한 질문과 대답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활의 문제를 들고 나와 질문하셨습니다.
즉 한 여인이 형사취수의 제도로 일곱 명의 남편을 가졌는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들의 그릇된 내세관을 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현세와 내세를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부활하면 천사와 같은 형체를 입게 되어 다시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 부활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음(막 12:25)
b. 항상 주와 함께 있음(살전 4:17)

예수님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함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부활 문제로 시험한 사두개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명확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듣고는 그분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요, 약속에 참예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a.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임(고전 1:24)
b. 그리스도의 교훈은 하나님의 것이요(요 7:16-17)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36절)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요 11:25, 26).

νεκ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3498

1. 죽은.  2. 마 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nĕkrŏs ]
어원  /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ζάω 스트롱번호 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영생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생명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늘 가난하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

개울물이 빨리 흘러가 돌아오지 않듯이 인명(人命)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불경(佛經)

거름은 땅을 비옥하게 한다. 생명에는 어디나 배설물이 있다. -도교

과학이나 생물학은 인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한 기원의 궁극적인 해답이나 해답자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된 성경만이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사망의 기원을 죄에 두는 깊은 관찰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준다. -올더스 헉슬리

그대의 생명을 잘 돌보아라. 그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휫필드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가졌고, 따라서 존중하는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높이는 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 -슈바이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 즉 자신의 내부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즐거움, 흥미, 지식, 유머, 슬픔 등을 송두리째 주라.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살찌우고, 자신의 생명감도 증진시키는 일이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준다는 그 자체가 무한한 즐거움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에릭 프롬

대지가 숨을 내쉴 때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준다. 대지가 숨을 들이마실 때는 우리는 죽음을 맞아야 할 운명이다. -칼릴 지브란

만약 장수하고 번영하려면 거미가 살게 놔 둬라.

모든 것은 서로 살리고 섬기는 모습이다. -석가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피조물을 학대하지 말고 죽이지도 말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해하도록 노력해라. 나 이외의 모든 살아있는 생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며 자신의 목숨을 최고로 여긴다. -불교

모든 생물은 오직 한 분, 신에게서 왔으며 그러므로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우리 각자는 거대한 신의 구성원이다. -톨스토이

모든 생물은 천성적으로 전쟁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스위프트

목숨은 오직 하나, 생명의 가치를 따질 수는 없다.

부식(腐蝕)은 그 자체가 더 풍요한 생명을 낳는다. -로버트 브라우닝

사람의 목숨은 모든 재물 중에서 으뜸가는 재물이다. -일련(日蓮)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 층 높이의 불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한 일이다.

살고 있는 한,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 좋다. -존 밀턴

살아있는 풀 한 포기 이상의 신비는 없다. -김용옥

생명 이외의 부는 없다. -러스킨

생명은 시간이 아니라 활동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사람은 서른 살에 노인이 되어 죽을 수도 있고, 여든 살에 젊은이가 되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한 사람은 죽음 후에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죽기 전에 멸망한 사람이다. -토마스 풀러

생명은 운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기교이다. -괴테

생명은 존재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토마스 굿윈

생명은 지속(持續)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지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져도 졌다 하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살려니, 되려니 하는 것이 믿음이다. 없어도 믿는 것, 없으면 만들기라도 하자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이 생명이다. -함석헌(咸錫憲)

생명은 황금을 쌓지만 황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다. -호메로스

생명의 자랑은 늘 신선하고 기운찬 점에 있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완성했다는 순간은 없는 것이다. -알랭

생명의 특성은 리듬(Rhythm)에 있다. -김용옥

생명이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죽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 자연의 도리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엇인가 바랄 수 있다. -세네카

생을 죽이는 자는 죽지 않고 생을 살게 하는 자는 살지 않는다. -장자(莊子)

세 종류의 생명이 있다. 첫째, 자연적인 생명, 둘째, 영적인 생명, 셋째, 영원한 생명(영생) -토마스 맨톤

신은 절대로 반복은 하지 않는다. 생명의 법칙은 무한한 변화이다.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 있게 하기를 배웠다. -플루타르크

아침에 나는 버섯은 그믐날도 초하룻날도 모른다. 사람의 생명도 이 버섯처럼 덧없는 것이다. -장자(莊子)

어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이 짧은 것을 믿지 않는다. -존슨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바그너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것은 생명이며 결코 죽음이 아니다. -발레리

예술은 생명 이해의 그릇이다. -딜타이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수명은 비록 짧지만 잘 소비된 일생의 기억은 영원하다. -키케로

우리가 하나님과 자연으로부터 받는 최고의 것은 생명이다. 이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기르려는 본성은 각자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깨뜨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은 역시 신비임에 틀림없다. -괴테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시간은, 그 생명을 빼앗기 시작한다.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짧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것을 가리켜 죽어가는 생명인지 살아가는 죽음인지 잘 모르겠노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연기 같은 그림자이자 그림자 같은 꿈일 따름이다. -토마스 브룩스

인간의 생명은 마치 바람에 내맡겨 있는 등불과 같아서 언제 꺼질지 모른다. -법보(法寶)

인생의 참된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데 있다. -톨스토이

자기 자신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서 추방시켜야만 한다. -톨스토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해도 미워해도 안 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존 밀턴

자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자는 남의 생명 또한 귀한 줄 모른다. -도교

자신의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속에서의 삶은 더욱 큰 환희를 안겨준다. -괴테

잘 사는 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사무엘 워드

조금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샘으로 빈 항아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가득 찬 두 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돌아갈 것이다. -칼릴 지브란

죽은 자에게 신은 생명을 되붙여준다. -빅토르 위고

'쥐를 위하여 밥덩어리를 언제나 남겨 두고, 나방을 불쌍히 여겨 등불을 켜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옛 사람의 이런 생각은 곧 우리 인생의 태어나고 자라게 하는 한 가지 작용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른바 흙이나 나무와 같은 형체일 따름이다. -채근담(菜根譚)

추위에 떨었던 사람일수록 태양을 따뜻하게 느낀다. 인생의 험한 항해에서 빠져 나온 사람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된다. -휘트먼

평안하게 죽는 것보다 괴로움을 견디면서 사는 것이 낫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생명을 소유하시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가지고 그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실 것이다. -무디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명심보감(明心寶鑑)

현재 우리의 생명은 한쪽에 너무 많은 자아가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너무 많은 기계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아직 순수한 생명이 아니다. -게오르그 짐멜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

우리는 이제 생명의 인식에 있어서 아홉 째 중점-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성경에서 지극히 중요한 진리이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영적인 생명을 분명히 알고 죄 없이 승리하는 생활을 하려면 이 기본 진리에 대한-온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Ⅰ. 세 가지 생명

A. 세 가지 생명의 정의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생명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 안에 있는 세 생명 - 사람의 생명, 사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 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 안에 오직 한 생명, 즉 부모로부터 얻은 사람의 생명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 안에 사람의 생명 외에 사탄의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 18절, 20절은 사람 안에, 즉 사람의 육신 안에 죄가 거함을 말한다. 여기의 죄는 사탄의 생명을 가리킨다. 이 육신은 사탄의 생명을 담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 안에 머물며 자주 영을 거스려 정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안에 사탄의 생명을 소유한다.

더우기 요한복음 3장 36절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라고 말한다. 요한 일서 5장 12절은 또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이 있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의 고유한 사람의 생명과 타락을 통해 생긴 사탄의 생명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준다.


B. 세 가지 생명의 기원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생기를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셨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아담은 피조된 사람의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의 두 나무,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앞에 두셨다. 성경에서 나중에 주어진 계시들에 의하면, 생명나무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사탄을 의미하며, 아담은 인류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 당시 에덴 동산, 즉 우주 가운데에는 세 편, 즉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이 관련된 하나의 상황이 벌어졌다.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그가 하나님과 겨루는 그 초점은 사람이다. 사탄과 하나님은 다 사람을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의 성취를 위해 사람을 원하셨고, 반면에 사탄은 그의 사악한 욕망과 실현을 위해 사람을 원했다. 사람을 얻음에 있어서 사탄과 하나님의 방법은 다 생명을 통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 그분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고 그분과 연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을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유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타락한 생명을 얻어 그와 혼합되게 했다.

사탄에게 속임을 당한 그날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 후부터 사탄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와 그를 타락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고유한 원래의 창조된 생명 외에 사람은 또한 타락한 사탄의 생명을 얻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중에 나타나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 안에 그분의 생명을 두시고, 그분의 아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사람이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창조된 사람의 생명과 타락을 통해 생긴 사탄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의 세 생명은 각각 창조, 타락, 구원을 통하여 얻은 바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손으로부터 나올 때 우리는 피조된 인간의 생명을 얻었다. 아담을 통과할 때 우리는 타락되어 사탄의 타락된 생명을 얻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받아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C. 세 생명의 위치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세 가지 다른,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의 생명은 각각 우리 존재의 세 부분인 혼과 몸과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 그분은 생기를 사람 속으로 불어 넣으셨고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창 2:7). 이것은 창조를 통해 얻은 사람의 생명이 사람의 혼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탄에게 유혹되어 타락했을 때, 그는 사탄을 의미하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그의 몸 안으로 섭취하였다. 그러므로 타락을 통해 사람에게 생긴 사탄의 생명은 사람의 몸 안에 있다. 사람이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의 생명을 그분과 함께 가져오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구원을 통해 사람이 얻는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영 안에 있다.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혼 안에는 사람의 생명을 가지며, 몸 안에 사탄의 생명을 가진다.

세 가지 생명이 위치하는 세 부분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 부분들의 의식에 관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가장 밖에 있는, 물질적인 부분인 몸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물질 세계를 접촉하는 촉각과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의 오감을 가진다. 그러므로 몸의 의식은 세상적인 느낌 또는 물질적인 감각이라 불린다.

우리의 가장 안에 있고 가장 깊은 부분인 영은 양심과 직감과 교통을 포함한다. 양심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관이며 옳고 그름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고 인정되며 무엇이 그르고 거절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직감은 아무런 수단이 필요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교통 부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통하고 교통을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접촉하게 하는 것이 교통의 부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느끼게 하는, 즉 영적인 세계를 접촉하게 하는 것은 양심과 직감 둘다이다. 이 두 부분의 느낌은 영 안에서의 느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인 감각, 또는 하나님의 느낌이라 불린다.

영과 몸 사이에 위치한 혼은 우리 내부의 심리적인 부분이며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내포한다. 생각은 사고하고 고려하는 기관이고, 감정은 즐거움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의 기관이며, 의지는 의견을 세우고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다. 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부분-생각과 감정-만이 의식을 가진다. 생각의 느낌은 합리성(rationalization)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면에 감정의 느낌은 좋고 싫음에 기초를 둔다. 우리 혼의 두 느낌은 우리에게 사람의 심리적인 부분, 즉 사람 자신 또는 자아를 느낄 수 있게 하며 심리적인 세계를 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심리적인 느낌, 또는 자아 의식이라 부른다.*

(*보통 우리가 「사람의 의식」을 말할 때, 우리는 혼의 감정 안에서 좋아하고 싫어함의 느낌을 의미한다. 이 느낌은 혼의 생각, 몸의 오감, 영의 의식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영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영의 직감으로 인해 약간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주로 혼의 감정에 있어서의 좋아하고 싫어함의 느낌으로 구성된다.)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수치감을 갖게 하셨다. 이 느낌은 이중 기능을 가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을 막아 준다. 만일 사람에게 수치감이 없다면 마음대로 죄를 범하기 쉽다. 누구든 수치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더 많이 보호될 것이다. 여자는 수치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이 있다.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분명 가장 낮은 부류의 사람이다.


D. 세 가지 생명의 본성과 상태

우리가 우리 안에 얻은 세 가지 다른 생명은 각각 그 고유한 기원을 가지고 우리 존재의 세 가지 다른 부분에 따로따로 거한다. 그러므로 이 세 생명의 본성과 우리 안에서의 각각의 상태 역시 서로 다르고 다소 복잡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직후에, 하나님의 눈에 사람은 「심히 좋았고」(창 1:31) 「정직하였다」(전 7:29). 그러므로 창조된 사람의 생명은 원래 좋았고 정직했다. 그것은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에 대한 의식이나 부끄러움의 의식도 없었다. 그것은 순전하고 단순했다.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한 후, 사람은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 있는 상황을 빚어 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사탄에게 중독되어 생명이 오염되고 타락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집에 있는 나의 자녀들에게 칠판 지우개를 가지고 놀지 말라고 명했다 하자. 내가 집을 떠난 후 그들은 호기심 때문에 그 지우개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돌아왔을 때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잘못된 행위는 단순히 가족 규율의 위반일 뿐 아무 것도 그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번에 내가 독약병을 집에 두고 아이들에게 『절대로 이것을 마시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하자, 내가 집을 비운 후 그들은 그 병이 가지고 놀기에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는-아뿔사, 그 독약을 마신다. 이 순간 그들은 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가족 규율을 위반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독이 있는 어떤 것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금령에 불순종했을 뿐 아니라 사탄의 생명을 그 자신 안으로 취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적으로 복잡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의 정직하고 좋은 사람의 생명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사악하고 타락된 사탄의 생명도 소유한 것이다.

온갖 종류의 죄로 가득 차 있는 사탄의 생명은 모든 타락의 씨와 악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탄은 사람 안에 살면서 그에게 정욕을 품게 하며(요 8:44) 죄를 범하게 한다(요일 3:8).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살아내게 하는 악의 근원이다. 사람이 저지르는 다양한 죄들은 사탄의 생명, 또는 그 안에 거하는 마귀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이 마귀적인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비록 때때로 사람이 그의 생명을 좇아 사람의 선함을 약간 살아낼 수 있긴 하지만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 마귀적인 생명을 좇아 무서운 악들을 살아낸다.

때때로 사람은 매우 점잖을 수 있다. 그는 정말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참된 사람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때에, 화낼 때, 그는 정말 마귀와 같고 악취로 가득하다. 사람이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함, 도박과 여러가지 범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무서운 모습을 지니며 마귀의 냄새로 가득하다. 사람이 그 마귀적인 생명을 살아내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를 속이고 그로 하여금 마귀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사람과 마귀의 혼합된 생활을 하게 하는 속에 있는 마귀의 생명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실지적인 내적 상태이다. 사람에게 사람과 사탄의 두 생명이 있고, 본성에 있어서 좋은 면과 또 다른 악한 면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에게는 한편으로는 선하고 정직해지려는 소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과 악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여러 세대를 거쳐, 인간 본성의 연구에 종사하는 철학가들은 두 가지 다른 사상을 주창해 왔다. 즉,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생명과 악한 생명을 다 소유하고 있으므로 우리 안에 이 두 본성이 다 있다.

그러나 주께 감사하라! 오늘날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과 마귀의 생명을 소유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도 소유하고 있다. 타락을 통해 사탄이 그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주입하여 우리를 그와 연합되게 하고 그에게 얻은 바 되게 하며 그의 본성의 온갖 악을 소유하게 하듯이, 하나님 역시 그분의 구출을 통해 그분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두시고 우리가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에게 얻은 바 되게 하며, 우리로 그분의 본성의 모든 신성하고 선함을 소유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타락의 결정적인 요점이 생명이었듯이 구원의 결정적인 요점도 역시 생명이다. 주의 상(床)을 대할 때, 우리는 먼저 생명의 떡을 떼고 그 후에 죄 사함의 잔을 마신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체험할 때 먼저 피를 받고 나서 생명을 받기는 하지만 그분의 구원에 있어서 주된 상징은 생명을 뜻하는 떡임을 의미한다. 피를 뜻하는 잔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떡을 취한 후에 잔을 취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 안은 세상 사람들보다 좀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사람의 정직한 생명과 사탄의 사악한 생명과 신성하고 선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그 당시 에덴 동산에 존재했던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의 셋으로 구성된 그 상황이 오늘 우리 안에 똑같이 존재한다. 우리 내부 그곳에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셋 모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에서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겨루는 사탄의 다툼 역시 오늘날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다.

사탄은 우리를 소유하려는 그의 사악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와 협력하기를 바라면서 오늘날 우리 안에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 역시 그분의 선하신 기쁘심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가 그분과 협력하기를 바라시면서 우리 안에 운행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사탄의 생명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사탄의 사악함을 살아내어 우리에 대한 그의 악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산다면 하나님의 신성한 선함을 살아 내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성취하실 수 있게 한다. 때로 우리가 사탄의 생명을 좇지도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좇지도 않고 독립적으로 우리 사람의 생명만을 좇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 우리는 독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살지 않으면 사탄의 생명을 좇아 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아주 다른 세 종류의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생활을 할 수 있다. 매우 친절한 한 형제가 아침에는 정말 사람처럼 보이고, 정오에 그의 아내에게 화낼 때는 마귀를 방불케 하며, 밤에 기도 시간 중에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과 그의 아내 앞에 자백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하루 중에도 그는 아주 다른 세 사람처럼 행동하고 서로 다른 세 가지 상황을 살아 낸다. 아침에 그는 사람처럼 친절하고, 정오에는 마귀처럼 화를 내고, 밤에 죄를 처리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모양을 나타낸다. 하루 종일 그의 생활 가운데 사람, 마귀, 하나님이 모두 표현된다.

그가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세 가지 생명-사람과 마귀와 하나님-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의 생명을 좇아 살 때에는 사람과 같고, 그가 마귀의 생명을 좇아 행할 때에는 마귀와 같으며,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모양을 표현한다. 우리가 좇아 사는 그 생명이 우리가 살아내는 바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한 사람 안에 세 가지 다른 생명-사람의 창조된 생명, 사탄의 타락된 생명,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세 가지 생명을 모두 소유했지만 세 가지 다른 발생으로 인해 세 번의 다른 때에 그 생명들을 얻었다. 첫째로 우리는 창조의 때에 창조를 통해 사람의 창조된 생명을 얻었고, 둘째로 사탄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접함으로 말미암아 타락 중에 사탄의 타락된 생명을 얻었으며, 세째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었다. 이 세 가지 사건들-창조, 타락, 구원-이 우리 안에 발생한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각각 생명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사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의 세 생명을 얻었다.

이것을 보고 알 때, 우리는 생명의 길에 관해 분명해질 수 있다.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이 동시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데 우리는 어느 생명을 좇아 살아야 하는가? 사람의 생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인가, 사탄의 생명인가? 우리가 좇아 사는 그 생명이 우리가 살아내게 될 생명이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놓여져 있다.


Ⅱ. 네 가지 법

구원받은 우리 안의 세 가지 생명은 각각 하나의 법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세 가지 생명에 속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이외에도 우리 밖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안과 밖에 모두 네 가지 법이 있다. 이것은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바이다.


A. 네 가지 법의 정의

로마서 7장과 8장의 중심 주제는 법이다. 먼저 6장에서 사도는,『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함이라』고 말한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는」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도는 7장과 8장에서 법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한다.

7장은 『형제들아(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함으로 시작한다. 다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6절)라고 말하고, 뒤에서 그는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7절)고 말한다. 다시 『나는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노라』(22절)고 말한다.

이들 모두는 구약의 법과 율법을 가리킨다. 마침내 그는 『내 지체들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나의 생각의 법과 싸워 나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 안으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도다』(23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 자신이 노예로서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8장에서 그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사도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연관된 네 가지 다른 법에 관해 전부 말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7:22, 25), 즉 구약의 율법으로서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밖으로 말해낸다. 둘째, 「생각의 법」(7:23)은 우리 생각 안에 있으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세째,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7:23)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한다.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법의 기능이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서 표현됨으로 인하여 그것은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이라 불리운다. 네째, 「생명의 영의 법」(8:2)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살게 한다. 이 법이 나오는 그 영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 사람의 영으로 구성된 조화(mingle)된 영, 생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명의 영의 법」이라 불리운다. 더우기 이 영은 생명을 담고 있고, 생명에 속하며, 생명이기 때문에 이 영의 법은 「생명의 법」이라 불리운다. 네 가지 법 중에서 한 법-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밖에 있는 반면, 나머지 셋-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 몸 안에 있는 죄의 법,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안에 있다.


B. 네 가지 법의 기원

네 가지 법의 기원은 각각 다르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쓰여져 구약시대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셨다. 나머지 세 법은 먼저 우리가 언급한 세 가지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모든 생명에는 법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법이 항상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생명은 항상 하나의 법을 소유한다.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이 있으므로 그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에 상응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때가 아닌 태어날 때에 얻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한 자연적인 증여물이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선물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생각과 사고 안에는 타고난 기호나 선을 행하고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람들에게 호의적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자 하는 원함과 우리 스스로 개혁하려는 희망과 진보하려는 결심이 허다하게 있었다. 선을 행하려 하고 진보하려는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으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것들은 또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도 이 선의 법이 이미 우리 안에 있었음을 증거한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 18절(내가 내 속에...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에 기초하여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나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으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의 원래 창조된 생명으로부터 나올 리가 없으며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7장 18절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이 결론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할 때 우리 육신 안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 23, 24절의 문맥에 의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육신은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을 가리킨다.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 즉 육신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장의 뒷부분에서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우리의 생각 안에 선의 법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의지와 생각은 둘다 우리의 혼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혼의 생각과 의지 양자 안에는 타락 후에도 선함의 요소가 있다. 이 선함의 요소는 자연히 우리의 창조된 선한 생명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의 원래 창조된 생명에 속하고 우리가 구원받기 전 곧 우리의 출생시에 존재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창조된 선한 생명은 타락을 통하여 사탄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으므로 그 선함의 요소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부정확하다. 예를 들어, 신맛의 요소를 꿀물이 든 컵 속으로 가미하면 단맛을 손상시키지만 단 요소를 없애지는 않는다. 비록 사람이 사탄으로 인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의 선함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 안에 있는 창조된 선함의 요소가 사탄으로 인해 부패되어 고칠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무(全無)한 상태로까지 부패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유리 컵을 박살낸다면 그것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지만 유리의 요소는 여전히 남는다. 금 막대기 한 조각이 오물통에 던져질 수는 있지만 금의 요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부모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 형제애, 성실, 진실, 예의 바름, 도덕성, 수치감 등이 다소 불순하고 혼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소들은 진심에서 우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선한 요소들이 오염되기는 했지만 파괴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비록 그 요소들이 매우 약하기는 해도 여전히 남아 있다. 중국의 현인들과 철학가들이 사람 안에 몇몇 「뛰어난 미덕」과 「타고난 지각」 등이 있음을 발견하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결론 내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함의 요소와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법이 있으므로, 사람의 본성에 관한 이들 철학가들의 발견은 과연 옳다.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앞에서 범죄-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음-를 통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왔음을 말했다. 사탄의 이 생명 안에 악의 법, 즉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사탄의 생명은 악하므로 그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그 법은 자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과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영과 조화되어 생명의 영이 된다. 이 생명의 영의 생명 안에 생명의 영의 법 또는 생명의 법인 한 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의 법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을 두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이지 선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생명의 법을 두신다. 선의 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를 통해 주어진다. 우리 안에 있는 선을 행하는 요소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을 두신다. 이 생명 안에는 생명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은 우리의 구원의 때에 얻은 바 되고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법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 속하며,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람에 속하며,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탄에 속하며, 생명의 영의 법은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와 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C. 네 가지 법의 위치

네 가지 법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려면 우리는 그들 각각의 위치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밖에 있다. 선의 법은 우리의 생각, 즉 우리의 혼 안에 있다. 선을 행하는 법이 우리의 혼 안에 있으므로 이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그 법 역시 물론 우리의 혼 안에 있다. 이 법의 기능은 특히 혼의 생각 안에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법은 「생각의 법」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안에는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의 법, 선한 인간 본성이 있다.

죄의 법은 우리의 지체들, 즉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사람은 타락 중에 그의 몸 안으로 지식의 나무 열매를 받아들였다. 그런고로 사탄의 악한 생명이 우리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죄의 법 역시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이 법이 우리의 몸 안에 있고 그 몸이 지체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이 법은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 안에는 사탄과 사탄의 생명과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죄의 법과 사탄의 악한 본성이 있다. 사탄과 사탄의 그 악한 것들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 섞인 사실로 인해 몸은 변질되어 타락한 육신이 되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생명의 영이 우리의 영 안에 거하므로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 역시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이 법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의 기원이 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위치 역시 영이다. 그런고로 그것은 전적으로 영에 속하며 몸이나 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 안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 그분의 생명의 본성이 있다.


D. 네 가지 법의 본성과 기능

우리 안팎의 이 네 가지 법의 본성과 기능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규칙들로 구성되며, 그 본성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우리 밖에 있는 이 법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이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규칙들을 좇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을 행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왔으며, 사람의 선한 본성을 내포하고,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본성에 꼭 맞는다. 이 법이 우리 안에, 즉 우리의 생각 안에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일으킨다. 특히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선해질 것을 요구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선의 법은 선을 행하기를 지향하는 경향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은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기를 기뻐한다. 이것이 사도가 『나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고 말한 바이다.

우리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사탄의 악하고 타락한 생명으로부터 나왔으며 사탄의 악한 본성을 담고 있다. 사탄의 악한 생명은 우리의 육신 안에 현존하는 「악」이고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이다(롬 7:21,20). 그것은 「죄의 법」이므로 이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이 법은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그 천연적인 힘을 행사하여 악을 행하고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을 거스려 싸운다.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줄 때, 이 죄의 법은 그것을 거스려 일어나 싸워 우리를 사로잡아간다(롬 7:23).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려 하거나 하나님의 법의 선한 요구를 만족케 하려는 우리의 갈망을 실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로마서 7장 21절로 24절에 기록된 대로 우리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 복종하여 온갖 종류의 죄를 범하여 사망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우리 자신의 의지력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우리를 자극하는 죄의 법에 의해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두 가지 서로 모순되는 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법은 창조된 선(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우리 혼의 생각 안에 작용하여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을 일으킨다. 다른 한 법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와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작용하며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한다. 우리의 생각과 지체들 안에서 모순된 일들을 행하는 이 두 가지 정반대되는 법은 우리 안에서 서로 거스려 싸운다. 그 결과 대개 죄의 법이 선의 법을 이겨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우리가 행하기 원치 않는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한다.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이성과 정욕의 싸움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성은 우리 창조된 생명 안에 있는, 본래 타고난 선을 행하는 요소이다. 정욕은 우리 타락된 몸 안에 거하는 죄, 또는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악이다. 이성이 부분적으로 우리 사람의 양심으로부터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 안에 작용한다. 그런고로 「이성」의 완성으로 인한 선함은 지식으로부터 나오거나 지식을 통과한다. 정욕이 우리 타락된 사람의 본성에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정욕의 결과인 악은 정욕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식에 있어서 강한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좀더 있는 반면, 좀더 격정적인 사람은 쉽게 악을 행한다. 다른 말로 해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선은 생각 안에 있는 지식으로부터 비롯되거나 생각 안의 지식을 통과하는 데 반하여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악은 지체들 안에 있는 정욕의 결과이다.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이성이 유리한 위치를 얻을 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한다. 지체들 안에 있는 정욕이 더 나은 위치를 얻을 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싸움이 갈라디아서 5장에 언급된 싸움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갈라디아서 5장은 영을 거스려 싸우는 우리의 육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아 성령을 얻은 후에만 일어난다. 그러나 두 법의 싸움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과 창조된 선한 생명 사이의 싸움에 관계되어 있고 이 싸움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존재하는 내적 싸움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세상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싸움이다.

죄의 법으로부터 나오는 이 「죄(Sin)」는 사탄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다. 대문자로 표시된 「죄(Sin)」는 그것이 인격화되고 유일함을 의미한다.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님이 계시고 오직 한 죄(Sin)가 있을 뿐이다. 죄는 하나의 특별한 용어이고 유일한 대상이다. 죄는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부터 8장은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주관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대하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하며,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압도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악을 우리에게 행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밖의 많은 죄들(sins)은 단지 우리 안의 유일한 죄(Sin)의 작용으로 인한 행위들일 뿐이다. 이 유일한 죄는 죄들의 뿌리요 어미다.

죄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밖으로 죄를 짓게 하는가? 우리는 죄가 우리의 몸 안에 거함을 보아 왔다. 그러나 자극하는 기관은 의지이지 몸이 아니다. 사람의 혼에 속하는 의지는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지시에 복종하며 사람의 몸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우리 몸 안에 거하기는 하지만, 그 손상 작용은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몸에서 시작된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에 손상을 입게 하며 우리 전존재가 타락되기까지 죄의 독성을 발산해 낸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장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1장과 마가복음 7장은 또한 온갖 종류의 죄가 사람 안에 있다고 밝힌다. 이 성경 구절들은 사람이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타락되었고 죄들로 가득함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의 혼은, 생각은 악하고 감정은 오염되고 의지는 반역적이며, 심지어 그의 영도 어두워졌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 안에 있는 죄의 활동의 결과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 안에 사람의 법과 사탄의 법, 선의 법과 악의 법, 두 법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있음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법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온다.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생명들 중에서, 신성하고 영원한 본성에 관한 한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생명」이다(이것은 1장 「생명은 무엇인가?」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은 「생명」이다. 생명의 영의 법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생명」이듯이 그 본성도 「생명」이다. 이 법은 그 근거가 되는 생명으로 인해 「선」하거나 「악」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법과 같지 않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생명과 선은 서로 다르다. 여기 세 가지 중점이 있다. 첫째로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인 반면, 선은 사람의 생명의 본성이다. 둘째로 생명은 선하지만 선이 반드시 생명인 것은 아니다. 세째,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의 나무는 생명과 선이 서로 명백히 다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생명은 선도 악도 아니다. 생명, 선, 악은 서로 다른 세 가지 독립된 것들이다.

우리는 생명과 선이 같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선과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이 있고 또한 사람의 선이 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을 담고 있다. 사람의 선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단지 사람의 선한 본성만을 담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0절과 디모데 후서 2장 21절에 언급된 선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살아내는 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이고 하나님의 선이다.

마태복음 12장 35절, 로마서 7장 18, 19, 21절과 9장 11절에 언급된 선은 우리가 우리 고유의 생명을 좇아 살아내는 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이고 사람의 선이다.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은 「생명」의 본성이나 하나님의 요소가 없는, 단지 사람의 선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선만이 선일 뿐 아니라 「생명」의 본성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참된 요소를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선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생명 본성은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는 사람의 선은 자연히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생명 본성을 담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본성을 담고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내도록, 즉 하나님의 선을 살아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본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이들 법은 또한 그 힘의 정도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 우리는 법들이 그들 각각의 기원이 되는 대상의 힘의 정도에 따라 세기에 있어서도 다양함을 안다.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왔는데, 사람의 생명은 가장 연약하다. 그런고로 선의 법이 선을 행하는 힘 역시 가장 연약하다. 죄의 법은 더 강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런고로 죄를 짓는 이 법의 힘은 선의 법이 선을 행하는 힘보다 더 강하다. 그것은 우리를 선을 행함에 있어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가장 강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런고로 이 법의 힘 역시 가장 강하다. 그것은 우리를 죄의 법에 복종하여 죄를 범하는 것에서 지킬 뿐만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 자체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자연스럽게 살아 낼 수 있게 한다.

역대로 철학가들은 도덕성을 개발하거나 행위를 개선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을 주창해 왔다. 사실상 그들이 주창해 온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원래의 선을 되찾거나 재활동시키기 위한, 이미 타락된 몸과 혼에 근거한 사람의 지식과 자기 의지와 자기 노력을 통한 작용이다. 이 모든 것은 죄의 법의 본연의 힘을 이겨낼 수 없다. 사람의 힘은 제한되어 있는 반면 법의 힘은 지속적이다. 사람이 애쓰는 것은 자기 노력인 반면 법의 힘은 자동적이다. 언젠가 그의 힘은 고갈되고 법의 힘이 다시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출 방법은 우리를 에워싸는 죄를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외적 몸에 역사하는 것도 아니며, 선을 행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하여 우리의 몸과 우리 영 사이에 있는 혼에 역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요소를 우리 안으로 더하시어 생명의 강력한 힘을 가져 오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우리의 영 안이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죄의 법 안에 죄 짓는 능력을 이겨내기 위하여 죄의 법을 정복할 만한 법을 이용하여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들에 퍼지면서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진전해 나아가신다. 나아가 우리는 전에 선의 법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선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영의 법으로부터 나온 생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생명을 살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관계된 네 가지 법, 즉 우리 밖에 있는 한 법과 우리 안에 있는 세 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 밖에 있는 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세 법 중 한 법은 우리 혼 안에, 한 법은 우리의 몸 안에, 한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창조된 선한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혼 안에 있는 법은 선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을 우리에게 일으킨다. 타락되고 악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 몸 안에 있는 법은 악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법은 신성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 내게 한다.

우리의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거룩함, 의로움, 선함의 요구를 부여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를 만질 때 그 요구들을 실행하기 원하고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우리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 밖의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틀림없이 반대하고 저항하며 대개는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이겨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함에 무력해질 뿐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어긴다. 이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우리의 영을 좇아 산다면 우리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이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표준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한 예로,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탐하지 않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의 이 요구를 만질 때,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하며 더이상 탐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반대하여 일어나 내부에서 우리로 하여금 탐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많이 작정하고 결정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탐심은 더욱더 우리 안에 무성해진다. 밖에 하나님의 법의 요구로 인해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즉시 우리 안에 악을 작용케 하여 우리의 선한 생각을 거스려 싸우게 한다. 더우기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거의 모든 교전에서 선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 진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보다 더 강하고 우리를 죄의 법에서 구출하여 해방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통한 우리의 고투와 투쟁을 멈추고, 대신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자극하는 탐욕으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우리는 탐하지 말라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빼어난 거룩함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우리 위에 특정한 요구들을 두며,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즉시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법-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과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의 사이에서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원하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막고 방해한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혼을 에워싸듯이 몸 안에 있는 죄의 법도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에워싸며, 죄의 법은 선의 법보다 더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 그 에워쌈을 격파하고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모든 것보다 가장 강하다. 그러므로 그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내고 그 법의 삼킴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충분히 이행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우리에 대한 이 네 법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또다른 한 예를 사용할 수 있다.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마치 우리에게 구애하는 훌륭한 한 남자와 같다. 반면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의 구애에 응하려는 정숙한 한 숙녀와 같다. 그러나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은 항상 그 숙녀를 좇아다니며 그녀와 그 남자 사이에 말썽을 일으키고자 하는 한 악한과 같다. 그는 이 숙녀가 그 남자의 구애에 응하려는 것을 알 때마다 그녀를 납치하여 강제로 그녀가 그녀 자신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원함대로 행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늘로부터 온 한 천사에 비유될 수 있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악한으로부터 숙녀를 구하여 그녀로 하여금 그 남자의 구애를 실행할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원함은 실현된다. 결국 그녀는 하늘로부터 온 이 천사가 사실은 그 남자가 분장한 분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그녀로 하여금 그 남자의 구애를 이행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 자신의 갈망을 그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한다.

이 예에서 우리는 비록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위에 요구들을 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 요구들을 실행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낼 힘이 전혀 없다. 게다가 죄의 법은 항상 선의 법을 반대하고, 선의 법이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방해하고 그 원함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강력한 힘과 함께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출인,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모든 요구들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낼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구출되어 자동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결론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구출은 사람의 개혁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 근거가 다르다. 사람의 개혁은 원래의 사람의 선에 근거하는 반면 하나님의 구출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 즉 생명의 영에 근거한다. 또한 그 방법이 다르다. 사람의 개혁은 사람의 힘을 발휘하고 우리의 신체에 심한 처리를 하여 격정을 눌러 사람 안에 선을 초래하는 방법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의 구출은 그분의 영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영 안으로 주입하여 우리의 영을 소생케 하는 방법으로 말미암는다. 그 때 새롭게 하는 역사가 우리의 영에서 시작되어 먼저 우리의 영의 다양한 부분들을 새롭게 하고 그런 연후에 우리의 혼의 다른 부분들을 새롭게 하며, 마침내 물질적인 몸까지 새롭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도 다르다. 사람의 개혁의 결과는 단지 사람의 가장 높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 신성한 하나님의 본성의 신성한 표준을 살아내게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구출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어 「하나님-사람들(God-men)」이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를 선한 사람들(good-men)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사람들(life-men)로 만든다. 우주 가운데에는 「하나님-사람들」과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의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를 악한 사람들이나 선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사람들」로 만든다.

세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출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로 「생명-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막연한 교리이다. 하나님 안에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영의 법 안에 살아야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영 안에 있으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영 안에 살 것을 요구한다. 생명의 느낌은 생명의 영의 법의 느낌이므로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의 느낌 안에 살 것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영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영의 법 안에 사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생명이며 우리는 「생명-사람들」이 된다.

네째, 하나님의 구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우리가 생명의 영의 법을 복종하여 하나님 안에 살 때, 하나님 또한 우리 안에 사시며 그분과 우리는 둘이 하나로 완전히 연합될 때까지 실제적으로 조화(mingle)된다.

주관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요점이 더 있다. 첫째로, 우리는 내적 느낌을 접촉해야 하는데, 이것은 내적 느낌을 복종함을 뜻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통 안에 살아야 한다. 교통은 생명의 흐름이다. 교통 안에 사는 것은 생명의 흐름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점은 우리로 하여금 실지적으로 생명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에 관한 이 장의 목적은 우리에게 이 요점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실지로 내적 느낌을 접촉하고 교통 안에 산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1) 죄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2)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고 (3)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것이고 (4)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낼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하나님-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이며 생명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내포하는 것이다.




03-23-2024(토) 누가복음 20:19-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25절)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Caesar's," they replied. He said to them, "Then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명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권력이 해야 할 몫과 종교가 해야 할 몫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처럼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이스라엘을 강제 점령한 로마의 법으로 올무를 놓으려 합니다.
올무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런 논쟁을 하고 있는 시기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때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정치와 종교, 제도론적으로는 국가(정부)와 종교단체(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정교분리는 자유의 원리를 강조한 것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용어 개념은 미국 헌법 수정 1조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로 처음 사용됨으로써 일반화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서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보다 ‘정교분리’라고 사용됩니다.

정교분리란 추상적으로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수 있고 내면적, 신앙적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내지 비종교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개념이 지닌 추상성 때문에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에 대한 불간섭’이 아니라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종교는 권력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혹독한 질책을 가해야 합니다.
반면에 권력이 올바른 방향을 선택할 때는 손뼉을 치며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 없는 종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애족의 기초위에 든든히 세워지고 번성해야 합니다.
만일 종교가 국가의 방향에 무관심 할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 할 경우 나라가 무너진 후에 땅을 치며 후회한들 무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편 22:28)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신 나라가 복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민족이 복이 있다." (시편 33:12)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나라가 세워져서 나라를 신앙을 두려워하고 신앙은 나라를 바른 길 위에 세워가도록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과 논쟁도 하시고 또 제자들과 이전과는 다른 말씀들을 해가고 계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한 과정을 정리하시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혼인 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결박하여 쫓아내었다는 것은 사실 이전과 다르게 두드러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르게 비유한다면 그 이전까지는 마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은근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함께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말씀으로 전하신 것을 십자가로 직접 보여주시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이것은 좀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줄곧 행함을 책망하시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다가 어떤 면에서 보면 좀 갑자기 의복을 입지 않고 온 것을 책망하시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러니까 길에서 불러서 왔으면 된 것이지 왜 의복까지 입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과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니 묻겠다.>며 시비를 거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의 시비는 '예수, 이때까지 너는 우리가 형식에 치중한 것을 그렇게 나무랐는데 이제 와서 예복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어쩜이냐? 그렇다면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우리 삶의 외모는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면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들의 시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되느냐? 아니면 행함이 있어야 하느냐?">하는 그것이다.

흔히들 전도를 해 보면 사람들은 '예수 이름을 시인하기만 하면 천국 간다면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시인하면 되지 않느냐?'하는 반문을 하곤 한다. 그러면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는 순간을 알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임종을 난데없이 졸지에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그건 좀 궁색한 답변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믿음과 행함으로 대변되는 문제는 늘 어렵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가장 먼저 뭐가 하나님의 것이고 뭐가 가이사의 것인지 구분하는 것부터 난제다. 다른 무엇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가이사의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부터 정의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하나님의 것이냐는 논제가 있고 그것 또한 극복하기 힘들다.(하지만 그것은 신앙 안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므로 좀 다르긴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 밀양의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엄마인 전도현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인한 살인범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믿었다. 그 사이 아들을 잃은 엄마도 아들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큰 용기를 내서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감옥을 찾아갔다. 여기까지는 너무 좋은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교도소에서 만난 유괴살인범은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들의 엄마에게 용서 받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지금 많은 교인들이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즉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시므로 교회에서 용서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가이사와 하나님이 전혀 구분이 없는 것이다.

구분이라는 것은 거룩함이다. 거룩함의 뜻이 원래 그것이다. 즉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용서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겐 용서 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것을 영화에서 잘 표현한 것이 바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예배 중에 틀어 버린 장면이다.)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내용이고 무엇이 형식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사람이 할 일이냐며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것이다. 정말로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세상에 것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보이시면서 답변을 하신 것이다. 동전에 가이사의 상이 그려져 있었기에 그것을 확인시키고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정말로 어려운 문제가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나리온 자체의 문제나, 세금의 문제나, 세상 물건 중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이 세상의 것인지를 나누는 방법이나 비법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누가 바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쓰는 데나리온은 로마의 황제에게 드려져도 하나님의 것이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황소를 하나님께 드려도 세상에게 그러니까 세상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바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바치느냐의 문제라는 것

예수님께 책망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본질을 오판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한 신앙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규례를 잘 지키느냐 하는 것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본질이 형식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형식이라는 것이 안에 내용과 원인이 있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냥 형식만 지키면 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 안에는 어떤 부정한 것이 있어도 형식만 온전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그렇다 보니 그들은 세금을 내는 형식이라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세금을 내는 형식이 가이사에게 내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금을 내지 않고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들의 그 생각이나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살인범의 가치관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신앙의 오류로서 맥을 같이 하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모가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외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슬아슬한 논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아주 분명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가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온전하면 된다는 이야기 아닌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외모가 죄인인 사람들과 어울린 탓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눈에는 예수님의 논리라면 사람은 창녀와 같이 음란해도 무관하고, 세리와 같이 매국적 행동 양식을 가져도 무관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그게 바로 유괴살인범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모나 형식은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겉모양이 고양이라서 고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중심이자 본질이 DNA가 고양이면 외모는 자연스럽게 고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고,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니 그 중심과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은 데나리온을 어디에 사용해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강아지가 되지 않는 것이나, 독사와 양이 같은 물을 먹어도 독이 되고 우유가 되는 것도 같은 논리인 것이다. 그와 같이 반대로 중심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그가 아무리 행동으로 경건한 모양을 하고 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며 안식일 마다 황소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그것은 다 세상에 바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의 냄새가 싫어서 누가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까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 가치관의 원조는 선악과인 것은 누누이 이야기 해 온 것이다. 다시 영화 밀양을 이야기 해 본다면, 유괴살인범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런 사과를 기대하는 세상의 흐름과 사람들의 생각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같이 세상의 것을 어느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분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세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며 배척하게 된다. 그것은 지금도 만연한 신앙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어떤 일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그런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일부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말이다. 마귀라는 것도 그렇다.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이 마귀가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이기지 못해서 세상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이긴다는 식의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귀나, 신앙에서 보면 일면 터부시해야 할 것 같은 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욥의 때와 같이 마귀도 부리시고, 또 세상에서 사람들이 큰 죄라고 사람 죽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하시는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죽인 사람의 수를 세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치관이 하나님을 세상의 주로 믿는 제대로 된 가치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세상의 법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인들의 법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법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안 된다며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하신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법이 무너질 것 같은 죄악 된 세상의 법과 가치관이 집행되는 것도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 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엘리야나 엘리사의 기적과 같은 기적으로 다 해결하시고 그것보다 그냥 두는 것이 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되면 그냥 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도 껌 값도 안 되는 기적 하나 베푸시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면 잘못된 그 일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 속한 세상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폐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한 뜻이 당시 사람들이 가진 가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죄를 물을 때 끌려가셨는데,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사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가 의아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중심에 있는지 아닌지를 보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고, 그런 가치관과 심령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이 바치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 심령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도덕을 무시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모양을 갖추며 살려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애쓰면 자신을 가꾸는 외모요 형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람, 뭘 해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존경할만한 행함이 우러나는 원인인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기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신앙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두 문장이 극적으로 대립되어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러한 표현 때문에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정교 분리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참조, 로마서 13:1-7)

모든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 문화 종교의 영역에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 놓으라는 말이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으로 돌려 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 극을 피해가는 기회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 놓고 가이사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하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23:2).










03-22-2024(금) 누가복음 20:9-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머릿돌(17절)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Jesus looked directly at them and asked, "Then what is the meaning of that which is written: "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머릿돌(케파레. kĕphalē. κεφαλή)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왜 머릿돌을 예수님이라고 할까요?
이 말씀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시편의 인용구 입니다(시편 118:22).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즉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머릿돌은 주춧돌로서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중심이 되는 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유대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열어주신다는 속담처럼 유대 땅에서 막힌 길은 이방인들에게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날마다 나를 통하여 예수님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한 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막힌 길이 아니라 열린 길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구원의 하나님을 향하여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열린 길이 되어
구원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섬김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힌두교가 말하는 구원의 길



힌두이즘의 윤회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 즉 까르마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러한 결과가 이 세상에서 윤회할 때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영원히 거듭되는 윤회에서 벗어나서 신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까르마 마르그(행위의 길)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여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1500년부터 500년에 걸친 베디시대에는 복잡한 제사의식이 강조되었습니다.

둘째는 갼 마르그(지식의 길)

세상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얻어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베단따 철학에서는 구원의 방법론으로 복잡한 제사의식에 반하여 명상과 요가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대중이 따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낮은 카스트와 여성들이 제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추상적인 지식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박띠 마르그(헌신의 길)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박띠 마르그가 7세기 말에 남인도의 타밀나두에서 태동한 것은 5세기에 이르러 힌두교에서 인격신의 개념이 완성되고 발전하는 시기와도 맞물립니다.

박띠마르그의 토대가 된 박띠운동은 7세기 말부터 남인도의 타밀나두에서부터 시작된 사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카스트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글자를 모르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지역 언어로 이야기와 찬양을 들려주며 구원의 길을 제시한 개혁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박띠운동은 12세기 이후 북인도 지역으로 퍼져서 15~17세기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도 예수박따운동을 하는 그룹이 있어서 쌋쌍이라는 형태의 찬양과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박띠전통과 기독교의 전통이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복음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은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박띠운동이 태동하는 역사적인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몇 학자는 기독교가 박띠운동의 역사적인 기원이 된다는 주장을 하는데요.
주로 인도를 연구하는 서구학자들과 인도의 기독교 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도마가 타밀나두의 수도인 첸나이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2세기와 3세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인들이 첸나이에 있었는데요.
박띠운동이 태동하는 7세기에는 남인도에 이미 기독교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타밀나두에 있었던 기독교 공동체가 힌두이즘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힌두교의 사상가들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격렬한 감정과 사랑의 환희'를 경험케 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의 사상을 자신들의 신앙체계에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죠.
물론 다른 요소들도 있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박띠운동의 성격을 알아서 그 전통에 따라서 복음을 제시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와 예배의 전통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본질적인 요소를 충실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선교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동의 문화와 인도의 문화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예배의 요소인 찬양과 말씀과 기도는 박띠운동의 전통이기에 앞서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독교의 전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204.
ἀκρογωνιαῖος, α, ον 스트롱번호204
1.

맨 모퉁이에 놓인

2.

엡2:20

3.

벧전2:6.

발음 [ akrŏgōniai- ŏs ]
어원
206과 1137에서 유래
베드로전서 2:6-8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04.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머릿돌 2776.

κεφα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2776
1.

머리.

2.

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kĕphalē ]
어원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모퉁이 1137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1. For in Scripture it says: "See, I lay a stone in Zion, a chosen and precious cornerstone, and the 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2. Now to you who believe, this stone is precious. But to those who do not believe,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3. and,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They stumble because they disobey the message--which is also what they were destined for.


머릿돌(2776).  κεφαλή, ῆς, ἡ 
1. 머리.  2. 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kĕphalē ]
어원  /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시 118:22을 인용한 문구인데 16절에서 언급된 결론과 청중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 대답이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비유가 주는 교훈을 더욱 명료하게한다.
이 비유 역시 상징적 의미로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경고와 좋은 돌은 한때 버려졌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머릿돌로 쓰여지게 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비유에서 주인의 종과 아들을 배척하고 죽인 농부들을 상징하며 사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의미(행 2:36).


모퉁이의 머릿돌은 무엇인가?(베드로전서 2:7)

모퉁이의 머릿돌, 곧 주춧돌을 가리킨다.
이 돌은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초석이고 가장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찮게 여겨버렸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셨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모퉁이 돌, 머릿돌 되신 예수님' 의미 파헤치기 | 이스라엘 건축 및 주거문화

고온건조한 기후인 이스라엘은 건축에 주로 돌을 사용했다.
애굽, 바벨론, 이스라엘의 일부 해안 지역은 진흙이 풍부해 볏짚과 진흙을 혼합해서 만든 벽돌로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석회암으로 건물을 세웠다.
나무는 문이나 서까래 등 아주 적은 부분에만 사용되었다.
갈릴리에는 검은색 현무암이 많아 검은색 건축물이 많지만, 예루살렘 인근의 돌은 대부분 옅은 베이지색 석회암이었다.
때문에 석회암으로 건축되고 회반죽을 바른 예루살렘 성은 강렬한 태양을 받으면 온통 금빛처럼 빛났다.

성경은 메시아에 대한 표현으로 ‘기초돌’(사 28:16), ‘모퉁이 돌’(엡 2:20, 벧전 2:6)로 표현했다.
이것은 집을 건축하는 기준이 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도들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붙잡고 계신 분도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퉁이 돌은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기초돌을 말합니다.
건축물 전체의 안전과 보존은 기초돌이 얼마나 단단하고 크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기초돌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욥이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하나님께 따질 때,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한 창조 행위를 통해 하나님에게는 욥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신비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느냐?”(욥 38:6)고 물으셨습니다. 건축물에 사용된 모퉁이 돌, 즉 기초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초돌 덕분에 건축물 전체가 안전하게 보존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기초돌은 욥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초돌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권리와 자격이 피조물인 욥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Isa 28:16 Therefore,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Look, I am laying a stone in Zion, an approved stone, set in place as a precious cornerstone for the foundation. The one who maintains his faith will not panic.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자신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소개하신 적이 있다 (마 21:42).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은 그 건축물의 모퉁잇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인들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십자가에 내던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귀하게 세우실 것을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초라하게 죽으셨다. 그러나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심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가 되셨다.

머릿돌 신앙으로


예수님은 질문으로 이미 하늘이 주신 권세로 일한다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주는 권세, 사람들의 주는 안수, 단체가 주는 자격증, 졸업증, 증서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됐다’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징비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성경선생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학교를 나왔거나 어떤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거나 어떤 단체에서 자격증을 주었기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포도원 농부 비유는 종교지도자들이 한 권세에 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이 일을 한다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와 목적, 결과를 말해줍니다.

비유 전체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9-16절입니다.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이 비유는 당시에 많이 있었던 부재지주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부재지주들이 있었고 소작농이 그 포도원을 경작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세를 주고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때가 되어 포도원 주인은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여러 종들을 보냈지만 세를 주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면 그를 공경할 것이라 생각해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농장주의 아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진노하여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유대인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이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유대인들과 세상은 그 아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게 닥칠 일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누가복음 20장 17,18절을 보십시오.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 하십니다. 그 이유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폐석인데 건축을 마치고 보니 그 폐석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폐석처럼 버림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서십자가 형을 당할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과 사형집행이 결합된 것입니다. 십자가 형은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게 하는 형벌입니다. 십자가 형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며 ‘이곳은 로마의 세상이며 로마가 통치하는 세상’이란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참하게 버리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폐석처럼 버림받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고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느리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버림받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왕이요 주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왕이요 주로 삼으시는 방법은 그가 버림을 받는 것을 통해서, 곧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버림받는 것은 그리스도 주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가이사와 빌라도, 로마군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가이사와 빌라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1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이유는 세상권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기 위한 것이요, 자신의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듯이 버림받으심을 통해 주요,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셧고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이요, 참다운 왕으로 등극하셨으며, 세상의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참된 왕이 되셨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모퉁이의 머릿돌 되실 예수님은 심판주가 될 것을 힘주어 말합니다. 누가복음 20장 18절을 보십시오.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심판주가 되기에 이 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을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길은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주인이요, 왕으로 등극하셨고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성도들에게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산 돌이신 예수께 나가자’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길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얻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는 길 외에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왕이요, 심판주가 되셨듯 제자들도 십자가를 통해 왕이요, 심판주들이 될 것입니다.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삶을 살 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세상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자비량선교단체인 우리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들 축에 속합니다. 이사무엘 현정 리 목자님의 일년요절은 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런 말씀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젊어서 스탭목자님들은 자주 몸살에 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몸살이 나기까지 언제나 한계에까지 역사를 섬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대부분의 목자님들은 고난을 사랑하는 이런 요절을 잡고 역사를 섬깁니다. 우리 자비량선교사들이 당하는 고난은 혹독하고 가혹한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가 UBF man으로 산다는 것은 죽도록 고생을 한다는 뜻이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죽도록 고생하는 삶을 자청할까요? 왜 우리는 죽도록 고생하는 삶을 기꺼이 살고자 할까요? 그 대답은 바로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는 것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더욱 자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03-21-2024(목) 누가복음 20: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슨 권세로(2절)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they sai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무슨 권세로(By what authority)
1849. 에쿠시아(ĕxŏusia)  ἐξουσία, ας, ἡ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Korean Translation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spoke, saying to Him,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or who is the one who gave You this authority?"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하늘로서 라고 대답한다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로서라고 말한다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려고 덤벼드는 무리들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를 부정하는 어떤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느냐?
또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성경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삶이 가장 분명한 대답이며 확신을 갖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종교 특히 사람의 이성을 만족시키려는 종교다원화주의가 지성인들과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곧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인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생명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자유롭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오늘도 종교인의 도덕적인 삶을 자랑하지 말고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랑의 길을 증거하는 은총의 삶을 자랑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는지 자신들의 무신앙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권세로 자신이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이나 믿음의 근거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깨우쳐야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믿고 있었는지 내 믿음에 대하여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또한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우리의 겸손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세상의 권권을 행사하거나 권위를 주장할 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 진정한 권세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거나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버려진 이들을 돌보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권세 사용할 때 겸손과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세상의 권세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권세와 권리에 대해 질문할 때, 우리 삶의 절대적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와 권리가 하늘로부터 오고 그것을 옳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살아갈 때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결론적으로, 권세의 근원을 묻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위임과 부름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따라, 우리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 마태복음에 관하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 사역, 죽음, 부활을 기록하며, 그분이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왕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하여, 그분의 탄생, 산상수훈을 포함한 가르침, 기적 행위, 제자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정과 십자가에서의 희생,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이 땅에 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왕국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그리고 유익한 비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예수님의 권위와 진리가 드러나며, 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가 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성전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열매를 맺지 않는 믿음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권위와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미다스 왕(마이다스의 손) 이야기

미다스(그리스어: Μιδας, 영어로는 Midas 마이다스)는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임금이다.
역사적으로 미다스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소아시아 지역 프리기아 나라의 국왕이자 선대 왕인 고르디아스 왕의 아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매우 탐욕스러웠던 미다스 왕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더 많은 부귀를 원했다.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실레노스를 도와주고 잘 대접한 인연으로, 그는 술(酒)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미다스는 정원수, 조각물, 가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도대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심한 그는 무심코 자기 딸을 안았다가 기겁을 했다.
사랑하는 딸이 금 조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으며, 다오니소스의 선심으로 미다스는 팍톨로스 강물에 목욕함으로써 원래의 미다스로 회귀할 수 있었다.
금 조각상으로 변한 딸도 강물에 담갔다고도 한다.
그래서 딸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음악의 신 아폴론의 수금 연주와 목신 판(강의 신 마르쉬아스와 대결했다는 설도 있다)의 피리 연주 대결에서 판을 편드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아폴론의 응징을 받아 두 귀가 당나귀 귀로 변해버렸다.

오늘날 미다스는 '탐욕, 과욕'을, 미다스의 손(Midas touch)은 '돈 버는 재주'라는 뜻을 지닌다.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이한 이야기 5선

태조 이성계(1335~1408)부터 순종(1874~1926)까지. 조선왕조실록은 27대에 걸쳐 조선 왕실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년, 월에 따라 적는 방법)로 기술한 사서다. 엄밀히 말하면 고종과 순종은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 1, 2대 황제지만, 여기 포함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분량과 철저한 고증으로 국내 사서 가운데 최고의 가치를 자랑한다.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실록에는 가치관과 풍습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왕실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기이한 이야기 5개를 소개한다. 의역이 섞여있다.

1. 중종(1488~1544) - 궁궐에 나타난 '삽살개 + 망아지' 괴물

1511년 5월 9일(중종 6년), 태조의 비(妃) 한 씨를 모신 사당 '문소전'에서 개를 닮은 짐승이 나타나는 변고가 벌어졌다.
처음 목격한 사람은 궁궐의 종(머슴)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짐승은 서쪽 담을 넘어 재빨리 달아났다.
중종은 병사를 보내 짐승의 뒤를 쫓았지만, 잡는데 실패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짐승은 삽살개 같이 생기고, 크기는 망아지만 했다.
또 대단히 민첩했다고 한다.

16년이 지난 1527년 2월 26일(중종 22년). 소위 '작서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 이후 짐승은 다시 등장했다.
이날 궁중에는 사지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진 쥐를 누군가가 동궁(왕세자)의 거처 북쪽 은행나무에 걸어놓는 소동이 있었다.

소식을 접한 중종은 분노했다.
동궁을 저주하는 행위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중종은 경빈 박 씨와 그의 시녀, 사위 홍려(洪礪) 등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이들을 불러다가 문초했다.
이어 박 씨와 아들 복성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6월 17일. 신하 정원(鄭源·1495~1546)은 중종에게 이 같이 아뢨다.

"간밤에 소라(나각, 관악기)를 부는 갑사(군인)가 가위에 눌려 기절하는 일이 있었다.
깨어난 동료들이 그에게 응급처치를 하던 중, 모양은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짐승이 취라치(나팔수)의 방에서 나와 서명문으로 향하는 걸 봤다.
취라치의 방에서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고 한다"

두려움을 느낀 중종은 궁궐(경복궁)을 잠시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법까지 검토하지만, 신하들 만류로 포기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짐승은 1530년(중종 25년)과 1532(중종 27년)년에도 나타나 조정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짐승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건 1545년(인종 2년) 7월 2일이다.
실록은 당시 경성(한양)에서 "괴물이 나타나 밤에 돌아다닌다.
그것이 지나가는 곳은 검은 기운으로 물들어 완전히 캄캄해진다.
수레 무리가 지나가는 듯 큰소리가 났다"는 괴담이 돌아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전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공교롭게도 이 날은 중종이 붕어(사망)한 날이었다.

2. 영조(1694~1776) - 평안도에서 나타난 '곰 + 돼지' 괴물

1747년 11월 5일(영조 22년), 평안도(현재 평안남·북도) 감사가 보낸 정체불명의 동물 가죽이 궁궐에 도착했다.

"앞발은 호랑이 발톱이고, 뒷발은 곰 발바닥이다.
머리는 말 같고 코는 산돼지 같으며, 털은 산양 같은데 능히 사람을 물었다.
병사가 잡아서 가죽을 올려 보내왔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괴물의 정체가 뭔 것 같냐"고 물었다.
이에 누구는 '얼룩말'이라고 답했고, 누구는 '맥(貘)'이라고 대답했다.

맥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 분포하는 포유류 동물 '테이퍼(Tapir)'를 뜻한다.
기제목(奇蹄目) 테이퍼과에 속한다.

맥은 숲·초원·산림 등에 주로 거주한다.
태어날 때, 멧돼지처럼 흰 가로줄 무늬를 갖고 있다가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없어진다.
앞발에 4개, 뒷발에 3개의 발굽이 있으며 코와 윗입술이 길게 자라나는 게 특징이다.

평안도에서 내려온 동물 가죽의 정체는 정말 '맥'이었을까?

3. 선조(1552~1608) - 하늘에서 내려온 '정체불명 삼형제'

1604년 12월 1일(선조 37년), 평안도 관찰사 김신원(金信元)은 조정에 '기이한 삼형제'에 대한 소문을 보고했다.

"군내에 사는 계집종의 집에 '강가시(康加屎)'라는 남성과 그의 부인 '향태'가 머물렀는데, 강가시는 집을 떠나기 전 '기이한 형제 세 명이 하늘에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계
집종이 반신반의하며 청소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강가시가 언급한 삼형제가 온 자취도 없이 있었다"

김신원에 따르면 형제의 생김새는 꽤 독특했다.
장남은 수염이 한 자(약 30cm)에 큰 눈과 쟁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차남은 수염이 다섯 치(약 15cm)에 얼굴과 체격이 크고 미남이었다.
삼남은 수염이 네 치(약 12cm)에 얼굴과 체격이 컸다.

삼형제는 모두 검은 관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김신원에 따르면 그 모습이 두려워 좀처럼 쳐다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삼형제와 함께 내려온 이들의 엄마는 계집종에게 "장남은 음문(성기)으로 낳았고, 나머지는 옆구리로 낳았다"며 "이들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 생불(生佛)"이라고 설명했다.

엄마는 "출산한 지 하루도 안 돼 3형제가 모두 장성했다"며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름도 귀신같이 맞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신은 김신원을 허풍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신은 기록를 전하며 "하늘 아래 어찌 이치에 벗어난 물건이 있겠냐"며 "이 일을 보고한 김신원도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또 이를 전한 계집종도 사리에 밝지 못한 것 같다"는 주석을 달았다.
실록에는 이 같이 사신이 자신의 의견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4. 중종(1488~1544) - 용산에서 발견된 두 발 잘린 아이

1533년(중종 28년) 2월 16일,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은 중종에게 괴이한 사건을 보고했다.
용산강(노량진과 마포) 근처 무녀의 집 뒤에서 두 발이 잘린 여자 아이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중종은 이에 "신중히 간호해 죽지 않게 하고, 속히 포도 부장을 불러 범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 조치였다.

실록에 따르면 아이는 상당히 똑똑했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옥가이(玉加伊)'라고 했고, 발목을 자른 범인도 정확히 지목했다.
옥가이는 '"한덕'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고 했다.
한덕은 옥가이의 수양 엄마로, 옥가이의 생모 '중덕'과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의금부는 한덕과 중덕을 불러 대질 심문을 했다.
옥가이에게 "둘 중 누가 네 발을 잘랐느냐"고 물었다.
옥가이는 곧장 한덕을 가르켰다.
한덕은 "옥가이의 발은 동상으로 썩어 저절로 떨어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금부도사(의금부 심문 책임자) 이창무(李昌茂)는 "아이의 발이 칼로 잘린 게 명백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중종이 금부도사의 의견 쪽으로 기울자, 일부 신하는 "어린 옥가이가 범인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한덕의 처형을 만류했다.

증인으로 불려온 마을 사람들은 "한덕의 집에 살던 최근까지도 옥가이의 두 발은 멀쩡했다", "한덕 뿐만 아니라 중덕(생모), 귀덕 등 용산가 근처에 있던 집을 옥가이가 들락날락 했다"는 등의 증언을 해 사건을 더 미궁에 빠지게 했다.
한덕과 중덕, 또는 제3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중종은 장장 2주에 걸쳐 이 사건을 심문했다.
하지만 진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5. 세종(1397~1450) - 함길도에 등장한 뱀 모양 기생충

1431년 5월 13일(세종 13년), 함길도(함경남·북도)의 감사(관찰사)는 조정에 관내에서 벌어진 괴상한 일을 전했다.
당시 함길도에는 무녀(巫女) 한 명이 뱀 그림을 음식에 넣는 소동이 있었는데, 이 그림은 보통 그림이 아니었다.
무녀는 그림 안에 '죽은 것도 산 것'으로 만드는 주문을 걸었다.
무녀는 그림을 넣은 음식을 한 남성에게 먹였다.
남성은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며칠을 앓다가 죽었다.
가족들은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 남성의 배를 열었다.
놀랍게도, 뱃속에는 뱀 세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대경실색한 가족은 뱀 두 마리를 죽이고, 한 마리는 키우던 개에게 먹이로 줬다.
뱀을 먹은 개도 나흘 만에 죽자 가족들은 "무녀가 저주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뱀 그림을 그린 무녀와 '신기(神氣)'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여인들을 도매금으로 잡아다가 옥에 가뒀다.

감사는 "당시 갇힌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옥에 있다가 목을 메 자살하고 있다"며 "(이들의) 억울함이 적지 않다.
형벌을 삼가는 뜻에 위배되니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세종은 "물건의 그림이 변해 살아났다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03-20-2024(수) 누가복음 19:41-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님의 눈물(41절)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3월 20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19:41∼48
♦ 묵상을 위한 주제 : 예수님의 눈물(41절)
♦ 성구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피와 눈물과 땀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액체라고 합니다.

피는 생명이며 또한 용기의 상징입니다. 

눈물은 정성과 사랑의 상징입니다.

땀은 노력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다는 것은 그만큼 예루살렘 성을 사랑하셨다는 증거라고 하겠으며 인성을 소유하신 온전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의 자긍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지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 이라고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랑이 되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머지않아 훼파되고 무너질 것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만큼 사랑하셨던 예루살렘과 성전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고 예언했습니다(사 56:7).

우리 모두 이사야의 예언처럼 먼저 내 안의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 세워진 거룩한 성전에서 복음의 물결이 다시 복음의 원산지 예루살렘으로 역류하여 흘러갈 수 있도록 온 땅을 복음의 열매로 채워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음의 열매를 맺는 일에 성공하여 그 열매가 예루살렘으로 흘러들어가서 빚진 복음을 갚아낼 수 있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송 / 온 세상 위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d-vayJOkgh8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눈물의 강이 흘러가는 곳에 감동이 있고 사랑과 나눔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위대한 것들은 인간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들입니다. 
피땀, 피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절대로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자신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구원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서 나누고 우리가 흘릴 눈물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3년 생애에서 몇 번이나 울었을까? 
성경에 그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도 사람인 이상 성장 과정과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들처럼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과 관련된 성구가 3회 나옵니다. 
아마 공생애 기간 이전에는 차치하고라도 그 기간 동안에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누가복음에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히브리서에 간접적으로 한 번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째, 나사로의 무덤에서였습니다(요 11:35)

32. 마리아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고 슬퍼하는 나사로의 누이들을 보면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누가 19:41)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나사로의 무덤에서는 조용히 우셨지만, 여기서는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번째 운다는 단어는 단순히 주님이 눈물을 금치 못하시고 주님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숨을 쉬고 흐느끼며 고통에 차서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신 예루살렘은 인간들의 죄악이 한데 똘똘 뭉쳐 있는 중심지를 뜻할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본문의 주님 말씀대로 "알았으면 좋을 뻔 한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크게 우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답답하여 우신 것입니다.  

셋째, 심한 통곡과 눈물의 간구와 소원(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에게는 눈물의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볼 때 감동적인 사실들이 참 많습니다만 특히 "예수께서 우셨다" 라는 그 눈물에 감동의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울지 않는다고 강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성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요, 그토록 완고하게 자기 길을 고집하고 그의 사랑을 거부하며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뻔뻔스럽게 그의 은혜를 요구했던 그 거역의 백성들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눈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물을 아낍니다. 
나약하게 보이기 싫어서일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에게 눈물은 절제하거나 금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됩니다. 
그래서 눈물을 막습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웃으면 복이 온다'며 웃음은 적극 권하면서 눈물은 애써 말립니다. 그러나 체험해본 사람들은 눈물 뒤의 절묘한 카타르시스를 압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경직된 근육이 풀리고, 침침한 마음이 개운해지고, 탁한 영혼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눈물을 웃음만큼 강한 영육간의 치료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물 흘리기를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슬플 때, 위기에 닥쳤을 때, 가슴을 찢는 감동의 순간에, 자신을 압도한 그 감정을 분출하여 강같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 약속해주셨습니다. 

눈물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감격의 눈물, 감사의 눈물, 슬픔의 눈물, 기쁨의 눈물, 통분의 눈물, 참회의 눈물, 아픔의 눈물, 외로움의 눈물, 연민의 눈물, 감동의 눈물 등등...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통한의 슬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눈물 없는 사람, 눈물 없는 세대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성도는 눈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늘 있어야 합니다. 스펄젼은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에게 많은 눈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귀하고 복된것인데,특별히 어떤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까?   

첫째, 회개의 눈물(시편 6: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하나님은 성도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런 사람을 귀히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임받은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를 철저하게 눈물로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변명하기에 바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으면 변화도 없고 갱신도 없고 회복도 없습니다. 

죠지 뮬러는 고아를 돌보고 기도하는 분으로 유명한데, 그가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취미에 대하여 죽고 기호와 개성, 책망과 칭찬에 대하여 죽는 자신을 보았는데, 그때로부터 온전히 하나님께만 순종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지만 철저한 회개로 용서함을 받고,위대한 역사를 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구원을 얻은 감격의 눈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감격에 눈물흘리는 사람입니다. 
한번도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격적인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면 "신앙의 진수"를 아직 경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기 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결코 구원의 눈물 같은 것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은 이후로 이 감격의 눈물이 일생동안 그를 지배했던 사람입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안질에 걸렸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눈 때문에 서신을 대필시키기도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가장 큰 일들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동안 많은 순교자를 냈지만 그 많은 순교자들은 모두 구원 받은 감격의 눈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게 되며 부흥되어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에 대한 눈물이 항상 있는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놀랍고 신령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셋째, 긍휼히 여기는 눈물

현대인들은 절대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함께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눈물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눈물의 리더십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독해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교회에나 또 어느 때나 존재합니다.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고 아픈 사람들이요 눈물의 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눈물은 때로는 눈에 띄기도 하지만 보통 남몰래 흘립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그는 벌써 리더쉽을 가진자이며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만으로도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가 생기고 복음의 문이 열리기도 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장영희교수는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내것 내가 먹고 네것 네가 먹으면 되지 나눌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그런 식의 인생관은 옳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시위대 뜰에 가두기도하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도 가두고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진흑구덩이에도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위협을 가한 그 백성들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호소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벧론으로부터 70년만에 돌아오게 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이 기도가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칼빈은 "기도와 눈물이 우리의 무기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후버는 "원자탄을 가진 나라보다도 기도하는 성도가 많이 있는 나라가 가장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물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회개의 눈물,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 남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눈물의 기도는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교회위에 놀라운 역사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의 눈물의 기도는 응답과 축복으로 열매 맺을 줄 믿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해주는 얘기 들어주겠니 믿어주겠니
옛날 어느 나라에 함께 살았던 왕자와 왕의 이야기

언제부턴가 그 나라에는 몹쓸 병이 돌고 있었대
사랑과 용서보다 미움과 싸움이 커져만 가는

그 왕은 고민했었나봐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이는
하나뿐인 왕자뿐이었는데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왕자님을 해치게 될 줄을 알았던거야

그 때 왕자님이 말했대
사랑하는 저들을 위해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드려요
당신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전하러
그 어디든 맨발로 찾아갈게요
사랑을 나눠 줄게요

추운 곳에서 어둔 곳에서 매일 사랑을 가르쳤대
항상 기뻐하라고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라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만
왕자님을 해치고야 만거야
하늘도 울고 세상도 울었지만
왕자님은 기도했대 저들을 용서하라고

그제서야 모두 알았지
우릴 위해 이곳에 오신 걸 우릴 위해 눈물 흘리셨단 걸
그분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배우고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렸는데

또 시간은 점점 흐르고 그 기억은 멀어져가면서
우리들은 다시 잊어가나봐
그분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우리는 언제까지나 항상 기억해야해
가슴에 새겨둬야 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한 육체로 오셨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당시 유대인들은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는 사람들은 육체로 보이기만 할 뿐 영적인 존재로 오셨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주장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근거를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합니다(Gnosticism. γνωστικός. gnōstikós).
그러나 예수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 소개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비교적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정말 예수께서는 한 번도 웃으신 적이 없으셨을까?
저녁 해가 넘어가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시면서 제자들과 정답게 둘러앉아 웃음 섞인 환담을 나눌 기회조차도 전혀 없으셨을까?
당시의 상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기와 파탄에 빠져 있었던 시기임을 고려해 본다면, 정말로 웃을 수 있는 기분이나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예수께서 적어도 세 번 우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 우셨던 것이 모두 감람산을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제일 먼저 우신 것은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 앞에서였다(요 11:35).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한 그녀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병 앞에서 힘없이 쓰러진 나약한 한 친구 나사로를 향한 연민의 정과 더불어, 오빠를 잃은 두 자매의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휴머니즘 자체가 신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은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야보고서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5:13)고 하였다. 고난당하는 욥을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은 울며 각자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말도 없이 땅에 앉아 마주보고 지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그런 슬픔을 나누는 신앙의 휴머니즘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우신 두 번째 경우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우신 것이다. 이 눈물은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향한 눈물로서 자기 민족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이 담겨있는 눈물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릴리를 출발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고,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고국이요 사랑하는 동족이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흘리는 예수의 눈물 속에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심이 담겨 있다.

애국심 자체가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안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나라와 나라의 국경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다(행 17:26).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각자의 조국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도 모두가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분들이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김으로 무서운 죄를 범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용서를 기도하였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줄 것까지 요구하였다(출 32:32).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뜨거운 애국심의 기도였다. 바울 역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위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였다(롬 9:1-2). 바울은 자신의 골육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민족의 구원을 원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였다. 복음서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같은 상황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담겨 있었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가 보여준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담 이후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흘린 눈물, 곧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눈물이었다. 이 눈물 속에는 인류의 절망적 운명을 뒤바꾸어 놓게 될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그 눈물은 절망이기보다 오히려 인류 구원의 감격이 담겨 있는 눈물이다. 눈물의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 선택한 십자가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넓은 길을 열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지금 우리도 예수께서 흘린 눈물이 필요하다. 지금은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엄청난 피해에 원전사고의 재앙이 겹친 이웃나라 일본을 위하여 함께 눈물을 흘릴 때이다. 자연재해 앞에 힘없이 무너진 과학과 경제의 오만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어느 때보다 뜨겁게 기도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통일시대를 내다보며 북한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대통령의 심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조국을 위하여 기도할 수는 있다. 이런 눈물의 기도가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우리를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친히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특성, 행동 및 서식지

말의 사촌인 당나귀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존재한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거나 끄는데 사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이 동물은 엄청나게 지능적이고 유순하다.
당나귀의 특성, 행동 및 서식지 등 당나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계속해서 읽어보자.

당나귀의 신체적 특성

당나귀는 말과에 속하기 때문에 말, 코뿔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말과에서 가장 작은 종이기도 하다.
성인 당나귀는 대개 키가 90~140 cm이지만, 조금 더 큰 품종도 있다.

예를 들어 카탈루냐 당나귀의 키는 160 cm가 넘고 대략 250 kg 정도의 체중이 나간다.
최대 15~20세까지 살 수 있지만 40살까지 살았다고 기록된 일부 사례가 있다.

당나귀의 색깔은 회색, 흰색, 검은색, 갈색의 모든 색조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완전한 백색 또는 흑색을 띠는 일부 품종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당나귀의 경우에는 이들 중 한 색상이다.
이 동물은 몸에 비례하여 짧고 뾰족한 머리와 큰 귀를 갖고 있다.
귀를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열을 식히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당나귀의 행동학적 특성

현재 당나귀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야생 당나귀의 후손이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약 6000년 전부터 길들여졌다.
튼튼하고 견고한 동물로서 사막처럼 물이 거의 없고 매우 뜨거운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추운 기후에서는 살기가 어렵다.

당나귀는 초식 동물이며 다른 초식 동물보다 훨씬 더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
그렇지만 잔디, 건초 및 관목을 선호한다.
채소를 정말 좋아하고 비슷한 크기의 다른 동물에 비해 많이 먹지 않는다.
섭취하는 모든 식물의 수분을 잘 이용하기 때문에, 물을 잘 마시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물은 아예 마시지 않는다. 

당나귀의 행동

당나귀는 매우 유순하고 고분고분하다.
거의 모든 당나귀가 무거운 짐을 옮기고 끄는 데 익숙하다.
보통 힘든 상황이나 휴식 없이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을 잘 해낸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불가능한 노동 생활 방식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동물이다.

편견으로 인해 “donkey” 와 “ass(영어로 당나귀를 뜻함)”라는 단어는 많은 문화권에서 모욕적인 말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당나귀는 매우 예리하고 지능적인 동물이다.
느리게 움직이고 절대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매우 똑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
또한 기억력이 훌륭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장소와 경로를 기억할 수 있다.

당나귀가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자기방어에 따라 뒷다리로 아주 세게 차거나 이빨로 세게 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격적이거나 예민하지 않고 매우 유순하기 때문에,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센 고집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마음을 바꾸기란 매우 어렵다.
작업 수행하거나 명령을 따르는 동안 위험을 감지할 때 매우 조심성이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서식지

당나귀는 전 세계에 살고 있다.
가장 처음 길들여진 곳은 북아프리카이지만, 놀라운 성격과 힘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날씨가 따뜻한 국가에서는 더 많이 찾았다.

남부 및 서부 유럽이나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당나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전역으로도 퍼졌다. 전 세계에 있는 당나귀 중 절반은 현재 아시아, 특히 중국, 아프가니스탄, 인도에 서식하고 있다. 남미 대륙에서 당나귀가 가장 많은 나라는 멕시코와 콜롬비아이다. 스페인의 경우, 특히 안달루시아에 많이 있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더 이상 야생 당나귀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현재 야생에 서식하는 당나귀는 실제로 유기되었거나 탈출했거나 인간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길들여진 당나귀의 자손이다.

종을 구조하는 것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는 당나귀의 숫자가 멸종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스페인 출신의 4종이 위험에 처한 상태이다.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재 많은 숫자가 학대의 희생자이거나 몇 년간 지속적인 이동 끝에 유기된 동물이다. 이로 인해 당나귀를 구하기 위한 보호소가 생기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좋지 않은 삶을 살았던 당나귀를 구조하고, 회복시키고, 돌봐주고, 더 좋은 집을 찾아주려고 한다. 

당나귀는 견고하고 지능적이며 특출난 동물이다.
힘과 유순한 성격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이로 인해 많은 문화권에서는 이야기, 속담, 우화에 당나귀가 들어간다.


나귀의 착각

나귀 한 마리가 잠에서 깼다.
마음 한 구석에 뿌듯한 자부심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우물 곁으로 잔뜩 점잔을 빼며 다가섰으나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러분은 왜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입니까?"
화가 나서 막 소리쳤다.
사람들은 기막힌 표정으로 나귀를 쳐다봤다.
어떤 이는 막대기로 꼬리를 내리치면서 빨리 꺼져버리라고 버럭 고함까지 질렀다.
"세상에 이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다 있나? 내가 누군지를 모르다니!"

나귀는 방향을 틀어 시장쪽으로 갔다.
그러나 반응은 매한가지였다.
고개를 까딱대며 한껏 폼을 잡고 시장 한가운데를 걸어갔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 사람들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란 말이야! 어제 일을 잊었는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뿐 나귀를 외면했다.
자존심에 금이 간 나귀는 몹시 혼란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겪은 수치를 들은 엄마 나귀가 말했다.
"이 바보야,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너는 그냥 나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니."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들어간 나귀 이야기의 속편이다.
나귀가 세상 사람들이 질러대는 환호성을 자기에게 보낸 것으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나귀는 그냥 짐이나 부릴 뿐이다.
단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때로 분에 넘치는 존경과 대접을 받는다. 하물며 제왕적 목회자, 유명 부흥강사는 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예수님 때문이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올라타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헛된 자만심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누군데." 아,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숱한 칭찬과 환호, 박수소리, 모두 다 주님께 보내는 것인데, 내게 오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착각인가!

타락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나귀의 본분을 잊을 때 찾아온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멀어지는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주님보다 더 유명해지고 더 힘세지려고 할 때 시작된다. 중세 군주 부럽지 않은 절대적 권위, 수많은 교인, 웅장한 건물, 막대한 예산,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모신 나귀가 되기 어렵다. 그리스도를 깔고 앉은 나귀가 되기 십상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한 것은 가난과 병고"라고 말했다.

한국 교회가 정화되기 위해 가장 긴요한 것은 고난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온갖 성취를 뽐내며 주님 위에 걸터앉은 교회가 아닌, 땀을 뻘뻘 흘리며 힘에 겨워 주님을 태우는 교회, 대강절을 앞두고 곱씹어야 할 교회상이다.

03-19-2024(화) 누가복음 19:28-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귀 새끼(30절)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Go to the village ahead of you, and as you enter it, you will find a colt tied there, which no one has ever ridden. Untie it and bring it here.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걸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a colt)타셨다고 합니다.
나귀의 어원은 "작은 것"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당나귀는 짐을 나르며(창세 22:3)
쟁기로 밭을 가는(이사 30:24) 짐승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수레를 끄는 일이다.
나귀가 일반 백성들에게 친근한 동물이었지만 또한 나귀와 노새는 고대 근동 지방 왕의 의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솔로몬은 왕이 되기 위한 기름 부음을 받으러 기혼으로 갈때 다윗의 노새를 탔다.
다윗 임금이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그리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그대들은 그대들 주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시오"라고 명령했다(1열왕 1, 33).
열왕기에는 입성할 때 의전으로 나귀를 탔다고 기록돼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를 생각해볼 만하다.
사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겨주셨다.
자존심이 강한 말을 타지 않고 온순한 당나귀를 일부러 택하신 것이다.

당나귀 모습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르쳐준다.
성경에서 나귀는 겸손과 봉사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지만 겸손하게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왕의 대관식을 하셨다.

나귀는 미련함을 상징하기도 한다(잠언 26:3).
유다인들은 연자 맷돌을 돌려 곡식을 찧는 데 나귀 힘을 빌렸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는 유다인들 재산으로 취급한다.
성경은 특히 나귀의 재산적 가치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놓거나 파고 그것을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 그 구덩이 임자는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치러 배상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탈출 21, 33-34). 또한 정의 실현에 관한 법을 설명하면서 나귀 안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탈출23, 4-5).

나귀는 주로 가난한 이들과 가까운 동물로 묘사됐고 이런 특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오랜 전승에서 나귀는 겸손과 봉사뿐 아니라 게으름, 어리석음과 완고함의 정반대 상징도 드러냈다.
붉은 나귀는 사탄의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이 되기도 했다.



다른 때는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제자들과 더불어 걸어서 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첫째는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구약의 예언자 스가랴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 타는 것이라면 나귀는 일반인들 중에서 노약자들이 탈 것으로 사용합니다.

둘째는 군중들의 흥분을 가라 앉히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누가복음 19:30)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무리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기뻐하며 큰 소리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군가 군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추대하자!" 라고 외치면 모든 군중들이 환호하며 마치 로마 정부를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분위기에서 개선장군처럼 말을 타고 등장한다면 반역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새끼 나귀의 걸음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이동하기 때문에 흥분한 군중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예언된 메시아가 되심을 보여주시려고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누가복음 19:39-40)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고 칭송할 때 어떤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릴 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세워질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로마 정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만일 로마 정부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반역으로 판단하고 모인 군중들과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아간다면 바리새인들도 위태롭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만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상 나라를 무너트리려고 한다면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전혀 다른 나라가 이미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세운 그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그 나라의 주인공처럼 나귀 새끼 타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다면, 그래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멋지고 훌륭한 말을 타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줄 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일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오신 왕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원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 만드시기 위해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사 우리가 당할 형벌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세상적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으로 들어가는 첫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바닥에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가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소리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도예수님처럼 고난에 동참하자고 외칩니다. 
금식을 하고 일주일간 금욕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이천여 년 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무지한 백성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며 마음 아파 하실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세상의 욕심들을 내려놓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몫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복을 위한 왕이 아니심을 기억하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세상적 욕심을 내려놓고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십시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유일한 구원주가 되십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외치던 우리들의 진심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자 메시아이시지만,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에 대해 묵상하고 새벽 설교로 요약했습니다. [생명의 삶 묵상] 마가복음 11:1-10,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며 나귀 새끼틀 끌고 옵니다. 그 위에 제자들이 겉옷을 얹고 예수님이 타시자, 무리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라라고 외칩니다.

본문 해설

1. 예수님의 왕적 권위 (11:1-6)

사명을 이루실 때가 이르자 예수님은 그분의 왕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명하십니다(2절). 당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는 신성한 목적에 사용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라고 묻는 나귀 주인에게는 “주님이 쓰시려 하십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게 하십니다(3절). 예수님은 이 일을 왕적 권한으로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시기에 어떤 것이라도 그분이 필요로 하시는 때에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나귀 주인의 온전한 순종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기꺼이 그분 바칩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온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왕적 권위가 어떻게 드러났나요?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주님께 기꺼이 드릴 것은 무엇인가요?

2.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1:7-10)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슥 9:9). 고대에 왕은 즉위식 때 노새를 탔고(왕상 1:38), 승전 후 개선할 때는 말을 탔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그분의 나라가 로마 황제가 추구하는 ‘압제와 전쟁의 나라'가 아닌 겸손으로 세우는 ‘섬김과 평화의 나라'임을 나타냅니다. 많은 시람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길 위에 겉옷을 펴는 행동은 충성과 존경을 뜻하고, 손에 든 종려나뭇가지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외쳐 부르는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시 118:25~26).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류의 구원자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어떻게 표현하나요?

한절 묵상 : 마가복음 11장 7절

겸손하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셨습니다(마 21:5; 슥 9:9). 예수님의 입성은 자기 백성을 위한 왕의 행차라고 하기에는 볼품없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기까지 낮아지셨고, 죽음을 향해 순종의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이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왕의 행차를 거절하신 예수님 모습은 우리가 따를 신앙 모범입니다.

    111-10      |
겸손과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다. 마가복음 11장 1-10절

나귀 새끼를 타신 평화의 왕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왕적 권위와 겸손,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찬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드러내셨지만, 그 방식은 기존의 왕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론

1. 예수님의 왕적 권위

마태복음 11장 1-6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어 어린 나귀 새끼를 데려오라고 명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가올 때 왕처럼 위엄 있게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당시 평범하고 겸손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자신이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섬김과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왕적 권위는 세상의 권력과는 달리,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권위입니다.

2. 겸손으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사람들이 펼친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영하고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되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의 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십자가에 오르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3. 나에게 주는 응답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겸손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 기도와 말씀 묵상: 예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배우기 위해 기도와 말씀 묵상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 섬김과 사랑: 예수님은 섬김의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평화 전파: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세상의 화해와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이 겸손하고 평화로운 구원자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요한복음 12:12-1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에서 '호산나!'란 '지금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붙여서 사용하는 바람에 '호산나'도 찬송한다는 뜻인 줄 알고 성가대 이름 중에서도 호산 나 성가대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찬송하는 뜻인 줄 알고 이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뜻이 아니고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하자면 도 움을 청하는 외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호산나라는 외침이 처절한 상황에서 외치기 보다는 자기를 도우고 해방시킬 메시야가 들어온다는 시점에서 외치는 것이 기 때문에 기쁨과 감격과 환영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이 대대적인 환영을 하던 날로부터 몇일이 못되어서 그렇게 찬송 하며 맞이했던 그 무리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쳐댓던 것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는 환호와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군중들은 다시 빌리도 법정에 모여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못박을 것을 요구했던 것 입니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급격한 변심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가 하는 것을 오늘 이 사건으로부터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도움과 큰 이적과 선한 일을 베푸셨던 그 분을 결국은 모두가 다 버리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복음서의 중요한 추적거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이렇게 쉽게 볼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들에게 좋은 일을 해줄 때는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이유야 어찌하였든지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제발 그러지 말자!' 이렇게 쉽게 비교해서 결론으로 가기에는 이른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같이 '도대체 사람 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졌으며, 또한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이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 어떻게 달라서 그렇게 떠나가고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리고 제자들은 무엇을 뛰어 넘었길래 나중에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그렇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되었는가'하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 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 을 때에 마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사람들은 들었습니 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문둥병자를 고쳤으며,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켰는 가 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다 더더욱 바로 몇일 전에 베다니에서 죽 은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에서는 친히 그같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고쳐주셔서 병이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 하였던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십시오! 당신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십니다!'하면서 그렇게 기쁘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가리켜 만일 '이 사람들이 소리치지 아니하면 이 돌들이 외치리라!'고 하신 것처럼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 였던 사건이 역사적으로 성취되는 사건임을 보여주실 뜻은 있었지만, 그러나 환호 하는 백성들의 그 기대와 요구를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건 자체에서 이 미 예수님은 상징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금지한 몇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기 를 먹을 때 짐승을 잡아서 먹게 되거든 그 짐승의 피는 먹지말라'라는 규약도 있고 '이방 민족과는 결혼하지 말라!'라는 규칙도 있습니다. 그런 많은 규칙 중에 중요 한 규칙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최소 한 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즉 농사용으로 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전투용으로는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명 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라 할지라도 마병을 거느릴 수 없게 되어 있고 전차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위용을 위해서는 전차를 가질 수 있었지만 전투용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가지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구 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솔로몬이 범한 가장 큰 잘못 중의 하나로 그가 말을 많이 둔 것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삼은 것을 큰 죄로 지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20:7절에 보면 이런 구체적인 설명도 나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 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신앙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말과 병거를 의지 하는 것은 중대한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과 병거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전 쟁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상징시키기 위하여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란 전쟁용으로는 부적격 합니다. 나귀가 힘 은 세지만 전쟁용으로는 못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하는 예는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예수님은 다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이 때에 그들은 겉옷을 깔아서 겉옷 위로 나귀를 타고 들어 오십니다.

종종 우리가 로마 제국이 배경이 된 영화들을 보면 로마 군대가 외국에 가서 전쟁 을 해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돌아오는 지를 묘사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 을 것입니다. 앞에서 나팔수들이 나팔을 불며, 연변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를 하고, 그리고 특별히 탈취한 전리품들을 앞세워 들어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쪽이 면 표범을 앞세우고, 사자도 함에 담아서 오고, 노예들도 앞세우고, 그리고 뿌리는 꽃송이와 오색 종이들, 환호하는 퍼레이드 속을 당당히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그 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추종을 받았을 때에 누가 제일 많이 긴장 했겠습니까 바로 로마 정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이고, 그 곳에 빌라도 총독 이 와서 관할하고 있습니다. 민중이 어떤 사람을 추종하고 거대한 힘으로 모였다 면 가장 긴장되는 것이 빌라도와 로마 정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이 예수님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혁명가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에게 무장한 모습이나 어떤 민첩함이나 교활함이나 그런 류의 어떤 것도 없음을 보 고 아마 피식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깐 겉옷 위를 지금 느릿느릿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드러내었 습니다. 그러한 모습에서는 로마 정부를 전복할 의도나 힘이 있어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상징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장면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겸손하셨다든가, 예언에 응해서 이 길을 걸으셨다든가 하는 것은 많이 상고하는데 이 사건 자체가 갖는 뜻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를 못하고, 바로 그 다음의 십자가 승리로 인한 능력과 감격으로 너무 쉽 게 뛰어갑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한 이 사건이 스가랴 9에 있는 말씀이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슥9:9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 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 귀의 작은 것 곧 새끼니라" 여기서 예언된 말씀 중에서 분명히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귀를 타고 오는데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 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면서 구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제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입니다마는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왜 그가 이스라 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신데 나귀 새끼를 탔느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이해를 못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한 번 더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실 그 때에 는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며,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러 오실 것입니다. 그 묘사는 요한 계시록 19장을 보시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19:11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무엇을 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백마를 타고 오시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분명히 정복하러 오시며, 심판하러 오시며, 권세 와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초림하시는 예 수님께서는 평화의 상징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셔야 했는지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을 오해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예 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다른 메사야룰 찾아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슥12:10절 의 말씀을 보면 또 하나의 예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 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잘못 알아 볼 것에 대한 예언이 이미 되어 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 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어느 날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자기네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 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대하여 회개하는 날이 온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예언이 응한 것같이 여기 이 예언도 응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놓고서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려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뜻밖에도 놀라운 결론에 부딪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때 예 수 그리스도를 환영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은 이것었습니다. 그 오해는 오 늘날 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로서, 자신들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 실을 생각지를 못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얻 은 자인데 다만 지금 악하고 나쁜 나라와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불편하게 핍박하고 있다고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생각에 이제 공의의 하나님께서 오 시기만 하시면 자기네들을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을 따름이 지, 그들 자신이 바로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러 오셨다고 설명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메사야는 지금 그 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공의로 심판하러 오시어서 자기네들의 어려 움과 억울한 핍박 가운데서 꺼내어 주실 자로 생각했지, 그들 자신이 고침을 받아 야 하고 죄값을 치러야 하고 거듭나야 될, 회개가 필요한 대상이라고는 전혀 상상 치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해하고 있는 신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향하여 갖고 있는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는 거의 대부분이 오해를 합니다. 나로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대한 특별한 뜻과 계획이 있어서 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 계획이 있고 내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필 요한 것을 요구해서 얻어 가지는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을 안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 다. 바로 이같은 생각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었다는 역 사적인 이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가 결국은 어떠한 불행을 불러 오게 되는가 하는 점을 눅19:4 1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며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 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 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사건을 놓고 우리가 이중적 인 메세지를 구분해 받아야 합니다. 그 첫번째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 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올바로 반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 고 또 한가지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상태에 모든 인생들이 빠져 있었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인 그 죄인됨을 고치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러 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이중성 때문에 기독교는 늘 오해를 받습니다. 기독교는 세 상사람들에게 이렇게 오해를 받습니다. '너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너희 들을 그 모양 그 꼴로 밖에는 인도하지 못하느냐'하는 오해를 듣습니다. 이건 세 상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 자체로 부터도 오해를 받습 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믿었을 때와 도대체 뭐가 다르고 차이가 납니까' 하는 오해를 제기 받기도 합니다.

왜 이런 오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 고 뛰쳐 나왔으되 자신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 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예수님 을 통하여 우리의 어려운 이 모든 형편이 피어지고 고쳐지리라는 기대와, 이 지긋 지긋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리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나왔는데 항 상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기대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 려운 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고 참된 신앙의 길이란 주님의 뒤를 쫓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인 것입니 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들어 오실 때에 말을 타고 들어 오셨다면 그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것 같습니까 놀랍 게도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 하 셨을 때에 심판 주와 왕의 모습으로 오셨더라면 모두 다 죄값으로 멸망을 받고 말 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이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된 현실은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대와 요구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작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에 대해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는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뿌리 깊은 문제입 다. 여러분의 기대와 요구사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의 모두가 '정말 예수 그리 스도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 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경제력입니까 집입니까 그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져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 가운데서 꺼집어 내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가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무엇을 쌓아 나가는 작업을 하는 그것이 시 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르켜 주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뭐 라고 고집을 피웁니까 ' 아닙니다! 이 경제의 문제, 건강의 문제, 집 문제, 이 출 세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 시는 것이 내게는 더 현실적인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다른 문제는 잘 모르겠고,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내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소원과 기대가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우리 입에서 무슨 말 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아!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는지 모르 겠습니다'하는 겁니다. 이와같은 혼동과 오해가 우리들의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하 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분은 놀라셔야 합니다.

왜 놀라야 합니까 우리는 백마타고 왕권과 철장의 권세로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 스도를 자꾸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 앞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 아 영락없이 자신조차 멸망 당하고 말 처지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심판의 주님을 자청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왜 심판의 대상이 됩니까 아직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을 상징하 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다음 번 재림 때에는 반드 시 백마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 평화의 주님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 이 땅의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시고 영광을 감추셨습니 다. 그래서 결국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에 대한 진 노와 형벌의 담을 제거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게해 주셨습니다 아직은 평화의 때입니다. 재림이 있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가지고 지속적인 교제를 이루는 것 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의 아들들답게 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 요한 우리 자신들의 지상 과제입니다. 결국 신자들의 지상의 삶이란 완성을 향해 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직은 우리가 누군지 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칼을 뽑아 보이도록 요구받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신자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방법으로 신자 됨을 증명해 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예 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환영을 받으셨지만 저들의 기대 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인생의 어떤 역경과 어려움 때문에 기독교에 입문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그 문제들을 푸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줄 아십니까 기독교는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에 전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 이란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며,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만들어준 분에게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배신한 자요, 상처받은 자요, 눈먼 자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지적을 기독교는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 고는 이제 거기서 돌이키고 돌아오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셨기에 그 분을 만나고 영접하므로써 돌아오라는 말씀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내가 이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중생한 자에게만 알게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 도 우리는 역시 2천년 전의 그 예루살렘의 군중들 처럼 그저 쉽게 호산나! 호산나! 외치면서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고 갈증이 난 군중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히 있 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환호하고 열열히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 이라는 이야기에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사랑하는 제자들마저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 런데 눅24:13-26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날에 저희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 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영광 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지적을 받아 마땅한 자들일 것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 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전 66권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약속들, 그리 고 그 행하신 능력에 관한 기록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성경 전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를 향하신 전체적인 뜻에 관심 이 있기 보다는 내 욕심에 더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내 욕심과 유사한 말씀을 찾 아 놓고서 '하나님! 이렇게 하셨으니까 제게도 이렇게 해 주십시오!'하면서 우리는 기독교를 너무도 쉽게 갈갈이 찢어서 마음대로 뜯어 맞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바를 더디 믿는 자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신자들의 참 승리와 감격의 생활로부터 단절시 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자랑이 물질이라고 누가 가르쳤습니까 인간의 힘이 자기의 육체요, 자기 손에 잡고 있는 권세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잠자리는 두평도 안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무덤도 그저 한 평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도 정력과 관 심과 마음을 쏟아붓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큰 사랑과 축복과 하늘의 행복을 왜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사는 것이야 뭐라 그러겠습니까마는 세상 사람들과 엄연히 그 신분과 차원이 달라야 할 신자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과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여간 불 행한 일이 아닙니다

<결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의 입성의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우리을 향하신 엄청난 진리를 우리 신앙의 대전제와 기초로 놓고서 그 위에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서 있 는 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문제 는 우리가 늘 미련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미를 더디 깨달음으로 연약한 신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걸어가야 할 신자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무엇인지에 온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내 마음의 욕심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참 행복과 축복과 감격이 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으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착취하시 려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이 다만 신자로서의 사명과 책임만을 요구하시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찬송과 감사를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느낄 수 없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까 아직까지 내게 미련함이 있고 더디 깨닫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미련한 마음을 제하시고 성경의 신령한 깨닫는 은혜로 속히 깨닫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세상이 주는 기쁨과 전혀 다른 새 기쁨을 차지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끼쳐주시는 평강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 보고 기뻐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바라고 독수리처럼 높이 높이 올라가는 믿음 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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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단위 -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 등 무게 단위


성경의 단위를 살피다 보면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한 도량형이 많이 등장한다.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 등의 단위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바사(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 조금씩 변해 왔다.

도량형은 무게나 길이, 부피, 화폐 등의 단위로 나눌 수 있는데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는 무게 단위로 쓰였다.
성경의 무게 단위들
이 각각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 살펴보자.

구약성경의 무게 단위

게라(Gerah)

게라(גֵּרָה, Gerah)는 성경의 무게 단위 중 가장 최소 단위로, 1게라는 약 0.5g, 0.15돈에 해당한다.
1원짜리 동전의 무게가 0.729g이라고 하니 게라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한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이 반 세겔은 주에게 올리는 예물이다.(새번역 출애굽기 30:13)

구약시대, 20세 이상의 남자는 성막의 기물을 제작하는 데 반 세겔, 즉 10게라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는 100원짜리 동전 정도의 무게다.

베가(Beka)

베가(בֶּקַע, Beka)는 5.7g으로, 1베가는 반 세겔, 10게라와 같은 무게다.

스무 살이 넘어서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두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므로,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가씩 낸 셈이다.(새번역 출애굽기 38:26)

구약•신약 성경의 무게 단위

세겔(Shekel)

세겔(שֶׁקֶל, Shekel)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기본 단위다. 1세겔은 게라의 20배 정도이며 약 11.5g, 3돈가량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무게 단위이기도 하다. 성소세겔, 일반세겔, 왕실세겔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무게를 잴 때는 먼저 어떤 세겔인지 정한 후에 무게를 쟀다.

그는 머리 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달아 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되었다.(새번역 사무엘하 14:26)

세겔은 후에 화폐로 통용됐는데 금으로 된 세겔과 은으로 된 세겔로 나뉘었다.

마네, 므나(Mina)

마네(מָנֶה, Mina)는 므나와 동일한 단위다. 개역한글 구약성경에는 원어인 히브리어 그대로 ‘마네’, 신약성경에는 누가복음 19장 예수님의 비유 속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따라 ‘므나(μνᾶ)’라고 번역되었다. 마네(므나)는 약 570g의 무게다. 이는 세겔의 50배, 1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한다.

그는 또, 금을 두드려 펴서 입힌 작은 방패를 삼백 개를 만들었는데, 그 방패 하나에 들어간 금은 삼 마네였다. 왕은 이 방패들을 ‘레바논 수풀 궁’에 두었다. (새번역 열왕기상 10:17)

솔로몬 왕이 3마네의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방패 하나의 무게는 1.7kg 정도 나갔다. 이는 1.5리터 음료수 병과 비슷한 무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네(므나) 역시 세겔처럼 화폐로도 통용됐다.

달란트(Talent)

달란트(Talent)는 성경의 무게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35kg이다. 이는 세겔의 3,000배, 마네의 60배다. 달란트는 헬라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헬라어 ‘탈란톤(τάλαντον)’은 ‘저울’, ‘계량된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글개역 구약성경의 달란트는 히브리어 ‘킥카르(כִּכָּר)’를 번역한 것이다. 킥카르는 ‘한 덩어리’라는 의미다. 달란트는 신약시대에는 세겔, 마네(므나)와 함께 주로 화폐 단위로 쓰였다. 한글개역 신약성경에서 달란트가 무게 단위로 쓰인 것은 요한계시록이 유일하다.

하나님께서는 큰 성 바빌론의 죄악을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들이키게 하셨습니다. 모든 섬들이 사라지고, 산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들이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우박 때문에 재난이 너무나 커서 ··· 너무나 끔찍한 재난이었습니다. (쉬운성경 요한계시록 16:19~2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진노의 일곱 대접 중에 마지막 일곱 번째 재앙 중에는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해 무게가 약 35kg의 우박이 9km 상공(우박이 형성되는 적란운의 위치)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우박이 고체라는 특성과 공기저항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있다.


성경의 화폐 단위 -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성경의 화폐 단위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등이 있다.
주조화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양모, 곡물, 목재, 가축 등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금속의 무게를 달아 값을 치렀다.

주조화폐는 B.C. 7세기경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금속 조각의 화폐였던 것이 차츰 금화나 은화로 발전했다.
화폐가 발전하면서 무게의 단위와 주화의 명칭이 상용되기도 했다.
무게 단위이자 화폐로 통용됐던 게라, 베가, 세겔에 대해서는 ‘성경의 단위 – 무게’ 편을 참고하면 된다.

구약성경의 화폐 단위

다릭(Daric)

다릭(Daric)은 바사(페르시아) 시대의 표준 금화다.
황제 다리오(다리우스 1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화폐 단위다.
원어인 히브리어 성경에는 ‘דַּרְכְּמוֹן(darkemon)’으로 기록되어 있다.
1다릭의 무게는 약 8.4g이다.
금 1돈이 3.75g이니 2돈을 웃도는 가치인 셈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공사를 위하여 창고에 바친 것은, 금이 이만 다릭이요, 은이 이천이백 마네였다.
(새번역 느헤미야 7:71)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치리할 때,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성경은 당시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금 20,000다릭을 성전 건축에 쓸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168kg의 엄청난 양이다.
2021년 금 시세가 순금 1g이 약 63,000원이다.
20,000다릭이면 100억 원 정도의 금액을 봉헌했던 것이다.
단, 금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 하에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 추정치는 90억원가량이다.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렙돈(Lepton)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헬라의 주화로 고드란트의 2분의 1 정도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1~4)

고드란트(Godrants)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앗사리온(Assarion)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은 로마에서 쓰던 소액 동전으로 청동 화폐 단위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1앗사리온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5천 원 정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29)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보잘것없는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 계신다.

데나리온(Denarius)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다.
로마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었으며 로마 황제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은화(銀貨)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 나드 한 옥합을 ···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마가복음 14:3~5)

한 여자가 들고 온 나드(Nard)는 고급 향유다.
휘발성이 강한 나드는 반드시 병에 넣어서 보관한다.
사용할 때는 병을 깨서 향을 퍼지게 하는데, 신경안정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드향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천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향료인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크마(Drachma)

드라크마(δραχμή, Drachma)는 ‘움켜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은화의 명칭이다.
무게는 약 4.3g으로 1드라크마는 로마의 주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누가복음 15:8~9)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작은 은화를 꿰어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해온 관습이 있다고 한다.
드라크마 10개를 끈에 꿰어 만든 이 머리 장식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리는데,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도 전해진다.
즉 세메디는 장식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드라크마는 바로 이 세메디로 추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화 한 닢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는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와 같음을 설명하셨다.

므나(Mina)

므나(μνᾶ, Mina)는 주로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으나 헬라와 로마에서는 화폐 단위로도 사용됐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새번역 누가복음 19:12~22)

비유 속 귀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 1므나씩, 총 10므나를 주었다(누가복음 19:16, 18, 20).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주고 간 10므나는 10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노동자 일일 급여를 7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7천만 원 정도다.
즉 종들은 개인당 7백만 원의 자본금을 받았던 것이다.
왕은 그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도 장사를 하지 않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을 엄히 문책했다.

달란트(Talent)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18:23~35)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다.


03-17-2024(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열 므나의 비유(13절)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So he called ten of his servants and gave them ten minas.'Put this money to work,' he said, 'until I come back.'

* 장사하라(4231) 프라그마튜오마이(pragmatĕuŏ- mai ) πραγματεύομαι

1. 사업을 하다.  2. 장사하다. 3. 눅 19:13.
발음 [ pragmatĕuŏ- mai ]
어원  /  디포넌트. 제1부정과거 ἐ- πραγματευσάμην, 4229에서 유래

* 4229
πρᾶγ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4229
1. 되어진 일.  2. 되어질 일. 3. 사물
발음 [ pragma ]
어원 / 4238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되어진 일, 행위, 일, 사건, 눅1:1, 행5:4, 고후7:11,히6:18.
  • 2.
    되어질 일, 맡은 일, 업무, 과업, 직부, 롬16:2, 살전4:6.
  • 3.
    [일반적으로] 일, 사물, 마18:19, 히10:1, 11:1, 약3:16.
  • 4.
    소송, 논쟁, 고전6:1.
* 4238

πράσσω 스트롱번호4238
1. 행하다.  2. 모으다. 3. 행 3:17
발음 [ prassō ]

뜻풀이부
  • 1.
    [타동사]
    • a.
      행하다, 하다, 완수하다, 행5:35, 19:19, 롬7:19, 고후5:10, 12: 21, 살전4:11.
    • b.
      모으다, 징수하다, 눅19:23.
  • 2.
    [자동사]
    • a.
      하다, 행하다, 행3:17, 17:7.
    • b.
      있다, 살아가다, 지내다, 행15:29, 엡6:21.

󰃨 그 종 열을 불러
-
마태는 달란트 비유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한 반면 누가는 그 세 배가 넘는 열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귀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종을 언급함으로써 귀인을 상당한 재력을 갖춘 권위있는 인물로 묘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 은 열 므나를 주며
- 여기서도 달란트 비유와는 달리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화폐의 단위도 차이가 있는데 '므나'(*)는 헬라의 동전으로서 한 달란트의 1/60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 여기서 언급되는 화폐 단위는 엄청나게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본 비유에서는 적은 액수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그런 의미에서는 작은 일에 충성(마 25:21,23)을 촉구하는 달란트 비유의 주제와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 이와 같은 당부내지는 지시의 말이 달란트 비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화폐 단위 '므나'를 각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재능이라고 한다면 '장사하라'는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재능, 또는 일을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수행(遂行)하라는 지시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예수의 명령과 연관될 때 예수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는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장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튜오마이'는 이윤 추구와 관계되는 상업적 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상업적 이윤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 무리들의 귀를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비유였으리라 짐작된다.


열 므나의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 
므나는 은화이고 100드라크마에 해당합니다.
달란트는 금화인데 6000드라크마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1므나는 1달란트의 1/60에 해당합니다.

므나의 비유는 예수님의 메시아로서, 청중들을 향한 마지막 공식적인 교훈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시작된 예루살렘을 향한 모든 여정이 이 말씀을 끝으로 마치게 됩니다. 
19장 앞부분에서는 여리고에서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다음 주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시게 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굉장히 중요한 교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열 므나의 비유’를 하실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11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예수님께서는 귀인으로 가셨다가 왕이신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이 땅에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교훈이 바로 므나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2천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시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조로 볼 때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날과 그 시는 모르지만 그 때까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열 사람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맡기셨고 그것으로 장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장사의 목적은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득을 남기고 칭찬을 받지만 한 사람은 한 므나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책망을 듣습니다.

나는 심판의 주로부터 칭찬을 듣겠는가?
아니면 책망을 듣겠는가?

"주마가편(走馬加鞭)" 이란 한자숙어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는 뜻입니다.
칭찬을 들을 사람은 더욱 분발하여 칭찬을 듣도록 노룍하고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책망을 들을 사람은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목표를 정하고 다시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천성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둘러보는 재미에 심취하여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오늘도 신실한 일군으로 내게 맡겨진 삶을 바르게 감당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달란트의 비유

은 열 므나의 비유

본문

마태복음25:14~30

누가복음 19:11~27

배경

천국은 타국으로 가는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는 군중들에게

화폐 가치

금 1달란트 = 90,000드라크마

250년치 품삯

(일5만원x90,000=45억원)

은 1 므나 = 100 드라크마

3개월치 품삯

(일5만원x100 =500만원)

배분방식

3명에게 각각 금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씩 차등 지급

10명에게 각각 은 1 므나씩

균등지급

결산

5달란트 => +5 달란트 = 10달란트 남김

2달란트 => +2 달란트 = 4달란트 남김

각가 주어진 재능만큼 균등있는결실을 얻음

 

1달란트 => 0 달란트 = 1달란트 남김

1 므나 =>  +10 므나 = 11므나 남김

1 므나 =>  +5 므나 = 6므나 남김

각자 최선으로 차등있는 결실을 얻음

 

1 므나 =>  0 므나 =1므나 남김

변명

질책

주인이 두려워서 땅에 감추고 보관

취리하는 자에게 맡겨 이자라도 얻어야

주인이 무서워서 수건에 싸서 보관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얻어야

평가

5달란트 => 작은 것에 충성, 착함

2달란트 => 작은 것에 충성, 착함

1달란트 => 악하고 게으름

1 므나 =>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착함

1 므나 =>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착함

1 므나 =>  악함

보상

5달란트 => 즐거움에 참여+1 달란트

2달란트 => 즐거움에 참여

균등 보상

1 므나 =>  열고을 권세+ 1 므나

1 므나 =>  다섯고을 권세

차등 보상

심판

1달란트 받은이 = 어두운데로 내 쫒김

주인의 왕 됨을 원하지 않은 자들 =>

죽임

 

성경의 두 비유는 천국(하나님 나라)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유사한 평행구절에 해당된다.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에 언급하신 내용으로 보여지며, 주제(하나님나라)가 같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태와 누가가 각각 다르게 받아 적은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다른 상황에서 다른 형식으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각각의 특징(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화폐단위를 볼 때 신약에서 달란트는 마태복음에서만, 므나는 누가복음에서만 사용된 단어이다

마태복음에서 종에게 지급한  금 다섯달란트는 현재 가치로 하루 일당 5만원으로 볼때 45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인 반면 누가복음에서 지급한 은 한 므나는 500만원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금액이다.
현재 경제상황에 맞춰 말하면 마태복음에서는 중견기업을 운영하게 한 것이고 누가복음은 소호창업을 하게 한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맡겨진 인생에서 최선으로 응답해야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각자의 인생에 대한 출발점과 성장과정에 대해서 다른 시야로  해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각각 차등 지급한 달란트의 가치를 비추어볼 때 달란트는 각자에게 부여된 재능 혹은 선별적 환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누가복음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지급한 므나의 가치를 보게되면 므나는 차별적 재능보다 보편적 환경에서 얻게되는 기회라고 볼 수 있겠다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부유한 가정, 교육적 여건이 풍부한 도시등 선별적 환경에서부터 차등있게 성장하기도 하는 반면, 초등학교 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환경 속에서 공부하며 노력여하에 따라 최소한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3.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결실을 남긴 형태는 차이가 있다.

마태에서는 각각 차등있는 재능에 걸맞게 각각 많은 결실을 거두었고 누가에서는 동일한 환경에서도 각자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차등있는 결실을 거두었다. 우리의 인생을 비추어볼 때 이런 다른 상황은 낯설지가 않다. 영재로 태어나서 전문가로 성장하는 모습이나 학교에서 꼴찌를 할 망정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각각의 출발점은 다르고 지나치는 여정은 다르지만 최선을 이룬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와 누가 모두 서로 다른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마태와 누가에서 각각의 화폐가치가 큰 차이를 보이지만 결실에 있어서 주인의 평가는 동일하게 '적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화폐가치로 보자면 달란트의 결실은 놀라울 정도로 크고, 므나의 결실은 상대적으로 작아보인다.
주인은 최선으로 일구어낸 결실에 대해서 칭찬하며 흐뭇해하시면서도 그 성과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적다는 표현은 더 큰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더 크고 놀라운 달란트를 혹은 므나를 맡기시고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원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종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일구어낸 성과에 만족하고 자만에 빠질 수가 없게된다.

5. 마태와 누가 모두 한 달란트, 한 므나를 받고 그대로 갖고만 있다가 다시 내어놓는 종의 모습과 그에 대한 주인의 심판은 동일하다.

모두 주인에대한 무서움  두려움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관리하다가 실패해서 손실을 입게 될 때 주인의 질책과 책임추궁을염려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핑계에 불과한것은 주인의 평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태 누가 모두 동일한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나 대부업자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았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6. 마태 마가 두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전혀 상반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통점을 찾아가다보면 다양한 인생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서로 다른 환경 다른 재능 그래서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며 모두 성공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 성공의 크기나 가치보다 자신만의 환경을 바탕으로 혹은 자신만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내는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다른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얻어낸 성과에 자만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는 삶이 곧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이다. 

7. 반면 좋은 환경을 낭비하고 나쁜 환경을 불평하면서 재능을 썩히고 제자리 걸음만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심판은 엄격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삶을 사는 행태를 가리켜 주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청지기로서의 삶의 기준은 주인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8. 어떤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것인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또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주신 내 인생의 재능과 환경 가운데서 최선의 삶을 견지하여 걸맞는 성과를 이루어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필요가 있는 곳에 거하는 것,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남과 비교하지 않고 타인을 존중히 여기는 것,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결실을 얻어내는 것,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주여 이 종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도하여 주소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열 므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의 종 열 명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귀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그가 종들을 신뢰했으며 또 종들의 충성 여부를 시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자신의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일을 막론하고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지만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의합니다. 

므나 비유가 달란트 비유와 다른 것은 10명의 종들에게 10개의 므나 중 한 개씩 똑같이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더 많이 주고 어떤 이에게는 조금 덜 나눠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맡기고 간 경제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이며 므나 비유는 작은 단위의 화폐를 맡기고 갔다는 점이 다르다. 
중량으로 말하면 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된다. 

여기 므나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는 날,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셨는지를 알고자 하여 10명의 종을 불렀다. 10명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와 모두 보고를 한다.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그들은 저마다 남긴 므나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눅 19:20을 보면 또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한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주인은 잘했다고 칭찬하기 시작했고 또 한편 “악한 종아 내가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므나를 맡긴 이유를 바로 알아야 칭찬을 받는다(13절)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은화 므나를 맡긴 이유는 장사하는 밑천으로 준 것이다.
므나를 맡긴 이유는 간직하고 있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열심히 사업하라는 뜻으로 준 것이다.

그러나 칭찬을 듣지 못한 종은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절)

위의 두 구절의 말씀은 므나를 맡긴 이유에 대해 한 종은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오히려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땅을 살면서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향해 왜 구원했는지, 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는지, 왜 은혜를 주셨는지를 바로 알고 살 길을 원하신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는 그 분의 의의 종이다. 내게 주님이 구주가 되시고 주님이 내 삶에 맡겨 주신 이유를 바로 알도록 성경을 읽자. 바로 알지 못하면 항상 므나를 받아들고서 수건으로 싸두는 일을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성도라는 이름을 맡긴 이유, 교회의 직분을 맡긴 이유, 시간과 건강과 사회 생활을 맡긴 이유를 오해하고 책망 받는 종처럼 되고 만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바로 알아 주님의 의도대로 움직여 칭찬 듣는 성도가 되자.

므나를 남기는 결산을 해야 칭찬을 받는다(16절)

칭찬을 받는 종들은 므나를 받아서 열심히 장사하였다. 장사의 목적은 이문을 남기는 것이다. 하나를 원금으로 삼았으면 하나 이상을 만드는 것이 장사 잘하는 상인의 능력이다.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원금을 잃어버리든지 남기지 못하고 원금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면 장사 잘하는 상인이라 볼 수 없다. 무조건 남기는 결산이 있어야 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모든 것이 시작할 때는 미약했지만 다섯이 되고 열이 되면 그 사람은 주인의 칭찬을 받는 이가 된다. 

회사를 맡은 CEO의 책임과 능력은 무엇인가? 적자 재정 구조를 흑자 재정 구조로 바꾸어 놓는데 있다. 남기는 결산을 하면 계속 연봉이 올라가고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남기는 결산을 하지 못하면 책망 받고 쫓겨나게 된다. 요즈음 미국의 애플이라는 회사는 아이폰이라는 핸드폰으로 유명하다. 

이 애플 회사는 1996년도에 수 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던 회사였다. 이것을 흑자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CEO를 영입하였다. 그러나 그 새로운 CEO는 2~7월 사이에 8억 8천 4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하였다. 새로운 CEO는 해고되었으나 그에게 지급된 임금이 930만 달러였다고 한다. 

왜 이렇게 큰 돈을 지급했는가? 장사 밑천을 가지고 더 많이 남기게 하려고 더 많은 이익을 내게 하려고 10억 이상의 돈을 경비로 쓴 것이다. 이익 창출이 이만큼 중요한 것이다. 결국 애플은 아이폰으로 성공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장사꾼은 맡긴 것을 가지고 남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사업가이다.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고 세워서 또 다시 복음의 사업가가 되게 하는데 있다. 무조건 교회는 남겨야 한다. 남기는 결산을 해야 칭찬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된다. 어느 교회는 가정마다 만원을 맡기고 추수감사절에 가져오게 하였다. 잊어버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남겨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가 통장에 물질을 남겨두라는 뜻이 아니다. 사명을 바로 알고 사명을 쫓아 일하며 사명을 다한 결과를 하나님 앞에 보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라고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3. 므나의 가치보다 더 좋은 상을 받으며 칭찬을 받는다. (눅19:17)

눅19:17에서 주인이 말씀하신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눅19:19에서도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여기서 주인이 베푸시는 상은 내가 이루어놓은 삶의 열매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주신다. 므나 은화의 가치와 비교가 안되는 것으로, 므나의 가치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준비되어 칭찬을 받게 하신다. 주인이 주시는 상과 칭찬의 초점은 작은 것에 소홀이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본다.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인이 맡기고 부탁하신 말씀에 대해 작은 일일지라도 순종하고 책임을 다할 때 내가 이루어놓은 일보다 비교가 안되는 훨씬 더 좋은 상을 허락하신다. 열 므나 남겼다고 열 고을을 치리하는 이로 세우신다. 이 상급은 사람의 계산법과는 아주 다른 특별한 계산법인 것이다.

주님이 나를 칭찬하는 방법은 계산할 수 없는 상을 주시는 것으로 하신다. 주님은 구체적이시다. 감동적이시다. 풍성하시다. 내가 이루어놓은 결과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므나의 가치와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칭찬하신다. 훨씬 더 좋은 상으로 충성된 자를 칭찬하신다. 

우리 모든 주님의 종된 그리스도인들은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온다. 계산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맡긴 일이 무엇이 있었느냐고 핑계하지 말라. 책망 받은 한 종처럼 주님을 오해하지 말라. 가만히 있으면 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말하지 말라. 주인이 되신 주님은 보자기에 모든 것을 싸두는 인생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하는 소극주의, 두려움 때문에 시작도 하지 못하는 소심주의, 땀 흘리지 않고 거두어 들이려는 한탕주의를 주님은 책망하신다. 

주님은 가만히 있는 자들에게 야단치신다. 내가 열 므나를 가져다 은행에 맡기고 원금과 이자라도 더불어 찾아 조금이라도 남기는 일을 하라고 선언하신다. 심판이 가까이 오고 종말이 가까이 오고 주의 재림이 가까이 올 때 더욱 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책망을 받는다. 맡겨진 일, 맡겨진 사명을 바로 깨달아 최선을 다해 남기며 작은 일에 충성하여서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상 주시는 칭찬을 받아야 한다. 

므나는 작은 은전이다. 
달란트는 큰 중량의 금화다. 
므나 비유는 보잘 것 없는 것, 사소한 것,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맡은 자라면 그것이 소중한 줄 알고 일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이런 작고 작은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 내게 맡기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작고 작은 므나만한 일을 가지고 칭찬 받고 책망 받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a.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심(막4:34)
b.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고전4:2)

2) 귀인이 왕위를 가지고 돌아옴
귀인이 왕이 되려고 먼 나라로 갔을 때에 백성은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에 보내어 자신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이 도모하는 일들이란 언제나 악하고 합당하지 못한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그 마음의 모든 계획들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귀인을 미워한 것과는 달리 귀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a.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함(요7:7)
b. 충성된 자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함(잠25:13)

3) 상급과 형벌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 그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에게 귀인은 칭찬과 함께 열 고을과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종은 주인의 엄한 것을 무서워하여 맡겨 준 한 므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두었다가 주인에게로 도로 가져 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단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한 므나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 됨을 거절한 자들을 끌어다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a. 정직으로 판단하심(시9:8)
b. 열매 맺는 백성이 천국을 차지함(마21:43)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중년 미국 여성분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 형제가 동네 한구석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지역의 유력한 저명인사가 말을 타고 그곳을 산책하다가 하필이면 아들 형제의 죽창이 저명인사가 타고 있던 말의 눈을 찔러, 놀란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말과 저명인사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었다.

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 말의 가격도 자그마치 천만 불이 넘는, 세계에서 몇 마리밖에 없는 엄청나게 비싼 말이었다.

두 아들이 재판을 받게 된다.
판사가 형제 둘에게 누구의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느냐고 묻는다.
두 형제는 서로 자기가 휘두른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했다.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청했다 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판결을 내릴 수 없는 판사가 마음씨 아름답고 형제 우애가 남다른 그 형제의 어머니를 재판정에 불러 세우고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인, 한 아들만 사형에 처하면 되는데, 형제가 서로 자기 죽창에 말의 눈이 찔렸다고 주장하니 부인이 한 아들을 정하도록 하시오!”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기도가 끝난 부인이 하는 말, “작은 아들을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판사가 “왜 작은 아들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부인이 이렇게 말한다.

“판사님, 큰 아들은 전처의 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제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말한다.
“아니, 부인!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한 법인데, 그 아들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이 답한다.
“판사님, 옳을 말씀입니다.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자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제가 큰 아들을 죽게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숙연해지고 재판정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순간 방청객들은 물론, 부인의 말에 감동받은 판사는 힘을 주어 근엄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부인! 지금까지 30년 넘게 재판을 하면서 오늘과 같이 감동 받기는 처음입니다.”
두 아들도 또 그 어머니도 미국 사회를 아름답게 선도할 모범적 가족이라고 판단한 판사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힘주어 판결문을 낭독한다.

“내가 판사의 권한으로 두 아들을 무죄로 석방한다.”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위에 소개한 미국과 과거 이북에서 일어난 두 사건은 마치 쌍둥이 예화처럼 거의 흡사한 내용이다. 어쩜 이리도 거의 똑같은 스토리일 수가 있는지, 하필이면 그 예화들이 모두 내 눈에 띄게 될 수 있는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더러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실망도 말고 절망도 말고 끝까지 인내로 기다리면서 선을 행하고 겸손을 보이고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두 가정이 경험한 것과 흡사한 기적의 결과를 우리도 맛볼 수 있을 줄 믿는다.
우리 모두도 이런 주인공들로 널리 널리 회자되었으면 좋겠다.

03-16-2024(토) 누가복음 19:1-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보시옵소서(누가복음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But Zacchaeus stood up and said to the Lord, "Look, Lord! Here and now I give half of my possessions to the poor, and if I have cheated anybody out of anything, I will pay back four times the amount."

"삭개오(Zacchaeus)"라는 이름은 "순결" 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아주 사악한 인간으로 취급되어 유대인들이 증오하던 대상이었습니다.
사회 통념으로는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행동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통념으로는 여전히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 통념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증오하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다는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討索. 칠 토, 찾을 색. 금품을 억지로 달라고 함)한 것이 있다면 사배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삭개오가 사악(邪惡. 간사할 사, 악할 악. 도리에 어긋나고 악독함)한 사람이었다면 자기의 소유를 절반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나눠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해서는 사배로 갚겠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사회 통념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외면하며 비웃는 대상을 찾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할 수 있는 만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만남에 의해서 한 사람을 돌이킬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사역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덕과 윤리와 법에 의해서 저촉(抵觸. 막을 저, 닿을 촉. 서로 부딪치거나 모순 됨)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사회 통념상 사악한 존재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모신 후에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 흩어져야 할 작은 예수라고 합니다.
작은 예수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면 세상은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까닭은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삶을 보여주지 못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이 땅에 수많은 성도들이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대합니다.
기대가 없는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비록 그 기대가 무너질지라도 또 다시 기대를 갖고 새 날이 열려질 것을 확신하며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 주의 나라와







사회통념
이란 사회 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건전한 상식, 또는 견해를 뜻하는데 사회통념에 대한 인정범위는 일반적인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통념의 함정

아이들과의 대화는 늘 초심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얼마 전 어느 중학교 진로교육 강연회에서 판사라는 직업과 법원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늘 빠지지 않는 질문이 ‘판사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정도인데, 그날은 뜻밖에 아무도 이를 묻지 않아서 준비해 둔 대답을 못하고 머쓱해 있었던 순간, 어떤 아이가 손을 들고 “판사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인생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판결을 하는데, 판사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다 잘 알고 있나요?
공부를 많이 하면 다 알게 되나요?”라고 물었다.

필자는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독서에 관한 동기 부여도 해줄 겸 해서 좋은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한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판단을 할 때 그 사람의 처지나 환경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고, 판사들이 모든 사회 현상과 직업을 경험해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많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질문을 먼저 받고 보니 간접경험을 위한 독서만으로는 그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판결문을 포함해서 법조인들은 법률서면에 ‘사회통념’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사회통념에 비추어 볼 때…', '사회통념에 부합한다', '사회통념에 어긋난다'는 등으로 말이다.
사회통념이란 '사회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공통된 사고방식' 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관념' 정도로 정의된다.
이웃 간에 수인한도를 정할 때와 같이 사회통념 자체가 규범적인 기준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판결문 등 법률서면에서는 대부분 어떤 결론이나 주장의 합리성 내지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이 되는데, 그것이 왜 사회통념인지에 대한 논증은 많이들 생략한다.
서면상의 논증은 생략했더라도, 단순한 나의 직관을 사회통념으로 격상시킨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든 사회통념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면 다시 한 번 주변과 사람을 세심하게 살펴야겠다.

삭개오(Zacchaeus) : 순결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덕과 윤리와 법에 의해서 저촉(抵觸. 막을 저, 닿을 촉. 서로 부딪치거나 모순 됨)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사회 통념상 사악한 존재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내가 삭개오와 관계를 갖고 지내면서 삭개오를 알게 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모신 후에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이런 삭개오를 생각하면 삭개오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통념이었을 뿐입니다. 

호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나다니엘 레첸메이어(Nathaniel Lachenmeyer)가 지은 ‘부러진 부리’라는 꼬마 참새 이야기입니다.

공원 나무에서 살면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참새가 어느 날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불행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참새들 세계에서도 왕따를 당하여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지 못해 야위고 씻지도 못해 지저분한 그를 동료들은 더러운 새로 취급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빵을 먹이는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던 노숙자 아저씨였습니다.
“너와 난 같은 처지인 모양이지”하고 웃으면서 그가 내미는 빵을 먹으며 오랜만에 참새는 행복을 느낍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을 만듭니다.
아저씨는 공원의 벤치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립니다.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덥수룩한 머리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아저씨가 꼬마 참새의 깃털을 쓸어주며 “안녕, 잘 자야해, 내일을 위하여”하고 속삭입니다.
꼬마 참새도 부드럽지만 힘차게 ‘짹’하고 대답합니다.
그날 밤 아저씨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다시 반듯해지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간추려 볼까요?
참새가 부리가 부러져서 기형이 되었습니다.
참새들 사이에 왕따를 당합니다.
그런데 노숙자 아저씨의 눈에 이 참새가 띄었습니다.
아마도 참새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참새에게 빵을 건네줍니다.
참새는 오랜만에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받아먹은 셈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참새는 아저씨의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잠이 듭니다.
함께 꿈을 꾸었는데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나아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자마자 이 이야기에 혹 빠졌습니다.
무조건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에 그렇게 쉽게 빠졌나 차분히 생각하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러진 부리’가 제목인데 부러진 부리의 참새의 모습에 저는 쉽게 동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동화되었겠습니까?
부러진 부리의 아픔을 저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글을 한국의 이동원 목사님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라는 책에서 접해 보았는데 이 목사님은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 바로 공동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곧 참 공동체는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라고 밝히시고 계신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동안 삶을 사시면서 부러진 부리의 경험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번 이상 기형이 되는 경험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들의 부리는 멀쩡한데 나의 부리만 부러지는 경험을 한번이상 다 하셨을 줄 압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남들 사이에 낄수 없는 고통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톨스토이도 아주 꼭 맞는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가정을 개인으로 바꾸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 같이 같다.
하지만 불행한 개인들의 불행은 제각기 다르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하나 같이 같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 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만 부러진 부리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처럼 부리가 부러진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는 모두가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
모양은 다 다르지만 부러진 것은 같으니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도리어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다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많은 문제를 도리어 어떻게 축복으로 바꿀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고 계셨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보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삭개오는 자기 키로는 도저히 볼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부자이지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다고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군가가 삭개오가 앞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삭개오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 아주 신기하게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부자이며 키가 작은 세리장이 뛰어 가니 모두 재미있게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저 삭개오 세리장이 어디를 저렇게 열심히 뛰어 가지.” 그런데 뛰는 것보다 더 웃기는 장면이 벌어집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뽕나무는 아이들이 올라가는 데입니다. 삭개오는 아이들에게 그 자리마저 빼앗길까 봐 열심히 뛰어가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들 킥킥거리며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소리내어 킥킥 거릴 수가 없습니다. 잘못해서 걸리면 다음번에 세금을 왕창 내야할지 모르니깐, 조심조심하며 조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삭개오보다 더 중요한 분은 예수입니다. 잠시 킥킥거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아무리 키가 작아도 그렇지 뽕나무에 올라갈 정도라면 키 말고도 다른 문제가 섞여 있을 줄 압니다. 키가 작으면 제일 앞에 나가서면 됩니다. 제일 앞에 나가서면 뒤의 사람들에게 전혀 방해가 안 됩니다. 키가 큰 사람들에게는 삭개오가 있으나 마나 입니다. 키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세리 중에 세리입니다. 곧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죄인들과 옷만 스쳐도 죄가 옮겨 온다고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삭개오만 나타나면 이들은 자리를 피합니다. 줄행랑을 칩니다. 왜냐하면 죄가 옮을 가봐. 삭개오는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자기가 앞에 나가서면 사람들이 다 피할 것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자기를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아예 삭개오는 뽕나무로 올라 간 것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나타나길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또다시 비통해 여깁니다. 아마 삭개오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가 뽕나무로 뛰어 오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자기를 쉬쉬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뽕나무에 올라가 있습니다. 심한 외로움을 느낍니다.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실시한 사회학적 실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이 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학교에 초대하였습니다.
아주 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였습니다.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초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행사도 행해지지 않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은 온데 간데 사라졌습니다.
수백 명의 주민들만 남아 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광고도 없습니다.
방문객들은 막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슬 방문객들은 군중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점점 자기들을 위한 아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두 그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두 다른 의견의 그룹이 생깁니다.
잠시 후에는 두 그룹의 대변인이 생깁니다.
논쟁은 싸움으로 변해 갑니다.
드디어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발전할 즈음이 되었습니다.
이 때 교수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회학적 실험이었다고….

이 실험을 통하여 심리학 교수들은 다시금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재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의 이중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곧 자신의 문제는 다양한 관점에서 봅니다. 자신의 문제를 생각할 때는 모두 부러진 부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의 부리를 생각할 때는 달라집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중구조로 봅니다. 이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매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순인 것 같습니다. 나의 문제는 세상에서 유일한 문제입니다. 남의 문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흑 아니면 백.

교우 여러분,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모두 부리가 부러진 면에는 같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다릅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죠? 서로 다른 면을 인정하며 포용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우리는 이웃을 볼 때는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의 이중구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대하는 사람들도 이중적 판단 구조로 삭개오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삭개오는 검은 색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많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독특한 부러진 부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도 부리가 부러져 있으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삭개오를 나쁜 사람으로 손가락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러진 부리를 가진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보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 하나 자기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검은 색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눈총뿐입니다.
이 때 드디어 그렇게도 보고 싶던 예수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삭개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치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뽕나무 위에 있으니 자기에게까지 쫓아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소리치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점점 가까이 오시고 계십니다. 자기가 있는 뽕나무 근처까지 오셨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고 무의식중에 몸을 가다듬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회개하라” 소리치실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욱 몸을 숨깁니다. 순간 예수님이 뽕나무 밑에 까지 오셨습니다. 몸은 얼어붙는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도 검정색과 나쁜 것의 대명사로 살아오면서 많이 기가 죽어 있는데 이제는 예수라는 사람에게까지 검정색이니 나쁜 것이니 불리게 되는 시간이 닥아 옴을 느낍니다. 그런데 순간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가 들립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귀를 의심합니다. 아니 삭개오만 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귀를 의심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그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해왔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토록 가까이 하길 원하시는 예수라는 분이 자기를 찾아 오셨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주님을 모셨습니다. 삭개오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무리는 어쩔 수 없는 무리입니다. 무리는 검던가 희던가 둘 중에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부러진 부리의 모양은 다 다르면서도…. 삭개오를 왕따시켰던 무리는 이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 볼 줄 모르는 무리는 금방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굳어집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곧 예수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삭개오와 즐거운 시간을 나눕니다. 삭개오와 웃고 놀고 별 장난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밥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키가 작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삭개오에게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와 같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개의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부르던 자가 자기 집에 함께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이미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삭개오는 난생처음 자기 편을 만납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이것이 삶이로구나를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갑자기 일어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진정으로 회개하였고 진정으로 구원이 그 집에 임한 것을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부자가 재산 반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수입이 많아질수록 십일조가 어렵다는 말들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부자였습니다. 얼마큼 큰 부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 곧 부정한 방법으로 빼앗은 경우는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22:1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삭개오가 공연히 4배를 갚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하면 최소한 4배는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하고 있지 못하던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제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시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고백을 들으셨을 때 주님은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할 때 그것도 삭개오처럼 구체적으로 고백할 때 주님은 이처럼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를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한 시작은 무엇이었나요?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였나요? 한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 그것도 구체적으로 결단하게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자 삭개오가 그러한 결단을 하였습니다. 협박을 통해서 이루어졌나요?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III)’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시리즈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소개하는 장면과 두 주전 본문 말씀 곧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많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장면과 연관해서 잠시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삭개오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은 흔들린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는 싶었는데 살려고 할 때마다 왕따를 당하는 경험을 합니다. 왕따를 당하면 포기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이러기를 수십 년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거의 포기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순간 삭개오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살아 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꼼짝 못하도록 도장을 찍으신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워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무엇이었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이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삭개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유는 우리도 언젠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동생 아무개야…”

테오도르 댈림플(Theodore Dalrymple)이라는 영국의 정신과의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감옥소에서 죄수들을 상담하며 치료하는 의사인데, 놀라운 사실을 보고합니다.
죄수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 죄인 줄은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죄수들이 자기들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드는데, 한 죄수는 교회의 기물을 늘 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훔치느냐고 물으면 교회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왜 교회당 관리를 소홀히 해서 자기로 하여금 훔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관리를 잘하면 자기 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더 소개할까요?
이 사람은 비디오등 전기제품들을 잘 훔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자기가 훔치는 이유는 의사들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빨리 좋은 약을 개발하여 자신의 도벽을 없애지 못하기에 자신이 자꾸 훔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죄를 계속 짖고 있을까요?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흑과 백의 관점에서 선인과 악인의 이중적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삭개오도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따시킵니다.
그러니 토색하는 것은 자신을 왕따를 시키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자신의 토색을 합리화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신비입니다.
죄인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잘 압니다.
그러나 죄는 반복되어 짓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합리화합니다.
바로 우리도 죄의 신비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 죄의 신비, 죄인의 신비 -  나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불륜)
죄는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크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삭개오는 평소에 사람들이 외면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뒤집어 졌습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있구나!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4배로 갚아주어야 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사순절의 시기에 삭개오와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視覺. 볼 시, 깨달을 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2-21-2024(수) 누가복음 14:7-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석에 앉으라(누가복음 14: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But when you are invited, take the lowest place, so that when your host comes, he will say to you, 'Friend, move up to a better place.' Then you will be honored in the presence of all your fellow guests.

상석(上席. the highest place)과 말석(末席. the lowest place)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다면 어느 자리에 앉기를 원할까요?
아마 모두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대한 비유의 핵심은 혼인 만찬에서 먼저 높은 자리에 앉으면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 자리를 내주면서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면 초청한 주인이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고 할 때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왕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잠언 25:6-7).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안식일에 고창병에 고생하던 사람을 고쳐주신 것에 대해서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은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관심을 갖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망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손님들이 앞을 다투어 높은 자리를 잡는 것을 보셨습니다.
저들은 누가 더 높고 중요한가를 자리를 통해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보려는 사람들의 가식적이고 과시적인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그들의 허위의식을 깨우치셨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손님으로 초대 받았을 때 안내자가 인도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판단하여 높은 자리에 먼저 앉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지체가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어주고 끝자리에 앉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먼저 끝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주인이 그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부르면서 다가와 더 높은 자리로 안내를 해 주어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높은 자리와 끝자리를 대조하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비유라고 하겠습니다(눅 13:30).

신앙이란 항상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들도 나를 낮추고 또 낮추므로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겸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11절에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지만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 질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잠언 29:23, 겔 21:26, 눅 18:14, 마 23:12, 약 4:6,10,벧전 5:5-6).
이 교훈은 신랑 메시아의 결혼 만찬에 초대받은 자들과 신자들 모두를 위한 말씀이다.
제자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자신이 가장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나를 드러내고자 상좌에 앉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늘 낮은 자세, 겸손한 자세로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는 다는 사실을 늘 헤아려서 낮은 자리 말석에 앉는 낮은 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2-20-2024(화) 누가복음 1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창병 든 사람(누가복음 14: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There in front of him was a man suffering from dropsy.

고창병(蠱脹病)

고창병(5203) 휘드로피코스( hüdrōpikŏs)  ὑδρωπ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5203

1. 수종 걸린.  2. 수종으로 앓는. 3. 눅 14:2.
발음 [ hüdrōpikŏs ]
어원 / 5204와 3700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수종(水腫) 걸린, 수종으로 앓는, 눅 14:2.

* 5204

ὕδωρ,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5204
1. 물.  2. 마 3:16. 3. 막 1:10
발음 [ hüdōr ]
어원  /  5205의 어간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물, 마 3:16, 막 1:10, 눅 7:44, 요 4:7.



* 3700.  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행 1:3.
발음 [ ŏptanŏmai ]

뜻풀이부

1. 나타나다, 보여지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행 1:3.

* 수종(水腫) : 물 수, 종기 종 
1. (신장성(腎臟性)ㆍ심장성(心臟性)ㆍ영양(營養) 장해성(障害性) 등(等)에 의(依)하여)몸이 조직(組織) 간격(間隔)이나 체강(體腔) 안에 임파약ㆍ장액(漿液)이 많이 괴어 몸이 붓는 병(病). 물종기.
2. 부증(浮症).


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 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도르'(*)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 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 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미쉬나, shabbat 7:2).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일.

이러한 금지 사항들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으며, 반대로 우상숭배자라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그 죄를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탈무드, shabbat 118b).
이밖에 더 자세한규정들에 대해서는 미쉬나의\"안식일\"(shabbat)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엣세네파들은 안식일을 바리새인이나 보통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다. \"다마스커스계약\"(Covenant of Damascus) 은 자세하게 안식일에 지켜야 할규정들에 대해서 기록하고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다(당시의 랍비들은1Km까지는 허용하고 있었다. 참조.행 1: 12).
엣세네파들은 마실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았고, 그들 가까이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엣세네 종파는 다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겨도 되도록 허락하였다.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겼을 때에는 7년동안 가두도록 규정하였다.
위에서 언급 한대로,안식일을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금지사항들은 범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용납되었다(미쉬나, Yoma 8: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던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마 12:9-14, 막 3:1-6, 눅 6:6-8).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었다. 다만 그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아니면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는그를 치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예수의 경우에는 환자(손 마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날까지기다렸다 치료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심으로 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랍비 유다(Judah the Prince) 와 메이어(Meir)는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양을 꺼내 주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하물며\"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하셨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려 구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다든지 아니면 그 동물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매트레스 같은 것을 그 구덩이에 넣어 주도록 했다.
예수께서는 또한 안식일에 18년동안 귀신에 잡혀 있던 여자를 고쳐 주셨다(눅13: 10-17).
이에 대해 회당장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꼭 고쳐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비난하였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된 것은 안식일에 응급 환자가 아닌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데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끌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박하셨다(15-16 절).
이러한 예수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되기도 한다).
"소는 매일마다 물을 주어야 하며, 이는 안식일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일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아니하면, 그 소는 큰고통을 당할 것이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랍비들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년동안 류머티스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전형적인 성서 해석 방법인 kal va-homer ("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을 사용하셨다).
즉 동물도안식일에 풀어 주는데 \"하물며\"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기초해서
예수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셨던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셨을 때에도 예수는 똑같은논리를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한편, 예수께서도 말씀하신것처럼 미쉬나와 탈무드는 안식일에 어떻게 동물들을 돌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요 5:12).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금지 사항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을 어겼다고 그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편,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까서 먹은 것때문에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기도 했다(마 12:1-8; 막 2:24-28, 눅 6:1-5).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임과 동시에 그것을 까부는 일로 비쳤다. 이러한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범하지않았다. 다만 제자들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을 내버려 둔 것에 대하여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금지된 거룩한 떡을 먹은 것(삼상 21:1-6)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떡을 먹었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율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토라(율법서)에서는 그러한 명백한 규정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예수의 이 말씀을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선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랍비들도 이렇게 가르쳤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Mekilta Exodus 31:13, 14; 탈무드, Yoma 85b).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시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나에게 분개하느냐?\"(요 7:23).
이러한 규정도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전통)가운데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잘 알려진 랍비들의 결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법을 따라서 아이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할례 받는 날이 안식일이 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주도록 랍비들은 결정을 했다.
안식일에 할례받는 것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할례를 주기 위해 할례에 사용될 도구를 운반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위에서 본대로 금지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 사항으로 허락을 했던 것이다(미쉬나, Shabbat 19:1).
그러나 아이의 건강 때문에 8일째에 할례를 받을 수 없을 경우는 아이가 회복된 다음에 받도록 했다(미쉬나, shabbat 19:5).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할례도 베풀거늘“하물며”사람의 전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고 반박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보편적인 해석 방법이었던 kal va-homer(\"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를사용하셔서 토라와 구전법을 해석하셨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규정을 부정하거나 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한번도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신 적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구전법)에 근거해서 자신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이 그들의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주셨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고창병(蠱脹病. dropsy)"이라고 하지만 새번역 성경에서는 "수종병(水腫病. dropsy)" 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휘드로피코스(hüdrōpikŏs. ὑδρωπικός)" 라고 합니다.
'고창병'이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질병이라고 하여 새번역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수종병'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병은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혈액 속으로 흘러야 할 물이 혈액 밖으로 나와서 몸이 붓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죄인들을 가리켜 영적 병자로 비유합니다.
따라서 '고창병'은 영적으로 어떤 병적인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창병'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왜 생명의 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병을 윱ㄹ하고 그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거나 더 악화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물인 말씀을 율법으로 읽고 적용하여 얻게 되는 병을 말합니다.
그 좋은 예가 "안식일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인들이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은 후에 거듭난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토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법으로 이해하고 행하므로 생명이 되어야 할 말씀이 오히려 죄인들을 고창병 또는 수종병에 걸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문제로 자주 부딪혔던 것입니다.
그만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문제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경 안에서 이렇게 생명과 같이 여기는 법이 왜 없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처럼 간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마치 율법적으로 인식하고 지킨다면 그것은 곧 고창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킨다면 율법의 범위를 벗어나 더 큰 긍휼과 자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한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더 높고 깊고 넓게 이해하고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명령대로, 그 율법대로 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단지 법을 지키는 행위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곧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말씀(물)에 의하여 고창병이 든 것이 아닐까요?

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며 고창병에서 자유롭게 되어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는 은혜로운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우리의 고창병, 참 예수를 만나서 안식일에 고침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치유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먼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떤 질병으로, 어떤  정도로 아픈 환자이든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마침내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셨기 때문에 병자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 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수종병(Dropsy)은 다른 말로 고창병이라고도 합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그러니 수종병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의 마음은 어떠했겠는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류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문제가 생기고, 그 증상이 만연하며, 복수가 차면서 몸이 퉁퉁 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심하십니다.

치유를 받아 생명의 연장을 보장받고, 건강하고 힘차게 사시며, 마음속에 기쁨과 희망과 행복이 넘쳐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서 치료와 회복과 쉼의 은총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항상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고창병든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이지만 실은 이 환자와의 관계성 보다는 예 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관계성에 더 집중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고창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셨기도 하시겠지만 주님은 이 환자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이 환자를 이용해서 바리새인들을 교육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에 들어가셨다.

1. 예수님과 바리새인?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 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눅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눅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 는가 엿보니”

눅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는 눈?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23:13 “화 있을진저 !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 이 먹는다' 하더라”

2.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시고 주님은 오늘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들어가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때에도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다)

①언제? 안식일에

②무엇을 하시려? 잡수시려

③어디에? 두령의 집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고, 안식일에 일하는 자라고 비판하는 그 잘 에 주님은 바리새인의 집에들어 가신다.

주님을 죽일려고 하는 그 바리새인들의 두목의 집에 들어 가신다.

왜 주님이 그 집에 들어 가시는가?

진정으로 배가 고파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이 좋아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의 꼬임에 바졌는가?
주님은 배고픔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좋아서도 아니고, 꼬임에 빠진 것도 아니다.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가?
생명이(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상좌의 어리석음이 어떤 것인가?
가난한 자들을 돌아 보아야 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

3.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이들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도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초청을 하고 초청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환대와 인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엿보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심성과 괴략을 엿보고 계셨다.

주님은 엿보아야 될 분이 아니다.
고백하고 그 분앞에 엎드려야 한다.
교회는 엿보는 데가 아니다.
목사는 엿보아서 될 사람이 아니다.
설교는 엿보아 들어서는 안된다.
평생가도 은혜 한번 받지를 못할 것이다.

4. 고창병 든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 ⇨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 가는 병.
당시에는 이 병이 하나님의 저주로 생기는 불치병으로 인식했다.

5. 예수님의 질문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①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의 엿봄을 지적하는 것이다.
② 이 질문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잠히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지를 않는 다는 것 을 그들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의 치유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이 환자의 치유는 이 환자의 믿음이나 고백이나, 간구가 없었고 주님의 필요에 의해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

Ⅱ. 예수님의 가르치심

1. 율법과 생명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 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에 우선을 두고 계신다.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생명 사랑, 생명 구원

2. 상좌에 앉은 사람들

「청함 받은 사람들의 상좌택함을 보시고...」
진정으로 상좌에 앉아야 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주님이 상좌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들은 주님을 모르기에 주님 앞에서도 자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자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3.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자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14절)


인트로(Intro, 소개)

어느 안식일날에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인 지도자들 중에 어떤 한 바리새인 집을 방문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 앞에는 수종병이라는 병을 앓으며 고생하고 있는 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등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켜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라도 귀신들려 18년 동안 중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 주신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번에도 예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면 그것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흠내고자 해서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진 생각을 아시고는 수종병을 앓는 자를 바라보시며 바리새인과 율법선생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대답해 보아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이 물으심에 그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수종병을 앓고 있는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는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묵묵부답으로 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너희 아들이나 집에서 키우는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고 해서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안식일이라도 당장에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 말씀에 그 누구도 이러쿵 저러쿵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고창병(Dropsy. 드랍시)

본문에 수종병이 나옵니다.
수종병(水腫病, dropsy) 옛날 성경에는 고창병이라 기억하는데, 헬라어는 "휘드로피코스" (물이라는 '휘도르'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고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수종병이 고창병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개역개정이나 한글성경에 수정이 되어서 지금은 수종병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사실 옛날에 쓰여진 고창병은 잘못된 표현이어서 지금은 수정한 것입니다.
사실 고창병이라는 말은 동물들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에 생기는 병이기에 동물에게 나타나는 병입니다.
그리고 고창병이 생기는 원인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삼킨 거친 풀· 나뭇잎· 열매들이 첫째위에서 다시 입으로 뱉어져 되새김을 하지 않고 막바로 4째위까지 통과하여 장으로 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전혀 되새김으로 씹히지 않은 음식물이 장에 오면 소화 장애로 부패되었기에 수분도 흡수가 안되어서 배만 맹꽁이배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게 되고 소가 한 번 이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라 합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위험한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자에 물이차서 북처럼 부풀어 생기는 병이라 해서 고창(鼓脹)병이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휘드로피코스 즉 물과 관련된 그리고 물이 차서 생긴 병이기에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창병으로 쓰였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물의 병과는 좀 다르기에 현재 수종병이라고 수정한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Dropsy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물이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는 대략 70%정도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의 60%가 물이라고 합니다.
물이 없으면 죽고맙니다.
날마다 물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수액을 통해서 온몸에 영양분들이 전달이 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이란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유지해 주는 아주 소중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물도 과하면 수종병처럼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뭐든지 과하면 안좋은것 같습니다.
적당함이 참 좋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물(事物)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도리어 안한 것만 못함이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분명히 물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3일만 물의 공급이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 전체에 문제가 생기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심지어 생명에도 지장을 초래 한다고 합니다.
부족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또 많이 넘치면 그것 역시 우리의 몸을 위험한 상태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은 우리에게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나치면 도리어 해가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에서 오는 것도 문제이지만 넘쳐서 오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물과 말씀

말씀 또한 물과 같은 것은 아닐까?
말씀 또한 언제나 필요한 물처럼 영적으로 생각을 해 볼때 날마다 반드시 필요한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매일같이 말씀이 없다면, 물이 부족하면 목마름이 오는 갈증처럼 우리의 심령의 갈급함이 생기고 급기야는 몸에 심각한 일이 벌어지듯이 말씀도 부족하면 우리의 영혼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바로 넘치면 오히려 안좋다는 그 말!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물이 우리를 해할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수종병…물과 관계된 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하필 물에 의해 피패된 몸을 치유하셨을까요?
그리고 그것도 안식일에 바리새인들 앞에서 말이죠?

물과 말씀을 같이 생각해 봤습니다.
물은 우리의 육신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말씀은 우리의 영이 숨쉬고 살아가는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수종병…딱 맞는 비유인것 같아요. 그것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장 많이 알고 말씀을 넘치게 알고 있는 그 바라새인들 앞에서 물이 넘쳐나서 수종병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는 치유의 목적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대로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생명 살리는 일이 가장 큰 일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높은 뜻을 가진 율법이라고 해도 안식일이라 하여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인 것입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은 하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수종병이 걸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독이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의 말씀은 정말 소중하고 귀한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오히려 생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씀이 아닌것입니다.
생명인 말씀을 그저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것만을 따르게 된다면 수종병에 걸리듯이 우리의 영혼도 수종병에 걸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런 영적 수종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이고 깨우치기를 원하셔서 수종병에 걸린자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귀한 말씀을 생명력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의 말씀을 알지만 온전한 이해가 되지 않고 그저 아는것만으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을 먹는것일까요?
혹시 이런 일들을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날 처음으로 성경의 내적인(영적) 비밀들을 접하면 너무도 기뻐서 놀라움에 젖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게 됩니다.
날마다 숨겨진 비밀들을 알아내느라고 다른 일은 뒷전이 되고 심지어는 집에 있는 아이들 밥 챙겨주는 일도 마다하고 이런 저런 모임에 열심을 냅니다. 일주일 내내 듣고 듣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유튜브라든 수많은 각종 SNS을 통해 많은 말씀들을 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여기서 알아진 지식을 남에게 전달하느라고 또 여념이 없습니다. 이모임 저모임에서 자랑하듯이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보면 참 은혜가 넘치는 일인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하기도 합니다. 소위 하나님과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여, 주구장창 말씀은 추구하나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 실제가 없는 공허한 이론일 뿐인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머리로만 알고 나의 영은 점점 수종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육신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친히 낮고 천한 피조물로 내려와서 인생을 체휼한 수난의 과정이 있어야 실제가 되었듯이, 영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역동되어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가 있어야 그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자신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며 부활의 삶으로 사는 것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지식은 그저 이론일 뿐이고 그저 떠있는 관념뿐인 것입니다. 역동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처럼 자신은 지식의 허영 속에서 높은 구원을 성취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비춰지는 실재의 모습은 생명이 없는 그저 곧 썩어 죽을 그런 뿌리없는 생명을 잃은 나무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에 제가 고창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종병의 옛날 말입니다. 같은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들에게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서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이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은 곧 묵상이라도 해도 될것 같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영적인 고창병 즉 수종병이 걸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되새김질하는 동물들처럼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내서 그 말씀을 곰곰이 되씹어야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가 풀만 먹어도 골수가 가득 찬 단단하고 굵은 뼈를 만들어내고, 영양이 풍부한 젖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되새김질에 비밀이 있습니다.
되새김질은 소화 흡수를 완벽하게 돕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억새풀이라 할지라도 다 분해시켜 버려 몸에 풍부한 영양을 공급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되새김질의 말씀묵상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뼈와 같은 견고한 믿음으로 형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게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는것을 봅니다.
이곳 저곳에서 온갖 미디어를 통해 마구잡이로 말씀을 먹습니다.
토할때 까지 먹고 또 먹습니다.
탈이 납니다.
바로 고창병 수종병이 생기고 맙니다.
묵상이 없이 마구 먹어대서 배에 복수가 차는 무서운 병인 복수 수종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계속되면 온갖 성인병 증세로 시달릴 것입니다. 암은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이라던가요? 그래서 암(癌)이라는 한자에 보면 입구자가 세 개나 들어 있습니다. 영적인 암은 많이 안다는 교만의 도도함과, 다른 이를 정죄하는 증세로 나타납니다. 쉽게 치료되지 않기에 아주 치명적입니다.
많이 듣고서 소화만 잘 시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완전 금상첨화 이겠죠. 그러나 들은 만큼 실제가 안 된다면, 이것들이 쌓여 영적인 수종병인 교만을 초래하고 곧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때에 조심할 것은, 듣는 것이 모두 구원이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말 위험합니다. 들은 만큼 살아내지 못하면 모든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습관적 신앙생활을 없애시기를 바랍니다. 혹여 우리가 그런 습관적 신앙생활을 한다면 단번에 일소하고, 말씀 앞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이제 탈바꿈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야만 더이상 고창병에 걸려 생사를 오고가는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무조건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씹고 또 되씹고 묵상이라는 말씀의 되새김을 통해 살아서 생명력을 갖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신앙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실제가 있는 살아 숨쉬는 건강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길은 오직 말씀의 되새김인 묵상뿐입니다.

요한계시록 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작은 능력(지식적으로 작은)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결단코 배반치 아니함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승리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능력이 많아 보인다고 해서 건강하고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비록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새김하는 묵상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삶가운데 지켜내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충만한 삶이 되어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이제 더이상 고창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생하지 마시고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작은 능력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뇌이면서 되새기면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생명력 넘치는 말씀의 능력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이 실제의 능력이 넘치고 살아 숨쉬는 그럼 신앙인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며 기도해 봅니다.



2-19-2024(월) 누가복음 13:31-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삼일에는(누가복음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He replied, "Go tell that fox, 'I will drive out demons and heal people today and tomorrow, and on the third day I will reach my goal.'

예수님 당시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인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희생물이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됨으로 속죄의 제물로 드려졌다.

헤롯(헤롯 안티파스, 분봉 왕. 영주)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 추종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헤롯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다(32절).


유대 사회에서(1세기 시대) 여우는

아가 2:15 / 여우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귀찮은 존재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3-4월).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오는 이유는 들쥐를 잡으려고 들어오는데 들쥐가 포도향을 좋아하여 포도원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때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와 포도나무의 꽃을 떨어트려 열매를 얻지 못하게 한다.

헤롯의 야심은 유대인의 왕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추종하는 세력은 미리 제거하려고 하였다.

마태복음 8:20 / 여우는 하찮은 존재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느헤미야 4:15 / 여우는 성벽을 쌓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여우가 지나가도 무너지겠다.
너희들이 쌓는 성은.........
깃털처럼 가벼운 하찮은 존재

열매를 맺히기 전에 꽃을 떨어트리는 여우
성곽을 쌓기도 전에 허무는 여우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본문의 내용은 어떤 바리새인 사람들 예수님께 와서 '이 곳을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다가 사흘이 되면 일을 모두 마칠 것" 이라고 일러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계속 갈 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적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 집이 버림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다.' 할 때까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랍비 문헌에서는 '여우'를 간교함의 대명사라고 합니다.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예수님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한 교활함과 간사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삼일에는 완전하여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삼일은 상징적 의미로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하겠으며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씩 주저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주님의 분부하심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따라가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내가 지고

저 여우
- 여우는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서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온다.
예수께서 여기서 헤롯을 여우로 부르는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당신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 한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여우는 사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승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또 다른 의미는 그의 교활함과 간교함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며 예수께서는 결코 그의 협박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과 내일...제 삼 일
- 헤롯의 협박은,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임을 언명(言明)하고 있다.
난해 구절인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1. 문자적인 의미에서 삼일을 가리킨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은 일을 더하고 제3일에 헤롯의 관할 지역을 떠나가겠다는 의미로 본다(Bleek,Meyer).
2. 출 19:10-11에 배경을 둔다고 보아 준비와 정결 기간인 이틀이 지나고 사홀째 되는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3. 제 삼 일이 절정에 이르는 결정적인 시간을 뜻한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즉 '이틀'은 그 시간에 이르기 까지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Marshall).
4. 상징적 의미로 보아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Bengel, Farrar).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4의 견해가 유력하다.

완전하여지리라
-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 문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헤롯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완료하신다(Bleek,Bruce).
2.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완료하신다(Manson).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m, Farrar, Marshall, Gilmour).
이중 3의 견해가 유력하다.

완성하다, 완전하다. 텔레이오오(tĕlĕiŏō) τελειόω 스트롱번호 5048

1. 완성하다.  2. 완수하다. 3. 히 2:10
발음 [ tĕlĕiŏ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τελείωσα, 완료 τε- τελείωκα, 완료수동태 τετελείωμαι,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τελειώθην, 미래 수동태 τελειωθήσομαι, 5046에서 유래


성경에서 숫자 3의 의미는?

모든 종교에서 3이란 숫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에서 쓰는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심오한 관념을 보더라도 3이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체적 효과가 무엇이든지 삼중 반복 형식은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민속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대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은 대체로 세 명이 한조로 나온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거나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점술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을 때도 세 번 연속으로 같은 수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문화권에서 3이란 숫자는 행운의 숫자이자,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하는 수로 사용했다.

3은 일련의 사건들의 형태가 이뤄지는 데 필요한 최소 숫자이다.
어떤 사건이 한 번이나 두 번 발생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으로 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신호가 된다.

성경에서도 3이란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3이란 숫자는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그래서 숫자 3은 '하느님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하느님이 사제의 축복에 관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에서도 축복을 세 번에 걸쳐서 하라고 당부하신다(민수 6:22-27).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신다(마태 4:1-11).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도 3일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는 최종적 목적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또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발생한다면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완전히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관해 물어본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복은 그들의 거절이 매우 단호한 것임을 의미한다(누가 23:13-25).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예사로 돼 있다.
미사 때 참회예식에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세 번 반복하는데, 이는 잘못을 완전하게 참회한다는 뜻이다.
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노래하는데, 이 역시 하느님이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순 월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49

2

18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50

2

19

월 

누가 13:31∼35

제 삼일에는(32절)

51

2

20

누가 14:1∼6

고창병 든 사람(2절)

52

2

21

누가 14:7∼14

말석에 앉으라(10절)

53

2

22

누가 14:15∼24

큰 잔치(16절)

54

2

23

누가 14:25∼35

제자가 되려면(27절)

55

2

24

누가 15:1∼10

하나를 잃으면(25절)


2-17-2024(토) 누가복음 13:22-3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열어주소서(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Once the owner of the house gets up and closes the door, you will stand outside knocking and pleading, 'Sir, open the door for us.' "But he will answer, 'I don't know you or where you come from.'

주여 열어주소서(Sir, open the door for us) / Lord please open it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세상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로 가야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좁은 길을 가기를 힘쓰라”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좁은 길로 가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그 좁은 길, 고난을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그 길은 생명의 길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육체적 ‘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생명’…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그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황에서 ‘좁은 문’은 어떤 문이었을까? 
예루살렘에는 문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문들에는 작은 문이 달려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큰 문을 닫히면 그 좁은 문으로는 짐을 실은 나귀나 수레 같은 것들은 들어올 수 없었고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씀에 대하여 ‘버클레이’ 신학자는 여기서 ‘바늘 귀’는 ‘바늘 문’, 즉 ‘좁은 문’인 이 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가는 문은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우리의 모든 세상의 짐들, 소유를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좁은 문이라는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냐 하면 어떤 사람의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마지막 때에 집 주인이 문을 닫을 때 사람들이 와서 문들 두드리며 ‘나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집 주인이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라고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악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믿음 있는 자와 행하는 자는 전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자는 비록 자신이 실패할지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기를 기뻐합니다. 그 길을 가며 항상 성공하지 않을 지라도 믿음으로 그 길을 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기뻐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오늘 나의 삶에서 어느 길로 가시며,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 길에 함께 동행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의 욕심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오늘 나의 삶에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주님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설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시며, 그 좁은 문 안으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적은지 물었다면,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많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하여도’로 번역된 기본형 ‘ζητέω제테오’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개인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장로들의 유전이나 율법에 열심을 내어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좁은 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구하여도 / 구하다. 제태오(zētĕō)  ζητέω 스트롱번호 2212

1. 발견하려고 찾다.  2. 마 28:5. 3. 요 18;4
발음 [ zētĕō ]

어원  / 미완료 ἐζήτουν, 미완료 단수3인칭수동 ἐζητεῖτο, 미래 ζητήσω, 제1부정과거 ἐζήτησα, 미래수동태 ζητη- θήσομαι,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발견하려고 찾다, 구하다.
 1. [문자적으로]
  a.  [잃는 것을] 마28:5, 막1:37, 눅2: 48, 19:10, 요6:24,26, 7:34, 36등.
  b.  [자기와 관계를 맺기 원하고 또 어디서 찾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얻기를 원하고 존재를 찾을 때] 요18;4, 행10:19,21, 딤후1:17, ζητεῖν τ. θε- όν, εἰ ἄραγε αὐτὸν εὕροιεν: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하여 하나님을 찾는다. 마2:13, 12:43, 눅11: 9,24등, 행17:27, 롬10:20등. 
 2.  찾아다니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 막3:32, 행9:11.
 3.  조사하다, 검사하다, 생각하다, 궁리하다, 막11:18, 14:1,11, 요16:19, [법적 용어로] 요8:50, 11:56.
II.  [찾는다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
 1.  얻으려고 노력하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다, 마6:33, 26:16, 막14: 55, 눅12:31, 22:6, 요5:44, 7:18, 롬2:7, 고전7:27, 고후12:14, 골3:1, 벧전3:11등.
 2.  애쓰다, 목표를 삼다, 원하다.
  a.  [무엇을] 요5:30, 빌2:21등, 고전7: 27, 계9:6.
  b.  [의문문과 함께] τί ζητεῖτε: 무엇을 원하는가, 요1:38, 4:27.
  c.  [부정사와 함께] 마12:46, 막12:12, 눅5:18, 9:9, 17:33, 요5:18, 7:1, 롬10:3, 갈2:17등.
  d.  ζ. τὴν ψυχήν τινος: 누군가의 생명을 찾는다, 마2:20, 롬11:3.
  3. 요구하다, 막8:12, 고전1:22, 고후13:3등, ζητεῖται ἐν τ. οἰκονόμοιςἵνα: 관리자에게 ~을 요구하다, 고전4:2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25-2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문이 닫힌 후에서 문 밖에 서 있는 이들은 문을 두드리며, 과거 집주인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문을 열어 줄 것을 애원합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외면한 채 호통합니다.
과거 주인과의 교제와 가르침에 진심으로 따르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그마저도 이용하려는 모습은 혹 우리의 모습일까 싶어 씁쓸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대조를 통해, 이야기를 매듭짓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야 6: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역설적 사명을 받았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 6:9-10).
주님도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라고 했다. 이사야처럼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열어주소서(κυριε ανοιξον)

눈을 열어주소서!(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성령이 눈을 열어주면, 위기를 극복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데스와 베렛 사이 샘 곁에서 하갈의 눈을 열어줬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을 만난 그녀는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라 불렀다(창 16:14).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자, “눈이 가리어져서”(눅 24:16) 주님을 몰라보던 엠마오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다”(눅 24:31).
성경을 풀어주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눅 24:32).
아람 군대가 밤에 사마리아를 에워싸자, 엘리사가 사환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엘리사가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사환은 불말과 불병거가 사마리아 산에 가득함을 보았다(왕하 6:17).
또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아람군대의 눈이 어두워졌다(왕하 6:18).

귀를 열어주소서!(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성령이 귀를 열어주면, 말씀을 깨닫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 11:15)고 가르쳤다.
“길가 밭”은 사탄의 방해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마 13:19).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과 박해로 곧 넘어진다(마 13:20-21).
“가시떨기”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결실치 못한다(마 13:22).
“좋은 땅”만 말씀을 듣고 깨달아 100배, 60배, 30배로 결실한다(마 13:23).
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의 후렴은 이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 29; 3:6,13, 22)

마음을 열어주소서!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He came to that which was his own, but his own did not receive him.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성령이 마음을 열어주면, 주님을 영접한다(요 1:12-13).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바울이 말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고(행 16:14), 베뢰아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것처럼(행 17:11),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자!(계 3:20)

말씀을 열어주소서(요한복음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All this I have spoken while still with you.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가르쳐 생각나게 하소서!(요 14:25-2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오직 성령께서 말씀을 가르쳐줘야 영적 분별력이 생긴다(고전 2:13-14).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19-21)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귀국길에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다. 성령의 인도로 그 수레에 올라탄 빌립과 내시의 대화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행 8:30)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행 8:31).
그러자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고(행 8:34-35), 물을 만나자 빌립은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8:36-38).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을 앞두고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따라가자!(막 10:46-52)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자!(히 3:1; 12:2)



하나님의 법칙이나 예수님의 법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느 누가 교회를 30년 40년 다녔다고 하면 우선 그의 인격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오래 다녔다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문제는 연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이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시간 이후로는 내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다고 그 년 수를 자랑하지 말고 몇 십 년 다녔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믿음이 뒤떨어졌거나 신앙생활 하는 것이 남만 못하다면 가슴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느냐 하는 년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의 믿음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설교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구원의 문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쫓겨 날 수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처럼 자기는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은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다시 한 번 자신의 믿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 “주여! 열어주소서” 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날에 은혜 받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 모두가 들림 받아 천국 문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16-2024(금) 누가복음 13:18-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겨자씨 한 알(누가복음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garden. It grew and became a tree, and the birds of the air perched in its branches."

겨자씨 한 알(a mustard seed) /

성경에 나오는 새는 실제 육적인 새와 영적인 새가 있으며 영적인 새는 영(靈)[1]을 의미한다.

육적 이치와 영적 의미

새가 하늘을 날며 나무에 깃들듯이, 성경에서는 나무목자와 성도로(사 5:7, 요 15:1), 그들에게 임한 나무에 깃드는 새로 비유한다(마 3:16).

두 가지 소속의 새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새

  •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계 18:2)
  • 공중에 나는 모든 새(계 19:17)
  • 하나님의 보좌네 생물 중 넷째 생물을 독수리 같다고 함(계 4:6~7).
  •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화를 외침(계 8:13).
  •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양육 받음(계 12:14).

역사

예언 성취

구약 예언

신약 예언

관련 인물

마태복음 13:31-32
겨자씨 비유

겨자씨와 누룩 비유인데 겨자씨 비유는 두 절이고 누룩 비유는 단 한 절이다.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리 쉽고 간단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두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 겨자씨, 밭, 겨자가 나무가 된다는 것, 공중의 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여자, 가루 서 말, 누룩, 부푼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풀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유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근거로 보았을 때 비유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며, 적어도 본 장에서 기록된 모든 비유가 각각 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같은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31-32절)라고 천국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흔히 “겨자씨 비유”라고 일컫는데 이 비유에 대한 해석들을 보면 대부분이 천국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미미하지만 나중에는 엄청나게 확장되어 놀라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혹은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욥기 8:7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천국을 크기로 말씀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의 왕국은 시작과 나중의 개념이 없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하고 주님의 일을 열심히하며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상태로 이 땅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수님은 그 나라의 본질을 보여 주셨고 그 본질은 십자가를 통해 극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겨자씨 비유는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에 연결하여 보충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알리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런 점에서 밀과 독보리 비유와 문맥상 연결되어 있고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하셔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밀과 독보리 비유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과 일맥상통한 관점에서 그 다음 비유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았을 것이다.
즉 누구든지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겨자가 자라서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겨자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좀 의아한 것이었다.
겨자는 2-3월이면 노란 십자화로 피는데 온 산과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다.
이스라엘 전역에 널리 자라지만 특히 갈릴리 지역에 많이 퍼져 있는 1년초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밭에 겨자를 심을 필요가 없었다.
지천에 널려 있는 겨자를 굳이 자기 밭에 뿌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농부도 없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어느 땅에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개정 성경에서는 “풀”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개역한글판에서는 “나물”이라고 번역하였었다.
사실 풀이라는 의미보다 나물 혹은 채소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보통은 1m정도로 자라지만 더 큰 것은 2-3m까지 자라기도 하는데 포기로 군락을 이루어 자라기 때문에 여름 건조기가 시작되면 씨를 맺은 후 말라 서로 엉켜서 딱딱한 나무같이 되어 새가 집을 짓기도 한다.
씨는 지름이 1-2mm 크기로 작은데 겨자씨가 씨앗 중의 가장 작은 씨앗은 아니지만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의 대명사로 쓰였다. 이것을 기름을 짜거나 향신료로 이용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는 구약적 배경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을 하고 있는 다니엘서 말씀을 통해 본문을 이해하도록 하자.

다니엘 4:10-12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본문은 느부갓네살의 꿈인데 다니엘이 설명하기를 느부갓네살이 이룩한 거대한 바벨론 제국은 땅의 모든 족속들이 깃들일 만한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넓은 문맥에서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살펴보면 이 꿈을 꾸기 전에 거대한 신상이 세워진 꿈이었는데 사람이 손대지 않은 뜨인 돌이 신상을 치니 산산이 파괴되어 작은 돌은 큰 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한 꿈이었다(단 2:31-45).
다시 말하면 바벨론 나라가 거대하여 모든 족속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지만 언젠가 뜨인 돌에 의해 망하는 나라가 될 것을 계시해 주신 것이었다(에스겔 17:22-24, 31:3-14에 보면 애굽 역시 이런 나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중의 나는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겉으로 풍성하게 보일지 모르나 언젠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실 나라라는 것이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의 씨를 먹는 존재가 13:4에서는 새라고 하였는데 그 새는 9절에서 악한 자라고 하셨고 그 악한 자는 38-39절에서 곧 원수요 마귀라고 밝히셨다.

성경에서 새는 일단 영적인 존재로 상징되는데 비둘기나 독수리는 성령님이나 하나님을 나타낼 때에 쓰여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중의 새는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악한 영으로 상징된다(참고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새는 공중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새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가만히 보금자리를 틀고 그 나무를 장악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들이 깃든 그 나라를 심판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8:2-4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언약의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뿌려 열매를 맺는 땅으로 만드셨고 천국의 아들들을 심으셨으나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추수 때까지는 그대로 두신다.
그것이 천국의 아들들을 보존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밀과 독보리 비유에 이어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고 경계를 삼도록 하시기 위하여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같이 되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물이 나무가 되는 비정상적인 현상, 예수님은 그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이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정상적인 확장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가 되어 악한 영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결과가 되는 복을 주신 것이라고 속이는 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하시기 위해 이 비유로 미리 알려 주셨다

이사야 6:9-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전통적인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고 하며, 누룩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내적 성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해석과 설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성장으로 인하여 부패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자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으로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가 깃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고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로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에 좋다고 합니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겨자씨는 마치 무씨 크기의 씨앗을 맺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마치 교회의 외적 성장을 강조한 결과 거대한 대형 교회로 성장한 후에는 대내외적으로 부패한 양상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생각할 때 무조건 좋게만 해석하는 것보다는 경고성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며(겨자씨 비유처럼) 또한 내적 성장(누룩의 비유처럼)을 겸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작금에 대형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기현상에 의한 것일뿐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철저하게 안으로는 욕망에 붙잡히려는 자아를 죽이고 겉으로는 날마다 후패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반듯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리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가 4:32.  누가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스겔은(17:3. 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

그리스도 왕국 이룰 ‘복음의 씨앗’으로 비유. 예수님 시대 ‘가장 작은 씨’로 속담에 자주 등장. 옆으로 자라며 순식간 번식하는 특성 때문 만민 향해 ‘말씀’ 퍼뜨려 온 세상 채우는 의미


아니, 이스라엘에도 유채 꽃이 자라요?

겨자 꽃이 보일 때마다 터지는 감탄사다. 특히 갈릴래아 호수는 봄마다 겨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현무암도 많아서, 제주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유채 같은 노란 꽃이 겨자라고 알게 되면, 겨자나무가 어쩜 저렇게 작냐고 또 한 번 감탄사가 터진다. 성경에서 겨자씨 비유를 읽을 때, 올리브나 소나무처럼 키 큰 나무들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다.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 좋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무씨 크기의 씨앗을 송알송알 맺는다.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성지에서 누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서 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그뿐인가?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르 4,32 루카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제키엘은(17,3.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도 실제로는 가장 작은 씨앗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의 대명사처럼 속담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고대 유다 법전 미쉬나는 정원에 겨자씨를 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순식간에 자라 공간을 잠식해 버리므로, 다른 식물들이 맥을 못 추는 까닭이다. 곧, 씨앗 크기에 비해 번식력이 대단해서, 작은 씨의 대명사가 된 듯하다. 또한 이런 특성 때문에 겨자는 큰 나무에 비유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겨자는 옆으로 제 존재를 퍼뜨린다. 예수님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도 만민을 향해 수평으로 번성하여, 온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간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천국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주변에 널린 겨자처럼 매일매일은 평범하다. 하지만, 그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면 내게는 천국이 된다. 겨자가 큰 들판을 메워가듯 내 인생에 천국들이 쌓이면, 마침내 하늘나라처럼 풍성해질 것이다. 게다가 새들까지 보듬는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은, 다른 이들과 천국을 나눌 수 있는 이타적 아름다움도 비유해 주는 듯하다. 이런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볼 때, 겨자 꽃은 정말 하늘나라를 닮지 않았나?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겨자씨(4615)

σίναπι, εως, τό 스트롱번호4615

1.

겨자

2.

겨자 씨

3.

마13:31

발음 [ sinapi ]
어원
σίνομαι ‘쏘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겨자, 겨자 씨, 마13:31, 막4:31, 눅13:19.

κόκκος, ου, ὁ 스트롱번호2848
1.

2.

낱알

3.

각종 식물의 씨

발음 [ kŏkk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씨, 낱알, 각종 식물의 씨, 겨 자씨, 마13:31, 17:20, 막4:31, 눅13:19, 17:6, 고전15:37.


겨자씨 한 알
- 유대인들에게는 "겨자씨 만큼이나 작다" 속담이 있는데(Robertson) 이는 '겨자씨'가 아주 작은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씨앗은 그렇게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무려 5m나 되는 큰 나무가 된다.
어떤 사본들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커다란'(*, 메가)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도 있다.
본문에서도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나 그 마지막 사람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 '그러므로'(*, 운)는 시간의 계속을 표시하는 접속사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말씀이 앞부분과 연속성을 가진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앞에서의 치유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관련되어져 이해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1) 예수께서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장과 같이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가....무엇으로 비할꼬 - 이 이중(二重)의 도입구는 사 40:18과 유형상 비슷하며 막 4:30 에 더 온전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NIV)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여러번 언급이 있었고, 여러 교훈 및 치유 사건을 통해 그 나라의 성격이 부분적으로 암시되기는 했지만(6:20;7:28;8:10;9:2,27,60;10:9,11;11:20), 여기서는 비유를 통해 그 성격이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이용해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을 설명하셨다. 

겨자씨는 놀랄 만큼 작은 것이다. 우리가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주님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를 설명하시기 위해 겨자씨를 사용하셨다. 이에 대해 말해보자.

겨자씨는 정말 정말 작다. 겨자 식물의 종류에 따라 연노란색에서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겨자씨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잘 심길 경우, 10일 아내 싹을 틔운다. 다 자란 겨자 줄기는 말을 탄 기수의 키 만큼 자란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3가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

누가복음 13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족한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몇 사람으로 시작된 교회가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방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원을 받자마자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 모두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성장해나갈 것이다.

믿음은 산도 움직일 수 있다

누가복음 17장 5~6절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하셨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 12:4)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ㅇ르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믿음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해도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찌라도 산과 나무를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믿음은 작게 시작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닿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 정도로 성장한다.

우리의 믿음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어둔 하늘에 빛과 같이 비추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마태 13:31-33과 누가 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

“12명의 제자들, 머지않아 그들은 70명의 제자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500명이 되었습니다.
500명은 어느 날 30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곧 이어 5000명이 됩니다. 
곧 이어 그들은 2만 명, 3만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지는 역사의 고동 소리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p. 66)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40년이 채 못 되어서 복음은 모든 로마제국의 대도시의 심장부까지 전파되었고, 이들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통상로를 따라서 수많은 마을들과 작은 촌락들에까지도 전파되었으며, 2세기 말쯤에는 알려진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Charles Swindoll, “New Testament Insights, LUCK”, pp. 444-445)

위의 예들은 다 역사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역사 속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눅 17:20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겨자씨 비유”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설령 가시적이라 할지라도(그러나 결코 가시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 나라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 13:31-32과 눅 13:18-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막 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와는 전후문맥 안에서만 보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룩 비유” 없이 “겨자씨 비유”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처음 깨닫고 지적한 자는, 필자가 알기에는, Arno C. Gaebelein(1861-1945)이다. 그는 마 13장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교회의 비정상적이며 유해한 관료주의적 팽창과 누룩으로 표현된 죄의 주입을 통해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사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비유들은 악의 성장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에 걸쳐 적용되는 예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에 눌려 이내 묻혀 버렸고, 나중에 James M. Boice(1938-2000)에 의해 또 다시 주장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 Arno C. Gaebelein은 무슨 근거로 이 비유에 나오는 거대한 겨자 나무와 누룩이 퍼진 반죽 덩이를 긍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커진, 그러나 내부는 전체가 죄로 오염된 타락한 교회로 보았는가?
Arno C. Gaebelein의 주장을 받아들인 James M. Boice가 그의 책 “The Parables of Jesus”에서 말한 것들 중에 우선 “겨자씨의 비유”에 관한 것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 13:31-32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James M. Boice의 견해

James M. Boice가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 비유”가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타락한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로 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겨자씨가 나무로까지 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예수께서 성장하는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셨으면,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자라는 비유나 백향목 씨가 레바논의 크나큰 나무 중 하나로 자라는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다.

둘째, 마 13장의 전후문맥에서 보면, 겨자나무에 깃들이는 새(32절)는 이미 첫 번째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어버린 새를 악한 자(마귀)로 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마귀로 비유된 새가 조금 뒤 겨자씨 비유에서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또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36-43절) 사이에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이 비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끼어있다는 것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동일한 성격의 비유라는 것을 말해준다.

“겨자씨 비유”에 대한 Arno C. Gaebelein과 James M. Boice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가 비정상적인 화려함과 거대함에 매몰된 참담한 상태를 고발하는 예수님의 슬픈 비유임에 틀림없다.
 

눅 13:18-19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견해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

누가복음의 “겨자씨 비유”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처럼 먼저 전후문맥 속에서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전후문맥 속에서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이 비유 앞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 13:6-9)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겨자씨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동일하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겉만 그럴 듯한 타락한 하나님 나라를 책망하시는 비유라는 말이다.
이는 “전후문맥에서”와 “겨자씨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 전후문맥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눅13:2-5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향해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눅13: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3:6)를 시작으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눅13:6-9).

그 후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셨다.(눅13:10-13). 이때 회당장은 분을 내어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어겼다고 비난한다(눅13;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이에 대해 예수님은 회당장을 비롯한 무리에게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신 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나귀에 대한 행위와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신다(눅13:15-16).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13:18)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회당장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태를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겉만 크고 화려한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그러나 그 속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반죽처럼 죄로 만연된 이스라엘을 “겨자씨와 누룩 비유”(눅13:18-22)로 폭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눅13: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에서, 또 눅13:34-35(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계속 발하신다.

이렇게 눅13장 전체의 전후문맥에서 볼 때(그 이전과 그 이후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정적인 그 무엇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엄중한 심판의 경고들을 쏟아내시면서, 그 사이에 전후문맥과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생뚱맞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2. 비유 속에서

“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타락한 하나님 나라, 즉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라는 증거는 눅13장의 전후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겨자씨 비유” 속에서도 차고 넘친다. 예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시작하신다.

여기서 “채소밭”(κῆπος. 케포스)은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자신의 집 부근에 정원을 만들어 놓고 틈틈이 채소 등을 재배해서 자급자족하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왜 저 사람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지 바보같이? 이 사람, 미친 거 아냐?’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 당시 겨자는 향신료(양념)와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겨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써야하는 필수 소비재가 아니어서 겨자를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들판에 널려 있는 것이 겨자 풀이었기 때문이다. 1년생 잡풀인 겨자는 번식력이 대단히 강해서 농부들은 오히려 자기 밭이나 채소밭에 겨자 풀이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쓴다. 만약 어쩌다가 겨자풀이 자기 채소밭을 침범해 자라기 시작하면, 그 채소밭은 못쓰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겨자 풀의 왕성한 생장으로 인해, 그 채소밭에서는 채소가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일부러 심는 바보는 절대로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등장하는 이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누가복음과 의미가 다른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는 단순히 “땅에 심길 때에는”이라고만 되어 있다).

또 유대인이 대단히 무겁게 여기는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유대인은 결코 없을 것이다(레19: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율법에 의하면 채소밭에는 채소만 심어서 재배해야 한다. 채소가 자라는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어 겨자 풀을 키우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 왜 그랬을까? 이 사람이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자신의 채소밭이 망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 율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겨자 풀은 번식력과 아울러 생장 속도도 대단히 빠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금방 크게 자란다. 보통은 3-5m, 대단히 크게 자라는 것은 8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뿌린 까닭은,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빠른 시간 내에 예루살렘의 겉모습과 이로 인한 자기 자신의 지위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내기 위해 부당하게 수많은 돈을 착복했다. 예루살렘 성전 당국은 절기 때 제사 제물에 쓸 짐승을 성전에서 팔면서 턱없는 폭리를 취했으며(예수님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마리를 염소 한 마리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비둘기를 준비해 오면, 제사장들이 고의적으로 흠 없는 제물로서의 부적격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전 뜰에서 파는 값비싼 비둘기를 사야 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악행은 수두룩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신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제 헌금을 내기도 하고, 또 제사를 잘 드리는 척,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의로운 척 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겨자 나무처럼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 위선으로 일관하면서도(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 속에서 몰래 누룩이 퍼지듯 속으로는 율법을 밥 먹듯이 어기면서(누룩 비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채소밭을 쓸모없게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에 “누룩 비유”를 더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따라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누룩 비유”가 없는“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와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겉만 화려하고 웅장한 위선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이 1년생 겨자 풀을 굳이 겨자 나무로 묘사하신 것은 단4:11-12(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에서 나무로 묘사된 바벨론 제국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은 거대한 나무이지만 이스라엘은 겉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년생 잡풀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1년생 겨자 풀을 겨자 나무라고 묘사하신 것은 바벨론 제국의 나무처럼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있는, 그러나 1년생 잡풀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진실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단4:11-12에서 하늘에 닿은 엄청난 크기의 나무는 바벨론 제국을 가리키며, 그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바벨론 제국에 빌붙어 살고 있는 주변국의 열왕들, 부자들, 권세자들을 가리킨다. 새들이 깃들이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불의한 무력으로 만들어낸 거짓 평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바벨론 제국을 흉내 내며 엄청난 크기의 겨자 나무를 가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그 가지들에 온갖 잡새들(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깃들이며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참 하나님 나라였다면 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과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겨자 나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누룩 비유”에서처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이에 누룩 같은 죄가 구석구석 완전히 퍼져버린 타락한 하나님 나라에 불과했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설명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잡새 같은 불법적인 권세자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께 끊임없이 비수를 들이댔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을 보라. 비정상적으로 커진 겨자 나무처럼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이런 교회에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반드시 온갖 잡새를 모여들고 깃들인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겨자 나무가 크면 클수록 더욱 많은 잡새들이 날아온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날아든 잡새들을 위해 둘러서서 정성껏 안수기도도 해주고, 이런 잡새들이 교회에 많이 깃들이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기까지 한다. “우리 교회는 대통령이 출석해요. 우리 교회에 국회의원들이 몇 명이나 출석하시는 줄 아세요? 우리 교회에는 판검사, 변호사만 200명이 넘어요”라고 하면서 말이다(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대통령들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자들 중에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커다란 겨자 나무 같은 교회를 골라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있는 잡새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겨자 나무는 1년생이므로 아무리 크게 자란다 할지라도 1년 동안 자라다가 사라지는 잡풀에 불과하며, 결코 진짜 나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무가 아닌 겨자 풀의 가지가 아무리 크고 굵게 자랐다할지라도 그 속이 비어있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는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설령 정신 나간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 깃들였다할지라도 겨자 풀은 1년생 잡풀이므로 깃들인 둥지의 수명은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다.

또 겨자 나무가 있는 채소밭은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 있고,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설령 겨자 풀의 가지가 나무처럼 튼튼하더라도 사람 가까이에 있는 채소밭에는 새들이 결코 깃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 나무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만큼이나 정상적인 새들이 아님에 틀림없다.
물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겨자 나무는 오래지 않아 로마 제국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겨자 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을 리는 결코 없다(다시 말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전진과 성장을 계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만연을 상징하는 “누룩 비유”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비유의 내용이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와 누룩 비유”와는 그 목적과 초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다면, 1년생 잡풀인 겨자 풀이 아니라 오래 동안 생존하며, 또 외관이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백향목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향목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시 92:12-13 /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104:16 /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정말로 의도하셨다면, 아마도 “마치 사람이 자기 뒷산에 갖다 심은 작은 백향목 가지 같으니 자라서 거대한 백향목이 되어, 공중의 비둘기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관한 비유는 결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웅장함과 거대함은 말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가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겨자씨 비유”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라 나무가 되어”에서 “자라”로 번역된 “ηὔξησεν”(에윅세센)은 “자라다, 늘어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αὐξάνω”(아욱사노)의 ‘단순 과거’이며, “되어”로 번역된 “ἐγένετο”(에게네토)는 “존재하게 되다, 있게 되다, 생기다, ~이 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γίνομαι”(기노마이)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가 이미 다 자라서 이제는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에서 “깃들였느니라”로 번역된 “κατεσκήνωσεν”(카테스케노센)도 “살다, 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κατασκηνόω”(카타스케노오)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나무가 된 겨자 풀의 가지에 새들이 이미 깃들였다는 말이다(참고로 “누룩 비유”가 없는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자라서”(ἀναβαίνει/아나바이네이), “커지며”(γίνεται μεῖζον/기네타이 메이존), “내니”(ποιεῖ/포이에이) 등의 모든 동사는 ‘현재형’ 동사로 되어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계속 전진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약 “겨자씨 비유”가 처음에는 겨자씨 한 알 크기의 보잘 것 없는 하나님 나라가 나중에 자라서 엄청나게 커지는 겨자 나무처럼 부흥하는 지상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였다면, 예수님은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미래형’(또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셔서 “자라 나무가 될 것이며(되고 있으며)”,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다(깃들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있을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이후의 교회의 외적 성장과 또 화려하고 엄청나게 성장(?)할 중세 교회와 중세 교회보다 더 화려하고 더 커질 현대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 하나님 나라임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현재형’이나 ‘미래형’은 고사하고, ‘미완료 과거’도 아닌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신 까닭은 당시에 타락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 화려하게 커져버린 고착화된 껍데기를 지적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헌금을 면죄부 등으로 사기치면서, 크고 화려하게 키운 교회의 외적인 껍데기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로 합리화시키기를 좋아했다. 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세교회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물들, 거대한 교회의 조직과 재물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등을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대하게 자란 겨자 나무 같은 성장이며 부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00%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외식적인 이스라엘을 거대한 겨자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와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성장(?)을 웅장한 겨자 나무에 적용시키며 기뻐하는 것은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가, 중세 교회처럼 황제마저도 굴복시키는 대단한 교세와 위용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외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사적인 교훈은 교회가 외적으로 커질 때 필연적으로 교회는 타락했다.
아니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외적으로 교회가 커졌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커지는데 집착하게 되며, 그러므로 필연적인 외적 성장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 이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셨듯이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타락한 중세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가?

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겨자씨 한 알처럼 외적으로는 오히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 나라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나라,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다(계 11:7-8 /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증인된 삶으로 인하여 세상의 핍박을 받으며 그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계 7:17 /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럼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므로(계 13:10 /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순교했으나 주의 재림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계 11:11 /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끝내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겨자씨 비유”에서의 겨자 나무처럼 거대해지고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외적으로 웅장하게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 없이 눈으로 판단하고 주판을 튕기거나 계산기를 두들기며, “교회가 이렇게 크고 화려하니까 불교보다는 낫겠지?”하면서, 겨자 나무 가지에 잡새들이 깃들이듯이, 누구나 들어와 깃들일 수 있는 다른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크고 힘이 강한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이 될수록 더욱 커지고 힘이 강해질 것이므로 세상 나라의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 나라가 친구가 되자고 거대한 겨자 나무 같은 교회에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들은 세상 나라의 핍박으로 인한 인내도 눈물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신 것처럼, 크고 힘은 강하나 타락한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모든 지상 교회들은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와 누룩 비유”에서 주님의 엄한 경고를 귀기우려 듣고, 피 눈물 나는 회개를 통해 “남은 자”의 교회로 다시 새롭게 서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교회가 아닌 겨자 나무 같은 교회들은 오히려 필자의 피토하는 권면을 비웃을 테지만 말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2-15-2024(목) 누가복음 13:10-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누가복음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forward and said to her, "Woman, 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 you are free from your illness

infirmity - 허약

ἀπολύω 스트롱번호 630

1. 놓아주다.  2. 가게 하다. 3. 이혼하다
발음 [ apŏlŏuō ]
어원 / 미완료 ἀπέλυον, 미래 ἀπολύσω, 제1부정과거 ἀπέλυσα, 제1부정과거부정사 ἀπολῦσαι, 현재완료수동태 ἀ- πολέλυ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πε- λύθην, 미래수동태 ἀπολυθήσομαι, 575와 3089에서 유래

* 575. 아포(apŏ)  ἀπό  

1. ~으로부터.  2. aπάγεσθαι.  3. 마 27:24
발음 [ apŏ ]

뜻풀이부

1.  놓아주다, 풀어주다, 용서하다, 마18: 27, 27:15-26, 눅6:37, 요18:39, 행3:13, 5:40. [수동태] 놓이다, 풀리다, 눅13:12.
2.  가게 하다, 보내버리다, 해산시키다.
  a. 이혼하다, 보내버리다, 마1:19, 5:31, 19:3, 막10:2,4,11, 눅16:18.
  b.  해산시키다, 돌려보내다, 마14:15, 22, 15:32,39, 막6:36, 8:3,9, 행19:41. [수동태] 해산 당하다, 출발하다, 떠나다, 행4:23, 15:30, 히13:2
 c.  [중간태] 가다, 떠나다, 행28:25, 히13:23

* 3089. 루오(lüō)  λύω 

1. 풀다.  2. 깨다. 3. 열다
발음 [ lüō ]

뜻풀이부

I. 풀다[결박, 족쇄 등을].
 1. [문자적] 깨다, 열다.
 2.  [비유적] 열다, 펴다, 막7:35.

II. 놓아 주다, 풀어주다.
 1. [문자적]
  a.  [죄수를] 행 22:30.
  b.  [천사를] 계9:14.
  c.  [사탄] 계20:3.
  d.  [나사로] 요11:44.
  e.  [동물] 마21:2, 막11:2,4, 눅19:30.
 2.  [비유적] 해방시키다, 자유하게 하다, 풀어주다.
 3.  파괴하다, 부수다, 헐다, 행27:41, 벧후3:10-12.
 4.  절멸시키다, 끝내다, 폐지하다, 없애다, 마5:19, 요5:18, 행2:24, 요일 3:8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마리아와 요셉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 레위기 12장 말씀에 따른다면, 예수님의 가족이 성전을 방문한 때는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을 넘긴 때였을 것입니다.
번제물로 ‘1년 된 어린 양’이 아니라 비둘기로 제사하려 했던 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품에 안겨있는 예수님이야말로, 온 인류를 위한 가장 크고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이것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 곧 성령님과 깊은 교류 속에 있었던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이자 온 인류를 구원할 대속제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생 동안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감격에 겨워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찬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누가 2:29).
‘놓임을 받다’(아폴루오)는 말은 속박되어있던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아포) 비로소 풀어지는(루오)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무엇에 묶여 있다가 풀려났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 것일까요?

1차적으로는 그를 붙들고 있는 세상과 육신입니다.
그는 이제 드디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히 육신의 속박을 벗어나는 ‘죽음’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시므온이 안고 있는 그 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육신을 벗어나는 죽음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자유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그에게 선사한 것은 잠깐 동안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짧은 분리’가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놓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 메시야로 인하여 임할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위로’는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이루시게 될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읽으신 성경 말씀이 이사야 61장입니다.
거기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읽으신 후에, 이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시므온은 30년 후에 예수님을 통해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의 품에 안기신 메시야를 만남으로 마음에 족한 위로가 넘쳤습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평안과 놓임과 위로를 얻었다면, 우리는 이에 비할 수 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14:16-17).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완전한 평안입니다(요 14:2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나를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부자유함
둘째는 정신적인 부자유함
셋째는 영적인 부자유함

사람을 부자유 하게 하는 것들 중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 부자유함은 이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영적인 부자유함은 심판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부자유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부자유함은 세상에서 해결 받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해결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차라리 그 손을 찍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가 다시 죽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을 두 번씩이나 경험했던 인물이 나사로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3절)

오늘날도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런 치유와 기적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치유와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내 죄 사함받고서

https://www.youtube.com/watch?v=CC_PApJ1oOw



동사 아폴루오(Homer 이래)는 아포($575)와 루오($3068: 목욕하다, 씻다)에서 유래했으며, 루오의 강의형으로 역시 '씻다, 씻어내다'를 의미한다. 의식적인 정화를 ...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요. C.S. 루이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노래하네요.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곧, C.S. 루이스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지 하나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의 진리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사주나 팔자 혹은 타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우상 앞에게 예물을 드리며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주팔자 등 운명을 점치며 부적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모든 우상숭배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지요.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세를 성취하고, 더 많은 재물을 성취하고, 세상의 더 큰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때로는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또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나누며 섬기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성경의 이러한 가치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사람이 이제는 양보하고 배려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결국 그의 행동과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치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0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안식일을 맞이하면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장소, 곧 정해진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면 다음주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 곧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는 그 이전까지 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다른 랍비들이 가르치다가 혹은 이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가르치다가,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회당을 찾아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의 능력과 그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날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른 랍비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권위와 권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절) “아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 회당에는 오랜 세월 안식일마다 회당예배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많은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겠지요. 당시 회당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안식일이나 바로 그날의 안식일이나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가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회당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 회당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더라도, 예배 준비가 완벽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라 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예배 준비가 조금 부족하고 예배를 위한 시설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은 치유를 받은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관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드디어 그 회당은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지는 극심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이 깨끗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은혜의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 회당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모든 책임을 가진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14a절) 

지금 회당장은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회당장이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회당장이 화가 난 대상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던 그는 회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그가 지적하는 사항은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겨있는 회당장의 마음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있는 행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회당장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고 있는데 왜 굳이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그의 또 다른 의도를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회당장이 크게 화를 내는 핵심 이유가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회당장의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외식하는 자들아”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하잖아요.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하지요. 

자, 회당장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숨겨진 원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세요.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네, 여기까지는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지요? 어떠한 전제입니까?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회당을 찾아와도 언제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여인은 18년 동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지 않았기에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잖아요. 지금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 회당장이나 여러 랍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방문하시기 이전까지 그들은 참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유독 회당장만큼은 애써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회당을 방문하면 언제라도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애써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회당장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 선포와 예수님의 치유 역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가 보아도 회당에서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당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회당장, 곧 그 회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날 하루만 예수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회당장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신 뒤에 18년 동안 근육이 수축되어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어요. ‘아니, 내가 이 회당의 회당장인데, 이 회당에서는 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 회당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쏠리니 회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본성은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질병인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여기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생각은 심지어 회당장조차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써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새로운 관점

회당장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거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이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기르는 가축에게는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고 안식일에도 풀을 뜯겼던 것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6절) 

회당장은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화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안식일의 규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대답 역시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해 답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본문 16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관점은 18년 동안 큰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이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브라함의 딸을” 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네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딸’ 정도가 되겠네요. 

이 여인이 겪었던 질병은 몸의 근육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다 꼬부라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육이 수축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이 힘을 잃고 탄력을 잃어버리기만 해도 몸의 자태가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관절이 꼬부라져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겉모습에는 만물의 영장,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자기 중심적 관점으로 가득했던 회당장을 비롯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여인을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겼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날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주십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여인은 그 외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딸’이라고 선언하여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바꾸어주시자,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라파(Yahwe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출 15:26) godsname
☆ Yahweh-Rapha

The Lord our healer. “By His stripes were are healed” declares the Bible. Jesus Christ died to give you life. Not only was God the healer in the Old Testament, but Jesus Christ revealed the healing heart of God for all of us, more than ever. (Exodus 15:26, 2 Chronicles 7:14, Psalm 6:2, 41:4, 103:3, 147:3, Isaiah 19:22, 30:26, 57:18-19Jeremiah 3:22; 17:14, 30:17)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시00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0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사19: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사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57:18-19 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렘0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당장처럼, 우리 역시 지독한 자기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반드시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여 주셔서, 철저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그들의 겉모습과 상관 없이 아브라함의 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무척이나 인형을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분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이 소녀는 손님 앞에서 여러 인형을 꺼내서 자기의 인형을 설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밝은 얼굴을 보다가 그 아저씨는 이렇게 묻게 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느냐? 가장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소녀는 깊은 침묵에 잠기었다가 한참 후에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저씨에게 다짐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절대로 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아, 그러지” 아저씨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저 뒤에 있는,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지고 옷은 다 헤진 가장 못난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와서 “제가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랬습니다. “어째서냐?”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대답합니다. “이 인형이 저와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제가 사랑한 그런 인형이고요, 둘째는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는 못난 인형이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꼭 같은 이 이야기가 있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데리고 하숙을 치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하숙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네 아이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이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맏아들, 우리 첫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더니 곧 부인합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우리집 4남매 중에 하나뿐인 고명딸이거든요. 그 딸이 예뻐서, 재롱을 떨고 그래서 제가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아니고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복자로서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아니오,” 다시 부인하고 한참을 생각한 후 이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합니다.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에 걸렸거든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아십니까? 병든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요. 오히려 약한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문제의 자식을 부모는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인물이 잘났느니 못났느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고 사랑의 이유는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왜 사랑하느냐고는 묻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성경에서 보십시다.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꼬부라진 사람입니다. 18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장기 병자입니다. 어쩌면 누구도 이 장애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어서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온 가족들도 다 버렸고 그 누구도 이것을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과 식구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그런 버려진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다른 말로 정신적 지체요, 이것은 의식의 부자유라는 것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말을 들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사랑을 압니까? 준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찌 생각하면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할 정도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몸도 병들었고 정신도 병들었고 인격도 병들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우리 인간의 흔히 보는 보편적 가치로 볼 때에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버려진, 완전히 소외당한 불쌍한 청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치론의 대표자인 R. B. 페리(Ralph Barton Perry)라고 하는 분의 그 가치론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
그래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돈이 많으면 대접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받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소비하느냐?
가졌더라도 구두쇠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돈을 쓰면서 사느냐?
이것이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가치가 오르고 내리기도 합니다.

둘째는 신체적 가치입니다.
건강하고 잘먹고 튼튼하고 그리고 늠름하게 보일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 말하는대로 키도 한 180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축구선수들이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확실히 신체적 가치가 높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평가가 됩니다.

셋째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혹은 심리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예술성이 있느냐?
아름다움을 갖추었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줄 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런 것입니다.

넷째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그것이 그 사람이 가치입니다.
목적이 가치를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높은 것 그것을,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살 때에 그만큼 인생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자, 이런 가치론에 한 번 준해서 여기에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자,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이 원리의 기준에 의해서 생각해 볼 때에 완전히 제로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잘 보십시오, 이 여자를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의 사람됨을 보았느냐?
분명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유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의 건강과 젊음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내면적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 통하든 안통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대해야 되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적인 인간을 보시면서 아브라함의 딸, 선민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렇게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에서 보아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 그러면서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지금 건강을 잃어버리고 특별히 마귀에게 붙들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부자유한 그러한 억압된 생명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를 볼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유가 없습니다. 무엇에 붙들려 있다는 말입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세 오르테가(Jose Ortega Y Gasset)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집단의 반란(The Revolt of the Masses)”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독특한 학술용어가 쓰여있습니다.
그것은 “전문화의 야만주의”라고 했습니다.
The Barbarism of Specialization,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단순 지식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단순 무식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합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둘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식하게 무식한 것입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아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Learned Ignorance 라고 했습니다. 공부 많이 한 무식한 사람,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전문화 때문입니다. 너무 한쪽으로만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어느 잡지를 보니까 의학도 이제는 부득불 일반의학을 많이 해야하겠다는 논문을 본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너무 전문적으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서 환자가 하나 왔을 때에 그 사람 진찰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공부하지 않은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환자가 와야 알지 내가 공부하지 않은 환자는 아무리 보아도 진찰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병도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은 딱 하나만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지식이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한쪽으로만 공부를 했지 너무 많이 하는 동안에 다른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니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 공부를 많이 못했더라도 절대 ‘나는 무식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무식한 사람들 밖에 살지 않으니까. 다 무식하니까. 왜? 전체적인 것을 모릅니다. 또 하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을 모르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만 했지 왜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연구에 연구를 하면서 건강까지 해치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번다고. 아니 병들어서 돈을 벌면 무엇합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 실상은 모르고 무엇을 가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없고. 여러분, 혹시 은행 빛이 없습니까? 당신은 재벌입니다. 요즘 빚이 없는 사람은 재벌입니다. 요즘 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 다 빚입니다. 자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있다고 하나 아무 것도 없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불쌍하고 무식한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알긴 무엇을 압니까?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모를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웃는 이런 학설이 나와있습니다. 유식한 무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기 우상화의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안다고 하는 감옥 속에 갇힌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들리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만의 감옥에 있고 욕심의 감옥에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열등의식의 감옥에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고집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을 볼까요?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늘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어려운 사회가 이 체제를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아, 거기는 뭐 분명합니다. 강한 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언제 이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북한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6.25때, 전쟁에 그 무자비하게 폭격할 때 부모가 다 죽고 고아로 살아남은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커서 지금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본인들이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본 일이 없습니다. 미 제국주의자 놈들이 폭격을 해서 다 죽었대요. 수령님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셔서 탁아소, 고아원을 거쳐서 지금 이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수령이요 진짜 어버이입니다. 어버이 수령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아, 무섭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죽인 그 놈들, 제가 복수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원한, 이 복수심에 꽉 막힌 것입니다. 여기에 붙들렸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그 복수할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북한이 못사는 것입니다. 무기 준비하고 전쟁 준비하느라고 거기다가 온 정력을 다 쏟다보니까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 변증법적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속 사람은 다 우리와 같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마음, 잘못된 생각, 증오심, 원한, 섭섭한 마음, 분한 마음에 꽉 붙들리면은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납니다.

자, 오늘 예수님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여자,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명만 유지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 들을 수 잇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지금 메어있습니다. 속박되어있습니다. 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이 완전히 속박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 거기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 공항에 나가면서 보면은 한쪽 구석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 모여 앉아서 이러고 빨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지나가면서 한 번씩 웃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아,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안 그렇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서 무엇엔가 노예가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그 욕심, 그 명예심, 그 벌컥벌컥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잘못된 습관에 매인 것, 다 매인 것입니다. 다 씌운 것입니다. 확실하게 씌운 것입니다. 제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매였다, 매였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의 시각에서 보셨습니다. 은혜를 +로 부여하시고 은혜 속에서 이 여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보여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미래가 보입니다. 애들이 장난을 칩니다. 심한 장난을 칠 때에 부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아이가 발명가가 되려고 하나보다’ 안 그렇습니까? 고집을 부리고 뒹굴고 할 때에도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은 “쟤가 의지가 있어. 개성이 있다고 쟤가.” 그렇지 않습니까? 왜요? 미래를 보잖아요 미래를. 사랑의 시각으로 보니까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봅니다. 이 매여있는 불쌍한 여자를 보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나면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한평생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하며 살 것을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자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미래와 소망을 환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노예가 된 것이요, 혈기의 노예가 되고, 욕심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여러분, 온전한 자유인이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여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 그 불쌍한 곳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입니다. 


2-14-2024(수) 누가복음 13:6-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누가복음 13: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Sir,' the man replied, '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and I'll dig around it and fertilize it.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Please leave it as it is this year too.

유예(猶豫) : 오히려 유, 미리 예
 1. 시일을 늦춤
 2. 망설여 결행하지 않음
 3. 집행(執行) 유예(猶豫)

중보(3316)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중보(3316) 메시테스(mĕsitēs) μεσίτης, ου, ὁ 스트롱번호 3316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발음 [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3319.  μέσος, η, ον 스트롱번호 3319

1. 중간의.  2. 마 25:6.  3. 중앙
발음 [ mĕsŏs ]
어원 / 332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간의, 가운데 있는.
 a. [형용사] 마 25:6, 눅 22:55, 요 1:26, 19:18, 행 26:13.
 b. [중성명사로] 중앙, 가운데, 마 13:25, 14:6, 막 3:3, 7:31, 눅 4:30,35, 17:11, 요 8:3,59, 20:19, 행 4:7, 계 7:17.
 c. [중성 μέσον이 부사로 사용됨] 빌 2:15.



이사야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라는 법률용어에서 '사면(赦免)’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후 2-3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맺는 열매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 그대로 두고 다시 한 번 더 열매를 맺도록 관리하겠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과원지기는 예수님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로서 예수님은 주인에게 간청하여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어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한다면 당장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왜 그토록 오래동안 참고 기다리실까요?
그 까닭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에스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들을 아직도 이 세상에 머물도록 지켜주시는 것은 구원해야 할 생명을 찾아내어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은혜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024년 내가 구원해야 할 생명이 누구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날마다 그 생명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열매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https://www.youtube.com/watch?v=i1UbpDjlDtU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겔 18: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딛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누가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유대인 농부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쉽게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번식력이 아주 강해서 아무 데에나 심어 놓아도 열매를 잘 맺습니다.
그런데 이 가치 없고 흔한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할 농부는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를 위해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돌보는 주인도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농사 규례를 살펴보면, 과목을 심고 3년 동안 맺힌 열매는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않고, 제 4년에는 첫 열매이니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부터 열매를 거둡니다(레 19:23~25).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24.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삼 년을 와서 열매를 구했다면 이 주인은 나무를 심어놓고 7년 이상을 기다린 셈입니다.
7년이 지나도 무화과나무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포도원에 있다면 정말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해서 7년 넘게 기다렸다는 것도 유대인 농부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마침내 주인은 화가 났고, 이제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무화과나무가 찍힘을 당하는구나’ 생각할 즈음에, 이번에는 주인이 아닌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주인에게 무화과나무를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주인이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이제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는데, 과원지기가 나서서 마땅히 찍어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변호합니다.
자신이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과원지기가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 간구는 과원지기가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하시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하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다림과 긍휼이라고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도대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왜 주님은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이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사야 27장 말씀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포도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오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무화과나무처럼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데, 열매를 맺도록 때를 따라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하거나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돌봐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찍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은 집행유예가 아닌 사면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외친 누가복음 13장 8절 말씀,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여기에서 ‘그대로 두소서’는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압히에미는 ‘용서하소서, 사면하소서’ 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하신 말씀인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즉 “압히에미(사면하소서)!”라고 외치십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완전히 끝이 난 것이고,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이나 벌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외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대적하는 무리, 인간들을 향하여 완전한 사면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지 못하여 무화과나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집행유예를 받은 것처럼 늘 행위를 보고 자신을 정죄하며 불안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예수님은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다

찍힘을 당해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압히에미” 즉 “사면하소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우리 행위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아야 할 심판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지만 믿지 못한 악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포도원지기 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 수 없는 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또한, 주인의 오래 참음과 과원지기의 간청 때문에 우리가 놀라운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때때로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도 우리를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진리를 믿지 못하는 악함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사탄에게 속아 자신에게 빠져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긍휼을 베푸시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임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포도원 안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자신에 대하여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원래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했습니다.
보통 무화과나무는 2~3년 정도가 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3년이 되었음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존재에는 분명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존재 가치를 결정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무화과나무의 존재 가치는 없습니다.
목적이 불분명하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땅을 아깝게 방치시켜놓을 바에 무화과나무를 어서 잘라버리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그 자리에 다른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금년까지만 유예기간을 준다면, 정성껏 가꿔보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망설임 없이 찍어버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과 가치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의 마땅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올 한해 동안 내 삶 속에서 어떠한 열매가 맺혔는가, 혹은 열매를 맺었는가 맺지 못했는가를 돌아봅시다. 

첫째, 기다림에도 때가 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주인은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참고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치시는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 등. 하지만 또 다른 성품이 있다면, 인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행동이 있습니다.

8절의 말씀에 포도원지기가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기다림 중에도 행동하십니다.
가만히 방관하며 기다리지 않고 열매가 맺어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시면서 깨닫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또 다른 특징은 한계, 곧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죄악에서 떠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인내하신 후에도 열매가 없을 때 마땅히 그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더 이상 은혜를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려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떠나가고 심판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기다림 끝에 “찍어버려라. 어찌 땅만 버리고 있느냐”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 포도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며 간절히 만류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인이 포도원지기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의 인정을 받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무화과나무를 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주인에게 한 번 더 수고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만약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무화과나무는 가차없이 찍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가 한 해만 더 거름과 물을 주며 수고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멸망 사이에 두신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주인의 생각에는 소망이 없는 나무이지만, 포도원지기는 소망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런 중보자이심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인 우리를 중보하시어 새로운 인생으로 치유하시고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조금만 더 고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면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중보자이신 예수님도 우리 안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며, 열매 맺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끝까지 책임지시는 예수님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유예기간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 무화과나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스스로 자신이 관리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무가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종자가 좋지 않아 노력을 기울여도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3년의 시간 동안 기르며 지켜봤던 포도원지기만큼 그 사실을 잘 아는 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자신이 더 노력해보겠다, 내가 끝까지 책임져보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더럽고 추하고 비틀어졌다고 해서 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곧고 바르게, 깨끗하게 만들어가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그 안에 품어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세워가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형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깨끗하고 병들지 않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깨끗하냐에 따라 그에 맞는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한 심령으로 빚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중보하시고 책임지시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

법률 용어에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가 있습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유예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사형이라는 형벌이 집행됩니다.
유예 기간 동안 잘 살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이라는 형의 집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聖徒)는 이 땅에 사는 유예 기간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면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사형 판결을 받고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던 우리가 대(大) 사면을 받아 하늘의 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뤄진 완전한 사면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된 사실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사탄이 주는 생각을 따라 살면서 십자가에서 이뤄진 역사를 집행유예 정도로 삶에 적용시켜서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항상 잘하려는 조바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쁨을 주는 소식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사면된 성도의 거룩함은 이 세상의 어떤 더러운 것과도 섞이지 않고,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는 온전한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렇기에 성화(聖化)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온전케 하셨다는 이 말씀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론으로 이 말씀에 교묘하게 흠집을 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에 짐을 질 뿐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았습니다. 설령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노력해서 벗어야 할 저주가 더 이상 없고, 십자가의 효력이 무효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이미 다 받아버리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하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주인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과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고 말하는데, 그것은 ‘열매를 잘 맺으면 살리고 못 맺으면 버릴 테니 금년에도 두고 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 속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게 참혹한 형의 집행을 일 년 동안 미루어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로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대로 두소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압히에미’로, 그 뜻은 ‘용서하다, 사면하다, 버리지 않고 놔두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형을 당하기 위해 집행 장소로 끌려가는 사형수에게 “당신은 사면이요!”라고 외치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대로 두소서(압히에미),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압히에미’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셔서 외치신 말씀 중에도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외치실 때, ‘사하여 주옵소서’란 말이 바로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사면해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 무화과나무에게 똑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형의 집행을 1년간 미루어 주시면 잘 해보겠습니다’ 하고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년이란 시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참혹히 찍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처럼 성도가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성화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과원지기에 의해 찍힘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과 죄가 온전히 씻어져서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 죄를 기억함이 없는 완전한 사면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름이 되셨다

물질이 죽어서 썩음으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에너지를 가진 것이 ‘거름’입니다.
거름은 죽음이 함의된 단어로,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거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거름이 되었고, 우리가 그 거름을 양분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혀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때를 따라 물을 주며 항상 보호하여 찍히지 않게 하며, 주인이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오직 과원지기에 의해서

신앙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한 나를 발견하고 과원지기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인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일에도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2-13-2024(화) 누가복음 13: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누가복음 13:3,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If you don't repent, you will perish)

* 회개하다(3340) 메타노에오(mĕtanŏĕō)  μετανοέω 스트롱번호 3340

1. 마음을 고치다.  2. 바꾸다.  3. 뉘우치다
발음 [ mĕtanŏĕō ]
어원  /  미래 μετανοήσω, 제1부정과거 με- τε νόησα, 3326과 353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마음을 고치다, 바꾸다, 뉘우치다, 회개하다, 마 3:2, 막 1:15, 눅 10:13, 행 2:38, 8:22, 고후 12:21, 계 2:21, 22, 16:11.


그때 마침
- 이 표현은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을 말해주는 동시에 어떤 예기치 않은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빌라도가...섞은 일
-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예수께 보고되고 있다.
여러명의 갈릴리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그 보고 내용인데 이러한 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극은 당시에 흔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느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고 다만 여러가지 추축이 있을 뿐이다.
1. 사도행전 5:37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2.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처럼 되게 한 사건이라고 본다(23:12).
12. 헤롯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3.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이들 견해는 확실한 증거로써 뒷받침되지 않는 하나의 추축에 불과하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이 말씀은 앞에서 보고한 사람들의 관심(關心)이 빌라도의 악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살자들의 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바,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욥 4:7;-8. 20. 22:4-5. 요 9:1-2).

회개치 아니하면...망하리라
-
'아니라'(*, 우키)고 하는 단정적인 부정의 표연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固定觀念) 즉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편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
여기서 '회개'(*, 메타노에오)는 지난 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깃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마 7:1-5; 롬 3:10-12). 한편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Farrar,Godet), 그보다는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arshall,Lenski).

실로암에서...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
-
예수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는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어상으로는 2절과 4절의 '죄'가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즉 2절(*, 하마르톨로이)에서 와는 달리 4절의 '오페일레타이(*)는 '빚진 자'라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서 '빚진 자'를 '죄인'에 대한 단순한 동의어라고 보는 견해(Marshall)와 열 여덟 명의 희생자들이 성전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Ewald)가 있다.
즉 이들은 빌라도의 수로공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고, 빌라도는 그 공사비를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사용한 것이므로 이 돈을 노임으로 받은 이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부분은 1-5절로 빌라도에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둘째 부분은 6-9절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입니다.
 
첫째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1-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두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극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죽음을 목격한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허겁지겁 달려와서 고했습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 의도는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객사한 이유는 바로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합니다. 
정말 갈릴리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갈릴리 사람들처럼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판단하지 말고 오리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요즘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삼풍백화점 , 성수대교, 무역센터, 비행기사고 , 열차사고, 자동차사고, 화재사고 이런 일들이 죄가 많아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회개라는 말은 히랍어로 “메타노에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 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입니다. 
망하지 않는 지름길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2월 13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13:1∼5
묵상을 위한 주제 : 회개치 않으면 망한다(3절)
성구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으로빌라도에 의해서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죄악이 크고 무겁기 때문에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3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같은 의미의 말씀으로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그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사고와 자연 재해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메타노에오) 라는 단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이며 망하지 않는 지름길이라고 하겠습니다.

♪ 찬양 / 어서 돌아오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시인 필립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는다면 회개를 설교하다가 죽기를 원하며, 만일 내가 강단 밖에서 죽는다면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
당신의 비밀스런 의무를  확실히 실행하라.
무엇을 하든 멈추지 말라.
그것을 소홀히 하면 영혼은 절대 강건하지 못한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골방 문을 먼저 떠난다.

주님과의 비밀스런 교제를 풍성히 하라.
그것은 성도를 풍요롭게 하는 비밀스런 업무이다.

기도가 당신의 아침을 여는 열쇠와 하루를 마감하는 빗장이 되게 하라.

죄를 대적하여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릎을 꿇고 싸우는 것이다. - 필립 헨리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착각이다.
사람들은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나라가 언제 부터인가 커피공화국이 되었다.
커피집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커피집을 오픈하는 사람들은 커피집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 대박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별화 되지 않으면 대박이 아니라 쪽박 찬다.
차별화하지 않으면 쪽박 찬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커피집을 오픈하면서부터 차별화를 위해서 몸부림 칠 것이다.
고객을 만족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시 회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예외 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일침이 놓고 계신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발생했던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을 좀 살펴보자.

첫 번째 사건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복음서에는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이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예수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로 건설을 제안했다.
수로를 건설하려면 재정이 많이 드는데 빌라도는 이 재정을 성전 헌금에서 충당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 바쳐지는 엄청난 수의 가축 희생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전체에서 성전의 물소비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빌라도의 제안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가운데 일부 갈릴리 사람들은 성전의 거룩한 돈을 이방인과 함께 썼다고 흥분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빌라도는 군사들을 풀어 이를 진압했다.
또한 경고의 의미에서 진압하는 과정가운데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성전제물에 섞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이방 민족에 의해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정치적 사건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전 모독과 관련되어 있어서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 분명했다.

​두 번째 사건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이다.

여기서 실로암 망대란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빌라도가 성전 헌금을 이용해서 예루살렘 성 밖에 건설했던 수로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던 망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망대가 무너짐으로 인해 18명의 사망자 발생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말씀처럼 어떤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디선가 재난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건이 자신과 관계되었을 경우에는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닥치는가?’ 라고 말하며 흥분한다. 타인에게 일어나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옛말에 ‘강 건너 불구경 하듯한다’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당장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들은 더욱 심했다. 그들은 누군가 불행한 사건을 당하면 인과 응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을 당했다는 것이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에 저가 시각장애인이 되었냐고 물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각장애인을 죄의 소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건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각은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다. 즉 유대인들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러한 사건을 당한 자들의 죄를 지적하기 바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초점을 바로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두셨다. 다시 말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정치적 살육이나 실로암 망대가 붕괴된 자연적 사건 모두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하셨다. 곧 그 모든 사건들은 ‘그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을 향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5절 말씀을 보라. 두 사건 이야기를 하시고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살육을 당했던 사람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도 너희도 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그들처럼 똑같이 망하게 된다고 말씀한다. 오늘 이 시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코로나 19에 걸린 사람이 우리 보다 죄가 많아서 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살육 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실로암 망대에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다르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말씀하신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망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정신차리라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았다면 너희는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 결과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예수님은 죄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은 죄 값에 따라 형량이 다르다. 형량이 큰 사람은 그 만큼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고 형량이 적은 사람은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다. 살인죄를 지은 사람과 좀도둑이 같은 형량을 받을 수는 없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는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실 때는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다. 큰 죄를 지었던 작은 죄를 지었던 모두가 죄인이다. 덜 죄인은 없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야고보기자는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그 죄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다고 말씀한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향하여 칼을 가신다고 말씀한다.
활을 이미 당기어서 쏠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말씀한다.
얼마나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인지 모른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하신 교회에 대해서는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큰 환난가운데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셨다.
토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이런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이것이 죄인의 끝이다.
죄를 지은 인간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그 끝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과하고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쉬운 것이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쉽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일까?
하나님을 의식하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회개는 쉽다.
인간인지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말은 하지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죄인 줄을 알고 빨리 회개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하기 어렵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니 죄에 대해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니까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회개는 형식적인 회개로 그치면 안 됩니다.
입으로만 하는 회개로 그치면 안 된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유다광야에 있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로 몰려왔다.
세례요한이 몰려오는 그들에게 가장 먼저 외쳤던 말씀이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쳤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라.
여전히 예루살렘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다.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가지고 와서 그 짐승에게 안수하여 자의 죄를 전가하고 직접 잡았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제물을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다 치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좋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세례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다. 왜 이미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을 그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인가? 이는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가운데 진정한 회개는 사라지고 없고 형식적인 회개, 말뿐만 회개만이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대해 말라기 3: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거짓된 모습으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성전 문을 차라리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는 너희가 손으로 어떤 것을 드리든지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사1:13절에서 더 강하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은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회로, 예배를 드린다고 모여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호소하고 계신다.

​짐승 한 마리 잡아서 바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고해성사 한 번 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 시대이다. 죄를 지어도 그것에 대한 대가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니 죄를 쉽게 짓는다. 바울은 죄와 싸우데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다.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죄다.
죄는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 된다.
죄는 사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회개하는 것이다.

이사야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보다 희게 씻어주시겠다고 하셨다. 회개하면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는 부패하고 만다.
회개가 없는 신앙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
회개가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 말뿐인 회개가 하니라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를 할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을 때 진정한 회개를 통해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늘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난을 보는 시각(누가복음 13:1~5)







지진은 말세의 징조 중에 대표적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1에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참고 마 24:7, 막 13:8).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큰’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말세에는 곳곳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8에도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이런 큰 지진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보아서 아는 사람이 있고, 또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다.
보지 않아도 됩니다.
듣기만하면 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삼고, 교훈을 받는 사람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 하찮은 남의 언행일지라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집 일본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지진을 앞에 두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오늘 읽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십시다.

재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총독 빌라도가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저들의 제물에 섞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세상이 이런 흉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수 더 떠서, 실로암에서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비참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2,4절에서 “이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남의 허물은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 나라 일본의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의 참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이 엄청난 일을 통해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화하고자 하는가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재난을 만나면 남의 죄를 생각하거나 원망부터 합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나라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핍니다. 이제 이 재난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1)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의 역사다. 왜 이런 비극이 인류에게 있는 것인가요? 성경은 이 세 가지가 인류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재난과 불행을 피해갈 길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경고와 심판으로 재난을 이 땅에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있는 곳에 재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2)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재난 속에는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재난 속에서 우리의 죄악을 털어내는 심판의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도 믿습니다.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는 사람이 죄를 버립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모든 인생을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은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곳이요, 홍수를 만난 노아의 때와 같았을 것입니다. 남아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래도 남겨두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자비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78:38에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3)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셋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치어죽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사건 뒤에 여러 가지로 사건 자체가 분석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실공사입니다. 돈을 떼어 먹고 엉터리공사를 했다느니, 관리를 잘못했다느니 정부정책이 잘못됐다느니 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망대가 낡았으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든지 보수 공사를 제 때 해야지, 이것은 인재(人災)라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본지진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지진에 대해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첨단장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어째서 지진 징후를 알지 못했으며 경보를 발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가하면 지진의 과학적 규명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경제손실과 득실을 따지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깨닫고 이 재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글자 한자 안 틀리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난 속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재난을 보는 주님의 시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남의 불행이나 재난을 보면 “무슨 죄가 얼마나 커서 저렇게 당할까?”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인과응보론 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어떤 사람들도 그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요한복음 9:2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욥이 당한 고난의 소문을 듣고 위로하려 왔다가 그 고난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는 결국, 욥이 죄 없이 이런 일을 당하겠느냐며 정죄자로 돌아선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재난을 보는 예수님의 시각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재난과 비극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요?

1) 우리도 저들과 같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나, 지진과 쓰나미로 죽거나 손해와 비극을 당한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고, 4절에도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비극을 보면서, 세상의 재난과 비극의 원인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렇듯 비참하게 죽었으나 우리도 저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원래 다혈질이라 자주 반정부, 반 정치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들이 다스리기가 어려워 ‘유대의 화약고’라고 불렀다. 그러니 까불다가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에 치어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공연히 죽었겠는가? 다 죗값이제!”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저 지진을 만난 것이 우상숭배, 배금주의, 성적 타락 때문이라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쉽게 비판하지 말라. 저 사람이 죄 때문에 망했다고 비판하지 말라. 너희도 저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도 저와 같다는 것이다. 남의 죄는 보면서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남이 당하는 고난을 보면서 자신이 당할 고난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3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눅 6:41).

2) 저들이 당하는 재난은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만 죄가 더 많아서 그 모든 재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는 분들은 종종 그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안전벨트 안 했다고 교통순경이 잡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가 걸린 순간에도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 차들이 무수히 지나갑니다. 그러면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왜 나만 잡아요. 저 사람들도 안하고 그냥 가는 데요!” 그러면, 순경이 하는 말이 “선생님, 죄 지었다고 다 감옥 갑니까? 대표로 가는 거지요. 대표로” 그럽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위반한 적이 많지만 그럭저럭 다 넘어가고 가끔씩 걸립니다. 죄지었다고 다 감옥가면 감옥이 세상보다 커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당할 일을 저들이 먼저 당한 것뿐입니다.

여기 갈릴리 사람들이 죽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도처에서 사고로, 질병으로, 전쟁으로, 지진으로 애매하게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만 죄인인가요? 아닙니다.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마치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당한 것처럼 아파하는 애통을 가져야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역사상 폼페이 지진이 유명합니다. 그러면 왜 폼페일까요? 로마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폼페이를 치시고, 그래도 로마가 회개치 않으니 다음에 로마를 치신 것입니다. 모두들 죄악이 관영한 중에 폼페이가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때는 부모 대신 자녀가 당하기도 하고, 내 대신 이웃이 당하기도 합니다. 결코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위태롭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좌파들이 너무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를 짓밟습니다. 안티크리스천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안티들은 세상에 대통령이 기독교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꿇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번은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이 많이 조심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은 메시지입니다. 재난은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지나가는 사건도 아니요 미래적인 사건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귀로 듣도록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눈으로 보게 하시고, 눈으로 봐도 못 알아들으면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재난을 보는 우리의 반응.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재앙을 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요?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3, 5절에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반복은 자비입니다.
먼저 죽은 몇 사람은 우리 모두가 당해야 할 일을 부분적으로 당한 것뿐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 사람이 당한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1. 회개하라.

주님은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일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사고를 보고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가족이 한 번 앰뷸런스로 병원에 실려 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추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저 차에 실려 가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재난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은혜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당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먼저 당함으로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거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6,11을 개역 성경은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다. 거울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개정 개역은 ‘본보기’로 썼다고 합니다.

유다서 1:7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8:23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했고, 디모데전서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십시다.

2. 깨어 있으라.

깨어 있지 않으면 들어도 못 듣고, 보아도 못 봅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결국 회개할 수 없게 됩니다.

누가복음 21:34-36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깨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의식하며 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영적각성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가요?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가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열매를 맺으라.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이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과 일에 열매를 남겨야 할 때이다. 열매를 생각합시다.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는 그 곳에 있지 않았으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일본 지진의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지금 내가 그 일을 보고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금이 복음이요, 지금이 은총입니다.
아직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주 앞에 나와서 이 음성을 듣고 있지 않은가요! 이것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일본의 엄청난 재난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TV가 하나님의 심판을 촉구하는 매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일본이다. 먼 나라가 아닙니다. 강 건너 이웃집입니다. 가까이 일본을 통해 종말이 가까웠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의로운가요? 아니다. 대표로 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말할 시간도 아니요, 비판할 시간도 아니요, 다만 들어야 할 시간이요, 무릎을 꿇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듣고 보았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총입니다. 이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요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다. 우리 오늘 이 시간 한 번 의자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읍시다. 대통령과 마음이 하나 되십시다. 주의 자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마음의 손을 들고 겸손의 무릎을 꿇읍시다.

김익두 목사님이 노방전도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천당’하고 외쳤더니, 그 중에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 여기서는 전도 안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고 은근히 협박을 합니다.
그래서 김목사님 ‘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큰 비가 있고, 뇌성벽력이 있었는데, 벼락이 정자나무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을 웅덩이처럼 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없으니 애꿎은 나무나 논을 때렸겠지요.
만약 하나님이 있어도 눈이 멀었을 겁니다.”
그럽니다. 그래 목사님이 잠시 묵상을 하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김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서당 나왔나? 학교에 다녔나?” 
“학교 다녔지요!” 
“그러면 선생님 손에 뭐가 있더냐?” 
“매가 있지요1” 
“그러면 그 매로 어딜 치더냐?” 
“그야, 칠판을 치거나 책상을 때리지요!” 
“왜 애매한 칠판이나 책상을 치는가?” 
“그야, 아이들이 떠들거나 안 듣고 장난치기 때문이지요!”
그때 김목사님이 냅다 고함을 질렀습니다.
“네 이놈, 다음에는 하나님이 네게 벼락을 때리실 게다!” 
그랬더니, 이 청년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그 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2-12-2024(월) 누가복음 12:54-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대를 분별하라(누가복음 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How is it that you don't know how to interpret this present time?

예수님께서는 천지의 기상을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는 불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이 불어오면 더위가 올 것을 알았습니다.
이와같이 기상은 잘 알면서도 시대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고 있습니까?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특징하는 사상을 "다원주의"라고 합니다.
'다원주의'의 대한 세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둘째는 뉴에이지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을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뉴에이지의 문자적 의미는 "새 시대"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합니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셋째는 동성애와 동성혼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하여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 섭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흐름에 한국에서도 "차별금지법"을 제안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을 교회가 막아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도 결국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생명력이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분별하다는 헬라어는 "도키마조(dŏkimazō. δοκιμάζω)"라고 합니다.
'도키마조'는 "시험하다, 시험하여 증거하다,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라(interpret this present time) Discern the times

분별하다(1381) 도키마조(dŏkimazō) δοκιμάζω 스트롱번호 1381

1. 시험하다.  2. 시험하여 증거하다. 3.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이다
발음 [ dŏkimazō ]
어원 / 미래 δοκιμάσω, 제1부정과거 ἐδο- κίμασα, 완료수동 δεδοκίμασμαι, 1384에서 유래


천지의 기상은...분변치 못하느냐

- '천지의 기상'에 대비되는 '이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선교 활동과 관련된 사건들,
(2) 인간들의 결단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행위(Marshall).
(3)예루살렘의 멸망 또는 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말(Jeremias).
본문은 이러한 제견해들을 종합하여 이해되어야 옳을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시대적 징후를 분별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시대를 분별하여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 태도 때문이었던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의 사람들은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을 불면, 어김없이 더위가 올 것을 알았다. 이렇게 기상은 잘 알아맞히면서도, 시대는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이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이 지금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 쯤 가고 있는지 왜 무관심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이 시대를 분별하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할 때, 우리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한 마디로 ‘다원주의’다.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교회는 다원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싸워야 한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를 살펴보자.

 1.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다원주의가 종교의 형태를 띠고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다.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한 마디로,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우리 시대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책들이 시중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학생들은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해서 학문을 배우기 때문에, 무엇을 전공했든지 간에 대학교를 나올 때는 종교다원주의의 맹신자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가 유일한 구주다”라고 말하면, 콧방귀를 끼고 만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영적인 면에서 심각한 도전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교회는 더욱 말씀으로 무장하고, 진리로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싸워 승리해야한다.

 2. 뉴에이지 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이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뉴에이지를 문화의 한 흐름 정도로만 이해하고 지나가는데, 그것은 피상적인 면만을 본 것이고, 그 본질에 들어가면 문화의 형태가 아니라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문화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영적인 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로운 영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에이지가 무슨 의미인가? ‘새 시대’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가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뉴에이지의 해로운 영적 영향력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3. 동성애와 동성혼(same-sex marriage, gay marriage)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섭리요 성경적인 모델인데,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기까지 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소위 ‘성 평등’이란 용어를 들고 나와서 법으로 명문화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성 평등이 무엇인가?
성을 구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성을 자신이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태어날 때 갖게 되는 생물학적인 성의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정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양성평등’은 인정하지만, 성 평등은 인정할 수 없다! 양성평등이 무엇인가? 남녀를 차별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하자는 것이다. 이는 이미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다(헌법 36조 1항). 동성애를 관철하기 위해서 양성평등을 성 평등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녀의 평등은 마땅하나, 모든 성이 평등할 수는 없다!

또 한 가지, 동성애,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의 개정을 주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기존의 차별금지법(헌법 11조 1항)에다가 ‘개인의 성적 지향’ 차별금지 등의 조항을 슬쩍 포함시켜놓고 있다. 이는 동성애, 동성혼을 비롯해서 온갖 변태적인 성적 태도들에 대해서도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성 평등과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되면, 학교에서는 성교육시간에 동성 간의 성관계에 대해서도 가르쳐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군대에서는 동성애자를 제재할 방법이 없게 되고 군사기와 전력은 크게 저하될 것이다.

영국의 기독교변호사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동성애 관련 법제화를 못 막으면, 교회가 세상에 짓밝히고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2만 명 넘게 나가 있는 해외선교사들도 다 철수해야합니다. 앞서 영국은 성 평등법 통과 후 출석교인이 2%가 안 될 정도로 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했는데, 더 이상 선교사를 내보낼 능력이 안 되어 빠른 속도로 철수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유능한 일꾼들을 선교사로 내보낼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남아서 차별금지법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최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통한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시대를 분별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이 시대를 변화시켜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노년 삶의 질을 향상하는 방법으로 ‘섹서사이즈’(sexercise)를 적극 권한다.
섹스(sex)와 운동(exercise)을 조합한 신조어다.
그 주제는 ‘침대에서 잠자는 것 이상을 얻으라’는 거다.
“섹스는 모든 근육 집단을 사용하며 심장과 폐를 활발히 움직이게 하고 시간당 약 300㎈를 소모한다”고 설명한다.
한술 더 떠 “올겨울의 정기적인 섹스가 다가오는 봄에 더 훌륭한 몸매와 더 젊어 보이는 용모로 이어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다 늙어서 무슨…’ ‘아휴 남사스럽게…’ ‘거 참. 주책맞네…’ 하며 외면할 일이 아니다.
친구도 아닌 며느리를 민망스럽게 한 주인공은 사실 내 아버지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전립선암을 앓고 계시다.
20년도 넘게 약을 잡수신다.
나는 아버지가 성생활은 졸업한 줄 알았다.
그런 내게 아버지의 고백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신비로웠다.
내 친구들 몇은 비아그라를 복용한 지 오래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아그라를 처방받은 흔적도 없다.

도쿄 노인의학연구소가 2007년 87세 노인의 건강과 체력을 조사했더니 1977년 70세에 해당했다.
30년 사이 17세가 젊어졌다.
요즘엔 자기 나이에 0.7을 곱하면 아버지 세대의 신체· 정신· 사회적인 나이와 맞먹는다고 한다.
지금 내 아버지 나이 93세에 0.7을 곱하면 겨우 65.1세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부친은 ‘장청년(長靑年)’이 맞다.
그동안 나 자신의 젊음에만 관심이 있었지 아버지 나이를 놓치고 있었다.
불효가 딴 게 불효가 아니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은 신석기시대 29세에서 17세기 유럽인은 51세였다.
이 기준으로 할 것 같으면 마르틴 루터의 63세는 오늘날 호모 헌드레드에 해당한다.
그는 죽음을 앞둔 며칠 전까지도 아내 폰 보라와 섹스를 주제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루터는 “일주일에 두 번 아내에 대한 의무로 섹스를 하면 남편은 물론 아내에게도 이롭다”는 부부섹스 규칙까지 제안했을까.
루터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침실에까지 확대한다.

“아담의 타락에서 잉태되어 인간의 불순한 본능으로 귀착돼 버린 성욕의 허물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것을 눈감아 준다.
결혼생활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섹스는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악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고(故) 안병무 교수는 어느 날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에 부부가 성교하는 중인데 하나님이 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면 손을 저으며 하나님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들과 며느리가 가정사역자로 살아가는 일을 삶으로 응원해준 아버지가 고맙기 그지없다.
부모님은 가정사역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성질’만 빼고 내 아버지를 살아내야 한다. 맞다.
침대는 잠자는 것 이상의 ‘스위트 홈’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 보자기다.




2-10-2024(토) 누가복음 12:3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을 던지러 왔노라(누가복음 12:49)

내가 불을 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I have come to bring fire on the earth, and how I wish it were already kindled!

성경에서 불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신명기 4:24)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 열 명이 없으므로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사도행전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예수님께서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한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셋째는 불은 하나님입니다(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our "God is a consuming fire."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했을까요?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는다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싸움을 "영적 싸움"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 종교 사회이었습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신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는 유일신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참람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번에 칼로 무를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놔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 하고 비난합니다.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합니다. 
결국 그 결과는 다툼과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을 소유한 영의 사람과 육체를 기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기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이 불과 같다고 할 때 불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용광로와 불타는 벌판의 불처럼, 성령의 불은 하나님의 강력한 영광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불같이 강력하게 임재하실 때에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구원입니다.
성령의 불은 쭉정이에게는 심판의 불이고, 알곡에게는 구원의 불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동일한 불이심판의 불도 되고, 구원의 불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불이 구원의 불로는 어떻게 임합니까?

* 흠향의 불 :

흠향의 불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영광으로 강력하게 임재 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엘리야의 제물을 흠향하셨습니다(왕상 18:33).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임재 하셔서 참 하나님 되심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이 됨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력한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공식 예배와 삶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강력한 임재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제련의 불 :

성령의 불은 흠향의 불이기도 하지만 제련의 불이기도 합니다.
말라기 3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의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용광로 불 속에 넣으셔서 불순물을 제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속에 교만과 음란과 미움의 불순물을 태워 없애버리십니다.
불평과 불만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감사와 경배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 파급의 불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경우 성령의 불이 불타는 벌판의 불길처럼 번지는 파급의 불이 됩니다.
성령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담력과 열정을 줍니다(행 4:31).
성령의 불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함으로 복음이 번져나가게 합니다.
성령의 불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겁게 해서 복음 열정의 불이 번지게도 합니다(눅 24:32).
성령의 불이 이 경우 열정의 불로 번집니다.
성령의 불은 마음에 감동을 주어 인도함으로 그 불이 번지게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감동을 주어 이것저것을 하게 하는 인도의 불로 번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불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번졌습니다.
성령의 불은 3세기 이내에 당시 로마제국 전체를 복음 앞에 무릎 꿇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게 번졌습니다.
성령의 불을 흠향의 불, 제련의 불, 파급의 불로 확실하게 체험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확실하고 강력한 증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행 1:8).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시면서 이 세상에 불이 붙는 것을 예수님은 그토록 원하고 계신다.
49절의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는 불이 붙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 뿐 불은 아직 붙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불이길래 예수님은 불이 붙기를 그토록 열망하고 계시는가?
50절에 주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다.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무엇이기에 그 세례를 받기까지 답답해하시는가?
그러면서 51절부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을 하시기 시작하는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시면서 “이후로는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이,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와 며느리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37)
도대체 불은 무엇이고 세례는 무엇이며 왜 집안 가족들이 이렇게 싸우고 다툰다는 말씀인가?

엡 2:14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골 1:20)
그리고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주님은 스스로 분쟁을 조장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 믿으면 가정이 화목해야지 이렇게 아비와 자식이 어미와 딸이 시어미와 며느리가 분쟁한다면 누가 예수 믿겠는가?

목사들이 설교할 때 예수 믿으면 가정에 싸움난다고 하는 말씀을 들어 보았는가?
본문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가를 확정해야 할 것이다.
49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불을 던지러 왔다고 했을 때 불은 어떤 불인가 하면 5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쟁이다.
주님은 지금 분쟁의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분쟁의 불이 붙지 않고 있다.

왜 주님은 집안을 분쟁시키지 못해서 애가 타시는가? 남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주님을 생각해 보셨는가? 남의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그렇게 원하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평화롭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왜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50절의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고 했다. 그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의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받으실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남의 가정 파탄 내는 불세례이다. 이 불세례는 다름 아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는 세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는 것이다. 불이 붙어 아비가 자식을 어미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미가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버리면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대 사회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사회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파버린다.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인다. 그들의 사고에서 유일신 사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참람죄를 걸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다. 단번에 칼로 무우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고 하고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하니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본문의 말씀을 정리하면 예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시면서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셨는데, 그 불이 다름 아닌 성령의 불을 의미했다. 그 성령의 불은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십자가에 죽지 않은 상태이고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게 될 때 하나님과 성령이 임한 성도는 화평을 이루는데, 하나님과 화평 된 자는 이제 사단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들 즉 사단의 종들과는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10: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했다. 마10:36절에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 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천륜을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령은 천륜을 거스린다. 둘 사이는 건너지 못할 강이 가로 막고 있듯이 한족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마귀가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집안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예수는 믿는데 엉터리로 믿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지 않은 영적 싸움을 하게 된다.

여기서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은 눈뜬 소경이고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저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먼저 본 자가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예수 믿는 것을 취미생활 수준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니까 능력은 절대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제대로 믿어버린다면 사단은 역사할 것이고 믿지 않는 불신 가족들은 적지 않게 괴롭힐 것이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에서 부터 '호적을 판다', '이혼을 한다' 까지 갈 것이다.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면 친지들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고 친지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이웃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등천하는 이 땅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불을 던지러 오신 주님의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지상 교회는 마귀와 싸우는 전투적 하나님 나라이다. 주님의 승리를 내 승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부득이하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고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 입고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불세례를 받기 전의 답답함을 우리가 느끼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의 승리가 나의 것이 되기까지 우리는 그 답답함과 싸우며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은 이상 영적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승리하기 위한 모든 영적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예수님의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습니다(49-50)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는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나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천국에서 영생으로 곧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주어지기에 불은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붙이기 위해 죽음의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말씀의 불을 지폈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을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그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믿는 자의 심령마다 오시고 구하는 자마다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해야 하고, 최선과 차선을 분별해야 하고, 선과 악을 계속 분별하여 가까이할 것과 멀리할 것을 계속해야 하고, 예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한 가운데 주님 편을 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깨달아 감사한 마음과 기쁜 마음,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잘 감당하도록 합시다.

2. 진리 위에 바로 섭시다(51-53)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고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이 분열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와 불신자 간에 바른 관계가 지속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과 육체적인 자는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 평화는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선행 요건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 간의 갈등과 분열을 필연적으로 동반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쟁입니다. 복음의 계획과 그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 주고 거룩한 사랑 안에 함께 묶어주는 것으로, 만일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연 그렇게 되어질 것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어 복음이 분쟁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쟁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이 이성과 감정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의 가장 근거 있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계속 조명하며 우리의 생각을 이성이 아니라 말씀으로 바꾸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둠과 빛은 상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취면 어둠은 도망가야 합니다. 동시에 빛이 빛을 발하지 않거나 못하면 어두움 속에 묻혀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 위에 서서 말씀을 통하여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3.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합시다(54-57)

팔레스틴에서의 비는 지중해의 습도 높은 바람에서 기인하는바 서쪽 지중해 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곧 비가 올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바람은 남쪽의 사막 지역에서 불어왔는데, 팔레스틴 지역을 가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위와 가뭄이 시작되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하시면서 질책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종교 윤리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상을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상황을 통하여 사회 속의 사회인들은 사회인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 지도자들대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영적 분별력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기상 변화에나 민감하고 자신의 안일함을 위해 로마의 정치적 상황에만 재빠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구약에 직간접으로 450번이나 예언된 메시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교회와 우리의 모습을 분별하여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때는 악한 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악한 시대이기에 세월을 아끼도록 말씀합니다. 하지만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기에 신랑 되신 예수님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머뭇머뭇하지 말고 옳은 것에 대하여 선택하였어야 합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수많은 유혹의 손길에서 결단하여 뿌리쳐야 합니다. 시대를 바르게 분변하여 죄악 된 길에서 단호히 돌아서야 합니다.

결단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4. 회개만이 살길입니다(58-59)

예수님은 58절에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하십니다. 이는 채무자가 법정에 서기전에 어떻게 해서든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정에 서기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늦기 전에 시대의 징후를 분별하여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법정 밖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쌍방이 서로 합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는 예수님의 댓속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 5장에서는 하나님과 화목케 됨을 말씀합니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요, 긍휼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우리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불에서 건짐을 받아 영원한 생명 된 길을 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영혼은 밝게 되어 세상을 밝게, 소망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 만이 살길이요 이 길을 가는 방법입니다. 죽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못하면 하나님의 법정에 서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의 뜻은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긍휼하심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회개만이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성령세례와 불세례

주님은 물과 성령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던지신다 하였다.

물과 불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물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로는 마임이라 한다. 물은 땅에도 하늘에도 있으며 처음 땅에는 깊은 샘(테홈, 깊음)이 있었고 그곳에 물이 있었으니 물의 얼굴에는 엘로힘의 영이 품고 있었다고 한다(창 1:2). 물과 성령의 관계는 태초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었으며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물과 영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으며(요 3:5) 제자들에게 너희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으나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하셨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 하셨으니(요 3:6) 물에서 난 것이 육이요 또한 물이다. 이 육은 물에서 났으나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하였다(벧후 3:5). 이와 같이 태초부터 물은 육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땅의 물은 아래 사상이요 하늘엔 윗물, 높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이 하늘의 높은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뜻을 거슬리어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어 땅과 모든 생물을 물에 수장시키신다. 노아 때에 홍수로 지면에 기식하는 모든 것을 멸하셨으나 노아를 비롯하여 여덟 목숨을 건지셨다. 그리고 노아와 그 후손과 방주에서 나오는 모든 생물과 언약을 정하셨다. 그것은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으며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어 땅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언약의 표적이라 하셨으니 앞으로는 물이 아닌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창 9:8~17).

인자는 밤에 도적같이 오시는데 그날에는 하늘과 초등 학문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태워지리니 의로운 삶을 산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된다고 한다(벧후 3:10~13). 이로 보건대 물과 성령의 관계와 물과 불의 관계에 물이 항상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은 위에 높은 사상이 깨우쳐 주고 품어 주어 일정한 기간을 훈육하여 그 물(사상)에서 나오게 하시는데 이를 세례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물과 세례를 이렇게 설명한다.

"물은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부도덕함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선한 양심이 하나님에 이르고자 질문하는 것이라(벧전 3:21)."

구원은 목숨이 받게 되는데 물에 잠겼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것을 세례라 한다. 둘째 날에 노아 때 홍수로 잠겼다가 나오며 셋째 날엔 소돔 고모라의 불세례에서 살아남은 믿음의 사람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넷째 날엔 요단강을 건너면서 세례를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고 다섯째 날엔 또 다시 요단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게 된다. 주님도 다섯째 날에 요단강 물로부터 올라오시게 된다.

다섯째 날까지의 물에서 나온다는 것은 물로써 거듭남이라 하는데 다섯째 날까지의 물, 곧 사상이란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법이다. 둘째 날에 홍수를 내려 지면의 죄악을 쓸어버리시고 무지개 언약을 주시고 셋째 날 아브라함의 믿음에 언약하셨으며 넷째 날 죄 있는 인생들에게 율법을 주시어 사망을 이루시는 사상이 다섯째 날까지의 사상이며 물이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다.

이제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에서 거듭남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이를 바울의 주석을 빌리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오도록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했으니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인데 불세례와 병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불 심판의 법인가? 성령세례란 죄와 사망의 법(사상)에서 해방되어 성령으로 사는 자를 말하는데 이 자를 연결된 소식을 가진 자라 말하고 있다.

주님이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연결된 소식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고 하셨다. 이로써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임하시어 성령세례를 주신다.

"오순절 날을 함께 채우려고 저희가 모두 하나 되어 그곳에 있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의 몰아치는 것 같은 울림이 나서 저희 앉아 있던 집 전부를 가득 채웠으니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져 저희에게 보이더니 각 사람 위에 앉았으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케 되어 성령이 발표하도록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혀)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온 자들, 즉 요한의 세례로 나온 자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는 동시에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지는 역사와 함께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게 된 것이다. 혀(방언)가 불이니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자신의 혀가 자신을 태운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상이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며 지옥에 속하여 불살라진다(약 3:6)."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불이 있는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을 불 못 또는 둘째 사망이라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불지옥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인데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사도 요한도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불속에 태우신다 하였으니 불세례는 쭉정이를 태우는 심판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쭉정이를 태우는 불 있는 지옥이 어느 장소에 있느냐다.

몸 밖에 있다면 주님께서 던지는 불세례는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몸 안에 있다면 반드시 불세례를 받아서 내 몸 안에 이롭지 못한 쭉정이와 더러운 사망의 사상들을 깨끗이 쓸어서 불지옥에 던져 태워야 한다. 그럼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도 얻는 일거양득의 효과적인 증인의 삶을 살도록 계획하신 것이니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동시에 받기를 권면한다.

주의 날(인자의 날)은 밤에 임하시므로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 날에 주님을 만난 자들은 모두 깨어서 옥을 지키던 자들이었다. 도적이 어느 옥에 올지 모르기에 항상 깨어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 성령세례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니 그날 하늘과 땅이 불타고 초등 학문이 불에 녹아질 때에 의로운 삶을 사는 자는 소식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 안에 도적같이 도착하리니 그날 안에서 하늘 삶이 굉음으로 지나갈 것이며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풀어질 것이며 땅과 그 안에 행위가 불 태워질 것이다. 그런즉 이 모든 삶이 풀어지나니 어떻든 너의 삶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안에서 시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날의 출현을 기다리고 서두르면 그날을 인하여 하늘 삶이 불붙어져 풀어지고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녹아지게 된다. 나의 삶도 그의 연결된 소식을 좇아 새 하늘 삶과 새 땅을 기다리나니 의는 하늘 삶 안에서 안주한다(벧후 3:10~13)."

주님께서는 나와 동행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뽑아서 짊어지고 나와 동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형 틀이니 사형장에 있어야 하지만 아예 사형 틀을 뽑아서 짊어지고 다니면서 죽을 일이 생각나거든 바로 죽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고 불붙은 지옥을 소유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시며 이 자에게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 연결된 소식을 주시어 의로운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시어 둘째 사망에 온전히 들어가지 않고 사망에 관한 부분만 태워서 불 못에 던지므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https://nykcn.org/serye-xi-li-mataebogeum-3-11






불(4442) 푸르()


던지다(906) 발로




- 본문에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것은 '불'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Grundmann, Ellis).
2. 영적 활동(Bengel,Vincent).
3. 심판 (Schlatter,Grasser).
4. 로마의 침략(Clark).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정확한 것인지를 판별하기란 어렵지만 앞의 비유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건대 (3)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이 불이...무엇을 원하리요

- 이 문구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하다.

1.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오(Bleek,Wette).
2. 내가 무엇을 하리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Alford,Meyer,Stier).
3. 이 불이 붙었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Plummer).
4. 이 불이 이제 붙어지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가?(Marshall).

이 가운데 "이 불이 이제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에 따라 (3)과 (4)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심판을 내리러 오셨는데 그 불이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어떤 화가가 복음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복음에 대한 그림은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침몰한 배에서 선원 한사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두 손으로 바위를 움켜잡고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참으로 생동감이 있고 세상 풍파 속에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를 때 산 소망이 주어진다는 뜻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는 그 그림을 보다가 다시 한번 더 붓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으로는 복음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완전하게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는 붓을 들고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냥 얼핏 보기에는 똑 같은 그림이었는데 앞에 그린 그림과 한군데 틀린 곳이 있었습니다.
앞에 그린 그림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바위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지만 뒤에 그린 그림은 한 손은 바위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자기만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다른 영혼들을 전도해서 함께 천국 가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 것입니다.


옛날에 석가님과 공자님과 예수님 세 분이 산보를 하는데 한 청년이 못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공자님이 말하기를 "허어, 군자는 대로 행인데 어찌하다 물에 빠져 고생을 하는고?" 하더랍니다.
그 다음에 석가님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물에 빠져 고생하는고?" 했답니다.
그 뒤를 따라가던 젊은 예수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그 청년을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한낱 우스운 얘기 같지만은 우리 기독교는 도덕적인 책망 이전에, 철학적인 윤회설 이전에 물에 빠진 사람을 나가서 건져 주는 사랑과 자비의 종교요 우리의 잘못을 책하지 않고 용서해 주고 믿음을 주고 돌보아주는 은총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요단강 계곡 경사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화창한 날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각기 자기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꿈이 있었어. 나는 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거기서 하 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쓰여졌으면 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큰 봉사를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알게 될 꺼야."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내 꿈이야.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해변으로 끌려나가서 큰 범선이 되어서 지중해 를 내왕하는 사람들을 도와 날라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모험을 하게 하고 저 로마의 풍요함을 이 땅에 심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 때 세 번째 나무도 늘어진 가지를 쳐들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이 너희들하고는 좀 달라. 나는 여기 그대 로 혼자 남아 있고 싶어. 여기서 내 가지를 하늘로 향하여 치켜들고 산을 오르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눈을 들어 하 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여름에 햇빛이 쪼일 때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이 내 그늘 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나무 그루에 도끼가 와 닿았습니다.
그 나무는 높은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언덕 에서 끌려 내려 왔습니다.
목수는 그 나무를 받아서 조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의 재목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이 나무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나무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어느 집의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들이 핥으며 비를 맞아 시들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그 나무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낡아빠진 구유가 되다니"하며 한탄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도 잘렸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 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큰 범선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를 싣고 다니는 작은 어선이 되었습니다.
매일 바닥에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싣고 다니는 조각배가 된 그 나무는 절망에 가득 차 자 기의 신세를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도 역시 베어져서 그 언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목수들의 손에 의해서 그 당시 중한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인 십자가로 만 들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나?"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하늘에 별 하나가 나타나서 그 말구유 위를 비추고 구유 위에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이 한 아기를 낳아 눕혔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건축물도 그 구유와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 습니다.
고깃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작은 바다에서 고기나 싣고 다니던 이 배는 자신의 삶이 시간 낭비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작은 배에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를 제단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이 작은 배는 세상의 어느 큰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십자가 된 나무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딴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땅의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나무는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 나무는 언덕 기슭에 있던 평범한 나무였지만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에게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쓰일 곳이 어딘지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삶의 성공이란 이것을 찾아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거기에 바쳐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의 자세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2-9-2024(금) 누가복음 12:3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다리는 사람(누가복음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to return from a wedding banquet, so that when he comes and knocks they can immediately open the door for him.

영국 리버풀대학의 로인 심리학자 브롬리(D. B. Bromley)는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며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며 보낸다"라고 했다.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볼때 60년을 늙어가며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의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며 지내는 것일가?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에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보았을 때 일생동안 어떤 일에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며 지내는지 활동별로 비교한 기사가 게재된바 있다. 이는 영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로 문화가 많이 다른 우리 일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수 있고 세대에 따라 소비하는 시간의 형식도 크게 다를수 있지만 그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평균수명 80년은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701,280시간이 된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 = 700,800시간에 윤달인 해 20년의 24시간 X 20년 = 480시간을 더하면 된다.

"표"에 따르면 일로 지내는 시간이 26년(227,760시간)으로 가장 길게 나타났고 아침에 깨여날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잠자는 시간은 평균 25년(239,000시간)으로 2위였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합쳐보면 평생 시간의 64% 가까이 된다. 이는 하루 24시간에서 15시간 반이 넘는 시간으로서 우리가 하루 쓸수 있는 나머지 시간은 8시간 반 정도라는 것을 알려준다.

TV를 보는 시간이 10년으로 하루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이상으로 3위로 나타났고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양분의 공급을 위한 식사나 간식을 하는 시간이 52,560시간(6년)으로 4위에 있다.

전화통화시간이 4년으로 그 뒤를 잇고 이는 하루중 1.2시간을 전화통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여준다. 스마트폰사용이 확산되고있는 현실에서 그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3년으로 6위로 나타났고 특별한 생각 없이 지내는 시간과 화를 내며 지내는 시간이 2년으로 같게 나타난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남성과 녀성에서 차이를 보이는것은 우선 주방에서 일하는 시간으로 녀성이 2년 5개월, 남성은 1년 3개월로 차이를 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외모를 가꾸는 몸단장 시간(거울을 보는 시간)이 녀성의 경우 평생 136일로 남성의 46일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것으로 나타난것이다. 그에 비해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는데 평생 들이는 시간은 남성이 1년인데 비해 녀성은 0.5년으로 2배의 차이를 보이는것도 흥미로왔다.

아쉽게도 조사항목중 미소짓는 시간은 88일로 꼴찌로 나타났다. 미소짓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씩 더 가진다면 1년에 3,650분, 약 60시간으로 2.5일 정도가 된다. 이는 40세인 사람이라면 80세까지 약 100일로 조사에서 나타난 평생의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된다.

이렇듯 우리 삶은 평소의 시간관리에 대한 마음가짐에 따라 크게 변할수 있다. "행복하기때문에 웃는것이 아니라 웃기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도 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기다리다(4327) 프로스데코마이(prŏsdĕchŏmai) προσδέχομαι

1. 집어 올리다.  2. 기다리다
발음 [ prŏsdĕ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εδε- χόμην, 제1부정과거 προσεδεξάμην, 제1부정과거수동태 προσεδέχθην, 4314와 120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집어 올리다, 받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눅 15:2, 행 24:15, 롬 16:2, 빌 2:29, 히 10:34.
2.  기다리다, 기대하다, 눅 12:36, 행 23: 21, 딛 2:13.


거룩한 성도(벧전 2:9)
거룩한 성전(고전 3:16)
하나님의 자녀(요 1:12)





깨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역사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이 깨어나야 한다
셋째는 교회가 깨어나야 한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의 수가 부족하여 멸망의 불에 의해서 무너졌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찾는 교회와 지도자들의 수가 부족하여 시련과 고통을 겪은 후에 다시 일어서야 한다면 불행한 역사가 될 것이다.

- 깨어 있으라 / 깨어 있다는 말씀의 원문 뜻은 = 주의를 기울이다. 준비하고 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시리란 구약의 예언 횟수는 456회
주님의 재림 횟수는 신구약 도합 1,518회(신약에만 300회)

1189장, 31073구절
초림에 대한 예언 109구절
재림에 대한 예언 224구절
모두 333구절




깨어 있음의 본질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정, 경주, 싸움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순례자로서, 멸망의 성으로부터 천성을 향하여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갑니다. 이 여정은 온갖 위험과 시련, 유혹의 덫이 도사리고 있는 낯선 땅을 지나는 나그네 길과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경주자로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마치기 위해 모든 방해 요인을 극복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군인으로서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의 대장이요 왕이신 예수님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여 우리를 대적하는 죄와 세상,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순례자요, 경주자요, 군인인 신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의 습관을 묵상과 기도처럼 잘 알려진 영적 훈련과 나란히 강조하면서도, 특별히 깨어 있음은 다른 습관들을 예리하게 유지해주는 습관으로 보았습니다. 즉 깨어 있음을 게을리할 때 다른 영적 습관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집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에 관해 가르칠 때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존 플라벨은 이 구절을 주제로 쓴 책의 서론에서 “회심할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고, 회심 이후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깨어 경계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이 용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말 그대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경성’(警醒)이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시 127:1; 히 13:17). 운전자에게 졸음은 선택 사항이 아닌 것처럼, 신자의 삶에도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물리적으로 깨어서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음은 정신적, 영적 의미일 때가 더 많습니다. 즉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 있어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어 있음은 일시적인 의무가 아니라 긴급하고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시기를 분별하는 신자들에게 ‘잠에서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롬 13:11). 어두운 밤과 같은 이 세상이 끝나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밝아올 새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깨어 있음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밤에 적의 후방을 노리기 위해 고공 침투 훈련을 받는 공수부대처럼 행동해야 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여객기에 탑승한 승객처럼 행동합니다. 위험을 긴급하거나 실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시 주의 사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고 금새 잊어버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교훈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눅 8:18)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2:1은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우리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있음에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살피는 일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눅 2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함께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끝으로, 깨어 있음은 특히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려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히 12:2). 우리 자신만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유혹에서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깨어 있음의 세 번째 요소는 ‘경계’입니다. 파수꾼은 깨어서 주의할 뿐만 아니라 적군이 침투하지 않는지 유심히 살피며 지킵니다. 신자가 파수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대적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 육신, 마귀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원수는 세상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말씀하고, 세상의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약 4:4)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치, 문화 체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두 번째 원수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울이 종종 “육신”으로 언급하는 “내주하는 죄”입니다(롬 7:18-20; 갈 5:16-17,24). 우리 내면에서 솟구치는 육신의 욕망에 미혹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는 스파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은밀히 숨어서 우리를 배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세 번째 원수, 가장 큰 원수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와 그의 명령을 받는 악한 영들입니다(엡 6:12).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4) 깨어 있음의 마지막 요소는 ‘기대’입니다. 경계가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면 기대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대를 시편 130:5-8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시편 저자는 자신을 날이 새기를 고대하며 한밤중에 불침번을 서는 파수꾼에 비유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5-8).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말씀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영혼의 태도입니다. 그런 영혼은 주제넘게 서두르거나 나태함에 빠져 죄를 짓거나 불신앙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이 올 것을 확신하며 자신의 위치를 굳게 지킨 채 어둡고 긴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자는 희망에 찬 기대를 품고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깨어 있음을 종말론적인 기대와 연결지어, 재림하실 그리스도께 생각을 집중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곧 깨어 있음이란 항상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줄곧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저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 모든 것을 과거에 이루어진 그분의 승리와 미래에 있을 그분의 재림이라는 영광스러운 빛에 비추어 생각하는 태도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랑이신 주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활기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깨어 있음은 네 가지 요소(경성, 주의, 경계, 기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도덕적인 원수들(세상, 육신, 마귀)을 경계해야 하고, 주님(그분의 약속과 재림)을 기대해야 합니다.

점검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정이자 경주요,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이자 경주자요, 군인입니다. 이런 비유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비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깨어 있음에 관하여 청교도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이 정의를 꼼꼼하게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깨어 있음이란 … 낱낱이 조심하면서 부지런하게 하나님이 지정하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 우리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사탄의 전략과 전술을 살펴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기회에 얽혀들지 않는 것이다.”

3.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4. 여러분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경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가장 필요한지 깨닫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5.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더욱 기쁘고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인....기다리는 사람

- 13:25와 마 25:11 에서는 주인이 문을 관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상황이 설정(設定)되고 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으므로 본문의 비유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실감나게 들렸을 것이다.
여기서 '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앙의 주(主)로서의 예수를 부를 때 많이 사용되는 말이나(마 26:22),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되었다(막 13:35).
그리고 '돌아와'의 헬라어 '아날뤼오(*) 문자적 의미는 '떠나다'이다(빌 :23; 딤후 4:16).
그러나 본문의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가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할 때는 집으로 떠나가는 것이 되고 그 주인의 집을 중심으로 할 때는 돌아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언제 오실지 알수는 없어도 반드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늘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재차 강조한 내용이다(마 25:1-13).



신앙생활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막연하게 시간만 흘러가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간을 성경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비록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기다리는 사람(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이라고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로마의 기독교 탄압이 심각하던 시대에 지하 땅굴 속으로 들어가(카타콤) 생활을 하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 북한 땅에서 지하교회 성도들은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언제 붙잡혀서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을지 알 수 없는 환경에서 더욱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탈북자들을 돕던 중국 연변의 어느 선교사의 놀라운 이야기가 새롭게 뇌리를 스쳐갑니다.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 탈북자들을 돕는 선교사를 만나 먹을 양식과 성경을 요구합니다.
이때 그 노인의 처참한 모습이 마음이 뭉클해진 선교사가 노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어르신 원하시면 제가 남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잠깐 하나님께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왔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남한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할 일은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네 믿음을 지키는 것이란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이제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마지막까지 내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북한 땅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 노인의 모습에서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구나!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난는 그 노인처럼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을까?
두렵고 떨리는 몸과 마음을 다시 내 믿음을 추스려야 하겠습니다.

주여,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찾아 오셨네









2-8-2024(목) 누가복음 12:22-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누가복음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
For the pagan world runs after all such things, and your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세상 사람들은 염려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맡겨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에피립토(ĕpirrhiptō)  ἐπιῤῥίπτω 스트롱번호 1977

1. ~위에 던지다.  2. 눅 19:35.
발음 [ ĕpirrhipt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πέριψα, 제2부정과거수동태 ἐπερρίφην, 1909와 449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에 던지다.
  a.  [문자적으로 : 옷에 대하여] 눅 19:35.
  b.  [상징적으로] τ. μέριμναν ἐ. ἐπὶ θεόν: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다, 벧전 5:7.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솰라크(shâlak) שָׁלַךְ 스트롱번호 7993

1. 히필형.  2. 던지다. 3. 물리치다
발음 [ shâlak ]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뜻풀이부

I. 동사 히필형
 1. 동사 던지다, 창 21:15, 민 35:20, 22
 2. 동사 물리치다, 버리다, 왕하 7:15, 겔 20:8, 전 3:6.
  a. 동사 [אֶל을 수반하여] 창 37:22, 민 19:6, 신 9:21, 렘 26:23.
  b. 동사 [בְּ를 수반하여] 창 37:20, 출 32:24, 미 7:19.
  c. 동사 [עַל을 수반하여] 삿 9:53, 욥 27:22.
3.동사 굴복시키다, 뒤엎다, 렘 9:18.
  a. 동사 [주][비유적 표현] 욥 18:7.
  b. 동사 호팔형 הָשְׁלַךְ: 내쫓기다, 사 14:19. [בְּ와 אֶל을 수반하여] 삼하20:21, 렘14:16, 겔16:5. [לְ을 수반하여] 버림을 당하다, 렘36:30
  c. 동사 [주][비유적 표현] 시 22:11(10)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ἐπί 스트롱번호 1909

1. ㉠ ~을 다스리는
발음 [ ĕpi ]


ῥίπτω 스트롱번호 4496

1. 던지다.  2. 맡기다. 3. 놓다
발음 [ rhiptō ]

뜻풀이부

1. 던지다, 맡기다, 놓다, 뉘우다[사나움이나 강렬함을 내포하지 않고], 마 9:36, 15:30.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 자기의 염려를 떠맡길 수 있다.

베드로전서 5:7의 원문은 "잊어버리는 것은 생각에서 지우라는 의미가 아니다. 행동에서 없이 하라는 말이다."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도
초대 교회 때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름은 티테디오스 아메림노스(Titedios Amerimnos)이다.
이 이름의 앞부분은 고유명사이며, 뒷 부 분은 “걱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 단어의 뜻이 반대가 되게 하는 부정 접두어인 헬라어의 문자 알파가 앞에 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이방신을 믿고 있었던 사람인데 그가 구원받고 예수의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코 걱정하지 않는 사람 티테디오스(Titedios)”라고 불리어졌던 것 같다.
ejpirivptw는  ejpi(위에) + rivptw(던지다)이다.
그럼 무엇 위에 던져야하는 가?
말씀 위로 던져야 한다(믿음이다.)
예수 위로 던져야 한다(기도이다.)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결의 key가 되시기 때문이다.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What the people of the world seek)

'세상 백성들'(타 에드네 투 코스무. τα εθνη του κοσμο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1934) 에피제테오(ĕpizētĕō) ἐπιζητέω

1. 탐색하다.  2. 누가 4:42.  3. 묻다
발음 [ ĕpizētĕō ]
어원 / 미완료 ἐπεζήτουν, 제1부정과거 ἐπεζήτησα, 1909와 221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탐색하다, 찾다.
  a. [문자적으로] 눅 4:42, 행 12:19.
  b. 묻다, 알기 원하다, 행 19:39.
  c. 토론하다, 논쟁하다, 논란하다.

2. 애써 노력하다.
 a. 바라다, 원하다, 마 6:32, 눅 12:30, 행 13:7, 롬 11:7, 빌 4:17, 히 11:14, 13:14.
 b. 요구하다, 갈망하다, 마 12:39, 16:4.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너 투 코스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의당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호멧이 군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이야기입니다.
"내일 여러분이 다시 모여 주시면 저 앞의 산이 내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도록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마호멧은 외칩니다.
"산아 내 앞으로 오라"고 외쳐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 다.
군중들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웅성거릴 때 마호멧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 산이 여기로 오지 않음은 만약 산이 이리로 오면 여러분이 다 산에 깔려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저 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산으로 숨어 버렸을 때 군중들은 깨닫고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야기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기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마호멧이 외친 "내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적이 내 앞으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기적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늘을 맞이하게 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맞이하지 못한 수 많은 사람들이 지구촌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서 호흡하며 생명의 길을 걷는 은혜의 기적을 믿음으로 누리며 더 큰 은총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작고 가난하여 교역자도 모시지 못하고 교인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러한 교회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휴가차 그곳에 왔다가 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 니다.
교인들끼리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단순한 예배인데 그 예배에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감동을 받은 목사님이 예배가 끝난 후 어느 집사님 한 분에게 어떻게 이렇게 은혜가 충만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깜짝 놀라며 그 목사님에게 그럼 은혜가 없는 예배도 있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라고 합니다.
그 시골 교회 교인들은 은혜 없는 예배가 있는 줄을 모르고 사는데 우리는 혹시 은혜가 충만한 예배가 있는  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은 흔히 예배와 설교를 놓고 은혜가 있었다 없었다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예배와 설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예배는 세상에 본시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은혜 받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동 받는 삶을 욕심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과 기도를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되기를 욕심 내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 보물...마음도

- '마음'은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며 '보물'은 궁국적인 관심을가리킨다.
결국 하늘과 땅 또는 물질과 하나님 나라 이 중 어느 것에 궁국적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미적지근하고 이중적인 자세는 용납되지 않으며 성도는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마 6:24).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재물을 덤으로 얻게 되지만 재물을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다.



2-7-2024(수) 누가복음 12:13-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탐심을 물리치라(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동남아에서 애완용 원숭이를 잡아 파는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아주 특이하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주둥이 긴 항아리 또는 병 속에 달콤한 사탕을 집어 넣고 그 항아리 또는 병을 땅에 깊숙히 박아 놓은 박대기에 묶어두면 원숭이가 그 병속에 들어있는 사탕을 꺼내려고 손에 사탕을 가득 잡고 손을 뺄 수 없어 결국은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팔려간다고 합니다.
이때 원숭이가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한개만 잡고 손을 빼면 될텐데 욕심 때문에 사탕을 쥐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붙잡으로 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멈추고 있다고 합니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다 보면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원숭이를 쉽게 만나게 됩니다.
이때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원주민이 조롱박과 바나나 몇 개 그리고 창이 넓은 밀짚모자를 준비해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나나 하나를 조롱박 속으로 집어넣고는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내서 맛있게 먹어 보였습니다.
물론 나무 위 원숭이들이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롱박 속에다 남아 있는 바나나를 집어넣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한숨 자는 척합니다.
원숭이들은 조롱박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중 대장 격인 원숭이 하나가 나무 밑에서 잠자는 사람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조롱박 속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습니다.
원숭이는 손에 힘을 주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이때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면 놀란 원숭이가 펄쩍 뛰어 나무를 잡고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한 손이 조롱박 속에 있기에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어서 결국 잡히고 맙니다.
조롱박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자기 손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고 불쌍해 보입니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도망갈 나무숲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왜 원숭이가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까?
바나나를 쥔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나나를 쥔 손을 풀고 밖에서 손을 빼었다면 원숭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끼 식사도 되지 않는 눈앞 욕심 때문에 자유를 잃고 인간의 포로가 된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람에게 실제 일어났습니다.

한 신앙 좋은 노인이 있었는데 그분은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연말이 되어 미국에 있던 자녀들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난 손자 녀석이 주둥이가 좁은 이조백자에 손을 집어넣고 빠지지 않는다고 울며 난리를 쳤습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백자가 깨지지 않도록 온 가족이 동원되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 사이 아이는 마치 죽어 넘어가는 아이처럼 울자 노인은 황급히 손자를 위해 망치로 백자를 깨뜨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가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던 손을 벌려보니 기가 막히게도 5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이 사건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노인의 결단과 아이의 행동을 통해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노인의 결단에 있어 아무리 고가 품의 백자라도 손자만큼 귀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백자의 가치보다 손자의 가치가 더 소중했기에 과감하게 깨트려 손자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있어 모범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이의 행동에 있어 마치 원숭이가 바나나를 쥔 것과 같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에게 이유를 말했더라면 백자를 깨지 않고 돈을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백자보다 5백 원짜리 동전의 가치가 더 있었고, 그것을 꺼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어른들보다는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고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욕심의 결과와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교훈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꼭 쥐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거나 그것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본다면 이제는 쥐고 있었던 손을 펴야 할 때 인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이란 분수에 넘거나 도에 지나친 욕망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까지 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그만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 가운데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제일 큰 욕심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정욕, 혹은 음욕

이것 때문에 고금을 통해 범죄하고 쓰러진 이들이 많습니다. 각종 성범죄와 치정 살인사건이 우리 사회에서도 매일 같이 일어납니다. 삼손은 이 정욕에 끌려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끝내 패망하였습니다.

둘째, 탐욕, 혹은 물욕

광부들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미시시피강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켰습니다. 배가 강 복판에서 휘청거리자 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승객들은 구명정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건장한 남성들은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뭍을 향해 헤엄을 쳤습니다. 승객들이 대부분 탈출한 후 한 남성이 갑판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있었고 몸에는 각종 보석들이 휘감겨 있었습니다. 그는 강물에 뛰어들었으나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구조대원들이 물 속에 잠긴 그의 시체를 건져 올렸는데 그 사람의 주머니는 승객들로부터 훔친 금덩이와 귀중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귀중품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익사한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한번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은 체면과 사랑과 우정도 모두 내팽개칩니다.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재물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을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욕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를 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 욕심 때문에 결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아간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탐내어 땅 속에 감추었다가 온 가족이 돌로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수7: 18- 26)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됩니다. 마음속에 이 욕심을 버려야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셋째, 권력욕, 혹은 지위욕

이 욕심 때문에 어떤 단체나, 조직이나 회사나 관청을 불문하고 온갖 시기와 쟁투와 분열과 뇌물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조 오백년사를 보면, 이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추태와 골육상쟁과 유혈의 비극이 있었습니까? 성경에도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의 위를 빼앗으려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에서는 먹는 데 약하여 그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고, 노아는 술에 약하여 큰 수치를 당하였고, 솔로몬은 정욕에 약하여 큰 실수를 했고, 롯 같은 이는 물욕에 약하여 소돔 성에 살다가 큰 재난을 당합니다. "누구나 지옥에 가는 사다리가 있다"는 속담처럼 항상 깨어 있어 내 자신의 약점을 미리 알아두고 이 방면에 침입하는 모든 유혹과 시험을 막아야 합니다.(마15:18- 20, 벧후2:10)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지라"(딛1:15)
특히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교만과 음행과 거짓과 탐심과 나태 등을 멀리하고 버려야 하겠습니다.(잠6: 16- 19)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심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하지만
때로는 더 좋은 것, 더 맛 있는 것, 더 멋진 것에 마음을 쏟기도 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이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에 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 만큼의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아침이 되자 곧장 출발하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름진 토지를 더 차지하려고 조금씩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한 채로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농부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그가 묻힌 3아르신(2미터) 크기만큼이었다.


탐심(4124) 플레오넥시아(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24

1. 탐심.  2. 탐욕. 3. 눅 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 412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탐심, 탐욕, 눅 12:15, 롬 1:29, 고후 9:5.

* 4123. πλεονέκτης, ου, ὁ   

1. 욕심꾸러기.  2. 탐심 많은 사람. 3. 고전5:10
발음 [ plĕŏnĕktēs ]
어원  / 4119와 219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욕심꾸러기, 탐심 많은 사람, 고전 5:10, 6:10, 엡 5:5.

* 4119.  πλείων    
1. 4183의 비교급 : 더 큰.  2. 마 12:41.
발음 [ plĕiōn ]


* 2192. ἔχω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
발음 [ ĕchō ]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예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거부하신 것은 그 사람이 당면한 문제 배후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은 한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즉 '저희에게'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탐심'(플레오녀시아. 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은 '더 많은'의 뜻을 가진 '플레온'(πλείων) 과 '소유하다'의 뜻을 가진 '혀시아'(*)의 합성어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가리킨다.
여기서 지적되는 것은 단지 '물질'에 대한 탐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는 모든 종류의 죄악된 성향(性向)을 총칭한다고 보아야 한다(시 39:6; 합 2:9; 골 3:5; 딤전6:9-11).



평생 베풀면서 살다간 방경삼 목사 소천이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방 목사님은 1935년 평안 남도에서 출생하여 월남하여 목회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영적 심적 물적으로 저들에게 베풀 수 있을 때까지만 목회하겠다" 일념으로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강원도 원주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습니다.
음성 나환자 뿐 만 아니라 양성 나환자 등 3백명이 전국에서 모여 사는 경천원에 들어 갔을 때 그들은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계란을 건네주었습니다.
방목사는 그것을 덥석 받아 먹고 그들의 환영 가운데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후 신안 농원에 가서 목회를 하였고 중부교회에서 교도소 출소자 뒷바라지를 하며 대전 신학교와 청주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이 어려울 때 생활비와 자녀학비를 내주느라 정작 자신의 딸과 아들의 등록금은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한이 되어 마지막 조의금으로 아들 등록금 한 번 내 주고 나머지는 섬선교회 후원과 목회자 미망인 자녀 장학금에 전달하고 돌아 가셨습니다.
마지막 그는 5월 15일 향년 62세로 아내에게 "살아 생전 내가 못다 베푼 어려운 이들을 당신이 대신 돌봐 달라.
내가 죽거든 시신을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고 장례식 대신 노회장으로 감사 예배를 드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소천 하였습니다.
입관식도 발인식도, 장례식도 없는 감사 예배로 이 땅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생활 경전이라 일컫는 <탈무드>에 사람의 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주먹을 꽉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 때는 손바닥을 보이고 숨을 거둔다.
태어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죽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빈손에 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도 흥미롭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신이 너무 일찍 그를 데리러 왔다.
32세의 나이에 정복지에서 중병에 걸렸다.
모기에 몰렸다고도 하고, 그를 시기한 어느 장군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신하들을 불러모아 "내가 죽거든 시체를 넣은 관 밖으로 내 손 하나를 내밀어 달라"라고 유언했다. 참으로 황당한 유언이었다. 신하들이 놀라자 알렉산더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호령했던 그 사람 역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부귀영화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물거품이라는 것을 자신의 관 밖으로 내민 빈손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유언이 이루어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 버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저승 갈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제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저승길에는 한 푼도 챙겨갈 수 없다. 그런데도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이것저것을 움켜쥐려고 악착을 떨다가 비루하고 던적스런 인간으로 몰락한다. 기어이 뭇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서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한다. 끝없는 욕심 때문에 파멸한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이사야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새번역) 사람의 탐욕스러운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로 가버렸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새번역)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로마서 7:7-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새번역)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새번역) 그러므로 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현대인)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욕심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하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또 그들은 탐욕에 빠져 그럴 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파멸이 반드시 그들에게 닥치고 말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개역개정,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과 과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온(whole) 3648. 홀로크레로스(hŏlŏklērŏs) ὁλόκληρος, ον 

1. 완전한.  2. 전체적인. 3. 건전한
발음 [ hŏlŏklērŏs ]
어원  / 3650과 28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완전한, 전체적인, 건전한, 건강한, 살전 5:23.

영혼육

몸, 육체(소마. sōma)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몸.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 14:12, 27:52, 58, 59, 막15:43, 45, 눅 17:37, 23:52, 55, 24:3, 23, 요 19:31, 38, 행 9:40, 히 13:11, 유 1:9.
  b. 산 몸, 마 5:29, 6:22, 26:12, 막 5: 29, 14:8, 눅 11:34, 요 2:21, 롬 1:24, 고전 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 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 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3, 2:16, 4: 4,12,16, 5:23, 30, 골 1:18, 24, 2:19, 3:15.


혼, 영혼(푸쉬케.  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혼, 목숨, 생명:
 1. [문자적으로]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영(프뉴마.  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 415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불기, 숨.
  a. 바람, 요 3:8, 히 1:7.
  b. 숨 내쉬기, 숨, 살후 2:8.
2.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 27:50, 눅 8:55, 행 7:59, 히 12:23.
3. [인간의 인격의 일부분으로서의] 영.
  a. 고후 7:1, 골 2:5.
  b. [통찰력, 감정, 의지의 원천 또는 좌 소, 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 막2:8, 눅1:47, 행17:16, 롬8:16, 고전16:18.
  c.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 성질, 기질, 의향, 고전4:21, 갈6:1, 엡4:23, 벧전3:4.
4. [독립적 존재로서의] 영.
  a.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요 4:24.
  b. 영, 영물, 행23:8,9, 히1:14, 12:9, 계1:4, 3:1.
  c. 유령, 눅24:37,39.
  d.  악한 영, 귀신, 마12:43, 막1:23, 눅8:29, 행5:16.
5.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를 구별짓는] 참된 영.
  a.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고전2:11, 롬8:11, 살전4:8.
  b. 그리스도의 영, 주님의 영, 행16:7, 고후3:17, 갈4:6, 빌1:19.
  c. 성령, 마12:32, 눅2:26, 행2:4, 히2:4.

영혼아...마시고 즐거워하자 -
그의 총체적 실존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물질에 의존하여 물질로 말미암아 쾌락을 즐기는 것일뿐 진리를 추구하는 의미의 문제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그에게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피땀흘려 부를 축적한 자에게 있어 그 부를 이용하여 안락하고 풍족한 세월을 구가해 보고자 하는 보상 심리는 본능적 욕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흘러가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했어야 옳았다(사 51:6).

어리석은 자여 -
자신의 삶에 대해 용의 주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18,19절)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 아프론)는 '정신없는 자','무분별한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의 근본이심을 거부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시 14:1).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뿌리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인하다시피 하는 유물론(唯物論)에 박혀 있음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시되는 소위 개인의 자유 역시 오직 자본 곧 물질을 확보하는 일에 집착되어가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물질이냐 영혼이냐 세속주의냐 하나님 중심주의냐 하는 이 근본적인 가치 선택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논제임에 분명하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부자는 '여러 해'를 계획했으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그의 영혼을 가져갈 것이다.
'오늘 밤'은 그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감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재물은 그의 생명을 단 하루 밤도 지속시키는 힘을 갖지 못한다.
여기서 '영혼'은 생명을 뜻하고 '도로 찾으리니'는 인간의 생명이란 하나님께 대여 받은 것으로 언젠가는 되돌려져야함을 말해주며 생명에 관한한 하나님이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기를 위하여...부요치 못한 자 -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부유함과 하나님께 대한 빈곤을 대비시킴으로써 부자의 삶의 목표가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33절; 마 6:20),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다(마 25:31-46).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생명과 재물이 하나님께 근거한 것임을 알고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벧전 4:10).

2-6-2024(화) 누가복음 12:8-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할 말(누가복음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for the Holy Spirit will teach you at that time what you should say.

신앙생활의 내용을 분석하면 언어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시자하기 전에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회중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때로는 어느 설교자의 외침에 동의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멘"하고 말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1:3)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인한다는 헬라어는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는 "같은(호모)"이란 단어와 "말을 한다(레고)"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인데 그 의미는 "같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인한다는 헬라어는 "아르네오마이(arnĕōmai. ἀρνέομαι)"라고 합니다.
'아르네오마이'는 "거절하다" "부정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심판주가 나는 너를 부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한 성당에서 한 사제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그 신부를 도와서 성찬을 준비합니다. 
그러다 그만 이 어린아이가 실수를 해서 포도주가 든 그릇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신부는 버럭 화를 내면서 저리 나가라고, 너 같은 녀석 필요 없다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무신론자가 되고 그리고 철저한 공산 국가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유고의 ‘티토(Josip Broz Tito. 1892. 5. 7~1980. 5. 4)' 대통령입니다. 
한편 동시대에 또 다른 한 성당에서 신부가 성찬을 준비하는데 어린이가 보좌를 합니다. 
어린이가 그만 실수해서 포도주잔을 땅에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너도 앞으로 큰 신부가 되겠어, 나도 너만 한때는 그런 실수를 많이 했거든,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훌륭한 신부가 됐잖아.” 
그리고 오히려 아이를 격려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유명한 ‘플턴 신(Fulton Sheen. 1895. 5. 8~1979. 12. 9)’ 대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만 어떻게 반응하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들의 인생이 전혀 다른 운명으로 갈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합니다.
말이란 이처럼 권세가 있습니다.

다 찬양하여라


6.25때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한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불행하게도 폐결핵이 걸렸습니다. 치료할 돈도 없습니다. 여동생이 어쩔 수 없이 술집에 가서 술을 따르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오빠에게는 절대적으로 비밀 이였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오빠를 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 후에 전쟁도 끝나고 오빠도 건강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신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바로 이 여동생이 술집에 있었던 사실을 아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교인은 다니면서 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덕스러운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온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오누이는 충격을 받고 그만 스스로 생명을 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 더 덮어줄 수 있었더라면, 지나간 과거의 일인데, 이제 새사람이 되었는데 그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걸 꼭 끄집어내서 소문을 내고 결국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유익한 말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말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말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말이 있으면 불안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말이 있는가하면 공동체를 허무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을 나쁜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얼마든지 선한 일에 쓰면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나라의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가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귀한 것을 가지고와라!” 또 다른 신하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와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 년 후에 신하들이 통에 무언가를 담아서 가져왔는데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인가 가져온 것을 뚜껑을 열어보니까 사람의 혀라는 것입니다. 혀는 죽을 사람도 살리고,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에 혀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신하들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담고 온 상자를 보니까 거기에도 역시 사람의 혀가 있었습니다. 혀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증오하게 만들기도 하고, 사기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우리가 말이라는 걸 참 조심해야합니다. 특히 목사라는 직분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십년 넘게 목회하면서 늘 말을 해놓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목사님은 그냥 내뱉고 끝나겠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얼마나 반성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내가 말을 또 조심해야지.’ 이러한 반성을 많이 하고 후회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괴로워하지만, 또 동시에 저에게 상처를 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에 맘이 괴롭고, 잠을 못 이루고, 갑자기 건강하던 위가 소화가 안 되고, 건강하던 허리가 아프고, 사람이 신경을 쓰니까 허리도 아프고 소화도 안 됩니다. 이게 문제가 참 많습니다. ‘사람의 모든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 신경성이다.’ 라는 걸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하던 곳이 문제가 생깁니다. 목사도 철갑을 두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하고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말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이 정말 저 사람에게 유익이 되겠는가? 저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저 사람에게 소망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늘 물어봐야 합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니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잘못된 말에 대해서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남을 헐뜯는 말 모두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니까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쓸데없는 말 자꾸 하면 문제만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1장에 보면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은 좀 두 번, 세 번 생각한 다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더러운 말, 덕이 되지 않는 말, 은혜가 안 되는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왜 잘 나가다 싸웁니까? 꼭 말 때문에 싸우고, 말 때문에 말꼬리 잡아서 그 말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좋은 말에 관한 격려도 있습니다. 잠언 16장에 보면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좋은 말은 보약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병이 떠나갑니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엔돌핀이 막 솟구칩니다. 

잠언 25장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정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데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하라.” 덕을 세우는 말만 합시다.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 헐뜯는 말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으면 묻어두는 것입니다.

잠언 18장에 보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데로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에고치 알고 계시지요?  이 누에고치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을 가지고 자기 집을 만듭니다. 누에고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누에의 나오는 실을 가지고 누에고치를 만들어서 자기가 그 속에 있는 거예요. 어찌 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근사한 빌딩을 지어가고, 어떤 사람은 초라한 초가집을 지어가고, 어떤 분은 개집 같은 것을 지어갑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에 이 은혜가 안 되는 말, 덕이 떠나는 말,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축복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 믿음의 말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붕어빵이 있고 잉어빵이 있습니다. 겨울에 화로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붕어모양의 틀에 넣으면 붕어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붕어빵을 잉어빵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붕어빵 틀을 버리고 잉어빵 틀을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틀을 놓느냐에 따라 빵이 결정 됩니다. 우리 인생을 바꾸려면 말을 바꿔야 합니다. 언어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이 언어를 잘 배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에 하숙하던 형님이 있었는데 이 형님이 남을 좀 비웃는 말을 자주합니다. 본인은 굉장히 유머스럽게 한다고 하는데 자꾸 남의 약점을 캐냅니다. 저도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게 재밌는 줄 알고, 잘하는 줄 알고 남의 약점만 있으면 자꾸 얘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받기는커녕 미움만 받았습니다. 저의 친형도 아닌데 그 형한테 잘못 배워서 남을 놀리는 것을 배우곤 했습니다.

제가 어느 집에 갔더니 그 집은 자기부인을 부르는데 보통 ‘여편네’라고 부릅니다. 저도 모르게 또 그것을 배워가지고 저희 집사람에게 “여편네! 여편네!” 라고 불렀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싫어합니다. “부인이라고 하지 여편네가 뭐냐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습관이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들이 한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위해서 말을 참 조심해야 해요. 여러분도 부인에게 ‘여편네’라고 하지 마십시오. 아들들이 장가가서 부인에게 ‘여편네! 여편네!’ 그러면 사랑도 못 받고, 참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말로 인해 운명이 갈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는데 10명의 정탐꾼은 그 가나안 땅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그 땅은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키는 장대 같아서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고 그 성은 견고합니다.” 이렇게 악평을 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온 백성이 술렁거립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에, 그런 들어가지도 못하는 땅에 들어가려고 여기까지 왔나?’ 하면서 백성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고, 돌을 들어서 지도자들을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능히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긍정적인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동요된 백성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매우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죽는다.”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경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해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보응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할 때에는 ‘하나님의 녹음기에 또 녹음이 됐겠구나!’ 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언어생활에 대한 어떤 말씀을 주고 계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망의 소리, 불평의 소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이래도 원망의 소리, 이래도 불평의 소리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임금이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 “임금이 안보이면 나랏님도 욕하는데 왜 욕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나랏님을 욕하면 하나님께서 다 듣고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망조차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데 그 전화 내용이 다 녹음되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 말조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도 못 듣는 거야, 비밀이야’ 이래서 마구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 녹음되어진다면, 만약에 제가 지금까지 핸드폰에서 한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져서 공개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불평과 원망을 다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말을 통해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교인들이 너무 불평이 너무 많아서 목사님께 와서 자꾸 누구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교인 불평록’이라는 공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뭐 불평을 하면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다 적겠습니다.” 하면서 다 적었습니다. “집사님께서 말씀하는 것, 어느 권사님이 어떤 일은 덕이 안 된다는데 지금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싸인하라고,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싸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싸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평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와 흑암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찬양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흑암의 나라, 사탄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불평과 원망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탄의 자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거 꼭 마음에 새기십시오.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8절부터 30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말씀입니다. 말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결국 다 죽었습니다. 정탐꾼이 정탐하고 돌아온 그 40일에 1년을 곱해가지고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고 유리하다가 20세 이상 된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어서 시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20세 이하의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 “우리는 그 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한 대로 된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정말 실수를 해도 “아이고 죽겠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죽겠다.” 물론 여러분은 그 말대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말한 것은 그 말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메랑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던지면 돌아서 자신의 손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존경받고 싶으냐? 남을 먼저 존경하라. 축복받고 싶으냐? 너희가 먼저 남을 축복해라. 이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말한 대로 응답하십니다.

‘사또 도미오’라는 일본사람이 쓴 책 중에는 <인생은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트 버드’라는 미국사람이 쓴 책 중에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책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젠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너는 그렇게 하다가 먹고나 살겠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이제는 축복을 선포해 주십시오. 비록 공부를 못하고 장난꾸러기일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아빠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넌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빌리그레이엄’목사님이 어렸을 때는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빌리가 커서 뭐가 되겠냐? 저거 깡패나 되겠지.”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믿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빌리! 너는 말도 잘하고 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귀하게 쓰실 거야.” 이렇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빌리그레이엄’ 같은 훌륭한 부흥강사가 나온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장군은 어릴 때 완전히 싸움꾼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맥아더만 보면 학을 땝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맥아더를 꼭 껴안고 “맥아더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그랬더니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훌륭한 대장군이 됩니다. 그 부모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인격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그의 인생이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소망의 말을 하면 소망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사랑의 말을 하면 사랑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정적인 말, 비판적인 말을 하면 다 부서져가는 비판적인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소망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거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도 힘듭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불신앙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신앙적인 삶을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비방을 일삼는 사람이 남에게 칭찬 받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타인을 무시하는 말을 뱉은 사람이 존경받고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은 그 입술의 열매대로 먹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혀는 영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말에는 기술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선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악해지는 것입니다. 음란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벌써 음란해지는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생각 없다가도 누가 자꾸 옆에서 음란한 말을 하면 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방하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도 거기 전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 줄로 믿습니다. 잠언 6장 2절에 보니까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입의 말로 내 인생의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내게 축복이 되는지, 남에게 유익이 되는지. 이 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세 번째로는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마가복음 11장 20절 이하를 살펴보았습니다.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러한 말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플러 신학교 ‘찰스 크래프트’ 교수가 <신자가 소유한 놀라운 권세>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참으로 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권세를 사탄이 빼앗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고 마귀에게 시험당할 때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내게 절하라. 내가 너에게 권세를 주겠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감히 예수님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잃어버린 권세를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찾아주신 그 놀라운 권세가 소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풍랑을 향해 명령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 자녀의 입에도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오십니까? 여러분! 두려움을 향해서 명령하십시오. “두려움은 떠나갈지어다.”, “풍랑은 잔잔해질지어다.”, “질병은 치료받을지어다.”, “장애물은 해결되어질지어다.” 여러분! 선포하시고 명령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앉은뱅이를 향해서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했을 때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믿음의 말만 하십시오. 믿음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불신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소망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남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말만 하십시오. 그것이 격려를 되고, 칭찬해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의 성공하는 비결은 바로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인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말합니다. “성공하는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 돈을 내면 그 지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몰려들었습니다. 돈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공하는 지혜가 무언가 들으려 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말 조심해.” 그리고 떠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말만 잘해도 천 냥 빚을 갚고, 말만 잘해도 죽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여러분의 인생이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아주 말이 거칠고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외아들이 하나 있는데 며느리를 봤습니다. 참 참한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혀를 찼습니다. “저 뭘 모르고 들어왔지, 저 집에 오면 죽어나가지, 살지 못할 텐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말이 거칠고 독살스러운데.” 그런데 이 며느리가 너무 지혜롭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초전박살 내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초반에 기를 잡으려고 무슨 일만 있으면 “너는 친정에서 그런 것도 못 배워가지고 왔느냐고, 무식한 년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저는 친정에서 별로 배운 게 없어요. 시집에 와서 훨씬 많이 배우네요. 어머니, 많이 지도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또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니 “야 너는 대학까지 나온 년이 그것도 모르냐?” 이 며느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아이고, 어머니! 지금은 대학 나와 봤자 옛날의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돼요. 어머니가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손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며느리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이제 내가졌다. 너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지혜로운 말로 시어머니에게 대응할 때 시어머니 마음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의 지혜입니다.

말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술에 이제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복음을 증거하며 실망한 자들을 일으키고 낙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인하다(3670)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  

1. 약속하다.  2. 동의하다. 3. 고백하다.
발음 [ hŏmŏlŏgĕō ]
어원  / 미완료 ὡμολόγουν, 미래 ὁμολο- γήσω, 제1부정과거 ὡμολόγησα, 3674의 어간과 3056에서 유래

사람 앞에서...시인할 것이요

-
'앞에서'(*, 엠프로스덴)는 공개적인 고백을 강조하는 말로 판사 앞에서 증언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나를 시인하면'(*, 호몰로 게세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고백하면'의 뜻이 된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고백이 단지 하나의 당위성 때문에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안에 사는 삶의 결과로서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뜻한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와 아울러 구체적인 결실을 맺어 보이는 생명력있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자태(姿態)이다.
마태의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대신 내 아버지 앞에서"로 서술되어 있는데, 누가는 법정에서의 증언을 염두에 두고 있고 마태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인자'에 대해서는 5:24 절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부인하다(720)  아르네오마이(arnĕōmai)  ἀρνέομαι  

1. 거절하다.  2. 부정하다.ὁμο- λογεῖν. 3. 부정하다
발음 [ arnĕōmai ]
어원 / 미래 ἀρ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ρ- νησάμην, 완료 ἤρνημαι, 아마도 1[부정불 변사]과 4483의 중간태에서 유래

사람 앞에서...부인함을 받으리라

- 앞절에서의 긍정적인 약속이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심판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말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행위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한편 8, 9절 전체의 의미는 바른 신앙적 삶에 대한 격려와 비신앙적 삶에 대한 심판 경고 등 양자를 모두 포함하지만, 문맥상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분노에 의한 핍박이 예상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11:53, 54) 후자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이...가르치시리라

- '곧 그때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때 성령의 도우심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준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위기 상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해 준다거나 방해 세력을 분쇄한다고 말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을 가르치신다고 하신 점에 유의하자.

이것은 성령께서 결코 기적이나 무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제자들을 무력한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며 위기의 상황 조차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정공법(正攻法)을 채택하신다는 것을 암시 한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베드로(행 4:8-12), 스데반(행 6:10), 바울(딤후 4:17) 등에게서 실제로 성취되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에 가게 되면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하게 되면 세 번 기도하라."
러시아에서 전해오는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크리스찬 작가 엔로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
그 작품은 1587년 이래 일본의 태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도꾸가와(德川) 장군으로 이어 오면서,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여 많은 사제와 신도들이 화형으로 처형되고 고문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진 소설 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로드리꼬라는 신부인데 그는 박해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고뇌와 신앙적 회의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스켓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톨릭 신도들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도록 강요받았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화를 밟지 않고 참혹한 죽음의 길을 걷는 순교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내세워 주저 없이 성화를 밟고, 그리고 괴로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로드리꼬 신부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깊이 고뇌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도들이 바닷물 속으로 무참히 가라 앉아가지만,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잠잠하고 새는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하나님은 계속 침 묵을 지킬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며 깊은 고뇌 가운데 있던 로드리꼬 신부는 드디어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희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니라."

여기서 신부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마을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첫날을 지낸 다음에 아침 담임 목사가 강사 숙소에 들러서 집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어젯밤 강사 목사의 설교 중 "젖꼭지를 생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양반 마을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런 집회를 계속할 수 없다고 야단 났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어젯밤 설교 원고를 검토하다가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날 밤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오늘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젖꼭지를 생각하라 하더라"고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고 아들은 곧바로 동네 이 집 저 집에 전화를 걸어서 온 동리가 발칵 뒤집혀졌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담임 목사님에게 "내가 어제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까?"하면서 설교 원고를 내 보이시는데 거기에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의사소통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2-5-2024(월) 누가복음 12: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두려워 할 자(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But I will show you whom you should fear: Fear him who, after the killing of the body, has power to throw you into hell. Yes, I tell you, fear him.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이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주할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동물들의 몸값을 검색하였더니 흰곰은 1-2억, 돌고개는 1억 5천, 아프리카 코끼리는 2-3억, 오랑우탄은 3억, 기린은 2억, 브라자 원숭이는 1만 달러- 1만 6천달러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값은 얼마일까요?

죽은 동물의 가치는 상아 1kg 2천 달러, 러시아 웅담은 1천만원, 뉴질랜드 녹용은 2박시 분말가루 84,900원, 중국 호랑이 가죽 350만원 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는 오히려 장례비가 필요합니다.
뉴욕에서 장례를 치루려면 가장 싼 관 1개 3000불, 묘지 3천불, 장례식장 비 최소한 1만 5천불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몸 값으로는 동물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동물은 죽은 후에 세속적 가치만 갖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텐데 영생이란 복된 삶과 영벌이란 저주의 삶으로 구분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삶을 누가 결정하느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 결정합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을 재림의 날,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비싼 몸값 자랑하는, 세계의 동물 ‘톱7’은? - 비마이펫 크리에이터즈

모든 존재는 귀하다.
그래서 그 존재에 감히 값을 매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을 얻기 위해 들인 비용 또는 시장에서 거래됐던 가격은 기록으로 남는다.

미국 <인디아타임즈>는 8일(현지시간), 이런 기록들을 활용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동물’들을 소개했다. 여기엔 독특한 컬러를 지닌 원숭이부터 세계 기록 경주마, 흰색 사자 새끼, 과학의 힘을 빌린 복제견, 희소성 가득한 대형견, 우유 생산량이 대단한 젖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만 달러부터 1천600만 달러까지 그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7위. 브라자원숭이(De Brazza’s monkey)

7위는 브라자원숭이다. 영장목 긴꼬리원숭이과의 포유류다.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피에트로 사보르난 디 브라자’가 처음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따왔다. ‘네글렉투스원숭이’라고도 불린다.

브라자원숭이는 사진에서 보듯 흰 수염, 주황색 왕관 털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도 볼 수 있다. 한 마리당 가격은 1만 달러에 이른다.  

6위. 아라비아말(Arabian horse)

아라비아말이 6위를 기록했다. 아라비아 및 그 주변 지역을 원산지로 하는 품종의 말이다. 독특한 머리 모양과 높은 꼬리 마차가 특징이다. 

가장 오래된 말 품종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라비아말은 4천500년 전 역사 속 동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고고학적 기록도 있다. 

때문에 다른 품종을 향상시키는데 많이 기여했다. 오늘날 거의 모든 현대 승마 종에서 아라비아말의 혈통이 발견되는 것은 그래서다.  

5위. 흰 사자 새끼(White Lion Cubs)

흰 사자는 지난 1938년 남아프리카의 팀바바티(Timbavati)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그들은 사자 중 가장 희귀한 종들 중 하나다. 

흰 사자는 야생에서도 소수만이 살아남은 만큼, 매우 희귀하다. 최대 14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위. 랜슬롯(Sir Lancelot)

‘랜슬롯’은 최초의 복제견 레트리버다. 원래 최초의 개 ‘랜슬롯’을 기리기 위해 동명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 

복제의 시작은 이러했다. 랜슬롯을 키우던 에드가와 니나 오토 부부는 자신이 키우던 랜슬롯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슬픔에 잠겨 있던 이들은 랜슬롯을 복제하기로 결심한 것. 

그들이 랜슬롯에게 투자한 비용은 무려 15만5천달러가 넘는 금액. 랜슬롯은 현재 슬하 8마리 새끼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다.



3위. ‘티베트 마스티프’(Tibetan Mastiffs)

3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티베트 원산의 대형견 ‘티베탄 마스티프’가 차지했다. 네팔에서는 ‘티베트의 개’라는 뜻을 가졌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개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은 가축, 궁전, 수도원 등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된 경비견으로 쓰였다. 죽을 때까지 한 명의 주인만 섬기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비싸게 판매된 티베트 마스티프는 지난 2011년 거래된 아이(150만 달러)다. 당시 국제애견협회 켄넬클럽에서 ‘지구상 가장 비싼 개’로 선정됐다. 

2위. ‘미스 미시’(Miss Missy)

‘미스 미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소다.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 지방 원산인 대표적 젖소 홀스타인(Holestein) 종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소보다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무려 50%나 더 많이 우유를 만들어낸다. 

값어치는 무려 120만 달러다. ‘미스 미시’는 지난 2009년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온타리오 주에서 열린 경매에서 해당 가격에 판매됐다. 

1위. 그린 몽키(Green Monkey)

1위의 주인공은 미국의 서러브레드(thoroughbred) ‘그린 몽키’다. 서러브레드는 말 품종의 하나로, 영국에서 영국 재래종과 아랍 말을 교배해 개량한 경주 말을 뜻한다. 

‘그린 몽키’는 2004년생이다. 2006년 2살이 되던 해, 한 경매에서 지금까지도 최고가 기록을 빼앗기지 않은, 무려 1천600만 달러에 팔렸다. 

그는 첫 경기에서 8분의 1마일을 무려 9.8초 속도로 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1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한자에서 두 개의 단어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공포(恐怖. 두려울 공, 두려워할 포)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말합니다.
둘째는 경외(敬畏. 공경 경, 두려워할 외)는 공경하고 두려워함을 말합니다.

공포는 나보다 더 크고 강한 것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라면 경외는 나보다 더크고 강한 것 앞에서 오히려 그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3. 타인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을 뿐이며 죽음 이후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우치셨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몸에 대한 것과 영혼에 대한 것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모두 몸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몸에 대한 것보다 더 소중한 영혼에 대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과 혼과 영을 갖춘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심판 후에는 영생과 영벌의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5:46)

영벌(eternal punishment. everlasting punishment)은 생전에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영혼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라면 영생(eternal life. the righteous into life eternal)은 이 세상에서 부요함으로 또는 가난함으로 살았을지라도 세속의 가치에 따른 삶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적인 삶을 확신했던 영혼들이 누려야 할 새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은 나의 구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과 은혜로 늘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야기 예화) 펄벅 여사의 간증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이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중국 동네 마을에는 백인이었던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했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몽둥이, 곡괭이, 도끼, 쇠스랑 등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가지고 펄 벅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마치 오늘을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들었다.
잠시 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단숨에 거실로 몰려왔다.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펄 벅의 어머니는  "정말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하며 정중히 차를 권했다.
그들은 멈칫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고 말했는데, 그것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두려움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첫번째 유형은 유익하며 장려되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번째 유형은 해가 되며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첫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반드시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분의 진노와 분노에 대하여 마땅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정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면 많은 축복과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지혜의 시작이며 명철로 인도합니다(시편 111:10).
오직 어리석은 자만 지혜와 훈계를 경멸합니다(잠언 1:7).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과 안식과 평강과 만족으로 인도합니다(잠언 19:23).
그것은 샘과 생명이며(잠언 14:27), 우리에게 보장과 안전한 장소를 제공합니다(잠언 14:26).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언급된 두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디모데후서 1:7에 언급된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두려움과 겁내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풍성하게 뿌려 놓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1:10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와 우리에게 발생할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얼마나 그분의 자녀를 위해 공급하실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31). 이 몇 구절들은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의 두려움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홀로 있게 되는 것과, 너무 연약하게 되는 것과, 무시 당하는 것과, 육체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권고는 성경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56:11에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에 대한 놀라운 증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주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옵니다. 욥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어려운 몇몇 연단을 경험하면서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라” (욥기 13:15)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두려워하다(5399) 포베오(phŏbĕō) φοβέω  

1. 무서워하다.  2. 놀라다. 3. 두려워하다
발음 [ phŏbĕō ]
어원 / 수동태 φοβέομαι, 미완료 수동태 ἐφοβούμην,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 φοβήθην, 미래수동태 φοβηθήσομαι, 540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
 a. [자동사] 놀라다, 무서워하다, 마17: 6, 막5:33, 행16:38.
 b. [타동사]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마10:26, 요9:22, 갈2:12, 히 11:23.

히브리서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5399 

2. 공경하다, 존경하다, 경외하다, 눅 1:50, 행 10:35(하나님을 경외하며), 벧전 2:17.

사도행전 10: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포베오) 의를 행하는(에르가조마이)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
                                                 5399                            2038

베드로전서 2:17
뭇라람을 공경하며(티마오) 형제를 사랑하며(아가파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포베오) 왕을 공경하라.
                               5091                                   25                                              5399



내 친구
- 요 15:14에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천구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내 친구'라 표현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이다. 이는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의 친밀한 관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며(Grundmann), 이 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므로 명심해서 들어야 함을 뜻한다.

몸을 죽이고...두려워하지 말라


-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교훈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며,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며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세상 권력이나 악인의 위세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인간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믿는 확신이 요청될 뿐이다(21:18).

지옥

- 여기 사용된 헬라어 '게엔나'((gĕĕnnaγέεννα)는 히브리어 '게엔놈'을 음역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아하스왕 이후 어린 아이를 몰록의 신에게 제물로 불태워 바친 곳이며(레 18 :21. 왕하 23:10),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으로 이 우상 숭배가 근절된 후에도(왕하 23:16) 이 곳은 저주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19:6; 렘 7:31-34). 신약 시대에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 곳에서는 항상 불이 타고 연기가 피어 올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상징하기도 하였다(Tyndale).
이러한 어두운 역사적 버경을 가지고 있는'게엔나'는 종말론적인 심판 뒤에 악인들이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같은 '지옥'으로 번역되지만 몸을 떠난 영혼들이 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 '하데스'(*)와 구분된다.
'게엔나'에 던져넣을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막 9:45,47. 약 4:12).이 권세는 세상을 불의로 통치하는 어둠의 권세(22:53)곧 죽음의 세력을 (히 2:14) 능가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권세이다.

지옥(1067) 게엔나(gĕĕnnaγέεννα, ης, ἡ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발음 [ gĕĕnna ]
어원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 5:29, 30, 10:28, 18:9, 23:15,33, 막 9:43, 47, 눅 12:5, 불의 지옥, 마 5:22, 18:9.
[상징적으로] 약 3:6.

하데스(86) 하데스(hadēs)  ᾅδης, ου, ὁ   

1. ‘눈에 보이지 않는다’.  2.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3. 죽은 자들의 거처
발음 [ hadēs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149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눈에 보이지 않는다’.
 a.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b. 죽은 자들의 거처, 지하세계, 행 2:27, 31.
 c. [하늘과 대비된] 깊음, 음부, 마 11: 23, 눅 10:15.
2. [인격화된] 죽음, 고전 15:15, 계 6:8, 20:13.


스올, 음부, 지옥,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스올, 음부, 게헨나,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 등의 다양한 용어들은 많은 논쟁과 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12:4, 요한계시록 2:7).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도둑들 중 한 명이 그 분께 자비를 구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 분이 곧 천국에서 그 분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낙원을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하셨고, 이후 “낙원”이라는 단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기쁨의 장소들을 표현할 때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성경에서 단 한번,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누가복음 16:19-31).
아브라함의 품은 탈무드에서 “천국”의 동의어로서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요한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기대었던 것처럼, 나사로가 천국의 만찬에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기대어 식탁에 누워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천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낙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은 행복을 누리는 반면 그들 자신들은 고통을 받는 것과, 사악한 자와 의로운 자들 사이에 절대 이어지지 않을 “큰 구렁텅이”(누가복음 16:26)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의 핵심과 사건의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는 스올입니다.
스올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장소” 혹은 “세상을 떠난 영혼/정신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지옥”을 의미하는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하데스로, 역시 “죽은 자들의 장소”를 나타냅니다.
게헨나라는 헬라어 또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며, 힌놈이라는 히브리어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스올과 하데스는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마지막 부활과 크고 흰 보좌에서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있게 되는 일시적인 장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사망 시 곧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즉 천국, 낙원,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게 가게 됩니다(누가복음 23:43,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요한계시록 19:20, 20:10, 14-15에서만 언급되어있는 불못은 최후의 지옥으로 천상의 존재와인간 모두를 포함하여, 회개하지 않은 반역자들을 영원히 처벌하는 장소입니다(마태복음 25:41).

불못은 유황으로 타는 곳으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4, 마가복음 9:45-46). 그리스도를 부정하여 하데스 및스올 안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죽은 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불못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자들은 이렇게 끔찍한 운명을 마주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뿌려진 그 분의 피에 의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거할 운명을 지음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음부”로 번역된 “스올”

구약성경에 65번 나오는 “sheol(스올)”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한글 성경에는 주로 “음부”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저승”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처럼 느껴진다.

17세기에 번역된 흠정역 영어 성경을 보면,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연구를 거치는 동안, “지옥”으로 번역된 “스올”이 문맥과 전체적인 의미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새국제역(NIV)은 “지옥” 대신에 “무덤”으로 번역함으로써 잘못된 번역을 수정하였다. “음부”로 번역된 “스올”이란 말은 “무덤”이란 뜻으로 이해해야만 된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스올”을 지옥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야곱, 욥, 다윗과 같은 의인들이 죽어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엉뚱한 결론이 생기기 때문이다.
1) 신실하게 산 야곱도 자신이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창 37:35 ; 42:38,44
2) 의로운 욥도 죽으면 스올로 내려간다고 하였다 : 욥 14:13 ; 17:13~16
3) 다윗도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시편 18:4,5 ; 30:3

신약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3가지

신약성경에는 지옥(hell)으로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hades), 12번은 “게헨나”(gehenna), 그리고 나머지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라는 헬라어가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의 “음부”인 “하데스” 
 “하데스”는 구약성경의 “스올”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아시아의 무덤에 있는 묘비를 보면, 지금도 묘비 위에 기록된 “ooo의 무덤”이라는 글에서 “하데스”라는 단어가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종종 “지옥”이라고 번역된 “하데스”는 죽은 악인들의 영혼이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우리 모두가 가게 되는 “무덤”이나 “죽음” 자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의 본문만 주의깊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번역된 성경들은 “하데스”를 “무덤” 또는 원어 그대로 “하데스”로 표현함으로써, “하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할 때에 생기는 문맥상, 그리고 신학상의 혼란을 피하고 있다.

B. 어두운 구덩이 -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또 다른 헬라어인 “타르타루스”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루스)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매.” 베드로후서 2:4. 베드로 후서 2장에서는 “지옥에 던져”로 번역된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타르타루스, a dark 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셨으며.” 유다서 6절. 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지옥으로 번역되었던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어두운 구덩이)로 번역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은 이 흑암의 구렁텅이는 어디일까? 요한계시록에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범죄하여 지구로 쫓겨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는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지구)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 요한계시록 12:7~9.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던져져서 심판의 날까지 흑암 가운데 가두워진 곳은 바로 지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기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천년기가 시작되면서, 한 천사가 사단과 그의 천사들을 천년 동안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결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도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배웠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2:4에 “지옥”으로 번역되었고, 유다서 6절에 “흑암”(abyss)으로 번역된 “타르타루스”는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C. 신약성경의 지옥 - “게헨나” 
신약성경에서 게헨나(gehenna)는 모두 12번 “지옥”이란 말로 번역됨으로써,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다. 게헨나는 12번 중에서 단 한번(약 3:6)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특이한 표현이다. 그 중에서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은, 지옥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성경절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그런데 여기 나오는 게헨나는 지옥이 아니라 지명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증거 1: 게헨나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인명인 “힌놈”(Hinnom)이 합성되어 생긴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지명인데, 구약성경에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여러번 등장한다(여호수아 18:16).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게헨나는 실제적인 지옥이 아니라,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힌놈의 골짜기”(gehenna)는 저주와 살륙을 의미하는 장소였다. 구약시대에는 그곳에서 자식들을 몰렉신에게 불살라 제사하였다. “아하스가 ...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 그 자녀를 불사르고.” 역대하 28:1~3.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골짜기가 장차 살륙의 골짜기로 불려지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예레미야 7:31~33.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게헨나 곧, 힌놈의 골짜기라고 불리웠던 예루살렘 성 밖의 남쪽 골짜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차 메시야를 거절하는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게 될 장소로 상징되었다. 예루살렘 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하였다. 그 골짜기에는 항상 처형당한 죄인의 시체와 죽은 동물의 시체와 쓰레기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뿌연 연기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파괴적인 화염 속으로 어떤 것이 떨어지게 되면, 순식간에 구더기에 덮혀서 없어져 버렸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아신 예수께서는 악인들이 최후의 심판날에 “게헨나” 즉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성벽 아래서 전개되는 완전한 파멸의 장면을 가리키면서, 예수께서는 지옥불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예증을 들었던 것이다. 구더기와 쥐들이 계속해서 각종 동물의 시체들을 뜯어먹는 장면을 지적하시면서, 지옥의 완전한 멸망의 모습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 힌놈의 골짜기)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증거 2: 만일 이 성경절에서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헨나”가 유황불이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진짜 지옥이라면, 어떻게 구더기가 그곳에서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 있겠는가? “거기(지옥)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구더기들을 사람의 혼(soul)으로 해석하는데,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가? 결코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구더기를 사람의 혼으로 표현하거나 상징한 곳이 있는가? 단 한군데도 없다. 구더기와 지옥의 유황불은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단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쓰레기와 죽은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밤낮 타오르던 게헨나(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시면서, 마지막 심판 날에 악인들을 태울 불길을 “영영한 불”로 표현하셨던 것이다(마 25:41). “영영한 불” 이란 영원토록 중단되지 않고 타는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인한 결과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게헨나”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 지옥이란 말로 번역되었지만(마 5:22, 29, 30 ; 10:28 ; 23;33), 사람이 죽은 뒤 몸을 떠난 혼백이 영원토록 불 가운데서 고통받는 곳을 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그 대신, 장차 있을 재림과 연관된 심판의 때에 육신이 유황불에 소멸되는 곳으로 묘사되었다(마 5:22 ; 25:41 ; 마 10:28 ; 5:29, 30).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게헨나) 불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5:22. “...온 몸이 지옥(게헨나)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30.





인간의 여섯 가지 기본적인 두려움

모든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유전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육체적 유전이고, 하나는 사회적 유전이 그것이다.
인간이 육체적 유전은 갖가지 습성과 육체적 형태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 이루어진 육체적 유전을 통해 인류 공통의 여섯 가지 두려움도 유전되어 왔다.
이러한 두려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 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유전'이란 개인이 지식을 얻게 되는 모든 수단과 출처를 의미한다.
즉, 독서와 상호간의 대화, 일반적으로 '개인적 경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의 영감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동료를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성향으로 부터 - 이러한 성향은 유전된다.- 유래한다.
동물들은 서로 육체를 먹이로 삼는 포식을 행하지만, 고등의 감각, 즉 직관과 사고, 이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은 그 동족을 유체적으로 포식하진 않지만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데서 더욱 커다란 만족을 느낀다.

작금의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는 물질 숭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두둑한 은행잔고가 없으면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간주되는 시대인 것이다.

가난처럼 인간에게 고통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 없다.
인간이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부에 대한 소유욕은 너무나 강렬하여 때로는 이를 손에 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합법적인 수단을 통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기도 한다.

가난에대한 두려움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다!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강간, 그리고 기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고도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위치에 계속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가난은 범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그러니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자신의 동료를 신뢰한다고 하면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첫 번째는 늙음이 가난과 결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종교인들의 무자비하고 그릇된 세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은 '유황과 불' , '연옥' 그리고 악령에 대한 설법으로 대변된다.
이에 따라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힘든 상황이나 악조건의 끔찍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관련한 두 가지 원인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하나는 자신의 재물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유전법칙을 통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사후 세계에대한 끔찍한 그림 때문이다.
이에 비쳐볼 때 인간이 나이 먹어가는 것을 두려워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3. 타인의 비판 대한 두려움

인간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에겐 이러한 종류의 두려움이 잘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류 제작업자는 모든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 이를 충분히 상업화에 이용하고 있다. 분기마다 의상의 컨셉과 소위 '트렌드' '스타일'이라는 것이 달라진다.
도대체 누가 트렌드를 창출하는 것인가? 이는 의류 구매자의 몫이 아니고 의류 제조업자의 상술이다.
그러면 그는 왜 분기마다 스타일을 바꾸는 것일까? 의심할 바 없이 더 많은 옷을 팔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자동차 생산업체의 경우에도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선보인다.
의류 제조업자들은 인간이란 동물이 '지금 보두가 입고 다니는 옷'보다 한두 시즌 뒤처진 옷을 입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해도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는 동료의 파트너를 빼앗으려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의 대상이어야 할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그녀를 뻇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본래 남성은 천성적으로 일부다처의 속성을 지닌다.
모든 남성은 '일부다처의 속성이 본능속에 잠재해 있다'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적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거나, 혹 다른 연유로 성적인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경우일 것이다.
'제정신의 미치광이'가운데에서도 여자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자와 반대로 남자 때문에 질투의 화신이 된 여자만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형태의 정신장애를 개인적으로 몇번 경험하였을 뿐인데 이 경험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령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6가지 두려움 가운데서는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은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마음을 파괴시키고 황폐화시켜 때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이상의 현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기원을 파헤쳐보면 가난과 나이 먹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빈곤과 노력에 대한 두려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건강 상실도 - 자신이 실제 경험해 본 적이 없어도 -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끔찍한 세계'로 이끌기 때문이다.
때로 건강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정도 이상으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인간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건강요법과 치료물질들이 존재해왔다.
자신의 생계를 타인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모든 수단을 다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설득을 할 것이다.
이래서 결국 사람들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물려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6가지 두려움 가운데 최악의 것으로 꼽을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두려움의 끔찍한 고통은 종교적인 광신주의에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죽음에 관한 이러한 종교상의 책임은 다른 이유들을 다 보탠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사실 '교화된' 사람들, 특히 신학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답이 없는 질문들을 해왔다.
'어디서?' '어디로?' 인데 이것은 결국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영(靈), 혼(魂), 육(肉)에 대한 성경적 이해

사람의 본질 / 사람은 흙으로 만든 몸(육)에 하나님이 숨(영)을 불어넣은 살아있는 혼이다.

창세기 2: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히브리어로 영은 “루아흐”, 혼은 “네페쉬”
히브리어 성경에는 "혼" 이라는 단어인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살전서 5: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혼이란 사람 그 자체를 말한다.

출애굽기 12:15
-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먹는 자는"에서 "자"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라고 한다.

For seven days you are to eat bread made without yeast. On the first day remove the yeast from your houses, for whoever eats anything with yeast in it from the first day through the seventh must be cut off from Israel.

에스겔 18:20
-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The soul that sinneth, it shall die. The son shall not bear the iniquity of the father, neither shall the father bear the iniquity of the son: the righteousness of the righteous shall be upon him, and the wickedness of the wicked shall be upon him.

혼이란 생명체를 말한다.

민수기 31:28 -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네페쉬”가 포함되어 있음.

From the soldiers who fought in the battle, set apart as tribute for the LORD one out of every five hundred, whether persons, cattle, donkeys, sheep or goats.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12:7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원어 성경에는 신이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되어 있음.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 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 개역의 "신"은 개역개정판에서 "영"으로 개정되었음

누가복음 23:46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낙원이나 지옥에 간다.

누가복음 16:22~23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특별한 경우 (예수님과 요나)

마태복음 12:40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 2:6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 the earth beneath barred me in forever. But you brought my life up from the pit, O LORD my God.

*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에,
요나의 혼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 예수님의 몸은 돌무덤에 있고,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19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영은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 혼, 몸이 다 있는 모습니다.

 

영, 혼 , 몸의 관계

예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태를 닫으셨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영이 슬퍼하였고, 그녀의 혼이 괴로워하고, 자기 혼을 주 앞에 쏟아놓았으며, 그의 몸은 음식을 거부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며 기도하였다.

사무엘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In bitterness of soul Hannah wept much and prayed to the LORD. ”

사무엘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영, 루아흐)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혼, 네페쉬) 통한 것뿐이오니”

* 원어 성경에는 마음은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번역되어 있고 심정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번역되어 있음.

"Not so, my lord," Hannah replied,  "I am a woman who is deeply troubled. I have not been drinking wine or beer;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영, 혼, 몸의 기능

: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
: 인격을 갖추고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인격체인 사람을 대표함
: 생명체로서의 기능 유지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혼은 자기를 의식하고, 몸은 세상을 의식한다.”

* 개역성경에서 "영(spirit)" 은 생기, 영, 신, 혼, 마음, 유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고,
" 혼(soul)"은 생령, 산 영, 심정, 마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이단적 사상과 오류들, 동양사상과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 NIV 성경은 "영"은 spirit, ghost 으로 "혼"은 soul, living being 으로 번역 되었다.

* 하나님의 이름은 KJV, NIV 성경은 "the LORD" 로 표기 했고 개역성경은 "여호와" 로 표기했다.




2-3-2024(토) 누가복음 12: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외식을 주의하라(1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Meanwhile, when a crowd of many thousands had gathered, so that they were trampling on one another, Jesus began to speak first to his disciples, saying: "Be on your guard against the yeast of the Pharisees, which is hypocrisy.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성경에서 누룩은 두 가지 의미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좋은 의미의 누룩(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선한 능력을 드러낸다면 그 믿음은 모두에게 유익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나쁜 의미의 누룩((마 16:6. 막 8: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만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범법자로 드러나거나 잘못된 일의 주인공이 될 때는 그 사람 때문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은 발효하는 힘이 있습니다.
음식에 누룩이 들어가면 그 음식을 발효시켜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적당한 발효는 음식을 더 좋은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효과를 얻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전통 음식 김치가 발효 음식입니다.
요구르트와 같은 음료도 발효 음료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믿음은 먼저 사람에게 들어간 후에 그 사람이 변화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이란 "위선, 가장, 겉표정"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과 친절한 언어로 마치 다정다감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마구잡이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겉과 속이 항상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언제나 일치한 삶과 신앙을 유지했던 인물이 "욥(Job. 인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고의 부자로 소문이 났을 때에도 갑작스런 변화로 온 몸에 악창이 솟아나 개가 그 헌데를 핥아주는 것으로도 만족하며 감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부인이 "차라리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라"고 욱박지를 때에도 입술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까?
내 어려움이 욥보다 더 심한가요?
그렇다면 욥도 참고 인내한 것처럼 나도 참고 인내하는 훈련장에서 멋진 훈련병으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이 하루가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내게 주어진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외식하는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 구제, 기도, 금식

외식이란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것,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것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복음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복음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기도  

     복음에 합당한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갖추라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

1. 복음을 방해하는 외식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 가득한 삶을 산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을 것이 빤하다. 복음은 ‘진리’이다. 그에 반해 위선은 ‘거짓’이다.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거짓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거짓된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도 거짓으로 매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책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바리새인의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 더욱 돋보였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보다 더욱 감동하여 마음을 열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녀들을 교육할 때도 나타난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 취급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한 행동을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으로, 직접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오히려 그런 사랑을 전하는 우리를 위선자로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진리로 생각하고 사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누룩, 즉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숨길 수 없는 외식

외식은 반드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서 겉모습을 위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리 숨기려고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일시적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 앞에서 모두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죄지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에게 긍휼을 베푼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지만 그 죄를 계속 숨기게 되면, 다시 말해서 나는 죄가 없다고 계속 발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위선은 거짓이다. 그리고 그 거짓은 숨길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숨길 경우, 즉 계속해서 위선으로 도배할 경우,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막 3;29).

3. 심판에 이르는 외식

신앙의 결과는 심판대 앞에서 결정될 것이다.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를 더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끝에서 이번에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를 ‘외식하는 자’로 규정하시면서, 그 외식 때문에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고 경고하셨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7-59).

무리를 고발하는 주체는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 등이다(요 5:45;롬 11:2-3). 모세와 엘리야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도 고발의 주체가 되신다. 고발하는 자가 죄를 범한 사람들을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끌어가면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가장 사소한 죄 하나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그곳에서 영원토록 나오지 못한다. 여기에서 ‘감옥’은 심판 장소인 ‘지옥’을 의미한다. 마가는 지옥의 참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네 눈이 너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지옥에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위선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지옥을 자초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외식이 주는 매력, 즉 죄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죄는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다리가 하나 잘려나가도, 암에 걸려 내일 죽게 되는데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죄가 주는 쾌락을 지옥과 맞바꾸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 한가운데로 몰려드는 나방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무교병을 먹는 절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누룩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을 상징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 세상의 힘으로 절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는 유일한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누룩이 되어 떡 속에 들어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누룩은 천국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측에서의 공로나 노력, 죄와 자기 의 등을 상징하는 이중적 상징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는 반면에, ‘천국은 누룩과 같다’라고 모순되는 듯한 인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후자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의 배를 위해 내놓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까지 포함한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외식이 무엇이지요?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가족들을 위해 나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외식이라고 하지 않고 ‘성실’이라고 합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타주며 “평안하시죠?”라고 인사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인내와 순종이라고 합니다.
외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기와 자랑과 배를 위한 모든 종교 행위와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식은 반드시 사람들의 눈을 세상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6:6~12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논의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논의라는 헬라 단어는 ‘디알로기조마이’라고 합니다.
디알로기조마이는 ‘논쟁하다,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떡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으십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미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으로 오게 될 구원과 영생에 대해 거기 모인 무리에게 표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만나가 바로 하늘의 떡인 당신을 상징함을 말씀해 주셨고, “이 세상의 떡은 사람들의 배를 잠시 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곧 다시 배가 고프게 되느니만큼 너희들은 하늘의 떡인 나를 먹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니느웨라는 야만인들의 구원을 위해 삼 일간 물고기 배 속에서 갇혀 있다 나와서 니느웨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물고기의 먹이로 내주셨다가 회개하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풀어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벌이라 하지 않고 ‘고난’이라고 한 것이며, 마치 예수님께서 사흘 간 지옥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사흘간의 물고기 배 속의 경험을 ‘스올, 음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요나 2:2~3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꾸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님의 표적이 담고 있던 구원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기적으로 자기들을 만족시켜 달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깨달은 사람은 절대 눈에 보이는 기적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무관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깨닫게 된 복음처럼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부복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신부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보태어 자기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우물물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야망에만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피해 도망가시는데, 제자들이 떡 하나를 갖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제자 중에서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성경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자기가 먹을 떡 한 개만 달랑 들고 배에 탄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무려 떡이 일곱 광주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한 개만 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떡 한 개가 뭐냐? 이걸로 어떻게 이 많은 숫자가 여행 중에 요기하겠느냐?”라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떡 한 개 챙겨온 사람이 다른 모든 제자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정당함을 피력하고 있었겠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떡을 두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이 말은 “외식하지 말라.”라고 했지요? 외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힘으로 삼아 그것의 유무로 일희일비하며 사는 것, 이 세상에서 자기 배만을 위해 사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즘 말로 쉽게 의역하면 “너희들의 육신의 배를 위해 이 세상의 떡이 마치 너희들 인생의 목적인 양 소란 떨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인생의 목적이 자신들의 입신양명과 자신들의 인기와 자기들의 자랑이기 때문에 하늘의 떡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떡을 또 만들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피해 도망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역시 영생의 떡으로 오신 당신 앞에서 세상의 떡을 하나 들고서 온통 그 떡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누룩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누룩,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 손에 들린 세상의 떡에 눈을 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기껏 하늘의 떡이신 당신의 공로로 거저 주어지게 될 구원에 관해 설명해 주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게다가 제자들까지 누룩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경건한 종교 행위까지도 자신들 이익의 재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떡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경건한 종교 행위는 전부 외식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 독사의 새끼들이라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건의 열심은 반드시 다툼과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나를 자랑하는 데 몰두하게 되면 우리는 경건까지도 나 자신의 이익에 사용하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겉으로 드러난 경건한 모습과 도덕적, 윤리적 삶의 양으로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기나 자랑을 위해 경건한 행위를 일삼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교만과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과 다툼이 쏟아지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9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세계적인 여성잡지 ‘엘르(Elle)’의 편집장이며 준수한 외모와 화술로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하던 43세의 한 젊은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3주 후 그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고,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깜박이는 신호로 알파벳을 지정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한 문장을 쓰는데 꼬박 하룻밤을 지새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필자인 클로드 망디빌(Claude Mendibil)에게 20만 번 이상의 눈을 깜박여 15개월 만에 책을 한권 쓰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잠수종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이고, 그 책의 저자는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1952-1997)입니다.

잠수종이라는 것은 세월호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다이빙벨(diving bell)입니다.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다이빙벨 안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갇혀있는 몸이지만 그의 마음만은 하늘을 훨훨나는 나비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잠수복을 입고 다이빙벨에 갇힌 것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마음은 훨훨 나는 나비를 상상하며 삶을 긍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잠수종과 나비』라는 자신의 책이 출간된 지 8일 후에 자신을 옥죄이는 잠수종을 벗어던지고 나비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그가 쓴 책 제목과 같은 ‘잠수종과 나비’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전신마비라는 처참한 상황에서 ‘우리가 자연스런 들숨과 날숨을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불평과 원망은 행복에 겨운 자의 사치스런 신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그는 50센티미터 앞에 있는 아들을 보고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어서 눈물을 쏟아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는 위기 덕분이고, 일류는 이류 덕분이고, 고귀함은 고생함 덕분입니다.
상처는 상급을 기약합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넘어진 곳이 일어서는 곳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희망적인 때이고, 어두움에 질식할 것 같을 때가 샛별이 나타날 때입니다.
희망이 늦을 수는 있지만 없을 수는 없습니다.
별은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축복은 조금 멀리 있어 보일 때 오히려 인생의 보약이 됩니다.
늦게 주어지는 축복이 더욱 풍성한 축복입니다.
꿈과 희망은 영혼의 날개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절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꿈과 희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자 하는 꿈과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은 축복의 씨앗이고, 행복의 설계도입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삶을 바라보십시오.
힘들다고 느낄 때 진짜 힘든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절망 중에서도 마음속에 태양을 품고 온기를 느끼십시오.
바른 길로 이끄는 ‘상처의 표지판’을 긍정하며 내일의 희망을 향해 훨훨 나는 나비가 되십시오.’

43살의 젊은 나이에 전신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눈꺼풀 밖에 없었지만, 그는 훨훨 하늘을 나는 나비를 꿈꾸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출간한 지 불과 8일 만에 45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잠수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비처럼 이 세상을 훌훌 털고 날아갔지만,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가 가장 희망적일 때’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에 수없이 만나는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중에 하나인 ‘희망’의 능력입니다.

장 도미니크 보비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욥입니다.
43살의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어느 날 뇌졸중이 찾아와 그의 삶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처럼, 욥에게도 그런 시련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욥기 1:1절에 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짧은 말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께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정도로 바른 삶, 정직한 삶,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아들 7명과 딸 3명 등 모두 10명의 자녀를 주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에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재산도 많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의 재산목록을 공개합니다.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욥기 1:3)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말 성경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인격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부러운 사람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 인격의 탁월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 성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욥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젊은이들은 그 앞에서 숨었고, 노인들도 다 일어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읍의 유지들은 말을 삼갔고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성읍의 지도자들조차 욥 앞에서는 말소리를 낮췄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앞에서 조심했습니다.(욥기 29:7-10)
성읍 사람들이 욥을 그렇게 존경하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욥이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다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욥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그가 가진 재산 때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욥에게 도움을 받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욥을 좋아했고 존경했던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멈췄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훌륭한 인품과 칭찬받는 신앙,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욥이 10명의 자식들과 함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평생을 살았다는 것으로 결말이 났으면, 많은 사람들이 ‘욥처럼 살면 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욥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어느 날 스바 사람들이 욥의 소유인 소떼를 다 빼앗아가버렸고, 가축을 지키던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남아 있던 양떼와 종들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침공해 들어와 낙타도 다 빼앗아갔고, 칼로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 소식에 낙심되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10명의 자녀들이 큰 아들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거친 들에서 폭풍우가 몰아쳐 건물 모퉁이 기둥을 치자 건물이 무너져 10명의 자녀들이 한 순간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욥기 1:20) 욥은 그런 큰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합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자신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표현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욥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항변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내게 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둬가신다면 내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당신이 가져다신다는데 내가 뭐 할 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온 몸에 종기가 생겼습니다. 건강을 잃은 것입니다. 그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8절) 성서학자들은 욥이 겪었던 병으로 추정되는 ‘종기’가 ‘궤양성 피부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악성 질병은 고대 사회에서 악인들만 감염되는 두렵고 수치스러운 질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욥은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재에 앉았다는 말은 비탄과 굴욕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신이 겪는 그 질병으로 인해 욥은 깊은 슬픔과 아울러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몸서리를 치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온 몸은 악성 종기로 가려워 질그릇으로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보십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한 순간에 잃었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욥의 열 명의 자들이 결혼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자녀들은 아직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욥의 나이는 많아야 50대, 그렇지 않으면 40대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부자라고 표현될 정도로 부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금수저로 태어난 어떤 갑부집의 자식이 아니라, 그는 그 재산을 그만큼 갖추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생의 시간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수고하고 땀 흘리며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가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열 명의 자녀는 그에게 미래의 행복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도 그만큼 부러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많은 자식들을 낳아도 가진 것이 없어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면 불쌍한 가정이겠지만, 욥에게는 그런 걱정이 필요없습니다. 욥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이 생일잔치를 하다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지 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일잔치가 끝나면 아이들을 데려다가 정결예식을 행하고 하나님께 아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풍족한 생활로 인해 죄를 짓지 않을까 하는 걱정 외에 욥이 자식들로 인해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욥의 미래입니다. 욥이 자녀들을 위해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것은 자녀들이 미래가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식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고 삽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좀 힘들어도 자식들이 잘 되면 기쁩니다. 부모님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욥은 건강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자신의 현재입니다. 과거가 사라지고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려도 오늘의 내가 굳건하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다시 일어설 용기도, 희망도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 현재가 무너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한 것처럼, 욥의 아내가 그에게 “당신은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이라.”(9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욥의 아내가 욥에게 신앙을 격려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겠느냐? 그냥 죽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보다 뜻을 명확하게 하여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진 재산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버렸을 때에도, 그리고 애지중지 키우던 열 명의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었을 때에도 욥의 아내는 욥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건강을 잃고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고 맙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 많던 재산이 날아가버린 것이 더 아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장사지내야 했던 어머니로서 아마도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때 욥의 아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일을 겪었을 때에도 욥의 신앙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던 아내가 욥이 건강을 잃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저주의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과거를 잃은 것도 마음 아프고, 미래를 잃은 것도 희망이 사라졌기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나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현재를 잃는 것입니다. 현재를 잃으면 과거도 필요 없고, 내일의 희망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도 잃었고, 미래도 잃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현재까지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었음에도 왜 욥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욥의 아내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는 악성종기로 인해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겠느냐?’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말한 ‘온전함’은 욥의 온전한 신앙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욥이 가진 온전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었을 때 욥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비난하는 아내를 향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 어려움을 겪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은 철저하게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찌 화를 당하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도 모두 잃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저주로밖에 읽혀지지 않을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뭔가를 조금만 잃어도 마음에 분노와 불평이 가득해집니다. 욥처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든 것을 잃은 상황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내기 바쁩니다. 가진 재산을 조금 잃었다고 불평하고, 나의 자존심이 조금 짓밟혔다고 분노하고,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원망합니다. 자식의 문제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 때문에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보다 승진이 더디다고 화가 납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너무나도 큰 존재인데 어느 순간에 내 곁을 떠나거나 내 품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많은 것을 잃었다 한들 욥만큼 잃어보았습니까? 우리는 과거 하나만 잃어도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 다 잃고도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되면 생을 자포하자기 하고 신앙이 흔들리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을 모두 잃고도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전부가 아니라 현재의 일부만 잃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데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니 어쩌면 온전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던 욥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욥기 42장에서 기록한 것처럼 고난의 때를 온전한 신앙으로 버티어냈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풍성한 것들로 채워주셨습니다. 재산이라는 과거를 모두 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욥에게 지난날 가졌던 것보다 배나 많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미래인 자녀 열 명을 모두 잃었었는데, 그 미래를 그대로 보상해 주셔서 열 명의 자녀를 다시 낳게 하셨습니다. 물론 건강이라는 현재의 삶도 온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서 온전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신앙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온전한 신앙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도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비비어(John Bevere)가 쓴 『광야에서』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우리네 인생길을 걸어 살아감에 있어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팁’을 제시하면서 그 열 번째 생존팁으로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는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기가 너무도 쉽다.
그래서 당신에게 작은 비밀 하나를 알려 주고 싶다.
정말이지 내가 광야에서 살아남고 번영하는데 큰 도움이 된 비밀이다.
나는 이것을 ‘비밀의 기쁨 약’이라고 부른다.
외적으로는 즐거운 일이 없을 때,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때,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이 해 주신 일을 다시 떠올린다.
예수님이 불이 꺼지지 않고 유황냄새가 그치지 않는 지옥에서 나를 구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고문, 그 지옥은 내가 아닌 마귀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마귀는 인류를 속여 수많은 사람을 그곳으로 함께 데려 간다.
하지만 창조주 예수님이 나를 그곳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생명을 내어 주셨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며 감사의 태도로 돌아서서 영원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때, 갑자기 눈앞의 상황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감사해야 할 모든 것을 돌아보며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 이것이 내 비밀의 기쁨 약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내게서 사라질 때, 심지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인도하신 구원의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만 바라보십시다. 그것이 온전한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온전한 신앙을 갖고 살면 욥을 회복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유대 지도자들이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16:6. 막 8:15)
이러한 경우 '누룩'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 반면 마태복음 13:33에서는 좋은 의미로 표현됩니다.

이와같이 누룩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누룩'이 '파급적 효과'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의 본래적 의미는 '배우', '각색'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위선'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위선은 11-37이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위선의 파급 효과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고(11:44)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52).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5272

1. 위선.  2. 가장. 3. 겉 표정
발음 [ hüpŏkrisis ]
어원 / 527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선, 가장, 겉 표정, 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약 5:12, 벧전 2:1.

오래 전에 일본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도시에 매우 진실하고 경건한 부인이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외출을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자동차들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역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집 가까이 다가갔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 부인의 집에 화재가 나서 집이 몽땅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후에 탄식하며 "아이구, 이제 망했구나!" 하고 슬퍼하더랍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말을 하였는데 막상 내 집이 불에 타서 시커먼 재로 변했을 때는 감사가 아니라 망했구나 하고 외치는 것이 과연 신앙의 본 모습일까요?


어떤 독일인이 혀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결국 혀를 잘라야 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의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수술이 끝나면 그는 입으로는 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눈과 손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그로서는 마지막 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그가 최후로 할 말은 무엇일까?
의사나 가족이나 간호원 모두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 조용히 감은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그의 입술을 통하여 흘러나온 말은 "주님, 감사합 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친구나 친척들 그리고 아끼던 것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른 최후의 이름은 "주님"이었고 남긴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멘으로 감사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에는 이유도 항변도 조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 눈을 감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라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사 신앙의 소유자가 됩시다.

누가복음 12:1-3 /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학자/율법선생]들의 외식을 책망하며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1:37-52).
1. 바리새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씻지만, 그들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2.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3.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4. 서기관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면서도, 너희는 스스로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5. 서기관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민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그들 조상들의 증인이 되며, 그들이 저지른 소행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여 그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는데, 이제 그 뒤를 좇아 서기관들이 의로운 자의 피 흘림에 있다. 이러한 그들은 아벨의 피에서부터 시작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6. 서기관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예수께서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책망하시자,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은 앙심을 품고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구실을 찾고자 악의적인 마음으로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지며 기회를 노렸습니다(눅 11:53-54).

그러한 동안에 사람들은 수없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어서 예수님 주변은 서로 짓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주의하라며 경계하게 하는 말씀을 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까닭 없이 괜히 그들을 미워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행하는 모습에서 선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은 외식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인 외식은 그들에게 있는 외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는 외식은 곧 온 유대인에게서 행해지고 있는 외식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선함이 없다는, 그래서 그들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겅건한 모양으로 치장한 몸과 그 행하는 일로 비록 선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는 선을 가장한, 그러니까 위선이라는 포장이요 가면일 뿐입니다.
포장 속에는 담겨 있는 내용물이 있으며 가면 속에는 실제의 얼굴이 있듯이, 위선은 영원히 그들의 본 모습의 얼굴을 숨겨 두지 못합니다.
그들의 위선은 떡덩이 속에 든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에 의해서 떡덩이는 크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떡덩이 속에는 누룩이 든 것을 압니다.
그러니 위선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본 모습인 악함이 드러납니다.
감추어 놓은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 숨겨 놓은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 있을 수 있었으며, 숨겨져 왔습니다만 언제까지나 그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그 실체는 감추어지지 못하며 숨겨지지 않고,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일지라도 밝은 대낮에 들리는 말이 되어서 위선자들의 위선을 환하게 드러낼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한 말이지만 지붕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만한 외치는 소리가 될 것이므로 위선자들의 위선은 감춰지지 못하고 누구나 알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이 있는 곳에서는 위선이 자리 잡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성에 의한 악독과 탐욕에 있는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나갑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 모두를 몰아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악독과 탐욕에 의한 위선이 자리할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없이 행하는 것에는 그것이 정결의 규례를 지키고 십일조 규례를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세밀히 가져나가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모두는 악독과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 것에서 가져나가는 외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그러한 행함이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에 의하여 하는 것이므로 아주 작고 적은 소소한 것일지라도 무시되지 않으며 선하며 존귀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외식이 결코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무릇 할 마음만 있으면 힘써 할 것이요,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를 힘입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죄 사함과 의를 힘입음에 있으므로 우리가 행하는 믿음 생활에서 선을 가장한 위선이 제거되고 외식의 포장이요 가면이 벗겨져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되며 받으심에 있습니다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온 유대인들에게서 드러내 주신 것에서 보는 외식을 주의할 것의 권면을 가볍게 여기고 한 귀로 흘려보내듯이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몸에 있는 한에는 육은 영을 거역하며 대적하는 유혹인 육의 욕망이 언제든지 꿈틀대며 그 기회의 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분을 아는 지식의 견고함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자신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 주시고 있는 권면, 주의에 주목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3-16)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있는 우리를 단 하루도 어둠에 갇혀 있게 하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진리가 비춰주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 아래에 있는 어둠이 물러가게 하므로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에, 단 한 시도 어둠의 지배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에 있을 틈이 없는 것은 어둠을 지배하는 빛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빛에 의하여 확연히 드러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있는 믿음은 외식에 있는 위선이 아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에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는 것을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5272

1. 위선.  2. 가장. 3. 겉 표정
발음 [ hüpŏkrisis ]
어원 / 527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위선, 가장, 겉 표정, 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약 5:12, 벧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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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 송구영신예배



送舊迎新禮拜 / a New Year's Eve Worship

송구영신'이라는 말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 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의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유래했는데, 중국 관가(官家)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하는 '신구관 이취임식'에 사용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음력 섣달그믐 밤에 묵은 해를 보내고 신년의 운수대통을 기원하던 무속적인 민속 행사에 사용되었다.

한국 개신교에서의 '송구영신예배'의 유래는 1887년 12월 31일 새문안교회와 정동감리교회가 연합예배를 드린 것이 그 유래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에는 '언약갱신예배' 혹은 '언약예배'로 불렸다고 한다.

또 장로교회에서는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셀러에 의해 '송구영신예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송구영신예배(送舊迎新禮拜) 또는 신년예배, 신년감사예배는 대한민국 개신교에서 매년 12월 31일 심야나 1월 1일 자정 두 날의 경계에 가까운 시각에 새해를 맞이하여 드리는 예배이다.

1월 1일이 일요일인 경우에는 송구영신예배는 따로 진행하지 않고 신정 당일에 주일예배를 겸한 신년감사예배를 대신 진행하는 일이 많다.

일반적으로 23:30분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신년 카운트다운을 하고 00:30분에 종료하는 형태가 많으나, 송구예배와 영신예배를 나누어서 23:00~00:00까지 송구예배를 진행하고 카운트다운 후, 영신예배를 새로 시작하여 01:00까지 진행하는 케이스도 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시편 107:4-9)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광야(廣野) : 넓을 광(廣), 들 야(野)

미드바르

다바르

광야 사막 길에서는 사람들이 길을 잃고 방황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광야 사막에는 어마 어마한 모래 폭풍이 불어와서 길들이 묻혀버리고 완전히 생소한 지형으로 바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늘 다니던 중요한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공위성에서 지형을 정확하게 오차 없이 판독하는 GPS가 있지만 옛날에는 자연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때 였기 때문에 그 같이 황당한 일들이 벌어져 여행자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광야 사막"이 바로 그런 배경이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말이나 나귀나 낙타를 타고 머나 먼 광야 사막길을 몇 주간 또는 한 달 이상 통과하는 여행을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다.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식품과 음료수가 떨어져(민 21:5) 쓰러져 죽는가 하면,
뱀이나 굶주린 야생동물의 공격을 받았다(신 8:15, 신 32:10, 사 13:20-21).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에 시달리고(렘 4:11),
밤에는 안식처가 없이 들판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모래 폭풍(사 21:1, 렘 4:11-13)과 강도의 위험(렘 3:2, 애 4:19)을 만나 생사가 오락 가락하는 때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크고 두려운 광야"(신 1:19)를 통과하는 인생의 고달픔 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광야 사막과 같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모든 환경은 우리를 건조하고 메마르게 하며 목마르고 굶주리고 피곤하게 한다.  
육신이 지치고 마음이 내려 앉으며 영혼이 피곤하다.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 막막하여 빠져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사막 한 복판 가운데 홀로 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놀란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일들이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인생은 마치 광야 사막길을 통과하는 것 같은데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불안하고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 좌왕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광야 길의 인생을 확인한다.  
광야 사막과 같은 세상을 마음과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잃어버린 바 된 인생은 자신의 지혜와 노력과 힘으로는 방황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광야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1. 인생은 광야같은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이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4-5절)

애굽왕 바로가 야곱에게

"네 연세가 얼마뇨?" 라고 물었을 때 야곱은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창 47:8-9).  
여기서 야곱은 인생 전체를 "나그네길" 걷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그 기간을 "험한 세월"로 표현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인생을 광야 사막을 통과하는 나그네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광야같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참 평안과 안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염려와 불안과 고난의 연속으로 이어지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렇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인생을 고백하였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욥14:1)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47:9)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5:7)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하는 나그네요,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는 자니이다" (창39:12-kjv)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명령들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시119:19-kjv)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11:13)

2. 광야같은 세상에서 바랄 것은 하나님 뿐이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기 때문에 불안과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차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는 메말라 가고,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사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며, 말세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천재지변의 재난은 산다는 것 자체가 공포의 불랙홀로 말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대가 되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절망감을 견디기 어려워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환경에서도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소망을 걸고 부르짖을 수 있는 대상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6절에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라고 하였다.  
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며, 오직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것을 실감하면서

" (이 때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나이다" (시 39:7)라고 하였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어성경 앞 부분에는 "이제부터는" 또는 "이 때에" 라는 접속사 "아타()"가 있는데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다.  
다윗은 주위 사람들이 "헛된 일에 분요" 하며 삶의 가치관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이 때에" 오직 참 소망이신 하나님만 바라겠다고 다짐하였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 속에 사로잡히는 "
이 때에" 우리들도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오직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서 "
바라본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카와()"인데 "간절히 바란다", "인내로 기다린다"는 뜻이 있어서 한글 성경에는 두 가지를 다 적용하여 번역하였다.  
그 동안 우리가 광야같은 세상에서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면서 당황하고 낙심하고 좌절감을 느꼈을지라도 우리는 "이 때에", 또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고 기다려야 할 것인가?  과거에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고 인내로 기다렸는가?

1). 우리는 광야같은 세상에서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
.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된다.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24:16)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37:24)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34:19)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카와" = )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 . . . ” (사40:31)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카와" = )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카와" = )" (시27:14)

2).  하나님은 광야같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진리로 지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카와" = )” (시25:5)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카와" = ) (원어는 이중으로 강조되어 있음=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니, 곧 내 영혼이 기다리니")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130:5)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시43:3)
      “저가 그 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20) 광야같은 세상에서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진리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건져내신다(시 107:20).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눈으로 보고 느끼는 육신의 삶에만 위험이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위험한 영적 위험이 우리를 덮쳐오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때 말씀 진리의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를 건져내신다.  
영적 위기는 미혹의 영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외에 다른 것으로는 영적 위기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럴듯 하게 변개하고 사람들을 속여서 멸망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자는 그 위기를 발견하게 되고, 그 진리는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며, 또한 우리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


3).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간다.

      “여호와를 바라고("카와" = ) 그 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찾이하게 하실 것이라 . . . ." (시37:34)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와 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라볼지어다("카와" = 인애공의)" (호12:6)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카와" = ), 기다렸더니("카와" = )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 . . " (시40:1-2)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곧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불순종한 사람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지금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위험한 상태에 있다.  

3. 하나님은 광야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7절)

옛적에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견고한 성(castle)이었다.
나그네처럼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생들도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이 보장되는 곳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죄악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놀라운 곳이 현실로 눈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계 21:2).  
사실 우리의 현재의 삶은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세계로 연장되어 영원히 계속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7절) 라는 말씀은 비유이면서도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광야같은 이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영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그 곳에 도착하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바른 길로 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37:5).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시 78:52)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 . . . "(사30:2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25:12)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25:4)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사49:10)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바른 길" 밖에 없는데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14:6).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여지는 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만 발견되는 소망의 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길이다.  

성경의 신.구약(66권)의 말씀은 모두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는 영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14:6).  성경의 신.구약(66권)은 우리가 광야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길을 잃지 않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교훈들로 채워져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사탄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도 미혹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가도록 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일으켜서(마 24:24)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삭제하거나, 보태거나,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스럽게 한다.
<또는 "속임수로 다룬다">(고후 2:17, 4:2).  


큰 기적과 표적을 보이면서 더욱 심해진다(마 24:24).  
광명한 천사처럼 보여지고, 의의 일군들로 보여진다(고후 11:14,15).  
그래서 거기에 속아 미혹받은 자들은 "다른 복음"(고후 11:4, 갈 1:8)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신자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통하여 확정된 신.구약 성경(66권)을 깊이 깨닫고 분별하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영적 분별력은 신기한 것을 보며 감동하고, 몸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때떄로 사탄이 사용하는 미혹의 도구이다.  
영적 분별력은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데서부터 온다(히브리서 5:13-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기록된 말씀 속에 있는 그 바른 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진리이기 때문이다.  

광야 사막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방황하지 않으려면 그 진리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은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 내면서 새 물결, 새 바람을 일으키고 전통적인 진리와 교리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매장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을

사망의 길인 넓은 길로 몰아간다(마 7:13-14, 눅 13:24).  
오늘날 그것이 기독교의 대세(trend)라고 본다.  
마지막 때에 영혼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은 마치 광야 사막 길에 나타나는 살인 더위, 불 뱀, 굶주린 야생동물, 살인 강도, 모래 폭풍들에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가 비록 그러한 광야의 위험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보호하시고(시61:7),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인도하신다(시78:52).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8-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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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같은 세상에서(마태복음 4:1-11)

우리는 기독교 신자들이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죄인인 나를 살리셨다. 그래서 저와 여러 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살아 있다는 의미는 영원한 것이다. 나를 살리신 주님은 구원자이시며 승리자이시다. 주님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분들은 주안에서 즐거워 하라! 기뻐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지시길 바란다.

성도 여러 분! 주일 아침에 여러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러 분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평화롭고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 주님을 따를 때 세상의 그 어떤 소란한 장소보다 더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할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를 때 내가 이기든지 아니면 패하든지 할 수 밖에 없는 싸움터에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 그래서 여러 분이 기쁨과 평강을 유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여러 분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긴장하는 것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다. 긴장하면 몸이 굳어진다.

그리고 좋지 않은 일이 곧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긴장의 상태이다. 여러 분이 긴장해야만 여러 분의 신앙이 성장한다. 여러 분의 가정이 튼튼해진다. 그리고 여러 분의 교회가 은혜롭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분이 항상 경건한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여러 분이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여러 분은 모든 일에 승리하실 것이다.

그러나 여러 분이 이 땅에서 주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여러 분은 항상 즐겁지 않을 것이다. 궁핍할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분은 수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다. 주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신 일에 대해 여러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또한 그 분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 임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시험이 닥쳐오면 미리 체념하고 지친 목소리로 말한다. '주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는데...'. 이러한 말은 주님도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이 약하고 부족하셔서 시험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구원하실 백성들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주님은 공생애의 처음과 마지막을 마귀의 시험으로 시작하셔서 시험으로 마치셨다.

주님이 당하신 마지막 시험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 본문에서 주님이 시험을 당하심으로 해서 우리는 무엇을 누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성도가 천국에 이르기 전까지 세상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분은 마귀가 주님에게 시험하신 세 가지의 내용을 잘 생각해보라! 마귀는 두 번에 걸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했다.

마귀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인지에 대하여 의심한 것이 아니다.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 아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수 있는 능력도 의심한 것이 아니다. 마귀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마귀는 주님이 잘못된 방법으로 능력을 사용하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것은 오직 주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이제 마귀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뜨림으로 해서 하나님의 구속을 좌절시키려는 것이다.

마귀는 이 시험에 엄청난 내기를 걸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시험에 넘어가기만 한다면 인류를 영원토록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마귀는 주님에게 시험을 통해 신적인 능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귀가 하는 짓이 얼마나 유치하고 가소로운 것인가? 마귀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마술사나 무협지를 연상하게 만든다. 주님은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러면 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패할 수 밖에 없는 이런 유치한 시험 거리를 가지고 와서 자신 만만하게 성자 하나님 앞에 와서 위세를 부리고 있는가? 그 이유는 주님께서 곧 새롭게 변화 될 인류의 대표가 되시기 때문이다.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이 가장 갈망하는 욕망들이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 전체를 향하여 시험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시험을 물리치셨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시험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단은 처음에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다. 마귀는 마치 영적인 양식을 주는 것처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왜 유혹에 넘어갔는가? 패배자인 하와는 사단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이것이 이유이다.

두 번째로 마귀는 주님에게 육신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여러 분! 이것이 신자가 승리하는 비결이다. 우리는 하와와 같은 자세를 취하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 하와가 사단과 나눈 대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미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 대한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와는 인간의 지혜를 잣대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재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물질의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돌 밖에 없는 광야에 서 있다면 누구든지 저 돌들로도 떡을 만들 수 있다면..하는 바램을 가질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회의나 철학적인 사고는 오히려 좌절감에 빠지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형편에 직면하게 될 때에 스스로의 지혜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만큼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의 지혜는 일시적으로 모면하는 것을 찾고 탈출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회복이며 해결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여기에 주님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사단에게 말씀하실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다. 주님은 신명기8:3절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이다.

여러 분이 바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 신자들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두 번째 시험은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시편91편 11절을 인용하면서 뛰어 내리라고 명령을 하였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공생애 시작부터 마귀에게 치욕을 당하고 계신다. 감히 마귀가 또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에게 명령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논쟁을 하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치셨다.

여러 분! 주님이 올라가셨던 성전 꼭대기는 120미터나 되는 높이이다. 오늘도 여전히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높은 곳에 올려 놓고 시험을 한다.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실적을 쌓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을 통해 보람을 갖고 성취감을 갖는 시대는 지났다고 보여진다. 경쟁을 해야만 하는 구조가 모든 낭만적인 것들을 빼앗아 갔다.

세상은 한결같이 마귀가 주님에게 했던 것같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만일 네가 사장이거든, 네가 실력이 있으면, 네가 경력이 있으면, 네가 정말 이 회사의 직원이 &47580;다면, 이 정도는 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매일 전쟁을 치루며 산다. 우리는 자주 피곤하다는 말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이유가 더 많다. 여러 분이 이 삶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신다면 성경에 있는 무기를 사용하기 바란다. 에베소서 6:16절은 말씀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주님께서 두 번째 유혹을 당할 때 신명기 6:16절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여러 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요구받을 때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고 행동할 때 이미 실패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여러 분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모든 일에 첫 번째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실패의 길로 들어 선 것이다. 세상이 내게 능력 발휘하기를 요구할 때 자신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잠언3:7에서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라고 했다. 그 지혜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언2:7)라고 하였다.

또한 이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잠언2:20)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아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욥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 주신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욥40:9). 그러므로 일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9)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다.

여러 분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분명하게 모시기를 바란다. 마귀는 주님에게 세 번째의 유혹을 한다.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 마귀가 주님께 보여 준 영광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예루살렘성의 왕좌였을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낮고 천한 마구간으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것이 권력과 물질이었다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부나 세리들이 아니였을 것이다. 인기나 명예였다면 예수님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마귀는 아마도 마지막 유혹을 할 때 숨겨 둔 비장의 카드를 제시했을 것이다. 마귀는 주님에게 골고다로 향하는 언덕 길을 보여 주지 않았다.

십자가의 비참한 모습과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려 주지 않았다. 마귀는 주님께서 가셔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을 세상의 영광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사기를 치는 것이다. 마귀는 은근히 주님에게 십자가의 길을 버릴 것을 유혹한 것이다. 굳이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아도 그 일을 마귀가 대신 영화롭게 해주겠다고 하는 약속이다.

성자 하나님의 사명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었다. 마귀가 하는 말은 무엇 때문에 인간 같은 것들을 위해 비참하게 대속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죄는 그대로 놔두고 예수 너는 영광만 받으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마귀의 수중에 그대로 남겨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다. 이 유혹은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네가 신자라고 해서 꼭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되느냐 라고 물어오고 있다. 마귀가 주님에게 십자가를 포기하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남을 위해 희생도 하지말고 손해도 보지 말라고 유혹한다.
우리 마음 속에 꼭 그렇게 손해 볼 필요가 있느냐고 속삭인다. 그러면서 지혜롭게 선택하라고 충고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세 번째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게 다가온다.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혹을 받으면서도 행복해 한다. 곧 그렇게 되리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유혹이 있을 때 그렇게 될 것 같은 길이 훤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번째의 시험이 올 때는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단아 물러가라'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사단은 우리를 이 세 번째의 유혹을 계속하고 있다. 물질적인 것, 성적인 것, 권력으로 우리를 속이면서 세상을 다 주겠다고 꼬드기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짧으니 모든 것을 즐기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단이 하자는 대로 하면 우리는 그 대가로 우리의 영혼을 팔아야 한다. 만약에 여러 분의 마음 속에서 세상의 방법대로 끌려가고 있다면 모든 것이 잘못되기 전에 예수님과 똑같은 방법으로 물리쳐야 한다.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셨다. 마귀는 주님을 시험할 때 '만일 내게 경배하면'이라고 했다. 우리가 심각하게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마귀는 이미 두 번의 유혹을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내게 경배한다면'이라는 뜻이다. 마귀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은 나도 알지만 그러나 만일 내 방법대로 하면 내가 성공의 지름길로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 번째의 유혹에서 많이 넘어지고 만다.

이 세 가지의 유혹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무조건 성공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한다. 순서와 과정이 올바른지를 생각지 않는 풍조이다. 그래서 잘못된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일 뉴스의 내용이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으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 속에는 늘 무엇인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크든 작든 그것을 해결하려면 세상적인 방법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지혜와 경험을 따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마귀는 주님을 시험할 때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말을 많이 듣는다. '당신 예수 믿는 사람 맞아!'. 예수님은 이런 말을 들으시고도 결코 범죄치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을 들 때 더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말 때문에 더 싸움이 커지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 분! 그리스도인이 겪는 시험과 연단과 영적 전쟁을 치룰 때는 무조건 이기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딱 세 마디로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사단의 온갖 달콤한 제안을 물러가라고 큰 소리로 외친 후에 오직 주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무기를 항상 사용하길 바라신다.

이제 우리를 위해 승리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란다.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성경 구절들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은 신명기 6:13절의 말씀이다. 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6:16절의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는 말씀은 신명기 8:3절에 있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신명기의 말씀만 사용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거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번 시험에서 실패했던 내용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사실을 사단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새로운 의지를 강하게 보여 주시고 계신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광야에서 실패 했지만 예수님께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태어날 피조물들은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도 여러 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광야와 같은 곳이다. 여러 분도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실패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그 모든 실패하였다. 마귀가 유혹한 것들은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이 욕망을 품을 때 마귀는 신자들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방법을 가지고 가까이 온다. 주님은 승리하셨다. 주님이 승리하신 장소가 어디인가? 그 곳이 광야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승리하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도 광야와 같은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승리한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주님은 광야로 성령에 이끌려 가셨다. 우리도 성령으로 인도함 받지 않고는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없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여러 분이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 주님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사단을 이기셨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신적인 능력을 과시해서 사단을 이기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사단을 이기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길 밖에는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사단에게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절대로 우리의 인격을 내세워서, 높은 도덕적인 자질과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떠난 것은 말씀의 능력 앞에서 물러 갔던 것을 기억하라!
여러 분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인정하라!
그 다음에 여러 분이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라!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적인 자원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될지 생각해 보라! 그 답을 주님이 광야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얻기 바란다. 마지막 절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을 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신다.


오늘은 성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주일이다.
성도 여러 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되시길 바란다.
하나님 만을 믿고 의지하며 유혹과 시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물리쳐서 항상 승리하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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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잘 믿으세요!

어느 전도자가 낯선 도시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마침 어느 대문에 무슨 교회라는 교패가 붙은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을 열고 한 젊은이가 나왔다.
그 젊은이에게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복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예, 저희 할아버지는 장로님이셨거, 저희 아버님도 장로님이시며, 저희 어머님은 권사님입니다.
제 동생은 대학부 회장을 맡고 있으며 나는 현게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로 봉사합니다."
전도자는 다시 그 젊은이에게 질문합니다.
"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가? 라는 질문입니다.

전도자의 질문을 바로 나에게 적용해 봅시다.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신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쯤 되었을 무렵 갑자기 제자들에게 두 사람씩 짝을 지워 세상으로 보내시며 귀신을 제어하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후에 각 마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제자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마을을 다니면서 귀신을 제어하고 모든 약한 것을 다 고쳐주었다며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그리고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남자 장정들만 오 천명이나 되는 큰 무리들에게 배부르게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여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엘리야, 세례 요한,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오시면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정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독립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유대인들이 오래동안 고대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 가문의 신앙적인 전통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이 집안에 계신가? 하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은 내가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받았으며 무슨 일을 하는 것이 마치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직분이나 무슨 일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는 것은 사람은 두 가지 생명을 갖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생명(비오스.  βίος)
둘째는 영원한 생명(조에.  ζωή)


세상에서는 육체적 생명이 우선되는 것처럼 보여지고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 8:38, 고전 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  16:25, 행8:33, 약 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 이생에, 고전 15:19.
   c.  τέλος ζωῆς : 생의 마지막, 히 7:3.
   d.  ζωὴ κ. πνοή : 생명과 숨, 행 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 생기, 계 11:11.
   f.  ψυχὴ ζωῆς ;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1.  하나님과 그리스도.
   a. [하나님에 대하여] 요 5:26, 12:50, 요일 5: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 1:4, 5:26, 행 3:15등, 요일 5:11.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βί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979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발음 [ bi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 생명, 삶.
 a.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 8:14, 딤전 2:2, 벧전 4:3.
 b.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 12:44, 눅 8:43, 15:12,30, 21:4, 요일 2:16, 3:17.